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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夢としてのクソゲ

    「ファミコンを通じて超能力を開発する」というテーマで開発されたゲームがあった。 1980年代当時の日本の超能力ブームのなか、超能力者として知られていた清田益章氏(通称、「エスパー清田」)が監修した『マインドシーカー』(FC,1989)という作品だ。作中に登場する清田氏の指示をこなし、この作品を遊ぶことで、実際に超能力が使え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た。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Culture Researcher) Inoue Akito (Game Culture Researcher) Sujin Park A graduate student who has stepped into game studies. Currently taking cours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Lately, exploring the varied game experiences mediated by games, as well as subculture within Japan. Writing is still hard.

  •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13 GG Vol. 23. 8. 10.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게임, 즉, 놀이의 형태는 고양이의 놀이이다. 사람이 레이저나 막대기, 털 장난감 등으로 인공적으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태까지 잘만 놀아 왔고 지금도 잘만 놀고 있다. 고양이는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나 막대기, 빛, 곤충이나 동물 시체 등을 갖고 논다. 이러한 놀이는 언뜻 사냥을 연습하기 위해 그 행위들을 가상으로 모방하여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한 순간, 정말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 그 시체를 뜯어 먹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유희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 놀이의 본질에는 어떠한 가상도 모방도 연습도 없으며, 실용성이 아니라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나 척추가 부러진 채로 아직 죽어가고 있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저 꿈틀거리기나 하는 초주검의 동물을 붙잡고 양손으로 데굴데굴 굴리거나 입으로 물어 공중으로 던진다던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다른 ‘실제 행위’도 모방하지 않고 있고 그저 그 자체로서가 이미 고유한 실제 행위이다. 그리고 이 놀이 행위들은 그 어떤 실용적 경험치에도 봉사하지 않고 그저 식사 이전의 재미, 신남, 기쁨 등만을 생산해 내고 있을 뿐이다. 즉, 놀이로서 게임은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다. 다른 외부적 목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게임 <핫라인 마이애미>의 결말 장면에서 이러한 게임의 행위 목적성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보통의 결말 (normal ending)’과, ‘숨겨진 결말 (secret ending)’의 구조이다.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두 인물은 해당 게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청소부 (janitor)’들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요 사건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어느 날부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고, 이렇게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의 내용은 어떤 특정 장소로 가서 배달받은 동물 마스크를 쓰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 전화의 발신자가 바로 청소부들이고,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명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명령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청소부들의 비밀 본부를 찾아내고. ‘보통의 결말’에서 이들에게 ‘왜’ 이러한 일들을 벌이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청소부 A: 그야 심심했으니까 그렇지! 청소부 B: 왜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겠어? 너는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잖아, 안 그래? 청소부들은 주인공이 제기한 ‘왜’에 대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은 그저 자신들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청소부들은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을 조종하며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또한 청소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실제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너희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야?”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소부들은 그 질문 속의 주어 설정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였어, 너가 죽였지...” 즉, 이 ‘보통의 결말’은 청소부들과 주인공 모두의 행위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변명 될 필요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실행되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며 즐거움을 얻은 또 다른 놀이자, 플레이어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명령하고 주인공을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청소부와 청소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획득하는 놀이자인 주인공의 구도처럼, 플레이어에게 명령하고 플레이어를 갖고 노는 게임이라는 놀이자와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이행하며 즐거워하는 플레이어라는 놀이자의 구도 또한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닭 마스크의 환영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생산되는 즐거움이 가지는 본질적인 행위 원리의 진실을 시사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걸 좋아하니?" 즉, 주인공이 모르는 전화 속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결국 이 행위자들 모두가 그 명령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명령하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릴 수 있는 튜토리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이 게임은 좌우 스틱으로 조작된다. R 버튼을 눌러 때린다. 얼굴을 노려라! 우선 네가 누군가를 쓰러뜨렸으면 그를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너는 X 버튼을 누른다. 알겠나? R을 눌러 때려라! X를 눌러 끝내라! 내 말 알아듣겠나? 실수하지 말아라! 