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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플레이의 영화화에서 게임-보기의 영화화로
“치킨 조키!” 주인공 스티브가 외치자 영화관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팝콘을 집어 던진다. 영화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가 개봉한 미국 영화관의 풍경이다. 틱톡 등 숏폼 플랫폼을 타고 바이럴된 컬트적 현상은 지난해 예고편이 공개되자 거센 조롱이 뒤따랐던 것에서 출발한다. 스티브역의 잭 블랙은 게임 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 큰 괴리가 있었고, CGI로 ‘실사화’된 마인크래프트 특유의 네모난 이미지가 언캐니 밸리를 자극했다. < Back 게임플레이의 영화화에서 게임-보기의 영화화로 24 GG Vol. 25. 6. 10. “치킨 조키!” 주인공 스티브가 외치자 영화관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팝콘을 집어 던진다. 영화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가 개봉한 미국 영화관의 풍경이다. 틱톡 등 숏폼 플랫폼을 타고 바이럴된 컬트적 현상은 지난해 예고편이 공개되자 거센 조롱이 뒤따랐던 것에서 출발한다. 스티브역의 잭 블랙은 게임 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 큰 괴리가 있었고, CGI로 ‘실사화’된 마인크래프트 특유의 네모난 이미지가 언캐니 밸리를 자극했다. 2019년 <수퍼 소닉>(2020)의 예고편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어글리 소닉’의 모습에 충격받은 게임 팬들과 같은 상황이었달까. 소닉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마인크래프트 무비> 예고편은 정식 개봉 전부터 다양한 짤로 분해된 밈이되었다. 전혀 스티브 같지 않은 모습의 잭 블랙이 “나는 스티브야!”라고 말하거나, 컬트적 밈의 대상이 된 ‘치킨 조키’처럼 말이다. *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 속 ‘치킨 조키’ 어쩌면 이 현상은 원작 게임은 물론 영화 자체와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관에서 소리 지르고 팝콘을 던지며 날뛰는 관객들은 단지 그 순간을 즐길 뿐, 영화의 나머지 장면을 즐기지 않는다. 원작의 이미지를 실사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어색함과 불쾌함에서 출발한 조롱이 밈의 근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밈을 생산하고 즐기는 이들이 모두 게임의 팬이라 볼 수도 없다. 아이코닉한 게임의 이미지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일치가 이들의 향유 대상이다.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의 계보에서 이 불일치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불일치를 먼저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미지의 측면에서 게임과 영화는 점차 닮아가고 있다. 게임엔진이 영화의 VFX 작업에 활용된 역사는 사실상 CGI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뿐 아니라 게임과 영화는 대중문화라는 큰 맥락 속에서 상호참조의 대상이다. <레이더스>(1981)를 모티프 삼아 제작된 게임 [툼 레이더](1996)는 그것의 영화판인 <툼 레이더>(2001)의 개봉 이후 게임 속 라라 크로프트의 모델링이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과 유사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되어 인기를 끈 ‘트레저 헌트’ 장르의 어드벤쳐 영화들, 이를테면 <미이라>(1999)나 <내셔널 트레져>(2004) 또한 툼 레이더의 자장 안에 있다. [툼 레이더]의 성공은 [언챠티드]라는 새로운 게임 프랜차이즈 탄생에 영향을 주었고, [언차티드 3: 황금 사막의 아틀란티스](2011)에서는 아예 해리슨 포드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광고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편으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2023)의 후반부 추락하는 기차를 기어오르는 톰 크루즈의 액션은 [언차티드 2: 황금도와 사라진 함대](2009)의 초반부를 오마주한다. 영화사의 맥락에서 톰 크루즈와 기차를 보고 버스터 키튼의 <제네럴>(1927)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물건들을 붙잡고 등반하듯 추락하는 기차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언차티드 2]를 명백한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1993)의 포스터(위), 영화 속 쿠파와 굼바(아래) 다만 이러한 일치와 상호참조는 게임과 영화 사이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누적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1993년 개봉한 최초의 게임 원작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는 원작 게임과 영화 사이의 불일치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This Ain’t No Game”이라는 문구를 포스터에 내세운만큼 게임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마리오 형제는 배관공으로 일하던 중, 도시 한 가운데 유적지를 조사하던 데이지가 쿠파에 의해 잡혀간 것을 목격하고 뒤쫓는다. 그들은 숨겨져 있던 지하도시 ‘디노하탄’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데이지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택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쿠파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라는 원작의 큰 맥락을 그대로 따라간다. 하지만 영화가 구현하는 이미지는 게임과 영 딴판이다. 버섯왕국은 브루클린 지하의 공룡도시로 바뀌었고, 거북이를 모티프 삼았던 쿠파는 인간화된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었으며, 버섯 몬스터 굼바는 퇴화한 공룡인간이라는 기묘한 설명으로 바뀌었고, 요시는 작은 벨로시랩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버섯이나 꽃을 먹고 파워업된다는 설정은 남아 있으나, 게임에서의 파워업보다는 각성제에 가깝게 묘사된다. 마리오와 루이지의 의상과 직업 정도를 제외한다면 원작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당연하게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혹평과 함께 흥행 참패를 겪었다. 연출자들은 본래 원작과 유사한 동화풍의 비주얼로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였으나, 제작비의 문제로 1980~90년대 유행하던 디스토피아 풍의 비주얼로 변경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작 게임의 요소들이 큰 변화를 겪은 것이다. 여기에는 원작 게임이 가진 세계를 영화로 옮겨오는 것, 마리오와 루이지가 아이템을 먹고 파워업하거나 점프로 벽돌을 부수는 등의 행위들을 곧장 실사영화로 옮겨왔을 때의 문제점도 동반될 것이다. 2023년 닌텐도와 일루미네이션 스튜디오의 합작으로 제작된 극장판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애니메이션 혹은 TV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어색하지 않았을 행위들이 ‘실사’라는 맥락에서 구현되기엔 무리가 있다. 나아가 1993년의 시점까지 출시된 [슈퍼 마리오] 게임들에는 “쿠파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라는 이야기의 뼈대만 존재할 뿐 디테일한 서사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각색된 실사영화의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이 영화는 원작 게임을 철저하게 배반했기에 컬트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극장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제멋대로 변형된 캐릭터들은 (물론 퀄리티의 조악함은 있으나) 컬트적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후의 작품들, 이를테면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마리오 형제와 그곳을 침공한 쿠파 일당을 격퇴한다는 설정이 202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애니메이션에서 반복되고,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2017)의 ‘도시 왕국’ 스테이지 또한 이 영화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작 게임과 영화 사이의 불일치는 기묘한 상호참조로 이어지기도 함을 보여준다.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2023, 위)와 <명탐정 피카츄>(2019, 아래) 스틸컷. 극장용 장편영화에 어울리는 내러티브가 결여된 ‘슈퍼 마리오’이니 다른 게임 원작 영화의 예시를 들어보자. <명탐정 피카츄>(2019)는 포켓몬 IP를 활용한 동명의 추리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 중후한 탐정의 목소리였던 피카츄의 목소리를 영화에서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맡으며 캐릭터 성격의 변화가 발생하지만.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라임시티에 온 주인공, 우연히 피카츄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설정, 이상행동을 보이며 난폭하게 폭주하는 포켓몬 등 주요 설정과 이야기 전개는 동일하다. 다만 포켓몬 세계의 영화화에서 중점이 되는 것은 이야기의 문제가 아니다. <명탐정 피카츄>는 포켓몬 팬들이 상상하던 포켓몬과 공존하는 도시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슷한 시기 공개된 <슈퍼 소닉> 예고편의 ‘어글리 소닉’에 쏟아진 혹평과 반대로, 영화 속 포켓몬의 모습은 (다소 과하게 리얼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팬들이 상상하던 ‘실사화된’ 포켓몬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했고, 게임 속 평면적인 도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다른 포켓몬 게임이 아닌 명확한 내러티브를 지닌 [명탐정 피카츄](2016)을 경유하여, 충분한 핍진성을 가진 세계로서 이를 구현했기에 가능하다. 동시에 ‘포켓몬’이라는 대상이 지닌 환상성과 가상성은 현실 세계를 베이스 삼은 게임들의 영화화와 다른 방향의 영화화를 가능케 한다. 이를테면 영화판 <히트맨>(2007), <맥스 페인>(2008), <언차티드>(2022) 등은 게임플레이나 게임이 그려낸 세계가 지닌 가상성을 소거한 채 전형적인 ‘액션영화’, ‘범죄영화’, ‘어드벤쳐 영화’가 되었을 뿐이다. * 왼쪽부터 <모탈 컴뱃>(1995), <레지던트 이블>(2002), <수퍼 소닉>(2020), <더 라스트 오브 어스>(2024)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원작 게임을 영화로 충실히 번역하는 것만이 정답인 것만은 아니다. 원작의 방대한 세계관을 열심히 옮겨온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2016)이나 <어쌔신 크리드>(2016)는 그것의 일부만을 부족하게 옮겨왔을 뿐이다. <사일런트 힐>(2006) 같은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폴 W. S. 앤더슨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2002~2016)나 <슈퍼 소닉>처럼 원작의 몇몇 설정만을 따오고, 오리지널 캐릭터를 추가하며,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성격을 팝콘무비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한 사례가 더욱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HBO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2024)의 첫 시즌에서 가장 호평받은 에피소드는 게임에서 그저 우연히 습득할 수 있는 편지를 읽어야 캐치할 수 있는 ‘로어’를 서브플롯으로 확장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에서도 원작 팬들의 플레이 경험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는 필수적이다. <레지던트 이블> 1편에는 [바이오하자드](1996)의 주요 무대인 아크레이 저택이 등장한다. <둠>(2005)은 내러티브상의 설정에선 원작과 큰 차이가 있지만, 1인칭 시점의 롱테이크 액션 시퀀스를 삽입함으로써 FPS 게임의 감각을 가져온다. <수퍼 소닉>의 속도감은 슈퍼히어로 영화 속 스피드스터의 액션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연출되지만, 게임의 시그니처 같은 몸통박치기를 액션에 추가한다. 이러한 방식은 원작의 일부만을 가져와 장편영화의 내러티브로 각색했음에도 게임플레이를 연상시킴으로써 게임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한다. 영화평론가 V. F. 퍼킨스는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를 관객이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복제한 리얼리즘에 기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에게 영화 속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연출로 인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1] . 게임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원작과의 불일치가 발생하지만, 게임플레이의 영화적 구현을 시도함으로써 게임의 가상성을 영화의 핍진성 속에 기입하는, 지난 30여 년간의 게임 원작 영화가 누적되며 형성된 하나의 전략이랄까. 이들 영화는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세계가 영화 안에서도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신뢰성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을 개발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액션, 호러, 어드벤쳐 등 익숙한 장르영화의 문법에 게임플레이적 순간을 기입하는 전략은, 비록 장르적 전형성 속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진 못해도 게임을 즐겨온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성공한다. 1990년대의 <스트리트 파이터>(1994)와 <모탈 컴뱃>(1995)이 그랬고, <사일런트 힐>이나 <명탐정 피카츄>가 그랬으며, 2023년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성공한 전략이다. <마인크래프트 무비> 또한 이 같은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 수준의 단순한 로그라인조차 존재하지 않는 [마인크래프트]의 영화화는 이러한 전략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나 <반교: 디텐션>(2019) 같은 스토리텔링은 불가능하거니와, 게임 내적으로 부재한 내러티브를 그 바깥의 사건으로 대신한 <그란 투리스모>(2023)나 <테트리스>(2023)와 같은 방식 또한 불가능하다. [팩맨]이나 [갤러그](1981), [테트리스](1985)의 형상을 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이야기의 <픽셀>(2015) 같은 방식을 도입하기에도 어렵다. 물론 ‘스토리 모드’가 존재하지만, 별도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되거나 유튜브의 무수한 팬 무비의 영역에 놓일 뿐이다. 사실 가장 히트한 샌드박스 게임으로서 [마인크래프트]는 머시니마(machinima) 팬 무비의 대표적인 재료가 된다. 이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마인크래프트 무비>에서도 강조되듯 ‘창의성’이 게임플레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오버월드’가 관객에게 신뢰받는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미지뿐 아니라 창의성이라는 키워드가 하나의 세계로서 작동하는 방식을 그려내야 한다. * <마인크래프트 무비> 속 스티브(좌)와 마을(우) 하지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창의성과 거리가 멀다. 익숙한 ‘이세계’ 판타지물의 배경이 ‘오버월드’와 ‘네더’로 바뀌었으며, 스티브 일행을 제외한 모든 것이 네모난 큐브 혹은 픽셀 형태의 그래픽으로 표현될 뿐이다. 게임적 가상세계를 배경삼은 최초의 영화 <트론>(1982)부터 스필버그의 야심작 <레디 플레이어 원>(2016)에 이르는 게임 배경의 영화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게임의 가상세계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을 고스란히 따른다. 영화 속 ‘마인크래프트’ 세계는 현실과 다른 세계일 뿐 게임이 내세웠던 ‘자유로운 창의성의 세계’가 아니다. 그저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어딘가일 뿐이다. 이는 <마인크래프트 무비>가 택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게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장면들을 영화 속에 욱여넣는다. 투병생활 중 세상을 떠난 [마인크래프트] 유튜버 ‘테크노블레이드’를 등장시키며 “저건 전설이야”라고 언급하고, 추락 도중 물 블록을 까는 ‘물 낙법’, 레드스톤의 힘으로 움직이는 광차 트랙, 앤더맨으로 가득한 저택 등의 순간을 영화 내내 선보인다. ‘치킨 조키’ 장면도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플레이적 순간을 영화에 기입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숏폼으로 전파되는 밈으로 빠르게 자리 잡길 잠재적으로 요청한다. (실제 제작과정이 그러하진 않았겠지만) 영화의 1차 예고편에서 “나는 스티브야!”라는 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한편의 영화라기보단 산산히 분해되고 밈으로 재생산되는 콘텐츠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마치 게임 유튜버들이 10~20분짜리 본영상의 하이라이트를 다시금 숏츠로 뽑아내듯이. 202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같은 작품이 관객 개인의 게임플레이 경험을 연상시킨다면,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타인의 게임플레이를 시청하던 경험을 연상시킨다. 내러티브가 부재한 게임의 내러티브는 게임의 디렉터나 디자이너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의 경험이 누적되며 생성된다. 출시로부터 어느덧 16년이 흐른 [마인크래프트]는 그 시간만큼 많은 플레이가 누적되어 있고, 각각의 플레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유튜브나 트위치의 시청자들은 그 내러티브를 게임의 내러티브로서 수용한다. 게임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게임을 매개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마인크래프트] 뿐 아니라 [시티즈: 스카이라인](2015)이나 [플래닛 코스터](2016) 같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2000~2014) 등의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내러티브 없는 게임의 스트리머·유튜버들이 플레이 과정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 <마인크래프트 무비> 상영 당시 팝콘을 던지지 말라는 극장 안내문 이러한 맥락에서, 서두에 언급한 ‘불일치’는 게임플레이를 통해 형성된 내러티브와 그것의 영화화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의 향유는 ‘게임’의 향유와 ‘영화’의 향유 사이에 놓인 틈새, 플레이와 시청 사이에 놓인 게임 소비 패턴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실 우리는 10년 전 장난감 원작의 영화 한 편이 ‘놀이’를 영화에 기입함으로써 성공한 바 있음을 알고 있다. <레고 무비>(2014)는 그저 평범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그의 모험이 사실은 레고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에 의한 것이었음을 영화 후반부에 드러낸다. 디지털 게임을 원작 삼은 영화에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그것을 정교한 영화적 내러티브 속 메타적 장치로 활용하진 못한다. 다만 이 영화의 관객들은 영화관에 방문하지만, 그들이 관람하길 바라는 것은 정교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들이 게임과 가진 경험 속에서 기억하는 이야기와 순간들의 재현이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하나의 완성된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실패했지만, 원작과의 불일치 속에서 의도치 않게 지금의 게임 소비 환경을 영화 외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원작 게임을 멀찍이 벗어나 괴상망측한 장르영화로 향했던 우베 볼의 영화들이나 내러티브의 부재를 게임 바깥의 사건으로 대리한 <그란 투리스모>, <테트리스>와도 다르다. 제작이 예정된 무수한 게임 원작 영화들이 방대한 세계관의 영화화를 예고하고 있을 때,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게임의 세계관이나 게임플레이가 아니라 게임-보기의 영화화가 하나의 방식일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없던 방식으로 보여준다. [1] V. F. 퍼킨스. 『영화로서의 영화』. 임재철 옮김. 서울: 이모션북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2021년 상반기의 최대 화제작이자, 신데렐라를 뽑자면 첫번째로 나올 게임은 바로 <잇 테이크 투> 다. 아직도 영화 <깝스>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끼우고 발사하던 장면을 연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부터 떠오르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이자, 게임 제작자인 요제프 파레스의 이 최신작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물이다. < Back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01 GG Vol. 21. 6. 10. 2021년 상반기의 최대 화제작이자, 신데렐라를 뽑자면 첫번째로 나올 게임은 바로 <잇 테이크 투> 다. 아직도 영화 <깝스>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끼우고 발사하던 장면을 연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부터 떠오르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이자, 게임 제작자인 요제프 파레스의 이 최신작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물이다. <잇 테이크 투>는 그 특유의 보편성이 빛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보편적 플레이의 집합체’ 라고 할 수 있다. 어느하나 완전히 새롭거나 원전을 찾기 어렵게 변용된 것이 없으며, 새로움 보다는 잘 편집되고 조율된 플레이의 연결이 빛이 나는 게임이다. 마치 순서대로 차려지는 가정식 백반 같다고나 할까. 이 게임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은 역시 다채로운 레거시 게임 플레이의 끝없는 연결이다. 이 게임은 2인 협동 게임이면서도, 기존 게임들의 장르적 메커니즘을 하나씩 따와 채워넣었다. 전체적으로는 2인 협동 퍼즐이라는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TPS, 비행 슈팅, 대전 격투, 리듬 액션, 플랫포머 등 수많은 클래식 메커니즘을 도구로 삼았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이 기존의 플레이 메카닉을 자유자재로 섞어넣은 탁월한 감각이 돋보인다. 이는 또한 게임의 한계점을 교묘히 가리는 효과도 낳는데, 앞서 말했듯 이 게임의 플레이 메카닉은 대부분 이미 있었던 클래식한 요소이기 때문에 반복하면서 피로를 느끼거나 자루함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이 게임은 그런 시기가 오기 직전에 새로운 플레이 메카닉으로 갈아치운다. 즉 잘 편집된 게임 플레이의 나열은, 익숙함을 신선함으로 전환하는 역설적 효과를 가져다 준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는 계속해서 ‘적응->숙련->응용’ 의 반복이다. 보통 하나의 핵심 메카닉을 추구하는 게임은 해당 플레이 메카닉에 플레이어가 충분히 익숙해지면 플레이 하기 위한 문턱, 허들을 높이는 식으로 대응한다. ‘레벨’ 로 대표되는 RPG적 성장 요소가 대표적이다. 이는 닌텐도 스위치로 나온 최근작 <페이퍼 마리오 종이접기 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이 게임은 기존의 게이머들, 특히 대중 게이머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만 하지만, <잇 테이크 투>는 반대로 플레이에 걸림돌이 되는 특징 또한 가지고 있다. 플레이 자체에 이런 저런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빛나게 하는 보편성, 하지만 반대로 그 보편성을 가로막는 플레이의 조건’ 의 대조는 다소 아이러니하다. <잇 테이크 투>를 플레이하는 와중에 든 생각은 이 게임이 왜 대단하고, 얼마나 천재적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플레이를 마무리짓고 나서 든 생각은 ‘이렇게 훌륭한데도 왜 국내에서는 폭넓게 플레이되고, 널리 알려지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플레이의 조건’ 에서 찾아보게 됐다. 지난해 직접 올해의 게임으로 뽑았던 게임, <하프라이프: 알릭스> 는 이런 맥락의 논란을 몰고 다녔다. 즉, VR이라는 기기가 필요한 게임이 어떻게 올해의 게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게임의 평가는 대중성 혹은 범용성을 꼭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쉽게 반박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건 플레이의 ‘조건’, 그것이 하드웨어이든, 아니면 플레이어가 갖춘 다른 어떤 여건이든 그 조건이 다소 높다면 과연 그 게임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남겼다. 비록 VR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쳐두고서라도,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한 조건을 요구한다. 사소하게는 기기 스펙에서부터, 나아가서는 플레이어의 실력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몇몇 게임들은 특유의 게임 플레이나 감각적 요소를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한 문화적 기반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조건이 필수적일 수도, 그저 더해지면 좋은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잇 테이크 투>는 다른 게임에 비해 이례적으로 그 요구 선이 독특하다. 