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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의 은유 : 요코오 타로의 질병 서사

    <니어> 시리즈와 <드래그 온 드라군> 시리즈에서 질병은 반복해서 절망의 폐쇄회로를 다룬다. 세계멸망의 꽃이 나타나 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에 레드아이가 퍼지고, 카임은 레드 드래곤과 계약을 맺어 2003년 도쿄 신주쿠에 이르기까지 결전을 벌이며, 레드 드래곤의 몸속에 마소가 확산되어 니어 월드에 전파되고, 인간이 만든 로봇들은 마소를 다른 세계로 돌려보내 세계멸망의 꽃은 Zero의 눈에 탄생하게 된다. < Back ‘병’의 은유 : 요코오 타로의 질병 서사 14 GG Vol. 23. 10. 10. 원문제목: “病”之隐喻:横尾太郎作品中的疾病叙事 “질병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완전하게 오래된 두려움이다. 미스테리한 것으로 취급되고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모든 질병은 실제 전염성이 없더라도 윤리적으로는 전염성이 있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다.” - 수전 손택 “질병은 생명의 그늘이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질병들과의 투쟁을 동반해왔다.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땐 잠시나마 안정을 얻었지만, “보편적인 즐거움은 항상 위협받”는데, 곧바로 다시 새로운 질병이 다가와 고통받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에서 질병은 생리적인 질병 이외의 색채를 부여받았는데, 수전 손택은 암에 걸린 후 집필한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질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은유(가령 폐결핵으로 대표되는 낭만, 암에 부여된 게으름 등)를 밝히고자 시도했다. 그 책에서 손택은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가장 진실한 방법으로 질병을 다루려면 질병을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될 수 있는 한 물들어서는 안 되며,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 [1] 고 말했다. 이와 달리 요코오 타로의 작품에서 질병은 완전히 은유적인 것이며, 은유적 색채를 제거하고 질병 자체에 환원할 필요가 없다. 요코오 타로의 이야기에서 ‘병’은 완전히 허구적인 병이며, 은유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이라는 요소는 요코오 타로가 주도해 만든 <드래그 온 드라군(Drakengard)>, <니어 레플리칸트(NieR Replicant)>, <드래그 온 드라군 3>, 그리고 <니어: 오토마타> 등 네 작품을 관통한다. 이 게임들에서 ‘질병’은 서사 속 갈등의 진원지로, 대립하는 진영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들은 손택이 언급한 낭만화되거나 불명예스러운 생리학적 질병도 아니고, 푸코가 상상했던 병원체 및 숙주도 아니다. 요코오 타로 작품 속의 ‘질병’이란 인류사회로부터 고유한 요소들——통상 우리에겐 익숙하고, 요코오 본인은 상당히 싫어하는——을 추출해내고, 이러한 요소들을 능동적이고 은유적으로 재창조한 산물이다. 가령 <드래그 온 드라군>에서부터 <니어 레플리칸트>까지 4편의 게임들이 요코오 타로의 가치관 변화를 반영한다고 본다면, ‘질병’에 대한 표현은 이러한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스크린 앞에 앉은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방식 중 하나다. <드래그 온 드라군> : 홍안증후군(이하 ‘레드아이’)[2]과 백염화증후군 “약 10여 년 전, <드래그 온 드라군>을 만들 때부터 ‘살육’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거든요. 당시 인기 게임들을 참고하면서 ‘100명의 적 격파!’, ‘100명의 적군 병사들을 박살냈다’ 등 긍지넘치는 어투에 주목했습니다. 얼마 후 차분히 생각해보니 자랑스럽다는 어투로 ‘100명 살해’같은 얘기를 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군가 실제로 100명을 죽였다면 그건 이미 ‘변태적인 살인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드래그 온 드라군>을 만들 때, 저는 캐릭터들을 좀 더 광인처럼 설정했고, 왜곡된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잘못되고 정의롭지 못한, 왜곡된 세계 속 비뚤어진 인류의 이야기를 한 것이죠.” - <드래그 온 드라군 3> 발매 전 인터뷰 <드래그 온 드라군>은 요코오 타로가 주도해 만든 세계관을 가진 첫 작품이자, 이 시리즈 중 가장 컬트적이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게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은 바로 ‘레드아이’(인터넷상에서는 적동[赤瞳]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주인공인 카임의 부모에 대한 피해로 직결된다. 후속작에서 ‘레드아이’는 니어 월드에서의 인류 멸종, <드래그 온 드라군 3> 속 세계멸망의 꽃 및 우타히메 [3] 의 출현과 관련되어, ‘레드아이’와 그 유인책인 ‘마소(魔素)’는 일련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핵심이 됐다. <드래그 온 드라군>이라는 게임 자체로 돌아가보면, 요코오 타로는 주요 캐릭터들을 만들 때 ‘잔(残)’과 ‘질(疾)’이라는 두 요소를 각각의 캐릭터 설정에 삽입해 <드래그 온 드라군>이라는 “모두가 병든” 세계를 만들어냈다. 주인공 팀원들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용과 정령 등 생물들과 계약을 맺고, 목소리나 시력, 생육, 성장의 제한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인터뷰에서 요코오 타로는 자신이 왜 이 게임에서 ‘결핍’이 있는 캐릭터를 고집했는지 이야기했다. 시장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게임의 플레이 방식은 ‘살해’라는 패턴을 피하기 어렵고, 이를 현실로 옮긴 ‘살인’은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이다. 요코오는 이것이 비록 허구일지라도, 주인공에게 조금이라도 살육의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것들을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개체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왜곡된 세계의 정의롭지 못한 집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코오 타로는 자신이 <드래그 온 드라군>의 세계를 “어두운 세계”라고 여기지 않으며, 이 세계를 만들면서 현실에서 영감——광적이고 편집증적인 인간들은 여러 이유로 서로를 도살한다——을 얻었다고 말한다. * 레드 드래곤과의 계약은 카임[4]에게 힘을 주지만, 그의 목소리를 앗아간다. 요코오 타로는 게임에서 주인공 카임을 벙어리로 만들고자 했다. 요코오 타로의 초기 작품들은 너무 난해해 게이머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주인공은 항상 시련을 겪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 그의 이야기는 일본식 영웅 서사시로 시작해 예상 밖의 방식으로 끝난다. <드래그 온 드라군>을 만들던 때의 요코오 타로는 중2병이 짙게 배어 있어 인류사회의 어두운 흐름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과 본능적인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게이머와 “서로 상처를 주는” 태도로 서사를 쓴 것이다. <드래그 온 드라군>이라는 게임만 놓고 보면, 홍안증후군의 존재는 전쟁을 유발하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모은 과장된 묘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의 E 엔딩은 <니어>과 <드래그 온 드라군>의 세계관을 이어가며, 니어 월드에 인류 멸망을 불러올 백염화증후군을 불러왔다. 마소를 지닌 레드 드래곤과 마더 엔젤은 니어 월드의 인류와 기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드래그 온 드라군> 세계 속의 인격화된 신에게는 중립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지만 제국군과 연합군의 충돌을 일으켜 세계를 멸망시켜왔다. 신주쿠 상공에 강림한 레드 드래곤은 “이것이 신의 세계입니다”라고 소리지르고, 작가와 창작된 허구 세계 둘의 관계를 밝혀낸다. * <드래그 온 드라군> E 엔딩 속 도쿄 신주쿠의 ‘거인’ 게임에서 백염화증후군은 적은 분량만 나타나는데, 주로 2003년 이후 니어 세계 인류의 운명을 배경으로 한다. 다른 세계(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에서 온 마소에 감염된 인간은 광포한 괴물 ‘군단’으로 변하거나, 그대로 백염(흰색소금)과 같은 물질로 부숴져버렸다. 마소는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퍼지고, 인간들이 마소에 맞설 때 거두는 짧은 승리는 새로운 재앙의 시작이 된다. (핵무기를 이용해 신주쿠의 모든 군단을 박멸하고, 군단을 이끄는 레드아이를 죽임으로써 마소는 더 확산된다.) * <니어: 레플리칸트>의 서장, 여름날의 도쿄에 내리는 하얀 눈 같은 물질은 백염증에 걸려 죽은 인간의 파편이다. <니어: 레플리칸트> : 붕괴체와 검은 병의 사회적 은유 “아마 여러분은 저의 게임에서 미치광이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수백에서 수천 명을 죽인 사람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남자가 애인과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가 보기엔 어두침침한 광기입니다.” - 2014년 게임 개발자대회에서 요코오 타로의 강연 중 9/11 테러는 ‘사람은 왜 악행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요코오 타로의 인식을 바꿔놨다. <드래그 온 드라군>을 만들던 시기에 요코오 타로는 살육과 광기를 하나로 연결해 인간 간 폭력을 악한 인성의 탓으로 돌렸다. 9/11사건과 그후 세계적 범위 안에서 나타나는 충돌과 대립은 폭력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꿔놨다. 실제 살인자는 미치광이나 악마가 될 필요가 없고, 자신이 정의를 대변한다고 굳게 믿는 평범한 사람이며, 스스로 정의의 동반자라고 생각하면 쉽게 학살의 칼을 휘두른다. 다원적 정의를 긍정하는 것은 통일신앙의 붕괴를 의미하며, 요코오 타로가 위치한 일본의 문화적 배경은 그가 북아메리카의 동료들보다 빠르게 비이원론적 대립의 정의관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것은 곧 정의와 악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의 사이의 내전을 가리킨다.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寛) [5] 는 < 리틀피플의 시대(リトル・ピープルの時代)> 에서 조지 오웰의 <1984>에 묘사된 '빅 브라더(big brother)'적 유일신앙이 1960년대 '정치의 계절’의 종언과 함께 말로를 걷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사회는 포스트모던 개념을 빠르게 소화해 수용(일본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학술용어가 아니라, 베스트셀러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다)했고, 통일적이고 온 국민이 희생할 만한 거창한 이상은 이미 무너져 버리고, 각기 다른 집단 간의 줄다리기만이 남았다. 이와 같은 생각에 기초할 때 <니어: 레플리칸트>의 적군과 아군 쌍방은 광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신장애인이 아니라, 제각각 대립적 입장에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니어’이라는 이름의 연원인 동족상잔을 끄집어낸다. 니어(Nier)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일본어와 발음이 같은 영어 단어 'near'에서 따온 것으로, 적과 아군이 서로 비슷하다는 뜻을 갖는다. “동족상잔”이라는 주제는 <니어> 시리즈를 관통하는데, 레플리칸트와 마소, 기계생명체 [6] 와 요르하부대 [7] , 적대적인 쌍방은 모두 같은 근원을 갖는 산물이지만 게임 내내 자멸한다. <니어: 레플리칸트>에서 붕괴체와 검은 병은 동일한 병변이 각기 다른 숙주의 일체양면에 나타나는 질병으로, 둘은 모두 백염화증후군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려는 인류의 수단——게슈탈트 계획——에서 비롯됐다. 본래 “게슈탈트(gestalt)” [8] 는 심리학 용어로, “완형(完形)”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게슈탈트학파는 “1 더하기 1은 2보다 크다”, 즉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주장한다. <니어: 레플리칸트>에 대입된 이야기 속에서 ‘게슈탈트 계획’이라는 명명은 일말의 아이러니를 안고 있는데——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지만, 인간 생명의 존재는 영혼과 육체의 직접적인 결합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마소를 연구해 마법을 배운 후, 백염화된 육체에서 영혼을 구하기 위해 게슈탈트 계획을 가동해 마법으로 영혼을 육체로부터 떼어내고, 백염증이 완전히 사라져 만들어진 ‘인공생명’의 체내로 돌아갈 계획이다. “게슈탈트”라는 이름은 계획 실패의 필연성을 예고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을 떨어뜨려 놓는 행위는 새로운 질병의 출현을 초래하는데, 그것은 곧 붕괴와 검은 병이다. 육체를 잃어버린 영혼은 곧 무너지기 시작해 점차 이성을 잃은 붕괴체가 되고, 영혼이 무너지거나 죽을 때마다 그것에 대응하는 ‘인공생명’ 레플리칸트도 검은 병에 걸린다. 검은 글자는 점차 온몸에 가득 채워지고, 레플리칸트는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육체를 갈망하는 영혼과 자의식이 생겨난 레플리칸트는 근원을 같이 하지만, 서로 대립하는 둘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인다. 이야기 속 레플리칸트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인간으로 착각하고, 몸을 되찾길 원하는 인간의 영혼을 “마물”이라고 부른다. 레플리칸트 니어는 마을과 여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물을 죽이고, 점차 많은 마을 사람들이 검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자신이 마물을 죽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행위는 검은 병의 확산을 가속화할 뿐이다. * 레플리칸트와 마물의 직접적인 충돌은 서로 상반된 요구와 소통할 수 없는 언어에서 비롯되지만, 왜 마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카이네와 온전한 인간이었던 에밀[9]은 마물을 죽이는 게 인류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사실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까? 에밀과 카이네의 캐릭터 설정은 <드래그 온 드라군>의 ‘에너지’에 대한 이해를 계승한다. 과학기술 실험은 에밀에게 마법의 눈을 안겨주었고, 이로 인해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에밀이 석화 마법을 제대로 장악하게 되는 것은 다시 시력을 회복한 뒤다. 누나와 하나로 합쳐 그가 마법을 완전하게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했는데, 이에 대한 대가는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카이네는 습격 중에 신체 반쪽이 파손된 후 마물에 붙어다니게 되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얻지만, 마물의 완전한 통제를 계속해서 억제해야 한다. 이야기에 빙의된 카이네는 마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전투 중 마물의 말에 여러 차례 동요와 고통을 느낀다. 에밀 역시 누나와 합체한 후 인간의 게슈탈트화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이 마물을 계속 죽이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로하여금 행동하게 한 것은 레플리칸트 니어에 대한 감정과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입장에 근거한 행동인데, 현실에서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서로를 적대시할 수 있듯, 카이네와 에밀, 그리고 백의 서의 인간에 대해 생산하는 엇갈림은 말이 통한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붕괴와 검은 병의 한계로 동류상잔은 반드시 둘 모두가 패배하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 요코오 타로의 반전평화 사상은 여기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각자 정의로운 사명을 지닌 투쟁은 양측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고, 이때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바로 ‘투쟁’이라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니어: 레플리칸트>의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답을 주지 못하며, 어쩌면 절벽의 마을 사람들이 마물과의 공생을 선택해 윈윈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가능성은 무모한 레플리칸트 니어와 복수에 집착하는 카이네의 칼에 사라지고만다. <드래그 온 드라군 3> : ‘병’의 원흉 “테러와 불평등으로 인한 약탈은 여전하고, 다양한 형태의 경쟁도 볼 수 있죠. 단체들 간의 경쟁은 학생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고요.” - 요코오 타로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드래그 온 드라군 3>는 1~2탄에서 어지간히도 날아다니게 하던 여러 엔딩의 세계관을 수습하고, 이 시리즈의 세계관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두 작품에서 ‘홍안병’과 ‘마소’가 연결되며, ‘마소’에 보다 강한 은유가 부여된다. <드래그 온 드라군>의 E 엔딩은 니어 월드와 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를 창세신(저자)이 존재하는 세계 vs. 창작된 허구의 내러티브로 정의한다. 그리고 허구적인 레드 드래군과 모천사가 ‘현실’로 넘어와, 죽음에 이르는 바이러스(마소)를 그들의 세계 내에 퍼뜨린다. 니어 월드의 인류는 마법을 연마해 마소를 다시 다른 세계로 돌려보내고, 마소는 다른 세계(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에 모여 세계멸망의 꽃으로 이 게임의 주인공 제로(Zero)의 눈 속에 기생하게 된다. * 요코오 타로는 고도로 장르화된 게임 산업과 전투 살육 게임의 패러다임을 수차례 거부해왔지만, 그의 창작에 폭력은 항상 맴돌았다. 프로젝트 자금의 30퍼센트 가까이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았던 <드래그 온 드라군 3>의 CG는 폭력미학을 연출해내며, 작은 공방 페이지 투어에 상시적인 소재를 제공한다. 모든 질병의 원흉——마소는 대체 무엇인가? 제작진이 공식 제시한 연표에서 두 세계는 서기 856년 대재앙이 ‘교회도시’를 탄생시키기 전까지 같은 역사의 거울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공에 나타난 도시는 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에 마법과 괴물을 가져다주었고, 적지 않은 카오쥐당(考据党) [10] 유저들도 니어 월드에서 인류가 보낸 마소로 인해 대재앙이 일어났다. 여기서 교회도시는 바로 핵폭발 이후의 신주쿠일 것이다. 두 세계의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서, 마소의 하나로 엮는 것은 세 작품을 폐쇄 고리로 만들어버린다. ‘현실’ 세계는 허구의 세계를 이용해 자기 딜레마를 해소하고, ‘현실’에 의해 변화된 허구적 세계는 세계멸망의 위협을 준비한다. 세계멸망을 위협하는 격투에서 허구는 ‘현실’로 넘어오게 되면 ‘현실’의 딜레마를 일으킬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위 ‘마소’는 추상적 사물의 은유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마소가 유발하는 모든 질병들——레드아이(인간이 미쳐가는 괴물로 변한다)와 백염화증후군(인간 공격을 거부하는 병을 앓다가 백염화되어 사망한다) 같은——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사회 규칙의 부정적 요소들을 상징하며, 요코오 타로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생각해보면 폭력과 살육, 악의적 경쟁, ‘타인을 짓밟고 이겨야 한다’는 정글의 법칙에 따른 사고로 귀납된다. 두 세계 간 마소의 흐름은 인간이 만든 허구적 이야기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을 은유하며, ‘현실’ 세계와 허구 세계는 서로를 독살하고, 허구 세계의 멸망 위기는 ‘현실’ 세계를 전염시키는 병적 원인으로 전환된다. 요코오 타로는 자기 작품을 통해 정글의 법칙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인데——니어 월드의 과학기술은 로봇까지 만들어 시간여행을 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시공간에서 인류를 구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두 세계의 모든 생명체들을 부정하는 행동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간명하고도 난폭한 방법은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인류의 멸종을 피할 수가 없다. <니어: 오토마타> : 인간에게 처방을 내리려 하다 영화감독 봉준호는 자본주의 지배하는 인간사회가 어떻게 붕괴를 피할 수 있을 것인지를 탐색해왔다. 요코오 타로의 게임들 역시 시종일관 인간이 왜 서로에게 해를 가해야 하느냐, 그리고 왜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다. <니어: 오토마타>는 인류가 멸종한다는 전제 하에 인간 문명의 인조인간과 기계생명체의 이야기를 연설을 통해 계승하고 학습하며, 인간의 ‘육체’를 벗어난 뒤 남은 어떤 정신을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사유한다. <니어: 오토마타>의 내러티브에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이미 절멸해버렸지만, 질병의 은유는 여전히 남아있는데, 게임 속에서 기계가 만든 인조인간조차 ‘병’을 앓는 숙명을 피하기 어렵다. 벙커 기지에 숨은 논리 바이러스는 요코오 타로의 작품에서 현실적으로 추적 가능한 유일한 ‘바이러스’로, 본래는 컴퓨터 시스템을 공격하는 데 활용된다. 이 내러티브 속 논리 바이러스와 그것이 일으키는 질병은 고도의 은유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병에 걸린 인조인간과 기계생명체에 나타나는 증상들——레드아이의 광폭과 검은 책——은 모두 시리즈의 전작에서 추적 가능하다. 이는 그것이 원래 갖고 있던 은유의 재창조이며, 요코오 타로 자신에 대한 오마주이다. * 붉을 빛을 발하는 레드아이를 제외하면, 이브의 검은 문양은 <드래그 온 드라군> 속 천사교회의 휘장과 높이가 비슷한 것처럼 여겨진다. ‘레드아이’는 기계생명체의 정상 상태이며, 요르하형 인조인간의 ‘병에 걸린 상태’이다. 요르하형 인조인간과 기계생명체의 핵심은 모두 ‘블랙박스’인데, 이는 질병과 건강, 각성과 광기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검은 병 역시 상징적 수법으로 돌아왔는데, 가령 아담의 영혼을 잃은 이브는 정신이 붕괴되고 그의 몸에는 검은 글자가 자라난다. <니어: 오토마타>에서 검은 병에 해당하는 병의 원인들을 돌이켜보면 영혼체의 붕괴에 있는데, 기계생명체로서 이브는 복제체만 걸리는 검은 병의 증상을 보인다. 기계생명체인 그는 지구에 도착해 인류가 남겨놓은 역사와 문화를 끊임없이 학습하는데, 이때 이브의 ‘병’이라는 상징성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담의 죽음은 이브가 인류로부터 ‘인간성’을 학습한 부분을 가져가버린 것이다. 2B [11] 를 죽인 원흉인 논리 바이러스의 전염 방식은 미스테리다. 게이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2B가 왜 9S의 백신에도 불구하고 재발했느냐는 온라인상의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2B가 벙커에서나 추적 과정에서 탈출할 때 논리 바이러스 감염 여부와 무관하게 그녀의 죽음은 9S와 A2 간의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로 이미 규정되어 있다. 2B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발작을 일으켜 폐허가 된 상점 앞에 쓰러진다. 그곳은 9S와 “기계생명체를 없애고 나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쇼핑도 하자. 네 티셔츠를 골라줄 거야”라고 희망과 행복의 약속을 했던 그 지점이기도 하다. 2B의 죽음과 이후 A2와 9S의 추락은 모두 “평화를 위해 모든 적을 소멸시킨다”는 논리가 불합리하고 아무 결과도 만들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전투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요르하부대 인조인간들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없으며, 그저 보조기이자 플레이어가 생사의 순환을 깨뜨릴 때까지 오르내리는 작전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니어: 오토마타>에 이르기까지 요코오 타로는 반전과 반폭력에 대해더욱 깊이 사유하고 설명해왔다. 그것은 전쟁의 후과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폭력을 갈등 해결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논리이다. 그는 종으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부터 인간 간 상호공격 행위에서 비롯된 ‘악의’ 자체로 화살을 돌렸고, 더 나아가 자기 희생과 상호원자라는 화해의 가능성까지 제시한다. * E 엔딩 직전의 탄막전. 게이머와 제작진의 전투에는 다른 게이머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니어> 시리즈와 <드래그 온 드라군> 시리즈에서 질병은 반복해서 절망의 폐쇄회로를 다룬다. 