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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 Back 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16 GG Vol. 24. 2. 10. 游戏现实主义与现实主义的“游戏”——象征界真实、想象界真实与实在界真实 1) 2)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시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명제 3) 는 리얼리즘이 역사 단계별로 변모해온 각기 다른 ‘이념’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가상현실 시대의 리얼리즘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경로를 제시한다. 사실 리얼리즘은 단순히 글쓰기 방법만이 아니라, 지식 시스템과 인지 패러다임의 ‘문체/형식’(스타일)이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뉴리얼’ 4) 을 탄생시켰고, 사람들은 과학적 이해를 통해 인간과 세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됐으며, 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갖게 됐다. 영화, 텔레비전 등 전자매체의 부상은 예술이미지의 생산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현실의 사물이나 캐릭터의 '반영'이 아닌, 현실 이미지를 접목·변형하거나, 아예 현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이미지 체계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오스카 히데시(大塚英志)에 논하며 제시했던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의 상상력 환경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캐릭터 생산을 중심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이뤄지면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생활 논리'를 넘어 애니메이션적인 행동 논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전파'라는 명제의 핵심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것은 가상현실 속에서 정보가 발신되는 시각, 즉 신체가 정보를 감지하는 시각이며, ‘전파'와 ‘매체'는 모두 사라진 것만 같다. 가상현실은 전통적 문예의 존재 형태를 깨부수고 ‘독자와 관객' 등 개념이 해소됐으며, ‘플레이어'라는 개념은 새로운 예술학 및 미학적 소비의 범주가 됐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인식론에 호소해 진실을 드러내고,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은 상상계에 호소해 진실을 드러낸다. 가상현실은 ‘신체의 직접적 현실'이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문예작품 바깥에 머물게 하며, ‘마음의 눈'을 통해 심미적 활동을 완성케 한다. 가상현실은 오히려 사람들의 신체를 작품 속의 캐릭터와 함께 위치짓게 하며,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 내고 느낀다. 사람들이 가상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게임 인생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게임의 경험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만드는 것을 ‘게임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게임 리얼리즘도 존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태도(游戏态)’의 삶은 실제 삶의 경험을 제공하며, 게임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게임 규칙을 뒤집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분석가적 해설’을 소멸시켜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는데, 그 길에서 게임 리얼리즘은 가상시대의 새로운 주체인 플레이어를 실재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상징계/역사적 진실'과 ‘상상계/이데올로기적 진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곧 일종의 상징계의 진실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생활 경험을 그것에 내포된 역사적인 언설의 서열에 포함시킨다. 장셴량(张贤亮)의 1984년작 소설 <가로수(绿化树)>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장용린(章永璘)은 문득 마잉화(马缨花)에게서 받은 찐빵을 발견한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그래봐야 통틀어 25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찐빵은 마치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아서 입 속에 넣자마자 녹아버렸다. 발효되지 않은 밀꽃 향기가 났고, 여름날의 햇살, 고원의 황홀한 흙냄새, 수확기의 땀, 모든 음식 본연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위쪽에서 아주 선명한 지문 자묵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겉이 하얀 찐빵의 껍질에 찍혀 있어 매우 선명했고, 크기를 보니 가운데손가락 지문이란 점을 알 수 있었다. 지문의 무늬를 보면 그것은 ‘키’가 아닌 ‘그물’처럼 빙글빙글 돌아있었고, 안쪽은 작고 바깥쪽을 향해 점차 커졌다. 마치 봄날의 호수에서 작은 물고기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물결은 점점 출렁거리고, 또 출렁거렸다…… 뚝, 나의 맑은 눈물 한방울이 손에 든 찐빵 위로 떨어졌다. 5)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지 어느덧 4년이 지난” 사람이 찐빵을 본 한 장면에서 저자의 펜은 먹을것에 대한 동물의 생리적 반응은 보이지 않고, 시적인 감정을 폭발시킨다. “마치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아서”, “발효되지 않은 밀꽃 향기”, “여름날의 햇살”; 그리고 지문 모양이 마치 “봄날의 호수에서 작은 물고기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물결은 점점 출렁거리고, 또 출렁거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대목을 프로이트식으로 분석한다면, ‘굶주림’이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화자의 집착과 ‘굶주림’이라는 고통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셴량은 ‘고난’의 경험을 ‘고난의 여정’으로 보고자 하며, 인생의 또 다른 고도의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는 시련으로 인식한다. 그 때문에 소설 속 “장용린의 굶주림”은 보통 사람의 배고픔이 아니라, 역사적인 운명인식이 넘치는 ‘배고픔’이 된다. 이 지식인의 운명에 대해 마잉화는 이렇게 비탄한다. “그녀(마잉화)는 아마 그 눈물을 봤을 것이다. 그녀는 웃지도 않았고, 나를 보지도 않았다. 바위 위에 돌아누워선 아이를 껴안고 길게 탄식했다. ‘하… 이런 벌이라니…’” 6) 주인공에 닥친 이 굶주림은 실제 생활에서 많은 이들이 겪는 ‘굶주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한 지식인이 ‘문화혁명’ 과정에서 맞닥뜨린 부당 대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동정하고, 다같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굶주림=고통’이라는 등식은 굶주림이라는 생활 경험에 대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의미를 ‘굶주림의 역사 진실은 곧 고통받는 것’이라는 의미로 완성한다. 바꿔 말하면‘고통받는’ 굶주림만이 진정한 굶주림,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반성하고 기억할 만한 굶주림이야말로 진정한 굶주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시는 중편소설 <투즈챵의 개인적 슬픔>(2013)이다. 시골에서 온 주인공은 근면성실하게 고생길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부딪히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위해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자살하게 되고, 높은 곳으로 나아가던 운명과 단절하게 된다. 일을 해도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은 그의 생계를 곤두박질치게 했다. 사장은 도주하고, 어머니는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설은 이 실패한 청년의 일생을 그리며 한 사람이 마주칠 수 있는 고난을 하나의 몸에 집중시킨다. ‘개인’에게 씌인 이 우연적인 슬픔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소설은 리얼리즘적이지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상징계 질서에 부합하는 현실이며, 특정한 서사 규범과 가치의 소구를 드러내는 역사적 진실이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게 관건은 ‘삶에 부합하는 논리인가’가 아니라, 역사적 시각을 통해 서술하는 ‘현실적 진실’이다.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새로운 현실 구축의 방식과 캐릭터 행동 논리를 구현한다. 데즈카 오사무(手冢治虫)의 <우주소년 아톰>(1952년)과 완라이밍(万籁鸣)의 <대료천궁(大闹天宫)>(1964년)은 유명세를 탔지만 확실히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1924년 월트 디즈니)이나 <톰과 제리>(1961년 진 디치Gene Deitch / 1965년 조셉 바버라)와는 행동 논리가 다르다. 앞의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 작품이지만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행동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내러티브 사건의 인과나 캐릭터 행동 모두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며, 그것이 담는 주제의 내용도 현실 사회 정치에 대한 표현이나 비유에 가깝다. 반면 뒤의 두 작품의 캐릭터인 도널드 덕이나 고양이 톰은 절벽에서 탈출하고나서 공중 위에 떠 계쏙 달려가다가 자신이 하늘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에야 바닥으로 추락한다. 