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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 Back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03 GG Vol. 21. 12. 10.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나온 〈어비스리움〉. 〈어비스리움〉이 외로운 산호석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플레로게임즈의 최덕수 팀장, 장연정 사원과 이야기해보았다. Q. 〈어비스리움〉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어비스리움〉은 올해 7월에 5주년을 맞은 게임입니다. 현재 시장에서 ‘힐링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불리고 있고요. 성장 압박을 심하게 받지 않고 원할 때 켜두기만 해도 힐링 되는 형태의 게임이라고 많이들 얘기합니다. 서비스하는 입장에서는 힐링을 강요하기보다는 예쁘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Q.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게 나름 선구적인 포지션입니다. 회사나 직원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는지요. A. 네. 회사 차원에서는 〈어비스리움〉을 하나의 IP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핀오프 작품도 이미 두 개 낸 상태고요. 앞으로도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관을 확장해나갈 가능성을 계속해서 살피는 중이에요. Q. 콘텐츠로써의 게임은 이용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5년 동안 고객들에게서 받은 피드백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A. SNS에 스크린샷 찍은 걸 포스팅해 주는 유저들이 종종 있어요. 하나같이 저희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예뻐서 항상 감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어비스리움〉 물고기 도감을 운영하는 유저들도 있는데 그 포스팅도 즐겁게 보고 있고요. 또, 대부분의 게임사가 그렇지만 저희는 매달 업데이트를 하거든요. 이 업데이트를 진행했을 때 꼭 예상을 뛰어넘는 유저들이 있어요. 한 달 치 콘텐츠를 준비했는데 세 시간 만에 완료한다던가.(웃음) 피드백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진 모르겠지만 유저들의 이런 플레이를 기쁘게 지켜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Q. 이번 호의 테마는 ‘보는 게임’입니다. 그 ‘보는 게임’ 안에서도 ‘방치형 게임’을 찾아오게 됐는데요, 〈어비스리움〉을 운영하시는 입장에서 ‘방치형 게임’은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A. 사실 〈어비스리움〉을 ‘유저들이 방치하도록 만들어야지’ 하고 운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보는 즐거움을 위해 위젯처럼 시계가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더 보기 좋게 만드는 건 있는데요, 따지고 보면 방치형 게임 전반의 플레이 스타일인 것 같아요.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콘텐츠를 길게 늘여놓은 걸 ‘방치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 폭 자체가 크진 않은데 숫자를 길게 늘여놓고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죠. 그게 방치 게임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임성이라고 봅니다. 별개로 〈어비스리움〉은 단순 방치에서 그치지 않는 형태의 콘텐츠들도 추가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방치형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유저들과 업데이트하고 세 시간 이내에 완수하는 유저들 모두에게 선택지를 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Q. ‘방치형 게임’이라는 단어를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긴 합니다. 사실 ‘방치형 게임’은 소위 ‘진정한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로부터 공격받는 포지션이기도 하죠. ‘방치형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다’라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게임’이라는 건 대부분 콘솔게임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런 입장이거든요. 모순적이죠.(웃음)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 굉장히 조작감이 많은 게임이 있었어요. 그런데 리텐션의 측면이라든가 매출 지표적인 측면에서 성적이 좋지는 않았어요. 고정 유저층이 있긴 했지만, 지금 모바일 게임에 요구되는 목소리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작하는 맛이 있는 게임을 바라는 유저와 아닌 걸 선호하는 유저가 양립하는 건 맞지만요. Q. 그럼 ‘진정한 게임’이라는 건 비판적인 목소리 크기 차원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잖아도 저는 그게 항상 궁금했거든요. 왜 아직도 커뮤니티는 콘솔 쪽만 활발하고 모바일 게임 쪽은 아닌가. 혹시 이거에 관해 의견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제가 게임 서비스하면서 그런 목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게임 조작하는 건 재밌는데 너무 피곤해.’ 그래서 원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오토 기능이나 한 번에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계속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커뮤니티에서 의견이 잘 나오지 않는 건 그런 유저 경향도 다소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Q. 그럼 질문을 확장해보죠. 예쁜 물고기들이 오가는 수족관을 디지털 액자처럼 보여줄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상상해볼게요. 그러면 그것과 〈어비스리움〉은 어떤 차이를 갖고 있을까요? A. 내 폰 안에 들어있는 내 어비스리움은 내 고유의 아이디가 박혀있는 뭔가로 인지되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유튜브 같은 데서 캡처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과 내 수조 안에 무언가를 넣는 건 또 다른 측면이거든요. 그래서 디지털 액자보다는 어비스리움 쪽이 ‘내 소유’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나 싶어요. ‘이 게임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수조는 온전한 내 거다.’라는 전제가 깔리는 거죠. Q. 지금 말씀에서 어떤 힌트를 얻은 느낌이네요. ‘방치형’이라는 장르 안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대단히 크게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A. 맞습니다. 그리고 방치형 게임이 예전에는 ‘스트레스 없는 빠른 성장’으로 많이 나왔는데 요즘 나오는 것들을 보면 주로 달고 있는 부제가 ‘키우기’예요. 그런 부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걸 키운다.’라는 열망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면 다 똑같은 캐릭터고 성장하는 폭도 같지만 다른 사람이 만렙을 찍은 것과 내가 찍은 건 다르니까요. Q. 말씀해주시는 중간에 ‘키우기’라는 키워드가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게임 역사 속에서 ‘키우기’라는 건 전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였죠. 그런데 ‘전투가 빠진 성장’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재미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A. 전투를 통해 얻게 되는 건 결국 경험치라는 수치잖아요? 그 수치로 캐릭터 레벨업을 시키고 다른 무언가를 계속 달성해나가는 거고요. 저희 게임 같은 경우에는 전투는 빠졌지만 산호석이라는 캐릭터를 성장시킵니다. 그리고 이 산호석이 성장하면 ‘생명력’을 계속 뱉어내는데, 이 생명력은 RPG로 비유하자면 경험치나 재화랑 마찬가지예요. 그런 맥락에서 생명력은 곧 전투의 결과물과 같으니, 그게 ‘보는 게임’ 나름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성장’이라는 것도 파고들면 어려운 개념이죠. 많은 사람이 빠른 성장을 원하지만 정말로 빠르게 성장하면 할 게 없어지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하고요. ‘어디서 어디까지가 적절한 성장인가’가 늘 애매한 것 같습니다. 실제 운영하시는 입장에서는 성장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려고 하시나요? A. 일단 성장이라는 것 자체가 PC 온라인 게임 시절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긴 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이 없었거든요. 처음 자동 전투가 들어왔을 때도 ‘이게 무슨 재미야’라는 의견이 주류였는데 지금은 그걸 다 하고 있죠. 그래서 저희도 이 부분이 항상 숙제처럼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저희 게임만의 문제도 아니고 또 모바일 게임만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재미 영역이 다르니까 느긋하게 방치형으로 즐기는 유저도, 업데이트 몇 시간 만에 확 크는 유저도 있는 거겠죠. 그 사이를 찾아서 모든 유저들이 업데이트 텀 동안 즐길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긴 한데, 유저들의 성향이 극단을 달리는 현상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추세 같습니다. Q.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비스리움〉의 물고기들을 눌러보면 응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테이블 위 화초처럼 볼 수 있으면서도 응원의 메시지가 나오는, 이런 것들이 〈어비스리움〉이 추구하는 ‘힐링’이 아닐까 싶은데 혹시 ‘힐링’ 이외에도 특별히 전하고자 하는 게 있으신지요. A. 〈어비스리움〉 시리즈의 모든 스토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키워드가 우정과 애정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방치형이기에 힐링이다.’라는 걸 넘어서, 게임의 키워드 자체를 유저들에게 전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푸시 메시지에서도 응원의 의미를 담으려 노력하고 있고요. Q. 듣다 보니 같은 힐링 계열이지만 게임과는 또 다른 영역인 명상 앱도 생각이 나네요. 〈어비스리움〉이 명상 앱과는 어떤 차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유저들이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캐릭터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서 어떤 위로 같은 걸 받길 원하고 있어요. 메시지를 작성하는 저희도 스스로를 위로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고요. ‘위로’라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Q. 그러면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아까 〈어비스리움〉이 디지털 액자 같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캔버스로 보면 또 어떤 시각일까요? 그러니까 미술 작품으로 이해해보면 어떠냐는 거죠. A. 이 게임이 미술 작품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고민은 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동세대에 같은 감성을 공유하는 제작진들이 스스로가 감동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구조다’ 정도로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적인 걸로 보자고 하면 너무 거창한 느낌이라. 그래도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그냥 내 감정에 공감해주길 바라.’라고 무겁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해요.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것처럼요. 예술도 여러 종류 있겠지만, ‘미술’이라는 단어에 깔린 거창한 것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느껴지긴 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해석 가능한 측면도 있겠지만 의도 자체는 동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동세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게임인 게 크고요. 그렇게 해서 녹여낸 감성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Q. 〈어비스리움〉이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되는 거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A. 그런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샌드박스 같은 느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힐링 받을 수 있는 물고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를 꺼내놓고 그 풍경을 즐기는 걸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Q. 그런 힐링을 ‘내가’ 이뤄냈다고 하는 게 핵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을 할 줄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원하는 느낌을 낼 수 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즐거움이 SNS 사진 공유를 하게 만드는 바탕이 되는 것 같고요. A. 네. 저희가 따로 안내는 안 했는데요, 사실 동일한 종류의 작은 물고기를 여러 마리 생성해두면 무리 지어 움직입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신기하다, 재밌다 하는 유저들도 많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런 부분을 확장해서 보자면 말씀 해주신 거랑 같은 거죠. Q. 그런 물고기에 대해 다루려면 모든 제작진이 어류 도감 같은 레퍼런스를 많이 보시겠네요. A. 많이들 보고 있긴 합니다. 최근에는 범위를 넓혀서 포유류까지 보고 있습니다. Q. 도감 말고도 따로 특별히 참고한다거나 영감을 받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저희가 매 업데이트 때마다 테마를 다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업데이트 콘텐츠를 꾸릴 때마다 참고할만한 데이터가 너무 없다는 것에 부딪히곤 해요. 업데이트가 잦은 편이다 보니 더 그렇죠. 그래서 어류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고 매달 눈에 띄는 예쁜 거, 지금 트렌드가 되는 어류, 포유류, 새 같이 여러 가지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방치형 게임’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짧게 짧게 플레이되던 기존의 게임들과는 다르게 느릿한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안온한 감각도 있는 것 같고요. A. 키우기 게임의 경우에는 만렙이 되면 환생하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처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잖아요? 그게 일반 RPG에서는 전투 한 번 끝난 거랑 마찬가지거든요. 다른 게임은 그런 식으로 하루면 끝날 걸 방치형은 며칠 더 늘여놨으니 기술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렇게 방치함으로써 느껴지는 어떤 편안함이 분명 존재하는듯합니다. 맞는 말씀 같아요. Q.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현대인의 시간관, 놀이, 여가와 엮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방치 게임이 다른 놀이, 다른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없애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려도 드네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저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해서 방치형 게임을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경우에도 다른 게임을 하고 있어도 옆에서는 방치형 게임이 계속 돌아가고 있거든요. 다른 게임 하다가 죽으면 어비스리움 한 번 보고.(웃음) 그래서 이 둘은 완전한 별개의 놀이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한테 ‘너 온라인 게이머니, 모바일 게이머니, 콘솔 게이머니.’ 이런 식으로 물어본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은 말하지 않을까 싶고요. Q. 제가 모바일 게임 관련 인터뷰하면서 흥미롭게 본 게 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게임을 병행하는 경우가 대다수더라고요. 드라마 시청 시간을 침범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바일 게임, 방치형 게임은 굉장히 안정적인 게임이 되는 것 같습니다. A. 아까도 한 이야기지만, 모바일 게임에 관해서 ‘무슨 게임 하는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이게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바일 게임에 이 정도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이 정도로 조작하고 싶지 않다.’일 수도 있거든요. 그 방면에서 방치형 게임이 요구하는 것과 패키지 게임이 요구하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모바일 게임에서 패키지 게임 같은 게임성을 요구하는 이들은 방치형 게임을 하지 않겠죠. 그 때문에 안정적이라는 인상이 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면서 마무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A. 장연정 사원: 〈어비스리움〉은 시간을 쪼개 짬짬이 플레이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힐링이 될 수 있는 게임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고요. 〈어비스리움〉이 일상 속 작은 휴식 같은 게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덕수 팀장: 개인적으로는 지금 〈어비스리움〉 시스템이 조금 복잡하지 않나 싶습니다. 구체화가 되어있는 건 아니지만 우선 고령자가 봤을 때 글자가 잘 보이도록 만들고 싶고요.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심플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백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주얼 노벨 올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Back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01 GG Vol. 21. 6. 10.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애니센터 앞에서 불타는 만화. 1996년에는 정부가 만화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른바 ‘청보법 파동’이다. 여기에 항의하기 위해 만화가들이 여의도에 모여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었고, 1997년에는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기소됐다. 대회가 열린 1996년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 됐고, 2001년 국가 공식 기념일이 됐다. 2000년 여름에는 ‘둘리아빠’ 김수정 당시 만화가협회장의 주도로 청보법 파동에 항의하는 침묵시위가 개최됐다. 김수정 화백은 “만화가협회 회원과 함께 나서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현장에는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연합,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이 있었다. [1] 2012년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부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독자와 작가들이 함께 싸웠다. 이 결과 세워진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서는 2018년 ‘웹툰 자율규제 연령등급 기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콘텐츠 분야 최초로 ‘차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자가진단표를 공개 [2] 하기도 했다. 대중과 호흡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이후에도 평단과 독자들이 웹툰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과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는 창작자와 향유자가 한 목소리를 내며 만화를 지켜낸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불량 콘텐츠였던 만화가 문화가 되어가는 장면이다. 현재, 2021년에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중교통에서도,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어디서나 웹툰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의 만화는 이렇게 ‘문화’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다. 게임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게임은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발달을 해치고’, ‘폭력성을 추동해 범죄를 유발하고’, 심지어 ‘중독을 유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저 말들은 만화에도 똑같이 쓰였던 말이다.