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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귀신-사랑 : <종이혼례복> 시리즈와 ‘중국식 공포’의 유행
최근 중국 내 추리 게임에는 ‘중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다. <페이퍼돌스>(纸人; 리치컬쳐, 2019)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回门; 핀치게임즈, 2021)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오래된 저택에 들어가 결혼과 장례, 장례용 종이인형, 풍수 등 민속을 바탕으로 스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 Back 혼례-귀신-사랑 : <종이혼례복> 시리즈와 ‘중국식 공포’의 유행 15 GG Vol. 23. 12. 10. ※ 역자 설명 : 이 글에서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 안 역주로 부기했다. 미주는 필자가 참고한 텍스트 출처이다. 최근 중국 내 추리 게임에는 ‘중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다. <페이퍼돌스>(纸人; 리치컬쳐, 2019)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回门; 핀치게임즈, 2021)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오래된 저택에 들어가 결혼과 장례, 장례용 종이인형, 풍수 등 민속을 바탕으로 스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음양항아리>(阴阳锅; 폴레스타게임즈, 2022)와 <누나의 북>(阿姐鼓; 폴레스타게임즈, 2023)은 지역 특색이 담긴 민간설화를 선정해 플레이어가 탐험할 수 있는 공포 공간을 설정한다. 도시의 기이한 현상과 춘절 [역주: 중국의 설 연휴] 의 귀신을 연결한 <홍콩실록>(港詭實錄; GHOSTPIE, 2020)과 산속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가족 멸종 사건을 조사하는 <파이어워크>(烟火; Shiying Studio, 2020)는 올해 처음 출시되는 게임이다. 세기말의 ‘초자연적 열풍’을 다룬 <삼복>(三伏; Shiying Studio, 2020) 역시 이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식 공포’는 새로운 하위 장르 또는 미학이 된 듯 하다. 이러한 유형의 게임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높은 평가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인을 겁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중국인이다”일 것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하트비트플러스가 개발한 <종이혼례복> 시리즈는 2021년 첫 출시 이후 <종이혼례복2: 장령촌>(纸嫁衣2奘铃村), <종이혼례복3: 원앙의 빚>(纸嫁衣3鸳鸯债), <종이혼례복4: 붉은실의 엉킴>(纸嫁衣4红丝缠), <지옥의 꿈: 사후세계 극장>(无间梦境:来生戏) 등의 속편을 6개월에 한 게임 간격으로 출시하며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게임들은 ‘혼제(婚祭)’를 테마로 하는데, 각각 한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종이 신부’가 되는 운명에 맞서 싸우고, 최종적으로 공포를 이겨내 진정한 사랑의 승리를 완성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다섯 게임들은 서로 연결되어 세기에 걸친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고 있으며, 전작인 <13호 병동>(13号病院)과 함께 독특한 ‘종이혼례복 유니버스’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이혼례복> 시리즈는 성공적인 미니 추리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플한 UI와 순수한 터치 플레이가 경이로운 걸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종이혼례복> 케이스를 통해 ‘중국식 공포’의 핵심 요소인 “중국인을 겁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중국인”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 다섯 편의 시리즈, '종이 혼례본 유니버스'를 구성하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공포(Unheimlichkeit) 개념은 독일어 heimlich에서 유래했다. ‘heimlich’는 친숙하고 친밀하다는 뜻인데, 여기에 부정 접두사를 붙인 ‘unheimlich’는 원래 뜻을 분명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heimlich’의 특수한 경우인 ‘익숙했던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다’는 의미로 해석돼 주체가 순수하게 두려움(fear)이 아닌 오싹(creepiness)한 느낌을 갖게 한다. [1] 따라서 ‘공포’는 통상적인 경험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이상, 기존 질서 내부의 어긋남 [원문의 핵심 개념 错置을 모두 ‘어긋남’으로 번역함] 이다. 예를 들어 공포장르 속에서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좀비, 조타수도 없이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유령선 등이 그것이다. 영화 <샤이닝>(The Shining)에서 문틈으로 흘러넘치는 핏물, 복도 끝의 쌍둥이 역시 경험이나 질서를 뛰어넘는 어긋남으로 평범해 보이는 산꼭대기 호텔을 공포영화의 명장면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혼례복>은 ‘공포’라는 개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진 장례용 종이인형을 소재로 삼는다. 이들은 외모는 비슷하지만 팔다리가 뻣뻣하고 표정이 이상하며, 종종 과장된 얼굴 화장을 한다. 무생물이었던 종이 인형은 어두운 게임 장면에서 번쩍이며 게이머들과 친근한 ‘점프 스케어(jump scare)를 한다. 이를 통해 제작진은 중국식의 특색을 살린 ‘유물(類物)’인 장례용 종이 인형을 세팅했다. 예를 들어 <종이혼례복 1>의 주인공 닝쯔푸(宁子服)가 저승 혼례식(冥婚) 현장에서 발견한 종이 요리는 정상 음식의 외관을 정교하게 모방하면서도 차갑고 무미건조해 화장 [원문에서 烧祭는 종이돈 태우기 같은 풍습보다는 화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오싹한 연상을 유발한다. * ‘유물’의 종이 묶음 제물 그러나 '공포'의 핵심은 잘못된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상식과 이상, 경험과 어긋남의 관계에 있다. 거의 모든 ‘중국식 공포’ 게임에는 현대적 개체의 전근대적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s)’ [ 미셸 푸코가 정의한 개념으로, ‘다른’을 뜻하는 ‘heteros’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os’의 합성어.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 ] 에서의 어긋남과 과학 패러다임에서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어긋남이 포함되어 있다. <종이혼례복> 시리즈에서 또 다른 높은 어긋남은 앞의 두 가지의 불안정 구조를 깨뜨린다. 그것은 로맨스 신화와 이성의 어긋남이다. 결혼: 형성되는 건 아무 것도 없고(无物之阵), 망령은 돌아온다 婚:无物之阵,幽灵复返 [루쉰은 자신의 '무물지진(无物之阵)' 개념이 권위주의 통치의 산물이자 민중의 열등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다.] <종이혼례복> 시리즈는 현대도시에 살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세상과 단절된 ‘산골마을’로 내동댕이쳐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곳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혼제’를 신봉하는 장령촌이나 봉건적 가부장이 점거한 말수촌(末水村)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살아남은 이가 아무도 없거나 귀신의 기운이 넘치는 익창진(益昌鎭)이 될 수도 있다. 이곳들은 현대사회와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통신신호가 사라지고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고집을 부리며 오래된 신앙과 의식을 이어가는 헤테로토피아이다. 플레이어는 주인공들의 시각을 통해 완전히 낯설기만한 스릴러 놀이터가 아니라 익숙한 듯하지만 마주하기 어려운 ‘무물지진(无物之阵)’—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죽음의 상징물들(관, 향초, 종이돈 등)]—이 정돈되지 않은 현대 이전의 역사, 틈만 있으면 파고드는 집단적 무의식을 가리킨다. 물론 조작해 현대적 공간을 하루아침에 이화시켜 ‘귀신을 불렀다’는 것이다.동네 입구 조화, 이웃집 할아버지의 혼백이 깃든 아파트, 길가의 장사용품점……현대적 공간을 떠도는 전근대적 자투리 조각은 ‘익숙한 물건의 낯설게 하기’라는 원칙에 더 부합하고, 오싹한 느낌을 더 잘 만들어낸다. 물론 이 게임은 때때로 역으로 작동해 현대성의 공간을 하룻밤 사이에 낯설게 하여(异化) "유령을 초대”한다. 주거단지(小区) 입구의 화단, 이웃의 영혼이 깃든 주거용 건물, 거리의 장례용품 가게 ......등등은 현대성의 공간에 떠다니는 전근대의 잔재이며, 이는 “익숙한 것의 낯설게 하기”의 원칙에 더 부합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을 줄 가능성이 더 크다. * 모든 이야기의 근원지는 장령촌 <종이혼례복 2: 장령촌>에서는 이러한 무물지진의 구축 과정을 의도적으로 추적한다. 어려서부터 ‘종이 신부’로 발탁된 여주인공 타오멍옌(陶梦嫣)은 ‘혼제’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홀로 장령촌으로 돌아와 지상의 궁궐에서 마을의 역사를 파헤친다. 이와 동시에 <종이혼례복> 시리즈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당나라 현장 스님이 경을 취하여 장령촌을 지나다가 자신이 지은 구장진경(九藏真经) [아홉 편의 숨겨진 불교 경전] 가운데 육장(六藏)이 이교(异教) [주류적인 종교와는 다른 종교] 적인 컬트임을 발견하고, 작별 인사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각해달라고 당부한다. 마을 사람들은 제멋대로 경전을 남기면서 ‘육장(六藏)’을 ‘육장(六葬)’ [여섯 번의 장례] 으로 왜곡한다. 이에 따라 마을 이장을 종교적인 리더로 삼아 정기적으로 의식을 주관하고 적령기 여성이 사신(适神)에 제사를 지내는 ‘혼제’ 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희생된 여성에겐 종이로 묶인 제사물품과 같이 ‘종이 신부’란 별명이 붙었는데, 이것이 바로 게임 타이틀 ‘종이혼례복’의 유래다. 흥미롭게도 게임은 ‘육장보살(六葬菩萨)’ [게임 속 캐릭터] 신앙을 현장 취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억지로 갖다붙인다. 심지어 당나라 적인걸(狄仁杰)이 악신에 제사를 지낸 걸 말끔히 제거했던 기록까지 그럴듯하게 가미하고 있다. 현장법사 캐릭터는 역사적 인물(실존하는 불교의 고승)과 전설적 캐릭터(신마소설의 주인공) [신마소설은 신, 귀신, 요괴 등을 주제로 한 한자문화권 고전 소설을 가리킨다] 의 이중적인 성격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출처를 추적하는 데 있어 진짜같기도 하고 가짜같기도 한 효과를 낸다. 당나라 때부터 천여 년간 이어져 온 오랜 관습은, 애써 시간의 깊이를 늘리고 거짓의 숭고함을 만들어, 기나긴 전현대 역사 속에서 공간 내부의 질서—원래 그랬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는—를 구축했다. 번잡한 의식(무엇을 해야 하는지)과 엄혹한 금기(무엇을 해선 안 되는지)가 질서의 하나된 양면을 이루고, 집단적 무의식의 ‘무물지진’을 점차 흔들기 어렵게 만든다. 의심할 여지 없이 철저한 상례로 굳어질 때까지 말이다. 그 사이에 잘못 들어가게 된 개인과 관행 하의 집단은 어긋남과 충돌을 만든다. 닝쯔푸나 양샤오핑 등 질서에 도전하는 외래자, 타오멍옌, 쭈샤오홍(祝小红) 등 반향식의 ‘종이 신부’는 역대 게임 주인공들이 관례에 편입되지 못하고 타자로 전락해 배척당하거나 교살당할 수밖에 없다. ‘중국식 공포’ 게임의 이질적 공간은 미래로 가지 않고 필연적으로 과거로 돌아간다. 주인공들은 에얼리언의 침입이나 터미네이터 사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육장보살 역시 크툴루(Cthulhu) 같은 냉혹한 우주의 신이 아니라, 아득한 별빛을 통해 인간의 생사를 굽어본다. ‘중국식 공포’의 귀신들은 제사상 위의 감실 상자[龛笼; 동양 사원에서 신령이나 부처 등의 상을 올려놓은 작은 상자] 안에 반듯하게 앉아, 감도는 향불을 사이에 두고 발원(發願)과 고충(诉苦)을 듣고, 평범한 사람들과 약간의 지전(纸钱)이나 억울하게 뒤집어 쓴 조금의 빚을 시시콜콜하게 따진다. 그렇게 무물지진 안 모든 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복적인 우화는 구체적인 서사 차원으로 정착되어 ‘혼제’ 의식의 세 요소인 귀신, 제물을 바치는 사람, 제물의 끌어당김과 격추 등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적 격식에 따르면 귀신은 역사를 기원하고 집단적으로 추앙받는 이질적인 힘이며, 제사를 올리는 사람에게 공정한 거래를 약속하는 원칙이며, 제사를 올리는 자는 경전과 악당의 기능을 담당하여 제물을 박해하는 대가로 거래를 성사시킨다. 제사물품인 ‘종이 신부’와 그 애인은 이질적 공간을 벗어나 현대 문명으로 돌아와 자기 구원을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돌아온 귀신들은 오히려 <종이혼례복>의 이야기가 이러한 격식을 벗어나게 한다. 최고신으로 여겨지는 ‘육장보살’은 “만물이 묻히면 모두 그의 관할이 된다”는 ‘거대한 능력’을 보여주기는커녕, 무물지진을 타파하기로 결심한 주인공들에 의해 여러 차례 목이 비틀어 끊어짐으로서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시리즈 전체의 진정한 악역 캐릭터 네모리는 제사물품의 자리를 차지했던 ‘유령’이다. 마을 촌장으로부터 마을에 유해하다는 단언받고,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그녀는 현대 대학교육을 통해 작은 산골마을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 육장보살 신앙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을 새로운 귀신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제사물품을 찾으며 의식을 완성해나간다. * 종이혼례복 시리즈의 진정한 악역 녜모리 이는 일찍이 ‘육장보살’ 역시 정전을 장악한 현장법사에 의해 추방되고 관가에 의해 토벌된 ‘유령’이었지만, 암암리에 천 년을 떠도는 악신이 된 것임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그녀와 같이, 혹은 전현대의 파편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무물지진’이 완전히 깨질 때까지 그들은 끊임없이 실패하지만, 영원히 계속해서 그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귀신: 말로도 안 되고, 배척해서도 안 된다 鬼:不可言说,不可摈弃 우리가 ‘중국식 공포’ 게임의 첫번째 어긋남으로 현대적 개체와 전근대적 이질적 공간의 어긋남을 지목한다면, 중국에서 공포 장르 서사는 전근대적인 문예작품 속에서 대응물을 찾기 힘들다는 역설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요재지이>(聊斋志异)[청나라 시대 포송령이 지은 8권 491편의 지괴소설집으로, 신선과 요괴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음] 등의 지괴서사(志怪故事)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행한 기괴한 이야기 소설집] 속 꽃요괴는 기본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서유기> 같은 신마소설 속 삼계 체계 [불교에서 삼계란 윤회의 세계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으로 구분한 것을 가리킨다] 는 권력사회의 복사판으로, 사람 마음이 귀신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밖에 신선과 요괴 이야기 등 설화집이나 필담집 역시 보통 현대 독자들에게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다시 말해 ‘중국식 공포’는 직접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중국식’ 텍스트도 없고, 전현대사의 완벽한 이식도 아니다. ‘공포’는 현대화의 산물이며, 주류이데올로기—어쩌면 ‘과학’—에서 주변화되어 남은 잉여이다.