튜토리얼에서부터 <핫라인 마이애미>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살인 행위뿐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탑다운 형식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사람 형상을 조작해 또 다른 조그만 사람 형상들을 쏘고 때리고 찢어발기는 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이 게임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원인’은 우리가 이러한 가학 행위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즐거움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속편에서도 우리의 행위 원리에 대한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존재한다. <핫라인 마이애미 2>의 16번째 장, “사상자들 (Casualties)”에선 죽음이 거의 확정된 임무에 자신들의 부대원들을 보내게 된 “대령 (the Colonel)”이란 인물이 임무 전날 밤, 죽은 퓨마의 안면 피부를 벗겨 미간 부위에 피로 성조기를 그려 놓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쓰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게 보이나? ... 내 얼굴이 보이냐고? 이것이 내 진정한 본성(nature)이다! 보이지, 안 그래? 이게 나야! 이게 우리 모두란 말이다. 우린 동물이야! ... 부인할 길은 없어! 우리가 빌어먹을 동물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학살하거나 학살되도록 내보내고 있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우리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복종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거야. 파괴와 폭력... 이것들은 그저 우리 본성의 일부일 뿐이지.” 위의 대사를 말하는 “대령”이 퓨마라는 동물의 얼굴을 벗겨 마스크로 쓰고 미간에 피의 성조기를 그려 놓았던 것, 그리고 이 피의 성조기는 바로 청소부들이 암약하는 비밀 단체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령”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 (nature)의 의지와 공명하며 그 모든 것들을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갑작스레 왜 대령이 청소부들의 상징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개발자도 단 두 명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청소부들의 얼굴그래픽은 게임 개발자들 자신들의 얼굴을 픽셀로 캐리커쳐한 형상이다. 즉, 청소부들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페르소나인 것이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그들이 “누구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 밑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은 “독립”적인 작업자들이며 “모든 것을 우리끼리 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마치 이 게임을 제작한 두 명의 독립 개발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부심과 마주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부들의 대사를 통해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순전히 즐겁기 위해 창작 행위를 한 것이며, 그 어떤 누구의 명령이나 협박과 같은 외부적 조건 따위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장기 말”이라고 불렀던 것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조종하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개발자들도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를 갖고 놀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는 <핫라인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서 참이다. 게임은 항상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도전과제 그리고 R 버튼을 눌러 때리고 X 버튼을 눌러 마무리하는 조작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을 제공하고 그 명령의 가짓수가 곧 게임의 부피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게임의 명령을 플레이어가 따르게 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우선 첫 번째로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처럼 그저 재밌어서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조건 따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목소리에 그대로 따랐던 것은 그가 청소부들의 지시사항, 그러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자신의 명령이 플레이어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될지의 여부를 항상 즐거움만에 맡기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명령받은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도 제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강제와 협박 같은 외부 목적적 수단들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게임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건적이고 강제적인 명령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을 우리는 <핫라인 마이애미>의 ‘숨겨진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청소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특정 패스워드를 찾아 놓고 비밀 본부에 있는 컴퓨터에 해당 패스워드를 집어넣어야지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결말’을 보기 위한 조건을 만족한 뒤 청소부를 만나면 주인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청소부 A: 정신 나가...? 네가 깨달아야 하는 건 말이야- 청소부 B: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청소부 A: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지. 여기서 청소부들은 게임 바깥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조건 명령 방식, 협박에 대해 꽤 좋은 비평을 남기고 있다. 청소부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위에서 최근 게임에 대한 논의들이 그 목적성에 대한 변명으로 천착한다고 언급했던 정치 · 사회의 표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리라.