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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란으로 1249개 검색됨

  • 채찍과 당근의 자강두천,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은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을 유도하고 또 감정선을 조절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때론 위협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면서, 무작정 사실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범위 안에 플레이어의 경험을 위치시키기 위해 수많은 요소가 무대 뒤에서 암약한다. 마치 영화 ‘캐빈 인 더 우즈’ 에서 미스터리 단체의 직원들이 주인공 일행에게 하나씩 위협을 던져주며 가지고 놀듯이 말이다. 만약 이런 시선으로 공포 게임을 본다면, 이제는 한 번쯤 그 의도와 예상을 부숴주겠다는 불순한 생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 Back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19 GG Vol. 24. 8. 10. 1. 유동하는 공포의 교집합은‘어디’인가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 [1] 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바우만은 인간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라고 토로한다 [2] . 그리고 “공포에서 벗어나, 공포의 온상인 무지에서 해방된 세계”로 나아가야 했을 근대(이성)의 희망이 단지 “길고 긴 우회로에 불과했음”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유동적 근대의 환경이 인간의 일생 전체를 다각적인 공포 속에 몰아넣게 되었음을 설파한다 [3] . 우리는 나날이 불어나는 ‘불확실한’ 공포를 동반자 삼아 ‘불확실한’ 삶을 영위하는 유목민이 되어서는, 이 유동하는 공포를 ‘명명하는(내지는 개념화하는)’ 일로부터도 한계를 느껴왔다. 다만 유동성으로 말미암아 ‘미지의 것’으로 한계 지었던 공포에 대하여, 그 윤곽을 포착할 수 있는 주요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 [4] ’에 다름없지 않을까. 공간 자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집약될 때, 우리에게는 식별 불가능했던 공포를 잠시나마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공간은 직접 경험과 추상적 사고라는 양극단을 가진 연속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식가능하기 때문이다 [5] . 그리고 현대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공포란 어쩌면 시간에 대한 공포보다 ‘몰입’을 해내게 되는 공포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푸코의 진단―오늘날의 불안은 확실히 시간보다는 공간에 훨씬 더 근본적으로 관련된다고 믿는다―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6] . 실제로 우리는 육박하는 시간의 흐름보다 ‘지금-여기’의 내가 머물고 있거나 머물렀던 곳의 으스스함에 대해, 더 나아가 그곳에서의 ‘나’의 존재에 대해 더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대성이나 추상성이 강한 시간의 공포와 달리, 객관적 지표로서의 구획을 실마리로 지닌 공간의 공포는 인간(들)에게 있어 크고 작은 교집합을 이루게 될 가능성을 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현재 유동하던 공간의 공포가 과연 어떤 공동의 지점을 발생시키고 있는가, 즉 ‘어디에서’ 고이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어디에서’의 문제는 서브 컬처계에서, 특히나 게임의 영역에서 창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8번 출구>는 바로 이 ‘어디’에 대한 확증의 재현에 다름 없다. 이를테면 소위 ‘유동하는 공포’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흘러들어와 있었고, 이를 포착한 사람들에 의해 그 공포가 어떤 식으로 ‘고임’을 이루며 특정 공간으로서 구축되거나 변용되고 있는지. <8번 출구>는 호러 게임 특유의 점프 스케어를 연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공간 자체에 압축된 공포만으로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식이다. 사실 게임 자체의 구성은 단순하다. 끝없이 펼쳐진 지하도에서, ‘8번 출구’에 도달할 때까지 소위 ‘이상 현상’이라 불리는 지점을 찾아 탈출에 성공하면 된다. 길게는 60분, 짧게는 2분 남짓으로까지 클리어가 가능하며 특유의 무한 반복 구조로 인해 형식만 놓고 본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 다소 ‘심심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 게임(의 정체성인 공간)을 두려워하고, 플레이하고, 급기야는 그에 매혹된다. 어디선가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논)픽션의 ‘어디’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집단적인 공포와 몰입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2.‘비장소’라는 호러 : ‘인간(성) 없음’의 장 <8번 출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지하도이다. 지하도는 일반적으로 ‘북적이는 익명의 사람들’이 ‘스치듯’ 교차하고 통행하는 곳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오제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은 정체성의 장소, 관계의 장소, 역사의 장소로서의 특질을 갖는 ‘인간적(인류학적) 장소’와 다른, ‘비장소(non-place)’로서 구분되는 곳이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가 되는 셈이다 [7] . 지하도를 비롯하여 공항,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이 이러한 비장소로서 지목될 수 있다. 오제는 사람보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이러한 비장소의 요소―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당 장소를 단지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인식하게 만드는―의 작용이 해당 공간에서 요구하는 ‘승객’이나 ‘소비자’, ‘운전자’와 같이 익명의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단일한 정체성을 생성해 냄을 거론한다 [8] . 그리고 이러한 비장소와 이용자들의 일시적인 ‘계약 관계’를 통해 비장소 안에서의 ‘나’의 존재는 ‘행인’과 같은 다소 안정적인 익명성으로서 포섭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8번 출구>에서는 이러한 비장소가 ‘호러’가 된다. 그 이유를 꼽자면, 이때의 ‘비장소’에는 플레이어인 ‘나’를 제외한 최소한의 ‘인간(성)’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장소’ 자체가 ‘인간-인간’ 간의 직접 경험이나 교류에 대한 느슨함을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체험해온 비장소는 ‘대중’ 자체가 경유하는(해야만 하는) 공간으로서 인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장소는 누구나 그곳을 지나칠 수 있다는 ‘공적 공간’의 지위로서 건설되고 이해된다. 비장소에서 인간은 ‘동존하며 교차하기’라는 공공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해당 공간에서 ‘이용자’라는 역할을 획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장소에 단독자로서 남게 되었을 때, 공적인 행보에 능숙했던 우리는 이 공간에서의 갑작스러운 사적 행보에 불안을 느낀다. 인간(성)들 사이에서의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은 사라지고, 어느새 끊임없이 증식하는 공간과 불명료한 ‘나’만이 대면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익명’으로서의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장소의 바깥에서의 ‘나’의 정체성도 아닌 ‘모름’이라는 공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나’가 된다. 물론 지하도의 복도를 돌 때마다 우리는 ‘중년 남성’의 형상을 띤 NPC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인간성이 결여된, 움직이는 메트로놈과 다를 바 없다. 그는 해당 공간 내 플레이어(나)의 탈출 욕구나 공포에는 관심이 없다. 게임 내 ‘루프’의 루즈함을 덜기 위한 오브젝트로서, ‘중년 남성’은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의 일부’로서 기능함에 가깝다. 실제 비장소에서 ‘나’에게 가해지는 위해는 인간(성)에 의해 구호받을 수 있지만, <8번 출구>의 지하도에는 그럴 만한 인간된 타자가 없다. 붉은색 물이 밀려오고, 액자에 귀신이 생기고, 안내판이 뒤집히는 등 예측 불허한 ‘이상 현상’만이 랜덤으로 ‘나’를 덮친다. 어쩌면 <8번 출구>는 익명성에 묻히는 순간 동반되는 비장소성으로부터의 고독, 곧 익명성에 지나치게 안주할 경우 언젠가 어떤 인간(성)으로부터도 구호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여과 없이 재현해 낸 ‘있을 법한’ 평행 공간의 현현일지도 모른다. 3.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 : ‘영속적인 현재’에서의 놀이 이처럼 <8번 출구>를 비롯한 ‘호러’된 비장소의 재현 시도들은 해당 게임이 출시된 2023년 이전부터, 북미 커뮤니티 레딧(Reddit)이나 트위터와 같은 웹 공간에서 굵직하게 출몰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대중들의 ‘몰입’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8번 출구> 자체의 모티브이면서 ‘호러화된 비장소’가 밈(meme)이 된 형태를 총칭해 온 개념이 바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이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1909년부터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학술적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해 왔으며, 건축이나 미술 등의 분야에서 차용되다가, 이후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웹공간을 순환하는 ‘인터넷 밈’의 일환으로 점층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출몰한 바가 있다. 이때 ‘리미널’은 ‘문간방(threshold)’ 또는 ‘경계’를 나타내는 라틴어 ‘리멘(Limen)’을 어원으로 두고 있으며 [9] , 인류학자 아놀드 판 헤네프(Arnold van Gennep)가 제시한 ‘통과의례 [10] ’의 3단계 구분―①분리(separation) ②전이(transition) ③재통합(re-aggregation) [11] ―의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문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러한 일상적인 문화•사회의 상태와,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시간을 경과시키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구조적인 지위를 정해가는 과정 사이의 ‘문턱에 있음(리미널리티)’의 상태를 보다 발전시켜 문화적 변화의 전반적인 국면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12] . 그리고 이런 ‘문턱됨’에서 비롯된 ‘리미널 스페이스’란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13] , 하나의 장소 또는 다른 장소도 아닌, 하나의 분야 또는 다른 분야도 아닌, 그들 사이에서(in-between)의 제3의 공간(thirdspace)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뜻으로 정의될 수 있다 [14] . '밈'으로서 대두된 리미널 스페이스에는 ‘문턱에 있음’ 상태의 비장소를 출처 삼은 이미지들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동반된 감각은 대개 ‘공포’로, 이때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8번 출구>의 지하도와 같이 친숙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위화감과 두려움을 지닌다. 