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문화다 소위 ‘주류’의 시선에서 보는 만화는 하위 문화로 여겨졌다. 불량하고, 어딘가 해로울 것 같고, 악당들이 유해물질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도 만화 화형식(?)이 거행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탄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업체들이 앞장서서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단체를 만들어 ‘승인된’ 만화만 발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보다 무서운 것이 주류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 미국 CCA의 승인 씰. 이런 주류의 시선이 탄압하는 역사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유구하다. 소설이, 신문이, 영화가 그랬다. 그러니 가장 막내(?)격 매체인 만화와 게임이 탄압받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새로 등장한 매체에 느끼는 공포’를 부르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오명, 억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즐기는 사람들의 힘이 가장 컸다. 2000년 종로 거리에서, 2012년 온라인 게시판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함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만화는 천천히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만화계에선 여전히 플랫폼의 역할,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역동성이야 말로 문화의 핵심이다. * 〈판타스틱 4〉이슈 1. 우측 상단에 CCA 씰이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 문화를 향유하는 향유자의 열망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문화는 빛을 발한다. 때로는 규제에 질문을 던지며 돌파구를 만들기도 하고, ‘판’ 밖의 돌팔매질에 창작자와 향유자가 함께 항의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를 질타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가능한 중심에는 콘텐츠를 경험하고, 즐기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 어떤 콘텐츠가 ‘문화’로 여겨진다는 건, 이런 과정을 거쳐 제공자와 향유자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의미한다. 게임 역시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화와 게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만화는 그동안 개인 창작자가 주류였지만, 게임은 태생부터 기업이 개발하는 산업의 요소가 더 강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CCA의 사전검열을 피해 피 대신 불꽃이, 살점 대신 바위가 튀는 <판타스틱 4>를 만들어냈고, 한국에서는 시장이 사라지자 온라인 공간에서 창작을 이어간 작가들이 웹툰의 씨앗을 틔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은 기업이 만들고,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만 존속할 수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액제를 넘어 ‘가챠’로 불리는 뽑기를 만났고, ‘P2W(Pay to Win)’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말에도 익숙해지게 됐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 게이머들은 이 과정까지도 어느정도 이해했다. 게임의 태생과, 내가 즐기는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건 단순히 게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게임이 주는 경험과 다른 유저와 협동-경쟁하며 느끼는 경험의 총합이다. 그동안 게임이 부당한 탄압을 받을 때 마다, 게이머들은 항상 게임 옆에 서서 비난을 받아냈고, 또 맞섰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을 지키기 위해서 게이머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게임은 문화다. 게이머에겐. 오늘날 게임이 처한 상황은 어떨까? 앞서 말한 것처럼, 게이머에겐 ‘게임은 문화’라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의 청소년기는 스타리그가, 20대는 LCK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에게 게임은 나 혼자서 즐기는 놀이를 넘어 함께 열광하는 문화였다. 게임을 만화처럼 불태우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의 시선은 느리지만 변하는 중이다. 게이머들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이제 게이머들은 창작자들, 즉 게임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블리자드의 ‘님폰없’ 사태, 한국의 트럭시위 릴레이를 보면 전세계적인 추세로 보인다. * 밈이 된 '님폰없'. 이제 게이머들은 ‘게임은 문화’라는 말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특히 대형 게임사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게이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게임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오히려 게이머들이 ‘더 강한 규제’를 외치는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있다. 만화는 발전 과정에서 ‘독자’의 힘으로 핍박을 이겨냈다. 미국은 ‘수퍼히어로’ 장르로, 한국은 독자와 함께 성장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 화형식을 거쳐 MCU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심엔 독자가 있었다. 최근 웹툰계에 대두되는 플랫폼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을 존중하고, 플랫폼을 찾는 이유가 작품임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결국 창작자, 콘텐츠 제공자가 ‘즐기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문화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이머들에게 게임은 부정할 수 없는 문화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계의 2000년과 2012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게임사들은 게이머들이 원하는,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내기 위해 50년 전 마블처럼 고민하고 있을까? 게임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문화 콘텐츠로서 게임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1] 손발을 잃고 할 말을 잃은 만화가들의 침묵시위, 중앙일보, 2000. 7. 23 https://news.joins.com/article/682613 [2] 웹툰자율규제 연령등급기준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s://www.kocca.kr/cop/bbs/view/B0000147/1836747.do?searchCnd=&searchWrd=&cateTp1=&cateTp2=&useAt=&menuNo=201825&categorys=0&subcate=0&cateCode=&type=&instNo=0&questionTp=&uf_Setting=&recovery=&option1=&option2=&year=&categoryCOM062=&categoryCOM063=&categoryCOM208=&categoryInst=&morePage=&delCode=0&pageIndex=1#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만화평론가) 이재민 2013년부터 만화/웹툰 리뷰 팟캐스트 ‘웹투니스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2019년 콘텐츠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부터 웹진 ‘웹툰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읽고, 글을 쓰고, 만화를 중심으로 이뤄진 시장 저변의 많은 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합니다. 소설 <룬의 아이들>과 스타리그, LCK, 그리고 수많은 웹툰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 [Editor's View] 무던히도 게임이 많았던 2023년을 마무리하며

    2년 반동안 GG의 글들을 눈여겨 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 2월, GG는 여전히 디지털게임과 우리라는 주제를 들고 변함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차분함과 평온함이 가득한 연말연시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Back [Editor's View] 무던히도 게임이 많았던 2023년을 마무리하며 15 GG Vol. 23. 12. 10. 2023년은 특히 작년인 2022년과 비교해 본다면 굵직하고 유의미한 게임들이 무더기로 쏟아진 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면서 게임은 시들해지겠지 싶었지만 오히려 쏟아지는 게임 덕분에 누군가에겐 밖에 나가기가 힘든 한 해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워낙 대작들도 많았고, 작지만 의미가 묵직한 게임들도 많았습니다. 아마 올해 이루어질 여러 게임 어워드는 어느 해보다도 치열할 것이고, 비록 수상에 이르지 못하고 후보로만 머무르는 게임조차도 다른 해였다면 GOTY급의 위상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게임들이 2023년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GG는 그동안 GG를 거쳐간 여러 필자분들에게 당신들에게 있어 2023년을 기억할 만한 게임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었고, 그 답변을 글로 받아보았습니다. 이 중에는 올해 여러 어워드를 휩쓸 대중적인 게임도 있고, 혹은 정말 소수의 마니아들만 만져볼 법 했던 게임들도 있습니다. 게이머 개개인에게는 모두에게 각자의 GOTY가 있을 것이지만, 비좁은 지면에서 그 모든 걸 다루기는 어렵기에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2023년의 게임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습니다. 2021년 6월에 첫 선을 보였으니 이제 GG의 나이는 두돌 반, 곧 햇수로는 4년차를 맞이합니다. GG는 특정한 게임 타이틀을 두고 평점을 매기지는 않습니다만, 내년부터는 여건이 된다면 GG의 입장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GGG(Game Generation GOTY)를 손대볼 의향도 있습니다. 2023년 12월호는 그 작업의 얼리 억세스라고 봐주셔도 좋겠습니다. 2년 반동안 GG의 글들을 눈여겨 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 2월, GG는 여전히 디지털게임과 우리라는 주제를 들고 변함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차분함과 평온함이 가득한 연말연시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 Back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06 GG Vol. 22. 6. 10. 1. 그들은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좌) 와 〈킬 빌〉(우).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정갈하게 무릎 꿇은 다이묘와 쇼군이 차를 마시며 명예와 무사도를 논한다. 일본 전통 음악이 흘러나오는 다다미방에서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와 복면을 두른 닌자가 밀서를 교환한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갈대밭에서 두 명의 검객이 우아하게 일본도를 맞부딪치고, 가문의 복수를 마친 사무라이가 함박눈을 맞으며 할복한다. 일본 대중문화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법한 장면들이다. 한국인들이 ‘왜색’ 이라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 세계의 대중들은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서방의 창작자들은 멋진 일본도, 이국적인 현악기 음악, 하이쿠와 다도, 명예와 바람의 길에 푹 빠졌다. 문화평론가들은 이를 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와 문화산업의 융성에 힘입은 대중문화 와패니즘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문화연구자들은 전도된 시각성 속에서 문화제국주의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평과는 상관없이 사무라이와 닌자는 오늘날에도 끝없이 재생산된다. 일본도를 든 여고생, 사이보그 닌자, 기모노를 입은 접대용 안드로이드 등등. 이러한 재현물들 중 대부분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표상과 설정만 가져와서 치장하는 키치(kitsch)이거나, 서구 재현체계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오리엔탈리즘인 경우가 많다. 어떤 지역 또는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재현 양식을 상품화하거나, 굴절된 시선 속에서 전유하는 것은 마냥 좋거나(상업적 성공이란 관점에서) 혹은 나쁜(제국주의의 본질을 은폐하는)것일까? 일본문화에 대한 터부가 강한 한국에서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문화, 경제, 정치 전 영역에 걸친 식민지 경험을 통해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문화가 잔학무도하고 끔찍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무라이는 신성한 바람의 길을 걷는 존재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양민들을 학살하는 존재이고, 게이샤와 기모노는 문란한 일본식 성문화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수탈했던 서구인들은 한술 더 떠 일본의 극악성을 숭상하고 상업화하는데, 이들에게는 아무리 입이 닳도록 참견해도 쇠귀에 경 읽기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하루 빨리 위대한 대한민국의 문화 영토를 세계 곳곳에 건설해 ‘왜색’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대안이 있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재현양식을 국민-국가의 틀거리로 협소하게 규정해, 문화적 민족주의 또는 주류 문화(서구의 시선)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으로 치장하는 등의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데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국민-국가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한 문화적 관습이나 재현이 민족성이나 혈통 등 고정불변한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는(부르디외가 ‘아비투스’ 라고 규정한) 접근을 지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경이 아니라 접경이 있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동하는 기호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도대체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국민-국가, 와패니즘, 오리엔탈리즘보다 더 큰 심급이 여기에 도사린다. 즉 지구(global)와 지역(local), 보편(universal)과 토착(vernacular) 사이를 편류하는 지정학적 미학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2. 보편과 토착의 변증법, 그리고 게이밍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일찍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전 지구적으로 평평하게 된 문화산업의 지배 하 상품처럼 찍어내는 대중문화의 보편성을 발견했다. 상품으로서의 대중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지구 어느 지역에서라도 수월히 팔릴 수 있고 또 이를 균질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재현, 내러티브)가 전제되어야 한다. 패스트푸드가 그 보편적인 맛 때문에 뉴욕에서나 상파울루에서나 똑같이 잘 팔리듯이, 문화상품 또한 그러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문법과 체계가 준비되어야 했고, ‘장르’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고안되었다. 장르는 즐길 거리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하나의 문화적 테일러리즘으로 출발했다. ‘중간계’에 심취한 이들은 중간계를 변용한(혹은 이름과 설정만 바뀐) 또 다른 판타지를 찾는다. 셜록 홈즈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에르큘 포와로와 파일로 반스가 등장하는 다른 추리물을 소비하고, 〈스타워즈〉의 장엄한 우주 서사시는 〈듄〉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전 지구의 문화소비 시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자본은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으리만치 촘촘한 포획망,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정확히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상상력이 쉽게 파악해낼 수 없는 문화생산의 권력과 통제망”인 지정학을 형성한다. * 지정학은 특정하게 축적된 ‘익숙함’의 소비 감각을 상업문화 재현체계 전반에 편재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힘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예술-상업문화 간 첨예한 마찰은 지정학의 매끄럽고 평평한 톱니바퀴들을 마모시키고, 불규칙하지만 미학적인 불협화음을 연출한다. 보편성의 공고한 지구적 벨트가 곳곳에서 작동을 멈추고, 차이를 드러내며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 즉 토착적인 것(The Vernacular)이 부상해 새로운 힘-관계를 형성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서부 활극 속에서 사무라이 활극이 나타나고, 갱스터물의 범람 가운데 스타일을 추구하는 필름누아르가 발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단지 지역 특산물이나 여행지의 이국적인 음식을 즐기고자하는 취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힘 관계들을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스타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했던 프랑스 누벨바그는 68혁명의 탈영토화의 물결 위에서 다양한 실험적 기법들(핸드헬드, 소외효과, 소비에트 몽타주, 즉흥연기 스토리보드 없는 촬영)을 개발했으며, 영화에 실존주의 철학을 결합시켰다. 뉴 저먼 시네마는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요청되는 가운데 누벨바그와 브레히트의 서사극를 접목한 문명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은 중심부 국가 뿐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토착성을 만들어내며 미학과 래디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경향을 띤다. 나아가, 장르 문법을 역으로 전유해 지역 공동체의 정치적·계급적 모순들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이 분야에서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사람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꼽힐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여기고, 또 가장 궁금한 것은 ‘게이밍에서 지정학에 반대하는 미학이 가능한가?’이다. 이는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 보다 더 광범위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형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협의의 질문으로 소구시킨다면, 그렇다, 게이밍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새롭게 등장한 언리얼 엔진5, 유니티 디지털 휴먼, GPT-3 기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Dall-E 2 등의 기술은 형식으로서의 재현 경계(시네마, 애니메이션, 게임, 포토리얼리즘)를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발명은 더 많은, 균질화된 재현의 생산에 봉사하고자 개발되고 있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르가 문화적 층위에서의 지정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면, 상기의 신기술은 컴퓨터적 층위에서의 기술적 지정학을 위한 평탄화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페이퍼, 플리즈〉, 〈스펙 옵스: 더 라인〉 같은 작품들은 게임이 특정한 방식으로 정치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을 생성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방대하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술형식이나 정치를 촉발하는 행위성 이전에, 전 지구적으로 평평한 문화재현 체계의 인력에 무의식적으로 부딪치는 척력과 결부해 있기 때문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지역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 사회구조와 닿아있는 토착성을 반 지정학으로 발전시킨 것과 반대로, 컴퓨터의 언어는 공용 언어였기 때문에 기존의 장르적 보편성과 쉽사리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인도인도, 유럽인도 베이직과 C++언어를 공용 언어로 사용한다. 