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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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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2. 10.

游戏现实主义与现实主义的“游戏”——象征界真实、想象界真实与实在界真实1)2)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시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명제3)는 리얼리즘이 역사 단계별로 변모해온 각기 다른 ‘이념’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가상현실 시대의 리얼리즘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경로를 제시한다. 사실 리얼리즘은 단순히 글쓰기 방법만이 아니라, 지식 시스템과 인지 패러다임의 ‘문체/형식’(스타일)이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뉴리얼’4)을 탄생시켰고, 사람들은 과학적 이해를 통해 인간과 세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됐으며, 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갖게 됐다. 영화, 텔레비전 등 전자매체의 부상은 예술이미지의 생산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현실의 사물이나 캐릭터의 '반영'이 아닌, 현실 이미지를 접목·변형하거나, 아예 현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이미지 체계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오스카 히데시(大塚英志)에 논하며 제시했던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의 상상력 환경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캐릭터 생산을 중심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이뤄지면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생활 논리'를 넘어 애니메이션적인 행동 논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전파'라는 명제의 핵심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것은 가상현실 속에서 정보가 발신되는 시각, 즉 신체가 정보를 감지하는 시각이며, ‘전파'와 ‘매체'는 모두 사라진 것만 같다. 가상현실은 전통적 문예의 존재 형태를 깨부수고 ‘독자와 관객' 등 개념이 해소됐으며, ‘플레이어'라는 개념은 새로운 예술학 및 미학적 소비의 범주가 됐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인식론에 호소해 진실을 드러내고,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은 상상계에 호소해 진실을 드러낸다. 가상현실은 ‘신체의 직접적 현실'이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문예작품 바깥에 머물게 하며, ‘마음의 눈'을 통해 심미적 활동을 완성케 한다. 가상현실은 오히려 사람들의 신체를 작품 속의 캐릭터와 함께 위치짓게 하며,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 내고 느낀다. 사람들이 가상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게임 인생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게임의 경험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만드는 것을 ‘게임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게임 리얼리즘도 존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태도(游戏态)’의 삶은 실제 삶의 경험을 제공하며, 게임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게임 규칙을 뒤집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분석가적 해설’을 소멸시켜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는데, 그 길에서 게임 리얼리즘은 가상시대의 새로운 주체인 플레이어를 실재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상징계/역사적 진실'과 ‘상상계/이데올로기적 진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곧 일종의 상징계의 진실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생활 경험을 그것에 내포된 역사적인 언설의 서열에 포함시킨다. 장셴량(张贤亮)의 1984년작 소설 <가로수(绿化树)>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장용린(章永璘)은 문득 마잉화(马缨花)에게서 받은 찐빵을 발견한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그래봐야 통틀어 25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찐빵은 마치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아서 입 속에 넣자마자 녹아버렸다. 발효되지 않은 밀꽃 향기가 났고, 여름날의 햇살, 고원의 황홀한 흙냄새, 수확기의 땀, 모든 음식 본연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위쪽에서 아주 선명한 지문 자묵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겉이 하얀 찐빵의 껍질에 찍혀 있어 매우 선명했고, 크기를 보니 가운데손가락 지문이란 점을 알 수 있었다. 지문의 무늬를 보면 그것은 ‘키’가 아닌 ‘그물’처럼 빙글빙글 돌아있었고, 안쪽은 작고 바깥쪽을 향해 점차 커졌다. 마치 봄날의 호수에서 작은 물고기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물결은 점점 출렁거리고, 또 출렁거렸다……
뚝, 나의 맑은 눈물 한방울이 손에 든 찐빵 위로 떨어졌다.5)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지 어느덧 4년이 지난” 사람이 찐빵을 본 한 장면에서 저자의 펜은 먹을것에 대한 동물의 생리적 반응은 보이지 않고, 시적인 감정을 폭발시킨다. “마치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아서”, “발효되지 않은 밀꽃 향기”, “여름날의 햇살”; 그리고 지문 모양이 마치 “봄날의 호수에서 작은 물고기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물결은 점점 출렁거리고, 또 출렁거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대목을 프로이트식으로 분석한다면, ‘굶주림’이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화자의 집착과 ‘굶주림’이라는 고통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셴량은 ‘고난’의 경험을 ‘고난의 여정’으로 보고자 하며, 인생의 또 다른 고도의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는 시련으로 인식한다. 그 때문에 소설 속 “장용린의 굶주림”은 보통 사람의 배고픔이 아니라, 역사적인 운명인식이 넘치는 ‘배고픔’이 된다. 이 지식인의 운명에 대해 마잉화는 이렇게 비탄한다.


