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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의 '사랑'

    사랑을 게임 속에 재현해보고자 처음 시도됐던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점차 게이머의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도록 ‘게임성’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연애 게임의 진화된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 Back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의 '사랑' 16 GG Vol. 24. 2. 10. 디지털 게임에서 사랑을 가장 중심으로 삼는 장르는 역시 연애 게임일 것이다. 2018년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실시된 닛케이 신문과의 연계 워크숍에서 대학생들이 연애 게임에 대한 조사 1) 를 실시한 바 있다 . 이 조사에 응답한 사람의 52%가 연애 게임을 해봤다고 진술했다. 절반이 넘는 수치이다. 조사를 주도한 학생들은 응답 결과와 함께 응답자들의 짧은 인터뷰, 연애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견을 종합해, 연애 게임의 인기 요인을 ‘게임에서만 가능한 연애’와 ‘스토리나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다’로 보았다. 이들은 ‘연애 게임의 고유성’을 통해 연애의 이상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해주고, 연애의 형태가 이로부터 진화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들은 단순히 연애나 사랑을 경험하거나 더 잘하기 위해 연애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게임 속 연애를 현실 연애의 간접 경험이 아닌, 게임 플레이 그 자체로 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연애 게임은 연애와 사랑을 어떻게 다루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 앞서, 연애 게임이라는 장르를 정의하는 것은 꽤나 난제다. 큰 하위 장르로는 크게 연애 어드벤처와 연애 시뮬레이션이 있다. 우선, 연애 어드벤처는 연애를 테마로 한 텍스트 어드벤처다. 1980~90년대 텍스트 어드벤처의 유행 속에서 연애를 소재로 만들어진 게임들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장르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원조 격으론 엘프(elf)의 1992년 작품 <동급생(同級生)>이 있다. 시나리오 속 선택지를 통해 자신만의 연애 스토리를 달성해가는 연애 어드벤처 방식은 오늘날의 연애 게임에서도 가장 많이 시도된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코나미의 1994년 작품인 남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도키메키 메모리얼(ときめきメモリアル)>를 시작으로 시작으로 발전해왔다 2) . 해당 작품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능력치를 통한 호감도 시스템은 롤플레잉이나 육성 시뮬레이션에서 채용하던 캐릭터 육성 시스템을 연애에 맞게 바꾼 형태였다. 한국에서도 이 게임을 통해 속칭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3) 라는 용어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점에서 실질적인 ‘연애 시뮬레이션’은 주인공이나 주변 캐릭터의 육성, 성장과 같은 관리 요소와 텍스트 어드벤처 요소를 결합해 연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 하는 장르를 의미한다.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연애 게임의 계보나 장르적 특성을 정리하는 것은 여러 논의를 통해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시초인 연애 어드벤처와 연애 시뮬레이션을 아우르는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연애와 사랑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집중하고자 한다. 연애 게임에서 흥미로운 점은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연애 게임의 시작이 ‘남성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연애 게임은 단순히 남성 게이머만의 장르는 아니기도 하다. 여성 게이머를 타겟으로 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시장은 지금에 와서 남성향과 견줄 만하다. 그렇다면 남성향 연애 게임은 여성향과는 무엇이 다를까? 기본적인 게임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연애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요소를 육성하며 플레이하거나, 텍스트 어드벤처 형태로 주어진 선택지를 골라가며 자신만의 연애를 달성하는 방식이다. 남성향이나 여성향 모두 같은 구조, 형태로 디자인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남성향의 경우 일반적으로 게이머가 남성 주인공 캐릭터가 되어 여러 여성 캐릭터 중 한 명을 선택해 연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여성향은 대체로 반대 구도를 채택한다. 등장 인물이나 인간관계 구도 외에도 세세하게는 게임이 채택하고 있는 세계관이나 설정 등 소재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두 성향의 차이로 제시된 소재나 설정에서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것은 흔히 판타지 세계관이나 요소 등이 남성향에 치우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성향의 경우에도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 시초인 <안젤리크> 역시 이른바 정통 판타지를 채택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판타지라는 설정이 남성향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그러나 판타지를 ‘가상, 상상’이라는 의미로 볼 때, 남성향은 더욱 게임적인 판타지를 띠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같은 스포츠 중심의 현대풍 판타지 세계관인 작품이라고 해도 남성향인 <푸른 저편의 포리듬(蒼の彼方のフォーリズム)>과 여성향인 <프린스 오브 스트라이드(プリンスオブストライド)>는 판타지의 '농도'가 다르다. <프린스 오브 스트라이드>는 계주를 소재로 한 가상의 스포츠 ‘스트라이드’를 중심으로 한다. 스트라이드는 현실에서도 접할 수 있는 계주와 골자는 같다. 그에 반해, <푸른 저편의 포리듬>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안티 그래비티 슈즈’를 중심으로 한 ‘플라잉 서커스’라는 가상의 스포츠를 중심으로 한다. 전제부터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는 설정과 세계관이다. 흔히 우리가 “게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소재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남성향의 취향을 반영하는 극적인 설정이나 테마가 적극적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아마 남성향이 갖는 특징 중 하나인 강조된 가상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푸른 저편의 포리듬> 4) <프린스 오브 스트라이드> 5) 연애 게임의 서사는 연애의 달성, 즉, 사랑의 결실이라는 단순 명쾌한 목표를 제시한다. 연애 어드벤처 또한 시뮬레이션 요소만 없을 뿐, 오히려 이런 시나리오는 더욱 강조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의외로 남성향 연애 게임의 경우, 게임을 끝낸 후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감상은 연애 게임에 대한 게이머들의 리뷰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게임들이 감동적이고, 로맨틱한 사랑의 쟁취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엔딩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애 게임의 대단원이 주는 것은 ‘즐거움’이다. 어째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테마로 하는 게임을 하는 데도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일까? 이는 앞서 언급한 남성향의 가상성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작품들의 플롯을 보고, 플레이하기 시작하면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어떤 스토리일까?’, ‘어떤 캐릭터가 있고, 누구를 공략할까?’일 것이다. 그 이유는 게이머가 스토리를 이해하고 진행하기 위해 제시된 설정과 조건들, 각각 캐릭터가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익히는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비현실’적인 정보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통해 게이머는 게임임을 인식하게 된다. 앞으로 겪게 될 사랑과 연애는 점차 현실적이지 않게 된다. 게이머 자신이 온전히 게임 속 주인공을 연기할 순 있지만, 현실에서 느끼는 사랑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게임적 인식 프레임’을 형성한다(井上, 2007). 게임 시작 지점에서 조금 더 진행을 하게 되면, 여성 캐릭터와의 여러 이벤트가 발생한다. 자신의 캐릭터를 육성하면서 발생한 이벤트일 수도 있고, 게이머 자신이 고른 선택지를 통해 유도된 것일 수도 있다. 이벤트는 시나리오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게이머는 앞서 형성된 게임적 인식 프레임을 통해,이 플레이가 현실의 연애가 아닌 ‘공략’을 위한 플레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여기서 게이머는 이벤트를 위해 자신만의 ‘공략 루트’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연애 게임의 ‘즐거움’임을 인지한다(江, 2019).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는 게이머가 게임에 몰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그 자체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 게이머 자신이 게임에서 사랑과 연애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달리, 주어진 게임의 목표를 달성하여 얻게 된 것이 시나리오다. 즉, 게이머는 자신의 플레이 결과로써 시나리오를 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게임이 주는 사랑과 연애의 경험은 온전히 게임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여성향도 똑같은 거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다른 점은 여성향 연애 게임이 ‘캐릭터의 감정 서사’와 이른바 ‘노벨 게임화’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궤적을 꼽을 수 있다(小出·尾鼻, 2018). 즉, 여성향 게임이 제공하는 주요한 플레이의 강조점이 서사 전달이라는 것이다. 더 좋은 시나리오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애라는 서사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여성향 게임의 목표에 가깝다. 다시 남성향으로 돌아가보자. 지금의 남성향이 추구하는 시나리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성장이다. 청춘의 우정에서 사랑으로, 미흡하던 모습에서 되고 싶은 자신으로 점차 발전해 나가는 스토리이다. 이는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주인공 서사처럼 점차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다. 게임이 제공하는 선택지는 단순히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으로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이 결과, 게임의 엔딩은 '완벽한 자신'과 '사랑의 결실'이라는 두 가지 값으로 수렴한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이러한 서사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게이머의 게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다. 강조된 판타지적 소재와 세계관, 캐릭터와의 갈등 구조, 역경의 극복 등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보다 게임적으로 강조하는 요소가 된다. 시뮬레이션 플레이만 해도 일련의 텍스트로 정리되진 않지만, 게이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시나리오 라이팅이기도 하다. 게임 디자인도 게이머의 적극적인 플레이를 상정한다. 즉,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의 획득 방식을 게임적으로 제공한다. 이를 위해 개발자들은 초창기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게임성’을 다시금 불러온다.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사랑이라는 요소를 게임 플레이로 치환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점차 게이머의 적극적인 게임 플레이를 강조하는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썸썸 편의점>과 같은 경영 시뮬레이션이 접목되어 있는 게임이나, DLSITE나 스팀의 일본 인디 연애 게임에서 연애 시뮬레이션에 RPG나 ‘서바이버즈 라이크’ 등을 접목하여 게임성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호감도를 얻게 되거나, 필요한 능력치나 아이템 등을 얻게 되기도 한다. 혹은 이러한 파트 이후 여러 이벤트들을 발생시키면서 다시 연애 어드벤처로 유도하는 방식 등을 교차적으로 활용한다. 테일즈샵의 <썸썸 편의점> 경영 파트(출처:스토브 인디)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연애와 사랑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분명하게 연애의 경험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를 다루는 방식은 매우 게임적이다. 사랑은 그러한 연애를 서포트하기 위한 순간순간의 파라미터처럼 작동한다. 즉,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연애와 사랑은 게임 플레이이자 게임의 목표, 목적이 된다. 특히 사랑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나 개념으로써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게임의 공략 대상이 된다. 사랑은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게임성’에 직결되는 요소이다. 게이머는 수치화 혹은 가시화된 사랑을 자기 캐릭터의 연애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 지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랑은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러한 플레이를 통해 게이머는 게임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 즐거움의 원천은 분명하게 사랑과 연애이지만, 그 표현의 방식은 매우 게임적으로 설계된다. 남성향 연애 게임이 중시하고 있는 사랑의 표현은 단순히 감정의 재현이 아닌, 어떻게 사랑을 게임 디자인적으로 재미있게 제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향 연애 게임을 하면서 여러 사랑의 감정과 경험을 겪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재밌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시나리오나 디자인이 사랑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향 연애 게임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할 수 있는 감정을 게임에 녹여내는 것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다른 장르에서 즐겨왔던 분위기를 제약된 연애 게임 구성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남성향적 테이스트가 시나리오 구조나 게임 디자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애와 사랑이라는 요소를 통해, 게임의 즐거움을 주는 방식이야 말로 남성향 연애 게임이 제공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남성향 연애 게임은 게임 그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이머를 위한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는 장르인 셈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테마를 가장 게임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게임에 대한 사랑을 대표하는 장르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남성향 연애 게임은 적극적으로 가상성을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장르의 게임을 혼종적으로 채택하기도 한다. 가끔 게임의 엔딩은 엉뚱하게 판타지 요소에 매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남성향 연애 게임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인기가 점차 식어가던 시장 상황에서, 이러한 시도들은 인디 개발자들과 새로운 남성 게이머층을 끌어들이도록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1인 인디 개발사 ‘스튜디오 사이’의 ‘액션RPG 연애 시뮬레이션’ <이터나이츠>와 같은 게임들처럼 말이다. <이터나이츠>(출처:스팀 상점 페이지) 필자의 생각이 연애 게임 전반에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향 또한 남성향에 관해 서술한 내용과 같은 방식으로 게임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게임 속에 재현해보고자 처음 시도됐던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점차 게이머의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도록 ‘게임성’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연애 게임의 진화된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노력은 다시금 게임에서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사랑은 게임 그 자체에 대한 애정 어린 표현은 아닐까? 참고문헌 井上明人(2007)「ゲームという認識の枠組み-日本の先行研究を中心に-」『デジタルゲーム学研究』第1巻1号、46-53p 江葉航(2019)「ビジュアルノベルにおける構造とそのリアリティー : ゲームデザインとゲームプレイをめぐって」『Core Ethics』第15号、35-46p 小出治都子、尾鼻崇(2018)「「乙女ゲーム」の歴史的研究 : キャラクター分析を中心に」『大阪樟蔭女子大学研究紀要』第8号、69-74p 1) https://www.nikkei.com/article/DGXMZO38898390T11C18A2000000/ 2)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인 코에이의 개발부서인 ‘루비파티’의 <안젤리크(アンジェリーク)> 또한 1994년 발매되었지만, <도키메키 메모리얼>이 발매 시기가 빨랐다. 3) 그러나 ‘미연시’는 이 게임에서 비롯된 준말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연애 시뮬레이션과 비주얼 노벨 형식의 연애 어드벤처를 모두 칭한다. 이는 연애 게임 시장의 주류가 점차 연애 어드벤처 장르로 치우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4) https://aokana.sprite.net/ 5) http://posweb.jp/pos/game/index.html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 Back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12 GG Vol. 23. 6. 10.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 [1] 의 순간 游戏性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 [2]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디지털 게임 속에서 리얼리즘적인 스토리 시간과 내러티브적 시간이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읽는 시간 즉 ‘제3의 시간’, ‘노는’ 시간이 구해진 것이다. 실제 세계로부터의 신체적인 충동이 게임 행동의 핵심으로 전환되고,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정신적 이끔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감각적 이끔으로 대체된다. 행동을 주도하는 의미생성 방식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 게이머는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육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비디오게임의 디자인, 소비, 상벌,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일종의 파노라마적인 지식의 환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게이머는 신체의 감각에 빠져 파노라마 지식 환각의 의미를 조각화, 껍데기화하는 것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내러티브에서 게이머의 행동 중 어느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불안정한 ‘다이성’을 나타나게 된다. 