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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Back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01 GG Vol. 21. 6. 10. 시작하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실로 익숙한 흐름의 대화였다. 게임을 ‘중독’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 악마화하거나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 엄마가 나의 오빠를 키우던 때에도 구사한 문법이니 말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오빠와 달리 나는 디지털 게임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쥬니어 네이버’ 세대답게 나 역시 ‘슈 게임’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조금 더 머리가 큰 뒤로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피카츄 배구’나 ‘보글보글’, ‘테트리스’, ‘카트라이더’ 등을 하며 점심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게임을 즐겨 하지 않던 나조차도 추억 저편에 게임이 있을 정도라면,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년시절은 온통 게임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게임이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뿐인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의 레드 카펫 위에서 한국영화를 알리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K팝을 알릴 때, 모니터 너머의 가상 세계에는 이미 ‘한국 vs 비한국’이라는 대결 공식이 생겼을 정도로 한국 게임문화의 위상은 최정점에 놓여있던지 오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는 게임도 엄연한 취미이자 하나의 문화로 봐 줄 법도 한데, 여전히 게임은 하찮고 저급한, 그래서 ‘문화’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우선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 때문일 테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교체가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편견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뿌리 깊게 남아있고, 그로 인해 게임은 문화가 아닌 잠깐의 일탈이나 못된 유흥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세상만사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게임이 문화영역에서 제 몫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외부적 편견 탓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 밖의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것을 ‘비평’으로 지목할 셈이다. ‘게임비평’? 사실 게임이 맥락적인 조건 속에서 주조되는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타의 문화예술처럼 비평이 따라붙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게임비평은 여전히 생소하고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 영역의 비평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은 탓이며 비평의 무능과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이 글이 쓰인 배경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영토로서 영화/비평 문화비평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단연 미술비평과 문학비평이다. 초기에는 양자 모두 작품의 고유한 특징과 미학적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작품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 또는 ‘문학사’와 함께 발맞춰 전개되었지만, 근대 전환기에 이르러 예술이 인간 이성의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자 비평은 역사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무렵이 되자 비평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예술 시장의 확대와 부르주아 계층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단순히 작가와 문화 향유자 사이를 중개하던 비평가의 역할이 특권 집단의 배타적인 취향을 형성하는 역할로 변모한 까닭이다. 특히나 미술과 문학은 일찍이 상류층의 취미이자 고급예술의 대표적 형태로서 문화사에 기입되어 왔기에 비평이 제 스스로 그것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강조하여 대중문화와의 구별짓기를 수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이때부터 비평은 문화예술의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반면 영화와 영화비평의 관계는 위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진화·발전을 이룩해왔는데, 영화는 근대의 산물이기에 태초부터 고도화된 자본 및 기술, 매체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 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도 신문과 잡지는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 발명과 영화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조푸앵(Mise au point)>(1897)이나 <르파시나퇴르(Le Fascinateur)>(1903)와 같은 영화 전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근대 영화비평의 초석이 마련되었는데, 달리 말해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탄생부터 그것에 대한 글쓰기와 함께한 셈이다. [1]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발명 초기, 영화가 ‘미래가 없는 발명’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온갖 종류의 장르 및 스타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자기 식대로 소화했고 제작과 평론, 관람을 한데 모으는 비옥한 토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대중매체로서 영화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점차 영화 산업에도 활기가 돌고 영화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자 영화 칼럼을 고정으로 싣지 않는 주간지가 없을 정도로 영화 비평은 몸집을 부풀렸고 정기 간행물 형태의 전문 영화 잡지 역시 앞다퉈 창간됐다. [2] 그리고 이때부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비평에 참여하면서 그 수준도 현저하게 끌어올려졌는데 알렉상드르 아스트뤽(Alexandre Astruc),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장 조르주 오리올(Jean George Auriol), 로제 레나르트(Roger Leenhardt),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등은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영화 미학을 심도 깊게 탐구하고, 비평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이하 <카이에>)와 <포지티프(Positif)> 역시 이러한 지적 계보 속에서 탄생했다. [3] 이렇게만 보면 영화/비평은 나름대로 순탄하게 독자적인 예술의 지위를 차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문 영화비평이 등장한 초기만 하더라도 영화는 연극이나 문학의 빈곤한 확장으로 여겨졌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는 제국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적 매체라는 편견이 빠르게 확산됐다. 게다가 전쟁 이후 맹렬한 기세로 성장한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쉽게 말해, 영화가 미술이나 문학과 같이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영화만의 미학적인 속성과 가치를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말소시켜야 했고, 그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저속한 유희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역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초창기 영화이론가 리초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선언한 이후 영화비평은 영화가 고유한 내적 세계와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한 형태이며, 그에 대해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모든 행위는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지성의 작용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아스트륔의 ‘카메라 만년필론(camera-stylo)’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스트뤽는 1948년 <레크랑 프랑세(L'Écran française)>의 지면을 빌어 영화감독은 화가나 작가에 비견되는 예술가로, 감독이 사용하는 촬영 기자재는 소설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만년필과 같다고 썼다. [4] <레크랑 프랑세>의 또 다른 필자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역시 이미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자 실천적 행위라고 말하며 ‘사유-이미지(Images-pensée)’를 주창했고, 영화비평의 전성기인 ‘황색 시대’ [5] 를 견인한 앙드레 바쟁 또한 카메라의 힘이 현실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역설하며 영화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6] 이렇듯 영화가 ‘근(현)대 예술’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비평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다. 비평이 촉발시킨 영화 미학에 관한 물음과 논쟁은 당대 많은 부르주아-엘리트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이 영화의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한 의미의 시네필 문화를 수호하던 비평계가 누벨바그 운동에 직면하며 폭넓은 지적 조류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간의 비평은 의식적으로 비정치성을 강조해왔는데, 이는 영화-이미지 이면에 놓인 감독(작가)의 천재성과 영화의 특수성을 세간에 드러냄으로써 영화와 비평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으려는 기획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요컨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마련한 자신만의 일관되고 독특한 세계관이 담긴 작품 세계로서의 미장센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이념적 해석이나 정치적 성향은 필요치 않다.” [7] 만약 “이를 강요한다면 영화의 시각적 구성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향된 ‘읽기’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것” [8] 이며, 이는 결국 영화를 도구적으로만 참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세대교체로 인해 젊은 감독들은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적 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비평도 변혁을 요구받았는데, 비평 역시 세계의 일부라면 모종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누벨바그의 거장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다. 그는 영화 안에는 언제나 미지의 상태로 남겨진 의미와 기능, 형식들이 존재하기에 자기 자신에게로 닫혀서는 안 되며, 이 미완성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힘이기에 영화는 결코 고립된 채 이해될 수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리베트 이전의 비평이 작품의 내적 탐구를 통해 영화를 진지한 사유와 토론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데 주력을 기울였다면, 리베트 시대의 비평은 작품의 안과 밖을 잇는 시도를 통해 영화의 이론적 정립과 과학적 글쓰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리베트는 <카이에>를 이끄는 동안 영화의 의미 확장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인류학과 문학 이론, 라캉의 정신분석학,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등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지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리베트와 함께 <카이에>를 이끌던 필진들 역시 블랑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융 등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영화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 영화를 다르게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강구했다. 이제 비평은 근대인의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영화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이 자극하는 무의식과 불안에 초점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화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둥지 밖으로 나오도록 신화를 깨부수는 것” [9] 으로 변모함에 따라 비평이 중요하게 포착해야 할 것 또한 작품이 높인 맥락, 즉 영화가 탄생한 환경적인 조건이나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것의 표현 방식 등으로 이동하게 된 셈이다. [10] 그리고 몇 년 뒤 영화/비평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회고처럼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은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그에 관해 쓸 수 없게 만들었다. 68혁명의 주창자들이 이끈 정치경제학적 변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로 프랑스 사회 내 모든 가치가 의문시되었고 영화 역시 황색 시대에 구축된 제도와 관습, 원칙, 규율 등이 1968년 이후의 상황을 다루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 시네필리아에 대한 거부가 만연해지자 영화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사유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요구 담론의 지속적인 형성 및 축적은 ‘영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열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 한국영화/비평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어떨까? 한국영화사에 비평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이었지만 이때의 평론은 서구의 초기 영화비평처럼 일간지나 잡지 등지에서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정도였으며, 보다 선명한 문제의식을 지닌 비평가 집단이 출현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5.16의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한국영화비평가협회’에 10여명의 문학평론가를 영입하며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하나의 비평적 공동체로 묶어준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새로운 ‘세대성’이었다. 