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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 Back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21 GG Vol. 24. 12. 10. -이 글에는 <마우스워싱>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노스탤지어적 로우 폴리곤 역사학자인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는 저서인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에서 다양한 시대와 형태의 노스탤지어를 소개한다. 디즈니의 영화 리부트나 N64와 같은 1990년대의 미디어가 2020년대에 각광받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아널드포스터는 세대론적 관점을 제시한다. 2020년대 초반에 성년이 된 사람들이 1990년대에 태어났으며, 이 시기는 또한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라는 설명이다 [1] . 실제로 itch.io와 같은 인디 플랫폼에 제출된 로우 폴리곤 기반의 게임들, N64나 PS1을 키워드로 게임의 제작자와 향유자는 노스탤지어를 적잖이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들 90년대생이 유년기에 향유하던 게임의 추억을 현재로 데려오고자 하는 시도로써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양식의 게임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배경으로는 제작에서의 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호러 인디 게임 컴필레이션 을 엮은 브레오간 해케트는 90년대의 저해상도 3D로 게임을 제작하는 동기로 접근성을 언급한다. “텍스처에 4K 해상도가 필요하지 않고 캐릭터 모델이 수천 개가 아닌 수십 개의 폴리곤으로 계산될 때 솔로 크리에이터가 3D로 전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2] . 그렇게 빚어낸 이미지는 AAA 게임과 직관적인 차이를 구획하고, 와 같은 작품이 드러내듯 아예 스스로를 실패작으로, 인디한 것으로 천명하며 등장하기도 한다 [3] .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기하학적인 신체와 저해상도 텍스처가 지속적으로 향유되는 데에는 특유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3D로의 이행은 명백히 기술적 한계에 직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평면적이면서도 블록 같은 질감은 투박하지만 분명 구체적인 신체성을 지닌 무엇이다. 그 위에 기입된 엉성한 텍스쳐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므로 인식의 혼란을 초래하며 불안을 자아낸다. “때때로 게임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이러한 그래픽은 따라서 호러 장르와 밀접하게 얽히게 된다. 이렇게 레트로 호러 게임이 향유되는 동기를 살펴봤을 때, 지난 9월에 출시된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우스워싱Mouthwashing>은 설명에 모범적으로 들어맞는 사례처럼 읽힌다. 롱 올간Wrong Organ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스웨덴 게임 개발 교육 기관에서 만나 팀을 이뤘다. 거기서 그들은 전작인 <하우 피쉬 이즈 메이드How Fish is Made>를 완성했고, 확장팩에서 후속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우스워싱>의 핵심 인물인 ‘컬리’는 이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가 운행하던 우주선 ‘툴파르’ 호는 천체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게 되는데, 폭발은 컬리의 전신을 강타하며 흔적을 아로새겼다. 작중에서 컬리는 사지와 눈꺼풀을 잃고 극심한 화상으로 인해 신음한다. 게임의 1인칭의 카메라는 플레이어블 아바타와 플레이어의 시점을 융합시키며 가상의 신체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격통이 화면 너머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지는 않기에 끔찍한 몸에 접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특별한 감각을 일깨우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공포는 가상의 육신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붕괴와 결합에서 파생된다. 어떤 퀘스트는 컬리의 살을 자르고 섭취할 것을 종용한다. 딱딱한 플라스틱 덩어리나 다름없어 보이는 저화질의 벌건 살은 가상의 신체가 언제든 인접한 다른 환경으로 무너져 내릴 가능성을 자극한다.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를 향유한다는 게이머 노스탤지어에 관한 설명은 “추억 소환 섹션”에 놓여 있는 대상에 한정한다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4] . <마우스워싱>은 로우 폴리곤이라는 장치가 범연히 1990년대적인 것의 부흥이라고 설명한 바와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상상적으로 구현된 미디어적 참조는 현재적으로 “풍부한 시청각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5] . <마우스워싱>이 엮어내는 영상 소스(뤼미에르 형제의 <유쾌한 해골>부터 1950년대 반공주의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인 을 거쳐 가글액의 광고 화면으로 이어진다)는 로우 폴리곤이 표방하는 1990년대 게임 하드웨어 이전의 시기까지 소급해 가며 현재화를 시도한다. 주권성에 대한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로 상상되는 과거는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노스탤지어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시간에 속한 순간들”에서 촉발되는데, 결국 “현재 우리가 보유한 가치나 윤리, 자기감에 더욱 부합하게끔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6] . 이 지점에서 90년대와 지금 사이의 연속성을 되짚어보게 된다. <마우스워싱>의 내러티브가 디디고 있는 역사적 토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다. 80~90년대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구현된 신자유주의는 “사사화privatiation와 개인의 책임”을 핵심으로 한다. “부와 의사 결정이 대중과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정책 결정 기구에서,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책임지지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 [7] . 그 결과 구조 조정과 노동유연화, 고용 불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풍경이 삶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마우스워싱> 속 툴파르 호는 마지막으로 남은 유인 우주 화물 서비스를 전문 기업인 포니 익스프레스의 소속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 속에서 승무원들이 화물을 운반하는 와중에 툴파르 호가 소행성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부함장인 ‘지미’는 구조가 올 때까지 다른 동료들을 책임지고 건사하고자 한다. 한편 비선형적으로 이어지는 게임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고의 전후를 퍼즐처럼 재구성하도록 요청한다. 작중에서 상기의 영상 콜라주는 한 장의 메일을 트리거삼아 재생된다. 그 메일이란, 본사는 이번 배송을 완료한 후에 툴파르 호의 인원이 전원 해고될 것이며 포니 익스프레스의 서비스가 무인 체제로 전환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컬리가 함장의 자격으로 그 메일을 수신하는 장면은 잠시 중지되고, 구시대의 애니메이션들이 흘러나오며 경제적 주체로서의 가장과 같은 자본주의의 유익한 삶을 역설한다. 이미지의 잡동사니가 멎은 자리에는 끄트머리가 꺾여버린 사다리들이 놓여 있다. 사다리는 컬리가 지미와 나누었던 대화를 환기하는 요소다. 컬리 : ...최근 이런 생각을 좀 해 봤어. 이걸로 충분한 건가? 지금까지 잘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되나?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으로 말이야. 지미 : 그게 안 좋은 건가요? 컬리 : 내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거야. 안 좋지는 않아. 하지만... 아주 무서운 일이지. 이런 생각이 들어. “이게 내 최선인가?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 지미 : 이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랐는데... 애초에 잘못된 사다리를 오른 건 아닐까 생각하신다는 거죠.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한참 위까지 올라가셨잖아요. ...전 아직도 그 사다리를 끝없이 오르고 있는데 말이죠. 『잔인한 낙관』을 저술한 로런 벌랜트는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좋은 삶’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애착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우리는 소진되거나 마모되면서도, 더 좋은 삶이라는 환상에 애착을 품는다.“잔인한 낙관은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대상에 애착심을 유지하는 상태”이며 또한 “우리에게 ‘좋은 삶’이라고 호명하는 대상에 대한 정동적 애착심 속에 기거하면서 ‘좋은 삶’을 살펴보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하다 [8] . 위의 대사에서 컬리는 지금껏 유지해 왔던 삶의 형식이 어느 정도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황을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벌랜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마모된 주체인 그는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이 주는 낙관이 불능에 처했음을 미묘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허무감을 공유받는 지미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다리의 ‘한참 위’에 있기에 가능한 토로라고 일축한다. 그러므로 사고 이후 임시 함장이 된 지미는 지속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되뇌며, 부상으로 불능 상태가 된 컬리를 대신하려 한다. 지미는 선원들의 안위와 툴파르 호의 위기를 책임지려 한다. 더 나아가서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함으로써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지미는 생존 물품을 찾아보기 위해 운송 창고 개방을 결단한다. 창고를 개방할 수 있는 열쇠는 함장만이 소지 가능하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휘두른 주권은 곧 미끄러진다. 영상의 콜라주로 이어진 시퀀스가 종료되면 마침내 플레이어는 창고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물은 생존에는 하등 쓸모없는 가글액에 불과하다. 이 가글액은 포니 익스프레스가 직접 생산하지 않은 물건일뿐더러 1950년대의 애니메이션과 병치된 광고 형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목전으로 닥친 자동화와 무인화의 미래를 절대 극복해 주지 못할 물건이다.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는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 함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주권성이란 객관적 상태라고 오인된 환상”으로 “개인적, 제도적 자기 정당화의 수행성을 열망하는 입장이며, 그 입장이 안전과 능률성을 제공한다는 환상과의 관계 속에서 통제권을 갖는다는 정동적 느낌”이다 [9] . 일반적으로 법에서는 주체를 행위하고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는 범박한 의미에서의 게임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해 상호작용 하는 미디어로 정의된다는 지점을 환기한다. 지미의 행위를 견인하는 동기는 플레이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로우 폴리곤 아바타를 꾸역꾸역 붙들고 있는 이유와도 일치한다. 툴파르 호와 승무원을 건사하는 것이다. <마우스워싱>의 게임 플레이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나가는 일방적인 워킹 시뮬레이터식 진행에 가깝다. 이 같은 구성은 전권을 휘두르는 주권성으로부터 비껴 나간다. 사고 당시를 재연하는 프롤로그는 이어질 전개의 메타포다. 소행성이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가운데,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돌리라는 경고문이 주어지지만 플레이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왼쪽으로 꺾는 일뿐이다. 여기서 주권성은 실패한 선택지를 고르는 데에 발휘된다. 그렇게 지미는 툴파르 호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플레이어는 지미의 ‘업보’를 책임지지 못한다. 1인칭 카메라를 활용한 시점 트릭은 여태껏 플레이어가 불완전한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시점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며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마우스워싱>은 노스탤지어적 장치를 활용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짤막한 역사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있다. 잔인한 낙관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은 <마우스워싱>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모든 관계가 파탄 난 상황 속에서 지미는 부상당한 컬리를 수면 장치에 밀어 넣는다. 비록 컬리는 망가진 신체와 고통으로 잠 못 드는 신세임에도 일단 수십 년간 냉동 수면 상태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구조되리라는 일방적인 기대에 내걸린다. 훗날 컬리가 어색하게 눈을 떴을 때, 그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1]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손성화 역.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서울: 어크로스. 2024. 273쪽. [2] Natalie Clayton, “The horror games harking back to the PSone era”, 2019.10.31.등록, 2024.11.05.접속, WhyNowGaming, [3] 이 게임은 닌텐도 64를 위한 게임을 “야심넘치게 개발하다가 프로젝트를 폐기할 위기”에 놓인 일련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https://l4ndo.itch.io/abandoned-64 [4]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273쪽. [5] Natalie Clayton, 위의 글. [6]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15쪽. [7] 리사 두건. 한우리·홍보람 역. 『평등의 몰락-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 현실문화. 2017. 57쪽. [8] 로런 벌랜트. 윤조원·박미선 역. 『잔인한 낙관』. 서울: 후마니타스. 2024. 48·55쪽. [9] 로런 벌랜트. 184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게임이 이야기를 경험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최근에는 <마라톤>을 플레이했습니다.