초창기 전자 게임인 〈스페이스 워!〉가 일본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 〈갤러가〉 등 거의 동일한 형태로 출현했음을 상기하자. 초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게이밍의 작은 역사는 가장 보편적이고 평평한 것들만을 골라서 한정된 비트의 시공간에 구현해내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토착성은 게임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며, 이안 보고스트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는 컴퓨터 언어(즉 보편 기술언어)로 현상된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 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게임 속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를 유도하는 절차적 수사학의 개념만으로는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을 찾아내는 데 불충분하다. 미국식 RPG(자유도)와 일본식 RPG(캐릭터와 선형성)의 차이를 규명하는 정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게임이 어떤 방식으로 지정학에 대항하는 힘을 주조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3. 공통적인 것들의 은하계,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들이 세계 시네마에 엄청난 내파를 불러일으킨 이후, 지역 장본인인 일본과 서구의 창작자들은 무수히 많은 사무라이들을 재생산해 왔다. 〈황야의 7인〉 같은 서부영화가 사무라이 결투를 참조해 새로운 서부극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와패니즘과 오리엔탈리즘은 제외하도록 하자). 게임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천주〉, 〈귀무자〉, 〈인왕〉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구에서는 〈쉐도우 택틱스〉, 〈세키로〉 같은 게임들이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사무라이와 에도시대라는 토착성을 재구성해냈다. 〈쉐도우 택틱스〉가 치밀한 퍼즐풀이 설계 기믹 속에 사무라이와 닌자, 게이샤의 스테레오타입을 녹여낸다면, 〈세키로〉는 극한의 조작술을 요구하는 게임 매커닉에 사무라이 결투의 긴장감을 조화시켰다. 가장 최신의 결과물 중 하나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몽골군의 쓰시마 침략에 맞서 싸우는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게임은 매우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토착성을 소환하는데, 다양한 게임의 조형적 요소들과 기존 재팬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한 미학적 장치들을 조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캐릭터의 등 뒤를 조작 시점으로 채택하는 게임들이 필수적으로 도입한 미니맵(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한) 대신, 버튼을 누르면 바람이 불어 목적지를 알려준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을 조작해 피리를 연주할 수 있는데, 이 순간 게임 속 날씨가 바뀐다. 또한 특정한 장소에 가면 플레이어는 주어진 문구들을 조합해 하이쿠를 창작할 수 있는데, 시점을 옮겨가며 특정 풍경 사물에 위치해 있는 시구들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시감을 정해 시를 쓰는 방식이다. 이러한 독특한 매커닉들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많은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하던 토착성의 기법들을 게임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이 결투를 시작하면 바람이 불고, 갈대가 흔들린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창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토착적 힘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군중의 움직임을 화면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치하는 데서 나온다. 이는 헐리우드가 매끄러운 카메라워크로 평평하게 화면을 흘려보내는 상업영화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강력한 단자로 작용했고, 유수의 상업영화 감독들(스필버그, 피터 잭슨, 조지 루카스) 및 작가주의(스탠리 큐브릭, 타르코프스키)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일본 사무라이 시네마의 강력한 설득력은 화끈한 칼싸움, 이국적인 복장이나 전통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산 위에 위상학적으로 배치된 군중들, 사건에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환경과 날씨 및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과 긴장을 고도로 은유하는 전개가 핵심이다. 우리가 익히 접한 것과 달리 사무라이들의 칼싸움은 매우 둔탁하거나 정적이다(좌, 〈하리키리〉). 또한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무쌍이나 멋과는 거리가 멀며(우, 〈7인의 사무라이〉),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채 굴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위로부터의 혁명, 군국주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전히 유예된 일본의 봉건적인 사회 모순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표현된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이러한 토착성의 미학 요소들을 디지털 게임의 보편화된 기술적 작동 인자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를 꾀하며, 시네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정학에 저항한다. 이를 기점으로 사무라이와 일본도는 더 이상 일본의 전통 문화도, 일본적인 것도 아닌, 보편적이면서 낯선 공통의 것으로 전화한다. 구로사와 스타일로 배치된 치밀한 공간과 화면,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비쳐지는 광원 효과는 단순히 게임의 그래픽을 치장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들은 쓰시마의 어느 장소, 어떤 환경에 있건 아름다운 경관의 포토제닉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왜색’에 반감이 깊은 한국의 플레이어들마저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미려한 토착 구상 앞에서 국민-국가의 감각을 관대히 걷어내게 된다. 이는 한국의 대중들이 탈식민적 저항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무라이물’이 지닌 토착성의 반-지정학이 세계 공용의 언어가 되어, ‘공통적인 것(The Common)’ 들로 이뤄진 하나의 문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의 문화계는 이러한 공통계를 낯설게 여기고 협소한 국민-국가 문화의 틀에 사로잡혀 사무라이와 고양이, 교복 여고생과 일본도의 혼성모방만을 도돌이표처럼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보편타당하고 지구적인 지정학에 토착성으로 부딪친다면, 게이밍은 이미 공고해진 문화산업의 보편성 속에서 ‘공통적인 것’들을 찾아내 평평한 세계를 다시 구형으로 입체화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사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게임은 극히 일부의 가능성 또는 이행적인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매커닉과 인터페이스-상호작용 환경구성은 사무라이, 닌자, 에도시대 같은 지역적 재현 요소들보다 더욱 보편성이 큰 만큼 공통적인 것이 되기도 쉽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계급적 알레고리를 게임 내 공간·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매커닉에 결합시키는 시도는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라는 게이밍의 미적 목표에 더욱 용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코소보 전쟁을 알레고리로 하여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형성하는 〈디스 워 오브 마인〉, 대만의 전체주의와 정치탄압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2차원적 평면구상 안에서 회상하는 〈반교: 디텐션〉, 그리고 이를 다시 다른 지역(제주 4.3사건)의 정치적 사건과 결합시키는 〈동백이야기〉는 어떨까? 이들 게임은 횡스크롤 방식으로 탐색하는 시공간에 지구적인 참극들이 상업적 보편성이 아닌 공통계 안에서 연대될 수 있고, 촘촘하고 광범위한 문화산업의 그물망에 구멍을 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게이밍의 문화적-기술적 공통계를 창작자들과 플레이어들이 함께 경작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민족-국가나 지역의 지엽성을 뛰어넘어 대항적인 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경로들을 발견한다. 어쩌면 게이밍의에서 이미 지역적 경계들은 이미 접경화 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 더 넘어서기 힘든 장벽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기는 하다. 언리얼과 유니티로 대동단결된 재현 생산 체계에서 토착적인 것들의 맹아들은 점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기존의 문학과 시네마에서 찾을 수 있던 여행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해 ‘공통화’의 미덕이 어떻게 대중미학으로 나아며, 또 지정학을 전복하는 힘으로 발로되는가를 관찰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전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게임의 쓸데없음과 효율성의 미학: 게이머는 왜 하필 게임에서 효율적 행위를 추구할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 하느라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야!’ 이어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장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청년, 청소년들은 ‘가정-내-관리자’로부터 고함을 동반한 힐난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고통을 수반한 손길까지 언제든 주어질 수 있음을 감수해야 했다. < Back 게임의 쓸데없음과 효율성의 미학: 게이머는 왜 하필 게임에서 효율적 행위를 추구할까? 18 GG Vol. 24. 6. 10.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 하느라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야!’ 이어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장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청년, 청소년들은 ‘가정-내-관리자’로부터 고함을 동반한 힐난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고통을 수반한 손길까지 언제든 주어질 수 있음을 감수해야 했다.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각계각층에 포진한 ‘관리자’들은 게임과 게이머를 향해 다양한 비판과 충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중에서도 빈출하기로 손꼽히는 것은 ‘게임은 쓸데없다.’라는 비판일 것이다. ‘게임을 한다고 밥이 나오는가, 쌀이 나오는가?’ 먹고 사는 일의 엄혹함을 환기하고 게임의 불필요함을 꼬집는 이러한 말 앞에서 게이머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게임에서 대체 어떠한 실용성, 생산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게임보다는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라는, 그리고 현실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삶을 꾸리라는 세간의 충고에 게이머가 반론을 제기하기란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임과 게이머에 대한 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게임이 실용성, 생산성, 효율성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은, 게이머의 비일관적 행태를 지적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를테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 왜 정작 게임 내에선 가능한 효율적인 행위를 하고자 애쓰는가?’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게이머들은 게임 내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행위를 수행하고자 분투한다. 그것은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한 지향에서 확인된다. 이를테면, 레이싱 게임의 플레이어는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따라 최적의 속도로 코너링 등을 수행하고자 한다. 최적화된 동선, 순서, 계획의 수립과 그것의 효율적 수행은 ‘타임 어택’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는 게임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이와 유사하게 <문명>과 같은 턴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등의 불가사의를 AI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매 턴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스타 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자원의 수집과 유닛의 사용에 있어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행동했는지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유닛 사용의 차원에서는, 소위 ‘마이크로 컨트롤’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유닛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과, 생산성을 문자 그대로 극한까지 추구하는 방식이 확인되기도 한다. * 압도적인 생산력을 자랑하며 ‘물량 테란’, ‘괴물 테란’ 등으로 불렸던 최연성 선수 이처럼 실제로 게이머들은 실용성, 유용성, 생산성을 갖추지 못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정작 게임 내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행위, 선택을 수행하기 위해 애쓴다. 게임의 불필요함과 게이머의 현실감각 부재에 개탄하는 ‘관리자’들은, 이러한 게이머들의 행태에서 ‘쓸모없는 일을 하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비일관성’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게임은 쓸모없고, 게이머는 비일관적이다. 불필요한 게임의 불필요한 장애물 게임은 쓸모없고, 게이머는 비일관적인가? 철학자 버나드 슈츠는 게임의 가치와 의의에 관해 성찰한 바 있다. 철학과 게임. ‘관리자’들의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것들 간의 불필요한 만남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슈츠는 그러한 시선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게임이 쓸모없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맥락에선’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게임 플레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마리오를 조종하여 다양한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짐 레이너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캐리건을 구해내는 것? 역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소드코스트의 도시 발더스 게이트를 구하기 위해선 D&D 규칙에 따라 절대자(The Absolute)를 물리쳐야 하지만, D&D 룰을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며 게임 내 도시가 몰락하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불필요하다.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그만두고 게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불필요해지는 것들이다. 슈츠는 이처럼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목표, 규칙, 서사, 재현, 메시지 등의 차원에서 게임의 의미, 가치, 효용을 끌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이 실질적이거나 실용적인 의미를 갖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그가 게임에 대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최종 평결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게임 내 장애물이 굳이 극복될 필요가 없는 것임에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려 하는 플레이어의 고투, 분투에서 게임의 의의를 도출한다. 이러한 슈츠의 관점에 따르면, 게임이 부과하는 제약과 틀 내에서 플레이어가 더 효율적인 행위, 최선의 선택, 최적화된 경로를 추구하는 것은 비일관적인 행태가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플레이어가 게임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 고투하는 데 게임의 의의가 있다는 관점은, 게임에서의 효율성의 추구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해준다. 플레이어가 게임 내 규칙과 제약 아래에서 최적화된 동선을 따르고, 효율적으로 유닛을 운용하고, 최선의 선택을 통해 AI를 앞지르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달성하게 되는 게임 내 목표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분투 행위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 슈츠의 생각이다. 게임의 목표, 장애물 등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분투와 고투 자체를 즐기려는 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게임에 관한 슈츠의 이러한 정의가 게임 일반을 아우르는지에 관해서는 물론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통찰이 시사하는 바는, 효율성이 곧 실용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실용적 가치, 생산적 가치를 찾기 어려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효율성은 성립할 수 있다. 그러한 행위의 가치는 목표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가치는 효율적으로 수행되는 행위 자체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 가치는 심지어 예술적인 것일 수 있다. 행위성의 예술과 효율성의 미학 C. 티 응우옌은 그의 저작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슈츠의 사유를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티 응우옌은 게임의 가치가 서사적 탁월성, 세계의 재현, 사회 비판적 기능 등 다양한 차원에서 성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이라는 매체가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그런 차원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티 응우옌은 슈츠에 동의하며, 게임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분투 행위 자체에 주목한다. 게임은 비록 쓸모없고 불필요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을지언정, 플레이어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행위성을 체험하게 하는 매체로 게임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즈: 스카이라인>에서 게이머들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간을 미적으로 구성하는 행위성을 체험할 수 있다. <스트리트 파이터>에서는 민첩한 반응과 상대 플레이어와의 심리전이라는 행위성을 체험할 수 있다. <문명>은 전략적 사고와 최적화된 선택이라는 행위성을 체험하게 하는 게임이다. 여기서 게임의 예술적 가능성이 발원한다고 응우옌은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자 행동할 때 그 행위 자체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리오넬 메시의 해트트릭 기록에도 감탄하지만,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유려한 움직임과 상대 선수를 기만하는 아름다운 동작을 되풀이하여 보곤 한다. FPS 게임에서 민첩한 반사신경과 정교한 조준으로 수적 열세마저 극복하는 플레이에는 환상적이라는 말을 붙인다. 체스 플레이어들은 허를 찌르는 그랜드마스터의 체스 말 운용에서 전율을 느낀다. 응우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위성에서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과 행위성에서 예술적,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응우옌의 통찰은, 불필요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하려는 게이머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효율성 역시 미적 감각을 환기할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려한 드리블러의 발재간에도 환호하지만, 최소한의 동작으로 상대를 제치는 축구선수의 우아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에도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한 효율성은 일종의 절제미를 환기한다. 