해방직후의 비평은 ‘민족영화 건설’이라는 모토를 내세웠고, 1950년대 전후 비평 역시 ‘한국영화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어받았지만, 이 새로운 비평 집단은 영화의 문학성(서사성)이나 외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미지-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강조하고 내적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영화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리얼리즘을 초극해야 한다” [11] 는 한국영화의 암묵적인 전제는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영화는 본디 기록의 매체이니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리얼리즘은 한국영화의 절대적 명령이 아닌 하나의 선택적 가치에 불과하며,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오브제가 아니라 그 오브제를 다루는 영상-이미지이다. [12] 이러한 흐름만 놓고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이 걸어온 길 역시 서구의 궤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근대 도시의 통속적이고 저속한 볼거리로 여겨지거나, 인접한 예술의 하위호환 버전으로 간주되거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각되다가 대대적인 세대 교체와 함께 그것의 역사적, 매체적, 미학적 특성을 규명하며 종국에는 예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영화는 언제나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세계영화문화의 공통된 목표였다면, 다른 하나는 문화 열강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민족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식민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벗어던지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힘의 획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한국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풀어 말하자면 50년대 한국영화는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식민지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를 대안으로 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세우는 테크놀로지나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두기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60~70년대의 한국영화비평은 기술과 예술을 엄격히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한국영화가 안고 있는 기술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과 좌절로부터 비롯된 의식적 부인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물적 토대를 감안했을 때 할리우드가 선보이는 기술과 기교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졸렬한 기술-자본이 만들어낸 말초적 쾌락이라 호명하며 예술성의 고양을 주창한 것이다. [1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한국영화의 기술력을 논할 때는 다소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가령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가 등장하자 비평단은 이를 한국영화의 획기적인 진전이라 상찬하고, 국산 시네마스코프가 제작되었을 때는 한국영화를 해외영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위대한 업적이라 호평했다. [14] 이것이 너무 까마득한 역사처럼 느껴진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장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그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했는데 당시 물밀듯 밀려 들어온 해외 문화로 인해 자국 문화의 위기설이 나돌았고, 이때 전 지구적 자본의 풍랑에 맞서 한국의 영화산업을 이끌 대표 주자로서 부상한 것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 민족주의적 서사를 채택하며 처음 등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막대한 자본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을 등에 업고 인기몰이를 했는데, 이에 대한 비평 역시 60~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영화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에 대거 유입된 해외 스펙터클 영화에 대해서는 자국의 영화를 말살시키는 ‘위협’의 딱지를 붙였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해외 문물로부터 국가·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지켜낼 문화예술의 지위를, 더 나아가 IMF 외환 위기와 구제 금융을 겪으며 좌절한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킬 산업분야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15] 해외영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자본에 대한 한국영화/비평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는 외래 문화로 출발했으나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기술은 근대성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비평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모순, 또는 지정학적 특수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6]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의 과제는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영화에 근대 문화예술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외래 문화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온 까닭이다. 이렇듯 한국영화/비평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대중문화)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저항과 해방을 꾀한, 이른바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이라 할 수 있다. 맺고 새로 시작하며: 현대 문화예술로서의 게임을 위하여 긴 우회로를 거쳤으니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글을 시작하며 나는 게임이 현대의 일상문화와 한국의 문화산업 한복판에 놓여 있음에도 대체 어떤 이유로 여전히 천대를 받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비평 문화의 비활성화를 언급했었는데, 이 글의 목적이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통한 비평의 각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뒤집어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하고 명쾌한 설명일 테다. 즉 게임비평의 소극적인 태도, 나태함, 약간의 무기력함과 무능함 등의 논리적인 귀결은 게임문화 전반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길게 서술했듯 영화 역시 고전 미학의 권위에 짓눌려 꽤나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비평의 공이 컸다. 특히나 한국영화의 경우 서구 문화의 계급투쟁 계보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중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국게임문화에 주는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주는 교훈을 통해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 비평은 수십 년 전부터 ‘위기설’이 감돌 정도로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몸체를 부풀리는 OTT 플랫폼으로 인해 영화 관람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담론장 형성과 지식-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아마추어 비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문 비평의 지나친 엘리트주의나 미학주의는 대중예술로서 출현한 영화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권 계층의 전유물과 같은 부르주아적 성향을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이는 영화를 미학적 탐구와 학문적 고찰의 대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주관비평에서 객관비평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던 과거의 비평적 요구가 절대화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였다. 기실 비평적 주체는 늘 제3자로서 중립적인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지워진 비평 주체의 주관성은 역설적으로 비평가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비평 행위는 단순히 제3자로서 사실을 기록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매개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언제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적이며,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 쓰고, 읽고, 말하고, 듣고, 보는 주체는 오늘의 시간을 지나쳐가는 주체와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평의 전문성을 보장한답시고 현실과 유리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자신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법한 논리를 내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핵심적 역할이 세계와 텍스트 사이에 오솔길을 놓고 장 안팎의 행위자들을 이을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 새롭게 마련된 비평-플랫폼의 책임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마주침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데에 있다. 지적 자본을 내세운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신랄한 목소리, 열정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의 뜨거운 열기와 유쾌한 분위기, 문화 자본으로 다듬어진 섬세한 감수성과 고아한 취향, 현장의 목격자 및 관찰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앎에 대한 열망 등이 뒤섞일 때, 그래서 저마다 활발하게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담론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게임은 비로소 현대 대중문화예술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 새로운 비평-플랫폼이 서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게임문화가 현대 대중문화의 치열한 계급전쟁에서 권력을 탈환하고 개별 학문의 지위를 차지하여 대학의 문턱을 넘는 날이 오기를, 한평 남짓한 책상 앞에서 펼치는 우아한 지적 활동이자 역동적인 취미로서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현질까지 해가며 기를 쓰고 게임을 한 우리 귀염둥이의 노력이 사춘기 소년의 한심한 일탈이 아닌 꿈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게임 제너레이션〉의 건투를 빈다. [1]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390쪽. [2] 에밀리 비커턴, 정용준·이수원 역,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이앤비플러스, 2013, 31-33쪽. [3]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4] http://www.newwavefilm.com/about/camera-stylo-astruc.shtml [5] <카이에>는 노란 겨자색 표지에 커다란 흑백사진을 실은 30페이지짜리의 잡지로 1950년대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잡지로 여겨지곤 했는데, 특히 별다른 헤드라인 스틸 사진을 사용하여 표지를 구성한 것은 <카이에>가 영화 미학에 큰 비중을 두겠다는 다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6]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51-52쪽. [7]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8]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9] Rivette, Cahiers 204, September 1968. [10]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85-90쪽. [11] 이영일, 『영화예술』, 1965년 4월호, 24-29쪽. [12] 문재철, 「60년대 중반 영화비평담론의 새로움」, 『영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61-79쪽. [13]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2쪽. [14]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3쪽. [15] 이 시기가 한국영화 담론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추가로 덧붙일 필요가 있는데,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해외 문화 유입으로 인해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팽창하자 대중문화론이 지식인 사회에서 각광 받기 시작했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는 이전과 달리 영상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 담론을 구성하고, 인문사회과학과의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갔는데,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도 영화가 엄연한 분과학문으로 인정받아 영화아카데미 설립 및 운영, 전문 예술대학의 건립, 종합대학의 영화학과 설치 등과 같은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16]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5-136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 스트리밍 어드벤처 : 서사라는 꿈과 퍼즐이라는 전의식으로

    어드벤처 게임이란 상당히 이상한 맥락의 장르명이다. 농담을 조금 보태자면,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중 ‘어드벤처’를 경험하지 않는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어니스트 아담스Ernest Adams는 『 Fundamental of Game Design』에서 ‘많은 모험적인 특징을 가진 게임들이 어드벤처 장르가 아니며, 반대로 많은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들이 모험을 다루지 않는다.’라며 이 장르명이 가진 이상한 아이러니를 언급한다. < Back 스트리밍 어드벤처 : 서사라는 꿈과 퍼즐이라는 전의식으로 29 GG Vol. 26. 4. 10. 어드벤처 게임이란 상당히 이상한 맥락의 장르명이다. 농담을 조금 보태자면,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중 ‘어드벤처’를 경험하지 않는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어니스트 아담스Ernest Adams는 『 Fundamental of Game Design』에서 ‘많은 모험적인 특징을 가진 게임들이 어드벤처 장르가 아니며, 반대로 많은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들이 모험을 다루지 않는다.’라며 이 장르명이 가진 이상한 아이러니를 언급한다. 물론 이 명명에는 명백히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 장르가 지칭하는 ‘어드벤처’는 모험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돈 우즈Don Woods와 윌리엄 크라우더William Crowther가 제작한 최초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Colossal Cave Adventure」(1976)에서 가져온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후 간단히 부르기 위해 제목을 「어드벤처Adventure」로 축약한 이래, 이 게임과 유사한 게임들을 묶어 ‘어드벤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근간의 ‘게임명-like’의 방식으로 장르명을 붙이는 경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DOS 버전의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어드벤처 장르는 초기 비디오 게임이 가진 한계, 그러니까 길고 복잡하며 기존 매체와 유사한 형식의 서사를 담지 못하던 그 때에 대안으로 등장했다. 일단 그 시초인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가 텍스트와 문자 입력식 파서(Parser) [1] 를 이용했던 것은 TRPG의 형식을 비디오 게임에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장르에 시각적 요소를 이식한 로버타 윌리엄스Roberta Williams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유사한 서사를 재현하기 위해 「미스터리 하우스Mystery House」(1980)를 만들었다는 사실 또한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초기 비디오 게임 전반이 기존의 매체를 일정량 재매개remediation하는 일이야 흔했겠지만, 어드벤처는 그러한 목적을 꽤나 진지하게 다룬 장르다. 다른 곳도 아닌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 아츠Lucas Arts’가 이 장르의 대표적인 제작사였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2] 장르로 두 편의 「인디아나 존스」게임을 만들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완된 영화 아이디어를 이용해 「더 디그The Dig」 (1995)를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로버타 윌리엄스도 이후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를 떠오르게 하는 「로라 보우」 연작을 만든다. 더 드리머스 길드The Dreamers Guild는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명작 SF 단편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1995)를 동명의 어드벤처 게임으로 만들었다. 델핀 소프트웨어Delphine Software가 만든 첩보 어드벤처 게임인 「오퍼레이션 스텔스Operation Stealth」(1990)가 북미판에선 「007 제임스 본드 : 더 스텔스 어페어007 James Bond : The Stealth Affair」로 둔갑한 웃지못할 사례도 존재한다. 따라서 어드벤처라는 장르가 하나의 ‘장르’로 규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사라는 개념을 취득하겠다는 ‘꿈’같은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 ‘서사성’이란 기존 매체에 대한 전유적 성질을 가진다.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와 리처드 그루신Richard Grusin은 이 재매개를 흥미있게 바라본다. 그들은 비디오 게임(특히 「미스트Myst」(1993))를 두고 ‘영화와 비슷해보이면서 더 나은 것’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루신과 볼터는 「미스트」가 필름 누아르에서의 탐정의 시점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서사적 평온함은 오히려 비할리우드적 영화들(이를테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과 더 유사하다고 말한다. 탐정으로서의 플레이어는 끝없이 세계를 탐색하지만 그 뒤를 기대하게 만들어야 할 폭력, 공포, 폭로는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스트」에 안토니오니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퍼즐 풀이’다 [3] . 