“그녀(마잉화)는 아마 그 눈물을 봤을 것이다. 그녀는 웃지도 않았고, 나를 보지도 않았다. 바위 위에 돌아누워선 아이를 껴안고 길게 탄식했다. ‘하… 이런 벌이라니…’” 6)

주인공에 닥친 이 굶주림은 실제 생활에서 많은 이들이 겪는 ‘굶주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한 지식인이 ‘문화혁명’ 과정에서 맞닥뜨린  부당 대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동정하고, 다같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굶주림=고통’이라는 등식은 굶주림이라는 생활 경험에 대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의미를 ‘굶주림의 역사 진실은 곧 고통받는 것’이라는 의미로 완성한다. 바꿔 말하면‘고통받는’ 굶주림만이 진정한 굶주림,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반성하고 기억할 만한 굶주림이야말로 진정한 굶주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시는 중편소설 <투즈챵의 개인적 슬픔>(2013)이다. 시골에서 온 주인공은 근면성실하게 고생길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부딪히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위해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자살하게 되고, 높은 곳으로 나아가던 운명과 단절하게 된다. 일을 해도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은 그의 생계를 곤두박질치게 했다. 사장은 도주하고, 어머니는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설은 이 실패한 청년의 일생을 그리며 한 사람이 마주칠 수 있는 고난을 하나의 몸에 집중시킨다. ‘개인’에게 씌인 이 우연적인 슬픔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소설은 리얼리즘적이지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상징계 질서에 부합하는 현실이며, 특정한 서사 규범과 가치의 소구를 드러내는 역사적 진실이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게 관건은 ‘삶에 부합하는 논리인가’가 아니라, 역사적 시각을 통해 서술하는 ‘현실적 진실’이다.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새로운 현실 구축의 방식과 캐릭터 행동 논리를 구현한다. 데즈카 오사무(手冢治虫)의 <우주소년 아톰>(1952년)과 완라이밍(万籁鸣)의 <대료천궁(大闹天宫)>(1964년)은 유명세를 탔지만 확실히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1924년 월트 디즈니)이나 <톰과 제리>(1961년 진 디치Gene Deitch / 1965년 조셉 바버라)와는 행동 논리가 다르다. 앞의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 작품이지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행동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내러티브 사건의 인과나 캐릭터 행동 모두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며, 그것이 담는 주제의 내용도 현실 사회 정치에 대한 표현이나 비유에 가깝다. 반면 뒤의 두 작품의 캐릭터인 도널드 덕이나 고양이 톰은 절벽에서 탈출하고나서 공중 위에 떠 계쏙 달려가다가 자신이 하늘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에야 바닥으로 추락한다. 거실에 사는 고양이(인간의 현실 논리 세계)는 구석에 사는 쥐(애니메이션적 현실 세계)에 이리저리 쫓기고, 짓밟히거나 망치질 당하면 ‘죽음’ 이후에도 갑자기 살아나 재빨리 움직여 복수한다. 


여기서 에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애니메이션 작품 속의 리얼리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형식 이념을 지칭하는데, 인류의 생활 양식은 더 이상 이러한 작품의 직접적인 기의가 아닌 숨겨져 있는 그 ‘궁극의 기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캐릭터에 대한 생동감 있는 행동, 재미나 창의성이 있는 제작은 이러한 작품들의 심미적 소비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또,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점차 상상계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고, 작품이 창조하는 세계를 초현실(하이퍼리얼hyper-real), 충동, 욕망의 진실 속에 고정시킬 수 있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상징계 현실을 형상화함으로써 심도 깊은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게 된다.


