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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에 재현된 농업의 유형들과 재현의 의미에 대하여

    디지털게임이 농업을 다루는 일은 보기 드물지 않다. 적지 않은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농업의 과정을 재현함으로써 그 속에서 재미를 만들려고 하고, 농업 자체의 재현이 아닐지라도 농업이라는 개념 속에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과정을 게임 규칙 안에 편입시키는 시도를 많은 게임사들이 이어 온 바 있다. 다만 이 때 ‘농업’, ‘농사’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어보면, 같은 농업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살펴보며 의미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Back 게임에 재현된 농업의 유형들과 재현의 의미에 대하여 30 GG Vol. 26. 6. 10. 이 글은 논문 [(이경혁, 2026), <농업은 게임에서 어떻게 상상되는가: 디지털게임 속 농업 재현의 유형과 사회문화적 의미>, 농촌사회, vol. 36(1), 349-407] 을 기반으로 다듬어진 글입니다. 논문 원문은 KCI링크( 바로가기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C 앞 도시 게이머들에게 농업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2020년에는 게임 분야에서 꽤나 흥미로운 사건이 한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는데, 게임 한 편이 두 나라의 농촌진흥청 웹사이트를 마비시킨 일이었다. 동아시아의 주요 식량작물인 벼농사를 꽤나 디테일하게 녹여낸 플랫포머 액션 게임 <천수의 사쿠나히메> 플레이어들은 게임에서 사실상 캐릭터의 성장을 책임지는 벼농사의 디테일을 알기 위해 온갖 농사 관련 정보를 찾아다녔고, 가상의 논을 향한 이 열망은 각 서버들을 뻗게 만들며 뉴스 면을 장식했다. 디지털게임이 농업을 다루는 일은 보기 드물지 않다. 적지 않은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농업의 과정을 재현함으로써 그 속에서 재미를 만들려고 하고, 농업 자체의 재현이 아닐지라도 농업이라는 개념 속에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과정을 게임 규칙 안에 편입시키는 시도를 많은 게임사들이 이어 온 바 있다. 다만 이 때 ‘농업’, ‘농사’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어보면, 같은 농업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살펴보며 의미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을 다루는 매체로서 디지털게임이 농업을 재현한다는 것은 비농업인구가 훨씬 많은 현대 사회에서 농업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피고자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다룬 농업과 농촌의 이야기가 무엇을 함의하는지를 살피는 연구가 존재하는 것과 달리, 게임에서 농사가 다뤄지는 방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살피는 연구는 없던 상황이다. 이 글은 그 의문에서 출발한 논문, <농업은 게임에서 어떻게 상상되는가: 디지털게임 속 농업 재현의 유형과 사회적 의미>(농촌사회학회, 36호 1권)에서 다뤄진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논문은 2000년대 이후 디지털게임 속에서 나타난 농업 재현을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유형들이 오늘날의 농업과 농촌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게임 속에 재현되는 농업, 농촌에 관한 다섯 가지 유형은 각각 목가적 생활양식, 산업적 경영체계, 생존을 위한 재생산장치, 성장 보조 시스템, 주기 순환의 시간장치로 나타나며, 각각의 유형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농업과 농촌이라는 관념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목가적 농업, 산업적 농업, 생존의 농업 첫 번째 유형인 목가적 생활양식으로서의 농업은 <스타듀 밸리>로 대표되는, 이른바 ‘힐링’의 요소가 강하게 결합된 농업과 농촌을 재현하는 유형이다. 도시에서의 틀에 박힌 삶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이 시골로 이주해 농장을 재건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스타듀 밸리>에서 농업은 그저 작물을 생산하는 것으로만 그려지기보다는 농촌이라는 생활공간과 그 안에서 엮이는 인적 네트워크를 포괄하는 총체적 관계로서 나타난다. 농업이라는 말에 담긴 이른바 ‘농촌성’이 <스타듀 밸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재현되는 농업과 농촌의 특성이다. <목장이야기> 등에서부터 이어져 내려 온 농촌성 재현을 중심에 둔 게임들은 농업을 목가적 생활양식의 일환으로 보고자 한다. 경쟁과 위험, 시장과 생산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안정과 회복, 그리고 정착의 감각이다. 농업과 농촌을 이처럼 정서적으로 안정된 관계의 공간으로 그리는 것은 ‘이상적 농촌성Rural idyll’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다른 매체에서도 나타난 바 있는데, 앞서 이야기한 <리틀 포레스트>나 <전원일기> 등이 농촌을 도시와 대비되는 ‘인간미 넘치는 공간’으로 묘사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목가적 생활양식으로 농업을 다루는 이러한 게임들은 그 숫자가 많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농업 게임을 대표하는 유형으로 꼽히는데, 농업과 농촌을 이처럼 낭만적인 공간으로 그리는 것에 대한 위험성은 이미 다른 매체들에서도 지적된 바 있는 패턴이다. 농촌사회학자 리-앤 서덜랜드는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통해서만 농업을 접하는 도시 생활자들이 갖게 되는 농업과 농촌에 대한 이미지를 ‘책상 앞 농촌desk-chair countryside’라고 개념화한 바 있는데, 이는 직접 농촌에서 농업을 영유하며 살거나 영화나 소설처럼 누군가 만든 농촌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제 3의 방식으로 농촌과 농업을 이해하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산업적 경영체계로서의 농업이다. <파밍 시뮬레이터>로 대표되는 이 유형은 앞선 유형과는 달리 농업에서 낭만성과 인간관계를 제거한 채 오로지 작물의 생산과 유통, 판매라는 시장 체제 안에서의 농업만을 다루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게임들은 작물을 먹거리로 보기보다는 공장에서 생산해 시장에 내다 파는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상품commodities의 일환으로 보며, 그 생산과정 또한 자연과의 교감이 아니라 현대화된 장비와 시스템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장면을 재현하고자 한다. 농업에 대한 이미지를 둘로 나눈다면, 앞선 유형이 ‘농촌에서의 농업’에 가깝고 이 유형이 ‘영농법인의 농업’에 가까울 것이다. 후술할 다른 유형들과도 가장 구분되는 산업적 경영체계로서의 농업 게임들이 갖는 특징은 오로지 상품 관계로만 농업과 그 산물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파밍 시뮬레이터>는 농업의 생산물을 플레이어가 직접 먹거나 요리하지 않으며, 밀과 옥수수는 오직 판매를 통해 현금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치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소규모 가족농이나 마을 단위의 협업을 통해 이뤄지는 한국의 농업보다는 대규모 농지에서 기계화된 농업을 돌리는 북미와 같은 공간에서의 농업에 대한 재현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아마도 여러 게임 속에 가장 보편적으로 녹아들어 있을 생존을 위한 재생산장치로서의 농업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규칙을 전제한 뒤, 생존을 위한 식량 확보의 일환으로 농업은 서바이벌 규칙을 가진 게임 안에 편입된다. 이름부터가 이 개념을 상징하는 게임인 <굶지마!>가 대표적인데, 처음 게임 시작 부분에서는 채집과 사냥으로 이뤄지던 식량 조달은 이후 농업을 본격화하고 대량생산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구성원의 생존을 안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최종 단계에서는 결국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는 것이 이 유형의 농업 게임들이지만, 앞선 산업적 경영체계로서의 농업을 다룬 게임들과는 달리 이 대량생산은 대부분 ‘구성원의 생존’을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대부분의 생존 및 운영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식량은 부가적으로는 거래 요소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먹기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 먹지 않으면 죽는 게임에서 먹거리를 생산하는, 살기 위한 먹거리 창출이라는 농업의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목표가 이러한 유형의 게임 속에서 재현된다. 성장 보조, 혹은 시간장치로서의 농업 네 번째 유형은 성장 보조 시스템으로서의 농업이 다뤄지는 게임들이다. <천수의 사쿠나히메> 와 같은 게임은 먹지 않는다고 굶어 죽는 규칙을 넣지는 않지만,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식량을 생산하고 먹어야 한다. 이는 하드코어한 생존 룰이 적용되지 않는 여러 롤플레잉 게임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으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게임들에서 식량이 일종의 버프로 기능하는 점과 맞물린다. 네 번째 유형은 농업과 먹거리가 갖는 ‘식약동원食藥同原’의 개념 하에 이루어진다. 먹음으로써 몸과 정신이 강해진다는 이 개념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개념을 밑바탕에 깐 뒤에 이루어지는 두 번째 레이어에 가깝다. 먹음으로써 강해지고, 그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네 번째 유형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초창기에 버프용 약초를 구하기 위해 리젠되는 지역을 돌던 행위를 ‘무 농사’라고 불렀던 것이 이 맥락과 상통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유형은 사실 농업 재현인지 의문일 수 있을 유형으로, 주기 순환의 시간장치로서의 농업이다. 2010년대 서구권을 휩쓸었던 <팜빌>과, 그와 유사한 여러 소셜 네트워크 게임들에서 나타났던 농업을 돌이켜보면 알기 쉽다. 이런 게임들에 등장하는 농업은 작물의 생산과 수확이라는 농업의 뼈대를 갖추고 있지만, 그 구조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플랫폼이 설계한 재방문 주기, 다시말해 리텐션 구조에 농업의 외피를 씌운 것에 가깝다. 비슷한 소셜 게임들이 모두 특정한 무언가를 만들거나 건설하는 명령을 내린 뒤 몇 시간, 며칠 뒤에 완성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중 하나로 농업의 파종 – 수확 순환 개념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재현되는 농업은 게이머들로부터 농업이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야 수확이 가능한 산업이라는 인식을 받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씨를 뿌린 뒤 기다렸다 거둔다는 순환의 구조는 게이머들이 플랫폼으로부터 제공받고자 하는 보상을 자연스럽게 기다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설득력의 요소로 작용한다. 앞서 이야기한 여러 농촌과 농업의 이미지는 이 유형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이 유형이 유독 모바일, 온라인 기반으로 이용자의 재방문 주기를 설계하는 경우에만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한 증거다. 게임으로 농업을 이해한다는 말의 깊은 의미를 곱씹으며 게임이 농업을 다룬다는 말은 이처럼 결코 하나의 방식으로 일반화하기 어렵다. 다섯 가지 유형은 모두 농업을 재현하고 있지만, 살펴본 것처럼 이 농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게 이해되며, 어떤 관계망 속에서 농업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게임 속에서 재현되는 농업은 그 의미부터 구조까지 모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유형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현실의 농업이 가지고 있는 고단함 자체는 배제되거나 순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일전의 GG 글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이, 놀이로 기획된 디지털게임의 재현에서 농업의 고단함은 굳이 그려지지 않는다. 현실 농사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부채, 가격 폭락에 따른 대손실, 고된 노동과 자연재해 등은 복구 가능한 수준으로 그려지곤 한다. 농업의 어려움에 대해 목가적 유형은 공동체의 온기로 덮어내고, 생존형은 전략적으로 관리 가능한 위기로 그려내며, 시간장치형은 예측 가능한 타이머로 풀어낸다. 당연하게도 매체로서의 게임이 농업의 모든 면을 담아내야만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애초에 규칙과 반복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디지털게임에서 그려내는 농업과 농촌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갈수록 현실의 농업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는 도시거주자 중심의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때로는 낭만화되고 때로는 산업화된 농업의 시스템만을 재현된 매체 안에서 보는 것이 가질 수 있는 매체론적인 문제에 있다.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들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농업과 농촌이라는 개념에 대해 단지 매체의 재현된 결과만으로 과도하게 손쉬운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게임 속 농업을 두고 따져야 할 것은 '얼마나 정확하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건 무엇이 거듭 선택되고 무엇이 거듭 빠지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패턴이 우리가 농업을 상상하는 방식을 어느 쪽으로 끌고 가는가에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농업 게임의 재미나 가치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게임 속 농사가 누군가 정성껏 고르고 배열한 한 편의 재현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플레이어는 그 경험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농사와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함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진흥청 서버를 마비시켰던 그 엉뚱한 호기심이야말로 농업이 뭔지 모르는 도시민들에게 ‘농업이란 무엇인가’를 한번 더 상기하게 해 준 좋은 기회가 아니었던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 Back 06 GG Vol. 22.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 세기 걸프전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전쟁의 게임화’에 관한 분석에서 거울상을 발견한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도되는 폭격의 현장에서부터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한 병사 훈련, 그리고 드론을 동원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게임이 전쟁을 재현(mimesis)할 때, 전쟁은 게임을 모사(mimesis)한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응우옌, 행위성, 전쟁,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eon Choi Drawing on identities both as a philosophy researcher and as a game enthusiast and researcher, has engaged in teaching, lecturing, research, writing, and translation, and currently enjoys the pleasure of sharing thought with students at Inha University and elsewhere.

  • 부분 화면 게임 플레이는 어떻게 게임 플레이를 재규정하는가

    그러나 방치형 게임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관습화된 감이 있다. 초창기의 시도가 장르 규칙으로 굳어지면서, 메커니즘(부재 시간의 플레이 편입, 실감 가능한 성장을 가시화하는 대시보드형 인터페이스, 자동화의 단계적 해금 등), 과금·보상 구조(보상형 광고, 프리미엄 가속재 혹은 패스, 온보딩 메타 등), 이용 행태(백그라운드 혹은 세컨드 스크린 소비, 효율 중시 공략 문화 등) 차원 모두에서 자유도 강화나 새로운 실험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보긴 어려운 실정이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 Back 06 GG Vol. 22.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ilkwon Jeong A farmer, a baker, and a barista. Currently in an eighth year of writing as a game journalist. Striving to experience and witness as much as possible within the limited time given.