세계멸망의 꽃이 나타나 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에 레드아이가 퍼지고, 카임은 레드 드래곤과 계약을 맺어 2003년 도쿄 신주쿠에 이르기까지 결전을 벌이며, 레드 드래곤의 몸속에 마소가 확산되어 니어 월드에 전파되고, 인간이 만든 로봇들은 마소를 다른 세계로 돌려보내 세계멸망의 꽃은 Zero의 눈에 탄생하게 된다. 요코오 타로의 내러티브 속에서 ‘질병’은 구원도 회복도 불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돌파하는 ‘윤회’에 가깝다. 질병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현실의 어떤 절실한 고통을 지향하지 않고, 은유적인 색채를 짙게 감싸고 있다. 두 세계에서 레드아이와 백염화증후군은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마소에서 비롯되는데, 붕괴와 검은 병 역시 대립하는 진영들 간 화해를 이루지 않는 한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다. 이야기 속에서 모래의 나라의 전임 국왕은 죽을 때까지 검은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탐색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요코오 타로는 <니어: 레플리칸트>에서 화해 가능성을 거부하고 모든 결말을 동족상잔으로 이끌어 양쪽 모두를 절멸시켰다. 리메이크판에선 니어와 카이네를 좋아하는 게이머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해피엔딩’을 만들었지만, 복제체와 인간의 영혼 모두 파멸을 피하지는 못한다. 한데 나이를 먹으면서 요코오 타로 역시 마음이 약해졌는지, 아니면 코카콜라가 진행한 ‘스몰 월드 머신(Small World Machine)’ 이벤트가 그를 감동시켰는지 모르겠지만, <니어: 오토마타>에서는 그나마 따뜻한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바로 일면식도 없는 게이머들이 서로 돕고 자발적으로 저장 파일을 희생해, E 엔딩에서 주인공 세 명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 요코오 타로는 자신의 강연들에서 코카콜라가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서 개최한 ‘스몰 월드 머신(Small World Machine)’ 이벤트를 언급한 바 있다. 이 이벤트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민들이 함께 협력해 작은 게임을 완성하고, 게임에 성공하게 되면 참가자들에게 콜라 캔을 지급한다. 요코오 타로는 입장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하게 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중2 때(14세)나 지천명(50세)에 이른 지금 [12] 이나 질병이라는 은유는 요코오 타로 게임 세계에 가득 차 있다. 그 증상들 배후에 있는 병변은 하나같이 살육과 폭력, 약탈, 경쟁 등 ‘악의’를 낳는 행동을 가리킨다. 현대 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네이쥐안(内卷) [13] 과 세계 곳곳의 국지전들은 예술 창작자들을 괴롭게 하는 토픽이다. 거대서사를 향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고, 어떠한 이념도 우리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藤本树) [14] 는 <체인소맨>에서 덴지의 답을 “그녀를 많이 안아줘”라고 했듯, 요코오 타로의 질병 치유 시도 역시 개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즉, 당신의 파일을 희생해 처방이 불가능한 플레이러를 구출하거나, 카이네가 다시 태어난 니어를 껴안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1] 수전 손택 저·이재원 역,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년 [2] 드래그 온 드라군 유니버스에서 홍안증후군, 즉 레드아이(赤目の病)는 [3] ‘드래그 온 드라군’ 서사 속 암흑의 시대에 강림한 여신들은 노래를 불러 마력을 발휘했고, 이를 통해 황폐한 대지에 평화를 안겨다 줬다. [4] [나무위키 ‘니어 레플리칸트/등장인물’] 절벽 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입이 험한 속옷 차림의 소녀. 할머니를 죽인 마물에게 복수하려 한다. 니어와 처음 만났을 때는 싸움을 벌이지만 곧 동료가 된다. [5] 일본의 평론가로, 비평지 ‘PLANETS’ 편집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제로년대의 상상력』『리틀피플의 시대』『모성의 디스토피아』등이 있다. [6] 먼 미래에 지구를 침략한 이성인(외계인)들이 보낸 병기 [7] 인류가 지구를 탈환하기 위해 조직한 신형 안드로이드 전투용 보병 [8] 백염화증후군에 맞서기 위해 신체와 영혼을 나누는 기술 [9] 남쪽 평원의 저택에서 집사와 살고 있는 소년. 눈으로 본 상대를 돌로 만드는 힘이 있지만, 이를 통제하지 못해 붕대로 눈을 감고 있다. [10] 중국 대륙 인터넷 유행어로, 소설이나 영상물, 그밖에 콘텐츠를 시청 또는 소비할 때 해당 동영상이나 작품에 등장하거나 작품과 관련된 내용을 찾기 위해 정보를 검색하고 조사하는 것(디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11] [나무위키 “2B(니어 시리즈)”] 3인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이며 (1회차의) 주인공. [12] 요코오 타로는 1970년생으로 현재 53세이다. [13] ‘네이쥐안(内卷)’이란 클리포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사회를 참여 관찰한 뒤 내놓은 저서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 Agricultural Involution』에서 제기된 involution 개념에서 유래한다. 프래신짓트 두아라(Prasenjit Duara)는 『Culture, Power, and the State: Rural Society in North China, 1900-1942』에서 근대 중국 역사의 바퀴가 안으로퇴행(involution)했다고 묘사한 바 있다. 즉, 한 사회나 조직이 급진적인 발전이나 점진적인 성장 없이 행하는 단순한 자기반복을 의미한다. 한데 2021년 인류학자 샹뱌오(项飙)가 펑파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개념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식사회의 쟁점이 됐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삶을 묘사한다. 질적 성장 없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내부 경쟁. 이로 인한 노동자계급, 청년들의 집단적인 번아웃 현상.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가리킨다. [14] 일본의 유명 만화가로, 2013년 데뷔 이후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소년 점프+에서 《체인소 맨》을 연재중이다. Tags: 드래그온드라군, 니어오토마타, 질병서사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张成(장청) 화동사범대학(华东师范大学) 철학과 박사후연구원.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Editor's View] 21세기 1쿼터를 마무리하며

    나이든 게이머들에겐 섬뜩하게 들릴 수 있지만, 2000년대가 시작된 것도 올해로 벌써 25년, 한 쿼터가 지났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네 강산은 벌써 두 번 하고도 반은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대중화에 힘입어 디지털게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시점도 아마 그와 비슷한 만큼의 시간을 겪어왔을 것입니다. < Back [Editor's View] 21세기 1쿼터를 마무리하며 23 GG Vol. 25. 4. 10. 나이든 게이머들에겐 섬뜩하게 들릴 수 있지만, 2000년대가 시작된 것도 올해로 벌써 25년, 한 쿼터가 지났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네 강산은 벌써 두 번 하고도 반은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대중화에 힘입어 디지털게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시점도 아마 그와 비슷한 만큼의 시간을 겪어왔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첫 1쿼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GG는 지난 사반세기를 돌아보는 기획을 꾸렸습니다. 갈수록 세상이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디지털게임이 시간을 겪으며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잠시 착시를 겪기도 합니다. 25년 전에 유행하던 게임은 오락실 게임이 아니라 <스타크래프트>와 <펌프잇업>이었고, <갤러그>나 <테트리스>같은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들은 아예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난 25년의 세월동안 디지털게임과 그를 둘러싼 문화는 다시 되돌아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장르와 플랫폼을 넘어 게임하는 사람들의 구성과 인구 자체도 대격변을 겪은 것이 21세기 첫 쿼터를 보낸 디지털게임의 변화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막 게임문화라는 것이 대중성을 가져가기 시작할 때 즈음의 모습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의 게임과 게임문화가 나아가는 방향을 한번쯤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디지털게임을 뉴미디어라는, 다소간의 경외와 다소간의 과장이 섞인 개념만으로 부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보편미디어의 일환으로, 마치 공기처럼 그 존재가 특별히 여겨지지 않는 무언가로 자리잡기 시작한 디지털게임의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25년전의 과거 모습과 오늘의 게임을 비교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 꽂아둔 GG 23호라는 마일스톤 하나를 통해 다가올 2050년에 또 한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쿼터도 늘 GG와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사라진 컨트롤러 : 가상현실 게임 속의 컨트롤러의 특징들

    가상 현실 게임에서 대부분의 경우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컨트롤러는 게임 내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팀(Steam)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가상현실 게임인 〈하프라이프: 알릭스 (Half Life: Alyx)〉나 PSVR2의 대표작인 〈호라이즌 콜 오브 더 마운틴 (Horizon Call of the Mountain)〉을 비롯한 다양한 슈팅 및 액션 게임에서도 대부분 손을 보여주는 방식의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다. < Back 사라진 컨트롤러 : 가상현실 게임 속의 컨트롤러의 특징들 11 GG Vol. 23. 4. 10. * 그림 1. 실제 손과 컨트롤러(좌)와 가상 현실 내에서 사라진 컨트롤러(우).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vr.com/importance-believable-vr-hands-presence/ 가상 현실 게임에서 대부분의 경우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컨트롤러는 게임 내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림1). 예를 들어, 스팀(Steam)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가상현실 게임인 〈하프라이프: 알릭스 (Half Life: Alyx)〉나 PSVR2의 대표작인 〈호라이즌 콜 오브 더 마운틴 (Horizon Call of the Mountain)〉을 비롯한 다양한 슈팅 및 액션 게임에서도 대부분 손을 보여주는 방식의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가상현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최대한 실재감(sense of presence)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가상현실 컨트롤러가 어떻게 생겼길래 가상현실 속에서 볼 수 없을까? 그림 2를 살펴보면, VR 컨트롤러는 기본적으로 콘솔용 게임 컨트롤러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각 컨트롤러의 옆면에는 검지로 누르는 트리거 버튼과 주먹을 쥐면 자연스럽게 눌리는 그립 버튼이 있다. 또한, 컨트롤러의 윗면에는 엄지로 조작할 수 있는 두 개의 버튼과 조그 스틱이 있고, 시스템 메뉴를 호출하는 버튼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무채색 VR 컨트롤러를 들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장르를 불문하고 가상현실 속의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에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게임 개발자들은 이러한 컨트롤러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 그림 2. 메타 퀘스트 2의 컨트롤러, 측면(회색 부분)에 위치한 트리거 및 그립 버튼과, 상단(검은 부분)에 위치한 조그 스틱, 두 개의 버튼, 시스템 버튼이 보인다. * 〈하프 라이프 알릭스〉에서 보이는 손. 이미지 출처 : https://www.roadtovr.com/half-life-alyx-update-1-4-1-example-pistol-modding/ 사용자의 외부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는 가상현실 헤드셋의 특성 때문에 가상현실 속의 가상현실 컨트롤러를 어떻게 보여줄지 결정하는 것은 가상현실 게임 디자이너들에게 필연적이었다. 컨트롤러 디자인은 기기 제작사가 아닌 게임 디자이너에게 일부 위임되었다. 가상현실 컨트롤러의 외형은 게임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다르게 재정의될 수 있다. 대다수 디자이너들은 마치 컨트롤러를 들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가상 현실 속에서 컨트롤러를 숨기고, 컨트롤러를 쥐지 않은 ‘가상 손’을 그렸다. 이것은 캐릭터의 손을 보면서 가상 환경 속의 객체와 상호작용하는 것이 플레이어가 그 환경에 실재하고 있다고 느끼게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상 손으로 표현된 컨트롤러의 문제들 가상 손이라는 디자인 옵션은 가상현실 게임 디자인에서 전형적인 문법이 되어가고 있지만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사용자가 실제 손과 가상 손 사이의 감각적인 불일치(discrepancy)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플레이어의 고유감각과 촉각이 느끼는 손의 모양과 가상 현실에서 그려진 손의 모양이 다른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손으로 표현된 컨트롤러는 일반적으로 트리거 버튼은 검지에, 그립 버튼은 중지부터 소지까지 대응되어 버튼이 눌리면 손가락이 접히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된다. 이 경우에는 실제 손과 비슷하게 가상 손이 표현되기 때문에 비교적 자연스럽게 보인다. 반면, 실제 컨트롤러의 상단의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 엄지를 움직일 때, 가상 손 엄지의 움직임은 생뚱맞고 이질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가상 현실 속에서 본다면, 아무 이유 없이 접었다 폈다 하는 엄지를 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 불일치는 플레이어들의 실재감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된다. 두 번째는 조작 방법 학습의 어려움이다. ‘가상 손'이 사용되는 경우에 실제 컨트롤러와 이를 조작하는 손이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게임 컨트롤러의 조작에 익숙해지기 쉽지 않다. 친구와 함께 VR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는가? 있다면 가상 현실 헤드셋을 착용한 친구에게 지금 뭐가 보이냐고 외치고, 왼쪽 컨트롤러에서 Y 버튼을 누르라고 외치고, Y 버튼은 볼록한 버튼 2개 중에 앞이라고 목소리를 높여본 일이 있을 것이다. 자기 손과 컨트롤러를 직접 볼 수 없는 것은 앞서 설명한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된다. 가상현실 컨트롤러에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많은 버튼이 있고, 각 버튼은 가상 현실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복잡한 행위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게임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모든 버튼 맵핑을 빠르게 학습하고 이를 빠르게 실행에 옮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임 컨트롤러의 조작을 학습할 때는 적어도 버튼들과 이를 조작하는 손을 볼 수 있었지만, 가상 손으로 표현된 컨트롤러에서는 플레이어의 손가락이 의도한 버튼에 가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고, 의도한 버튼이 어떤 기능이 있는지 떠올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경험은 플레이어의 전반적인 퍼포먼스를 떨어뜨리고 게임에 대한 흥미를 감소시킬 수 있다. 필자는 〈하프라이프: 알릭스〉를 플레이하면서 크고 작은 감각적 불일치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조작 방법의 학습에 관한 것이었다. 플레이 도중에 잠시 실제 컨트롤러 모양을 보여주며 어떤 상황에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시각적으로 안내해주었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안내는 사라지고 가상 손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로 인해서 간단한 동작을 수행하는데도 여러 버튼을 눌러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많았고, 이는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가상현실에 대한 기대와 현실 컨트롤러 대신에 가상 손을 보여주는 것은 플레이어들에게 현실에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단점들을 감수하고서라도 게임 디자이너들이 가상 손을 선택하는 이유는 시각적인 실재감을 그만큼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재감은 가상 현실에서 항상 우선해야 할 가치일까? 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한 경험이 모든 면에서 현실과 같을 필요는 없다. VR에서는 현실과 다르지만, 성공적으로 관습화된 상호작용 방식들이 있다. 레이 포인팅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대상을 선택하고자 할 때, 만지거나 찌르듯이 직접 컨트롤러를 가져다 대는 대신에 컨트롤러 전면에서 나가는 레이(ray)를 이용해서 가리키고 선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터페이스 조작에서 레이를 활용한 방식은 직접 컨트롤러를 옮겨 선택하는 방식보다 더 선호된다. 현실과는 다르게 원거리에 있는 대상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순간이동이라는 이동 방식의 예도 들 수 있다. 특정한 위치로 이동하려고 할 때, 현실과 같이 걸어서 이동하거나 연속적으로 캐릭터의 위치와 시점을 업데이트하길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실제 공간은 좁고 가상 공간은 훨씬 더 넓은 경우가 많아 직접 걸어서 게임 속 공간을 모두 탐험하기는 어렵다. 부드럽게 캐릭터를 이동시키는 것도 쉽게 멀미를 일으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이동을 많이 해야 하는 게임에서는 이동할 위치를 가리키고 그 위치까지 한 번에 이동하는 순간이동 방식이 많이 채택된다. 레이 포인팅과 순간이동은 현실의 경험과는 아주 다르지만 가상 현실 속에서는 일반적이다.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방식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사용자의 의도를 실현한다. 결과적으로 가상현실에 안에서 제시하는 내용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VR 컨트롤러는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쉽게 정답을 맞힐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시각적인 실재감을 추구하는 데에서 벗어나,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컨트롤러를 시각화하는 것도 가능한 방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효율적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사용자가 쉽고 빠르게 익숙해지도록 돕는 것을 포함한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VR 게임을 만들고 있을 게임 디자이너들이 가상 현실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컨트롤러 표현 방식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현철 학부에서 산업디자인 및 뇌인지과학을 공부하고, 석사 과정에서는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과학기술원 문화기술대학원 시각인지연구실에 소속된 박사 과정 학생이다. 행동 및 생체 데이터를 활용하여,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경험을 평가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야,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연애’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 Back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16 GG Vol. 24. 2. 10. 게임에 연애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임이 미연시인건 아니며 , 혹여 장르 불문 연애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이드 콘텐츠 취급을 받곤 한다 .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 야 ,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 ‘ 연애 ’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 * 뭐 이것도 로맨스라면 로맨스일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RPG 들 , 특히 좀더 TRPG 원류의 감성을 추구하는 CRPG 들에서는 로맨스 옵션이 거의 필수적으로 여겨지게 됐다 . 특정 연애 루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다투는 정실 (?) 논쟁은 커뮤니티에서는 일상이다 . 어쩌다 이랬을까 . 세계를 구하고 악을 무찌르라고 있는 게임에서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애만 하게 된걸까 . 하지만 재미있는 건 이런 게임에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건 ‘ 모험 ’ 의 연장선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 과거 RPG 명가 바이오웨어의 게임들이 CRPG 시류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 비록 그들이 이 형태를 취한 최초는 아니라도 ), ‘ 발더스 게이트 2’ 이래로 로맨스 옵션에서도 하나의 메인스트림이 형성된다 . 그건 바로 기용 가능한 동료들과 지속적인 대화와 동료 퀘스트 같은 사이드 콘텐츠를 통해서 연대를 형성하고 , 그렇게 깊어진 연대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 이처럼 CRPG 의 연애 , 로맨스 옵션이 기존의 미연시와 다소 다른 결을 띄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동료 시스템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 대체로 CRPG 의 로맨스란 어디까지나 핵심은 동료 퀘스트라는 매우 명확하고 달성 여부가 확실하게 가름나는 콘텐츠이며 , 여기에 양쪽이 연애가 가능한 지향일 경우 연애를 선택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 미연시의 연애는 오직 연애를 위해서 일종의 루트 공략 , 엔딩 공략 게임의 느낌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비중과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렇게 된 이유는 CRPG 의 토대가 TRPG 라는 점을 생각해볼 만 하다 . 기존에 현실에서 펼쳐지던 TRPG 는 동료가 진짜 사람이며 , 대체로 이미 친분이 있는 지인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은 현실의 관계처럼 끈끈했고 , 상호 간에 영향을 미쳤다 . 하지만 최근 멀티플레이어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CRPG 는 모두 오프라인 게임이었고 , 플레이어 캐릭터 외에 함께하는 동료들은 인공지능 AI 이제 스크립트 더미였고 , TRPG 수준의 상호작용의 활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 때문에 이렇게 게임을 함께하게 되는 동료 캐릭터를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실적으로 느끼고 , 플레이어와 더 연대를 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동료 퀘스트를 위시한 컴패니언 시스템 일체라고 할 수 있다 . 