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는 협박으로 행위의 원인 항을 강제로 채우는 법, 규범, 도덕, 국가 등은 청소부들의 대사 그대로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원칙”,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가 거세 협박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에게 습득되는 과정부터가 바로 “이 원칙”의 실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체계가 신경증 환자와 같은 모범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의 명령 방식이 플레이어를 향한 게임의 또 다른 명령 방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왜냐면 미리 말하건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러한 명령 방식들은 플레이어-행위자의 즐거움에 기반한 비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명령 이행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핫라인 마이애미>에서 “R을 눌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X를 눌러” 쓰러진 상대방의 머리를 밟아 으깨라는 명령에는 그 어떤 조건절도 선행하지 않지만, 게임은 때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의 조건절을 플레이어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협박은 HUD에 떠올려져 있는 ‘체력 바’와 같이 주인공의 죽음, 즉, ‘게임 오버’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태의 UI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명령들은 처음에 즉각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플레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UI의 대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당장 ‘죽음’이라는 협박이 가지는 급박함이 우선 게임에 몰입하기 이전까진 게임 외부의 경험적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게임 안의 현실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끊임없이 즐거움을 탐색하는 플레이어에게 저러한 협박은 그다지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하지는 못한다. 물론 체력을 채우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그 행위들 자체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지만, 이 시점에서 UI가 원래 가했던 협박의 조건절, ‘나를 채우지 않으면 주인공은 죽게 되고 너는 게임을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는 문구는 그 전과 같은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게임은 언제든지 다시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 오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저 죽기 전까지의 플레이 과정을 다시 돌려 플레이해야 한다는 일시적인 불편 정도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과 싸우는 것 자체 또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소위 ‘죽음’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강제하는 협박으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게임 속에서 일부러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한다. 체력이 바닥났으나 회복 수단까지 다 떨어졌을 경우, 스테이지를 거의 다 클리어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경우들에는 이제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가능성이 소진되어 더 이상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그저 빨리 죽고 다시 시작해 즐거움의 가능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죽는 행위 자체가 발생시키는 즐거움을 위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죽음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게임들, 그러니까 주인공이 죽을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워 일부러 그 가능한 모든 죽음의 시나리오들을 전부 실험해 보도록 만드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게임 오버’의 협박이 더더욱이나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특히 <데드 스페이스>, <사일런트 힐>, <바이오 하자드> 등의 호러 장르 게임들에선 괴물, 환경 등 주인공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각각이 저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죽음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새로운 위협 요소와 마주칠 때마다 이 요소는 주인공을 어떻게 죽이게 될 것인지를 실험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실재적 차원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단 한 번의 죽음이 곧 삶의 영구적인 끝을 의미하는데,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플레이어가 급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게임 속 현실에 몰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그렇다면 게임에서 조건 없는 즐거움의 명령이 조건적인 협박식의 명령보다 유효하다는 걸 현실에서의 행위 원리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적 차원에서도 이미 언제나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속 세계 자체에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이 실재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 보편적으로 게임들은 그 안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불러오기’ 혹은 ‘이어하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다시 주인공을 부활, ‘재생성 (respawn)’시키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바깥의 메뉴 영역에 국한되어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가정’한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예만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타나 제로>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이 속한 세계도 모두 주인공의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카타나 제로>에서 주인공은 ‘크로노스 (Chronos)’라는 이름의 마약을 투여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전투 상황, 즉, 주인공의 끝없는 죽음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들은 주인공의 계산 속 경우의 수들인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게임 내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직 주인공이 죽지 않고 모든 적을 처치한 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바로 그 경우의 수뿐일 테지만, 우리는 이 또한 허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니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면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에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은 전혀 무의미할 터이다. 2)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마치 일년처럼 느껴지”고 “모든 말이 길어지고, 모기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주인공 그 자신의 주관적 현실에선 그 모든 죽음의 경험들은 더욱 생생해질 여지도 없을 만큼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나 제로>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죽음은 주인공에게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로 아주 