대부분 인적이 없고 시간대가 불명한 이미지의 정보값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텅 빈 건물 복도, 호텔 로비, 끝없이 이어지는 새벽의 어느 국도, 영업이 끝난 쇼핑몰의 내부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15] . 그러나 유튜브 스트리머들의 <8번 출구> 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해당 공간을 과연 ‘공포’의 대상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판 헤네프는 일찍이 이러한 ‘문턱된’ 상태가 적용된 시간을 ‘실험’과 ‘유희’가 넘쳐 흐르는 ‘미술적인 시간’으로 파악하면서, 현실 사회의 구조적인 여러 활동들을 ‘직설법’이라 한다면 사회 문화적인 과정에 있어서의 ‘리미널리티’란 마치 ‘가정법’과도 비슷하여 현실적이고 직설법적인 구조에 반격을 가하는, 일종의 사고•언어•상징•메타포에 대한 ‘놀이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가정법적인 시간•공간’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기도 한 바가 있다 [16] .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으로서 우리는 ‘밈’된 리미널 스페이스의 이면에도, 일종의 ‘놀이’로서 대중을 견인하는 측면이 존재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8번 출구>에 대두되는 리미널 스페이스(내지는 비장소)의 경우, 표면적으로 그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상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포에서 오는 유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그 심층에는 ‘영속된 현재’에 대한 놀이의 감각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정서가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현재성’의 지배는 본디 비장소의 특질로, 리미널 스페이스는 이때의 ‘현재성’을 영구히 늘어뜨리는 마력을 지닌다. 결정적으로 이와 같은 요소는 불분명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턱된 상태’를 이미지나 게임과 같은 매체로서 창조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경유할 뿐인 비장소의 현재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그에 따른 자극에도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로제 카이와에 따르면 규칙과 놀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놀이의 원천에는 근본적인 자유―쉬고 싶은 욕구이며 아울러 기분전환 및 변덕스러움의 욕구―가 있으며, 이런 자유는 놀이의 필수 불가결한 원동력이 된다 [17] . 곧, <8번 출구> 역시 해당 공간 내에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규칙(e.g.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가세요.”)이 존재하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진입하는 리미널 공간 특유의 ‘영속된 현재’에는 공포만으로 포섭하기 어려운 ‘놀이’의 욕망, 그로 인한 자유로의 (불)가능성이 혼융되어 있다. 4. 공간은 행위자가 된다 공간은 힘이 세다. 개중 비장소는 유동하는 공포의 교차점이자, 몰입할 수 있는 놀이로서의 가능성이 결집된 곳으로, 이를 활용한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이 게임의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불안과 매혹의 비장소는 게임 내에서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횡단하며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마침내 ‘인간-공간’의 지위 설정에 대한 역전까지를 가능케 한다. 기존 체계에의 인간이 언제나 공간을 생성하고 존립하게 하는 존재였다면, 비장소성을 담지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오히려 역동적으로 행위하는 쪽은 공간인 셈이다. 이를테면 <8번 출구>의 경우 인간(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수행성이 오직 앞뒤로 걷거나 달리는 일에 그쳤다면, ‘지하도’라는 비장소는 그 자체로 각종 ‘이상현상’을 일으키며 인간보다 더욱 스펙터클한 움직임과 변화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 공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익숙하던 객체가 아니며 거꾸로 우리를 응시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던져버린다 [18] . 그 안에서 인간은 공포로서 압도당하는 한편, 놀이로서 유희하는 복합적인 감각을 지닌다. 이때의 감각에는 비장소성에서 기인한, 근대적 개인들의 내밀한 신경증 같은 것이 동반되어 있다. 결국 게임 내 리미널한 비장소에 대한 ‘공포’와 ‘몰입’의 요인 탐색에 착수하는 일로부터. 우리는 게임의 사회학이 아닌, 게임을 시발점으로 둔 사회학의 단초까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게임은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이 투영된 공간, 곧 ‘어디’의 가능태를 탄력적으로 선취하는 사회적 기술로서 긍정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1] 티모시 모튼이 주장한 개념. 시공간에 너무나 거대하게 (hyper-) 퍼져 있어서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는 객체(-object)로, 모튼은 이 하이퍼객체의 특성을 점성(viscosity), 용해성(molten-ness), 비국지성(non-locality), 초차원성(phased-ness),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의 다섯 가지로 명명한다. [2] 지그문트 바우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11쪽. [3] 위의 책, 12-16쪽 참조. [4] 본고에서는 장소와 공간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양자 모두 어떠한 물리적 지점이나 위치에 인간의 삶과 실천 행위가 누적되며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곳으로서의 위상을 지님을 전제한다. 다만, 정적이고 안정적이면서 지역성에 기초하여 생활세계에 부착되는 대상으로 장소를 이해하는 논의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추상적이면서 그 자체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을 공간에 관한 논의의 특징으로 구분해 둔다. (정헌목,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비교문화연구』 제19집 제1호, 서울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2013, 116쪽 참조.) [5]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39쪽. [6]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23, 48쪽. [7] 마르크 오제, 이상길, 이윤영 옮김, 『비장소』, 아카넷, 2017, 97쪽. [8] 정헌목, 앞의 글, 119쪽. [9] 조대원, 임종엽,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응용 및 재현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계획계 제23권 제1호, 대한건축학회, 2003, 279쪽. [10] 빅터 터너, 이기우, 김익두 옮김, 『제의에서 연극으로』, 현대미학사, 1996, 208쪽 참조. 이 ‘통과의례’는 모든 문화 유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어떤 사회 문화적인 상태나 지위에서 다른 상태나 지위로 옮겨갈 때, 이를테면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처녀에서 기혼녀로, 아이에서 부모로, 유령에서 조상의 영혼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평화에서 전쟁으로, 또는 그 반대로, 곤궁에서 부유로,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갈 때, 그 지표나 매개”로서 이것은 나타나고 있다. [11] 위의 책, 209쪽 참조. 판 헤네프는 통과의례의 3단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① (일상 사회생활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② (문지방을 뜻하는) 주변 혹은 전이역(轉移域, transition): 이때 제의의 당사자는 제의 이전의 생활양식과 이후 생활양식의 ‘중간상태’에 빠진다. ③ 재통합(re-aggregation): 이때 다시 제의적인 과정을 통해 세속적인 집단으로 되돌아오는데, 의례의 당사자는 제의 참가 이전보다 더 높은 상태로 이행하며, 의식이 변하고, 이전과는 달라진 사회적 존재가 된다. [12] 위의 책, 207-208쪽. [13] 조경진, 한소영, 「역공간(Liminal Space) 개념으로 해석한 현대도시 공공공간의 혼성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39권 4호, 한국조경학회, 2011, 53쪽. [14] 조대원, 임종엽, 앞의 글, 280쪽. [15] 정지돈, 『스페이스 (논)픽션』, 마티, 2022, 39쪽. [16] 빅터 터너, 앞의 책, 208쪽. [17] 로제 카이와, 이상률 옮김,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1996, 57쪽. [18] 신지연, 이승빈, 김영대, 『이제 공간에 주의하십시오』, 영남대학교출반부, 2023, 28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정찬미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문합니다. 서브컬처의 애호가이자 관망자.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들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 효율, 계산 가능성 그리고 민맥싱

    테크 전문 월간지인 와이어드WIRED는 지난 3월 [1](효과/효율적 이타주의의 종언)이라는 장문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째서 특정한 철학 사조를 비판하는 철학자의 글이 기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잡지에 실리게 됐으며, 이토록 큰 관심을 유도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효과/효율적 이타주의(통칭 EA)가 처한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EA는 실리콘 밸리의 유력한 엔지니어들과 테크 억만장자들(이 두 그룹은 종종 겹친다.) 사이에서 이미 실질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민맥싱, 최적화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비주얼노벨의 미디어믹스 : 무대 위로 소환된 텍스트

