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결과

공란으로 643개 검색됨

  • 게임플레이의 영화화에서 게임-보기의 영화화로

    “치킨 조키!” 주인공 스티브가 외치자 영화관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팝콘을 집어 던진다. 영화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가 개봉한 미국 영화관의 풍경이다. 틱톡 등 숏폼 플랫폼을 타고 바이럴된 컬트적 현상은 지난해 예고편이 공개되자 거센 조롱이 뒤따랐던 것에서 출발한다. 스티브역의 잭 블랙은 게임 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 큰 괴리가 있었고, CGI로 ‘실사화’된 마인크래프트 특유의 네모난 이미지가 언캐니 밸리를 자극했다. < Back 게임플레이의 영화화에서 게임-보기의 영화화로 24 GG Vol. 25. 6. 10. “치킨 조키!” 주인공 스티브가 외치자 영화관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팝콘을 집어 던진다. 영화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가 개봉한 미국 영화관의 풍경이다. 틱톡 등 숏폼 플랫폼을 타고 바이럴된 컬트적 현상은 지난해 예고편이 공개되자 거센 조롱이 뒤따랐던 것에서 출발한다. 스티브역의 잭 블랙은 게임 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 큰 괴리가 있었고, CGI로 ‘실사화’된 마인크래프트 특유의 네모난 이미지가 언캐니 밸리를 자극했다. 2019년 <수퍼 소닉>(2020)의 예고편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어글리 소닉’의 모습에 충격받은 게임 팬들과 같은 상황이었달까. 소닉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마인크래프트 무비> 예고편은 정식 개봉 전부터 다양한 짤로 분해된 밈이되었다. 전혀 스티브 같지 않은 모습의 잭 블랙이 “나는 스티브야!”라고 말하거나, 컬트적 밈의 대상이 된 ‘치킨 조키’처럼 말이다. *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 속 ‘치킨 조키’ 어쩌면 이 현상은 원작 게임은 물론 영화 자체와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관에서 소리 지르고 팝콘을 던지며 날뛰는 관객들은 단지 그 순간을 즐길 뿐, 영화의 나머지 장면을 즐기지 않는다. 원작의 이미지를 실사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어색함과 불쾌함에서 출발한 조롱이 밈의 근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밈을 생산하고 즐기는 이들이 모두 게임의 팬이라 볼 수도 없다. 아이코닉한 게임의 이미지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일치가 이들의 향유 대상이다.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의 계보에서 이 불일치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불일치를 먼저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미지의 측면에서 게임과 영화는 점차 닮아가고 있다. 게임엔진이 영화의 VFX 작업에 활용된 역사는 사실상 CGI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뿐 아니라 게임과 영화는 대중문화라는 큰 맥락 속에서 상호참조의 대상이다. <레이더스>(1981)를 모티프 삼아 제작된 게임 [툼 레이더](1996)는 그것의 영화판인 <툼 레이더>(2001)의 개봉 이후 게임 속 라라 크로프트의 모델링이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과 유사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되어 인기를 끈 ‘트레저 헌트’ 장르의 어드벤쳐 영화들, 이를테면 <미이라>(1999)나 <내셔널 트레져>(2004) 또한 툼 레이더의 자장 안에 있다. [툼 레이더]의 성공은 [언챠티드]라는 새로운 게임 프랜차이즈 탄생에 영향을 주었고, [언차티드 3: 황금 사막의 아틀란티스](2011)에서는 아예 해리슨 포드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광고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편으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2023)의 후반부 추락하는 기차를 기어오르는 톰 크루즈의 액션은 [언차티드 2: 황금도와 사라진 함대](2009)의 초반부를 오마주한다. 영화사의 맥락에서 톰 크루즈와 기차를 보고 버스터 키튼의 <제네럴>(1927)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물건들을 붙잡고 등반하듯 추락하는 기차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언차티드 2]를 명백한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1993)의 포스터(위), 영화 속 쿠파와 굼바(아래) 다만 이러한 일치와 상호참조는 게임과 영화 사이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누적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1993년 개봉한 최초의 게임 원작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는 원작 게임과 영화 사이의 불일치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This Ain’t No Game”이라는 문구를 포스터에 내세운만큼 게임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마리오 형제는 배관공으로 일하던 중, 도시 한 가운데 유적지를 조사하던 데이지가 쿠파에 의해 잡혀간 것을 목격하고 뒤쫓는다. 그들은 숨겨져 있던 지하도시 ‘디노하탄’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데이지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택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쿠파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라는 원작의 큰 맥락을 그대로 따라간다. 하지만 영화가 구현하는 이미지는 게임과 영 딴판이다. 버섯왕국은 브루클린 지하의 공룡도시로 바뀌었고, 거북이를 모티프 삼았던 쿠파는 인간화된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었으며, 버섯 몬스터 굼바는 퇴화한 공룡인간이라는 기묘한 설명으로 바뀌었고, 요시는 작은 벨로시랩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버섯이나 꽃을 먹고 파워업된다는 설정은 남아 있으나, 게임에서의 파워업보다는 각성제에 가깝게 묘사된다. 마리오와 루이지의 의상과 직업 정도를 제외한다면 원작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당연하게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혹평과 함께 흥행 참패를 겪었다. 연출자들은 본래 원작과 유사한 동화풍의 비주얼로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였으나, 제작비의 문제로 1980~90년대 유행하던 디스토피아 풍의 비주얼로 변경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작 게임의 요소들이 큰 변화를 겪은 것이다. 여기에는 원작 게임이 가진 세계를 영화로 옮겨오는 것, 마리오와 루이지가 아이템을 먹고 파워업하거나 점프로 벽돌을 부수는 등의 행위들을 곧장 실사영화로 옮겨왔을 때의 문제점도 동반될 것이다. 2023년 닌텐도와 일루미네이션 스튜디오의 합작으로 제작된 극장판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애니메이션 혹은 TV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어색하지 않았을 행위들이 ‘실사’라는 맥락에서 구현되기엔 무리가 있다. 나아가 1993년의 시점까지 출시된 [슈퍼 마리오] 게임들에는 “쿠파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라는 이야기의 뼈대만 존재할 뿐 디테일한 서사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각색된 실사영화의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이 영화는 원작 게임을 철저하게 배반했기에 컬트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극장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제멋대로 변형된 캐릭터들은 (물론 퀄리티의 조악함은 있으나) 컬트적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후의 작품들, 이를테면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마리오 형제와 그곳을 침공한 쿠파 일당을 격퇴한다는 설정이 202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애니메이션에서 반복되고,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2017)의 ‘도시 왕국’ 스테이지 또한 이 영화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작 게임과 영화 사이의 불일치는 기묘한 상호참조로 이어지기도 함을 보여준다.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2023, 위)와 <명탐정 피카츄>(2019, 아래) 스틸컷. 극장용 장편영화에 어울리는 내러티브가 결여된 ‘슈퍼 마리오’이니 다른 게임 원작 영화의 예시를 들어보자. <명탐정 피카츄>(2019)는 포켓몬 IP를 활용한 동명의 추리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 중후한 탐정의 목소리였던 피카츄의 목소리를 영화에서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맡으며 캐릭터 성격의 변화가 발생하지만.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라임시티에 온 주인공, 우연히 피카츄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설정, 이상행동을 보이며 난폭하게 폭주하는 포켓몬 등 주요 설정과 이야기 전개는 동일하다. 다만 포켓몬 세계의 영화화에서 중점이 되는 것은 이야기의 문제가 아니다. <명탐정 피카츄>는 포켓몬 팬들이 상상하던 포켓몬과 공존하는 도시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슷한 시기 공개된 <슈퍼 소닉> 예고편의 ‘어글리 소닉’에 쏟아진 혹평과 반대로, 영화 속 포켓몬의 모습은 (다소 과하게 리얼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팬들이 상상하던 ‘실사화된’ 포켓몬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했고, 게임 속 평면적인 도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다른 포켓몬 게임이 아닌 명확한 내러티브를 지닌 [명탐정 피카츄](2016)을 경유하여, 충분한 핍진성을 가진 세계로서 이를 구현했기에 가능하다. 동시에 ‘포켓몬’이라는 대상이 지닌 환상성과 가상성은 현실 세계를 베이스 삼은 게임들의 영화화와 다른 방향의 영화화를 가능케 한다. 이를테면 영화판 <히트맨>(2007), <맥스 페인>(2008), <언차티드>(2022) 등은 게임플레이나 게임이 그려낸 세계가 지닌 가상성을 소거한 채 전형적인 ‘액션영화’, ‘범죄영화’, ‘어드벤쳐 영화’가 되었을 뿐이다. * 왼쪽부터 <모탈 컴뱃>(1995), <레지던트 이블>(2002), <수퍼 소닉>(2020), <더 라스트 오브 어스>(2024)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원작 게임을 영화로 충실히 번역하는 것만이 정답인 것만은 아니다. 원작의 방대한 세계관을 열심히 옮겨온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2016)이나 <어쌔신 크리드>(2016)는 그것의 일부만을 부족하게 옮겨왔을 뿐이다. <사일런트 힐>(2006) 같은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폴 W. S. 앤더슨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2002~2016)나 <슈퍼 소닉>처럼 원작의 몇몇 설정만을 따오고, 오리지널 캐릭터를 추가하며,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성격을 팝콘무비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한 사례가 더욱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HBO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2024)의 첫 시즌에서 가장 호평받은 에피소드는 게임에서 그저 우연히 습득할 수 있는 편지를 읽어야 캐치할 수 있는 ‘로어’를 서브플롯으로 확장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에서도 원작 팬들의 플레이 경험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는 필수적이다. <레지던트 이블> 1편에는 [바이오하자드](1996)의 주요 무대인 아크레이 저택이 등장한다. <둠>(2005)은 내러티브상의 설정에선 원작과 큰 차이가 있지만, 1인칭 시점의 롱테이크 액션 시퀀스를 삽입함으로써 FPS 게임의 감각을 가져온다. <수퍼 소닉>의 속도감은 슈퍼히어로 영화 속 스피드스터의 액션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연출되지만, 게임의 시그니처 같은 몸통박치기를 액션에 추가한다. 이러한 방식은 원작의 일부만을 가져와 장편영화의 내러티브로 각색했음에도 게임플레이를 연상시킴으로써 게임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한다. 영화평론가 V. F. 퍼킨스는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를 관객이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복제한 리얼리즘에 기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에게 영화 속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연출로 인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1] . 게임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원작과의 불일치가 발생하지만, 게임플레이의 영화적 구현을 시도함으로써 게임의 가상성을 영화의 핍진성 속에 기입하는, 지난 30여 년간의 게임 원작 영화가 누적되며 형성된 하나의 전략이랄까. 이들 영화는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세계가 영화 안에서도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신뢰성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을 개발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액션, 호러, 어드벤쳐 등 익숙한 장르영화의 문법에 게임플레이적 순간을 기입하는 전략은, 비록 장르적 전형성 속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진 못해도 게임을 즐겨온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성공한다. 1990년대의 <스트리트 파이터>(1994)와 <모탈 컴뱃>(1995)이 그랬고, <사일런트 힐>이나 <명탐정 피카츄>가 그랬으며, 2023년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성공한 전략이다. <마인크래프트 무비> 또한 이 같은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 수준의 단순한 로그라인조차 존재하지 않는 [마인크래프트]의 영화화는 이러한 전략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나 <반교: 디텐션>(2019) 같은 스토리텔링은 불가능하거니와, 게임 내적으로 부재한 내러티브를 그 바깥의 사건으로 대신한 <그란 투리스모>(2023)나 <테트리스>(2023)와 같은 방식 또한 불가능하다. [팩맨]이나 [갤러그](1981), [테트리스](1985)의 형상을 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이야기의 <픽셀>(2015) 같은 방식을 도입하기에도 어렵다. 물론 ‘스토리 모드’가 존재하지만, 별도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되거나 유튜브의 무수한 팬 무비의 영역에 놓일 뿐이다. 사실 가장 히트한 샌드박스 게임으로서 [마인크래프트]는 머시니마(machinima) 팬 무비의 대표적인 재료가 된다. 이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마인크래프트 무비>에서도 강조되듯 ‘창의성’이 게임플레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오버월드’가 관객에게 신뢰받는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미지뿐 아니라 창의성이라는 키워드가 하나의 세계로서 작동하는 방식을 그려내야 한다. * <마인크래프트 무비> 속 스티브(좌)와 마을(우) 하지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창의성과 거리가 멀다. 익숙한 ‘이세계’ 판타지물의 배경이 ‘오버월드’와 ‘네더’로 바뀌었으며, 스티브 일행을 제외한 모든 것이 네모난 큐브 혹은 픽셀 형태의 그래픽으로 표현될 뿐이다. 게임적 가상세계를 배경삼은 최초의 영화 <트론>(1982)부터 스필버그의 야심작 <레디 플레이어 원>(2016)에 이르는 게임 배경의 영화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게임의 가상세계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을 고스란히 따른다. 영화 속 ‘마인크래프트’ 세계는 현실과 다른 세계일 뿐 게임이 내세웠던 ‘자유로운 창의성의 세계’가 아니다. 그저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어딘가일 뿐이다. 이는 <마인크래프트 무비>가 택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게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장면들을 영화 속에 욱여넣는다. 투병생활 중 세상을 떠난 [마인크래프트] 유튜버 ‘테크노블레이드’를 등장시키며 “저건 전설이야”라고 언급하고, 추락 도중 물 블록을 까는 ‘물 낙법’, 레드스톤의 힘으로 움직이는 광차 트랙, 앤더맨으로 가득한 저택 등의 순간을 영화 내내 선보인다. ‘치킨 조키’ 장면도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플레이적 순간을 영화에 기입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숏폼으로 전파되는 밈으로 빠르게 자리 잡길 잠재적으로 요청한다. (실제 제작과정이 그러하진 않았겠지만) 영화의 1차 예고편에서 “나는 스티브야!”라는 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한편의 영화라기보단 산산히 분해되고 밈으로 재생산되는 콘텐츠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마치 게임 유튜버들이 10~20분짜리 본영상의 하이라이트를 다시금 숏츠로 뽑아내듯이. 202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같은 작품이 관객 개인의 게임플레이 경험을 연상시킨다면,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타인의 게임플레이를 시청하던 경험을 연상시킨다. 내러티브가 부재한 게임의 내러티브는 게임의 디렉터나 디자이너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의 경험이 누적되며 생성된다. 출시로부터 어느덧 16년이 흐른 [마인크래프트]는 그 시간만큼 많은 플레이가 누적되어 있고, 각각의 플레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유튜브나 트위치의 시청자들은 그 내러티브를 게임의 내러티브로서 수용한다. 게임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게임을 매개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마인크래프트] 뿐 아니라 [시티즈: 스카이라인](2015)이나 [플래닛 코스터](2016) 같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2000~2014) 등의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내러티브 없는 게임의 스트리머·유튜버들이 플레이 과정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 <마인크래프트 무비> 상영 당시 팝콘을 던지지 말라는 극장 안내문 이러한 맥락에서, 서두에 언급한 ‘불일치’는 게임플레이를 통해 형성된 내러티브와 그것의 영화화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의 향유는 ‘게임’의 향유와 ‘영화’의 향유 사이에 놓인 틈새, 플레이와 시청 사이에 놓인 게임 소비 패턴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실 우리는 10년 전 장난감 원작의 영화 한 편이 ‘놀이’를 영화에 기입함으로써 성공한 바 있음을 알고 있다. <레고 무비>(2014)는 그저 평범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그의 모험이 사실은 레고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에 의한 것이었음을 영화 후반부에 드러낸다. 디지털 게임을 원작 삼은 영화에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그것을 정교한 영화적 내러티브 속 메타적 장치로 활용하진 못한다. 다만 이 영화의 관객들은 영화관에 방문하지만, 그들이 관람하길 바라는 것은 정교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들이 게임과 가진 경험 속에서 기억하는 이야기와 순간들의 재현이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하나의 완성된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실패했지만, 원작과의 불일치 속에서 의도치 않게 지금의 게임 소비 환경을 영화 외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원작 게임을 멀찍이 벗어나 괴상망측한 장르영화로 향했던 우베 볼의 영화들이나 내러티브의 부재를 게임 바깥의 사건으로 대리한 <그란 투리스모>, <테트리스>와도 다르다. 제작이 예정된 무수한 게임 원작 영화들이 방대한 세계관의 영화화를 예고하고 있을 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의 세계관이나 게임플레이가 아니라 게임-보기의 영화화가 하나의 방식일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없던 방식으로 보여준다. [1] V. F. 퍼킨스. 『영화로서의 영화』. 임재철 옮김. 서울: 이모션북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2021년 상반기의 최대 화제작이자, 신데렐라를 뽑자면 첫번째로 나올 게임은 바로 <잇 테이크 투> 다. 아직도 영화 <깝스>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끼우고 발사하던 장면을 연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부터 떠오르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이자, 게임 제작자인 요제프 파레스의 이 최신작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물이다. < Back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01 GG Vol. 21. 6. 10. 2021년 상반기의 최대 화제작이자, 신데렐라를 뽑자면 첫번째로 나올 게임은 바로 <잇 테이크 투> 다. 아직도 영화 <깝스>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끼우고 발사하던 장면을 연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부터 떠오르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이자, 게임 제작자인 요제프 파레스의 이 최신작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물이다. <잇 테이크 투>는 그 특유의 보편성이 빛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보편적 플레이의 집합체’ 라고 할 수 있다. 어느하나 완전히 새롭거나 원전을 찾기 어렵게 변용된 것이 없으며, 새로움 보다는 잘 편집되고 조율된 플레이의 연결이 빛이 나는 게임이다. 마치 순서대로 차려지는 가정식 백반 같다고나 할까. 이 게임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은 역시 다채로운 레거시 게임 플레이의 끝없는 연결이다. 이 게임은 2인 협동 게임이면서도, 기존 게임들의 장르적 메커니즘을 하나씩 따와 채워넣었다. 전체적으로는 2인 협동 퍼즐이라는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TPS, 비행 슈팅, 대전 격투, 리듬 액션, 플랫포머 등 수많은 클래식 메커니즘을 도구로 삼았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이 기존의 플레이 메카닉을 자유자재로 섞어넣은 탁월한 감각이 돋보인다. 이는 또한 게임의 한계점을 교묘히 가리는 효과도 낳는데, 앞서 말했듯 이 게임의 플레이 메카닉은 대부분 이미 있었던 클래식한 요소이기 때문에 반복하면서 피로를 느끼거나 자루함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이 게임은 그런 시기가 오기 직전에 새로운 플레이 메카닉으로 갈아치운다. 즉 잘 편집된 게임 플레이의 나열은, 익숙함을 신선함으로 전환하는 역설적 효과를 가져다 준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는 계속해서 ‘적응->숙련->응용’ 의 반복이다. 보통 하나의 핵심 메카닉을 추구하는 게임은 해당 플레이 메카닉에 플레이어가 충분히 익숙해지면 플레이 하기 위한 문턱, 허들을 높이는 식으로 대응한다. ‘레벨’ 로 대표되는 RPG적 성장 요소가 대표적이다. 이는 닌텐도 스위치로 나온 최근작 <페이퍼 마리오 종이접기 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이 게임은 기존의 게이머들, 특히 대중 게이머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만 하지만, <잇 테이크 투>는 반대로 플레이에 걸림돌이 되는 특징 또한 가지고 있다. 플레이 자체에 이런 저런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빛나게 하는 보편성, 하지만 반대로 그 보편성을 가로막는 플레이의 조건’ 의 대조는 다소 아이러니하다. <잇 테이크 투>를 플레이하는 와중에 든 생각은 이 게임이 왜 대단하고, 얼마나 천재적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플레이를 마무리짓고 나서 든 생각은 ‘이렇게 훌륭한데도 왜 국내에서는 폭넓게 플레이되고, 널리 알려지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플레이의 조건’ 에서 찾아보게 됐다. 지난해 직접 올해의 게임으로 뽑았던 게임, <하프라이프: 알릭스> 는 이런 맥락의 논란을 몰고 다녔다. 즉, VR이라는 기기가 필요한 게임이 어떻게 올해의 게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게임의 평가는 대중성 혹은 범용성을 꼭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쉽게 반박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건 플레이의 ‘조건’, 그것이 하드웨어이든, 아니면 플레이어가 갖춘 다른 어떤 여건이든 그 조건이 다소 높다면 과연 그 게임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남겼다. 비록 VR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쳐두고서라도,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한 조건을 요구한다. 사소하게는 기기 스펙에서부터, 나아가서는 플레이어의 실력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몇몇 게임들은 특유의 게임 플레이나 감각적 요소를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한 문화적 기반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조건이 필수적일 수도, 그저 더해지면 좋은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잇 테이크 투>는 다른 게임에 비해 이례적으로 그 요구 선이 독특하다. 이는 ‘카우치 코옵(Couch Co-Op)’ 이라는 특성과 제작자의 전작과 달리 ‘가족’ 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카우치 코옵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카우치 코옵은 아직 가정 인터넷이 보급 되지 않은 2000년대 이전 가정용 콘솔 기기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로서, 콘솔 게이밍 기반이 200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콘솔 게이밍 기기는 네트워크 기능을 막 탑재하고 네트워크를 통한 코옵을 확장하였기에, 한국에서는 하나의 기기 앞에 여럿이 모여 분할 화면과 여러 개의 컨트롤러로 함께 플레이하는 문화가 흔치 않았던 것. 있더라도 <위닝 일레븐> 같은 스포츠 대결 게임 위주의 경험이 고작일 것이다. 한국에서 카우치 코옵과 가장 비슷한 문화를 찾아 보자면 한대의 PC로 다자가 한 게임을 공유하며 플레이하던 경험, 또는 오락실의 클래식 아케이드를 찾을 수 있다. 다행히도 21세기 들어 카우치 코옵을 중시하는 콘솔 게이밍 기기인 닌텐도의 Wii, 스위치 등이 저변을 넓히면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Wii 방, 그리고 이후 닌텐도 스위치 커뮤니티를 통해 ‘추억의로서의 카우치 코옵’ 이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 조립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인에게 ‘카우치 코옵’ 은 내가 스스로 겪고 자란 문화라기 보다는, 수입된 문화에 가깝다. 이 카우치 코옵의 감성은 <잇 테이크 투> 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카우치 코옵의 경험은 주로 청소년기에 형성되며, 일종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기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경험이 청소년기에 부재한 한국 게이머들에게는 훨씬 덜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이와 더불어, 게이밍 문화에 아직 짙게 남아있는 남성 중심적 기조는 <잇 테이크 투> 를 온전하게 창작자의 주제의식 그대로 받아들여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아직까지도 한국, 그리고 세계에서 청년-청소년이 아닌 기성세대에게 게임은 남성의 문화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게임이 2인 협동 게임일 뿐만 아니라 ‘자식을 가진 부부’ 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게임은 각각 이혼 위기를 맞이한 아내와 남편을 플레이하도록 한다. 또한 감정적으로 매우 풍부한 과정을 플레이에 담아두었다. 즉 대리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이 게임의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 구성은 역시 ‘부부’ 게이머가 함께 플레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잇 테이크 투> 는 생각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게이머 경력을 요구한다. 각종 기존 게임들의 레거시 플레이가 순간적으로 교체되고, 즉각적인 적응이 이 게임의 미덕이다. 비행 슈팅, 대전 격투, TPS 슈팅, 클래식 RPG 등 이 게임이 계속해서 변환하는 게임 메카닉은 코어 게이밍의 영역이며, 캐주얼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는 재미를 느끼기 전에 여러 자잘한 장벽으로 방해받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코어 게이머였던 여성을 찾기 힘든 현재 한국의 기혼 세대에게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자체가 또다른 분란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즉, 여성들이 게임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레거시 게임에 대한 선험적인 경험이 필요한 이 게임에서 ‘코어 게이머로서의 경력’ 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주변에서 부부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 현재 부모 세대(40대 이상)에게 게이밍이란 전적으로 남성의 문화, 또는 남성적 게임과 여성적 게임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인식, 그리고 행동 양식이 깊게 베어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훨씬 그 빈도가 높아보였다. 실제로 부부가 함께 플레이 했다는 감상, 후기의 절대적인 수가 해외가 더 높았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여성들도 어렸을 때부터 비디오 게임을 접하는 기회가 남성만큼이나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세대를 불문하고 ‘여성 게이머’ 에 대한 멸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불거진 특정 여성 스트리머의 <리그 오브 레전드> 챌린저 논란이 대표적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등 대중적 게이머층을 형성한 경쟁 게임을 중심으로 게이밍은 점점 더 보편적인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코어 게이밍 문화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다. 그나마 닌텐도 스위치를 위시로 한 보다 대중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게임들을 중심으로 점점 더 여성 코어 게이머 층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그런 게이머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게이밍이 어떤 기본 교양, 소양으로 여겨지는 문화였다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카우치 코옵이라는 장벽에 가로 막히지도 않고, 또는 부부 사이에 좋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로서 이 게임을 플레이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카우치 코옵이라는 플레이 방식이 주는 노스탤지어, 그리고 ‘부부의 갈등 해소’ 라는 중심 사건이 플레이어에게 깊이 천착하는 감성은 역으로 한국의 게이머들에게는 거리감을 두게 만든다. 이 두가지가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임을 고려할 때, 게임의 완성도에 비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잇 테이크 투>가 올해의 최고의 게임이 될만한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올해 상반기 출시작 중 이만큼 강렬한 게임 플레이를 보인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의는 순수하게 ‘게임 플레이’, 즉 직관적인 놀이로서의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게임 플레이라는 핵심이 아닌 캐릭터의 외관, 이야기에 삽입된 전형적 요소, 마케팅 같은 외적 요인에 기댄 게임들에게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게임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논한 ‘플레이의 조건’ 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태초의 게임 ‘퐁’ 역시 2인이 아니면 플레이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물론 어떤 한 문화의 시작점이 수십년이 지나도 절대적인 잣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꾸준히 요제프 파레스는 2인 플레이 게임을 만들어왔고, 때문에 전작과 동일한 플레이 저변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잇 테이크 투>가 전작과 달리 널리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대중적 접근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다른 대중적 게임에 비해서는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작에 비해서는 훨씬 진일보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자리잡은 게이밍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또는 그 변화가 충분히 급격하지 못하다면,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폭넓은 이해의 관점이다. 협소한 사건 그 자체나 자신의 1차적 경험에만 의존한 해석이 아니라 좀더 광의에서의 이해, 근본적으로 그 감정이 내게는 어떤 식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 찾아보는 수용의 자세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완전 연소한 게임의 가치를 곱씹을 수 있다면 된게 아닐까. 아마 올해 내내, <잇 테이크 투>가 고평가를 받는데 있어서 이 플레이의 조건은 내내 발목을 붙잡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이 게임은 카우치 코옵,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있는 시도였다고 평하겠다. 더불어, 게임을 평가할 때마다 하는 말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세상에는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16