선명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핫라인 마이애미>를 포함해 아무리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 세계 안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자신조차 자신의 죽음에 무지하다 하더라도, 정작 플레이어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자신의 경험 안에서 플레이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주관적’ 실재에서 그 모든 죽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근본적인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내에서 명령되는 사항들을 플레이어가 이행하는 원리 중에서 조건절로 협박하는 명령보다 조건 없이 플레이어 자신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명령들이 언제나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면, 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놓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 1) 안티 오이디푸스, 547p. 2) 비극의 탄생, 99p.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yuri Kim Interested in the ways games let us experience stories. After poking around here and there, lately played Marathon.

  •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hye Kang A blind person with a keen interest in games. Currently teaches Korean at a middle school while also contributing to game story work at Banjihagames.

  •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폴더와 디렉토리 기반으로 오프라인 PC에서 파일 관리를 하던 세대들은 요즘처럼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려두는 방식을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온라인이 기본이 되는 시대. 과거에는 PC 한 대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파일을 옮기는 일을 부가적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정보의 존재위치 자체가 관계망 위에 놓이는 것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K-의 거짓’ : 으로 바라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을 향한 갈망

    이라는 이례적인 작품의 사례는 그 플레이 경험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인식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대항 담론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준점에 부합함과 부합하지 않음으로 나뉘며 게이머 커뮤니티의 ‘진정성’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 Back ‘K-의 거짓’ : 으로 바라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을 향한 갈망 15 GG Vol. 23. 12. 10. “난 바다 건너 아침의 나라 출신이야. 어떤 곳인지는 묻지 마. 그곳에 대해서는 나도 딱히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은 벨 에포크 시기의 가상 도시 크라트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등장하는 NPC 유제니는 거의 유일한 동양인 소녀다. 유제니는 그의 고향을 ‘아침의 나라’라고 직접 밝힌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줄곧 서구에 해설되던 1800년대의 조선을 인용하는 셈이다. 기술자로서의 열정을 감추지 않는 유제니는 작중에서 주인공의 장비를 강화하고 수리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주인공이 여정을 진행하며 크라트라는 세계의 상을 완성해가는 동안, 유제니는 그 한 축이 된다. 그리하여 시계태엽과 기계장치로 맞물린 크라트의 테크놀로지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동시에 아침의 나라는 아득한 온정의 저편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설정은 콘솔 게임 세계로의 진출을 열망하며 발현된 국내의 이야기 구도를 유비적으로 환기한다. , 자랑스러운 ‘국산 트리플 A’ 은 국내 게임사인 네오위즈 산하의 라운드8 스튜디오에서 개발되었다. 온라인이 아닌 싱글 플레이 게임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스탠드 얼론 게임으로 분류된다. 장르는 일본의 개발사 프롬 소프트웨어에서 유래한 소울라이크다. 이는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전투를 치르고, 맵을 탐색하고 보스와 전투를 벌이는 것을 주축으로 한다. 일반적인 한국 게임이 ‘리니지라이크’로 요약되는 온라인과 모바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확실히 이질적이다. "소울라이크 팬이라면 만족"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낸 은 ‘국산 트리플 A 게임’으로 자부심을 담아 호명된다. 국산이라는 호명 뒤로는 그간 한국 게임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 된다. 2022년 기준으로 게임 이용자가 74.4%에 달할 정도로 게임을 향유하는 사람은 많고 1) , 문화예술진흥법의 대상으로 편성되었지만 정작 문화로서의 위상을 뒷받침할 만한 자국 게임이 부족하다는 절박함이 크게 자리한다. 수용자의 불만은 생산자들의 요구와도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수익성 등의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했다면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최지원 디렉터의 인터뷰 멘트 2) 는 자신을 개발자와 수용자 모두를 아우르는 재미-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의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와중에 한국 게임계가 주력하던 온라인 분야에서도 중국의 선두가 이어지며 위기의식이 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뉴스 빅데이터 수집 및 분석 시스템인 빅카인즈에서 을 서치해보면 ‘MMORPG’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과 같이 반대 항으로 설정된 장르가 함께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출시된 은 한국 디지털 게임의 역사에서 특수한 좌표를 설정한 작품으로 위치 지어진다. 우선 콘솔 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도 성공적인 판매를 거두었다는 측면이 강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10월 17일 기준으로 은 글로벌 누적 판매 100만 장을 달성함으로써 상업성을 입증했다. 판매의 90% 이상이 해외 시장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침체된 한국 게임 시장의 새로운 활로”를 제시한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특히나 코로나 특수가 끝나며 전체 게임 이용자의 비율이 현저히 줄어든 시점이다 3) . 콘솔 게임은 드물게 이용률 증가를 경험한 영역으로 부각되었다. 이에 의 성공 경험에 비추어 포화된 모바일 게임 시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제시되기도 한다. 4) 그러는 한편, 다른 측면에서는 작품성에 관한 논의가 검토된다. 일반적으로 게임전문지가 기존의 소울라이크 게임과 문법을 인용하며 게임의 작품성을 평가한다. 즉 이 이미 형성된 문법으로서의 소울라이크를 얼마나 충실히 좇는지가 주로 서술된다. 