즉 , 혼자서 게임을 하지만 외롭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 그래서 그러한 ‘ 인간적인 상호작용 ’ 을 플레이어 캐릭터와 동료 캐릭터 사이에 넣는다면 , 그 흐름이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최종판인 연애로 흘러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초기의 CRPG 들은 이런 부분의 배려가 부족한 편이었지만 , 서양 시장에서의 시류는 바이오웨어를 필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바이오웨어는 CRPG 메이커 중에서 이러한 동료와의 유대 , 그리고 연애 등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이끈 공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단순히 함께 싸우는 전투원 1 에서 벗어나 동료에게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고 , 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다보면 자연스레 친밀해지고 , 그러다 이제 서로 성적 지향도 맞는다면 연애도 하는 … 그런 흐름이었다 . ‘ 매스 이펙트 ’ 시리즈는 이러한 동료 시스템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 그리고 가장 대중화시킨 주인공이었다 .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문제가 생긴다 . 바로 동료로서 원하는 캐릭터와 연애 대상으로서 원하는 캐릭터가 다를 경우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이 결합하고 이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문제였는데 , 바로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과 전투 캐릭터로서의 성능 , 두가지 요소에 기인했다 . CRPG 의 연애 시스템은 세이브로드 신공과 함께라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다 . 하지만 단 한가지 , 성적 지향에 따라 가능 / 불가능으로 나뉘는 케이스는 절대적인 벽이었다 . 현대적인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 첫 CRPG 라고 할 수 있는 ‘ 발더스 게이트 2’ 는 주인공이 스토리상 고정된 인물이었고 , 성별 또한 남성으로 고정이었으니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 .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을 널리 퍼트린 ‘ 매스 이펙트 ’ 시리즈와 동시기의 ‘ 드래곤 에이지 ’ 로 가면서 , 동성 연애 지향을 가진 동료들이 추가되며 이러한 경향이 생겨났다 . 이렇게 로맨스 옵션에 성적 지향이 추가된 건 게임이 보다 더 많은 취향과 환경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게임 내에서 표현하기 위한 흐름에 따른 일이었다 .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가 되어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건 RPG 에선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고 , 그러려면 먼저 플레이어 캐릭터가 성별을 비롯해 각 플레이어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야 했다 . 이에 따라 동료들 , 연애 대상들이 각 지향과 취향에 맞게 분배되는건 당연한 일 . 재미있는 일은 플레이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좋아하는 캐릭터의 성적 지향이 맞지 않을 때 벌어지는데 , 자신이 게임 초기에 선택한 성별과 커스터마이징 때문에 특정 대상과 연애를 할 수 없게되고 , 이는 게임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캐릭터 생성부터 특정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다는걸 의미했다 . 아무튼 이러한 현상 덕분에 플레이어들 대다수가 원하는 로맨스 대상이 아무래도 훨씬 머릿수가 많은 이성애자들을 위한 연애 대상이 아닐 경우 많은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 , 대표적인 예시는 ‘ 사이버펑크 2077’ 의 주디 알바레즈다 . 주디 알바레즈는 주인공 V 의 핵심 조력자이자 이 게임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대외적으로 게임을 어필하는데 동원되어 온 일종의 얼굴마담이자 상징이었다 . 모든 플레이어들이 이 캐릭터와 연애를 하려고 달려들 건 분명했다 . 그런데 여기서 개발진은 한 번 비튼다 . 주디 알바레즈는 동성애자 캐릭터이고 , 남성 V 를 위한 이성애자 파트너는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 때문에 이를 모르고 습관처럼 남성 V 로 게임을 시작한 , 남성 이성애자 플레이어들은 주디 알바레즈가 동성애자이며 , 한참 게임을 진행한 자신의 캐릭터로는 주디와 프렌드존을 넘지 못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 여기서 그런 플레이어들이 취한 행동은 크게 두가지 . 커뮤니티에 원성을 쏟아내거나 여성 V 로 새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 사실 이렇게 성적 지향으로 연애 대상을 나누는건 바이오웨어가 먼저였다 . 동료 시스템과 이를 뒷받침하는 로열티 퀘스트 , 그리고 동료와의 연애 선택지라는 요소를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시킨 게임이기도 했던 ‘ 매스 이펙트 ’ 시리즈는 1 편에서는 모든 연애 대상이 이성애자였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했다 . 그건 아사리라는 종족적인 특성을 빌려 , 리아라 트소니를 양성애자로 설정한 것 . 이성애자 여성 애슐리 , 이성애자 남성 케이든에 양성애자 리아라가 존재하는 로맨스 옵션이었다 . 이는 아무래도 ‘ 선택 ’ 을 집어넣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 셰퍼드의 성별을 어떻게 고르더라도 결국 연애할 수 있는 대상이 한명이라면 , 호불호를 떠나서 내가 연애할 대상을 선택한다는 느낌을 줄 수 없었고 , 대상을 선택하는건 로맨스 옵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시리즈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고 , 또 가장 대표적인 혁신작이었던 ‘ 매스 이펙트 2’ 는 동료 시스템을 훨씬 크게 키움과 동시에 로맨스 옵션도 방대하게 늘어났다 . 그런데 여기서는 오직 이성애자만이 등장한다 . 한 성별 당 3 명의 연애 대상을 부여받았는데 , 2007 년 게임인 전작에서 양성애자를 등장시켰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후퇴 (?) 였다 . 그리고 3 편은 이 부분을 의식했는지 , 좀더 다양해졌다 . 각 성별마다 한명씩 동성애자 연애 대상이 추가됐고 , 1 편의 연애 대상인 3 명이 다시 들어왔다 .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조건이 좀 있기는 하나 한 성별당 4 명의 이성애자 , 1 명의 동성애자 , 1 명의 양성애자 연애 대상을 가지게 되었다 .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성토를 받았던 게임은 바이오웨어의 ‘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 ’ 이었다 . 다른 게임에 비하면 동료의 수가 무척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를 성적 지향 , 종족별로 배분하다보니 플레이어 캐릭터의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연애 대상이 너무나 적었던 것 . 심지어 전투원이 아닌 동행 캐릭터들도 연애 대상으로 넣었음에도 이랬는데 , 그런 캐릭터들은 또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탓에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이 상황을 보자면 , 플레이어들이 CRPG 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플레이어 캐릭터에 이입하고 동시에 다른 등장인물에 얼마나 몰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 한편으로는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을 설정하는데에 있어서 굉장한 고민을 떠안게 됐다 . 어떤 연애 대상을 설계할 것인가 ? 어떤 성적 지향에 어떤 캐릭터를 배치할 것인가 ? 이는 단순히 고민을 떠나서 특정 성적 지향을 스테레오타입화 시키는 , 어쩌면 차별 또는 편견으로 비칠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했다 . 세상에 , 그냥 게임 캐릭터와 연애를 하고 싶은 것 뿐인데 이런 문제까지 신경써야 한다니 ! 그러나 , 여기서 ‘ 발더스 게이트 3’ 는 재미있는 해법을 제시했다 . 모든 동료를 연애 대상으로 , 동시에 모든 연애 대상 동료를 양성 모두 연애 가능으로 만든 것 . 너무나 간단한 , 어쩌면 무성의한 해법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맥이 풀리지만 오히려 한편으로는 아 ! 왜 다들 그 생각을 못했지 ? 하고 감탄할 법한 해법이었다 .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지 않았는데도 , 오직 캐릭터 생성 단계만 지나도 접근 할 수 없는 콘텐츠가 생기는 셈이었던 이전의 이성애자 - 동성애자 중심의 로맨스 옵션이 , 그냥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를 양성애자 , 혹은 연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기가막힌 해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 물론 , 이전에 이 방법을 쓰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 이성애자들에게 양성애자 동료가 과연 진정한 로맨스 옵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 이게 가장 큰 의문거리였다 . 실제로 기존의 바이오웨어 게임들처럼 이성애자 / 동성애자 / 양성애자가 모두 존재하는 RPG 에서는 양성애자 캐릭터들은 보통 인기가 가장 없는 편이었다 . 하지만 흥미롭게도 , ‘ 발더스 게이트 3’ 에서는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반감이 강하기 마련인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이들 캐릭터가 양성애자라는 건 전혀 지적받지 않고 있다 . 오히려 게일 같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양성애자로서의 면모 , 그리고 쉬운 로맨스는 일종의 밈화되어 혐오의 대상보다는 유머의 대상으로 더 가깝게 여겨지고 있다 . ‘ 발더스 게이트 3’ 의 로맨스 옵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 기존 게임들의 로맨스 옵션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이핑으로 만들어진 대상이었고 , 성적 지향이 진정한 정체성 표현보다는 ‘ 제한 ’ 으로서 받아들여진 면이 더 컸다는걸 깨닫게 된다 . 기본적으로 각각의 캐릭터가 성적 지향에 맞추어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이핑 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 성적 지향에 따른 제한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플레이어들은 캐릭터들을 만날 때 감정 선을 정리하고 진짜 캐릭터 대 캐릭터로서 교감하기 보다는 게임 콘텐츠로서의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점에서 , 오히려 모든 캐릭터가 성별과 상관없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일종의 게임적 허용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고리타분한 성적 지향에 따른 분배와 이런저런 고려는 치우고 , 그냥 넌 이 동료가 가장 마음에 들어 ? 그럼 얘랑 끝까지 가봐 . 라는 간단하고 쉬운 게임적 허용으로 게임 내 로맨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 . 즉 , 바이오웨어식 로맨스의 한계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에 맞추어 각 캐릭터를 너무 세분화하고 , 카테고리로서 분화시켜 배치한 점에서 왔다 . 그 순간부터 오히려 플레이어들은 캐릭터 그 자체보다는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인가를 생각한다 . 어쩌면 현실의 연애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 그냥 내가 좋다고 되는건 아니지 않는가 . 하지만 ‘ 발더스 게이트 3’ 의 동료들은 모두가 연애가 가능하고 , 특정 성별 지향을 대외적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 사실 이들을 양성애자라고 하는 것도 연애 가능성이라는 콘텐츠 기능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이지 ,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양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지도 않는다 ( 그래서 앞서 ‘ 양성애자 ’ 라는 표현이 아니라 ‘ 연애 가능 ’ 이라고 했다 ). 그러니 좀 더 정확하게는 로맨스 옵션에 성별의 제한이 없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 현실이라면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 이건 ‘ 게임 ’ 이니까 . 즉 , 오히려 게임의 애정과 연애를 적당히 게임이라는 선 안에 두고 그 안에서 게임적 편의성을 취한 결과 , 플레이어들이 가장 만족하는 로맨스 옵션이 만들어지게 된다 . 그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 바이오웨어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지나치게 현실의 연애를 고려했던건 아닐까 ? 어디까지나 우리가 게임 상에서 이루고 싶었던 건 지고한 순애가 아니라 , 일종의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인정받는 증표였던건 아닐까 ? 즉 , 여러 과정을 거쳐서 변화해오기는 했지만 CRPG 에서의 로맨스란 말그대로 게임을 하면서 외롭지 않기 위해 탄생했고 , 이것이 플레이어가 어떠한 ‘ 인정 ’ 을 받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 비록 스크립트 덩어리와의 연애가 현실에서 동료와의 상호작용 만큼 깊고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 ‘ 함께 모험한 동료 ’ 와 또 하나의 사적인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건 마찬가지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 Back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01 GG Vol. 21. 6. 10. 디지털게임은 이제 뉴미디어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처음 등장한 것으로도 거의 반세기에 달하는 이 매체는 그러나 그 발전과 변화의 폭이 너무 넓어 초창기와 지금을 비교하면 도대체 어디까지를 공통점으로 봐야 할 것인지 난감할 지경의 다양성을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도 게임이란 무엇인가 라는 정의를 쉽게 내리기 어려운 이유다. 등장 이래 조금씩 저변을 넓혀 온 게임은 이제 모바일 네트워크 시대에 이르러 서브컬처가 아닌 대중문화의 일환으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단순한 산업적 규모에 대한 찬사이건, 혹은 디지털게임이 만들어 낸 기존의 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동경이건 간에 이제 게임은 대중문화의 프레임 밖에 두기 어려운 존재감을 확보했다. <게임 제너레이션>은 먼 훗날 최초의 게임 세대로 일컬어질 수 있을 바로 이 시대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시작된 잡지다. 게임이라는 매체를 만나 변화하기 시작한 인간의 삶과 생각, 행동이 다시 또 게임에 반영되는 과정 전반을 살피며 우리의 관심사는 게임을 넘어 게임하는 인간을 향한다. 게임을 곱씹어 거기에 비춰지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의 탐색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가장 큰 목표다. <게임 제너레이션>은 총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매 호마다 선정되는 ‘집중기획’을 통해 동시대 게임 담론의 주요 주제들을 깊은 호흡으로 검토하고, 빠르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흐름을 ‘TRENDS’에서 놓치지 않도록 주시한다. 마지막으로 ‘ARTICLES’에서 오늘날 게임에 대한 비평과, 게임개발자 및 게이머라는 사람에게 묻는 인터뷰로 게임과 게이머라는 게임문화의 근간을 맨손으로 훑으며 우리 시대의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로서의 게임’을 손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그 말이 현재로서는 다분히 공허한 선언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게임은 문화다’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게임을 문화의 틀 안에서 바라보고 사고하며 이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게임 제너레이션>의 창간과 도전은 그런 실천을 통한 실험이며, 창간호의 기획도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문화로서의 게임'이라는 대주제를 두고 먼저 고민한 것은 다른 선배격의 매체들이 겪어 온 과정이었다. 영화와 만화라는 두 매체가 표현양식에서 서브컬처를 지나 대중매체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지점들은 없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한송희, 이재민 두 평론가의 글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문화'라는 말을 굳이 강조해야 하는 지금 게임의 상황은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나는지에 대한 고민은 이정엽 교수가 고민의 결과로 가져왔다. 문화매체 성립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비평의 영역은 어떤 과정을 거쳐오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강신규 박사의 글도 적지 않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동시에 같은 고민을 다른 지역에서 하고 있는 북미의 게임연구자 Mia Consalvo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시대적 공통요소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고자 했다. TRENDS에서는 현재 가장 뜨거운 단어들의 현황을 살펴보고자 했다. 2021년 7월 다시한번 불타오른 셧다운제 이슈와 함께 게임 관련법들에 대한 관심이 재부상했는데, 수 차례 여러 가지 입법 발의는 뉴스에 나왔지만 실제로 입법되었는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 국회에서 게임법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이도경 비서관이 현업의 시각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게임 플레이와 콘텐츠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결제양식에 최근 불고 있는 새로운 변화인 구독형 결제는 어떤 변화와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를 홍성갑 기자가 점검했고, 비즈니스 워드로 2021년 하반기 중심에 선 메타버스라는 말이 게임과 갖는 유사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메타버스 게임에 대한 관심이 품고 있는 실체와 허상을 분리하고자 하는 고민을 김재석 기자가 담아냈다. 디지털게임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담는 Articles 코너에서는 비평이나 평론의 형식을 정의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의 글들을 모아보고자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전장 구성이 갖는 원근법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김얼터 작가의 글은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게임디자인에 접근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2021년 상반기 트럭시위 사태로 화제가 되었던 〈로스트아크〉난민사태에서의 '난민'을 본격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오영진 평론가의 도전은 실제 게이머들의 위상을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스탠스들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2021년 GOTY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잇 테이크 투〉를 살피는 이명규 기자의 시선은 코옵이라는 보기 드문 형태의 플레이를 이해하는 단초들을 제공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도 정작 '초딩 게임'이라는 선입견에 강하게 묶여 있는 〈로블록스〉의 의미는 박이선 연구자의 정리를 통해 좀더 뚜렷해진다. 야쿠자 게임으로만 알려져 있던 〈용과 같이〉에 접근하는 시사평론가 김민하의 글은 이 게임을 '관광 게임'으로 정의하며 일본이라는 현실배경과 게임의 연계를 되새기게끔 한다. 게임텍스트 뿐 아니라 사람으로도 이뤄지는 것이 게임문화다보니 매 호에서는 항상 사람을 향한 인터뷰를 포함하고자 했고, 첫 호에서는 두 사람을 만났다. 인디게임 개발자 somi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죄책감 3부작'이라고 부르며 연결성을 부여하고, 이는 게임에서의 작가론을 가능케 하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somi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동시에 세계 최대 e스포츠를 운영하는 라이엇게임즈 코리아의 진예원 PD를 만나 한국 e스포츠의 현황과 미래에 대해 현업의 시각에서 느끼는 바를 받아적고자 했다. 격월로 정리하는 이슈들은 아무래도 시기마다 적절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좀더 긴 호흡에서 한국의 게임문화를 곱씹는 결과물로 자리할 것이다. 긴급한 소식에 대한 논의는 다른 여러 매체와 커뮤니티에 맡기고, 우리는 숨을 고를 때 비로소 보이는 문제들로 시선을 던지고 말을 걸고자 한다. 기획회의 내내 이야기했던, '웹진보다 무겁게, 학술지보다 가볍게'라는 기조는 주제와 소재, 톤까지를 아우르는 우리의 슬로건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글을 찾아 읽을 독자가 있을 거냐고 반문하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없으면 때로는 독자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잡지의 힘이자 의무이기도 했음을 잊지 않는다.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대담회]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 야스케 논란을 보는 여러 관점들

