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걷는 작은 이유, 피크민 블룸 서울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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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6. 10.
들어가며
2025년 가정의 달인 5월 첫 주말, 서울 도심에 수상한 집단이 출현했다. 이들은 머리 위에 두 개의 큰 눈과 잎사귀 또는 꽃 모양의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충무로에서 창덕궁까지의 거리를 누비며 서울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선가는 노란 잎사귀 모자를 쓴 사람이 광장시장에서 호떡을 집어 들고, 다른 한 편에서는 빨간 꽃 모자를 쓴 사람이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묘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파란 봉우리 모자를 쓴 사람들도 보였다. 이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도 않았다. 독특한 생김새의 모자를 제외하면 서로를 묶는 뚜렷한 공통점은 없어 보였다.
이 사람들의 정체는 바로 <피크민 블룸>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들이 쓰고 있단 머리에 쓴 모자는 닌텐도의 유명 캐릭터인 ‘피크민’을 본뜬 것으로, ‘피크민 블룸 투어 2025: 서울’ 행사 참여자들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도심을 누비던 그들은, 사실 같은 게임 속에서 도시를 탐험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피크민 블룸 투어 이벤트 포스터
‘피크민 블룸 투어(Pikmin Bloom Tour)’는 AR 모바일 게임 <피크민 블룸>의 현장 이벤트이다. 이 행사는 평균 하루에서 이틀 동안 진행되며, 개최되는 지역의 특정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별 진행이기 때문에 소요 시간은 참여자들에 따라 천차 만별이고, 동선 역시 개인의 재량에 달려 있다. 참여자들에게는 피크민 모자와 행사 지도, 특별 꽃 정수와 황금모종 등이 보상으로 지급된다. 행사는 무료이지만 인앱을 통한 추첨에 당첨되어야지만 참여 가능하다.
피크민 블룸 투어의 간략한 역사
지금까지 피크민 블룸 투어는 총 5회 개최되었다. 투어는 2023년 삿포로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벚꽃 시즌을 맞아 사람들이 거리의 꽃과 게임을 함께 즐기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2년 동안 서로 다른 일본의 3가지 지역에서 투어가 개최되었으며, 각각은 시기에 맞는 이벤트 꽃과 함께 전개되었다.
이름 | 일자 | 지역 | 계절 | 이벤트 꽃 | 특징 |
Pikmin Bloom Tour 2023: Sapporo | 2023년 4월 23일 | 삿포로 | 봄 | 벚꽃 | 첫 시도 |
Pikmin Bloom Tour 2023: Yokosuka | 2023년 7월 23일 | 요코스카 | 여름 | 해바라기 | 인앱 패키지 도입 |
Pikmin Bloom Tour 2023: Kyoto | 2023년 11월 12일 | 교토 오카자키 지역 | 가을 | 빨란 패랭이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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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kmin Bloom Tour 2024: Fukuoka | 2024년 3월 30일-31일 | 후쿠오카 | 봄 | 벚꽃 | 2일로 연장 |
Pikmin Bloom Tour 2025 : Seoul | 2025년 5월 3일-4일 | 서울, 한국 | 봄 | 하얀 히비스커스 | 첫 일본 밖 개최 |
* 피크민 블룸 투어 요약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인 만큼 5가지의 행사는 모두 같은 골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참여자들은 정해진 선물 증정 장소에 방문하여 피크민 모양의 선 바이저, 지도를 수령한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지역을 찾아가며 이벤트 꽃 정수와 피크민 모종을 획득한다. 이벤트 장소에 들어서면, 세 가지 미션이 인앱에 표시되는데, 이는 이벤트 스팟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모두 달성할 수 있다. 모든 투어는 “(1) 7천보 이상 걷기 > 선물스티커(금색) 피크민 (2) 이벤트 꽃 3000송이 심기 > 선물스티커(금색) 피크민 (3) 이벤트 스팟 7개 방문하기 > 이벤트 뱃지”라는 유사한 미션과 보상 구조를 공유한다.

* 피크민 블룸 투어 이벤트와 보상
두 번째인 요코스카 투어부터 참여자들만 살 수 있는 인앱 패키지가 추가되었다. 여기에는 현장 이벤트에서 수령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인앱 코스튬이 포함되어 있다. 구매한다면 ‘나’와 같은 패션을 한 피크민과 함께 걸어다닐 수 있다.

