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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 Back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07 GG Vol. 22. 8. 10. 가장 빈곤한 게임 장르로서의 리듬 게임 본고에서 우리는 〈비트매니아beatmania〉, 〈이지투디제이EZ2DJ〉를 필두로 해서 〈디모Deemo〉, 〈사이터스Cytus〉까지 이르는 리듬 게임을 게임 일반의 극한이 되는 형태로서, 정확히는 가장 빈곤한 게임의 형태로서 다루고자 한다. 다만 우리는 숱한 리듬 게임들을 하나하나 비평할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리듬 게임 전반에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다른 장르라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일 이와 같은 장르 일반에 대한 비평은 리듬 게임 장르 특유의 빈곤함에 의거해서 가능해진다. 리듬 게임이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장 빈곤한 장르라면 어떤 의미에서인가? ‘악보’에 맞추어 대응하는 ‘키’를 입력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이 단순한 장르에서는 자유가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타이밍’이 이 장르의 본질을 규정하며, 그 외의 모든 요소들, 예컨대 서사라든지 경험치라든지 하는 요소들은 이 장르에 대해 부수적이거나 장식적이다. 그런 요소들은 물론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리듬 게임이 선사하는 쾌감에 불가결하진 않다. 리듬 게임이 이처럼 빈곤하리만치 단순한 장르라면 과연 거기에 새삼 비평할 만한 가치나 분석할 만한 구석이 있을까? 세계universe 자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광활한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에 하필이면 리듬 게임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퇴행적이고 고루하게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즉시 제기될 법한 의문이다. 리듬 게임에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ゼルダの伝説 ブレスオブザワイルド〉처럼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시리즈처럼 다른 세계의 안으로 들어가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처럼 내러티브narrative를 비틀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각성하도록 유도하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듬 게임이 현실에서는 드문 어떤 체험을 환상의 형태로 제공하는 것조차 아니다. 리듬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플레이’라는 용어가 리듬 게임만큼 꼭 들어맞는 장르도 또 없을 것이다. 그 용어가 ‘연주’를 뜻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런 연유로 리듬 게임은 쉽게 냉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종종 이 냉소는 리듬 게임을 하고 놀 거라면 차라리 피아노, 드럼, 기타 등을 직접 연주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물음의 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리듬 게임인 〈락스미스Rock Smith〉로 기타를 익혀서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악보는 전혀 읽지 못하고 스케일scale 같은 개념도 알지 못하는 기타리스트 세대가 등장해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타를 배운 세대를 당황케 만든 바 있다. 그러므로 저 냉소적 물음에 진리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보면 저 냉소는 리듬 게임이야말로 게임 플레이의 원초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음을 함축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현생現生을 살지 않고 게임을 하는가? 이런 의문은 현실보다 더 풍부하고 강렬한 체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을 제공하는 게임의 경우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왜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고 굳이 그 열화판처럼 보이는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일까? 현실이 게임보다 더 풍요로울 때조차도, 게임이 현실보다 더 빈곤할 때조차도 우리가 여전히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즉 게임의 빈곤함을 단순히 현실에 비한 게임의 부족함이나 미진함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빈곤함이야말로 게임을 더욱 게임답게 만드는 속성이라고 간주하여야 한다. 리듬 게임에 고유한 유한성의 쾌감 악기 연주와 리듬 게임 플레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빈곤함과 결부된 소진 가능성이다.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실제 음악의 ‘악보’는 우리에게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한다. 무음無音의 음악인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33초〉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하나의 곡을 두고도 그토록 다양한 연주와 변주가 등장하고 그토록 다양한 커버cover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음악의 경우 악보는 소진 불가능한 객체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악보’는 그렇지 않다. 리듬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름 아니라 악보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데 있으며, 거기에는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리듬 게임 장르를 두고 통용되는 유명한 경구 “빛이 나는 곳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가는 곳에서 빛이 난다”는 악보가 플레이어에 의해 완전히 학습되었음을, 따라서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뜻한다. 관건은 이런 소진을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앞서 리듬 게임은 빈곤하다고 말했다. 즉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에게는 선택의 자유나 운신의 폭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화면을 왼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세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아니면 발판을 오른발로 밟을지 왼발로 밟을지 정도를 결정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징검다리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게 리듬 게임의 제일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다. 이는 리듬 게임을 깨기 위한 왕도가 게임이라는 ‘타자’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맡기는 데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타자의 ‘리듬’에 자기의 ‘리듬’을 동기화시키는 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리듬 게임이라는 타자는 무한한 해석과는 거리가 먼, 전적으로 유한한 타자다. 즉 이론적으로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는 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퍼펙트’한 판정으로 관통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쾌락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물건들과, 즉 타자들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협상하면서 그 리듬에 나를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적 타자들의 리듬이란 무척 변덕스러운 것이고, 실제의 악보 사례가 보여주듯 심지어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변덕스러움, 자유로움, 무한함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맞추고 동기화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사둔 요거트가 상하기 전에 챙겨 먹어야 하고 방금 받은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식기를 기다려야 하며 지하철역에 가득 들어찬 인파와 발걸음을 맞춰야 하고 오늘도 이어지는 상사의 일장연설에 적절한 ‘리듬’으로 맞장구를 쳐야 한다. 요컨대 이 현실 세계의 리듬은 나의 리듬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줄곧 나보다 느리거나 빠르다. 이와 달리 리듬 게임은 이런 리듬의 괴리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타자와의 무결한 동기화가 가능하다는 일체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이런 일체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울 수 있지만, 결코 타자에 대해 폭력적인 전능감은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왜냐하면 이 동기화는 타자의 리듬을 나의 리듬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이루어지기는커녕 정반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리듬 게임에서는 오히려 내 쪽이 타자의 리듬에 굴복해야 한다. 곡曲을 소진시키고 ‘클리어’하기 위해서 나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를 완전히 소화했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쾌감, 타자와 완전히 동기화됐다는 쾌감은 오로지 게임에서만 적법하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생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무척 희귀하고 심지어는 금지되어 있기까지 하다. 예컨대 영화, 소설, 회화, 음악 등의 경우, 내가 그 작품을 완벽히 이해했고 그것과 완벽히 동기화되었다고, 그리고 그런 내가 보기에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소진시킨다면 아주 난폭하고 비윤리적인 짓일 것이다. 내가 어떤 대상의 진리와 전모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단언은 해당 대상을 두고 무한히 전개될 수 있을 풍요로운 대화의 가능성 전체를 미리 차단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바로 그런 유한한 차폐가, 즉 ‘풀 콤보 퍼펙트 플레이’가 합법적인 목표로 제시된다. 해석의 자유나 변주의 가능성 같은 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한’하고 ‘폐쇄’적인 타자의 악보에 나의 리듬을 녹여 넣음으로써 완전한 동기화를 달성해야 한다. 리듬 게임의 독특한 자유로움 물론 개방성 자체를 모사하는 것을 재미의 근거로 삼는 게임들이 있어서, 유한한 폐쇄성에 의해 가능해지는 완전한 동기화로부터 쾌감을 추출해 내는 리듬 게임과 대척을 이룬다. 아닌 게 아니라 근래의 게임 중 상당수는, 특히 장대한 서사와 드넓은 ‘오픈 월드open world’를 주요한 무기로 삼고 있는 게임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다채로운 체험들을 가능케 만드는 데서 존재 가치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에게 마치 무한히 자유로운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가상假想을 선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스탠리 패러블〉은 다름 아니라 무한한 자유라는 가상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이념적’ 풍자로서 성립한다. 내레이터narrator가 플레이어의 행동을 미리 앞질러 말함으로써 결국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내레이터의 지시대로 게임을 진행해서도 곤란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곤란하다는 이율배반을 체험하게 된다.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내레이터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며, 심지어는 버그처럼 생각되는 요소가 눈에 띄어 이용하면 그것조차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내레이터가 응수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결과적으로 자유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스탠리 패러블〉은 이렇게 순조로운 내러티브라는 관념을 고장내고 게임 내부의 세계(“월드”)에 ‘자유롭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리듬 게임은 자유를 모사하기 위해 제작된 게임들에 대한 ‘물리적’ 논박으로서 〈스탠리 패러블〉을 보충한다.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리뷰가 게임 내부의 세계 안에서 어디까지 용인되고 어디부터 금지되는지 실험해보는 과정을 필히 거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핵심적 재미가 무엇에 의해 산출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게임이라는 대상을 향유하는 태세가 기본적으로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가능성을 샅샅이 탐사하고 소진시켜 보는 데 있음 역시 보여준다. 리듬 게임의 경우에 소진되어야 할 것이 악보라면 오픈 월드 게임의 경우에는 세계 자체일 뿐이다. 동일 선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많은 수의 게임이 리듬 게임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처럼, 혹은 적어도 리듬 게임이 게임의 어떤 본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예컨대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는 〈슈퍼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의 타임 어택(-최단 시간에 게임을 클리어해서 엔딩을 보는 플레이) 영상들에서 고수들은 〈슈퍼마리오〉를 마치 리듬 게임처럼 플레이하는데, 이때 횡스크롤로 진행되는 〈슈퍼마리오〉의 스테이지는 〈비트매니아〉의 악보와 아주 유사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스테이지의 설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슈퍼마리오〉 고수는 악보를 외운 〈비트매니아〉 고수와 다를 바 없다. 둘은 모두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을 완전히 소진시킨 이들이다. 리듬 게임의 경구를 비틀어 인용하자면, ‘거북이가 오기 때문에 마리오가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가 점프한 자리에 거북이가 오는 것’이다. 비단 〈슈퍼마리오〉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한 부류부터 복잡한 부류까지 모든 게임에는 타자와의 동기화를 통한 소진이 전부인 국면, 즉 리듬 게임을 닮는 국면이 존재하며, 이는 게임의 재미 일반을 설명하는 건 아닐지라도 오로지 게임에서만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쾌감이라는 점에서 게임 특유의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완벽히 동기화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하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실제의 타자와는 장단을 맞출 수 없다. 타자에게 나를 한 끗의 오차도 없이 딱 맞췄다는 감각,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었다는 감각은 곧 나를 가장 굳건하게 속박하고 있는 ‘자기’가 소산消散되는 감각으로, 게임 외의 영역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리듬 게임은 빈곤하고 유한하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독특한 자유로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로움을 맛보게 만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파리8대학교 LLCP 박사과정) 김민호 데카르트의 『정념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데리다 사유의 전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매체나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다.
-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Back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01 GG Vol. 21. 6. 10.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 이름을 대면 알법한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메타버스’란 키워드를 소재로 신사업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린든 랩이 만든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 세계가 메타버스란 키워드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 같이 그 기획안을 준비하던 그 대기업의 부장은 우리 팀에 이런 주의를 자주 주었다. “회장님은 게임을 정말 싫어하세요. 자제분들에게도 절대 게임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신사업 기획에 우리 안이 절대 게임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게’자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은 아뿔싸! <세컨드 라이프> 같은 메타버스의 저작 툴의 개념과 그 당시 유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를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메커닉과 같은 핵심 요소들은 회장님이 게임을 싫어하신 나머지 처음에는 ‘재미요소’라는 단어로, 그 뒤에는 영어 단어 ‘funness’로 대체되었다가 최종 본에는 아예 빠지게 되었다. 물론 겉은 메타버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사용자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게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소프트웨어를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게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cond Life〉.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하고는 싶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서비스가 게임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은 게임과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는 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게임 혐오 심리에는 게임이 문화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게임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이러한 게임 포비아는 세대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근본 천출(賤出)의 문화로 간주해 왔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이어질 노동을 위한 휴식과 투자로 간주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간 정치권과 미디어,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주도했던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재 등의 여러 게임규제들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매체성을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과 미디어를 비롯한 주류 사회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육과 노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강박을 그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왔다. [1] 따라서 자기 자식과 가족들을 그 교육과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7-80년대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런 희생양이었다면, 게임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보편적인 대중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이후에는 게임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미디어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면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전 국민의 게임 이용률은 70.5%에 달한다고 한다. [2] 그 중 10대의 게임 이용률은 91.5%에 달하며 20대 85.1%, 30대 74.0%, 40대 76.6%, 50대 56.8% 등으로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게임이 보여준 산업적인 성장과 양적 팽창은 다른 문화콘텐츠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크기는 매우 작아 보인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록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국내에서도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 때 제기된 운동 중 하나가 주로 SNS를 배경으로 하여 ‘게임은 질병이 아닙니다. 게임은 문화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가 선용을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이 대중문화 중 하나가 아닐 리가 없지만, 이러한 운동은 온라인에서 게임 사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연매출 15조가 넘어가는 게임 업계의 산업적인 기여 대부분은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을 더 낸 사람이 게임에서 더 유리한 구조를 차지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시스템이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그간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발의 등과 관련하여 항상 게임업계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용자들의 성원이 이제는 게임 업계에 규제를 해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제기한 ‘게임은 문화다’ 운동의 저변에는 그간 사회로부터 근본 천출의 문화로 취급받아온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을 만드는 쪽에서 ‘게임은 문화다’라고 주장해버리면서 그간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게임은 문화적인 결격 형태에 해당해 왔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이라는 국내 게임업계의 원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지심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인 사례들이 대부분 해외의 사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게임 사용자들에게마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업계 자체의 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게임업계가 결연함만을 보여주는 대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게임을 단순히 문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으면 사용자들의 시선은 지금보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대로 벌고 싶고 문화로 인정도 받고 싶은 모순된 2가지 감정이 착종되면서 “게임은 당연히 문화가 맞는데, 왜 주변에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이 문제적인 매체가 된 것은 미구엘 시카트가 지적한 바대로 ‘게임이 행동을 유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 [3] 이다.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은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으로 게임 내의 다음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해 플레이어가 참여할 시공간의 빈틈을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채우게 만든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의 시공간은 자신이 들어가서 채워 넣고 행동해야 할 무대가 된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용자들에게 참여할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지속적인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 냈다. *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한 장면. 또한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은 필수적으로 가치의 평가와 직결된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사용자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주요한 설득적인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최근 10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social impact games)의 창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셜 임팩트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듯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이나 <미싱(Missing)> 같은 해외 사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시리아 난민의 독일 정착 문제를 시뮬레이션 한 <21 데이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페치카> 같은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주요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왔다. 게임의 표현력이 정교해지고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연출방식이 개발자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제 게임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상세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게임’과 ‘게이밍(gaming)’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이밍’이란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주변에 전유되는 다양한 활동들 즉, 유튜브나 트위치로 게임 방송보기, 게임 웹진에서 게임과 관련한 정보와 소감 나누기 활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이며, 게이밍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이밍이 보편적인 문화적 행동양식이 되기 전에는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subculture)의 범주에서 주류 문화에 대한 대안형태로 존재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의 70% 이상이 게임하기 과정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게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매체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로 대표되던 소속감 높은 하위문화적인 정체성은 다소 느슨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에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도입 이후 이러한 게임을 통한 사회적인 활동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일과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디스코드에 모여 다른 사용자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나 메타버스 플랫폼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서브 게임과 미션들로 가득하다. 최근의 게이밍 문화는 점점 혼자 플레이하는 스탠드 얼론(stand-alone) 게임에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최근의 메타버스 붐이 다시 일어나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전뇌코일(電脳コイル)>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5-26년경 다이코쿠시라는 가상의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이 도시로 전학 온 오코노기 유코와 아마사와 유코라는 두 여학생의 얽힌 인연을 다룬다. 2007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AR 안경이 작품 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전뇌코일〉의 한 장면.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우리는 다시 게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1] 이동연, 「누가 게임을 두려워하랴?」, 『게임포비아』, 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p.78. [2] 문화체육관광부,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pp.495-496.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p.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똥겜 리뷰를 보는 즐거움
