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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우주에 손을 뻗는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세계에 고립되어 존재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우주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내가 아닌 타자와 진정으로 동기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심전심, 역지사지는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개념이기에 이상향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언어가 가진 소통 수단으로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 Back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우주에 손을 뻗는다 29 GG Vol. 26. 4. 10.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세계에 고립되어 존재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우주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내가 아닌 타자와 진정으로 동기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심전심, 역지사지는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개념이기에 이상향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언어가 가진 소통 수단으로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의 말을 듣고, 글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자신있게 서로를 칭송하고 비난한다. 협력하고 배제한다. 바벨탑의 저주는 어쩌면 사람들의 언어를 나누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뉜 언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맹신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류가 자신의 우주를 뛰어넘어 다른 우주와 소통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손을 뻗기 시작한 순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타자를 알아가기 위해 내 시간을 기꺼이 쏟겠다고 결심한 순간. 이 가공할 욕구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길 원하며, 무엇 때문에 이해하려 하는가? 이는 비단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구사하는 모든 개인을 향한 물음이다.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기이한 존재들-가족, 친구, 직장 상사 또는 부하 직원, 매일같이 소셜미디어에서 마주하는 익명의 존재들을,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길, 원하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우리의 애정과 관심 밖에 있는 존재들, 처음으로 마주하는 그 낯선 존재들을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는 순간. 낯선 세계에서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이들 사이를 단지 수첩과 펜을 들고 바지런히 뛰어다니는, <챈트 오브 세나르Chants of Sennaar> 속 이름도 얼굴도 없는 여행자로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왜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왜 그들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려 하는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진정 이해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너, 돕다, 나” 생전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울타리 사이로 나 있는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겠다는 친구, 여기서 뛰어내리면 더 빨리 내려갈 수 있지 않냐고 따지는 친구를 볼 때, 비로소 게임의 언어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비디오게임의 영역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그리고 으레 사용되는 언어가 존재한다. 키 매핑, 시청각적 가이드, 플레이어가 플레이할 수 있는 동사의 한계 범위는, 광범위하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경험이 발휘되는 ‘감’의 영역이다. 어느새 2n년 동안 게임을 해온 나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감각이지만, 게임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왜 저기 지나가는 저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는지가 의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게임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조금씩 파악한다. 몇 개의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 점프할 수 있는지, 얕은 개울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자에 앉을 수 있는지. 이것이 이 게임의 언어다. 키오스크나 AI 상담 챗봇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유로워 보이는 게임이라도 플레이어에게 말을 건네는 규칙은 정해져 있다. 경험을 위해선 이 규칙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긴 텍스트로 설명하는 튜토리얼과,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지저분한 시스템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렇게 복잡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튜토리얼은 플레이어가 순수하게 낯선 상태에서 게임을 알아가는 경험을 간섭한다. 플레이 중 직관적인 행동과 시도를 통해 게임의 언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공식을 머릿속에 쏟아부으며 암기하게끔 한다. 반면 <챈트 오브 세나르>는 하나의 문제를 던져주며 플레이어에게 말을 건넨다. “문 열림”과 “문 닫힘”. * 여행자가 처음 만나는 인물은 퍼즐을 통해 기본적인 단어들을 전수한다. <챈트 오브 세나르>의 게임 언어는 단순한 편이다. 동사의 종류가 많지 않고, 처음 게임을 시작해서 홀로 길을 걷다가 첫 문제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 초 동안 플레이어는 모든 언어(규칙)를 다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플레이어는 비로소 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소통의 본질을 경험한다. 낯선 문자의 의미를 파악해, 닫힌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 세 단어(문, 열다, 닫다)는 앞으로 플레이어가 마주하고 번역해야 하는 수많은 상형문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암시한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게임의 규칙을 파악하는 것은 처음 접하는 언어를 파악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맞닿아있다.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자각이 없는 본능적인 행위였고, 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앞서 언급한, 긴 텍스트로 도움말을 쏟아붓는 학습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결국, 스페이스바를 눌러보기 전엔 점프가 가능한 지 알 수 없고, 레버를 내려보기 전까진 이 문자가 “열림”인지 “닫힘”인지 알 수 없다.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감각하기 이전에 언어의 껍데기를 마주하는 것은 학습일 수는 있겠지만, 이해일 수는 없다. 나의 세계를 포착하는 단어장 만들기 작품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언어는 모두 표의문자를 사용한다. 하나의 문자는 단순히 하나의 단어를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2층에 사는 전사들의 어떤 문자는 ‘집어들다’부터 ‘지니다’까지 광범위한 한국어 단어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추상적으로 그린다면 결국 하나의 개념에 수렴한다. 작품은 해당 문자가 어떤 단어에 조응하느냐가 아닌, 어떤 개념을 그리고 있는지에 접근한다. 때문에 여행자의 수첩에는 문자의 의미가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 그려진다. ‘문’이나 ‘열쇠’같이 대상이 명확한 개념부터 ‘아름답다’, ‘두렵다’ 같은 형용사, 심지어 숫자나 ‘금’, ‘은’처럼 형태가 없는 명사까지 모든 개념은 독창적일 정도의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되고, 플레이어는 이 그림이 표현하는 개념에 걸맞은 문자를 짝짓는다. 만약 이를 텍스트로 표현했다면 그 순간 해당 문자의 의미는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규정되었을 것이다. * 여행자는 새롭게 알게 된 개념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규정되어 치환된 단어는 해당 문자를 얼마나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예상하지 못한 함의와 뉘앙스가 섞여들어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는 표현의 중립성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수단이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각각의 언어와 문자에 어떠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같은 개념이 다섯 개의 다른 문자로 표현될 수 있는 이상, 각각의 문자가 얼마나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외국어 학습 유튜브 영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는 ‘당신이 알던 것은 틀렸다’ 논조다. 우리가 한국어와 치환해서 사용하던 외국어 단어나 문장 구조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며, 때문에 그 언어에 더 적합한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부족이 사용하는 다섯 개의 언어는 문자도, 문법도, 문장 구성도, 어휘도 다르다. 연금술사들은 복수형을 표현하는 별도의 문자를 사용한다. 음유시인들은 목적어를 문장의 제일 앞에 제시한다. 은둔자들은 문자들을 결합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 탑의 1층에 사는 신자들은 탑의 위쪽을 신이 있는 공간으로 여기며, 때문에 ‘위’를 ‘좋은 것’이라는 개념과 연결한다. 이들에게 ‘수도원’은 지리적으로 ‘위’에 있는 동시에 ‘좋은(신성한)’ 공간이기에, ‘위’라는 문자에 ‘공간’을 표현하는 부수를 붙여 ‘수도원’이라는 문자를 만든다. 이는 단순히 어떤 개념을 규정하는 것과 더불어, 해당 부족의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관과 정서를 보여준다. 사실 다섯 부족이 동일한 단어들을 단지 다른 문자로 표현하도록 설계한다면 개발 상의 편의를 확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부족들은 문자의 개수도 다르고, 사용하는 어휘도 다르다. 이는 각 언어의 세계관에 차이점을 둘 수 있다는 이점과 더불어, 다섯 개의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플레이 요소에도 차이를 둘 수 있다. 유일하게 숫자 어휘를 사용하는 연금술사들의 사회에서 금속을 계량하고 화합물을 만드는 퍼즐을 푸는 것은, 낯선 세계를 배회하는 여행자가 이들의 삶을 가장 밀접하게 체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음유시인들은 탑의 위로 올라갈 방법과 그럼에도 갈 수 없는 이유를 연극으로 만들었다. 견고한 관성의 경계 너머를 떠도는 유령이 있어 2층의 전사들은 1층의 신자들을 ‘불순하다’ 말하며 멸시하고, 3층의 음유시인들을 ‘선택받았다’ 표현하며 동경한다. 4층의 연금술사들은 5층의 은둔자들을 ‘요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행자는 완전한 이방인 그 자체다. 어디에서도 비롯되지 않았으며, 어떤 언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도, 얼굴도, 말도 없는 그는 이 탑의 모든 층을 오르내리며 분리된 세계들을 관통하는 관계를 구축해낸다. 그의 여정을 함께하는 것은 칼이나 총이 아닌, 수첩과 펜 한 자루다. 이 유령은 탑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그러니까, 사상적으로. 이제 막 태어나, 어떠한 세계관과 편견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상태. 사실상 이 게임을 이제 막 실행해 아무것도 모르는 플레이어와 마찬가지의 상태다. 때문에 여행자에게는 언어가 없다. 그는 언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른 언어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다. 언어를 가진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들, 자신의 언어라는 장벽에 둘러싸인 세계, 그 편견에 스스로를 가두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탑에 사는 부족들의 분열과 몰이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모든 층이 견고하게 분리되어 있고, 때로는 잘못된 신념이, 우월주의적 오만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그리고 거대한 문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심지어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이 탑을 세웠다는 은둔자들은 서로마저 밀어내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고 있다. 이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눈을 마주하거나 말을 나누지 않고 시뮬레이션 기계 안에서 세상을 관음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소통과 이해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스크린 속 모습만이 이들이 보고 있는, 보려 하는 세상의 전부다. 결국, 낯선 여행자가 이 탑에서 해내야 하는 일은, 단순히 다섯 언어를 공부해 소통을 매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해야 한다는 필요와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의 관계를 매개해 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이상을 좇는 것에 몰두한다는 삶의 방향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각자가 머무는 층 안에서 그런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 관성이 탑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시스템, 여행자가 궁극적으로 맞서야 하는 시스템의 본질이다. 여행자가 숨겨진 장소들에서 마주하는 탑의 관리자, 고립자는 이러한 고립이 탑에 거주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항변한다. 그러니까 고립자의 세계관, 시스템의 언어로 묘사되는 ‘안전’이라는 개념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항구적인 불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족들 간의 아무런 접촉도, 그로부터 벌어지는 아무런 변수도 발생하지 않는 상태. 영원한 분열과 반목 속에서 서로를 자극하거나 시너지를 일으킬 수 없는 상태. 탑으로 밀려드는 다른 부족들이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은둔자들은 이러한 관성이 자신들의 사회를 아사시키고 있음을 깨달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여행자를 만들었다. 여행자, 플레이어가 이 탑에 저지른 일은 단순히 다양한 언어들을 터득해 부족 간의 말을 번역해 준 것이 아니라, 이 항구적인 불변성에 변화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 탑 곳곳에는 다른 부족과의 소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전사들은 신자들 역시 자신들처럼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이 음유시인들과 한 부족이었다는 발견을 음유시인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음유시인들의 사회를 떠받치던 노예들은 신자들의 사회에 노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찾고 있거나 혹은 찾아볼 생각도 못 했던 답을 다른 세계관을 가진 다른 사회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을 멈출 때, 사회는 숨이 멎는다. 사실은 이렇다. 모두가 소통을 원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낯선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진 않을 수도 있다. 전 지구적 연결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그렇게까지 이 현실에 열광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분명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질문이 있고, 너무나 많은 답이 있다. 누군가는 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더 이상 타인을 궁금해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을 끊임없이 하고싶어한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만연하고 노골적인 몰이해에 둘러싸여, 우리는 더 이상 질문을, 궁금해하기를 멈추고, 자신만의 우주 안에 웅크린 채 관성에 의지해 살아가려 할지도 모른다. 소통을 해야 한다는 필요와 의지조차 상실한, 항구적인 불변의 상태. 그러나 이런 때조차도 소수의 몇몇이 존재한다. <챈트 오브 세나르>에서 스크린 속 다른 부족을 마주한 채 말을 던지는 사람들. 이들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을 갈망하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이들의 사이를 엮어주는 여행자.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탄생하고 구조화된 두 언어를 매개하고, 두 세계가 서로의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 연금술사들은 전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두 부족은 함께 괴물을 생포한다. 적어도 오늘날의 우리는 더 이상 수 백 년 전처럼 내가 사는 동네가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가진 않는다.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세상에 자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만 있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쓰인 책과 영화, 음악, 게임을 매일같이 접하고, 직접 세상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큰 세상을 마주한다. 때로는 탑의 고립과 분열을 수호하려는 관리자가 등장할 수도 있고, 늘 관성에 의지해 그런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게 남은 미래는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이고, 종의 존속과 진화를 위해서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필수적이다. 누군가는 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낯선 세계를 이해하길 갈망할 것이고, 다른 우주로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 게임에서 재현과 미학적 아우라: <1979 레볼루션: 블랙 프라이데이>와 <믹스테이프>의 고체적 서사에 대하여
