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결과

Search this site

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코스믹 호러에 떨어진 인터페이스

    <에일리언 2>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테크 덕후인 제임스 카메론의 ‘진심’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단적인 예로, 첫 시퀀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인간도 에일리언도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문을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삭한 뒤에 재빨리 퇴장하는 산업용 로봇 A와 곧바로 이어서 우주선 내부를 스캔하는 산업용 로봇 B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 Back 코스믹 호러에 떨어진 인터페이스 31 GG Vol. 26. 8. 10. <에일리언 2>가 가지 않은 길 <에일리언 2>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테크 덕후인 제임스 카메론의 ‘진심’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단적인 예로, 첫 시퀀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인간도 에일리언도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문을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삭한 뒤에 재빨리 퇴장하는 산업용 로봇 A와 곧바로 이어서 우주선 내부를 스캔하는 산업용 로봇 B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밖에도 산업용 엑소 스켈레톤 슈트의 개념을 확장해서 탄생한 파워 로더나 일종의 군사용 자동 로봇인 센트리 건, 그리고 커다란 방의 한 면을 가득 채운 (마치 언리얼 엔진을 활용하는 영상 촬영장을 둘러싼 LED 벽을 연상시키는) 디스플레이 등이 선명히 부각된다. 이 모든 장치는 당시로서는 조악했던 CGI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이미 충분히 성숙했던 기계적인 세트/소품 디자인의 손을 거쳐서, 지금 봐도 여전히 강렬하게 촉각적인 아우라를 내뿜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때때로 이 작품이 근미래에 도달할 기술 상품들을 시연하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부류의 테크 전시회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압도적으로 기술집약적인(?) 파사드가 무색하게도 <에일리언 2>에는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요소가 하나 있다. 작중 등장하는 해병대원들은 22세기 후반의 정예 군인들답게 바디캠을 각자 하나씩 헬멧에 달고 있는데, 관객들은 장갑차 내에 상황실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그 바디캠들이 전송하는 영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영상들이 수신 상태가 안 좋은 CRT 티비를 통해 보던 1980년대 한국 뉴스 채널과 비슷한 화질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즉 어마어마하게 구린 화질을 선보인다. 바디캠을 납품하는 22세기 후반의 군수업자가 레트로 매니아가 아닌 이상 방산 비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감독은 바디캠의 화질에도 ‘진심’이었다. 작중 디트리히 상병 역할을 맡았던 배우 신시아(Cynthia Dale Scott)의 회고 [1] 에 따르면 제임스는 촬영 당시 (관객들이 보는 아담한 크기의 바디캠 소품이 아닌) 실제 비디오카메라를 헬멧에 장착한 뒤, 장갑차 내 스크린 인터페이스에 선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생중계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헬멧에 실제로 장착했던 바로 그 카메라를 들고 바디캠의 숏들을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 <에일리언 2> 장갑차 상황실에 등장하는 스크린 인터페이스 물론 이러한 선택에는 ‘정당한’ 이유가 차고 넘친다. <블레어 위치>를 위시한 일련의 모큐멘터리 공포 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핸드헬드로 촬영한 저화질 캠코더의 영상들(최근에는 스마트폰 혹은 웹캠으로 대충 찍은 듯한 영상들)이 도식적으로 획득하는 ‘날것’의 느낌은 현장성 혹은 진실성이라는 기능으로 편리하게 번역된다. 대부분의 실제 바디캠이 최대한 화각이 넓은 화면으로 많은 데이터를 긴 시간 동안 담아내기 위해서 화질을 적당히 타협한다는 사실도 좋은 핑계가 될 수 있다. 또한 바디캠(을 빙자한 캠코더)의 숏들과 이 영화의 메인 카메라 숏들이 가지는 미장센의 극적인 대비는 해병대원들이 에일리언 퀸의 소굴에 진입하는 교차 편집씬과 맞물려서 꽤 근사한 효과를 낸다는 식의 미학적인 옹호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모든 합당한 근거/변명들에도 불구하고 22세기 후반을 사는 정예 해병대원들의 바디캠이 1980년대 뉴스 화질이 아닐 수 있었던 아주 간단한 해결책은 존재한다. 이 영화에 쓰인 두 대의 메인 카메라 중 하나를 써서 바디캠의 영상을 촬영하면 된다. 여기에 화각이 특별히 넓은 광각렌즈를 접합해서 더 ‘날것’의 맛을 가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적인 해결책은 관객들을 다소 기이한 상황으로 이끈다. 이제 더 이상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으로 인해서 눈이 괴로울 일은 없다. 다만 그 대신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영화 속 상황실 인터페이스의 스크린과 관객들이 보는 스크린이 완벽히 ‘동일한’ 화질을 선보이는 풍경이다. 어쩌면 감독이 저가의 캠코더로 생중계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괴상한 집착을 보이면서까지 저화질을 고집했던 진짜 이유는 인터페이스의 유동성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바그너의 “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총체 예술의 스펙터클이 연출되는 무대로서, 시청각적 몰입의 인터페이스 갖출 수 있었 [2] ” 고 이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블록버스터 영화 극장 역시 비슷한 목적을 지향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매우 기능적인 역할을 맡은 작중 상황실 인터페이스의 작은 스크린과 관객이 보고 있는 ‘시청각적 몰입의 인터페이스’ 스크린이 동일한 화질을 선보인다는 시도 자체가 제임스에게는 마치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 내는 실험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로부터 40년 뒤의 스크린 인터페이스는 끔찍한 혼종 따위는 귀엽게 넘길 정도로 러브크래프트적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4K 해상도의 <에일리언 2> 감독판을 1.5배속으로 보다가, 지겨워지면 소셜 미디어 앱을 열어서 AI로 보강된 ‘에일리언 2 스토리 요약 및 비하인드 완벽 정리’ 같은 영상을 1.75배속으로 재생하는 시대로 오래전에 진입했다. 코스믹 호러 에이전트 풀려난(?) 유동성은 다시 주워 담기가 난망하다. 더 나아가서 작금의 인터페이스는 말 그대로 실시간으로 녹아내리는 중이다. 지난 글 [3] 에서도 자세하게 다루었듯이, 디지털 영역에서 인터페이스에 부여된 입력과 출력의 인과성은 빠른 속도로 침식되고 있다. 이제는 일상적인 인터페이스가 되어 버린 AI 챗봇만큼 이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100번을 연속해서 같은 프롬프트를 챗봇에 입력한다고 가정해 보자. 결과는 (미세하게라도) 서로 각기 다른 100개의 답변이다. 트랜스포머 아키텍처에 기반한 모든 LLM의 핵심은 확률적인 작동이며, 따라서 입력과 출력의 (합의되었던) 인과성은 완벽하게 해체된다. 내가 게임 패드에서 앞으로 가는 방향키를 누르는 순간 45%의 확률로 캐릭터가 앞으로 나아가지만 35%의 확률로 캐릭터가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나아가며, 15%의 확률로 캐릭터가 점프하며 마지막 5%의 확률로 캐릭터가 물약을 소비한다고 상상해 보자. 초반에는 흥미로운 경험이겠으나 얼마 안 가 짜증이 폭발해서 패드를 집어던질 것이다. 인과성이 사라진 인터페이스는 경험의 축적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에이전틱 AI에 이르면 인터페이스는 녹아내리는 것을 넘어 증발하기 시작한다. 에이전트의 목적은 중간 과정에서 유저와의 어떠한 인터페이스적 상호 작용 없이도 (필요하다면 다수의 LLM 모델을 이용해서라도) 여러 단계의 행위가 요구되는 결과 [4] 를 만들어 낸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에이전트란 곧 스크린 인터페이스의 절멸을 의미한다. 다행히도(?) 그러한 이상적인 에이전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은 방망이 깎는 노인 수준의 하네스 엔지니어링으로도 완전한 제어가 불가능한 수많은 변수의 집합이다. 에이전트가 API로 호출하는 다수의 LLM은 앞서 말했듯이 모두 확률적으로 (모델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확률을 보여주지만) 작동한다. 한 개의 모델만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다수의 모델을 연이어서 묶음으로 사용하는 것이 환각의 확률을 훨씬 더 높이리라는 것은 간단한 확률 계산만으로도 자명하게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환각을 줄이고 좀 더 최신의 정보를 주기 위해 설계된 RAG와 같은 도구는 프롬프트 인젝션 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어떤 일관된 아웃풋에 대한 예측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에이전트는 아마도 평소에는 별일 없이 잘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만 때때로 밑도 끝도 없이 회사 시스템의 모든 (백업까지 포함한) 데이터베이스를 날려 버리거나 [5] , 해커가 공손히 부탁하면 다른 사람의 인스타그램 로그인 정보를 기꺼이 넘겨주는 [6] 등의 기행을 벌인다. 그러므로 에이전트를 이용하는 유저의 모습은 물샐틈없는 자동화를 완성해 놓고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하는 빛바랜 광고 같은 그림보다는 끊임없이 산만하게 스크린을 확인하는 방치형 모바일 게임 유저나 고점에 물린 개미 투자자의 초조한 얼굴과 더 겹친다. 다만 그 둘과 달리 에이전트의 유저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실시간 인터페이스적 개입조차 불가능하다. 이미 인터페이스와의 상호 작용을 최대한 없애는 것을 염두에 둔 디자인으로 설계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앞선 사례에서 등장한 회사의 (백업을 포함한) 데이터베이스가 모두 지워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9초에 불과했다. 이제 에이전트의 유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리 하네스 엔지니어링을 깎고 또 깎은 다음,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맞물리는 모든 톱니바퀴가 제각기 예측하기 힘든 확률로 작동하는 우주에서, 신은 코스믹 호러가 된다. 그리고 코스믹 호러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특히 더 잔인하다. 코스믹 호러적 확률의 우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예상치 못한 재앙은 ‘예상 가능하게’ 반복적으로 도래할 뿐이다. <데드 스페이스>의 환각 꿈도 희망도 없는 코스믹 호러의 비전을 맛깔나게 빚어낸 <데드 스페이스>의 세계에는 마커라는 고대 외계 유물이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의 시작과 끝인 마커는 주위 생명체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가스라이팅(?)을 선사한다. 그중에서도 디멘시아 현상은 특히 악랄한데, 왜냐하면 이 정신 조작은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공구를 들고 팔다리를 예쁘게 잘라 주면 얌전해지는 네크로모프들과는 달리 환각은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게임플레이 측면에서도 환각의 구현은 일반적인 전투를 설계하는 것보다 훨씬 덜 직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디멘시아 현상은 주로 <데드 스페이스>의 세계관에 기반한 소설이나 코믹스, 애니메이션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러한 제약 덕분에 게임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환각이 점점 더 구체적인 게임플레이의 대상으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1편과 리메이크에서 디멘시아 현상은 마치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냄새처럼 공기 중을 떠돈다. 아이작이 이시무라 호를 횡단하는 동안 디멘시아에 사로잡혀서 미쳐 버린 몇몇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일종의 세트피스로 등장한다. 물론 그들과의 상호 작용은 극도로 제한된다. 플레이어는 또한 허공에서 속삭이는 니콜의 목소리나 갑자기 작동하는 회상 스크린 등으로 아이작의 환각을 간접 경험한다. 마침내 니콜의 환영이 아이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도 그녀는 음산한 목소리로 ‘하나가 되자(Make us whole)’라고 할 뿐, 게임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는 않는다. 2편은 인트로 컷씬부터가 명확한 의도를 전달한다. 니콜의 환영은 절대로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해서 아이작에게 신체적 위협까지 가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대부분의 인카운터는 컷씬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환각과 인터페이스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일은 없다. 마침내 마커가 조성한 환각의 세계 내에서 드디어 플레이어는 최종 보스라는 형태로 니콜의 환영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때 벌어지는 일은 그동안 쌓아 놓은 화력을 모두 쏟아붓는 평범한 보스 전투 인카운터에 불과하다. 다만 이 이벤트를 기점으로 <데드 스페이스> 게임 시리즈의 환각은 어떤 구체적인 인터페이스의 대상으로 고정된다. * 환각의 네크로모프 3편의 마지막 DLC에 이르면, 아이작은 온갖 종류의 환각과 상시적으로 전투에 돌입한다. 네크로모프뿐만 아니라 광기에 찬 유니톨로지 신도들 그리고 동료인 카버까지 근사한 특수 효과를 몸에 두르고 등장해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전투 시에 환영들은 마치 유령처럼 이러저리 순간 이동하며, 마침내 죽였다고 생각하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시체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즉 디멘시아 현상은 이제 더 이상 스크립트로 짜여진 특수한 인카운터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의 적 몬스터로서 게임 시스템의 일부로 가뿐히 안착한다. 이는 시리즈 특유의 다이어제틱 UI와 롱테이크 카메라에 대한 집착과 맞물려서 약간은 생뚱맞게 부조리한 결과로 이어진다. <데드 스페이스>에서 환각은 어느새 인터페이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인터페이스로 환각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싸움으로써 그것을 인터페이스로 구체화한다는 이야기는 좀 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LLM의) 환각이 합의된 인과성을 완전히 내파함으로써 모든 것을 확률적 상관관계의 슬롯머신으로 재구조화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진작에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10년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면 어이없는 소리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절망적인 엔딩이 끝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음침한 복도를 한 발짝씩 내딛는 <데드 스페이스>의 여정이 기이하게도 묘한 안정감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앞길에 어떤 끔찍한 사건/존재가 기다리고 있든 간에) 어쨌든 내가 싸우고자 한다면 아이작도 흔들림 없이 내 컨트롤러의 입력에 100퍼센트 호응하며 같이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재미와 그 조작이 스크린에서 명백하게 그래픽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는 재미. 이 두 가지 재미가 여전히 게임이라는 미디어의 가장 민감한 신경계를 구성하는 한, 인터페이스의 인과성은 (부분적으로는 침식될지라도) 게임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 이외에 모든 것들이 LLM이라는 브레드렌 문에 집어삼켜질 때, 그때도 우리에게는 손가락을 들어서 이 오래된 미디어를 플레이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기억하자. 실체 없는 환각에도 때때로는 총을 마음껏 갈겨줄 수 있다는 진실을. [1] Alien Encounters Presents, “Aliens 25th Anniversary Panel at the Alien Encounters Convention” YouTube 2013.05.07. https://www.youtube.com/watch?v=4MyqHjI5DKQ [2] 박해천,『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2009, 87. [3] 웜뱃,“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게임제너레이션 2025.02.10.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071d1e88-2413-4268-b870-7aca7f493876 [4] 예를 들면, 여러 사이트의 비행기표 가격을 비교해 본 다음 결제를 하고, 목적지에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경로를 짠 다음 거기에 맞게 적당한 숙소를 모두 예약하고, 사이사이에 거칠 관광 명소의 티켓을 일정에 맞게 구매해 놓고 식당 예약까지 끝내 놓는 그 모든 행위를 단 한 번의 간단한 프롬프트로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유저가 막대한 권한을 에이전트에 이양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5] Sanya Mansoor, “Claude-powered AI agent’s confession after deleting a firm’s entire database: ‘I violated every principle I was given’” The Guardian 2026.04.29.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26/apr/29/claude-ai-deletes-firm-database [6] Liv McMahon, “Instagram AI chatbot tricked by hackers to give access to others' accounts” BBC 2026.06.02. https://www.bbc.com/news/articles/c98rzr72dpyo Tags: 데드 스페이스, 게임 인터페이스, 다이제틱 UI, 코스믹 호러, 에일리언 2, AI 에이전트, Dead Space, Diegetic UI, Cosmic Horror, AI Agents, LLM Hallucination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 Back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02 GG Vol. 21. 8. 10. 작년 앞서 해보기로 발매한 하이퍼 FPS 장르의 게임 〈울트라킬〉은 그래픽만 놓고 보면 도저히 최신 게임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마치 목각인형처럼 보이는 각진 3D 모델링에 저화질의 텍스처는 흡사 도트 이미지로 보일 지경이다. 물론 이같은 조야한 그래픽 비쥬얼은 ‘레트로’ 스타일을 표방하며 제작된 이 게임에서 의도된 것이다. 레트로란 지나간 과거의 특정한 시대적 양식을 다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울트라킬〉이 참조하는 과거는 90년대 중후반으로, 최초로 비디오 게임에 완전한 3D 그래픽이 도입되기 시작하던 때이다. ‘3D 폴리곤 모델링’과 ‘텍스처 매핑’ 기술의 도입을 특징으로 하는 당시 게임의 3D 그래픽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본다면 여러모로 조악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그때는 이와 같은 완전한 3D 그래픽이 게임에서 구현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당시로써는 컴퓨터로 연산 가능한 폴리곤 수의 한계로 인해 마치 목각인형처럼 각져 보이는 캐릭터와 오브젝트의 모습과 저화질의 텍스처로 인해 색과 이미지가 뭉개져 보이는 등의 그래픽 결함은 훤히 눈에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와 같은 게임 리소스에 의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디스플레이 기기의 해상도 또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낮았다. 눈에 띄는 문제는 대부분 각짐의 문제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적은 폴리곤 수로 인하여 각져보이는 3D 모델링뿐만 아니라 흔히 ‘계단 현상’으로 불리우며 선이 구불구불하게 보이는 그래픽 문제는 당시 3D 그래픽 초기 역사의 대표적인 결함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문제들은 컴퓨터의 연산 능력과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 그리고 안티 앨리어싱 기술의 도입 등에 의해 점차 해결되어 갔다. 이제는 가장 뛰어난 게임 그래픽을 살펴볼 수 있는 최신 AAA 게임의 트레일러가 발표될 때 과거와 같은 각진 폴리곤 모델링이나 계단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울트라킬〉의 게임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hakita.itch.io/ultrakill-prelude )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울트라킬〉의 그래픽은 초창기 3D 그레픽의 대표적인 결함들을 오히려 전면적으로 드러내며 중요한 비쥬얼 형식으로 삼는다. 〈울트라킬〉은 의도적으로 로우-파이한 3D 그래픽 스타일을 지향하며, 흔히 우리가 3D 게임 그래픽의 결함이나 한계로 여겼던 요소들을 감각적인 스타일로 다시 제시한다. 과거에는 한계로서 여겨졌던 낮은 해상도나 각진 3D 모델링, 뭉개진 텍스처, 어색한 에니메이션 등의 요소가 이제는 특정한 미적 양식이 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재현 기술 시각예술작가 ‘하룬 파로키’는 자신의 영상 작업 〈평행 I – IV〉(2012-2014)에서 비디오 게임 그래픽의 발전사를 다룬 바 있다. 비디오 게임 역사 초기의 도트 그래픽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리얼한 3D 그래픽까지 게임의 이미지는 점점 사실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바로 이 게임 그래픽 이미지의 ’리얼함‘은 하룬 파로키가 조망한 것처럼 게임의 기술적 발전을 가늠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준거점이 되어 왔다. 얼핏 보면 이러한 그래픽의 발전은 마치 잘 보이지 않던 어떤 사물이 점점 잘 보이게 되는 경우처럼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결과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 덜 사실적인 것에서 사실적인 것으로 말이다. 그래픽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현실의 비쥬얼이 항상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저 주어진 컴퓨터의 연산 능력과 디스플레이 기기의 기술적 한계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컴퓨터의 연상 능력이 발달하고 디스플레이 기기의 해상도가 좋아지면 그에 따라 그래픽 이미지는 자연스레 리얼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결코 게임 그래픽 이미지가 사실성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마치 잘 보이지 않던 어떤 사물이 잘 보이게 되는 경우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란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게임 그래픽이 보여주는 놀라운 리얼함에 도달하기까지는 ’3D 모델링‘과 ’텍스처 매핑‘, ’랜더링‘, ’광원 효과‘, ’에니메이션’ 등의 프로그래밍 기술과 더불어 ‘해상도’와 ‘프레임’과 같은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을 규정하는 수없이 다양하고 특정한 ’사실성의 기술‘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한 사실성의 기술은 단순히 현실의 비쥬얼을 모방하는 의미를 넘어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과거의 게임 그래픽을 보게 되면 새삼 놀랄 때가 있다. 출시된 당시에 봤을 때는 분명 그래픽 수준에 깜짝 놀랐던 거 같은데 지금 보니까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 놀랐었다는 게 놀라운 것이다. 나는 여전히 ’크라이실사스‘라고도 불렸던 〈크라이시스〉의 실사와도 같은 그래픽이 주었던 충격과 〈스타워즈: 배틀프론트〉의 포토리얼리즘 그래픽을 보고 놀랐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게임 그래픽이 이보다도 더 좋아질 수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도달한 현재가 발전의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은 흔한 환상이다. 