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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폴더와 디렉토리 기반으로 오프라인 PC에서 파일 관리를 하던 세대들은 요즘처럼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려두는 방식을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온라인이 기본이 되는 시대. 과거에는 PC 한 대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파일을 옮기는 일을 부가적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정보의 존재위치 자체가 관계망 위에 놓이는 것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 Back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08 GG Vol. 22. 10. 10. 폴더와 디렉토리 기반으로 오프라인 PC에서 파일 관리를 하던 세대들은 요즘처럼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려두는 방식을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온라인이 기본이 되는 시대. 과거에는 PC 한 대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파일을 옮기는 일을 부가적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정보의 존재위치 자체가 관계망 위에 놓이는 것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게임도 시대변화에 발맞추며 변화했다. 기기 한 대 안에서 모든 플레이를 처리하던 시절 만들어졌던 디지털게임들은 온라인이 기본이 된 시대를 맞이하며 싱글플레이 중심에서 네트워크 기반의 온라인 멀티플레이로 그 중심을 옮겨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단지 싱글  멀티라는 간단한 명명으로 뭉뚱그리기 어려울 만큼 넓은 진폭을 보여 왔다. 그러나 오프라인 시대는 온라인이 대세가 됐다고 갑자기 휙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지나간 듯한 한 시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다음 시대의 현상에 흔적을 남기며 지속적으로 공생한다. 이번 호, 그리고 이 글에서는 온라인이 기본이 된 시대에 여전히 의미를 남기고 있는 오프라인 시대의 게임들을 되짚어본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게임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몇 개의 기준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 기반에서 가상공간의 의미는 외적으로 변화했다 온라인 시대 들어 게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점은 게임 텍스트 안쪽보다는 오히려 바깥쪽, 특히 구매방식의 변화다. 오프라인 싱글플레이를 가능케 한 것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구매 혹은 대여해 텍스트가 제시하는 가상세계를 온전히 영유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오프라인 시절에는 게임 속 가상세계는 언제나 완성된 것이어야만 했고, 그 안에서 완결되는 무엇이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오늘날 온라인RPG 등에서 만나볼 수 있는 ‘미구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추가 DLC를 구매하거나 패치를 통해 열리는 새로운 공간은 상품 형태로 거래되는 게임소프트웨어 기반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프라인 기반 시절과는 사뭇 다른 가상세계를 낳았다. 이제 우리가 겪는 게임 속 시공간은 설령 그것이 멀티플레이가 없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고정된 텍스트 속의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마치 인쇄된 책과 같았던 오프라인 시절 클라이언트에서만 작동하던 가상세계는 그 실물공간을 서버라는 위치로 옮기면서 언제 어떤 이유로도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과거 ‘마그나 카르타’ 처럼 버그로 작동이 불가능한 세계 대신 언제든 패치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의 등장이지만, 동시에 공식 서버가 사라지면 다시 옛날 책 꺼내들듯 쉽게 뽑아들기는 어려운 곳으로 게임 속 세계가 옮겨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싱글플레이는 이제 과거와 같지 않은 무엇이 되어간다 싱글플레이 게임은 공간과 시간을 대여하는 아케이드 시절을 벗어나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개인이 소유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콘솔, PC 시대로 접어들면서 세이브/로드를 기반으로 점차 긴 시간동안 스토리 진행을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수백 시간에 이르는 싱글플레이 스토리라인 진행 동안 이야기를 밀고나가는 것은 오로지 단일한 플레이어의 개입 뿐이었지만, 이러한 싱글플레이 진행은 온라인 시대를 맞으며 앞서 이야기한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만으로는 남지 않는 형태가 되었다. ‘데스 스트랜딩’과 같은 비동기식 멀티플레이(이를 멀티플레이라고 부를지 싱글플레이라고 부를지가 애매하지만)는 온라인 시대의 싱글플레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플레이어는 분명 혼자 플레이하지만, 그 공간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영향력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한다. 설령 직접적인 변화를 게임 안에 구현하지 않는다 해도, 싱글플레이의 클리어 스코어를 전세계 단위로 비교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변화는 싱글플레이의 과거와 오늘을 다르게 만들어낸다. * '데스 스트랜딩'은 싱글플레이 같지만 비동기방식을 통해 타인의 영향력을 게임 안에 당겨오면서 독특한 고립감을 연출해내며 오프라인 시대와는 다른 싱글플레이를 선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게임 텍스트 안쪽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온라인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는 완전한 스탠드얼론 싱글플레이라 하더라도 공략과 포인트들이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퍼지면서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손쉽게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공략을 파악하고 최적경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갈 수 있는 시대의 싱글플레이와 제한된 정보상황에서 오직 플레이어의 경험만으로 뚫고나가야 하는 시대의 싱글플레이를 같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싱글플레이가 갖는 매력이 온라인 시대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온라인 멀티플레이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게임들은 혼자 세계 안을 휘저을 수 있는 싱글플레이를 꾸준히 모드이건 단독이건 가리지 않고 출시하고 있고, 멀티플레이만큼의 수익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 또한 이에 적잖은 호응을 보내고 있다. 싱글플레이에 타인의 기여 혹은 개입을 적절히 섞는 게임제작자들의 시도 또한 어디까지를 싱글플레이로 보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심스런 탐색으로 이어지고 있음은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싱글플레이의 의미가 죽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오프라인 코옵과 온라인 랜덤매칭은 다르다 아마도 플레이 면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온라인 시대 이후 코옵 분야일 것이다. 오프라인 시대의 코옵 플레이는 반드시 시공간을 같이 점유하는 둘 이상을 필요로 했음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콘솔 게임의 코옵은 모르는 사람과 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아케이드에서 또한 경쟁형 멀티플레이는 가능할지라도 모르는 사람과 코옵을 하는 것은 매우 생경한 일이었다. (혼자 ‘라이덴’을 플레이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동전을 넣고 2P를 시작했다고 생각해보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이른바 PVE라 불리는 새로운 방식이 주는 재미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었다. 이른바 MMORPG의 레이드는 대규모의 인원이 합을 맞춰 공략을 풀어내는, 마치 잘 맞춘 매스게임과 같은 쾌감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타난 것은 이른바 트롤링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코옵이라는, 이름에 ‘협동’이 들어가는 어떤 플레이에 오프라인 기반의 지인 네트워크가 아닌 오로지 게임플레이만을 위한 새로운 관계 속 익명의 누군가가 함께 하게 된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잇 테익스 투’는 그러한 난감함을 잘 드러내준 게임이었다. 2인 코옵으로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이 게임은 온라인 매칭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모르는 사람과 플레이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형태의 디자인이었다. 아케이드/콘솔 시절의 코옵을 되살린 듯한 이 게임은 우리가 오늘날 겪는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말에 사실은 ‘익명기반의 랜덤매칭 멀티플레이’라는 말이 가려져 있음을 드러냈다. 지인간에 가능한 코옵이 있고, 익명 매칭으로도 가능한 코옵이 있다는 구분은 생각처럼 우리에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 '잇 테익스 투'로부터 우리는 오늘날의 멀티플레이가 사실은 랜덤매칭 기반의 익명 멀티플레이임을 깨닫는다.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정보의 물리적 위치기반이 바뀌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변화인지는 비단 게임이 아니어도 2000년대 전후를 살아온 많은 이들이 깨닫고 있을 것이다. 오롯이 가상공간 안의 것으로 여겨지는 게임도 다르지 않아서, 온라인 시대라는 이 변화는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시작된 디지털게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는 우리가 온라인을 100% 가상공간의 무엇으로만 생각해선 안된다는 포인트를 남겨주며, 과거 온라인 이전에 만들어진 어떤 형식이 온라인 시대에도 새로운 변화 속에 꾸준히 이어진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프라인 시절의 흔적과 유산을 온라인 시대에 찾는 것은 그저 ‘옛날엔 이랬지~’같은 회상이나 ‘라떼는 말이야~’에 그칠 일은 아니다. 반세기가 넘어가는 게임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의 변화가 일어난 변곡점으로서 우리는 온라인 시대의 대두를 이해해야 하며, 그 변화 속에서 무엇이 이어지고 무엇이 소멸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오프라인 시대의 게임을 온라인 시대에 다루는 일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눈 먼 돈 사냥: 멈춰버린 메타버스와 살아있는 메타버스 진흥법

