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어드벤처 : 서사라는 꿈과 퍼즐이라는 전의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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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4. 10.
어드벤처 게임이란 상당히 이상한 맥락의 장르명이다. 농담을 조금 보태자면,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중 ‘어드벤처’를 경험하지 않는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어니스트 아담스Ernest Adams는 『 Fundamental of Game Design』에서 ‘많은 모험적인 특징을 가진 게임들이 어드벤처 장르가 아니며, 반대로 많은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들이 모험을 다루지 않는다.’라며 이 장르명이 가진 이상한 아이러니를 언급한다. 물론 이 명명에는 명백히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 장르가 지칭하는 ‘어드벤처’는 모험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돈 우즈Don Woods와 윌리엄 크라우더William Crowther가 제작한 최초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Colossal Cave Adventure」(1976)에서 가져온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후 간단히 부르기 위해 제목을 「어드벤처Adventure」로 축약한 이래, 이 게임과 유사한 게임들을 묶어 ‘어드벤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근간의 ‘게임명-like’의 방식으로 장르명을 붙이는 경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DOS 버전의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어드벤처 장르는 초기 비디오 게임이 가진 한계, 그러니까 길고 복잡하며 기존 매체와 유사한 형식의 서사를 담지 못하던 그 때에 대안으로 등장했다. 일단 그 시초인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가 텍스트와 문자 입력식 파서(Parser)[1]를 이용했던 것은 TRPG의 형식을 비디오 게임에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장르에 시각적 요소를 이식한 로버타 윌리엄스Roberta Williams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유사한 서사를 재현하기 위해 「미스터리 하우스Mystery House」(1980)를 만들었다는 사실 또한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초기 비디오 게임 전반이 기존의 매체를 일정량 재매개remediation하는 일이야 흔했겠지만, 어드벤처는 그러한 목적을 꽤나 진지하게 다룬 장르다.
다른 곳도 아닌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 아츠Lucas Arts’가 이 장르의 대표적인 제작사였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2] 장르로 두 편의 「인디아나 존스」게임을 만들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완된 영화 아이디어를 이용해 「더 디그The Dig」 (1995)를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로버타 윌리엄스도 이후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를 떠오르게 하는 「로라 보우」 연작을 만든다. 더 드리머스 길드The Dreamers Guild는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명작 SF 단편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1995)를 동명의 어드벤처 게임으로 만들었다. 델핀 소프트웨어Delphine Software가 만든 첩보 어드벤처 게임인 「오퍼레이션 스텔스Operation Stealth」(1990)가 북미판에선 「007 제임스 본드 : 더 스텔스 어페어007 James Bond : The Stealth Affair」로 둔갑한 웃지못할 사례도 존재한다.
따라서 어드벤처라는 장르가 하나의 ‘장르’로 규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사라는 개념을 취득하겠다는 ‘꿈’같은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 ‘서사성’이란 기존 매체에 대한 전유적 성질을 가진다.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와 리처드 그루신Richard Grusin은 이 재매개를 흥미있게 바라본다. 그들은 비디오 게임(특히 「미스트Myst」(1993))를 두고 ‘영화와 비슷해보이면서 더 나은 것’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루신과 볼터는 「미스트」가 필름 누아르에서의 탐정의 시점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서사적 평온함은 오히려 비할리우드적 영화들(이를테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과 더 유사하다고 말한다. 탐정으로서의 플레이어는 끝없이 세계를 탐색하지만 그 뒤를 기대하게 만들어야 할 폭력, 공포, 폭로는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스트」에 안토니오니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퍼즐 풀이’다[3].