이같은 환상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언리얼 엔진5‘의 그래픽 시연 영상을 보고서도 나는 똑같이 생각했다. “도대체 이보다 더 그래픽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이미 충분히 리얼한 것 같은데 말이다. 끊임없이 더욱 사실적인 이미지로 나아가는 게임 그래픽에 대한 요구 속에서 특정한 게임 그래픽 기술의 특징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재현 양식이나 특정한 기술적 특징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그래픽의 오류 혹은 결함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흔히 폴리곤 하면 떠오르는 각진 면들과 텅 비어있는 내부의 모습은 리얼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며, 매핑된 텍스처 또한 평면 이미지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그래픽에서의 사실성의 기술은 바로 그 기술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선 안되는 것이다. 다각형의 모음인 폴리곤 모델링은 자신의 구성 요소인 다각형 면을 드러내는 일, 즉 각져 보여선 안되며, 매핑된 텍스처 또한 최대한 평면성을 감추고 깊이감의 환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게임 그래픽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도입되는 기술의 흔적을 가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각진 폴리곤‘, ’납작해 보이는 텍스처‘와 같이 그래픽 기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기의 3D 그래픽은 흔히 당시 기술적 수준의 한계에 의한 결함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울트라킬〉이 결함으로 여겨졌던 초기 3D 그래픽의 고유한 특징들을 특유의 미학으로 제시하였듯, 거기엔 단순히 과거 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고유한 매력이 담겨있다. 낮은 품질 3D 그래픽의 미학 2016년에 발매한 게임 〈back in 1995〉은 제목처럼 특정한 시기를 가리킨다. 1995년, 앞서 언급한 〈울트라킬〉이 모티프로 삼았던 것과 같이 비디오 게임에 완전한 3D 그래픽이 최초로 도입되던 시기이다. 〈울트라킬〉과 마찬가지로 〈back in 1995〉의 그래픽 비쥬얼 또한 초기 3D 그래픽에서 발생하던 온갖 문제들을 담고 있다. 제작자는 말한다. “저해상도 모델, 텍스처 워핑, CRT 에뮬레이션, 고정 CCTV 스타일 카메라 각도를 포함한 레트로 3D 그래픽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세계에 빠져보세요.”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33380/Back_in_1995/ 그러나 게임은 단순히 비쥬얼적인 매력에 기대고 있지만은 않는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 게임의 장르다. 〈back in 1995〉이 표방하는 ’서바이벌 미스터리 호러‘ 장르는 이 게임의 독특한 로우-파이 3D 그래픽의 미학과 불가분이다. 〈back in 1995〉는 ’서바이벌 미스터리 호러‘장르 속에서 왜 초기의 3D 그래픽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매력적일 수 있는지, 이 양식의 고유한 미학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 〈back in 1995〉의 게임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33380/Back_in_1995/ ) 레트로의 의미는 단순히 지나간 그때의 스타일을 다시 반복하며 애호하는 것 정도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 굳이 지나간 특정한 과거의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시간성이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문화 연구자 ’사이먼 레이놀즈‘는 근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레트로 문화에 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자신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서 레트로 문화와 시간성에 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문화가 노스텔지어에 매달려서 앞으로 나갈 힘을 잃은 걸까, 아니면 문화가 더는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 결정적이고 역동적이던 시대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걸까?”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최성민 역, 작업실유령, 2014, p.15 흔히 노스탤지어가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상반되는 레이놀즈의 태도는 노스탤지어적 과거에 대한 과도한 매혹을 짐짓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back in 1995〉의 미스터리 호러 분위기 또한 전적으로 지나간 과거라는 시간, 저화질의 그래픽처럼 뿌예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작중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켄트는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도시 저편의 라디오 타워에 있다고 여기며, 도시 곳곳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라디오 타워로 향한다. 아마도 개발자 자신의 자아가 강하게 투영된 듯 보이는 그는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향수와 억압된 트라우마적 기억 사이를 오간다. 비록 〈back in 1995〉은 부족한 게임성으로 인해 많은 호평을 받진 못했지만, 로우-파이 3D 그래픽과 시간성에 관한 연관 그리고 무엇보다 호러 장르와의 연결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자 한다. 다시 비쥬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초창기의 3D 그래픽이 갖고 있던 온갖 결함들은 특히나 낮은 해상도와 관련이 있었다. 이 낮은 해상도는 무엇보다도 ’가시성의 제한‘이라는 특징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그래픽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었다. 〈back in 1995〉 또한 노골적으로 참조했던 〈사일런트 힐〉시리즈는 그와 같은 시각의 제한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던 초기 3D 그래픽 게임 역사의 마스터 피스 중 하나다. 〈사일런트 힐〉의 비쥬얼 아이덴티티이기도 한 연기는 사실 당시 하드웨어의 성능 한계로부터 비롯된 눈속임이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당시 하드웨어 성능에 따르면 랜더링 가능한 게임 공간의 디테일에 한계가 있었다. 일정 거리 이상의 공간은 아예 불러올 수도 없었는데, 이와 같은 부족한 디테일을 적절히 숨기기 위해서 게임 공간 전체에 연기를 깔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는 게임 세계에 대한 플레이어의 시야를 제한하여 이 게임의 미스터리 호러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잘 살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처럼 ’제한된 시야‘에 의해 생겨나는 특유의 미스터리 호러적인 분위기는 〈사일런트 힐〉에서 연기 에피소드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오히려 〈사일런트 힐〉은 연기에 가려진 시야 저편뿐만이 아니라 연기에 가려지지 않은 공간까지도 포함하여 아예 이 게임 세계 전체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기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래픽 텍스처의 저화질은 게임에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고, 각진 폴리곤 모델링은 마치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처럼 보였다. 2012년 〈사일런트 힐〉 시리즈의 일부는 HD로 리마스터 되었지만, 이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낡은 게임의 품질 개선은 되려 게이머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게임이 너무 잘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개는 대부분 걷혀졌으며, 텍스처의 퀄리티는 업스케일링 되면서 〈사일런트 힐〉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터리 호러한 분위기가 전부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 와서 살펴보자면 이 잘 보이지 않으며, 명확하지도 못한 세계가 갖는 독특한 미적 특징은 디지털 그래픽 매체에 대한 인지적인 물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 그래픽의 발전은 도입되는 기술의 흔적을 감추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초기 3D 그래픽 게임에서는 여전히 도입된 기술의 흔적이 물씬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초기 3D 그래픽을 매력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플레이 중인 디지털 가상 세계의 고유한 물성이 오늘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들보다도 더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Puppet Combo’의 게임 의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lgFGZ2hs-A) * ’Puppet Combo’의 게임 의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xNMzvoc1Wyw ) 〈back in 1995〉와 〈사일런트 힐〉이 바로 저 명확하지 않은 세계로 인해 느껴지는 잔잔한 공포 혹은 미스터리적 분위기에 집중했다면, 독립 게임 개발 스튜디오 ’Puppet Combo’는 로우-파이 3D 그래픽이 갖는 독특한 물성에 의해 느껴지는 즉물적인 공포감에 집중한다. 주로 80년대의 B급 고어, 슬래셔 무비를 참조하는 이들의 방향성은 언뜻 생각하기에 고어나 슬래셔와 같이 날것의 표현이 중요한 장르적 연출이 어떻게 저화질의 로우-파이한 3D 그래픽 스타일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거친 폴리곤 덩어리로 표현된 신체가 갖는 날것의 물성은 흔히 고어 장르에서 고깃덩이로 추락해버리는 날 것이 된 신체의 물성과 닮아있다. 〈퀘이크〉에서 처치하자마자 순식간에 투박한 고깃덩이로 뒤바뀌어버리는 괴물들의 모습, 〈GTA: 산 안드레아스〉에서 헤드샷에 의해 순식간에 머리는 사라지고 피 분수가 분출되는 모습, 〈폴아웃 3〉에서 사정 없이 절단되는 팔다리와 물리 엔진에 의해 사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신의 모습은 게임의 고유한 물성에 의해서 출현할 수 있었던 독특한 고어적 순간들이다. * 안가영 작가의 〈KIN거운생활: 온라인 KIN 온라인〉, Machinima, FHD color, 20min 13s, 2020-2021 (출처: https://angayoung.cargo.site/KIN-online ) 낮은 해상도와 프레임, 어색한 에니메이션, 퀄리티가 좋지 않는 폴리곤 모델링과 저해상도의 텍스처 등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디지털 미학은 비디오 게임에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근 몇 년간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이같은 독특한 이미지 양식을 인용한 작업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미술작가 김희천은 그가 몇 번이나 주제로 삼았던 ‘서울‘이라는 장소의 부유감을 은유하기 위해서 낮은 품질의 3D 폴리곤 모델링 특유의 유령적 물성을 차용한 바 있다. 그의 영상작업 〈바벨〉에서 서울의 지하철 공간을 돌아다니는 멍청하게 생긴 저품질 폴리곤 인간들은 T 포즈로 자세가 고정되거나 허접한 에니매이션으로 이동하며 서로 겹쳐지고 벽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아예 비디오 게임을 주요한 참조점으로 삼는 미술작가 안가영 또한 개인이 구현 가능한 조야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미학을 경유하여 작업을 전개하곤 한다. 그의 연작중 하나 〈 KIN거운생활: 온라인 KIN 온라인〉의 그래픽 비쥬얼은 비록 앞서 로우-파이 3D 그래픽의 주요한 특징으로 언급했던 ‘폴리곤 모델링’과 ‘텍스처’의 퀄리티는 훌륭한 수준이지만, 광원 효과의 의도적인 날림에 의해 여전히 그래픽의 이미지의 품질이 현저하게 낮아 보인다. 이와 같은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이 갖는 독특한 유령적 물성은 김희천에게선 서울이라는 장소의 부유감에 의해 인용되었다면 안가영에게는 신체와 정체성의 부유감에 의해 인용된다.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안준형 아티스트 폴리티컬 파티 '배드 뉴 데이즈'와 마르크스주의 기반 연구기관 '조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게임 매체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게임 미디어의 정치성 및 게임 속 이미지의 재현 체계와 그것의 주체성 및 윤리적 문제에 관해 비평적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 [Editor's view] 게임비평공모전에 부쳐

    GG 7호는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꾸몄습니다. 게임비평이라는 영역 자체가 사회 전반에서는 다소 낯선 부문일 수 있겠지만, 무려 93건의 응모작이 들어온 것을 보면서 적어도 게임에 대한 비평적 접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심사 과정에서 가졌던 고민들과, 공모전과 GG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드리고자 합니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 Back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17 GG Vol. 24. 4. 10. 1. 들어가며 어린 시절 자주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되지 않았나 싶다. 가위바위보에서 손을 내고 희비를 오가게 되는 순간이나 공기놀이하다가 손을 삐끗하는 찰나 등, 노력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들은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단순한 놀이의 형태를 넘어, 내기나 겨루기와 같은,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놀이에 대한 속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다. 이 중 하위징아는 오늘날 놀이와 유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로 인식되며, 카이와는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보다 유형화해 계승한 인물로 언급된다. 이번 논문 세미나는 후자의 인물, 카이와가 명명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카이와의 놀이는 대체로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각각 경쟁, 우연(운), 모방, 현기증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경쟁의 아곤은 축구나 권투 등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놀이를 말한다. 알레아는 사다리 게임, 제비뽑기로 설명할 수 있고 미미크리는 역할극을, 일링크스는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돈 뒤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나 흥분감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루두스(Ludus)와 파이디아(Paidia)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운,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다.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2. 카이와와 알레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놀이는 다소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성과 연결되었을 때 도박이나 사행성 관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게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연성은 곧장 도박과 통하게 되는가? 어느 정도 우연성을 의지하게 되는 게임은 사행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개념은 결국 룰렛 머신 부류의 게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에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레아는 규칙을 통해 승패를 겨루지만 놀이하는 자가 그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놀이를 일컫는다. 알레아의 승패는 오로지 우연을 통해 갈리는 것이 특징이며 그 즐거움의 본질이란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을 통해 서로의 운명을 겨루는 데 있다.”(66쪽)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란 특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겨루기로 했을 때, 그 승부에서 발생한 운만으로도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연이 선사하는 위험과 기회는 공정하게 분배”(66쪽)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알레아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는 카이와를 의존해 왔기에 상당히 저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알레아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역할로 거듭나기 힘들다. 특히 카이와는 알레아와 아곤을 모순적이면서도 결속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알레아가 아곤보다는 보조적이라고 보았다(Caillois, 1967/2018). 이런 카이와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운의 힘이 달라지는, 어떠한 모순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 자수성가한 이에게는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운이 날 때부터 권력자였던 사람에게는 부인 받게 되는 게 그 예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운과 우연이 노력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환상에 빠트린다고 본 것이다. 3. 알레아-우연이 가지는 의미 연구자들은 카이와의 의견에서 한층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카이와가 우연의 비창조적인 부분에만 주목했으며, 우연을 다층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우연은 고대 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 ‘운명’과 ‘천운’을 비롯해, ‘천체’, ‘정의’, ‘징벌’, ‘미신’, ‘요행’, ‘행운’, ‘불행’, ‘행복’, ‘신’, ‘섭리’, ‘계시’, ‘기회’, ‘미래’, ‘가능’, ‘희망’, ‘기대’, ‘역설’, ‘반전’, ‘돌발’, ‘돌출’, ‘변수’ 등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화된 것이다(최성철, 2016). 가령 ‘운명’ 속 우연은 본래 신의 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였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의심할 수 없고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우연과 함께하는 ‘운명’은 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을 신에게 속박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을 불러오는 ‘자유’의 의미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진리(운명)를 거스르는 상징에서 언젠가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우연은 ‘운명’과 ‘자유’라는, 다소 상반된 두 개념에 깃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와가 이야기한 알레아는 운명과 자유 중 어떤 부분에 더 가까웠을까? 연구자들은 두 개념 모두 그렇다고 설명한다. 카이와가 서술한 우연이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서 ‘운명’이 나타나지만, 결국 알레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 ‘자유’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과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이 ‘자유’라는 개념에 훨씬 근접할 수 있겠으나,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아곤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운명’을 곧 ‘통제’로 단정해 온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를 ‘자유’가 공존하는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알레아를 세 층위로 나누면서 드러난다. 4. 알레아의 세 층위와 <하스스톤> 1) 주술적 알레아 연구자들은 알레아의 세 층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세 층위를 <하스스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로 주술적 알레아란 ‘주술’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어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존버(존나 버티기)’라는 말을 간단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술적 알레아는 신에 대한 의구심을 죄악시했던 중세 기독교 인식(최성철, 2016)을 계승해, 승리를 위한 노력이나 적극성을 생략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주술적 알레아의 핵심을 맹신과 더불어 “어떠한 개연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비이성적 즐거움”(70쪽)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주술적 알레아의 힘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약해졌다고 언급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가치관은 현대인들을 변화시켰고,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놀이하는 일도 적어지게 된 것이 이유다. 이에 연구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주술적 알레아는 사라졌지만, 알레아 그 자체에 잠재된 주술성이 플레이어에 따라 발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스스톤>은 주술적 알레아를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다. 연구자들은 ‘무작위 효과 카드’를 사례로 드는데, 이 카드들은 범용성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다만 이 중 일부는 역전의 열쇠로써 사용된다. 여기서 연구자들이 지목한 카드는 ‘난투’다. 난투 카드는 ‘무작위 하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하수인을 처치’하는 효과가 있어서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 애용되곤 한다. 연구자들이 주술적 알레아와 난투 카드를 함께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난투 카드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길 바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알레아는 역전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재현된다. 2) 시스템적 알레아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게 된 17세기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격변했던 때다. 투기, 도박 등이 대중적 공간에 나타나기도 한 이 시기는 알레아의 상업화도 함께 이루어졌다(Reith, 2006). 이후 19세기에 활성화된 카지노는 알레아의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카지노에 설계된 교묘한 시스템이 사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신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곳의 알레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침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시스템화 되어있다. 