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 에서 현대과학의 진로는 본질적으로 낡은 패러다임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하는 혁명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른바 ‘패러다임(paradigm)’은 과학 연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따르는 어떤 패턴으로, 이 분야의 합리적인 문제(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와 방법(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을 규정하여 법칙, 이론, 기구 등을 포함해 정립한 일관된 과학 전통을 형성한다. 과학이 물질 세계에 대한 수수께끼 풀기 게임이라면, 패러다임은 게임의 규칙과 무엇이 ‘미스터리’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창안한다. 이에 대해 쿤은 ‘상자’라는 비유를 제시한 바 있다. “이런 활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만들어놓은 경직된 상자에 자연을 처넣으려는 것 같습니다. 기존 과학의 목적은 새로운 유형의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상자에 채워지지 않은 현상은 종종 완전히 무시되고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신앙 패러다임으로 인한 제약은 과학 발전에 꼭 필수적입니다.” [2] 현대 과학은 수백 년의 발전을 거쳐 ‘신화’로 분류되는 다른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화’가 됐다. 새로운 신화의 서사 공간이 매우 넓고, 말과 전망이 유달리 아름다워 현대적인 개인이 상자의 사면 장벽을 쉽게 홀시할 수 있다. 하지만 상자 밖의 사물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패러다임에 포함될 수 없는 현상은 언어구조에서 '도깨비', '풍습', '전통' 또는 그밖에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과 가리키는 것 사이의 어긋남에 무관하게 무엇이라 말할 수 없게 만든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리 또는 판별할 수 없으므로 배제할 수 없다. <종이혼례복4: 붉은실의 엉킴>에서 장천루이의 민속학 전공이라는 배경은 고등교육과 과학은 상자 안의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공포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자조적인 자기 인식이다. * 민속학 연구생 장천루이(张辰瑞)의 자조 하지만 <종이혼례복> 제작진은 그런 자조에 만족하지 않고 상자의 경계를 반복적으로 넘나들었다. 과학적 패러다임과 전근대의 뒤얽힘은 엉뚱한 효과를 낳았다. 화재경보기로 인해 연소된 지전 더미, 복사기로 복사된 부적…… 각종 ‘물리적 귀신 퇴치’ 수단은 플레이어들로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뒤얽힘’은 음과 양을 통하게 하는 두 개의 매개인 불과 핸드폰이다. 둘은 겉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전자는 제물을 태우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양에서 음으로 옮겨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투사이며, 제사물품은 화염 속에서 재로 변하지만 다른 가치 영역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종이혼례복>의 주인공들은 흔한 지전이나 종이인형은 물론, 귀신과 통화할 수 있는 종이로 만든 핸드폰까지 불태운다. 현대 과학기술 장비가 버젓이 제사물품의 대열에 오르자 플레이어들은 “원래 현지에 사업자가 있나? 그럼 누구에게 전화요금을 내야 하지?”라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후자는 다음과 같은 설정을 기반으로 육안으로 귀신에 쉽게 속고 무심한 기계만이 위장을 간파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휴대폰 카메라는 주인공이 귀신을 정확하게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눈으로 상자 밖의 공간을 응시하는 것 역시 일종의 어긋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익숙한 것의 낯설게 하기”는 오싹함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두 매개 모두 통일된 전제를 숨기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현대적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과학은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것을 해명하고 정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 음양을 소통하는 두 가지 매개체: 불과 휴대전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리저리 뛰어도, <종이혼례복>의 결말은 패러다임 속으로 돌아온다. 헤테로토피아의 모든 요괴들은 진기한 꽃(奇花) 명타란(冥陀兰)이 일으키는 환각이다. ‘작은 산골마을’은 필연적으로 현대 문명에 의해 재발견되고 청산되며 수용된다. 무고한 사람은 구출되고, 악한 자는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주인공들은 탈출에 성공하거나, 일시적으로 (귀신을) 격퇴하지만 실제 ‘공포’—‘중국식 공포’는 결코 핏대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를 이겨본 적은 없다. 아무리 무서운 괴물이라도 핏대를 세우면 공격할 수 있고 소멸할 수 있는 대상이며 이때 두려움은 화력 부족에서 비롯된다. ‘중국식 공포’는 피와 살이 없는 몸이라 애석하게도 <무간몽경: 내생희>의 마지막 예고편에서 역대 주인공들이 힘을 합쳐 ‘무물지진’이 아닌 악역 녜모리를 물리치려 한다. 상자 안에서 주인공들은 잠시나마 자신이 무적이라고 믿지만, 이중으로 엇갈린 위치는 오직 사랑의 신화에 의해서만 메워지게 된다. 사랑: 로맨스 신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情:浪漫神话,至死不渝 “사랑이 죽었다”는 요즘, <종이혼례복>의 역대 주인공들은 희귀한 사랑 신화의 독실한 신도들로, 플레이어들은 이들을 ‘로맨티스트 싸움꾼’이라며 농담삼아 부른다. 백중날[음력 7월 15일] 귀신문을 뚫고 아내를 구한 닝쯔푸, “정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는” 량샤오핑(梁少平), ‘원앙 빚(鸳鸯债)’을 대신 갚고 악당과 함께 죽은 왕자오통(王娇彤),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천루이와 추이완잉(崔婉莺), 그리고 전생과 현생, 재연과 인연을 이어온 쉰위앙펑(荀元丰)과 타오멍옌 등이 그들이다. 여기서 각 커플의 성이나 이름은 모두 고전문학 속 고전적인 애정 텍스트인 <요재지이의 섭소천>(聊斋志异之聂小倩), 양축전설(梁祝故事) [중국 동진시대부터 1,700여 년 동안 민담으로 전해져 온 4대 애정소설 중 하나] , <교홍기>(娇红记) [명나라 맹잔순(孟称舜)이 쓴 희곡] , <서상기>(崔莺莺待月西厢记) [원나라 왕실보(王实甫)가 1295~1307년 무렵에 쓴 허구 잡문] , <요재지이: 소취>(聊斋志异之小翠) [청대 소설가 포송령이 여우 귀신의 이미지를 빌어 쓴 소설] 등에 대응한다. 혼의 이탈과 나비가 되는 것, 치료 등 줄거리 역시 위 고전작품들에 오마주를 뉘앙스가 뚜렷하다. 이 텍스트들의 공통점은 사랑이란 하나하나의 개인이 만들어낸 낭만적 기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산 자는 죽을 수 있고, 죽은 자는 살 수도 있다”(<모란정 牡丹亭>에서 인용)는 말처럼, 사랑이 깊어지면 인간과 귀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가문의 편견을 산산조각낼 수 있다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인은 현대 주체의 사유에 가까운 방식으로 봉건적인 예법과 도덕에 선전포고를 한다. 설령 선전포고가 항상 무기력하더라도, 설령 최종 결말은 두 집안의 사회 지위·경제 형편이 걸맞아[门当户对] 함께 살게 되거나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화를 입어[玉石俱焚] 함께 죽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설령 과도하게 낭만적이어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전근대적인 배경에서 그들은 여전히 경전 말씀에서 벗어나 도리를 위반하는 해로운 서적으로 폄하받으며, 올바른 사람이라면 읽어선 안 되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 《무간몽경: 내생희》(无间梦境:来生戏)의 주인공 커플 애정 신화의 합법화는 지난 2세기에 걸친 현대화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애정 신화는 사실 하나의 배다리처럼 유럽 문화를 현대와 개인으로 건너가 개인주의 담론의 중요한 초석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애정 신화는 낭만주의의 테마 중 하나로서 시종일관 광기나 비이성/반이성적 함의를 항상 담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파괴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일대일로 이뤄지는 현대의 배타적 사랑은 ‘개체’와 ‘여성’의 탄생을 전제로 성과 사랑, 육체와 정신의 통합과 순결을 원칙으로 한다. 즉, 약수가 삼천리를 뻗어 흘러도[弱水三千; 아무리 많은 상대가 있어도], 그/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녜모리가 쌍둥이 동생 녜모치(聂莫琪)를 훔쳐서 기둥을 바꾼 후, 닝쯔푸는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고, 그녀가 아니면 안됐기에 수많은 난관을 거쳐 녜모치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야 했다. 량샤오핑의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장령촌에서 자란 쭈샤오홍을 일깨웠다. 같은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제사물품대 위에 놓인 ‘종이 신부’가 되는 것보다는 족쇄를 풀고 나비가 되어 추락하는 것이 낫다. 낭만 신화가 신화인 이유는 사랑이 이성적 계산의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이 계급, 이익,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도록 재촉한다. 높은 사람은 ‘고귀한 배신’을 결심하고, 낮은 사람은 무릎을 치켜들어 ‘나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를 단호히 던져버리고, ‘나는 어떻게 하겠다’고 함성을 지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은 ‘공포’와 같은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상자 바깥에 있다. 사랑은 <종이혼례복>의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최대 동인이다. 게임은 첫 작품에서 ‘순애보에 빠진 싸움꾼’이 약혼녀를 구한다는 단일한 시점에서 남녀 주인공들이 서로를 구한다는 두 가지 시점으로 바뀌어 고정된다. 그리고 오마주를 표하는 고전 텍스트들처럼 두 개체의 기적을 짙게 그려낸다. 과학과 자본이 만연하고 개인의 감정이 함께 시들어가는 시대에 현대 이성에 대한 최고의 어긋남으로 충족되는 사랑의 신화만 남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안에 담긴 전복적 역량은 무물지진을 돌파하고 우리에게 절대 사로잡히지 말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싸워서 이길 수 없지만, 진정한 사랑은 결국 충분하다. 죄를 지으면 사랑에 빠지게 되고, 남녀가 치정에 빠지게 한다. ‘중국식 공포’의 핵심적인 어긋남은 현대 개인의 두 눈으로 응시하면서도 직시할 수 없는 전근대적 잔재다. 사후 결혼, 종이인형, 오래된 신앙, 잔혹한 의식, 우매한 마을 사람들…… 죽음의 기호들이 널려 있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집단 무의식이 굳어져 무물지진을 만들고, 과학상자 밖의 침묵은 익숙했던 일상의 흉악한 틈새를 드러내며 '중국인이 중국인을 놀라게 하는' 이기(利器)로 변모한다. <종이혼례복> 플레이어들이 공포게임에서 사랑을 감상하는 데 열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도 일찍이 낯선 신화로 전락한 지 오래됐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부디 오호(五湖) [오월지방의 호수] 의 밝은 달과 인내심이 원앙의 빚을 갚게 하기를.” [4] [1] 탕메이신(唐梅欣)의 《恐惑概念的演变——从弗洛伊德、海德格尔到拉康 프로이드와 하이데거에서 라캉으로의 공포 개념의 변화》, 2021년 우한대학(武汉大学) 석사학위논문 참고. [2] 토마스 쿤 저, 진우룬(金吾伦)·후신허(胡新和) 역, <과학혁명의 구조>, 베이징대학출판사, 2003년 [3] 다이진화(戴锦华), <电影批评(第二版)>, 베이징대학출판사, 2015년 [4] <종이혼례복 3: 원앙의 빚>의 서문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徐佳(서가)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 Back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25 GG Vol. 25. 8. 10. 야코 수오미넨은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tlure》에서 ‘디지털 게임을 포함한 미디어 문화는 본질적으로 유아성infantlism, 유치함chindishness 또는 청소년성juvenility을 내포하고 있으며(...)’라고 쓴다. 폭탄 같은 발언처럼 들리지만, 비디오 게임과 걸쳐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논제다. 요컨데 우리가 게임학이라고 부를때의 루돌로지Ludology의 어원으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우리 사이에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 아니 게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즐거움’에 대한 지향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다. 이 때에 즐거움을 가장 원초적인 단위까지 훑고 내려가면 결국 유아성, 유치함, 청소년성 같은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비디오 게임과 전쟁이라는 두 키워드를 하나로 조합하면 그러한 ‘원초적 즐거움’의 상이 그려진다. 몰려드는 적, 화면을 메우는 총탄, 화면 어딘가에 표시되는 점수 또는 킬마크… 등등. 애초에 군사적 기술의 변용으로 탄생한 이 매체는 「미사일 커맨더」같은 군사주의적 테마의 게임과 함께 성장해왔다. 꼭 그 대상 또는 배경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타이토의「스페이스 인베이더」, 코나미의 「콘트라」같은 외계인과의 혈투를 그린 아케이드 게임도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주의와 매개하고 있다. 