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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찍과 당근의 자강두천,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은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을 유도하고 또 감정선을 조절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때론 위협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면서, 무작정 사실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범위 안에 플레이어의 경험을 위치시키기 위해 수많은 요소가 무대 뒤에서 암약한다. 마치 영화 ‘캐빈 인 더 우즈’ 에서 미스터리 단체의 직원들이 주인공 일행에게 하나씩 위협을 던져주며 가지고 놀듯이 말이다. 만약 이런 시선으로 공포 게임을 본다면, 이제는 한 번쯤 그 의도와 예상을 부숴주겠다는 불순한 생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Back 채찍과 당근의 자강두천,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 10 GG Vol. 23. 2. 10. 밸브의 게임 ‘포탈 2’ 에는 특이하게도 코멘터리 모드가 있다. 이는 일종의 영화 DVD 에 들어있는 코멘터리 특전처럼, 개발자들이 어떻게 게임을 만들고 고쳐나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이 이 게임을 만든 과정은 마치 소설을 짓는 것과 같은 작성과 무수한 퇴고의 연속이다. ‘포탈 2’ 는 퍼즐을 중심으로 한 게임이고, 이들의 고민은 그렇다. 이 퍼즐을 어떻게 풀도록 설계했는가? 그 설계가 어떻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나? 보완하기 위해 어떤 변화를 주었나? 플레이어가 이 설계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가?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유도한 플레이에서 벗어나는가? 그 벗어난 플레이가 허용 가능한가, 아니면 게임의 핵심을 해치고 있는가? 이러한 수많은 고민이 뭉쳐 어떻게 최종 버전의 게임이 완성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 ‘포탈 2’ 코멘터리 모드 지금까지도 기억이 나는 예시가 하나 있다. 이 퍼즐의 최초 버전은 플레이어의 시작 위치와 출구가 바로 보이는 탁 트인 형태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자 플레이어들은 퍼즐을 정상적으로 풀어내지 않고 출구 근처로 바로 포탈을 만들어 퍼즐을 ‘무시’ 했다. 그러자 개발자들은 시작 위치와 출구 사이에 큰 벽을 설치했다. 그러자 이제는 플레이어들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퍼즐을 제대로 풀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벽을 반쯤 투명한 유리벽으로 바꾸어 출구가 보이면서도 동시에 플레이어가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플레이어들은 퍼즐을 제대로 풀면서 기획자의 의도대로 게임을 플레이해 나갔다. 이 과정 자체가 바로 게임의 UX 디자인에 대한 매우 적절한 설명이다. ‘포탈 2’ 의 제작사 밸브는 ‘하프 라이프’ 시절부터 이처럼 잘 유도된 플레이어 경험을 짜는 능력이 뛰어난 회사였다. 이와 함께 밸브의 게임 중 또다른 작품은 새로운 방식으로 특정 장르적 UX에 접근한다. 공포 게임이자 4인 협동 게임, ‘레프트 4 데드’다. 그때까지 공포 게임은 놀이공원의 다크라이드와 유사한 방식이 주류였다. 즉 주어진 동선, 레일이 있고, 이 동선을 따라가면서 발동하는 트리거들로 적이 등장하거나, 이벤트가 발생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레프트 4 데드’ 는 이런 다소 고전적인, 배치된 오브젝트나 동선 설계처럼 게임 내에 이미 구성되어 변하지 않는 고정 요소를 넘어서서 실시간으로 플레이를 측정하고 이에 따라 플레이 환경을 바꾸는 ‘감독 AI 시스템’ 을 도입했다. 이는 이전부터 있었던 적응형 난이도 시스템의 변형이지만, 공포 게임에 적극적으로 사용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낳았다. * ‘레프트 4 데드’ 의 감독 AI는 당시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감독 시스템의 요지는 이렇다. 플레이어의 스테이터스, 잔탄량, 위치 등 여러 모니터링 정보를 통해 플레이어의 현재 스트레스를 가늠한다. 그렇게 측정된 스트레스치를 기반으로 더 많은 적을 등장시킬지, 적을 줄일지, 또는 치료제를 제공할지, 다음 아이템 드롭에서 총알을 제공할지 등을 판단한다. 이 때문에 플레이어가 겪는 현재의 경험은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게 적절한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타도록 조율된다. 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감독 시스템 자체보다는, 이러한 실시간 모니터링을 기반으로 한 난이도 조정 툴이 필요할 만큼 공포 게임의 UX는 다른 게임에 비해 독특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여러 게임의 테마 중에서 공포 게임은 그 경험을 설계하기에 가장 어려운 편에 속한다. 이름 자체는 공포이지만, 결국 그 안에서 벌어지는 플레이란 플레이어가 공포를 최대한 회피하고, 또는 그 원인을 찾아내 공포를 해소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는 공포 게임이 다른 공포 콘텐츠(즉, 공포 영화 같은)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포 영화는 콘텐츠 수용자 입장에서 그저 관찰할 수 밖에 없는 일방적인 수용의 입장에 놓이게 되지만 공포 게임에서는 그 공포에 저항하고, 직접적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암네시아’ 시리즈로 대표되는, 공포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거할 수 없고 피해다녀야 하는 게임들도 그처럼 플레이어의 회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훨씬 능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서 공포 게임에서의 경험 설계는 더 나아가 어떻게 ‘공포’ 가 총합으로서 긍정적인 체험이 될 수 하는가 하는 고민도 담겨있다. 공포는 그 자체로는 상당히 부정적인 감정이며 불쾌함을 유발하고, 우리가 공포 게임에서 느끼는 쾌락은 그 공포 이후에 이를 극복하고 다시 평정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즉, 좋은 공포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그 UX는 항상 시련과 극복의 연쇄가 될 수 밖에 없다. 공포 게임은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설계하는 방법, 그리고 공포라는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 등에서 많은 고민과 발전의 과정이 있어왔다. 여기에 더불어 사람은 어떤 감각 요인, 또는 자극에 적응하고 둔감해진다는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즉 공포, 또는 공포를 직접 느끼기 바로 전 단계의 긴장은 항상 적정 범위 내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 적정 범위는 변동성이 있으며 심지어 순간적으로 큰 폭의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다른 게임들에 비해 감정이 관여하는 바가 큰 경험이기에 특히나 그런 면이 부각된다. 최근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칼리스토 프로토콜’ 과 ‘데드 스페이스 리메이크’ 는 한명의 창조자에게서 출발한 공포 게임이지만 긴장감의 조절에서 서로 다른 방법론을 채택했다. ‘칼리스토 프로토콜’ 은 굉장히 전통적인 방법의, 맵 곳곳에 수많은 트리거를 숨겨두는 방법과 적 AI 의 강화를 필두로 이 긴장감을 조율한다. ‘데드 스페이스 리메이크’는 원작에 없던 감독 시스템을 고정된 트리거 들을 제외하면 매 플레이마다 다른 패턴으로 적이 등장한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의 개발자는 한 인터뷰에서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을 ‘호러 엔지니어링’ 이라고 칭했다. 이는 비단 전투 뿐만 아니라 게임 전체의 흐름을 조절하는 요소다. ‘칼리스토 프로토콜’ 은 각 전투의 거리를 좁히고 밀도를 높여, 정해진 레일을 뚫고 가면서 일정 구간을 통과하면 저장하고 다시 일정 구간을 뚫고 가는 일종의 갱신을 하는 느낌의 플레이 구성이다. 하지만 ‘데스 스페이스 리메이크’ 는 리메이크를 통해 오픈월드의 느낌을 가져왔고, 때문에 하나의 레일을 따라 트리거를 배치하는 식으로는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여러 변수에 대처할 수 없기에 감독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직접 레일 위의 난이도 조건을 조절하느냐, 또는 감독 시스템을 활용하느냐는 그 결과물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말그대로 방법론의 차이이다. 예컨대 게임의 맵을 디자인하는데 있어 미리 정해진 맵을 제공할 것인지, 특정 패턴에 기반한 절차적 생성 기법을 활용할 것인지 하는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건 어떤 방법을 쓰느냐가 아닌 최종적으로 어떤 플레이어의 행동을 유도하고 의도했는지다. 아무리 감독 시스템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그 최종 상태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었다면 제대로 된 행동 패턴을 유도하기 어렵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감정선을 조절하기 위한 노력들도 살펴볼 수 있는데, 첫번째로는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대리인, 즉 게임 내 아바타와 실제 플레이어와의 거리감 조절이다. 이를 위한 도구 중 하나가 공포 게임의 UX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이 구성 요소 중 하나인 UI 다. 두 게임의 공통 조상인 ‘데드 스페이스’ 를 포함해 이들 게임은 다이제틱 UI 를 사용한다. * 몰입감에 극도로 집중한 UI를 보여주는 ‘칼리스토 프로토콜’ 다이제틱 UI 와 논-다이제틱 UI 에 대한 가장 빠른 설명은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 로 가능하다. 이 게임에서는 하나의 게임으로 이 두가지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데, 트럭에 부착된 계기반으로 속도를 확인하면 다이제틱 UI, 그게 아니라 화면 구석에 고정된 네비게이션 창으로 속도를 확인하면 논-다이제틱 UI를 사용하는 것이다. 즉 논-다이제틱 UI 는 플레이어와 게임 속 세계 사이에 한겹의 필터가 있는 것과 같다. ‘칼리스토 프로토콜’ 과 ‘데드 스페이스 리메이크’ 는 이 부분을 제거하고 캐릭터의 등에 달린 장비로 HP를, 총기에 달린 부품으로 잔탄량을 표시하고 인벤토리, 아이템 정보 등도 게임 내 홀로그램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 이런 UI는 필수적인 부분 외의 정보량을 제한하며 현실감을 더 적게 저해하기에 소위 말하는 ‘몰입감’ 을 강조하게 된다. 어느 시점부터 다이제틱 UI 는 공포 게임의 기본 소양처럼 되었는데, 몰입 엔터테인먼트로서 공포 게임은 감정선을 플레이어가 자신이 조종하는 캐릭터가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차원(현실-게임 속)의 경계를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다이제틱 UI 를 위시한 여러 몰입 기믹을 사용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투입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전투 음악 같은 음향효과가 그렇다. 이런 요소는 오히려 현실감을 위해서는 현장의 소리 외엔 없어야 하는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런 음향효과들은 일종의 가이드로서 플레이어의 감정선과 고양감을 다가올 사건에 앞서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뒤에서 튀어나온 적에게 바로 공격당해 죽는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전조없이 일방적으로 당한, 소위 ‘억까’ 라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적이 등장하기 직전, 또는 등장 후 공격받기 전 특정한 음향이나 또는 전투음악 같은게 흘러나온다면 플레이어는 위협을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곧 위협이 다가온다는 걸 심리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는 철저히 비현실적이고 게임이기에 가능한, 일종의 초현실적 요소이지만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에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즉, 공포 게임은 일방적으로 플레이어를 겁주고 위협하는게 아니라 꽤나 정당하게 주고 받으며 플레이어와 놀아주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어떤 수를 써볼까?” “음… 일단 한 번 죽게 만들까요?” 공포 게임의 UX 디자인은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을 유도하고 또 감정선을 조절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때론 위협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면서, 무작정 사실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범위 안에 플레이어의 경험을 위치시키기 위해 수많은 요소가 무대 뒤에서 암약한다. 마치 영화 ‘캐빈 인 더 우즈’ 에서 미스터리 단체의 직원들이 주인공 일행에게 하나씩 위협을 던져주며 가지고 놀듯이 말이다. 만약 이런 시선으로 공포 게임을 본다면, 이제는 한 번쯤 그 의도와 예상을 부숴주겠다는 불순한 생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도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최적화하는 재미, 최적화된 세상 - 자동화 시뮬레이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최적화와 효율을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최적화 게임’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의 최적화를 이뤄온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최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게임에서 최적화의 행위를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자본주의로 최적화된 우리 사회의 비가시화된 영역을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이 줄 수 있는 의미이지 않을까? 버튼 읽기 대중문화의 변화 위에서 게임의 미래를 묻다: GXG2025 컨퍼런스 GG 세션, <시각예술콘텐츠의 오늘과 미래> <시각예술콘텐츠의 오늘과 미래>라는 제목은 게임 행사에서 게임 비평 잡지가 기획한 자리의 이름이라고 보기에 너무나 방대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로서의 게임을 이해하려면 현실의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매체들과 게임이 어떻게 협응하는지, 또 대중문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야 한다. 버튼 읽기 [인터뷰] 25년간 게임의 지평은 어떻게 바뀌었나? : 게임 역사연구자 나보라, 게임 아카이비스트 오영욱 대담회 한때 미래 세계를 의미했던 21세기가 들어선 지도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 25년 동안 많은 문화적 변화가 야기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게임은 급격한 속도로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왔고 다양한 문화적 유산들을 만들어냈다. 이번 호에서는 게임 역사 연구자인 나보라 박사와 게임 아카이빙을 하고 있는 오영욱 박사를 모시고 그동안 우리의 게임이 얼마나 변했는지에 대해 대담회 형식으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버튼 읽기 [인터뷰] SNS의 규칙을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바꾸는 여정 : <페이크북> 제작사 반지하 게임즈 이유원 대표 SNS가 현대인의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교통, 통신의 기술이 해마다 급격하게 발전하고, 문화적 양상은 그보다 더 빠르게 급변하기에 오늘날 SNS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SNS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상의 규칙성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녹이는 데 특화된 ‘반지하 게임즈’이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SNS의 규칙을 게임화하였을까? GG 2호 이후 오랜만에 반지하 게임즈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버튼 읽기 [인터뷰] AI로 새로운 게임성을 만든다는 것: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의 이가빈 PD,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의 한규선 PD 크래프톤의 스튜디오 중 하나인 렐루게임즈는 딥러닝 기술을 게임과 접목시켜 새로운 경험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여러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음성 역할 시뮬레이터와 프리폼 채팅 어드벤처라는 독특한 게임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번 호에서는 평단과 게임사의 관점뿐 아니라, 유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이하<즈큥도큥>)의 이가빈 PD와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이하<스모킹건>)의 한규선 PD를 만나, AI 기술의 가능성과 현시점에서의 한계를 짚어보고, 새로운 게임성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버튼 읽기 인벤토리 시스템은 어떻게 효율을 재미로 연결시켰는가?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꽉찬 인벤토리에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2023년 대흥행을 이루었던 <발더스게이트3>에서는 아이템의 무게가 발목을 붙잡는다. 일반적으로 처음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어떤 아이템이 좋은 아이템이고, 어떤 아이템이 ‘잡템’인지 알 수 없어서 보부상처럼 모든 아이템을 들고 다닌다. 그러다 걸음걸이가 무거워지면 아이템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이때 무엇을 들고 다닐 것이고 무엇을 버리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유튜브나 커뮤니티에는 ‘발더스게이트 인벤토리 관리 꿀팁’ 글들이 무수히 올라와 있다. 버튼 읽기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버튼 읽기 [인터뷰]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만들어내는 게임 문화: PUBG UX 유닛 한수지 실장, UI 디자인팀 문휘준 팀장 그러나 오늘날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단순하지 않다. 보이스 채팅이 생기고, 다양한 방식의 전술적 소통 방식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런 변화는 게임 문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가 게임의 재미와 플레이 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PUBG의 UI 디자인팀 문휘준 팀장과 UX 유닛 한수지 실장을 만나고 왔다. 버튼 읽기 [인터뷰] 창간 2주년,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게임제너레이션> 이경혁 편집장 인터뷰 그렇다면 독자들과 여러 필진이 함께 만들고 있는 게임 담론은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읽고 쓰는 행위는 게임문화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 창간 2주년을 맞아, GG의 이경혁 편집장과 평소에는 담지 못했던 웹진 자체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왔다. GG가 만들어졌던 배경이나, GG를 만드는 당시 상상했던 독자층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더욱 고민하게 할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버튼 읽기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 많은 사람들이 인생 첫 게임을 ‘플래시 게임’으로 접했고, ‘마시마로’나 ‘졸라맨’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등 플래시는 2000년대 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플래시 서비스의 종료는 단순히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단종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며, 그 문화적 산물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버튼 읽기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튼 읽기 ‘인디게임’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반지하게임즈 이유원 대표 인디게임의 범주에 관해서는 여러 행위자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바, 모두를 만족시킬 온전한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념적인 개념어의 범주와 상관없이 지금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인디게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반지하게임즈’의 이유원 대표를 만나 그가 정체화하고 있는 인디게임은 어떤 개념이며 지향점은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2021년 9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이 직접 반지하게임즈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 [인터뷰] EBS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PD-자문위원의 코멘터리 대담
지난 10월 10일, EBS에서 만든 게임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참조: https://youtu.be/5LWXpmdV_BU) 일반적인 게임 다큐멘터리처럼 게임의 산업적 측면을 강조하지 않고 게임의 본질과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트렌디한 연출에서부터 방송 직후 유튜브에 즉시 공개한 것까지, 제작과정과 유통과정 모두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공개된 유튜브의 댓글에는 ‘제작자가 게임에 진심’이라는 시청자들의 호평이 잇따랐다. < Back [인터뷰] EBS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PD-자문위원의 코멘터리 대담 09 GG Vol. 22. 12. 10. 지난 10월 10일, EBS에서 만든 게임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참조: https://youtu.be/5LWXpmdV_BU ) 일반적인 게임 다큐멘터리처럼 게임의 산업적 측면을 강조하지 않고 게임의 본질과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트렌디한 연출에서부터 방송 직후 유튜브에 즉시 공개한 것까지, 제작과정과 유통과정 모두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공개된 유튜브의 댓글에는 ‘제작자가 게임에 진심’이라는 시청자들의 호평이 잇따랐다. 그러나 기존의 게임 다큐멘터리와 궤를 달리한다는 것은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가 뒤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제작과정은 어땠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며, 어떠한 관점으로 게임을 보고자 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이번 호에서는 박진우 PD와 자문위원 이경혁 편집장의 대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Q. 마침 다큐멘터리의 PD와 자문위원을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 다큐멘터리에 관한 논의를 처음 시작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이경혁 자문위원: 제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한예종에서 열었던 크리티컬 플레이어 행사였어요. ‘게임 비평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주제의 행사에서 제가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끝나고 찾아오신 거예요. 게임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그때 앉은 자리에서 2시간을 더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 굉장히 반가웠던 것이 ‘이제는 게임을 하던 세대가 제작자의 위치로 가는 순간이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다큐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웠어요. 그래서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그다음에는 서로 바빠서 잊고 있었어요. (웃음) 박진우 PD: 그렇죠. 서로 바빴죠. 이경혁 자문위원: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났는데 다시 또 연락이 와서 예산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다큐의 시작이라고 하면 5년 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다큐멘터리가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한 것은 3년 정도이지만, PD님은 예전부터 이 주제를 다루고 싶어하셨으니까, 마치 배추를 절이는 데 2년, 양념에서 묻히는 데 3년 같이 5년을 고민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진우 PD: 맞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었고, 대학 졸업할 때도 졸업 논문을 게임에 관해 썼거든요. 그러다 보니 뭔가 나름대로 파보고 이것저것 읽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관심이 생겼고, 이차적으로는 이러한 작업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PD가 된 다음에도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할 것이냐’라고 했을 때 게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 과정에서 편집장님이 말씀하셨던 한예종 행사에 갔는데,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필드가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위안과 용기를 얻었어요. ‘이 정도의 콘텐츠가 있으면 다큐를 하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사실 아이템만 가지고는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거든요. 그게 2018년 겨울이었어요. Q. 5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은데, 그 과정에서 생각이 변하거나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박진우 PD: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조바심이 있었어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게임에 관한 감각을 잃어버리기 전에 게임 다큐멘터리를 두 개는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한 3, 4년 정도 제작했는데, 1년, 1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제 어릴 적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제가 게임을 엄청 좋아하고, 가장 열성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그 시절과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아서 더 빨리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게임의 주 소비층을 2030이라고 봤을 때, 이 문화에서 제가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이 어떤 문화를 좋아하면 예전에는 100% 다 알았는데, 조금씩 모르는 것들이 생기면서 이걸 완전히 놓치기 전에 만들어야겠다고 서둘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나왔던 다큐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2년 후에 저라면 이런 방식과 이런 드립을 넣는 형태로 만들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드립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인터넷 상의 반응을 보면서 굉장히 ‘성공했구나’라는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있었어요. 박진우 PD: 어떤 씁쓸함이었을까요? 이경혁 자문위원: 유튜브에 댓글이 달리는 데, 이런 댓글인 거죠. ‘이 다큐가 훌륭한 이유는 밈을 잘 쓴 것이다, 이말년이 나왔다, 전용준이 나왔다.’ 그러나 이 다큐의 의미가 그거 하나는 아닌 거죠. 밈이 잘 사용된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이 다큐의 핵심은 결국 게임의 본질에 관한 질문들인데, 이것이 주목받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어요. 박진우 PD: 그렇죠. 그 부분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처음에 선생님과 함께 다큐 기획을 할 때도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고, 방송 나간 결과물을 보면서도 어렵다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말씀하신 타겟에 관한 문제예요. 