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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트라우마와 유령의 소환술: 〈반교: 디텐션〉의 역사주의

02

GG Vol. 

21. 8. 10.

유령의 소환술과 ‘유령되기’ 


유령은 만져지지 않지만 눈에는 보이는 존재다. 유령은 가상인 동시에 실재에 현상하며, 현재에 머무르면서도 현재에 부재한다. 유령은 형이상학에 속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때때로 인식과 경험에 영역에도 걸쳐져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유령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언제나 뭔가를 암시하고 일깨우는 존재다. 고뇌에 빠진 햄릿 왕자의 앞에 나타난 왕의 유령은 자신이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동생 클로디어스에게 독살당했음을 알리고, 햄릿은 복수를 위해 일부러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한다.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고려의 무장 강조는 자신이 살해한 왕(목종)의 혼령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업보를 깨닫고 주저앉게 된다. 역사의 무수한 협잡의 순간마다 유령은 언어화되지 않은 목소리들과 더불어 되돌아오는데, 때론 ‘배회’하면서 혁명적 순환의 계기를 만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운동 속으로 민중을 휘몰리게 만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수한 좌절과 분노의 비극적 순간들이 희극으로 소급되면서 역사가 진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유령’은 역사가 비극의 플롯으로 치달을 때마다 한 세대를 구원하고자 천을 뒤집어쓰고 돌아오는 기계신이자, 부재하는 현재를 실재에 표시하는 인기척인 셈이다. “유령은 근본적으로 장래이며, 항상 도래할 것으로 남아있고, 도래하거나 다시 도래할 수 있는 것으로서만 자신을 제시한다.”1)


유령은 부르면 달려오는 시종이나 램프의 요정이 아니다. 유령은 태어나지도, 길들여지지도 않으며 단지 출몰할 뿐인 존재이다. 그것은 등재된 공식역사나 승자들의 후일담을 받들지 않는다. 유령은 숨죽인 채 우리 곁을 맴돌면서 패배의 순간, 비명이 질러지는 소리들을 엿듣는다. 잊혀진 이야기, 침묵 속에서 억눌러진 단말마들이 유령의 인기척에 새겨진다. 그런 점에서 유령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목소리들을 받아 적는 우리는 역사가인 동시에 소환술사라 할 수 있다. ‘유령의 소환술’은 역사의 가장 희미한 빛을 점화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경외감만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와 다른 길을 간다. 수많은 예술이 유령의 흔적을 좇아 미사여구를 창조하지만, 유령 자체를 소환하려는 시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비극을 현재의 희극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필연적인 비극 또한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소환의식은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애써 부인하는 비밀을 마주하는 용기로부터 출발한다. 


대만의 어드벤처 게임 <반교: 디텐션>은 역사를 다룬다. 그러나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패퇴한 장제스와 국민당이 대만에서 국부천대를 시작한 후 40여 년 간 지속된 백색테러 시기, 비참하게 생매장된 민중사가 주 무대다. 수많은 시네마와 게임이 역사를 상업적 소재거리로 삼아왔고, 승리의 시간들, 번영과 영화의 시기가 말초적 유흥 및 장르 문법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전체주의 권력에 의한 폭력과 광기의 날들은 상업 문법으로 접합되기 어렵다. 감각적 만족을 이용자 상호작용의 제1요소로 삼는 게임에서 아픔이라는 감각은 일반적인 고려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교>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서가에 기대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유령을 빙의시켜 스스로 입을 여는 유령되기, 즉 유령의 소환술에 가깝다. <반교>의 시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유령이 되어 떠도는 여고생 방예흔(方芮欣, 팡 레이신)을 움직여 학교에 은폐된 비밀들을 풀어 나가야만 한다. 플레이어가 유령이 되어 스스로에게 암시를 던지고 진실을 좇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게이밍을 활용한 <반교>의 소환술은 매우 탁월하다. 유령의 기척을 느끼고 따라가 이야기를 엿들어야만 하는 기존의 서사 전개방식과 다르다. 플레이어는 평면과 횡으로만 구성된 폐교 공간을 헤매며 ‘유령되기’를 시도하는데, 이 유령되기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단히 깨어 있는 상태로 만들어 자신(게임 속 인물과 자신이 연동된)에게 암시와 은유들을 던진다. 유령되기를 통해 플레이어는 스스로 배회하고, 암시하며, 진실을 좇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 유령으로부터 은폐된 비밀의 단서들을 전달받는 것이 아닌 ‘유령되기’를 통해 스스로 일깨우고 진실의 조각들을 맞춰나간다. 〈반교〉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해 게임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유령의 소환술로 매우 잘 전유한 예제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대면하기: 앰비규어티와 부검학