  •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잘 짜인 레벨 디자인.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는 1985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4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달리고. 뛰고.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 Back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16 GG Vol. 24. 2. 10. 잘 짜인 레벨 디자인 .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시리즈는 1985 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 물론 , 이 시리즈는 40 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 달리고 . 뛰고 .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 밟고 뛴다는 액션 측면은 유지하면서 부가적으로 붙는 아이디어는 시리즈의 첫 작품과는 다른 갈래에서 발전을 이룩했다 . 2D 플랫포밍을 넘어서 3D 플랫포밍으로 전환된 것도 이제 엿말이다 . 매 시리즈마다 새로운 컨셉을 제시하고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수집품을 찾는 탐색형 타이틀까지 발전이 이루어졌다 .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지고 마리오 시리즈가 지속적인 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무르는 작품도 나왔다 . 시리즈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2D 플랫포밍 . 우리가 2D 마리오 시리즈라 부르는 작품들이 그 예다 . 첫 플레이가 익숙해지면서 플랫포밍의 난이도가 점차 오르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비슷한 메커닉을 채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그 결과 , 2D 마리오 시리즈는 여타 3D 마리오나 탐색형과 다르게 변화하지 않는 . 혹은 매너리즘이라는 굴레에 빠지기 시작했다 . 새로운 컨셉은 다른 마리오 시리즈에서 진행하고 있기에 근본적으로는 뛰고 밟고 변신하는 것과 같이 변화할 수 없는 플레이가 자리했다 . 늘 비슷하다는 혹평과 저조한 판매량 . 그것이 11 년 동안 후속작이 나오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 파생작과 달리 11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 , 자리한 후속작 . 2D 마리오 시리즈의 갈래에 있는 ‘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 ( 이하 슈퍼 마리오 원더 ) 는 이제 익숙함을 넘어 매너리즘이 되어버린 플레이와 흐름을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 다른 시리즈가 근본적인 메커닉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컨셉으로 변화를 추구하듯이 , 효과적이고 쉼 없는 놀라움의 연속으로 본인들의 미래를 새로이 그리고자 했다 . 슈퍼 마리오 원더는 마리오 시리즈이기에 항상 같은 선상에 있던 플레이 양상 ‘ 뛰고 / 밟고 / 변신한다 ’ 는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 . 이와 동시에 그간의 시리즈와는 다른 경험을 주기 위한 게임 디자인이 곁들여졌다 .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변화와 플레이 과정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변화를 통해서 슈퍼 마리오 원더는 놀라움이라는 큰 가치를 전하기 시작한다 . 슈퍼 마리오 원더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되던 레벨 디자인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 레벨 디자인의 교과서처럼 다가오는 형태 . 즉 , 첫 코스에서 굼바를 밟으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 이는 2D 마리오 시리즈가 꾸준하게 쌓아온 문법이기도 하다 . 플레이어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를 배우고 엔딩에 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했다 . 순차적으로 설계된 코스별 구조는 레벨 디자인 측면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시도이자 결과물이었다 . 게임을 진행하며 조금씩 난이도를 올려나가고 플레이어가 학습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였으니까 .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백한 단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 지난 몇 년간 2D 마리오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약점 . ‘ 게임 플레이를 엔딩까지 진행한 사람이 적다는 점 ’ 으로 이어진다 . 플레이 과정에서 선보인 것들을 모두 활용하게 만들고 있기에 , 플레이어의 조작이 많은 영향을 미치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조작 타이밍에서 한 번의 실수가 실패로 이어지기도 하며 , 플레이어가 이를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적은 편이었다 . 그리고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마주하는 레벨 디자인도 오랜 시간 재생산되며 , 익숙함의 영역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조작과 도전 체계에서 나오는 어려움이라는 감정 . 그리고 시리즈를 지속하며 이제는 익숙해진 레벨 디자인과 플레이 양상 . 슈퍼 마리오 원더는 이러한 두 개의 개선점을 가장 중심에 두고 게임 플레이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 시리즈의 전통이라 부를 수 있는 요소를 개편하고 지금까지 없었던 것들을 덧붙이는 과정과 같았다 . 우선 , 슈퍼 마리오 원더는 이와 같은 시리즈 전통의 레벨 디자인을 벗어나 ,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어느 정도 자유로이 플레이할 수 있는 형태로 두고 있다 . 하나의 메커닉을 선보이고 이를 체득시키는 과정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 동시에 난이도를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두면서 몇 개의 층위로 도전적인 게임 플레이라는 측면을 잡아낸다 . 대표적인 변화는 40 년 가까이 유지되던 시간 제한을 삭제한다는 결정이다 . 시간 제한이 사라지며 슈퍼 마리오 원더의 코스는 탐색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변모했다 . 탐색을 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코스에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장소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개발진은 코스 여기저기에 숨겨둔 것들을 제공하는 한편 , 다음 코스로 넘어가기 위한 ‘ 원더 시드 ’ 라는 수집품을 조건으로 배치해 뒀다 . 이를 통해서 코스의 시작부터 끝까지 죽지 않고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 원더 시드를 획득하는 것이 슈퍼 마리오 원더의 중요한 지점으로 자리한다 . 샌드박스나 탐색형 마리오 시리즈의 그것과 같이 , 플레이어가 평면적으로 구성된 환경을 자유로이 둘러보고 코스를 클리어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 원더 시드를 찾는 것이 코스 클리어의 진정한 목적이 되고 시간 제한도 없어졌다는 것은 곧 , 꼭 어려운 코스에 도전하지 않아도 진행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 게임 내 상점 등에서 원더 시드를 구매할 수도 있으므로 쉬운 코스를 선택해 엔딩까지 도달하는 방법도 가능해졌다 . 이렇게 개발진은 플레이어가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 캐릭터에 능력을 부여하는 ‘ 배지 ’ 나 코스별 난이도 표기 등이 대표적인 예다 . 배지의 경우 플레이어가 난이도를 직접 조정할 수 있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 액션 측면에서 다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거나 . 조금 더 멀리 날아가는 등의 기능이다 . 코스 자체의 어려움은 ★의 수로 표기되어 플레이어가 얼마나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해뒀다 . 이를 통해서 슈퍼 마리오 원더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단계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 이전처럼 정해진 순서대로 클리어를 해야만 엔딩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 직관적인 표기를 통해 쉬운 코스부터 어려운 코스까지 단계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 다음 월드로 진행하는 것 또한 키 아이템인 ‘ 원더 시드 ’ 가 담당하므로 사람에 따라서는 일부 코스를 거치지 않고도 게임의 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슈퍼 마리오 원더는 도전적인 코스와 그렇지 않은 코스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 이마저도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 적과 접촉해도 사망하지 않는 요시나 톳텐 같은 캐릭터를 통해 한 단계 난이도를 낮추는 것도 가능해졌다 . 온라인 가입자에게 제공되는 멀티 플레이는 끝까지 엔딩에 도달하는 데에 일조한다 .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만 물리적인 간섭이 없는 ‘ 라이브 고스트 ’ 형태로 멀티 플레이를 설계하면서 플레이어들이 간접적으로 협력하고 부활 지점을 만들도록 했다 . 마리오 메이커와 같이 경쟁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코스 완주에 도움을 주는 형태로 작동한다 . 게임 내에서 다른 플레이어에게 도움을 받거나 . 의미가 없이 재활용되던 시간이나 점수를 탈피하고 . 플레이어가 지표를 통해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을 보면 , 거기서 나오는 결과물은 명확하다 . 혁신적이거나 지금까지 없던 것이 아님에도 2D 마리오 시리즈 내에서는 큰 변화다 . 큰 어려움 없이도 누구나 도전 가능한 플레이를 코스나 메커닉의 직접적인 변화 없이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한편 , 자꾸 사망해 진행에 어려움이 있다면 보너스 스테이지와 같은 부가적인 요소를 자연스레 꺼내 간접적으로 돕는다 . 궁극적으로는 구조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던 게임 플레이 양상이 탐색형 마리오 시리즈의 문법을 곁들이면서 많은 변화를 거친 셈이다 . 40 여년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게임 구조가 조금 여유롭게 변화했다 . 그리고 변화를 거치며 필연적으로 생기는 공간들은 새로운 기믹을 더하는 것으로 채운다 .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변화이자 전면에 자리하는 요소인 ‘ 원더 플라워 ’ 의 존재다 . 코스 진행 도중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 원더 플라워 ’ 는 기능적으로는 명확한 즐거움을 준다 . 이전 시리즈의 코스 구성을 보면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 이전 시리즈에서 하나의 코스는 월드 컨셉의 아래에 있었다 . 수중 코스나 성 안 코스와 같이 월드의 컨셉에 맞춰서 개별 코스가 디자인되며 , 이와 어울리는 새로운 기믹과 플레이 방법이 제공되는 구조였다 . 원더 플라워는 이렇게 월드 컨셉 아래에 있던 코스의 디자인을 극단적으로 뒤트는 일종의 ‘ 킥 ’ 이자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에 가깝다 . 이전 시리즈의 경우 , 월드의 컨셉을 따라가면서 코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약간의 제한이 되기도 했다 . 치밀한 레벨 디자인으로 설계되어야 하기에 새로운 기믹을 넣거나 이질적인 요소를 넣기 어려워서다 . 하지만 슈퍼 마리오 원더는 앞서 언급한 구조적 변화로 말미암아 월드 컨셉의 제한에서 보다 자유롭게 다뤄진다 . 코스 중간에 만나게 되는 원더 플라워는 플레이어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점으로 인도한다 . 때로는 퀴즈쇼를 하게 되기도 하며 , 원래 코스에서 보지 못했을 다양한 색감의 플레이 등이 제공된다 .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원더 플라워는 개발진이 구상한 독특한 발상의 총체다 . 코스 자체를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하며 , 발상의 근본적인 출발 지점이 기존 시리즈의 한계를 벗어난다 . 심지어 사이드뷰에서 탑뷰로 시점을 바꾼다거나 . 이전까지 진행한 코스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하는 등 온갖 상상력들이 여유 공간을 채운다 . 결국 슈퍼 마리오 원더는 코스를 돌파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타이틀이 아니게 된다 . 이전 시리즈가 초급 - 중급 - 상급으로 차근차근 레벨 디자인과 도전적인 즐거움을 주었다면 , 이제는 다양한 기믹과 아이디어를 선보이는 형태로 다뤄진다 . 이를 통해서 비슷한 코스처럼 다가오다가도 순식간에 인상과 경험 자체가 달라지는 장면을 마주한다 . 이전에 했던 경험의 확대 재생산이 아닌 , 지속적으로 새로운 경험이 자리하는 것이다 . 새로운 경험과 놀라움의 지속적인 공급은 원래의 마리오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요소를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 오랜 시간 시리즈를 내면서 익숙해졌기에 경험 자체가 흐릿해졌지만 , 근본적으로는 토관을 거쳐서 새로운 장소가 나왔을 때 . 혹은 블록을 두드렸을 때 나오는 즐거움이 슈퍼 마리오 시리즈가 전하는 핵심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 하지만 그 당시의 특별한 경험은 현재 시점에서 익숙한 것이 되었고 이제 놀라움을 전하지 못했다 . 원더 플라워는 시리즈가 시간을 쌓아오며 도달했던 ‘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 을 정면에서 비튼다 . 어떤 기믹과 상황이 나올 것인지 알 수 없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경험들이 꽃을 피운다 . 코스마다 하나씩 마련된 원더 플라워는 시점이나 플레이 양상을 바꾸기도 하면서 코스 자체를 두 개의 맛으로 설계한다 . 일반적인 점진적인 난이도 구성을 보여주는 코스는 물론이고 , 놀라움이 가득한 원더 플라워 코스까지 . 다채로운 경험이 자리하게 되는 모습이다 . 정리하자면 , 슈퍼 마리오 원더는 그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원더 플라워를 통해 비트는 한편 , 코스의 전반적인 설계는 이전 시리즈의 것을 따르고 있다 . 그리고 자칫하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두 개의 요소를 한데 묶어서 뒤섞는다 . 결과적으로 개발진이 시도한 접목은 놀라움이 된다 . 이전 2D 마리오 시리즈에 없던 비주얼과 경험이 자리하는 한편 ,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 없이 모든 순간이 발견과 감탄의 연속으로 승화한다 . 이제 2D 마리오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월드 중심의 설계는 없다 . 대신 기믹과 이를 활용하는 디자인이 코스 전반을 관통하며 , 여기서 새로운 기믹과 플레이 양상을 ‘ 원더 플라워 ’ 로 더한다 .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슈퍼 마리오 원더는 시리즈 첫 작품이 전했던 놀라움에 가까워진다 . 덩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그 때의 감정 . 토관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을 때의 발견과 같은 것들이다 .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면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 시리즈의 한계를 벗어난 슈퍼 마리오 원더는 새로운 자극을 연속적으로 주는 데에 가장 큰 가치가 있다 . 그렇기에 모든 순간이 즐겁고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 지켜야만 하는 플레이 양상과 치밀한 레벨 디자인을 어느 정도 덜어내더라도 놀라움을 택한 슈퍼 마리오 원더 . 오랜 고민 끝에 매너리즘을 탈피하고 감탄과 발견이라는 고전적 가치를 재발견한 타이틀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논모던 워페어nonmodern warfare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개자의 증식이 전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의 일상적인 세계는 때때로 전쟁보다도 불투명하다. 물류와 인프라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 팽배하지만, 역설적으로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는 (아이패드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 아래서 가시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로부터 팬데믹을 거쳐 급격한 기후 변동까지, 2020년대의 우리는 마치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 Back 논모던 워페어nonmodern warfare 09 GG Vol. 22. 12. 10. 더 이상 편한 날은 없다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콜 오브 듀티〉 만큼 널리 알려진 게임 프랜차이즈도 드물 것이다. 특히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게임 플레이의 일신(一新)과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사회/정치적인 논란들이 합쳐져서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게임의 어떤 ‘범례’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에서 폭발을 떠올리면 반자동적으로 마이클 베이가 연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전 FPS 게임을 이야기할 때 모던 워페어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고, 그중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범주들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런데 이미 나왔던 이야기들을 비슷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 외에도 이 카테고리들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22년의 시공간은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발매되었던 2007-2011년과는 완전히 다르며, 심지어 첫 번째 리부트가 등장한 2019년과도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1) 흔히 ‘클래식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고 이야기하지만, 이 문장에서 생략된 전제는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롭게 (혹은 다시금) 부각되는 관점에 맞춰서 의미망을 성공적으로 업데이트한 작품들만이 클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왜곡’된 2022년의 렌즈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바라볼 때, 우리는 기존의 의미망들이 잘 작동하지 않음을 목도한다. 예를 들어,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개발한 인피니티 워드가 속한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2022년 3분기 매출 2) 발표에 따르면 회사 총매출의 52%가 모바일 게임들에서 발생한다. 