시청자들의 게임 이해가 각기 다르고, 어떤 것을 원하는가 했을 때, 이런 부분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물론 다큐의 본질이 별로였으면, 밈에 대한 반응도 안 나왔겠죠. 그렇지만 저희가 2년 반 동안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거든요. 찍어놓은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리서치를 굉장히 길게 했어요. 그런 지점에서 오는 아쉬움이죠. 박진우 PD: 사실 내용적인 부분에 있어서 반응이 많이 나왔던 것은 3부였거든요. 전체 기획의 측면에서 봤을 때, 1부가 기본적인 내용이라면 2부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3부가 일종의 심화편으로, 시청자들이 다큐프라임이나 다큐멘터리에 기대하는 정보량과 깊이는 3부의 온도였을 것 같아요. 다만, 제작과정에서 너무 심층적인 논의들은 의도적으로 많이 뺐어요. 핵심적인 내용만 남기고 많이 덜어내고자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게임을 해왔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공중파 다큐멘터리라는 미디어는 일종의 공인 효과를 만들잖아요? 저희는 그런 지점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했어요. 다들 느끼고 있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걸 언어화해서 공유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으로 담론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잖으니까요. 그렇게 족적을 남김으로써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급적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밈이나 인터넷 문화를 많이 가져온 것도 이런 맥락이에요. 재밌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테니까요. *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시청자 반응. 이경혁 자문위원: 그래서 그런 후속 효과도 굉장했죠. 계속 커뮤니티에 돌았고, 소위 말하는 ‘짤’로 ‘EBS가 이런 것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웃음)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게임을 하나의 매체로서 다루는 시금석’이라는 방향성은 확실히 기존 문법이랑 다른 지향점을 가지게 했는데요. 저희가 시작할 때부터 배제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했거든요. 처음에 저희가 기존 다큐들이 무엇을 다루었는지 쭉 훑었어요. 그러면서 게임 산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고 방향을 정했었죠. 다른 이야기지만, 어려움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것도 있을 것 같네요. 이전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들을 보니까 미국의 경우에는 비디오 게임 연구의 장이라는 것이 이미 있는 거죠. 거기서 자신들이 쌓아놓은 역사들이 있고, 대학의 전공도 있으며, 전문가들이 있어요. 그러면 다큐 제작진들이 누군가를 컨택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전문가가 없으니까 어려웠죠. 박진우 PD: 맞아요. 그게 되게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였습니다. 자료도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리서치에 동원될 수 있는 인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Q. 그러면 자료나 전문가를 구하기 어려운 문제가 다큐의 방향성을 바꾸셨던 지점도 있을까요? 이경혁 자문위원: 저는 기억나는 게, 초기에 기획했던 콘텐츠 중에는 백인의 인터뷰가 있었어요. 게임계의 100명을 선정해서 가장 좋았던 게임에 대한 인터뷰를 모으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했었죠. 박진우 PD: 저는 여전히 그 기획이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을 하고, 나중에라도 해보고 싶은데, 당시에 캔슬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었어요. 하나는 여태까지 나왔던 게임 중에서 최고의 걸작을 꼽는다고 하면, 걸작이라는 말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정해진 답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을 배제하기가 너무 쉬운 거예요. 결국, 작품론적 관점으로 질문이 흐르게 되죠. 저희 내부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때도 기껏해야 와우(WoW) 정도?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 두 가지 매체의 게임을 포기하게 되니까 세팅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나 있었고요. 두 번째로 다큐를 기획할 때는 판데믹 시국이었기 때문에, 해외로 못 나갔었거든요. 그래서 해외의 게임 관련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는 요인이 작용했어요. 물론 이 기획 과정에서 프린세스 메이커의 아카이 타카미씨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이번 다큐에 나오시긴 했지만요. Q. 두 분은 그 5년 사이에 어느 정도로 만나신 건가요? 박진우 PD: 처음에 만나 뵙고 그 이후로는 저도 이제 다른 프로그램 한참 제작을 하다가, 다큐프라임 기획안 공모가 떠서 올해는 게임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요. 정리를 하다 보니 한계가 있는 거예요. 이전에 정리해놓은 자료들 중에서는 유실된 것도 있고, 그 사이 지형이 많이 바뀌면서, 전문가 선생님의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경혁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흔쾌히 나와주셨어요. 이경혁 자문위원: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장소가 그렇게 멀지 않아서요. (웃음) 동네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했어요. 우연찮게 작가분도 근처에 사셔서, 초창기에는 거의 하루종일 이야기를 하는 모임들을 꽤 자주 가졌던 것 같아요. 어떤 결론이 나기보다는 탐색을 엄청 많이 했었죠. 박진우 PD: 그래도 꽤 많은 가능성들을 펼쳐놓고 시뮬레이션을 돌렸어요. 그러다가 기획을 다듬어서 지금의 1, 2, 3부 형식을 잡기까지 한 1년 걸렸던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제작이라는 과정이 그런 것 같아요. 완성된 작품은 150분이지만, 할 이야기는 정말 많은데 제한된 150분 안에 무엇을 넣어야 우리의 목표에 들어갈 것인가 하고 훨씬 많은 시간을 고민했죠. 이런 식으로 걸러내는 과정들이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박진우 PD: 맞아요. 전체 50분짜리 다큐멘터리에서 내러티브가 전개되는데 필수 불가결하게 쓰이는 시간들이 있어요. 거기서 시간을 더 줄이면 몰입이 안 되거나, 캐릭터가 설명이 안 되거나, 상황이 인지가 안 되거나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구조 자체가 무너지는 거고, 구조가 무너지면 알맹이들은 더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거죠. 게다가 내용적인 면에서도 깊게 다루거나 더 들어가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거든요. 그래서 진짜 핵심만 남기고 버리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이경혁 자문위원: 결국은 다 필요없고 재밌게 보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남겨줄게!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죠. (웃음) 박진우 PD: (웃음) 맞아요. 정확하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욕심으로는 약간 그런 것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1부에서는 다큐 중에서 규칙이나 상호작용을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싶었었어요. 그치만 사실 동영상은 일방향 콘텐츠니까 상호작용을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나마 최대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느낌이라도 줄 수 있게 중간중간 퀴즈나 퀘스트 같은 것들을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짜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렸죠. 추가적으로 그런 어려움도 있었네요. 인터뷰이들을 어렵게 모셨는데, 제한된 시간에서는 모든 이야기를 담기가 어렵잖아요. 50분 다큐에 한 두 세문장 정도 나오실 수 있는데, 저희가 조사를 할 때에는 평균적으로 3시간 정도 인터뷰를 했거든요. 진짜 좋은 말씀이 많았는데, 그걸 다 못 담아내서 너무 아쉬워요. 다만, 저희가 그래도 최대한 모든 분들의 인터뷰를 담아내려고 노력했어요. 이번 작업에서 낭비가 거의 없었거든요. 인터뷰 등을 나갔던 모든 자료들을 다 썼고, 한두 컷이라도 담으려 했죠. 근데 딱 한 분 전반적인 톤과 약간 달라서 못 쓴 분이 있었어요. 방송 나가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녹여내려 고민했는데, 안 돼서 방송 전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세 부가 사실 각기 다른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보니까 에피소드 별 비하인드도 다를 것 같은데요. 이경혁 자문위원: 맞아요. 저도 궁금했던 것이, 1부에서 인트로가 충격적이었잖아요? (웃음) 사람들이 말로만 하던 ‘고인의 생전 최고의 플레이를 보시겠습니다’를 직접 그려내니까. 그런데 해당 장면을 촬영하는 배우들은 자기가 뭘 찍는지 아나요? 예를 들어 목사님은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시는 걸까? 그런 점에서 저는 PD님이 어떻게 디렉팅을 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박진우 PD: 저희가 앞부분 대본을 드리고, 감추는 것은 없었어요.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를 했는데, 다만 밈에서 출발했던 것까지 정확하게 이해하신 분들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특히 어르신 출연자들도 있고 했었으니까. 한 30대 중후반쯤 되시는 남자 배우 분만 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디렉팅은 그런 거죠. ‘상상도 못했던 걸 봤다고 생각하고 놀래 달라’ 이경혁 자문위원: 아무래도 다 알고 연기하시긴 어렵겠죠. 아, 그 ‘전용준 게임’은 따로 외주 제작한 건가요? 박진우 PD: 네 맞아요. 따로 게임 개발하시는 분을 컨택해서 제작을 했죠. 저희 나름 그 게임 진짜 신경 많이 썼습니다. (웃음) 다큐멘터리가 그냥 한 편의 다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체험을 할 수 있는 다큐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의 확장선이었던 거죠. 영상이라는 일방향적인 매체의 한계를 벗어나보고 싶었고, 그 안에는 나름 많은 비밀과 다큐에서 나왔던 내용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장치들 등을 세밀하게 조정을 하고자 했습니다. 진짜 공을 많이 들였죠. * 다큐프라임의 ‘게임의 신’ 게임 출시 공지. 전용준 게임은 http://www.ebsgodofgame.com에서 바로 접속할 수 있다. 이경혁 자문위원: 이게 진짜 이스터에그가 많더라고요. 박진우 PD: 네. 그런 비밀을 감춰놓음으로써, '게임이 재미를 발생시키는 원리'를 직접 느껴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었거든요. 처음에 화면을 켜면 튜토리얼이 짧게 한 장으로 나오는데, 진짜 미니멀하게만 짜놨고, 어떻게 해야 고득점을 하는지, 고득점을 받으면 어떻게 집계가 돼서 뭘 하는지 이런 규칙은 일부러 다 감춰놨어요. 그걸 찾아내는 게 일종의 재미를 발생시킨다고 봤기 때문이죠. 이경혁 자문위원: 나도 그 의도를 보고 그게 게시판이 좀 올라오길 바랐어요. ‘이 게임 고득점 뽑는 법’ 뭐 그런 걸로요. 이런 게 어디에 글이 올라와야 재밌는 거니까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사람들이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아직도 액티브 되어 있죠? 박진우 PD: 네. 한 3년 정도 서버비를 내놨습니다. 제 사비로... (웃음)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3부 마지막에 가상의 미술관도 실제로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놨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공들인 것에 비해서 사람들이 많이 안 보셨더라고요. 이경혁 자문위원: 그것도 3년치 서버비를 넣어뒀나요? 사비로? 박진우 PD: 네 (웃음) (가상 미술관은 https://www.ebsgamedocu.co.kr 주소로 접속할 수 있다) 이경혁 자문위원: 그리고 1부에서는 ‘바람의 나라’가 메인이 되고, 송재경씨가 거울에 나오잖아요? 세 게임 중에서 맨 처음으로 바람의 나라를 배치한 이유가 있나요? 박진우 PD: 음. 아무래도 제 유년 시절의 일부분을 책임졌던 게임에 대한 리스펙이 크죠. 이경혁 자문위원: 그래서 저는 바람의 나라 세대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바람의 나라와 송재경씨가 가지는 의미가 또 특별하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지점에서 또 중요한 것이 거울에 관한 지점일 것 같은데요. 거울은 왜 쓰셨나요? 박진우 PD: 우선은 인터뷰 공간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어요. 인터뷰 샷이라는 게 사실 다양하게 보이지만, 한국에서 전문가들이 나온다고 했을 때 한정적이거든요. 사무실 혹은 집무실, 교수님 방 이런 공간이 가지고 있는 넓이나 장면이 너무 뻔하고, 각도도 제한적이어서 어쨌거나 좀 다르게 구성하고 싶다는 게 출발이었어요. 다만 저희가 전문가 선생님들을 직접 찾아 뵙고 촬영을 하는 형태니까, 인터뷰 샷에 통일감을 줄 수 있는 공통의 오브제가 하나 있어야 되겠다 싶었고요. 그게 게임에 대한 무언가면 더욱 좋겠죠. 다만 뻔하게 콘솔 패드나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등을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굉장히 고민을 하다가 떠올린 게, 게임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거울이었어요. 거울이 우리를 비추듯, 게임이 우리 자신을 반영하기도 하고, 거울에 우리를 투영하기도 하고... 일상에 함께하면서도 저 너머의 현실과 꼭 닮았지만 완전히 현실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언가. 그런게 게임이라고 봤기 때문에 거울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각의 프레임이라는게 시각적으로 활용하기도 좋았고요. 자막을 넣는다거나, 거울에 비친 인물에 게임의 일부를 합성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쓰기에 좋았죠. 아울러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사각 프레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경혁 선생님이 쓰신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라는 책의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네요. 매체로서 게임을 바라본다는 차원에서 더더욱 그렇네요. 이경혁 자문위원: 무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2부의 세팅이 또 굉장히 재밌잖아요. 제가 볼 때에는 온스테이지 공간의 느낌이 들던데, 어떤 기획이었나요? 박진우 PD: 온스테이지와 같은 공간이냐고 물어보시면, 완전히 같은 공간은 아니고요. 요새 호리존트(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음새 없이 만들어 놓은 세트 벽면)에 조명을 넣는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는 영상들이 되게 많아요. 아마 처음에는 공중파의 세트 규모를 소규모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따라가기는 힘들어서 차용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역으로 공중파에 영향을 많이 미치죠. 왜냐하면 그것들이 일종의 공통감이라는 걸 만들어내거든요. 예를 들면 90년대 영상들을 보면, 편집의 호흡이나 샷의 크기 이런 것들이 미묘하게 지금 되게 다르거든요. 이런 감각이 결국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감에 기반을 둔다고 하면, 유튜브 콘텐츠에서 나오는 배경들이 지금 공통감의 영역에 올라섰고, 그런 지점에서 온스테이지 같은 느낌을 좀 받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온스테이지의 팬입니다. 제가 예전에 뮤직박스라고 어린이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거기에 음악 공연을 보여주는 구성이 있었거든요. 당시에 온스테이지를 많이 참고했고 훈련된 면들이 있지요. 이번 다큐에서는 최대한 심플하게 가면서도, 인상적인 비주얼을 만들고자 했고요. 거기도 이제 보면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씩, 가령, 집이라든지 음표라든지 이런 것들을 넣기로 했었어요. 사실 그 거울도 되게 비싼 겁니다. (웃음) 거의 한 100만 원 되는 거울인데, 인터뷰를 위해서 샀어요. 사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 말렸었고, 제가 귀가 얇은 편이라 웬만하면 사람들이 말리면 안 하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해야 한다고 우겨서 넣었어요. (웃음) 그래도 결과물을 보고 다들 만족해서 다행이에요. 이경혁 자문위원: 저는 2부 마지막에 4명 부감 잡는 장면에서 무대 세팅에 놀라움을 느꼈는데요. 아마 저만 그렇게 느끼진 않았을 것 같아요. * 위에서 찍었을 때, Game을 나타낸 무대효과. 이경혁 자문위원: 3부서는 예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결론을 명확하게 내리지는 않잖아요. 결론을 강하게 가져가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까요? 박진우 PD: 부담이 없었다고 하면 사실이 아니겠죠. 근데 그게 결론을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어요. 물론, 강하게 이야기 해볼 수는 있었겠죠. 예를 들어, 다큐에 나왔던 표현을 좀 빌리자면 “게임의 상호작용이 예술이다”,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보면서 반대 의사를 가지신 분들의 말씀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저는 이 주제가 논리적으로 설득할 게 아니라, 그냥 다름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분들이 자연스럽게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의 단초들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우리 다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고, 그런 면에서는 이루려고 했던 소기의 성과들을 조금 이뤘던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또 절묘하게도 화두를 던지는 엔딩이 더 의미가 있었던 모종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잖아요? 사실 우리가 논의할 때만 해도 그런 이야기가 없었죠? 박진우 PD: 맞아요. 9월 7일에 ‘문화예술’의 범위에 게임을 추가하는 내용의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죠. 8월 초부터 뉴스에 ‘이번에 국회 본회의 통과가 유력하다’고 나왔던 것 같은데, 그걸 처음에 봤을 때는 약간 식은 땀이 흘렀죠. (웃음) 지금은 게임이 최소한 법적으로는 예술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걸 가정하고 이미 다 만들어 놨는데, 갑자기 그 안에 들어온다니요. 반갑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몇 년을 고민한 걸 엎을 수도 없고, 이거를 모른 체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어떡할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오히려 좋은 거예요. 이런 상황을 살리자. 그게 3부에서 다루는 ‘게임과 예술의 관계’라는 게 먼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마주하고 있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라는 게 확 와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방송 말미에 자막으로 덧붙였습니다. 박진우 PD: 때가 다행히 잘 맞았죠. 그것도 방송 나가기 직전까지 몰랐던 게 국회 본회의에 법안이 통과되고 나면 그다음에 행정상의 절차라고 보통 얘기를 하는데, 그 이후에 행정부로 이관하고 공포하는 그 두 가지 단계가 남아 있더라고요. 물론 거기서 파기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한데, 그래도 확정이 되어야지 법적으로 효력을 갖는 거니까. 근데 그게 방송 3일 전인가 막 이랬거든요. 그래서 일단 다 써놓고 처리가 되었는지 계속 새로고침하고 그런 초조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Q. 마지막으로 이후에 하시고 싶은 작업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박진우 PD: 기획하고 있는 여러 가지 아이템 중 하나는 인디 게임 제작기거든요. 한 케이스로 쭉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여러 케이스를 같이 엮어서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이외에도 게임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더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자문위원: 이번 다큐를 책으로 만들거나 하는 후속 작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진우 PD: 사실 지금의 3부작만으로는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아카데믹한 작업들이 진행된 경우가 조금 더 책으로 발간하기 적합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게임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더 탐닉하고 싶어요. 책을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게임 다큐를 하다 보면, 작업물들이 충분히 쌓인다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소망이 있습니다. 결국 게임 다큐로 좀 더 많은 걸 해보고 싶어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게임과 예술 : 게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문에 현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 일정한 미적인 속성을 체계적이고 인공적으로 구성한 형식이 아니면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했다. 사진과 영화가 아날로그 기술적 혁신에 대응하는 형식이었다면, 게임은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고도의 예술형식이라고 보는 게 당연하고 타당했다. “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 Back 게임과 예술 : 게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12 GG Vol. 23. 6. 10.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다" - 베르그송 1. 게임은 예술인가 우문에 현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 일정한 미적인 속성을 체계적이고 인공적으로 구성한 형식이 아니면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했다. 사진과 영화가 아날로그 기술적 혁신에 대응하는 형식이었다면, 게임은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고도의 예술형식이라고 보는 게 당연하고 타당했다. “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1) 더욱이 게임은 일찌감치 여느 예술 못지않게 당대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과 감정을 담아냈다. 어쩌면 그 이상이다. 게임은 사람들과 ‘호흡’한다고, 게임을 통해서 사람들끼리 ‘공명’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도대체 게임의 어떤 점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MMORPG에서 여럿이 함께 난관을 하나씩 극복하며 최종보스를 잡는 경험도, 싱글 액션게임에서 고독한 게이머가 산산히 흩어진 세계(와 조각난 이야기)를 힘겹게 짜맞추어 나가는 과정도, 예술적 경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임은 기존의 예술적 형식과 경험을 반복하는 동시에 갱신하며, 예술·세계·경험을 확장시킨다고 봐야 했다. 물론,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는 과정이 녹록하지 않고, 여러 불편한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있었다. 전례가 있지 않은가. 영화 사진 만화 등 뒤늦게 등장한 예술형식들은 이 통과의례를 거쳤으며, 여전히 시험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임이라고 예외는 될 수 없을 테니,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고난의 시기’만 잘 넘기면, 어렵지 않게(?) 정착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당연히 준비할 거리는 있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과 미술 같은 예술과 똑같지는 않았기에 ‘설명’이 필요했다. 새로운 형식들을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 그 때문에 다른 특성을 띠는 게 무엇인지, 밝혀야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꼬였다. 이 점에서 게임은 영화에 비해서 운이 나빴다. 그것도 매우. 2. 서사, 그 예견된 잘못된 만남 생각해 보면, 문학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였고, 그만큼 성공할 때가 많았다. 미술과 음악은 물론이고, 최근에 등장한 영화까지 문학의 위성예술로 만들고자 했던 전례를 생각해 보라. 문학의 이른바 ‘멀티’ 행보는 유구하게 악명 높다. 2) 역사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미술이었다. 역사와 함께 태어났지만, 미술은 언제나 ‘찬밥’ 신세였다. ‘시는 회화와 함께’ut pictura poesis라는 테제처럼, 미술은 문학이 되고 싶었고, 문학의 기준에 따랐다. 아니, 따라야 했다. 더욱이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비롯해 이후에도 쟁쟁한 문학·이론이 뒷받침했다.(서구에서 성경은 역사·서사 자체였다) 역사는 (그리고 종교와 이념과 체제는) 언제나 문학의 편이었다. 역사 자체가 그것들이 뒤섞인 ‘이야기’story이지 않은가. 그들은 마음대로 미술과 음악 등에 마수를 뻗쳤고, 서사를 형식에 상관없이 우격다짐 밀어 넣었다. 미술은 그렇게 종교화나 역사화가 되었고, 음악은 가극이 되었다. 미술의 경우 20세 중반이 돼서야 겨우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평면, 그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어떤 다른 예술과도 공유할 수 없는 유일한 조건이며, 따라서 모더니스트회화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평면성 그 자체에로 향하는 것이다.” 3)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을 ‘평면성’flatness으로 규정하고, 비미술적인 것에 전면전을 선포했다.(물론, 문학이 완전히 ‘청소’된 것은 아니었고, 현재도 여전히 곳곳에서 진지전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다) 영화는 비교적 형편이 나았다. 기술적 태동기를 짧게 거친 후, 영화의 잠재력을 알아차린 전위대가 일찍부터 달라붙었다. 만 레이가 대표적일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다다 등, 그들은 선언부터 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필요하다면 스스로 비문학적 문학을 하는 예술집단이었다. 예술의 외부인 자본과 산업도 한몫 거들었다. 그것들은 영화형식의 기술적 본성을 완전히 실현시켰다. 강철에서 다리로 뛰는 철마가 아니라 바퀴로 구동하는 기차를 제작했듯, 영화의 형식을 완전히 개방시켰다. 매체의 양적 속성을 합리화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순수이론 영역은 오해를 양산했다. ‘기술적 반응과 질료적 실현’은 ‘순수예술·대중문화’의 범주로 엉뚱하게 굴절되어, 결국은 ‘머릿수’ 논쟁으로 곡해되어 전파됐고, 두고두고 ‘서열놀이’가 이어졌다. 이후,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서 교정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일소됐다고 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게임은 영화에 비해서 운이 나빴다. 더욱이 게임은 영화와도 매우 달랐다. 돌연변이나 괴생명체 같다고 할까. 영화는 그래도 사진과 연극이란 징검다리로 기존의 예술과 연결됐고, 예술적 전위들이 재빠르게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에 게임은 모든 게 기존의 예술과 단절되어 발원했다. 최초의 게임 〈퐁〉을 생각해 보라. 출력되는 모니터, 입력하는 인터페이스, 장치내부의 숨겨진 이진수체계 등, 기존의 예술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형식이 달랐다. 더욱이 생산자도 생산환경도 개발자에 실험실이었으니, 완벽한 이종(異種)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후, 문학 미술 음악 등 기존의 예술을 내용으로 ‘흡수’하면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형태로 가시화됐지만, 사진과 영화에 비해서 처음에 느꼈던 이질적인 ‘거리’는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게임이 성숙하고 형식이 완연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자, 설명이 요구됐다. 게임은 예술인가, 예술이면 무엇 때문인가, 꼬리에 물 듯 질문이 이어졌고, 예술적 ‘인정과 인증’이 필요해졌다. 문학은 언제나 그렇듯 독보적으로 빨랐다. 역시 서사가 전가의 보도였다. 장장 2000년 넘게 호령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생각해 보라. 