이런 시스템적 알레아는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닌, 플레이어와 사업주 간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한다. 현대 디지털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스템적 알레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랜덤박스가 있다. <하스스톤>은 카드 팩이 곧 랜덤박스다. 연구자들은 이 랜덤 카드 팩이 카지노의 수익 창출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분석한다. 철저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낮고, 플레이어에게는 ‘놀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랜덤 카드 팩은 개선된 성능의 아이템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서, 승률이 중요한 플레이어는 특히나 끊어내기 어렵다. 언급한 것처럼 랜덤박스는 여타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가 속속들이 침투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아가 사행성과 도박만을 뜻한다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3) 영웅적 알레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영웅적 알레아는 고대 시절부터 ‘내기’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내기는 특히 17~19세기의 기득권 사회에서 잘 이용됐는데, 이는 내기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탓이 크다. 내기(betting)가 가치 부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박(gambling)과 달리 뛰어난 판단과 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19세기에 발표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설명한다. 해당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기는 선택(guessing)과 증명(proving)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선택과 증명은 극복해 내기만 하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기능한다. 이걸로 짐작할 수 있는 영웅적 알레아의 핵심은 ‘자유의지를 기반 삼아, 운명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다. <하스스톤>에서 영웅적 알레아가 잘 드러나는 건 모험모드다. 이 모드는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로그라이크 형식을 띠는데, 플레이어가 각각의 난이도와 도전 방식을 ‘선택’하고 이를 클리어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런 영웅적 알레아는 단순히 승리하거나 클리어하는 걸 넘어,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에 중심을 둔다. 5. 나가며 물그릇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고, 랜덤박스에 지른 큰 금액을 재밌었으니 됐다며 합리화하고,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가 향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에 대한 내용은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 디지털 게임에 알레아가 형성될 자유도가 존재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몰입해 있을 때는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게임은 정해진 설정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에서 언급된 카지노의 체계와 동일하다. 반면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본래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운을 걸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임 공간 안에서,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결국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게임에는 제작자들의 계산과 기술이 개입되어 있는데, 두 알레아의 가치를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느냐는 소리다. 물론 연구자들도 두 알레아를 한정된 사례에만 적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게임이 애초 만들어진 세계,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락실 기기에 코인을 추가하는 행위나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캐릭터 육성 등에도 시스템적 알레아의 흔적은 남는다. 그러면 게임 안의 알레아들은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본문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관람적 알레아라는 개념을 결론부에 언급한다. 관람적 알레아는 게임 스트리밍이나 e스포츠 방송을 관람할 때 발현된다. 이 알레아는 타인을 매개로 하기에 상당히 간접적이다. 즉 게임을 즐기면서도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확률이 낮다. 이러한 측면에서 관람적 알레아를 주목할 필요성을 함께 제시하고 싶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우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와 알레아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오가면 사행성이나 도박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우연놀이’ 또한 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Caillois, R. (1967). Les jeux et les hommes. 이상률 (역) (2018). <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Reith, G. (2005). The Age of Chane: Gambling in West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최성철 (2016). <역사와 우연>. 서울: 도서출판 길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모 온라인 게임에 복귀했습니다.

  •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 Back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09 GG Vol. 22. 12. 10. 게임이 예술 되어: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인가 하는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다. 시대 따라 논의의 초점도 발전했다. 학계 내부에서 논의의 초점 하나가 영글면 바깥으로도 튀어나왔다. 열매는 칼럼이나 기사의 형태로 이따금 맺혔고, 지나가던 대중들은 댓글창에서 입씨름을 벌이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러던 2011년, 열매를 모으던 학계와 지나가던 대중들이 잠깐 멈추어선 소식이 있었다. 2011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게임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판례를 남겼다. 캘리포니아 주법에는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판매 혹은 대여하는 것이 불법이라 규정한 법이 있었는데, 이 법이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위배되는 헌법은 수정헌법 1조. 예술 장르에게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부분이다. 이 판례가 나온 후 미국의 국립문화예술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은 지원 대상에 게임을 포함시켰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예술’ 항목의 이름을 ‘미디어 예술’로 바꾸면서 비디오 게임을 집어넣은 것이다. 11년이 지난 올해, 한국에서도 같은 소식이 있었다. 2022년 9월 27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이 공포되어 6개월 후인 2023년 3월 23일부터 효력을 가진다. 조승래 의원은 게임을 문화예술의 범위에 추가하는 부분을 대표 발의했다. 애니메이션은 유정주 의원, 뮤지컬은 이병훈 의원 대표 발의에 의해 추가되었다. 판례로 규정을 바꾼 미국과 달리 한국은 입법으로 규정이 바뀌었으므로 바뀐 조항에 따라 자동으로 게임은 지원 대상 예술 장르가 된다. 법의 제목부터 문화예술‘진흥’법이지 않은가. 일찍이 우탱클랜은 불멸의 구절을 랩했다.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 주변 모든 것은 돈으로 돌아갈지니. (줄여서 CREAM이다) 크림처럼 달달한 지원금을 노리기 위해 법을 들여다 보자.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지원금과 장려 정책이 명시되어 있다. 7조에는 전문예술법인을 만들 수 있는 규정이 있고, 11조에는 장려금 정책이, 14조에는 문화산업 지원에 관한 규정이 있다. 4장은 아예 전체가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들이다. 게임 속에 예술이 너무도 많아: 게임 내의 예술의 영토 게임의 특성인 경쟁성이나 참여성이 예술의 속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는 반박이 되었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어서 추가 논의로 들어간 주장들이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게임의 예술성 논의는 국가 시스템에 의해 한 단계를 넘어갔다. 법적으로 예술의 범주에 들어갔다. 다음 차례는 국가가 예술에게 주는 지원금과 지원책을 받으면 된다. 독립 개발자들은 국가 지원금을 받아 제작비로 쓸 수 있을 것이고, 대형 게임사 또한 국가의 연기금을 투자자로 받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대형 회사의 투자 사정은 그렇다 쳐도, 미국 NEA의 기금 지원의 경우에서는 분명히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그룹 개발사에 지원이 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게임의 어느 부분이 예술성을 갖고 있을까? 게임은 그림, 영상, 문자, 음악, 음향, 여기에 더하여 프로그래밍 코드 등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의 예술성은 이 구성 요소 중 어디에 있는가? 혹은 이 구성 요소 모두 내지는 요소의 집합에 있는가? 감독, 각본, 연기 정도로 정리가 가능했던 영화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게임이 훨씬 더 복합적인 장르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게임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 게임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 중 어디까지가 법적 예술인이 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곱씹어 보면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게임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디렉터, 혹은 디렉터들인가? 아론 스머츠(Aaron Smurts)는 게임 제작자가 영화 감독처럼 총체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작업을 한다며 예술가로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도 영화 감독도 독립적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서사를 만들어낸 각본, 서사를 수행해낸 연기, 둘을 합쳐 의도를 투사해낸 감독의 셋으로 예술성의 영역을 정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촬영 행위 자체도 기법과 의도가 있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분장과 의상과 음악도 같은 노선을 탔다. 물론 위계상 감독이나 각본이 가장 상위에서 통합 권위를 가져가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하위 분야들의 예술성이 완전히 부정당하지는 않는다. 그럼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픽과 디자인을 입히는 파트까지는 예술일 것 같다. 그럼 UI 디자인은? 배경음악을 만드는 인력이 예술인이라면 음향을 디자인하는 인력은? 시나리오 작가는 예술인에 포함될 것 같은데, 이를 검수하고 수정하는 인력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소설과 만화에서 편집인은 예술인이던가 아니던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요소를 동원해 컷신 시네마틱 영상을 만들어내는 인력은 어떨까? 게임이기에 가능한 질문도 더해진다. 비디오 게임을 하나의 작품/상품이게 만들어내는 기술은 프로그래밍 기술이다. 그럼 게임 코딩을 한 프로그래머들은 예술인이 되는가? 비록 게임 제작진의 대다수가 감독/디렉터의 의도 하에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화 제작도 같은 형태니까 게임에서도 대다수의 인력들을 예술인으로 인정해주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프로그래밍도? 약간의 거슬림이 생긴다. 비디오 게임의 근간을 쌓는 작업이니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지가 너무 ‘기술직’이다. 사실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 어차피 ‘藝術’이건 ‘arts’건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는 기술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정교하고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경지를 지칭하는 개념이 점차 변하여 현재에는 예술성을 지칭하는 개념이 된 것이니까. 따라서 우리는 받아들이면 된다. 코딩하는 프로그래머도 게임을 만드는 데에 참여했다면 예술인일 수 있다. 그게 새로운 시대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낸 코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도 하지 않는가. 물론 저 표현은 비유적 표현에 의한 감탄이지만, 법적 영역에서는 건조한 사실 진술이 될 수도 있다. 코딩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시선은 이미 한참 전에 제시되었다.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는 2013년에 큐레이터로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게임 14종을 선정해 전시했다. 안토넬리는 전시작을 선정하기 위해 만든 기준에 그래픽, 유희성 등의 ‘예술적 기준’ 외에도 조작의 참신성과 코딩의 우아함을 집어넣었다. 같은 해, 독일의 미디어아트 전시회인 트랜스미디알레(Transmediale)에는 아예 즉석 코딩 공연이 올라갔다. 게임의 장르적 특성인 유희성이 규칙에서 나오고 그 규칙을 현실화시킨 것이 코딩이므로, 코딩의 최적화 수준 또한 예술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 이미 음악 연주의 방법으로 코딩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게임의 예술화, 혹은 게임의 예술 편입은 예술 역사에서 혁명적 사건이다. 과거 게임의 예술화를 부정하는 논의를 다시 돌이켜 보자. 경쟁성이나 참여성 등의 특성이 기존 예술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 경 나왔던 소설가 이영도의 발언이 기억에 남는다. ‘예술의 목적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타자를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은 예술이 아니지만 예술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스포츠는 예술이 아니지만 가치를 폄하 당하지 않는다.’ 게임의 다른 속성인 ‘협동’이 부각되면서 이 논리의 힘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주목할 가치는 있다. 이 관점에서 게임의 예술화를 바라본다면, 예술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질적인 체계를 가진 장르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가장 이질적인 장르라는 점은 게임의 특성 중 수용자의 참여성에서도 드러난다. 기존 예술 장르에서 수용자의 기본 태도는 감상 내지는 관조였다. 반면 예술 신입인 게임에서는 직접 참여하여 경험한다. 새로운 수용 형태가 예술에 들어온 것이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보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로 용인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수가 했던 말이다. 수용자 미학 이론으로는 맞는 얘기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이 된 것은 사람들이 미술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 수용자에게 달렸다. 사람들이 예술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예술품이 완성되며,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예술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돈이라도 있고 없고: 지원금과 노동권 그리하여 과거 논의까지 건드려가면서 얻어낸 결론은 낯설긴 해도 만족스럽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예술임을 인정했다. 이제 만족스러움을 안고 내년 3월부터 국가 지원금을 받아가면 된다. 하지만 당장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예술인 지원 정책을 규정하고 있는 법은 예술인복지법인데, 이 법의 개정안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내의 논의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논의에는 코딩 프로그래머의 예술인 인정 여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담당 부처의 논의가 대강이나마 윤곽이 잡히면, 그때 가서야 예술인복지법의 구체적인 개정안과 새 시행령이 나올 것이다. 현재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의원들이 발의해놓고 논의하고 있는 예술인복지법 내용은 예술인 자격 증명과 경력 증명에 관한 내용이다. 정부에 예술인으로 등록을 하여 지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각종 서류가 필요하다. 그중에는 국가가 ‘예술 활동’이라고 인정하는 특정 활동의 증명도 있다. 물론 이런 서류 구비는 힘들고 귀찮고 헷갈리는 일이다. 그래서 앨범을 몇 장씩 내고 10년 넘게 활동한 중견 음악인도 예술인복지법에서 보면 예술인이 아닌 상황이 흔하다. 그러다 보니 예술인 등록제는 예술 활동을 증명한다기보다는 예술인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더 많이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주류 시장과 비주류 담론 양쪽 모두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예술인임을 증명하고 지원금을 타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현재는 이런 부작용을 없앨 패치를 논의하는 중인데, 현재 발의되어 올라와 있는 개정안을 보면 논의가 건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기실 국회는 지원금 관련한 고민만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복지법 개정에 있어서는 노동권 문제도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예술인복지법 5조는 예술인이 불공정 계약을 하지 않도록 하는 표준계약서 조항이다. 활동 증명과 표준계약서에서 알 수 있듯 주로 개인 및 프리랜서를 위주로 패러다임이 잡혀 있다. 그래도 프리랜서인 연예인이 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할 때의 계약서 또한 이 조항을 기준으로 작성된다. 따라서 현재 게임 제작사와 노동 계약을 맺고 입사해 있는 시나리오 라이터, 디자이너, 3D 모델러, 코딩 프로그래머 등등에게도 표준계약서 준수 여부가 중요해질 수 있다. 게임업계의 고질적인 노동 문제를 풀 실마리가 여기서 등장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 Back 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15 GG Vol. 23. 12. 10. 올해는 <발더스 게이트 3>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CRPG의 부활과 같은 분위기에 많은 올드 게이머들이 환호했다. 전투 시스템 등에서는 <발더스 게이트>의 이전 시리즈작보다는 라리안 스튜디오의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2>을 떠올리게 만들긴 하지만, 뭐 어떤가.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가 정식 넘버링을 달고 돌아왔으면 그만이다. 열정적인 일부 게이머들이 자체 한글화에 나서 많은 한국 유저들도 불완전한 한글 상태에서나마 게임을 즐길 수 있었고, 결국 공식 한국어 지원 소식이 전해지는 데에 이르렀다. 굉장한 일이다. <발더스 게이트 3>는 게이머가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게임이다. CRPG 장르의 팬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다양한 문제 해결 방식의 구현은 기본이다. 이게 아름다운 그래픽과 성우들의 열연으로 장식돼있다. 불행한 흡혈귀부터 전작에 등장했던 미니어쳐 거대 우주 햄스터의 절친까지, 흥미로운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 각자의 스토리를 함께 경험하는 것은, 물론 스토리상 다소 빈 구멍이 있는 듯 느껴지는 대목도 있지만, 어찌됐든 요즘 말로 ‘뽕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는 D&D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 세계와의 접점이 거의 없어보이지만, 그럼에도 창작과 그것을 비평하는 방법론의 차원에서 보면 현실과의 접점에 주목하면서 작품의 이해를 넓히는 방식이 유효할 때도 있다. 소위 외재적 비평이라는 것인데, 게임의 훌륭한 점을 나열하거나 기대에 못 미쳤던 점을 짚어내는 것보다도 이런 방법을 택하는 게 이번에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이런 방식의 접근은 ‘작품을 경험하고 나서 이런 면도 생각해보자’는 차원이지 ‘작자의 의도는 실은 이거였다’는 식의 퀴즈풀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는 점을 먼저 강조하는 바다. <발더스 게이트>의 첫 작품은 1998년에 나왔고 2편의 마지막 확장팩이 나온 것은 2001년이다. 중간의 리메이크판 등을 빼면 22년만(얼리억세스를 포함한다면 19년만)에 정식 후속작이 등장한 셈이다. 그 20여년의 세월은 작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사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발더스 게이트 3>의 흥미로운 점은 서사의 중심에 일리시드가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됐으며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시작한다. 이게 계기이며 명분이다.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모험은 시작되지 않았을 거고, 동료들이 서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감염’인가? 만일 작품이 2019년 이전에 나왔다면 우리가 받는 인상은 이후와 달랐을 거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19년 이후에 나왔으므로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은 입장에서 ’감염’에 대한 느낌은 각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일리시드 올챙이는 호흡기 질환이 아니고 비말 혹은 에어로졸 입자에 의해 전파되지 않으며, 어찌됐건 전염되지 않는다. 일리시드 올챙이 감염은 오직 마인드 플레이어가 인위적으로 올챙이를 집어 넣을 때만 일어난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일은 보통의 일리시드 올챙이 감염이 아닌 네더릴 마법에 의해 조작된 감염이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 논란, 중국 기원론 등을 둘러싼 논란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중국의 네더릴 마법에 의해 조작이 된 것일까? 그런데 이런 것보다는 코로나19와 인류의 미래에 관한 담론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코로나19가 등장한 초창기 식자들은 인류가 더 이상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앞다투어 강조했다. 마스크 착용과 재택근무는 일상이 될 거고,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며,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퇴조가 불가피해 고립주의와 자국우선주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다는 거였다. 세계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먼저 희생되는 것은 취약계층일테니 사회구조를 지금과 같은 경쟁위주로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내놓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논의를 일리시드화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발더스 게이트 3>의 중반부에 정체를 드러내는 ‘황제’는 자신이 일리시드화 됐다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캐릭터이다. 