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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남을 이들, 기억으로 살아갈 이들

31

GG Vol. 

26. 8. 10.



어릴 적, 할머니는 나에게 어느 겨울 숲에서 곰을 만나 사망한 친척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소 잔인한 이야기라 자세히 서술하진 않겠지만,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나는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 역시 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그는 곰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름이나 성격, 한 일,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아닌, 죽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는.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한 세기도 채 되지 않는 인간의 삶이야말로 예정된 찰나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이 땅을 거쳐갔을 무수한 인류 중, 자신의 삶으로 남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다. 심지어 박물관에 모셔진 고대의 예술작품을 만든 장인이 누군지조차 많은 경우 우리는 알지 못한다.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수학 공식으로, 심지어 법률로 이름을 남긴 극소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나를 알고 있는 누군가의 머릿속에만 남게 될 것이고, 이들마저 떠난다면 그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다.


삶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죽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애석하게도, 이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기억의 주도권을 가진 것은 엄연히 타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에디스 핀치의 유산What Remains of Edith Finch(2017)>에서 에디스는 남편 스벤이 용과 싸우다 죽었다고 증언한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 많은 가족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그들을 죽음으로 기억한다.


[그림 1] 핀치 가족의 가계도는 떠나간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져있다.

단지 기이하고 독특한 죽음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다소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하지 않은가. 작품은 핀치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을 들여다보면서 그들 삶의 좋았던, 행복했던 일화가 아닌, 그들의 마지막 죽음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죽음들이 단지 사실로서의 죽음이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의 기억을 통해 구현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몇 안 되는 동물이며, 때문에 작품이 이렇게 구현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과정은 죽음 그 자체를 구현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바바라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 중 에디스가 이것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바바라 핀치가 세상에 남긴 것은 잘린 귀 한 쪽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극적이고 허황된 타블로이드지의 가십 뿐이다. 이는 바바라의 엄마인 에디스가 선택한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매우 고의적으로 선택된 버전의 기억. 딸이 실종된(그리고 아마 잔혹하게 살해되었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에디스가 하필 이 잡지의 버전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바라의 죽음을 놀랍도록 모욕하는 이 버전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삶을 놀랍도록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영화로 반짝 스타가 된 아역배우. 이제 그녀의 영광은 쇠락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와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기회를 꿈꿨다. 그런 바바라가 자신의 전성기를 기억하고 열광하는 공포영화 속 괴물들과 살인마들에게 잡아먹힌다는 결말은 그런 면에서 유효하다. 영화를 사랑하고,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했던 바바라의 삶을 그녀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구현한다.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영정 앞에 이 잡지를 둔다. 그녀가 자신의 꿈과 미래를 빼앗긴 것이 단지 불운한 비극이었으리라는 현실적인 추측에 비하면 이 잡지는 그녀가 사랑하던 것들에 대한, 또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 대한 헌사일지 모른다.


바바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삶을 투영한다. 몰리는 자신이 사랑하던 바다생물에 대한 꿈을 꿨고, 거스는 아빠의 재혼을 경멸했다. 이는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드러난다. 때론 본인의 일기에서, 때론 주변인의 편지에서, 때론 사진으로도 기억이 증언되는 동안, 플레이어는 이들의 죽음을 직접 플레이한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수사관도, 탐정도 아니다. 플레이어에게 맡겨지는 몫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샘이 아내 케이에게 쓴 편지가 낭독되는 동안, 플레이어는 그레고리의 죽음을 플레이한다. 아니, 이는 단지 욕조에서 벌어지는 물놀이에 불과하다. 장난감 오리, 개구리, 블록 인형 친구들과 욕조의 깊은 바닥으로 헤엄치는 즐거운 탐험으로 묘사된다. 샘이 편지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그레고리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발견하며 즐거워하는 천진한 아기이기 때문에. 편지에서 그레고리의 죽음에 대한 경위는 아주 짧고 우회적으로 묘사되며, 샘은 슬퍼하고 자책하는 케이를 위로하기 위해 편지를 썼을 뿐이다. 그리고 이 편지가 두 사람의 이혼 서류 마지막 장에 쓰였다는 표현은 그레고리의 죽음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까지 묘사한다.


[그림 2] 각 인물의 죽음을 다루는 스테이지는 인물의 삶에 맞춰 다양한 구성으로 디자인된다.