이제 가상현실은 메타스페이스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게임적 방식’으로 개인의 일상 경험에 몰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이제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라, ‘리얼’이다. 즉, 인류의 지식에서 배제됐던 ‘게임’은 “자유의지”(Immanuel Kant), “심리상태의 경계”(Friedrich von Schiller), 혹은 “정력의 과잉”(Herbert Spencer)의 게임이 되고, 메타버스 시대에 새로운 지적 경험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 “게임을 통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지식”이 됐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메타버스는 일상의 잉여로서의 ‘놀이’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인류 일상의 이념을 변화시켰다. 세 가지 리얼리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角色独立)’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가 창안한 개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이나 오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와의 대담을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동물화된 포스트모던>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세 가지 리얼리즘을 언급했다. 그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연구가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가지 리얼리즘을 도출했다고 봤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 꼭 에밀 졸라(Émile Zola)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유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순수문학의 한 형태로서 ‘사소설(私小說)’을 지칭한다. 오오츠카 에이지에 따르면 사소설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 발화 주체인 ‘나’를 갖고 있으며, ‘나’가 스토리의 논리와 구조에 따라 발화하는 소설이라고 언급한다. 한편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라이트노벨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나 캐릭터, 스토리, 플롯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발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작가는 캐릭터 자체에 얽매이는데, 오타쿠들이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속의 ‘2차원’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라이트노벨은 사소설이 한 명의 ‘나’로 소설을 통제한다는 의식을 바꿔버렸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두 가지 리얼리즘 구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든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든 작금의 현실을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즈마 히로키는 이 새로운 리얼리즘을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세 가지 리얼리즘의 분류를 완성했다. 그렇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게임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모두 ‘캐릭터’가 핵심이지만, 게임적 리얼리즘의 경우 캐릭터의 메타서사 기능(메타적 스토리성)에 기초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포인트는 여전히 “캐릭터 독립”이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故事)는 플롯(情节)이나 현실 때문에 설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캐릭터를 위해서 설정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감동적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속 캐릭터의 삶과 상태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사실 캐릭터가 게임적으로 존재함을 가리키며, 이는 게이머나 독자가 자유롭게 캐릭터를 이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메타서사’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게임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곧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신체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고, 게이머/독자를 텍스트의 일원으로 만드는 방식——게이머/독자의 캐릭터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캐릭터’ 독립의 관점으로부터 설정되는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측면을 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캐릭터 독립’은 독자가 읽고 소비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독자가 캐릭터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기 때문에 스토리 설정의 내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원하는대로 캐릭터를 위한 스토리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침묵하는 독서인이 아니라 ‘게임을 열독하는’ “게이머”가 된다. 따라서 ‘캐릭터 독립’은 읽는 행위의 문제를 지향하는데, 독자들이 이와 같은 캐릭터 독립을 원하기 때문에 캐릭터는 독립할 것이란 점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텍스트에서 독자의 의지는 얼마든지 이야기의 의지(그것이 존재한다면)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과 캐릭터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며, 즉 독자(게이머)가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도 발생했지만, 가상현실 시대에는 더욱 전형적으로 변화했다. 가상현실 서사 [3] 에서는 인간과 캐릭터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그들의 삶의 경계는 점차 통합되며, 이와 같은 인간과 머신의 공생은 새로운 캐릭터 의식을 낳았다. 근대 이후 과학적 진실에 대한 요구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내러티브 속 캐릭터의 ‘재생’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요구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가상현실 시대에 인간과 가상 캐릭터의 일체화가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새로운 현실 경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가상의 형식으로 실제의 신체적/정신적 경험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의 경험은 실제 생활 경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뿌리는 바로 ‘게이머’ 자체다. 게이머는 캐릭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잠재적으로 구성하고, 실제 텍스트 활용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텍스트 활용 과정을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게임적 리얼리즘은 단순히 장르(genre)나 형식(style)이 아니라, 가상현실 자체를 지향하는데, 이때 ‘게임적 리얼리즘’은 가상현실의 철학 이념과 스토리텔링의 규칙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곧 읽는 행위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캐릭터 독립은 왜 발생할까? 그것은 독자가 이와 같은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의 2차원적 내러티브에서 캐릭터가 꼭 이야기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야기가 결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 즉 라이트노벨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이 플롯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은 사소설과는 다르다. 사소설이 작가 중심적이라면, 라이트노벨은 독자 중심적이다.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활용(물론 완전히 자유로운 활용은 아니다)은 캐릭터에게 자율적인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중복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자신을 바꾼다. “제3의 시간” : 사람의 게임,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서 게이머로 나아가 게임적 리얼리즘은 캐릭터의 독립을 통해 그동안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독서 행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 서사는 언제나 행동 주도로 이뤄지며, 인간과 캐릭터와의 간극이 가상현실 서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메타버스적 ‘게임형태’는 인류 생존의 선형적 역사를 폭발시켜 현재진행형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는 이야기 발생 시간과 서사가 차지하는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이 서사의 첫 번째 시간(이야기 시간)과 두 번째 시간(서사 시간)을 형성한다. 서사 시간은 문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이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을 제어한다. 상대적으로 리얼리즘 텍스트는 스토리텔링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의 조화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모더니즘 텍스트는 오히려 서사 시간과 균형을 맞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다니엘 벨(Daniel Bell) [4] 은 모더니즘의 특징은 현장성(거리의 소멸, eclipse of distance), 즉 독자로하여금 이야기꾼의 말버릇이나 말투가 독자에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전통 소설들은 대체로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의 조합이다. 하지만 전통 서사에서 읽는 시간——이를 ‘제3의 시간’이라고 하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들은 ‘제3의 시간’을 ‘제로 시간’ [5] 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반대로 게임적 리얼리즘은 ‘제3의 시간’을 위주로 하여 텍스트의 사용 활동(제1의 시간)과 텍스트의 서사 행동(제2의 시간)이 함께 새로운 ‘게임 행위’(제3의시간)를 구성한다. ‘제3의 시간’ 안에서 신체의 충동이 게임행위의 핵심으로 변화하고, 게임적 리얼리즘의 ‘주인공’이 ‘캐릭터’에서 ‘플레이어’로 바뀐다. 서사자로부터 ‘서사’의 핵심적 지위는 플레이어의 ‘플레이’로 바뀌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신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된다.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독자의 존재는 텍스트 입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는 어떠한 이야기든 이상화된 암묵적 독자를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암시적 독자(Der implizierte Leser)’ [6] 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암시적 독자는 휴머니즘의 주체론적 환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텍스트를 읽는 과정을 탐색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해 “to be or to have”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위에 ‘쓰기 가능한 텍스트(writerly text)’의 범주를 제시했다. 하지만 ‘쓰기 가능한 텍스트’는 텍스트 의미의 틈새를 통해 구축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읽기 행위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읽기를 일종의 성적 활동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은밀성만 강조했을 뿐 텍스트 읽기 자체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미학과 독자반응이론, 버밍엄 학파의 암호에 대한 강조를 수용하는 것은 사실 “텍스트 의미의 실현”이나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태도”에 중점을 두는 것이며, 제3의 시간이 서사 측면에서 제1의 시간이나 제2의 시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독자, 관중 등은 ‘플레이어’와 같지 않다. 전자(독자)는 텍스트 뒤에만 나타날 수 있고, 후자(관중)는 텍스트 서사의 새로운 행동을 발현한다. 우리가 오직 게임적 리얼리즘 텍스트, 특히 비디오게임 텍스트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제3의 시간’은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인류의 게임 발전은 세 가지 형태를 거쳤다. 최초는 낮에 사냥하고 밤에 사냥을 모방하는 ‘인간의 놀이’ 형태로 출현했다. 다음으로는 ‘놀이하는 인간’이 나타났는데,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이를 두고 이질적 산업화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규율과 이질성에 저항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놀이란 곧 목적 없는 합목적성, 불규칙한 규율성, 자유의 상징(놀이 충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놀이’나 ‘놀이하는 인간’을 연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게임’, 즉 ‘플레이’를 핵심으로 하는 게임을 연구한다. 플레이란 텍스트를 즐기는 것이자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곧 ‘제3의 시간’의 중심화를 형성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더 이상 텍스트 밖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적 행동 속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전통 서사와 게임 서사는 매우 다르며, 후자는 전통 서사에 없는 ‘제3의 시간’ 서사를 만든다. 전통 서사는 독자들이 서사 시간을 통해 이야기 시간에 몰입하게 하고, 자신의 현실 시간을 잊게 한다. 따라서 전통 서사의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야기의 폐쇄성을 형성하고,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독자의 읽는 시간은 껍데기가 된다. ‘독자’는 설정적인 캐릭터가 되고, 읽기란 개인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말하자면 전통 서사는 텍스트의 독서자/사용자를 구조적으로 배척한다. 게임 서사는 이와 반대인데, 그것의 심오함은 ‘제3의 시간’이 이야기 시간을 빌어 서사 시간을 소멸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은 현실의 시간이 거대한 작용을 하도록 하는 것인데, 게임은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시작된다. 가상현실 시대,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변화했다. 첫째, 그것은 서사가 단순한 인과적 사슬을 따라가게 하지 않고, 대신 이야기에 몰입한 ‘행동자’에게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적 상황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시간적 논리를 공간적 논리로 대체시킨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표현하고 표현되는 관계인 반면, 가상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함께 행동하는 관계가 된다. 즉 사람들이 이야기를 구동하며, 이야기가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둘째, 플레이어가 위탁한 ‘아바타’의 함의는 은유가 아니며, 유일무이한 개인의 완전한 대표 그 자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이야기는 ‘과거의 시간’을 다루지 않으며, 일종의 ‘현재진행형’이다. 플롯이 아니라 게임 캐릭터의 행동을 이끌어냄으로써 보다 넓은 상상력과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 인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핵심은 게임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게임을 진행하고 어떻게 게임 속에서 게임을 완성하느냐에 딸려 있다. 간단히 말해 오직 게임의 행동만이 독립적인 인간의 자유로운 태도를 설정——즉, 놀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구성한다——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인물의 운명은 더 이상 미리 짜여지지 않고 ‘사건화’된다. 여기서 가상현실 서사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모두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침잠하는 사건이며, 영원히 ‘진행중’인 사건이란 점이 ‘제3의 시간’의 핵심이 된다. 그러니까 제3의 시간이란 영원히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정한 시간이다. 분명히도 ‘제3의 시간’은 우리가 게임의 철학적 함의를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게임은 인간의 이성적 생활의 ‘평안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끼워져 있는 의제이다. 게임이야말로 상징계와 상상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수 없는 진실의 일부를 폭로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게임이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이래 인류의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과 자제, 자율, 자각을 둘러싼 초자아적인 욕망은 게임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배양해왔다.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하는 사람’의 통제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성주의 시대에 잠재된 ‘비인간화의 충동’, 즉 이질적인 노동규율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여기서 ‘비인간화’란 인간의 탈인간화가 아니라, 사회 내에서 규정되는 방식보다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따르는 ‘인간화’, 즉 ‘비사회적 인간화’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철학, 사회학, 인류학 연구 시야에서 ‘게임’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여전히 ‘면대면’의 인간 활동이며, 오늘날까지도 ‘게임’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이다. 전통적 문화비평, 또는 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게임은 ‘서사’의 어떤 도움으로 껍데기를 구축하는 쾌감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일종의 ‘서사’로서 이야기의 시간적 단서들을 수정하고, 플레이어들의 게임 활동 중 ‘사건적 행동’의 문을 열어준다. 문화연구에서 ‘게임’(아케이드, 휘파람 부는 소년, 해변의 서퍼 등)은 청년 저항성의 표징이지만, 게임의 주이상스(jouissance) [7] 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미련(결국 저항은 확실성을 내포한 행위이므로)이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어디까지나 확정적인 행위인데, 게임은 소환되지 않은 신체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경험이다. ‘ 다이성’의 순간과 플레이어로서의 나 제3의 시간에서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일(과거)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현재진행)으로 바뀐다. 