“가장 맛있는 햄버거는 포스터 속에 있다”는 말처럼, 포스터 속 햄버거는 색깔과 광택도 충만하고 모양도 완벽한,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햄버거이다. 그것은 일종의 ‘햄버거의 초현실’을 가리킨다. ‘햄버거’라는 음식의 개념에 따라, 포스터 속 햄버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음식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상징계의 법칙에 따라 기호가 설정되는 게 아니라 기호 그 자체로 자유롭게 표현될 때,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충동과 욕망이 다양한 캐릭터들이 행동하는 장면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2016년 신카이 마코토)에서 ‘혜성이 지구로 충돌한다’는 공포는 재난 정치의 상징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공간·신분과 신체를 넘나드는 소년소녀의 사랑이 충동과 욕망의 방면에서 ‘사랑 본연의 진실’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작품에서의 사랑만큼 사랑 같은 것이 또 있을까? 삶의 현실에서 ‘사랑’은 호명의 매력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며, 언제나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사랑의 신화를 깨뜨리는 무기가 되며,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 이런 현실 논리는 모두 그대로 방치되고 사랑의 ‘초현실’ 표정, 소위 ‘순수한 사랑’이 생생하고도 눈부시게 빛난다. <너의 이름은>에서 영혼의 부르짖음은 간명하다. ‘삶의 논리’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심플하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신비로운 연관이 있어보이는 여자를 위해 운석이 떨어지기 전 시공간을 바꾸며 미친듯 움직인다. 이와 같은 격정적 사랑은 상상계로부터의 환상이 오히려 세계의 순수한 진리일 수도 있다는 이치를 적절하게 해설한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환상을 품은 여자들이 남자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남자친구가 어찌 이런 ‘진정한 사랑’에 어울리겠는가?


분명히도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무의식적으로 이념적 진실을 폭로한다(어쩌면 그 진실엔, 찢김과 패러독스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진실성은 어디에 있는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사건적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게임 안의 리얼리즘이나 게임이 어떻게 현실에 도달하는가라는 명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캐묻고 싶었던 것은 비교적 간결한 문제였는데, 소설은 게임처럼 설정됨으로써 새로운 리얼리즘 특색을 띠게 되는가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뜻하고자 했던 ‘게임 경험의 소설화’는 비디오 게임을 주체로 삼아 게임 서사를 하나의 새로운 형식이자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으로 간주하고, 이 새로운 형식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문학예술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에 있었다.”7) 따라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개념은 게임 서사 역시 현실에 대한 서사라는 명제를 낳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형태의 게임 서사를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게임’을 일종의 서사 논리로 소설을 구성하는 것이다. 몹을 때려 업그레이드하는 것과 수련에서 환생을 통한 역습과 판타지 횡단까지, 인터넷 문학의 서사 메커니즘은 비디오 게임의 모듈식 조합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인터넷 문학의 뿌리로 자주 거론되는 <바람직한 이야기>(뤄션罗森, 1997년), 원작이 일본의 비디오게임인 <귀축왕 란스>(1996년) 등 동호인소설들이 있다. 인터넷 소설 초기 유행했던 서양 판타지 설정은 데스크톱 롤플레잉 게임 <던전 앤 드래곤 Dungeons & Dragons>(1974년)의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2004년경 큰 인기를 얻은 ‘온라인게임 소설’은 실존 혹은 허구적인 온라인게임 세계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공간으로, 이후 게임 시스템을 해체한 판타지나 수선문(修仙文)이 탄생케 하는 길을 닦았다. 인터넷 문학에서 각양각색의 판타지세계의 등장은 디지털 게임으로 인한 ‘평행 시공간’의 느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인터넷 문학에서 ‘모에포인트(萌点)’가 두드러진 ‘캐릭터 설정된’ 역할도 직간접적으로 일본계 롤플레잉 게임과 문자 어드벤처 게임의 영향을 받았다….”8)


이와 같은 서사 속에서 삶의 논리에 의해 창조된 스토리텔링은 게임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스토리텔링 설정으로 대체되고, 플롯의 흐름은 모듈화된 조합에 위치지어지게 된다. 이른바 ‘의견이 맞지 않으면 온 가족을 죽인다(一言不合、杀你全家)’는 인터넷소설의 관습은 단지 비교적 실용적인 모듈조합 방식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게임적인 조합 방식 배후에 숨겨진 것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조우이다. 이러한 조우는 현실 맥락에서, 즉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조우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태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 게임적 서사 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 없는 사건으로 만들고,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던 현실을 고통스러운 조우에 놓인 사건적 우화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게임 내러티브가 만들어내는 ‘통쾌함(爽)’은 결국 현실 생활의 ‘불편함(不爽)’으로 귀결된다. 다만 현실 생활에서는 이런 불편함이 인과관계까지 부착되어 존재 이휴가 있는 무언가처럼 변화한다.


