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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락실 시대의 대표주자 대전격투 게임, 어떻게 변해왔나
200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에 초점을 맞춰, 사반세기 동안 대전격투게임과 그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주요 변화 양상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적 맥락, 산업 구조, 기술 변화, 문화 수용 등의 차원을 고려한다. < Back 오락실 시대의 대표주자 대전격투 게임, 어떻게 변해왔나 23 GG Vol. 25. 4. 10. 21세기 사반세기의 대전격투게임 대전격투게임(fighting game)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컴퓨터나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로 싸우는 류의 게임을 말한다. 체스나 장기처럼 추상화되지 않고, 캐릭터끼리 직접 몸을 맞대 치고박는 원초적인 싸움 형태를 취함으로써 플레이어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는 장르이기도 하다. 정확하진 않지만, 보통 1976년 세가에서 아케이드용으로 출시했던 <헤비급 챔프(Heavyweight Champ)>를 대전격투게임의 기원으로 꼽는다. 1:1 대결이라고는 해도 복싱시합에 국한돼 있었던 데다 스틱과 버튼도 사용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의미의 대전격투게임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흑백으로 그려진 두 명의 복서를 글러브 모양의 컨트롤러로 움직이며 펀치를 날리는 방식을 취하는 등 대전격투게임의 기본적 형태를 지녔다고는 할 수 있다. 이후 다양한 대전격투게임이 등장했지만, 대전격투게임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대표적인 게임은 <스트리트 파이터 2(Street Fighter 2, 1991)>였다. 마치 영화나 만화의 세계를 그대로 게임으로 만든 듯한 연출과, 특수한 커맨드 입력을 통한 기술 시전이라는 신선한 조작방식에 더해, 플레이어의 실력으로 승부내기를 권장하는 게임 디자인은 많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강한 흥미를 유발시켰다. <스트리트 파이터 2>의 그야말로 엄청난 히트 이후 1990년대 초중반까지 대전격투게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아랑전설(Fatal Fury, 1991)>, <버추어 파이터(Virtua Fighter, 1993)>, <킹 오브 파이터(The King of Fighters, 1994)>, <철권(Tekken, 1994)>을 비롯해 굉장히 많은 수의 대전격투게임이 발매됐다. 1990년대 게임문화 전반의 흐름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던 장르였고, 아케이드뿐 아니라 콘솔과 같은 플랫폼으로도 수많은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조금씩 대전격투게임 붐이 사그러들기 시작했고, 2000년대부터는 마니아들 중심으로 플레이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스테디셀러 장르가 되어 AAA급 게임부터 인디게임에 이르기까지 매년 대전격투게임이 꾸준히 발매되고 있고, 특히 북미와 일본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에 초점을 맞춰, 사반세기 동안 대전격투게임과 그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주요 변화 양상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적 맥락, 산업 구조, 기술 변화, 문화 수용 등의 차원을 고려한다. 변화의 배경 구체적인 변화 양상을 논의하기에 앞서, 그 변화를 추동한 요인들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기술적 혁신과 플랫폼의 전환, 그리고 온라인화와 네트워크 대전의 부상이 대표적이다. 첫째, 기술적 혁신과 플랫폼의 전환이다. 2000년대 초반 가정용 콘솔과 PC의 기술적 발전은 대전격투게임 환경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 2(PlayStation 2)와 Xbox의 등장은 아케이드에서 콘솔 중심으로의 본격적인 이동을 촉진했으며, PC방 문화의 안착은 대전격투게임 플레이 무대 중심을 바꿔놓았다. 고해상도의 그래픽, 향상된 프레임 속도 등 기술적인 발전은 플레이어들에게 아케이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몰입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은 아케이드 산업의 쇠퇴와도 관련 맺는다. 이와는 별개로 ‘바다이야기 사태’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이 시기 한국에서 아케이드의 위상이 급격히 하락하게 된 측면도 있다. 이는 대전격투게임 플레이어의 감소를 야기하는 한편, 가정 내에서의 게임 환경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는 계기로 작용했다. 둘째, 온라인화와 네트워크 대전의 부상이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대와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은 대전격투게임의 플레이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온라인 대전 기능은 지리적 한계를 없애고 글로벌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특히 Xbox 라이브(Xbox Live)와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PlayStation Network) 같은 플랫폼은 온라인 대전 환경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온라인화는 단순한 환경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격투게임에서 중요한 심리전과 반응속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롤백 넷코드(rollback netcode)와 같은 기술이 도입되었으며, 이는 보다 원활한 대전 환경을 제공하고 경쟁을 더욱 심화시켰다. 랭킹 시스템의 확립으로 경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플레이어들 간의 실력 격차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면서 숙련된 소수의 ‘고인물’ 문화 형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변화의 양상들 기술 변화와 온라인화를 중심으로 대전격투게임은 사반세기 동안 여러 측면으로 변모해왔다. 첫째, 2D에서 3D 그래픽 중심으로 이동한 듯 보였던 대전격투게임 트렌드 속에서, 다시 2D 스타일이 부활하는 움직임이 발견된다. 2000년대 초 대전격투게임은 하드웨어의 발전과 함께 본격적인 3D 그래픽 기반으로 전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철권>, <버추어 파이터>, <데드 오어 얼라이브(Dead or Alive)> 시리즈로, 이들은 다면체 기반의 입체적 전장과 움직임을 제공하면서 시각적 현실감을 극대화하였다. 동시에 2D 기반 대전격투게임들은 조금씩 비인기 타이틀로 밀려났다. <스트리트 파이터 3: 3rd 스트라이크(Street Fighter III: 3rd Strike, 1999)와 같은 2D 고전 명작들도 복잡한 메커니즘과 고난이도 탓에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8년 <스트리트 파이터 4>가 출시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이 게임은 3D 모델링 기술을 사용하되 2D 게임 플레이를 유지하는 ‘2.5D’ 방식으로, 전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포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과거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새로운 플레이어층도 유입시키는 전략이었다. 이후 <길티 기어 Xrd(Guilty Gear Xrd, 2013)>는 셀셰이디드 렌더링(cel shaded rendering) 기법을 통해 3D 모델로 2D 애니메이션과 같은 비주얼을 구현하여 비평적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두었으며, <드래곤 볼 파이터 Z(Dragon Ball Fighter Z, 2018)>는 애니메이션 IP를 기반으로 동일 기술을 적용해 폭넓은 플레이어 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미학적 변화에 대한 고려는 3D에서 2D로의 단순 복고가 아니라, 시각 스타일과 게임 플레이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글로벌 시장 전략과 캐릭터 다양성의 강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전격투게임 캐릭터의 재현은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 반복에 가까웠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 제작사들은 캐릭터들의 다양성에 신경을 쓰고 있다. <철권 7(2017)>은 샤힌(사우디), 조시(필리핀), 라르스(스웨덴), 리로이(흑인 무술가) 등의 캐릭터를 도입하였고, 현지 언어(아랍어, 타갈로그어 등)를 사용하는 음성 연출도 탑재했다. 이는 외양적 다양성만이 아니라, 문화적 리얼리즘 구현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의미한다. 또한 캐릭터 성별과 체형의 다양성, 성격과 배경의 서사성도 중요해졌다. <스트리트 파이터 6>의 마농(프랑스 여성 유도 선수),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Guilty Gear Strive, 2021)>의 브리짓(트랜스젠더), <더 킹 오브 파이터즈 XV(The King of Fighters XV, 2022)>의 돌로레스(흑인 여성 샤먼) 등은 기존 남성 중심, 체격 중심의 캐릭터 구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시장 다변화 전략과 맞물리며, 문화 다양성과 포용성을 중시하는 게임산업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이처럼 대전격투게임은 다문화적 접점으로 기능하는 장르로 변모하고 있다. 셋째, 싱글플레이 요소와 RPG적 시스템의 결합이다. 대전격투게임의 본질은 PvP 대결이지만, 플레이어층 확대를 위해 PvE 콘텐츠와 싱글플레이 요소가 강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모탈 컴뱃(Mortal Kombat)> 시리즈의 시네마틱 스토리 모드다. 단순한 컷씬 삽입을 넘어, 할리우드식 내러티브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기존 대전격투게임에 새로움을 더했다. 2023년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 6>의 월드 투어 모드는 더 나아가 오픈월드 탐색, NPC 대전, 캐릭터 육성 시스템 등을 통합한 RPG형 콘텐츠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대전격투게임은 대전 외적인 플레이 구조에서도 기술 습득의 서사화, 성장의 게임 플레이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장비 아이템, 스탯 강화 등 RPG 요소는 기존 대전격투게임의 단순반복성을 완화하며, 플레이어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 및 몰입 강화 기능을 수행한다. 대전격투게임이 경쟁 중심 장르에서 경쟁과 모험이 함께하는 장르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로의 이행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온라인화는 게임 플레이 방식뿐 아니라 커뮤니티 성격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아케이드게임장 중심의 직접적인 대면 교류는 온라인 포럼,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플랫폼과 같은 비대면 커뮤니티로 대체되었다. 이 변화는 커뮤니티의 글로벌화와 함께 플레이어 간 정보·전략 공유를 급격히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온라인 커뮤니티의 성장은, 숙련된 플레이어 중심의 폐쇄적인 문화가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특정 기술과 전략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와 공유가 이루어지는 반면, 신규 플레이어들에게는 다소 배타적인 환경이 조성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전체 플레이어층의 확장보다는 특정 그룹의 전문화가 더욱 강조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다섯째, e스포츠의 부상과 글로벌 경쟁문화 확산이다. 2000년대 들어 대전격투게임이 겪은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e스포츠화의 급격한 발전이다. EVO(Evolution Championship Series)와 같은 글로벌 대회가 본격화되면서, 대전격투게임은 전문성을 요구로 하는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스폰서십과 프로리그가 활성화되었고, 이는 게임의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수준을 극도로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e스포츠의 발전은 격투게임의 위상을 높이고 새로운 플레이어를 유입시키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경쟁 환경으로 인해 일반 플레이어와 전문 선수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문제점도 함께 발생시켰다. 여섯째, 인디 개발자의 실험적 다양성 추구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스팀(Steam)’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유통 플랫폼의 확산과 유니티(Unity),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등과 같은 개발 툴의 민주화로 인해 인디게임 씬의 대전격투 장르로의 진입이 활발해졌다. 랩 제로 게임즈(Lab Zero Games)의 <스컬걸즈(Skullgirls, 2012)는 여성 중심 캐릭터, 복고풍 애니메이션 스타일, 커뮤니티 중심 업데이트 구조로 대전격투 장르의 실험성과 다양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인디 팀 마네6(Mane6)에서 개발한 <뎀스 파이팅 허드(Them’s Fightin’ Herds, 2020)>는 원래 <마이 리틀 포니(My Little Pony)> 팬 게임으로 시작해 독자 IP로 전환된 사례로, 비주류 미학과 대중성의 융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인디 대전격투게임들은 기술적 실험, 표현 양식의 다양화, 커뮤니티 참여 모델의 구현 등을 가능케 했으며, 기존 주류 대전격투게임의 방향에도 일정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인디 개발자들은 커스터마이징, 모드 지원, 공개 개발 등의 방식을 통해 개방형 게임문화를 격투게임에 도입한 주체로도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의 사반세기 지난 25년 동안 대전격투게임의 변화는 기술 혁신과 온라인화의 토대 하에, 2D 스타일의 부활, 글로벌 시장 전략과 캐릭터 다양성의 강화, 싱글플레이 요소와 RPG적 시스템의 결합,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로의 이행, e스포츠의 부상과 글로벌 경쟁문화 확산, 인디 개발자의 실험적 다양성 추구 등 다양한 축에서 이뤄져 왔다. 이러한 변화는 대전격투게임의 대중화와 전문화를 동시에 만들어내면서 복잡한 문화적 현상으로 이어졌다. 앞으로의 대전격투게임은 기술 발전과 플레이어 문화의 상호작용 속에서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과제를 계속 안고 나아갈 것이다. 대전격투게임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규 플레이어 유입을 촉진하고, 동시에 숙련된 플레이어를 위한 깊이 있는 경험을 유지하는 전략적 접근이 요청된다. 물론 둘 간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게임 디자인 차원의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초보자들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복잡한 입력 없이도 주요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끔 조작체계를 단순화한다거나,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IP와의 협업을 통해 대중성을 강화한다거나, e스포츠 이벤트와 스트리밍 플랫폼을 적극 활용해 장르 인지도를 높이거나, 기존의 플랫폼 제한을 넘어 여러 플랫폼(PC-콘솔-모바일 등)에서 크로스 플레이가 가능하게 하는 등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동시에 숙련된 플레이어들이 요구하는 깊이와 전략성까지 유지하려는 균형 잡힌 디자인을 추구함은 물론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숙련된 플레이어와 신규 플레이어 간의 실력 간극이 완전히 좁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의 25년 동안 대전격투게임이 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똑같이 즐기는 장르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해 볼 만하다. Tags: 대전격투게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체인소 맨>의 한국적 수용과 문화적 증폭’(2026), ‘극사실주의의 게임적 재구성: <나는 SOLO>의 상호/텍스트성과 수용구조’(2026),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등이 있다.