장수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곰곰 생각하면, 문학은 참 이상하다. 미술이나 음악은 다른 곳에 차용돼도 청구하지 않는데, 문학은 늘 청구한다. 때로는 월권을 서슴지 않는다. 게임이 운이 나빴던 것은 (영화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개발과 예술의 거리는, 비평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이 상황은 나아졌다고는 해도,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할 사람도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4) 이론적 무주공산, 누구에게 이보다 쉬운 등반은 없었을 것이다. 놀이론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불가피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게임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관련된 전거를 찾았고, 자연스럽게 인류학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곳에 게임·놀이가 있었으니까. 더욱이 ‘행위’를 설명하기도 적합해 보였다. 그것은 일찍이 다른 문화·예술 형식이 들추어낸 적이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놀이는 미분화된 원시종합적 (예술)형식이다. 모든 게 녹아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정치와 사회를 배우고, 미술도 음악도 춤도 익힌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하면, 사람과 이론에 따라 선택되는 속성의 조합은 무한해진다. 어떤 이는 도박과 가면놀이를, 또 어떤 이는 다른 무엇들을 선택해 조합할 것이다. 이 작업은 끝이 없고, 발굴되는 유적이 늘어날 때마다 가설이 늘어나는 고고학처럼, 게임이 다양해질수록 선택되는 속성들의 조합도 똑같이 늘어날 것이다. 이후, 이렇게 성립한 ‘서사 대 놀이’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승패를 영원히 가릴 수 없는 카드게임과 전혀 다를 없었다. 이쪽이 이 카드(반례)를 내밀면, 저쪽은 저 카드(반례)를 내밀고, 이것이 영원히 진행된다. 이 미학적 PvP에서 문학이 졌을까. 사실 역사에서 문학이 지는 법은 거의 없었다. 역사는 (이념은 종교는 체제는) 언제나 문학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 개개의 논쟁에 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도는 영원히 남는다. 이 문학적 ‘문제’를 제거하지 않는 한, 문학적 ‘해’solution와 씨름해 봤자 소용이 없다. 이 문제는, 이 논쟁은, 이미 문학의 승리를 영구히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전리품’이며, 그런 식으로 폐쇄적인 담론구조를 만들어, 또 다른 생산적 담론을 은폐하고 차단하는 것은 훌륭한 ‘덤’이다. 3. 게임, 해석과 비평의 사이에서 모든 비평은 ‘텍스트’라는 것을 무엇보다 유념해야 한다. 하지만, 이 ‘언어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해서, 떨치기 힘들다. 그것은 본능에 가깝다. 비평조차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평의 내재적 운명이다. “모든 예술은 벙어리인 것이다…시는 언어를 사용하되 사심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즉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다.” 5) 비평이 예술에 대해서 말하는 권리라면,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비평의 태도는 모든 곳에서 ‘언어’를 발견하는 구조주의자와 비슷하다. 6) 그들은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서사를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비문학적인 것을 비평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다. 다른 매체의 고유한 굴곡을 ‘평평하게’ 다듬고 눌러서, 서사의 고속도로를 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언어로 분해하는 게 가장 쉽다. 그러한 해석에 반대해야 하며, 그것이 제1의 공리가 돼야 한다. 앞서 미술의 경우 장장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서사에서 겨우 독립했다고 말했다. 회화론은 1430년대에 와서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트가 처음으로 제창했고, 이때 처음으로 ‘의미 있는’ 그림에서 ‘정확한’ 그림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는 무엇보다 기하학의 세속적 형식인 원근법 덕분이었다. 말하는 방법이 아닌 보는 방법은, B.C. 4세기 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등장한 이후, 장장 1800년이 필요했다. 본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 본래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던 것이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소중한 자산이었지만, 카드 한 장에 불과했다. 카드게임을 할 만큼 패가 두둑히 마련된 것은, 20세기를 거치며 수많은 실천과 이론이 축적된 이후였다.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자(미래파)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년) 같은 작업은 텍스트가 한치도 침입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기껏해야 작품 전까지 작가의 행로나 그의 태도나 같이 활동한 집단을 묘사할 따름이다. 언어가 주변을 웅성거리며 맴도는 그곳은, 텍스트의 무덤이다. 7) *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블라디미르 타틀린. 그래서 〈에디스 핀치의 유산〉이나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같은 게임을 조심해야 한다. 물론, 좋은 게임들이란 사실은 틀림없다. 몇 시간 몰입해 끝내고 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솟구칠 것이다. 변신이나 미로 같은 구조를 보면 카프카를 언급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전체주의와 반영웅을 보면서 근대체제의 우의allegory로 분석하고 싶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입장에 따라서는 윤회까지 떠올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를 들어, 〈디아블로 3〉 2회차 경험을 생각해 보라. 과연 게이머가 레아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생각할까. 티리엘의 (지위) ‘하강’을 보면서 희랍비극의 과오harmatia 개념을 끄집어낼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이머의 머릿속에는 이번에 할 빌드와 하늘에서 ‘찰랑’ 빛나며 떨어지는 전설 아이템만 주시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이 346회차 하니까 서사적 경험은 1/346으로 줄었군 하면서, 게임의 평균회차로 서사적 경험을 ‘나누면’ 문제가 해결될까. 혹은 딱 한 차례 경험한 게이머를 심층면접해서 따로 정리해 ‘본질적’ ‘핵심적’ 서사적 경험을 증류하면 충분할까. 이런 식의 접근법은 넌센스다. 여기서 서사는 놀이동산에 입장할 때 필요한 ‘입장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가 인물도 사건도 심지어 개연성까지 타락시켰지만, 게이머가 게임을 계속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임에서 서사는 기껏해야 필요조건 중 하나지,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8)9) * '에디스 핀치의 유산'(위), '바이오쇼크'(아래) 4. 미술이라는 전례, 미래의 전령으로서 게임 현대에 미술은 문학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 본질로 부르든 핵심이라고 하든 ‘하나’를 고수하는 대신에, 그 하나마저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을 영역이라고 한다면, 무대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틀고 연극도 하고 강의도 하는 등, 실행가능하고 상상가능한 모든 행위가 ‘전시’되며, 심지어 요리도 한다. 미술은 말 그대로 ‘일반예술’이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게임은 미술과 비슷하다. 여러 다른 예술을 흡수하는 동시에, 심지어 경제 사회 정치 등 다른 부문까지 끌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과 게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술이 ‘사용’하는 수준이라면, 게임은 각각의 부문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윌리엄 깁슨) 깁슨의 말대로 미래가 널리 퍼져 있지 않을지는 몰라도, 게임이 미래의 일부를 선취해 게이머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최소한 게임이 전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일찍이 하우저는 연극을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부대끼며 대화하고 논쟁하며, 근대적 시민으로 형성됐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고독한 개인의 ‘묵독적 (혹은 해석적) 태도’가 연극은 물론 영화까지 점령했지만, 초창기 영화도 연극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10)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서 왁자지껄하게 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장면을 상기해 보라. 그곳에서 지금과 같은 개인의 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상은 없었다. 그 경험은 집단적이었고 역동적이었다.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의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이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Zertreuung과 정신집중Sammlung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영화는, 관중으로 하여금 비단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와 아울러 이러한 영화관에서의 관중의 비평적 태도가 주의력을 포함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종교의식적 가치를 뒷면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관중은 시험관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그는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인 것이다.” 11) 벤야민은 이 분산적 태도에서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예술(영화), 주체(대중)를 모색했다. 벤야민은 영화를 분석하며 미래를 진단했지만, 그의 묘사는 게임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물론, 그것이 연극이나 영화처럼 민주주의적 경험은 아닐 것이다. 벤야민이 기대했지만 실패했던 미래의 사회도 미래의 예술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과거의 예술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문학적 패악은 끝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각작용aesthesis 일반’의 변화다. 미시적 습속들의 변화, 말하는 화법들,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는 방식들, 물건을 교환하고 결제하는 행태들,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식들, 혹은 작업장의 봇들이나 디지털 사회범죄 같은 문제들 등등, 그 밑바닥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꾸준하고 착실하게 변화를 추동하는 기술적 동향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기원을 게임에서 찾자는 게 아니다. 그런 것도 있을 것이고,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경험과 태도의 변화를 게임이 주도하며, 게이머를 (혹은 인류를) 훈련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관찰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잘 만든 AAA게임에 주목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게임과 다른 사건과 다른 기획을 주시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 어차피, AAA게임들은 본성상 비평(제도)에 친화적이다. 그런 게임들은 언제나 할 ‘이야기들’이 많고, (게임 외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그러면 다른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예를 들어, 통계적 피드백을 게임에 접목해 게임행위를 미묘하게 비트는 행태 같은 것.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뻔한 서사적 결말들보다, 게임행위에 개입하는 통계수치의 ‘효과’를 분석하는 게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중요한 (윤리적) 판단을 할 때마다 통계수치와 비교해 보는가. 통계적 지표는 관찰대상이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지표의 기능을 상실한다. 피드백 루프가 발생해, 게이머가 행동을 선택할 때 지표로 삼는 순간, 지표기능이 교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별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렇게 미묘하게 인간·게이머의 ‘결정구조’를 변화시키는 방식들, 거칠게 말해서 수치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12) 게임 외부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메타의 메타버스 기획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블리자드 인수계획 같은 게 있겠다. 언뜻 보기에 메타의 메타버스는 과거 〈세컨드 라이프〉를 상기시킨다. 둘 다 커뮤니티 서비스의 3차원 확장인데, 게임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세컨드 라이프〉는 현실의 ‘보완재’에 불과했다면, 메타의 기획은 ‘대체재’를 지향한다는 것. 실패했지만 메타가 2019년 암호화폐 리브라를 발표했던 것도 생각해 보라. 메타의 메타버스는 온전한 세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인류 이주계획’인 것이다. 이 계획에서 게임이 직간접적으로 매개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달리 다가오는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행보도 의미심장하기는 비슷하다. 최근 인공지능 때문에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게임 쪽 확장도 광폭이다.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RPG 스튜디오 베데스다를 인수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까지 노리고 있다. 독점 논란 때문에 여의치 않아 보이지만, 성사만 된다면 어떤 양상이 벌어질지 사뭇 흥미롭다. 알다시피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사회’다. 시작은 달랐지만 이런저런 흐름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 메타의 '메타버스' 한때 예술은 미래의 안테나라고 했다. 이제 게임은 현재에 도착한 미래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균등하고 불균질적일 지라도. 1)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224~5. 2) 한국에서도 비슷한 패악이 되풀이됐다. 2000년대 초중반, 영화비평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때, 계간지 〈창작과비평〉은 ‘문학적으로’ 영화비평을 딱 한 번 시도했다. 편집위원 김영희가 앞장섰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김소영이 〈창작과 비평〉의 월권을 거세게 비판하며, 일단락(?) 되었다. 3) 클레멘트 그린버스, “모더니스트 회화,” 〈현대미술비평 30선〉, 계간미술편중앙일보사, 1992, 67쪽. 4) 이후 매체예술이나 뉴미디어 형태로 미술에서 반응하기 시작하긴 했다. 2000년 개최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디지털 호모 루덴스〉가 초창기 상황을 보여준다. 5) 노스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 한길사, 2000, 48쪽. 6) 들뢰즈,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518쪽. “사실상 오로지 언어적인 것에만 구조가 존재한다…무의식은 그것이 말하는 한에서, 그리고 언어인 한에서 구조를 지닌다. 신체는 징후들이라는 언어를 통해 말하는 한에서 구조를 지닌다. 사물들은 기호들의 언어인 침묵의 담론을 취하는 한에서 구조를 지닌다.” 7) 그러나 러시아 구성주의의 미래는 ‘배드 엔딩’으로 끝났다. 미래의 사회(였던) 소련에서 미래의 미술은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현재가 된 사회에서 과거의 문학에 패배했다.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는 일리야 레핀의 아류이자 후계자들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갈음됐다.(벤자민 부흘로, ‘팍투라’에서 ‘팍토그람’으로,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시각과언어사, 1995 참고) 8) 영화나 게임에서 비평가의 진술과 관객과 게이머의 선호가 충돌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쓰기 좋은 소재와 관객과 게이머의 경험은 ‘우연히’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하기 좋은 게임이 반드시 좋은 게임인 것도 아니다. 조금 과장하면, 졸작은 졸작대로 할 말이 많다. 9) 〈엘든링〉 같은 게임에서 파편화된 이야기 조각들을 찾는 게 ‘또 다른’ 게임행위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게이머가 서사와 무관하게 시간을 통제하며 행동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행태는 루카치가 생각했던 근대적 주체의 의미찾기 같은 게 아니다. 죽은 시체에서 단서찾기 같은 것으로, 에른스트 블로흐가 ‘죽은 이야기’라며 비판했던 범죄소설의 형식과 비슷하다. 영웅적인 주체가 의미를 찾는 여정이 약물중독자의 수수께끼 풀이로 귀결되는 것을 주류 (문학) 이론가들은 못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장르문학 딱지를 붙이며 서열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그렇기는 하다. 10) 1973년 〈록키 호러 픽쳐 쇼〉가 우발적으로 인기를 끌며, 이 정적이고 묵독적이고 해석적인 태도를 공격했다. 이 컬트영화가 영화제도와 관객성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 소규모 ‘반란’은 이내 진압되었다. 지금은 영화역사서 아니면,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다. 반면 게임에서 행위는 ‘디폴트 값’이다. 11)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228~9쪽. 12) 현재 미국은 범죄자의 재범가능성을 엄격한 수학적 통계적 알고리즘에 따라 평가하고 반영한다.(데이비드 섬프터, “편향없음은 불가능하다,”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해나무, 2022) Tags: 예술 미술 비평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김상우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미술 , 매체, 게임 세 가지로 세상을 응시하며 미술기획과 글쓰기하며 활동했다. 〈죄악의 시대〉(2010), 〈딱 한 판만〉(2009)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게임과 문화연구〉를 같이 썼고, 〈친밀한 살인〉, 〈튜링스 맨〉 등의 책을 옮겼다.
- 재현, 추상,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정치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에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물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쏘아 올리던 고대 로마의 분수부터 폭포 아래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물레방아까지, 우리는 스스로 ‘작동(作動)’하는 대상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스의 헤론이 만든 회전하는 증기 장치에서 근대 산업기술 사이를 비집고 등장한 다양한 오토마타까지, 작동하는 무언가가 주는 즐거움은 기술의 고도화 여부와 관계없이 인류 문화 한켠을 차지해 왔다. < Back 재현, 추상,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정치 27 GG Vol. 25. 12. 10. 오토마타와 시뮬레이션 사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에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물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쏘아 올리던 고대 로마의 분수부터 폭포 아래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물레방아까지, 우리는 스스로 ‘작동(作動)’하는 대상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스의 헤론이 만든 회전하는 증기 장치에서 근대 산업기술 사이를 비집고 등장한 다양한 오토마타까지, 작동하는 무언가가 주는 즐거움은 기술의 고도화 여부와 관계없이 인류 문화 한켠을 차지해 왔다. 디지털게임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시뮬레이션’은 이러한 작동의 세계를 한발 더 밀고 나간 개념이다. 단순히 작동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작동에 직접 개입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시뮬레이션의 독특한 즐거움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그 과정에서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뮬레이션’이 본래 게임 장르가 되기 이전에는 현실 세계의 현상과 질서를 모델링을 통해 재현하는 기술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실제 장치나 제도를 구현하는 데 드는 비용—경제적 비용뿐 아니라 실패가 낳는 기회비용까지—을 절감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작동의 실패는 언제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작동을 구경하는 즐거움은 게임화된 시뮬레이션 속에서는 실패의 위험을 관리하고 극복해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무엇’을 만들어냈다는 성취의 즐거움으로 확장된다. * 골드버그 장치(위)와 <요절복통 기계>(1992)는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전자가 완성된 작동 장면을 감상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장치를 ‘만드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한다. 우리가 즐기는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이 두 가지 즐거움이 나란히 담겨 있다. <팩토리오>에서 플레이어가 설계한 자동화 공장이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풍경은 시각적 쾌감을 넘어서는 스펙터클이다. 동시에 그 완성된 체계를 직접 만들었다는 뿌듯함도 있다. 오토마타를 바라보는 즐거움과, 그 오토마타를 스스로 설계했다는 즐거움이 하나의 장르 안에서 조우한다. 완성된 레고 테크닉을 바라보는 기쁨과 레고를 조립하는 과정의 기쁨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즐거움은 시뮬레이션 장르의 고유한 지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전격투 게임을 떠올려보자. <철권>에서 플레이어는 복잡한 프레임 사이로 움직이며 상대의 체력을 깎아나간다. 여기서도 실패의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고, 이를 넘어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분명 크다. 하지만 기술과 기술이 매끄럽게 연계되는 순간은 게임 속에 실시간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짧은 리플레이를 통해 스쳐 지나간다. 완성된 순간 자체를 오래 관조하는 구조가 아니다. 때로는 컷신처럼 게임 외부로 튀어나오거나, e스포츠나 영상 콘텐츠의 형태로 아예 바깥에 존재한다. 반면 <산소미포함>에서 완성된 지하도시가 철컹거리며 돌아가는 광경을 바라보거나, <롤러코스터 타이쿤>에서 자체적으로 굴러가는 완성된 공원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시뮬레이션 장르의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완성물을 관조한다는 것은 ‘복잡성을 장악했다’는 증명과도 같다. 복잡한 체계를 단순화된 규칙으로 조정해 낸 결론이 단순히 ‘승리!’라는 순간이 아니라, 그 완성된 작동이 펼쳐 보이는 논리적 풍경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조금 현실적인 비유를 들자면, 제국을 완성한 권력자가 느끼는 ‘잘 돌아가는 제국’의 감각에 가깝다.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인프라를 하나의 질서 하에 묶어낸 진시황이 느꼈을 법한 그 만족감—시뮬레이션 게임이 겨냥하는 지점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시뮬레이션에서 추상되는 것들 시뮬레이션 게임에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면, 조금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권력지향적일 리 없다. 현실에서 권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리스크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폭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욕망을 통제해 왔다. ‘게임’으로서의 시뮬레이션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본래의 시뮬레이션이 그랬듯이 현실의 비용—물리적·경제적·윤리적 비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시뮬레이션은 제한된 가상세계 안에서 적당한 성취를 맛보게 하고, 그 과정은 현실보다 훨씬 가볍다. 이 가성비 높은 즐거움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 바로 ‘추상화’다. 현실에서 어떤 욕망을 구현하려면 수많은 조건들이 따라붙지만, 놀이로서의 시뮬레이션은 그중 많은 요소를 과감히 생략한다. 전략 시뮬레이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를 보자. 플레이어는 군웅할거의 시대에서 천하통일을 목표로 한다. 영토는 인구와 생산력 같은 기본 스탯을 가지고 있고, 내정을 통해 수치를 끌어올린다. 군대를 징병하려면 농업·상업 개발과 인구 증가를 통해 얻은 금과 식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내정’이라는 복잡한 개발 과정은 게임 안에서 그저 장수에게 하나의 커맨드를 실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실의 토지개발 과정을 그대로 모사하면 게임의 주제—군웅할거의 경쟁—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이 주는 즐거움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현실과의 대응 여부가 아니라, 재미를 기준으로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지가 결정한다. <심시티>도 마찬가지다. 이 게임은 도시의 성장과 번영을 탁월하게 그려내지만, 그 우상향 그래프의 바탕에는 경제력, 특히 땅값과 세금 구조가 놓여 있다. 그렇기에 디테일을 구현하면서도, 예컨대 땅값 상승으로 기존 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현실의 복잡한 요소들은 과감히 추상한다. 결국 시뮬레이션 게임을 평가하는 하나의 질문은 “무엇이 추상되었는가?”다. 이 기준을 플레이어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기에 장르 안에서도 다양한 논점이 발생한다. 실제 전투기와 흡사한 디테일이 ‘진정한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에이스 컴뱃>이 납득되지 않는다. 반면 <팰콘 4.0>의 <자본론>보다 두꺼운 매뉴얼 앞에서 좌절한 이들에겐 정도면 충분히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이다. 추상과 정치 이 지점에서 ‘시뮬레이션’과 ‘시뮬레이션 게임’은 분리되어야 한다. 양자는 정치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무엇을 추상하고 무엇을 남겼느냐가 즐거움의 기준이 되는 순간, 게임은 의도치 않은 정치적 해석에 휘말릴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심시티>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도 여기에 속한다. <문명> 시리즈는 이런 문제가 훨씬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이 게임은 인류사를 데이터와 연산을 기반으로 재구성하며 플레이어에게 ‘다른 시간선’을 만들어낼 기쁨을 준다. 실존 역사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다. 하지만 제작사는 이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인 기존 역사 서술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지도자의 성비를 조정하고, 말리·하와이·폴리네시아 같은 비서구 문명을 적극 편입했다. 최근 시리즈일수록 점령과 정복 중심의 승리 조건에서 벗어나 과학·문화·종교·외교 승리 등 다양한 엔딩을 제시하며 제국주의적 서사의 편향을 완화하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역사에 승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따라붙는다. 