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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똥겜 리뷰를 보는 즐거움

    똥겜 전문 리뷰어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똥겜’과 혼용되서 사용되는 ‘망겜’, ‘쿠소게(クソゲー)’와의 용례를 통한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혹자는 망겜과 똥겜을 동의이음어와 같이 분류하기도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게임을 총칭하는 망겜과 똥겜을 사용하는 맥락은 다른 지점이 있다. 똥겜의 번역어인 쿠소게와도 똥겜이 활용되는 지점은 상이한 부분이 존재한다.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Hyunyoung Hong Entered the world of games thanks to ads pitching the Famicom as a must-have for the happy household. A steady devotee of Just Dance. Co-wrote Mario, Born in '81, The Theory of Games, and Media and Gender, among others.

  • [Editor's View] 게임과 소수자, 소수자와 게임

    그런 고민의 결과로 ‘GG’ 4호는 ‘소수자들의 게임’을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소수자라는 건 단지 숫자가 적은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류’가 아닌, 주류로부터 스스로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받는 많은 존재들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게임은 그런 소수자와 얽히는 부분에서 아직까지 짧은 역사 때문인지 고민을 오래 해 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하데스 Hades〉는 혹평이 거의 없는 좋은 게임의 정석 같은 게임이다. 2020년 하반기 최고작으로 뽑히며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 TGA) 올해의 게임 노미네이트, 각본상, 인디 게임상, 액션 게임상을 수상했고, 메타크리틱 게임 리뷰에서 93점의 높은 점수를, 현재 스팀에서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SF 문학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까지 수상하니, 국내의 한 게임 비평지에서는 “하데스는 깔 게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렇게 길게 수상 목록과 긍정적인 평가를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하데스〉가 보편적으로 잘 만든 게임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 Back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10 GG Vol. 23. 2. 10. 〈하데스 Hades〉는 혹평이 거의 없는 좋은 게임의 정석 같은 게임이다. 2020년 하반기 최고작으로 뽑히며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 TGA) 올해의 게임 노미네이트, 각본상, 인디 게임상, 액션 게임상을 수상했고, 메타크리틱 게임 리뷰에서 93점의 높은 점수를, 현재 스팀에서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SF 문학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까지 수상하니, 국내의 한 게임 비평지에서는 “하데스는 깔 게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렇게 길게 수상 목록과 긍정적인 평가를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하데스〉가 보편적으로 잘 만든 게임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미 좋은 평이 많은 〈하데스〉의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이었다. 가깝고 먼 이들을 전례 없이 자주 떠나보낸 2022년이었고, 스스로는 잦은 자살 충동과 싸워야 하는 시기를 겪었다. 그러면서 연구자로서 ‘죽음’의 여러 사회적 논쟁을 다뤄보고 싶어졌고, 최근엔 그 준비를 하는 시기였다. 그 이름이 〈하데스〉인 만큼, 많은 리뷰에서 이 게임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죽음’을 다룬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하데스〉는 로그라이크에서의 퍼머넌트 데스(Permanent Death) , 재시작 구조로서 죽음을 영리하게 사용했고, 그것이 게임의 큰 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 〈하데스〉를 다시 플레이했을 때 발견한 것은 이 게임에서 ‘죽음’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 오히려 ‘살아있음/삶’ 그리하여 계속 진행되는 ‘이야기’가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 왜 〈하데스〉가 좋은 게임이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게임이어야 한다 아직 〈하데스〉를 플레이하지 않았고, 이후에 플레이하고자 하는 독자는 이 리뷰를 읽는 것을 잠시 뒤로 미뤄주길 부탁드린다. 이렇게 당부하는 이유는 이 게임의 첫 번째 경험만큼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 첫 번째 플레이 시작 장면 * 첫 번째 플레이 직후, 히프노스, 하데스와 자그레우스 대화 장면 좋은 게임이기 위해서는 우선 ‘게임’이어야 한다. 〈하데스〉를 좋은 게임으로 만든 첫 번째 요소는 군더더기 없는 게임 구조이다. 가장 첫 플레이는 튜토리얼의 역할을 하는데 ‘몬스터를 죽인다 - 방을 넘어간다 - 죽으면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게임 전체 구조를 바로 경험하게 한다. “잘 있어요. 아버지.” 한 마디 남기고 어떠한 가이드도 없이 바로 시작점에 선 플레이어는 버튼을 눌러 칼을 휘두르고, 앞에 있는 몬스터를 죽이고, 방을 넘어간다. 얼마나 멀리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최종 보스인 하데스를 만나기 전에 죽게 되고, 기가 죽은 채로 집에 돌아오는 자그레우스를 보게 된다. 반드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죽음으로 이 게임에 대한 장르적, 방법적 이해를 모두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듣게 되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통해 최대한 덜 죽어야겠다는 동기부여와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에 대한 힌트 그리고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선 탈출을 반복해야 한다는 서사적 이해까지 자연스럽게 획득한다. 그다음은 반복되는 플레이를 다채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로그라이크의 장르적 특성을 따르기 때문에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게임적 요소를 배치하는 것이 흥행의 관건이었을 것이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한번 죽으면 쌓은 경험치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호불호가 강하다. 그러나 〈하데스〉는 로그라이크의 조건 중 맵의 랜덤 생성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유연하게 사용한다. 한번 죽더라도 획득한 경험치나 아이템이 전부 사라지지 않고, 획득한 어둠, 타탄의 피 등은 남아 있어서 무기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 심지어 낚시로 얻은 물고기도 집으로 가져와 교환할 수 있다. 플레이가 익숙하지 않은 유저를 위해선 ‘신(God) 모드’라는 친절한 배려도 있다. 신 모드는 일종의 초보자 모드로 20%의 데미지 감소가 적용되고 죽을 때마다 2%씩 증가한다. 한번 죽을 때마다 캐릭터가 강해진다는 설정이다. 캐릭터 레벨이 없는 대신 죽음의 횟수로 플레이어의 실력을 보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게임 외적인 조건인 유저의 실력으로 인한 경험 차이를 만들지 않으면서, 반복되는 지루한 죽음으로 게임 플레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 외에도 〈하데스〉에는 사용할 수 있는 6개의 무기와 무기마다 4개의 양상이 있다. 무기에 따라 플레이 경험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플레이의 흥미를 지속시킨다. 또 게임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여러 형벌 규약 으로 게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며 비교적 짧은 러닝 타임을 보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복 플레이를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유인책이다. 플레이어가 엔딩까지 보도록 하는 목표 의식을 어떻게 만드는가? 이 게임을 1회차 이상 플레이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이야기를 더 읽기 위해 책장을 더 넘기겠다는 것과 동일하다. 위에 서술한 게임적 요소도 반복 플레이를 지치지 않게 하지만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데스를 죽이고 지상으로 탈출해 페르세포네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1번만 탈출해서는 전체의 이야기를 알 수 없고, 엔딩을 보기 위해선 최소 10번의 탈출이 요구된다. 또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올림포스의 신뿐만 아니라 메가이라, 카론, 타나토스, 아킬레우스, 시시포스, 에우리디케 등 여러 인물을 만나고 이들과의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탈출을 반복할 필요를 자발적으로 느낀다. 반전된 죽음의 의미 이야기가 중요한 유인책이라는 것은 앞서 이 게임에서 “죽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맥락과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로그라이크에서 말하는 퍼머넌트 데스는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번복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매 순간 신중한 판단으로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 중요한 선택 직전 저장&불러오기를 통해 결과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다른 장르의 게임과 달리 로그라이크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해야 한다. 따라서 극도의 긴장감과 책임감이 이 장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그라이크에선 빠른 판단과 반사 신경이 요구되는 플레이보단 턴제 형식으로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장려하기도 한다. 한 번의 죽음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 플레이어가 스트레스로 게임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 집으로 돌아온 페르세포네와의 대화 그러나 〈하데스〉에서 자그레우스는 반드시 죽는다. 플레이 중간에 만나는 보스에 의해 죽을 수도 있고, 아버지 하데스를 만나 처참히 죽을 수도 있다. 무사히 탈출했어도 스틱스강에 붙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로그라이크에서 경험하는 강한 긴장감은 느슨해진다. 지하의 신인 하데스에게 죽음이 그렇게 나쁜 것만이겠는가? 그래서 〈하데스〉에서 죽음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잃는 실수가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이다. 죽어야 집으로 돌아오고, 그래야 그 과정에서 만났던 인물과 관계를 전진시킬 수 있다. 페르세포네를 만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자그레우스에게 죽음은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여정이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과정, 헤어진 연인을 연결하고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이다. 그 모든 문제를 겪고 나서 마침내 죽음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의미로 바뀐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 시시포스의 친구, 돌덩이 이것만으로도 〈하데스〉는 좋은 게임이다. 잘 만든 구조, 플레이의 재미, 기존 장르의 특성을 살짝 비트는 전개 방식 말이다. 그러나 충분하진 않다. 나는 〈하데스〉가 삶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이야기’로 풀었고, 더 나아가 게임의 방식으로 전유했기 때문에 좋은 평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그레우스는 어떤 행동을 해도 탈출할 수 없다. 모든 무기를 해금해도 하데스의 식당에 우수 직원으로 뽑히더라도 결국 ‘죽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는다는 것은 게임 밖, 플레이어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는 생을 “힘들게 살 가치가 없다”고 삶의 부조리를 고백하기도 한다. 삶은 무의미한 작업의 반복이라는 부조리를 폭로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소통은 죽음에 이르는 한 인생의 무의미함과 고독을 잊어버림으로써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일어난다.” 지금은 저명한 커뮤니케이션 학자로 불리는 한 철학자의 말이다. 생의 허무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인간(종)은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를 사랑하여, 역사 동안 말과 글로 모자라 게임으로도 전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카뮈는 삶을 시시포스의 형벌에 비유하지만, 다시 바위를 굴려 올릴 수 있음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인간을 상상한다. 〈하데스〉에선 허무의 극복을 게임적 방법으로 해결한다. 태어난 곳을 바꿀 수 없는 자그레우스가 어떻게 가족의 화합과 스스로의 사랑을 획득하는지가 〈하데스〉가 말하는 이야기의 주제이다. 또 탈출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 운명을 놀이와 유희로 전복하는 것이 〈하데스〉가 전하는 게임의 본질이다. 플레이어는 죽음을 반복하며 이를 체득한다. 철학자의 말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방식이 아닌, 나의 시간과 경험으로 온전히 습득하는 것이다. 삶과 같은 총체적 경험, 그렇기에 〈하데스〉는 ‘좋은 게임’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획자) 최선주 선주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 『특이점의 예술』(2019) 등이 있다.