즉, 가상현실의 새로운 의미 표현의 물꼬를 튼 것(다의성, multi-paradox)이다. 이와 같은 다이성 속에서 ‘플레이어’가 함유하고 있는 뜻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제3의 시간’은 다이성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양한 가능성과 다양한 불가능성이 충돌의 순간을 교차하게 된다. ‘다이성’은 각종 모순과 역설의 동시발생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고정적 의미, 즉 역사적으로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이해, 혹은 미리 결정된 플롯화 서사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고 심지어 보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전통 서사에서 이야기의 결말(이야기의 끝)과 엔딩(서사의 완료)은 따로 존재한다. 게다가 결과는 이미 일어났지만 엔딩이 여전히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엔딩과 결말의 분립은 독자의 ‘제3의 시간’을 ‘규칙화’, ‘권력화’, ‘질서화’하겠다는 전통 서사의 야망을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서사와 전통적인 서사는 정반대인데, 게임 중의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교묘하게 접목되고 스토리텔링의 시간은 여기에서 보류된다. 따라서 많은 슈팅 게임들이 반전과 평화를 말하지만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이야기 시간을 빼앗고 침잠하여,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제3의 시간’의 살육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엔딩이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제3의 시간’의 반복적인 중첩이 이뤄지는 순간이며, 스토리에서 사망한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플레이해야 게임의 의의가 진정으로 풀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Hearts of Iron IV)’는 “1936~49년 간 세계 어느 나라든 정치·경제·첩보·외교·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기간의 판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플레이어들은 히틀러를 선택해 전 세계를 점령하는 걸 선택한다……. 확실히 그것은 서사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이 ‘제3의 시간’을 규율하는 게 아니라, ‘제3의 시간’이 독보적 시간이 됐음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어디에서 끝나느냐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로 인해 플레이어의 선택권은 ‘제3의 시간’이 되며, 그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의 쾌락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 게임 스토리의 시간과 서사 시간 사이의 모든 의미는 ‘제3의 시간’을 활성화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는 ‘제3의 시간’을 진정으로 텍스트 주도의 시간으로 만들고, 플레이어는 다이성의 주체, 즉 홑따옴표만 있는 “‘나”가 되는 것이다. 홑따옴표 ‘나는 처음엔 실제 사람이지만, 그 후에는 게임 속 캐릭터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와 캐릭터’의 융합체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정의를 구성한다. 즉 ‘나는 ‘제3의 시간’을 게임 속으로 갖고 들어가, 모종의 캐릭터와 융합된다. 이것이 바로 ‘게임 텍스트’를 전통 서사 텍스트와 다르게 만드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서사 텍스트는 작품을 시작하는 첫 글자부터 끝맺는 마지막 글자까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의 앞표지부터 마지막까지의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텍스트는 소위 ‘과학 텍스트(算学文本)’ 즉 기술적 인터페이스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 텍스트 즉 ‘나의 텍스트’라는 두 번째 측면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 텍스트는 게임 제작사가 생산해낸 일부이며, 플레이어와 더불어 플레이를 할 때 ‘제3의 시간’을 가지고 게임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융합된 부분의 모음이다. 다시 말해 게임 텍스트는 동적 텍스트, 즉 플레이의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잉여인(空余人)’ [8] 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 중에 역설적인 경험을 분출해냄으로써 일종의 ‘잉여인’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거벗음(Nudities)>의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체가 순수하게 생물적인 비사회적 신분으로 귀결될 때, 그것은 각종 가면을 쓰고 인터넷상에서 제2, 제3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는다.” 여기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남아있는 부호로서의 신체인 플레이어 ‘나의 쾌락은 시비의 의의가 지배한다. 또 다른 텍스트를 맞닥뜨리면 ‘나는 곧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플레이어가 여전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하는 ‘이드(id)’, 즉 한 사람 마음 속 욕망의 쾌감을 깊숙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나이퍼 엘리트(Sniper Elit)>에서 모든 플레이어는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한데 게임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는 척하는 방식일 뿐이다. 살인은 게임을 방불케 하지만 저격하는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살인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플레이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국외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플레이의 가치를 점수나 장비, 등급을 통과해 창조하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의 표지물이 무의미한 행동(플레이)의 내적 뒷받침일 뿐, 플레이어의 플레이는 그런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강렬한 ‘씽킹 프롬 씽커(Thinking from Thinker)’를 보여준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허무에 대항하는 것이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다음의 측면에서 철저하게 개조됐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으로부터 독자의 욕구가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환원적이고 규정적인 성질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비디오 게이머들이 서사의 시간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제3의 시간’이란 개념으로 보여줬다. 이 지점에서 플레이 행동은 해방됐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불안정한 자아를 지향하고, 케릭터와 안정적 세계 사이에 항구적인 모순과 대립을 지향하게 됐다. 한 사람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때, 그의 심리 상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 게임 속의 불안정한 ‘나로 변모할 수 있다. 그것은 살인의 쾌락, 돌격하는 용감함, 숨겨놓은 비열함, 죽은 동료들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기쁜, 그리고 전우를 구해냈다는 신성함 등을 아우른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다이성의 자아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강림해오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는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불안정성에 대한 갈망으로 구축되어 게임의 현실적인 역설을 형성한다. 게임 규칙에 대한 준수와 세계의 결핍을 플레이할 가능성에 대한 싫증 역시 역설적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순간’은 바로 ‘다이성’의 순간이다. 이 세계는 플레이할 만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규정된 동작을 따라야 하며, 이는 곧 ‘플레이’에 대한 주도적인 욕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할 수 있고, 규정적인 것에 대한 파괴이며, 동시에 규정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여러 역설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역설적인 현실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의 얼굴은 ‘다이성’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것은 플레이어로서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 그것은 ‘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 분해하고, 이미지 차원에서 주변을 맴도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인 원칙을 게임의 정신 활동 속에 포함시킨다. ‘타자와 나’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주체의 안정적인 함의를 제거하여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생명력있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시킨다. 플레이어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게임산업은 비로소 천편일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비인간/폐인’이라는 의식을 고수하면서 인간의 역사적 활동에 대해 ‘현장에 내가 없는 척’ 가장하는 태도를 취해 가상현실 경험과 에고의 장벽에 빠져들게 한다. 디지털 세계의 파괴자로서 그것은 파괴력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역사적 현실세계의 유령으로써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것 같은(摇摇欲坠) 등불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침묵하고 있지만, 게임은 시끄럽게 울리기도 한다. 게임 세계가 닫히는 순간 그것은 크게 소리를 낸다. *본문출처 : 《난징사회과학(南京社会科学)》 2023년 제3기에 실린 본문은 1만3천 자로 이를 축약하였음. [1] 역주 : 원문의 ‘多异性’은 저자가 창안한 학술 어휘로 보인다. 영어로 하면 multi-difference 정도의 뜻을 갖는데, 이러한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어 한자 독음 그대로 직역했다. [2] 国家社科基金重大项目“虚拟现实媒介叙事研究”(21&ZD327) [3] 역주 : 국내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을 소개하는 텍스트들은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이야기(거대서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각각 ‘故事’와 ‘叙事’로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문의 故事는 ‘이야기’로, 叙事는 ‘서사’로 번역하였다. [4] 역주 : 다니엘 벨은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1960년)을 통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했고, 《탈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Post-Industrial Society)》(1973년)를 통해 '제조업 경제'에서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로의 전환을 전망했다.(위키피디아 참고) [5] 역주 :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창안한 ‘ti con zero’를 지칭한다. 그의 단편소설집 <티 제로(ti con zero)>(1967) 속 단편들은 수학과 시적 상상력이 혼합된 시공간과 우주의 진화를 다룬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1972)은 기존 이야기들의 시간중심 서사를 무너뜨리고, 공간 중심의 서사를 펼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되, 그 안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 내용을 담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위키피디아, amazon.com 등 참고) [6] 역주 : 볼프강 이저는 독일의 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로, 독자반응비평 이론을 연구했다. 이저에 따르면, 구조화된 행위로서의 독자의 역할은 독자가 텍스트 구조를 상상 속으로 수렴하게 하여 텍스트 구조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독자가 읽기 과정에 참여할 때 텍스트 구조가 연결되고 살아나며, 독자는 역사적 현실과 자신의 경험, 독자로서의 역할 수용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7] 역주 : 저자는 라캉 이론을 통해 게임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이상스는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 및 언어상징 너머의 전복(顚覆) 충동이다. 주이상스는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이때 주체는 분열적 상황에 빠지고, 대타자를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8] 역주 : 원문의 空余(공여)는 ‘남아돌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空余人을 ‘잉여인’으로 번역했다. Tags: 번역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후원 경제’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중심으로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RPG 게임을 꼽으라면, 대다수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꼽을 것이다. 여론은 <발더스 게이트 3> 쪽이 우세다. <스타필드>는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고 홍보에 힘입어 많은 판매량을 올렸지만, 게임 디자인에서 실망스러운 지점도 있어, 베데스다식 RPG 게임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을 받았다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풍부한 상호작용과 롤플레잉으로 RPG 장르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으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과 함께 올해의 게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 Back ‘후원 경제’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중심으로 15 GG Vol. 23. 12. 10.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RPG 게임을 꼽으라면, 대다수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꼽을 것이다. 여론은 <발더스 게이트 3> 쪽이 우세다. <스타필드>는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고 홍보에 힘입어 많은 판매량을 올렸지만, 게임 디자인에서 실망스러운 지점도 있어, 베데스다식 RPG 게임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을 받았다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풍부한 상호작용과 롤플레잉으로 RPG 장르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으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과 함께 올해의 게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게임 그 자체보다는, 두 게임이 대표하고 있는 2020년대 RPG 게임, 나아가 ‘전통적인 자본’이 지배하는 고예산 AAA 게임과 킥스타터와 얼리 액세스 같은 ‘후원 경제’에 기반한 중저예산 게임 개발 과정과 자본 경제 현상을 다루고자 한다. 게임 커뮤니티 내 여론을 살펴보면, <발더스 게이트 3>를 마치 <스타필드>를 위시한 AAA 게임과 똑같은 제작 과정을 거친 게임인 것처럼 비교하는 의견이 많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발더스 게이트 3>의 창의성과 풍부한 디테일 칭찬하면서, <스타필드>를 위시해 어딘가 부족하게 나온 AAA 게임이 <발더스 게이트 3>보다 태만했으며 최종적으로 AAA 게임 제작진이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판하는 의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발언들이 좋은 게임에 대한 갈증이라던가, ‘좀 더 잘 나올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라는 당연한 감정에서 비롯된 발언이겠지만 이렇게 비교하고 비판하는 것엔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같은 장르에 속하고, 화제작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는 전혀 다른 방법론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세부적인 게임 디자인 역시 1대 1로 비교할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필드>는 거대 투자 자본의 지원으로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방향성으로 구축된 생산품이라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활성화된 후원 경제에 힘입어 만든 소수 취향을 노린 공예품에 가깝다. 물론 생산품과 공예품에는 어떤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취향에 기반한 ‘후원 경제’의 개입 여부가 어떤 중요한 차이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스타필드>는 대자본의 투자로 거대한 상품을 만들려는 성격이 강한, 전형적인 AAA 게임이다.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25년 만의 새 IP라는 점을 강조한 토드 하워드의 인터뷰라던가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 쇼 등지에서 보여준 강력한 홍보 정책은 <스타필드>가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제니맥스 미디어, 마이크로소프트에 어떤 가치를 지닌 ‘상품’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월 가의 투자자들 역시 이 게임에 거는 기대가 컸을 것이다. 한편 <스타필드> 제작진은 정보 공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디벨롭 컨퍼런스 2020에서 이뤄진 토드 하워드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는 “<스타필드>의 정보 공개와 홍보는 출시 직전 짧고 빠르게 이뤄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스타필드>가 폐쇄적인 환경에서 제작되고 피드백을 받아왔다는 걸 보여준다. 이처럼 대다수의 AAA 게임은 개발 과정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으며, 피드백을 받는 과정 역시 내부 QA라던가 체험판 같은 곳으로 한정시켜 자신을 신비화한다. 그리고 발매일이 다가올수록 이런 신비화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게임에 대한 호기심과 구매 의사를 증폭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동시에, 오해와 실망을 낳을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스타필드> 발매 후 이어진 거센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는, AAA 게임이 취하는 일방적인 개발이 개발진 (내지는 임원진과 주주)의 내부 예측과 수요층의 기대랑 어긋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스타필드>를 기대하고 구매한 유저 대부분은 풍부한 요소들로 가득한 우주 탐사와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특유의 노련한 RPG 디자인과 결합한 게임을 기대했다. 