이는 결국 ‘추상’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고정된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여러 요소를 배치해 플레이어가 조합하도록 설계한다. 이 과정에서 재미를 위해 무엇을 추상할지 결정하는 순간, 의도와 다르게 정치적 메시지가 발생할 수 있다. 재미를 위한 삭제가 ‘의도적 누락’으로 읽힐 때, 게임은 본래의 목적을 떠나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세계를 구성하는 데이터의 일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 세계가 이미 정치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실 모사와 재미, 혹은 즐거움의 문제로서의 시뮬레이션 게임 커뮤니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게임은 재미가 최우선!”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게임만이 재미를 추구하는 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재미’를 준다. 특히 현실의 논리를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현실의 구조를 기반으로 삼되, 재미를 위해 일부 요소를 추상해야 한다. 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와 ‘재미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충돌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앞서 언급한 오토마타 비유를 조금 바꿔 말하면 마치 건프라 조립 세트에 가깝다. 완성품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만드는 과정의 즐거움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결국 현실의 특정 논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모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의 모든 요소를 담아내는 시뮬레이션은 이미 게임이 아니라 실제 시뮬레이션 시스템이다. 게임으로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상이 필요하고, 그 추상은 곧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선택을 포함한다. 이 선택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정치적인 행위다. 무엇이 빠져 있고, 무엇이 강조되었는지, 그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완전한 작동’처럼 느껴지는지를 살펴보는 일. 이러한 감상과 이해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다 비평적으로 즐기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 Back 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15 GG Vol. 23. 12. 10. 올해는 <발더스 게이트 3>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CRPG의 부활과 같은 분위기에 많은 올드 게이머들이 환호했다. 전투 시스템 등에서는 <발더스 게이트>의 이전 시리즈작보다는 라리안 스튜디오의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2>을 떠올리게 만들긴 하지만, 뭐 어떤가.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가 정식 넘버링을 달고 돌아왔으면 그만이다. 열정적인 일부 게이머들이 자체 한글화에 나서 많은 한국 유저들도 불완전한 한글 상태에서나마 게임을 즐길 수 있었고, 결국 공식 한국어 지원 소식이 전해지는 데에 이르렀다. 굉장한 일이다. <발더스 게이트 3>는 게이머가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게임이다. CRPG 장르의 팬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다양한 문제 해결 방식의 구현은 기본이다. 이게 아름다운 그래픽과 성우들의 열연으로 장식돼있다. 불행한 흡혈귀부터 전작에 등장했던 미니어쳐 거대 우주 햄스터의 절친까지, 흥미로운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 각자의 스토리를 함께 경험하는 것은, 물론 스토리상 다소 빈 구멍이 있는 듯 느껴지는 대목도 있지만, 어찌됐든 요즘 말로 ‘뽕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는 D&D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 세계와의 접점이 거의 없어보이지만, 그럼에도 창작과 그것을 비평하는 방법론의 차원에서 보면 현실과의 접점에 주목하면서 작품의 이해를 넓히는 방식이 유효할 때도 있다. 소위 외재적 비평이라는 것인데, 게임의 훌륭한 점을 나열하거나 기대에 못 미쳤던 점을 짚어내는 것보다도 이런 방법을 택하는 게 이번에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이런 방식의 접근은 ‘작품을 경험하고 나서 이런 면도 생각해보자’는 차원이지 ‘작자의 의도는 실은 이거였다’는 식의 퀴즈풀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는 점을 먼저 강조하는 바다. <발더스 게이트>의 첫 작품은 1998년에 나왔고 2편의 마지막 확장팩이 나온 것은 2001년이다. 중간의 리메이크판 등을 빼면 22년만(얼리억세스를 포함한다면 19년만)에 정식 후속작이 등장한 셈이다. 그 20여년의 세월은 작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사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발더스 게이트 3>의 흥미로운 점은 서사의 중심에 일리시드가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됐으며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시작한다. 이게 계기이며 명분이다.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모험은 시작되지 않았을 거고, 동료들이 서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감염’인가? 만일 작품이 2019년 이전에 나왔다면 우리가 받는 인상은 이후와 달랐을 거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19년 이후에 나왔으므로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은 입장에서 ’감염’에 대한 느낌은 각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일리시드 올챙이는 호흡기 질환이 아니고 비말 혹은 에어로졸 입자에 의해 전파되지 않으며, 어찌됐건 전염되지 않는다. 일리시드 올챙이 감염은 오직 마인드 플레이어가 인위적으로 올챙이를 집어 넣을 때만 일어난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일은 보통의 일리시드 올챙이 감염이 아닌 네더릴 마법에 의해 조작된 감염이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 논란, 중국 기원론 등을 둘러싼 논란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중국의 네더릴 마법에 의해 조작이 된 것일까? 그런데 이런 것보다는 코로나19와 인류의 미래에 관한 담론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코로나19가 등장한 초창기 식자들은 인류가 더 이상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앞다투어 강조했다. 마스크 착용과 재택근무는 일상이 될 거고,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며,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퇴조가 불가피해 고립주의와 자국우선주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다는 거였다. 세계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먼저 희생되는 것은 취약계층일테니 사회구조를 지금과 같은 경쟁위주로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내놓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논의를 일리시드화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발더스 게이트 3>의 중반부에 정체를 드러내는 ‘황제’는 자신이 일리시드화 됐다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캐릭터이다. 주인공들에 음모에 맞설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제공하는 인물인 ‘황제’는 후반부에 가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주인공이나 주요 동료들의 반(半)일리시드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외양의 변화만 일부 감수하면 특별한 이득을 여러가지로 얻게 돼 다양한 측면에서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최종전 직전의 선택에서 ’황제’와 결별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주인공과 새롭게 우군으로 합류하는 기스양키 오르페우스를 포함한 누군가가 일리시드화 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작중 인물들이 반복 강조하듯 일리시드화는 불가역적 변화이며 ‘나’를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일리시드화로 가장 많은 개인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동료인 칼라크는 일리시드 상태에서도 앞으로의 희망을 얘기하지만, 성우의 연기는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즉 ‘감염’은 어떤 불가피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감염’으로 인한 변화에 적응하거나 그것을 수용하기 보다는 ‘감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추구했고 그것을 쟁취했다. 그것은 현실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감염’으로 인한 생채기를 치유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게임의 안과 밖, 양쪽 모두가 그렇다. 이게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의문은 다소 남아있다. 그러나 또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변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감염’을 겪으면서 <발더스 게이트 3>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거나,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넘어서는 등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그렇게 성장한 주인공 혹은 그들의 서사를 이어받는 누군가는 ‘감염’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견디면서 또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갈 거고, 그들과 모험을 함께하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거다. 그게 아마 앞으로 또 언젠가 나올 <발더스 게이트 4>가 현실과 관계맺는 방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발더스 게이트 3> 서사의 중심에 일리시드가 위치하면서 연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모티프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것이다. 일리시드는 일종의 군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집단의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엘더브레인이다. 엘더브레인은 경향적으로 자신의 제국 건설과 이를 위한 정복 사업을 위해 움직인다. 3명의 악신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은 네더스톤으로 엘더브레인을 조종해 일리시드를 지배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각자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 이 구조는 일견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익숙한 권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네더스톤으로 엘더브레인을 통제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루트 권한을 탈취한 것이다. 주인공들은 악신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에게 네더스톤을 빼앗아 권한을 다시 탈취해 엘더브레인의 통제권을 취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이 이야기의 기본 구도는 루트 권한을 누가 갖느냐의 싸움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것은 엘더브레인은 이미 네더스톤의 수신기 역할을 하는 카서스 왕관을 장악해 네더브레인으로 진화한 상태이며, 주인공들이 3악신의 선택된 자들로부터 네더스톤을 탈취하는 것도 네더브레인이 만든 ’위대한 설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를 앞서 권한 구조에 비유한다면, 루트 권한을 탈취당한 시스템이 자기가 알아서 루트 권한 수복을 위한 계획을 실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인공지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주제가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관련된 일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의 오픈AI 사태는 어떤가? CEO인 샘 올트먼이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과정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보도에 의하면 이 갈등의 핵심은 일반인공지능의 개발 속도를 둘러싼 이견이라고 하는데, 물론 보도되지 않은 여러 맥락이 더 있겠지만 이런 주제를 현실의 사건을 다룬 뉴스에서 보는 세상이 벌써 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놀라움을 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일반인공지능이란 무엇이고 그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엄밀한 차원에서 각자 제각각의 정의를 내놓고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공지능-디스토피아가 당장 눈 앞에 도래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둘러싼 인간 사이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지시하지 않은 일을 스스로 판단해 이행한 결과로 인류가 위기에 빠지는 사건은 아직도 아주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걸 걱정하는 일은 현재의 일이 된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해결책은 역시나 ‘황제’가 제시하는데, 앞서 언급한 일리시드화가 그것이다. 네더브레인은 일리시드이므로 능력이 모자라는 인간으로 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리시드에는 일리시드로 대항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비유해 말하면 문제적 인공지능에 대항하는 ‘우리 편’ 인공지능을 활용해 문제적 인공지능의 권한 탈취 시도를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거다. ‘황제’는 그 자신을 네더브레인에 대항하는 일리시드, 즉 ‘우리 편’의 인공지능으로서 네더스톤 즉 루트권한의 양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발더스 게이트 3> 속 이야기 내내 ‘황제’를 바라보며 주인공들이 느끼는 의구심 그 자체이다. ‘황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리시드인 ‘황제’를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우리 편’ 인공지능은 언제까지 인간의 편인가? ‘우리 편’ 인공지능은 과연 문제적 인공지능으로 진화하는 일이 없는가? <발더스 게이트 3>는 적어도 이 의구심에 대해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황제’는 주인공들이 편들어 주지 않으면 상대방에 붙고, 편들어 주면 배신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일행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실의 인공지능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가 아닌 복잡한 정치사회적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발더스 게이트 3>가 아닌 다른 게임으로 논하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건 다음 기회에 해보기로 하겠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 Back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27 GG Vol. 25. 12. 10. 라이프 시뮬레이션과 '승리 조건의 부재'의 나비효과 <심즈>의 아버지이자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개척자 윌 라이트는 2001년 Game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긴다. 윌 라이트는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활성화하는 것이 자신이 게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라고 밝히며,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은 단순히 게임 디자인의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라이프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1. 윌 라이트(2010) (출처: 위키피디아)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와 시뮬레이션의 의사소통은 플레이어가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작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가 플레이 디자인을 완성하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에게 조작할 수 있는 플레이 환경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시뮬레이션에 대한 플레이어의 이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플레이 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특정한 방향으로 플레이어의 이해를 유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자체가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적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의 목표설정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시뮬레이션 게임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를 모델링하여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환경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플레이어는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미시계의 규칙들을 파악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가며 시뮬레이션을 탐구해 나간다. 특히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게임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를 우연히 확인해가며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서사를 획득해 간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게임들을 본질적으로 소프트웨어 장난감에 가깝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게임이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특정한 가능성보다는 각 플레이어가 가능한 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큰 해법 공간을 제공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만약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에 훨씬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난감에는 정해진 목표도 없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는 주체 스스로가 놀이의 규칙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윌 라이트의 이런 인터렉티브 디자인 철학은 ‘심시리즈’를 비롯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목적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종속된 플레이를 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우연히 시뮬레이션을 만지다보니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윌 라이트가 지적하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의 장난감적인 특성은, 게임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상기하게 만든다. 게임은 오랫동안 로저 이버트를 포함한 많은 평론가와 연구자에게 존재론적으로 예술의 특성을 가진 매체로는 인정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들이 제시하는 평가의 근거는 대게 칸트가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 그리고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개념에 근거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목적성’의 표상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특정한 목적의 귀속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불렀다. 칸트에게 미적 경험은 인식적 판단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개념적 파악이나 실용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관조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칸트는 자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어떤 질서인지는 모른다는 것이고, 종속된 것들은 딱히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내적인 질서 창출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법칙만을 추구하는 의지를 욕망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이를 ‘선의지’라고 부르며,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라고 보았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어떤 자유로운 유희를 허용받으며, 하나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지성의 합법칙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칸트의 개념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와 같은 것들이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 것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아주 우연히 도달하게 되는 경지 같은 것이 된다. 물론, 칸트가 이렇게까지 ‘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데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주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타우마제인(thaumazein)’이라고 부르는, 인간에게 철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개념이 기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이 경이로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무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타우마제인은, 설명하자면 “매번 보는 노을이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나한테는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현상” 정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칸트에게 ‘선의지’란 무언가를 추구하는 힘이나 동력 같은 것이라기보단, 프로그래밍 코드를 돌리다가 리팩토링 안 한 스파게티 코드가 문득문득 시스템과 맞아떨어지며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경이 체험 같은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을 제공한다면, 게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는 힘을 잃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예술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단순히 규칙의 집합이나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스템과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게임 연구자들 역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게임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만들만한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 가능성을 분석해왔다. 윌 라이트 자신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뮬레이션을 ‘역설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플레이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가 중간 모델이며,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MDA에서 DPE로, 시스템 산출물에서 주관적 경험으로 오늘날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연구자는 아마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의 대표작으로 종종 소개되는 (Thatgamecompany, 2012)의 개발자이기도 한 로빈 후니케(Robin Hunicke)일 것이다. 후니케는 2004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기 위한 MDA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MDA 프레임워크란 시뮬레이션 게임의 플레이를 디자인하는 개발자를 위한 프레임워크로, 게임을 개발할 때 매커니즘, 상호작용, 미학 혹은 경험 순서로 플레이를 설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1. MDA 도식과 요소별 개념] - 출처: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Robin Hunicke, 2004) - 동시에 후니케는 MDA 프레임워크가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을 구조화해 분석할 수 있으며, 플레이 경험을 시스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플레이 동기와 시스템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발자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후니케는 개발자는 MDA의 흐름으로 '설계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에 접근하면 되고, 플레이어는 ADM의 흐름으로 '경험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니케의 MDA 프레임워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가진 플레이 특성을 경험 지향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은 분명하나, 미학 혹은 경험이 매커니즘과 상호작용에 종속된 결과로만 이해하게 만드는 한계 역시 품고 있다. MDA 프레임워크가 플레이에 대해 계층적으로 접근한 것은 게임플레이 디자인에 있어 명확함을 담보해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게임 디자인의 유기성을 저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림2. DPE 도식] - 출처: 「The Design, Play, and Experience Framework」(Brian Winn, 2008) - (DPE는 본래 게이미피케이션 분석을 위한 프레임워크로, 베네디스는 DPE가 MDA보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 분석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제네시스 베네디스(Genesis Benedith)는 MDA 프레임워크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며, MDA 프레임워크가 UX전략이나 연출과 같은 규칙으로 환원 불가능한 게임 요소를 분석에서 배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베네디스는 MDA가 <심즈>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DLC 등에 의한 게임의 기술 변화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플레이어가 창출한 서사 아크 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궁극적으로 MDA가 게임 개발에 있어 매커니즘 편향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베네디스는 이러한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하는데, 이는 MDA가 집중한 내재적 분석을 외재적 요소까지 확장시킨 것에 가깝다. 