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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 Back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12 GG Vol. 23. 6. 10. *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2. 괄호에 숫자로 페이지만 표시한 것은 모두 상기 책의 인용이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응우옌은 이 책에서 이렇게 분투하는 플레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해 나간다.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회의론자들의 반박들을 논파하면서 어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방법론으로 게임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 『게임: 행위성의 예술』 표지 이미지 응우옌의 논의는 게임 담론 내부의 논쟁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학, 예술학 등 게임과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담론장까지 면밀히 검토하면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것을 통해 게임을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규정하고, 예술로서 게임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책 전반에 깔려있는 철학자 특유의 논법은 (그가 베트남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철학/미학 담론 안에서만 대부분 작동하는데, 이는 내재적인 논리를 단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 논하겠지만 이토록 정교한 논의를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근본적인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이 책은 차라리 게임의 존재론이거나 게임을 통해서 삶을 대하는 방법을 돌아보는 윤리학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게임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까지 생각하도록 만든다. 또한 응우옌이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인터페이스 장치 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고 즐기는 디지털 비디오 게임뿐만 아니라 보드 게임, 등산, 술자리 게임, 나아가 사랑까지 포괄하면서 삶 그 자체까지 나아간다. 앞서 말을 꺼냈듯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핵심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응우옌이 고안한 개념이 아니라, 버나드 슈츠의 개념을 가져와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 책의 초반부의 대부분은 슈츠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분투형 플레이의 회의론자들, 특히 성취형 플레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논파해 나가는 내용이다.) 우리는 게임을 할 때 무조건 이기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때로는 심지어 이겨버리는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76) 게임이 쉬워져서 난이도를 보다 어렵게 조정하는 상황이나 애인과 보드게임을 하는 상황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헨리 시지웍의 ‘쾌락주의의 역설’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설명한다. 쾌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를 비우려고 하면 절대로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오직 다른 목표에 헌신해야만 그러한 쾌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요가는 특정한 자세를 취하는 육체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손을 뻗어서는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영적 효과에 가닿으려는 행위성의 형식이다. 학부 시절 즐기던 술자리 게임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술자리 게임에서 기를 쓰고 이기려고만 한다면 그 게임은 아무런 재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술자리 게임을 통해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서 서로 웃고 친해지는 것이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진짜 목적이다. 〈트위스터〉 같은 게임을 통해서도 분투형 플레이의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제한된 행위성을 통해서 결국 넘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일부러 넘어지면 재미가 없어진다. 진짜로 실패하여 넘어졌을 경우에만 재미가 생긴다. 진심으로 게임이 제안하는 어떤 동작을 하려고 최선을 다할 경우에만 진짜 실패가 되어 모두가 크게 웃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성공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성공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이렇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goal)와 목적(purpose)이 어긋나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을 취한다면,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수단을 취하기 위해서 결과를 추구한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러면서도 일시적인 목표에 제대로 몰입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게임 속 목적에 완전히 몰입해야만, 목표는 추구될 수 있다. 게임의 과정을 즐기려면 일시적으로 승리에 대한 관심을 철저하게 장착해야한다. 누군가 게임에 진지하게 몰입하지 못한다면 그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금방 재미를 잃고 만다. 이것이 분투형 플레이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응우옌은 게임과 사랑을 비교하기도 한다. 사랑의 경우 목표에 대한 진심 어린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자신의 감정을 도구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릇된 나르시시즘이다. 심할 경우 스토커가 되어버린다. 게임에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 속 목표에 그토록 진정성 있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가 일시적이고 인공적인 형식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부루마블〉을 할 때, 게임 속 씨앗은행 화폐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던 게임이 끝나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종이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부루마블 속 화폐를 계속 소중하게 여겨서 게임이 끝난 뒤에도 마차 상자 안에 넣지 못하고 지니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만해도 살짝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논할 때, 오늘날 온라인 게임들의 화폐가 실제 세계의 화폐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응우옌의 책에서 이러한 문제는 의도적으로 간과되어 있다.) 한국 맥락에서 〈리니지〉 작업장 같은 사례를 떠올린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게임과 노동의 구분이 사라지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게임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게임은 특정한 방식으로 형식화된 환경과 행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게임 속 목표들은 현실과 달리 굉장히 명료하다. 현실에서는 그토록 뚜렷할 수 없는 것들이 게임에서는 목적론적으로 명백한 것으로 재구성된다. 수치화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기도 한다. 삶을 그 자체로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은 삶의 목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문제를 낳는다.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다시 돌아와, 분투형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목표들에 일시적으로 헌신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변덕스러움이 요구된다. 기존의 행위성 관련 논의들은 행위자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분투형 플레이는 행위성에 여러 가지 유의미한 불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100) 행위성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긴 시간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을 장착할 수 있는 인간 행위성의 유동적인 역량과 자율성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분투이다.(98) 그렇기에 게임 속 목표가 일회용이라는 점은 게임이 허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라는 매체가 행위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식화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측면이 된다. 게임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게임의 목표와 규칙, 그리고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제약 체계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환경 등을 고안한다. 게임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실천적 행위성, 그리고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을 통해 특정한 실천적 경험을 조형해 내는 것이다. 이런 형식화의 차원에서 게임을 예술적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임 디자이너의 매체는 행위성이다. 하나의 표어로 만들어 보자면,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이다.”(35) 예술은 특정한 형식을 가지고 미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응우옌은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형식을 통해서 미적 경험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과 플레이어가 취할 일시적 행위성을 형식으로 삼아서 우리에게 특정한 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의 아름다움은 행위가 형식화된 제약 속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게 제한되는 조건이 여기에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게임 디자이너의 형식이기도 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 경기에서 페이커의 플레이가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움직임의 절대적인 형태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의 엄밀한 규칙의 체계 안에서 게임의 목표와 관련된 엄청난 행위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문제는 제한된 행위성의 형식 안에서 성공만이 예술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위성을 제한하면서 발생하는 실패나 부조화에서도 예술성을 드러난다. 키보드의 QWOP 버튼만을 이용해 다리의 관절을 제각각 조정하여 달리기를 해야하는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일부러 조작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형식 안에서 제대로 한번 달려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 자체가 그 게임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 베네트 포디(Bennett Foddy)가 2008년에 만든 게임 〈QWOP〉. 출처: https://www.foddy.net/2010/10/qwop/ 게임은 이렇게 특정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위의 형식으로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타당하고, 오늘날 게임과 예술을 둘러싼 논쟁적인 담론에서도 중요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응우옌의 논의를 딛고서 다시, 게임이 왜 예술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범주와 관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필요하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면서 음악이나 회화 같은 예술의 매체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모더니즘적 장르 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게임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영역을, 예술을 통해서 게임이라는 영역을 불안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가 예술에 편입되면서 발생했던 과거의 논쟁들을 변증법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한편으로 이 책에는 니콜라 부리요나 권미원 같이 미술계에서는 낯익은 필자들도 등장한다. 응우옌은 사회적 관계나 공동체에 관련된 예술 형식을 논하는 관점을 게임에 적용하며 니콜라 부리요의 논의를 빌려온다. “예술은 특수한 사회성을 생산하는 공간이다.”라는 니콜라 부리오의 말을 빌려와 게임도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282)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의 미학』에서 관계를 다루는 예술 작업들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이례적이고 특수한 관계적 상황을 창출한다며 옹호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지는 관계가 ‘작은 유토피아’를 창출한다는 그의 주장은 다양한 차원의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그러한 관계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클레어 비숍의 논의는 굉장히 유효한 비판이다. 물론, 응우옌이 책에서 언급하는 게임이 모두 니콜라 부리오식 관계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행위와 관계를 통해서 적대를 감각할 수 있는 사례들에 대한 언급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렌다 로메로가 2009년에 만든 보드게임 〈기차〉에서 플레이어들은 기차를 운행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나중에 그 기차가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나치의 기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브렌다 로메로(Brenda Romero)가 2009년에 만든 게임 〈기차(Train)〉. 출처: http://brenda.games/train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에는 저자성의 문제도 있다. (보통 한명의) 예술가가 정해진 미적 형식을 인준하고 통제하는 전통적인 저자성은 굉장히 근대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관념이다. 응우옌의 논의에는 게임을 전형적인 예술의 개념틀에서 비추어 보기 위해 게임 디자이너를 전통적인 예술의 저자로 상정하는 문제가 전반에 깔려있다. 응우옌은 12쪽 각주 2번에서 게임 디자이너가 복수의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짚으면서도 논의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한명인 것처럼 상정할 것이라고 쓰는데, 오히려 게임의 저자가 한명일 수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성의 문제는 단지 게임을 제작하는 관점에서만 중요한 논의가 아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저자성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해 생각해야한다. 반갑게도 응우옌은 책의 후반부에 게임의 아름다움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미적 책임이란) 게임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사이에 복합적으로, 예술가와 관객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책임이 주로 플레이어에게 있고 다른 경우에는 디자이너에게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책임은 복합적인 협업의 형태를 띤다. 이 경우, 게임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미적 효과의 상당수를 성취하고, 그 최종 결과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미적으로 귀속된다.”(253) 이러한 언급은 이 책에서 게임의 미적 역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디자이너가 의도하지 않은 행위성을 발생시키는 플레이어의 역능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행위성의 제약을 위반하거나 허점을 찾아내는 플레이어들이 있다. 주어진 역량을 의심하고, 게임 자체를 전유해 버리는 플레이어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비틀어 ‘해방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역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해방된 플레이어들은 단지 주어진 행위성을 가지고 노는 정도가 아니라, 게임을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게임에서 서로를 죽이지 않고 함께 산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는 플레이어들을 떠올린다. 바로 이런 곳에서 미학(감각)의 정치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사유할 틈을 만들어 낸다. 응우옌의 논의를 이러한 관점과 함께 밀어붙여 볼 수도 있다. 그가 게임과 게임 플레이의 자율성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이 고안한 제한된 행위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행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되고 형식화된 행위성이 그곳에 있다는 점이다. 게임은 형식화된 행위성들의 다발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게임을 통해서 다양한 행위성들의 라이브러리를 탐험하게 된다. 혹은, 서로 다른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여러 가지 행위성들을 넘나들 수 있게 된다. 게임이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 예술이라면, 그것이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예술적이다.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는) 우리에게 여러 행위성을 넘나들고, 완전히 상충하는 여러 유형을 오갈 것을 요구한다.”(341) 심지어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의 상충되는 태도를 종합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명료하게 조직화된 가치들 사이를 오가며 가치에 대한 어렵고 세심한 질문을 던질 것을 주문받는다. 응우옌이 보기에 게임은 이런 방식으로 명료성과 유혹의 쾌를 폐기한 뒤, 가치를 대하는 세밀함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 “게임의 구조는 우리의 자율성 전체를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다.”(125)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특정한 방식의 행위성에 순응하도록 만들지만, 우리는 그런 게임을 통해서 행위성 자체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성이 제한적으로 형식화되어 있기에 해방적으로 전유할 가능성도 열린다. 응우옌은 우리가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를 통해 특정한 실천적 틀에 너무 집착하거나 너무 명료한 목표를 고수하지 않을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딘가에 푹 빠졌다가 또 빠져나오고, 깊게 몰입했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는 방법을 게임을 통해서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형식화된 행위성을 통해서 행위의 역량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게임이라는 가장 목적론적인 체제를 통해서 세계가 목적론적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상황을 다시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내는 일이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책을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1) 이러한 논의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C. 티 응우옌의 또 다른 논고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글에서 응우옌은 예술 감상 또한 고투의 과정이라고 쓴다. 예술 감상은 결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술 감상에 목표(goal)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술품 앞에서 가이드북이나 미술사 교과서만 읽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예술을 감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삶이 예술작품으로써 결말이 열려 있는, 끝나지 않는 대화가 되기를 바라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변으로써 끝나버릴 무언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옮긴이 이동휘의 블로그: http://economic-writings.xyz/text/textblocks1/art_is_a_game.html Tags: 행위성, 응우옌, 행위성의예술, 북리뷰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 도시 밖도 자본의 바깥은 아니다 - 〈동물의 숲〉과 자본주의

