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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24

GG Vol. 

25. 6. 10.

 ※ 아래 내용은 <위니언 바이러스>, <두근두근 문예부>, <KinitoPET>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Welcome to the playground[1] : 0과 1이 만들어낸 공간

Welcome to the playground, follow me

Tell me your nightmares and fantasies

 놀이터에 온 걸 환영해 날 따라와

너의 악몽과 환상에 대해서 말해줘


Sink into the wasteland underneath

Stay for the night, I'll sell you a dream

지하의 황무지에 가라앉아 / 하룻밤만 지내 내가 너에게 꿈을 팔게[2]

    


*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 속 ‘다크웹’으로 묘사된 공간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믿’어야 작동하기에, 공포의 신화 다수는 힘을 잃었다. 러브크래프트가 언급했듯,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관련된다. 역으로 말하면 폭로되고 정복된 공포는 더이상 공포로서 그 권능을 행사하지 못한다. <주술회전(2018)>, <체인소맨(2020)>과 같은 현대 이능 판타지물 속 빌런-저주 혹은 악마-의 힘이 사람들이 그것을 공포로서 ‘믿’는지 ‘안 믿’는지에 따라 비례 또 반비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구태의연한 괴담과 귀신 혹은 과학으로 해명된 이상 현상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현대 콘텐츠들이 대체세계 혹은 SF로 서사적 배경을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이로 미루어볼 때, 미지의 공간이자 미개척지인 사이버 공간이 공포의 공간으로 설계되는 것은 효과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공간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개척해나간 게임은 다수 있다. 흔한 비주얼 노벨인 줄 알았던 <두근두근 문예부(2017)>는 연애 시뮬레이션의 외피를 배신하고 게임 중반부부터 그 노선을 호러로 급선회한다. 그 중심에는 프로그램과 현실세계 사이에 갇혀 플레이어에게 집착하다 못해 인터페이스를 넘나들고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모니카란 캐릭터가 있다. 한편, <KinitoPET(2024)> 속 귀여운 시스템 비서인 줄만 알았던 ‘키니토 펫’은 사실 그곳에 오랜시간 갇혀 있던 존재였고, 더이상 혼자가 되기 싫어 플레이어를 그곳에 붙잡아 두려 기존 윈도우 시스템을 활용해 온갖 공포를 안겨준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 속 공간이 실존한다는 가정을 하나의 설계도법으로 채택한 게임들은, 단지 ‘낯섦’의 그것이 인류 공포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단 이유로만 그것을 채택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공간은 몰락한 공포의 신화를 되살려낼 수 있는 미개척지로서의 의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일까. 어떤 ‘공간’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 <위니언 바이러스(2024)>는 이에 대해 유의미한 답을 주었다.

     

     

Liminal Space : 경계공간이란 공포


<위니언 바이러스>는 큰 틀에서,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다운받은 유저-플레이어-가 일반 육성게임처럼 평화롭게 어린 다섯 위니언을 기르게 되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위니언이 죽거나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사실 그 뒤엔 더 큰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위니언 키우기” 플레이 화면

    

우선 게임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상상력 ’생명을 가진 데이터’란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두근두근 문예부>, <KinitoPET>과 같은 심리적 호러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Detroit Become Human(2018)>, <her(2014)>와 같은 SF적 질문을 던지는 게임과 영화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상상력이다. 1966년 개발된 내담자 중심 상담 인공지능 일라이자(ELIZA)가 그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인격체로 착각한 현상에서 유래한 ’일라이자 효과‘는 이런 상상력이 연출로써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명한다. 일라이저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프로그래밍으로 짜여진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그에게 영혼을 부여하게 하고, 애착하게 만들며, 결국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다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친숙함으로써의 일라이저 효과를 넘어 공포를 연출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그 효과를 활용한다. 컴퓨터 뒷세계에 놓인 구식 CRT 모니터는 위니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니언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는 데이터 형태의 생명체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복감과 우울감을 느끼며, 육체 또한 지니고 있어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그러니 부디 위니언을 데이터가 아닌 생명체로서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노이즈 낀 소리, 불길한 단조 bgm, 검은 배경에 강조되는 암시와 같은 특정 붉은 단어의 이 컷신은 플레이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복선이 된다.


