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건설〉, 게임 방법론의 새로운 예술적 적용
06
GG Vol.
22. 6. 10.
게임 뒷면, NPC들의 세계
웹소설, 웹툰과 같은 분야에서 디지털게임을 소재로 삼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주인공이 게임 속에 들어가 전형적인 성장 서사를 풀어내기도 하고, 이른바 ‘먼치킨’이 되어 게임 속이라는 이세계이자 가상세계를 평정해 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콘텐츠 중에서는 주인공이 아닌 게임 세계의 다른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는 사례들도 적지 않은데, 이른바 NPC에 초점을 맞춘 경우들이다.
플레이어가 떠나면 한숨을 돌리며 몬스터 연기를 접고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NPC의 일상을 다루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펼쳐져 왔던 오늘날까지의 여러 시도들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이런 흐름은 계속 확장되는 추세다.
* 영화, 웹툰, 웹소설 등 전반에서 게임적 세계관, 나아가 게임 속 대상으로만 그려졌던 NPC의 시점을 중심에 두는 흐름은 이제 꽤나 대중적이다.
리움미술관에서 2022년 7월까지 전시중인 이안 쳉의 작품 〈세계건설〉에서 가장 주요한 구성요소는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오브젝트들이다. 작품에 달린 설명처럼 이들은 시작시각과 종료시각을 갖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영상물이 아닌, 서로 얽히고 부딪히며 각자의 속성을 유지한 채 다른 객체들과 네트워크를 이루는 과정 자체를 무한히 반복한다.
대본과 스크립트로 구성되는 영상물과 달리 이 전시는 각자의 속성을 부여받아 행동하는 개별 객체들이 상상된 세계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과정 전체를 그려낸다. 영화로 대표되는, 서사 중심으로 이어지는 작품들과의 차이는 단지 이러한 작동의 기전에 머무르지 않는데, 애초에 서사라는 방식 자체가 존재하는 현실을 압축적으로 추상해 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두 시간 남짓의 상영시간으로 10년의 이야기를 다룰 때 영화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건 대신 서사에 필요한 사건과 순간들을 발췌하여 편집하는 방식을 취한다. 무한대에 이르는 사건의 개수 중에서 이 서사에 연관된 사건만을 추려내는 영화의 방식과 이안 쳉의 작품은 기초부터 다른 입장에 선다. 영화에서는 이미 현실이 존재하고 그로부터 가상의 서사 재료를 뽑아내는 반면 이안 쳉의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발췌와 추상으로서의 ‘서사’다. 그저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각각의 객체가 알아서 작동하고 상호작용하게끔 설계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이안 쳉의 작품은 영상을 기반으로 하지만 영화보다는 디지털 게임과 닮아 있다.
플레이어의 개입이 없는, 객체들만의 세계
초창기 게임과 달리 요즘의 게임은 오로지 알고리즘에 의한 상호작용만으로 모든 텍스트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모든 매체가 그 이전 매체의 재현이듯, 게임 또한 순수한 연산 과정에 머물지 않고 영화와 텔레비전, 만화와 소설 같은 그 이전의 모든 매체를 참고하고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매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임만의 특유한 방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게임적인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적인 방식은 이안 쳉의 작품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과 무척 닮아 있다.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문명’ 시리즈다.
‘문명’ 에는 관전모드가 존재한다.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고 이번 게임에 참가한 모든 문명의 조종을 AI에게 맡겨버린 채 역사의 진행 과정을 그저 구경만 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각 문명의 AI들은 각자 주어진 행동양식에 맞게 주변 지형과 자원, 타 문명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역사를 이어 나가고, 이 과정은 별도의 대본이 없기에 같은 조건으로 플레이해도 매번 다른 양상과 결과로 이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NPC 간의 상호작용이 디스플레이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한 상호작용은 누락되었지만, 여전히 가상세계 안에서는 각자의 의미를 부여 받은 오브젝트들이 알아서 주변과 관계 맺으며 디지털 연산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작동하는 무언가로 만들어낸다. 〈세계건설〉 전시에 등장한 〈사절〉 삼부작이 모두 이와 동일한 방식을 통해 각자의 디스플레이에 오브젝트 간의 합의되지 않은 상호작용을 별도의 서사를 위한 압축 없이 날 것 그대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전시에 녹아있는 디지털 게임의 방법론을 체감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오토마타들의 온전하게 닫힌 계
시작도 끝도 짐작하기 어려운 이 무한한 시간을 향한 관조는 그러나 여러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는 아니다. 이를테면,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를 향한 관찰의 시선은 아이들의 교구로 많이 알려진 개미집 관찰 도구를 연상케 한다. 투명한 아크릴판 안에 채워진 흙 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개미들의 모습은 네모난 아크릴 프레임을 통해 관찰자에게 그대로 전시된다. 먹이를 주는 정도의 개입은 할 수 있지만(이번 전시 출품작 중 〈BOB(신념이 담긴 가방)〉 을 보라!) 근본적으로 관찰자의 개입은 배제된 상태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는 수족관이나, 동물원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미집, 동물원의 예시가 이미 현존하는 ‘작동하는 세계’에 대한 관찰이라면 의외로 디지털을 통해 창조된 관찰도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에 자리한 적도 있는데, 바로 PC의 화면보호기다. 이 프로그램에도 내부의 객체가 알아서 화면에 이미지를 렌더링하여 무한하게 랜덤한 결과물을 생성하고, 사용자는 그 생성에 개입하지 못한 채 관조하게 되는 과정을 향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전시작들처럼 세부적인 관계의 네트워크까지는 아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윈도우 화면보호기 속의 3차원 파이프와, 계속 개체수를 늘려나가며 굴을 파고 방을 만들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개미집과, 어딘지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신을 찾아 떠나는 것 같은 〈사절〉 삼부작에는 스토리텔링을 위한 압축과 추상이 없고, 관찰자의 개입이 없는 대신 내부의 객체들이 정해지지 않은 상호작용으로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는 공통점이 자리한다.