    그 시절의 보도자료 중 대부분은 메타버스-NFT&P2E 소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기업이 '메타버스'를 선언했다. 게임사는 물론이고 통신사, 제조사, 심지어 은행까지 너도나도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보도자료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실체가 모호한 가상공간 그림 몇 장에 'MOU 체결', '생태계 확장', '미래 선도' 같은 단어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메타버스를 완성할 열쇠처럼 여겨졌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게임산업, 정책, 공공기관, 메타버스, 산업진흥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압둘 와합과 〈21DAYS〉를 플레이하다

    필자는 최근 압둘 와합과 〈21Days〉를 같이 플레이해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난민을 다룬 이야기가 드문 가운데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게임적 형식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압둘 와합(Abdul Wahab Al Mohammad Agha)은 시리아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활동을 하다 시리아 내 한국 유학생들을 친구를 둔 인연으로 2009년에 처음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2011년 고국의 민주화 시위 이후 복잡하게 전개된 내전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헬프 시리아’라는 단체를 만들며 시리아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jin Oh Since 2015, has developed the Hanyang University ERICA course "Software and Humanistic Criticism" and served as organizer of "Machine Criticism." Researches the aesthetics and politics of digital culture as represented by computer games, webtoons, and social networks. Co-developed Under the Sunlight (2018), a web-responsive interactive story about Syrian refugees. Directed Erangel: Dark Tour (March 20–21, 2021), a work of dark tourism for experiencing the sites of tragic events in a virtual world, and The Endless Voyage (June 2021), a metaverse project tied to the academic conference "SF and Geopolitical Aesthetics."

  • 역사적 트라우마와 유령의 소환술: 〈반교: 디텐션〉의 역사주의

    이처럼 애매하고, 역설적이고, 공백으로 가득 찬 대안적 역사인식의 상징극장(학교)을 탐색하며 퍼즐 열쇠들을 수집하는 플레이어는, 유령이 된 채 부재하는 현재의 표식들을 이어붙이고, 역사의 버려진 시신을 가르는 부검의가 된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며 자신의 그림자에게 읊조리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파편화된 상흔들은 수집과 탐색행위로 이뤄진 이 부검에 의해 점차 진혼된다. 플레이어의 부검은 사망 원인 추적에 그치지 않고, 망자의 부릅뜬 눈을 감기는 의식으로 연동되는 것이다. < Back 역사적 트라우마와 유령의 소환술: 〈반교: 디텐션〉의 역사주의 02 GG Vol. 21. 8. 10. 유령의 소환술과 ‘유령되기’ 유령은 만져지지 않지만 눈에는 보이는 존재다. 유령은 가상인 동시에 실재에 현상하며, 현재에 머무르면서도 현재에 부재한다. 유령은 형이상학에 속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때때로 인식과 경험에 영역에도 걸쳐져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유령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언제나 뭔가를 암시하고 일깨우는 존재다. 고뇌에 빠진 햄릿 왕자의 앞에 나타난 왕의 유령은 자신이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동생 클로디어스에게 독살당했음을 알리고, 햄릿은 복수를 위해 일부러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한다.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고려의 무장 강조는 자신이 살해한 왕(목종)의 혼령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업보를 깨닫고 주저앉게 된다. 역사의 무수한 협잡의 순간마다 유령은 언어화되지 않은 목소리들과 더불어 되돌아오는데, 때론 ‘배회’하면서 혁명적 순환의 계기를 만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운동 속으로 민중을 휘몰리게 만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수한 좌절과 분노의 비극적 순간들이 희극으로 소급되면서 역사가 진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유령’은 역사가 비극의 플롯으로 치달을 때마다 한 세대를 구원하고자 천을 뒤집어쓰고 돌아오는 기계신이자, 부재하는 현재를 실재에 표시하는 인기척인 셈이다. “유령은 근본적으로 장래이며, 항상 도래할 것으로 남아있고, 도래하거나 다시 도래할 수 있는 것으로서만 자신을 제시한다.”1) 유령은 부르면 달려오는 시종이나 램프의 요정이 아니다. 유령은 태어나지도, 길들여지지도 않으며 단지 출몰할 뿐인 존재이다. 그것은 등재된 공식역사나 승자들의 후일담을 받들지 않는다. 유령은 숨죽인 채 우리 곁을 맴돌면서 패배의 순간, 비명이 질러지는 소리들을 엿듣는다. 잊혀진 이야기, 침묵 속에서 억눌러진 단말마들이 유령의 인기척에 새겨진다. 그런 점에서 유령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목소리들을 받아 적는 우리는 역사가인 동시에 소환술사라 할 수 있다. ‘유령의 소환술’은 역사의 가장 희미한 빛을 점화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경외감만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와 다른 길을 간다. 수많은 예술이 유령의 흔적을 좇아 미사여구를 창조하지만, 유령 자체를 소환하려는 시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비극을 현재의 희극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필연적인 비극 또한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소환의식은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애써 부인하는 비밀을 마주하는 용기로부터 출발한다. 대만의 어드벤처 게임 <반교: 디텐션>은 역사를 다룬다. 그러나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패퇴한 장제스와 국민당이 대만에서 국부천대를 시작한 후 40여 년 간 지속된 백색테러 시기, 비참하게 생매장된 민중사가 주 무대다. 수많은 시네마와 게임이 역사를 상업적 소재거리로 삼아왔고, 승리의 시간들, 번영과 영화의 시기가 말초적 유흥 및 장르 문법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전체주의 권력에 의한 폭력과 광기의 날들은 상업 문법으로 접합되기 어렵다. 감각적 만족을 이용자 상호작용의 제1요소로 삼는 게임에서 아픔이라는 감각은 일반적인 고려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교>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서가에 기대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유령을 빙의시켜 스스로 입을 여는 유령되기, 즉 유령의 소환술에 가깝다. <반교>의 시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유령이 되어 떠도는 여고생 방예흔(方芮欣, 팡 레이신)을 움직여 학교에 은폐된 비밀들을 풀어 나가야만 한다. 플레이어가 유령이 되어 스스로에게 암시를 던지고 진실을 좇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게이밍을 활용한 <반교>의 소환술은 매우 탁월하다. 유령의 기척을 느끼고 따라가 이야기를 엿들어야만 하는 기존의 서사 전개방식과 다르다. 플레이어는 평면과 횡으로만 구성된 폐교 공간을 헤매며 ‘유령되기’를 시도하는데, 이 유령되기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단히 깨어 있는 상태로 만들어 자신(게임 속 인물과 자신이 연동된)에게 암시와 은유들을 던진다. 유령되기를 통해 플레이어는 스스로 배회하고, 암시하며, 진실을 좇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 유령으로부터 은폐된 비밀의 단서들을 전달받는 것이 아닌 ‘유령되기’를 통해 스스로 일깨우고 진실의 조각들을 맞춰나간다. 