-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
찬바라를 적극 수용한 게임도 다채로운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사무라이](侍, 1979), 데이터 이스트의 제목부터 [찬바라](ちゃんばら)인 횡스크롤 액션 게임부터 [사무라이 스피리츠](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부시도 블레이드](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등의 대전 격투 게임, 닌자 잠입 액션을 표방한 [천주](天誅, 1998), 최근의 [세키로: 쉐도우 다이 트와이스](セキロ: シャドウズ ダイ トゥワイス, 2019)까지, 사무라이와 닌자를 주인공 삼은 대부분의 액션 게임을 찬바라 게임의 범주에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미소녀 좀비 액션을 표방한 [오네찬바라](お姉チャンバラ, 2004) 같은 게임도 있으니 말이다. < Back The Ghost Games: A Parry Through Chanbara's Tangled Family Tree 30 GG Vol. 26. 6. 10. Chanbara (ちゃんばら) is a compound of chanchan (ちゃんちゃん), the onomatopoeia for the sound of clashing blades, and barabara (ばらばら), the onomatopoeia for the sound of blood scattering. Originally a term of derision for the slapdash Edo-period costume dramas churned out in bulk, it is now used as a genre label covering films, novels, games, and plays in which samurai, ninja, and the like carry on their action with bladed weapons. There is even a sport called chanbara that uses foam swords and padded weapons, so the term itself can be said to circulate widely, indifferent to genre or medium. Chanbara first came into popular use in the dawn of the Japanese film industry, from the 1920s up to the defeat of 1945. Chanbara theater did exist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but it was the costume dramas mass-produced from the silent era onward—taking swordplay as their central material—that fixed the word in popular usage. In the period when imperial Japan was beginning its wars in earnest, the chanbara costume drama was also pressed into service as nationalist propaganda emphasizing bushido . By one count, six thousand costume dramas were produced in Japan from 1908 up to the defeat, a figure equal to half the films made in the country.[1] Not all of these, of course, would have been chanbara films. Poster for the arcade game Chanbara (top) and the cover of Onechanbara*, released on PS2 (bottom).* For this reason chanbara can be seen as a subgenre of popular culture boasting a history of more than a hundred years. Games that actively took up chanbara can be found from the 1980s, the moment when richly varied graphics began to appear in earnest. From Sega's arcade game Samurai (侍, 1979) and Data East's side-scrolling action game titled, right on the nose, Chanbara (ちゃんばら); through fighting games like Samurai Shodown (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and Bushido Blade (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to the ninja-infiltration action of Tenchu (天誅, 1998) and the recent Sekiro: Shadows Die Twice (セキロ, 2019)—it would do no harm to file most action games with samurai and ninja as protagonists under the heading of chanbara games. After all, there is even a game like Onechanbara (お姉チャンバラ, 2004), billed as bishōjo-zombie action. To set the starting point of this genealogical sketch outside of games is only natural, since chanbara seeped into popular culture through the films (and a few novels) of the early twentieth century. In the lineage of exploitation—where a word first used as an insult settled into a genre as the works piled up—chanbara holds its place with confidence. Ghost of Tsushima (2020), the final exclusive for the PlayStation 4, and its successor Ghost of Yōtei (2025) can be called the most recent works of the chanbara genre as it has settled into popular culture. Nate Fox, the creative director of both games, has stated that he was influenced by the chanbara manga he read in childhood, such as Lone Wolf and Cub (子連れ狼, 1970–1976) and Usagi Yojimbo (兎用心棒, 1984–). I leave them unmentioned because it is not an area I know well, but anime like Samurai Champloo (サムライチャンプルー, 2004–2005) and manga like Bleach (ブリーチ, 2001–2016) and the recent mega-hit Demon Slayer: Kimetsu no Yaiba (鬼滅の刃, 2016–2020) can be said to profess the chanbara genre or to fall within its sphere of influence. When the American studio Sucker Punch announced it would make a chanbara game, that these would become its primary references was a matter of course. To bind into a single genealogy the chanbara scattered across the whole field of popular culture would be impossible. What can be drawn, though, is an unfinished genealogy that moves between film and game—the traits of chanbara one comes to feel while playing Ghost of Tsushima and Ghost of Yōtei , or the path running between the spaghetti Westerns and other Westerns born under chanbara's influence and the Japanese-style Westerns that branched off once that influence returned home to Japan. From Western to Chanbara, and Back to Western In a Japan where, after the defeat, the Occupation forces had banned the depiction of swordsmanship and other martial arts on film, the revival of the chanbara film came through Akira Kurosawa. Not long after the Occupation's censorship was lifted in 1952, Seven Samurai (七人の侍, 1954) was released. Because this was the Kurosawa who a few years earlier had taken the Grand Prix at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ith Rashomon (羅生門, 1950), another masterpiece from his hand at once captured the critics and the public alike. Kurosawa makes no secret that his chanbara films—the series of films starring Toshiro Mifune as a samurai—were influenced by the Hollywood Western.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hen the chanbara film was gripping the Japanese public, the genre that flourished alongside it was unquestionably the Western. From the silent era through the postwar Occupation, the Western was the biggest film commodity not only in Japan but worldwide. Kurosawa, too, took the Westerns of this period as his chief motif. Seven Samurai (top) and How Green Was My Valley (bottom). The setup, for instance, of a near-rōnin samurai helping villagers face off against bandits immediately calls to mind a film like John Ford's My Darling Clementine (1946). Though not a Western, John Ford's How Green Was My Valley (1941) is also drawn upon for scenes in Seven Samurai . The scenes in Yojimbo (用心棒, 1961) and Sanjuro (椿三十郎, 1962), where the wandering rōnin departs right after the final duel, naturally summon up not only Ford's Stagecoach (1939) but George Stevens's Shane (1953) and Fred Zinnemann's High Noon (1952). Even in a war film like Throne of Blood (蜘蛛巣城, 1957) or an adventure like The Hidden Fortress (隠し砦の三悪人, 1958), Kurosawa put a katana in Mifune's hand and had him swing it. As John Wayne's figure functioned in Ford's films, Kurosawa made Mifune's feral aspect the emblem of the anti-hero in his own. As if in answer to the signal flare of chanbara's revival fired off by Kurosawa, several chanbara series appeared in succession. Zatoichi (座頭市, 1962), starring Shintaro Katsu, takes a blind swordsman as its protagonist and runs on through twenty-six sequels and a remake directed by and starring Takeshi Kitano. Lone Wolf and Cub: Sword of Vengeance (子連れ狼 子を貸し腕貸しつかまつる, 1972), produced by the very Shintaro Katsu who played Zatoichi, was based on the manga of the same name and, recording a major hit, was made into six films and a TV drama. Alongside their popularity in Japan, these works were categorized—together with Hong Kong kung-fu/wuxia films and Korean kwŏn'gyŏk (fist-fighting) films—as "Asian martial arts films," and circulated worldwide in the form of pirated prints, unauthorized dubs, and recut versions. Of course, the films of the Venice Grand Prix laureate Akira Kurosawa were introduced around the world through official distribution networks and exerted great influence on Europe and Hollywood. Steven Spielberg and George Lucas put out Star Wars (1977), effectively a remake of The Hidden Fortress . In being a pseudo-Western set in space, this creates a strange genealogy in which the films of Kurosawa—who took John Ford as his cinematic master—pass through chanbara and circle back once more to the Western. A more direct uptake took place in Italy. A Fistful of Dollars (1964), produced by Sergio Leone with Clint Eastwood, lifts Yojimbo wholesale—so much so that there is an anecdote about Eastwood thinking of Yojimbo the moment he read the script. That said, Leone's spaghetti Western drags over only the shell of the chanbara film Kurosawa made. He takes only the components—the plot, the anti-hero character, the showdown—and makes a film of an entirely different character. Different, one might say, from Kurosawa's films, which transposed the way the John Ford Western depicts America into something Japanese. The similar compositions of Yojimbo (top) and A Fistful of Dollars (bottom). In any case, through Leone's films the Western entered a different phase. The outlaw anti-hero became the mainstream of the spaghetti Western, and the level of violence rose above that of the 1930s–50s Western—as in the machine-gun spraying of Sergio Corbucci's Django (1966). Hollywood, too, put out The Magnificent Seven (1960), a direct remake of Seven Samurai ; this drew notice for its glittering star casting, but the film's own impact was not large—though it did become a film that, together with spaghetti Westerns and revisionist Westerns like The Wild Bunch (1969), spawned countless imitators. The spaghetti Western, influenced by Kurosawa's chanbara films, returns to Japan once more—just as in 1970s Korea the Manchurian Western emerged under the influence of Leone's (and Kurosawa's) films. Juzo Itami's Tampopo (タンポポ, 1985), which hauls in a great heap of Western clichés, used "ramen Western" as its promotional tagline, displaying Japanese cinema's answer to the spaghetti Western. An anime conscious of the Western right down to its title, like Cowboy Bebop (カウボーイビバップ, 1998), recorded a major hit, and Takashi Miike, a master of Japanese genre film, even made it into the competition section of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ith Sukiyaki Western Django (スキヤキ・ウエスタン ジャンゴ, 2007). The manga Golden Kamuy (ゴールデンカムイ, 2014–2022), which reached its conclusion a few years ago, carried on the tradition of the Japanese Western too, setting itself in Hokkaido and featuring Ainu people as major characters. Chanbara as Cultural Melting Pot, or Chimera So… the work of drawing a genealogy that moves between Western and chanbara brings on a certain awkwardness. As one can see from the countless films mentioned above, drawing the genealogy of these films is possible, but it is no different from a maze in which one is bound at some point to lose the way. Genres mix across borders—as in Zatoichi Meets the One-Armed Swordsman (新座頭市 破れ!唐人剣, 1971), the twenty-second film in the series, which attempted a kind of collaboration with the Hong Kong wuxia masterpiece The One-Armed Swordsman (獨臂刀, 1967)[2]—and, as seen above, diverse mutations are born within the repetition of a genre's import and re-import. Indeed, unlike Japan's pre-defeat chanbara films, which put bushido forward as their theme, the chanbara films after Kurosawa (as the revisionist Westerns did) exposed the cruel violence and toxic masculinity inherent in bushido, and at times revealed an aversion to the lingering traces of feudalism. Masaki Kobayashi's Harakiri (切腹, 1962), which took ritual disembowelment as its material, and Bushido, Samurai Saga (武士道殘酷物語, 1963), which criticized the totalitarianism grounded in bushido, appeared around the same time as Kurosawa's chanbara films. Chanbara films critical of bushido continue to appear to this day: The Twilight Samurai (たそがれ清兵衛, 2002), portraying a fading samurai at the end of the Edo shogunate; Nagisa Oshima's Taboo (御法度, 1999), treating the male homosociality grounded in bushido; and, similarly, Takeshi Kitano's Kubi (首, 2023), treating the (sexual) violence within a samurai band of the Sengoku era. The Kill Bill poster, mixing Bruce Lee's yellow tracksuit with the chanbara katana (top), and the 47 Ronin poster, a representative case of conscripting the samurai as a symbol of Orientalism (bottom). On the other hand, in a situation where the figure of the samurai is no longer what it was, bushido migrates to objects that are not chanbara. The tokusatsu hero series Kamen Rider (仮面ライダー), begun in 1971, presents—for an older audience than other tokusatsu shows—a dark hero in a style resembling the chanbara film, or the spaghetti Western's outlaw. Some of the series' spin-offs even set out, with an adults-only rating in mind, chanbara-style gore and bloodshed. If inside Japan chanbara mutates into the tokusatsu hero, outside Japan chanbara becomes a representative symbol of Orientalism and Wapanism (the Western fetishization of things Japanese). In the spaghetti Western Red Sun (Sole rosso, 1972), featuring Toshiro Mifune, a samurai appears, out of nowhere, in the Western desert. In The Last Samurai (2003), starring Tom Cruise, the samurai is placed in exactly the position of the Western's "Indian." Tarantino's Kill Bill: Volume 1 (2003), which haphazardly blends chanbara with kung-fu film, blaxploitation, and more, pays homage to everything from Kurosawa's films to Zatoichi , Lady Snowblood (修羅雪姬, 1973), and Tattooed Life (刺靑一代, 1965).[3] Beyond such successful films, there are of course cases like 47 Ronin (2013), starring Keanu Reeves, or the villain "Silver Samurai" in The Wolverine (2013)—but such cases are, so to speak, without end. So: chanbara has now become a genre, or a representation, unrelated to bushido. What bushido can one feel in the duel between Wolverine and the Silver Samurai? Even if it were the bushido that Inazo Nitobe[4] Orientalistically distorted in Bushido: The Soul of Japan (1899). The bushido-flavored imagery shown by Arasaka in Cyberpunk 2077 (2020), for instance, is nothing more than imagery borrowed. The grotesque form of Adam Smasher, Arasaka's "kagemusha," is already set far apart from anything like bushido. Or take how, in John Wick: Chapter 4 (2023), Caine, played by Donnie Yen, reveals the strange contradiction of being a kung-fu master and at the same time the blind swordsman "Zatoichi." What is emphasized in samurai-led games like Samurai Shodown or Bushido Blade is not bushido but only "chanbara" swordplay and its pleasures. The imagery and characters left behind by the chanbara film keep being broken down into morphemes—mobilized for the genre or concept of the action—and reassembled, over and over. Adam Smasher, bodyguard of the Japanese corporation Arasaka in Cyberpunk 2077*. The armor encasing his body references the design of samurai armor. The katana in the capture is also a weapon you can make major use of in the game. Personally, I cleared my first playthrough using only the katana….