상실감, 우울, 원한 등과 달리, 마음과 뇌에 깊은 충격을 안기는 외상인 ‘트라우마’는 역사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극심한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하는 트라우마는 멜랑꼴리나 로맨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상품화된 카타르시스 경로를 따라가는 장르문법과 이질적이란 뜻이다. 트라우마는 분명하게 현존하는 고통이지만 그 본원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에 얽매여져 있고, 해소될 길이 없다. 트라우마가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집단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트라우마는 ‘애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사자를 애도하기 위해 슬퍼하고 자발적으로 상처 입는다. “살아있지 않은 누군가에 대해 바쳐진 존중 속에서 생성되는, 법을 넘어서는 어떤 정의의 명령에 우리는 응답한다.”2)  만약 애도가 좌절된다면, 우리는 개인이 연결되어 있는 역사의 신체에 깊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한 세대와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합적 고통의 기억이며, ‘모든 것이 변화하는 역사’라는 기관차가 마주하는 막다른 터널이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외상을 극복하지 못한 ‘영호’가 선로에 뛰어들고,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이 학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해 작고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 아픔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좀처럼 씻겨나갈 길이 없다. 신체를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에도 고통을 끊임없이 지각하듯이, 그 실체는 유령적이다. 


본토 수복을 엿보며 대만을 장악한 국민당의 통치는 실로 끔찍했다. 명·청 시기에 대만으로 건너와 살고 있던 본성인(本省人)들을 지배하기 위해 국민당 정권은 2.28 사건3) 이후 계엄령을 강화하고, 40여년에 걸친 백색 테러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간첩으로 몰려 고문·처형되거나 실종됐다. 국민당은 계엄을 유지하기 위해 특히 학교 통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 대만에서 학교는 두 가지 방향으로 훈육되었다. 하나는 뒤쳐진 산업화를 이룰 일군을 양성하는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본토 수복을 위해 싸울 병력을 양성하는 학교이다. ‘군대식 교육’ 이 아니라 학교가 곧 군대였고, 청소년을 징집하는 창구였다. 이에 반발하는 교사들은 모두 간첩죄로 숙청되었으며, 지정되지 않은 책을 읽는 학생들도 모두 반역죄로 다스려졌다. 〈반교〉에 등장하는 군훈교관 백국봉(白國峰, 바이 궈 팡)은 학생과 교사들을 감시 훈육하는 정훈장교이다. 반면 학생들과 비밀독서회를 운영하는 장명휘(張明暉, 장밍후이) 선생과 은취함(殷翠涵, 인쯔이한) 선생은 타고르의 시를 읽어나가며 희망의 씨앗을 파종하려 한다.   


* 대만 시네마에서 끊임없이 배회하는 학교라는 유령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좌 상)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우 상) 〈반교: 디텐션〉(2019, 좌 하)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 우 하)에 이르기까지, 대만 시네마는 광범위한 시간대(계엄 이전과 이후)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학교공간의 기억술을 펼친다. 긴 시간동안 군사주의의 억압과 독재가 학교에 집중적으로 투과한 결과, 학교는 문화적 상징투쟁의 장소로서 재현된다. 감시와 처벌이 이뤄지는 공간으로서의 학교와, 비밀과 약속이 지켜지거나 깨어지는 장소로서의 학교가 중의적인 역사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교>가 게임 속 ‘유령되기’를 통해 소환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는 공식사에 쓰여져 있지 않는 부분들을 역사화 한다. “예술작품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승시켜준 역사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창작자의 영향을 수용한다.”4) 역사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반교의 소환술은 크게 두 가지 접근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트라우마를 이루는 오브젝트(포대자루, 거꾸로 매달린 옷과 초상, 거울상 등)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해 억압의 기표들을 상징화하는 앰비규어티(ambiguity)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상징물들을 퍼즐풀이의 대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이용자가 트라우마를 재구성하게끔 만드는 부검학의 측면이다. <반교>는 시적 언어가 ‘낯설게하기’ 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비문법성의 세계-일상언어의 세계 간 대화를 게이밍의 독특한 방식으로 역설계했다. 낯선 상징과 메타포를 통해 모호화된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은 자동화된 세계(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행동, 표현, 감각들로 가득차 낯익고 익숙하기만 한 세계)에 대한 전혀 다른 독해를 요구하게 되는데, <반교>는 공동체의 상흔을 상기시키는 오브젝트들을 퍼즐풀이에 삽입함으로써 ‘낯설게하기’의 게이밍적 측면, 즉 역사적 트라우마의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5) 을 부각시켰다. 이런 상징물로 가득찬 ‘학교’를 유령이 되어 탐색하는 과정 속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혹은 잊어버리려 외면했던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난다. 


