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전쟁, 격리
25
GG Vol.
25. 8. 10.
장면 하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검투사 몇이 경기장에 있다. 다른 검투사 하나가 무기를 들고 입장한다. 새로 입장한 검투사는 적절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상대 검투사들을 하나씩 도륙낸다. 이따금 불필요하지만 화려한 동작도 섞어준다. 관중들이 환호한다. 만신창이가 된 마지막 상대는 이미 전투 능력을 잃고 선 채로 죽어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승자는 화려한 기술로 그를 두 동강 내버린다. 홀로 남은 승자가 된 검투사는 신이 나 있는 관중들에게 분노를 담아 외친다. “Are you not entertained?” 2000년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이다.
장면 둘.
한 남자가 공항 출국 게이트에 있다. 게임 쇼에 참가해 우승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참여를 했다. 게임 종목은 어린이들의 골목 놀이였지만 패배의 대가는 죽음이었기에 남자는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죽는 지옥을 경험했다. 홀로 남아 우승한 남자는 거금을 갖고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갈 참이다. 하지만 게임의 주최측과 연결된 마지막 통화를 끊자 그는 뒤돌아 걸어간다. 그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야.” 2021년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이다.
두 장면의 두 인물은 목숨을 건 게임을 했고 승자가 되어 살아남았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전쟁과 흡사하다. 이들이 일종의 선수로서 게임을 수행했듯, 전쟁은 군인이 선수로서 싸운다. 싸움 바깥에서 싸움을 지켜보는 관중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전쟁의 승패는 그 관중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이들의 게임은 관중에게 영향이 없다. 그래서 전쟁은 일종의 사업으로서 해석되지만, 이들의 게임은 관중에게 유희다.
전쟁과 유희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다 보면, 어떤 네덜란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호이징가 혹은 하위징어로 불리는 이 네덜란드 학자는 자신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문명의 근간은 놀이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분석한 놀이성, 놀이의 특징 중 하나는 규칙으로 시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다. 저녁 먹을 때까지, 여기 이 놀이터 내에서, 얼음땡 규칙으로 게임을 한다는 식이다. 그 시공간을 벗어나면 놀이가 끝나고 놀이의 규칙은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이 특징이 확대되어 제의, 법률, 행정 등 문명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모두가 놀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 네덜란드 아저씨의 고찰이었다.
경쟁과 협동은 놀이의 두 축이 되는 원리이고, 이는 자연에 대해, 인간 서로에 대해 투쟁하는 생존 추구의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제한적인 규칙 속으로 집어넣자 놀이가 되었다. 일상과는 다른 어떤 시공간을 가정하고 거기에서만 통하는 규칙을 만든다는 점은, 인간이 일상의 생존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이성은 생존 너머의 문명을 만드는 근간이 되는 원리다.
현대인으로서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워지는 대목은, 그래서 자본에 포섭되어 시장화한 스포츠는 삶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놀이는 직접 수행하는 방법 외에도 타인의 놀이를 구경하는 방법이 있다. 콜로세움, 오징어 게임, 스포츠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생사를 거는지 아닌지를 제외하면 타인에게 게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자본으로 해석되었다 하여, 관중이 즐기게 되는 ‘보는 게임’으로서 놀이의 본질이 사라졌는지는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콜로세움에서 스타디움까지. 검투사에서 프로 선수까지. 관중을 대신해 게임을 하며 보는 게임을 제공하는 경우는, 싸움-전투-전쟁을 모사하긴 하지만 한 가지 한계가 있다. 소규모 전투의 모사라는 점이다. 격투기가 아니어도 양편이 나뉘어 싸우는 구기 종목이 그 경우다. 축구는 기병과 보병 전술과 유사하다. 농구는 흔히 기병과 궁병 전술에 비유된다. 핸드볼의 전술은 투창 전투와 많이 닮았다. 그렇다면 야구는 포병과 유사할까? 피겨 스케이팅과 같은 점수 경쟁 스포츠는? 하카처럼 전투 전의 의식을 겨루는 모습와 유사하다고 갖다댈 수 있겠다. 유희(遊戲)의 희(戱)는 중국 고대의 전장에서 전투 전에 위세를 겨루기 위해 호랑이 머리를 장식한 기물(䖒)을 창(戈)으로 치는 행위에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여전히 ‘태극 전사’니 ‘상암 대첩’이라는 식으로 전쟁의 용어를 스포츠에 갖다 쓴다. 팀 단위의 경쟁 스포츠는 전쟁에 대한 욕구를 대리 해소하는 용도 또한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적용되는 전쟁의 국면은 전략이 아닌 전술이다.