효율성은 정합성과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자원과 에너지가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투입되었을 때, 그것은 정합성과 조화에서 비롯하는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학자들은 딱딱한 계산 기계가 아니다. 수학적 난제를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풀이, 과정, 공식 앞에서 그들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흡사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컴의 면도날은 단지 이론적 검약성만을 함의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를 명쾌하고도 효율적으로 풀어내는 설명은 미감을 자극한다. 효율적 행위는 미적 체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게이머들은 굳이 게임의 ‘쓸 데 있음’을 입증하고자 항변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행위성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게이머들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효율성은 실용성과 동의어가 아니며, 효율적인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행위성과 효율성이 담지할 수 있는 가치에는 미적, 예술적 가치가 포함된다. 게임의 행위성, 행위의 효율성, 그리고 오컴의 반짝이는 면도날은 이런 점에서 미학적 대상일 수 있다. Tags: 무용성, 아름다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철학연구자) 최건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 Back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18 GG Vol. 24. 6. 10.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그런데 <페르소나3>는 여기에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커뮤 시스템’을 추가했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얼마나 발전시켜 놓았는지에 따라 악마 개념을 대신한 페르소나의 성능에 더해 일부 스토리 라인에도 영향을 주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페르소나 3>에선 던전과 전투만큼이나 일상 파트에서의 스케쥴 관리가 중요해졌다. 방과 후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가 던전-전투의 성과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는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우리가 현실에서도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게임 중에 ‘오늘은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할 때에는 단지 선택지를 고르는 것임에도 묘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반면 던전과 그 안에서의 전투는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결국 게임 속에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만일 게임이 오로지 ‘오늘은 무엇을 할까’만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하면, 던전RPG로서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이 게임 고유의 요소인 던전-전투와 연계된다는 게 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페르소나 3>는 이전의 시리즈에 비해 게임과 현실을 잇는 가교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작인 <페르소나 4>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형식이지만 일상의 재현에 보다 무게를 둔 느낌이다. 덕분에 고교 시절 친구들과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대리 체험하는 비중이 커졌다. 즐겁고도 그리운 느낌이 게임 전반을 지배한다. 3편에서 ‘타르타로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일직선 구조의 던전도 <페르소나 4>에서는 캐릭터별 특징에 맞는 던전이 스테이지별로 따로 구현되었는데, 이런 구조는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섀도’와 싸울 수 있도록 해주는 ’페르소나’의 개념도 조금 달라졌는데, 3편에선 단순히 소질과 각성의 문제였다면 <페르소나 4>에선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인격의 갑옷’이라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각 등장 인물의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해진다. 동료 캐릭터의 서사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다. <페르소나 5>는 3편과 4편을 합친 모양새다. 분위기는 4편의 아기자기함 보다는 3편의 염세에 가깝다. 그러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각각의 캐릭터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선 4편을 연상하게 된다. 던전 역시 일직선 구조의 ‘메멘토스’와 캐릭터의 내면과 연계된 ‘팰리스’가 병존하고 있다. 3편과 비교해 다소 간략화 된 느낌이었던 전투 파트는 5편에선 오히려 더 복잡해졌고 변수 역시 많아졌다. 섀도를 설득해 페르소나로 흡수하는 시스템은 심지어 3편 이전으로의 회귀다. 이런 점에서 보면 <페르소나 5>는 시리즈 전체를 종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관점을 스토리를 중심에 놓는 것으로 바꿔보면 더 흥미로운 대목이 드러난다. 사실 <페르소나 3>는 서사 구조만 놓고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볼만하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주기적으로 공격하는 대형 섀도, 그럴듯한 명분으로 싸움의 목적을 오인하게 하는 ‘흑막’, 주인공과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자신의 본래 목적 달성 여부를 고민하는 강적, 인류의 집단적 바람이 원인이 된 종말과 같은 요소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는 시기적으로 보면 다소 식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코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된 시기는 1995년 말에서 1996년 초까지다. <페르소나 3>는 2006년에 출시되었다. 이 10년의 간극에도 불구 <페르소나 3>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걸 스토리를 중심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작품의 성공은 버블붕괴로 인한 사회적 혼란 및 이와 맞물린 비관주의의 확산과 떼어 놓고 평할 수 없다. 1990년대의 일본은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에서 혼란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자민당이 스캔들과 비리 등으로 정권을 잃었다가 사회당과의 연정 등을 통해 간신히 되찾으면서 55년 체제가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경제적으로는 버블 붕괴로 인한 주요 금융회사의 도산이나 부동산 주가 폭락 등 자산시장의 경색이 문제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한신 아와지 대지진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이 작품을 향한 절대적 지지에는 이 모든 사태가 빚어낸 혼란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르소나 3>가 나온 2006년의 상황은 1990년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는 국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는 구호와 함께 등장해 비교적 안정적 정치 기반을 구축하면서 ‘개혁’ 담론을 주도했는데,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우정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를 이상화 해 밀어 붙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은 ‘버블붕괴’라는 폐허를 뒤로 하고 불안 속에서도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한다는 느낌으로 나름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시점에, 일상의 평화에 젖어 오히려 종말을 바라는 인류, 이대로 세상의 종말을 평화롭게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종말을 막기 위해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시선에 비유한다면 ‘돌아보는 시선’이다. 분명 어떤 점에서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닥친 자신의 문제라는 절박함은 상대적으로 희박한 것이다. 이게 <페르소나 3>의 서사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느껴지는 이유다. <페르소나 3>에 투영된 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돌아보는 시선’이라면, <페르소나 4>는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선이 보는 세계는 지극히 개인화 되어 있다. 세계의 위기는 주인공이 잠시 살고 있는 이나바시라는 시골 마을에 국한된다. 본편에서 숙적은 주인공을 돌봐주는 삼촌의 직장 동료이다. 심지어 <페르소나 4> 최대의 반전은 주인공에게 최초의 시련을 부여하는 ‘흑막’이 기껏해야 동네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위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 게임을 해보면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설정들에 현재성이 실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페르소나 4>는 2008년 7월에 출시됐는데 시기적으로 3편의 출시일과(2006년 7월)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즉, <페르소나 4>는 3편과 동시대성을 공유하며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페르소나 3>과 <페르소나 4>는 비유하자면 같은 화자의 다른 이야기인 셈이다. 여기서 화자는 버블 붕괴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된 시점을 현재로 삼고 있다. 현재 시점에 비관주의가 득세했던 과거를 모사하며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게 <페르소나 3>, 과거를 뒤로 하고 눈 앞의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게 <페르소나 4>다. 따라서 <페르소나 3>가 세계의 종말을 주인공의 자기 희생을 통해 막는 얘기일지라도, 그건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소중한 삶을 지키기 위한 제스처라는 해석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페르소나 3>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나 나온 <페르소나 5>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크게 바뀌게 된다. <페르소나 5>는 3편이나 4편처럼 현재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쓴 티가 역력하다. 예를 들면 <페르소나 5>에서의 ‘페르소나’는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는 ‘반역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서 각성한다. 주인공들은 마음의 괴도단을 구성해 유력한 개인들을 개심시키는 것으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기득권에 의해 반격을 당하는 상황에 내몰리기 까지 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그에 굴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세계가 왜곡된 원인인 세상의 질서 그 자체와 맞서는 데까지 전진한다. 이를 통해 확인하게 된 진실은 대중의 무세계성(worldlessness)에 기반한 욕망이 한데 모여 통제를 원하게 되었고, 그러한 의사를 대리하는 신을 자처하는 존재로부터 세계가 실제 통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존재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성배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인공들은 이 거짓된 신에 맞서 또 다른 반역을 일으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여기서 게임 제작진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3편과 4편에 비하면 선동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페르소나 5>에서 반복되는, 이전에서 없었던 이러한 코드는 어디서 나온 걸까? <페르소나 4>이후의 현실엔 크게 세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 2009년 자민당이 다시 한 번 정권을 잃고 민주당이 집권하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두 번째,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세 번째, 2012년 아베 신조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해 다시 자민당 집권기가 열렸다. 아베 신조 정권은 1차 집권기(2006년)에 달성하지 못한 과제를 뒤늦게라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는 인상을 남기며 이런 저런 우파 지향의 의제를 밀어 붙였다. 그 결과 2015년에는 이른바 안보법제 논란으로 국회 주변에 12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일본 사회 및 시민운동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당시 언론은 1960년 안보투쟁 이래의 55년만의 최대 규모 운동으로 이 사안을 다뤘다. 이것이 <페르소나 5> 발매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다들 반역을 외치는 <페르소나 5> 특유의 분위기가 현실의 어떤 부분을 반영한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또다시 변화되었다. 아베 신조의 장기 집권은 더 이상 없다.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아베 신조와 같은 강압적이고 일극지향적인 이미지를 갖지는 않는다. 지지율은 저조하지만 원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은 탄탄한 편이다. 일본 사회의 우향우는 지속되고 있지만 안보법제 폐지 투쟁 때와 같은 격렬한 반대 운동은 없다. 밖의 상황은 심상찮지만 적어도 일본 내의 분위기를 보면 당분간은 이러한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다. 바로 그러한 때에, 과거 그러한 시기를 ‘돌아보는 시선’으로 기억한 <페르소나 3>가 <페르소나 3 리로드>로 되돌아왔다. <페르소나 3 리로드>는 <페르소나 3>를 거의 그대로 현대에 되풀이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페르소나 5>의 혁명은 실패했고, 우리는 그 이전으로 뒷걸음질쳐 온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현 시대에 맞는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려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누구도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전히 새 작품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갖게 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Tags: 일본, 정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사파의 탄생과 몰락

    아케이드에서 가동 중인 대전 격투 게임을 가정으로 온라인으로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최초의 시기는 94년 말 미국에 출시된 메가드라이브 용 X-Band로, 당시로서는 강력한 2,400bps 전송속도의 모뎀을 통해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게임들을 미지의 상대와 가정에서 대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콘솔 능력의 한계로 아케이드 게임 자체를 그대로 옮길 수 없던 시기였으니, 진정한 의미의 (열화 없는) 아케이드 게임을 온전히 집에서 즐기는 환경은 사실상 14.4kbps의 모뎀을 새턴에 연결하여 즐길 수 있었던 96년에 발매된 버추어 파이터 리믹스가 최초라 할 수 있다.  < Back 사파의 탄생과 몰락 08 GG Vol. 22. 10. 10. 아케이드에서 가동 중인 대전 격투 게임을 가정으로 온라인으로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최초의 시기는 94년 말 미국에 출시된 메가드라이브 용 X-Band로, 당시로서는 강력한 2,400bps 전송속도의 모뎀을 통해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게임들을 미지의 상대와 가정에서 대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콘솔 능력의 한계로 아케이드 게임 자체를 그대로 옮길 수 없던 시기였으니, 진정한 의미의 (열화 없는) 아케이드 게임을 온전히 집에서 즐기는 환경은 사실상 14.4kbps의 모뎀을 새턴에 연결하여 즐길 수 있었던 96년에 발매된 버추어 파이터 리믹스가 최초라 할 수 있다. X-band는 미국의 경우 전용회선의 서비스를 일부 지역에 별도로 운영했으나, 대부분 플레이어는 모뎀 플레이의 문제점인 대전 도중 전화비용이 계속 청구되는 점과 집에 전화가 오면 통신이 끊기는 등의 문제, 디스커넥트로 인해 패배가 기록되면 억울하다고 고객센터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는 등, 운영 미숙과 아케이드에 비해 낮은 요금 경쟁성으로 전 세계에서 최대 15,000명의 플레이어만을 확보한 채 서비스를 종료하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생애 처음으로 온라인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유니크한 경험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상대는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무슨 행동을 하든 괜찮다’라는 점이었다. 아케이드에서 이렇게 플레이하면 바로 옆에 앉은 대전 상대에게 사람과 사람이 게임을 즐기며 지켜야 하는 예의가 무엇이 있는지를 몸으로 익혀야 할 위험이 있던 반면, 온라인 대전은 상대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예의를 알려줄 수 없다. 흔히 이러한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플레이어를 한국은 당시 무협물의 인기에 힘입어 ‘사파’라고 불렸는데, 이들이 내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시대가 드디어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과거 분류되었던 정파와 사파에 대해 구분하자면, 정파는 쉽게 말해 서로 얼굴 붉히지 않을 내용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나의 승리인 것을 인정하도록 깔끔하게 경기를 지배하는 플레이어를 말하며, 사파는 이기기 위해 어떤 행동이라도 서슴지 않는 플레이어다. 이러한 행동은 처음에는 밸런스를 무너뜨릴 정도의 강한 캐릭터를 선택하거나,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는 버그 테크닉을 사용하는 플레이 등이 해당했다. *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5에서는 숨겨진 커맨드로 보스 캐릭터인 오메가 루갈을 플레이할 수 있었는데, 선택창에 이 강력한 캐릭터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오락실 분위기는 늘 심상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게임의 밸런스를 커뮤니티에서 임의로 룰을 이용해 조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유명한 예라면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의 ‘어퍼 금지 룰’이다. 기본적으로 앉아서 강펀치로 구사되는 어퍼컷이 공중에 있는 상대를 너무 빠르고 쉽게 떨어뜨렸기 때문에, 게임 초보자와 숙련자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지자 PC통신을 주축으로 서로 오프라인에서 얼굴 붉히지 않으면서 게임의 수명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어퍼컷을 쓰지 않기로 합의한 내용을 말한다. 당연히 모두가 이 룰을 알 수는 없었으며, 따라야 할 강제성도 없었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일부 플레이어들은 오프라인 모임의 확대를 위해서는 이 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정파로 자신들을 규정한 그들은 이러한 룰을 지키지 않는 상대에게 난입 후 이길 수 있는 실력과 인지도가 있었기에 룰을 어느 정도 정착시킬 수 있었으며,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방법을 병행하여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했다. 지금이야 온라인 업데이트를 통해 간단히 버그를 수정하고 밸런스를 개선할 수 있는 시기이기에 이러한 문화는 사라졌으니, 대전 격투 게임 붐에서 태어난 90년대의 이질적인 아케이드 문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피를 부르는 싸움의 적절한 예시 하지만 내 돈을 내고 아케이드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게임을 하겠다는데, 그것을 간섭하는 경우가 마냥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하자니 서로 얼굴 보며 게임을 하는 이상 불필요한 적을 만들 뿐이다. 이들에게 오프라인에서 진정한 자유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 속에 온라인 대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차선책이 되기에 충분했다. 