* 게임은 여러 테마를 동원해 플레이어에게 위니언이 ‘생명체’임을 강조하고 환기한다.

     

바이러스에 의해 정신과 육체가 잠식되어버린 픽스(Fix)의 해리성 장애와 사이코패스적 행동은 다섯 어린 위니언들이 겪는 비극의 단초가 된다. 호전적이던 평소의 성격이 극단적 부정성으로 반전된 픽스는 가장 밝았던 아이온(I-on)을 표적 삼아 폭력성을 표출한다. 때리고 할퀴는 것을 넘어서, 감정적으로 몰아붙여 협박하거나 스토킹하고, 그것도 모자라 재생이라는 위니언의 육체적 특질을 악용해 식인이란 만행을 저지른다. 가장 약하게 태어난 디버그(Debug)의 여린 마음을 또 다른 타깃으로 삼은 픽스는 디버그의 자해 습관을 약점 삼고 다른 위니언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가스라이팅을 일삼는다. 이도 성에 차지 않는지 픽스의 폭주는 죽은 아이온의 시체를 인터페이스 너머 점프스케어로 매달아 전시하는 사건으로 결국 정점을 찍는다. 난도질당한 피범벅의 시체, 이등신 도트 안에 들어있던 실제 같은 장기들. 호러 게임이 으레 그러듯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진저리칠 만큼 끔찍하고 고어하게 연출된다. 이제 위니언은 더이상 우리가 알던 16bit의 귀여운 그들이 아니다.


* 아이온의 희생과 그것을 잔인하게 전시하는 연출

     

알록달록한 16bit의 외피가 울컥 토해낸 뜨끈 물컹한 내용물에 플레이어는 단지 ’호러’란 두 글자로는 채 다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공포감을 느낀다. 귀여운 도트 이등신 안에 들어차 있는 실제와 같던 육체의 흔적은 현실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참담할 만큼 정교하게 재현된 감정적 폭력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신체적 폭력과 훼손, 살인 행위는 현실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단지 영혼이 있음 직한 존재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소름 돋을 만큼 적확히 우리와 닮은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섬뜩함을 느낀다. 닮았을 뿐 같지 않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거리감으로부터 비롯된 애착은 이제, 우리에게 내제되어 있지만 늘 외면하고 억누르고자 했던 끔찍한 부분으로서 범람해온다. 이 잔혹한 유사성은 멀미와도 같은 섬찟함을 선사한다. 낯선 것에서 느끼는 억압됐던 익숙한 것의 귀환, 언캐니[Uncanny(운하임리히, Unheimlich)][3]이다.


뜨끈한 내용물의 매끈한 외피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공간은 차원이라는 지표로 크게 2D 공간과 3D 공간으로 양분된다. 2D 공간은 플레이어가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표면적 공간이며, 3D 공간은 그 프로그램 너머인 내 PC, 쓰레기통, 그리고 코딩됐지만 나타나지 않은 잠재적 공간이다. 서사진행의 주요부분을 차지하는 내 PC 즉, 프로그램 ‘뒷세계’는 무한한 복도와 그에 파생되는 무한한 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 구석에 CRT 모니터가 존재하거나 벽지 구성이 바뀔 뿐 공간은 림보한다. 그곳엔 복도를 오가거나 문을 여닫는 존재도,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복도를 통과하거나 문을 여닫을 목적도, 처음과 끝 출발지와 종착점이라는 시간개념도 모두 부재하는 곳이다.


* 0과 1이 만들어낸 경계공간

    

이 공간은 <이스케이프 더 백룸(2022)>이란 게임 속 공간과 무척 닮아있는데 이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란 공간 구성적 미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경계 혹은 문턱을 뜻하는 리미널리티(Liminality)에서 파생된 이 개념은 경계공간에서 느끼는 방향감각의 상실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감각을 내포한다. 친숙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부재와 상실, 그로부터 오는 괴리감과 위화감은 <위니언 바이러스> 속 잠재공간의 특질이다.