    GG Vol. 16 디지털 연산매체는 사랑을 다룰 수 있을까? 다룬다면 어떻게 다룰까?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방향으로의 사랑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징과 결부되며 어떤 특이점들을 드러내고 있을까? '이코'에서 '갓오브워'까지: 사랑의 대상과 게이머의 나이듦에 대하여 게임 주인공 캐릭터를 둘러싼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트렌드 변화가 주로 PC, 콘솔 기반의 스탠드얼론 게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곱씹어볼 여지를 남긴다. Read More 2023 동아시아 인디게임 답사기: bitsummit 그리고 G-eight 제일 더운 7월에 개최하기로 마음먹은 듯한 일본의 인디 게임 행사 “BitSummit”과, 버닝 비버와 마찬가지로 작년으로 2회차를 맞이한, 그리고 날짜도 거의 비슷하게 12월 초에 개최하지만 훨씬 따뜻한 대만 타이베이의 “G-Eight”이 오늘 답사기의 주인공들이다. Read More How far can the ‘economics of crowdfunding’ go?: The comparative case of and If we were to choose two of the most talked-about RPG games in 2023, many would agree to pick (Bethesda Game Studios, 2023) and (Larian Studios, 2023). It appears that gamers generally favor over due to disappointing elements in its game design, despite it still managing to achieve good sales records thanks to the developers’ publicity. The game seems to have demonstrated the limitations of the so-called Bethesda-style RPG games, whereas was praised for its rich interactivity and engaging role-playing elements. Some claim that this Belgium-made game has made a new mark in the RPG genre, listing it as one of the most critically acclaimed RPGs of 2023 alongside The Legend of Zelda: Tears of the Kingdom (Nintendo, 2023). Read More Ordinary Corrupted Dungeon Love: ‘플레이어블’을 구하지 못한 서사와 갈등, <디아블로4> 다만 지난 10년간의 행보를 돌아볼 때 걱정되는 것은 그 장엄한 세계관을 구축했던 블리자드 기획진의 에고다. Read More [Editor's View] 0과 1을 기반으로 한 계산을 딛고 서는 매체이지만 디지털게임 역시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을 다룬다. 우리는 수시로 사랑은 계산가능한 감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익숙한 관용구는 사랑을 다루는 연산장치인 디지털게임 앞에서 조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Read More [게임과 예술] 로딩중인 세계의 권태와 노동에 관한 소고 상희는 유희와 즐거움의 이미지로서 소비되던 게임의 형식을 빌려 디지털 산업 사회에서 노동하는 신체에 관한 감각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즉각적인 쾌락과 만족, 완전히 개인화된 세계에서 내면적 사유로서 ‘권태’가 가진 정서를 재조명한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이 논문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사이버 폭력의 배경을 밝히기 위해 우선 기술 또는 게임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어낸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No homosexuals in Star Wars? BioWare, ‘gamer’ identity, and the politics of privilege in a convergence culture 콘디스는 <스타워즈: 구 공화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진정한’ 게이머의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살핀다. 콘디스는 ‘진정한’ 팬 또는 게이머 무리가 미디어 환경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유토피아적 공간을 이룩하고 게임 내 특권적 지위를 이루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Read More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Read More ‘모에’는 어떻게 발현되는가?: 서브컬처 게임 속의 인물에 대한 애착 유발 구조의 고찰 2022년 즈음부터, 한국의 게임 업계는 만화‧애니메이션에 가까운 비주얼 표현 기법을 내세우는 게임들을 ‘서브컬처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만화‧애니메이션풍으로 묘사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임’이라는, 이름이라기보다 차라리 서술에 가까운 호칭으로 일컬어졌던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간결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Read More 개척, 애정, 확장성: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 그리고 제다이 서바이버 이번에 얘기한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와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를 플레이해보며, 스타워즈라는 새로운 문화에 발을 내딛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Read More 게임과 데이팅 세계 사랑은 일상적인 곳에서 온다. 그리고 그 일상은 현재 ‘디지털화’되었다. 연애관계의 돌입과 사랑의 속삭임을 우리는 ‘가상적으로, 디지털로, 플랫폼을 통해’ 수행(play)하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이는 관심은 인스타그램의 DM으로, 페이스북의 댓글로, 카카오 톡의 메신저로 꾸준히 접속하여 수치화된다. Read More 게임에서 사랑이 재현되는 두 가지 형태 – 자기애와 애착 캐릭터에 대한 애착(attachment)은 단순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애착의 대상인 캐릭터가 절대 연애의 주체성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플레이어를 만족시킬만한 일러스트와 계량화된 수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포함된다. Read More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댓 드래곤 캔서>가 ‘게임’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댓 드래곤 캔서>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Read More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야,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연애’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Read More 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Read More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의 '사랑' 사랑을 게임 속에 재현해보고자 처음 시도됐던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점차 게이머의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도록 ‘게임성’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연애 게임의 진화된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Read More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잘 짜인 레벨 디자인.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는 1985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4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달리고. 뛰고.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Read More 북미의 루트박스: 한국과 다르면서 또 같은 관계자 A는 “미국게임업계의 모바일 게임을 경시하는 풍조는 오히려 업계관계자들 특히나 게임개발자들 사이에서 더욱 심하다”고 말하며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들은 좋은 개발자를 영입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작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보는 사람들이 많다. 인게임 결제가 있는 게임 자체에 대한 반감이 크다보니 오히려 수가 적고 따라서 로트박스 문제는 관심 밖이라는 느낌이 있다”고 말하며 루트박스가 커뮤니티 안에서 크게 회자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Read More 슈퍼 히어로 '게임'의 과거와 오늘 원전인 수퍼히어로 만화는 여전히 독자적 산업을 잘 이끌고 있다. 그리고 영상 컨버전이 최근에 들어 절정을 찍었다면, 게임 컨버전은 비교적 신생이다. Read More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왜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의 수면 습관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왜 이 수면 측정 앱은 흥행에 성공했는가? Read More

  •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매체라는 말은 A와 B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스마트폰을 우리가 매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들이 각각 생각과 생각, 창작자와 수용자,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게임도 같은 의미에서 매체다. < Back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11 GG Vol. 23. 4. 10. 매체라는 말은 A와 B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스마트폰을 우리가 매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들이 각각 생각과 생각, 창작자와 수용자,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게임도 같은 의미에서 매체다. 그러나 이 매체라는 말은 조금 더 파볼 여지를 갖는다. 이를테면 텔레비전 매체는 물리적 매개체로서 텔레비전 수상기라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시청각 정보를 시청자에게 매개한다.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물리적 매체 안의 콘텐츠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 다시말해 디스플레이 기기, 스피커,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 또한 매체로 불린다. 디지털게임에서 물리적 매체는 PC, 스마트폰, 콘솔게임기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만 다른 매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물리적 매체 영역 하나를 게임은 더 가지고 있는데, 바로 입력 인터페이스다. 물리적 피드백을 제공했던 게임 인터페이스들 조이스틱과 패드, 키보드와 마우스, ‘펌프 잇 업’의 발판에 이르기까지 디지털게임에는 사용자와 게임소프트웨어 사이를 연결하는 입력장치로서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한 매체로 자리한다. 게임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규칙의 세계는 사용자가 규칙에 조응함으로써 완성되며, 때문에 디지털게임에는 사용자의 의도를 기호화하여 소프트웨어에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의도를 소프트웨어에 되먹이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소프트웨어의 신호는 뇌에 이르러 체계화된 상으로 구성되고, 이를 토대로 플레이어는 상황을 추론하여 해법에 맞는 의도를 다시 쏘아보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음성이나 몸짓 같은 경우도 인터페이스로 기능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경우 이 과정을 매개하는 방식은 손과 같은 기관을 이용해 특정한 버튼을 눌러 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버튼을 누른다는 말로 대표되는 게임 인터페이스의 활용에는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가 단순히 시청각매체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닌 특정한 상황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촉각이다. 스틱과 패드, 키보드와 마우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 인터페이스들은 대체로 특정한 버튼을 누르거나 스틱을 일정한 방향으로 밀고 당기는 동작을 요구하는데, 이 때 스틱과 버튼, 키들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 입력이 제대로 들어갔음을 알리는 특정한 촉각적 신호를 보내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오락실부터 유구하게 이어지는, 플레이어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아! 눌렀는데!’는 이 촉각의 피드백과 게임 소프트웨어의 피드백이 보여주는 불일치(이기도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변명이기도 한)의 순간을 보여준다. 내 손에 들어온 감각으로는 제 때 스틱을 당기고 버튼을 눌렀지만, 소프트웨어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는 판정을 결과로 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버튼을 제 타이밍에 누르지 못했거나 하는 순간 소프트웨어가 결과값을 출력하기 전에 이미 촉각 신호로부터 ‘아, 망했구나!’를 먼저 체감하기도 한다. 비단 버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스틱은 움직임의 제한값 – 다시말해 얼마나 오른쪽 방향으로 밀어낼 수 있는지의 한계를 스틱을 움직이다가 최대값의 벽에 부딪혔다는 촉각의 신호로 판단한다. 격투 게임에서 스틱이나 패드를 이용해 연속적으로 방향 커맨드를 입력해야 할 때 우리는 경우에 따라 스틱을 돌리는 모션을 취하곤 하는데, 이를테면 ←↙↓↘→같은 커맨드를 연속으로 입력할 때 우리는 반시계 방향으로 스틱을 끝까지 밀어 돌리게 된다. 이 때 그려지는 스틱의 움직임은 스틱의 가동범위 안에서 촉각을 통해 호의 모양으로 인지된다. 현실의 물리적 피드백이 사라지는 시대 소프트웨어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디지털게임의 인터페이스는 그렇게 오랫동안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방식에서 비롯되는 또다른 피드백과 함께 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독특하게도 이런 피드백이 사라진 새로운 게임 인터페이스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바로 터치스크린이다. 모바일 기기들의 보편화되면서 모바일 기반의 게임들이 크게 대중화되었고, 그와 함께 터치스크린은 게임 인터페이스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단지 인터페이스의 중심이 바뀌었다는 말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변화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장 앞서 언급한, 촉각을 통한 피드백이 과거의 인터페이스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매끈한 유리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플레이어의 입력은 더 이상 촉각적인 피드백과 함께 하지 못한다. 이른바 가상패드라고 불리는, 터치스크린 안에서 표현하는 별도의 입력방식을 통해 우리는 손가락으로 마치 스틱을 미는 듯한 움직임을 입력하지만, 이 때 손가락은 과거 스틱과는 달리 한없이 미끄러져나간다. 특정한 버튼을 누르면 여전히 소프트웨어는 우리의 입력에 반응하지만, 과거와 같이 게임 소프트웨어 바깥에서 주어지는 ‘눌렸음’의 촉각적 신호는 사라진다. 햅틱과 같은 기술을 통해 일정부분 보완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 방식에 기반한 촉각 신호와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일련의 가치판단으로 귀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들은 특유의 감각에 걸맞는 게임 규칙들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궁수의 전설’이나 ‘탕탕특공대’처럼 오로지 스와이프 동작만으로 이동과 공격을 묶어버리되 고전적인 입력방식의 형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고, 아예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에 적합한 장르와 시점으로 넘어가버린 소셜네트워크게임류도 있다. 과거 스틱/패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전격투게임과 같이 특정한 장르는 아무래도 소화하기 어려운 것이 터치스크린이겠지만, 이 또한 이후 장르가 어떻게 바뀔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숙련도가 머무는 곳은 어디였을까 촉각 피드백이 사라진다는 점을 조금 더 폭넓은 개념, 인터페이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인간-소프트웨어 사이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형태가 보편화되고 이 과정에서 물리적 피드백이 점차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테면 간혹 이야기되는 뇌파를 통한 게임 컨트롤을 예로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속 캐릭터의 행동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컨트롤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한다면 이 과정에서 또한 물리적 인터페이스가 제공하던 촉각적 피드백은 사라진다. 컴퓨터와 신경망을 직접 연결하는, 마치 ‘사이버펑크 2077’같은 세계에서의 게임이라면 아마도 인터페이스의 촉각 피드백은 무의미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상상 속에서라면 디지털기기가 가상으로 만들어내는 햅틱과 같은 촉각 피드백은 플레이어가 인터페이스를 활용할 때 나타나기보다는 차라리 마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촉각 수트를 입고 적의 공격을 유사하게 그려내는 것과 같은 방식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인터페이스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물리적 피드백은 점차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가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드백이 메꾼다. 촉각은 아니지만 VR 헤드셋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레이어가 VR 헤드셋을 쓰고 시선을 돌리면 센서는 플레이어 머리의 동작을 읽어낸 뒤 시선이 돌아간 만큼의 시야를 렌더링하여 실시간으로 뿌려주는 피드백을 제공한다. 현실에서 플레이하지만 인터페이스의 물리적 피드백이 사라질수록 우리가 체감하는 감각은 더욱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온전한 가상의 세계에 강하게 귀속된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띤다. 첫 번째는 말그대로 디지털게임이 그려내고자 했던 가상세계가 보다 제작자의 의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게 변화한다는 점이다. 시청각 뿐 아니라 촉각까지도 의도한 바 대로 피드백해줄 수 있다는 것은 현재도 적용되고 있는 콘솔 게임의 게임패드들에서 이미 시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듀얼센스가 제공하는 트리거의 장력 변화나 특정한 상황에 제공하는 햅틱 등은 결국 촉각을 동원해 소프트웨어가 제공하고자 하는 정보를 보다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자 함일 것이다. 두 번째는 잘 거론되지 않는 점인데, 이는 결국 플레이어 – 소프트웨어라는 길항구도 안에서 중립적인 영역이 사라져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던 이른바 ‘눌렀는데!’는 바로 그 물리적 피드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터페이스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변명이 될 것이다. 물론 신경망을 연결한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접속노드가 이상한데?’, ‘핑이 별로네’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손에 직접 누른 타이밍에 들어오던 촉각적 피드백을 근거로 삼던 시절과는 달리 이 때의 항변은 오로지 소프트웨어가 제공한 결과값과 자신의 의도가 만드는 차이로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인터페이스가 갖는 물리적 한계는 한계로만 머무르기보다는 디지털게임의 발전과정 안에서 그 또한 극복, 혹은 마주해야 할 어떤 대상으로 자리하며 게임 플레이 안에 함께 녹아들어 온 바 있었다. 터치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는 그 물리적 피드백의 공백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짝 체험하는 중이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게임들이 그 물리적 한계와 함께 어우러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신체가 유발하는 레이턴시를 넘어서는 완벽한 가상세계와의 합일을 꿈꾸게 하는 것도 인터페이스 기술의 발전이지만, 동시에 특유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부었던 인간의 노력과 그 성과들, 이른바 ‘피지컬’이라고 불렸던 일련의 숙련도가 만들어내던 재미의 영역은 그대로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영역에 눌려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전쟁의 문제, 윤리와 당위의 문제,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분의 문제 등 다양한 층위의 함의를 지닌다. 이 글은 게임과 전쟁, 폭력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 Back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 25 GG Vol. 25. 8. 10. 나는 평화활동가다. 반전 집회를 조직하고, 무기 산업을 비롯해 전쟁과 군사화에 자본을 투자해 이윤을 얻는 전쟁수혜활동을 비판하며, 한국이 분쟁 지역과 독재 국가에 무기 수출하는 것을 감시하고 실효성 있는 통제체제 도입을 요구한다. 한편 게이머로서 나는 전쟁 게임을 즐긴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서든어택> 같은 FPS(1인칭 슈팅 게임)부터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같은 RTS(실시간 전략 게임), , <팬저 코어> 같은 TBS(턴 전략 게임), <리스크>, <임페리얼> 같은 보드게임까지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이런 이중의 정체성이 어째서 나에게 도덕적 모순을 제기하지 않는지 설명해보겠다.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전쟁의 문제, 윤리와 당위의 문제,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분의 문제 등 다양한 층위의 함의를 지닌다. 이 글은 게임과 전쟁, 폭력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폭력적인 게임’이란 무엇인가?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군사주의적으로 만드는가?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의 양심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무엇이 게임 속 폭력과 현실의 폭력을 구분하는가? ‘폭력적인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이 그 자체로 혐오표현이자 폭력인 경우도 있다. 미국의 극우단체 국민동맹(National Alliance)이 2002년에 발매한 FPS <인종청소>에서 플레이어는 네오나치 스킨헤드나 KKK 단원이 되어 흑인, 유대인, 라틴 아메리카인을 학살해야 한다. 이 조악한 게임은 피해자들을 조롱하듯 마틴 루터 킹의 날인 1월 21일에 출시됐으며, 백인우월주의 상징 숫자인 14.88달러 [1] 에 판매됐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는 ‘폭력적인 게임’은 <인종청소>처럼 표현물로서 그 자체가 현실에서 정서적·문화적 폭력을 행사하는 게임이 아니라, 단지 매체로서 폭력을 묘사하거나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의 폭력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게임을 말한다. 이 두 범주가 칼 같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전자는 혐오 표현처럼 사회적·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온 집단이나 소수자를 표적으로 삼는다고 거칠게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게임에서 왜 ‘가상 살인’은 허용되고 ‘가상 소아성애’는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Luck(2009)의 설명과 맥을 같이 한다 [2] . 어떤 게임이 전쟁을 다루거나 ‘19금’이라는 이유만으로 플레이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국의 게임물관리위원회 같은 게임 심의 기구들은 게임의 전체 맥락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폭력, 섹스, 마약, 도박 등의 표현 수위에 따라 등급을 결정한다. 일각에서는 특정 게임이 해롭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든 아니든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게임이 해롭다고 말하려면, 단지 폭력을 묘사한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하다. 예컨대 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이거나 군사주의적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인종청소> 게임 플레이 영상 캡처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 · 군사주의적으로 만드는가? 게임과 폭력성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상반된 이론과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하지만 게임과 폭력 간의 연관성을 강하게 믿었던 이들이 진행한 초기 실험들은 여러 한계를 지녔으며, 문제를 보완한 후속 연구나 메타분석, 종단 연구들은 게임이 폭력에 영향을 준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했다 [3] . 오히려 어떤 연구는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착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부도덕한 가상 행위 [4] 에 대한 죄책감이 도덕적 감수성의 향상과 나아가 이타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5] . 게임이 이처럼 ‘윤리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디스 워 오브 마인>과 <프로스트펑크>가 있다. 두 게임은 각각 전쟁과 기후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윤리적 딜레마로 플레이어를 몰아붙인다. 한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으로 만들지는 않더라도, 군사적 세계관을 내면화하는 데는 영향을 줄 수 있다. Martino(2012)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군사화된 게임의 전형으로 본다. ‘군사적 아비투스(military habitus)’의 형태로 군사화(“사람이나 사물이 점차 군대의 통제하에 놓이거나 군국주의 사상에 종속되는 단계적 과정”)를 촉진하고, 플레이어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쳐 전쟁 선호 정서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6] . 게임이 직접적으로 폭력성을 증가시키지 않더라도, 위계질서에 익숙해지게 만들거나, 군사적 수단의 사용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군국주의 선전 영화가 그렇듯, 일부 군사 게임도 폭력의 정상화(normalization)에 기여하고 교련 수업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펙 옵스: 더 라인>처럼 폭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게임도 존재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이 게임과 <콜 오브 듀티>를 구분 짓는 것은 플레이어에 의해 수행되거나 모니터와 스피커로 재현되는 가상 폭력의 수위가 아니라 맥락과 의도다. 군국주의 영화와 반전(反戰) 영화의 차이가 영상물 등급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여, 게임의 폭력성이나 유해성 논의는 대체로 FPS 내지 <배틀그라운드>, 같은 TPS(3인칭 슈팅 게임)에 집중된다. 그러나 어쩌면 일선 병사로서 전투를 수행하는 FPS나 TPS보다, 병사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휘관의 시점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RTS나 TBS가 더 ‘해로울’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게임에 묘사된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재현되고 수행되는 맥락과 방식에 있다. 이것은 게임 플레이의 장단기적 영향에 대한 정량적 연구보다 게임 비평이 다뤄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비평은 게임의 장르 구분이나 등급 심의에 대한 판단을 넘어, 개발자의 의도부터 게임이 나온 사회적 배경까지 개별 게임의 맥락을 면밀히 따져야 할 것이다. <스펙 옵스: 더 라인>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의 양심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한 동료 평화활동가는 20여 년 전 어느 날, FPS를 하다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과 두통을 느꼈다고 한다. 단순한 3D 멀미가 아니라, ‘병역거부자인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표인 게임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에서 비롯된 정신적 거부 반응이었다 [7] . 그렇다면 평화주의자는 <서든어택>, <배틀그라운드>, <스타크래프트> 같은 폭력적인 게임을 해서는 안 되는가? 앞의 질문이 사실과 진위 판단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윤리와 당위에 관한 것이다. 