똥겜 전문 리뷰어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똥겜’과 혼용되서 사용되는 ‘망겜’, ‘쿠소게(クソゲー)’와의 용례를 통한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혹자는 망겜과 똥겜을 동의이음어와 같이 분류하기도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게임을 총칭하는 망겜과 똥겜을 사용하는 맥락은 다른 지점이 있다. 똥겜의 번역어인 쿠소게와도 똥겜이 활용되는 지점은 상이한 부분이 존재한다. < Back 똥겜 리뷰를 보는 즐거움 05 GG Vol. 22. 4. 10. 정식 발매 이전부터 올해의 게임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타이틀도 막상 플레이해보니 기대 이하인 경우가 있다. 역으로 잘해야 범작 혹은 괴작에 가까우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플레이어 수가 늘어서 흥행하는 게임도 있다. GOTY 여부가 구매의 기준이 되는 이유는 위와 같은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함이다. 특정 스튜디오의 시리즈는 믿고 구매한다는 말의 맥락도 게임이라는 상당한 시간을 소진하는 활동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둘러싼 즐거움이라는 경험이 소위 갓겜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속칭, ‘똥믈리에’라고 지칭되는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뾰족하게 다듬었기에 회자되는 이들도 있다. 똥겜 전문 리뷰어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똥겜’과 혼용되서 사용되는 ‘망겜’, ‘쿠소게(クソゲー)’와의 용례를 통한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혹자는 망겜과 똥겜을 동의이음어와 같이 분류하기도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게임을 총칭하는 망겜과 똥겜을 사용하는 맥락은 다른 지점이 있다. 똥겜의 번역어인 쿠소게와도 똥겜이 활용되는 지점은 상이한 부분이 존재한다. * 검색엔진에 뜨는 ‘망겜’에 관한 연관검색어(좌)와 한국인 게이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짤(우) ‘망겜’과 관련된 연관 검색어 중 루리웹에서 파생된 짤, “망겜이 다 그렇죠 뭐”가 가장 상위에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경우 망겜은 처음부터 흥행에 실패한 게임이라기보다 ‘고인물’이 잔존하지만 더 이상 신규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거나 신규 유저의 유입이 없는 상태에서 비슷한 루틴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사용자만 남은 경우를 의미한다. 과거 〈팡야〉를 샷 한 번으로 홀인원하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언의 종류와 각도, 바람의 세기와 거리를 엑셀로 계산했던 사용자들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뿌요뿌요〉의 치가 떨리는 효과음 ‘빠요엔’을 상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 검색엔진에 ‘쿠소게’를 쳤을 때 나오는 연관검색어(좌)와 ‘똥겜’과 관련된 연관검색어(우) 쓰레기 게임을 뜻하는 ‘쿠소게(クソゲー)’는 반대인 ‘카미게(神ゲー)’가 함께 거론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통칭 갓겜의 반대로 사용된다. KOTY(Kusoge Of The Year)가 매해 진행되기도 하고, 잡지 소년매거진에서는 역대 쿠소게를 세 부분으로 나눠서 별도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악의 쿠소게를 꼽는 것에는 일련의 기준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쿠소게가 그 게임의 형편없음을 성토하는 멸칭인 것에 비해, ‘똥겜’의 관련 검색어는 해당 게임을 골라서 플레이하기 위한 ‘추천’이나 ‘소믈리에’와 결합되어 하나의 단어처럼 활용되는 경우가 눈에 띤다. 별칭 ‘똥겜 메이커’로 더 많이 불리는 〈마인크래프트〉의 맵 256도 연관 검색어에 올라가 있다. 이는 똥겜과 이를 둘러싼 영역이 탐사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똥겜은 단순히 선택지에서 회피하고자 사용하는 수식어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플레이어는 똥겜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물리엔진을 무시하거나 기존 게임 디자인의 법칙으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게임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런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전자의 예시로 〈염소 시뮬레이터〉를 위시한 몇몇 타이틀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로 손꼽히는 스트리머나 리뷰어 역시 적지 않다. 〈슈의 라면가게〉와 같은 쥬니버게임(네이버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었던 플래시 게임) 플레이로 흥한 유튜버 ‘선바’는 어른의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게임을 계속한다. 플레이어의 괴로움이라는 대주제로 웹툰연재를 이어가는 〈노8리뷰〉는 괴로워하는 ‘노동8호’의 모습 자체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앞서 언급된 똥믈리에의 대표 시리즈인 〈AVGN(The Angry Video Game Nerd)〉은 유튜브라는 매체 자체의 역사에 비등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너드(nerd)’를 화나게 만드는 비디오게임이라는 시리즈 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플레이어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의 법칙을 습득했고 취향을 만들어 가는가를 반대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명력을 표시하는 파라미터가 배경색과 구분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인터페이스, 배경으로 활용될 것이라 예측했던 벽이나 계곡이 닿기만 해도 죽는 장애물로 디자인됐을 때, 스테이지의 구분이 무의미하거나 갑작스럽게 난이도가 올라가는 경우, 저장이 되지 않아 지루하게 처음 스테이지를 반복하게 만드는 안일한 게임 디자인으로 플레이 시간을 늘리는 경험마다 너드는 단말마의 비명과 같은 욕을 내뱉으며 맥주를 들이킨다. 〈AVGN〉을 시청하는 즐거움의 맥락은 복합적이다. 초창기 가정용 게임기 시절부터 콘솔게임을 즐겨온 플레이어는 다양한 콘솔기기와 주변 기기를 함께 소개하면서 당시 게임 플레이의 경험과 유통된 플랫폼, 콘텐츠로서 소비했던 문화를 상기한다. 게임다운 게임을 즐길 줄 아는 진정한 게이머라면 사야한다고 광고했지만 주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콘솔에 대한 리뷰나 최악의 게임을 구분할 때 거론되는 똥겜지수(Shit Scale) 레드에 이름을 올린 〈배관공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홍콩 97〉에 대한 리뷰는 게임 문화사의 야사(野史)에 해당한다. 영화와 같은 연애시뮬레이션을 표방했으나 동영상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배우가 연기한 스크린샷만 감상하게 만드는 〈배관공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횡크스롤에 도트방식으로 디자인된 재현 방식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식하기까지 실패 과정을 보여준다. 이 똥겜을 플레이하는 너드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게임 문화사가 누적해 온 게임다움이라는 척도를 시청자가 충분히 내재화했기 때문이다. 리뷰를 보는 즐거움은 단순히 똥겜을 ‘똥’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오기도 한다. PS4용으로 만들어졌지만 500메가의 용량을 자랑하는 슬림한 게임 〈라이프 오브 블랙 타이거〉에 대해 너드는 대나무와 하이에나 똥 같은 것으로 만든 컴퓨터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농담을 한다. 그가 게임의 형편없음에 분노할 때 사용하는 비유에서도 똥은 다양한 변주로 활용된다. 오프닝 화면에서도 콘솔에 똥을 붓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구독자에게 단순히 웃기는 요소일 수도 있고 불편한 방식의 재현일 수도 있다. 똥을 언급하는 농담과 욕설뿐만이 아니라 똥이라는 물질 자체를 다루는 방식도 이중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혐오와 은닉하기, 숭배와 카타르시스의 경험으로서 배설을 다룬 역사는 유구하다. 하지만 의학과 약학, 신앙과 같은 큰 범주에서 똥이 활용되던 양상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아는 부모에게 자신의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똥을 선사하고, 양육자는 그 행위를 기뻐하고 칭찬한다. 그러나 의무 교육기관에서 용변을 보는 용도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놀림의 대상이다. 이는 위생을 학습하고 관리, 감독한다는 명목으로 학교 화장실 문의 형태가 위아래 공간을 비워둔 모양이라는 점도 요인일 것이다. 놀림을 피하기 위해 의지력을 발휘해가며 학교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 이라도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맥락 없이 거론되는 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웃는다. 사회인이 된 커뮤니티 애호가는 회사 화장실을 쾌변의 장소로 사용하는 상황을 트위터나 익명 게시판에 올린다. 혹은 이와 같은 트윗이 게시된 것을 읽으며 실소한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넘나들며 똥은 농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관리의 대상이다. 똥겜 리뷰를 보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 역시 양가적이다. 똥겜 리뷰를 보는 사람은 똥겜을 플레이하지 않는다. ‘본다’는 행위는 ‘구경’의 요소와 ‘관음’의 요소를 상호적으로 환기한다. 구경이 집합적이고 비관여적인 시각 행동이라면 관음은 개별적으로 이뤄지며 적극적으로 시각을 내재화한다. 이 두 요소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를 통해 전시되는 게임 리뷰는 플레이어의 거듭되는 실패와 이로 인한 분노를 극적인 요소로 분절해서 표현한다. 이를 시청하는 경험이 즐겁다면 그것은 똥과 같은 용어를 거침없이 내뱉는 너드의 (비유적 의미로서의)배설을 시청하는 이의 감각과 병치하는 것에서도 오는 쾌감일 수도 있다. 동시에 과장되게 표현하는 너드의 좌절을 관여하지 않고 조망하는 것에서 오는 폭소이기도 하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게임 플레이를 보면서 향유하는 즐거움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은 총체적인 상으로서 게임을 정의할 수 없다는 지점과 상당히 닮았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 Back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09 GG Vol. 22. 12. 10. 게임이 예술 되어: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인가 하는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다. 시대 따라 논의의 초점도 발전했다. 학계 내부에서 논의의 초점 하나가 영글면 바깥으로도 튀어나왔다. 열매는 칼럼이나 기사의 형태로 이따금 맺혔고, 지나가던 대중들은 댓글창에서 입씨름을 벌이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러던 2011년, 열매를 모으던 학계와 지나가던 대중들이 잠깐 멈추어선 소식이 있었다. 2011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게임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판례를 남겼다. 캘리포니아 주법에는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판매 혹은 대여하는 것이 불법이라 규정한 법이 있었는데, 이 법이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위배되는 헌법은 수정헌법 1조. 예술 장르에게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부분이다. 이 판례가 나온 후 미국의 국립문화예술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은 지원 대상에 게임을 포함시켰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예술’ 항목의 이름을 ‘미디어 예술’로 바꾸면서 비디오 게임을 집어넣은 것이다. 11년이 지난 올해, 한국에서도 같은 소식이 있었다. 2022년 9월 27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이 공포되어 6개월 후인 2023년 3월 23일부터 효력을 가진다. 조승래 의원은 게임을 문화예술의 범위에 추가하는 부분을 대표 발의했다. 애니메이션은 유정주 의원, 뮤지컬은 이병훈 의원 대표 발의에 의해 추가되었다. 판례로 규정을 바꾼 미국과 달리 한국은 입법으로 규정이 바뀌었으므로 바뀐 조항에 따라 자동으로 게임은 지원 대상 예술 장르가 된다. 법의 제목부터 문화예술‘진흥’법이지 않은가. 일찍이 우탱클랜은 불멸의 구절을 랩했다.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 주변 모든 것은 돈으로 돌아갈지니. (줄여서 CREAM이다) 크림처럼 달달한 지원금을 노리기 위해 법을 들여다 보자.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지원금과 장려 정책이 명시되어 있다. 7조에는 전문예술법인을 만들 수 있는 규정이 있고, 11조에는 장려금 정책이, 14조에는 문화산업 지원에 관한 규정이 있다. 4장은 아예 전체가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들이다. 게임 속에 예술이 너무도 많아: 게임 내의 예술의 영토 게임의 특성인 경쟁성이나 참여성이 예술의 속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는 반박이 되었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어서 추가 논의로 들어간 주장들이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게임의 예술성 논의는 국가 시스템에 의해 한 단계를 넘어갔다. 법적으로 예술의 범주에 들어갔다. 다음 차례는 국가가 예술에게 주는 지원금과 지원책을 받으면 된다. 독립 개발자들은 국가 지원금을 받아 제작비로 쓸 수 있을 것이고, 대형 게임사 또한 국가의 연기금을 투자자로 받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대형 회사의 투자 사정은 그렇다 쳐도, 미국 NEA의 기금 지원의 경우에서는 분명히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그룹 개발사에 지원이 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게임의 어느 부분이 예술성을 갖고 있을까? 게임은 그림, 영상, 문자, 음악, 음향, 여기에 더하여 프로그래밍 코드 등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의 예술성은 이 구성 요소 중 어디에 있는가? 혹은 이 구성 요소 모두 내지는 요소의 집합에 있는가? 감독, 각본, 연기 정도로 정리가 가능했던 영화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게임이 훨씬 더 복합적인 장르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게임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 게임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 중 어디까지가 법적 예술인이 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곱씹어 보면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게임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디렉터, 혹은 디렉터들인가? 아론 스머츠(Aaron Smurts)는 게임 제작자가 영화 감독처럼 총체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작업을 한다며 예술가로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도 영화 감독도 독립적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서사를 만들어낸 각본, 서사를 수행해낸 연기, 둘을 합쳐 의도를 투사해낸 감독의 셋으로 예술성의 영역을 정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촬영 행위 자체도 기법과 의도가 있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분장과 의상과 음악도 같은 노선을 탔다. 물론 위계상 감독이나 각본이 가장 상위에서 통합 권위를 가져가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하위 분야들의 예술성이 완전히 부정당하지는 않는다. 그럼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픽과 디자인을 입히는 파트까지는 예술일 것 같다. 그럼 UI 디자인은? 배경음악을 만드는 인력이 예술인이라면 음향을 디자인하는 인력은? 시나리오 작가는 예술인에 포함될 것 같은데, 이를 검수하고 수정하는 인력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소설과 만화에서 편집인은 예술인이던가 아니던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요소를 동원해 컷신 시네마틱 영상을 만들어내는 인력은 어떨까? 게임이기에 가능한 질문도 더해진다. 비디오 게임을 하나의 작품/상품이게 만들어내는 기술은 프로그래밍 기술이다. 그럼 게임 코딩을 한 프로그래머들은 예술인이 되는가? 비록 게임 제작진의 대다수가 감독/디렉터의 의도 하에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화 제작도 같은 형태니까 게임에서도 대다수의 인력들을 예술인으로 인정해주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프로그래밍도? 약간의 거슬림이 생긴다. 비디오 게임의 근간을 쌓는 작업이니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지가 너무 ‘기술직’이다. 사실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 어차피 ‘藝術’이건 ‘arts’건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는 기술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정교하고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경지를 지칭하는 개념이 점차 변하여 현재에는 예술성을 지칭하는 개념이 된 것이니까. 따라서 우리는 받아들이면 된다. 코딩하는 프로그래머도 게임을 만드는 데에 참여했다면 예술인일 수 있다. 그게 새로운 시대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낸 코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도 하지 않는가. 물론 저 표현은 비유적 표현에 의한 감탄이지만, 법적 영역에서는 건조한 사실 진술이 될 수도 있다. 코딩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시선은 이미 한참 전에 제시되었다.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는 2013년에 큐레이터로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게임 14종을 선정해 전시했다. 안토넬리는 전시작을 선정하기 위해 만든 기준에 그래픽, 유희성 등의 ‘예술적 기준’ 외에도 조작의 참신성과 코딩의 우아함을 집어넣었다. 같은 해, 독일의 미디어아트 전시회인 트랜스미디알레(Transmediale)에는 아예 즉석 코딩 공연이 올라갔다. 게임의 장르적 특성인 유희성이 규칙에서 나오고 그 규칙을 현실화시킨 것이 코딩이므로, 코딩의 최적화 수준 또한 예술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 이미 음악 연주의 방법으로 코딩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게임의 예술화, 혹은 게임의 예술 편입은 예술 역사에서 혁명적 사건이다. 과거 게임의 예술화를 부정하는 논의를 다시 돌이켜 보자. 경쟁성이나 참여성 등의 특성이 기존 예술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 경 나왔던 소설가 이영도의 발언이 기억에 남는다. ‘예술의 목적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타자를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은 예술이 아니지만 예술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스포츠는 예술이 아니지만 가치를 폄하 당하지 않는다.’ 게임의 다른 속성인 ‘협동’이 부각되면서 이 논리의 힘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주목할 가치는 있다. 이 관점에서 게임의 예술화를 바라본다면, 예술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질적인 체계를 가진 장르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가장 이질적인 장르라는 점은 게임의 특성 중 수용자의 참여성에서도 드러난다. 기존 예술 장르에서 수용자의 기본 태도는 감상 내지는 관조였다. 반면 예술 신입인 게임에서는 직접 참여하여 경험한다. 새로운 수용 형태가 예술에 들어온 것이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보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로 용인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수가 했던 말이다. 수용자 미학 이론으로는 맞는 얘기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이 된 것은 사람들이 미술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 수용자에게 달렸다. 사람들이 예술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예술품이 완성되며,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예술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돈이라도 있고 없고: 지원금과 노동권 그리하여 과거 논의까지 건드려가면서 얻어낸 결론은 낯설긴 해도 만족스럽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예술임을 인정했다. 이제 만족스러움을 안고 내년 3월부터 국가 지원금을 받아가면 된다. 하지만 당장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예술인 지원 정책을 규정하고 있는 법은 예술인복지법인데, 이 법의 개정안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내의 논의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논의에는 코딩 프로그래머의 예술인 인정 여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담당 부처의 논의가 대강이나마 윤곽이 잡히면, 그때 가서야 예술인복지법의 구체적인 개정안과 새 시행령이 나올 것이다. 현재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의원들이 발의해놓고 논의하고 있는 예술인복지법 내용은 예술인 자격 증명과 경력 증명에 관한 내용이다. 정부에 예술인으로 등록을 하여 지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각종 서류가 필요하다. 그중에는 국가가 ‘예술 활동’이라고 인정하는 특정 활동의 증명도 있다. 물론 이런 서류 구비는 힘들고 귀찮고 헷갈리는 일이다. 그래서 앨범을 몇 장씩 내고 10년 넘게 활동한 중견 음악인도 예술인복지법에서 보면 예술인이 아닌 상황이 흔하다. 그러다 보니 예술인 등록제는 예술 활동을 증명한다기보다는 예술인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더 많이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주류 시장과 비주류 담론 양쪽 모두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예술인임을 증명하고 지원금을 타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현재는 이런 부작용을 없앨 패치를 논의하는 중인데, 현재 발의되어 올라와 있는 개정안을 보면 논의가 건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기실 국회는 지원금 관련한 고민만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복지법 개정에 있어서는 노동권 문제도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예술인복지법 5조는 예술인이 불공정 계약을 하지 않도록 하는 표준계약서 조항이다. 