이는 ‘카우치 코옵(Couch Co-Op)’ 이라는 특성과 제작자의 전작과 달리 ‘가족’ 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카우치 코옵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카우치 코옵은 아직 가정 인터넷이 보급 되지 않은 2000년대 이전 가정용 콘솔 기기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로서, 콘솔 게이밍 기반이 200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콘솔 게이밍 기기는 네트워크 기능을 막 탑재하고 네트워크를 통한 코옵을 확장하였기에, 한국에서는 하나의 기기 앞에 여럿이 모여 분할 화면과 여러 개의 컨트롤러로 함께 플레이하는 문화가 흔치 않았던 것. 있더라도 <위닝 일레븐> 같은 스포츠 대결 게임 위주의 경험이 고작일 것이다. 한국에서 카우치 코옵과 가장 비슷한 문화를 찾아 보자면 한대의 PC로 다자가 한 게임을 공유하며 플레이하던 경험, 또는 오락실의 클래식 아케이드를 찾을 수 있다. 다행히도 21세기 들어 카우치 코옵을 중시하는 콘솔 게이밍 기기인 닌텐도의 Wii, 스위치 등이 저변을 넓히면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Wii 방, 그리고 이후 닌텐도 스위치 커뮤니티를 통해 ‘추억의로서의 카우치 코옵’ 이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 조립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인에게 ‘카우치 코옵’ 은 내가 스스로 겪고 자란 문화라기 보다는, 수입된 문화에 가깝다. 이 카우치 코옵의 감성은 <잇 테이크 투> 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카우치 코옵의 경험은 주로 청소년기에 형성되며, 일종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기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경험이 청소년기에 부재한 한국 게이머들에게는 훨씬 덜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이와 더불어, 게이밍 문화에 아직 짙게 남아있는 남성 중심적 기조는 <잇 테이크 투> 를 온전하게 창작자의 주제의식 그대로 받아들여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아직까지도 한국, 그리고 세계에서 청년-청소년이 아닌 기성세대에게 게임은 남성의 문화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게임이 2인 협동 게임일 뿐만 아니라 ‘자식을 가진 부부’ 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게임은 각각 이혼 위기를 맞이한 아내와 남편을 플레이하도록 한다. 또한 감정적으로 매우 풍부한 과정을 플레이에 담아두었다. 즉 대리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이 게임의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 구성은 역시 ‘부부’ 게이머가 함께 플레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잇 테이크 투> 는 생각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게이머 경력을 요구한다. 각종 기존 게임들의 레거시 플레이가 순간적으로 교체되고, 즉각적인 적응이 이 게임의 미덕이다. 비행 슈팅, 대전 격투, TPS 슈팅, 클래식 RPG 등 이 게임이 계속해서 변환하는 게임 메카닉은 코어 게이밍의 영역이며, 캐주얼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는 재미를 느끼기 전에 여러 자잘한 장벽으로 방해받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코어 게이머였던 여성을 찾기 힘든 현재 한국의 기혼 세대에게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자체가 또다른 분란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즉, 여성들이 게임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레거시 게임에 대한 선험적인 경험이 필요한 이 게임에서 ‘코어 게이머로서의 경력’ 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주변에서 부부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 현재 부모 세대(40대 이상)에게 게이밍이란 전적으로 남성의 문화, 또는 남성적 게임과 여성적 게임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인식, 그리고 행동 양식이 깊게 베어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훨씬 그 빈도가 높아보였다. 실제로 부부가 함께 플레이 했다는 감상, 후기의 절대적인 수가 해외가 더 높았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여성들도 어렸을 때부터 비디오 게임을 접하는 기회가 남성만큼이나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세대를 불문하고 ‘여성 게이머’ 에 대한 멸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불거진 특정 여성 스트리머의 <리그 오브 레전드> 챌린저 논란이 대표적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등 대중적 게이머층을 형성한 경쟁 게임을 중심으로 게이밍은 점점 더 보편적인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코어 게이밍 문화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다. 그나마 닌텐도 스위치를 위시로 한 보다 대중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게임들을 중심으로 점점 더 여성 코어 게이머 층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그런 게이머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게이밍이 어떤 기본 교양, 소양으로 여겨지는 문화였다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카우치 코옵이라는 장벽에 가로 막히지도 않고, 또는 부부 사이에 좋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로서 이 게임을 플레이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카우치 코옵이라는 플레이 방식이 주는 노스탤지어, 그리고 ‘부부의 갈등 해소’ 라는 중심 사건이 플레이어에게 깊이 천착하는 감성은 역으로 한국의 게이머들에게는 거리감을 두게 만든다. 이 두가지가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임을 고려할 때, 게임의 완성도에 비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잇 테이크 투>가 올해의 최고의 게임이 될만한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올해 상반기 출시작 중 이만큼 강렬한 게임 플레이를 보인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의는 순수하게 ‘게임 플레이’, 즉 직관적인 놀이로서의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게임 플레이라는 핵심이 아닌 캐릭터의 외관, 이야기에 삽입된 전형적 요소, 마케팅 같은 외적 요인에 기댄 게임들에게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게임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논한 ‘플레이의 조건’ 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태초의 게임 ‘퐁’ 역시 2인이 아니면 플레이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물론 어떤 한 문화의 시작점이 수십년이 지나도 절대적인 잣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꾸준히 요제프 파레스는 2인 플레이 게임을 만들어왔고, 때문에 전작과 동일한 플레이 저변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잇 테이크 투>가 전작과 달리 널리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대중적 접근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다른 대중적 게임에 비해서는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작에 비해서는 훨씬 진일보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자리잡은 게이밍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또는 그 변화가 충분히 급격하지 못하다면,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폭넓은 이해의 관점이다. 협소한 사건 그 자체나 자신의 1차적 경험에만 의존한 해석이 아니라 좀더 광의에서의 이해, 근본적으로 그 감정이 내게는 어떤 식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 찾아보는 수용의 자세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완전 연소한 게임의 가치를 곱씹을 수 있다면 된게 아닐까. 아마 올해 내내, <잇 테이크 투>가 고평가를 받는데 있어서 이 플레이의 조건은 내내 발목을 붙잡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이 게임은 카우치 코옵,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있는 시도였다고 평하겠다. 더불어, 게임을 평가할 때마다 하는 말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세상에는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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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11 디지털게임은 소프트웨어와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인터페이스를 언제나 필요로 해 왔다. 조그셔틀과 버튼으로 시작해 조이스틱과 키보드/마우스, 다양한 터치스크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단순히 사람과 소프트웨어를 매개할 뿐 아니라 게임의 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쳐 온 바 있다.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길었던 팬데믹의 터널이 끝나고 게임쇼에도 봄이 돌아왔다. 물론 모든 게임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발표되었던 E3 2023의 취소 소식은 게임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3월 말에 열린 PAX EAST는 GDC 2023과 비슷한 시기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B2C 부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필자 역시 4년 만에 GDC를 찾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20년부터 2022년 GDC에 모두 등록했었다. 다만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작년은 패스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Read More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Read More [논문세미나]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 이번 세미나에서 리뷰할 논문은 지난 2022년 8월 ‘게임 스터디즈(Game Studies)’라는 저널에 게재된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이다. 번역하면 “X를 눌러 기다리시오: 레드 데드 리뎀션 2 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게임 시간의 문화정치” 정도 될 수 있다. 이 논문은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다룬다. Read More [북리뷰] 게임콘솔 2.0: 현대 게임기의 계보와 궤적을, 사진으로 읽다 어린 시절을 비디오 게임을 벗 삼아 왔기에 게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2000년대 중반쯤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위키백과 문서에 실린 고전 게임기들의 사진 퀄리티가 너무 조악했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웹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 웹 문서들의 사진자료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초기이기도 해서 개인이 형편 되는 대로 찍어 자가 제공한 사진들 일색이었으므로, 그때 눈으로 봐도 거개가 저해상도 저퀄이기 일쑤였다. 물론 하드웨어 제작사가 말끔하게 찍은 공식 사진자료가 있기는 하나, 당연히 제작사에 저작권이 있는데다 언론사 등에나 한정적으로 제공되기에, 공공자료로 개방되어 인용용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고퀄리티 사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Read More [인터뷰] DRX 무릎이 말하는 게이머와 조이스틱의 관계 그렇다면 조이스틱에서 발생하는 감각과의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오랜 기간 세계 최정상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격투 게임 프로게이머라면, 아주 미묘한 감각과 게임 간의 상호작용을 더 면밀히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십 여 년간 탑 티어를 놓지 않으며 수많은 게임기기를 이용해본 게이머라면, 조이스틱의 변천에 따른 감각적 차이를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를 품고 이번호에서 편집장은 글로벌 이스포츠 전문기업 DRX 소속 철권 프로게이머인 '무릎' 배재민 선수를 만나고 왔다. Read More 『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는 서민적인(接地气)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Read More 기억의 조작술: 사건의 컨벤션으로부터 벗어나기로서 인디게임 장르는 게이밍에서 오랜 논쟁의 주제 중 하나다. 디지털게임의 매커닉과 외형은 무궁무진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TV쇼와 마찬가지로 어떤 약속된 경로들이나 재현의 양태가 축적되고 있음다. 컨벤션(convention)은 창작자와 텍스트, 그리고 수용자 사이에 형성되는 하나의 묵시적인 관습으로 우리는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이 생산되고 반복적으로 읽히는 과정에서 공통의 컨벤션을 체화한다. 장르가 계약을 통해 창작자-수용자 모두 텍스트의 진행 과정을 사전에 공식화한다면, 컨벤션은 비공식적으로 모두가 따르는 불문율이다. 장르는 헌법처럼 작동하지만 컨벤션은 그 안의 관습법 혹은 윤리처럼 흐른다. 장르는 끌어당기는 반면, 컨벤션은 대류한다. 장르는 포뮬러(정형화된 공식)와 컨벤션을 만들고, 스타일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를 생산한다. Read More 낚시스피릿의 별매 낚시 컨트롤러로부터 본 게임 경험의 확장 전세계에서 게임을 하는 입력 인터페이스로 가장 많이 이용 되는 것은 무엇일까. 몇 년 전이라면 자신있게 게임 패드라고 이야기를 하겠지만 지금은 터치 인터페이스 역시 적지 않기 때문에 자신있게 게임 패드라 말할 수 는 없겠다. 다만 터치인터페이스 위에 구현되어있는 가상 패드까지 고려하면 현재에도 게임 입력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입력 인터페이스는 게임 패드일 것이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보았을때의 경향이며, 한국에서는 가정용 게임기보다 개인용 컴퓨터를 통한 게임이 더 익숙하기 때문에 흔히 키마라고 부르는 키보드 마우스 컨트롤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Read More 사라진 컨트롤러 : 가상현실 게임 속의 컨트롤러의 특징들 가상 현실 게임에서 대부분의 경우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컨트롤러는 게임 내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팀(Steam)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가상현실 게임인 〈하프라이프: 알릭스 (Half Life: Alyx)〉나 PSVR2의 대표작인 〈호라이즌 콜 오브 더 마운틴 (Horizon Call of the Mountain)〉을 비롯한 다양한 슈팅 및 액션 게임에서도 대부분 손을 보여주는 방식의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다. Read More 상상된 공간의 지도화: 가상공간의 전시와 도식화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1)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백(Michel Houellebecq)의 문장이다. 영토가 위상학적 차원에서 물리적인 땅과 장소를 가리킨다면 지도는 그 땅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지도는 왜 영토보다 흥미로운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기호화 하는 작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도는 신체와 물리적인 공간을 서로 마주하게 만드는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 기능하며, 현상학적 맥락에서 분리할 수 없는 공간적 경험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아마도 우엘백이 말한 ‘흥미’는, 실재 세계를 매핑(mapping)하는 인식론적 태도와 세계를 이미지로 상상하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Read More 오래된 미래: 1989년에 상상한 미래형 컨트롤러, U-Force와 파워 글러브의 대결 조이스틱과 게이머의 남근선망을 연결 짓는 비평(Pozo, 2015)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어떨까. 2009년, “섹스와 테크놀로지”를 테마로 개최된 Arse Electronika 컨퍼런스에서 SF미디어 랩은 실험적인 게임 컨트롤러 하나를 선보였다. “조이딕(Joydick)”으로 명명된 이 게임 컨트롤러는 벨트로 부착시킨 원기둥 물체를 상하좌우로 움직여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당시 SF미디어랩의 공동대표였던 노아 와인스타인(Noa Weinstein)이 게시한 유튜브 영상에 의하면, 이러한 조이딕은 “사용자의 페니스를 네 개의 주요 방향 으로 화면의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는 조이스틱으로 변환시킨다." Read More 컨트롤러로 인한 게임플레이의 진화 내가 처음 비디오 게임의 존재를 경험한 것은 1985년으로, 당시 업무차 미국에 자주 다녀오던 작은 고모부가 선물로 들고 온 퐁 전용 게임기가 시작이었다. 퐁은 그저 막대 위치를 롤링 스위치로 조절하며 공을 받아내는 단순한 테니스형 대전 게임이었지만, 나에게는 TV에 나오는 화면을 내가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들 만한 경험이었다. Read More 콘솔게임 시장으로 진입하는 한국 게임산업을 바라보며 자주는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지만 가끔 닌텐도 스위치 구매를 후회할 때가 있다. 최근 2년 넘게 스위치를 제 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개인적인 게임 취향 탓이다. 무거운 테이스트에 충분한 핍진성을 통해 몰입감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데, 밝은 테이스트에 캐주얼한 게임이 많은 닌텐도가 잘 맞지 않음을 너무 늦게 즉 스위치 구매 후에 깨달았다. Read More 펌프잇업의 플레이 분화에 놓인 '기계'의 의미 앤서니 던에 따르면 전자제품의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는 사용자들을 제품에 구현된 가치와 개념을 사용자들이 스스로 제품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동안 학습시킨다.1) 이것이 전적으로 맞는 전제라고 가정한다면 게임도 마찬가지일까? 게임은 다른 전자제품들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상품은 그것이 완성되거나 완벽하게 조립된 것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로서의 게임은 완성된 상품이기도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가 제공하고자 하는 게임이라는 상품의 형태는 게이머의 ‘수행’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각각의 게이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체험된다. 소프트웨어로서는 완성된 상품이기도 하지만, 게이머가 게임을 수행하고 난 뒤에야 ‘게임’ 그 자체는 완성된다. Read More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매체라는 말은 A와 B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스마트폰을 우리가 매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들이 각각 생각과 생각, 창작자와 수용자,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게임도 같은 의미에서 매 체다. Read More 하이파이러시: 같은 뿌리의 리듬과 액션 사이에서 리듬은 사전적 정의에서 ‘일정한 박자나 규칙에 따라 장단과 강약이 반복될 때의 규칙적인 음의 흐름’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있다. 박자에 따라서 음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음의 덩어리를 리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게임에서 리듬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 자체는 연주하는 행위. 혹은 건반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리듬 그 자체보다는 음악 연주를 모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므로 날아오는 노트를 처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Read More 확률형 아이템 확률공개 법제화 : 진정한 이용자 보호를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 지난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의 공약이기도 했던, 확률형 아이템 확률공개 법제화가 2023년 2월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위 법은 1년 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24년 3월 1일부터 시행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잘 알 것으로 예상되지만, 확률형 아이템은 구입 당시에는 그 종류나 효과가 명확하지 않고, 일정한 행위 (요컨데 뽑기를 한다거나, 특정 장비를 강화를 하는 등의 행위) 를 할때 확률에 따라 그 종류나 효과가 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Read More
- 전업 게임평론가의 솔직한 고민
경험과 지식,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둘 모두가 필요한 것이 교양을 딛고 서는 게임평론의 전제가 된다는 생각은 굳건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대중성은 오히려 게임평론에 필요한 요소 중 이 둘보다 후순위에 선다. 경우에 따라서는 훌륭한 게임 경험과 이를 적절히 일반화하고 풀어내는 지식의 조화만으로도 대중성은 완성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Back 전업 게임평론가의 솔직한 고민 20 GG Vol. 24. 10. 10. 평론은 애초에 대중적이지 않았다. 게임은 더욱 그럴 것이고. 평론이라는 영역이 대중과 유리되었다는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어찌보면 평론은 애초에 대중과 가깝게 있었던 적을 손에 꼽기 어렵기 때문이다. 출판이 그나마 활성화되었던 시절의 문학평론, 다양한 분야에 대한 비평이 이루어지던 잡지가 잘 팔리던 시절의 여러 평론 등의 옛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도 평론이 팔리던 시절에도 평론이 대중문화의 일부라고 이야기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대중적인 평론의 시절이라면 아무래도 영화평론의 전성기를 꼽을 것이다. 영화잡지가 지금보다 다채로웠던 시절도 따지고 보면 이 평론이 대중적이었느냐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대중적이라는 평가로 사람들의 기억에 영화평론이 남는 것은 평론이 대중적이었다기보다는 영화가 대중적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낫다. 평론이라는 이름을 단 모든 것들이 애초부터 대중성과 거리가 멀었는데, 디지털게임의 영역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평론이라는 이름을 단 많은 것들이 점차 사그라들어가고 있는 시점의 측면에서도 디지털게임의 평론이라는 말은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애초에 대중적이지 않은 글과 말의 방식이 단지 대중적인 매체를 다룬다고 해서 갑자기 흥할 리 없고, 안그래도 죽어가는 판이 단지 매체가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부흥할 이유도 없다. 여러 모로 게임평론의 생존 조건은, 좋지 않다. 교양으로서의 비평에 필요한 경험과 지식의 균형점 매체에 게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2014년부터니까, 나는 햇수로 어느새 10년차를 채운 게임평론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시작했던 일은 구르고 굴러 이름 뒤에 다양한 게임 관련 직함이 덧붙었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의 방향이나 의미, 가능성에 대해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잡지를 맡은 지도 만 삼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말과 글이 디지털게임을 이야기하는 데 필요하다고 쉽사리 선언하지 못한다. 따라서 게임평론이 어떻게 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도 나는 선뜻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수 차례 이어진 질문에는 한결같이 “씬”의 형성이라는 이야기를 해 오기는 했다. 이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현답이라기보다는 일반론을 주워섬기는 수준에 불과하다. 너무나 당연한 말. 읽는 사람이 늘고, 그러면 그 속에서 쓰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라는. 하나마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이 말은 중요하다. 게임평론, 비평의 쓸모에 대해서는 다른 글 에서 이야기했으니 필요의 당위성을 두 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이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원론 수준의 솔루션을 내지 못한다. 다만 ‘씬의 활성화’라는 원론은 각론에 들어가면 조금 더 다른 이야기를 담기는 한다. 