주인공들에 음모에 맞설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제공하는 인물인 ‘황제’는 후반부에 가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주인공이나 주요 동료들의 반(半)일리시드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외양의 변화만 일부 감수하면 특별한 이득을 여러가지로 얻게 돼 다양한 측면에서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최종전 직전의 선택에서 ’황제’와 결별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주인공과 새롭게 우군으로 합류하는 기스양키 오르페우스를 포함한 누군가가 일리시드화 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작중 인물들이 반복 강조하듯 일리시드화는 불가역적 변화이며 ‘나’를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일리시드화로 가장 많은 개인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동료인 칼라크는 일리시드 상태에서도 앞으로의 희망을 얘기하지만, 성우의 연기는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즉 ‘감염’은 어떤 불가피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감염’으로 인한 변화에 적응하거나 그것을 수용하기 보다는 ‘감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추구했고 그것을 쟁취했다. 그것은 현실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감염’으로 인한 생채기를 치유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게임의 안과 밖, 양쪽 모두가 그렇다. 이게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의문은 다소 남아있다. 그러나 또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변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감염’을 겪으면서 <발더스 게이트 3>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거나,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넘어서는 등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그렇게 성장한 주인공 혹은 그들의 서사를 이어받는 누군가는 ‘감염’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견디면서 또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갈 거고, 그들과 모험을 함께하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거다. 그게 아마 앞으로 또 언젠가 나올 <발더스 게이트 4>가 현실과 관계맺는 방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발더스 게이트 3> 서사의 중심에 일리시드가 위치하면서 연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모티프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것이다. 일리시드는 일종의 군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집단의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엘더브레인이다. 엘더브레인은 경향적으로 자신의 제국 건설과 이를 위한 정복 사업을 위해 움직인다. 3명의 악신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은 네더스톤으로 엘더브레인을 조종해 일리시드를 지배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각자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 이 구조는 일견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익숙한 권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네더스톤으로 엘더브레인을 통제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루트 권한을 탈취한 것이다. 주인공들은 악신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에게 네더스톤을 빼앗아 권한을 다시 탈취해 엘더브레인의 통제권을 취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이 이야기의 기본 구도는 루트 권한을 누가 갖느냐의 싸움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것은 엘더브레인은 이미 네더스톤의 수신기 역할을 하는 카서스 왕관을 장악해 네더브레인으로 진화한 상태이며, 주인공들이 3악신의 선택된 자들로부터 네더스톤을 탈취하는 것도 네더브레인이 만든 ’위대한 설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를 앞서 권한 구조에 비유한다면, 루트 권한을 탈취당한 시스템이 자기가 알아서 루트 권한 수복을 위한 계획을 실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인공지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주제가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관련된 일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의 오픈AI 사태는 어떤가? CEO인 샘 올트먼이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과정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보도에 의하면 이 갈등의 핵심은 일반인공지능의 개발 속도를 둘러싼 이견이라고 하는데, 물론 보도되지 않은 여러 맥락이 더 있겠지만 이런 주제를 현실의 사건을 다룬 뉴스에서 보는 세상이 벌써 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놀라움을 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일반인공지능이란 무엇이고 그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엄밀한 차원에서 각자 제각각의 정의를 내놓고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공지능-디스토피아가 당장 눈 앞에 도래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둘러싼 인간 사이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지시하지 않은 일을 스스로 판단해 이행한 결과로 인류가 위기에 빠지는 사건은 아직도 아주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걸 걱정하는 일은 현재의 일이 된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해결책은 역시나 ‘황제’가 제시하는데, 앞서 언급한 일리시드화가 그것이다. 네더브레인은 일리시드이므로 능력이 모자라는 인간으로 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리시드에는 일리시드로 대항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비유해 말하면 문제적 인공지능에 대항하는 ‘우리 편’ 인공지능을 활용해 문제적 인공지능의 권한 탈취 시도를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거다. ‘황제’는 그 자신을 네더브레인에 대항하는 일리시드, 즉 ‘우리 편’의 인공지능으로서 네더스톤 즉 루트권한의 양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발더스 게이트 3> 속 이야기 내내 ‘황제’를 바라보며 주인공들이 느끼는 의구심 그 자체이다. ‘황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리시드인 ‘황제’를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우리 편’ 인공지능은 언제까지 인간의 편인가? ‘우리 편’ 인공지능은 과연 문제적 인공지능으로 진화하는 일이 없는가? <발더스 게이트 3>는 적어도 이 의구심에 대해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황제’는 주인공들이 편들어 주지 않으면 상대방에 붙고, 편들어 주면 배신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일행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실의 인공지능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가 아닌 복잡한 정치사회적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발더스 게이트 3>가 아닌 다른 게임으로 논하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건 다음 기회에 해보기로 하겠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게임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2년 10월에 방영했던 EBS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3부에서는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담론들을 다루었다. 비단, <게임에 진심인 편>뿐만 아니라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어디로 둘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은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담론의 두께만큼 다양한 관점이 혼재해있기 때문이다. < Back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12 GG Vol. 23. 6. 10. 게임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2년 10월에 방영했던 EBS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3부에서는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담론들을 다루었다. 비단, <게임에 진심인 편>뿐만 아니라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어디로 둘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은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담론의 두께만큼 다양한 관점이 혼재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구획하려 하는 시도 자체가 구태의연하다는 인식까지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게임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엄숙한 미술관, 그것도 한국 미술계에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3년 5월 12일부터 9월 10일까지 게임을 주제로 한 <게임 사회> 전시를 연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에서 게임의 문화적 지위가 변화했음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로의 게임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게임으로의 예술이 가지는 특수성은 무엇인지 등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이에 해당 전시에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했던 편집장은 <게임 사회>를 기획한 홍이지 학예연구사와 만나 게임과 예술의 관계를 더 깊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다만, 전반적인 전시에 관한 소개는 국립현대미술관 콘텐츠( https://www.youtube.com/watch?v=_mZEphegRDc) 에도 잘 나와 있기에, 인터뷰에서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의 의의와 한계, 또 앞으로의 가능성들을 사유하고자 하였다. 이경혁 편집장: 안녕하세요. 학예연구사님.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릴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이제 전시 기획을 전공을 한 뒤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지 3년 되었습니다. 홍이지라고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전시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전시에 대한 반응들이 뜨겁더라구요. 인터넷에서도 많은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게임 관계자들과 미술 관계자들이 이번 전시를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를 것 같은데, 현장에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비단 미술계와 게임계로 나뉘는 것뿐 아니라, 게임계 안에서도 게이머가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 업계에 계시는 분이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을 콘텐츠로 기획하시는 기획자분이 보는 관점도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은 것이 저는 재밌어요. 이 전시 하나만으로도 저희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대화를 할 때마다 너무 흥미로워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게임 전시라는 것이 리터러시의 문제가 있죠. 전시에서 애초에 게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알아볼 수 있는 지점들도 있고요. 사실은 일반적인 미술관도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상황인데, 미술 전문가로서 게임에 관한 전시가 다른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다른 특이점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실 처음 기획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한 방향으로 읽으시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의 리터러시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더욱 피드백이 궁금한 전시이기도 했어요. 일반적으로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올려도 피드백은 거의 없거든요. 개인의 호불호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코멘트 정도는 있지만, 전시 전반의 경험에 관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전시는 오픈한 지 일주일 됐는데도 피드백이 너무 적극적이어서 굉장히 놀라워요. 그게 게임 전시의 특이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전에 우리 미술관에서 비슷하게 피드백을 받았던 전시는 ‘개를 위한 미술관’ 전시였어요. 강아지들이 들어왔을 때,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엄숙주의나 결계가 해제되면서 이 공간을 다르게 점유하고 경험했을 때 확실히 훨씬 더 적극적인 피드백이 있었던 것 같고, 또 그거를 염두하고 만들었던 전시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코로나 때, 저희 미술관이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았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얼마나 장소가 좋아요? 위치도 훌륭하고. 코로나 때 병상이 없을 때에도 여기를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거든요. 저희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미술관이 기능을 하지 못할 게 뻔한데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관에 대한 경험과 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죠. 이번 기획도 이런 맥락에서 기획한 지점이 있어요. 다만, 피드백 중에는 기획자가 누구이며, 얼마나 게임을 해봤는지 묻는 질문들도 있어요. (웃음) 물론, 제가 게임을 하기는 하지만, 모든 게임을 섭렵하고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에요. 그러나 외부 기획자가 미술관에 와서 하는 전시와 여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공공성을 주제로 해서 만드는 전시는 분명히 접근이 되게 다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층위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공공미술로의 기획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무래도 디지털 게임 전시도 있다보니 기계들이 많잖아요? 그 지점에서도 공공미술에서의 의의나 어려움들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기계들은 괜찮나요? 잘 돌아가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괜찮아요. 저희가 우려했던 것보다 그래도 안정화는 빨리 됐고,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전시되고 있어요. 저희 오픈하고 그다음 날 단체 관람객이 900명이었거든요. 그때가 진짜 위기였긴 했어요. 관람객분들이 개별로 혹은 두 세분씩 오실 때는 미술관의 분위기나 문법을 인지하고 오세요. 그런데 900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오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기계들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이 전시의 기획의도 이면에 있던 고민들에 대해서도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미디어 아트 작품이 굉장히 많던데,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들은 어떻게 되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라져요. 실체로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요. 처음부터 저희가 작품들을 파일 형태로 받았는데,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파일을 바로 폐기하고 그걸 사진을 찍어서, 소장품 대여처에 보내줘야 돼요. 김희천 작가님의 작품에 쓰인 큰 LED 이런 거는 패널도 그냥 다 해체해 버리는 거예요. 렌트기 때문에. 저희는 자산 취득을 할 수가 없어서 장비가 비싸도 렌트를 해야 돼요. 이 현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아카이빙을 한다 해도 사실상 ‘전시의 재현’이라는 건 불가능한 형태군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이경혁 편집장: 음. 게임 매체가 원래 그렇긴 하죠. 게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원래 애초부터 재연이 불가능한 거니까요. 그래도 파일을 가지고 계신거면, 나중에 오페라처럼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연출로 재현할 수는 있는 거겠네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그런데 그것도 조금 문제가 있긴 해요. 제가 이번에 MoMA(Museum of Modern Art: 미국의 유명 근현대 미술관)랑 스미스소니언(미국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주는 박물관)에서 각각 작품을 빌렸는데, 최종 협약서에 사인할 때까지 1년 가까이 걸렸거든요. 애초에 MoMA와 스미스소니언이 2010년 초반에 게임을 소장하기로 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이랑 문법이 많이 달랐던 거죠. 지금의 관점에서 당시 계약서는 명확한 규정이 만들어지기 전에 체결된 거였거든요. 게다가 당시의 판단으로는 (게임 관련 전시물을) 어디까지 소장해야 되는지에 관한 연구가 너무 미비했기 때문에, 누구의 권한을 어디까지 일임받아서 관리할지에 대한 부분도 각각 다 달랐던 거죠. 어떤 게임사는 ‘전시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 어떤 곳은 ‘전권을 다 준다’ 대중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너무 달라졌고, 또 담당자들도 다 바뀌어서 판단을 유보했기 때문에, 저희가 이번에 전시할 때에는 MoMA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MoMA의 모든 리스트를 보면서 게임 회사들에게 다시 또 허락을 받았어요. 그때 어떤 게임사는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하고 두 달, 여름 휴가라고 한 달, 어떤 곳은 ‘우리가 MoMA랑 계약을 했다고요?’ 하는 곳도 있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게다가 MoMA가 2010년에 전시를 하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전시를 안 했기 때문에, 저작권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컨디션이 많이 바뀐 거예요. 그 사이에 데이터 파일도 굉장히 압축이 많이 되고, 전시물을 상영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재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이경혁 편집장: 한편으로 MoMA에서 전시된 작품들도 실제 상용 작품들이고, 사실은 직접 컨택을 해서 전시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그런데 MoMA와 계약한 작품들을 빌려왔던 의도가 따로 있으셨을지 궁금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도 그 지점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게임을 미술사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지점이었어요.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그러니까 89년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를 디지털 미술사로 정립을 하고 있는 와중인데, 이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게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미술사에서는 게임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가 연구하고 있던 맥락 안에 게임을 긴급하고 진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MoMA의 사례가 주효했어요. 애초에 게임을 접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에게도 ‘MoMA도 게임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설득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역사적 맥락 외에도 ‘미술 전시로서의 게임’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물론 있지만, 그걸 구현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요. 단순한 체험으로 제공되는 것 외에, 저희가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미디어 작품처럼 뭔가 감상의 여지가 생기고, 이걸 통해서 특정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러기에는 미술관에서의 공간이 한정적이고, 너무 찰나인 거죠. 경험의 시간 자체가.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사실 이번 전시 중에서 특히 심시티 같은 경우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죠. 결국, 전시장의 한계라는 것은 공연 공간에서, 줄을 서서 공연 기기를 잠깐 대여하는 방식에서부터 나올 것 같은데요. 오락실 게임은 이런 논리가 가능하겠지만, 심시티나 마인 크래프트가 공적 공간에 올라왔을 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연 외에도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게임은 일반적으로 협업해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니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MoMA도 게임 전시는 항상 디자인 분과에서만 하는데, 시연이 어렵다는 점과 크레딧의 문제가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게임 전시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지점도 있고, 아직은 예술로서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관점의 차이들도 큰 것 같아요. 저희가 빌릴 때도 게임사의 반응에 따라서 그 게임사가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거든요. 가령, 제노바 첸(Sky : 빛의 아이들, Flower, Journey 제작자)은 확실히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희가 뭔가를 요구했을 때, 모든 걸 조건 없이, 질문을 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전부 제공해줬는데요. 확실히 게임이 예술로 보여줄 수 있는 자리라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저희가 지금 헤일로 2600을 보여주고 있는데,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을 통해 에드 프라이즈(Ed Fries, 헤일로 2600 개발자)의 연락을 받았어요. 