특정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이고 군사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종청소>처럼 게임 자체가 폭력이 아닌 이상, 핵심은 게임 플레이가 개인의 윤리적 신념 내지 양심과 양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2018년 12월, 대검찰청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판단 지침을 하달했다. 이 지침에는 FPS 게임 가입 여부를 확인하는 내용이 담겼다. 일선 검찰은 지침에 따라 기소장에 병역거부자의 FPS 이용 기록을 적시했고, 이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됐다. 2019년 6월,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서든어택> 등 FPS를 두 차례, 총 40여 분 이용한 병역거부자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게임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접속 횟수나 시간에 비춰 보면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이 진실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8] . 그런데 바로 한 달 뒤인 2019년 7월, 대전지방법원은 다른 병역거부자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입영을 거부한 이후에도 폭력성 짙은 게임을 한 점 등에 비춰보면 종교적 신념이 깊다거나 확고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9] . FPS 이용 기록이 판결의 유일한 근거는 아니었겠지만, 판결문에도 적시된 것을 보면 양심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게임 이용 기록이 과연 개인의 신념을 부정할 수 있을까? 폭력적인 게임 플레이를 진정한 평화주의자라면 할 수 없는 폭력 행사에 준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까? 유튜브 채널 <스브스뉴스> 썸네일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의 마음가짐이다 게임은 가상 매체지만, 다른 매체들과 구분되는 ‘행위성(agency)’을 특징으로 한다. 소설 속 살육을 읽는 것과,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해 게임 캐릭터를 죽이는 가상 폭력을 행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같은 이유로, 게임 속 행위의 최종적인 책임은 게임이 아닌 플레이어에게 있다. 이는 사형 집행을 소재로 한 실험 게임 <엑시큐션>이 제기하는 도덕적 문제와도 일치한다. 1992년작 영화 <토이즈>에 이런 장면이 있다. 형으로부터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은 전직 군 장성 릴랜드 지보는 장난감을 개조해 무기를 만들려는 전쟁광이다. 그는 오락실에서 탱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며 적의 병력은 쏘지 않고 유엔 트럭들만 골라 파괴한다. 적의 탱크를 쏘면 300점, 헬리콥터를 쏘면 500점을 얻고, 유엔 트럭을 쏘면 1,000점이 감점되는데도 말이다. 이는 플레이어가 단순히 점수나 승리를 목표로 움직이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자기 가치관에 따라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게임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며, 플레이를 통해 수용되는 상호작용적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특정 게임이 통계적으로 폭력과 군사화를 유발하더라도, 그것은 게임에 내재된 속성이기보다 게임이 개별 플레이어에게 수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면 평화주의자는 여전히 게임에서 총을 쏴선 안 되는가? 영화 <토이즈>의 한 장면 게임 플레이의 가상성과 연극성 폭력적인 게임 플레이가 평화주의 신념에 모순되는가라는 질문은, 게임 플레이의 ‘가상성’보다 ‘연극성’에 주목해야 한다. FPS에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나 NPC(비플레이어 캐릭터)를 죽이는 행위가 폭력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가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가상 세계에서도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욕설을 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격투 스포츠나 BDSM 플레이는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이들을 게임과 같은 범주로 묶는 것이 연극성이다. 직접적·구조적 폭력이 해악인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의 권리 실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무대(게임 공간)에서 배우(플레이어)들이 대본(합의된 규칙)에 따라 하는 연극(play)은 폭력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도 해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으며, 거기에 동의한 채 참여한다.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 전쟁 당시 “어떤 베트콩도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며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누구도 알리가 직업적으로 사람을 때린다는 이유로 그의 전쟁 반대 신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게이머는 한정된 가상 공간에서 합의된 규칙에 따라 한 행위로 양심을 의심받아야 할까? 게임에서 적 캐릭터를 죽이며 느끼는 성취감은, 사격 선수가 과녁을 맞췄을 때 기뻐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것은 폭력이나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난관을 극복하고 목표를 성취한 데 대한 반응이다. 폭력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맥락이다. 살인자 역의 배우나 권투 선수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듯, 플레이어는 죄가 없다. 게임에서의 폭력적인 행위가 현실 윤리의 배신은 아니다. 진정한 평화주의는 현실의 전쟁과 폭력을 멈추기 위한 고민과 실천이다. 그리고 게임이라는 가상의 체험은 오히려 그 고민을 더 깊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1] 14와 88은 각각 네오나치 은어로 “우리는 백인 민족의 존립과 백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We must secure the existence of our people and a future for white children)”라는 슬로건을 뜻하는 ‘14단어’와 H가 알파벳의 8번째 글자라는 점에서 “히틀러 만세(Heil Hitler)”를 뜻하는 ‘HH’를 상징한다. [2] Luck, M. (2009). The gamer’s dilemma: An analysis of the arguments for the moral distinction between virtual murder and virtual paedophilia. Ethics and Information Technology 11 (1):31-36. [3] 유창석, 게임, 폭력, 범죄 연구의 타임라인, GG Vol. 14, 2023년 10월 10일.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906eddb-0772-48e4-b3d0-6256f4accd17 [4] 피실험자들은 <오퍼레이션 플래시포인트: 콜드 워 크라이시스>의 변형된 버전에서 테러리스트(실험군)와 유엔 평화유지군(대조군) 중 하나를 플레이했다. [5] Grizzard, M.. et al. (2014), Being Bad in a Video Game Can Make Us Morally Sensitive, Cyberpsychology, Behavior, and Social Networking 2014 17:8, 499-504 [6] Martino, J. (2012). Video Games and the Militarisation of Society: Towards a Theoretical and Conceptual Framework. In: Hercheui, M.D., Whitehouse, D., McIver, W., Phahlamohlaka, J. (eds) ICT Critical Infrastructures and Society. HCC 2012. IFIP Advances in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vol 386. Springer, Berlin, Heidelberg. [7] 이용석, 폭력 게임이 폭력적인 사람을 만드나요, 폭력적인 사람이 폭력 게임을 하나요?,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2022년 12월 8일. http://www.withoutwar.org/?p=19647 [8] 한겨레, ‘살상게임’ 접속한 병역거부 여호와의 증인 신도 무죄, 2019년 6월 20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8621.html [9] 세계일보,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FPS 게임을 해?…‘병역법 위반’, 2019년 7월 16일. https://www.segye.com/newsView/20190716511591 Tags: 평화운동, 반전, 병역거부, 폭력성, 전쟁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활동가) 쥬 전쟁 게임을 즐기는 평화주의자.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세상을 바꾸다: 광장에서 국회까지>, <내 머릿속의 무지개> 등 반식민 투쟁과 비폭력 사회운동, 정신장애 임파워먼트 등을 주제로 보드게임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21세기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산업 규모를 구축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이전의 상황이나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그 이전의 역사, 그러니까 ‘8비트 게임 시대’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중국 게임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이 글은 중국의 8비트 게임 시대를 조망하고 그 역사가 지닌 함의를 논한다. 이 글은 또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초기 게임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 Back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02 GG Vol. 21. 8. 10. - 편집자 주: 이 글은 중국의 게임연구자 Jian Deng이 투고해온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이 너무 길어 번역은 핵심을 놓치지 않는 선에서 축약하였습니다. 원문이 필요하신 경우 별도로 게재한 아티클을 참고해 주십시오.- 원문링크: 21세기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산업 규모를 구축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이전의 상황이나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그 이전의 역사, 그러니까 ‘8비트 게임 시대’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중국 게임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이 글은 중국의 8비트 게임 시대를 조망하고 그 역사가 지닌 함의를 논한다. 이 글은 또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초기 게임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두 다리로 걷기”: 패미클론과 학습용 컴퓨터 1980년에 행정부의 지도 하에서 아케이드 게임장치를 개발하기 시작했던 중국이 처음으로 게임 콘솔을 개발한 것은 1981년 말의 일이었다. 베이징의 제1경공업연구소(北京第一轻工业研究所)에서 개발한 YQ-1은 〈퐁〉의 여러 버전이 내장된 콘솔로서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eneral Instruments)의 AY-3-8500칩을 사용했다. 이 콘솔이 1982년 소량 출시되기 시작한 이래, 항저우나 우시, 상하이, 내몽골, 광저우 등 타 지방의 공장들에서도 유사한 콘솔장치들이 조립/생산되기 시작한다. * 1980년대 중국에서 생산되었던 YQ-1 콘솔의 모습(왼쪽), AY-3-8500칩(오른쪽) 1984년에는 2세대 콘솔이 중국 시장에 진입한다. 1985년까지 게임 콘솔은 외국에 거주하는 친척들이 주는 귀하고 비싼 선물이었는데(1986년 기준으로 1000위안 수준), 이러한 상황은 1987년 패미콤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가격이 비싼데다 중국의 PAL-D 텔레비전과 연결도 쉽지 않았던 패미콤이었지만, 중국 내수 시장에 “패미(콤)클론(이하 패미클론)”의 생산 기반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중국의 텔레비전에서도 패미콤이 작동할 수 있도록 개조된 패미클론들이 홍콩으로부터 수입되었지만, 이내 홍콩과 대만의 제조사들이 중국 본토에서 직접 콘솔을 복제/개조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국가적 개혁 및 개방을 통해 중국 남부에 거대한 규모의 저렴한 노동력이 이용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개 수십명 정도 규모의 이 공장들은 연간 수십만에서 백만대 규모의 콘솔을 생산하면서 중국 전역에 기술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중국 본토의 기업들이 게임산업에 진입하게 되는 계기도 제공했다: 1987년 초반 선전과 주하이, 닝보 등 중국의 남부 해안가 도시들이 일본산 게임 콘솔 조립 산업을 주도하면서 난천(兰天), 왕중왕(王中王), 천마(天马), 소패왕(小霸王) 등의 패미클론들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당시 중국에는 7백개가 넘는 인기 비디오게임 소프트웨어가 존재했다. (Pan A2)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시기에 중국 남부 해안 지역의 콘솔 생산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1989년 6-700 위안이었던 게임 콘솔의 가격은 1992년에 100위안 정도로 떨어졌다(Sun 79). 가격이 낮아지면서 평균적인 임금 수준의 노동자 가정에서도 게임용 콘솔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집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1993년에는 텐진의 뉴스타 일렉트로닉스(Tianjin Newstar Electronics Co., Ltd.)가 SUN 워크스테이션 시스템과 통합 회로 설계 소프트웨어(그리고 SM-T 생산라인까지)를 갖추고 중국 최초의 16비트 게임 콘솔 “소교수(小敎授)”의 개발에 성공한다. 이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성취로서, 중국은 당시 독립적으로 16비트 게임 콘솔을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는 소수의 국가들 중 하나가 된다. 중국 게임 콘솔 역사의 또 다른 흐름으로는 ‘학습기(学习机)’라 불리는 학습용 컴퓨터가 있다. 전지구적으로 게임의 산업적 발전이 활발하던 1980년대에 중국이 주목했던 것은 학습용 컴퓨터였는데, 그 이유는 컴퓨터를 통해 놀이를 훈련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콘솔 같은 명백한 오락장치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습용 컴퓨터’라는 위장으로 부모들의 염려를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 재개된 대학입시 제도 또한 관련성이 있는데, 대학 입시를 통해 사회 계층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중국 사회에서 지식에 대한 존중과 자신감이 상승했고, 이것이 학습용 컴퓨터의 필요성에 중국인들의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학습용 컴퓨터가 현대적 지식 매체로서 상상적으로 구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맥락이 존재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학습용 컴퓨터의 생산과 대중화 아래에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현대화가 은폐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학습용 컴퓨터를 통해 적당한 가격의 컴퓨터를 보급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주의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수준을 맞추고자 했다. 학습용 컴퓨터의 역사적 흐름은 덩샤오핑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재집권한 뒤 교육과 과학 그리고 기술의 현대화를 주요 국가적 목표로 삼았던 덩샤오핑은 1984년부터 컴퓨터의 대중화를 직접적으로 챙기기 시작한다. “아동을 위해 컴퓨터의 대중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에 따라 중국 사회가 컴퓨터 교육을 중시하게 되고 전국의 초중등 교육기관이 재빠르게 컴퓨터 장비를 구매하기 시작한다. 1986년에는 컴퓨터의 대중화와 교육의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과학 기술 위원회, 국가 교육위원회, 전자산업부가 “중화학습기(中华学习机)” 개발에 합의하는 등 사회적/국가적으로 의지가 충만한데다 관련 부처의 지원이 뒤따르면서 학습용 컴퓨터는 이내 중국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어 간다. 이처럼 국가 차원에서 열성적으로 학습용 컴퓨터의 생산과 보급에 나섰음에도, 시장 경제적인 문제가 그 발목을 잡는다. 학습용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지닌 한계도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개혁과 개방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적 의지와 시장 원칙 간 내재하던 모순이었다. 그 목적이 본래 (특히 젊은이들이) 국가의 근대화에 조력할 수 있게 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학습용 컴퓨터의 게임 기능은 우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여러 가정들이 컴퓨터를 구매하도록 이끈 그 시장 경제적 동기는 바로 게임 기능이었다. 결과적으로 시장은 점진적으로 상대적으로 (기능이) 통일되어있던 학습용 컴퓨터로부터 보다 다기능적인 시스템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동은 기술적 발전이나 국가 소유로부터 사적 생산 및 판매로의 이동이라는 조직적인 움직임이라기 보다는, 1990년대 중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경제적 개혁의 심화에 따른 시장 중심적 권력 관계의 변동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점차 시장의 압력에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민간 영역에서 운영되던 학습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불확실한 시장의 수요 및 다양성에 맞출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끝에 학습용 컴퓨터를 다기능 멀티미디어 제품으로 전환시키고, 게임 소프트웨어와의 호환성에 제품의 디자인 및 마케팅의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장 지향적 조치를 통해 학습용 컴퓨터들은 지배적인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부여했던 자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국가적 서사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난 학습용 컴퓨터들은 사실상 시장의 권위와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들을 긍정하는 게임장치로 변모해갔다. * CEC-1 학습용 컴퓨터, Subor SB-486D PC 학습용 컴퓨터 “문화 침략”: 게임 콘솔에서 중국의 8비트 게임소프트웨어까지 이처럼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게임산업이지만, 그 상업적 성공을 이끈 것은 1990년대 전세계를 주름 잡던 세가, 닌텐도, PC엔진 등의 일본산 게임 하드웨어의 복제품들이었다. 한편 복제품이 글로벌 게임 소프트웨어 어셈블리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생산 표준을 따라해야 했다. 즉 중국이 세계 콘솔 시장 경쟁에 참여하려면 일본의 게임 아키텍처와 로지스틱을 기반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1993년 전력산업 정보센터(电力工业信息中心)와 무장 경찰 과학기술 정보센터(武警科技信息中心站)는 QZM이라는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기로 하였는데, 이 시스템은 PC와 패미콤 간 커뮤니케이션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 시스템은 286 또는 386 마이크로 컴퓨터를 개발 플랫폼을 활용해서 닌텐도용 어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를 컴파일할 수 있었다. 이 소프트웨어는 즉각적으로 패미콤에 전송되어 실행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소스프로그램이 컴퓨터에서 변환 및 디버그 되었고 성공적으로 작업이 수행될 수 있었다(Pan A2). 이 상황은 개발 패러독스로 이어졌다. 개혁 개방에 따른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던 중국이 발전의 딜레마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중국은 이미 구축되어있는 세계 시장 질서를 받아들이고 일본 게임산업의 중국 지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주성을 더 중시할 것인가? 이 패러독스는 또한 중국의 게임산업에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문제를 강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 업체들이 일본신 게임장치의 복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시장 자주성을 지니게 된다 할지라도, 8비트 콘솔 제작에 있어 핵심적인 CPU는 여전히 해외에서 들여와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로 인해 20세기 말에 이르러 중국의 게임산업은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특히 PC용 게임 소프트의 개발로 이동해간다. 사실 중국의 게임 소프트웨어 산업은 중국이 국가적으로 하드웨어 제조산업을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시점에 시작되었다. 1982년 ISCAS(중국과학원 반도체연구소)가 로켓런처 게임칩을 생산했던 바로 그 해에 북경 과학위원회(北京科委)는 10개 대학과 연구기관을 모아 콘솔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해외 전문가의 지도 하에서 중국은 1983년 초 중국적 특성을 가진 게임 프로그램 〈손오공(孙悟空)〉과 〈칠교판(七巧板)〉등을 개발하여 국제적인 게임기업들에 판매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젝트들은 변동하는 외부 환경과 맞물려 사라져간다. 대신 1980년대 후반 들어 불분명한 지식재산권을 가지고 있었던 소규모 기업들 - 얀샨소프트웨어(烟山软件), 파이오니어 카툰(先锋卡通) 등 - 이 8비트 게임의 해킹과 불법복제 사업에 뛰어든다. 이들의 성공은 경제적 생존이 최우선 되는 입장에서 게임 하드웨어 시장이 추구하던 모방 전략을 따른 결과였고, 이는 다시 말해 중국 게임 소프트웨어 시장의 번성이 일본의 8비트 게임 불법복제로 뒷받침된 것임을 의미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게임의 내러티브가 보다 복잡해지면서 중국의 게임개발사들은 새로운 도전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카게의 전설(The Legend of Kage)〉는 공주를 구하는 닌자의 이야기인데, 그 속에 일본의 닌자 문화를 표현하는 다양한 시청각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족주의적인 중국에 있어 이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게임은 중국 시장에 넘쳐나고 있던 수많은 일본 게임들 중 하나일 뿐이었고, 이러한 상황이 1990년대의 중국 게이머들이 게임의 문화적 식민화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중국 내에 새로운 게임 소프트웨어 시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중국 고유의 특성을 지닌 게임에 대한 수요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플레이어들의 문화적 각성은 중국 IT 산업의 빠른 성장과도 맞물려 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새로운 IT 인력들의 다수는 게임 산업에 열광적이었는데, 그들은 게임을 개발하는 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기반 운영에 있어 가장 낮은 수준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운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Wei 75). 비록 그들이 문화 지식인으로 성장했던 것은 아니었지만(그들은 엔지니어였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 아래서 중국의 문학과 예술작품에 실린 “대도(载道/도를 떠받든다)의 전통”을 과감하게 차용한다. 그들이 시도한 것은 정치적 도덕 교육에 기반한 보수적인 게임문화의 구축이었고, 이는 1990년대 중국 게임에 팽배했던 독특한 애국주의 기반의 정서를 형성했다. 1994년 10월 골든디스크 일렉트로닉(金盘公司)은 중국의 첫 PC게임 〈신응돌격대(The Magic Eagle)〉을 출시한다. 1998년에 이르면 15개 개발사들이 55편의 PC용 게임을 출시하는데, 이 게임들은 중국의 PC게임 첫세대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푸저우 웨이싱 컴퓨터 사이언스 & 테크놀로지(外星科技)는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중국 게임산업계에서 이 회사는 중국의 8비트 게임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6년부터 이 회사가 생산하고 출시한 270편 이상의 8비트 게임들은 중국 8비트 게임에 있어 핵심이었다. 이 회사를 필두로 199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열군데가 넘는 업체들이 8비트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업체들은 무허가로 8비트 게임 소프트웨어를 번역하고, 이식하고, 백포트하고, 해킹해서 유통시켰는데, 중국 8비트 게임 시장의 번성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표] 업체별 게임 소프트웨어 출시 현황 이 부분이 바로 8비트 게임 개발 과정의 중국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PC엔진의 출시 이래 세계는 16비트 게임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차세대 콘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의 중국에는 여전히 구식 8비트 게임을 겨냥한 게임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과 연관이 있다. 중국의 게임업체들 또한 세계 시장을 열심히 따라잡고자 노력하던 무렵, 뤄양시에서 “2.29” 살인 및 시체 방화사건이 벌어졌다. 허난성 뤄양시에 거주하던 3명의 6학년생들이 게임방 주인에게 살해된 후 벌판에서 불태워졌던 것이다. 이 사건이 보도된 후 국가적 분노가 일어나면서 정부의 엄격한 게임 통제로 이어진다. 2000년 6월 12일 각 부처가 합동으로 “내수 시장을 대상으로 게임 장치와 그 구성요소들의 생산과 판매”를 완전히 정지하는 전자오락실 특별 관리 계획을 공포하였고, 그에 따라 중국 게임 하드웨어의 개발이 정체되기 시작한다. 그 영향으로 중국의 게임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들은 대거 PC용 게임 생산에만 집중하게 된다(이 시기는 한국산 온라인게임의 영향으로 주로 온라인게임이 개발됨).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콘솔용 게임 소프트웨어에 천착하던 게임 업체들은 시장 내에 존속하는 8비트 게임 콘솔용 소프트웨어만 개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은 차세대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는 시장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다시 말해, 게임 콘솔 금지 정책은 중국 콘솔 게임의 발전을 억제했고, 그에 따라 8비트 게임 중심성이 비정상적으로 존속되었던 것이다. 관점에 따른 중국 8비트 게임 소프트웨어 분류 중국의 8비트 게임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여기서는 생산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정리해보았다: 1. 일본 게임을 해킹한 게임: 이러한 유형의 게임들은 중국인들이 8비트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역사적 계기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임으로는 얀샨 소프트웨어가 남코의 〈배틀시티(Battle City)〉와 코나미의 〈콘트라(Contra)〉를 해킹해서 만든 〈얀샨탱크(얀샨 Tank)〉와 〈슈퍼콘트라 II(Super Contra II)〉가 있다. 얀샨 소프트웨어는 이전에 푸저우의 제16중학교 운영하던 기업이었는데, 그래서 “푸저우 제16중학교(福州16中)”이라는 단어와 "얀샨"(烟山)이라는 단어가 게임 중에 나타난다(이미지 참조). 중국 게임산업상 최초의 인-게임 광고라 할 수 있다. * 〈얀샨 탱크〉 내 인-게임 광고 2. 일본 게임의 번역판: 여기에는 주로 1990년대에 웨이싱(Waixing)에서 출시했던 무단 번역게임들이 해당한다. 이 회사가 무단으로 번역한 일본 게임에는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시리즈, 〈파이어 엠블렘〉 시리즈 등이 있다. 지식재산권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무단 번역 게임들은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중국 게임의 역사 내 그들의 위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해적판 8비트 게임들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비용과 기술의 한계로 인해 게임 플레이 가이드 같은 것들은 대개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중국의 플레이어들은 〈드래곤 퀘스트〉 같은 복잡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JRPG 게임들이 중국에서 별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웨이싱을 비롯한 중국의 8비트 게임회사들의 번역 시도는 중국의 젊은 플레이어들이 동아시아 하위문화의 젊고 생생한 상상을 저렴한 가격으로 누릴 수 있게 해준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이는 주류 정치적 서사에 묶여있던 젊은이들의 사고를 해방시킬 수 있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3. 이식된 게임: 이러한 유형의 게임들은 보다 고성능 플랫폼의 게임들을 패미클론 플랫폼으로 각색하여 이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의 플레이어들은 여러 인기 걸작들을 패미클론 콘솔을 통해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 포켓몬은 가장 중요한 이식 대상이었는데, 웨이싱의 포켓몬 시리즈, 난징 테크놀로지(南晶科技)의 젬 시리즈(Gem series), 쉔젠 진코타 테크놀로지(晶科泰, 이하 진코타)와 헹거 테크놀로지(恒格电子, 이하 헹거)의 포켓몬 시리즈, 마스 프로덕션(火星科技, 이하 마스)의 포켓 엘프 시리즈 등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게임들이 중국 고전 PC게임 또한 이식해왔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난징 테크놀로지의 〈신월검흔(新月剑痕)〉 와 진코타의 〈헌원검(轩辕剑)〉 등은 대만 게임으로부터 이식된 것이다. * 난징 테크놀로지의 〈헌원검〉 4. 그림을 바꾼 게임(换皮游戏): 대개 JRPG 게임을 중국적으로 보이도록 시청각적인 요소들, 예컨대 스토리, 장면, 오프닝 등의 게임 내 시네마틱, 캐릭터 디자인, 장비 액세서리 등에 중국적 요소를 덧입히는 것이다. 즉 원본이 되는 일본 게임(주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게임플레이와 구조에 기반하되, 원본의 스토리를 중국의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징 테크놀로지의 〈헌원검〉 시리즈는 명시적으로 대만의 소프트스타 엔터네인먼트(大宇公司)의 고전 CRPG 〈헌원검〉를 이식한 것이었지만,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시스템(인터페이스, 레이아웃, 시스템 아키텍처 등)을 도입하여 중국의 스토리를 담았다. 5. 오리지널 게임: 중국에도 오리지널 8비트 게임들이 있다. 비록 이 게임들이 중국의 8비트 게임을 완전히 혁신적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기존의 게임플레이를 활용해서 중국적인 테마를 지닌 게임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드래곤 퀘스트〉의 구조에 기반해서 중국적 스토리와 시청각적 요소들을 입힌 4번의 경우와 달리, 이 오리지널 게임들은 다양한 게임 플레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중국의 문화적 특성을 지닌 8비트 게임의 개발을 추구했다. 중국의 게임산업의 발전이 아직 미진하던 1990년대의 그와 같은 시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당시 일본과 미국의 게임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전세계가 “일본-미국 중심주의”의 게임 역사에 빠져 있었고, 그에 따라 각 국의 게임 역사가 그 자신과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표현하는 8비트 게임의 개발은 “게임 제국”의 변방에 놓인 중국이 반드시 다뤄야 하는 문제였다. 