실재에 가까운 재현은 매체가 태어난 이래로, 매체를 만드는 창작자와 그것을 소비하는 이용자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이상이자 욕망이었다. 게임 또한 ‘실재에 가까운 재현’이라는 이상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행동을 조작하고 결정하게 하며 그 결과를 다시 확인시키는 일련의 모달리티를 통해, 게임은 다른 매체가 좀처럼 도달하지 못한 실감을 구현해왔으며, 플레이어가 게임을 통해 느끼는 실감은, 게임이 실재에 다가서는 고유한 방식이었다. < Back Representation and the Aesthetic Aura in Games: On the Solid Narratives of 1979 Revolution: Black Friday and Mixtape 30 GG Vol. 26. 6. 10. Aligned Choice and Result, and Enforced Passivity Representation close to the real has, ever since media were born, been an ideal and a desire long held by the creators who make media and the users who consume them. Games, too, have never been free of the ideal of "representation close to the real." Through the chain of modalities that has the user manipulate and decide actions and then confirms the result back to them, games have realized a sense of immediacy that other media seldom reach; and the immediacy a player feels through a game has been the game's own particular way of drawing near to the real. In the process of approaching the real, a game inevitably produces two linked events: choice and result. Of the two, choice—in that the user can manipulate or decide it by their own will—is also the process of aligning the user's will and senses to the result. A considerable part of the core pleasure a game gives comes precisely from this alignment. The circuit by which the input I press returns as an event on the screen, and that result becomes in turn the ground for the next input, is taken by some to be the very substance of the agency a game grants the user.[1] The word "choice," though, must be handled with care here, because operating—pressing a button—is not in itself a meaningful choice. Operations occur without number, but only when an operation leads to a branch point in the result, and the user's will leaves a trace on the world, does choice acquire meaning. To play a game is not merely to watch a story but to perform the logic of a system with one's own body, and in that sense the working of a game is always an act.[2] Yet the fact that the user can operate choice harbors, at the same time, the possibility that the user might deliberately detach their will and senses from the result. The room for divergence—deliberately straying from the set route, twisting the intended ending, intentionally taking aim at the gaps in the system—is the very freedom the medium of the game permits the user, and the ground on which the play the game implements becomes the player's own. Some games, by contrast, are designed so that the user cannot decide whether choice and result align. Whatever you press, the story flows in its predetermined direction, and the room for divergence is sealed off in advance. To enforce the alignment of choice and result is to drag the stories of the world the game offers in a particular direction. Whether intended or not, a game that enforces alignment takes on the character of propaganda. A game conveys its message not only at the level of narrative or image; the working of its rules and systems itself can become an argument.[3] The arrangement of rules that determines what is possible and what impossible, what is rewarded and what punished, is in itself an element of persuasion. When the alignment of choice and result occurs, the player is placed in the domain of passivity. A story the game enforces upon the user comes into being. The problem is that enforcing a story does not stop at simply emphasizing a message. It disables the very function of the feedback the user could gain through results, and so damages the circuit that is the game's distinctive medial trait.[4] The enforcement of alignment can therefore lead, at worst, to a failure to make full use of the game's medial strengths. And yet no small number of developers and creators choose the path of enforcing the alignment of choice and result in order to deliver the message or representation they want. This is not merely a limit or problem of technology or capital. It is not that they lack the capacity to implement a branch point, but that not branching is more faithful to the something they wish to convey. It can, rather, be a choice toward the ideal of representing the real that the medium has long held dear. What Games Gained by Giving Up Feedback To gauge why games cling to representing the real even at the cost of giving up feedback, that characteristic of the medium, we first need to look a little more deeply at what representation is. Stuart Hall pointed out that representation is a phenomenon situated beneath society, holding that according to social convention and relations of power even the same object can be represented in entirely different ways. In particular, borrowing the concept of "discourse" that Foucault drew out to explain the union of knowledge and power, Hall argued that in the process by which meaning is reconstructed by media, there is no meaning fixed in the thing itself: meaning is not inherent in the object but is produced only within a particular discursive practice. On this basis Hall holds that a particular group forms rules and discourses that represent objects in ways aligned with its own interests. As evidence, citing cases where Western media, in representing the East, depict it by way of Orientalism, he stresses the process by which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images collude with each other to create meaning. The East does not exist in itself but is drawn again and again as the Other that the West needs in order to define itself. Hall saw this process of media images colluding as something to be overcome through oppositional reading. By grasping the intent hidden behind the collusion of production and consumption, the public can resist media. But there is one irony here. At the center of the oppositional reading and the alternative discourse Hall described, there always lay the shadow of an axiomatic standard: the universal and the mainstream. An oppositional reading is, in the end, a reading that stands against some dominant code, and that dominant code presupposes a common sensibility the public shares. The trouble is that this premise does not sit well with today's fragmented media environment. In today's distribution environment, where hyper-personalized experiences like the omnichannel have become the norm, what forms a mainstream force is no longer a group with a general-purpose identity, like the median of a normal distribution. In an environment where algorithms propagate a different world to each person, the very notion of a single dominant code that everyone must oppose grows blurred. Rather, several small, hard groups—each pursuing strong exclusivity and a closed identity through extreme claims—gather to form the mainstream. The boundary between opposition and domination collapses, and one person's oppositional discourse becomes another's dominant discourse. This is not far from the scenery of the neo-tribal society Michel Maffesoli depicted. According to Maffesoli, the greatest feature of neo-tribalism is that the emotional resonance offered by the here and the now—this place where I stand—is what binds people together. Not a rational contract or a grand ideology, but the emotion of being-together itself becomes the ground of cohesion. Attending to a social vitality—puissance—welling up from the bottom of the everyday, distinct from institutionalized power (pouvoir), Maffesoli held that this vitality is expressed through an "aesthetic aura." The aesthetic aura is the everyday ritual and aesthetic, such as a tribe's own distinctive style or slang. Here we must pause on one thing: the origin of the aesthetic aura is not the person who creates or enjoys that distinctive style, but the form of the aesthetic aura itself. The aesthetic aura Maffesoli pointed to does not, as Walter Benjamin noted, dwell in a unique and singular original, but in the endlessly copied and shared form itself. If Benjamin's aura is the aura of authenticity, Maffesoli's aura is the aura of form. The scene of games clinging to the representation of the real lies precisely on the tension between these two auras. A game seems to chase the Benjaminian authenticity of the real's presence, but what it actually puts in the player's hands is the aesthetic aura Maffesoli pointed to—the aura of form. In other words, the reason a game clings to representing the real even at the cost of giving up feedback may lie, rather than in the message it wishes to convey, in a particular form itself. From Narrative to System: How Has the Game's Aesthetic Aura Changed? When many people think of Maffesoli's "aesthetic aura," they tend, because of its enjoyability and presentness, to imagine expressions or styles that are apolitical and stand well clear of propaganda. But the aesthetic aura itself can be put to political use however one likes, and can—even unwilled—work like propaganda. Consider, for instance, Call of Duty 4: Modern Warfare (hereafter Modern Warfare ), which newly established the history of the FPS. Modern Warfare 's greatest features can be summed up roughly as: minimal yet highly polished combat contained within a relatively small volume; a short, narrative-driven structure; and cinematic staging that makes use of a linear story. What we need to examine again here is the sense of speed Modern Warfare realizes through these features. This sense of speed works by stimulating the user's desire to move quickly to the next campaign, and shuns feedback beyond the walkthrough. The pleasure the player gets from Modern Warfare is the fun of a shooter breaking through enemies who are clear objects of hostility. It is worth noting, though, that this fun rests on a thoroughly Western-centric viewpoint—saving the world by engaging in firefights on the soil of other countries sick with civil war, like the Middle East or Russia. This sensibility, which makes war consumable as entertainment in a clear good-versus-evil structure, is already political enough.[5] The "aesthetic aura" Maffesoli pointed to is precisely something like the narrative clarity of the distinct good-versus-evil structure that Modern Warfare lays as the base of its sense of speed. The narrative clarity meant here does not refer only to the distinctness of conflict—that is, to the relations between the work's world and its characters. It means the clarity of choice and result, which is to say the clarity of cause and effect. In Modern Warfare , for instance, the rules of cover and fire that form the sense of rushing forward grant the player clarity in the state of failure. This clarity of cause and effect creates an aesthetic aura, even within a narrative worldview that handles complex character relations, through the form of result-following-from-action. The camera system of 1979 Revolution: Black Friday*. When the character arrives at a spot that can be interacted with via the camera, a camera icon appears at the bottom. Among these, when there is an interaction that can call up material juxtaposed with historical sources, the camera focus turns green. (source: gameplay capture)* 1979 Revolution: Black Friday (hereafter 1979 Revolution ) deserves to be singled out as a case that creates an aesthetic aura through the clarity of choice and result even within a complex worldview. The system of interacting through the camera the protagonist Reza carries around is worth noting as a modality that creates an "aesthetic aura." 1979 Revolution is an interactive movie, and even seeing every ending it has a short play time of a little over three hours. And whatever choice the player makes, 1979 Revolution judges the Iranian Revolution to be a tragedy. Since the past is recalled within a frame structure in which the protagonist is held and interrogated by the new regime, the emotion of the ending is already determined from the start. On top of that, by presenting, at particular points, material showing the actual Iran, the game takes on the form of the protagonist going around searching out what tragedy occurred in Iran. The key here is the camera mechanism. A scene the player photographs within the game is set side by side with a historical photograph actually taken during the revolution. At the moment the fictional image overlaps the documentary image, the game declares that what it represented was not fiction but the real. This is a case of implementing