베네디스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분석하기 위해 게임 요소를 Design, Play, Experience로 확장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한다. DPE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맥락을 중심으로 게임을 분석하여, 주관적 경험에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레임워크를 지나치게 넓게 확장하고, MDA가 왜 오늘날 시뮬레이션 게임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간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MDA에서 DPE 프레임워크로 넘어오며 주관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분석이 왜 하필 플레이어의 주관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조이>, 콘텐츠 진공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즈음에서 크래프톤이 야심차게 ‘앞서 해보기’로 공개했던 <인조이(InZOI)>(2025~)를 떠올려보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인조이>는 플레이어에게 까다로운 플레이 환경을 요구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버그가 많고, 콘텐츠는 진공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더구나 엔비디아와 협력을 통해 게임 내에 AI NPC ‘스마트조이’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현 상태만 두고 보면 <인조이>의 AI 환경 수준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아직까지는’ CDPR의 <사이버펑크 2077>와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는 분명히 <인조이>의 단점이며, 우발적 사건들이 난입할 가능성을 생각해가며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가장 중요한 소구점 중 하나인 ‘쾌적한 플레이 환경’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으로 인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최적화 문제 △잦은 크래시 △예측 불가능한 버그로 인해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할 게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점만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임 커뮤니티가 비판하고 있는 ‘콘텐츠 진공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상태를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콘텐츠 진공상태’ 만큼은 (최소한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인조이>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조이>가 ‘앞서 해보기’를 런칭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 요인이자 존재 가치라고 생각한다.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상태는 <심즈>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세계’보다는 ‘일상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현대세계와 일상성(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에서 일상을 일종의 패턴이자 리듬이라고 지적하며, 반복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을 ‘환상과 진실, 힘과 무력함이 교차하는 지점,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과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만나는 곳’이라고 변증법적으로 정의하며, 일상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리듬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형되는 갈등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구간을 동일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이 패턴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점을 통해 구분할 수는 없으나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일성’을 ‘차이 혹은 변화 없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 혹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와 변화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그 차이와 변화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조이>에서 ‘콘텐츠 진공’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향을 지시하지 않음 △플레이어가 게임 빌드나 시퀀스 내의 사건에 개입하기 어려움(혹은 없음)에 가까워 보인다. <인조이>의 개발일지를 보아도 플레이어블한 개발보다는 생성형 인터랙티브 무비의 빌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가령, 가장 최근에 쓰여진 11월 26일 패치노트에는 “ 무법자 기질 조이가 자율 행동으로 '훔치기' 상호작용을 진행하지 않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고, 11월 19일 패치노트에는 “ 식사 후 2시간이 지난 음식 그릇을 일괄 정리할 수 있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으며, 대부분의 패치에 AI의 행동을 감상하는 것으로 플레이 요소가 종결되는 빌드들이 개선사항으로 나온다. 이는 플레이어의 조작 경험을 ‘클릭 후 감상’ 정도의 극단적 단순함으로 느끼게 만들며, 폐쇄적인 플레이 환경 아래 놓여있다는 감각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조이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조이들은 자율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피로를 느끼며, 사회적 욕구를 느낀다.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조이들에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나 <심즈>와 달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지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심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플레이어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심즈>와는 분명 다른 특성이다. <심즈>에서는 심이 불을 내면 플레이어가 개입해 불을 끄거나 소방관을 불러야 한다. 심이 직장을 잃으면 플레이어가 새로운 직업을 찾아주어야 하고, 관계가 악화되면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채무 갚기’라는 커다란 미션 아래 다양한 할 거리를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동물의 숲>과도 다르며, 점수와 같은 수직적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타듀벨리>와도 다르게 보인다. <동물의 숲>은 채무 상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공한다. <스타듀벨리> 역시 콘텐츠의 볼륨이 클지언정 농장 경영이라는 명확한 프레임워크 안에서 수익, 작물 품질, 마을 주민과의 관계 등 측정 가능한 수직적 성과 지표들을 제공한다. <인조이>에도 카르마 시스템이 있지만, 카르마 시스템이 수직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람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조작 감각의 부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인조이>의 게임 특성은,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조작 압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PvE가 아닌 PiE(Player in Environment)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PvE가 플레이어가 환경과 대결하는 구조라면, PiE는 플레이어가 환경 속에 존재하며 환경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PiE와 메타적 경험, 혹은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 이때 우리는 Environment가 게임이 가진 미시계의 전체적인 세팅과 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으며, 글의 서두에서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PiE에서 플레이어는 조작을 통해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파악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조작이 사실상 제한된 게임 환경을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게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인조이> 디스코드 같은 공간이 그러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인조이> 플레이어는 결국 게임 밖을 나와 디스코드 와 같은 공간을 통해 인조이의 단순한 조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인조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이 펼쳐지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플레이어가 직접 <인조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인조이>와 <인조이> 밖을 오고가며 내가 <인조이>를 플레이하는 이유와 정보를 비교해가며 공략 아닌 공략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과정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 가까우며, 매우 불편하고도 비효율적인 플레이 경로를 가졌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긴 경로와 과정은 <인조이>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와 다른 플레이어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조이>와 그 개발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나의 플레이 목표에 개입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개입은 <인조이>의 플레이가 플레이어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는 상태로 귀결된다. 동시에 <인조이>를 플레이 과정을 늘어뜨려 <인조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주관을 통해서만 <인조이>를 파악하게 만든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플레이어가 시뮬레이션을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고 표현했다. 플레이어는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시뮬레이션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1]. 이는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과 컴퓨터의 모델이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이며, <인조이>는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욱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 순간들이 우연히 상상했던 서사와 맞아떨어질 때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체험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게임에서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이란 바로 그 감각이 아닐까? 이는 <인조이>가 게임을 통해 AI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입력한 명령이 시스템의 자율적 질서와 우연히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이상한 순간들이 있다. <인조이>가 제공하는 ‘콘텐츠 진공’ 상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게임이 명확한 목표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매력적인 경험은 아닐 수 있다. <인조이>의 현재 상태는 분명히 미완성이며, 기술적 한계와 버그로 인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플레이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인조이>가 보여주는 실험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시스템의 자율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예측 불가능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창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임을 예술로 보는 가능성이란, 그 플레이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아름다움의 섬광에 있다. 그리고 <인조이>는,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섬광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PiE, 즉 환경 속의 플레이어로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경험의 지평은 아닐까. 참고문헌 ○ Celia Pearce (2001). 「Sims, BattleBots, Cellular Automata God and Go: A Conversation with Will Wright」. Game Studies. - https://www.gamestudies.org/0102/pearce/ ○ Hunicke, R., LeBlanc, M., & Zubek, R. (2004).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AAAI Workshop on Challenges in Game AI. ○ Benedith, G. (2024). 「Decoding The Sims: Analysis of Gamification Frameworks, User Experience, and Game Design Evolution」. Arizona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데스루프〉 는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어떤 선형 구조의 게임들은, 모두 그 과정의 가치가 결과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영원회귀가 가지는 긍정성은 결과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은 과정은 다시금 플레이 할 가치를 빠르게 잃는다. 그러나 〈데스루프〉 는 그 결말에 이르러 진정으로 모든 과정을 긍정해버리면서 다시금 그 루프로 뛰어들게 만든다. 물론 플레이 메카닉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시 이 게임의 파괴와 생성을 플레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퇴장한 후에도 이들이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플레이한 과정보다 더 즐거운 유희가 될 거란 것도. 이 부분이 조금은 특별하다. < Back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03 GG Vol. 21. 12. 10. 김연자 말고, 니체의 ‘아모르 파티’ 수년 전,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 가 인터넷에서 크게 유행을 탄 적이 있었다. 특유의 비트와 김연자의 보컬로 곡 자체도 훌륭하지만 가사도 그렇고 후렴의 막강한 뽕짝 비트가 절묘했다. 사실 일종의 유머로서 소비되기는 했지만, 트로트 답게 좀 쌉쌀한 맛도 있는 노래였다. * 막상 생각해보면 이 노래만큼 아모르 파티를 잘 설명한 것도 없는듯. 이미지 출처 - TV조선 유튜브 채널 그렇다면 바로 이 곡의 제목 ‘아모르 파티(Amor Fati)’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말 자체는 라틴어이고, 대충 들으면 어디서 나온 유명한 경구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이 단어의 출처는 저 멀리 프로이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로 간다. “신은 죽었다.” 는 패기 넘치는 한마디를 꺼냈던 이 철학자는 그 말마따나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고자 몇가지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물론 여기서 니체 이론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분량도 모자라거니와 애초에 필자도 관련 전공 또는 심도 있게 연구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더할 나위 없이 니체가 어울리는 어떤 게임을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니체가 제시한 개념 중 ‘아모르 파티’ 는 니체 사상에서 일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이다. 풀어 쓰자면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이란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과는 정반대로,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고 결정하는 운명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흥하거나 망하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자신의 운명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그를 긍정하라는 것. 이처럼 니체의 사상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것처럼, 현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추구하며, 인간 개인이 그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론이 바로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라고 축약할 수 있다(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요약한 해석이다). 영원회귀란 파괴(실패, 좌절, 괴로움 등)와 생성(성공, 성취, 즐거움 등)의 동일한 과정을 무한 반복하여 마침내 긍정의 결론(내 운명-인생을 사랑-긍정하자)에 다다름으로서 마침내는 파괴의 과정 역시 긍정의 질(형식)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삶에 대한 긍정이란 이뤄낸 성과, 성공, 원초적인 즐거움과 쾌락 같은 너무나 당연한 긍정의 질을 말하는게 아니다. 삶에서 필연적으로 얻고 겪게 되는 좌절과 실패, 괴로움과 불쾌함까지도 긍정하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이 과정이 바로 영원회귀이며, 그 결과 이르게 되는 것이 아모르 파티이고, 또는 이 둘은 서로의 원인이자 서로의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니체의 사상 전체를 상당히 짧고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큰 맥락은 같다. ‘영원회귀’ 라는 고통과 성취의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마침내 얻어낸 결실은 그 모든 과정을 한순간에 긍정적인 여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자신의 운명의 결론을 긍정함으로서 그 과정도 값지고 긍정적인 질로 바꾸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인생의 자세가 바로 ‘아모르 파티’ 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자, 그럼 이제 〈데스루프〉 라는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게임의 기본 모델 ‘영원회귀’ 가 데스루프에서 특별한 이유 〈데스루프〉 는 그 이름에서부터 죽음으로 되풀이되는 루프를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흔히 ‘루프물’ 이라고 하는 장르 또는 특성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많이 선보여졌다. 수십년 전 TV에서 특선 영화로 보던 ‘사랑의 블랙홀’ 이나 최근으로 보면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는 더더욱 많이 사용된 요소이기도 하다. * 데몬즈 소울 리메이크(Demon’s Souls, 2020). 이쪽 게임 디자인에선 워낙 유명한 소울 시리즈. 당연하게도 이는 게임에서도 흔히 활용되는 소재였다. 아니 오히려, 죽음과 부활로서 플레이어가 성장하는 논리는 플레이의 반복성을 부여해야만 하는 게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 논리다. 여기서 나아가 아주 직접적인 ‘영원회귀’ 적인 과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게임들은 많다. 오래 전부터 그 예시로 들어왔던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 을 위시한 ‘소울 시리즈’가 그 예다. 참고로 최근에는 한국에서 이름 자체가 ‘영원회귀’ 인 게임도 나왔다. * 이터널 리턴(Eternal Return, 2020). 여기는 이름부터 영원회귀다. 사실 게임 내용은 크게 상관… 없나? 그리고 사실은 ‘소울 시리즈’ 까지 가지 않더라도 게임은 근원적으로 그 구조에서 영원회귀를 기본 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계속해 같은 시도를 하며 죽으면서 경험을 쌓고 강해지고, 마침내 극복해내고 한 번의 성공을 만들어 냄으로서 그전까지의 실패가 모두 이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서 빛나게 되는 것. 그러나 〈데스루프〉 가 영원회귀 모델에서 독특한 점은 바로 플레이어의 성장 또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플레이어의 스킬 향상이나 명시적인 게임 내 각종 스테이터스, 기능의 향상이 아닌, 정보의 취득으로 표현한다는 부분이다. 보통 이러한 죽음(실패)과 부활(재도전),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게임들은 그 성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게임 내의 수치나 변화보다는 플레이어 자신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노골적인 예시인 〈다크 소울〉 시리즈의 경우 거듭되는 싸움을 통해 상대의 패턴을 파악하고, 나 자신의 로직, 나 자신의 조작이 가장 크게 성장에 관여한다. 물론 거기에 최적화된 도구를 다시 고르거나 필요한 만큼의 스테이터스를 향상시키고 돌아오는 등의 선택도 가능하지만, 플레이어 자신이 가장 큰 성장의 매개체라는 점은 〈다크 소울〉 이나 〈몬스터 헌터〉 같은 부류의 게임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 이 게임의 룰과 목표는 간단하다. 크게 세가지다. 1. 루프를 끊어라. 2. 하루 안에 8개의 타겟을 제거해라. 3.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방법을 찾아내라. 그러나 〈데스루프〉 는 이러한 노골적인 영원회귀의 방법론을 취하면서도 몇몇 부분에서 좀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갔다. 게임은 하루의 루프가 반복되며, 하루는 4개의 시간대와 4개의 장소로 구분되고, 각 시간대 별 장소마다 얻을 수 있는 단서가 다르게 고정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없게 되는 정보가 생긴다. 때문에 죽거나 하루를 넘겨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놓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다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고, 또 이것이 게임 내 퀘스트 로그의 변화로 직접 기록된다. 즉, 마치 탐정처럼 어떤 정보를 얻고 실마리에 접근하는 것이 성장이자 게임의 진척도를 상징한다. 플레이어의 자각이 바로 상승을 의미하며, 무력에 의한 극복이라기보다는 무수한 스무고개 끝에 정답을 찾아내는 식이므로 그 스무고개를 확인하기 위한 생성과 파괴가 반복되는 것이다. * 가지런히 정돈된 정보가 계속 쌓이고 중첩되면, 이러한 '정답' 이 나온다. 무엇보다 〈데스루프〉 가 보여주는 영원회귀 구조에서 다른 점은 바로 ‘죽음’ 을 보다 바른 성장을 위해 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게임에서 죽음이란 가급적 피해야만 하는, 어떤 심각한 패널티로서 존재한다. 어찌보면 징벌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스루프의 죽음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또는 이미 지나친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한 일종의 선택지로 기능한다. 마치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 에서 주인공이 작전을 실행하다가 수틀리면 바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어 다시 하루를 시작하듯 말이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의미이며 패널티였던 죽음이 하나의 선택지이자 상승의 원동력이 되면서, 즉 게임 자체를 직접적으로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면서 보다 ‘아모르 파티에 가까운 파괴와 재생성으로 한걸음 다가간다. 이는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부분에서의 차이도 크지만, 무엇보다 플레이어가 취하는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고 플레이어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뜻한다.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맞이하는 죽음과 이를 잘근잘근 곱씹는 절치부심의 과정이 아닌, 거시적인 측면에서 세운 계획을 따라 하나하나 자신의 의도에 따라 스스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재생성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때문에 이 게임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모두 계획대로야.” 또는 “이제는 이걸 하면 되겠군.” 하는 식으로, 플레이어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크게 달라진다. * 죽이고 죽고 정보를 모으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선택과 확인의 연속.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통상적으로 부정적인 질을 지니며 실패의 상징인 ‘죽음’ 은 그 자체로 긍정의 질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이 게임이 가장 니체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원회귀와 아모르 파티의 기본은 행위자의 주체성, 그리고 결과에 대한 긍정과 확신을 통해 모든 과정마저 긍정해버리는 자세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 로직 그 자체다. 긍정의 끝이 아닌, 긍정의 순환을 만드는 끝 게임의 결론은 마치 이런 해석을 부추기기라도 하는듯 크게 두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되어있다. 섬에 걸려있는 루프를 끝내고 수십년이 지난 세계로 나가거나, 아니면 루프를 유지하고 주인공과 줄리아나의 끝나지 않는 놀이를 계속하는 것. 여기서 대부분은 지금까지 목표로 해왔던 루프의 파괴를 선택하지만, 오히려 어떤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이게 끝인가? 정말로 이걸로 모든 지금까지의 과정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 되었나? * 영원회귀적 관점을 떠나서도 너무나 훌륭한 게임이니 꼭. 그렇기 때문에 엔딩에 이르러서 이렇게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과 탄생이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를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줄리아나라는 존재 자체로 인해서 나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희가 된다면? 이런 가정은 지금까지 루프를 깨기 위해서 달려왔던 플레이어들에게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 선택은 어쩌면 궁극적으로 아모르 파티를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까지 반복한 루프가 영원히 반복되고 또 되풀이 되겠지만, 더 이상 고통과 결론을 위한 감내의 과정이 아닌 그 자체가 유희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 이 황야마저도, ‘내 행위의 결과’ 이기에 긍정할 수 있다면? 〈데스루프〉 는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어떤 선형 구조의 게임들은, 모두 그 과정의 가치가 결과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영원회귀가 가지는 긍정성은 결과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은 과정은 다시금 플레이 할 가치를 빠르게 잃는다. 그러나 〈데스루프〉 는 그 결말에 이르러 진정으로 모든 과정을 긍정해버리면서 다시금 그 루프로 뛰어들게 만든다. 물론 플레이 메카닉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시 이 게임의 파괴와 생성을 플레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퇴장한 후에도 이들이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플레이한 과정보다 더 즐거운 유희가 될 거란 것도. 이 부분이 조금은 특별하다. 