게임적 내러티브는 고통스러운 조우의 사건적 특성을 회복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현실 질서의 의도치 않은 단절이며, 기존의 현실 이성이 내러티브를 합리화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데릴사위물(赘婿文)이나 환생물(重生文), 역습물(逆袭文)에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온 가족을 죽인다’는 갈등요소는 자신을 괴롭히거나 모욕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통쾌한’ 형식을 보여주며, 실생활에서 괴롭힘이나 모욕의 내재적 논리도 ‘노출’한다. 즉, 어느 순간이든 보통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남을 괴롭히는 힘이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타인을 모욕하는 행위에 대한 어떠한 합법적 변호도 의의를 상실한다. ‘괴롭힘 당하는 것의 고통’은 환원 혹은 해석이 불가능한 사건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9)


게임 내러티브의 두번째 형식은 바로 가상현실 자체의 서사, 즉 게임 자체가 서사인 것에 있다. 이는 가상현실 시대에 비디오 게임 서사 행위에 집중된다. 디지털 게임은 특정한 서사의 틀을 빌려 전개되는데, 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서사와 유사하며, 이따금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서사를 채택하기도 함으로써 디지털 게임 서사의 내용 차원을 구성한다.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에는 게임 내 자신의 행동을 통해 스토리를 생성한다는 또 다른 서사적 측면이 있다. 이것은 비디오 게임 서사의 행동 측면이다. 한편으로 비디오 게임은 스토리를 채용해 게임성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 플레이어는 이러한 게임성을 빌려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사용해 자기만의 내러티브 흐름을 생성한다. 즉, 각양각색의 논리적 스토리들을 스스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불가지성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완전히 사건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게임적 리얼리즘은 플레이어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고, 플레이어의 성격과 감정, 능력까지 끄집어내 전혀 다른 인생 경험을 구축케 한다.


여기서 비디오 게임은 ‘조우’를 진실로 만들지, 조우한 이야기 자체를 진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조우’는 플레이어가 비디오 게임에서 조우하는 임무나 이야기가 아니라, 플레이어와 비디오 게임 자체의 ‘조우’이다. 즉 플레이는 곧 사건적인 조우다. 비디오 게임, 특히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며, 마치 캐릭터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자아(주체)를 플레이어로 정립시킬 때이며, 플레이어가 자아를 주체의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더는 동일성 캐릭터인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 순간이 되면 플레이어들은 모순투성이인 자아 캐릭터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 Disco Elysium>(2019, ZA/UM)에서 플레이어가 콘트롤하는 게임 속 주인공은 게임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사상과 정치적 주장을 접하는데, 이러한 관념들은 게임의 ‘사유’시스템을 구성한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에게 ‘아이템’을 장착해 다른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면 새로운 능력이나 수치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주인공의 장비창에 “해석하기 어려운 페미니즘 아젠다”라는 사유를 추가하면 주인공이 남성 캐릭터들에 대항할 때 ‘강한 승부욕’ 스킬값이 2포인트 상승해 수치적 측면에서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로 묘사된다. 하지만 게임의 목표는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장비’를 갖춰야 한다는 ‘사유’ 역시 그에 따라 변화할 필요가 있다. 가령 덩치 큰 남자를 쓰러뜨리려면 ‘건장한 체격’ 스킬을 보강해야 하고, 영리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을 설득하려면 ‘권모술수’를 터득해야 한다.10) 


간단히 말해 사유의 ‘장비화’는 주인공을 어떤 관념을 가진 특정한 ○○주의자가 아니라, 여러가지 생각들 사이를 오고가는 ‘산보자’로 만든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주의’도 이 이야기 속 문제를 해결하는 약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주의’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게임 시스템은 주인공을 불안정한 ‘사상 도둑’으로 만들고, 지속적으로 다른 사유 관념을 수용케 하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앙으로 삼지는 않는다. 게임의 스토리는 플레이어를 아무 해결책도 없는 실제 세계의 심연으로 내던지고, 플레이어가 본래 갖고 있던 완전하고 통일된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산산조각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도우반(豆瓣) 페이지를 보면 아래 세 종류의 리뷰를 볼 수 있다.