the representation of the real as mechanism, and at the same time it brings about a powerful, repeated learning effect on the player: remember the Iranian Revolution as a tragedy. Of course, the Iranian Revolution is not a history that can be judged only positively, as 1979 Revolution exhibits it, and its victims, too, deserve rightly to be mourned. But what matters critically is something else: that the manner of presenting material showing the actual Iran produces the effect of emphasizing the representation of the real. This effect does not stop at imprinting the Iranian Revolution on the player as a tragedy. It can expand into an aesthetic aura that makes one judge negatively the very macro-category of power that provided the cause of the revolution. The formation of an aesthetic aura is ambivalent. It can, as Hall hoped, promote critical thought about a work and make oppositional reading possible. But at the same time, it can hold the power to make the player follow the aesthetic aura that rejects power as such, to the point of refusing even axiomatic common sense like order itself. When the aura takes form itself as its ground, the rejection of power that had been the object of critique can, before one knows it, slide into a blind loyalty to form. When the sentiment of negating power in general hardens into an aesthetic, it becomes another kind of enforcement. Mixtape poster (source: Steam) Mixtape , which has lately been stirring controversy across various game communities, makes us reflect on how precariously this aesthetic aura can be put to use. Mixtape , too, like 1979 Revolution , is an interactive movie composed in the manner of recalling the past, a work aiming nostalgia toward the 1990s as its point of appeal in play. As three friends move toward the last night of their high school days and trace back their memories, particular songs call up playable scenes of recollection. What is peculiar is that Mixtape has almost no campaign that would be implemented as a fail state. In Mixtape the player fails at nothing and branches to no result. This can become the seed of a criticism that the game did not implement even the minimum requirement of choice it ought to provide the player—for the possibility of failure is the very device that grants meaning to the player's action. If you cannot fail, there is no success either; and if the result does not diverge, there is no choice.[6] Mixtape 's interaction is functional interaction as texture, existing for emotion rather than for result. But we ought to retrace how the choice by which Mixtape went to such lengths to remove the domain of choice could lead to a global commercial hit. What Mixtape gained by not implementing the player's choice is two things. One is a solid system in which the player cannot set the direction of consumption; the other is an aesthetic volatility in which no meaning beyond a single playthrough can be found. That is: even though it can reap no meaning beyond a kind of instant simulation, discarded once played, the chance of being chosen by consumers rises, rather, if it presents a clear direction of appeal. What Mixtape gained in exchange for erasing the options is a package of smooth emotion that arrives identically for everyone. Here we need to look back, with suspicion, at what the language of achievement—like "sales figures"—is producing. Perhaps the "aesthetic aura" and the propaganda that Mixtape aims for are themselves precisely a use-and-throw-away consumerism. If Modern Warfare secured a minimum of the real through narrative clarity, and 1979 Revolution through its judgment of power, then Mixtape 's aura is directed at no message at all, but at the form of consumption itself. In this way the aesthetic aura gradually empties out content and leaves only form. The process that runs from the clarity of hostility that war brings, through the pastiche that incites the condemnation of power, and finally to the texture of a nostalgia that asserts nothing, is also the process by which the aura is released from message and becomes form itself. Solid Virtuality and Liquid Reality The shared feature of these three works worth attending to here is that the relations of their narratives are fixed. Choice and result were forced to align, the room for divergence was closed, and the story is hard and set. Zygmunt Bauman once pointed to liquidity as the feature of the modern age. What Bauman regarded as the object of liquidity was nothing other than identity and meaning. Identity is no longer something given but a task each person must endlessly bear and renew, and that task is never completed. When in consumer society even identity becomes a commodity to be bought and discarded, people, unable to stay long anywhere, endlessly flow away. Why, then, in an age of liquidity, do we go out of our way to consume fixed narratives? Perhaps, within the virtuality of the aesthetic aura, we are migrating to a solidified virtuality, fleeing the liquid reality where identity, endlessly flowing away, can find no place to set its foot. The place where choice has vanished, the world where the result is predetermined and has hardened stiff, may look rather like a refuge to those worn out by a reality with nothing firm to grip. Herein lies the reason the 1990s that Mixtape revives appeals so powerfully. It is a nostalgia for what was never experienced, presenting a past one cannot return to as if it were a hometown that could be fully restored—a gesture that thrusts out a hardened past against a present that flows away.[7] But a last question remains. Can solidified virtuality truly save an identity that endlessly flows away? Or is it no more than a momentary refuge, one more use-and-throw-away instant? If, just as Benjamin's aura withered amid reproduction, this solid virtuality leaning on the aura of form also evaporates with a single act of consumption, then where we have arrived may not be a refuge but another name for an ever-smoother liquidity. References Janet H. Murray, Hamlet on the Holodeck: The Future of Narrative in Cyberspace (New York: Free Press, 1997). Alexander R. Galloway, Gaming: Essays on Algorithmic Cultur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6).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Cambridge, MA: MIT Press, 2007). Espen J. Aarseth, Cybertext: Perspectives on Ergodic Literatur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Roger Stahl, Militainment, Inc.: War, Media, and Popular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10). Jesper Juul, The Art of Failure: An Essay on the Pain of Playing Video Games (Cambridge, MA: MIT Press, 2013). Svetlana Boym, The Future of Nostalgia (New York: Basic Books, 2001).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HyunJae Lee Researcher at the K-Culture & Story Contents Research Institute, Kyung Hee University. Researches trends and policy in the content and IT industries, and works as a critic across the content field broadly. Has contributed to projects including "A Survey and Analysis of AI and Digital Policy Trends in Major Countries" (National Information Society Agency), "A Survey and Analysis of Digital Security Trends" (Korea Internet & Security Agency), and "Global Game Industry Trends"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Began working as a critic after winning the Dong-A Ilbo Spring Literary Contest in film criticism, the Korea Manhwa Contents Agency's New Critic Award in comics criticism, and the Game Generation Criticism Award.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GG Vol. Tags: 인터뷰, 게임비평공모전, 게임비평, 게임 연구자, 비평의 미래, 김규리, 이현재, 영이, 게임 코러스, Interview, Game Criticism, Game Criticism in Korea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게임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전시 리뷰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담론장을 떠돌고 있다. 게임과 예술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행정과 법의 영역에서도 게임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물론 예술가, 행정가,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게이머 각각의 입장과 목표는 모두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게임 주제전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기에 일단 《게임사회》라는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 Back 게임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전시 리뷰 12 GG Vol. 23. 6. 10.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담론장을 떠돌고 있다. 게임과 예술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행정과 법의 영역에서도 게임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물론 예술가, 행정가,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게이머 각각의 입장과 목표는 모두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게임 주제전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기에 일단 《게임사회》라는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국가가 운영하는 미술 기관에서 게임을 예술적 대상으로 직접 다루고, 나아가 게임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은 공식적인 선포가 아닐지라도 담론적 차원에서 어떠한 인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기라도 미술관에 가져다 놓으면 미술 작품이 된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처럼 게임을 미술관에서 전시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미술관에 전시되지 않더라도 게임은 이미 예술(적)이다. 사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게임이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 같은 것이 아닐까. 예술이라는 영역에 게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예술의 입장과 게임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전시 《게임사회》를 돌아보면서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보려한다. * 《게임사회》 전시 포스터 지금은 당연히 예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들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다. 사진의 경우를 언급하고 넘어가면, 사진은 예술가 주체보다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사진 이미지의 기계적인 뚜렷함이 회화에 비하여 사진을 예술적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적 목적으로 사진을 다루는 작가들은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연초점으로 사진의 선명도를 낮추거나 일부러 번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사진은 회화와 결부된 특성들을 끊어내면서 독자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장르의 고유성과 구분 자체가 모더니즘적이라는 것이지만) 그런 시기를 거쳐 사진이 예술의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지금 이 글에서 다루는 ‘전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사진이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시를 위해서 사진은 그 인터페이스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사진은 원래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작은 액자나 책자 같은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감상하는 매체였다. 그러나 사진이 예술로 편입되는 과정과 함께 기술이 발달하여 대형 필름을 통한 대형 인쇄가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사진도 다른 예술 매체들처럼 크게 벽에 걸어서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에 들고 혼자 보는 사진이 아니라, 벽에 걸어 함께 볼 수 있는 사진이라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는 사진이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무엇이든 미술관에 전시하면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레디메이드식의 위상 변화뿐만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짚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런 변화가 그 매체를 미술관에 전시하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불화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손에 들고 보는 사진은 전시하기 적합하지 않은 매체였기 때문에 변화가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이 미술관에 전시될 때는 어떠한가. 오락실이나 PC방, 혹은 집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과 전시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은 크게 다르다. 애초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른 점도 짚어야겠지만, 게임을 ‘전시’하였을 때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관람성의 문제부터, 플레이 시간의 문제, 나아가 게임 컨트롤러 차원의 인터페이스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등등. 이런 것들은 단지 화이트큐브 전시장을 오락실이나 PC방을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디자인해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애초에 미술관은 게임을 전시하기에 적합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 게임은 전시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를 전시하려고 하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문제를 단순한 불화로 보지 않고, 예술과 게임 각각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인터페이스는 단지 게임 컨트롤러 같은 하드웨어 장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서로 다른 것이 마주한 면(face) 사이(inter-)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게임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낸다. 