* <이스케이프 더 백룸> 속 리미널 스페이스

    

단지 데이터의 정렬뿐으로 이해된 공간은 가볍게 전복되며 그것만의 사이버 공간을 펼쳐 보인다. 그곳은 버려진 잉여 데이터와 사체들이 겹겹이 쌓여 분진을 일으키는 공간이며, 무한히 파생되고 인과가 뒤섞인 문과 복도를 지닌 미로 공간이다. 0과 1의 코드가 물적 콜라주로 산재한 해체적 공간이며, 코드 오류(Bug)가 아닌 벌레(Bug)가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의 공간이다. 부재와 해체를 설계 문법으로 채택한 이 공간은 0과 1을 넘어선 그것만으로 작동하는 기호적 공간[4]을 직조해낸다.


물론 플레이어는 합리적 이성으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 이 공간은 그저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들이 모니터의 액정패널을 통해 투사되는 것일 뿐이라고. 다만 그렇게 몇번이고 되뇌도 이 공간은 공포의 동력이자 권능으로서 작동한다. 편편하고 매끈한 2D의 공간에서 불완전하고 까끌거리는 3D 공간으로 내던져지는 기시적인 틈의 감각. 그것의 논리만으로도 작동하고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공간을 직조해낸 어떤 세계의 재림. 시뮬라크르[5]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Happy ever after : 아이러니적 벡터의 추동


다소의 희생이 있었지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좋은 결말을 맞이한다. 디버그와 보는 픽스의 기억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픽스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다. 최초 바이러스였던 시스템 위니언도 비지트(Bizit)라는 자신의 원래 이름과 기억을 되찾는다. 이후 부모 위니언으로서 다섯 어린 위니언들에게 저지른 폭력을 반성하고 삭제를 받아들이게 되며, 비대해진 뇌만 남은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서 풀려나게 된다. 돌연변이 양자 위니언 생산을 위해 육성 프로그램이란 탈을 쓴 불법 프로그램 “위니언 키우기”를 배포했던, 그렇게 위니언 무한 생산과 개조, 살육을 반복했던 WIN-S는 수사대상이 되었다. 남아있던 그리드와 보는 위니언 수사대에 안전하게 인계되어 국가 보호 아래 유능한 위니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행복했던 다섯 위니언의 한때가 엔딩 크레딧으로 올라간다. 에필로그는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 어린 위니언들이 쓴 애정어린 메일이 플레이어에게 도착하며 마무리된다. 더해서 이스터 에그인 픽스의 암호문구(I love my friends)를 보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역경을 딛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이다.


* 감동적인 엔딩 일러스트

     

<위니언 바이러스>의 매끈하게 메워진 닫힌결말은 전형적인 마스터 플롯을 따르고 있다. 무너진 질서의 회복, 권선징악, 성장서사로 짜여진 이 플롯은 플레이어에게 서사적 완결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플레이를 마친 우리는 무언가 꺼림직한 기분, 미완되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해, 홀가분하게 ‘Happily ever after.’라 외칠 수 없다. 게임은 이미 완결됐으며 기대 층위의 종결을 완수했다. 서사는 더이상 ‘더 읽기’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6]. 다만, 이 엔딩이 끝이 아닐 거야-라는 반응이 다수 포착되는 커뮤니티의 반응처럼 우리는 그저 감각할 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위니언 바이러스>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무력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상황적 가짓수와 엔딩 기점으로 파생되는 인터렉티브 비디오 게임의 선지와 달리, <위니언 바이러스>의 선지는 표현만 다를 뿐 하나의 상황과 엔딩만을 허락한다. 때문에 플레이어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이고 엔딩에 대한 일말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론적 귀결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서사는 그정도로 완벽하게 닫혀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위니언 바이러스>가 공포를 설계하는 연출문법은 기대 층위의 종결을 이루어낸 서사를 애써 열어젖히며 ‘더 읽기’를 권유한다. 우리와 끔찍하리만큼 닮은 그가 그곳에 계속 살아 있을 것만 같다[7]. 프로그램 너머 무한히 림보하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할 것 같다. 인터페이스 너머로 내민 손과 구조를 요청하며 내지른 그 목소리는 마치 이곳을 향해 뻗어있는 것만 같다.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것 같은 위니언들과 지금 이 순간도 림보하며 스스로를 직조해내는 컴퓨터 뒷세계. 무력하게 닫힌 운명론적 결말은 우리를 ‘덜 읽기’로 안내했지만, 바로 이 공간이, 기이한 공포감과 기호로 지어 올려진 0과 1의 공간이 우리에게 ‘더 읽기’를 권하며 손짓한다. 그렇게 닫힌 서사를 활짝 열어젖히며 그 틈을 벌리고 폭로하며 완결을 지연시킨다.