- 플레이시간의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 탕진의 재미와 축적의 재미
온라인게임 시대가 만들어낸 이 변화는 놀이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전환을 만들어냈다. 노는 일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놀이의 본질은 일종의 무용함, 생산의 시간에 맞선 시간 탕진의 즐거움에 가까웠지만,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그 무용함의 효용마저도 상품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 Back 플레이시간의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 탕진의 재미와 축적의 재미 21 GG Vol. 24. 12. 10. 놀이로서의 디지털게임: 생존, 노동, 여가의 세 분류 안에서 디지털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즐거움을 찾기 위한 유희, 놀이로서의 게임 플레이 행위 안에 디지털게임 플레이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놀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행위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특정한 행위에 들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행위의 결과로서 무언가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산출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시 새겨보면, 결국 놀이를 정의하는 데 있어 전제되는 것은 놀이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놀이 행위에 투여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투여되는 것은 다름아닌 시간이다. 물리학적인 시간일 수도 있고, 혹은 인간의 24시간 일상이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가능성의 범주일 수도 있다. 생명유지를 위해 필수로 써야 하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시간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생산에 투여하는 노동시간이 아닌 제 3의 시간 사용으로 우리는 예술, 문화, 놀이와 같은 영역에 시간을 쓴다. 인간의 시간을 아주 크게 세 덩이로 나눈다면, 생존 – 노동 – 여가라는 세 가지 분류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매체와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상품으로 자리잡은 디지털게임 디지털게임 플레이를 포함한 놀이와 여가 전반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소비하지만, 기존의 놀이, 여가와 달리 디지털게임에서는 많은 경우 시간과 함께 돈을 써야 한다는 전제가 덧붙는다. 최초의 디지털게임을 이야기할 때 수많은 초창기 프로토타입 중에서도 <퐁>이 거론되는 이유는 이 게임이 본격적인 상업적 게임이고, 그 상업성을 딛고 생산과 유통 양 측면에서 유의미한 대중화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게임의 대중화는 디지털게임의 상업적 성공을 딛고서야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여러 놀이 중 시간과 돈을 함께 써야만 하는 것이 오직 디지털게임만의 특징은 아니며, 이는 상업성에 기반한 현대의 많은 대중문화들이 공통적으로 딛고 있는 전제다. 놀이문화 전체를 큰 역사적 범주에서 본다면, 시간을 쓴다는 공통전제 안에서 우리는 경제적 소비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놀이가 등장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적 여가의 시대를 놀이의 두 번째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돈과 시간을 함께 쓰는 자본주의 시대 놀이로서 디지털게임은 그러나 다른 대중문화의 놀이와 매체 자체의 특성을 통해 차별화되는데, 바로 돈과 시간이 독특하게 어우러지며 서로 등가교환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다. 구매나 대여를 통해 접하는 책이나 영화, 광고시청과 같은 간접적 방식의 돈/시간 소비를 활용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매체에서는 금액을 지불한 만큼의 향유시간을 구매한다고 볼 수 있는 패턴이 나타나지만, 디지털게임에서는 그와 더불어 경우에 따라서는 놀이시간 자체를 현금지불을 통해 대체할 수 있는 방안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시절의 디지털게임: 숙련도와 현금의 교환관계 디지털게임에서의 시간/돈 소비는 초창기에는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과 유사한 맥락으로 나타났다. <퐁>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게임기에 동전을 투입하고 일정한 플레이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공공 기기에 대해 일련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사용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가깝게는 그 이전의 놀이기구들이었던 핀볼이나 주크박스와, 조금 더 멀고 넓게는 공공장소의 기기 대여라는 의미에서 영화 상영의 방식과 유사했다. 초창기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시작된 디지털게임 문화는 한국의 경우 21세기 전까지 이어진 오락실 문화를 중심으로 디지털게임의 일반적인 소비방식을 돈과 시간을 결합해 사용하는 형태로 대중 및 소비자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런데 다른 매체와 달랐던 점은, 이러한 지불방식은 디지털게임에서는 소비자/이용자의 숙련도에 따라 1코인당 플레잉타임이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이른바 가성비, 일정한 금액을 투여한 뒤 얼마만큼의 시간동안 기기를 점유해 플레이할 수 있느냐가 다른 매체와 달리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의해 좌우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 때 돈과 시간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게 결합했다. 기계에 코인을 넣는 일은 일정한 기회를 대여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기회의 시간은 숙련도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고 숙련도를 키우는 길은 개인차를 떠나 더 많은 동전을 투입하여 실력을 쌓는 길이었다. 개인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많은 돈을 지불하고 오랫동안 기계를 점유할수록 1코인당 점유시간은 늘어나는 구조라는 것이다. 책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읽는다고 책값에 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물론 만화대여점 같은 경우 시간 단위로 이용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매체의 유통채널이라기보다는 공간대여로서의 의미가 더 크니 예외로 두자) 게임의 경우에는 효율적인 플레이를 숙달할수록 1코인의 가치가 올라가는 구조였다. 게임에서 시간과 돈이 엮이는 독특한 형태는 이미 아케이드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온라인시대의 현질은 시간과 돈을 맞교환하는 과정이다 1970년대 말부터 이뤄진 가정용 콘솔과 PC의 보급을 통해 디지털게임의 소비는 공공기기 대여에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직접 구매해 소유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게임기기를 개인이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는 다시금 다른 매체와 유사한 형태로 돈과 시간의 문제가 얽힌다. 한 번의 구매로 영원히 소유하는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더 이상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스탠드얼론 패키지라는 형태로 콘솔, PC를 중심으로 게임의 구매가 이루어지던 시절의 시간 / 돈 관계는 온라인게임으로 디지털게임의 중심이 옮겨오면서부터 다시금 큰 변화를 맞이한다. 소프트웨어가 서버상에 위치하게 되고, 사용자는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소프트웨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구매 혹은 대여하게 되면서 게임에서의 시간 / 돈 관계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시간 / 돈 관계의 변화는 아이템의 현금 구매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게임이 만든 가상공간 안에서만 도구적으로 유의미한 물질로서 인식되는 아이템은 대체로 게임 안에서의 플레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이 때의 플레이는 상당부분 시간의 소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력을 가진 검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들여야 하는 사냥, 혹은 레벨업에의 시간 소비가 필수적이다. 그런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구매 가능하게 만들 경우, 게임 플레이에 들어가는 시간은 현금으로 교환가능한 가치로서 다시금 의미지어진다. 기존에는 직접적 교환이 불가능했던 플레이 시간이 현금과 등가교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게임사가 직접 아이템 – 현금의 교환 창구를 만들기 전부터도 시작된 바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서버상에서 작동하는 온라인 MMORPG가 대세가 된 이후, 이용자들은 스스로 특정한 아이템을 현금을 대가로 거래하는 사례들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쌀먹’이라 불렸던, 게임 아이템을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사례들은 게임에서의 시간 / 돈 관계가 변화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례였다. 자동사냥과 아이템거래: 숙련도를 벗어난 새로운 유희적 시간의 의미 이후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 상호 교환이 가능해진 플레이시간과 현금의 관계는 보다 본격화되는데, 여기에는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라는 한계도 일정부분 영향력을 발휘했다. 과거의 스틱, 키보드/마우스처럼 세밀한 컨트롤을 구사하기 어려워진 터치스크린 환경에서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과거만큼의 의미를 플레이 안에서 갖추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플레이의 결과물은 개인의 숙련도보다 한 플레이어가 얼마나 오랫동안의 시간을 사용해 서버에 접속해 활동했느냐의 질문에 가까워졌다. 이 변화의 끝에는 자동사냥이 서있다. 굳이 플레이를 ‘직접’ 하지 않아도, 단지 서버에 접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말해 플레이어가 자신의 숙련도를 활용해 개입하는 전통적 의미의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단지 서버에 접속한 시간만을 인증해주면 게임 플레이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속 플레이의 효율을 올려줄 수 있는 권한, 이를테면 자동사냥 효율 부스트라던가, 애초에 자동사냥 자체의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아이템들이 현금으로 구매가능한 대상이 되면서 게임플레이에서의 돈과 시간은 완벽히 상호 교환이 가능한 형태로 안착하기 시작했다. 탕진의 재미와 축적의 재미가 혼용되는 시대 온라인게임 시대가 만들어낸 이 변화는 놀이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전환을 만들어냈다. 노는 일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놀이의 본질은 일종의 무용함, 생산의 시간에 맞선 시간 탕진의 즐거움에 가까웠지만,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그 무용함의 효용마저도 상품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정말 그 무용함은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내가 생산하지 않는 시간에 만들어냈던 즐거움, 난해한 퍼즐을 돌파하는 과정과 그 결과에서 얻을 수 있었던 희열과, 생산하지 않는 활동임에도 충분한 성취감을 만들어냈던 수많은 가상세계에서의 모험들은 정말 돈으로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끝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다보면, 혹여 이 돈으로 산 즐거움은 과거 시간의 탕진을 통해 얻었던 즐거움과는 다른 무엇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올라온다. 오히려 이 즐거움은 탕진의 즐거움이 아니라, 축적의 즐거움이다. 서버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의 플레이 시간 기록이 현실의 재화와 교환가능한, 혹은 교환되지 않더라도 가상의 그 무언가가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의 즐거움. 사실 우리가 눙쳐서 게임의 재미라고 부르는 효용의 순간은 적어도 시간이 돈과 교환되기 시작한 온라인게임 이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재미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 Back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26 GG Vol. 25. 10. 10. 크래프톤, 게임문화재단과 게임비평잡지를 창간하면서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넣은 아이템이 게임비평공모전이었다. 게임비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보다, 비평임을 자처하는 글들을 뭉쳐 가면서 천천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과정이 있어야만 편집장이 가진 특정한 비평에의 고집이 좀더 다양한 지평에 선 비평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모든 종류의 사고와 글쓰기에 뛰어들기 시작한 AI에 대한 고민 4회 공모전 응모작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트렌드가 AI의 개입이었다. 절반은 의심이고 절반은 확신이다.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기초적인 글쓰기의 기술적 측면에서 큰 폭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글을 못 썼다’라는 이유로 예심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오늘날의 글쓰기, 특히 공모전과 같이 심사가 곁들여지는 형식의 글쓰기에는 AI의 강한 개입이 나타난다. 나는 글쓰기에 있어 도구로서의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원론적 입장은 아니다. 두 가지 이유로부터인데, 첫 번째는 더 나은 정보와 전달력을 위해 향상된 효율의 도구를 활용하는 것에는 오히려 적극적일 필요도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설령 인공지능과의 협업에 의한 글쓰기를 반대하더라도 이를 공모전과 같은 심사 체계에서 완벽하게 필터링할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다만 말그대로 심사가 이뤄지는 공모전이기에 이는 단순히 합격 – 불합격의 문제를 떠나 애초에 이 공모전을 시작했던 이유까지를 거슬러 되짚어야 할 순간을 만들어낸다. 게임비평웹진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의 목적은 당연하게도 신진 필자 발굴과 육성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주최측의 목적일 뿐, 응모자 입장에서도 반드시 ‘내가 게임비평을 쓰겠어!’라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그저 상금과 스펙을 위해, 누군가는 연습삼아 참가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AI가 개입할 경우 주최측의 고민은 조금 더 깊어진다. 우리가 찾는 것은 게임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꾸준하게 가져갈 수 있는 필자이지만, 그 꾸준한 관심과 통찰을 AI라는 도구를 통해 충분히 가장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고 시상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해당 필자를 지속적으로 게임비평 담론을 생산해내는 사람이라고 짚어내기는 어려워진다. 