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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본토템>과 AI 애셋 시대로서의 2023년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는 대략 60년 정도 되는 디지털 게임의 짧은 역사 내에서도 꽤 큰 지분을 차지할 만큼 ‘근본 있는’ 장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참신한 게임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올해 출시한 본토템 역시 기존 장르의 문법을 더 유저 친화적으로 유려하게 다듬을지언정 이 ‘오래된’ 장르를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탈바꿈시키는 식의 혁신추구형(?) 게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은 디지털게임의 문화적 접근 폭을 넓히고 게임문화를 선도적이고 실천적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필자의 발굴을 위해 아래와 같이 게임비평공모전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게임과 게임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많은 분들의 참가를 부탁드립니다. < Back 06 GG Vol. 22.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 Back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18 GG Vol. 24. 6. 10. 원문: 《奥威尔》:“监视资本主义”时代的政治焦虑.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6494534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2020년 9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딜레마(The Social Dilemma)>가 온라인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다방면으로 확산됐다. 주로 자본주의의 이윤 지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윤리적 감시와 도덕적 성찰이 부족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혼란을 드러낸다. 이러한 플랫폼에서 일했던 여러 내부자들은 여러 유명 사이트가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하고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특정 주제로 시청자를 유도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사람들이 플랫폼용 콘텐츠를 제작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자본 지향에 대한 성찰은 사회적 반응의 한 단면일 뿐이다. 소셜미디어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이해하고 의견을 발표하고 소통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면서, 정보의 정확성과 이견의 포용성 등에 대한 관심은 ‘감시자본주의’에 휘말려 정치적 불안감을 형성한다. 이에 따라 사이버 세계에서의 권위적 경향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상이 됐으며, 근래에는 반복적으로 논란거리로 부각되기도 했다. 2016년 10월 게임 개발사 오스모틱 스튜디오(Osmotic Studios)에 의해 <오웰: 당신의 눈을 떠라>라는 디스토피아 게임이 출시됐다. 2018년 2월, 속편 <오웰: 무지가 힘이다>가 발행됐다. ‘오웰’이라는 감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함으로써 디지털 생활에 잠재된 엄청난 위험을 보여주려는 두 게임의 시도는 게임 제작자들이 인터넷 시대의 정치적 위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특성화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성화된 사회 통제 : 자유국가의 감시계획 이 게임의 내러티브는 ‘더 네이션(The Nation)’이라는 가상 국가에서 일어난다. 불안한 이웃나라 정세와 국내 안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오웰'이라는 극비 감시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정보당국은 해외 지원자들을 조사요원으로 모집해 정보부서 직원의 지도 아래 정부 내 인사들이 열람할 수 없도록 돼 있는 자국민 파일을 감시하고, 사람들의 전자기기를 해킹해 반사회적 인물이나 테러리스트의 혐의가 있는지 검사하도록 한다. 플레이어는 조사관으로서 오웰 시스템을 직접 조작해 각종 혹은 공개적이거나 은밀한 정보 채널을 빌려 이른바 ‘위험 인물'의 사생활 깊숙이 침투할 수 있다. 게임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자유광장 폭발 사건에서 시작된다.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당국은 폐쇄회로 영상을 보면서 경찰 습격으로 형사사건에 휘말린 젊은 여성이 폭발장치 설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한다. 수사관들은 곧 그녀의 가족 정보, 소셜미디어 계정을 수집하여 그녀가 폭발 사건에 관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플레이어들은 용의자를 특정할 근거가 의심스럽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논쟁, 인터넷 친구나 커뮤니티의 정치적 경향이 기록되며, 이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낙인으로 활용될 수 있다. 소셜미디어 및 언론 등의 의심스러운 증거를 통해 조사관은 특정 개인의 다양한 네트워크 흔적과 사적인 채팅 및 전화통화 녹음 내용까지 계속 모니터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에피소드2가 시작되면 회색 영역을 넘나드는 수사 임무 뒤에 있는 권위주의적 권력의 추진력은 더욱 적나라해진다. 같은 시간대에 반정부 블로그 ‘피플스 보이스(People's Voice)’의 라반 바르트(Raban Vhart ) 편집장은 주류 언론을 비판해 두터운 팬을 얻고 있다. 그가 유력지 ‘내셔널 비홀더(The National Beholder)’를 거듭 비난하자 오웰의 수뇌부는 그의 가족까지 수사 대상에 올리기로 하고 바르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한다. 정부 관료는 앞 에피소드에서처럼 조사원의 유죄추정만 시사하는 게 아니라, 조사원에게 직접 위법 증거를 찾아내 체포영장을 발부하도록 한다. * 게임 속 ‘더네이션’에서 가장 권위 있는 뉴스 사이트 ‘내셔널 비홀더’ 흔히 디스토피아 게임의 배경 묘사에서는 권력당국의 사회적 통제 수단을 경계가 모호하고 제지하기 어려운 정치폭력으로 묘사한다. 같은 장르의 게임, 예를 들어 2016년 발매된 <비홀더(Beholder)>의 경우에도 주인공은 도시 세입자를 감시하는 건물 관리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권력을 아래를 향해 무한정 뻗어나가는 공포정치의 풍경으로 연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주의적 상상과 비교했을 때 <오웰>은 국가권력의 구현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하며, 당대 미디어 권력의 작동 논리에 가깝다. 게임 속에서 수사관들은 ‘내셔널 비홀더’ 뉴스 업데이트를 통해 주류 언론의 홍보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유력 언론은 국경 충돌과 테러 사건을 대량으로 보도하고, 헤드라인 뉴스를 통해 ‘더네이션’ 범죄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희소식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 이들은 게임 배경에 대한 설명을 통해 왜 ‘오웰’ 시스템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에 대해 대중의 항의를 받지 않을 수 있었는지 교묘하게 해석한다. 1978년 출간된 <위기 관리: 노상강도, 국가, 법과 질서(Policing the Crisis: Mugging, the State and Law and Order)> 책에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비롯한 버밍엄학파 저자들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국가들이 권위주의적 통제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국에서는 언론 보도로 인한 작은 강도 사건이 대규모의 도덕적·법적 공황 상태로 이어지면서 사회가 갑자기 질서를 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다양한 운동이나 소수민족에 대한 우려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법의 엄격한 집행과 사회거버넌스 정책을 촉구했다. 그러나 홀의 입장에서 볼 때 범죄가 핵심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도덕적 해이 때문도, 사회질서의 혼란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하는 것은 미디어[로 인한] 사태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국 정부 당국이 뉴스 보도에 대해 의도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가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복지국가가 쇠퇴하면서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대중의 동의가 약해지면서 정치운동이 빈발했고, 자본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부족해져 뉴스 주도권에서 상업매체의 방해를 받았다.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긴박한 정세하 다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사회 통제권을 되찾아야 한다. 미디어 사태로 인한 사회적 공황은 일석이조의 훌륭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경찰과 법원 시스템, 주류 언론의 범죄 문제 집중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사회가 갑자기 부정적인 감정의 분출구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이후의 결과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폭력이 예상되는 소외계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정부의 엄격한 사회적 통제를 묵인하게 됐고, 영국 정부 역시 공포에 떠밀려 모인 여론을 바탕으로 언론 통제권을 더 확장했다. 1991년 필립 슐레진저(Philip Schlesinger)가 집필한 에서도 저자는 테러로 분류되는 대형 사건들이 언론 통제의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사건들에서 영국 정부 당국은 언론 보도의 정치적 경향과 내용을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당국이 테러에 대한 해석권을 장악하고 이성적이고 의도적인 납치사건을 비논리적인 테러로 해석하는 데 직접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정부가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앞서 게임 속 ‘더네이션’의 사회 상황을 살펴본 결과, 게임 제작자들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 국가들이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통제의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웰>에서 ‘더네이션’이 위치한 지역은 불안정하다. 이웃나라 ‘파게스(Parges)’에서 오랜 내란이 이어지고 있어 ‘더네이션’은 군대를 파병해 지역 안보를 유지해야 한다. 