직접 전장을 모사하지 않더라도 총기나 냉병기를 다루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조금 과장해서 폴 비릴리오를 경유하자면, 레이싱 게임 같은 기술 중심의 게임 마저도 군사주의에 대한 어슷한 인상 정도는 가지고 있겠다.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는 언제나 군사주의라는 존재의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군사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는 원초적 재미라는 근원적 공간이다. 반전을 외치는 비디오 게임이 군사적 쾌감을 준다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문제는 구태의연하고 철지난 이야기일 정도다. 그래서,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서 이 군사주의를 걷어내면 그 자리에 ‘진지한serious’이라는 단어가 들어서게 된다.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이라는 단어의 현존 자체가 비디오 게임에 드리워진 루두스의 음산함을 시사한다. 게임이 진지해려면 특정한 수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군사주의를 우회하는 전쟁 비디오 게임은 대체로 이 시리어스 게임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물론 시리어스 게임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가지 논의가 있다. 초기에는 교육적 효과를 가진 게임들을 지칭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게임들을 교육적으로 전환 사용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교육적 효과’, 아니 더 넓게는 ‘어떠한 효과’를 내포하는 게임들까지 아우르게 된다. 자우티Djaouti, 알바레즈Alvarez, 제슬Jessel은 기존의 비디오 게임을 ‘엔터테인먼트 게임’으로 구분한 뒤, 시리어스 게임을 ‘진지함serious’과 ‘게임성game’을 모두 가진 게임으로 규정한다. [1] 물론 여기서도 이 ‘진지함’이 어느 범주까지를 뜻하는지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는다면, 매우 모호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2] 여튼 게임이 어떠한 엔터테인먼트를 초과하는 ‘진지한 테마’를 목적한다면 시리어스 게임의 범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떠한 충돌이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루두스는 일정량 ‘진지함’을 배격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전쟁과 비디오 게임 사이에 언제나 군사주의가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논리적 귀결과 맞붙는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이 군사주의와 거리를 두고, 그 이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하려 할때, ‘시리어스’와 ‘루두스’ 사이에는 강렬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게임이 바로 Juggler Games의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My Memories of Us」이다. 이 게임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 한 유대인 소녀와 도둑 소년이 함께 수용소로부터 탈출해 도망치는 이야기를 다룬다. 메커닉적으로는「발리언트 하츠」에 큰 빚을 졌다 할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두 주인공을 통한 퍼즐 메커닉은 새로운 흥미로움을 낳는다. 손을 잡으면 서로의 능력이 공유되고 손을 놓으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메커닉은 게임이 부여하는 퍼즐을 보다 다채롭게 구축한다. 그러한 반면 이 게임은 ‘노년의 남성이 회상하는 과거’를 이유로 역사에 환상적인 면모들을 이식한다. 이를 통해 제3제국을 로봇으로, 제국의 총통을 로봇 왕으로, 유대인을 표시하는 노란 뱃지는 지워지지 않는 붉은색의 페인트로 묘사한다. 이 환상성(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해야할까)이 있기에 더 다양한 퍼즐 메커닉이 나올 수 있었겠으나, 역사의 무게를 감소시켰다는 평은 피할 수 없었다. 《게임스팟》에서는 "게임의 더 귀여운 미적 요소와, 캐릭터들이 게토에 살게 되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야기 사이의 단절은 거슬린다. ...이러한 분위기의 혼란은 경험의 대부분을 약화시킨다." [3] 고, 《닌텐도 라이프》에서는 “주요 비판점은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실질적인 위협과 그것이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공포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슬리는 분위기의 불일치다.” [4] 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이 더 현실적인 아트를 가졌다면 게임 전체를 ‘흥미롭게’ 만든 퍼즐 메커닉의 삽입은 불가능했을 것이 자명하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군사주의를 우회한 비디오 게임이 필연적으로 겪게되는 전쟁의 진지함과의 각축전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치 독일의 제3제국을 로봇 군대로 묘사한다. 의미가 구조를 앞지를 때 이런 충돌에 대해 이안 보고스트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절차procedure’와 ‘수사rhetoric’ 사이의 긴장이라고도 정리할 수 있다. 게임적 절차(=구조)를 동원해 수사(=의미에 대한 표출)를 구축한다는 보고스트의 발안을 따르자면, 진지함은 언제나 수사의 목적에 위치한다. 여기서 절차는 이 수사의 구축에 결부된다. 하지만 게임의 절차, 그러니까 루딕 메커닉은 앞서 정리한대로 유희성을 기반으로 한다. 결국 진지함에 대한 수사를 어떻게 유희적으로, 그러니까 원초적이지 않은 흥미로움으로 구축하느냐가 긴장의 근원이다. 정리하자면 수사의 확고한 대상을 위해 절차가 동원되는가, 아니면 절차의 목적이 수사의 대상보다 더 높은 층위에서 작동하는가의 문제다. 이 긴장의 내부에서, 게임을 통해 전쟁의 ‘진지함’을 논한다면 과연 어떤 방식을 이루어야 할까? 이를테면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경우, 이는 명백히 역사 교육을 위한 콘텐츠가 된다. Charles Games의 「아텐타트 1942Attentat 1942」와 「스보보다 1945 : 해방Svoboda 1945 : Liberation」이 대표적인 예시다. 두 게임은 모두 체코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 자료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의도적으로 복잡한 사회적 양태의 시기, 체코슬로바키아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뒤에 벌어진 억압적 통제 ‘하이드리하디’가 발생한 1942년과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독일인들에 대한 폭력적 추방이 시행된 1945년을 그 조사의 배경으로 삼는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현대의 체코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노벨 게임’ 스타일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정보를 모아야 한다. 비록 재연 배우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가상의 인터뷰라는 형식은 전쟁 중의 민중들이 겪은 미시사의 복잡함을 인지시킨다.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타자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의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전쟁이라는 현상이 주는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유대인이 아님에도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할아버지의 역사를 추적하는「아텐타트 1942」의 경우, 주인공의 할머니는 불신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누군가의 불온한 고발이 남편에게 부당한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인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의심의 대상인 이웃집 남자 역시 나치당의 폭압에 의한 피해자라고 고백한다. 그 역시 총독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친독적인 기사를 써야 했던 과거에 고통받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정보는 파편화되어, 결국 켜켜히 쌓인 오해가 한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텐타트 1942」는 가상화된 인터뷰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아텐타트 1942」는 이를 위해 역사 탐구를 가상적으로 분화시킨다. 게임 중 발생하는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정보 전체를 한번에 획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행 중 발생한 미니게임을 통해 지급받은 코인을 사용하면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 이 ‘처음부터’ 다시는 문자 그대로의 처음부터, 즉 ‘이전의 인터뷰가 없었던 것’으로는 간주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이전 인터뷰의 정보는 남아있다. 이러한 인식상의 오류가 있음에도, 딱히 이런 과정을「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즈」처럼 초상적 능력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즉 사실상 주인공은 부족한 정보들로 구성된 한 플로우의 인터뷰 경험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치 않게 진짜 ‘진실’과 접촉하게 된 셈이다. 이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잠재태의 경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게임이 아닌 현실의, 그러니까 실재태의 인터뷰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주의에 가깝다. 어쩌면 이 현상이 「아텐타트 1942」의 인터뷰이들이 가진 정보 부족의 비극을 일부 설명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은 근본적으로 가진 판단의 한계지점을 가지며 오해와 불신의 가능성은 언제나 곁에 도사린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는 이런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증가시킨다. 플레이어가 추적한 진실은 이러한 세계의 초상이며, 오직 각 인간에 대한 불가능한 정보 습득의 반복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수사인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텐타트 1942」는 매우 흥미로운 메커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미니 게임들에는 그다지 미덕은 없다. 물론 증언자들의 코너에 몰린 긴장을 체감시킬 의도로 삽입된 것들이긴 하나, 증언 기반이라는 한계로 인해 고정된 결과만을 산출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미니게임의 성패는 오히려 인터뷰의 반복을 위해 코인을 버는 용도로만 사용될 뿐, 증언의 디테일이나 결과를 극단적으로 변화시키진 못한다. 따라서 이 게임이 다루는 ‘절차’는 역시 확실한 의미 층위를 가지기 어렵다. 사실상 대부분의 ‘수사’는 게임 자체의 구조보다는 이 게임이 담지하는 인터뷰에서 (말 그대로의 수사로서) 나오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유사한 구분, 즉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게임 중에서도 구조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케이스라면 어떤 형태일까. Rayonist의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Grief like a stray dog」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사실상 아트 게임에 가까운 이 게임 역시 동유럽의 전쟁 시기를 다룬다. 주인공 나디아는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뒤, 무기력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우체부의 일을 맡는다. 이 마을의 집 대다수는 가족 중 한명이 참전한 상태인 터라 모두 긴장 상태에 있다. 그리고 나디아는 그 긴장의 트리거가 된다. 나디아가 전달하는 편지는 크게 두 종류인데, 흰 편지는 가족의 생존을 의미하지만 검은 편지는 가족의 전사를 의미한다. 편지를 전해주는 장면은 클로즈업 된 두 개의 팔로 묘사되며, 플레이어의 마우스 움직임에 따라 나디아의 손도 움직이게 된다. 보통 배달하게 되는 흰 편지는 그저 손을 움직여 상대방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면 된다. 하지만 그 편지가 검은 편지일 때, 나디아의 손은 흰 편지 때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에서, 전사 통보 편지의 전달은 느린 속도로 표현된다. 이 게임에는 약 60분 정도 지속되는 짧은 서사와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아트가 있다. 하지만 게임의 코어는 바로 이 손의 움직임이다. 편지를 건네 준다는 간단한 행위가 조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부여받는 것이다. 검은 편지를 건네 주게 될 때, 플레이어는 그 느린 팔의 움직임을 통해 나디아의 복잡한 감정을 공유받는다.물론 이 두 편지가 동시기에 공존한다는 점, 그리고 언제나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에서 편지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대한 제유나 다름없다. 그리고 팔의 움직임은 그 전쟁이 주는 상처와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표출이다. 물론 그러한 역학을 제외하면 게임 전체는 매우 빈약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을 ‘플레이 가능한’ 행위로 번역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의미와 구조가 만날 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은 전형적인 시리어스 게임이기는 하지만 의미와 구조가 융합되는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군사주의를 이탈한 비디오 게임은 (군사주의를 동원하는 비디오 게임과 마찬가지로) 절차와 수사가 거의 유사한 층위에 있을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역시 11bit Studios의「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게임은 「림 월드Rimworld」같은 전형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플레이어가 다수의 캐릭터를 ‘관리’하며 방해되는 물건을 치우고,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고,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생존해나간다. 