이런 고민은 비단 게임비평 뿐 아니라 아마도 다른 모든 류의 글쓰기 공모전에서 공통적으로 떠안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GG 공모전은 적어도 GG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계속 지속될 예정인데, 앞으로 모든 심사에서 AI가 던진 이 새로운 고민인 지속가능한 게임비평 필자의 발굴이라는 고민은 더욱 심사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한 응모자 집단 4년째 비평공모전을 이어 오면서 확인한 또 하나의 변화는 헛스윙이 줄어들고 있다는 흐름이다. 1회 공모전에서는 상당수의 응모작이 GG의 정체성과 잘 맞지 않거나, 혹은 아예 게임비평과 무관한 글들이었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나온 주제는 “게임을 마약으로 치부하는 한국사회”, “확률도박이나 만드는 한국게임”, “페미가 게임을 망친다” 였다. 이런 주제들은 주최자의 기운을 빼곤 한다. 애초에 GG가 뭐하는 곳인지 글 하나도 보지 않고 응모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4회째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주제의 응모가 거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나름 길다면 긴 역사에 탑승해 흘러온 결과일 것이다. 적어도 게임제너레이션이라는 웹진이 어떤 글을 쓰고 있고,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해 주는 변화로 보인다. 일반적인 리뷰가 아니라 비평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비평웹진의 독자 수는 아무래도 대중적이기는 어려우며, 이런 경우 독자층은 상당부분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 혹은 의지를 가진 집단과 겹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GG는 과거보다는 좀더 올라간 인지도를 갖게 되었고, GG의 방향에 맞춰 글을 쓰거나, 혹은 GG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아예 응모를 피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 이번 4회 공모전의 결과다. 아직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게임비평의 문제를 넘어 모든 종류의 비평 자체가 과거보다 허약한 대중성으로 인해 사그라드는 추세 속에서 이러한 흐름이 나타난다는 것은 나름 긍정적인 신호다. 아직 사회적으로 다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흐름에 공감하고 게임비평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자 하는 일련의 그룹이 존재하고, 그 존재감이 다소 뭉툭하지만 하나의 덩어리로 만져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지난 4년의 작업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게임비평이 활성화되고, 대중문화 담론에서 갑작스럽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당장 비평의 필요성을 말하는 입장에서 추구해야 할 과제는 큰 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씨 하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나가는 일이다. 언젠가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지금 살려낸 불씨 하나로 비로소 유의미한 불을 지펴낼 수 있는 불지킴이로서의 역할이 비평 전반이 죽어가는 시대에 비평을 생각하는 이들이 첫 손으로 꼽아야 할 일일 것이다. 과도한 무거움 언제가 될 지 모를 시기를 위해 비평의 불씨를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현재까지의 게임제너레이션과 게임비평공모전에 남는 다소간의 아쉬움은 필요보다 과하게 무겁다는 점에 있다. 이는 좀더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냥 무겁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보다 과하게’에 방점을 찍은 무거움이다. 나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간혹 불필요하게 두꺼운 학술의 옷을 걸치려 하는 일련의 글쓰기 습관을 경계하곤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 학술의 옷이라는 건 말그대로 옷처럼 대중 앞에 설 때 쉽게 발가벗기 어려운 일종의 습관이 함께 따라붙는다. 비평이라는 글쓰기가 상당부분 학술적 글쓰기가 일반적인 학계를 통해 학습되는 문제도 있고, 애초에 ‘진지하게 글쓰기’라는 방식에 묻은 스타일 자체가 그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비평이 꼭 학술적이어야 할까?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GG와 공모전의 글들은 학술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학술적인 스타일의 글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중성과 학술성의 가운데를 자임한다고 늘 이야기하는 웹진이지만 막상 거기 실리는 글들의 논지에 대한 근거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학자의 주장을 각주로 다는 것으로 갈음하곤 한다. 특정한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일련의 메시지와 감정들을 재해석하고 설명하는 데 반드시 다른 ‘학자’의 주장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저 손쉽게 남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일종의 잘 갖춰진 우상을 등 뒤에 두고 자신의 해석을 풀어가는 것은 아닐지 경계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글의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불씨를 살리는’ 일과 맞닿는다. 정작 게임비평의 확산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대중적으로 퍼져나가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 같은 글들만이 쌓여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 필요한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적절한 순간을 위해 대비해 온 결과가 맞을까? 이론과 근거를 쌓아나가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GG같은 웹진이 할 일이 아니라, 별도의 재정과 인력을 굴리며 그런 일을 하도록 사회적으로 자리매겨진 ‘학계’가 해야 할 일이다. GG는 아카데미가 아니며, 아카데미어야 할 이유도 없고, 아니 더 나아가 아카데미가 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비평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아주 단순하고 과감하게 요약하자면 결국 모든 비평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 세상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방안을 찾아낸 뒤 이를 세상 모두에게 알리며 공감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비평은 때로는 텍스트를, 때로는 수용자를, 때로는 씬 전반을 주목하지만, 그 주목의 대상이 무엇이건간에 원론적 의미에서의 목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속성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게임에 대한 비평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게임이라는 매체가 등장하고 나름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겪으며 인간과 사회는 게임을 통해 소통하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몇몇 사례들을 통해 게임이 인간을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변화시킨 과정을 목격했고, 반대로 인간이 게임을 새롭게 만들며 더 나은 세계, 혹은 더 어두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동시에 목격했다. 게임비평의 근본적 목적이라면 이 변화가 보다 인간과 사회 전반을 위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방향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을 것이다. 고작 게임 비평 가지고 무슨 거창한 이야기냐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본래 모든 비평의 목적은 그리로 향하는 법이다. GG가 지향한다고 늘 말하는, 학술성과 대중성 사이라는 지향은 사실 이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깊은 성찰을 요하면서도 그 결과가 단지 소수의 그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두에게 향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갖춘 통찰이 게임, 그리고 게임을 넘은 세상 전반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GG 창간의 목적이었고, 아마도 이런 입장에 공감하는 많은 필진들의 목적과도 유사할 것이며, 이런 작업들과 함께 나아가는 비평공모전의 지향과도 총론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년에 열릴 제 5회 공모전에서도 이런 지향이 좀더 많은 동지들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눈 먼 돈 사냥: 멈춰버린 메타버스와 살아있는 메타버스 진흥법
그 시절의 보도자료 중 대부분은 메타버스-NFT&P2E 소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기업이 '메타버스'를 선언했다. 게임사는 물론이고 통신사, 제조사, 심지어 은행까지 너도나도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보도자료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실체가 모호한 가상공간 그림 몇 장에 'MOU 체결', '생태계 확장', '미래 선도' 같은 단어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메타버스를 완성할 열쇠처럼 여겨졌다. < Back 눈 먼 돈 사냥: 멈춰버린 메타버스와 살아있는 메타버스 진흥법 25 GG Vol. 25. 8. 10. 지금으로부터 대략 5년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모두가 집 밖을 나가기 꺼리던 시절, 필자가 재직 중인 회사에서도 유례없는 재택근무를 실시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으로 가득 찬 출근길 지하철을 탈 수 없다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보도자료를 읽던 때였다. 필자는 또렷이 기억한다. 잠옷 바지에 와이셔츠를 챙겨 입고 화상인터뷰를 했던 나날들을. 공교롭게도 그 시절에는 읽을 만한 보도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야외활동 대신 집에서 게임을 즐기라는 세계보건기구의 조언 덕인지 게임 유저는 날로 늘어갔고 매출도 잘 나왔지만, 모두가 원격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기여서 정작 다룰 만한 신작 소식은 드물었다. 여러 주요 기업들은 개발자들에게 파격적인 연봉 인상을 제안하면서 화제가 됐고, '단군 이래 최대 연봉 인상 직종'이라는 농담까지 돌았다. 그 시절의 보도자료 중 대부분은 메타버스-NFT&P2E 소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기업이 '메타버스'를 선언했다. 게임사는 물론이고 통신사, 제조사, 심지어 은행까지 너도나도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보도자료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실체가 모호한 가상공간 그림 몇 장에 'MOU 체결', '생태계 확장', '미래 선도' 같은 단어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메타버스를 완성할 열쇠처럼 여겨졌다. 과문한 필자의 눈에는 대단히 기이한 광경이었다. 수십 년간 'MMORPG' 또는 '가상세계' 내지는 그냥 '게임'이라고 불러온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메타버스'라는 이름표를 달고 미래를 구원할 신개념으로 등장한 것이다. 필자와 비슷한 공감대를 가진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으나, 이 광풍은 수년간 꺼질 줄 몰랐다. 돌이켜보면 좋지 않은 어감의 게임 대신에 '메타버스'라는 비전을 판매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게 투자를 유치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 소란스러운 시장의 움직임을, 정치권에서는 '새로운 기회'의 신호로 읽었다. 기업들이 열광하고 언론이 떠드는 이 '메타버스'라는 것을 국가적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조급증이 퍼져 나갔다. 2025년, 지금 미디어에서 메타버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극히 줄어들었다. 그때 메타버스가 온다던 분들은 지금 인공지능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혹스럽다. 물론 인공지능과 메타버스의 결합을 추구할 수 있을 일이지만, 이렇게도 하나의 개념이 반짝였다가 수그러들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지금부터 필자가 하려는 이야기는 제법 씁쓸하다. 기술 유행어에 편승한 보여주기식 정책이 어떻게 산업 생태계를 왜곡하고 '눈먼 돈'의 향연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소극이자 비극이다. 메타버스의 홍보에는 이런 이미지가 왕왕 쓰였다. (출처: 블록체인어스) # 눈 먼 돈 사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기왕 과거로 온 김에 시계를 조금만 더 돌려보자.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행어가 널리 유포되던 2016년 10월, 정부는 VR을 '9대 국가전략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정하며 본격적인 육성에 나섰다. 2020년까지 VR 전문기업 50개 육성, 1조 원 규모의 신시장 창출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가 제시됐다. 언론은 연일 VR이 게임과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국방, 의료,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쏟아냈다. 이에 발맞춰 과기정통부와 문체부는 수천억 원의 R&D 및 콘텐츠 제작 지원 예산을 편성했다. 전국의 지자체들은 앞다퉈 VR 체험관을 구축하며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예산 편성 소식에 전국의 연구자들과 기업도 발빠르게 반응했다. '다누리 엔진'도 그중 하나였다. 2015년부터 7년간, 357억 원의 세금이 투입된 국책 사업이다. 국산 VR 엔진과 저작도구를 개발해 외산 기술에 대한 종속을 끊고, 'K-VR' 생태계를 자립시키겠다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 VR 엔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실제로 현장에서 사용하는 사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6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의 감사 결과로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났다. 감사를 해봤더니 연구를 주관하는 기관이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실제로 엔진을 개발하지 않았다. 이들이 일을 맡긴 민간 기업이 가지고 있던 외산 엔진(아마 두 엔진 중 하나일 것이다)의 소스코드를 거의 그대로 복사해 '다누리'라는 이름만 붙여놓고는 "자체 개발한 국산 엔진"이라며 허위로 보고했다. 이뿐 아니라 이 엔진은 실사용이 불가능한 미완성 상태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책임연구원은 자신의 제자가 창업한 업체에 7억 원 규모의 용역을 몰아주고, 공동연구기관으로부터 1천만 원의 현금을 받는 등 개인 비리까지 저지른 정황이 포착됐다. 국산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기술 사기와 부패가 공공연하게 벌어진 것이다. 