    하지만 이처럼 익숙한 미디어 믹스의 이동 방식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인기 IP를 다른 형식으로 재포장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이동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의 어떤 요소가 건너가는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새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동하는 매체의 형식에 따라 달라지는 층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Back 비주얼노벨의 미디어믹스 : 무대 위로 소환된 텍스트 29 GG Vol. 26. 4. 10. 게임의 미디어믹스, ‘슈퍼 마리오’에서 ‘8번 출구’까지 게임은 때로 다른 미디어의 언어를 빌려왔다. 소설의 서사 구조, 영화의 연출 문법, 만화의 이미지와 컷 분할 등 다양한 매체의 언어로 구현되곤 했다. 그렇다면 게임이 다양한 형태의 다른 매체로 건너가는 모습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이러한 풍경을 이미 자주 경험했다. 흔히 말하는 ‘미디어 믹스’가 그렇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러한 게임의 변용은 하나의 산업적 흐름으로 자리잡은지도 오래다. 하지만 이처럼 익숙한 미디어 믹스의 이동 방식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인기 IP를 다른 형식으로 재포장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이동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의 어떤 요소가 건너가는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새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동하는 매체의 형식에 따라 달라지는 층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슈퍼 마리오가 극장 애니메이션이 된다고 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오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들의 티셔츠나 장난감에도 있어왔고,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물리적 공간에도 등장하여 게임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게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2023년 개봉한 『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무비』가 전 세계에서 13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역대 게임 원작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을 때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라기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마리오는 처음엔 단순한 8비트 횡스크롤 방식의 플랫폼 액션 게임이었지만, 마리오라는 IP는 게임의 경계를 넘어 이미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아 있었고, 영상화는 그 아이콘의 자연스러운 확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꽤 오래 전 실사 영화화 되었던 캡콤의 서바이벌 호러 게임 『바이오하자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복잡한 세계관과 인물 관계, 기업의 음모와 생물 병기라는 묵직한 서사를 가진 이 게임은 2002년 실사 영화화 과정에서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세계관의 차용’이라는 전략을 취했다. 영화는 게임의 세부적인 서사에 얽매이지 않고, 원작이 구축해둔 호러 환경과 설정을 토양 삼아 오리지널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즉, 스토리가 건너간 것이 아니라 원작 게임이 설계해둔 ‘세계관’ 자제가 새로운 이야기의 무대가 된 것이다. 2025년 일본 실사 영화 시장을 뒤흔든 『8번 출구(8番出口)』의 사례는 게임의 미디어믹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했다. 명확한 스토리도, 입체적인 캐릭터 서사도 없이 무기질한 지하 통로를 걷는 ‘규칙’과 ‘이변’이 전부였던 이 인디 게임을 실사화한 영화가 어떻게 개봉 3일 만에 흥행 수입 9억 5천만 엔을 돌파하며 2025년 일본 실사 영화 1위에 오르고,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될 만큼 강력한 영상 매체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영화는 원작에서 가져올 서사가 없었기 때문에 게임이 설계한 ‘무한 루프의 공포’와 ‘공간적 압박감’이라는 순수한 감각에 집중했다. 미디어믹스가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텍스트나 서사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형식이 만들어내는 감각 그 자체였던 셈이다. 반대로, ‘스토리가 전부’인 게임은 어떠한가? 비주얼노벨은 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플레이어가 실제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읽는 것이다. 그 본질은 텍스트의 향유에 있다. 화면을 채우는 텍스트와 배경 이미지, 표정 정도만 변화하는 고정된 캐릭터 일러스트, 장면의 정서를 받쳐주는 음악과 효과음 등이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게임. 『8번 출구』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장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주얼노벨의 미디어믹스는 전혀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미 완성된 텍스트를 다른 매체로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그 도달지가 영상 매체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와 관객의 호흡이 실재하는 연극 같은 오프라인 무대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읽는 게임, 경계 위의 장르 비주얼노벨은 다소 기묘한 위치가 있는 장르다. 플레이어의 조작은 최소화되어 있고, 게임 경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다. 그래서 비주얼노벨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것이 과연 게임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이야말로 비주얼노벨이라는 장르의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비주얼(Visual)과 노벨(Novel), 비주얼노벨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경계의 모호함을 안고 있다. ‘이미지’와 ‘소설’이라는 이질적인 문법을 동시에 차용한 이 형식은 게임과 문학, 만화 사이의 '경계적 공간'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정체성이 역설적으로 비주얼노벨을 미디어믹스에 가장 최적화된 장르로 기능하게 한다.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는 장르는 서사 자체가 매체의 중심축을 단단히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 서사를 다른 형식으로 옮기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소설 ‘해리포터’의 서사가 영화 ‘해리포터’를 낳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테마파크를 만든 것처럼. 2000년대 이후 일본의 비주얼노벨들은 실제로 활발한 미디어믹스를 전개해왔다. 그 경로는 대체로 일정했다. 원작 게임이 인기를 얻으면 만화화, 이른바 코미컬라이즈(comicalize)가 이루어지고, TV 애니메이션화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동인 게임으로 출발한 『쓰르라미 울 적에(ひぐらしのなく頃に)』는 만화와 TV 애니메이션을 거쳐 실사 영화까지 제작됐다. 마찬가지로 『Fate/stay night』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극장판, 수십 종의 파생 미디어를 아우르는 거대한 프랜차이즈로 성장했다. 『CLANNAD』와 『Steins;Gate』 역시 애니메이션화를 통해 원작 게임을 접하지 않은 관객들에게까지 그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들의 팬 중 상당수는 게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먼저 접한 사람들이다. 이 일련의 흐름에는 공통된 방향성이 있다.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정지된 이미지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로 옮겨가는 것이다. 독자가 상상하던 장면이 실제로 움직이고, 영상 매체의 문법에 맞는 연출을 통해 화면 위에서 구체화된다. 비주얼노벨이 이미 갖추고 있던 요소들, 캐릭터, 세계관, 서사 구조를 영상 매체가 충실히 계승하면서 새로운 감각적 완성도를 더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로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비주얼노벨의 미디어믹스란 곧 애니메이션화라는 등식이 거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텍스트가 영상으로 ‘진화’하는 것이라는, 텍스트보다 영상이 고차원적인 매체라는 사고가 장르의 문법에 깊게 박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등식은 비단 비주얼노벨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이라는 매체 전반에 걸쳐, 미디어믹스는 영상화라는 방향으로 수렴해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디어믹스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조망해보면, 이 당연해보이는 공식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매체가 다른 형태의 매체로 건너가는 모습은 다양한 국가의 산업구조와 문화적 토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나라마다 다른 미디어믹스의 풍경 ‘텍스트에서 영상으로’의 이행은 현대 미디어믹스의 가장 지배적인 문법이다. 서구권에서 게임 미디어믹스의 중심축은 단연 거대 자본을 투입한 OTT 플랫폼 기반의 영상화에 있다. HBO의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필두로 넷플릭스의 『아케인』,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그리고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폴아웃』에 이르기까지, 최근 수년간 우리는 게임 IP가 고예산 드라마 시리즈와 애니메이션으로 변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무비』가 거둔 기록적인 흥행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게임 IP를 하나의 콘텐츠 자산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탄탄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춘 게임은, 이미 검증된 서사적 토대를 지닌 원작으로서 영상 제작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서구권의 미디어믹스는 게임이 가진 시네마틱한 연출과 서사 구조를 극대화하여, 게임을 하지 않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그 경험을 확장하는 '판타지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한국의 미디어믹스 지형은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한국 또한 세계적인 콘텐츠 강국이지만, 미디어믹스의 시발점은 게임이 아닌 웹툰과 웹소설에 집중되어 있다. 『신과함께』, 『이태원 클라쓰』, 『나 혼자만 레벨업』 등 성공 가도를 달리는 수많은 영상 콘텐츠의 뿌리는 웹소설의 디지털 활자와 웹툰의 칸 만화에 있다. 한국 게임이 IP로서 미디어믹스의 중심에 서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희소하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한국 게임 산업의 특수한 구조가 자리한다. 한국은 오랜 기간 온라인·모바일 게임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으며, 이들은 게임 자체의 서사나 캐릭터의 깊이보다는 '플레이어 간의 경쟁'과 '성장의 시스템'에 최적화된 문법을 지니고 있다. 미디어믹스의 재료가 될 만한 '이야기'보다는 '룰'이 강조되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최근 한국도 콘솔 시장의 성장과 함께 스토리 중심 게임의 시도가 늘고 있으나, 여전히 한국에서 게임은 미디어믹스의 '출발지'보다는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다른 IP가 도달하는 '목적지'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 혼자만 레벨업』이나 『신의 탑』 같은 웹툰 IP가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위의 사례들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는 일본의 사례가 있다. 게임의 애니메이션화와 만화화라는 경로는 일본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문화권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산업적 영역이 확고히 구축되어 있다. 바로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실제 현실 공간인 무대로 소환하는 '2.5차원 무대화'다. 일본에서 무대화는 단순히 팬들을 위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았다. 