그 안에서 게임의 독자성을 부각하는 요소로는 “최적화”와 “그래픽”이 꼽힌다 5) . “세계적인 개발사들도 PC 구동 환경 마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시대에, 독보적으로 완벽한 최적화를 구현해 놀라움을 샀다” 6) , “시원한 타격감, 독특한 세계관, 사실적인 그래픽 등도 호평을 받았다”와 같은 기술이 대표적이다. 7) <폭스 레인저>와 으로 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의 과거와 현재 이처럼 을 둘러싼 기사들을 읽다 보면, 이전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지, 그와 관련해 당시에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불쑥 궁금증이 든다. 한국 게임의 역사를 죽 훑었을 때, 스탠드 얼론 패키지 게임의 시원은 1992년에 발매된 <폭스 레인저>에 닿는다. 이 작품은 소프트 액션 사에서 개발되었다.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발매된 최초의 PC 패키지 게임으로 거론된다. 소프트 액션은 “PC 통신망을 통해 한 스테이지만 플레이할 수 있는 공개용 버전을 배포하는 마케팅 기법을 구사”하고, “‘고급 기술’이 구현되었다는 것에 맞춰” 게임을 홍보했다 8) . 이와 같은 지점은 정식 출시 이전에 데모판을 공개함으로써 플레이어를 유치하고 게임의 최적화 수준을 주요한 홍보 지점으로 세운 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당시의 언론 보도는 외국산 게임에 잠식된 한국을 위기로 진단한다. “일본·미국산이 90%이상을 차지하는 전자게임시장”이라는 문구를 통해 게임 선진국으로 어떤 나라가 상정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은 게임의 개발과 게임 향유 문화의 측면에서 모범상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는 사뭇 비장하게 강조된다. 수출주도 경제를 추구하는 기조, 그리고 다가오는 정보화 시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필요는 인기 작품 <폭스 레인저>를 개발한 남상규를 “컴퓨터 산업 전사”로 일컫기도 한다 9) . 인터뷰에서 그는 “한글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일본 가나 글자를 독해하며 게임에 몰두하는 현실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바라보며 “어떤 소프트웨어보다도 게임 소프트웨어의 국적을 찾는 일이 급하다”고 모종의 사명감을 드러낸다 10) . 이때 게임에서 언어는 ‘우리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남상규의 인터뷰를 염두에 두고서 2023년에 발매된 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이 게임이 별도의 한국어 음성 없이 영어만 녹음한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게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작중 인물인 소피아는 주인공에게 닿길 바라며 말을 건네고, 그리하여 “Can you hear me?”는 그를 어둠으로부터 깨워낸다. 이는 이 글로벌 게임 체인에 깊이 가닿고자 하는 열망과 겹쳐 보인다. 실제로 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게임 패스에 입점했으며, 초국적 기업이 견인하는 거대 콘솔 플랫폼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서 경합하는 접두사 ‘K-’가 구현된다. 이 접두사는 한국을 환기하면서도 “국가 지리적 범주를 넘어” “원산지가 외국인 콘텐츠를 전유한 사례”로서 복잡한 의미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11) . 즉 은 소울라이크라는 같은 장르를 즐겨 온 전 세계 게이머에게 호소한다. 그러는 동시에 국내의 게이머들에게는 양질의 게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다. 그 결과 게임 문화장에서 선진국으로 간주해온 국가와 상호 동등한 주체로 서고 싶다는 국내 게이머들의 기대가 충족된다. 이 같은 점은 을 리뷰하는 매체들에서 드러난다. 독특하게도 몇몇 기사들은 이전에 소울라이크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이 없으며 이 첫 소울라이크 게임이라는 점을 밝히고 시작한다. “처음 플레이해보는 기자에게도 P의 거짓은 그야말로 ‘신세계’”와 같은 문장에서 “소울라이크 초심자가 즐겨본 P의 거짓은 ‘지인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입문용 소울라이크 타이틀’”로 이어지는 흐름은 사뭇 모순적으로도 들린다 12) . 그러나 여기서 발생하는 결절점을 ‘초대 받음’의 감각으로 읽는다면 어떨까. 은 소울라이크로 상정된 글로벌 콘솔 게임 시장과 한국인 게이머 사이에 놓인 매개물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게임’에 가닿고자 하는 열망 소울라이크 게임에 ‘초대 받음’으로써 느끼는 기대나 흥분이 작품이 제공하는 경험에서 비된다. 한편으로 ‘초대’는 안과 밖의 구분을 상정한다. 그렇다면 어디가 글로벌 콘솔 게임의 내부고 외부일까? 따라서 소울라이크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경험한 긍정적인 기분이 사회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해진다. 미아 콘살보는 <애니팡>과 같은 캐주얼한 소셜 게임이 유행하던 시기, 기존의 게임 개발자 및 커뮤니티가 이를 두고서 ‘진정한 게임’이 아니라며 적대하던 현상에 주목한다. 이에 ‘진정한 게임’과 ‘그렇지 못한 게임’을 가르는 기준이 어떻게 활성화되는지 제시한다. 첫 번째는 과거에 어떤 ‘적통’ 게임을 만들었는지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게임의 메커닉이다. 손가락 터치 몇 번 만으로 간편하게 수행되는 모바일 게임은 키보드·마우스 및 게임 패드와 같이 복잡하고 정교한 조작으로 구동하는 게임에 비해 일견 하찮게 느껴진다. 그 결과 모바일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닿게 된다. 이러한 기준들을 적용하여 만들어지는 상상의 ‘게이머’ 커뮤니티는 진정한 게임과 그렇지 않은 게임을 구분하는 룰을 영속화한다. 그러한 열망은 왜 한국에서 게임과 친숙한 이들이 에 환호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3) . 물론 첫 번째 기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의 위상은 다소 애매해진다. 한국 게임사는 일반적으로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성장을 구가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MMORPG 중심으로의 전환을 거치며 “아케이드 게임과 비디오 게임 위주의 세계 게임 시장의 표준적인 흐름과 뚜렷이 구별되며 철저하게 온라인 게임에 편향된 성장”을 이뤘다. 을 개발한 네오위즈의 경우 <맞고>와 같이 소셜 카지노게임이 매출이 가장 높은 비중으로 실적을 견인해왔다. 즉 ‘진정한 게임’과 거리가 먼 게임을 서비스 해 왔던 온라인 게임 회사들이 다시금 콘솔 게임의 주축이 되고 있다. 그들이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어 게임 문화를 제고하기를 바라는 갈망은 “게임 강국 한국에서는 왜 GOTY수상작이 안 나오는 걸까?”와 같은 IT 기사의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유추된다 14) . ‘게임 강국’이라는 말에서 전제되는 것은 온라인과 모바일을 바탕으로 수익성을 매끄럽게 구현한 한국의 거대 게임 산업 맥락이다. 물론 배틀 그라운드가 고티를 탄 사례가 있지만, 이 기사에서 비교항으로 설정되어 거론되는 작품은 ‘위쳐 시리즈’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와 같은 스탠드 얼론 게임이다. 그 같은 논리 설정은 온라인이 ‘진정한 게임’과 일정 부분의 거리가 있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을 ‘진정한 게임’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항은 소울라이크라는 장르에서 강하게 유래한다.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성장한다’는 구현함으로써 직관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이는 많은 모바일 게임이 간단한 터치로 수행되며, 성장의 감각이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에 축적되는 것과 대비된다. 