  • 미겔 시카트의 <플레이: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 리뷰

    게임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대개 규칙에서 출발한다. 예스퍼 율의 <하프 리얼>처럼 게임이 규칙과 허구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 따지는 식이다. 이런 구성이 나쁘다거나 가볍다는 것은 아니나, 논의의 첫 단추를 게임 쪽에서 끼워왔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카트는 첫 단추를 놀이 쪽으로 끼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2012년 가을과 겨울 키보드를 광적으로 두들기며 이 책을 썼다고 돌아본다. < Back 미겔 시카트의 <플레이: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 리뷰 32 GG Vol. 26. 10. 10. 1. 가벼워 보이는 책이었다. 두께만이 아니고 내용도 그런 듯했다. 논다는 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둥, 우리가 게임만이 아니라 장난감과 함께 놀이터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가지고도 논다는 둥 게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동안 숱하게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등장해서 더욱 그랬다. 하위징아 이후 놀이를 예찬하는 인문서는 적잖이 나왔고,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요즘 기업 연수 자료나 심지어 육아서에서도 심심찮게 보일 정도가 아닌가. 한국어판은 1장부터 8장까지 다 합쳐도 150쪽이 채 안 되고, 형식 역시 “놀이는 ~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해 사례 몇 개를 거쳐 다시 선언으로 돌아오는 구성을 취하는 문단이 많다. 원서가 나온 MIT 프레스의 ‘플레이풀 싱킹(Playful Thinking)’ 시리즈부터가 짧고 읽기 쉬운 책을 내겠다는 기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간결함은 애초에 의도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플레이: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이하 ‘플레이’)>이 가볍게 넘길 책은 아니다. 본문 앞의 ‘책 읽는 법’에서 저자 시카트는 주석이 수백 개에 이르지만 절망하지는 말라고, 주석을 하나도 읽지 않아도 책을 읽는 데는 문제가 없다 말한다. 본문을 편하게 읽어 나가면서, 궁금한 개념이 생기면 서른 쪽이 넘는 주석을 뒤지면 된다. 추천사에서 연세대학교 윤태진 교수가 이 책을 이론적 선언문에 가깝다고 하면서도 ‘에세이형 교양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고 덧붙인 것도 그래서일 터다. 여기서 플레이풀 싱킹 시리즈가 대중성만이 아니라 전문성까지 추구한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플레이>는 여러 입장을 고르게 늘어놓기보다, 놀이에 관한 한 가지 관점을 힘줘 밀고 나가는 책이다. 문장이 쉽다 해서 생각까지 평범하진 않다. 이 책이 나왔을 시기 “게임이 21세기의 가장 지배적인 문화 형식이 될 것”은 이미 익숙한 말이었지만, 시카트는 이런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는 편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옛 우화처럼, 게임은 손가락이고 놀이가 바로 달이라고 그는 말한다. 옮긴이 나보라가 원제 ‘Play Matters’ 뒤에 ‘not games’, 그러니까 게임이 아니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읽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카트 역시 게임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오늘날 가장 강력한 놀이 형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여기서 게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못 박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은 확장 혹은 이동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2. 게임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대개 규칙에서 출발한다. 예스퍼 율의 <하프 리얼>처럼 게임이 규칙과 허구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 따지는 식이다. 이런 구성이 나쁘다거나 가볍다는 것은 아니나, 논의의 첫 단추를 게임 쪽에서 끼워왔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카트는 첫 단추를 놀이 쪽으로 끼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2012년 가을과 겨울 키보드를 광적으로 두들기며 이 책을 썼다고 돌아본다. 당시 학계에서는 게임을 규칙에 따라 돌아가는 절차로 다루는 이른바 절차주의 담론이 대세였고, 사람들이 실제 게임을 할 때 규칙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관찰한 논의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놀이 논의와 게임 논의가 따로 놀던 시절, 둘을 잇는 다리로 쓴 책이 바로 <플레이>다. 그래서 <플레이>에서는 게임이 놀이가 취하는 여러 형식 중 하나가 된다. 시카트는 놀이를 전쟁, 의례, 게임 같은 특정 활동에 묶어 두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꺼내 쓸 수 있는 휴대용 도구처럼 이해하자며, 이에 ‘놀이의 수사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놀이는 일상의 물건과 상황,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시카트가 꼽는 놀이의 성격은 일곱 가지다. ①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가지고 노느냐에 따라 달라지고(맥락적), ② 그럴듯한 제도나 권위를 조롱하며 뒤집기도 하며(카니발적), ③ 주어진 것을 제 것으로 만들뿐 아니라(전유적), ④ 기존 질서를 흔들어 놓는다(교란적). ⑤ 노는 것 자체가 목적이면서(자기목적적), ⑥ 노는 사람에게 제 방식대로 표현할 자유를 줌은 물론(창조적), ⑦ 여럿이 함께 놀아도 경험은 저마다의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개인적). 일곱 가지를 어떤 활동이 놀이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기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시카트가 공들이는 건 놀이의 범위를 정하는 일만큼이나, 놀이가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중 핵심은 ‘전유’다. 말은 어려워 보여도 내용은 간단하다. 주어진 물건이나 공간을 원래 쓰임새와 다르게, 내 놀이에 맞게 써먹는다는 것이다. 시카트가 놀이터 장에서 드는 예를 빌리면, 스케이트 보더에게는 도시의 난간과 계단이 모두 놀이 대상이 되고, 파쿠르를 하는 트레이서에게 도시의 건축물은 장애물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물건을 엉뚱하게 가지고 놀아 본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놀이는 자기가 놓인 맥락을 차지해 버리기 때문에, 맥락이 놀이를 완전히 미리 정해둘 수는 없다. 놀이는 현실 한복판에서, 현실의 재료를 잠시 다르게 쓰는 일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카트와 오랜 전통이 구분된다. 그는 놀이를 “명확한 규칙에 기반하는 별도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으로 보는 하위징아식 전통은 따르지 않겠다고 밝힌다. 놀이가 현실과 떨어진 마법의 원 안에서 벌어진다는 매직 서클의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카트에게 놀이는 세상과 분리되지 않은 채 세상 안에서 번성하는 활동이며, 자기목적적 놀이조차 경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게임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선은 늘 협상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규칙을 내다 버리자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규칙은 놀이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못 되고, 노는 동안 얼마든지 따져 보고 고치고 바꿀 수 있기에 소품에 가깝다. 놀이가 현실을 바꾼다 하지만, 늘 좋은 쪽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준다 해서 반드시 재미있거나 기쁘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아프거나 불쾌하거나 놀림을 받을 때조차 즐거울 수 있다. 놀이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중독되거나 파괴적으로 흐르기도 하고, 몸을 다치게 하거나 친구와 절교하게 만들거나 마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책은 이어서 놀이성, 장난감, 놀이터, 아름다움, 정치, 건축가를 한 장씩 다루고, 마지막 8장에서 컴퓨팅 기계와 놀이의 관계를 살핀다. 놀이성은 노는 태도를 놀이 아닌 일에까지 가져가는 걸 말하고, 장난감과 놀이터는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건과 공간이다. 같은 관점을 장별 새로운 사례에 대보는 식이라,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게임에서 나선형 플레이를 하듯 저자의 주장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흘러 들어온다. 물론 때로 특정 독자에게 이런 논리 전개 방식은 같은 말의 되풀이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3. 이 책이 갖는 차별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책을 집필하던 당시 게임 연구에서 지배적이었던 절차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옮긴이 서문에 따르면 이안 보고스트가 예인데, 그는 게임이 규칙과 절차를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규칙만으로 의미를 설명하면 플레이어는 디자이너가 미리 넣어 둔 의미를 꺼내 쓰는 사람쯤으로 쪼그라들고, 규칙을 넘나들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규칙 분석을 그만두자는 말은 아니다. 규칙에, 사람들이 실제로 노는 경험까지 더해 논의를 보완·확장해 가자는 것이다. <플레이>는 같은 문제의식을 게임 바깥으로 열어젖힌다. 달리기 선수나 축구 선수, <스타크래프트> 거장의 경기를 보며 감탄해 본 적이 있다면, ‘아름다움’ 장이 반가울 듯하다. 다만 시카트가 내세우는 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놀이 미학으로, 잘 만든 규칙 너머 사람들이 무언가를 제 것으로 만들고 표현하는 행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참가자들이 직접 인물 역할을 맡아 몸으로 연기하는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 게임이나 플레이어를 일부러 괴롭히는 불쾌한 게임이 예로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건축가’ 장에서 디자이너에게 하는 주문은 더 단호하다. 게임 디자이너는 맥락 외의 것들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놀이를 활성화시키는 촉매로서 소품 담당자나 무대 감독처럼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고 배치할 뿐이다. 게임 디자이너라는 말에 담긴 작가의 권위도 문제다. 당연히 이러한 주장 또한 아무것도 정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 플레이어의 해석과 표현을 설계자 의도 아래 묶어 둬서는 안 된다는 요구로 읽으면 어떨까 싶다. 다른 하나는 놀이를 효율과 성과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게이미피케이션을 떠올리기 쉽지만, 옮긴이가 서문에서 일러두듯 저자는 게이미피케이션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본문에는 그 말이 아예 안 나오고, 딱 한 번 등장하는 주석에서도 상업적으로는 두루 비판받았되 놀이 바깥에서 놀이성을 생각하는 데는 여전히 희망적인 개념이라 적어 두었을 뿐이다. 시카트는 게이미피케이션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대신 보다 큰 관점에서 논의를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이론을 놀이를 도구화하여 기계처럼 효율만 따지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로 설명하면서,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생산성과 목표와 수량화로 규정되는 삶 대신 다른 존재 방식을 고민하자고 말하는 것이 그 증거다. 다만 여기서 놀이성과 도구화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카트에게 놀이성은 노는 태도를 가져오되 원래 활동의 목적은 존중하는 것이라서, 일하면서도 놀 듯이 할 수 있다. 문제는 놀이의 겉모양만 빌려 와 정해진 성과를 내라고 다그치면서 참여하는 사람이 제 방식대로 움직일 여지를 없애는 경우인데, 이때 남는 것은 놀이성이 빠진 놀이의 형식, 곧 도구화된 놀이다. 4. 한국어판에는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는 시카트를 하위징아, 그리고 하위징아를 잇는 놀이-게임 연구자들과 연결한다. 그 연결을 통해 시카트를 기존 놀이 이론에 대보고, 또 대어지지 않는 부분을 찾아보라고 주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카트는 자신의 놀이 이론이 명백히 포스트 하위징아적이지만 여전히 그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밝힌다. 그 영향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본문이 넌지시 알려 준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놀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진화론적이거나 인지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방식이어야 한다는 대목이 그렇다. 놀이를 인간다움의 핵심에 둔 하위징아의 문제의식을, 부제의 말 그대로 인문학의 방식으로 이은 셈이다. 다만 놀이를 현실과 분리된 가장(假裝)으로 보는 고전적 이론이나, 명확한 규칙에 기반한 별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공정한 경쟁으로 보는 하위징아식 전통과는 선을 긋는다. 로제 카이와와 견주면 시카트의 차이가 더 또렷해진다. 옮긴이 서문은 카이와의 놀이 분류인 아곤(경쟁), 알레아(우연), 미미크리(흉내), 일링크스(현기증)를 소개한다. 시카트가 이 책에서 주로 살피는 것은 놀이의 유형보다 놀이가 여러 맥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바꾸는가이다. 그는 주석에서 카이와가 놀이의 타락과 잠재적 위험성을 논했다고 소개하며, 자신도 놀이가 중독적이거나 파괴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놀이를 일상과 분리하기보다, 일상 속에서 전유와 표현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2016)의 이안 보고스트 논의와도 비교할 만하다. 앞서 옮긴이 서문이 절차주의의 예로 든 보고스트지만, 이 책에서는 게임 바깥 놀이를 다루고, 놀이를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카트와 유사하다. 다만 보고스트는 사물이 주는 제약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경험에, 시카트는 주어진 맥락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 표현하는 과정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우리가 실제로 놀 때는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기에, 두 책을 같이 읽으면 그 얽힘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일 듯하다. <플레이>를 읽으면서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동휘 옮김, 2022)도 떠올랐다. 응우옌에게 게임은 목표와 능력, 행동방식을 설계하는 예술이고, 그가 ‘분투형 플레이’라 부르는 경험은 우리가 게임 속 (자신이 정한) 목표에 진지하게 매달리다가도 게임이 끝나면 그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게임의 단순하고 명확한 가치가 삶의 복잡한 판단을 대신해 버릴 위험을 다룬 대목은, 시카트의 도구화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규칙을 받아들이고 목표에 몰입하는 즐거움이 궁금하다면 응우옌 책이, 놀이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놀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시카트가 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한국에서도 놀이와 플레이를 다룬 작업은 꾸준히 있어 왔다. 당장 <게임, 게이머, 플레이>(이상우, 2012), <게임의 이론>(이동연 등, 2019), <사이버 루덴스>(이동연 등, 2024) 등의 책들이 떠오르는데, 실제로는 더 많다. 그럼에도 옮긴이가 게임 연구에서 놀이 이론의 계보가 특히 한국의 경우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진단하는 데 상당 부분 동의한다. <플레이>가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데, 앞서도 언급했듯 놀이 이론으로 게임을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게임을 여러 놀이 가운데 하나로 다시 보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5. 한국어판에는 원서에 없는 것들이 있다. 저자가 새로 쓴 서문, 옮긴이의 서문, 그리고 옮긴이가 여러 개념을 한국어로 옮기며 내린 선택들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원서를 훨씬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텍스트로 만들어준다. 저자 서문에서 시카트는 이 책이 2008년 경제 위기와 중동에서 끝없이 이어진 전쟁들에 분노하면서도 세상이 바뀔 거라 믿었던 시절, 격분의 낙관주의 속에서 쓰였다고 돌아본다. 월가 점령 운동부터 어나니머스까지 세상을 놀이하듯 제 것으로 만드는 움직임에 기대를 건, 낙관적인 시대에 쓰인 낙관적인 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낙관이 군데군데 지나쳤고 희망이 섞인 생각에 가까웠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정치를 다룬 6장과 마지막 8장이 특히 그렇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핵심 생각은 지금 더 절실해졌다며, 놀이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사고파는 아이템으로 전락하면 우리에게 남는 건 자유 없는 세상뿐이라고 경고한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저자가 말하는 본문의 주장과 한계를 함께 놓고, 자신의 생각을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게 된다. 옮긴이 서문은 이 이야기를 한국의 맥락으로 가져온다. 2010년대 초반 서구 분위기와 당시 게임 산업의 사정, 게이미피케이션을 둘러싼 논쟁까지 독자가 알아 두면 좋을 배경을 차근차근 정리한다. 책에서의 주장이 한국 게임 연구에서 갖는 의미도 빼놓지 않는다. 그리고 2024년 계엄 사태 당시 K팝과 응원봉 시위를 통해 절망적인 상황을 연대와 축제의 장으로 전유하며 헤쳐 나갔던 우리 경험을 떠올리면, 놀이의 정치에 대한 낙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괄호 속에 슬쩍 덧붙이기도 한다. 시카트가 말한 놀이의 정치적 가능성을 우리 경험에 비춰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 부분이 꽤 인상적이었다. 번역 곳곳에 게임 연구자로서의 흔적도 배어 있다. 추천사에서 윤태진 교수는 옮긴이 나보라를 드문 게임문화 연구자이자 번역가로 소개하는데, 실제로 나보라는 한국 전자오락의 역사를 게임성 개념으로 풀어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추천사에 따르면 ‘play’를 ‘놀이’로, ‘playfulness’를 ‘놀이성’으로 옮긴 것도 고민 끝의 선택이었다 한다. 본문은 이 원칙을 바탕에 두면서, 게임을 하는 행위에는 ‘플레이’를 사용하고 ‘다크 플레이’ 같은 말도 살려 둔다. ‘ludic’을 왜 ‘루두스’로 옮겼는지, ‘컴퓨팅 기계’가 왜 그냥 컴퓨터가 아닌지를 풀어주는 역주, 인용된 책의 국내 번역 여부와 원서가 안내하는 웹사이트의 접속 여부까지 챙긴 주석을 읽다 보면, <플레이> 번역 작업이 문장만이 아니라 책이 읽힐 지금 여기의 맥락까지 함께 옮겨오는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무엇보다 <플레이>의 가장 큰 장점은 게임을 읽고 말할 때 두고두고 꺼내 쓸 수 있는 개념들을 간명하게 건넨다는 데 있다. 시카트는 ‘장난감’ 장에서, 공은 그저 둥근 물체일 뿐이지만, 그 안에 무한한 수의 게임이 담겨 있다고 쓴다. 책에서 소개하는 개념들도 공처럼, 이리저리 굴려 보면 좋겠다. 이야기가 얼마나 깊은지, 시스템은 얼마나 정교한지, 매출이 얼마인지 따지는 질문 옆에, 플레이어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놀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나 더 놓아 보자는 것이다. 시카트 말대로 놀이는 게임보다 넓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게임의 목표와 보상과 경쟁 방식이 방송으로, 일터로, 연애로, 공부로 번져 간다. 게임이 놀이보다 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임의 형식이 여기저기 쓰인다고 노는 자유까지 함께 늘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놀이가 일상을 관리하고 성과를 끌어올리는 데 동원되기 쉽다. 이 책을 오늘의 현실에 갖다 대본다면, 모든 것이 게임이 된다 했을 때 놀이는 어디에 있는가.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놀이는 우리에게 세상을 주고, 우리는 놀이를 통해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168쪽) 이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그걸 가로막는지 따지는 일은 독자에게 맡겨진다. 이처럼 <플레이>는 잘 설계된 시스템과 성과 너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놀고 무엇을 표현하는지 게임 비평이 다시 묻게 만든다. Tags: "미겔 시카트", "플레이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 "놀이 이론",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 "절차주의", "서평", "나보라", "Miguel Sicart", "Play Matters", "Play Theory", "Game Studi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체인소 맨>의 한국적 수용과 문화적 증폭’(2026), ‘극사실주의의 게임적 재구성: <나는 SOLO>의 상호/텍스트성과 수용구조’(2026),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등이 있다.