그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작품은 모던 워페어의 스펙터클한 느낌과는 거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캔디 크러쉬 사가〉다. 2021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 을 기록한 탑 3 게임은 전부 모바일 게임들이며, 리스트 어디에도 콜 오브 듀티와 같은 전통적인 블록버스터나 다른 트리플 A 게임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액티비전의 챔피언 〈캔디 크러쉬 사가〉만이 당당히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 3) ‘블록버스터’ 라는 단어가 아주 큰 상업적인 성공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계속해서 시장에 쏟아지는 압도적인 연출과 그래픽을 내세운 (모던 워페어 리부트를 포함한) ‘소위’ 대작들은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더 ‘블록버스터’스러운 외양을 자랑하지만 정작 온전한 의미로서 블록버스터라고 명명되기에는 애매한,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 깜찍한 ‘블록버스터’ 〈캔디 크러쉬 사가〉 게임 플레이의 일신 또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규정하는 한 축으로 여겨져 왔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는 이 시리즈의 근간이 되는 게임 플레이의 포석을 깔았다는 점에서 특히 더 중요한데, 〈하프라이프〉의 오프닝 트램 시퀀스를 센세이셔널하게 비틀어 버린(“repurposing the techniques popularized by Half-Life’s tram to march you through a city being torn apart, and ultimately, to your own execution.”) 4) 프롤로그의 ‘쿠테타The Coup’ 미션부터 마치 드론 조종사가 된 것 같은 섬뜩한 기시감을 전달해 주는 그 유명한 AC-130 건쉽 미션인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수많은 적 탱크들과 보병들이 코 앞에서 지나가는 걸 낮은 포복자세로 숨 죽인 채 기다려야 하는 ‘위장 완료All Ghillied Up’ 미션까지, 타이트한 연출로 제어되는 스펙터클이 게임 플레이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매우 ‘쫄깃한’ 싱글 플레이 경험을 선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던 워페어 1이 발매되었던 2007년은 보통 해가 아니었다. 7세대 콘솔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3와 엑스박스 360, 그리고 닌텐도 Wii가 바로 그 전 해에 출시가 된 상황이었고, 업그레이드된 하드웨어에 발맞춰서 무시무시한 타이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슈퍼 마리오 갤럭시〉, 〈포탈 1〉, 〈갓 오브 워 2〉, 〈팀 포트리스 2〉, 〈바이오쇼크〉, 〈매스 이펙트 1〉, 〈메트로이드 3 커럽션〉, 〈헤일로 3〉, 〈언차티드: 엘도라도의 보물〉, 〈크라이시스〉 등등. 그 외에도 거대 프랜차이즈의 시작을 알린 〈위쳐 1〉과 〈어새씬 크리드〉가 발매되었다. 즉, 모던 워페어가 게임플레이의 혁신을 이유로 명함을 내밀기에는 좀 뻘쭘한 그림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7년에 출시한 ‘인디’ FPS 게임 〈스토커 섀도우 오브 체르노빌〉과 비교해봐도, 마치 오래된 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타는 것과 같은 모던 워페어의 계산된 스펙터클은 어느 순간 지겨움과 상호 교차가 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물론 멀티 플레이를 빼놓고 모던 워페어의 게임 플레이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실제로 캐릭터 퍽과 킬스트릭 시스템은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할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멀티플레이 게임들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킬스트릭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AC-130 건쉽을 일종의 공중지원 보너스로 끌어옴으로써 특정한 싱글 플레이 미션의 충격 효과를 멀티플레이에서의 반복으로 소진시키는 탁월함(?)을 뽐내기도 했다. 하지만 참신한 시스템으로 인더스트리를 선도하던 모습은 ‘그땐 그랬지’의 느낌처럼 추억 속의 이야기가 되어 가는 중이다. 모던 워페어 1 리부트의 멀티 플레이 버전으로 2020년 출시한 〈콜 오브 듀티: 워존 퍼시픽〉은 (올해 출시된 워존 2.0과 마찬가지로) 〈배틀그라운드〉와 〈포트나이트〉가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배틀로얄 모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혁신의 아이콘이기보다는 노련한 후발 주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이처럼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담론을 지탱하던 두 개의 커다란 범주들(게임 플레이의 혁신, 굉장한 상업적인 성공)은 점점 ‘라떼는 말이야~’와 같은 톤에 가까워지고 있다. 반면 사회/정치적인 논란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좀 더 미묘한 방향으로 선회한다. 엿같은 날들 S.S.D.D.(Same Shit, Different Day) 사실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과 아군이 비교적 명확하고 (영화와 게임 제작자들에게 나치가 얼마나 소중한(?) 빌런인지 생각해 보자) 어느 정도 역사적 평가가 마무리된 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현대전modern warfare은 여전히 ‘전장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아무리 가상의 국가와 인물, 심지어는 가상의 타임라인을 설정한다고 해도 ‘중동’, ‘러시아’, ‘대량살상 무기’, ‘테러리즘’, ‘블랙 옵스’, ‘극단적 국수주의자’ 등과 같이 민감하고 복잡다단한 역사적인 레이어들이 누적된 키워드는 게임 바깥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동됨으로써 게임의 유틸리티적인 측면(무해한 오락으로서의 소프트웨어)이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정치적 텍스트로서의 측면을 급부상시킨다. 더욱이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연이어서 발매되던 2007년과 2011년 사이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끝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5) 그 와중에 현대전으로의 전환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아했던 퍼블리셔 액티비전 6) 과는 달리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는 미국 해병대USMC의 자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은 물론, 논란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문제적인 미션들도 서슴없이 도입하는 등 매우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특히 1편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미션과 2편의 ‘러시아어 사용금지No Russian’ 미션은 지금도 종종 회자될 정도로 악명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이 선명한 정치적인 논란은 블록버스터적인 연출과의 기이한 콜라보를 통해서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대작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종종 보이던) 일종의 ‘맛있는 불량식품’을 만들기 위한 완벽한 레시피로 거듭날 수 있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꽤 훌륭한(?) 길티 플레져 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부분에 더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서 이 게임을 둘러싼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맛있는’에 집중하는 (모던 워페어를 포함한)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광적인 팬들이 존재한다. 그 반대편에는 ‘불량식품’에 치를 떠는 (아마도 게임 그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과 모던 워페어의 정치적 스탠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을) 비판자들이 소리 높인다. 마지막으로 ‘맛있는 불량식품’이 가지는, 그 약간의 죄책감이 얹힌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계몽된 냉소주의자들이 조용히 게임을 플레이한다. 폴리곤의 〈 How Call of Duty turned war into a circus 〉 7) 영상은 계몽된 냉소주의자인 화자의 입장에서 나머지 두 팩션을 가로지르는 재치 있는 영상으로 세 가지 다른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을만한 지점인데, 바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내러티브는 바보 같다는 점이다. 이 공통의 감각(?)은 모던 워페어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단발적인) 논란으로 가득 차게 만듦과 동시에 도식적인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논의의 지루한 공회전을 유지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조성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통해 이야기해보자. 이전 글 8) 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거의 모든 비디오 게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루도내러티브 부조화가 작용한다. 이에 따라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마치 한 컵에 담긴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못한 채, 일종의 느슨한 동기화로 연결된다. 때로는 특정한 사건(괴랄한 게임/과금 디자인 혹은 모딩과 같은 유저의 초월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마치 예전 아이튠즈처럼 아예 동기화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에 이르기도 한다. 즉, 동기화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반(半) 연결적인 투 트랙의 구조는 게임의 분열적인 수용을 가속화한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멀티플레이를 이미 수천 시간 이상 뛰었으며, 아마 지금도 리부트의 멀티플레이인 워존에서 구르고 있을 ‘찐팬’들에게 바보 같은 내러티브라는 조롱은 통하지 않는다. 킬스트릭을 달성하면 주어지는 AC-130 건쉽 폭격의 등장을 내러티브적으로 녹여냈다는 것만으로도 모던 워페어의 스토리는 이미 “장르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비판자들에게 모던 워페어의 황당무계한 내러티브는 영미 제국주의와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프로파간다 텍스트다. 대부분은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단 한 번도 플레이해보지 않았을 것이며, 그중 소수는 약간의 싱글 플레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재확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멀티 플레이에 수백 시간 아니 수 시간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계몽된 냉소주의자들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공감할 뿐 아니라, 그 간극이 주는 ‘불량식품’의 맛을 은근히 즐기고 있을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모던 워페어가 출시할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비슷한 비판들이 다시 도래하며, 또다시 비슷한 반론이 재등장한다. 비슷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러거나 말거나 ‘찐팬’들은 바로 이전 모던 워페어와 아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멀티플레이에 다시 수천 시간을 퍼붓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일련의 행위들을 축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축제는 반복된다. 그런데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마이클 베이스러운’ 9) 내러티브가 더 이상 의례 그렇듯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면, 그때도 우리는 이 축제를 지속할 수 있을까. 가령 자국 내의 ‘극단적 국수주의자’ 반군들이 미국과 인근 유럽 국가들을 침략해서 전쟁이 벌어지자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평화 회담장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대통령을 국수주의자 무리의 리더가 납치하는 이야기와, 본인부터가 ‘극단적 국수주의자’인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인근 유럽 국가의 침공을 명령하는 이야기 중 어느 쪽이 더 황당무계하고 초현실적인가. 둘 다 만만치 않지만 나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겠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가리킨다.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에게 행한 전쟁 범죄 10) 가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중인데, 그에 따라 러시아군을 굉장히 악랄하게 묘사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던 모던 워페어 1 리부트가 사실 알고 보니 그들을 미화(?)했던 거라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재평가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 러시아 대통령마저 납치하는 상남자 마카로프. 하지만 게임 바깥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의 ‘쿠테타The Coup’ 미션에서 유저들은 이 게임의 메인 빌런 중 하나인 알 아사드가 생중계되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을 중동 ‘어느’ 국가의 대통령의 시점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몇 년 뒤 세계는 아이에스Islamic State가 포로들을 ‘참수’하는 영상들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퍼뜨리는 것을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또다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1) 그뿐 아니라 마치 ‘아랍의 봄’의 뒤집힌 악몽과도 같이 아이에스는 스마트폰이라는 물리적 네트워크 노드 기반 위에서 소셜 미디어와 다크 웹을 통한 매우 공격적인 ‘모집’ 과정을 전개했다. 그 결과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유럽 전역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들이다. 201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이미 ‘중동을 너무 선정적으로 묘사했다’, ‘스테레오 타입들의 캐릭터로만 채워져 있다’는 식의 관습적인 모던 워페어 비판들은 길을 잃어버린다. 어느 순간 현실은 거의 스너프 필름에 가까워지고, 중동의 ‘새로운 전사’들은 네트워크로 연계된 새로운 양태의 테러를 직접 시연함으로써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들에서 아득히 멀어진다. 먼지에서 먼지로 Dust to Dust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배태한 그 수많은 논란들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당시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음을 알려 주는 일종의 지표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할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어떤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만큼 지금의 세계가 더 많이 불안정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던 워페어는 이제 평화로운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당시에는 나름 센세이셔널했던) 추억의 펑크록 앨범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인가. 나는 아직 그렇게 단정 짓기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게임 시리즈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급격한 불안정성을 예비하는 단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전이 이전 시기의 전쟁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물류, 장비, 인프라, 기술, 국경, 평화협정 등을 포함한 수많은 비인간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인간들의 결정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좌지우지된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기술 하나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거나, 혹은 아예 전쟁 자체를 예방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군은 위협용으로 대만의 군기지 근처에 미사일 3개를 연달아 발사했다. 첫 번째 미사일은 예정된 목적지에 떨어졌지만, 나머지 2개의 행방이 묘연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날아가는 도중 그 2개 미사일 내에 GPS 신호가 끊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는 미국이 개발하고 관리해 온 시스템이다. 즉, 미군은 중국군이 GPS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단기적으로는 중국군이 물러남으로써 전쟁 위기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이를 갈고 자체적인 항법 시스템을 개발해서 위성을 쏘아 올리도록 만들었다. 12) 이렇듯 스마트폰의 여러 앱들을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GPS 같은 기술조차 전쟁 상황에서는 그 파급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 역시 이러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던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미션은 (3편의 ‘철의 여인Iron Lady’ 미션도 마찬가지로) 유저들을 AC-130 건쉽 조종사의 모니터링 스크린 앞으로 데려다 놓는데, 이때 유저들이 경험하는 것은 사실 무인 드론 조종사의 포지션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굉음을 내는 건쉽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방 안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지상의 풍경은 무인 드론 조종사의 모니터 화면과 놀랄 만큼 유사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오버랩은 이 미션의 꽤 노골적인 (소격 효과를 노리는) 의도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미션을 수행하는 건쉽 오퍼레이터들의 건조한 대화 중 간간이 들리는 즐거운 환호성과 농담보다도 유저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건쉽/드론을 조종하는 감각이다. 한껏 당긴 망원 렌즈 덕에 원근감이 제거된 평평한 화면 위로 작게 꼬물거리는 ‘타겟’들은 마치 치워 버려야 할 ‘벌레’처럼 제시되며, 그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실제 벌레를 잡는 일보다도 훨씬 간단하다. 