그러나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가능한 콘텐츠를 전부 구현하기엔 AAA 게임 제작 체계상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대대적으로 단순화하고 가지치기하는 방법을 취했다. 게임의 핵심이자 가장 논란이 되었던 우주 탐사 디자인이 대표적이다. <스타필드> 제작진은 행성 지형의 절차적 생성이라던가, 이착륙/이동 과정의 간소화 같은 다양한 ‘간소화’를 동원해 우주라는 공간의 크기는 유지하되, 만들어야 할 콘텐츠 가짓수는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스타필드>를 기대한 사람들이 원했던 방법론이 아니었고, 게임에 대한 멸칭과 제작진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돌아왔을 뿐이다. 사실 <스타필드>는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유일한 예측 실패작은 아니다. 이미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폴아웃 76>에서 오픈 월드와 온라인 게이밍, 기존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RPG 게임 간의 결합이라는 무리한 전략과 현장 관리의 실패로 발매 초기 거센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스타필드>는 <폴아웃 76> 때보다는 비교적 긴 시간과 공력을 들여 개발된 게임이라 상황이 낫긴 하다. 하지만 굳어진 AAA 게임의 일방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개발 과정이 유저의 기대와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런 과정을 쉽게 바꿀 수 없는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스타필드>에 대한 밋밋한 반응은 그 점에서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개발 노선에 재고가 필요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 3>는 반대로 ‘후원 경제’의 지원받아 개발 과정을 공유하면서 진행한 게임이다. 우선 이 게임은 발매일까지 베타 테스트가 이뤄지던 얼리 액세스로 구매할 수 있었던 게임이었다. 킥스타터 같은 크라우드펀딩이 동원된 게임은 아니지만 (라리안 스튜디오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이 성공한 이후 크라우드펀딩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완성될 때까지 이뤄질 게임 개발 과정을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팬덤에게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베타 테스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공식 커뮤니티에서 게임 유저로서 제작진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제작진 역시 커뮤니티 업데이트를 통해 개발 진척과 변경 사항을 공개하기도 했다. 요컨대 <발더스 게이트 3>의 개발 과정은 커뮤니티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지 가능한 과감한 개발 과정이다. 여기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얼리 액세스 3년 동안, TRPG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유도와 콘텐츠를 할 수 있는 한계치 내에서 최대한 구현하려고 애썼다. 이런 노력으로 완성된 높은 자유도는 이미 많은 리뷰와 플레이 영상들이 소개하고 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발더스 게이트 3>는 후원자들이 원하는 게임 디자인을 위해 모든 자원이 총동원되었고, 그 결과물에 대다수가 흡족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며, 흥미로운 결과다. 게임이 제공하는 시스템 내에서 플레이어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개발 노선은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게임을 만드는 쪽이나 플레이하는 쪽이나 복잡하게 여길만한 구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스타필드>랑 달리 주류화된 CRPG가 아닌 (시점 변환을 제공하지만) 고전적인 탑다운 RPG 게임이라는 점 역시 거대 자본한테서는 근심을 샀을 요소였을 것이다. 여기다 라리안 스튜디오 전작들보다도 더욱 방대해진 이야기와 세계관, 많은 이벤트 신을 요구하는 게임이었기에 개발 난도가 만만치 않았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와 라리안 스튜디오는 명백히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게임을 개발했으며, 성장 과정 역시 시대적 차이점도 있다.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개발 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1990년대부터 정착한 전통적인 게임 스튜디오의 발전 과정과 거대 IT 기업에서 볼 수 있는 월가 투자자본과 연계된 인수합병 과정을 밟아오면서 커진 회사다. 베데스다가 RPG 제작사로 시작한 1990년대 초중반은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는 ‘경제’를 형성할 정도는 아니었고, ‘셰어웨어’로 대표되는 대안적인 유통/발매 체계는 물리 매체와 게임 소매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인터넷 환경의 한계로 ‘셰어웨어’는 게임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게임 일부를 보여주고, ‘정식판’의 구매를 유도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유저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게임을 개발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개인 제작에 머물고 있던 시절이었다.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 역시 기존 회사 경영/재정 관리 방식에 통달한 CEO 로버트 올트먼과 제니맥스 미디어가 개입하면서였다. 지금의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월가로 대표되는 거대 기업과 투자자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다. 반대로 라리안 스튜디오는 기존 회사 경영이나 상장하고는 관련 없이 설립되고 운영되는 회사다. 우선 제이슨 슈라이어의 기사 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라리안 스튜디오는 최고경영자이자 디렉터인 스벤 빈케와 그의 아내가 소유한 개인 회사에 가깝다. 그렇기에 라리안 스튜디오는 게임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주주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슈라이어는 동시에 이런 구조의 회사는 위험 부담 역시 크다는 점도 지적했다. 실제로 디비니티 시리즈 첫 작품인 <디바인 디비니티>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후속작 <비욘드 디비니티> 개발 당시엔 회사 인원이 3명 밖에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비화가 있다. 그럼에도 라리안 스튜디오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성공 이후로도 개인 기업 체제하에 특정 장르와 취향의 게임을 만들고 있다. 이 점에서 있어서 라리안 스튜디오는 중소기업 규모 하에 꾸준히 특정 취향의 JRPG를 만들어 흑자를 내는 니혼 팔콤하고도 비슷하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상장 회사 체제하의 다작하는 니혼 팔콤과 달리, 라리안 스튜디오는 크라우드펀딩 같은 ‘후원 경제’의 도움이 컸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라리안 스튜디오를 견인한 ‘후원 경제’의 양태다: 라리안 스튜디오의 지지 기반은 흔히 볼 수 있는 과거의 영광 재현보다는 순수한 장르 매니아들의 입소문과 지지에 가까웠다. 사실 라리안 스튜디오는 과거의 영광이라고 할만한 게 별로 없었던 회사였다. <디비니티> 초기작은 소소하게 성공한 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지 기반은 미약했던 편이다.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킥스타터로 대표되는 ‘후원 경제’ 형성기였던 2010년대 초중반에 등장한 프로젝트였지만, 정작 펀딩 당시엔 (<발더스 게이트>를 배급한 인터플레이 출신도 포함된) 기존 선점자들에게 밀려서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결과적으로 고전 RPG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 데 성공하면서, 선점자들보다 훨씬 더 ‘후원 경제’ 붐을 적극적으로 타고 고유의 팬층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팬층 형성은 여타 크라우드펀딩을 받은 과거 영광을 누렸던 개발자들과 달리 영광스러운 과거가 없었기에, 더욱 과감하게 재해석할 수 있었다는 점도 컸다. 요컨대 라리안 스튜디오는 과거에 가진 게 별로 없었기에, 시대의 조류에 얻을 게 많았던 포지션이었다. 사실 <발더스 게이트 3>는 ‘후원 경제’로 성장해 어느 정도 체급을 키운 회사의 거대 프로젝트에 가깝다. 새로 설립된 지사를 제외하고도 본사 인원만으로 200명이나 동원했으니,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만들던 시절의 라리안 스튜디오하고 같다고도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많은 게임 커뮤니티의 조롱감이 되었던 “그들은 운이 좋았다”로 요약할 수 있는, 제이슨 슈라이어나 자비에 넬슨 주니어 를 비롯한 업계 사람들의 주장도 틀린 것도 아니다. 슈라이어의 지적대로 개발 방향성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디 게임 제작사는 라리안 스튜디오만큼 자본이나 인력을 투입할 수 없을 것이며, 반대로 라리안 스튜디오 이상으로 자본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같은 개발사에서는 이런 기획이 통과될 가능성이 극히 낮다. 통과되더라도 상업적 타협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발더스 게이트 3>는 프랜차이즈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라리안 스튜디오의 방법론에 신뢰를 보냈기에 가능했던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이랑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의 얼리 액세스는 거의 완성된 게임을 다듬어가고 보충해가는 비교적 전형적인 얼리 액세스였다면, <발더스 게이트 3>의 얼리 액세스는 무모할 정도로 긴 시간을 들여 팬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어 간 쪽에 가깝다. 물론 얼리 액세스 스케줄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었는지 발매 후 내정되어 있던 콘텐츠가 삭제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프랜차이즈 소유주자 투자자로서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라리안 스튜디오에 많은 신뢰와 편의를 봐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더스 게이트 3>의 ‘후원 경제’를 신뢰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수용한 개발론이 대대적으로 성공했다는 점은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라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발더스 게이트 3> 개발 과정에 적극적으로 돈을 내고 참여한 계층은, 거대 투자자본의 냉정한 시장 분석에 따르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거금을 투자하기엔 손실이 따른다고 판단한 게임 장르의 팬들이었다. 이 팬들은 단순히 고전 RPG 장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하이퍼 FPS, 2D 플랫포머, 공룡 시뮬레이터 등… 200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ESD와 얼리 액세스, 크라우드펀딩의 등장, 인디 게임 시장의 체계화는 거대 투자자본에 소외당한 ‘팬덤’들이 대안적으로 자본과 경제를 형성하고 지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왔다. 얼리 액세스를 기반으로 커뮤니티와 소통하며 진행하는 개발 방법도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플래닛 코스터>를 비롯해 사례들이 나오고 있었다. <발더스 게이트 3>의 대대적인 성공은 (자신들을 믿고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달라는) ‘후원 경제’의 파급력이 인디와 팬덤의 영역을 넘어서 주류의 영역으로 올라왔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거대 자본의 투자와 베테랑 제작사의 야심에 차 보이지만 실은 안전하게 검증된 개발 노선으로 구성된 <스타필드>가 좋은 평을 듣지 못한 것과 대조해보면, 게임 유저들이 AAA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거대 자본이 판을 짠 안전한 AAA 게임 개발론에 진력을 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후원자들은 르네상스 시절 귀족들이 예술가나 공예가들에게 수공예품을 주문 제작하듯이, 게임 개발사가 돈 걱정하지 않고 후원자 자신들의 취향을 반영해준 게임을 만들어주길 원한다. 다만 르네상스 귀족 후원자들의 후원이 계급 권력을 통해 예술품이나 공예품을 독점하면서 특권을 누리기 위한 도구였다면, 이 새로운 후원자들의 후원은 공통된 취향을 지닌 익명의 소비자들이 기존 자본 권력에서 소외된 취향을 복권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후원 경제가 항상 긍정적인 현상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며, <발더스 게이트 3>의 개발 과정은 근래 비디오 게임 개발 역사 중에서도 보기 드문 실험이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라리안 스튜디오가 향후 만들 게임에서 이 실험을 계속 택할지는 알 수 없다. 차기작 개발에 6년이나 투자하고 싶지 않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 개발을 하고 싶다는 스벤 빈케의 인터뷰 를 참조하면, 라리안 스튜디오의 차기작은 <발더스 게이트 3> 같은 개발 노선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저 운과 상황이 좋았던 짧고 행복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후원 경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투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더스 게이트 3>의 성공은 2023년 비디오 게임계의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게임 산업 전체가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은 길을 가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몇몇 혁신가들에게는 탐구해볼 만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 게임제너레이션::필자::단위안, 但愿

    쓰촨사범대학(四川师范大学) 문학원 문예미학 박사. 단위안, 但愿 단위안, 但愿 쓰촨사범대학(四川师范大学) 문학원 문예미학 박사. Read More 버튼 읽기 <바이페즈(双相)>와 게임의 신체화 2022년 11월 중순, 랩시드(西山居SEED实验室, 시산쥐SEED실험실)에서 인큐베이팅한 중국산 공익게임 <바이페즈>가 정식 출시됨으로써, 국내 최초 게임 형식으로 양극성 장애[역주: 조울증]를 다룬 게임이 됐다.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인 양극성 장애는 전 세계에 약 6천만 명의 환자가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이찬중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즐기는 것과 더불어, 지금의 PC방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찬중 이찬중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즐기는 것과 더불어, 지금의 PC방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게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한 놀이 문화로 통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오락이 가능한 값비싼 콘솔기기로 시작해, PC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정 내 기초 게임 환경 구축이 가능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거리와 관계없이 편하게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없앴던 비범함에 대해서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2024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노르웨이의 ‘마츠 스틴’라는 게이머의 삶에 주목한다. 작품은 작년 한 해 동안 선댄스 영화제에서의 수상과 더불어 여러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며 유명세를 얻었고, 현재는 OTT서비스 ‘넷플릭스’와 계약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있다. < Back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없앴던 비범함에 대해서 23 GG Vol. 25. 4. 10.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Tags: 다큐멘터리, WOW, MMORP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15년 만에 다시 돌아온 <어이쿠, 왕자님>, 게 섯거라 이놈아!

    버틀러는 이러한 패러디적인 창조성을 원본이라는 것 자체도 원래 본질적으로 원본인 것이 아니라 원본이라고 가정되는 이상적 자질을 모방을 통해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원본이 동시에 모방본이라는 점에서 원본과 모방본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모방본도 원본도 원본의 상상적 특성들을 모방하는 것이고, 오히려 모방본이 원본의 모방적 자질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면 이제 오히려 모방본이 원본에 선행한다는 역설적인 생각까지 가능해진다. 이는 원본이 가진 창조성의 가치와 패러디의 모방본이 가진 창조성의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오히려 패러디 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모방본이 원본에 선행하여 더 높은 창조적 위치를 점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 Back 15년 만에 다시 돌아온 <어이쿠, 왕자님>, 게 섯거라 이놈아! 10 GG Vol. 23. 2. 10. 〈프린세스메이커〉라는 게임을 아는가? PC용 게임으로 시작하여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랑받아 온 이 게임은 1991년 최초로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해낸 게임이다. 이 새로운 장르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귀엽고 밝은 ‘소녀’다. 게임을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의 딸을 다양한 방식으로 육성시킬 수 있다. 물론 딸이 ‘프린세스’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면 우리는 우리가 짜놓은 스케줄을 따라 움직이고, ‘아버지’라고 부르며 밝게 웃어주는 딸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아마도 이후 〈프린세스메이커〉 시리즈가 연이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게임 플레이를 통해 발생하는 딸과의 다양한 정서적 감응 때문이 아니었을까. 게이머들은 플레이를 통해 딸과 대화를 나누기도, 바캉스를 즐기기도 하며 8년동안 자라나는 딸에게 애정, 슬픔 혹은 (내가 원하는 엔딩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 등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의 발생은 게임의 이야기 진행 방식이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게이머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게이머는 적어도 마우스를 클릭하는 등의 아주 작은 행동을 통해, 게임의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는 우리가 행위하고 조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나 ‘친밀감’과 같은 정서적 교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그러나 나는 이 게임이 재밌으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게임 안으로 들어간 게이머인 ‘나’는 내가 사회적으로 주체화한 성별과는 무관하게 딸이 ‘아버지’라 부르는 걸 묵과해야했던 경험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린세스메이커〉는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딸을 키우는’ 게임이다. 내러티브상으로는 여성 게이머를 고려하지 않은 ‘남성적’ 게임이었다는 의미이다. 여성 게이머는 게임 밖에서는 여성이지만 게임 안에서는 ‘딸을 잘 키워 왕자를 만나도록 애쓰는 아버지’로 남아야 하는 것이〈프린세스메이커〉를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의 역설이다. 심지어 〈프린세스메이커〉의 엔딩 중 하나엔 그 딸이 아버지와 결혼을 원해 아내가 되기도 한다. 아니 내 딸이 나(시스젠더 여성+남성애자)와 결혼을 원하다니. 