플레이어의 성장은 그 신체나 인지에 귀속됨으로써 고유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복잡하고 정교한 메커닉을 신체적으로 습득하고 구현한다는 ‘진정한 게이머’ 판타지가 충족된다. 여태껏 게임 담론의 역사는 크게 규제 담론과 산업 담론으로 요약되었다. 중독의 대상이자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해 오락물로서의 게임, 그리고 해외 수출을 견인하는 자랑스러운 국력으로서의 상품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게임 중독 담론에 위기감을 느낀 게임사들이 ‘한국 게임의 사망’을 부르짖으며 ‘게임은 문화’라는 선언을 방어적으로 되풀이하기도 했다. “오래되고 어색한 슬로건” 15) 이지만 동시에 문화가 품은 넓은 의미에 기대어 역량을 발굴할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 게임이용의 문화사를 발굴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이라는 이례적인 작품의 사례는 그 플레이 경험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인식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대항 담론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준점에 부합함과 부합하지 않음으로 나뉘며 게이머 커뮤니티의 ‘진정성’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1) 한국콘텐츠진흥원, 「2022년 전체 게임 이용률」, 『2022 대한민국게임백서』, 2023, 6쪽. 2) 이시영, 네오위즈 'P의 거짓', "기괴하지만 아름다워야한다", 고집스러운 철학 녹여내다, 2021.11.30.등록, 게임조선,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55993&memberNo=12478036 3) 한국콘텐츠진흥원, 2023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 2023.10.19. 4) 조충희, 네오위즈 'P의 거짓' 성공, 내년 쏟아지는 콘솔 게임에 대한 기대와 우려, 2023.10.22. 비즈니스 포스트, https://www.businesspost.co.kr/BP?command=article_view&num=330565 5) 김승주, [리뷰] "진실 혹은 거짓" P의 거짓은 재미있나요?, 디스이즈게임, 2023.09.14.등록.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16/?n=176290#:~:text=%EC%B4%9D%ED%8F%89%ED%95%98%EC%9E%90%EB%A9%B4%20%3CP%EC%9D%98%20%EA%B1%B0%EC%A7%93,%EC%9D%98%20%EA%B1%B0%EC%A7%93%3E%EC%9D%80%20%EA%B2%B8%EC%86%90%ED%95%A9%EB%8B%88%EB%8B%A4 . 6) 길용찬, 프롬도 이건 배워야 한다, 'P의 거짓' 업계 최장점 2가지, 2023.10.19.등록, 게임플, https://www.game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420 7) 피노키오 마법 통했다...네오위즈 ‘P의 거짓’ 콘솔 3관왕 비결은, 2022.08.31.등록,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20830_0001996358 8) 남영. "1990년대 한국 PC 게임 산업: PC 게임 개발자들의 도전과 응전." 한국과학사학회지 39, no. 1 (2017): 33-63. 9) 박종성, 新世代(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3) SW의 승부사들, 1993.04.16.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0) 김명환, "우리말로 게임" 국산개발 활기, 1993.01.15. 조선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1) 박소정. "확장하고 경합하는 K : 국내 언론 보도를 통해 본 K 담론에 대한 분석." 한국언론학보 66, no. 4 (2022): 146-147, 10.20879/kjjcs.2022.66.4.005 12) 차종관, 못 깨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요…‘P의 거짓’ 해봤더니 2023.09.27.등록, 쿠키뉴스,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309260243 13) Mia Consalvo·Christopher A. Paul, "Facebook Games Were Evil", Real Games: What's Legitimate and What's Not in Contemporary Videogames, 2019:The MIT Press. 14) 김혜지, 게임 강국 한국에서는 왜 GOTY수상작이 안 나오는 걸까?, 2020.05.15.등록, 앱스토리, https://news.appstory.co.kr/report13261 15) 최태섭,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한겨레출판: 2021, 18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게임이 이야기를 경험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최근에는 <마라톤>을 플레이했습니다.

  •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위한 제노바 첸의 작업들

    게임이 미술관에서 ‘작품’으로 전시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듯, 게임을 만드는 것 역시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술 매체로서 게임, 예술가로서 게임 제작자. 게임을 예술 매체로 취급하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예술가로서 게임 제작자들의 존재감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제노바첸, 플로우, 작가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Leesun Park Studies games from a social perspective. Believes that games, as a tool, ultimately offer a way to explore what it means to be human. These days, mainly writing.

  • 게임과 예술 : 게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문에 현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 일정한 미적인 속성을 체계적이고 인공적으로 구성한 형식이 아니면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했다. 사진과 영화가 아날로그 기술적 혁신에 대응하는 형식이었다면, 게임은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고도의 예술형식이라고 보는 게 당연하고 타당했다. “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예술 미술 비평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angwoo Kim Studied philosophy and aesthetics. Has gazed at the world through three lenses—art, media, and games—working in art curating and writing. Curated exhibitions including The Age of Sin (2010) and Just One More Round (2009), co-wrote Game and Cultural Studies, and translated books such as Intimate Murder and Turing's Man.

  •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aehoon Lim Assistant Professor in the Schoo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Liberal Arts) at Chosun University. Researches the intersection of media technology and literary history, as well as SF culture and soundscape art. Co-authored books include Machine Critiques, A Chronicle of Korean Technoculture, and A Citizen's Guide to Technology; major works include The Freedom Not to Be Searched and The Mediology of Friendship.