활동 증명과 표준계약서에서 알 수 있듯 주로 개인 및 프리랜서를 위주로 패러다임이 잡혀 있다. 그래도 프리랜서인 연예인이 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할 때의 계약서 또한 이 조항을 기준으로 작성된다. 따라서 현재 게임 제작사와 노동 계약을 맺고 입사해 있는 시나리오 라이터, 디자이너, 3D 모델러, 코딩 프로그래머 등등에게도 표준계약서 준수 여부가 중요해질 수 있다. 게임업계의 고질적인 노동 문제를 풀 실마리가 여기서 등장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 Back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02 GG Vol. 21. 8. 10. 작년 앞서 해보기로 발매한 하이퍼 FPS 장르의 게임 〈울트라킬〉은 그래픽만 놓고 보면 도저히 최신 게임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마치 목각인형처럼 보이는 각진 3D 모델링에 저화질의 텍스처는 흡사 도트 이미지로 보일 지경이다. 물론 이같은 조야한 그래픽 비쥬얼은 ‘레트로’ 스타일을 표방하며 제작된 이 게임에서 의도된 것이다. 레트로란 지나간 과거의 특정한 시대적 양식을 다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울트라킬〉이 참조하는 과거는 90년대 중후반으로, 최초로 비디오 게임에 완전한 3D 그래픽이 도입되기 시작하던 때이다. ‘3D 폴리곤 모델링’과 ‘텍스처 매핑’ 기술의 도입을 특징으로 하는 당시 게임의 3D 그래픽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본다면 여러모로 조악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그때는 이와 같은 완전한 3D 그래픽이 게임에서 구현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당시로써는 컴퓨터로 연산 가능한 폴리곤 수의 한계로 인해 마치 목각인형처럼 각져 보이는 캐릭터와 오브젝트의 모습과 저화질의 텍스처로 인해 색과 이미지가 뭉개져 보이는 등의 그래픽 결함은 훤히 눈에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와 같은 게임 리소스에 의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디스플레이 기기의 해상도 또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낮았다. 눈에 띄는 문제는 대부분 각짐의 문제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적은 폴리곤 수로 인하여 각져보이는 3D 모델링뿐만 아니라 흔히 ‘계단 현상’으로 불리우며 선이 구불구불하게 보이는 그래픽 문제는 당시 3D 그래픽 초기 역사의 대표적인 결함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문제들은 컴퓨터의 연산 능력과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 그리고 안티 앨리어싱 기술의 도입 등에 의해 점차 해결되어 갔다. 이제는 가장 뛰어난 게임 그래픽을 살펴볼 수 있는 최신 AAA 게임의 트레일러가 발표될 때 과거와 같은 각진 폴리곤 모델링이나 계단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울트라킬〉의 게임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hakita.itch.io/ultrakill-prelude )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울트라킬〉의 그래픽은 초창기 3D 그레픽의 대표적인 결함들을 오히려 전면적으로 드러내며 중요한 비쥬얼 형식으로 삼는다. 〈울트라킬〉은 의도적으로 로우-파이한 3D 그래픽 스타일을 지향하며, 흔히 우리가 3D 게임 그래픽의 결함이나 한계로 여겼던 요소들을 감각적인 스타일로 다시 제시한다. 과거에는 한계로서 여겨졌던 낮은 해상도나 각진 3D 모델링, 뭉개진 텍스처, 어색한 에니메이션 등의 요소가 이제는 특정한 미적 양식이 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재현 기술 시각예술작가 ‘하룬 파로키’는 자신의 영상 작업 〈평행 I – IV〉(2012-2014)에서 비디오 게임 그래픽의 발전사를 다룬 바 있다. 비디오 게임 역사 초기의 도트 그래픽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리얼한 3D 그래픽까지 게임의 이미지는 점점 사실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바로 이 게임 그래픽 이미지의 ’리얼함‘은 하룬 파로키가 조망한 것처럼 게임의 기술적 발전을 가늠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준거점이 되어 왔다. 얼핏 보면 이러한 그래픽의 발전은 마치 잘 보이지 않던 어떤 사물이 점점 잘 보이게 되는 경우처럼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결과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 덜 사실적인 것에서 사실적인 것으로 말이다. 그래픽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현실의 비쥬얼이 항상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저 주어진 컴퓨터의 연산 능력과 디스플레이 기기의 기술적 한계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컴퓨터의 연상 능력이 발달하고 디스플레이 기기의 해상도가 좋아지면 그에 따라 그래픽 이미지는 자연스레 리얼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결코 게임 그래픽 이미지가 사실성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마치 잘 보이지 않던 어떤 사물이 잘 보이게 되는 경우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란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게임 그래픽이 보여주는 놀라운 리얼함에 도달하기까지는 ’3D 모델링‘과 ’텍스처 매핑‘, ’랜더링‘, ’광원 효과‘, ’에니메이션’ 등의 프로그래밍 기술과 더불어 ‘해상도’와 ‘프레임’과 같은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을 규정하는 수없이 다양하고 특정한 ’사실성의 기술‘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한 사실성의 기술은 단순히 현실의 비쥬얼을 모방하는 의미를 넘어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과거의 게임 그래픽을 보게 되면 새삼 놀랄 때가 있다. 출시된 당시에 봤을 때는 분명 그래픽 수준에 깜짝 놀랐던 거 같은데 지금 보니까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 놀랐었다는 게 놀라운 것이다. 나는 여전히 ’크라이실사스‘라고도 불렸던 〈크라이시스〉의 실사와도 같은 그래픽이 주었던 충격과 〈스타워즈: 배틀프론트〉의 포토리얼리즘 그래픽을 보고 놀랐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게임 그래픽이 이보다도 더 좋아질 수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도달한 현재가 발전의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은 흔한 환상이다. 이같은 환상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언리얼 엔진5‘의 그래픽 시연 영상을 보고서도 나는 똑같이 생각했다. “도대체 이보다 더 그래픽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이미 충분히 리얼한 것 같은데 말이다. 끊임없이 더욱 사실적인 이미지로 나아가는 게임 그래픽에 대한 요구 속에서 특정한 게임 그래픽 기술의 특징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재현 양식이나 특정한 기술적 특징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그래픽의 오류 혹은 결함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흔히 폴리곤 하면 떠오르는 각진 면들과 텅 비어있는 내부의 모습은 리얼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며, 매핑된 텍스처 또한 평면 이미지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그래픽에서의 사실성의 기술은 바로 그 기술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선 안되는 것이다. 다각형의 모음인 폴리곤 모델링은 자신의 구성 요소인 다각형 면을 드러내는 일, 즉 각져 보여선 안되며, 매핑된 텍스처 또한 최대한 평면성을 감추고 깊이감의 환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게임 그래픽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도입되는 기술의 흔적을 가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각진 폴리곤‘, ’납작해 보이는 텍스처‘와 같이 그래픽 기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기의 3D 그래픽은 흔히 당시 기술적 수준의 한계에 의한 결함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울트라킬〉이 결함으로 여겨졌던 초기 3D 그래픽의 고유한 특징들을 특유의 미학으로 제시하였듯, 거기엔 단순히 과거 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고유한 매력이 담겨있다. 낮은 품질 3D 그래픽의 미학 2016년에 발매한 게임 〈back in 1995〉은 제목처럼 특정한 시기를 가리킨다. 1995년, 앞서 언급한 〈울트라킬〉이 모티프로 삼았던 것과 같이 비디오 게임에 완전한 3D 그래픽이 최초로 도입되던 시기이다. 〈울트라킬〉과 마찬가지로 〈back in 1995〉의 그래픽 비쥬얼 또한 초기 3D 그래픽에서 발생하던 온갖 문제들을 담고 있다. 제작자는 말한다. “저해상도 모델, 텍스처 워핑, CRT 에뮬레이션, 고정 CCTV 스타일 카메라 각도를 포함한 레트로 3D 그래픽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세계에 빠져보세요.”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33380/Back_in_1995/ 그러나 게임은 단순히 비쥬얼적인 매력에 기대고 있지만은 않는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 게임의 장르다. 〈back in 1995〉이 표방하는 ’서바이벌 미스터리 호러‘ 장르는 이 게임의 독특한 로우-파이 3D 그래픽의 미학과 불가분이다. 〈back in 1995〉는 ’서바이벌 미스터리 호러‘장르 속에서 왜 초기의 3D 그래픽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매력적일 수 있는지, 이 양식의 고유한 미학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 〈back in 1995〉의 게임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33380/Back_in_1995/ ) 레트로의 의미는 단순히 지나간 그때의 스타일을 다시 반복하며 애호하는 것 정도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 굳이 지나간 특정한 과거의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시간성이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문화 연구자 ’사이먼 레이놀즈‘는 근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레트로 문화에 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자신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서 레트로 문화와 시간성에 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문화가 노스텔지어에 매달려서 앞으로 나갈 힘을 잃은 걸까, 아니면 문화가 더는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 결정적이고 역동적이던 시대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걸까?”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최성민 역, 작업실유령, 2014, p.15 흔히 노스탤지어가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상반되는 레이놀즈의 태도는 노스탤지어적 과거에 대한 과도한 매혹을 짐짓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back in 1995〉의 미스터리 호러 분위기 또한 전적으로 지나간 과거라는 시간, 저화질의 그래픽처럼 뿌예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작중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켄트는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도시 저편의 라디오 타워에 있다고 여기며, 도시 곳곳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라디오 타워로 향한다. 아마도 개발자 자신의 자아가 강하게 투영된 듯 보이는 그는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향수와 억압된 트라우마적 기억 사이를 오간다. 비록 〈back in 1995〉은 부족한 게임성으로 인해 많은 호평을 받진 못했지만, 로우-파이 3D 그래픽과 시간성에 관한 연관 그리고 무엇보다 호러 장르와의 연결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자 한다. 다시 비쥬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초창기의 3D 그래픽이 갖고 있던 온갖 결함들은 특히나 낮은 해상도와 관련이 있었다. 이 낮은 해상도는 무엇보다도 ’가시성의 제한‘이라는 특징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그래픽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었다. 〈back in 1995〉 또한 노골적으로 참조했던 〈사일런트 힐〉시리즈는 그와 같은 시각의 제한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던 초기 3D 그래픽 게임 역사의 마스터 피스 중 하나다. 〈사일런트 힐〉의 비쥬얼 아이덴티티이기도 한 연기는 사실 당시 하드웨어의 성능 한계로부터 비롯된 눈속임이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당시 하드웨어 성능에 따르면 랜더링 가능한 게임 공간의 디테일에 한계가 있었다. 일정 거리 이상의 공간은 아예 불러올 수도 없었는데, 이와 같은 부족한 디테일을 적절히 숨기기 위해서 게임 공간 전체에 연기를 깔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는 게임 세계에 대한 플레이어의 시야를 제한하여 이 게임의 미스터리 호러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잘 살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처럼 ’제한된 시야‘에 의해 생겨나는 특유의 미스터리 호러적인 분위기는 〈사일런트 힐〉에서 연기 에피소드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오히려 〈사일런트 힐〉은 연기에 가려진 시야 저편뿐만이 아니라 연기에 가려지지 않은 공간까지도 포함하여 아예 이 게임 세계 전체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기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래픽 텍스처의 저화질은 게임에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고, 각진 폴리곤 모델링은 마치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처럼 보였다. 2012년 〈사일런트 힐〉 시리즈의 일부는 HD로 리마스터 되었지만, 이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낡은 게임의 품질 개선은 되려 게이머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게임이 너무 잘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개는 대부분 걷혀졌으며, 텍스처의 퀄리티는 업스케일링 되면서 〈사일런트 힐〉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터리 호러한 분위기가 전부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 와서 살펴보자면 이 잘 보이지 않으며, 명확하지도 못한 세계가 갖는 독특한 미적 특징은 디지털 그래픽 매체에 대한 인지적인 물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 그래픽의 발전은 도입되는 기술의 흔적을 감추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초기 3D 그래픽 게임에서는 여전히 도입된 기술의 흔적이 물씬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초기 3D 그래픽을 매력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플레이 중인 디지털 가상 세계의 고유한 물성이 오늘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들보다도 더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Puppet Combo’의 게임 의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lgFGZ2hs-A) * ’Puppet Combo’의 게임 의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xNMzvoc1Wyw ) 〈back in 1995〉와 〈사일런트 힐〉이 바로 저 명확하지 않은 세계로 인해 느껴지는 잔잔한 공포 혹은 미스터리적 분위기에 집중했다면, 독립 게임 개발 스튜디오 ’Puppet Combo’는 로우-파이 3D 그래픽이 갖는 독특한 물성에 의해 느껴지는 즉물적인 공포감에 집중한다. 주로 80년대의 B급 고어, 슬래셔 무비를 참조하는 이들의 방향성은 언뜻 생각하기에 고어나 슬래셔와 같이 날것의 표현이 중요한 장르적 연출이 어떻게 저화질의 로우-파이한 3D 그래픽 스타일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거친 폴리곤 덩어리로 표현된 신체가 갖는 날것의 물성은 흔히 고어 장르에서 고깃덩이로 추락해버리는 날 것이 된 신체의 물성과 닮아있다. 〈퀘이크〉에서 처치하자마자 순식간에 투박한 고깃덩이로 뒤바뀌어버리는 괴물들의 모습, 〈GTA: 산 안드레아스〉에서 헤드샷에 의해 순식간에 머리는 사라지고 피 분수가 분출되는 모습, 〈폴아웃 3〉에서 사정 없이 절단되는 팔다리와 물리 엔진에 의해 사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신의 모습은 게임의 고유한 물성에 의해서 출현할 수 있었던 독특한 고어적 순간들이다. * 안가영 작가의 〈KIN거운생활: 온라인 KIN 온라인〉, Machinima, FHD color, 20min 13s, 2020-2021 (출처: https://angayoung.cargo.site/KIN-online ) 낮은 해상도와 프레임, 어색한 에니메이션, 퀄리티가 좋지 않는 폴리곤 모델링과 저해상도의 텍스처 등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디지털 미학은 비디오 게임에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근 몇 년간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이같은 독특한 이미지 양식을 인용한 작업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미술작가 김희천은 그가 몇 번이나 주제로 삼았던 ‘서울‘이라는 장소의 부유감을 은유하기 위해서 낮은 품질의 3D 폴리곤 모델링 특유의 유령적 물성을 차용한 바 있다. 그의 영상작업 〈바벨〉에서 서울의 지하철 공간을 돌아다니는 멍청하게 생긴 저품질 폴리곤 인간들은 T 포즈로 자세가 고정되거나 허접한 에니매이션으로 이동하며 서로 겹쳐지고 벽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아예 비디오 게임을 주요한 참조점으로 삼는 미술작가 안가영 또한 개인이 구현 가능한 조야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미학을 경유하여 작업을 전개하곤 한다. 그의 연작중 하나 〈 KIN거운생활: 온라인 KIN 온라인〉의 그래픽 비쥬얼은 비록 앞서 로우-파이 3D 그래픽의 주요한 특징으로 언급했던 ‘폴리곤 모델링’과 ‘텍스처’의 퀄리티는 훌륭한 수준이지만, 광원 효과의 의도적인 날림에 의해 여전히 그래픽의 이미지의 품질이 현저하게 낮아 보인다. 이와 같은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이 갖는 독특한 유령적 물성은 김희천에게선 서울이라는 장소의 부유감에 의해 인용되었다면 안가영에게는 신체와 정체성의 부유감에 의해 인용된다.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안준형 아티스트 폴리티컬 파티 '배드 뉴 데이즈'와 마르크스주의 기반 연구기관 '조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게임 매체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게임 미디어의 정치성 및 게임 속 이미지의 재현 체계와 그것의 주체성 및 윤리적 문제에 관해 비평적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 Back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12 GG Vol. 23. 6. 10.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하지만 이게 생산적 의미를 가지려면 게이머 스스로가 ‘인정투쟁’을 넘어 게임과 예술의 본질에 가 닿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비평 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제시해본다면 어떤가? 가령 “예술을 논한다”고들 하는데, 그게 뜻하는 바는 뭔가? 모나리자든 벽에 붙여 둔 바나나든 뭐든 ‘얼마나 팔렸느냐’, ‘쓸모가 있느냐’를 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가치평가를 둘러싼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예술을 논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게임을 논한다”고 할 수 있다면, 게임을 예술의 일종이나 그 비슷한 뭔가로 취급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 게임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게임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인터랙티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랙티브에 기반한 게임이 아닌 것’들도 세상엔 많이 있다. ‘인터랙티브’를 게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볼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랙티브 하지 않은 것’을 게임이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무언가가 게임이기 위해서는 선택이든 조작이든 입력이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사용자의 행위가 게임을 통해 형성된 공간 내 사건을 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은 일반적으로 불특정다수의 사용자 즉 대중을 전제한다. 대중이 매체를 통해 가상적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거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즉, 예술의 그것에 비견될만한 것으로서 게임 비평의 정수는 그 게임이 무엇을 통해서 어떤 세계의 변화를 사용자에게 경험하게 하느냐,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리고 그게 현실 인식의 무엇으로 이어지느냐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닌텐도의 최근 신작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상당히 인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전작에서 오픈월드의 물리엔진을 응용력을 발휘해 활용하도록 한 것에 ‘조나우 기어’라는 장치를 더해 ‘놀이’로서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널판지에 팬과 배터리, 조종기를 달고 물에 띄우면 간이 보트로 활용할 수 있어 체력 소모 없이도 강을 건널 수 있다는 식이다. 기구를 만들고 불을 피워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이 덕에 퍼즐의 난이도가 하락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게이머 입장에서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보다 쉽고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의미있다. ‘오픈월드’를 표방한 게임이라도 게이머의 사용자 경험은 제작자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오픈월드’ 또한 가상의 환경에 불과한 탓에 제작자가 설계된 영역 밖으로 사용자가 나가는 것까지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한계는 지형지물의 배치나 ‘보이지 않는 벽’ 등을 매끄럽게 배치하는 것으로 사용자 경험의 훼손을 자연스럽게 최소화 하는 포장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이러한 ‘포장’을 훨씬 더 그럴듯하게 해내고 있다. ‘조나우 기어’들의 등장에 더해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트레루프’ 능력의 존재는 ‘오픈월드’의 한계를 상정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아주 조그만 부분이라도 천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게이머가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물의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기에, 애초에 제작자가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움직이도록 해야 할 ‘레벨 디자인’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바가 대단히 많아 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모든 천장을 다 뚫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조나우 기어’로 만든 비행기 역시 일정 거리 이상 날아가면 사라지게 설계된 등의 한계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수단을 통해 사용자가 게임으로 형성된 세계에 대한 훨씬 더 강한 개입력을 확보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는 점은 누구나 놀라워할만한 대목이다. 이런 요소는 사용자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전작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부터 새로 시작된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본질적으로 멸망한 세계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서는 우선 그 세계의 주인이 되는 일이 필요하다. 집 청소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가진 예산의 한도 내에서 알맞은 청소용구 구매를 계획하고 실행한 후 그 도구로 청소를 하고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집 주인의 일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제공된 청소도구를 활용해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따르며 청소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집 주인의 경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게임은 아무리 ‘오픈월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후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은 최소한 전자에 가까워진 느낌을 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이 주는 사용자 경험은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형식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지만 ‘이야기’로 보면 좀 다르다. 자연럽게 생길 수 있는 의문을 두루뭉술하게 넘어 간다. 