많은 일본의 고전게임들이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활용해온 가운데 종종 무의식적인 변형과 왜곡이 뒤섞여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는 삼국의 “도시’ 개념을 일본 전국시대의 “일본식 성”의 개념으로 변형시켰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는 중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명백히 잘못된 방식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리지널 8비트 게임은 중국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인 고유의 관점을 통해 조망하면서 스토리를 전달하는, 고도의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오리지널 8비트 게임들을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역사적 테마를 가진 게임: 주로 1990년대에 등장해서 대개 중국 근대의 역사를 다룬다. 대표작으로 〈임칙서의 금연(Lin Zexu's Smoking Ban, 林则徐禁烟)〉, 〈지도전(Tunnel Warfare, 地道战)〉 등이 있다. 대부분 롤플레잉 게임플레이를 채택하고 스토리상 근대 중국이 직면했던 “노예화와 멸종”의 위기를 강조하면서 아바타를 통해 플레이어들을 국가의 운명과 연결시키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는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를 강조한다. 이러한 게임들의 내러티브 콘텐츠는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중국의 게임산업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2. 전기(biography) 게임: 중국의 역사나 소설의 인물을 주요 캐릭터로 삼아 그 캐릭터의 영웅적인 행실을 다룬다. 대개 전통적인 중국 문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았으며 권선징악, 의협심, 국가에 대한 충성 같은 주류적 가치를 표현한다. * 웨이싱의 〈포청천(Bao Qingtian, 包青天)〉, 난징 테크놀로지의 〈곽원갑(Huo Yuanjia, 霍元甲)〉과 〈황비홍(Huang Feihong, 黄飞鸿)〉, 마스의 〈악비전(Yue Fei Biography, 岳飞传)〉 (왼쪽 위부터) 3. 각색된 게임: 중국의 8비트 게임에 있어 메인이 되는 유형으로, 고전 걸작, 무협 소설, 유명 영화와 TV 드라마, 고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외국의 동화 등을 각색한 게임들이 있다. 4. 고전 소설을 각색한 게임: 서유기, 수호지, 삼국연의, 홍루몽, 수당연의, 삼협오의, 경화연 등의 고전 소설을 각색한 게임들 * 웨이싱의 〈서천취경 2(The Journey to the West 2, 西天取经2)〉, 〈수호전(Water Margin, 水浒传)〉, 〈삼협오의: 어묘전기(Three Heroes and Five Righteousness: Legend of the Imperial Cat, 三侠五义:御猫传奇)〉, 난징 테크놀로지의 〈홍루몽(Dream of Red Mansions, 红楼梦)〉, 〈수당연의(Sui and Tang Dynasties, 隋唐演义)〉 (왼쪽 위에서부터 차례로) 1) 무협소설을 각색한 게임: 김용이나 구용 같은 작가의 무협소설을 각색한 게임들이다. 중국 게임의 역사에 있어 8비트 무협 게임은 문화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드래곤 퀘스트〉 같은 해외 게임들에 기반한 상상이 넘쳐나는 가운데, 무협 게임만이 유일하게 중국의 전통적 문학 및 예술적 사고가 “보장된 영토”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미국의 청소년 하위문화가 부상하는 가운데서, 이 게임들은 전통적 문학작품과 예술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자 수많은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수천년 간 내려온 고유의 대중 문학 및 예술적 사고에 노출시켜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협 게임들은 중국 게임의 문학적/예술적 특별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는 “의협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 같은 중국 전통의 이데올로기적 자원들이 게임 영역에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 웨이싱의 〈초류향(Chu Liuxiang Legend, 香帅传奇之血海飘零)〉과 〈의천도룡기(Massacre Dragon Knife, 屠龙刀)〉, 난징 테크놀로지의 〈천룡팔부(The Demi-Gods and Semi-Devils, 天龙八部)〉와 〈절대쌍교(Handsome Siblings, 绝代双骄)〉, 진코타의 〈초류향신전(New Biography of Chu Liuxiang, 楚留香新传)〉 (왼쪽 위에서부터 차례로) 2) 영화와 드라마를 각색한 게임: 당대의 유명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각색한 게임들. 그러나 이 게임들은 원본 작품의 이름이나 컨셉만을 차용했을 뿐, 게임의 플롯은 완전히 다른 경우도 많았다. * 웨이싱의 〈대화서유(A Chinese Odyssey, 大话西游), 난징 테크놀로지의 〈무림외전(My Own Swordsman, 武林外传)〉, 마스의 〈타이타닉(Titanic)〉 (위에서부터 차례로) 3) 고전 신화와 설화를 각색한 게임: 일본이나 유럽 또는 미국의 마법 문화와는 완전히 상이한 고대 중국의 신이나 귀신에 대한 전설과 초자연적인 상상을 활용함으로써 중국 8비트 게임의 문화적 콘텐츠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 웨이싱의 〈봉신방격투(Fighting!The Legend of Deification, 封神榜格斗)〉와 〈천왕항마전(King Defeat Devil, 天王降魔传)〉, 난징 테크놀로지의 〈나타전기(The Legend of Nezha, 哪吒传奇)〉과 〈마도겁(Devil way, 魔道劫)〉 (위에서부터 차례로) 4) 외국 동화를 각색한 게임: 외국의 고전 동화를 활용한 게임들로, 이를 통해 해외의 동화들이 중국의 플레이어들에게 알려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게임들이 원본에 완전히 충실했다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 플레이가 원본인 고전 작품에 대한 경험이라기 보다는 그저 신나게 플레이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중국의 8비트 게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상 살펴본 중국의 8비트 게임의 역사는 중국 게임의 역사에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녔으며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지적재산권을 지닌 내수용 8비트 게임의 생산과 판매는 1990년대 초반 웨이싱을 매개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 내수용 8비트 게임은 적절하지 못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었다. 당시 국가적 차언에서 컴퓨터 및 인터넷 기술의 발전에 매진하던 가운데 게임을 사랑하는 수많은 컴퓨터 인력들이 게임 소프트웨어 제작업계에 진입하면서 중국의 PC게임이 발전했다. 중국의 주류 게임사가 콘솔 게임의 역사로부터 컴퓨터 게임(온라인 게임도 포함)의 역사로 빠르게 바뀌어간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8비트 게임 소프트웨어 제조업계가 우세했었지만 PC게임 부문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8비트 게임은 비가시적인 형태로 “보이지 않게 발전”할 수 있었을 뿐으로, 그에 따라 중국 게임의 역사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2000년도에 있었던 콘솔 금지 정책은 8비트 게임에 있어 유리한 면이 있었는데, 중국 정부가 16비트 게임 콘솔을 비롯한 차세대 고성능 게임 하드웨어를 개발하는 것 - 그리고 그에 따라 차세대 콘솔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 - 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8비트 게임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중국에서는 글로벌한 경향과는 달리 8비트 게임 중심성이 지속되었다. 비록 중국의 게임 제조업체들이 다양한 8비트 게임을 개발했음에도, 실질적으로 세계 게임 산업 및 중국의 8비트 게임 산업을 혁신하고 발전시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반대로, 게임플레이의 혁신이 게임 혁신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면, 대부분의 8비트 게임들 - 앞서 언급했던 오리지널 8비트 게임들 포함 - 은 그저 일본의 8비트 게임의 디자인을 모방했을 뿐이며, 중국적인 특성을 지닌 오리지널한 게임플레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 오리지널리티의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8비트 게임은 실패라 할 수 있다. 일본 게임의 질 낮은 복제에 가까운 이 게임들은 혁신적인 가치를 지닌 문학이나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수익을 위해 산업적으로 생산된 하급품에 가까웠고, 그에 따라 8비트 게임들은 중국의 플레이어들로부터 언제나 비판과 조롱을 받곤 한다. 그러한 8비트 게임일지라도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나름의 장점과 의미가 없지 않다. 다양한 오리엔탈리즘적 담론들로 가득한 게임 영역에서 중국의 이미지는 자주 왜곡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에는 외국 게임 개발자들의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상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중국의 국가적 이미지를 저해하고 그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8비트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이 상대적으로 “리얼”한 중국을 중국의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특정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의 8비트 게임들은 치명적인 흠결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8비트 게임들의 플레이가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데다 심지어는 버그로 가득해서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온전하게 경험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8비트 게임의 시장 매출은 실질적으로 형편없었으며, 그 게임들이 중국 게임산업의 발전을 주도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그 기저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 보고 8비트 게임의 텍스트와 그 생산 과정 및 사회적 텍스트 간의 상호작용을 논의하면서, 중국의 8비트 게임 역사를 오늘날 중국에 대한 하나의 증상이나 은유로서 취하여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8비트 게임은 1990년대 중국 십대들의 사고방식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 1949년 중국 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래, 문학과 예술에 대해 사회주의적 관점이 주도해온 환경 아래서 만화나 예술 영화 등 중국의 아이들을 위한 문화상품들은 혁명의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육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문화상품들이 십대들이 좋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청소년 문화의 영역 내 엄격한 사회주의 교육 및 이데올로기 체계의 연장일 뿐이었다. 개혁개방 이후 일본의 8비트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여러 청소년 하위문화 상품들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중국으로 대거 유입되고 1990년대에 이르러 엄청난 규모를 형성하게 되면서, 기존의 엄격한 문화적 상황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일본 문화 상품의 분방한 문화적 상상력이 중국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일본의 청소년 하위문화가 당국이 엄격하게 통제하는 주류 문화와 첨예하게 충돌하게 되었고, 점진적으로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른바 중국 십대 청소년들의 “마음의 해방”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8비트 게임 생산은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다. 중국의 게임 제조업체들은 중국의 이야기들을 8비트 게임 기술과 결합시키고자 했고, 8비트 게임이 중국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해방시키고 있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중국의 문화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관심이 강화되는 것도 원했다. 그러나 이는 한정된 기술력으로 온전하게 실현될 수 없었고, 플레이어를 유인할 수 있는 혁신에도 실패하면서 8비트 게임은 시장에서 밀려났다. 즉 이 8비트 게임들은 콘텐츠 내에 중국적인 것을 담는 것에 지나치게 치중하다가 게임플레이의 재미 그 자체를 경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8비트 게임의 상징적 가치가 언제나 그 사용 가치를 넘어섰던 것이다. 대부분의 8비트 게임들의 매출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은 여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향후 8비트 게임의 발전을 도모하고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중국적인 분위기가 확실히 담겨있는 8비트 게임을 계속해서 개발하되 혁신적인 8비트 게임 플레이의 가능성을 탐구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중국 내 버려진 시장 부문인 8비트 게임의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中国音数协游戏工委(GPC),中国游戏产业研究院.2020年中国游戏产业报告[R/OL].(2020-12-18)[2021-09-03]. https://pan.baidu.com/s/1RbLCh5fKLCyTfFcZeFPHvA?_at_=1618218156065 . 中国文化部等,关于开展电子游戏经营场所专项治理的意见[R/OL].(2000-06-12)[2021-09-03] http://www.gov.cn/gongbao/content/2000/content_60240.htm Pan, Song 潘松. “Zhongguo dianshi youxiye fazhan gaikuang” 中国电视游戏业发展概况 [Report on Development of Chinese Video Game Industry]. Diannao bao 电脑报27 August 1993: A02. Print. Wu, Zhensheng, et al乌振声等. “Zhonghua xuexiji yuanli he yingyong(1)” 中华学习机原理和应用(1) [China Learning computer’s Principles and Applications]. Wuxiandian 无线电1(1988):5.Print. Zhu, Zhangying朱章英. “Mantan dianshi youxiji” 漫谈电视游戏机 [The Talk About the Video Games]. Jiayong dianqi家用电器4(1986):24.Prin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학자) 덩 젠 , 邓剑 쑤저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부교수. 디지털게임 문화연구를 주 관심사로 다루며, 〈澎湃新闻〉에서 게임에 관한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산업의 트리플A, 이용자의 트리플A

    한 때 트리플A가 상징했던 것들을 더욱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신성함을 게임에서 꿈꿔보자. 하나의 통일된 지향을 추구하기 보다는, 여러 방향의 주변화된 상상력이 각자의 방식으로 누적될 때 인류에게 진정으로 울림을 주는 더욱 경이로운 경험을 우리는 협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통해 가능한 것의 경계를 계속 확장하고, 그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 Back 산업의 트리플A, 이용자의 트리플A 10 GG Vol. 23. 2. 10. 트리플A(AAA)에 관하여 얼마전 게임과학연구원에서 20대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트리플A라는 단어가 더 이상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일 후, 이경혁 편집장에게서 트리플A 개념에 대한 원고 제안 전화를 받았다. 연달아 찾아온 우연이 운명같이 느껴진 걸까, 덥석 퀘스트를 수락하고 나서야 미련하게 후회가 밀려왔다. 고민의 끝에 나는 트리플A에 대해서, 나와 그 단어의 아주 사적인 관계를 벗어나 그에 대해 고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우선 고백부터 하고 싶다. 지금 하려는 트리플A의 이야기는 어떠한 학술적인 개념에 대한 분석이기 보다는, 오롯이 나의 존재-제약적 위치성(positionality)에 기반한 개인적인 심중소회라는 점을 말이다. 한때 나라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지녔던 ‘존재’로서 그 용어가 퇴색되거나 희미해 져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 이자, 또 그 과정속에서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에 대한 글이다. 트리플A가 상징했던 것들 2010년 경만 해도, 게임 산업의 일원들은 누구나 트리플A를 꿈꿨다. 적어도 내가 만난 이들은 그랬다. 조금 과장하자면, 당시 "AAA"라는 레이블은 탁월함과 위신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많은 개발자들은 명성을 얻을 게임을 만들기를 열망했다. 당시 말단 주임이었던 나는, 그저 AAA 개발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 괜스레 혼자 자긍심에 벅차오르곤 했다. 게임의 세계에서 트리플A는 1990년 대 후반, 야심 찬 생산 가치를 지닌 게임의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주요개발자들에게 트리플A는 가능한 한계를 확장하고, 훌륭한 게임은 어떤 것인지 정의하는 것을 칭했다. 실제 당시의 트리플A 게임들은 대체로 주요 스튜디오의 대표 타이틀로, 뛰어난 기술 활용을 바탕으로 그래픽, 사운드, 플레이어 경험 측면에서 매번 업계 표준의 진화를 쉼없이 이끌었다. PC게이머로서 나의 게임 경험은 플로피디스크와 비트 그래픽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도스화면에서부터 광케이블 인터넷까지 지나오는 동안 나에게 게임의 지속적인 변태(metamorphosis)를 지켜보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진화하는 게임의 세계와 경험은 늘 기대 이상이었다. 잔디 잎이 한 올 한 올 바람에 실랑이는 넓은 들판에 서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감성에 잠긴 때, 오픈월드를 산책자처럼 거닐 때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걸던 NPC AI가 더 이상 사물처럼 느끼지 않아졌을 때, 그리고 수천명의 사람들과 물러설 수 없는 전투를 벌이던 중 그 부하를 버텨내는 서버의 안전성을 새삼 인지했을 때, 매 순간이 ChatGPT를 만나던 순간만큼 경이로웠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이 디지털 게임이라는 것의 한계라는 것이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대단한 경험을 하고, 또 함께 게임을 하는 사람들과 즐거울 수 있을까? 그리고, 절실히 바랬다. 누구나 열망해왔지만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경험을 만드는 여정에 동참할 수 있기를. 어쩌면 잊혀지고 변질되고 있는 이름 라떼 감상이 조금 길었는데 현재 시점으로 복귀해보자. 트위터 투표를 진행해봤다. “당신의 경험에 기반했을 때, 트리플A라는 용어가 최고 품질 게임 프로덕션의 의미로 여전히 자주 사용되나요?”라는 질문에 57.1%만이 ‘그렇다’, 그리고 18.6%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70여명의 소규모의 샘플임에도 나의 트위터 친구들이 대부분 게임, 이스포츠 관련 종사자, 연구자, 혹은 열정적인 게이머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적잖이 놀라웠다. 그리고 여전히 주변에서 용어 자체는 쓰이지만, 품질 보다는 개발비 규모의 표현이라도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친절한 댓글을 보았다. 이 어설픈 사전조사는 트리플A라는 용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트리플A 레이블은 ‘훌륭한 게임’ 즉 예술적 또는 기술적 성과보다는 높은 제작 예산과 마케팅 비용을 들여 얻는 상업적 성공과 산업 가시성의 수준을 나타낼 때 더 자주 사용된다는 결론을 지었다. 게임의 세계에서 트리플A의 개념이 인식되는 방식은 수년간 역동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추억속의 소중한 의미는 퇴색되었나 보다. 안타까움과 함께 궁금해진다. 이 개념적 변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트리플A의 기원과 변천: 산업의 트리플A, 게이머의 트리플A 사실 AAA라는 용어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원래 AAA는 가장 높은 기준의 신용도를 보이는 채권에 부여되는 등급으로, 가장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낮은 채권을 의미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90년대말 미국의 게임쇼에서 일부 개발사들이 사용하면서 게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 용어가 게임을 수식하게 되었을 때, 그 관계로부터 중의적인 의미가 발생하게 되었다. 하나는 기원의 의미 그대로의 경제적 측면에서 ‘높은 신용’이다. 즉, 개발사나 투자자들에게 그들의 재무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안전한 투자 및 사업 기회를 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게이머들에게도 트리플A는 높은 게임퀄리티에 대한 ‘신뢰’의 약속을 의미했다. 일례로 전설적인 게임디자이너 시드마이어(Sid Meyer)는 ‘승인 표시(Seal of approval)’를 비디오 게임 역사 상 가장 주요한 혁신 3가지 중의 하나로 꼽은 적이 있다(Arendt, 2000). 패키지 박스에 ‘시드마이어’의 이름이나 닌텐도의 ‘품질보증표시(Seal of Quality)’가 있을 때, 게이머들은 특정 수준 이상의 게임 경험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관행이 대충 만들어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한 ‘셔블웨어(Shovelware)’ 게임으로부터 게이머들을 보장하는 게임 퀄리티’의 기준을 설정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보았다. 한국이 온라인 게임의 제국으로 불리던 시절(Jin, 2010) NCSOFT에서도 게임이 출시되기 위해서는 ‘NC Quality’의 높은 벽을 넘어야했다. * 시드마이어의 <문명>(1991) 시작화면과 닌텐도의 품질보증표시 즉, 트리플A는 경제적 가치와 게임적 가치를 모두 지닌 게임, 그래서 모든 이해관계자가 신뢰할 수 있는 게임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이 나아가야할 방향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기준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가 지닌 경제적 가치와 게임적 가치의 균형 상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경계선은 전자의 방향으로 점점 기울어갔다. 경제적 ‘생산가치’로서 트리플A는 초기에는 흥행이 보장된 ‘상품’을 그 자체만을 의미했으나, 게임이 비즈니스 모델이 확장팩을 비롯한 여러 방식으로 다각화 되는 과정에서 한 게임의 지속가능한 자산화(assetization) 역량까지 표현하게 되었다(Bernevega & Gekker, 2021). 이 과정에서 AAA+나 AAAA와 같은 변형된 용어도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디 게임이 더욱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그 반대 극부에서 기존 흥행 사례를 따라 표준화된 개발 방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위험도 낮은 게임개발시스템(Folléa, 2020)이나, 그로 인해 극도로 동질화 되어버린 게임 산업을 의미하기도 한다(Keogh, 2015). 마치 영화계의 ‘블록버스터’라는 용어가 진부해진 헐리우드식 흥행 공식에 갇혀버린 상업 영화를 의미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오늘날, 트리플A라는 용어는 반쪽짜리 지향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의미변화로 인해 트리플A라는 존재는 ‘훌륭한 게임’이라는 지향으로서 신성한 상징성, 즉 이정표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상징적 빈곤의 극복을 위하여 그렇다면 트리플A가 한때 지니던 상징적 기능의 상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개인적으로는 그 상징적 빈곤은 현 시대의 인류가 게임에 대해 지닌 사회적, 공동체적 상상력의 빈곤이 아닐까 생각한다. 게임산업의 규모는 점차 방대해지고 있지만, 게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혼미한 상태에 처해있다. 나아가 게임에 대한 인식론적 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빈곤이 아닐까 생각한다.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많은 경우에 그들이 말하는 ‘게임’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게임연구자로서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현행법의 ‘게임물’의 정의를 수없이 읽었지만 여전히 아리송하다. 게임의 ‘등급’을 제시하는 사람들, 개발하는 사람들, 그리고 플레이 하는 사람들 사이의 인식론적 간극과 그로 인한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이 빈곤의 시대에,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일이지만, 오히려 그 원래부터 그 실체가 모호했던 트리플A라는 존재의 쇠퇴 과정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전히 트리플A는 그 개념의 상징적 몰락, 즉 어떠한 ‘신비로움’이 탈착되는 과정을 통해서 여전히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정표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먼저, 트리플A의 의미변화는 경제적 가치가 게임적(미학적, 기술적, 플레이경험적) 가치와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게임에 대한 ‘(오락)상품’ 혹은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관점을 벗어나 그 매체적 잠재력에 대해 본질적으로 차원에서 고민해 볼 수 있는 틈을 얻는다. 지금까지 게임은 좁은 의미에서 여가를 위한 문화(엔터테인먼트)산업으로 기존 사회의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비슷한 개념들에 빗대어 표현되어왔다. 이러한 규범적, 인식론적 경계는 게임을 고정관념 속에 가둬왔다. 트리플A의 상징적 몰락은 이 틀을 인식함을 통해 약화시킬 수 있는 계기, 즉 사회가 게임을 인식하는 방식을 변혁할 수 있는 계기를 시사한다. 게임이라는 고유한 예술 혹은 기술 형식에 깃든 가치들은 그 고정관념 속에서는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트리플A’ 혹은 그 이름이 상징했던 것에 대한 재정의 혹은 대안의 탐색을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은 생산자-소비자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서, 게임에 대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추구할 수 있는 미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을 다시 모색하는 것이다. 게임의 가치가 예산이나 생산 가치가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경험과 감정에 있다는 것을 되새기자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트리플A의 쇠퇴는 게임이 더 이상 하위문화가 아니라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였다는 점도 나타낸다는 점에서 또 한번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적 프레임을 부여한다. 최근 게임과학연구에서 ‘포스트게이머 전회’ 담론은 게이머라는 집단이 기존의 ‘젊은 백인 남성’의 하위문화적 스테레오타입에서 각각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인간-게임의 관계에 따라 다원화된 여러 집단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논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트리플A는 당대의 상황속에서 비교적 동질성을 지닌 초기 게임 커뮤니티는 ‘훌륭한 게임’을 유사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는 점과, 동시에 다원화된 현 시대의 여러 ‘게이머 유형’들에게는 공통된 이정표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도 드러낸다. 그렇다면, 환하게 빛나던 트리플A는 양초처럼 녹아내려 초라해짐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빛의 설계를 구체화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포괄성과 접근성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플레이어 중심 가치를 반영하거나 새로운 기술적 발전에 걸맞은 더 실험적이고 더 야심 찬 열망과 이상을 반영한 이정표 말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경제적 생산 가치와의 협상에 있어, 더욱 윤리적이거나 지속가능한 방식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을 구축할 시점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리플A를 기리며 게임에 대한 경제적 가치와 게임적 가치의 경계가 재협상되는 과정에서 정든 이름은 서서히 잊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대변하던 가치들과 의미변화 과정은 게임이라는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그만의 프레임을 우리에게 남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게임의 가치는 게이머와 개발자, 혹은 그 사이의 모호한 정체성의 여러 이해관계자의 모두의 변화하는 우선순위와 욕구를 반영하여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이제 인간-기술의 본질적인 관계성이 재고되는 패러다임의 전회기에 서있다. 지난 몇 십 년에 걸친 디지털 시대가 디지털 기술을 기존 사회의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속에서 활용하던 시기라면, 이제 우리 일상을 구성하던 대부분의 ‘물질적인 것’들이 디지털로 구현된 포스트디지털 시대는 미래의 규범들이 새롭게 쓰일 수 있다. 그리고 한 때 ‘쓸모없는 것’이었던 게임은 그 모든 가능성들의 테스트베드이다. 이스포츠나 디스코드의 예시에서 드러나듯, 게임과 관련 문화는 그 자체로 머무르지 않고 외부의 것들 것 혼성적으로 결합하면서, 기존 사회의 규범들을 무력화시키거나 변형시키고 있다. 한 때 트리플A가 상징했던 것들을 더욱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신성함을 게임에서 꿈꿔보자. 하나의 통일된 지향을 추구하기 보다는, 여러 방향의 주변화된 상상력이 각자의 방식으로 누적될 때 인류에게 진정으로 울림을 주는 더욱 경이로운 경험을 우리는 협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통해 가능한 것의 경계를 계속 확장하고, 그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참고문헌 Arendt, S. (2000, March 4). Civilization Creator Lists Three Most Important Innovations in Gaming | WIRED. Wired. https://www.wired.com/2008/03/sid-meier-names/ Bernevega, A., & Gekker, A. (2021). The Industry of Landlords: Exploring the Assetization of the Triple-A Game. Https://Doi.Org/10.1177/15554120211014151, 17(1), 47–69. https://doi.org/10.1177/15554120211014151 Folléa, C. (2020). Experiencing, Experimenting with, and Performing Visual Narratives. Http://Journals.Openedition.Org/Inmedia, 8.1. https://doi.org/10.4000/INMEDIA.2031 Jin, D. Y. (2010). Korea’s online gaming empire. MIT Press. https://mitpress.mit.edu/books/koreas-online-gaming-empire Keogh, B. (2015). Between triple-a, indie, casual, and diy: Sites of tension in the videogames cultural industries. In K. Oakley & J. O’Connor (Eds.), The Routledge Companion to the Cultural Industries (1st ed., pp. 152–162). Routledge. https://doi.org/10.4324/9781315725437-21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h.D. 게임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University of Jyväskylä 박사후연구원) 진예원 게임·이스포츠를 통해 기술-인간(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관심이 많다. 게임과학연구의 글로벌, 다학제간, 오픈사이언스 접근을 지지한다. DiGRA 한국 지부의 창립 멤버이고, 현재 Esports Research Network Board Member, 한국e스포츠학회 이사, APRU Games and Esports Research Working Group member로 활동하고 있다. 한동안 NCSOFT와 RiotGames Korea에서 근무했다. 저서로는 (2021, 챕터공저), ‘이스포츠의 기술성 분석을 통해본 포스트디지털 문화연구’(2022, 박사논문), ‘게이밍 경험에서의 일상과 게임 세계의 개념적 혼성’(2018, 논문) 등이 있다.

