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 싫은 플레이어의 애도하기: <마이 리틀 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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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2. 10.

인간사의 비극에는 꿈쩍 않던 사람이 <TV동물농장>을 볼 때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꼭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동물의 감정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일까. 그 순수함에 감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동물이라는 소재는 보편적인 ‘눈물버튼’으로 쓰인다.
‘마이 리틀 퍼피’는 명백히 동물이 ‘눈물버튼’인 사람들을 겨냥한 게임이다. 견종 중에서도 귀여움으로 이름 높은 웰시코기 ‘봉구’가 사후세계에서 ‘아빠’를 마중나가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반려동물을 먼저 보낸 게이머라면 아마 천국의 강아지들이 주인과 재회하는 도입부부터 눈물을 훔쳤으리라. 필자 또한 반려견을 잃어버려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은 경험이 있기에 그리웠던 강아지를 만나자마자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고 휴지를 찾아 일어서야 했다.
무지개 다리를 내달리는 봉구의 치명적인 뒷태와 다리가 짧아 높은 턱을 오르지 못해 바둥거리며 낑낑대는 모습에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은 무조건 반사적인 행동이다. 게임은 반려견과 죽음이라는 소재에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생전에 보호소에서 주인을 만나고 먼저 떠나기까지의 사연과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 여기에 섬세하게 구현한 강아지의 움직임이 더해져 애틋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마이 리틀 퍼피>에 쉽게 마음을 열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눈물은 ‘눈물버튼’이 눌린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파에 울지 않으려는 소비자
특정 소재에 ‘눈물버튼’이 눌리는 현상은 해당 창작물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다. 신파의 서사를 접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은 기계적인 반사작용으로 여겨진다. 이에 정형화된 신파에 익숙해진 소비자는 흔히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감해지거나,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창작물과 심리적 거리를 두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전형적인 한국식 신파 영화를 보고 나와 벌건 눈으로 ‘눈물이 나서 자존심이 상한다’며 성을 내는 관객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마이 리틀 퍼피>의 플레이 중반까지 나는 예시로 든 관객과 같이 이중적인 반응을 보였다.
신파에 냉담해진 소비자는 신파의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이러한 태도를 보이며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슬픈 영화를 보며 울지 않기 위해 일부러 촬영장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배우의 연기일 뿐이라고 거듭 생각하는 식이다. 이는 특정 형식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통제하려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정형화된 형식에는 진정성이 부족하며, 이에 감응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문화비평가 에밀리 부틀이 주장하듯 진정성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다. 사람들은 창작물의 진정성에 천착하며 그것에 자신이 감동할 가치가 있는지 추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물버튼’이라는 표현의 유행을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틀에 의하면 진정성은 자신의 가식을 인정하는 개념으로 팔린다. ‘눈물버튼’을 탓하는 이는 자신의 감정적 반응은 자동반사적인 것일 뿐 진정으로 감동하진 않았다며 진정성의 결여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 때문에 신파의 소재로 인지되는 순간부터 그 소재의 확장성은 제한된다. 특정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뻔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는 실제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의외성을 적극적으로 간과하고, 재해석의 필요를 무시하곤 한다. 설사 99%가 전형적 신파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수용자의 상황에 따라 유의미한 감정의 승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신파의 힘을 빌렸다는 것만으로 작품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신파라는 말에 갇혀 소재가 가진 힘이 소실되는 것은 창작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손해이다.
필자 역시 ‘눈물버튼’이 눌리길 거부하는 소비자이기에 <마이 리틀 퍼피>와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위험천만한 맵을 지나게 하고 있자니 봉구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감동적인 재회를 위해 나의 컨트롤 미스로 강아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봐야 한다는 것에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며 <마이 리틀 퍼피>의 잔인함은 이 게임이 재현하려는 세계의 중요한 성격으로 드러난다.
‘힐링 게임’에 어울리지 않는 잔인함
전형적 신파의로 소비되기 쉬운 주제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은 연출과 재현이다.‘마이 리틀 퍼피’의 제작진은 강아지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점을 특징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이미 다양한 매체의 창작물에서 시도된 바 있다. 고양이의 행동양식을 사실적으로 구현해 화제가 된 게임 <스트레이>와 비교해 보면 그와 같은 수준의 본격적인 시점 전환이 의도된 것은 아니다. <마이 리틀 퍼피> 역시 강아지의 행동을 매력적으로 구현해 냈지만, 인간의 언어는 완전히 배제된 <스트레이>와 달리 <마이 리틀 퍼피>는 그림과 자막을 통해 강아지들의 의사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해준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게임이 재현하기로 선택한 인간과 개의 모습이다. 봉구가 천국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심상치 않다. 갓난아기와 아기를 지키는 허스키, 교복을 입은 학생, 헤진 옷을 입은 노인까지 각자의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이들이 등장한다. 게임의 배경이 사후세계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 내 모든 캐릭터가 망자임을 인식하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배경을 유추하게 된다. 평화롭지 못한 죽음을 맞은 것이 분명해보이는 천국의 인물들은 플레이어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일회적인 장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천국의 풍경에서 이들이 등장했을 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위화감은 게임 중반부의 사막 맵에서 진돗개 가족과 들개 무리를 마주했을 때 다시 찾아온다.