눈 앞에서 바닥을 뚫고 나오는 주인공에 잠시 놀라기만 할뿐 곧바로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듯 무덤덤한 게임 내 등장인물의 존재 등이 그렇다. ‘게임적 허용’을 고려하더라도, 외양과 생태가 판이하게 다른 민족 간의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충돌이 묘사될 법도 한데, 잘해야 몇 번 튕기는 게 전부고 대개는 다들 속없이 주인공을 기꺼이 도와주기로 한다. 1차원적 감동이 있긴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크다.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닌텐도는 ‘온 가족의 닌텐도’이다. 지위와 자격을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감수하는 중세 정치를 묘사한 ‘크루세이더 킹즈 3’의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아니다. 소년 소녀들의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둘째, 이게 일본의 방식이다. 불편한 얘기는 뒤에서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누구나 수긍할만한 아름다운 얘기를 남기길 원한다. 되도록이면 문제를 직면하거나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의 한일관계 개선 논의에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과거사에 대한 태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일본이 불편한 주제를 오로지 외면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온 가족의 닌텐도’의 이면에는 가히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 볼만한 성인물 시장과 PC-98시리즈 등 자체 규격 컴퓨터 시절 성인용 어드벤처 게임 범람의 역사가 있다. 즉, 불편한 얘기를 하는 공간은 따로 있다. 하지만 거기가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리즈’ 일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 얘기를 덧붙이는 건 ‘이야기’에 해당하는 요소까지 ‘주인이 되는 경험’에 결합시킬 수 있었다면 비평적으로 더 나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야기’로부터 발생하는,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살면서 겪을 법한 갈등을 뭔가 방법을 강구해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에 비할만한 뭔가를 찾아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실엔 이미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이 존재한다. 그것을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자며 머리를 맞대자고 말하는 사람이 극소수일 뿐이다. 그나마 일본과 같은 ‘게임 선진국’이 만든 게임을 소재로 한다면 최소한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인 한국의 게임 이슈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코인과 결합한 수익 모델 얘기라든가, 여성 캐릭터의 신체 부위라든가, 사기나 다름없는 사건과 같은 얘기들만 떠오르지 않는가? 이것이야 말로 다들 주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대개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이슈에서 이러한 풍경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예술로 인정받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하고 있는가? ‘무엇이 어떤 것을 통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단 그 각오가 된 다음에야 가능할 것 같다. Tags: 예술,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13 GG Vol. 23. 8. 10.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게임, 즉, 놀이의 형태는 고양이의 놀이이다. 사람이 레이저나 막대기, 털 장난감 등으로 인공적으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태까지 잘만 놀아 왔고 지금도 잘만 놀고 있다. 고양이는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나 막대기, 빛, 곤충이나 동물 시체 등을 갖고 논다. 이러한 놀이는 언뜻 사냥을 연습하기 위해 그 행위들을 가상으로 모방하여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한 순간, 정말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 그 시체를 뜯어 먹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유희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 놀이의 본질에는 어떠한 가상도 모방도 연습도 없으며, 실용성이 아니라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나 척추가 부러진 채로 아직 죽어가고 있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저 꿈틀거리기나 하는 초주검의 동물을 붙잡고 양손으로 데굴데굴 굴리거나 입으로 물어 공중으로 던진다던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다른 ‘실제 행위’도 모방하지 않고 있고 그저 그 자체로서가 이미 고유한 실제 행위이다. 그리고 이 놀이 행위들은 그 어떤 실용적 경험치에도 봉사하지 않고 그저 식사 이전의 재미, 신남, 기쁨 등만을 생산해 내고 있을 뿐이다. 즉, 놀이로서 게임은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다. 다른 외부적 목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게임 <핫라인 마이애미>의 결말 장면에서 이러한 게임의 행위 목적성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보통의 결말 (normal ending)’과, ‘숨겨진 결말 (secret ending)’의 구조이다.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두 인물은 해당 게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청소부 (janitor)’들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요 사건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어느 날부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고, 이렇게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의 내용은 어떤 특정 장소로 가서 배달받은 동물 마스크를 쓰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 전화의 발신자가 바로 청소부들이고,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명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명령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청소부들의 비밀 본부를 찾아내고. ‘보통의 결말’에서 이들에게 ‘왜’ 이러한 일들을 벌이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청소부 A: 그야 심심했으니까 그렇지! 청소부 B: 왜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겠어? 너는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잖아, 안 그래? 청소부들은 주인공이 제기한 ‘왜’에 대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은 그저 자신들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청소부들은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을 조종하며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또한 청소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실제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너희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야?”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소부들은 그 질문 속의 주어 설정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였어, 너가 죽였지...” 즉, 이 ‘보통의 결말’은 청소부들과 주인공 모두의 행위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변명 될 필요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실행되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며 즐거움을 얻은 또 다른 놀이자, 플레이어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명령하고 주인공을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청소부와 청소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획득하는 놀이자인 주인공의 구도처럼, 플레이어에게 명령하고 플레이어를 갖고 노는 게임이라는 놀이자와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이행하며 즐거워하는 플레이어라는 놀이자의 구도 또한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닭 마스크의 환영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생산되는 즐거움이 가지는 본질적인 행위 원리의 진실을 시사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걸 좋아하니?" 즉, 주인공이 모르는 전화 속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결국 이 행위자들 모두가 그 명령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명령하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릴 수 있는 튜토리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이 게임은 좌우 스틱으로 조작된다. R 버튼을 눌러 때린다. 얼굴을 노려라! 우선 네가 누군가를 쓰러뜨렸으면 그를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너는 X 버튼을 누른다. 알겠나? R을 눌러 때려라! X를 눌러 끝내라! 내 말 알아듣겠나? 실수하지 말아라! 튜토리얼에서부터 <핫라인 마이애미>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살인 행위뿐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탑다운 형식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사람 형상을 조작해 또 다른 조그만 사람 형상들을 쏘고 때리고 찢어발기는 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이 게임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원인’은 우리가 이러한 가학 행위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즐거움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속편에서도 우리의 행위 원리에 대한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존재한다. <핫라인 마이애미 2>의 16번째 장, “사상자들 (Casualties)”에선 죽음이 거의 확정된 임무에 자신들의 부대원들을 보내게 된 “대령 (the Colonel)”이란 인물이 임무 전날 밤, 죽은 퓨마의 안면 피부를 벗겨 미간 부위에 피로 성조기를 그려 놓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쓰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게 보이나? ... 내 얼굴이 보이냐고? 이것이 내 진정한 본성(nature)이다! 보이지, 안 그래? 이게 나야! 이게 우리 모두란 말이다. 우린 동물이야! ... 부인할 길은 없어! 우리가 빌어먹을 동물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학살하거나 학살되도록 내보내고 있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우리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복종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거야. 파괴와 폭력... 이것들은 그저 우리 본성의 일부일 뿐이지.” 위의 대사를 말하는 “대령”이 퓨마라는 동물의 얼굴을 벗겨 마스크로 쓰고 미간에 피의 성조기를 그려 놓았던 것, 그리고 이 피의 성조기는 바로 청소부들이 암약하는 비밀 단체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령”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 (nature)의 의지와 공명하며 그 모든 것들을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갑작스레 왜 대령이 청소부들의 상징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개발자도 단 두 명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청소부들의 얼굴그래픽은 게임 개발자들 자신들의 얼굴을 픽셀로 캐리커쳐한 형상이다. 즉, 청소부들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페르소나인 것이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그들이 “누구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 밑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은 “독립”적인 작업자들이며 “모든 것을 우리끼리 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마치 이 게임을 제작한 두 명의 독립 개발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부심과 마주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부들의 대사를 통해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순전히 즐겁기 위해 창작 행위를 한 것이며, 그 어떤 누구의 명령이나 협박과 같은 외부적 조건 따위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장기 말”이라고 불렀던 것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조종하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개발자들도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를 갖고 놀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는 <핫라인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서 참이다. 게임은 항상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도전과제 그리고 R 버튼을 눌러 때리고 X 버튼을 눌러 마무리하는 조작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을 제공하고 그 명령의 가짓수가 곧 게임의 부피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게임의 명령을 플레이어가 따르게 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우선 첫 번째로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처럼 그저 재밌어서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조건 따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목소리에 그대로 따랐던 것은 그가 청소부들의 지시사항, 그러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자신의 명령이 플레이어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될지의 여부를 항상 즐거움만에 맡기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명령받은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도 제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강제와 협박 같은 외부 목적적 수단들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게임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건적이고 강제적인 명령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을 우리는 <핫라인 마이애미>의 ‘숨겨진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청소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특정 패스워드를 찾아 놓고 비밀 본부에 있는 컴퓨터에 해당 패스워드를 집어넣어야지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결말’을 보기 위한 조건을 만족한 뒤 청소부를 만나면 주인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청소부 A: 정신 나가...? 네가 깨달아야 하는 건 말이야- 청소부 B: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청소부 A: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지. 여기서 청소부들은 게임 바깥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조건 명령 방식, 협박에 대해 꽤 좋은 비평을 남기고 있다. 청소부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위에서 최근 게임에 대한 논의들이 그 목적성에 대한 변명으로 천착한다고 언급했던 정치 · 사회의 표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리라.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는 협박으로 행위의 원인 항을 강제로 채우는 법, 규범, 도덕, 국가 등은 청소부들의 대사 그대로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원칙”,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가 거세 협박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에게 습득되는 과정부터가 바로 “이 원칙”의 실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체계가 신경증 환자와 같은 모범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의 명령 방식이 플레이어를 향한 게임의 또 다른 명령 방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왜냐면 미리 말하건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러한 명령 방식들은 플레이어-행위자의 즐거움에 기반한 비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명령 이행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핫라인 마이애미>에서 “R을 눌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X를 눌러” 쓰러진 상대방의 머리를 밟아 으깨라는 명령에는 그 어떤 조건절도 선행하지 않지만, 게임은 때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의 조건절을 플레이어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협박은 HUD에 떠올려져 있는 ‘체력 바’와 같이 주인공의 죽음, 즉, ‘게임 오버’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태의 UI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명령들은 처음에 즉각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플레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UI의 대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당장 ‘죽음’이라는 협박이 가지는 급박함이 우선 게임에 몰입하기 이전까진 게임 외부의 경험적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게임 안의 현실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끊임없이 즐거움을 탐색하는 플레이어에게 저러한 협박은 그다지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하지는 못한다. 물론 체력을 채우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그 행위들 자체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지만, 이 시점에서 UI가 원래 가했던 협박의 조건절, ‘나를 채우지 않으면 주인공은 죽게 되고 너는 게임을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는 문구는 그 전과 같은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게임은 언제든지 다시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 오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저 죽기 전까지의 플레이 과정을 다시 돌려 플레이해야 한다는 일시적인 불편 정도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과 싸우는 것 자체 또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소위 ‘죽음’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강제하는 협박으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게임 속에서 일부러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한다. 체력이 바닥났으나 회복 수단까지 다 떨어졌을 경우, 스테이지를 거의 다 클리어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경우들에는 이제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가능성이 소진되어 더 이상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그저 빨리 죽고 다시 시작해 즐거움의 가능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죽는 행위 자체가 발생시키는 즐거움을 위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죽음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게임들, 그러니까 주인공이 죽을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워 일부러 그 가능한 모든 죽음의 시나리오들을 전부 실험해 보도록 만드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게임 오버’의 협박이 더더욱이나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특히 <데드 스페이스>, <사일런트 힐>, <바이오 하자드> 등의 호러 장르 게임들에선 괴물, 환경 등 주인공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각각이 저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죽음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새로운 위협 요소와 마주칠 때마다 이 요소는 주인공을 어떻게 죽이게 될 것인지를 실험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실재적 차원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단 한 번의 죽음이 곧 삶의 영구적인 끝을 의미하는데,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플레이어가 급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게임 속 현실에 몰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그렇다면 게임에서 조건 없는 즐거움의 명령이 조건적인 협박식의 명령보다 유효하다는 걸 현실에서의 행위 원리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적 차원에서도 이미 언제나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속 세계 자체에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이 실재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 보편적으로 게임들은 그 안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불러오기’ 혹은 ‘이어하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다시 주인공을 부활, ‘재생성 (respawn)’시키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바깥의 메뉴 영역에 국한되어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가정’한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예만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타나 제로>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이 속한 세계도 모두 주인공의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카타나 제로>에서 주인공은 ‘크로노스 (Chronos)’라는 이름의 마약을 투여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전투 상황, 즉, 주인공의 끝없는 죽음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들은 주인공의 계산 속 경우의 수들인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게임 내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직 주인공이 죽지 않고 모든 적을 처치한 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바로 그 경우의 수뿐일 테지만, 우리는 이 또한 허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니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면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에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은 전혀 무의미할 터이다. 2)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마치 일년처럼 느껴지”고 “모든 말이 길어지고, 모기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주인공 그 자신의 주관적 현실에선 그 모든 죽음의 경험들은 더욱 생생해질 여지도 없을 만큼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나 제로>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죽음은 주인공에게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로 아주 선명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핫라인 마이애미>를 포함해 아무리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 세계 안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자신조차 자신의 죽음에 무지하다 하더라도, 정작 플레이어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자신의 경험 안에서 플레이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주관적’ 실재에서 그 모든 죽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근본적인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내에서 명령되는 사항들을 플레이어가 이행하는 원리 중에서 조건절로 협박하는 명령보다 조건 없이 플레이어 자신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명령들이 언제나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면, 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놓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 1) 안티 오이디푸스, 547p. 2) 비극의 탄생, 99p.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The Resonant Samurai: Historical Accuracy versus Market Appeal