    2024년 공개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는 시리즈 최초로 일본 전국시대를 무대로 삼으며, 여성 시노비와 흑인 사무라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된 이후 흑인 사무라이 주인공의 인종과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으며, 이는 국내외 커뮤니티에서 역사 고증의 문제를 넘어 서구중심주의나 PC주의 비판 등의 다양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번호 GG에서는 홍현영 박사, 이정엽 박사, 강신규 박사 세 명의 디지털 게임연구자 및 인문사회 연구자들을 만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쟁점을 나누고, 오늘날 게임이 재현하는 역사와 정체성의 의미와 딜레마를 검토해 보았다. < Back [대담회]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 야스케 논란을 보는 여러 관점들 24 GG Vol. 25. 6. 10. 2024년 공개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는 시리즈 최초로 일본 전국시대를 무대로 삼으며, 여성 시노비와 흑인 사무라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된 이후 흑인 사무라이 주 인공의 인종과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으며, 이는 국내외 커뮤니티에서 역사 고증의 문제를 넘어 서구중심주의나 PC주의 비판 등의 다양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번호 GG에서는 홍현영 박사, 이정엽 박사, 강신규 박사 세 명의 디지털 게임연구자 및 인문사회 연구자들을 만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쟁점을 나누고, 오늘날 게임이 재현하는 역사와 정체성의 의미와 딜레마를 검토해 보았다. 이경혁 편집장: GG의 이번 호 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배경설명을 해 드리자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17년 정도 된 오래된 프랜차이즈고요. 그간 예루살렘 근방의 어쌔신 집단, 이탈리아 피렌체, 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다가 사실상 시리즈 최초로 동아시아를 다룬 게 이번의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끝 무렵을 다루면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이번 작품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는데, 하나는 ‘후지바야시 나오에’라는 일본 여성 시노비이고 나머지 하나는 ‘야스케’라는 흑인 사무라이입니다. 이 중 후자가 이슈가 되었죠. ‘일본을 다루는 게임인데 일본인이 주인공이 아닌 경우가 어딨냐, 서구인들이 멋대로 만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고, 특히 무슨 게임이 나와도 항상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고증이 엉망이다’라는 등의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흑인의 재현에 관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의 논란이 기존의 논란과는 다른 맥락에서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란에서 어떤 점에 주목을 해야 할지, 그리고 이 논란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다음 게임과 게임 담론을 만들 때 우리가 고려해야 될 건 무엇일지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일단은 다들 관련 이슈를 보시니 어땠는지요? 커뮤니티 반응은 어떠셨을까요? 역사적 인물 ‘야스케’, 고증인가 상상력인가 홍현영 박사: 야스케라고 하는 캐릭터가 실제로 역사적 사료에 잠깐 등장한 내용을 굉장히 부풀려서 만들어낸 캐릭터잖아요. 커뮤니티 몇몇 댓글을 보면 저는 그게 궁금하더라구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무라이의 삶’이 있는것 같은데 그게 뭘까. 사무라이로서 재현되어야 되는 특정한 삶과 자격이 있는데 야스케가 그 자격에 속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또 이런 댓글도 봤습니다. 노부나가가 실제로는 야스케를 일종의 트로피처럼 데리고 다녔을 거다. 인간으로서의 존재라기보다는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사물이나 대상에 가까웠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이런 댓글을 굉장히 확신에 찬 태도로 쓴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라는 점이 가장 신기하고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일본 현지에서도 흑인 사무라이에 대해서 여러 말이 많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이정엽 박사: 역사적으로는 야스케가 실제로 사무라이가 아니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노부나가에게서 정식 사무라이가 될 때 받는 태도(太刀)와 집을 받았고 부하처럼 데리고 다녔다는 설들도 있습니다. 사실 전국시대가 게임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재현되었고, 202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NHK 대하드라마의 사례처럼 기존의 역사관과 다른 인물상이 재현되기도 했거든요. 저는 콘텐츠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변용의 범주가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야스케를 무사로 격상을 시켜서 활용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을 펼쳐왔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서 그간 정사에 완벽하게 맞게끔 나왔던 주인공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와 상당히 밀접한 형태의 역사로 다가오고, 특히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 역사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상당히 민감히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감정적 요인’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제가 처음 <어쌔신 크리드>를 하며 충격받았던 부분은, 야스케가 주인공일 때 플레이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와 ‘침묵’ 사이에서 선택하게 하잖아요. 여기서 전자를 고르면 반 년도 안 되어 오다 노부나가의 곁에서 같이 전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야스케가 노부나가와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혔음을 보여주는 부분이죠. 그 장면을 보며 ‘이 게임은 이런 형태로 극적인 허용을 최대치로 넓혀 놓고 상상력을 발휘해 들어가는구나’ 싶었고, 그때부터 이 게임에서 고증과 관련된 검증은 내려놓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야스케가 노부나가의 최심복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얼마나 흥미로운가의 여부만 초점을 놓고 파악하자는 거죠. 이경혁 편집장: 인정적인 면에 조금 더 주목을 해보죠.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공이라서 문제가 된 거라면, 만약 그 주인공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홍현영 박사: 방금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무라이의 상’을 언급한 바 있는데요. 아까 토템이나 트로피 이야기도 그렇고, 흑인 사무라이 비판 담론들에서 야스케는 정말 뭐랄까 ‘인간’으로서의 행위가 가능한 주체로 표현이 되지 않고 있거든요. 일본 전통이나 서브컬처에서 활용되는 사무라이의 전형성이라는게 있다면,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주체로 호명될 수 있는 존재는 흑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경혁 편집장: 생각해 보면 서양인 사무라이 설정도 영화로는 꽤 나왔던 것 같은데, 거진 백인 사무라이였네요. 강신규 박사: <어쌔신 크리드>에서 백인 사무라이가 나왔어도 논란이 되었을 수 있지만, 야스케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재현을 두 번 비튼 거죠. 사무라이를 백인도 아니고 심지어 흑인으로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어떤 문화적 고정관념을 굉장히 거슬리게 했기 때문에 더 그런 반응이 나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리 서양 회사에서 만든 게임이라 해도 동양 고유의 사무라이라는 직업을 다룰때는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이 배경에 깔려있는 거고, 흑인이 등장하니 이 불쾌함을 지우기 위해서 ‘원래 역사적으로는 어땠냐’ ‘실제로 이게 가능한 거냐’는 말을 들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선생님들의 말씀과 연결되지만, 저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역사 왜곡도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일부 게이머들이 욕하는 PC 강요가 좀더 맞아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흑인 사무라이 논란은 ‘하나의 게임 안에서 다양성과 핍진성을 중심으로 한 재현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거죠. 게다가 유비소프트의 그동안의 게임들은 대체로 이래 왔습니다. 오리지널에서도 이집트 사람, 바이킹 등 여러 민족들이 등장해 왔지만, 동아시아적 남성성의 핵심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는 사무라이에 흑인 캐릭터가 배치되자 이런 논의가 불거졌던 것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야스케가 화제가 제대로 됐을 거라 생각하고 재현의 정치나 다양성의 정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효과가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이정엽 박사: 사무라이가 실제로 전투했던 방식이 게임 메카닉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피는 것도 재밌는 부분입니다. 전국시대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특징은 부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려는 욕망이 강한, 구조주의적인 다이묘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런 자의 심복들이 게임에서는 ‘암살 닌자’와 ‘무쌍 찍는 흑인 무사’로 재현된다는 것이죠. 잘못하면 조총 한 방 맞고 끝날 수 있는 상황을 매우 판타지적으로 재해석하는 건데요. 사실 <다크 소울>로 대변되는 액션 RPG류가 히트를 치다 보니까, 유비소프트에서도 트렌드에 맞춰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게임의 액션성을 강화하려던 시도가 아니었나 싶어요. 거기에 가장 맞는 형태의 캐릭터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기존의 잠입액션을 포기할 수 없어서 나오에를 넣었고, 무쌍을 위해 야스케를 넣으면서 양쪽을 다 잡는 일종의 절충안을 넣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신규 박사: 결국 이런 인물들에게 서사 권력을 어떤 식으로 나누어 줄지에 대해 이정엽 선생님이 운을 띄워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를 플레이해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들어보면 전투 방식부터 해서 현지 언어를 할 수 있느냐 이런 부분들까지, 게임 속 흑인 사무라이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최종의 결정권을 게임 플레이어에게 주는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유비소프트의 결정 자체가 굉장히 정치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쪽에서도 당연히 이런 논란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입니다. <어쌔신 크리드>에 드러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이경혁 편집장: 사실 <어쌔신 크리드>는 기존에 암살이 메인인 게임이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암살이 잘 안 나오는데 그 이유는 암살이라는 메카닉 자체가 갖는 일종의 지루함 때문일까 싶거든요. 처음 암살을 해보면 숨는 기분도 들고 굉장히 재미있지만, 규칙에 익숙해진 순간부터는 넘기 힘든 벽이 있습니다. 무쌍은 액션 상황을 칼질 몇 번에 금방 해결할 수 있지만, 암살은 기다려야 하니 게임 플레이 시간도 늘어지죠. 그 때문에 게임 메카닉적인 면에서도 액션을 강렬하게 표현한 캐릭터가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일본의 무예를 대표하는 두 가지 캐릭터인 시노비와 사무라이를 선택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근데 우리의 핵심 주제는 ‘왜 그 사무라이는 흑인이었을까’가 되는거죠.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은, <어쌔신 크리드>를 하다 보면 계절이 바뀌는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걸 보면서 서구에서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국가를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극심한 계절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더라구요. 다시 말해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서구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전제 자체가 매우 명확하고, 오리엔탈리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신규 박사: 그런데, 애초에 게임이라는 무국적인 공간 안에 일본을 구현하는 것도 굉장히 의도적인 것이기에 그 재현은 당연히 실제와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유비소프트에서 만든 그동안의 게임이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전부 사실성이 중요한 게임은 아니었다고 하셨잖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 말도 실은 조금은 모순되는 게,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언제나 대체 역사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역으로 항상 역사가 중요했던 게임이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에 기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그렇고, 게임의 주요 홍보 포인트로 ‘플레이어가 현장에 가서 진짜로 전자 관광을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을 내세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는 관광 모드까지 있죠. 이정엽 박사: 동의합니다. 제가 거부감이 조금 들었던 부분은 야스케가 실제로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오다 노부나가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일본어를 너무 잘하고, 일본에 있는 다양한 문화적인 습성들을 굉장히 빠르게 내면화한 캐릭터라는 거였어요. 이때 ‘흑인’이라는 설정은 사실상 스킨 같은 것이고, 실은 서양인들 입장에서 ‘일본의 대체역사 안에서 내가 무사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라는 부분을 빠르게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 생각합니다. 계절 표현이나 게임 구조물들도 꽤 고증이 잘 된 게임이지만 문제는 캐릭터 설정에서 ‘흑인이면 응당 가졌어야 할 이 문화에 대한 낯섦’, ‘일본 문화권과 흑인이 부딪히는 충돌의 지점’들이 충분히 나왔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 지점이 거의 재현이 안 된거죠. 프란츠 파농이 이미 후기 식민주의의 문제점으로 식민지 본국에서 가진 심상들을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세대의 사람들도 내면화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지요. 야스케를 만약 문화적 충돌이나 갈등이 들어가는 캐릭터로 묘사했다면 상당히 설득력과 핍진성 있는 캐릭터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요. 이를 삭제한 채로 완벽하게 일본적인 것을 내면화한 흑인 사무라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본식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의문이 드는 거죠. 설정까지는 그런 허용을 할 수 있어도 세부적인 재현에서는 여러 문제가 있고 그게 더욱 우리의 거부감을 증폭시켰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앞뒤를 잘라놓고 보면, 야스케는 그냥 검은 피부의 일본인일 뿐인거죠. 홍현영 박사: 저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흑인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써 외국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일본에 대한 상을 부각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거는 그냥 유비소프트에 대한 저의 과도한 기대였고(웃음) 전혀 그런 방식으로 나오지 않는군요. 강신규 박사: 그러니까 그 캐릭터가 거기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이나 복잡할 수 있는 이 사람의 여러 정체성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거네요. 이경혁 편집장: 최소한의 서사를 위한 고려는 되어 있지만 정말 스토리텔링에서의 세팅일 뿐이고, 사실 게임에서는 그보다 야스케라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다른 NPC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봐야 하거든요. 게임 중간에 국숫집 아저씨와 농담을 나누는 부분이나 일본의 다양한 진미를 모으는 서브 퀘스트 같은 게 나오는데, 일본 땅에 온 지 얼마 안 된 낯선 흑인 캐릭터가 능숙하게 농담을 하고 일본의 진미를 다 알아보는 걸 보면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긴 하죠. 이정엽 박사: 지금 시대에는 일본이 굉장히 인기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고, 우리 세대에서는 일본 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다 한 번씩은 접해봤을 것이기 때문에 서양인의 입장에서 다루기 제일 좋은 지역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떻게 보면 자신이 이렇게 ‘약간만 알고 있는 공간’이 이런 형태의 판타지적 허용을 가장 쉽게 설정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경혁 편집장: 전국시대라는 배경 또한 그렇습니다. 가장 일본에서 유명한 시대기도 하고 이미 역사적으로 서양이 개입한 시대거든요. 그래서 <어쌔신 크리드>가 참 영리한 선택을 했으면서도 한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게, 결국 서양인이 일본에 들어오는 시대를 선택했잖아요. 물론 역사적 맥락상으로도 예수회가 들어오고 서양인 선교사들을 따라 템플 기사단과 암살단이 들어온다는 선택을 하는게 자연스럽죠. 이미 기존의 프랜차이즈 시리즈에서 암살단의 기원을 서구 역사에 따라가는 것으로 밝혀놨기 때문에, 일본에서 암살단이 자생적으로 나타났다고 쓰면 기존의 설정이 다 붕괴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왔기에 이 이야기는 ‘일본의 암살단 이야기’가 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어쌔신 크리드>라는 프랜차이즈 안에서 이후에 어떤 제3세계를 건드리건, 이 이야기는 반드시 이미 서구의 역사에서 완성된 암살단과 기사단 이야기가 제3세계에 넘어가는 형태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히스토리아 자체가 이미 서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리즈가 이야기의 다양성을 만들려면 무대도 바꿔야 되고 이제 계속 다른 세계를 다뤄야 되거든요. 어쩔 수 없이 그 확장의 과정 또한 이미 역사에 존재했던 제국주의적 확장의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정엽 박사: 말씀하신 대로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비롯된 형태의 대체 역사가 인류 역사의 여러 단면들을 거쳐 간다는 <어쌔신 크리드> 설정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을 그간 어떤 균열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대부분의 문명권이 서양의 흐름을 어느 정도 따라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유비소프트의 개발자들이 간과했던 부분들은 ‘서양인 개발자’가 대체역사를 만들었을 때 아시아 유저들이 갖는 문화적 거리감이, 같은 것을 동양인 개발자가 만들 때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여전히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너희가 왜 우리 역사를 다루니’라는 식의 어떤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장벽들이 각 문화권 내에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이 있고 그걸 건드린 거라고 봐요. 이를테면 한국의 개발사가 나오에의 암살물과 야스케의 무쌍물을 만들겠다고 하면 과연 이런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나왔을까 싶은 거죠. ‘역사’와 ‘관광’의 모순된 결합 홍현영 박사: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서양 세계 내부 구성원이 등장하는 방식이었거든요. 실은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재현들이 얼마나 평면적이고 얄팍한 방식인지 포착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이번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서양인 관광객’이 가지고 있는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시선에 가깝게 재현된다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아까 이야기한 야스케가 오사카의 명물 음식을 먹는 장면은, 과연 관광이랑 무엇이 다를까요? 물론 이 게임에서 전자 관광이 중요한 모티브이기는 하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그 시대가 가진 특수한 맥락이나 다양한 재현 양상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전자 관광에서 요구할 만한 부분에 대한 1차적인 충족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가 가지고 있던 배치 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데 그쳤다고 보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관광’이란 표현이 그래서 굉장히 핵심 키워드라고 느껴집니다. 태초부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는 관광이라는 요소가 있었지만, 문제는 이뿐 아니라 이 시리즈가 역사라는 키워드를 또 하나 끌고 간다는 거죠. 하지만 역사는 관광과는 달라요, 같을 수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역사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둘을 계속 꿰맞추려는 시도를 오랫동안 해 왔어요. 역사를 기반으로 한 투어 프로그램도 굉장히 많잖아요. 저는 그런 역사 관광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모순을 이 게임이 어느 순간 정확하게 보여준 게 아닌가 싶어요. 이정엽 박사: 저는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극적인 허용과 설정 변용을 자국 개발자나 비슷한 형태의 문화권 개발자가 하면 문제가 덜 되는데, 왜 서양 개발자가 하면 큰 반발과 문화적인 배리어가 발생하는지 짚고 싶어요. 예를 들면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에서 사무라이 문화를 재해석하는 형태로 ‘광선검’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은유적인 시도들은 굉장히 많이 있었죠. 그냥 그렇게 바라보듯이 허용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쉬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동의도 되지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사례를 보면 다르게 생각도 됩니다. 이 드라마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지만 조금 찜찜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이 드라마가 구한말 항일의병 독립운동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독립운동의 주체는 다 외세란 말이죠. 주인공도 미국인이고. 하지만 우리는 별로 그거에 대해서 거부감을 안 느껴요. 결국 <미스터 션샤인>은 한국 제작진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만약 똑같은 기획을 간사이에서 제작했다고 생각한다면 얘기는 정말 달랐을 겁니다. 강신규 박사: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만약 유비소프트가 일본 회사고 야스케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설령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논란이 되는 사례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미스터 션샤인> 같은 사례가, 이를테면 누가 만들었느냐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얼마나 자연스러우냐’가 더 중요한 거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쨌든 역사를 재현하는 것 자체는 사실 무조건 해석의 산물인데, 그걸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말한 모든 걸 다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누가 만들었고, 다른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재현하고 있으며, 그게 얼마나 안에서 잘 녹아 있는지 등등 말입니다. 홍현영 박사: 저는 <미스터 션샤인>이 인물의 정체성을 그렇게 단순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쌔신 크리드>와 같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례로 ‘유진 초이’라는 캐릭터는 미국인이 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백정 출신으로 기본적으로는 국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존재였잖아요. 처음부터 조선인의 바운더리 안에서 튕겨져 나가는 존재였죠. 유일하게 지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었고요. 그랬기 때문에 다른 국적을 취득했고 심지어는 국민으로서 한 번도 승인받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인이기를 기대받는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갖는 매우 아이러니한 공감대가 있는 거죠. 저는 야스케도 이런 식으로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면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화를 냈을까 싶습니다. 이정엽 박사: 유비소프트에서 <어쌔신 크리드>의 제작처가 몬트리올 스튜디오인데, 몬트리올이 독특한 형태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만 합니다. 몬트리올이 캐나다에 있지만 영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동시에 다 들어가 있잖아요. 정형화된 어떤 민족성 같은 것들로부터 굉장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조금만 내려가면 뉴욕 등 여러 민족들이 사는 용광로 같은 도시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문화적인 교류나 상상력을 개입시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고 봅니다. 근데 동아시아인들이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부분까지는 고려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글로벌화되었다고 하지만 동아시아는 아직까지 자국 내 문화를 중점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공간이잖아요. 