거실에 사는 고양이(인간의 현실 논리 세계)는 구석에 사는 쥐(애니메이션적 현실 세계)에 이리저리 쫓기고, 짓밟히거나 망치질 당하면 ‘죽음’ 이후에도 갑자기 살아나 재빨리 움직여 복수한다. 여기서 에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애니메이션 작품 속의 리얼리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형식 이념을 지칭하는데, 인류의 생활 양식은 더 이상 이러한 작품의 직접적인 기의가 아닌 숨겨져 있는 그 ‘궁극의 기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캐릭터에 대한 생동감 있는 행동, 재미나 창의성이 있는 제작은 이러한 작품들의 심미적 소비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또,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점차 상상계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고, 작품이 창조하는 세계를 초현실(하이퍼리얼hyper-real), 충동, 욕망의 진실 속에 고정시킬 수 있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상징계 현실을 형상화함으로써 심도 깊은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게 된다. “가장 맛있는 햄버거는 포스터 속에 있다”는 말처럼, 포스터 속 햄버거는 색깔과 광택도 충만하고 모양도 완벽한,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햄버거이다. 그것은 일종의 ‘햄버거의 초현실’을 가리킨다. ‘햄버거’라는 음식의 개념에 따라, 포스터 속 햄버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음식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상징계의 법칙에 따라 기호가 설정되는 게 아니라 기호 그 자체로 자유롭게 표현될 때,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충동과 욕망이 다양한 캐릭터들이 행동하는 장면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2016년 신카이 마코토)에서 ‘혜성이 지구로 충돌한다’는 공포는 재난 정치의 상징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공간·신분과 신체를 넘나드는 소년소녀의 사랑이 충동과 욕망의 방면에서 ‘사랑 본연의 진실’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작품에서의 사랑만큼 사랑 같은 것이 또 있을까? 삶의 현실에서 ‘사랑’은 호명의 매력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며, 언제나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사랑의 신화를 깨뜨리는 무기가 되며,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 이런 현실 논리는 모두 그대로 방치되고 사랑의 ‘초현실’ 표정, 소위 ‘순수한 사랑’이 생생하고도 눈부시게 빛난다. <너의 이름은>에서 영혼의 부르짖음은 간명하다. ‘삶의 논리’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심플하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신비로운 연관이 있어보이는 여자를 위해 운석이 떨어지기 전 시공간을 바꾸며 미친듯 움직인다. 이와 같은 격정적 사랑은 상상계로부터의 환상이 오히려 세계의 순수한 진리일 수도 있다는 이치를 적절하게 해설한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환상을 품은 여자들이 남자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남자친구가 어찌 이런 ‘진정한 사랑’에 어울리겠는가? 분명히도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무의식적으로 이념적 진실을 폭로한다(어쩌면 그 진실엔, 찢김과 패러독스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진실성은 어디에 있는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사건적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게임 안의 리얼리즘이나 게임이 어떻게 현실에 도달하는가라는 명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캐묻고 싶었던 것은 비교적 간결한 문제였는데, 소설은 게임처럼 설정됨으로써 새로운 리얼리즘 특색을 띠게 되는가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뜻하고자 했던 ‘게임 경험의 소설화’는 비디오 게임을 주체로 삼아 게임 서사를 하나의 새로운 형식이자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으로 간주하고, 이 새로운 형식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문학예술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에 있었다.” 7) 따라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개념은 게임 서사 역시 현실에 대한 서사라는 명제를 낳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형태의 게임 서사를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게임’을 일종의 서사 논리로 소설을 구성하는 것이다. 몹을 때려 업그레이드하는 것과 수련에서 환생을 통한 역습과 판타지 횡단까지, 인터넷 문학의 서사 메커니즘은 비디오 게임의 모듈식 조합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인터넷 문학의 뿌리로 자주 거론되는 <바람직한 이야기>(뤄션罗森, 1997년), 원작이 일본의 비디오게임인 <귀축왕 란스>(1996년) 등 동호인소설들이 있다. 인터넷 소설 초기 유행했던 서양 판타지 설정은 데스크톱 롤플레잉 게임 <던전 앤 드래곤 Dungeons & Dragons>(1974년)의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2004년경 큰 인기를 얻은 ‘온라인게임 소설’은 실존 혹은 허구적인 온라인게임 세계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공간으로, 이후 게임 시스템을 해체한 판타지나 수선문(修仙文)이 탄생케 하는 길을 닦았다. 인터넷 문학에서 각양각색의 판타지세계의 등장은 디지털 게임으로 인한 ‘평행 시공간’의 느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인터넷 문학에서 ‘모에포인트(萌点)’가 두드러진 ‘캐릭터 설정된’ 역할도 직간접적으로 일본계 롤플레잉 게임과 문자 어드벤처 게임의 영향을 받았다….” 8) 이와 같은 서사 속에서 삶의 논리에 의해 창조된 스토리텔링은 게임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스토리텔링 설정으로 대체되고, 플롯의 흐름은 모듈화된 조합에 위치지어지게 된다. 이른바 ‘의견이 맞지 않으면 온 가족을 죽인다(一言不合、杀你全家)’는 인터넷소설의 관습은 단지 비교적 실용적인 모듈조합 방식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게임적인 조합 방식 배후에 숨겨진 것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조우이다. 이러한 조우는 현실 맥락에서, 즉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조우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태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 게임적 서사 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 없는 사건으로 만들고,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던 현실을 고통스러운 조우에 놓인 사건적 우화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게임 내러티브가 만들어내는 ‘통쾌함(爽)’은 결국 현실 생활의 ‘불편함(不爽)’으로 귀결된다. 다만 현실 생활에서는 이런 불편함이 인과관계까지 부착되어 존재 이휴가 있는 무언가처럼 변화한다. 게임적 내러티브는 고통스러운 조우의 사건적 특성을 회복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현실 질서의 의도치 않은 단절이며, 기존의 현실 이성이 내러티브를 합리화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데릴사위물(赘婿文)이나 환생물(重生文), 역습물(逆袭文)에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온 가족을 죽인다’는 갈등요소는 자신을 괴롭히거나 모욕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통쾌한’ 형식을 보여주며, 실생활에서 괴롭힘이나 모욕의 내재적 논리도 ‘노출’한다. 즉, 어느 순간이든 보통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남을 괴롭히는 힘이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타인을 모욕하는 행위에 대한 어떠한 합법적 변호도 의의를 상실한다. ‘괴롭힘 당하는 것의 고통’은 환원 혹은 해석이 불가능한 사건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9) 게임 내러티브의 두번째 형식은 바로 가상현실 자체의 서사, 즉 게임 자체가 서사인 것에 있다. 이는 가상현실 시대에 비디오 게임 서사 행위에 집중된다. 디지털 게임은 특정한 서사의 틀을 빌려 전개되는데, 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서사와 유사하며, 이따금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서사를 채택하기도 함으로써 디지털 게임 서사의 내용 차원을 구성한다.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에는 게임 내 자신의 행동을 통해 스토리를 생성한다는 또 다른 서사적 측면이 있다. 이것은 비디오 게임 서사의 행동 측면이다. 한편으로 비디오 게임은 스토리를 채용해 게임성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 플레이어는 이러한 게임성을 빌려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사용해 자기만의 내러티브 흐름을 생성한다. 즉, 각양각색의 논리적 스토리들을 스스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불가지성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완전히 사건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게임적 리얼리즘은 플레이어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고, 플레이어의 성격과 감정, 능력까지 끄집어내 전혀 다른 인생 경험을 구축케 한다. 