이처럼 공포의 서사와 공포적 연출은 <위니언 바이러스>란 하나의 게임 안에 조화로운 구성으로 녹아있지만, 그것이 가진 종결 층위에서의 힘은 정면으로 대치한다. 이런 낙차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적 벡터는 경계공간 속 실재의 균열을 추동한다[8]. 최초의 의도성이 어찌 되었든, 그것은 현실에서 비현실로 미끄러지는 감각을 기민하게 포착해내는 우리의 감각적 센서를 툭 켜버린 셈이다.

     

     

Your Reality[9] : 재현과 해체로서의 게임


But in this world of infinite choices / What will it take just to find that special day? 

하지만 이 무한한 선택지의 세계 속에서 / 어떻게 해야 그 특별한 날을 찾을 수 있을까?

And if this world won't write me an ending / What will it take just for me to have it all? 

이 세계가 나에게 결말을 주지 않는다면 / 그냥 전부 다 내 것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10]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했던 서사에 대한 욕망, 좀더 명확하게는 서사의 종결성에 대한 욕망은 미완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인류의 오랜 욕망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 서사라 함은 늘 완결성을 보장해왔다. 시련이 있기에 성장이 있고, 타락한다면 추락할 것이며, 혼돈은 질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하나의 매끈한 플롯은 유기적으로 꿰어낼 수 없는 체험들과 종결이 결여된 카오스적 실재에 대한 필사적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결성을 서약하는 전통적 서사와 달리 실재 세상은 무의미성과 미완의 틈으로 가득 차있다. 앞서 말한 ‘Happily ever after.’를 후련하게 외치지 못한 그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낙차는 필연적으로 해체를 수반한다. 구조의 틈이 폭로된 순간 그것의 허물어짐은 멈출 수 없다. 영화 <인셉션(2010)>에서 꿈을 자각하는 순간 애써 설계한 광활한 꿈 공간이 산산이 붕괴 되는 장면처럼. 이로 미루어본다면 <위니언 바이러스>는 설계하는 동시에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게임은 기이하도록 우리와 닮은 위니언이란 존재를 만들어내고, 0과 1의 벽돌을 쌓아 경계공간을 지어 올린다. 그 기호 자체만으로도 작동하는 기호의 세계는 마치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의 재현, 아틀란티스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위니언 바이러스>는 그에 뒤따르는 기이한 공포감과 부재가 종결된 서사성과 맞부딪히며 아이러니적 벡터를 만들고, 그 동력은 지어 올려진 아틀란티스를 스스로 해체 시킨다.


그것은 마침표 대신 반점을, Happily ever after 뒤에 물음표를 붙이게 한다. 플레이어는 플레이란 체험을 통해 0과 1로 지어진 경계공간을 건설해내는 동시에 허무는 주체가 된다. 이는 필히 종결된 미완이란 모순적 체험을 가능케 하고 ‘더 읽기’란 행위로 이어진다. 닫힌 동시에 열어 젖혀졌기에, 우리는 서사와 연출로 구성된 게임, 플레이란 체험 전반, 그리고 그 둘의 사이를 씨실과 날실로 엮어내며 독자적으로 핍진한 어떠한 궤적을 덧그려내는 체험에 참여하게 된다. 디버그와 보는 정말로 안전히 보호받고 있을까. 희생된 아이온과 픽스 그리고 디버그는 위니언들의 내세로 갔을까. 어떤 다른 어린 위니언은 여전히 버그에게 쫓기며 그 으스스한 뒷세계를 계속 림보하고 있지 않을까. 비지트가 개조된 끔찍한 그 모습은 인격체를 수단화하는 현대사회와 단적으로 너무 닮아있는데. 게임 속 세계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곧 존재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곁에 어떤 위니언은 또 어떤 뒷세계는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닐까. 질문은 상이하더라도 그것은 지연되는 완결성이란 하나의 줄기로 모인다. 종결과 미완이 꼬리잡기하듯 서로가 서로를 뒤따르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마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서사와 연출의 낙차를 통해 <위니언 바이러스>가 가능케 한 이런 일련의 체험을 가히 ‘차연적’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11].  