*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용으로 활용되는 교구인 개미집은 투명한 아크릴로 완전히 닫힌 계 너머에서 관찰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움직이는 대상의 모습을 관조하게끔 한다.
사용자, 플레이어로서의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내부의 객체들이 알아서 끊임없이 작동하며 움직이는 가상의 세계는 말 그대로 객체들의 세계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공학적 측면에서는 객체지향프로그래밍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절차적 프로그래밍과 궤를 달리하고, 철학적으로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고의 틀을 바꾸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분명 디지털 게임을 구성하는 방법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건설〉의 출품작은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말 게임스러운가? 라는 질문 앞에 마주 선다. 적지 않은 게이머들은 아마도 플레이어 개입이 불가능한 작품을 두고 존재론적 논쟁을 벌일 것이다. 이를테면, 오락실의 오락기기는 동전을 넣지 않은 상태에선 데모 플레이로 캐릭터들이 알아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무료로 선보인다. 하지만 이때 플레이는 동전을 넣고 스틱을 직접 조작해 난관을 돌파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앞의 데모 플레이는 ‘본게임’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데모 플레이는 게임 텍스트의 일부이지만,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게임이 아니라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플레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는 데모 플레이와 게임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플레이라는 상호작용의 이면에 존재하는, 플레이어의 개입 없는 객체들만의 상호작용을 플레이로 부르지 않는 것에 있다.
달리 말하면 이안 쳉의 ‘세계건설Worlding’ 개념은 게임 그 자체라기보다는 게임이라는 매체 형식의 이면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건설하는 방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게임에서 비롯된, 각각의 객체들이 자신의 속성대로 움직이고 상호작용하며 맞물리는 일종의 프로그램화된 오토마타Automata가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플레이를 위한 전제로서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부터 플레이어를 떼어냄으로써 비로소 게임을 구성하는 각각의 객체만으로 구성된 온전히 닫힌 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인간에 대한 상호작용을 위해 만들어졌던 객체들이 인간의 손을 떠나 스스로 동작하는 개미집으로 온전하게 독립할 수 있음이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카르마와 다르마, 전시와 애니메이션의 질문들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닫힌 계로서 각각의 작품은 진행의 결과에서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갖는다. 어느 누구도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똑같은 전개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관심은 여기서 한 갈래를 더 뻗어 각각의 결과들이 구성해 온 경로들이 비교가 가능해지는 평행우주 속 시간을 향한다. 이른바 세계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상대성이론과 연관된 개념보다는 게임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사용된 시간여행을 통해 분기되며 달라지는 미래에 대한 개념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전시된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가 이를 드러낸다.
〈BOB 이후의 삶〉에서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인 ‘최적경로’는 BOB이라는 생체 결합형 인공지능을 통해 개인의 삶이 특정한 루트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삶의 경로를 가리킨다. 마치 내비게이션의 그것처럼, BOB은 자신과 하나가 된 인간의 삶과 행동을 통제하여 목표한 삶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루트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정작 이 인공지능을 만든 회사의 설립자인 Z는 무한한 삶의 경로에서 최적의 루트를 찾아내어 인간을 인도하는 BOB의 최적경로와 동시에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원의 시간 속을 무의미하게 유영하는 ‘신의 시간’을 거론한다.
Z가 와불의 얼굴에 비춰진 프로젝트 맵핑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다분히 최적경로의 문제가 불교적인 모티프와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최적경로는 불변하는 숙명으로서의 카르마로, 그 모든 숙명적 경로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선택으로 채워나가는 시간으로서의 최적경로 바깥은 다르마로 이어진다. 현대 디지털 기술의 극의極意라고 불릴 수 있을 인공지능을 통해 마침내 찾아낸 인간 삶의 최적경로는 한편으로는 인간해방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정해진 시간선을 따라가며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카르마로 기능한다. BOB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은 목표 달성에 있어 부인할 수 없는 최적경로이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삶이 아닌 것이 된다. 인공지능 BOB은 무한대의 인생경로 중 최적의 경로를 뽑아내 제시하지만, 삶의 경로가 애초에 수학 기반의 가치판단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 또한 동시에 드러난다.
* 〈BOB 이후의 삶〉 은 수학적으로 계산가능한 최적경로를 따르는 삶과, 그 차원을 넘어서서 무위하게 시간 속을 유영하는 삶을 대비시킨다. 이는 스크립트 없는 전시작과 대본에 의해 기승전결로 달려나가는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적 대비이기도 하다.
〈BOB 이후의 삶〉은 그래서 다른 출품작과 함께 놓이며 그 질문을 전시 전체로 확장해 낸다. 각각의 작품이 구축한, 각각의 닫힌 계들 안에서 객체들이 무한히 상호작용하며 만들어가는 무량대수의 경로는 〈BOB 이후의 삶〉이 제시하는 질문과 만나며 하모니를 이룬다. 무한한 가짓수를 만들어내는 작품과 함께 영화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하나, 찰리스라는 소녀가 겪은 이야기 한 줄기를 최적경로로 뽑아낸 애니메이션 작품이 놓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게임이었다면 무언가 관객의 상호작용을 유도했을 법한 장치를 동원했으리라고 여겼을 진부함을 넘는 도발적인 태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들 속에 단 한줄기로 이어진 세계선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놓인 의미는 인류가 오랫동안 탐구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경지에 놓여있는 그 카르마와 다르마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접근경로에의 제시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