아마 <어쌔신 크리드>에서 그리스나 이집트 사례를 내부까지 파고 들어가면, 실질적으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 안에 문화권을 정형화시키고 스테레오 타입을 만드는 등 문제적으로 느껴질 구간들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이경혁 편집장: 최소한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다고 했으면 일본 쪽의 자문진이 더 두꺼웠어야 한다, 그 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은 어떤 제작자가 만들더라도 타자화를 끌고 올 수밖에 없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필연적으로 관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관광객도 주체일 수는 없거든요, 항상 타자인 거고. 홍현영 박사: 그렇죠,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야스케가 아쉽습니다. 관광객의 장점은 사실 그 구역 내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고착화된 통념이나 기대 지평, 사고, 세계관을 오히려 바깥에서 다른 방식으로 느슨하게 사유할 수 있다는 점이거든요. 야스케가 차라리 관광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게임 시리즈의 정체성과 캐릭터 기대지평의 충돌 이정엽 박사: 사실 <어쌔신 크리드>에서 특이하게 재현되는 부분은 동아시아에서 흑인의 존재를 정말 모르다 보니 야스케를 바라보는 일본인의 반응을 열심히 구현했다는 점이에요. 야스케를 바라보며 눈치 보고 놀라는 일본인의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정작 야스케는 거기에 있어서 특별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죠.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야스케에 대한 재현보다는 개발자들이 뭘 그리고 싶었는가입니다. 야스케의 존재를 빨리 서양 유저들에게 내면화시키고 싶었고, 그 때문에 어떤 형태의 통역이 필요한 형태의 존재가 아니게끔 철저하게 서양식으로 캐릭터화된 존재를 만드는 게 목표였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이 캐릭터가 암살단의 일원이 되어서 기존의 업무들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 문화권에 거부감을 느끼는 캐릭터 존재가 나온다면 전 시리즈의 어떤 통일성에 위배가 되는 부분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문화권에서 특이하고 이질적인 형태의 존재를 집어넣었지만, 플레이어가 얘한테는 빨리 동화되어야 하고. 그러나 그 인물이 흑인이라는 형태의 인지는 계속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곳의 인물들은 야스케를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나는 매우 일본화한 캐릭터다’라는 것들을 끊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홍현영 박사: 달리 말하면, 지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 흑인 캐릭터 재현에서 드러나는 기대 지평들이 계속 부딪히는 거네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시리즈는 결국 서구의 시리즈인 건데, 동양 얘기를 하려니까 어려워진 것이지요. 그런데 나름 플레이를 해보면, 중간중간의 설정이나 장치를 보면 개발자들이 이 문제를 나름 고민했다는 것도 느껴져요. 제일 대표적인 게 주인공을 듀얼로 설정한 것입니다. 암살의 시노비와 액션의 사무라이를 설정함으로써 젠더나 인종 차원에서 다양성이 고려된 설정 등으로 이야기가 됐을 겁니다. 결국 이 논쟁의 근본적인 문제는, 재현이나 고증 차원의 이야기보다 역사는 서구에 의해 쓰였다는 점을 게임 내 장치로는 미처 넘어서지 못한 게 제일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강신규 박사: 우리가 이 게임에서는 야스케라는 존재를 통해 ‘서구 중심의 동양 재현’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식의 어떤 경유 지점이나 시그널이 없는 다른 일반적인 게임들에 있어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오늘 자리가 만들어진 계기는 사실 플레이어들이 이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였지요. 한국에 있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문제를 역사왜곡 뿐 아니라 PC 비판 등의 담론을 통해 접근한다면 이에 대한 논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논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정엽 박사: 우리가 야스케 얘기는 많이 했지만 시노비인 나오에에 대한 얘기는 별로 안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여성 닌자가 존재했었냐는 의문이 있고 일부에서는 여성 닌자가 고위 인사들의 운송이나 특수한 형태의 임무 수행을 위해 있었다고는 하는데요.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에서는 여성 닌자를 중점적인 역할로 배분해서 암살과 무쌍을 동시에 할 수 있게끔 캐릭터를 배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기존 시리즈에서 ‘에지오’를 중심으로 나왔던 전형적인 캐릭터성을 여기 와서 해체하는 거죠.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 이 게임에서 고증은 더 이상 제 생각에는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라고 보여져요. 이경혁 편집장: 약간 멍에를 쓴 것 같기도 해요. 아까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의 문제를 이야기하셨는데, 이 게임의 원래 정체성과 메카닉 자체는 지루해졌고 대중들이 환호하는 쪽으로 가기 시작했더니 다른 문제들이 터지고 좀 이런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이정엽 박사: 우리가 지금까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 대해 암살 메카닉과 관광 등을 쭉 얘기해 왔는데, 이제 그 정체성에 있어서 관광은 유지하고 있지만 암살이나 서양 중심에 대한 정체성은 포기한 것 같기도 해요. 시리즈의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식으로 일종의 선언을 한 것으로도 느껴지거든요. 이경혁 편집장: 오히려 그래서 그냥 고증을 떠나 우리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하는 게임이라고 세게 밀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이정엽 박사: 그러려면 아예 정말 더 문화적인 은유가 들어갔어야 했는데 매우 리얼하게 묘사해 놓고 ‘우리는 서양 중심적으로 할게’라고 얘기하니까 그 이율배반이 나오는 지점이 있는거죠. <어쌔신 크리드>를 하다 보면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했기 때문에 정말 그곳 안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있잖아요. 굉장히 재현이 잘 되어있고 그걸 관광의 요소로 넣는 게 사실 이 시리즈의 미덕이었는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을 테고요. 이경혁 편집장: 관광이라는 게 분명히 장점도 있지만 갖고 있는 한계가 매우 명확한데, 그것이 게임이 되고 특히 역사라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조심스러운 소재와 만났을 때 결국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계속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정엽 박사: 이를테면 역으로 매우 옥시덴탈리즘적으로 만들어진 게임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입니다. 이 시리즈를 보면 서양 재현에 있어 굉장히 일본적인 시선이 많이 들어가 있고, 일본인 자신들의 문화권을 서양과 비교하고 싶어하는 욕망들이 그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걸 통해서 일본의 게임 회사들이 자신의 문화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방법론을 그동안 펼쳐왔던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는 그 게임을 플레이할 때 서양이 왜 이렇게 재현되었는지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권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옥시덴탈리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걸 게임적인 허용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거든요. 물론 아시아권이 오랜 기간 서구 문명에 의한 피식민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양보가 불가능한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양만 동양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동양 또한 서양을 그렇게 포장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그려왔던 게 게임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생님들과 제가 견해가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형태의 서양이 보여주는 시각 자체를 어느 정도 긍정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해당 문화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는 이상 그 문화권 사이에서 해석의 문제는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런 형태의 문제 제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충분히 건설적으로 갈 수 있는 문제인데 이것 자체를 그리지 못하게 막는다는 게 잘못된 발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커뮤니티 내 플레이어의 반응들에 대해 이경혁 편집장: 우리가 이 논란을 게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봤었잖아요, 저는 거기서 흑인이라는 키워드도 꽤 다양한 역할을 했다고 봐요. 게임 커뮤니티에서 논의되는 ‘흑인’은 이 게임에서 단독으로 유래된 맥락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인어공주> 와 같이 그 앞에 있었던 흑인 캐릭터의 맥락들이 있어요.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흑인의 활용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오래 해온 커뮤니티의 입장에서 형성된 흑인에 대한 이미지가 있고, 이것이 <어쌔신 크리드> 논쟁에 와서 달라붙은 것은 아닐까 싶거든요. 이정엽 박사: 저는 이 부분에서 개발자와 유저 상호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충분히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한다는 점을 문제삼고도 싶습니다. 실제로 미국 게임 개발자 사이에서 고집스러운 PC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컨텐츠가 나올 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의 사례처럼 이에 대한 백래시도 너무나도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은 야스케는 역사적인 근거도 있고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게끔 만들어진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들에서 유래하는 백래시의 영향을 받아 지나치게 세게 얻어맞고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을 넣어서 나름대로 고증에 성공해서 갔는데도 PC주의로 매도당하는 측면이 있는 거죠. 그런 백래시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나름대로의 고증을 갖춘 형태의 게임의 근거 자체를 무너뜨리는 건 매우 문제적이라 봅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쓰는 게 아니고 콘텐츠를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의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작품이고 그 안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은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얼마든지 허용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발자가 어느 정도 의무감을 가지고 그 안에서 그 세계관이 갖추는 나름대로의 핍진성을 추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개발자도 유저도 그 원칙들을 양쪽 다 위배하며 서로 간의 진영 싸움을 오랜 기간 고집스럽게 벌여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실은 ‘자신이 어떻게 재현되는가’의 문제를 정말 중요시하기보다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라는 것이 모든 양쪽 진영의 목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콘텐츠가 그를 통해서 오히려 더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경혁 편집장: 오늘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서 앞에 얘기와 붙여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는 그 앞에 흑인 캐릭터 설정에 대한 맥락이 없었다면 생각보다 별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냥 ‘흑인이 온지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일어를 잘해’라며 웃고 넘어갔을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결국 이 담론이 커뮤니티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커뮤니티에는 그 앞의 맥락이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야기를 끌면 한도 끝도 없는 주제이긴 하지만, 약속드린 시간이 다 되어 대담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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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 Vol. 8 온라인이 보편화되면서 게임 또한 계정 생성과 로그인을 통해서 접근가능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서버로부터 분리되어 작동하는 오프라인 게임 시대로부터 진화해 온 현대의 게임에서 오프라인 게임은 어떤 유산을 남겼고 어떻게 역사에 남을 것인가? BIC 2022 탐방기 9월 1일부터 9월 4일 까지 부산역 근처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게임 행사가 열렸다.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발이다. 올해로 8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은 완전 비대면으로, 2021년엔 사전선정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할수 있게 한정적으로 열렸다. 코로나가 완저히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해제되면서 3년만에 완전 오프라인으로 열린 셈이다. Read More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Read More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Read More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Read More ‘대항해시대 오리진’, 멀티플레이의 계층화와 사이버 농노들 비동기 멀티플레이는 모바일 게임의 시류에서 도드라진 방식이다. 모바일, 그리고 무선 네트워크라는 아직 태동기에 불안정성이 남아있던 플랫폼들은 참여자들이 동시에 접속하지 않으면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체계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현재 이 방식은 비단 모바일 플랫폼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특유의 선택적 연결성 덕분에 많은 게임에서 채용되곤 한다. Read More ‘아카트로닉스’라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는 것이 있다. 호기심의 방은 말 그대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진귀하고 이국적인 것들, 때로는 괴이한 것들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주로 16-17세기 영국에서 개인 컬렉터들에 의해 만들어진 호기심의 방은 박물관의 기원 중 하나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공간이 단순히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수집 공간’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보여졌다. 당대에 가치있던 고미술품이나 유물, 또는 명망있는 화가의 작품이 아니었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상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Read More 〈포켓몬 고〉는 당신의 시공간에 침투한다 〈포켓몬 고〉는 2016년 글로벌 출시된 증강 현실 모바일 게임이다. 증강 현실이란 더해진 현실이라는 뜻이니, 현실 위에 정보 레이어가 한 겹 더해졌다는 의미다. 일반적인 지리 데이터 위에 포켓몬스터 데이터를 덧씌워보니 게임이 탄생했다. 출시 초기 〈포켓몬 고〉는 플레이어의 GPS를 추적하여 구글 맵 위에 포켓몬들을 등장시키고,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만 보여주던 포켓몬스터 트레이너의 삶을 살아보도록 선보였다. Read More 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Read More 사파의 탄생과 몰락 아케이드에서 가동 중인 대전 격투 게임을 가정으로 온라인으로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최초의 시기는 94년 말 미국에 출시된 메가드라이브 용 X-Band로, 당시로서는 강력한 2,400bps 전송속도의 모뎀을 통해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게임들을 미지의 상대와 가정에서 대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콘솔 능력의 한계로 아케이드 게임 자체를 그대로 옮길 수 없던 시기였으니, 진정한 의미의 (열화 없는) 아케이드 게임을 온전히 집에서 즐기는 환경은 사실상 14.4kbps의 모뎀을 새턴에 연결하여 즐길 수 있었던 96년에 발매된 버추어 파이터 리믹스가 최초라 할 수 있다. Read More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게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한 놀이 문화로 통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오락이 가능한 값비싼 콘솔기기로 시작해, PC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정 내 기초 게임 환경 구축이 가능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거리와 관계없이 편하게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Read More 온라인 시대의 살아있는 화석, 보드게임 이야기 1938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가 알려진 실러캔스라는 어류 개체가 있다. 실러캔스는 약 3억 7천 5백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하여, 약 7천 5백만년 전 절멸했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러캔스는 살아있었다. Read More 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Read More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Read More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Read More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폴더와 디렉토리 기반으로 오프라인 PC에서 파일 관리를 하던 세대들은 요즘처럼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려두는 방식을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온라인이 기본이 되는 시대. 과거에는 PC 한 대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파일을 옮기는 일을 부가적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정보의 존재위치 자체가 관계망 위에 놓이는 것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Read More 혼자-서 오롯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은 : 싱글 플레이에 던지는 물음 오래전 어느 PC게임 잡지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칼럼에서 글쓴이는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을 끝내는 것이 아쉬워 엔딩을 앞두고 진행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칼럼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머뭇거림’의 정취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Read More

  • 시뮬레이티드 셀프: 놀이하는 인간이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세계는 불확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생동하는 물리적 실재를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가정법에 따른 결과론, 혹은 결정론은 입자들의 불확정한 위치에 선형성을 부여하는 매력적인 시뮬레이션이다. ‘만약 ~라면 어땠을까?’ ‘만약 ~한다면 어떨까?’는 확률의 세계에서 확고한 인과관계를 부여할 뿐 아니라 대안적인 실재를 상상하도록 어떤 유희의 프레임을 제공한다. 만약 조선이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와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지적인 유희를 즐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시뮬레이션 절차들을 상정함으로써 확률의 시공간을 결과의 시공간으로 바꿔놓게 된다. < Back 시뮬레이티드 셀프: 놀이하는 인간이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14 GG Vol. 23. 10. 10. 불확정성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현미경 세계는 불확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생동하는 물리적 실재를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가정법에 따른 결과론, 혹은 결정론은 입자들의 불확정한 위치에 선형성을 부여하는 매력적인 시뮬레이션이다. ‘만약 ~라면 어땠을까?’ ‘만약 ~한다면 어떨까?’는 확률의 세계에서 확고한 인과관계를 부여할 뿐 아니라 대안적인 실재를 상상하도록 어떤 유희의 프레임을 제공한다. 만약 조선이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와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지적인 유희를 즐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시뮬레이션 절차들을 상정함으로써 확률의 시공간을 결과의 시공간으로 바꿔놓게 된다.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사위 놀이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긴다. 놀이는 언제나 불확정성을 데카르트 좌표계로 옮겨놓는 과정이다. ‘시뮬레이션’은 모의실험인 동시에 유희의 근원이며, 인간은 오래 전부터 시뮬레이션과 유희를 접목시켰다. 가장 오래된 게임인 바둑과 장기는 전쟁에 대한 각기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러나 전장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불확정성으로 가득하다. 날씨, 사기, 진군 속도, 무기, 영양상태, 파발마의 속도, 말의 종자 등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승패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전쟁 시뮬레이션은 전장의 요소들을 극도로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폰은 앞으로만 전진하고, 나이트는 뛰어넘으며, 승패는 킹을 잡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킹을 쓰러트리는 순간 결정된다. 그러나 놀이하는 인간은 어두운 방 안의 헬륨 풍선의 위치를 찾는 사람처럼 좌표에 도달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즐긴다. 시뮬레이션은 추상화 될수록 명료해지지만, 명료함은 복잡성을 제거하므로 역설적이게도 유희를 완성하는 동시에 방해한다. * H.G. 웰스가 1913년에 제작한 워게임 (좌)와 게임즈 워크숍의 워해머 40K(우) 대안적인 현실 또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선지자이자 미래의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H.G. 웰스가 전쟁 게임에 광적으로 집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전장의 요소들을 바꿔가며 놀이를 즐기는 워게임 매니아였고, 스스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제작했을 정도였다. 