이를 테면, ‘씬’이라는 일종의 구분짓기를 만드는 경계에는 ‘교양’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배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교양’은 비평을 존재하게끔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 때의 교양은 고정된 개념으로서의 지식이라기보다는 상호관계적이고 변증법적인 현상으로서의 의미다. 앞선 시대의 지식과 담론이 새로운 매체로 연장되고, 동시대의 경험과 의견이 이와 함께 버무려지면서 나타나는 지금 시대의 지식담론이다. ‘씬’을 만드는 조건에는 단순히 쓰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유무 뿐 아니라, 이들이 딛고 있는, 정의하기 어려운 이 교양이라는 조건이 추가된다. 교양이 매우 비정형적이며 유동적인 영역이라는 점은 게임비평의 현실적 존재를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다. 아주 단적인 이유를 먼저 꺼내보자면, 당장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를 비평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교양을 달성하기 위한 물리적 조건의 문제가 등장한다. 두 시간 내외로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디지털게임은 다른 매체에 비해 그 매체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비교불가능한 시간 소모를 요구한다. 스탠드얼론 패키지 하나를 클리어하는 시간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매우 작은 단위다. 패치마다 추가되는 요소들이 있고, DLC를 통해 확장되는 이야기가 있으며, 온라인게임의 경우에는 아예 릴리즈 버전마다 게임이 달라지기도 한다. 매체가 시간을 요구하는 조건 자체가 이미 험악한 난이도인데, 제한된 24시간의 하루를 똑같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교양을 위한 게임플레이와 기타 경험의 축적을 동시에 요구하는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요구가 될 수 있다. 게임과 학습이라는 두 영역의 교집합을 모두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는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둘의 균형보다는 한쪽으로 더 기울어진 평론의 생산이다. 3년째 비평공모전 심사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이 이 지점이다. 어떤 글은 오직 자신의 게임 경험만을 풀어놓으려 했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과 교감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로지 독자적이기만 한 경험은 비평이 아니라 감상에 머물게 된다. 또 어떤 글은 오로지 자신이 배운 일련의 지식체계에만 무게가 실리는 바람에 디지털게임 비평이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체득한 지식의 틀을 통해 게임을 보니 이렇다, 라는 적용에 머물기도 한다. 경험과 지식,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둘 모두가 필요한 것이 교양을 딛고 서는 게임평론의 전제가 된다는 생각은 굳건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대중성은 오히려 게임평론에 필요한 요소 중 이 둘보다 후순위에 선다. 경우에 따라서는 훌륭한 게임 경험과 이를 적절히 일반화하고 풀어내는 지식의 조화만으로도 대중성은 완성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성의 문제 비평과 평론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놓치는 또 하나의 균형점은 시장성이다. 어떤 이들은 비평이 경제적 문제와 무관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게임에 대해 말하고 글쓰는 일로 먹고사는 입장에서 이는 다소 아쉬운 소리로 들린다. 결국은 이 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리잡기 위해서는 들인 노력과 시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는 노동으로 자리잡아야 하는데, 그러한 부분이 고려되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학계와 같은 곳은 역으로 그런 시장논리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논리와 지식의 생산을 위해 일종의 소도와 같은 형태로 연구자를 보호하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긴 하지만, 게임비평과 같은 경우는 아직 그와 같은 보호논리 안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더 슬픈 것은 오히려 그 학계라는 곳 또한 평론과 마찬가지로 이미 최초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많이 엇나가 있다는 점이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기보다는 사업실적으로까지도 평가받는 공간에서 경제적 문제와 무관한 비평의 성립이 가능할까? 때문에 지금의 게임평론가는 작게는 자신이 먹고살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법, 좀더 넓게는 앞서 말한 형이상학적 의미의 “씬”의 형성이 현실에서 어떻게 다른 경제적 주체들과 관계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해법을 가져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의무를 등에 지게 된다. 단순히 말과 글을 준비하는 일만으로도 벅찬데, 그러한 결과물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어떻게 관계맺는지까지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일을 생업으로 가져가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두 가지의 방법이 현실에 존재한다. 전업이 아닌 부업, 혹은 취미로 게임평론을 수행하는 것이 첫 번째다. (실제로 나도 처음 시작이 그랬다.) 하지만 이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미 교양으로서 평론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요구하는 시간을 생업에 나눠 써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생산물로서의 평론이 경제적 가치로 직결될 수 있는 루트 – 이를테면 최근의 유튜브 운영 – 같은 방식이 실제 존재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는 다분히 어려운 문제다. 보다 빠르고 감각적인 매체로서 자리잡아가는 인터넷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교양으로서의 다소 느리고 무거운 감각의 게임평론을 안착시키는 것을 장담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수익을 노린다면 보다 자극적인 형태의, 이를테면 강한 어조로 ‘똥겜’을 욕한다던가, 별점을 통해 줄세우기를 한다던가, 혹은 게이머 커뮤니티와 같은 여론의 흐름들이 원하는 방향에 편승한다던가 하는 방식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는 교양으로서의 평론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이 나타날 수도 있겠고 또 그러한 노력이 없다고 이야기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이것이 게임평론의 살길이다 라고 자신있게 주장하지는 못하겠다. 다시 일반론으로 현재 전업 게임평론가, 게임연구자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고민하는, “게임평론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는 그래서 다시 교양으로서의 평론이 어떻게 하면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남을 것인가 라는, 게임 자를 뗀 평론의 생존 일반론 편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평론이라는 것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유지 가능하게끔 만들고 그 영향력이 다시금 게임제작자, 이용자들에게 미치게끔 하려는 일은 결국 ‘게임’ + ‘평론’ 이라는 두 개념 중 ‘평론’을 살리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특수성으로서의 ‘게임’은 일반론으로서의 ‘평론’을 활성화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할 것이다. 가장 많은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고, 산업적으로 가장 큰 매출의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게임’ 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에서 대중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해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비단 게임평론가들 뿐 아니라 평론이라는 것의 사회적 기능을 인지하고 그것에 일련의 의무감을 지닌 모두가 함께 해 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아니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오히려 ‘게임’ 평론가는 차라리 다른 영역에 비해 조금 더 나은 인프라를 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게임연구자,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단 것이 10년 전이었고, 이런저런 활동 끝에 한 가지 해법으로 게임제너레이션이라는 잡지를 시작한 것이 3년 전이었다. 감히, 정말 감히 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한 매체의 영향력에 다른 벡터를 부여할 수 있는 평론이라는 힘을 부여하는 데 있어 10년 전 보다는 먼지만큼이나마 나은 디딤돌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온 경과를 뿌듯해하기엔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은 절벽이 더 높고 두터워 보인다. 현실의 전업 게임평론가는, 보통 이러한 고민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 Back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16 GG Vol. 24. 2. 10.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2016년도 <레플리카>를 시작으로 <리갈 던전>, <더 웨이크>까지 이어지는 ‘죄책감 3부작’은 그동안 여러 호평과 비평 사이에서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게임과 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질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게임의 완성도와 자본의 상관관계’까지. 물론, 이러한 고민거리에 대한 답은 게이머 각자가 다르게 내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구조화되지 않은 인디게임씬에서 작은 씨앗을 심고 있는 그의 행보는 귀하다. 그래서 더더욱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somi를 만나고 싶었다. 이경혁 편집장: 사실 ‘죄책감 3부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저는 이 시리즈가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번 작품도 죄책감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작품은 어떻게 분류가 될까요? 죄책감 4부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somi: 저는 개인적으로 ‘죄책감 3부작’은 3부작으로 마무리를 했고, 이번 게임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게임을 대하는 관점이 조금 달랐거든요. ‘죄책감 3부작’을 만들 땐 ‘게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점으로 게임을 만들었고, 그걸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에 조금 더 주목했어요. 그리고 게임에서 표현하는 세계도 저나 제 주위의 사람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구성을 했죠. 그러니까 하나의 사회를 투영하는 창처럼 게임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번 게임은 완전히 저와 분리된 게임이라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순수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기존의 ‘죄책감 3부작’과는 조금 차이를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저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그래도 게이머들은 ‘죄책감 3부작’과의 연계성을 떠올릴 것 같은데요. 가령, 이번 작품의 주인공이 전경이잖아요. <리갈 던전>의 전경이 나이 든 상태인 거죠? somi: 글쎄요. 그건 뭐 판단하시는 플레이어에게 맡기고요. (웃음) 사실 딱히 그 인물이 나이 들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저는 그냥 제가 만들었던 등장 인물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제가 만들었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친구들, 아니면 스스로의 선택이든 플레이어의 선택이든 이를 통해서 악인으로 만들어졌던 인물들. 그런 등장 인물들에게 ‘너도 이런 인생을 다시 살 수 있지 않겠니’라고 새로운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서원이도 그렇고, 전경도 그렇고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등장 인물에 대한 애정이 좀 묻어나는, 일종의 ‘인물에 대한 스핀오프’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somi: 네. 맞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사실 <리갈 던전>은 플레이에 따라서 스토리 진행이 달라지잖아요? 그러면 이른바 전작의 진 엔딩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연결되지 않을까요? somi: 사실 <리갈 던전>의 스토리도 플레이하는 방식에 따라 워낙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중 어떤 엔딩이 지금 작품과 연결성이 있을지, 아니면 연결성이 전혀 없을지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번에 내신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가 스팀에서 압도적 긍정을 찍고 있는데요. somi: 처음이에요. 그래서 다소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아, 이전 작에서 많이 받으셨을 줄 알았는데, 처음이시군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평가가 이어지는 작품에 대해 앞으로 해외 번역 버전을 늘릴 계획은 없으신가요? somi: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간체), 영어 이렇게 총 4개 국어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다만, 번역에 조금 어려움이 있어요. 이전 <레플리카>의 경우에는 팬 베이스로 번역을 다 열어놨거든요. 그런데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게임이 주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고민이 되긴 해요. 특히 제가 만든 게임은 거의 텍스트 기반이다 보니, 번역 과정이 너무 어렵거든요. <리갈 던전>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그노시아>라는 게임을 만든 Petit Depotto라는 스튜디오가 있는데요. 거기에서 게임을 만드시는 두 분이 <리갈 던전>을 플레이하시고 게임이 너무 좋다며 번역을 해 주시고, 일러스트도 그려주셔서 그 버전으로 재출시가 되었어요. 덕분에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게 되었죠. 이런 좋은 번역가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저희 GG의 이전 인터뷰에서, 크레딧에 항상 문학 작품들을 넣으시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이번 작품은 어떤 문학 작품이 가장 주요한 레퍼런스로 작용했을까요? somi: 사실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레퍼런스를 넣는다고 하기엔 민망하고요.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게임을 만드는 가운데 읽고 있는 책이 있을 건데, 그 책 중에 기억나는 문구를 게임에 넣고 있어요. 그러니 ‘게임을 만드는 중간에 이걸 읽고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이번에 레퍼런스에 넣은 작품은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라는 소설집인데, 김연수 작가를 제가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거기서 이런 대목이 나와요.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비로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삶의 플롯이 바뀔 수 있다.” 이 게임의 기반이 되는 생각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이 문구를 작가의 말에도 넣고, 크레딧에도 넣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비단 레퍼런스뿐만 아니라, 저는 somi님 작품이 항상 문학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한편으로 게임을 지금까지 만들어오신 입장에서 게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디게임을 만들 때, 게임의 스토리를 위해서 문학적 지식이 필요할까요? somi: 게임의 스토리가 가지는 완성도나 참신함을 평가할 때,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 표현은 한편으로 게임이라는 장르가 독자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아직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생각을 해요. 게임이라는 장르는 스토리와 게임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장르잖아요? 그런 지점에서는 문학적 지식이나 스토리라는 개념을 별도로 떼어놓기보다, 게임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들을 최대한 많이 활용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는 책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이번 게임이 1월에 나왔잖아요? somi님 작품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BIC(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같은 시상식에 출품하기에는 다소 불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걸립니다. somi: 제가 게임 개발 외의 현업이 따로 있는데, 최근에 오롯이 게임 개발에 좀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맞아서 그 시기에 맞춰 게임을 만들고자 했어요. 다른 어워드나 게임쇼 일정은 고려하지 않고, 제 일정에 맞췄던 거죠.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전업 개발자가 아니시기에 일어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somi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투잡을 유지하는 방식의 장단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somi: 일단 제 개인적으로는 창작의 자유로움이 큽니다. 물론,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고, 일상이 빡빡하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일탈의 창구가 있다는 점이 커요. 가령, 직장에서는 창작 욕구를 발현하기가 어려운 지점들이 있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저만의 창작 욕구를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다만, 게임 업계에 완전히 뛰어들지 못한 사람으로서 가지게 되는 스스로의 거리감이나 어려움들이 있어요.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데, ‘너는 그렇지 않은 지점이 있지 않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판매 실적이나 리뷰와 같은 지점에서 자유롭게 제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하신 지점에서 대형 프로젝트가 아니라, 1인 작가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어드벤티지도 있을까요? 예를 들어, somi님의 게임을 보면서 스튜디오를 차리고 게임을 만드시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somi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somi: 저도 어려울 것 같아요. 단순히 게임 안의 메시지가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를 떠나서, 게임의 플롯을 만들고, 게임 메카닉을 짜고, 그 안에 어떤 그래픽 요소를 넣을지, 음악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이런 모든 작업이 저의 일관된 의도 하에 진행이 되고 있는데, 대규모 협업을 한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제가 게임을 만드는 방식이 처음부터 완전한 기획서를 만들어놓고 a부터 z까지 기획해놓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때로는 부분부분 생각나는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을 조합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해요. 그 안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오고, 그 가지에서 다시 또 게임의 형태를 갖춰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게임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것들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래서 외주를 맡기는 것도 엄청 힘들어해요. 지난번에 <리갈 던전>에서 <그노시아>의 그래픽 디자인을 하시는 코토리 씨께서 일러스트를 만들어주셨는데, 캐릭터들이 너무 이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몰입도가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번에 게임을 만들 땐 등장 인물들에게 얼굴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픽셀 아티스트분들을 찾아봤는데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상황에, 어떤 표정을 짓는 일러스트를 넣을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놓은 게 아니고, 대사를 쓰다 보면 이렇게 한번 그려봤다가 수정했다가 하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외주를 맡길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결국 또 저 혼자 그리게 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번 작품의 경우에는 구성이 치밀하다는 호평이 자자한데요. 이번 작품도 작은 조합들을 배합하시는 방식으로 구성하신건가요? 아니면 전반적인 큰 구성을 먼저 해두신걸까요? somi: 사실 그 방식은 게임을 만들 때마다 다른데요. 어떤 게임은 문장 하나를 가지고 시작했던 경우도 있고, 필요한 문장들을 겹치다 보니까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이번 게임은 처음부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을 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플롯부터 짜서 이야기를 시작했죠. 특히, ‘미제사건으로 남겨달라’는 실종 아동 아버지의 대사로 시작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이 게임의 감동이나 재미를 더 배가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독자분들께서 읽으시고, 게임의 마지막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somi: 작가의 말에도 적은 내용인데요. 결국 이 게임을 플레이하시는 분들이 최종적으로 가져가시게 될 이야기일 것 같아서 이야기를 드리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가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방식을 강요하고, 당연시하잖아요? 그리고 분노와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데,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틀린 게 아니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게임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 Back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04 GG Vol. 22. 2. 10. 1. 미래는 널리 ‘분배’되지 않았다 사이버펑크의 효시가 되는 소설 『뉴로맨서』의 저자인 윌리엄 깁슨은 이렇게 적었다. “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 새로운 전자기기, 혁명적인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IT기업가들과 평론가들, 테크노크라트들이 이 문구를 인용해 왔다. 기술혁신이 사회를 이끌고, 정체된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이라는 산업적 낙관주의에 기인한 인용들이다. 이들의 발언에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기술의 진보를 사회의 진보와 동일시하는 기술결정론적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는 하이테크 전문가집단과, 신산업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분리하려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이다. 우리 엘리트들이 열심히 개발하고 제도화할테니, 무지몽매한 당신들은 초개처럼 동참하기나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새 기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해마다 스마트폰을 바꾸고 있지만 이를 직접 분해해 들여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알파고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을 이겼는지 자세히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유튜브와 피드에서 엄청난 콘텐츠 소비를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왜 내 앞에 추천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얼리어댑션과 진보의 상징인 아이폰이 계획적 노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공유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깁슨의 계시록적 문구를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라고 섣불리 해석한다. 