“(이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군중심리>(1895년)나 <죽도록 즐기기>(1985년), <1984>, <백년 동안의 고독>, <황금시대(黄金时代)>를 읽는줄 알았음. 30분 동안 플레이하다보니, 내가 플레이한 게 <공산당선언>, <순수이성비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도우요우63235291, 2000년 3월 20일)”

“단순한 게임이 아님. 나는 자유주의의 번화와 억압, 코뮤니즘의 격앙과 광기, 민족주의의 단결과 차별, 모더니즘의 광기와 미망, 이상주의의 위대함과 허망함, 휴머니즘의 인자함과 실패를 승인하게 됨. 도덕주의자가 되거나,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중도파가 되기도 하며, 마조프주의 사회경제학에 정통한 고뮤니즘의 별, 천리안을 가진 세계의 거성, 법률의 화신, 신자유주의 구역의 나그네,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제8봉인자, 전통주의자 미친개, 논박할 수 없는 페미니스트, 초췌한 꼬라지의 민족주의자가 되기도 함…. 킴 키츠라기 경위는 만나본 형사들 중 최고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무식하고 비참하며, 정말 충격받았다. 나는 선을 분명히 긋지도 못하고,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운 망령이었다….” (Paze, 2022년 9월 22일)

“내 머리와 의식, 거울, 내가 만진 모든 것이 시인이나 철학자같다. 말하는 것은 모두 문체가 가지런하고, 밤에 잠을 자면 머리 속에서 글쓰기 세미나를 여는 것만 같다. 나는 입만 열면 온통 헛소리뿐인데, 게임 내내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하지?’, ‘뭘 믿어야 하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지?’ 등을 고뇌한다.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제작자들의 정치적 입장, 내게 어떤 정치적 입장을 원하는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측했고, 거의 모든 관점을 내가 가진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밟았다. 한데 빌딩이 기울어갈 때 어떤 이론도 고집하지 않자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당신은 인간의 편만 들 수 있다. 게임 엔딩 후 돌이켜보면 나를 감동시킨 거의 모든 사람과 사건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있는 사람과 생명, 바닷바람, 형편이 어려워지는 기계 속에서 따스함을 가져다주고 서로 돕는 선량함이었다. 나는 술과 담배를 피우는 걸 좋아한 탐정이었다. ‘당신은 내가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생물입니다.’” (덜익은 서핑보드, 2020년 3월 19일)11)

분명 완벽하게 통일된 자아는 자아에 대한 하나의 설정(주체화)에 불과하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자아 캐릭터’의 완벽히 통일된 판타지적 속성을 드러내는데, 이때 자아 캐릭터의 통일은 삶의 과정을 덮는 무질서한 사건의 진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디오 게임이 뭘 했는지(전형적 리얼리즘과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논리)가 아니라, 이 행동을 ‘플레이’하는 비논리성에 있다. 즉 플레이는 플레이 그 자체이며, 확실성을 추구하지 않은 채로 그것의 의미 규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진정으로 서사 텍스트의 수용자인 전통적 내러티브에서 추상화된 캐릭터의 사건적인 실제 면모를 회복한다. 게임적 리얼리즘 바깥에서도 ‘나’는 ‘사람’에 대한 서사의 다양한 이야기들에 속해 있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플레이어’는 다양한 사건들에 의해 흩어지는 ‘나’의 증상으로 돌아간다. 즉 ‘나’란 ‘나의 동일성이라는 가상’을 증명하기 위한 용어에 불과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언제나 모든 걸 안다는 방식으로 통제력 있는 ‘주체적 자신감’을 창출한다.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이러한 자신감이 증폭된 후의 ‘순수한 자아’를 부각시킨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람과 사람의 근본적 함의를 회복케 한다. ‘나’의 조우야말로 개개인의 생존적 진실이며, 그 조우에 대한 과잉적 해석(상징계의 진실)이나 순수한 이념화(상상계의 진실)가 아니다. 