게티스버그 전투를 묘사한 웰스의 워게임 <리틀 워즈>는 단순히 모형을 가지고 하는 병정놀이가 아니라 엄격하고 복잡한 규칙에 따라 부대를 이동시키고, 포 구경에 따라 성냥개비 또는 몽당연필을 실제로 발사할 수 있는 장치와 태엽으로 움직이는 기관차 등이 구현된 ‘워게임 시뮬레이션’ 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병정놀이를 빙자한 워게임을 즐기는데, <워해머> 시리즈의 매니아들은 직접 제작하거나 구매한 피규어를 갖고 며칠 내내 광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문제는 워게임이 시뮬레이션과 놀이 사이에서 교묘히 표류한다는 것이다. 웰스와 같은 편집광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지만, 모든 놀이는 동료와 상대, 그리고 공동체를 동반한다. 공통으로 적용되는 룰이 없다면 놀이가 될 수 없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이 명료화되는 과정, 즉 연성화된 규칙과 단순한 절차들의 발명은 시뮬레이션이 놀이로 전화하는 필연적인 의례다. 동료, 또는 상대방과 담소를 나누며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절차는 무엇일까? 순서대로 한 번씩, 한 수씩 주고받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시공간을 일시 정지하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 불확정성의 요소들을 조작함으로써 어떤 ‘배치(assemblage)’를 만들어내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이제 워게임은 역동적인 동시에 정주적인 것이 되었다. 전장에서 정지는 곧 죽음이지만, 워게임에서 정지는 더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다. ‘턴제’가 된 시뮬레이션은, 불확정성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현미경이자 놀이를 구조화하는 프레임이 된다. 시뮬레이션의 재배치: 시뮬라시옹에서 에르고딕으로 * 헥스타일로 명료화된 시뮬레이션의 지도학. 전쟁을 소재로 하는 보드게임을 넘어 문명, 경영, TRPG등 게이밍 전체를 떠받드는 프레임이 된다. 프레임은 단순하면서 단단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소재를 버틸 수 있는 강도를 지녀야 한다. 전자게임이 등장하기 전 단계의 보드게임은 워게임 시뮬레이션이 주조했던 추상적 시공간, 즉 타일 중심의 규칙을 연성화해 다방면에 도입했다. 따라서 입자(atom) 세계의 시뮬레이션이 비트(bit) 세계의 시뮬레이션으로 재편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사위를 인간이 직접 손으로 굴리느냐, 혹은 컴퓨터가 대신 굴려주고 계산해주느냐의 차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 시뮬레이션을 둘러싼 많은 결과들이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대두되게 되었다. 시뮬레이션의 가장 큰 장벽인 자연 연산 부문이 기계 연산으로 대체되면서, 워게임의 딜레마였던 복잡성과 명료성이 교집합을 이룰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디지털 게이밍에서는 불확정성과 결정성의 요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확률론적 결정론, 혹은 인과율과 양자얽힘이 공존하는 세계가 곧 디지털 게임의 시뮬레이션이다. *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앤 매직3(좌상), 문명2(우상), 듄2(좌하), 워크래프트2(우하) 시뮬레이션이라는 건축물의 형태가 턴제에서 실시간으로 바뀌어도, 그 프레임인 ‘타일’에 의한 공간직조는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원본없는 실재, 초월적 실재인 시뮬라시옹이 물자체로 이뤄진 실재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소비자본주의의 풍경을 두고 ‘실재의 폐허’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 영토에 경계를 긋고 유희의 공간을 창출하는 게이밍의 세계에서 실재의 폐허는 거꾸로 시뮬레이션의 천년왕국이 된다. 시뮬라크르가 더 정교해질수록, 그것들의 어셈블리지가 불확정성과 인과성을 더 광범위하게 포섭할수록 근사한 에르고딕(ergodic)은 골계미를 더해간다. 왜 골계미인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차이의 반복을 통해 프레임의 강도를 더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와 달리 게이밍에서는 아무리 강도 높은 프레임이라 해도 마음대로 형태를 바꾸거나 심지어 재설계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파도의 강도를 상상하며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가동시킨다. 그들은 육면 주사위를 던질 뿐 아니라 즐기며, 평균 3에 수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던진다. 어제는 중국 문명을, 오늘은 영국 문명을, 내일은 인도 문명을 즐길 것이다. 오전에는 외교를 통한 승리를, 오후에는 전쟁을 통한 승리를 추구할 것이며 똑같이 게임을 즐기는 ‘시뮬레이티드 셀프(simulated self)’ 들과 이런 전략을 토론하고, 공유하고, 경쟁할지도 모른다. 시뮬레이티드 셀프, 혹은 시뮬레이티드 리얼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웰스의 워게임에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실시간 전술 시뮬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시뮬레이션은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를만한 변화를 겪은 적이 없다. 웰스가 고안해낸 타일과 턴 기반의 규칙들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실시간’은 결국 윤곽선을 가린 타일 위에서 동시에 기물을 움직이는 워게임에 다름아니다. 느긋하게 식사하거나 담소를 나눌 턴이 사라졌기 때문에 전장의 안개(fog of war)가 치열함을 더한 새 요소로 가미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실시간 전술 게임은 ‘시뮬레이션’이란 관면에서 보면 인지와 반응속도에 더 의존하는 형식이다. 커맨드 앤 컨커, 스타크래프트 등의 게임은 점점 도태되고 즐기는 플레이어도 점점 줄어드는 반면, 턴 기반의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재탄생되고 있는 현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젊은 게이머들은 치열한 실시간 경쟁과 화려한 그래픽보다 오히려 도트 그래픽으로 잘 짜여진 정적인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예컨대 <데이브 더 다이버>), 턴제 시뮬레이션 방식의 게이밍에서 더 큰 새로움을 만끽한다. * <발더스 게이트3> 와 <재기드 얼라이언스 3>와 같은 전통적인 턴제 시뮬레이션 기반 게임의 선풍적인 인기는 레트로(retro)라기보단 재매개(remediation)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게이밍이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편향을 넘어 고유한 시공간적 프레임을 자아내는 의례로서 시뮬레이션이 대두되고 있다. 요컨대 워게임에 열광했던 웰스나, 전설적인 시리즈, <재기드 얼라이언스> 시리즈, <문명>과 <심시티>를 즐기는 플레이어, 그리고 최근 전대미문의 비평적 성공을 거둔 <발더스 게이트>를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보드판 위에서 기물을 움직인다 할 수 있으며, 각자의 컨셉과 설정을 구조화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천년왕국은 더욱 진화할 것이다. 아마도 시뮬레이션의 패러다임 전환은 ‘시뮬레이티드 셀프’에서 ‘시뮬레이티드 리얼’로의 이행으로 이뤄질 것인데, 이는 형식이 아닌 기술을 통해서 성취될 가능성이 크다. 생성 인공지능의 도입은 우리가 게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비인간 요소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예컨대 NPC, 몬스터등이 생성 인공지능을 탑재해 비인간 인격체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함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 속에 인게임-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이 뒤섞이면 어떻게 될까? 핍진성은 실재에 근접하거나 보드리야르가 우려했던 실재의 폐허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엔비디아를 위시한 많은 빅테크가 시뮬레이션 내에서의 비인간 행위자의 가능성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비트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은 그래픽의 평면이 매끄러워 지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들이 매끄러워지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의 몬스터와 동료들이 비인간 인격체라면 우리는 어떤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킬수 있을까? 생성 인공지능과 게이밍의 절합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의 친애하는 웰스 경은 어쩌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시뮬레이티드 리얼’을 목격하고 돌아와, 투명인간이 된 채 홀로 워게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게이밍과 시뮬레이션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시뮬라크르들을 조작하는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술미학적 상상력일 것이다. Tags: 에르고딕, 시뮬레이션, 턴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왜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의 수면 습관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왜 이 수면 측정 앱은 흥행에 성공했는가? < Back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16 GG Vol. 24. 2. 10. 내 포켓몬이 부르니까 자러 가야지 2023년 7월 처음 출시된 포켓몬 컴퍼니의 새로운 모바일 게임 <포켓몬 슬립Pokémon Sleep>은 출시 2개월 만에 전 세계 누적 수면 시간 10만년을 돌파 1) 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장르를 내세우며 이 앱이 게임이라고 주장했다. 게임의 방식은 단순하다. 이용자가 자면, 게임은 이용자의 수면패턴을 분석하고 이에 맞는 포켓몬을 수집한다. 보다시피 이용자가 재미를 느낄 요소라고는 포켓몬밖에 없다. 즉 <포켓몬 슬립>의 흥행은 오로지 ‘포켓몬스터’라는 유명하고 사랑받는 주머니 괴물들의 매력 하나만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 세계 엄청난 열풍을 일으킨 <포켓몬 GO>의 목표 또한 오로지 현실 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포켓몬을 포획하는 것이었다. 포켓몬스터라는 IP는 성공적으로 게임 이용자에게 재미를 유도하고 두 게임을 ‘게임’이라고 인식시켰다. 일단 게임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자 두 게임은 IP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IP를 통해 흥행에 성공한 게임은 역으로 자신들의 현실과의 접합을 이용해 포켓몬스터 IP의 해상도를 높여갔다. <포켓몬 슬립>을 살펴보자. <포켓몬 슬립>이 이용자 수면 측정의 개연성으로 채택하는 것은 바로 포켓몬의 잠자는 모습 연구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이용자의 파트너 포켓몬은 잠자기 약속을 지키라며 이용자에게 알림을 띄운다. 이용자는 파트너 포켓몬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눈을 뜬 이용자를 맞이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수면 습관을 가진 새로운 포켓몬들이다. 이를 반복하며 이용자는 포켓몬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성장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용자는 자연스럽게 매일 밤 포켓몬과 함께 잠들고, 포켓몬과 눈 뜨는 일상을 보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용자는 게임에게 지시받은 대로 매일 포켓몬이라는 생명체를 ‘연구’하게 된다. 포켓몬 연구자가 된 이용자는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생명체에 대해 현실의 생명체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포켓몬이라는 형상은 이용자 속에서 점점 구체화되며, 이용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매개로 그들과 가장 내밀한 일상을 공유하며 ‘현실을 함께 한다’는 감각을 전달받는다. 구체화된 형상과 실재하는 감각이 심상에서 결합하며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생명체는 현실 공간에서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포켓몬 컴퍼니의 이 같은 전략은 기존 팬들의 애착을 강화하고 모바일의 접근성을 이용해 새 이용자를 유치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이러한 전략은 포켓몬스터가 단순히 거대한 IP일뿐만 아니라 꾸준히 콘텐츠의 무한확장 및 구체화를 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켓몬 컴퍼니는 대내외적으로 포켓몬이라는 생명체를 구체화시키고 그들과 이용자의 거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IP를 개발해왔다. 대표적인 사례인 <포켓몬 GO>는 그저 일부분이다. 현재 포켓몬 게임은 가장 기본이 되는 콘솔 게임이외에도 모바일 게임, 오프라인 카드게임, 아케이드 게임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다. 어딜 가나 보이는 다양한 상품과의 콜라보 ‘굿즈’까지 포함할시 포켓몬은 체감상 비둘기보다도 자주 목격된다. 포켓몬이라는 허구의 생명체는 여러 매개를 통해 지금도 끈질기게 현실을 침범하고 있는 셈이다.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인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의 DLC에서는 이용자가 포켓몬을 씻기고, 먹이는 걸 넘어 포켓몬의 몸으로 행동하고 다른 이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포켓몬 슬립>이 게임이냐? 앞선 일련의 전략들은 현실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AR 게임 <포켓몬 GO>의 엄청난 흥행과 현실의 생활 습관을 관리하는 <포켓몬 슬립>의 약진이라는 특수한 결과를 탄생시켰다. 왜 ‘특수한’ 결과일까? 평소 우리가 보아온 다른 사례들과 비교하면 쉽게 답을 알 수 있다. 이 대대적인 IP 경쟁력 강화 작업은 포켓몬 컴퍼니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포켓몬 슬립>은 정말 ‘게임’인가? <듀오링고Duolingo>는 ‘게임하듯 재미있게’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습 앱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게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녹색 부엉이가 호들갑을 떨어도 <듀오링고>를 재미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포켓몬 슬립>은 <듀오링고>처럼 수면습관 개선이라는 명백히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지만 게임으로 여겨진다. 물론 앞서 말했듯 포켓몬의 존재 덕분이다. ‘포켓몬’에 대한 애정이 사람들을 웬 수면측정 앱으로 이끌었다.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란 게임이 아닌 분야에 게임적 요소를 적용하여 흥미를 유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이 연로한 단어를 모셔온 이유는 이 단어가 근래에는 더 이상 예전만큼 주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이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금, 게임적 메커니즘 또한 인간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매일 금융거래 앱에 들어가 출석체크를 하고 포인트를 받으며, 중고거래 앱에서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며 자신의 레벨을 올린다. 이것은 달리 말해 이런 세상에서 게임이 ‘게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게임적 요소로 치장한 가지각색의 서비스보다 그들이 조금 더 게임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다수의 게임에게 이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게임은 게임적 요소를 통해 이용자를 유혹해야만 하는 실용적인 목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명감이나 따내야할 사업 예산이 없는 이상 게임에 실용적인 목적을 넣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게임의 본질, 즉 재미에만 충실하면 당연히 게임은 금융거래 앱이나 중고거래 앱보다 재밌고 게임 같다. 그렇지 않은 게임도 물론 일부 있다. 그에 대해선 유감이다. 이런 현실에 반해 포켓몬 컴퍼니는 실용적인 목적을 역으로 자신들의 IP 강화에 이용하였다. 게임 이용자는 대개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이번에는 훨씬 최신이지만 마찬가지로 근래 관심이 부쩍 시들어버린 단어를 가져와보겠다. 바로 한때 전 세계인을 3차원 가상공간으로 불러 모았던 메타버스(Metaverse)다. 코로나19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진 메타버스 열풍은 빠르게 퍼진 만큼 빠르게 식었다. 대면 활동이 제한되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현실의 사회·경제활동이 가능하단 점은 한때 메타버스를 주목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게임과의 차별점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현재 남아있는 <로블록스Roblox>나 <제페토ZEPETO> 등의 메타버스 공간을 게임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 세계는 현실과 닮아있을지언정 현실 공간과 별개의 규범으로 운영되며, 이용자들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들이 즐거운 이유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타버스로 통칭되는 게임의 현재 모습은 현실의 사회·경제활동을 수행하는 것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메타버스의 대다수 이용자가 어린 연령대라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블록스>의 로우 폴리곤 세상은 빈말로도 현실과 닮았다고 할 수 없다. 이용자들은 현실과 다른 다양한 세계를 넘나들며 체험하고 교류하는 것을 주요 즐거움으로 삼는다. <제페토>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에 <제페토>는 어쨌든 얼굴인식과 AR 기술을 활용한 메타버스로 소개되지만, <제페토>의 아바타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제페토>를 깊게 즐길수록 아바타가 점점 현실의 모습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달라진 아바타로 다양한 테마의 배경을 즐기는 것이 <제페토>의 핵심이다. 이 사실은 대부분의 AR 게임이 왜 흥행에 실패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즐거움을 원하는 게임 이용자는 대개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반면 포켓몬이 선사하는 이 모든 간접 체험에도 포켓몬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생명체다. 이용자들은 포켓몬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현실에서 보고 싶어 한다. 가상공간에서 굳이 현실의 일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현실의 일에 가상의 상상력이 끼어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AR 게임이 <포켓몬 GO>라는 사실은 AR 기술의 한계에도 포켓몬이 그들의 방대한 배경을 통해 이용자들을 감성적으로 매혹하고, 이를 믿어주고 싶은 이용자들이 넘어가준 것에 가깝다. ‘포켓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게임이 현실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현실에 첨가할 매력적인 가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다른 도구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보통은 기술력으로 돌파구를 찾고, 그래서 돈이 많이 든다. 캐릭터는 좋은데 게임성은 별로? <포켓몬 슬립>은 강력하게 형성된 IP에 힘입어 성공한 ‘게임’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그 자체로 이용자들이 ‘포켓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모바일 게임의 규모를 무시할 수 없는 현재의 게임 지형에서 포켓몬 컴퍼니의 이러한 노력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포켓몬 슬립>의 사례는 매력적인 캐릭터 IP의 영향력이 단순히 뽑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 수집 모바일 게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캐릭터 IP는 게임의 한 구성 요소를 넘어 독자적으로 재미와 아우라를 창출할 수 있는 요소로 등극하였다. 독자성을 가진 IP는 결코 베껴지지 않는단 점에서 그것을 보유한 회사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남는다. 점진적으로 애착 관계를 형성한 이용자에게 캐릭터의 존재는 이미 현실이고, 이는 대체 불가능하다. 다만 캐릭터 IP가 게임 안에서 독자적으로 재미를 창출하는 지위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임과 동시에 아이러니한 논란을 동반한다. IP는 게임의 중대한 구성 요소로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재미를 담보하지만, 게임 이용자들이 ‘게임성’이라는 각자 다른 정의를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할 때 ‘캐릭터’의 존재는 흔히 논외이기 때문이다. ‘게임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대개 재미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캐릭터를 보며 느끼는 재미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이용자들 사이에서 격한 ‘게임성’ 논란을 일으켰다. 같은 시기 같은 장르의 다른 게임에 비해 질 낮은 그래픽과 각종 버그 등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지적 또한 매 게임 시리즈마다 있어왔다.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출시 초기에는 게임이 불가능할 정도의 다양한 버그가 문제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용자들이 게임을 할 때 이 모든 요소는 종합적으로 고려되므로, 이런 식의 분리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게도 게임의 모든 요소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미비한 기술력이나 불합리한 시스템은 게임 진행 및 몰입을 방해해 시리즈 자체의 호감을 하락시키며, 그것은 IP도 마찬가지다. ‘게임성’이라는 합의되지 않은 정의를 합의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미 이용자들의 게임 선택 기준에는 IP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포켓몬은 왜 우리의 수면을 책임지려 하나? 왜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의 수면 습관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왜 이 수면 측정 앱은 흥행에 성공했는가?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은 이용자가 키, 몸무게, 습성, 성격, 먹이와 서식지를 넘어 잠자는 모습까지 연구하게 만들며 구체화된 형상으로 머릿속에 안착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점차 거리를 좁히며 치밀하게 이용자의 현실 공간에 침투해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포켓몬에 대한 애정이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들고, 게임 플레이는 다시금 이용자의 애정을 강화시켰다. 게임에서 흔히 ‘현실’이라는 요소가 가상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구조를 통해 <포켓몬 슬립>이라는 독특한 ‘게임’은 목표를 달성했다. 이것은 현재 게임에서 IP라는 요소가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인 재미를 달성할 수 있는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동시에 이는 오랜 기간 축적된 IP가 어디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확실한 것은, 포켓몬은 앞으로도 이용자들의 일상을 서슴없이 침략하고 더욱 친근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1) 디스이즈게임, 2023.10.20., 수면 게임 ‘포켓몬 슬립’ 전 세계 누적 수면 시간 10만 년 돌파, https://www.thisisgame.com/webzine/game/nboard/225/?n=17908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대학원생) 손민정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과 문화를 공부 중입니다. 글과 함께한 만큼 게임과 늘 함께 해왔습니다. 별별 게임 다 합니다.

  • What’s fair price for video games?