볼터와 그루신의 연구 대상은 특정 장르가 아니라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 전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유가 「미스트」로 대표되는 어드벤처 게임의 본질과 연결되었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클라라 페르난데즈-바라Clara Fernández-Vara는 「Introduction to Game Analysis」에서 어드벤처 게임을 ‘플레이어가 퍼즐을 해결함에 따라 게임의 스토리를 열어주는 일련의 서사적 퍼즐로 구성’된다고 규정한다. ‘어드벤처’라는 장르는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이래 다종의 하위 장르로 분화했으며, 따라서 이들을 명백한 하나로 규합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핵심을 ‘서사’와 ‘퍼즐’이라는 양대의 축에 두는 것은 가능하다. 어드벤처 게임은 본질적으로 ‘서사장르’다. 하지만 단순히 서사를 출력하기만 해서야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구조는 구축될 수 없다. 따라서 동원되는 것이 바로 ‘퍼즐’이다. 여기서 말하는 ‘퍼즐’은 광의의 의미를 가진다. 이를테면 춘소프트의 「 카마이타치의 밤」같은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은 어떠한가? 이런 게임에선 「미스트」나 「원숭이섬의 비밀」등에서 볼 수 있는 명시적이고 발상적인 퍼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텍스트 어드벤처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이퍼 텍스트적인 성질이 퍼즐을 대신한다. 텍스트 어드벤처는 상황과 함께 가능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그 경중에 차이는 있겠지마는, 어찌되든 각 선택은 이후 출력되는 텍스트(=서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 게임에서 퍼즐은 ‘서사’라는 미로 전체가 된다. 여기서 퍼즐은 형식이 아니라 구조다. 어드벤처는 ‘퍼즐’이라는 구조를 통해 ‘서사’를 체감시킨다.
꼭 텍스트 어드벤처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원숭이 섬의 비밀」(1990)의 디렉터인 론 길버트Ron Gilbert는 「 Why Adventure Games Sucks」(1989)에서 어드벤처 게임이 지향해야 할 요소로 ‘목표의 명확성’과 더불어 ‘퍼즐과 서사의 결합성’을 거론한다. 이 기치 아래에서 서사적 목표와 퍼즐적 목표는 일체화한다. 쉽게 말해 ‘문’이라는 목적이 발생하면 플레이어는 그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은 서사를 추동하는 것이다. 어드벤처 장르에 있어서 플레이어의 주요 수행은 결국 퍼즐 풀이다. 그리고 서사는 이 퍼즐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주어진다. 플레이어는 퍼즐과 서사라는 양대의 축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 관점이 현재에 어드벤처라는 장르를 규정하는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 비디오 게임에 서사가 보편화 되어버린 지금 시기에, 과연 ‘무엇’을 어드벤처라는 범주로 확정할 수 있을까? 어드벤처는 결국 (광의의 개념에서의) 퍼즐과 그것을 지탱하는 (구체성과 무관한 개념에서의) 서사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장르다. 퍼즐은 아이템 수색, 결합, 비밀번호 탐색, 문 열기 따위의 보편적인 방식을 넘어 대화의 양상 조정, 진행 방향의 지시, 인간 관계의 관리, 추리와 해답, 단순 수집과 정보 처리 등을 모두 포함한다. 서사 역시 단방향성이나 순차성을 넘어 「미스트」나 「곤 홈Gone Home」 (2013)같은 환경 스토리텔링, 「파이어워치Firewatch」(2016)같은 비의적이고 내적 서술에 가까운 방식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보는 것과 플레이하는 것
어드벤처 게임이 기존의 매체, 특히 영화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욕망은 아무리봐도 플레이 가능한playable 서사의 구축을 향하고 있다. 「 미스트」같은 퍼즐 중심의 게임이 서사의 직접성을 극히 줄였지만, 오히려 「곤 홈」같은 워킹 시뮬레이터[4]들은 환경 스토리텔링이라는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서사’의 텍스처를 확장한다. ‘영화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은 시에라 온라인의 문제작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1995)나 FMV 같은 하위 장르의 게임들에서 읽을 수 있다. 물론 대상으로 삼는 영화는 ‘서사 영화’임이 자명하다. 따라서 어드벤처 장르는 서사를 ‘보는 것’에서 ‘플레이하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장르적 준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드벤처는 비디오 게임의 모든 장르 중 가장 기존 미디어와 강하게 관계하며, 그 긴장의 한복판에 있다. 타입문의「Fate/Stay Night」(2004)을 두고 ‘이것은 문학’이라는 우스개가 나오는 배경에도 아마 이러한 긴장이 있었을 것이다. 즉 어드벤처에는 전(前) 매체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 「판타스마고리아」