그러나 깁슨이 왜 ‘spread’ 가 아닌 ‘distribute’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실제 전달하고 싶었던 뉘앙스는 “미래가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데도, 적절히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았다.” 였을 것이다. 신기술은 역사적으로도 사회적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불만을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증기기관과 전기·화학 및 소재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19세기, 서구 사회는 전에 없던 엄청난 생산력을 획득했지만 절대 다수의 노동인구는 최악의 빈곤에 시달렸다.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시 실태를 조사한 문헌을 인용하면서(특히 1850년대의 정부 보고서들) 산업도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20세보다도 짧았다!)과 영양상태가 선사시대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보다 나빴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괜히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찰스 디킨스가 『위대한 유산』같은 책을 쓴 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신 기술은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야한 공구로 노동하는 야만인들보다 더 오래 노동하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가진 자들에게는 궁전을, 빈자들에게는 움막을 생산한다.” 2. 사이버펑크라는 반문화적 문제계 따라서 사이버네틱스 제어혁명이 일어난 당시, 선구적인 컴퓨터기술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은 신기술에 대한 엄청난 우려와 낭만주의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행동주의를 선포했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개발하는데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들어갔는데, 왜 소수의 거대기업들이 그 권리를 독점하는가?’였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저 그런 타자기나 생산하던 IBM, 뜨내기 대학생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벼락부자가 된 것은 정부에서 주어진 특혜와 넘쳐나는 세금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자아내는 새로운 세계를 자본주의의 공간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통계(commons)로 만들기 위해서는 신기술들을 널리 ‘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기업과 국방성이 독점한 컴퓨터·인터넷을 만인이 조건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공공재화 하는 것이다.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공통의 네트워크는 이러한 이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확장시키는 정신적 통로들인 간-네트워크(inter-network), 인터넷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급진적인 정보기술 사상가인 존 페리 발로우는 199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공리주의이념을 월드와이드웹에 적용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종, 경제, 군사, 지역에 따른 특권과 편견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침묵과 동조를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 현실의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관한 법적인 개념들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들은 물질에 기반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는 물질이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휴머니티의 모든 감정과 표현이 연속적인 전체의 부분이며 비트의 전 지구적인 대화이다…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마음의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정부가 이전에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세상이 될 것이다.” - 존 페리 발로우,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1996) 사이버스페이스를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공간으로 상상하던 시기, 깁슨과 발로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대안적인 세계가 평등과 해방의 공동체로 건설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의 기대처럼 초기 사이버스페이스에는 환대와 존중이 공통윤리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민주주의 실험과 참여가 꽃피우는 영토로 거듭났다. 개인홈페이지와 정보공유가 미덕이던 초창기 PC통신과 웹 1.0 시대는 실제로 그랬다. 누구나 익명 게시판에서 애정이 듬뿍 담긴 글과 답변을 주고받고, 선망하는 마음으로 채팅방에서 타인을 기다리며 서로 연결되는 순간을 꿈꾸던 그런 때가 있었다. 비록 오늘날 인터넷은 분노와 언설, 비아냥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핵티비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은 ‘물질이 아닌, 정신만이 존재하는’ 이 신세계에 새로운 문화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사회관계들(인종, 젠더, 지역, 세대 등)에 기반한 구 문화는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광대한 성간을 채워 넣기 시작한 것은 지배질서 문화가 아닌 반문화(counter culture)였다. 배타적 소유와 일방적 상품 생산-소비문화가 아니라 공유와 연대의 문화를 창조할 당위가 요청됐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임금노동, 인종주의로부터 인류의 정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반문화. 선택된 시민들만의 교양에 반대하는 재즈와 록음악,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힙합·레게, 부르주아의 패션을 비웃는 노동계급의 데님패션,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뉴에이지와 히피이즘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구의 합리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전쟁과 범국가적 폭력, 홀로코스트, 주기마다 반복되는 경제대공황, 빈곤, 항구적 실업이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반문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이버-펑크’는 이와 같은 테크노 진보주의와 반문화 시대정신이라는 두 역사적 실타래가 엮이면서 등장한 문제계라 할 수 있다. 야심차게 장르명을 제목으로 차용한 〈사이버펑크 2077〉은 깁슨의 『뉴로맨서』를 필두로 해서 닐 스티븐슨의 『스노크래시』,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 매트릭스』, 영화 〈블레이드러너〉와 〈트론〉, 〈매트릭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와 〈아키라〉가 수놓은 사이버펑크의 별자리들을 하나의 은하계로 집대성한 게임이다. 〈2077〉은 그간 우리가 목겨해온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살풍경과 반문화적 열광에 대한 모든 노스탤지어가 망라되어 있다. 〈2077〉은 크게 세 가지의 문제적 시공간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어떤 유포리즘의 상상력이 결부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1. 오딧세이적 활극의 간-경계 시공간 〈2077〉은 세 가지의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스트릿 키드, 노마드, 기업하수인이 그것이다. 이 배경 설정은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19세기 대중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거리 부랑아의 SF적 재매개화라는 문제를 던진다. 거리를 비참하게 떠도는 부랑아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해킹)을 무기삼아, 뒷골목 정보거래와 갱들과의 경쟁에서 성장해온 인물군상이다. 크게 한탕 해서 성공을 꿈꾸는 얼치기 현상금사냥꾼이 거대 기술기업-권력의 음모와 연루되어 고난을 맞이하는 구도다. 이는 『뉴로맨서』 이후 사이버펑크가 하나의 장르문법으로 구축해 온 서사에 조응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와 몰리가 거의 동일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이 설정은 〈공각기동대〉의 모토코와 바토로 차용되었으며, 『스노크래시』에서는 히로와 와이티라는 인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일본도를 쓰는 한국계 피자배달부인 히로와 스케이트 배달부인 와이티는 메타버스(사이버스페이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지만 요즘엔 PVE나 NFT로 돈벼락을 맞을 수 있다며 온갖 사기가 판치는 그 메타버스가 맞다)에서는 잘 나가는 해커로, 유행하는 사이버 약물 ‘스노크래시’를 추적하는 의뢰를 맡고 그 과정에서 해커 갱단-거대기업의 권력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는 한때 이름을 날렸던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해커)였지만, 의뢰인의 정보를 빼돌린 댓가로 독극물 주사를 맞아 몰락한 인물이다. 케이스는 수수께끼의 인물 아미티지로부터 거대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센스/넷’에 침투해 전설적인 카우보이의 영혼이 복제된 데이터 ROM을 빼내면 대가로 신경복원술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미녀 카우보이 ‘몰리’와 함께 침투극에 발을 내딛는다. ROM은 카우보이의 침입을 차단하는 방벽 ‘아이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블랙아이스’에 침투했다가 죽음을 당한 전설적인 카우보이 ‘딕시-플래트론’의 인격이 담겨진 데이터 집합체이다. 〈2077〉의 현상금사냥꾼 주인공 V와 사고로 그의 인격에 빙의되는 전설의 현상금사냥꾼 조니 실버핸드, 그리고 픽서의 영혼을 가두는 사이버감옥 ‘미코시’와 ‘소울킬러’ 흑막인 거대 군벌기업 아라사카는 사이버펑크의 문법을 고스란히 계승하며 오딧세이적 활극을 연출한다. 그렇다면 왜 ‘활극’인가? 활극은 탈영토적이고, 대안적인 상상으로 재구축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이다. 물리적 현실의 제약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국경과 민족을 넘나들며 초월적인 모험을 펼치는 시공간으로서 활극은 하나의 공통계이다. 활극은 기존의 법이나 사회계약이 작동하지 않고, 자유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정의와 공동선이 우선시되는 장소다. 무협의 ‘강호’, 웨스턴의 ‘황야’, 스페이스오페라의 ‘우주’는 이러한 활극 공간의 무정부성과 자유를 펼치는 무대다. 국경과 민족, 인종과 성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활극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웨스턴의 문법은 다양한 지리적 맥락에 따라 새로 번역되고 재조립된다. 한국의 만주웨스턴은 〈쇠사슬을 끊어라〉(1971),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등에서 보듯이 ‘황야’를 미국 서부가 아닌 만주로 옮겨놓는다(마찬가지로 커리웨스턴, 스파게티웨스턴, 스시웨스턴 등 각 지역마다 웨스턴을 차용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에서 강조되는 ‘강호’에는 한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한민족까지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우주는 인간과 다양한 외계인 종족들이 만나고 협상하는 광활한 공통 공간으로서, 문화다양성이 자리잡은 대안세계에 대한 상상적 메타포가 도입된다. 요컨대 해안선과 산맥을 넘어 비물질의 신대륙을 건설한 사이버스페이스를 재현하는 문제로서 활극만큼 적절한 형식은 없을 것이다.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도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활극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이념을 역설적으로 재현하는 안티테제적 서사다. 〈2077〉의 나이트시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모험담은 사이버펑크의 활극을 고스란히 전유하는 동시에, 점점 악화되고 있는 자유와 기술 기축사회의 빅브라더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훌륭한 장치로 작동한다. 3.2. Turn on, Tune in, Drop out! 사이키델릭의 반자본주의적 시공간 〈2077〉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화려했던 사이버펑크의 반문화 흔적들이 사려 깊게 재현된다는 데에 있다. 선글라스와 가죽패션, 할리데이비슨과 메탈음악, 모히칸머리와 LSD, 프리섹스, 유체이탈과 화끈한 총격전, 일본도를 쓰는 테크노-사무라이, 말끝마다 은어와 욕설을 붙이는 쿨한 길거리 언어, 사랑 한 큰 술까지… 조니 씨발핸드와 나이트시티는 사이버펑크의 모든 문법들이 통하는 교과서 자체다. 일본도를 등에 맨 채, 마음에 맞는 라디오채널을 골라 들으며 유유자적 바이크를 타고 도시를 질주하는 경험은 다른 어떤 사이버펑크들보다 유의미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브레인댄스’ 라는 게임 속 영상기록매체(사실상 『멋진 신세계』의 촉감영화의 오마주인)에 들어가 재현을 만지고 조작하는 경험은 디지털 게임만의 고유한 매체성인 능동적 탐색과 조형행위를 십분 활용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제작사가 거창하게 광고했던 것과는 달리 한정적인 시퀀스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브레인댄스, 블랙월(현상금사냥꾼들을 막는 사이버 방벽) 너머의 초월적 이계에 대한 갈망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2077〉은 여타의 사이버펑크가 그러하듯 이 대안적 시공간을 충실히 재현한다. 〈공각기동대〉의 네트와 2501,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와 요원이 그렇듯 〈2077〉 또한 물질/관념, 육체/정신이 탈주하는 이데아로서 ‘사이버스페이스’를 묘사한다. 여기에서는 현실의 어떤 물리적 및 사회적 제약도 한계로 작용하지 않는다. 신체는 죽었지만 영혼이 살아남아 사이버스페이스의 지성체가 된 넷러너 알트 커닝햄은 대표적인 알레고리다. 니체는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라고 했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대탈주가 가능해진다. 1966년, 히피들의 성자이자 반문화의 선구자였던 티모시 리어리는 “전원을 켜고, 조율하고, 이탈하라!(turn on, tune in, drop out!)”라고 선동했다. 서구사회 전역에서 발발한 68혁명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는 수세기간 이어진 합리적 이성 중심 세계관에 신물이 난 터였다. 그 산물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계속된 경제공황과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로 파산을 선고받았다. 반대편 진영의 소련과 중국도 전체주의 감시국가로 변모하던 중이었다. 전 지구적 노동착취와 식민지 수탈, 감시국가, 전쟁에 사람들은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지적이고 무능한 인간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혁파하길 열망했다. 이 열망을 동력삼아 다양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여성해방, 생태주의, 탈성장, 노동거부, 마을공동체, DIY, 프리섹스 등이 주요 골자였는데 이는 앙시앙 레짐(구 체계)의 사고방식과 전부 단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즉 냉철한 이성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성을 해방시켜 물질의 굴레로부터 이탈하는 영성혁명이 새 방법으로 대두된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요가를 배우고 인도와 중국, 터키에서 내면을 발견하는 여행을 하는 것도 이 시기부터다(한국은 90-2000년대).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전통 직물을 입고, 밥 말리의 드레드헤어를 백인들도 따라한다. 이른바 ‘정신줄을 놓은 채 몽상과 꿈의 원천의식을 좆는’ 사이키델릭은 리어리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LSD나 마리화나의 환각을 통해 더욱 이상적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반문화를 추종하던 청년들과 이상주의자들은 거리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된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주 52시간 노동, 보편적 복지, 차별금지법, 지속가능경제 등은 이 시대 영성혁명의 맹아에서 발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공고한 노동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근면성실하게 노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아낌없이 쓰는 소비사회의 레짐은 이들 반문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부는 즉각 법을 입안시켜 LSD와 환각제를 불법으로 규제하고(한국에서 마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미디어는 내면을 좆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면서 사회 탓만 하는 싸이코들, 성스러운 노동을 거부하는 이교도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반문화의 옹호자들은 이런 사회적 낙인을 비웃고 뒤틀었다. 이들은 구체제가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그 ‘펑크’가 되길 스스로 택했다. 외모를 괴이하게 꾸미고, 메탈 밴드를 결성하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고발하는 가사를 욕설처럼 내뱉으며, 튜닝한 오토바이로 도로를 질주하는 폭주족되기를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사이버펑크는 반체제적 사이키델릭의 이념적 파편들이 장르의 문법 속에서 재결정화된 문장들인 동시에, 노동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이 ‘힙하게’ 재현되는 대중문화 장소이기도 하다. 메탈 밴드 ‘사무라이’를 이끌며 군벌 기업들의 폭정을 비판하던 조니 실버핸드가 아라사카로 쳐들어가 화끈한 파장을 일으키고, V에 탑승해 반문화의 환등도시 나이트시티를 거니는 플레이경험에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이트시티는 사이키델릭의 어둡지만 섹시한, 좌절된 이상향들이 펼쳐지는 그런 시공간이다. 3.3. Becoming with: 기술적 탈신체화의 시공간 자유로운 외형 커스터마이징과 신체개조 시스템, 등장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기계신체 구현들은 〈2077〉의 탈신체화된 마음이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플레이어는 남성/여성의 외형과 성기를 교차 선택해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젠더와 신체의 횡단을 시스템에서 구현한 것도 재미있지만, 이에 따라 달라지는 서사 상호작용 및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크게 네 명의 인물들과 연애를 할 수 있는 분기들도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플레이어가 남성인 경우 게이 인 ‘캐리’와 여성 조력자 ‘팬앰’과 로맨스를 진행시킬 수 있으며, 여성인 경우 히스패닉 레즈비언인 ‘주디’와 남성 마초 ‘리버’와 연애를 선택할 수 있다. 남/녀라는 생물학적 성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경로들을 플레이어가 만들어갈 수 있으며, ‘탈 신체화’의 기술적 마법을 조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개발자들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강박때문에 억지로 끼워 넣은 설정이 아니라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다각적으로 이해했다는 징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질계의 질서가 해체되는 사이버펑크에서 신체는 더 이상 제약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될 수 있는 ‘becoming with ~’의 계기가 된다. 물질과 신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리퍼닥(사이보그 외과의)에게 인공 인지기관과 신체부위를 시술받으니, 더 이상 신체의 물리적 강도나 유전된 외형이라는 선험성이 무의미해진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아인 마음의 신체 또한 변화한다. 사이버펑크에서는 여성을 얕잡아본다거나 인종에 편견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적이다. 메레디스, 레지나, 로그, 다코타 스미스 같이 카리스마 넘치고 위험한 기계신체 여성들이 즐비한 나이트시티에서 그/녀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반면 미스티나 마마 웰즈, 이블린 같은 전통적인 성향의 여성들도 존재한다. 교조주의적 정체성 정치를 우회해 탈신체화된 판타지를 적절한 균형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에, 〈2077〉은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유연성을 잘 전유했다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1985년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라고 선언했다.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해러웨이 또한 사이버네틱스 과학기술이 인간 정신의 진보와 공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한계에서 탈코드화되는 상생의 미래에 대한 고고학적 은유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외형과 물리적 차이, 성역할에 따른 사회권력의 관계망은 유사성의 원리로부터 기인한다. 근대의 자연과학과 생물학은 외형과 진화의 유사 정도에 따라 세세한 분류학을 만들어냈다. 개과, 고양이과, 파충류, 포유류 등의 분류는 유사성과 더불어 차이 또한 만들어낸다. 백인과는 다른 흑인, 남성과는 다른 여성, 아리아인과는 다른 하류인종, 유럽인과는 다른 아시아인, 위대한 한족과 야마토민족과 구분되는 야만족 등… 이분법에 기반해서 사회적 권력(너를 차별할 수 있는 나)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권력은 차이와 호혜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래·고양이와 협력하는 인간, 아시아인과 흑인 친구, 서로 협조하는 LGBT와 이성애자들, 서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남성과 여성 등. 주어진 신체의 날인으로부터 벗어나는 ‘탈 신체화’의 순간에야 차이를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가 되어 함께하는 경험, 즉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을 상상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병폐와 파괴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별의 상상을 연결하는 강력한 은유(사이보그)가 필요하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사이버 펑크’의 탈 신체적 사회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름’을 넘어서 연대하는 경험이다. 인간, 개, 고양이 뿐 아니라 바이러스, 인공지능, 퇴비, 곤충,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객체들과 반려종이 될 준비가 되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평등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다. 기술은 미래에 그것을 가능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사이보그들이 활극을 펼치는 무정부적 시공간, 사이버펑크는 그렇게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 된다. 4. 극단의 시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고학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NPC는 몇 안되고, 엄청난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지만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처럼 물리적 자유의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사이버펑크의 팬이 아니라면 메인서사 진행과 큰 상관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사이드퀘스트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버그는 화룡점정을 찍으며, 갑자기 영향력을 잃는 캐릭터들(대체 메레디스는 V를 불러내 질펀하게 즐긴 다음 어디로 사라진 걸까?), 서사 진행을 위해 소모되는 팩션(부두보이즈는 블랙월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가?) 등 미숙한 게이밍 설계들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77〉은 사이버펑크 장르를 여러 방면에서 집대성한 정점으로 추켜세우기 아까움이 없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가 제기하는 반문화, 탈신체화, 초월이라는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쌓아올린 점, 그리고 각 주제들이 조화롭게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들과 조응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특히 오늘날처럼 극단적인 분열과 적대가 판치는 하수상한 시대, 철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새롭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뉴 클래식의 정류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 그 이후는 무엇이 도래할까? 인간 사회의 진보와 자유를 꿈꿨던 초창기 사이버펑크의 기획은 오늘날 종언을 고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인터넷을 대안적인 공간이라거나 새로운 민주주의 실천의 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사이버 공간’의 해프닝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은 더 이상 공통계(commons)도 아니다. 카피레프트도, 자유소프트웨어 운동도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빈 자리를 꿰찬 것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다. 콘텐츠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전지구에서 납세를 회피하며, 고용은 거의 하지 않는 다국적 IT 자본들. 어떻게 보면 〈2077〉과 같은 사이버펑크가 다시 귀환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2077〉의 멀티 엔딩 중 하나인 ‘악마’ 엔딩에는 거대기업 ‘아라사카에 완전히 항복하기’라는 선택지가 나온다. 말 그대로 그토록 죽어라 싸웠던 군벌독재 기업 아라사카에 백기투항하고, 생존을 위해 정신을 디지털 감옥인 미코시로 전송해 영원한 사이버 유령이 되어버리는 결말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떻게 그때처럼 다시금 반문화를 일으키고 자유를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다만 그 발자국들이 만들어낸 길들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샛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77〉이 제시한 사이버펑크라는 문제계는, 오래된 스토리텔링과 미래지향적 매체기술을 버무려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이 도래할 우리의 미래에 다시금 묵시록적 개연성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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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점검: 플랫폼 인앱결제의 오늘