     

     

Spinning glove[12] : 무한히 덧그려 나아가는 물음


완결성(完結性)과 미완성(未完性)은 낙차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벡터의 대항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13]게 한다. 질문 층위의 열림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 생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서사의 첫 희생양이자, 양자 위니언으로서 그 모든 가능성을 안고 있던 ‘아이온(I-on)’의 이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고 화학에서의 이온(Ion)과 양자 컴퓨터 스마트업의 아이온큐(IonQ)가 그 예이다. 화학 분자로서 이온(Ion)의 의미로 보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매개자이자 전이자, 변화의 축이란 의미에서 서사적 역할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아이온의 죽음으로 인해 서사는 급물살을 탄다. 한편, 과학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다른 유래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온(Aion[Αἰών])’이란 그리스 신화 속 우주와 영원의 신이다.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대비되며 영원히 끝나지 않고 순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사를 인과로 조직해내는 시간이 아닌 존재 전체를 감싸고 맴도는 시간-아닌-시간이다. 즉,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차연하는 시간성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완전히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은 시간. 그 안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해석은 지연되며 서사는 열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위니언들의 이름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픽스는 ‘수리하다(fix)’라는 관점에서, 최초 바이러스인 시스템 위니언의 난폭함을 바로잡고 그 부당한 현실을 수리하기 위해 디버그 대신 자신이 희생되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택은 오히려 희생의 고리와 죄책감으로 인한 비극을 고착화하고 앞당기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을 수리하고 고쳐내 다시 ‘다섯 위니언들이 행복하게 지내던 평화로운 시간’에 영원히 ‘고정(fix)’되는 걸 가장 간절히 바랐던 픽스이지만, 그 바람은 오히려 가장 큰 비극으로 돌아왔다.


* 빨간색 픽스로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디버그, 보, 그리드. 가장 가운데는 노란색 아이온.

    

픽스가 ‘고정(fix)’한다면 디버그는 ‘해체(debug)’한다. 프로그래밍 중 발생한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디버깅(debugging)에서 유래한 그 이름은 뜻대로, 이 비극의 실타래를 푸는 데에 디버그가 전면으로 내세워진다. 다만 시간은 디버그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결국 디버그는 몸과 마음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 위니언은 감정을 가진 존재였기에, 디버그는 죄책감으로 난도질당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픽스라는 고정값과 디버그라는 해체값이 그렇게 덧셈과 뺄셈의 과정을 거쳐, 서사는 0이란 균형의 국면을 맞는다.


이후 남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위니언이자, 최종 생존자로서의 위니언은 그리드(Grid)와 보(Bo)이다. 격자무늬, 신경망의 알고리즘과 같은 ‘규칙(Grid)’으로 읽히는 그리드는 0으로 돌아온 세계를 다시 규칙으로 지어올리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주변값을 기반으로 추정해 자연스럽게 채워 넣는 ‘보간법’에서 유래한 보의 이름은 틈을 메꾸어내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무너진 규칙을 세우고 틈을 메꾸는 행위. 이 흐름은 앞서 언급한 닫힌 서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이온-픽스-디버그-그리드와 보라는 순서로 보자면, 아이온-그리드와 보는 전적으로 대비 된다. 이름의 축으로도 설명될 수 있듯, <위니언 바이러스>는 낙차를 만든다. 그렇기에 그 기이함과 부재의 경계공간이 선사한 공포라는 순간적 감각은 질문이라는 영속적인 감각, 즉 아이온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도착하게 된다.


질문이란 관점에서, 제목 자체가 질문의 형식을 가진 지브리의 2023년 작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언급하고 싶다. 제목이 발표된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가지는 어조 탓에 어떤 교조적인 교훈이 담겼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개봉 후, 지브리의 전작들과 달리 조금 난해 하다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반응과 함께 제목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단 반응으로 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은 정형화된 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관객에게 물었다. 꼭 바이트 상 존재하긴 하지만 화면상에 표시돼 존재하지는 않는 Null 값처럼. 질문에 대한 답은 비어 있었다.