  • 먹지 않으면 죽는다 – 게임에서의 음식과 먹는 행위

    유난히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으레 나오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 말 안에는 단순히 맛이 좋다는 것을 뛰어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피곤했던 하루가 풀리는 감각, 살아 있길 잘했다는 감각, 그러니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감각.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감각이 바로 ‘살맛’이다. 무엇을 먹는가는 곧 어떻게 사느냐와 연결되고, 인간다운 삶의 기준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음식은 인간에게 영양 섭취 이상의 의미로 자리 잡혀있다. < Back Eat or Die: Food and the Act of Eating in Games 30 GG Vol. 26. 6. 10. "Now this is the taste of being alive!" "It makes life worth living!" These are the things we reflexively say when we eat something especially good. But inside these words is a meaning that goes beyond simply tasting nice. The sense that a tiring day is undone by eating food that suits you; the sense that it was good to be alive; the sense that, so, things are bearable yet. The sense in which all of these blend into one is precisely salmat —the "taste of living." For what one eats connects directly to how one lives, and is taken, too, as a measure of a humane life. In a word, food has settled into a meaning, for humans, beyond the intake of nutrition. The act of eating is taken as an important element within games as well. As befits a medium that expresses the many parts of life, games have gone on representing cooking, food, and the act of eating. That players seek out food in games for all sorts of reasons is, no doubt, a natural phenomenon following from these many modes of representation. Perhaps, just as "food" (食) is in our lives, "food" (食) in games long ago moved beyond the mere act of eating. If so, was food, from the earliest games, the same as it is now? What meaning does the act of eating carry, genre by genre, within games? Is there a genre in which eating is especially important—and if so, which, and why did it become that way? 1. A Genealogy of Food in Games When you call to mind the role of food in games, three things come up broadly: a consumable for recovery and survival, a support item for buffs, and a trade good. Add in the content one can enjoy in connection with food, and naming just a few probably will not be enough. Bubble Bobble. Source: Nintendo Store This kind of food functioned as points in early arcade games. Take a game like Bubble Bobble . The characters in Bubble Bobble did not go hungry in the first place; food simply popped out as you played along. Here, food was as good as a sign converting play performance into something visual. Following real-world worth or degree of fullness, it appeared in such a way that a plate of cake or a bowl of ramen gave a bigger score than a single piece of fruit. Final Fight. Source: Game Informer ( https://gameinformer.com/2020/08/25/the-top-10-health-items-in-gaming ) Food, which had taken price and fullness as its scoring criteria, gradually advanced into a device for recovering health. So it is with the food that appears when you smash trash cans and crates in Final Fight . These foods—whiskey, fruit, sushi, barbecue, and more, varied in kind—become the stamina for the characters to fight again. The recovery amount of these foods was applied by the same law as the foods that had functioned as points: the greater an item's fullness, the higher its recovery rate, and foods that could not serve as a meal had a lower recovery rate. The way of recharging body and mind by eating something appears together with this symbolism, leading players to accept it naturally. That said, it is hard to regard the food in these cases as perfectly represented. The food that pops out of trash cans and crates has its cooking process omitted, and stays whole without ever spoiling. That food of unknown origin should restore the body is, in fact, an impossibility. Within this, there is neither wariness nor anxiety about something being digested. The reason this era's game foods cannot be perfect elements of representation is that the food does not function as ordinary fare. What is demanded of these foods is the role of fuel to sustain violence. The campfire and Festival Food of Mabinogi. This function of food meets a change as we enter the era of online games. Now food, beyond the role of points or recovery, becomes a device for firming up the bonds between players. Mabinogi 's campfire is famous for representing a model of romantic adventure—playing instruments and sharing food. As the saying goes that people grow close over meals, the act of sharing one another's food before a campfire worked as a new form of fellowship. Here one might say food settles the player as a resident within the game world. At the same time, food in online games also played a large role in strengthening stats. Likewise, Mabinogi 's "Festival Food" is one example of food functioning as a buff. The better the quality of the ingredients, the more powerful the festival dish's effect, and through the stats boosted here one can fight more easily. Eating festival food can also be seen as a kind of rite, a prayer for a successful hunt. The role of food in games, developed this way, forms a genealogy: points—recovery—communion and buff. This genealogy seems to show every element of food that a game can represent. But upon reaching the survival game, food advances one step further, into yet another aspect. 2. From Food to Provisions: Food in the Survival Game As said above, food in games was an index for getting a higher score, a recovery item for sustaining play, and also a support item needed to strengthen communal experience and ability. And most of these properties are inherited by the survival game, where food begins to function as something for maintaining the player's body. Don't Starve , blunt right down to its title, is a game where you have to worry about every meal, every moment. Threats to survival appear in plenty, monsters among them, but what comes at the player as the greatest anxiety is, before anything else, hunger. The same can be seen in Oxygen Not Included , a game from the same studio: a world where food resources are scarce, where even calories must be weighed carefully. Caloric energy is as good as lifespan, and the presence or absence of provisions puts you squarely at the crossroads of life and death. Project Zomboid. Project Zomboid , set in a world overrun by zombies, requires you to survive in a similar way. To stay alive here, you must learn how to light a fire, find seeds and farm, and ready the tools to make food. At the same time, distributing appropriate resources to teammates and checking how far the leftover food has rotted are essential. Canned goods, provisions that help over the long term, are useless without a tool to open them. This is the same in The Long Dark —which even represents, with a sense of realism, the way you waste energy when you do not use the proper tool. In such extreme conditions the player has to find ways to eat food and to preserve it. The reason is simple: to survive without dying, and keep a foothold in this world a little longer. And in this respect, food in the survival game comes to be seen as a consumable and, at the same time, an object of investment. In a survival game, in fact, leaving food aside matters more than eating it. The act of eating comes to presuppose production, storage, and distribution. The player must therefore solve the present hunger and, at the same time, calculate even future hunger. In the traditional action game, death was an event brought by the enemy. But the death that appears in the survival game occurs with the passage of time. So what the player faces in a survival game is not only the enemy. Time, too, is something to be overcome, and in that process the greatest variable becomes the player's own body. At this point food takes on a meaning different from earlier genres. Food, which had been the means of points, recovery, communion, and buff, changes into the essential condition for maintaining survival. The recipes and effects of food grow concrete, and the situation careens toward the extreme. The player must prepare even for the coming winter, for disaster, for being unable to move. And through it all, hunger is sure to arrive, and the body is consumed accordingly. Here the property of food in the survival game is revealed for the last time: even if taste and aroma cannot be implemented, hunger at least is represented to the point of obstinacy. The less the provisions, the more it is the pressure of hunger that tightens its grip on the player. Hunger leads straight to game over. In that sense, the survival game has more persuasive power in conveying the sense of sustenance than the five senses. 3. What Is Represented by Eating Food in games began with points and the means of recovery, then expanded all the way to communal experience and the condition of survival. This genealogy can also be seen as the result of how we have imagined human life and the body. So why do humans, why do games, ceaselessly seek to represent these elements? And why is this represented most concretely in the survival genre? To cook and to eat is an act that has become utterly taken for granted in our daily lives. We are always thinking we want to eat something, and we are in fact eating—yet perhaps we have never properly thought about the essence of the act of eating. That to live, a person must ceaselessly secure resources; that the matter of making a living was, from the start, hard. What lets us experience that, if only indirectly, is, I think, the survival game. The survival game restores this sense with a primal tension. But one important part is omitted from this restoration: namely, that real-world hunger is a social problem, whereas the survival game's hunger has to do with personal management. The player dies if they fail to secure food, but that death is not a social tragedy—only a failed playthrough. This happens because the medium of the game, even when it seems to handle society itself, places individual action more at the center. And so there always remains a certain measure of blank space in the way a game handles something. So it is with the matter of food. Even so, that we feel a certain "taste of living" within a game is an undeniable fact. This does not mean only having survived in the game. Just as in reality we eat good food and think it was good to be alive, the enjoyment and satisfaction felt in a game grant us a sense that life is worthwhile. Even if taste and aroma cannot be conveyed, it lets us feel, at least, a hope about how we will go on living from here. In this respect, what a game represents through food may be the sense of living on—one more "taste of living."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ahin Park Interested in the boundary between the real and the virtual. Recently returned to a certain online game.