여기서 비디오 게임은 ‘조우’를 진실로 만들지, 조우한 이야기 자체를 진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조우’는 플레이어가 비디오 게임에서 조우하는 임무나 이야기가 아니라, 플레이어와 비디오 게임 자체의 ‘조우’이다. 즉 플레이는 곧 사건적인 조우다. 비디오 게임, 특히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며, 마치 캐릭터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자아(주체)를 플레이어로 정립시킬 때이며, 플레이어가 자아를 주체의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더는 동일성 캐릭터인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 순간이 되면 플레이어들은 모순투성이인 자아 캐릭터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 Disco Elysium>(2019, ZA/UM)에서 플레이어가 콘트롤하는 게임 속 주인공은 게임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사상과 정치적 주장을 접하는데, 이러한 관념들은 게임의 ‘사유’시스템을 구성한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에게 ‘아이템’을 장착해 다른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면 새로운 능력이나 수치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주인공의 장비창에 “해석하기 어려운 페미니즘 아젠다”라는 사유를 추가하면 주인공이 남성 캐릭터들에 대항할 때 ‘강한 승부욕’ 스킬값이 2포인트 상승해 수치적 측면에서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로 묘사된다. 하지만 게임의 목표는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장비’를 갖춰야 한다는 ‘사유’ 역시 그에 따라 변화할 필요가 있다. 가령 덩치 큰 남자를 쓰러뜨리려면 ‘건장한 체격’ 스킬을 보강해야 하고, 영리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을 설득하려면 ‘권모술수’를 터득해야 한다. 10) 간단히 말해 사유의 ‘장비화’는 주인공을 어떤 관념을 가진 특정한 ○○주의자가 아니라, 여러가지 생각들 사이를 오고가는 ‘산보자’로 만든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주의’도 이 이야기 속 문제를 해결하는 약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주의’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게임 시스템은 주인공을 불안정한 ‘사상 도둑’으로 만들고, 지속적으로 다른 사유 관념을 수용케 하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앙으로 삼지는 않는다. 게임의 스토리는 플레이어를 아무 해결책도 없는 실제 세계의 심연으로 내던지고, 플레이어가 본래 갖고 있던 완전하고 통일된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산산조각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도우반(豆瓣) 페이지를 보면 아래 세 종류의 리뷰를 볼 수 있다. “(이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군중심리>(1895년)나 <죽도록 즐기기>(1985년), <1984>, <백년 동안의 고독>, <황금시대(黄金时代)>를 읽는줄 알았음. 30분 동안 플레이하다보니, 내가 플레이한 게 <공산당선언>, <순수이성비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도우요우63235291, 2000년 3월 20일)” “단순한 게임이 아님. 나는 자유주의의 번화와 억압, 코뮤니즘의 격앙과 광기, 민족주의의 단결과 차별, 모더니즘의 광기와 미망, 이상주의의 위대함과 허망함, 휴머니즘의 인자함과 실패를 승인하게 됨. 도덕주의자가 되거나,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중도파가 되기도 하며, 마조프주의 사회경제학에 정통한 고뮤니즘의 별, 천리안을 가진 세계의 거성, 법률의 화신, 신자유주의 구역의 나그네,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제8봉인자, 전통주의자 미친개, 논박할 수 없는 페미니스트, 초췌한 꼬라지의 민족주의자가 되기도 함…. 킴 키츠라기 경위는 만나본 형사들 중 최고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무식하고 비참하며, 정말 충격받았다. 나는 선을 분명히 긋지도 못하고,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운 망령이었다….” (Paze, 2022년 9월 22일) “내 머리와 의식, 거울, 내가 만진 모든 것이 시인이나 철학자같다. 말하는 것은 모두 문체가 가지런하고, 밤에 잠을 자면 머리 속에서 글쓰기 세미나를 여는 것만 같다. 나는 입만 열면 온통 헛소리뿐인데, 게임 내내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하지?’, ‘뭘 믿어야 하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지?’ 등을 고뇌한다.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제작자들의 정치적 입장, 내게 어떤 정치적 입장을 원하는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측했고, 거의 모든 관점을 내가 가진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밟았다. 한데 빌딩이 기울어갈 때 어떤 이론도 고집하지 않자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당신은 인간의 편만 들 수 있다. 게임 엔딩 후 돌이켜보면 나를 감동시킨 거의 모든 사람과 사건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있는 사람과 생명, 바닷바람, 형편이 어려워지는 기계 속에서 따스함을 가져다주고 서로 돕는 선량함이었다. 나는 술과 담배를 피우는 걸 좋아한 탐정이었다. ‘당신은 내가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생물입니다.’” (덜익은 서핑보드, 2020년 3월 19일) 11) 분명 완벽하게 통일된 자아는 자아에 대한 하나의 설정(주체화)에 불과하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자아 캐릭터’의 완벽히 통일된 판타지적 속성을 드러내는데, 이때 자아 캐릭터의 통일은 삶의 과정을 덮는 무질서한 사건의 진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디오 게임이 뭘 했는지(전형적 리얼리즘과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논리)가 아니라, 이 행동을 ‘플레이’하는 비논리성에 있다. 즉 플레이는 플레이 그 자체이며, 확실성을 추구하지 않은 채로 그것의 의미 규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진정으로 서사 텍스트의 수용자인 전통적 내러티브에서 추상화된 캐릭터의 사건적인 실제 면모를 회복한다. 게임적 리얼리즘 바깥에서도 ‘나’는 ‘사람’에 대한 서사의 다양한 이야기들에 속해 있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플레이어’는 다양한 사건들에 의해 흩어지는 ‘나’의 증상으로 돌아간다. 즉 ‘나’란 ‘나의 동일성이라는 가상’을 증명하기 위한 용어에 불과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언제나 모든 걸 안다는 방식으로 통제력 있는 ‘주체적 자신감’을 창출한다.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이러한 자신감이 증폭된 후의 ‘순수한 자아’를 부각시킨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람과 사람의 근본적 함의를 회복케 한다. ‘나’의 조우야말로 개개인의 생존적 진실이며, 그 조우에 대한 과잉적 해석(상징계의 진실)이나 순수한 이념화(상상계의 진실)가 아니다. 리얼리즘적 ‘게임’ 상징계의 진실과 상상계의 진실에서 실재계의 진실까지, 우리는 리얼리즘 스타일 이념의 세 가지 요소를 얻을 수 있다. 첫째, 리얼리즘은 삶에 대한 반영이며, 현실 생활의 내적 논리와 역사적 진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둘째,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며,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의 환각으로 세계의 본질을 표현한다. 셋째, 리얼리즘은 진실의 게임에 통달했고, 게임적 리얼리즘은 인간 삶의 원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세계의 다이성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다의성의 다의성(multitudes of multitudes)’을 보여준다. 12) 리얼리즘은 ‘반영’으로서 과학주의의 인문정신을 확립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묘사는 인류세계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효과적 수단이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생활존중의 태도를 채택해야만 진정한 생활 상황이 비로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루쉰(鲁迅)과 마오둔(茅盾)은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실생활의 파괴와 쇠퇴가 반영될 수 있고, 사람들의 구원의식이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응’으로서의 리얼리즘은 현실 사회의 생존 상황에 대한 간여이자 개입이며, 그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정신을 서사의 의미 프레임으로 삼아 현실 상황을 재구성하거나 각색한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저명한 유화 작품 <건초 마차>(1820-21년작)는 농촌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 관점을 제공한다…. 농촌은 조화, 아름다움, 안정, 전통, 평화, 순결, 미덕의 관점에서 특징지어진다. 왜 이런 의미들이 이 그림이나 다른 유사한 유화 작품들 속의 시골에 붙게 됐을까? 1980년 존 배럴(Jon Barrel)이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업은 18~19세기 영국의 풍경화(부유층을 위해 생산되는 저작들)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도래하는 자본주의 농업과 그것이 내포하는 계급투쟁의 배경에서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고자 했다….” 