이 때문에 ‘더네이션’이 더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적 갈등이 첨예하다. ‘파게스’로부터 대량의 난민이 유입되고, 퇴역 군인들이 취업난을 겪으며, 자국의 지식인들은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이런 상황에서 ‘오웰’의 시스템은 주류 언론의 여론에 부응해 사회 통제라는 비장의 수단이 된다. 게임은 시스템 조사관의 관점에서 정보 부서, 반론 단체 및 일반 네티즌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들에 대한 관점과 감정을 반영하며, 이러한 정보는 또한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한 게임 제작자의 개인적 이해를 반영한다. 인터넷 생태계 묘사하기 : 복잡한 개인, 모호한 국가 1. 이견집단의 내재적 긴장감 <오웰>은 디스토피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를 지나치게 편평하게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 반체제 인사들의 경우에도 인물군상을 차별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의 정의만 부각시키기보다는 사회적 환경과 다양한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네이션’의 사회 위기와 권력 통제는 신분 간 격차가 큰 시민들에게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성적인 능력을 발휘해 사회적 위기에 대처한다. 에피소드1에서 정부 정보당국은 ‘생각(The Thought)’이라는 엉성한 인터넷 동호회에 초점을 맞춰 폭발사건의 진범을 찾으려 한다. 수사관들이 이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은 좌편향의 이 집단이 사회 환경에 대한 불만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행동 이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각’의 창시자 에이브러햄 골드펠스(Abraham Goldfels)는 당국의 미디어 거버넌스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청년들을 조직해 미디어 윤리에 대해 토론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정부가 오웰 시스템의 윤리계획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개방적 자세로 이에 참여했지만, 조사원으로서 도저히 임무를 중립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퇴했다. ‘생각’의 동인이었던 해리슨 오도넬(Harrison O'Donnell)은 ‘생각’의 블로그에 여러 차례 글을 올리기도 했지만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다가 주류 언론 ‘내셔널 비홀더’의 칼럼니스트로 변신했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펑크 신분을 감추려 애쓴다. 취업난과 정신질환, 폭력적 저항이 많은 편집증적 사고를 지닌 퇴역 군인 니나 마테르노바(Nina Maternova)는 끝까지 반발을 제기하고 정치문제에 대한 민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유광장에서 폭탄을 터뜨린다. 에피소드2에서 반체제 인사들의 모습은 더 어두워진다. ‘피플스보이스’ 편집장 라반 바르트는 ‘파게스’ 난민으로서 ‘파게스’의 국가적 재난과 개인적 불행은 ‘더네이션’에 의해 의도된 설계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은 그의 음모론에 대한 집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게임 속 ‘피플스보이스’ 편집장 라반 바르트는 “국가기관에 맞선 전쟁을 시작한다”는 글을 게시한다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에 서 있고, 다른 배경과 경력을 가진 반체제 인사들은 단순히 사회적 사명감에 의해 소환되는 단순한 저항자가 아니다. 정치이념의 성숙도에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에이브러햄 골드펠스는 오랫동안 사회비판적 활동을 해온 지식인으로서 당국의 정책에 대해 보다 인내하며 체제 내 개혁의 가능성을 믿었던 반면, 다른 반체제 인사들은 안정적인 정치적 입장가 부재했다. 해리슨 오도넬의 정치적 태도는 급진적인 듯하면서도, 좌절할 때는 현실에 쉽게 고개를 숙인다. 니나와 바르트의 과격 행동은 ‘더네이션’에 대한 위화감과 관련이 깊지만, 그 배후의 가치에 대한 고민은 얕다. 이처럼 내부적 긴장감이 넘치는 인물군상을 부각해 보면, 정부 당국의 미디어 거버넌스 논리를 게임 안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인터넷 시대에 사회 상황에 대한 여러 집단들의 능동적 반응은 편리한 미디어 조건으로 인해 더 쉽게 발견되고, 관심받고 인식되며, 더 큰 사회적 영향을 미친다. 급진적인 반대 의견과 행동이 확산될 가능성을 예상하는 것 외에도, 권력자들은 더 엄격한 사회적 통제를 고려해야 할 ‘강제’를 받을 수 있다.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사회적 리스크 때문에 오웰식의 시스템이 게임에 등장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반체제 인사들의 복잡성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정치적 압박의 저항자로만 보는 것은 정부와 민중 간 미묘한 관계를 적절하게 묘사하기 어렵게 만들고, 국가기구에 대한 게임의 주장을 너무 가볍게 보이게 할 수 있다. 2. 전능한 정부의 이미지 안타깝게도 <오웰>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묘사만큼 국가기관에 대한 묘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으로 인해 게임 내 당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사회 통제 수단 간 관계는 효과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에피소드2에서 ‘피플스보이스’의 조직자 라반 바르트는 ‘더네이션’이 ‘파게스’ 정국에 개입해 현지 내란을 일으켰으리라는 음모론에 사로잡혀 있다. 나아가 그는 ‘더네이션’ 정부가 ‘피플스보이스’에 대한 보복으로 자유광장 폭발 사건을 일으켰고, 자기 아내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오랜 정신적 편집증 때문에 그는 ‘더네이션’ 정부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처음에 수사관들의 시각에서 보면 라반 바르트의 정부 고발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는 파게스에 있는 학교에서 우발적인 폭탄테러를 당했고, 그의 아내는 감시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게 폭발 사건에 연루된다. 하지만 수사가 진척될수록 게임 제작자들은 역설적으로 바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음모론을 따라가도록 구현한다. 그것은 즉, 정부가 조직적으로 바르트를 도발하여 그가 편집장이란 직위를 통해 파게스 선거에 간접 개입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바르트가 받는 항간의 소문들은 모두 오웰 시스템이 주관하는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 속 ‘더네이션’ 정부의 모습은 너무 전능한 나머지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게임은 정보의 홍수가 쏟아지는 인터넷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디스토피아 게임의 진부한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는다. 국가기관은 급변하는 여론 동향과 민중의 반응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미디어에 대한 권력구조의 상실과 관련한 제작자들의 우려를 투영한 측면이 크다. 인터넷의 힘은 실재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인터넷이 겉보기에는 더 큰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이로 인한 개인의 사생활 손실과 사회적 통제 강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있다. 기술과 권력의 불균형에 직면하여 제작자들은 미디어가 사람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믿음이 없기에 <오웰> 역시 권력의 자리에 대해 인식하거나 이입하지 않는다. 또, 끊임없이 확장되는 권력의 미디어 권력,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를 주저하지 않는 미디어 거버넌스의 논리가 부분적으로는 온라인 여론의 복잡성과 실제 영향력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현실에 대해 편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에피소드2는 국가기관의 형성에 대해 전체주의화되기 시작한다. 오웰 시스템은 더 이상 수사관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정보 당국의 리더가 직접 수사에 개입해 바르트의 ‘흑색선전’을 찾아내 ‘피플스보이스’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바르트 가족의 메신저 계정을 해킹해 이들을 체포할 수 있는 불법 증거를 찾도록 독려한다. * 에피소드2의 ‘인플루언서’ 메커니즘엔 댓글러 활용 여론공세로 비판여론 공격하기 기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전체주의적 상상력이 결코 목적 없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필립 슐레진저는 정치폭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막스 베버(Max Weber)와 기든스(Anthony Giddens)를 인용해 자유주의 국가에서 전체주의적 성향은 당국이 정치상황이 급박하다고 생각하고 민중들이 이를 묵인할 때 어떤 국민국가도 도덕적 전체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역설적인 점은 미디어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통해 사회 정세의 긴장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당국에 의해 장악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3. 수사관 모델: 윤리적 계획은 가능한가? <오웰> 플레이의 핵심인 수사관 모델은 이런 현실적 우려에 대한 활로를 모색해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즉 사회적 통제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실제 범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권력의 침투를 피할 수 있는 거버넌스 방법이 있는지 여부이다. 정부 지도자는 ‘더네이션’ 시민들의 사생활 정보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특정 사건이나 집단을 중심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지만, 수사 대상자의 위협성 여부를 판단할 때는 결정적인 의견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비전이 개인에 대한 정치 폭력의 침해를 해결하지 못할 것임을 행간에서 암시하기도 한다. <오웰>의 두 에피소드 모두 수사관들이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취향,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보를 정보당국에 제공하는데, 게임 내러티브의 전개는 복수의 엔딩으로 이어지도록 설정됐다. 반체제 인사들이 오웰의 감시 계획을 폭로했는지, 아니면 오웰 시스템이 사회적 위기를 통제했는지 여부는 수사관의 도덕적 선택에 크게 의존한다. 