하지만 여기에 이 캐릭터들이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도시의 생존자’라는 서사 층위가 씌워진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다룰 수 있는 ‘세계 전체’는 한정적 자원의 세계로 규정된다. 즉 이 세계에서 획득 가능한 물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도, NPC에게도 본질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런 와중에 플레이어는 밤마다 다른 건물에 들어가 필수적인 자원들을 챙겨와야만 생존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도시에 남겨진 다른 생존자들과 조우하는 경우가 생기며, 자원의 소유권을 놓고 경쟁하는 일도 발생한다. 때로 병든 가족 같은 사연을 가진 생존자와 조우할 때엔, 그들을 위해 의료품을 남겨올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져올 것인가 같은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특징은 바로 장르적 순수성에 있다. 「디스 워 오브 마인」에서 전시의 생존자라는 서사 층위를 벗겨내면 상당히 전형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구조만이 남는다. 자원의 한정성과 생존의 고통은 해당 장르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코드다. 즉 이 게임의 루두스적 구조는 매우 전형적이고 표층적인 역학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진지한’ 층위가 이 구조를 더 강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반대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전쟁이라는 사건은 인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디스 워 오브 마인」은 바로, 전쟁은 우리들을 서바이벌 장르의 고통스러운 세계로 밀어넣는다고 답한다. 이 사유의 과정은 전적으로 군사주의적이지 않은, 군사주의를 우회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디스 워 오브 마인」은 비디오 게임의 장르를 경유하며 전쟁을 규정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혹은 좀 더 서사적 층위로 접근하는 Birdisland/PortaPlay의 「게르다 : 어 플레임 인 윈터Gerda A Flame in Winter」(이하 「게르다」)의 경우는 어떨까. 2차 세계 대전 당시 덴마크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게임은, 독특하게도 「디스코 엘리시움」과 유사한 TTRPG 스타일의 서사 중심Story-Driven 게임이다. 주인공인 게르다는 덴마크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덴마크의 혼혈이다. 나치당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1945년의 어느날, 남편인 안데르가 레지스탕스 혐의로 게쉬타포에게 체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편을 지키고 싶어하는 게르다는 여러 사람들의 힘을 빌리려고 하며 이야기는 점점 더 복잡한 층위로 들어선다. 게임 메커닉은 장면 단위로 진행되며, 게르다는 장면 내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아이템 수색을 통해 정보를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때때로 대화의 와중에 게르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두 종류의 선택지가 발생하곤 한다. 하나는 세 가지 능력치인 연민Compassion, 통찰Insight, 재치Wit 중 하나를 사용하는 선택지로, 즉시 호의적인 효과가 나지만 해당 능력치를 1 소모한다. 능력치는 각 장면이 끝난 뒤, 일기에 적을 내용에 따라 한 능력치를 1점 회복할 수 있다. 또 다른 선택지는 일종의 판정 국면이며, 대화 상대가 속한 소속과 대화 상대와의 관계도, 가지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난이도가 결정된다. 「게르다 : 어 플레임 인 윈터」는 단순한 하나의 선택으로 급격한 관계의 증감을 경험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관계도의 증감이다. 관계도는 매 대화의 선택에 따라 즉시적으로 1씩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거의 모든 대화에 증감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매번 선택의 고민은 깊어진다. 특히 각기 다른 소속의 인물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국면인 경우에 고통은 증가한다. 양측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작동하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관계도 상승을 포기하거나, 혹은 하락의 가능성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 시스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쟁이라는 테마를 건드린다. 하나, 이런 즉각적인 관계의 변화는 현실에 비추자면 매우 급작스럽고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대화란 본질적으로 인상을 결정하는 행위이기는 하나, 각각의 발언 또는 선택이 이후의 가능성을 훼손할 정도로 변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게임의 메커닉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과도하다. 하지만 「게르다」는 이 게임의 시기가 전시라는 사실을 통해 이 메커닉을 설득시킨다. 나치 통치의 덴마크는 극도의 분열 상태고, 독일인과 덴마크인은 서로를 의심하고 증오한다. 게르다가 일하는 진료소의 의사는 독일인은 절대로 치료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독일인들은 모든 덴마크인을 잠재적 반동분자로 치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계도의 급격한 증감은 오히려 설득력을 낳는다. 그리고 이 메커닉과 설정은 놀랍게도 서로를 돕는다. 전시라는 배경은 메커닉을 설득시키고, 메커닉은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동체의 균열을 설명한다. [5] 둘째, 게르다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게르다는 덴마크에서 나고 자랐으며, 덴마크인 남편과 살고 있다. 하지만 나치당을 지지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있는 게르다의 아버지, 게쉬타포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는 친척 등 독일인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한편 가장 친한 친구는 게쉬타포 소속이지만 합리적인 남성인 볼프강과 연인관계이기도 하다. 이 모든 복잡한 관계는 게르다를 선택의 지점으로 몰아넣는다. 덴마크인들은 필요하다면 게르다를 독일인으로 취급하고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설득해야 하지만, 남편을 구해야한다는 목적은 또 다른쪽과의 관계 역시 신경쓰도록 만든다. 결국 이러한 분열과 정체성의 혼란 역시 전쟁이라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이 또한 의미와 구조의 확실한 일치를 낳는다. 따라서 「게르다」는 「디스 워 오브 마인」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이 장르적 전형을 끌어들여 ‘시리어스’를 설득시킨다면, 「게르다」는 ‘시리어스’와 ‘루두스’가 거의 동일한 역학으로 서로를 돕는다. 하지만 결국 둘 다 게임 메커닉이라는 자원을 이용해 전쟁이란 무엇인지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 동일한 면에서 흥미롭게 바라볼만한 게임이 바로 Madnetic Games의 「WW2 리빌더」다. 이 게임은 「하우스 플리퍼」 또는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와 같은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으로,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각 격전지를 원상복구하는 일을 맡는다. 플레이어의 주된 행위는 전형적인 리노베이션 게임의 그것으로, 현장에서 물건을 해체해 자원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고, 파괴된 도로를 메우거나 벽을 새로 건설하는 재생작업이다. 이 역시 「디스 워 오브 마인」과 유사한 작동을 가진다. 순수한 장르의 틀에 전쟁(정확히는 전후)이라는 서사 층위를 덧씌워서 전쟁의 감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WW2 리빌더」에는 탈군사주의라는 맥락에서 더 깊은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은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터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탈군사적인, 아니 정확히는 반군사적인 틀이다. 이 장르는 대체로 1인칭의 시점을 지니며, 플레이어는 호스의 물을 ‘쏘거나’, 해체 장비를 ‘휘둘러’ 먼지를 지우고 폐허화된 공간을 해체한다. 이 과정은 정확히 FPS와 반대의 역학이며, 사실상 거의 FPS에 대한 패러디다. 이들의 시점, UI, 조작법은 전적으로 FPS와 동일하지만 양자가 만들어내는 풍광은 정확히 반대의 것이다. FPS는 파괴하고, 시체와 폐허를 남기지만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터는 정리하고,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애초에 이 장르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비세라 클린업 디테일Viscera Cleanup Detail」부터가 가상적 전투의 뒷정리라는 컨셉이었던 것이다.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션의 공간은 ‘사건’ 이전 상황을 연상하도록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의 역할은 그런 ‘사건’이 남긴 불쾌감을 떠안고, 장소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회복자라고 할 수 있다. 「WW2 리빌더」가 군사주의 게임의 가장 인기있는 테마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놀랄만치 통렬한 패러디다. 즉 이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는, 그 앞에 있었을 FPS의 거대한 대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 각 스테이지마다 존재하는 검은 형체의 존재는 이 개념을 전면화한다. 게임의 특정 지점에 서 있는 이 검은 형체와 접촉하면, 플레이어는 잠시 전쟁 당시의 기억 공간으로 이전된다. 군수 공장의 부두라면 배가 진수하는 광경이, 폭격지라면 폭격 당시가 재생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게임의 스테이지는 모두 전쟁이라는 역사를 가진 공간이 되며, 게임의 플레이 역시 가상화된 다크 투어가 된다. 따라서 「WW2 리빌더」는 다크 투어리즘의 게임이며 동시에 그 공간을 회복시키는 전후의 회복적 게임이 된다. 지나간 전쟁의 전장에 놓인 총을 그저 ‘고철’로 환원시킬 때, 이 게임은 군사주의와의 싸움에서 완벽히 승리한다. 「WW2 리빌더」는 전장에 남아있는 총기를 ‘고철 3개’로 표시한다. 게임은 이를 위해 주인공들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영국의 주인공은 전쟁 중 사망한 파일럿의 동생이며, 독일의 주인공은 참전자의 아내, 프랑스의 주인공은 전쟁 중 고향이 파괴된 참전 당사자다. 이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상실한 자들이지만, 그 증오의 소용돌이에 잠식되기 보다는 조용히 삶의 공간을 회복시키는 일에 전념한다. 「WW2 리빌더」는 테마, 서사 그리고 메커닉이 모두 일거에 작동하는 가장 전복적인 탈군사주의 게임이자 안티 FPS다.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이러한 탈군사주의 비디오 게임은 어느새 확고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분량의 문제로 모두 소개하진 못했지만, 시리아 내전에서의 탈출 중인 아내와의 텔레그램 대화를 컨셉으로 삼은 「버리 미, 마이 러브Bury me, My love」,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 스탈린그라드 출신의 소녀가 주인공인 「톤 어웨이Torn Away」, 나치가 부상 중인 독일에서 반나치 지하 조직을 운용하는 「쓰루 더 다키스트 오브 타임스Through The Darkest of Times」, 2차대전 후 독일인 아이를 입양한 노르웨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My Child Lebensborn」같은 게임들은 충분히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들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군사적 테마, 전투나 사격 등의 메커닉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전쟁의 이면에서 벌어진 일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조금은 독특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정리하려 한다. LKA의 1인칭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사 이즈 데드Martha is Dead」는 전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명시적으로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아니다. 주인공 줄리아의 아버지가 독일군 소속이라는 점, 주인공들인 쌍둥이 자매와 관계가 있는 남성이 파르티잔 활동을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떠한 전쟁의 지배력도 게임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지 않는다. 게임은 오직 쌍둥이 동생을 잃은 한 여성의 파괴되어가는 내면을 그리는 싸이코 스릴러의 전형을 따른다. 심지어는 그 쌍둥이가 실재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격인지조차 불분명하게 만든다. 「마사 이즈 데드」에서 동생 마사가 죽는 순간에 하늘엔 전투기가 날아간다. 하지만 이 게임은 미묘하게 전쟁이라는 요소를 게임의 내부에 가지고 들어오려고 한다. 줄리아가 동생 마사의 시체를 발견하는 그 장면에서, 하늘에는 비행기 엔진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몇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이 보인다. 하지만 이후 마사의 죽음과 비행기의 운용에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도출되지 않는다. 마사는 그 때 죽었고, 비행기는 때마침 지나간 것 뿐이다. 하지만 줄리아의 꿈에 나타난 사신은 서로 자신이 마사라고 주장하는 쌍둥이를 보고 허탈한듯 말한다. ‘전쟁 시에는 항상 누군가 죽는 거야.’라고. 「마사 이즈 데드」가 게임의 내부에 전쟁을 끌고 들어오는 방식은 모던 시네마적 역학과 유사하다. 마사의 죽음과 비행기 사이에는 전적으로 미장센의 결부가 있다. 줄리아의 심리적 파괴의 작동에는 자주 군사적인 이미지가 끼어들어온다. 남자친구의 죽음은 줄리아의 내면적 파괴로 이어지지만, 거기에는 파르티잔 활동과 독일군의 점령이라는 세계적 혼란이 어슷하게 걸쳐져있다. 