* At that very point, the two chanbara games made by the American studio Sucker Punch come close to being cases that lay out, just as they are, the complex topography of the genealogy in which "chanbara" sits. Ghost of Tsushima , set in the Kamakura period, takes as its central material the Yuan dynasty's 1274 attempt to subjugate Tsushima. When Tsushima is suddenly overrun and occupied by the Mongol army, the game captures the process by which Jin Sakai—a samurai who alone survives the battle—abandons bushido and becomes the first shinobi (ninja). Because, in the face of the Mongol army's overwhelming force, responding while keeping to bushido is impossible. In this story, the clichés accumulated in moving between chanbara and Western do not work all that much. The protagonist is not a rōnin or outlaw like Toshiro Mifune or Clint Eastwood, and, depicted as the nephew of the lord who governs Tsushima, he is in his own way a man of power. The only chanbara/Western element within this story, one might say, is the point at which he casts off bushido and becomes a kind of anti-hero, "the Ghost." Its successor Ghost of Yōtei , set in Hokkaido, far more actively draws in a chanbara/Western mood. Music that sounds like Ennio Morricone-style Western scores played on instruments like the shamisen; the vast Hokkaido landscape that has already served as the backdrop for many a Japanese Western; a rōnin protagonist returning home with reasons of her own—from story to setting, in many directions, it evokes the cinematic genealogies mentioned above more than its predecessor did. On top of that, many striking elements are scattered throughout: the "standoff" combat system in both games pulls in the shot composition of the showdown that ran from Yojimbo to A Fistful of Dollars , and so on. https://www.youtube.com/watch?v=lbB3EUruQ4U Footage of Ghost of Yōtei played with Kurosawa, Miike, and Watanabe Modes all switched on. A hybrid situation unfolds: a black-and-white screen mimicking a film look, drenched in excessive blood, while jazzy music plays. But how can the two games be positioned atop the chanbara/Western genealogy described above? Intriguingly, both games reveal their own hybrid identity through the modes they themselves provide. If Ghost of Tsushima has a "Kurosawa Mode" offering a black-and-white image and sound with a texture resembling Akira Kurosawa's films, Ghost of Yōtei has modes taken, respectively, from Takashi Miike of Sukiyaki Western Django and Shinichiro Watanabe of Cowboy Bebop and Samurai Champloo . In Miike Mode the blood and mud spray all the more; in Watanabe Mode the Western-ish music is swapped for lo-fi contemporary music. To play the game with all three modes switched on would be an experience that lets you take in the accumulated genealogy of the chanbara genre all at once. Playing Ghost of Yōtei in that state is quite a chore, admittedly…. Seen from the standpoint of bushido, Jin Sakai of Ghost of Tsushima and Atsu of Ghost of Yōtei are figures converging on a midpoint from opposite directions. Jin Sakai, a samurai grounded in bushido, gradually abandons it after defeat and becomes the first shinobi. Atsu, who burned with vengeance from the start, comes (without becoming a samurai) to understand bushido a little, through her companions the "Wolf Pack" and, above all, through her reunion with Jubei, the twin younger brother she had not known was alive. But this is no more than an alibi to keep the narrative running. To dig deep and analyze these stories is closer to exhuming the stale spirituality called bushido. And what we would then find would likely be a figure like an oni, rotted here and there. Chanbara = Parrying? Bushido has been reduced to an object of discard or critique, and the samurai and ninja have been taxidermied—from a thoroughly Orientalist gaze—into mere popular-culture icons. The center of gravity binding them together seems all but gone. So what, then, do the works that can be bound together as "chanbara" have in common? Here we need to return once more to the etymology. It is worth attending to the fact that what audiences went wild for in the early-twentieth-century Japanese costume dramas disparaged as chanbara was, rather than bushido, the swordplay itself. The so-called tachimawari (立ち回り)—the staged melee—comes close to the heart of chanbara. After all, even the etymology of chanbara is the compounding of onomatopoeia depicting blades clashing and blood scattering. The final duel of Sanjuro (top)—chanbara itself—and a standoff scene from Ghost of Yōtei (bottom). Translate the onomatopoeia "chanchan barabara" into a game mechanic and you get parrying. Indeed, the game known as the first to feature parrying is the samurai fighting game Samurai Shodown II (真SAMURAI SPIRITS 覇王丸地獄変, 1994). Parrying as a game mechanic then began to be used mainly in fighting games like Killer Instinct 2 (1996) and the Tekken series (鉄拳, 1994–). The technique of parrying itself, of course, existed from the Middle Ages in Western swordsmanship and in sports like fencing; but chanbara's influence is immense in its becoming established as a game mechanic. Parrying in Samurai Shodown II (top) and a parrying GIF from Sekiro (bottom). Today parrying can be found not only in fighting games but in nearly every action game—whether the game uses bladed weapons and shields or centers on fists and kicks. Even in a JRPG-style turn-based game like Clair Obscur: Expedition 33 (2025), where combat and magic mingle, parrying has come to be used as the single most important system. What popularized the parry system across action games today was, in all likelihood, the games of FromSoftware. In Dark Souls (2011), the dull sound effect that appeared on a successful parry was essential to the "riposte," the critical follow-up that lets you deal heavy damage. But befitting a game famous for its punishing difficulty, from Dark Souls through Elden Ring (2022) parrying was less a tool every player needed than an optional play-style for veterans. The intriguing case is Sekiro . While it keeps its distance from FromSoftware's orthodox Souls line, in this game—which foregrounds a single weapon and a Posture system—the single most important action is parrying. Memorizing the enemy's attack patterns wholesale and knocking them back (in-game the action is rendered not as "parry" but as "deflect") makes up most of the action, to the point where players call it a rhythm game. The method of filling the enemy's Posture gauge through deflects, breaking their stance, and landing a single blow left as strong an impression as the Dark Souls series, and created a fad of another kind. What is more, the "shinobi-kill" (忍殺) Deathblow—dispatching the opponent with a single strike after trading blows blade to blade—immediately evokes the iconic final scene of Sanjuro . Parrying in Ghost of Yōtei. Ghost of Tsushima , too, adopts a similar system. Of course, since its release date is only about a year apart from Sekiro 's, there would not have been enough time to borrow Sekiro's system directly. But Ghost of Tsushima likewise has nearly the same construction of action mechanic—breaking the opponent's stance through a parry and landing a single blow. The differences are only that it has more moments of one-against-many combat than Sekiro , and that the action is built around learning various swordsmanship stances and responding according to the opponent's weapon (katana, spear, shield, and so on). This is not greatly different in Ghost of Yōtei ; the only difference is that Jin Sakai's various swordsmanship stances are replaced, for Atsu, by various weapons—the ōdachi, the kusarigama, the spear, the dual blades, and more. In the "standoff," one of the game's systems, the figures of protagonist and enemy glaring at each other belong to chanbara but at the same time to the Western. From the vantage of the 2020s it is impossible to tell them apart. That the stages of both games handle regions outside Japan's "mainland"—Tsushima and Hokkaido—is surely a clear Western influence. Ghost of Tsushima , which chooses the thirteenth century rather than the Sengoku era, and Ghost of Yōtei , which treats the Sengoku era and mentions great battles like Sekigahara yet stands one step removed from their center, draw in the Western by way of avoiding the chanbara film's two principal settings (the Sengoku era and the Edo shogunate). What makes the two games chanbara, though, is that their action follows the parry-based manner of the chanbara film. That parrying as a game mechanic emerged under chanbara's influence, the two games faithfully inherit. So, in the end, the core of the two games is this: that they are swordfighting games. From top: the final duel of Yojimbo, the duel of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 and a standoff scene from Ghost of Tsushima. The similarity of composition runs through them. Merely by richly providing the pleasure of action one can expect from a chanbara action game, the two games are a success. The Western-style atmosphere that settled into Hokkaido by way of the spaghetti Western from chanbara, the narrative of a wandering, outlaw anti-hero—these are no more than a set of shells needed to render chanbara action vividly. Picked apart in detail, these shells are not even sufficiently "real." The Yuan subjugation of Tsushima, the chief motif of Ghost of Tsushima , involved not only Mongol forces but Goryeo (Korean) troops, who do not appear in the game. The design of Jin Sakai's armor and katana follows the Sengoku era rather than the thirteenth-century Kamakura era—because that is the image of the samurai more familiar to those who will play the game. That Ghost of Yōtei , unlike other games set in the Sengoku era, takes Hokkaido as its stage is to present a plausible backdrop for a lone individual, Atsu, to defeat the Saitō clan and the Yōtei Six; beyond that, a reason is hard to find. The construction of the finished game comes closer to the result of selecting the options through which a fitting chanbara-action tachimawari can be played and felt via the PlayStation DualShock/DualSense. In that context, atop the genealogy that the genre named "chanbara" has formed across all sorts of media, Ghost of Tsushima and Ghost of Yōtei are, paradoxically, composed of elements that lay out one by one the path chanbara has traveled. The traces of bushido as a national project; the motifs and clichés developed in exchange with the Western; parrying, the chanbara of game mechanics. Chanbara is a genre of the Japanese popular-culture tradition and, at the same time, has become a cultural icon whose traces can be found in any country on earth. At any rate, the two works—American games both—confirm this anew. [1] Kim Ryeo-sil, Ilbon yeonghwa-wa naesyeoneollijeum [Japanese Cinema and Nationalism] (Seoul: Chaeksesang, 2005), 28. [2] As an aside, the Japanese release of this film is said to have ended with Zatoichi's victory, while the Hong Kong release ended with the One-Armed Swordsman's. [3] Strictly speaking, the protagonist is a yakuza rather than a samurai, but the swordfight of the latter half, captured in long takes, can be said to follow the chanbara template. [4] A Japanese thinker, educator, and statesman, known as an internationalist who worked toward Japan's modernization in the Meiji era; he was also the figure depicted on the old 5,000-yen note.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보더랜드4 - 변방의 수렵채집
탐험가들의 후예로서 우리 인간은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낭만을 갖고 있다. 황무지, 너른 들판, 혹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풍부한 사냥감을 품은 목초지?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담은 숲? 농사 짓기 딱 좋은 비옥한 강변? 식량원이 바닥나서, 종교적 열망에 들떠서, 단순한 호기심에서 등등 여러 이유로 호모 사피엔스는 터전을 걷고 일어나 지도의 바깥으로 행진했다. < Back 보더랜드4 - 변방의 수렵채집 27 GG Vol. 25. 12. 10. 탐험가들의 후예로서 우리 인간은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낭만을 갖고 있다. 황무지, 너른 들판, 혹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풍부한 사냥감을 품은 목초지?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담은 숲? 농사 짓기 딱 좋은 비옥한 강변? 식량원이 바닥나서, 종교적 열망에 들떠서, 단순한 호기심에서 등등 여러 이유로 호모 사피엔스는 터전을 걷고 일어나 지도의 바깥으로 행진했다. 지도는 내 삶의 터전이 있는 지역을 가운데에 놓고 그리게 된다. 지도의 끄트머리는 세계의 끄트머리고, 그 바깥은 다른 세계다. 그 경계를 넘어가면 다른 천하가 펼쳐진다. 천하통일은 그 경계 안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 경계 지역은 변방이다. 변방의 개념은 중심 지역이 성립해야 생겨난다. 생존과 공동체 존립에 중요한 자원, 물과 식량과 재료가 많은 곳에 인구가 몰려 중심이 되고, 변방은 그런 중요도가 떨어지는 먼 곳이기에 인구 밀도도 낮다. 권력도 중앙 권력과 결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두 세계가 맞닿는 지역이기에 보통 방패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변방의 인상은 혹독한 환경 혹은 강인한 거주민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변경백 작위, 중국의 만리장성은 그런 방어의 맥락이 낳은 결과물이다. 경계의 땅. 영어로 직역하면 보더랜드 정도가 될 것이고, 이는 루트 슈터라는 하위 장르를 정립시킨 슈팅 게임의 명작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하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무대인 행성들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의 지도에서 변방에 속한다. 자원이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고, 환경은 딱 거주만 가능할 정도로 혹독하다. 멸망한 옛 문명이 남김 유적인 ‘볼트’가 있긴 하지만 이 행성에만 있는 유적도 아니니 중요한 행성이 아니다. 그래서 권력화한 기업들이 채굴과 전쟁을 위해 온 적은 있다. 그들이 데려온 인력은 노예 노동을 맡은 죄수 혹은 용병들이었고, 이들은 기업이 떠난 후에도 남았다. 자원과 유적을 놓고 만인이 만인을 적대하는 세계가 되었다. 공동체가 만들어지긴 했으나 마을 혹은 용병단 정도의 규모다. 방어의 맥락은 없지만 폭력으로 다져진 사람들이 사는 ‘변방’이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오프닝은 이런 변방 공간의 덧없는 폭력성을 보여준다. 처음 카메라가 잡는 대상은 10초 안에 허무하게 죽는다. 그 인물을 죽인 인물들도 몇 초 후에 죽는다. 생명의 존엄 같은 개념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세계라는 것을 빠르게 보여준다. 이 정도면 변방을 넘어 세계 바깥이다. 보더랜드를 비롯한 황무지 서사의 특징은 서사의 무대가 되는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 구조, 더 정확히는 제도화된 권력 구조가 없거나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만드는 사회적 종족이고, 공동체의 작동을 위해 권력 구조를 만들고, 권력의 작동을 통해 생존 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면 인구가 늘어나 공동체가 확장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문명이 등장한다. 반대로 말하면 권력 기구 따위 없는 세계는 문명의 세계가 아니다. 야생의 법칙 중 하나인 폭력의 법칙이 제1규칙의 자리에 있게 된다. 자원도 많지 않은데 이를 제도적으로 가공 생산품으로 바꿔낼 문명도 존재가 희박하다 보니, 대부분의 자원과 도구 – 무기는 서로를 죽이고 뺏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 토마스 홉스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투쟁하는 자연 상태를 상정하고 여기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권 개념을 끌어냈다. 완벽한 자연 상태의 자유에서는 오히려 개인의 생존이 위험하기에 인간은 자유를 일부 포기하면서 공동체 권력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다는 논리였다. 물론 잘 죽이고 잘 뺏으려면 협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을 단위나 도적단 단위 정도의 공동체는 만들어지지만 그 이상의 권력은 쉽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등장하면 행성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유적, 볼트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면 볼트를 열고 싶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충돌한다. 그렇게 갈등이 끊이지 않고, 플레이어는 그 갈등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상대를 총으로 쏴 그의 자원과 무기를 탈취한다. 쏘고 줍는, 루트 슈터 장르가 보더랜드 시리즈에서 정립되었다. * 상자를 열고 적을 죽여서 전리품을 얻는 것은 전투를 컨텐츠로 삼는 거의 모든 장르에 있는 자원 수급 방법이지만, 보더랜드 시리즈와 같은 루트 슈터 장르에서는 의미가 약간 달라진다. 루트 슈터 장르를 지탱하는 두 행동, 쏘는 행위 슈팅과 줍는 행위 루팅은 이 장르에서 가치 있는 재화와 장비를 획득하는 주된 방법이다. 구매와 보상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그리고 가치가 가장 높은 방법은 적에게서의 루팅이다. 보통의 MMORPG에서도 루팅은 주요한 획득 방법이지만, 제작이나 퀘스트 보상이라는 다른 주요 획득처가 존재한다. 같은 전리품 맥락의 획득이지만 루트 슈터에서는 다른 획득처가 중요하지 않거나 없다. 그리하여 루트 슈터에서의 루팅은 약탈 혹은 채집에 가깝고, 시뮬레이션으로의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수렵 채집의 시뮬레이션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마침 변방, 세계 바깥이라는 작중 세계의 황량함은 수렵 채집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부족 규모의 공동체, 황무지에서 벌이는 적대적인 개체들과의 전투, 약탈, 문명 이전의 서사다. 보더랜드 시리즈를 수렵 채집 시대에 SF 스킨을 씌워 문명 바깥을 구현한 작품으로 본다면, 최근작인 4편의 서사적 맥락이 독특해진다. 이전작들의 무대인 판도라 행성은 변방 내지는 세계 바깥이라고 요약하기 딱 좋은 시공간이었다. 4편의 카이로스 행성은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여기에는 타임키퍼의 교단이라는 지배 권력이 존재한다. 타임키퍼의 지배 수단은 볼트(Bolt)라는 장치다. 이를 사람의 신체에 심어 모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의 우주적 사명이라는 것을 교리화하여 세뇌하다시피 한 신도들을 조직화해 교단을 꾸렸다. 이 세력이 카이로스를 지배하면서 외부에서의 관찰에 잡히지 않도록 행성 전체를 가려놓기도 했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지도에 없는 행성이었고, 운 나쁘게 불시착한 용병이나 해적들이 토착민과 함께 경쟁하며 살고 있다. 즉 카이로스는 중심 성계에서 변방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강력한 독재 권력이 지도에서 지워놨기에 변방이 된 것이다. 게임 플레이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플레이어는 볼트(Vault)를 열기 위한 경쟁을 하는 볼트 헌터고, 카이로스의 볼트를 독점하려는 타임키퍼와 그의 교단을 상대로 전투와 약탈을 한다. 이전작에서의 회사, 용병단 등의 적과 형태는 다르지 않다. 반면 설정된 반동 세력의 규모와 성격은 정반대다. 카이로스에는 교조적 독재 문명이라는 제도 권력이 존재한다. 전제를 다시 정리해보자. 변방은 각 세계의 끝이기에 문명이 없거나 옅다. 방어 전담 지역이기 때문에 혹은 중요하지 않아 무관심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방/바깥은 만인 투쟁 상태의 무법 지대로 그려진 것이며, 그래서 보더랜드 시리즈의 수렵 채집 시뮬레이션을 펼쳐놓기 좋은 무대다. 반면 카이로스는 명백히 문명화된 설정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수렵 채집 시뮬레이션, 문명 바깥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지역 중에선 아웃랜드, 크아레쉬처럼 이미 문명이 멸망한 지역이 등장한다. 이런 지역은 열리기 이전, 정보가 거의 없을 때는 황무지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진입하여 스토리를 접하게 되면 각 세부 지역에 존재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체를 만나고, 그들에게서 퀘스트를 받거나 그들과 적대해 싸우면서 아직 문명의 잔재가 남아있음을 접하게 된다. 이는 카이로스에서의 서사와 유사하다. 이건 수렵 채집이 아니라 전쟁의 서사다. 그렇다면 카이로스를 무대로 한 보더랜드4의 이면에 독재는 문명이 아니라는 함의가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전쟁과 대립이 다시 시대의 테마로 떠오르고 있는 현재의 지구 정세와 연결해 사유할 지점이 생긴다. 변방의 황무지 행성이라는 무대를 홉스의 자연 상태에 가깝게 포장하는 데에는 보더랜드의 설정에 존재하는 기업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총기와 장비는 제조사마다 독특한 특수 효과를 지닌다. 이 제조사들은 여러 행성을 실질 지배하는 지배 권력이기도 한데, 작중의 은하계는 이미 정치 권력이 기업 권력에 무력으로 패배한 상태로 기업 간의 경쟁이 곧 전쟁을 포함하는 세계다. * 국가가 사라지고 기업이 정치 권력을 대체하는 세계는 SF에서 보통 디스토피아로 묘사된다. 보더랜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기업들은 적으로 등장하는 서넛을 제외하고는 묵직한 배경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이들이 벌이는 경쟁 내지는 기업 전쟁은 플레이어의 스토리와는 거리가 있다. 그 서사는 변방이 아닌 저기 중심부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기업 중에서 플레이어의 스토리 수행에 의해 사세가 기우는 경우는 있어도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런 배경 설정에서 다른 해석을 뽑아낼 수 있다. 홉스가 상상했던 자연 상태에 가까운 상태는 문명 바깥의 상태다. 독재 치하에서 폭력이 제1수단인 카이로스 또한 문명 외의 상태라면, 기업 전쟁이 횡행하는 은하계 또한 문명 외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약간의 비약은 섞여있지만 말이다. 지도 밖으로의 행진은 개척의 서사다. 우리가 겪은 마지막 개척 경험은 미국 서부 개척을 마지막으로 현실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보더랜드의 수렵 채집 시뮬레이션은 개척이 아닌 생존 서사에 가깝다. 문명은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는 바, 생존 서사는 곧 문명의 농도가 옅거나 없는 상태의 서사다. 더군다나 수렵 채집 행위를 매개로 하니 이는 전쟁의 생존 서사와 또 다른, 문명 유무의 맥락에서 읽히는 서사가 된다. 이런 사유의 끝에서, 폭력이 만성화되고 생존이 우선인 상태는 문명 외의 상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어쩌면 기업 전쟁이 만연한 보더랜드의 은하계처럼 겉보기에는 문명 사회로 보이는 상태도 문명이 옅어진 것일 수 있다.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자 인생이 마지막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수렵 채집의 세계에서 문명 국가의 세계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하지만, 게임 요리에서는 아무 맛이 나지 않는걸