동시에 권력구조는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도자가 수사관에게 내리는 대부분의 명령은 수사관이 피의자를 유죄로 판단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할 의향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1에서 플레이어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지만 폭발사건에 연루된 ‘생각’의 멤버 카산드라와 니나는 체포된다. 이와 비교했을 때 게임의 엔딩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생각’의 멤버들이 오웰 시스템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성공해 당국이 계획을 취소하더라도 시스템의 계획은 여전히 암암리에 진행된다. ‘더네이션’의 승인으로 수사관이 된 시민은 위험 인사로 기록 및 저장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헤게모니를 다투는 과정에서 갖는 관성 때문에 공식 통제를 받는 오웰 시스템이 중립적 성격의 매개체 기술로 사용될 가능성은 없다. <오웰>의 정치적 불안 결국 오웰의 서사는 스스로가 설정한 딜레마에 빠진다. 이 게임은 ‘더네이션’ 당국의 상징에 대해 제작자들이 온라인 매체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내비친다. 권력과 과학기술의 우위를 쥐고 있는 권력자를 상대로 권위주의적 성향의 사회통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오웰>에는 권위 있는 언론과 일반 대중, 반체제 인사들 간의 상호작용이 매우 단순하게 표현된다. 당국은 유력 매체에 공개된 정보를 통해 항상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하고 적시에 반체제 인사들을 격분시켜 그들이 예정된 계획에 복무하도록 한다.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정치적 힘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비관적 미래상에 더 공감하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인터넷 세계 권력구조 현상에서 취약계층의 저항은 항상 존재할 수 있지만, 강자가 항상 국민의 동의와 묵인을 얻는다면 권력은 계속 확장될 것이다. <오웰>의 게임 상징은 이런 관점의 ‘자기실현’이다. 한편으로 게임 속 네티즌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감정적 집단으로 축소되고, 반체제 인사들은 대중들로부터 공감받지 못하는 외톨이로 묘사된다. 다른 한편, 인터넷 디스토피아에 대한 제작자의 과도한 관심은 인터넷 밖 현실의 표현 공간을 밀어낸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표현을 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사회적 상황에 대한 판단이 결여되어 있는 ‘오합지졸’인 것은 아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냉정한 관점이 어쩌면 진짜 이견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온건한 견해가 일상에서는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주류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술과 권력의 결합이 <오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매우 긴밀하더라도, 우리는 인터넷 세계가 오늘날 정치 지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각종 뉴스와 인기검색어, 상업광고가 전방위적으로 다루는 인터넷 세계는 결국 사람들의 실생활, 실제의 사회적 감정이나 견고한 관점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오웰>에서 표현된 상징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진정한 정치적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터넷 세계에 ‘이용자’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이 부족한 현대인들의 경우에는 정치적 다툼의 공간은 급속하게 축소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헤드라인 뉴스와 감정적인 관점에 의해 빈번하게 끌올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념을 확고하게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견고한 관점을 형성해 주류와 경쟁할 가능성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점차 인터넷에 의존해 정보를 얻고, 자신의 인식을 구축하거나 소통하고, 심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인터넷 세계의 이질적인 권력구조는 긴장감 넘치는 국가-개인 관계를 대체하는 압도적인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오웰>의 엔딩은 이런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스토피아적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닐지라도, 권력에 맞선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현실’과 조심스레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비관적인 인터넷 풍경의 배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의 사회를 봐야 할 것이다. 통제 불능의 폭력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통해 꿈꾸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논리를 보다 정교하게 이해해야 한다. Tags: 빅브라더, 파놉티콘, 전체주의, 감시, 혁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량청린 梁成林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소수자들의 게임에 대한 세 가지 소고

    디지털게임은 한때 ‘소수자’들의 매체이기도 했다. 소수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적은 숫자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게임 초창기에 한국에서 게이머는 소수자에 가까웠다. 전자오락실은 불량한 이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엄연한 자영업장인 오락실에 학교 교사들이 들이닥쳐 ‘손님’인 학생 게이머들을 강제로 끌고나가는 영업방해 행위도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불량한 오락실과 게임 때문에 망가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이 부분은 아직도 유지되는 바 또한 있다) 게임은 눈치보면서 해야 하는, 말그대로 여가오락 문화 부문에서의 소수자 포지션이었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종교성과 게임성은 양립할 수 있을까? - 예수 시뮬레이터

    예수의 몸에 들어온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목수의 체력을 갖고 계심에도 예수님은 파쿠르는커녕 사다리도 타지 못했다) 과연 예수가 ‘낙뎀’을 받는지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아쉽게도 역시 신은 낙뎀을 받지 않았다. < Back 종교성과 게임성은 양립할 수 있을까? - 예수 시뮬레이터 30 GG Vol. 26. 6. 10. 올해 4월, 와 라는 두 게임이 게이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제목만 보아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이 게임들은 출시 전부터 리뷰어들과 게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게임을 해본 기자들은 개신교, 불교, 가톨릭 등 자신의 종교적 배경을 밝히며 이 게임의 의의와 한계를 이야기했다. 사실 종교적 소재가 게임에 등장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종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가진 IP이기에, 종교의 세계관과 인물, 서사는 게임으로 다루기 좋은 소재이다. <디아블로> 시리즈도 기독교의 천사와 악마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차용했고, <신들의 전쟁(Fight of Gods)>처럼 본격적으로 신을 등장시킨 게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두 게임이 이슈가 된 것은 게임이 예수의 실제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이점 때문이다. 두 게임은 예수를 모티브 삼거나 하나의 IP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1] 에 나오는 그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을 게임 안에서 플레이로 재현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아니, 그 전에 근본적으로 게임은 행위성(agency)을 중시하고, 성서는 전개와 결론이 정해져 있는데, 종교성과 게임성은 양립 가능한가? 스스로를 종교연구자이자 게임연구자로 정체화하는 나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종교의 게임성 예수의 몸에 들어온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목수의 체력을 갖고 계심에도 예수님은 파쿠르는커녕 사다리도 타지 못했다) 과연 예수가 ‘낙뎀’을 받는지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아쉽게도 역시 신은 낙뎀을 받지 않았다. * 낙뎀을 받기 위해 높은 지형에서 점프하고 있는 예수 이 질문은 종교적으로도, 게임적으로도 중요하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는 온전한 신성을 가진 신으로 규정되었지만,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양성론(兩性論), 즉 온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라고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고증하고자 했다면, 예수는 낙뎀을 받아야 했다. 데미지를 수치화할 필요는 없겠지만,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쉬운 점은 이 게임이 추구하는 자유도의 한계가 체감되었다는 점이다. 신성한 예수의 생애를 따라가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낙하 데미지는 불필요한 기능일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증명하듯, 마우스와 키보드를 눌렀지만 예수는 그 흔한 펀치조차 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성서는 너무 유명한 IP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문자(성서)로도, 음성(설교/강론)으로도, 영화와 드라마로도 이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그러면 제작자는 성서를 굳이 게임으로 만들었을 때 뭔가 다른 경험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게임성’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려면 너무 많은 학술적 논의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져야 하겠지만, 게임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 지점에서 콘텐츠와 유저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행위성을 기대했다. 