내가 상대를 아무리 약올려도 뭐라 할 수 없는 비정한 곳이 온라인 세계다. 더해 특유의 위화감까지 더해지며,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이들은 점차 온라인 세계의 특징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대전 격투 게임의 온라인 붐이 일어난 것은 2003년 출시된 Xbox Live가 시작으로, 이는 해외에서 서비스하는 드림캐스트와 플레이스테이션 2의 온라인 플레이를 한국에서 즐기려면 VPN을 통한 우회 접속을 비롯해 굉장히 복잡한 과정과 높은 비용이 필요했고, 플레이스테이션 2의 온라인 서비스가 이후 한국에서 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대전 격투 게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온라인 플레이가 가능한 Capcom vs. SNK 2, 스트리트 파이터 15주년 기념판 등은 아케이드에서도 일부 점포만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해외 소식을 통해 듣기만 하던 온라인 플레이의 첫 실전을 경험하면서 지금까지 듣기만 하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반응 속도가 아케이드와 비교해 느리다는 것이었다. 후에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며 등장하는 게임들은 어느 정도 네트워크 매치를 개발 단계부터 고려해 약간 먼저 버튼을 누르거나 커맨드를 대충 입력해도 기술이 구사되도록 보정 시스템이 있지만, 처음 등장한 Xbox live 대응 타이틀은 아케이드와 동일한 조작감이었고, 당시 아케이드의 격투 게임은 실력의 상향 평준화로 인해 컨트롤의 난이도를 가장 극단적으로 어렵게 올리던 시기였으니 온라인과의 궁합이 좋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이 나에게 닿기 5프레임 직전부터 커맨드를 입력해야 구사되는 스트리트 파이터의 블로킹 같은 테크닉은 감각이 아예 다를 정도였으며, 고수가 많았던 아케이드 유저들은 아케이드와 감각이 다른 점이 오히려 양쪽의 플레이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만큼, 다시 아케이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임의 밸런스가 가정용에서 달라진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당시의 온라인 대전 감각은 다른 게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며, 이는 온라인 세계가 고유의 생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아케이드에서 익힌 능력은 쉽게 통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라도 시도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또 하나의 유흥거리가 되었는데, 이 온라인 특유의 느린 반응 속도를 철저하게 승리를 위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아케이드에 방문하지 않고 온라인으로만 게임을 즐기는 성향이라면 당연한 흐름이기도 했다. 혼다의 슈퍼 박치기, 브랑카의 롤링 어택 등 오프라인에서 막히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기술도 온라인에서는 막혀도 반응이 어려운 것을 알자. 온라인 세계의 상위 랭크는 ‘얼마나 네트워크에 최적화된 플레이를 하는가’라는 능력이 더해진 비정한 전쟁터가 되었으며, 아케이드를 주축으로 한 오프라인 유저들은 그 들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사파로 규정하며 ‘랙만 아니면 내가 이긴다’라는 주옥같은 명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후 2009년에 출시한 스트리트 파이터 4, 블레이블루: 캘러미티 트리거 같은 게임들은 처음 게임 설계부터 네트워크 대전 상황도 고려했기에 한국에서 일본 등의 근거리 국가들과 아케이드와 플레이 감각이 비슷한(납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 유저와 대전을 피하지 않는 사파들의 게임량을 따라갈 수는 없기에, 항상 게임의 최상위 랭킹은 온라인에 최적화된 플레이어들의 기록으로 쌓였다. 그렇게 2004년부터 약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대전 격투 게임의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별개의 게임이라는 인식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점차 형성되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인식도 서서히 변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롤백(Rollback)”이라 불리는 넷코드 기술이 있었다. * 인풋 딜레이 방식과 롤백 방식의 차이를 설명한 영상. 기존의 인풋 딜레이 방식은 서버에 입력 신호가 닿으면 화면에 적용되는 방식이며, 롤백은 일단 입력하면 상대의 행동을 예측해 다음 프레임을 미리 시뮬레이션 하는 형태이다. (영상의 1분 3초 ~ 1분 5초가 롤백 방식의 화면) 양쪽의 입력이 다를 경우 직전 상황으로 돌아오게 되는 새로운 문제도 있지만, 예측의 적중률이 높을수록 로컬과 같은 감각으로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니 최근 모든 격투 게임 플레이어 신이 롤백 방식을 선호하고, 예측을 적중시키는 노하우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어차피 광케이블이 빛을 이용한 속도인 이상, 지구 전체가 광케이블로 연결되어 있고 매질의 영향을 전혀 안 받는다고 해도 지구 반대편과는 8프레임의 입력 지연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서로의 신호를 교환한 뒤 진행하는 인풋 딜레이 방식은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는 예전부터 남미가 전통적인 강국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 각종 해외대회에서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만, 먼 미래에도 인풋 딜레이 방식으로는 물리적인 위치로 인해 정상적인 대전이 온라인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롤백 넷코드는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고, 장르의 특성상 순간적으로 게임을 뒤흔들 변수가 적기 때문에, 유독 이 예측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 결국 이 기술은 상대의 행동을 빠르게 예측하는 것과 위화감 없이 화면을 보정하는 것이 중요한 아이디어 싸움이며, 개발사들은 배경 데이터와 사운드는 놔두고 캐릭터의 핵심적인 요소만 패킷이 이동하게 하는 등, 화면의 변화를 최소화하고 데이터양을 줄이는 방법을 병행하며 이 요소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공식 토너먼트까지 각 지역이 온라인으로 개최될 정도로 쾌적한 네트워크 대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롤백 넷코드가 예측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 예측이 벗어날 경우 딜레이보다 더 처참한 결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프라인과 같은 감각의 입력이 가능한 것과 개발사들의 기술력 향상으로 인해, 현재는 딜레이 넷코드를 밀어내고 대전 격투 게임의 요소 중 기본 사양이 될 정도로 지지받는 기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 게임의 밸런스까지 수시로 업데이트되자 사파 게이머들 역시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 롤백 넷코드의 가장 비극적인 상황 중 하나 FPS 장르에서 유명한 게임 중 하나인 배틀필드도 일부러 딜레이가 높은 서버에 들어가 나를 맞출 수 없는 스나이퍼를 향해 원거리부터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정면에서 접근하는 등, 타 장르 역시 온라인 입력 지연을 이용한 다양한 플레이 방법들이 있다. 그런데도 주제를 굳이 대전 격투 게임으로 한정 지어 이야기한 이유는, 비록 오프라인을 대표하던 아케이드는 존재감이 얕아졌지만, 장르의 특성상 온라인 환경은 대안일 뿐 여전히 콘솔을 기반으로 오프라인 대회를 개최하거나 모임을 통해 실력 향상을 꾀하는 행동이 같이 진행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더해 온라인에서 재미를 느껴 오프라인으로 진출하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여 점차 오프라인 행사의 규모가 다시 커지는 것도 주목할 만하며,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는 기술이 네트워크 대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특수한 상황도 흥미롭다. 개발사들은 팬데믹을 겪으면서 온라인에서 최대한 오프라인 기분을 낼 수 있도록 점차 게임 환경을 구성하고 있고, 대전 격투 게임은 떠오르는 e스포츠 종목이기도 하기에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자들과 만나지 않도록 블랙리스트 설정 등의 관리 옵션도 점차 추가하고 있어, 이제 온라인에서도 자신이 보여준 플레이 행동은 반드시 책임이 동반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온라인도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지금은, 스포츠 정신과 게임의 지속적인 관리가 더해지면서 충분히 게임 내에서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해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기에 플레이어 성향에 따라 사파라 불리게 되던 요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사파라 불리던 플레이어들 역시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신만의 무기를 갈고 닦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온라인 랭크를 달성하였기에 존재감을 형성한 만큼, 이기는 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그만큼 게임에 애정이 있는 것도 확실한 플레이어들이었다. 승리를 향한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새로운 시대에서 더욱 꽃피우기를 바란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IGN코리아 대표) 이동헌 1999년 월간 게임라인을 시작으로 게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기간을 게임 개발사에서 보낸 뒤, 게임 제작자보다 글로서 게임 문화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2018년부터 IGN Korea를 운영하고 있다.

  • 〈세계건설〉, 게임 방법론의 새로운 예술적 적용

    무한한 가짓수를 만들어내는 작품과 함께 영화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하나, 찰리스라는 소녀가 겪은 이야기 한 줄기를 최적경로로 뽑아낸 애니메이션 작품이 놓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게임이었다면 무언가 관객의 상호작용을 유도했을 법한 장치를 동원했으리라고 여겼을 진부함을 넘는 도발적인 태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들 속에 단 한줄기로 이어진 세계선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놓인 의미는 인류가 오랫동안 탐구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경지에 놓여있는 그 카르마와 다르마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접근경로에의 제시로 읽힌다. < Back 〈세계건설〉, 게임 방법론의 새로운 예술적 적용 06 GG Vol. 22. 6. 10. 게임 뒷면, NPC들의 세계 웹소설, 웹툰과 같은 분야에서 디지털게임을 소재로 삼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주인공이 게임 속에 들어가 전형적인 성장 서사를 풀어내기도 하고, 이른바 ‘먼치킨’이 되어 게임 속이라는 이세계이자 가상세계를 평정해 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콘텐츠 중에서는 주인공이 아닌 게임 세계의 다른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는 사례들도 적지 않은데, 이른바 NPC에 초점을 맞춘 경우들이다. 플레이어가 떠나면 한숨을 돌리며 몬스터 연기를 접고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NPC의 일상을 다루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펼쳐져 왔던 오늘날까지의 여러 시도들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이런 흐름은 계속 확장되는 추세다. * 영화, 웹툰, 웹소설 등 전반에서 게임적 세계관, 나아가 게임 속 대상으로만 그려졌던 NPC의 시점을 중심에 두는 흐름은 이제 꽤나 대중적이다. 리움미술관에서 2022년 7월까지 전시중인 이안 쳉의 작품 〈세계건설〉에서 가장 주요한 구성요소는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오브젝트들이다. 작품에 달린 설명처럼 이들은 시작시각과 종료시각을 갖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영상물이 아닌, 서로 얽히고 부딪히며 각자의 속성을 유지한 채 다른 객체들과 네트워크를 이루는 과정 자체를 무한히 반복한다. 대본과 스크립트로 구성되는 영상물과 달리 이 전시는 각자의 속성을 부여받아 행동하는 개별 객체들이 상상된 세계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과정 전체를 그려낸다. 영화로 대표되는, 서사 중심으로 이어지는 작품들과의 차이는 단지 이러한 작동의 기전에 머무르지 않는데, 애초에 서사라는 방식 자체가 존재하는 현실을 압축적으로 추상해 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두 시간 남짓의 상영시간으로 10년의 이야기를 다룰 때 영화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건 대신 서사에 필요한 사건과 순간들을 발췌하여 편집하는 방식을 취한다. 무한대에 이르는 사건의 개수 중에서 이 서사에 연관된 사건만을 추려내는 영화의 방식과 이안 쳉의 작품은 기초부터 다른 입장에 선다. 영화에서는 이미 현실이 존재하고 그로부터 가상의 서사 재료를 뽑아내는 반면 이안 쳉의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발췌와 추상으로서의 ‘서사’다. 그저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각각의 객체가 알아서 작동하고 상호작용하게끔 설계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이안 쳉의 작품은 영상을 기반으로 하지만 영화보다는 디지털 게임과 닮아 있다. 플레이어의 개입이 없는, 객체들만의 세계 초창기 게임과 달리 요즘의 게임은 오로지 알고리즘에 의한 상호작용만으로 모든 텍스트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모든 매체가 그 이전 매체의 재현이듯, 게임 또한 순수한 연산 과정에 머물지 않고 영화와 텔레비전, 만화와 소설 같은 그 이전의 모든 매체를 참고하고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매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임만의 특유한 방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게임적인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적인 방식은 이안 쳉의 작품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과 무척 닮아 있다.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문명’ 시리즈다. ‘문명’ 에는 관전모드가 존재한다.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고 이번 게임에 참가한 모든 문명의 조종을 AI에게 맡겨버린 채 역사의 진행 과정을 그저 구경만 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각 문명의 AI들은 각자 주어진 행동양식에 맞게 주변 지형과 자원, 타 문명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역사를 이어 나가고, 이 과정은 별도의 대본이 없기에 같은 조건으로 플레이해도 매번 다른 양상과 결과로 이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NPC 간의 상호작용이 디스플레이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한 상호작용은 누락되었지만, 여전히 가상세계 안에서는 각자의 의미를 부여 받은 오브젝트들이 알아서 주변과 관계 맺으며 디지털 연산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작동하는 무언가로 만들어낸다. 〈세계건설〉 전시에 등장한 〈사절〉 삼부작이 모두 이와 동일한 방식을 통해 각자의 디스플레이에 오브젝트 간의 합의되지 않은 상호작용을 별도의 서사를 위한 압축 없이 날 것 그대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전시에 녹아있는 디지털 게임의 방법론을 체감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오토마타들의 온전하게 닫힌 계 시작도 끝도 짐작하기 어려운 이 무한한 시간을 향한 관조는 그러나 여러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는 아니다. 이를테면,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를 향한 관찰의 시선은 아이들의 교구로 많이 알려진 개미집 관찰 도구를 연상케 한다. 투명한 아크릴판 안에 채워진 흙 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개미들의 모습은 네모난 아크릴 프레임을 통해 관찰자에게 그대로 전시된다. 먹이를 주는 정도의 개입은 할 수 있지만(이번 전시 출품작 중 〈BOB(신념이 담긴 가방)〉 을 보라!) 근본적으로 관찰자의 개입은 배제된 상태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는 수족관이나, 동물원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미집, 동물원의 예시가 이미 현존하는 ‘작동하는 세계’에 대한 관찰이라면 의외로 디지털을 통해 창조된 관찰도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에 자리한 적도 있는데, 바로 PC의 화면보호기다. 이 프로그램에도 내부의 객체가 알아서 화면에 이미지를 렌더링하여 무한하게 랜덤한 결과물을 생성하고, 사용자는 그 생성에 개입하지 못한 채 관조하게 되는 과정을 향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전시작들처럼 세부적인 관계의 네트워크까지는 아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윈도우 화면보호기 속의 3차원 파이프와, 계속 개체수를 늘려나가며 굴을 파고 방을 만들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개미집과, 어딘지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신을 찾아 떠나는 것 같은 〈사절〉 삼부작에는 스토리텔링을 위한 압축과 추상이 없고, 관찰자의 개입이 없는 대신 내부의 객체들이 정해지지 않은 상호작용으로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는 공통점이 자리한다. *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용으로 활용되는 교구인 개미집은 투명한 아크릴로 완전히 닫힌 계 너머에서 관찰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움직이는 대상의 모습을 관조하게끔 한다. 사용자, 플레이어로서의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내부의 객체들이 알아서 끊임없이 작동하며 움직이는 가상의 세계는 말 그대로 객체들의 세계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공학적 측면에서는 객체지향프로그래밍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절차적 프로그래밍과 궤를 달리하고, 철학적으로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고의 틀을 바꾸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분명 디지털 게임을 구성하는 방법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건설〉의 출품작은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말 게임스러운가? 라는 질문 앞에 마주 선다. 적지 않은 게이머들은 아마도 플레이어 개입이 불가능한 작품을 두고 존재론적 논쟁을 벌일 것이다. 이를테면, 오락실의 오락기기는 동전을 넣지 않은 상태에선 데모 플레이로 캐릭터들이 알아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무료로 선보인다. 하지만 이때 플레이는 동전을 넣고 스틱을 직접 조작해 난관을 돌파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앞의 데모 플레이는 ‘본게임’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데모 플레이는 게임 텍스트의 일부이지만,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게임이 아니라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플레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는 데모 플레이와 게임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플레이라는 상호작용의 이면에 존재하는, 플레이어의 개입 없는 객체들만의 상호작용을 플레이로 부르지 않는 것에 있다. 달리 말하면 이안 쳉의 ‘세계건설Worlding’ 개념은 게임 그 자체라기보다는 게임이라는 매체 형식의 이면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건설하는 방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게임에서 비롯된, 각각의 객체들이 자신의 속성대로 움직이고 상호작용하며 맞물리는 일종의 프로그램화된 오토마타Automata가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플레이를 위한 전제로서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부터 플레이어를 떼어냄으로써 비로소 게임을 구성하는 각각의 객체만으로 구성된 온전히 닫힌 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인간에 대한 상호작용을 위해 만들어졌던 객체들이 인간의 손을 떠나 스스로 동작하는 개미집으로 온전하게 독립할 수 있음이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카르마와 다르마, 전시와 애니메이션의 질문들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닫힌 계로서 각각의 작품은 진행의 결과에서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갖는다. 어느 누구도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똑같은 전개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관심은 여기서 한 갈래를 더 뻗어 각각의 결과들이 구성해 온 경로들이 비교가 가능해지는 평행우주 속 시간을 향한다. 