이 '다누리 엔진' 사건은 뒤늦게 알려져 충격을 주었으나 어떻게 보면 수면 위로 드러난 하나의 관행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특별하거나 일회적인 일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습은 필자가 반복적으로 목격해 온, 기술 유행을 좇는 '눈먼 예산'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산업 생태계의 단면에 불과하다. 팬데믹 시절, 필자가 메일로 받은 무수히 많은 보도자료는 대체로 그 유행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눈 먼 돈 사냥 생태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필자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눈먼 돈 사냥’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 과제가 뜰 수 있도록 외곽에서 부채질을 한다. VR나 메타버스는 거기에 동원된 중요한 개념어였다. 공무원들이 설득되고 정부 과제 공고가 뜬다. 이때 일을 쉽게 만들기 위해 산학협력단 또는 컨소시엄을 조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사업계획서에는 온갖 유행어가 삽입된다. 때로는 내부자의 비호 아래 기술도 경험도 없는 업체가 수억 원의 용역을 수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선정된 기업들은 단기 결과물 납품에만 집중할 뿐, 지속적인 서비스 운영이나 고도화에는 관심이 없다. 만들어서 납품하면 시쳇말로 ‘땡’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인력은 흩어지고, 결과물은 방치된다. 전국적으로, 장기적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부터 하나씩 그 예를 불러드리겠다. 오세훈 시장이 65억 원을 투입하고도 하루 이용자 수백 명을 넘기지 못한 채 사라진 <메타버스 서울>, 10억 원을 들여 만들었으나 조악한 품질로 외면받은 <잼버리 메타버스>와 새만금의 실물 체험관, 통영 VR존, 광주 VR/AR 제작거점센터, <메타버스 대구>, <부산 메타버스>, <전주·익산 도서관 메타버스>, <강원 청소년 동계올림픽 메타버스>, 이밖에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VR, 메타버스 제작 지도 자격증과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들… 정부의 VR 사업 진흥 정책으로 본격화된 업계의 관행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흐름을 타고 메타버스라는 유행을 만나게 됐다. 수십억 규모의 메타버스 지원 사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팬데믹이 끝난 지금도 활발하게 서비스되는 메타버스는 사실상 없다. 돈만 쓰고 활용도가 지극히 낮은 결과물만 남게 된 것이다. 소프트웨어로 제작된 프로젝트는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 이제 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다누리 엔진이라는 것이 있었다. 2016년 정부는 VR을 미래 먹거리로 제시했지만,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누리 엔진은 특별한 먹거리를 만들어주지 못했다. (출처: 다누리 엔진) # 후일담이 되었어야 할 이야기 ‘가상현실’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이제는 잠잠해졌다. 우리는 일상을 회복했고, 메타버스는 빠르게 잊혀져 갔다. 팬데믹도, 메타버스 유행도 끝났지만, 지금은 법이 남게 됐다. 후일담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른바 '메타버스 진흥법'이 통과되어 법전에 명문화됐다. 미증유의 아이러니다. 2024년 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같은 달 8월 시행을 시작한 가상융합산업 진흥법은 전 세계 최초의 메타버스 진흥 법률이다. 과기정통부 장관으로 하여금 3년마다 '가상융합산업 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 기관을 지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우선 허용, 사후 규제' 원칙을 적용해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에 대해 법령이 없거나 불분명할 경우, 일단 허용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규제하는 원칙을 명문화했다. 또 정부 주도의 직접 규제보다는 민간 중심 자율규제를 지원하는 체계를 구성했다. 이 법은 논의 단계에서부터 현행 '게임산업법'과의 중복 및 충돌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문체부는 메타버스 안에 게임이 있다면 당연히 게임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제페토>와 <이프랜드> 등의 메타버스가 등급분류를 피하게 되고, P2E의 뒷문을 열어버리면 또 다른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네이버제트를 포함한 업계와 과기부는 메타버스를 게임과 다른 새로운 산업으로 보고, 게임법의 엄격한 규제를 피하려 했다. 결국 접점은 '메타버스 안에 게임이 있다면 게임법의 적용을 받는다'라는 애매한 지점에 형성되었고, 혼란이 해결되기 전에 네이버제트를 제외한 다수의 사업자들이 메타버스에서 한 발 빼면서 지금의 애매한 형국이 나타나게 됐다. 업계는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설명하다가, 자신이 설명하려던 사업을 접어버렸고, 법은 남아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과기부 장관의 기본계획 정도가 거의 유일한 쟁점인데, 정부가 의지가 있다면 전문인력 양성과 연구 개발 기반 조성을 위한 국책사업을 펼칠 수 있다. 그동안 필자는 이 국책사업이라는 것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관해서 길게 설명해드렸다. 여기서는 그만 이야기하겠다. 지난 상반기, 서울회생법원은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사 컬러버스에 파산을 선고했다. 컬러버스는 카카오가 주도하던 프로젝트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SKT의 <이프렌드>도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 국내 주요 게임사들의 여러 메타버스 프로젝트도 거의 빛을 보지 못했다. 미래를 예견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지금까지의 메타버스는 명백히 실패했다. 과거를 점검하고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포스트모템이나 백서라도 잘 남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자들은 그런 일도 하지 않았다. 공공의 지원사업은 물론이요 사기업의 메타버스가 얼마나 근시안적인 프로젝트였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하긴 페이스북도 메타로 사명을 바꾸었으니 국내 기업만 탓할 일은 아니다. 혹자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메타버스의 조합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으나 그 물꼬도 좀처럼 트이지 않고 있다. 화려한 구호와 넘치는 지원사업 대신에 냉철한 평가와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한국형 인공지능을 다누리 엔진처럼 만들 수는 없을 일 아닌가. 정부가 추진 중인 가상융합세계 분야 규제 개선방안 도출 과정표. 과기정통부는 아직 이 계획에 대해 입장을 업데이트하지 않고 있다. (출처: 과기정통부) Tags: 게임산업, 정책, 공공기관, 메타버스, 산업진흥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김재석 8년 동안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서브컬처 스타트업에서 대외협력을 맡고 있다.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논문세미나] 데이터가 만든 신화: ‘동남아 성장 신화’를 주도하는 게임 시장 분석 보고서 비판
그러나 동남아시아 시장의 전망에는 비판도 따른다. 게임 시장 전망을 내놓는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들이 사실은 시장 담론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홍콩과학기술대학교 웡(K.T. Wong) 교수는 2022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며, 뉴주(Newzoo)와 같은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이 만들어낸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 시장”의 서사가 이 지역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구성된 분석이라고 지적한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Leesun Park Studies games from a social perspective. Believes that games, as a tool, ultimately offer a way to explore what it means to be human. These days, mainly writing.
- 제3회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심사평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이 올해로 벌써 세 번째를 맞이했다. 세 차례 모두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응모작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계속 좋아졌다는, 어쩌면 뻔한 총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상향평준화라는 표현이 정확할텐데, 이는 ‘좋은 비평’의 요소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겠다. 응모작들의 평균적인 형식적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 Back 제3회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심사평 20 GG Vol. 24. 10. 10.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이 올해로 벌써 세 번째를 맞이했다. 세 차례 모두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응모작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계속 좋아졌다는, 어쩌면 뻔한 총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상향평준화라는 표현이 정확할텐데, 이는 ‘좋은 비평’의 요소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겠다. 응모작들의 평균적인 형식적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형식적 완성도가 높다고 모두 훌륭한 비평문이 될 수는 없다. 비평문이 단순 경험담이나 감상문과 구별된다는 것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소화되지 않은 이론적 개념에 매몰되어 갈 길도 할 말도 잃은 글쓰기 역시 좋은 비평문이 될 수 없다. 게임 비평가는 게임 애호가와 게임 연구자의 중간에 서서 애정과 이론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공모전에 출품된 48편 가운데 아쉽게 당선권에 들지 못한 글들 중 상당수는 거창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했으나 추상적인 과잉 개념 사이를 떠돌다가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글을 닫은 경우들이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개별심사와 집단 토론을 거쳐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한 네 편의 비평문은—물론 완전하진 않지만—자기만의 분명한 시각을 유려하게 풀어가는 한 편 위와 같은 함정들을 잘 피한 수작들이었다. 각 당선작에 대한 간단한 심사평을 접수번호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평가는 다섯 심사위원의 의견을 종합하여 요약한 것이다. 나원영의 “ 기계장치의 우주 - 레인월드와 아우터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는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게임에 대해 잘 알고 많이 하는 저자가 즐겁게 쓴 흔적이 뚜렷했고, 독자로 하여금 비평문 속 게임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라는 것도 강점이었다. 개념의 투박함이 아쉽고 친절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도 마이너스 요인이었지만, 저자 나름의 시각이 분명하고 앞으로 좋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 또한 높다고 판단했다. 박정서의 “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는 인문학적 관심과 지식을 기반으로 하되 독창적인 시각으로 게임을 바라본 수작이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고 비평 대상이 되었던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신선한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했다는 점이 놀라웠으며, 제목의 압축성이 비평의 핵심 내용과 잘 조응한 글이기도 했다. 군데 군데 현학적 문장들이 독이성을 떨어트리는 점과 결론이 다소 흐지부지되었다는 점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윤수빈의 “ 미술관이라는 공포 체험 ”은 보기에 따라 엉뚱한 비약으로 읽히기도 하고 독창적인 시각으로 보이기도 하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RPG 게임 과 전시회 <게르테나전>을 넘나들면서 시각성과 장소감을 게임에 연결지어 설명한 시도는 다른 글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인다. 반면 자신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비평문의 기능 중 하나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훌륭한 비평문의 요소를 갖춘 글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은의 “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은 게임에 대한 오랜 애정과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둘 다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문장과 문체 또한 유려하여 독이성이 높았다. 하지만 모범적인 구조와 내용이라는 긍정적 평가는 안전한 (비교)구도 속에서 전형적인 내용을 도식적으로 나열했다는 비판적 평가를 낳기도 한다. ‘제 4의 벽’ 개념적 도구로 삼은 <언더테일> 비평을 독창적이라 평가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글의 높은 완성도만으로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상 네 편 외에도 딱 한 두 개의 흠결 때문에 당선작에 포함되지 못 한 응모작이 다수 있었다. 이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글들을 쓴 예비 게임 비평가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앞서 두 차례의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을 통해 이미 좋은 비평가들이 배출되었으나, 우리나라 게임 평론의 토양이 갑자기 비옥해졌을 리는 없다. 이번 3회 공모전을 위해 글을 썼던 저자들, 특히 당선의 영예를 안은 네 분의 새내기 비평가들은 앞으로도 게임 및 게임 비평, 그리고 게임 연구를 향한 애정을 잃지 않고 꾸준한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게임계 전반의 발전에 기여해주기를 기대한다. 제 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윤태진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세대학교 교수) 윤태진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금까지 20년 이상 미디어문화현상에 대한 강의와 연구와 집필을 했다. 게임, 웹툰, 한류, 예능 프로그램 등 썼던 글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모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활동들”을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디지털게임문화연구』라는 작은 책을 낸 적이 있고, 요즘은 《연세게임·이스포츠 연구센터(YEGER)》라는 연구 조직을 운영하며 후배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 게임문화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디아블로3〉는 왜 ‘똥3’, ‘수면제’가 되었는가?