한 점 한 획도 건드릴 수 없는 완전무오한 성서의 텍스트이지만, 게임으로 재현한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도는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게임 모두 [2] 그러한 자유도는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으로의 특수성을 발견한 부분은 자유도가 아닌 다른 영역이었다. 캐릭터의 자유도가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의아하게도 는 오픈월드 필드를 구현하고 있었다. 다음 퀘스트를 하러 가는 것 외에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일이 구현되어 있지 않음에도 광활한 유대 광야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비록 퀘스트 지역을 벗어나면 패널티가 주어진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게이머라면 이를 참을 수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나 역시 광야의 한계를 향해 달려나갔다. * 우측 상단에 보이는 믿음 수치 그렇게 계속 퀘스트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면, 성령이 만류하면서 ‘믿음’ 수치가 떨어진다. 맵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며 믿음이 다 떨어져도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자유도는 역시 없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믿음이라는 수치 자체이다. 이 게임에서 ‘믿음’은 변형(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등의 기적), 치유, 퇴마, 부활, 신의 시선 [3] 이라는 ‘스킬’(?)을 쓸 수 있게 만드는 ‘마나’와 같다. 그리고 이 마나통은 신자 수에 비례해서 올라간다. 물론, 실제로 게임 내에서 마나의 부족으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기적 스킬은 퀘스트를 통해 해금되고, 퀘스트를 하면 신도 수가 자동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같은 게이머들이 자발적으로 방황하여 길 잃은 양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클릭으로 기도를 하면 믿음 수치가 차오르기 때문에 예수가 믿음이 부족하여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음과 신자 수라는 이 성장 요소는 게임으로서의 특수성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 생활을 깊게 해본 사람이라면, ‘신앙이 수치화되면 좋겠다’는 바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경을 읽고 108배를 올려서 내가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특히, 신앙이 일종의 상징권력으로 작동하는 종교 환경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개신교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 자신의 신앙을 자신이 확신하고 또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목사든 초신자든 누구나 불안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앙이 지금 온전하다고 확언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에 새벽 기도 참석은 10 경험치, 성서 통독은 1500 경험치를 얻고, 레벨 10을 달성하면 방언의 은사를, 20을 달성하면 방언 통역의 은사를, 100을 달성하면 신유의 은사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누구든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신앙의 성장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신앙인이라면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 아니더라도 어릴 적 한 번쯤 참석해 본 달란트 잔치는 이러한 인간적 욕망의 표상이기도 하다. 달란트 잔치가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 교회에 시스템적으로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교회를 나오고 얼마나 열심히 참석했는가에 대해 즉각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달란트 잔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주일학교 교육에서 종교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되어 왔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달란트를 물질적 보상과 연결짓는 것은 비유의 본래 의미를 역전시키는 셈일뿐더러, 시장 논리로 운영되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앙을 성장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은 일반적이지만,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가시화하고자 하는 욕망은 개신교의 핵심 교리인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로, Sola Gratia)’ [4] 와 충돌한다. 신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행실과 의에 따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원칙에 부합하는 형태이다. 조지 리처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측 가능성과 계산 가능성이라는 맥도날드화의 논리가 교육, 의료, 종교, 여가 등 사회 전 영역으로 침투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종교라는 추상적 활동 내에서 인간은 성장을 추구하고, 또 이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예수의 삶이 게임화되었을 때, 나에게 주는 새로운 경험은 이처럼 원래 존재하던 종교의 게임성을 확인시켜주는 점이었다. 더 좋은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퀘스트를 깨고 사냥을 하듯이, 종교 안에는 원래부터 성장에 대한 게임적 욕망의 구조가 내재해 있다는 것. 물론, 이 게임들이 이러한 점을 잘 캐치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게임의 종교성 애석하게도 이 게임들은 예수의 삶에 성장 시스템을 잘 녹여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보자. 흉악한 조작감과 AI로 만든 것 같은 퀄리티로 인해 는 평가가 좋지 않지만, 는 출시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평가가 ‘매우 긍정적’이다. 자유도나 성장 시스템 등 다방면으로 게임적 재미를 주지 못하고, 기적을 행할 때 반복되는 미니게임은 지루함을 넘어 당황스러움을 안겨주지만, 스팀 후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영적인 체험이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남겨놓았다. 설령 게임성은 다소 부족할지언정, 1인칭 시점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기적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성서를 읽거나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게임에서 어떠한 종교적 체험을 한 것일까? * WASD를 누르는 단순한 미니게임이 게임 내내 반복된다 분명 새로운 점은 있었다. 조기 교육으로 인해 성서의 내용이 매우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듣던 성서의 지명을 지도로 보고 발로 뛰어다니는 경험이나, 막연하게만 상상하던 성서의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재구성되는 경험이 존재했다. 가령,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전 정화 사건은,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성전 뜰에서 환전상과 비둘기 장수들의 상을 뒤엎으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분노한 사건이다. 이를 성서로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읽고 넘어갔는데, 실제로 게임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보니 단순히 상 몇 개 엎었다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와서 따질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거대한 성전의 내외부로 장사꾼들이 많았고 심지어 시장통답게 시끄러운 상황에서 적당한 소란으로는 모두의 시선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게임의 퀘스트는 나에게 여러 개의 동물 우리와 새 우리를 부수게 시켰고, 무엇보다 동물 우리를 부쉈을 때 안에 있던 양과 염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온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퀘스트 달성에만 초점을 두고 이후 처리는 리소스를 줄이는 선택을 하는 반면, 이 게임은 확실한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그려내려 했다. 그런데 이것이 게임이 줄 수 있는 종교적 경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종교적 경험이라기보다 재현의 경험에 가깝다. 성서의 텍스트가 입체적으로 구현되면서 상상력의 공백이 채워지는 경험, 즉 읽고 듣던 것을 직접 보고 걷고 수행하는 경험이다. 초월이나 성스러움을 동반하는 종교적 경험과는 층위가 다르다. 아쉬운 점은 게임의 종교성이 가지는 포텐셜이 단순히 재현의 경험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종교학계에서는 종교와 종교적인 것을 구분하여 사유한다. 종교(Religion)가 교리, 경전, 공동체 등 제도화된 신앙 체계를 가리킨다면,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은 특정 제도 종교에 귀속되지 않더라도 인간이 경험하는 초월, 성스러움,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지향 전반을 가리킨다. 콘서트장에서의 집단적 황홀감이나 스포츠 응원, 정치 팬덤, 명상 앱 등 특정 교단이나 신앙 고백과 무관하게 다양한 종교적인 경험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은 이러한 ‘종교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다.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 며칠 밤을 새 함께 레이드를 성공했을 때 함께 희열을 느낀다거나, <림월드>에서 삶과 죽음,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 등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우연성, 집합 감정, 의미 추구 등 다양한 감각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게다가 게임은 제도 종교 내에서도 다른 방식의 종교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적 경험을 제도나 교리가 아닌 개인의 내면적 경험으로 정의했다. 