볼터와 그루신의 연구 대상은 특정 장르가 아니라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 전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유가 「미스트」로 대표되는 어드벤처 게임의 본질과 연결되었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클라라 페르난데즈-바라Clara Fernández-Vara는 「Introduction to Game Analysis」에서 어드벤처 게임을 ‘플레이어가 퍼즐을 해결함에 따라 게임의 스토리를 열어주는 일련의 서사적 퍼즐로 구성’된다고 규정한다. ‘어드벤처’라는 장르는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이래 다종의 하위 장르로 분화했으며, 따라서 이들을 명백한 하나로 규합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핵심을 ‘서사’와 ‘퍼즐’이라는 양대의 축에 두는 것은 가능하다. 어드벤처 게임은 본질적으로 ‘서사장르’다. 하지만 단순히 서사를 출력하기만 해서야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구조는 구축될 수 없다. 따라서 동원되는 것이 바로 ‘퍼즐’이다. 여기서 말하는 ‘퍼즐’은 광의의 의미를 가진다. 이를테면 춘소프트의 「 카마이타치의 밤」같은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은 어떠한가? 이런 게임에선 「미스트」나 「원숭이섬의 비밀」등에서 볼 수 있는 명시적이고 발상적인 퍼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텍스트 어드벤처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이퍼 텍스트적인 성질이 퍼즐을 대신한다. 텍스트 어드벤처는 상황과 함께 가능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그 경중에 차이는 있겠지마는, 어찌되든 각 선택은 이후 출력되는 텍스트(=서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 게임에서 퍼즐은 ‘서사’라는 미로 전체가 된다. 여기서 퍼즐은 형식이 아니라 구조다. 어드벤처는 ‘퍼즐’이라는 구조를 통해 ‘서사’를 체감시킨다. 꼭 텍스트 어드벤처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원숭이 섬의 비밀」(1990)의 디렉터인 론 길버트Ron Gilbert는 「 Why Adventure Games Sucks」(1989)에서 어드벤처 게임이 지향해야 할 요소로 ‘목표의 명확성’과 더불어 ‘퍼즐과 서사의 결합성’을 거론한다. 이 기치 아래에서 서사적 목표와 퍼즐적 목표는 일체화한다. 쉽게 말해 ‘문’이라는 목적이 발생하면 플레이어는 그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은 서사를 추동하는 것이다. 어드벤처 장르에 있어서 플레이어의 주요 수행은 결국 퍼즐 풀이다. 그리고 서사는 이 퍼즐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주어진다. 플레이어는 퍼즐과 서사라는 양대의 축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 관점이 현재에 어드벤처라는 장르를 규정하는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 비디오 게임에 서사가 보편화 되어버린 지금 시기에, 과연 ‘무엇’을 어드벤처라는 범주로 확정할 수 있을까? 어드벤처는 결국 (광의의 개념에서의) 퍼즐과 그것을 지탱하는 (구체성과 무관한 개념에서의) 서사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장르다. 퍼즐은 아이템 수색, 결합, 비밀번호 탐색, 문 열기 따위의 보편적인 방식을 넘어 대화의 양상 조정, 진행 방향의 지시, 인간 관계의 관리, 추리와 해답, 단순 수집과 정보 처리 등을 모두 포함한다. 서사 역시 단방향성이나 순차성을 넘어 「미스트」나 「곤 홈Gone Home」 (2013)같은 환경 스토리텔링, 「파이어워치Firewatch」(2016)같은 비의적이고 내적 서술에 가까운 방식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보는 것과 플레이하는 것 어드벤처 게임이 기존의 매체, 특히 영화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욕망은 아무리봐도 플레이 가능한playable 서사의 구축을 향하고 있다. 「 미스트」같은 퍼즐 중심의 게임이 서사의 직접성을 극히 줄였지만, 오히려 「곤 홈」같은 워킹 시뮬레이터 [4] 들은 환경 스토리텔링이라는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서사’의 텍스처를 확장한다. ‘영화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은 시에라 온라인의 문제작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1995)나 FMV 같은 하위 장르의 게임들에서 읽을 수 있다. 물론 대상으로 삼는 영화는 ‘서사 영화’임이 자명하다. 따라서 어드벤처 장르는 서사를 ‘보는 것’에서 ‘플레이하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장르적 준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드벤처는 비디오 게임의 모든 장르 중 가장 기존 미디어와 강하게 관계하며, 그 긴장의 한복판에 있다. 타입문의「Fate/Stay Night」(2004)을 두고 ‘이것은 문학’이라는 우스개가 나오는 배경에도 아마 이러한 긴장이 있었을 것이다. 즉 어드벤처에는 전(前) 매체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 「판타스마고리아」 문제는 서사 수용이라는 행위에 드는 본질적 수동성에 있다. 서사는 왜 재미있는가? 혹시 수동적이기 때문에 재미있지는 않는가? 브라이언 업튼Brian Upton은 서사를 ‘읽거나 보는’ 행위에도 일정한 플레이의 양식이 있다고 정의한다 [5] . 하지만 이 플레이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작동일 뿐 물리적 수행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헤비 레인Heavy Rain」(2010)에서 서사를 추동시키기 위해 아기의 기저귀를 직접 갈아야 할 때, 여기엔 무언가 이상한 저항감이 발생한다. 플레이어는 뒷 이야기를 알고 싶을 뿐이지 생전 처음보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스틱과 버튼을 허우적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비디오 게임 플레이에는 노동과도 같은 측면이 있다. 줄리안 퀴클리흐Julian Kücklich는 플레이Play와 레이버Labour를 합쳐 플레이버Playbour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물론 퀴클리흐가 규정한 플레이버는 플레이어들의 자발적인 노동으로서의 모딩Modding을 일컫는 것이었다 [6] . 하지만 이 개념은 점차 범주가 넓어져 이제는 게임 플레이 내부의 노동화된 행위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조이스 고긴Joyce Goggin은 플레이버의 의미를 아이템 파밍이나 레벨 그라인딩같은 반복적 행위에까지 플레이버의 범주를 확장한다. 범주는 유동적인 것이며, 플레이버의 문제는 전통적인 노동과 여가의 경계를 뒤흔든다 [7] . 이 논의를 다시 어드벤처 장르로 던져보자. 올드 미디어에서 서사는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1989)에서는, 베네치아 도서관 지하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석판을 획득하는 인디애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루카스 아츠가 만든 동명의 게임(1989)에서 지하 무덤은 상당히 복잡한 미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판을 획득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양의 퍼즐을 풀어야 한다. 어드벤처 게임의 흥미로운 지점은 퍼즐 풀이라는 메커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사의 측면에서 보자면야, 이것은 불필요한 노동의 강요와도 같다. 어드벤처 장르가 전(前) 매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앞선 규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솔직히 말해 어드벤처 게임에는 일부 ‘피곤한’ 구석이 있다. 대행화된 노동과 매체의 아이러니컬한 우회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표한 『2025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게임을 즐기지 않은 사람들의 36%가 그 이유로 ‘게임의 흥미가 감소했으며 게임방송 시청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자료에 즉시 플레이버의 논의를 가져오는 것은 지나친 연결일 수 있겠다. 하지만 2022년 NewZoo가 발표한 「Gamer Segmentation」연구 자료에 의하면. 게임의 플레이보다 게임 방송을 더 많이 보는 게이머들, 소위 The Backseat Viewer 집단은 ‘게임을 하기에 적합한 기기를 갖추지 못했거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게임 방송을 본다고 답했다. 말하자면 (기기 마련의 조건을 경제적 조건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이런 구성에는 필히 게임의 플레이를 하기 위한 ‘자원의 소모’가 일정량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커뮤니티 플레이 게임 방송의 현장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종목은 경쟁형 게임이다. 하지만 종합 게임 스트리머들에게 있어 소위 ‘서사 게임’ 플레이는 적은 비중이라고 할 수 없다. 일부는 음성이 지원되지 않는 게임의 텍스트를 스트리머가 직접 ‘연기’해 전달하기도 하고, 게임의 불투명하거나 혼란스러운 서사를 시청자들과 논의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게임이 어드벤처 게임의 형식에 포함되는 호러 장르 게임은 특히 스트리밍계의 인기 콘텐츠다. 공포 게임 전문 스트리머라고 할 수 있는 수탉은 2026년 3월 기준 구독자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덕분에 이러한 ‘방송’의 방식을 게임의 내부에 이식하는 어드벤처 게임들도 존재한다. 퀀틱 드림은 당사의 게임에 사용할 수 있는 트위치 확장 프로그램인 ‘Community Play’를 제공해 시청자들의 의견을 수집할 수 있도록 한다. 「애즈 더스크 폴즈As Dusk Falls」의 경우 게임 내부에 ‘방송 모드’가 탑재되어 플랫폼의 채팅을 통해 선택지 투표가 가능하도록 유도한다. 어드벤처 게임을 위시한 ‘서사 게임’은 이미 게임 방송이라는 구조에 상당히 적응해있는 상태다. 앞서 말했듯 어드벤처 장르는 퍼즐과 서사라는 두 개의 축으로 움직이는 장르다. 이 때 퍼즐은 수행이고 서사는 결과다. 그것이 어드벤처 게임이 스스로 매개하고 있는 전(前) 매체와의 차이점이다. 이렇게 정리했을 때, 어드벤처 게임에서의 ‘유희 노동’은 전적으로 서사가 아니라 퍼즐에 매여있다. 어드벤처 게임을 플레이 한다는 것, 특히 그 안에서 서사를 추동하기 위해 게임 메커닉에 집중한다는 것은 ‘퍼즐’이라는 플레이버 수행에 대한 몰입이다. 만약 이 수행이 없는 상태로 서사만을 즐긴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어드벤처 게임이 매개하고 있는 전(前) 장르의 수용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지하동굴의 퍼즐에서 골머리를 썩지 않는다면, 석판을 획득하는 인디애나를 즉시 관람하는 「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다. 즉 누군가가 퍼즐이라는 노동을 대행해준다면, 관람자의 위치는 다시금 전(前) 매체 수용자의 자리로 돌아가버리게 된다. *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의 지하 묘지 따라서 르네 글라스René Glas가 규정한 대리적 플레이Vicarious Play [8] 란 상당히 이상한 역학을 만든다. 어드벤처 게임에서 퍼즐 수행을 타인에게 ‘맡겨버리고’, 그 결과물인 서사만 취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서사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적 변곡을 ‘가로지른 뒤’, 다시 이전 미디어의 형식으로 ‘귀환해버리는’ 우회된 경로를 그리는 수용자성이다. 이 때 ‘게임’이며 동시에 ‘영화’인 이상한 형식이 만들어진다. 물론 다른 장르 역시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드벤처 게임에서 (그 전제조건을 따져보았을 때) 퍼즐이라는 요소가 상실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결과는 매개하는 다른 매체와의 친연성의 즉시적 증가다. 퍼즐이 포기된 어드벤처 게임에는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재매개로서의) 서사 뿐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드벤처 게임의 현재는, 오히려 그것이 (기술적 한계 때문에) 우회적으로 매개하려 했던 바로 ‘그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여전히 어드벤처 게임의 팬덤은 존재하고, 퍼즐을 직접 수행하는 플레이어는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비중에서 이러한 ‘대행된 모험Vicarious Adventure’의 비중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퍼즐과 서사라는 양대의 축으로 지탱되던 어드벤처 게임은, 이제 수행적 노동을 위임해 서사라는 결과만을 취하려는 수용자들의 손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다. 기술적 한계를 넘어 서사를 체감시키려 했던 이 야심의 장르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환경 속에서 ‘서사만을 관람’하는 매체로 선회하려 한다. 어찌보면 서사를 얻기 위한 퍼즐 풀이라는 행위가 일종의 유희 노동playbour으로 분류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외주화를 통한 수용의 등장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이 대행되고 서사만이 남은 이 기이한 우회로 속에서 어드벤처 장르는 (볼터와 그루신이 말했던)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는 에너지를 소실하고 전(前) 매체의 그림자로 되돌아가고 있다. 긴 세션과 복잡함을 담지하기 어려웠던 초기 비디오 게임은 서사라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문학 또는 영화를 향한 재매개적 형식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보자면 어드벤처 게임은 비디오 게임의 꿈과 같은 장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구체성의 엔진은 퍼즐과 서사의 진동이라는 독특한 모델의 ‘비디오 게임’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행된 플레이를 통한 퍼즐의 소거는 오히려 초기 비디오 게임이 꾸던 바로 그 꿈과 맞닿는다. 하지만 어쩐지 그 꿈에는 현재는, 지나치게 꿈이 되어서 현실 감각이 소실되어 가는 것 같은 이상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물론 당연하게도 영화를 보는 것과 어드벤처 게임의 스트리밍을 보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게임 플레이 관람에는 대행된 수행 육체와 결과로서의 서사라는 이중화된 관람 경험이라는 특이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래도, 꿈과 연결되기 위한 전의식preconscious으로서의 퍼즐은, 그것의 감각을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공허함으로 향하는 것만 같다. 비디오 게임에서의 서사의 일상화, 그리고 (퍼즐보다 전투를 중시하는) 액션 어드벤처의 주류화는 일견 고전적인 어드벤처 장르의 축소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어드벤처 게임은 오히려 ‘서사와 퍼즐 사이의 변증법적 진동’을 통해 그 생존을 연장했다. 그렇기에 ‘서사의 전달’이라는 가장 꿈같던 그 목적에 한없이 가까워진 지금이 어드벤처 게임이라는 장르의 가장 기묘한 시간처럼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어드벤처 게임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여전히 퍼즐이라는 전의식의 불투명함에 매료된 자들이, 서사라는 꿈을 꿈으로 남겨두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그러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서사의 매체가 되려는 꿈을 꾼 게 원인이었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시에라 온라인 게임의 제목을 얄궂게 빌리자면, 완전한 서사 매체라는 목적이야로 비디오 게임의 ‘판타스마고리아’였던 것 아니었을까. [1]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이용해 자연어 명령어를 적어넣는 행위를 말한다.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직접 텍스트를 타이핑해 게임을 진행해야 했다. [2] 포인터를 이용해 특정한 오브젝트와 명령어를 클릭해 진행하는 어드벤처의 하위 장르. [3] 제이 데이비드 볼터 & 리처드 그루신, 『재매개』, 커뮤니케이션북스(2006) [4] 워킹 시뮬레이터를 어드벤처의 하위 장르로 포섭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서사는 있지만 퍼즐의 구조가 상당히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즐이라는 개념을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환경 스토리텔링이 가진 정보의 수집과 결합을 퍼즐의 영역에 넣을 수 있다. 자이언트 스패로우의 「왓 리메인즈 오브 에디스 핀치」같은 게임은 워킹 시뮬레이터면서 일부 복잡하지 않은 퍼즐을 삽입하기도 한다. [5] 브라이언 업튼, 「플레이의 미학」, 에이콘(2019) [6] Julian Kücklich(2005), Precarious Playbour: Modders and the Digital Games Industry, The Fibreculture Journal [7] Joyce Goggin(2011), Playbour, farming and leisure, Ephemera: Theory & Politics in Organization, 2011, Vol 11, Issue 4, p357 [8] 르네 글라스는 스트리머의 유희적 몰입Ludic Immersion을 지켜보는 비유희적 참여Non-Ludic Engagement라는 구분으로 이 개념을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게임 플레이라는 인지적/육체적 수고를 스트리머에게 ‘위임’하는 구조를 가진다. 대리 플레이의 결과, 시청자는 그 결과로서의 서사와 감정적 보상만을 취사적으로 취하게 된다. René Glas(2015), Vicarious play: Engaging the viewer in Let's Play videos, European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Communication 5 (1):81-8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인터뷰] SNS의 규칙을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바꾸는 여정 : <페이크북> 제작사 반지하 게임즈 이유원 대표