게임과 게임적인 예술 작업을 함께 전시하고, 무엇보다 하나의 게임을 전시할 때에도 서로 다른 인터페이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시는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단지 보기 좋고, 가장 편안하고, 잘 작동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전시된 게임에 키보드와 마우스, 게임패드, 조이스틱 같은 전형적인 게임 인터페이스와 함께 접근성 컨트롤러를 함께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질적인 배리어프리 차원에서도 중요하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반적인 게임 컨트롤러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접근성 컨트롤러는 오히려 불편한 인터페이스가 된다. (아예 게임 컨트롤러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일반적인 게임패드 역시 조작이 쉽지 않은 무언가라는 점도 짚어야 한다.)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인터페이스라는 문제 자체를 다시 감각할 수 있는 전시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게임사회》의 〈심시티 2000〉 전시 전경 게임과 게임적인 예술 작업을 오가는 전시 구성도 비슷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교차(inter-)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플라워〉 같은 제노바 첸의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이어지는 공간 안쪽으로 들어서면 하룬 파로키의 〈시리어스 게임〉과 〈평행〉 시리즈를 만나게 되는 식이다. 하룬 파로키는 게임과 현실의 관계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기에 그 작업의 내용에서도 전시의 기획적 맥락을 심화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지금 글의 맥락에서 파로키가 더욱 중요한 지점은,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미술관에 들여오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만든 주요 작가 중 한명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영상을 하나의 스크린을 통해 단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서로 다른 화면들 사이를 오가면서 감상하는 멀티채널 작업은 영화를 극장이 아니라 전시장에 옮겨오면서 가능해진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파로키의 작업들도 시리즈를 멀티 채널처럼 설치했고, 특히, 그의 또 다른 작업 〈인터페이스〉의 경우에는 자신이 찍었던 영상과 그것을 편집하는 인터페이스의 모습을 2채널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무빙이미지에서 인터페이스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영역을 열어내었다. *하룬 파로키, 〈시리어스 게임 I-IV〉, 2009-2010, 다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Harun Farocki GbR 소장. 영상스틸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게임은 예술인가’ 당연히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에 그냥 답을 해버리는 것보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범주와 게임이라는 범주를 함께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게임적인 것을 통해서 예술의 범주와 그 규정에 균열이 일어나야 이러한 질문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과 미술이 교차되면서 제도적 분열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가 발생했던 것처럼. 게임 역시 미술과 교차되고, 미술 제도가 게임을 받아들이면서 서로의 영역에 변화를 촉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게임의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의 문제는 게임과 미술 각각의 형식적인 문제에서 더 나아갈 지점이 있다. 미술관 제도가 게임이라는 기존과 다른 형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업데이트되어야 하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관은 전시뿐만 아니라 소장을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게임이 미술계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기점은 이번 전시 맥락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게임을 소장품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로 기록할 만한 문화적 산물로서의 게임을 소장하려면, 단지 담론적 차원의 투쟁뿐만 아니라, 기존의 미술관 소장품 시스템에 큰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코드로 이루어진 소프트웨어를 소장하는 문제는 미술관의 기존 소장품 시스템과 불화한다. (심지어 게임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인터페이스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이렇게 게임은 미술관이라는 인터페이스 자체를 성찰하고 업데이트할 계기를 만들 타자가 될 수 있다. 게임을 통해서 변화하는 미술관의 모습을 계속 상상한다. Tags: 전시, 미술관,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 <사이렌> 속 불쾌한 플레이
리플레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사이렌>의 내러티브는 더욱이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다. 이 게임의 내러티브 진행은 극도로 제한된 정보량으로 제공되는 내러티브 전개이다. 게이머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면서 게임의 스토리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이렌>은 그저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게이머에게 클리어 조건을 제시하고 방치한다. < Back <사이렌> 속 불쾌한 플레이 23 GG Vol. 25. 4. 10. <사이렌(サイレン; SIREN)>(SCEジャパンスタジオ, 2003)은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재팬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호러 어드벤처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시리즈의 공통적인 줄거리는 주인공 일행이 (당장은)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농어촌 마을에 갇힌 상태에서 살아 남아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알림이 바로 ‘사이렌 소리’이다. 기본적으로 <사이렌>은 시리즈의 틀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사이렌>의 특징은 사실적인 인물 표현과 실제 일본 풍경을 참조한 현실적 호러 묘사다. 게임은 심리적 공포를 유도하는 방식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를 극대화하는 요소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 ‘시인(屍人; 시비토)’이다. 시인의 디자인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형 귀신이나 좀비처럼 그로테스크하게 표상되는데, 이들 시인은 인간일 적에 했을 법한 일상적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경찰관 시인은 총을 들고 순찰하며, 농부 시인은 낫을 들고 작물을 수확하거나 엽총을 들고 새를 쫓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괴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임을 표현하는 시인의 존재는 <사이렌>의 리얼리티와 엮이며 역설적이면서도 기묘한 공포감을 강조한다. 심리적 공포와 현실적인 디자인으로 여전히 훌륭한 호러 게임으로 평가받는 <사이렌> 시리즈이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들이 게임에 대해 어렵고 짜증난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야후 재팬 지혜봉투 [1] 에서 한 유저는 “<사이렌>이라는 게임은 어렵다고 들었는데, 플레이하면서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짜증나는 느낌인가요? (…) ” [2] 라고 질문을 올리기도 하고, 관련 질문에도 난이도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일본 실황 영상 타이틀에는 빠지지 않고 난이도가 높다는 댓글들이 자주 달린다. 오죽하면 일본의 한 블로거 珠音真珠(타마네 펄; 2022)은 “명작 호러 게임 「SIREN」은 무엇이 어려운가 게임 디자인을 해설(名作ホラーゲーム「SIREN」は何が難しいのかゲームデザインを解説)” [3] 이라며 이 게임의 어려움을 설파할 정도이다. * (<사이렌> 실황 타이틀. 난이도 올라가고 있다(難易度上がってきた)라던가, 불합리 오브 불합리(理不尽of理不尽) 등의 문장과 수식어는 그 악명을 보여준다. – 출처: YouTube) <사이렌>의 난이도 악명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뭔지도 모르겠는 지도만 보고 길찾기가 무섭다(O)” [4] 라며 어려워서 무섭다며 비꼬는 의견에 동의하듯이, “옛날 게임 특유의 (비속어) 난이도”라는 덧글이 달리기도 한다. 개인 블로그의 게임 플레이 리뷰나 유튜브 영상에서도 어려움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치는 사이에 출시된 호러 어드벤처 게임에서 어려움을 언급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일례로 <바이오하자드(Biohazard, 1996)>의 경우, 좀비들을 쓰러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한정적인 수의 총알로 인해 적절한 타이밍에 총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 높은 난이도로 인해 불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렌>은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리플레이 디자인에서 비롯된 불쾌함 이 게임의 어려움은 무엇이 다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이렌>이 채택하고 있는 게임 디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이렌>은 공포 뿐 아니라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하는 플레이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사이렌>은 가장 기본적인 상호작용 시스템 층위에서부터 불편함을 유발한다. 우선 게임 내 상호작용 버튼을 누르게 되면 게이머가 취할 수 있는 행위를 선택지로 제공하는데, 이를 통해 주변 NPC 부르기(기본 기능)나 아이템 수집,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 행위가 가능하다. 하지만 오브젝트에 다가서도 이 오브젝트와 상호작용하라는 별도의 지시는 나오지 않는다. 앞에 있는 오브젝트가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가까이 가야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수집이 가능한 물건인지, 심지어 이것이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에 필요한 것인지조차도 게이머는 직관적으로 알 수 없다. * (<사이렌>의 상호작용 시스템. 거리나 위치에 따라서 상호작용 가능한 개수가 달라진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게임 플레이 경험은 어렵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게임의 전반적인 클리어 과정은 시인과의 추격 관계 하에 이루어진다. 게이머는 시인을 피하면서 스테이지 내에서 시인의 행동을 파악하고 [5] , 은신해서 피하며, 스테이지를 탐색하는 식으로 퍼즐 풀이를 해 나간다. 불친절한 지도 시스템은 우리가 찾고 있는 클리어 조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플레이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불충분한 정보 안에서 게이머는 시인을 피하면서, 혹은 시인을 무력화시켜 가면서 게임 클리어를 위한 단서를 수집해야 한다. 다만 주인공은 시인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쓰러뜨리더라도 시인은 다시 부활한다. 결국 주인공은 시인에게 죽고, 게이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방금 전까지 쫓아오던 시인의 위치와 행동 패턴은 다시 리셋 되어 주인공 앞에 나타나고, 왔던 길을 다시 지나면서 아까 살펴보지 못한 곳을 다시 살핀다. 점차 공포를 유발하던 시인의 존재는 공포의 표상이 아닌 비대칭적 관계에서 비롯된 장애물로 여겨지게 된다. 게이머가 받는 시인이나 게임 분위기로부터의 공포는 점차 사라진다. 이는 <사이렌>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적인 게임 플레이 디자인이 바로 ‘반복’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플레이를 통해 <사이렌>의 공포 경험은 우리가 다른 게임을 하며 경험하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목표지향적 놀이로 변화한다. 즉, <사이렌>의 게임 플레이 경험은 다시 하기, ‘리플레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때 공포는 장애물을 극복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지향적 놀이의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 어려움을 유발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이미 이 시점에서 공포는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리플레이는 공포를 피로, 지루함 등의 불쾌함으로 만든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공포에서 변질된 어려움으로 인한 불쾌한 게임 경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최종적으로 게임을 클리어하겠다는 목표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서튼 스미스는 다양한 유형의 놀이와 게임의 동기 부여 요인에 부정적 감정 또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놀이가 단순히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 이러한 감정들을 재인식하여 지배하고 있는 부정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Sutton-Smith, 2008). 즉, 공포에서 불쾌함으로 변화하는 게이머의 부정적 감정 경험은 게임을 계속해서 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의 일체인 셈이다. 게이머는 불쾌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플레이하게 되고,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불쾌함의 근원을 해결했을 때 성취감과 함께 게임을 플레이했다고 느끼게 된다. 즉, 게이머가 겪는 <사이렌>의 경험은 부정적 감정을 재인식하고, 정서적 기술을 연마하여, 예측할 수 없는 혹은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개발과 실천을 동반하는 시뮬레이션으로써 놀이가 된다(Henricks, 2015a). 난잡한 내러티브 해독 게임 리플레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사이렌>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이 게임의 내러티브 진행은 극도로 제한된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게이머는 일반적 방식으로 주어진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면서는 게임의 스토리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이렌>은 그저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게이머에게 클리어 조건을 제시하고 방치한다. 제한된 내러티브는 다른 스테이지 내에서 스토리 관련 아이템을 수집하거나 다른 스테이지의 정보(맵 이름, 등장인물 등)와 조합해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반복해도 플레이어는 게임의 기본적인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게임 플레이가 여러 캐릭터를 통해 진행되고, 인물 사이의 관계들이 스토리 이해에 중요하게 작용하며, 이 인물들로 조합되는 사건들이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런 난잡함은 게임 내러티브 이해 자체를 방해한다. 게이머가 느끼는 답답함과 의문은 특정 엔딩에 도달하더라도 풀리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게이머가 겪는 두루뭉실한 내러티브 참여는 불쾌한 게임 경험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 (시간대, 등장인물을 표시해주는 ‘링크 내비게이터 시스템’) 또 하나의 난점은 ‘종료조건’이다. <사이렌>의 종료조건은 일반적으로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있는 클리어 요건이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이 게임에서의 종료조건은 한 스테이지에 2가지가 존재한다. 2번째 종료조건은 해당 스테이지가 아닌 다른 스테이지에서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거나 아이템을 수집해야만 등장한다. 이 때문에 게이머는 다른 종료조건을 가진 채로 이전에 플레이한 스테이지를 다시 플레이해야만 한다. 앞선 게임 플레이 디자인이 의도하듯이, <사이렌>은 리플레이 유도를 내러티브 전개에서도 활용한다. 종료조건 또한 게임 플레이와 내러티브 디자인이 의도한 불편함을 유발하는 중요한 장치인 셈이다. * (<사이렌>의 종료조건. 특정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 게임은 마치 게이머에게 불쾌감만을 주기 위해 디자인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참여의 불쾌한 경험이 단순히 재미나 즐거움을 반감시키기 때문에 놀이로 기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이머가 계속해서 내러티브에 참여하며 플레이하게 되는 것은 결국 몰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허나 몰입은 지루함과 불안 사이의 중간 지점에 존재하는 상태로 긍정적 감정 경험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Henricks, 2015b; Calleja, 2022). <사이렌>의 내러티브 경험은 난해, 불편, 불쾌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수반하지만, 게이머는 내러티브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를 종합하여 앞으로의 플레이에 반영한다(Henricks, 2015b; Calleja, 2022). 게이머가 겪는 불편하고 불쾌한 내러티브 참여 과정 그 자체는 놀이 과정의 한 단계로 기능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임 시스템은 ‘아카이브’이다. 여러 게임에서도 아카이브는 존재하지만, <사이렌>의 아카이브는 내러티브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특정 아이템에서 도출되는 텍스트는 게임 내 별도의 기능인 아카이브에 저장된다. 아카이브는 게임 설정이나 스토리의 일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연하게도 아카이브만으로 내러티브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편화되어 있는 아카이브를 모으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며 얻는 내러티브 정보와 이어 붙이는 작업을 통해 비로소 <사이렌>의 스토리는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된다. 