    In Korean gamer communities, there's this saying about playing games from the Steam library: "Back then, we never paid to play the game. Nowadays, we never play despite paying the game." The phrase sarcastically highlights the contrast between the game market back in the 80s-90s, when no one actually paid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ith the abundance of pirated and copied games in Korea, compared to now with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when people do not play the game despite after purchase. < Back What’s fair price for video games? 17 GG Vol. 24.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34e447be-d2b1-48f0-85e6-eb63ee2f907b In Korean gamer communities, there's this saying about playing games from the Steam library: "Back then, we never paid to play the game. Nowadays, we never play despite paying the game." The phrase sarcastically highlights the contrast between the game market back in the 80s-90s, when no one actually paid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ith the abundance of pirated and copied games in Korea, compared to now with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when people do not play the game despite after purchase. The internet is flooded with countless games available to play at any time. We are living in an era where people can purchase more game easily through online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than what humans could possibly play in a lifetime. The normalization of digital distribution, like Steam, has certainly contributed to lowering the entry price of a video game. But coming up with a fair amount of price tag in reality is a bit more complex than that, and it is difficult to say whether the game prices have truly become affordable than before. The regular release price of so-called “AAA” game titles has been steadily on the rise, not to mention all those excessive special editions (e.g., deluxe packages, limited editions) that cost well over ₩100k (approximately $80). As such, in some degree games are affordable form of entertainment, but at the same time, they deemed as expensive. To fully comprehend this contradictory situation, we must start asking ourselves: what is actually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e do know that a considerable amount of manpower and resources go into video game production. So, being able to come up with a mutual range of fair prices would contribute to the industry in terms of securing sufficient profits for the creator and, thus, the necessary funds for the development of a better game. It would also contribute to its users that fair price can contribute to a continuation of a good product that offer enjoyable and enriching virtual experiences. Challenges in Determining Regular Prices of Video GamesHistorical records suggests that the pricing of video games was not never really calculated based on systematic business forecasts but often by arbitrary guesswork. The normative rules of game prices have frequently changed as well. For example, early arcades operated on fixed-price coin-op business model, where the playable time per coin heavily depended on how the player is good at that particular game. Ironically speaking, the more skilled players play longer while spending less, resulting in fewer profits for arcade operators. (This led to instances where skilled arcade-players in Korean arcades were occasionally kicked out from the premises, with a coin refund, to make way for the next player in line.) As such, the cost of complete gameplay experiences varied from person to person, largely contingent on their gaming proficiency. Of course, it not all gamers back then expected to achieve complete gameplay experiences in every arcades. The emergence of console and PC “package” games introduced the concept of fixed prices in the game industry, which meant people could pay the same price regardless of the amount of gameplay hours of each user. Each cartridge, disk, or CD was sold at a fixed price, gradually forming an average price range for games. But with the rise of online digital distribution channels and their mass-scale discount systems, real-time price controls, and game subscription schemes, the range of regular prices for package-type games has begun fluctuating again. Determining the fair price of a game has become even more complicated with the rise of the micro-transactions in games, which has become increasingly prevalent in the online/mobile game era. Now the cost of a game is not only about the gaming proficiency but also the total amount spent in-game. The gameplay experience of a heavy user who spends $1,000 on micro-transactions in a free-to-play game like Uma Musume: Pretty Derby (Cygames, 2021) would vastly differ from that of someone who didn't spend a dime in that game. In such a vastly different player-base, coming up with a mutual ‘fair’ price is certainly not an easy task. What I would like to note here is that the topic of regular price of a game and the appropriate cost (i.e., what is deemed as appropriate amount of money that one can spend in games) are a different thing. Because, to put it simple, the amount of coins that a player bring to arcade shop is not just about how much each session of a gameplay in that particular arcade cost. Rather, it’s about how many sessions of gameplay that the player is going to (or willing to) pay, multiplied by the cost of each gameplay session. As such, answering the question of 'what is a fair price for a game' is not solely about the determining the sales price tag of a game product, but also about finding a mutual balance between producers and consumers – in a way to maintain a sustainable cycle of production, distribution, and consumption. While individual purchasing power is certainly an important indicator to look at, but the primary concern lies here is about how goods (in this case games,) can be fairly exchanged between producers and users. Then another thing that needs to be addressed is the issue of today’s digital game distribution method, specifically, its pluralistic nature of game as both a product and a service. In the arcade era, games were primarily operated as a rental business. Then, gradually, they transitioned into owning the game (or game machines) as goods in the home console and PC game era. However, with the normalization of online/mobile games, there has been a shift back to rental services – games that are channeled through server-based, internet-connected platforms. Therefore, we are now living in an era where games cannot be explained by a single value; rather, they are both products and services that intersect and coexist. So there cannot be a simple answer regarding the fair price of games. And this is not even considering all those numerous discounts deals and subscription services. So it is evidently clear that there is no magic number about ‘what is the fair price’ in a game – we cannot do simple math by ticking checkboxes. One ideal approach is perhaps to first examine the amount of money spent on game production and then propose a range of unit prices that could potentially recoup those production costs for its creators within a reasonable timeframe. Then whether that price range is acceptable are ultimately determined consumers, by finding just the right balance between the market’s natural supply and demand. Clearly, it’s not an easy task. But a tasks that must be done. Why should we talk about the fair price of games? The Korean Consumer Price Index (CPI) is calculated based on the cost of 480 essential goods and services, served as a common indicator to determine South Korea’s regular living cost and inflation rate. Among these, 47 fall under the category of “entertainment and cultural activities”, which include activities such as purchasing musical instruments, computers, film tickets, and books, and the costs of travelling and even repairing digital devices. However, game-related expenditures are not included in Korean CPI. Despite numerous reports about the significant increase in South Koreans' usage of games, and despite all those provocative media coverage of somebody ‘spending tens of thousands of dollars on video games in micro-transaction instead of doing something productive’. Some easily solution is to add already existing collectable data such as PC-bang hourly fees and average of online entertainment purchases. Even if so, there are clear limitations; as they do not fully capture the overall game-related spending patterns of general South Korean players. This call for thorough actions in order for us to truly able to say that games have become one of the mainstream media – regarded as one popular media and enjoyed as any other daily leisure activity. This would include polishing our societal system and facilitating infrastructures to finally acknowledge gaming as an act of leisure and cultural fulfillment in contemporary society, and economic analysis on game-related consumptions. For instance, Korea do have basic reports on how much money people spend on games per month and what the highest and lowest prices are – such as the Game User Census Report conducted annually by the Korean Creative Contents Agency. However, there are still rooms for improvement as those numbers are isolated from the overall economic index, such as other consumable indexes in Korean CPI. While the cost of watching films, television shows, and portable multimedia devices is accepted as a ‘valid’ indicator of the livelihood of South Korean households, the cost of playing games is still missing. Now is the time when we should finally acknowledge the significance of the cost of software that is called video games. And not just the price tag of the game itself but also the significance of games in the overall socioeconomic context. This then leads to my question, “What is the fair price of games?” In this complex, ever-connected era of gameplay, the question shouldn’t be limited to “how much should the game product cost” but rather should target the fundamental question of “what games mean” – the value of game-related consumptions intersect with other means of our entertainment, social, and leisure activities. Instead of fixated by the price tag of a game itself, we should start asking ourselves how the game-related expenditures are compared to other leisure and cultural activities. Why do people choose to spend money on games rather than other means of media? What’s unique about games? It is now time to surface these questions that are currently encapsulated within gamers' communities and web forums, further into mainstream societal discourse. Lastly, perhaps we now need to start asking the very fundamental question of “What is the (means of) fair price of games?” Because, controversial topic such as the toxicity of impulsive or excessive game micro-transactions, or the irony of free-to-play (that, there’s no such thing as free to play anything), eventually leads to the fundamental question; what could account for the price of gameplay? What are the fair means of purchasable in gameplay? What can be quantified and what cannot? And how to measure them? We must realize that we no longer live in the era of a simple supply and demand market that can determine the simple one-for-all price of games. Instead, now is the time to embrace this ever-complicated question even to video games as medium itself.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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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혼자-서 오롯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은 : 싱글 플레이에 던지는 물음

    오래전 어느 PC게임 잡지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칼럼에서 글쓴이는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을 끝내는 것이 아쉬워 엔딩을 앞두고 진행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칼럼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머뭇거림’의 정취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 Back 혼자-서 오롯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은 : 싱글 플레이에 던지는 물음 08 GG Vol. 22. 10. 10. 오래전 어느 PC게임 잡지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칼럼에서 글쓴이는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을 끝내는 것이 아쉬워 엔딩을 앞두고 진행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칼럼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머뭇거림’의 정취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경험해야 할 다른 게임이 이미 많이 쌓여있고 또 앞으로 더 그럴 것을 생각하면 엔딩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그 발걸음을 붙들고 서성이게 하는 힘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은 찾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엔딩을 앞두고 일부러 멈춰 서성거린 적은 없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경험한 특정한 순간들이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코 ico〉에서 게임을 저장하기 위해 ‘요르다’와 함께 처음 소파에 앉았을 때나, 〈Gibbon: Beyond the Trees〉에서 긴팔원숭이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섰을 때가 그랬다. 그 순간들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경험한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리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해당 게임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인 동시에 게임에서 겪은 바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칼럼을 쓴 이의 지인이 마침내 머뭇거림을 지나 엔딩으로 향했건 끝내 멈추었건 그에게도 그 게임의 어떤 특정한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 머뭇거림의 순간을 게임 크리에이터가 의도했을까 하는 새로운 호기심도 생겼다. 게임을 끝내는 걸 아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게이머가 느끼는 만족감이 크다는 뜻이겠지만, 거기서 느낄 보람과 별개로 그 머뭇거림이 크리에이터가 의도한 결과인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 호기심은 굳이 선명한 답을 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호기심을 품는 순간, 게임을 만든 이가 어떤 의도를 품었을지 궁금해하면서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혼자’ 던져보는 경험은 중요하다. 게임 플레이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인 ‘싱글 플레이’는 한 사람의 게이머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련의 과정을 혼자 진행하는 것을 의미 한다. 싱글 플레이의 의미는 게임을 만들고 즐기는 방식이 확장되는 변화와 함께 달라져 왔다. 흥미로운 것은 그 변화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싱글 플레이가 게임을 하는 본래의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출발하면 간단하다. 메인 메뉴에서 게임을 새로 시작할지 이어서 할지 선택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 방식의 전부였던 시기가 있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코옵 플레이’(Cooperative Play)를 생각하면 싱글 플레이의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램페이지Rampage〉나 〈황금 도끼Golden Axe〉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플레이하거나, 〈스코치드 어스Scorched Earth〉처럼 차례를 기다리며 순서대로 플레이하는 등 다른 유형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련의 과정을, 같은 장소에서 진행한다는 점에서 싱글 플레이에 포함된다. 싱글 플레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는 네트워크에 있다. 싱글 플레이와 대비되는 용어인 ‘멀티 플레이’가 대표적이다. 같은 장소나 가까운 범위 안에서 유선 통신망으로 기기들을 연결해 여러 명이 함께 플레이하는 ‘랜 플레이’(Local Area Network Play)를 주로 의미하는 ‘멀티 플레이’는 인터넷의 활용이 높아지면서 이제 ‘여럿이 하는 게임’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멀티’가 복수나 다중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임을 생각하면 딱히 축소되었다고 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온라인 게임’이 복수와 다중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연결’을 더 풍부하게 갖춤으로써 ‘멀티 플레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온라인 게임’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은 이제 ‘사회 기반 시설’로 자리 잡았다. 사회와 일상의 많은 영역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03년 1월 인터넷 대란이나 2018년 11월 통신망 장애 등으로 인해 겪은 불편을 통해 우리 생활의 많은 방식이 온라인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체감한 바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 서버에 접속한 여러 사람이 함께 플레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 게임 외에도 인터넷은 싱글 플레이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한다. 텔테일 게임즈의 〈더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는 에피소드를 마치면 주요 선택지에서 다른 게이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준다. 선택의 순간에 다른 게이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잠깐 떠올리거나, 다른 게이머들의 선택 결과와 자신의 선택을 비교하면서 게임의 여운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장치는 게이머가 느끼는 즐거움을 풍부하게 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쌓은 업적을 중심으로 순위를 나타내는 ‘리더 보드’ 역시 다른 게이머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것이 게임 플레이에 얼마나 동기를 부여하느냐는 게이머마다 다르겠지만,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다른 게이머가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게이머가 다른 게이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환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엑스박스 게임패스’로 대표되는 게임 구독 서비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게이머들의 게임 이용 행태를 분석하는 에이전시인 GameDiscoverCo는 2022년에 엑스박스 게임패스 구독자들이 게임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관한 자료를 발표했다. 1) 이 중 이목을 끈 결과는 게임의 최초 출시일에 공개되는 ‘데이 원’(Day One) 타이틀 이용에 관한 기록이었다. 구독자들의 게임 플레이 기록이 하나의 새로운 차트로 다루어진 셈인데, 개별 게이머들의 게임 플레이 정보가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자료였다. 즉, 싱글 플레이를 혼자 플레이하더라도 그 경험 자체가 서버로 전달되면서 게이머는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2) 이러한 예들이 싱글 플레이의 의미 중 게임을 플레이하는 인원에 대한 것이라면, 또 다른 부분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DLC(Downloadable Contents)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DLC는 시작부터 결말까지 일련의 과정을 일단락 지은 싱글 플레이 게임에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콘텐츠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기존 게임의 줄거리에서 갈라지는 ‘외전’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결말이 될 수도 있다. 매체를 통해 게임이 유통되던 시기에는 이러한 콘텐츠가 ‘확장팩’(Expansion Pack)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다. 그런데 온라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는 콘텐츠의 범위가 스킨, 캐릭터, 아이템부터 새로운 싱글 미션이나 스테이지까지 다양해지면서 ‘DLC’가 ‘확장팩’을 대신하게 되었다. ‘업데이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DLC는 단순히 콘텐츠를 추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의 오류를 수정하는 패치의 기능과 시스템을 변경하는 등의 변화도 포함한다. 이를 통해 일단락 지어진 싱글 플레이 경험이 다시 이어지거나 새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만들어졌다. 결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싱글 플레이만의 특징으로 꼽기가 애매해진 셈이다. 이처럼 온라인을 중심으로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하는 방식이 확장되면서 싱글 플레이의 본래 의미는 달라졌다. 혼자이되 완전한 혼자가 아니고, 결말이 있되 그것이 완전한 끝은 아닌 것이다. 온라인이 다양한 방식과 정도로 접목되면서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싱글 플레이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새로 하든 이어 하든, 혼자 하든 여럿이 하든 싱글 플레이 게임과 온라인 게임 모두 “룰에 따라 일정한 시공의 한계 속까지 완료하는 자유로운 임의의 행동 또는 활동으로 인간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자 문화현상의 한 가지 표현 형태” 3) 라는 점에서 싱글 플레이의 변화는 축소가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었다. 온라인이 다양한 방식과 정도로 사회와 삶 전반에 접목된 것처럼 싱글 플레이는 지금의 게임에 다양한 방식과 정도로 접목된 것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 시대’라 부를 정도로 많은 게이머가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4) 현재, 본래 의미의 싱글 플레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이루어진 싱글 플레이의 변화가 축소가 아닌 확산이라면, ‘머뭇거림’과 ‘의도에 대해 던지는 질문’ 역시 유효할 것이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건 고독하고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크리에이터가 만든 세계를 탐색하면서 의도와 까닭을 짐작하는 것, 그리고 실패를 거듭할지라도 자기만의 페이스에 온전히 집중하며 플레이 해나가는 것은 게이머와 게임 크리에이터의 비동시적인 대화인 동시에 게이머가 자기와 마주하는 동시적인 과정이다. 엔딩을 앞두고 플레이를 멈추도록 붙든 것은 어쩌면 게임 크리에이터의 의도가 아닌 게이머 그 자신의 목소리였지도 모른다. 한편, 싱글 플레이를 통해 게이머가 던지는 ‘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은 영영 어딘가로 흩어지고 마는 걸까. 같은 게임을 두고 뚜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게이머마다 다를 것이듯, 그 질문 역시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게임 크리에이터의 답을 구하지 않더라도, 게이머들끼리 자신의 질문을 서로에게 건네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 질문과 답들이 게임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게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가 나누어질 필요가 있고 더 많은 비평의 장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 https://newsletter.gamediscover.co/p/xbox-game-pass-titles-in-2022-whats 2) 이와 관련해서 2013년 Xbox One 출시 당시 마이크로소프트(MS)가 제시했다가 철회한 중고 정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MS는 중고 거래에 제약을 둘 목적으로 Xbox One을 최소 24시간에 한 번씩 온라인에 연결되도록 강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거센 비난에 직면한 후 중고 정책과 온라인 연결 강제에 대한 계획을 모두 철회했다. 이 경험이 MS가 게임패스 서비스를 추진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온라인 연결을 강제해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게임 이용 정보를 게임패스를 통해 큰 반감 없이 확인할 수 있게 된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롭다. 3) 도쿄 지방재판소 1979년 제10867호 손해배상청구사건 판결주문 중 발췌, 〈팩맨의 게임학〉(이와타니 토루 저, 김훈 역, 비즈앤비즈, 2012년) p.53. 4) 한국의 게이머들은 온라인 게임을 확실히 더 많이 플레이하고 있다. 이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대한민국 게임백서〉의 ‘국내 게임 플랫폼의 시장 규모 및 점유율’과 〈2021 게임이용자 패널연구(2차년도)〉의 ‘게임이용자 1순위 이용게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사회학자) 강지웅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게이머즈〉를 비롯한 여러 게임매체에서 필자로 활동했다. 저서로 〈게임과 문화연구〉(공저), 〈한국 게임의 역사〉(공저)가 있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게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게임이 삶의 수많은 순간을 어루만지는, 우리와 동행하는 문화임을 믿는다.