이 얼마나 이성애-전복적인 상황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프린세스메이커〉를 통해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접했던 많은 여성들이 이미 이 당시 탈이성애를 경험하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 딸이 자라면서 다양한 경험을 시도하는 것(다이어트를 하거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풍류환을 먹고 가슴이 커진다던가 하는)이 나 자신을 대상화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이 시리즈가 묘하게 불편해졌다. 그렇게 10대가 가고 20대에 접어든 나는 2007년 우리나라의 몇몇 아마추어 여성 게이머가 〈프린세스메이커〉의 성역할을 전도시킨 일종의 패러디 게임 〈어이쿠 왕자님∼호감가는 모양새〉 (이후 〈어이쿠 왕자님〉)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블로그를 통해 접했다. 이 게임은 딸이 아닌 아들을 키우는 형식이고, 게임 속 주체를 아버지/어머니 중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이쿠 왕자님〉은 단순히 〈프린세스메이커〉 패러디로서의 특성만 갖는 것이 아니었다. 이 게임은 인디문화의 속성을 공유하는 게임인 동시에 남성 동성애물을 표방한다는 의미의 동인(同人)게임 1) 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이 게임이 PC 게임으로 발매되고 드라마시디까지 제작되는 걸 보면서 굉장한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는 이를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들을 찾기 시작해 논문을 썼다. 그게 무려 15년 전이다. 그런 〈어이쿠 왕자님〉이 2023년 크라우드펀딩으로 다시 돌아왔다. 심지어 펀딩율 1200%를 달성하고, 오디오 드라마까지 풀로 착장한 채. 〈어이쿠 왕자님〉은 단순한 인디/BL 게임으로 호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어이쿠 왕자님〉과 〈프린세스메이커〉의 첫 번째 차이점은 프린세스메이커 시리즈의 커다란 틀로써 작용하고 있었던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변용하여 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 게이머의 젠더 트러블 요소로 작용했던 '아버지 되기'에서 선택적 사항을 더한 것으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되기를 통해 여성 게이머로서 느낄 수 있었던 젠더 트러블적 요소를 제거하여 여성 게이머의 주체성을 부각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어이쿠 왕자님〉은 〈프린세스메이커〉가 가진 남성적 요소들을 제거하여 원작과는 다른 의미를 게이머에게 전달한다. 여기서 남성적 요소들이란 남성 게이머가 〈프린세스메이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요소, 즉 여성을 보는 대상으로 하며 남성의 시각을 주체로 하여 얻는 쾌락적 요소를 말한다. 〈어이쿠 왕자님〉은 〈프린세스메이커〉를 〈프린세스메이커〉로 전복시킴으로써 여성 게이머들에게 보는 대상을 남성으로 치환시키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원작이 가진 의미를 완전히 전복한 것으로 남성을 위한 게임에서 여성을 위한 게임으로 의미화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린세스메이커〉와 〈어이쿠 왕자님〉이 지닌 가장 큰 차이점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차이점을 복합적으로 변용하여 이성애적인 젠더체계의 틀을 벗어나 남성 성장서사를 남성 동성성애 서사로 패러디 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이쿠 왕자님〉은 부성애와 모성애가 선택적으로 존재하는 게임적 장치와 더불어 남성동성성애의 서사로 패러디함으로써 당시 소수였던 여성 게이머들뿐만 아니라 이를 플레이하는 게이머 모두에게 원본과 원본을 넘어서는 패러디의 의미를 플레이를 통해 경험하게 했다. 인디게임이 일반적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문화, 주류문화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난 게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어이쿠 왕자님〉 인디게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인디게임의 생성 동기와 존립 근거가 새로움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이쿠 왕자님〉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창조성은 단순히 개인의 주관적인 기회가 아니라 사회구조와 그 구조내의 행위자와의 충돌, 그리고 그러한 충돌 과정에서 정체성을 생성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의 변화와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면서 기존 질서에 대한 대안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쿠 왕자님〉을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들은 기존의 사이버 공간에서 이미 원본을 동성성애화하여 패러디한 2차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세대였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기존의 텍스트 부분 및 내용이나 형식을 변형하고 확대하며 생략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콘텐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데 익숙했던 것이다. 특히 게임이라는 영역은 여전히 생산이 제한된 영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의 지속적인 생산경험을 통해 여성 게이머들은 자신이 게임 유통과 생산 과정에 진입이 가능하다는 생산자적 자율성과 창조성을 획득하여 〈어이쿠 왕자님〉이라는 게임을 생산해낸 것이다. '인디 집단'자체가 수년간 축적해둔 일상적 생산적 주체의 경험은 고착화된 구조나, 단계가 아닌 잠재적으로 단순한 수용자, 게이머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진화를 통한 창조적 생산자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게 한다. 특히 게임이라는 매체는 실제와 허구 사이의 경계가 붕괴되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게임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새롭게 자기표현을 찾는 능동적 생산자를 관객으로부터 유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몰입하고 플레이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 게임이라는 공간에서 실제 본인의 성별과 상관없이 스스로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만들고, 억제된 욕구 표현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만들며 주체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 게이머들은 자신들의 젠더를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생물학적 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들은 앞서 논의한 다양하고 새로운 주체를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어이쿠 왕자님〉에는 풍자와 익살적인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게임의 배경은 시공간이 모호한 중세 판타지 풍의 바이케 왕국이다. 바이케 왕국을 거꾸로 읽으면 게이바다. 또한 바이케 왕국에 내려오는 전통춤으로는 바닥에 꽂힌 길다란 봉 주위를 돌며 추는 매우 관능적인 춤이라 할 수 있는 'bar dance'(봉춤)이 있으며,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주최하는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현재 왕위는 노므헨 국왕이 갖고 있으며, 왕족 '맨슨(이명박)'이 등장하여 해저도로를 건설하자고 굳건히 이야기 하는 이벤트는 당대의 정치상황을 절묘하게 패러디 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어이쿠 왕자님〉의 패러디 요소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의 패러디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킨다. 패러디의 성립조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복과 치환, 다른 의미 담기를 통해서 단순하게 익살과 풍자의 모방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어이쿠 왕자님〉은 기존 텍스트의 담론적 권위나 지위에 의존하여 기존 텍스트의 의미체계와는 전혀 다른 의미체계를 지니는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한다. 패러디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기존 텍스트의 병치, 재구성, 해체를 이용한 담론효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대상에서의 보는 주체로의 여성, 이성애중심의 젠더체계의 전복이라는 이중적 패러디를 생산하면서 더욱 심화된다. 이러한 이중적 패러디는 모방의 한 형식이지만 동시에 패러디된 작품을 희생시키지 않는 다는 점에서, 그리고 '차이'의 창조성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유희적이고 해체적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라도 말할 수 있다. 버틀러는 이러한 패러디적인 창조성을 원본이라는 것 자체도 원래 본질적으로 원본인 것이 아니라 원본이라고 가정되는 이상적 자질을 모방을 통해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원본이 동시에 모방본이라는 점에서 원본과 모방본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모방본도 원본도 원본의 상상적 특성들을 모방하는 것이고, 오히려 모방본이 원본의 모방적 자질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면 이제 오히려 모방본이 원본에 선행한다는 역설적인 생각까지 가능해진다. 이는 원본이 가진 창조성의 가치와 패러디의 모방본이 가진 창조성의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오히려 패러디 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모방본이 원본에 선행하여 더 높은 창조적 위치를 점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1) 현재는 동인이라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고, BL(Boys’ Love)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인은 사실 일본에서 수입되어 처음에 ‘동인지’라는 소수의 문인들이 창작 활동을 위해 만든 문예잡지에서 유래되었다. 그 이후 한국에서 동인은 아마추어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게 되었고, 주류 콘텐츠가 될 수 없었던 남성동성애서사 또한 동인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자리잡게 되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장민지 덕후 진화론(덕후는 정신적/육체적/기술적으로 진화한다)을 믿는 팬-미디어 연구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박사논문〈유동하는 세계에서 거주하는 삶 : 20~30대 여성청년 이주민들의 집의 의미와 장소화 과정〉으로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 학회 학술상, 2016년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환상〉으로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방송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 [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난이도 – 숙련도 길항에 관여하는 데이터값들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력이 1천만!’, ‘체력이 500만!’같은 숫자 크기가 아니다. 100만에서 99만 9,999를 뺀 1이라는 값, 난이도와 숙련도가 주고받은 그 연산의 결과값이 길항의 의미이자 결과물이기에 체력과 공격력은 동시에 하향될 수 있다. 최근 모바일게임 광고에서 ‘플레이어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 보여주는, 막대한 공격력을 뽑아내는 장면이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 플레이를 통해 정말 강해지는 것은 아마도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는 숙련도뿐일 것이다. < Back [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06 GG Vol. 22. 6. 10. 디노미네이션 오랜 와우저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0년대 초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60레벨 만렙 체력은 대략 4천 대 근처였다. 캐릭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풀 파밍이 완료된 탱커도 1만을 넘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좀 지나 같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체력은 지나간 시간과 비례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2014년 출시된 확장팩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에 이르면 10만 단위의 체력도 보기 드물지 않은 상황을 맞았는데, 이때 블리자드는 능력치 압축이라는 이름의 디노미네이션을 결정했다. 디노미네이션은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스탯들을 동일한 비례식 하에 전반적으로 낮추어 잡는 변화를 가리킨다. 특정 패치를 기점으로 게임 내의 모든 스탯들, 레벨, 캐릭터의 체력과 공격력, 마나량과 회복량, 몬스터의 체력과 공격력 같은 전반적인 수치가 일제히 하향조정되었다. 물론 상호작용하는 모든 수치가 함께 하향된 터라 전체적인 게임의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언제 하향했냐가 무색하게 이어지는 패치를 통해 다시금 게임 내의 모든 수치들은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게임 플레이 속에서 플레이어는 지속적으로 과거보다 더 강한 적과 맞서 싸운다는 감각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이룬 승리는 경험치와 레벨, 아이템이라는 보상을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누적되며,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는 또다시 다가오는 더욱 강한 도전에 맞서는 구조 안에 선다. 플레이 이력이 서버에 기록되며 마치 플레이어의 소유물인 것처럼 인식되는 온라인 기반의 게임이 지속되는 한, 이 영원한 우상향의 그래프는 지속될 것이다. 체력과 기회 디지털게임에서 체력의 근원을 거슬러올라 생각해보면 ‘기회’라는 개념에 맞닿을 것이다. 체력 개념이 보편화하지 않았던 초창기 아케이드 시절에도 난이도 – 숙련도의 대결 안에는 도전기회라는 규칙이 존재했었다. 제시된 난이도를 향한 도전의 의미는 실패의 가능성이 있을 때 발생한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 외계인 무리가 지상에 닿을 때, 〈팩맨〉에서 식탁보 유령에게 붙잡힐 때, 〈테트리스〉에서 쌓인 블록이 천장에 닿을 때 맞는 게임오버의 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플레이어는 분투하며 클리어를 향해 달려나간다. 한 판의 플레이는 그러나 한 번의 기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소프트웨어마다, 혹은 아케이드나 콘솔 기기의 설정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한 판의 게임에는 일정 숫자의 도전기회가 주어졌다. 잔기, 생명 등으로 표현되었던 이들 도전기회는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었던 간단한 숫자의 기회였고, 기회의 상실은 작은 규모의 리스타트 – 플레이가 이어지지 않고 실패 후에 다시 리트라이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체력 개념은 기회의 부여 차원에서 이 실패 후 리트라이를 좀더 연속적인 감각으로 바꿔낸다. 이를테면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골든액스〉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1개의 생명당 총 3개의 체력 바를 가지고 나오는데, 적의 공격을 받으면 체력 바가 하나씩 줄어들고 체력 바가 0이 되면 하나의 라이프가 날아가는 방식이다. 이때 도전기회, 다시말해 허용되는 실수의 수는 체력바 X 생명 수로 나타난다. 3개의 생명을 가지고 시작했다면 클리어까지 허용되는 피격의 수는 총 9번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라이프는 그 실패의 결과 면에서 연속성이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피격당했지만 생명이 줄지 않는 경우에는 말그대로 체력이 깎이면서 나타나는 약간의 경직과 넉백 정도에 머무르지만, 캐릭터가 사망한 경우에는 아예 새로 캐릭터를 출현시키면서 생명을 깎는 연출을 보여준다. 같은 기회지만 체력  생명으로 이어지는 점층적인 구조를 통해 실패의 패널티는 다르게 기능한다. 〈파이널 파이트〉에 이르면 이제 체력은 바bar로 표시된다. 적의 공격은 모두 동일한 1회의 피격이 아니라 적과 공격의 유형에 따라 다른 수치의 피해를 플레이어의 체력에 입히는데, 이때부터는 그 피해량을 숫자로 매기는 대신 일종의 인포그래픽인 체력바를 통해 표현한다. 플레이어는 정확히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히고 입는지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너구리〉에서 한 번만 압정을 밟아도 게임오버되던, 가벼운 숫자의 도전기회는 체력 바라는 표현의 시대에 이르면서 점차 실패와 도전의 관계를 좀더 연속적인 변화량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동시에 보너스 점수 등을 통해 추가 도전기회를 받을 수 있었던 방식 또한 체력 바의 시대에는 숫자로 표기되는 점수 대신 음식, 약물과 같은 체력과 상관관계를 이루는 아이템을 획득해 받은 피해를 복구하는 은유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체력 바의 시대에 이르면 도전과 기회는 횟수가 아닌 게이지로서 좀더 연속적인 형태의 기회로 변화한 것이다. 방향성이 아니라 표현의 다변화 횟수로서의 기회가 체력이라는 형태의 연속적 기회로 변화한 데에는 일정부분 컴퓨팅 기술의 발전 또한 기능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서두에 언급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디노미네이션 사례와도 통하는데, 디노미네이션의 이유로 당시에는 과도하게 상승한 수치 때문에 개별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8비트 시대의 컴퓨터로는 아무래도 연속적인 기회로서의 체력 연산보다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규칙이 우선했을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디지털게임의 규칙은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TRPG와 같은 아날로그 게임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이를테면 대전격투 게임에서 타격과 피격의 순간 각각의 행동에 맞추어 공격력과 방어력을 계산해 실시간으로 반영해 결과에 반영하는 게임규칙을 가능케 하면서도 동시에 연산력과 같은 제한에 의해 생명, 체력과 같은 다른 양식의 도전기회를 규칙화하는 영향력을 동시에 발휘한다. 그러나 이 변화의 방향은 반드시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당장 오늘날의 전투형 게임들은 도리어 방대해진 체력량을 새로운 연출요소로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타격감(이 개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을 위한 연출에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꽂아넣는 피해량이 막대한 숫자로 표기되는 방식이 들어간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체력 바는 자세히 보면 전체 체력 바의 총량을 100%의 길이로 두되, 레벨업과 아이템을 통해 향상되는 체력의 수치를 체력바 사이에 일정 단위로 표기되는 눈금을 통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MMORPG에서 나타나는 수치의 우상향도 다른 장르에서는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매 게임마다 다시 리셋되는, 서버에 레벨과 경험치가 축적되지 않는 순환형 시간에 놓인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플레이할수록 나의 캐릭터가 강해진다’는 전제가 희미해지기 때문에 체력의 절대값은 반드시 우상향하지 않으며 고정된 최대값 – 최소값의 범주 안에 위치한다. 이처럼 도전기회라는 규칙은 기술과 환경, 노하우의 변화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기보다는 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확보하며 다양화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강해지지 않는다 서두에 언급한 디노미네이션의 사례와, 세부적인 규칙연산의 결과를 플레이어에게 데이터로 보여주느냐 혹은 연속적인 기호를 통해 보여주느냐의 문제의 기저에는 결국 난이도 – 숙련도 길항이라는 디지털게임의 근본적인 갈등구조 자체에는 크게 변화하지 않아 왔다는 전제가 있다. 난이도 – 숙련도 길항에 관여하는 데이터값들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력이 1천만!’, ‘체력이 500만!’같은 숫자 크기가 아니다. 100만에서 99만 9,999를 뺀 1이라는 값, 난이도와 숙련도가 주고받은 그 연산의 결과값이 길항의 의미이자 결과물이기에 체력과 공격력은 동시에 하향될 수 있다. 최근 모바일게임 광고에서 ‘플레이어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 보여주는, 막대한 공격력을 뽑아내는 장면이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 플레이를 통해 정말 강해지는 것은 아마도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는 숙련도뿐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판꽝안 Phan Quang Anh