  • 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 Back 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16 GG Vol. 24. 2. 10. 游戏现实主义与现实主义的“游戏”——象征界真实、想象界真实与实在界真实 1) 2)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시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명제 3) 는 리얼리즘이 역사 단계별로 변모해온 각기 다른 ‘이념’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가상현실 시대의 리얼리즘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경로를 제시한다. 사실 리얼리즘은 단순히 글쓰기 방법만이 아니라, 지식 시스템과 인지 패러다임의 ‘문체/형식’(스타일)이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뉴리얼’ 4) 을 탄생시켰고, 사람들은 과학적 이해를 통해 인간과 세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됐으며, 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갖게 됐다. 영화, 텔레비전 등 전자매체의 부상은 예술이미지의 생산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현실의 사물이나 캐릭터의 '반영'이 아닌, 현실 이미지를 접목·변형하거나, 아예 현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이미지 체계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오스카 히데시(大塚英志)에 논하며 제시했던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의 상상력 환경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캐릭터 생산을 중심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이뤄지면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생활 논리'를 넘어 애니메이션적인 행동 논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전파'라는 명제의 핵심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것은 가상현실 속에서 정보가 발신되는 시각, 즉 신체가 정보를 감지하는 시각이며, ‘전파'와 ‘매체'는 모두 사라진 것만 같다. 가상현실은 전통적 문예의 존재 형태를 깨부수고 ‘독자와 관객' 등 개념이 해소됐으며, ‘플레이어'라는 개념은 새로운 예술학 및 미학적 소비의 범주가 됐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인식론에 호소해 진실을 드러내고,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은 상상계에 호소해 진실을 드러낸다. 가상현실은 ‘신체의 직접적 현실'이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문예작품 바깥에 머물게 하며, ‘마음의 눈'을 통해 심미적 활동을 완성케 한다. 가상현실은 오히려 사람들의 신체를 작품 속의 캐릭터와 함께 위치짓게 하며,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 내고 느낀다. 사람들이 가상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게임 인생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게임의 경험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만드는 것을 ‘게임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게임 리얼리즘도 존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태도(游戏态)’의 삶은 실제 삶의 경험을 제공하며, 게임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게임 규칙을 뒤집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분석가적 해설’을 소멸시켜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는데, 그 길에서 게임 리얼리즘은 가상시대의 새로운 주체인 플레이어를 실재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상징계/역사적 진실'과 ‘상상계/이데올로기적 진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곧 일종의 상징계의 진실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생활 경험을 그것에 내포된 역사적인 언설의 서열에 포함시킨다. 장셴량(张贤亮)의 1984년작 소설 <가로수(绿化树)>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장용린(章永璘)은 문득 마잉화(马缨花)에게서 받은 찐빵을 발견한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그래봐야 통틀어 25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찐빵은 마치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아서 입 속에 넣자마자 녹아버렸다. 발효되지 않은 밀꽃 향기가 났고, 여름날의 햇살, 고원의 황홀한 흙냄새, 수확기의 땀, 모든 음식 본연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위쪽에서 아주 선명한 지문 자묵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겉이 하얀 찐빵의 껍질에 찍혀 있어 매우 선명했고, 크기를 보니 가운데손가락 지문이란 점을 알 수 있었다. 지문의 무늬를 보면 그것은 ‘키’가 아닌 ‘그물’처럼 빙글빙글 돌아있었고, 안쪽은 작고 바깥쪽을 향해 점차 커졌다. 마치 봄날의 호수에서 작은 물고기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물결은 점점 출렁거리고, 또 출렁거렸다…… 뚝, 나의 맑은 눈물 한방울이 손에 든 찐빵 위로 떨어졌다. 5)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지 어느덧 4년이 지난” 사람이 찐빵을 본 한 장면에서 저자의 펜은 먹을것에 대한 동물의 생리적 반응은 보이지 않고, 시적인 감정을 폭발시킨다. “마치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아서”, “발효되지 않은 밀꽃 향기”, “여름날의 햇살”; 그리고 지문 모양이 마치 “봄날의 호수에서 작은 물고기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물결은 점점 출렁거리고, 또 출렁거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대목을 프로이트식으로 분석한다면, ‘굶주림’이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화자의 집착과 ‘굶주림’이라는 고통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셴량은 ‘고난’의 경험을 ‘고난의 여정’으로 보고자 하며, 인생의 또 다른 고도의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는 시련으로 인식한다. 그 때문에 소설 속 “장용린의 굶주림”은 보통 사람의 배고픔이 아니라, 역사적인 운명인식이 넘치는 ‘배고픔’이 된다. 이 지식인의 운명에 대해 마잉화는 이렇게 비탄한다. “그녀(마잉화)는 아마 그 눈물을 봤을 것이다. 그녀는 웃지도 않았고, 나를 보지도 않았다. 바위 위에 돌아누워선 아이를 껴안고 길게 탄식했다. ‘하… 이런 벌이라니…’” 6) 주인공에 닥친 이 굶주림은 실제 생활에서 많은 이들이 겪는 ‘굶주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한 지식인이 ‘문화혁명’ 과정에서 맞닥뜨린 부당 대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동정하고, 다같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굶주림=고통’이라는 등식은 굶주림이라는 생활 경험에 대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의미를 ‘굶주림의 역사 진실은 곧 고통받는 것’이라는 의미로 완성한다. 바꿔 말하면‘고통받는’ 굶주림만이 진정한 굶주림,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반성하고 기억할 만한 굶주림이야말로 진정한 굶주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시는 중편소설 <투즈챵의 개인적 슬픔>(2013)이다. 시골에서 온 주인공은 근면성실하게 고생길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부딪히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위해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자살하게 되고, 높은 곳으로 나아가던 운명과 단절하게 된다. 일을 해도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은 그의 생계를 곤두박질치게 했다. 사장은 도주하고, 어머니는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설은 이 실패한 청년의 일생을 그리며 한 사람이 마주칠 수 있는 고난을 하나의 몸에 집중시킨다. ‘개인’에게 씌인 이 우연적인 슬픔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소설은 리얼리즘적이지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상징계 질서에 부합하는 현실이며, 특정한 서사 규범과 가치의 소구를 드러내는 역사적 진실이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게 관건은 ‘삶에 부합하는 논리인가’가 아니라, 역사적 시각을 통해 서술하는 ‘현실적 진실’이다.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새로운 현실 구축의 방식과 캐릭터 행동 논리를 구현한다. 데즈카 오사무(手冢治虫)의 <우주소년 아톰>(1952년)과 완라이밍(万籁鸣)의 <대료천궁(大闹天宫)>(1964년)은 유명세를 탔지만 확실히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1924년 월트 디즈니)이나 <톰과 제리>(1961년 진 디치Gene Deitch / 1965년 조셉 바버라)와는 행동 논리가 다르다. 앞의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 작품이지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행동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내러티브 사건의 인과나 캐릭터 행동 모두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며, 그것이 담는 주제의 내용도 현실 사회 정치에 대한 표현이나 비유에 가깝다. 반면 뒤의 두 작품의 캐릭터인 도널드 덕이나 고양이 톰은 절벽에서 탈출하고나서 공중 위에 떠 계쏙 달려가다가 자신이 하늘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에야 바닥으로 추락한다. 거실에 사는 고양이(인간의 현실 논리 세계)는 구석에 사는 쥐(애니메이션적 현실 세계)에 이리저리 쫓기고, 짓밟히거나 망치질 당하면 ‘죽음’ 이후에도 갑자기 살아나 재빨리 움직여 복수한다. 여기서 에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애니메이션 작품 속의 리얼리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형식 이념을 지칭하는데, 인류의 생활 양식은 더 이상 이러한 작품의 직접적인 기의가 아닌 숨겨져 있는 그 ‘궁극의 기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캐릭터에 대한 생동감 있는 행동, 재미나 창의성이 있는 제작은 이러한 작품들의 심미적 소비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또,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점차 상상계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고, 작품이 창조하는 세계를 초현실(하이퍼리얼hyper-real), 충동, 욕망의 진실 속에 고정시킬 수 있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상징계 현실을 형상화함으로써 심도 깊은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게 된다. “가장 맛있는 햄버거는 포스터 속에 있다”는 말처럼, 포스터 속 햄버거는 색깔과 광택도 충만하고 모양도 완벽한,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햄버거이다. 그것은 일종의 ‘햄버거의 초현실’을 가리킨다. ‘햄버거’라는 음식의 개념에 따라, 포스터 속 햄버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음식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상징계의 법칙에 따라 기호가 설정되는 게 아니라 기호 그 자체로 자유롭게 표현될 때,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충동과 욕망이 다양한 캐릭터들이 행동하는 장면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2016년 신카이 마코토)에서 ‘혜성이 지구로 충돌한다’는 공포는 재난 정치의 상징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공간·신분과 신체를 넘나드는 소년소녀의 사랑이 충동과 욕망의 방면에서 ‘사랑 본연의 진실’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작품에서의 사랑만큼 사랑 같은 것이 또 있을까? 삶의 현실에서 ‘사랑’은 호명의 매력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며, 언제나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사랑의 신화를 깨뜨리는 무기가 되며,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 이런 현실 논리는 모두 그대로 방치되고 사랑의 ‘초현실’ 표정, 소위 ‘순수한 사랑’이 생생하고도 눈부시게 빛난다. <너의 이름은>에서 영혼의 부르짖음은 간명하다. ‘삶의 논리’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심플하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신비로운 연관이 있어보이는 여자를 위해 운석이 떨어지기 전 시공간을 바꾸며 미친듯 움직인다. 이와 같은 격정적 사랑은 상상계로부터의 환상이 오히려 세계의 순수한 진리일 수도 있다는 이치를 적절하게 해설한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환상을 품은 여자들이 남자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남자친구가 어찌 이런 ‘진정한 사랑’에 어울리겠는가? 분명히도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무의식적으로 이념적 진실을 폭로한다(어쩌면 그 진실엔, 찢김과 패러독스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진실성은 어디에 있는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사건적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게임 안의 리얼리즘이나 게임이 어떻게 현실에 도달하는가라는 명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캐묻고 싶었던 것은 비교적 간결한 문제였는데, 소설은 게임처럼 설정됨으로써 새로운 리얼리즘 특색을 띠게 되는가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뜻하고자 했던 ‘게임 경험의 소설화’는 비디오 게임을 주체로 삼아 게임 서사를 하나의 새로운 형식이자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으로 간주하고, 이 새로운 형식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문학예술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에 있었다.” 7) 따라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개념은 게임 서사 역시 현실에 대한 서사라는 명제를 낳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형태의 게임 서사를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게임’을 일종의 서사 논리로 소설을 구성하는 것이다. 몹을 때려 업그레이드하는 것과 수련에서 환생을 통한 역습과 판타지 횡단까지, 인터넷 문학의 서사 메커니즘은 비디오 게임의 모듈식 조합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인터넷 문학의 뿌리로 자주 거론되는 <바람직한 이야기>(뤄션罗森, 1997년), 원작이 일본의 비디오게임인 <귀축왕 란스>(1996년) 등 동호인소설들이 있다. 인터넷 소설 초기 유행했던 서양 판타지 설정은 데스크톱 롤플레잉 게임 <던전 앤 드래곤 Dungeons & Dragons>(1974년)의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2004년경 큰 인기를 얻은 ‘온라인게임 소설’은 실존 혹은 허구적인 온라인게임 세계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공간으로, 이후 게임 시스템을 해체한 판타지나 수선문(修仙文)이 탄생케 하는 길을 닦았다. 인터넷 문학에서 각양각색의 판타지세계의 등장은 디지털 게임으로 인한 ‘평행 시공간’의 느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인터넷 문학에서 ‘모에포인트(萌点)’가 두드러진 ‘캐릭터 설정된’ 역할도 직간접적으로 일본계 롤플레잉 게임과 문자 어드벤처 게임의 영향을 받았다….” 8) 이와 같은 서사 속에서 삶의 논리에 의해 창조된 스토리텔링은 게임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스토리텔링 설정으로 대체되고, 플롯의 흐름은 모듈화된 조합에 위치지어지게 된다. 이른바 ‘의견이 맞지 않으면 온 가족을 죽인다(一言不合、杀你全家)’는 인터넷소설의 관습은 단지 비교적 실용적인 모듈조합 방식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게임적인 조합 방식 배후에 숨겨진 것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조우이다. 이러한 조우는 현실 맥락에서, 즉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조우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태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 게임적 서사 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 없는 사건으로 만들고,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던 현실을 고통스러운 조우에 놓인 사건적 우화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게임 내러티브가 만들어내는 ‘통쾌함(爽)’은 결국 현실 생활의 ‘불편함(不爽)’으로 귀결된다. 다만 현실 생활에서는 이런 불편함이 인과관계까지 부착되어 존재 이휴가 있는 무언가처럼 변화한다. 게임적 내러티브는 고통스러운 조우의 사건적 특성을 회복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현실 질서의 의도치 않은 단절이며, 기존의 현실 이성이 내러티브를 합리화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데릴사위물(赘婿文)이나 환생물(重生文), 역습물(逆袭文)에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온 가족을 죽인다’는 갈등요소는 자신을 괴롭히거나 모욕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통쾌한’ 형식을 보여주며, 실생활에서 괴롭힘이나 모욕의 내재적 논리도 ‘노출’한다. 즉, 어느 순간이든 보통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남을 괴롭히는 힘이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타인을 모욕하는 행위에 대한 어떠한 합법적 변호도 의의를 상실한다. ‘괴롭힘 당하는 것의 고통’은 환원 혹은 해석이 불가능한 사건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9) 게임 내러티브의 두번째 형식은 바로 가상현실 자체의 서사, 즉 게임 자체가 서사인 것에 있다. 이는 가상현실 시대에 비디오 게임 서사 행위에 집중된다. 디지털 게임은 특정한 서사의 틀을 빌려 전개되는데, 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서사와 유사하며, 이따금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서사를 채택하기도 함으로써 디지털 게임 서사의 내용 차원을 구성한다.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에는 게임 내 자신의 행동을 통해 스토리를 생성한다는 또 다른 서사적 측면이 있다. 이것은 비디오 게임 서사의 행동 측면이다. 한편으로 비디오 게임은 스토리를 채용해 게임성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 플레이어는 이러한 게임성을 빌려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사용해 자기만의 내러티브 흐름을 생성한다. 즉, 각양각색의 논리적 스토리들을 스스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불가지성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완전히 사건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게임적 리얼리즘은 플레이어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고, 플레이어의 성격과 감정, 능력까지 끄집어내 전혀 다른 인생 경험을 구축케 한다. 여기서 비디오 게임은 ‘조우’를 진실로 만들지, 조우한 이야기 자체를 진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조우’는 플레이어가 비디오 게임에서 조우하는 임무나 이야기가 아니라, 플레이어와 비디오 게임 자체의 ‘조우’이다. 즉 플레이는 곧 사건적인 조우다. 비디오 게임, 특히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며, 마치 캐릭터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자아(주체)를 플레이어로 정립시킬 때이며, 플레이어가 자아를 주체의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더는 동일성 캐릭터인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 순간이 되면 플레이어들은 모순투성이인 자아 캐릭터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 Disco Elysium>(2019, ZA/UM)에서 플레이어가 콘트롤하는 게임 속 주인공은 게임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사상과 정치적 주장을 접하는데, 이러한 관념들은 게임의 ‘사유’시스템을 구성한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에게 ‘아이템’을 장착해 다른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면 새로운 능력이나 수치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주인공의 장비창에 “해석하기 어려운 페미니즘 아젠다”라는 사유를 추가하면 주인공이 남성 캐릭터들에 대항할 때 ‘강한 승부욕’ 스킬값이 2포인트 상승해 수치적 측면에서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로 묘사된다. 하지만 게임의 목표는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장비’를 갖춰야 한다는 ‘사유’ 역시 그에 따라 변화할 필요가 있다. 가령 덩치 큰 남자를 쓰러뜨리려면 ‘건장한 체격’ 스킬을 보강해야 하고, 영리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을 설득하려면 ‘권모술수’를 터득해야 한다. 10) 간단히 말해 사유의 ‘장비화’는 주인공을 어떤 관념을 가진 특정한 ○○주의자가 아니라, 여러가지 생각들 사이를 오고가는 ‘산보자’로 만든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주의’도 이 이야기 속 문제를 해결하는 약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주의’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게임 시스템은 주인공을 불안정한 ‘사상 도둑’으로 만들고, 지속적으로 다른 사유 관념을 수용케 하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앙으로 삼지는 않는다. 게임의 스토리는 플레이어를 아무 해결책도 없는 실제 세계의 심연으로 내던지고, 플레이어가 본래 갖고 있던 완전하고 통일된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산산조각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도우반(豆瓣) 페이지를 보면 아래 세 종류의 리뷰를 볼 수 있다. “(이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군중심리>(1895년)나 <죽도록 즐기기>(1985년), <1984>, <백년 동안의 고독>, <황금시대(黄金时代)>를 읽는줄 알았음. 30분 동안 플레이하다보니, 내가 플레이한 게 <공산당선언>, <순수이성비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도우요우63235291, 2000년 3월 20일)” “단순한 게임이 아님. 나는 자유주의의 번화와 억압, 코뮤니즘의 격앙과 광기, 민족주의의 단결과 차별, 모더니즘의 광기와 미망, 이상주의의 위대함과 허망함, 휴머니즘의 인자함과 실패를 승인하게 됨. 도덕주의자가 되거나,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중도파가 되기도 하며, 마조프주의 사회경제학에 정통한 고뮤니즘의 별, 천리안을 가진 세계의 거성, 법률의 화신, 신자유주의 구역의 나그네,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제8봉인자, 전통주의자 미친개, 논박할 수 없는 페미니스트, 초췌한 꼬라지의 민족주의자가 되기도 함…. 킴 키츠라기 경위는 만나본 형사들 중 최고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무식하고 비참하며, 정말 충격받았다. 나는 선을 분명히 긋지도 못하고,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운 망령이었다….” (Paze, 2022년 9월 22일) “내 머리와 의식, 거울, 내가 만진 모든 것이 시인이나 철학자같다. 말하는 것은 모두 문체가 가지런하고, 밤에 잠을 자면 머리 속에서 글쓰기 세미나를 여는 것만 같다. 나는 입만 열면 온통 헛소리뿐인데, 게임 내내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하지?’, ‘뭘 믿어야 하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지?’ 등을 고뇌한다.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제작자들의 정치적 입장, 내게 어떤 정치적 입장을 원하는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측했고, 거의 모든 관점을 내가 가진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밟았다. 한데 빌딩이 기울어갈 때 어떤 이론도 고집하지 않자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당신은 인간의 편만 들 수 있다. 게임 엔딩 후 돌이켜보면 나를 감동시킨 거의 모든 사람과 사건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있는 사람과 생명, 바닷바람, 형편이 어려워지는 기계 속에서 따스함을 가져다주고 서로 돕는 선량함이었다. 나는 술과 담배를 피우는 걸 좋아한 탐정이었다. ‘당신은 내가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생물입니다.’” (덜익은 서핑보드, 2020년 3월 19일) 11) 분명 완벽하게 통일된 자아는 자아에 대한 하나의 설정(주체화)에 불과하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자아 캐릭터’의 완벽히 통일된 판타지적 속성을 드러내는데, 이때 자아 캐릭터의 통일은 삶의 과정을 덮는 무질서한 사건의 진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디오 게임이 뭘 했는지(전형적 리얼리즘과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논리)가 아니라, 이 행동을 ‘플레이’하는 비논리성에 있다. 즉 플레이는 플레이 그 자체이며, 확실성을 추구하지 않은 채로 그것의 의미 규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진정으로 서사 텍스트의 수용자인 전통적 내러티브에서 추상화된 캐릭터의 사건적인 실제 면모를 회복한다. 게임적 리얼리즘 바깥에서도 ‘나’는 ‘사람’에 대한 서사의 다양한 이야기들에 속해 있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플레이어’는 다양한 사건들에 의해 흩어지는 ‘나’의 증상으로 돌아간다. 즉 ‘나’란 ‘나의 동일성이라는 가상’을 증명하기 위한 용어에 불과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언제나 모든 걸 안다는 방식으로 통제력 있는 ‘주체적 자신감’을 창출한다.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이러한 자신감이 증폭된 후의 ‘순수한 자아’를 부각시킨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람과 사람의 근본적 함의를 회복케 한다. ‘나’의 조우야말로 개개인의 생존적 진실이며, 그 조우에 대한 과잉적 해석(상징계의 진실)이나 순수한 이념화(상상계의 진실)가 아니다. 리얼리즘적 ‘게임’ 상징계의 진실과 상상계의 진실에서 실재계의 진실까지, 우리는 리얼리즘 스타일 이념의 세 가지 요소를 얻을 수 있다. 첫째, 리얼리즘은 삶에 대한 반영이며, 현실 생활의 내적 논리와 역사적 진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둘째,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며,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의 환각으로 세계의 본질을 표현한다. 셋째, 리얼리즘은 진실의 게임에 통달했고, 게임적 리얼리즘은 인간 삶의 원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세계의 다이성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다의성의 다의성(multitudes of multitudes)’을 보여준다. 12) 리얼리즘은 ‘반영’으로서 과학주의의 인문정신을 확립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묘사는 인류세계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효과적 수단이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생활존중의 태도를 채택해야만 진정한 생활 상황이 비로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루쉰(鲁迅)과 마오둔(茅盾)은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실생활의 파괴와 쇠퇴가 반영될 수 있고, 사람들의 구원의식이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응’으로서의 리얼리즘은 현실 사회의 생존 상황에 대한 간여이자 개입이며, 그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정신을 서사의 의미 프레임으로 삼아 현실 상황을 재구성하거나 각색한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저명한 유화 작품 <건초 마차>(1820-21년작)는 농촌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 관점을 제공한다…. 농촌은 조화, 아름다움, 안정, 전통, 평화, 순결, 미덕의 관점에서 특징지어진다. 왜 이런 의미들이 이 그림이나 다른 유사한 유화 작품들 속의 시골에 붙게 됐을까? 1980년 존 배럴(Jon Barrel)이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업은 18~19세기 영국의 풍경화(부유층을 위해 생산되는 저작들)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도래하는 자본주의 농업과 그것이 내포하는 계급투쟁의 배경에서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고자 했다….” 13) 자본주의의 잔혹한 약탈과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화 사이에서 <건초 마차>는 리얼리즘적인 ‘반응성’ 관계를 구축한다. ‘게임’으로서 리얼리즘은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결국 리얼리즘은 인류의 생존에 관한 진실한 상황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들을 ‘실재계의 위치’에 놓으며, ‘플레이어’는 ‘인생을 희롱함’을 통해 오히려 인생의 실재계적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한 번의 ‘게임’을 통해 세상의 변동을 쫓고 우연히 모여 특정한 질서를 끊고 한 번의 ‘플레이’를 완성하게 된다. ‘플레이’는 바로 인류 생존의 실재계적 진실’ 이며, 인류의 사회생활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해부해 다양한 ‘문화 해결’행동을 일종의 ‘게임 행위’로 바뀔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게임 방식을 구현한다. 이때 리얼리즘의 스타일 이념에는 폭로와 비판의 구원적 정치뿐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가 향락에 젖는 쾌감 정치도 있다.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세 가지 면모, ‘진실’을 이해하는 세 가지 재밌는 방식을 구현하는데, 과학주의가 주도하는 리얼리즘은 상상력이 대폭발하는 스타일 기호학 방식을 추구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게임을 통해 현실을 관촬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이러한 설정은 가상현실 세계가 사람들의 현실 세계의 현실 세계의 법칙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2016년 슬라보예 지젝은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를 언급한 바 있다. (任天堂、宝可梦公司、Niantic Labs) “플레이어는 핸드폰에 있는 전세계 위성위치확인장치 및 카메라로 포착, 전투 및 가상 포켓몬(Pokemon)을 훈련합니다. 이러한 요정은 화면에 나타나는 방식은 마치 플레이어와 실제 세계의 같은 장소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 내에서 이동할 때, 그들의 게임 캐릭터를 대표하여 동시에 게임 맵에서 이동……우리는 전광판이라는 환상적인 틀을 통해 현실을 보고 현실과 현실의 교감,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 중개 틀은 가상 요소를 이용하여 현실을 증강시킵니다.이러한 가상 요소는 게임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를 지탱하고 현실에서 그들을 찾도록 촉진하며, 이러한 환상적 틀이 없으면 우리는 현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14) 지젝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게임 방식과 현대 이데올로기 구축 방식의 일치에 있다. 지젝의 서술에서 사람들은 <포켓몬 고>라는 게임을 사용하는데, 이는 허구적 틀에 따라 자신의 현실을 지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포켓몬 고>는 “비록 자신을 새롭고 최신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어떤 것으로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낡은 이데올로기 메커니즘에 의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환상을 증폭시키는 실천이다.” 15) 여기서 지젝은 가상현실과 이데올로기가 공유하는 허구성을 보면서도 가상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정치적 기능의 차이를 간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방식이지만 가상현실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확대'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리셋'이다. 현실에서 의미가 없는 곳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포켓몬을 찾는 논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이 옳은데, 우리에게 “포켓몬은 판타지의 기본 구조에 직면케 하고, 현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세계로 바꾸는 환상적인 기능을 요구한다.” 16)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17)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통해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났을 때 이데올로기적 역설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리얼리즘은 정신분석가와 같은 ‘사설(辞说)’을 갖고 있으며, 자신만만하게 현실의 증상을 건전한 이성으로 전환한다. 또 다른 한편 게임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들뢰즈식 역설을 드러낸다. 이때 정신분석가는 건전한 이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광적으로 믿기 때문에, 증상은 정신분석가 자신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1)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21&ZD327)이다. 이 기사는 <탐구와 논쟁(探索与争鸣)> 2023년 11호에 게재되었다. 2) 실재계는 질서의 법칙에서 벗어나 기호화되지 않는 사건을 뜻하며, 본문에서도 '사건적 진실'이라는 표현을 쓴다. 3)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ゲー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2>, 황진롱(黄锦荣) 번역, 홍콩 당산출판사(唐山出版社), 2015년 9월, 제43~57호, 135페이지 4) 버트런드 러셀은 현실 세계가 17세기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마지막으로 뉴턴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가설은 전통적인 '유기적 세계의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에서 만유인력의 가설은 '신이 없는 세상은 저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을 확립한다. 뉴턴은 신의 존재를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현실 세계'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적 세계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가장하는 방식인 '리얼리즘'의 문체적 이념을 이해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신세계 그림과 논리적으로 통일된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敢于面对自己不懂的“生活”——现实主义的文体哲学与典型论的哲学基础>, 《중국 문예평론》, 2021년 제8호 참고. 5) 장셴량, <장셴량 소설 자선집>, 션린, 리장출판사(漓江出版社), 1995년 8월, 185페이지 6) 장셴량, <장셴량 소설 자선집>, 션린, 리장출판사(漓江出版社), 1995년 8월, 185페이지 7) 콩더강, <대다수(大多数)와 ‘게임적 리얼리즘’ : 비디오 게임의 계층간 서사적 시도와 초월향상>, <중국도서평론> 2023년 11호 8) 왕위수(王玉玊), <온라인 문학의 ‘게임화’ 방향과 그 ‘네트워크적’ 성격 : (디지털) 인공 환경과 온라인 문학의 자아실현>, 문학(文学), 2023년 제1기 9) '중생일대효룡'이라는 '무뇌상쾌문'을 예로 들어보자: 강지호라는 사람이 갑자기 2000년으로 환생했다. 이 '환생'의 스토리 역시 장르소설의 줄거리처럼 실생활에서 능욕의 경지에 빠진 약자들이 합리적인 조건에서 능욕자들을 능욕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기괴한 쾌감에 의해 움직인다. 이 인물의 형성은 도덕적인 이상적 인격에 대한 추구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부'와 인연이 없는 대다수의 소인물들의 내면의 '무능하고 분노'에서 비롯된다. 수없이 많은 혐오를 겪으면서 형성된 '사회적 열등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0) 승부욕', ''권모술수', '현혹'등은 모두 ''디스코 엘리시움'안에서 활용되는 스탯 명이다. 11) https://www.douban.com/game/26935092/comments 12) 슬라보예 지젝 저, 주우(朱羽) 옮김, <뇌 속에 헤겔을 연결하라>, 시베이대학출판부, 2023년 10월, 17페이지 13) Elaine Baldwin 저, 타오둥펑 옮김, <文化研究导论 Introducing Cultural Studies>, 고등교육출판사, 1991년작/1994년 번역, 153-154페이지. 14)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제IV-V페이지. 15)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 VI 페이지. 16)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 VI 페이지. 17) 미국, 일본, 독일 등에서는 비교적 엄격한 게임 검열을 하고 있는데, 유명한 검열 기관으로는 ESRB, CERO, USK 등이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