  • :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선형적 서사에 있어 반복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무한한 반복이란 오직 탈출해야 할 환경에 불과하다. 이야기들은 그 사실을 붙잡고는 ‘사실 진짜 생은 반복의 바깥에 있어’라고 끝없이 주장한다. <팜 스프링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주인공이 일시적으로나마 반복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탈출의 의지가 발생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진짜 삶’과 마주하기 위해 바깥으로 탈출한다.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nin Lee Writes and lectures freely across comics, games, and film. A lifework: clearing every Final Fantasy title except the MMORPGs. Mainly plays on the Steam Deck.

  •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 Back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07 GG Vol. 22. 8. 10. 아서: 우리 집안은 영국인도 아니었다고. 숀: 아무렴, 아서왕이시여! 미키: 좋은 이름이에요. 강한 이름입죠. 왕 같은 이름! 저만의 왕 같은 분이세요, 아서 씨. 존: 서부 모험 얘기가 재밌나 보지? 잭: 이젠 별로요. 기사 얘길 읽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원탁의 기사들요. 존: 거기 왕 이름이 뭐더라? 잭: 아서 왕도 있고, 랜슬롯 경이랑, 귀네비어 왕비랑, 잔뜩 더 있어요. 존: 그 이름… 잭: 좀 맘에 들어요. 존: 그거 알아? 아빠도 그래.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 1) .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본디 〈레데리2〉가 장르적 상상력을 빚진 할리우드 웨스턴 시네마의 원형적 트로프가 중세 기사 로맨스와 공유하는 바가 많다는 점, 나아가 웨스턴 장르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일본 사무라이 시네마가 중세 유럽 봉건제와 흔히 비교되는 에도 시대 사회 구조를 모티프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인유 자체는 그리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레데리2〉의 기사 로맨스 인유는 단지 두 장르의 표면적 유사성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사 로맨스 장르를 참조점 삼아 〈레데리2〉는 내러티브는 물론 오픈월드까지 아우르는 고유한 주제의식을 구축한다. 자기기만의 루도내러티브 협박, 갈취, 폭행, 재물절도, 가축절도, 침입, 강도, 강간, 밀렵, 살인미수, 탈옥 2회. 이는 〈레데리2〉에서 자행 가능한 범죄를 열거한 것이 아니다(이 게임이 제공하는 범죄-유희의 목록에 성폭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영국 중세 말, 로맨스 『아서 왕의 죽음』을 집필한 기사 토마스 말로리 경의 화려한 범죄 경력이다. 아서 왕 전설을 집대성하며 그처럼 고귀한 기사도의 공동체를 그려낸 장본인이 정작 “기사도라기보다 모범적인 깡패질의 기록”(Cooper x)에 수렴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말로리의 독자들을 꾸준히 당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명예로운 신념이 이끄는 삶에 대한 선망과 직업범죄자로서의 삶의 이력을 한 사람 안에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어쩌면 〈레데리2〉의 플레이어야말로 말로리의 자아분열적 모순을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지 앞의 질문이 무법자 아서 모건을 플레이하는 경험을 요약하는 문장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레데리2〉가 자기기만이 얼마나 강력하게 자기모순을 지탱하는 기제인지, 나아가 자기성찰이 과연, 어떻게, 얼마나 가능한지 묻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 아서의 일기. “매번 끝이 없다. 현상금사냥꾼. 핑커튼. 법집행인. 가는 곳마다 문명이 더 늘어선다. 어쩌면 앞으론 이게 다일지도 모른다. 차차 알게 되겠지. 이곳이 슬슬 기분나쁘다. 서부의 탁 트인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나마 남아있는 땅으로라도. 하지만 그곳마저도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다.” 손글씨에 드로잉을 곁들인 일기는 이 과묵한 무법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밀한 창구이자, 플레이어의 정서가 주인공 및 게임의 내러티브와 호응하도록 조율하는 가이드로 기능한다. 1899년. 오프닝에서부터 〈레데리2〉는 한 시대의 끝을 배경으로 삼겠다 선언한다. 〈레데리2〉의 세계는 문명 대 야생이라는 오래된 신화적 내러티브의 시공간이다. 선형적 흐름으로 표상되는 근대 ‘역사의 진보’와 함께 백인 문명은 기어이 서부의 야성을 길들였다. 제도적 권력보다 개인의 물리적 폭력이 훨씬 선명한 실체를 지니던 서부의 경계적 공간에서 활개 쳤던 무법자들은 이제 국가권력·자본주의·물리적 폭력의 결합체인 미연방 및 핑커튼 요원들에게 뒤쫓기는 처지다. 아서가 20년을 충성한 반 더 린드 갱은 낯선 풍경들 사이에 갇혀 이리저리 내몰리며 몰락의 수순을 걷고, 시나리오 후반부터 급격히 쇠약해지는 아서의 병든 육신은 플레이 경험을 세계의 풍경과 동기화시킨다. 역사의 흐름과 인간 문명의 발전을 ‘황금시대’로부터의 점진적 쇠퇴로 인식하는 중세 역사관처럼, 〈레데리2〉의 게임 세계는 새 시대의 도래를 기념하기보다 이전 시대의 종말을 애도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무법자의 존재론으로 거듭난다. 우리 시대는 다 지나갔으며 세상이 더는 우릴 원치 않는다는 아서의 한탄은 무법자들의 좌절감과 위기의식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레데리2〉 재현의 철학의 대변자이기도 한 동시대 사상가 에블린 밀러가 문명 대 야생의 신화적 구도를 구세계 문명의 퇴폐와 신세계 자연의 순수로 변주하고 후자로의 회귀를 주장한다면, 밀러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 더치 반 더 린드의 리더십은 이를 다시 문명 대 무법자의 구도로 전유함으로써 범죄에 반체제적 투쟁이라는 대의를 덧씌운다. 더치와 아서는 무법자가 현재에서 미래로 돌이킬 수 없이 나아가는 근대 역사의 선형적 시간성과 불화하는 존재라는 핵심적 인식을 공유한다. 더치가 설파하는 사회 개혁이나 원시의 지상낙원 타히티로의 도피라는 비전은 아서의 향수와 마찬가지로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좋았던 과거’를 향한다. 하지만 무법자들의 세계관은 역사적 현실에 시대착오와 자기기만이 뒤섞여 만들어진 왜곡의 결과물이다. 그들 마음속의 더 조화롭고 더 단순했던 과거, 생계형 강력범죄자가 환영받았던 과거는 존재한 적 없다. 따지고 보면 문명 대 야생의 이분법에서 무법자가 야생의 영역에 속하며 문명과 적대해 왔노라는 단순명쾌한 환원부터가 환상이다. 그들은 스스로도 문명 없이는 존재 불가능한, 서부 개척 시대 백인 문명 경계의 최전선이지, 야생이나 자연의 일부였던 적은 없다. 인간 제도가 없는 타히티(식민주의적 환상이다)로의 탈출을 꿈꾸지만, 텐트에서 축음기로 오페라를 감상하고, 대도시에서 목격한 세련된 삶에 매혹을 숨기지 못하는 더치의 모순처럼. 인지왜곡을 바탕으로 무법자들은 시대착오를 반복한다. 익숙한 방식 이외에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할 다른 방법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금을 기대하고 전차역 금고를 턴다거나(물론 푼돈밖에 없다) 석유 재벌 콘월을 살해하는(시스템화된 자본주의는 가령 적대 갱의 리더를 죽이면 전체가 와해되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식의 행동은 집단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과오는 막연한 위기의식과 그럴듯한 수사를 갖췄을 뿐, (게이머에게는 『호모 루덴스』로 더 유명할)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에서 조명한, 중세 말 부르고뉴와 네덜란드 등지 기사들의 시대착오적인 “기사도적 환상”이나(92), 리 패터슨이 초서를 통해 진단한, 중세 후기 영국 기사계급의 “자기인식의 실패”(230)에서 비롯한 정체성의 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급변하는 역사적 풍경에 맞서 만들어낸 자기기만적 세계관의 폐쇄회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까닭이다. 추억보정이란 이름의 인지왜곡을 걷어내고 나면 과거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갱이 돌이킬 수 없이 와해되는 순간에야 아서와 존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더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는가? 기실 이는 아서를 대체해 다음 세대 주인공이 될 존 마스턴이 꾸준히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존: 가끔은 세상이 우리가 기억하던 그런 모습이었던 적이 있긴 했는지 모르겠어. 우리들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들이었던 적이 있긴 했는지. 아서: 내가 그랬지, 그렇게 땅굴 파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마스턴. 그런 생각 아무 도움 안 돼. 이동 중 발생하는 이 대화는 무법자들의 세계관과 자기인식이 어딘가 뒤틀려 있음을 일찍부터 암시하는 중요한 실마리지만, 플레이어가 목표 지점까지 너무 빨리 도착하면 대사를 출력할 시간이 부족해 생략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충직한 아서처럼, 당장의 임무 완수를 최우선 삼는 플레이어는 무법자들의 인지왜곡을 회의하거나 성찰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아서가 묵살했던 존의 질문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아서의 결핵이 밝혀지는 시퀀스에서, 오직 명예 수치를 높게 쌓은 아서에게만, 보이스오버로 되돌아온다. 아서의 자기성찰은 오직 그를 조종하는 플레이어가 반복적인 선행을 통해 아서 내면에 선한 마음이 있으며, 그가 명예와 범죄 사이에서 자기분열적 모순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노라는 루도내러티브를 구성할 때라야만 가능해진다. 그렇게 죽음을 앞두고서야 아서는 선한 신념에 이끌리면서도 범죄를 일삼는 자기모순을 지탱해 온 것이 다름 아닌 스스로의 기만이었으며, 끝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 것이 바로 그 자기기만이었음을 깨닫는다. 반면 명예 수치가 낮은 아서에게 자기성찰의 기회는 없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은 악인에 가까운 아서의 뇌리를 죽는 순간까지 스치지 않는다. 또다른 ‘아서 왕의 죽음’으로서〈레데리2〉는 자기인식의 실패가 이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체험 가능한 서사로 구현한다. 종국에는 〈레데리2〉의 철학을 대변해 온 에블린 밀러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서구 문명의 병폐를 비판하는 내내 스스로 그 일부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밀러의 최후를 목도한 뒤 존은 일기에 적는다. 그 많은 학식도 가엾은 밀러 씨를 “자기 스스로 생각했던 것만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진 못했노라고. 궁극적으로 이는 〈레데리2〉 자신조차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과오다. 〈레데리2〉는 무법자들을 역사적 몰락의 풍경에 깊이 연루된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이들을 오히려 탈역사화하는 모순을 범한다. 에스더 라이트는 〈레데리2〉가 서부의 역사를 곧 서구 근대 문명 진보의 역사로 표상하는 전통을 성찰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종국에는 서구·백인·남성 중심 진보의 서부 역사관을 재생산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Rockstar Games,” “Women out of Date”). 이 재생산 과정에서 게임은 번번이 반 더 린드 갱이나 ‘옛 서부’의 과거를 상징적 인간 역사 이전의 상태로 표상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결국 〈레데리2〉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무법자들이 범하던 과거의 편집이라는 오류를 좀더 교묘한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레데리2〉에서 성찰은 가능하지만, 오직 최후의 순간에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 필연적인 완성이자 종말의 순간을 지연하는 것이 〈레데리2〉의 전략이다. 지연하는 오픈월드, 팽창하는 게임 오픈월드 시스템을 빼놓고 〈레데리2〉를 제대로 논의하기는 불가능하다. 세기전환기 미국 땅을 방대하고, 치밀하며, 상호작용 가능한 공간으로 구현한 〈레데리2〉의 게임 세계는 발매 이래 꾸준히 찬사의 대상이었고, 아직까지 번번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이는 게임을 둘러싼 불평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레데리2〉의 오픈월드가 동시대 게임 테크놀로지로 구현 가능한 플레이어 자유도와 비선형적 게임 경험의 지평을 확장하는 반면, 상술한 메인 시나리오는 극단적으로 선형적인 플레이 경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레데리2〉에서 시나리오 미션과 오픈월드 상호작용, 선형성/비선형성 간 괴리와 불협화음은 전례 없이 극대화된다. 로맨스의 오랜 관심사이기도 했던 이 긴장을 〈레데리2〉는 오직 디지털게임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주제화한다. 서사의 비집약성과 비선형성은 문학 양식이자 장르로서 로맨스를 특징짓는 요소다. 로맨스는 결말을 향해 내달리기보다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며, 우연한 조우를 통해 모험의 원래 목적과 상관없는 곁가지로 빠지기를 반복한다. 로맨스의 이러한 성격은 서사의 필연적 선형성에 저항하는 충동으로 해석되곤 한다. 패트리샤 파커는 로맨스가 불가피한 결말을 끝없이 지연하는 팽창의 양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고(4, 63), 리 패터슨은 로맨스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에 주목함으로써 역사적 의식을 억누르는 힘을 지닌 장르라고 해석한다(107). 기사 로맨스의 주인공인 편력기사(knight errant)의 errant는 모험의 방랑을 뜻하지만, 인식적·도덕적 탈선을 뜻하는 error에서 파생된 말이기도 하다. 로맨스의 팽창하는 모험은 이야기를 지연하고, 필연적인 종말과 완성의 순간을 유예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저항하며 서사적·물리적·도덕적 방황 자체의 즐거움에 주목하는 일이다. 이는 〈레데리2〉가 역사에 뒤쫓기는 무법자 아서 모건을 플레이하는 경험을 통해 구현하는 바이기도 하다. * “실패: 잘못된 말에 안장을 얹었습니다.” 일단 시나리오 미션에 진입하면, 시시각각 개입하는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간 온갖 기상천외한 사유로 게임오버를 당하기 십상이다. 〈레데리2〉의 시나리오는 선형적 시간성에 관한 자의식적 루도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증기기관차처럼 내달리는 근대 선형적 역사의 흐름을 구시대의 무법자는 거스를 수 없다. 〈레데리2〉가 전작 〈레드 데드 리뎀션〉(이하 〈레데리1〉)의 프리퀄임을 고려하면, 예정된 종말의 미래로 치닫는 〈레데리2〉의 시간의 흐름은 더더욱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다가온다. 