소규모 전투가 아닌 대규모 전쟁을 경기장 안에서 구현해 전략을 게임화하려면 상당히 많은 권력-자본이 필요해진다. 압도적으로 많은 선수가 필요할 테니까. 혹은 ‘이 말 하나가 사람 천 명이다’라는 식으로 추상화되어 전술과 전투의 재미가 사라진다. 전략을 보는 지적 재미는 추가되지만, 이래선 흥행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리 왕이고 부족장이라도 이런 이벤트를 만들었다간 재미없음 이유로 권좌에서 내쫓길 수 있다. 그래서 대규모 전쟁은 추상화되어 보드 위에 자리잡았다. 바둑, 체스, 장기와 같은 게임은 기물을 선수로 대체한다. 그래서 검투사의 유혈을 보고 공감 능력이 발휘되어 몰입이 깨져버리는, 콜로세움 입장료가 아까운 경우도 없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조감도 시야도 제공한다. 게다가 ‘보는 게임’에 특화된 가까운 경기장과 달리 보드는 ‘하는 게임’이 우선이다.
기술과 장르를 옮겨서 디지털 게임으로 오면, 앞서 있었던 많은 제약이 해제된다. 디지털 게임은 보드 게임의 추상성과 경기장 게임의 구체성을 모두 추구할 수가 있다. 프로세서의 연산 기능을 늘리기만 한다면 소규모 전투와 대규모 전쟁을 각각 혹은 한꺼번에 모사해낼 수 있다. 그렇게 전쟁은 게임이 가장 자주 다루는 소재가 된다. 병사 하나가 되어 전장을 누비는 개인 액션부터 10만 단위의 부대가 점 몇 개로 표시되는 전략까지 가능하다. 모두 바둑, 체스, 장기의 후예들이다.
여러모로 전쟁과 게임은 닮았다. 전쟁의 추동력은 전쟁을 수행하는 두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는 상황이니, 결국 경쟁이 핵심이다. 이기기 위해 군대는 계급에 따른 수직적 분업과 보직에 따른 수평적 분업을 수행한다. 분업이 수직-수평으로 직조하는, 협동의 체계가 군대 체계의 핵심이다. 전쟁을 요약하면, 협동하여 적과의 유혈 경쟁을 이기는 것이다. 유혈 부분을 빼면 게임과 동일하다. 게임에서는 1인 플레이의 경우에는 협동이 빠지기도 하고, 역으로 협동이 크게 강조되어 경쟁 요소가 옅어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전쟁의 저 두 핵심을 그대로 매체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결국 차이점은 유혈의 유무다. 싸움-전투-전쟁은 생명을 잃게 한다. 잘 기능하는 사회 구성원 하나를 키우는 데에 사회가 들이는 비용은 시간만 보아도 20여 년 이상이다. 게다가 인간의 공감 능력은 피 색깔만 비슷해도 그 죽음을 안타까워 할 수 있는데, 종까지 같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다. 아무리 증오스러운 적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보고 직접 죽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 좋지 않다. 그러면서 아무 가치도 생산하지 않고 가치를 사용하기만 하니 문명 전체의 손해이기도 하다.