즉, 수백 명을 학살하는 행위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상적인 ‘클릭질’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이는 또다시 무인 드론 조종사의 실제 경험과 겹쳐지면서, 초점을 유저/조종사와 같은 인간적 주체에서 건쉽/드론 - 적외선 카메라 - 모니터/스크린 - 마우스/조이스틱으로 이어지는 (라투르의 표현을 빌자면)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바로 이 비인간 행위자들의 네트워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학살자’로서의 유저/드론 조종사를 역으로 ‘주조해’ 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던 워페어modern warfare가 어째서 ‘근대적이지 않은지nonmodern’ 이해할 수 있다. *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미션의 스크린(왼쪽)과 실제 무인 드론의 스크린(오른쪽)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개자의 증식이 전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의 일상적인 세계는 때때로 전쟁보다도 불투명하다. 물류와 인프라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 팽배하지만, 역설적으로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는 (아이패드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 아래서 가시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로부터 팬데믹을 거쳐 급격한 기후 변동까지, 2020년대의 우리는 마치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여기서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과장된 스펙터클과 거친 매너로 우리의 등을 떠밀면서 그들(비인간 존재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였으며, 우리 역시 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새롭게 거듭났었다는 진실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위태로운precarious 현재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과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역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누군가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며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프라이스 대위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네가 알던 그 세계는 끝났어. 그런데 그걸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너는 어디까지 갈 수 있지? Your world as you knew it is gone. How far would you go to bring it back?” 1) 얼마 전에 발매한 모던 워페어 2 리부트 역시 이미 여러 해 전부터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일종의 타임캡슐적인 성격을 지닌다. 2) Evgeny Obedkov, “Diablo Immortal and Candy Crush were biggest contributors to Activision Blizzard’s mobile growth in Q3” Game World Observer, 2022.11.10. https://gameworldobserver.com/2022/11/10/diablo-immortal-candy-crush-saga-mobile-revenue-activision-blizzard 3) David Curry, “Top Grossing Games (2022)” Business of Apps, 2022.10.27. https://www.businessofapps.com/data/top-grossing-games/ 4) Amr Al-Aaser, “Shock and Awe: The Political Influence of Modern Warfare” Paste Magazine, 2016.11.02. https://www.pastemagazine.com/games/call-of-duty/shock-and-awe-the-political-influence-of-modern-wa/ 5) 미국은 결국 2011년 12월에 이라크 전쟁의 종결을 공식 선언했다. 모던 워페어 3가 출시한 지 한 달 뒤의 일이다. 6) 액티비전이 콜 오브 듀티 4가 모던 워페어로 출시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굳이 황금알을 잘 낳고 있는 거위(2차 세계대전 배경의 콜 오브 듀티 1,2,3)의 배를 가르고, 논란이 클 것이 뻔한 현대전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비즈니스적으로 큰 리스크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바비 코틱은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개발사는 그대로 밀어붙여서 모던 워페어를 출시한다. 7) Patrick Gill, “How Call of Duty turned war into a circus” Polygon, 2022.05.06. https://www.youtube.com/watch?v=JIEB5DKzJLM 8) 웜뱃,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제너레이션, 2022.08.08.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43 9) 공교롭게도 모던 워페어 2에는 마이클 베이가 감독한 〈더 록〉의 샤워실 총격신을 그대로 옮긴 듯이 오마주한 챕터가 있다. 10) DW Documentary, “War crimes in Ukraine | DW Documentary” DW Documentary 2022.11.27. https://www.youtube.com/watch?v=ONWW02pNvFk 11) 유튜브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메인스트림 앱들은 재빠르게 대응했지만, 이내 IS는 텔레그램과 Surespot 같이 소셜 미디어의 기능이 혼합된 메시지 앱으로 이동했다. 12) Minnie Chan, “'Unforgettable humiliation' led to development of GPS equivalent” South China Morning Post, 2009.11.13. https://www.scmp.com/article/698161/unforgettable-humiliation-led-development-gps-equivalen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Back The Cultural Ontology of Games: Lowborn, Technology's Darling, Participatory Culture 01 GG Vol. 21. 6. 10. Some ten-odd years ago, I had occasion to deliver a new-business pitch built around the keyword "metaverse" before the chairman of a major conglomerate—the kind of name you would recognize. It was the era when Second Life , the virtual world built by Linden Lab, was drawing attention under that very banner. The general manager from the conglomerate who was preparing the proposal alongside us kept giving our team the same warning: "The chairman truly detests games. He won't even let his own children play them. So our proposal for this new venture must never, under any circumstances, look like a game. In the presentation, we can't write so much as the 'g' in 'game.'" And yet—of all things—our concept was a fusion of a metaverse authoring tool in the vein of Second Life with an MMORPG along the lines of World of Warcraft , then at the height of its popularity. Because the chairman so disliked games, the core elements—the game mechanics and the like—were first swapped out for the phrase "fun factor," then for the English word "funness," and in the final version dropped altogether. The package was dressed up as a metaverse, of course, but here was software that plainly contained game-like elements designed to draw users in, and the fact that it could not be called a game was deeply ironic—and, at the same time, revealing of a double standard toward games. * Second Life . The mindset that wants to build a new platform like the metaverse and amass wealth from it, yet insists the platform's service must never be a game, belongs to the same logic that judges games and the act of playing them to be, by ordinary social standards, worthless and of no use. Latent in this aversion to games is the perception that games are culturally without value. Studies have shown that the more ignorant of games a person is, the more negatively they tend to regard them; yet this game phobia, crossing every generation and age group, has treated games as a fundamentally lowborn culture. Watching a film or listening to music counts as rest and as an investment toward the labor to come, while playing a game is dismissed as a waste of time. The many game regulations spearheaded over the years by politicians, the media, women's organizations, and religious groups—the Shutdown Law (a nighttime gaming curfew for minors), the cooling-off system, the proposed game-addiction bill, the move to register gaming addiction as a disease code—have done much to cast the game, as a new medium, as something at odds with established social values. Beneath the surface lies a mainstream society—politicians and media included—that is, in part, afraid of the younger generation who play these games. Korean society has long held up, as its ideology, an obsessive valuation of education and labor above all else.[1] It has therefore always made scapegoats of the various forms of popular culture that pull one's children and family away from the arena of study and work. If comics and animation were the scapegoats of the 1970s and '80s, then from the 1990s on—once games had settled in as a common form of popular culture among teenagers and twenty-somethings—national regulation and media criticism of games followed. Looking at what underlies this backlash, one can surmise that the reaction was so strong precisely because games had been more widely loved than other media. According to the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 the game participation rate across the population reaches 70.5 percent.[2] Among them the rate for teenagers reaches 91.5 percent, with those in their twenties at 85.1, thirties at 74.0, forties at 76.6, and fifties at 56.8—showing that games are enjoyed across nearly every age bracket. The industrial growth and sheer scale Korean games have achieved since the 2000s have come to overwhelm every other category of cultural content. And yet the pride felt by those who work in the industry appears remarkably small. In May 2019, when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unanimously approved registering gaming disorder as a disease code, a range of opposing movements arose in Korea as well, led by the game industry, academia, and trade associations. One campaign raised at the time, unfolding mainly on social media, hoisted the slogan: "Games are not a disease. Games are culture." A pastime played by more than 70 percent of the population could hardly fail to be a form of popular culture—yet the campaign drew no broad support from game users online. This was because most of the industrial contribution of a sector with annual revenues exceeding 15 trillion won had been built on probability-based items (loot boxes) and enhancement systems. As the so-called "pay-to-win" system—where whoever pays more secures a more advantageous position—became the mainstream of the domestic market, the very users who had always sided with the industry over the Shutdown Law, the cooling-off system, and the game-addiction bill now turned their support into petitions demanding that the industry be regulated. Underlying this "games are culture" movement, led by industry, academia, and trade bodies, was a sense of grievance at having long been treated by society as a fundamentally lowborn culture. For in declaring "games are culture," the makers of games effectively conceded that, by common consensus, games had until then amounted to a culturally deficient form. Perhaps this inferiority complex surfaced because of the domestic industry's original sin: probability-based items and enhancement systems. But because most of the affirmative cases one could cite for games-as-culture were drawn from abroad, the claim won little echo even among game users, and ended as a movement internal to the industry. Still, I find myself wondering how things might have gone had the industry, instead of merely projecting resolve, responded with a little more composure. Had it acknowledged that outside perceptions of games were poor while also showing some willingness to reflect on the very things—probability-based items and the like—that keep games from being seen simply as culture, users would have regarded it far more favorably than they do now. Instead, two contradictory desires—to make money as money, and to be recognized as culture—became entangled, giving rise to the question: "Games are obviously culture, so why should we have to be recognized as culture by anyone?" That games became such a contentious medium owes, as Miguel Sicart has pointed out, to the fact that games carry rules that prompt action.