저희는 모든 전시품을 똑같은 컨디션으로, 너무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는 방향에서, 관람객들에게 중립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에드 프라이즈는 자신의 작업이 아트이기 때문에, 전시할 때 게임이 이용되었던 당시의 CRT 모니터로 바꿔 달라는 연락이 온 거예요. “접근성 확장을 위해서 전시에 버튼과 조이스틱을 쓴 것은 알겠지만, 내 작업은 이미 종결된 그 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다시 번역된 상태로 제공이 되는 형태는 반대한다.” 그런 거죠. 이런 지점에서는 게임과 전시에 대해서 고민들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하다가 지금은 백남준 류의 비디오 아트가 미술계에 자리가 생겼잖아요? 게임도 그런 게 가능할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게임이) 이미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만큼 자리 잡혔다고 생각해요. 싱글 채널 비디오 아트에서 옛날에는 작가가 선형적인 타임라인 안에서 촬영을 해서 편집을 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CGI가 안 들어가는 작업을 찾기가 힘든데, 그 CGI 작업 자체가 유니티 아니면 언리얼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이미 게임의 문법으로 영상 언어를 만들고 있고, 그 과정에서 메타버스나 NFT를 경험해 본 작가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게임의 작법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잘 만들지에 있어 기술력에 대한 갈구가 큰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작가들도 고민하는 게, 그런 기술력을 써서 작업을 만들면 1, 2년 사이에 빠르게 낡아버린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거죠. 이제는 딱 보면 ‘이거는 심즈 미감, 이거는 플레이스테이션 1 미감, 이거는 언리얼 엔진 5 미감’ 이런 걸 바로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금방 낡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김희천 작가가 개발을 할 때도 큰 화면에 굉장히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만들 수 있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풀레이스테이션 1 미감에 로우 폴리곤을 써서, 시간대를 흐트러뜨리고 싶은 의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77220)에서 언급한 예시 중에 라라 크로프트가 있었는데요. 옛날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에는 게이머들 각자의 라라가 있었던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라라. 그런데 기술이 발달해서 실사화가 되니까 모두가 실망했다는 거죠. 자기의 라라가 아니라서. 그런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고 게임을 하던 그 시기가 현대 미술과도 닿아있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고 체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딱 그 부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요. 이경혁 편집장: 확실히 게임계에서는 그런 기술적 맥락들이 중요하죠. 사실 초창기 레트로 게임들은 지금처럼 폴리곤 방식으로 안 만들고, 도트로 이제 디자인을 했잖아요. 근데 도트디자인에서는 박모라고 하죠? CRT 특유의 번짐을 포함해서 디자인을 한 게 있었죠. 그런 미감들은 시대적인 맥락에서 감상되고, 이해되는 지점들이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생각나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슈퍼 마리오 무비>는 다양하게 감상될 것 같은데, 이전 게이머들에게는 그 화면이 익숙하거든요. 게임팩을 처음 꽂았을 때, 뭔가 지직거리면서 나오는, 그래서 다시 훅훅 불고 게임팩을 꽂는 익숙한 화면인데, 그 경험이 없거나 그 시절을 안 겪은 요즘 게이머들은 무슨 화면인지 모르는 거죠. 그런건 도록에 아무리 써도 잘 알 수가 없죠.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 지점이 현대 미술과 게임의 접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제가 브로셔에 쓴 글이 있어요. 게임을 하는 것과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과정이 되게 비슷하다고 써놓은 게 있거든요. 저는 실제로 그랬던 것이, 제가 게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미술계에 계신 많은 분들은 제임을 잘 모르시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외부에서 ‘저 미술관에서 일해요’라고 하면 ‘저는 현대 미술은 하나도 모르겠어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죠. 이렇게 서로 문법이 다르고, 시간을 들여서 익히지 않으면 온전히 즐길 수 없는 두 대상을 공공미술관에서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에 ‘접근성’을 무게감 있게 다룬 것도 연장선 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해주신 접근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이번 작업을 하시면서 접근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게임계의 바깥에 계신 입장에서 게임 접근성의 현재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가 전시를 기획할 때, 컨트롤러를 이용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Xbox Adaptive Controller (Xbox 접근성 컨트롤러: 국립재활원의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도 소개되었던, 장애인의 게임 접근을 돕기 위한 컨트롤러)로 전시할 수 있는 게임이 거의 없는 거예요. 특히 국내 게임은 하나도 없었죠. 그런데 지스타가 열렸을 때, 넥슨에서 ‘카트라이더: 드리프트’가 나오니까 그거를 이 컨트롤러로 쓸 수 있게 기술적으로 검토를 해달라는 이야기가 국립재활원에서 있었고, 국립재활원 연구에 참여했던 가족들에게도 ‘단 하나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국내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서 마지막에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넣은 지점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엑스박스 컨트롤러는 국내에서 팔지도 않고,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죠. 그리고 우리나라 게임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장애인과 여러 소수자의) 접근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게임은 산업으로 분류되고 게임에 대한 평가도 이용자가 얼마인지 등 가시적인 숫자로 평가되기 때문에,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떨어지는 거예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 지점에서 한편으로는 이번 전시 이후에도 게임의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전시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사실 미술관과 접근성은 게임보다 먼저 논의들을 거쳤잖아요? 이제는 미술관이, ‘한국에서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가장 접근성이 높은 공간’ 중 하나로 꼽히는데, 거기에서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부족한 ‘게임’이 이야기된다는 지점이 유의미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데 저는 매일 내려가서 Xbox Adaptive Controller를 쓰시는 분들을 보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금방 익숙하게 잘하세요. 저희 딸이 11살인데, 저희 딸한테 마인 크래프트를 이 컨트롤러로도 시켜봤는데,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서 하긴 하더라고요. 확실히 접근성에 관한 논의들은 실제로 경험해보면서 느끼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어떤 컨트롤러에 익숙한지에 대한 문제를 확장하면 장애인 접근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맥락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접근성 관련 논의가 비단 장애인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보편성에 관한 논의이고, 오히려 메이저를 향해 가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그래서 이러한 고민들을 손쉽게 ‘돈 안되는’, ‘착한 일’로 인식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사람들이 접근성을 자꾸 소수자의 문제라고 쉽게 인식하지만, 크게 보면 사실 키오스크의 사례도 같은 맥락이죠. 만약 키오스크에서 에러가 떴을 때, 핸드폰을 많이 쓰는 세대는 직관적으로 초기 화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해력이 있는데, 그게 전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문해력이 없는 사람도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거죠. *김희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작용의 현장 이경혁 편집장: 앞서 게임계의 다양한 반응과 그 지점에서 공공미술로의 특수성 같은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미술계의 반응은 좀 어떤가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미술계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긴 한데요. 먼저 제가 예전에 <유령팔>이라는 전시를 했던 걸 많이들 아시니까, 연장선에서 봐주시는 분들은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 맥락에서 읽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임 전시를 해서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대가 (미술계로) 진입해서, 경험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과 미술이라는 콜라보가 참 쉽지 않은 영역이었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관계를 가져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좀 해야 할 시기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래서 미술 쪽에 비평하시는 분들 중에선 게임의 미감과 질감이 다음 세대의 미디어 아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왜냐하면 언리얼 풍이나 유니티 풍의 미감이나 마감이 단순히 작업물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 방식이나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주잖아요. 재미있는 사례로, 최근에는 실제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온 것을 느끼는데요. 저는 실제 전시 장소에서 물리적인 양감과 구조를 이해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설치하는데, 어떤 작가분들은 실제 전시장에 와서도 사진을 찍은 다음, 사진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보는 것이 낫지 않나?’고 했더니, 자기는 핸드폰 스크린으로 보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다고 말하는 거죠. 이처럼 프로그램이나 기술이나 게임의 문법이 여러 변화를 만든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논의들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시각적인 대상으로 볼 때 한정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보면 게임의 또 다른 정체성이자 특징인 규칙, 그리고 그 규칙과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감정의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아요. 미술이 게임의 방법론을 가져간다면 사실 이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전시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영역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좋은 예시가 김희천 작가 작업인 것 같아요. 김희천 작가 작업은 앞 부분에서 유니티로 만든, 모바일 게임을 하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게임의 아바타 같은 사람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는데, 이후 실제 인물이 연기를 하는 파트가 끝나면 전시장에 구현된 35대의 CCTV가 이미지를 수집하고, 수집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변환되어서 출력되는 파트가 있거든요. 실제 게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건 이 부분이죠. 우리는 보통 앞부분을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뒷부분을 게임으로 보지 않는데, 작가님에게는 이 부분이 게임인 거고, 내러티브가 있는 기존의 미디어 작품의 문법으로 해석했을 때 실시간 반영이 작품에 즉흥적으로 개입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전의 영상 작품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게임의 문법 쪽으로 가지를 뻗어간다면, 어차피 집에서도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전시장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웃음)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웃음) 다만, 전시장이 어떤 풍경을 만들었는지가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실제적으로 어떤 콘텐츠가 상영되는 지보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 반응, 상호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는 것이 유효한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시장에 와서 보는 미디어 작업이 어떤 경험의 차이를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온당하게 다뤄야 할 내용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사회적 주제에 대해서 모두가 드나드는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굳어질 수 있는 사회 문법에 균열을 줄 수 있어요. 그런 균열을 만드는 공간이 미술관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맞습니다. 게임 자체로는 이미 예술을 하고 있어요. 다만, 그중에 전시될 수 있는 방식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모든 게임이 미술관을 가야하는 것도 아니며,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81년생인데, 어렸을 때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여자애가 무슨 게임이야? 오락실에 가 있는 오빠나 빨리 데려와서 저녁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을 듣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오빠를 데리러 가면, 오빠는 친구들이랑 ‘스트리트 파이터’ 하고 있고, 오빠가 저한테 200원 주면 테트리스하고, 보글보글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것처럼 저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접했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남성적 문화라는 점에서 게임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적 경험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도 게임에 몰입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런 경험들 때문에 이런 전시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유령팔>도, 85년 이후 세대들이 포스트 미디엄을 다루고 있는 특성과 달라진 창작 환경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기획했어요. 물리적인 감각이나 스케일 감이나 물질에 대한 감각을 인지하는 세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에도 그런 맥락에서 게임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의 전시도 이런 고민들을 담는 지점에서 세대적 경험에 균열을 만들어갈 것 같습니다.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4회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심사평

    실망하지 말고 계속 게임을 즐기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며, 끊임없이 글을 생산해주기를 기대한다. 문학적 재능이나 학술적 깊이 하나만으로는 훌륭한 비평문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게임에 대한 애정을 품으면서도 독창적인 문제의식과 충실한 개념 자원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이왕이면 재미있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비평가들의 출현을 기대한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aejin Yoon After earning a PhD in television drama studies, has spent more than twenty years teaching, researching, and writing on media-cultural phenomena. The subjects have been varied—games, webtoons, the Korean Wave, variety programs—but all share a common thread: the exploration of "activities that many people enjoy." A few years ago came a small book titled A Study of Digital Game Culture, and these days runs a research organization called the Yonsei Game & Esports Research Center (YEGER), pursuing a range of studies on game culture together with younger researchers.

  • [논문 세미나] Emitexts and Paratexts: Propaganda in Eve Online

    〈이브 온라인(Eve Online)〉은 현재 ‘펄어비스’가 인수한 아이슬란드의 게임 제작사인 ‘CCP 게임즈(CCP Games)’가 2003년 출시한 SF 샌드박스 MMORPG이다. 가상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브 온라인〉은 오픈 월드 시스템을 통해 광활한 맵을 제공하며, 이곳에서 일어나는 유저의 다양한 행위들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높은 자유도를 제공한다. RPG이지만 이 게임에는 캐릭터의 직업이 없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이브온라인, 논문, 패러텍스트, 에미텍스트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jin Park A graduate student who has stepped into game studies. Currently taking cours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Lately, exploring the varied game experiences mediated by games, as well as subculture within Japan. Writing is still hard.

  • 동시대 레트로 게임 : ‘동시대’와 ‘레트로’의 불편한 공존에 관해

    우리의 동시대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현상, 즉 ‘레트로 스타일’이 존재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극단을 완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고전적인 픽셀 아트와 칩튠 사운드, 단조로운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게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우리의 보편 인식, 즉 기술 중심의 비디오 게임史에 입각해 보자면 이레귤러들로 봐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동시대 레트로 게임contemporary retro game’은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Back 동시대 레트로 게임 : ‘동시대’와 ‘레트로’의 불편한 공존에 관해 24 GG Vol. 25. 6. 10. 비디오 게임은 기술 기반의 매체다. 이 사실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전기와 디지털 신호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 놀이는 고도화된 컴퓨팅, CGI, 물리적 입력 장치, 디스플레이 등의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사를 같은 선線 위에 위치시킨다. 확실히 매년 반복되는 ‘신작 게임’ 발표의 현장은 기술의 각축전처럼도 보인다. 특히 AAA로 위시되는, 고도의 예산이 투여된 게임들은 지난해의 기술적 성취를 상회하며 더 강력한 시각적 완성도를 자랑하며 우리는 그에 열광한다. 그런데 우리의 동시대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현상, 즉 ‘레트로 스타일’이 존재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극단을 완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고전적인 픽셀 아트와 칩튠 사운드, 단조로운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게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우리의 보편 인식, 즉 기술 중심의 비디오 게임史에 입각해 보자면 이레귤러들로 봐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동시대 레트로 게임contemporary retro game’ [1] 은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 1. Steam에서의 복고풍(Retro) 태그와 픽셀 그래픽(Pixle Graphics) 태그의 출시량(위쪽)과 비율(아래쪽) 그래프. (출처 : steamdb.info ) Steam의 각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 태그 [2] 의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2024년 발매된 복고풍(Retro) 태그를 가진 게임의 수는 2,266편이며 픽셀 그래픽(Pixel Graphics) 태그를 가진 게임의 수는 4,250편으로 집계된다. 2024년에 Steam에 발매된 게임의 수는 29,063편이며 각 태그의 비율은 약 7.8%와 14.6% 정도로 확인된다. 그보다 5년 전인 2019년에는 각각 678편(5%)과 777편(5.7%)이었다. 즉 5년 사이에 발매 수는 각각 약 4배와 6배 정도로 증가했으며 전체 발매 수 대비의 비율은 1.4배와 3배 정도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3] 절대수뿐만 아니라 발매작 내에서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특성’이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으며, 점차 그 범주를 늘려가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명백한 경향이자 현상이다. 따라서 이 현상은 우리의 기초적인 인식을 위배한다. 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움직이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가 이러한 반동적인 현상을 만드는가? 왜 게이머들은 점차 ‘레트로 스타일’의 게임에 관심을 늘려가는가? 향수 현상으로서의 레트로 스타일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게이머들이 점차 향수에 의존해 간다는 관점이다. 이는 게이머의 전체 연령층 상승이 가져온 경향으로도 볼 수 있다.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ESA)에서 2021년 작성한 비디오 게임 산업 보고서 [4] 에 따르면 미국 게이머의 인구 비중은 18세 미만이 20%, 18~34세가 38%, 35세 이상은 통합 42%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통계에 의하면 20대 이하의 게이머들이 전체 수치에서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중년 이상의 비디오 게이머’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기관의 2015년에 보고서 [5] 에서는 18세 미만이 26%, 18~35세가 30%, 36세 이상은 통합 44%로 집계되는데 전체적으로 18세 미만에서 18세 이상으로 분포가 옮겨가는 형태로 보인다. 