이 게임을 탈군사적인 독법으로 읽는다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볼 생각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플레이어들에겐 구태여 그런 독법이 필요 하지 않다. 이것은 뭐랄까, 앞서 말한 방법에 따른다면, 마치 구조가 의미를 앞지른 게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게임에서 전쟁은 전달해야할 주된 테마는 아니지만, 독법에 따라서는 전쟁과 죽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음울하고 자기파괴적인 체험을 준다. 이 긴장은 어쩌면 비디오 게임에 군사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면서부터 원초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발생한 것 같기도 하다.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비디오 게임에 남은 숙제는, 군사주의라는 이 난감한 파트너와 어떻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가 일지도 모른다. 비디오 게임은 「이카리」로, 「듄 2」로, 「코만도스」로, 「진 삼국무쌍」으로, 그리고 더 많은 게임들로 전쟁을 낭만적 이미지와 등치시켜 왔다. 군사 테마의 쾌감이 짙을 수록,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아니 당위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것이 수오미넨이 말한 비디오 게임의 원초적 테제, 유치함, 유아성 그리고 청소년성과 결별할 어떠한 방법에 도달하는 길일 지도 모른다. [1] 《Classifying Serious Games: the G/P/S model》(Damien Djaouti, Julian Alvarez, Jean-Pierre Jessel, 2016) [2] 이를테면 「파이널 판타지 VII」은 전형적인 JRPG의 구조를 가지지만, 기술 중심주의와 환경 파괴에 대한 진지한 서사를 가진다. 이 경우 「FFVII」를 시리어스 게임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는 조금 복잡한 질문을 만든다. [3] https://www.gamespot.com/reviews/my-memory-of-us-review-war-has-changed/1900-6417007/ [4] https://www.nintendolife.com/reviews/switch-eshop/my-memory-of-us [5] 흥미로운 것은 이 게임에서 독일인과 게쉬타포의 관계도는 분리되어있다. 독일인은 ‘독일인’으로, 게쉬타포들은 ‘점령군’으로 표기된다. 독일인 소속의 인물들은 본래부터 이 땅에 살던 독일인을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때로 ‘독일인’은 상승해도 ‘점령군’은 줄어드는 선택지도 발생한다. Tags: 군사주의, 욕망, 반전운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Editor's View]
0과 1을 기반으로 한 계산을 딛고 서는 매체이지만 디지털게임 역시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을 다룬다. 우리는 수시로 사랑은 계산가능한 감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익숙한 관용구는 사랑을 다루는 연산장치인 디지털게임 앞에서 조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진보가 게임을 망친다?” <데스티니2>의 부침을 따라서
흔히 재난에 “‘별 혹은 행성의 불길한 국면’이라는 첫 번째 정의와 ‘갑작스럽거나 커다란 불행’이라는 두 번째 정의가 함께 관계”해 왔을 때, 일반적으로 <데스티니2>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전자의 의미를 조명하는 쪽에 가깝다. < Back “진보가 게임을 망친다?” <데스티니2>의 부침을 따라서 14 GG Vol. 23. 10. 10. 플레이어와 적(敵)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흔히 재난에 “‘별 혹은 행성의 불길한 국면’이라는 첫 번째 정의와 ‘갑작스럽거나 커다란 불행’이라는 두 번째 정의가 함께 관계”해 왔을 때, 일반적으로 <데스티니2>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전자의 의미를 조명하는 쪽에 가깝다. 1) 이 게임에서 조성되는 위기 국면은 언제나 ‘여행자’의 불능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태양계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로서, 게임의 공간을 독특하고도 문제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데스티니2는 여행자라는 초월적인 구체가 인류를 방문해 태양계를 테라포밍하여 황금기를 누리게 해주었다는 설정을 채택했다. 한편 게임을 플레이 하다 보면 여행자에 관한 이해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는 거점 베이스 맵인 탑을 계속 방문하게 되는 장소인데, 하늘에는 여행자가 흰 구체의 형상으로 떠 있다. 분명 시점을 위로 올려다 보며 여행자를 포착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행할 수는 없다. FPS 장르의 문법이 1인칭의 눈으로 대상을 감각하는 것을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으로 연결 지었다면, 여행자는 FPS의 문법에서 규정하는 인간적인 시각과 불화하는 존재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행자의 위기는 마치 “인간이 막을 수 없는 하늘의 영역에” 속하는, “명명 불가능한” 재앙의 요소를 품고 있다. 그러나 게임은 플레이어의 자리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게임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 환경으로, 인간 행위자가 개입해야 비로소 의미 항을 생성하는 매체로 상상되어 왔다. 따라서 데스티니2의 개발사인 번지(Bungie) 스튜디오는 “재앙에서 재난의 몫을 구별해내기 위해” 2) 여행자가 퍼뜨리는 긍정적인 영향을 일종의 자원으로 인식하고, 서로 다른 종족이 희소 자원을 둘러싸고 갈등한다는 정치의 내러티브로 위기를 빚어냈다. 여행자를 억류하고 그 힘을 탈취하려는 외계인 장군을 격퇴한 데스티니2의 첫 확장팩인 ‘붉은 전쟁’은 하나의 대명사가 되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게임 세계관에서 타도해야 할 타자를 외계의 침략자로 일방적으로 구성하는 관행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새로운 재난을 구성하고, 그에 대처하는 주체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번지는 이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적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채택한 듯하다. ‘목격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적은 여행자의 반대 선상에 배치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임 내에서 여행자의 형태가 추상적인 구체로 제시되는 반면, 목격자의 외형은 캐릭터적으로 뚜렷하다. 두 눈과 코는 흰 얼굴 위에 선명히 놓여 있으며, 안면 뒤로는 무수한 얼굴이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두상을 갖췄다. 여러 사람의 음성이 겹친 목소리는 뚜렷한 응시와 함께 명확한 의도를 품고서 전달된다. 얼굴이 전통적으로 주권의 표상으로 기능할 때, 인격화된 초월체인 목격자는 깔끔하게 지목 가능한 적수다. 이 같은 설정은 그간 스튜디오가 행해 온 반성적 해석을 다소 무색하게 만든다. FPS 문법이 급진적으로 사유되지 못하고 다시 적과 아군의 구획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번지는 오랜 세월 ‘떡밥’을 던지며 조성한 적을 야심만만한 형상으로 빚어놓았지만, 그 기표는 어딘가 공허하게 다가온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윤리, 인간 게이머가 이길 수 없는 대상과 마주하기 이 같은 관성은 번지가 <헤일로> 대부터 매끄럽게 구축해 온 하이퍼 FPS의 문법과 연관이 깊다. 헤일로는 스튜디오에는 메이저한 스튜디오의 명성을 안겨준 타이틀이다. 플레이어는 강화 군인 ‘마스터 치프’가 되어 외계 종족 ‘코버넌트’의 쇄도로부터 인류를 수호해야 한다. 코버넌트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연상케 하는 종교를 믿고 모든 생명체를 잠재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헤일로’에 집착한다. 인류를 지키는 것은 곧 은하 전체를 지키는 것과 등치 되어 대립을 자연화하는 구성을 취한다. 3) 물론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슈팅을 연결한다는 발상이 그 자체로 특수한 정치적 돌출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초창기 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1978)>가 외계인의 침략을 쏘아 막는다는 플레이를 기획한 게 대표적이다. 리자르디는 2000년대 초에 미국이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동안 출시된 비디오 게임들이 “일반적인 유사성”을 형성했음을 지적한다. 4)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와 인간성이 겪는 위기, 이를 복원하기 위한 전투와 저항을 주요 요소로 삼은 게임들이 9·11 테러나 이라크 전쟁과 같은 특수하고 문제적인 맥락으로 재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데스티니 시리즈 역시 헤일로처럼 인류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과 마주한다는 골조를 채택했다. 작중의 시점은 황금기가 저문 이후의 어수룩한 문명에 선 인류를 다룬다. 여행자로부터 선택 받아 특수한 힘을 쓸 수 있는 ‘수호자’는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탑을 세우고 인류를 견인한다.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구분하는 모일란의 논의를 따라, 페레즈-라토레는 주요 게임들이 어떻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묘사하는지 분류하고 있다. 특히 디스토피아 내에서도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소수의 유토피아적 근거지는 주로 세 가지 방식에 의해 묘사된다. (1)‘카우보이형’ 고독한 영웅 (2)자연으로의 회귀와 자급 자족적 생활 (3)공감과 연대를 통한 집단적 생존. 5) 이 입장들은 명확히 나눠떨어지기보다 중첩되며 개개의 효과를 자아낸다. 헤일로의 마스터 치프는 “까다로운 조건에서 개의치 않고 험준한 환경을 질주하는 동시에 자유와 정복이라는 가능성을 향하는 선구자로 낭만화”되는 영웅이기에 첫 번째 유형에 가깝게 읽힌다. 치프 개인이 공동체와 불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보적인 역량을 가진 전사로 간주된다. 홀로 수행하도록 고안된 게임 내의 미션들은 아웃사이더의 뉘앙스를 강화한다. 이처럼 소수의 선각자를 부각하는 방식은 게임이 플레이어가 게임에 개입하여 활약할 만한 국면을 확보하는 데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뒤를 이은 데스티니 시리즈 역시 영웅을 만들어 내는 문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데스티니1에서 주인공 수호자는 단일한 몸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위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묘사하는 지형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빛의 저편’ 확장팩 이후부터다. 혹한의 행성 ‘유로파’를 바탕으로 몰락자들이 거주하던 폐허를 묘사함으로써 황량한 풍경에서 비롯되는 애수와 정동이 인간의 감상으로만 독점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부연되었다. 스튜디오가 그간 행해온 작업에 대한 반성적 기획은 ‘사냥의 시즌’을 통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적이었던 ‘울드렌’을 우군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본래 그는 유머를 겸비한 총잡이로 인기가 많았던 인물 ‘케이드-6’를 살해함으로써 공분을 일으켰다. 케이드-6의 죽음이 감정적 방아쇠가 되어 확장팩의 성공을 가져왔을 때, 울드렌을 부활시킨다는 발상은 스튜디오가 그간 행해온 작업에 대한 반성적 기획으로 읽힌다. 개인의 층위에서 국한되었던 유토피아적 충동은 이제 (3) 공감과 연대를 통한 집단적 생존으로 이어진다. 원래라면 적으로 배치되었을 외계 종족은 기꺼이 장벽 안으로 수용되었다. 공동체는 이들을 포용하고 건전하고 든든한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다가오는 재난에 대비하려 한다. 이를테면 ‘망령의 시즌’에서는 악몽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인물들의 굴절된 과거를 눈앞으로 불러내 해소하는 작업을 펼친다. 이때 카타르시스를 겪는 인물은 인류에게만 특권적으로 한정되지 않고, 한때 적이었던 외계인에게도 배분됨으로써 동맹의 정서적 울타리를 단단하게 엮어 낸다. 또한 인류에 대한 주류적 상상-건강한 백인 남성-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수자성 역시 공동체의 이름으로 수용된다. 게임에서는 장애인 비행기 조종사나 디스포리아를 겪는 기계 인간 등의 매력적인 메타포가 제시된다. 그러나 게임이 공감과 연대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동안 커뮤니티 내에서는 불만이 커져 갔다. 주요한 비판 중 하나는 여러 인물이 탑으로 편입되고는 있지만 주인공은 그저 국면을 눈에 담는 목격자가 될 뿐, 개입자로서의 효능감을 크게 누리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즉 데스티니2가 게임 세계와 관계 맺어 온 플레이어에게 자리를 제공하는 방식을 재고하는 데에 혼란을 느끼는 것처럼 비친다. 이 점에 있어서 국내 데스티니2 온라인 커뮤니티가 ‘우주 해적의 시즌’에서 두 남성 인물의 키스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것을 두고 오직 ‘PC’에 대한 역행적인 반발로만 읽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텍스트가 곧 남성적 개입의 플레이 전반에 대한 위협으로 수용된 것은 아닐까. 파올로 루피노는 포스트휴먼 관점에서 게임을 검토하며 상호작용성과 도구주의에 대한 잘못된 신화와 “이 개념에 내재된 남성주의”에 도전한다 6) .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인류세의 위기를 만능으로 타파할 수 있는 제품과 기술을 기대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모두 통제하려는 자신감 과잉”을 드러내는데, 이는 인간과 기계를 이원적으로 바라보며 상상적 분리를 심화하는 기존의 게임 담론과 유비 관계를 가진다고 이해한다. 이때 게임은 인간이 도구성과 합리주의를 견지하여 풀어내야 할 문제 텍스트로 인식된다. 데스티니2는 인간이 개입하여 통제해야 할 대상의 기준을 뒤흔들면서도 전통적인 적수의 문법에 따라 목격자를 둠으로써 우왕좌왕하고 있다. 진보적 가치를 반영한 게임 개발과 플레이는 성공할 수 있을까? 데스티니2는 플레이어 이탈이 극심해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게임이다. 번지 스튜디오의 수석 개발자인 저스틴 트루먼은 2022년 지스타에서 이 문제에 관해 공개 강연을 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서비스 개선 과정에서 라이브 스튜디오로서 ‘속도’를 유지하는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 이슈인지 강조했다. 7) 데스티니2의 시즌 패스 콘텐츠는 번지가 추구하는 속도를 잘 보여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미션이 업데이트된다. 플레이어의 꾸준한 참여를 스토리와 컷씬 등을 통해 고무한다. 그리고 약 3개월 남짓의 짧은 기한 안에 한 시즌의 기승전결을 제공해야 한다. 