누구든 이 글의 제목이 표시하고 있는 의문에 현혹되어 본문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그의 추억 속에서 디아블로가 스타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민속놀이’에 준하는 반열에 올려져 있음직하다.1) 특정 게임을 민속놀이에 비유하는 표현은, 물론 오래도록 익숙해진 대상에 대한 게이머들의 애정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어느 로맨스도 항상 분홍빛으로만 채색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애정은 옅어지고 힐난과 혐오의 감정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변하게 된 것은 ‘나’와 대상이거나 양자가 달라지면서 마땅히 뒤따른 관계의 양상이지 ‘사랑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hilosophy Researcher) Jiyoung Jang Majored in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studying chiefly modern criticism and cultural history, and has continued research in intellectual history concerning scholarship of the colonial and post-liberation periods. A "game boy" who only belatedly realized he hadn't played, known, or been good at games all that well. (Philosophy Researcher) Geon Choi Drawing on identities both as a philosophy researcher and as a game enthusiast and researcher, has engaged in teaching, lecturing, research, writing, and translation, and currently enjoys the pleasure of sharing thought with students at Inha University and elsewhere.
- 하이파이러시: 같은 뿌리의 리듬과 액션 사이에서
리듬은 사전적 정의에서 ‘일정한 박자나 규칙에 따라 장단과 강약이 반복될 때의 규칙적인 음의 흐름’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있다. 박자에 따라서 음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음의 덩어리를 리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게임에서 리듬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 자체는 연주하는 행위. 혹은 건반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리듬 그 자체보다는 음악 연주를 모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므로 날아오는 노트를 처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 Back 하이파이러시: 같은 뿌리의 리듬과 액션 사이에서 11 GG Vol. 23. 4. 10. 리듬은 사전적 정의에서 ‘일정한 박자나 규칙에 따라 장단과 강약이 반복될 때의 규칙적인 음의 흐름’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있다. 박자에 따라서 음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음의 덩어리를 리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게임에서 리듬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 자체는 연주하는 행위. 혹은 건반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리듬 그 자체보다는 음악 연주를 모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므로 날아오는 노트를 처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리듬 게임 장르의 대부분이 노트를 처리하는 메커닉으로 구성되기는 했지만, 여기에 다른 시각을 더한 타이틀도 있다. 리듬 천국의 개발자 ‘층쿠’ PD가 ‘리듬 천국 골드’ 발매 시점에 진행했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와타 사토루 사장과의 대담을 통해 “최근 소위 음악 게임(리듬 게임)이란 것이 유행했었잖아요. 조금 해보고 있습니다만,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는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리듬보다는 눈으로 보고 누르는 것을 강요하는 것을 강요하는 거죠”라고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층쿠 PD가 갖는 의문은 결국, 음악에서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는 리듬이라는 존재를 타이밍에 맞춰 노트를 누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렇기에 층쿠가 제작한 ‘리듬 세상’이라는 타이틀은 플레이어들이 박자와 규칙을 ‘느끼고’ 조작하는 형태로 시리즈가 이어졌다. 그간 공포 게임을 만들었던 ‘탱고 게임웍스’가 갑작스레 선보인 타이틀, ‘하이파이 러쉬’도 비슷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보고 정확한 타이밍에 버튼을 입력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액션이 시작되는 형태가 아니라, 플레이어인 사람 안에 자리한 박자에 집중하고 이를 메커닉 측면에서 액션으로 구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파이 러쉬는 액션 게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리듬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리듬 액션’이라는 장르적인 측면에서의 정리보다는 액션이라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박자에 주목했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즉, 동작이 가지고 있는 리듬이 더욱 두드러지도록 게임 메커닉을 구성한다는 아이디어가 더해진 것이며, 이는 모든 액션 장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게임에 있어서 음악을 의미하는 ‘리듬’이 아니라, 박자와 규칙의 반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의 리듬이 앞선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어떠한 동작에서 ‘리듬’이라는 것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축구에서 공을 차는 데에도 선수 개인마다 동작에 리듬을 찾아볼 수 있다. 어디서 어떤 타이밍에 공을 슈팅할 것인지. 어떤 템포와 타이밍에 행위를 진행하고 결과를 얻어나가는 것이다. 야구 또한 마찬가지다. 투수가 던지는 공을 타자가 때릴 때에는 모든 동작이 하나의 리듬을 보여준다. 타격을 위해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부터 무게중심의 이동. 배트를 휘두르기까지 이어지는 흐름 자체가 하나의 리듬이 된다. 액션 장르에 있어서 이 ‘리듬’은 플레이어 캐릭터의 동작을 버튼으로 치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동작과 동작을 이어나가는 과정은 단발성 공격에서 시작해 하나의 콤보와 새로운 액션으로 파생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버튼을 누르는 것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동작을 통해 표현되며, 전체적으로 보면 리듬을 구성하는 요소로 자리한다. 하이파이 러쉬는 이 부분에 주목했다. 액션 게임은 결국 버튼으로 플레이어 캐릭터가 동작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서 적을 제압하는 플레이로 귀결된다. 따라서 버튼을 어떻게 누르느냐. 언제 누르느냐의 플레이 형태를 보이기 마련이다. 타악기를 연주하듯이 버튼을 누르는 것 -이는 버튼 입력형 리듬 게임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에서 착안한 메커닉이다. 리듬을 구성하는 요소는 ‘비트’와 ‘템포’로 다시금 나눌 수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액션 장르에서의 비트는 버튼의 연속적인 입력과 동작의 반복이 되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버튼 입력을 수행하는 액션의 속도와 템포가 되는 셈이다. 이 비트와 템포는 하이파이 러쉬가 아닌 그간의 액션 타이틀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빠른 공격의 속도감과 콤보를 테마로 삼은 타이틀에서 두드러진다. 하이파이 러쉬는 액션 장르에서 표면에 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 ‘리듬’이라는 개념을 가장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게임 내의 모든 요소가 구성되도록 했다. 버튼을 누르는 과정 전반이 리듬을 구성할 수 있도록 플레이어를 유도하는 형태다. 이를 위해서 비트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액션을 접목하고 속도감인 템포를 더하는 것으로 특유의 리듬이 느껴지도록 플레이어를 이끈다. 말 그대로 타격한다는 의미의 비트(beat)는 플레이어 캐릭터의 공격 액션이 되며, 비트와 비트의 조합이 콤보 그리고 액션으로 이어진다. 게임 시스템적으로는 공격을 쉬는 ‘레스트’ 버튼을 길게 누르는 것으로 약간의 변주를 가한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 자체가 변경되기는 하지만, 누르는 것을 쉬거나 장시간 누르는 것도 비트를 기반으로 실행되도록 구성했다. 잘 살펴보면, 하이파이 러쉬의 플레이 자체는 드럼을 연주하는 것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타격이라는 점에서도 정체성이 맞물리지만, 플레이어의 박자감을 유도하는 것이 베이스 드럼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공격 시에 나오는 효과음 등이 하이햇과 스네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개발진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동시에 하이파이 러쉬의 메커닉은 플레이어들이 ‘같은 간격으로 버튼을 입력하는 것’을 유도한다. 즉, 해당 타이틀은 일정한 템포(BPM)의 틀 안에서 게임 플레이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는 액션 장르의 문법에서 보자면 이질적이며 쉽지 않은 결정이다. 속도감을 내세우는 타이틀을 몇 가지 떠올려보자. 이들의 경우 다양한 패턴을 가진 적들을 선보이는 것이 일반이다. 이를 통해서 플레이어가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진 적들을 상대하고 파훼하며 극복하는 재미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하이파이 러쉬는 게임 플레이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같은 박자로 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이파이 러쉬가 보여주는 공격의 템포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나마 변화가 있는 것은 배경음악인데, 배경음악의 템포가 130~160 정도로 설정되어 있고 그 안에서도 베이스 드럼이 보여주는 연주의 템포는 변화가 없다.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액션. 그리고 적들의 모든 공격은 바로 이 고정된 템포 위에서 진행된다. 비슷한 속도와 비슷한 간격. 이 두 가지를 통해 적들의 패턴이 구성되며, 일정한 템포는 독특한 플레이를 만들어낸다. 플레이어의 액션과 적의 패턴 모두를 하나의 리듬으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이파이 러쉬에는 엇박자 패턴을 사용하는 적이나 플레이어가 유지 중인 리듬을 뒤흔들 수 있는 적의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의 종류도 많지 않으며 대응 방식도 큰 틀에서는 변화가 적용되어 있지 않다. 일부 적들의 QTE 상황을 제외하면 상황에 따라서 누르는 버튼 조합이 달라질 뿐, 비트와 템포는 같은 악보 위에서 연주되는 셈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속도 / 프레임으로 구성된 액션을 조합하고 적을 파훼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적절하게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액션을 즐기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일정한 속도로. 자신의 리듬을 잃지 않고 비트를 연주하는 것. 게임으로 치면, 일정한 속도로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다. 이는 공격을 해도 마찬가지고 패링이나 잡기를 통해서 변주를 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투 도중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본인의 리듬을 잊을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발진은 게임 내의 모든 오브젝트를 같은 템포로 만들어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주인공인 ‘차이’가 활동하는 게임 내의 장소들. 배경음악. 효과음 모두가 같은 템포 위에서 함께 리듬을 맞춘다. 심지어 차이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도 일정한 속도와 박자를 따라가게 하기 위함이며, 걷는 동작까지 포함해 모든 액션이 개발진이 의도한 레일 위로 플레이어를 유도한다.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비트와 템포. 더 나아가 하나의 리듬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플레이어는 자연스레 여기에 따라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 비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보조 기능을 지원하는 한편, 박자를 놓치더라도 개발진이 의도한 속도감과 리듬 위로 올라탈 수 있도록 해뒀다. 적과 아군 모두 일정한 속도감과 리듬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만큼, 다소 단조로울 수 있다는 단점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개발진은 이를 액션을 구성하는 조합을 수를 늘리는 것. 그리고 플레이어가 비트를 따르지 않는(버튼을 입력하지 않는) 사이에 이용할 수 있는 것들로 채운다. 다양한 적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적이 나왔을 때에는 동료를 불러 도움을 받거나 패링을 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이를 통해서 게임 초반부에 그저 버려야만 했던 비트들은 후반부에 들면서 정체성이 확립된다. 적들의 패턴에 익숙해지더라도 다수의 적이 조합을 이뤄 등장하기에 버려지는 비트가 점차 사라진다. 궁극적으로 모든 비트에 플레이어가 버튼 입력을 할 수 있게 되며 하이파이 러쉬의 메커닉은 개화한다. 연주라는 게임 플레이가 꽉 채워질 수 있도록 모든 비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없이 버려지는 비트가 점차 사라지고 액션으로 연주되는 리듬이라는 개념이 점차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간 리듬에 다른 장르의 문법을 접목한 타이틀이 여럿 나왔음에도 하이파이 러쉬가 발상 측면에서 고평가를 받은 것은 이러한 이유다. 기존에 있던 장르의 문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근본적인 부분까지 한 번 해체하는 것에서 개발을 시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체를 통해 액션 게임이 가지고 있는 일면을 다시금 파악했고 이를 하나의 목적에 맞춰서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여느 리듬 액션 타이틀처럼 리듬 장르 위에 액션 메커닉을 얹어두고 조율한 것이 아니라, 액션 게임이 가지고 있는 리듬 측면을 비트와 템포로 다시금 규정하는 과정을 거치고 이후에 재조립으로 하이파이 러쉬라는 작품을 완성한 셈이다. 그 결과, 하이파이 러쉬는 리듬 혹은 노트에 맞춰서 플레이어가 행동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액션이라는 장르가 함유하고 있던 리듬 그리고 플레이어의 조작에서 오는 반복적 리듬을 일깨우는 것에 있다. 게임 내에서 박자가 심장에서 시작되듯이, 노트가 아닌 박자 자체가 리듬의 시작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서 액션 장르가 가지고 있었던 리듬이라는 측면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는 것에서 나오는 리듬감을 강조하기 위해 게임 내의 모든 요소는 같은 비트와 템포에 맞췄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세부적 요소들이 뻗어 나가면서 하이파이 러쉬는 일관되고 집중력이 있는 경험으로 맺어지기 시작한다. 리듬과 액션을 더했다고 일축할 수도 있을 테지만, 아이디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축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 그리고 액션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던 요소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임은 틀림없다. 액션의 버튼 입력을 비트로. 오브젝트와 배경음악을 포함한 액션 외적인 것 일체를 템포로 치환한 이들의 발상이 이채를 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하이파이 러쉬는 발상하나가 얼마나 다른 느낌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타이틀과 같다. 게임이라는 매체가 작은 발상하나로 얼마나 큰 경험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이며, 장르 측면에서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를 다르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이제 게임은 플레이하지 않는다: 관리와 지배의 시대