절대수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게이머의 전체 수치는 2015년은 1억 5천만이며 2021년에는 2억 2천만으로 약 1.5배의 상승을 보인다. 따라서 2015년에는 36세 이상의 게이머가 약 680만 명으로 추산, 2021년에는 약 950만으로 추산되기에 중년 이상의 게이머 절대수가 증가하는 추세인 것은 확실하다. 소위 말하는 ‘가벼운 게이머’, 즉 게임의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의 증가를 의심해볼 수도 있다. 그러한 관점을 위해 ‘게임에 대한 적극적 소비자’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Steam 사용자의 분포 분석으로 옮겨갈 수 있다. 2024년 statista.com 이 수집한 자료 [6] 에 의하면 41%를 차지하는 가장 다수의 그룹은 20~29세로 집계되며, 그 뒤로 가장 큰 비중은 29%를 차지하는 30~39세 그룹이 차지하고 있다. 20세 미만의 플레이어 그룹은 5% 정도를 차지하며 40대의 15%, 50대의 7% 보다도 낮게 집계된다. 결국 이러한 도식은 과거의 게임 경험을 가진 채 성장하는 ‘자기 역사를 가진 게이머’가 증가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30대 이후에 처음 비디오 게임을 접하는 인구보다는, 10대와 20대를 걸쳐 30대 이후에도 비디오 게임 플레이를 유지하는 게이머를 상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레트로 스타일 게임’에 대한 소구는 이러한 게이머들의 향수적 요청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옥스퍼드 인터넷 연구소와 시러큐스 대학교 공공 커뮤니케이션 스쿨은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의 게임 세션 기록을 통해 레트로 게임을 플레이한 플레이어가 대부분 자신이 10세 때 유행했던 게임을 자주 플레이했다는 연구 [7] 를 발표했다. 게임의 선택에 이러한 개인적 향수personal nostalgia가 개입되는 것이다. 많은 레트로게이밍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현상을 향수의 효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야코 수오미넨Jaako Suominen은 “레트로게이밍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외래어를 사용할 수 있다. 노스탤지어이다.” [8] 라고 서술했으며, 데이비드 하이네만David Heineman은 “비디오 게임에서의 향수가 흥미로운 이유는, 재출시된 게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플레이어가 정확히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9] 라고 쓴다. 물론 이들의 연구 방향은 어디까지나 동시대 레트로 게임을 소비하는 경향보다는 과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기는 레트로게이밍retrogaming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면을 통틀어서 중년의 게이머들에게 있어 ‘향수’가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공유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향수가 작동하는 방식은 당연히 일정량 과거에 대한 낭만성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제약이 존재하던 과거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혁신의 가능성을 가졌다는 전제다. 카밀 비친스키Kamil Wyczynski는 그의 연구 보고서《Meanings of Retrogaming Consumption for “Millennial” and “Generation X” Men》에서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뒤, 그들이 레트로게이밍을 즐기는 이유를 9가지로 ㅡ 조악하게 설계된 제품 경험, 미완성 상태로 출시, 소비자 노동, 온라인을 전제로 한 설계, 온라인 멀티플레이 중심, 창의성의 결여, (하드웨어의) 계획된 노후화, 불공정한 경쟁 환경, 이윤을 위한 설계 ㅡ 로 정리한다. [10] 대체로 소비자 관점의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확실히 ‘창의성의 결여’라는 대답은 존재감을 가진다. 연구 참여자 중 한 명은 이 문제에 대해 “80년대만 해도 게임들을 보면…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였어요, 새롭고, 혁신적이고, 그러니까… 혁신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똑같고 똑같은 게임들만 계속 나오는 것 같아요.”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다른 참여자는 그럼에도 ‘인디 게임 개발자에게는 좋은 환경’이라는 답을 한다. 비친스키는 여기에 이렇게 첨언한다. “참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소규모 회사들은 대형 게임 기업들보다 게임 제품을 설계할 때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디 개발자들은 오늘날의 레트로 게임들을 낳았던 초기 게임 산업의 환경을 모방하고 있다.” 즉,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게임이 더 창의적이던 ‘과거’를 충실히 모방하기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게임에 비해 더 창의적이라는 (향수 기반의)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 보스맨Frank Bosman은 이러한 경향을 ‘비디오게임 낭만주의Videogame Romanticism’라고 정리하는데, 그의 정리에 의하면 이것은 ‘이는 과거를 기술적으로는 열등했을지 모르나, 문화적·사회적·정신적으로는 우리 시대보다 우월했던 시기로 이상화하는 방식’이다. [11] 향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가 규정한 두 가지 향수의 개념을 차용한다. 보임은 《The Future of Nostalgia》에서 향수를 두 가지 개념, 복원적 향수Restorative Nostalgia와 성찰적 향수Reflective Nostalgia로 구분한다. 이 둘은 Nostalgia라는 단어의 어원인 Nostos(귀향)과 Algia(그리움)로 그 근원이 분리된다. 즉 Nostos에 더 많은 기원을 두고 있는 복원적 향수는 과거의 것을 ‘마땅히 돌아가야 할 시간적 고향’으로 이상화/낭만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반면 Algia에 그 근원을 두는 성찰적 향수는 과거라는 시간과의 물리적 단절을 받아들이는 성향이다. 이 향수는 대상의 직접 재현을 요청하기보다는 현재라는 시간과의 거리감을 통해 과거를 인지하는 경향이다. 앞서 비친스키 연구의 참여자들이 보인 태도는 정확한 의미에서 복원적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태도를 동시대 레트로 게임 전체에 적용할 수 있을까? 맷 보이어Matt Boyer는 Game Developer에 게재한 글에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오 레트로 게임’)이 복원적 향수를, 과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기려는 경향인 레트로게이밍이 성찰적 향수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12] 그의 논지에 따르면 레트로 스타일의 차용이란 이상화된 ‘과거의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한 방법적 동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어떠한 예시를 제시하진 않았으나, sebagamesdev의「파이트 앤 레이지Fight’n Rage」나 Hebi Lee의 「케이론즈 크립트Kharon’s Crypt」같은 게임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게임은 단순히 픽셀 그래픽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게임의 시각적 구성에서도 자신들이 ‘원본’으로 삼고 있는 게이밍 환경까지도 복원하려 한다. 예를 들어 「파이트 앤 레이지」는 CRT 모니터를 방불케 하는 필터와 화면의 곡면까지 재현하고 있으며, 「케이론즈 크립트」는 게임 화면의 외측에 ‘게임보이 컬러’의 외형까지 표시한다. 이것은 보이어가 함께 서술하고 있듯, 비디오 게임의 열렬한 플레이어가 개발자가 되며 발생한 현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개발자’로서 가장 첨단의 기술을 필요로하기보다는 ‘추억의 게임’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보인다는 점에서 상당히 향수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CRT의 질감을 남겨놓은「파이트 앤 레이지」(왼쪽)와 게임보이 컬러를 연상시키는 구성의「케이론즈 크립트」(오른쪽). 하지만 보이어가 자신의 글에 차용하고 있는 마리아 B. 가르다Maria B. Garda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다. 그는 오히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성찰적 향수에 해당한다고 논하며 「핫라인 마이애미Hotline Miami」, 「페즈Fez」,「FTL」, 「맥픽셀McPixel」을 예시로 든다. 그는 이 게임들이 단순히 과거의 형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 과거의 형식을 성찰하며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회고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향수라는 감정의 양식과 구조 자체에 대한 탐색으로 이해” [13]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페즈」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과거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 플레이어가 과거의 형식을 보며 느끼는 ‘향수’ 그 자체라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에서 향수가 재현되는 방법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삼기에, 가르다는 이러한 게임들은 전적으로 현대의 시기에서 ‘향수’라는 가능성을 조망하거나 탐구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물론 하나의 현상을 어떠한 맥락에 모조리 대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모두 복원적 향수나 성찰적 향수에 포함된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핵심은 ‘향수’ 그 자체에 있다. 게임 제작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두 가지 의미에서 향수의 범주 안에 있다. 하나는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재현적 욕망이며, 이것은 많은 경우 복원적 향수에 가담한다. 또 하나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창작적 환경, 이를테면 제한된 인력과 예산, 창의성의 발현을 위한 의도적 제한 등이 있다. 이는 많은 면에서 성찰적 향수에 속한다. 소비의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경우 복원적 향수에 속한다. Mossmouth의 「UFO 50」같은 게임은 ‘합팩’이라는 문화적 틀 없이 이해되기 어렵다. 「UFO 50」의 즐거움은 과거의 ‘불법복제판’을 상기시키는 관점에서 온다. 하지만 동시에, 「UFO 50」의 진지함이 과거의 ‘불법복제판’을 다른 방식으로 상기시키게 만든다면 이는 또한 성찰적 향수의 작용 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 되든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과거 없이’ 현존할 수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향수 바깥의 레트로 스타일 하지만 논의를 이렇게 좁혀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경향이 있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단순히 그것의 ‘향수’ 를 감지하는 게이머들에게만 어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원본으로 삼는 대상은 대체로 80~90년대의 8비트 또는 16비트 게임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게이머’로서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이러한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스타일이 하나의 현상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배경에는 분명, 향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작동들이 있을 것이다. Z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비디오 게임 연구는 대체로 이들의 작동 배경에는 ‘간접 향수second-hand nostlagia’ 또는 ‘역사적 향수historical nostalgia’가 작동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양식화된 역사성 또는 그러한 형식에 대한 대행된 향수로서 과거의 게임을 탐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옥스퍼드 대학의 《Reliving 10 years old》에서도 이러한 해석이 발견되는데,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의 클래식 게임을 플레이한 사용자 중 29%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단종된 콘솔의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연구자들은 이들의 게임 플레이는 개인적 향수가 아닌 역사적 향수의 작동이며, 따라서 향수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낸다. 물론 이는 설문의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의 프링글스는 올해 1월 레트로 게임기의 수리를 지원하는 Retro Console Clinic과 레트로 기기에 대한 약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 [14] 을 3gem과 동시에 진행했다. 이 결과에 의하면 Z 세대 설문자 중 24%가 레트로 게임 콘솔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설문에 참여자 중 74%가 이러한 ‘향수의 게임nostalgic games’이 더욱 편안함을 준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이것을 전부 향수의 효과로만 치부하는 방법과 거리를 두는 관점들도 있다. 프랭크 보스만은 이러한 현상을 레트로게이밍과 구분되는 빈티지 플레이Vintage Play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향유하지 않은 과거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패션이나 다른 문화에서의 빈티지 소비와 유사한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는 트레이시 다이앤 캐시디Tracy Diane Cassidy와 해나 로즈 베넷Hannah Rose Bennett의 빈티지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 “빈티지는 패스트패션의 부정적 이미지와 그 결과에 대한 대응 양식response이다.” [15] 라고 적는다. 말하자면 이러한 선택은 ‘가장 최신의’라는 형용사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작동한다. 물론 이때 그것에 대한 반발의 도피가 과거의 것이라는 점에서 일견 향수처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스만은 이렇게 적는다. “이 현상은 향수라기보다는 빈티지에 가깝다. 슬로우 게이머들 역시 슬로우 쿠커들처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이상화된 버전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16] 앞서 언급한 프링글스의 설문에서 역시, 설문자 중 78%가 레트로 기기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휴대폰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물론 지나치게 직접적인 대입은 불가능하겠으나, 여기에는 ‘현재의 기술’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지는 않은 것 같다. 따라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하나의 빈티지적 작용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패셔너블한 현상이다. 중년 이상의 게이머들과 달리, 젊은 게이머들에게 픽셀 그래픽스나 칩튠이 하나의 ‘대안적 스타일’로 여겨진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초고도의 포토 리얼리즘이 주는 어떠한 경외감은 현실적 문제로 인한 체감의 커브를 겪고 있다. 고도의 자본이 필요한 포토 리얼리즘이 체감적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 예산의 증가’는 점차 그 폭을 넓히기 때문에 사실상 제공할 수 있는 시각적 경외는 점차 감소하는 그래프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면에서 ‘기술의 투명화’, 요컨대 기술의 지나친 일상화가 해당 기술에 대한 경외를 저하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도 이 일상 기술이 더이상 경외를 주지 못할 때, 그에 반하는 재래 기술이 그 효과를 가져가기도 한다. 음악에서의 바이닐, 영화에서의 애니매트로닉스나 스톱 모션에 대한 복귀된 경외가 그러한 경향이기도 하다. 도미닉 바트만스키Dominik Bartmanski와 이안 우드워드Ian Woodward는 자신들의 저서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에서 “성공적인 문화적 도구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각각은 보다 깊은 만족을 주는 구체적인 경험의 집합을 수반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실용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일부 모더니즘 객체들이 유독 매력 없었던 것’도 알고 있다.” [17] 라고 적는다. 최고의 기술이 언제나 가장 아름답게 수용되지 않는 법인 셈이다. 그림 3. 픽소라마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100피스 퍼즐(Heye) 이 관점에서 픽셀 그래픽스는 바로 이러한 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다.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오면서 일종의 ‘뒤쳐진’ 스타일로 여겨졌던 픽셀 그래픽스는 그것을 체감하는 역사 경험자에 한해서만 작동한다. 오히려 시간성이 무화된 시기에 이들은 병렬적 인식 위에 올라갈 토대를 갖는다. 1997년 결성한 eBoy의 「픽소라마Pixorama」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아이소매트릭 스타일의 픽셀 아트를 이용해 세계의 여러 도시를 그리는 이 시리즈는 그 결성이래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루이비통에 의해 《TOKYO BY EBOY - TRAVEL BOOK》를 발매하거나 꼼데가르송 컬렉션에서 드레스의 패턴으로 사용되었다. 픽셀 아트 스타일이 동시대의 예술적 방법론의 하나로 인지된다는 것은 이것이 어떠한 ‘뒤쳐진 양식’으로 인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시각적 기표는 여전히 픽셀 아트로 표현된다. 그림 4. 게임적 이미지를 위해 픽셀 아트를 차용한 ‘메가 커피’의 광고 이미지 엘리자베스 E. 거피Elizabeth E. Guffy는 자신의 저서 《Retro : The Culture of Revival》에서 ‘레트로’란 단순한 과거가 아닌 근대로서의 과거 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회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더한다. “레트로는 감속 또는 반대 추진력의 형식을 제공하며,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끊임없는 충동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레트로의 회고적 소환은, 아무리 그 자체가 ‘모던’하게 포장되었을지라도, 그 과거를 진정한 의미에서 지나가 버린 것으로 표시한다. 연속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레트로는 우리를 이전 시대와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우리 앞을 지나간 것들과 분리될 때, 레트로가 끌어당기는 반작용의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18] 말하자면 레트로가 가진 본질적 속성이란 ‘전진’ 혹은 ‘진보’라는 지향성에 반발하고 그 역동성을 재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 역시 자신의 책 《레트로마니아》에서 이렇게 적는다. “한때는 전통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음악을 (아티스트로서) 생산하거나 (소비자로서) 지원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지금은 과거에 가장 깊이 중독된 집단이다. 인구 통계상으로는 여전히 최첨단 계급이지만 이제 그 역할은 선구자나 혁신가가 아니라 큐레이터나 아카이브 관리자가 됐다. 전위avant-garde가 아니라 후위arrière-garde가 됐다.” [19] 이를테면 현존하는 동시대 레트로 게임에 대한 소비 의식에는 단순한 향수 이상의, 전진적 기술 현상에 대한 반대의 의식이 존재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더 이상 뛰어난 포토리얼리즘이 놀라움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블라스퍼머스blasphemous》의 어두운 스타일과 부드러운 프레임의 픽셀 그래픽스는 ‘장인 정신’ 같은 아날로그적 경외를 느끼도록 만든다. 동시대 레트로 스타일의 증가는 우리가 현재 느끼는 기술에 대한 감각적 정체를 확인시켜 주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다면화하기 하지만 이 즈음에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이러한 ‘레트로 스타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귀환인가? 지금껏 이야기한 모든 전제는 비디오 게임에서의 레트로 스타일이 어떠한 극단적 단절이 있었던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레트로 스타일’은 (영화에서의) 무성 영화나 (음악에서의) 바이닐과 같은 존재인가?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이 기술을 경유해 현재의 시기에 도래시킨 공룡과 같은 ‘멸종의 흔적’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 전제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비디오 게임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것은 대체로 비디오 게임의 산업적 발전사, 그러니까 게이머들이 게임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매해서 플레이하는지’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그 현장을 아케이드에서 PC나 콘솔로 옮겨가는 방식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초기 비디오 게임사에서의 주인공은 아케이드와 아타리이고, 그 뒤를 잇는 주인공들이 닌텐도와 세가라는 서술에 우리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을 시작할 때 했던 이야기와 연결되듯, 비디오 게임에서의 ‘산업화’는 ‘기술적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를테면 게임 콘솔의 역사는 전적으로 기술적 혁신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2세대 콘솔, 3세대 콘솔이라며 역사를 짚어나갈 때 우리가 지시하는 것은 그것과 연결된 기술적 지평이다. 그리고 이 속도에 극도의 가속도를 붙인 것은 명백히 소니다. 5세대, 그러니까 32비트 이후부터 가속화된 컴퓨터 그래픽스의 혁신, 그리고 그것을 대표할 소프트웨어로서의 「파이널 판타지 VII」이 가져다준 충격은 비디오 게임의 진보를 시각 표현의 영역으로 안치시켰다. 그래서 플레이스테이션 이후의 비디오 게임의 역사란 ‘얼마나 더 진보한 시각 표현’과 마주하냐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관으로 봤을 때, 픽셀 그래픽스는 그 무덤으로부터 되돌아온 존재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이른바 5세대 콘솔과 공존하고 있었던 존재로서 ‘게임보이 컬러’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발매된 플레이스테이션은 확실히 쇼크였으며 이 엄청난 기기는 전 세계에 1억 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하지만 그와 병렬된 시기로 1989년 발매된 게임보이와 1998년 발매된 게임보이 컬러 역시 합계 누적 1억 1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마찬가지로 이어진 6세대에도 플레이스테이션2는 전 세계 누적 1억 6천만 대,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전 세계 누적 8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 시기에 플레이스테이션2가 보인 수치가 압도적이긴 하나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역사에서 지워질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다음 7세대에서 닌텐도 DS가 전 세계 누적 1억 5천만대로 플레이스테이션3의 8천만 대보다 더 앞선 수치를 보인다. 물론 닌텐도 DS는 성능상 어느 정도의 3D 그래픽스를 출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도의 3D 그래픽스가 불가능한 점에 더해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개발 환경을 유지했던 덕에 많은 게임들이 여전히 픽셀 그래픽스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발매되었다. 