13) 자본주의의 잔혹한 약탈과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화 사이에서 <건초 마차>는 리얼리즘적인 ‘반응성’ 관계를 구축한다. ‘게임’으로서 리얼리즘은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결국 리얼리즘은 인류의 생존에 관한 진실한 상황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들을 ‘실재계의 위치’에 놓으며, ‘플레이어’는 ‘인생을 희롱함’을 통해 오히려 인생의 실재계적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한 번의 ‘게임’을 통해 세상의 변동을 쫓고 우연히 모여 특정한 질서를 끊고 한 번의 ‘플레이’를 완성하게 된다. ‘플레이’는 바로 인류 생존의 실재계적 진실’ 이며, 인류의 사회생활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해부해 다양한 ‘문화 해결’행동을 일종의 ‘게임 행위’로 바뀔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게임 방식을 구현한다. 이때 리얼리즘의 스타일 이념에는 폭로와 비판의 구원적 정치뿐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가 향락에 젖는 쾌감 정치도 있다.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세 가지 면모, ‘진실’을 이해하는 세 가지 재밌는 방식을 구현하는데, 과학주의가 주도하는 리얼리즘은 상상력이 대폭발하는 스타일 기호학 방식을 추구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게임을 통해 현실을 관촬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이러한 설정은 가상현실 세계가 사람들의 현실 세계의 현실 세계의 법칙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2016년 슬라보예 지젝은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를 언급한 바 있다. (任天堂、宝可梦公司、Niantic Labs) “플레이어는 핸드폰에 있는 전세계 위성위치확인장치 및 카메라로 포착, 전투 및 가상 포켓몬(Pokemon)을 훈련합니다. 이러한 요정은 화면에 나타나는 방식은 마치 플레이어와 실제 세계의 같은 장소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 내에서 이동할 때, 그들의 게임 캐릭터를 대표하여 동시에 게임 맵에서 이동……우리는 전광판이라는 환상적인 틀을 통해 현실을 보고 현실과 현실의 교감,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 중개 틀은 가상 요소를 이용하여 현실을 증강시킵니다.이러한 가상 요소는 게임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를 지탱하고 현실에서 그들을 찾도록 촉진하며, 이러한 환상적 틀이 없으면 우리는 현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14) 지젝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게임 방식과 현대 이데올로기 구축 방식의 일치에 있다. 지젝의 서술에서 사람들은 <포켓몬 고>라는 게임을 사용하는데, 이는 허구적 틀에 따라 자신의 현실을 지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포켓몬 고>는 “비록 자신을 새롭고 최신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어떤 것으로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낡은 이데올로기 메커니즘에 의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환상을 증폭시키는 실천이다.” 15) 여기서 지젝은 가상현실과 이데올로기가 공유하는 허구성을 보면서도 가상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정치적 기능의 차이를 간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방식이지만 가상현실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확대'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리셋'이다. 현실에서 의미가 없는 곳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포켓몬을 찾는 논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이 옳은데, 우리에게 “포켓몬은 판타지의 기본 구조에 직면케 하고, 현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세계로 바꾸는 환상적인 기능을 요구한다.” 16)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17)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통해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났을 때 이데올로기적 역설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리얼리즘은 정신분석가와 같은 ‘사설(辞说)’을 갖고 있으며, 자신만만하게 현실의 증상을 건전한 이성으로 전환한다. 또 다른 한편 게임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들뢰즈식 역설을 드러낸다. 이때 정신분석가는 건전한 이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광적으로 믿기 때문에, 증상은 정신분석가 자신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1)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21&ZD327)이다. 이 기사는 <탐구와 논쟁(探索与争鸣)> 2023년 11호에 게재되었다. 2) 실재계는 질서의 법칙에서 벗어나 기호화되지 않는 사건을 뜻하며, 본문에서도 '사건적 진실'이라는 표현을 쓴다. 3)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ゲー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2>, 황진롱(黄锦荣) 번역, 홍콩 당산출판사(唐山出版社), 2015년 9월, 제43~57호, 135페이지 4) 버트런드 러셀은 현실 세계가 17세기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마지막으로 뉴턴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가설은 전통적인 '유기적 세계의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에서 만유인력의 가설은 '신이 없는 세상은 저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을 확립한다. 뉴턴은 신의 존재를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현실 세계'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적 세계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가장하는 방식인 '리얼리즘'의 문체적 이념을 이해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신세계 그림과 논리적으로 통일된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敢于面对自己不懂的“生活”——现实主义的文体哲学与典型论的哲学基础>, 《중국 문예평론》, 2021년 제8호 참고. 5) 장셴량, <장셴량 소설 자선집>, 션린, 리장출판사(漓江出版社), 1995년 8월, 185페이지 6) 장셴량, <장셴량 소설 자선집>, 션린, 리장출판사(漓江出版社), 1995년 8월, 185페이지 7) 콩더강, <대다수(大多数)와 ‘게임적 리얼리즘’ : 비디오 게임의 계층간 서사적 시도와 초월향상>, <중국도서평론> 2023년 11호 8) 왕위수(王玉玊), <온라인 문학의 ‘게임화’ 방향과 그 ‘네트워크적’ 성격 : (디지털) 인공 환경과 온라인 문학의 자아실현>, 문학(文学), 2023년 제1기 9) '중생일대효룡'이라는 '무뇌상쾌문'을 예로 들어보자: 강지호라는 사람이 갑자기 2000년으로 환생했다. 이 '환생'의 스토리 역시 장르소설의 줄거리처럼 실생활에서 능욕의 경지에 빠진 약자들이 합리적인 조건에서 능욕자들을 능욕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기괴한 쾌감에 의해 움직인다. 이 인물의 형성은 도덕적인 이상적 인격에 대한 추구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부'와 인연이 없는 대다수의 소인물들의 내면의 '무능하고 분노'에서 비롯된다. 수없이 많은 혐오를 겪으면서 형성된 '사회적 열등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0) 승부욕', ''권모술수', '현혹'등은 모두 ''디스코 엘리시움'안에서 활용되는 스탯 명이다. 11) https://www.douban.com/game/26935092/comments 12) 슬라보예 지젝 저, 주우(朱羽) 옮김, <뇌 속에 헤겔을 연결하라>, 시베이대학출판부, 2023년 10월, 17페이지 13) Elaine Baldwin 저, 타오둥펑 옮김, <文化研究导论 Introducing Cultural Studies>, 고등교육출판사, 1991년작/1994년 번역, 153-154페이지. 14)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제IV-V페이지. 15)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 VI 페이지. 16) 슬라보예 지젝: <가면과 진실: 라캉의 7교시>, 탕젠 옮김, 구이린, 광시사범대학 출판부, 2022년, VI 페이지. 17) 미국, 일본, 독일 등에서는 비교적 엄격한 게임 검열을 하고 있는데, 유명한 검열 기관으로는 ESRB, CERO, USK 등이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리그 오브 레전드>가 처음 들어와 국내에서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던, 아직 프로씬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전국구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 중에는 ‘황충아리’라는 게이머가 있었다. 챔피언 ‘아리’ 장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아리장인’ 보다 그는 ‘황충아리’로 더 이름을 떨쳤는데, 이유는 그가 노장 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노장 캐릭터로 유명한 황충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지만, 그의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 Back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02 GG Vol. 21. 8. 10. 나이들면 게임하기 어려운가? <리그 오브 레전드>가 처음 들어와 국내에서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던, 아직 프로씬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전국구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 중에는 ‘황충아리’라는 게이머가 있었다. 