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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모랄레스의 정체성과 브루클린이라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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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4. 10.

2024년 3월 27일 소니 애니메이션은 <The Spider Within>이라는 7분 14초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공개했다. 최근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손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현재 소니가 서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스파이더맨은 1대인 피터 파커보다는 2대 마일즈 모랄레스다. 공개된 애니메이션도 스파이더버스를 잘 구현했다는 평을 받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이후 시간선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마일즈의 불안한 심리를 악몽을 통해 보여준다. 파악할 수 없는, 즉 언어로 규정되어 특정한 국면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은 확정된 표상을 갖지 않는다. 마일즈의 불안은 인물(아마도 다른 시간선에서 스파이더맨이어야 했으나 프라울러가 되고 만 마일즈)의 형상을 취하다가 거미로 변모한다. 그의 공포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자격과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었던 셈이다.



스파이더맨은 미성숙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청소년이라는 정체성과 결합된 히어로다. 마일즈의 악몽은 영웅으로서 의무와 자신과 연결된 세계만을 지키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한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작과 끝이 전제된 서사에 기댄 선형적 방식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스파이더맨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장소성에 기댄 히어로다. 그것은 웹스윙을 포함한 스파이더맨의 기술이 가진 매력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곳이 마천루의 숲, 맨해튼이라는 점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를 수식한 다른 표현이 “친절한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에는 특수한 그리고 출중한 능력을 가진 구원자로서 영웅이라는 정체성보다 내가 살고 있는 거리 나아가 도시와 관계 맺는 인간이라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이 인간, 대상,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피터를 설명하는 요소는 뉴욕이라는 보다 공간에 가까운 이미지의 비중이 크다. 그에 비해 마일즈의 정체성은 브루클린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통해 만들어진다.


‘공간’과 구분되는 경험의 축적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부여된 ‘장소’를 구분해서 파악했던 것은 이 푸 투안의 접근법이다. 피터 파커는 퀸즈 출신이다. 그러나 퀸즈로 특정되는 장소보다는 스파이더맨이든 피터 파커라는 인간 개인이든 그의 정체성은 뉴욕이라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도시에서 좌절을 경험하고 의무감을 통해 각성하는 존재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피터 파커에게는 퀸즈가 그의 장소로 자리매김하는 사건이 부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1대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가 너무 오랫동안 뉴욕의 히어로로 활약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와 달리 새로운 세대인 마일즈의 정체성은 동시대의 브루클린이라는 장소와 맞물려 있다. 브루클린은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사망 후에 국회의원이 된 어머니 리오 모랄레스의 장소인 할렘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 말까지 뉴욕 재즈의 중심지는 할렘이었다는 평가가 증명하는 것처럼 할렘은 재즈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가 등장하면서 그 역동성과 흑인 공동체라는 정체성과 결합된 곳이었다. 도난당한 문화 박물관의 악기들을 찾아달라는 퀘스트는 흑인인 아버지와 히스패닉인 어머니 사이의 마일즈가 갖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근간은 문화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가와 그들의 악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문화적인 것을 포함한다. 마일즈 모랄레스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힙합 역시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옛날 음악”이라고 평가했지만 아버지가 좋아했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와 같은 인물들의 계승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마일즈의 표현대로 그것은 과거의 것이기에 새로운(그리고 젊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를 부각하기에 충분한 문화적 서사가 되기 어렵다. 오히려 청소년 마일즈의 주요한 인물 관계는 사이드킥 역할을 하는 강케와 여자친구 헤일리를 포함해 브루클린 비전이라는 학교를 중심으로 확장된 것들이다. <마블 스파이더맨2>에서 수행되는 퀘스트 중 상당수는 두 명의 스파이더맨 중 누구를 선택해 플레이해도 무관하지만 할렘과 브루클린에서 발생하는 퀘스트는 마일즈만 수행이 가능하다. 이 퀘스트들은 그야말로 “친절한 이웃”인 스파이더맨이자 브루클린 비전 재학생 마일즈를 연결하는 것들이다. 브루클린 비전의 라이벌인 미드타운이 훔쳐간 학교 마스코트인 사자 인형 랜스를 회수하기 위해 퀴즈를 푼다든지, 프롬파티에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썸남에게 고백하는 이벤트를 도와주는 일과 같은 퀘스트들은 재학생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건이다. 조력자로 활약하는 스파이더맨은 이들과 함께 브루클린을 경험하면서 영웅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정체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친절하고 (세대적으로도) 가까운 히어로의 표상을 획득한다.