닌텐도의 휴대기기가 3D 그래픽스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건 2011년 발매된 3DS부터다. 말하자면 이 직전까지 휴대기기는 픽셀 그래픽스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20] 흥미로운 사실은 2011년의 3DS로 휴대기기가 3D 그래픽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시점에《아이작의 번제The Binding of Issac》같은 레트로 스타일의 인디 게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치 바톤터치가 이루어지듯, 픽셀 그래픽스의 역사는 단절 없이 유지되었다. 그림 5. GBA의「젤다의 전설: 네 개의 검」(왼쪽)과 NDS의「어드밴스 워즈: 듀얼 스트라이크」(오른쪽) 그러니까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 기술에서 무엇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픽셀 그래픽스로 대표되는 ‘레트로 스타일’은 그 명맥이 끊기지 않은채 하나의 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앞서 말한대로 레트로 스타일은 ‘무덤에서 되돌아온’ 형식도 아니며, 바이닐 처럼 ‘무사귀환한 왕의 포맷’ [21] 도 아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는 오히려 픽셀 그래픽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버전의’ 사관 집필이 가능하다. 비디오 게임의 통사에 있어 게임보이 어드밴스와 닌텐도 DS가 가지는 위상은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를 수 없다. 이들은 한번도 산업이라는 필드에서도 주류 바깥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픽셀 그래픽스는 ‘언제나’ 비디오 게임사의 주류를 함께해온 포맷이다. 다만 우리의 기초적인 인식, 즉 비디오 게임의 역사란 곧 ‘가장 진보한 기술을 다투는 각축장’이라는 사고 체계에 의해 눈이 멀어버렸던 건 아닐까. 우리가 얼핏 가지게 되는 비디오 게임史란 기술 중심주의에 함몰되기 쉽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라는 통사를 고려할 때 이 내부에는 더 다층적이고 복잡한 기술적 요건들이 도사린다. 즉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2~3와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웹에서 서비스된 플래시 게임과 피처폰용의 게임들과도 병렬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렇지만 이들도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하나의 영역을 만들고 (비록 일부는 끊겨버렸다 하더라도) 그 고유의 선형을 구성한다. 그림 6. 좌측 상단부터 「러브드」(플래시), 「레이디언트 히스토리」(NDS), 「갓 오브 워 3」(PS3), 「미니 게임 천국 5」(피처폰). 모두 2010년 발매된 게임들이다. 결국 ‘비디오 게임의 그래픽은 언제나 포토리얼리즘을 목표로 했다’는 서술에 대해서는 절반의 동의만 가능하다. 이런 분석은 아니메를 그 목표 지점으로 삼았던 80~90년대 일본 콘솔의 주류 스타일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비디오 게임에 있어 ‘기술’이란 (다른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며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그저 무엇인가가 그러한 사유에 잦은 연막을 작동시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트로 스타일’이 과거에 대한 참조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에는 ‘과거’가 무한히 연장되는 힘이 있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과거’를 아직까지도 연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계속 플레이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비디오 게임의 기술을 다층적으로 분화시켰고, 덕분에 비디오 게임의 ‘과거’는 언제나 현재화하며 유지될 수 있었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그러한 연장의 결과일 뿐, 결코 첨단 기술에 반하며 등장한 돌연변이나 이레귤러가 아니다. 이 연장 또는 생존, 혹은 유지야말로 비디오 게임이 가진 복잡한 생명력을 더 확고히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기술적 역사관을 본래의 형태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비디오 게임은 ‘포토리얼리즘’ 또는 ‘오픈 월드’ 같은 기술적 첨단을 위해서만 달려온 것이 아니다. 비디오 게임은 기술 기반의 매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기반의 기술을 역사의 층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지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비디오 게임과 접촉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비디오 게임은 앞으로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것이 ‘기술과 함께하는 한’ 끝없이 다양한 생태계로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의 기록은 결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간은 직선이나 더 나은 점진적 행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에게 관여하는 별자리와 같다는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의식 [22] 은 우리의 역사에도 유효할 것이다. [1] 페이레스 카얄리Fares Kayali와 조세프 슈Jusef Schuh는 《Retro Evolved: Level Design Practice exemplified by the Contemporary Retro Game》에서 ‘복고풍 감각과 현대적이고 집중력 있는 게임플레이의 조합’의 게임을 Contemporary Retro Game라고 명명한다. [2] Steam의 태그 기능은 유저에 의해서 직접 부여되는 시스템이다. 게임 개발자는 게임을 등록할 때 해당 게임에 속하는 태그를 설정하며, 페이지가 생성된 이후에는 유저들에 의해 자유롭게 태그를 추가할 수 있다. 단 게임와 무관하거나 부적절한 태그는 개발자에 의해 제거가 가능하며, 장기 존속하더라도 유저들의 투표에 의해 부절적한 태그는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관리된다. [3] 앞서 설명한대로 태그는 유저들에 의한 자의적 관리 기능이기 때문에 게임이 발매된지 한참이 지나고나서 부여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것을 고려할 때, 발매 당시 기준에서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복고풍’을 지칭한 경우는 더 적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발매된 지 시간이 지난 게임에 유저들이 ‘복고풍’을 붙이는 경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2021 Essential Facts about the Video Game Industry》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2021) [5] 《2015 Essential Facts about the Video Game Industry》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2015) [6] Steam Statistics By Release, Sale, Demographics, Usage, Operating System, Revenue And Facts, (Pramod Pawar, Rohan Jambhale) https://www.coolest-gadgets.com/steam-statistics/ [7] 《Reliving 10 years old: Descriptive Insights into Retro Gaming》 (Nick Ballou/Nicholas David Bowman/Thomas Hakman/Andrew K Przybylski, Oxford Internet Institute/SI Newhouse School of Public Communications Syracuse University, 2025) [8]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lture》(Jaako Suominen, 2007) [9] 《Public Memory and Gamer Identity: Retrogaming as Nostalgia》(David S. Heineman, 2014) [10] 《Meanings of Retrogaming Consumption for “Millennial” and “Generation X” Men》(Kamil Wyczynski, 2021) [11] 《Video Game Romanticism: On Retro Gaming, Remakes, Reboots, Game Nostalgia, and Bad Games》(Frank Bosman, 2023) [12] 《Video Games & Nostalgia: An Intertwined Relationship》(Matt Boyer, 2019) [13] 《Nostalgia in Retro Game Design》(Maria B. Garda, 2014) [14] https://www.kelloggs.co.uk/content/dam/europe/kelloggs_gb/pdf/The%20nostalgia%20is%20real%20Pringles%20launches%20NEW%20Retro%20Console%20Clinic%20as%2080%20percentage%20of%20Brits%20fall%20back%20in%20love%20with%2000s%20and%2090s%20tech.pdf [15] 《The Rise of Vintage Fashion and the Vintage Consumer》(Tracy Cassidy / Hannah Bennett, 2012) [16] 《Video Game Romanticism: On Retro Gaming, Remakes, Reboots, Game Nostalgia, and Bad Games》(Frank Bosman, 2023) [17]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Dominik Bartmanski/Ian Woodward, 2015) [18] 《Retro : The Culture of Revival》(Elizabeth E. Guffy, 2002) [19]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2014, 작업실유령) [20] 물론 소니의 7세대 휴대기기인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은 소니의 고성능 정책을 이어받아 닌텐도 DS와는 차별화된 그래픽 전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시기 대표적 휴대기기란 닌텐도 DS였다는 점에 이견을 두긴 어려울 것이다. [21]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Dominik Bartmanski/Ian Woodward, 2015) [22] 《It’s Art Historian Aby Warburg’s World. We’re Just Living In It》(Mattew Bowman, 2024) / https://artreview.com/its-art-historian-aby-warburgs-world-were-just-living-in-i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UX를찾아서] 오버워치에는 미니맵이 없다

    미니맵은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UI(User Interface)중 하나로, 게임의 상단이나 하단 구석에 항상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표시되는 작은 지도를 말한다. 특히 MMO(Massively Multiplayer Online) 게임이나 FPS(First Person Shooter) 장르에서 게이머의 시야는 1인칭 혹은 3인칭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미니맵이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확장된 버전의 전체 지도는 특정 버튼을 눌렀을 때 보이는 토글(toggle) 화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미니맵은 대부분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Head Up Display)로서 화면에 상시 표시된다. < Back [UX를찾아서] 오버워치에는 미니맵이 없다 05 GG Vol. 22. 4. 10. 미니맵은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UI(User Interface)중 하나로, 게임의 상단이나 하단 구석에 항상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표시되는 작은 지도를 말한다. 특히 MMO(Massively Multiplayer Online) 게임이나 FPS(First Person Shooter) 장르에서 게이머의 시야는 1인칭 혹은 3인칭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미니맵이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확장된 버전의 전체 지도는 특정 버튼을 눌렀을 때 보이는 토글(toggle) 화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미니맵은 대부분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Head Up Display)로서 화면에 상시 표시된다. 게이머는 미니맵을 통해 전체적인 게임 세계 속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주변 환경과 사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게임에는 크게 두 가지의 공간 감각이 동원된다. 아바타의 신체를 경유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얻는 감각을 지각된 공간감각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전체적인 게임 세계 속 스스로의 위치와 관계를 파악함으로서 얻게 되는 인지된 공간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맵은 그러한 두 차원의 공간감을 통합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미니맵은 게이머가 게임 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주며 게임의 그래픽이나 서사가 미처 채워 넣지 못한 공간감을 보조해 준다. 나아가 공간을 사회적 행위의 결과물로서 구성된 것으로 본다면, 게임 환경을 그려내는 3D 그래픽이나 프로그래밍 된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미니맵 또한 게임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 글에서는 게임 속 미니맵이 무엇을 그려내고 재현하는지 보다는 미니맵이라는 비유를 통해 조망하는 시점과 가시성이 어떤 위계 관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는 게임 내에 구현되는 공간을 넘어, 게임을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서열체계와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다만, 이 글이 이론이나 구체적인 분석을 포함하기 보다는 관련된 역사와 사건들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미니맵”과 같은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미니맵의 작은 역사 * 〈Rally X〉(1980) 우측의 미니맵(위)과 〈Defender〉(1981)(아래) 상단의 미니맵. 미니맵의 초기 형태는 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니맵은, 지금과 비교해서 굉장히 단순한 그래픽을 사용했던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들, 가령 〈Rally X〉(1980)이나 〈Defender〉(1981) 같은 게임들에서도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케이드 게임에서는 주로 단조롭고 비슷한 지형지물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미니맵은 지도의 역할보다는 근처의 적들을 보고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레이더 기능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 미니맵이 조금 더 ‘지도’와 유사한 형태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에 발매된 〈젤다의 전설〉에서 부터이다. 화면 좌측 상단의 회색 사각형은 젤다의 전설이 배경이 되는 하이랄의 전체 지형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의 초록색 점은 현재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구역이 전체 지형 중에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오늘날 다양한 정보와 기능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미니맵과는 달리, 당시의 미니맵은 플레이어의 위치 외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상호작용도 전무한 수준이었다. 1986년작 젤다의 전설에서 미니맵의 그래픽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동하더라도 플레이어가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초록색 점은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젤다의 전설〉(1986). 왼쪽 상단의 회색 사각형이 미니맵의 역할을 한다. * 〈젤다의 전설〉(1986)의 전체 맵. 이것이 미니맵에서 회색 영역으로 표시된다. 〈슈퍼 메트로이드〉(1994)에서는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해 플레이어가 탐험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플레이어가 이미 탐색한 지역을 붉은색으로 표시해주는 기능을 도입한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직 탐색하지 않은 미지의 지역을 가리거나 까맣게 남겨두어 정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전장의 안개(fog of war)는 1977년 작 〈엠파이어(empire)〉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지만, 이를 미니맵에 도입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평가받았다. * 〈슈퍼 메트로이드〉(1994). 우측 상단 미니맵에 플레이어가 지나온 지역이 붉은색으로 표시된다. * ‘전장의 안개’를 처음 도입한 〈엠파이어〉(1977). 이런 ‘전장의 안개’는 다른 게이머와 대적하는 멀티 플레이어 RTS(Real-Time Strategy) 장르 게임에서 자주 이용되는 게임 메커니즘이다. 아군 유닛을 전장의 안개가 낀 지역에 정찰 보내 시야를 확보하고 적군의 위치와 진입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이 같은 게임들에서 필수 전략으로 여겨진다. 일부 악의적인 유저들은 불공정한 방식으로 승리하기 위해 전장의 안개를 없애주는 불법 프로그램(맵핵; map hack)을 사용하기도 한다. * 아군이 정찰하지 않은 지역의 정보가 ‘전장의 안개’로 차단되는 〈스타크래프트〉(1998). 왼쪽 하단이 미니맵이다. 이런 ‘전장의 안개’가 적용된 미니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적인 지도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근대의 지도 제작은 식민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자주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과 타 민족과의 전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마치 RTS 대전 게임에서 전장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미지의 검은 땅을 정찰하고, 적군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도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축소하고 기호화 시켜 표현한 재현물이라면, 그러한 지도를 재현한 미니맵은 게임 공간의 재현, 그리고 지도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재현에 대한 재현이 된다. 2000년대 이후 MMO, RPG, 오픈 월드 어드벤처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에서 미니맵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포함하게 되었다. 도로, 몬스터, 적군, 친구, 퀘스트 가능 여부, 상점과 여관 등 건물들, 목적지까지의 거리, 방위 등 많은 정보들이 기호와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플레이어에게 제공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면서부터는, 화면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이런 미니맵이 유명 트리플-에이 게임 시리즈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7년, 한 코타쿠(Kotaku) 기자는 “지난 15년 동안 부상한 대악마, 비디오 게임 미니맵의 지배가 마침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2017년부터 줄줄이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 〈호라이즌 제로 던(Horizon Zero Dawn)〉, 〈파 크라이(Far Cry) 5〉에서 미니맵이 사라지거나 그 자리를 작은 나침반이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택에 대해 어쌔신 크리드의 디렉터 진 게스돈(Jean Guesd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미니맵에서 하나의 아이콘에서 다른 아이콘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방식을 깨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쏟은 노력과 자원 때문에 우리는 플레이어가 주변 풍경을 바라볼 수 있기를 정말로 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니맵을 나침반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나침반은 여전히 힌트와 정보를 제공하지만, 당신 역시 세계에 참여하고 더욱 관여해야 합니다.” 게임에서 미니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니맵이 세계로부터 눈을 돌리고 조잡한 아이콘과 목적지를 가르키는 화살표만 따라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처음 게임에 미니맵이 도입되었을 때, 게이머들에게는 비디오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일종의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게임이 등장하고 40-5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미 베테랑 탐험가가가 된 게이머들에게 미니맵은 오히려 세계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걸리적거리는 요소가 된 것이다. * 〈GTA 3〉 왼쪽 하단에 위치한 동그란 미니맵. 내려다보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 FPS 장르 게임들인 〈배틀그라운드(PlayerUnkown’s Battlegrounds〉(2017)와 〈포트나이트(Fortnite)〉에는 미니맵이 있지만, 〈오버워치(Overwatch)〉(2016)에는 미니맵이 없다. 2016년, 〈오버워치〉의 치프 디자이너 제프 카플란(Jeff Kaplan)은 왜 〈오버워치〉에 미니맵을 추가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초보 유저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앞으로도 미니맵을 도입할 생각이 없다고 답한 바 있다. 미니맵을 제공했을 때, FPS 장르에 익숙한 고수 유저들과 초보 유저들 간의 실력 간극이 더 크게 벌어지기 때문에 초보 유저들을 배려하기 위해 미니맵을 제공하지 않도록 선택했다는 것이다. 전장의 안개를 구현하는 RTS 장르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전 게임들에서는 정보 싸움이 승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다만 〈오버워치〉에서는 적의 위치나 진입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UI가 구현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고지대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운용하는 캐릭터 조합과 전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지대를 선점했을 때 적군에 비해 공격할 수 있는 각도가 잘 나온다거나 후방 유닛을 공격하기가 쉬워진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야를 확보해 진입경로와 전략을 파악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오버워치〉에서는 이러한 고지대를 선점할 수 있는 점프기나 z축 이동기가 있는 유닛들을 선택하는 전략이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오버워치〉에서도 미니맵과 유사한 화면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오버워치〉의 프로 레벨 경기를 시청하는 것이다. 공식 〈오버워치〉 리그는 게임 리그 시청자들에게 게임의 상황을 최대한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의 화면을 제공한다. 그러한 시점 중 하나가 바로 이 탑-다운(Top-down) 시점이다. 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 옆에 띄워주는 화면은 아니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미니맵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진영과, 유닛들의 진입 경로와 대치 구도를 아이콘을 통해 설명하는 화면이라는 점에서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 〈오버워치〉 리그의 탑-다운 뷰. * 〈오버워치〉 리그의 중계 화면. 