이는 연출, 자본, 팬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독립된 산업 체계로 확립되어 있다. 원작의 평면적 이미지를 배우의 육체와 무대라는 입체적 공간으로 번역해내는 이 독특한 공정은, 일본의 미디어믹스 풍경을 다른 나라와 구분 짓는 가장 결정적인 변별점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비주얼노벨이라는 '텍스트 매체'가 왜 영상화라는 자명한 경로를 이탈해 무대라는 아날로그적 현장으로 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무대 위로 소환된 텍스트 일본의 미디어믹스 지형에서 가장 독특한 구획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2.5차원’이라 불리는 공연 문화다. 만화나 게임 속 평면적인 2차원 캐릭터를 3차원의 실재하는 무대 위에 재현하는 이 형식은, 2015년 ‘2.5차원 뮤지컬 협회’가 설립될 만큼 일본 내에서 견고한 문화적 위상을 점하고 있다. 이 흐름의 기점으로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2003년 초연된 『뮤지컬 테니스의 왕자(テニスの王子様)』다. 만화적 허용이 가득한 스포츠 연출을 무대적 문법으로 번역해낸 이 작품은, 만화 원작의 캐릭터들을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형식으로 독자적인 팬덤을 형성했고, 이후 수많은 만화·애니메이션·게임 IP가 무대화의 길을 따랐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주얼노벨이 이러한 흐름 안에서 무대화와 특히 잘 맞는 장르라는 점이다. 연극의 최소 단위가 인물과 대사라면, 비주얼노벨 역시 인물 간의 관계성과 텍스트 중심의 서사 구조를 뼈대로 삼는다. 다른 게임 장르들에서 돋보이는 화려한 시네마틱 영상이나 복잡한 물리 엔진 대신, 정지된 배경 위로 흐르는 대화와 심리 묘사에 집중하는 비주얼노벨의 장르적 특성은 무대의 언어로 번역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최근 도쿄에서 공연된 『괭이갈매기 울 적에』 무대판은 비주얼노벨의 무대화가 영상 매체의 무대화와 어떻게 다른 문법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풀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가 관객이 기억하는 애니메이션의 ‘동적인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어떻게 재현(Representation)할 것인가’에 있었다면, 비주얼노벨 원작의 무대는 그 방향이 사뭇 다르다. 여기서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적인 텍스트와 정지된 일러스트로만 존재하던 가상의 존재에게 처음으로 구체적인 신체와 시간성을 부여(Enactment)하는 작업이 핵심이 된다. 이러한 무대화는 다른 미디어믹스와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 위에 서 있다. 애니메이션화가 원작의 감각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확장하여 보편적 향유를 돕는다면, 무대화는 오히려 디지털의 가변성을 아날로그의 일회성으로 되돌린다. 게임에서는 세이브와 로드를 통해 언제든 실패를 교정하고 서사를 재시작할 수 있지만, 무대 위의 공연은 막이 오르고 내리는 그 찰나의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며 끝나면 소멸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에서 가오나시가 괴물로 변해가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변화가 유려한 작화와 매끄러운 프레임으로 표현됐다. 무대 위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배우 여럿이 검은 천 안에서 천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펄럭이며 그 부피를 점점 불려갔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역시 검은 옷의 배우들이 작은 하얀 종이 새를 연 날리듯이 천장을 향해 밀어 올리고, 날갯짓 하나하나를 사람의 손으로 구현해냈다. 비주얼노벨의 무대화는 방향이 반대다. 정지된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것에 처음으로 신체와 시간성을 부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괭이갈매기 울 적에』 무대에서 원작 게임의 추리 대결 장면은 이렇게 구현됐다. 원작 게임에서는 그저 두 캐릭터가 붉은 텍스트와 파란 텍스트로 추리를 주고 받던 장면이었다. 무대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배우들이 종이판을 들고 무대 위를 빠르게 이동하며 종이판 위로 붉은 글씨와 파란 글씨를 빔으로 쏘고, 텍스트가 총알처럼 공간을 날아가 서로를 공격하는 연출로 재구성됐다. 화면 속에서 눈으로만 읽던 언어가 배우의 몸을 빌려 공간 안에서 물리적인 속도와 무게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IP를 널리 알리는 ‘확산’의 논리보다는, 원작의 서사를 이미 내면화한 팬들에게 그 이야기를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재경험하게 하는 ‘전환’의 논리에 가깝다. 비주얼노벨의 무대화는 영상화가 제공하는 시각적 쾌감과는 또 다른, 배우의 육체와 관객의 호흡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현장감의 마찰’을 활용한다. 더 많은 관객에게 퍼져나가는 확산성보다는, 기존 경험의 층위를 다각화하려는 시도로서 무대화는 기능한다는 것이다. 마치며 : 매체의 경계 너머에서 미디어믹스의 성공 여부는 그 결과물이 원작의 명성을 얼마나 소비했느냐가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원작 게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극장을 나서며 다시 게임을 켜고 싶어졌다면, 그것은 새로운 미디어의 언어가 원작이 가진 가치를 훌륭하게 재발견해냈다는 증거다. 슈퍼 마리오가 애니메이션 영화가 되고, 스토리 없는 인디 게임의 실사 영화가 칸 영화제의 스크린에 걸리고, 텍스트와 일러스트로만 존재하던 캐릭터가 무대 위에서 실제 몸을 얻어 걷고 말하는 시대다. 가장 디지털화된 게임 속 상상력의 공간이 가장 아날로그적인 현실의 무대가 되고, 게임 속 캐릭터가 실제 인물이 되어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시대인 것이다. 이제 게임은 더 이상 하나의 매체 안에 고립된 섬이 아니다. 게임은 타 매체의 언어를 빌려 스스로를 증명하고, 어떤 매체들은 게임이 가진 몰입의 문법을 활용하기 위해 다시 게임의 형태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 안에서 미디어믹스는 단순히 IP를 반복 소비하는 산업적 전략을 넘어, 하나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매체적 환경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형식으로 생존하고 변주될 수 있는지를 묻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게임을 켜고, 미디어의 경계를 넘어 계속해서 살아남을 이야기의 힘을 발견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표절이라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선

    요 몇 년 부쩍 게임기자라는 부담스러운 직함을 달고서 듣기에 더더욱 부담이 가는 질문들이 있다. “이 게임이 저 게임을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표절이 맞지 않나요?” 마치 녹음기를 켠 채 내 커리어를 끝장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인데, 그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같다. ‘예/아니오’ 로 답하는게 아닌, 상대방과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 Back 표절이라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선 24 GG Vol. 25. 6. 10. 요 몇 년 부쩍 게임기자라는 부담스러운 직함을 달고서 듣기에 더더욱 부담이 가는 질문들이 있다. “이 게임이 저 게임을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표절이 맞지 않나요?” 마치 녹음기를 켠 채 내 커리어를 끝장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인데, 그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같다. ‘예/아니오’ 로 답하는게 아닌, 상대방과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게임과 게임 사이의 표절 시비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더더욱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또 이전보다 게임사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보호를 위해서 나서는 것도 눈에 띈다. 표절을 직접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은 저작권과 관련된 법이지만, 최근 불거진 몇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보면, 결국 제기된 소의 내용은 저작권이 아니라 특허권이나 부정경쟁방지 위반, 영업기밀 침해 등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의 상황에서 저작권은 각사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지만 특허권 침해나 부정경쟁방지 위반 등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거나 최소한 협상카드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저작권이 보호하는 영역이 명확하기 때문에도 있지만,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 유독 그 한계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다 근본적으로 질문을 바꿔보자면, 게이머들이 보기엔 아무리봐도 표절인 게임들이 어째서 법적으로는 그러한 판단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게이머들이 확증편향에 물들어 잘못된 생각을 하는걸까?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는 법과 수용자가 각 작품 또는 결과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법이라면 특허권을 침해했거나 또는 제조법을 도용했는지를 판단하려면 제작 과정을 살펴볼 것이고, 저작권처럼 어떤 발상을 침해했거나 타인의 아이디어로 부정한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면 아이디어를 직접적으로 표절했는지, 정도는 어느정도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들 법은 이미 게임 밖 다른 미디어에서는 여러 사례들을 낳았고, 물론 다른 미디어에서도 그 한계 또는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가 많지만 어느정도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유독 게임에서는 표절과 오마주, 벤치마킹에 대한 구분이 옅고 항상 격론이 오가는 주제가 되곤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법알못으로서,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우리가 겪는 괴리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모든 창작물은 정반합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때문에 미메시스(Mimesis)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사한 발상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더 나은 발전을 아예 가로막아버리는 일이 되기 쉽다. 다른 창작물만큼이나 게임의 제작은 레퍼런스에서부터 시작하며, 창작과 발상은 수렴과 변용으로 시작한다. 그 때문에 이러한 행위 자체를 일종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나 카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표절은 게임계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만큼이나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 역시 “이 게임은 XXX한 OOO임.” 이라며 비슷한 다른 게임에 빗대어 표현하는게 일반화되어 있을 정도이니. 그만큼 대부분의 디지털 게임들은 그 원류가 비교적 명확하며 장르적 정반합에서 언제나 비교당하기 일쑤다. 때문에, “이 게임은 어느 게임을 닮았죠?” 또는 더 나아가 “이거 XXX 베낀거 아닌가요?” 