[3] This prompting of action is at once the decisive difference that sets games apart from other media and the mechanism that, having induced an action, compels the player to fix attention on the next situation in the chain. Unlike other media, the game carves out—for the player—a gap of time and space for the player to enter, and has the player fill that gap. From the player's side, the time and space within the game become a stage one must step into, fill, and act upon. In this way games have created an environment that offers users a space to participate while drawing them into sustained immersion. * A scene from This War of Mine . The actions that occur within a game, moreover, are necessarily bound up with the appraisal of value. Because a game can induce its users to perform particular actions, it functions as a powerful persuasive medium, one that urges specific conduct. It is no accident that the past decade has seen a rapid rise in social impact games, which call on players to attend to a range of social problems. As is always noted in discussions of the genre, the examples are not only foreign ones like This War of Mine or Missing . At home, too, social impact games have been actively produced and have taken prizes at major indie game contests: the Unfolded series, which centers on the tragedy of the Jeju April 3 incident (the 1948 suppression and massacre on Jeju Island); 21 Days , a simulation of Syrian refugees trying to settle in Germany; and Pechka , which traces the life of Choi Jae-hyung, who l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Russia's Maritime Province. As games' expressive power grows more refined, and as techniques for systemically persuading the player circulate among developers, the game is being reborn as the most effective medium for communicating with—and persuading—a new generation. To probe the question "Are games culture?" more closely, then, we first need to distinguish between "games" and "gaming." "Gaming" is the act of actually playing a game, but it is also a concept that encompasses the many activities appropriated around play—watching game streams on YouTube or Twitch, sharing information and impressions on game webzines, and so on. In other words, a game is in itself a cultural product carrying a certain value, and it is only through the process of gaming that it becomes a cultural mode of conduct. Before gaming became a universal cultural mode, it existed as an alternative to mainstream culture, within the bounds of a subculture epitomized by the otaku; but now, when more than 70 percent of the population takes part in playing, the game has become the single most representative popular medium of our time. In that process, to be sure, the tightly belonging subcultural identity once embodied by the otaku has loosened and weakened somewhat. With the arrival of online networked environments in video games, users became able to form communities within games and to sustain social activity, exchanging views in real time. Since the advent of the smartphone, such game-borne social activity has overrun the limits of time and space and is dissolving the boundary between work and play. Every day, tens of millions gather on YouTube, Twitch, and Discord to watch and debate one another's play and to produce entertainment of their own. Sandbox and metaverse platforms like Minecraft and Roblox teem with countless sub-games and missions made by users themselves. Recent gaming culture has steadily evolved away from the solitary, stand-alone game toward forms that draw out the user's active participation. As the recent metaverse boom flared up again, it brought to mind a Japanese animation I personally enjoyed, Den-noh Coil . Set around 2025–26 in the fictional Japanese town of Daikoku, the work follows the entangled fates of two schoolgirls who transfer there—Okonogi Yuko and Amasawa Yuko. Though made in 2007, it features, as if foreseeing the future, AR glasses that connect to the internet at any moment as a central motif. The story arrives at catastrophe: the games and pranks carried out through the glasses move beyond the characters' romantic entanglements to generate trauma and, in the process, to threaten the lives of those who use them. The parents try to confiscate the glasses, and at this point the protagonist Yuko and her friends offer a message of their own—that, having once dwelt in that world and come to know it, they cannot go back to how things were. Is our own life not much the same? Having already experienced the world of games, we can no longer return to the age before them. What remains, then, is only the task of enduring and accepting both the sweetness and the pain that games have wrought. * A scene from Den-noh Coil . Having stepped inside the game, can we ever step back out? [1] Lee Dong-yeon, "Who's Afraid of Games?," in Game Phobia (Seoul: Communication Books, 2021), 78. [2]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2020), 495–496. [3] Miguel Sicart, The Ethics of Computer Games , trans. Kim Gyeom-seop (Seoul: Communication Books, 2014), 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 Back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26 GG Vol. 25. 10. 10. 크래프톤, 게임문화재단과 게임비평잡지를 창간하면서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넣은 아이템이 게임비평공모전이었다. 게임비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보다, 비평임을 자처하는 글들을 뭉쳐 가면서 천천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과정이 있어야만 편집장이 가진 특정한 비평에의 고집이 좀더 다양한 지평에 선 비평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모든 종류의 사고와 글쓰기에 뛰어들기 시작한 AI에 대한 고민 4회 공모전 응모작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트렌드가 AI의 개입이었다. 절반은 의심이고 절반은 확신이다.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기초적인 글쓰기의 기술적 측면에서 큰 폭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글을 못 썼다’라는 이유로 예심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오늘날의 글쓰기, 특히 공모전과 같이 심사가 곁들여지는 형식의 글쓰기에는 AI의 강한 개입이 나타난다. 나는 글쓰기에 있어 도구로서의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원론적 입장은 아니다. 두 가지 이유로부터인데, 첫 번째는 더 나은 정보와 전달력을 위해 향상된 효율의 도구를 활용하는 것에는 오히려 적극적일 필요도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설령 인공지능과의 협업에 의한 글쓰기를 반대하더라도 이를 공모전과 같은 심사 체계에서 완벽하게 필터링할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다만 말그대로 심사가 이뤄지는 공모전이기에 이는 단순히 합격 – 불합격의 문제를 떠나 애초에 이 공모전을 시작했던 이유까지를 거슬러 되짚어야 할 순간을 만들어낸다. 게임비평웹진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의 목적은 당연하게도 신진 필자 발굴과 육성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주최측의 목적일 뿐, 응모자 입장에서도 반드시 ‘내가 게임비평을 쓰겠어!’라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그저 상금과 스펙을 위해, 누군가는 연습삼아 참가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AI가 개입할 경우 주최측의 고민은 조금 더 깊어진다. 우리가 찾는 것은 게임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꾸준하게 가져갈 수 있는 필자이지만, 그 꾸준한 관심과 통찰을 AI라는 도구를 통해 충분히 가장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고 시상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해당 필자를 지속적으로 게임비평 담론을 생산해내는 사람이라고 짚어내기는 어려워진다. 이런 고민은 비단 게임비평 뿐 아니라 아마도 다른 모든 류의 글쓰기 공모전에서 공통적으로 떠안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GG 공모전은 적어도 GG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계속 지속될 예정인데, 앞으로 모든 심사에서 AI가 던진 이 새로운 고민인 지속가능한 게임비평 필자의 발굴이라는 고민은 더욱 심사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한 응모자 집단 4년째 비평공모전을 이어 오면서 확인한 또 하나의 변화는 헛스윙이 줄어들고 있다는 흐름이다. 1회 공모전에서는 상당수의 응모작이 GG의 정체성과 잘 맞지 않거나, 혹은 아예 게임비평과 무관한 글들이었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나온 주제는 “게임을 마약으로 치부하는 한국사회”, “확률도박이나 만드는 한국게임”, “페미가 게임을 망친다” 였다. 이런 주제들은 주최자의 기운을 빼곤 한다. 애초에 GG가 뭐하는 곳인지 글 하나도 보지 않고 응모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4회째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주제의 응모가 거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나름 길다면 긴 역사에 탑승해 흘러온 결과일 것이다. 적어도 게임제너레이션이라는 웹진이 어떤 글을 쓰고 있고,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해 주는 변화로 보인다. 일반적인 리뷰가 아니라 비평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비평웹진의 독자 수는 아무래도 대중적이기는 어려우며, 이런 경우 독자층은 상당부분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 혹은 의지를 가진 집단과 겹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GG는 과거보다는 좀더 올라간 인지도를 갖게 되었고, GG의 방향에 맞춰 글을 쓰거나, 혹은 GG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아예 응모를 피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 이번 4회 공모전의 결과다. 아직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게임비평의 문제를 넘어 모든 종류의 비평 자체가 과거보다 허약한 대중성으로 인해 사그라드는 추세 속에서 이러한 흐름이 나타난다는 것은 나름 긍정적인 신호다. 아직 사회적으로 다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흐름에 공감하고 게임비평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자 하는 일련의 그룹이 존재하고, 그 존재감이 다소 뭉툭하지만 하나의 덩어리로 만져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지난 4년의 작업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게임비평이 활성화되고, 대중문화 담론에서 갑작스럽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당장 비평의 필요성을 말하는 입장에서 추구해야 할 과제는 큰 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씨 하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나가는 일이다. 언젠가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지금 살려낸 불씨 하나로 비로소 유의미한 불을 지펴낼 수 있는 불지킴이로서의 역할이 비평 전반이 죽어가는 시대에 비평을 생각하는 이들이 첫 손으로 꼽아야 할 일일 것이다. 과도한 무거움 언제가 될 지 모를 시기를 위해 비평의 불씨를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현재까지의 게임제너레이션과 게임비평공모전에 남는 다소간의 아쉬움은 필요보다 과하게 무겁다는 점에 있다. 이는 좀더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냥 무겁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보다 과하게’에 방점을 찍은 무거움이다. 나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간혹 불필요하게 두꺼운 학술의 옷을 걸치려 하는 일련의 글쓰기 습관을 경계하곤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 학술의 옷이라는 건 말그대로 옷처럼 대중 앞에 설 때 쉽게 발가벗기 어려운 일종의 습관이 함께 따라붙는다. 비평이라는 글쓰기가 상당부분 학술적 글쓰기가 일반적인 학계를 통해 학습되는 문제도 있고, 애초에 ‘진지하게 글쓰기’라는 방식에 묻은 스타일 자체가 그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비평이 꼭 학술적이어야 할까?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GG와 공모전의 글들은 학술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학술적인 스타일의 글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중성과 학술성의 가운데를 자임한다고 늘 이야기하는 웹진이지만 막상 거기 실리는 글들의 논지에 대한 근거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학자의 주장을 각주로 다는 것으로 갈음하곤 한다. 특정한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일련의 메시지와 감정들을 재해석하고 설명하는 데 반드시 다른 ‘학자’의 주장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저 손쉽게 남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일종의 잘 갖춰진 우상을 등 뒤에 두고 자신의 해석을 풀어가는 것은 아닐지 경계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글의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불씨를 살리는’ 일과 맞닿는다. 정작 게임비평의 확산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대중적으로 퍼져나가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 같은 글들만이 쌓여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 필요한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적절한 순간을 위해 대비해 온 결과가 맞을까? 이론과 근거를 쌓아나가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GG같은 웹진이 할 일이 아니라, 별도의 재정과 인력을 굴리며 그런 일을 하도록 사회적으로 자리매겨진 ‘학계’가 해야 할 일이다. GG는 아카데미가 아니며, 아카데미어야 할 이유도 없고, 아니 더 나아가 아카데미가 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비평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아주 단순하고 과감하게 요약하자면 결국 모든 비평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 세상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방안을 찾아낸 뒤 이를 세상 모두에게 알리며 공감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비평은 때로는 텍스트를, 때로는 수용자를, 때로는 씬 전반을 주목하지만, 그 주목의 대상이 무엇이건간에 원론적 의미에서의 목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속성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게임에 대한 비평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게임이라는 매체가 등장하고 나름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겪으며 인간과 사회는 게임을 통해 소통하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몇몇 사례들을 통해 게임이 인간을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변화시킨 과정을 목격했고, 반대로 인간이 게임을 새롭게 만들며 더 나은 세계, 혹은 더 어두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동시에 목격했다. 게임비평의 근본적 목적이라면 이 변화가 보다 인간과 사회 전반을 위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방향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을 것이다. 고작 게임 비평 가지고 무슨 거창한 이야기냐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본래 모든 비평의 목적은 그리로 향하는 법이다. GG가 지향한다고 늘 말하는, 학술성과 대중성 사이라는 지향은 사실 이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깊은 성찰을 요하면서도 그 결과가 단지 소수의 그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두에게 향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갖춘 통찰이 게임, 그리고 게임을 넘은 세상 전반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GG 창간의 목적이었고, 아마도 이런 입장에 공감하는 많은 필진들의 목적과도 유사할 것이며, 이런 작업들과 함께 나아가는 비평공모전의 지향과도 총론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년에 열릴 제 5회 공모전에서도 이런 지향이 좀더 많은 동지들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종교성과 게임성은 양립할 수 있을까? - 예수 시뮬레이터