    많은 사람들이 인생 첫 게임을 ‘플래시 게임’으로 접했고, ‘마시마로’나 ‘졸라맨’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등 플래시는 2000년대 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플래시 서비스의 종료는 단순히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단종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며, 그 문화적 산물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 Back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 05 GG Vol. 22. 4. 10. 게임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최근에 진행되었던 ‘R.I.P. 플래시 프로젝트’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https://www.thisisgame.com/webzine/special/nboard/5/?n=127359 ‘디스이즈게임’ 기사 참조) 어도비(Adobe)사의 플래시는 2020년 12월 31일부로 서비스가 종료되었고,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이러한 플래시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추모하려 했던 프로젝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첫 게임을 ‘플래시 게임’으로 접했고, ‘마시마로’나 ‘졸라맨’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등 플래시는 2000년대 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플래시 서비스의 종료는 단순히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단종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며, 그 문화적 산물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R.I.P. 플래시 프로젝트가 지난 2월 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장례’가 과거에 잠재된 미래를 살피는 행위인 것처럼 이 프로젝트의 의의 역시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에 이번 호에서 편집장은 R.I.P. 플래시 프로젝트를 기획한 박이선 게임문화연구자와 권태현 미술 큐레이터를 만나 프로젝트에 대한 소회를 묻고, 앞으로의 방향을 듣고자 했다. 편집장 : 오늘 인터뷰에서는 R.I.P. 플래시 프로젝트의 결과와 소회를 여쭙고 싶어요. 스스로 평가를 해보셨을 때, 프로젝트의 성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권태현: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자신감이 높았어요. 시의적절하기도 하고, 나름 글로벌한 반응이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시작을 했죠, 그런데 실제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스스로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플래시라는 것 자체가 글로벌한 플랫폼이고, 그 쓰임이라는 것도 굉장히 광범위한 거였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거대한 것을 건드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은 너무 일부인데, 과대표 되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죠. 박이선: 실제로 처음에 기획을 할 때에는 반응이 되게 좋았거든요. 처음에는 한예종에서 시작했다가, 반응이 좋아서 인천문화재단으로 옮기고, 그다음에는 텀블벅 펀딩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 과정 내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줬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연구를 하다 보니까 저희가 소프트웨어의 주체들, 그러니까 플래시를 만들었던 사람들까지 다 다루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플래시를 향유했던 사람들과 그 틀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담았지만, 정작 어도비나 매크로미디어(Macromedia)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데 한계가 있었기에 그때는 반쪽짜리 잔치라고도 생각했어요. 권태현: 그런데 결론적으로 원고를 조금씩 취합하고, 편집을 해나가고, 대담을 진행하면서 오히려 이 프로젝트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분명히 우리의 방법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학문적 베이스, 우리의 연구 역량으로 가닿을 수 없는 지점들이 있었고, 소프트웨어 생산자에 관한 연구는 기술 문화나 IT 연구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잘 정리할 수 있는 분야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연구에서 누락 되기 쉬운 ‘사용자의 목소리’, ‘구술사’, ‘역사가 아닌 계보’를 봐야겠다는 목표를 잡았거든요. 이로써 프로젝트의 정체성이 확실해졌어요. 그래서 ‘플랫폼 스터디스(Platform Studies)’나 혹은 기술적으로 연구하시는 분들이 잘 정리해 놓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의 독창성은 한국이라는 맥락이나 게임이라는 맥락, 미술이라는 맥락과 같이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것의 위치를 찾아가는 지점에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이선: 결과적으로 그런 정체성을 명확히 잡고 프로젝트도 잘 되었어요. 소프트웨어 장례식을 한다는 게 특이하고, 플래시에 대한 감각도 공감이 된다면서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고, 특히나 텀블벅에서 만났던 분들은 학계나 미술계, 게임계가 아니라 단순히 플래시 게임과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사람들로서 저희를 지지해주셨어요. 게다가 그분들은 저희가 아직 홍보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 자발적으로 홍보를 해주셨거든요. 그런 점들이 너무 감사하고, 이런 지지가 저희 책을 만드는 데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결과물도 저는 굉장히 만족해요. 책의 구성에서도, 그러니까 플래시에 대한 간결한 소개부터 주변 인터뷰도 싣고, 거기에 학계에 계시는 분들이 각각 포인트에 맞는 견해들을 주셔서 전반적인 구성이 좋게 나올 수 있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셔서 프로젝트가 잘 되었다고 생각해요. 편집장: 말씀 중에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요. 관련 자료를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 매크로미디어나 어도비 같은 회사에 대한 연구는 북미 등 해외에서 진행이 많이 됐을까요? 권태현: 일단 기본적으로 MIT Press에서 나오는 플랫폼 스터디스(Platform Studies) 시리즈에 플래시가 있어요. 그게 저희도 가장 많이 참조했던 텍스트인데, 거기 보면 유저(user) 문화 같은 것도 물론 있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술적인 맥락이 어떻게 반영되는지와 인프라스트럭쳐(infrastructure) 자체에 대한 분석이 주(主)가 되기 때문에 그런 연구가 나름 정리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기술적이고 산업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플래시가 가지는 산업적 위상에 대해서는 이선 씨가 저희 책 초반부에서 정리한 것이 있어요. 어도비가 플래시 단종하겠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 날부터 2, 3일 동안 페이스북, 모질라 등 거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성명을 발표했어요. 디렉터나 혹은 웹 브라우저 담당자 정도 되는 헤드(head)급 인사들이 편지를 썼거든요. 그것들을 저희가 전체를 번역해서 실었어요. 그런 것을 통해서 ‘기술적’인 산업이 아니라 그 산업 안에서의 관계, 그리고 거기서 플래시라는 것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플래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요. 재미있는 건 그러면서도 플래시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네들이 짱이다’는 (웃음)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요. 박이선: 예를 들어 유니티 같은 경우는 “우리는 개발의 민주화 잃지 않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기네 사명 다시 한번 외치는 거로 마무리하죠. (웃음) 권태현: 결과적으로 산업에 대한 연구는 이미 있는 것이 맞고, 저희의 프로젝트 안에서도 산업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인간적이고 조금은 관계 중심적인 차원으로 다루었어요. 그런 면들이 이 책의 기획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편집장: 해외에도 이용자 수용 양상에 관련된 연구나 프로젝트가 많이 있나요?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이용자들의 경험과 문화적 산물을 본다는 것은 지역적인 측면이 중요해지거든요. 그래서 다른 지역에 좀 비슷한 프로젝트들이 있었는가도 궁금해요. 박이선: 저희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MIT Press의 플래시 책이 사실상 유일했어요. 그 책은 2014년에 나왔던 책이거든요. 그때는 ‘플래시가 죽겠다’는 소식이 나오기 전이었고 저자는 그냥 플래시에 관심 있어서 플랫폼을 연구했던 거예요. 거기 안에는 수용자 연구도 있었지만, 기술 자체에 코드 분석 같은 것이 많이 담겨있었고 그 책 외에는 플래시에 대한 연구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권태현: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희랑 유사한 콘셉트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유저들의 문화에서 눈에 띄는 프로젝트들은 ‘아카이브 프로젝트’였어요. ‘내가 재밌게 했던 플래시 게임이 없어지니까 일단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유저들은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박이선: 그런 맥락에서 제가 생각하는 비슷한 프로젝트는 이거였어요. 미국에 두 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운영하는 재단이 있어요. 웹 디자인 뮤지엄이라고, 운영자 둘 다 웹 디자이너로서 나이 많은 개발자들이 운영하는 곳이 있는데요. 우리가 90년대 구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도 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복원을 해서 다 사진을 찍어두는 프로젝트예요. 그런 일들을 사비로 해오고 있었고, 그중에 하나로 플래시가 있었던 거죠. 이분들이 플래시의 원형들을 굉장히 잘 보존한 걸 webdesignmuseum.org에 게시해놨어요. 저희 작업도 이분들의 작업을 많이 참조했죠. 그리고 그분들이 재단 페이트리언(Patreon, 모금 후원 사이트)을 하시거든요. 저희도 후원을 하면서 열심히 해 달라고 응원을 해드렸어요. 그리고 추가로 웹 아카이브( web.archive.org ) 재단, 그러니까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인 웹 재단이 저희가 그나마 참조했던 프로젝트였어요. 편집장: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에는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프로젝트였다면, 해외로 나가야 하는 의무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권태현: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저도 몇 번 들었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분들 중에서 외국에 계신 분들도 많았는데, 그분들이 “외국 친구들 보여주고 싶은데, 혹시 번역 계획이 있냐”는 연락을 두세 명한테 받았어요. 근데 저희가 일단 돈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죠. (웃음) 박이선: 재밌는 게 저희 프로젝트에 웹사이트가 있는데요. 그 웹사이트에 외국인들이 내용을 다 읽고 댓글을 다는 거예요. 거기 한글밖에 없는데 아랍어로도 댓글이 달리고. 그래서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권태현: 그런데 사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어떤 연구를 하더라도 사실 지역적인 연구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까 플래시 프로젝트보다는 한국 웹문화사의 성격이 되게 강해졌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웹문화사에서 플래시는 당시 웹 문화의 조건이었기 때문에, 플래시에 대한 문화연구를 하면 그냥 당시의 웹문화사가 나와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당대의 한국 웹문화사의 성격이 강할 것 같고, 한국 웹문화사가 궁금한 외국인들이 읽었을 때 오히려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플래시 일반에 대한 연구는 훨씬 더 좋은 콘텐츠들이 영문으로 있을 텐데, 만약에 저희 프로젝트를 번역했을 때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90년대 후반 한국 웹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길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런 확장성을 생각해 보면 이 프로젝트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 프로젝트에서 가지를 쳐서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그런 계획이나 움직임이 있을까요? 박이선: 지금은 우선 이 책을 서점에 납품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전시에 대한 기획들도 고민을 했는데, 코로나 19로 상황이 어려워졌죠. 권태현: 저희가 인천문화재단 펀딩을 받을 때, 인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랑 콜라보를 하는 필수 요건이 있었어요. 그때 저희가 리스트를 봤는데, 국악을 하시는 분이 있는 거예요. 장례식 때 국악을 하는 드렁갱이(동해안별신굿에서 반주로 쓰이는 장단: 한국민속대백과사전)라는 것이 있거든요. 또 마침 연락을 해보니 그분이 드렁갱이 전문가였어요. 그래서 저희가 저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드리고, 드렁갱이 음악도 받았어요. 그 음악을 틀어놓고 장례식을 한다거나 하는 계획들이 있었는데, 코로나 19로 어려워졌어요. 박이선: 당장은 어렵겠지만, 발전시키고 싶은 프로젝트는 있어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자발적으로 아카이브를 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국내에 ‘와플래시’나 ‘플래시아크’처럼 아카이브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최근의 기술로 과거의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는 분들이나 해외에 그런 단체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분들께 “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런 아카이브를 하는 거냐”고 물으면 그분들의 과거 이력이 나오겠죠. 그런 부분이 궁금하고, 아카이브를 통해서 뭘 하고 싶은지 묻고 싶어요. 물론 ‘광고를 달기 위해서 한다’는 답변을 할 수도 있지만, 노력이 워낙 많이 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 동기가 궁금해요. 권태현: 이런 맥락에서 저도 아카이브나 마이그레이션 같은 문제를 확장시키고 싶어요. 미술계의 뮤지올로지, 이 ‘미술관학’이라는 학제를 기반으로 제가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난과 치유》 라는 전시의 위성프로젝트로 〈영구소장〉( https://youtu.be/WQ7takHNmTg)이라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것과 연동되어서 저희 프로젝트 후반부에 ‘소프트웨어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방금 이선 씨가 말씀해 주신 ‘아카이브 피버’, 이 아카이브 열망에 소프트웨어 버전을 연작처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쿠키런’이라고 해도, 박물관이 단순히 ‘쿠키런’의 최신 버전을 그냥 다운받은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쿠키런’의 인터페이스나 캐릭터, 디테일한 게임 디자인, 빌드 등 소프트웨어의 아카이브는 그 형태나 필요성이 또 다른 거죠. 물론, 미술품 아카이브도 물리적인 보존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있기에, 소프트웨어의 아카이브라는 것 자체가 되게 흥미롭고, 박물관학적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굉장히 높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소프트웨어의 아카이브를 미술관학이나 박물관학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특히나 요즘 작품들은 이제 다 디지털 작업이기 때문에, 데이터로 미술관이 그걸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플래시나 게임의 아카이브 방법론에서 배울 점이 너무 많았어요. 편집장: 그런 부분이 참 아쉽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거든요. 특히, 한국의 메이저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프로젝트가 끝났지만 조금 더 회자될 수 있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이선: 저희가 서울경제 등의 일간지에 나오긴 나왔어요. 그런데 저희한테 먼저 연락을 주신 기자분들의 나이대가 2, 30대세요. 그러니까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은 어렸을 때 졸라맨이나 마시마로를 봤던, 공감대가 있으신 분들인 거죠. 편집장: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그러면 혹시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공공 기관이나 박물관 등으로 이관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권태현: 그런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 같아요. 저희가 작년에 넥슨 컴퓨터 박물관 측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비록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전시를 하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셨어요. 박이선: 만약 20년 넘게 한국 게임을 만들었던 회사와 협업을 하면 저희 시각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얘기를 끌어낼 수 있겠죠. 넥슨의 경우에는 저희 연표에도 나오듯이, 애초에 플래시 부흥기 때 〈바람의 나라〉가 성장한 딱 그 시기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회사 측 견해가 들어가면 저희가 못 보던 시각이나 기술적인 측면 등이 추가적으로 들어가면서 유저 문화도 훨씬 더 깊이 있게 기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비단 넥슨뿐 아니라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소수의 사람이 할 때 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저희는 이 프로젝트가 확장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요. 편집장: 결국 이 프로젝트는 끝난 게 아닌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는 언제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종료했던 것은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종료였던 거고, 실질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종료는 언제, 어떻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박이선: 저는 저희 ripflash.net의 방명록에 더 이상 글이 달리지 않을 때, 프로젝트가 종료될 것으로 생각해요. 지금도 매일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는 댓글이 달리고 있는데, 아마 구글에 플래시를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더 이상 플래시를 검색하지 않으면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것이겠죠. * R.I.P. 플래시 프로젝트의 홈페이지, ripflash.net 편집장: 인터뷰가 거의 끝나가는데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프로젝트가 일단 일단락 되었는데, 소회를 좀 말씀해주세요. 박이선: 일단 굉장히 힘들었어요. (웃음) 어떤 것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과거의 소프트웨어를 날짜별로 돌려가면서 그것의 의미를 찾는 일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고, 지금 그 플래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나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적는 것도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었죠. 더 나아가서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홍보까지 해야 되는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시도를 해봤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요. 권태현: 저희가 이 프로젝트를 오래 끌고 온 만큼 기다려주시는 후원자님들도 있었고, 초기부터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힘을 받고, 추동력을 받아가면서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홈페이지를 만들어주신 개발자분도 프로젝트가 너무 재미있다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주신 분들이거든요. 그분들처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확장된 관계들이 일단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어요. 결과적으로 책 말고도 남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편집장: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고 싶었는지, 혹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이선: 개인적으로는, ‘어떤 기술’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사용자’들을 가시화했던 작업인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싣고 그 사람들을 찾고 그 사람들의 과거들을 아카이빙 해놓음으로써, “기술이라는 것은 탑-다운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플래시 문화가 보여줬던 것처럼 커뮤니티가 기술을 만들고 선도했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어요. 실제로 그런 기록도 있었어요. 플래시 초기에 매크로미디어가 커뮤니티에서 업데이트 되어야 할 사항들을 많이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이처럼 커뮤니티와 개발자들이 사업 관계로서 협력했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사용자와 커뮤니티를 가시화했다는 의의가 있을 것 같아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One Hundred Pounds of Bear Meat: Educational Games and the Lasting Legacy of The Oregon Trail

    Writing about The Oregon Trail has become its own genre at this point. So much has been published on MECC’s classic game that all the clever references to dysentery, one of the many afflictions the player characters will experience on their journeys, have already been used. This is a testament to the game’s legacy and its lasting presence that bridges gaming culture and mainstream American popular culture. < Back One Hundred Pounds of Bear Meat: Educational Games and the Lasting Legacy of The Oregon Trail 06 GG Vol. 22. 6. 10. -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in here: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24 Writing about The Oregon Trail has become its own genre at this point. So much has been published on MECC’s classic game that all the clever references to dysentery, one of the many afflictions the player characters will experience on their journeys, have already been used. This is a testament to the game’s legacy and its lasting presence that bridges gaming culture and mainstream American popular culture. The game has had such an impact on American youth of the 1980s that ‘The Oregon Trail Generation’ has been used to describe the first generation of people who grew up with videogames present in their classrooms. This article revisits The Oregon Trail and idea of the The Oregon Trail generation, and considers why the game has resonated with players for decades. A Brief History of the Oregon Trail and The Oregon Trail The actual Oregon Trail, after which the game is named and themed, was a road used by American settlers migrating west to Oregon, California and Colorado from the 1840s until the completion of the transcontinental railroad in 1869. David Dary estimates that at its height, the road was used by at least 250,000 people, mostly families, who traveled for over four months across perilous terrain to reach their new homes. Unsurprisingly, this was a dangerous undertaking and according to the National Historic Oregon Trail Interpretive Center, at least 20,000 people died while traveling the trail. The story of the migrants and the trail became a crucial piece of American history taught in schools and celebrated in literature, films, and eventually in The Oregon Trail game. The Oregon Trail has had several iterations. Developed by Don Rawitsch, Bill Heinemann and Paul Dillenberger, the earliest version of The Oregon Trail developed out of a board game Don Rawitsch designed to teach westward migration to his own classroom. The game was then picked up by MECC, a Minnesota-based educational game developer, where the original designers converted the game into a text-adventure computer game that was distributed among Minnesota schools in 1975. The game first saw success in Minnesota and was later sold in schools across the United States with the help of a partnership between MECC and Apple, who were pushing to get their Apple II computer system into every American school. As the Apple II successfully worked its way into the fabric of the American education apparatus, The Oregon Trail was reworked for this new pervasive computer system in 1985 and became the version of the game that would be redistributed across American schools in a range of formats. Since then, the game has become a full-on brand with even more iterations in addition to contemporary board and card games. For this article I will focus on the 1990 version of the game. Playing The Oregon Trail In The Oregon Trail you assume the role of a family of travelers, and beginning in the town of Independence, Missouri, you attempt to traverse the long road across America to Oregon City. You begin by choosing an occupation, either a banker, a carpenter, or a farmer, who will have a set amount of funds with which to purchase oxen to pull the cart, clothes to shield yourself from the elements (or more likely to be stolen off your back by thieves), bullets for hunting, rations for survival, and wagon parts to repair the unavoidable damage your vehicle will take. Bankers will have the most funds but gain the fewest points, while farmers have the least, but are rewarded with tons of points for completing the game