    ‘문명 6’에 등장하는 ‘쇼핑몰’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업지구가 아닌 주거지역에 지을 수 있는 건물로 등장한다. 건물의 효과 또한 쇼핑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조금 다른데, 단순히 상업수익이 나는 곳이 아니라 거주민의 쾌적도와 지역의 관광을 크게 올려주는 효과가 핵심이다. 우리의 여가는 시스템 밖을 꿈꾸지만, 그 밖을 향하는 경로까지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상품화한다. 설령 무인도에서의 고요한 삶을 꿈꾸더라도 그조차도 Inc. 가 붙은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숲〉의 설정은 애초에 그런 삶을 생각하며 게임 시스템에 접속하게 되는 시대에 대한 거친 스케치로도 읽힌다. < Back 도시 밖도 자본의 바깥은 아니다 - 〈동물의 숲〉과 자본주의 04 GG Vol. 22. 2. 10.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하 〈동숲〉)은 여러 모로 게임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다. 새로운 콘솔 플랫폼이었던 ‘스위치’의 흥행에 일조했으며, AAA급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전통적인 게이머 타겟층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붐을 일으켜 한편으로는 게이머의 범주 확장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동숲〉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붐을 일으키며 게이머가 아닌 이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수 있는 수준의 흥행을 가져왔다는 점은 이 게임의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널리 퍼져나가는 게임은 그만큼 사회와 관계맺는 영향력의 면적 또한 넓을 수 밖에 없다. 하나의 게임이 만들어낸 세계와 그 세계의 법칙은 내적 완결성을 갖추고 아름답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게임이용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작위 팀 매칭 기반의 협업 플레이라는, 마치 대학교 조별과제 같은 협업의 방식을 일상화시킨 것과 비슷하게 〈동숲〉의 게임 구조 또한 플레이어에게는 일련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물론 그 메시지가 대단히 강력한가,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부분이 많지만, 한 게임이 제시하는 완결된 세계가 주는 메시지의 의미 자체를 살펴보는 일은 그리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게임은 깊게든 얕게든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사는 세계 혹은 우리가 상상하는 세상에 대한 해석과 재현으로 이루어진다. 〈동숲〉의 게임규칙 또한 이러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인도에 정착해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휴양의 섬은 누구의 것인가? 〈동숲〉은 기본적으로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강렬하게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는 요구를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플레이어는 휴양과도 같은 목적으로 준비된 무인도에 입도하며, 거기서 간단한 텐트를 치면서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한다. 무엇을 하건, 언제까지 하건 딱히 게임은 급하게 달성해야 할 무언가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매우 느리고 담담한 템포가 게임 전반을 지배한다. 그러나 느린 템포가 곧 게임이 완전한 샌드박스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동숲〉은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플레이어로 하여금 도전해야 할 다음 과제를 은근하게 제시하며 게임의 진행에 일련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텐트로 만들어진 집은 조금씩 튼튼하고 넓은 집의 모양으로 발전해 나가며, 낚시와 수집의 결과물들은 박물관과 수족관 안에서 빈 자리를 채워나가며 쌓여간다. 게임이 제시하는 이 모든 과제들은 제한시간 내에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게임을 진행시키기 위해 거쳐야 할 요소들로 제시된다. 도전을 요구하는 갈등을 제시하는 게임의 방식은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를테면 집 구매를 위한 대출의 방식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인 플레이 결과로는 〈동숲〉에서 플레이어는 집 건축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 충분한 금액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다. 매우 자연스럽게도 너구리는 플레이어에게 ‘그래서 대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를 제시하고, 플레이어 또한 자연스럽게 이 대출을 받아들이며 집의 개축이 시작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표면적인 방식은 동일하지만, 이때부터 〈동숲〉의 플레이는 조금 달라진다. 기존의 방식이 되는대로 플레이하며 돈을 모으는 식이었다면, 대출 이후부터는 원금상환을 위한 플레이로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상환이 돈으로만 이뤄지지는 않는다. 게임 안에서는 딱히 돈을 크게 벌 만한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으며(단 하나의 예외는 후술한다) 오히려 여러 활동으로 쌓는 마일리지 포인트가 주요 대출상환의 방법으로 이용된다. 상환의 압박은 현실처럼 거세지 않고 다양한 방법, 무기한에 가까운 상환기한처럼 유연하게 제시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구조인 대출 – 상환 시스템이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니다. 대출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동산(집)을 구매하고 개축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는 보편적인 일로 다가오긴 하지만, 게임에서의 방식은 흔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른 방식, 돈을 모아 집을 사는 일과 비교해볼 때 그 효과가 잘 드러난다. 더 넓고 많은 장식물과 비품을 갖춰둘 수 있는 좋은 집을 갖기 위해 먼저 막대한 자금을 열매 주워팔기와 물건만들어 팔기로 시도한다고 생각해 보자. 집의 효용을 맛보기 전까지 이런저런 활동으로 푼돈을 모으는 시간은 길고 지루해진다. 그러나 자금이 충당되기 전에 먼저 집 공사가 시작되고 대출장부에 이름만 올라가는 〈동숲〉의 방식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대출자금의 긴 상환을 잊게 만들 만큼의 효용을 제시한다. 이는 게임 디자인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부동산과 같은 고가의 거래물이 대출을 끼고 돌아가는 매우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차피 장기간에 걸친 축적으로만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적절한 신용보증이 되는 상황이라면 효용을 먼저 누리고 천천히 자금을 갚아 나가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먼저 누리고 나중에 내되, 선불과 후불만큼의 시간차는 금리로 계산되어 상환액에 포함되는 것이 오늘날의 대출 구매 방식이다. 〈동숲〉은 표면적으로는 대자연 속의 힐링, 복잡한 도시를 떠난 무인도에서의 맑고 아름다운 삶을 제시하지만 그런 삶의 중심을 이루는 주택구매라는 포인트는 자연속의 힐링이라는 주제와는 사뭇 다른,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핵심이 뼈대에 자리한 대출구조를 통해 연출된다. 비슷하게 무인도의 삶을 소재로 삼았던 게임 〈심즈 2: 캐스트 어웨이〉는 (물론 여기는 조난에 가까운 상황이지만) 섬에서의 삶을 구현할 때 별도의 화폐경제나 대출 같은 방식이 포함되지 않는다. 같은 무인도의 자연 속 삶이지만 〈동숲〉은 여기가 현대 문명과 완전히 동떨어져있지 않은 곳임을 건축회사와 대출구조, 상점 등을 통해 끊임없이 플레이어에게 주지시킨다. 많은 이들의 탄식과 환호성을 불러왔던 게임 속 시스템인 ‘무 상인’의 존재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 일요일마다 방문하는 행상 ‘무파니’의 무는 딱히 다른 용도가 주목받지 않는, 말그대로 투자수익을 위한 미니게임의 용도로 게임 안에 의미지어진다. 막대한 채무를 손쉽게 돌파할 수 있는 루트로서의 무 투자는 마일리지 도전과제가 있을 만큼 추천되는 플레이인데, 무 값의 변동은 게임 내 다른 요소들과 완전히 무관하며 오직 매수가와 매매가의 차이만이 중요하게 다뤄질 뿐이다. 평화로운 섬에서의 휴양 중에 그것도 매주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무파니’의 존재 또한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연에서의 휴양이라는 컨셉과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다. 〈동숲〉, 사이버공간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스타필드'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풍광에서의 휴양이라고는 하지만 〈동숲〉이 보여주는 그 힐링의 현장은 우리의 이상과는 다르게 매우 자본주의적인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힐링공간이다. 플레이어가 전입해 온 이 평화로운 섬에 먼저 와 기다리는 것은 너굴 주식회사의 인프라임을 게임 도입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곤충채집과 조개줍기, 낚시와 정원가꾸기는 모두 너굴 주식회사가 제공하는 휴양 프로그램의 일환임을 게임은 시작부터 끝까지 여러 가지 요소들을 통해 강조한다. 휴양을 위해 도시는 벗어났지만, 플레이어는 여전히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날 수 있는 출구로서의 무인도 또한 주식회사라는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경로이며, 낭만적인 휴양도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인프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동숲〉은 시사한다. 심지어 그 시스템이 부과한 채무를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 또한 일종의 투자 게임인 무 투매라는 점에서 〈동숲〉이 제시하는 휴양의 세계는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우리가 늘 동경하고 욕망하는, 세계의 짜여진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조차도 결국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 욕망을 포착하고 만들어낸 상품일 뿐이라는 점에서다. 〈동숲〉이 드러낸 현대인의 여가와 휴양에 관한 단면은 실제 현실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주말의 여가를 위해 이른바 ‘교외’로 불리는 곳을 향해 나들이를 떠난다. 실제로 도시의 삭막한 환경을 벗어나 산과 강을 찾기도 하지만, 그 교외에 위치한 복합 엔터테인먼트 쇼핑몰들의 존재는 〈동숲〉이 보여준 상품으로서의 휴양을 현실에서 만나볼 수 있는 좋은 예시들이다. ‘스타필드’와 같은 브랜드 쇼핑몰들은 도시의 번화가에 자리한 백화점과 달리 ‘교외’를 중심으로 자리잡으며, 방문객들로 하여금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쇼핑’이라는, 소비와 여가를 결합시킨 활동을 통해 소비자들로 하여금 상품관계 속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문명 6’에 등장하는 ‘쇼핑몰’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업지구가 아닌 주거지역에 지을 수 있는 건물로 등장한다. 건물의 효과 또한 쇼핑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조금 다른데, 단순히 상업수익이 나는 곳이 아니라 거주민의 쾌적도와 지역의 관광을 크게 올려주는 효과가 핵심이다. 우리의 여가는 시스템 밖을 꿈꾸지만, 그 밖을 향하는 경로까지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상품화한다. 설령 무인도에서의 고요한 삶을 꿈꾸더라도 그조차도 Inc. 가 붙은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숲〉의 설정은 애초에 그런 삶을 생각하며 게임 시스템에 접속하게 되는 시대에 대한 거친 스케치로도 읽힌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눈 먼 돈 사냥: 멈춰버린 메타버스와 살아있는 메타버스 진흥법

    그 시절의 보도자료 중 대부분은 메타버스-NFT&P2E 소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기업이 '메타버스'를 선언했다. 게임사는 물론이고 통신사, 제조사, 심지어 은행까지 너도나도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보도자료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실체가 모호한 가상공간 그림 몇 장에 'MOU 체결', '생태계 확장', '미래 선도' 같은 단어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메타버스를 완성할 열쇠처럼 여겨졌다. < Back 눈 먼 돈 사냥: 멈춰버린 메타버스와 살아있는 메타버스 진흥법 25 GG Vol. 25. 8. 10. 지금으로부터 대략 5년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모두가 집 밖을 나가기 꺼리던 시절, 필자가 재직 중인 회사에서도 유례없는 재택근무를 실시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으로 가득 찬 출근길 지하철을 탈 수 없다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보도자료를 읽던 때였다. 필자는 또렷이 기억한다. 잠옷 바지에 와이셔츠를 챙겨 입고 화상인터뷰를 했던 나날들을. 공교롭게도 그 시절에는 읽을 만한 보도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야외활동 대신 집에서 게임을 즐기라는 세계보건기구의 조언 덕인지 게임 유저는 날로 늘어갔고 매출도 잘 나왔지만, 모두가 원격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기여서 정작 다룰 만한 신작 소식은 드물었다. 여러 주요 기업들은 개발자들에게 파격적인 연봉 인상을 제안하면서 화제가 됐고, '단군 이래 최대 연봉 인상 직종'이라는 농담까지 돌았다. 그 시절의 보도자료 중 대부분은 메타버스-NFT&P2E 소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기업이 '메타버스'를 선언했다. 게임사는 물론이고 통신사, 제조사, 심지어 은행까지 너도나도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보도자료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실체가 모호한 가상공간 그림 몇 장에 'MOU 체결', '생태계 확장', '미래 선도' 같은 단어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메타버스를 완성할 열쇠처럼 여겨졌다. 과문한 필자의 눈에는 대단히 기이한 광경이었다. 수십 년간 'MMORPG' 또는 '가상세계' 내지는 그냥 '게임'이라고 불러온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메타버스'라는 이름표를 달고 미래를 구원할 신개념으로 등장한 것이다. 필자와 비슷한 공감대를 가진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으나, 이 광풍은 수년간 꺼질 줄 몰랐다. 돌이켜보면 좋지 않은 어감의 게임 대신에 '메타버스'라는 비전을 판매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게 투자를 유치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 소란스러운 시장의 움직임을, 정치권에서는 '새로운 기회'의 신호로 읽었다. 기업들이 열광하고 언론이 떠드는 이 '메타버스'라는 것을 국가적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조급증이 퍼져 나갔다. 2025년, 지금 미디어에서 메타버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극히 줄어들었다. 그때 메타버스가 온다던 분들은 지금 인공지능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혹스럽다. 물론 인공지능과 메타버스의 결합을 추구할 수 있을 일이지만, 이렇게도 하나의 개념이 반짝였다가 수그러들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지금부터 필자가 하려는 이야기는 제법 씁쓸하다. 기술 유행어에 편승한 보여주기식 정책이 어떻게 산업 생태계를 왜곡하고 '눈먼 돈'의 향연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소극이자 비극이다. 메타버스의 홍보에는 이런 이미지가 왕왕 쓰였다. (출처: 블록체인어스) # 눈 먼 돈 사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기왕 과거로 온 김에 시계를 조금만 더 돌려보자.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행어가 널리 유포되던 2016년 10월, 정부는 VR을 '9대 국가전략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정하며 본격적인 육성에 나섰다. 2020년까지 VR 전문기업 50개 육성, 1조 원 규모의 신시장 창출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가 제시됐다. 언론은 연일 VR이 게임과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국방, 의료,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쏟아냈다. 이에 발맞춰 과기정통부와 문체부는 수천억 원의 R&D 및 콘텐츠 제작 지원 예산을 편성했다. 전국의 지자체들은 앞다퉈 VR 체험관을 구축하며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예산 편성 소식에 전국의 연구자들과 기업도 발빠르게 반응했다. '다누리 엔진'도 그중 하나였다. 2015년부터 7년간, 357억 원의 세금이 투입된 국책 사업이다. 국산 VR 엔진과 저작도구를 개발해 외산 기술에 대한 종속을 끊고, 'K-VR' 생태계를 자립시키겠다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 VR 엔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실제로 현장에서 사용하는 사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6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의 감사 결과로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났다. 감사를 해봤더니 연구를 주관하는 기관이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실제로 엔진을 개발하지 않았다. 이들이 일을 맡긴 민간 기업이 가지고 있던 외산 엔진(아마 두 엔진 중 하나일 것이다)의 소스코드를 거의 그대로 복사해 '다누리'라는 이름만 붙여놓고는 "자체 개발한 국산 엔진"이라며 허위로 보고했다. 이뿐 아니라 이 엔진은 실사용이 불가능한 미완성 상태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책임연구원은 자신의 제자가 창업한 업체에 7억 원 규모의 용역을 몰아주고, 공동연구기관으로부터 1천만 원의 현금을 받는 등 개인 비리까지 저지른 정황이 포착됐다. 국산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기술 사기와 부패가 공공연하게 벌어진 것이다. 이 '다누리 엔진' 사건은 뒤늦게 알려져 충격을 주었으나 어떻게 보면 수면 위로 드러난 하나의 관행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특별하거나 일회적인 일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습은 필자가 반복적으로 목격해 온, 기술 유행을 좇는 '눈먼 예산'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산업 생태계의 단면에 불과하다. 팬데믹 시절, 필자가 메일로 받은 무수히 많은 보도자료는 대체로 그 유행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눈 먼 돈 사냥 생태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필자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눈먼 돈 사냥’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 과제가 뜰 수 있도록 외곽에서 부채질을 한다. VR나 메타버스는 거기에 동원된 중요한 개념어였다. 공무원들이 설득되고 정부 과제 공고가 뜬다. 이때 일을 쉽게 만들기 위해 산학협력단 또는 컨소시엄을 조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사업계획서에는 온갖 유행어가 삽입된다. 때로는 내부자의 비호 아래 기술도 경험도 없는 업체가 수억 원의 용역을 수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선정된 기업들은 단기 결과물 납품에만 집중할 뿐, 지속적인 서비스 운영이나 고도화에는 관심이 없다. 만들어서 납품하면 시쳇말로 ‘땡’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인력은 흩어지고, 결과물은 방치된다. 전국적으로, 장기적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부터 하나씩 그 예를 불러드리겠다. 오세훈 시장이 65억 원을 투입하고도 하루 이용자 수백 명을 넘기지 못한 채 사라진 <메타버스 서울>, 10억 원을 들여 만들었으나 조악한 품질로 외면받은 <잼버리 메타버스>와 새만금의 실물 체험관, 통영 VR존, 광주 VR/AR 제작거점센터, <메타버스 대구>, <부산 메타버스>, <전주·익산 도서관 메타버스>, <강원 청소년 동계올림픽 메타버스>, 이밖에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VR, 메타버스 제작 지도 자격증과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들… 정부의 VR 사업 진흥 정책으로 본격화된 업계의 관행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흐름을 타고 메타버스라는 유행을 만나게 됐다. 수십억 규모의 메타버스 지원 사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팬데믹이 끝난 지금도 활발하게 서비스되는 메타버스는 사실상 없다. 돈만 쓰고 활용도가 지극히 낮은 결과물만 남게 된 것이다. 소프트웨어로 제작된 프로젝트는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 이제 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다누리 엔진이라는 것이 있었다. 2016년 정부는 VR을 미래 먹거리로 제시했지만,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누리 엔진은 특별한 먹거리를 만들어주지 못했다. (출처: 다누리 엔진) # 후일담이 되었어야 할 이야기 ‘가상현실’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이제는 잠잠해졌다. 우리는 일상을 회복했고, 메타버스는 빠르게 잊혀져 갔다. 팬데믹도, 메타버스 유행도 끝났지만, 지금은 법이 남게 됐다. 후일담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른바 '메타버스 진흥법'이 통과되어 법전에 명문화됐다. 미증유의 아이러니다. 2024년 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같은 달 8월 시행을 시작한 가상융합산업 진흥법은 전 세계 최초의 메타버스 진흥 법률이다. 과기정통부 장관으로 하여금 3년마다 '가상융합산업 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 기관을 지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우선 허용, 사후 규제' 원칙을 적용해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에 대해 법령이 없거나 불분명할 경우, 일단 허용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규제하는 원칙을 명문화했다. 또 정부 주도의 직접 규제보다는 민간 중심 자율규제를 지원하는 체계를 구성했다. 이 법은 논의 단계에서부터 현행 '게임산업법'과의 중복 및 충돌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문체부는 메타버스 안에 게임이 있다면 당연히 게임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제페토>와 <이프랜드> 등의 메타버스가 등급분류를 피하게 되고, P2E의 뒷문을 열어버리면 또 다른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네이버제트를 포함한 업계와 과기부는 메타버스를 게임과 다른 새로운 산업으로 보고, 게임법의 엄격한 규제를 피하려 했다. 결국 접점은 '메타버스 안에 게임이 있다면 게임법의 적용을 받는다'라는 애매한 지점에 형성되었고, 혼란이 해결되기 전에 네이버제트를 제외한 다수의 사업자들이 메타버스에서 한 발 빼면서 지금의 애매한 형국이 나타나게 됐다. 업계는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설명하다가, 자신이 설명하려던 사업을 접어버렸고, 법은 남아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과기부 장관의 기본계획 정도가 거의 유일한 쟁점인데, 정부가 의지가 있다면 전문인력 양성과 연구 개발 기반 조성을 위한 국책사업을 펼칠 수 있다. 