문제는 서사 수용이라는 행위에 드는 본질적 수동성에 있다. 서사는 왜 재미있는가? 혹시 수동적이기 때문에 재미있지는 않는가? 브라이언 업튼Brian Upton은 서사를 ‘읽거나 보는’ 행위에도 일정한 플레이의 양식이 있다고 정의한다[5]. 하지만 이 플레이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작동일 뿐 물리적 수행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헤비 레인Heavy Rain」(2010)에서 서사를 추동시키기 위해 아기의 기저귀를 직접 갈아야 할 때, 여기엔 무언가 이상한 저항감이 발생한다. 플레이어는 뒷 이야기를 알고 싶을 뿐이지 생전 처음보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스틱과 버튼을 허우적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비디오 게임 플레이에는 노동과도 같은 측면이 있다. 줄리안 퀴클리흐Julian Kücklich는 플레이Play와 레이버Labour를 합쳐 플레이버Playbour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물론 퀴클리흐가 규정한 플레이버는 플레이어들의 자발적인 노동으로서의 모딩Modding을 일컫는 것이었다[6]. 하지만 이 개념은 점차 범주가 넓어져 이제는 게임 플레이 내부의 노동화된 행위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조이스 고긴Joyce Goggin은 플레이버의 의미를 아이템 파밍이나 레벨 그라인딩같은 반복적 행위에까지 플레이버의 범주를 확장한다. 범주는 유동적인 것이며, 플레이버의 문제는 전통적인 노동과 여가의 경계를 뒤흔든다[7].
이 논의를 다시 어드벤처 장르로 던져보자. 올드 미디어에서 서사는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1989)에서는, 베네치아 도서관 지하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석판을 획득하는 인디애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루카스 아츠가 만든 동명의 게임(1989)에서 지하 무덤은 상당히 복잡한 미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판을 획득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양의 퍼즐을 풀어야 한다. 어드벤처 게임의 흥미로운 지점은 퍼즐 풀이라는 메커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사의 측면에서 보자면야, 이것은 불필요한 노동의 강요와도 같다. 어드벤처 장르가 전(前) 매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앞선 규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솔직히 말해 어드벤처 게임에는 일부 ‘피곤한’ 구석이 있다.
대행화된 노동과 매체의 아이러니컬한 우회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표한 『2025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게임을 즐기지 않은 사람들의 36%가 그 이유로 ‘게임의 흥미가 감소했으며 게임방송 시청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자료에 즉시 플레이버의 논의를 가져오는 것은 지나친 연결일 수 있겠다. 하지만 2022년 NewZoo가 발표한 「Gamer Segmentation」연구 자료에 의하면. 게임의 플레이보다 게임 방송을 더 많이 보는 게이머들, 소위 The Backseat Viewer 집단은 ‘게임을 하기에 적합한 기기를 갖추지 못했거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게임 방송을 본다고 답했다. 말하자면 (기기 마련의 조건을 경제적 조건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이런 구성에는 필히 게임의 플레이를 하기 위한 ‘자원의 소모’가 일정량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커뮤니티 플레이
게임 방송의 현장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종목은 경쟁형 게임이다. 하지만 종합 게임 스트리머들에게 있어 소위 ‘서사 게임’ 플레이는 적은 비중이라고 할 수 없다. 일부는 음성이 지원되지 않는 게임의 텍스트를 스트리머가 직접 ‘연기’해 전달하기도 하고, 게임의 불투명하거나 혼란스러운 서사를 시청자들과 논의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게임이 어드벤처 게임의 형식에 포함되는 호러 장르 게임은 특히 스트리밍계의 인기 콘텐츠다. 공포 게임 전문 스트리머라고 할 수 있는 수탉은 2026년 3월 기준 구독자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덕분에 이러한 ‘방송’의 방식을 게임의 내부에 이식하는 어드벤처 게임들도 존재한다. 퀀틱 드림은 당사의 게임에 사용할 수 있는 트위치 확장 프로그램인 ‘Community Play’를 제공해 시청자들의 의견을 수집할 수 있도록 한다. 「애즈 더스크 폴즈As Dusk Falls」의 경우 게임 내부에 ‘방송 모드’가 탑재되어 플랫폼의 채팅을 통해 선택지 투표가 가능하도록 유도한다. 어드벤처 게임을 위시한 ‘서사 게임’은 이미 게임 방송이라는 구조에 상당히 적응해있는 상태다.