라는 말을 들을 때면, 한마디로 쉽게 답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단 게임 자체가 너무 복합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게임이라도 그를 구성하는 요소가 수백 수천가지라고 하기에도 부족할 정도이고, 또 대체 그 중에서 어느것이 같거나 비슷할 때 표절이라 할 수 있는가, 어느정도 비율이 넘어서야 표절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즉, 게임에서의 표절 논쟁은 그 정의에서부터 갈림길에 서있다. 비교적 그 정의를 내리기 쉬운 다른 미디어에 비하면 말이다. 물론 다른 미디어들이 가진 표절 논쟁에서도 항상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라는 이야기는 나오곤 하지만 게임만큼 이 문제가 골치 아픈 것도 없다. 같은 그래픽 스타일을 가졌지만 게임 플레이는 판이하게 다른 케이스는 흔해 빠졌고, 플레이 구성요소가 비슷하다고 해도 이를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같은 플레이 메커니즘을 가지고 다른 그래픽 요소와 플레이 도구, 구성으로 바꾸어 만들어내는 것이 게임적 변용의 기본이다. 아무리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는 말도 있지만, ‘미메시스’ 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애매한 선에 걸친 것도 참 많다. 즉, 이처럼 어떤 게임의 표절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법적인 부분을 떠나 게이머 입장에서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게임 자체가 워낙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표절 또는 벤치마킹한 요소가 분량 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플레이 측면에서는 오히려 다른 요소가 부각되고 중심이 된다면 그건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수 있고, 역으로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게 게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면, ‘베꼈다’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근래에 있었던 가장 큰, 그리고 유명한 사례라고 한다면 미호요의 ‘원신’ 과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법적인 표절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원신’ 은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표절이 되기는 어렵다.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디자인 요소를 트레이싱하거나, 당연하게도 미호요가 닌텐도를 해킹이라도 한게 아닌 이상 제작과정이나 그 소스코드가 동일할리는 없다. 그러나 이 게임은 많은 부분에서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닮아있으며, 개발사인 미호요도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가 준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좋은 참고가 되었다는 말은 결국 ‘원신’ 의 레퍼런스에는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가 들어가있었다는 말이 되며 그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두 게임을 할 때의 경험이 거의 비슷한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게임의 전반적인 그래픽 스타일 지향점이나 스태미나 아이콘 같은 시각요소의 차용에서부터, 넓게보면 퍼즐 중심의 오픈월드 탐색이라는 게임 경험 자체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글라이더 활공에서부터 벽타기, 맵의 구성과 몬스터 배치까지 단순히 유사한 정도를 넘어서는 부분도 있다. 최소한 ‘원신’ 의 어드벤처 파트는 그 근원이 ‘젤다의 전설: 브레드 오브 더 와일드’ 있다는데에 모두가 동의한다. 따라서 ‘원신’ 이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표절했음을 주장하는 쪽은 주로 이러한 부분을 인용한다. 게임 내 콘텐츠와 메커니즘의 구성과 더불어 조작감, 타격감 같은 상당히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요인들까지도 언급된다. 그러한 이유는 결국 게임이란 경험에 의해 정의되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대리 체험할 때의 경험보다도 내가 직접 플레이어로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그로써 얻어지는 성취감, 순간적인 피드백, 감각들이 비슷하다면, 이유와 근거를 명확하게 들 수는 없어도 이들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문제는 이것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표절작인가? 레퍼런스를 참고해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는 관행은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당연한 행위이지만, 이 자체를 리버스 엔지니어링과 동일한 행위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질 때 나온다. 표절이라고 하는 측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측이 제기하는 근거가 게임의 서로 다른 부분이라서다. 어떤 요소를 차용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게임 전체가 어느 게임의 표절인가 하는 결론에 다다랐을 때에는 결국 전체 게임의 종합적인 부분을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원신’ 과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경우 어드벤처 파트는 굉장히 높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전투는 액션이라는 공통 분모를 빼면 그 근간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으며, 플랫폼과 BM에서 발생하는 플레이 특성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원신’ 은 기본적으로 캐릭터 수집 및 육성이 주요 콘텐츠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를 가챠로 뽑고, 육성 재화와 장비를 수집해 일정 이상의 완성도로 캐릭터를 빚고 깎아내는 과정이 핵심이다. 물론 이 또한 완전히 전에 없던, 다른 게임에 없던 ‘발명’ 은 아니지만 최소한 ‘젤다의 전설’ 에서는 크게 거리가 있으며 독자적인 발전을 가장 많이 꾀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4개 캐릭터와 원소 반응을 통한 파티 빌딩, 하나의 핵심 장비를 중심으로 여러 부품 단위로 세부 스펙을 쪼개어 조합하고 빌딩할 수 있는 장비 성장은 ‘원신’ 의 핵심이고, 이미 여러 갈래로 발전해온 빌드깎기 게임의 ‘원신’ 적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나아가 7신과 국가와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원신만의 세계관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성적인 만족감은 오롯이 ‘원신’ 이 이루어낸 성과다. 물론 이들 요소도 비슷한 사례를 찾으라면 못할 건 없지만, 유사성보다는 오리지널리티가 더 돋보이는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게임으로서 ‘원신’ 이 가진 독자적인 영역도 결코 적고 좁다고 할 수 없다. 게임은 그 자체로 굉장히 많은 레이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몇몇 레이어가 겹친다고 해서 완전히 동일한 총합으로 보기는 도저히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벤치마킹한 부분이 지배적이라면 또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지만, ‘원신’ 에 있어서는 모사한 레이어 만큼이나 직접 고민하고 그려낸 레이어가 많고 그것이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비록 논쟁의 여지가 있어도 사람들이 ‘원신’ 을 무조건적인 표절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수학적인 비율 산정을 말하고자 하는건 아니다. 게임의 경험은 매우 미시적인 체험들의 총합으로 하나의 거대한 경험이 된다. 때문에 아무리 같은 재료를 썼다 하더라도 곁들이는 음식이나 조리법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벤치마킹한 부분 외의 레이어가 충분히 두터울 때 전체 경험의 성격이 바뀌는” 현상을 이루어낸다면 단순한 표절작이 아닌 새로운 갈래의 발산이 될 수 있다. ‘원신’ 은 분명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어드벤처 파트를 토대로 하지만, 그 위에 자신만의 요소들을 쌓아올림으로서 다른 형태의 게임을 빚어냈다. 그래서 이제 ‘원신’ 은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표절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예, 아니오로 답할 수는 없다. 필자라면, “게임의 핵심적인 요소 일부를 본땄지만, 그만큼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 라고 답하겠다. 결국 표절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량적일 수 없으며, 우리는 각각의 게임에 대해 저마다 들어맞는 고민과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근래 ‘소울 시리즈’ 의 대성공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던 소위 소울라이크 게임들 역시 어떤 정량적인 기준을 가지고 소울라이크다, 이건 소울을 계승했다, 이건 소울라이크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 모두가 어떠한 정성적인 감각들, 경험들의 총합으로서 여러 플레이어의 논의를 거쳐 일종의 합의를 이루어낸 것에 가깝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왜 저작권을 판단하는데 있어 법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지 증명하는 셈이다. 법이라는 정량적인 판단으로는 선을 명확히 긋는게 불가능하며, 결국 재판관이나 배심원 같은 심리를 진행하는 권한자들의 재량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마저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법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만큼의 부작용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법리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이러한 게임의 독창성과 특별함들은 지금보다 더 보호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게임이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발산하고 발전하고 정반합의 과정을 반복하는걸 방해하여서는 안된다. 얼핏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매우 미세한 틈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어떤 일에서도 어떤 선을 긋고 경계를 정의하는 건 반복적인 조정과 다시긋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글조차도 그러한 과정 중 하나이며, 그때그때 우리는 엄격한 선을 조금씩 이동시킨다는 얼핏보면 모순적인 일을 해야 한다. 법이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해내야 할까? 이에 대한 답 또한 간단하고 원론적이다. 결국은 게이머다. 소비자이자 독자이자 애정자인 게이머들이 표절이 아닌 독창성을 높게 판단하고, 가치를 발굴하고 그런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것. 점차적으로 시장에, 게임이라는 넓은 세계에 그러한 ‘스스로 추구하는’ 게임들이 지배적으로 남도록 하는 것. 일종의 시장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단순한 소비자주의가 아니라 어떤 문화의 향유자로서, 명확한 가치관으로서 자신이 즐기는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야 말로 무분별한 표절작을 근절하고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추구를 치하할 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플레이어에 대한 존중과 함께 절대적인 선(線)이 있다고 믿기보다는 항상 새롭게 판단하고 스스로가 엄격한 기준이 될 자신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선 안에서 옥석을 가려가며 치밀하게 소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지루하고 현학적이라도, 단정적일 수 만은 없으니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인터뷰]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에 대한 동시대의 감각들 - GG필진 대담회