By now, the online backlash against the inclusion of Yasuke as one of two protagonists in the story has become somewhat infamous, if not tired, since outrage first erupted last year. Although the game had teased at the 2022 UbiForward as Codename Red, it wasn’t until the full reveal on May 15, 2024, with the cinematic trailer that the inclusion of Yasuke, as a co-protagonist, became clear. < Back The Resonant Samurai: Historical Accuracy versus Market Appeal 24 GG Vol. 25. 6. 10. ***이 글의 한국어 버전은 아래 URL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53c58c4-a26a-4e46-8aac-48c10227ca8b Introduction: Yasuke Enters the Franchise By now, the online backlash against the inclusion of Yasuke as one of two protagonists in the story has become somewhat infamous, if not tired, since outrage first erupted last year. Although the game had teased at the 2022 UbiForward as Codename Red [1] , it wasn’t until the full reveal on May 15, 2024, with the cinematic trailer that the inclusion of Yasuke, as a co-protagonist, became clear. [2] [3] For over two months, criticism swirled at design choices in both Western and Japanese circles, though the online discontent among segments of the more conservative Western audience specifically focused on the inclusion of Yasuke, [4] leading, among the many heated discussion threads, to harassment of members of the development team. On July 23rd, Ubisoft released a somewhat ambiguous statement about the context, backhandedly addressing global audiences by way of seemingly focusing on the Japanese Community, and reaffirming their commitment to overall authenticity . [5] * Figure 1: Yasuke as Protagonist This statement raises a number of concerns that articulate the controversy surrounding Yasuke, which taken at face value is about historical accuracy, but arguably has more to do with how this segment of the audience has been served by the franchise so far. As discussed by de Wildt and Aupers in a 2021 study focusing on the franchise overall and including dozens of interviews with former Ubisoft game directors and assorted senior developers, Assassin’s Creed overall privileges the marketability of any given setting. [6] That marketability is further contextualized by a audience that is disproportionately European and American (roughly 79% all of Ubisoft sales). [7] With that market in mind, Ubisoft has put to use a model they term the “marketing-brand-editorial burger,” where the core of the franchise must remain generally similar, while changing the sauce (the cultural setting) in order to draw in new or repeat clientele. [8] To that end, most of the franchise’s games have generally featured protagonists that are relatively uncomplicated to access for that core audience. For instance, Black Flag’ s Edward Kenway presents a European perspective into Nassau and Caribbean colonialism, while Assassin’s Creed II and Brotherhood engages with Ezio as a cultural insider in Renaissance Italy. [9] [10] [11] It also uses Ezio as a way to access the comparatively more distant Istanbul setting and culture in Revelations . [12] Even when protagonists are more complicated, as is the case for Connor Kenway in Assassin’s Creed III [13] and Adewale in Freedom Cry , [14] it is nonetheless the dominant European and American perspectives that orient the core structure of the games. [15] [16] So, why is that centering of the Western audience the case, and how does the controversy surrounding indicate breaks or continuities with this design trend? The answer, broadly, comes from a prioritizing of resonance, of expectations, above accuracy. The Question of Accuracy: Accuracy versus Expectations The question of historical accuracy in the Assassin’s Creed series, over its 18-year span, has been the subject of thousands of games journalism pieces, not to mention dozens of academic articles and book chapters. In early inroads, historical accuracy appears as a demand, essential for games to be taken seriously, as a pedagogical tool, an archaeological model or an account of events past. [17] This demand is draped over a number of design elements, such as the areas of the game included, in conjunction with the time period covered (along with the key events that the narrative focuses on). Perhaps most importantly, there is enduring concern and desire for the protagonists at the center of these games to match the historical period which audiences understand as a coherent whole. In other words, the setting, the story and the characters need to work in harmony, but whether that harmony adheres to historical truth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18] [19] When discussing historical accuracy, it would be useful to consider at what point is the media portrayal considered accurate. Is any deviation allowed? As Adam Chapman argues, there is a threshold where the game can be considered historically resonant, and that point is when individual players deem the historical aspects to match their pre-existing knowledge. [20] Evidently players tolerate deviation from historical fact as necessary to game adaptation in general, and especially in the context of Assassin’s Creed , where historical figures are repositioned as actors in secret conspiracies and ancient aliens plotlines. The fact that the franchise requires a genealogy of assassins and templars, in this case the Kakushiba Ikki (League of the Hidden) and the Shinbakufu (True Shogunate). The distortions necessary to make the armature of the franchise fit with the real persons that the game adapts are in most cases no more or less intensive than the depth provided to Yasuke. This level of adaptation or distortion is also in line with the degree of departure players can find in Odyssey [21] , for instance, with the portrayals of Sokrates and Aspasia of Miletus, [22] or Origins ’ Cleopatra. [23] The games are all, to put it bluntly, historical fiction, rather than history, an approach detailed by Ubisoft itself. [24] As they explain in their 2025 open letter, Yasuke presented an “ideal candidate” for the series formula that incorporates “fantasy elements” and that his “unique and mysterious life” is considered by the company to be a match for franchise patterns. [25] The idea of Yasuke as a candidate for cultural representation is in keeping with de Wildt and Aupers mentioned earlier, where marketing dominates broader choices, and where any narrative or representational choice “defers to the market and the largest possible audience.” [26] Franchise lead Jean Guesdon had previously spoken about tapping into popular zeitgeist to buttress franchise sales, so relying on Yasuke, a figure that has become increasingly visible in popular media over the past two decades makes sense. [27] Unlike Sucker Punch’s Ghost of Tsushima , [28] from which Shadows borrows much of its visual language and colour scheme, Assassin’s Creed provide Yasuke a proxy for audiences, not as a man of colour, but as an outsider to Japan.Yasuke is legitimate enough as a choice, given his historic presence, yet, like players, experience Japan as a foreigner becoming gradually integrated. [29] In other words, the game’s internal structure is positioned to open with, and favor an outsider perspective, over one of the other notable candidates audiences can imagine, including notable samurai like Musashi Miyamoto or Sasaki Kojiro. * Figure 2: Yasuke Criticized for Use of nanban (European) concepts in the context of Japanese warfare. This tension, between what a game company considers an ideal candidate, and what serves historical accuracy most, has been the subject of research over the past few years. [30] In my previous work on the subject, I locate this decision space as shaped by the tension between representation and identification. As film scholar Charles Acland notes, with respect to cinema, the work of identification is complicated and requires exiting one’s own reality to inhabit the specific circumstances of another person, in another place and time. [31] Identification, on the other hand, provides protagonists and perspectives ready-made for individuals to absorb into their experiential frame. This form of media production is positioned to produce the “that resonates with me” reaction, and has been the subject of academic critique concerning Assassin’s Creed for the better part of the last decade. So far, installments have been positioned to always provide that kind of easy identification, if not in main protagonists, then at least in circumstances and ideological positions. Yasuke, in that vein, presents a particular issue. His perspective provides an outside-in look at feudal Japan, but it also bucks against the generally empowering positions that series protagonists have enjoyed. Yasuke’s inclusion seems in itself revolutionary and novel, but as scholar Kishonna Gray noted in the case of Adéwalé in Haiti, there is an echo of white European and American social positions within the very framework of the game. [32] Even when the characters are non-white, their social positions in the game privilege the presumed Euro-American audience mentioned above. In Shadows , Yasuke is not gated from spaces any more than the game’s other protagonist, Naoe, is. The game’s fiction smooths out the creases in what would otherwise be a presumably more confronting experience. Then, if the game resonating with audiences is the primary goal, the game’s choice to platform Yasuke presents quite logically, with the exception that the audience being favored is not the same audience that has been favored in the past decade. To put it bluntly, the racial intolerance evident in Yasuke’s characterization as a “DEI hire” showcases as barrier in audiences identification with a man of colour, more than a rigorous analysis of whether that character’s story is accurate, which is already difficult to claim for any Assassin’s Creed protagonist in good faith. [33] The backlash, at least in the West, has clearly been centered on race and gender, while the Japanese response has certainly been more tempered, and focused on how players are allowed to damage holy sites. The subsequent question that arises is whether or not this entire outrage, as visible as it has been, represents the whole of the consumer base in the West, or rather a specific subset of consumers. The Payoff: Yasuke as Commodity Whether or not reception to Yasuke has been hot or cold is difficult to definitely weigh in on. How do we define success? Is it based on the sentiment of a vocal segment of the audience, or do we prioritize something closer to an international audience reception? Do we look at critical reception, and do we look in a vacuum or in the context of how recent installments have been received? Perhaps the most representative forum for critical and audience reception remains Metacritic, despite concerted efforts to review bomb the title. [34] In fact, when comparing the open-world installments, the pattern is relatively stable. Critics have Shadows at 81, compared to Valhalla ’s 80, Odyssey ’s 83, and Origins ’ 81. Audiences, even keeping in mind a greater proportion of disproportionately negative reviews, have Shadows at 62, compared to Valhalla ’s 60, Odyssey ’s 68, and Origins ’ 73. Critical consensus seems to be that the game is qualitatively in line with previous installments, and for audiences seems a slight improvement over the previous title. Where it does depart is in Shadows ’ higher proportion of extremely low scores, which may be indicative of review bombing. Metacritic, like any review aggregator, will overrepresent audiences that are already invested enough to log on and review, but the consistency in scores over time indicates relative stability between titles at a broader level. * Figure 3: Review Score Aggregates for all Open-World AC Titles (Mirage Omitted). Surely then, the outrage professed against Yasuke was equally felt in terms of sales, which would at least provide an industrial indication that the game was boycotted or sold less well. In actuality, Shadows boasts the second-highest day one sales for the franchise, behind Valhalla , which Ubisoft attributes to the “perfect storm” of conditions during the pandemic. [35] Longer tail analytics show a “modest” sales record of roughly 1.7M copies sold on Playstation 5 alone (Alinea, 2025). [36] So, the picture is somewhat murky, given that we won’t have the long-tail data for a while yet. Compared to Odyssey’s roughly 2M sales in the first month, as well as keeping in mind the pressures on discretionary expenses in the current economic climate, the game is not the historic success of yore, but it’s certainly still successful. Conclusion: It was Never about Accuracy The academic response, as always, will take a longer while to cement, as qualitative studies and criticism goes through the comparatively longer publication cycle. It is my sense, given the title’s consistency within franchise patterns, that academic consensus will broadly settle where it has for the past decade: that Shadows is a relatively safe market bet, with serviceable characters and the core formula unchanged. It is, in many ways, the same Assassin’s Creed we’ve come to know since 2007, and more specifically since the series’ open-world shift in 2017. Within that framework 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al response to the game is novel, as critiques of desecration of ritual sites has generally been confined to academic critiques, rather than the state. [37] [38] In fact, the homage paid to the series at the Paris Olympics for Ubisoft’s assistance with the Notre Dame reconstruction signals a significant gap in how Western states interact with the company’s cultural products. Likewise, the Yasuke controversy, which seems to have lost steam since last year, has faded away into the series’ tenuous relationship with race and gender across many of its installments. It is nonetheless interesting to consider which way audience sentiment slices. Here, Yasuke was called out as corporate pandering to modern sensibilities and audience demand, yet that was not so much the case when Odyssey ’s Alexios was provided as a secondary protagonist for players to enjoy, or when company scandals revealed that Aya was intended as the main character of Origins , despite the release featuring almost exclusively Bayek. The audience’s rigidity regarding accuracy is always one that has been shaped by personal taste, and if the issue was really the accuracy of the character, we’d have had similarly caustic debates about many titles in the series. [1] Ubisoft, dir. 2022. Ubisoft Forward: Official Livestream - September 2022 | #UbiForward . https://www.youtube.com/watch?v=rvV4ZBx6_bo . [2] Ubisoft, dir.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Official World Premiere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vovkzbtYBC8 . [3]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Launches November 15, Features Dual Protagonists in Feudal Japan.” https://news.ubisoft.com/en-ca/article/2LH4Ael4X1TlNJY3B3aYg5/assassins-creed-shadows-launches-november-15-features-dual-protagonists-in-feudal-japan . [4] Walker, John. 2024. “Ubisoft Issues Weird Statement On Assassin’s Creed Shadows Controversies.” Kotaku, July 23, 2024. https://kotaku.com/assassins-creed-shadows-ubisoft-statement-yasuke-1851602337 . [5]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 An Update for the Japanese Community.” https://news.ubisoft.com/en-us/article/7dWPCtVQU7udC0KkPFOyXh/assassins-creed-shadows-an-update-for-the-japanese-community . [6] Wildt, Lars de, and Stef Aupers. 2019. “Playing the Other: Role-Playing Religion in Videogames.”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22 (5–6): 867–84. https://doi.org/10.1177/1367549418790454 . [7] Ibid, 4. [8] Ibid, 11-12. [9]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IV: Black Flag.” [10] Ubisoft. 2009. “Assassin’s Creed II.” 2009. Ubisoft. [11] Ubisoft. 2010. “Assassin’s Creed: Brotherhood.” [12] Ubisoft. 2011. “Assassin’s Creed: Revelations.” [13]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14]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Freedom Cry.” [15] Shaw, Adrienne. 