〈반교〉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해 게임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유령의 소환술로 매우 잘 전유한 예제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대면하기: 앰비규어티와 부검학 상실감, 우울, 원한 등과 달리, 마음과 뇌에 깊은 충격을 안기는 외상인 ‘트라우마’는 역사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극심한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하는 트라우마는 멜랑꼴리나 로맨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상품화된 카타르시스 경로를 따라가는 장르문법과 이질적이란 뜻이다. 트라우마는 분명하게 현존하는 고통이지만 그 본원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에 얽매여져 있고, 해소될 길이 없다. 트라우마가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집단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트라우마는 ‘애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사자를 애도하기 위해 슬퍼하고 자발적으로 상처 입는다. “살아있지 않은 누군가에 대해 바쳐진 존중 속에서 생성되는, 법을 넘어서는 어떤 정의의 명령에 우리는 응답한다.”2) 만약 애도가 좌절된다면, 우리는 개인이 연결되어 있는 역사의 신체에 깊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한 세대와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합적 고통의 기억이며, ‘모든 것이 변화하는 역사’라는 기관차가 마주하는 막다른 터널이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외상을 극복하지 못한 ‘영호’가 선로에 뛰어들고,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이 학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해 작고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 아픔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좀처럼 씻겨나갈 길이 없다. 신체를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에도 고통을 끊임없이 지각하듯이, 그 실체는 유령적이다. 본토 수복을 엿보며 대만을 장악한 국민당의 통치는 실로 끔찍했다. 명·청 시기에 대만으로 건너와 살고 있던 본성인(本省人)들을 지배하기 위해 국민당 정권은 2.28 사건3) 이후 계엄령을 강화하고, 40여년에 걸친 백색 테러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간첩으로 몰려 고문·처형되거나 실종됐다. 국민당은 계엄을 유지하기 위해 특히 학교 통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 대만에서 학교는 두 가지 방향으로 훈육되었다. 하나는 뒤쳐진 산업화를 이룰 일군을 양성하는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본토 수복을 위해 싸울 병력을 양성하는 학교이다. ‘군대식 교육’ 이 아니라 학교가 곧 군대였고, 청소년을 징집하는 창구였다. 이에 반발하는 교사들은 모두 간첩죄로 숙청되었으며, 지정되지 않은 책을 읽는 학생들도 모두 반역죄로 다스려졌다. 〈반교〉에 등장하는 군훈교관 백국봉(白國峰, 바이 궈 팡)은 학생과 교사들을 감시 훈육하는 정훈장교이다. 반면 학생들과 비밀독서회를 운영하는 장명휘(張明暉, 장밍후이) 선생과 은취함(殷翠涵, 인쯔이한) 선생은 타고르의 시를 읽어나가며 희망의 씨앗을 파종하려 한다. * 대만 시네마에서 끊임없이 배회하는 학교라는 유령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좌 상)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우 상) 〈반교: 디텐션〉(2019, 좌 하)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 우 하)에 이르기까지, 대만 시네마는 광범위한 시간대(계엄 이전과 이후)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학교공간의 기억술을 펼친다. 긴 시간동안 군사주의의 억압과 독재가 학교에 집중적으로 투과한 결과, 학교는 문화적 상징투쟁의 장소로서 재현된다. 감시와 처벌이 이뤄지는 공간으로서의 학교와, 비밀과 약속이 지켜지거나 깨어지는 장소로서의 학교가 중의적인 역사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교>가 게임 속 ‘유령되기’를 통해 소환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는 공식사에 쓰여져 있지 않는 부분들을 역사화 한다. “예술작품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승시켜준 역사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창작자의 영향을 수용한다.”4) 역사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반교의 소환술은 크게 두 가지 접근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트라우마를 이루는 오브젝트(포대자루, 거꾸로 매달린 옷과 초상, 거울상 등)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해 억압의 기표들을 상징화하는 앰비규어티(ambiguity)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상징물들을 퍼즐풀이의 대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이용자가 트라우마를 재구성하게끔 만드는 부검학의 측면이다. <반교>는 시적 언어가 ‘낯설게하기’ 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비문법성의 세계-일상언어의 세계 간 대화를 게이밍의 독특한 방식으로 역설계했다. 낯선 상징과 메타포를 통해 모호화된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은 자동화된 세계(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행동, 표현, 감각들로 가득차 낯익고 익숙하기만 한 세계)에 대한 전혀 다른 독해를 요구하게 되는데, <반교>는 공동체의 상흔을 상기시키는 오브젝트들을 퍼즐풀이에 삽입함으로써 ‘낯설게하기’의 게이밍적 측면, 즉 역사적 트라우마의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5) 을 부각시켰다. 이런 상징물로 가득찬 ‘학교’를 유령이 되어 탐색하는 과정 속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혹은 잊어버리려 외면했던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난다. * 포대가 씌워진 인형, 뽑힌 이빨로 된 주사위, 호롱불을 들고 주인공을 찾아다니는 차사 귀신 등 <반교>의 상징물들은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데서 그치지 않고 독재권력의 폭력을 암시하는 연상작용으로 이어진다. ‘낯선 느낌들’로 재배치된 공간의 탐색 경험은 트라우마의 공통감각을 직조하는 비문법성의 세계, 대안적 역사인식의 공간으로 플레이어를 스스로 등록시킨다. * 초현실주의적으로 재현되는 기억의 공간들. 〈반교〉는 2차원적 평면이라는 한계를 뒤집어 회화적 아이디어들을 의미심장하게 도입한다. 과거의 비밀들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평면의 공백 투사하며 읽어나가는 방식이다. 아버지의 외도와 가정불화를 암시하는 추상화적 대목(좌 상), 흠모하는 장 선생과의 데이트를 떠올리는 총천연색 경로(우 상), 잊기 위해 스스로 파편화했던 밀고의 기억들이 미러이미지화 되는 방식들(하)은 상반된 색체 대비와 원근법으로 〈반교〉의 평면을 수놓는다. 〈반교〉의 ‘유령되기’는 대사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간의 독해를 통해 플레이어가 사건을 인식하도록 하는 독특한 미디어 매커닉이다. 대안적 역사인식 공간의 재구성: 새로운 재현양식과 미적 전술 이처럼 애매하고, 역설적이고, 공백으로 가득 찬 대안적 역사인식의 상징극장(학교)을 탐색하며 퍼즐 열쇠들을 수집하는 플레이어는, 유령이 된 채 부재하는 현재의 표식들을 이어붙이고, 역사의 버려진 시신을 가르는 부검의가 된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며 자신의 그림자에게 읊조리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파편화된 상흔들은 수집과 탐색행위로 이뤄진 이 부검에 의해 점차 진혼된다. 플레이어의 부검은 사망 원인 추적에 그치지 않고, 망자의 부릅뜬 눈을 감기는 의식으로 연동되는 것이다. <반교>는 이 부검 프로세스를 세련된 플레이 실천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회화적 앰비규어티를 더욱 부각한다. 연속성에 구속되려 하는 사건의 시간성을 탈주시키고, 과거-현재-미래를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후반부에 이르면 방예흔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가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문자화되지 못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비로소 ‘낯설게 된 비문법’의 법칙 하에 하나의 문장이자 산문으로 읽히게 된다. <반교>는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시스템을 제공하지도, 화려한 시네마틱 스펙타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방대하고 치밀한 드라마텔링보다는 절제된 시적 조작을 추구한다. 그러나 가장 단순하고 오래된(2차원 공간의 어드벤처 퍼즐풀이) 게이밍의 문법을 변주해 독창적인 미디어 매커닉을 제시한다. 이 매커닉은 기존의 재현양식이 시도한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 ‘유령되기’라는 소환술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고, 난도질당한 과거의 신체-유령통을 앓는 현재의 부재하는 신체를 오고가는 경험 속에 과거의 얼굴들을 대면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교>는 방법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전술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술은 미디어가 장르라는 문법과 상업적 경계를 넘어서, 한 시대와 세대가 공유하는 ‘죽은’ 공통감각의 회로에 전류를 불어넣는 전술이자, 침묵의 시대를 뛰어넘어 시민적 언어가 보편어가 되는 순간들을 상상시키는 회로도이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새로운 재현의 언어들을 재발명하기 위해, 이 회로도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난폭한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자유는 빼앗을 수도 억누를 수도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자유의 비가 이 섬에 고루 흩뿌려지길 원합니다.” -드라마 〈반교〉 中 1)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EJB, 2007, 91쪽. 2)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EJB, 2007, 194쪽. 3) 일왕 항복 이후 대만으로 건너온 국민당 지배세력과 외성인(外省人)들은 본성인들과 정체성이 달랐으며, 국민당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행세를 하며 대만과 본성인들을 식민 통치 하듯 다뤘다. 