    예수의 몸에 들어온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목수의 체력을 갖고 계심에도 예수님은 파쿠르는커녕 사다리도 타지 못했다) 과연 예수가 ‘낙뎀’을 받는지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아쉽게도 역시 신은 낙뎀을 받지 않았다. < Back 종교성과 게임성은 양립할 수 있을까? - 예수 시뮬레이터 30 GG Vol. 26. 6. 10. 올해 4월, 와 라는 두 게임이 게이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제목만 보아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이 게임들은 출시 전부터 리뷰어들과 게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게임을 해본 기자들은 개신교, 불교, 가톨릭 등 자신의 종교적 배경을 밝히며 이 게임의 의의와 한계를 이야기했다. 사실 종교적 소재가 게임에 등장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종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가진 IP이기에, 종교의 세계관과 인물, 서사는 게임으로 다루기 좋은 소재이다. <디아블로> 시리즈도 기독교의 천사와 악마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차용했고, <신들의 전쟁(Fight of Gods)>처럼 본격적으로 신을 등장시킨 게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두 게임이 이슈가 된 것은 게임이 예수의 실제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이점 때문이다. 두 게임은 예수를 모티브 삼거나 하나의 IP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1] 에 나오는 그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을 게임 안에서 플레이로 재현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아니, 그 전에 근본적으로 게임은 행위성(agency)을 중시하고, 성서는 전개와 결론이 정해져 있는데, 종교성과 게임성은 양립 가능한가? 스스로를 종교연구자이자 게임연구자로 정체화하는 나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종교의 게임성 예수의 몸에 들어온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목수의 체력을 갖고 계심에도 예수님은 파쿠르는커녕 사다리도 타지 못했다) 과연 예수가 ‘낙뎀’을 받는지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아쉽게도 역시 신은 낙뎀을 받지 않았다. * 낙뎀을 받기 위해 높은 지형에서 점프하고 있는 예수 이 질문은 종교적으로도, 게임적으로도 중요하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는 온전한 신성을 가진 신으로 규정되었지만,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양성론(兩性論), 즉 온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라고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고증하고자 했다면, 예수는 낙뎀을 받아야 했다. 데미지를 수치화할 필요는 없겠지만,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쉬운 점은 이 게임이 추구하는 자유도의 한계가 체감되었다는 점이다. 신성한 예수의 생애를 따라가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낙하 데미지는 불필요한 기능일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증명하듯, 마우스와 키보드를 눌렀지만 예수는 그 흔한 펀치조차 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성서는 너무 유명한 IP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문자(성서)로도, 음성(설교/강론)으로도, 영화와 드라마로도 이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그러면 제작자는 성서를 굳이 게임으로 만들었을 때 뭔가 다른 경험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게임성’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려면 너무 많은 학술적 논의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져야 하겠지만, 게임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 지점에서 콘텐츠와 유저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행위성을 기대했다. 한 점 한 획도 건드릴 수 없는 완전무오한 성서의 텍스트이지만, 게임으로 재현한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도는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게임 모두 [2] 그러한 자유도는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으로의 특수성을 발견한 부분은 자유도가 아닌 다른 영역이었다. 캐릭터의 자유도가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의아하게도 는 오픈월드 필드를 구현하고 있었다. 다음 퀘스트를 하러 가는 것 외에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일이 구현되어 있지 않음에도 광활한 유대 광야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비록 퀘스트 지역을 벗어나면 패널티가 주어진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게이머라면 이를 참을 수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나 역시 광야의 한계를 향해 달려나갔다. * 우측 상단에 보이는 믿음 수치 그렇게 계속 퀘스트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면, 성령이 만류하면서 ‘믿음’ 수치가 떨어진다. 맵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며 믿음이 다 떨어져도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자유도는 역시 없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믿음이라는 수치 자체이다. 이 게임에서 ‘믿음’은 변형(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등의 기적), 치유, 퇴마, 부활, 신의 시선 [3] 이라는 ‘스킬’(?)을 쓸 수 있게 만드는 ‘마나’와 같다. 그리고 이 마나통은 신자 수에 비례해서 올라간다. 물론, 실제로 게임 내에서 마나의 부족으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기적 스킬은 퀘스트를 통해 해금되고, 퀘스트를 하면 신도 수가 자동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같은 게이머들이 자발적으로 방황하여 길 잃은 양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클릭으로 기도를 하면 믿음 수치가 차오르기 때문에 예수가 믿음이 부족하여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음과 신자 수라는 이 성장 요소는 게임으로서의 특수성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 생활을 깊게 해본 사람이라면, ‘신앙이 수치화되면 좋겠다’는 바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경을 읽고 108배를 올려서 내가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특히, 신앙이 일종의 상징권력으로 작동하는 종교 환경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개신교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 자신의 신앙을 자신이 확신하고 또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목사든 초신자든 누구나 불안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앙이 지금 온전하다고 확언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에 새벽 기도 참석은 10 경험치, 성서 통독은 1500 경험치를 얻고, 레벨 10을 달성하면 방언의 은사를, 20을 달성하면 방언 통역의 은사를, 100을 달성하면 신유의 은사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누구든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신앙의 성장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신앙인이라면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 아니더라도 어릴 적 한 번쯤 참석해 본 달란트 잔치는 이러한 인간적 욕망의 표상이기도 하다. 달란트 잔치가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 교회에 시스템적으로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교회를 나오고 얼마나 열심히 참석했는가에 대해 즉각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달란트 잔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주일학교 교육에서 종교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되어 왔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달란트를 물질적 보상과 연결짓는 것은 비유의 본래 의미를 역전시키는 셈일뿐더러, 시장 논리로 운영되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앙을 성장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은 일반적이지만,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가시화하고자 하는 욕망은 개신교의 핵심 교리인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로, Sola Gratia)’ [4] 와 충돌한다. 신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행실과 의에 따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원칙에 부합하는 형태이다. 조지 리처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측 가능성과 계산 가능성이라는 맥도날드화의 논리가 교육, 의료, 종교, 여가 등 사회 전 영역으로 침투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종교라는 추상적 활동 내에서 인간은 성장을 추구하고, 또 이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예수의 삶이 게임화되었을 때, 나에게 주는 새로운 경험은 이처럼 원래 존재하던 종교의 게임성을 확인시켜주는 점이었다. 더 좋은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퀘스트를 깨고 사냥을 하듯이, 종교 안에는 원래부터 성장에 대한 게임적 욕망의 구조가 내재해 있다는 것. 물론, 이 게임들이 이러한 점을 잘 캐치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게임의 종교성 애석하게도 이 게임들은 예수의 삶에 성장 시스템을 잘 녹여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보자. 흉악한 조작감과 AI로 만든 것 같은 퀄리티로 인해 는 평가가 좋지 않지만, 는 출시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평가가 ‘매우 긍정적’이다. 자유도나 성장 시스템 등 다방면으로 게임적 재미를 주지 못하고, 기적을 행할 때 반복되는 미니게임은 지루함을 넘어 당황스러움을 안겨주지만, 스팀 후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영적인 체험이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남겨놓았다. 설령 게임성은 다소 부족할지언정, 1인칭 시점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기적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성서를 읽거나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게임에서 어떠한 종교적 체험을 한 것일까? * WASD를 누르는 단순한 미니게임이 게임 내내 반복된다 분명 새로운 점은 있었다. 조기 교육으로 인해 성서의 내용이 매우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듣던 성서의 지명을 지도로 보고 발로 뛰어다니는 경험이나, 막연하게만 상상하던 성서의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재구성되는 경험이 존재했다. 가령,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전 정화 사건은,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성전 뜰에서 환전상과 비둘기 장수들의 상을 뒤엎으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분노한 사건이다. 이를 성서로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읽고 넘어갔는데, 실제로 게임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보니 단순히 상 몇 개 엎었다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와서 따질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거대한 성전의 내외부로 장사꾼들이 많았고 심지어 시장통답게 시끄러운 상황에서 적당한 소란으로는 모두의 시선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게임의 퀘스트는 나에게 여러 개의 동물 우리와 새 우리를 부수게 시켰고, 무엇보다 동물 우리를 부쉈을 때 안에 있던 양과 염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온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퀘스트 달성에만 초점을 두고 이후 처리는 리소스를 줄이는 선택을 하는 반면, 이 게임은 확실한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그려내려 했다. 그런데 이것이 게임이 줄 수 있는 종교적 경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종교적 경험이라기보다 재현의 경험에 가깝다. 성서의 텍스트가 입체적으로 구현되면서 상상력의 공백이 채워지는 경험, 즉 읽고 듣던 것을 직접 보고 걷고 수행하는 경험이다. 초월이나 성스러움을 동반하는 종교적 경험과는 층위가 다르다. 아쉬운 점은 게임의 종교성이 가지는 포텐셜이 단순히 재현의 경험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종교학계에서는 종교와 종교적인 것을 구분하여 사유한다. 종교(Religion)가 교리, 경전, 공동체 등 제도화된 신앙 체계를 가리킨다면,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은 특정 제도 종교에 귀속되지 않더라도 인간이 경험하는 초월, 성스러움,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지향 전반을 가리킨다. 콘서트장에서의 집단적 황홀감이나 스포츠 응원, 정치 팬덤, 명상 앱 등 특정 교단이나 신앙 고백과 무관하게 다양한 종교적인 경험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은 이러한 ‘종교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다.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 며칠 밤을 새 함께 레이드를 성공했을 때 함께 희열을 느낀다거나, <림월드>에서 삶과 죽음,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 등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우연성, 집합 감정, 의미 추구 등 다양한 감각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게다가 게임은 제도 종교 내에서도 다른 방식의 종교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적 경험을 제도나 교리가 아닌 개인의 내면적 경험으로 정의했다. 그는 진정한 종교적 경험은 성경 지식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깨달음을 동반하며, 순간적이고, 비의지적으로 찾아온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관점에서 게임을 만든다면, 신학적으로도 게임적으로도 해괴한 퇴마 시스템이 아니라, 로마 병사의 입장에서 예수에게 못을 박는다거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를 부인하게 만드는 선택지를 제공하여 플레이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강렬한 종교적 경험과 마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배고픈 예수’를 기다리며 이러한 맥락에서 게임을 다시 살펴보자. 게임은 예수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종이나 성서의 사건들, 심지어 길에 심어져 있는 나무까지 고증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라는 CCM에도 나오는 성서의 감람나무는 번역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올리브 나무를 잘못 번역한 것인데, 게임 곳곳에서 올리브 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자연환경을 구현하고자 고민한 것이다. 그러나 재현 자체가 목적이 되면 좋게 보아야 '교육용 게임'이 될 뿐이다. 아니, 교육용 게임이라는 것도 사실 핑계에 가깝다. 비기독교인 지인에게 이 게임의 타깃 대상이 누구일지 물었더니 "기독교인들이 할 게임"이라고 했고, 기독교인 지인은 "비기독교인을 위한 교육용 게임"이라고 했다. 결국 누구를 위한 재현인지 불분명한 셈이다. 재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현에 머무는 한 게임이라는 매체가 가진 가능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역사 교육 도구로 주목받은 것도 단순히 역사를 재현해서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에 플레이어의 행위성과 선택이 개입하면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의미가 생산되었다. 게임을 하는 내내 아쉬웠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게임과 종교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접점이 존재한다. 종교의 게임성, 게임의 종교성 모두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가능성의 영역이다. 특히, 게임은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수행하는 자로 만든다. 그리고 종교는 언제나 수행을 요구해왔다. 기도하고, 절하고, 금식하고, 순례하는 것. 종교적 실천의 핵심은 언제나 몸으로 행하는 데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과 종교는 처음부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이 논의는 게임을 단순히 더 재밌게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 속 예수에게는 허기짐 게이지도, 음식을 먹는 시스템도 없다. 그래서 사탄이 돌을 빵으로 바꾸라던 유혹은 유혹이 아니다. 높은 데서 떨어져도 데미지를 받지 않기에,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도 시험이 아니다. 예수의 광야 시험이 가진 핵심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취약성이다. 그 고뇌가 시스템 안에 구현되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는 결코 그것을 수행으로 경험할 수 없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가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현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다. 배고픈 예수, 낙하 데미지를 받는 예수, 유혹 앞에서 고뇌하는 예수.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게임 안에 구현될 때, 비로소 게임은 재현을 넘어 종교적인 것을 경험하게 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 [1] 일각에서는 '성경'이 ‘성서’보다 더 권위 있는 표현이며 역사적으로도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근거로 '성경'의 사용을 주장하지만, 이 글에서는 1968년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참여한 '성서 공동번역위원회'의 전통을 따라 '성서'로 표기하고자 한다. [2] 상기한 내용은 에 관한 내용이지만, 수태고지부터 시작되는 는 더욱 자유도가 없었다. [3] 이 역시 신학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많은 개념이지만, 넘어가자. [4] 물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나온 개신교 5대 강령 중 가장 핵심적 종교 원칙은 ‘솔라 피데(오직 믿음으로, Sola Fide)’이다. 그럼에도 그 믿음이 주어지고 성장하게 되는 원동력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5] 조지 리처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두고 ‘합리성의 비합리성’이라고 비판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부분 화면 게임 플레이는 어떻게 게임 플레이를 재규정하는가