남아 있는 불쾌함을 해소하기 위한 게임 텍스트 밖 놀이 정말 놀라운 사실은 두 가지 방향(게임 플레이 & 내러티브 이해)에서 게이머가 열심히 노력해도 진정으로 <사이렌>을 완전히 즐길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도 이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스테이지의 모든 부분을 가 보고, 상호작용해 보고, 모든 텍스트를 정리해서 자기 나름의 설정집을 만들어본다면 혼자 힘으로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이 게임은 사실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사이렌>이 그만큼 치밀하고 방대하게 짜여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독특한 파고들기 요소가 가미된 것은 맞지만, 게이머에게 불편함을 유발해 어려움을 겪게 하고 불쾌한 감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게임 디자인 의도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한 명의 게이머가 이 게임을 전부 파헤치길 바랬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렌>에 관한 게임 플레이 공략과 내러티브 이해를 위한 커뮤니티 실천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의 경우, 인물이나 시계열순으로 시나리오 공략을 작성하거나 [6] , 아카이브만을 위한 공략 등 [7] 이 존재했고, 한국의 경우도 시스템부터 스테이지 순서대로 공략을 작성하는 등의 노력 [8] 들이 있었다. 물론 공략이 활발했던 것이 당시 <사이렌>만의 특징이라고 할 순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독특한 양상은 난잡한 내러티브를 정리하려는 실천이 공략뿐만 아니라 2차 창작까지 이어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사이렌> 팬 페이지인 ‘레무리아(Lemuria)’ [9] 는 <사이렌>의 세계관, 설정, 시나리오, 등장인물 등을 활용해 실사 영상을 만들어서 이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웹게임처럼 구성되었다. 물론 그 방식은 여전히 <사이렌>과 같이 비-선형적이지만, 게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들을 게임 텍스트 밖에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해 두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처럼 <사이렌>을 둘러싼 게임 텍스트 밖 실천들은 엔딩에 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발적인 내러티브가 어떻게 선형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공략이나 관련 글을 접하면서 게이머는 자신의 놀이 반경을 넓혀간다. 게이머는 이런 외부 공략을 보고 자신의 플레이에 반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이 끝난 후 다시금 게임 속 이야기를 즐긴다. 즉, 놀이는, 매직 서클과 같이 제한된 영역이 아닌, 분리된 경계가 없고, 게이머 자신만의 해석 프레임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행위라도 놀이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Calleja, 2022). <사이렌>에서 겪은 불쾌한 플레이 경험은 게임이 끝난 후의 일상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메타게임 플레이 과정 중 하나이다. 나가며 <사이렌>의 플레이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놀이이다. 게이머는 게임 디자인이 의도한 리플레이를 피하고자, 제한적인 정보를 효율적으로 조합하여 공략을 찾아간다. 이러한 플레이 속에서 접하게 되는 내러티브는 산발적이고, 난잡하다. 나아가 같은 스테이지를 강제적으로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머는 <사이렌>을 즐기기 위해 타인의 공략을 참조하거나 스토리가 정리된 글 또는 영상을 보는 등의 행위를 통해 메타적 실천을 행한다. 이 사이클이야말로 <사이렌>이 제시하는 부정적 감정 경험으로서 놀이이다. 물론 이는 모든 게이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구조에서 파고드는 재미를 느끼거나, 게임이 제시하는 불편함조차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플레이 요소로 여겨질 수도 있다. 또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은 <사이렌>이 제공하는 불쾌한 게임 경험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놀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서튼 스미스나 헨릭스가 말하듯이, 놀이는 모든 감정 경험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놀이는 긍정적 감정 추구가 아닌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생존하는 놀이로 존재해왔다(Henricks, 2015a). 그러나 본고는 우리가 이 게임에 대해서 왜 어렵다고 느끼고, 또 남겨진 평가에서 왜 자신의 불쾌했던 경험을 표출하는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해석을 덧붙여보고자 했다. 비단 이러한 놀이 양상은 <사이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이렌>을 살펴보고자 했던 출발점은 세간의 평가에 녹아 있는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단상이었다. [10] 이 측면에서 여러 게임에 대한 평가를 찾아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순수하게 특정 게임의 안티로서 비난하는 글들이나 코멘트를 제외하고도, 게이머들은 종종 부정적이었던 게임 경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특정 게임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순간의 분노나 불쾌감의 표현을 위해 표출하면서도 ‘그래서 재미없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무용담처럼 ‘난 이런 점이 어려웠고, 되게 힘들고, 그거 때문에 불쾌했지만, 이젠 클리어했지.’와 같은 발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의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러 불특정 다수와 이를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상호간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교환해 나간다. 게이머들은 플레이 당시 부정적이었던 자신의 게임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그 경험을 게시글이나 코멘트, 영상으로 남기고, 이 속에서 플레이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창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필자는 지금 이 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있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해보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 글 또한 그 과정 중 하나다. 아직은 엄밀하게 ‘부정적 게임 경험’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여러 이론적 자원을 바탕으로 이러한 현상을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제언해 보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Calleja, G. (2022). Unboxed: Board game experience and design. The MIT Press. Henricks, T. S. (2015a). Play as experience. American Journal of Play, 8(1), 18-49. Henricks, T. S. (2015b). Play and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Sutton‐Smith, B. (2008). Play Theory: A Personal Journey and New Thoughts. American Journal of Play, 1, 80-123. 참고자료 SCEジャパンスタジオ. (2003). サイレン(SIREN). [Game]. 東京, SONY. [1] 네이버 지식인과 같은 형태의 야후 재팬 질문 사이트이다. [2] https://detail.chiebukuro.yahoo.co.jp/qa/question_detail/q1011257965 [3] https://tamane-pearl-survive.com/%E5%90%8D%E4%BD%9C%E3%83%9B%E3%83%A9%E3%83%BC%E3%82%B2%E3%83%BC%E3%83%A0%E3%80%8Csiren%E3%80%8D%E3%81%AF%E4%BD%95%E3%81%8C%E9%9B%A3%E3%81%97%E3%81%84%E3%81%AE%E3%81%8B%E8%A7%A3%E8%AA%AC/ [4] https://bbs.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2209319?m=humor&t=now [5] 여기서 ‘환시’라는 적의 시야를 하이재킹하는 시스템이 사용된다. 이 시스템 또한 <사이렌>의 매우 독특한 시스템이지만, 이번 분석에서 환시는 <사이렌>이 의도하는 플레이에서 어려움을 가미해주는 조미료에 가까웠다. [6] http://kremnant.html.xdomain.jp/siren/siren-character.html [7] https://niwaka-games.com/2018/05/15/2466/ [8] https://blog.naver.com/gamedonga/223752058889 [9] https://nakadararirurero.wixsite.com/lemuria-sirenda [10] 물론 그 이후 필자는 직접 게임을 해보면서 납득할 수 있는 지점과 그러한 점들이 모여 이 게임을 계속해서 플레이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Tags: 게임디자인, 난이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AAA의 한계를 뒤로 하는 북미 게임업계의 뉴미들
지난해 11월, 워너 브라더스 게임즈는 수년간 공들여 개발한 <수어사이드 스쿼드: 킬 더 저스티스 리그>에 오프라인 모드를 추가한다는 내용을 조용히 발표했다. 겉으로는 유저 편의를 위한 업데이트처럼 보였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서비스 종료 예고로 받아들였다. < Back AAA의 한계를 뒤로 하는 북미 게임업계의 뉴미들 28 GG Vol. 26. 2. 10. 2025년 북미 게임시장, 라이브 서비스는 왜 무너졌나 지난해 11월, 워너 브라더스 게임즈는 수년간 공들여 개발한 <수어사이드 스쿼드: 킬 더 저스티스 리그>에 오프라인 모드를 추가한다는 내용을 조용히 발표했다. 겉으로는 유저 편의를 위한 업데이트처럼 보였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서비스 종료 예고로 받아들였다. DC 유니버스라는 거대 IP를 앞세워 수천억 원을 쏟아부은 라이브 서비스 게임이 출시 1년도 채 되지 않아 백기를 든 것이다. 숫자를 보면 이런 결정이 이해가 간다. 2025년 1분기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실적 발표에서 게임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48% 급감했다. 경영진은 공개적으로 "게임 전략 수정"을 언급했고, 라이브 서비스 중심 전략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검증된 프랜차이즈 중심의 전통적 개발 방식으로 회귀하겠다는 것이었다. 소니 역시 비슷한 국면을 맞았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온라인> 프로젝트와 <갓 오브 워>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모두 개발 중단됐다. 물론 게임의 퀄리티와는 무관한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2024년 출시된 멀티플레이 슈터 <콩코드>는 극심한 흥행 부진 끝에 수개월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고 결국 스튜디오 폐쇄로 이어졌다. 2025년 소니 CFO는 실적 발표 자리에서 솔직하게 인정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 전략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시간을 두고 벌이는 전쟁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핵심은 단순하다. 라이브 서비스는 유저의 '돈'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모델이며, 이 시간은 본질적으로 한정돼 있다. <포트나이트>, <로블록스>, 같은 소수의 초대형 플랫폼형 게임이 유저의 시간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신규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진입 단계부터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여기에 시즌 패스, 데일리 미션, 한정 이벤트로 대표되는 비즈니스 모델은 피로감을 주고 있다.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조바심을 뜻하는 Fear of Missing Out(FOMO)에 기반을 뒀기 때문이다. 2025년 하반기 레딧과 디스코드에서는 "게임이 취미가 아니라 숙제가 됐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왔고 새로운 온라인 게임이 나와도 이에 익숙해지고 새로 배우는 것이 부담스러워 시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출시 후 완성' 문화에 대한 신뢰 붕괴다. 이전의 싱글 플레이 게임과는 달리 출시 후 패치를 전제로 발매되는 게임들이 많다. <배틀필드 2042>, <헤일로 인피니트>, <마블 어벤져스> 등은 모두 불완전한 상태로 출시된 뒤 장기적인 패치를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저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마블 어벤져스>는 출시 직후 분기 손실 약 6300만 달러를 기록하며, 라이브 서비스 실패가 얼마나 큰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제 유저들은 미완성 게임을 돈을 지불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엔딩이 있는 게임의 귀환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5년 12월, 더 게임 어워즈를 전후로 가장 뜨거웠던 질문은 명확했다. "왜 우리는 다시 싱글 플레이어 게임에 열광하고 있는가?" 답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했다. 유저들은 엔딩이 있는 경험, 즉 완결된 만족감을 다시 원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33원정대>다. 프랑스의 중소 규모 스튜디오 샌드폴 인터랙티브가 약 30명 내외의 팀으로 제작한 이 게임은 언리얼 엔진 5를 활용한 AAA급 비주얼과 실험적인 턴제 전투 시스템으로 북미 시장을 뒤흔들었다. 출시 6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500만 장을 돌파했고, 엑스박스 게임 패스 역사상 2025년 가장 성공적인 서드파티 런칭 타이틀로 기록됐다. 더 게임 어워즈 2025에서는 무려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9관왕을 차지했다. 개발비는 약 1000만 달러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대형 AAA 게임 평균 개발비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캡콤의 <몬스터 헌터 와일즈>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온라인 협동 요소를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싱글 플레이를 중심으로 한 완결형 액션 RPG인 이 게임은 출시 3일 만에 8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캡콤 역사상 가장 빠르게 팔린 게임이 됐다. 비평과 유저 반응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강점은 "라이브 서비스처럼 느껴지지 않는 설계"였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이유'를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서사, 탐험, 성장의 리듬을 존중했다. 뉴 미들의 부상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3000억이 넘는 예산, 5년이 넘는 개발기간을 거치는 초대형 라이브 서비스 프로젝트는 이제 과도한 리스크를 동반한 도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뉴미들, 즉 고품질 AA 시장이다. 1000억원 이하의 예산, 3년 이하의 개발기간, 명확한 기획과 타겟을 가진 싱글 플레이어 중심 프로젝트들이 산업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이 무엇보다 유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술 발전과 개발 툴의 대중화가 만들어낸 결과다. 언리얼 엔진 5 같은 도구 덕분에 이제 소규모 팀도 AAA급 비주얼을 구현할 수 있다. 유저는 더 이상 '가장 큰 게임'이 아니라 '가장 밀도 높은 게임'을 선택한다. 북미 게임업계에서 오랜 시간 일한 한 개발자는 “누구나 다 퀄리티가 높은 게임을 하고 싶어하지만 게임사 입장에서는 퀄리티를 높이며 커져버린 비용을 회수하려면 당연히 라이브 서비스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며 “그래서 많은 유저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라이브 서비스 게임을 해온 면이 있다. 피로도가 누적된 유저들이 눈을 돌리니 퀄리티가 높으면서도 유저들을 ‘쥐어짜지 않는’ 싱글 플레이 게임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실제로 2025년 하반기부터 북미 주요 퍼블리셔들은 라이브 서비스 프로젝트 수를 줄이고, 대신 중규모 싱글 플레이어 게임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2026년은 북미 게임 산업이 '규모의 경제'에서 '밀도의 경제'로 이동하기 시작한 변곡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라이브 서비스의 신화는 무너졌고, 완결형 싱글 플레이어 게임은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미래는 가장 비싼 게임의 것이 아니라, 가장 명확한 비전을 가진 게임의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라이브 서비스 하지만 여기에 뉴미들을 곁들인 북미 게임업계 관계자들이 보는 한국의 게임업계는 라이브 서비스의 선두주자였다. 넥슨은 이전부터 부분유료화라는 모델을 만든 게임회사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드러내왔고 NC소프트는 모바일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서 수익을 창출해 왔다. 특히 (과거 FIFA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EA가 한국의 의 비즈니스 모델을 보고 이를 참고해서 라이브 서비스를 운영해왔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여전히 한국의 게임사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은 라이브 서비스 게임들이다. <던전앤파이터>, <배틀그라운드>, <리니지> 등 각 게임사의 대표게임들이 검증된 수익모델로 자리잡고 있는 이상 회사들은 여기에 자원을 투자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완전히 모든 자원을 모바일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 올인하는 것 같던 2010년대의 분위기는 조금씩 누그러지고 오히려 엔딩이 있는 게임을 개발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 <스텔라 블레이드>, <데이브 더 다이버> 등의 성공사례가 있고 관련 분야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붉은 사막> 또한 3월 출시를 앞두고 있다. 4년전 NC소프트의 한 관계자를 만나 업무관련 협의를 하는데 그는 당시 사내 분위기를 전했다. <리니지> 처럼 모바일 라이브 서비스 게임을 통해 극히 적은 고액 결제 유저, 이른바 고래들에게 의지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이제 저물고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고. 2020년대 들어서부터는 한국의 게임사들이 이러한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20년대도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위기감의 결실들이 하나씩 보이고 있다. 북미 게임계의 뉴미들과 경쟁할 만한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지 지켜볼 만하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나성인) 홍영훈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english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Feng Zhu (Game Researcher) Bora Na A game researcher. Game-playing goes back quite a long way, but the first encounter with game studies came by chance, through a game course take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Since graduating, has carried out research and writing centered on game history and culture, here and there. Contributed to The History of Games, The Theory of Games, and Mario, Born in '81, among others.