그동안 필자는 이 국책사업이라는 것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관해서 길게 설명해드렸다. 여기서는 그만 이야기하겠다. 지난 상반기, 서울회생법원은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사 컬러버스에 파산을 선고했다. 컬러버스는 카카오가 주도하던 프로젝트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SKT의 <이프렌드>도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 국내 주요 게임사들의 여러 메타버스 프로젝트도 거의 빛을 보지 못했다. 미래를 예견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지금까지의 메타버스는 명백히 실패했다. 과거를 점검하고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포스트모템이나 백서라도 잘 남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자들은 그런 일도 하지 않았다. 공공의 지원사업은 물론이요 사기업의 메타버스가 얼마나 근시안적인 프로젝트였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하긴 페이스북도 메타로 사명을 바꾸었으니 국내 기업만 탓할 일은 아니다. 혹자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메타버스의 조합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으나 그 물꼬도 좀처럼 트이지 않고 있다. 화려한 구호와 넘치는 지원사업 대신에 냉철한 평가와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한국형 인공지능을 다누리 엔진처럼 만들 수는 없을 일 아닌가. 정부가 추진 중인 가상융합세계 분야 규제 개선방안 도출 과정표. 과기정통부는 아직 이 계획에 대해 입장을 업데이트하지 않고 있다. (출처: 과기정통부) Tags: 게임산업, 정책, 공공기관, 메타버스, 산업진흥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This is a Title 02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This is a Title 02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Want to view and manage all your collections? Click on the Content Manager button in the Add panel on the left. Here, you can make changes to your content, add new fields, create dynamic pages and more. You can create as many collections as you need. Your collection is already set up for you with fields and content. Add your own, or import content from a CSV file. Add fields for any type of content you want to display, such as rich text, images, videos and more. You can also collect and store information from your site visitors using input elements like custom forms and fields. Be sure to click Sync after making changes in a collection, so visitors can see your newest content on your live site. Preview your site to check that all your elements are displaying content from the right collection fields. Previous Next

  •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 Back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03 GG Vol. 21. 12. 10. 잘못된 전제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게임은 원래 ‘손맛’이 아니라 ‘보는 맛’이라 우기는 광고 카피. 적잖은 게이머들은 “게임은 플레이할려고 하는 거 아닌가? 본질을 없애버리네!”같은 댓글에 동의하고 공감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진행되는 게임을 게임이라 부를 수 있는가? 키보드나 마우스로 입력을 하고 그래서 점수든 승리든 목표를 달성하는 것, 즉 게이머와 게임 텍스트의 상호작용이 게임의 매체적 본질 아니던가?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켜놓고 연예인들이 박장대소하며 히히덕대는 장면들을 멍하니 쳐다보는 카우치 포테이토족의 모습과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역동적인 게이머 모습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수동적 텔레비전 시청자와 능동적 게임 플레이어의 구분은 꽤 오랜 기간 양 미디어의 본질적 차이인 것처럼 여겨졌다. 직관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본다”는 것은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수동적인 행위라는 전제가 있고, ‘상호작용성’이야말로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차별되는) 게임의 매체적 본성이라는 전제가 있다. 크게 의심받지 않던 이 전제들. 최근,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들이 자꾸 생긴다. 자기가 게임을 하는 대신 남들이 게임하는 모습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내가 조작을 하는 대신 기계가 알아서 내 캐릭터를 육성시켜주는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키보드에서 손 떼라는 게임도 나왔고, 성공했다. 우리가 뭔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보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 게으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흘긋) 보다(see)”와 “바라보다(look)”는 구별되어야 한다. 일상적 삶에서 우리 시선이 어떤 대상들에 우연히 머물거나 스쳐가는 상황이 아니라 목적성과 방향성을 가진 자발적인 행동으로서의 ‘바라봄’은 바라보는 ‘실천 행위’이다. 길가에서, 술집에서, 운전을 하다가, “뭘 봐, 인마!”라는 마술같은 네 글자로 인해 싸움이 일어나고 목숨이 왔다갔다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해변에서, 클럽에서, 응시하는 자와 시선을 피하려는 자의 줄다리기는 드문 일이 아니다. CCTV로 잠재적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편의점 사장이나 몰래카메라로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변태 범죄자에게 ‘바라봄’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힘 있는 행위이다. 시선만으로도 권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감옥의 간수와 죄수는 이 명제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사례다. 푸코(Michel Faucault)가 19세기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원형 감옥의 작동 원리를 설파할 때, 그 핵심은 시선의 권력이 내면화된다는 점이었다. 중앙 첨탑에서 죄수의 방을 비춘다면 죄수는 첨탑의 간수를 볼 수 없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일차적인 권력의 자원이 된다면, 그가 지금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가 정한 규율과 표준을 내면화하여 행동해야 하는 것이 권력 작동의 최종 결과가 된다. 간수는 시각의 주체이다. 죄수는 대상이다. 시각중심주의는 주체와 대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하고, 주체에게 바라보고 분석할 힘을 준다. 이론(theory)의 어원은 본다(theoria)이다. 눈은 권력을 가졌지만 대상에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주체는 능동적인 해석의 주체이기도 하다. 코미디를 보면서도 울 수 있다면 이를 어찌 수동적 수용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텍스트 중심주의의 미디어 문화이론이 수용자에 대한 관심으로 선회했던 이유도 바로 해석 주체의 능동성 때문이었다. 홀(Stuart Hall)이 부호화와 해독에 대한 도발적 논의를 시작한 때가 40여 년 전이고, 이를 이어받아 피스크(John Fiske)가 저항적 즐거움과 기호론적 민주주의를 제기한 지도 30년 이상이 흘렀다. 오히려 수용자의 능동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 나왔을 정도니,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신문기사나 만화를 보는 것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보다 수동적이라 믿어버리는 것은 시대착오적 전제가 아닐 수 없다. 게임은 과연 상호작용적 미디어인가? 하지만, 여전히, 게이머의 개입적 행동을 영화 관객의 해석적 행동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 게임의 본질이 ‘상호작용성’이라는 믿음도 여기서 출발한다. 주체와 대상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전통적 시각매체와 달리, 게임에선 수용자가 대상 텍스트의 내용과 구조에 작용을 가하고(입력) 그 결과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점은 분명한 차별 지점이기 때문이다. 게임문화연구의 초기, 게임과 게임플레이를 유희의 관점에서 보는 접근(루돌로지)과 서사의 관점에서 보는 접근(내러톨로지)이 대립했을 때도 상호작용성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전자는 게임의 본질을 게이머의 입력행위에서 찾았고 후자는 게임 텍스트가 상호작용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놀이’가 놀이 주체(플레이어)의 작용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상호작용적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무엇과의 상호작용인가? 축구는 공과의 상호작용인가, 상대 팀과의 상호작용인가, 아니면 심판이나 관중과의 상호작용인가? 축구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경기를 하나의 서사로 간주하는 비유이다. 이 서사는 선수들이 플레이함으로써 완성된다. 자유도는 높지만, 서사 구성의 정해진 규칙은 있다. 게임을 게이머의 참여로 완성되는 서사의 일종으로 이해했던 머리(Janet Murray)의 정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축구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관중이다. 영화의 서사를 즐기듯, 축구 서사를 만끽한다. 놀이의 주체가 선수로부터 관중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게임에 대한 두 가지 암묵적인 전제, 즉 ‘보는’ 행위가 수동적이라는 전제와 ‘상호작용성’이야말로 게임의 매체적 본성이라는 전제는 처음부터 불안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게임을 설명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지만, ‘본질’이라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의 주체도 게이머로부터 관중으로 옮겨질 수 있다. 이스포츠(eSporsts)나 게임 스트리밍 시청의 경우이다. 이스포츠의 경우, 프로 게이머가 게임 서사를 완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관중은 게임 서사를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즐기는 주체가 된다. 방치형 게임 플레이어는 적극적인 입력을 하는 대신 서사의 전개과정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게임을 즐기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 게임의 본질을 거스르는 기형적 상황은 아니다. 시각성의 재림 게임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라 치더라도, 왜 하필 지금 ‘보는 게임’이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 의문은 남는다. 더 정확히 질문하자면,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모두 사용하던 게임 플레이가 당연하던 시기를 지나 거의 전적으로 시각에만 의존하는 방식의 플레이(관람)가 중요해진 시기가 도래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쇄술의 발달 이후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상대적 우위에 있어 왔다. 매체 철학자인 맥클루언(Marshall McLuhan)은 인쇄술이 인간의 감각들을 서로 떼어 놓고, 다양한 감각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구술 중심의 부족문화에서 문자 중심의 필사문화로, 그리고 인쇄술 발전으로 인해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등장했다는 그의 매체사적 통찰 속에서, 시각은 필사문화 시기부터 중심적 감각으로 등장하여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시기에는 다른 감각들을 억압하는 지배적 감각이 된 것이다. 총체적 인간 감각이 분화되고, 시각이 나머지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시각 권력은 근대성의 등장에 맞춰 지배적 지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각 권력과 원형감옥의 간수가 갖는 시각 권력이 같은 의미는 아니다. 맥클루언이 강조한 근대적 시각성의 지배는 인쇄술과 선형적 문자중심성과 더불어 등장, 강화되었고, 따라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진다. 신의 시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을 강조하면서 원근법에 충실한 과학적 그림이 등장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훔쳐보고 나아가 통제하는 생체권력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제기이다. 다시 맥클루언을 인용하자면, 시각 중심으로 형성된 인쇄-미디어 문화가 주술적이며 마법적인 청각 세계를 붕괴시켰던 것처럼, 구텐베르크 은하계 역시 전기 미디어의 발명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신과 라디오, 텔레비전은 메시지를 찰나적으로 만들어 합리성보다는 직관과 통찰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가장 탈근대적인 매체이다. 게임 내의 다양성과 차이들을 잠시 접어두고 단순화하자면, 게임은 시각중심성에 저항하는 감각 분산적 매체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의 태도는 인쇄매체에 담긴 선형적 언어를 따라가는 (맥클루언이 말하는) 시각중심적 자세도 아니고 경건한 자세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벤야민이 말하는) 정신집중의 태도도 아니다. 7,80년대의 오락실에서 시작해 90년대말 PC방에 의해 대중화되고 21세기 이후의 모바일 미디어로 인해 폭발한 디지털 게임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와 도전과 때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이스포츠와 방치형 게임에서 발견되는 시각성의 재림은 근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일까? 다시 시각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단서로 이해해야 할까? 탈근대적 시각성의 게으름 여기서 근대적 시각성과 구별되는 탈근대적 시각성을 발견한다. 전자가 시지각에만 의존해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설명한다면, 후자는 시각 주체로서 대상을 바라보되 게으르고 산만하고 찰나적인 바라봄을 지칭한다. 물론 다른 감각기관이 주변화된다는 면에서는 유사하고, 시각중심적 문화라는 지칭도 온당하다. 그러나 디지털 영상을 보는 지금의 태도는 읽고 이해하고 해석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탈근대적 시각성은 디지털 영상매체의 발전과 같은 속도로 전파되었다.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근대 성격의) 텔레비전 방송이 아닌, 개인화되고 상호작용적이며 시공간 제약도 극복할 수 있는 미디어들이 보편화되면서, 몰입하지만 자유로운, 유익하지만 심심풀이인 바라봄도 따라서 보편화되었다. 비유하자면, 노동과 생산을 위한 시각성이 아니라 여가와 휴식을 위한 시각성이다. 공을 차는 대신 축구 중계를 시청하고 먹는 대신 먹방을 즐겨보는 행위는 게으르고 산만하다. 방치형(idle) 게임의 idle은 게으름, 나태함, 빈둥거림을 뜻한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상태. 생산성 없는, 노동의 반대편에 있는 휴식의 상태이다. 노동의 반대편에는 휴식 대신 여가가 자리잡기도 한다. 일하지 않는 주말, 사람들은 열심히 여가활동을 즐긴다. 영화를 보거나 근교 관광지를 가거나, 아마 골프를 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여가활동’이라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가활동’은 준(準)노동이기도 하다. 함께할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하고,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야 하기도 한다. 생산하지 않는 행위라 하여 노동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피곤한다. 이를 적극적/소극적 여가로 구분하기도 하고, ‘준노동적 여가’와 ‘보상적(compensatory) 여가’로 구분할 수도 있다. 혹은 (학술적 개념은 아니겠으나) ‘진지한’ 여가와 ‘게으르고 산만한’ 여가로 구분하는 편이 더 직관적일 수도 있겠다. 맑스의 사위이기도 한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게으르고 산만한 여가야말로 이 운동에 딱 맞는 활동 아닐까. 방치형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진지한 플레이를 거부하는 것이고, 게으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시각 주체 노릇은 하지만 개입하지 않고, 열심히 바라보지만 해독하지 않는 게이머. 탈근대적 시각성은 게으르고 산만하다. 게임 본질주의의 쇠락 방치형(idle) 게임이라 퉁치기는 했지만, 게이머의 게으름에 기댄 게임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요즘은 흔해진 자동전투 기능도 방치의 일종이고, 방치를 필수 요건으로 만들어 놓은 파밍 게임들도 있다. 방치형 게임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박이선은 게임의 방치 구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5분 이내로 방치하면서 간헐적으로 게임에 진입하는 게임 (〈AFK아레나〉)도 있고, 몇 시간까지 게임을 켜두고 꾸준히 방치해야 하기 때문에 일과를 보내다가 잠시 게임이 생각나면 화면을 확인하고 개입하는 방식 (〈리니지2 레볼루션〉)도 있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아도 게임이 항상 진행되는 항시적 방치 게임(〈중년기사 김봉식〉)도 있다. 다양한 종류와 위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게으름’에 맞는 적절한 게임을 선택해서 즐긴다. 혹은 바라본다. 이스포츠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남들이 게임하는 것을 관람하는 방식도 여러 종류이다. 특정 게임의 공략방법을 배우기 위한 유튜브 채널을 열심히 보는 사람도 있고, 셀러브리티의 미숙한 게임 플레이를 팬심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내가 플레이하는 대신 남들을 보며 즐기는 행동을 ‘상호수동성’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관찰주체는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 위임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각에만 의존하여 즐거움을 얻는 이런 관람행위들은 근대적 의미의 진지한 바라봄과는 구별되는, 산만한 바라봄이라는 점이다. 플레이어의 적극적 개입 없이 시각에만 주로 의존하는 게임(관람) 방식이 확대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방치형 게임이 게임산업의 미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스포츠가 게임보다 더 중요한 문화적 영역이 될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판이나 마우스, 컨트롤러를 움직이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지향점이 되는 시기를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PC방에서 컵라면 먹으며 밤을 새는 것이 전형적인 게이머의 이미지가 되는 시기가 지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글이나 사석에서도, 나는 소위 ‘진짜’ 게이머가 설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캐주얼 게이머, 노년 게이머, 방치형 게이머를 무시하며 “너희가 게임을 알아?”라며 언제든지 코웃음칠 자세가 되어 있던 이들이 점점 주변화됨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가장 중요한 ‘매체적 본질’이 상호작용성이라는 전제를 폐기한다면, 그리고 방치형 게이머의 산만한 바라봄을 근대적 시각 권력과 차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면, 게임 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변화는 소소한 유행이 아니라 거대한 문화적 변동의 일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학교 과제를 하면서 자동 사냥을 흘긋 쳐다보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유형의) 게이머를 보며, 혹은 게임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이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는 (과거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게이머를 보면서, 사실은 탈근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코끼리의 종아리 어딘가를 만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세대학교 교수) 윤태진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금까지 20년 이상 미디어문화현상에 대한 강의와 연구와 집필을 했다. 게임, 웹툰, 한류, 예능 프로그램 등 썼던 글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모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활동들”을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디지털게임문화연구』라는 작은 책을 낸 적이 있고, 요즘은 《연세게임·이스포츠 연구센터(YEGER)》라는 연구 조직을 운영하며 후배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 게임문화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자각몽으로서 게임(우수상)