카메라 앞에 선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든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사람들 주머니에 통화도 되고, MP3 플레이어도 되고, 동영상 재생기도 되는 스마트폰이 담기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저들은 ‘그 작은 기계로 무슨 게임이냐’라는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 < Back 현황점검: 플랫폼 인앱결제의 오늘 04 GG Vol. 22. 2. 10. 카메라 앞에 선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든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사람들 주머니에 통화도 되고, MP3 플레이어도 되고, 동영상 재생기도 되는 스마트폰이 담기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저들은 ‘그 작은 기계로 무슨 게임이냐’라는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 과일을 썰고(프루트 닌자), 새를 날리는(앵그리 버드) ‘스내커블’한 게임을 넘어서 스마트폰에는 수백 명 이상의 유저들이 모여 공성전을 펼치는 MMORPG와 <원신> 같은 3D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까지 플레이되고 있다. (물론 3-매치-퍼즐 등 캐주얼 게임은 아직도 유력한 모바일 게임 분야다) 플랫폼을 넘나드는 크로스플레이를 넘어, 클라우드 기술로 모바일에서 PC 게임을 구동시키겠다는 원대한 아이디어도 현실의 영역에 다가섰다. 조사 업체 뉴주(Newzoo)의 데이터를 보면, 전 세계 게임산업 내 소비자 지출은 1,803억 달러(약 213조 6,900억 원)를 기록했고, 그 가운데 모바일 게임 분야가 52%에 해당하는 932억 달러를 차지했다.1) 이밖에 ‘지난 10년간 모바일 게임 시장은 줄곧 우상향 그래프를 그려오고 있다’는 명제를 근거하는 분석은 곳곳에 널려있다. 이러한 시장 상황 속에서 엔씨소프트, 넷마블, 크래프톤 등 한국 게임사들도 모바일 게임 시장에 진출해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 모바일 게임 시장에는 거대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스마트폰의 운영체제, 그리고 앱 마켓을 서비스 중인 구글과 애플이 매기고 있는 30%의 인앱결제 수수료가 과연 온당한 수준이냐는 것이다. 현재 게임을 비롯한 모바일 앱에서는 인앱결제가 사실상 강제 중이며 결제가 발생할 ‘때마다’ 30%의 이용 수수료가 부과되고 있다. 이 30%는 왜 부과하는 걸까? 왜 이 수수료가 너무하다는 까닭은 무엇일까? 누가 구글과 애플을 상대로 도전장을 내밀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옛날에는 혁신적이었던 30%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디지털 플랫폼 사업자가 30%의 수수료를 가져가기로 약속이 된 것은 언제일까? 애플은 2003년 음악 플랫폼 아이튠즈를 출시했다. 애플은 당시 음악사에게 앱스토어에 인앱결제를 필수적으로 적용하며, 중앙 통제적인 서버를 관리하고 보안 문제를 책임지는 비용으로 30%의 수수료를 받겠다고 발표했다. 이 30%는 '우수리'를 뗀 금액으로 이해됐다. 그 무렵 애플은 99센트의 노래를 판매할 때마다 큰 음반사에 72센트, 독립 음반사에 62센트를 지급했다.2) 이러한 기조는 2008년 앱스토어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3) 앱에 대한 개념도 희미하던 시절, 일정 부분의 수수료만 내면 전체 애플 이용자를 대상으로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소개할 수 있는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졌다. 이전에는 결제가 이뤄질 때마다 카드사 별 대행 수수료나 통신사별 호스팅 비용이 발생했는데 모든 금액을 30%로 일원화해 책정한 것이다. 개발사는 통신사를 거치지 않고 애플을 통해서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초창기 애플이 내세운 인앱결제 의무 + 30% 정책은 비교적 합리적인 정책으로 평가됐다. 애플에 복귀해서 앱스토어의 얼개를 짠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가 30%의 수수료에 대해서 "우리는 (CP들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려는 게 아니라 아이폰을 더 많이 파는 것이 목표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4) 놀이터를 제공한 뒤 최소한의 관리 비용만 걷을 뿐이지, 중요한 것은 자사 스마트폰을 더 많이 보급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30%는 구글플레이 스토어, 아마존 앱스토어, MS 스토어는 물론 엑스박스, 소니, 닌텐도, 스팀도 책정 중인 비율이다. 규모있는 콘텐츠 제공자(CP)들에게 30%의 수수료는 '국룰'이 아닌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ESD)의 '국제 표준'이었다. 향후 자신의 ESD에 더 많은 CP를 유치하기 위해서 연매출을 기준으로 영세한 규모의 회사들에겐 수수료를 15%나 20%로 깎아주었다. 거의 모든 ESD 사업자들이 생태계 관리를 위해서 수수료를 매기고 있다. * 플랫폼 사업자별 수수료 요율.5) 낮은 효능감, ‘갑질’... 수수료 30%는 적당한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CP들은 30%에 의문을 품었다. 비즈니스모델(BM)이 고도화되면서 30%씩 구글과 애플에 납부하는 것에 불만이 발생했던 것이다. 다이아와 루비 같은 인게임 재화에 대한 결제가 이뤄지는 순간마다 30%의 수수료를 물리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냐는 주장이다. 애플이 초기 30%를 설정할 때는 통신사마다 따로 진행되는 빌링 시스템에서 벗어나 애플 생태계를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앱을 알릴 수 있는 혁신이었지만, 시장이 성장세를 거쳐 안정세에 진입한 오늘날까지 플랫폼 사업자가 30%나 거둬가는 것은 무리라는 해석이다. 2020년 애플 앱스토어에는 2,800만 명의 개발자가 활동 중이고 등재된 앱은 180만 개에 이른다.6) 플랫폼 사업자들은 거대해진 생태계를 관리하는 데 30%의 수수료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역폭 처리, 거래 관리, 악성코드 식별에도 비용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앱결제가 '갑질'이라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기업과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제공한 앱을 통해서 생태계를 키운 구글과 애플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양대 기업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30%의 룰'은 인앱결제로 강제된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엔씨소프트 등이 가입된 한국인터넷기업협회(인기협)은 "앱 마켓의 독점이 콘텐츠 서비스의 독점으로 이어질 것이며 (구글, 애플은) 시장 지배적 지위를 악용해 앱 사업자와 이용자 모두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려 한다"고 날을 세우고 있다.7) 창작자들로 구성된 한국웹소설산업협회, 한국만화가협회, 한국웹툰작가협회도 인앱결제 수수료가 부당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창작자들에게는 30%로 이루어지는 생태계에 대한 효능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게임 개발사들에게도 수수료를 내고 있지만 앱 심사 지연, 서비스 중단 등에 관한 안내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구글과 애플이 몇몇 플레이어에게는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2018년, 넷플릭스는 앱스토어가 아닌 웹브라우저로 회원을 모객했다. 앱스토어의 정기구독 앱은 첫 번째 해에 30%, 두 번째 해에 15% 수수료를 떼어가는 데 이 돈을 내기 싫었던 넷플릭스는 우회책을 사용했다. 넷플릭스 앱에서는 신규 가입을 등록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양대 기업은 다른 곳에게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 이 방법을 사실상 용인해줬다. 에픽게임즈는 <포트나이트>에서 자체 빌링 옵션을 추가했다가 양대 스토어에서 퇴출된 적 있다. 엔진사, 게임사, 스토어 사업자 등 다종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에픽게임즈는 퇴출을 준비라도 한 듯 구글과 애플에게 “반 독점법 위반”이라며 고소장을 날렸고, 기나긴 법정 투쟁을 시작했다. 현재 에픽게임즈는 대표 팀 스위니를 중심으로 양대 산맥의 지위에 균열을 내고 있다. 스팀은 매출이 1,000만 달러(약 119억 원) 미만이면 30%, 1,000만 달러 이상은 금액에 따라 25%, 20% 순으로 수수료를 매긴다. 이들과 달리 에픽 스토어는 12%를 떼간다. 지난한 소송 투쟁을 통해서 에픽게임즈가 원스토어, 갤럭시스토어와 같이 써드 파티 스토어를 기획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애플은 이같은 써드 파티 스토어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에픽게임즈는 인기 데이팅 앱 ‘틴더’의 매칭그룹과 함께 CAF(앱 공정성 연대)을 만들었다. 현재 CAF는 구글, 애플에 조직적으로 맞서고 있다. 한국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CAF 임원들은 코로나19 시국에도 한국을 찾아 국회 토론회, 인터뷰 등에 참석하며 한국의 ‘구글갑질방지법’을 높이 평가8)하며, 구글과 애플의 행위를 "자사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며 혁신이나 경쟁, 공정성을 위한 노력을 지향하는 회사는 아니다"라며 비판하고 있다. (‘데이팅 앱’의 존재는 뒤에서도 한 번 더 등장할 것이다.) 30%의 벽은 무너졌다 이미 영세 규모 기업에는 낮은 요율을 적용했던 플랫폼 사업자들, 에픽게임즈의 행보 등을 통해 구글, 애플이 고수하던 30%의 벽은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구글와 애플은 여러 나라 규제 당국의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구글과 애플을 감시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 전기통신사업자 일부개정안, 이른바 ‘구글갑질방지법’에는 특정 결제방식 강제, 부당한 앱 심사 지연 및 삭제, 타 앱마켓 등록 방해 등을 할 수 없으며,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해당 업무를 담당케 했다. 방통위는 앱마켓 사업자의 의무 이행 실태를 점검하는 한편, 자료 제출과 시정을 '명령'할 수 있다. 법 체계에서 요구와 명령은 무게가 다르다. 아직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상당히 강력한 법안이 통과된 셈이다. 이 법 통과를 바라본 팀 스위니 대표는 “나는 한국인”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새 법이 통과되자 구글 한국 지사는 4%p 낮은 결제 수수료를 부과하는 외부 결제를 허용하기로 발표했다. 이 조치에 대해 국내 업계는 ‘꼼수’라는 비판을 내놓았다.9) 공개적인 액션을 취하는 구글에 비해 애플 한국 지사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연초 애플 코리아는 한국 법을 지키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서한을 방통위에 전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본 원고를 제출하는 지금까지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애플코리아 서비스 최고 책임자 한수정은 새 법에 대한 구체적인 회의를 전개하던 시점,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논의에 참가하지 않았다.10)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한 총괄이 EA코리아 대표 등을 역임한 게임 업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뿐 아니라 네덜란드 당국은 애플에게 틴더, 범블 등 데이팅 앱에서 인앱결제 외 써드파티 결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애플은 이에 따라서 지난 1월 14일부터 특정 애플리케이션에 외부 결제 시스템을 적용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애플에게 벌금을 물렸다. 제3자 결제를 도입하면서 일부 앱스토어 기능을 차단시키는 식으로 꼼수를 부렸다는 것이다. 개발자에게 외부 결제를 위한 별도 앱을 개발하도록 지시했으며, 외부 결제를 이용할 경우 애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애플은 제3자 결제 도입 후에도 수수료를 징수했는데, 네덜란드는 이것을 명령 위반으로 보고 신속하게 애플에게 벌금을 부과시켰다.11) 유럽의회는 빅 테크에 대한 규제·감시를 강화하는 디지털 시장법을 추진 중이며, 호주에서는 애플과 구글의 행위들이 반경쟁적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인도, 영국, 프랑스 당국이 양대 기업의 인앱결제 강제 등에 대해서 주시하고 있다.12) 결제 규모, 본사의 위치 등을 복합적으로 보았을 때 대마(大馬)는 미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10월, 미국 민주당이 주도하는 하원 반독점 위원회는 구글과 애플의 행동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해당 문건에는 "한때 기존 질서(Status Quo)에 도전했던 산만한 언더독 스타트업들은 이제 석유 부호나 철도 거물들의 시대에나 봤던 독점자(Monopolies)가 되어버렸다"라는 강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들 기업은 사회에 분명 혜택을 주었지만, 이제 대가를 치를 때가 됐다"며 "다른 회사들도 그들의 규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구도 있다.13) 강력한 어조의 보고서가 발간된 뒤, CAF는 미국 현지에서 결코 무시 못할 수준의 로비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이와 별개로 에픽게임즈와 애플의 소송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이 사안에 중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2021년 9월 1심에서 재판부는 인앱결제 외 직접 구매로 연결할 수 있는 링크를 포함시키지 못하게 하면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10개의 쟁점 사안 중 1개에만 에픽게임즈의 손을 들어주었다. 인정된 1개의 쟁점은 이미 애플이 영세 규모 개발자들과 소송에서 합의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1심 재판부는 현상 유지를 선택했고, 2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새로운 국면이 마련될 것이다. 지난 1월 21일, 미국 상원 법사위원회는 구글과 애플을 규제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들 기업의 지배력 남용을 막는 법안을 16:6으로 통과시켰다. 자사 상품 우대를 규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인앱결제가 유튜브 등 자사 앱을 우대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으므로 이 법에 따라서는 금지의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법이 장기적으로 30%의 수수료에도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 법안은 곧 본회의에 올라갈 예정이다.14) 1) The Games Market and Beyond in 2021: The Year in Numbers (Newzoo, 21-12-22) 2) 2000년대 애플의 아이튠즈 수수료에 대한 뒷이야기는 <콘텐츠의 미래>(바라트 아난드 저)에 잘 정리되어있다. 3) How Apple’s 30% App Store Cut Became a Boon and a Headache (NYT, 20-08-14) 4) Apple’s Latest Opens a Developers’ Playground (NYT, 08-07-10) 5) Apple's App Store and Other Digital Marketplaces (Analysis Group, 20-07-22) 6) Apple, 세계 개발자 컨퍼런스(WWDC)를 전체 온라인 포맷으로 다시 가져오다 (Apple Newsroom, 21-03-30) 7) 구글 “네이버·카카오 웹툰 日 성공, 인앱 결제 덕분”... 인기협 “구글만 좋은 불공정 정책” (아주경제, 20-09-29) 8) [단독] "이러다 다 죽는다", 팀 스위니가 말하는 앱 생태계와 독점 (TIG, 21-11-18) 9) 구글, 4%p 수수료 낮춘 ‘꼼수’ 논란 여전…방통위는 ‘골머리’ (뉴스1, 22-01-12) 10) 인앱결제법 이행 논의 헛도는데…애플코리아 경영진은 '부재중' (연합뉴스, 21-11-24) 11) 네덜란드, 애플에 67억 벌금…"외부결제 허용 불충분" (ZDNet Korea, 22-01-25 )12) 美 앱공정성연대 "한국 구글갑질방지법 기념비적…강제화 중요" (연합뉴스, 21-11-15) 13) 미국 하원 반독점위원회 "구글·애플 마켓 수수료 30% 너무해 (TIG, 20-10-08) 14) 구글, 위치 추적 설정 꺼놔도 몰래 추적…미국 지자체 '줄소송' (경향신문, 22-01-25)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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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 게임의 역사도 반세기에 이르면서 레트로 게임에 대한 선호가 일련의 마니아적 현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레트로, 복고라고 불리는 이들 현상은 한편으로는 게이머 세대의 나이듦을 보여주며, 동시에 게임연구자들에게는 이제 게임에서 '클래식'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8bit era in china This article looks to the 8 bit gaming history in China to illuminate the Chinese gaming industry of today, one that earned 2786.87 billion yuan in 2020 (GPC et al. ) . While becoming the world's largest game market, Chinese gaming industry has also attracted worldwide attention. However, despite our fascination with the great success of the Chinese gaming industry in the 21st century, we should not forget the road ahead. Looking back on the early challenges that China's 8 bit gaming industry ever faced is an essential prerequisite for us to understand the industry’s current success. Therefore, this paper will analyze the Chinese 8 bit game and its history. Read More Inside BIC 2021- 감염병 시대의 인디게임페스티벌 참관기 부산행 전날, 병원에 들러 코로나 PCR 진단검사를 받았다. 부산인디커넥트 페스티벌(BIC Festival)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PCR 음성 확인증(혹은 백신 접종 완료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BIC-2020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감염병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철저한 방역 절차 아래 오프라인에서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렇듯,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서를 하나 꼽아보자면 ‘불안’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가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어딜 가든 짙게 깔려 있다. Read More [Editor's view]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근래들어 출시되는 많은 게임들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는 ‘복고’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은 게임들이 새로운 플랫폼과 형식으로 다시 현역 복귀 신고를 줄줄이 하고 있는 분위기다. 왕년의 인기 게임들은 함께 성장해 이제는 중장년에 이른 게이머들에게 추억을 앞세우며 다시금 인기를 몰았다. 가장 최근 출시한 <디아블로 2: 레저렉션>은 20여년 전 게임규칙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PC방 게임순위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Read More [북리뷰] 스테이지를 전환하자는 제안, 〈모럴컴뱃〉 따라서 필요한 것은 ‘컨트롤러를 집어들고 게임을 계속 즐기면서’(246쪽) 게임에 대해 계속 대화하는 것이다. 〈모럴컴뱃〉은 게임에 대한 대화를 하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310개에 달하는 각주는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와 부정적인 연구를 포함하면서 게임에 관한 주요한 사건에 관한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이 책의 자료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호기심이 찾는 여정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Read More Oldies But Goodies - 클래식 게임의 조건 그래서 다시 클래식 게임이다. 그의 분투는 눈물겹다. 이 보다 더 순수할 수 없을 그 시대만이 줄 수 있는 순정의 게임 경험과 이를 통한 자수성가형 성취감을 제공한 클래식 게임은 게임 미디어의 '형식'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봉인되는 순간, 수 많은 아류작과 온전한 장르의 모태가 됨으로써 태를 바꾸어 '미디어'로 존재한다. 이렇게 미디어로 명명된 클래식 게임은 상징으로 일반화되고, 상징을 통해 제시된 '기대'는 클래식 게임 고유의 경험을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재현하고 확장한다. Read More ‘인디게임’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반지하게임즈 이유원 대표 인디게임의 범주에 관해서는 여러 행위자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바, 모두를 만족시킬 온전한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념적인 개념어의 범주와 상관없이 지금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인디게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반지하게임즈’의 이유원 대표를 만나 그가 정체화하고 있는 인디게임은 어떤 개념이며 지향점은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2021년 9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이 직접 반지하게임즈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Read More 〈디아블로〉 시리즈의 역사로 바라보는 블리자드의 변화 2021년 2월 20일에 시작된 블리즈컨라인(BLIZZConline)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2005년 10월 처음 개최된 블리즈컨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가 자신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팬들을 위한 축제로써 기획되었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의 블리즈컨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제작자와 게임 팬의 화합의 장이었던 블리즈컨이 끝나면 항상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최근 들어 함성은 잦아들고 작은 수근거림이 더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Read More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단절을 넘어서-퀘이크 리마스터 최근 다수의 리마스터 타이틀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과거 발매되었던 게임의 비주얼이나 시스템을 조정해 다시금 선보이는 리마스터 / 리메이크들이 예다. ROM 혹은 디스크 등의 형태를 넘어서 디지털로 복각되고 라이브 서비스를 진행하는 MMORPG 또한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거의 빌드를 그대로 서비스하는 사례도 여럿이다. Read More 나는 아직까지도 현역 게이머 - 레트로게이머 꿀딴지곰 인터뷰 네이버 지식인을 통해 기억에서 희미해진 4,000여 개의 고전 게임을 찾아주고 이제는 유튜브로 영역을 넓혀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그는 국내 몇 없는 ‘레트로 게이머’이자 ‘레트로 게임 컬렉터’다. 