한편 전쟁은 전쟁을 수행하는 사회의 경제, 기술, 행정, 정치의 과실이 그대로 반영된다. 그 찬란한 과실을 갖고 하는 것이 조직적 살인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인 자괴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서 전쟁은 추악하고 또 아름답다. 문명의 정수와 실력이 발휘되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추악함을 최대한 제거하고 아름다움을 가능한 부각시키려면, 죽음을 무시할 수 있으면 된다. 콜로세움에서 죽는 검투사에게서 공감을 거두면 그 게임은 재미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죽음을 제거하기란 어렵고 모두가 공감 스위치를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의 전쟁은 그래서, 호이징거 혹은 하위징어의 해석을 따르자면, 놀이성이 강화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규칙을 두는 것이다. 선전포고를 해야 정식 전쟁이고, 민간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고, 전쟁 중의 약탈과 민간인 학살 같은 것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포로를 정식 신분으로 만드는 등등, 전쟁에 놀이성이라는 족쇄를 채우려고 애를 쓰고 있다. 생사를 건 전투가 오직 전시에만 일어나게 하는 시도다.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놀이성의 특징인 시공간 제한에 의해 게임 안과 밖은 엄격히 구분된다. 콜로세움의 선수, 전장의 병사가 대신 생명의 위협을 받는 대신 제한된 시공간 바깥의 관중은 면제된다. 이미 검투사들을 관중 대신 데스 게임에 밀어넣으면서 인간 문명은 싸움에 놀이성을 부여해봤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약간 불편한 가설도 도출할 수 있다. 전쟁 게임이란 안전해진 사람들의 안도감을 흥분으로 바꾸는 것이 본질일 수도 있다.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액션의 쾌감, 전술의 합, 전략의 수려함은 결국 게임 밖의 나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으므로. 저 사람들이 내 재미를 위해 죽어도, 나는 잠깐 마음이 불편하고 나머지 시간은 즐거우니까. 그래서 보훈은 국가의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된다. 타인 대신 전장에서 목숨을 걸겠다고 나선 직업인들에 대한 예우다.
그럼 인간은 왜 전쟁을 게임에서 재현하고 있을까? 구성원 대다수가 전쟁에서 벗어나 안전한 문명 영역에 도달했으면서, 자꾸 그 특수한 지옥을 가져와 가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인간은 전쟁을 게임 안으로 가두려 하는 걸까?
인류 문명이 전쟁을 국제 사회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가두어가는 한편, 인간은 게임 규칙 속으로 전쟁을 가져오면서 콜로세움을 졸업했다. 현재의 스포츠에서 경기 도중 죽는 선수는 격투기 종목에서조차 극단적으로 적다. 오징어 게임은 어디까지나 은유이지 실제 현실에서 유사한 경기가 열리는 일은 없다. 이제 과거의 검투사 대신 뛰는 현재의 스포츠 선수는 전쟁과 유사한 활동을 할 뿐이다. 따라서 ‘대신 놀아주기’는 전쟁을 가두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은 만들기가 어렵다. 인간이 전쟁을 게임 안에 가두는 중이라면, 오히려 전쟁을 잊거나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재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저 질문을 다르게 바꿔보면, 전쟁은 정말 그렇게 매력적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사실 전쟁의 유혈과 광기를 동경하는 부분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인간은 모순을 사랑한다. 전쟁은 찬란한 동시에 추악하다. 어쩌면 인간은 전쟁, 전투, 싸움, 죽음을 끊을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혹은 끊기 위해 게임 속에서 전쟁, 전투, 싸움, 죽음을 죽이는 중이라고 서술할 수도 있다. 혹은, 삶에서 아주 특정한 때에만 있는 이벤트라면 질병이라고 치환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군인은 전쟁 속에서 전쟁을 해소하려 하는 의사로 비유할 수도 있고,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예방용 백신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으니 답은 아직 없다. 다만 우리 인류가 전쟁이라는 특정 시공간 상황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