  •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데스루프〉 는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어떤 선형 구조의 게임들은, 모두 그 과정의 가치가 결과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영원회귀가 가지는 긍정성은 결과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은 과정은 다시금 플레이 할 가치를 빠르게 잃는다. 그러나 〈데스루프〉 는 그 결말에 이르러 진정으로 모든 과정을 긍정해버리면서 다시금 그 루프로 뛰어들게 만든다. 물론 플레이 메카닉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시 이 게임의 파괴와 생성을 플레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퇴장한 후에도 이들이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플레이한 과정보다 더 즐거운 유희가 될 거란 것도. 이 부분이 조금은 특별하다. < Back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03 GG Vol. 21. 12. 10. 김연자 말고, 니체의 ‘아모르 파티’ 수년 전,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 가 인터넷에서 크게 유행을 탄 적이 있었다. 특유의 비트와 김연자의 보컬로 곡 자체도 훌륭하지만 가사도 그렇고 후렴의 막강한 뽕짝 비트가 절묘했다. 사실 일종의 유머로서 소비되기는 했지만, 트로트 답게 좀 쌉쌀한 맛도 있는 노래였다. * 막상 생각해보면 이 노래만큼 아모르 파티를 잘 설명한 것도 없는듯. 이미지 출처 - TV조선 유튜브 채널 그렇다면 바로 이 곡의 제목 ‘아모르 파티(Amor Fati)’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말 자체는 라틴어이고, 대충 들으면 어디서 나온 유명한 경구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이 단어의 출처는 저 멀리 프로이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로 간다. “신은 죽었다.” 는 패기 넘치는 한마디를 꺼냈던 이 철학자는 그 말마따나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고자 몇가지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물론 여기서 니체 이론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분량도 모자라거니와 애초에 필자도 관련 전공 또는 심도 있게 연구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더할 나위 없이 니체가 어울리는 어떤 게임을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니체가 제시한 개념 중 ‘아모르 파티’ 는 니체 사상에서 일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이다. 풀어 쓰자면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이란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과는 정반대로,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고 결정하는 운명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흥하거나 망하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자신의 운명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그를 긍정하라는 것. 이처럼 니체의 사상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것처럼, 현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추구하며, 인간 개인이 그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론이 바로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라고 축약할 수 있다(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요약한 해석이다). 영원회귀란 파괴(실패, 좌절, 괴로움 등)와 생성(성공, 성취, 즐거움 등)의 동일한 과정을 무한 반복하여 마침내 긍정의 결론(내 운명-인생을 사랑-긍정하자)에 다다름으로서 마침내는 파괴의 과정 역시 긍정의 질(형식)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삶에 대한 긍정이란 이뤄낸 성과, 성공, 원초적인 즐거움과 쾌락 같은 너무나 당연한 긍정의 질을 말하는게 아니다. 삶에서 필연적으로 얻고 겪게 되는 좌절과 실패, 괴로움과 불쾌함까지도 긍정하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이 과정이 바로 영원회귀이며, 그 결과 이르게 되는 것이 아모르 파티이고, 또는 이 둘은 서로의 원인이자 서로의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니체의 사상 전체를 상당히 짧고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큰 맥락은 같다. ‘영원회귀’ 라는 고통과 성취의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마침내 얻어낸 결실은 그 모든 과정을 한순간에 긍정적인 여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자신의 운명의 결론을 긍정함으로서 그 과정도 값지고 긍정적인 질로 바꾸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인생의 자세가 바로 ‘아모르 파티’ 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자, 그럼 이제 〈데스루프〉 라는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게임의 기본 모델 ‘영원회귀’ 가 데스루프에서 특별한 이유 〈데스루프〉 는 그 이름에서부터 죽음으로 되풀이되는 루프를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흔히 ‘루프물’ 이라고 하는 장르 또는 특성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많이 선보여졌다. 수십년 전 TV에서 특선 영화로 보던 ‘사랑의 블랙홀’ 이나 최근으로 보면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는 더더욱 많이 사용된 요소이기도 하다. * 데몬즈 소울 리메이크(Demon’s Souls, 2020). 이쪽 게임 디자인에선 워낙 유명한 소울 시리즈. 당연하게도 이는 게임에서도 흔히 활용되는 소재였다. 아니 오히려, 죽음과 부활로서 플레이어가 성장하는 논리는 플레이의 반복성을 부여해야만 하는 게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 논리다. 여기서 나아가 아주 직접적인 ‘영원회귀’ 적인 과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게임들은 많다. 오래 전부터 그 예시로 들어왔던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 을 위시한 ‘소울 시리즈’가 그 예다. 참고로 최근에는 한국에서 이름 자체가 ‘영원회귀’ 인 게임도 나왔다. * 이터널 리턴(Eternal Return, 2020). 여기는 이름부터 영원회귀다. 사실 게임 내용은 크게 상관… 없나? 그리고 사실은 ‘소울 시리즈’ 까지 가지 않더라도 게임은 근원적으로 그 구조에서 영원회귀를 기본 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계속해 같은 시도를 하며 죽으면서 경험을 쌓고 강해지고, 마침내 극복해내고 한 번의 성공을 만들어 냄으로서 그전까지의 실패가 모두 이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서 빛나게 되는 것. 그러나 〈데스루프〉 가 영원회귀 모델에서 독특한 점은 바로 플레이어의 성장 또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플레이어의 스킬 향상이나 명시적인 게임 내 각종 스테이터스, 기능의 향상이 아닌, 정보의 취득으로 표현한다는 부분이다. 보통 이러한 죽음(실패)과 부활(재도전),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게임들은 그 성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게임 내의 수치나 변화보다는 플레이어 자신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노골적인 예시인 〈다크 소울〉 시리즈의 경우 거듭되는 싸움을 통해 상대의 패턴을 파악하고, 나 자신의 로직, 나 자신의 조작이 가장 크게 성장에 관여한다. 