2015. “The Tyranny of Realism: Historical Accuracy and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Assassin’s Creed III.” Loading... 9 (14). https://journals.sfu.ca/loading/index.php/loading/article/view/157 . [16] Zanescu, Andrei. 2023. “Blockbuster Resonance in Games: How Assassin’s Creed and Magic: The Gathering Simulate Classical Antiquity.” Phd, Concordia University. https://spectrum.library.concordia.ca/id/eprint/992024/ . [17] Ibid, 17-57. [18] de Wildt and Aupers, 2019. [19] Westin, Jonathan, and Ragnar Hedlund. 2016. “Polychronia – Negotiating the Popular Representation of a Common Past in Assassin’s Creed.” Journal of Gaming & Virtual Worlds 8 (March):3–20. https://doi.org/10.1386/jgvw.8.1.3_1 . [20] Chapman, Adam. 2016. Digital Games as History: How Videogames Represent the Past and Offer Access to Historical Practice. 1st ed. New York: Routledge. [21] Ubisoft. 2018. “Assassin’s Creed Odyssey.” [22] Ubisoft North America, dir. 2017. Assassin’s Creed Origins: Developer Q&A - History & Setting | Ubisoft [NA]. https://www.youtube.com/watch?v=FK43sE36rdo . [23] Ubisoft. 2017. “Assassin’s Creed Origins.” [24]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 An Update for the Japanese Community.” https://news.ubisoft.com/en-us/article/7dWPCtVQU7udC0KkPFOyXh/assassins-creed-shadows-an-update-for-the-japanese-community . [25] Ibidem. [26] De Wildt and Aupers, 13. [27] Zanescu, 2023. [28] Fox, Nate. 2020. “Ghost of Tsushima.” Sucker Punch Productions. [29] DJangi, Parissa. 2025. “The Real History of Yasuke, Japan’s First Black Samurai.” History.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history/article/the-real-history-of-yasuke-japans-first-black-samurai . [30] Eklund, Lina, Björn Sjöblom, and Patrick Prax. 2019. “Lost in Translation: Video Games Becoming Cultural Heritage?” Cultural Sociology 13 (4): 444. [31] Acland, Charles R. 2020. American Blockbuster: Movies, Technology, and Wonder. 1 online resource (xi, 388 pages) : illustrations (black and white) vols. Sign, Storage, Transmiss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1515/9781478012160 . [32] Gray, Kishonna L. 2018. “POWER IN THE VISUAL: EXAMINING NARRATIVES OF CONTROLLING BLACK BODIES IN CONTEMPORARY GAMING.” Velvet Light Trap, no. 81 (March), 62–67. [33] Mercante, Alyssa. 2024. “This Was Never About Anything Other Than Hate.” Kotaku. July 23, 2024. https://kotaku.com/this-was-never-about-anything-other-than-hate-1851602820 . [34] Wolens, Joshua. 2025. “Ubisoft Says Don’t Compare Assassin’s Creed Shadows’ Success to Valhalla: The Latter Launched in Covid’s ‘perfect Storm’ and Feedback on Platforms ‘Less Affected by Review Bombing’ Is Stellar.” PC Gamer, March 25, 2025. https://www.pcgamer.com/games/assassins-creed/ubisoft-says-dont-compare-assassins-creed-shadows-success-to-valhalla-the-latter-launched-in-covids-perfect-storm-and-feedback-on-platforms-less-affected-by-review-bombing-is-stellar/ . [35] Ibidem. [36] Alinea. 2025. “Xbox Dominated PlayStation’s Top 10 Games by Copies Sold in April, as Forza Horizon 5 Overtakes 1.4 Million Copies on PS5.” Alinea. https://alineaanalytics.com/blog/playstation_april_2025/ . [37] Small, Zachary. 2024. “The Fight Over a Black Samurai in Assassin’s Creed Shadows.” The New York Times, September 11, 2024, sec. Arts. https://www.nytimes.com/2024/09/11/arts/assassins-creed-shadows-yasuke-samurai-japan.html . [38] Murray, Conor. n.d. “New ‘Assassin’s Creed’ Releases To Strong Reviews—But Sparks Anti-’Woke’ Backlash And Roils Japanese Government.” Forbes. Accessed May 30, 2025. https://www.forbes.com/sites/conormurray/2025/03/21/new-assassins-creed-releases-to-strong-reviews-but-sparks-anti-woke-backlash-and-roils-japanese-government/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Andrei Zanescu Andrei Zanescu is a postdoctoral fellow and part-time faculty member in Communication Studies, and Anthropology & Sociology, at Concordia University, in Montreal, Canada. He specializes in AAA studio cultural adaptation practices involving resonance as a corporate strategy, as well as the legitimation of games through the formation of awards bodies tied to film and television cultural capital. He regularly publishes game and platform studies concerning a range of games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 DOTA 2) and awards bodies, and in New Media & Society (2021), Games & Culture (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 (2021) and Convergence (Forthcoming). He is also a co-author of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 (MIT Press, 2025).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콩코르디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와 인류학·사회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 및 시간강사로 재직 중이다. AAA 게임 스튜디오의 문화적 적응 관행에서 '공명(resonance)'을 기업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영화 및 텔레비전의 문화 자본과 연결된 시상 기관 형성을 통한 게임의 정당화 과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DOTA 2 등 다양한 게임과 시상 기관에 관한 게임 및 플랫폼 연구를 활발히 발표하고 있으며, 《New Media & Society》(2021), 《Games & Culture》(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2021), 《Convergence》등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MIT Press, 2025)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19 GG Vol. 24. 8. 10.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디지털게임에 이르면 호러는 한층 더 강력해집니다. 게임은 플레이어를 공포의 현장 한가운데에 밀어넣기 때문에 많은 경우 게임에서의 공포는 관조가 아닌 개입과 참여를 통해 전달됩니다. 무서운 것을 보는 것과, 직접 무서운 일을 일으키거나 맞닥뜨리는 것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역대급 폭염이 덮친 2024년 8월 GG의 탐색은 호러를 향합니다. 후발 매체로서 디지털게임은 공포라는 감정을 자신이 매우 잘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많은 기존 매체들의 문법을 학습해 왔고, 게임 특유의 호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적지 않은 수로 쏟아지는 공포 게임들이 이 실험과정의 활발함을 보여주는 단서들일 것입니다. 한켠에서는 무서워서 공포 게임을 손도 못 대는(저를 포함합니다) 사람부터, 호러 게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상 붙잡고 있는 마니아까지의 다양함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게임에서의 호러가 어떤 의미인지를 폭염 속에서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이번 19호를 기점으로 GG는 만 3년을 채웠습니다. 게임에 관한,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가 나름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끊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 디지털게임을 무겁게 이야기하는 일은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GG는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걸어온 길보다 더 머나먼 앞날의 길에도 독자분들과 함께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는 9월 초까지 진행되는 게임비평공모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 Back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07 GG Vol. 22. 8. 10. 달리의 이미지들 그레이엄 하먼의 책 〈예술과 객체〉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여기서 ‘환언’(환원과 헷갈릴 수 있는)이라는 개념이 많이 낯설다면 원문에 있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를 가져오는 것이 좀 더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저자는 패러프레이즈의 가능 여부에 따라 지식과 예술이 구분되는 경계선을 긋는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당시에는 조금 뜬금없게도 OpenAI 사(社)의 이미지 생성 AI 시스템인 달리(DALL・E)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었다. 그것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유저가 간단한 설명(예를 들어, 말위에 탄 우주비행사 같은)을 제시하면, 달리는 조금씩 스타일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 설명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 중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바꿔도 제시된 설명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히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언제나 그것의 묘사나 혹은 분석만으로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같은 설명에 기반한 이미지들이라고 해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온전하게 ‘설명’해낼 수는 없다. 다만 달리의 이미지들에는 (James Bridle이 〈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 2) 에서 날카롭게 펼쳐 보이듯이) 유튜브의 보상 알고리즘에 의해 추동된 채로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조금씩 변조되지만 여전히 똑같은 주제와 전개 과정, 캐릭터를 공유하는 수많은 영상들과 유사한 종류의 스산함이 묻어나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 달리(DALL・E)의 이미지들(왼쪽) 그리고 챗봇 플라밍고와의 대화(오른쪽)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 트윗 3) 을 인용한 김성완 인공지능 연구자의 페이스북 글 4) 이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자인 Antoine Miech는 그들이 새로 개발한 AI 챗봇 플라밍고(Flamingo)에게 달리 2(2022년에 새롭게 등장한 달리의 새 버전)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여준 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냐고 묻는다. 가짜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럼 이 가짜 사진을 만들어낸 기술은 무엇일까 라고 다시 묻는다. 플라밍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a GAN to create this image.”(누군가 GA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이를 인용한 김 연구원은 “물론 DALL-E 2은 GAN 모델이 아니라 최신의 Diffusion 모델로 이미지를 생성한 거지만 이정도면 최고의 답변입니다.” 라고 코멘트를 덧붙였다.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고 또 대단한 성취가 맞지만 여기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바로 플라밍고가 ‘얼추’ 맞췄다는 점에 있다. 만약 플라밍고가 ‘누군가 Diffusio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라고 확고하게 대답했다면 완벽한 답변이었겠지만 나는 별달리 흥미를 못 느꼈을테고, ‘스카이넷이 멀지 않았구나!’ 같은 부질 없는 한탄이나 하고 앉았을 터였다. 물론 Antoine 가 직접 이어지는 트윗에서 밝힌 것처럼 플라밍고를 훈련시킬 당시에 달리 2에 대한 웹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러한 모범적인 답변은 불가능했다. 즉, 플라밍고는 달리 2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도 제공된 사진이 (Diffusio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머신러닝 테크닉(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것을 ‘추론’해 낸 것이다. 그 추론의 과정은 연구자들에게도 대부분 블랙박스에 가깝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AI 챗봇은 (인간의 시지각은 인지 못하는) 딥러닝으로 구성된 이미지의 정체를 수월하게 알아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실제 인물 사진들과 This Person Does Not Exist 5) 같은 사이트에서 GAN 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랜덤하게 섞어서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 둘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플라밍고라면 앞서 달리의 이미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된’ 영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나와는 다르게, 혹시 플라밍고는 달리의 이미지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 소름끼치는 동질성을 꽤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플라밍고의 관점에서는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DALL・E)의 이미지들은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 지점에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들, 즉 지식의 범주를 좀 더 넓혀 볼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뒤 혹은 빠르면 내년에는 동영상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플라밍고 2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 때 유행하게 될 어떤 오픈월드 게임의 인게임 플레이 영상을 이 놀라운 챗봇에게 보여준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의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Ubisoft's open-world formula to create this game.”(누군가 유비식 오픈월드 게임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Ludonarrative dissonance 어게인? 게임 역시 지식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지식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의 디스커버리 투어 모드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전들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닐 수 있으면 진정한 지식의 힘이 비로소 발현되는 것인가.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경우처럼 날이 추우면 말의 고환이 수축한다는 식으로 실제 동물들의 행동 패턴과 생리적인 과정들을 게임 속에서 정밀하게 재현하면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지식인가. 15세기 초반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 지방)내에 프라하 인근 지역을 마치 스캔해서 옮긴 듯한 디테일과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킹덤 컴: 딜리버런스〉는 역사 지식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질문들이 그 모든 ‘당연한’ 답변들에 의해 집어 삼켜지기 전에 ludonarrative dissonance(이하 루도)의 샛길로 잠시 빠져 보자. '게임내러티브 부조화'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루도를 둘러싼 논의는 한 블로그 글 6) 에서 시작되었다. 게임개발자 Clinton Hocking은 〈바이오쇼크〉를 플레이 한 뒤 자신이 느낀 어떤 불편한 감각을 전달해 줄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단어가 좀 어려워 보여서 그렇지 이 개념은 사실 꽤 직관적이다.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내러티브가 서로 심하게 상충될 경우 몰입감이 완전히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두 내러티브의 간극을 루도라고 정의한다. 민감한 스포일러의 이유로 바이오쇼크는 제외하고 〈배틀필드 1〉의 예를 들어보겠다.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이 FPS 게임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묵직한 반전(反戰)의 모티프를 전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려한 그래픽으로 구현된 그 참상들을 ‘감상’하면서 잠시 간담이 서늘할 수는 있겠지만 총을 쏠 때마다 느껴지는 반동과 탱크를 직접 운영하는 감각, 폭탄들이 떨어져서 폭발하는 떨림 같은 촉각적인 경험에 중독되는 순간 그 반전(反戰)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가 ‘손맛’에 취한 채 조건반사적으로 달성하게 되는 일종의 기이한 성취로 탈바꿈한다. 폴리곤의 비교적 최근 칼럼 7) 에서도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잊을만 하면 다시 등장하는 오래된 떡밥인 루도는 블록버스터(트리플A) 게임의 산업적인 측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실재하는’ 두 내러티브의 부조화인 루도는 게임 고유의 현상이며, 고쳐야 할 문제라는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루도가 없는 게임이 가능할까. 바꿔 말해서 두 개의 내러티브가 완벽히 매끈하게 엮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내러티브만을 가지게 되는 이상적인(?) 상황을 연출해 낸 게임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테트리스〉와 같은 고전 게임이 떠오를 수 있다. 다만 테트리스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게임플레이를 제외한 내러티브를 아예 배제한 경우에 가깝다.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이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몇몇 고전게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비록 장식에 불과할지라도) 공식적인 내러티브가 평행선을 달리는 구조를 채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사가 아무리 게임플레이를 내러티브에 일치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어들의 변칙성은 때때로 이러한 노력을 쉽게 무력화시킨다. 유튜브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스피드런(speedrun) 영상이 대표적이다. 문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버그마저 초월해 버리고) 〈엘든링〉을 7분 안쪽으로 클리어 해버리는 영상 8) 만큼 루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인터넷의 수많은 자생적인 커뮤니티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드(mod)들은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모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베데스다의 게임 중 하나인 〈폴아웃 4〉를 살펴 보자. 인벤토리의 무게 제한을 해제해주는 모드는 거의 ‘바닐라’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매우 사소한 변형이지만, 그것이 내러티브에 끼치는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무게 제한이 없어진 플레이어는 더 이상 보급과 거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폴아웃 4〉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맵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정착지 건설에 매진할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인벤토리의 용량을 늘려주는 캐릭터 퍽(perk)을 찍을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성장 역시 달라진다. 가장 간단한 모드의 파급력이 이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러티브 사이의 간극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모더(modder)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루도를 특정 게임들이 때때로 맞닥뜨리는 문제일 뿐이라고 납작하게 눌러 놓은 채 지나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그것은 차라리 현대의 디지털 게임이 가지는 핵심적인 특성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불편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루도가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라면 우리(게이머)는 어떻게 여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일까? 게이머들은 많은 경우 특정한 논리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 실험가들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역시 사례와 함께 중첩시켜 보자.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통칭 야숨)에서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최소한의 조건만을 갖추고, 하이랄 성으로 곧장 ‘날아 가서’ (실력이 받쳐 준다면) 가논을 처단하고 게임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내버릴 수 있다. 혹은 정확히 그 반대로 할 수도 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가논과 그 짐승을 온 힘을 다해서 봉인하고 있는 젤다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링크 앞에 펼쳐진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껏 누비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게임이 바로 그 방향으로 게이머들을 은근하게 유도한다는 점이다. 물론 기억을 되찾고 재앙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앞의 설산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신전은 궁금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혹은 여관 주인을 짝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메뚜기를 10마리 잡아보자는 등. 그 광대한 세계가 끊임없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한다. 마치 게임 스스로가 루도를 원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야숨은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내용이 아무튼 그 매체를 가리키거나 암시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9) 는 그린버그식 정의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방가르드 게임일지도 모른다. ∗ 뇌전의 검을 들고 잔디를 깎는 링크 위와 같은 샌드박스적인 펼쳐짐은 게임 내에서 매우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물리적인 상호작용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실험’에 몰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들을 실제로 발과 손을 ‘디딘 채’ 올라가 볼 수 있고, 게임 내의 대부분의 요소들과 촉각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철로 된 무기는 비오는 날 떨어지는 번개에 취약하며, 횃불을 들고 들판에 가면 들풀들이 탄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세계는 게이머들로 하여금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토록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에서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중요한 맥락으로 부상한다. 