그를 만나 레트로 게임의 현주소와 그가 생각하는 과거, 현재 게임의 접점을 물었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전문용어와 자세한 게임의 예시들 그리고 이제 중년이 된 그가 회고한 어린 날의 추억 이야기로 현장엔 웃음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날의 대화를 정리한다. Read More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리그 오브 레전드>가 처음 들어와 국내에서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던, 아직 프로씬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전국구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 중에는 ‘황충아리’라는 게이머가 있었다. 챔피언 ‘아리’ 장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아리장인’ 보다 그는 ‘황충아리’로 더 이름을 떨쳤는데, 이유는 그가 노장 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노장 캐릭터로 유명한 황충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지만, 그의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Read More 레트로 시대 한국 게임비평의 흔적들 지금의 한국에서 게임 평론 시도들은 일부 웹진의 기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일부 게임평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꾸준히 평론을 지면에 생산하는 게임평론가는 매우 적다. 이렇다 보니 국내에 게임 평론계는 의미 있게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25년 동안 한국 게임계는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렇다 보니 실제 게임평론을 생산하지 않는 자칭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최초의 게임평론가라고 이야기하는 웃지 못할 상황들도 벌어지고는 한다. 이런 점을 정리하려면 먼저 과거에 있었던 게임비평에의 시도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Read More 레트로를 다시 소환하는 인디게임의 방식들 이런 점에서 레트로 장르를 계승하는 인디 게임들이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올드 게이머와 뉴 게이머를 이어주는 인디 게임들을 통해 세대를 아우르는 팬덤은 게이머의 확장된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올드 게이머에겐 추억을, 뉴 게이머에겐 신선함을 말이다. 어찌 보면 레트로 게임, 장르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린다. 누군가에겐 레트로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겐 새로운 게이밍일 수 있다. 인디 개발자들의 레트로 장르 경의와 찬사는 게임 과거 게이밍과 현대 게이밍을 이어주는 가교를 만들어 주고 있다. Read More 모험가들은 다시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 : 게임과 노스탤지어 2015년 9월 1일 게임 개발자 론 길버트(Ron Gilbert)는 자신의 블로그에 ‘Happy Birthday Monkey Island(원숭이 섬 생일 축하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그가 1990년에 개발한 어드벤처 게임 〈원숭이 섬의 비밀〉의 2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글이었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서 〈원숭이 섬의 비밀〉을 함께 만들었던 당시의 팀과 ‘이 게임이 25년간 살아 있을 수 있게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 오래전에 받은 한 통의 팬레터 사진1)을 첨부한다. 당시 12살이라고 밝히고 있는 크레이그 톰슨(Craig Thompson)이 그에게 보낸 것이다. Read More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Read More 변호사의 눈으로 본 역전재판 벌써 오래 전 이야기다. 토요일 아침이면 신문을 펼쳐 TV 편성표를 살펴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특히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에서 어떤 영화를 방영하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는데, 넷플릭스도 IPTV도 없던 시절이니, 시간도 돈도 없는 학생에게는 영화를 볼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편성표 옆에는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간단히 소개하며 별 5개 만점으로 나름의 평가를 달아두었는데, 별점이 높은 영화가 방영되는 날에는 종일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Read More 북유럽 레트로: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 핀란드에서 컴퓨터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 였고 80년대부터는 상업화 되었으니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최초의 e스포츠 토너먼트 - 당시에는 “이스포츠”가 아니라 “핀란드 컴퓨터게임 챔피언십”이라 불렸다 - 가 1983년에 이미 개최되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게임플레이가 청소년들의 주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는다. Read More 역사적 트라우마와 유령의 소환술: 〈반교: 디텐션〉의 역사주의 이처럼 애매하고, 역설적이고, 공백으로 가득 찬 대안적 역사인식의 상징극장(학교)을 탐색하며 퍼즐 열쇠들을 수집하는 플레이어는, 유령이 된 채 부재하는 현재의 표식들을 이어붙이고, 역사의 버려진 시신을 가르는 부검의가 된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며 자신의 그림자에게 읊조리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파편화된 상흔들은 수집과 탐색행위로 이뤄진 이 부검에 의해 점차 진혼된다. 플레이어의 부검은 사망 원인 추적에 그치지 않고, 망자의 부릅뜬 눈을 감기는 의식으로 연동되는 것이다. Read More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인터페이스는 설계에 투영된 이상을 정확히 구사하기 위해 발전할 수도 있지만, 우연한 계기들에 의해 손쉽게 그 설계가 변형되기도 한다. 변형된 인터페이스는 게이머들의 게임 실천 자체를 변형시키기도 하며, 이런 변화된 게임실천은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의 변형을 가져오고, 게임성 그 자체를 다르게 느끼게 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이처럼 인터페이스는 단순한 입력장치이고,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 없는 게임의 요소라기보다는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하드웨어이면서 동시에 게이머와 연결되어 신체화된 기계적 대상물이다. 인터페이스는 게임의 설계에 따라 발전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게이머는 물론이고 자신과 연결된 모든 환경과 함께 상호작용하며 변화무쌍하게 공진화(co-evolution)하는 과정 안에 놓여있다. Read More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21세기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산업 규모를 구축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이전의 상황이나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그 이전의 역사, 그러니까 ‘8비트 게임 시대’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중국 게임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이 글은 중국의 8비트 게임 시대를 조망하고 그 역사가 지닌 함의를 논한다. 이 글은 또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초기 게임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Read More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Read More
-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 Back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21 GG Vol. 24. 12. 10. -이 글에는 <마우스워싱>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노스탤지어적 로우 폴리곤 역사학자인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는 저서인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에서 다양한 시대와 형태의 노스탤지어를 소개한다. 디즈니의 영화 리부트나 N64와 같은 1990년대의 미디어가 2020년대에 각광받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아널드포스터는 세대론적 관점을 제시한다. 2020년대 초반에 성년이 된 사람들이 1990년대에 태어났으며, 이 시기는 또한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라는 설명이다 [1] . 실제로 itch.io와 같은 인디 플랫폼에 제출된 로우 폴리곤 기반의 게임들, N64나 PS1을 키워드로 게임의 제작자와 향유자는 노스탤지어를 적잖이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들 90년대생이 유년기에 향유하던 게임의 추억을 현재로 데려오고자 하는 시도로써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양식의 게임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배경으로는 제작에서의 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호러 인디 게임 컴필레이션 을 엮은 브레오간 해케트는 90년대의 저해상도 3D로 게임을 제작하는 동기로 접근성을 언급한다. “텍스처에 4K 해상도가 필요하지 않고 캐릭터 모델이 수천 개가 아닌 수십 개의 폴리곤으로 계산될 때 솔로 크리에이터가 3D로 전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2] . 그렇게 빚어낸 이미지는 AAA 게임과 직관적인 차이를 구획하고, 와 같은 작품이 드러내듯 아예 스스로를 실패작으로, 인디한 것으로 천명하며 등장하기도 한다 [3] .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기하학적인 신체와 저해상도 텍스처가 지속적으로 향유되는 데에는 특유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3D로의 이행은 명백히 기술적 한계에 직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평면적이면서도 블록 같은 질감은 투박하지만 분명 구체적인 신체성을 지닌 무엇이다. 그 위에 기입된 엉성한 텍스쳐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므로 인식의 혼란을 초래하며 불안을 자아낸다. “때때로 게임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이러한 그래픽은 따라서 호러 장르와 밀접하게 얽히게 된다. 이렇게 레트로 호러 게임이 향유되는 동기를 살펴봤을 때, 지난 9월에 출시된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우스워싱Mouthwashing>은 설명에 모범적으로 들어맞는 사례처럼 읽힌다. 롱 올간Wrong Organ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스웨덴 게임 개발 교육 기관에서 만나 팀을 이뤘다. 거기서 그들은 전작인 <하우 피쉬 이즈 메이드How Fish is Made>를 완성했고, 확장팩에서 후속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우스워싱>의 핵심 인물인 ‘컬리’는 이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가 운행하던 우주선 ‘툴파르’ 호는 천체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게 되는데, 폭발은 컬리의 전신을 강타하며 흔적을 아로새겼다. 작중에서 컬리는 사지와 눈꺼풀을 잃고 극심한 화상으로 인해 신음한다. 게임의 1인칭의 카메라는 플레이어블 아바타와 플레이어의 시점을 융합시키며 가상의 신체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격통이 화면 너머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지는 않기에 끔찍한 몸에 접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특별한 감각을 일깨우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공포는 가상의 육신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붕괴와 결합에서 파생된다. 어떤 퀘스트는 컬리의 살을 자르고 섭취할 것을 종용한다. 딱딱한 플라스틱 덩어리나 다름없어 보이는 저화질의 벌건 살은 가상의 신체가 언제든 인접한 다른 환경으로 무너져 내릴 가능성을 자극한다.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를 향유한다는 게이머 노스탤지어에 관한 설명은 “추억 소환 섹션”에 놓여 있는 대상에 한정한다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4] . <마우스워싱>은 로우 폴리곤이라는 장치가 범연히 1990년대적인 것의 부흥이라고 설명한 바와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상상적으로 구현된 미디어적 참조는 현재적으로 “풍부한 시청각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5] . <마우스워싱>이 엮어내는 영상 소스(뤼미에르 형제의 <유쾌한 해골>부터 1950년대 반공주의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인 을 거쳐 가글액의 광고 화면으로 이어진다)는 로우 폴리곤이 표방하는 1990년대 게임 하드웨어 이전의 시기까지 소급해 가며 현재화를 시도한다. 주권성에 대한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로 상상되는 과거는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노스탤지어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시간에 속한 순간들”에서 촉발되는데, 결국 “현재 우리가 보유한 가치나 윤리, 자기감에 더욱 부합하게끔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6] . 이 지점에서 90년대와 지금 사이의 연속성을 되짚어보게 된다. <마우스워싱>의 내러티브가 디디고 있는 역사적 토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다. 80~90년대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구현된 신자유주의는 “사사화privatiation와 개인의 책임”을 핵심으로 한다. “부와 의사 결정이 대중과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정책 결정 기구에서,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책임지지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 [7] . 그 결과 구조 조정과 노동유연화, 고용 불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풍경이 삶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마우스워싱> 속 툴파르 호는 마지막으로 남은 유인 우주 화물 서비스를 전문 기업인 포니 익스프레스의 소속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 속에서 승무원들이 화물을 운반하는 와중에 툴파르 호가 소행성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부함장인 ‘지미’는 구조가 올 때까지 다른 동료들을 책임지고 건사하고자 한다. 한편 비선형적으로 이어지는 게임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고의 전후를 퍼즐처럼 재구성하도록 요청한다. 작중에서 상기의 영상 콜라주는 한 장의 메일을 트리거삼아 재생된다. 그 메일이란, 본사는 이번 배송을 완료한 후에 툴파르 호의 인원이 전원 해고될 것이며 포니 익스프레스의 서비스가 무인 체제로 전환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컬리가 함장의 자격으로 그 메일을 수신하는 장면은 잠시 중지되고, 구시대의 애니메이션들이 흘러나오며 경제적 주체로서의 가장과 같은 자본주의의 유익한 삶을 역설한다. 이미지의 잡동사니가 멎은 자리에는 끄트머리가 꺾여버린 사다리들이 놓여 있다. 사다리는 컬리가 지미와 나누었던 대화를 환기하는 요소다. 컬리 : ...최근 이런 생각을 좀 해 봤어. 이걸로 충분한 건가? 지금까지 잘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되나?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으로 말이야. 지미 : 그게 안 좋은 건가요? 컬리 : 내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거야. 안 좋지는 않아. 하지만... 아주 무서운 일이지. 이런 생각이 들어. “이게 내 최선인가?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 지미 : 이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랐는데... 애초에 잘못된 사다리를 오른 건 아닐까 생각하신다는 거죠.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한참 위까지 올라가셨잖아요. ...전 아직도 그 사다리를 끝없이 오르고 있는데 말이죠. 『잔인한 낙관』을 저술한 로런 벌랜트는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좋은 삶’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애착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우리는 소진되거나 마모되면서도, 더 좋은 삶이라는 환상에 애착을 품는다.“잔인한 낙관은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대상에 애착심을 유지하는 상태”이며 또한 “우리에게 ‘좋은 삶’이라고 호명하는 대상에 대한 정동적 애착심 속에 기거하면서 ‘좋은 삶’을 살펴보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하다 [8] . 위의 대사에서 컬리는 지금껏 유지해 왔던 삶의 형식이 어느 정도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황을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벌랜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마모된 주체인 그는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이 주는 낙관이 불능에 처했음을 미묘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허무감을 공유받는 지미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다리의 ‘한참 위’에 있기에 가능한 토로라고 일축한다. 그러므로 사고 이후 임시 함장이 된 지미는 지속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되뇌며, 부상으로 불능 상태가 된 컬리를 대신하려 한다. 지미는 선원들의 안위와 툴파르 호의 위기를 책임지려 한다. 더 나아가서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함으로써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지미는 생존 물품을 찾아보기 위해 운송 창고 개방을 결단한다. 창고를 개방할 수 있는 열쇠는 함장만이 소지 가능하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휘두른 주권은 곧 미끄러진다. 영상의 콜라주로 이어진 시퀀스가 종료되면 마침내 플레이어는 창고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물은 생존에는 하등 쓸모없는 가글액에 불과하다. 이 가글액은 포니 익스프레스가 직접 생산하지 않은 물건일뿐더러 1950년대의 애니메이션과 병치된 광고 형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목전으로 닥친 자동화와 무인화의 미래를 절대 극복해 주지 못할 물건이다.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는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 함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주권성이란 객관적 상태라고 오인된 환상”으로 “개인적, 제도적 자기 정당화의 수행성을 열망하는 입장이며, 그 입장이 안전과 능률성을 제공한다는 환상과의 관계 속에서 통제권을 갖는다는 정동적 느낌”이다 [9] . 일반적으로 법에서는 주체를 행위하고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는 범박한 의미에서의 게임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해 상호작용 하는 미디어로 정의된다는 지점을 환기한다. 지미의 행위를 견인하는 동기는 플레이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로우 폴리곤 아바타를 꾸역꾸역 붙들고 있는 이유와도 일치한다. 툴파르 호와 승무원을 건사하는 것이다. <마우스워싱>의 게임 플레이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나가는 일방적인 워킹 시뮬레이터식 진행에 가깝다. 이 같은 구성은 전권을 휘두르는 주권성으로부터 비껴 나간다. 사고 당시를 재연하는 프롤로그는 이어질 전개의 메타포다. 소행성이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가운데,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돌리라는 경고문이 주어지지만 플레이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왼쪽으로 꺾는 일뿐이다. 여기서 주권성은 실패한 선택지를 고르는 데에 발휘된다. 그렇게 지미는 툴파르 호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플레이어는 지미의 ‘업보’를 책임지지 못한다. 1인칭 카메라를 활용한 시점 트릭은 여태껏 플레이어가 불완전한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시점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며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마우스워싱>은 노스탤지어적 장치를 활용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짤막한 역사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있다. 잔인한 낙관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은 <마우스워싱>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모든 관계가 파탄 난 상황 속에서 지미는 부상당한 컬리를 수면 장치에 밀어 넣는다. 비록 컬리는 망가진 신체와 고통으로 잠 못 드는 신세임에도 일단 수십 년간 냉동 수면 상태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구조되리라는 일방적인 기대에 내걸린다. 훗날 컬리가 어색하게 눈을 떴을 때, 그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1]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손성화 역.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서울: 어크로스. 2024. 273쪽. [2] Natalie Clayton, “The horror games harking back to the PSone era”, 2019.10.31.등록, 2024.11.05.접속, WhyNowGaming, [3] 이 게임은 닌텐도 64를 위한 게임을 “야심넘치게 개발하다가 프로젝트를 폐기할 위기”에 놓인 일련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https://l4ndo.itch.io/abandoned-64 [4]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273쪽. [5] Natalie Clayton, 위의 글. [6]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15쪽. [7] 리사 두건. 한우리·홍보람 역. 『평등의 몰락-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 현실문화. 2017. 57쪽. [8] 로런 벌랜트. 윤조원·박미선 역. 『잔인한 낙관』. 서울: 후마니타스. 2024. 48·55쪽. [9] 로런 벌랜트. 184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보는 게임의 한복판에서 보는 현재: 게임유튜버 김성회