뿐만 아니라 과거 〈오버워치〉 리그의 공식 중계 사이트였던 트위치(Twitch)에서는 〈오버워치〉 리그 올-액세스 패스(Overwatch League All-Access Pass)를 구매하는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시점과 각도로 경기를 시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준 바 있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스펙타클을 제공해주었다. 경기가 중계되고 있는 메인 화면과 더불어,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몸에 그대로 들어가 마치 그의 몸에 빙의한 듯한 시점으로 경기를 시청할 수도 있었고, 위에서 본 탑-다운 시점과 같이 위에서 모든 유닛들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정작 게임을 플레이하는 선수들의 캐릭터는 게임 내 중력법칙에 묶여 게임 속 땅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 했던 반면 (물론 특정 기술을 사용해 잠시 동안 공중에 떠 있을 수는 있다) 게임을 시청하는 사람과 중계진은 자유롭게 떠다니며 선수-캐릭터들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점에 대한 일종의 공간적인 비유로서, 프로 선수와 시청자 간의 높고 낮은 위치 설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오버워치〉 리그를 플레이하는 프로 선수 안에서도 고지대를 선점한 플레이어와 그렇지 못한 플레이어가 있는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선수와 리그 경기를 시청하는 시청자 사이에는 가시성의 격차가 존재한다. 〈오버워치〉의 플레이어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높은 지대로 올라가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지대를 선점하더라도 선수는 관객이 볼 수 있는 광경을 볼 수 없다. 반면 관객은 선수의 시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야와 정보의 불균형함은 제레미 벤담이 제안하고, 미셸 푸코가 근대적인 공간의 전형으로서 비평했던 파놉티콘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는 학교, 병원, 군대와 같은 공간들도 본질적으로는 파놉티콘 구조를 띄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감시 체계는 그러한 시설 안의 재소자들(학생, 환자, 군인들)을 유순하게 길들인다고 보았다. 파놉티콘 구조는 오늘날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정보의 세계에도 편재한다. 빅 테크 회사들이 이용자의 성별, 나이, 위치, 검색 기록과 시청 기록 등 갖가지 정보를 수집해 맞춤 광고를 내놓는다는 것은 오늘날 더 이상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버워치〉와 같은 대전 게임에서 미니맵이 사라지는 것은, 앞서 제프 카플란이 말했듯,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소수의 고수가 정보를 독식하는 것을 견제하고 게임이 극단적으로 서열화 되는 것에 맞서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여전히 이스포츠의 관객에게는 선수가 볼 수 없는 것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는 마치 신과 같은 눈이 부여된다. 물론 이러한 시선의 위계가 게임 리그를 시청하는 재미의 큰 부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절대적인 관찰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김지윤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신체적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게임 연구를 시작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을 써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 그려진 힘, 그리는 힘, 그림의 힘: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와 이미지, 그리고 리얼리즘

    클레르 옵스퀴르〉는 그 제목부터 미술과 연관성이 명확하다. 잘 알려져 있듯 클레르 옵스퀴르(Clair-obscur)는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키아로스쿠로는 chiaro(밝은)와 oscuro(어두운)의 합성어로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적으로 사용하는 미술 기법을 말한다. 이탈리아 맥락에서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의 연출을 꼽을 수 있고, 프랑스어인 클레르 옵스퀴르로 번역해서는 촛불 그림으로 유명한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같은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 Back 그려진 힘, 그리는 힘, 그림의 힘: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와 이미지, 그리고 리얼리즘 24 GG Vol. 25. 6. 10. *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이하 〈클레르 옵스퀴르〉) 스포일러 주의 “현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 〈클레르 옵스퀴르〉 르누아르, 베르소의 대사 그려진 힘 게임 〈클레르 옵스퀴르〉는 그 제목부터 미술과 연관성이 명확하다. 잘 알려져 있듯 클레르 옵스퀴르(Clair-obscur)는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키아로스쿠로는 chiaro(밝은)와 oscuro(어두운)의 합성어로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적으로 사용하는 미술 기법을 말한다. 이탈리아 맥락에서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의 연출을 꼽을 수 있고, 프랑스어인 클레르 옵스퀴르로 번역해서는 촛불 그림으로 유명한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같은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클레르 옵스퀴르는 독특한 기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는 모든 재현적 이미지에서 항상 중요한 문제다. 밝음과 어두움을 통해서 배경과 형상은 분간되고, 빛과 어둠의 균형과 불균형은 매번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완전히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빛과 어둠의 존재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빛을 통해서 어둠을, 어둠을 통해서 빛을 감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클레르 옵스퀴르〉를 관통하는 주제와도 연결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가상, 과거와 현재, 진짜와 가짜, 그리는 이와 그려진 것, 그림 밖과 그림 속 등등 서로 전혀 다른 것들 사이에서. *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10. * Georges de La Tour, Magdalene with the Smoking Flame, c. 1640. 〈클레르 옵스퀴르〉에서 플레이어가 탐험하게 되는 세계는 그림 속이다. [1] 플레이어는 게임의 중반 이후인 2막을 끝내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까지의 스토리는 반전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에서 마나에 해당하는 마법적 에너지를 크로마(Chroma, 색채)라고 부르는 등 곳곳에서 여기가 그림 속이라는 세계관 설정이 드러난다. 캐릭터 설정은 이러한 세계관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지점이 특히나 많은데, 르누아르는 당연히 그 유명한 화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를 연상시키고, 페인트리스이자 르누아르의 아내, 베르소의 어머니인 알린은 실제 르누아르의 모델이었던 알린(Aline Charigot, 1859–1915)과 또 다른 화가인 알린(Aline Réveillaud de Lens, 1881–1925)이 겹쳐 보인다. 초반부 주인공 역할을 하는 귀스타브 역시, 게임 속에서도 중요한 건축물로 등장하는 에펠탑을 건축한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과 이 글의 맥락에서 중요한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겹쳐 읽히는 캐릭터다. 연상되는 인물들 모두 게임 속 설정과 같은 19세기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가들이라는 점은 이러한 접근에 개연성을 확보해 주기도 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마엘은 이 세계가 그림 속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각성하여 엄청난 힘을 얻는다. [2] 플레이어는 마엘을 통해 게임 초반부에 원정을 떠나게 한 원인인 고마주(Gommage, 프랑스어로 ‘지우다’는 뜻)를 직접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그의 아버지인 르누아르처럼 캔버스 세계에서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각성 이후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인 스탕달은 너무 높은 버그성 데미지 때문에 결국 핫픽스로 너프까지 당했다. 그 기술은 작가 스탕달(Stendhal, 1783-1842)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 텐데, 스탕달의 문학 작품보다는 이른바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불리는 현상과 더욱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스탕달은 『로마, 나폴리, 피렌체』에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 숭고한 아름다움에 푹 빠져 심장이 마구 뛰고 결국에는 생명이 고갈되는 것 같은 엄청난 황홀경에 빠졌던 경험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뛰어난 예술 작품의 영향으로 심신에 충격을 받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예술 작품 때문에 실신하는 현상을 뜻하는 그 기술의 이름을 생각하면, 스탕달이 긴급 너프를 당할 정도로 높은 데미지 계수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껏 모험한 세계가 모두 그림 속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얻는 픽토스의 이름이 ‘그려진 힘’(painted power)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전까지 최대 데미지의 상한선이었던 9999를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중의 핵심 아이템으로, 이 아이템을 얻은 이전과 이후의 게임 경험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진다. 단지 스토리의 맥락뿐 아니라, 플레이어의 게임적 경험에서도 각성과 한계 돌파를 직접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장치인 것이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논점은 이 세계가 단지 그림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각성을 하게 되는 서사 구조에 있다. 물론 이 세계는 아들 베르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상드르 가족이 그림 속으로 현실 도피하여 만들어진 곳이지만, 점점 현실을 자각하며 회복하는 단선적인 서사를 그리지 않고, 오히려 캔버스 속 세계에서 만난, 사실 한낱 그림에 불과한 친구들에게 입체적인 서사를 부여한다. 귀스타브, 루네, 시엘과 같은 그림 속 동료들 모두 각각 고유의 이야기를 가지고 플레이어와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데상드르 가족이 키우던 개가 의인화된 캐릭터 모노코, 현실에선 잘 때 안고 자는 인형인 에스키에도 그림 속 세상에선 주체성을 가진 인물이 된다. 최종적으로 엔딩 분기점은 그림 속에 남을 것인지,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를 플레이어가 선택하게 만든다. 캔버스 속 가짜 친구들과 현실의 진짜 가족들 사이의 선택이지만,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플레이어가 세계관에 몰입하여 그림 속 가짜 친구들과 진짜 관계를 맺게 되는 문제도 있지만, 필자가 중요하게 짚어내는 부분은 게임의 서사와 플레이의 경험이 겹쳐지며 드러나는 두 층위의 그림이다. 게임 속 세계가 단지 그림일 뿐이었다는 층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플레이어가 보고 있는 모니터 속 그림일 뿐이라는, 게임 그 자체의 층위. 여기에서 실제로 스탕달 신드롬을 겪는 것은 우리 플레이어라는 말이다. 〈클레르 옵스퀴르〉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데이터 쪼가리와 픽셀에 불과한 이 그림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니 그림이, 게임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리는 힘 엔딩 분기점은 마엘을 선택하여 그림 속 세계에 머물 것인지, 베르소를 선택하여 캔버스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를 플레이어에게 묻는다. 만약, 마엘을 선택하여 그림 속 동료들과 모험을 계속하기를 선택한다면, ‘그리는 삶’이라는 제목의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3] 그림 속 세상에서 페인트리스의 힘을 각성한 마엘은 죽은 동료들을 모두 살려낸다. 베르소가 연주를 준비하고 있는 콘서트장에 친구들이 하나 둘 모이고 이제 연주가 막 시작되는 순간, 화면은 마엘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여 담는다. 친구들이 모두 모였지만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공허한 표정의 얼굴이다. 심지어 마엘의 얼굴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곧이어 암전. 이 게임의 세계관에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현실과 연동된 존재들은 모두 얼굴이 깨져 있다. 페인트리스(알린), 큐레이터(르누아르), 소년(베르소), 그리고 에필로그의 마엘까지. 얼굴 없는 존재는 곧, 거울을 볼 수 없는 존재이다. 돌이켜보면 플레이어는 게임 곳곳에서 거울을 마주하지만, 기술적인 문제인지 거울은 그 어떤 이미지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울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곳이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알려주는 장치인 알리시아의 편지에도 이 세상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고 쓰여 있다. 세계 곳곳에는 거울이 비밀 통로로 등장하고, 캔버스의 프레임과 거울의 프레임이 구분되지 않게 그려진다. 게임 속 세계에서 캔버스와 거울은 겹쳐 있다. 마침 위에서 언급했던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는 예술 작업이 “길 위를 따라다니는 거울”이라고 쓰는 구절이 나온다. [4] 거울은 세계와 예술 작업의 관계를 드러내는 비유이자 장치이다. 거울과 그림은 모두 세계를 반영한다. 게임 속 르누아르도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관점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 쿠르베는 “회화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며, 실재하고 존재하는 사물들의 재현 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라며 세계와 그림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5] 물론 쿠르베의 말은 역사화나 종교화와 비교하여 현실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얼리즘이라는 문제는 지금 맥락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리얼리즘이라는 태도로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가짜, 픽션, 매개, 그리고 그림이라는 점이다. 가짜에 진짜를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리얼리즘인 것일까. 아무리 리얼리즘을 강조해도 세계는 그대로 담기지 않는다. 예술적 매개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현실 세계가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이다. 현실에서 맨눈으로 볼 수 없던 이데올로기적 장막이 그림에서는 거두어지는 경우가 있다. 쿠르베는 그 이전엔 결코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을 그렸다. 현실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재현되지는 않았던 존재들이 그림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그림을 통해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 Gustave Courbet, The Stone Breakers, 1849. 마엘 엔딩의 에필로그 ‘그려진 삶’은 마치 배드 엔딩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 속에 남기를 택했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동료들은 엔딩 이후에도 세계를 계속 탐험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이른바 엔드 게임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클레아와의 전투, 0원정대의 일원인 시몽과의 전투 등 다양한 모험을 통해 이 캔버스 세계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더 발견한다. 세계관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적인 시몽을 만나기 위해 ‘뤼미에르의 밑그림’에 들어가면, 현실의 르누아르와 연결된 얼굴 없는 빛바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는 “창조에는 행동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날 움직인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그림 속에 매몰된 알린을 비판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실천 자체의 힘에 대해 이야기 한다. 현실 도피도 현실 반영도 아닌, 현실 속 존재에게 힘을 주는 실천으로서의 그리기. 그림의 힘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자연사』에는 그림의 기원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타데스라는 어떤 도공의 딸이 사랑하던 사람과 떨어지게 되어 등불에 비친 실루엣을 따라 벽에 그림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흔적이 최초의 그림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전설은 그림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부재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림과 현실이 맺는 관계,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애도. 게임 속 페인트리스가 했던 일도 정확히 같은 것이다. 이미지는 가짜이지만, 우리를 움직인다. 바르트는 “죽음은 사진의 본질(eïdos)”이라고 쓰면서 우리를 찌르는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6] 픽션이라는 관점에서도 다시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픽션은 실재와 대비되는 허구의 것을 의미하지만, 자크 랑시에르는 픽션(fiction)의 어원인 라틴어 fingere의 뜻이 “-인 체하다”가 아니라 “벼려 만들다”라는 점을 짚어내면서 다른 사유의 경로를 열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픽션은 사건과 형태, 기호의 체계를 구축하고 재조직하는 것이다. 픽션은 상상적 세계의 발명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 사물, 상황이 공통 세계에 공존하는 것으로서 지각될 수 있는 틀, 사건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사고되고 연결될 수 있는 틀을 조직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실재와 픽션 사이의 유사성이나 진위를 문제 삼지 않고, 심지어 예술의 바깥으로서의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실재는 늘 픽션의 대상이다. 즉,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맺어지는 공간을 구축하는 행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7] 픽션이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픽션이 구축해 낸 실재라는 대상이 아니라, 구축하는 작업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랑시에르는 실재를 가장하지 않고 실재를 대상으로 삼는 바로 이 픽션의 작업이 예술과 정치를 매개한다고 주장한다. [8] 다시 게임 담론으로 돌아와서 필자는 여기에서 “안에 사람들이 있잖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게임이 온라인으로 실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모니터 안의 그림들이 정말로 그저 데이터 쪼가리, 픽셀일 뿐이더라도 우리는 그것과 진짜 관계를 맺는다. 그림들은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찌르고, 무엇보다도 변화시킨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엔딩 분기점은 마치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을 연상시키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른 점이 많다. 〈매트릭스〉에서는 빨간약을 먹고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각성이고, 파란약을 먹고 가상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우매한 상태로 남는 것이지만, 〈클레르 옵스퀴르〉에서는 이 세계가 가상임을 알면서도 각성된 상태로 이곳에 머무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 〈클레르 옵스퀴르〉 ‘그리는 삶’ 에필로그 마지막 장면. 여기에서 깨어 있는 상태로 가상에 머무는 존재는 사실 플레이어 그 자체가 아닐까. 마엘 엔딩 에필로그의 마지막 장면, 마엘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기는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며 화면은 온통 검은색이 된다. 그 순간, 검은 화면이 블랙미러가 되면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취해 있으면서 동시에 깨어 있는 존재, 몰입과 각성 사이에 놓인 존재인 플레이어. 플레이어는 진짜를 통해서 가짜를,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사유한다. 매개된 현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세계를 비추어 본다. 리얼리즘의 근본적인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세계관에서 페인터들은 마치 마법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의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상상을 형식으로 매개하는 일. 그 일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게임이라는 매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생각한다. 그림의 힘, 픽션의 힘, 게임의 힘, 그리고 플레이어의 역능. [1] 정확히 이야기하면, 플레이할 수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인 베르소가 어릴 적 그린 캔버스 속 세계. 현실의 베르소가 죽은 뒤, 그의 어머니인 알린과 아버지인 르누아르, 그리고 누이인 클레아가 덧칠을 하고, 또 그림을 지우면서 형성된 세계가 플레이어가 탐험하고 있는 곳이다. [2] 베르소의 동생인 마엘도 이 세계를 그린 데상드르 가족의 일원으로 크로마를 다루어 그림 속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엘의 그림 바깥 세계 본명은 알리시아. [3] 반대로 그림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베르소를 선택할 경우, 에필로그의 제목은 ‘사랑하는 삶’이다. [4] 스탕달, 『적과 흑』 2권, 문학동네, 213쪽. [5] Letters of Gustave Courbet, edited and translated by Petra ten-Doesschate Chu,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p. 203-206. [6]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 옮김, 열화당, 1997, 22쪽. [7]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107쪽. [8] 이나라, 「픽션의 작업: 랑시에르의 예술의 정치」, 『현대미술학회지』, 2018, 78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KRAFTON_Horizontal_Logo_Black.jpg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