폭압적인 전시국가경제를 운영하며 민생이 파탄나는 가운데, 참다못한 본성인들은 계엄령 해제와 선거권을 요구하며 반정부투쟁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전 연령에 걸쳐 14만 여명이 군사법원에 기소됐고, 2-3만 명의 시민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역, 길, 2008, 260. 5) 언어적인 기호계에서 예술작품은 고유한 수사를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 문학은 상징과 은유(문자적 수사학)를 통해, 시네마는 몽타주와 미장센(시각적 수사학)을 통해 수사를 실천한다면, 디지털 게임은 플레이어의 공간 탐색과 오브젝트 조형행위에 기반해 의미들을 구성해나가는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을 현상한다. 절차적 수사학은 연산과 입출력을 바탕으로 하는 디지털 게임의 고유한 표현 방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Bogost, Ian. (2007).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 Games, Cambridge: The MIT Press를 참조.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GG Vol. Tags: 논문세미나, 다양성과 포용성, 게임 커뮤니티, 여성 게이머, 게이머게이트, 체계적 문헌고찰, 게임 산업, Journal Club, Diversity and Inclusion, Gaming Communities, Gamergate, Game Studi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구독 서비스의 대두 앞에서 떠올리는 생각들

    구독 서비스의 미래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과거 부분유료결제와 확률형아이템이라는 결제방식의 변화가 가져온 게임 내부까지의 변화를 겪으며 우리는 다음에 올 결제양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저 시장의 흐름에 맡기기만 하는 것이 최선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노동과 생산의 영역에서 가격의 결정이 그저 시장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짐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은 오늘날 최저임금제와 같은 여러 보완책들을 이끌어낸 바 있다. 아주 같은 맥락은 아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소비와 이용의 차원으로 들어온 여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련의 ‘여가의 정치경제학’과 같은 생각을 떠올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 Back 09 GG Vol. 22.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 Back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27 GG Vol. 25. 12. 10. 게임 연구,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게임 연구를 한다고 자기소개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게임 연구요? 그럼 코딩하시나요? 게임 개발 쪽인가요?" 게임을 연구한다는 말이 곧 기술 연구나 프로그래밍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게임 연구에는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디어 연구, 문화 연구, 장르 연구, 철학이나 미학 연구 등 게임을 바라보는 지평은 다양하다. 그러나 '게임 연구'라는 말은 여전히 명확한 윤곽을 갖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혼란은 비단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연구자들 스스로도 게임 연구가 어느 학문 분과에 속하는지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 미디어학과 강의실, 컴퓨터공학과 실험실, 문화연구 세미나실 가운데 어느 곳이 그 자리가 될 수 있을까? 2025년 5월 일본에서 출간된 『クリティカル・ワード ゲームスタディーズ ― 遊びから文化と社会を考える』(이하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의 네 명의 편저자 – 이노우에 아키토(井上明人), 마츠나가 신지(松永伸司), 요시다 히로시(吉田寛), 마틴 로스(Martin Roth) – 는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게임 연구는 기존의 대학 분과나 학문 제도로는 수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가 바라보는 지평 그렇다면 일본의 게임 연구자들은 게임 연구의 이 불안정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에서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 게임 연구의 현주소는 흥미롭다. 편저자들은 게임 연구가 "새롭고 영역횡단적인 학문"이기에 전체와 현위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인정한다. 앞서 국가별로 게임 연구가 주도되는 학문의 영역이 다르다고 언급했듯, 이러한 지역적 편차는 게임 스터디즈가 아직 확립된 학문 분과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이라는 대상 자체가 단일한 학문적 렌즈로는 포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게임 제작에 요구되는 기능이 프로그래밍부터 영상, 시나리오, 세계관 설정,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듯, 게임 연구 역시 문과도 이과도 아닌, 혹은 문과이면서 동시에 이과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책의 구성에도 반영된다. 네 명의 편저자는 각기 다른 전문 분야와 배경을 가진다. 편저자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연구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 내에서 각자의 게임 연구에 임해도 좋다"며, 학문적 다원주의를 적극 옹호한다. 일본 게임 연구가 주목하는 것들 이러한 학문적 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그 답은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책의 제1부 이론편은 '룰(Rule)', '미디어(Media)', '놀이(Play)', '픽션(Fiction)',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소셜(Social)', '인공물(Artifact)',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 등 8개 핵심 개념을 다룬다. 주목할 점은 하나의 개념을 네 명의 편저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설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룰' 개념을 둘러싸고 "게임은 룰인가", "룰 개념의 다의성과 다양한 성질", "룰은 게임을 정의하는가"라는 세 가지 소제목 하에 서로 다른 시각이 제시된다. 이는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가 다양한 견해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적 전략이다. 제2부 키워드편은 27개 항목으로 구성되며, 현재 게임 문화와 게임 연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여기에 수록된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현재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떤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드러난다. 이 항목들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묶인다. 첫째, 기술적·물질적 기반 주제다. 'NFT', '에뮬레이션', '아카이브', '플랫폼'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단순히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경제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미디어로 파악한다. 특히 아카이브와 에뮬레이션 파트는 게임의 보존과 접근성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게임이 점점 더 '사라지는' 미디어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다. 플랫폼 개념은 게임이 중립적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와 경제 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문화적 쟁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접근성과 장애의 표상', '게임 행동 장애(Gaming Disorder)'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둘러싼 정치성을 전면화한다. 젠더 파트는 게임 문화의 남성중심성과 배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접근성 파트는 장애인 게이머들의 경험이 어떻게 주변화되어왔는지를 다룬다. 게임 행동 장애 파트는 WHO의 질병 분류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면서, 게임 플레이를 병리화하는 담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 현상과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플레이어의 창조적·전복적 실천에 대한 주제다. '게임 실황', 'UGC(User-Generated Contents)', '치트', '내비게이션'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개발자가 설계한 대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임 실황은 게임 플레이를 관람 가능한 퍼포먼스로 전환하는 실천이고, UGC는 플레이어를 공동 창작자로 위치시킨다. 