번지는 매년 새롭게 출시한 확장팩으로 게임 전체의 윤곽을 그리고, 다시 그 안에 4개의 시즌을 배치한다. 이처럼 속도를 중점으로 두고 콘텐츠를 관리함으로써 데스티니2가 현재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스튜디오 내부의 평가다. 같은 맥락에서 트루먼은 게임 발매 전 고강도의 야근을 일삼는 업계의 크런치 관행을 지양해야 할 것으로 언급했다. 스튜디오의 장기적인 수명을 깎아 먹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지는 속도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 시장성 및 장기적 신뢰로 비견된 윤리라는 두 축을 포괄하려 시도한다. 스튜디오의 이름을 걸고 다양한 정치적 이슈에 목소리를 높여왔는데, 2020년의 Black Lives Matter 캠페인과 관련해 공개한 입장문 등이 대표적이다. 8) 또한 UI 엔지니어인 데이비드 세처는 ‘Trans in Bungie’를 꾸리고 게임 내 콘텐츠로 트랜스젠더 플래그를 본뜬 엠블럼을 제작한 것과 같이 소수자 정체성을 연결하고 확대하려 한 기획이 고루 존재한다. 9) 그러한 방침 아래 제작된 게임 텍스트 역시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제스처를 취한다는 점에서 제법 인상적이다. 2021년 5월 12일에 출시된 ‘융합의 시즌’에서는 본래 적대 팩션이었던 외계 종족 ‘몰락자’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여 인간 사회의 장벽 안으로 수용했다. 피난민을 배척한 강경파가 몰락한다는 결말은 포스트 트럼프 시대의 불안과 고통을 승화하려는 몸부림처럼 비친다. 데스티니2라는 게임 텍스트 내외에서 행적을 읊어 봤을 때, 이는 시장 질서 내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진보로 읽히기도 한다. 이토록 야심 찬 청사진은 과연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을까. 2020년 도입한 ‘콘텐츠 금고’ 조치는 그들이 봉착한 어려움을 드러낸다. 오래된 콘텐츠를 따로 빼 두었다가, 훗날 다시 가져오겠다는 기획이다. 새로운 데이터가 더해질수록 용량의 부담이 심화 되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구매한 콘텐츠가 삭제된다는 불만을 토로했으며, 더 나아가 스튜디오의 역량을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기존의 콘텐츠를 유지·보수하는 것도 허덕인다면 매주 새 콘텐츠를 업데이트 한다고 해서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소외된 정체성을 하나씩 끌어들여 태그를 붙인 후 연합에 끌어들이는 일련의 흐름은 텅 빈 구호로 흘러들어가는 주체의 무한한 자기 긍정처럼 보인다. 플레이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자기 갱신이 요구된다. 매주 업데이트 되는 이야기의 흐름에 제대로 탑승하기 위해서는 전투력을 올려야 한다. 결국 목적은 갱신 그 자체가 되고 만다. 데스티니2 6년 차에 출시된 ‘빛의 추락’ 확장팩은 목격자를 전면에 내세웠으나, 무엇도 해소된 것 같지 않다는 원성을 자자하게 받으며 스팀에서 부정적인 평가에 놓였다. 비장한 제목 앞에서는 아무것도 새롭게 추락하지 않는다. 실은 모든 게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데스티니2는 광대한 재난을 인간 중심적인 시선으로 부각할 때 발생하는 균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다. 앞으로의 게임들이 어떻게 위기를 발굴하고 개입자를 위치 지을 것인지에 관해 고민을 던져준다. 1) 황호덕. (2022). 한국 재난 서사의 계보학 - 비인지적 낯익음에서 인지적 낯설게 하기까지. 현대소설연구, (88), 432쪽. 2) 윗글, 437쪽. 3) Voorhees, (2014) “Play and Possibility in the Rhetoric of the War on Terror: The Structure of Agency in Halo 2”, Game Studies, 14(1), https://gamestudies.org/1401/articles/gvoorhees 4) Lizardi, (2009) “Repelling the Invasion of the ‘Other’: Post-Apocalyptic Alien Shooter Videogames Addressing Contemporary Cultural Attitudes”, Eludamos: Journal for Computer Game Culture, 3(2), pp. 298. doi: 10.7557/23.6011. 5) Pérez-Latorre, (2019) “Post-apocalyptic Games, Heroism and the Great Recession”, Game Studies, 19(3), https://gamestudies.org/1903/articles/perezlatorre 6) Ruffino, P. (2020), "Nonhuman Games: Playing in the Post-Anthropocene", Coward-Gibbs, M. (Ed.) Death, Culture & Leisure: Playing Dead (Emerald Studies in Death and Culture), Emerald Publishing Limited, Bingley, pp. 11-25. https://doi.org/10.1108/978-1-83909-037-020201008 7) “[지스타 2022] 번지 CDO, "기존 게임 개발 공식을 바꿔야 한다"”, 김승주, 디스이즈게임, 2022.11.17.등록, 2023.09.29.접속, https://m.thisisgame.com/webzine/news/nboard/4/?n=162164 8)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Destiny Dev Team, Bungie, 2020.06.01.등록, 2023.09.27.접속, https://www.bungie.net/ko/Explore/Detail/News/49184 9) “Trans at Bungie”, Destiny Dev Team, Bungie, 2021.03.31.등록, 2023.09.27.접속, https://www.bungie.net/ko/Explore/Detail/News/50218 Tags: 데스티니, 재난서사, 포스트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게임이 이야기를 경험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최근에는 <마라톤>을 플레이했습니다.
-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 Back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01 GG Vol. 21. 6. 10. 디지털게임은 이제 뉴미디어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처음 등장한 것으로도 거의 반세기에 달하는 이 매체는 그러나 그 발전과 변화의 폭이 너무 넓어 초창기와 지금을 비교하면 도대체 어디까지를 공통점으로 봐야 할 것인지 난감할 지경의 다양성을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도 게임이란 무엇인가 라는 정의를 쉽게 내리기 어려운 이유다. 등장 이래 조금씩 저변을 넓혀 온 게임은 이제 모바일 네트워크 시대에 이르러 서브컬처가 아닌 대중문화의 일환으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단순한 산업적 규모에 대한 찬사이건, 혹은 디지털게임이 만들어 낸 기존의 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동경이건 간에 이제 게임은 대중문화의 프레임 밖에 두기 어려운 존재감을 확보했다. <게임 제너레이션>은 먼 훗날 최초의 게임 세대로 일컬어질 수 있을 바로 이 시대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시작된 잡지다. 게임이라는 매체를 만나 변화하기 시작한 인간의 삶과 생각, 행동이 다시 또 게임에 반영되는 과정 전반을 살피며 우리의 관심사는 게임을 넘어 게임하는 인간을 향한다. 게임을 곱씹어 거기에 비춰지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의 탐색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가장 큰 목표다. <게임 제너레이션>은 총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매 호마다 선정되는 ‘집중기획’을 통해 동시대 게임 담론의 주요 주제들을 깊은 호흡으로 검토하고, 빠르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흐름을 ‘TRENDS’에서 놓치지 않도록 주시한다. 마지막으로 ‘ARTICLES’에서 오늘날 게임에 대한 비평과, 게임개발자 및 게이머라는 사람에게 묻는 인터뷰로 게임과 게이머라는 게임문화의 근간을 맨손으로 훑으며 우리 시대의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로서의 게임’을 손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그 말이 현재로서는 다분히 공허한 선언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게임은 문화다’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게임을 문화의 틀 안에서 바라보고 사고하며 이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게임 제너레이션>의 창간과 도전은 그런 실천을 통한 실험이며, 창간호의 기획도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문화로서의 게임'이라는 대주제를 두고 먼저 고민한 것은 다른 선배격의 매체들이 겪어 온 과정이었다. 영화와 만화라는 두 매체가 표현양식에서 서브컬처를 지나 대중매체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지점들은 없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한송희, 이재민 두 평론가의 글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문화'라는 말을 굳이 강조해야 하는 지금 게임의 상황은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나는지에 대한 고민은 이정엽 교수가 고민의 결과로 가져왔다. 문화매체 성립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비평의 영역은 어떤 과정을 거쳐오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강신규 박사의 글도 적지 않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동시에 같은 고민을 다른 지역에서 하고 있는 북미의 게임연구자 Mia Consalvo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시대적 공통요소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고자 했다. TRENDS에서는 현재 가장 뜨거운 단어들의 현황을 살펴보고자 했다. 2021년 7월 다시한번 불타오른 셧다운제 이슈와 함께 게임 관련법들에 대한 관심이 재부상했는데, 수 차례 여러 가지 입법 발의는 뉴스에 나왔지만 실제로 입법되었는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 국회에서 게임법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이도경 비서관이 현업의 시각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게임 플레이와 콘텐츠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결제양식에 최근 불고 있는 새로운 변화인 구독형 결제는 어떤 변화와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를 홍성갑 기자가 점검했고, 비즈니스 워드로 2021년 하반기 중심에 선 메타버스라는 말이 게임과 갖는 유사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메타버스 게임에 대한 관심이 품고 있는 실체와 허상을 분리하고자 하는 고민을 김재석 기자가 담아냈다. 디지털게임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담는 Articles 코너에서는 비평이나 평론의 형식을 정의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의 글들을 모아보고자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전장 구성이 갖는 원근법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김얼터 작가의 글은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게임디자인에 접근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2021년 상반기 트럭시위 사태로 화제가 되었던 〈로스트아크〉난민사태에서의 '난민'을 본격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오영진 평론가의 도전은 실제 게이머들의 위상을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스탠스들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2021년 GOTY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잇 테이크 투〉를 살피는 이명규 기자의 시선은 코옵이라는 보기 드문 형태의 플레이를 이해하는 단초들을 제공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도 정작 '초딩 게임'이라는 선입견에 강하게 묶여 있는 〈로블록스〉의 의미는 박이선 연구자의 정리를 통해 좀더 뚜렷해진다. 야쿠자 게임으로만 알려져 있던 〈용과 같이〉에 접근하는 시사평론가 김민하의 글은 이 게임을 '관광 게임'으로 정의하며 일본이라는 현실배경과 게임의 연계를 되새기게끔 한다. 게임텍스트 뿐 아니라 사람으로도 이뤄지는 것이 게임문화다보니 매 호에서는 항상 사람을 향한 인터뷰를 포함하고자 했고, 첫 호에서는 두 사람을 만났다. 인디게임 개발자 somi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죄책감 3부작'이라고 부르며 연결성을 부여하고, 이는 게임에서의 작가론을 가능케 하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somi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동시에 세계 최대 e스포츠를 운영하는 라이엇게임즈 코리아의 진예원 PD를 만나 한국 e스포츠의 현황과 미래에 대해 현업의 시각에서 느끼는 바를 받아적고자 했다. 격월로 정리하는 이슈들은 아무래도 시기마다 적절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좀더 긴 호흡에서 한국의 게임문화를 곱씹는 결과물로 자리할 것이다. 긴급한 소식에 대한 논의는 다른 여러 매체와 커뮤니티에 맡기고, 우리는 숨을 고를 때 비로소 보이는 문제들로 시선을 던지고 말을 걸고자 한다. 기획회의 내내 이야기했던, '웹진보다 무겁게, 학술지보다 가볍게'라는 기조는 주제와 소재, 톤까지를 아우르는 우리의 슬로건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글을 찾아 읽을 독자가 있을 거냐고 반문하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없으면 때로는 독자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잡지의 힘이자 의무이기도 했음을 잊지 않는다.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온라인 시대의 살아있는 화석, 보드게임 이야기
1938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가 알려진 실러캔스라는 어류 개체가 있다. 실러캔스는 약 3억 7천 5백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하여, 약 7천 5백만년 전 절멸했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러캔스는 살아있었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Changhwan Yoon Someone who makes board games. Wants to spread the joy of making board games far and wide. Always recruiting fellow board game players. Get in touch via Instagram @imakeboardgames.