    비디오 게임의 모순적인 표현을 지적하는 말로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라는 개념이 쓰이곤 한다. 이는 게임 디자이너 클린트 호킹이 〈바이오쇼크〉를 비평하며 제시한 용어로, 말 그대로 게임 플레이(ludo)와 게임의 스토리(narrative) 사이의 부조화를 의미한다. 그는 〈바이오쇼크〉에서 플레이를 통해 경험하는 규칙이 게임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내용과 상충하고, 게임의 진행에 따라 강제되는 선택이 전자에서 제시된 딜레마를 소거한다는 모순이 있음을 지적한다. < Back 자각몽으로서 게임(우수상) 07 GG Vol. 22. 8. 10.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비디오 게임의 모순적인 표현을 지적하는 말로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라는 개념이 쓰이곤 한다. 이는 게임 디자이너 클린트 호킹이 〈바이오쇼크〉를 비평하며 제시한 용어로, 말 그대로 게임 플레이(ludo)와 게임의 스토리(narrative) 사이의 부조화를 의미한다. 그는 〈바이오쇼크〉에서 플레이를 통해 경험하는 규칙이 게임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내용과 상충하고, 게임의 진행에 따라 강제되는 선택이 전자에서 제시된 딜레마를 소거한다는 모순이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이 ‘이야기 구조’와 ‘플레이 구조’의 대립 관계는 초기 게임학 연구의 내러톨로지와 루돌로지의 구분에서 유래하지만, ‘루돌로지스트에 속한 쪽’의 주역이었던 에스펜 올셋(Espen Aarseth, 2014)이 회상한 바에 의하면 당시 ‘내러톨로지스트’들이 게임에 서사학을 부적절하게 적용한 것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루돌로지스트’라는 자리가 주어졌을 뿐이었다. 덧붙여 그는 이 루돌로지스트들은 현재 모두 게임에 대해 서사학 이론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밝히며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 대조의 오해를 지적한다. 이렇듯 게임 연구 방법론의 이원화는 다소 인위적인 구분에 기인하지만, 주류 비디오 게임(특히 대량의 자본이 투입된 소위 ‘AAA 게임’)의 방향성이 발전된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스펙타클한 장면 연출을 위시하여 기존 영화적·문학적 서사를 게임 환경에서 재현하는 데 힘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도 2년 전 논쟁적이었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 현대의 게임들은 이러한 단절을 의식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절충하는 방식을 써오면서, ‘영화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플레이 같은 영화’를 보는 것 사이에서 전통적 서사 구조에 대해 여전히 양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박인성, 2020). 여기선 이런 배경에서 대두된 몰입환경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원론적인 관점에서 기존 논의를 되짚어가며 디지털 게임에 대한 이해를 재고해보고자 한다. 이야기로 환원하기 단지 산만하고 무의미한 서술이 아니라 표현력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선 그 구성요소를 온전히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 바깥의 행위자, 즉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환경에서 이를 행하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는 이야기의 의미 구조하에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변수이고, 이야기의 청자가 단지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수용할 때와 달리 이들은 이야기의 과정과 내용 자체에 직접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 플레이어의 존재가 게임이 기존의 수용적인 예술 매체와는 다른 속성을 가지게 한다. 게임은 그 안에 영상이든 음악이든 텍스트든 다른 예술 형식을 적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을 모방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데이터로써 포함할 뿐이다. 예스퍼 율(Jesper Juul, 2001)의 지적처럼 내러티브의 시간과 이야기되는 시간 간에는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는 반면, 상호작용은 항상 현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서술과 상호작용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때문에 이야기로서 서술되기 위해선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분리되고 그 영향력 바깥에 있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게임 스토리텔링은 플레이어의 입력이 허용되지 않는 컷신 속에서나, 시간적·공간적으로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해왔다. 이들은 그 자체로 게임 플레이를 형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맥락을 제시하면서 현재 나의 행동을 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 〈오브라 딘 호의 귀환〉에서 플레이어는 특수한 시계를 이용하여 과거의 한 시점으로 이동하지만 단지 관찰하고 정황을 추측하는 해석적인 접근만이 가능하다. 한편 비디오 게임이 스포츠나 보드게임 등과 달리 내러티브 요소를 적극적으로 포함하는 게 가능한 것은 디지털 매체로서 가지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에릭 짐머만(Eric Zimmerman)과 케이티 세일런(Katie Salen)의 저서 〈Rules of Play〉에선 디지털 게임의 특징 중 하나로 ‘복잡한 시스템의 자동화’를 제시한다. 보드게임을 할 때는 이해한 룰에 따라 말을 손으로 움직이고 상호작용 결과를 직접 계산해야 했던 과정을 디지털 게임상에선 구현된 AI, 캐릭터가 움직이는 모습, 그래픽 엔진 등의 모든 자동화된 절차로 대신할 수 있다.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비-디지털 게임에서 손수 수행하기엔 너무 복잡한 수준의 상호작용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단지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는 것 이상으로 디지털 게임은 가상의 공간과 캐릭터를 구체화하여 동적인 허구 세계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플레이어의 존재는 이렇게 시스템이 자동화됨에 따라 축소된다기보다는 각 게임의 설정에 따라 그 역할이 바뀔 뿐이다. 최근 모바일 시장에서 지배적인 ‘방치형 게임’이라 하더라도 시뮬레이션을 재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소비하고 캐릭터나 아이템의 조합을 적절하게 구성하는 식의 운영을 요구하며 다른 조건과 방식의 플레이를 제공하고 있다. 1)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는 이러한 자동화된 구성요소 사이에서 입력을 요구받고 자동적인 절차를 거쳐 출력을 되돌려 받는다. 이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새로운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이에 다시 대응하는 과정이 연속된다. 게임 플레이를 이렇게 단순화했을 때 이 ‘모델’로부터 플레이어는 사건을 경험한다. 이 과정은 게임을 하는 동안 반복되지만, 플레이어가 스토리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모든 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 구조 안에서 (상정된 것이든 시스템에 의해 발생한 것이든) ‘이상적인 시퀀스’를 그려낼 때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건은 게임에서 항상 일어나지만, 이야기는 이를 사후적으로 의미화하고 재조합할 때만 존재한다. 따라서 게임 내부에 고정된 이야기를 조합하여 연속된 하나로 이은 것이 그 게임의 스토리라는 것도 지나치게 좁은 해석이고, 반대로 게임 플레이 전체를 두고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던가 ‘각본 없는 드라마’ 혹은 ‘플레이어 스토리’나 ‘창발적 내러티브’라고 이르는 것 2) 도 가능성을 두고 말하는 비유일 뿐이다. 게임은 그 자체로 내러티브인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로 제시될 수 있는 것’에 가깝다. 3) 시스템으로 환원하기 한편으로 게임연구 초기엔 게임에 대한 텍스트적 해석에 반대하고 (‘학문적 식민지화’를 경계하며) 게임 매체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게임 내 기존 이론으로 해석하기 쉬운 요소들(텍스트, 이미지, 내러티브 등)이 도외시되기도 했다. 올셋(2004)은 한 에세이에서 체스 말이 어떤 모양을 가지든 체스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라 크로프트의 외모는 몸이 다르게 보인다고 다른 식으로 플레이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무관하다고 말한다. 이런 논지는 현재까지 몇몇 비평과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지속되어, 이들은 ‘진정한 게임’을 찾기 위해 ‘가장 게임다운 것’ 혹은 모호하기 그지없는 ‘게임성’을 추려내는 과정에서 항상 룰과 상호작용을 발견하고, 거기에 더해진 스토리와 이미지, 음악은 부차적이고 메커니즘을 보조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상부 구조인 이야기로 환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위 요소로 환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호모 루덴스〉에서 하위징아(Huizinga, 1949/2010)는 놀이가 ‘외양의 실현’으로서 상상력을 질서화하는 과정이라 설명했다. 디지털 게임이 놀이의 시뮬레이션적 본질을 가지고서 ‘복잡한 시스템의 자동화’를 통해 허구세계를 다른 차원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모방 행위’라는 의미를 고려했을 때, 게임이 그려내는 픽션은 단지 뼈대인 룰을 이해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재현하는 데 있어 생생함을 더하고 그 일부로서 참여하기 위해 질서가 부여된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율(Juul, 2005)이 설명한 것처럼 픽션과 룰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에 묘사 대상의 성질이 개입되고 또 반대로 구조가 표현 방식을 지정하는 식으로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쟁하고 상호 보완하는 관계이다. 또한 디지털 게임은 시스템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맥락에 의해 경험하는 하나의 과정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앞서 기계적 관점에서 단순화시킨 디지털 게임의 플레이 과정을 돌이켜 봤을 때, 룰을 먼저 이해하고 진행하는 다른 놀이 형식과 달리 디지털 게임에서 프로그램이 절차를 처리하는 과정은 숨겨진다. 플레이어는 모니터와 스피커를 통해 출력된 것만을 감각할 수 있기에 작동 방식을 직접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그 기능을 알게 된다. 4) 일반적으로 가이드북이나 게임 내의 튜토리얼을 통해 기본적인 조작법을 익히고 게임을 진행하면서 메커니즘을 숙지할 순 있지만, 게임 시스템을 완전히 알고 행동할 수는 없다. 다니엘 벨라(Daniel Vella, 2015)는 이런 성질 때문에 게임의 본질로서 시스템에 대한 탐구는, 시스템이 의미하는 방식을 주장하기 위해선 전체 시스템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현상을 경험하고 이를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게임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는 대신 오히려 의도적으로 작동방식을 숨기고 플레이하면서 발견하고 추론하도록 한다. 게임 속 세계를 탐험하는 행위도 근본적으로 이런 ‘미스터리’의 존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폴 마틴(Paul Martin, 2011)은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의 풍경이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인 전체를 그리면서 ‘게임적 숭고’(Ludic sublime)를 제시한다고 하였다. *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오픈월드의 풍경에 외부는 없다. “세계는 눈이 볼 수 있는 데까지 뻗어나간다.”(Martin, 2011)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숭고함은 약화된다. 게임에 익숙해짐에 따라 시스템을 내면화시키고 전체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상을 그릴 수 있게 되면, 점차 게임의 세계는 가능성의 공간에서 질서정연한 우주로 변화하면서 이에 따라 플레이도 “좌절과 발견 사이의 팽팽한 기브앤테이크에서 생산적인 놀이를 위한 일상화된 운동”에 가까워진다(Welsh, 2020). 그럼에도 벨라(Vella, 2015)는 게임에 웬만큼 숙련된 상태라 하더라도 여전히 새로움을 발견할 여지는 있으며 5) , ‘블랙박스’라는 특성상 시스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 불가능하다는 성질이 게임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미지와 몰입 서술한 대로 플레이어는 시스템에 직접 접근하는 대신 이미지, 인터페이스를 통해 메커니즘을 해석하며 이를 통해 상호작용한다. 디지털 게임의 이미지는 단지 표면적인 기호가 아니라 시스템의 인터페이스가 되고, 지표로서 룰과 상호작용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현재 포토리얼리즘을 추구하는 3D 그래픽 엔진의 사실적 재현 수준은, 게이머들이 이런 정교한 그래픽으로 그려진 신작 오픈월드 게임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특히 ‘자유도’에 대해)을 가지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적 사실성만큼의 실제적인 시스템을 구현하는 건 현실의 물리법칙에 점근하는 수준의 정교함이 요구되는 일이기에, 게임들은 재현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신 플레이에 적합한 방식으로 추상화되고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상호작용에 제한을 두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제약으로서 룰’은 유저 인터페이스를 통해 가시화되면서, 게임 이미지는 그림과 액자의 관계와 같은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이 미디어의 존재를 수시로 각성시키기 때문에 시각적 리얼리즘이 그리는 환영에 온전히 빠져들 수 없게 한다. 영화와 같은 스펙타클함을 추구하는 게임은 유저 인터페이스를 숨기고 심리스 스타일을 사용하면서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에 온전히 몰입하기를 바라지만, 비현실적인 규칙의 존재가 인공적인 시스템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유저 인터페이스(하드웨어 인터페이스도 물론이고)에 의해 플레이어는 허구 세계와 늘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게 된다. 비디오 게임은 연극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그 내부 세계의 환영은 투명하게 노출된다기보다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극적인 연상을 통해 상상된다. 초기 비디오 게임 그래픽의 투박함은 기술적 한계에 의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추상적인 기호로서 이해되어 그 비현실성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6) 점 두 개와 선 하나로 사람의 얼굴을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재현이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한 의미가 제시될 수 있다면 환영은 만들어진다. *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2019). 여타 리마스터·리메이크 작품과 다르게 〈꿈꾸는 섬〉의 리메이크된 그래픽은 플라스틱 미니어처처럼 그려진다. 닌텐도는 여전히 추상성을 유지하는 방향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비디오 게임의 몰입 환경에 대해 고규흔(2004)은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아무런 계기판 없이 하늘을 날고 있는 행글라이더의 라이더가 자신이 대기 안에 존재함으로써 온몸으로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경험하고 상황을 판단하여 기체를 조종한다면, 계기판 앞에 앉은 파일럿은 자신의 대기에 존재하면서도 환경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의 패턴으로 나누고 객관화시킨다. 풍속과 고도, 현재의 운항 속도, 시야 거리 등등의 수치화된 정보를 기준으로, 행글라이더의 기수와는 달리 현 상황에 대해 객관적 방식으로 각성하는 것이다.” 그는 “고전적 리얼리즘에서의 관객”이 행글라이더의 기수라면, 게임 플레이어는 환영과 동화되지 않는 파일럿의 태도와 같다고 한다. 자각몽으로서 게임 *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Don’t Look Back〉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의 주인공 오필리아에게는 다른 불행한 인물들과 달리 따로 판타지 세계가 주어진다. 오필리아는 요정에 이끌려 목신 판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과제를 수행한다. 이와 유사한 알레고리를 가진 게임 〈Don’t Look Back〉에서는 그림과 같은 장면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불행해 보이는 그에게도 역시 판타지 세계로서 지옥이 주어진다. 우리는 그를 조종하여 장애물을 통과하고 괴물들을 격파하며 거침없이 나아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까지 물리친 후에 그는 아내의 영혼과 만난다. 이제 ‘규칙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이동하여 다시 이승으로 올라오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 결과가 〈판의 미로〉에서는 사실관계가 모호하게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보다 명확하다. 남자가 처음 떠난 자리로 돌아올 때, 이 과정을 함께한 플레이어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고 ‘게임적 존재’들은 그대로 소멸한다.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에게 혼란스러운 현실과 대조적으로 판타지 세계에선 절대적인 규칙이 제시되고, 이에 따라 고난을 극복한다. 이 짧은 게임 안에서도 플레이어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상상하는 남자로서 게임을 하고, 목적을 달성하곤 합당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두 작품이 판타지를 체현하는 방식은 게임 플레이와 맞닿아있다. 이들이 진행하는 게임은 규칙을 두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긴장 속에서 문제를 극복하는 놀이이면서, 공상만이 아닌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으로 제시되는 공간이다. 상상된 시스템 속에서 꿈을 꾸고 있지만 일상적 현실을 자각한 채로 정교하게 욕망을 만족시킨다.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로서, 게임은 일방적으로 재생되는 꿈도, 잠깐 빠져드는 백일몽도 아닌 자각몽으로 경험된다. 1) 다만 그 자동화의 대상이 기존 액션 RPG 장르에서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자동 사냥’을 제공하는 RPG 게임들은 게임 커뮤니티 등지로부터 ‘이것은 게임이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2) Soler-Adillon(2019)이 지적한 바대로 시스템의 자기조직화가 행위자의 인지와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Importantly, they do so while responding to this sense-making process itself. However ... it is problematic to associate self-organization to processes in which the agents generating the phenomenon are aware of it” (Soler-Adillon, 2019) 3) 다만 게임이 기존 내러티브 구조를 따르는 대신 “더 큰 내러티브 경제에 기여”하는 매체라는 관점도 있다.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2004)는 〈스타워즈〉 시리즈와 1983년 아타리에서 출시한, 영화의 한 장면을 시뮬레이팅하는 동명의 비디오 게임이 영화에서처럼 전체적인 플롯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주장을 두고, 게임을 하며 환경적 세부 사항을 직접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미디어와 결합하여 더 큰 단위에서 풍부한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대의 주류 온라인 게임에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4) 워게임 디자이너 제임스 더니건(James F. Dunnigan, 2000)은 이를 컴퓨터 게임의 경험을 축소시키는 ‘블랙박스 신드롬’(Black box syndrome)이라 불렀다. 그는 내부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워게임의 핵심 요소라고 주장했다. 5) 일례로 1994년 출시된 〈둠 2 : 헬 온 어스〉의 한 숨겨진 구역은 출시 후 24년이 지난 2018년까지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유튜버 Zero Master가 특수한 방법을 써서 정상적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찾아내어 이에 게임 개발자 존 로메로(John Romero)가 직접 트위터에 축하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다. romero. (2018,09,01). CONGRATS, Zero Master! Finally, after 24 years! "To win the game you must get 100% on level 15 by John Romero." Great trick getting to that secret! 6) 이런 점에서 현대 인디 게임에서 흔히 표방하는 로우폴리곤이나 픽셀 그래픽이 활용된 레트로 스타일은 단지 노스탤지어만이 아닌 게임적 이미지의 물성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Hocking, C. (2009).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The problem of what the game is about.” In D. Davidson (Ed.), Well played 1.0: Video games, value and meaning. ETCPress. Aarseth, Espen (2014) “Ludology,” in The Routledge Companion to Video Game Studies edited by Mark J.P. Wolf and Bernard Perron. 박인성 (2020). “2010년대 비디오 게임에서 나타나는 서사와 플레이의 결합 방식 연구 - AAA급 게임의 심리스(Seamless) 스타일을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1(1), 83-111. Juul, Jesper (2001). “Games telling stories? - A brief note on games and narratives.” Game Studies, Vol. 1 Issue 1, July 2001. Eric Zimmerman, Katie Salen (2003). “Rules of Play.” MIT Press Soler-Adillon, Joan (2019). “The Open, the Closed and the Emergent: Theorizing Emergence for Videogame Studies.” Game Studies, Volume 19, issue 2 Jenkins, Henry (2004). “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Ed. Noah Wardrip-Fruin & Pat Harrigan. Cambridge, Ma.: The MIT Press. Aarseth, Espen (2004). “Genre trouble: narrativism and the art of simulation.”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Ed. Noah Wardrip-Fruin & Pat Harrigan. Cambridge: The MIT Press. Huizinga, J. (1949).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이종인 (역) (2010). 〈호모 루덴스〉. 일산: 연암서가 Juul, Jesper (2005). “Half-Real: Video Games between Real Rules and Fictional Worlds.” MIT Press. James F. Dunnigan, “Wargames Handbook: How to Play and Design Commercial and Professional Wargames.” 