그는 진정한 종교적 경험은 성경 지식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깨달음을 동반하며, 순간적이고, 비의지적으로 찾아온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관점에서 게임을 만든다면, 신학적으로도 게임적으로도 해괴한 퇴마 시스템이 아니라, 로마 병사의 입장에서 예수에게 못을 박는다거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를 부인하게 만드는 선택지를 제공하여 플레이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강렬한 종교적 경험과 마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배고픈 예수’를 기다리며 이러한 맥락에서 게임을 다시 살펴보자. 게임은 예수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종이나 성서의 사건들, 심지어 길에 심어져 있는 나무까지 고증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라는 CCM에도 나오는 성서의 감람나무는 번역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올리브 나무를 잘못 번역한 것인데, 게임 곳곳에서 올리브 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자연환경을 구현하고자 고민한 것이다. 그러나 재현 자체가 목적이 되면 좋게 보아야 '교육용 게임'이 될 뿐이다. 아니, 교육용 게임이라는 것도 사실 핑계에 가깝다. 비기독교인 지인에게 이 게임의 타깃 대상이 누구일지 물었더니 "기독교인들이 할 게임"이라고 했고, 기독교인 지인은 "비기독교인을 위한 교육용 게임"이라고 했다. 결국 누구를 위한 재현인지 불분명한 셈이다. 재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현에 머무는 한 게임이라는 매체가 가진 가능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역사 교육 도구로 주목받은 것도 단순히 역사를 재현해서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에 플레이어의 행위성과 선택이 개입하면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의미가 생산되었다. 게임을 하는 내내 아쉬웠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게임과 종교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접점이 존재한다. 종교의 게임성, 게임의 종교성 모두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가능성의 영역이다. 특히, 게임은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수행하는 자로 만든다. 그리고 종교는 언제나 수행을 요구해왔다. 기도하고, 절하고, 금식하고, 순례하는 것. 종교적 실천의 핵심은 언제나 몸으로 행하는 데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과 종교는 처음부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이 논의는 게임을 단순히 더 재밌게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 속 예수에게는 허기짐 게이지도, 음식을 먹는 시스템도 없다. 그래서 사탄이 돌을 빵으로 바꾸라던 유혹은 유혹이 아니다. 높은 데서 떨어져도 데미지를 받지 않기에,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도 시험이 아니다. 예수의 광야 시험이 가진 핵심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취약성이다. 그 고뇌가 시스템 안에 구현되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는 결코 그것을 수행으로 경험할 수 없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가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현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다. 배고픈 예수, 낙하 데미지를 받는 예수, 유혹 앞에서 고뇌하는 예수.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게임 안에 구현될 때, 비로소 게임은 재현을 넘어 종교적인 것을 경험하게 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 [1] 일각에서는 '성경'이 ‘성서’보다 더 권위 있는 표현이며 역사적으로도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근거로 '성경'의 사용을 주장하지만, 이 글에서는 1968년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참여한 '성서 공동번역위원회'의 전통을 따라 '성서'로 표기하고자 한다. [2] 상기한 내용은 에 관한 내용이지만, 수태고지부터 시작되는 는 더욱 자유도가 없었다. [3] 이 역시 신학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많은 개념이지만, 넘어가자. [4] 물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나온 개신교 5대 강령 중 가장 핵심적 종교 원칙은 ‘솔라 피데(오직 믿음으로, Sola Fide)’이다. 그럼에도 그 믿음이 주어지고 성장하게 되는 원동력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5] 조지 리처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두고 ‘합리성의 비합리성’이라고 비판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夢としてのクソゲ

    「ファミコンを通じて超能力を開発する」というテーマで開発されたゲームがあった。 1980年代当時の日本の超能力ブームのなか、超能力者として知られていた清田益章氏(通称、「エスパー清田」)が監修した『マインドシーカー』(FC,1989)という作品だ。作中に登場する清田氏の指示をこなし、この作品を遊ぶことで、実際に超能力が使え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た。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Culture Researcher) Inoue Akito (Game Culture Researcher) Sujin Park A graduate student who has stepped into game studies. Currently taking cours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Lately, exploring the varied game experiences mediated by games, as well as subculture within Japan. Writing is still hard.

  • 스팀의 ‘양식화된’ 태그를 통해서 본 예술로서의 게임, 혹은 게임으로서의 예술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2년 전, 그러니까 2014년에 ‘태그’ 기능이 스팀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스팀은 스스로 이 기능을 “새롭고 강력한 게임 구매 방법”이라 설명한다. “지속적으로 부착된 태그는 독립적인 부류로 나누어지고, 모두가 함께 정의한 장르, 주제, 특징으로 나누어진 상품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즉 여기서 ‘태그’는 “장르, 주제, 특징”과는 다른 제4의 분류법이다. 나아가 스팀의 ‘태그’ 기능 소개 페이지는 “어떤 단어로도 태그를 달 수 있”음을 명시한다.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eong-Yi Writes with an interest in the interrelations among violence, suffering, and division. Produced works including Mapping the Affective, Pouring Water into a Poisoned Bottomless Jar, and Monthly Paper, and served as dramaturg for the plays Opera Charlotronique and The Man Who Became a Pillow. Author of Hormone Journal and Game Chorus, and co-author of A Mad, Love Song.

  • 혼자-서 오롯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은 : 싱글 플레이에 던지는 물음

    오래전 어느 PC게임 잡지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칼럼에서 글쓴이는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을 끝내는 것이 아쉬워 엔딩을 앞두고 진행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칼럼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머뭇거림’의 정취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 Back 혼자-서 오롯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은 : 싱글 플레이에 던지는 물음 08 GG Vol. 22. 10. 10. 오래전 어느 PC게임 잡지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칼럼에서 글쓴이는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을 끝내는 것이 아쉬워 엔딩을 앞두고 진행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칼럼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머뭇거림’의 정취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경험해야 할 다른 게임이 이미 많이 쌓여있고 또 앞으로 더 그럴 것을 생각하면 엔딩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그 발걸음을 붙들고 서성이게 하는 힘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은 찾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엔딩을 앞두고 일부러 멈춰 서성거린 적은 없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경험한 특정한 순간들이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코 ico〉에서 게임을 저장하기 위해 ‘요르다’와 함께 처음 소파에 앉았을 때나, 〈Gibbon: Beyond the Trees〉에서 긴팔원숭이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섰을 때가 그랬다. 그 순간들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경험한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리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해당 게임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인 동시에 게임에서 겪은 바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칼럼을 쓴 이의 지인이 마침내 머뭇거림을 지나 엔딩으로 향했건 끝내 멈추었건 그에게도 그 게임의 어떤 특정한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 머뭇거림의 순간을 게임 크리에이터가 의도했을까 하는 새로운 호기심도 생겼다. 게임을 끝내는 걸 아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게이머가 느끼는 만족감이 크다는 뜻이겠지만, 거기서 느낄 보람과 별개로 그 머뭇거림이 크리에이터가 의도한 결과인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 호기심은 굳이 선명한 답을 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호기심을 품는 순간, 게임을 만든 이가 어떤 의도를 품었을지 궁금해하면서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혼자’ 던져보는 경험은 중요하다. 게임 플레이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인 ‘싱글 플레이’는 한 사람의 게이머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련의 과정을 혼자 진행하는 것을 의미 한다. 싱글 플레이의 의미는 게임을 만들고 즐기는 방식이 확장되는 변화와 함께 달라져 왔다. 