    SNS가 현대인의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교통, 통신의 기술이 해마다 급격하게 발전하고, 문화적 양상은 그보다 더 빠르게 급변하기에 오늘날 SNS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SNS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상의 규칙성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녹이는 데 특화된 ‘반지하 게임즈’이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SNS의 규칙을 게임화하였을까? GG 2호 이후 오랜만에 반지하 게임즈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 Back [인터뷰] SNS의 규칙을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바꾸는 여정 : <페이크북> 제작사 반지하 게임즈 이유원 대표 22 GG Vol. 25. 2. 10. SNS가 현대인의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교통, 통신의 기술이 해마다 급격하게 발전하고, 문화적 양상은 그보다 더 빠르게 급변하기에 오늘날 SNS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SNS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상의 규칙성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녹이는 데 특화된 ‘반지하 게임즈’이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SNS의 규칙을 게임화하였을까? GG 2호 이후 오랜만에 반지하 게임즈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이경혁 편집장: 오랜만에 GG 인터뷰로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신작 <페이크북>을 내셨는데요. 사실 <페이크북>이라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저도 좀 인연이 있지요. 이전에 이 프로젝트를 고민하실 때 저희 사무실을 찾아오셨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맞습니다. 처음 기획할 때에는 특이한 컨셉에 소위 말하는 ‘인디게임’스러운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그때 스토리가 중요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고민이 많았는데요. 게임의 재미를 주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보았을 때, 이야기를 쭉 보는 어드벤처 형식의 게임이 대표적으로 스토리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 게임으로 주고 싶었던 것은 특정한 ‘이야기’가 아니고, SNS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거기서 유저가 상호작용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나 참신함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 뵙고 난 이후에 이 게임 시스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스토리가 뭘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 결국 중요한 결정들을 하는데 항상 생각이 나는 조언들이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그런 느낌을 좀 받았어요. ‘제작자분들이 실제로 SNS에서 신상을 꽤 털어봤구나’라는 생각이었는데요. (일동 웃음) 그런 말씀을 많이 들으시나요? 이유원 대표: 이번에 게임을 출시하고서 스트리머분들이 되게 많이 플레이해주셨어요. 어제도 ‘한동숙’ 님이 플레이해주셨고요. 그런데 그분들 플레이를 보면서 시청자분들이 채팅으로 ‘이 사람 SNS를 얼마나 한 거냐?’, ‘이 사람 인터넷 귀신이다’ 라고들 하시는데, 그걸 들을 때 처음엔 되게 놀랐어요. ‘이게 그 정도인가?’, ‘이건 다 아는 내용 아닌가?’, ‘이 정도는 다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공감을 잘 못했는데, 계속 이런 반응이 나오니까 ‘아, 제가 좀 많이 했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 그런데 사실 저는 SNS를 그렇게 많이 안 하거든요. 오히려 이 게임을 만들면서 열심히 보려고 했었고, 정확하게는 SNS를 많이 한다기보단 인터넷에 있는 웃긴 상황이나 우리가 맞닥뜨릴 법한 경험 같은 것들 좋아했던 것 같아요. 사실 인터넷에서 웃긴 이야기가 올라와서 사람들이 퍼내고, 댓글로 싸우고, ‘누가 알고 봤더니 누구였더라’ 하는 그런 것들이 메타적으로 보면 재밌는 문화잖아요? 그런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경험들을 녹여서 게임을 만든 것이 조금은 주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 경험을 게임으로 녹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유원 대표: 네. <페이크북>이 신상을 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드벤처 게임이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비주얼 노벨 같은 느낌이어서, 저희도 작업하면서 단순한 ‘신상 털기’를 넘어서는 참신함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는 기획 공수가 컸었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재미를 느낀 점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예전에 텍스트 게임을 만들거나 일반적인 라이브 하는 게임을 만들 땐, 재미있는 장치를 만드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페이크북>은 처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게 엄청 어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새로운 감각이어서 기획하는 입장에서도 되게 재미있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영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사실 이런 스토리텔러 게임들이 제작자 입장에서 굉장히 어려운 게, 100개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도 플레이어가 100개를 다 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열심히 만들었는데, 플레이어가 하지 않는 부분들은 아쉽지 않나요? 이유원 대표: 사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제가 텍스트 게임을 오래 만들어서 그런지, 그런 거에 대해서는 생각을 크게 안 하는 것 같아요. 텍스트 게임은 상호작용성이 중요하니까, 결국 플레이어들이 가지 못하는 분기가 있는데요. 오히려 모든 분기를 다 파악하게 만드는 순간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고, 실제로 <페이크북>을 플레이하시는 분들 반응을 보면, 당연히 못 가는 분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재미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한편으로 게임을 하면서 궁금했던 게, ‘왜 하필 페이스북이었나?’이었거든요. 사실 요즘 페이스북이 10대, 20대들이 사용하는 SNS의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데이브 더 다이버>에서도 SNS가 나오는데, 거기선 인스타그램을 따라갔어요. 그런데 더 나중에 나온 게임이 페이스북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저는 특이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이스북을 모티브로 삼으신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이유원 대표: 사실은 기획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요. 인스타그램이나 모바일 UI처럼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아예 게임을 모바일로 출시하자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일단, PC 게임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첫 번째로, PC 게임에 진출하고자 하는 저희 회사의 내부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고요. 두 번째로는, <페이크북>을 만들 때 ‘게임을 몰입해서 하지 않으면 유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결국 현실에 있는 인터넷 세상을 재현하는 모습이다 보니까요. 그리고 모바일 환경에서 하다 보면 흐름이 끊긴다거나 너무 작은 화면으로 봐서 와닿지 않을 수 있기에 집중된 상태에서 게임을 할 수 있는 PC가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PC 게임 시장은 이미 너무 많은 게임이 나오고 있기에 특이하고 컴팩트한 컨셉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런 조건들을 충족하면서 여러 세대의 공감대를 살 수 있는 방향으로 페이스북을 선정했죠. 아무래도 다른 SNS를 활용하면 그 SNS를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SNS를 따라한 것이다’라는 게 확 와닿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인스타그램은 익숙하지 않은 세대가 있을 수 있지만, 페이스북은 나이대에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향수를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하신 부분 중에 굉장히 공감하는 건 PC 앞에서 해야 하는 게임이라는 점인 것 같아요. 제작자로서 그 차이를 많이 느끼시는 거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모바일 게임을 만들 때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못 해봤는데, 일단 몰입을 저해할 만한 요소들이 굉장히 많아요. <페이크북>은 이야기의 진지함이 담겨있는 파트도 있다 보니까, 수시로 껐다 켰다 하면서 방해를 받으면 좀 아쉬울 것 같다는 기획자적인 아쉬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실제 SNS를 따라 한 게임인데, 플레이하다가 실제 SNS 알림이 뜨거나 카톡 알림이 뜨면 몰입이 얼마나 깨지겠어요? 그런 것들을 방지하고 싶어서 기획 초반에 팀원들과 많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그 선택에서 역으로 우리의 인식 속에 페이스북이 어떤 미디어인지가 잘 드러났다고 생각이 들어요. 페이스북은 PC로 보아야 글이나 내용에 집중을 할 수 있고, 모바일로는 잘 다가오지 않는 SNS인 거죠. 그래서 ‘PC 게임을 만들 땐 결국 페이스북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거든요. 이유원 대표: 저도 페이스북을 생각했을 때, 컴퓨터로 했던 기억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 영향을 받은 점도 있겠네요. 이경혁 편집장: 그리고 <페이크북>의 UI를 되게 유심히 보다 보면 이게 지금의 페이스북 UI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0년 전의 모습이랄까요? 그런 지점에서 페이스북이라는 특정 코호트에 맞춘 SNS를 가져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원 대표: 눈썰미가 진짜 좋으시네요. 저희는 옛날 페이스북 UI를 가져오고 싶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제 예전의 향수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페이스북 UI는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저희도 조사 차원에서 페이스북 UI의 변천사를 정리해 놓은 사이트를 찾을 수 있었는데, 타겟으로 한 건 2010년대의 페이스북이에요. 왜냐하면 그때의 UI가 한편으로는 투박하지만, 한편으로는 필요한 것만 배치되어서, 뭐랄까요... 본질에 집중한?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확하게 왠지는 몰라도 옛날 페이스북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디자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저는 콘텐츠 측면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페이스북에서는 이런 활동을 잘 안 하거든요. 이유원 대표: 그렇죠. 요즘은 페이스북이든 스레드든 사람들이 뭔가를 일부러 재밌게 쓰려고 하거나 내용이 있는 글을 쓰려고 하는데, 당시의 페이스북은 ‘배고파’, ‘심심해’ 같이 그냥 아무 말이나 올리기도 하고, 진지하거나 웃긴 글도 올리고 그런 감성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보니까, 기획적으로도 (<페이크북>에선) 글이랑 그림이 막 올라오면서 이 사람의 사생활도 볼 수 있고, 생각도 볼 수 있고, 무슨 캐릭터인지 빨리 캐치할 수 있는 점에서 적합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페이스북을 선택하는 지점에서의 모종의 향수가 있다고 표현을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페이스북이 트위터나 다른 SNS와 다르게 싸이월드처럼 지인과의 연결된다는 점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페이스북은 실명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레트로한 지점도 있고요. 그런 부분이 페이스북의 향수를 만드는 지점도 있을까요? 이유원 대표: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상의 재밌는 경험에서 핵심 메커니즘이 뭘지 생각을 하고 게임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요. <페이크북>을 만들 때에도 페이스북에서 저랑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랜덤한 사람들을 많이 타고 다녔어요.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친구들 리스트가 공개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타고 네다섯 거리 건넜을 때, 진짜 저와는 평생 만나보지 못할 것 같은 분들이 떠요. 그런데 그분들의 일상을 보면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인스타처럼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인 섬이 있고 거기의 네트워크가 있는 형태다 보니 신기하고 생경한 재미를 주는 거예요. 그때 이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랍고 그런 점들에서 <페이크북>이 주는 재미는 이런 거겠다 싶었어요. 실제로 <페이크북>을 보면 누군가는 바보 같을 정도로 자기 사생활을 엄청 올리고 그걸 보면서 얘네가 이렇게 친하고 이런 관계망들을 알게 되잖아요. 그렇게 탐방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지금 게임 이용자의 주 연령대는 어떻게 될까요? 이유원 대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체크해 본 적은 없지만, 20대 초반보다는 중후반쯤에서 좀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좀 재미있어요. 스트리머분들이 게임을 하실 때, 채팅창에서 ‘옛날에는 다 그랬어’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사실 게임 내용에서 댓글에다가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서 응모하는 그런 것들은 지금 시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그런 문화니까. (웃음) 한편으로는 지금 10대 분들이 보시기에는 마치 예전 세대가 PC 통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유튜브에서는 반응이 아주 좋았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되게 많이 스트리머 분들이 해주셨었고, PC 게임은 모바일 게임과 다르게 되게 이제 호의적으로 많이 플레이해주시다 보니까 뿌듯했습니다. 보통 모든 개발자가 그러겠지만, 게임을 출시하고 난 뒤에는 버그가 나오면 어떡하지, 막히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함께 기획 의도대로 반응이 나올 때의 성취감이 있는데, 그런 지점이 개발하면서 엄청 큰 힘이 됐고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돼서 좋았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스트리머분들 말씀이 나와서 그러는데, 이번 작품에서 까메오를 많이 쓰셨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맞아요. 처음 기획 과정에서부터 이게 실제 SNS를 옮겨 놓은 것이다 보니, 스트리머 분들이나 인플루언서분들이 나오시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고요. 먼저 저희와 친분이 있는 분들부터 아닌 분들까지 광범위하게 연락을 드렸어요. 사실 이게 콜드 메일이잖아요? 그래서 안 받아주실 만도 한데, 거의 한 90-95%는 다 흔쾌히 답장을 주시더라고요. 순전히 호의로 해주시는 건데도 생각보다 더 호의적으로 말씀을 해주셨고, 안 된다고 하셨어도 사정을 설명해주시고 하셔서 그런 과정들이 감사하고 재밌었습니다. 실제로 게임이 나왔을 때의 유저분들의 반응도 좋고, 스트리머분들이 게임하실 때 채팅창의 반응을 볼 때 희열이 있었죠. 이경혁 편집장: 텍스트 베이스의 게임이다 보니까 해외 진출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장벽이 좀 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한 상황이나 이후 계획은 어떻게 보고 계세요? 이유원 대표: 일단, 7월에 BIC(인디게임커넥트페스티벌)에서 ‘비트 서밋’(인디 게임 페스티벌)에 가는 것을 지원해주면서, 번역을 해야 해요. 그런데 번역에 두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하나는 로컬라이제이션을 정말 잘 하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지금의 문화적 색채를 유지하면서 언어만 대응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 지금은 양방향으로 많이 알아보고 있어요. 만약에 해외 유저분들도 형식이 파격적이라며 재미있어하신다면, 앞으로 더 확장될 영역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조금 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한편으로 요즘 한국의 대중 문화에 관한 해외의 관심도가 높다 보니, 현지화를 안 하더라도 그냥 한국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로컬라이제이션을 하는 방향도 여러 가지잖아요. 현지 회사랑 합작을 해서 거기서 변화를 주는 방법도 있을 거고요. 이유원 대표: 네. 맞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방법들을 열어놓고 알아보고 있어요. 해외 퍼블리셔를 만나는 것도 생각하고 있고요. 사실 <페이크북>이 저희의 첫 번째 PC 게임이다 보니, 성적이나 흥행에 대해서 되게 걱정이 많았었는데 정말 후회 안 하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플레이해주시고 그런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어서, 사실 작년을 되게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반지하게임즈는 <서울 2033>처럼 발매 이후에도 패치를 한다거나 확장팩을 선보이는 모습들을 보이곤 했는데요. 혹시 이번 작품도 패치나, DLC 같은 형태로 확장시킬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유원 대표: 네. DLC를 생각하고 있고 욕심은 많습니다. 이 포맷이 좋기 때문에 이야기를 바꾸어가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요. 일단은 DLC 쪽으로 해서 추가되는 스토리들을 보여드리는 식으로 준비를 할 것 같고요. DLC 외에도 나중에 이 포맷을 다시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인터넷 서핑하는 재미라는 걸 주는 게임이 좀 고유할 것 같아서, 발달하는 AI 기술에 접목시킬 생각도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마지막으로 그 외의 차기작에 대해서 계획도 여쭙고 싶어요. 이유원 대표: 저는 텍스트 게임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서울 2033>이 벌써 6, 7년 되었는데, 하다 보니까 노하우가 많이 쌓였거든요. 물론, 혹자는 텍스트 게임이 수익성이 없고, 글을 쓰는데 노고가 많이 들어가며, 비즈니스 모델도 적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기도 하고 노하우도 쌓였으니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최근에 저희가 AI 관련 기술들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노하우를 접목시켜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로망이 있어요. 신작으로는 PC 게임 더 도전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요. 이번에 나온 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컴팩트한 규칙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은 저희가 원래 잘하던 건데, PC 버전으로 그런 류의 게임을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페이크북>은 사람들의 네트워킹이 모종의 재미를 주었는데, 이런 재미를 메타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서 지금까지의 전작들이 서로 연결되는 차기작도 나올 수 있을까요? <서울 2033>의 인물이 나오는데, <페이크북>의 인물과 접점이 있고, 또 그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수확의 정석>의 인물이고 하는 그런 그림이요. 이유원 대표: 언제 별도의 작품으로 진지하게 기획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저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희는 결국 팬덤의 사랑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그래서 반가움을 드리는 작업들을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결국 저희 게임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반지하의 특정 프로젝트나 캐릭터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이잖아요? <서울 2033>을 구매해주시는 분들이 <페이크북>을 찾아주시고, 또 입소문이 나면서 유입이 되고. 그래서 그런 점들이 되게 중요한 면인 것 같아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전쟁, 게임, 그리고 게임화라는 이름의 수치화