아서나 플레이어는 한 시대의 끝을, 갱의 분열과 몰락을, 아서 자신의 죽음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시나리오 미션이 구성하는 게임플레이의 선형성 역시 플레이어 행위자성의 감각을 저해한다. 시나리오 미션 내내 플레이어는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개입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정확히 특정 지점으로 이동해 정확히 특정 행동을 수행하라는 지령은 종종 강제적인 조작 매뉴얼에 가까워지고, 여기서 이탈해 비선형적 플레이를 추구하는 시도는 게임오버로 차단된다. 결국 이 손쓸 수 없는 몰락의 이야기를 진행하며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자유란 기껏해야 번번이 돌아오는 전투 구간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상을 자행할지 정도뿐인데, 이는 아서가 시대의 변화 앞에 좌절감을 느끼며 폭력적 충동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고백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주체를 좌절시키는 (역사와 게임 시스템의) 선형적 힘이야말로 〈레데리2〉의 서사와 플레이경험이 동기화되는 지점이다. 반면 〈레데리2〉의 비선형적 오픈월드 시스템은 이 선형적 시간성에 저항하는 지연과 팽창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오픈월드는 게임플레이를 시나리오로부터 이탈시키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틈을 비집고 팽창시킴으로써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지연한다.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두 세계는 암묵적으로 전혀 다른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시나리오 미션에서 반 더 린드 갱의 몰락이 조밀한 인과관계 속에서 긴박하게 진행되는 반면, 오픈월드에서는 밤낮이 수없이 바뀌며 아서의 수염이 자라고 체중이 변할지언정 갱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선형적 플레이를 조작 단위로 강제하던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개입이 몰입적 플레이를 강조하는 오픈월드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물론이다. 오픈월드의 전례 없는 규모와 디테일, 높은 상호작용성은 물리적 플레이타임은 물론, 시나리오에서 좌절되었던 행위자성의 감각마저 팽창시킨다. 실패·도피·배신의 드라마의 구심점인 갱 캠프를 떠나 플레이어는 드넓은 자연을 탐험하며 수백 종의 동물들을 관찰하고 사냥하거나, 길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행인과 상호작용하거나, 마을에 들어가 목욕과 이발을 한 뒤 포커를 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갱의 명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비선형적 활동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오픈월드는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감각을 통해 플레이어를 끝없이 붙들어 놓는다(비약적으로 불어나는 플레이타임이 암시하듯 이 행위자성 감각의 팽창이야말로 게임플레이의 즐거움의 요체인지도 모른다). 〈레데리2〉 오픈월드의 비선형적 플레이경험은 선형적 역사의 시간에 맞서 종말의 미래를 끝없이 유예하는 지연의 시간성을 구성한다. 결핵으로 소진되어 가는 아서의 생명조차 선형적 시간이 지배하는 시나리오 미션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영원하다. 역사 바깥에, 비선형적 편력의 세계에 머무는 한 아서 왕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기기만일 것이다. 서부의 가을, 또는 “끝없는 여름” 〈레데리2〉는 개인을 좌절시키는 역사의 흐름과 그것을 뿌리치려는 개인의 충동 간 긴장을 게임화한다. 이는 아서의 죽음 이후 에필로그와 포스트게임의 플레이어 캐릭터로 거듭나는 존 마스턴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에필로그에서 존은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직한 삶을 일구고, 옛 배신자에게 복수함으로써 과거에 매듭을 짓는다. 엔딩크레딧 시퀀스는 〈레데리2〉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레데리1〉을 예고한다. 마침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 존과 애비게일의 결혼식 장면과 정부 요원들이 그의 자취를 추적해 오는 장면이 교차하고, 그 위로 게임 클리어 업적을 달성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업적 이름은 “끝없는 여름”이다. 크레딧이 모두 지나가고 나면 마침내 시나리오 미션의 제약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포스트게임 오픈월드를 존과 플레이어는 영원히 누빌 수 있다. 〈레데리2〉의 결말로부터 〈레데리1〉의 오프닝으로 향하는 이 거역 불가능한 선형적 시간 한가운데서, 머지않아 또다시 찾아올 폭력과 죽음의 미래는 끝없는 여름의 정지된 시간 속에 언제까지고 유예된다. 하지만 이는 다가올 미래를 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 머지않아 불청객이 방문할 것이고, 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로워졌다고 믿었던 순간 자기 손으로 일군 농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결국 〈레데리2〉의 존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착오에 빠진다. 그는 무법자였던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개인의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복수를 통해 되찾은 돈으로 은행빚을 청산하고 자기 소유 농장을 유유자적 경영함으로써 동시대 사회라는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 포스트게임 오픈월드의 영원한 여름의 시간 속에서 선형적 시간은 힘을 잃고, 무한한 활동의 자유 속에 행위의 인과는 의미를 상실한다. 물론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4년 뒤, 〈레데리1〉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 엔딩크레딧 시퀀스 위로 뜨는 에필로그 클리어 업적 달성 메시지, “트로피 획득! 끝없는 여름”. 하지만 이 여름이 어떻게 끝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개인이라는 (미국적인) 꿈이 얼마나 큰 착각이며 자기기만이었는지 무자비하게 폭로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결국 존 마스턴은 다시금 세상이 자기가 생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음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운명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을을 가리키고 있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한 서부의 여름은 영원할 것이므로. 그렇게 아서 왕의 죽음 뒤에도 존과 플레이어는 다시 한번 종말을 지연하고 인식적 과오 속에서 즐거움이 팽창하는 ‘로맨틱한’ 편력을 계속한다. 끝없는, 여름이었다. 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참고문헌 Cooper, Helen. Introduction. Le Morte Darthur: The Winchester Manuscript, by Sir Thomas Malory, edited by Cooper, Oxford UP, 2008, pp. vii-xxx. Huizinga, Johan. Autumntide of the Middle Ages: A Study of Forms of Life and Thought of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in France and the Low Countries. Translated by Diane Webb, edited by Anton van der Lem and Graeme Small, Leiden UP, 2020. Parker, Patricia A. Inescapable Romance: Studies in the Poetics of a Mode. 1979. Princeton UP, 2015. Patterson, Lee. Chaucer and the Subject of History. U of Wisconsin P, 1991. Red Dead Redemption 2. Rockstar Games, 2018. Wright, Esther. “Rockstar Games, Red Dead Redemption, and Narratives of ‘Progress.’” European Journal of American Studies, vol. 16, no. 3, 2021, pp. 1-19. ---. “Women Out of Date.” Bullet Points Monthly, December 2018, https://bulletpointsmonthly.com/2018/11/12/women-out-of-date/. Accessed 11 June 2022.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선오 영문학을 전공하고 중세 로맨스에서 여성의 사랑이 재현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게임은 오랫동안 꾸준히 플레이해 왔지만, 특히 중학생 때 코에이의 대항해시대 프랜차이즈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삶의 궤적이 전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비디오게임, 영화, 드라마 등 동시대 미디어가 역사, 역사적 배경, 그리고 역사와 개인(특히 여성)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댓 드래곤 캔서>가 ‘게임’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댓 드래곤 캔서>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 Back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16 GG Vol. 24. 2. 10. ※ 본 글은 의 주요한 게임의 줄거리 및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사랑을 담은 게임 (이하 < 댓 드래곤 캔서 >) 는 2016 년 Numinous Games 의 소규모 팀에 의하여 개발된 자서전 형태의 게임이다 . 라이언 그린 (Ryan Green) 과 에이미 그린 (Amy Green) 은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게임을 제작하였는데 , 그들은 자신들의 셋째 아이인 조엘 (Joel) 이 암을 투병해 나가는 모습을 게임으로 담아내었다 . 게임의 제목인 ‘ 댓 드래곤 캔서 ’ 는 ‘ 암 (cancer)’ 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기 위하여 고안된 상징적 장치로 , 조엘이 겪고 있는 암을 무찔러야 할 ‘ 드래곤 ’ 그리고 투병 중인 조엘을 ‘ 용사 ’ 로 묘사한다 ( Green, 2017). 그림1, 2. 용사 조엘과 드래곤(Numinous Games) 그린 부부의 셋째 아들인 조엘은 생후 1 년 만에 뇌암을 진단받았다 . 당시 의사들은 아이의 수명이 4 개월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지만 , 조엘은 치료를 통해 3 년을 더 살았고 4 살이 되던 해에 숨을 거두었다 . 추가적으로 얻게 된 3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린 부부는 “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법 ” 을 배웠으며 이러한 경험을 전달하기 위하여 < 댓 드래곤 캔서 > 를 제작했다 (Aki, 2016). 그림3, 4. 라이언과 그의 아들 조엘(Robertson, 2016; Numinous Games) 게임은 간단한 포인트 앤 클릭 방식으로 1 인칭과 3 인칭을 오가며 진행된다 . 플레이어는 그린 부부의 시점에서 매 순간을 조엘과 함께하게 되는데 , 이로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그를 돌보는 부모의 경험에 참여하게 된다 . 게임을 구성하는 14 개의 작은 챕터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특정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 각 챕터들을 통해 플레이어는 투병 중인 아이와 함께하며 얻게 되는 기쁨과 , 불안 , 사랑과 , 의심 , 절망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내기 조엘과 함께한 시간을 심리적으로 기록한 < 댓 드래곤 캔서 > 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담아낸 게임이다 . 그린 부부가 실제로 느꼈던 조엘에 대한 당시의 ‘ 사랑 ’ 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인 셈이다 . 한편 , ‘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 은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미디어에서 가장 흔한 주제 중 하나이다 .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절절한 사랑을 다루는 글이나 영화는 특히나 넘쳐 난다 . 그럼에도 개발자들은 ‘ 게임 ’ 으로 자신들의 ‘ 사랑 ’ 을 담아 내길 선택했다 . 그렇다면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왜 하필 게임이었을까 ? 제작자인 그린 부부가 자신들을 사랑을 기록하기 위해 ‘ 게임 ’ 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왜 영화나 소설이 아니었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016 년 SDF 1) 에서 진행된 라이언 그린의 짧은 강연으로부터 엿볼 수 있다 . 2) 해당 강연에서 라이언은 제작 중 겪은 어려움을 바탕으로 ,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을 담는 매체가 될 수 있는지 , 그리고 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 “게임은 재미를 위한 매체 ” 라는 풍조 속에서 < 댓 드래곤 캔서 > 는 환영 받을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 ‘ 시한부 아이의 투병기 ’ 는 이용자들이 쉽게 즐기기에는 너무나도 어둡고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괴리는 투자금 확보에 있어 큰 장애가 되었는데 , 제작자들은 왜 이 새로운 주제가 게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했다 . 3) 여기서 라이언 그린은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이야기 하며 < 댓 드래곤 캔서 > 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 먼저 , 게임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소 광범위하다 . 라이언에 따르면 , 게임은 ‘ 인터렉티브 미디어 ’ 로 수용자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독특한 매체이다 . 즉 , 어떠한 행동 (action) 을 취하는 것이 게임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 게임 제작자들은 특정한 행위성을 만들어 내고 , 수용자는 게임을 플레이하게 됨으로써 제작자가 정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 4 ) 한편 , 대부분의 게임들이 따르는 행위성은 매우 한정적이다 . 그들은 특정한 미션을 제시하고 , 플레이어의 행위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형식을 취한다 . 그리고 , ‘ 성과 ’ 라는 기준으로 플레이어의 ‘ 행위 ’ 를 판단하는 위와 같은 게임들은 너무나도 신자유주의적이다 . 