    이번 GG의 대담에서는 게임연구자 김규리, 평론가 이선인, 그리고 이경혁 편집장이 함께 시뮬레이션 장르의 확장과 변주 과정을 짚으며, 쉽사리 정의하기 어려운 시뮬레이션의 다층적 의미를 통해 우리가 게임 비평자로서 도달해야 할 질문은 무엇인지 탐색해 본다. < Back 27 GG Vol. 25.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디지털게임 비평의 활성화와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매년 게임비평공모전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2024년의 공모전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 Back 19 GG Vol. 24. 7. 22.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 Back 09 GG Vol. 22.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빅브라더, 파놉티콘, 전체주의, 감시, 혁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량청린 梁成林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논문세미나] 즐거움과 죄책감 사이에서 게임하기: 인도 남성 청년들의 게이밍 하위문화와 문화적 불협화

    이번 글에서 다룰 논문은 인도 라자스탄 주의 우다이푸르라는 소도시에서 성인모색기(emerging adult, 유년기와 성인기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남성 청년들의 게이밍 하위문화를 풀어내고자 하는 글이다. <대항문화로서 인도 게이밍 존(Indian Gaming Zones as Oppositional Subcultur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온라인 게임 플레이가 우다이푸르 청년들에게 어떻게 게이머라는 대안적 하위문화 정체성을 제공하는지, 그리고 이들은 즐거움과 죄의식 속에서 왜 게임을 그토록 중독적으로 경험하는지를 탐색한다. < Back [논문세미나] 즐거움과 죄책감 사이에서 게임하기: 인도 남성 청년들의 게이밍 하위문화와 문화적 불협화 30 GG Vol. 26. 6. 10. TEXT: Snodgrass, J. G., Dengah, H. F., Upadhyay, C., Else, R. J., & Polzer, E. (2021). Indian Gaming Zones as Oppositional Subculture: A Norm Incongruity “Cultural Dissonance” Approach to Internet Gaming Pleasure and Distress. Current Anthropology , 62(6), 771-797.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리고 후자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때 특히 그렇다. 아마 게임을 사랑하며 성장해 온 젊은 게이머들에게 이러한 양가감정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과거 팬덤, 펑크, 오타쿠 문화가 그러했듯 게임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장 강렬한 즐거움과 소속감을 제공하는 문화적 실천이다. 그러나 바로 그 즐거움은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과 충돌하며 불안과 죄책감을 낳기도 한다. 이처럼 게임은 즐거움과 낙인, 소속감과 불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역으로 더더욱 강한 중독적 몰입을 추동하기도 했으며 그 결과 게이머들만의 규범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위문화를 형성해 왔다. 이번 글에서 다룰 논문은 인도 라자스탄 주의 우다이푸르라는 소도시에서 성인모색기(emerging adult, 유년기와 성인기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남성 청년들의 게이밍 하위문화를 풀어내고자 하는 글이다. <대항문화로서 인도 게이밍 존(Indian Gaming Zones as Oppositional Subcultur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온라인 게임 플레이가 우다이푸르 청년들에게 어떻게 게이머라는 대안적 하위문화 정체성을 제공하는지, 그리고 이들은 즐거움과 죄의식 속에서 왜 게임을 그토록 중독적으로 경험하는지를 탐색한다. 배경 설명 및 문화적 불협화(cultural dissonance) 관점 이 연구는 특정한 사회적 집단의 질병이나 고통을 물리적 맥락을 넘어 문화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연구하는 의료인류학적 관점으로 ‘게임 중독’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글이다. 연구진은 우다이푸르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게임에 열광적으로 점점 몰입하는 양가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의료인류학자 드레슬러의 개념을 일부 사용했다. 드레슬러는 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건강을 결정하는 것은 소득, 영양, 의료접근성 같은 물질적 요인뿐 아니라 그 개인이 가진 문화적 가치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기대 사이의 관계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한 개인이 자신의 문화적 가치에 기반한 신념/행동을 사회에서 공유하는 문화적 모델에 얼마나 근접하게 일치시키는가를 보여주는 문화적 합치(cultural consonance) 개념을 개발했다. 즉 문화적 합치 개념은 개인의 건강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문화적 삶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문화적 합치가 일어나지 못해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사회의 기대가 엇갈린 상황에 놓인 개인은 어떻게 되는가? 이를 위해 연구진은 문화적 합치 개념에 심리학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개인의 신념과 태도가 양립 불가능성을 제거할 수 없을 때 개인이 고통을 겪는 경향) 개념을 더해 문화적 불협화(cultural dissonance)라는 관점을 개발한다. 이러한 개념을 통해 이 연구는 우다이푸르 청년들의 게임 하위문화를 단순한 병리화 담론에서 말하는 중독이나 반사회적 회피 현상으로 읽는 것을 넘어 온라인에서의 삶과 오프라인에서의 삶 사이에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심리-사회적 협상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인도 우다이푸르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연구의 참여자들은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이거나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반의 남성 인도인들이다. 저자들의 언급에 따르면 25세 이전까지의 인도 남성 청년들은 기본적으로 학생 브라마차리아(brahmacharya)로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 위한 준비 단계에 있는 위치로 여겨진다. 우다이푸르의 청년 대부분은 중매혼을 거쳐 결혼하며, 그 이전까지는 가장으로서의 생계능력과 좋은 신부를 얻을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간다. 대부분이 결혼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거나 독립을 하더라도 부모와 가까이 지내며,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예비) 가장의 역할이 강하게 각인된 이러한 사회에서, 게임을 즐기는 행위는 청년들의 평판을 쉽게 깎고 미래 직업이나 결혼 전망을 어렵게 하는 ‘중독’으로 쉽게 규정된다. 한편 우다이푸르는 휴대전화와 와이파이, 인터넷 기술의 보급으로 SNS나 게임에 대한 접근성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곳이다. 때문에 많은 연구참여자들은 게이밍 존과 같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카운터 스트라이크> 같은 온라인 게임을 무리없이 즐길 수 있었다. ‘게이밍 존’이란 인도의 대면 게이밍 카페로, 고사양의 네트워크와 PC장비가 구비된 한국의 PC방과 비슷한 곳이다. 연구참여자들은 대부분 중산층이거나 집에 따로 PC를 갖고 있음에도 친구들과 이곳을 함께 방문하며, 텍스트와 음성 채팅을 통해 온라인 유저들과 교류하며 게임을 한다. 대부분의 청년 게이머들은 게이밍 존에 매일같이 출근하면서 ‘진정한 게이머(true gamer)’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매주 일요일은 ‘풀 러시의 날’로 하루종일 게임을 하는 유저도 있을 정도였다. 연구 방법 이 연구는 대상을 분석하기 위해 최소 3가지 이상의 연구방법을 결합했다. 첫째로, 우다이푸르 남성 청년들이 게임에 몰입하고 게이머 정체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탐색하기 위해 3개의 게이밍 존에서 6주간 참여관찰이 동반된 에스노그라피를 수행했다. 일반적으로 각 존에 12-15명 정도 있는 정기 플레이어들이 연구의 초점이 되었고, 아침과 저녁 최소 1시간 반-최대 3시간 가량 필드노트를 동반한 관찰이 진행되었다. 둘째로, 게이밍 존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비공식 인터뷰를 수행했다. 인터뷰에서는 게이밍과 게이머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이들이 삶에서 받는 직업과 결혼에 대한 압박의 문제까지 다루고자 했다. 셋째로, 설문조사를 통해 이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게이머’ 정체성 모델의 네 가지 핵심 구성 요소를 식별했고, 이 요소들이 어떻게 이들의 긍정적/부정적 게이밍 경험과 연결되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네 가지 핵심요소는 아래 서술할 에스노그라피에서 드러난 4가지 요소(가까운 게이머 친구들 보유, 글로벌 게이머 공동체와의 연결감, 프로 게이머에 대한 꿈, 게이머 하위문화 소속감)이며, 긍정적/부정적 게이밍 경험은 드레슬러의 방법론에 따른 21문항 측정도구를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우다이푸르 청년들이 진정한 게이머 정체성에 가까워진다고 느낄수록, 긍정적 게이밍 경험(즐거움) 뿐 아니라 부정적 게이밍 경험(이에 수반되는 고통) 또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설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위 3가지 분석 결과에 기반한 측정을 시행하여 우다이푸르 청년들이 갖는 긍정적 게이밍과 부정적 게이밍에 대한 문화적 모델을 도출했으며 이것이 개인의 건강 결과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에스노그라피 연구 방법과 결과 "모두가 모두를 안다(Everybody knows everybody)" 먼저, 인도의 게이밍 존은 우다이푸르 청년들에게 강력한 우정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게임하기 좋은 환경을 찾아 이곳에 왔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두 알게 될 정도로 가족 같은 관계가 되었다. 이들은 게이밍 존에서 자기 시간의 절반 이상을 플레이어가 아닌 ‘관전자’로 보내는 시간에 쓴다. 관전하는 동안 팀원들이나 온라인 친구들에게 지시나 명령을 외치며, 휴식 시간에는 차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다음 전략을 논의한다. 게이밍 존에서 이들은 욕설을 하거나 시끄럽게 외치고, 놀리거나 장난스럽게 때리며 상호작용한다. 그간 공공장소에서는 쉽게 용납되지 않았던 행위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 담배에 마커로 이름을 적어 게이밍 존 주인의 서랍에 보관한다. 게이밍 존에서 거래되는 담배, 차, 간식 역시 비공식적인 ‘우정의 화폐’로 자리한다. 글로벌 게이머 공동체 우다이푸르 청년들은 글로벌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을 통해 전세계의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친분관계를 맺고 소통했다.