* 요코스카 투어에서 판매된 Mii 코스튬
가장 최근에 개최된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은 이전의 행사들과 비교했을 때 약간의 특이점을 지닌다. 우선, 이는 처음으로 일본을 벗어난 개최된 투어이다. 비교적 작은 볼륨인 ‘미니워크’는 일본 밖에서도 이루어진 바가 있지만, ‘투어’가 일본 밖에서 이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제철에 맞지 않은 꽃이 이벤트 꽃으로 선정되었다. 이번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의 이벤트 꽃은 ‘하얀 히비스커스’였는데, 히비스커스의 일반적인 개화 시기는 6월에서 10월 (7~9월이 절정)이다. 대개 ‘시즌의 맞는 꽃’을 선보이던 <피크민 블룸> 운영진이 여름 꽃인 히비스커스를 봄에 선보인 이유는,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가 이와 같은 속(genus)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행사가 일본 밖에서 개최된 만큼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에 맞추어 이벤트 꽃을 선보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 인게임 하얀 히비스커스의 모습: 무궁화와 상당히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 차례의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피크민 블룸 미니 워크(Pikmin Bloom Mini Walk)’와 ‘피크민 블룸 저니(Pikmin Bloom Journey)’라는 두 종류의 또다른 현장 이벤트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먼저, 피크민 블룸 미니 워크는 투어를 간단하게 축약해놓은 버전으로, 지역 축제나 행사와 연결된 것이 특징적이다. 따로 신청이 필요하지 않고, 특정 지역에 들어가면 바로 참여가 가능하다.
이름 | 일자 | 지역 | 이벤트 스팟 | 행사 |
Pikmin Bloom Mino Washi Akari Walk 2023 | 2023년 10월 8일-21일 | 미노시, 일본 | 7종류 | 미노와시아카리전 |
Pikmin Bloom MINI WALK: Nagano Tomyo Festival | 2024년 2월 9일-12일 | 나가노, 일본 | 9종류 | 나가노 등불 축제 |
Pikmin Bloom MINI WALK: Japan-Tag Düsseldorf/NRW | 2024년 6월 1일 | 뒤셀도르프, 독일 | 6종류 | 일본의 날 |
Pikmin Bloom MINI WALK: Tainan City | 2024년 10월 26일-11월 10일 | 타이난, 대만 | 8종류 | 대만 디자인 엑스포’24 |
Pikmin Bloom MINI WALK: Lucca Comics & Games 2024 | 2024년 10월 15일 | 루카, 이탈리아 | 9종류 | 루카 코믹스 & 게임스 |
Pikmin Bloom MINI WALK: San Diego Zoo | 2024년 11월 16일-29일 | 샌디에고, 미국 | 4종류 | 없음, San Diego Zoo Wildlife Alliance와 협업 |
* 피크민 블룸 미니 워크 요약
투어나 미니 워크와 달리, 피크민 블룸 저니는 유료로 진행된 이벤트이다. 이벤트 티켓은 인앱 결제를 통해 구매할 수 있었다. 2024년에 1회 개최되었으며, 현장 이벤트인 ‘피크민 블룸 저니 2024: 도쿄 돔 시티(Pikmin Bloom Journey 2024: Tokyo Dome City)’와 온라인에서 참여할 수 있는 ‘피크민 블룸 저니 2024: 어디서나 챌린지(Pikmin Bloom Journey 2024: Challenge Anywhere)’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현장 이벤트와 온라인 이벤트를 동사에 진행한 특이 사례이다. 온라인 이벤트의 경우 장소와 상관 없이 5개의 빅 플라워를 흔들고, 2000송이의 파란 장미를 심으면 보상을 주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특별 이벤트 피크민과 투어에서 유료로 판매하던 패키지 보상 코스튬을 제공했다.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은 이벤트 지역에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참가 자격을 얻은 플레이어들이 행사 지역에 입장하면 다음과 같은 인앱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현재 이벤트’란에 투어 미션이 추가된다.

* 피크민 블룸 투어 서울 이벤트 화면
본격적인 이벤트 참여를 위해서는 정해진 선물 수령장소에 방문해야 한다. 이번 행사의 수령 장소는 현대 아울렛 동대이었는데, 여기에서 참가자들은 피크민 모자와 이벤트 지도, 엽서를 수령할 수 있다. 건물 안에서는 특별 AR 사진과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이벤트 부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 이벤트 수령 장소 몇 기념품의 모습
제공된 모자를 착용했다면, 남은 일은 지도를 따라 곳곳을 방문하는 것이다. 이번 투어에서 탐험해야 했던 장소는 총 12곳으로, 모두는 하나의 동선 안에 배치되어 있다. 각 장소는 저마다의 공간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참여자들은 이에 맞는 피크민을 획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충무로 극장에서는 영화관 피크민을, 청계천에서는 물가 피크민을, 그리고 광장시장에서는 김치(한식) 피크민을 획득할 수 있다.