이른바 세계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상대성이론과 연관된 개념보다는 게임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사용된 시간여행을 통해 분기되며 달라지는 미래에 대한 개념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전시된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가 이를 드러낸다. 〈BOB 이후의 삶〉에서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인 ‘최적경로’는 BOB이라는 생체 결합형 인공지능을 통해 개인의 삶이 특정한 루트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삶의 경로를 가리킨다. 마치 내비게이션의 그것처럼, BOB은 자신과 하나가 된 인간의 삶과 행동을 통제하여 목표한 삶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루트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정작 이 인공지능을 만든 회사의 설립자인 Z는 무한한 삶의 경로에서 최적의 루트를 찾아내어 인간을 인도하는 BOB의 최적경로와 동시에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원의 시간 속을 무의미하게 유영하는 ‘신의 시간’을 거론한다. Z가 와불의 얼굴에 비춰진 프로젝트 맵핑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다분히 최적경로의 문제가 불교적인 모티프와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최적경로는 불변하는 숙명으로서의 카르마로, 그 모든 숙명적 경로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선택으로 채워나가는 시간으로서의 최적경로 바깥은 다르마로 이어진다. 현대 디지털 기술의 극의極意라고 불릴 수 있을 인공지능을 통해 마침내 찾아낸 인간 삶의 최적경로는 한편으로는 인간해방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정해진 시간선을 따라가며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카르마로 기능한다. BOB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은 목표 달성에 있어 부인할 수 없는 최적경로이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삶이 아닌 것이 된다. 인공지능 BOB은 무한대의 인생경로 중 최적의 경로를 뽑아내 제시하지만, 삶의 경로가 애초에 수학 기반의 가치판단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 또한 동시에 드러난다. * 〈BOB 이후의 삶〉 은 수학적으로 계산가능한 최적경로를 따르는 삶과, 그 차원을 넘어서서 무위하게 시간 속을 유영하는 삶을 대비시킨다. 이는 스크립트 없는 전시작과 대본에 의해 기승전결로 달려나가는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적 대비이기도 하다. 〈BOB 이후의 삶〉은 그래서 다른 출품작과 함께 놓이며 그 질문을 전시 전체로 확장해 낸다. 각각의 작품이 구축한, 각각의 닫힌 계들 안에서 객체들이 무한히 상호작용하며 만들어가는 무량대수의 경로는 〈BOB 이후의 삶〉이 제시하는 질문과 만나며 하모니를 이룬다. 무한한 가짓수를 만들어내는 작품과 함께 영화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하나, 찰리스라는 소녀가 겪은 이야기 한 줄기를 최적경로로 뽑아낸 애니메이션 작품이 놓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게임이었다면 무언가 관객의 상호작용을 유도했을 법한 장치를 동원했으리라고 여겼을 진부함을 넘는 도발적인 태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들 속에 단 한줄기로 이어진 세계선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놓인 의미는 인류가 오랫동안 탐구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경지에 놓여있는 그 카르마와 다르마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접근경로에의 제시로 읽힌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타이쿤, 자유로운 세상을 생각하다

    <돈스타브>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농사의 중요성을 알고있을 것이다. 당장의 굶어 죽을 위기에서 안정적인 식량 보급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밥을 찾아 헤매는 일은 너무나도 고달프다. 따라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게이머들은 어느 순간부터 터를 잡고 작물들을 키워나간다. 더 ‘효율적’으로 작물을 수집하기 위함이다. < Back 타이쿤, 자유로운 세상을 생각하다 18 GG Vol. 24. 6. 10. 1. 효율을 위한 공간 <돈스타브>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농사의 중요성을 알고있을 것이다. 당장의 굶어 죽을 위기에서 안정적인 식량 보급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밥을 찾아 헤매는 일은 너무나도 고달프다. 따라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게이머들은 어느 순간부터 터를 잡고 작물들을 키워나간다. 더 ‘효율적’으로 작물을 수집하기 위함이다. <돈스타브>에서 농장은 곧 ‘효율을 위한 공간’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들은 농사를 하기 위한 땅을 선점하고 생존에 유리한 작물을 선택하여 공간에 배치한다. 이 모든 활동들은 ‘효율’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겨냥하는데, 이때 효율이란 더 적은 시간으로 더 많은 수확량을 거둬들이는 시스템을 뜻한다. 즉, 시간 대비 최대의 수확량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돈스타브>의 농사는 아주 세심하게 이루어진다. 과연 무엇이 더 효율적일지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땅, 작물, 배치를 선택하는 것이다. * <돈스타브> 농장 사례. 출처: https://www.fanatical.com/ko/game/dont-starve-together <마인크래프트>에서 ‘효율을 위한 공간’은 더욱 다채로워진다. 여기에는 농장 뿐만이 아니라, 동물들을 모아 기르는 목장, 나아가 아이템을 자동으로 수집하게 해주는 공장들도 있다. 자동으로 수집되는 물품들 역시 매우 다양한데, 단순 작물부터 광물 경험치까지 게임 속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자동화의 대상이 된다. 한편 <마인크래프트>에서 ‘효율을 위한 공간’은 <돈스타브>의 것과 성격상의 차이를 지닌다. 이는 수확물에 대한 즉각적인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긴박한 생존 게임이 아닌 <마인크래프트>에서 효율화 과정은 본격적인 놀이의 과정으로 편입된다. * <마인크래프트> 농장 사례. 출처: https://youtu.be/kf8yXlobhOQ?si=4QZ_wF0Ddjf0UgmV 앞서 필자는 효율이 ‘들인 노력 대비 얻은 결과의 비율’임을 밝혔다. 농장, 목장, 공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더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더 많은 수확량을 거둬들이기 위함이다. 이들은 플레이어의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효율화 과정이 본격적인 놀이의 일부로 편입될 경우 ‘효율’은 매우 역설적인 양태를 띤다. 주목해 볼 점은 <마인크래프트>에서의 몇몇 효율화 작업이 결코 ‘효율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플레이어들이 만드는 자동화 장치가 매우 많은 생산량을 산출해내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이를 만드는 일은 너무나도 큰 노력을 요구한다. 자동화 기계를 만드는 시간에 그냥 수렵·채집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수준이다. 예를 들어 밀을 자동으로 수확하는 농장을 만드는 일은 ‘광물 캐기, 몬스터 잡기’ 등의 부가적인 절차를 요구하는데, 이는 밀을 그냥 키워내는 것보다 몇 배는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여기에 드는 효율화 과정을 포함한다면 농장/목장/공장을 만드는 것은 결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 아니다. [1] 필자의 경우 <마인크래프트> 야생에서 자동화된 농장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솜씨가 서툴러서 인지 회로를 짜고 재료를 모으는데 한 평생이 결렸고, 모으고 나서는 정작 작동 방식을 구경하다 게임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작동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만들고 서버를 버리는 일들이 몇 번 더 반복되기도 하였다. 정작 생산물을 얻는 것보다도 ‘효율적인/효율적일’ 구조를 짜고 만들어 보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마인크래프트>의 사례가 알려주는 것은 효율을 구상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마냥 ‘효율적’이지 않더라도 값어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언가를 효율적으로 만들어보는 과정 자체가, ‘효율적인/효율적일’ 시스템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2. 타이쿤에서의 ‘기업가 정신’ 이때의 즐거움을 정확히 포착해낸 장르가 바로 ‘타이쿤’이다. ‘타이쿤(Tycoon)’은 에도시대의 쇼군을 의미하는 대군(大君; Taikun)을 철자만 바꾸어 영어 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인데, 게임 문화에서는 ‘경영 시뮬레이션’ 장르를 뜻한다. 어원을 통해 짐작 해보자면, 마치 쇼군(대군)과 같은 위치에서 특정 대상을 사업/경영해 보는 시뮬레이션 게임들이겠다. 구상과 운영에 특화된 이 장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효율’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주어진 시간, 땅, 돈, 인력 안에서 더 좋은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방법을 고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효율에 대한 추구는 시간이나 자원적 제한을 걸어 두어두는 등 게임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의도되기도 하며, 의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게임 안에서의 플레이 과정은 효율과 딱히 멀어지지 않는다. 플레이어들이 끊임없이 더 좋은, 더 참신한 방식을 고안해 내기 때문이다. 타이쿤은 무엇이 가장 ‘효율적’일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장르이다. 보다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슈의 라면집>과 같은 타임어택 타이쿤에서 플레이어들은 당장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최적의 방식을 찾아 나선다.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더 높은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 도전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더 효율적인 전략과 더 좋은 피지컬이 요구된다. 다른 한편 <롤러코스터 타이쿤>과 같이 높은 자유도를 지닌 게임에서 효율에 대한 추구는 보다 창조적인 과정으로 거듭난다. 여기에서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구조를 고민해보며 그를 통해 무엇이 가장 많은 산출물들을 만들어 낼지를 찾아나선다. 이때 타이쿤 게임은 본격적으로 ‘효율적인/효율적일’ 시스템을 구상하는 실험실이 된다. * <롤러코스터 타이쿤>에서의 실험 사례. 출처: https://youtu.be/h0kTdVw8nxo?si=F4196cZ6cs4dICX8 사실, 타이쿤과 같은 효율의 놀이화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만은 없다. 더 많은 축적과 더 높은 수익을 갈구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마치 신자유주의 서사 안에서의 기업가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즉, 효율에 골몰하는 게이머들이 마치 생산과 축적에 도취된 현대의 경영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다이어-웨더포드와 드퓨터(Dyer-Witheford & De Peuter, 2009/2015)의 연장선상에서 타이쿤이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기르는 기계로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가능할 것이다. 3. 타이쿤, 자유로운 세상을 생각하다 다만, 이 글은 타이쿤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가능성에 대하여 주목해보고자 한다. 첫 단락에서 살펴보았듯이, 효율이 놀이가 되는 순간 그 중심에는 ‘구상의 과정’이 있다. 플레이어들은 무엇을 어떻게 위치시켰을 때 더 효율적일지를 생각하고 실험하며 최적의 방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러한 ‘효율적인/효율적일’것을 찾는 구상의 과정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됨으로써 놀이화 된다. 이때의 효율에는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본래 효율이 적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 많은 산출물들을 얻는 비율이라면, 효율적인 구조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서버를 떠나거나 만들어 놓은 것을 부수는 식으로 시스템들을 구상하다 세계를 떠난다. 굉장히 비효율적인 수준에서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다. 이는 효율의 놀이가 실제 생산된 결과물에 다소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즐거움이 생산보다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타이쿤 플레이어들을 보며 그것이 너무나도 신자유주의적이라 비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실제 생산 활동과 빗대어서만 타이쿤을 생각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시각에서 놀이를 사유하는 것이다. 타이쿤으로 대표되는 효율에 대한 놀이는 마냥 생산에 도취되는 것이기 보다는 효율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에 가깝다. 플레이어들은 오히려 실제 생산량에 무관심하며 그저 이후 벌어들이게 될 생산량을 기대하는 수준에서 멈추기도 한다. 여기서 효율의 또 다른 의미를 가져와보자. 효율은 시간 대비 벌어들이는 생산량의 비율이다. 따라서 효율적이라 함은 그 시간을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율에 대한 추구는 곧 해야할 일이 없는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 이기도 하다. 타이쿤에서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탑을 쌓아나가는 것만 같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그저 안주하기 보다는 더 좋은, 더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구상한다. 때문에 너무나도 효율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는 마치 잘 만들어진 수식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타이쿤의 묘미는 자유로운 세상을 생각해보고 나름대로 만들어보는 것은 아닐까? 생산과 축적을 끌어안기보다는 사람들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타이쿤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Dyer-Witheford, N., & De Peuter, G. (2009). Games of empire: Global capitalism and videogames. 남청수 (역) (2015). <제국의 게임>. 서울: 갈무리. [1] 물론 이는 개인의 플레이스타일에 따라 차이가 있다. 만약, 플레이어가 한 야생에서 막대한 시간을 생활한다면 100시간을 들인 기계도 장기적으론 효율적일 수 있겠다. 다만,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효율적인 시스템(구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이기에 그와 같은 가능성은 생략하였다. Tags: 굶지마, 시뮬레이션, 타이쿤, 대량생산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3)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 Back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07 GG Vol. 22. 8. 10. 하나의 세계라는 조건 속의 여정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디스코 엘리시움〉의 등장인물 〈디스코 엘리시움〉은 반세기 전 한때 공산주의 혁명의 파도가 엄습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혁명으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인 가상 국가 레바숄과 그 한 구역인 마르티네즈를 주 배경으로 한다. 탄광에서 일하며 벽화 페인트와 미술에 심취한 공산주의자 스컬 신디와 대기업 와일드 파인 사의 대사이자 초자유주의자인 조이스, 해리의 동료 킴 키츠라기를 순수 혈통이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인종주의자 운전수와 미확인파시스트 개리, 왕정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노인과 마조프주의자로 연합군에 저항했던 탈영병, 밀매 혐의를 받으면서도 항만 노동조합 대표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실 권력을 움켜쥔 에브라트 등의 사민주의자, 클럽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이곳은 화해 불가능한 NPC들, 성원들이 살아가며 서로에 필연적으로 적대, 모순, 역설 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세계다. 한 세계의 구성원들이지만 동시에 결코 엮일 수 없으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된 곳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놓인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육성해나가는 방식(능력치, 생각 캐비닛, 장비)에서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피상적인 혹은 구체적인 사상과 이념을 가졌든, 아니면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냥 플레이하든 게임 진행에 문제는 없다. 인물들과의 상호작용과 주사위 판정에 따라 선택지와 이념 루트들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며, 게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은 맞다. 분명 〈디스코 엘리시움〉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캐릭터 구축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게임 내 모든 활동은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접촉하고, 대면하고, 공유하게 되는 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플레이어는 전지적인 능력으로 세계를 뒤흔들고, 변형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곧 레바숄이라는 하나의 황폐한 세계를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에서 해리의 자아와 의식,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도가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반영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인공이 본인으로 다시 서는 과정에서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플레이를 이어나가면서 분실한 신분증을 찾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드 부아다. 주정뱅이 해리는 새로운 동료 킴 키츠라기와 함께 살인 사건을 조사해나감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NPC들에 접근하여 소통하거나 교감하며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하지만 해리 또한 세계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인물이 전혀 아니다. 해리는 RCM 소속의 경찰로 권위를 위임받은 인물이다. 그 자신이 몸담은 RCM은 혁명 이후 연합 정부에 의해 국제 영역의 치안을 복구하고자 조직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을 자처하고 있으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단지 설립이 허락된 조직에 불과한, RCM의 경찰이라는 조건을 해리와 플레이어는 이를 끊임없이 자각해나간다. 그렇기에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선택이 반영되는 결과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세계로부터, 인물로부터 독립된 각각의 가능 세계들을 앞세우려 드는 멀티 유니버스, 멀티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동원되는 평행세계, 대체역사, 가상현실 같은 개념들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여기에 독립된 각자의 다원적 세계들이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스코 엘리시움〉은 결과에 도달하는 선택의 과정들에 활로를 열어젖힘으로써 게임을 통해 정식화된 공통의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에서 선택지를 통하여 과정과 분기가 결정됨에도 그것이 세계를 뒤바꾸는 성공이나 실패의 특정한 루트를 창출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일각에서는 네 개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선택지를 골라서 특정 이념을 체화한 인물로 만들어도, 결국 같은 화면을 공유하며 세계의 결과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들어 게임의 자유도를 비판하곤 한다. 