‘아이들러’, ‘오토 배틀러’, ‘자동화’, ‘클리커’ 등의 키워드로 분류되는 이런 방치형 게임들은 과거 모바일 게임 중심으로만 유통되었다. 모바일 플랫폼에서 방치형 게임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반복 전투의 실행을 자동화에 위임함으로써 얻게 되는 게임 플레이 시간의 자유를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 Back 이제 게임은 플레이하지 않는다: 관리와 지배의 시대 29 GG Vol. 26. 4. 10. 최근 스팀 플랫폼에는 그간 스팀에서 잘 출시되지 않았던 방치형 게임 장르들이 자주 발견된다. <몰티즈와 복실복실 온천>, <미니 코지룸>, <우주 암석 파괴자> 등 최근 인기를 모은 방치형 게임은 일반적으로 해당 장르와 거리가 멀었던 PC 플랫폼의 틈새를 파고들어 나름의 틈새시장을 형성했다. PC 화면의 아주 작은 일부만 차지하거나 쉽게 화면 전환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이러한 게임들은 업무를 자주 방해하지는 않으면서 업무 중에도 띄워놓을 수 있는 장점을 바탕으로 PC 플랫폼에 정착했다. 물론 전투 위주의 모바일 방치형 게임과는 달리 생활형 소재나 아기자기한 게임 디자인으로 천편일률적이었던 방치형 게임에 다양성을 덧대었다는 점이 차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러’, ‘오토 배틀러’, ‘자동화’, ‘클리커’ 등의 키워드로 분류되는 이런 방치형 게임들은 과거 모바일 게임 중심으로만 유통되었다. 모바일 플랫폼에서 방치형 게임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반복 전투의 실행을 자동화에 위임함으로써 얻게 되는 게임 플레이 시간의 자유를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 동안에도 미리 설정된 자동화 공식에 따라 게임 플레이가 이루어지면서 플레이어는 일상 생활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적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 <몰티즈와 복슬복슬 온천>의 한 장면. PC를 통해 원고를 쓰면서도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다. 2010년대 이후 고안된 이 장르는 역설적으로 게임이 가진 몇몇 제약들을 붕괴시키면서 생존해왔다. 이를테면 일반적인 게임에서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게임 플레이를 자동화시켰다. 본래 게임 플레이는 게임 디자인이 고안된 이후 항상 개발자가 게임 결과의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플레이어에게 할당시킨 영역이었다. 바꿔 말하면 게임 플레이어 입장에서 게임 플레이는 자신들에게 강제적으로 할당된 영역인데, 방치형 게임은 이러한 제약을 붕괴시킴으로써 플레이어가 이를 컴퓨터에 위임할 권한이 생긴 셈이다. 이렇게 되면 플레이어는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기 위해 열심히 플레이하는 주체가 아니라 게임의 결과만 관리하는 ‘관리적 주체’로 변모하게 된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플레이로 인한 ‘결과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미디어였다. 과거의 플레이어들은 결과의 불확실함을 자신의 승리로 바꾸기 위해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해왔다. 그러나 방치형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 결과의 불확실함을 참아내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이 고되거나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이는 기존 게임들에서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플레이 과정이 MMO 같이 다소 밀도가 떨어지거나 반복될 때 느끼게 된 게임 플레이의 노동화 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애초에 게임 디자인 과정에서는 밀도있는 게임 플레이를 극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지만, 게임의 완성도보다는 비즈니스 모델을 중시한 모바일 게임들에서는 게임 플레이 과정보다 플레이 과정을 통해 생긴 아이템 등의 결과물들이 플레이어에게 더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 <디아블로 2>의 카우 레벨(cow level) 장면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플레이의 밀도보다 결과값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인식되었던 게임은 <디아블로> 시리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기나 방어구 등 아이템에 붙는 접두사와 접미사에 따라 해당 아이템의 가치가 달라지면서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카우 레벨(cow level)을 반복해서 돌았던 행동들은 아마 RPG 게임에서 결과중심적 플레이가 본격적으로 극대화된 최초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중심적 플레이에 대한 선호는 이후 개발자들이 본래 게임의 제약 사항으로 묶어두었던 현금 결제를 통한 제약의 우회로 이어지게 된다. 주로 MMORPG를 통해 구현된 이러한 유료화 방식은 캐릭터나 아이템의 강화뿐만 아니라 시간적 제약이나 게임 내 공간의 위상까지 무력화시키면서 플레이어를 ‘지배적 주체’로 변모시킨다. 이 지점에서 게임 플레이는 더 이상 과정 자체가 아니라 결과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되었다. 이 두 장르는 동일한 ‘과정 생략 욕망’을 공유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식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방치형 게임이 게임 플레이 자체를 시스템에 위임함으로써 과정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MMORPG는 결제를 통해 플레이어가 그 과정을 직접 우회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전자는 플레이어를 ‘관리적 주체’로, 후자는 시스템을 지배하는 ‘지배적 주체’로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한 욕망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특히 모바일 게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이러한 MMORPG와 방치형 게임으로의 양극화 현상은 넓게 보면 사실 유사한 심리적 기제를 바탕으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게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불확실성을 회피하고 과정을 생략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경쟁을 통해 획득해야만 하는 어려운 과정을 회피하고 시스템의 외부를 현금이나 시스템 관리를 통해 우회하는 상황이 주는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장르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은 단순히 게임 과정에서의 유희를 포기한 것이라기보다는 반복적인 노동을 알고리즘에 위탁하면서 결제나 시스템 관리를 통해 스스로가 게임을 제어하고 있다는 권력욕을 대리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PvP가 중심이 된 모바일 MMORPG를 플레이할 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필드의 몹들을 사냥하는 PvE 컨텐츠는 자동화를 시키지만, 본인들의 길드가 장악한 사냥터가 다른 플레이어에게 침범당하거나 PK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게임 플레이에 개입하여 이러한 과정을 플레이하는 것을 즐긴다. * <리니지 M>의 다양한 자동사냥 옵션 설정 방식 “유능한 한국 모바일 게임 개발자가 되려면 게임을 재밌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돈을 내면 게임이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인상을 풍길 수 있도록 적당히 재미없어야 한다.” 게임업계에서는 한국 모바일 게임 개발자를 대상으로 한 이와 같은 농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MMORPG와 방치형 게임은 매우 동일하게 게임 플레이 과정을 반복적이고 지루하게 만들어 왔다. 이들은 게임의 외피를 덮어쓰고 있지만 그 과정의 재미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결과중심적인 레벨과 아이템, 수치적 데이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물론 결제나 시스템 관리를 통해 기존 게임의 제약을 극복하는 순간 주어지는 쾌감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게임들은 은밀하게 다른 게임들이 주지 못했던 욕망들을 충족시키면서 범박하게나마 재밌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엄밀히 말하면 결제 과정이나 자동화를 통해 강해진 내 캐릭터가 만족스럽다는 느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해당 장르들은 이러한 우회과정을 통해 PvP의 컨트롤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시간이 부족한 플레이어들을 해당 장르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TV 광고를 통해 플레이어가 게임의 ‘운영’에까지 개입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SOL과 같은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투표를 통해 운영 방침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플레이어가 단순히 주어진 규칙을 따르는 존재를 넘어, 게임의 규칙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 주체’로 구성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모바일 플랫폼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MMORPG와 방치형 게임은 해당 장르의 불모지였던 스팀 플랫폼까지 천천히 상륙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MMORPG는 글로벌 스탠더드 시스템에 맞추기 위해 확률형 아이템이나 강화형 결제 시스템을 줄이거나 없애고, 방치형 게임은 천편일률적이었던 횡스크롤 형태의 단순 전투 시스템을 버리고 아기자기한 생활형 소재로 변모시키면서 미아 콘살보가 언급한 진정한 게이머(real gamer)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그 본진인 스팀까지 성공적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장르 이동이 아니라, 플랫폼 간 플레이 문화의 재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진정한 게임 플레이’를 중시하던 PC 플랫폼조차도 이제는 과정의 밀도보다는 결과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플레이 양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게임이 더 이상 ‘플레이의 미디어’가 아니라 ‘결과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재정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게임이 더 이상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가 언급한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을 통해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매체가 아니라, 결과값의 축적을 통해 만족을 제공하는 데이터 중심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게임이 더 이상 ‘플레이를 경험하는 매체’가 아니라, 플레이를 최소화하면서도 결과를 관리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터랙티브 시스템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The Coevolution of Arcade Games, Gamers, and Interfaces
As such, interfaces may evolve to accurately construct the ideals projected on the design, but that design can easily change based on coincidental chance. The modified interface also brings about transformation to one’s gameplay itself, and this change in gameplay can change the experience provided by the game, thus bringing about an effect that makes the game itself feel different. Therefore, the interface is not merely a simple input device nor a factor that does not bring any fundamental changes to the game, but rather is the very hardware that constitutes the game and simultaneously the “physicalized” mechanical object connected to the gamer. The interface does not evolve or progress according to the game’s design; it lies in the process of ever-changing co-evolution while interacting with the game, the gamer, and all environments tied to the self. < Back The Coevolution of Arcade Games, Gamers, and Interfaces 10 GG Vol. 23. 2. 10. Arcade Machines as Retro Games The term “retro games” generally refers to old and classic games. With the recent resurgence of interest in retro games, the arcade games of the past can now be seen all the more frequently. Arcade games, met with immense popularity since their emergence in the 1970s, are treated more or less as forgotten media (at least in academia) despite their prominence as the first form of digital mainstream pop culture. The reason is likely due to the stereotype that arcade games are a mainstream culture, primarily targeted toward young children and teenagers. Arcade culture, which is consistently treated as youth culture and a subculture of the public, continues to receive widespread interest in terms of the destructive and antisocial impact it can leave on teenagers. However, from the perspective that arcade games were ‘absorbed by and replaced with digital video games since the 1990s,’ what little interest there is dissipates. Then, what exactly are these video games considered to have absorbed and replaced arcade games? Gonzalo Frasca defines video games as “including any forms of computer-based entertainment software, either textual or image-based, using any electronic platform such as personal computers or consoles and involving… [games] in a physical or networked environment.” If we go by Frasca’s definition, arcade games quite literally fit the description of video games. Then, what do we really mean by the arcade games that have been rendered extinct? In truth, arcade venues (or amusement arcades) are still thriving—just comprised of different components and conditions. Small, damp arcades became large-scale, and these spaces have become filled mainly by virtual reality games, rhythm action games, and hands-on games with imitative interfaces. The arcade games considered to be extinct are likely of a different kind compared to those at the current-day amusement arcade. As part of the arcade game generation, we have at least a handful of memories where we enjoyed arcade games. However, the memories brought up of such games are different for each individual. To one person, their memory of an arcade is made up of shooting games such as “Space Invaders” or “Galaga.” Another might recall claw machines where you grab plushies or prizes, while another might think of fighting games such as the “Street Fighter” and “Tekken” series or rhythm games such as “DDR” and “Pump It Up.” Otherwise, it may be a memory of using the coin-operated karaoke machine located in the corner of the arcade to relieve stress. These arcades are represented by one word but can mean many different physical spaces depending on each individual. What’s interesting is that the arcade games shown in media as retro games appear more frequently in the form of arcade cabinets as opposed to actual games. With this representation, rather than defining them as hailing from a specific genre or period, couldn’t we regard arcade games as a “form of game experience itself” that can be interacted with by using a unique interface, the joystick? *Inside the “Put your Hands Up” game arcade at Lotte World Tower. (Source: Eun-ki Jeon) The Misunderstanding about Game Interfaces What are the elements that make up a game? Geoff Howland (1998) distinguishes these factors as 1) ‘Graphics’ - the images that are displayed with any effects performed on them, and 2) ‘Sound’ - the music or sound effects that are played during the game; 3) ‘Interface’ - anything that the player has to use or have direct contact with in order to