이 기억들은 본질적으로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플레이어는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죽음을 경험하고, 이 한 장면으로 떠나간 사람의 삶까지 경험한다. 저택 곳곳에 깃들어있는 다양한 죽음의 기억들은 다양한 장르와 무드의 스테이지로 구현된다. 이 죽음들이 가진 공통점은 이들이 얼마나 우연찮고 기이했냐는 것보다는, 이들이 당사자의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저택을 떠난 던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 난 모든 집에 들어가선 안되는 문과 들여다보는 구멍이 있다고 생각했다.”


핀치 가족의 저택에는 이곳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사위와 며느리인 스벤, 케이, 산제이의 흔적 역시도 작게나마 자리하고 있다. 이 저택은 가문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담긴 공간으로,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차 기이한 모양으로 확장, 증축되어, 이 저택의 마지막 사람인 던과 에디스 2세의 방은 저녁이라도 먹으러 내려오려면 5분은 족히 걸릴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여기서 이 저택의 역사는 끝난다. 던과 에디스 2세가 저택을 떠나면서, 그리고 이 저택에서 평생을 살아온 에디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림 3] 저택에는 이 곳에 머물렀던 가족만큼이나 많은 공간이 덧붙여져있다.

에디스의 아버지인 오딘이 노르웨이에서 이곳 오르카스 섬으로 집을 가져왔다는 설정은 이야기 전개의 이점과 흥미로운 요소를 부여한다. 이 저택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는다면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핀치 가족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이, 이 섬에서 살아온 4대가량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설정상의 편의가 있을 것이다. 오딘이 가져왔던 집은 오딘과 함께 오르카 섬 앞바다에 가라앉고, 에디스와 스벤 부부라는 새로운 세대가 집의 벽돌 일부를 떼어와 새로운 곳에 정착해 새로운 핀치 저택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이주민 가족의 서사를 비유하는 직관적인 방식이다. 핀치 가족을 따라다닌다는 ‘저주’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도 그럴듯한 긴장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저택은 에디스에게서 시작해 에디스로 끝난다는 사실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자녀를 낳았고, 손주를 길렀고, 증손주를 봤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는 이 저택을 지키면서, 이곳에 왔다가 떠나간 많은 가족 구성원들(심지어 반려동물까지)을 기록했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방이 있다. 각자의 방에는 각자의 삶이 담겨있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도 이 방은 비워지지 않고,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된다. 에디스는 모든 방에 떠나간 구성원들을 기리는 제단을 만들었다. 새롭게 생겨나는 구성원들에게는 비워진 방이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이 마련된다.


이 저택이 이렇게 기이한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저택은 에디스의 기억이 담긴 무형의 저장소, 그러니까 그녀의 머릿속이 물리적 형태로 구현된 공간이다. 집의 공용공간들 역시 숨 막힐 정도로 많은 사진, 책, 신문, 소품들로 가득하다. 모든 크고 작은 부분들이 에디스의 삶에 쌓여온 크고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해변에 위치한 저택의 창 너머로는 종종 바닷속에 가라앉은 옛날 집의 흔적이 보인다. 에디스가 노르웨이에서 살아왔을 어린 시절이 담긴 집은 이제는 저 먼 바다에 그녀의 아버지와 가라앉아있고, 이제 그녀는 이 집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새로운 가족과 함께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일궈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게 가족이 늘어났고, 방이 늘어났고, 저택이 커졌다. 죽음이 쌓였고, 무덤이 늘어났다. 그녀가 간직한 기억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저택을 떠났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 손녀 던이 결국 한 아이를 잃고 난 다음 했던 일은, 에디스가 간직한 이 기억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새어 나오지 않도록 죽은 가족들의 방을 봉인하는 일이었다. 에디스가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기억을 꺼내오지 않도록 입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에디스는 이렇게 봉인된 방문에 엿보기 구멍을 뚫었다. 던의 아이들에게 아주 조금씩 그녀의 기억을 얘기해 주기 위해서.