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를 플레이했는데, 여기서 접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그들의 국가적·종교적 정체성을 초월하게 만들었다. 이라크에 사는 길드 친구가 게임에 들어와 자국의 전투가 소강됐다는 소식을 전해 주기도 했고, 파키스탄 무슬림들과 자연스럽게 팀을 맺고 플레이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게임을 하는 동안만큼은 이들은 그저 ‘게이머’였으며, 카스트나 종교, 지리와 같은 다른 소속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연구참여자들은 플레이 도중 힝글리시(hinglish, 힌디어 모어 화자의 인도식 영어)를 활용해 본인의 영어 실력과 게임 지식의 능숙함을 드러내기를 즐겼다. 이들이 자신들을 ‘진정한 게이머’로서 타인들과 구별짓는 지점은 게이밍에 대한 열정과 글로벌한 소속감을 만들어내는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담배, 에너지음료, 정크푸드로 상징되는) 자신을 ‘중독자’로 규정할 수 있는 특정한 소비 패턴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꿈 연구참여자들이 느끼는 게임의 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게이밍이 자신에게 인생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열정이나 동기, 경쟁심을 제공해주었다고 답변했다. 특히 이들은 게임 실력을 연마하여 꾸준하게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얻었다. 이를 위해 유명 팀들 사이의 매치 라이브 방송을 꾸준하게 시청했으며, 장시간 깨어 있기 위해 담배와 에너지음료를 필수로 챙겼다. 게이밍 존 소유주들도 이들의 열정을 알고 존들 간의 지역 매치를 조직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우다이푸르의 ‘진지한 게이머’ 청년들 대부분은 프로 게이머로 데뷔하는 것을 꿈꾸었다. <도타 2> 플레이로 유명해진 ‘인디언 울브즈’ 같은 인도의 프로 e스포츠 팀들은 이런 꿈을 꾸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데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진짜 게이머’의 타이틀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게임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고 인터넷이 불안정한 소도시 출신이기에, 이러한 꿈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일정 부분 인식하고 있었다. 하위문화적 도피로서의 게이밍 앞서 언급했듯이, 게이밍 존에서 우다이푸르 청년들은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용납되지 않던 일종의 자유를 얻었다. 게이밍 존에서만큼은 비명을 지르고, 싸우고, 욕하고, 거칠게 굴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먹고 마실 수 있는 모든 활동이 허용되었다. 때문에 많은 연구참여자들은 게임의 즐거움을 현실 세계에서 도망쳐 내 문제들을 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 이러한 답변은 우다이푸르의 실업률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청년들이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현실 인식에 근거한다. 좋은 직업은 얻기 어렵고 결혼 또한 어차피 부모가 주선하는 중매로 이미 예정되어 있는데,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면 자기의 게임 생활은 완전히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게이밍 존이라는 공간은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분리된 일종의 매직 서클(magic circle)과 같은 장소로서, 연구참여자들이 도피하고 싶은 압박적인 상황으로부터 해방이나 문화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바로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 공간은 연구참여자들이 다시 맞닥뜨려야 할 실제 세계의 공간 및 관심사와 중요하게 연결된 채로 남아 있었다. 사회적 도덕 공황: 기술 중독(a technical addiction)이라는 담론과 정서적 고통 앞서 언급했듯 힌두교의 브라마차리아 담론에서 게임은 중요한 인생의 준비 시기를 망칠 수 있는 행위로 간주된다. 남자들이 가정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의 ‘동물적’ 충동을 최대한 통제하고 관리해야 할 시기에 게임을 하는 것은 무절제한 시간낭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이는 우다이푸르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연구진들에게도 내재화된 관점이었다. 전통적인 브라만 출신인 한 연구진은 참여관찰 단계에서 연구참여자들의 무절제한 욕설과 줄담배 흡연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인도 우다이푸르 사회에서 게임이 비난받는 맥락은 남성 가장의 역할규범 외에도 ‘기술에 대한 (세대적) 비난’과 결합되어 있다. 우다이푸르 기성세대의 일부는 인터넷이 인도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며, 청년들의 90%가 쓸데없는 인터넷 중독에 빠져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기성의 젠더규범 인식과도 연결된다. 인터넷이 청년 남성과 여성을 부적절한 관계로 끌어들이고, 서구 라이프스타일을 베껴서 혼전 성관계의 유행과 강간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들 사회가 제시하는 적절한 인터넷 사용의 예시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미래 직업을 배우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할 때로 한정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연구참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게임에 중독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100시간 연속으로 플레이한 연구참여자들도 많았으며, 게임으로 인해 성적이 떨어지거나 출석률을 못 지켜 수업 참여가 금지되는 등 학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끊임없이 게이밍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해요(karna to hai)”라 설명하면서도 재빨리 자신과 친구들을 중독자 혹은 시간 낭비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명명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설문조사 및 측정 분석 결과 먼저 설문조사 표본에 대한 기술통계 분석 결과, 응답자들에게서는 긍정적 게이밍 경험이 부정적 게이밍 경험보다 조금 더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온라인 공동체를 통해 적절한 사회적 소속감과 지원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 삶에서 크게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설 검증 단계에서는 진정한 게이머 행동 모델의 4가지 요소 (가까운 게이머 친구들 보유(H1), 글로벌 게이머 공동체와의 연결감(H2), 프로 게이머에 대한 꿈(H3), 게이머 하위문화 소속감(H4)) 들이 긍정적/부정적 게이밍 경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했다. 응답자들에게서는 앞의 세 가지 변수가 강할수록 긍정적 게이밍 경험 보고가 증가했다. 반대로 게이머 하위문화 소속감의 경우 부정적 게이밍 경험이 높아질수록 강하게 드러났다. 이는 응답자들이 느끼는 게이밍의 즐거움이 주류 인도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게이머 대항문화에 소속된다는 점에서도 비롯됨을 보여준다. 이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전반적인 분석 결과 긍정적 게이밍 경험과 부정적 게이밍 경험은 강하게 양의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높은 긍정적 플레이 경험을 갖는 플레이어들은 대다수가 동시에 높은 부정적 플레이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긍정적 플레이 경험을 추동했던 변수들은 각각 더 높은 부정적 게이밍 경험과 연결되었다. 즉, 우다이푸르 남성 청년의 게이밍 경험에서 양자는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경험이 아니라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론 이처럼 게임 플레이에 대한 우다이푸르 청년들의 양가적인 감정은 게임의 긍정성과 부정성이 대립되는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이 게이머 하위문화와 주류 사회 속에서 경험하는 ‘문화적 불협화’의 두 가지 얼굴로 해석할 수 있다. 하위문화와 주류 사회라는 두 세계가 가지는 양립 불가능성이야말로 연구참여자들의 정체성과 의식을 이중적이고 분열화시키는 기제이다. 이들이 게임을 하면서도 내재된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이 단순히 게임 속 세상에만 고립되어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전제로 플레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연구진은 우다이푸르 청년들이 자기 게이밍을 ‘중독’이라 의미화하는 것은 자신들이 처한 인지적, 정서적 불협화를 최소화하는 또 다른 하나의 방안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게이머 정체성과 인도 사회의 일부로서 남성화된 규범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 사이에서 이들은 전자를 일시적 중독으로 의미화함으로써, 자기의 미래의 삶을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올려놓고 현재에 자신이 겪는 고통이나 스트레스, 불화하는 감각을 최대한 줄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우다이푸르 청년들의 하위문화로서 게이밍 경험에 대한 분석이 기존 게이머들에 대한 분석적 시선을 확장해 준다고 본다. 그간 게임 중독이라는 문제는 생체의학적 관점에서 약물이나 도박 중독과 같은 정신질환의 문제로 다루어졌거나, 혹은 문화적 관점으로 갈 경우 소비주의를 조장하고 청/소년의 도덕성을 위협하는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의 유발 기제 정도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연구의 참여자들이 ‘자기 스스로가 위험하게 온라인 게임에 중독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야말로 게이밍 중독에 대한 사회적 공황 이론을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정리하며 우다이푸르 청년들에 대한 ‘문화적 불협화’라는 저자들의 관점은, 특정한 하위문화 집단을 저항과 복종이라는 이분법에 근간해서 판단하지 않으려는 연구진의 지적 노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게이밍 존에서 이들이 보여준 문화는 주류 인도 사회가 가정하는 지배적 남성성의 규범들에 일정 부분 대항하고도 있지만, 동시에 이들은 스스로가 주류 집단에서 벗어난 사회적 거부자 혹은 ‘루저’ 라는 낙인을 일정 부분 내재화하고도 있다. 주류 규범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이들의 이중적인 상황은 (미래에는 어차피 게임 생활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위치를 일시적인 중독자로 격하하는 행동으로 현상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게임 중독의 문제를 어떻게 기존의 문화적 접근과 다른 방향에서 논의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글이기에, 우다이푸르 청년의 하위문화가 갖는 대항성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지 못한 것은 한계로 남는다.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의 주요 리뷰어 중 하나인 레슬리 조 위버의 지적은 매우 유의미하다. 