 


리얼리즘적 ‘게임’


상징계의 진실과 상상계의 진실에서 실재계의 진실까지, 우리는 리얼리즘 스타일 이념의 세 가지 요소를 얻을 수 있다. 첫째, 리얼리즘은 삶에 대한 반영이며, 현실 생활의 내적 논리와 역사적 진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둘째,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며,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의 환각으로 세계의 본질을 표현한다. 셋째, 리얼리즘은 진실의 게임에 통달했고, 게임적 리얼리즘은 인간 삶의 원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세계의 다이성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다의성의 다의성(multitudes of multitudes)’을 보여준다.12)


리얼리즘은 ‘반영’으로서 과학주의의 인문정신을 확립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묘사는 인류세계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효과적 수단이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생활존중의 태도를 채택해야만 진정한 생활 상황이 비로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루쉰(鲁迅)과 마오둔(茅盾)은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실생활의 파괴와 쇠퇴가 반영될 수 있고, 사람들의 구원의식이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응’으로서의 리얼리즘은 현실 사회의 생존 상황에 대한 간여이자 개입이며, 그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정신을 서사의 의미 프레임으로 삼아 현실 상황을 재구성하거나 각색한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저명한 유화 작품 <건초 마차>(1820-21년작)는 농촌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 관점을 제공한다…. 농촌은 조화, 아름다움, 안정, 전통, 평화, 순결, 미덕의 관점에서 특징지어진다. 왜 이런 의미들이 이 그림이나 다른 유사한 유화 작품들 속의 시골에 붙게 됐을까? 1980년 존 배럴(Jon Barrel)이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업은 18~19세기 영국의 풍경화(부유층을 위해 생산되는 저작들)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도래하는 자본주의 농업과 그것이 내포하는 계급투쟁의 배경에서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고자 했다….” 13)자본주의의 잔혹한 약탈과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화 사이에서 <건초 마차>는 리얼리즘적인 ‘반응성’ 관계를 구축한다.


‘게임’으로서 리얼리즘은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결국 리얼리즘은 인류의 생존에 관한 진실한 상황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들을 ‘실재계의 위치’에 놓으며, ‘플레이어’는 ‘인생을 희롱함’을 통해 오히려 인생의 실재계적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한 번의 ‘게임’을 통해 세상의 변동을 쫓고 우연히 모여 특정한 질서를 끊고 한 번의 ‘플레이’를 완성하게 된다. ‘플레이’는 바로 인류 생존의 실재계적 진실’ 이며, 인류의 사회생활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해부해 다양한 ‘문화 해결’행동을 일종의 ‘게임 행위’로 바뀔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게임 방식을 구현한다. 이때 리얼리즘의 스타일 이념에는 폭로와 비판의 구원적 정치뿐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가 향락에 젖는 쾌감 정치도 있다.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세 가지 면모, ‘진실’을 이해하는 세 가지 재밌는 방식을 구현하는데, 과학주의가 주도하는 리얼리즘은 상상력이 대폭발하는 스타일 기호학 방식을 추구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게임을 통해 현실을 관촬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이러한 설정은 가상현실 세계가 사람들의 현실 세계의 현실 세계의 법칙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2016년 슬라보예 지젝은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를 언급한 바 있다. (任天堂、宝可梦公司、Niantic Labs)


“플레이어는 핸드폰에 있는 전세계 위성위치확인장치 및 카메라로 포착, 전투 및 가상 포켓몬(Pokemon)을 훈련합니다. 이러한 요정은 화면에 나타나는 방식은 마치 플레이어와 실제 세계의 같은 장소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 내에서 이동할 때, 그들의 게임 캐릭터를 대표하여 동시에 게임 맵에서 이동……우리는 전광판이라는 환상적인 틀을 통해 현실을 보고 현실과 현실의 교감,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 중개 틀은 가상 요소를 이용하여 현실을 증강시킵니다.이러한 가상 요소는 게임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를 지탱하고 현실에서 그들을 찾도록 촉진하며, 이러한 환상적 틀이 없으면 우리는 현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14)

지젝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게임 방식과 현대 이데올로기 구축 방식의 일치에 있다. 지젝의 서술에서 사람들은 <포켓몬 고>라는 게임을 사용하는데, 이는 허구적 틀에 따라 자신의 현실을 지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포켓몬 고>는 “비록 자신을 새롭고 최신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어떤 것으로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낡은 이데올로기 메커니즘에 의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환상을 증폭시키는 실천이다.” 15)