앞서 거론한 퀘스트 중 랜스 찾기는 도시가 도로를 정비하고 건물을 건축하는 기획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퀘스트다. 마일즈는 도시 곳곳의 건물 옥상을 이동하면서 미드타운 학생들이 남긴 메시지를 통해 랜스를 숨긴 곳을 수색한다. 특정 각도로 거울을 움직여야 벽화에 투사되는 메시지는 그 내용보다는 도시에 산재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벽화를 완상하기 위한 매개로 활용된다. 장소의 특수성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마일즈가 이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이는 그래피티 활동가이자 개인 전시도 기획하는 도시미술가이자 그의 여자친구인 헤일리다. 마일즈라는 하나의 인물만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문화적 기호를 헤일리와 같은 인물을 통해 분산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피티나 벽화와 같이 도시 계획과는 무관하게 거리를 수식하는 다양한 예술적 재현을 인식하는 일은 장소가 고립된 공간이 아닌 인간과 다른 인간, 다양한 사물과 연결되어 구축되는 역동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마블 스파이더맨2>은 튜토리얼은 맨하탄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전 시리즈에 비해 브루클린과 퀸즈까지 확장된 맵을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뉴욕에 편입된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브루클린의 공간적 성격은 극적으로 변모했다. 1960년대 쇠락한 제조업의 상징이었고 실업자와 범죄자의 온상과도 같이 여겨졌던 브루클린은 현재는 현대 예술과 디자인의 요람이자 첨단 기술을 가진 신규 기업이 사옥을 건설할 공간으로 선택하는 곳이 됐다. 마일즈가 자신이 살던 브루클린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고 표현한 것은 과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에 살던 마일즈는 어머니 때문에 할렘으로 이사했다.) 아울러 이곳은 1930년대 할렘에 거주했던 흑인들의 상당수가 브루클린 북부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할렘의 장소성과 연장선상에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일즈가 동시대적 현재를 보여주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임을 알 수 있는 장치 중 그가 즐겨 착용하는 헤드셋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음악이다. <마블 스파이더맨2>의 아쉬운 점은 전작 <마블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에는 적절하게 활용됐던 힙합 중심의 OST가 이번 게임에서는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수자이자 방외자로서의 정체성에서 시작됐던 힙합이 대중성과 트렌드를 대표하는 장르가 된 것과 같이 마일즈는 그의 인종적 정체성의 비감에 고뇌하는 인물이기보다는 사교적인 성격의 캐주얼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음악, 나아가 사운드가 그를 견인하는 서사적 기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상기하는 전략이다. OST 선정의 아쉬움에도 미스테리오가 운영하는 코니 아일랜드의 어트렉션 체험과 같은 에피소드는 실소를 짓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클럽 음악을 디제잉하는 마일즈를 통해 미스테리오발 미래 기술을 경험할 수 있다. 피터와 MJ, 해리가 코니 아일랜드를 추억의 놀이공원을 반추하는 것과는 상이한 체험이다.


마일즈의 브루클린 나아가 뉴욕이 그가 경험하는 사건과 관계 맺는 인물들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플레이어에게 뉴욕은 어떤 곳일까? 혹자는 실제 뉴욕을 경험해본 이들이 게임을 통해 재현한 공간을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를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것은 재현물이 얼마나 실재적인(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한 입장에서 개인적인 즐거움은 뉴욕이라는 로컬리티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기호, 이미지, 기술과 같은 매개체의 역할이 수행하는 바를 확인하는 과정에 있었다. 심비오트 둥지가 조형물처럼 서 있는 뉴욕 경관을 윙슈트를 입고 날아가면서 볼 수 있는 경험은 오직 이 게임만이 재현하는 스파이더 세계관에서의 뉴욕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역으로 게임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뉴욕에 대한 궁금증과 미디어 이미지에 기반을 둔 향수를 경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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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강사)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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