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우주에 손을 뻗는다
29
GG Vol.
26. 4. 10.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세계에 고립되어 존재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우주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내가 아닌 타자와 진정으로 동기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심전심, 역지사지는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개념이기에 이상향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언어가 가진 소통 수단으로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의 말을 듣고, 글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자신있게 서로를 칭송하고 비난한다. 협력하고 배제한다. 바벨탑의 저주는 어쩌면 사람들의 언어를 나누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뉜 언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맹신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류가 자신의 우주를 뛰어넘어 다른 우주와 소통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손을 뻗기 시작한 순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타자를 알아가기 위해 내 시간을 기꺼이 쏟겠다고 결심한 순간. 이 가공할 욕구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길 원하며, 무엇 때문에 이해하려 하는가? 이는 비단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구사하는 모든 개인을 향한 물음이다.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기이한 존재들-가족, 친구, 직장 상사 또는 부하 직원, 매일같이 소셜미디어에서 마주하는 익명의 존재들을,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길, 원하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우리의 애정과 관심 밖에 있는 존재들, 처음으로 마주하는 그 낯선 존재들을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는 순간. 낯선 세계에서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이들 사이를 단지 수첩과 펜을 들고 바지런히 뛰어다니는, <챈트 오브 세나르Chants of Sennaar> 속 이름도 얼굴도 없는 여행자로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왜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왜 그들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려 하는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진정 이해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너, 돕다, 나”
생전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울타리 사이로 나 있는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겠다는 친구, 여기서 뛰어내리면 더 빨리 내려갈 수 있지 않냐고 따지는 친구를 볼 때, 비로소 게임의 언어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비디오게임의 영역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그리고 으레 사용되는 언어가 존재한다. 키 매핑, 시청각적 가이드, 플레이어가 플레이할 수 있는 동사의 한계 범위는, 광범위하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경험이 발휘되는 ‘감’의 영역이다. 어느새 2n년 동안 게임을 해온 나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감각이지만, 게임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왜 저기 지나가는 저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는지가 의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게임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조금씩 파악한다. 몇 개의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 점프할 수 있는지, 얕은 개울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자에 앉을 수 있는지. 이것이 이 게임의 언어다. 키오스크나 AI 상담 챗봇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유로워 보이는 게임이라도 플레이어에게 말을 건네는 규칙은 정해져 있다. 경험을 위해선 이 규칙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긴 텍스트로 설명하는 튜토리얼과,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지저분한 시스템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렇게 복잡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튜토리얼은 플레이어가 순수하게 낯선 상태에서 게임을 알아가는 경험을 간섭한다. 플레이 중 직관적인 행동과 시도를 통해 게임의 언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공식을 머릿속에 쏟아부으며 암기하게끔 한다. 반면 <챈트 오브 세나르>는 하나의 문제를 던져주며 플레이어에게 말을 건넨다. “문 열림”과 “문 닫힘”.

* 여행자가 처음 만나는 인물은 퍼즐을 통해 기본적인 단어들을 전수한다.
<챈트 오브 세나르>의 게임 언어는 단순한 편이다. 동사의 종류가 많지 않고, 처음 게임을 시작해서 홀로 길을 걷다가 첫 문제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 초 동안 플레이어는 모든 언어(규칙)를 다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플레이어는 비로소 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소통의 본질을 경험한다. 낯선 문자의 의미를 파악해, 닫힌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 세 단어(문, 열다, 닫다)는 앞으로 플레이어가 마주하고 번역해야 하는 수많은 상형문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암시한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게임의 규칙을 파악하는 것은 처음 접하는 언어를 파악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맞닿아있다.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자각이 없는 본능적인 행위였고, 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앞서 언급한, 긴 텍스트로 도움말을 쏟아붓는 학습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결국, 스페이스바를 눌러보기 전엔 점프가 가능한 지 알 수 없고, 레버를 내려보기 전까진 이 문자가 “열림”인지 “닫힘”인지 알 수 없다.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감각하기 이전에 언어의 껍데기를 마주하는 것은 학습일 수는 있겠지만, 이해일 수는 없다.