챔피언 ‘아리’ 장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아리장인’ 보다 그는 ‘황충아리’로 더 이름을 떨쳤는데, 이유는 그가 노장 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노장 캐릭터로 유명한 황충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지만, 그의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일반적인 사회문화에서라면 창창한 나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시원치 않을 30대 중반이 ‘황충’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게 되는 곳이 게임공간이다. 이는 편견이나 농담이 아니라 일정 부분 사실에 가깝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 선수가 갓 제대했을 즈음 이야기한 목표가 ‘30대에도 프로게이머로 살아남겠다’ 였고,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20대 중반만 지나도 신체적인 한계를 느낀다며 은퇴를 선언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곤 한다. 이렇게 보면 게임이라는 매체는 확실히 젊은이들의 공간인 것 같다. 그러나 또 고개를 돌려 보면 꼭 피지컬만이 게임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심시티>를 하는 데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니 심지어 신체적인 반응능력이 정말 좋아야 하는 <철권> 의 영원한 황제 ‘무릎’ 배재민 선수는 2021년 기준으로 36세고, <스트리트 파이터>로 EVO 2003에서 전설적인 명경기를 만들어냈던 우메하라 다이고는 올해 나이로 마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현역 게이머로 활동중이다. 격투 게임과 RTS 같은 장르 안에서의 피지컬 문제를 일일이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디지털게임이 상당부분 신체적인 능력치를 요구하는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모든 게이머가 나이가 들었다고 게임으로부터 멀어진다고만 보기도 어렵다. 그레이게이머의 두 가지 의미 전자오락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게임 문화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1970년대 말로부터 계산해보면 어느새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80년대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몇 시간을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꼬마 아이들은 이제 중장년의 나이가 되었고, 20대에 담배연기 자욱한 오락실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갤러그>로 시간을 때우던 청년들은 어느새 노년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1980년대 오락실에 앉아있던 20세 청년인 1960년생은 올해부터 60세를 넘기며 인구통계학적으로 노년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반세기라는 시간의 흐름은 한동안 우리에게 일종의 고정관념이었던 어떤 부분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렸다. 노년 세대라면 그저 ‘하여간 요즘 것들은 게임 같은거나 하고’라고만 영원히 말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테트리스>와 <팩맨>, <갤러그>를 즐기던 오락실 세대가 노년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장년을 생각한다면 이 변화는 좀더 성큼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출시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빌드오더를 가르치는 부모와, 과거의 추억으로 <리니지>에서 혈맹 뛰던 이야기를 나누는 4-50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나보는 시대를 맞았다. 그레이게이머greygamer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그렇게 게임과 함께 나이를 먹어 온, 좀더 경의를 붙여 표현하자면 ‘인류 최초의 디지털게임 세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세대를 담는다. 초창기 디지털게임의 역사를 문헌이 아니라 자신의 플레이로 겪은 노년 세대의 등장은 노년층을 이른바 ‘겜알못’으로 부를 수 있는 시기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단서다. 그리고 이는 게이머라는 구분이 더 이상 특정 연령, 특정 세대만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라 전연령대에 걸친 보편적인 경험이면서도 동시에 시대별로 그 양상을 매우 뚜렷한 차이로 갖게 되는 어떤 문화 전반을 통한 구분으로 옮겨가게 만드는 흐름이다. 그레이게이머라는 말이 가진 첫 번째 의미가 이른바 레트로 세대를 가리키는 과거 경험을 향했다면, 두 번째 의미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모바일 시대가 열어낸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보편화를 시작한 게임저변의 확장으로부터 만들어진 또다른 변화를 향한다. 지하철 안을 둘러보면 이제 쉽게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는 노년층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다. 게임하는 노년의 배경은 반드시 유년기의 게임경험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뒤늦게 잡아보게 된, 이제는 시대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으로부터 손쉬운 게임으로의 접근성을 얻게 된 이들 또한 게이머의 이름을 달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두 번째 의미로서의 그레이게이머가 출현한다. 2020년에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게임문화연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직접 심층인터뷰를 통해 만난 노년층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노년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정착하기 시작한 디지털게임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 바 있었다. 은퇴한 노년 여성이 주시청자를 이루는 평일 저녁의 지상파 텔레비전 일일연속극 시청은 이제 게임플레이와 섞이기 시작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TV는 귀로만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간단한 퍼즐 게임을 즐기곤 했다. 어차피 드라마의 진행은 큰 줄기를 벗어나지 않으니 귀로 상황만 들으며 게임에 집중하다가, 드라마에서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대부분의 드라마는 이런 순간에 시청자로 하여금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별도의 음악을 깔거나 배우의 대사톤이 높아지는 등의 포인트를 만들곤 한다) 비로소 눈을 스마트폰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기는 식이었다. 그레이게이머의 존재는 그래서 유년기의 경험을 가진 1세대 게이머로서, 동시대의 게이머로서 나타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유의미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존재는 그러나 현재의 게임담론 하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의 게이머들보다 더 치열하게 게임했을 그 세대는 정말 이제는 게임과 담쌓고 지내는 것일까?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니 당연히 게임을 모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제대로 된 판단인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게이머라는 집단을 너무 좁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년 게이밍에 대한 이해는 아직까지 부족하다 노년 게이머의 양적, 질적 증대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산업과 제도의 변화는 아직까지 잘 나타나지 않는 편이지만, 서구권에서는 2010년대부터 게이머 노년화에 관한 주목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게임은 젊은 사람들만의 매체라는, 그래서 노년층은 아예 거론되지 않는 고정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연구(Facer & Whitton, 2010), 실제로 늘어나고 있는 노년 게이머에 비해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 산업과 제도의 변화는 크게 뒤쳐지고 있다는 지적(Quandt & Grueninger, 2009)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 또한 결국 서구권에서도 노년 게이머가 잘 조명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권 모두 상황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일부 연구들은 노년 게이밍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과도 유사한데, 이를테면 노년의 게임하는 이유를 치매예방과 같은 신체노화에 대한 기능적 대안으로만 바라보거나(Schutter & Brown), 자녀세대와의 교감만을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고 보거나(Pearce, Lee) 하는 기능주의적 접근들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이는 단지 비노년이 노년의 게이밍을 ‘두뇌 트레이닝’의 일환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년층 스스로도 ‘늙지 않으려면 고스톱이라도 쳐야지’라고 마음먹는 모습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런 기능주의적인 접근만이 실제로 노년층의 게임하는 이유를 다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한국에서도 노년 게이밍에 대한 접근은 주로 기능주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치매예방을 위한 게임개발과 플레이,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게임과 같은 방식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게이머라는 