그러나, 다른 여느 일상의 메커니즘처럼 요리를 게임에 구현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핵심 가치인 맛이라는 스테이터스를 플레이어들에게 현실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게임에서 이러한 행위, 또는 메커니즘은 수치화를 기반으로 재창조될 수 밖에 없고, 요리 또한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수치화가 대략 가늠이라도 잡히는 다른 요소에 비해 맛이라는 가치를 파라미터로 표현할 수 있을까? < Back 하지만, 게임 요리에서는 아무 맛이 나지 않는걸 30 GG Vol. 26. 6. 10. 게임의 수많은 게임 플레이와 메커니즘은 현실의 그것을 모방하는 식으로 구현되곤 한다. 자연 법칙, 행정 절차, 인문학적 상식 등등 수많은 행위 또는 현상의 시뮬레이팅은 게임의 기본이다. 게임을 하다보면 느끼는 또 하나의 재미는 이렇게 모사된 현실의 현상이나 행위들이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달라지는지 찾아보는 일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게임 속에서 매우 자주 찾아볼 수 있지만 구현의 딜레마가 느껴지는 메커니즘 중 하나는 바로 요리다. 의식주 중의 하나로 우리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지만 게임에서는 항상 구현의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요리란 레시피라는 공식을 따라가는 행위이다. 아무리 간단한 음식도 조리법이 있기 마련. 때문에 과정을 실수 없이 해내야 하는 퍼즐 요소로서 수많은 게임에서 활용되었다. 문제는 요리를 하나의 게임 플레이로 구현할 때, 성공의 이면에는 실패가 있다는 점이고, 요리를 하고 나면 발생하는 음식이라는 결과물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게임플레이에서, 실패의 위험이 있기에 성공의 가치가 생겨나는 법이다. 그런데 요리에서의 실패는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일단 ‘실패한 요리’ 란 무엇일까? 현실에서는 어떤 요리를 실패한다고 하던가? 간단히 생각했을 때, 관건은 역시 ‘맛’ 이다. 어쨌거나 소화 가능한 유기물이라면 모두 가능한 영양분 섭취라는 면을 제외하고, 요리,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맛이다. 특히 요리라는 과정을 볼 때, 우리가 어떠한 레시피라는 공식을 따르는 이유 자체는 적절한 조리를 거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기에 ‘레시피를 따라 조리하는’ 요리라는 과정의 성공 여부는 결국 맛에 좌우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여느 일상의 메커니즘처럼 요리를 게임에 구현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핵심 가치인 맛이라는 스테이터스를 플레이어들에게 현실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게임에서 이러한 행위, 또는 메커니즘은 수치화를 기반으로 재창조될 수 밖에 없고, 요리 또한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수치화가 대략 가늠이라도 잡히는 다른 요소에 비해 맛이라는 가치를 파라미터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결국 현실에서 실패한 요리와 게임의 실패한 요리는, 이러한 감각 전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요리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건 맛이 거의 전부라 해도 거짓이 아닐진대, 게임에서는 그 맛을 전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맛있음’ 을 기반으로 성공을 재정의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진다. ‘맛있는 요리’ 또는 ‘맛있는 음식’ 이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맛있음’ 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효과로 정의될 수 있는가? 고민 끝에, 수많은 게임들은 이러한 ‘맛있음’ 의 효과를 일종의 섭취한 플레이어의 상승효과로서 받아들였다. 맛있는 음식은 기본적으로 섭취한 인간의 행복을 고양시킨다. 부차적으로 만약 그 음식의 재료들이나 조리 방법이 특히 건강할 경우, 육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도 자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임 속 음식, 요리들은 섭취자에게 버프를 제공하고, 더 귀한 식재료를 쓰고, 더 복잡한 조리 과정을 거치고, 더 맛있는 형태일 때(통솔적인 의미에서) 더 좋은 효과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다른 문제는 이러한 스테이터스 강화 요소가 모든 게임에 항상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게임에서 ‘맛있는 요리’ 라는 결과물을 판단하려면, 그 게임에서 ‘맛없는 요리’ 또는 ‘실패한 요리’ 는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게임 속 ‘실패한 요리’ 의 유형을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 이렇다. 1. 아예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음. 2. 부정적인 효과가 달리거나 긍정적 효과가 적은 별도의 ‘실패한 음식’ 이 생성됨. 3. 실패한 요리=게임 오버 또는 임무 실패. 첫번째, 요리에 실패할 경우 아예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는 가깝게는 ‘마비노기 모바일’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게임의 경우 요리는 확률 생성에 기반하여, 10% 단위로 끊긴 성공 확률에 따라 제작대에 재료를 투입하고 확률적으로 음식이 만들어진다. 매우 단순한 방식이다. 두번째, 요리에 성능이 다른 실패한 요리가 별도로 생성되는 경우 또한 매우 많은 게임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보면, 전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고기를 굽는 액션은 기본적으로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눌러야 하는 간단한 퍼즐의 형태다. 고기가 구워지는 도중 고기는 3단계에 걸쳐 모습이 변하고, 구워지는 고기가 적절하게 익은 모습일 때 버튼을 눌러 완료하는 형태다. 실패한다면 덜익은 고기나 탄 고기가 생성되고, 이들은 그 긍정적인 효과(스태미너 증가)가 적게 설정되어 있다. 세번째, 요리의 성공/실패 여부가 게임의 성공/실패 여부 자체를 판가름 하는 기준인 게임들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예 요리를 협심해서 만드는게 목표인 ‘오버쿡드!’ 가 있으며, ‘커피톡’ 시리즈 역시 넓게는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커피톡’ 에서는 어떤 재료를 넣더라도 음료는 만들어지지만, 누군가에게 무언가 제공해야 하는 정답이 정해져 있고, 이들이 두루뭉술하게 주문하는 재료의 조합을 가지고 하나하나 맞추어 완성해 제공해야 한다. 즉, 여기서는 요리 자체의 완성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기호를 맞추는 것’ 까지가 성공적인 요리라는 의미이며, 이를 맞추는 건 게임의 엔딩과 업적 달성에 영향을 주니 게임의 성취도 자체로 음식의 성공을 판가름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두번째 케이스들이다. 어쨌거나 게임의 아이템 데이터 베이스를 쓸모가 그저 ‘실패 판정’ 인 아이템이 차지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사하중이나 다름 없다. 그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로 이 ‘실패한 요리’ 가 쓰임새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실패한 요리’ 가 특별한, 또는 유용한 쓰임새를 가진 게임들을 살펴보면 ‘룬 팩토리’ 시리즈와 대중적인 게임 중에서는 ‘원신’ 이 있다. (이미지 출처 : 룬 팩토리 4 정보봇 @RF4_KR_info) ‘룬 팩토리’ 시리즈의 실패한 요리는 레시피에서 어긋난 요리를 하게 되면 발생한다. 이 요리들은 적에게 디버프를 거는 용도로 쓰일 수 있고, 또 일부 괴상한 취향을 가진 NPC 에게 주어 호감도를 올리는 용도로 쓰인다. ‘원신’ 에서도 실패한 요리는 비슷한 쓰임이 있다. 이상한 요리를 만들어 접대하거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선물하기도 한다. 또 업적 중에도 이 이상한 요리를 만들어내는게 있다. 또한, ‘몬스터 헌터’ 에서도 일부 아이템의 재료로서 잘못 구워진 고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요리를 일종의 스킬 체크로 활용하는 방식과 음식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한 허들로서 활용하는 방식 두가지에 따라 게임 속 ‘요리’ 와 ‘음식’ 의 위상이 달라진다. ‘오버쿡드!’ 와 ‘커피톡’ 은 요리라는 스킬 체크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게임들이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나 ‘룬 팩토리’ 시리즈, ‘마비노기 모바일’ 등은 음식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한 과정이고, 이에 실패할 경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얻게 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쯤 오면, 이들 요리를 판단하는데 ‘맛’ 이 대체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 근본적으로 이러한 괴리는 게임 속 ‘요리’ 라는 개념이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그 맛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의 ‘실패한 요리’ 와 개념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차이가 생기는데서 발생한다. 현실의 요리는 ‘맛이 없다’ 고 하면 끝이지만, 그 맛이라는게 게임 속에서는 전달할 수 없으니 그 ‘실패’ 를 여러 개념으로 대체하다보니 생기는 일이다. 비슷한 느낌은 현실에서도 있다. 맛있는 요리를 구분하는데 있어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먹기엔 맛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먹으면 괜찮고, 또는 만족한 맛은 아닌데 가격 생각하면 괜찮은 것 같고, 또 보기에는 나쁘지 않고... 반대로 나쁘지 않지만 이 가격에 이 수준이면 안될 것 같고. 현실에서 ‘맛있는 요리’ 를 구분하는데에 ‘맛’ 이 지배적이라는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그 ‘맛’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기대치, 취향 자체가 모두 다르니 오히려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기 어렵다. 결국 게임에서의 요리의 성공과 실패는 현실과는 달리 명확한 기준이 필요했고, 둘은 극적으로 대비되어야만 했다. 더구나 이러한 요리, 그리고 음식이라는 아이템이 게임마다 가지는 플레이에서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실패한 요리’ 라는 개념은 여기저기 분화하게 되었고, 그 ‘실패한 요리’ 의 대척으로서 ‘성공한 요리’ 또한 변화해 왔다보니 현실의 요리와 게임 상의 요리 상의 괴리가 좁혀지기는 커녕 벌어지기만 했다. 즉 게임 상에서 현실의 요리를 최대한 모사하려던 시도가 결국 또 거리감을 오히려 만드는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게임 속 요리의 가치 기준이 현실과 아예 상관이 없어져도 되는 건 아니다. 결국 게임 속에 등장하는 요리와 레시피는 현실의 것을 따오거나 그에 기반할 수 밖에 없고, 과거 유행했던 플래시 게임 ‘고향만두’ 처럼 엉터리 스킬체크로 가득하다면 게임이 보여주는 요리에 전혀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요는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 상에서 맛을 보지는 못하지만, 레시피와 외형, 그리고 조리 과정 등을 통해 그 맛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맛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맛으로 연결되는 논리적 연관성(조리법, 외형, 재료의 종류 등)을 설득력 있게 내어야 그나마 게임 속 요리와 현실 요리의 간극을 좁히고 맛을 간접적으로 연상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게임 내에 등장하는 요리/음식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은 경우는 그 맛을 어떻게 표현했느냐보다도, 맛을 제외한 다른 음식의 특성을 이용하여 요리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했을 때였다. 애초에 맛으로 승부할 수 없다면, 감성으로 승부하면 된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에서 어떤 확실한 가치나 대단한 목적이 아닌, 그저 평범한 행위로서 하는 요리가 더 깊게 기억에 남고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다. ‘천수의 사쿠나 히메’ 에서 농사를 하고 밥을 짓는건 그다지 특출난 게임 플레이도 아니고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값지게 쌀을 수확해 밥을 지어 동료들과 나눠먹는 기억이 너무나 특별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커피톡’ 시리즈에서도 어떤 음료를 탄다고 해서 대단한 효과가 돌아오는건 아니지만, 마시고 난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요.” 라고 하는 말 하나를 듣기 위해서 레시피를 검토하며 몇 번이고 재시도를 하곤 했다. 정말 일상적인 요소이지만 요리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은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기 때문이고, 요리란 어떤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의 행동과 몰입감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예를 들어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의 요리와 음식은 어디까지나 주된 콘텐츠가 아닌 사냥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이고 플레이어의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그만큼 앞서 소개한 게임들 중 게임 내에서 작거나 크거나 요리가 구현되었을 때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는 메커니즘의 논리나 구현의 적절함 만큼이나 ‘요리’ 라는 행위가 들어갈 당위성이 크게 영향을 미쳐왔다. 요리는 게임 속 일상성을 유지하고 플레이어의 몰입을 끌어들이는 요소이고, 때론 게임 내 다른 캐릭터와의 유대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결국 게임이나 현실이나 요리와 음식의 쓰임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맛을 느낄 수 있냐 없냐이고,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직접 섭취하는 음식이 아니라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는 간접 경험으로서의 요리, 음식과 맥락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핵심 감각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떠한 물질의 특성을 표현하는 건 언뜻 불가능해보이지만, 때론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요리, 맛있는 음식의 가치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인터뷰] SNS의 규칙을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바꾸는 여정 : <페이크북> 제작사 반지하 게임즈 이유원 대표
SNS가 현대인의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교통, 통신의 기술이 해마다 급격하게 발전하고, 문화적 양상은 그보다 더 빠르게 급변하기에 오늘날 SNS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SNS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상의 규칙성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녹이는 데 특화된 ‘반지하 게임즈’이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SNS의 규칙을 게임화하였을까? GG 2호 이후 오랜만에 반지하 게임즈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 Back [인터뷰] SNS의 규칙을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바꾸는 여정 : <페이크북> 제작사 반지하 게임즈 이유원 대표 22 GG Vol. 25. 2. 10. SNS가 현대인의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교통, 통신의 기술이 해마다 급격하게 발전하고, 문화적 양상은 그보다 더 빠르게 급변하기에 오늘날 SNS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SNS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상의 규칙성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녹이는 데 특화된 ‘반지하 게임즈’이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SNS의 규칙을 게임화하였을까? GG 2호 이후 오랜만에 반지하 게임즈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이경혁 편집장: 오랜만에 GG 인터뷰로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신작 <페이크북>을 내셨는데요. 사실 <페이크북>이라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저도 좀 인연이 있지요. 이전에 이 프로젝트를 고민하실 때 저희 사무실을 찾아오셨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맞습니다. 처음 기획할 때에는 특이한 컨셉에 소위 말하는 ‘인디게임’스러운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그때 스토리가 중요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고민이 많았는데요. 게임의 재미를 주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보았을 때, 이야기를 쭉 보는 어드벤처 형식의 게임이 대표적으로 스토리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 게임으로 주고 싶었던 것은 특정한 ‘이야기’가 아니고, SNS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거기서 유저가 상호작용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나 참신함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 뵙고 난 이후에 이 게임 시스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스토리가 뭘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 결국 중요한 결정들을 하는데 항상 생각이 나는 조언들이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그런 느낌을 좀 받았어요. ‘제작자분들이 실제로 SNS에서 신상을 꽤 털어봤구나’라는 생각이었는데요. (일동 웃음) 그런 말씀을 많이 들으시나요? 이유원 대표: 이번에 게임을 출시하고서 스트리머분들이 되게 많이 플레이해주셨어요. 어제도 ‘한동숙’ 님이 플레이해주셨고요. 그런데 그분들 플레이를 보면서 시청자분들이 채팅으로 ‘이 사람 SNS를 얼마나 한 거냐?’, ‘이 사람 인터넷 귀신이다’ 라고들 하시는데, 그걸 들을 때 처음엔 되게 놀랐어요. ‘이게 그 정도인가?’, ‘이건 다 아는 내용 아닌가?’, ‘이 정도는 다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공감을 잘 못했는데, 계속 이런 반응이 나오니까 ‘아, 제가 좀 많이 했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 그런데 사실 저는 SNS를 그렇게 많이 안 하거든요. 오히려 이 게임을 만들면서 열심히 보려고 했었고, 정확하게는 SNS를 많이 한다기보단 인터넷에 있는 웃긴 상황이나 우리가 맞닥뜨릴 법한 경험 같은 것들 좋아했던 것 같아요. 사실 인터넷에서 웃긴 이야기가 올라와서 사람들이 퍼내고, 댓글로 싸우고, ‘누가 알고 봤더니 누구였더라’ 하는 그런 것들이 메타적으로 보면 재밌는 문화잖아요? 그런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경험들을 녹여서 게임을 만든 것이 조금은 주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 경험을 게임으로 녹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유원 대표: 네. <페이크북>이 신상을 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드벤처 게임이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비주얼 노벨 같은 느낌이어서, 저희도 작업하면서 단순한 ‘신상 털기’를 넘어서는 참신함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는 기획 공수가 컸었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재미를 느낀 점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예전에 텍스트 게임을 만들거나 일반적인 라이브 하는 게임을 만들 땐, 재미있는 장치를 만드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페이크북>은 처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게 엄청 어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새로운 감각이어서 기획하는 입장에서도 되게 재미있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영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사실 이런 스토리텔러 게임들이 제작자 입장에서 굉장히 어려운 게, 100개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도 플레이어가 100개를 다 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열심히 만들었는데, 플레이어가 하지 않는 부분들은 아쉽지 않나요? 이유원 대표: 사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제가 텍스트 게임을 오래 만들어서 그런지, 그런 거에 대해서는 생각을 크게 안 하는 것 같아요. 텍스트 게임은 상호작용성이 중요하니까, 결국 플레이어들이 가지 못하는 분기가 있는데요. 오히려 모든 분기를 다 파악하게 만드는 순간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고, 실제로 <페이크북>을 플레이하시는 분들 반응을 보면, 당연히 못 가는 분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재미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한편으로 게임을 하면서 궁금했던 게, ‘왜 하필 페이스북이었나?’이었거든요. 사실 요즘 페이스북이 10대, 20대들이 사용하는 SNS의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데이브 더 다이버>에서도 SNS가 나오는데, 거기선 인스타그램을 따라갔어요. 그런데 더 나중에 나온 게임이 페이스북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저는 특이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이스북을 모티브로 삼으신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이유원 대표: 사실은 기획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요. 인스타그램이나 모바일 UI처럼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아예 게임을 모바일로 출시하자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일단, PC 게임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첫 번째로, PC 게임에 진출하고자 하는 저희 회사의 내부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고요. 두 번째로는, <페이크북>을 만들 때 ‘게임을 몰입해서 하지 않으면 유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결국 현실에 있는 인터넷 세상을 재현하는 모습이다 보니까요. 그리고 모바일 환경에서 하다 보면 흐름이 끊긴다거나 너무 작은 화면으로 봐서 와닿지 않을 수 있기에 집중된 상태에서 게임을 할 수 있는 PC가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PC 게임 시장은 이미 너무 많은 게임이 나오고 있기에 특이하고 컴팩트한 컨셉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런 조건들을 충족하면서 여러 세대의 공감대를 살 수 있는 방향으로 페이스북을 선정했죠. 아무래도 다른 SNS를 활용하면 그 SNS를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SNS를 따라한 것이다’라는 게 확 와닿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인스타그램은 익숙하지 않은 세대가 있을 수 있지만, 페이스북은 나이대에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향수를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하신 부분 중에 굉장히 공감하는 건 PC 앞에서 해야 하는 게임이라는 점인 것 같아요. 제작자로서 그 차이를 많이 느끼시는 거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모바일 게임을 만들 때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못 해봤는데, 일단 몰입을 저해할 만한 요소들이 굉장히 많아요. <페이크북>은 이야기의 진지함이 담겨있는 파트도 있다 보니까, 수시로 껐다 켰다 하면서 방해를 받으면 좀 아쉬울 것 같다는 기획자적인 아쉬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실제 SNS를 따라 한 게임인데, 플레이하다가 실제 SNS 알림이 뜨거나 카톡 알림이 뜨면 몰입이 얼마나 깨지겠어요? 그런 것들을 방지하고 싶어서 기획 초반에 팀원들과 많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그 선택에서 역으로 우리의 인식 속에 페이스북이 어떤 미디어인지가 잘 드러났다고 생각이 들어요. 페이스북은 PC로 보아야 글이나 내용에 집중을 할 수 있고, 모바일로는 잘 다가오지 않는 SNS인 거죠. 그래서 ‘PC 게임을 만들 땐 결국 페이스북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거든요. 이유원 대표: 저도 페이스북을 생각했을 때, 컴퓨터로 했던 기억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 영향을 받은 점도 있겠네요. 