흥미로운 것은 그 변화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싱글 플레이가 게임을 하는 본래의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출발하면 간단하다. 메인 메뉴에서 게임을 새로 시작할지 이어서 할지 선택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 방식의 전부였던 시기가 있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코옵 플레이’(Cooperative Play)를 생각하면 싱글 플레이의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램페이지Rampage〉나 〈황금 도끼Golden Axe〉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플레이하거나, 〈스코치드 어스Scorched Earth〉처럼 차례를 기다리며 순서대로 플레이하는 등 다른 유형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련의 과정을, 같은 장소에서 진행한다는 점에서 싱글 플레이에 포함된다. 싱글 플레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는 네트워크에 있다. 싱글 플레이와 대비되는 용어인 ‘멀티 플레이’가 대표적이다. 같은 장소나 가까운 범위 안에서 유선 통신망으로 기기들을 연결해 여러 명이 함께 플레이하는 ‘랜 플레이’(Local Area Network Play)를 주로 의미하는 ‘멀티 플레이’는 인터넷의 활용이 높아지면서 이제 ‘여럿이 하는 게임’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멀티’가 복수나 다중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임을 생각하면 딱히 축소되었다고 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온라인 게임’이 복수와 다중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연결’을 더 풍부하게 갖춤으로써 ‘멀티 플레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온라인 게임’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은 이제 ‘사회 기반 시설’로 자리 잡았다. 사회와 일상의 많은 영역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03년 1월 인터넷 대란이나 2018년 11월 통신망 장애 등으로 인해 겪은 불편을 통해 우리 생활의 많은 방식이 온라인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체감한 바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 서버에 접속한 여러 사람이 함께 플레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 게임 외에도 인터넷은 싱글 플레이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한다. 텔테일 게임즈의 〈더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는 에피소드를 마치면 주요 선택지에서 다른 게이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준다. 선택의 순간에 다른 게이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잠깐 떠올리거나, 다른 게이머들의 선택 결과와 자신의 선택을 비교하면서 게임의 여운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장치는 게이머가 느끼는 즐거움을 풍부하게 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쌓은 업적을 중심으로 순위를 나타내는 ‘리더 보드’ 역시 다른 게이머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것이 게임 플레이에 얼마나 동기를 부여하느냐는 게이머마다 다르겠지만,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다른 게이머가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게이머가 다른 게이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환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엑스박스 게임패스’로 대표되는 게임 구독 서비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게이머들의 게임 이용 행태를 분석하는 에이전시인 GameDiscoverCo는 2022년에 엑스박스 게임패스 구독자들이 게임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관한 자료를 발표했다. 1) 이 중 이목을 끈 결과는 게임의 최초 출시일에 공개되는 ‘데이 원’(Day One) 타이틀 이용에 관한 기록이었다. 구독자들의 게임 플레이 기록이 하나의 새로운 차트로 다루어진 셈인데, 개별 게이머들의 게임 플레이 정보가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자료였다. 즉, 싱글 플레이를 혼자 플레이하더라도 그 경험 자체가 서버로 전달되면서 게이머는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2) 이러한 예들이 싱글 플레이의 의미 중 게임을 플레이하는 인원에 대한 것이라면, 또 다른 부분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DLC(Downloadable Contents)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DLC는 시작부터 결말까지 일련의 과정을 일단락 지은 싱글 플레이 게임에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콘텐츠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기존 게임의 줄거리에서 갈라지는 ‘외전’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결말이 될 수도 있다. 매체를 통해 게임이 유통되던 시기에는 이러한 콘텐츠가 ‘확장팩’(Expansion Pack)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다. 그런데 온라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는 콘텐츠의 범위가 스킨, 캐릭터, 아이템부터 새로운 싱글 미션이나 스테이지까지 다양해지면서 ‘DLC’가 ‘확장팩’을 대신하게 되었다. ‘업데이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DLC는 단순히 콘텐츠를 추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의 오류를 수정하는 패치의 기능과 시스템을 변경하는 등의 변화도 포함한다. 이를 통해 일단락 지어진 싱글 플레이 경험이 다시 이어지거나 새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만들어졌다. 결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싱글 플레이만의 특징으로 꼽기가 애매해진 셈이다. 이처럼 온라인을 중심으로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하는 방식이 확장되면서 싱글 플레이의 본래 의미는 달라졌다. 혼자이되 완전한 혼자가 아니고, 결말이 있되 그것이 완전한 끝은 아닌 것이다. 온라인이 다양한 방식과 정도로 접목되면서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싱글 플레이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새로 하든 이어 하든, 혼자 하든 여럿이 하든 싱글 플레이 게임과 온라인 게임 모두 “룰에 따라 일정한 시공의 한계 속까지 완료하는 자유로운 임의의 행동 또는 활동으로 인간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자 문화현상의 한 가지 표현 형태” 3) 라는 점에서 싱글 플레이의 변화는 축소가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었다. 온라인이 다양한 방식과 정도로 사회와 삶 전반에 접목된 것처럼 싱글 플레이는 지금의 게임에 다양한 방식과 정도로 접목된 것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 시대’라 부를 정도로 많은 게이머가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4) 현재, 본래 의미의 싱글 플레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이루어진 싱글 플레이의 변화가 축소가 아닌 확산이라면, ‘머뭇거림’과 ‘의도에 대해 던지는 질문’ 역시 유효할 것이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건 고독하고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크리에이터가 만든 세계를 탐색하면서 의도와 까닭을 짐작하는 것, 그리고 실패를 거듭할지라도 자기만의 페이스에 온전히 집중하며 플레이 해나가는 것은 게이머와 게임 크리에이터의 비동시적인 대화인 동시에 게이머가 자기와 마주하는 동시적인 과정이다. 엔딩을 앞두고 플레이를 멈추도록 붙든 것은 어쩌면 게임 크리에이터의 의도가 아닌 게이머 그 자신의 목소리였지도 모른다. 한편, 싱글 플레이를 통해 게이머가 던지는 ‘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은 영영 어딘가로 흩어지고 마는 걸까. 같은 게임을 두고 뚜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게이머마다 다를 것이듯, 그 질문 역시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게임 크리에이터의 답을 구하지 않더라도, 게이머들끼리 자신의 질문을 서로에게 건네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 질문과 답들이 게임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게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가 나누어질 필요가 있고 더 많은 비평의 장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 https://newsletter.gamediscover.co/p/xbox-game-pass-titles-in-2022-whats 2) 이와 관련해서 2013년 Xbox One 출시 당시 마이크로소프트(MS)가 제시했다가 철회한 중고 정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MS는 중고 거래에 제약을 둘 목적으로 Xbox One을 최소 24시간에 한 번씩 온라인에 연결되도록 강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거센 비난에 직면한 후 중고 정책과 온라인 연결 강제에 대한 계획을 모두 철회했다. 이 경험이 MS가 게임패스 서비스를 추진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온라인 연결을 강제해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게임 이용 정보를 게임패스를 통해 큰 반감 없이 확인할 수 있게 된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롭다. 3) 도쿄 지방재판소 1979년 제10867호 손해배상청구사건 판결주문 중 발췌, 〈팩맨의 게임학〉(이와타니 토루 저, 김훈 역, 비즈앤비즈, 2012년) p.53. 4) 한국의 게이머들은 온라인 게임을 확실히 더 많이 플레이하고 있다. 이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대한민국 게임백서〉의 ‘국내 게임 플랫폼의 시장 규모 및 점유율’과 〈2021 게임이용자 패널연구(2차년도)〉의 ‘게임이용자 1순위 이용게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사회학자) 강지웅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게이머즈〉를 비롯한 여러 게임매체에서 필자로 활동했다. 저서로 〈게임과 문화연구〉(공저), 〈한국 게임의 역사〉(공저)가 있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게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게임이 삶의 수많은 순간을 어루만지는, 우리와 동행하는 문화임을 믿는다.