successfully. After choosing your occupation, the game asks you to name your party of five travelers. This is an exercise in cruelty, as whatever party you bring into existence here will be ground down through all manner of torment on their (likely doomed) journey West. Part of the magic of The Oregon Trail is its facade as an innocuous educational game with pleasant colors and a sprinkling historicity in its early screens. This illusion quickly gives way soon after Matt the shopkeeper takes your money in exchange for 3 yoke of wandering oxen that will surely ferry your family to their grave. * Playing The Oregon Trail, 1991 As you depart Independence you are given information about the weather, your stock of rations, the health of your group, and the distance to the next landmark on your trip. You’re able to choose how many miles you travel per day, and how many rations you consume, all the while experiencing the dire effects of travel in the wilderness upon the bodies of your party. Monitoring the health of your party seems to be the core mechanism of the game, but there is often little to be done for the many afflictions and events that besiege your travelers besides resting when you reach an outpost and making sure you don’t run out of food. The most famous single line of the game is without a doubt “You have died of dysentery,” which has become a popular meme that reflects the likelihood that your party will perish. If we consider what this means for the game in our cultural memory, it is both an educational game and an oddly compelling misery simulator. On my recent playthrough of the game I was robbed by thieves twice, afflicted by cholera and measles, bitten by snakes, and all the children broke their legs, and this was only a fraction of the misfortune that befell my group. If your group perishes you are met with a gravestone adorned with pithy text that essentially taunts you to try again, and many players did just that despite how hopeless the game could seem. Upon running out of rations you will need to gather your bullets and your rifle and go on the hunt. In the version of the game I played you could hunt squirrels, deer, buffalo, and bears. Hunting is represented by a minigame where rocks and shrubbery block the path of your bullets from hitting animals that pass across the screen. Smaller animals provide very little meat, but buffalo and bears provide tons of meat, of which you can only ever carry one hundred pounds back to the wagon. If you want to feed your family for the journey and you are anything but a wealthy banker, you will need to spend a substantial amount of time hunting, and the travelers might die anyway. While the gamified struggles of the travelers are the strongest associations with the game, you also pass by artistic renditions of landmarks across the trail as an engagement with geographical Americana. You trade and speak with other travelers and Indigenous Peoples along the trail, although unsurprisingly the history presented here is grounded in Americentric tropes that don't reflect the reality of American settlement. Katharine Slater notes that “Although various editions of The Oregon Trail seem to make an effort to move beyond explicit stereotypes, the game nevertheless perpetuates a racist narrative that privileges the ethos of white settlement through its refusal to engage directly with the genocidal consequences of westward expansion.” Had The Oregon Trail done a better job of conveying the details of what settlement and settlers did to Indigenous Peoples, it probably wouldn’t have ended up in schools in the first place. Part of the game’s reach was its appeal to a settler-colonial curriculum. While some of this is speculation, it is clear The Oregon Trail is not a particularly accurate or nuanced historical document, and yet the game became the poster child for educational games and continues to resonate with players. It has also become synonymous with a generation. The Oregon Trail Generation The concept of ‘The Oregon Trail Generation’ is a challenging one. The term refers to people who were born between 1977 and 1985, also labeled as ‘Xennials,’ a ‘micro-generation’ between Generation X and Millennials.’ This ‘micro-generation’ is so named because they grew up as computers were passing into the mainstream, particularly through the presence of homeroom computers or computer labs in schools that were often bundled with copies of The Oregon Trail. In practice, ‘The Oregon Trail Generation’ is a bit troubling as a label because the association with age, technological emergence, access, and aptitude doesn’t reflect how technology made its way into homes and schools from 1970 through to the 2000s. There were plenty of people from Generation X who developed technical competencies with the technology (and many who in fact designed the technology in the first place), and there were also many homes and schools that weren’t equipped to effectively expose students to these technologies until well into the Millennial generation. While the temporal parameters of The Oregon Trail Generation don’t really work, the term does point to students who grew up with educational games in the classroom as having a different experience than what came before. It is more accurate to think of the ‘The Oregon Trail Generation’ as a group that is parallel to Xennials but not limited to the same temporal boundaries. They should primarily be defined as the students or even independent Generation X learners who had regular exposure to educational games in the classroom or in their personal lives. In this sense we’re referring more to people who grew up accustomed to educational games as a part of the overall process of engaging with the world, of which The Oregon Trail was a fundamental part for many learners, although it was far from the only game in this genre to make a lasting impact. What was it about The Oregon Trail and other popular educational games like The Carmen Sandiego series (Broderbund, 1985), or for my classmates and I, Cross Country Canada (Ingenuity Works, 1986), that produced such strong feelings and positive memories about these kinds of games? When I was growing up it was not uncommon to rush to the one computer in the back of the classroom to play Cross Country Canada, another The Oregon Trail-inspired educational game, if we had spare time in class. As young learners we were compelled to play: we were actively anticipating learning geography by playing a game that allowed us to traverse Canada’s highways. It wasn’t just something we were doing because we were in school and it was expected of us, it was part of our days that we looked forward to. * Driving Canada's Highways in Cross Country Canada, 1986 Going back to The Oregon Trail, why might this be? Does The Oregon Trail represent history well? Not particularly: it retreads familiar tropes of the settling of the American West, including extremely dated representations of Indigenous Peoples - but like many other games branded with the ‘educational games’ label, it also provided a level of attachment to the material that can’t be overlooked. The cultural legacy of this game, despite its reputation for producing challenge, misery, and digital dysentery, is one of pop culture presence and fond remembrance among those who played it. This is partly because The Oregon Trail and its educational game offspring provided a sensory connection to a curriculum-safe rendition of topics that were so often off-putting to students because the delivery mechanisms of dusty chalk and hard-to-read projected acetate sheets simply did not work for all kinds of learners. Traditional modes of teaching can produce a familiar experience despite what subject was being taught, and for many students they weren’t as compelling as naming our family and sending them to their untimely end on the long trail west. The Oregon Trail stands out because at the time it was central to a new way of learning - a break in the routine - that added color, drama, and choice to an often rote learning routine. So why haven’t educational games reached the same heights culturally since The Oregon Trail? Well for one, the technology of some classrooms has increased substantially, and the classroom PC isn’t as novel a teaching tool as it once was. What’s more, at the time of The Oregon Trail’s rise, far fewer people were playing games or had games in their home, so educational games had far less competition from mainstream games and were more impressive as an experience. As time passed the kinds of educational games that school boards purchased were severely outclassed aesthetically and in playability by the games young people had at home. In some cases we were left playing games from the early 1990s in classrooms in the early 2000s. Other educational games did leave a mark on students but they weren’t first, nor were they implemented at the same time as a large-scale technological advancement in education across the United States with the introduction of the Apple II. The Oregon Trail was the right game at the right time, but it also resonated with those who played it. It has become emblematic of the many educational games that came after, as the aesthetic and design choices became prominent across other games. It is not a perfect historical document, but as a learning tool it drew students in to play the game and engage at least a little with the subject, and there is no doubt that culturally we have held onto fond memories of the experience. Much like the game’s limit on one hundred pounds of bear meat, as learners and players we could only carry a small piece of what the game provided for us, and in this case a substantial portion of what we carried were memes about dysentery. But that doesn’t mean that The Oregon Trail didn’t succeed as an educational game. Games like The Oregon Trail are just one component of our educational journey that build our interest in particular topics or allow us to explore subjects in ways other media cannot. But all the elements of our learning: our teachers, our books, our study habits, are what get us even further down our own perilous trail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논문세미나] 베트남 게임 환경과 무협문학의 관계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술과 영웅담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장되는 무협 이야기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베트남 현지어로 키엠히엡(kiếm hiệp), 트루옌쯔엉(truyện chưởng)으로 불리는 무협물은 베트남에서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20세기 초 베트남에 처음 소개된 무협소설은 인쇄매체와 온라인게임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오늘날의 베트남 디지털게임이 다루는 무협 콘텐츠가 어떠한 배경 속에서 무협문학으로부터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는 초창기의 무협물에 관한 경험이 베트남의 동시대 게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생애사적 접근법과 문화적 근접성의 개념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 Back [논문세미나] 베트남 게임 환경과 무협문학의 관계 23 GG Vol. 25. 4. 10. 무협물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문화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판타지 문학의 하위 장르다. 특히 중국 문화권 혹은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Chen, 2009)을 대표하는 장르로 이야기된다.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술과 영웅담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장되는 무협 이야기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베트남 현지어로 키엠히엡(kiếm hiệp), 트루옌쯔엉(truyện chưởng)으로 불리는 무협물은 베트남에서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20세기 초 베트남에 처음 소개된 무협소설은 인쇄매체와 온라인게임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오늘날의 베트남 디지털게임이 다루는 무협 콘텐츠가 어떠한 배경 속에서 무협문학으로부터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는 초창기의 무협물에 관한 경험이 베트남의 동시대 게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생애사적 접근법과 문화적 근접성의 개념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베트남 무협의 초창기 영향력 베트남 무협 소설의 뿌리는 처음 베트남 독자들이 중국 무협소설을 경험한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작품들은 무술 소재에 유교적 이상, 역사 소설을 결합한 전통적Oldschool(Hamm, 2005) 중국 무협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편이었다. 베트남 작가들은 무협물을 베트남 현지 상황에 맞게 각색하기 시작했고, 종종 베트남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룩밧( lục bát) [1] 구절과 같은 베트남 문학의 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초창기 베트남의 무협물들은 중국 무협의 전통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로맨스 서사와 같은 프랑스 문학의 요소로부터도 영향받은 바 있어 중국 작품에 비해 보다 말랑말랑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Phan. 1998). 그러나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정치적 변화를 겪으며 북베트남에서 무협물은 탄압받게 된다. 북베트남 공산정부는 무협물을 체제전복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적 퇴폐의 상징으로 간주했고, 동시에 이를 해로운 외세의 영향이라고 보았다(Linh 외, 19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물은 남베트남에서 여전히 번성했으며, 특히 홍콩과 대만에서 진용(김용), 량유성, 우롱성, 니광, 구롱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무협작가들이 등장하면서 베트남 대중문화의 한 축을 차지하기 시작했다(Vu, 2015). 베트남 무협물은 1975년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북베트남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정부 당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적대감에 직면했다. 북베트남 당국이 무협 서적을 전면 금지한 이후, 북베트남 사람들은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무협 서적을 돌려 읽기 시작했다. 출판 및 유통이 금지되어 불법으로 수입될 수 밖에 없었던 사본들이 시장 전체로 조용히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무협물의 매력은 오히려 더 커져갔다(응우엔 통, 2018). 베트남 정부는 1990년대 경제개혁과 미국의 금수조치가 종료되면서부터 무협물 제작과 유통에 대한 접근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무협 관련 자료들은 국영 출판사에서 제작하는 합법적 번역출판물들을 통해 다시금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인터넷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디지털 자료, 영화 콘텐츠, 게임 등을 통해 무협물을 접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온라인게임에서의 무협 인터넷 기술이 베트남에서 본격화하면서부터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을 통해 무협물은 다시한번 부각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온라인게임 Võ Lâm Truyền Kỳ(The Swordsman )와 Cửu Long Tranh Bá(9Dragons ) 가 베트남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플레이어들은 김용과 구룡의 작품에 등장했던 무술의 테마와 영웅들의 컨셉을 가져온 이 게임을 통해 무협의 무한한 세계를 경험했다. 무협 온라인 게임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무협소설(Ge, 2017)에 묘사된 복잡한 세계를 탐험하는 무협무술가 당사자로서의 이야기를 경험하게끔 함으로써 개별 플레이어들의 협력이 가능한 장을 조성했다. * 2000년대 베트남 무협 온라인게임 Võ Lâm Truyền Kỳ 베트남에서의 온라인 무협 게임 붐의 배경에는 플레이어들의 향수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1980년대, 1990년대에 태어난 이들 무협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린 시절부터 소설과 TV 프로그램, 영화 등을 통해 무협물에 익숙한 세대였기 때문이었다. 무협 게임 플레이는 이들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 경험했던 무협물의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해 가진 환상과 정서적 유대감을 다시금 일깨우며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Chan, 2006). 이러한 현상은 생애 초기의 경험이 이후의 행동과 선호도를 형성한다는 인생과정 이론과 일치한다. 베트남 게이머들의 경우, 무협물에 대한 노출이 게임 취향을 형성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 중국 사이의 영토 분쟁으로 인해 반중 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베트남 게이머들은 정치적 갈등과 문화적 감상을 구분했고, 무협물을 비롯한 중국 미디어 콘텐츠들을 계속 수용하고 있었다. 향수는 베트남 전역에서 무협 게임의 인기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무협 관련 콘텐츠들은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존재하는 수천년 이상 이어진 문화적 연관성을 토대로 베트남 플레이어들을 매료시킨다. 양국 간의 역사적 연결은 양국 정부가 중국 미디어 콘텐츠를 베트남 이용자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문학 및 게임 등에서의 무협 소재를 베트남 이용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지하는 가교로서 작용한다(Yoo et al, 2014).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영유권 분쟁으로 인한 정치적 긴장은 베트남 게이머들이 중국산 무협 게임 플레이를 즐기는 것을 막지는 못했는데, 이는 베트남 게이머들이 정치적 문제와 문화적 소비행동을 분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Kinh Hoa, 2018). 외국 미디어의 수용에 영향을 미치는 두 문화 간의 유사성 정도를 의미하는 문화적 근접성 개념 또한 베트남에서의 무협 게임 인기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이다. 문화적 근접성은 베트남 시장에서 무협 게임의 수용을 촉진했으며, 플레이어는 충성심과 명예, 무술 철학과 같은 무협을 통해 공유된 문화적 주제와 가치를 반영하는 게임에 더욱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Straubhaar, 1991). 베트남 무협 게임 시장은 아시아 게임사들의 효과적인 홍보 전략을 통한 지속적인 사업전략적 선택 덕에 갈수록 번창하는 중이다. 게임 프랜차이즈로서의 무협물이 가진 인기에 힘입어 베트남 게임 개발사들은 무협을 주제로 한 게임들을 자사의 주요 제품 라인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들 업체는 보다 저렴한 라이선스 비용으로 이미 무협 게임을 좋아하는 베트남 이용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무협 게임 수입에 많은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게임사가 무협물을 테마로 선택하는 주요한 이유로 이들 무협물이 베트남 플레이어들의 문화적 선호도를 충분히 충족하고 있고, 무협물 콘텐츠에 대한 기존의 시장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MIC, 2019a). 이는 통계상으로도 드러난다. 베트남 정보통신부(MIC, 2019a)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 308개의 온라인 게임이 PC 혹은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베트남 시장에 진출했으며, 이들 중 95%는 무협물 혹은 무협 컨셉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2019년 상반기에 수입된 게임 중에서는 90%가 무협 컨셉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MIC, 2019b). 베트남 문화부 웹사이트에 게시된 최신 보고서(MIC, 2024)에서도 무협 게임의 수입 우세가 뚜렷하게 기록되는 것으로 볼 때 무협물의 강세는 여전히 지속되는 중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와 같은 인기 MOBA게임이 무협게임의 소비자층을 줄이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한데, 다른 장르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무협게임의 팬층 자체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맥락에서의 베트남 무협물 무협물은 베트남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반면, 서구 시장에서는 그다지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중국 철학, 무술과 같은 소재들이 강조된 무협물 속의 문화적, 서사적 뉘앙스가 관련 배경지식이 없는 서양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협물 서사는 중국 문화의 깊은 곳까지를 파고들기 때문에 서구권 수용자들에게 무협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Frisch, 2018). 실제로 무협물을 영어로 번역할 때 서양 언어에는 각각의 무협 개념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용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 또한 무협물이 서구권에 알려지기에 어려운 또다른 요소로 작용한다(Earnshaw, 2018). 그 결과 무협 기반 게임은 베트남을 비롯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보여준 성공과 달리 서구권에서는 상대적으로 틈새 시장에 머무는 형태가 되었다. 서양과 동양의 게임문화 간 차이는 무협 게임의 차별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서양 게임들은 종종 군사화된 남성성, 전략 기반의 전쟁, 식민지 서사를 강조하는 반면, 동아시아 게임에서는 판타지와 신화, 무술적 전통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시적 기교에 가까운 무술의 기교나 무협물에서 활용하는 역사적 우화와 같은 간접적 뉘앙스들은 서구 이용자들의 무협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다. 무협 서사가 가진 복잡성과 어려움은 무협 게임에도 영향을 미쳐, 서구권을 포함한 글로벌로의 진출이 제한되며 무협 게임은 주로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현상으로서의 위상이 강화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의 무협 게임은 문학과 영화 등을 통해 다양하게 각색된 장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친화도 덕분에 게임업계에서는 지속적인 활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베트남의 게임산업 발전에 대한 열망 또한 무협물의 영향을 받았다. 투언 티엔 키엠(Thuận Thiên Kiếm) [2] 과 같은 베트남산 무협 게임을 제작하려는 시도는 국가의 역사와 신화를 게임 서사에 통합하려는 열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높은 제작비용, 각종 규제, 수입 게임과의 경쟁과 같은 문제는 베트남 내부에서 개발하는 무협 기반 게임들의 성공을 가로막고 있다. 그 결과, 베트남 게임업체들은 독창적인 게임 개발보다는 외산(중국산) 게임의 현지화에 보다 집중하였고, 이로 인해 무협물의 상당 부분은 중국산 무협 게임이 차지하게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과 베트남 도서 시장에는 셴샤(판타지), 옌칭(로맨스), 보이러브, 툼레이더와 같은 새로운 장르들이 등장하면서 무협소설의 출판량과 독자가 감소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무협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는 여전히 베트남 그리고 세계적인 규모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중이다. 고품질 게임을 만들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한 중국 게임 스튜디오들의 노력 덕택에 무협물 게임은 전 세계, 그리고 특히 베트남에서 무협의 본질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나라카: 블레이드포인트>는 무협에서 영감을 얻은 블록버스터 게임을 개발하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고, <검은 신화: 오공>은 그러한 열망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24엔터테인먼트의 게임개발자들은 배틀로얄 규칙에 양식화된 무술전투 메커니즘을 결합하여 <나라카: 블레이드포인트>를 제작했다. 2021년에 출시된 이 게임은 가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서바이벌 개념을 따라가는 대담한 시도였다. <나라카>는 무협물이 가진 개방형의 미학을 속도감 넘치는 경쟁모드로 전환하면서 무협 게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멀티플레이어 기반의 온라인게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 속에서 <나라카>는 중력을 거스르는 이동기술, 마샬 ‘아츠’ 로서의 검술, 신화적 요소와 같은 무협 게임의 기본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중국과 서구시장 모두에서 이뤄낸 <나라카>의 성과는 무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게임이 전통적 문화적 기반과 함께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Obedkov, 2024) 한편 <검은신화: 오공>은 매혹적인 그래픽 속에서 중국 고전 <서유기>를 재해석해낸 신화적 이미지가 훌륭하게 연출되며 큰 인기를 모았다. <서유기>의 여정을 따라가는 주인공 캐릭터는 봉술이라는 무술의 전문가로 묘사되면서 무협 요소를 크게 차용했다. <오공>의 개발자들은 언리얼 5를 사용하면서 강한 몰입감과 영화적 영상연출을 동시에 일궈냈고, 이러한 접근방식은 무협 미디어가 발전하는 기술을 통해 어떻게 무협물의 국제화를 달성하고 기존의 수용자층을 넘어서는 범주 확장을 이뤄내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무협물 본연의 스토리텔링을 유지함으로써 <서유기>에 익숙한 이용자 뿐 아니라 서구권의 수많은 초심자들까지도 플레이어 풀에 끌어들이는지를 보여주었다(Meng, 2025). 결론 베트남 무협의 역사는 문학과 기술미디어, 디지털 엔터테인먼트가 갖는 복잡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인쇄소설에서 시작된 무협은 온라인게임의 디지털 전환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문화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유지해 왔다. 향수와 문화적 근접성은 중국발 무협 게임이 베트남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가져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많은 플레이어들은 무협물을 일찌감치 다른 미디어를 통해 접해 왔다는 배경 속에 무협 장르를 게임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무협 게임이 달성한 성공은 이 장르의 지속적인 매력을 인식한 베트남 게임사들의 비즈니스 전략에 힘입은 바 또한 크다. 