여기서 지젝은 가상현실과 이데올로기가 공유하는 허구성을 보면서도 가상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정치적 기능의 차이를 간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방식이지만 가상현실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확대'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리셋'이다. 현실에서 의미가 없는 곳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포켓몬을 찾는 논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이 옳은데, 우리에게 “포켓몬은 판타지의 기본 구조에 직면케 하고, 현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세계로 바꾸는 환상적인 기능을 요구한다.” 16)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17)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통해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났을 때 이데올로기적 역설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리얼리즘은 정신분석가와 같은 ‘사설(辞说)’을 갖고 있으며, 자신만만하게 현실의 증상을 건전한 이성으로 전환한다. 또 다른 한편 게임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들뢰즈식 역설을 드러낸다. 이때 정신분석가는 건전한 이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광적으로 믿기 때문에, 증상은 정신분석가 자신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1)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21&ZD327)이다. 이 기사는 <탐구와 논쟁(探索与争鸣)> 2023년 11호에 게재되었다. 

2) 실재계는 질서의 법칙에서 벗어나 기호화되지 않는 사건을 뜻하며, 본문에서도 '사건적 진실'이라는 표현을 쓴다.

3)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ゲー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2>, 황진롱(黄锦荣) 번역, 홍콩 당산출판사(唐山出版社), 2015년 9월, 제43~57호, 135페이지

4) 버트런드 러셀은 현실 세계가 17세기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마지막으로 뉴턴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가설은 전통적인 '유기적 세계의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에서 만유인력의 가설은 '신이 없는 세상은 저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을 확립한다. 뉴턴은 신의 존재를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현실 세계'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적 세계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가장하는 방식인 '리얼리즘'의 문체적 이념을 이해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신세계 그림과 논리적으로 통일된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敢于面对自己不懂的“生活”——现实主义的文体哲学与典型论的哲学基础>, 《중국 문예평론》, 2021년 제8호 참고.

5) 장셴량, <장셴량 소설 자선집>, 션린, 리장출판사(漓江出版社), 1995년 8월, 185페이지

6) 장셴량, <장셴량 소설 자선집>, 션린, 리장출판사(漓江出版社), 1995년 8월, 185페이지

7) 콩더강, <대다수(大多数)와 ‘게임적 리얼리즘’ : 비디오 게임의 계층간 서사적 시도와 초월향상>, <중국도서평론> 2023년 11호

8) 왕위수(王玉玊), <온라인 문학의 ‘게임화’ 방향과 그 ‘네트워크적’ 성격 : (디지털) 인공 환경과 온라인 문학의 자아실현>, 문학(文学), 2023년 제1기

9) '중생일대효룡'이라는 '무뇌상쾌문'을 예로 들어보자: 강지호라는 사람이 갑자기 2000년으로 환생했다. 이 '환생'의 스토리 역시 장르소설의 줄거리처럼 실생활에서 능욕의 경지에 빠진 약자들이 합리적인 조건에서 능욕자들을 능욕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기괴한 쾌감에 의해 움직인다. 이 인물의 형성은 도덕적인 이상적 인격에 대한 추구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부'와 인연이 없는 대다수의 소인물들의 내면의 '무능하고 분노'에서 비롯된다. 수없이 많은 혐오를 겪으면서 형성된 '사회적 열등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0) 승부욕', ''권모술수', '현혹'등은 모두 ''디스코 엘리시움'안에서 활용되는 스탯 명이다.

11) https://www.douban.com/game/26935092/comments 

12) 슬라보예 지젝 저, 주우(朱羽) 옮김, <뇌 속에 헤겔을 연결하라>, 시베이대학출판부, 2023년 10월, 17페이지

13) Elaine Baldwin 저, 타오둥펑 옮김, <文化研究导论 Introducing Cultural Studies>, 고등교육출판사, 1991년작/1994년 번역, 153-154페이지.

14)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제IV-V페이지.

15)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 VI 페이지.

16)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 VI 페이지.

17) 미국, 일본, 독일 등에서는 비교적 엄격한 게임 검열을 하고 있는데, 유명한 검열 기관으로는 ESRB, CERO, USK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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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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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 작가)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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