논문에서 더 논의되어야 했을 사항은 청년들이 단순히 중독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도 이러한 불협화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불협화를 해소하려 노력하는지, 나아가 게이머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인도 가부장제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라는 좀더 심층적인 분석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논문이 이런저런 맥락에서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떠올리게 하는 만큼, 이들의 문화적 불협화가 인도 사회의 더 큰 문화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남성 중심성과 마초성에 대한 광범위한 규범을 어떻게 재생산하거나 혹은 벗어나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 Back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01 GG Vol. 21. 6. 10. 미술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아주 짧게 정리하자면 원근법은 3차원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재현할 때 필요한 방법으로, 입체인 3차원 세계를 실제로는 입체가 아닌 2차원 평면 위에 재현하면서 마치 입체인 것처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기도 하다. 화면 안에 적용된 원근법은 화면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드(grid)로 분할한다. 그리고 이 그리드를 기반으로 대상의 크기나 비율, 선명도, 색상, 명암의 방향 같은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원근법은 무엇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관객의 눈은 어디에 어떻게 참여할지 같은 질문들, 더 나아가 화면의 전체적인 풍경을 결정하는 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리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린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 안의 모든 것이 배치되는 규칙, 어떤 것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를 결정하는 화면 구성의 내적 논리의 설계 방법론이다. 우리의 눈과 뇌는 화면이 제공하는 원근법에 의거하여 화면 내부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인식하고 그 내부의 공간감에 우리의 신체를 동기화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입체감을 가지지 않는 평면 매체에서 원근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 회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원근법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은 언제나 기묘하거나 이상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모니터라는 평면을 사용하는 게임에서는 어떨까? 게임 내 원근법과 캐릭터의 이동, 크기, 비율 문제는 우리의 플레이 경험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MMORPG 게임의 경우 몬스터가 아닌 이상 혹은 몬스터조차도 배경 세계의 원근법에 착실히 순종한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게임이 설정한 휴먼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며 캐릭터를 제외한 인게임 요소들, 예컨대 건축물, 아이템, 탈 것, 펫, 배경 같은 것들도 캐릭터의 크기에 맞추어 하나의 완결되고 고정된 원근법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한다. 반면 1인칭 FPS 게임에서는 이 원근법이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서든어택이나 오버워치 같은 게임들에서는 주로 화면 정 가운데에 십자 모양이나 원, 탄젠트형의 에임(aim)이라고 부르는 조준점이 있다. 이 에임에 맞추어 1인칭 플레이어의 무기를 든 손이 정렬되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1점 투시 원근법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면 중앙에 소실점(vanishing point) 하나가 놓이는 1점 투시 원근법의 제1규칙, 가장 중요한 것을 소실점에 놓는다는 규칙은 회화에서 수차례 변용되었고, (프레임이라는 천성 때문에 회화에서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지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무엇을 둘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이런 게임들이 상정하는 게임 내 원근법은 우리의 실재와 최대한 유사하게 조성한다는 하나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게임들의 카메라가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 시야로 날뛸 수 있느냐에 상관없이, X축과 Y축은 고정되어 있다. 아주 잠시 이색적인 뷰로 한 장면을 비춘다고 하여도 플레이의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는 X축과 Y축이다. 그러나 AOS 게임의 경우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도타나 카오스(CHAOS),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같은 게임들이 포함되는 AOS 게임의 경우 축약되고 매우 인위적으로 가공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용하며 이미 우리의 실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원근법, 그러므로 쉽게 도식화하기가 곤란한 형태의 원근법이 화면을 구성한다. 내가 가장 많이 플레이 해 본 리그 오브 레전드를 두고 논의를 좁혀 보자. 일반적으로 2차원 평면을 사선으로 기울인 쿼터 뷰(Quater View)를 사용하는 2.5차원 게임에서 X축과 Y축은 마름모 모양의 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맵을 비교해 보면 전자의 맵은 다이아몬드형, 후자의 맵은 정사각형으로 보기에 약간 다르지만 쿼터 뷰 게임이 설정하는 X축과 Y축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의 협곡 지도 (출처: 좌-쿠키런 킹덤 공식 유투브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VUIy7RaHcL4, 우-리그오브레전드 나무위키 https://namu.wiki/w/소환사의%20협곡)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특히 더 흥미로운 것은 이 Y축이 Y축이 아니라 X축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있다. 퀸의 ‘후방지원’이나 자야의 ‘저항의 비상’ 같은 특정 챔피언의 특정 스킬은 X축 면에서 도약하며 (미니)맵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인게임 Y축을 가시화한다. 아예 Y축의 패러미터를 벗어났다가 돌아오는 형식의 스킬을 사용하는 갈리오나 판테온 같은 챔피언들도 있다. 아주 얕은 수준이지만 렉사이 같은 챔피언은 X축 평면 아래, 즉 -Y축의 공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의 시점을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2.5차원 쿼터 뷰로 설정하면서, 앞서 언급한 챔피언들이 스킬 사용으로 지면을 도약하면서 인 게임 원근법을 떠받치는 X축과 Y축이, 그리고 숨겨져 있던 Z축이 등장하며 서로 뒤엉키게된다. (좌, 그림 2) 쿼터 뷰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우, 그림 3)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챔피언이 지면을 도약하면 지면 위에서 이동 시 Y축이 자연스럽게 Z축으로 변하고, 챔피언이 도약하는 방향은 Y축으로 새롭게 등장한다. 챔피언은 X축의 연장된 면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X축의 방향이 달라지고, 여러 개의 방향이 이어지면서 X축은 (그림 2의 Y축이었던) Z축까지 가 닿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근법에 상관없이, 각 라인은 미니맵에서 보여지는 순서대로 탑-미드-바텀이다.) 즉, 리그 오브 레전드의 원근법은 고정된 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게임의 원근법은 캐릭터의 이동과 도약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축들을 뒤섞는다. 플레이어는 평균 20분의 플레이 타임 안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유동적인 축들에 놀랍도록 매끄럽고 빠르게 적응하는데, 이는 이전의 초지일관(初志一貫)적 시각성과는 물론 다른 양상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하나의 세계가 제공하는 원근법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다시 저것에서 이것으로 전환되는 유동적인 원근법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우리의 변화된 시각성이기도 하다. 이에 덧붙여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스킨이나 캐릭터의 크기가 스킬의 적중 여부를 좌우하기도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챔피언 스킨 때문에 게임 내에서 챔피언의 크기와 부피, 모양, 그리고 스킬의 크기와 부피가 달라지면 조준의 방법도 미세하게 바뀌게 된다. 최근 추가된 서리불꽃 건틀릿(Frostfire Gauntlet) 같은 아이템에는 챔피언 크기를 키우는 옵션이 달려 있다. 인터넷에서 롤 챔피언 크기라고 검색하면 이 옵션이 도대체 왜 있는 거냐는 플레이어들의 의문과 위엄을 위하여, 재미를 위하여, 논타킷 공격을 대신 맞아 아군 보호, 사거리 증가 등의 답변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자신의 기존 캐릭터에 맞추어져 있던 원근법의 축 변화와 그로 인해 재구성된 시각성에 기반하는 공간감에 시시각각 적응하고야 만다. 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시각성이 기존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이 글의 주장을 보완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캐릭터의 비율, 스케일, 거리감, 공간감 등 원근법에 관여된 여러 문제들이 관건에 오르게 된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 “이걸 맞는다고?” 혹은 “이걸 안 맞는다고?”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떨 때는 내 캐릭터에 스킬이 닿지 않았는데도 맞았다는 판정, 닿았는데도 맞지 않았다는 판정이 의아하기도 하다.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판정의 순간은 오히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형성하는 공간감, 하나의 원근법에서 다른 원근법으로 교체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할 시각성에 관하여 고민하기에 더 없이 적절한 출발점이다. 모니터 평면 안의 크기와 비율, 스케일과 동기화되어 있던 우리 신체의 공간감이 끊기고 기존 원근법의 축이 변화하는 지점, 플레이 시간 내내 계속해서 눈의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인 게임 원근법의 변화무쌍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한다.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1] 물론 입체 매체, 예를 들자면 조각에서도 원근법은 중요한 문제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고대 그리스 조각들은 사람의 실제 몸과 비교하자면 머리가 훨씬 더 크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각을 주로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기 때문인데, 실제 사람의 비율대로 제작하면 멀리 있는 머리가 더 작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원근법은 크기와 비율의 문제에 관여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김얼터 리얼리티, 리얼리즘, 픽션, 그리고 매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시험하는 사물을 좋아한다. 미술 전시와 전시에 관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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