물론 거기에 최적화된 도구를 다시 고르거나 필요한 만큼의 스테이터스를 향상시키고 돌아오는 등의 선택도 가능하지만, 플레이어 자신이 가장 큰 성장의 매개체라는 점은 〈다크 소울〉 이나 〈몬스터 헌터〉 같은 부류의 게임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 이 게임의 룰과 목표는 간단하다. 크게 세가지다. 1. 루프를 끊어라. 2. 하루 안에 8개의 타겟을 제거해라. 3.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방법을 찾아내라. 그러나 〈데스루프〉 는 이러한 노골적인 영원회귀의 방법론을 취하면서도 몇몇 부분에서 좀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갔다. 게임은 하루의 루프가 반복되며, 하루는 4개의 시간대와 4개의 장소로 구분되고, 각 시간대 별 장소마다 얻을 수 있는 단서가 다르게 고정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없게 되는 정보가 생긴다. 때문에 죽거나 하루를 넘겨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놓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다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고, 또 이것이 게임 내 퀘스트 로그의 변화로 직접 기록된다. 즉, 마치 탐정처럼 어떤 정보를 얻고 실마리에 접근하는 것이 성장이자 게임의 진척도를 상징한다. 플레이어의 자각이 바로 상승을 의미하며, 무력에 의한 극복이라기보다는 무수한 스무고개 끝에 정답을 찾아내는 식이므로 그 스무고개를 확인하기 위한 생성과 파괴가 반복되는 것이다. * 가지런히 정돈된 정보가 계속 쌓이고 중첩되면, 이러한 '정답' 이 나온다. 무엇보다 〈데스루프〉 가 보여주는 영원회귀 구조에서 다른 점은 바로 ‘죽음’ 을 보다 바른 성장을 위해 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게임에서 죽음이란 가급적 피해야만 하는, 어떤 심각한 패널티로서 존재한다. 어찌보면 징벌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스루프의 죽음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또는 이미 지나친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한 일종의 선택지로 기능한다. 마치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 에서 주인공이 작전을 실행하다가 수틀리면 바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어 다시 하루를 시작하듯 말이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의미이며 패널티였던 죽음이 하나의 선택지이자 상승의 원동력이 되면서, 즉 게임 자체를 직접적으로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면서 보다 ‘아모르 파티에 가까운 파괴와 재생성으로 한걸음 다가간다. 이는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부분에서의 차이도 크지만, 무엇보다 플레이어가 취하는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고 플레이어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뜻한다.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맞이하는 죽음과 이를 잘근잘근 곱씹는 절치부심의 과정이 아닌, 거시적인 측면에서 세운 계획을 따라 하나하나 자신의 의도에 따라 스스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재생성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때문에 이 게임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모두 계획대로야.” 또는 “이제는 이걸 하면 되겠군.” 하는 식으로, 플레이어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크게 달라진다. * 죽이고 죽고 정보를 모으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선택과 확인의 연속.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통상적으로 부정적인 질을 지니며 실패의 상징인 ‘죽음’ 은 그 자체로 긍정의 질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이 게임이 가장 니체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원회귀와 아모르 파티의 기본은 행위자의 주체성, 그리고 결과에 대한 긍정과 확신을 통해 모든 과정마저 긍정해버리는 자세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 로직 그 자체다. 긍정의 끝이 아닌, 긍정의 순환을 만드는 끝 게임의 결론은 마치 이런 해석을 부추기기라도 하는듯 크게 두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되어있다. 섬에 걸려있는 루프를 끝내고 수십년이 지난 세계로 나가거나, 아니면 루프를 유지하고 주인공과 줄리아나의 끝나지 않는 놀이를 계속하는 것. 여기서 대부분은 지금까지 목표로 해왔던 루프의 파괴를 선택하지만, 오히려 어떤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이게 끝인가? 정말로 이걸로 모든 지금까지의 과정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 되었나? * 영원회귀적 관점을 떠나서도 너무나 훌륭한 게임이니 꼭. 그렇기 때문에 엔딩에 이르러서 이렇게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과 탄생이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를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줄리아나라는 존재 자체로 인해서 나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희가 된다면? 이런 가정은 지금까지 루프를 깨기 위해서 달려왔던 플레이어들에게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 선택은 어쩌면 궁극적으로 아모르 파티를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까지 반복한 루프가 영원히 반복되고 또 되풀이 되겠지만, 더 이상 고통과 결론을 위한 감내의 과정이 아닌 그 자체가 유희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 이 황야마저도, ‘내 행위의 결과’ 이기에 긍정할 수 있다면? 〈데스루프〉 는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어떤 선형 구조의 게임들은, 모두 그 과정의 가치가 결과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영원회귀가 가지는 긍정성은 결과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은 과정은 다시금 플레이 할 가치를 빠르게 잃는다. 그러나 〈데스루프〉 는 그 결말에 이르러 진정으로 모든 과정을 긍정해버리면서 다시금 그 루프로 뛰어들게 만든다. 물론 플레이 메카닉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시 이 게임의 파괴와 생성을 플레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퇴장한 후에도 이들이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플레이한 과정보다 더 즐거운 유희가 될 거란 것도. 이 부분이 조금은 특별하다. 때문에 그동안의 역경을 모두 감내하고 오히려 루프 안에 갇히기를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몰락하는 자신을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의 정신에 부합하며, 이것이 오히려 진짜로 이 게임에 어울리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스루프〉 는 좋은 게임이지만, 그 과정에 비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떤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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