-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매체라는 말은 A와 B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스마트폰을 우리가 매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들이 각각 생각과 생각, 창작자와 수용자,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게임도 같은 의미에서 매체다. < Back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11 GG Vol. 23. 4. 10. 매체라는 말은 A와 B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스마트폰을 우리가 매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들이 각각 생각과 생각, 창작자와 수용자,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게임도 같은 의미에서 매체다. 그러나 이 매체라는 말은 조금 더 파볼 여지를 갖는다. 이를테면 텔레비전 매체는 물리적 매개체로서 텔레비전 수상기라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시청각 정보를 시청자에게 매개한다.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물리적 매체 안의 콘텐츠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 다시말해 디스플레이 기기, 스피커,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 또한 매체로 불린다. 디지털게임에서 물리적 매체는 PC, 스마트폰, 콘솔게임기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만 다른 매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물리적 매체 영역 하나를 게임은 더 가지고 있는데, 바로 입력 인터페이스다. 물리적 피드백을 제공했던 게임 인터페이스들 조이스틱과 패드, 키보드와 마우스, ‘펌프 잇 업’의 발판에 이르기까지 디지털게임에는 사용자와 게임소프트웨어 사이를 연결하는 입력장치로서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한 매체로 자리한다. 게임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규칙의 세계는 사용자가 규칙에 조응함으로써 완성되며, 때문에 디지털게임에는 사용자의 의도를 기호화하여 소프트웨어에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의도를 소프트웨어에 되먹이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소프트웨어의 신호는 뇌에 이르러 체계화된 상으로 구성되고, 이를 토대로 플레이어는 상황을 추론하여 해법에 맞는 의도를 다시 쏘아보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음성이나 몸짓 같은 경우도 인터페이스로 기능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경우 이 과정을 매개하는 방식은 손과 같은 기관을 이용해 특정한 버튼을 눌러 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버튼을 누른다는 말로 대표되는 게임 인터페이스의 활용에는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가 단순히 시청각매체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닌 특정한 상황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촉각이다. 스틱과 패드, 키보드와 마우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 인터페이스들은 대체로 특정한 버튼을 누르거나 스틱을 일정한 방향으로 밀고 당기는 동작을 요구하는데, 이 때 스틱과 버튼, 키들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 입력이 제대로 들어갔음을 알리는 특정한 촉각적 신호를 보내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오락실부터 유구하게 이어지는, 플레이어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아! 눌렀는데!’는 이 촉각의 피드백과 게임 소프트웨어의 피드백이 보여주는 불일치(이기도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변명이기도 한)의 순간을 보여준다. 내 손에 들어온 감각으로는 제 때 스틱을 당기고 버튼을 눌렀지만, 소프트웨어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는 판정을 결과로 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버튼을 제 타이밍에 누르지 못했거나 하는 순간 소프트웨어가 결과값을 출력하기 전에 이미 촉각 신호로부터 ‘아, 망했구나!’를 먼저 체감하기도 한다. 비단 버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스틱은 움직임의 제한값 – 다시말해 얼마나 오른쪽 방향으로 밀어낼 수 있는지의 한계를 스틱을 움직이다가 최대값의 벽에 부딪혔다는 촉각의 신호로 판단한다. 격투 게임에서 스틱이나 패드를 이용해 연속적으로 방향 커맨드를 입력해야 할 때 우리는 경우에 따라 스틱을 돌리는 모션을 취하곤 하는데, 이를테면 ←↙↓↘→같은 커맨드를 연속으로 입력할 때 우리는 반시계 방향으로 스틱을 끝까지 밀어 돌리게 된다. 이 때 그려지는 스틱의 움직임은 스틱의 가동범위 안에서 촉각을 통해 호의 모양으로 인지된다. 현실의 물리적 피드백이 사라지는 시대 소프트웨어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디지털게임의 인터페이스는 그렇게 오랫동안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방식에서 비롯되는 또다른 피드백과 함께 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독특하게도 이런 피드백이 사라진 새로운 게임 인터페이스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바로 터치스크린이다. 모바일 기기들의 보편화되면서 모바일 기반의 게임들이 크게 대중화되었고, 그와 함께 터치스크린은 게임 인터페이스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단지 인터페이스의 중심이 바뀌었다는 말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변화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장 앞서 언급한, 촉각을 통한 피드백이 과거의 인터페이스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매끈한 유리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플레이어의 입력은 더 이상 촉각적인 피드백과 함께 하지 못한다. 이른바 가상패드라고 불리는, 터치스크린 안에서 표현하는 별도의 입력방식을 통해 우리는 손가락으로 마치 스틱을 미는 듯한 움직임을 입력하지만, 이 때 손가락은 과거 스틱과는 달리 한없이 미끄러져나간다. 특정한 버튼을 누르면 여전히 소프트웨어는 우리의 입력에 반응하지만, 과거와 같이 게임 소프트웨어 바깥에서 주어지는 ‘눌렸음’의 촉각적 신호는 사라진다. 햅틱과 같은 기술을 통해 일정부분 보완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 방식에 기반한 촉각 신호와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일련의 가치판단으로 귀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들은 특유의 감각에 걸맞는 게임 규칙들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궁수의 전설’이나 ‘탕탕특공대’처럼 오로지 스와이프 동작만으로 이동과 공격을 묶어버리되 고전적인 입력방식의 형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고, 아예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에 적합한 장르와 시점으로 넘어가버린 소셜네트워크게임류도 있다. 과거 스틱/패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전격투게임과 같이 특정한 장르는 아무래도 소화하기 어려운 것이 터치스크린이겠지만, 이 또한 이후 장르가 어떻게 바뀔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숙련도가 머무는 곳은 어디였을까 촉각 피드백이 사라진다는 점을 조금 더 폭넓은 개념, 인터페이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인간-소프트웨어 사이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형태가 보편화되고 이 과정에서 물리적 피드백이 점차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테면 간혹 이야기되는 뇌파를 통한 게임 컨트롤을 예로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속 캐릭터의 행동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컨트롤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한다면 이 과정에서 또한 물리적 인터페이스가 제공하던 촉각적 피드백은 사라진다. 컴퓨터와 신경망을 직접 연결하는, 마치 ‘사이버펑크 2077’같은 세계에서의 게임이라면 아마도 인터페이스의 촉각 피드백은 무의미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상상 속에서라면 디지털기기가 가상으로 만들어내는 햅틱과 같은 촉각 피드백은 플레이어가 인터페이스를 활용할 때 나타나기보다는 차라리 마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촉각 수트를 입고 적의 공격을 유사하게 그려내는 것과 같은 방식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인터페이스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물리적 피드백은 점차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가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드백이 메꾼다. 촉각은 아니지만 VR 헤드셋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레이어가 VR 헤드셋을 쓰고 시선을 돌리면 센서는 플레이어 머리의 동작을 읽어낸 뒤 시선이 돌아간 만큼의 시야를 렌더링하여 실시간으로 뿌려주는 피드백을 제공한다. 현실에서 플레이하지만 인터페이스의 물리적 피드백이 사라질수록 우리가 체감하는 감각은 더욱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온전한 가상의 세계에 강하게 귀속된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띤다. 첫 번째는 말그대로 디지털게임이 그려내고자 했던 가상세계가 보다 제작자의 의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게 변화한다는 점이다. 시청각 뿐 아니라 촉각까지도 의도한 바 대로 피드백해줄 수 있다는 것은 현재도 적용되고 있는 콘솔 게임의 게임패드들에서 이미 시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듀얼센스가 제공하는 트리거의 장력 변화나 특정한 상황에 제공하는 햅틱 등은 결국 촉각을 동원해 소프트웨어가 제공하고자 하는 정보를 보다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자 함일 것이다. 두 번째는 잘 거론되지 않는 점인데, 이는 결국 플레이어 – 소프트웨어라는 길항구도 안에서 중립적인 영역이 사라져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던 이른바 ‘눌렀는데!’는 바로 그 물리적 피드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터페이스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변명이 될 것이다. 물론 신경망을 연결한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접속노드가 이상한데?’, ‘핑이 별로네’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손에 직접 누른 타이밍에 들어오던 촉각적 피드백을 근거로 삼던 시절과는 달리 이 때의 항변은 오로지 소프트웨어가 제공한 결과값과 자신의 의도가 만드는 차이로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인터페이스가 갖는 물리적 한계는 한계로만 머무르기보다는 디지털게임의 발전과정 안에서 그 또한 극복, 혹은 마주해야 할 어떤 대상으로 자리하며 게임 플레이 안에 함께 녹아들어 온 바 있었다. 터치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는 그 물리적 피드백의 공백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짝 체험하는 중이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게임들이 그 물리적 한계와 함께 어우러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신체가 유발하는 레이턴시를 넘어서는 완벽한 가상세계와의 합일을 꿈꾸게 하는 것도 인터페이스 기술의 발전이지만, 동시에 특유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부었던 인간의 노력과 그 성과들, 이른바 ‘피지컬’이라고 불렸던 일련의 숙련도가 만들어내던 재미의 영역은 그대로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영역에 눌려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콘솔, 스팀덱, PSP, 미디어, 하드웨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imong Lee From childhood to now, always in the company of Nintendo games. A few months ago, bought a Steam Deck on installment and has been enjoying it to the fullest. Studied business administration at Kyung Hee University and cultural mediatio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and is currently a doctoral student in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Researches digital media content and culture, including games and webtoons.
- 도시 밖도 자본의 바깥은 아니다 - 〈동물의 숲〉과 자본주의