* 피크민 투어 서울의 이벤트 지도.
실물 지도가 주어졌지만, 참여자들이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표지는 두 가지가 더 있었다. 첫째는 인게임 화면이다. 게임 화면에는 각 이벤트 스팟이 범위와 함께 표시되어 있었고, 참가자가 이 범위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 빛이 들어와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다른 참가자들이다. 모든 참가자들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유저들은 서로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가는 길에 확신이 없을 때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을 따라가면 다음 장소로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 투어 플레이 화면
디지털 게임은 점차 개인적인 경험으로 변모해왔다. 동네 아이들이 화면을 기웃거리며 훈수를 두던 오락실 시절에서, PC방에서 자신의 모니터에 집중하는 시기를 거쳐, 이제는 손 안의 기기로 혼자만의 화면을 들여다보면 모바일 게임의 시대로 넘어왔다. 오늘날 디지털 게임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개인적인 취미가 되었다.
피크민 블룸 투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동선을 정하고, 시간을 알아서 조절하며, 개인의 속도에 맞추어 플레이한다. 사람마다 관심 있는 장소도 다르고, 걷는 속도도 다르기에 누구나 자기만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같은 투어에 참여하고 있다 해도 다른 참가자와 상호작용할 필요도 없다. 미션은 오로지 개인 화면에서 독립적으로 진행되며, 여기에는 어떤 다른 참가자들과의 상호작용도 필요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참가자들이 투어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감각은 모자로부터 나왔는데, 색색의 피크민 모자를 쓰고 같은 도시를 누비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더라도,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작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피크민 블룸) 투어의 장소성
장소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나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다. 장소는 인간에 의해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고유한 가치와 분위기가 형성된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역사, 이야기, 상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다른 곳과는 분명히 구분되며, 이러한 의미는 사회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부과된다. 따라서, 특정 장소에 대한 개인의 감각은 그가 속한 집단이나 축적한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투어’는 장소(성)을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투어는 개별 장소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프로그램화한 것으로, 참가자들에게 각 장소의 정체성, 관계, 역사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피크민 블룸 투어도 이와 같은 기능을 한다. 앱에는 특정한 이벤트 스팟들이 설정되어 있으며, 그 위치에 도착하면 장소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간략한 설명이 제공된다. 다만, 피크민 블룸 투어는 매우 느슨하다. 일반적인 투어는 엄격한 시간과 동선을 요구하곤 하지만, 피크민 블룸 투어에는 몇 가지 ‘스팟’들이 지정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참여하는 유저의 자유에 맡겨진다. 설명 역시 매우 간결한 수준으로 제공되어 있어 참가자들은 직접 장소를 둘러보며 의미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 곧, 피크민 블룸 투어가 제공하는 것은 장소에 대한 대략적인 스케치이다.

* 이벤트 스팟 화면
여기에 피크민 블룸 투어가 특별하게 덧붙이는 것은 ‘피크민’의 존재이다. 어떤 장소의 의미는 그곳을 함께 했던 사람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같은 레스토랑이라도 가족과 갔을 때와 연인과 갔을 때의 기억은 전혀 다른 것처럼, 피크민 블룸 투어 참가자들은 ‘피크민’들과 함께 걸으며 추가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더욱이, 방문한 장소에 따라서 획득한 특정 피크민들은 기억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참가자들은 이벤트 도중 장소의 특징에 맞는 피크민들을 획득하는데, 여기에는 공간의 이름이나 일자 등이 포함되어 있어 장소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반년 넘게 <피크민 블룸>을 플레이하면서, 나는 내 지도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는 걸 느꼈다. 이 게임을 통해서 나는 단순히 길을 걷는 것을 넘어,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 때로는 발명하듯 내 동선을 만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꽃을 더 심기 위해 일부터 평소에 걷지 않던 길로 돌아가기고 하고, 엽서를 얻기 위해 모르는 길목을 탐험하기도 했다. 특별한 모종을 찾기 위해 낯선 동네를 헤매고, 일종의 보물찾기처럼 숨겨진 장소를 찾아다니는 날도 많았다. 심지어, 이 원고를 쓰기 바로 전 날에도 커뮤니티 데이 배지를 얻기 위해 평소보다 먼 길을 돌아 집에 왔다. 라이프로그 상에서 새로운 곳이 푸르게 빛나는 것이 뿌듯함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 피크민 블룸 라이프로그 화면. 자주 간 곳은 초록빛이, 꽃을 심은 자리에는 꽃이 표시 되어있다.
내게 이번 피크민 블룸 투어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제공된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나는 익숙한 도시를 다시 탐험했다. 서울 거주자로서 대부분의 장소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아예 모르는 골목을 찾아 새로운 엽서를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즐거웠다.
단순히 걸음을 기록하고, 가상의 식물을 심고, 작은 캐릭터를 모으는 행위가 어떻게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 수 있는 걸까? <피크민 블룸>에서 정확히 무엇이 ‘보상’이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작은 피크민들은 분명 사람들에게 동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 동력이 계속하여 우리의 삶과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