play the game; 4) ‘Gameplay’ - how fun and immersive a game is, and 5) Story - information learned by the player as the game progresses, such as the game’s backstory. Although it is one of the components of a game, the interface is oft neglected from discussion despite the fact that games interact with gamers in ways that require the body (usually the hands). If any game is not connected to the body using some sort of controller, the game is reduced to nothing more than a set of deactivated codes. We can consider the moment on screen made possible by controllers that achieve harmony with the body’s experience, allowing the sensibility and knowledge engraved within gamers to work together. As such, the interface that mediates the interaction between games and gamers goes beyond simply transmitting signals. In other words, the interface is hardware that allows gamers to feel the experiences provided by the game's software, and at the same time, serves as a “bodily extension" for gamers. Accordingly, changes in games have caused the interface to change continuously as well. However, there are some inaccurate beliefs about interfaces. In sum, James Newman (2007, p. 260) states that “[in] concentrating only on change, progress and technological advancement, it is tempting to overlook some of the constancies that a consideration of retrogaming reveals. Perhaps the most immediately obvious element that has remained largely unaltered is the videogame controller.” Thus, Newman claims that the gaming interface has not undergone much fundamental change since being attached to the old consoles of the 1980s—only tweaked to provide a slightly more comfortable grip and placement changes without much fundamental change otherwise, and only advancing for more accurate input. Below, using the joystick of arcade machines as an example, we’ll examine why his argument that the interface has not fundamentally changed is wrong, and why it may be false to claim the technological advancements were for the purpose of more accurate input to meet design demands. Social Reconstruction of Imported Technology It is easy to understand why the joystick interface has continuously been advanced when we examine what kinds of games they are currently used for. Currently, mice, keyboards, or directional pads are predominantly used as game interfaces, for combat games, shooting games, and etc., joysticks are the primary interface. Unlike input devices such as directional pads, which mainly use cross-shaped keys that are designed to register up-down-left-right, joysticks are used for 360° directional input, especially for diagonal input which would require simultaneous input of one of the up and down directional keys with one of the left and right directional keys. Thus, nearly every arcade game’s joystick—except for those of Korea—come equipped with square-shaped guides limiting the movement of the lever in order to facilitate diagonal input. However, only in Korea do we see a different sort of joystick being used. We can safely assume that the joystick equipped with a circular base, commonly referred to as the mu-gak lever (or, the Korean bat stick), is only used in Korea. This is because the technology that is the joystick was newly reconstructed after being imported from Japan and used in Korea due to Korea’s technological environment at the time. Presently, games have grown into one of the most popular industries, but arcade games were not an industry that were promoted by the government nor paved by large companies.3) Consequently, the small businesses in the Cheonggyecheon Electronics Shopping Center near the electronics industry led the charge in manufacturing, importing, and distributing arcade games. When these businesses imported arcade machines from Japan, they imported them separately as parts, not as final products, in order to reduce tariffs. Then, these parts were reassembled and the products were distributed around the Cheonggyecheon area. Around this time, products that could be produced domestically began being manufactured in South Korea. However, the issue lied in a lack of understanding by producers in the gaming parts market as to why each part was designed a particular way. Thus, the design for diagonal input was glossed over, and products with good up-down-left-right drive values were produced, reassembled, and distributed. Japan's joystick also used spring elasticity to return the stick to neutral position after command input, but in Korea, the spring was replaced with rubber because the production of springs with uniform elasticity required high technical skill and production cost. Gamers Adapting to the Reconstructed Joystick In this way, the joystick interface has changed not only under Korea’s political, economic, and technical environment, but also by the physical environment of the arcade. It’s true that as consumables, joysticks must be regularly managed and replaced. However, according to the owner of the now-closed-down green arcade in Daelim-dong, Seoul, very few business owners were aware of such practices in the early days of the arcade. “In the early days of the arcade, there was no concept of it being a specialty store. No one cared about the accuracy of [joystick] inputs. Think back to those days. All the owners did was sit in the room and give you change.” - Kyung-sik Yoon, Male, 68, owner of amusement arcade “Consumables have a long shelf life with business owners that offer games or parts makers and so on. But there was no maintenance done for these. When these consumables that aren’t very durable are used for years on end past their time, the looseness becomes severe. But that’s how Koreans learned to play games, so of course the area of command becomes broader. You couldn’t help but move your hands around all the time.” - Kyung-sik Yoon, Male, 68, owner of amusement arcade South Korean arcade regulars grew used to the loose joysticks that became loose due to the poor management. Unlike gamers of different countries who can control the input with just their fingers, Korean gamers have grown accustomed to manipulating joysticks by moving not only their wrists, but their whole arms. The joystick, a mechanical object, was transformed by gamers who adapted it as their own tool. Going further, it transformed gamers to utilize their own selves and make this apparatus conform to them . Gamers who had adapted to the changed interface also enjoyed playing games in different ways. Rather than use precise diagonal input, they enjoyed using the circular base to rotate the stick. And rather than use play that required quick reflexes using dynamic vision, they would quickly manipulate the loose joystick to engage in their own psychological warfare. We can even largely attribute the differences in play style, compared to players of different countries, to the joystick, especially when it comes to fighting games like Tekken. The Evolution of the Joystick In Korea, the joystick evolved not by how fine and accurate the input was reproduced within a game, but by how it related to the gamer that adapted to the joystick. “The lever has to be dumber in Korea. Why? Because you can’t use it if it’s too sensitive. If you move it little by little, you mess up the command. There has to be a margin of error so that it won’t register even if you move it a certain amount. If there isn’t, you can’t use the lever. Electronic equipment doesn’t lie. But the people who produce levers don’t think that way. They don’t think about the margin of error they should consider, and just keep making them sensitive. ” - Kyung-sik Yoon, Male, 68, owner of amusement arcade The circular base guide that was created in the context of Korea, and the joystick connected to the gamers who adapted to the looseness due to lack of maintenance, have continued to change into a form that requires less maintenance and has a certain margin of error. This is because a sensitive and accurate joystick would directly reproduce the mistakes made by these Korean gamers with dynamic hand movements in command inputs, which would render the joystick unusable. Thus, the joystick changed not in the direction of delivering more accurate input, but rather considering “how consistently dull it could remain.” In order to prevent bending or melding of the copper contact, a rubber part was added between the copper plates, and has been recently transformed to use a switch, along with a more durable silicon that returns the joystick to neutral using the elastic rubber. (See Figure 2, Figure 3, and Figure 4.) * Earliest joystick. (Source: Eun-ki Jeon) * Former joystick. (Source: Eun-ki Jeon) * Latest joystick. (Source: Eun-ki Jeon) That being said, we cannot fully regard the latest joystick as having improved and progressed linearly from the earliest joystick. The interface is also faced with the possibility of change due to ever-changing factors surrounding the game and the gamer, such as a switch from the physical location of the arcade to a gamer’s private space, and other factors. For example, early joysticks are still being produced faithfully to this day; while the price does play an important part, there exist people who prefer to stay away from the sounds made by switches. The demand for the original joysticks continues steadily as the number of gamers who wish to stay away from the noisy arcade and opt for the comfort of their homes increases. Suppose a culture where gamers develop a greater zeal and steadily manage their interfaces as a “bodily extension” becomes widespread. In that case, copper contact joysticks—which hold the advantage in that they make less noise—will become the main kind of joystick and create a new trend of change. As such, interfaces may evolve to accurately construct the ideals projected on the design, but that design can easily change based on coincidental chance. The modified interface also brings about transformation to one’s gameplay itself, and this change in gameplay can change the experience provided by the game, thus bringing about an effect that makes the game itself feel different. Therefore, the interface is not merely a simple input device nor a factor that does not bring any fundamental changes to the game, but rather is the very hardware that constitutes the game and simultaneously the “physicalized” mechanical object connected to the gamer. The interface does not evolve or progress according to the game’s design; it lies in the process of ever-changing co-evolution while interacting with the game, the gamer, and all environments tied to the self. 1) Frasca, G. (2008). Videogames of the Oppressed . Communication Books. Translated by Gyeom-sup Kim. 2) Howland, G. (1998). Game Desine: the Essence of Computer Games. Newman, J. (2008). Videogames (p. 14). Routledge. 3) Jo, D. W. (2019). An Early History of Digital Culture: East Asia-wide Translocal Practices of Copying of Electronic Entertainment Machine and Personal Computer. (98th ed., pp. 153-178). Korean Association For 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Studi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ech-cultural researcher) Eunki Jeon He majored in cultural anthropology and cultural research, and is currently working as a researcher at the Cheonggyecheon Technology and Culture Research Institute and Hanyang University Global Multicultural Research Institute. (Translator) Esther Yum