    판꽝안 Phan Quang Anh 판꽝안 Phan Quang Anh Read More 버튼 읽기 [논문세미나] 베트남 게임 환경과 무협문학의 관계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술과 영웅담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장되는 무협 이야기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베트남 현지어로 키엠히엡(kiếm hiệp), 트루옌쯔엉(truyện chưởng)으로 불리는 무협물은 베트남에서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20세기 초 베트남에 처음 소개된 무협소설은 인쇄매체와 온라인게임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오늘날의 베트남 디지털게임이 다루는 무협 콘텐츠가 어떠한 배경 속에서 무협문학으로부터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는 초창기의 무협물에 관한 경험이 베트남의 동시대 게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생애사적 접근법과 문화적 근접성의 개념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 Back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08 GG Vol. 22. 10. 10. 매일 저녁 오락실에서는 뜨거운 응원전이 열렸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그래서 오락실 맨 구석 <갈스패닉 S2> 기기에서는 요구 조건 달성을 위한 협동 플레이가 펼쳐졌다. 그날 마침 잔돈이 가장 많이 남은 친구가 물주가 되고, 무리 중 가장 컨트롤이 좋은 친구가 자리에 착석한다. 날아오는 탄막이나 남은 시간을 일러주는 친구, 다음 패턴이라던가 적 몬스터를 가두는 법을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당시는 핸드폰 카메라로 완성 결과물을 촬영할 수도 없었으므로 눈으로 일러스트를 담아가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최선을 다해 이미지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이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이야말로 필자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다. 오락실은 그야말로 협동플레이(Co-Op, 코옵)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앞서 말한 <갈스패닉>뿐 아니라 여러 게임에서 코옵이 이루어졌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이는 오락실의 특성상 같이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여럿이 함께 의사소통을 하면서 퍼즐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UX를 찾아서 돌이켜보면 오락실은 2인용 게임에 특화된 공간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락기 하나에 자리는 2개이므로 1p와 2p가 겨루는 게임이 많았지만, 함께 목적 달성을 위해 달리는 게임도 적지 않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임은 <스노우 브라더스 2>. 설계상 눈, 번개, 물, 바람 등 4종류의 캐릭터를 모두 골라서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오락실에서는 기판의 한계로 대체로 2p 플레이까지 지원했다. 두 플레이어가 각자 몬스터를 볼로 만들어 가둔 뒤, 타이밍을 맞춰 터뜨리는 재미가 있었다. 아케이드판 <천지를 먹다>나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같은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은 코옵의 진수라고 이를 수 있다. 두 사람이 좁은 기기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부딪치며 버튼을 재빨리 눌러가며 게임을 플레이하곤 했다. 서로 체력 회복 아이템을 양보하거나, 서로의 캐릭터에 더 도움이 되는 버프 아이템(또는 무기)을 양보하는 미덕이 작동했다. 미션에 성공할 때 하이 파이브를 하기도 하고, 나는 살았지만 혼자 남아서 플레이하기 싫어 2p를 부활시키기 위해 선뜻 100원을 내기도 했다. 그렇다.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위해서 돈을 내준다는 행위는 오락실에서 대단히 멋진 일이었다. 하던 게임을 뺏어서 하거나, 오락실 근처 으슥한 골목에서 돈을 뺏거나, 딸깍이(또는 딱딱이)를 작동시켜 몰래 크레딧을 추가하는 등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오락실에서는 누구나 100원짜리를 기기에 집어넣어야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이 엄정한 100원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한 판 크레딧을 나누어주는 호혜는 온라인게임 시대에서는 ‘소매넣기’와 같은 뉴비 도와주기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다. 그마저도 ‘고인물’ 유저가 잉여 자산의 일부를 나눠주는 것으로 그 무게는 다를 것이다. 100원의 행복 농담 조금 섞어서, 누구나 한 판에 100원을 넣어야 한다는 법칙은 곧 P2W(Pay 2 Win)과 연결시킬 수 있다. 특정 게임기에 동전을 많이 넣은 플레이어일수록 숙련도가 올라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PvP를 할 때 그 게임에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이 유리한 측면이 크다고 볼 만하다. 그러다 플레이어의 게임 숙련도가 특정 경지를 넘어가면, 동전 한 닢에 결말을 보는 ‘괴수’가 되어 오락실 사장의 눈초리를 받았을 것이다. 100원 하나 넣고 종일 <테크모 월드컵 98>을 플레이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축구게임은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가 한 쪽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회전율이 지극히 떨어졌다. 결국 그를 제지시킬 수 있었던 건 야간자율학습을 무단으로 결석하고 오락실에 있다는 익명의 제보였다. 그 형보다 한참 어렸던 또래 친구들은 오락실 사장이 직접 그를 신고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필자의 오락실 최애 게임은 사이쿄의 슈팅게임 <텐가이>였다. 필자는 특유의 일본풍 룩앤필과 스릴 넘치는 게임플레이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서 절친했던 친구와 종종 <텐가이> 오락기가 있는 옆 동네 오락실까지 걸어가곤 했는데, 그 자체가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에는 어느 누가 100원 내고 게임 한 판 하겠다고 20분을 걸어갈까? 게임잡지는 있었지만 게임잡지에서 오락실 게임 공략을 찾기는 어려웠던 시절, 오락실까지 걸어가는 20분 내내 친구와 무슨 캐릭터를 고를지, 어떻게 스테이지를 깰지 의논했다. <텐가이>에는 히든 캐릭터 ‘아인’이 있었다. 선택창에서 상상상, 하하하, 상상상상상상상의 커맨드를 입력하면 해금되는데, 작동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히든 캐릭터를 골라주는 것도 일종의 협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킹 오브 파이터즈>(킹오파) 같은 PvP 게임에서도 코옵은 작동했다. <킹오파 97>에서 친구에게 ‘미친 이오리’(정식 명칭은 달밤에 오로치의 피에 미친 이오리)를 골라주는 것처럼 말이다. ‘현피’까지 3m 커플은 오락실에서 <컴온 베이비>나 <다른 그림 찾기>를 많이 플레이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볼록한 버튼을 연타하는 소리 역시 추억으로 남아있다. <컴온 베이비>야말로 2021년 여러 매체로부터 ‘올해의 게임’에 선정된 <잇 테익스 투>의 프로토타입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2인용 게임이라는 점도 그렇고, 플레이에 과하게 몰두했다가는 관계의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과거 오락실 죽돌이였던 필자는 <컴온 베이비>를 하다가 “왜 봐주지 않느냐”는 말을 꺼내면서 싸우는 커플을 본 적 있다. 사실 커플끼리의 싸움은 대체로 애정의 확인이었기 때문에 귀여운 수준이었던 적이 많다. 대전 격투 게임 중 건장한 남성 둘이 시비가 붙어 오락실 전체의 게임플레이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필자의 동네 오락실에선 <철권 태그 토너먼트> 중 데빌이 자꾸 레이저를 쏘는 탓에 상대방이 “얍삽이 그만 쓰라”며 물리적인 싸움이 벌어진 적 있다. 오락실의 대전 격투 게임에서 서로의 얼굴은 바로 맞은편에 있다. 우리에게 오프라인 코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우리는 온라인 시대에 살고 있다. 단적으로 게임 곳곳에 삽입된 미니게임들이 오프라인 코옵에 대한 헌사로 여겨지는 <잇 테익스 투>를 플레이하기 위해서도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만날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이 온라인에서 친구초대 버튼을 누르면 같이 게임 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오프라인 협동 플레이는 어떤 의미가 남아있을까? 물론 닌텐도 스위치에는 훌륭한 파티게임이 많이 남아있으며, 비록 소프트웨어는 없지만 여럿이 방탈출 카페에 가서 퍼즐을 푸는 것도 코옵이라면 코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프라인 코옵은 이제 주류에서 밀려나 추억의 대상이 된 듯하다. 여러 사람이 한 화면을 보면서 반응하는 경험은 일상이 아닌 특별한 이벤트가 되고 있다. 오락실 오프라인 코옵이 대세였던 시절에는 새로운 정보를 구할 인터넷이 (상대적으로) 귀했고, 집에 게임을 실행할 콘솔이나 PC가 있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당연히 모두의 손에 전화기가 들려있지도 않았다. 플레이 이력을 남길 만한 방법은 순위표에 자신의 이니셜을 남기는 것밖에 없었다. 오프라인 코옵은 한 게임, 한 게임이 귀중했다. 온라인 시대에서는 ‘한 게임’에 대한 접근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됐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어느 한편에는 게임 중 익명성의 장막에 숨어 차마 담기 어려운 욕을 꺼내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다. 온라인 랜덤매칭에서 만난 사람들은 때때로 가볍게 욕하고, 가볍게 사라진다. 두 시대를 나란히 경험한 입장에서 ‘오락실 시절이 좋았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옛날 오락실 오프라인 코옵에는 ‘노는 형’들이 자행한 여러 악행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UX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사용자의 경험의 총체라고 일컫는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오락실만의 특수한 환경이야말로 게임 UX의 역사에서 특별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13 GG Vol. 23. 8. 10.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게임, 즉, 놀이의 형태는 고양이의 놀이이다. 사람이 레이저나 막대기, 털 장난감 등으로 인공적으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태까지 잘만 놀아 왔고 지금도 잘만 놀고 있다. 고양이는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나 막대기, 빛, 곤충이나 동물 시체 등을 갖고 논다. 이러한 놀이는 언뜻 사냥을 연습하기 위해 그 행위들을 가상으로 모방하여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한 순간, 정말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 그 시체를 뜯어 먹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유희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 놀이의 본질에는 어떠한 가상도 모방도 연습도 없으며, 실용성이 아니라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나 척추가 부러진 채로 아직 죽어가고 있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저 꿈틀거리기나 하는 초주검의 동물을 붙잡고 양손으로 데굴데굴 굴리거나 입으로 물어 공중으로 던진다던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다른 ‘실제 행위’도 모방하지 않고 있고 그저 그 자체로서가 이미 고유한 실제 행위이다. 그리고 이 놀이 행위들은 그 어떤 실용적 경험치에도 봉사하지 않고 그저 식사 이전의 재미, 신남, 기쁨 등만을 생산해 내고 있을 뿐이다. 즉, 놀이로서 게임은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다. 다른 외부적 목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게임 <핫라인 마이애미>의 결말 장면에서 이러한 게임의 행위 목적성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보통의 결말 (normal ending)’과, ‘숨겨진 결말 (secret ending)’의 구조이다.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두 인물은 해당 게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청소부 (janitor)’들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요 사건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어느 날부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고, 이렇게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의 내용은 어떤 특정 장소로 가서 배달받은 동물 마스크를 쓰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 전화의 발신자가 바로 청소부들이고,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명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명령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청소부들의 비밀 본부를 찾아내고. ‘보통의 결말’에서 이들에게 ‘왜’ 이러한 일들을 벌이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청소부 A: 그야 심심했으니까 그렇지! 청소부 B: 왜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겠어? 너는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잖아, 안 그래? 청소부들은 주인공이 제기한 ‘왜’에 대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은 그저 자신들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청소부들은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을 조종하며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또한 청소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실제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너희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야?”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소부들은 그 질문 속의 주어 설정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였어, 너가 죽였지...” 즉, 이 ‘보통의 결말’은 청소부들과 주인공 모두의 행위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변명 될 필요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실행되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며 즐거움을 얻은 또 다른 놀이자, 플레이어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명령하고 주인공을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청소부와 청소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획득하는 놀이자인 주인공의 구도처럼, 플레이어에게 명령하고 플레이어를 갖고 노는 게임이라는 놀이자와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이행하며 즐거워하는 플레이어라는 놀이자의 구도 또한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닭 마스크의 환영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생산되는 즐거움이 가지는 본질적인 행위 원리의 진실을 시사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걸 좋아하니?" 즉, 주인공이 모르는 전화 속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결국 이 행위자들 모두가 그 명령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명령하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릴 수 있는 튜토리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이 게임은 좌우 스틱으로 조작된다. R 버튼을 눌러 때린다. 얼굴을 노려라! 우선 네가 누군가를 쓰러뜨렸으면 그를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너는 X 버튼을 누른다. 알겠나? R을 눌러 때려라! X를 눌러 끝내라! 내 말 알아듣겠나? 실수하지 말아라! 튜토리얼에서부터 <핫라인 마이애미>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살인 행위뿐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탑다운 형식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사람 형상을 조작해 또 다른 조그만 사람 형상들을 쏘고 때리고 찢어발기는 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이 게임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원인’은 우리가 이러한 가학 행위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즐거움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속편에서도 우리의 행위 원리에 대한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존재한다. <핫라인 마이애미 2>의 16번째 장, “사상자들 (Casualties)”에선 죽음이 거의 확정된 임무에 자신들의 부대원들을 보내게 된 “대령 (the Colonel)”이란 인물이 임무 전날 밤, 죽은 퓨마의 안면 피부를 벗겨 미간 부위에 피로 성조기를 그려 놓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쓰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게 보이나? ... 내 얼굴이 보이냐고? 이것이 내 진정한 본성(nature)이다! 보이지, 안 그래? 이게 나야! 이게 우리 모두란 말이다. 우린 동물이야! ... 부인할 길은 없어! 우리가 빌어먹을 동물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학살하거나 학살되도록 내보내고 있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우리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복종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거야. 파괴와 폭력... 이것들은 그저 우리 본성의 일부일 뿐이지.” 위의 대사를 말하는 “대령”이 퓨마라는 동물의 얼굴을 벗겨 마스크로 쓰고 미간에 피의 성조기를 그려 놓았던 것, 그리고 이 피의 성조기는 바로 청소부들이 암약하는 비밀 단체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령”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 (nature)의 의지와 공명하며 그 모든 것들을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갑작스레 왜 대령이 청소부들의 상징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개발자도 단 두 명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청소부들의 얼굴그래픽은 게임 개발자들 자신들의 얼굴을 픽셀로 캐리커쳐한 형상이다. 