    전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유명 게임 프랜차이즈의 대사도 있지만,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영역에서 전쟁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러한 진화는 ‘전쟁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답이 특정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은 내 이웃과 친구들의 비극 혹은 그걸 막기 위한 결단인가, 아니면 권력을 잡거나 방어하기 위해 장기판의 말을 옮기는 것과 같은 형식의 게임에 불과한가? < Back 전쟁, 게임, 그리고 게임화라는 이름의 수치화 25 GG Vol. 25. 8. 10. 전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유명 게임 프랜차이즈의 대사도 있지만,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영역에서 전쟁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러한 진화는 ‘전쟁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답이 특정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은 내 이웃과 친구들의 비극 혹은 그걸 막기 위한 결단인가, 아니면 권력을 잡거나 방어하기 위해 장기판의 말을 옮기는 것과 같은 형식의 게임에 불과한가? 전자라면 전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태도는 최대한 그것을 막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후자라면?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며 따라서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효율적으로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우리의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게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워게임’은 현대 전쟁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이다. 워게임의 시초는 ‘크릭스슈필(Kriegsspiel)’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보드 게임이다. 1800년경 프로이센의 퇴역 장교 등을 중심으로 개발된 이 게임은 곧 프로이센군의 공식 훈련 교재가 되었다. 또 ‘크릭스슈필’은 민간의 상업용 보드게임의 조상 중 하나로도 간주된다. 전쟁을 상징과 규칙으로 환원하고 이에 근거한 판단과 결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군용의 ‘워게임’과 오늘날 우리가 가정에서 즐기는 전쟁 소재의 게임은 공통지반을 갖고 있다. 양자는 비슷한 경로를 따라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게임으로 발전했다. 수많은 측면에서 다른 점을 갖고 있지만 본질이라는 측면에선 사실상 같은 것인 셈이다. ‘워게임’의 본질을 사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전략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간파해왔다. 우리가 익히 알듯, 힘이 없는 개인의 입장에서 전쟁은 각 개인의 겪는 비극의 총합이다. 그러나 ‘워게임’은 제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전쟁을 제3자적 입장, 그러니까 전지적 시점에서 상징화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비극’과 같은 서사적 요소들은 게임 시스템 그 자체와 일단 분리된다. 가정용 게임에서도 우리는 늘상 이러한 일을 겪는다. 가령 리얼타임전략시뮬레이션(RTS)을 떠올려 보자. 현실에서 병사는 총알 한 개에 목숨을 잃는다. 현대전을 소재로 한 어떤 RTS 게임에서 병사 유닛은 수십 발의 총알을 맞아야 비로소 죽는다. 총알을 운 좋게 피한 것일까? 게임의 화면으로 표현되지 않는 은폐 엄폐 동작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공격을 당한 횟수에 비례해 유닛의 체력이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병사는 분명 피격당했다. 치명적 부상을 입지 않은 것 뿐일까? 이 경우는 체력이 탄환이 몸에 명중할 때마다 비균등하게 감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체력은 입은 피해에 따라 균등하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해진 산식에 의거한 계산에 따라 감소한다. 이런 방식으로 총을 맞는 것이냐 피하는 것이냐의 문제, 즉 총을 맞는 순간 이 병사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은 어떻게 되느냐와 같은 개인의 실존과 관련한 문제는 게임 시스템 안에서 소거된다. 전쟁을 주제로 한 게임의 이런 측면은 전쟁 규모의 재현과 관련해서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때가 종종 있다. <파이어 엠블렘> 시리즈와 같은 전략롤플레잉(SRPG) 게임의 경우 전쟁에 준하는 세력의 대립 등을 묘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의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아군은 아무리 많아야 십수명의 캐릭터가 전부이다. 하나의 캐릭터는 하나의 사람이 아닌 한 무리의 부대를 상징하는 것일까? 그러나 무기의 장비, 체력 회복, 사망 등의 요소는 명백하게 개인화 되어 있다. <랑그릿사>의 경우 지휘관 외 병사 유닛을 따로 배치할 수 있도록 해 현실감을 높였지만 그래봐야 한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유닛 수는 수십 명 정도이다. 전쟁이 아닌 패싸움 수준이다. 그렇다면 사태는 좀 더 간단한 논리로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작 몇십 명의 병사를 휘하에 거느리고 뽐내는 황제가 꼭 세상을 지배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를 게임적 맥락에서 전쟁의 이야기로서 수용한다. 시적 허용이 아닌 게임적 허용, 좀 더 나아간 개념으로 한다면 ‘게임화’의 단면이다. 이러한 게임들이 대개 턴 방식을 규칙으로 취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당연히 실제의 전쟁이 ‘너 한 번 나 한 번’식의 턴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물론 턴제의 형식은 동시턴 방식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턴 방식을 강제하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이다. 첫째는 전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변수에 대한 실시간 대응을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일정 기준에 따라 정지시킨 상태에서 게이머에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순차적 결정을 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둘째는 ‘게임’이 ‘겨루기’라는 형식을 어느 정도는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양측에 똑같은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한 ‘게임화’의 결과물이 턴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게임화’는 현실을 상징화 하는 과정에 반영되는 일종의 편집 기술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편집을 통해 전쟁의 무엇을 덜어내고 게이머에게 무엇을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는 전략에 충실한 쪽으로 기운다. 이 게임에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감성은 없다. 게이머는 철저히 이해타산에 맞춰 결정을 내리는 냉혹한 전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실제 현대의 전쟁 지도자에게 실제 전장에서 특정 병사의 영웅적 활약상이나 동료애에 기반한 미담 같은 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에게 전쟁은 지도와 숫자로 이루어진 ‘게임’일 뿐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가 그리는 전쟁은 그러한 세계에 존재한다. 전투 역시 상당 부분은 숫자로만 표현된다. 전장의 실제 모습을 재현하는데 집중하는 것은 주로 1인칭 슈팅(FPS) 게임이다. 가령 유명 영화의 장면을 오마주한 <콜 오브 듀티> 초기작의 경우 누구에겐 총알만 주고 누구에겐 총만 주는 방식으로 부족한 물자 문제를 때웠던 소비에트군의 부조리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게이머는 죽은 아군의 시체에서 소총을 확보해 자신이 받은 실탄을 장착해 사용해야 된다. 만일 전선에서 후퇴해 도망가려고 하면 바로 뒤에서 독전을 하는 정치장교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이런 형식의 FPS에서 게이머는 전쟁 지도부의 전략과 전체 전쟁의 양상을 잘 알 수 없지만 전쟁터에서 어떻게든 작전을 수행하고 살아 남아야 하는 병사의 처지를 실감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사의 <토탈 워> 시리즈는 그 이름답게 전쟁의 모든 면을 보여주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토탈 워>에는 전쟁 지도자의 냉혹한 계산과 전장의 스펙터클이 함께 공존한다. 물론 무게추는 전략 전술을 경험하는 것에 쏠려 있다. <토탈 워>의 의의는 다른 전쟁 게임과 비교해 실제 전장에서의 상징화 수준을 현실에 가깝게 내린 것에 둘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전략 수준의 결정이 실제 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전략 전술을 잘못 짠 영향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중세 병사들을 보고 있으면 현장 지휘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게이머가 전장의 비극이라는 서사적 측면을 대리 체험하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결과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전쟁의 기술적 측면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콜 오브 듀티>가 영화였다면 관객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등장 인물이 전우의 시체에서 획득하는 소총의 종류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머는 게임 속에서 바로 자신이 획득한 장비이기에 그것이 모신나강 라이플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내 소총이 모신나강이라면 적군이 쓰는 총은 무엇인가? 각각 어떤 특징이 있는가? 발사음은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게이머는 전쟁의 비극을 그린 서사 안에서도 적군과의 교전을 직접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전투의 기술적 측면을 간접 학습하게 된다. 가령 총격전을 벌이기 전에 은폐 엄폐를 하기 좋은 지형을 찾는다든가, 교전 중에 실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게이머는 자연스럽게 전쟁을 내면화 할 수 있다. 실제 FPS를 모병 홍보 또는 훈련 과정의 일부에 활용하려고 한 시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주장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는 미 육군이 직접 개발한 홍보용 FPS 게임이다. 는 미국과 영연방 및 나토 국가 등의 훈련 소프트웨어로 등을 기반으로 했다. 더 이전으로 올라가면 전술 훈련을 목표로 한 실험적 시도로서 의 MOD였던 의 존재도 있다.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말이다. ‘게임을 하면 살인에 둔감해진다’와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가령 ‘살인’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위이다. 대다수 게임이 살인을 소재로 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엄하게 금지된 행위에 대한 게이머의 경각심이 희미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벌써 세상은 살인과 절도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시리즈의 인기를 생각해보자. 시리즈의 성공으로 세상이 ‘자동차 도둑놈’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가 허용하거나 나아가서는 권장하는 분야에 대한 게임의 영향이라면 어떨까? 게임은 게이머의 사회에 대한 인식 및 태도에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오늘날 게임이 전쟁의 준비에 이미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우리 사회는 전쟁을 이미 ‘불가피한 게임’으로 받아들이고 전쟁의 본질을 ‘효율적으로 이기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율적으로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며, 심지어 권장된다. 그렇기에 거기에 게임이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하고 있는 거다. 실제 ‘워게임’의 일반화는 전쟁의 양상을 바꿨다. 두 가지 면에서다. 첫째, ‘워게임’으로 통칭되는 시뮬레이션은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 위험을 낮추는 요인으로 기능한다. 실제 전쟁을 치르기 전에 서로 간의 치열한 시뮬레이션 및 계산에 따른 ‘장군-멍군’식 대비 대책으로 미리 충돌을 방지할 수 있다. 둘째, 그럼에도 결국 군사적 충돌을 감행하게 된다면? ‘워게임’은 효율적이고 유연한 전략 수립을 가능하게 해 승리의 가능성을 높인다. 최근 강대국이 개입한 전쟁의 양상은 어떤 형태로든 이런 양상을 띄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가장 본질적 이유는 게임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임도 숫자, 전쟁도 숫자, 세상도 숫자이다. 모두가 숫자를 향할 때 효율과 최대 이익이라는 공통분모가 만들어진다. ‘게임에 사상을 담지 말라’는 구호가 게이머들 사이에서 종종 나오지만, 이렇게 게임에는 이미 지배이데올로기라는 형태로 사상(ideology)이 반영되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란을 공습하고 가자 지구에서 인종학살을 지속하는 이스라엘의 사례를 보며, 그리고 그러한 전쟁의 구실이 되는 정치, 그 정치를 떠받치는 대중적 동력의 실재를 확인하며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은, 우리의 삶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늘 숫자로 상징화 되지만, 언제나 잔여물이 남으며 그것은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앞에서 쓴 전쟁의 또다른 의미, 즉 전쟁의 본질은 우리 삶의 비극이라는 진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일은 곧 전쟁이 숫자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가 아닌 게임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제기하는 의문이 ‘반전 메시지’를 담은 게임의 가능성에 대한 건 아니라는 거다. 과 같은 게임은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결국 게이머가 주되게 수용하는 것은 ‘효율적 관리 및 생존’이라는 장르적 요소다. 게임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관점의 경로의존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 필요한 건 그러한 경로의존성을 벗어날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 즉 해석이며 비평이다. 숫자의 세계에서 숫자가 될 수 없는 것들에 주목하고 그런 것들을 짚어 내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게임과 우리의 삶 모두에 죽음이 아닌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다. Tags: 수치화, 워게임, 재현윤리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angwoo Lee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Creative Writing at Chung-Ang University and wrote a master's thesis on video games in graduate school. Has thought about video games for a long time since, working to render the fascinating experiences games offer into prose. Contributes writing not only on games but across a range of fields; a related book is Game, Gamer, Play: Reading Games through the Humanities.