3d ed. (San Jose: Writers Club Press, 2000) Welsh, Timothy (2020). “(Re)Mastering Dark Souls.” Game Studies, Volume 20, Issue 4 Martin, Paul (2011). “The Pastoral and the Sublime in Elder Scrolls IV: Oblivion.” Game Studies, Volume 11, issue 3 Vella, Daniel. (2015). “No Mastery without Mystery: Dark Souls and the Ludic Sublime.” Game Studies, Volume 15, Issue 1 고규흔 (2004). 비디오 게임에 대한 스펙터클적 관점에서 계약의 관점으로 이동. 한국게임학회 논문지,4(3),29-42.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학생) 김도근 디지털 미디어와 같이 자란 세대로 특히 디지털 게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 Back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06 GG Vol. 22. 6. 10. 1. 숏폼 콘텐츠와 연쇄적 소비 바야흐로 짧은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이다. 평균적으로 50분의 상영시간을 가진 TV 드라마는 15분 내외의 웹드라마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으며, 유튜브에는 ‘너덜트’나 ‘숏박스’ 같은 채널을 중심으로 3-4분 정도로 짧은 콩트들이 유행하고 있다. 게임 역시 짧게는 수십 시간, 길게는 몇 백 시간의 플레이 시간을 요하는 PC나 콘솔 게임보다는 1회 플레이 시간이 짧은 모바일 게임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며, 모빌리티를 무기로 하는 각종 플랫폼들이 기존의 하드웨어를 대체한 2000년대 후반 이후 지속화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72초TV’가 상영시간을 채널명으로 전면화 하여 인기를 끈 것은 숏폼 콘텐츠(Short form contents)의 승리를 상징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모바일 시대 초압축 드라마의 표본을 제시한 ‘72초 TV’의 한 장면 이러한 숏폼 콘텐츠가 고전적인 다른 고전적인 콘텐츠보다 주목받는 것은 이의 주 소비층이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시간을 부족한 이들에게 짧은 콘텐츠는 부족한 여가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스낵 컬쳐(snack culture)가 된다. 등하교길이나 화장실에 들르는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몇 분만 할애하면 게임 한 판과 동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숏폼 콘텐츠는 금세기의 여가 문화의 틈새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숏폼 콘텐츠의 대부분이 SNS나 유튜브 등의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서비스 된다는 점에서 구매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에게 잘 먹히는 콘텐츠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핵심적인 서사를 바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숏폼 콘텐츠에는 전후 맥락이 생략되어도 상관없는 내용들이 주종을 이룬다. 짧은 콘텐츠 재생시간 속에서 완전하지 못한 서사를 갖춘 숏폼 콘텐츠들은 긴 설명이나 전후 관계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를 본론부터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너덜트 채널의 첫 에피소드인 “당근마켓 남편들”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중고거래 현장을 비춘다. 이 영상에서 공감대는 이미 해당 마켓들 통해 거래를 해본 기혼 남성들의 일상적 공감을 양분으로 삼아 전후의 맥락을 제거하고 거래 현장만 집중하여 짧은 상영 시간에 맞게 콘텐츠를 압축할 수 있게 해준다. * 너덜트의 〈당근마켓 남편들〉 일반적으로 숏폼 콘텐츠는 짧은 플레이 시간을 바탕으로 연쇄적인 콘텐츠 소비를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숏폼 콘텐츠를 멍하게 반복적으로 여러 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게임의 경우도 한 번 플레이하는 시간이 짧을 뿐이지 이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하드코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못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게임학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캐주얼 레볼루션(Casual Revolution)〉에서 캐주얼 게이머들이 게임을 캐주얼하게 소비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하드코어하게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실제 사용자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예스퍼 율, 이정엽 역, 『캐주얼 게임: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의 재창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콘텐츠의 연쇄적 소비가 트래픽을 불러일으켜 광고 수익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하 BM)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유저들이 사이트에 오래 머무를수록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플랫폼은 어떤 특정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고양된 감정으로 사이트를 떠나는 현상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콘텐츠 소비가 끝났을 때 다음 콘텐츠를 이어 보고 싶은 감정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 이는 게임으로 환원하면 짧은 플레이를 무수히 반복해서 쌓아나가는 방식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비슷한 메커닉의 반복적인 플레이는 지루함을 유발하여 접속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여기에 캐릭터 성장 시스템과 BM을 연계시키는 방식이 사용되는 것이다. 2. 숏폼 게임의 메커닉 축소과정과 비즈니스 모델 물론 처음부터 숏폼 형태의 게임과 BM이 초창기부터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PC나 콘솔 게임이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처음으로 전환되던 시점에는 키보드나 컨트롤러를 이용한 복잡한 컨트롤을 손가락을 이용한 터치로 단순하게 바꾸는 UI 차원의 시도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 때 통상적인 게임 장르는 그대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의 환경에 따라 게임 메커닉을 약간씩 변형하면서 이식된다. 예를 들어 PC 게임 플랫폼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중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가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같은 AOS 장르로 이식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숏폼으로 변화하게 된다. 〈클래시 로얄(Clash Royale)〉은 통상적으로 CCG(Collectible Card Game)이나 RTS(Real-time Strategy ) 장르로 분류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의 메커닉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이를 숏폼으로 축소한 게임이라 볼 수 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가장 유명한 맵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를 비교하면 크게 3갈래로 갈려진 지도가 〈클래시 로얄〉에서는 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한 경로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아군과 적군의 미니언들은 AI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고, 챔피언만 플레이어가 컨트롤 할 수 있지만, 〈클래시 로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캐릭터의 처음 시작하는 위치만 지정할 수 있으며, 그 캐릭터의 개별 전투는 모두 AI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된다. 또한 〈리그 오브 레전드〉는 특별히 정해진 플레이 타임이 존재하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1회당 3-4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클래시 로얄〉은 처음 3분의 타임 어택과 추가 1분 30초의 타임 어택을 포함해 최대 1판이 4분 30초를 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다. 다시 말해 〈클래시 로얄〉은 PC에서 사용되던 플레이어에 의한 복잡한 컨트롤을 최대한 줄이고, AI에 의한 자동전투를 극대화시키면서 플레이 타임을 거의 1/10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시 로얄〉에서 더욱 강조된 부분은 각 캐릭터의 성장을 ‘카드 강화 시스템’을 통해 극대화 시켰다는 점이다. CCG 장르의 카드 강화 메커닉을 활용하여 자신의 카드가 성장하는 느낌을 부여하면, 그 카드의 효용을 실험해보고 싶어 다시 플레이를 시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의 덱이 8장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모든 성장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 〈클래시 로얄〉의 BM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오히려 〈클래시 로얄〉은 현질을 통해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요소를 제한하여 게임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구현한 좋은 예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성공 이후 RTS의 AI 전투 시스템은 축소하고 카드 강화의 BM만 극대화 한 게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실제 이 때에도 RTS적인 요소들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일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치형 이나 CCG로 불리는 현질 유도 게임은 현재에도 무수히 양산되고 있지만, 문제는 앞선 사례들에서 적절히 제한되었던 현질의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제한 요소들은 차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 BM의 전면화와 미학의 소외 물론 콘텐츠의 길이가 짧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하긴 어렵다. 소설과 영화에서도 장편과 단편의 미학이 다르며, 단편은 장편이 구현하기 어려운 단일 플롯의 직접성과 단도직입적인 풍자 등을 통해 독립적인 미학을 쌓아왔던 것이다. 장대한 서사시와 촌철살인의 미학은 애초부터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도 짧은 플레이 시간 내에 추구할 수 있는 한 판의 쾌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 타임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풍성한 서사, 전후의 맥락, 컷신, 텍스트, 맵의 디테일, 전략적 요소 뒤에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고전적인 재미요소를 제거하고 BM만 남겨놓아도 플레이어가 잔존한다는 사실이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확인된 이상 게임 회사들은 굳이 어렵게 게임을 풍성하게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모바일 게임의 소프트 런칭 시스템(특정 국가 하나 정도만을 대상으로 게임을 시범적으로 출시하는 방식으로, 게임 회사들은 이를 통해 특정 메커닉의 잔존율(retention)을 실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잔존율 낮은 메커닉이나 BM은 도태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은 특정 메커닉과 BM의 잔존율을 아주 쉽게 테스트 할 수 있게 해주어, 노골적인 BM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 내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설정만 해놓으면 해당 퀘스트가 다 클리어된다거나, 별다른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바로 사냥과 전투가 시작되는 게임들을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치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식적 요소와 몰입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것이 게임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익성을 위해 깎여나간 게임의 숏폼화는 결국 BM와 노골적인 결제 모듈만 남기고 게임을 앙상하게 만들어버렸다. * 게임 플레이어 모두에게 1억이 지급되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최근의 게임 광고들은 노골적으로 상당한 금액의 확률형 아이템을 지급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아이템이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리 만무하다. 물론 이러한 방치형 게임들을 유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시간이 부족한 학생이나 직장인이 성장의 재미만 누리게 하는 게임으로 일정 가치를 지닌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난이도 – 숙련도 길항에 관여하는 데이터값들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력이 1천만!’, ‘체력이 500만!’같은 숫자 크기가 아니다. 100만에서 99만 9,999를 뺀 1이라는 값, 난이도와 숙련도가 주고받은 그 연산의 결과값이 길항의 의미이자 결과물이기에 체력과 공격력은 동시에 하향될 수 있다. 최근 모바일게임 광고에서 ‘플레이어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 보여주는, 막대한 공격력을 뽑아내는 장면이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 플레이를 통해 정말 강해지는 것은 아마도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는 숙련도뿐일 것이다. < Back [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06 GG Vol. 22. 6. 10. 디노미네이션 오랜 와우저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0년대 초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60레벨 만렙 체력은 대략 4천 대 근처였다. 캐릭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풀 파밍이 완료된 탱커도 1만을 넘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좀 지나 같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체력은 지나간 시간과 비례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2014년 출시된 확장팩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에 이르면 10만 단위의 체력도 보기 드물지 않은 상황을 맞았는데, 이때 블리자드는 능력치 압축이라는 이름의 디노미네이션을 결정했다. 디노미네이션은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스탯들을 동일한 비례식 하에 전반적으로 낮추어 잡는 변화를 가리킨다. 특정 패치를 기점으로 게임 내의 모든 스탯들, 레벨, 캐릭터의 체력과 공격력, 마나량과 회복량, 몬스터의 체력과 공격력 같은 전반적인 수치가 일제히 하향조정되었다. 물론 상호작용하는 모든 수치가 함께 하향된 터라 전체적인 게임의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언제 하향했냐가 무색하게 이어지는 패치를 통해 다시금 게임 내의 모든 수치들은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게임 플레이 속에서 플레이어는 지속적으로 과거보다 더 강한 적과 맞서 싸운다는 감각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이룬 승리는 경험치와 레벨, 아이템이라는 보상을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누적되며,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는 또다시 다가오는 더욱 강한 도전에 맞서는 구조 안에 선다. 플레이 이력이 서버에 기록되며 마치 플레이어의 소유물인 것처럼 인식되는 온라인 기반의 게임이 지속되는 한, 이 영원한 우상향의 그래프는 지속될 것이다. 체력과 기회 디지털게임에서 체력의 근원을 거슬러올라 생각해보면 ‘기회’라는 개념에 맞닿을 것이다. 체력 개념이 보편화하지 않았던 초창기 아케이드 시절에도 난이도 – 숙련도의 대결 안에는 도전기회라는 규칙이 존재했었다. 제시된 난이도를 향한 도전의 의미는 실패의 가능성이 있을 때 발생한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 외계인 무리가 지상에 닿을 때, 〈팩맨〉에서 식탁보 유령에게 붙잡힐 때, 〈테트리스〉에서 쌓인 블록이 천장에 닿을 때 맞는 게임오버의 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플레이어는 분투하며 클리어를 향해 달려나간다. 한 판의 플레이는 그러나 한 번의 기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소프트웨어마다, 혹은 아케이드나 콘솔 기기의 설정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한 판의 게임에는 일정 숫자의 도전기회가 주어졌다. 잔기, 생명 등으로 표현되었던 이들 도전기회는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었던 간단한 숫자의 기회였고, 기회의 상실은 작은 규모의 리스타트 – 플레이가 이어지지 않고 실패 후에 다시 리트라이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체력 개념은 기회의 부여 차원에서 이 실패 후 리트라이를 좀더 연속적인 감각으로 바꿔낸다. 이를테면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골든액스〉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1개의 생명당 총 3개의 체력 바를 가지고 나오는데, 적의 공격을 받으면 체력 바가 하나씩 줄어들고 체력 바가 0이 되면 하나의 라이프가 날아가는 방식이다. 이때 도전기회, 다시말해 허용되는 실수의 수는 체력바 X 생명 수로 나타난다. 3개의 생명을 가지고 시작했다면 클리어까지 허용되는 피격의 수는 총 9번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라이프는 그 실패의 결과 면에서 연속성이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피격당했지만 생명이 줄지 않는 경우에는 말그대로 체력이 깎이면서 나타나는 약간의 경직과 넉백 정도에 머무르지만, 캐릭터가 사망한 경우에는 아예 새로 캐릭터를 출현시키면서 생명을 깎는 연출을 보여준다. 같은 기회지만 체력  생명으로 이어지는 점층적인 구조를 통해 실패의 패널티는 다르게 기능한다. 〈파이널 파이트〉에 이르면 이제 체력은 바bar로 표시된다. 적의 공격은 모두 동일한 1회의 피격이 아니라 적과 공격의 유형에 따라 다른 수치의 피해를 플레이어의 체력에 입히는데, 이때부터는 그 피해량을 숫자로 매기는 대신 일종의 인포그래픽인 체력바를 통해 표현한다. 플레이어는 정확히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히고 입는지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너구리〉에서 한 번만 압정을 밟아도 게임오버되던, 가벼운 숫자의 도전기회는 체력 바라는 표현의 시대에 이르면서 점차 실패와 도전의 관계를 좀더 연속적인 변화량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동시에 보너스 점수 등을 통해 추가 도전기회를 받을 수 있었던 방식 또한 체력 바의 시대에는 숫자로 표기되는 점수 대신 음식, 약물과 같은 체력과 상관관계를 이루는 아이템을 획득해 받은 피해를 복구하는 은유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체력 바의 시대에 이르면 도전과 기회는 횟수가 아닌 게이지로서 좀더 연속적인 형태의 기회로 변화한 것이다. 방향성이 아니라 표현의 다변화 횟수로서의 기회가 체력이라는 형태의 연속적 기회로 변화한 데에는 일정부분 컴퓨팅 기술의 발전 또한 기능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서두에 언급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디노미네이션 사례와도 통하는데, 디노미네이션의 이유로 당시에는 과도하게 상승한 수치 때문에 개별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8비트 시대의 컴퓨터로는 아무래도 연속적인 기회로서의 체력 연산보다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규칙이 우선했을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디지털게임의 규칙은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TRPG와 같은 아날로그 게임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이를테면 대전격투 게임에서 타격과 피격의 순간 각각의 행동에 맞추어 공격력과 방어력을 계산해 실시간으로 반영해 결과에 반영하는 게임규칙을 가능케 하면서도 동시에 연산력과 같은 제한에 의해 생명, 체력과 같은 다른 양식의 도전기회를 규칙화하는 영향력을 동시에 발휘한다. 그러나 이 변화의 방향은 반드시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당장 오늘날의 전투형 게임들은 도리어 방대해진 체력량을 새로운 연출요소로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타격감(이 개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을 위한 연출에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꽂아넣는 피해량이 막대한 숫자로 표기되는 방식이 들어간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체력 바는 자세히 보면 전체 체력 바의 총량을 100%의 길이로 두되, 레벨업과 아이템을 통해 향상되는 체력의 수치를 체력바 사이에 일정 단위로 표기되는 눈금을 통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MMORPG에서 나타나는 수치의 우상향도 다른 장르에서는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매 게임마다 다시 리셋되는, 서버에 레벨과 경험치가 축적되지 않는 순환형 시간에 놓인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플레이할수록 나의 캐릭터가 강해진다’는 전제가 희미해지기 때문에 체력의 절대값은 반드시 우상향하지 않으며 고정된 최대값 – 최소값의 범주 안에 위치한다. 이처럼 도전기회라는 규칙은 기술과 환경, 노하우의 변화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기보다는 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확보하며 다양화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강해지지 않는다 서두에 언급한 디노미네이션의 사례와, 세부적인 규칙연산의 결과를 플레이어에게 데이터로 보여주느냐 혹은 연속적인 기호를 통해 보여주느냐의 문제의 기저에는 결국 난이도 – 숙련도 길항이라는 디지털게임의 근본적인 갈등구조 자체에는 크게 변화하지 않아 왔다는 전제가 있다. 난이도 – 숙련도 길항에 관여하는 데이터값들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력이 1천만!’, ‘체력이 500만!’같은 숫자 크기가 아니다. 100만에서 99만 9,999를 뺀 1이라는 값, 난이도와 숙련도가 주고받은 그 연산의 결과값이 길항의 의미이자 결과물이기에 체력과 공격력은 동시에 하향될 수 있다. 최근 모바일게임 광고에서 ‘플레이어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 보여주는, 막대한 공격력을 뽑아내는 장면이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 플레이를 통해 정말 강해지는 것은 아마도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는 숙련도뿐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라이브 서비스 전쟁 · 역사 기계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