이경혁 편집장: 그리고 <페이크북>의 UI를 되게 유심히 보다 보면 이게 지금의 페이스북 UI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0년 전의 모습이랄까요? 그런 지점에서 페이스북이라는 특정 코호트에 맞춘 SNS를 가져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원 대표: 눈썰미가 진짜 좋으시네요. 저희는 옛날 페이스북 UI를 가져오고 싶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제 예전의 향수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페이스북 UI는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저희도 조사 차원에서 페이스북 UI의 변천사를 정리해 놓은 사이트를 찾을 수 있었는데, 타겟으로 한 건 2010년대의 페이스북이에요. 왜냐하면 그때의 UI가 한편으로는 투박하지만, 한편으로는 필요한 것만 배치되어서, 뭐랄까요... 본질에 집중한?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확하게 왠지는 몰라도 옛날 페이스북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디자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저는 콘텐츠 측면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페이스북에서는 이런 활동을 잘 안 하거든요. 이유원 대표: 그렇죠. 요즘은 페이스북이든 스레드든 사람들이 뭔가를 일부러 재밌게 쓰려고 하거나 내용이 있는 글을 쓰려고 하는데, 당시의 페이스북은 ‘배고파’, ‘심심해’ 같이 그냥 아무 말이나 올리기도 하고, 진지하거나 웃긴 글도 올리고 그런 감성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보니까, 기획적으로도 (<페이크북>에선) 글이랑 그림이 막 올라오면서 이 사람의 사생활도 볼 수 있고, 생각도 볼 수 있고, 무슨 캐릭터인지 빨리 캐치할 수 있는 점에서 적합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페이스북을 선택하는 지점에서의 모종의 향수가 있다고 표현을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페이스북이 트위터나 다른 SNS와 다르게 싸이월드처럼 지인과의 연결된다는 점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페이스북은 실명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레트로한 지점도 있고요. 그런 부분이 페이스북의 향수를 만드는 지점도 있을까요? 이유원 대표: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상의 재밌는 경험에서 핵심 메커니즘이 뭘지 생각을 하고 게임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요. <페이크북>을 만들 때에도 페이스북에서 저랑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랜덤한 사람들을 많이 타고 다녔어요.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친구들 리스트가 공개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타고 네다섯 거리 건넜을 때, 진짜 저와는 평생 만나보지 못할 것 같은 분들이 떠요. 그런데 그분들의 일상을 보면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인스타처럼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인 섬이 있고 거기의 네트워크가 있는 형태다 보니 신기하고 생경한 재미를 주는 거예요. 그때 이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랍고 그런 점들에서 <페이크북>이 주는 재미는 이런 거겠다 싶었어요. 실제로 <페이크북>을 보면 누군가는 바보 같을 정도로 자기 사생활을 엄청 올리고 그걸 보면서 얘네가 이렇게 친하고 이런 관계망들을 알게 되잖아요. 그렇게 탐방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지금 게임 이용자의 주 연령대는 어떻게 될까요? 이유원 대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체크해 본 적은 없지만, 20대 초반보다는 중후반쯤에서 좀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좀 재미있어요. 스트리머분들이 게임을 하실 때, 채팅창에서 ‘옛날에는 다 그랬어’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사실 게임 내용에서 댓글에다가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서 응모하는 그런 것들은 지금 시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그런 문화니까. (웃음) 한편으로는 지금 10대 분들이 보시기에는 마치 예전 세대가 PC 통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유튜브에서는 반응이 아주 좋았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되게 많이 스트리머 분들이 해주셨었고, PC 게임은 모바일 게임과 다르게 되게 이제 호의적으로 많이 플레이해주시다 보니까 뿌듯했습니다. 보통 모든 개발자가 그러겠지만, 게임을 출시하고 난 뒤에는 버그가 나오면 어떡하지, 막히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함께 기획 의도대로 반응이 나올 때의 성취감이 있는데, 그런 지점이 개발하면서 엄청 큰 힘이 됐고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돼서 좋았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스트리머분들 말씀이 나와서 그러는데, 이번 작품에서 까메오를 많이 쓰셨잖아요? 이유원 대표: 네. 맞아요. 처음 기획 과정에서부터 이게 실제 SNS를 옮겨 놓은 것이다 보니, 스트리머 분들이나 인플루언서분들이 나오시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고요. 먼저 저희와 친분이 있는 분들부터 아닌 분들까지 광범위하게 연락을 드렸어요. 사실 이게 콜드 메일이잖아요? 그래서 안 받아주실 만도 한데, 거의 한 90-95%는 다 흔쾌히 답장을 주시더라고요. 순전히 호의로 해주시는 건데도 생각보다 더 호의적으로 말씀을 해주셨고, 안 된다고 하셨어도 사정을 설명해주시고 하셔서 그런 과정들이 감사하고 재밌었습니다. 실제로 게임이 나왔을 때의 유저분들의 반응도 좋고, 스트리머분들이 게임하실 때 채팅창의 반응을 볼 때 희열이 있었죠. 이경혁 편집장: 텍스트 베이스의 게임이다 보니까 해외 진출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장벽이 좀 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한 상황이나 이후 계획은 어떻게 보고 계세요? 이유원 대표: 일단, 7월에 BIC(인디게임커넥트페스티벌)에서 ‘비트 서밋’(인디 게임 페스티벌)에 가는 것을 지원해주면서, 번역을 해야 해요. 그런데 번역에 두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하나는 로컬라이제이션을 정말 잘 하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지금의 문화적 색채를 유지하면서 언어만 대응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 지금은 양방향으로 많이 알아보고 있어요. 만약에 해외 유저분들도 형식이 파격적이라며 재미있어하신다면, 앞으로 더 확장될 영역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조금 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한편으로 요즘 한국의 대중 문화에 관한 해외의 관심도가 높다 보니, 현지화를 안 하더라도 그냥 한국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로컬라이제이션을 하는 방향도 여러 가지잖아요. 현지 회사랑 합작을 해서 거기서 변화를 주는 방법도 있을 거고요. 이유원 대표: 네. 맞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방법들을 열어놓고 알아보고 있어요. 해외 퍼블리셔를 만나는 것도 생각하고 있고요. 사실 <페이크북>이 저희의 첫 번째 PC 게임이다 보니, 성적이나 흥행에 대해서 되게 걱정이 많았었는데 정말 후회 안 하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플레이해주시고 그런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어서, 사실 작년을 되게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반지하게임즈는 <서울 2033>처럼 발매 이후에도 패치를 한다거나 확장팩을 선보이는 모습들을 보이곤 했는데요. 혹시 이번 작품도 패치나, DLC 같은 형태로 확장시킬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유원 대표: 네. DLC를 생각하고 있고 욕심은 많습니다. 이 포맷이 좋기 때문에 이야기를 바꾸어가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요. 일단은 DLC 쪽으로 해서 추가되는 스토리들을 보여드리는 식으로 준비를 할 것 같고요. DLC 외에도 나중에 이 포맷을 다시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인터넷 서핑하는 재미라는 걸 주는 게임이 좀 고유할 것 같아서, 발달하는 AI 기술에 접목시킬 생각도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마지막으로 그 외의 차기작에 대해서 계획도 여쭙고 싶어요. 이유원 대표: 저는 텍스트 게임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서울 2033>이 벌써 6, 7년 되었는데, 하다 보니까 노하우가 많이 쌓였거든요. 물론, 혹자는 텍스트 게임이 수익성이 없고, 글을 쓰는데 노고가 많이 들어가며, 비즈니스 모델도 적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기도 하고 노하우도 쌓였으니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최근에 저희가 AI 관련 기술들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노하우를 접목시켜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로망이 있어요. 신작으로는 PC 게임 더 도전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요. 이번에 나온 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컴팩트한 규칙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은 저희가 원래 잘하던 건데, PC 버전으로 그런 류의 게임을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페이크북>은 사람들의 네트워킹이 모종의 재미를 주었는데, 이런 재미를 메타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서 지금까지의 전작들이 서로 연결되는 차기작도 나올 수 있을까요? <서울 2033>의 인물이 나오는데, <페이크북>의 인물과 접점이 있고, 또 그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수확의 정석>의 인물이고 하는 그런 그림이요. 이유원 대표: 언제 별도의 작품으로 진지하게 기획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저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희는 결국 팬덤의 사랑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그래서 반가움을 드리는 작업들을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결국 저희 게임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반지하의 특정 프로젝트나 캐릭터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이잖아요? <서울 2033>을 구매해주시는 분들이 <페이크북>을 찾아주시고, 또 입소문이 나면서 유입이 되고. 그래서 그런 점들이 되게 중요한 면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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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팀의 ‘양식화된’ 태그를 통해서 본 예술로서의 게임, 혹은 게임으로서의 예술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2년 전, 그러니까 2014년에 ‘태그’ 기능이 스팀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스팀은 스스로 이 기능을 “새롭고 강력한 게임 구매 방법”이라 설명한다. “지속적으로 부착된 태그는 독립적인 부류로 나누어지고, 모두가 함께 정의한 장르, 주제, 특징으로 나누어진 상품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즉 여기서 ‘태그’는 “장르, 주제, 특징”과는 다른 제4의 분류법이다. 나아가 스팀의 ‘태그’ 기능 소개 페이지는 “어떤 단어로도 태그를 달 수 있”음을 명시한다. < Back 스팀의 ‘양식화된’ 태그를 통해서 본 예술로서의 게임, 혹은 게임으로서의 예술 29 GG Vol. 26. 4. 10. “예술이 의지가 펼치는 궁극의 게임이라면 ‘스타일’은 이 게임을 하는 일련의 규칙으로 구성된다.” [1]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2년 전, 그러니까 2014년에 ‘태그’ 기능이 스팀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스팀은 스스로 이 기능을 “새롭고 강력한 게임 구매 방법”이라 설명한다. “지속적으로 부착된 태그는 독립적인 부류로 나누어지고, 모두가 함께 정의한 장르, 주제, 특징으로 나누어진 상품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즉 여기서 ‘태그’는 “장르, 주제, 특징”과는 다른 제4의 분류법이다. 나아가 스팀의 ‘태그’ 기능 소개 페이지는 “어떤 단어로도 태그를 달 수 있”음을 명시한다. “장르를 분류할 때는 ‘퍼즐’을, 주제를 분류할 때는 ‘군사’를, 특징을 보여주고 싶으면 ‘어려움’을 쓰시면” 되지만, “제품에 걸맞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도 좋”을 때도 있다 [2] . 이 문장을 읽자마자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러한 임의적 민주주의는 해당 기능이 본래 의도한 대로 작동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실제 게임 내용과 “장르”적으로도 “주제”적으로도 “특징”적으로도 전혀 무관한 ‘밈’, ‘심리적 공포’, ‘LGBTQ+’ 등의 태그를 다는 장난질은 꾸준히 성행해 왔다. 그리고 이처럼 명백한 악용 사례를 넘어, 그 뒤에 숨겨진 의도조차 알기 힘든 태그도 있다. 바로 ‘양식화된’이다. 사실적인과 양식화된 ‘양식화된’은 영어 태그 ‘Stylized’를 번역한 것으로, 원본 단어를 보아도 그 뜻은 다소 아리송하다. ‘양식 (Style)’을 ‘스타일’로 직접 음차한 표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보통 무언가의 맵시가 멋지거나 뛰어날 때는 ‘스타일리쉬’하다는 형용사를 자주 쓰지, ‘스타일라이즈드’되었다는 수식어는 익숙하지 않다. 이 스타일라이즈드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는 시각적 게임 디자인의 두 갈래 중 하나로 ‘리얼리스틱’, 즉 ‘사실적인’의 반대편을 일컬을 때이다. <호라이즌 제로 던>과 <배틀필드> 시리즈 등 개발에 참여한 3D 디자이너 킴 아바 (Kim Aava)는 게임 디자인에서 사실주의가 실사를 모방하는 그래픽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양식화된 디자인은 현실을 굳이 재현의 기준으로 삼지 않은 채 자유로운 표현을 목표로 하는 방법론이라 규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분하는 도중에 아바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을 강조한다. 바로 사실주의도 결국엔 양식에 속한다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어디까지나 더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상화된 현실의 이미지를 참조할 뿐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10년 전에 사실적으로 보인다 믿었던 것들이 오늘날엔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그것들은 누군가에겐, 당시에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렸던 선택들로 인해 심지어 양식화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3] .” 즉, 현실을 과장한 표현이든, 현실을 단순화한 표현이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모방하려 한 표현이든 전부 어떠한 ‘양식’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모방과 재현은 마치 예술가의 표현적 선택에서 면제되는 듯한 인식이 퍼져 있어, 사실상 ‘사실주의, 그리고 나머지’ 모든 작품이란 범주가 통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 (Susan Sontag)이 1965년도 에세이 <스타일에 관하여>에서 ‘리얼리즘도 하나의 스타일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4] . 그렇다면 ‘양식화된’ 태그엔 ‘현실적’ 태그 바깥의 모든 게임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2026년 3월 16일 오전 5시 43분 시점에 해당 태그를 클릭해 들어갔을 시 가장 상위에 뜨는 3편의 게임은 중세 타워 디펜스 게임 <쓰론폴 (Thronefall)>, 아니메 확률형 아이템 수집 RPG 게임 <소녀전선2: 망명>, 코스믹 호러 낚시 게임 <드레지 (DREDGE)>이며, 조금 더 밑으로 내리면 <바둑>이란 제목의 아주 직설적인 바둑 게임도 있다. 확실히 네 편의 게임 모두 시각적 현실 재현이 목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점 외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주의가 아닌 표현주의적 양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양식화된’이란 태그가 붙지 않은 게임들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울트라킬 (ULTRAKILL)>, <멈추지 마, 걸리팝! (Don’t Stop, Girlypop!)>, <스프롤 (SPRAWL)>의 세 작품은 전부 극도로 강조된 색채나 한 알 한 알이 두드러지는 픽셀, 투박하게 각진 로우 폴리곤 등, 현대 기술 수준에서 재현할 수 있는 현실성과 아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양식화된’ 페이지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쓰론폴>과 <울트라킬> 사이를 나누는 그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쓰론폴>을 분류하는 태그인 ‘양식화된’은 <울트라킬>, <멈추지 마, 걸리팝!>, <스프롤>에 붙어 있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이 세 게임도 <쓰론폴>에게 없는 공통적인 태그를 하나 달고 있다. 바로 ‘부머 슈팅’이다. ‘부머 슈터’는 1990년대를 풍미했던, 다시 말해 베이비부머 세대가 즐겼던 ‘복고풍’ FPS 게임 양식을 일컫는 표현이다. ‘부머 슈팅’ 말고도 <울트라킬>이 속한 태그인 ‘복고풍’, <멈추지 마, 걸리팝!>을 장식하는 ‘1990년대’, <스프롤>을 부연하는 ‘올드 스쿨’이 이를 확인해 준다. 물론 정말 90년대 PSX 부머 슈터 게임을 표방하고 있는 <울트라킬>과 달리 <멈추지 마, 걸리팝!>과 <스프롤>은 Y2K 2000년대 미학을 자칭하고 있으므로 저 태그들이 정확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근접하게라도 이들이 지향하는 바를 일컬을 어휘가 스팀 상에 입력돼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당시에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렸던 선택들로 인해 심지어 양식화된 것으로 보’이게 된 양식을 말하는 ‘복고풍’이 저 셋을 더 잘 묶어줄 수 있겠지만, 스팀 사용자들의 임의성은 복고 ‘FPS’라는 특징에 더 주목을 해 ‘부머 슈팅’으로 퉁쳐 버린 듯하다). <쓰론폴>과 <드레지>의 경우엔 색채의 과장과 세부 묘사의 생략, 형상의 단순화 등을 통해 독특하고 고유한 양식을 이루고 있음에도, 이들이 구현하고 있는 양식을 일컬을 기존의 태그가 스팀에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이 두 게임에선 ‘양식이 두드러지지만’, 그 양식을 뭐라 따로 분류할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소녀전선 2: 망명>에겐 이미 ‘애니메이션’이란 태그가 존재하고, <바둑> 같은 경우는 배경 공간을 추상화하거나 생략했을 뿐 오히려 바둑판 자체는 꽤나 현실의 물건과 유사하게 구현된 듯하며 전체적으로 시각적 창의성과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어째서 ‘양식화된’ 태그가 아래 있는 것인지 다소 아리송하다. 양식과 양식화된 태그의 최신 분류는 앞서 말한 사용자 중심 운영 체제의 임의성에 영향을 많이 받아 범주도 작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 있으니, ‘양식화된’ 태그 아래 ‘최고 평가’를 들어가 보자. 여기선 그나마 조금 그림이 명확해지는 듯한데, <펜티먼트 (Pentiment)>, <슬러지 라이프 (SLUDGE LIFE)>, <에코 포인트 노바 (Echo Point Nova)> 등 기존 장르 바깥의 고유한 양식이 확연히 두드러지는 게 보이는 게임들이 모여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 ‘양식이 두드러진다’라는 건 애초에 무엇인가?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앞서 리얼리즘을 당연시하는 풍조에 경종을 울렸던 수전 손택의 <스타일에 관하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손택은 우선 양식 혹은 스타일을 “작품의 인상 또는 리듬”이라고 표현한다 [5] . 그리고 단연 예술을 넘어 “어떤 말이나 움직임, 행동이나 사물이 직접적이고 실용적이고 무감한 표현이나 존재에서 벗어난 특질을 보인다면, 그것에 ‘스타일’이 있다” 말한다 [6] . 결국 이러한 개념과 사고의 확장과 전개는, 현실과의 관계에서 “스타일이 곧 예술”이라는 감격스러운 정의로 향한다 [7] . 이미 예술이 곧 스타일, 다시 말해 양식이라면, ‘양식화되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손택은 예술가가 “주제와 형식 사이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구분을 지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즉 “스타일과 주제가 서로 대척할 때, 주제가 어떤 스타일로 다루어졌다”, 또는 ‘양식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8] . “‘스타일’과 ‘스타일화’을 나눈 것이 의지와 고집의 차이와 유사하다” [9]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보면 ‘양식화된’은 비판적 표현이다. 이미 근본적으로 내용도 표현도 모든 것이 구분 없이 총체적으로 양식인 예술에서, 굳이 불필요하게 양식이라는 분리된 범주에 집착해 “조화가 부족한 과잉의 예술”이란 결과를 낳게 되는 경향을 질타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니 말이다 [10] . 다만 스팀 페이지에서 게임에 부착된 ‘양식화된’이라는 태그가 해당 게임이 스타일을 실험하다 자기 복제에 빠져 상상력이 소진된 결과물을 낳았다고 비판하기 위해 적용된 것은 아니리라 믿어진다. 애초에 스팀이 자신 있게 알려주듯이, 태그 기능은 게임을 “구매”하라고 발명된 장치이지 않은가. 이 시점에서 손택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역은 ‘양식화된’ 자체보단 그 안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단서에 그친다. 그럼 다시 태그의 실제 사례들로 돌아가 보자면, <펜티먼트>, <슬러지 라이프>, <에코 포인트 노바>는 전부 각각이 고유한 “인상 또는 리듬”을 전면에 부각하고 있다. <펜티먼트>는 목판화를 차용한 2D 그래픽, 펜으로 직접 쓰이는 듯 서서히 나타나며 그 과정에서 밑줄 강조나 오타 수정들까지 애니메이팅되는 대사 글씨, 맵을 이동할 때 책 페이지가 넘겨지는 효과로 전환되는 화면 등, 게임 전체가 16세기 근세 유럽의 양식을 구현하고 있다. <슬러지 라이프>의 화면 전체에 색조 및 저해상도 필터가 강하게 들어가 있으며, 모델링은 전부 둥글둥글하고, 텍스처는 색조 필터 아래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또 더 대비가 뚜렷하고 강한 단색을 기용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처에선 (텍스처는 의미상 질감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질감이 느껴지지 않고, 이는 모델링의 곡선과 공명해 그 ‘둥근’ 효과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화면 전환 및 UI 상의 VHS 효과, 맵 공간을 채우고 있는 녹색의 스모그, 그리고 담배, 캔, 팝업 창과 같은 일상 사물들의 반복 등은 필터로 잔뜩 왜곡되어 침침한 시야와 다시 만나 ’지저분한’ 감각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고, 이 상반되는 두 감각, 즉 ‘마찰 없는 더러움’은 제목인 ‘진흙탕 인생’을 하나의 고유하고 완결된 양식으로 구현한다. <에코 포인트 노바>에선 모든 것이 매끄럽게 빛나는 미래적 기술에 대한 예측이, 산산이 부서져 부유하는 자연 및 폐허와 만나, 마치 천상에 대한 환상과 같은 신비로운 감각을 준다. 그리고 이 감각을 앰비언트/드럼 앤 베이스 음악이 하나로 묶어, 빠르고 복잡한 이동 기술과 사격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스타일리쉬’한 액션과 융합한다. 그리고 이 세 게임은 <쓰론폴>, <드레지>와 마찬가지로, 각 작품의 양식을 설명해 줄 ‘부머 슈팅’과 같은 기존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펜티먼트>의 경우 시대적으로도 근세 배경에 ‘중세’ 태그는 부정확하고, <크루세이더 킹즈 (Crusader Kings)>나 <마운트 앤 블레이드 (Mount & Blade)> 같은 또 다른 ‘중세’ 게임들도 해당 시대를 그저 재현하는 데 치중하는 장르를 이룰 뿐이지 ‘중세 미학’ 그 자체를 재현하거나 재해석하는 양식을 선보이진 않는다. 나아가 <슬러지 라이프>와 <에코 포인트 노바>는 기존의 여타 어떤 양식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미학을 체화하고 있으니 당연히 스팀에 이들의 양식을 일컬을 범주가 없다. 단 하나의 항목만을 지니는 범주는 범주가 아니라 그저 그 개체 자체의 이름일 뿐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양식화된’은 어떠한 게임이 돋보이는 양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양식을 일컬을 기존의 다른 태그가 스팀 내에 없을 때 포괄해주는 분류 항목으로서 가장 일차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듯 보인다. 양식과 플레이, 그리고 의지 ‘양식화된’이 그저 기존 분류에 담기지 않는 게임들을 위한 잔여 항목들의 모음집으로서 형성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 ‘기타 등등’들의 구심점으로 ‘양식화’라는 키워드가 선택되었어야 했던 이유엔 아직 더 파고들 구석이 남아 있는 듯하다. 어째서 태그 체계는 사실주의를 기준으로 삼아 그 나머지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 ‘양식화된’의 구도를 빌려와 분류 범주를 구성해야 했을까? 바꿔 말하자면, 어째서 게임은 하나의 양식과 나머지 양식으로 망라되어야 했으며, 양식이 이 모든 걸 나누는 윤곽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왜, 태그 분류 체계 안에 ‘양식화된’은 있는데 ‘내용화된’은 없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먼저 태그 범주가 어떻게 양식과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스팀 내 태그들엔 ‘장르’, ‘하위 장르’, ‘비주얼 및 관점’, ‘테마 및 분위기’, ‘특징’이라는 상위 대분류가 있어 각 범주들을 또 한 차례 나눠 담고 있는데, 예를 들어 ‘양식화된’은 ‘비주얼 및 관점’에 속한다. 그뿐 아니라 시청각적 미학의 양식은 거의 ‘비주얼 및 관점’에 속하고 스토리나 주제의 내용적 특징은 주로 ‘테마 및 분위기’를 구성한다. 문제는 에코 포인트 노바에서 ‘스타일리쉬’하게 구사되는 액션, 즉 플레이 형식 같은 경우에 ‘장르’와 ‘하위 장르’를 오롯이 독차지하면서도 ‘비주얼 및 관점’과 ‘테마 및 분위기’, 그리고 ‘특징’에도 섞여 들어가 있어, 분류 체계 안에서 양식과도 혼재하고 내용과도 범주를 같이 쓴다는 것이다. ‘귀여운’이라는 미적 양식과 ‘1인칭’이라는 플레이 형식이 ‘비주얼 및 관점’ 아래 함께 들어가 있고, ‘포스트아포칼립스’나 ‘감정적인’이란 주제적 성질과 ‘낚시’나 ‘암살’의 플레이 형식이 ‘테마 및 분위기’ 아래 같이 속한다. ‘특징’은 오히려 또 다시 ‘장르’들처럼 플레이 형식 위주의 범주이지만 ‘PvP’와 ‘퍼마 데스’ 사이에 ‘풍부한 스토리’가 끼어 있다. 