큰 범주로부터 노년 게이머를 매우 타자화된 대상으로 분리시켜버리는 시선으로 굳어질 수 있는 우려를 내포한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의 반응속도를 낼 수 없어 <다크소울>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저니>를 하고 있다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클리어하고 감상에 젖어 있다면, 혹은 과거 동네 오락실에서 <갤러그> 하이스코어 1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굳이 우리는 특정 기능의 향상을 위해서만 게임을 만지는 사람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경의와 동료애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노년 게이머에의 이해를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라는 매체는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수용양식을 넘어 반응이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분명한 접근에의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다. 2012년에 <리그 오브 레전드>를 곧잘 하던 나는 이제는 방송경기의 리플레이를 봐도 한타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신체나이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임이 반드시 높은 반사신경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진정한 의미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이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아니 다른 의미로라면 오히려 과거 레트로 게임 시절에는 동네 오락실을 휘어잡았을지도 모를, 왕년의 용사들에 대한 경의를 가져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플레이를 통해 완성되는 디지털게임의 경험은 단지 특정한 프로그램을 보존한다고 해서 후대에 그 경험이 온전하게 복원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여러 고전게임의 리마스터를 통해 겪은 바 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과 함께 그들의 게임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시절의 게임과 플레이어에 일련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 ‘치매예방 게임’을 하는 세대로 바라보는 것보다 오히려 노년 게이머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인종과 성별로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통해 누군가를 대상화하려는 어떤 흐름을 넘어서서 게이머로서의 동료애를 품을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레이게이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노년층 게이머에 대한 이해와 그로부터 시작될 변화들을 미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게이머라면 함께 플레이할 노년 게이머를 이해해야 하고, 게임사라면 늘어나는 노년 게이머들에게 필요한 게임과 인터페이스를 고민해야 하며, 정부와 공공단체라면 변화하는 게임문화 향유층에 필요한 제도와 인프라를 생각해야 할 시기다. 최초의 레트로 게임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일 것이다. 디지털게임이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이 매체가 보편적인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 보편성에는 인종과 젠더, 계급과 장애유무 뿐 아니라 연령대라는 요소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보편 대중문화로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년 게이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 기네스북 공인 세계 최고령 비디오게임 유튜버 하마코 모리. 2019년 89세로 등재되었다.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457124-oldest-videogames-youtuber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개발자, 문화, 그리고 현금: 서구 AAA 게임계의 세 가지 경향

    AAA게임은 예술, 산업, 문화가 결합되는 영역으로서 지속되어왔다. 게임 연구는 그러한 요소들이 - 진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 과거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 정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 차기작 출시에 대한 기대 및 차기 하이프 사이클에 대한 예측 그리고 다가올 시상식에 대한 흥분 속에서, AAA게임 개발이 보다 높은 예술적 수준의 미래를 향해 최고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훨씬 큰 극단의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게임 언론계나 학계의 간섭, 그리고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 관련 운동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적법성, 노동자와 플레이어에 대한 착취 등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Game Researcher) Bora Na A game researcher. Game-playing goes back quite a long way, but the first encounter with game studies came by chance, through a game course take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Since graduating, has carried out research and writing centered on game history and culture, here and there. Contributed to The History of Games, The Theory of Games, and Mario, Born in '81, among others.

  •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타임라인

    그래서 게임과 중독에 관한 글을 쓸 때 모든 식자들은 엘리트주의적 정서를 느낀다. 이 복잡한 맥락을 나는 잘 정리해서 이해했으니 알려주고 싶다! 실제로 이 글의 서두는 그렇게 쓰여졌고, 완성 후에 후회했다. 그런 정리는 이미 너무 많다. 현재에는 게임 중독, 혹은 게임이용장애에 대해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과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가치 있을 것이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게임중독, KCD-11, ICD-11,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ggap Hong Freelance writer—a job title suspected of being a synonym for "unemployed." Started out as a reporter at Ddanzi Ilbo, where broke the first story exposing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s comment-manipulation operation. A lifelong gamer who wrote a first piece of game criticism in 2001—and is very glad it has since been lost.

  •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Hyunwoo Shin A cultural researcher and cultural critic, specializing in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media. Researches cultural phenomena surrounding gaming, artificial intelligence, platforms, and blockchain, and teach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and the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 개척, 애정, 확장성: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 그리고 제다이 서바이버

    이번에 얘기한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와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를 플레이해보며, 스타워즈라는 새로운 문화에 발을 내딛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yuYeon Lee After learning programming as a child, a wide-ranging interest in culture and the arts led to the goal of becoming a game designer. While at university, is preparing to enter the game industry, and at the same time frequents game-related exhibitions, festivals, and e-sports competitions.

  •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aejin Yoon After earning a PhD in television drama studies, has spent more than twenty years teaching, researching, and writing on media-cultural phenomena. The subjects have been varied—games, webtoons, the Korean Wave, variety programs—but all share a common thread: the exploration of "activities that many people enjoy." A few years ago came a small book titled A Study of Digital Game Culture, and these days runs a research organization called the Yonsei Game & Esports Research Center (YEGER), pursuing a range of studies on game culture together with younger researchers.