그것은 적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던함과 포스트모던함, 표층과 심층의 이야기의 공존 “만약 새로운 정치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실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근원적 대상으로서의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집단적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행동하고 위치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하고, 현재 우리의 공간적·사회적 혼란에 의해 중화되어버린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적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창안하고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앞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떤 사상과 이념을 택하든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분명히 동시대 유행하는 어떤 RPG, 오픈월드 게임들의 방향과는 확연히 다른, 이전 세기의 전유물 같은 인상을 준다. 플레이어들이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거나, 한 문학평론가의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1) 이라는 말은 그것을 대변하는 의견일 것이다. * 도덕주의자 퀘스트에 등장하는 연합 군함 아처 먼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무결자로 불리는 '돌로레스 데이'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임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이 인물은 무결자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이고 도덕주의자들(=인문주의자)의 상징이며, 통치 시기에는 엘리시움에 있는 여러 이솔라를 발견했다. 레바숄 또한 이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돌로레스 데이에 대한 숭배는 단순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으로 여겨졌으며, RCM의 법규도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기반을 둔다. 돌로레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경호원에게 총에 맞고 죽고, 돌로레스 데이의 시절이 돌연 막을 내린 이후 더는 이러한 세계의 질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레바숄은, 사회를 어떻게 질서화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실패하고 이러한 구상 자체가 외부 세력에 의해 짓눌려버린 곳이다. 그것은 곧 이성, 합리, 질서 등을 내세운 근대가 좌초된 것이기도 하다. * 교회 안의 클럽 반면 서브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이전의 시스템이 더는 기능 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듯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은 최신의 아노딕 댄스 뮤직을 구현하는 행위에 전념한다. 훼손당한 돌로레스 데이의 벽 조각상이 안치되어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 클럽을 만든다. 진중한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은 너무나 '소프트코어'한 세상을 '하드코어'하게 바꿔야 한다고 하거나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무엇이든 거대한 이념과 사상들은 다 나쁘고 가치판단에는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대뜸 돌로레스 데이를 대량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렌즈로 '오타쿠'와 현대 일본의 정신구조에 대한 분석하면서 이 개념을 축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이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점을 탐구한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의 세계를 트리형, 데이터베이스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근대의 트리형은 우리의 의식에 비치는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반해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을 ’이야기하기‘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형사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는 표층과 기억을 잃은 자가 인물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마주하며 다시 나아가는 심층의 이야기로서, 그리고 근대와 근대 이후의 감각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지나간 근대를 재료로 삼는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 해리 또한 근대를 지나온 인물이다. 해리는 근대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인간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수정 능력을 통하여 세계와 마주하며 자신을 다시 찾아가며, 게임의 세계관도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누구로, 무엇으로,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사고해나가는 해리나 자신을 다소 철학적인 항만 노동자로 소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투쟁하는가‘식의 거시적인 담론을 나누는 걸 즐기는 편이라고 말하는 마냐나 같은 인물은 이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아노딕 댄스 뮤직의 아이들에게는 이는 관심사도 아니다. “거대한 이야기와는 철저히 단절한 새로운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은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히로키식의 설명을 빌리자면, 트리형 세계 속에 작품의 심층적인 이념, 사회구조, 세계관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은 해리일 것이다. 반면 아노딕 뮤직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던 이야기구조, 데이터베이스형 모델을 추구하며, 근대의 커다란 이야기들이 실종된 채로 당장 본인들이 추구하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대한 파편적인 데이터베이스들로 자신들만의 세계와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들어간다.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서브 퀘스트를 수락하고 진행하게 되면, 해리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맞춰 교회에서 춤사위를 벌인다. 한때의 찬란했던 신세대의 음악이라 불리던 디스코의 시절은 어느덧 저물고, 빈사 상태가 되었다. 해리는 새로운 세대의 아노딕 댄스 하드코어 음악을, ’돌로레스 데이‘의 조각상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그저 옛 찬란했던 20세기의 근대적 이상을 복원하는 것에 착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찬미하는 게임인가. 모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포스트모던을 부정하고, 아노딕 댄스 뮤직을 선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에 조소하고 한탄하는 게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과거 기획의 실패, 우울, 좌절, 절멸, 절망, 패퇴, 패배주의,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내내 게임의 정서를 지배하는 듯한 종반부에는 극적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인술린데 대벌레와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한 도라, 그리고 탈영병 같은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해리(플레이어)는 탈영병을 마주하기 직전 꿈에서 자신의 오랜 결핍의 대상이었던 옛 연인이자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된 도라를 마주하고, 이후 인술린데 대벌레를 만나 그 옛 연인을 이제는 잊고 극복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인다. 종반부에 예상치 못한 범인으로 대면하게 되는 탈영병 노인은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이다. 탈영병 노인과 해리는 완전히 상반되는 궤적을 지닌다. 게임의 시작에서 해리는 연인 도라와의 결별을 중심으로 세상에 대해 환멸과 회의로 얼룩진 나머지 모든 권총으로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모색했던 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게임의 시작에서 모든 것에 절망하고 세계와 단절한 채로 자신을 고립시킨 해리가 개인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자생적 의식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추방되기를 기꺼이 자처했던 해리가 다시 세계와 마주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라 혹은 이를 형상화한 돌로레스 데이를 떠나보내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모순적 세계의 성공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디스코 엘리시움〉의 리드 작가 헬렌 힌드페레(Helen Hindpere)는 ’포스트 소비에트‘의 시기에서 자란 기이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레바숄이 마치 10년 전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 .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러한 경험들의 잔향이 당연히도 짙게 배어있다. 하지만 이는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련의 몰락 이후의 시기를 직접 겪은 이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여 그것의 실상에 관해 증언하는 역사물이 아니다. 가상적 공간을 주 무대로 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존적 무게로 다가오는 정치적 실재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그 자체로 재현하거나 규명하는 것을 자처하면서 이를 훈고학적으로 늘어놓으며 일련의 무용담, 음모론, 교훈극으로 소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미학적 구성물로 승화하는 셈이다. 이로부터 한 예술비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동구와 서구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면서 공산주의 붕괴 이후 서구 좌파들이 가지는 어떤 멜랑콜리나 채무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역사 이후의 시간이란 ‘최적의 사회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미 완수된 시대이며, 지금 중요한 것은 ‘앞서 일어난 혁명의 성과’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현세적 실천이라고 말하는 보리스 그로이스다. 역자 김수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코뮤니스트 후기〉라는 책을 소련을 회고하는 역사 에세이가 아닌, 철학적 성격의 사고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미학적 구성물에 가깝게 구성한다. “만약 공산주의를 언어라는 매체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약속하는 것은 목가라기보다는 자기모순 속에 놓인 삶, 최대치의 내적 분열과 긴장의 상황이다”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체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대립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첨예화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에 내재한 모순과 분열, 적대를 숨기지 않고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둘러싼 대립을 첨예화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쩌면 그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도 같다. RPG 캐릭터의 육성 방법으로 어느덧 암묵적으로 필수 사항이 된듯한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자리를 방대한 텍스트와 온갖 갈등, 모순, 역설, 적대로 얼룩진 세계관으로 채우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모두에게 어필할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따분하거나 거북하거나 섬뜩할 수도, 혹은 고양되거나 짜릿하거나 흥분되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3) 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게임 개발사 하나 제대로 없던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설가 출신으로 실패를 경험한 로버트 쿠르비츠 등을 위시하여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던 이들에게 말이다. 1) (인하영, 2021) 문학평론가,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경향신문』, 2021.10.28https://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10280300115 2) 〈Masterclass: Helen Hindpere Talks About Writing Disco Elysium: The Final Cut〉, https://youtu.be/Xf_hU7IW5qs 3) 보리스 그로이스,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Becoming the Artwork)〉, 2020,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Contemporary-Art-Business: The New Orders of Contemporary Art)》 https://youtu.be/W9Uu13m5JxI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VIRTU), 201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 편집위원) 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 변해가는 게임의 위상, 다큐의 관점도 변한다 - 〈하이스코어〉리뷰

    2000년대 중반 이래 게임을 다루는 다큐 프로그램들이 간간이 등장해온 가운데 넷플릭스가 서비스 중인 〈하이스코어〉는 가장 최근에 출시된 게임 역사 다큐 프로그램이다. 큰 틀에서 볼 때 게임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주요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게임 역사를 다룬 저술이나 다큐 프로그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전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발굴한 점이 눈에 띈다. < Back 변해가는 게임의 위상, 다큐의 관점도 변한다 - 〈하이스코어〉리뷰 03 GG Vol. 21. 12. 10. 2000년대 중반 이래 게임을 다루는 다큐 프로그램들이 간간이 등장해온 가운데 넷플릭스가 서비스 중인 〈하이스코어〉는 가장 최근에 출시된 게임 역사 다큐 프로그램이다. 큰 틀에서 볼 때 게임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주요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게임 역사를 다룬 저술이나 다큐 프로그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전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발굴한 점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이야기 할 만한 부분은 - ‘게임’만이 아니라 - ‘플레이’에도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와 본격화되는 게임에 대한 학술적 (특히 인문사회학적) 연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게임의 특성은 ‘상호작용성’이었는데, 이는 디자이너들이 설계한 ‘게임’이 플레이어들의 ‘플레이’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일단 완결된 상태로 수용자들에게 제시되는 기존의 매체들과는 달리, 게임의 이와 같은 특성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상이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람의 의도나 취향에 따라 그 경험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와 같은 (수용자의) ‘능동성’은 한동안 게임학 연구에 있어 주요 의제였으며 심지어는 ‘게임 세대론’이 등장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게임의 역사 연구 분야에서는 ‘게임’에 한정되어 그 발전과정이 기술되어온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게임을 만든 개발자나 업체 또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게임들의 개발과정 등에 초점을 맞추는 식이다. 나름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의 접근은 소위 ‘능동적’이라던 게이머들은 사라지고 소수의 천재적 개발자들이 내놓은 혁신적인 게임을 그저 열심히 소비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게임 소비자들만 남게 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하이스코어〉 1편부터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개발한 니시카도 토모히로와 1980년 아타리배 전국 게임대회 챔피언 리베카 하이네먼을 병치시킨 것은, 그래서 눈여겨 볼 만하다. 게임을 만들어낸 개발자조차 불가능한 게이머들의 엄청난 플레이가 게임의 디자인만이 아니라 그 플레이 또한 뛰어난 창의성과 혁신의 산물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존의 논의에서 게이머의 능동성은 대체로 모드나 머시니마 등 플레이 너머의 (생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왔는데, 사실 게임의 ‘플레이’ 자체가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창조 행위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플레이어들의 이와 같은 창의성이야말로 e스포츠가 발원할 수 있었던 근간이라 할 만한데, 기존 e스포츠 담론에서 이러한 측면은 소외되어온 감이 있다. 〈하이스코어〉에서 e스포츠는 메인 주제가 아니지만, 게임의 발전과정에 있어 ‘플레이’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발굴함으로써 현재 산업적 측면에 치중되어있는 e스포츠 담론에서 향후 하나의 문화로서 e스포츠의 방향성을 고민할 수 있는 시사점으로 삼을 만한 지점이다. * 아타리 전국 게임대회 챔피언 출신인 리베카 하이네먼의 등장은 게임이용자라는 플레이의 또다른 한 축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깊다. 이미지: 넷플릭스 또 하나 〈하이스코어〉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양성’이다. 게임은 전통적으로 산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젊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꽤나 균질한 집단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는 최근 몇 년간 게임계에서 PC(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화두가 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균질성의 신화는 성장기 때 게임을 즐기던 게이머들이 업계에 입문하는 특성상 또래들과 게임을 즐기던 남성 청소년 중심의 하위문화적 특성이나 취향이 업계에도 고스란히 전이되면서 형성된 것인데, 게임을 플레이하는 집단이 다양해지면서 그와 같은 문화적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타 게이머들과 마찰을 겪으면서 갈등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이스코어〉가 게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최초의 카트리지 교환형 콘솔 채널F의 개발자 제리 로슨을 조망한 것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채널F가 개발되었던 7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흔치 않았던 유색 인종으로서 초기 게임산업의 발전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그 오래된 신화에 균열을 가하기 때문이다. 사망한 인물이라 자세한 인터뷰를 담을 수 없었던 점은 아쉽지만 - 이미 많이 늦었다는 방증이겠다 - 채널F처럼 게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콘솔의 개발자가 이처럼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게임의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그처럼 묻혀져 있을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를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들의 유산은 게임의 발전과정 안에 오롯이 녹아있을 것이며, 그것을 발굴해낸다면 게임의 문화적 가치와 의미는 또 얼마나 풍성해질지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 채널 F의 개발자 제리 로슨을 향한 조명은 이 다큐가 게임산업 발전사 속에서 소외되는 누군가를 잊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이미지: 넷플릭스 EA의 간판 스포츠게임 〈매든 NFL〉 시리즈의 열혈팬으로서 후에 EA에 입사하여 〈매든 NFL 95〉에 사상 최초로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킨 흑인 남성 동성애자 게이머(이자 개발자) 고든 벨라미의 이야기 또한 게임 역사 내 다양성에 대한 화두를 이끌어낸다. “세상의 규칙이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을 평생 체감하며 살아가는 소수자들에게 있어 “모두에게 공평한 규칙이 적용되는” 게임의 세계란 그저 한낱 게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벨라미의 이야기는, 게임 문화 내 다양성이 지니는 중요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게임 캐릭터의 짙은 피부는 물리적으로 화면 내 작은 픽셀들의 바뀐 색조합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변화는 평생을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의 정당성을 위해 싸워야 하는 소수자들에게는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혹은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이란 것을. 