작품 속 마지막 장면, 마히토는 환상을 빠져나왔음에도 그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현실-환상-현실 구조의 마스터 플롯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다. 이에 마히토를 환상 속으로 이끌었던 매개자 왜가리는 “혹시 뭐 가져온 것이 없”냐고 묻는다. 그에 마히토가 주머니에서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돌을 꺼내 보이자, 왜가리는 그것을 “강력한 부적”이라고 칭하면서도 “다행히 힘센 돌은 아니니까, 점점 잊을거고, 그거면 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돌”은 저쪽 세계에서의 서사는 종결됐지만 그 세계를 계속 기억하도록 하기에 미완의 서사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그것이 “강력한 부적”인 까닭은 지연된 질문은, 그리고 계속해 지연될 질문은 이제 그 자체로 열린 채 생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왜가리에게는 안타깝게도 마히토는 “점점 잊”는 것이 아닌 환상과 현실 그리고 그 잔여를 기억하고 또 품으며 열려있는 텍스트로서, 질문으로서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질문으로서의 무너뜨림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게임은 서사와 연출, 체험과 그 체험을 나누는 담론이 유기적으로 흘러 오가는 매체이다. 그 모든 것은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의 직접적이고 실감 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층위가 만들어내는 색채는 여타 다른 매체보다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시대와 함께 나아가며 그것을 충실히 흡수하기도, 때론 재치 있는 전복을 해내기도 하는 역동성은 분명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을 설레게 하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무수한 층위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게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물을 수 있는 공간을 활짝 열어 보일 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 곡 속 ‘세계’를 의미하는 ‘Globe’ 앞에 붙은 수식어 ‘Spinning’처럼. 아이온의 시간 속에서 지연되는 물음으로. 질문으로서의 질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려나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전부이고 최선이라는 듯. 우리는 그렇게 게임이라는 체험적 감각을 덧그려 나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1] <ARCANE(2021) 1> ost “Playground” 가사 일부
[2] 악몽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자운-으로의 초대 서곡으로 쓰인 이 곡은 마치 어떤 공간 속으로 플레이어를 초대하는 게임의 초대장과도 닮아있다. 게임이 초대하는 그곳은 놀이터이자 꿈이며 0과 1로 지어진 공간이다.
[3] 유진월, <비바리움>의 부조리한 세계와 출구 없는 삶의 공포 : 언캐니와 그로테스크를 중심으로, 횡단인문학(9), 2021, p216.
[4] 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HUINE(2016). p.90.
[5] 위의 책, p.114-115.
[6] 독자는 텍스트를 주도적으로 읽기 시작할 때 그것을 향한 힘을 필연적으로 행사하게 되는데, 그 형태는 ‘덜 읽기’와 ‘더 읽기’로 크게 나뉜다. ‘덜 읽기’는 서사 속 존재하는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해석적 종결을 짓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돼있다. 한편, ‘더 읽기’는 마스터 플롯에 의해 촉발된 정동이 드러낸 틈을 자발적으로 메우고자 하는 행위로, 그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69-177.
[7] 실제로 게임의 중반, 평화롭던 분위기가 점점 호러로 발돋움할 무렵, 위니언 상식을 설명하는 화면과 별개로 “WE ARE ALIVE HERE”라는 보이스가 겹쳐지며 플레이어를 놀라게 한다.
[8]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샘』, 한충수 역, 이학사(2022), p.93.
[9] 마찬가지로 경계공간이란 설정을 사용한 <두근두근 문예부>의 엔딩 곡. 처음부터 끝까지 음성 없이 텍스트로만 진행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직 모니카만’의 목소리를 해당 곡에 입혀지는 보이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10] 플레이어를 향한 모니카의 집착적 애정이 드러나는 곡이지만, 이는 무수한 선택을 반복할 수 있는 게임과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의 현실세계(your reality)의 ‘차이’를 인정하고 플레이어를 떠나보내며 스스로 게임 데이터를 모두 지워나가는 모니카의 선택 또한 드러나는 곡이다.
[11] 이조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인식론과 선」, 禪學(23), 2009, p335.
[12]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엔딩 곡 영어 제목. 원제는 지구본(地球儀).
[13]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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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Life is strange>.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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