  • 표절이라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선

    요 몇 년 부쩍 게임기자라는 부담스러운 직함을 달고서 듣기에 더더욱 부담이 가는 질문들이 있다. “이 게임이 저 게임을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표절이 맞지 않나요?” 마치 녹음기를 켠 채 내 커리어를 끝장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인데, 그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같다. ‘예/아니오’ 로 답하는게 아닌, 상대방과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 Back 표절이라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선 24 GG Vol. 25. 6. 10. 요 몇 년 부쩍 게임기자라는 부담스러운 직함을 달고서 듣기에 더더욱 부담이 가는 질문들이 있다. “이 게임이 저 게임을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표절이 맞지 않나요?” 마치 녹음기를 켠 채 내 커리어를 끝장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인데, 그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같다. ‘예/아니오’ 로 답하는게 아닌, 상대방과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게임과 게임 사이의 표절 시비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더더욱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또 이전보다 게임사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보호를 위해서 나서는 것도 눈에 띈다. 표절을 직접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은 저작권과 관련된 법이지만, 최근 불거진 몇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보면, 결국 제기된 소의 내용은 저작권이 아니라 특허권이나 부정경쟁방지 위반, 영업기밀 침해 등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의 상황에서 저작권은 각사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지만 특허권 침해나 부정경쟁방지 위반 등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거나 최소한 협상카드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저작권이 보호하는 영역이 명확하기 때문에도 있지만,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 유독 그 한계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다 근본적으로 질문을 바꿔보자면, 게이머들이 보기엔 아무리봐도 표절인 게임들이 어째서 법적으로는 그러한 판단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게이머들이 확증편향에 물들어 잘못된 생각을 하는걸까?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는 법과 수용자가 각 작품 또는 결과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법이라면 특허권을 침해했거나 또는 제조법을 도용했는지를 판단하려면 제작 과정을 살펴볼 것이고, 저작권처럼 어떤 발상을 침해했거나 타인의 아이디어로 부정한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면 아이디어를 직접적으로 표절했는지, 정도는 어느정도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들 법은 이미 게임 밖 다른 미디어에서는 여러 사례들을 낳았고, 물론 다른 미디어에서도 그 한계 또는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가 많지만 어느정도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유독 게임에서는 표절과 오마주, 벤치마킹에 대한 구분이 옅고 항상 격론이 오가는 주제가 되곤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법알못으로서,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우리가 겪는 괴리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모든 창작물은 정반합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때문에 미메시스(Mimesis)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사한 발상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더 나은 발전을 아예 가로막아버리는 일이 되기 쉽다. 다른 창작물만큼이나 게임의 제작은 레퍼런스에서부터 시작하며, 창작과 발상은 수렴과 변용으로 시작한다. 그 때문에 이러한 행위 자체를 일종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나 카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표절은 게임계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만큼이나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 역시 “이 게임은 XXX한 OOO임.” 이라며 비슷한 다른 게임에 빗대어 표현하는게 일반화되어 있을 정도이니. 그만큼 대부분의 디지털 게임들은 그 원류가 비교적 명확하며 장르적 정반합에서 언제나 비교당하기 일쑤다. 때문에, “이 게임은 어느 게임을 닮았죠?” 또는 더 나아가 “이거 XXX 베낀거 아닌가요?” 라는 말을 들을 때면, 한마디로 쉽게 답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단 게임 자체가 너무 복합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게임이라도 그를 구성하는 요소가 수백 수천가지라고 하기에도 부족할 정도이고, 또 대체 그 중에서 어느것이 같거나 비슷할 때 표절이라 할 수 있는가, 어느정도 비율이 넘어서야 표절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즉, 게임에서의 표절 논쟁은 그 정의에서부터 갈림길에 서있다. 비교적 그 정의를 내리기 쉬운 다른 미디어에 비하면 말이다. 물론 다른 미디어들이 가진 표절 논쟁에서도 항상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라는 이야기는 나오곤 하지만 게임만큼 이 문제가 골치 아픈 것도 없다. 같은 그래픽 스타일을 가졌지만 게임 플레이는 판이하게 다른 케이스는 흔해 빠졌고, 플레이 구성요소가 비슷하다고 해도 이를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같은 플레이 메커니즘을 가지고 다른 그래픽 요소와 플레이 도구, 구성으로 바꾸어 만들어내는 것이 게임적 변용의 기본이다. 아무리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는 말도 있지만, ‘미메시스’ 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애매한 선에 걸친 것도 참 많다. 즉, 이처럼 어떤 게임의 표절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법적인 부분을 떠나 게이머 입장에서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게임 자체가 워낙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표절 또는 벤치마킹한 요소가 분량 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플레이 측면에서는 오히려 다른 요소가 부각되고 중심이 된다면 그건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수 있고, 역으로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게 게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면, ‘베꼈다’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근래에 있었던 가장 큰, 그리고 유명한 사례라고 한다면 미호요의 ‘원신’ 과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법적인 표절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원신’ 은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표절이 되기는 어렵다.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디자인 요소를 트레이싱하거나, 당연하게도 미호요가 닌텐도를 해킹이라도 한게 아닌 이상 제작과정이나 그 소스코드가 동일할리는 없다. 그러나 이 게임은 많은 부분에서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닮아있으며, 개발사인 미호요도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가 준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좋은 참고가 되었다는 말은 결국 ‘원신’ 의 레퍼런스에는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가 들어가있었다는 말이 되며 그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두 게임을 할 때의 경험이 거의 비슷한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게임의 전반적인 그래픽 스타일 지향점이나 스태미나 아이콘 같은 시각요소의 차용에서부터, 넓게보면 퍼즐 중심의 오픈월드 탐색이라는 게임 경험 자체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글라이더 활공에서부터 벽타기, 맵의 구성과 몬스터 배치까지 단순히 유사한 정도를 넘어서는 부분도 있다. 최소한 ‘원신’ 의 어드벤처 파트는 그 근원이 ‘젤다의 전설: 브레드 오브 더 와일드’ 있다는데에 모두가 동의한다. 따라서 ‘원신’ 이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표절했음을 주장하는 쪽은 주로 이러한 부분을 인용한다. 게임 내 콘텐츠와 메커니즘의 구성과 더불어 조작감, 타격감 같은 상당히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요인들까지도 언급된다. 그러한 이유는 결국 게임이란 경험에 의해 정의되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대리 체험할 때의 경험보다도 내가 직접 플레이어로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그로써 얻어지는 성취감, 순간적인 피드백, 감각들이 비슷하다면, 이유와 근거를 명확하게 들 수는 없어도 이들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문제는 이것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표절작인가? 레퍼런스를 참고해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는 관행은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당연한 행위이지만, 이 자체를 리버스 엔지니어링과 동일한 행위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질 때 나온다. 표절이라고 하는 측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측이 제기하는 근거가 게임의 서로 다른 부분이라서다. 