나의 세계를 포착하는 단어장 만들기
작품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언어는 모두 표의문자를 사용한다. 하나의 문자는 단순히 하나의 단어를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2층에 사는 전사들의 어떤 문자는 ‘집어들다’부터 ‘지니다’까지 광범위한 한국어 단어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추상적으로 그린다면 결국 하나의 개념에 수렴한다. 작품은 해당 문자가 어떤 단어에 조응하느냐가 아닌, 어떤 개념을 그리고 있는지에 접근한다.
때문에 여행자의 수첩에는 문자의 의미가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 그려진다. ‘문’이나 ‘열쇠’같이 대상이 명확한 개념부터 ‘아름답다’, ‘두렵다’ 같은 형용사, 심지어 숫자나 ‘금’, ‘은’처럼 형태가 없는 명사까지 모든 개념은 독창적일 정도의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되고, 플레이어는 이 그림이 표현하는 개념에 걸맞은 문자를 짝짓는다. 만약 이를 텍스트로 표현했다면 그 순간 해당 문자의 의미는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규정되었을 것이다.

* 여행자는 새롭게 알게 된 개념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규정되어 치환된 단어는 해당 문자를 얼마나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예상하지 못한 함의와 뉘앙스가 섞여들어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는 표현의 중립성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수단이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각각의 언어와 문자에 어떠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같은 개념이 다섯 개의 다른 문자로 표현될 수 있는 이상, 각각의 문자가 얼마나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외국어 학습 유튜브 영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는 ‘당신이 알던 것은 틀렸다’ 논조다. 우리가 한국어와 치환해서 사용하던 외국어 단어나 문장 구조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며, 때문에 그 언어에 더 적합한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부족이 사용하는 다섯 개의 언어는 문자도, 문법도, 문장 구성도, 어휘도 다르다. 연금술사들은 복수형을 표현하는 별도의 문자를 사용한다. 음유시인들은 목적어를 문장의 제일 앞에 제시한다. 은둔자들은 문자들을 결합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 탑의 1층에 사는 신자들은 탑의 위쪽을 신이 있는 공간으로 여기며, 때문에 ‘위’를 ‘좋은 것’이라는 개념과 연결한다. 이들에게 ‘수도원’은 지리적으로 ‘위’에 있는 동시에 ‘좋은(신성한)’ 공간이기에, ‘위’라는 문자에 ‘공간’을 표현하는 부수를 붙여 ‘수도원’이라는 문자를 만든다. 이는 단순히 어떤 개념을 규정하는 것과 더불어, 해당 부족의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관과 정서를 보여준다.
사실 다섯 부족이 동일한 단어들을 단지 다른 문자로 표현하도록 설계한다면 개발 상의 편의를 확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부족들은 문자의 개수도 다르고, 사용하는 어휘도 다르다. 이는 각 언어의 세계관에 차이점을 둘 수 있다는 이점과 더불어, 다섯 개의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플레이 요소에도 차이를 둘 수 있다. 유일하게 숫자 어휘를 사용하는 연금술사들의 사회에서 금속을 계량하고 화합물을 만드는 퍼즐을 푸는 것은, 낯선 세계를 배회하는 여행자가 이들의 삶을 가장 밀접하게 체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음유시인들은 탑의 위로 올라갈 방법과 그럼에도 갈 수 없는 이유를 연극으로 만들었다.
견고한 관성의 경계 너머를 떠도는 유령이 있어
2층의 전사들은 1층의 신자들을 ‘불순하다’ 말하며 멸시하고, 3층의 음유시인들을 ‘선택받았다’ 표현하며 동경한다. 4층의 연금술사들은 5층의 은둔자들을 ‘요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행자는 완전한 이방인 그 자체다. 어디에서도 비롯되지 않았으며, 어떤 언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도, 얼굴도, 말도 없는 그는 이 탑의 모든 층을 오르내리며 분리된 세계들을 관통하는 관계를 구축해낸다. 그의 여정을 함께하는 것은 칼이나 총이 아닌, 수첩과 펜 한 자루다.