“이 모든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은,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딘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기로 한 것은 가족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이곳에서도 저주는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했다. 에디스의 다섯 아이 중 한 아이만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세 손주 중 한 아이만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세 증손주 중 한 아이만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이 ‘저주’가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죽음이라는 사실 그 자체뿐이다. 시작도 끝도 알려지지 않은 이 저주의 실체는 플레이어들에겐 끝까지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남는다. 하지만 적어도 핀치 가족의 구성원들은 이 저주의 존재를 믿거나 최소한 의식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오딘은 저주를 믿었다. 아마 아내인 잉게보르와 아들 요한의 죽음을 저주와 연관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저주를 피한다며 노르웨이를 떠났다. 다섯 남매 중 유일하게 어른이 된 샘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군인이자 생존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의 아이들도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들의 삶을 지배하고, 평생의 행동과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는 저택을 떠났고, 누군가는 저주에 맞섰다. 그리고 이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보존해 온 사람이 에디스다. 부모부터 손주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을 ‘저주’ 때문에 잃은 사람이다.


때문에 던이 아이들을 저주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분리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을 저주로부터 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이었다. 바바라가 공포영화 속 괴물들에게 잡아먹혔고, 월트가 두더지인간이었고, 스벤이 용 모양 미끄럼틀을 만들다가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용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말하는 에디스의 기억으로부터 분리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이 저주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디스가 저주의 기억을 보존하려 했던 것은, 평생을 겪어왔던 무수한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가족들을 기리고, 그들이 단지 이 땅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가 아니라, 각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름과 개성과 삶을 가졌던 소중한 존재들이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있는 유일한 사람인 에디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공포였을 가족의 저주는, 에디스가 가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리는 방식이었다.


[그림 4] 에디스는 가족들의 삶이 깃든 모든 공간에 가족들을 기리는 제단을 마련했다.

유달리 독특했던 이 가족의 죽음들, 삶의 모습을 반영한 죽음의 양태는 에디스가 죽은 뒤 저택을 떠난 가족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에디스의 제단으로 남지 못한 가족들의 죽음은 플레이할 수 있는 스테이지가 되지 못한다. 어쩌면 평범한 죽음들이고, 어쩌면 저주에서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에디스의 기억을 거친다면 이들의 죽음 역시 다른 모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던 오딘이 옛 집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핀치 가족의 새로운 세대가 시작된 것처럼, 에디스가 세상을 떠나고 저택이 버려지며 또 다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다. 노르웨이에서의 가족의 역사가 해변 저 멀리 가라앉은 옛 집에서 삐죽 나와있는 지붕으로 남은 것처럼, 오르카 섬 저택에서의 가족의 역사는 에디스 2세가 기록한 한 권의 일기장으로 남았다. 망각은 기억의 필연적인 최후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억은 점점 희석되고 희미해질 것이고, 우선순위가 점점 밀려날 것이고,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결국 핀치 가족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주의 이야기 역시 잊혀질 것이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기에, 가족의 기억 역시 선택할 수 없다. 루이스가 부친의 인도계 혈통에 더욱 마음을 두었던 이유는, 핀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이 공동체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이 기억을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결국 저택에 돌아와 비범한 죽음을 맞았으니, 저주를 피해 가지는 못한 모양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쌓인 기억은 반드시 즐거울 수만은 없다. 때로는 온갖 치부와, 지저분한 구설수와, 못난 감정의 응어리와, 죽음과, 상실이 끼어들어가기 마련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이를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벗어나려 애쓴다.


상실의 기억이 누군가에겐 저주가 되고, 저주가 누군가에겐 애도가 되고, 애도가 누군가에겐 평생을 따라다니는 공포로 남는다. 이 모든 기억을 품은 기이한 저택에는 삶을 담은 죽음이 가득하고, 평생 이 저택을 지켜온 한 여성은 묵묵히 이를 기록하며 떠나간 이들을 기린다. 이들을 단지 죽은 자가 아닌, 실제로 이 땅을 밟고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누군가로 남기기 위해. 작품이 이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아닌 죽음에 대한 다른 이의 기억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죽음은 사건이라기보다는 한때 살아있었고 지금은 기억되기에 충분한 누군가의 결말이 되었다. 삶으로 이름을 남길 만큼 비범하진 않았지만, 다른 이의 머릿속에 잠시라도 남아있기엔 충분한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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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에디스 핀치, 왓 리메인즈 오브 에디스 핀치, 죽음의 재현, 가족 서사, 워킹 시뮬레이터, What Remains of Edith Finch, Giant Sparrow, Death in Video Games, Walking Simul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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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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