‘문명 6’에 등장하는 ‘쇼핑몰’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업지구가 아닌 주거지역에 지을 수 있는 건물로 등장한다. 건물의 효과 또한 쇼핑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조금 다른데, 단순히 상업수익이 나는 곳이 아니라 거주민의 쾌적도와 지역의 관광을 크게 올려주는 효과가 핵심이다. 우리의 여가는 시스템 밖을 꿈꾸지만, 그 밖을 향하는 경로까지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상품화한다. 설령 무인도에서의 고요한 삶을 꿈꾸더라도 그조차도 Inc. 가 붙은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숲〉의 설정은 애초에 그런 삶을 생각하며 게임 시스템에 접속하게 되는 시대에 대한 거친 스케치로도 읽힌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 Back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08 GG Vol. 22. 10. 10. 매일 저녁 오락실에서는 뜨거운 응원전이 열렸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그래서 오락실 맨 구석 <갈스패닉 S2> 기기에서는 요구 조건 달성을 위한 협동 플레이가 펼쳐졌다. 그날 마침 잔돈이 가장 많이 남은 친구가 물주가 되고, 무리 중 가장 컨트롤이 좋은 친구가 자리에 착석한다. 날아오는 탄막이나 남은 시간을 일러주는 친구, 다음 패턴이라던가 적 몬스터를 가두는 법을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당시는 핸드폰 카메라로 완성 결과물을 촬영할 수도 없었으므로 눈으로 일러스트를 담아가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최선을 다해 이미지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이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이야말로 필자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다. 오락실은 그야말로 협동플레이(Co-Op, 코옵)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앞서 말한 <갈스패닉>뿐 아니라 여러 게임에서 코옵이 이루어졌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이는 오락실의 특성상 같이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여럿이 함께 의사소통을 하면서 퍼즐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UX를 찾아서 돌이켜보면 오락실은 2인용 게임에 특화된 공간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락기 하나에 자리는 2개이므로 1p와 2p가 겨루는 게임이 많았지만, 함께 목적 달성을 위해 달리는 게임도 적지 않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임은 <스노우 브라더스 2>. 설계상 눈, 번개, 물, 바람 등 4종류의 캐릭터를 모두 골라서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오락실에서는 기판의 한계로 대체로 2p 플레이까지 지원했다. 두 플레이어가 각자 몬스터를 볼로 만들어 가둔 뒤, 타이밍을 맞춰 터뜨리는 재미가 있었다. 아케이드판 <천지를 먹다>나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같은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은 코옵의 진수라고 이를 수 있다. 두 사람이 좁은 기기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부딪치며 버튼을 재빨리 눌러가며 게임을 플레이하곤 했다. 서로 체력 회복 아이템을 양보하거나, 서로의 캐릭터에 더 도움이 되는 버프 아이템(또는 무기)을 양보하는 미덕이 작동했다. 미션에 성공할 때 하이 파이브를 하기도 하고, 나는 살았지만 혼자 남아서 플레이하기 싫어 2p를 부활시키기 위해 선뜻 100원을 내기도 했다. 그렇다.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위해서 돈을 내준다는 행위는 오락실에서 대단히 멋진 일이었다. 하던 게임을 뺏어서 하거나, 오락실 근처 으슥한 골목에서 돈을 뺏거나, 딸깍이(또는 딱딱이)를 작동시켜 몰래 크레딧을 추가하는 등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오락실에서는 누구나 100원짜리를 기기에 집어넣어야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이 엄정한 100원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한 판 크레딧을 나누어주는 호혜는 온라인게임 시대에서는 ‘소매넣기’와 같은 뉴비 도와주기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다. 그마저도 ‘고인물’ 유저가 잉여 자산의 일부를 나눠주는 것으로 그 무게는 다를 것이다. 100원의 행복 농담 조금 섞어서, 누구나 한 판에 100원을 넣어야 한다는 법칙은 곧 P2W(Pay 2 Win)과 연결시킬 수 있다. 특정 게임기에 동전을 많이 넣은 플레이어일수록 숙련도가 올라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PvP를 할 때 그 게임에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이 유리한 측면이 크다고 볼 만하다. 그러다 플레이어의 게임 숙련도가 특정 경지를 넘어가면, 동전 한 닢에 결말을 보는 ‘괴수’가 되어 오락실 사장의 눈초리를 받았을 것이다. 100원 하나 넣고 종일 <테크모 월드컵 98>을 플레이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축구게임은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가 한 쪽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회전율이 지극히 떨어졌다. 결국 그를 제지시킬 수 있었던 건 야간자율학습을 무단으로 결석하고 오락실에 있다는 익명의 제보였다. 그 형보다 한참 어렸던 또래 친구들은 오락실 사장이 직접 그를 신고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필자의 오락실 최애 게임은 사이쿄의 슈팅게임 <텐가이>였다. 필자는 특유의 일본풍 룩앤필과 스릴 넘치는 게임플레이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서 절친했던 친구와 종종 <텐가이> 오락기가 있는 옆 동네 오락실까지 걸어가곤 했는데, 그 자체가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에는 어느 누가 100원 내고 게임 한 판 하겠다고 20분을 걸어갈까? 게임잡지는 있었지만 게임잡지에서 오락실 게임 공략을 찾기는 어려웠던 시절, 오락실까지 걸어가는 20분 내내 친구와 무슨 캐릭터를 고를지, 어떻게 스테이지를 깰지 의논했다. <텐가이>에는 히든 캐릭터 ‘아인’이 있었다. 선택창에서 상상상, 하하하, 상상상상상상상의 커맨드를 입력하면 해금되는데, 작동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히든 캐릭터를 골라주는 것도 일종의 협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킹 오브 파이터즈>(킹오파) 같은 PvP 게임에서도 코옵은 작동했다. <킹오파 97>에서 친구에게 ‘미친 이오리’(정식 명칭은 달밤에 오로치의 피에 미친 이오리)를 골라주는 것처럼 말이다. ‘현피’까지 3m 커플은 오락실에서 <컴온 베이비>나 <다른 그림 찾기>를 많이 플레이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볼록한 버튼을 연타하는 소리 역시 추억으로 남아있다. <컴온 베이비>야말로 2021년 여러 매체로부터 ‘올해의 게임’에 선정된 <잇 테익스 투>의 프로토타입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2인용 게임이라는 점도 그렇고, 플레이에 과하게 몰두했다가는 관계의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과거 오락실 죽돌이였던 필자는 <컴온 베이비>를 하다가 “왜 봐주지 않느냐”는 말을 꺼내면서 싸우는 커플을 본 적 있다. 사실 커플끼리의 싸움은 대체로 애정의 확인이었기 때문에 귀여운 수준이었던 적이 많다. 대전 격투 게임 중 건장한 남성 둘이 시비가 붙어 오락실 전체의 게임플레이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필자의 동네 오락실에선 <철권 태그 토너먼트> 중 데빌이 자꾸 레이저를 쏘는 탓에 상대방이 “얍삽이 그만 쓰라”며 물리적인 싸움이 벌어진 적 있다. 오락실의 대전 격투 게임에서 서로의 얼굴은 바로 맞은편에 있다. 우리에게 오프라인 코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우리는 온라인 시대에 살고 있다. 단적으로 게임 곳곳에 삽입된 미니게임들이 오프라인 코옵에 대한 헌사로 여겨지는 <잇 테익스 투>를 플레이하기 위해서도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만날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이 온라인에서 친구초대 버튼을 누르면 같이 게임 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오프라인 협동 플레이는 어떤 의미가 남아있을까? 물론 닌텐도 스위치에는 훌륭한 파티게임이 많이 남아있으며, 비록 소프트웨어는 없지만 여럿이 방탈출 카페에 가서 퍼즐을 푸는 것도 코옵이라면 코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프라인 코옵은 이제 주류에서 밀려나 추억의 대상이 된 듯하다. 여러 사람이 한 화면을 보면서 반응하는 경험은 일상이 아닌 특별한 이벤트가 되고 있다. 오락실 오프라인 코옵이 대세였던 시절에는 새로운 정보를 구할 인터넷이 (상대적으로) 귀했고, 집에 게임을 실행할 콘솔이나 PC가 있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당연히 모두의 손에 전화기가 들려있지도 않았다. 플레이 이력을 남길 만한 방법은 순위표에 자신의 이니셜을 남기는 것밖에 없었다. 오프라인 코옵은 한 게임, 한 게임이 귀중했다. 온라인 시대에서는 ‘한 게임’에 대한 접근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됐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어느 한편에는 게임 중 익명성의 장막에 숨어 차마 담기 어려운 욕을 꺼내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다. 온라인 랜덤매칭에서 만난 사람들은 때때로 가볍게 욕하고, 가볍게 사라진다. 두 시대를 나란히 경험한 입장에서 ‘오락실 시절이 좋았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옛날 오락실 오프라인 코옵에는 ‘노는 형’들이 자행한 여러 악행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UX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사용자의 경험의 총체라고 일컫는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오락실만의 특수한 환경이야말로 게임 UX의 역사에서 특별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김재석 8년 동안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서브컬처 스타트업에서 대외협력을 맡고 있다.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개척, 애정, 확장성: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 그리고 제다이 서바이버
이번에 얘기한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와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를 플레이해보며, 스타워즈라는 새로운 문화에 발을 내딛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 Back 개척, 애정, 확장성: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 그리고 제다이 서바이버 16 GG Vol. 24. 2. 10. 우리는 넘쳐나는 콘텐츠의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살며 다양한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 ) 와 마주하고 있다 . 그 중에서 ‘Star Wars Jedi: Fallen Order’ 그리고 ‘Star Wars Jedi: Survivor’ 라는 게임 작품으로 IP 확장성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 컨텐츠 IP 우선 , IP 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위해 정의를 하고 가려 한다 . 다들 저작권을 가지고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정확히 그 개념이 무엇인지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IP, 우리말로 지식재산이란 것은 무형적인 자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여 창작된 무형적인 것으로 이익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 그 중에서 오늘 계속 언급할 IP 는 콘텐츠 IP 이다 . 하나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다양한 부가 사업을 가능하게 하며 , 오늘날에 영화 , 애니메이션 그리고 웹툰 , 만화 , 게임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 Star Wars 세계관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위 구절로 항상 시작하는 스타워즈는 루카스 필름이 제작한 미국의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영화 시리즈로 조지 루카스 감독이 감독 , 각본을 맡아 1977 년에 개봉한 첫번째 작품인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부터 다양한 영화 , 애니메이션 , 드라마 , 소설 등 여러 매체로 뻗어 나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과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 스타워즈는 들어봤지만 세계관을 모를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세계관 설명과 뒤에 게임 얘기를 위해 알아야 할 내용 정도만 얘기하고 가겠다 . 우선 간단하게 은하 공화국이 존재하고 은하계의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는 제다이 기사들이 있다 . 하지만 은하 공화국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고 시스 ( 제다이와 같이 포스라는 힘을 쓰지만 악한 쪽 ) 의 움직임과 “ 오더 66” 에 공화국이 몰락하고 사악한 은하제국이 들어섰으며 이에 저항하는 반란군과 은하 제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위에서 간단하게 설명한 것에서 “ 오더 66” 는 제다이 폴른 오더를 시작할 때도 알고 가면 좋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만 조금 더 설명하겠다 . 우선 위에서 은하 공화국의 분열의 움직임을 말했었는데 은하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한 분리주의자들은 공화국이 크지 않은 군사 조직을 가지고 있는 점을 노려 비밀리에 대규모 드로이드 군대를 제작하고 공화국을 무력으로 압박하여 독립을 얻으려고 하였다 . 이러한 상황에서 은하 공화국 최고 수상 ( 은하 공화국의 국가원수 , 총리 위치 ) 인 쉬브 팰퍼틴이 공화국 앞으로 주문해 놓은 대규모 클론 트루퍼 군대를 발견하게 되고 , 급한 상황 해결을 위해 이 군대를 사용한다 . Excute Order 66. - 다스 시디어스 - 공화국의 가장 큰 군대로 채용된 클론 트루퍼들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였지만 이후 팰퍼틴에게 제다이들을 즉각 사살하라는 내용을 받아 은하계 곳곳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제다이와 파다완 ( 제다이 수련생 ) 들은 함께 싸운 전우들인 클론 트루퍼들에게 배신당해 사살당한다 . 그 외에 위치가 알려져 있던 제다이들도 사살당하고 마는 슬픈 서사이자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스타워즈의 큰 사건이다 . Star Wars IP 확장 1970 년대에 스타워즈가 등장하게 되면서 콘텐츠 IP 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단순히 영화가 성공한 것만 아니라 스타워즈 콘텐츠 IP 를 문구 , 장난감과 같은 MD 상품 영역 확대와 영화 속 복장을 똑같이 코스튬 플레이하여 일상 , 문화에 크게 녹아 들었고 , 이런 사유로 스타워즈라는 콘텐츠 IP 의 사업영역과 부가가치가 크게 올랐다 . https://www.youtube.com/watch?v=iFvjTwXAXUo 스타워즈는 자신이 보유한 IP 를 직접 게임으로 개발한 기업 중 한 사례로도 꼽힌다 . 바로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루카스 아츠이며 , 디즈니에 인수되기 이전까지 30 여 종이 넘는 스타워즈 IP 기반 게임을 개발하였다 . IP 라이선스 홀더가 직접 게임을 개발한 만큼 , 루카스 아츠의 스타워즈 게임은 IP 가 가진 특징이 잘 드러나며 , 영화 속 장면을 게임화 한 ‘ 스타워즈 레이서 ’ 와 비행 시뮬레이션 같은 현실감이 있던 ‘X-wing 시리즈 ’ 그리고 호평을 받았던 RPG 게임인 ‘ 스타워즈 : 구 공화국의 기사단 ’ 은 현재 리메이크 작품까지 개발 중이라고 한다 . 요즘 스타워즈 IP 의 확장을 얘기하자면 디즈니 인수 이후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 70 년대에 나온 스타워즈는 30~40 년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다가 디즈니에 인수되었고 , 그 이후 스타워즈의 스카이워커 사가의 세번째 시리즈인 시퀄 3 부작을 망쳐 최악의 평가를 받았지만 스핀오프 영화인 ‘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 같은 경우에는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에서 못 보던 부분을 보여주어 신선함과 첫번째 스핀 오프임에도 성공을 거둬 ‘ 한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 ’ 나 후에 성공하는 ‘ 만달로리안 ’ 과 같은 스타워즈 앤솔로지의 발판이 되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또 , TV 시리즈로 제작된 스핀오프 작품인 ‘ 만달로리안 ’ 은 시퀄로 온갖 악평을 받았던 디즈니의 스타워즈를 다시 일으킬 만큼 큰 영향력을 가져왔고 새로운 캐릭터들의 매력적인 서사가 인상깊다 . Star Wars Jedi: Fallen Order 위에도 여러가지 부분으로 스타워즈 IP 확장을 설명했지만 스타워즈의 IP 확장은 말하기엔 길 정도로 너무나 많다 . 