앞서 말했듯 어드벤처 장르는 퍼즐과 서사라는 두 개의 축으로 움직이는 장르다. 이 때 퍼즐은 수행이고 서사는 결과다. 그것이 어드벤처 게임이 스스로 매개하고 있는 전(前) 매체와의 차이점이다. 이렇게 정리했을 때, 어드벤처 게임에서의 ‘유희 노동’은 전적으로 서사가 아니라 퍼즐에 매여있다. 어드벤처 게임을 플레이 한다는 것, 특히 그 안에서 서사를 추동하기 위해 게임 메커닉에 집중한다는 것은 ‘퍼즐’이라는 플레이버 수행에 대한 몰입이다. 만약 이 수행이 없는 상태로 서사만을 즐긴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어드벤처 게임이 매개하고 있는 전(前) 장르의 수용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지하동굴의 퍼즐에서 골머리를 썩지 않는다면, 석판을 획득하는 인디애나를 즉시 관람하는 「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다. 즉 누군가가 퍼즐이라는 노동을 대행해준다면, 관람자의 위치는 다시금 전(前) 매체 수용자의 자리로 돌아가버리게 된다.

*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의 지하 묘지
따라서 르네 글라스René Glas가 규정한 대리적 플레이Vicarious Play[8]란 상당히 이상한 역학을 만든다. 어드벤처 게임에서 퍼즐 수행을 타인에게 ‘맡겨버리고’, 그 결과물인 서사만 취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서사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적 변곡을 ‘가로지른 뒤’, 다시 이전 미디어의 형식으로 ‘귀환해버리는’ 우회된 경로를 그리는 수용자성이다. 이 때 ‘게임’이며 동시에 ‘영화’인 이상한 형식이 만들어진다. 물론 다른 장르 역시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드벤처 게임에서 (그 전제조건을 따져보았을 때) 퍼즐이라는 요소가 상실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결과는 매개하는 다른 매체와의 친연성의 즉시적 증가다. 퍼즐이 포기된 어드벤처 게임에는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재매개로서의) 서사 뿐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드벤처 게임의 현재는, 오히려 그것이 (기술적 한계 때문에) 우회적으로 매개하려 했던 바로 ‘그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여전히 어드벤처 게임의 팬덤은 존재하고, 퍼즐을 직접 수행하는 플레이어는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비중에서 이러한 ‘대행된 모험Vicarious Adventure’의 비중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퍼즐과 서사라는 양대의 축으로 지탱되던 어드벤처 게임은, 이제 수행적 노동을 위임해 서사라는 결과만을 취하려는 수용자들의 손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다. 기술적 한계를 넘어 서사를 체감시키려 했던 이 야심의 장르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환경 속에서 ‘서사만을 관람’하는 매체로 선회하려 한다. 어찌보면 서사를 얻기 위한 퍼즐 풀이라는 행위가 일종의 유희 노동playbour으로 분류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외주화를 통한 수용의 등장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이 대행되고 서사만이 남은 이 기이한 우회로 속에서 어드벤처 장르는 (볼터와 그루신이 말했던)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는 에너지를 소실하고 전(前) 매체의 그림자로 되돌아가고 있다.