  • “진보가 게임을 망친다?” <데스티니2>의 부침을 따라서

    흔히 재난에 “‘별 혹은 행성의 불길한 국면’이라는 첫 번째 정의와 ‘갑작스럽거나 커다란 불행’이라는 두 번째 정의가 함께 관계”해 왔을 때, 일반적으로 <데스티니2>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전자의 의미를 조명하는 쪽에 가깝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데스티니, 재난서사, 포스트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yuri Kim Interested in the ways games let us experience stories. After poking around here and there, lately played Marathon.

  • 제1회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안녕하십니까, 게임제너레이션입니다.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 Back 제1회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07 GG Vol. 22. 8. 10. 안녕하십니까, 게임제너레이션입니다.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수상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이렇게 흥미로운 스토리에 이렇게 진부한 요소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의 SF 세계관과 캐릭터 디자인의 충돌

    〈승리의 여신: 니케〉(이하 〈니케〉)는 2022년 11월 시프트업에서 제작하고 레벨 인피니트에서 서비스하는 FPS/TPS 모바일 게임이다. 출시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광고에서 이미 한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2019년 처음 트레일러가 발표되었을 당시 캐릭터들의 섹슈얼한 디자인과 가슴과 엉덩이의 모핑(morphing)이 과도하게 부각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화젯거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2022년 출시를 앞두고서도 미디어를 통한 광고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부각된 광고가 있었다. < Back 이렇게 흥미로운 스토리에 이렇게 진부한 요소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의 SF 세계관과 캐릭터 디자인의 충돌 10 GG Vol. 23. 2. 10. 엉덩이 모핑이 주가 되는 게임은 아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이하 〈니케〉)는 2022년 11월 시프트업에서 제작하고 레벨 인피니트에서 서비스하는 FPS/TPS 모바일 게임이다. 출시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광고에서 이미 한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2019년 처음 트레일러가 발표되었을 당시 캐릭터들의 섹슈얼한 디자인과 가슴과 엉덩이의 모핑(morphing)이 과도하게 부각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화젯거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2022년 출시를 앞두고서도 미디어를 통한 광고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부각된 광고가 있었다. 그래서 출시 이후 게임에 대한 리뷰에 접근하는 유튜브 채널들 등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 알 수 있다. 출시된 게임은 제작사인 시프트업의 이전 작품들이 그랬던것처럼 수려하지만 섹슈얼리티를 한껏 강조한 여성형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이들 캐릭터를 수집하여 플레이어인 지휘관이 일종의 미소녀 하렘을 만드는 형태를 보여준다. 거기에 가슴과 엉덩이 모핑이 강조된 게임이라니, 이러한 요소들을 좋아하는 유저들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정도의 의미에 그치는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진짜 흥미로운 요소들은 사실 부각해 광고한 것들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 있다. 바로 세계관의 설정과 스토리텔링이다. 우선 〈니케〉는 아주 완성도 높은 SF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계관의 설정과 그 안에서 주가 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인 ‘니케’의 설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스토리 모두 잘 짜인 상태이다. 특히 튜토리얼 성격의 첫번째 챕터 이후에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홍보에 그치는 기타 게임의 애니메이션에 비해 세계관 전체를 잘 조망하고 플레이어가 선택한 ‘지휘관’에 나를 이입시키는 장치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계속해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작사는 왜, 엉덩이 모핑을 전면에 내세워서 게임을 홍보하는 전략을 취한 걸까? 게다가 인게임 상황에서는 더더욱 의아함이 커진다. 광고 등에서 한껏 강조했던 게임 상황에서의 캐릭터들의 뒷모습에서 보여주는 모핑은 눈길을 보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아무리 에임(aim)을 자동으로 설정해 놓고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더라도, 중간중간 상황에 개입해 줘야 하고 미션의 진행사항을 확인해 봐야하는 경우 캐릭터들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만한 여유는 없다. 결국 게임을 하는 상황에서는 이들의 캐릭터 디자인 정보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캐릭터 정보창에 가서 따로 확인을 해야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초반 광고로 부각되었던 엉덩이의 모핑과 같은 요소는 게임에 대한 특정 유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로만 작용하고, 게임을 수행하게 하는 요소로는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1) 그렇지만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스토리텔링인데, 한국에서 생각보다 많이 시도되지 않았던 SF적인 장르 세계관을 충실하게 구현해서 스토리 자체의 몰입감을 유의미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게임의 몰입도를 판단하는데 스토리텔링만 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니케〉의 경우 게임을 진행하게 하는 요소에 스토리텔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 자체가 그동안 한국에서 나온 SF 세계관의 게임 중에서도 꽤 완성도 높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완성도 높은 SF 스토리텔링의 장점 〈니케〉는 SF에서 자주 사용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상황에서의 디스토피아(Distopia)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들은 왜 아포칼립스 상황이 닥쳤는가에 따라서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의 양상과 구체성이 달라지게 되는데, 〈니케〉의 경우 아포칼립스를 추동한 요소가 기계 생명체인 ‘랩쳐’의 공격을 받고 지상에서 지하로 피신해 방주라는 거대 시설에서 생존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디스토피아 물이 그렇듯, 인류는 기계 생명체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니케’라는 사이보그를 발명했고, 그들을 통해 랩쳐들의 침공을 저지하고 랩쳐들에게 빼앗긴 지상의 탈환을 위한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 이미지 출처: https://www.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19867063836200&id=100232432466330&_rdr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은 ‘니케’를 사이보그로 설정하고, 그들이 기존에는 보통의 인간이었으나 개조되면서 뇌를 NIMPH(Neuro-Implanted Machine for Protecting Human)라는 나노머신에 의해 컨트롤 당하는 개체들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으로 인해서 캐릭터들이 가지게 되는 다양한 요소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각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들을 소거당하고 인간에 의해서 조종되는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지만 유기체 뇌를 여전히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계의 몸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에 다양한 스토리의 설정이 가능하다. 이는 캐릭터들을 수집해야 하는 게임에서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존에 인간을 변형시켜 사이보그로 만들었다는 캐릭터들의 기본 설정은 비인간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니케〉는 캐릭터를 단순히 수집하고 단순히 전투의 지휘관으로 통제권을 가진 사용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맺는 것과 같이 캐릭터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재미를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내가 수집한 캐릭터들은 단순히 게임에서 활용하는 도구에서 그치지 않고, 수집된 스토리를 기반으로 관계가 발전되는 형태를 보여준다는 특징이 생긴다. 2) 또한 이 지점에서 SF 스토리텔링의 성공적인 형태들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데, 흔히 비인간 캐릭터들을 설정하면 인간보다 월등한 특수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는 것에 그치는데 비해 〈니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비인간 캐릭터들은 뛰어난 능력과 함께, 인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같은 것들이 함께 부가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해 발생하는 인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비인간 캐릭터들의 가능성들을 오히려 제한하는데, 〈니케〉에서는 사이보그(Cyborg)라는 설정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명확하게 활용하여 이러한 지점들을 극복하고 스토리의 풍부함을 확보하고 있다. 3) 그러기 때문에 게임 스토리 내에서 ‘니케’들은 자신이 인간으로부터 개조된 사이보그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도구라는 사실에 자조하거나 절망하기도 하지만 굳이 인간을 닮거나 동경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인간과 니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사회적인 부조리나 그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가치의 충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의 충돌에 마치 만화의 주인공처럼 부딪히는 주인공(유저)의 시각은 SF 스토리텔링이 보여주는 지금의 현상 너머의 진보적인 가능성을 그리는 특징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게다가 거대 사기업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술력으로 회사를 구성하고, 수집해야 하는 ‘니케’들 역시 그 회사의 특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정들은 수집의 또 다른 구체성과 흥미를 유발한다. 