결국 플레이 형식은 태그를 양식과 내용으로 분류할 수 없도록 그 구분을 흐리는 주범이다. 그리고 게임 측에서 제공하는 플레이 형식에 더해 플레이어가 취하는 플레이 방식, 다시 말해 소위 ‘플레이스타일’이라 불리는 작품 향유 양식까지 고려하면 분류는 더욱 요원해진다. RPG 게임 등에서 가능한 한 모든 선택지를 보거나 최선의 선택지를 얻기 위해 세이브 파일 저장과 불러오기를 반복하는 ‘세이브 스커밍 (save scumming)’은 플레이어가 내용과 관계하는 방식을 일컫고, FPS 게임에서 컨트롤러를 흔들며 조준해 반동을 조절하는 ‘지터 에임 (jitter aim)’은 형식과 관계하는 방식을 말하지만 둘 모두 플레이스타일에 속한다. 예술 작품 자체가 본래 “경험하는 사람의 협력에 크게 의존”하지만, 그중에서도 독자를 더 가까이, 깊게 끌고 들어오는 게임이란 갈래에서 그 협력의 양식이 플레이어에게 수용되는 내용에든 양식에든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은 명백하다 [11] . 실로, ‘테마 및 분위기’ 아래 있는 ‘공포’, ‘귀여운’, ‘유머’ 등 정동을 중심으로 한 태그들은 게임에서뿐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양식을 기술할 때도 사용될 수 있고 내용을 수식할 수도 있는 단어들이다. ‘양식이 두드러지는 게임’들, 그러니까 <펜티먼트>, <슬러지 라이프>, <에코 포인트 노바>의 ‘양식화된’ 삼총사든, <울트라킬>, <멈추지 마, 걸리팝!>, <스프롤>의 ‘복고풍’ 삼총사든, “직접적이고 실용적이고 무감한 표현이나 존재에서 벗어난 특질”을 첨예하게 구성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특별히 다른 게임에 비해 “주제와 형식 사이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구분을” 지으며 내용을 경시하거나 도구화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 내에서 “스타일과 주제가 서로 대척”하긴커녕, 양식과 내용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상승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근본적으로 자신들 사이의 “굳이 필요하지 않은 구분”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묶는 건 ‘플레이’라는 기제다. 애초부터 게임을 다른 예술 장르와 구분하며, 기타 예술이 동경해 마지않는 그 궁극의 관객 참여 장치 말이다. 게임의 모든 예술적 요소들은 놀이라는 게임의 본색에 전적으로 징용된다. 그러니 플레이라는 대의 아래 양식이든 내용이든 나눠 봤자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양식과 내용의 구별이 그렇게나 의미가 없다면, 왜 제3의 명칭이 아닌 ‘양식’이 아직도 태그의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가? “스타일이 곧 예술”이라면, 플레이는 그 양식이 본격적으로 향유되어 작동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플레이 또한 그만의 고유한 양식을 갖는다. 게임에서 양식과 플레이는 서로가 서로를 작동시키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 조건인, 같은 진실의 두 화신 데미우르고스 [12] 다. 이 둘 모두를 발생시키는 공통된 진리는 바로 의지이다. “예술은 의지를 구현하고, 또 자극하거나 일깨우는 사물이나 공연이다.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은 의지를 구현하는 것이며, 관객의 관점에서는 의지를 구현할 가상의 배경을 창조하는 것이다. [13] ” 양식은 의지가 발현되는 그 모습을 일컫는 것이지만, 게임에서 양식은 플레이라는 관객과 작품 간 상호작용에서 마침내 현현하고, 또 플레이가 자신의 양식을 가짐으로써 분리할 수 없는 영혼을 구성한다. 그리고 모든 예술이 “관객의 관점에서는 의지를 구현할 가상의 배경을 창조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일컬을 뚜렷하고 자연스러운 이름이 없어 ‘관객 참여형’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접두사의 이식을 필요로 하는 반면, 게임은 플레이를 본원적으로 내재한다. “스타일은 예술 작품에서 결정의 원칙이자 예술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특징적 표식이다. [14] ” 게임의 플레이에선 개발자의 의지뿐 아니라 플레이어의 의지도 춤을 추며, 플레이스타일은 그 춤선을 일컫는다. 그러니, 양식과 내용 모두 게임에서 플레이에 복무함에도 양식이 갖는 동등한 협업자적 위치와 내용의 순수한 기능적 위치는 다르다. “예술에서 ‘내용’이란 본질적으로 형식적 인 변형 과정에 의식을 끌어들이는 구실이며, 목적이자 미끼다. [15] ” 이 지점에서 내용과 양식 중 후자만이 그 두드러짐의 이름을 태그 분류 속에서 따로 얻게 된 연유는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사실주의에 많은 환상이 덮어 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주의조차 여전히 하나의 양식으로서 내용에 비해선 예술의 본질에 가까운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쾌감이 예술 작품의 유일하게 타당한 목적이며 그 자체로 충분히 정당화된다”면 게임에서 플레이는 그 쾌의 발생을 일컫고, 양식은 쾌가 발생되는 형태와 배경을 아우르는 관념이다 [16] . 그리고 내용은 양식에 속하는 한 부품에 불과하다. 만일 태그에 ‘내용이 두드러지는’ 게임을 담는 항목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양식화된’ 아래 하위 범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변화하는 미적 경험의 현장으로서 ‘양식화된’ ‘양식화된’의 정체를 추적하기 위해 손택의 지도를 따라간 자리엔, 우리가 ‘좋은 게임’이라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도 자리한 듯하다. 우리가 훌륭한 양식이라 부르는 것은 쾌를 탁월하게 제공하는 것이며, 게임에서 양식을 호명해야 했던 이유도 쾌 창출의 배경을 뛰어나게 구성하는 작품을 검색할 수 있어야 하는 필요에 의해서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게임은 어디까지나 쾌를 잘 주는, 재미있는 게임인 것이다. 예술이 그렇듯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미적 현상이다. [17] ” 태그 체계의 작동은 재밌는 게임, 좋은 게임을 찾기 위한 플레이어들의 십시일반 노력이다. “작품이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지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반복을 인식해야만 예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18] ” 이런 면에서 시청각적 양식을 넘어 향유 양식까지 모든 양식에 이름을 붙이는 태그 체계는 제품으로서 게임을 구매하기 위한 방법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작품의 패턴을 따라 그 궤적을 그리고자 하는 향유자의 태도를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명백하겠지만, 모든 태그는 각각이 곧 양식이다). 태그 체계는 때로 임의성이라는 예측 불능의 부산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향유자들이 자신의 감상을 기록하고 또 다른 잠재적 향유자에게 공유하는 이 미적 경험의 최전선이 얼마만큼의 열정과 혼돈을 (이 둘도 상호불가결하다) 품고 있는지 드러내는 지표일 뿐이다. 또 태그 체계가 스팀 측에서 제공한 장치임에도 각 항목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 또한, 사용자 책임 전가를 넘어, 결코 고정되는 일 없이 계속되는 과정인 열렬한 미적 경험의 한 양태였던 것이다. ‘양식화된’ 아래 게임들은 언제든지 자기 양식의 이름을 얻어 이사 나갈 수 있다. 어디까지나 ‘양식화된’은 당장 갈 곳 없는 게임들을 위한 임시 거처이니 말이다. <크루얼티 스쿼드 (Cruelty Squad)>, <마마의 잠든 천사들 (Mama‘s Sleeping Angels)>, <잼는 라쿤 게임 (Funi Raccoon Game)> 등 2020년대에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 ‘눈 아프고 머리 아프고 정신 없는’, ‘추함’의 미학을 선보이는 게임들은 지금은 그 미학을 일컬을 이름이 없지만 이렇게 점점 그 흐름을 쌓아나가다 보면 이름을 얻게 되는 것도 눈 깜짝할 사이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성장해 독립한다 해도 ‘양식화된’이란 집은 그 이후의 또 다른 이단아들과 새로운 흐름의 탄생을 위한 경계 공간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결국 ‘양식화된’은 사실주의의 단순한 안티 테제를 넘어, 게임이란 예술의 유동성을 대표하는 태그라 할 수 있다. [1] 수전 손택, 『해석에 반하여』 (서울: 윌북, 2025), 62쪽. [2] https://store.steampowered.com/tag/steam/?l=koreana [3] https://80.lv/articles/realistic-vs-stylized-technique-overview [4] 수전 손택, 『해석에 반하여』, 42쪽. [5] 위의 책, 56쪽. [6] 위의 책, 67쪽. [7] 위의 책, 58쪽. [8] 위의 책, 42쪽. [9] 위의 책, 63쪽. [10] 위의 책, 44쪽. [11] 위의 책, 46쪽. [12] 데미우르고스는 본래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분파, 즉 영지주의에서 그 신의 또 다른 현현을 일컫는다. [13] 위의 책, 60쪽. [14] 위의 책, 61쪽. [15] 위의 책, 51쪽. [16] 위의 책, 57쪽. [17] 위의 책, 55쪽. [18] 위의 책, 65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MMORPG 레이드와 확률에 대응하는 플레이어
게임은 ‘불확실성’의 매체다. 보통 게임에서 불확실성은 두 차원으로 작동하는데, 하나가 게임의 결과와 관련된다면, 다른 하나는 게임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특정 기회의 작동과 관련된다. 고도의 플레이 스킬을 요구하는 게임이든 운 중심으로 플레이되는 게임이든, 플레이어가 그에 참여해 플레이한 결과가 어떤 것일지는, 실제 플레이를 끝내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 Back 17 GG Vol. 24.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게임 역사 초창기의 기록들: 닌텐도 뮤지엄 방문기
2024년 10월 2일, 닌텐도 뮤지엄(Nintendo Museum)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프로젝트 발표 이후 3년만의 소식이었다. 닌텐도의 역사와 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이 박물관은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물관은 1969년에 세워진 우지 오구라 공장(Uji Ogura Plant)을 개조한 것인데, 이 공장은 닌텐도가 일본 전통 카드 게임인 화투와 서양식 트럼프 카드를 제작하던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까지 함께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닌텐도의 변천사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다시금 과거와 현재를 모아놓은 셈이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eonwoo Lee Interested in games played together, and studies the relationality of games. Hopes that games can bring joy to everyone, all at once.
-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 Back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27 GG Vol. 25. 12. 10. 라이프 시뮬레이션과 '승리 조건의 부재'의 나비효과 <심즈>의 아버지이자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개척자 윌 라이트는 2001년 Game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긴다. 윌 라이트는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활성화하는 것이 자신이 게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라고 밝히며,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은 단순히 게임 디자인의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라이프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1. 윌 라이트(2010) (출처: 위키피디아)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와 시뮬레이션의 의사소통은 플레이어가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작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가 플레이 디자인을 완성하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에게 조작할 수 있는 플레이 환경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시뮬레이션에 대한 플레이어의 이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플레이 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특정한 방향으로 플레이어의 이해를 유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자체가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적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의 목표설정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시뮬레이션 게임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를 모델링하여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환경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플레이어는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미시계의 규칙들을 파악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가며 시뮬레이션을 탐구해 나간다. 특히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게임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를 우연히 확인해가며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서사를 획득해 간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게임들을 본질적으로 소프트웨어 장난감에 가깝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게임이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특정한 가능성보다는 각 플레이어가 가능한 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큰 해법 공간을 제공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만약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에 훨씬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난감에는 정해진 목표도 없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는 주체 스스로가 놀이의 규칙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윌 라이트의 이런 인터렉티브 디자인 철학은 ‘심시리즈’를 비롯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목적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종속된 플레이를 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우연히 시뮬레이션을 만지다보니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윌 라이트가 지적하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의 장난감적인 특성은, 게임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상기하게 만든다. 게임은 오랫동안 로저 이버트를 포함한 많은 평론가와 연구자에게 존재론적으로 예술의 특성을 가진 매체로는 인정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들이 제시하는 평가의 근거는 대게 칸트가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 그리고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개념에 근거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목적성’의 표상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특정한 목적의 귀속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불렀다. 칸트에게 미적 경험은 인식적 판단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개념적 파악이나 실용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관조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칸트는 자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어떤 질서인지는 모른다는 것이고, 종속된 것들은 딱히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내적인 질서 창출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법칙만을 추구하는 의지를 욕망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이를 ‘선의지’라고 부르며,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라고 보았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어떤 자유로운 유희를 허용받으며, 하나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지성의 합법칙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칸트의 개념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와 같은 것들이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 것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아주 우연히 도달하게 되는 경지 같은 것이 된다. 물론, 칸트가 이렇게까지 ‘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데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주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타우마제인(thaumazein)’이라고 부르는, 인간에게 철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개념이 기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이 경이로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무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타우마제인은, 설명하자면 “매번 보는 노을이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나한테는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현상” 정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칸트에게 ‘선의지’란 무언가를 추구하는 힘이나 동력 같은 것이라기보단, 프로그래밍 코드를 돌리다가 리팩토링 안 한 스파게티 코드가 문득문득 시스템과 맞아떨어지며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경이 체험 같은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을 제공한다면, 게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는 힘을 잃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예술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단순히 규칙의 집합이나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스템과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게임 연구자들 역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게임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만들만한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 가능성을 분석해왔다. 윌 라이트 자신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뮬레이션을 ‘역설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플레이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가 중간 모델이며,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MDA에서 DPE로, 시스템 산출물에서 주관적 경험으로 오늘날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연구자는 아마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의 대표작으로 종종 소개되는 (Thatgamecompany, 2012)의 개발자이기도 한 로빈 후니케(Robin Hunicke)일 것이다. 후니케는 2004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기 위한 MDA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MDA 프레임워크란 시뮬레이션 게임의 플레이를 디자인하는 개발자를 위한 프레임워크로, 게임을 개발할 때 매커니즘, 상호작용, 미학 혹은 경험 순서로 플레이를 설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1. MDA 도식과 요소별 개념] - 출처: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Robin Hunicke, 2004) - 동시에 후니케는 MDA 프레임워크가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을 구조화해 분석할 수 있으며, 플레이 경험을 시스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플레이 동기와 시스템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발자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후니케는 개발자는 MDA의 흐름으로 '설계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에 접근하면 되고, 플레이어는 ADM의 흐름으로 '경험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니케의 MDA 프레임워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가진 플레이 특성을 경험 지향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은 분명하나, 미학 혹은 경험이 매커니즘과 상호작용에 종속된 결과로만 이해하게 만드는 한계 역시 품고 있다. MDA 프레임워크가 플레이에 대해 계층적으로 접근한 것은 게임플레이 디자인에 있어 명확함을 담보해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게임 디자인의 유기성을 저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림2. DPE 도식] - 출처: 「The Design, Play, and Experience Framework」(Brian Winn, 2008) - (DPE는 본래 게이미피케이션 분석을 위한 프레임워크로, 베네디스는 DPE가 MDA보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 분석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제네시스 베네디스(Genesis Benedith)는 MDA 프레임워크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며, MDA 프레임워크가 UX전략이나 연출과 같은 규칙으로 환원 불가능한 게임 요소를 분석에서 배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베네디스는 MDA가 <심즈>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DLC 등에 의한 게임의 기술 변화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플레이어가 창출한 서사 아크 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궁극적으로 MDA가 게임 개발에 있어 매커니즘 편향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베네디스는 이러한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하는데, 이는 MDA가 집중한 내재적 분석을 외재적 요소까지 확장시킨 것에 가깝다. 베네디스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분석하기 위해 게임 요소를 Design, Play, Experience로 확장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한다. DPE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맥락을 중심으로 게임을 분석하여, 주관적 경험에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레임워크를 지나치게 넓게 확장하고, MDA가 왜 오늘날 시뮬레이션 게임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간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MDA에서 DPE 프레임워크로 넘어오며 주관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분석이 왜 하필 플레이어의 주관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조이>, 콘텐츠 진공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즈음에서 크래프톤이 야심차게 ‘앞서 해보기’로 공개했던 <인조이(InZOI)>(2025~)를 떠올려보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인조이>는 플레이어에게 까다로운 플레이 환경을 요구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버그가 많고, 콘텐츠는 진공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더구나 엔비디아와 협력을 통해 게임 내에 AI NPC ‘스마트조이’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현 상태만 두고 보면 <인조이>의 AI 환경 수준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아직까지는’ CDPR의 <사이버펑크 2077>와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는 분명히 <인조이>의 단점이며, 우발적 사건들이 난입할 가능성을 생각해가며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가장 중요한 소구점 중 하나인 ‘쾌적한 플레이 환경’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으로 인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최적화 문제 △잦은 크래시 △예측 불가능한 버그로 인해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할 게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점만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임 커뮤니티가 비판하고 있는 ‘콘텐츠 진공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상태를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콘텐츠 진공상태’ 만큼은 (최소한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인조이>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조이>가 ‘앞서 해보기’를 런칭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 요인이자 존재 가치라고 생각한다.