즉, 청소부들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페르소나인 것이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그들이 “누구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 밑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은 “독립”적인 작업자들이며 “모든 것을 우리끼리 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마치 이 게임을 제작한 두 명의 독립 개발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부심과 마주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부들의 대사를 통해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순전히 즐겁기 위해 창작 행위를 한 것이며, 그 어떤 누구의 명령이나 협박과 같은 외부적 조건 따위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장기 말”이라고 불렀던 것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조종하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개발자들도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를 갖고 놀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는 <핫라인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서 참이다. 게임은 항상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도전과제 그리고 R 버튼을 눌러 때리고 X 버튼을 눌러 마무리하는 조작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을 제공하고 그 명령의 가짓수가 곧 게임의 부피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게임의 명령을 플레이어가 따르게 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우선 첫 번째로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처럼 그저 재밌어서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조건 따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목소리에 그대로 따랐던 것은 그가 청소부들의 지시사항, 그러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자신의 명령이 플레이어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될지의 여부를 항상 즐거움만에 맡기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명령받은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도 제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강제와 협박 같은 외부 목적적 수단들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게임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건적이고 강제적인 명령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을 우리는 <핫라인 마이애미>의 ‘숨겨진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청소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특정 패스워드를 찾아 놓고 비밀 본부에 있는 컴퓨터에 해당 패스워드를 집어넣어야지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결말’을 보기 위한 조건을 만족한 뒤 청소부를 만나면 주인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청소부 A: 정신 나가...? 네가 깨달아야 하는 건 말이야- 청소부 B: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청소부 A: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지. 여기서 청소부들은 게임 바깥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조건 명령 방식, 협박에 대해 꽤 좋은 비평을 남기고 있다. 청소부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위에서 최근 게임에 대한 논의들이 그 목적성에 대한 변명으로 천착한다고 언급했던 정치 · 사회의 표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리라.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는 협박으로 행위의 원인 항을 강제로 채우는 법, 규범, 도덕, 국가 등은 청소부들의 대사 그대로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원칙”,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가 거세 협박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에게 습득되는 과정부터가 바로 “이 원칙”의 실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체계가 신경증 환자와 같은 모범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의 명령 방식이 플레이어를 향한 게임의 또 다른 명령 방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왜냐면 미리 말하건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러한 명령 방식들은 플레이어-행위자의 즐거움에 기반한 비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명령 이행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핫라인 마이애미>에서 “R을 눌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X를 눌러” 쓰러진 상대방의 머리를 밟아 으깨라는 명령에는 그 어떤 조건절도 선행하지 않지만, 게임은 때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의 조건절을 플레이어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협박은 HUD에 떠올려져 있는 ‘체력 바’와 같이 주인공의 죽음, 즉, ‘게임 오버’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태의 UI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명령들은 처음에 즉각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플레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UI의 대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당장 ‘죽음’이라는 협박이 가지는 급박함이 우선 게임에 몰입하기 이전까진 게임 외부의 경험적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게임 안의 현실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끊임없이 즐거움을 탐색하는 플레이어에게 저러한 협박은 그다지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하지는 못한다. 물론 체력을 채우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그 행위들 자체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지만, 이 시점에서 UI가 원래 가했던 협박의 조건절, ‘나를 채우지 않으면 주인공은 죽게 되고 너는 게임을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는 문구는 그 전과 같은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게임은 언제든지 다시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 오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저 죽기 전까지의 플레이 과정을 다시 돌려 플레이해야 한다는 일시적인 불편 정도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과 싸우는 것 자체 또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소위 ‘죽음’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강제하는 협박으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게임 속에서 일부러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한다. 체력이 바닥났으나 회복 수단까지 다 떨어졌을 경우, 스테이지를 거의 다 클리어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경우들에는 이제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가능성이 소진되어 더 이상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그저 빨리 죽고 다시 시작해 즐거움의 가능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죽는 행위 자체가 발생시키는 즐거움을 위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죽음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게임들, 그러니까 주인공이 죽을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워 일부러 그 가능한 모든 죽음의 시나리오들을 전부 실험해 보도록 만드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게임 오버’의 협박이 더더욱이나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특히 <데드 스페이스>, <사일런트 힐>, <바이오 하자드> 등의 호러 장르 게임들에선 괴물, 환경 등 주인공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각각이 저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죽음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새로운 위협 요소와 마주칠 때마다 이 요소는 주인공을 어떻게 죽이게 될 것인지를 실험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실재적 차원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단 한 번의 죽음이 곧 삶의 영구적인 끝을 의미하는데,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플레이어가 급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게임 속 현실에 몰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그렇다면 게임에서 조건 없는 즐거움의 명령이 조건적인 협박식의 명령보다 유효하다는 걸 현실에서의 행위 원리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적 차원에서도 이미 언제나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속 세계 자체에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이 실재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 보편적으로 게임들은 그 안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불러오기’ 혹은 ‘이어하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다시 주인공을 부활, ‘재생성 (respawn)’시키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바깥의 메뉴 영역에 국한되어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가정’한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예만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타나 제로>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이 속한 세계도 모두 주인공의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카타나 제로>에서 주인공은 ‘크로노스 (Chronos)’라는 이름의 마약을 투여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전투 상황, 즉, 주인공의 끝없는 죽음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들은 주인공의 계산 속 경우의 수들인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게임 내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직 주인공이 죽지 않고 모든 적을 처치한 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바로 그 경우의 수뿐일 테지만, 우리는 이 또한 허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니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면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에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은 전혀 무의미할 터이다. 2)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마치 일년처럼 느껴지”고 “모든 말이 길어지고, 모기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주인공 그 자신의 주관적 현실에선 그 모든 죽음의 경험들은 더욱 생생해질 여지도 없을 만큼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나 제로>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죽음은 주인공에게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로 아주 선명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핫라인 마이애미>를 포함해 아무리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 세계 안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자신조차 자신의 죽음에 무지하다 하더라도, 정작 플레이어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자신의 경험 안에서 플레이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주관적’ 실재에서 그 모든 죽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근본적인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내에서 명령되는 사항들을 플레이어가 이행하는 원리 중에서 조건절로 협박하는 명령보다 조건 없이 플레이어 자신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명령들이 언제나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면, 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놓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 1) 안티 오이디푸스, 547p. 2) 비극의 탄생, 99p.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4회공모전수상작] 서브컬처 모바일 게임 비평을 위한 시론 - 캐릭터 뽑기가 갖는 의의란

    하지만 ‘서브컬처’라는 명명에는 꽤나 기묘한 구석이 있다. 문화연구 분야에서 서브컬처는 고급 문화 혹은 주류 문화에 대응하는 하위 문화를 뜻하지만 근래에는 그 외연이 확장되어 “‘주변부’의 취향 공동체로, 전체 문화 속 문화 혹은 사회 내 다양한 문화들”로 규정되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컨텐츠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서브컬처가 수입 및 활용되며 정착된 사회적 의미가 존재한다. < Back [4회공모전수상작] 서브컬처 모바일 게임 비평을 위한 시론 - 캐릭터 뽑기가 갖는 의의란 26 GG Vol. 25. 10. 10. 페이트/그랜드 오더, 블루 아카이브, 원신, 승리의 여신 니케 등등 2010년대 중후반부터 독자적인 시장을 확보해온 소위 서브컬처 게임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게임 장르가 있다. 서브컬처 게임의 특징은 모에 캐릭터/수집형/확률형 뽑기로 여겨진다. 추가적으로 일부 웹게임도 존재하며 미호요(현 호요버스)가 2020년 공개한 원신과 같이 멀티 플랫폼을 지원하는 경우도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바일을 중심으로 향유되는 라이브 서비스 게임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서브컬처’라는 명명에는 꽤나 기묘한 구석이 있다. 문화연구 분야에서 서브컬처는 고급 문화 혹은 주류 문화에 대응하는 하위 문화를 뜻하지만 근래에는 그 외연이 확장되어 “‘주변부’의 취향 공동체로, 전체 문화 속 문화 혹은 사회 내 다양한 문화들”로 규정되곤 한다. [1] 그러나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컨텐츠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서브컬처가 수입 및 활용되며 정착된 사회적 의미가 존재한다. 유사하게 중국에서는 우리가 ‘서브컬처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를 2차원 모바일 게임(二次元手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2차원이란 단순히 그래픽이 2D냐 3D냐는 구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본 오타쿠 컬처 에 바탕을 둔 ‘ACG(애니메이션・코믹・게임) 스타일’을 지칭한다. 즉 앞서 서브컬처 게임의 특징 중 하나로 언급한 모에한 이미지・그래픽으로 어느 정도 그 의미가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브컬처 게임 시장은 오타쿠 문화에 깊은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한중일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증권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3년까지의 전체 게임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보다 서브컬처 게임 시장이 동일 기간 약 3배에 가까운 성장율을 보여왔으며 앞으로도 10%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2] 그러나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시장 상황과 달리 해당 장르는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곤 한다. 게임 비평이 아니더라도 진성 게이머를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뽑기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은 [3] 서브컬처 게임을 진정한 게임 미만의 것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요인이곤 한다. 그 외에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수집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는 플레이어들의 향유 태도도 또한 게임의 플레이에서 오는 재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서브컬처 게임에 대한 비평적 곤란함은 단순히 식자층이 던지는 자격 미달의 시선 때문만은 아니다. 전술했듯이 서브컬 처 게임은 대개 모바일 게임으로 완성된 패키지 게임이 아니라 라이브 서비스 게임으로 제공된다. 과거 온라인 MMORPG 게임 ‘서비스’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완결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다루는 비평이 작동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이렇게 끝이 지워지고 무한히 연속하는 라이브 서비스의 활동성live-ness은 유저에 의해 소유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실시간live으로 소화 및 접속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4] 때문에 라이브 서비스, 특히 서브컬처 모바일 게임을 두고 기존의 게임 비평은 하나의 메인 시나리오 혹은 하나의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분석 정도에 그치곤 했다. 간혹 게임 플레이에 중점을 둔 비평도 시도되었으나 캐릭터를 컨텐츠의 핵심으로 내세우는 서브컬처 게임의 모방적인 게임성으로 인해 한계가 뚜렷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과거와 같은 근대적 작품관에 입각한 비평으로는 동시대의 라이브 서비스 게임을 온전히 다룰 수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라이브 서비스를 다루기 위한 비평의 원리가 요청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에서는 특히 기존의 게임 비평이 상정해온 ‘게임성’과 일선을 달리하는 서브컬처 게임을 위한 비평의 시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서브컬처 게임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필자는 캐릭터 수집 요소라고 본다. 해당 장르의 제작자도 향유자도 모두 게임이라는 특정한 플레이 경험 속에서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캐릭터를 필수불가결적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타 게임 장르에 비해서 유독 두드러지는 캐릭터 존재가 컨텐츠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5] 특히 호요버스가 2020년 공개한 〈원신〉 이래로 트리플 A급 게임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레퍼런스 삼아 유려한 그래픽과 거대한 볼륨의 컨텐츠를 앞세운 중국발 서브컬처 게임─‘원신 라이크’들은 이러한 장르적 핵심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최전선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캐릭터성의 강조에는 그것이 곧 뽑기라는 과금으로 이어지며 게임사의 매출과 직결한다는 이유도 존재한다. 게임 내 부분유료 컨텐츠로 제공되는 확률형 아이템, 즉 뽑기는 일반적으로 게임의 수익 모델로 여겨지곤 한다. 