이 세계는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같은 세계는 아니다. 마치 장르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암묵적인 장치들이 핍진성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기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의 내러티브는 특정한 시스템만의 논리에 장르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앞서 봤듯이 우리는 야숨에서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바로 그 모든 행동들의 가능성을 떠받치고 있는 하이랄의 대지는 가논의 재앙이 100년 간 유예된 세계이다. 어딜 가든 우리는 계속해서 그 흔적들과 마주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애써 무시한 채 마치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링크(게이머)가 그 앞의 설산을 오를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캐릭터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은 어차피 그저 수많은 폴리곤 덩어리일 뿐 아닌가. 백지 상태에서 ‘모든 것은 가능하고, 뭐든지 해도 된다’ 라는 말은 마치 자유처럼 들리지만 사실 정확히 그 반대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게이머들은 내러티브라는 관습화된 약속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그 세계에서 마음껏 실험할 자유를 얻는다. 그에 따라 게임은 게이머들이 내러티브라는 조건 아래에서 주어진 시스템의 한계를 가늠해 보는 지속적인 실험 과정으로 변모한다. 재현성 위기는 기회다 ‘게임은 지식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게임은 실험 과정일 수 있다’ 라는 답변은 대략 근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실험을 하다 보면 그게 지식이 되는 것 아닌가. 미안하지만 실험과 지식 사이의 그 (빌어먹을) ‘간극’은 생각보다 심대하다. 실험에서 지식으로 이르는 과정을 간단히 상기 해보자. 자신이 세운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 중 하나가 실험이고, 물론 실험 역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을 검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실험이 제대로 설계되었다면 그 실험을 누가 하든, 어디서 하든 혹은 몇 번을 반복하든 간에 (모든 변인이 적절하게 통제된다는 가정 하에서) 도출되는 값은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 시리즈에서 보통 헐벗고 다니는 고인물 ‘망자’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들이 마치 미래에서 온 것처럼 가장 최적의 움직임으로 길 위에 잡몹들을 빠르게 압살해 버리고, 보스마저 한 대도 맞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된 수많은 실험들(YOU DIED)을 통해서 이 실험의 결과값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은 리듬 게임이라는 농담 10) 도 바로 이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그런데 만약 플레이어들이 ‘YOU DIED’ 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맵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질 뿐 아니라 잡몹들의 출현 위치와 등장하는 숫자도 랜덤으로 변하고, 결정적으로 보스의 공격 패턴마저 전혀 예측 불가능하게 달라진다면 어떨까. 제 아무리 고일대로 고인 망자들이라도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다닐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실제 랩에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던 중에 일어난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실험은 엉터리이고, 실험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가설은 지식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일이 유명하고 권위 있는 저널에 이미 게재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실험에서 벌어졌다면? 그것도 한 두 건이 아니라면? 스캔들을 넘어서 위기 상황이라고 부를 만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실제로 그 일들이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재현성 위기(The replication crisis)라고 부른다. 네이쳐(Nature)지에서 1,576명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 조사를 소개하는 2016년 아티클 11) 에 따르면 그들 중 70% 이상이 다른 연구자가 진행한 연구의 실험들을 재현(반복)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대답했다.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직접 한 실험들을 재현하는데도 실패했다. 재현성 위기가 단순히 자연 과학 영역을 넘어서 (특히 이 문제가 처음 대두된 영역이 심리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지식계 전반에 던진 충격파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이 현상을 게임과 겹쳐 보면 심각한 위기로 가득 찬 큰 길 옆에 또 다른 샛길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다크 소울〉 시리즈가 충실히 이행된 실험의 메타포로 기능했듯이, 우리는 재현성 위기를 반영하는 게임들을 탐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는 타임루프물만큼 재현성 위기를 제대로(?) 겪고 있는 게임도 없어 보인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이 강제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 폴리곤의 〈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12) 영상에서 올바르게 짚어내듯이 모든 게임은 근본적으로 타임루프물이다. (“All video games are implicitly time loops.”) 왜냐하면 캐릭터가 죽더라도 우리는 세이브를 통해서 (세이브가 없는 로그라이크 같은 게임이라면 게임오버를 통해서) 언제든 다시 특정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다고 다시 고쳐 말해야 할까. 그 결론으로 시급히 달려가기 전에 잠시 게임에서 반복이 지니는 모호함을 상기 해보자. 우리는 게임의 소프트웨어적 특성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함에 있어서 자잘한 반복적인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특정한 버튼에 할당된 특정한 행위들을 하는 것의 조합들이 매우 다양한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게임 개발자들은 플레이어를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반복적인 조합을 피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세심하게 디자인한다. 이는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또 어쩌면 당연하게도) 노골적인 타임루프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반복되는 플레이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절차적으로 생성되는(procedurally generated) 레벨을 도입한 〈리터널〉, 계속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더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으로 유도하는 〈포가튼 시티〉, 같은 지역이라도 어떤 시간대인지에 따라 분위기와 적들의 규모와 위치가 변하는 〈데스루프〉 등. 결과적으로 우리는 대놓고 타임루프를 표방하는 게임들 내에서 오히려 반복적인 ‘실험’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타임루프물이 아닌 게임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잇 테이크 투〉는 마치 뷔페처럼 모든 스테이지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극도로 잘 조율된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그뿐 아니라 역시 극도로 타이밍이 좋은 자동 세이브 기능 덕에 플레이 중 캐릭터가 죽더라도 이미 지나쳐 온 과정을 반복하는 행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다. 이제는 반복을 회피하려는 강박이 없으며, 그 반복의 결과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게임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게 과연 ‘재미있는’ 게임일까. 나는 당연히 그런 게임들은 존재하며 심지어 끝내주게 재미있는 것도 있다고 주장할 참이다. 그 중 하나가 〈프레이〉다. 〈프레이〉가 특히 훌륭하게(?)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은 이 게임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머시브 심(Immersive Sim)이라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한 야숨과 폴아웃 등도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 우선의 플레이 스타일로 몰입형 시뮬레이션적인 특징을 공유하지만 오픈 월드라는 형식을 경유해서 그것들을 마치 빵에 잼 바르듯이 얇고 넓게 펼쳐 놓는다면, 〈프레이〉는 ‘탈로스-1’ 이라는 우주 정거장 하나만을 배경으로 삼는 대신 해상도를 극적으로 높인다. ∗ 우주에서 바라 본 탈로스-1 스테이션 예를 들어, 나는 플레이 하던 도중 잠긴 문으로 막힌 공간을 발견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다만 촘촘한 창살 사이로 내부 공간을 엿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안에는 문 옆에 조그만한 버튼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장난감 석궁으로 좁은 창살 사이를 조준해서 그 버튼을 맞추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공간에서 키카드를 입수할 수 있었다면 그냥 그 키카드로 문을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힘이 충분했다면 그 공간 뒤쪽에 장애물들을 치우고 그 공간으로 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 안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관건이 되는 것은 게임의 물리엔진을 위배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이든 허용되며, 스크립트로 짜여진 공식적인 루트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아주 작은 버튼 같은) 꽤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논리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이 특성은 제한적인 공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이 게임의 레벨 디자인과 결합하며 이상적인 실험 환경을 구축한다. 여기서 반복되는 실험들의 제각기 다른 결과값들은 모두 ‘정당’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즉, 이 실험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은 예술이 아니며, 지식이 되는 것에는 실패한 실험 과정이라는 시나리오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인기가 있는 가능성도 아닐 듯하다. 게임은 예술 혹은 문화, 하다못해 지식이라도 ‘되어야만’ 하는 시대에 무슨 생뚱맞고 처량하게 실패한 실험 운운인가. 그런데 어쩌면 바로 실험이 ‘실패’한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게임 = 예술, 지식, 문화’ 와 같은 (완벽하게) 숨 막히는 동어반복적 회로를 잠시라도 차단하고 완전히 다른 회로를 돌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게임이 당위적으로 스스로를 정의/선언할 필요가 없는 회로를 말이다. 〈포탈 2〉의 그 모든 ‘실험’들이 스펙타클하게 실패한 이후 글라도스(GLaDOS)는 마침내 골칫덩이 실험체인 첼(플레이어)을 바깥 세상으로 놓아준다. 특유의 위트와 미묘한 슬픔이 뒤섞인 그녀의 작별인사 13) 는 마치 기이한 예언이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어떤 가능성을 예비한다. Go make some new disaster (가서 새로운 사고를 쳐) That's what I'm counting on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You're someone else's problem (너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니까) (I used to want you dead but) (예전에는 네가 죽기를 원했는데) Now I only want you gone (이제는 그냥 너가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1)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90-91. 2) James Bridle,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Medium, 2017.11.7. medium.com/@jamesbridle/something-is-wrong-on-the-internet-c39c471271d2 3) Antoine Miech, Twitter, 2022.5.3. twitter.com/antoine77340/status/1521218333412139009 4) 김성완, Facebook, 2022.5.7. facebook.com/story.php?story_fbid=7748085815216489&id=100000454416270 5) https://this-person-does-not-exist.com/en 6) Clinton Hocking,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Typepad, 2007.10.7. clicknothing.typepad.com/click_nothing/2007/10/ludonarrative-d.html 7) Chris Plante, “The Last of Us 2 epitomizes one of gaming’s longest debates” Polygon, 2020.6.26. polygon.com/2020/6/26/21304642/the-last-of-us-2-violence 8) Distortion2, “Elden Ring Any% Unrestricted Speedrun in 6:59 (WORLDS FIRST SUB 7 MINUTES)” Youtube, 2022.4.12. youtube.com/watch?v=XuUEk6e1LOE 9)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230. 10) “[영상] 다크소울은 리듬게임이다.” 루리웹, 2021.9.16. 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90253 11) Monya Baker, “1,500 scientists lift the lid on reproducibility” Nature, 2016.5.25. nature.com/articles/533452a 12) Polygon,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Youtube, 2022.1.29. youtube.com/watch?v=QWEVGbVoxQ4 13) TheMediaCows, “Portal 2: End Credits Song 'Want You Gone' by Jonathan Coulton [1080p HD] ” Youtube, 2011.4.19. youtube.com/watch?v=dVVZaZ8yO6o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 Back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08 GG Vol. 22. 10. 10.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10%의 게임 중 단 1% 만이 이른바 성공한 게임의 반열에 들어간다 - 개인 창작이나 인디 게임을 제외하고도 그렇다는 가정이다. 「피, 땀, 리셋」 (원제: Press Reset: Ruin and Recovery in the Video Game Industry)는 바늘구멍 같은 확률을 뚫고 성공한 게임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황망하게 망한 게임 개발 스튜디오와 이후에 남은 개발자들의 운명 을 다룬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게임 제작 스튜디오는 세상에 빛을 보지도 못한 38 스튜디오(38 Studios)의 프로젝트 코페르니쿠스(Project Copernicus)부터, 에픽 미키(Epic Mickey)나,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 시리즈 처럼 상업, 비평 양쪽의 매우 준수한 성적을 낸 작품을 만든 스튜디오에 관한 사례부터, 다수의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 수상을 이뤄내고 1,10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한 바이오 쇼크 인피니트(Bioshock Infinite)를 만들고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스튜디오, 이레셔널 게임즈(Irrational Games)의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장 처음 다뤄지는 비디오 게임 디자인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워렌 스펙터(Warren Spector)의 사례는 비디오 게임 산업의 이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는 속편 제작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성공한 작품을 완성해냈고 모 회사인 디즈니 인터렉티브 스튜디오(Disney Interactive Studios)의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성과를 인정 받는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 산업의 미래를 잘못 예단한 여타 비전문적인 경영진에 의해 결국 자신의 스튜디오를 폐쇄당한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던 2013년의 전후는 모바일 게임의 중흥으로 인해 비디오 게임 콘솔(Video Game Console) 플랫폼 산업은 급격히 쇠퇴할 것이라는 여러 경제 분석가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시기였다. 워렌 스펙터의 정션 포인트 스튜디오(Junction Point Studios)는 콘솔 게임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스튜디오였고, 모바일 게임 산업으로 전환을 결정한 경영진은 “가망이 없는 콘솔 게임 시장을 노리고 게임을 만드는 스튜디오”에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후 콘솔 게임 시장은 모바일 게임 시장과 함께 여전히 큰 폭으로 성장 중이다. 그의 사례는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비디오 게임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대기업이 야심차게 비디오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가 성과가 나오기 직전에 사업을 철수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고, 게임 제작 스튜디오로 성장한 몇몇 국내 스튜디오들은 과거 이와 비슷한 악명 높은 허들 시스템으로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이와 관련한 불편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이른바 “사업상의 결정”으로 인해 회사에서 성실히 근무하던 개발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례는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일일히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후의 에피소드들은 아무리 비디오 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좀 체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디렉터 한 명이 퇴사했을 뿐임에도 그의 밑에서 같이 게임을 만들어낸 훌륭한 팀을 단번에 박살내 버려버린 이야기(이레셔널 게임즈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매번 전작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지만, 경영진이 목표로 하는 “전 보다 매우 뛰어난 성공”을 거두지 못해 결국 버려진 스튜디오에 대한 이야기(비서럴 게임즈 -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 마치 제조 공장의 조립 라인처럼 개발자들을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 옮기다 개발 역량과 좋은 조직 문화를 모두 소진하고 자연스럽게 소멸된 스튜디오(2K 마린 - 더 뷰로: 기밀 해제된 엑스컴)에 대한 이야기는 그나마 순한 맛에 해당한다. 매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커트 실링(Curt Schilling) 개인 재력과, 주 정부의 투자 약속을 바탕으로 비디오 게임 산업 불모지인 지역에 스튜디오와 대규모 개발 인력을 이전한 38 스튜디오. 그리고 38 스튜디오의 자회사 빅 휴즈 게임즈(Big Huge Games)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도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여기에 희망과 게임 개발의 꿈을 걸었던 개발자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게임 개발자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스튜디오의 폐쇄 이후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개발자들의 운명은 매우 끔찍했다. 이주 지원 명목으로 회사가 받은 거액 대출은 개발자 개인이 값아가야 할 몫으로 남아버렸는데, 해당 지역에서는 다시 취업할 수 있는 비디오 게임 회사가 없다. 겨우겨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지역에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정리해고의 공포를 안고 일을 해야만 한다. 실제로 빅 휴즈 게임즈의 개발자들은 이후 에픽 게임즈(Epic Games)의 새로운 스튜디오에 합류했지만, 에픽은 고작 8개월만에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이 스튜디오를 폐쇄해 버린다. 한번도 극복하기 힘든 일을 일년 사이에 두번이나 겪게 된 개발자들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차마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 책은 이해할 수 없는 스튜디오 폐쇄와, 이로 인해 재기 불능의 피해를 입고 업계를 영원히 떠나버린 개발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생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듯, 여기에도 살아남는데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인디 게임 개발로 진로를 바꿔 인생의 벼랑 끝에서 겨우 빠져나온 이야기. 북미에 비해 노동권 및 복지에 대한 보장이 잘 되어 있는 유럽으로 이주해 안정적인 개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개발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일부의 사례에 불과하다. 이 책의 서문에는 션 맥러플린(Sean McLaughlin)이라는 개발자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리고 저는 이제 책상에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아요.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의 짐만 가져다 두죠.” 이 이야기에 어떠한 동질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이미 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게임 개발자이거나 산전수전 다 겪고 뛰쳐나온 옛 종사자일 것이다 - 나 또한 여러 업체들을 옮겨 다니면서 개인 짐을 많이 가져다 두지 않는다. 가장 최근의 퇴사에서는 오직 백팩 하나 분량의 짐만 가볍게 챙겼을 뿐이다. 크런치로 불리우는 강도 높은 근무 환경. 프로젝트에 따라 얼마든지 직장을 잃어버리기 수월한, 다른 산업과 비교되는 노동 유연성은 국내의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피, 땀, 리셋」에서 나오는 예시처럼 하루 아침에 스튜디오가 폐쇄되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사례에 개발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이에 대한 응답을 받는 사례가 점차 나오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성과는 아니다. 다른 산업계에서 이어진 뿌리깊은 노동 운동은 2000년대 초 IT 노조의 출범과 이후 2013년 게임개발자연대 등의 단체에서 비디오 게임 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게임 업계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게임 개발자들 스스로도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8년부터 넥슨, 스마일게이트, 웹젠 등의 대형 게임 회사들에 개별 노조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느리지만, 점차 개선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오히려 북미의 비디오 게임 산업 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는 모양새이다. 미국의 경우 2022년이 되어서야 액티비전 블리자드(Activison Blizzard)의 자회사인 레이븐 소프트웨어(Raven Software)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는 미국 내 상장 비디오 게임 업체 중 최초의 일이다. 혹자는 이러한 일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게임이 망했으면, 당연히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피, 땀, 리셋」에서 언급된 사례들은 거의 대부분 “성공했으나 망한” 경우이고, 실패 역시 개발자가 아닌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 결정”에 기인한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개발진에게 잘못된 판단에 기반한 결정을 강요한 경영진들은 개인적인 큰 손실을 입거나, 여타 개발자처럼 빚에 허덕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결과를 두고 “게임이 망했으니 책임을 지라”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혹은 얼마나 불평등한 이야기인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피, 땀, 리셋」 같은 책이 세상에 소개되면서, 비디오 게임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알리고, 이를 통해 끔찍한 게임 개발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가 느리지만 점차 개선되고 있다. 비디오 게임 제작은 충분히 어렵다. 그리고 그 성공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게임을 만드는 것 이외의 문제로 힘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 개발자) 임현호 과거의 게임 개발 영웅들의 모험담을 쫓으며 게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게임 개발자. 매우 긴 기간 동안 대표, 기획자, 인디 게임 개발자, 프로젝트 매니저 등의 여러 타이틀을 달고 살았으나 게이머이자 게임 개발자로 불리길 희망하는 소시민.