그 중 우리는 EA 의 스타워즈 게임에서 Respawn Entertainment 가 개발한 스타워즈 제다이 시리즈를 중점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는 2019 년도말에 나온 작품으로 스토리는 위에서 말한 오더 66 이후 살아남은 옛 제다이 파다완 ( 수련생 ) ‘ 칼 케스티스 ’ 의 이야기를 다룬다 . ‘ 칼 ’ 은 브라카라는 행성에 숨어 고철 처리부로 몇 년 동안 조용히 지내다 제국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지만 ‘ 시어 준다 ’ 와 ‘ 그리즈 드리터스 ’ 덕분에 살아남게 된다 . 그들을 따라 보가노 행성에 가 고대 회랑의 비밀을 밝히러 가다 ‘BD-1’ 이라는 드로이드를 만나 동행해 회랑 안에서 마스터 ‘ 에노 코르도바 ’ 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 ‘ 에노 코르도바 ’ 는 제다이 오더가 몰락하는 환영을 미리 보고 포스 센서티브 아이들 ( 포스를 가진 아이들 ) 의 목록을 복사해 담은 홀로크론을 두었다 하며 , 이를 알게 된 ‘ 칼 ’ 과 ‘ 시어 일행 ’ 이 홀로크론을 찾고 제다이 오더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해 진행되는 스토리이다 . 우선 게임은 홀로크론을 찾기 위해 ‘ 칼 케스티스 ’ 가 되어 다양한 행성에 가 탐험하는 스타워즈 배경의 액션 어드벤쳐 게임이다 . 타이탄폴 같은 명작을 만들어낸 Respawn Entertainment 인 만큼 자신들이 가진 재미 요소가 잘 담겨져 있다 . 훌륭한 그래픽과 맵 디자인에 벽 타기나 그래플 등 기존 리스폰에서 볼 수 있던 친숙한 요소와 광선검을 통한 전투는 단순한 공격키 연타가 아닌 소울 시리즈의 전투 방식을 참고하였는지 상대의 공격 패턴에 맞게 패링을 하고 공격하는 컨트롤이 필요한 부분이다 . 소울 시리즈라 하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제다이 폴른 오더는 소울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전투가 더 캐주얼한 방식이며 , 난이도 조절도 플레이어에 맞게 적절히 설정할 수 있다 . 또한 스타워즈 세계관에서도 모호한 포스를 간단하게 전투와 스토리를 진행하는 퍼즐에 적절히 녹여낸 점도 칭찬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스토리의 서사구조도 깔끔하다 . 컷신이 지루하게 길지도 않으며 , 맵을 탐사하면서 포커싱되는 장면 , 과거 회상 장면에 스타워즈 특유의 사운드트랙이 어우러져 더욱더 연출과 스토리를 아름답게 해준다 .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스타워즈를 모르는 사람이 하더라도 진입장벽 없이 할 수 있도록 게임의 매력과 스타워즈 세계관이 들어있고 , 기존 팬덤에게도 큰 선물 같은 게임이라 할 수 있다 . Star Wars Jedi: Survivor 우선 다른 리뷰나 비평에서도 말이 많이 나온 최적화에 대한 얘기는 아래서 짧게 얘기만 하겠다 . Respawn Entertainment 가 최적화 부분에 매우 실망스럽게 낸 것은 맞지만 이미 다른 곳에서 많이 언급된 내용이고 본 비평은 게임에 대해서 얘기도 하지만 결국 IP 에 대한 개척 , 애정 , 확장성을 주제로 잡기 때문에 이를 중점적으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에 없던 칼 케스티스 같은 인물이나 스타워즈 IP 를 개척하였고 이를 추가적으로 더 확장시키려 노력한 부분이 보인다 . 각 행성들의 오픈월드로 하여 볼륨은 커지고 넓은 맵에 각각 있는 npc 들은 칼과 이전 작처럼 얘기를 나누는 기능 말고도 서브 퀘스트를 주기도 하고 대화를 할수록 npc 에 대한 정보도 도감에 기록된다 . 생물도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이 아닌 ‘ 칼 ’ 이 포스로 길들여 타고 다닐 수 있는 생물도 있으며 광활하고 멋진 퀄리티의 오픈월드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며 탐사할 수 있다 . 넓어진 맵에 따라서 길 찾기 시스템도 개선한 것이 보이고 오픈월드인 만큼 수집 요소도 많지만 강제되지 않고 주요 목표만을 따라 빠르게 진행하는 방향과 수집품이나 이곳저곳 탐사를 하면서 천천히 진행하는 방향 둘 다 상관없다 . 탐사를 하는데 풀 게 되는 퍼즐은 행성마다 작용하는 기믹과 컨셉의 차별화를 두려한 점이 보인다 . 성장할 요소도 많이 늘었다 . 퍽이라는 상황에 맞게 명상 지점에서 일정 개수를 선택하여 선택한 종류의 퍽에 대한 패시브를 제공받는 것과 기존에 한가지 줄기에서 뻗어 나가 스킬 트리를 찍던 제다이 폴른 오더와 다르게 스킬 포인트는 공유하지만 각 파트별로 스킬 트리를 찍게 되어 있다 . 생존 관련 스킬 , 광선검 관련 스킬 , 포스 관련 스킬로 크게 나뉘며 광선검 스킬 트리는 또 그 중에서 광선검 스탠스별로 스킬 트리가 있다 . 전투에서 쓰는 광선검 스탠스는 기존에 보여준 싱글 블레이드 , 더블 블레이드를 넘어서 전작에서는 스킬로만 등장했던 듀얼 윌드가 아예 스탠스로 등장한다 . 또 , 아예 새롭게 나온 전투 방식으로는 한쪽에서 광선이 나오고 바로 그 밑에 양쪽으로 짧게 광선이 나와 크로스가드를 갖춘 검과 같은 모양으로 사용하는 크로스 가드 스탠스를 포함해 아예 광선검과 함께 블래스터 ( 광선총 ) 도 쏠 수 있다 . 스토리에 대한 부분도 전작에서 5 년이 지난 시점으로 잡고 주연 캐릭터들의 변화가 잘 표현되어 있다 . 5 년동안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이러한 위치에서 이렇게 활동하였다가 이해된다 . 기존 주연 캐릭터의 개성을 살린 부분 말고도 새로운 캐릭터도 매력적이게 디자인되었다 .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인 ‘ 데이건 게라 ’ 는 고 공화국 시대라는 은하공하국 이전 시대의 제다이로 스토리를 보다 보면 그가 타락하는 과정과 이유를 보고 공감할 수 있다 . 이처럼 다양한 게임 요소와 매력이 가득하며 전작보다 스토리와 즐길 부분이 너무나 많다 . 게임을 하면서 불편한 점을 꼽자면 키보드 , 마우스로 플레이하는데 회피 키가 Tap 키로 되어 있어 불편했던 점 말고는 정말 없다 . 이는 키 설정만 바꾸면 해결된다 . 정말 얘기가 많이 나온 문제인 최적화만 잘 했다면 최다 G.O.T.Y 정도의 많은 시상을 받았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이다 . 게임 자체만 놓고 보자면 정말 명작이라 평가한다 . 수많은 IP들과 매력 우리는 문화 예술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수많은 IP 들이 꽃피었고 지금도 피어나고 있다 . 그리고 ,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수많은 IP 들에 빠지는 방식은 세계관 , 캐릭터 그리고 확장성이라고 본다 . 우선 영화 , 게임 , 드라마 , 애니메이션 등에는 다양한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다 . 우리가 오늘 중점적으로 본 스타워즈도 커다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 세계관의 매력은 단지 크고 작음이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시뮬레이션이 되야 매력적인 세계관이라 생각된다 . 스타워즈는 다양한 생물체와 역사 , 기술이 있으며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유명한 광선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다 했을 때 원리 , 제작방식 , 종류 , 색상이 다른 이유 등 다양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 이는 제작사가 알려준 여러 정보를 가공해서 다른 사람이 올린 정보를 또다른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2 차 소비하는 구조라 볼 수 있다 . 이렇게 깊이 있는 세계관은 관심을 가지고 애정이 생긴 사람들에게 앞선 예시로 빠져들게 한다 . 세계관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그 다음은 세계관 속 캐릭터를 들어볼 수 있겠다 . 스타워즈의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다스베이더는 “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 “ 왜 다크사이드로 빠지는 선택을 하였는가 ” 같은 물음으로 그 캐릭터를 알아가면 이제 앞선 것이 합쳐져 “ 캐릭터가 이러한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 “ 스토리에서 만나지 않았던 이들이 만난다면 어떠한 시너지를 일으킬까 ” 같은 사고로 이어지며 이는 다양한 2 차창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확장성인데 사실 앞서 세계관과 캐릭터를 말하면서 말한 부분에서도 확장성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앞서 말했던 세계관 정립 2 차소비와 캐릭터 이해에 따른 2 차창작이며 , 소비자나 팬 입장이 아닌 제작 쪽으로 얘기하자면 앞서 말한 Respawn Entertainment 의 스타워즈 시리즈인 제다이 폴른 오더와 제다이 서바이버 모두 좋은 IP 확장 사례라 말할 수 있다 . 그들은 스타워즈 세계관에 없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내 새로운 서사시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짜임새 있게 작동해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을 알고 있던 사람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였고 새롭게 스타워즈를 Respawn 의 게임으로 즐기는 사람도 스타워즈 세계관을 게임을 하면서 이해하게 구성하였다 . 기존 스타워즈 팬이든 새롭게 접해본 사람이든 칼 케스티스나 BD-1 또는 그리즈 , 시어까지 새로운 인물들이 어떠한 성격과 과거를 가졌고 , 서로가 어떠한 도움을 주는 지 우리가 칼이라는 주인공으로 여정을 이어나가며 함께 성장하고 공감하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되어있다 . 스타워즈라는 거대 IP 이자 세계관을 새로 개척해 나간 것이다 . 위 과정이 개척이었다면 이번 제다이 서바이버에서는 확장을 보여준다 . 성장한 주인공과 변화한 일행이 어떠한 일을 하는 지 , 특히 칼 케스티스가 이번작을 시작하면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우리가 이번 여정에서 어떠한 방향을 가지고 나아가는 지를 바로 이해하고 같이 생각한다 . 또 , 스타워즈 세계관에서 알려져 있지만 팬덤에서도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고공화국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며 시간은 뒤로 갔지만 앞선 시대의 스타워즈의 생소한 설정도 이번 스토리와 모험에 잘 담겨진 모습을 보여준다 . 기존에 없거나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확실히 확장한 것으로 말할 수 있겠다 . 디지털 게임이 IP 확장에서의 위치와 가지고 있는 것 디지털 게임은 여러가지 문화 예술과 산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영화 산업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 그냥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콘텐츠적으로 소설에서 영화가 미치고 영화에서 소설이 미치는 상호보완성처럼 영화 산업이 새롭게 만들어낸 확장성과 상호보완성을 게임이라는 문화예술이자 산업이 이에 대해 또다른 영향력을 가진다 . 우선 앞서 말한 소설과 영화로 예시를 들어 말해보자면 소설과 영화 , 서로 가진 강점이 다르다 . 영화는 우선 정보가 소설처럼 상상할 필요없이 시각적 , 청각적으로 접근해온다 . 기존에 소설이 있든 대본이 있든 이것을 배우들의 대사나 몸짓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대중들에게 친숙하다 . 우리가 말로 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이해가 잘 되는 상황처럼 말이다 . 다만 이 부분은 단점도 있는 것이 배우가 해당 캐릭터와 맞지 않는다 거나 연기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 또한 슬픈 장면에 슬픈 노래가 깔리는 효과처럼 분위기를 더욱 몰입하고 영화 ost 를 들었을 때 해당 장면이 떠오르는 것처럼 청각적으로도 영향을 준다 . 반대로 이제 소설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 소설은 시각적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 간단하게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가 아니기 때문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에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상상하게 해준다 . 또한 책은 텍스트로 모든 것을 담아야 하다 보니 묘사가 상세하다 . 심리에 대한 것을 영화는 배우의 연기만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면 소설에는 그대로 적혀 있다 . 이는 시각적이지는 않지만 직관적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것 . 또한 요즘은 ott 가 많기 때문에 돌려볼 수도 있긴 하지만 영화관에서 본다 했을 때 시간에 따라가야 하지만 책은 이해가 안 된다 거나 놓친 문장이 있다면 다시 앞으로 가 읽으면서 각자의 템포에 맞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진다 . 이렇게 각자의 강점이 있고 , 단점도 있으며 소설에서 영화가 되기도 하고 영화가 소설로 나오는 사례 등 서로를 보완하면서 확장시켜준다 . 다시 게임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보면 게임도 이러한 위치에서 또 다른 보완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게임의 가장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 상호작용 ’ 인데 퍼즐을 풀 때 포스로 물체를 당기고 미는 방식도 있고 그냥 캐릭터한데 말을 걸었을 때 , 해당 캐릭터가 대답을 하는 방식도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 이는 간단하지만 영화와 소설과는 다르게 내가 직접 말을 걸어서 이 캐릭터가 대답을 해주고 직접 알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 맵 탐사도 같다 . 우리는 이 모르는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 아니라 그 행성의 사는 생물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 , 메아리로 포스 안에 남아있는 것을 감지하는 ‘ 칼 ’ 의 능력으로 이전에 해당 메아리에 있던 사건을 알아볼 수 있다 . 이는 플레이어가 직접 행하는 과정으로 또 다른 몰입을 준다 .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 루크 스카이워커가 제국에 맞서 싸워 은하계에 평화를 가져왔다 .” 같은 진술이지만 게임에서는 “ 나 ” 가 사용될 수 있다 . “ 내가 스타워즈 제다이 시리즈에서 칼 케스티스가 되어 남은 제다이를 찾아 학살하고 다니는 인퀴지터와 싸워 이겼다 .“ 또는 “ 나는 험난한 행성인 다쏘미르를 탐사하였다 .” 와 같은 자연스러운 진술이 게임에서는 가능하다 . 이러한 차별성과 강점이 소설 , 영화 등과 비슷하지만 다른 위치를 가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 게임은 여러 요소가 합쳐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디지털 게임만이 개척할 수 있는 방향성과 매력이 있는 것이다 . 이렇게 IP 가 개척되고 , 우리가 IP 에 애정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며 , IP 가 다양하게 확장되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았다 . 이번에 얘기한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와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를 플레이해보며 , 스타워즈라는 새로운 문화에 발을 내딛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 당신이 크리에이터라면 새로운 IP 를 개척하는 데에 영감을 얻을 지도 모르며 , 소비자로서 새롭게 접한 IP 에 애정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며 , 어떤 방식이든 당신의 세상에 또 하나의 큰 확장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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