  •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2024년 진행된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게임 경험의 외재화 역사와 기억의 재전유 양상

    디지털 게임은 처음 등장 당시 며칠을 두고 길게 플레이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1970년대에 등장한 아케이드 게임은 짧은 시간 동안 동전 투입이 여러 번 반복되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기에 게임 플레이 역시 짧고 직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미덕이었다. 반면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 게임은 아케이드와는 다른 조건 위에 있었다. 아케이드 기판은 개별 게임에 특화된 전용 하드웨어를 쓸 수 있어서 그래픽과 사운드가 훌륭했던 반면,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은 범용성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에 물리적인 표현력에서 오랫동안 아케이드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 Back 31 GG Vol. 26. 8. 10. Tags: 게임 세이브, 세이브 데이터, 언더테일, 니어 오토마타, 아우터 와일즈, 게임 기술사, 패스워드 시스템, Game Save Systems, Undertale, NieR Automata, Outer Wilds, Video Game History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용과 같이>, 관광게임 속의 정치적 맥락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도 용과 같이 시리즈의 주인공 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휴가를 내서 관광지로 여행을 떠난 경우가 그렇다. 일상으로 돌아가 해결해야 할 여러 복잡한 난제를 머리 속에 넣고 있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도쿄 신주쿠, 오사카 도톤보리, 오키나와, 후쿠오카, 삿포로, 나고야, 요코하마 등의 거리를 거닐고 지역 음식 등 문화를 경험하면서 하루종일 즐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용과 같이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우리는 코로나19 시대에 일본 관광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게 이 시리즈가 본질적으로 관광 게임인 이유이다. < Back <용과 같이>, 관광게임 속의 정치적 맥락들 01 GG Vol. 21. 6. 10. ‘용과 같이 ’ 시리즈는 전직 야쿠자가 등장하는 느와르물을 표방하고 있다 . 리메이크를 포함해 따지면 국내에 시리즈 전체의 내용이 한글화 돼 소개됐다고 볼 수 있는데 유독 6 편은 정식 발매가 이뤄지지 않았다 . 그러나 스팀을 통해 PC 판이 구매 가능해진 걸 계기로 유저 한글패치가 나와 한국인도 게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용과 같이 ’ 시리즈는 ‘ 느와르 ’ 다운 스토리를 선보여 왔다 . 폭력조직 내외의 항쟁과 정치적 음모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건에 휘말린 등장인물들의 비극적 운명 ,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의지를 강조하는 패턴이다 .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에도 불구 ‘ 용과 같이 ’ 는 본질적으로 ‘ 관광 게임 ’ 이라는 생각이다 . 코로나 19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바로 그 관광이다 . 어째서인가 ? 지금부터 따져보자 . 먼저 시사평론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역대 시리즈가 선택한 주제가 일본의 현실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 가령 1, 2 편의 소재인 폭력 조직 간의 대립구도나 정치인의 돈세탁은 ‘ 클리셰 ’ 인데 , 3 편의 미군 기지 이전과 부지 개발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민주당 정권 당시의 중요한 정치적 논쟁거리였기 때문이다 . 민주당 정권은 2009 년 후텐마 기지 이전을 공약하고 집권했다 . 미군 기지 이전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다 . 애초에 ‘ 류큐왕국 ’ 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다 일본 제국에 병합된 역사가 있는데다 , 2 차대전 당시 본토를 향해 진격해온 미군과 이를 막으려는 일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민간인 학살 등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아픔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 게다가 전후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동아시아 전략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미국의 계획이 개발의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중 삼중의 피해를 감수하는 처지가 된 상태였다 . 이 점에서 민주당의 공약은 상당한 기대를 모았다 .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 최소한 오키나와현 밖으로의 이전 ’ 을 거듭 거론했으나 문제는 미국의 입장이었다 . 미국은 이미 후텐마 기지 반환과 대체 시설의 오키나와 내 건립에 대한 협상을 이전 자민당 정권과 진행한 바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상황에서 기지 이전을 주장하는 민주당 정권은 미국의 이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었다 . 이러한 상황이 미일관계의 근본적 불안으로 이어지자 하토야마 정권은 결국 2010 년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전을 포기했고 지지율은 폭락했다 . 용과 같이 3 편이 출시된 2009 년 3 월은 민주당이 집권하기 5 개월 전이다 . 자민당 정권의 미국과의 합의가 2006 년에 1 차로 이뤄졌고 민주당은 야당 시절부터 이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는 점을 볼 때 관련한 논란이 제작에 반영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 작중에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가 건설자본과 정치권의 유착을 넘어 CIA 와 국제 무기 밀매 조직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앞서의 구도가 게임적으로 과장돼 표현된 결과일 것이다 . 용과 같이 6 편에도 정치적 맥락을 떠올릴 수 있는 소재가 등장하는데 초야마토급의 전함과 전비횡령 , 이를 근거로 한 정경유착의 묘사가 그것이다 .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족의원 - 관료 - 자본의 삼각동맹에 의한 정경유착을 대표적인 정치적 문제로 다뤄왔다 . 일본의 정치개혁 논의는 정경유착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민당 내 파벌 구도를 깨는 것에 집중돼왔다고 볼 수 있다 . 이를 상징하는 인물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인데 그를 중심으로 한 금권정치의 실상을 1974 년 고발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지난 4 월 사망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지기도 했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보도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돼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계기가 됐는데 ,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수사를 받게 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막후에서 돈과 인맥으로 일본 정치를 주물러 ‘ 어둠의 쇼군 ’ 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용과 같이 6 편에 묘사된 흑막은 특정 인물을 그대로 모델로 옮겨 놓았다기 보다는 일본 정치의 이러한 현실이 오래 전 전쟁을 야기한 정치와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용과 같이 6 편의 메인 스토리 구도는 그 자체의 완결성과는 별개로 명확한 자기 주장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용과 같이 7 편의 경우는 일본 사회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 가령 앞서의 정경유착 구도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그것과 맞서 싸울 ‘ 힘 ’ 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여왔다 . 선출되지 않은 ‘ 관료 ’ 와 그와 연합한 정치 파벌이 정경유착의 주범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의미로의 ‘ 정치 ’ 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화되기도 했다 . 그러나 ‘ 대통령형 총리 ’ 로 불린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 총리 관저의 권한이 ‘ 개혁 ’ 이라는 명분 하에 지속적으로 확대돼 온 결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신자유주의 전면 도입과 아베 신조의 유례없는 장기집권 및 극우화로 치달았다 . 용과 같이 7 편에 등장하는 도쿄도지사 역시 ‘ 선출된 권력 ’ 으로서 총리보다도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 그는 ‘3K 작전 ’ 등으로 조직폭력배와의 전쟁을 벌이며 급진화 된 지지층을 동원하는 방식 등으로 ‘ 개혁 ’ 을 내세우지만 그 실상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구태정치 그 자체이다 . 이는 최근까지 세계적 문제로 다뤄졌던 극우포퓰리즘을 떠올리게 하는데 , 이게 아마 제작진이 아베 신조 , 이시하라 신타로 , 하시모토 도루 등을 보는 시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그런데 용과 같이 시리즈 스토리의 핵심은 주인공이 이러한 사회 문제가 야기하는 현실적 갈등으로부터 자신과 주변의 삶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 결국 맞서게 된다는 것이다 . 즉 , 정치사회적 문제는 이렇든 저렇든 주인공의 일상을 위협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 행복을 지키기 위해선 결국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이 점에서 ‘ 메인 스토리 ’ 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제작진은 유저에게 상당히 비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 그런데 게임에서 유저가 실체 ‘ 체험 ’ 하는 것은 이러한 비장함과는 사뭇 다른 감각이다 . 용과 같이 시리즈에서 등장인물들의 인생이 걸린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중 ‘ 서브 스토리 ’ 나 ‘ 미니게임 ’ 등의 삼천포로 빠지는 일은 비일비재이다 . 특히 이 요소들은 메인 스토리의 비장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상적 소재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다소의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 서브 스토리 ’ 와 ‘ 미니게임 ’ 이 오히려 ‘ 메인스토리 ’ 를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 즉 , 용과 같이 시리즈의 게임적 본질은 영화와 같은 메인스토리를 감상하면서 동시에 소소한 일상을 경험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 일상 그 자체이다 . 실제 삶에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뭔가 고민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나게 돼있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 설혹 대통령이더라도 라면을 맛있게 끓이기 위해 물을 얼마나 넣을 것인지 , 면과 스프 중 무엇을 먼저 넣을 것인지 등의 사소한 일상적 고민을 외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그런 점에서 ‘ 메인스토리 ’ 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요소들을 가득 넣어 놓은 현실은 울티마 7 이후 ‘ 상호작용 ’ 의 구현 , 모로윈드식의 자기 서사 구성 등과는 별개의 , ’ 자유도 구현 ’ 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용과 같이 시리즈를 통한 체험과 우리의 일상이 갖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 그것은 직업을 갖고 있는 현실의 우리는 ‘ 서브스토리 ’ 와 ‘ 미니게임 ’ 을 오직 여가시간에만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 반면 용과 같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전직 야쿠자는 무직자이기에 반복되는 ‘ 루틴 ’ 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 앞서의 ‘ 자유도 ’ 는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구현이 불가능하다 .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도 용과 같이 시리즈의 주인공 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 휴가를 내서 관광지로 여행을 떠난 경우가 그렇다 . 일상으로 돌아가 해결해야 할 여러 복잡한 난제를 머리 속에 넣고 있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도쿄 신주쿠 , 오사카 도톤보리 , 오키나와 , 후쿠오카 , 삿포로 , 나고야 , 요코하마 등의 거리를 거닐고 지역 음식 등 문화를 경험하면서 하루종일 즐길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 용과 같이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우리는 코로나 19 시대에 일본 관광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이게 이 시리즈가 본질적으로 관광 게임인 이유이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잘 짜인 레벨 디자인.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는 1985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4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달리고. 뛰고.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ilkwon Jeong A farmer, a baker, and a barista. Currently in an eighth year of writing as a game journalist. Striving to experience and witness as much as possible within the limited time given.