-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Back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03 GG Vol. 21. 12. 10. 1. 두 아이 아빠의 게임 라이프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털어놔야겠다. 지난 몇 년 동안 게임을 즐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저런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가진 탓에 늘 마감에 쫓긴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두 아이가 반긴다. 둘 다 아직은 엄마, 아빠의 손이 많이 가는 나이다.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과 잠시나마 놀아준다. 고집 센 아이들을 설득해 씻기고 재우면 대략 밤 10시다(정신적·체력적으로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다). 이때부터 명목상 자유시간이지만 대개는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게 된다. 어쩌다 여유가 있더라도 게임기로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1~2시간 만에 끝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밤 게임을 저장하면 언제 다시 데이터를 불러낼지 기약할 수 없다. 한 번 흐름이 끊긴 게임을 다시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최근 육퇴 후 아내와 함께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하겠노라며 큰마음 먹고 패키지 버전을 2개나 구입했지만, 한 달 동안 고작 ‘아시라 세트’를 맞춘 것이 전부였다. 아내는 둘째를 재우다 그대로 잠드는 날이 많았고, 아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몇 번의 솔로플레이를 하다가 새로운 업무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멀어졌다.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사냥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서 플레이 시간이 늘어나면 업무는 물론, 가족과의 일상이 대검에 썰려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생이라는 맵에서 홀로 사냥하던 시즌1은 끝났다. 시즌2에서는 두 아이가 동반자 아이루(몬스터헌터의 고양이 서포터)처럼 늘 함께한다. 아침에 두 아이를 등원시키려면 일찍 잠을 청해야 한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바깥 활동을 하니 평일보다 더 여유가 없다. 부족한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40대 중반에 접어드니 체력은 물론,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다. 〈몬스터헌터〉처럼 컨트롤이 필요한 게임은 오래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처럼 여유가 있을 때는 게임기를 켜기보다 넷플릭스에 접속한다. 궁금한 게임이 있으면 유튜브 영상을 본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내 삶에 게임이 끼어들 공간은 거의 없는 셈이다. 2. 자동화된 게임: 핀볼과 〈월드플리퍼〉 이런 두 아이의 아빠가 오랜만에 빠져든 게임이 있다. 사이게임즈에서 개발한 〈월드플리퍼〉다. 복고풍 도트그래픽으로 핀볼 게임과 RPG를 접목한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플레이어는 6명의 캐릭터(메인 3명, 서브 3명)를 조합해 파티를 구성하고, 핀볼처럼 디자인된 맵(스테이지)에서 적을 물리치게 된다. 화면 하단 플리퍼로 구슬 대신 캐릭터를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데, 캐릭터를 터치하면 적에게 돌진할 수 있고, 게이지가 쌓이면 고유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일본식 RPG의 소위 ‘몸통박치기’를 핀볼 게임과 적절하게 섞은 느낌이다. 핀볼 게임이 그렇듯 이 게임도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타이밍에 맞게 플리퍼를 터치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스킬을 쓰는 것이 전부다(애초에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게 아니라 플리퍼로 날린 뒤 지켜보는 구조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 중 대부분의 시간은 조작보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득점을 ‘지켜보는 데’ 할애된다. * 〈월드플리퍼〉는 핀볼 개념과 RPG를 섞으며 자동 플레이에 대한 나름의 납득 가능한 지점들을 구현해낸 바 있다.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있다 보니 ‘자동’ 기능을 사용해도 큰 이질감이 없다. 오히려 AI가 나보다 더 정확하게 적을 조준하고, 알맞게 스킬을 구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컨트롤이 필요 없을 만큼 캐릭터가 성장하면 자동 진행은 어느새 옵션이 아닌 디폴트가 된다. 자동 플레이의 비중이 수동 플레이의 비중을 넘기는 시점부터 게임은 본격적인 ‘보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그에 맞춰 게임의 핵심 재미도 변화한다. 플레이어는 캐릭터 육성에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핀볼 게임을 반복해야 한다. 처음 몇 번이야 재미를 주겠지만 반복이 거듭되면 단순노동으로 변질된다. 자동 기능은 이 ‘반복구조’를 대행해준다. 전통적인 RPG에서는 성장을 위해 지루한 구간(소위 레벨노가다)을 참고 인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어른 게이머들은 이를 감당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성장한다는 것은 게임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플레이어는 자동화를 통해 얻어진 재화를 전략적으로 분배하고, 성장한 캐릭터를 조합해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데서 재미를 얻는다. 자동 기능은 전체 게임 디자인의 일부이자 게임의 구조적인 재미를 작동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드플리퍼〉가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된 ‘핀볼’을 차용한 것은 꽤나 영리한 설정이다. 핀볼 게임의 구조가 ‘지켜보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오토 플레이로 전환시키고, 수집형 RPG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동 기능을 합리화시키기 때문이다. 3. 플레이의 경계가 사라지다 ‘보는 게임’을 ‘플레이어의 참여가 최소화된 게임’으로 정의한다면 앞서 언급한 〈월드플리퍼〉를 포함해 자동 기능이 탑재된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이 아마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비주얼과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는 게임도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보는 게임’이란 시각적인 이미지에 관계없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게임’으로 한정짓고자 한다. 따라서 화면을 보지 않고 ‘방치’하는 게임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보는 게임’에 포함될 것이다. ‘보는 게임’의 핵심은 ‘플레이의 자동화’다. 오늘날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 오토 플레이는 필수 기능으로 자리잡았다. RPG 장르의 자동 사냥은 물론, 캐릭터 조작 없이 클릭 한 번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것도 일종의 오토 플레이 요소다. 진행이 자동화된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부분은 주로 습득한 재화를 배분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보는 게임’은 그래서 이중적이다. 그것은 스스로 작동하는 게임화면을 바라보는 것이자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행위의 영역이 아닌 인식의 영역이다.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고 개입하는 존재로서 플레이어는 게임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제 게임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물리적인 하드웨어와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동화된 세계를 인식하고 떠올리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게임이 된다. 플레이의 경계는 무너졌다. 하지만 이런 열린 상태가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매직서클’의 경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게임’은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무너질 때 ‘워라밸’의 균형도 무너진다. 자동화된 놀이가 생활과 인식의 영역으로 침범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보는 게임’은 쾌락의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늘 미끄러진다. 그래서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도 욕망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는다. 4. ‘보는 게임’의 기원 ‘보는 게임’은 스마트폰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으나 게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기부터 그 원형이 발견된다. 나는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에서 초창기 게임의 진화 과정을 아케이드 게임과 PC 게임이 서로 결합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아케이드 게임이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하는 형태로 발전했다면, PC 게임은 이야기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런 관점에서 PC로 등장했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장르는 ‘보는 게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은 물론, RPG, 시뮬레이션 게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초기 PC 게임들은 물리적인 조작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지켜보는’ 형태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PC 플랫폼의 하드웨어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키보드’라는 입력도구는 조이스틱과 달리 문자를 입력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고, 초기 PC의 낮은 그래픽 성능은 움직이는 이미지보다 고정된 이미지와 텍스트 중심의 게임을 강제했다. 게다가 PC는 아케이드 게임과 달리 긴 플레이 시간을 보장했다. PC 플랫폼에서 게임의 플레이 타임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저장 기능은 게임 플레이가 일상생활에서 적절하게 끊어지고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런 PC 게임의 특성이 극대화된 장르 중 하나다. 〈삼국지〉나 〈문명〉 시리즈는 대부분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PC라는 업무용 하드웨어가 비디오게임과 결합되면서 그 게임 스타일도 마치 직장에서 업무 지시를 내리듯 사무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당시에 PC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은 놀이라기보다 업무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이런 ‘보는 게임’의 흐름은 2000년대 웹 게임을 거쳐 스마트폰 게임으로 이어진다. 5. ‘보는 게임’은 어떻게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었을까? 과거 PC라는 하드웨어의 등장으로 새로운 게임 장르가 등장했던 것처럼 스마트폰이라는 하드웨어는 ‘보는 게임’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24시간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터치스크린’ 단말기는 PC가 그랬듯이 캐릭터를 조작하기가 불편했다. 뭔가를 보고 조작하기에는 화면이 너무 작았고, 물리버튼이 없어서 정교한 컨트롤도 어려웠다. 오토 플레이 기능은 이런 하드웨어의 한계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24시간 플레이가 가능한 개인화된 기기라는 점도 오토 플레이에 영향을 미쳤다. 스마트폰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언제 어디서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상태로 플레이어 곁에 대기 중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플레이어는 24시간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수 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동일하지 않고, 대부분의 온라인 모바일 게임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한(혹은 비용을 더 지불한)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흘러간다. 늘 손안에 있는 하드웨어, 항상 게임에 접속할 수 없는 플레이어,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게임 내 경쟁구조. 이 세 가지 요인이 맞물리면서 ‘자동 사냥’ 혹은 ‘오토 플레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탄생한다. 물론 하드웨어 특성만으로 ‘보는 게임’이 주류가 된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보는 게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이 재미를 만들어내는 구조와 더불어 오늘날 수용자들의 게임 플레이 환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임을 ‘선택’한다는 것은 취향은 물론 자신의 플레이스타일과 라이프사이클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다. 아무리 게임이 재미있어도 플레이하는 과정이 내 삶의 파장과 맞지 않으면 버려지게 된다. 우리 집 책꽂이에 방치된 닌텐도 스위치와 〈몬스터헌터 라이즈〉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바쁜 와중에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즐기는, 아니 즐기는 것이 용인되는 〈월드플리퍼〉처럼 말이다. 여러 모바일 게임 중에서도 〈월드플리퍼〉가 내 삶의 틈새로 구슬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게임은 각각의 플레이 과정이 작은 단위로 분절되어 있다. 레벨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지만 하나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3분 정도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나에게 재화를 빨리 모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드플리퍼〉에는 유저간 PVP가 없다. 경쟁 요소가 거의 없다보니 캐릭터 수집이나 성장에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과정이 즐겁다. 멀티 플레이도 마치 솔로 플레이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3명의 플레이어가 함께 진행하는데, 타인의 생성한 룸에 참여하면 행동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알람 신호가 울리면 클릭해서 참여하고, 오토 플레이가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면 재화를 얻을 수 있다(물론 이벤트 난이도에 따라 컨트롤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채팅 기능이 없어서 커뮤니케이션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런 특성 덕분에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부담 없이 멀티 플레이에 참여해 재화를 모을 수 있다. 일하다가 알람이 울리면 클릭해서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도중에 전화가 오거나 접속이 끊겨도 자동 전투는 끝까지 진행되고, 그에 따른 보상도 받을 수 있다. 집중이 필요한 업무를 할 때는 이마저도 어렵지만 간단한 업무를 할 때는 충분히 병행 가능한 수준이다. 이렇게 해서 일과 게임을 동시에 처리하는 신인류가 탄생했다(멀티태스킹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6. 시간은 없지만 게임은 하고 싶어 누군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것처럼, 나 역시 시간이 없지만 게임은 하고 싶다. ‘보는 게임’은 그런 어른 게이머의 모순된 욕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켜준다. 일과 게임의 밸런스, ‘워게밸’이 가능하다고 합리화하면서 스마트폰에 게임을 설치한다. 하지만 불온한 멀티태스킹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일과 게임, 둘 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외치는 탓이다. 처음에는 똑같이 아껴주겠다고 다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균형은 무너진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는 결국 게임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게임은 그동안 발생한 ‘매몰비용’의 영수증을 들이대면서 붙잡는다. 오래 붙잡은 인연일수록 끊어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누군가는 일을 잠시 밀쳐두고 게임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삶의 조건에 맞게 수많은 게임들이 소비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다이어트 코크’를 이야기한다. 다이어트 코크는 카페인과 설탕이 제거된 콜라다. 우리는 가짜 콜라, 유사 콜라를 마시면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원래의 핵심이 제거된 콜라를 마시면서도 기존에 느꼈던 ‘청량감’과 ‘각성효과’를 기대한다. 다이어트 코크를 마시면서 오리지널 콜라를 욕망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보는 게임’도 어쩌면 그런 다이어트 코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콜라에 카페인과 설탕이 필요하듯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요구된다. 이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쾌락을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마음껏 투입할 수 없다. 그래서 게임회사는 우리가 게임에서 누려야 할 플레이 시간을 제거한다. 바로 일상을 방해하는 해로운 성분이 제거된 ‘보는 게임’이다. 사실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그 몰입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보는 게임’에는 그 본질적인 부분이 제거되어 있다. 마치 카페인과 설탕이 제거된 다이어트 코크처럼 말이다. 나는 일하면서도 게임을 즐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했던 게임은 업무 사이에 던져진 또 다른 업무였을지도 모른다(유저들이 ‘일일퀘스트’를 ‘숙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본질이 제거되면서 욕망은 더욱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해롭지 않다는 생각에(일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더 많은 시간을 안심하고 게임에 투입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투입한 시간은 결코 작지 않다. 7. 포장된 쾌락의 한계 게리 S. 크로스, 로버트 N. 프록터의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책에서는 초콜릿, 담배, 사진, 축음기, 영화 등 ‘포장된 쾌락의 혁명’에 대한 내용들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매우 쉽고 빠르게 열량을 섭취할 수 있게 했다.” 19세기 말부터 기업들은 지방, 당분, 염분 등을 농축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멀리 운반할 수 있도록 포장했다. 시중에 ‘포장된 쾌락’이 넘쳐나면서 미각, 시각, 청각 등 한때는 희소했던 감각들을 이제는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포장된 쾌락은 감각 경험의 강도를 크게 높였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마약이다. 씹거나 연기로 피우거나 차로 마셨던 아편은 모르핀, 헤로인으로 정제되었고, 새로 발명된 주사기를 통해 혈관에 직접 주입되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담배회사는 새로운 가공법으로 연기의 맛을 순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연기를 폐 깊숙이 흡입하게 되었다. 제품 자체는 순해졌지만 오히려 건강에는 치명적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포장된 쾌락이 전달되는 과정을 주사기 같은 튜브에 빗대어 ‘튜브화(tubularization)’라고 부른다.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공연장에 가는 대신 ‘아이팟’을 켜는 것, 짧은 기간에만 허락되었던 축제의 즐거움을 일 년 내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놀이공원’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디오게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기술은 사람들이 놀이를 즐기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매우 쉽고 빠르게 재미와 쾌락을 충족시킬 수 있게 했다. 컴퓨터는 인간이 놀이를 위해 수행해야 할 것들, 이를테면 놀이도구의 배치, 규칙의 적용, 컴포넌트의 이동, 점수 계산 등을 기계가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비디오게임은 TV보다 상호작용성이 뛰어난 매체였지만, 한편으로는 놀이에서 인간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과거의 놀이를 생각해보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놀이들은 물리적인 공간에 친구들을 모으고, 몸을 움직여야 하며, 탈락하면 다른 친구들이 승부를 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놀이를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 대상, 시간이 필요했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일종의 ‘허들’이었다. 비디오게임은 이런 허들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물론 접근이 간편해진 만큼 규칙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비디오게임 산업이 성장하고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게임은 점차 ‘튜브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 비디오게임은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편리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드코어 게임들은 난이도를 대폭 낮추거나 ‘EASY MODE’를 추가했고, 닌텐도 DS와 Wii는 ‘캐주얼 혁명’을 일으켰다. 스마트폰은 이런 튜브화를 더욱 강화시켰다. 특히 모바일 플랫폼의 ‘보는 게임’은 자동화와 튜브화가 결합된 ‘포장된 쾌락’의 극단적인 형태다. 심지어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는 현실의 자본으로 보다 압축된 시간을 구입할 수 있다. 자동으로 진행되는 전투조차 곧바로 결과를 볼 수 있도록 스킵해 버리는 티켓은 더 빠른 ‘포장된 쾌락’을 위한 입장권이다.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된 휴대용 모바일 기기는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서버에 접속된 게임환경을 제공한다. 주머니 속의 사탕을 꺼내듯 하드웨어를 꺼내서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은 채, 일상에 해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쾌락을 마음껏 소비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길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게임은 어쩌면 구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오히려 이런 게임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과거에 즐겼던 게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마치 비디오게임을 시작하면서 구슬치기가 밋밋해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8. 1973년의 핀볼과 2021년의 월드플리퍼 다시 〈월드플리퍼〉를 가만히 바라본다. 어쩌면 ‘보는 게임’이란 핀볼 기계를 떠도는 구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구슬은 스스로 랜덤으로 점수를 얻고 시간이 지나면 중력에 의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아주 잠시 플리퍼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게임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973년의 핀볼』에는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거대한 창고 안에서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핀볼 기계를 찾아내고 나서야 그는 충족되지 않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 ‘보는 게임’은 다이어트 코크처럼, 포장된 초콜릿처럼 놀이의 중심에 닿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노동에서 벗어나 놀이 자체를 온전히 마주할 때까지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2021년의 나는 〈월드플리퍼〉를 플레이하면서 유년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고 있다. “핀볼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내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상념도 사라졌다.” -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중에서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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