일리시온(ELYSION)과 미실리스(MISSILIS), 테트라(TETRA)라는 거대 기업들이 소위 플레이어의 수집대상인 엘리트 니케들을 제작하는 회사들인데, 각각의 회사들 마다의 특징이 명확하게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서 등장하는 ‘니케’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프랭크 하버트(Frank Herbert)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듄(DUNE)〉에서의 세력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이러한 구체적인 설정과 세계관 구조의 치밀함은 단순한 수집을 넘어, 캐릭터들을 확보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이야기가 풍부해진다는 장점을 가져온다. 섹슈얼리티한 캐릭터 디자인과 모핑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와 같이 〈니케〉는 SF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그동안 한국에서 선보였던 게임뿐 아니라 웬만한 미디어 콘텐츠를 통틀어서도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SF 스토리텔링의 경우 장르가 가지고 있는 관습(convention)이나 코드(code) 들의 외향적인 요소들만 차용하여 서사 내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2010년대 이후 소설 등에서는 끊임없이 구체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소되었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비롯해 게임과 같은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유독 그러한 문제점들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니케〉의 경우, 이러한 아쉬움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SF 스토리텔링을 적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캐릭터들을 모아서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다양하게 마주하는 문제와 해결 방식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부터, 해결을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인식의 전환 양상 역시 SF에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하는 것과 맞닿아 있는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SF를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사고실험을 구현하고 있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나 〈호라이즌〉 시리즈와 같은 작품과의 결은 다르지만, 오히려 그들 작품에서 지나치게 프로파간다적이고 무겁게 다루려 했던 지점들을 재치있게 풀어냄으로써 모바일 게임이라는 형식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의미들을 효과적으로 구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들 때문에 오히려 캐릭터들에 반복되고 있는 섹슈얼리티한 디자인의 강조나 모핑 요소와 같은 것들이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아쉬움은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등의 문제로 단순히 게임을 판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했을 때도 이러한 요소는 장르의 특성에서 효용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내에서 가상적 실재감을 확대시키는 현전감(Sense of Presence)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했을 때, 게임 플레이 시에 느껴지는 구체적인 정보가 시각작용, 그리고 그에 따라서 움직이는 조작감과 인터페이스의 요소들이 중요하다. 4) 하지만 〈니케〉에서는 게임 플레이시에 아주 복잡하고 거대하게 발생하는 적(랩쳐)을 처리하는 FPS라는 게임의 특징 상 짧은 시간내 복잡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가 처리해야 하는 상대에 내가 지정한 에임이 정확하게 가 있는가를 확인하고 혹여 빗나가 소모되는 탄이 없는지를 확인 해야지 캐릭터들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모핑 등의 요소들을 넣음으로써 오히려 게임 중 인지되는 정보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히는 듯한 경향도 있어 일종의 사이버 멀미(cybersickness) 5) 를 유발하기도 한다. 아무리 방치형 게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해도 비효율적인 정보들이 게임내 난립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게다가 〈니케〉가 스스로 그려 놓은 세계관 내에서도 이러한 캐릭터 디자인들이 충돌하는 경우를 만들어낸다.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인 지휘관은 아무런 편견 없이 사이보그인 ‘니케’들을 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이 그 세계의 균열을 만들고, 다른 부조리들을 없애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특히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데 익숙한 비인간 ‘니케’들을 오히려 능동적으로 타자화와 대상화하지 않고 동일한 객체로 인식하고 대하는 모습이 세계관 전체에서 드러난다. 수많은 세계관 내 부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역시 그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게임에서 유저들은 편견과 대상화에 맞서는 능동적인 주체를 수행함에도 유독 성적으로 대상화된 부분들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이상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는 스토리를 쌓아 올라가면서 다양한 전사를 가진 캐릭터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아픔과 한계를 공유하는 경험이 늘어나면서 더 크게 와닿는 부분들이다. 나는 이들을 편견 없이 동일한 개체들도 대하고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부분은 인간들이 도구적으로 성적 대상화한 지점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각종 편견을 걷어내는 플레이어의 스토리 전개가 쌓아질수록, 반대로 내적으로 쌓이는 묘한 도덕적 부채감 역시 생겨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캐릭터 디자인을 단순히 유저들의 성향과 호응의 문제로 보기에는 진지하게 쌓아 놓은 세계관 위에서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지점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사전 테스트에서 유저들의 반응을 조사했을 때 78%가 ‘캐릭터의 외형 및 설정이 매력적’이었다고 답한 것이 레퍼런스가 되었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특정 요소를 부각한 외형적인 것들로 판단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게임을 플레이하면 할수록 하게 된다. 오히려 78%가 답변했을 때 외형과 더불어 함께 배치된 단어인 ‘설정’과 37%를 각각 치지했던 ‘스토리와 세계관의 몰입감’과 ‘독특하다’라고 답변했던 지점들을 상기해 보았으면 한다. 6) 왜냐하면 〈니케〉는 한국에서 SF 스토리텔링이 미디어 콘텐츠에 구현되었을 때,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과 완성도를 가져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토리의 치밀한 구성과 완성도를 가진 게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특히 중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는 검과 마법의 세계에 비해 SF적인 미래와 경이감(Sense of wonder)을 형성하는 세계관의 구성이 여전히 미흡한 현 상황에서 〈니케〉는 이정표로 삼을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후의 환상적인 세계관을 구성할 때 SF적인 요소들이 더 확장될 것으로 기대되는 미래에 이러한 요소들이 좀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 해당 부분은 개발사에서도 실제 게임을 출시하면서 언급한 부분이다. “독특한 캐릭터 표현으로 주목받았으나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즐길 거리가 많아 감상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의 홍보는 정말 의도적으로 특정 유저층에게 어필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게임시장에서 대중적이지 않은 SF 세계관을 비롯해 FPS와 수집형을 동시에 배치한 게임의 성격을 우회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출처: http://m.game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34 ) 2) 물론 이러한 스토리의 발전에 따라서 관계성이 변화하고, 이전과 다른 행동이나 외향, 반응 등을 이끌어 내는 것 자체가 새로운 형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서 그동안 충실하게 보여주었던 방법이고, <니케>는 이러한 방식을 아주 열심히 게임 안에서 구현하고 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서비스가 시작된 <우마무스메>, <무기마도>, <블루 아카이브>, <에버소울>과 같은 게임에도 이러한 요소들은 기본적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최근 캐릭터 스토리에 공을 들이는 수집형 게임들은 꾸준히 관심을 받고 성공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니케>의 경우 탄탄하게 구성된 SF 세계관 내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 있는 캐릭터 스토리들을 만들어 냈다는데서 이후의 다른 SF 세계관을 구성하는 게임 및 미디어 콘텐츠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3) 사이보그(Cyborg)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체를 일컫는다. 미디어에서 사이보그에 대한 대중성을 확보해준 대표 콘텐츠인 <로보캅>(1987)의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을 보면 사이보그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들은 SF 서사 내에서는 다른 비인간 캐릭터들인 로봇(robot)이나 안드로이드(Android)들이 그 시작부터 인간중심주의 적인 위계를 가지고 인간에 대한 저항과 동경을 가지는 존재로 그려졌던 것에 비해, 인간의 의미에 대한 확장인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개체로 볼 수 있다. 4) 이승제, 조현주, 「FPS 게임에 나타난 현전감의 구성 용인 연구」,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6(4), 한국디자인문화학회, 2010, pp.426-427 참조. 5) Rebenitsch, L., and Owen, C. “Review on cybersickness in applications and visual displays.”, Virtual Reality, 20(2), 2016, pp.101-125. 6) http://www.game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85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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