- 왜 스네이크는 들개가 되었는가
1987년 코지마 히데오(小島秀夫, Hideo Kojima) 감독이 제작한 〈메탈 기어(Metal Gear)〉는 여러 가지 의미로 특이한 게임이었다. 한 명의 캐릭터로 적진을 돌파한다는 점은 같은 제작사의 〈콘트라(Contra)〉 시리즈, 그 외 많은 게임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경험이다. 그러나 스테이지를 헤쳐나가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사뭇 새로운 감각이었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inho Jang Doctoral student in the Department of Genre Technology and Subculture Studies, Graduate School of Hanyang University. Received a master's degree in American literature studies and is interested in questions of human identity. Recent interests include the question of nonhuman identity in science fiction literature and the possibility of coexistence.
- 아케이드가 할 수 있는 미래의 역할
오락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아케이드 게임장은 1980~1990년대의 많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점차 가정용 게임기와 PC가 보급되며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어가는 환경에서도, 집에서 절대 즐길 수 없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게임을 동전 하나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의미를 넘어 게임 환경의 선두를 달린다는 이미지마저 주는 곳임을 뜻했고, 실제 게임 산업의 선두를 달리는 분야가 아케이드 게임이기도 했다. < Back 아케이드가 할 수 있는 미래의 역할 04 GG Vol. 22. 2. 10. 오락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아케이드 게임장은 1980~1990년대의 많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점차 가정용 게임기와 PC가 보급되며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어가는 환경에서도, 집에서 절대 즐길 수 없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게임을 동전 하나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의미를 넘어 게임 환경의 선두를 달린다는 이미지마저 주는 곳임을 뜻했고, 실제 게임 산업의 선두를 달리는 분야가 아케이드 게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아케이드 게임장은 매리트가 많이 사라져, 한국에서는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시기이다. 가정용 게임기와 PC의 그래픽 성능이 더욱 좋을 정도로 더 이상 시각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온라인 환경이 발전한 결과 집에서 편하게 게이머들이 전 세계 상대들과 마음껏 경쟁을 할 수 있는 것도 크다. 오히려 실력으로만 놓고 보면 전 세계와 경쟁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이 경험적 측면에서 훨씬 풍부한 것도 사실이다. 아케이드에서 형성되었던 게이머들의 커뮤니티 역시 개인 SNS로 얼마든지 전 세계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지금은 발걸음을 옮길 만한 매리트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해 아케이드는 가장 저렴하게 게임을 즐길 방법이었으나, 지금은 기본 무료 게임들과 모바일 게임의 보급으로 고유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으며,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으로 인해 아케이드 게임을 돈을 내고 즐기는 것이 아깝다는 그릇된 인식조차 생긴 상황이다. 결국 아케이드 게임장은 살아남기 위해 재미보다 감성을 공략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코인노래방과 인형 뽑기를 위주로, 여전히 집에서는 즐기기 어려운 체감형 게임 위주로 환경을 세팅하며, 스틱과 버튼으로 조작하는 게임은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인기 레트로 게임들로 편성하였다. 사실 2000년 이후 아케이드 게임 산업이 크게 줄어 신작 게임이 나오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에, 이처럼 레트로 게임들로 꾸민 것은 그나마 소비자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 합리적이면서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인구가 훨씬 많고, 아케이드 게임 산업이 발달했던 미국이나 일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미 미국의 아케이드 게임장은 테마파크나 레저시절에 같이 편승하여 체감형 게임 위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가장 게임 시장에서 아케이드의 영향력이 강했던 일본 역시 상징과 같았던 유명 게임장들이 연달아 문을 닫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인구의 규모가 커 여전히 새로운 게임들이 조금씩이나마 출시되고 있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팬데믹 상황을 이야기하기가 민망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아케이드 게임장은 오랜 기간 매리트를 잃고 서서히 규모가 줄어들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동네 오락실’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지역에 오락실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는 시대가 되었다. 아케이드 게임장의 위기에 관련 회사들은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5년 전부터 도입된 VR기기이다. 아케이드가 주는 매력 중 하나가 집에서는 즐기기 어려운 새로운 체험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노린 발상이다.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어떻게든 아케이드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겠다는 이 시도는 VR 산업이 예상보다 커지지 못하면서 소프트웨어의 부족과 기술 정체, 팬데믹 상황까지 겹쳐 현재까지 유의미한 결과를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더해 새로운 시도가 연달아 빠른 속도로 이어지다 보니 업계의 시도만큼 정책이 따라가지 못해, VR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데 있어 법률 관련 문제가 미흡했거나, 아케이드 업체 입장에서 체감 게임이 주가 되는 이상 금형 비용 지원이 중요한데 정부는 여전히 소프트웨어 개발비를 기준으로 산업 육성 차원에서 지원하는 부분 등 산업 발전을 위해 손발을 맞추는 것도 버거운 모양새였다. 설상가상으로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도 디지털 게임 구매의 가속화로 수익이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이 흐름이 아케이드 게임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 게임을 위해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이유 자체가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케이드는 미래의 역할을 진지하게 파악해야 할 때가 왔다. 새로운 시대는 피할 수 없고, 아케이드는 결국 변해야 한다.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의 경우,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 속에 “사람들이 매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공간”에 대한 실험을 이미 전 세계에서 2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다. 현재 이 같은 실험에서 가장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곳은 미국 게임스탑의 컨셉 스토어이다. 협동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대형 TV와 소파, TRPG로 대표되는 테이블 게임, 함께 게임을 즐기기 위해 앉을 수 있는 12~36개의 게임 부스, 레트로 코너, 수집품 전시장 등의 코너를 준비했으며, TRPG의 경우 큰 히트를 기록해 일부 매장은 프리랜서 던전 마스터를 고용하기도 했다. 구매하기 전 즐기는 것을 넘어, 같은 게임이라도 이 공간에서 즐긴다는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PC방 서비스에 복합 게임 공간이 결합한 상황인 게임스탑의 실험 목적은 “게임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것”도 있으며, 게임스탑은 여전히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는 상황이지만 현재까지 유의미한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 같은 복합 오프라인 공간은 한국도 몇 곳이 존재하며, 모두 나름의 생존전략을 찾아 오프라인 및 온라인 이벤트로 수년 이상 활발하게 공간을 가동하고 있다. 2022년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실제 생활에서 게임들과 게임을 즐기기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있는 게임스탑의 컨셉 스토어. 이 같은 사례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커뮤니티 형성이고, 아케이드는 여전히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 커뮤니티의 형성은, 대상의 정보를 온라인보다 훨씬 많이 빠르게 습득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낯익은 얼굴이 밸런타인데이에 나와 같은 오락실에 나타났을 때 동질감을 느끼는 망상부터, 상대가 처한 환경을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에, 특유의 커뮤니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게임에 있어 인성 역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e스포츠 문화에 아케이드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킬러 콘텐츠와 오프라인 커뮤니티 특유의 예의 있는 교류가 합쳐진다면, 팬데믹이 지나 다시 한번 아케이드 게임 공간은 다시 사람들이 매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될 것이라 믿는다. * 디시디아 파이널 판타지 아케이드는 세 명이 팀을 이루어 다른 팀과 싸우는 게임으로, 낯선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팀을 이루는 순간, 오프라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유대감이 생겨난다. 따라서 현재 가장 큰 숙제는 커뮤니티를 이끌어갈 만한 아케이드만의 경쟁력 높은 콘텐츠이다. 소속 커뮤니티가 뭉쳐 지역 최강 → 국내 최강 → 세계 최강으로 향한다는 흐름은 2022년의 게임 업계에서 아케이드를 떠나 게임 커뮤니티의 단합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재의 아케이드는 네트워크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 실제 자신의 세계 랭킹을 확인하는 것이 한국도 가능한 시대이고, 점포끼리 대전도 가능하다. 안타까운 것은 콘솔 시장을 이끄는 소프트 메이커들이 아케이드 게임 시장을 이끄는 구성이기도 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 같은 인프라를 위해 달려들 기술력과 자본들 있는 아케이드 소프트 메이커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체험을 위해 구글 코리아가 기획한 게임 프로젝트인 구글 플레이 오락실 행사 역시, 애초 구글이 기획을 한 행사였기에 국내 게임사들의 다양한 모바일 게임을 전시하며 오락실이라는 명칭과 달리 유사 게임쇼 형식에 머무는 결과로 그쳤다. 90년대 출간된 만화 중 게이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브레이크 에이지’라는 만화가 있다. 작가가 미국의 아케이드 게임인 배틀 테크를 본 뒤 이와 연관된 미래를 상상하며 그린 이 만화는, 제한된 리소스 안에서 자신이 로봇을 자유롭게 커스텀 할 수 있는 통신대전형 체감 게임인 ‘데인저 플래닛(Danger Planet)’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출간 이후 버추어 온, 아머드 코어 등 조작이나 개념이 비슷한 게임이 출시될 때마다 ‘드디어 데인저 플래닛 같은 게임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따라다닐 정도의 인기를 얻었고, 결국 2010년 중반에 재판이 출간하게 되었다. 실제 이 만화로 인해 게임 업계에 뛰어든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들이 이 만화에 열광한 이유는, 게임의 개념이나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다.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이 주는 박력이 상상됨과 더불어 남녀노소가 게임을 통해 건전한 교류를 하는 따뜻한 모습과, 지금의 NFT 개념과 비슷하게 자신이 만든 커스텀 기체를 판매하고 쉽게 구할 수 없는 부품을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 및 실력만 있다면 개발사와 플레이어 모두 수익을 낼 수도 있는 건설적인 환경이 게이머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게임이 30년 전에는 SF에 그쳤을지 모르나, 현재의 기술로 만화 내용의 구현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현재의 아케이드 산업은 코인 노래방, 인형 뽑기, 체감형 게임으로 유지되는 상황이며, 시장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홀로그램 등 새로운 기술을 체감할 수 있는 최첨단 체감형 게임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지만,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시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 킬러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이다. 다행인 것은 이 문제가 실제 전 세계의 대형 아케이드 게임 제작사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며, 올해도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차례차례 등장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아케이드 산업을 살리겠다는 개발사들의 시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이상, 아케이드는 향후 다시 한번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이머들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저 업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열정이 꺾일 정도로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IGN코리아 대표) 이동헌 1999년 월간 게임라인을 시작으로 게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기간을 게임 개발사에서 보낸 뒤, 게임 제작자보다 글로서 게임 문화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2018년부터 IGN Korea를 운영하고 있다.
- Assessing Genshin’s Soft Power Impact on Southeast Asia
At the Anime Festival Asia (AFA) held in Singapore in November 2023, miHoYo assumed the prime spot at the exhibition—squarely at the entrance of the convention centre. Consequently, fans flocked to the booth for physical merchandise, resulting in three days of traffic slowdown. The booth had photo corners and character goods from the game Genshin Impact (GI), miHoYo’s ticket to global fame since its publication in 2020.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길었던 팬데믹의 터널이 끝나고 게임쇼에도 봄이 돌아왔다. 물론 모든 게임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발표되었던 E3 2023의 취소 소식은 게임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3월 말에 열린 PAX EAST는 GDC 2023과 비슷한 시기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B2C 부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필자 역시 4년 만에 GDC를 찾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20년부터 2022년 GDC에 모두 등록했었다. 다만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작년은 패스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 Back 11 GG Vol. 23.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수퍼히어로물의 다음 세대를 건져올린 <디스패치>
가장 미국적인 문학 장르인 수퍼히어로는 경이(amazing)적 판타지의 장르다. 주인공 히어로와 빌런이 사용하는 초능력이라는 경이 요소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때문에 판타지이며 개연성 대신 핍진성만이 작동하는 장르다. 이 장르는 만화와 라디오 드라마를 거쳐 영상 영화를 지나 게임까지 와 있다. < Back 28 GG Vol. 26. 2. 10. Tags: 히어로물, 코믹스, 골든에이지, 북미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ggap Hong Freelance writer—a job title suspected of being a synonym for "unemployed." Started out as a reporter at Ddanzi Ilbo, where broke the first story exposing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s comment-manipulation operation. A lifelong gamer who wrote a first piece of game criticism in 2001—and is very glad it has since been lost.