* 포대가 씌워진 인형, 뽑힌 이빨로 된 주사위, 호롱불을 들고 주인공을 찾아다니는 차사 귀신 등 <반교>의 상징물들은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데서 그치지 않고 독재권력의 폭력을 암시하는 연상작용으로 이어진다. ‘낯선 느낌들’로 재배치된 공간의 탐색 경험은 트라우마의 공통감각을 직조하는 비문법성의 세계, 대안적 역사인식의 공간으로 플레이어를 스스로 등록시킨다.  

* 초현실주의적으로 재현되는 기억의 공간들. 〈반교〉는 2차원적 평면이라는 한계를 뒤집어 회화적 아이디어들을 의미심장하게 도입한다. 과거의 비밀들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평면의 공백 투사하며 읽어나가는 방식이다. 아버지의 외도와 가정불화를 암시하는 추상화적 대목(좌 상), 흠모하는 장 선생과의 데이트를 떠올리는 총천연색 경로(우 상), 잊기 위해 스스로 파편화했던 밀고의 기억들이 미러이미지화 되는 방식들(하)은 상반된 색체 대비와 원근법으로 〈반교〉의 평면을 수놓는다. 〈반교〉의 ‘유령되기’는 대사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간의 독해를 통해 플레이어가 사건을 인식하도록 하는 독특한 미디어 매커닉이다. 



대안적 역사인식 공간의 재구성: 새로운 재현양식과 미적 전술


이처럼 애매하고, 역설적이고, 공백으로 가득 찬 대안적 역사인식의 상징극장(학교)을 탐색하며 퍼즐 열쇠들을 수집하는 플레이어는, 유령이 된 채 부재하는 현재의 표식들을 이어붙이고, 역사의 버려진 시신을 가르는 부검의가 된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며 자신의 그림자에게 읊조리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파편화된 상흔들은 수집과 탐색행위로 이뤄진 이 부검에 의해 점차 진혼된다. 플레이어의 부검은 사망 원인 추적에 그치지 않고, 망자의 부릅뜬 눈을 감기는 의식으로 연동되는 것이다. <반교>는 이 부검 프로세스를 세련된 플레이 실천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회화적 앰비규어티를 더욱 부각한다. 연속성에 구속되려 하는 사건의 시간성을 탈주시키고, 과거-현재-미래를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후반부에 이르면 방예흔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가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문자화되지 못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비로소 ‘낯설게 된 비문법’의 법칙 하에 하나의 문장이자 산문으로 읽히게 된다. 


<반교>는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시스템을 제공하지도, 화려한 시네마틱 스펙타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방대하고 치밀한 드라마텔링보다는 절제된 시적 조작을 추구한다. 그러나 가장 단순하고 오래된(2차원 공간의 어드벤처 퍼즐풀이) 게이밍의 문법을 변주해 독창적인 미디어 매커닉을 제시한다. 이 매커닉은 기존의 재현양식이 시도한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 ‘유령되기’라는 소환술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고, 난도질당한 과거의 신체-유령통을 앓는 현재의 부재하는 신체를 오고가는 경험 속에 과거의 얼굴들을 대면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교>는 방법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전술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술은 미디어가 장르라는 문법과 상업적 경계를 넘어서, 한 시대와 세대가 공유하는 ‘죽은’ 공통감각의 회로에 전류를 불어넣는 전술이자, 침묵의 시대를 뛰어넘어 시민적 언어가 보편어가 되는 순간들을 상상시키는 회로도이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새로운 재현의 언어들을 재발명하기 위해, 이 회로도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난폭한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자유는 빼앗을 수도 억누를 수도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자유의 비가 이 섬에 고루 흩뿌려지길 원합니다.” -드라마 〈반교〉 中





1)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EJB, 2007, 91쪽. 
2)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EJB, 2007, 194쪽. 
3) 일왕 항복 이후 대만으로 건너온 국민당 지배세력과 외성인(外省人)들은 본성인들과 정체성이 달랐으며, 국민당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행세를 하며 대만과 본성인들을 식민 통치 하듯 다뤘다. 폭압적인 전시국가경제를 운영하며 민생이 파탄나는 가운데, 참다못한 본성인들은 계엄령 해제와 선거권을 요구하며 반정부투쟁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전 연령에 걸쳐 14만 여명이 군사법원에 기소됐고, 2-3만 명의 시민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역, 길, 2008, 260.
5) 언어적인 기호계에서 예술작품은 고유한 수사를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 문학은 상징과 은유(문자적 수사학)를 통해, 시네마는 몽타주와 미장센(시각적 수사학)을 통해 수사를 실천한다면, 디지털 게임은 플레이어의 공간 탐색과 오브젝트 조형행위에 기반해 의미들을 구성해나가는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을 현상한다. 절차적 수사학은 연산과 입출력을 바탕으로 하는 디지털 게임의 고유한 표현 방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Bogost, Ian. (2007).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 Games, Cambridge: The MIT Press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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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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