다른 게임장르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무협 장르는 베트남 게임산업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유산은 베트남에서 무협소설이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변화하는 미디어 형식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나라카: 블레이드포인트> 와 <검은신화: 오공>의 성공은 무협 장르가 전세계 게임업계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장르이며, 게임만 잘 나온다면 동서양의 문화적 경계도 모호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게임들은 현대적인 게임 플레이로부터의 요구에 적응하면서 전통적인 장르가 현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무협 장르의 지속가능성을 증명한다. 참고문헌 Chan, D. (2006). Playing with indexical Chineseness: The transnational cultural politics of Wuxia in digital games. Enter Text , 6 (1), 182–200. Chen, L. C. (2009). The value chain in the Asian online gaming industry: A case study of Taiwan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Westminster. Earnshaw, G. (2018, November 1). I translated Chinese writer Louis Cha “Jin Yong.” Here’s why he never caught on in the West. South China Morning Post . https://www.scmp.com/news/china/society/article/2171127/i-translated-chinesewriter-louis-cha-jin-yong-heres-why-he-never Frisch, N. (2018, April 13). The gripping stories, and political allegories, of China’s best-selling author. The New Yorker . https://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the-gripping-storiesand-political-allegories-of-chinas-best-selling-author Ge, S. S. (2017). The influence of Chinese culture on television to young people in Vietnam [Master’s thesis]. VNU University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Hanoi. Hamm, J. C. (2005). Paper swordsmen: Jin Yong and the modern Chinese martial arts novel. University of Hawai’i Press. Kinh Hoa. (2018). Kim Dung anh huong nguoi Viet nhu the nao? [How Jin Yong influences Vietnamese readers?]. https://www.rfa.org/vietnamese/in_depth/jin-young-and-vietnamese-11012018115035.html Linh, T., Hien, P., Quynh, T. T., Binh, H. L., Phuong, T., & Ta, T. H. (1977). Van hoa, van nghe mien Nam Viet Nam duoi che do My Nguy [Culture and Arts in South Vietnam under the regime of US-RVN]. Culture Publishing House. Meng, Q. (2025). Black Myth: Wukong – The Internationalization of Chinese Games. Journal of Modern Social Sciences, 2 (1), 13–19. https://doi.org/10.71113/JMSS.v2i1.173 Ministr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MIC). (2019a). List of online games with content approved from 2015 to 2018 and defunct games . http://www.mic.gov.vn/solieubaocao/Pages/TinTuc/139632/Danh-sach-cac-tro-choi-duoc-cap-quyet-dinhphe-duyet-noi-dung-kich-ban-tu-2015-2018–dang-phat-hanh–va-Danh-muc-tro-choi-truc-tuyen-da-thong-bao-ngung-phathanh.html Ministr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MIC). (2019b). List of online games with content approved in 2019 . http://www.mic.gov.vn/solieubaocao/Pages/TinTuc/139630/Danh-sach-cactro-choi-duoc-phe-duyet-noi-dung–kich-ban-nam-2019–denthang-8-2019-.html Ministr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MIC). (2024). List of online games with content approved from 2015 to 2023 (until December 2023). https://abei.gov.vn/danh-sach-cap-phep/danh-sach-cac-tro-choi-duoc-cap-quyet-dinh-phe-duyet-noi-dung-kich-ban-2015-2023-tinh-den-thang-122023/108392 Nguyen, Thong. (2018). Mot the he khong co Kim Dung [A generation without Jin Yong]. https://motthegioi.vn/van-hoa-giai-tri-c-80/tap-van-c-172/mot-the-he-khong-co-kim-dung-99979.html Obedkov, E. (2024). The First Descendant tops Steam charts, with Naraka: Bladepoint rising 56 positions and breaking its CCU record . https://gameworldobserver.com/2024/07/09/the-first-descendant-tops-steam-charts-naraka-bladepoint Phan, N. (1998). À la rencontre de deux cultures: l’influence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au Viêt-nam [The meeting of two cultures: the influence of French literature in Vietnam]. Aséanie, Sciences humaines en Asie du Sud-Est , 1 , 123–143. Straubhaar, J. D. (1991). Beyond media imperialism: Asymmetrical interdependence and cultural proximity. Critical Studies in Mass Communication , 8 , 39–59. https://doi.org/http://doi.org/fw2vqv Vu, D. S. B. (2015). Kim Dung giua doi toi [Jin Yong in my life]. Tre Publishing House. Yoo, J., Jo, S., & Jung, J. (2014). The effects of television viewing, cultural proximity, and ethnocentrism on country image . Social Behavior and Personality, 42 (1), 89–96. https://doi.org/10.2224/sbp.2014.42.1.89 [1] 역자 주: 六八. 6음절 연과 8음절 연을 연이어 사용하는 베트남의 시 형태. 중국 고전문학에서 중간중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장면을 베트남 현지 분위기로 맞출 때 사용했음을 나타낸다. [2] 번역자 주: 順天劍, 순천검. 명나라와 싸워 베트남을 명의 지배로부터 독립시킨 Lê Lợi 왕이 가졌다고 알려진 전설의 검이다. Tags: 베트남, 무협, 온라인게임, MMORP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베트남 국립대학교 학제 간 과학 및 예술 학교) 판꽝안 Phan Quang Anh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 Back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22 GG Vol. 25. 2. 10. 컴퓨터를 격파하는 법 인터넷을 배회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분노에 찬 누군가가 컴퓨터나 모니터 (혹은 프린터와 같은 여타의 주변 기기들)를 때려 부수는 밈과 마주친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온 이 밈의 시작은 1997년에 무려 이메일을 통해서 바이럴된 영상이다. [1] 시기를 고려하면 놀랍지 않게도 이 영상은 인터넷 최초의 바이럴 영상 중 하나로 여겨진다. 즉 컴퓨터를 ‘격파’하는 밈은 그 자체로 밈의 역사이자 현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카타르시스 충만한 밈은 어째서 죽지도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일까. 바꿔 말하면 이 밈은 왜 여전히 작동하는 것일까. 물론 부수지 말아야 할 것을 부숴버리는 쾌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좀 더 농담을 다큐로 받아 보자. 특정한 세부 장르의 서로 다른 작품들이 어떤 공통된 내러티브적 요소들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컴퓨터 격파 밈’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뼈대를 갖추고 있다. 모니터 안의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좌절 혹은 공포에 휩싸인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그 모니터 혹은 컴퓨터 전체를 때려 부순다. * 전설이 되어 버린 “badday.mpg” 흥미로운 지점은 그들에게 좌절 혹은 공포를 준 대상과 그들이 때려 부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오롯이 모니터의 스크린과 키보드 혹은 프린터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상징적 인터페이스(GUI)에서 받은 충격을 엉뚱하게 기계적 인터페이스(스크린, 키보드)에 화풀이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간극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은 모니터 속 전자 회로의 논리적 구조에 직접 접속이라도 할 것처럼 주먹으로 모니터를 꿰뚫어 버린다. 인터페이스는 연결하지만, 또 차단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신체는 진화/퇴화와 최적화 사이를 불안정하게 진동한다. ‘컴퓨터 격파 밈’은 인터페이스가 처한 아포리아에 관한 우화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해결책도 제시하는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것 없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 버리라고. 그런데 매듭이 끊어지는 순간 도래하는 것은 카리스마에 압도된 고요함 같은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다는 웃음이다. 안타깝지만 진심 어린 펀치로도 그 모든 복잡다단한 인터페이스의 레이어들을 뚫고 추상 기계라는 ‘물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주먹이 가닿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인터페이스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밈의 과도한 액션들은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기능한다. 밈을 보는 사람들은 뜬금없이 강렬한 타격에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동시에 인터페이스에 내재한 긴장 관계가 이런 식으로 해소될 수 없음을 갑작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끊어야 할 매듭도 없다는 진실도. 이것이 ‘컴퓨터 격파 밈’이 지금까지 작동을 멈추지 않은 이유이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유동하는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는 편재한다. 이 문장은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이제는 거의 모두가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일과 여가를 가리지 않고 쓰게 되는 랩탑/컴퓨터 그리고 우후죽순 늘어나는 식당/카페의 키오스크까지, 사람들은 지금도 손가락을 열심히 놀려서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처럼 디지털 기기들이 일상을 완전히 에워싸기 전에도 인터페이스는 도처에 있었다. 현재의 디지털 환경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인 조건 중 하나인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기 전의 시기를 떠올려 보자. 1930년대의 경성을 정처 없이 떠도는 소설가 구보씨의 의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인터페이스에 직면한다. 구보씨가 타고 다니는 ‘전차’에서부터 백화점의 ‘승강기’, ‘전기 보청기’, ‘경성역’, ‘자동차’, ‘축음기’, ‘자전거’, ‘전화’, “'간다(神田)' 어느 철물점에서” 구입한 “한 개의 '네일 클립퍼'”까지. 요컨대 인터페이스는 ‘편재해 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명백한 시대적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1930년대의 경성과 2020년대의 서울은 편재하는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연속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는 ‘도처에 있음’이라는 말 속에 혼재하는 다른 두 인터페이스의 맥락을 서로 떼어놓고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폰 노이만 구조의 발명이 그 둘 사이를 가르는 가장 선명한 구분 선이 될 수 있을 텐데, 왜냐하면 이 구조의 컴퓨터는 (애니악ENIAC과는 달리) 소프트웨어적으로 프로그램을 구현할 수 있게 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더 고도의 추상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저 인터페이스의 측면 뿐 아니라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의 측면에서도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 작동 사이의 부분적인 단절은 더욱 심화한다 . [2] 이 구도는 박해천이 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상기시킨다. “ 기계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리적 형식으로 존재했다. 이런 시각적 연속성 덕분에, 특정한 조형 언어로 그것을 상징화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스크린을 통해서만 자신의 현존성을 드러낼 뿐, 언제나 조형 언어의 상징적 질서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실제로 디지털 제품의 전자 회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세계와 감각적으로 불연속적인, 그래서 종종 ‘탈물질적’이라고 과장되곤 하는 미세한 전자들의 운동에 의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 [3] 관건은 (기계 테크놀로지와는 달리) 트랜지스터에 기반한 디지털 기기들에는 인터페이스가 ‘잘 붙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터페이스 자체를 독립적인 개념으로서 부각하면서 내적인 완결성을 갖춘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인터페이스 역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개인 컴퓨터에서 가상 머신virtual machine을 구축하거나 혹은 가상화virtualization 기술을 사용한 서버들이 밀집된 데이터 센터에 기반한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할 때, 실행 중인 프로그램은 API를 통해서 가상의 하드웨어가 제공하는 컴퓨팅 리소스를 할당받는 방식으로 물리적인 하드웨어와의 관계로부터 다시 한번 추상화한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의 경험 또한 이와 같은 미끄러짐을 가시적으로 잘 드러낸다. 특히 비디오 게임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데, 왜냐하면 게임은 하드웨어적인 연산을 요구하는 소프트웨어인 동시에 그 연산을 ‘시스템적으로’ 비껴가는 놀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게임이 그래픽 하드웨어의 발전과 밀접하게 맞물려 왔던 역사적 맥락은 이 미디어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선형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식의 목적론적인 환상을 강화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는 지점은 게임이, 테크크런치 디스럽트Techcrunch Disrupt와 같은 행사에서 어떤 스타트업이 공들여 만든 데모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신적인 컴퓨팅 기술을 향한 집착은 게임의 욕망과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의 역사는 한정된 컴퓨팅 자원의 제약 속에서 인터페이스적 ‘눈속임’의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들은 당시 디스플레이 기술의 한계를 텍스트로 극복해 보려는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 [4] 에서 장르의 기원부터 인터페이스-하드웨어의 긴장 관계를 내포한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장르의 커뮤니티가 누구보다도 깐깐한 ‘고인물’들로 가득하다는 맥락과 결합하면서 장르적 전형archetype의 핵심으로 전면화한다. 따라서 하드웨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2023년에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스테이시스: 본 토템>은 마치 살아있는 화석처럼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이 ‘응당’ 따라야 하는 많은 관습적인 디테일을 유지한다. 이를테면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작동이 되는’ 인터페이스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그것을 찾지 못하면 게임이 실패한 숨은그림찾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게임에서 ‘퍼즐’은 먼저 적절한 인터페이스를 발견한 다음 그것과 올바르게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알아내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과정 중에 플레이어들은 상황적인 증거를 긁어모아서 머릿속으로 ‘연산’하거나 혹은 ‘숨은그림’이 숨겨진 스크린을 마우스로 하릴없이 여기저기 찔러보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쓰게 된다. 결국 작동하는 인터페이스와 상호 작용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또한 본격적인 하드웨어적 연산이 발생하는) ‘실감나는’ 과정은 실제 게임 플레이 중 극히 일부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게임 유저 인터페이스UI는 크게 다이어제틱(diegetic) UI와 논다이어제틱(nondiegetic) UI로 나뉜다. 이런 식으로 나뉘는 기준은 게임이 창출하는 허구의 세계가 UI를 인지하고 그에 따라 반응하는가의 여부다. [5] 일례로 <디아블로> 시리즈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던 (지금은 사라진) 오버레이 맵은 전형적인 논다이어제틱 UI라고 볼 수 있다. * 와우의 압도적인(?) UI HUD(head-up display)로 대표되는 논다이어제틱 UI는 군사적인 기원에 걸맞게, 플레이어들이 더 효율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추상화된 형태(막대그래프,미니맵,그리드 인벤토리 시스템 등)로 빠르게 전달한다. 알렉산더 R. 갤러웨이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미지의 다이어제틱한 공간의 가치는 강등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논다이어제틱 의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6] 라고 썼다. 이 문장은 논다이어제틱 UI가 낭만적인 판타지 픽션의 공간을 어떤 식으로 ‘전쟁상황실’로 탈바꿈시키는지 간결하게 짚어낸다. 반면 <스테이시스: 본 토템>은 다이어제틱 UI에 대부분의 상호 작용을 의존한다. 추상적인 형태의 정보 전달은 지양되며, 플레이어들은 아이소메트릭 뷰로 표현된 이 디스토피아의 공간에 좀 더 시각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심지어는 인벤토리 창에 있는 아이템을 다른 공간에 있는 캐릭터에게 클릭 한 번으로 넘기는 (매우 논다이어제틱하게 느껴지는) 기능마저 QSD(Quantum Storage Device)라는 이름의 기술로 그 세계 내에서 정당화된다. 이처럼 UI는 스테이시스의 ‘배경’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플레이어들은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떼어다가 아이템으로 만들 수도 있다. 또는 그 아이템들을 이리저리 주물럭거리거나, 조합해서 다시 배경으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다. ‘작동하지 않는’ 인터페이스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다소 기묘한 순서의 과정을 거쳐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가 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프로세스를 여러 번 겪다 보면, 배경/전경 그리고 ‘작동하는/작동하지 않는’의 임의적인 이분법은 희미해진다. 플레이어들은 탐정이라도 된 듯이 집요하게 인터페이스를 쫓지만, 인터페이스는 마치 유령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출몰했다가 다시 사라진다. 입력과 출력의 이벤트 호라이즌 이렇듯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 사이의 어긋남은 (기술의 발전 경로에서 비롯된) 어느 정도 내재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에 비해 인터페이스와 유저들의 신체 사이에서의 ‘단절’은 플레이어들의 심리가 결부된 디지털 게임의 산업적인 추세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후자의 케이스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서 이야기했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맥락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다시 말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인터페이스의 미끄러짐은 하드웨어의 ‘실제적인’ 작동과는 다소 독립적으로 디지털 인터페이스 자체의 논리를 유도한다. 그것의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오히려 폴더의 리얼리티 효과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용자가 폴더를 더블 클릭한 이후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즉 사용자가 납득하고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 사건들이 전개될 때, 아이콘의 리얼리티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성의 원리’는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핵심 원리라고 할 수 있다....(중략).... 결과적으로 스크린의 기호 체계는 입력과 출력의 인과율이 지배하게 된다.” [7] 애초에 유저들을 기만하기 위해 설계된 다양한 종류의 다크 패턴이나 유저 인터페이스의 인과성 자체를 거의 사보타주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광고 페이지들을 제외하면, 위 인용문에서 제시된 원리는 2025년 현재도 많은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동일하게 유지된다. 즉 인터페이스가 하드웨어의 작동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과는 별개로 스크린 내에서는 원인(입력)에 따른 결과(출력)가 확고하게 ‘인과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서는 이러한 인과성의 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한다. 먼저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에 걸쳐 있는 케이스부터 시작해 보자. 입력 버퍼링은 특히 플랫폼 게임이나 대전 격투 게임과 같은 장르를 개발할 때 널리 쓰이는 트릭이다. 이 두 장르의 공통점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세심하고 복잡한 컨트롤이 요구되며, 실패할 시 패널티가 즉각적으로 부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버퍼 윈도우 없이 게임을 디자인하게 되면 (입력과 출력의 타이밍이 ‘정확’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게임이 불공평하며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개발자들은 점프한 캐릭터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시 점프 버튼을 누른다고 해도 그 입력이 캐릭터의 다음 행동에 반영이 되도록 하는 식으로 적당한 수준의 버퍼 윈도우를 설정한다. 혹은 대전 격투 게임에서 필살기를 쓰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복잡한 버튼 연타와 조이스틱 움직임을 다른 행동 중에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다음 액션에 반영된다. 물론 이와 같은 입력과 출력 사이의 의도적인 지연은 여전히 인과성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게임마다 다른 버퍼 윈도우의 임의적인 길이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트리트 파이터 6>의 경우 상당히 긴 버퍼 윈도우로 인해서 입력한 필살기의 커맨드가 전혀 엉뚱한 순간에 발현되는 불만들이 플레이어들에게서 자주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게이머들은 일상적으로 인과성의 작은 ‘균열’을 종종 감지한다. 그런데 이 케이스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입력 버퍼링이라는 트릭 자체가 플레이어의 주관적 경험에 초점을 맞춘 ‘최적화’를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이다. 게임과 여타 유틸리티 앱의 목적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게임의 최적화는 생산성의 향상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유틸리티 프로그램들의 목적은 효율적인 일 처리다. 따라서 입력과 출력의 확고한 인과성은 업무를 최적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게임의 목적은 ‘효율적인 일 처리’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입력과 출력의 인과율”은 노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적당히 무시해도 된다. 아니 무시하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깨뜨리는 것도 괜찮다. 단,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그것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감각/착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인터페이스를 완벽히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얻는 효능감은 게임플레이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최적화란 인터페이스적 감각 속임인 셈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8] 에 등장하는 한국 조이스틱의 특수한 진화 과정이다. 과거 오락실에서는 소모품인 조이스틱을 주기적으로 교체하거나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게이머들은 오래되어서 유격이 심한 조이스틱에 익숙해진 채로 동작이 큰 그들 나름의 게임플레이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후에 등장한 조이스틱들은 새 제품이라 유격이 적었음에도 한국 게이머들의 습관에 맞춰서 일부러 입력값을 민감하지 않게, 즉 의도적으로 ‘멍청하게’ 만들어 왔다는 이야기다. 입력 버퍼링의 사례에서 균열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면, 한국 조이스틱의 예시는 게임의 최적화가 입력과 출력의 인과율을 어떤 식으로 교란하는가에 대한 어떤 범례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유저 편의성’을 향한 인과율의 침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딥러닝을 활용해서 더 적은 컴퓨팅 파워로 업스케일링을 구현하는 기술로서 출발했던 엔비디아의 DLSS(Deep Learning Super Sampling)는 최근 출시한 DLSS 4에 이르면 래스터화로 렌더링된 프레임 하나당 뉴럴neural 렌더링으로 생성된 프레임이 최대 3개까지 더해지는 일종의 실시간 AI 그래픽 생성 기술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적 성취가 인터페이스의 인과성과 대체 무슨 상관일까. 이를 연결 짓기 위해서는 게임의 프레임과 입력 지연시간 사이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 생성된 프레임이 더해질수록 입력 지연시간은 꾸준히 상승한다. 통상적으로 게임의 초당 프레임 개수가 많아질수록 입력 지연시간은 줄어든다. 스크린을 초당 30번 리프레쉬하는 것보다는 60번 리프레쉬 할 때 플레이어가 입력한 값이 바로 다음 프레임에 반영되는 시간 간격이 훨씬 짧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이 높아질수록 게임의 ‘손맛’은 더욱 찰져진다. 특히 거의 자동반사적인 컨트롤이 요구되는 멀티플레이어 FPS 게임을 주로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프레임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은 반비례 관계는 프레임의 일부분을 뉴럴 렌더링에 의존하는 DLSS 업스케일링까지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데 뉴럴 렌더링만을 이용해서 프레임을 완전히 새로 ‘생성’해 내는 DLSS 4의 멀티 프레임 생성MFG 단계에 이르면, 흥미롭게도 프레임의 개수가 몇 배로 불어나는 동안 입력 지연시간은 극적으로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소폭 상승한다. [9] 여기서 곧바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곱절로 더해진 뉴럴 렌더링된 프레임들이 플레이어의 입력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렌더링 된 프레임들 사이의 ‘빈 시간’을 픽셀 하나하나의 다음 위치를 예측하는 식으로 꼼꼼하게 채워 넣는 AI 연산의 복잡한 과정에는 유저의 ‘인풋’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멀티 프레임 생성 기능을 최대로 설정해 놓고 게임을 플레이할 때, 스크린에 출력되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나의 입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른 무언가라고 봐야 한다. 입력과 출력의 확고했던 인과율은 느슨하고 불투명한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인터페이스는 직접적으로는 상호 작용이 불가능한 것들을 맞붙이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필요성이 이것은 그저 투명하고 ‘필연적인’ 연결 장치라는 서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인터페이스는 연결하지만, 또 차단하며, 때로는 연결된 관계 전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일그러뜨리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것은 ‘확장된 기계’나 ‘확장된 신체’로서 단순히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신체를, 그러니까 연루된 모든 것들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할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자다. 따라서 인터페이스는 어떤 번역을 위한 도구로 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장치로 납작하게 이야기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표면 장력이 어마어마한 총체적인 디지털 표면에 가깝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투명한 표면 아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많은 경우 바로 그 표면이 우리의 감각을 끊임없이 ‘최적화’한다. 플레이어의 입력 없이도 다음 프레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동 사냥’이 전면화된 시대에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중이다. 인터페이스에서 오는 미세한 감각에 오랜 시간을 쏟아온 게이머라면 말 그대로 몸으로 동의할 것이다. 게임은 진정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꿔버린 것이다. [1] 클라우드는커녕 소셜 미디어도 이제 막 태동하던 시절이라 이 막대한(?) 용량의 영상은 이메일 주소를 타고 돌며, 다수의 이메일 서버를 다운시켰다. Joe Veix, “The Strange History of One of the Internet's First Viral Videos” Wired 2018.01.12. https://www.wired.com/story/history-of-the-first-viral-video/ [2] 스위칭 소자를 직접 배선으로 이은 하드웨어적인 프로그래밍에 기반한 애니악조차도 진공관과 스위치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2진법으로 추상화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3] 박해천,『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2009, 166. [4] AG Staff, “An overview of genre history, by The Art of Point-and-Click Adventure Games: Part I” Adventure Gamers 2020.06.12. https://adventuregamers.com/articles/view/an-overview-of-genre-history-by-the-art-of-point-and-click-adventure-games [5] 영화에서 배경음악은 대표적인 논다이어제틱 사운드 중 하나다. 공포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으스스한 음악이 그들의 모습과 오버랩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6] Alexander R. Galloway, The Interface Effect (Cambridge, UK: Polity Press, 2012), 51. [7] 박해천,『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2009, 174. [8] 전은기,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게임제너레이션, 2021.08.10.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adda44f-a475-4385-9b30-35cd4146581f [9] Digital Foundry, “Nvidia GeForce RTX 5090 Review: The Fastest Gaming GPU (A Lot Of) Money Can Buy” YouTube 2025.01.24. https://www.youtube.com/watch?v=Dk3fECI-fmw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크래프톤로고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