치트는 게임의 룰을 의도적으로 위반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이러한 항목들은 게임 연구가 '텍스트 분석'에서 '실천과 문화 연구'로 확장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넷째, 게임의 사회적 확장에 대한 주제다. '스포츠', '투어리즘',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더 이상 오락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게이미피케이션은 업무, 교육, 건강관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이 게임의 논리로 재편되는 현상을 가리키며, 투어리즘 파트는 <포켓몬 GO> 같은 게임이 실제 공간의 이동과 경험을 재조직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스포츠 파트는 e스포츠의 부상과 함께 게임과 전통적 스포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다룬다. 다섯째, 메타적 성찰에 대한 주제다. '비평(Criticism)', '윤리(Ethics)', '역사 서술', '내러티브(Narrative)', '몰입' 같은 개념들은 게임을 연구하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윤리 파트는 게임 내 폭력 표현, 착취적 과금 모델, 개발 노동 조건 등 게임을 둘러싼 다층적 윤리적 쟁점들을 다룬다. 역사 서술 파트는 게임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탐구한다. 비평 파트는 게임 비평의 언어와 방법이 무엇인지,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묻는다. 제3부 북가이드편은 20개의 필독 문헌을 소개한다. 하위징아(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카이와(Caillois)의 『놀이와 인간(Man, Play and Games)』 같은 고전부터, 예스퍼 율(Jesper Juul)의 『하프 리얼(Half-Real)』,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설득적 게임(Persuasive Games)』 같은 현대 게임 연구의 주요 저작까지 망라한다. 흥미롭게도 편저자들은 일본어 문헌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밝히는데, 이는 "일본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접근이 어려운 외국어 문헌 소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어쩌면 내용보다 형식에 있을지 모른다. 서문에서 편저자들은 독자에게 "이 책을 도중에 내던지고 즉시 자신만의 게임 스터디즈를 시작해도 좋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책에는 다양한 전문 분야와 연구 테마를 가진 많은 저자들이 다루는 현재진행형의 게임 스터디즈가 담겨 있으므로, 끝까지 읽는 것을 권장한다"고도 덧붙인다. 이는 게임 연구라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영역에서 학술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게임 연구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게임 연구 커뮤니티와 연구 서적이 서서히 쌓여 왔고, 이 책은 그 축적의 위에 서서 ‘입문용 지도’를 제안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게임 연구 씬뿐만 아니라 한국의 게임 연구 현장에서도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는 명확한 학문적 경계나 방법론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을 문제로 보기보다, 오히려 가능성으로 전환하려 한다. "문과도 이과도 아니다", 기존 학문 제도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은 패배주의적 자조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적 실험을 위한 생각의 전환에 가깝다. 일본의 지형, 한국의 질문 사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미학, 철학, 미디어 이론, 기술사 등 인문학적이고 이론 지향적인 게임 연구 관점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 연구, 디자인학 연구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며, 지역이나 대학별로 강조하는 학문 분과도 다르다. 한국 역시 커뮤니케이션학, 미디어학, 문화연구는 물론이고 게임 정책 연구, 산업 분석, 기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이 공존한다. 두 나라 모두 게임 연구를 단일한 학문 체계 안에 정착시키기보다는, 여러 분과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이라는 대상을 탐구해왔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게임 연구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교의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는 문화적 맥락과 제도적 환경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젠더 담론, 게임 병리화 담론, 아카이브와 보존 문제, 플레이어 실천의 의미 등 한국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쟁점들을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연구 지형을 새로운 각도에서 성찰하게 만든다.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단순히 일본 게임 연구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게임 연구자들에게도 "당신은 게임을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고 볼 수 있다. 나가며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완결된 지식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게임 연구라는 영역이 여전히 형성 중이며,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긴장과 대화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 연구는 확립된 지식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탐구의 과정이며, 따라서 단일한 방법론이나 관점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임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권위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지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35개의 키워드와 20개의 필독서는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이라기보다, 계속 수정되고 확장될 '잠정적 지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제시하는 비전이 순탄하게 실현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임 스터디즈가 기존 학문 제도에 수용되지 않는다는 진단은, 동시에 제도적 지원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문적 다원주의는 지적 풍요로움을 약속하지만, 공통의 언어와 방법론이 부족해지는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 게임 연구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일본 게임 연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고,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며, 동시에 새로운 참여자들을 초대한다. 한국의 게임 연구자와 게임 문화 연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비교 참조점이자, 우리 자신의 게임 연구 지형을 성찰하게 만드는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게임을 어떤 학문적 렌즈로 바라보고 있는가? 국내 게임 문화의 고유성과 글로벌 게임 연구 담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게임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일은, 이 질문들을 다시 꺼내어 놓게 만드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심사위원장 총평

    제 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연세대학교의 윤태진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번 응모작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심사위원들이 기대했던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좋은 원고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응모해주신 90여명의 예비 비평가 모두에게 감사와 격려를 전합니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aejin Yoon After earning a PhD in television drama studies, has spent more than twenty years teaching, researching, and writing on media-cultural phenomena. The subjects have been varied—games, webtoons, the Korean Wave, variety programs—but all share a common thread: the exploration of "activities that many people enjoy." A few years ago came a small book titled A Study of Digital Game Culture, and these days runs a research organization called the Yonsei Game & Esports Research Center (YEGER), pursuing a range of studies on game culture together with younger researchers.