이 유령은 탑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그러니까, 사상적으로. 이제 막 태어나, 어떠한 세계관과 편견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상태. 사실상 이 게임을 이제 막 실행해 아무것도 모르는 플레이어와 마찬가지의 상태다. 때문에 여행자에게는 언어가 없다. 그는 언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른 언어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다. 언어를 가진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들, 자신의 언어라는 장벽에 둘러싸인 세계, 그 편견에 스스로를 가두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탑에 사는 부족들의 분열과 몰이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모든 층이 견고하게 분리되어 있고, 때로는 잘못된 신념이, 우월주의적 오만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그리고 거대한 문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심지어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이 탑을 세웠다는 은둔자들은 서로마저 밀어내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고 있다. 이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눈을 마주하거나 말을 나누지 않고 시뮬레이션 기계 안에서 세상을 관음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소통과 이해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스크린 속 모습만이 이들이 보고 있는, 보려 하는 세상의 전부다.
결국, 낯선 여행자가 이 탑에서 해내야 하는 일은, 단순히 다섯 언어를 공부해 소통을 매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해야 한다는 필요와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의 관계를 매개해 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이상을 좇는 것에 몰두한다는 삶의 방향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각자가 머무는 층 안에서 그런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 관성이 탑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시스템, 여행자가 궁극적으로 맞서야 하는 시스템의 본질이다. 여행자가 숨겨진 장소들에서 마주하는 탑의 관리자, 고립자는 이러한 고립이 탑에 거주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항변한다.
그러니까 고립자의 세계관, 시스템의 언어로 묘사되는 ‘안전’이라는 개념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항구적인 불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족들 간의 아무런 접촉도, 그로부터 벌어지는 아무런 변수도 발생하지 않는 상태. 영원한 분열과 반목 속에서 서로를 자극하거나 시너지를 일으킬 수 없는 상태. 탑으로 밀려드는 다른 부족들이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은둔자들은 이러한 관성이 자신들의 사회를 아사시키고 있음을 깨달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여행자를 만들었다. 여행자, 플레이어가 이 탑에 저지른 일은 단순히 다양한 언어들을 터득해 부족 간의 말을 번역해 준 것이 아니라, 이 항구적인 불변성에 변화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 탑 곳곳에는 다른 부족과의 소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전사들은 신자들 역시 자신들처럼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이 음유시인들과 한 부족이었다는 발견을 음유시인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음유시인들의 사회를 떠받치던 노예들은 신자들의 사회에 노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찾고 있거나 혹은 찾아볼 생각도 못 했던 답을 다른 세계관을 가진 다른 사회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을 멈출 때, 사회는 숨이 멎는다.
사실은 이렇다. 모두가 소통을 원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낯선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진 않을 수도 있다. 전 지구적 연결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그렇게까지 이 현실에 열광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분명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질문이 있고, 너무나 많은 답이 있다. 누군가는 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더 이상 타인을 궁금해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을 끊임없이 하고싶어한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만연하고 노골적인 몰이해에 둘러싸여, 우리는 더 이상 질문을, 궁금해하기를 멈추고, 자신만의 우주 안에 웅크린 채 관성에 의지해 살아가려 할지도 모른다. 소통을 해야 한다는 필요와 의지조차 상실한, 항구적인 불변의 상태. 그러나 이런 때조차도 소수의 몇몇이 존재한다. <챈트 오브 세나르>에서 스크린 속 다른 부족을 마주한 채 말을 던지는 사람들. 이들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을 갈망하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이들의 사이를 엮어주는 여행자.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탄생하고 구조화된 두 언어를 매개하고, 두 세계가 서로의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 연금술사들은 전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두 부족은 함께 괴물을 생포한다.
적어도 오늘날의 우리는 더 이상 수 백 년 전처럼 내가 사는 동네가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가진 않는다.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세상에 자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만 있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쓰인 책과 영화, 음악, 게임을 매일같이 접하고, 직접 세상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큰 세상을 마주한다. 때로는 탑의 고립과 분열을 수호하려는 관리자가 등장할 수도 있고, 늘 관성에 의지해 그런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게 남은 미래는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이고, 종의 존속과 진화를 위해서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필수적이다. 누군가는 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낯선 세계를 이해하길 갈망할 것이고, 다른 우주로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