  • 저자성이란 농담?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론』을 읽으며

    브라이언 히카리 하츠하임의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론』은 코지마 히데오가 감독하거나 제작 과정에 참여한 게임을 다양한 매체 이론을 따라 살펴본다. 반전, 반핵의 주제 의식을 일관적으로 지켜나가는 스토리텔러이자 ‘모든 것을 감독하는 책임자’, 게임 업계의 유명 인사 등으로 읽혀 온, 혹은 그렇게 읽히고자 유도해 온 코지마의 행적 역시 집중적으로 비춘다. 하츠하임은 주로 코지마의 인터뷰와 서적,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와 출시 당시의 리뷰를 제시하며 그가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 관철하려고 했으며 제작 과정에 어떤 식으로 개입했는지를 도해한다. < Back Authorship as a Joke? Reading Bryan Hikari Hartzheim's Hideo Kojima: Progressive Game Design from Metal Gear to Death Stranding 30 GG Vol. 26. 6. 10. Bryan Hikari Hartzheim's Hideo Kojima: Progressive Game Design from Metal Gear to Death Stranding examines the games Hideo Kojima directed or took part in producing, following a range of media theories. It also trains an intensive light on the trajectory of Kojima—who has been read, or has induced himself to be read, as a storyteller who consistently holds to anti-war, anti-nuclear thematic concerns, as "the one responsible for directing everything," and as a celebrity of the game industry. Hartzheim mainly presents Kojima's interviews and books, the documentaries he appeared in, and reviews from the time of release, diagramming how Kojima sought to push through his intentions and in what ways he intervened in the production process. As one can guess without difficulty from the book's title, Hartzheim has a pointedly intentional design: to read the game designer as the source of the "authorship" within a game. I was a relatively recent fan, having come to Kojima's games through Death Stranding , and because I have no direct experience of how a game designer's authority operates in a commercial game produced through large-scale collaboration, I approached the book curious about how this design would unspool. Because it surveys Kojima's games chronologically, from the 1980s through the 2020s, reading it through also lets one trace the history of console hardware alongside the process by which Kojima's control over collaborative work expanded. As a theory for showing how Kojima's control over collaboration links to authorship, Hartzheim directly cites and grounds his design in the current of auteurist film criticism led, above all, by Cahiers du cinéma in the 1960s. A question is bound to arise about a setup that discusses games by reference to a particular current of film criticism; but this is less because Kojima himself draws strong inspiration from film, or because the use of cinematic cutscenes within his games is distinctive, than in order to compare production practices within the game industry with film production. By the author's account, contributors to auteur theory held that the "dissidence and singularity of commercial film," set against film-production practices within the Hollywood system, originate from a director who forms a consistent visual style and inner meaning. The leap of borrowing from film theory to explain games rests on the commonality that both games and film were media carried out as large-scale collaborations, under pressure to anonymize the producer and to orient toward marketability. The game designer's name, hidden as an "Easter egg" in a secret room, makes one recall in a suggestive way the old convention, in both the video game and film industries, of not foregrounding the creator's name. Hartzheim discloses the limitation that the critical current called auteurism "has been criticized for overvaluing the director's subjectivity and slighting the many other people involved in the particular context of production and the creative process," but he still regards that authorship as a valid and strategic tool for pinpointing and identifying the unconventionality that appears in collaborative work (Hartzheim 25–26). Along with this, the concept of "disruption" the author employs is drawn not from the language of film criticism but from Mary Flanagan's concept of Critical Play, encompassing innovations in game design that tend to subvert or weaken the system, and the invention of genre that follows from them. The author's approach carries the aim of expanding the concept of "critical play"—which tends to apply only to "games that seek to reform the present situation, artistic games, and the critical self-reflection they provoke; that is, only to games that hold a strong oppositional and critical stance toward commercial games"—so that it can apply as well to "commercial games" themselves, or to game designers working in the commercial game industry (Hartzheim 31). Through analysis of the production process, reception, reinvention of genre grammar, systems, and storylines of Snatcher , Policenauts , and the Metal Gear series, in which Kojima took part as planner, the author organizes Kojima's game design into four broad elements, and with these characterizes the critical play of Kojima's games that causes "disruption" to "the conventions of existing games." By mixing "elements of fiction and the real world into a linear narrative," they create a generic fable about the contemporary, and attempt a "remediation" of audiovisually oriented media such as animation, live-action film, or motion graphics. They build a "ruled system" that becomes the axis of "emergent play," and finally attempt the insertion of a "space for metafictional purposes" (Hartzheim 73). Here the author identifies two directions: the expression of the social consciousness the game designer holds as an author, and the creation of a formal mechanism that seeks to redefine the boundaries of play. The attitude of trying to discover a kind of dissident insistence in the direction of dismantling and breaking with formal conventionality is also an attempt to transpose into games the authorship that had been the critic's place to lean on, within a discourse that has defined the so-called "progressive text" as the opposite term to the classical text. It is a belief that if the game designer can be placed in the seat of the film director—a subject doing critical, experimental work within commercial constraints and material—then the properties of that experimental work, too, can be identified as a consistency attributed to the game designer. Hartzheim borrows the expression "progressive film genre"—which Barbara Klinger pinpointed as "formed not only on the ideological plane but by the words of progressive critics seeking rupture within the film form and structure of the time"—to form the concept of "progressive game design." Reading this as progressive game design, transformative game design, will pose no great difficulty for understanding (Hartzheim 28). Hideo Kojima: Progressive Game Design lays out, clearly and in order, the various modes of the progressive game design the author has defined, examining the systems within Kojima's games, the conditions that were necessary to produce those games, and the patterns of reception by studios and players. One passage not sufficiently explained is the context in which the expression "progressive film genre" was used in Klinger's original article, "'Cinema/Ideology/Criticism' Revisited: The Progressive Text." Klinger holds that the "classical text" that exists as the opposite term to the progressive text is in fact more aptly called the "classical text system." In Klinger's words, this system is produced "from an unstable combination of imbalance (excess, difference) and balance (containment, repetition)." Genre is a "tense permutation" of the system "that thrives on a play of variation and regulation," and a provider of "regulated variety." Presenting an economy of variation rather than rupture, genre permits "the (regulated) forms of excess and the (regulated) forms of display of that process," domesticating and besieging excess within itself (Klinger 43). The reason Klinger, in explaining genre as the "tense permutation" of the classical text system, proposes a far more continuous "variety" rather than dramatic events like disruption, rupture, and articulation is so as not to soft-pedal the powerful force of normalization. Klinger warns that a reading that overemphasizes, on the side of subversiveness, signifiers that seem to constitute a rupture from existing norms can result in underestimating the system's means of "negotiating a normalizing function even onto the most foregrounded, progressive, and deviant tendencies." In the face of the view that progressiveness and transformativity are determined as signifiers isolated within the text, and of an attachment to readings that can reinforce such a view, Klinger seeks to keep a critical distance. She points out that the critical perspective forming the "progressive film genre" presupposes a counterpart called the "classical text," one that can be articulated and ruptured by the transformativity of intratextual signifiers alone—and by this she poses the question of whether the term designated as classical and normative is really so homogeneous and uniform an object. When Hideo Kojima: Progressive Game Design borrows the analytical frame of "progressive game design," it regrettably does not deal deeply with the critical implication latent in this primal naming. The author does, of course, examine games' capacity as an interactive medium that is never one-directional or fixed and always mediates player, reception environment, and technical conditions. Aided by archival materials that let one confirm how Kojima's games were received in their day, he examines not an analysis isolated in the text's inner meaning and formal articulation, but how the player forms meaning by interacting with the personality of the system that induces their action and with the technical conditions. That said, under an analytical setup in which Kojima expresses consistent authorial themes as he diverges from the established methods of the commercial video game industry, and in which those authorial themes generate this emergent divergence, "transformation" risks degenerating into a rhetoric that assumes a uniform "essence" in its opposite term. A passage like the following could serve as an example. In a gaming culture where building up a score through takedowns or victory was held to be good, a system that encourages weighing nonviolent options is an especially groundbreaking invention, but at the same time it also functions as a moral account, by raising questions about the logic of the war game—the contempt for human life it essentially harbors, and the stance of affirming armed conflict as the solution to a difficult objective. As in the real world, diplomacy or nonviolence is hard to achieve, but it holds the possibility of a far greater payoff in terms of human (and player) lives and of social order. (Hartzheim 88) Furthermore, if even the singularities that appeared as transformation or departure can be absorbed into commercial logic or generic inertia, then caution toward a "transformative" generic reading needs to be revisited once more. In particular, compared with film, the contemporary community of game reception, creation, and response tends to make the institutional engines driving universal canonization and classicization look unclear, while triggering almost simultaneous mutual reference; and so the distinction between "existing games" and "transformative games," and the identification of "authorship" grounded on that distinction, becomes an even more complex and subtle problem. But I am not trying to argue that it is better to discard the entire concept of authorship in games; I want to say that a kind of authorship is needed—one not established on the basis of hierarchization. Here I would like to refer to Im Ga-young's "Games and the Author," which likewise notes that authorship has been kept in a perpetually precarious place owing to the "withdrawal" of the author that arises because the game designer makes a game rather than gameplay, and owing to "players' consumer-centrism, and the common notion that sees the game as an industrial and technical product and a mere amusement." It hopes to "rediscover the author as a precarious and dependent being" in just this way, and to return the game to a place that becomes a "dialogue" between player and author, rediscovering the relationship the author forms with the player. Her essay finds the author in a voice that, having withdrawn into "agential distance" and "hidden itself," "steps out to greet" the player. The scene in which this gesture of withdrawal and welcome constitutes an author who addresses the player in a "direct voice" came to me as lovely and as important. This is probably because, in a medium captured between the admonition to root itself in entertainment and service and the stigma of being harmful because of that very root, I could feel all the more intensely the obstinacy of wanting to be more than, or less than, a commodity—the helpless necessity of an "it had to be this way." In this connection, I would like to close this piece by mentioning the excess of "paratext" that this book deals with throughout. In Kojima's games, the paratext appears by way of the technical possibilities and memory limits of the day, packaging practices, and the functions of physical interfaces such as the console and input device; the author explains the definition and function of paratext by citing Gérard Genette and Jonathan Gray. The literary theorist Gérard Genette defined the paratext as the threshold between a text and the things that constitute it. This includes not only formal frames such as the cover, title, and notes, but also explanatory frames such as newspaper reviews and magazine interviews. Jonathan Gray applied this to media like film and