  • < Back GG Vol. Tags: 인터뷰, 게임비평공모전, 게임비평, 게임 연구자, 비평의 미래, 김규리, 이현재, 영이, 게임 코러스, Interview, Game Criticism, Game Criticism in Korea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Collaborate, Compete, and Broadcast: Gaming’s 21st Century Cultural Shifts from MMOs to Live Streaming and Online Platforms

    If you’re a video game enthusiast born after the year 2000, chances are good that you grew up with relatively easy access to video game media. Though gaming still maintains some of its countercultural reputation, it has simultaneously become a facet of mainstream culture, and the sheer volume of player-produced video game content has done a lot of legwork to keep our favorite games alive in our eyes and ears long after we’ve signed off for the night. For even some of the most obscure games, it feels like there is a limitless amount of game content available for players to consume without even needing to play. Video gaming’s cultural spaces now weave in and out of games, online communities, and numerous digital platforms like Steam and Discord.  < Back 23 GG Vol. 25. 4. 10. Tags: NorthAmerica, MMORPG, Online Game, live streamin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arc Lajeunesse

  •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 Back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06 GG Vol. 22. 6. 10. 1. 숏폼 콘텐츠와 연쇄적 소비 바야흐로 짧은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이다. 평균적으로 50분의 상영시간을 가진 TV 드라마는 15분 내외의 웹드라마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으며, 유튜브에는 ‘너덜트’나 ‘숏박스’ 같은 채널을 중심으로 3-4분 정도로 짧은 콩트들이 유행하고 있다. 게임 역시 짧게는 수십 시간, 길게는 몇 백 시간의 플레이 시간을 요하는 PC나 콘솔 게임보다는 1회 플레이 시간이 짧은 모바일 게임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며, 모빌리티를 무기로 하는 각종 플랫폼들이 기존의 하드웨어를 대체한 2000년대 후반 이후 지속화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72초TV’가 상영시간을 채널명으로 전면화 하여 인기를 끈 것은 숏폼 콘텐츠(Short form contents)의 승리를 상징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모바일 시대 초압축 드라마의 표본을 제시한 ‘72초 TV’의 한 장면 이러한 숏폼 콘텐츠가 고전적인 다른 고전적인 콘텐츠보다 주목받는 것은 이의 주 소비층이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시간을 부족한 이들에게 짧은 콘텐츠는 부족한 여가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스낵 컬쳐(snack culture)가 된다. 등하교길이나 화장실에 들르는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몇 분만 할애하면 게임 한 판과 동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숏폼 콘텐츠는 금세기의 여가 문화의 틈새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숏폼 콘텐츠의 대부분이 SNS나 유튜브 등의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서비스 된다는 점에서 구매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에게 잘 먹히는 콘텐츠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핵심적인 서사를 바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숏폼 콘텐츠에는 전후 맥락이 생략되어도 상관없는 내용들이 주종을 이룬다. 짧은 콘텐츠 재생시간 속에서 완전하지 못한 서사를 갖춘 숏폼 콘텐츠들은 긴 설명이나 전후 관계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를 본론부터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너덜트 채널의 첫 에피소드인 “당근마켓 남편들”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중고거래 현장을 비춘다. 이 영상에서 공감대는 이미 해당 마켓들 통해 거래를 해본 기혼 남성들의 일상적 공감을 양분으로 삼아 전후의 맥락을 제거하고 거래 현장만 집중하여 짧은 상영 시간에 맞게 콘텐츠를 압축할 수 있게 해준다. * 너덜트의 〈당근마켓 남편들〉 일반적으로 숏폼 콘텐츠는 짧은 플레이 시간을 바탕으로 연쇄적인 콘텐츠 소비를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숏폼 콘텐츠를 멍하게 반복적으로 여러 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게임의 경우도 한 번 플레이하는 시간이 짧을 뿐이지 이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하드코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못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게임학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캐주얼 레볼루션(Casual Revolution)〉에서 캐주얼 게이머들이 게임을 캐주얼하게 소비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하드코어하게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실제 사용자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예스퍼 율, 이정엽 역, 『캐주얼 게임: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의 재창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콘텐츠의 연쇄적 소비가 트래픽을 불러일으켜 광고 수익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하 BM)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유저들이 사이트에 오래 머무를수록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플랫폼은 어떤 특정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고양된 감정으로 사이트를 떠나는 현상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콘텐츠 소비가 끝났을 때 다음 콘텐츠를 이어 보고 싶은 감정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 이는 게임으로 환원하면 짧은 플레이를 무수히 반복해서 쌓아나가는 방식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비슷한 메커닉의 반복적인 플레이는 지루함을 유발하여 접속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여기에 캐릭터 성장 시스템과 BM을 연계시키는 방식이 사용되는 것이다. 2. 숏폼 게임의 메커닉 축소과정과 비즈니스 모델 물론 처음부터 숏폼 형태의 게임과 BM이 초창기부터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PC나 콘솔 게임이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처음으로 전환되던 시점에는 키보드나 컨트롤러를 이용한 복잡한 컨트롤을 손가락을 이용한 터치로 단순하게 바꾸는 UI 차원의 시도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 때 통상적인 게임 장르는 그대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의 환경에 따라 게임 메커닉을 약간씩 변형하면서 이식된다. 예를 들어 PC 게임 플랫폼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중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가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같은 AOS 장르로 이식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숏폼으로 변화하게 된다. 〈클래시 로얄(Clash Royale)〉은 통상적으로 CCG(Collectible Card Game)이나 RTS(Real-time Strategy ) 장르로 분류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의 메커닉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이를 숏폼으로 축소한 게임이라 볼 수 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가장 유명한 맵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를 비교하면 크게 3갈래로 갈려진 지도가 〈클래시 로얄〉에서는 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한 경로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아군과 적군의 미니언들은 AI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고, 챔피언만 플레이어가 컨트롤 할 수 있지만, 〈클래시 로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캐릭터의 처음 시작하는 위치만 지정할 수 있으며, 그 캐릭터의 개별 전투는 모두 AI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된다. 또한 〈리그 오브 레전드〉는 특별히 정해진 플레이 타임이 존재하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1회당 3-4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클래시 로얄〉은 처음 3분의 타임 어택과 추가 1분 30초의 타임 어택을 포함해 최대 1판이 4분 30초를 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다. 다시 말해 〈클래시 로얄〉은 PC에서 사용되던 플레이어에 의한 복잡한 컨트롤을 최대한 줄이고, AI에 의한 자동전투를 극대화시키면서 플레이 타임을 거의 1/10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시 로얄〉에서 더욱 강조된 부분은 각 캐릭터의 성장을 ‘카드 강화 시스템’을 통해 극대화 시켰다는 점이다. CCG 장르의 카드 강화 메커닉을 활용하여 자신의 카드가 성장하는 느낌을 부여하면, 그 카드의 효용을 실험해보고 싶어 다시 플레이를 시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의 덱이 8장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모든 성장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 〈클래시 로얄〉의 BM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오히려 〈클래시 로얄〉은 현질을 통해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요소를 제한하여 게임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구현한 좋은 예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성공 이후 RTS의 AI 전투 시스템은 축소하고 카드 강화의 BM만 극대화 한 게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실제 이 때에도 RTS적인 요소들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일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치형 이나 CCG로 불리는 현질 유도 게임은 현재에도 무수히 양산되고 있지만, 문제는 앞선 사례들에서 적절히 제한되었던 현질의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제한 요소들은 차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 BM의 전면화와 미학의 소외 물론 콘텐츠의 길이가 짧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하긴 어렵다. 