    <폭스홀>은 극단적으로 상세화된 활동적 측면으로, <헬다이버즈 2>는 운영진의 적극적 개입과 플레이어 활동 반영 등의 실시간 소통의 방식으로 각각 전쟁 앞 개인의 감각을 생산해 플레이어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 < Back 라이브 서비스 전쟁 · 역사 기계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 25 GG Vol. 25. 8. 10. 게임에서 전쟁은 주제로, 소재로, 또 하나의 주된 장르로 그 태동부터 아주 오랜 시간 다뤄져 왔다. RPG, RTS, FPS, TPS 등 형태를 가리지 않고 전쟁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현상의 부분적 측면들을 다뤄 왔으며 MMO 장르에서 플레이어들이 형성한 길드, 혹은 클랜 간의 전쟁은 그 자체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전쟁들을 짧은 기간 안에 축소판으로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출현한 라이브 서비스 (Live Service) 형식으로 운영되는 멀티플레이 전쟁 게임들은 종래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쟁을 다룬다. 여기서 전쟁의 라이브 서비스 측면은 교전 대상을 정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등의 구조적이고 정치적 측면을 게임의 개발진이나 운영자가 대신 전담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선 2003년 <플래닛사이드>에서 2012년 <플래닛사이드 2>로 이어지는 전신이 존재하긴 했었지만 2022년에 발매된 <폭스홀>과 2024년에 발매된 <헬다이버즈 2>는 각각 PVP와 PVE의 형식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주안점을 두며 이전보다 훨씬 본격적인 차원에서 전쟁을 구현한다. “지속적 세계 전쟁” - <폭스홀> <폭스홀>에서 플레이어는 조감도로 비치는 화면 아래 놓인 아주 작은 군인 한 명을 조종한다. 서버에 접속하자마자 성별과 피부색 등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어차피 군모와 군복으로 전부 가려진 아주 작은 신체들은 시각적으로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별개로 선택해 참여할 수 있는 콜로니얼 (Colonials)이라는 연방국과 워든 (Wardens)이라는 제국의 서로 국경을 맞댄 진영들은 각각 녹색과 청색의 대표색 말고도 장비 및 기반 시설, 시작 구역의 지형 등 적잖은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이 차이 또한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지는 않고 예를 들어 워든의 무기는 성능이 다소 우월한 대신 생산 비용이 비싼 등 접근 방식에 차이를 줄 뿐이다.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폭스홀>은 무기 생산은 물론이고 자원 채취까지, 즉 군사 활동의 모든 물리적 측면을 플레이어들이 직접 운영해야 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러나 기존의 RTS 게임과는 달리 한 진영의 전체 유닛들을 한 명의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전장에서 플레이어는 그저 단 하나의 유닛만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동 및 행동 속도, 소지 물품의 무게, 조준 시간 등 각 유닛의 역량은 너무 한정되어 있는 나머지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해당 싸움 속에서도 영웅적 활약은커녕 아주 작은 총알받이 하나의 역할 이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니 게임 내 병과 간 수행 가능한 작업을 구분 짓는 시스템상 제한이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병이 의무병의 치료를 돕는 것도, 의무병이 보급병의 병참을 돕는 것도 순수하게 ‘여력’ 상 불가능하다. 군장 무게상 치료에 필요한 구급상자를 보병이 소지하고 있을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만에 하나 구급상자가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총을 내려놓고 그것을 주워 착용한 뒤 그 안에 붕대를 채워 넣는 데 걸릴 시간이면 이미 총알에 맞아 죽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병참은 트럭과 같은 이송 장치를 모는 것이 아니면 물자를 들고 옮기는 건커녕 기지에서 하나하나 꺼내는 데만도 시간이 적잖이 걸리며 심지어 창고에서 물자를 꺼내는 시간과 기지에서 꺼내는 시간은 천지차이이다. 또 병참 안에서도 물자 이동과 군수품 생산, 그리고 자원 생산 사이의 역할이 전부 하나하나 나뉘어 있으며 역시 여기도 시스템상에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업무 수행 역량의 한계 때문에 자연스레 플레이어들이 특정 역할을 전담하게 되는 것이다. <폭스홀>에서 각각의 플레이어는 하나의 분야 속 하나의 아주 작은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커다란 전쟁을, 현실 시간으로 짧게는 10일에서 길게는 50일까지도 걸리는 전쟁을 영원히 반복해서 작동시킨다. <폭스홀>이 자신을 “지속적 세계 전쟁 (Persistent World Warfare)”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한번 선택한 진영은 바꿀 수 없으며 전체 지도는 게임 내 실제 축척으로 한 변의 길이가 1km인 육각형으로 구획된 43개의 지역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 즉 대략 111.7km²의 전체 넓이를 가진 거대한 (프랑스의 수도 파리시 전역이 105.4km²) 전장에서 평균 3,000명가량의 플레이어가 한꺼번에 싸우려면 이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은 결국 병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보급 활동은 앞서 설명했듯 단계적으로 각 활동이 절차적으로 세세하게 나뉘어 있는 이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기제로는 다소 터무니없는 시간을 소모하는데, 예를 들어 경기관총 100개와 그 탄창 120개가 각각 생산 시간이 1시간씩 걸린다. 그리고 재고를 확인하고 15상자에서 60상자 사이의 물품을 적재한 뒤 차량을 주유하며 전방에서 후방으로 이동하는 데 도로 상황과 차량의 종류 등 변수에 따라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20분까지 걸린다. 지금 여기에 물자 생산에 필요한 자원 채취 및 정제 시간, 생산 기반 시설 건설, 시설 작동을 위한 연료 보급 등을 위한 시간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달렸는데 전방 근처에서 적군 파르티잔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 모든 군사 활동을 하나하나 전부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어들이 수행해야 하니 한 번에 기여할 수 있는 범위는 당연히 한정된다. 활동 종류에 시스템상 제약이 존재하지도 않고 채팅은 존재하지만 지휘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계급은 있지만 별도로 권위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니 플레이어들은 자주적으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역할을 맡는다. 전방 재고를 확인하여 어떤 부족한 물자를 채워 놓을지도 보급병이 알아서 선택해야 하고 자원을 채취하다가도 채팅에서 전방 보병들이 무기 부족을 외치면 급하게 트럭을 돌리는 일도 생긴다. 물론 자유도의 부작용으로 같은 물자를 동시에 여러 명이 배달해 잉여분이 쌓이는 경우나 보병보다 위생병이 몰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폭스홀>에선 오인 사격도 가능하고 이처럼 활동에 제약이 없다 보니 아군 방해의 걱정이 있을 수 있지만 다행히도 신고 및 정지 시스템은 존재하며 나아가 한 번에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되어 있는 점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애초에 마음먹고 방해 공작을 벌이는 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대규모 전쟁 활동을 시뮬레이션하는 이 게임의 면모가 가장 여실히 기록된 일화는 2022년 초창기 물류 노조 파업 사건이다. 게임 내 물류 부서에 노조가 결성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파업까지 벌이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일 터이다. 실제로 해당 파업은 기사화 [1] 도 되었고 노조 자체적으로 만든 웹사이트에 아카이브도 되어 있는데 당시 물류 운영의 불합리한 환경에 제기한 열한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공공 재고 및 정제소 적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림. 2. 게임 초반 부품 확보가 과하게 어렵고 경쟁적이며 비건강함. 3. 공장 주문 유지 시간이 너무 짧음. 4. 생산 건물들에 연대 차원의 대기열이 필요함. 5. 컨테이너들이 물류 작업의 폐쇄회로 운영을 불가능케 함. 6. 전방과 후방 사이에 물류 시설 부족. 7. 물량을 쉽게 합칠 수 없기 때문에 재고 안에서 재료 포장을 푸는 것이 극단적으로 느림. 8. 화물선 전체 양의 폐품을 기본 자재로 가공할 수 없음. 9. 비축 재고 내 상자 양 제한이 너무 적음. 10. 전쟁 첫날부터 눈보라가 오는 것은 말이 안 됨. 11. 맵 상에 끼인 차량 강제 이동 명령어를 한 전쟁에 세 번까지 밖에 사용 못하는 건 너무 적음 [2] . 이 파업은 49일간 진행되어 결국 개발진이 위 요구 사항들을 업데이트에 반영하기로 하며 막을 내렸다. “모든 일이 정사” - <헬다이버즈 2> <폭스홀>이 미국과 유럽의 1 · 2차 세계 대전을 섞어 가상의 배경에서 재현하고 있다면 <헬다이버즈 2>는 미래 세계의 우주 전쟁을 구현한다. <헬다이버즈 2>는 4인분대로 작전에 배치되는 3인칭 협동 PVE 슈터로, <폭스홀>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헬다이버”의 체형 및 목소리를 정할 수 있지만 헬멧과 방어구에 가려 그 안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헬다이버들은 궤도에 정박한 구축함에서 외계생물과 로봇 군단 등 다양한 적 세력 한복판으로 강하정을 타고 직접 투하되어 구축함의 지원을 받으며 싸운다. 여기서 한복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고 또 하나하나가 플레이어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전투력을 지닌 적들 사이에 둘러싸이게 된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플레이어가 강력한 보호 장비나 압도적 화력을 소지한 채 지상에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플레이어는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 로봇의 총탄이나 외계 생명의 발톱 등에 한두 방 맞으면 단숨에 몸이 토막 나며 죽는다. 그나마 플레이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AI 지능에 비해 조준과 반응 속도, 판단력 등이 나은 점, 그리고 구축함의 궤도 공격 지원이지만 궤도 공격의 경우 피아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고폭탄이나 레이저에 무수히 육편이 된다. 또 플레이어의 공격 또한 <폭스홀>처럼 오인 사격이 가능해 같은 분대원 간에도 많은 사망 요인을 낳는다. 군장의 무게로 인해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져도 낙사하고 헤엄을 칠 수 없어 얕은 물에서 익사하는 것에 이르면 어이없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끊임없이 죽으며 다시 투입되는 과정은 게임 내 허용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설정상 정말로 한명 한명의 병사가 일일이 죽으며 증원되는 것이다. 즉, <헬다이버즈 2>는 플레이어가 복무하게 되는 인류 세력이 “슈퍼지구”라는 황당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군국주의 파시즘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를 게임플레이 장치로 구성한 작품이다. 생명 경시를 넘어 병사 하나하나를 말 그대로 총알로 써 가며 외계 세력을 선제 침공하는 슈퍼지구는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이 침략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적들더러 “전체주의” “계급사회” “외계인 혐오주의” “팽창주의” “폭정”로 자신들이 현재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역으로 뒤집어씌워 모함한다. 작중 외계 세력은 크게 세 가지인데 ‘테르미니드’는 신체에서 연료를 추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슈퍼지구가 공격하고 있는 곤충 형태의 외계 생물들이다. ‘오토마톤’은 A부터 F까지 등급으로 시민권을 나누고 A와 B등급 시민마저도 공휴일에 최대 1시간의 휴식 시간만을 가질 수 있으며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위해선 허가증을 작성 후 제출해야 하는 극단적인 전체 · 감시사회에 반기를 든 분리세력으로 패권국에 저항하기 위해 신체를 개조한 기계 세력이다. 특히 일루미닛이란 고등 외계 종족의 경우에 슈퍼지구는 그들이 대량살상병기를 가지고 있다는 명분을 들며 침략했는데, 이는 미국의 2003년 이라크, 2025년 이란 침공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슈퍼지구가 내세우는 “통제민주주의” 이데올로기까지 <헬다이버즈 2>는 해당 게임이 현실 미국에 대한 풍자임을 숨기지 않는데, 통제민주주의 아래 시민들은 컴퓨터가 정해준 결과를 투표할 뿐이지만 이 ‘민주주의’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으로 헬다이버는 전투 내내 “ 민주주의 맛 좀 봐라!”, “ 번영 을 위하여!”, “이 다친 팔로는 자유 를 전파할 수 없어” 등 세뇌의 표제어들이 담긴 함성을 질러댄다. 튜토리얼 지역에서부터 플레이어는 석판으로 세워진 고용 계약서 주변 15미터 이내에 1초만 서 있어도 서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정작 3.3번 항목에 따르면 해당 계약서를 직접 읽는 것은 계약 위반에 해당한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파시즘에 대한 묘사의 끝은 바로 운영자들이 “진리부”를 통해 게임 내외로 내리는 공지다. 새로운 적을 먼저 업데이트해놓고 공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어들이 발견하면 이 진리부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들이 테르미니드 중 날아다니는 개체들이 등장한 것을 발견하자 진리부는 “벌레는 날 수 없으며 벌레 동조자들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같은 진리부가 “언제나 날아다니는 벌레의 가능성을 믿어왔다”라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던 것과 같은 일은 예삿일이다. 게임 외적 공지마저 이러한 설정에 이입하며 “인류부는 전투 이동 안전 지침에 대한 개정안을 발표하여 헬다이버가 강하 중 스스로 각성제를 투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이전에는 “가위를 들고 달리는 행위”와 “실제 수류탄으로 저글링하는 행위”와 동일한 위험 구역으로 분류되었던 행위입니다”, “우리의 혁신적인 군사 연구팀이 더 날카로운 깃대를 개발한 덕분에 깃발은 이제 적들에게 직접 자랑스럽게 꽂을 수 있습니다. 죽어있든지 살아있든지 말이죠. 이것으로 적들의 피로만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슈퍼지구의 영원한 색깔이 바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와 같은 식으로 패치 내용을 알린다. 난이도와 같은 플레이 시스템 차원에서도 일루미닛은 느린 발사 속도로 거의 정확하게 플레이어를 사격하는 것에 반해 오토마톤은 빠른 발사 속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격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오토마톤의 상황 인식 프로토콜” 성능 때문이라고 서술하는 등 설정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풍자적으로 이입하는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헬다이버즈 2>에서 라이브 서비스 전쟁 게임으로서의 측면이 빛나는 지점은 바로 이 운영자의 개입이다. 플레이어가 배치될 수 있는 행성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바로 은하계의 전황이 플레이어의 참여에 따라 실시간으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운영자는 앞서 말한 진리부의 입을 빌어 슈퍼지구, 그리고 교전 중의 세 세력이 각각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기적으로 알리며 은하계 지도 상황을 변경한다. 이는 새로운 전쟁 이벤트 (제트팩 오토마톤 등장, 블랙홀 출현, 일루미닛의 슈퍼지구 본성 침공 등)나 임무 (“두마 티어” 행성 확보, 샘플 22,000,000개 수집, 테르미니드 1,500,000,000마리 처치 등)를 소개하며 또 이 이벤트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참여를 집계하고 다시 참여 통계를 반영해 임무 성공 혹은 실패 등 향후 이벤트 전개를 정하는 피드백 고리를 형성한다. 이는 플레이어들에게 계속해서 다른 환경의 맵을 경험할 기회를 만드는 설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개개인이 스스로 하나의 커다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한다. 특히 운영진은 플레이어 커뮤니티 내에서 공유되는 경험을 게임 내 공식 설정으로 만들기까지 하는데, 절망적인 난이도로 악명 높았던 전장 “말레벨론 크릭” 행성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추모일을 지정했던 것이나, “마르파르크” 행성에서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신무기 재료를 구하는 임무와 “버넌 웰스” 행성에서 아동 중환자 병원 생존자를 구출하는 임무가 사실상 둘 중 하나만 성공할 수 있는 작전으로 동시에 주어졌을 때 플레이어들이 후자의 행성으로 집결하자 실제로 개발진이 아이들의 감사 편지를 그려 공식 계정에 올리고 세이브더칠드런 재단에 기부를 했던 일처럼 그 범위가 역시나 게임 안팎으로 활개 친다. 그리고 당연히 성공뿐 아니라 실패 시에도 방어 대상이었던 행성이 영영 파괴되어 잔해만 남는 등 그 영향이 뚜렷하게 궤적을 남긴다. 이러한 운영 방식에 대해 커뮤니티 내에서 <헬다이버즈 2>의 플레이어들은 파시즘에 대한 풍자로 유명한 또 다른 게임 시리즈 <워해머 40K>에서 “(수없이 많은 매체상으로 묘사되는) 모든 것이 정사”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는 것을 빌려와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정사”라는 의미로 살짝 비틀어 쓴다. 전쟁이라는 역사 기계 앞 개인의 참전 <폭스홀>와 <헬다이버즈 2>는 둘 모두 각각 제목 그대로 참호전의 참혹함과 전장의 지옥을 그리는 데 주력한다. <폭스홀>에선 전쟁 한번에 평균 3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헬다이버즈 2>에선 출시 이후 1년간 총 28억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전쟁에서 혼자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개 병사이자, 광막한 죽음 앞에 선 자그마한 개인에 불과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현실에서 한 인간 앞에 ‘참전’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규모를 짐작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슈터, 즉 액션 장르인 <헬다이버즈 2>에서 그래도 하나의 ‘전투’에선 목숨을 희생하며 혹은 특출나게 뛰어난 실력으로 중요한 목표를 개인이 달성하는 업적이 가능하지만 그래봤자 그 업적은 전체 은하 전쟁 차원에선 미미한 숫자로 실제 구축함 귀환 후 화면에 뜨는 기여도 수치는 0.0015% 정도에 불과하다. PVP임에도 지휘 체계가 없는 <폭스홀>과, 적진과 아군 작전을 전부를 운영자가 대신 움직이는 <헬다이버즈 2> 모두 위계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영향력은 아무리 게임을 오래 해도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보다 유달리 커지지 않는다. 이것이 <폭스홀> 말마따나 ‘지속적’인 전쟁 경험을 제공하는 비결이리라.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사회지리학자였던 레프 메치니코프 (Lev Mechnikov)는 고대 중국의 거대 건축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양자강의 운하와 황하의 제방들은 십중팔구 수세대에 걸친 정교하게 조직된 공동작업의 소산이다. (...) 이러한 노동은 시간이 지나야만 바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노동의 계획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수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3] . 즉, 자신이 당장 운송한 물자가 정확히 전쟁에 어떻게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몇 시간 째 배달하는 콜로니얼의 트럭 운전수나 진리부의 공지만 믿고 오토마톤 공장 습격 작전에 뛰어드는 헬다이버는 마치 기계 속 하나의 부품과 같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실제로 산업사회의 기계 속 노동자는 도박사와도 같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벤야민은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 (Alain)이 “도박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독특한 면은 어떠한 게임도 이전에 이루어진 게임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도박에 있어서는 어느 편도 확실한 입장에 있지 않다. 이전에 이겨서 벌었던 것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포착한 것을 변주해 “기계노동자의 기계조작이 먼저번의 기계조작의 동작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동작이 먼저번의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도박에 있어 한탕이 그때마다 이전의 한탕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조작의 동작도 매순간마다 그 이전의 동작과 차단된 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임금노동자의 작업은 노름꾼의 작업과 그 나름대로 짝을 이루게 된다”라는 고찰을 생산한다. 즉 마치 로그라이트 장르처럼 느껴지는 이 공통 구도상에서 노동자와 도박사 모두에게 “양자의 작업은 하나같이 일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4] .”라고 썼다. 콜로니얼의 트럭 운전수와 헬다이버 모두 다음 날, 혹은 며칠이 더 지나서야 그나마 지도상에서 전선이 살짝 전진한 것을 보며 희미하게 자신 행위의 사소한 영향력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임하는 같은 작업이 또 다시 어떤 결실로 맺어질지는 정확하게도 구체적으로도 알지 못하면서도 전장으로 향한다. 벤야민은 이처럼 과거 · 미래와 분리된 시간을 통해 관망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실은, 수천 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 하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로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5]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가 형식적 측면에서 전쟁, 그리고 역사적 시간과 관계하고 있다면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 (Obsidian Entertainment)의 게임들은 주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 앞 한 개인의 인식이라는 문제를 연속적으로 다루어 왔는데,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기사단 2>의 ‘크레이아’에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로 이어지는 인물상은 인과를 알 수 없는 운명의 의지 앞에 너무나도 왜소한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투신하는 초인의 꿈을 꾼다. 