television as well, saying there are cases in which paratexts such as toys, games, spin-offs, novels, and websites "come to influence the text after the first interaction, or even redirect it." (Hartzheim 91–92) Jonathan Gray's words hint at a deep linkage between interactivity and the situation in which matter external to the narrative overflows into the narrative's interior. On the flooding of paratext, the author notes that in Metal Gear Solid 2 the game's physical package not only contains various setting materials about the world but also affects gameplay. Examples are the scene that, within gameplay, instructs you to use the decoding table printed in the game manual, and an interaction that mentions finding the frequency to tune the codec to in "the photograph on the back of the game software package" (Hartzheim 93). This is also a strategy frequently used in board games—which actively make use of physical elements—at moments of unexpected discovery. The "Find the home!" note one can find on the victim's body in Snatcher is also intriguing. This reads as if it means "the victim's house itself," or "examine the 'house model' in the dining room of the victim's house"—but in fact it is a literal answer: that you can press the "Home" key on the keyboard to decode the cipher (149). Through such depictions of paratext, the book restored, for me—someone who came to most of Kojima's games through emulation or remake editions, without using the game hardware of the time or encountering its packaging—jokes that I could not understand or whose context had dropped out. On the side of a game design that mediates and invites the player outside of play while expanding the play domain, the author cites Kojima's words: "If film is a medium that makes a person laugh, then in a game one's own action must be what leads to laughter." "Making the player laugh through their own action" reminds us that the player is "at once spectator and performer" (Hartzheim 148). Hartzheim sees this overlap as leading to an extension of the distancing effect that prompts the player's action within everyday life. Here I would like to add the layer of the sheer, unsublimated snigger when one is made "to laugh through one's own action," of an unavoidable becoming-slapstick-comedian. At this point the player physically encounters, first, a different kind of authorship—not the control that devises the totality and style of a game so as to put a critical distance between the player and an auteurist figure, that is, an ideological product. Something more like a mischievous stub of rock, a protruding threshold, that makes you suddenly plant your nose into the floor of the makeshift stage, bowing for no meaning whatsoever. The whole distinction between what lies outside gameplay and what is irrelevant or relevant to the virtual chain of meaning suddenly seems to turn trivial—and then, as if nothing had happened, it sends you back to immersive gameplay. This vividly reveals not a "meta" subsumed into self-reflection, but the occasion of the sitcom: getting right back up, returning to the act, playing innocent as though nothing had happened. Our protagonists, who brazenly cross between heavily armed soldiers with a flimsy cardboard box upside-down over their heads, or who start throwing punches at the screen when the player, sovereign over the camera, zooms in on their crotch. The authorship marked by Kojima's face, which haunts and drifts through this community as the punchline of a circulating joke or as a memetic sign, seems to me, after all, to be of this kind. References Hartzheim, Bryan Hikari. Hideo Kojima: Progressive Game Design from Metal Gear to Death Stranding. [Korean translation: Kojima Hideo-ui Geim-ron, trans. Mun Seong-ho, AK Communications, 2026.] Im Ga-young. "Games and the Author." Munjang Webzine, May 2026, Korea Arts Council Literature Platform,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5000000&bid=0005&list_no=110333&act=view . Klinger, Barbara. "'Cinema/Ideology/Criticism' Revisited: The Progressive Text." Screen, vol. 25, no. 1, 1984, pp. 30–44.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ngHoon Majored in literature. Loves games and comics. The Sims 4 isn't really a favorite, yet has logged some 1,500 hours in it—unsure whether that's a source of shame or just funny. Also goes by the pen name Ttuibuchi.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팀펑크적 제작 기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는 전투가 메인 컨텐츠인 MMORPG 게임이다. 세부적으로는 테마파크 유형이다. 작중의 세계에서 유저는 온갖 다양한 활동을, 현실의 그것을 모사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초나 광물을 채집할 수 있고, 낚시를 할 수 있고, 전투와 낚시를 통해 얻은 재료로는 요리를 할 수 있다. < Back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팀펑크적 제작 기술 24 GG Vol. 25. 6. 10.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한다. 인간의 문명사는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낸 역사다. 우리는 도구의 동물이다. 심지어 우리가 만든 가상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무언가를 만든다. 축약되고 변형된 형태로 모사한 것이지만 어쨌든 만든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는 전투가 메인 컨텐츠인 MMORPG 게임이다. 세부적으로는 테마파크 유형이다. 작중의 세계에서 유저는 온갖 다양한 활동을, 현실의 그것을 모사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초나 광물을 채집할 수 있고, 낚시를 할 수 있고, 전투와 낚시를 통해 얻은 재료로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요리 외에도 만들 수 있는 것은 많다. 전문기술이라는 분류에는 채집과 제작 두 가지 종류의 기술이 있는데, 유저는 두 가지를 선택해 배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채집 기술 하나를 배우고 이 채집 재료를 이용하는 제작 기술 하나를 배우지만, 채집 둘 혹은 제작 둘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약초를 채집했다면, 이를 재료로 사용하는 연금술과 주문각인을 고려해봄직하다. 채광 기술을 배웠다면, 광석을 이용하는 대장기술, 기계공학, 보석세공 등이 어울린다. 이런 제작 기술은 마법이나 전투 능력 등의 기술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발 효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건, 즉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영구적인 장비일 수도 있고 쓰면 사라지는 소모품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제작품은 전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적거나 아예 없기도 하다. 캐릭터가 착용하는 장비나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아이템 같은 경우는 전투에 도움은 되지만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다. 반면 기계공학으로 만들어 일시적으로 활공을 할 수 있게 하는 글라이더 같은 아이템은 전투와는 거의 무관한 단순 장난감이다. 예는 더 들 수 있다. 연금술을 배워 만들 수 있는 비약과 영약, 회복 효과를 주는 물약, 무기를 일시 강화하는 대장기술의 숫돌과 무게추, 주문각인으로 만드는 레이드에서의 버프 아이템인 반투스 룬 같은 것은 전투를 돕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기계공학으로는 전투 중에도 부활을 쓸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공략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 보석세공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 ‘보석 맞추기’를 사용하면 타일 매칭을 미니게임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물론 몇몇 클래스는 제작 기술이 아니어도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법사는 마법으로 음식을 만들 수 있고, 흑마법사는 생명석이라는 회복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아이템은 제작 기술로 만든 아이템과 달리 영구적이지 않아서 게임에서 로그아웃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캐릭터가 사용하는 마법과 전투 기술은 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즉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효과를 낸다. 버프를 주는 마법을 쓰면 버프가 생기고, 데미지를 주는 기술을 쓰면 적에게 데미지가 들어간다. 직업 기술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제작 기술의 효과는 아이템이라는 매개체를 만들어 효과를 미래로 유예시킨다. 둘 다 체계화가 되어 있고 둘 다 캐릭터가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제작 기술만의 특징은 결과의 일부를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판다리아> 확장팩에서는 가죽세공과 대장기술의 일부 항목 또한 비슷했다. 대부분의 레시피는 전문가 NPC에게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는 다른 제조를 하면 그 결과로 배우는 레시피들도 생겼다. 이때의 연금술은 아예 모든 레시피를 배우는 것이 다른 레시피 제조의 결과로 배우는 방식이었는데, 무엇을 배우게 될지는 랜덤이라 예상할 수 없었다. 특히 기계공학에서는 이 점이 도드라진다. 전력선과 같은 기계공학의 전투 부활 아이템은 실패 가능성이 있다. 몇몇 기계공학 아이템은 낮은 확률이지만 폭발하여 캐릭터를 하늘 높이 날려보내거나 큰 데미지를 주기도 한다. 용군단 확장팩부터 연금술에 적용된 ‘실험’이라는 메커니즘은, 실험에 성공하면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게 되지만 실패하면 빈사 상태로 만드는 데미지를 입게 된다. 연금술의 실험이라는 요소는 위험부담을 전제하는 것이다. * 연금술 실험이 실패했을 경우의 예시 (필자의 캐릭터 중 하나) <용군단> 확장팩부터 적용된 다른 요소도 있다. 전문 기술에만 적용되는 전용 스탯이 생겼다. 이로 인해 채집할 때는 확률에 의해 재료를 더 많이 채집하거나 희귀 재료를 추가로 채집하거나 할 수 있다. 제작 기술에서는 일정 확률로 재료를 적게 소모하거나, 아이템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 제작되거나 한다. 예상 외의 추가 성과라는 형태로 ‘예상 외 요소’가 늘어났다. 이는 전투용 기술에 흔히 따라붙는, 치명타를 달성했을 때 추가 데미지와 같은 요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투 기술의 예상 외 요소는 긍정적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고, 부정적 효과를 제공하는 경우엔 반드시 예상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제작 기술은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 모두 확률을 따른다. * 전문기술 스탯 4종류 중에서 지혜는 재료를 덜 소모하는 확률을 결정하고 복수 제작은 결과물이 더 많이 나올 확률을 결정한다. 기계공학에도 연구라는 요소가 최근 들어왔다. 소정의 재료를 소모해 연구 결과를 쌓고, 이를 소모해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는 형태다. 물론 배울 레시피 후보는 랜덤하게 정해지기 때문에 예상할 수가 없다. 이 경우에는 예측 불가능 요소 외에도 이전 성과를 쌓는 적층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해당 분야가 완전히 파악되어 철저히 분류화가 되지 않았다는 설정을 시사한다. 현실의 자연과학과 공학은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여전히 있다. 와우의 제작 기술이 전투 기술과 달리 예상 외의 결과를 낳는 요소가 다수 있는 것은 이런 현실을 게임의 확률 체계를 통해 모사한 결과다. 이전 성과의 일부를 다음 성과로 끌어가는 적층 구조 요소는 현실의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이전 세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모사한 결과다.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의 모습을 모사하지 못한 혹은 모사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현실의 기술은 그것이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개인보다는 팀의 연구로 발전을 하고, 나아가 팀과 팀의 피드백 및 협업으로 진보한다. 줄여 표현하면 학계가 진보를 이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체제 전체를 이끄는 진보라는 것을 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존재하는 레시피를 숨겨둘지언정, 유저가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게 한다는 아이디어는 실현된 적이 없다. 제작 기술에 존재하는 레시피는 어디까지나 제작사가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현실과 같은 의미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고, 유저는 이미 완성된 테크트리에서 숙련도를 쌓아 올리는 학생으로서만 기능한다. 물론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실험과 연구를 통해 몰랐던 레시피를 배워나가는 것은 충분히 기술의 적층성을 반영한 형태일 수 있다. 또한 기계공학으로 만드는 탈것처럼 들어가는 재료의 규모가 많은 아이템의 경우엔, 기계공학 외의 다른 제작 기술이 만들어내는 재료 아이템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는 서로 다른 기술의 수평적 협업을 구현한 요소다. 반면 이런 협업 제작품의 경우에도 결국 유저 개인으로 수렴한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최후에 오토바이, 비행기, 로봇 등 현실이라면 산업계 하나가 필요한 결과물도, 조립해내는 기계공학 유저는 한 명일 뿐이다. 이 형태에는 엄밀히 말하면 개인만이 존재한다. 홀로 아이언맨 수트를 제작한 토니 스타크의 서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소수의 천재가 기술 분야를 선도하는 이야기는 에디슨/테슬라 시절의 서사이며, 사실 그때도 상당 부분 허구였고, IT 분야의 초기 시절에나 살펴볼 수 있다. 기술 분야가 개창된 초기에는 한두 천재가 이끌어가지만, 산업이 성립한 후에는 집단과 집단의 협업 및 경쟁이 발전을 주도하는 것이 역사다. 게다가 학문 분야의 적층화가 많이 진행되어 복잡해지면, 일개 개인은 모든 분야를 섭렵할 수가 없다. 인간의 두뇌에는 용량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리지널 시절 <와우>의 연금술에는 분야 특화가 존재했다. 물약, 비약, 변환의 세 영역으로 나눠서 일정 숙련도 이상에서는 ‘대가’라는 이름으로 특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의 대장기술 또한 무기 대가와 방어구 대가로 나뉘었다. 가죽세공 또한 세 가지의 대가 전문화가 있었다. 이렇게 전문 분야를 선택하면 선택한 전문 분야에서는 같은 양의 재료로 더욱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각 분야만이 배울 수 있는 심화된 레시피도 존재했다. 기계공학 또한 오리지널부터 <판다리아> 확장팩까지의 시간 동안 두 가지의 분화 트리를 갖고 있었다. 고블린과 노움의 경쟁 컨셉이 있었는데, 에디슨과 테슬라의 직류 대 교류 싸움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고블린 기계공학과 노움 기계공학의 분류는 다른 제작 기술의 대가 전문화처럼 각각의 분야만 배울 수 있는 레시피가 따로 있었다. 폭탄류는 고블린 기계공학에서 배울 수 있고, 독특한 효과를 내는 장비는 노움 기계공학으로만 배울 수 있는 식이다. 이런 차별화된 세부 테크트리는 나름 분과 학문 혹은 숙련공을 모사한 결과다. 앞서 살펴본, 제작의 주체가 유저 개인으로 집중되는 모습의 천재적 기술자 서사와 합쳐 보면 근대적 기술 발전의 초기 시절이 떠오른다. 천재적 개인의 시대에서 세분화된 분과 학문의 시대로 전환되던 그 시기, 르네상스부터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대다. SF 중에서 스팀펑크 장르는 이런 ‘근과거’의 기술적 특징을 중심 소재로 사용한다. 이 특성 때문에 <와우> 내에서 기계공학을 비롯한 제작 기술은 옅은 향수를 동반하고 있다. 스팀펑크 특유의 이 정서는 현대인이 실제로는 살아보지 않았지만 현 기술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시기를 재조직한 세계를 대할 때 발현된다. 이는 <와우>가 독보적인 몰입도를 이룩한 데에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비록 게임 내 서사와 설정을 보면 호드가 소형 핵무기를 사용하고 얼라이언스가 지하철을 운행하고 드레나이가 우주를 항행하는 등 미래형 SF가 중세형 판타지와 결합해 있지만, 그런 식으로 융합되어 있는 다수의 요소 중에는 ‘살지 않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내는 스팀펑크가 있다. *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팀펑크는 증기기관과 톱니바퀴가 공학의 중심이던 시절의 기술을 가져온다. SF지만 과거를 다룬다. 그리고 스팀펑크에서 가져와 재조직한 시절의 기술 발전이란, 현재도 그렇지만 현재보다 월등하게, 위험을 수반하는 진보였다. 고블린과 노움처럼 기술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성이 있었고, 연금술의 연구 실험 시스템의 실패 폭발처럼 안전 대책은 취약했다. 이를 요약하는 이미지는 연구실에서 혼합물을 섞다가 폭발을 일으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이다.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하지만 렌즈를 거친다. <와우>는 전문 기술 중에서 제작 기술의 체계를 잡으면서 스팀펑크의 시대인 근과거, 기술 발전 초기의 세계관을 구현했다. 변인과 결과에 대한 완전한 파악이 되지 않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기술, 아직 탐험 중이기에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측면의 기술, 기술 요소가 개인에게로 수렴되어 천재적 개인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던 시절의 기술, 점차 분화가 쌓여가면서 다른 분야와의 협업과 이전 연구의 계승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기술. 현재의 분업화, 조직화, 체계화된 연구는 좀 더 안전하고 세련되게 발전했지만 스팀펑크의 묘한 낭만은 없다. 그 낭만의 편린은 게임 안에서 살짝 맛볼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공포와 액션의 사이에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공포 게임의 공포는 반드시 옅어지고, 무뎌지고, 희석되고, 탈각된다.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이 9개의 넘버링과 3개의 외전과 3개의 리메이크, 그 외 다수의 서브 작품을 진행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 태생적 모순을 피하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7편의 방향성을 2~4편의 리메이크작과 8편 또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긍정하고 활용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ggap Hong Freelance writer—a job title suspected of being a synonym for "unemployed." Started out as a reporter at Ddanzi Ilbo, where broke the first story exposing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s comment-manipulation operation. A lifelong gamer who wrote a first piece of game criticism in 2001—and is very glad it has since been l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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