‘보는 게임’을 게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이를 두고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실제로 조작하지 않는 것은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특별한 조작 없이도 진행되는 ‘방치형 게임’은? 아예 참여하지 않고 관전만 하는 그러니까, 게임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게임을 둘러싼 시선과 그것을 향유하는 방법이 변해가는 오늘날 ‘보는 게임’을 이끄는 유튜브 ‘김성회의 G식백과’의 진행자 김성회를 만났다. 변화의 과정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 만큼 양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Back 보는 게임의 한복판에서 보는 현재: 게임유튜버 김성회 03 GG Vol. 21. 12. 10. ‘보는 게임’을 게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이를 두고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실제로 조작하지 않는 것은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특별한 조작 없이도 진행되는 ‘방치형 게임’은? 아예 참여하지 않고 관전만 하는 그러니까, 게임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게임을 둘러싼 시선과 그것을 향유하는 방법이 변해가는 오늘날 ‘보는 게임’을 이끄는 유튜브 ‘김성회의 G식백과’의 진행자 김성회를 만났다. 변화의 과정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 만큼 양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간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유독 지쳐 보였다. 방금 막 마지막 일정인 프로그램 녹화를 마쳤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또렷했고 무엇보다 씬 내부에서 오랫동안 고민한 주관과 신념으로 번뜩였다. 덧붙일 의견이 생기면 몇 번이고 양해를 구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편집장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인사로 문을 연 대화는 그래서 유독 깊게 찌르고 더 깊게 찌른 호흡으로 가득했다. 한 편의 장대한 대담과도 같던 현장이었다. #1 . ‘보는 게임’으로의 변화? “정반합의 과정일 뿐” e스포츠, 방치형 게임, 게임 스트리밍 등이 비슷한 트렌드로 엮인 것 같다. 큰 줄기 세 개를 잘 잡아줬다. 우선 방치형 게임의 경우 나는 이게 진화나 퇴화라기보다 진폭이 있는 정반합의 과정이라고 본다. 손으로 직접 컨트롤하는 것만이 진정한 게임이라고 보는 시기가 지났다는 거지. 예를 들어 디아블로2. 자룬(게임 아이템)을 먹기 위해 카우방을 천 바퀴, 만 바퀴를 돈다고 치자. 이게 과연 내가 컨트롤하는 게임일까? 무아지경으로 슬롯머신 당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실제로 디아블로의 디렉터도 슬롯머신의 몰입구조를 염두에 두고 게임을 기획했다고 밝히기도 했고. 처음에는 컨트롤의 재미와 공략의 성취감을 느끼더라도 이후에는 점점 파밍의 소유욕만 남게 되며 그마저도 빈도가 낮아진다. 그러다가 이런 ‘과정’의 지루함을 덜어 주기 위해 오토모드가 추가된 게임들이 등장했고 나중에는 ‘혁신적 24시간 오토 시스템’이라는 광고 문구가 나오기까지 했다. 자동화가 고도화 되면서 게임의 영역이 넓어졌다. 컨트롤 뿐 아니라 육성 관리 ‘분재 게임’까지 게임 플레이의 영역에 들어왔다. 유행이 돌고 돌 듯 게임 하는 방법도 돌고 돈다. 자동화 경향이 과도해지자 게임 플레이 본연의 컨트롤 손맛, 모험가들의 협동을 원하는 니즈가 많아진다. 전자는 디아블로2 레저렉션, 후자는 WOW(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이 좋은 사례다. 2019년에 와우 클래식이 출시됐을 때 인기가 엄청났다. 정반합에서 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한동안 개인화되고 자동화되었던 와우에 지루함을 느낄 때쯤 클래식을 하니까 예전의 그 재미가 느껴지는 거다. 확장팩보다 클래식의 동시 접속자가 더 많은 경우까지 생기지 않았나. 디아블로 2도 마찬가지다. 인벤토리 정렬 기능조차 없는 20년 전 게임을 불편해서 어떻게 하냐 했지만 막상 해보니까 잊었던 즐거움을 맛본다. 불편함 마저 추억이 된다. 오토, 관리형 게임에는 없는, 예전 플레이 방식으로의 회귀에 재미를 느낀다. 근본주의자들은 직접 하는 게임만을 진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도 e스포츠, 그리고 게이머 임요환, 페이커를 통해 ‘보는 게임’을 인정한다. 왜냐? 내가 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의 플레이를 보여주기 때문에. 오락실 시절에는 동네 최고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게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최고의 자리가 내 눈에 보이니까. 하지만 게임 방송이 나오고 무대가 확장되자 프로게이머란 압도적 존재와 부딪힌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경지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이들의 플레이를 봐보자’, ‘그 정도 경지는 내가 인정해 줄 수 있다’ 하며 e스포츠가 ‘보는 게임’으로서 받아들여졌다.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아도 게임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실력이 좋지 않더라도 고정 팬층이 있는 게임 스트리머도 있다. 이것도 일종의 정반합의 과정이다. 프로게이머가 스트리밍하는 경우도 있고 게임을 잘 못해서 재미있는 코믹형 스트리머도 있다. 또한 시청자 참여형 콘텐츠나 단체 플래시몹처럼 동시에 같은 서버에 들어가서 스트리머와 함께 즐기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것들이다 ‘하는 게임’과 ‘보는 게임’의 사이에 놓여있는 형태라고 본다. 앞으로는 하는 것과 보는 것이 적절하게 융합된 형태로 계속 새 콘텐츠가 나오지 않을까. #2 . ‘보는 게임’. “경제적, 세대적 측면에서도 해석이 가능...” 지금은 게임을 하려면 돈을 꽤 들여야 한다. 100원만 있으면 게임 한판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게임을 ‘제대로’ 하려면 돈을 꽤 들여야 하는 시대다. ‘보는 게임’이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경제적 측면. 콘솔 게임의 경우 시작을 위해 적어도 50만 원은 있어야 한다. 모바일의 경우 ‘프리 투 플레이(Free-to-play, 부분 유료화 게임)’형의 많은 게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대로’ 즐기려면 적지 않은 돈을 들일 수밖에 없다. 이 때 ‘맹독성 과금 체계’가 문제가 된다. 컨트롤 실력, 소위 피지컬이 받쳐줌에도 고과금 유저의 (게임적) 강함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스트레스가 된다. 따라서 그런 플레이 형태의 공정성에 불만을 갖게 되고 애착을 갖지 못한다. 특히나 요즘 Z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다. 수저론이 휩쓴 세대다. 현실의 경제적 요인 때문에 내 게임 컨트롤 실력이 평가 절하되는 것이 스트레스일 거다. 확률 뽑기는 말초적 재미가 있지만 직접 내 돈을 들이기엔 너무 과금 요구량이 높다. 이런 현실들이 스트리머 방송 등 ‘보는 게임’으로 대리 만족하는 경향에 일조할지도 모른다. 요즘 시대에 ‘보는 게임’은 무시할 수 없는 큰 흐름이다. 그런 면에서 게임을 보는 것이 ‘게임의 확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문화 콘텐츠 중에서 게임만큼 범주가 넓은 콘텐츠가 또 없다. 맞고, 애니팡부터 시작해서 전문가들도 감탄할 정도의 ‘(마이크로 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비행 시뮬레이션 게임)’까지 모두 게임이라고 불린다. ‘하는 게임’의 범위가 넓어지면 ‘보는 게임’의 범위 역시 마찬가지로 넓어진다. 넓이가 넓어지면 밀도가 낮아지듯이 ‘하는 게임’과 ‘보는 게임’ 사이의 경계선도 점점 희미해지며 그라데이션 형태가 될 것이다. 미래에는 둘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고 게임 플레이는 한 판도 안 하면서 내 취미는 게임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진행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김성회의 G식백과(이하 G식백과)’에서 게임 스트리밍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게임’하고 더 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거기서 더 범주를 넓히면 내 채널도 ‘보는 게임’에 속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유튜브 설문조사 기능으로 알게 된 사실인데, 내 채널에 오시는 분들의 게임 플레이 비율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직접 손으로 플레이해서 즐기지 않아도 게임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게이머로서 소속감을 느끼신다. 내 채널에는 게임 산업이나 게임 문화적으로 논평을 구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주기를 바라는 시청자분들이 많다 보니까 확실히 더 그렇다. 예전처럼 게임을 안 해도 충분히 게임이라는 취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걸 내 구독자 성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3 . 게임의 확장과 대체제의 등장. “게임, 편하게 누워서도 즐길 수 있는 것!” 초등학생인 아들이 ‘와, 샌즈(‘언더테일’이란 게임의 캐릭터)’라는 말을 하길래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샌즈가 밈이 됐더라. 플레이를 통해 게임이 대중화가 되는 게 아니라 밈이나 혹은 다른 매체를 통해 2차 전파가 되는 거다. 20년 전 스타크래프트 때도 비슷한 걸 느꼈다. 황제, 콩, 영웅, 천재, 폭군 등 인기 프로게이머들의 별명이나 코믹한 사진을 밈화 시켜서 향유했다. 딱히 마린과 질럿의 공격력이나 사정거리에는 관심 없어도 이런 e스포츠 밈들 만으로도 게임 친구들과의 대화에 충분히 낄 수 있었다. PC방에서 절반 이상이 스타를 하던 때가 아득하게 지났지만 그럼에도 스타크래프트의 수명이 다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스타를 더 이상 하지는 않지만 ‘보는 게임’이라고 말하며 임요환, 이윤열, 박정석의 시대를 지나 이제동, 송병구, 허영무에 열광하던 시기가 꽤 오래가기도 했고. 지금은 아예 ‘민속놀이’화 되어 중장년층 시청자들이 젊은 세대 스트리머에게 스타 훈수를 두는 콘텐츠까지 인기를 끈다. 이제 와서 스타를 직접 하는 건 피곤해서 엄두가 안 나지만 남이 하는 걸 보는 건 아직도 재미있다는 정서다. 아까 젊은 층이 ‘보는 게임’을 원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경제력이라고 했는데, 반면 중장년층이 ‘보는 게임’을 원하는 이유 중 하나는 노쇠한 체력이다. (웃음) 콘솔, PC 게임은 특정한 시간, 공간, 재력이 있어야만 한다. 반면 요즘의 모바일 게임은 말 그대로 모바일, 즉 이동성이 있다. 누워서도 할 수 있고. 휴대형 콘솔인 닌텐도 스위치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PC 게임 플랫폼의 대장인 스팀(Steam)이 계속 휴대형 게임기에 도전하는 이유도 맥락이 비슷하다. 딱딱한 컴퓨터 책상에서 게이머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책상보다는 소파가, 소파보다는 침대가 편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편해지고 싶다는 인간의 기본 욕망을 공략하는 것이다. 예전엔 게임을 하다 피곤하면 누웠다. 지금은 모바일로 게임을 누워서도 할 수 있고, 방치형 게임을 ‘누워서 하는 게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시사적이지 않나? LOL을 한 때 정말 재밌게 했었다. 지금은 칼바람 협곡(정식 게임보다 간략화 된 게임모드) 두세 판만 해도 지친다. 처음 만나는 타인과 호흡을 맞춰 싸워야 한다는 게 너무 피곤하다. 롤드컵 결과와 하이라이트 영상만 보는 정도다. 그것만 봐도 충분히 욕구 해소가 되더라. 게이머의 평균 연령대가 점점 높아지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형태도 점점 노화되어 간다. 게임과 인구, 연령 계층의 연결성 역시 중요하다. 게임사의 입장에서 돈 되는 유저층에 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경제력이 있는 중장년층까지 판매 타겟층의 범위가 계속 높아진다. 그 결과 신체적 피로도가 덜 한 방치형 게임, 오토 게임에 성인향 과금구조를 결합 시키기도 한다. 트럭시위 등 열정적으로 개선 요구의 목소리를 내는 젊은 층보다, 스피커는 작으면서 과금력은 높은 중장년층을 공략하는 게 사업적 메리트가 크다는 게임사의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성회와 비슷한 나이대의 인터뷰어 경혁은 이즈음에서 게이머 세대가 나이 들었음에 크게 공감했다. 젊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보는 게임’을 선택했다면 반대로 중장년층의 게이머는 튜토리얼을 안 봐도 게임의 맥락을 예상할 수 있다. 즉, 직접 하는 게임의 재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할 만큼의 체력이나 새로움이 없는 것. 경혁은 “최초로 게임 하는 것을 피곤해하는 늙은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성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98-90년대 게임을 즐기던 윗세대가 그래 봐야 20대 후반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 나이대가 상당히 올라갔음을 지적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다 체력적으로 힘든 걸 버티면서 며칠씩 밤새워 게임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저희가 다 같이 늙은 거죠.” 게임도 같은 콘텐츠이나 드라마 혹은 만화 등에 비해 체력 소모의 등급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성회는 힘주어 반복했다. #4 . ‘보는 게임’의 시대, 유튜버로 살아남기 혹은 살아가기 게임 유튜브 채널 ‘G식 백과’를 개설 한지 어느덧 4년 차가 됐다. 콘텐츠 제작의 신념이 있다면? 흥미든 분노든 감동이든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낀 소재를 택하려고 한다. 민심은 뜨겁지만 정작 ‘나’는 그다지 흥미 없는 주제라면 되도록 피하고 싶다. 물론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간혹 등 떠밀리다시피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면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움직이는 감정들 중 가장 강한 연료는 역시나 ‘분노’다. (웃음) 셧다운제는 ‘내’가 진심으로 분노했던 소재다. 또 하나 2019년 인디게임 규제. 민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6만여 건의 어린이 플래시 게임을 날려 버린 기계적 행정은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때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서 호소하기도 했던 거고. 특히 게임과 아무런 접점이 없던 자들이 우리를 계도, 계몽, 치료 해주겠다며 접근할 때 가장 분노한다. 나는 유치원 들어가기 전 문방구 오락기 시절부터 게임을 시작했는데, 항상 ‘전자오락’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기성세대의 인식을 참기 힘들었다. 나는 소위 유리멘탈에 귀도 얇고 의지도 박약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신념’이라는 게 하나 있다면 맹목적 게임 혐오, 게임 하대 인식에 대한 저항이다. 현재 72만 정도의 구독자를 가졌다. 이 정도의 성취를 예상했었는지. 2014년쯤 아프리카TV BJ를 할 때 유튜브도 같이 겸해서 했었다. 그때 구독자가 4, 5천 정도 됐었고.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유튜브를 시작했고 지금은 샌드박스 네트워크라는 소속사에 들어와 있다. 여기서 첫 미팅을 할 때 나한테 구독자 몇만이 목표냐고 묻더라. 그때 나랑 같은 카테고리의 유튜버 중에 제일 잘나가는 채널의 구독자가 20만 정도였다. 그 채널을 따라잡는 게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3년을 해서 한 15만? 더 잘해서 3년 뒤에 구독자 20만을 찍으면 대성공일 것 같다고 답했다. 지금 그럼 ‘대대대성공’을 이룬 거다. 그때 샌드박스 쪽에서 뭐라 그랬냐면 “원대한 포부를 갖고 계시네요. 열심히 노력하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웃음) 사실 당연한 덕담을 해주신 거고 나도 그게 현실성 낮은 원대한 포부가 맞다고 생각했다. 이 일 시작하고 의식적으로라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특별한 재주도 없는 내가 구독자 70만을 넘었다는 건 정말 기적적인 성공이고 인생의 행운이다. 구독자가 확 늘게 된 콘텐츠가 있을까? 초기에 가시적으로 확 늘었던 건 ‘그린 게임랜드 폐업’ 편. 철권의 성지라고 불렸던 오락실인데 2018년에 문을 닫았다. 오락실 키드이자 대전격투게임 마니아로서 너무 안타까웠다. 오락실 주인아저씨의 업적 등을 취재해서 많은 공감을 받았다. 정말 기뻤다. 그다음이 ‘임요환 VS 페이커’. “팬분들이여 싸움을 멈추소서. 페이커의 만개한 꽃 같은 플레이에 감동하면서 임요환이라는 깊은 뿌리를 기억해 주면 될 일입니다.” 라고 클로징멘트를 했었다. 그 구절 때문에 구독한 분들이 되게 많았다. 그렇게 초기 구독자가 확 늘었고 외부 섭외도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끝으로 ‘보는 게임’이 앞으로 어떻게 흐를 것 같은가? ‘보는 게임’이 이제 어느 정도 키워드화 됐다. 공중파 혹은 대기업 홍보 마케팅 문구로 사용할 정도로. 그러다 보니 사어화 돼가고 있다고 느낀다. 유행어는 뉴스에 소개되며 수명을 다 한다고 하지 않던가. (웃음) 얼마 전에 IPTV에서 ‘보는 게임관’을 신설했다고 들었다. 스트리머의 방송을 사다가 몇 시간 짜리를 통으로 틀어주는 건데 솔직히 회의적이다. 10대 20대가 열광할 콘텐츠를 4, 50대가 주력인 플랫폼에 틀다니. 인터넷 유행어가 뉴스에 소개되는 걸 보는 느낌이다. 구독자분들에게 내 별명은 ‘김펠레’다. 미래 예측을 항상 틀린다는 이유로. (웃음) ‘보는 게임’이라고 굳이 표현하는 게 점점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보는 게임’은 게임 향유의 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유저가 만드는 콘텐츠라는 게 전혀 신기하지 않은 세상이 되자 UCC라는 말이 사어가 됐듯이 ‘보는 게임’이라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편화 되어 왔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게임 향유의 형태가 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프리랜서) 박수진 ‘여성 인디 뮤지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음악에 관한 글을 주로 쓰며 현재는 대중음악 웹진 이즘의 필자로 활동 중이다.
- 북미의 루트박스: 한국과 다르면서 또 같은
관계자 A는 “미국게임업계의 모바일 게임을 경시하는 풍조는 오히려 업계관계자들 특히나 게임개발자들 사이에서 더욱 심하다”고 말하며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들은 좋은 개발자를 영입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작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보는 사람들이 많다. 인게임 결제가 있는 게임 자체에 대한 반감이 크다보니 오히려 수가 적고 따라서 로트박스 문제는 관심 밖이라는 느낌이 있다”고 말하며 루트박스가 커뮤니티 안에서 크게 회자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 Back 북미의 루트박스: 한국과 다르면서 또 같은 16 GG Vol. 24. 2. 10. 세계의 루트 박스, 루트 박스의 세계 온라인이 보편화된 이후의 비디오 게임에 대해 사행성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이미 새삼스러울 정도로 많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행성의 가장 큰 부분으로 지목되는 것은 뽑기. 우리에게는 가챠라는 이름으로 익숙하지만 익숙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이를 루트 박스 (Loot Box)라고 부른다. 아예 모든 종류의 루트 박스를 금지하고 있는 벨기에와 같은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라도 유럽의 국가들은 루트박스에 대해서 공적인 제재를 선호하고 있다. 루트 박스에 대해서는 엄격한 나이 제한을 두고 있는 독일, 일부 루트 박스에 대해서는 불법 도박으로 규정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아예 EU 전역에서 루트 박스가 금지되는 법안을 준비 중인 네덜란드 등이 대표적인 예다. 유럽 내의 큰 시장에서 그나마 가장 약한 제재를 가하는 곳은 영국이다. 루트 박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경고문구를 붙이는 선에서 처리되고 있다. 한국처럼 확률공개를 통해서 루트 박스를 규제하려는 국가도 있다. 2017년 5월 전세계 최초로 게임사들에게 확률공개를 의무화 했던 중국과 이를 따라 2023년부터 확률공개를 의무화한 대만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또한 확률공개를 의무로 만드려는 법안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루트 박스의 문제점에 대해서 인식하고 이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려고 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공적인 제재를 통해서 루트 박스를 통제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의의 주변에 있는 미국의 루트 박스 압도적인 규모의 게임시장을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루트 박스는 논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202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게임시장은 주로 싱글플레이 패키지 게임 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루트 박스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다. 물론 매출의 규모만 보면 모바일 게임들이 몸집을 계속 키워가고 있었지만 게이머 커뮤니티를 주도하는 여론 층은 콘솔에서 즐기는 스토리 위주의 게임에 대해서 고평가하고 논의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가챠가 포함된 모바일 게임이 시장을 완전히 주도하고 있던 한국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미국의 게이머 커뮤니티의 여론을 주도하는 층은 여전히 콘솔에서 플레이하는 싱글플레이어 게임에 대한 선호가 굉장히 높고 게임을 사서 즐기는 행위를 일종의 책이나 영화 같은 전통적인 문화상품과 비슷하게 생각한다. 작품을 하나 사서 ‘클리어’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렇다 보니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돈을 써야하는 ‘인게임 결제’에 대해서 극도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게임의 스토리를 완결성 있게 즐기는 것을 선호하기에 DLC 또한 ‘인게임 결제의 다른 이름’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아직 루트 박스에 의한 피해가 한국에서처럼 게이머 커뮤니티 안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거리까지는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루트 박스 자체가 화제의 중심에 올랐던 사건이 바로 2021년에 있었던 EA 내부문서 유출이었다. EA의 한 관계자가 내부문서를 캐나다의 공영방송 CBC에 제공하면서 누군가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사실들이 드러났다. 54페이지의 프레젠테이션 안에는 현재는 EA FC로 이름을 바꾼 축구게임 FIFA 시리즈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매출을 견인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거대 프랜차이즈에 대한 EA의 내부 평가는 명확했다. 루트 박스를 통해서 원하는 축구선수를 뽑아야 하는 FIFA 얼티밋 팀(FUT)이라는 컨텐츠가 사실상 게임의 시금석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플레이어들을 FUT로 인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고 기술해 놨다. 내부문서를 유출한 관계자는 루트 박스가 포함된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기쁘게 일할 수 없다고 내부고발을 한 이유를 밝혔다. 2024년 현재의 북미의 게임 커뮤니티를 봐도 루트 박스가 가장 뜨거운 주제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론을 주도하는 층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는 아닐지언정 루트 박스가 게이머들의 경험을 망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다. 사적인 제재에 나서다 미국사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저변에는 항상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유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 건국 초기 있었던 연방주의 논쟁부터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충돌했고 정부와 개인이 충돌해왔다. 그 과정에서 미국 사회는 정부의 공적인 행위를 통한 문제해결에 대한 기피와 불신을 품고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차상위계층에 대한 경제적 도움을 줄 때도 유럽은 세금을 많이 내 정부가 주도하는 복지를 강조하는 반면 미국은 개인의 기부가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그림을 선호한다. 그리고 이게 미국시장이 루트 박스를 대하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 연방거래위원회는 이미 2019년 루트 박스 판매에 대해서 소비자 보호 기능이 더 강화되야 한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딱히 공적인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상술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루트 박스가 문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공적 제재에 나서려고 하지만 미국은 아직까지도 사적 제재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집단소송을 통해서 루트 박스에 대한 견제가 들어가는 형국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에픽게임즈에 대한 소송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제기 된 집단 소송에 따르면 에픽게임즈는 포트나이트의 한 모드인 ‘포트나이트: 세이브 더 월드’에서 루트 박스를 판매했다. 소송을 진행한 측에서는 에픽게임즈가 루트 박스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 게임에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미성년자들도 어떤 상품이 나올지 모르는 채 구매를 하는 등의 ‘착취’를 당했다고 밝혔다. 에픽게임즈는 이후 패치를 통해서 루트 박스를 구매할 때 안에 있는 상품을 확인할 수 있게 바꾸었지만 이미 지금까지 구매했던 플레이어로부터 제기된 소송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픽게임즈사는 2021년 집단소송에서 합의에 이르렀고 2650만 달러 규모의 게임 내 재화를 지급했다. 루트 박스 상품인 ‘라마’를 구입한 모든 플레이어에게 8달러 상당의 V-Bucks를 지급했다. 로켓 리그에서도 같은 일이 있어 루트 박스를 구매한 플레이어들에게 1000 크레딧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서 게임 내 재화를 받은 플레이어는 각각 650만 명과 29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에픽게임즈는 발표했다. 소송은 효과적인 루트박스 규제인가 물론 성공적으로 합의에 이른 소송만 있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에서는 EA를 상대로 FIFA 시리즈의 루트 박스에 대한 소송이 제기됐다. 원고인 마크 서덜랜드 측은 EA가 소비자를 기만해왔으며 루트 박스는 불법도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 측은 EA가 기만적인 판매방법을 썼을 수 있지만 루트 박스 판매가 일종의 도박이며 따라서 불법이라고 규정한 서덜랜드 측의 주장에는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2023년 공개한 판결문에서 캐나다의 법정은 게임 내에서 통용되는 재화나 아이템은 ‘현금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사용 할 수 있는 재화를 걸고 하는 도박과는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물론 EA 측은 이런 판결에 대해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전개한 소송이 있었지만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모바일 게임 브롤 스타즈의 루트 박스가 미성년자에게 판매된 것은 불법도박이라고 주장한 레베카 테일러는 브롤 스타즈의 제작사인 슈퍼셀을 고소하지 않고 이러한 루트 박스 판매를 용인한 애플 앱스토어 측을 고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루트 박스를 구매할 때 쓰는 게임 내 재화인 ‘보석’은 도박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애플은 게임 내 재화 구매까지만 책임이 있고 이후에 게임 내 재화를 이용해서 하는 것들은 애플보다는 제작사 측에 책임이 있다고 명백히 밝힌 것이다. 물론 애플과 함께 양대 앱마켓을 이루고 있는 구글 플레이 스토어 측에도 비슷한 소송이 있었다. 같은 로펌에 의해서 제기 된 이 소송은 게임의 종류가 브롤 스타즈에서 파이널 판타지 브레이브 엑스비어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이 소송 또한 상술한 것과 같은 이유로 기각됐다. 실패한 소송을 보면 루트 박스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측이 루트 박스가 불법도박이라는 점을 입증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따라서 루트 박스를 판매하는 게임들이 현재의 갑자기 게임 내부에서 현금을 가져갈 수 있는 ‘환전소’를 만들지 않는 이상 소송은 효과적인 제재가 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미국 게임업계의 의견 업계 내부에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미국 게임업계에 현직으로 일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들어보았다. 관계자 A는 “미국게임업계의 모바일 게임을 경시하는 풍조는 오히려 업계관계자들 특히나 게임개발자들 사이에서 더욱 심하다”고 말하며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들은 좋은 개발자를 영입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작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보는 사람들이 많다. 인게임 결제가 있는 게임 자체에 대한 반감이 크다보니 오히려 수가 적고 따라서 로트박스 문제는 관심 밖이라는 느낌이 있다”고 말하며 루트박스가 커뮤니티 안에서 크게 회자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BM과 관련한 업무를 하고 있는 관계자 B는 “현재 게이머 커뮤니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30대 이상은 루트박스를 이용하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모바일 네이티브인 10대들은 거부감 없이 루트박스를 이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우려할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면서 “루트박스와 관련한 소송을 거 주체들이 대부분 10대 자녀를 둔 부모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부모도 모르는 사이에 루트박스에 돈을 탕진하는 일이 소송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나성인) 홍영훈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 게임 디자이너, 수익모델의 변화 앞에서