  • 축소 지향 헌터들 연대기:<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어떻게 손 안에 축소되었다가 혼종적으로 변모하려고 하는가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하게 된 캡콤 제작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2000년대 초부터 대두되고 있던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일본 게임계의 대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이 처음 등장했던 2004년 일본 게임업계는 2002년 성공적으로 MMORPG를 콘솔 게임에 이식한 <파이널 판타지 XI>를 제외하면 마땅한 청사진이 없었다. < Back 축소 지향 헌터들 연대기:<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어떻게 손 안에 축소되었다가 혼종적으로 변모하려고 하는가 25 GG Vol. 25. 8. 10. 1. 단기지향적인 헌터 파티: 로컬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으로서 정체성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하게 된 캡콤 제작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2000년대 초부터 대두되고 있던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일본 게임계의 대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이 처음 등장했던 2004년 일본 게임업계는 2002년 성공적으로 MMORPG를 콘솔 게임에 이식한 <파이널 판타지 XI>를 제외하면 마땅한 청사진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로는 당시 대세였던 콘솔인 플레이스테이션2 (이하 PS2)의 한계가 있었다. 이론적으로 PS2는 인터넷 대응이 되었지만, 인터넷 보급 문제와 더불어 <파이널 판타지 XI>나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제외한 몇몇 게임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는 기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인기를 끈 <파이널 판타지 XI>조차도 외장 하드를 달아야 플레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벽이 좀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본격적으로 인터넷 대응이 된 건 사실상 PS3 시절부터다. 콘솔 위주로 흘러갔던 일본 게임업계 입장에서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 만들기에 상당한 제약이 걸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초 일본 게임계에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고 상상하게 하는 부류의 유사 온라인 게임이 더러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파이널 판타지 XI>와 엇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프랜차이즈 <닷핵> 시리즈가 있다. 이 프랜차이즈는 실제 알맹이는 전형적인 일본 싱글 플레이 RPG 게임이었지만, 일본 게임 유저들에게 온라인 (RPG) 게임이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기획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시 일본 게임업계에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개념이 일종의 괴리감이 있었다는 현상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99년부터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을 준비해 왔던 캡콤으로서도 MMORPG나 멀티플레이 게임을 내놓는데 조심스러웠다. 캡콤 멀티플레이 게임 프로젝트의 초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 점에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아예 헌팅 액션 게임이라 불리는 장르로) 토착화되고 발전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게임이다. 기본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삼인칭 액션 게임 기반으로 하되, 규모를 늘린 중후기 일부 토벌 퀘스트를 제외하면 4인 위주의 소규모 파티 경향이 강했던 게임이었다. 정확히는 MMORPG의 보스몹 레이드 개념을 싱글 플레이 기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의 보스전과 합치고 재해석한 후, 플레이어 혼자 또는 소수의 헌터 동료와 우직하게 보스 몬스터를 파고들고 대응해 가며 진행하는 게임이었다. 이렇기에 초창기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 점에서 시작부터 제법 인기를 얻었지만, 코어한 경향이 강했다. 게임 디자인 자체의 불친절함과 더불어 상술한 온라인 플레이의 한계로 실상 솔로 플레이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초기 <몬스터 헌터>는 온라인 플레이를 하기 위해 KDDI 멀티 매칭 BB라는 유료 온라인 서비스에 가입해야 했다. 시리즈가 지향했던 소규모 멀티플레이 환경은 어울리지 않는 거치형 콘솔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다 명확한 레벨링 시스템 없이 (간단히 말해 헌터 랭킹이 캐릭터 능력치랑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장비와 전투 숙련도로 플레이어의 실력을 가늠하는 게임 디자인과 더불어 ‘물욕 센서’로 지칭되곤 했던, 2(DOS)부터 도입된 지난한 채집 요소들도 이런 문턱에 한몫했다. 그렇기에 2부터 몬스터 헌터는 반복되는 수렵과 채집으로 장비를 만들고 개별 몬스터 파훼법을 감각으로 익혀야 다음 진행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게임이 되었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극 초기작들은 입문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는 건 유추할 수 있다. 1편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캡콤은 1편을 PSP로 이식하기로 결정한다.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이하 PSP)이 게임보이 어드밴스드나 원더스완으로 대표되던 휴대용 게임기에 완전히 새로운 판도를 열였기 때문이다. PSP는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었던 닌텐도 DS보다도 전체적인 성능도 훨씬 나았던데다 네트워크 기술이나 지원이 좋았던 편이었기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로서는 충분히 승산있는 시장이었다. 다만 <몬스터 헌터 포터블> 당시에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온전한 온라인 게임이라 보긴 힘들었다. <포터블> 시절에도 무선랜 환경은 아직 초창기 단계였기에 지금과 같은 인터넷 환경을 지원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저런 고려 끝에 포터블 시리즈는 애드 혹이라는 단말기 간 직접 통신을 이용한 소규모 로컬 멀티플레이 시스템만을 공식 지원했고, 온라인 플레이를 하려면 우회적인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 제작진이 포터블 시리즈를 발매하면서 처음 노렸던 것은 다소 축소된 PS2 게임을 손에 들고 사람들과 만나 기기들끼리 로컬 멀티플레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실상 TRPG나 보드게임을 즐기는 방식하고 크게 떨어져 있지 않은 셈이다. 이렇듯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당시 일본 콘솔 온라인 환경의 한계 속에서 처음 등장한 게임이기에, MMORPG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며 온라인 게임을 추구했음에도, 내실은 로컬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에 가깝게 정립되었다. 심지어 <월드> 이전까지는 싱글 플레이 퀘스트와 멀티플레이 퀘스트가 분리되어 있을 정도로 제작 단계에서부터 싱글 플레이 게임 관점에서 멀티플레이와 온라인을 접근했다는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크게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 시리즈가 멀티플레이 유저 간 상호작용에 상당히 제약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는 MMORPG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레이어 간 물물 교환이라는 개념이 없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모든 재화나 장비는 플레이어 본인이 직접 채집하거나, 제작해야 하며 플레이어 간에 교환하는 방법은 없다. 전반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멀티플레이 유저들을 NPC 파티원을 대신하는 존재에 가깝게 정립하고 있으며 (물론 여전히 한계가 있는 NPC AI 동료에 비하면 강력하고 유용한 존재이긴 하다), 복잡한 유저 간 관계 구축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게임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폐쇄적인 관계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월드> 이전까지는 다른 유저의 퀘스트 난입할 수 없었다. 다른 유저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필드 이외에는 퀘스트를 수주받고 정비하는 마을 내 한정된 공간 정도였고, 게임 내 길드 설립이나, 대항전 같은 시스템은 당연히 없었다. 모든 파티는 퀘스트를 위해 일시적으로 성립하고 종료 후 해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나마 <월드>부터 이런 개념들이 조금씩 확장되는 추세다. 전반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플레이하다가 다른 유저를 만난다는 개념 자체가 오랫동안 없었고, 혼자서 즐기거나 (오프라인이든 인터넷 커뮤니티든) 사전에 알게 된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로 모여서 레이드를 뛴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 내에서 처음 만난 헌터랑 교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길드 카드를 서로 확인하고 등록한다는, 지극히 일본 명함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 점에서 어떤 끊임없이 돌아가는 유저 생태계를 구현한다기보다는, 혼자서 즐기는 싱글 플레이 게임에 멀티플레이 요소를 도입해 일시적으로 모였다 퀘스트 클리어 후 해체하고 초면인 사람은 길드 카드로 교환해 교류를 이어간다는, 단기지향적인 부족/길드적인 감각으로 확장해 온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여러모로 기존 MMORPG나 MMOFPS하고는 완전히 다른 폐쇄적인 경향이 짙었지만, <몬스터 헌터>는 포터블 시리즈를 통해 <퀘이크>로 대표되던 랜파티 게임의 진화를 상징하는 게임 중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해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정통적인 삼인칭 액션 게임을 휴대용에 맞게 ‘축소’한 후 네트워크 멀티플레이 영역을 기술적 발전과 맞춰 확장해 성공한, 꽤 독특한 방식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왔던 게임이다. 상술한 단기지향적인 부족/길드적 감각과 연계해 보면 게임 자체의 엔드 콘텐츠 지향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부담 없이 서로 연결하고 끊어질 수 있는 동료 관계를 지향해온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멀티플레이 게임들을 기점으로 랜파티 게임은 단순히 한 장소에 고정된 컴퓨터/콘솔과 인터넷이 아닌, 휴대용 게임기 간의 무선 통신, (나아가 무선랜)을 통해 언제든지 모일 수 있게 변했다. 어찌 보면 2000년대 중후반 이후 흔해진 집 바깥에서 게임기나 스마트폰을 맞대고 대전하거나 파티 플레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중적으로 끌어낸 게임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2. 축소 지향에서, 확장 지향으로: <4>와 <월드>의 급변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2편인 DOS 시리즈가 종료될 무렵,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눠진다. 우선 스기우라 카즈노리를 주축으로 DOS 디자인을 들고 PC 쪽으로 분가해 본격적인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 되려고 도전한 <프론티어> 시리즈가 있다. <프론티어>도 설왕설래가 있긴 해도 장기 서비스했을 정도로 성공한 편이지만, 게임계는 본가 쪽에 훨씬 더 주목했다. 왜냐하면 본가 쪽은 상술했던 축소 지향을 심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트라이>까지는 선 거치형 콘솔, 후 휴대용 콘솔이라는 원칙을 지켰지만 <몬스터 헌터 4>부터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아예 휴대용 콘솔인 3DS로 이적해 자신을 훨씬 더 축소하기에 이른다. 콘솔 세대가 교체될 무렵, 거치형 콘솔을 버린다는 과감한 선택을 한 셈인데 오히려 이 시기부터 휴대용으로는 최초로 온라인 환경을 공식적으로 대응하는 등 멀티플레이 환경 개선에 주력하는 등 손안에서 즐길 수 있는 소규모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다만 좋은 변화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몬스터 헌터 4>부터 게임 그래픽이나 기타 요소는 사실상 정체되게 된다. 물론 그대로 사용하지만은 않고, 새 게임이 나올 때마다 새 몬스터와 배경이 추가되고 큼직한 변화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이 시절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PS2~Wii 시절 게임 디자인이나 에셋을 대다수 재활용하면서 휴대용 게임기의 성능에 맞춰가는 방식으로 수명을 연장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인기의 큰 원동력인 휴대용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이라는 개념은 잘 지켜냈으니, 대다수의 유저들은 별말 없이 따라왔고 신규 유입도 수월히 이뤄졌다. 하지만 반대로 이걸 ‘우려먹기’나 한계에 갇혔다고 여기는 불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몬스터 헌터 4>가 이적한 닌텐도 콘솔들은 성능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류였기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 의견도 강해져 갔다. 3DS 후기/말기에 발매된 <몬스터 헌터 크로스> 시리즈는 그 점에서 ‘축소 지향의 헌터’ 시절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시기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크로스>가 발매될 당시 혜성같이 등장한 스마트폰 시장이 점점 몸집을 키워가면서 휴대용 게임기라는 개념 자체가 다시 격변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휴대용 게임기를 샀던 구매층은 대다수 스마트폰 쪽으로 이동했고, 이제 휴대용 게임기는 스마트폰과 차별화를 해야 했다. 닌텐도도 이를 염두에 둬 스마트폰 도입 초창기 발매된 3DS에서 3D 기능을 내세워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콘솔 자체의 성공과 반대로 막상 3D 게임은 정착에 실패했다. 당시 Wii U도 실패한 상태라 닌텐도는 차기작으로는 휴대용/거치용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위치라는 휴대용과 거치용이 결합한 혼종 콘솔을 내세우게 된다. 즉 중간급 성능의 거치형 콘솔과 휴대용 게임기 콘셉트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성능과 단가 간의 줄타기를 시도했다. 세대 교체된 현시점에서 보자면 닌텐도 스위치는 8세대 콘솔 초창기 사양(PS4/Xbox One)으로, FHD 수준을 온전히 구현할 여력을 실현한 첫 닌텐도 콘솔이자 거치형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 간의 경계를 무너트린 최초의 콘솔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고사양을 지향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 간의 괴리는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저 둘이나 스마트폰이 갈 수 없었던 영역을 갔다는 점에서 스위치는 게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콘솔이다. 스팀 덱을 비롯한 혼종적인 핸드헬드 게임용 PC들의 물꼬를 터준 게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캡콤도 그 혼종적인 가능성을 주목했다. 2017년 닌텐도 스위치 발매가 이뤄졌고, 동시에 <더블 크로스> 스위치판 발매와 거치형 콘솔 복귀작 <몬스터 헌터 월드>가 발표되었다. 이는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지배해왔던 축소 지향적인 헤게모니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더블 크로스> 스위치판은 단순히 확장판 이상으로, 스위치의 휴대용/거치용 콘솔 간 혼종적 성향을 따라가겠다는 천명이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 제작진이 다시 거치형 콘솔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지금까지 휴대용 게임기에 맞춰왔던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라 봐야 한다. 그렇게 <월드>는 새로운 <몬스터 헌터> 청사진을 제시하는 게임이 되었다. 우선 <월드>는 기존의 멀티플레이 환경을 그동안 발전한 인터넷 환경에 맞게 확장했다. <월드>는 상시 온라인 연결을 요구할 정도로 온라인 비중이 높아진 첫 <몬스터 헌터> 시리즈였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토쿠다 유야가 제작한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온라인과 멀티플레이 간의 결합을 고려한 듯한 디자인이 대거 도입되었다. 싱글 플레이와 멀티플레이 퀘스트가 하나로 합쳐졌고, 구조신호라는 개념을 통해 다른 플레이어의 개입을 허용하게 조처했다.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진행하다가 도무지 어렵겠다 싶으면, 베이스캠프에서 구조신호를 쏴 올릴 수 있다. 이 구조신호는 집회소에 있는 퀘스트 게시판에서 등록되어 다른 헌터들이 확인하고 중도 참여할 수 있다. 한번 퀘스트를 시작하면 타인의 접근이 차단되는, 어떤 소규모 부족 내지는 길드적인 멀티플레이를 지향해왔던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처음으로 완라인으로 연결된 타인의 개입을 허락했다는 점에서 꽤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월드>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에 더 큰 결단이 하나 일어났다. 2019년 상술했던 <프론티어> 서비스를 정리한 것이다. 의도는 명확했다. <몬스터 헌터>가 그동안 취해왔던 이원화 멀티플레이 노선을 폐기하고 하나의 게임으로 합치겠다는 의도였다. 실제로 <프론티어> 서비스 종료 당시, DOS 기반 디자인이 2010년대에 들어서서 너무 낡았기에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프론티어>의 서비스 종료는 <더블 크로스> 스위치판과 더불어, DOS 시절 디자인과 노선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앞으로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갈지 보여주는 실마리기도 했다. 바로 혼종적인 것들을 배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창출하려는 방향성이다. 3. 혼종적 세계화의 성공과 위험: <라이즈>와 <와일즈> 시대의 명암 <월드>를 마무리한 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라이즈>를 발매해 다시 스위치에서 시작했다. <라이즈>는 <월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소 사양이 떨어지는 스위치로 개발되었기에 기기 특성상 <더블 크로스> 시절의 게임 디자인과 비주얼로 회귀한 구석도 있었지만, 이 회귀엔 의미는 달라졌다. 자신을 정체시키는 방식으로 축소해 왔던 <4>랑 달리, <라이즈>는 <월드>에서 시작된 변화와 풀 스케일적인 게임의 지향성을 고려하면서도, 휴대용 게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상술했던 닌텐도 스위치의 혼종적인 특성에서 기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PSP에서 3DS로 넘어가면서, <몬스터 헌터>는 콘텐츠 축소 이상으로 구세대 게임이라는 오명을 쓸 각오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지켜갔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이런 선택은 정체를 의미했고, 거치형 콘솔과 휴대용 콘솔 간에는 명백한 계급 의식 내지는 상하관계가 당시엔 강하게 있었기에,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위치는 그 계급 의식을 상당히 없애버렸고 그 결과 <라이즈>는 <월드>보다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구세대 게임이라는 오명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라이즈>는 이후 다른 거치형 콘솔과 PC로도 이식되었다. <라이즈>는 그 점에서 좀 더 고전 <몬스터 헌터>로 회귀하면서도 휴대용과 거치형, 온라인과 오프라인, 싱글 플레이와 멀티플레이 간의 혼종을 염두에 두는 2010년대 후반 이후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방향성을 선언하는 포부였다. 이후 다시 거치형 콘솔로만 발매된 <와일즈>가 나왔기에 <라이즈>를 잇는 휴대-거치 혼종적 콘솔 지향 <몬스터 헌터> 게임이 다시 나올지는 조금 기다려야 하겠지만, 적어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양방향 노선을 짜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간단히 말해 캡콤은 <월드>, <라이즈>와 <와일즈>를 통해 축소 지향 시절 다져놓았던 소규모-단기적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유행을 쫓아가고 싶어 한다. 그 점에서 <월드>와 <라이즈>는 휴대용 콘솔의 혼종적 변화라는 사건을 두고 이뤄진 변증법적인 관계를 형성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월드>와 <와일즈> 같은 거치용 콘솔 전용 <몬스터 헌터>를 통해 공격적으로 외양을 확장하고, 이때 받은 피드백을 <라이즈> 같은 휴대용 게임기 중심 혼종 지향 <몬스터 헌터>로 적용해 내실을 꾀하는 것이다. 다만 올해 발매된 <와일즈>가 겪고 있는 위기는 캡콤이 새로이 내세우고 있는 지향성이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방향성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온라인의 비중을 늘려 지금까지 단단하게 유지해 왔던 경계를 무너트리고 공간을 확장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사실 <월드>부터 온라인 서비스로서 정체성을 강화하고 필드 세계를 풍부하게 하려는 토쿠다 유야의 노선과 이에 반발하며 싱글 플레이/소규모 멀티플레이 콘텐츠에도 신경 써 주라고 요구한 유저들 간의 대립이 암암리에 이어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몇몇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줄타기에 성공했던 <월드>랑 달리 <와일즈>는 괜찮은 싱글 플레이 콘텐츠와 정반대로 부족한 멀티플레이 엔드 콘텐츠 문제와 더불어 온라인 환경을 강제하는 방향성과 디자인상 여러 문제로 많은 반발을 샀고 대량 유저 이탈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와일즈>는 세미 오픈 월드 도입과 더불어 파티원 이외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헌터들을 볼 수 있는 첫 번째 <몬스터 헌터> 게임이라는 것이다. 설정상으로 <와일즈>의 헌터들은 개척자에 가까운지라 베이스캠프가 집회소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필드에서도 파티원 이외 헌터들을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다 기존 퀘스트 수주 시스템에다 자율 탐사 도중 필드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공격해 퀘스트를 시작하는 시스템을 추가하면서 수렵을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변했다. 이렇게 필드에서 몬스터를 공격하면 퀘스트를 발동하면 여러 추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이점으로 헌터가 세미 오픈 월드 시스템을 거쳐 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와일즈>에서 확실해진 점이 있다면 토쿠다 유야 체제 <몬스터 헌터>는 시리즈가 암암리에 지켜져 왔던 폐쇄적으로 구분된 공간과 헌터 간 관계망, 퀘스트 구조를 실제 수렵 과정 내지는 온라인 게임처럼 ‘열려있게’ 변하는 방식으로 게임의 외연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상술한 <프론티어> 서비스 종료와 연계해서 보면, <월드>와 <와일즈>는 여러모로 온라인 (세미) 오픈 월드 헌팅 액션 게임으로서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유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기종뿐만이 아니라 게임 디자인에서도 혼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세미 오픈월드적인 시도들에 대한 반응은 그리 좋지 못하며 <와일즈>에 이르면 콘텐츠 강요라는 비난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이런 반발은 지금까지 정체성과 신규 요소가 잘 조화되지 못했던 부분도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퀘스트를 하기 전 거점에서 준비한 뒤 출발하고, 퀘스트 종료 후 거점에서 재정비하는 절차가 강한 게임이다. 그렇기에 거점과 몬스터가 있는 필드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자유롭게 다니게 하는 세미 오픈 월드 구성을 취할 거면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을 택해야 했다. 즉 헌터가 거점과 필드 간의 전환을 해야 할 강한 동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와일즈>는 다소 안이한 절충주의를 택했다. 그 결과 세계의 밀도는 높아졌는데, 정작 그 높아진 밀도가 핵심 콘텐츠인 헌팅/채집에 포만감보다 피로감을 더한다는 <월드> 당시의 지적이 오히려 심화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자율 탐사 도중 수렵 퀘스트 돌입 시 추가 보상 역시 일부러 헌터가 세미 오픈 월드 형식을 따라가야 할 강력한 동기 유발이 되지는 못했다는 게 발매 후 중론이다. 결국 <와일즈>의 반쯤 열린 세계는 중간이 희박하고, 그 중간에 들어간 요소들은 헌터 입장에서는 지극히 미시적 것들이라 지금까지의 싱글 플레이 기반으로 칼같이 구분된 공간과 관계망에서 진행되는 부족적이고 단기지향적 멀티플레이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월드> 시절부터 거의 반 강제화된 온라인 환경이 정작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사실 역시 피로감을 가중하는 결과만 나왔다. 즉 <와일즈>는 시리즈 기준으로 과감하게 세계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 지점에서만 한정해서 보면 어느 정도 성취를 거뒀지만, 정작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게임 디자인과는 잘 조화되지 않고 어색하게 동거하는 모양새가 되어 자기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이외 <와일즈>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들도 있으나, 이 글 방향성에서는 다소 일탈하기에 생략한다. <와일즈>가 지금 겪는 진통은 거치형 콘솔 <몬스터 헌터>로 복귀 후 생긴 과도기 현상의 지나친 지속/개악과 더불어 유저들과 개발진의 성향 차와 알력이 맞물려 벌어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월드> 이후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싱글 플레이 액션 게임을 확장한 소규모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기존 정체성과 세미 오픈 월드-온라인 게임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간의 혼종을 꾀하려 하나, <와일즈>에서는 계산 실패로 걸려 넘어졌고 그 결과 헌터들은 이탈했다. 그렇기에 <와일즈>의 진통은 역설적으로 싱글 플레이와 멀티플레이 간의 경계가 아직도 견고하며,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월드>부터 내세우는 기종적, 게임 디자인적 혼종이 여전히 난제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보긴 힘들다. 일단 시리즈 전통으로 확장판을 내놓아 타이틀의 수명을 늘리는 전략이 있었고, 2010년대부터 서비스로서 게임 개념이 강해지면서 당장의 곤란만으로 게임 전체의 수명을 판단하기엔 힘들어졌다. 물론 <와일즈>가 이렇게 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엔 <와일즈>가 완전히 망하더라도 혼종적 휴대용 게임기라는 성과를 이어가려는 스위치 2라는 와일드카드가 있다. 지금 당장은 스위치 2로 나올 <몬스터 헌터> 신작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라이즈>에서 그들은 휴대용 게임기의 새로운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야심을 보였다. 그렇기에 다시 살짝 축소한 뒤 소규모 멀티플레이의 재미를 내세우는 고전적이지만 시류도 잘 따르는 <라이즈> 스타일의 <몬스터 헌터>로 성난 헌터들을 유혹하려는 건 시간 문제리라 본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축소 지향 및 휴대용 게임기 지향으로 획득한 정체성은 유령처럼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프랜차이즈를 맴돌고 있으며, 캡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Tags: 몬스터헌터, 프랜차이즈, 액션롤플레잉, 일본게임, 헌팅액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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