    그러나 방치형 게임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관습화된 감이 있다. 초창기의 시도가 장르 규칙으로 굳어지면서, 메커니즘(부재 시간의 플레이 편입, 실감 가능한 성장을 가시화하는 대시보드형 인터페이스, 자동화의 단계적 해금 등), 과금·보상 구조(보상형 광고, 프리미엄 가속재 혹은 패스, 온보딩 메타 등), 이용 행태(백그라운드 혹은 세컨드 스크린 소비, 효율 중시 공략 문화 등) 차원 모두에서 자유도 강화나 새로운 실험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보긴 어려운 실정이다. < Back 부분 화면 게임 플레이는 어떻게 게임 플레이를 재규정하는가 26 GG Vol. 25. 10. 10. 방치형 게임의 역설과 관습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은 이용자의 시간과 관심을 두고 벌이는 끊임없는 경쟁의 장이다. 이런 장에서 ‘방치형 게임’류는, 플레이어의 지속적·적극적 개입 없이도 플레이가 자동으로 진행되고 자원·보상이 누적되도록 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통해 주류로 부상했다. 물론 플레이어의 개입이 적게 이뤄진다는 점은, 소셜 게임이나 캐주얼 게임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플레이가 진짜 게임 플레이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방치형 게임을 단순히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을 플레이하는 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기보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플레이되고 있는 방치형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지를 논의하는 일이 생산적일 듯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방치형 게임의 성공은 플레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규정을 수반한다고도 할 수 있다. 방치형 게임의 인기요인은 역설적으로 플레이어의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전통적인 게임에서 플레이가 능동적인 수행을 의미했다면, 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는 자동화를 통해 수행의 필요성을 약화 혹은 무화하고 플레이어의 역할을 시스템 관리자로 변화시킨다. 재미 역시 순간적인 조작의 쾌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 배분과 업그레이드 순서 등 장기적인 성장 전략을 수립하고, 그 결과가 기하급수적인 성장으로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는 만족감에 기인한다. 그러나 방치형 게임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관습화된 감이 있다. 초창기의 시도가 장르 규칙으로 굳어지면서, 메커니즘(부재 시간의 플레이 편입, 실감 가능한 성장을 가시화하는 대시보드형 인터페이스, 자동화의 단계적 해금 등), 과금·보상 구조(보상형 광고, 프리미엄 가속재 혹은 패스, 온보딩 메타 등), 이용 행태(백그라운드 혹은 세컨드 스크린 소비, 효율 중시 공략 문화 등) 차원 모두에서 자유도 강화나 새로운 실험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보긴 어려운 실정이다. 부분 화면 인터페이스의 혁신: <러스티의 은퇴> 사례 등장 그런 중 방치형 게임의 인터페이스 자체를 혁신한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러스티의 은퇴(Rusty’s Retirement)>다. <러스티의 은퇴>는 인디 개발사 미스터 모리스 게임즈(Mister Morris Games)가 제작한 방치형 농장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2024년 4월 스팀(Steam)을 통해 출시되었다. 미스터 모리스 게임즈는 2022년 <로봇 하이쿠(Haiku the Robot)>로 이름을 알렸는데, <러스티의 은퇴>에 그 세계관의 로봇 캐릭터들이 등장해 팬들에게 친숙함을 더한다. 방치형 농장 시뮬레이션이라는 비교적 친숙한 장르를 채택했음에도 <러스티의 은퇴>를 혁신 사례로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니터 일부 화면만을 활용하게 함으로써 ‘게임이 위치하는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가로 혹은 세로 띠 형태로 모니터 하단이나 우측 약 1/3 정도 크기만 차지하도록 설계된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시선만 살짝 옮겨 농장의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간단한 조작을 통해 운영을 할 수 있게끔 한다. 멀티태스킹 디자인을 위해 이용자 인터페이스(UI) 요소도 효율화돼 있는데, 초기 설정을 통해 항상 게임 화면이 다른 창 위에 표시되고, 필요한 정보(로봇 범위 표시나 작물 언락 조건 등)가 마우스 오버 툴팁으로 제공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UI 확대 및 축소, 다른 모니터로 이동, 인터페이스 크기 조정 등의 편의 설정이 지원돼 플레이어 환경에 맞게 화면을 구성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플레이어가 집중할 일이 있을 때 ‘집중 모드(Focus Mode)’를 켜면 게임 속 작물 성장속도가 절반으로 느려지고 그동안에는 농장이 천천히 돌아간다. 집중 모드를 통해 플레이어는 다른 일에 몰두해야 할 때 게임 진행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 않게 하고, 다시 여유가 생기면 모드를 해제하여 정상 속도로 돌리는 식으로 현실 작업과 게임 속도를 조율할 수 있다. 모니터 일부 화면만을 활용하는 공간적 측면만이 아니라, 게임 세계 속 시간적 측면, 그리고 게임 바깥 플레이의 시간적 측면까지를 고려한 설계인 것이다. 시간적 분리에서 공간적 분리로 초기 방치형 게임은 플레이어가 웹 브라우저의 다른 탭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백그라운드에서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확인하는 단순한 즐거움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게임 플레이의 ‘시간적 분리’와 관련된다. 장르가 발전하며 시스템이 복잡해지고 자동화가 도입되면서 게임의 핵심도 ‘효율성의 극대화’가 되었는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방치형 게임들도 플레이어에게 상당한 인지적 부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임을 ‘방치’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더욱 ‘적극적으로’ 최적의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방치형 게임이 기존 게임의 틀을 많이 바꿔놓았음에도 중요한 문제 하나는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바로 ‘화면 점유’였다. 게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어찌 됐든 하고 있던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화면을 전환해 보고 있던 화면에 게임을 띄우거나, 게임이 띄워져 있는 다른 화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러스티의 은퇴> 같은 게임을 통해 이제는 방치형 게임에서 ‘공간적 분리’까지 이뤄지게 되었다. 엠비언트 게이밍과 주변적 노동 기존의 게임은 전체 화면을 장악함으로써 플레이어를 가상세계에 몰입시켜왔다. 그것이 방치형 게임이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였다. 반면, <러스티의 은퇴>는 스스로가 ‘보조적’인 공존을 추구한다. 사용되지 않는 디지털 공간을 게임화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의식적 주의를 포착하면서도 지속적인 심리적 관여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구현했음을 의미한다. 게임이 항상 시야의 가장자리에 존재함으로써, 플레이어는 화면 전환 없이 농장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는 맥락 전환 비용을 제거하여 주된 작업의 흐름을 거의 방해하지 않으며, 기존 방치형 게임이 주지 못했던 플레이어와 게임 사이의 지속적인 연결감을 제공한다. 화면 주변부를 활용하는 디자인은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 게임을 ‘활동’이 아닌 ‘환경’으로 전환하는 이른 바 ‘앰비언트 게이밍(ambient gaming)’ 경험을 창출한다. 화면 한구석에서 로봇들이 움직이고 작물이 자라는 모습은 마치 디지털 분재 같기도 하다. 시각적 자극 역시 주된 인지 부하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낮게 설계되었다. 오히려 복잡한 업무 사이에 이루어지는 짧은 개입(씨앗 심기, 로봇 배치 등)이 마이크로 브레이크(micro-break) 역할을 함으로써 긍정적인 심리적 환기를 제공한다. 시선을 잠시 돌렸을 때 자원이 쌓여있는 모습은 즉각적이면서 작은 도파민 분출을 유도한다. <러스티의 은퇴>는 키오와 리처드슨(Keogh & Richardson, 2017)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백그라운드 게임(background game) 같아 보이기도 한다. 백그라운드 게임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기기나 게임 서버의 처리 능력을 배경에서 사용하며 과업을 진행하고 자원을 축적하는 게임을 말한다. 더욱이 그 백그라운드 게임이 플레이어의 일상, 그것도 일과 여가 사이에 자연스럽게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주변적 노동(ambient labor)’을 수행하게 만든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퀴클리흐(Kücklich, 2005. 1)의 ‘놀이노동(playbor)’ 개념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백그라운드 게임은 플레이어가 단순 반복적인 과업을 수행하거나, 혹은 그 노동을 전혀 하지 않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하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노동 형태의 축약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단순 과업이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러스티의 은퇴>는 이러한 주변적 노동을 통해 명확한 성장 시스템을 제공하며 만족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동시에, 플레이어의 생산성을 배려하는 유희적 설계를 보여준다. 이는 일부 플레이어에게 업무 중 게임을 한다는 심리적 허들을 낮추는 측면도 있다. 은퇴의 미학과 효율성의 아이러니 위에서는 주로 <러스티의 은퇴>가 제공하는 부분 화면 플레이가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기존과는 다른 것으로 바꿔놓는지에 초점을 맞춰 논의했지만, 게임의 테마 자체도 흥미롭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은퇴’라는 테마는 직접적인 스토리텔링보다는 게임의 상황 설정과 플레이 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인 로봇 러스티는 제작사의 전작 <로봇 하이쿠>의 세계관에서 긴 모험을 마치고 조용한 삶을 찾은 캐릭터다. 시·공간 배경은 인류 멸망 후 로봇들만 남은 미래로, 맵 곳곳에 과거 인간 문명의 잔해 위에서 러스티와 동료 로봇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다는 설정이다. 전작에서 기계들이 지배하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그렸다면, <러스티의 은퇴>는 그 세계에서 인간이 사라진 지 오래인 지구를 로봇들이 다시 녹색으로 재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무엇보다 ‘은퇴’라는 테마는 게임 전반에 걸쳐 느긋한 톤으로 구현돼 있다. 러스티가 은퇴한 로봇답게 느릿느릿 움직이기에, 플레이어 역시 서두를 필요 없이 농장 일을 지켜보며 간간이 지시만 내리면 된다. 러스티에게는 이제 급한 일이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 역시 느긋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게임에서 시간 제한요소(계절 변화에 따른 작물 재배, 하루 동안 해야만 할 일 등)가 발견되지 않으며, 어떤 것이든 아무리 오래 방치해 두어도 패널티가 없다. 모든 일을 자신의 페이스대로, 천천히 즐기도록 유도하는 게임이 <러스티의 은퇴>다. 이러한 느림의 미학은 가끔 모니터 구석에 시선을 두고 몇 가지 관리만 하면서 적당히 게임을 즐기려는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식과도 딱 맞아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러스티의 은퇴>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과도한 효율 추구’에 대한 메시지, 즉 지나친 생산성과 효율성에의 강조에서 잠깐 벗어나 한눈을 팔게 만드는 딴짓 거리로도 읽힌다. 하지만 실제 플레이를 살피면 아이러니가 발견된다. 처음에는 여유롭게 시작하는 듯 보였던 농장이 점점 자동화되고 기계화될수록 플레이어는 더 큰 수익과 효율을 추구하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농장이 자동으로 돌아가 저절로 수확이 굴러 들어오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는 은퇴 후에까지 생산성과 최적화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의 삶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임이 이를 가시적이거나 풍자적으로 그리진 않지만, 플레이어로 하여금 방치형 게임 특유의 끝없는 성장에 빠져드는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찰을 유도한다. 요컨대 <러스티의 은퇴>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은퇴 생활의 모상을 제공하면서도, 플레이어에게 스스로 얼마나 최적화에 집착하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이중적 매력을 지니는 게임이다. 게임 플레이의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러스티의 은퇴>는 제약을 통한 혁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게임이 언제, 어떻게 플레이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력을 넓혀준다. 전통적인 게임/플레이 개념에 도전하면서도 새로운 참여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주의력 경제와 디지털 노동의 새로운 형태도 구현한다. 이러한 방치형 게임의 지속적인 변화(혹은 진화?)와 주류 게임 장르로의 편입은, 이들이 단순 틈새 장르를 넘어 새로운 게임 플레이의 장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백그라운드 게임 플레이의 조건 하에서 비물질적 노동, 모바일 미디어 실행, 그리고 게임과 놀이 간 경계가 희미해지는 양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당분간 방치형 게임 ‘현상’과 그 변화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Brendan, K. & Richardson, I. (2017). Waiting to play: The labour of background games.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21(1). Retrieved from https://journals.sagepub.com/doi/full/10.1177/1367549417705603 Kücklich, J. (2005. January). Precarious playbour: Modders and the digital games industry. Fibreculture, 5. Retrieved from http://journal.fibreculture.org/issue5/kucklich_print.html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체인소 맨>의 한국적 수용과 문화적 증폭’(2026), ‘극사실주의의 게임적 재구성: <나는 SOLO>의 상호/텍스트성과 수용구조’(2026),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등이 있다.

  • 부서지는 몸, 나뒹구는 몸 - <스케이트 스토리>와 퀴어한 실패의 미학

    “You Died.”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한 번 이상은 보게 되는 문구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사망에 다다르면 화면은 까맣게 암전되고, 중앙에 붉은 글씨가 떠오르며 죽음을 알린다. 단정적인 선언과 형식은 게임 오버 화면을 밈으로 기능하게 했다. 이는 다시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에 관해 떠올리는 정의와 끈끈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 Back 부서지는 몸, 나뒹구는 몸 - <스케이트 스토리>와 퀴어한 실패의 미학 29 GG Vol. 26. 4. 10. 죽음과 성장의 이분법 바깥에서 “You Died.”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한 번 이상은 보게 되는 문구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사망에 다다르면 화면은 까맣게 암전되고, 중앙에 붉은 글씨가 떠오르며 죽음을 알린다. 단정적인 선언과 형식은 게임 오버 화면을 밈으로 기능하게 했다. 이는 다시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에 관해 떠올리는 정의와 끈끈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어려운 난이도에 대한 성토는 곧장 ‘유다이’라는 표현으로 수렴되고, 반복되는 죽음의 경험은 어려운 게임이라는 평판과 동의어처럼 엮인다. 어떠한 게임에 관한 이해는 그 게임이 형상화하는 죽음과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게임 속 죽음은 플레이어가 과업 수행에 실패했을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부과되는 일종의 처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피격되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맞는 죽음은 실패의 가장 직접적인 피드백으로 작동한다. 이는 단순한 패배의 신호를 넘어, 플레이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구축해 온 세계를 일시적으로 상실하게 각인시키는 경험이다 [1] .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게임 경험을 최적화하기 위하여 죽음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죽음은 무엇이 올바른 플레이인지,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성취하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가늠하게 하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죽음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승리는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수백 번의 사망 끝에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의 보스를 쓰러뜨리는 유튜버의 영상을 관람하던 시청자들이, 그의 고투에 찬탄을 보내는 광경은 게임 스트리밍계에서 전율을 이끌어내는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플레이어의 여러 번의 죽음은 하나의 극적인 성공 장면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겪으며 성장한 플레이어는 고투를 이겨낸 실존적 주체로 긍정된다. <엘든 링>의 스토리텔링과 플레이를 결합해서 논의하려 한 장순호와 최지원은 파편적으로 주어진 세계와, 동시에 여러 죽음으로 산산조각 났던 경험을 수습하는 플레이어 주체를 실존적 인간 영웅으로 호명하기도 한다 [2] . 더 강해진 플레이어, 더 숙련된 조작, 더 큰 보상으로 이어지는 속에서 죽음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순간의 죽음이 다음 플레이에서의 개선이라는 약속 아래 배치된다. 단적으로 ‘You Died’는 한국어권에서 여성 인명인 ‘유다희’를 환기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유다희 양과의 데이트’라는 수식어로 소화하려는 충동을 인터넷 곳곳에서 포착해볼 수 있다. 이러한 수사는 죽음을 여성화된 대상으로 상정하고, 그와 데이트하는 남성적 주체로 플레이어를 위치시켜, 결국 죽음을 친숙하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재현한다. - 2인칭의 ‘유다희’ 이러한 서사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다 보면 게임에서의 죽음 자체를 좀 더 긍정해볼 수 없을까, 하는 물음이 남는다. 