수많은 게임들이 장애물을 극복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중요한 행위의 척도로 설계되지만 , 이는 성취 지향적이고 자기책임 논리에 복속되어 있는 미디어의 한 형태일 뿐이다 . 결국 인터렉티브 미디어는 어떤 행위성에 대한 설계이며 , 그 행위성은 사회의 특정 가치를 담고 있다 . 그렇다면 , 게임이 담아낼 수 있는 행위성 역시 다양할 것이다 . 게임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될 수 있고 ,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그를 사랑하는 것 역시 될 수 있다 . 즉 , 게임이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행위는 무궁무진하다는 말이다 . 여기서 , 라이언 그린은 인터렉티브 미디어가 포용적이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제시하는 행위가 사회 공동체적 가치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성공이나 성취를 위한 행위 보다는 사랑과 배려 , 관용을 베푸는 게임 , 즉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고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정확히 이러한 주장과 맞닿아 있다 . 그림5. 풍선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떠나가는 조엘(Numinous Games) <댓 드래곤 캔서 > 는 본질적으로 성취가 불가능한 게임이다 . 약 두 시간 남짓의 플레이 타임 동안 플레이어는 다양한 활동들을 하지만 , 그 어떤 행동도 조엘의 병을 이겨내게 할 수 없다 .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 암으로 인한 조엘의 죽음 ’ 이라는 하나의 결말로 나아갈 뿐이다 . 실제로 , 플레이 과정 중 이용자들이 하는 모든 액션은 성공이나 실패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 < 댓 드래곤 캔서 > 에서 유저들은 아이와 놀아주고 ,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 편지를 읽는다 . 모두는 ‘ 실패가 불가능 ’ 한 활동들이다 . 이는 미니게임에서 역시 마찬가지인데 , 카트 라이딩에는 제한 시간이 없으며 , 드래곤을 무찌르고자 나아가는 용사 조엘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나아가며 미션을 완수한다 . 행위에 대한 적절성 보다는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 < 댓 드래곤 캔서 > 는 ‘ 성취 ’ 가 아닌 ‘ 사랑 ’ 을 위해 디자인 된 게임이다 . 한 방의 역전이나 선택에 따른 긴장은 없지만 , 플레이어들은 ‘ 불치병에 걸린 아이와 함께 산다 ’ 라는 상황 안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을 수행하며 전혀 다른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에 공감할 기회를 얻게 된다 . 이러한 접근은 게임이란 매체 자체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에 기여하였는데 , 제작자들은 플레이어가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 내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디자인을 선보임으로써 ‘ 혁신성 (Most Innovative)’ 분야의 상을 수상하였다 . 그림6,7. 미니게임 장면들(Numinous Games)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 < 댓 드래곤 캔서 > 가 ‘ 게임 ’ 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 < 댓 드래곤 캔서 > 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 이는 제작자들이 담아내고자 한 것이 아가페 (Ageape) 적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 헌신적인 거룩한 사랑 ’ 을 의미하는 아가페는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베풂으로써만 실천된다 . 시한부 아이를 돌보는 일은 아이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애정을 베푸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게임은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매체이다 .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교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 5) 이처럼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사랑의 매체로서 게임을 보여준다 . 게임은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냥 주는 것 역시 될 수 있다 . 그리고 , 사랑은 순간적인 감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적극적인 행위이기에 , 행위성을 통해 보여지고 게임을 통해 담아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참고문헌 라이언 그린 (2016, 5, 20). 친밀함을 위한 게임 디자인 : 댓 드래곤, 캔서 [That Dragon, Cancer]. . URL: https://www.sdf.or.kr/archive/2016/ko/video/10000000347 Aki, A. (2016, 1, 22). ‘That Dragon, Cancer’: Q&A With Developer Ryan Green. Voice of America. URL: https://blogs.voanews.com/techtonics/2016/01/22/that-dragon-cancer-qa-with-developer-ryan-green/ Eilon, S. (2018, 7, 21). That Dragon, Cancer. IEEE: Technology and Society. URL: https://technologyandsociety.org/that-dragon-cancer/ Green, A. (2017). A video game to cope with grief. TED. URL: https://youtube.com/watch?v=vWJwa7lntTs Tanz, J. (2016, 1). Playing for Time. WIRED. URL: https://www.wired.com/2016/01/that-dragon-cancer/ Robertson, A. (2016, 2, 12). That Dragon, Cancer: the video game that takes death seriously. The Guardian. URL: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6/feb/12/that-dragon-cancer-video-game Stafford, P. (2015, 4, 16). A GAME ABOUT CANCER, ONE YEAR LATER. Polygon. URL: https://www.polygon.com/features/2015/4/16/8374481/that-dragon-cancer 1) SDF(SBS D포럼)는 SBS가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실시해온 지식나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2) 강연에 대한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sdf.or.kr/archive/2016/ko/video/10000000347 3) <댓 드래곤 캔서>의 투자금 유치에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예술로서의 게임’ 논쟁으로 유명한 캘리 산티아고(Kellee Santiago)이다. 그녀는 <댓 드래곤 캔서>가 가지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투자금 유치에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어주었다(Stafford, 2015). 이후 개발자들은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Kickstarter를 통해 약 3,700명의 후원자로부터 100,000달러 이상을 모금 받아 게임을 제작하였다. 때문에 게임 내부에는 클라우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진 및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4) 이는 게임을 행위성의 매체로 본 티 응우옌(Nguyen, C. Thi)의 주장과도 닿아 있다. 5) 실제로, 제작자들은 조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보다는 그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방점을 맞추었다. 조엘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세세한 묘사에 효과적인 영화나 수필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3)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 Back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07 GG Vol. 22. 8. 10. 하나의 세계라는 조건 속의 여정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디스코 엘리시움〉의 등장인물 〈디스코 엘리시움〉은 반세기 전 한때 공산주의 혁명의 파도가 엄습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혁명으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인 가상 국가 레바숄과 그 한 구역인 마르티네즈를 주 배경으로 한다. 탄광에서 일하며 벽화 페인트와 미술에 심취한 공산주의자 스컬 신디와 대기업 와일드 파인 사의 대사이자 초자유주의자인 조이스, 해리의 동료 킴 키츠라기를 순수 혈통이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인종주의자 운전수와 미확인파시스트 개리, 왕정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노인과 마조프주의자로 연합군에 저항했던 탈영병, 밀매 혐의를 받으면서도 항만 노동조합 대표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실 권력을 움켜쥔 에브라트 등의 사민주의자, 클럽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이곳은 화해 불가능한 NPC들, 성원들이 살아가며 서로에 필연적으로 적대, 모순, 역설 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세계다. 한 세계의 구성원들이지만 동시에 결코 엮일 수 없으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된 곳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놓인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육성해나가는 방식(능력치, 생각 캐비닛, 장비)에서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피상적인 혹은 구체적인 사상과 이념을 가졌든, 아니면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냥 플레이하든 게임 진행에 문제는 없다. 인물들과의 상호작용과 주사위 판정에 따라 선택지와 이념 루트들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며, 게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은 맞다. 분명 〈디스코 엘리시움〉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캐릭터 구축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게임 내 모든 활동은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접촉하고, 대면하고, 공유하게 되는 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플레이어는 전지적인 능력으로 세계를 뒤흔들고, 변형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곧 레바숄이라는 하나의 황폐한 세계를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에서 해리의 자아와 의식,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도가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반영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인공이 본인으로 다시 서는 과정에서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플레이를 이어나가면서 분실한 신분증을 찾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드 부아다. 주정뱅이 해리는 새로운 동료 킴 키츠라기와 함께 살인 사건을 조사해나감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NPC들에 접근하여 소통하거나 교감하며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하지만 해리 또한 세계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인물이 전혀 아니다. 해리는 RCM 소속의 경찰로 권위를 위임받은 인물이다. 그 자신이 몸담은 RCM은 혁명 이후 연합 정부에 의해 국제 영역의 치안을 복구하고자 조직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을 자처하고 있으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단지 설립이 허락된 조직에 불과한, RCM의 경찰이라는 조건을 해리와 플레이어는 이를 끊임없이 자각해나간다. 그렇기에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선택이 반영되는 결과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세계로부터, 인물로부터 독립된 각각의 가능 세계들을 앞세우려 드는 멀티 유니버스, 멀티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동원되는 평행세계, 대체역사, 가상현실 같은 개념들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여기에 독립된 각자의 다원적 세계들이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스코 엘리시움〉은 결과에 도달하는 선택의 과정들에 활로를 열어젖힘으로써 게임을 통해 정식화된 공통의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에서 선택지를 통하여 과정과 분기가 결정됨에도 그것이 세계를 뒤바꾸는 성공이나 실패의 특정한 루트를 창출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일각에서는 네 개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선택지를 골라서 특정 이념을 체화한 인물로 만들어도, 결국 같은 화면을 공유하며 세계의 결과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들어 게임의 자유도를 비판하곤 한다. 그것은 적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던함과 포스트모던함, 표층과 심층의 이야기의 공존 “만약 새로운 정치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실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근원적 대상으로서의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집단적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행동하고 위치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하고, 현재 우리의 공간적·사회적 혼란에 의해 중화되어버린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적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창안하고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앞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떤 사상과 이념을 택하든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분명히 동시대 유행하는 어떤 RPG, 오픈월드 게임들의 방향과는 확연히 다른, 이전 세기의 전유물 같은 인상을 준다. 