긴 세션과 복잡함을 담지하기 어려웠던 초기 비디오 게임은 서사라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문학 또는 영화를 향한 재매개적 형식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보자면 어드벤처 게임은 비디오 게임의 꿈과 같은 장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구체성의 엔진은 퍼즐과 서사의 진동이라는 독특한 모델의 ‘비디오 게임’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행된 플레이를 통한 퍼즐의 소거는 오히려 초기 비디오 게임이 꾸던 바로 그 꿈과 맞닿는다.
하지만 어쩐지 그 꿈에는 현재는, 지나치게 꿈이 되어서 현실 감각이 소실되어 가는 것 같은 이상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물론 당연하게도 영화를 보는 것과 어드벤처 게임의 스트리밍을 보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게임 플레이 관람에는 대행된 수행 육체와 결과로서의 서사라는 이중화된 관람 경험이라는 특이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래도, 꿈과 연결되기 위한 전의식preconscious으로서의 퍼즐은, 그것의 감각을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공허함으로 향하는 것만 같다.
비디오 게임에서의 서사의 일상화, 그리고 (퍼즐보다 전투를 중시하는) 액션 어드벤처의 주류화는 일견 고전적인 어드벤처 장르의 축소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어드벤처 게임은 오히려 ‘서사와 퍼즐 사이의 변증법적 진동’을 통해 그 생존을 연장했다. 그렇기에 ‘서사의 전달’이라는 가장 꿈같던 그 목적에 한없이 가까워진 지금이 어드벤처 게임이라는 장르의 가장 기묘한 시간처럼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어드벤처 게임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여전히 퍼즐이라는 전의식의 불투명함에 매료된 자들이, 서사라는 꿈을 꿈으로 남겨두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그러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서사의 매체가 되려는 꿈을 꾼 게 원인이었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시에라 온라인 게임의 제목을 얄궂게 빌리자면, 완전한 서사 매체라는 목적이야로 비디오 게임의 ‘판타스마고리아’였던 것 아니었을까.
[1]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이용해 자연어 명령어를 적어넣는 행위를 말한다.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직접 텍스트를 타이핑해 게임을 진행해야 했다.
[2] 포인터를 이용해 특정한 오브젝트와 명령어를 클릭해 진행하는 어드벤처의 하위 장르.
[3] 제이 데이비드 볼터 & 리처드 그루신, 『재매개』, 커뮤니케이션북스(2006)
[4] 워킹 시뮬레이터를 어드벤처의 하위 장르로 포섭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서사는 있지만 퍼즐의 구조가 상당히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즐이라는 개념을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환경 스토리텔링이 가진 정보의 수집과 결합을 퍼즐의 영역에 넣을 수 있다. 자이언트 스패로우의 「왓 리메인즈 오브 에디스 핀치」같은 게임은 워킹 시뮬레이터면서 일부 복잡하지 않은 퍼즐을 삽입하기도 한다.
[5] 브라이언 업튼, 「플레이의 미학」, 에이콘(2019)
[6] Julian Kücklich(2005), Precarious Playbour: Modders and the Digital Games Industry, The Fibreculture Journal
[7] Joyce Goggin(2011), Playbour, farming and leisure, Ephemera: Theory & Politics in Organization, 2011, Vol 11, Issue 4, p357
[8] 르네 글라스는 스트리머의 유희적 몰입Ludic Immersion을 지켜보는 비유희적 참여Non-Ludic Engagement라는 구분으로 이 개념을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게임 플레이라는 인지적/육체적 수고를 스트리머에게 ‘위임’하는 구조를 가진다. 대리 플레이의 결과, 시청자는 그 결과로서의 서사와 감정적 보상만을 취사적으로 취하게 된다. René Glas(2015), Vicarious play: Engaging the viewer in Let's Play videos, European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Communication 5 (1):81-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