축적되는 죽음을 성장 자원으로 삼는다는 골조를 비트는 흥미로운 시도로 를 꼽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은 소울라이크 게임에서 공략당하는 보스의 시점을 전면으로 배치해, 반복적인 살해와 피살의 구도를 뒤집어 본다. 보스를 조종하게 된 플레이어는,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돌아오는 용사를 계속해서 마주해야 한다. 용사는 죽음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장비, 파훼법, 스킬 따위를 들고 오며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이때 게임은 보스라는 2인칭 화자를 통해 1인칭의 용사를 시니컬하게 응시하는 구도를 택한다. 보스로서의 플레이어가 가질 수 있는 공격 패턴은 한정적이지만, 수없이 죽더라도 끝내 승리할 운명이 정해진 용사 사이의 권력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보스-플레이어의 구도를 다소 기계적으로 반전시키는 데에 머무른다. 아마도 플레이어를 가차 없이 살해하던 그 모든 매력적인 살해자들에게 끝끝내 품게 되고 마는 기이한 열락과 애착에서 착상되었을 이 게임의 기획은, 보스와 플레이어가 로맨스 가능한 관계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유다희 양과의 데이트’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구현한 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서 보스가 용사에게 유효한 죽음을 끌어낼 수 없게 되듯, 프롬 소프트웨어에서 죽음을 유도하는 주요한 방식들 또한 장르가 안착됨에 따라 익숙해져 갔다. 독 늪, 화염 피해, 즉사 기믹 등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소울라이크 게임이라면 으레 있을 만한 것으로 예측 가능한 패턴이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죽음은 더 잘 대응하고,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반복 자극으로 수렴되고 만다. 그런 한편으로는 미야자키 히데타카가 <다크소울1>을 만든 이후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된다. 그는 자사의 게임을 두고 ‘마조히즘적’이라고 표현한다 [3] . 그 말에는 자사 게임이 고통을 주고 플레이어를 괴롭힌다는 의식뿐만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틀리고도 기묘한 쾌감의 뉘앙스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숙달과 파훼의 문법 바깥, 실패와 파괴 자체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까? 이에 이번 글에서 삼 엥(Sam Eng)의 게임 <스케이트 스토리>를, 파괴되고 망가지는 경험을 즐기는 여정으로 재구성해 보려 한다. 유리와 고통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된 플레이어가 매 순간 넘어지고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그 경험을 성장의 내러티브로 환원하지 않는 방식에 주목해 보고 싶다. 그렇게 ‘퀴어한 실패’를 다루는 게임인 <스케이트 스토리>를 바라볼 것이다. 유리와 고통으로 이루어진 몸 “당신은 유리와 고통으로 만들어진 언더월드의 마귀입니다. 악마가 당신에게 스케이트보드를 주며 한 가지 거래를 했습니다. 보드를 타고 달로 가서 그것을 삼키면 자유를 주리라는 거래를 말입니다. ...필요한 건 오직 스케이트보드 뿐입니다.” [4] <스케이트 스토리>의 진행 자체는 상당히 단순하다. 제목에 포함된 ‘스토리’라는 단어가 드러내듯,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비교적 선형적인 어드벤처 게임이다. 사건의 연속체로서의 스토리는 특정한 방향성을 전제하고 [5] 지옥에서 달로 향하는 운동 역시 단테적 상승의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구조는 구원과 도달, 위로의 상승이라는 지배적 가치와 잘 맞물린다. 가능한 한 넘어지지 않고 콤보를 최적화하여 피날레를 향해 부드럽게 전진한다면 이 게임의 엔딩을 쉬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플레이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스케이트 스토리>의 후기를 보면, 영 어색한 좌우 조작감과 커맨드의 밋밋한 활용처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많은 리뷰어들이 지적하듯 조작감은 어딘가 미끄럽게 느껴지고, 스케이트 운전의 감각은 끝내 손에 익지 않는다. 테크닉 커맨드를 익힌 뒤에도 그 사용처는 분명하게 요청되지 않는다. 모든 챕터의 피날레에서 플레이어는 달과 경주를 벌이지만, 이 구간은 3~5분 동안 연속 점수만 채우면 되는 단순한 구조에 가깝기에 숙련의 정점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체현하지 못한다. 그 결과 피날레는 종종 허탈한 감상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완벽히 통제되지 않는 조작감은 플레이어를 실패를 극복하는 주체로 영웅화하기보다, 언제나 다시 넘어지고,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는 유리 신체의 상태 속에 머무르게 한다. 더불어 사실적인 중력 구현은 스케이트보드의 조작을 한층 어렵게 만든다. 현실에 가까운 물리감이 몰입을 높이기도 하지만, 난해한 조작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 또한 안고 있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코너링의 난도가 함께 상승하며, 그 상태에서 킥플립이나 그라인드와 같은 다양한 기술 커맨드를 수행해야 하기에 이중의 도전이 된다 [6] . 이렇게 중력에 밀착된 관계는 게임이 형상화하는 넘어짐–파괴의 경험을 극적으로 빚는다. <스케이트 스토리>와 <사요나라 와일드 하츠>(2019)가 게임 오버를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비교한다면, 전자가 플레이어블 아바타가 파괴되는 감각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두 작품은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활용해 리듬 게임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플레이 메커니즘을 지닌다. 게임의 주인공들은 고정된 캐릭터로, 이들은 방이나 침대와 같은 내밀한 실내에서 외부로 뻗어가는 여정을 소화한다. 스테이지화된 시공간을 거쳐 가며 내면과 외면을 넘나드는 기행문적 체험을 공유한다. 한편 <사요나라 와일드 하츠>가 비행, 유영, 오토바이 운전 등 다양한 이동 방식을 통해 음악과 동기화되는 감정의 궤적을 그려낸다면, <스케이트 스토리>는 중력에 밀착된 감각, 즉 보드에서 미끄러지고 박살 나는 느낌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요나라 와일드 하츠>에서 죽음은 장애물과 부딪히거나 투사체에 맞았을 때 화면을 암전시키고는 곧장 리셋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반면 <스케이트 스토리>에서 죽음이 구현되는 방식은 복합적이다. 주인공인 유리 스케이터가 바닥을 구르는 연출은 훨씬 복잡하게 구현되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는 삼인칭의 시점에서 보드를 타는 스케이터의 등 뒤를 따라간다. 그러다 넘어지는 순간, 일인칭에 가깝게 급격히 당겨지고, 시야는 회전하며 바닥을 스친다. 제작자인 삼 엥은 이러한 연출이 스케이트보드 영상을 시청하다 보드에 탄 사람이 넘어질 때 카메라와 함께 시야가 튀고 회전하는 장면에서 영감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7] . 그는 이러한 움직임이 실제로 넘어졌을 때 느꼈던 순간적 감각과 겹친다고 말하며, 게임에서 이 시차적 충돌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디볼버 디지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개발 당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오피스로 이동하다 넘어진 탓에 한 손으로 코딩했던 일화를 나누기도 한다 [8] . 이처럼 가상의 지옥이 빚어내는 낙상은 제작자의 일상과 유리되지 않은 채, 신체와 작업의 질감으로 녹아 있다. 이러한 대목을 마주하다 보면 앨리슨 케이퍼가 고안한 ‘불구의 시간’ 개념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퀴어 시간성을 규범적 생애 리듬에서 벗어나, 어긋나고 비동시적으로 시간을 살아내는 경험의 양식이라고 할 때, 케이퍼는 그와 불구의 시간 사이 “잠재적으로 연결되거나 중첩되는 지점”을 추적하려 한다. 탈골과 같은 신체적 비유는 온전하게 배열된 몸으로부터 어긋난, 몸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시간을 상상하게끔 한다 [9] . 보드에서 떨어진 스케이터의 관절을 어긋나게 만들다 못해 산산이 깨트리는 <스케이트 스토리>는 탈골된 시간을 잠시 시각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닥을 나뒹구는 카메라의 시선은 넘어짐이라는 조건 속에서 새롭게 생성된 후천적 일인칭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본래 쭉 뻗어나가야 할 삼인칭의 도로와 몸의 시야가 잠시 포개어지며, 게임 속 몸과 시간의 어긋남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스케이터의 죽음은 우발적인 미끄러짐이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거듭 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유리와 고통으로 이루어진 언더월드의 마귀는 매끄럽고 반짝이며, 동시에 언제든 깨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균형이 조금만 흐트러지거나 스킬 커맨드의 타이밍을 놓칠 경우 몸에는 금이 가고 부서진다. 애초부터 망가지게끔 설계된 존재에게 넘어지는 것은 예외적인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항상-이미 스케이터에게 주어진 조건에 가깝다. 통상적으로 취약성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해야 한다는, 방어적인 플레이와 직결된다. 상처는 피해야 할 실패로, 파손은 잘못된 플레이의 결과다. 그러나 〈스케이트 스토리〉에서 유리 신체의 취약성은 되레 그 규범이 얼마나 달성 불가능한지 폭로하는 듯하다. 부서지도록 설계된 몸 위에서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요구는 허약한 이상에 가깝다. 취약한 몸은 정상성의 기준을 추락시키고, 기준 자체의 깨지기 쉬운 성질을 드러낸다. 직선으로 순항해야 할 스토리의 시간은 전진을 종용하지만, 몸은 중력에 붙들린 채 미끄러지고 회전하며 흐름에서 이탈한다. 그렇게 구현된, 박살 난 유리 조각들이 큐빅의 파도처럼 바닥을 뒤덮으며 반짝이는 광경은 실패의 시각적 형상화이며 그 자체로 매혹적인 풍경이 된다. 게임이 구현하는 미성숙과 좌절의 경험은 바로 이러한 퀴어한 실패의 감각과 연결된다. 핼버스탬은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에서 퀴어한 실패를 통해 성공/실패의 이분법과 성장 서사, 완결과 성취를 향한 강박 자체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한다. 분명 실패는 불쾌한 경험이며, 핼버스탬은 그와 같은 지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바로 그 일련의 부정적 정동을 이용해 “우리 삶에서 해로운 긍정주의toxic positivity가 지닌 허점을 찾아”내자는 것이 이론의 정치적 기획이다. 실패는 “어둠, 무지, 미완성, 비능력, 파편성”에 머무르려는 선택이며, 이 선택이 “더 창조적이고, 더 협력적이며, 더 놀라운 존재 방식”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0] . 보 루버그는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그리고 에스퍼 율의 『The Art of Failure』가 제목부터 상호 텍스트적 독서의 흥미를 자아냄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가 서로를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루버그는 둘을 연결하여 게임이 어떻게 실패를 유희적이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1] . 실패를 퀴어한 놀이의 양식으로 제안하는 루버그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숙련에 도달하지 못한 채, 어딘가 붕 떠 있는 <스케이트 스토리>의 플레이 경험은 퀴어한 실패의 감각을 조작과 진행의 과정에 걸쳐 퀴어한 실패의 감각을 조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를 긍정하는 활기 플레이어는 유리 스케이터의 취약한 몸을 하나의 렌즈 삼아 그 파편이 흩뿌려진 바닥, 지저 세계를 더듬어 나가게 된다. 데굴데굴 구르며 바라보는 언더월드는 텅 비고 공허한 듯하면서도 기이한 활기가 가득한 공간이다. 핼버스탬은 미술 콜라주 작업을 독해하며 파편성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다. 깨뜨리고 자해하는 퍼포먼스는 반사회적 페미니즘의 미학을 구현하는데, 여기서 신체는 치유와 복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부서져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신체는 부서지는 것을 통해 다른 관계와 정동을 여는 재료로 등장한다 [12] . <스케이트 스토리>의 유리 신체는 깨짐을 통해 비둘기와 개구리, 철학자의 머리 따위가 NPC로 출현하는 언더월드와 친밀히 접속하는 매개가 된다. 그렇게 게임 속 뉴욕은, 그리고 실제 뉴욕과 그곳의 스케이트보딩 문화까지도 겹치며 읽히게 된다 [13] . 게임의 후반부에 이르면 <스케이트 스토리>는 스스로의 구성적 성질을 노출한다. 사탄의 계약이 영원히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스케이터는 붕괴하고 만다. 플레이어는 온 사방에 흩날린 스케이터의 육신 조각을 하나둘씩 그러모으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케이트보드는 못처럼 붙박인 이동기다. 분명 스케이트보드는 그를 지옥의 여정에 묶어 두는 규율 장치이자 애증의 대상이지만, 끝내 놓지 못하는 이동 수단이자 쾌락의 매개로 남아 있다. 파편난 육신이 점차 형태를 되찾아가는 동안, 스케이터는 지금까지 지나온 맵을 요약본처럼 다시 미끄러져 지나간다. 이어서 게임은 아예 프로그램이 세계를 렌더링하는 장면을 일종의 맵처럼 제시해 그 위를 달리게끔 한다. 이러한 자기 응시는 플레이 화면을 매끄러운 연속체가 아닌, 구성 요소를 이어붙인 콜라주처럼 이해하게 만든다. 깨진 유리 육신과 이미 플레이한 여정의 파편들을 재편집해 엮어내는 것이다. 파편성의 미학에 기대어, 이러한 연출을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재료로 배치해 보면 어떨까. “어떻게 이 어렵고도 어이없는 일, 달을 먹는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왜 굳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려 할까요,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요? 왜 굳이 그런 짓을 하려는 걸까요?” 삼 엥은 <스케이트 스토리>를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온 지난한 게임들의 역사 안에 배치한다 [14] . 그에 대한 답을 성장 문법으로 재차 회수하고 싶진 않다. 되레 그러한 게임 속에서 붙들고 싶은 것은 ‘굳이’ 하는 ‘그런 짓’에 몰두하는, 그리고 몰두하게 하는 몸이다. 핼버스탬은 마조히스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마조히스트는 쾌락과 죽음 간의 해소될 수 없다고 가정된 긴장을 해소시키며 자아에 대한 관념을 고통과 상처의 소용돌이에 묶는다. 그는 일관성을 유지하길 거부하고, 죽음에 관한 지식에 맞서 스스로를 무장시키길 거부하고, 그 대신 완패당해 시공간과 욕망에 매인 몸이 되기를 자처한다. [15] ”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언더월드를 배회하는 게임의 마지막 장면은, 완패를 수락하고서 지옥에 매인 몸이 되기를 자발적으로 택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스케이트 스토리>의 나뒹구는 몸은, 일련의 게임들이 제공해 온 영웅적 회복의 판타지 바깥에서, 깨어진 상태에 머무르려는 몸의 고집을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서 긍정해 보도록 유혹한다. [1] Jesper Juul. 2010. In search of lost time: on game goals and failure costs. In Proceedings of the Fif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Foundations of Digital Games (FDG '10).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New York, NY, USA, 86–91. https://doi.org/10.1145/1822348.1822360 [2] 장순호, 최지원. (2025). 소울라이크 게임의 파편화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구 :<엘든 링>을 중심으로. PREVIEW : 디지털영상학술지, 22(1), 06. [3] Michael Thomsen. “Dark Night (After Night After Night) of the Soul: Is a 100-hour video game ever worthwhile?” https://slate.com/culture/2012/02/dark-souls-review-is-a-100-hour-video-game-ever-worthwhile.html에서 인용. 원본 링크 소실. [4] 스케이트 스토리 스팀 상점 설명. https://store.steampowered.com/app/1263240/Skate_Story/ [5] H. 포터 애벗. 우찬제 역. (2010). 『서사학 강의』. 서울: 문학과지성사. 44쪽. [6] 동시에 플레이어가 행하는 달의 파괴 역시 중력과 밀접하다. 최대한 많은 콤보를 쌓아 공격력을 비축해 두었다가, 콤보 동안 축적된 추진력을 데미지로 전환하여 땅을 내리찍으며 충격파를 발생시켜 보스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전투 방식은 파괴의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7] SEDaily. “Skate Story with Sam Eng”. Software Engineering Daily. 2026.03.17.등록. 2026.03.24.접속. https://softwareengineeringdaily.com/2026/03/17/skate-story-with-sam-eng/ [8] DevolverDigital. “Skate Story | A Q&A Sesh with Sam Eng | The DEVELOPER?! OMG”. 2025.12.20.등록. 2026.03.04.접속. https://www.youtube.com/watch?v=4MkT39b2OpM 1분 27초 경. [9] 앨리슨 케이퍼. 이명훈 역. (2023).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파주: 오월의봄. 104쪽. [10] 잭 핼버스탬. 허원 역. (2024).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서울: 현실문화. 15-62쪽. [11] Bonnie Ruberg. (2017). “PLAYING TO LOSE: The Queer Art of Failing at Video Games.” Gaming Representation: Race, Gender, and Sexuality in Video Games, edited by JENNIFER MALKOWSKI and TREAANDREA M. RUSSWORM, Indiana University Press. 202p. [12] 핼버스탬, 위의 책. 279-281쪽. [13] 서핑을 육지에서 대체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었던 스케이트보드는 점차 계단과 난간, 광장 등 도시 기물을 수직적이고 공세적으로 타는 과정을 거치며 하위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뉴욕의 경우, 스케이터들은 공식 스케이트파크보다 박물관 계단이나 공공 조각 주변 등을 도전적으로 재전유하며 도시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구성한다. (Richard Blankman. “A Non-Skateboarder's Skateboarding Guide to NYC.” 2023.12.06.등록. 2026.03.24.접속. https://www.blankmanlist.com/p/skateboarding-in-nyc [14] SEDaily, 위의 글. [15] 핼버스탬, 위의 책. 294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게임이 이야기를 경험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최근에는 <마라톤>을 플레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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