때문에 그동안의 역경을 모두 감내하고 오히려 루프 안에 갇히기를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몰락하는 자신을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의 정신에 부합하며, 이것이 오히려 진짜로 이 게임에 어울리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스루프〉 는 좋은 게임이지만, 그 과정에 비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떤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논문세미나]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본 논문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게임, 젠더 연구자인 로렌스 허프스(Laurence Herfs)가 일본 학술지 ‘Replaying Japan’에 2021년에 투고한 논문이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외부자의 시선(특히 서양)에서 일본 게임을 일본 학술지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 Back [논문세미나]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18 GG Vol. 24. 6. 10.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본 논문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게임, 젠더 연구자인 로렌스 허프스(Laurence Herfs)가 일본 학술지 ‘Replaying Japan’에 2021년에 투고한 논문이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외부자의 시선(특히 서양)에서 일본 게임을 일본 학술지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정치 부패, 사회문화적 문제와 불안으로 시작하여 국가 브랜딩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정체성을 <페르소나 5>(이하 페르소나 5)를 통해 살펴본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진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에 해당하는 작품이었지만, 사회문화, 철학, 심리학적 소재를 테마로 청소년이자 학생인 캐릭터를 내세워, 이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로 인기를 얻어 시리즈가 된 JRPG 작품이다. 이러한 특징처럼 페르소나 5 또한 도쿄를 배경으로 자경단이자 학생인 주인공 일행이 일본 내 사회문화적 불안과 부패를 상징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국가를 개혁하는 상당히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가볍고, 스타일리쉬하고, 위트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본격적으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이 논문이 나올 수 있던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다. * 페르소나5, 출처 –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 일본의 부패를 탐험하며 페르소나 5는 주인공(플레이어)이 유력 정치인의 여성 폭행을 막았다는 이유로 보호 관찰을 받은 후 도쿄로 전학 가게 되며 시작된다. 이후 플레이어는 ‘죄수(しゅうじん; 囚人)’와 동음이의어인 ‘슈진(しゅうじん; 秀尽)’ 학원 고교에 전학을 가게 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슈진 학원 고교는 마치 어두운 현실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로 압축하고 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학생들을 언어,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교사(어른)인 ‘카모시다 스구루’를 마주한다. 페르소나5는 이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특정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이형의 인지 공간(팰리스)을 통해 현실 세계를 표현한다.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작중 튜토리얼 파트인 도입부에서 플레이어는 부패한 현실 속 두 명의 희생자인 ‘사카모토 류지’(학생 체벌)와 ‘타카마키 안’(성폭행과 자살)과 팀을 이루어 카모시다의 팰리스로 들어가 반항 정신의 인지적 표현인 ‘페르소나’와 계약을 맺고 카모시다와 싸우게 된다. 이러한 도입부처럼 게임 스토리는 부패 인물을 제시하고, 게임은 일본 사회 속 다양한 형태의 부패, 학대, 불의 등을 팰리스로 표현하고 이곳을 탐험하고 문제가 되는 부패 인물을 타도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또한 플레이어는 학교가 위치한 도쿄 도심을 탐험하면서 사람들의 생각과 대화를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사회에 대한 불안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한 페르소나 5 속 비판점은 ‘자본주의의 과잉’이다. 부패 인물들은 더 많은 부,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집착한다. 페르소나 5는 사회적 긴장과 불안에 대한 이미지를 부패 인물에 위치시킴으로써 다루고 있다. 페르소나5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극복의 서사를 제공한다. 이처럼 페르소나 5는 일본 수도 도쿄의 사회적 불안과 부패한 인물상을 이미지와 서사로 제시하며, 이를 극복하여 일종의 해방감을 제공한다. 순응하는 침묵 문화 속 일본 청년 문제 페르소나 5는 일본 사회의 관습적 규범인 ‘일본다움’에 대한 메시지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다움’은 집단적이고, 조화를 추구하며, 위계적 관계를 통해 ‘높은 의식 사회’로 묘사된다. 달리 말하면, ‘올바른 것’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은 게임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은 순응, 위계질서와 같은 ‘일본다움’이 실제로 부패와 고통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개인주의와 반항을 상징하는 ‘마음의 괴도단’은 일본식 순응주의와 이 사고방식의 정반대를 상징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페르소나 5의 중요한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게임 속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야 하는 ‘코옵(Co-op)’이다. 모든 코옵은 어떤 식으로든 착취, 괴롭힘, 무시당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일본인은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순응하는 침묵 속에서 고통받으며, 타인이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침묵을 깨기 위한 은유적 장치가 ‘페르소나’이다. 새로운 멤버가 ‘마음의 괴도단’에 합류할 때마다 반항 정신의 인지적 표현인 ‘페르소나’와 계약을 맺고 깨어난다. 가면을 뜯는 ‘페르소나’ 등장 연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아의 정체화를 반영하기도 한다(Lopez & Marquez, 2023).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일본의 순응적인 페르소나 구조인 ‘혼네(本音; 속마음)-타테마에(建前; 겉마음)’의 분열적 알레고리로 보았다. 즉, 페르소나 5는 ‘혼네’를 받아들여야 억압 구조 안에서 진정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페르소나 5는 청년들이 어른들의 순응 압박과 그에 따른 ‘타테마에’에 고통받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진정한 병리는 청년들의 부담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중 등장하는 정치인 ‘요시다 토라노스케’는 불안정한 일본 청년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청년이 조용히 고통받고 있습니다. 일자리, 안전, 저축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2010년대 초 일본 언론이 제시한 ‘청년 문제(若者問題)’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일본 청년층의 ‘도덕적 공황’을 둘러싼 대중 담론을 의미한다. 페르소나 5에서는 이런 문화적 불안을 서사로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인 ‘사쿠라 후타바’는 후술할 ‘시도 마사요시’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오타쿠이자 히키코모리이다. 그러나 후타바는 어머니의 복수를 하는 코옵과 ‘마음의 괴도단’과의 유머러스한 인터랙션과 에피소드를 통해 구원받고 점차 다시금 사회에 적응해 간다. 페르소나 5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일본 청년 문제를 둘러싼 문화적 불안을 풀어나간다. * 사쿠라 후타바 연출, 출처 – https://bbs.ruliweb.com/game/1074/read/9408327 ? 페르소나 5는 ‘순응하는 일본인 스테레오타입’을 극한까지 드러냄으로써 문화적 불안을 비판한다. 이는 스토리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본인들의 순응과 침묵을 통해 국민이 다시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집단적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흑막 정치인 ‘시도 마사요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게임에서 나타나는 ‘일본다움’의 담론적 이미지는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을 따른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본 사회를 묘사하는 이 게임은 미디어 속 일본의 스테레오타입과 일치시키며 동시에 비판한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의 괴도단’은 청년 문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혼네’인 페르소나를 통해 ‘타테마에’를 거부하는 성취자로 그려진다. 쿨 재팬 브랜딩으로서의 페르소나 5 페르소나 5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제작 초기 시기인 2011~2014년 사이의 미디어 열풍 속 동일본 대지진과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재등장을 다룬다는 점이다. 이는 흑막인 ‘시도 마사요시’로 그려진다. ‘마음의 괴도단’이 초기에 만난 부패 인물 중 상당수 또한 현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의 정치적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가 개혁에 몰두하며 민족주의를 표출한다. 이는 실제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유사하다. 페르소나 5는 시도를 일본 정치의 랜드마크인 국회의사당과 같은 형태의 팰리스로 표현하여 일본 정치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나아가 시도의 팰리스는 붉은 바다 속 침수된 도쿄를 항해하는 호화 크루즈를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쓰나미를 은유한다. 이처럼 페르소나 5는 두 가지 재해를 혼합하여, ‘시도 마사요시’를 당시 동일본 대지진 시기의 아베 신조의 정치적 이미지와 수사를 강조한다. * 시도 마시요시의 팰리스, 출처 – https://macco-poke.hateblo.jp/entry/persona5R/7_1에서 수정·사용 그러나 저자는 페르소나 5가 반드시 일본 정치의 비판만을 내포하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일본의 기업 상품 측면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정부의 국가 재건을 위한 ‘소프트 파워’로서의 ‘쿨 재팬’ 정치 의도로 보았다. 일본은 ‘쿨’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생산하고 강화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과 같은 미디어 문화 산업에 의존해왔다(Tamaki, 2019). 이 맥락에서 페르소나 5는 일본과 ‘일본다움’ 브랜딩에 기여한다. 플레이어는 페르소나 5를 플레이함에 따라 일종의 가상 여행을 하며, 도쿄를 체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일본다움’의 물질적 형태에 익숙해진다. 즉, 페르소나 5의 정치,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 권위에 대한 반항적 태도, 사회적 개혁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사회 비판이 아닌, 그 자체로 쿨 재팬 상품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르소나 5에서는 국가 브랜딩이 추구하는 것처럼 이미지에 맞지 않는 불편한 요소는 배제되었다. 일본 내 인종, 젠더, 퀴어 문제이다. 특히 밀러(Miller, 2011a)가 쿨 재팬이 추구하는 이미지가 소프트 포르노그라피적 표상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듯이, 게임 내에서 성적 대상화한 것을 비판하면서도 게임 내 불필요한 성적 대상화가 계속해서 존재했다. 안의 괴도복이나 관련된 서사는 불필요한 성적 대상화의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측면은 쿨 재팬 이데올로기의 상품화된 여성성을 보여준다. 쿨 재팬의 재현은 여성을 가부장적 통제와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시킨다(Miller, 2011b). 즉, 여전히 페르소나 5는 여성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반항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여전히 일본의 가부장적이고 성적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 타카마키 안 괴도복, 출처 – https://asia.sega.com/persona-remaster/p5r/kr/ 마지막으로 페르소나 5는 쿨 재팬의 비서양적(non-Western)이면서도 비아시아적(un-Asian)인 독특한 이중 정체성을 반영한다. 게임은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마음의 괴도단’의 페르소나는 유럽 문학 속 영웅 또는 무법자에 기반한다. 서구 영웅의 반항적 개인주의라는 서양적 가치는 일본이라는 비서구적 세계에 통합된다. 이처럼 페르소나 5가 제시하는 일본이라는 브랜드는 서양적 가치와 일치하는 아시아지만 아시아가 아닌 역설적이고 독특한 존재이다. 결국 이 게임은 극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일본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쿨 재팬에 공모하고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저자는 결론적으로 페르소나 5가 예술로서 사회적 비판과 기업의 이익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페르소나 5는 정치적 부패, 사회적 불안 등을 문화적 표현으로 제시하면서도, ‘쿨 재팬’ 국가 브랜딩의 원천이 된 문화적 인공물이기도 하다. 페르소나 5가 찬사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전 시리즈들보다 직설적으로 일본 사회의 현실을 비추고, 비판하는 상징과 스토리, 은유에 있다. 물론 게임 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청년 문제, 정치 부패 등)가 단순히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많은 타국 게이머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페르소나 5는 이 문제들에 대해 진보적이고, 성찰적인 스탠스를 보여준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일본 밖 외부자의 시선에서 더 깊은 곳을 조명하고 있다. 이 게임이 갖는 정치적 의미, 의도는 일본 외부, 즉, 타자에게 보이는 일본의 국가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게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혼네-타테마에’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페르소나 5는 여전히 ‘일본다움’을 내포한다. 다시금 타국 게이머들에게 일본의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게임을 즐기는 데에 있어, 이러한 측면을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게임이 이러한 가치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논문이 주장하는 궁극적인 바는 아마 게임은 여전히 ‘국경’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미디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Herfs, L. (2021).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REPLAYING JAPAN, 3, 43-54. Lopez, A.A.L. & Marquez, L.P. (2023). Persona 5 Royal as Philosophy: Unmasking (Persona)l Identity and Reality. In: Kowalski, D.A., Lay, C., S. Engels, K. (eds) The Palgrave Handbook of Popular Culture as Philosophy. Palgrave Macmillan, Cham. Miller, L. (2011a). Cute Masquerade and the Pimping of Japan. International Journal of Japanese Sociology. 20. 18 – 29. Miller, L. (2011b). Taking girls seriously in ‘cool Japan’ ideology. Japan Studies Review. Florida: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15, 97-106. Tamaki, T. (2019). Repackaging national identity: Cool Japan and the resilience of Japanese identity narratives. Asi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27(1), 108–126. Tags: 페르소나, 쿨재팬, 오리엔탈리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아이프리버스』와 『비밀의 아이프리』, “프리파라 아저씨”: 무엇이 ‘비밀’인가?
체크 남방을 입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자기 몸뚱이만 한 알록달록한 보라색 아케이드 게임기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이 밈처럼 퍼진 적이 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프리파라』다. 모두가 사진을 찍혀 밈이 되어 인터넷 세상을 부유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프리파라 “프리파라 아저씨”들이 있었고, 프리파라의 시대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프리파라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도 프리파라 아저씨(들)이었다. < Back 『아이프리버스』와 『비밀의 아이프리』, “프리파라 아저씨”: 무엇이 ‘비밀’인가? 27 GG Vol. 25. 12. 10. 비밀의 아이프리 체크 남방을 입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자기 몸뚱이만 한 알록달록한 보라색 아케이드 게임기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이 밈처럼 퍼진 적이 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프리파라』다. 모두가 사진을 찍혀 밈이 되어 인터넷 세상을 부유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프리파라 “프리파라 아저씨”들이 있었고, 프리파라의 시대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프리파라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도 프리파라 아저씨(들)이었다. 이미지 1: 2020년대 들어서는 “어이 내 몸으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짤”로도 알려진 이미지. “프리파라 아저씨”로 검색해도 찾을 수 있다. ‘밈화’된 이미지들이 곧잘 그렇듯 원본 이미지의 출처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프리파라』 기기가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아이프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프리 아저씨가 되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 정도까지 바지 정장을 입고 (때에 따라 넥타이까지 한다) 일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한밤중이 다 되어서 아이프리를 하러 가면, 꼴이 영락없이 후줄근한 ‘프리파라 아저씨’의 전형 그 자체다. 집에서 가까운 대형 마트에도 아이프리 기기가 있지만, 어린이와 주부 용품이 있는 층에 있는 단 한 대뿐인 아이프리 기기를 쓰고 있으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더라도 왠지 여자아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내의 오락실을 선호한다. 그래도 가능하면 너무 후줄근하지 않은 차림으로, ‘아이돌 프린세스’에 어느 정도 걸맞은 용모로 아이프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나에게 프리파라를 가르쳐 주고 우정 티켓을 교환해 준 프리파라 아저씨들보다 나와 놀아준 적도 없는, 서울 시내의 가챠샵에서 로리타 양복을 차려입고 멋들어지게 프리파라를 하던 프리파라 언니들에 가까운 태도를 어느새 체화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이프리를 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아이프리를 플레이함으로써 우리는 아이프리적 태도와 가치관이 우리 안에 침투하도록 허락하고, 나아가 우리의 현실을 조종하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아이프리는 『프리티 리듬』, 『프리파라』 등을 발매한 신소피아와 타카라토미 아츠의 ‘여아용 아케이드 게임’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TV 애니메이션과 병행되는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로, 주요 대상층으로 아동을 상정했기에 오락실이 아닌 주택가 주변의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이프리 게임기는 두 종류가 있는데, 플레이어의 아바타인 ‘마이 캐릭터’에게 옷을 입혀서 간단한 리듬게임을 플레이하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이프리버스』, 그리고 라이브를 감상하고 TV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카드를 수집할 수 있는 『비밀의 아이프리』가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작중 캐릭터들에게 있어서 아이프리가 어쩌다 ‘비밀의’ 아이프리가 되었는지 간략하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러한 애니메이션 스토리의 디테일이 작품의 제목까지 『비밀의 아이프리』로 설정된 이유를 완전하게 설명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사실 시간순으로는 『비밀의 아이프리』라는 IP 타이틀이 먼저 정해지고, 애니메이션 각본의 상세가 나중에 작성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개연성이 있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러면 아이프리는 도대체 왜 비밀인 것인가? 내 의견으로는, 아이프리가 비밀인 이유는 아이돌 프린세스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아이프리는 분명히 위험한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아저씨라면 더욱 그렇다. 넥타이를 꽉 조이고, 선배와 거래처에는 깍듯하게 대하고, 여유는 최소한으로 두고 솔선수범 성실하게 노동하되 질병을 얻거나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는 아저씨가 ‘아이돌’로도 모자라서 ‘프린세스’를 추구하는 데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여아’라고 해서 아이프리가 완전히 안전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1] . 당신이 어른이라면,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보자―‘공주병’이라는 표현이 가장 효과적인 인신공격으로 작용하는 것은 초등학교 교실이다. 아이프리는 자의식과 미의식의 과잉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이캐릭터’의 신체성과 퍼포먼스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해리 현상이다. 그것은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바비니쿠 원조 아케이드용 미소녀 옷 입히기 카드게임이었던 『멋쟁이 마녀♥ 러브 and 베리』(2004) [2] 는 큰 틀에 있어서 ‘프리파라’나 ‘아이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지고 있는 의상 카드의 바코드를 게임기에 스캔해서 가상의 미소녀를 코디하고, 라이브 무대를 상징하는 리듬게임을 플레이해서 점수를 얻고, 플레이 보상으로 얻는 새로운 의상 카드는 다음 게임 플레이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된다. 차이점은, 『러브베리』에서 플레이어는 스티커북을 열어 옷 입히기 스티커를 붙이듯 ‘러브’, ‘베리’, 혹은 ‘미샤’의 의상을 고르고 그들의 라이브를 대리로 플레이했다면, 이후에 발매된 게임들에서는 플레이어 자신의 아바타가 되는 캐릭터를 스스로 이름 붙이고 기본적인 신체 부위의 단위에서부터 커스텀한다는 점이다. 나아가서 아이프리에서는 ‘마이캐릭터 룸’이라는 웹페이지와 연동하여 간단한 프로필을 작성하거나, 남의 ‘마이캐릭터’ 사진에 ‘좋아요’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로써 기존에는 픽션 속 캐릭터의 코디력과 댄스력을 키우는 일종의 육성 게임에 가까웠던 러브베리의 장르적 지향성으로부터, 아이프리에 이르러서는 플레이어 자신의 가상의 육체를 치장하고 공유하는, 말하자면 VRChat에 가까운 이입형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변형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VRChat 이용자 및 ‘버추얼 유튜버’들을 표현하는 용어 중 ‘바비니쿠’라는 단어가 있다. ‘바비니쿠’ 혹은 ‘버미육’은 ‘버추얼 미소녀 수육(バーチャル美少女受肉)’의 줄임말로, 대개 지정성별 남성인 사람이 버추얼 아바타를 통해 미소녀의 육체로 활동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바비니쿠에 관한 연구는 바비니쿠가 대체로 수육자에게 기존의 신체로는 불가능했던 표현의 자유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경향성을 발견해 왔다. 여기에는 버추얼 미소녀의 육체를 수육하는 이의 ‘현실’ 내지는 비-버추얼 육체는 미소녀가 아니며 대체로 아저씨라는 전제가 있다 [3] . 체크 남방을 입은 육중한 프리파라 아저씨의 육체를 대리하는 늘씬하고 화려하고 어린 마이 캐릭터는 이러한 ‘바비니쿠’의 정의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듯하다. 여기서 잠시 “프리파라 아저씨” 밈에 등장하는 게임인 프리파라를 살펴보자. 마이캐릭터 룸 같은 웹페이지와의 연동도 없었고, 최신 티켓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플레이 데이터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프리파라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은 단연코 ‘우정티켓’이다. 프리파라의 ‘카드’는 ‘티켓’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프리티켓’에는 공연 티켓이나 비행기 티켓처럼 절취선이 있는데, 절취선을 아래로는 플레이어의 세이브 데이터와 캐릭터에게 입힐 수 있는 의상의 데이터가 담겨있고, 절취선 위로는 친구에게 주는 ‘우정 티켓’이다. 플레이어가 우정 티켓을 게임에 읽어 들이면, 우정 티켓의 소유주를 플레이어 자신의 게임 세계에 불러올 수 있는 식이다. 이미지 2: 한국어판 프리티켓. 위쪽의 우정티켓을 뜯지 않은 상태이다. 이미지 3: ‘마이캐릭터 룸’ 웹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모두의 프리포토’ (왼쪽), WEB 프렌드 카드 (오른쪽). 프리파라와 아이프리버스 사이에 인터넷 기술은 한층 발전하여, 아이프리버스는 만나본 적 없는 이 세상 어딘가의 플레이어를 나의 아이프리 광장에 등장시키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남의 라이브 사진에 ‘좋아요’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정 티켓의 역할을 계승하는 ‘프렌드 카드’는 이제는 ‘마이캐릭터 룸’ 웹페이지에서 내려받아 스마트폰으로 공유하고 스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돈선필은 이러한 “기술적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온라인에 접속하는 그 순간에만 미소녀로 변신하는 유연성”이 발휘되어 “모든 선택이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의 조건이 만족된다고 보았다. ‘우정티켓’이 전자 발송이 가능해짐으로써, ‘좋아요’한 아이돌 프린세스와 ‘친구’가 되어 ‘함께’ 라이브를 하고 사진을 찍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상대가 프리파라 아저씨인지 프리파라 언니인지 어떤지 같은 사실은 완벽하게 아이프리버스라는 세계관verse 바깥의 영역으로 가려질 수 있게 되었다. NPC와 플레이어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마이캐릭터 NPC(논-플레이어 캐릭터)와 플레이어 캐릭터, 그리고 플레이어의 경계는 때때로 모호해진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가 이입하여 조종하는 캐릭터를 플레이어 캐릭터, 플레이어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를 NPC로 총칭하는 듯하나, ‘컷씬’으로 대표되듯 플레이어 캐릭터를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경우 [4] 도 있고, 반대로 NPC로 여겨지는 캐릭터를 조종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한 게임도 있다. 캐릭터를 ‘조종한다’는 개념의 정의에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정해진 스토리라인에 따라 UI가 지정한 범위의 움직임만을 실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캐릭터를 조종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비평가 안준형이 서술하듯, “오히려 마치 내가 그의 정해진 운명을 재생할 뿐인 주인공 캐릭터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5] . 이미지 4: 『아이프리』에서 ‘프렌드 카드’를 스캔하면, ‘프렌드’가 정중앙에 나타난다. 