그리고 국내 게임 담론에서 BM에 대한 논의는 대개 사행성이나 유독성에 대한 논의에 머무르곤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뽑기는 게임성과 완전히 무관할까? 뽑기 시스템이 도입된 RPG 게임의 플레이 경험이나 그 게임성에 손상을 입힌다는 주장이 성립한다면, 특정 게임에서는 뽑기가 게임성을 구성하는 데에 핵심적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메타 게이밍의 요소로서 현질을 플레이의 한 형식, 즉 ‘납금 플레이’로 이해하는 접근도 존재한다. [6] 그러나 여기서 납금이란 플레이 형식은 어디까지나 게임과 유저 사이에 존재하는 난이도와 숙련도 관계에 대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지, 캐릭터의 매력이나 애정과 같은 게임 플레이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영역에서 추동되는 과금 행위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물론 서브컬처 게임에서 캐릭터 수집이 게임 플레이와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앞서 설명한 것처럼 캐릭터가 컨텐츠 기획의 핵심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게임 내적 난이도와 캐릭터의 성능은 매우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소위 라이브 서비스 중 버전이 진행됨에 따라 게임의 재미를 제공하기 위해 점차 상승하는 난이도 및 다양한 기믹-메타에 최적화되어 최신 픽업 캐릭터가 디자인된다. 즉 최신 버전의 메타를 쾌적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최신 캐릭터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드는 점에서, 캐릭터의 사용가치는 중요하다. 그러나 캐릭터를 포함한 유료 아이템의 성능이 사업 모델과 직결하는 ‘페이 투 윈’ 과 조금 다른 이유는 성능이 다시 캐릭터의 매력으로 회수되기 때문이다. 그 예시로 원신에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리월 출신의 강력한 신이란 컨셉을 가진 종려 캐릭터가 자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실성능이 무척 낮다는 이유로 ‘자국 신임에도 성능이 낮다’와 ‘컨셉이 성능과 불일치한다’는 등의 이유로 반발을 샀다가 큰 상향을 받게 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오타쿠 문화에 익숙한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외모도 성능이다’란 금언이 있었듯이, 실제 사용가치만으로 캐릭터 뽑기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성능 때문에 뽑기도 하지만,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자신의 취향에 완전히 맞지 않는 경우에는 그 어떤 게임 유저들과 다르게 강고한 거부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 것이 바로 오타쿠 유저들이다. 원신 라이크 게임들에서는 각 버전마다 진행되는 메인 스토리에서 새로 추가된 픽업 캐릭터가 크게 활약하는 장면을 넣어두고 또 자연스러운 체험 플레이를 유도함으로써 ‘강제애착 스토리’를 제공하고 있다. [7] 하나의 게임 내에서 다양한 메인 스토리 및 이벤트, 서브 이벤트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픽업 캐릭터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은 다양한 매체를 동시에 전개하는 미디어 믹스적 전략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호요버스의 최신 작품인 〈젠레스 존 제로〉 속 유즈하 캐릭터의 경우 픽업과 함께 추가된 메인 에피소드 외에도 여름 바캉스 특집 이벤트에 맞춰 스킨이 출시되며 해당 스킨에 맞는 대규모 특별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게임 내에서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성과 상품의 내적 연결고리가 강력하게 착종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상품의 사용가치(성능)와 별개로 상품이 갖는 일종의 기호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전략이 호요버스 게임 속에서 매우 첨예하게 갱신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서브컬처 게임의 최신 경향 속에서 캐릭터의 매력에 사로잡힌 유저가 자연스럽게 해당 캐릭터를 뽑아 수집하고자 한다는 일련의 흐름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대상에 대한 소유(수집)으로 이어진다는 비약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사랑에서 비롯되는 독점욕이나 소유욕과 같은 본성적 차원으로 소급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욕망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오늘날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비자연(=기술)적이기 때문이다. [8] 그런 의미에서 ‘비오타쿠의 현명함’이란 인터넷 밈은 복제가능한 이미지로서의 ‘캐릭터’가 게임 내 개인계정으로 수집되는 행위와 게임 외적으로 데이터로서의 기록(캡처)에 대한 의미론적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오타쿠적 소비 양태에 근간은 이루는 (과)몰입에 대한 냉소적 비판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 표적이 되는 것은 캐릭터라는 비실재 대상에 대한 애정과 몰입이라는 지 극히 ‘리비도적 경제’ 활동이다. 지금까지 많은 서브컬처 게임들이 서비스 종료됨에 따른 ‘최애’ 캐릭터들에 대한 상실과 그로 인한 불가능한 애도가 유저에게 문제가 되는 반면에, 페이 투 윈으로 유명한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의 서비스 종료는 유저 개인의 리비도가 아니라 아이템 재산이나 소유권 같은 지극히 실물 경제적 측면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리비도적인 것의 차이를 도출할 수 있다. 동시대 서브컬처 게임에서 이뤄지고 있는 이러한 리비도적인 것, 즉 애정과 몰입을 소유와 연결지어내는 마법과 같은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보여준 놀라운 통찰을 빌려와 설명해볼 수 있다. 바르트는 매혹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러한 ‘첫눈에 반한 사랑’은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면이란 ‘사물들의 배치’이며, 특정 대상을 둘러싼 환경이 대상과 맺는 관계성이 대상을 특별하게 만들며 대상을 사랑에 빠질만한 것으로 ‘축성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바르트의 통찰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상품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플랫폼, 알고리즘과 같은 디지털 기술에 의한 기호적 환경에 대한 이해로 연결될 수 있다. [9] 앞서 예시로 들었듯이 젠존제라는 하나의 플랫폼 내에서 제공되는 미디어 믹스, 그 이미지와 서사, 플레이의 관계망 속에 배치된 유즈하에 대한 애정은 매우 잘 짜인 코드화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0] 이처럼 종합적이고 중층적인 배치를 통해서 캐릭터가 제공되는 형태를 ‘장면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게임 속 서사는 장면화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보다 정확히는 서사의 장면화는 게임에서 제공되는 단일한 서사가 아니라 서사가 제공되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수집형 서브컬처 게임 속에서 서사와 캐릭터의 매력이 결합하여 제공되는 구조적 형태에 대해 연구한 이아름의 연구에 따르면, [11] 수집형 게임 속에서 무수히 병렬되며 추가되는 캐릭터들과 그 서사는 “전체를 아우르는 큰 이야기”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각자로 완전히 별개된 ‘커뮤니케이션(=일정량의 작은 이야기)’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하나의 서사(루트) 속에서 선택과 분기를 경험할 필요 없이 초월적 위치에서 모든 가능성을 확보하며 하나의 시간성(=무시간성)을 체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집이란 행위는 실제로 시간성을 초월한 질서를 수집된 대상에 부여함으로써 무역사성 안에서 자기 폐쇄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행위다. [12] “모든 시간은 수집품의 세계 안에서 동시 존재 또는 동시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호요버스 게임에서는 이러한 수집형 게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집품’의 서사적 시간성의 구조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기념품’으로서의 시간성의 구조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기념품은 “각각의 경험을 특별하게 인식”하며 “이야기를 통해 본래의 맥락을 끊임없는 소비의 맥락으로 대체”한다. 나아가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의식하며 우리의 관심을 과거로 전치시켜 “과거 안에 현재를 가둬 넣는 기능”을 수행한다. [13] 이아름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메인 스토리)와 함께 병치되는 다양한 이벤트 스토리 및 후속 이벤트를 통해서 메인 스토리에서 활약하지 못한 캐릭터의 주목도와 매력을 높이는 보완적 기능을 해낸다고 설명한다. [14]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브컬처 모바일 게임이 ‘모바일 게임’으로서 갖는 특징은 과거에 진행된 픽업뿐만 아니라 한시적 이벤트까지도 반복해서 개최하는, 유실과 변형을 갖지 않는 무한 반복이 가능한 데이터성에서 비롯되는 소위 ‘복각’에 있었다. 하지만 출시 이래 원신은 기존 서브컬처 모바일 게임과 달리 현재까지 단 한 번도 과거에 이뤄진 이벤트를 복각한 적이 없었다. 유사하게 2015년 출시한 페그오의 경우도 2021년 이후로는 과거와 달리 거의 이벤트 복각이 이뤄지지 않는 운영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15] 이처럼 무손실의 반복과 복제가 가능한 데이터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복각 정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메인・이벤트 서사와 함께 연동된 캐릭터의 매력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유저에게 매우 찰나적이며 한정적으로 제공되는 셈이다. 때문에 신규 캐릭터의 등장과 함께 유저가 느끼는 애정이 ‘뽑기’를 통한 소유로 나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계정 내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 ‘캐릭터 자체’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기 위한 기념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가 뽑기를 통해 소유한 캐릭터는 해당 ‘캐릭터’에 대한 (상실과 추억의) 지표임과 동시에, 유저에 의해 뽑혀 게임 내에서 플레이됨으로써 상실된 과거에 대한 대상행동으로서 새롭게 생성되는 게임 내의 ‘행위서사’가 현재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아즈마 히로키가 오타쿠 비평을 통해서 논한 바 있듯이 “캐릭터의 본질보다도 캐릭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상상력의 환경”에 관한 것이다. [16] 아즈마가 분석하던 시기와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야기보다 캐릭터쪽이 기초적인 단위로서” 상정되고 있다는 상황 판단에는 여전히 시의성이 존재한다. 나아가 그는 작품 자체가 이미 소비 환경을 감안해 제작되었으므로 분석자도 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환경 분석’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타쿠적 문화 소비의 가장 큰 특징은 ‘동인’이라고 하는 2차창작 향유라고 할 수 있다. 모에한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서브컬처 게임들은 과거에도 일러스트 공모전과 같은 수용자 참여를 독려하는 이벤트를 꾸준히 개최하곤 했다. 그러나 아예 제작사가 전면에 나서서 공식적으로 이를 독려하는 대대적인 장을 마련한 것은 역시나 호요버스가 선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부터 개최되어 여러 분야의 크리에이터가 참여하는 호요페어는 ‘공식’이 제공하는 재미를 보충하고 확장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게임 내외부로 순환되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동인 품기’를 통해서 노리는 것은 역시나 게임 외적인 미디어 믹스가 빚어내는 ‘사물들의 배치’다. 나아가 현재 젠존제를 비롯한 호요버스의 게임들은 서비스 초기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신규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디테일하게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관련 유튜버들을 지원하여 신규 캐릭터에 대한 성능 및 육성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유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요버스는 현재 서브컬처 게임 제작사 중 가장 소비 환경을 잘 활용하는 회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유저는 이처럼 게임 내외부의 환경 속 배치 안에서 해당 캐릭터의 매력에 매혹된다. 때문에 복제가능한 ‘모두의’ 캐릭터라고 할지라도 개인이 해당 캐릭터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에는 ‘뽑은 캐릭터’가 고유명사로서의 캐릭터에 대한 기념품이자 수집품이란 양가적 의미로 성립한다. 뽑기는 단순히 해당 캐릭터를 구매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극악의 확률에 기대어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손에 넣는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다. 물론 충분한 금액을 투여한다면 반천장과 같은 확률 조정 시스템을 통해 확실하게 얻을 수는 있지만 고래가 아닌 일반 유저들은 결국 확률에 기댈 수밖에 없고 유저들은 기원을 하게 된다. [17] 기도라는 행위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즉 우연(우발)성에 대한 요청이다. 그러나 만일 해당 기도의 내용이 이뤄진다면 기도란 행위 자체는 내용이 이뤄지는 것과 실질적인 인과성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적으로 인과적 필연성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기도의 신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뽑기를 통해 특정 캐릭터를 갖게 된 것은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비오타쿠적인 현명함은 우연성을 포함한 총체적 ‘사물의 배치’ 외부에서 특정 대상만을 포착하는 것에서 비롯되지만, 오타쿠적 어리석음은 배치 안에서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엮어내는, 바로 그 양가성의 성립을 통해서만 활성화되는 리비도에서 기인한다. 마지막으로 서브컬처 게임 비평에 관해 한가지 짚어두자면, 그렇다면 과연 뽑기 시스템은 서브컬처 게임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호요버스의 원신 이래로 게임 내 뽑기의 평균 단가가 상승해 과금 부담이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서브컬처 게임의 중소과금 유저들의 뽑기 양태는 ‘명전’ [18] 으로 수렴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2025년 상반기에 발표된 중국 게임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모바일 서브컬처 게임 매출은 전년의 19%에서 11%로 크게 하락했다고 한다. [19] 이처럼 포화 상태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국발 서브컬처 게임 시장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20] 이러한 시도가 앞서 다룬 서브컬처 게임 장르의 핵심을 얼만큼 갱신시킬지는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뽑기를 통해서 캐릭터와 유저가 맺게 되는 리비도 경제가 변화한다면 역시나 서브컬처 게임의 배치 또한 변화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게임성 자체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임은 분명하다. 원신으로 시작된 거대자본 서브컬처 게임이 5년차를 맞이하면서 해당 장르의 변곡점에 진입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서브컬처 게임을 향한 비평의 움직임 또한 시동이 걸릴 최적의 시기가 아닐까 싶다. [1] 강신규, 《서브컬처 비평》, 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p.11 [2] 미래에셋증권, 〈시프트업─호요버스의 성장 스토리가 보인다〉, 2024.9.11 [3] 이경혁, 《현질의 탄생》, 이상북스, 2022, p.178-179 [4] KAI-YOU, 北出栞, 〈ソーシャルゲーム以降、主体的に生きることは可能なのか?──『マギレコ』サービス終了から始める批評原論〉, https://premium.kai-you.net/article/830 , 2024.8.21 [5] 기존 게임 장르 중 비슷한 경우는 격투 게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게임 플레이 경험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동시에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플레이어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레인보우 식스 시즈 등 다양한 장르에서 컨텐츠 기획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전환되어 왔다. 나아가 2021년 출시된 〈배틀필드 2024〉가 FPS 시리즈의 전통적인 병과 분류가 아니라 병과 내에서 비대칭 능력을 가진 개별 캐릭터(스페셜리스트)를 내세우며 변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 이처럼 라이브 서비스 게임들에서 점차 캐릭터 중심으로 컨텐츠가 재편되는 현상에서 서브컬처 게임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6] 이경혁, 같은 책, p.182-183 [7] 그러나 동시에 해당 메인 스토리에서의 활약 이후에 다른 메인 스토리에서 주연으로 다시 활약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할 수 있다, 家無しララ, “なぜガチャ嫌いの私は課金沼に堕ちたのか? 沼らせるカラクリを鳴潮から学ぼう”, https://www.youtube.com/@NHLala , 2025.8.4. [8] 앨피 본, 박종주, 《게임 사랑 정치》, 시대의창, 2023, p.174 [9] 앨피 본, 같은 책, p.55-61 [10] 물론 그 코드의 다발은 또 ‘서브컬처’라고 하는 오타쿠 문화에서 공유되는 모에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11] 이아름, 디그라 한국학회 제1회 〈플레이어에서 프로듀서로─캐릭터 수집형 게임 시대의 게이머 주체성〉, 2025 [12] 수잔 스튜어트, 박경선, 《갈망에 대하여》, 산처럼, 2015, p.313 [13] 수잔 스튜어트, 같은 책, p.282-283, p.312 [14] 이아름, 같은 곳 [15] 이에 대해서는 2021년부터 페그오를 인수한 애니플렉스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입장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일각에서는 페그오 자체가 매우 뒤떨어진 개발 엔진을 사용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버전간 호환이 어려워 복각이 시스템적으로 어렵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2020년대 호요버스를 위시한 현재 서브컬처 게임 중 무복각 노선 운영이 일반적인 경우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신규 캐릭터・이벤트 중심으로 컨텐츠 지형이 이동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16] 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p.27 [17] 〈원신〉에서 뽑기 시스템의 이름이 ‘기원'이며 이에 사용되는 교환 화폐의 이름은 ‘뒤얽힌 인연’이다. [18] 명함과 전용무기를 합쳐 줄여 부르는 용어. 명함은 중복 캐릭터 뽑기를 통해서 할 수 있는 돌파를 하지 않은 ‘돌파횟수 0’을 가르키는 말이다. 전용무기는 신규 캐릭터의 성능을 최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신규 무기를 가르킨다. [19] 게임메카, 〈중국 게임시장 성장 속, '서브컬처’는 쇠퇴하고 있다〉,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764382 , 2025.8.5. [20] 게임메카, 〈캐릭터 뽑기 삭제, 듀엣 나이트 어비스 10월 28일 출시〉,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765332 , 2025.8.2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강현 한일 오타쿠 문화 독립연구자. 근래 PC 싱글 게임 구력을 보드게임 구력이 추월하고 있다. 최근까지 티바트 세계(원신)와 뉴에리두(젠존제)의 수호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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