특히 두 작품 모두의 서사 전체에서 전쟁은 지배적인 이야기꾼이고 두 인물은 국가 사이에 흐르는 그 거대한 힘의 충돌 앞에 개인이 역사와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 고뇌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관은 옵시디언이 포착한 전쟁 앞에서 문자 그대로의 현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전쟁은 역사를 쓰는 것도, 지우는 것도 가능한 그 무엇보다 “현재시간” 속의 것인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그 성격상 필연적으로 전쟁은 개인이 역사와 관계하도록 강제하고, 그 개인들은 또 반동 인물로서 주인공에게 파편인 동시의 영원인 역사를 잇고 전해 나간다. 전쟁과 역사에 대해 이와 같이 주제적 측면에서 사유하는 시도는 그야말로 태초부터 형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형식적 측면에서 그 자체를 체화하고 시뮬레이션하는 사례는 오직 게임에서만 발생해 왔다.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그 원리를 인간 본질에서 찾은 바 있는데, " 국가들의 역사를 한낱 우리에게 많은 부분이 숨겨져 있는 인간성의 내적 소질의 현상으로 본다면, 국가들의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목적인 목적들에 따르는 자연의 모종의 기계적인 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국가는 정복하기를 희망하는 이웃 나라가 있는 한, 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자기를 확대하고, 하나의 보편왕국을, 즉 그 안에서 일체의 자유와 그리고 그것과 함께하는 덕, 취미, 학문이 소멸할 수밖에는 없는 하나의 체제를 향해 애쓴다. 그러나 이 괴물은, 모든 이웃 나라들을 삼켜버린 다음에, 결국은 저절로 해체되어 봉기와 분열에 의해 많은 작은 국가들로 쪼개진다. 이 작은 국가들은 하나의 국가연합을 향해 노력하는 대신에, 다시금 그들 각각이 전쟁을 정말로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똑같은 놀이 를 시작한다 [6] . " 다시 말해 칸트는 국가를 인간 본성의 표현으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전쟁 또한 그 성질에 내재된 하나의 치명적인 “악”이며, 심지어 그 자체로서 목적성을 가지는 자기 완성적 · 순환적 “놀이”이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폭스홀>은 극단적으로 상세화된 활동적 측면으로, <헬다이버즈 2>는 운영진의 적극적 개입과 플레이어 활동 반영 등의 실시간 소통의 방식으로 각각 전쟁 앞 개인의 감각을 생산해 플레이어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특히나 플레이어들에게 위계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지 않고 또 개인으로서의 플레이어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체감되는 전쟁의 크기를 키우고,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에 참여했다는 생생한 실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은 ‘악의 반영’으로서 놀이에 대한 놀이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인간 행위의 본질에 대한 섬광을 계속해서 비춰 나간다. [1] https://www.nme.com/news/gaming-news/foxhole-logistics-union-ends-49-day-strike-after-demands-met-3173270 [2] https://logiunion.com/archive/openletter/ [3]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서울, 민음사, 1983), 76쪽. [4] 위의 책, 145쪽. [5] 위의 책, 355쪽. [6] 임마누엘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파주: 아카넷, 2015), B30=VI34. Tags: 온라인게임, 라이브서비스, 전쟁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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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 Vol. 17 아곤과 알레아의 경합으로 일컬어지는 놀이의 전통 끝자락에서, 디지털게임은 운과 확률을 동원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경우의 수 판타지 세계를 열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겨지면서도, 또다른 측면에서는 과도한 확률 의존으로 비판받는 오묘한 확률과 게임의 세계를 고찰해 본다.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Read More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깊이 읽기 이 글은 이번 게임백서에서 주목할 만한 데이터들과 놓치면 안 될 흐름들을 소개한다. 백서가 더 널리 활용되기 위해 고려할 지점들에 대해서는 지난 10호에서 살핀 바 있고, 그 내용들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므로 이 글에서 반복하지는 않도록 한다. 물론 그 중에는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음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Read More MMORPG 레이드와 확률에 대응하는 플레이어 게임은 ‘불확실성’의 매체다. 보통 게임에서 불확실성은 두 차원으로 작동하는데, 하나가 게임의 결과와 관련된다면, 다른 하나는 게임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특정 기회의 작동과 관련된다. 고도의 플레이 스킬을 요구하는 게임이든 운 중심으로 플레이되는 게임이든, 플레이어가 그에 참여해 플레이한 결과가 어떤 것일지는, 실제 플레이를 끝내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Read More Randomness is a double-edged sword. The opposite reception of randomness in AAA and indie game sectors It seems fascinating that the same mathematical phenomenon could become the foundation of the most acclaimed and the most despised design principles of modern gaming. As I will argue in this article,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ed to randomness. Read More What’s fair price for video games? In Korean gamer communities, there's this saying about playing games from the Steam library: "Back then, we never paid to play the game. Nowadays, we never play despite paying the game." The phrase sarcastically highlights the contrast between the game market back in the 80s-90s, when no one actually paid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ith the abundance of pirated and copied games in Korea, compared to now with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when people do not play the game despite after purchase. Read More [Editor's View] 재현의 도구냐, 사행성의 도구냐를 묻는 오늘날의 디지털 주사위 알 수 없는 미래를 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음악과 문학, 영화 등 기존의 많은 매체들이 시간선을 따라 정해진 사건을 풀어가는 형태였던 것과 달리 디지털게임은 '알 수 없음'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왔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완벽하게 모사할 수는 없고, 제한된 방법으로서의 확률 계산을 통해 게임은 그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상황과, 그 상황에 놓인 인간의 머뭇거림과 결단을 그려내고자 한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Read More 게임 개발자가 바라보는 확률의 구현 게임에서는 확률이 필수 불가결이라는 의견도 있고 지나치게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게임에서 확률을 실제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까? Read More 디지털 연산장치와 확률이라는 조합의 아이러니 디지털게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이 매체의 물적 기반인 컴퓨터의 시작이다.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설계된 이 전자장치는 애초에 암호해독이나 탄도 계산 같은 전쟁 기술을 보조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그런 도구로 사람들은 놀이하는 방법을 찾아내 즐기고 돈을 번다. 전쟁용 전자장비를 활용해 만든 놀이들의 상당수가 전쟁과 전투를 재현하려 든다는 점까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Read More 랜덤함: AAA와 인디게임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양날의 검에 관하여 요약하자면 현재 게임 산업 내 랜덤성의 인기와 그것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인식은, 처음에는 놀랍게 여겨질 수 있으나 우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랜덤성이 과거의 아날로그 게임들에서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Read More 마일즈 모랄레스의 정체성과 브루클린이라는 ‘장소’ 마일즈의 불안은 인물(아마도 다른 시간선에서 스파이더맨이어야 했으나 프라울러가 되고 만 마일즈)의 형상을 취하다가 거미로 변모한다. 그의 공포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자격과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었던 셈이다. Read More 모든 게임의 확률은 여전히 주사위다 비록 이제는 멀티코어를 활용하거나 별도의 알고리즘, 하드웨어를 이용해 진정한 의미의 난수를 디지털에서도 생성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 벽은 높다. 주사위라면 단 몇백원 만에 유의미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확률놀음을 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의 것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Read More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Read More 셧다운제부터 게임 사전심의까지 - 21대 국회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그럼에도 유독 지난 국회에서는 ‘친게임’이라 부를 만한 국회의원이 다수 활동했으며, 유의미한 성과를 기록했다. 게임이라는 의제에 대한 정치권의 높은 관심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어져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들이 게임 정책을 힘주어 발표하거나, 게임 전문 유튜버, 매체와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Read More 유보된 이야기와 넓어진 유희공간- <용과 같이 8> 이 글에서 다루는 <용과 같이>는 전통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취급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카무로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수두룩하고, 선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으며, 무수한 미니게임이 게임의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Read More 확률이 만드는 스킵: 즐거움과 귀찮음 사이를 맥동하는 플레이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을 풍부한 경우의 수로 뽑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확률은 디지털게임에서 직면하는 상황의 다채로움을 만들어내며 빛을 발한다. ‘다키스트 던전’에서 랜덤하게 튀어나오는 스트레스 상황과 영웅의 기상은 플레이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나락에서 극락까지의 폭넓은 감정 변화를 만들어내고,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서 매 라운드마다 주어지는 랜덤한 카드보상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예측불가능한 도전에 대해 예측과 적응으로 돌파하게 만드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Read More

  •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채팅 비활성화와 게임 커뮤니티 문화

    2019년 브리아나 우는 게임이 단순한 모방 범죄와 폭력성을 유발하고 있다는 담론에서 벗어나 이제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와 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또한 사회 문제가 생겼을 때 게임을 모방한 사건이나 게임 중독자의 일탈 행동 등 개인의 책임을 묻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이머 문화와 커뮤니티의 유해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지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 Back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채팅 비활성화와 게임 커뮤니티 문화 03 GG Vol. 21. 12. 10. * 〈리그 오브 레전드〉 2021년 11월 21일 패치 노트 2021년 11월 21일, 〈리그 오브 레전드〉의 게임 내 전체 채팅 기능이 사라졌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게임의 명성만큼이나 해로운 상호작용을 지닌 게임으로도 유명하다. 롤의 채팅 기능은 게임을 위한 전술을 교환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대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번 패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팀원 간 채팅은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운영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에 존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되던 기능을 삭제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고, 팀 내 채팅마저 삭제될 경우 당장 타인과 함께 플레이하지 않는 유저들 간에 전술을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이 미흡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패치를 주목했다. 누군가는 진작 생겨야 할 기능이었다며 환영했고, 반쪽짜리 기능일 뿐이라며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체 채팅은 사라졌지만 게임이 끝나자마자 결과 화면에서 바로 상대 팀원에게 욕설을 퍼붓는 게이머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이번 패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이미 제공되는 채팅 끄기 기능을 왜 쓰지 않냐면서 이번 패치로 인해 자신이 채팅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 뿐만 아니라,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많은 게이머들은 게임 중 발생하는 폭력적인 대화들을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미 게임 문화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폭력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익명의 상대방에게 더 쉽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가? 기존의 MMORPG 게임은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일정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됐다. 상위 컨텐츠를 플레이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부대낄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면 (좋건 싫건 간에) 게임 속에서 사회 규범이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유저들과의 대결인 PVP 보다는 PVE 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원망의 대상이 몬스터나 개발사 쪽으로 가지 유저로 가는 일은 상대적으로 드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MMORPG 중 PVP가 유명한 게임들의 경우 채팅 환경이 상대적으로 더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AOS 게임은 부계정을 만들기가 타 장르에 비해 쉬운 편이다. 캐릭터의 숙련도를 정하는 것은 캐릭터의 레벨이나 전설적인 장비가 아닌 자신의 피지컬, 즉 순수한 실력이다. 게임 규칙을 지키지 않아 채팅이 막히고 아이디가 정지되더라도 다른 아이디로 접속하면 전과 같은 환경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 타인과 경쟁하는 게임에서 원망의 대상은 자신에게 패배의 경험을 제공하는 상대방이다. 같은 편이어도 예외는 없다. 끊임없는 조작이 필요한 AOS 게임의 특성상 채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부정적인 경험(캐릭터의 사망, 승패가 가려진 후)을 한 직후밖에 없는데, 이때의 흥분되는 감정들이 직접적으로 상대방에게 쏟아지기 쉬울 수밖에 없다.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증오 표현과 성희롱을 하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게임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속된 말로 게임을 던지는) 것도 불사하는 행동, 때로는 게임 밖으로 까지 뻗어나가 사이버 괴롭힘과 스토킹까지 지속하는 이런 행위들을 서구권 게임 업계에서는 독성 행동(Toxicity, 일부 논문에서는 유해 행동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게이머게이트 사건 이후, 게임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독성 행동이 어떤 기반에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이런 행동들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사회문화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북미의 경우 게임 커뮤니티에서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의 경우 대부분은 보수적인 성향을 띄며 여성 보다는 남성의 수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어리거나 젊은 게이머가 많았으며, 백인이고, 이성애자의 비율이 높아 주류 사회의 포지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공격성은 위보다는 아래로 향하였고, 타인이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빼앗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약자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욕설 대상은 여성과 타 인종, 성소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1)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이런 경향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단일민족 국가 정체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타인종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욕설은 상대적으로 덜 하지만 그 부분을 여성에 대한 욕설이나 성희롱으로 채운다. 주목할만한 사실로는 상대방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더라도 어떤 캐릭터를 고르는지, 어떤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는지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되는 순간 상대방을 여성이라 단정하고 공격하는 경향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2) 공통적으로 독성 행동은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보다는 남성이, 팀워크를 통해 경쟁하는 게임을 경험했을수록 더 흔하게 발생한다. 남성 게이머는 나쁘고 여성 게이머가 덜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을 하는 유저들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온라인 활동을 하는 이용자들의 수가 애초에 적기 때문이다. 게임 이용자들 중 1.4%만이 적극적인 온라인 활동을 한다. 댓글을 남기는 비율을 포함해도 10% 미만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 중 악성 유저의 수는 소수이지만, 이 소수가 게임과 게임 커뮤니티의 의견을 과대표하게 되면서 이들의 의견이 게이머 전체의 의견인 양 노출되게 된다는 점이다. 3) 이런 독성 행동은 게임 밖 커뮤니티에서 특히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자신을 드러낼 필요성이 없는 익명 사이트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한데 문제는 한국의 경우 게임 커뮤니티의 상당수를 익명 사이트(대표적으로 디시인사이드가 있다.)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카페나 팬 사이트와 다르게 익명 사이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를 강조한다. 이들은 친목과 규칙을 거부하고 쉽고 빠르게 글을 쓴다. 날것의 감성을 강조하여 원색적인 표현을 쓸 수록 반응이 좋기 때문에 자극적인 글들이 많고, (루머를 포함한) 최신 정보도 다른 곳에 비해 빠르게 올라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당연히 게임 개발자나 운영자들 또한 익명 사이트를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하게 되고, 원색적인 단어에 놀라던 사람들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자극에 익숙해져 “잘못된 것 같긴 하지만, 원래 게임이 그렇다.” 는 식으로 무뎌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익명 사이트 문화가 게임 문화의 일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런 익명 사이트는 몇몇 유저가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쉽다. 독성 행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타인의 독성 행동을 학습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디시인사이드의 경우 유저 수가 작은 마이너 갤러리가 하나 있다고 하자. 이 곳이 아무리 ‘DC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도 사람이 증가하면 독성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된다. 