프리파라 및 아이프리에서 ‘우정티켓’이나 ‘프렌드카드’로 불러온 ‘친구’는, 실은 QR코드의 데이터에 저장된 신체부위와 의상의 조합을 불러올 뿐, 친구의 당장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환되고 움직임은 게임 코드에 내재된 모션을 재생할 뿐이라는 점에서, 이 행위를 멀티플레이어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용례로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아이프리 게임 속 친구는 NPC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논의와 같이, 플레이어의 주관으로 정해진 마이캐릭터 파츠와 의상을 불러와서 짜여진 움직임을 재생한다는 점에서는 ‘마이캐릭터’ 역시 ‘친구’와 다르지 않다. 안준형은 현실 세계를 불완전하게 재현하는 가상 세계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NPC의 다양성”의 한계를 든다. 아이프리버스에서 만나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아바타는 NPC와 동일한 모션으로 움직이더라도, 누군가의 주관과 취향이 반영된 의상과 누군가에게 고유한 이름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으므로 “복제인간”의 혐의를 벗어나는 듯하다 [6] . 마이캐릭터는 대개 짜여진 대로 움직이는 만큼, ‘버그’를 위시한 예기치 못한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아이프리버스에서 플레이어가 리듬게임을 잘 치거나 엉망으로 치면 스코어에 다소간의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아이템의 획득에 차질이 생길 수는 있으나, 예상치 못하게 캐릭터의 움직임이 흐트러지거나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매끄럽게 최적화된 그래픽의 재생에는 실패의 가능성도, 망설임도 없다. 반면, 기존의 바비니쿠 관련 논의의 중심이 되는 버추얼 유튜버나 VRChat 아바타는 마이캐릭터와 달리 컴퓨터 코드로 짜여진 각본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한 버추얼 유튜버들이 드러내는 사실은, 가상에서 현실을 감각하는 순간은 가상이 현실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가상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발생하는 버벅거림과 균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버추얼 아바타에 반영하는 모션 트래커가 실패하는 순간에 우리는 버추얼 아바타 너머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떠올리고 [7] , 게임 맵의 제한된 범위는 순환하되 어느 순간 칼로 자른 듯 끝나버리지는 않는 우리의 물리적인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8] . 버추얼 유튜버를 연구한 돈선필이 관찰하듯 “의도하지 않은 열화된 상태는 우리에게 실재하는 대상 특유의 정서를 전달”한다면, 열화의 여지를 인게임 UI로 단단하게 제한한 아이프리에는 비밀이 새어 나올 균열이 없는 듯이 보인다. 프리티켓의 절취선 사이로 새어 나가는 혁명적인 비밀에 관하여 영이의 저서 『게임 코러스』는 “코러스에서 발생”한 연극을 “UI의 연속체”인 게임에 비교한다. 고대의 연극에서는 배우가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나 대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UI처럼 합창단이 비일상적이고 도취적 차원의 세계가 존재함을 나타냈다고 한다. 『아이프리』의 게임 세계도 연극 세계와 비슷하다. 동전을 넣고 QR코드를 스캔하여 플레이어 캐릭터를 불러오고 의상을 입히는 일련의 UI의 연속이 플레이어를 비밀의 세계로 불러온다. 마침 아이돌 게임인 아이프리의 세계는, 말 그대로 “무대 위의 디오니소스적 세계”(61)인 셈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코러스는 ‘무대 위의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결국 이 무대 위의 세계가 곧 자신들의 현실로서 실재한다고”(23) 깨닫고 실천하기 위한 장치였다. 영이는 게임의 UI가 연극의 코러스와 같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UI가 플레이어를 “배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게임 코러스>가 대표적 예시로 드는 <언더테일>에서는, “픽셀 그래픽 게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임이 갑자기 실사 그래픽을 사용”하거나 “게임이 화면 바깥으로 기어나와 게임 자신의 프로그램 제목까지 바꾸”는 연출이 플레이어를 배반하고 “플레이어를 경험적 현실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61). 게이머 용어로는 ‘자유도’로 일컬어지는, UI가 허락하는 게임 속 움직임의 범위에 있어서 프리파라와 아이프리는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 앞서 서술했듯, 의외성이나 버그 등 “UI의 배반”으로 일컬어질 만한 현상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나 프리파라의 가상 세계에는 균열이 있었다. 그 균열은 바늘자국처럼 일렬로 숭숭 뚫린 구멍의 모양으로, 인쇄업계에서는 그 균열을 가리켜 ‘미싱’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 균열로부터 프리티켓을 “똑하고 반으로 나눠서 친구들을 컴플릿하자バキンと半分こで 友達コンプリートしよ [9] ”는 프로파간다야말로 프리파라의 세계의 근본이었다. 우정티켓은 실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물리적 ‘현실’의 세계에서 교환될 필요가 있었다. 프리파라 아저씨와 만나거나, 적어도 우편을 교환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자크 데리다라는 철학자나 일반우편으로 티켓을 교환한 경험이 있는 여러 프리파라 유저들의 기록에 따르면 우편물이 반드시 발신인으로부터 수신인에게 똑바로 도착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발신이라는 절차가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벌써 비밀에는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비록 프리파라 아저씨들의 ‘비밀’에 균열을 내는 기능을 대표적으로 도맡았던 우정티켓은 이제는 프리파라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이프리는 여전히 카드 용지가 부족해지면 직원을 불러와야 하는 카드 게임이고, 여전히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게임기와 조그만한 의자와 동전 투입구와 카드 배출구가 있는 아케이드 게임이다. 질량 없이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이프리에서 프렌드 카드의 데이터를 불러 오거나, 마이캐릭터 룸에서 누군가의 사진에 좋아요를 찍거나, 아이프리 광장에서 다른 사람의 마이 캐릭터와 마주칠 때 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 각각 가상과 현실이라고 생각되었던 게임과 삶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아이프리 아저씨는 자신이 모션 파일을 재생하는 소녀를 바라보는 감상자인 동시에, 그녀를 “추동하는 의지”[ 10] 이자 그녀 “안의 사람 [11] ”이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에게는 ‘아이돌’을, ‘프린세스’를 표현하고자 하는 능동적이고 반동적인 욕망이 있다. 2020년경 업로드된 프리파라 게임 OST 「Realize!」를 “완전 카피”한 남성을 찍은 유튜브 쇼츠의 조회수가 요사이 폭발적으로 올라, 2025년에는 프리파라의 음악과 댄스를 맡은 원본 아티스트 i☆Ris가 반대로 “완전 카피남”을 모방하는 영상을 틱톡에 게시했다. 여자 아이돌과 완전 카피 프리파라 아저씨가 “힘을 합쳐 두근거림을 발견力合わせて トキメキ探してく [13] ”하는 프리파라의 전복적 가치를 “리얼라이즈”하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손색없는 장면이다. 이미지 5: 통칭 “완전카피남 完コピニキ”로 알려진 남성이 「Realize!」를 완벽하게 따라하고 있다 [14] . (왼쪽) / 「Realize!」를 포함한 프리파라의 OST 전반을 맡은 아이돌 유닛 I☆Ris의 공식 틱톡 채널에 게시된 영상 [15] (오른쪽) 그리고 시스-헤테로-비장애인-신경전형인-성인 남성들의 가치로 가득한 사회를, 아이돌 프린세스들이 소녀들의 파라다이스에서 체득한 이데올로기로 모두 전복하고 만다면…… 프리파라의 제작사가 스스로 드러낸 욕망의 편린인 아래 사진이 만우절 농담에 그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16] [1] TV 애니메이션 〈비밀의 아이프리〉의 초반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들이 각각 아이프리를 비밀로 향유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주인공 히마리와 미즈키는 개인적인 층위에서는 서로에게 알리지 않고 아이프리에 ‘데뷔’한 사실을 숨기고 있고, 사회적인 층위에서는 마땅히 학생의 본분이어야 할 공부를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작중 학교 사회에 내려진 아이프리 금지령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2] 일본에서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국내에서는 세가코리아를 통해 2006년부터 서비스되었던 『멋쟁이 마녀♥러브 and 베리 オシャレ魔女♥ラブandベリー』는 세가가 개발한 카드 게임 형식의 아케이드 게임이다. 2025년 지금까지도 일본 남자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시리즈인 『벌레킹 ムシキング』의 여아용 버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 ‘러브베리’와 ‘벌레킹’은 동일한 규격의 기기로 가동되었다. https://ja.wikipedia.org/wiki/%E3%82%AA%E3%82%B7%E3%83%A3%E3%83%AC%E9%AD%94%E5%A5%B3%E2%99%A5%E3%83%A9%E3%83%96and%E3%83%99%E3%83%AA%E3%83%BC https://dpg.danawa.com/news/view?boardSeq=60&listSeq=877378&past=Y [3] “브레디키나와 지아드...에 따르면, 바비니쿠 문화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저항한다. 버튜버들은 연약함, 의존적임, 매력적임과 같이 자기 자신에 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보편적 남성성에 벗어나는 특성들을 수행하기 위해 ‘나’를 표현하고 탐구하는 수단으로서 미소녀 아바타를 선택한다.” 우엉. 2022년 2월 22일. 미소녀를 뒤집어 쓴 남성들.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https://fwdfeminist.com/2023/02/22/vol-7-7/ “바비니쿠들이 미소녀를 연기하며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이분법적 성별의 역할극에 빠져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대안점이 바비니쿠라는 형태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돈선필. 2025년 1월 16일. 레자: 가면보다 무겁고 허물보다 두터운 것.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http://semacoral.org/features/sunpildon-reja-lighter-than-the-mask-thicker-than-the-shell [4] 영이. (2025). 게임 코러스. 워크룸프레스. 53 [5] 안준형. 2021년 5월 1일. 안준형_게임 세계의 유물론적 유령들과 폐쇄성: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안 무너진대요. 크리틱-칼. http://www.critic-al.org/?p=6525 [6] 위의 글 [7] 돈선필. 앞의 글 [8] 안준형. 앞의 글 [9] 森月キャス, Make it!, 2014 [10] 게임 속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추동하는 의지가 된다.” 영이, 앞의 책. 53 [11] “버츄얼 유튜버 팬덤 사이에서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을 ‘안에 있는 사람(中の人)’이라고 따로 부르는 명칭이 있는 것을 보아도 확실한 현실 인식을 확인할 수 있지요.” 돈선필, 위의 글. [13] Hifumi, inc., Realize!, 2015 [14] @maelbeek (2020). i☆Ris realizeを完コピするオタクおじさんが凄すぎるwww / A man who copies woman's movement perfectly [영상]. 유튜브 쇼츠. https://www.youtube.com/shorts/pDOrdfAcfgg [15] i☆Ris (2025). あの動画、知ってますか…? #プリパラ #i_Ris #アイドル #コピーダンス #UNIDOL #ユニドル2425冬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영상]. 틱톡. https://www.tiktok.com/@iris_official_1107/video/7472738322863934727 [16] タカラトミーアーツ公式. (@tartsPR). “4月4日からの『アイドルタイムプリパラ』放送開始に合わせて、タカラトミーアーツでは名刺交換の代わりに「トモチケ交換」を行なうことが義務付けられました。これから弊社社員と出会うお客様、ぜひパキってください。 #pripara #エイプリルフール #アーツフール .” 2017년 4월 1일. 트위터. https://x.com/tartsPR/status/84797681760442777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윤수빈 2007년부터 시작된 포켓몬스터 시리즈와의 인연으로 게이머가 되었으나, 2023년에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포켓몬 게임 시리즈의 출력 텍스트인 "햇살이 강해졌다!"가 삶의 모토. 좋아하는 게임이 생기면 동인지를 만드는 삶을 살아왔지만, 2024년부터는 게임 비평이라는 새로운 감상의 언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종종 '룬츠'라는 닉네임으로 2차 창작을 쓰고 그린다.
- 판단하고 행동하는 효율의 <피크민 4>
프라스카를 포함한 루돌로지스트 관점에서의 분석대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지털digital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비디오 게임은 세계를 어느 정도 계산 가능한 것digit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숫자로 치환된 현실을 가진다. 이것은 디지털 게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다. < Back 판단하고 행동하는 효율의 <피크민 4> 18 GG Vol. 24. 6. 10. 수치적 접근과 감각적 접근 프라스카를 포함한 루돌로지스트 관점에서의 분석대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지털digital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비디오 게임은 세계를 어느 정도 계산 가능한 것digit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숫자로 치환된 현실을 가진다. 이것은 디지털 게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디지털 게임의 총체가 숫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디지털 게임과 접촉하는 접면surface은 수치적 정보와 감각적 정보의 혼합물이다. 캐릭터는 힘 18과 민첩 14와 지능 8으로 이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외형 등의 시각적 정보와 (게임에 따라서는) 목소리 등을 통한 청각적 정보로 이루어지는 감각적 규정도 동시에 가진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굼바는 한 번의 점프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체력, 수치적으로 규정된 속도, 지향성의 운동 알고리즘을 가진 존재이며 동시에 도끼눈을 하고 마리오를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괴물이기도 하다. 이런 조건에서 다음의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수치가 감각에 복종하는가, 아니면 감각이 수치에 복종하는가. 여기에 명백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비디오 게임이란 수치와 감각이 일으키는 긴장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하나의 축이 다른 축을 앞지를 수 있다. 요컨대 게이머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효율론’의 경우, 전적으로 수치가 감각보다 높은 층위를 차지하는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치가 감각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강캐를 애캐로 삼으면 된다.’는 유쾌한 레토릭이 떠돌아다닌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강한 캐릭터가 아닐 때 생기는 안타까움을 역설적으로 논하는 일종의 해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결국 ‘강캐’에 대한 메타적 접근(=수치적 접근) 조차도 ‘애캐’에 대한 친밀감의 접근(=감각적 접근)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규의 서술대로 특정 캐릭터와의 연애를 하기 위해서라면 게임의 재시작조차 불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감각적 접근이란 말 그대로 ‘감각적’ 접근이다. 플레이어는 어느 때에 대상으로부터 감각적 친밀감을 얻는가? 그것은 감각적으로 접촉할 수 있을 때다. 요컨데 찰리 채플린의 그 명언,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의 작동이 비디오 게임에서도 일부 유효하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인물에게 접근할 때, 요컨대 그 대상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을 때 감각적 인식의 가능성은 오른다. 따라서 게임이 규정하는 고정된 시점을 벗어나 캐릭터를 다양한 방향에서 비추어는 컷씬은 일거에 감각 접근을 수치 접근보다 앞지르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그 외에도 음성의 삽입을 통한 청각의 접근, 진동 등의 기능을 통한 촉각적 접근은 나와 대상이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적 가능성을 증가시켜 준다. 많이 배제되는 경향이긴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서 촉각은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비디오 게임을 여타 매체와 차별화시키는 감각이 바로 촉각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동작 인식 센서를 활용하는 게임이 아닌 이상에야) 결국 컨트롤러를 ‘손으로 잡고’ 버튼을 ‘손가락으로 눌러야’ 대상과 연결된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컨트롤러는 <스타크래프트>나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신경삭Nerve cord [2] 같기도 하다. 나와 게임이 연결되는 접촉의 연결지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의 손으로부터 뻗어나간 신경삭이 게임 내부의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요컨대 (대부분의 액션 게임들처럼) 특정한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뮬레이션 게임들처럼)확인 불가능한 가상의 신적god-like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 그림 1 : 코에이의 <삼국지 14> 이에 비추어 보자면 대부분의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극도의 효율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에는 단순히 인구 혹은 전력戰力 따위로 수치되는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플레이어의 인지가 대상(=유닛)과 감각적으로 유리되어 있다는 전제도 함께 작동한다. 특히나 특별히 어떠한 인물이라 특정할 수 없는 매니저 혹은 전략 지도자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가상적 부표, 즉 커서는 그 전달 대상과의 촉각적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린다. 이 때 유닛이란 신경삭으로 연결되지 않은 감각 바깥의 존재들이며 따라서 이들의 생존 혹은 고용 상태 같은 것도 어디까지나 가상적 감각으로 체화된다. 그들과 거리가 멀어질 수록, 요컨대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처럼 병사 1의 존재를 절대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단절이 발생한다면 결코 생명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삼국지>의 전투 중 부대와 부대의 싸움으로 100의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우리에겐 100명의 부상 혹은 사망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피크민4>와 접촉의 메커니즘 닌텐도의 <피크민 4>는 2024년 TGA에서 최고의 시뮬레이션/전략 게임Best Sim/Strategy Award를 수상했다. <피크민> 시리즈의 장르는 제작사에 의해 AI액션AIアクション [3] 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정확히 액션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오히려 TGA의 수상이 말해주듯,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공간 내에서 유닛을 ‘생산’하고, 업무적 분류에 따라 ‘명령’하는 실시간 전략RTS:Real Time Strategy에 가까운 문법을 가진다. 다만 목표가 적진의 괴멸이 아닌 물건의 수집이라는 점, 건설의 개념이 없다는 점, 자원 수집과 생산 명령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의 RTS와는 다른 감각을 줄 뿐이다. 그럼에도 유닛을 어떻게 분리하고 운영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RTS의 전략을 상당히 공유한다. 그런 면에서 <피크민 4>를 RTS로 구분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부분적으로 ‘액션’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세계를 비추는 방식이 신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크민> 시리즈에는 RTS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커서의 메커니즘이 배제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으로 규정되는 중요 캐릭터 [4] 를 직접 조작해 유닛인 피크민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가상적 부표가 아닌 명백히 물리적인 주체와 신경삭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거치고, 시뮬레이션 일반과 상이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특히 유닛을 운용하는 가장 기초적인 메커니즘이 대상이 되는 피크민을 ‘들어 던지는’, 상당히 밀도 높은 물리적인 접촉 형태를 취한다. * 그림 2 : <피크민> 시리즈에는 언제나 피크민의 손실에 대한 상실의 메시지가 존재한다. <피크민> 시리즈의 독특함은 바로 이 접촉의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전략적 판단을 전제로 하는 전략 게임의 세계임에도 개별 유닛 하나하나와 직접 접촉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각의 피크민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RTS의 유닛 일반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갖는다. 이들은 명백히 살아있으며, 자신들만의 생태가 있고, 때로는 죽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명령에 헌신하며 잘못된 판단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특히 피크민의 죽음은 시체 위로 승천하는 영혼으로 표현된다. 만화적 유쾌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고체적’ 성질에서 부유하다 사라져버리는 ‘기체적’ 성질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피크민> 시리즈는 RTS로서는 이례적으로 개별적 유닛의 실존을 강력하게 표출한다. 효율과 계획력 * 그림 3 : 피크민은 스스로 놀지 않는다. 오직 플레이어가 그들을 놀리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피크민 4>에는 ‘계획력’이라는 개념이 강조된다. 작품은 계획력을 ‘순서를 생각해서 효율 좋게 작업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게임 내적으로는 피크민의 분산적 운용과 쉼없는 컨트롤을 통한 시간대비의 효율적인 움직임을 총칭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피크민 4>는 표면적으로 효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효율은 전적으로 현재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의미, 즉 감각을 앞지르는 수치의 전면화와는 근본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피크민 4>는 효율적인 수치보다는 효율적인 움직임을 강조한다. 앞서 구분했던 대로 수치와 감각의 개념으로 치환해 보자면, <피크민 4>가 강조하는 효율은 감각의 운용에 가깝다. 비록 게임은 몇 종/마리의 피크민과 동행 중인가 하는 수치적 스테이터스를 표시하긴 하지만, 이 수치의 효과는 전적으로 플레이어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극도로 변화한다. 이 변곡이 바로 본작이 추구하는 ‘계획력’이다. 이 감각적 효율 추구는 대상에 대한 전적인 친화를 기반으로 한다. 요컨대 여기에는 덜 효율적인 수치에 대한 배제 또는 제거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피크민 4>의 효율은 오직 하나의 기준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감각 활용이며, 조금 더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쉼없는 판단과 움직임의 동원이다. 이러한 규정에 의해 성패의 거시적 판단이 확고해진다. 요컨대 <피크민> 시리즈에는 ‘유닛이 약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에서의 실패는 오직 플레이어의 상황과 능력에 대한 오판, 비전략적 혹은 비효율적 움직임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실패의 결과는 피크민이라는 생명의 소실로 연결되는 치명적인 감각의 실패를 낳는다. 전략 시뮬레이션이란 결국 매니지먼트의 시뮬레이션이다. 유닛으로 총칭되는 병력과 병기에 대한 관리가 그 규칙의 체계를 구성하는 장르인 것이다. 하지만 때로 비디오 게임의 매니지먼트는 지나치게 감각의 세계를 배제하곤 한다. 실패는 냉엄한 수치의 손실인 것 뿐인가? 혹은 패배의 원인은 수치적 불완전성, ‘더 뛰어나지 못한’ 관리의 대상이 포함되었기 때문인가? <피크민> 시리즈는 이러한 수치 매니지먼트 또는 효율론의 한계 지점을 가로질러 매니지먼트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로 되돌아간다. <피크민 4>는 계획력이라는 단어를 경유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매니지먼트의 본질에 대해 설파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직접 행동하라. 바로 이것이 매니지먼트의 효율이며, 그것은 감각의 무게다. [5] * 그림 4 : 계획력이란 순서를 생각해서 효율좋게 작업하는 능력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도 계획력을 발휘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이다. [1]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이명규, GG 16호) [2] 이 두 작품에서 신경삭은 모두 다른 존재와의 정신적 연결을 위한 기관으로 등장한다. 특히 <아바타>에서는 신경 다발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장면이 다수 나온다. [3] 정확히 말하면 전작인 <피크민 3>까지 이러한 장르명으로 규정한다. [4] 전작들인 1편과 2편에는 올리마를 단독으로 조작했으며 3편에서는 알프, 브리트니, 찰리라는 3인 팀을 교체하며 조작할 수 있었다. 4편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제작한 캐릭터를 사용한다. [5] <피크민 4>의 로딩 스크린에 나오는 문구 중에는 일상생활에서도 계획력을 발휘하는 습관을 들여보라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사유를 현실에까지 연장시키고 싶다는 바람의 투영같기도 하다. Tags: 피크민, 감각, 시뮬레이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Back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01 GG Vol. 21. 6. 10. 시작하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실로 익숙한 흐름의 대화였다. 게임을 ‘중독’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 악마화하거나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 엄마가 나의 오빠를 키우던 때에도 구사한 문법이니 말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오빠와 달리 나는 디지털 게임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쥬니어 네이버’ 세대답게 나 역시 ‘슈 게임’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조금 더 머리가 큰 뒤로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피카츄 배구’나 ‘보글보글’, ‘테트리스’, ‘카트라이더’ 등을 하며 점심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게임을 즐겨 하지 않던 나조차도 추억 저편에 게임이 있을 정도라면,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년시절은 온통 게임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게임이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뿐인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의 레드 카펫 위에서 한국영화를 알리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K팝을 알릴 때, 모니터 너머의 가상 세계에는 이미 ‘한국 vs 비한국’이라는 대결 공식이 생겼을 정도로 한국 게임문화의 위상은 최정점에 놓여있던지 오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는 게임도 엄연한 취미이자 하나의 문화로 봐 줄 법도 한데, 여전히 게임은 하찮고 저급한, 그래서 ‘문화’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우선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 때문일 테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교체가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편견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뿌리 깊게 남아있고, 그로 인해 게임은 문화가 아닌 잠깐의 일탈이나 못된 유흥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세상만사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게임이 문화영역에서 제 몫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외부적 편견 탓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 밖의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것을 ‘비평’으로 지목할 셈이다. ‘게임비평’? 