- 울기 싫은 플레이어의 애도하기: <마이 리틀 퍼피>
애도는 개와 인간의 관계만큼이나 <마이 리틀 퍼피>의 중요한 주제다. 봉구에 대한 애도는 재회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해 게임에 등장한 모든 영혼에게 각자의 해피엔딩을 쥐어주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봉구와 ‘아빠’는 개와 인간, 죽은 자와 산 자로 관계맺으며 서로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 Back 울기 싫은 플레이어의 애도하기: <마이 리틀 퍼피> 28 GG Vol. 26. 2. 10. 인간사의 비극에는 꿈쩍 않던 사람이 을 볼 때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꼭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동물의 감정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일까. 그 순수함에 감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동물이라는 소재는 보편적인 ‘눈물버튼’으로 쓰인다. ‘마이 리틀 퍼피’는 명백히 동물이 ‘눈물버튼’인 사람들을 겨냥한 게임이다. 견종 중에서도 귀여움으로 이름 높은 웰시코기 ‘봉구’가 사후세계에서 ‘아빠’를 마중나가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반려동물을 먼저 보낸 게이머라면 아마 천국의 강아지들이 주인과 재회하는 도입부부터 눈물을 훔쳤으리라. 필자 또한 반려견을 잃어버려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은 경험이 있기에 그리웠던 강아지를 만나자마자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고 휴지를 찾아 일어서야 했다. 무지개 다리를 내달리는 봉구의 치명적인 뒷태와 다리가 짧아 높은 턱을 오르지 못해 바둥거리며 낑낑대는 모습에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은 무조건 반사적인 행동이다. 게임은 반려견과 죽음이라는 소재에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생전에 보호소에서 주인을 만나고 먼저 떠나기까지의 사연과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 여기에 섬세하게 구현한 강아지의 움직임이 더해져 애틋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마이 리틀 퍼피>에 쉽게 마음을 열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눈물은 ‘눈물버튼’이 눌린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파에 울지 않으려는 소비자 특정 소재에 ‘눈물버튼’이 눌리는 현상은 해당 창작물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다. 신파의 서사를 접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은 기계적인 반사작용으로 여겨진다. 이에 정형화된 신파에 익숙해진 소비자는 흔히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감해지거나,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창작물과 심리적 거리를 두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전형적인 한국식 신파 영화를 보고 나와 벌건 눈으로 ‘눈물이 나서 자존심이 상한다’며 성을 내는 관객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마이 리틀 퍼피>의 플레이 중반까지 나는 예시로 든 관객과 같이 이중적인 반응을 보였다. 신파에 냉담해진 소비자는 신파의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이러한 태도를 보이며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슬픈 영화를 보며 울지 않기 위해 일부러 촬영장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배우의 연기일 뿐이라고 거듭 생각하는 식이다. 이는 특정 형식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통제하려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정형화된 형식에는 진정성이 부족하며, 이에 감응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문화비평가 에밀리 부틀이 주장하듯 진정성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다. 사람들은 창작물의 진정성에 천착하며 그것에 자신이 감동할 가치가 있는지 추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물버튼’이라는 표현의 유행을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틀에 의하면 진정성은 자신의 가식을 인정하는 개념으로 팔린다. ‘눈물버튼’을 탓하는 이는 자신의 감정적 반응은 자동반사적인 것일 뿐 진정으로 감동하진 않았다며 진정성의 결여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 때문에 신파의 소재로 인지되는 순간부터 그 소재의 확장성은 제한된다. 특정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뻔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는 실제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의외성을 적극적으로 간과하고, 재해석의 필요를 무시하곤 한다. 설사 99%가 전형적 신파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수용자의 상황에 따라 유의미한 감정의 승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신파의 힘을 빌렸다는 것만으로 작품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신파라는 말에 갇혀 소재가 가진 힘이 소실되는 것은 창작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손해이다. 필자 역시 ‘눈물버튼’이 눌리길 거부하는 소비자이기에 <마이 리틀 퍼피>와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위험천만한 맵을 지나게 하고 있자니 봉구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감동적인 재회를 위해 나의 컨트롤 미스로 강아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봐야 한다는 것에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며 <마이 리틀 퍼피>의 잔인함은 이 게임이 재현하려는 세계의 중요한 성격으로 드러난다. ‘힐링 게임’에 어울리지 않는 잔인함 전형적 신파의로 소비되기 쉬운 주제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은 연출과 재현이다.‘마이 리틀 퍼피’의 제작진은 강아지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점을 특징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이미 다양한 매체의 창작물에서 시도된 바 있다. 고양이의 행동양식을 사실적으로 구현해 화제가 된 게임 <스트레이>와 비교해 보면 그와 같은 수준의 본격적인 시점 전환이 의도된 것은 아니다. <마이 리틀 퍼피> 역시 강아지의 행동을 매력적으로 구현해 냈지만, 인간의 언어는 완전히 배제된 <스트레이>와 달리 <마이 리틀 퍼피>는 그림과 자막을 통해 강아지들의 의사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해준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게임이 재현하기로 선택한 인간과 개의 모습이다. 봉구가 천국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심상치 않다. 갓난아기와 아기를 지키는 허스키, 교복을 입은 학생, 헤진 옷을 입은 노인까지 각자의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이들이 등장한다. 게임의 배경이 사후세계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 내 모든 캐릭터가 망자임을 인식하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배경을 유추하게 된다. 평화롭지 못한 죽음을 맞은 것이 분명해보이는 천국의 인물들은 플레이어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일회적인 장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천국의 풍경에서 이들이 등장했을 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위화감은 게임 중반부의 사막 맵에서 진돗개 가족과 들개 무리를 마주했을 때 다시 찾아온다. 어미 진돗개와 새끼 세 남매는 봉구 이외에 처음으로 생전의 사연이 소개되는 캐릭터들이다. 보호소에서 지내던 어미 개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새끼들은 입양을 기다리다 안락사되었다. 입양 공고에서 예쁘게 보이기 위해 둘렀던 장식을 사후에도 하고 있다. 이들의 등장을 통해 게임이 조명하는 세계는 봉구와 아빠라는 개체 간 관계를 넘어서, 개와 그들이 생전에 속했던 세계의 관계로 확장된다. 봉구와 진돗개 가족을 위협하는 들개 무리의 등장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들개 무리는 실험견, 투견 등 인간에 의해 학대당한 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들개들의 모습은 게임의 동화적인 디자인과 어긋나며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각은 대자연만이 펼쳐진 사후세계와 대비되는 잔인한 이승의 세계, 인간의 세계를 가리킨다. 들개 무리와의 추격전이 펼쳐지는 미니게임에 실패할 경우, 들개들이 봉구와 진돗개 가족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며 게임이 종료된다. 마냥 사랑스러운 게임을 기대한 플레이어라면 이 장면에서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처참한 모습의 들개들이 공격성을 표출하는 모습은 게임의 메인 빌런인 악령들의 공격과 달리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게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재현은 수의사 캐릭터가 등장하며 절정에 이른다. 수의사는 저승의 은신처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거나 아직 천국으로 가지 못한 개들을 돌보고 있다. 생전에 보호소에서 일하며 수많은 강아지를 안락사시켜야 했던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했다. 안락사된 개들과 정신적으로 무너진 수의사는 게임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잔인하게 묘사된다. 시커멓게 칠해진 수의사의 눈은 공포게임 연출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이질적이다. 예고없이 나타나는 잔인한 재현과 게임의 동화적 미학이 불화할 때의 이질감은 익숙한 신파의 구조에서 플레이어를 미끄러트린다. 잔인함의 구체성이 현실을 호출해 냉소를 유지하게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 미끄러짐을 통해 플레이어는 신파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중단하고 게임이 ‘개’라는 종을 다루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로써 신파에 갇힌 ‘펫 로스’라는 소재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이질적 연출의 등장과 동시에 이야기의 중심은 봉구에게서 진돗개 가족, 들개 무리, 수의사로 이동하며, 게임은 인간과 개의 양면적인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이들의 사연을 통해 그려지는 두 종의 관계는 긴밀하고도 일방적이다. 개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다. 사랑과 상처의 흔적은 미련이 되어 개들이 죽어서도 저승을 떠돌게 한다. 이처럼 귀여움과 잔인함이 병존하는 이질적인 재현 방식은 불편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바로 인간에게 종속된 개의 삶에는 태생적으로 잔인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표현형이 사랑이든, 상처이든 간에 말이다. 개와 망자라는 타자와의 관계 게임을 플레이하며 필자가 느낀 잔인한 일방적 관계는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가 <반려종 선언>에서 지적한 바 있다. 해러웨이는 개들의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개와 인간 모두에게 가학적이며, 이 사랑이 소중하다면 오히려 무조건적인 사랑의 담론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에 종속된 개는 이 사랑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라는 개체와 종 전체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시도하지 않고 사랑의 관점으로 개를 보는 것은 “종류와 개체 모두를 무조건적으로 죽이게 된다.” <마이 리틀 퍼피>는 봉구를 통해 무조건적 사랑의 담론을 충실히 재생산하는 한편, “개 자신의 가치-와 삶-는 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인간의 인식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해러웨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재현을 보여준다. 들개 무리는 게임의 마지막까지 인간과 함께하지 않고 저승을 떠돌길 선택한다. 과거 자신들을 받아줬던 수의사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들개들은 유유히 길을 떠난다. 이들의 존재는 저승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는 다른 개들 역시 사랑의 담론에 종속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는 그간 함께한 봉구와의 여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개의 입장이 되어보길 권하는 이 게임을 통해 필자는 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됐다. 인간은 개를 관찰해 가상의 개를 모델링할 수 있지만 개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해러웨이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인식, ‘부정의 방식으로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개와 인간은 함께 관계를 구성하며 그 속에서 서로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해러웨이는 이 관계를 통해 개와 인간에게 서로에 대한 ‘권리’가 구축되며,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무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이야기이다. 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알 수 없으며, 애도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모든 이야기는 산 자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말하는 개와 인간의 관계에서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산 자가 죽은 자의 흔적을 만질 때에 죽은 자도 산 자를 변화시킨다. 애도는 개와 인간의 관계만큼이나 <마이 리틀 퍼피>의 중요한 주제다. 봉구에 대한 애도는 재회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해 게임에 등장한 모든 영혼에게 각자의 해피엔딩을 쥐어주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봉구와 ‘아빠’는 개와 인간, 죽은 자와 산 자로 관계맺으며 서로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더불어 봉구가 생전에 ‘아빠’라는 개인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되돌아보게 된다. 이야기는 신파에 대한 냉소로 되돌아온다. <마이 리틀 퍼피>는 감정의 과잉이라는 신파의 문법을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이 감정은 들개 무리와 수의사의 이야기를 통과하며 개인 간의 애틋함이라는 전형적 서사의 감정에서 인간과 개의 관계가 지닌 비대칭성과 책임에 대한 고찰이 남기는 감상으로 변모한다. 이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감정은 ‘눈물버튼’이 눌린 결과를 넘어서, 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재고를 거친 것이 된다. 역설적으로 봉구와 아빠의 이야기 역시 이 과정을 통해 다시금 힘을 얻게 된다. 애도의 진정성조차 평가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마이 리틀 퍼피>는 감정을 솔직하게 밀어붙이며 플레이어에게 ‘아빠’의 애도에 동참하길 요청한다. 꼭 반려동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사랑한 적 있는 플레이어라면 이 여정을 함께하며 그 솔직함에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Tags: 건조, 강아지, 반려동물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에디터) 박유진 시사 유튜브·팟캐스트를 만드는 직장인이자 평범한 게이머. 시사를 녹여낸 게임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종종 함께합니다.
-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 Back 02 GG Vol. 21.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unhyung Ahn Active in the artist political party "Bad New Days" and in "Survey," a Marxist research institute. Recently, building on an interest in game media, undertakes critical writing on the politics of game media and on the systems of representation of in-game images, along with their attendant questions of subjectivity and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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