이들은 수가 소수일 때는 침묵하다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한 두 명 보이기 시작하면 그동안 게시판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말을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곧 마이너 갤러리의 분위기는 다른 갤러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식이다. 이들은 하나의 익명 사이트만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익명 사이트에서 동시에 비슷한 행동을 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게시물을 여러 사이트에 공유하고, 각종 혐오 문화를 밈(MEME)과, 동영상, 짤방을 통해 재생산하여 퍼뜨리다 보면 대형 커뮤니티까지 이런 글들이 확대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침묵하기를 선택하고, 그것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커뮤니티를 떠난다. (게임 이용자들의 절반이 커뮤니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러다 보면 게임 커뮤니티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추구하게 된다. 남들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것들은 남성이어도 쉽게 웃음거리가 된다. 수준 미달인 상대방을 놀리기 위해 원색적인 욕을 서슴없이 하며, 그것들을 가식 떨지 않는 솔직함으로 표현한다. ‘상남자’스럽지 않은 것은 계집들이나 게이들이 하는 일이며, 자신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서클 안에 속하는 우리들 뿐이다. 그 곳에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분명 게임 속 커뮤니케이션 문화에 질려 떠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 채팅 기능이 없는 〈스플래툰〉과 〈포켓몬 유나이트〉 독성 행동에 대한 해결 방법은 아직은 일반론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에이펙스 레전드〉(Apex Legends) 등 몇몇 게임에서 채팅 기능을 제거하고 핑(Ping) 시스템을 통한 간접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도입한 이후 많은 게임에서 핑 시스템을 적극 차용하고 있으며 채팅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게임들 또한 등장하고 있다. 핑 시스템이 완벽한 대안이라는 말이 아니다. 핑을 쉴 새 없이 찍어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감정 표현을 통해 상대방을 비꼬는 행위는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채팅 기능이 삭제되는 것 만으로도 타인의 노골적인 적대적 감정을 원치 않는 순간에 맞닥뜨리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게이머도 게임사도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발매될 게임들 중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채팅을 사용하는 게임들은 점차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게임 시스템적으로 다양한 대안을 세운다 하더라도 헤게모니 적 남성성을 과시하는 커뮤니티가 살아 있는 한 게이머들의 독성 행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AI 봇의 차단을 피해가며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기 위한 방법을 자랑스럽게 공유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 게이머를 참교육한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나눈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영상들을 유튜브 클립과 이미지를 통해 재생산되며 집단 내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이 선을 넘은 행위로 게임을 정지당하더라도, 게임 커뮤니티에는 여전히 이들의 게시물과 동영상이 남아 있다. 자극적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이는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런 문화는 점점 더 부추겨질 수 밖에 없으며, 알고리즘으로 인해 유입되어 그 문화를 학습한 다른 이용자들에 의해 독성 문화는 계속해서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 “비디오 게임은 총기 난사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게이머 문화는 증오를 조장한다.” 4) 2019년 브리아나 우는 게임이 단순한 모방 범죄와 폭력성을 유발하고 있다는 담론에서 벗어나 이제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와 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또한 사회 문제가 생겼을 때 게임을 모방한 사건이나 게임 중독자의 일탈 행동 등 개인의 책임을 묻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이머 문화와 커뮤니티의 유해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지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1) Weird (2020.12.09),Toxicity in Gaming Is Dangerous. Here's How to Stand Up to It, (https://www.wired.com/story/toxicity-in-gaming-is-dangerous-heres-how-to-stand-up-to-it/) 2) 이현준,(2021), ‘혜지’가 구성하는 여성에 대한 특혜와 남성 역차별 : 공정성에 대한 남성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의 열망은 어떻게 여성혐오로 이어지는가?,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17-19p 3) 박소영, (2020.08.19), 게임이용자 중 1.4%만 적극적 온라인 활동... "남성 게이머 과대표됐다",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80901430002130) 4) Wu, B. 2019. Video Games Don’t Cause Mass Shootings. (https://www.washingtonpost.com/outlook/video-games-dont-cause-mass-shootings-but-gamer-culture-encourages-hate/2019/08/09/655409a0-b9f2-11e9-a091-6a96e67d9cce_story.html)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게임 리뷰어) 딜루트 타인이 공들여 만들어낸 가상 세계와 이야기를 분석하는 행위를 즐겨 합니다. 선호하는 장르는 RPG이며 최근에는 보드게임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 콘솔게임 시장으로 진입하는 한국 게임산업을 바라보며

    자주는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지만 가끔 닌텐도 스위치 구매를 후회할 때가 있다. 최근 2년 넘게 스위치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개인적인 게임 취향 탓이다. 무거운 테이스트에 충분한 핍진성을 통해 몰입감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데, 밝은 테이스트에 캐주얼한 게임이 많은 닌텐도가 잘 맞지 않음을 너무 늦게 즉 스위치 구매 후에 깨달았다. < Back 콘솔게임 시장으로 진입하는 한국 게임산업을 바라보며 11 GG Vol. 23. 4. 10. 자주는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지만 가끔 닌텐도 스위치 구매를 후회할 때가 있다. 최근 2년 넘게 스위치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개인적인 게임 취향 탓이다. 무거운 테이스트에 충분한 핍진성을 통해 몰입감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데, 밝은 테이스트에 캐주얼한 게임이 많은 닌텐도가 잘 맞지 않음을 너무 늦게 즉 스위치 구매 후에 깨달았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향후 출시 예정 타이틀을 둘러 보기는 한다. 콘솔은 어린 시절부터의 로망이었고(이 쓸데없는 개인사는 과거 칼럼인 ‘왜 한국 콘솔시장은 작을까? - 한국 콘솔게임에의 회상’ 의 도입부를 참조하면 좋다) 이왕 산 스위치이니 어떻게든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얼마 전 ‘베요네타 3’이 출시되어 실로 오랜만에 스위치를 켜보았다. 예정 신작 리스트를 볼 때마다 확인하는 부분은 한국어화가 되어 있는가이다. 영어여도 게임 진행을 할 수는 있는 정도의 어학 능력이 있긴 하나, 즉각적으로 독해가 가능한 모국어를 따라갈 수준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산 콘솔 게임이 적은 것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더 코마’가 스위치로 발매되었을 때 즐거웠던 기억은 오래 남아 있다. 한국 게임의 콘솔 점유율이 낮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앞서 링크한 과거 칼럼에서 분석했던 바, 한국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로 인해서 당시 청소년이었던 게임 유저들이 거실의 권력을 가져가지 못했다. 대신 자기 권력이 작동하는 ‘방’에서 가능한 PC 게임이 가정 내 게임의 헤게모니를 가져갔다. 그 결과 약하지만 확실한 오프라인 소셜의 콘솔 게임보다 확고한 온라인 소셜의 PC 게임이 주류가 되었고, 오프라인 소셜의 성격이 지배적인 아케이드(PC방 포함) 게임의 전통은 역설적 오프라인 소셜 기능을 가진 모바일로 계승되었다. 이것이 모바일-콘솔 우선의 세계 여타 시장, 특히 북미 및 유럽 시장과 모바일-PC 우선의 한국 시장의 차이를 낳은 원인이며 과정이었다. (이제 저 과거의 글을 읽을 이유가 없어졌다!) 스위치 구매를 이따금 회의하는 가운데, 요즘은 PS5 구매를 고민하고 있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와 같은 PS 독점의 트리플A 게임을 하고 싶기 때문인데, 스위치의 전례가 있다 보니 출시작과 출시 예정작을 면밀히 훑고 있다. 즐길 게임이 최소 두 자릿수는 있어야 저 돈이 아깝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보면 괜히 살 마음 없는 엑스박스의 출시작 리스트도 보게 된다. 호기심엔 답이 없다. 이 지점에 오면 눈에 들어오는 경향성이 있다. 각 콘솔의 출시 예정작 중에서 한국산 게임들의 비중이 점차 늘어난다. NC소프트의 ‘쓰론 앤 리버티’, 넥슨의 ‘데이브 더 다이버’,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퍼스트 디센던트’ 등에 넷마블이 유명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나혼자만 레벨업’ 등이 눈에 띈다. 여기에 네오위즈 작품인 ‘P의 거짓’, 위메이드의 ‘나이트크로우’, 개인적으로는 내 안의 변태를 깨우는 그래픽이라 위험작으로 분류한 시프트업의 ‘스텔라 블레이드’ 등등까지. 여기에 ‘크로스파이어: 시에라 스쿼드’와 같은 콘솔 기반의 VR 게임들까지 합하면 숫자와 무게감은 더욱 늘어난다. 전통적으로 콘솔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게임사들이 대대적인 도전을 하고 있다. 2022년 한국 게임 시장에서 콘솔 게임이 차지하는 비율은 유저의 이용률로 볼 때 17.9%에 불과하다. 이를 세계 전체 게임 시장으로 확장해보면 시장 규모 대비 1.7%다. 자본 규모로는 1조 원 가량에다 5% 정도 비중의 작은 시장이다. 한국이 미국-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게임 시장의 7.6%를 차지하는 세계 4위 시장임에도, 혹은 감안하지 않아도 작다. 그나마 한국 콘솔 게임 시장은 최근 7년 동안 꾸준한 성장을 해오긴 했다. 2015년에 1.8% 비중에 불과했던 이 시장은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라는 히트작이 발매된 2020년에는 6.4%까지 성장했다. 다만 바로 대형 히트작이 없었던 바로 다음 해에 5.5%로 떨어지긴 했지만,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서는 한국 게임사들의 출시 예정작이 출시되면 다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 출처 :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 하지만 게임 개발 현장과 전문가들의 지적은 콘솔 성장보다 PC와 모바일의 성장에 집중되어 있다. 일단 최고 파이인 모바일의 비중과 매출에서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팬데믹 특수를 탔던 2020년에 잠시 성장세가 늘어났을 뿐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시장이 성장 한계점에 다다른 것이 더욱 눈에 띈다. 이런 상황은 PC 게임 시장 또한 마찬가지다. 유명 IP의 신작이 출시되면 잠시 매출이 늘어나는 정도인데, 이건 시장이 이미 한계에 도달한 후라는 의미다. * 출처 :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 이미 시장에서의 신호는 PC와 모바일에서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이 관측되고 있다. 게임사 입장에서 당장 오늘 먹을 것은 있지만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의 먹거리가 불확실해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시장과 개발 현장이 성숙해지고 법적 예술의 지위도 확보된데다 노조들이 제 역할을 하려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인건비 상승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개발 비용 증가다. 그리하여 한국 게임사들은 다양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블록체인과 NFT를 접목해서 환금성이 높은 게임을 만들어보는 시도가 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의 과금유도 게임과 기본 구조가 같고, 한국 국내 시장에서는 게임사의 현금 환금을 금지하는 법안이 합헌이라는 판결까지 나와 갈 길이 애매하다. 메타버스 개념을 활용하는 방안도 시도되고 있다. 메타버스는 환경만 제대로 조성된다면 이용자가 곧 컨텐츠 창작자가 되어주기 때문에 컨텐츠 개발 소요가 많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시장에 안착한 후에는 여타의 MMO 게임과의 차별성을 두는 부분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온라인 성범죄의 플랫폼이 되는 등 신종 범죄에 이용 당하는 부작용도 관찰된다. 게임 개발의 노하우를 다른 분야에 적용시켜 가상인간이나 버튜버를 만드는 수익 모델도 제시가 되었지만, 일단 이건 게임 분야가 아니니 논외로 하자. 이런 와중에 느리게나마 확실하게 성장 중인 국내 콘솔 시장과, 이미 확고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북미/유럽의 콘솔 시장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현재 한국의 게임 수출 대상국 1위는 압도적으로 중국인데, 이런 중국의 게임 시장 상황은 최근 몇 년 동안 좋지가 않다. 중국 게임사의 개발 역량이 양질의 측면에서 궤도에 오르면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데다, 중국 정부가 자국의 게임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 게임에 대한 판호 발급을 줄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솔 게임에 진출하는 것은 중국 시장 대신 북미/유럽 시장을 개척하는 2중의 개척이며, 필수불가결한 개척이 된다. 여기에 더해서 진출 정체 상태인 중국 시장에서조차 콘솔 게임은 성장 중이다. 2021년 대비 2022년의 중국 콘솔 시장의 매출은 17% 증가했다. 비록 불법인 그레이마켓 매출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혹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잠재 성장 예상은 더 높다. 그렇다면, 판호만 얻어낼 수 있다면, 이 성장하는 콘솔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모로 한국 게임사에게 콘솔이 다음 개척지가 될 이유들이다. * 출처 : 니코파트너스 그리고 배틀그라운드가 흥행했다.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게임 개발 현장에 준 메시지 중 하나는, 기존 MMO 게임처럼 온라인 퍼블리싱 판매가 아닌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에서의 판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게임이 ESD에서 판매가 가능하다면, 그 ESD는 스팀일 수도 있고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일 수도 있고 닌텐도샵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배틀그라운드의 2017년 이후 대작과 인디 가릴 것 없이 많은 게임이 스팀을 비롯한 ESD를 통해 출시되었다. 스팀 기준으로 판매 및 접속 성적을 보면 ‘블레스’, ‘섀도우 아레나’ 같은 게임들은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지만, ‘스컬’, ‘플레비 퀘스트: 더 크루세이즈’, ‘영원회귀: 블랙서바이벌’ 등은 나쁘지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고 보면 스위치에서 할 게임이 없다고 징징대던 내가 닌텐도샵에서 ‘더 코마: 커팅 클래스’를 샀던 시기도 배틀그라운드 이후인 2019년이었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의 콘솔 게임 시장 진출 시도는 약간의 절박함도 묻어 있다. 집 안에서는 더 이상의 산출이 어려운데, 바깥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았기에, 그리로 가는 것이다. 당장의 먹거리는 있지만 통계 지표는 그 먹거리가 조만간 포화 상태가 될 것을 경고하고 있으니까. 이는 제국주의에 비유할 수도 있고 이민자에 비유할 수도 있다. 사실 비유의 측면에서는 두 가지 모두 같은 동인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의 시장 성장이 한계이니 외국으로 나간다는 제국의 동인과, 국내에서 원하는 성취나 생존을 이루기 어려우니 외국으로 나간다는 이민의 동인은 사실 포화 상태에서 추동력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 단지 서있는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뿐이다. 매출 통계 보고서를 받아든 현장의 경영자와 개발자는 절박한 이민자의 마인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절박함은 보상 받을까? 앞서 스팀에 진출했다가 실패를 맛본 게임들의 예를 들었는데, 최근에는 ‘칼리스토 프로토콜’이 비평적으로 실망을 끌어내면서 사실상 실패의 성적을 거뒀다. 이후에 올 도전들이 이런 식이 되면 큰일난다. 이미 ‘P의 거짓’과 ‘퍼스트 디센던트’는 아류작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눈길을 받고 있다. 우리가 출시 예정작의 미래를 전망할 때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단어는 ‘완성도’다. 특히 콘솔이면 소위 ‘패키지 게임’이 우선 떠오르기에 차차 고쳐나갈 수 있는 온라인 기반 게임보다도 출시 직후의 완성도가 더욱 중요하다. 가장 흔히 그리고 가장 먼저 짚는 요건이고,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하나마나 한 말이다. 그러니 자칫 놓치기 쉬운 완성도의 중요 요소를 짚어 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경영 분야에서 비유를 빌려온다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원리가 있다.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동명의 저서에서 제시한 비유적 개념이다. 렉서스는 세계화, 보편성의 아이콘이고 올리브나무는 전통성, 문화적 오리지널리티의 아이콘이다. 이 짝패는 또한 개방성과 폐쇄성, 수출과 내 수의 상반된 개념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리드먼은 반대의 두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국적 요소에 의해 만들어져 다양한 국가로 팔려나가는 렉서스만을 택해 개방 일변도, 세계화로 나아가기만 하면 큰 시장에서 거대한 성과를 얻어낼 수는 있어도 지구 반대편의 악재로 인한 도미노 현상에 얻어맞을 수가 있다. 때 되면 찾아오는 금융 위기가 가장 확실한 예시다. 이것을 문화 분야로 번역하면 ‘상품에 줏대와 무게감이 없어진다’. 반면 동네 올리브나무를 놓고 싸우는 분쟁은 지엽적이고 유치해 보이지만, 동시에 지역의 뿌리이기도 하다. 프리드먼은 국가를 최후의 올리브나무라고 규정한다. 가족, 지역, 민족, 종교 등은 ‘우리’를 규정하는 판단 준거다. 배타주의와 혐오를 낳기 쉽고 확장성은 0에 가깝지만, 이 또한 렉서스만큼이나 확고한 인간 욕망의 한 축이다. 다시 이를 문화 분야의 언어로 번역하면 ‘확고한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컨텐츠’가 된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의 1편, 도입부 컷신에서 흘러나왔던 전설적인 대사다. “Wow, What a Mansion!” 본래의 일본어 대사는 “대단한 저택이군” 정도의 문장이지만 허술한 영어 번역과 방만한 연기로 인해 저런 어처구니없는 감정선의 대사가 만들어졌다. 또는 드라마 ‘로스트’에서 한국 장면이랍시고 동남아 식생이나 60년대 간판을 등장시켰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제작진들이 렉서스를 제대로 타고 저쪽의 올리브나무에 도착하는 임무를 해내지 못한 경우다. * 1편의 왓어맨션은 밈이 되었지만 7편의 현지 재현도는 강력한 효과를 냈다. 반면 성공한 경우는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의 7편이다. 루이지애나 외딴 늪지에 위치한 베이커 저택의 음침함을 현실성 있게 표현해내기 위해, 제작사는 텍사스 출신의 작가를 기용하고 로컬라이제이션 디렉터를 따로 기용했다. 이는 해당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렉서스에 제대로 탑승한 시도였다. 반대의 경우는 드라마 ‘킹덤’이 있다. 일본도 중국도 아닌 조선의 복식과 정부 시스템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끈 것은 의외로 복식, 특히 갓이었다. 생소하지만 멋져 보이는 ‘cool hats’에 대한 관심은 올리브나무가 렉서스를 타고 넘어가 전파에 성공한 경우다. 유사한 성과를 보인 게임으로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들 수도 있겠다. * 드라마 속 복식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킨 드라마 ‘킹덤’. 이는 우리 동네 올리브나무를 설득력 있게 파는 방법에 대해 큰 힌트가 된다. 렉서스 개념과 올리브나무 개념은 서로 정반대의 원리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을 한 콘텐츠 안에서 구현하려고 한다면 둘의 지향점이 같아진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현실성 혹은 핍진성이다. 그리고 이 지향점의 끝은 몰입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완성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향후의 콘솔 도전기에서 개인적인 기대작은 올리브나무를 제대로 분석해 딱 맞는 렉서스에 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펄어비스의 ‘도깨비’가 되겠다. 이 게임 역시 멀티 플랫폼으로 콘솔을 지원할 예정인데, 트레일러를 통해 본 예상 장점으로는 현대 한국적 환경을 훌륭히 녹여낸 배경이 있다. 한국적이라 하여 고궁이나 한복을 우선 내미는 구시대의 우를 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런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지도 않으며, 전통과 현대가 맥락을 넘어 뒤섞여 있는 현실 한국의 특색을 그대로 녹여냈다. 딱히 이런 배경을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게임의 경우에도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원리는 적용될 수 있다. ‘쓰론 앤 리버티’에서는 ‘기상이 전술에 미치는 영향’을 얼마나 현실감 있게 구현해내는지가 이 게임의 올리브나무가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한 명의 게이머로서, 아무쪼록 모든 출시 예정작들이 자신의 올리브나무를 잘 파악하길 바란다. 가능하면 닌텐도 스위치 버전으로 살 것 같지만, 어느 날의 내가 간이 커져서 PS5를 질렀을 수도 잇으니 장담은 못 한다. 다만 어느 버전이든 충분한 몰입감을 주는 핍진성 구축에 성공하였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게임 라이프가 PC와 모바일을 넘어 콘솔의 로망에 다시 가닿기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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