플레이어들이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거나, 한 문학평론가의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1) 이라는 말은 그것을 대변하는 의견일 것이다. * 도덕주의자 퀘스트에 등장하는 연합 군함 아처 먼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무결자로 불리는 '돌로레스 데이'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임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이 인물은 무결자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이고 도덕주의자들(=인문주의자)의 상징이며, 통치 시기에는 엘리시움에 있는 여러 이솔라를 발견했다. 레바숄 또한 이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돌로레스 데이에 대한 숭배는 단순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으로 여겨졌으며, RCM의 법규도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기반을 둔다. 돌로레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경호원에게 총에 맞고 죽고, 돌로레스 데이의 시절이 돌연 막을 내린 이후 더는 이러한 세계의 질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레바숄은, 사회를 어떻게 질서화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실패하고 이러한 구상 자체가 외부 세력에 의해 짓눌려버린 곳이다. 그것은 곧 이성, 합리, 질서 등을 내세운 근대가 좌초된 것이기도 하다. * 교회 안의 클럽 반면 서브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이전의 시스템이 더는 기능 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듯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은 최신의 아노딕 댄스 뮤직을 구현하는 행위에 전념한다. 훼손당한 돌로레스 데이의 벽 조각상이 안치되어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 클럽을 만든다. 진중한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은 너무나 '소프트코어'한 세상을 '하드코어'하게 바꿔야 한다고 하거나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무엇이든 거대한 이념과 사상들은 다 나쁘고 가치판단에는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대뜸 돌로레스 데이를 대량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렌즈로 '오타쿠'와 현대 일본의 정신구조에 대한 분석하면서 이 개념을 축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이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점을 탐구한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의 세계를 트리형, 데이터베이스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근대의 트리형은 우리의 의식에 비치는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반해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을 ’이야기하기‘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형사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는 표층과 기억을 잃은 자가 인물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마주하며 다시 나아가는 심층의 이야기로서, 그리고 근대와 근대 이후의 감각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지나간 근대를 재료로 삼는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 해리 또한 근대를 지나온 인물이다. 해리는 근대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인간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수정 능력을 통하여 세계와 마주하며 자신을 다시 찾아가며, 게임의 세계관도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누구로, 무엇으로,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사고해나가는 해리나 자신을 다소 철학적인 항만 노동자로 소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투쟁하는가‘식의 거시적인 담론을 나누는 걸 즐기는 편이라고 말하는 마냐나 같은 인물은 이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아노딕 댄스 뮤직의 아이들에게는 이는 관심사도 아니다. “거대한 이야기와는 철저히 단절한 새로운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은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히로키식의 설명을 빌리자면, 트리형 세계 속에 작품의 심층적인 이념, 사회구조, 세계관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은 해리일 것이다. 반면 아노딕 뮤직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던 이야기구조, 데이터베이스형 모델을 추구하며, 근대의 커다란 이야기들이 실종된 채로 당장 본인들이 추구하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대한 파편적인 데이터베이스들로 자신들만의 세계와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들어간다.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서브 퀘스트를 수락하고 진행하게 되면, 해리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맞춰 교회에서 춤사위를 벌인다. 한때의 찬란했던 신세대의 음악이라 불리던 디스코의 시절은 어느덧 저물고, 빈사 상태가 되었다. 해리는 새로운 세대의 아노딕 댄스 하드코어 음악을, ’돌로레스 데이‘의 조각상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그저 옛 찬란했던 20세기의 근대적 이상을 복원하는 것에 착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찬미하는 게임인가. 모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포스트모던을 부정하고, 아노딕 댄스 뮤직을 선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에 조소하고 한탄하는 게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과거 기획의 실패, 우울, 좌절, 절멸, 절망, 패퇴, 패배주의,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내내 게임의 정서를 지배하는 듯한 종반부에는 극적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인술린데 대벌레와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한 도라, 그리고 탈영병 같은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해리(플레이어)는 탈영병을 마주하기 직전 꿈에서 자신의 오랜 결핍의 대상이었던 옛 연인이자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된 도라를 마주하고, 이후 인술린데 대벌레를 만나 그 옛 연인을 이제는 잊고 극복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인다. 종반부에 예상치 못한 범인으로 대면하게 되는 탈영병 노인은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이다. 탈영병 노인과 해리는 완전히 상반되는 궤적을 지닌다. 게임의 시작에서 해리는 연인 도라와의 결별을 중심으로 세상에 대해 환멸과 회의로 얼룩진 나머지 모든 권총으로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모색했던 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게임의 시작에서 모든 것에 절망하고 세계와 단절한 채로 자신을 고립시킨 해리가 개인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자생적 의식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추방되기를 기꺼이 자처했던 해리가 다시 세계와 마주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라 혹은 이를 형상화한 돌로레스 데이를 떠나보내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모순적 세계의 성공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디스코 엘리시움〉의 리드 작가 헬렌 힌드페레(Helen Hindpere)는 ’포스트 소비에트‘의 시기에서 자란 기이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레바숄이 마치 10년 전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 .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러한 경험들의 잔향이 당연히도 짙게 배어있다. 하지만 이는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련의 몰락 이후의 시기를 직접 겪은 이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여 그것의 실상에 관해 증언하는 역사물이 아니다. 가상적 공간을 주 무대로 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존적 무게로 다가오는 정치적 실재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그 자체로 재현하거나 규명하는 것을 자처하면서 이를 훈고학적으로 늘어놓으며 일련의 무용담, 음모론, 교훈극으로 소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미학적 구성물로 승화하는 셈이다. 이로부터 한 예술비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동구와 서구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면서 공산주의 붕괴 이후 서구 좌파들이 가지는 어떤 멜랑콜리나 채무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역사 이후의 시간이란 ‘최적의 사회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미 완수된 시대이며, 지금 중요한 것은 ‘앞서 일어난 혁명의 성과’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현세적 실천이라고 말하는 보리스 그로이스다. 역자 김수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코뮤니스트 후기〉라는 책을 소련을 회고하는 역사 에세이가 아닌, 철학적 성격의 사고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미학적 구성물에 가깝게 구성한다. “만약 공산주의를 언어라는 매체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약속하는 것은 목가라기보다는 자기모순 속에 놓인 삶, 최대치의 내적 분열과 긴장의 상황이다”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체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대립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첨예화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에 내재한 모순과 분열, 적대를 숨기지 않고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둘러싼 대립을 첨예화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쩌면 그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도 같다. RPG 캐릭터의 육성 방법으로 어느덧 암묵적으로 필수 사항이 된듯한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자리를 방대한 텍스트와 온갖 갈등, 모순, 역설, 적대로 얼룩진 세계관으로 채우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모두에게 어필할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따분하거나 거북하거나 섬뜩할 수도, 혹은 고양되거나 짜릿하거나 흥분되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3) 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게임 개발사 하나 제대로 없던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설가 출신으로 실패를 경험한 로버트 쿠르비츠 등을 위시하여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던 이들에게 말이다. 1) (인하영, 2021) 문학평론가,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경향신문』, 2021.10.28https://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10280300115 2) 〈Masterclass: Helen Hindpere Talks About Writing Disco Elysium: The Final Cut〉, https://youtu.be/Xf_hU7IW5qs 3) 보리스 그로이스,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Becoming the Artwork)〉, 2020,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Contemporary-Art-Business: The New Orders of Contemporary Art)》 https://youtu.be/W9Uu13m5JxI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VIRTU), 201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 편집위원) 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 인벤토리 시스템은 어떻게 효율을 재미로 연결시켰는가?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꽉찬 인벤토리에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2023년 대흥행을 이루었던 <발더스게이트3>에서는 아이템의 무게가 발목을 붙잡는다. 일반적으로 처음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어떤 아이템이 좋은 아이템이고, 어떤 아이템이 ‘잡템’인지 알 수 없어서 보부상처럼 모든 아이템을 들고 다닌다. 그러다 걸음걸이가 무거워지면 아이템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이때 무엇을 들고 다닐 것이고 무엇을 버리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유튜브나 커뮤니티에는 ‘발더스게이트 인벤토리 관리 꿀팁’ 글들이 무수히 올라와 있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인벤토리, 롤플레잉, 아이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won Seo Studies culture in pursuit of a more interesting life. Curious about a wide range of cultural domains, including games, religion, and film.