어떤 요소를 차용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게임 전체가 어느 게임의 표절인가 하는 결론에 다다랐을 때에는 결국 전체 게임의 종합적인 부분을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원신’ 과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경우 어드벤처 파트는 굉장히 높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전투는 액션이라는 공통 분모를 빼면 그 근간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으며, 플랫폼과 BM에서 발생하는 플레이 특성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원신’ 은 기본적으로 캐릭터 수집 및 육성이 주요 콘텐츠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를 가챠로 뽑고, 육성 재화와 장비를 수집해 일정 이상의 완성도로 캐릭터를 빚고 깎아내는 과정이 핵심이다. 물론 이 또한 완전히 전에 없던, 다른 게임에 없던 ‘발명’ 은 아니지만 최소한 ‘젤다의 전설’ 에서는 크게 거리가 있으며 독자적인 발전을 가장 많이 꾀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4개 캐릭터와 원소 반응을 통한 파티 빌딩, 하나의 핵심 장비를 중심으로 여러 부품 단위로 세부 스펙을 쪼개어 조합하고 빌딩할 수 있는 장비 성장은 ‘원신’ 의 핵심이고, 이미 여러 갈래로 발전해온 빌드깎기 게임의 ‘원신’ 적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나아가 7신과 국가와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원신만의 세계관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성적인 만족감은 오롯이 ‘원신’ 이 이루어낸 성과다. 물론 이들 요소도 비슷한 사례를 찾으라면 못할 건 없지만, 유사성보다는 오리지널리티가 더 돋보이는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게임으로서 ‘원신’ 이 가진 독자적인 영역도 결코 적고 좁다고 할 수 없다. 게임은 그 자체로 굉장히 많은 레이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몇몇 레이어가 겹친다고 해서 완전히 동일한 총합으로 보기는 도저히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벤치마킹한 부분이 지배적이라면 또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지만, ‘원신’ 에 있어서는 모사한 레이어 만큼이나 직접 고민하고 그려낸 레이어가 많고 그것이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비록 논쟁의 여지가 있어도 사람들이 ‘원신’ 을 무조건적인 표절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수학적인 비율 산정을 말하고자 하는건 아니다. 게임의 경험은 매우 미시적인 체험들의 총합으로 하나의 거대한 경험이 된다. 때문에 아무리 같은 재료를 썼다 하더라도 곁들이는 음식이나 조리법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벤치마킹한 부분 외의 레이어가 충분히 두터울 때 전체 경험의 성격이 바뀌는” 현상을 이루어낸다면 단순한 표절작이 아닌 새로운 갈래의 발산이 될 수 있다. ‘원신’ 은 분명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어드벤처 파트를 토대로 하지만, 그 위에 자신만의 요소들을 쌓아올림으로서 다른 형태의 게임을 빚어냈다. 그래서 이제 ‘원신’ 은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표절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예, 아니오로 답할 수는 없다. 필자라면, “게임의 핵심적인 요소 일부를 본땄지만, 그만큼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 라고 답하겠다. 결국 표절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량적일 수 없으며, 우리는 각각의 게임에 대해 저마다 들어맞는 고민과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근래 ‘소울 시리즈’ 의 대성공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던 소위 소울라이크 게임들 역시 어떤 정량적인 기준을 가지고 소울라이크다, 이건 소울을 계승했다, 이건 소울라이크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 모두가 어떠한 정성적인 감각들, 경험들의 총합으로서 여러 플레이어의 논의를 거쳐 일종의 합의를 이루어낸 것에 가깝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왜 저작권을 판단하는데 있어 법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지 증명하는 셈이다. 법이라는 정량적인 판단으로는 선을 명확히 긋는게 불가능하며, 결국 재판관이나 배심원 같은 심리를 진행하는 권한자들의 재량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마저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법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만큼의 부작용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법리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이러한 게임의 독창성과 특별함들은 지금보다 더 보호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게임이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발산하고 발전하고 정반합의 과정을 반복하는걸 방해하여서는 안된다. 얼핏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매우 미세한 틈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어떤 일에서도 어떤 선을 긋고 경계를 정의하는 건 반복적인 조정과 다시긋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글조차도 그러한 과정 중 하나이며, 그때그때 우리는 엄격한 선을 조금씩 이동시킨다는 얼핏보면 모순적인 일을 해야 한다. 법이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해내야 할까? 이에 대한 답 또한 간단하고 원론적이다. 결국은 게이머다. 소비자이자 독자이자 애정자인 게이머들이 표절이 아닌 독창성을 높게 판단하고, 가치를 발굴하고 그런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것. 점차적으로 시장에, 게임이라는 넓은 세계에 그러한 ‘스스로 추구하는’ 게임들이 지배적으로 남도록 하는 것. 일종의 시장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단순한 소비자주의가 아니라 어떤 문화의 향유자로서, 명확한 가치관으로서 자신이 즐기는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야 말로 무분별한 표절작을 근절하고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추구를 치하할 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플레이어에 대한 존중과 함께 절대적인 선(線)이 있다고 믿기보다는 항상 새롭게 판단하고 스스로가 엄격한 기준이 될 자신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선 안에서 옥석을 가려가며 치밀하게 소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지루하고 현학적이라도, 단정적일 수 만은 없으니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대담회] 게임비평의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 왔고 어디로 향해야 할까?

    이번 대담에서는 창설에 기여했으며 초창기부터 공모전을 지켜보거나 심사위원 활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던 연구자 및 평론가들이 모여, 가 만들고자 했던 게임 비평 및 담론 장의 성격과 현재까지의 성과와 이력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게임 비평 씬에서의 후속세대 양성에 대한 고민과 계획을 함께 짚어보았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isu Kim Studies a range of fields—culture and knowledge, space, and the academic field. Also interested in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ves of gamers.

  • 놀이하는 전정기관에의 상상 - 멀미 너머의 게임

    매클루언의 아이디어를 빌리자면, 이 감각기관이 우리에게 잘 인지되지 않는 것은 이 기관은 다른 감각기관들에 비해 그다지 기술에 의해 확장된 시도가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구의 보편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마치 우리를 둘러싼 공기처럼 너무나 보편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특별한’ 감각적 자극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변호사의 눈으로 본 역전재판

    벌써 오래 전 이야기다. 토요일 아침이면 신문을 펼쳐 TV 편성표를 살펴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특히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에서 어떤 영화를 방영하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는데, 넷플릭스도 IPTV도 없던 시절이니, 시간도 돈도 없는 학생에게는 영화를 볼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편성표 옆에는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간단히 소개하며 별 5개 만점으로 나름의 평가를 달아두었는데, 별점이 높은 영화가 방영되는 날에는 종일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 Back 02 GG Vol. 21.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Byeongchan Lee A lawyer of fourteen years who has loved games since childhood. Keenly interested in the new future that video games may bring. Still struggling, even today, just to clear games on normal difficulty.

  •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군사주의, 욕망, 반전운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nin Lee Writes and lectures freely across comics, games, and film. A lifework: clearing every Final Fantasy title except the MMORPGs. Mainly plays on the Steam D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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