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상태는 <심즈>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세계’보다는 ‘일상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현대세계와 일상성(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에서 일상을 일종의 패턴이자 리듬이라고 지적하며, 반복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을 ‘환상과 진실, 힘과 무력함이 교차하는 지점,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과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만나는 곳’이라고 변증법적으로 정의하며, 일상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리듬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형되는 갈등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구간을 동일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이 패턴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점을 통해 구분할 수는 없으나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일성’을 ‘차이 혹은 변화 없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 혹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와 변화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그 차이와 변화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조이>에서 ‘콘텐츠 진공’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향을 지시하지 않음 △플레이어가 게임 빌드나 시퀀스 내의 사건에 개입하기 어려움(혹은 없음)에 가까워 보인다. <인조이>의 개발일지를 보아도 플레이어블한 개발보다는 생성형 인터랙티브 무비의 빌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가령, 가장 최근에 쓰여진 11월 26일 패치노트에는 “ 무법자 기질 조이가 자율 행동으로 '훔치기' 상호작용을 진행하지 않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고, 11월 19일 패치노트에는 “ 식사 후 2시간이 지난 음식 그릇을 일괄 정리할 수 있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으며, 대부분의 패치에 AI의 행동을 감상하는 것으로 플레이 요소가 종결되는 빌드들이 개선사항으로 나온다. 이는 플레이어의 조작 경험을 ‘클릭 후 감상’ 정도의 극단적 단순함으로 느끼게 만들며, 폐쇄적인 플레이 환경 아래 놓여있다는 감각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조이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조이들은 자율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피로를 느끼며, 사회적 욕구를 느낀다.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조이들에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나 <심즈>와 달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지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심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플레이어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심즈>와는 분명 다른 특성이다. <심즈>에서는 심이 불을 내면 플레이어가 개입해 불을 끄거나 소방관을 불러야 한다. 심이 직장을 잃으면 플레이어가 새로운 직업을 찾아주어야 하고, 관계가 악화되면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채무 갚기’라는 커다란 미션 아래 다양한 할 거리를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동물의 숲>과도 다르며, 점수와 같은 수직적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타듀벨리>와도 다르게 보인다. <동물의 숲>은 채무 상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공한다. <스타듀벨리> 역시 콘텐츠의 볼륨이 클지언정 농장 경영이라는 명확한 프레임워크 안에서 수익, 작물 품질, 마을 주민과의 관계 등 측정 가능한 수직적 성과 지표들을 제공한다. <인조이>에도 카르마 시스템이 있지만, 카르마 시스템이 수직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람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조작 감각의 부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인조이>의 게임 특성은,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조작 압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PvE가 아닌 PiE(Player in Environment)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PvE가 플레이어가 환경과 대결하는 구조라면, PiE는 플레이어가 환경 속에 존재하며 환경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PiE와 메타적 경험, 혹은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 이때 우리는 Environment가 게임이 가진 미시계의 전체적인 세팅과 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으며, 글의 서두에서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PiE에서 플레이어는 조작을 통해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파악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조작이 사실상 제한된 게임 환경을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게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인조이> 디스코드 같은 공간이 그러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인조이> 플레이어는 결국 게임 밖을 나와 디스코드 와 같은 공간을 통해 인조이의 단순한 조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인조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이 펼쳐지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플레이어가 직접 <인조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인조이>와 <인조이> 밖을 오고가며 내가 <인조이>를 플레이하는 이유와 정보를 비교해가며 공략 아닌 공략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과정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 가까우며, 매우 불편하고도 비효율적인 플레이 경로를 가졌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긴 경로와 과정은 <인조이>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와 다른 플레이어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조이>와 그 개발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나의 플레이 목표에 개입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개입은 <인조이>의 플레이가 플레이어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는 상태로 귀결된다. 동시에 <인조이>를 플레이 과정을 늘어뜨려 <인조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주관을 통해서만 <인조이>를 파악하게 만든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플레이어가 시뮬레이션을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고 표현했다. 플레이어는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시뮬레이션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1]. 이는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과 컴퓨터의 모델이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이며, <인조이>는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욱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 순간들이 우연히 상상했던 서사와 맞아떨어질 때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체험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게임에서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이란 바로 그 감각이 아닐까? 이는 <인조이>가 게임을 통해 AI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입력한 명령이 시스템의 자율적 질서와 우연히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이상한 순간들이 있다. <인조이>가 제공하는 ‘콘텐츠 진공’ 상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게임이 명확한 목표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매력적인 경험은 아닐 수 있다. <인조이>의 현재 상태는 분명히 미완성이며, 기술적 한계와 버그로 인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플레이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인조이>가 보여주는 실험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시스템의 자율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예측 불가능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창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임을 예술로 보는 가능성이란, 그 플레이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아름다움의 섬광에 있다. 그리고 <인조이>는,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섬광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PiE, 즉 환경 속의 플레이어로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경험의 지평은 아닐까. 참고문헌 ○ Celia Pearce (2001). 「Sims, BattleBots, Cellular Automata God and Go: A Conversation with Will Wright」. Game Studies. - https://www.gamestudies.org/0102/pearce/ ○ Hunicke, R., LeBlanc, M., & Zubek, R. (2004).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AAAI Workshop on Challenges in Game AI. ○ Benedith, G. (2024). 「Decoding The Sims: Analysis of Gamification Frameworks, User Experience, and Game Design Evolution」. Arizona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후원 경제’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중심으로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RPG 게임을 꼽으라면, 대다수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꼽을 것이다. 여론은 <발더스 게이트 3> 쪽이 우세다. <스타필드>는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고 홍보에 힘입어 많은 판매량을 올렸지만, 게임 디자인에서 실망스러운 지점도 있어, 베데스다식 RPG 게임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을 받았다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풍부한 상호작용과 롤플레잉으로 RPG 장르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으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과 함께 올해의 게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 Back ‘후원 경제’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중심으로 15 GG Vol. 23. 12. 10.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RPG 게임을 꼽으라면, 대다수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꼽을 것이다. 여론은 <발더스 게이트 3> 쪽이 우세다. <스타필드>는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고 홍보에 힘입어 많은 판매량을 올렸지만, 게임 디자인에서 실망스러운 지점도 있어, 베데스다식 RPG 게임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을 받았다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풍부한 상호작용과 롤플레잉으로 RPG 장르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으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과 함께 올해의 게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게임 그 자체보다는, 두 게임이 대표하고 있는 2020년대 RPG 게임, 나아가 ‘전통적인 자본’이 지배하는 고예산 AAA 게임과 킥스타터와 얼리 액세스 같은 ‘후원 경제’에 기반한 중저예산 게임 개발 과정과 자본 경제 현상을 다루고자 한다. 게임 커뮤니티 내 여론을 살펴보면, <발더스 게이트 3>를 마치 <스타필드>를 위시한 AAA 게임과 똑같은 제작 과정을 거친 게임인 것처럼 비교하는 의견이 많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발더스 게이트 3>의 창의성과 풍부한 디테일 칭찬하면서, <스타필드>를 위시해 어딘가 부족하게 나온 AAA 게임이 <발더스 게이트 3>보다 태만했으며 최종적으로 AAA 게임 제작진이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판하는 의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발언들이 좋은 게임에 대한 갈증이라던가, ‘좀 더 잘 나올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라는 당연한 감정에서 비롯된 발언이겠지만 이렇게 비교하고 비판하는 것엔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같은 장르에 속하고, 화제작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는 전혀 다른 방법론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세부적인 게임 디자인 역시 1대 1로 비교할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필드>는 거대 투자 자본의 지원으로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방향성으로 구축된 생산품이라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활성화된 후원 경제에 힘입어 만든 소수 취향을 노린 공예품에 가깝다. 물론 생산품과 공예품에는 어떤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취향에 기반한 ‘후원 경제’의 개입 여부가 어떤 중요한 차이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스타필드>는 대자본의 투자로 거대한 상품을 만들려는 성격이 강한, 전형적인 AAA 게임이다.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25년 만의 새 IP라는 점을 강조한 토드 하워드의 인터뷰라던가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 쇼 등지에서 보여준 강력한 홍보 정책은 <스타필드>가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제니맥스 미디어, 마이크로소프트에 어떤 가치를 지닌 ‘상품’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월 가의 투자자들 역시 이 게임에 거는 기대가 컸을 것이다. 한편 <스타필드> 제작진은 정보 공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디벨롭 컨퍼런스 2020에서 이뤄진 토드 하워드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는 “<스타필드>의 정보 공개와 홍보는 출시 직전 짧고 빠르게 이뤄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스타필드>가 폐쇄적인 환경에서 제작되고 피드백을 받아왔다는 걸 보여준다. 이처럼 대다수의 AAA 게임은 개발 과정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으며, 피드백을 받는 과정 역시 내부 QA라던가 체험판 같은 곳으로 한정시켜 자신을 신비화한다. 그리고 발매일이 다가올수록 이런 신비화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게임에 대한 호기심과 구매 의사를 증폭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동시에, 오해와 실망을 낳을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스타필드> 발매 후 이어진 거센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는, AAA 게임이 취하는 일방적인 개발이 개발진 (내지는 임원진과 주주)의 내부 예측과 수요층의 기대랑 어긋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스타필드>를 기대하고 구매한 유저 대부분은 풍부한 요소들로 가득한 우주 탐사와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특유의 노련한 RPG 디자인과 결합한 게임을 기대했다. 그러나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가능한 콘텐츠를 전부 구현하기엔 AAA 게임 제작 체계상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대대적으로 단순화하고 가지치기하는 방법을 취했다. 게임의 핵심이자 가장 논란이 되었던 우주 탐사 디자인이 대표적이다. <스타필드> 제작진은 행성 지형의 절차적 생성이라던가, 이착륙/이동 과정의 간소화 같은 다양한 ‘간소화’를 동원해 우주라는 공간의 크기는 유지하되, 만들어야 할 콘텐츠 가짓수는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스타필드>를 기대한 사람들이 원했던 방법론이 아니었고, 게임에 대한 멸칭과 제작진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돌아왔을 뿐이다. 사실 <스타필드>는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유일한 예측 실패작은 아니다. 이미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폴아웃 76>에서 오픈 월드와 온라인 게이밍, 기존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RPG 게임 간의 결합이라는 무리한 전략과 현장 관리의 실패로 발매 초기 거센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스타필드>는 <폴아웃 76> 때보다는 비교적 긴 시간과 공력을 들여 개발된 게임이라 상황이 낫긴 하다. 하지만 굳어진 AAA 게임의 일방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개발 과정이 유저의 기대와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런 과정을 쉽게 바꿀 수 없는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스타필드>에 대한 밋밋한 반응은 그 점에서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개발 노선에 재고가 필요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 3>는 반대로 ‘후원 경제’의 지원받아 개발 과정을 공유하면서 진행한 게임이다. 우선 이 게임은 발매일까지 베타 테스트가 이뤄지던 얼리 액세스로 구매할 수 있었던 게임이었다. 킥스타터 같은 크라우드펀딩이 동원된 게임은 아니지만 (라리안 스튜디오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이 성공한 이후 크라우드펀딩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완성될 때까지 이뤄질 게임 개발 과정을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팬덤에게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베타 테스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공식 커뮤니티에서 게임 유저로서 제작진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제작진 역시 커뮤니티 업데이트를 통해 개발 진척과 변경 사항을 공개하기도 했다. 요컨대 <발더스 게이트 3>의 개발 과정은 커뮤니티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지 가능한 과감한 개발 과정이다. 여기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얼리 액세스 3년 동안, TRPG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유도와 콘텐츠를 할 수 있는 한계치 내에서 최대한 구현하려고 애썼다. 이런 노력으로 완성된 높은 자유도는 이미 많은 리뷰와 플레이 영상들이 소개하고 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발더스 게이트 3>는 후원자들이 원하는 게임 디자인을 위해 모든 자원이 총동원되었고, 그 결과물에 대다수가 흡족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며, 흥미로운 결과다. 게임이 제공하는 시스템 내에서 플레이어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개발 노선은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게임을 만드는 쪽이나 플레이하는 쪽이나 복잡하게 여길만한 구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스타필드>랑 달리 주류화된 CRPG가 아닌 (시점 변환을 제공하지만) 고전적인 탑다운 RPG 게임이라는 점 역시 거대 자본한테서는 근심을 샀을 요소였을 것이다. 여기다 라리안 스튜디오 전작들보다도 더욱 방대해진 이야기와 세계관, 많은 이벤트 신을 요구하는 게임이었기에 개발 난도가 만만치 않았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와 라리안 스튜디오는 명백히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게임을 개발했으며, 성장 과정 역시 시대적 차이점도 있다.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개발 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1990년대부터 정착한 전통적인 게임 스튜디오의 발전 과정과 거대 IT 기업에서 볼 수 있는 월가 투자자본과 연계된 인수합병 과정을 밟아오면서 커진 회사다. 베데스다가 RPG 제작사로 시작한 1990년대 초중반은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는 ‘경제’를 형성할 정도는 아니었고, ‘셰어웨어’로 대표되는 대안적인 유통/발매 체계는 물리 매체와 게임 소매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인터넷 환경의 한계로 ‘셰어웨어’는 게임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게임 일부를 보여주고, ‘정식판’의 구매를 유도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유저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게임을 개발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개인 제작에 머물고 있던 시절이었다.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 역시 기존 회사 경영/재정 관리 방식에 통달한 CEO 로버트 올트먼과 제니맥스 미디어가 개입하면서였다. 지금의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월가로 대표되는 거대 기업과 투자자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다. 반대로 라리안 스튜디오는 기존 회사 경영이나 상장하고는 관련 없이 설립되고 운영되는 회사다. 우선 제이슨 슈라이어의 기사 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라리안 스튜디오는 최고경영자이자 디렉터인 스벤 빈케와 그의 아내가 소유한 개인 회사에 가깝다. 그렇기에 라리안 스튜디오는 게임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주주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슈라이어는 동시에 이런 구조의 회사는 위험 부담 역시 크다는 점도 지적했다. 실제로 디비니티 시리즈 첫 작품인 <디바인 디비니티>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후속작 <비욘드 디비니티> 개발 당시엔 회사 인원이 3명 밖에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비화가 있다. 그럼에도 라리안 스튜디오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성공 이후로도 개인 기업 체제하에 특정 장르와 취향의 게임을 만들고 있다. 이 점에서 있어서 라리안 스튜디오는 중소기업 규모 하에 꾸준히 특정 취향의 JRPG를 만들어 흑자를 내는 니혼 팔콤하고도 비슷하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상장 회사 체제하의 다작하는 니혼 팔콤과 달리, 라리안 스튜디오는 크라우드펀딩 같은 ‘후원 경제’의 도움이 컸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라리안 스튜디오를 견인한 ‘후원 경제’의 양태다: 라리안 스튜디오의 지지 기반은 흔히 볼 수 있는 과거의 영광 재현보다는 순수한 장르 매니아들의 입소문과 지지에 가까웠다. 사실 라리안 스튜디오는 과거의 영광이라고 할만한 게 별로 없었던 회사였다. <디비니티> 초기작은 소소하게 성공한 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지 기반은 미약했던 편이다.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킥스타터로 대표되는 ‘후원 경제’ 형성기였던 2010년대 초중반에 등장한 프로젝트였지만, 정작 펀딩 당시엔 (<발더스 게이트>를 배급한 인터플레이 출신도 포함된) 기존 선점자들에게 밀려서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결과적으로 고전 RPG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 데 성공하면서, 선점자들보다 훨씬 더 ‘후원 경제’ 붐을 적극적으로 타고 고유의 팬층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팬층 형성은 여타 크라우드펀딩을 받은 과거 영광을 누렸던 개발자들과 달리 영광스러운 과거가 없었기에, 더욱 과감하게 재해석할 수 있었다는 점도 컸다. 요컨대 라리안 스튜디오는 과거에 가진 게 별로 없었기에, 시대의 조류에 얻을 게 많았던 포지션이었다. 사실 <발더스 게이트 3>는 ‘후원 경제’로 성장해 어느 정도 체급을 키운 회사의 거대 프로젝트에 가깝다. 