  • 오락실 시대의 대표주자 대전격투 게임, 어떻게 변해왔나

    200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에 초점을 맞춰, 사반세기 동안 대전격투게임과 그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주요 변화 양상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적 맥락, 산업 구조, 기술 변화, 문화 수용 등의 차원을 고려한다. < Back 23 GG Vol. 25. 4. 10. Tags: 대전격투게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 Back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05 GG Vol. 22. 4. 10. 평등한 게임이라는 환상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이런 주장은 다양한 이유로 게임에 접근조차 어려운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극 빈곤층 등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많은 게임 커뮤니티들에서 어린 고수들에게 게임의 도道를 사사 받은 풋내기 성인들의 경험담 같은 것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어쨌거나 게임의 세계에서는 게임 잘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사실은 유효하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은 오늘날 게임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재능하나로 돌파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지는 따져볼 일이다. 데이터 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을 배반하는 데이터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령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NBA(전미농구협회)를 가난한 흑인들이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장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데이터는 반대다. NBA는 점차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이 가난한 선수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규칙을 지키는 등의 사회적 능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1). ‘게임을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임이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에는 무시당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것을 놔두는 것은 책임방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런 개입들은 필연적으로 게임을 더 돈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Pay to win이라는, 돈을 많이 낼수록 강해지고 승리하는 게임들의 승승장구와, 하나의 게임을 잡다하게 쪼개서 팔아치우는 부분유료화의 전면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게임들이 있다. 하지만 자녀가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신형 컴퓨터를 사주고 프로게이머 학원에 보내주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게임계에서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인성’논란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한 문제들은 앞선 예처럼 교육과 양육환경의 문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프로스포츠들에 비하면 아직은 덜 체계화 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만약 e-sports가 진짜로 다른 인기 스포츠들만큼의 위상을 획득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경쟁하면서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은 티어로 알 수도 없고, 반영되지도 않는다. 엄마가 모욕이 된 세계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렇듯이, 게임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평등하게 소통하기보다는 무차별적 모욕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혹자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모욕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평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욕이 진짜로 ‘무차별적’인지는 살펴봐야 한다. 박서련의 단편 소설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2)은 동명의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소설은 무용을 전공할 뻔하고, 외국계 게임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하나 낳은 중산층 가정주부인 ‘당신’3)의 이야기를 다룬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게임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아이에게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부모인 당신은 고민 끝에 게임과외를 떠올린다. 최초로 찾아온 것은 명문대를 다니며 챌린저 티어인 남자 대학생이다. 그는 게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나무라며 부모라도 아이가 하는 게임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게임을 가르쳐 주겠다던 그는 그걸 빌미로 손을 잡고 가슴에 팔꿈치를 갖다 대며 성추행을 한다. 이제 어리지로 순진하지도 않은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고, 단호하게 그를 내쫓는다. 불쾌감을 뒤로하고 새롭게 만난 과외선생은 다이아 티어의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이다. 당신은 그에게 여성적 매력이 없음을 안도하며 아이의 과외선생으로 낙점하지만, 그는 아이가 아니라 당신이 게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선생의 등쌀에 떠밀리듯 당신은 게임을 시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놀랍게도 재능이 있었다. 당신은 승리를 쌓아가며 오랜만에 온전한 성취감을 맛본다. 순식간에 아이의 티어인 브론즈를 넘어 골드에 진입한 당신은, 때마침 아이의 라이벌이 아이와 전교회장 출마를 두고 게임으로 승부를 내자고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신은 불신하는 아이를 이겨 실력을 입증하고, 아이의 라이벌을 게임으로 불러내 보기 좋게 압살해버린다. 하지만 사실 게임을 그다지 잘 하지도 못했던 아이의 라이벌은 패배에 승복하지 않고 아이의 계정에 접속해 있는 당신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쏟아낸다. 그리고 당신은 알게 된다. 게임에서 ‘엄마’는 그 자체로 욕설로 받아들여지고, 당신이 엄마라고 타이핑할 때마다 ‘XX’가 그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아이의 라이벌은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너희 엄마를 외치지만, 게임은 엄마인 당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이긴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패배감을 맛본다. 게임, 엄마, 여성 이 소설은 여성과 게임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례들을 엮어 한편의 악몽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악몽은 엄마의 것이다. 소설 속의 ‘당신’은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엄마이고, 자녀 양육에 관한 최신의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 중산층이다. 훈육과 금지보다 이해와 도움을 통해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고, 과도한 애정관계를 형성해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소위 깨인 엄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은 이런 듣기 좋은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은 아이의 미래를 자신의 계획과 계산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고,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이는 의존적이고 버릇없게 자라고 있다. 당신은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하려 하는 미숙한 어른임에도, 자신이 아이를 빈틈없이 케어하고 있다는 허위의 자족감에 빠져 있다. 따라서 소설은 엄마인 당신을 온전한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빠져있는 함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심지어 공모하고 있는 존재에 가깝다. 게임문화에서 엄마의 표준적인 모습은 당장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닦달하는 존재이지만, 소설 속의 당신은 이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녀의 모든 영역을 빈틈없이 조망하고 싶어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게임에 직접 뛰어들게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지든 방임이든 개입이든 간에 게임은 엄마들에게 불안의 영역이다. 그것이 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게임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담론이나 연구들은 온전한 논의가 아니라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정해두고 말하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마들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게임에 맞서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런 역할들을 엄마가 도맡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양육과 돌봄이라는 문제가 엄마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엄마의 일’로 여겨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모든 삶이 평가되는 종류의 문제이다. 하지만 학업성적이나, 일의 성과 같은 것에 비해 양육은 지극히 평가가 어렵다. 사회적으로는 아이가 명문대에 입학하고 고소득 직업을 갖는 것 정도가 성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잘못이 되고야 만다. 이 함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양육의 책임을 모든 가족과 사회에 실질적으로 분산하고, 엄마들에게 합당한 사회적 인정과 자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엄마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지운다. 직장에서는 자기만 조직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밖에서는 이기적인 ‘맘충’이고, 가족들에게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엄마이자 아내다. 게임에 대한 ‘엄마’들의 적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방어적인 반응이다. 자신의 의무는 아무것도 줄어든 것이 없는데, 남편과 자녀가 시간과 돈을 게임이라는 잘 알지도 못할 것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의 악몽은 여자에 대한 것이다. 게임에서 가장 심한의 모욕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여성형이다. 게임을 못한 것이 남자일지라도 욕을 먹는 것은 애꿎은 엄마와 전국의 아무 상관없는 ‘혜지’들이고, 평생을 모쏠로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남자친구 따라서’ 게임을 시작한 줏대 없는 게이머 취급을 당한다. 그런가하면 많은 남자게이머들이 여자게이머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여긴다. 엄마, 선생님, 여가부(!)처럼 여자는 게임을 방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게이머 여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저도 그 여성은 나보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며, 게임을 ‘가르쳐’줘야할 존재일 것이라는 가정이 붙는 경우가 대다수다. 게임을 잘하는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그의 실력은 언제나 ‘합리적 의심’에 휩싸이고, 폄훼당하기 일쑤다. 자신이 그 여성게이머보다 게임을 못하더라도, 게임실력을 의심하고 훈수를 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남성게이머들이 넘쳐난다. 게임문화의 공식적인 입장은 ‘게임만 잘하면 되지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이지만, 이것으로는 게임문화 전반에 넘쳐나는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를 설명할 수 없다. 딜루트는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에서 많은 게임커뮤니티의 주류담론들이 모두를 동등한 게이머로만 대해야 하며, 친목질을 방지하고 성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드러내선 안 되는 성별은 오직 ‘여성’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지칭하고, 여성 게이머 이슈에서는 입을 모아 조롱하기에 바쁘지만 그런 것에 문제를 제기할 때 만 “남자건 여자건 그냥 각자 게임을 하면 그만”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4) 최근 몇 년간에 걸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게임업계의 성차별, 남성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아시아시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런 흐름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게이머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의 책임 있는 단위들이 하다못해 말이라도 차별에 대한 반대를 뚜렷하게 표하는데 반해, 한국과 아시아는 모든 것을 소비자-게이머들의 뜻이라며 회피하기에 바쁘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일부 남성게이머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앞장서서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듯 오늘날의 게임문화는 엄마에게도 여성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이렇게 특정한 남성 집단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새로움도 품을 수 없음을, 그래서 결국에는 고립되고 도태될 것임을 예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당신’은 게임을 통해 그간 얻지 못했던 승리감을 맛본다. 그가 현실에서 다뤄야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결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고, 끝나지도 않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게임은 짧은 시간동안 승리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어쩌면 당신은 패배 역시 기뻤을지 모른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조차 없는 세상과는 다르게 명확하게 판정을 내려주고, 심지어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게임은 이미 현실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로 침식되어 있었고, 게임은 그를 “XX”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게임의 세계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 할 수 없고,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협곡에서도 똑같은 기울기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는 게임에서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며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한다. 나는 게임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지겨워진다. 왜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 기어코 현실의 가장 나쁜 것들을 끌고 들어오고야 마는가? 왜 누군가를 모욕하고 신뢰를 깨트리는 것에서 음침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녀야 하는가?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게임하는 것 대신에 진짜게이머와 가짜게이머를 구분하는 의미 없는 언쟁에 휘말려야 하는가? 게임은 가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 중 하나지만,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우려스럽다. 더 약탈적인 비즈니스모델,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지와 무시, 독성을 가득 머금고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커뮤니티문화. 이 흐름들을 멈출 수 없다면, 게임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우리와 닮은 ‘게임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손을 쓰지 못하게 되기 전에 게임을 되찾자. 이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1)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모두 거짓말을 한다》, 더 퀘스트, 2018. 2)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3) 당신은 이름이 아닌 2인칭 대명사이다. 4)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동녘,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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