소설과 영화에서도 장편과 단편의 미학이 다르며, 단편은 장편이 구현하기 어려운 단일 플롯의 직접성과 단도직입적인 풍자 등을 통해 독립적인 미학을 쌓아왔던 것이다. 장대한 서사시와 촌철살인의 미학은 애초부터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도 짧은 플레이 시간 내에 추구할 수 있는 한 판의 쾌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 타임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풍성한 서사, 전후의 맥락, 컷신, 텍스트, 맵의 디테일, 전략적 요소 뒤에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고전적인 재미요소를 제거하고 BM만 남겨놓아도 플레이어가 잔존한다는 사실이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확인된 이상 게임 회사들은 굳이 어렵게 게임을 풍성하게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모바일 게임의 소프트 런칭 시스템(특정 국가 하나 정도만을 대상으로 게임을 시범적으로 출시하는 방식으로, 게임 회사들은 이를 통해 특정 메커닉의 잔존율(retention)을 실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잔존율 낮은 메커닉이나 BM은 도태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은 특정 메커닉과 BM의 잔존율을 아주 쉽게 테스트 할 수 있게 해주어, 노골적인 BM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 내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설정만 해놓으면 해당 퀘스트가 다 클리어된다거나, 별다른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바로 사냥과 전투가 시작되는 게임들을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치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식적 요소와 몰입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것이 게임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익성을 위해 깎여나간 게임의 숏폼화는 결국 BM와 노골적인 결제 모듈만 남기고 게임을 앙상하게 만들어버렸다. * 게임 플레이어 모두에게 1억이 지급되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최근의 게임 광고들은 노골적으로 상당한 금액의 확률형 아이템을 지급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아이템이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리 만무하다. 물론 이러한 방치형 게임들을 유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시간이 부족한 학생이나 직장인이 성장의 재미만 누리게 하는 게임으로 일정 가치를 지닌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 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게임을 한다”라고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컴퓨터 앞에 앉아 역동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모양새를 “게임을 한다”라고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닥타닥”(키보드), “딸깍딸깍”(마우스), “삐걱”(의자). PC방이라면 “웅성웅성”까지. 사람들은 기계 앞에 올곧이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다. 누가 봐도 게임을 하는 모습은 티가 났다. 그래서 게임을 할 때 방, 거실, 피시방, 플스방 같이 분리된 공간으로서 게임의 장소가 중요했고,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그곳에 방문을 해야 했다. < Back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 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03 GG Vol. 21. 12. 10. “게임을 한다”라고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컴퓨터 앞에 앉아 역동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모양새를 “게임을 한다”라고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닥타닥”(키보드), “딸깍딸깍”(마우스), “삐걱”(의자). PC방이라면 “웅성웅성”까지. 사람들은 기계 앞에 올곧이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다. 누가 봐도 게임을 하는 모습은 티가 났다. 그래서 게임을 할 때 방, 거실, 피시방, 플스방 같이 분리된 공간으로서 게임의 장소가 중요했고,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그곳에 방문을 해야 했다. 그 풍경은 바뀌고 있다. “게임을 한다”를 상상하면 이제는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모니터 앞에 앉아 몰두하는 장면도 있지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있다. 그 스마트폰은 손에 붙어있기도 하지만, 책상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있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일이나 학업에 바빠 터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스마트폰 화면 안에는 스스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대중교통 속 인파에 꽉 끼어 팔을 움직이지 못할 때도, 눈을 감고 밤에 잠을 청할 때도 게임은 혼자서 돌아간다. ‘자동’과 ‘방치’라는 이름 아래서. 2020년, 모바일 게임 매출 순위 3위에 갑자기 오르면서 이목을 끌었던 게임이 있었다. 릴리스 게임스의 〈AFK 아레나〉이다. AFK(Away From Keyboard)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 게임은, 제목 그대로 플레이어의 부재를 허용한다. 자동과 방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게임. 앱스토어에 등록된 모바일 게임 홍보문구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손가락 하나로 지배", "접속하지 않아도 저절로 강해지는"이라는 말들이 눈에 띈다. 이 게임은 특히 자신을 “바쁜 현대인을 위한 게임”이라고 소개한다. 지상파와 유튜브에도 게임 광고가 송출되었는데, 광고는 게임의 다양한 ‘맛’을 거론하며 ‘손 떼는 맛’을 게임의 새로운 스타일로 소개한다. “게임은 뭐니 뭐니 해도 손맛이라고? 이제 모두들 손 떼! 하루 종일 메어있지 않아도, 가끔씩만 만져줘도, 보는 맛, 뽑는 맛, 키우는 맛, 깨는 맛이 최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야.” 모바일 게임에서 자동 기능은 이제 없으면 허전한 존재가 되었다. 보조적 장치가 아닌 주요 장치가 된 것이다. 2013년 모바일 게임 〈몬스터 길들이기〉는 자동 타격, 자동 이동 기능을 게임에 도입했다. 모바일에서 캐릭터 조작이 힘들기 때문에 전투 메커닉의 일부를 자동 실행되도록 한 것이다. 캐릭터의 수집과 성장이 더욱 중요해졌고, 플레이어의 조작은 전투에서 스킬 실행 정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이 게임은 매출과 평가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모바일 플랫폼에서 RPG의 가능성을 보인 사례가 된다. 그리고 일종의 모바일 RPG 템플릿이 생성된다. 모바일 게임을 이용하는 틈새 시간과 맞물리는 단편적 구조가 정착되었고, 이동과 타격, 스킬 사용 전반을 모두 최적 알고리즘으로 자동화하여 플레이어의 조작 스트레스를 낮추었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방치형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새로운 플레이 장르로 자리 잡았다. 피시 플랫폼에서 클리커(clicker) 게임, 아이들(idle) 게임으로 불리던 이 장르는 가만히 있어도 재화가 자동으로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플레이어는 재화가 더욱더 빠르게 쌓일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시스템을 성장시키고, 자원을 순환시킨다. 부재중 동안 재화가 증식하는 속도를 높여라. 이러한 투자 행위는 금융 자본을 다루는 〈어드벤처 캐피탈리스트〉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비슷한 장르의 〈중년기사 김봉식〉, 〈오늘도 환생〉, 〈거지 키우기〉, 〈어비스리움〉 등 국내 개발사의 방치형 게임은 길게는 5년이 넘도록 단단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게이머는 방치되고 자동 진행되는 게임을 보며 “이것이 게임인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실시간 조작을 우선시하는 게임의 일반적 범주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러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온라인 담론에서 쉽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같은 장르의 신규 게임들이 매일 앱스토어에 출시되고 있다. 화면을 실시간으로 쳐다보고, 캐릭터를 직접 움직여야만 게임일까? 어찌 보면 “게임을 한다”는 의미가 그동안 너무 좁았던 것일 수도 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동 진행되고 방치되는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마냥 박탈하지 않았다. 다른 행동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포인트. 나는 이러한 게임들에 주목하고,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어떻게 새로운 게임 플레이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 알아봤다. * 사진: 〈AFK 아레나〉 자동화된 게임들 나는 자동 전투, 방치형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게임들을 모두 합쳐 ‘방치’ 문화의 게임으로 묶었다. 물론 게임은 모두 달랐지만, 플레이어가 부재한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방치된다는 사실은 같았다. 자동화된 게임의 양상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방치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간헐적 방치, 장기적 방치, 항시적 방치로 묶었다. 우선 간헐적으로 방치되는 게임은 여러 개의 스테이지로 분기가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하나의 스테이지는 1분에서 3분 정도로, 일과의 틈새 시간에 짧게 즐길 수 있다. 