새로 설립된 지사를 제외하고도 본사 인원만으로 200명이나 동원했으니,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만들던 시절의 라리안 스튜디오하고 같다고도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많은 게임 커뮤니티의 조롱감이 되었던 “그들은 운이 좋았다”로 요약할 수 있는, 제이슨 슈라이어나 자비에 넬슨 주니어 를 비롯한 업계 사람들의 주장도 틀린 것도 아니다. 슈라이어의 지적대로 개발 방향성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디 게임 제작사는 라리안 스튜디오만큼 자본이나 인력을 투입할 수 없을 것이며, 반대로 라리안 스튜디오 이상으로 자본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같은 개발사에서는 이런 기획이 통과될 가능성이 극히 낮다. 통과되더라도 상업적 타협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발더스 게이트 3>는 프랜차이즈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라리안 스튜디오의 방법론에 신뢰를 보냈기에 가능했던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이랑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의 얼리 액세스는 거의 완성된 게임을 다듬어가고 보충해가는 비교적 전형적인 얼리 액세스였다면, <발더스 게이트 3>의 얼리 액세스는 무모할 정도로 긴 시간을 들여 팬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어 간 쪽에 가깝다. 물론 얼리 액세스 스케줄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었는지 발매 후 내정되어 있던 콘텐츠가 삭제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프랜차이즈 소유주자 투자자로서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라리안 스튜디오에 많은 신뢰와 편의를 봐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더스 게이트 3>의 ‘후원 경제’를 신뢰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수용한 개발론이 대대적으로 성공했다는 점은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라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발더스 게이트 3> 개발 과정에 적극적으로 돈을 내고 참여한 계층은, 거대 투자자본의 냉정한 시장 분석에 따르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거금을 투자하기엔 손실이 따른다고 판단한 게임 장르의 팬들이었다. 이 팬들은 단순히 고전 RPG 장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하이퍼 FPS, 2D 플랫포머, 공룡 시뮬레이터 등… 200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ESD와 얼리 액세스, 크라우드펀딩의 등장, 인디 게임 시장의 체계화는 거대 투자자본에 소외당한 ‘팬덤’들이 대안적으로 자본과 경제를 형성하고 지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왔다. 얼리 액세스를 기반으로 커뮤니티와 소통하며 진행하는 개발 방법도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플래닛 코스터>를 비롯해 사례들이 나오고 있었다. <발더스 게이트 3>의 대대적인 성공은 (자신들을 믿고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달라는) ‘후원 경제’의 파급력이 인디와 팬덤의 영역을 넘어서 주류의 영역으로 올라왔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거대 자본의 투자와 베테랑 제작사의 야심에 차 보이지만 실은 안전하게 검증된 개발 노선으로 구성된 <스타필드>가 좋은 평을 듣지 못한 것과 대조해보면, 게임 유저들이 AAA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거대 자본이 판을 짠 안전한 AAA 게임 개발론에 진력을 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후원자들은 르네상스 시절 귀족들이 예술가나 공예가들에게 수공예품을 주문 제작하듯이, 게임 개발사가 돈 걱정하지 않고 후원자 자신들의 취향을 반영해준 게임을 만들어주길 원한다. 다만 르네상스 귀족 후원자들의 후원이 계급 권력을 통해 예술품이나 공예품을 독점하면서 특권을 누리기 위한 도구였다면, 이 새로운 후원자들의 후원은 공통된 취향을 지닌 익명의 소비자들이 기존 자본 권력에서 소외된 취향을 복권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후원 경제가 항상 긍정적인 현상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며, <발더스 게이트 3>의 개발 과정은 근래 비디오 게임 개발 역사 중에서도 보기 드문 실험이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라리안 스튜디오가 향후 만들 게임에서 이 실험을 계속 택할지는 알 수 없다. 차기작 개발에 6년이나 투자하고 싶지 않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 개발을 하고 싶다는 스벤 빈케의 인터뷰 를 참조하면, 라리안 스튜디오의 차기작은 <발더스 게이트 3> 같은 개발 노선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저 운과 상황이 좋았던 짧고 행복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후원 경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투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더스 게이트 3>의 성공은 2023년 비디오 게임계의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게임 산업 전체가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은 길을 가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몇몇 혁신가들에게는 탐구해볼 만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 B급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과 B급이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기에, 둘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한 것은, 게임에서 ‘B급’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그렇지 않은 것들 못지않게)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게임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게임과 B급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앞서 말한 연결지점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지점을 중심으로 게임+B급에 대해 논의하도록 한다. B급 정서나 코드가 게임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핌으로써, 게임에서의 B급, B급 게임, B급 게임문화 등이 게임문화 전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한다. < Back B급 게임이란 무엇인가 05 GG Vol. 22. 4. 10. 주류 대중문화의 주변부에서 꽃을 피우는 문화가 있다. 이 문화는 기존 대중문화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위상을 만들어간다. ‘B급’ 문화 이야기다. B급 문화의 시초는 B급 영화였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제작여건이 나빠지자 할리우드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 메이저 영화와 끼워팔기+동시상영 전략을 구사했다. 관객들은 졸지에 A급이 된 메이저 영화와, 저예산 B급 영화를 한 편의 가격으로 볼 수 있었다. 이후 1940년대 말부터 독립영화제작사들이 출현하면서 B급 영화의 의미는 메이저 영화가 표현하지 못하는 자유로우면서도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화해갔다. 탈장르화·탈문법화와 함께 B급 영화가 적극 활용한 방법론 혹은 기법은 키치(kitsch), 패스티시(pastiche), 패러디(parody), 오마주(hommage) 등이었다(조주영·안숭범, 2015). 그리고 이제 B급은 그 대상이 영화에만 한정되지 않는 데다, 비주류 정서나 코드를 통한 자극적 유희성을 추구하는 창작물의 의미까지 넓게 포함한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B급이란 무엇일까? 다른 대중문화 장르에서도 대체로 그렇겠지만, 게임과 B급은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다. 그 연결지점을 구분하면 다음 정도겠다. 첫째,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문화 장르 사이에서도 게임은 B급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주류가 될 수 없는 B급 대중문화물 중 대표적인 것이 게임이었다. 둘째, 수준 미달의 게임을 B급 게임으로 부르기도 한다. 셋째 그리고 가장 일반적으로, 영화나 다른 대중문화 장르를 통해 구축된 B급 정서나 코드를 활용한 게임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 넷째, 소수에 의한 열광적인 수용문화와도 관련된다. B급 문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추종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작품이 끊임없이 재/해독되어야 한다. 작품에 내재한 의미들이 드러나고, 일견 가볍고 유치한 것이 수용자들의 굉장히 적극적인 해독행위와 만나 진지하게 읽혀질 때 비로소 B급 문화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게임과 B급이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기에, 둘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한 것은, 게임에서 ‘B급’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그렇지 않은 것들 못지않게)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게임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게임과 B급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앞서 말한 연결지점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지점을 중심으로 게임+B급에 대해 논의하도록 한다. B급 정서나 코드가 게임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핌으로써, 게임에서의 B급, B급 게임, B급 게임문화 등이 게임문화 전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한다. B급 게임은 무엇을 담는가 B급 게임도 다른 B급 문화장르처럼 비교적 저예산으로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비주류 콘텐츠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자유분방하고 오락적·자극적인 스타일을 지닌다. 게임 속 이야기 전개가 (있는 경우) 탈개연적·비약적이고, 느슨하거나 비논리적임은 물론이다. 상호텍스트적(intertextual) 방법론의 활용도 B급 게임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우스꽝스럽거나 진지하지 않은 그림체와 여타 그래픽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물론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B급의 공식들도 조금씩 바뀌기는 하는 듯하다. 가령 B급 게임도 이제는 얼마든지 메이저 게임에 비견되는 예산과 기간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그리고 B급의 스타일이나 방법론은 이제 꼭 B급이 아닌 게임에서도 빈번히 발견된다. B급 게임을 규정하는 데에는 시대적 맥락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높은 완성도와 전작의 인기로 후속작이 출시될 때마다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 〈바이오하자드(Biohazard)〉 시리즈지만, 처음부터 〈바이오하자드〉가 지금과 같은 위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96년 캡콤이 출시한 첫 〈바이오하자드〉는 크게 기대하는 타이틀이 아니어서 소량만 출시됐다. 출시 직후 화제가 됐던 것은 충격적인 오프닝 영상이었는데, 제작비 문제로 무명배우를 기용해 찍었던 오프닝 영상은 B급 호러물의 느낌을 보여주었다. 어지간한 슬래셔물을 능가하는 잔인한 장면들은 사회적으로도 논란을 야기했다. 가정용 비디오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에 그렇게까지 잔인한 장면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관념에 비춰봤을 때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문의식, 2015. 1. 16). B급을 B급이게 만드는 요건들이 느슨해지거나 그 경계가 희미해지거나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B급 게임은 존재한다. 〈엄마는 게임을 숨겼다〉라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 주인공은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그러다 엄마에게 걸린다. 엄마는 게임기를 숨기고, 주인공은 한 스테이지 스테이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게임기를 찾는다. 설정만 봤을 때는 그냥 조금 우스꽝스런 게임인 듯하지만, 게임기를 찾는 기상천외한 방식(옷장 앞을 막고 있는 축구선수?를 따돌리면 게임기가 등장한다거나), 당황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게임오버 씬(주인공이 “마마, 칙쇼!!”라고 외친다거나...), 그리고 다양한 사물들의 맥락 없는 배치(게임 〈고양이 장애물〉의 생선 등), 그럼에도 지나치게 맑은 색감과 깔끔한 그림체는 묘하게 부조화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플레이어들을 긴장케 만든다. B급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비주류 취향 게임들이 모여 B급 장르화되는 경우가 있다. 설정·연출·전개 등이 비상식적이고 약을 빤 듯한 분위기를 내는 ‘바카게(バカゲー)’가 대표적이다. 바카게는 바보, 멍청이, 무능하다는 뜻의 ‘바카(バカ)’와 게임의 줄임말인 ‘게(ゲー)’의 합성어이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병맛겜’ 정도가 될 듯하다. B급 장르로 ‘슈르게(シュールゲー)’도 빼놓을 수 없다. ‘슈르(シュール)’는 초현실주의(surréalisme)의 일본어 발음인 슈루레아리스무(シュルレアリスム)에서 앞 자만 따온 말이다. 슈르게는 말 그대로 초현실적 게임, 즉 기괴하거나 난잡한 그래픽, 이상한 외모나 성격의 캐릭터,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한 비현실적 상황 등을 주된 요소로 삼는 게임류를 가리킨다. 당연하게도, 바카게나 슈르게가 게임성을 포함하는 개념은 아니다. 둘에는 게임성이 우수한 게임과 그렇지 못한 게임이 모두 포함되며(물론, ‘우수한 게임성’에 대한 기준도 수렴되지는 않을 테지만), 마니아층의 지지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나 바카게/슈르게적 요소가 적당한 수준이라면 그 게임은 대중적으로 폭넓게 사랑받기도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B급 게임을 만드는 데 특화된 게임사들도 있다. 1970년대 설립돼 2000년대 초반까지 〈트리오 더 펀치(トリオ・ザ・パンチ, 1989)〉와 같은 게임을 만들었던 일본의 데이터 이스트(Data East)사, 〈어스 디펜스 포스: 아이언 레인(Earth Depense Force: Iron Rain, 2019)〉의 D3 퍼블리셔(D3 Publisher), 그리고 미소년/녀 게임을 주로 만들어 온 FURYU 등이 예다. (B급 장르화와 마찬가지로) B급 게임 제작에 특화됐다 해서, 이러한 게임사들을 이상한 게임이나 만드는 B급 메이커 취급을 해선 안 된다. 콘셉트나 스타일이 다소 독특하고 괴상할 뿐, 게임성까지 후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들이 B급 게임만 만든 것도 아니었다. 데이터이스트의 〈미드나잇 레지스탕스(Midnight Resistance, 1989)〉, 〈나이트 슬래셔즈(Night Slashers, 1993)〉 같은 게임들은 오락실 플레이어들에게 뜨겁게 사랑받은 명작들이다. 하지만 이제 게임 개발비용의 점증과 출시게임의 대형화로 인해 점점 B급 게임사나 장르들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모바일게임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모바일게임의 양적·질적 수준도 높아져, B급 게임들이 다른 모바일게임들 사이에서도 경쟁을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모바일게임에서 일어나는) 방치형 플레이 방식의 보편화 역시 플레이에 있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B급 게임들에 긍정적이지 못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것이 B급 게임과 상호배타적 개념이 아님에도,) 인디게임까지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외적 환경 속에서 내부적으로도 B급 게임사나 장르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어, B급 게임들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설상가상과 악화일로라고 할 수 있다. B급 게임은 어떻게 수용되나 B급 게임은 특유의 정서와 코드를 통해 플레이어를 게임의 안과 밖에 보다 강력하게 가둔다. 일본에서 유행했던 코나미(Konami Holdings Corporation) 〈러브플러스(Love plus)〉 시리즈의 플레이 문화를 살펴보자. 〈러브플러스〉의 후속작 〈러브플러스+〉(닌텐도 3DS용)와 〈러브플러스i〉(아이팟 터치·아이폰·아이패드용)는 가상의 애인과 추억을 쌓아나가는 증강현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 속에서 시간도 흘러가고, 카메라를 통해 플레이어를 캐릭터가 인식하고 불러주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캐릭터들의 복장도 변하고, 매시간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도 다르다. 캐릭터들이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모닝콜도 해준다. 때로는 플레이어와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가기도 한다. 때문에 계절과 시간에 따라 데이트 코스를 치밀하게 짜야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터치 기능을 이용한 스킨십도 가능하다. 때로는 게임기 마이크에 대고 특정 대사를 입력해야 게임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꽤 리얼하게 가상세계 속의 캐릭터와 연애를 해나가게끔 만든 게임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들에 의해 단순히 집에서만 플레이되는 수준을 넘어, 플레이어들을 집 바깥으로 나서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러브플러스〉 시리즈는 이를테면 〈포켓몬 고〉처럼 위치기반 서비스 요소가 강한 것도 아니고, 게임을 하기 위해 반드시 현실의 다양한 공간을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일본의 특정 지역에서 특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있기는 했지만, 오로지 이러한 부분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현실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가상의 여자친구와 당당하게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한 발 나아가 특별한 데이트를 위해 현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도 등장했다. 이러한 〈러브플러스〉 시리즈의 독특한 플레이 문화는 일본에 한정돼서 일어난 현상이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동안 플레이어를 집에 틀어박히게 하는 것으로나 여겨져 왔던 게임이 오히려 플레이어를 자발적으로 집 밖에 나서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갖는다(강신규, 2020). 다른 한 편으로 플레이어들이 원래는 그렇지 않았던 게임을 주체적으로 이용함으로써 B급 문화를 형성할 수도 있다. 대표사례가 ‘모드(MOD: modification)’다. 모드란 기존에 출시된 게임의 내부 데이터를 플레이어가 수정해 새롭게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모드를 통해 플레이어는 B급과는 상관없던 콘텐츠에 B급 정서와 코드를 불러들일 수 있다. 이를테면 VR(virtual reality) 게임인 〈로보 리콜(Robo Recall)〉은, 모드 킷을 공개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직접 게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어떤 플레이어가 만든 ‘트럼프 리콜’ 모드는 적의 얼굴을 모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으로 바꿔 플레이어로 하여금 트럼프들과 싸우게 만든다. 물리쳐도 물리쳐도 좀비처럼 끝없이 트럼프가 나타나 플레이어에게 달겨드는 식이다( www.roborecallmods.com ). 이러한 모드는 현실세계의 적을 가상세계로 불러옴으로써 게임의 문법을 바꿀 뿐 아니라, 단순한 소비자-수용자를 넘어 적극적인 의미의 생산자-행위자-창작자의 위치로 플레이어를 불러들인다(박근서, 2009). B급의 요건들이 어느 정도는 존재함에도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개인에 따라 그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어 논란이 야기되는 경우도 있다. 2021년 10월 반지하게임즈의 〈어몽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논란은 하나의 예다. 〈어몽 오징어게임〉은 제목 그대로 게임 〈어몽어스〉의 임포스터 룰을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적용한 게임이다. 2021년을 강타한 두 게임(어몽어스+오징어게임)을 패러디하고 오마주해, B급 감성을 담은 독창적인 게임으로 재창조하자는 것이 제작사 반지하게임즈의 의도였다. 하지만 기성 콘텐츠의 인기에 편승해 인디 정신을 잃었다는 비판과, 원작을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패러디·오마주한 게임을 출시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플레이어들의 옹호를 동시에 받으며 논란이 됐다(김재석, 2021. 10. 13). 창작자/사가 B급을 의도해 기획·제작한 게임이라 해도, 그것이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수 있다. 〈어몽 오징어게임〉 논란은 이미 B급 콘텐츠임이 전제된 후 그것이 수용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 단계인 B급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독특한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B급 게임이 수용되는 맥락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복합적이다. 더 많은 B급 게임들을 위하여 이제 (꼭 게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대중문화 장르에서) B급은 일종의 상업적 코드로 각광받으면서 그 위상을 확대해가고 있다. 제작규모나 기간, 거대 게임사, 유명 창작자 유무로 B급을 판단하는 시선은 수명을 다했다. 평균 제작비를 훨씬 웃도는 자본이 투여된, 거대 게임사의 유명 창작자가 만든 게임들도 B급 정서나 코드를 빈번하게 활용한다. 그러다보니 자유분방한 실험이나 탈구속적인 전복을 기도하는 B급 게임이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B급 게임과 관련된 가장 큰 변화는, B급의 보편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어떻게든 B급임을 드러내는 게임들도 많지만, B급을 완전히 제거한 게임도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게임에 B급 정서가 은밀히 숨어 있거나,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지기도 하며, 플레이어의 경험이나 욕망과 마주침으로써 B급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하지만 B급의 보편화는 B급 게임을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A급 게임의 한 재미요소 정도로 B급이 게임에 녹아드는 것보다는, B급 정서와 코드를 전면에 내세워 B급 게임 자체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창의적인 콘텐츠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콘텐츠는 더 많다. 상업적으로든 비상업적으로든 성공하는 콘텐츠가 나오면 유사한 콘텐츠로의 쏠림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콘텐츠의 창의성과 다양성은 유지되기 어렵다. 이는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독보적 위상을 갖는 마이너 리그가 존재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거의 모든 대중문화 분야에서 특정의 소수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성일권, 2015. 5. 21.). 게임도 전반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인디게임이나 저예산 게임이 제작되고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국내·외에서 그러한 게임들을 위한 플랫폼이 생겨 전세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메인스트림 게임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게임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다양한 장에서 기획되고 창작되는 수많은 무명의 게임들일 터다. B급 게임은 그 대표주자로서 더 많이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플레이돼야 한다. 참고문헌 김재석 (2021. 10. 13). [해설] 오징어게임 카피 게임, 어떻게 볼 것인가? 〈디스이즈게임〉. URL: https://www.thisisgame.com/webzine/special/nboard/11/?n=134570 조주영·안숭범 (2015). 한국 B급 영화 정체성 탐색을 위한 비평장 고찰: 전통적인 미국 B movie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인문콘텐츠〉, 37, 45~71쪽. 문의식 (2015. 1. 16). B급 호러로 시작해 블록버스터 대명사로, 바이오하자드. 〈게임어바웃〉. URL: http://www.gameabout.com/news/articleView.html?idxno=34724 박근서 (2009). 〈게임하기〉. 커뮤니케이션북스. 성일권 (2015. 5. 21). [나쁜 장르의 B급 문화] 왜 B급 문화인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URL: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8 〈로보리콜〉 모드 (www.roborecallmods.com)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체인소 맨>의 한국적 수용과 문화적 증폭’(2026), ‘극사실주의의 게임적 재구성: <나는 SOLO>의 상호/텍스트성과 수용구조’(2026),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등이 있다.
- '이코'에서 '갓오브워'까지: 사랑의 대상과 게이머의 나이듦에 대하여
게임 주인공 캐릭터를 둘러싼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트렌드 변화가 주로 PC, 콘솔 기반의 스탠드얼론 게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곱씹어볼 여지를 남긴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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