-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번역가.
어쩌면 그래서 “힘세고 강한 아침” 같은 문장이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 문장은 분명 이상하지만, 동시에 게임 번역의 역사 속 한 장면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게임을 전달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행착오가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이니까. < Back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번역가. 29 GG Vol. 26. 4. 10.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왈도. 게임 커뮤니티를 조금이라도 돌아본 사람이라면 ‘힘세고 강한 아침’이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 정확히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몰라도 묘하게 웃긴 문장이다. 단어 하나하나는 익숙한데 문장으로 묶이는 순간 어딘가 미묘하게 비틀린다. 마치 한국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어색함이 웃음을 만든다. “깔깔깔, 힘세고 강한 아침이래! 이게 무슨 말이야!” 이 문장은 1998년 4월에 출시된 PC 게임 <마이트 앤 매직 6>의 국내 발매판 번역에서 등장한 대사다. 요즘 세대에게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이젠 가망이 없어.”라는 대사가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힘세고 강한 아침’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일종의 조상 격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번역이 종종 인터넷 문화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번역이 어색할수록, 혹은 지나치게 직역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새로운 재미가 생긴다. 커뮤니티에서는 스크린샷이 돌아다니고, 패러디가 생기고, 어느새 그 문장은 원래 게임과 별개로 독자적인 생명을 얻는다. 번역이 틀렸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이것도 번역이 겪게 되는 묘한 운명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범위를 넓혀 보면 이런 사례는 의외로 많다. 영화나 게임에서 어색하게 번역된 한 문장이 밈이 되어 커뮤니티를 떠돌다가, 나중에는 원작보다 더 널리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문장은 패러디가 되고, 어떤 문장은 유머의 소재가 되며, 어떤 문장은 인터넷 유행어가 되기도 한다. 언어가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셈이다. 배우를 비추는 조명 장치, 번역가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현상은 꽤 흥미롭다. 내가 번역가라는 직업을 설명할 때 종종 언급하는 책이 있다. 데이비드 즈와이그의 <인비저블>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겉으로 성과가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다룬다. 난 번역가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수록 좋으니까. 게이머가 게임 속 텍스트를 읽으며 “아, 이거 번역이네!”라고 느끼는 순간, 어딘가에서 이미 삐걱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읽히는 번역은 게이머의 기억에 거의 남지 않는다. 게이머는 번역문을 기억하기보다는 캐릭터와 이야기, 세계관과 게임 플레이를 기억한다. 번역은 그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경이지만, 동시에 그 배경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번역을 종종 무대 뒤의 조명처럼 비유한다.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조명 장치가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선 안 된다. 하지만 조명이 없으면 무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번역 역시 비슷하다. 번역이 제대로 흘러간다면 게이머는 그것을 거의 인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번역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모든 시선은 번역으로 향한다. 아, 물론… 좋은 시선이 아니라, 안 좋은 시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커뮤니티에서 밈이 되는 번역은 이 원칙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번역이 너무 눈에 띄어서, 너무 이상해서,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번역이 본래 지향하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이다. 게이머의 열망, 유저 번역의 시작 이런 기묘한 번역들은 사실 지금으로부터 약 20~25년 전, 해외 게임들이 ‘한국어 미지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국내에 들어오던 시기에 특히 많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해외 게임사가 정식으로 한국어 번역을 진행해 출시하는 일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한국 시장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현지화라는 개념도 지금만큼 체계적으로 자리 잡지 않았던 시기였으니까. 게다가 그 시절에는 ‘게임을 정식으로 구매한다’라는 문화적 인식 역시 지금과는 꽤 달랐다. 많은 게이머가 웹하드 사이트에서 게임을 내려받고, 포털 사이트에 ‘○○ 게임 한글판’이나 ‘○○ 한글 패치’를 검색하며 인터넷을 뒤지곤 했다. 몇 시간을 헤매다 결국 바이러스에 걸려 컴퓨터를 수리 맡기는 엔딩을 맞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찾아다녀도 한글 패치를 끝내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검은 건 글자요, 하얀 건 배경이니라’ 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곤 했다. 퀘스트 설명은 물론, NPC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 해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기묘한 플레이 방식이다.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로 퀘스트를 진행하고, 스킬 설명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로 스킬을 사용한다. 그런데도 게임은 이상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의미도 모른 채 버튼을 눌러 보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게임을 익혀 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모험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게임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동시에 ‘한국어로 게임을 하고 싶다’라는 욕구도 강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유저 번역과 한글 패치 문화였다. 개인이나 소규모 팀이 자발적으로 게임 데이터를 뜯어 번역을 만들고, 그것을 패치 형태로 배포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번역 품질은 들쭉날쭉했지만, 그 열정만큼은 놀라울 정도였다. 커뮤니티에서 이런 사람들이 ‘네임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 거의 뭐 연예인 저리 가라는 수준으로 인기를 구사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게임 파일 구조를 분석해야 했고, 텍스트 데이터를 추출해야 했으며, 때로는 프로그램을 직접 수정해야 했다. 그런데도 많은 게이머가 시간을 들여 자기들만의 번역을 만들었다. 순수하게 “이 게임을 한국어로 즐기고 싶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 시절의 번역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꽤 거칠었다. 문장은 어색했고, 용어는 제각각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문맥조차 맞지 않았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그 번역을 붙잡고 게임을 했다. 왜냐하면 그 몇 줄의 문장이야말로 게임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게이머를 게임 속 세상으로 이끄는 존재, 현지화 담당자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대부분의 대형 게임은 출시와 동시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현지화 과정도 훨씬 체계적으로 다듬어졌다. 현지화 담당자들은 용어집을 만들고, 세계관 설정을 확인하고, UI 글자 수를 맞추며, 필요하다면 개발팀과 소통하면서 문맥을 검증한다. 예를 들어 게임 번역에서는 단순히 문장을 옮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UI 버튼 하나에도 글자 수 제한이 있고, 아이템 이름이 너무 길어서 아이템 창을 벗어나거나 잘려선 안 되며, 캐릭터의 말투는 세계관과 어울려야 한다. 어떤 게임에서는 스킬 이름이 플레이 스타일을 암시하기도 하고, 어떤 게임에서는 아이템 설명이 세계관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게임 번역은 퍼즐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주어진 공간 안에서 의미와 어감을 모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이라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표현이 필요할 때도 있다. 대사인지, UI 문구인지, 아이템 설명인지에 따라 번역 방식이 달라지니까. 아, 물론 요즘에도 대부분의 중소 게임 회사에서는 퍼즐을 놓을 퍼즐 판조차 준비되지 않은 채로 번역을 들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번역 일을 시작한 뒤에는 게임을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야기를 따라가거나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UI 문장 하나, 스킬 이름 하나에도 눈이 멈춘다. “왜 이 표현을 썼을까, 왜 이 단어를 선택했을까, 글자 수 제한 때문에 이렇게 줄어든 것은 아닐까.” 게임을 하면서도 자꾸 번역의 흔적을 찾는 나 자신을 보면 ‘참, 이 게임도 제대로 즐기기에 글렀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야기에 날개를 달아주는 번역 조명 장치라고 말했지만, 사실 번역엔 조명 장치보다는 조금 더 능력을 뽐낼 기회가 존재한다. 문학성, 문장력, 흡입력… 같은 문장을 번역하더라도 번역가에 따라 결과물은 꽤 달라진다. 예를 들어 원문에 “He laughed.”라고 적혀 있다고 해보자. 가장 단순하게 번역하면 “그는 웃었다.”다.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피식 웃었다.”, “쓴웃음을 지었다.”, “껄껄 웃었다.”, “코웃음을 쳤다.” 같은 표현으로 바뀔 수도 있다. 같은 한 문장이지만 캐릭터의 성격과 장면의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런 순간은 의외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캐릭터 대사에서는 말투 하나만 바뀌어도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가 “Let’s go.”라고 말한다고 해서 항상 “가자.”라고 번역할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 “출발하지.”가 될 수도 있고, “가 보자고.”가 될 수도 있고, “따라와.”가 될 수도 있다.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같은 문장이 전혀 다른 온도를 갖게 된다. 그래서 게임 번역가는 종종 제2의 기획자가 되기도 한다. 원시 언어를 사용해서 최초의 이야기를 만드는 제1 기획자(대개 이야기 기획자, 시나리오 라이터 등), 그 이야기를 각 문화권에 맞춰 캐릭터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제2 기획자, 바로 나, 현지화 담당자. 번역이라곤 하지만, 결국 게이머들은 우리가 만든 번역문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기 때문에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지금 어떤 감정인지를 가장 나은 방법으로 게이머들에게 전달하는 게 바로 현지화 담당자이자 번역가인 우리들이 맡은 일이다. 사실 꽤 많은 경우에 원문 자체가 엉망인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경력 많고 경험 많은 현지화 담당자가 있다면 이런 원문의 부족한 부분을 번역으로 절묘하게 메꿔 꽤 볼만한 작품으로 탄생시키기도 한다. 가끔 이런 과정 속에서 특정한 문장이나 단어가 적절하게 번역되면 그런 걸 게이머들은 ‘초월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문과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히 대응시키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의미를 더 잘 전달하는 번역이다. 물론 이 영역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번역가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원문에서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가는 늘 두 가지 사이에서 줄타기하게 된다. 원문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독자에게 더 자연스럽게 다가갈 것인가… 일정은 어떤지, 번역을 만든 이후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내가 번역한 이 한마디가 게임에 언제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입혀지게 되는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니까. 어쩌면 번역이라는 작업의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문장을 두고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어떤 말투를 사용할지, 어디까지 자연스럽게 다듬을지 같은 고민을 말이다. 물론 이런 고민이 항상 눈에 띄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번역은 여전히 조명 장치처럼 조용히 뒤에 서 있다. 하지만 가끔은 번역 덕분에 캐릭터가 더 또렷해지고, 장면이 더 생생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면 번역은 단순히 문장을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이야기에 작은 날개를 달아주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이머가 바라보는 번역과 내가 바라보는 번역 가끔 커뮤니티에서 번역 이야기가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표현이 어색하다거나, 특정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게이머의 관점에서 그런 반응은 자연스럽다. 게임을 즐기는 과정에서 언어는 매우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요소기 때문이다. 다만 내 입장은 게이머들과 사뭇 다르다. 게이머들은 이백만 개의 글자 중 단 몇 개를 골라 자기가 원하는 바를 피력하지만, 현지화 담당자의 관점에서 그건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글자 수 제한, UI 레이아웃, 기존 용어와의 통일성, 세계관 설정 같은 여러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번역이 특별히 변명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뜻은 아니다. 번역은 결국 돈을 받고 번역이라는 작업을 한 ‘작업자’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자, 마지막으로 ‘고객’인 게이머에게 전달되는 결과물이다. 문장이 어색하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더 나은 문장을 고민하는 편이 옳다. 다만 게임 번역이라는 작업이 생각보다 많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게이머’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없진 않다. 마치 맛없는 요리를 내놓은 요리사 주제에 요리의 과정에서 발생한 노고를 알아달라는 말처럼 이기적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힘세고 강한 아침” 같은 문장이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 문장은 분명 이상하지만, 동시에 게임 번역의 역사 속 한 장면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게임을 전달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행착오가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이니까. 생각해 보면 번역은 늘 그런 일을 한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그 다리가 때로는 삐걱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 다리를 건너 게임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게이머가 번역이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그 세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면, 아마 그 번역은 제 역할을 꽤 잘 해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난 내가 번역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참 즐겁게 생각한다. 게이머들에게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계를 선물할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즐겁기 때문이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는 최고의 작품을 선물하는 게 목표지만, 그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최소한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게이머를 위해’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병욱 게임을 사랑하고, 이야기를 사랑하고, 그만큼 게이머를 사랑하는 번역가이자 작가. 캐릭터의 감정과 세계관을 말보다 섬세한 호흡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 물론 짝사랑이다 보니 가끔 게임에게 차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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