어미 진돗개와 새끼 세 남매는 봉구 이외에 처음으로 생전의 사연이 소개되는 캐릭터들이다. 보호소에서 지내던 어미 개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새끼들은 입양을 기다리다 안락사되었다. 입양 공고에서 예쁘게 보이기 위해 둘렀던 장식을 사후에도 하고 있다. 이들의 등장을 통해 게임이 조명하는 세계는 봉구와 아빠라는 개체 간 관계를 넘어서, 개와 그들이 생전에 속했던 세계의 관계로 확장된다.
봉구와 진돗개 가족을 위협하는 들개 무리의 등장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들개 무리는 실험견, 투견 등 인간에 의해 학대당한 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들개들의 모습은 게임의 동화적인 디자인과 어긋나며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각은 대자연만이 펼쳐진 사후세계와 대비되는 잔인한 이승의 세계, 인간의 세계를 가리킨다.

들개 무리와의 추격전이 펼쳐지는 미니게임에 실패할 경우, 들개들이 봉구와 진돗개 가족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며 게임이 종료된다. 마냥 사랑스러운 게임을 기대한 플레이어라면 이 장면에서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처참한 모습의 들개들이 공격성을 표출하는 모습은 게임의 메인 빌런인 악령들의 공격과 달리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게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재현은 수의사 캐릭터가 등장하며 절정에 이른다. 수의사는 저승의 은신처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거나 아직 천국으로 가지 못한 개들을 돌보고 있다. 생전에 보호소에서 일하며 수많은 강아지를 안락사시켜야 했던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했다. 안락사된 개들과 정신적으로 무너진 수의사는 게임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잔인하게 묘사된다. 시커멓게 칠해진 수의사의 눈은 공포게임 연출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이질적이다.

예고없이 나타나는 잔인한 재현과 게임의 동화적 미학이 불화할 때의 이질감은 익숙한 신파의 구조에서 플레이어를 미끄러트린다. 잔인함의 구체성이 현실을 호출해 냉소를 유지하게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 미끄러짐을 통해 플레이어는 신파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중단하고 게임이 ‘개’라는 종을 다루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로써 신파에 갇힌 ‘펫 로스’라는 소재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이질적 연출의 등장과 동시에 이야기의 중심은 봉구에게서 진돗개 가족, 들개 무리, 수의사로 이동하며, 게임은 인간과 개의 양면적인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이들의 사연을 통해 그려지는 두 종의 관계는 긴밀하고도 일방적이다. 개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다. 사랑과 상처의 흔적은 미련이 되어 개들이 죽어서도 저승을 떠돌게 한다. 이처럼 귀여움과 잔인함이 병존하는 이질적인 재현 방식은 불편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바로 인간에게 종속된 개의 삶에는 태생적으로 잔인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표현형이 사랑이든, 상처이든 간에 말이다.

개와 망자라는 타자와의 관계
게임을 플레이하며 필자가 느낀 잔인한 일방적 관계는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가 <반려종 선언>에서 지적한 바 있다. 해러웨이는 개들의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개와 인간 모두에게 가학적이며, 이 사랑이 소중하다면 오히려 무조건적인 사랑의 담론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에 종속된 개는 이 사랑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라는 개체와 종 전체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시도하지 않고 사랑의 관점으로 개를 보는 것은 “종류와 개체 모두를 무조건적으로 죽이게 된다.”
<마이 리틀 퍼피>는 봉구를 통해 무조건적 사랑의 담론을 충실히 재생산하는 한편, “개 자신의 가치-와 삶-는 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인간의 인식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해러웨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재현을 보여준다. 들개 무리는 게임의 마지막까지 인간과 함께하지 않고 저승을 떠돌길 선택한다. 과거 자신들을 받아줬던 수의사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들개들은 유유히 길을 떠난다. 이들의 존재는 저승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는 다른 개들 역시 사랑의 담론에 종속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는 그간 함께한 봉구와의 여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개의 입장이 되어보길 권하는 이 게임을 통해 필자는 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됐다. 인간은 개를 관찰해 가상의 개를 모델링할 수 있지만 개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해러웨이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인식, ‘부정의 방식으로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개와 인간은 함께 관계를 구성하며 그 속에서 서로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해러웨이는 이 관계를 통해 개와 인간에게 서로에 대한 ‘권리’가 구축되며,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무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이야기이다. 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알 수 없으며, 애도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모든 이야기는 산 자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말하는 개와 인간의 관계에서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산 자가 죽은 자의 흔적을 만질 때에 죽은 자도 산 자를 변화시킨다.
애도는 개와 인간의 관계만큼이나 <마이 리틀 퍼피>의 중요한 주제다. 봉구에 대한 애도는 재회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해 게임에 등장한 모든 영혼에게 각자의 해피엔딩을 쥐어주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봉구와 ‘아빠’는 개와 인간, 죽은 자와 산 자로 관계맺으며 서로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더불어 봉구가 생전에 ‘아빠’라는 개인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되돌아보게 된다.
이야기는 신파에 대한 냉소로 되돌아온다. <마이 리틀 퍼피>는 감정의 과잉이라는 신파의 문법을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이 감정은 들개 무리와 수의사의 이야기를 통과하며 개인 간의 애틋함이라는 전형적 서사의 감정에서 인간과 개의 관계가 지닌 비대칭성과 책임에 대한 고찰이 남기는 감상으로 변모한다. 이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감정은 ‘눈물버튼’이 눌린 결과를 넘어서, 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재고를 거친 것이 된다. 역설적으로 봉구와 아빠의 이야기 역시 이 과정을 통해 다시금 힘을 얻게 된다. 애도의 진정성조차 평가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마이 리틀 퍼피>는 감정을 솔직하게 밀어붙이며 플레이어에게 ‘아빠’의 애도에 동참하길 요청한다. 꼭 반려동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사랑한 적 있는 플레이어라면 이 여정을 함께하며 그 솔직함에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