물론 소수자들에 한해 게임이 정체성이나 의사 표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게임이 소수자들에게 중요한 소통과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 세상에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매체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이미 주류의 취향과 가치관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기성 매체와 달리, 젊은 매체는 비주류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자유롭게 담길 수 있는 여지를 지니며, 그와 같은 개방성과 다양성에 기반한 ‘가능성들’이야말로 이 매체의 ‘젊음’이 지녔던 문화적 가치였던 것은 아닐까. 초기 인디 게임의 사례로서 미국 사회 내 동성애자 혐오 정서에 대항하는 패러디 게임 〈게이블레이드〉의 존재는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단순한 오락물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서의 가능성 말이다. 이처럼 게임의 ‘젊음’을 조망한 〈하이스코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절 게임의 산업과 문화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의 노색이 완연한 모습은 역으로 게임의 ‘나이듦’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현역에서 물러나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 시절 우리가 즐겨 플레이했던 게임, 그러니까 부모님과 선생님의 눈을 피해 짜릿하게 즐겼던 우리끼리의 그 오락이 더 이상 그 때의 그것이 아님을 새삼 일깨워준다. 게임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부분은 한 때 젊었던 게임이 지녔던 그 가능성들이 여전히 유효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다른 가능성과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 혹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 것인지 등이 아닐까? 다른 말로 바꾸자면 이 과거의 흔적 또는 유물들을 현재와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나아가 미래를 위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게임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로서 〈하이스코어〉에서 아쉬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기존에 다뤄지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이나 사건을 발굴한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였지만, 그러한 발굴을 통해 새롭게 논의해 볼 수 있는 오늘날 게임의 가치나 의미를 끌어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놀런 부쉬넬, 니시카도 토모히로, 로베르타 윌리엄스, 존 로메로 등 기존 게임사의 주요 인물들과의 인터뷰 또한 기존의 게임사 다큐나 저술에서 이미 이야기했던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과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오늘날과 미래에 대해 지닌 견해를 물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꿈꾸고 가꿨던 그 게임이 오늘날의 게임과 얼마나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하여 그 다름은 또 어떤 의미인 것인지와 같은 논의가 담겨 있었더라면, 과거에 비추어 오늘날을 돌아보고 미래를 고민하는 역사적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게임사를 다루는 저술이나 프로그램에서 으레 첫 장에 위치하는 놀런 부쉬넬을 맨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하이스코어〉는 게임의 역사가 곧 혁신의 역사라는 관점을 분명히 내비췄는데, 개인적으로는 2020년이라는 시점에 나온 게임 다큐로서 좀 안일한 (혹은 진부한) 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의 역사가 정말로 재미를 좇는 혁신의 과정에만 한정된다면, 자동사냥이나 확률형 아이템 등이 디폴트화 되고 메타버스나 NFT, P2E 등이 대두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러한 화두들이 북미에서는 한국 만큼 현안이 아니어서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서글프)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그러한 화두들이 결국엔 게임의 미래와 직결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재미를 좇는 혁신의 역사’라는 〈하이스코어〉를 비롯한 기존의 게임 역사 저술이나 다큐의 역사관에서 벗어난 작품이 나와주길 기대해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서울을 걷는 작은 이유, 피크민 블룸 서울 투어

    이 사람들의 정체는 바로 <피크민 블룸>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들이 쓰고 있단 머리에 쓴 모자는 닌텐도의 유명 캐릭터인 ‘피크민’을 본뜬 것으로, ‘피크민 블룸 투어 2025: 서울’ 행사 참여자들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도심을 누비던 그들은, 사실 같은 게임 속에서 도시를 탐험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Back 서울을 걷는 작은 이유, 피크민 블룸 서울 투어 24 GG Vol. 25. 6. 10. 들어가며 2025년 가정의 달인 5월 첫 주말, 서울 도심에 수상한 집단이 출현했다. 이들은 머리 위에 두 개의 큰 눈과 잎사귀 또는 꽃 모양의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충무로에서 창덕궁까지의 거리를 누비며 서울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선가는 노란 잎사귀 모자를 쓴 사람이 광장시장에서 호떡을 집어 들고, 다른 한 편에서는 빨간 꽃 모자를 쓴 사람이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묘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파란 봉우리 모자를 쓴 사람들도 보였다. 이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도 않았다. 독특한 생김새의 모자를 제외하면 서로를 묶는 뚜렷한 공통점은 없어 보였다. 이 사람들의 정체는 바로 <피크민 블룸>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들이 쓰고 있단 머리에 쓴 모자는 닌텐도의 유명 캐릭터인 ‘피크민’을 본뜬 것으로, ‘피크민 블룸 투어 2025: 서울’ 행사 참여자들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도심을 누비던 그들은, 사실 같은 게임 속에서 도시를 탐험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피크민 블룸 투어 이벤트 포스터 ‘피크민 블룸 투어(Pikmin Bloom Tour)’는 AR 모바일 게임 <피크민 블룸>의 현장 이벤트이다. 이 행사는 평균 하루에서 이틀 동안 진행되며, 개최되는 지역의 특정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별 진행이기 때문에 소요 시간은 참여자들에 따라 천차 만별이고, 동선 역시 개인의 재량에 달려 있다. 참여자들에게는 피크민 모자와 행사 지도, 특별 꽃 정수와 황금모종 등이 보상으로 지급된다. 행사는 무료이지만 인앱을 통한 추첨에 당첨되어야지만 참여 가능하다. 피크민 블룸 투어의 간략한 역사 지금까지 피크민 블룸 투어는 총 5회 개최되었다. 투어는 2023년 삿포로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벚꽃 시즌을 맞아 사람들이 거리의 꽃과 게임을 함께 즐기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2년 동안 서로 다른 일본의 3가지 지역에서 투어가 개최되었으며, 각각은 시기에 맞는 이벤트 꽃과 함께 전개되었다. 이름 일자 지역 계절 이벤트 꽃 특징 Pikmin Bloom Tour 2023: Sapporo 2023년 4월 23일 삿포로 봄 벚꽃 첫 시도 Pikmin Bloom Tour 2023: Yokosuka 2023년 7월 23일 요코스카 여름 해바라기 인앱 패키지 도입 Pikmin Bloom Tour 2023: Kyoto 2023년 11월 12일 교토 오카자키 지역 가을 빨란 패랭이꽃 Pikmin Bloom Tour 2024: Fukuoka 2024년 3월 30일-31일 후쿠오카 봄 벚꽃 2일로 연장 Pikmin Bloom Tour 2025 : Seoul 2025년 5월 3일-4일 서울, 한국 봄 하얀 히비스커스 첫 일본 밖 개최 * 피크민 블룸 투어 요약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인 만큼 5가지의 행사는 모두 같은 골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참여자들은 정해진 선물 증정 장소에 방문하여 피크민 모양의 선 바이저, 지도를 수령한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지역을 찾아가며 이벤트 꽃 정수와 피크민 모종을 획득한다. 이벤트 장소에 들어서면, 세 가지 미션이 인앱에 표시되는데, 이는 이벤트 스팟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모두 달성할 수 있다. 모든 투어는 “(1) 7천보 이상 걷기 > 선물스티커(금색) 피크민 (2) 이벤트 꽃 3000송이 심기 > 선물스티커(금색) 피크민 (3) 이벤트 스팟 7개 방문하기 > 이벤트 뱃지”라는 유사한 미션과 보상 구조를 공유한다. * 피크민 블룸 투어 이벤트와 보상 두 번째인 요코스카 투어부터 참여자들만 살 수 있는 인앱 패키지가 추가되었다. 여기에는 현장 이벤트에서 수령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인앱 코스튬이 포함되어 있다. 구매한다면 ‘나’와 같은 패션을 한 피크민과 함께 걸어다닐 수 있다. * 요코스카 투어에서 판매된 Mii 코스튬 가장 최근에 개최된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은 이전의 행사들과 비교했을 때 약간의 특이점을 지닌다. 우선, 이는 처음으로 일본을 벗어난 개최된 투어이다. 비교적 작은 볼륨인 ‘미니워크’는 일본 밖에서도 이루어진 바가 있지만, ‘투어’가 일본 밖에서 이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제철에 맞지 않은 꽃이 이벤트 꽃으로 선정되었다. 이번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의 이벤트 꽃은 ‘하얀 히비스커스’였는데, 히비스커스의 일반적인 개화 시기는 6월에서 10월 (7~9월이 절정)이다. 대개 ‘시즌의 맞는 꽃’을 선보이던 <피크민 블룸> 운영진이 여름 꽃인 히비스커스를 봄에 선보인 이유는,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가 이와 같은 속(genus)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행사가 일본 밖에서 개최된 만큼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에 맞추어 이벤트 꽃을 선보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 인게임 하얀 히비스커스의 모습: 무궁화와 상당히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 차례의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피크민 블룸 미니 워크(Pikmin Bloom Mini Walk)’와 ‘피크민 블룸 저니(Pikmin Bloom Journey)’라는 두 종류의 또다른 현장 이벤트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먼저, 피크민 블룸 미니 워크는 투어를 간단하게 축약해놓은 버전으로, 지역 축제나 행사와 연결된 것이 특징적이다. 따로 신청이 필요하지 않고, 특정 지역에 들어가면 바로 참여가 가능하다. 이름 일자 지역 이벤트 스팟 행사 Pikmin Bloom Mino Washi Akari Walk 2023 2023년 10월 8일-21일 미노시, 일본 7종류 미노와시아카리전 Pikmin Bloom MINI WALK: Nagano Tomyo Festival 2024년 2월 9일-12일 나가노, 일본 9종류 나가노 등불 축제 Pikmin Bloom MINI WALK: Japan-Tag Düsseldorf/NRW 2024년 6월 1일 뒤셀도르프, 독일 6종류 일본의 날 Pikmin Bloom MINI WALK: Tainan City 2024년 10월 26일-11월 10일 타이난, 대만 8종류 대만 디자인 엑스포’24 Pikmin Bloom MINI WALK: Lucca Comics & Games 2024 2024년 10월 15일 루카, 이탈리아 9종류 루카 코믹스 & 게임스 Pikmin Bloom MINI WALK: San Diego Zoo 2024년 11월 16일-29일 샌디에고, 미국 4종류 없음, San Diego Zoo Wildlife Alliance와 협업 * 피크민 블룸 미니 워크 요약 투어나 미니 워크와 달리, 피크민 블룸 저니는 유료로 진행된 이벤트이다. 이벤트 티켓은 인앱 결제를 통해 구매할 수 있었다. 2024년에 1회 개최되었으며, 현장 이벤트인 ‘피크민 블룸 저니 2024: 도쿄 돔 시티(Pikmin Bloom Journey 2024: Tokyo Dome City)’와 온라인에서 참여할 수 있는 ‘피크민 블룸 저니 2024: 어디서나 챌린지(Pikmin Bloom Journey 2024: Challenge Anywhere)’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현장 이벤트와 온라인 이벤트를 동사에 진행한 특이 사례이다. 온라인 이벤트의 경우 장소와 상관 없이 5개의 빅 플라워를 흔들고, 2000송이의 파란 장미를 심으면 보상을 주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특별 이벤트 피크민과 투어에서 유료로 판매하던 패키지 보상 코스튬을 제공했다.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은 이벤트 지역에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참가 자격을 얻은 플레이어들이 행사 지역에 입장하면 다음과 같은 인앱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현재 이벤트’란에 투어 미션이 추가된다. *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 이벤트 화면 본격적인 이벤트 참여를 위해서는 정해진 선물 수령장소에 방문해야 한다. 이번 행사의 수령 장소는 현대 아울렛 동대이었는데, 여기에서 참가자들은 피크민 모자와 이벤트 지도, 엽서를 수령할 수 있다. 건물 안에서는 특별 AR 사진과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이벤트 부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 이벤트 수령 장소 몇 기념품의 모습 제공된 모자를 착용했다면, 남은 일은 지도를 따라 곳곳을 방문하는 것이다. 이번 투어에서 탐험해야 했던 장소는 총 12곳으로, 모두는 하나의 동선 안에 배치되어 있다. 각 장소는 저마다의 공간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참여자들은 이에 맞는 피크민을 획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충무로 극장에서는 영화관 피크민을, 청계천에서는 물가 피크민을, 그리고 광장시장에서는 김치(한식) 피크민을 획득할 수 있다. * 피크민 투어 서울의 이벤트 지도. 실물 지도가 주어졌지만, 참여자들이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표지는 두 가지가 더 있었다. 첫째는 인게임 화면이다. 게임 화면에는 각 이벤트 스팟이 범위와 함께 표시되어 있었고, 참가자가 이 범위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 빛이 들어와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다른 참가자들이다. 모든 참가자들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유저들은 서로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가는 길에 확신이 없을 때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을 따라가면 다음 장소로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 투어 플레이 화면 디지털 게임은 점차 개인적인 경험으로 변모해왔다. 동네 아이들이 화면을 기웃거리며 훈수를 두던 오락실 시절에서, PC방에서 자신의 모니터에 집중하는 시기를 거쳐, 이제는 손 안의 기기로 혼자만의 화면을 들여다보면 모바일 게임의 시대로 넘어왔다. 오늘날 디지털 게임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개인적인 취미가 되었다. 피크민 블룸 투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동선을 정하고, 시간을 알아서 조절하며, 개인의 속도에 맞추어 플레이한다. 사람마다 관심 있는 장소도 다르고, 걷는 속도도 다르기에 누구나 자기만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같은 투어에 참여하고 있다 해도 다른 참가자와 상호작용할 필요도 없다. 미션은 오로지 개인 화면에서 독립적으로 진행되며, 여기에는 어떤 다른 참가자들과의 상호작용도 필요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참가자들이 투어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감각은 모자로부터 나왔는데, 색색의 피크민 모자를 쓰고 같은 도시를 누비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더라도,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작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피크민 블룸) 투어의 장소성 장소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나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다. 장소는 인간에 의해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고유한 가치와 분위기가 형성된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역사, 이야기, 상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다른 곳과는 분명히 구분되며, 이러한 의미는 사회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부과된다. 따라서, 특정 장소에 대한 개인의 감각은 그가 속한 집단이나 축적한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투어’는 장소(성)을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투어는 개별 장소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프로그램화한 것으로, 참가자들에게 각 장소의 정체성, 관계, 역사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피크민 블룸 투어도 이와 같은 기능을 한다. 앱에는 특정한 이벤트 스팟들이 설정되어 있으며, 그 위치에 도착하면 장소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간략한 설명이 제공된다. 다만, 피크민 블룸 투어는 매우 느슨하다. 일반적인 투어는 엄격한 시간과 동선을 요구하곤 하지만, 피크민 블룸 투어에는 몇 가지 ‘스팟’들이 지정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참여하는 유저의 자유에 맡겨진다. 설명 역시 매우 간결한 수준으로 제공되어 있어 참가자들은 직접 장소를 둘러보며 의미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 곧, 피크민 블룸 투어가 제공하는 것은 장소에 대한 대략적인 스케치이다. * 이벤트 스팟 화면 여기에 피크민 블룸 투어가 특별하게 덧붙이는 것은 ‘피크민’의 존재이다. 어떤 장소의 의미는 그곳을 함께 했던 사람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같은 레스토랑이라도 가족과 갔을 때와 연인과 갔을 때의 기억은 전혀 다른 것처럼, 피크민 블룸 투어 참가자들은 ‘피크민’들과 함께 걸으며 추가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더욱이, 방문한 장소에 따라서 획득한 특정 피크민들은 기억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참가자들은 이벤트 도중 장소의 특징에 맞는 피크민들을 획득하는데, 여기에는 공간의 이름이나 일자 등이 포함되어 있어 장소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반년 넘게 <피크민 블룸>을 플레이하면서, 나는 내 지도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는 걸 느꼈다. 이 게임을 통해서 나는 단순히 길을 걷는 것을 넘어,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 때로는 발명하듯 내 동선을 만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꽃을 더 심기 위해 일부터 평소에 걷지 않던 길로 돌아가기고 하고, 엽서를 얻기 위해 모르는 길목을 탐험하기도 했다. 특별한 모종을 찾기 위해 낯선 동네를 헤매고, 일종의 보물찾기처럼 숨겨진 장소를 찾아다니는 날도 많았다. 심지어, 이 원고를 쓰기 바로 전 날에도 커뮤니티 데이 배지를 얻기 위해 평소보다 먼 길을 돌아 집에 왔다. 라이프로그 상에서 새로운 곳이 푸르게 빛나는 것이 뿌듯함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 피크민 블룸 라이프로그 화면. 자주 간 곳은 초록빛이, 꽃을 심은 자리에는 꽃이 표시 되어있다. 내게 이번 피크민 블룸 투어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제공된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나는 익숙한 도시를 다시 탐험했다. 서울 거주자로서 대부분의 장소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아예 모르는 골목을 찾아 새로운 엽서를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즐거웠다. 단순히 걸음을 기록하고, 가상의 식물을 심고, 작은 캐릭터를 모으는 행위가 어떻게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 수 있는 걸까? <피크민 블룸>에서 정확히 무엇이 ‘보상’이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작은 피크민들은 분명 사람들에게 동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 동력이 계속하여 우리의 삶과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길 바란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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