사실 게임이 맥락적인 조건 속에서 주조되는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타의 문화예술처럼 비평이 따라붙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게임비평은 여전히 생소하고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 영역의 비평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은 탓이며 비평의 무능과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이 글이 쓰인 배경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영토로서 영화/비평 문화비평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단연 미술비평과 문학비평이다. 초기에는 양자 모두 작품의 고유한 특징과 미학적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작품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 또는 ‘문학사’와 함께 발맞춰 전개되었지만, 근대 전환기에 이르러 예술이 인간 이성의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자 비평은 역사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무렵이 되자 비평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예술 시장의 확대와 부르주아 계층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단순히 작가와 문화 향유자 사이를 중개하던 비평가의 역할이 특권 집단의 배타적인 취향을 형성하는 역할로 변모한 까닭이다. 특히나 미술과 문학은 일찍이 상류층의 취미이자 고급예술의 대표적 형태로서 문화사에 기입되어 왔기에 비평이 제 스스로 그것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강조하여 대중문화와의 구별짓기를 수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이때부터 비평은 문화예술의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반면 영화와 영화비평의 관계는 위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진화·발전을 이룩해왔는데, 영화는 근대의 산물이기에 태초부터 고도화된 자본 및 기술, 매체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 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도 신문과 잡지는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 발명과 영화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조푸앵(Mise au point)>(1897)이나 <르파시나퇴르(Le Fascinateur)>(1903)와 같은 영화 전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근대 영화비평의 초석이 마련되었는데, 달리 말해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탄생부터 그것에 대한 글쓰기와 함께한 셈이다. [1]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발명 초기, 영화가 ‘미래가 없는 발명’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온갖 종류의 장르 및 스타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자기 식대로 소화했고 제작과 평론, 관람을 한데 모으는 비옥한 토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대중매체로서 영화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점차 영화 산업에도 활기가 돌고 영화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자 영화 칼럼을 고정으로 싣지 않는 주간지가 없을 정도로 영화 비평은 몸집을 부풀렸고 정기 간행물 형태의 전문 영화 잡지 역시 앞다퉈 창간됐다. [2] 그리고 이때부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비평에 참여하면서 그 수준도 현저하게 끌어올려졌는데 알렉상드르 아스트뤽(Alexandre Astruc),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장 조르주 오리올(Jean George Auriol), 로제 레나르트(Roger Leenhardt),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등은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영화 미학을 심도 깊게 탐구하고, 비평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이하 <카이에>)와 <포지티프(Positif)> 역시 이러한 지적 계보 속에서 탄생했다. [3] 이렇게만 보면 영화/비평은 나름대로 순탄하게 독자적인 예술의 지위를 차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문 영화비평이 등장한 초기만 하더라도 영화는 연극이나 문학의 빈곤한 확장으로 여겨졌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는 제국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적 매체라는 편견이 빠르게 확산됐다. 게다가 전쟁 이후 맹렬한 기세로 성장한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쉽게 말해, 영화가 미술이나 문학과 같이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영화만의 미학적인 속성과 가치를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말소시켜야 했고, 그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저속한 유희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역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초창기 영화이론가 리초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선언한 이후 영화비평은 영화가 고유한 내적 세계와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한 형태이며, 그에 대해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모든 행위는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지성의 작용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아스트륔의 ‘카메라 만년필론(camera-stylo)’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스트뤽는 1948년 <레크랑 프랑세(L'Écran française)>의 지면을 빌어 영화감독은 화가나 작가에 비견되는 예술가로, 감독이 사용하는 촬영 기자재는 소설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만년필과 같다고 썼다. [4] <레크랑 프랑세>의 또 다른 필자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역시 이미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자 실천적 행위라고 말하며 ‘사유-이미지(Images-pensée)’를 주창했고, 영화비평의 전성기인 ‘황색 시대’ [5] 를 견인한 앙드레 바쟁 또한 카메라의 힘이 현실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역설하며 영화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6] 이렇듯 영화가 ‘근(현)대 예술’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비평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다. 비평이 촉발시킨 영화 미학에 관한 물음과 논쟁은 당대 많은 부르주아-엘리트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이 영화의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한 의미의 시네필 문화를 수호하던 비평계가 누벨바그 운동에 직면하며 폭넓은 지적 조류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간의 비평은 의식적으로 비정치성을 강조해왔는데, 이는 영화-이미지 이면에 놓인 감독(작가)의 천재성과 영화의 특수성을 세간에 드러냄으로써 영화와 비평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으려는 기획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요컨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마련한 자신만의 일관되고 독특한 세계관이 담긴 작품 세계로서의 미장센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이념적 해석이나 정치적 성향은 필요치 않다.” [7] 만약 “이를 강요한다면 영화의 시각적 구성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향된 ‘읽기’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것” [8] 이며, 이는 결국 영화를 도구적으로만 참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세대교체로 인해 젊은 감독들은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적 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비평도 변혁을 요구받았는데, 비평 역시 세계의 일부라면 모종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누벨바그의 거장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다. 그는 영화 안에는 언제나 미지의 상태로 남겨진 의미와 기능, 형식들이 존재하기에 자기 자신에게로 닫혀서는 안 되며, 이 미완성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힘이기에 영화는 결코 고립된 채 이해될 수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리베트 이전의 비평이 작품의 내적 탐구를 통해 영화를 진지한 사유와 토론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데 주력을 기울였다면, 리베트 시대의 비평은 작품의 안과 밖을 잇는 시도를 통해 영화의 이론적 정립과 과학적 글쓰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리베트는 <카이에>를 이끄는 동안 영화의 의미 확장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인류학과 문학 이론, 라캉의 정신분석학,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등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지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리베트와 함께 <카이에>를 이끌던 필진들 역시 블랑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융 등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영화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 영화를 다르게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강구했다. 이제 비평은 근대인의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영화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이 자극하는 무의식과 불안에 초점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화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둥지 밖으로 나오도록 신화를 깨부수는 것” [9] 으로 변모함에 따라 비평이 중요하게 포착해야 할 것 또한 작품이 높인 맥락, 즉 영화가 탄생한 환경적인 조건이나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것의 표현 방식 등으로 이동하게 된 셈이다. [10] 그리고 몇 년 뒤 영화/비평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회고처럼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은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그에 관해 쓸 수 없게 만들었다. 68혁명의 주창자들이 이끈 정치경제학적 변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로 프랑스 사회 내 모든 가치가 의문시되었고 영화 역시 황색 시대에 구축된 제도와 관습, 원칙, 규율 등이 1968년 이후의 상황을 다루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 시네필리아에 대한 거부가 만연해지자 영화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사유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요구 담론의 지속적인 형성 및 축적은 ‘영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열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 한국영화/비평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어떨까? 한국영화사에 비평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이었지만 이때의 평론은 서구의 초기 영화비평처럼 일간지나 잡지 등지에서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정도였으며, 보다 선명한 문제의식을 지닌 비평가 집단이 출현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5.16의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한국영화비평가협회’에 10여명의 문학평론가를 영입하며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하나의 비평적 공동체로 묶어준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새로운 ‘세대성’이었다. 해방직후의 비평은 ‘민족영화 건설’이라는 모토를 내세웠고, 1950년대 전후 비평 역시 ‘한국영화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어받았지만, 이 새로운 비평 집단은 영화의 문학성(서사성)이나 외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미지-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강조하고 내적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영화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리얼리즘을 초극해야 한다” [11] 는 한국영화의 암묵적인 전제는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영화는 본디 기록의 매체이니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리얼리즘은 한국영화의 절대적 명령이 아닌 하나의 선택적 가치에 불과하며,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오브제가 아니라 그 오브제를 다루는 영상-이미지이다. [12] 이러한 흐름만 놓고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이 걸어온 길 역시 서구의 궤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근대 도시의 통속적이고 저속한 볼거리로 여겨지거나, 인접한 예술의 하위호환 버전으로 간주되거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각되다가 대대적인 세대 교체와 함께 그것의 역사적, 매체적, 미학적 특성을 규명하며 종국에는 예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영화는 언제나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세계영화문화의 공통된 목표였다면, 다른 하나는 문화 열강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민족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식민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벗어던지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힘의 획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한국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풀어 말하자면 50년대 한국영화는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식민지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를 대안으로 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세우는 테크놀로지나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두기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60~70년대의 한국영화비평은 기술과 예술을 엄격히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한국영화가 안고 있는 기술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과 좌절로부터 비롯된 의식적 부인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물적 토대를 감안했을 때 할리우드가 선보이는 기술과 기교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졸렬한 기술-자본이 만들어낸 말초적 쾌락이라 호명하며 예술성의 고양을 주창한 것이다. [1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한국영화의 기술력을 논할 때는 다소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가령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가 등장하자 비평단은 이를 한국영화의 획기적인 진전이라 상찬하고, 국산 시네마스코프가 제작되었을 때는 한국영화를 해외영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위대한 업적이라 호평했다. [14] 이것이 너무 까마득한 역사처럼 느껴진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장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그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했는데 당시 물밀듯 밀려 들어온 해외 문화로 인해 자국 문화의 위기설이 나돌았고, 이때 전 지구적 자본의 풍랑에 맞서 한국의 영화산업을 이끌 대표 주자로서 부상한 것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 민족주의적 서사를 채택하며 처음 등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막대한 자본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을 등에 업고 인기몰이를 했는데, 이에 대한 비평 역시 60~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영화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에 대거 유입된 해외 스펙터클 영화에 대해서는 자국의 영화를 말살시키는 ‘위협’의 딱지를 붙였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해외 문물로부터 국가·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지켜낼 문화예술의 지위를, 더 나아가 IMF 외환 위기와 구제 금융을 겪으며 좌절한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킬 산업분야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15] 해외영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자본에 대한 한국영화/비평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는 외래 문화로 출발했으나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기술은 근대성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비평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모순, 또는 지정학적 특수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6]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의 과제는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영화에 근대 문화예술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외래 문화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온 까닭이다. 이렇듯 한국영화/비평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대중문화)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저항과 해방을 꾀한, 이른바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이라 할 수 있다. 맺고 새로 시작하며: 현대 문화예술로서의 게임을 위하여 긴 우회로를 거쳤으니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글을 시작하며 나는 게임이 현대의 일상문화와 한국의 문화산업 한복판에 놓여 있음에도 대체 어떤 이유로 여전히 천대를 받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비평 문화의 비활성화를 언급했었는데, 이 글의 목적이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통한 비평의 각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뒤집어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하고 명쾌한 설명일 테다. 즉 게임비평의 소극적인 태도, 나태함, 약간의 무기력함과 무능함 등의 논리적인 귀결은 게임문화 전반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길게 서술했듯 영화 역시 고전 미학의 권위에 짓눌려 꽤나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비평의 공이 컸다. 특히나 한국영화의 경우 서구 문화의 계급투쟁 계보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중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국게임문화에 주는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주는 교훈을 통해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 비평은 수십 년 전부터 ‘위기설’이 감돌 정도로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몸체를 부풀리는 OTT 플랫폼으로 인해 영화 관람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담론장 형성과 지식-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아마추어 비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문 비평의 지나친 엘리트주의나 미학주의는 대중예술로서 출현한 영화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권 계층의 전유물과 같은 부르주아적 성향을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이는 영화를 미학적 탐구와 학문적 고찰의 대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주관비평에서 객관비평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던 과거의 비평적 요구가 절대화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였다. 기실 비평적 주체는 늘 제3자로서 중립적인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지워진 비평 주체의 주관성은 역설적으로 비평가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비평 행위는 단순히 제3자로서 사실을 기록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매개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언제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적이며,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 쓰고, 읽고, 말하고, 듣고, 보는 주체는 오늘의 시간을 지나쳐가는 주체와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평의 전문성을 보장한답시고 현실과 유리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자신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법한 논리를 내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핵심적 역할이 세계와 텍스트 사이에 오솔길을 놓고 장 안팎의 행위자들을 이을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 새롭게 마련된 비평-플랫폼의 책임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마주침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데에 있다. 지적 자본을 내세운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신랄한 목소리, 열정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의 뜨거운 열기와 유쾌한 분위기, 문화 자본으로 다듬어진 섬세한 감수성과 고아한 취향, 현장의 목격자 및 관찰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앎에 대한 열망 등이 뒤섞일 때, 그래서 저마다 활발하게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담론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게임은 비로소 현대 대중문화예술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 새로운 비평-플랫폼이 서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게임문화가 현대 대중문화의 치열한 계급전쟁에서 권력을 탈환하고 개별 학문의 지위를 차지하여 대학의 문턱을 넘는 날이 오기를, 한평 남짓한 책상 앞에서 펼치는 우아한 지적 활동이자 역동적인 취미로서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현질까지 해가며 기를 쓰고 게임을 한 우리 귀염둥이의 노력이 사춘기 소년의 한심한 일탈이 아닌 꿈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게임 제너레이션〉의 건투를 빈다. [1]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390쪽. [2] 에밀리 비커턴, 정용준·이수원 역,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이앤비플러스, 2013, 31-33쪽. [3]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4] http://www.newwavefilm.com/about/camera-stylo-astruc.shtml [5] <카이에>는 노란 겨자색 표지에 커다란 흑백사진을 실은 30페이지짜리의 잡지로 1950년대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잡지로 여겨지곤 했는데, 특히 별다른 헤드라인 스틸 사진을 사용하여 표지를 구성한 것은 <카이에>가 영화 미학에 큰 비중을 두겠다는 다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6]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51-52쪽. [7]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8]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9] Rivette, Cahiers 204, September 1968. [10]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85-90쪽. [11] 이영일, 『영화예술』, 1965년 4월호, 24-29쪽. [12] 문재철, 「60년대 중반 영화비평담론의 새로움」, 『영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61-79쪽. [13]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2쪽. [14]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3쪽. [15] 이 시기가 한국영화 담론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추가로 덧붙일 필요가 있는데,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해외 문화 유입으로 인해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팽창하자 대중문화론이 지식인 사회에서 각광 받기 시작했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는 이전과 달리 영상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 담론을 구성하고, 인문사회과학과의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갔는데,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도 영화가 엄연한 분과학문으로 인정받아 영화아카데미 설립 및 운영, 전문 예술대학의 건립, 종합대학의 영화학과 설치 등과 같은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16]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5-136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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