전투 화면에 동영상 재생 기능이 도입된 것이 특징인데, 전투가 진행되는 속도에 배속을 높여 빠르게 넘어가거나 정지 버튼을 눌러 캐릭터의 상황을 점검하기도 한다. 또다른 범주인 장기적 방치는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까지 게임을 켜두어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마트폰을 끄거나 다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게임이 정지한다. 따라서 배터리 소모가 필수적이며, 화면 보호 모드를 켜두거나 피시 화면에 게임을 연결해 플레이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항시적 방치의 분류에서 게임은 가입한 이래로 캐릭터가 무한하게 전투를 하고 아이템을 수집한다. 게임은 항상 진행되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접속하여 게임 진행에 가속 운동을 한다. 물론 이러한 게임들도 너무 오래 플레이어의 부재를 허용하진 않아서 최대 24시간이 지나면 더는 진행되지 않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임의로 세 개의 큰 카테고리를 분류했지만, 사실 이들 사이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으며 서로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쿠키런: 킹덤〉에는 수 분 내로 끝나는 스테이지가 있으나, 동시에 최대 8시간까지 초당 몇 개의 속도로 지속해서 재화가 발생하는 '풍요의 샘'이 있다. 〈AFK 아레나〉도 마찬가지로 두 시스템을 동시에 가진다. 게임에서 구현된 것과 별개로, 플레이어에 따라서 스타일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항시적으로 방치되는 〈꿈의 마을〉에 길게 접속해 오랫동안 플레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쿠키런: 킹덤〉 일과에 녹은 게임의 시간 게임이 스스로 가동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잠을 자는 시간에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게임을 하게 되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노동 시간은 게임을 방치해두기 좋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업무 책상 위에서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화면 보호 모드를 켜두거나 화면 밝기를 낮추어 게임이 계속 진행되도록 했다. 이는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여러 행위를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에 속한다. 게임을 켜둔 상태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자기 계발을 하거나, 집안일이나 식사를 같이하기. 시간을 이중으로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가치를 더 창출하려는 의지다. 아무 쓸모 없는 시간이 될 수 있는 묵묵히 일하거나 머리를 말리거나 양치하기, 빨래하기, 대중교통 이동할 때 게임을 켜두면 또 하나의 생산물이 발생하는 것이다. “밤에 게임을 켜 놓고 자요. 충전기를 끼고 켜 놓고 자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콘텐츠가 쌓여있거든요. 핸드폰 보고 처리하고, 화장실 가서 씻습니다. 출근 지나서 제일 먼저 김봉식 다시 켜서 충전기에 꽂아 넣고요. 퇴근 후에 운동하고, 샤워하고 컴퓨터 하거나 영상을 보는데, 한 쪽에 김봉식을 켜놓고 15분에서 많게는 20분에 한 번씩 다시 봐줍니다.” 방치되는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생각을 덜 빼앗는다. 즉, 집중, 몰입, 관심이라는 인지적 자원을 덜 사용하면서 절약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높은 몰입을 요구하며 인지 자원을 빼앗는 게임은 중독적이라고 보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루 종일 업무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소소하게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 그 게임은 나의 일상을 잡아먹지 않는다. 다양한 게임 중에서 자동화된 플레이의 게임들은 너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여가 실천이다. '게임하기'의 변화: 기계 관리자로서 플레이어 사람들은 게임을 "돌려놓는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은 보통 기계를 다룰 때 쓰는 말이다. 오랜 시간 방치했던 게임에 복귀하여 "쌓여있는" 것들을 "처리"하고 "정리"한다는 점 역시도, 게임 진행을 일종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마치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처럼 기계에 힘든 일을 맡기고 일정 시간 뒤 작업이 완료되면 결과물을 획득하는 것처럼, 알고리즘에게 게임을 맡기고 일정 시간 뒤의 결과물을 확인하는 지금의 자동화된 게임 양상은 인간의 정신적 유희 활동으로 게임을 정의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일으킨다. 오늘날 방치되는 게임에서 인간은 아바타 당사자가 아닌, 기계의 관리자로서 위치가 변화했다. 다시 말해, 기계를 조작하는 일과 기계가 가져온 결과물을 재배치하는 일이 게임하기가 된 것이다. 기계에게 명령을 내린 플레이어는 이제 직접 고단한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게임을 지켜보는 관리자가 되었다. 게임 〈고양이 식탁〉은 고양이들이 방문하는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끝없이 방문하는 고양이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바닥을 청소하는 등의 일을 한다. 처음에는 직접 화면 터치를 통해 이러한 응대를 모두 처리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게임의 메커니즘이 익숙해졌을 즈음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거리가 멀어져 관리자가 되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직접 처리하지 않고 그 일을 처리할 직원 캐릭터를 배치하며, 그 캐릭터가 일을 밀리지 않고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로 변모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기계 행위자인 캐릭터(알고리즘)를 관리하는 위치가 되었다. 캐릭터와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당사자에서 제3자가 되며, 게임 상황을 관망하게 된다. 여기에서 보기로서의 게임하기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관리자이자 시청자, 양육자, 혹은 수학자 이렇게 변화한 역할에서 발생하는 감각은 어떤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게임 방송 시청'과 비슷하다고 답했다. 나의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전투 장면을 즐거이 감상하는 것이다. 전투가 끝나면, 다음 방송이 재생되듯 다음 전투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하물며 캐릭터가 도중에 사망하기라도 하면, 장면에 감정이입 하면서 탄식을 보였다. 또 다른 집단은 자동 전투하는 캐릭터를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면서, 캐릭터 군단과 인간 플레이어 본인과의 거리가 멀어 이입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냉정하게 드러냈다. 캐릭터와 거리가 계속 멀어지다 못해 무덤덤한 관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면 눈앞에서 성장하는 캐릭터를 자식이나 반려동물로 느끼는 부류도 있었다. 〈중년기사 김봉식〉을 즐기는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자신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거리감은 있지만,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키운 반려동물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이는 과거의 육성 게임기 〈다마고치〉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귀여운 캐릭터가 알 모양의 기계 안에서 플레이어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는 다마고치는, 배설물을 치우거나 잠을 잘 때 불을 꺼줘야 하는 생물학적 리듬을 표방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행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도록 플레이해야 했고, 디지털 반려동물로 여기면서 캐릭터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움을 느꼈다. "더 멋진 기계 관리자"가 되는 일로 플레이어의 지향점이 설정되기도 했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많은 유저들은 캐릭터 육성법을 공유한다. 이들은 도표를 그려 수치를 분석하고, 각 선택에 따르는 최적의 효율을 찾는다. 이러한 행위를 띠어리크래프트(theorycraft)라고 부르는데, 2000년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커뮤니티에서 유저들이 게임 세계의 작동 연산을 밝혀 더 좋은 플레이를 하도록 실천한 것으로 기록된다. 띠어리크래프트를 즐기는 유저는 관리자가 된 동시에 최적의 루트, 최적의 성장법을 찾아 수학자가 된 것과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듯, 게임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방치를 허용하고, 사람들은 방치 행위를 일상에 녹여낸다. 과거 피시 온라인 게임에서 불법으로 규제했던 자동 플레이가 모바일 게임으로 오면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5분, 1시간, 24시간 등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여 방치할 수 있는 오늘날 자동과 방치의 게임들은 마치 여가 시간을 채우는 상품의 여러 가짓수를 제공하는 듯싶다. 이제 플레이어는 기계 관리자로서, 게임 기계가 잘 굴러가도록 보살핀다. 같은 관리자라도 요란하게 전투하는 캐릭터를 지긋이 감상하는 사람들, 감정 이입하는 사람들, 혹은 감정 없이 냉정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친밀성을 가지고 '반려 캐릭터'로 보는 경우, 게임 내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그 수를 이해하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수학자가 되어버린 관리자도 존재하기도 한다. 아직 모바일 MMORPG에서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이 적극적으로 도입이 되면, 여태까지 말한 '관리'의 속성이 다르게 변할 수도 있다. 정해진 기능을 마냥 수행하지 않는 캐릭터가 나타날까?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게임하기의 범위를 확장할 것 만은 확실하다. *이 글은 필자의 석사논문 〈플레이어 없는 게임들: 모바일 게임의 ‘방치’ 문화 연구〉에 기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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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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