결국 온라인 게임의 수익 모델이 부분유료화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분유료화로 뭉뚱그려 취급되는 과금 모델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 Back 게임 디자이너, 수익모델의 변화 앞에서 04 GG Vol. 22. 2. 10. 어떤 게임 디자이너의 시작 때는 바야흐로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투탑이 한국 게임 시장을 견인하던 시기. 인터넷의 대중화와 더불어 두 게임이 워낙 잘나가고 있을 때이므로, 한국의 다른 게임 개발사들도 이 둘을 벤치마크하여 기회를 엿보곤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대다수 개발사들은 단품으로 팔 때에만 매출이 발생할 뿐 이후에는 별도의 비용을 받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서비스를 유지해줘야하는 RTS, 즉 스타크래프트보다는 리니지처럼 월정액제를 통해 꾸준히 매출을 올릴 수 있는 mmorpg를 대체로 선호했고, 나 또한 그런 mmorpg를 서비스 중인 회사들 중 하나에 게임 디자이너 (게임 기획자)로 입사했다. 오래 하는 게임 만들기 당연하지만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도 서로 바라는게 매우 다르다. 각자 다른 취향의 플레이어들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다양한 시도들을 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유지해야만 했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자주 찾고 오래 플레이하도록 만들 것’ . 온라인 게임 이전 세대의 단품 게임들은 대체로 멋지고 훌륭한, 강력하고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얼마나 오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사업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때의 게임은 한 번 팔면 그걸로 끝이니 플레이 타임과 매출의 관계는 데면데면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은 다르다. 사람들이 게임에 더 오랜 기간 머물수록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과금모델이 단품 판매가 아닌 월정액제이기 때문에. 한달 만에 모든걸 경험하고 돌아보지 않아도 될 게임을 만든다면 1개월치 월정액 밖에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몇 개월, 몇 년을 플레이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재밌는걸 만들자’라는 기본 위에, ‘오래 플레이하게 한다’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고려된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mmorpg들은 수십 시간에서 수백 시간, 때로 수천 시간까지도 플레이하는걸 전제로 한다. 가능하다면 평생 게임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그렇다면 일종의 ‘가성비’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가격 대 성능비. 여기서 가격이란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이다. 성능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오랜기간 게임을 플레이하느냐’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얼마나 적은 비용을 들여 만든 컨텐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을 플레이하게 만들었는가?” 이것이 월정액제 시대에 만들어지던 게임에 대해 주어지던 가장 중요한 질문들 중 하나이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과 비용 내에 만들어진 컨텐츠로 최대의 플레이타임’을 달성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채택된 방법은 게임에 단순 반복적 플레이, 즉 ‘노가다’를 많이 넣는 것이었다. 물론 일부러 지루한 컨텐츠를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같은 컨텐츠를 만들더라도 언제나 ‘가능한한 오래 플레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캐릭터의 게임과 플레이어의 게임 이게 가능한 이유는 mmorpg가 플레이어의 게임이기보다는 캐릭터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아주 큰 범주에서 두 가지로 나눠보자면, 플레이어의 실력이 좋아서 승리하는 게임과 캐릭터에 쏟은 시간이 더 많아서 승리하는 게임으로 나눌 수 있다. 편의상 전자를 플레이어의 게임, 후자를 캐릭터의 게임이라고 하겠다. 플레이어 게임에서 소위 말하는 ‘재능충’은 10시간의 플레이만으로도 남들에 비해 월등한 솜씨를 자랑하게 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100시간을 플레이해도 아주 조금 발전하는데 크치고 만다. 그러나 캐릭터의 게임에서는 노력의 효율이 대체로 모두에게 비슷하다. 같은 시간을 플레이한다고 할 때, 남들은 50레벨까지 키웠는데 혼자만 100레벨로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게임이 무 자르듯 플레이어의 게임과 캐릭터의 게임으로 깔끔하게 나뉘는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부분의 게임들은 플레이어의 게임과 캐릭터의 게임 중간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두드러지게 플레이어 게임의 비중이 매우 높은 장르가 있는데 대전격투 게임, FPS, RTS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캐릭터 게임의 비중이 아주 높은 대표적인 장르가 mmorpg이다. 플레이어의 게임은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플레이어에게 보상이 된다. 나의 실력이 이정도나 대단해! 또는 이 어려운걸 해냈어! 라는 기쁨이 게임을 더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캐릭터의 게임은 그렇지 않다. 캐릭터의 게임에서 주어지는 장애물들의 난이도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많이 들인다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그리고 장애물을 극복하면 게임 내에서 아이템, 경험치 등 뭔가가 주어진다. 아이템과 경험치에 부여된 일련의 ‘숫자’들은 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아이템과 경험치를 모아 점점 더 강해진다. 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라는 기분이 캐릭터 게임을 지속하게 하는 주된 동기부여 장치이다. 플레이어의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 본인이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캐릭터의 게임은 시간을 들여 과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 주어지는 보상을 통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면 된다. 캐릭터 게임의 대표적 장르인 mmorpg에서, 플레이어는 ‘강해졌다’라는 느낌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게임 내에서 ‘보상’의 형태를 통해 제공된다. 단순반복 플레이가 지루하다면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게임을 지속해야 할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노가다의 끝부분에 배치된 보상 때문이다. 다소 지루한 플레이를 일정정도 마치고 나면 얻게될 보상. 그 보상을 통해 내 캐릭터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기대감. 이런 메커니즘이 가장 많이 쓰인 장르들 중 하나가 mmorpg이다. 앞서 말한대로,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대비 매출의 관계는 결국 mmorpg 만들기를 ‘얼마나 노가다를 더 잘 만드느냐’의 문제로 바꾸었다. 더 잘 만들어진 노가다란 대체로 플레이어가 게임이 지겨워 떠나가기 직전까지 단순반복 플레이를 시켜 시간을 끌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멋지고 근사한 보상을 획득케함으로써 다시 게임을 지속할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것이다. 노가다가 낳은 현질 그리고 부분유료화 보상은 좋다. 그건 명백한 동기부여장치이다. 하지만 노가다는 싫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노가다를 피할 방법을 찾아냈다. ‘돈을 주고 남에게 시키는 것’이다. 획득하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걸리는 아이템이 있다면? 그걸 이미 얻은 누군가에게 돈 – 즉 현금 – 을 주고 구입하면 된다. 캐릭터를 성장시키는게 어렵다면?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내 캐릭터를 대신 플레이하여 레벨을 올리게 한다. (부주副主. 캐릭터의 본래 주인인 본주本主 에 대비되는, 대신 키워주는 이들을 일컫던 당시의 용어) 게임 내 화폐가 더 많이 필요한데 플레이를 통해 얻을 시간이 없거나 귀찮다면 마찬가지로 현금 거래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mmorpg는 ‘캐릭터의 게임’ 속성이 매우 강한 게임이고, 그렇기에 시간을 투자한만큼 강해진다. 이 시간의 대부분이 단순 반복적 플레이, 즉 노가다로 채워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강해지고 싶지만 노가다를 하고 싶지는 않다면? 사려는게 아이템이든 캐릭터이든, 돈을 주고 구입하면 된다. 당시 mmorpg에서는 지금과는 달리 모든 아이템은 거래 가능한 것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다양한 게임에서 유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특히 mmorpg에서 이러한 거래는 광범하게 일어났다. 인기가 높은 게임일수록 현질 – 아이템을 현금거래를 통해 매매하는 것 – 의 빈도와 비중이 높았다. 게임 속의 아이템 또는 고레벨 캐릭터와 현금을 서로 거래하기 위해 아이템 베이를 위시한 아이템 거래 전문 사이트까지 생겨났고 한동안 상당한 성업을 이루기도 했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의 활황은 게임 개발사들에게는 꽤 배아픈 일이었다. 내가 만들고 서비스하는 게임의 아이템과 재화와 캐릭터가 다른 서비스 (아이템 거래 서비스)를 통해 거래되면서 높은 중개수수료를 먹고 있다니? 심지어 개발사에게 아무런 라이선스나 로열티에 대한 합의도 없이? 물론 ‘배가 아팠다’라고 하면 너무 저속해보이니까 회사 입장에서는 점잖게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렸음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해야겠지만. 바로 이 ‘새로운 사업 기회’는 결국 mmorpg들이 월정액제 중심에서 부분유료화 중심으로 옮겨가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들인 시간 대비 캐릭터의 성장은 모두에게 같아야 한다’라는 유저들의 믿음으로 인해 부분유료화에 대한 저항이 매우 강했으나, 수년간에 걸친 인식 변화를 통해 지금은 ‘월정액제만으로 서비스되는 mmorpg’는 찾아보기 어려울정도로 보편화되었다. 한편, 한국 캐주얼 게임은 또 다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캐주얼 게임’이라는 용어에 대해 잠시 부연하고자 한다. 명확한 조어는 아닐지언정 당시 한국 게임 시장에서 ‘mmorpg가 아닌 장르의 게임들’은 모두 ‘캐주얼 게임’으로 통칭되곤 했다.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전혀 캐주얼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는데, 적절한 단어라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들지 않지만 어쨌건 그것이 널리 쓰이는 용어였으므로, 이 글에서도 ‘캐주얼 게임’이라는 것은 ‘mmorpg가 아닌 다른 장르의 게임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겠다. mmorpg가 한국 게임 시장에서 탄탄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걸 꾸준히 유지하는동안에도, 소위 ‘국민 게임’이라 불리우는 게임들은 mmorpg가 아니었다. BnB나 카트라이더, 포트리스 블루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mmorpg와 선명히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 mmorpg가 ‘캐릭터의 게임’인데 비해 이들 게임은 모두 ‘플레이어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이런 게임들은 월정액제 도입이 어렵다. 흔히 말하는대로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게임에 투자한 시간은 게임 내의 캐릭터나 캐릭터가 장비한 아이템 등의 형태로 남는다. 그것은 이후에 다시 그 게임에 접속할 경우 내가 여전히 강력한 위치에 있을 것임을 보장해준다. 심지어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내다 팔아서 현금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캐주얼 게임은 플레이어의 실력에 의존하는 게임이고 그렇기에 지금 내가 고수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졌더라도 이후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이 장르에서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게임 내의 그 무엇도 아닌 내 실력을 높이는 것이다. 결국 게임 내에 남는건 없는 셈이다. mmorpg에서 승리하기 위해 내 캐릭터가 필요하다면 그걸 이용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은 기꺼이 월정액을 지불한다. 하지만 캐주얼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게임 내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의 실력이다. 그렇다면 월정액을 지불할 이유도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이기에 게임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 등은 분명 게임을 지속하게 하는 동기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금을 유도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재미있었다’만으로 게임이 유저들의 결제를 이끌어내기엔 부족했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퀴즈퀴즈 초기의 월정액제 도입 실패 사례이다. 퀴즈퀴즈는 1999년 오픈 베타 테스트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바 있다. 초기 베타 테스트 기간이 어느정도 지나 상용화를 시도할 즈음이 되어 넥슨은 퀴즈퀴즈에 월정액제를 도입했다. 가격은 월 16,500원으로 당시 다른 게임들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그때는 게임 = 월정액제가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이 결정이 현명한 것이지는 못했을지언정 당시 관점에서 얼토당토 않은 수준의 이상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월정액제 퀴즈퀴즈는 게이머들에게 철저히 외면받는다. 놀란 넥슨이 곧바로 가격을 인하했음에도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던 퀴즈퀴즈의 인기를 반전시킨 것은 게임 본편을 무료 플레이로 전환하되 부분유료화의 초창기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부분유료화 도입 이후 퀴즈퀴즈는 상용화 이전에 보이던 인기를 회복하게 된다. 이후 “mmorpg는 월정액제, 캐주얼 게임은 부분유료화” 구도가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면 결국은 …? 지금까지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캐릭터 게임에서 요구하는 긴 플레이 타임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단순 반복적 플레이를 수반하게되고, 이를 우회하려는 유저들의 니즈는 초기의 반발을 딛고 부분유료화로의 전환을 대체로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플레이어 게임에서는 어차피 월정액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부분유료화가 태어났으며,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이 수익 모델은 시장에 환대받으며 안착했다. 그렇다면 결국 온라인 게임은, 캐릭터 게임이건 플레이어 게임이건 관계없이 어차피 나중엔 부분유료화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게이머로서의 나는 월정액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부분유료화가 요구하는 다양한 상품들을 살펴보고 내게 맞는 상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필요할 때마다 잦은 빈도로 이것저것 결제한 다음에도 남들보다 내가 뭔가 손해본게 아닐까? 같은 돈을 게임에 써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걸 고민하고 가끔 후회하는게 피곤하다.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런 측면에서 월마다 자동결제 해두고 컨텐츠에만 집중하면 되는 월정액제가 내게 맞다고 느낀다. 게임의 가장 코어한 부분까지 가서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핵심 컨텐츠까지 맛보기 위해 필요한 비용 또한 부담된다. 월정액제 게임에서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건 월정액 요금이 전부였다. 부분유료화 게임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아무리 적어도 월 수십만원인 경우가 보통이며, 많게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이 필요한 경우조차 있다. 하지만 어쨌건 게임 디자이너이자 게임 개발자로서 나는, ‘서비스 형태의 게임이 대체로 부분유료화로 쏠리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은 생각을 거쳐 꽤 납득하게 되었다. 잘 모르면서 어떻게든 만들던 월정액제 게임 시대 게임 개발 경험 상에서 월정액제 게임과 부분유료화 게임은 다른 점들이 꽤 있다. 월정액제 게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고 살펴보게 되는건 동시 접속자수이다. 특히 mmorpg는 동기화 플레이가 필수적이고, 그렇기에 동시 접속자수는 매우 중요한 지표로 취급된다. 그럼 다른 수치들은? 아쉽게도 월정액제 게임을 서비스하던 시기에는 그러한, 지표에 의해 유저의 행동을 살피는 일은 흔치 않았다. 왜냐면 … 그게 가능하다는걸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함께 게임을 만들던 이들은 대체로 단품으로 구성된 게임을 즐기며 성장한 이들이다. 한 번 구입해서 엔딩을 볼 때까지 플레이하는 형태의 게임들. 계속해서 서비스되는 형태의 게임에 대해 만드는 입장에서도 처음인 것들이 많았다. 아울러 이 시기는 인터넷 문화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기에, 지금처럼 서비스측에서 여러 유저 지표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교차해서 살피는 일들 자체가 아직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게임의 형태 자체도 지표를 뽑아 분석하기에 까다로운 지점들이 많았다. 전술했듯 이 시기의 게임들은 많은 경우 단순반복 플레이로 메워져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알게된 다른 이들과 때로는 우호적인 때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맺곤 했으며 그 자체가 게임이 제공하는 컨텐츠의 일부로 여겨질 때이다. ‘커뮤니티는 온라인 게임 서비스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금과옥조로 여겨지긴 했지만, 그래서 그걸 자극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어떤 일들이 가능한지를 게임 플레이에서 알수 있는 숫자만 가지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임팩트를 던졌던 게임인 World of warcraft가 나오면서 mmorpg를 컨텐츠로 채워넣는다는 개념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플레이어들은 노가다를 하면서 다른 이들과 교류를 즐기던 시절에서 벗어나 게임이 제공하는 여러 피쳐들을 플레이하게 되었으며, 이런 일종의 정형화된 플레이 패턴이 정립되면서 비로소 ‘분석하기에 좋은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의 mmorpg 게임들이 널따란 운동장에 축구공 몇 개 던져놓고 ‘재밌게들 노세요’하는 편이었다면, 와우는 운동장을 미끄럼틀, 시소, 그네, 정글짐, 철봉 등 다양한 놀이기구로 채워놓고 ‘뭐 하고 노실래요?’하는 식이다. 뭔가 좀 알게 된 부분유료화 게임 시대 그리고 대략 2010년 정도를 기점으로 모바일 게임 이슈가 PC 온라인 게임을 앞서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때 이후로 나온 게임들은 대부분이 와우가 제시했던 ‘컨텐츠로 가득한 놀이공간’의 개념을 따른다. 나는 와우의 임팩트가 던진 충격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게 새로 개발되는 게임에 보편화된 시점을 그 즈음으로 보고 있다. 이전 세대의 게임들에 비어 있는 공간이 많고 그 공간을 ‘커뮤니티 활동’이라 통칭되는 유저간의 상호작용이 메워주는 모양새였다면, 와우 이후에 나온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이 다른 플레이어에 주목하기보다는 게임 자체에 좀더 시선을 주길 원했고, 그 과정은 다양한 경로의 플레이 경로를 만들어냈고, 그 모든 플레이 경로에서 플레이어들이 하는 일들은 수치로 환산되어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된다. 아무 것도 없는 빈 운동장에 축구공과 함께 놓여진 이들이 누군가는 축구공과 관계없이 혼자 담벼락 옆에 서있을 뿐이고 또 누구는 축구는 안하고 스탠드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그 중 일부는 축구공으로 축구는 안하고 발야구를 하고 있을 때, 다들 왜 그러는지를 짐작하는건 얼추 가능하겠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놀이기구로 채워진 운동장에서 그네가 시소보다 유저가 머무르는 시간이 32%가량 길다거나, 어딘가에는 줄이 너무 길어 불편함을 겪고 있다거나, 정글짐에서 유난히 부상자 발생율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취해야 할 조치가 좀더 분명해진다. 이를 게임에 대입하면, 대부분의 퀘스트를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잘 수행하고 있지만 327번 퀘스트에서 유독 퀘스트 포기 확률이 15%를 넘는다면? 이 퀘스트에 뭔가 문제가 있으므로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37레벨까지 모든 클래스의 레벨업 속도가 일정하지만 37레벨 이후부터 마법사의 성장 속도가 유난히 느려진다면? 37레벨 직후의 퀘스트나 던전 플레이에 마법사를 어렵게하는 뭔가가 있으므로 찾아서 고쳐야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조치하기 위해 다양한 지표들이 개발되어 쓰인다. Organic user와 non-organic user, UV/NRU/ARU, DAU/WAU/MAU, PU/NPU/PUR, Retention Rate과 Bounce Rate, ARPPU 등등. 이들은 말하자면 게임 개발의 도구이다. 월정액제 시대에는 모호해서 분석하기 난해했던 여러 측면들을 자세히 뜯어보기 위한, 우리가 만든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도구. 어차피 게임 개발 게임 디자이너를 포함하여 게임 개발자들은 원래가 다양한 제약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다. 월정액제 시대에는 그게 동시 접속자수라는 지표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여러 현상들이었다면, 부분유료화 시대에는 게임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가급적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분석 도구들이 더욱 정교해졌다. 월정액제 시대에는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더 오래 머무르도록 해야한다는 제약 아래에서 일했고, 지금은 더 많은 상품을 팔면 좋다는 제약 아래에서 일한다. 둘은 언뜻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결국 매출이라는 같은 목표에 다름아니다. 이왕 제약이 주어진다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정교한 도구와 방법을 쓸 수 있는 쪽이 더 좋다. 한때는 모바일 게임들이 다들 너무 엇비슷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내 가설은 이러했다. 먼저 수익 모델은 고정된다. 가장 검증된 모델만을 쓰는게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익 모델이 안정을 추구하면, 수익 모델에 엮인 게임 디자인도 거기에 호응해야만 한다. 둘은 너무 긴밀하게 엮여있어서 따로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임 디자인에 변화를 줄 여지가 적어지면, 게임 자체가 다른 게임들과 엇비슷한 것만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러 모바일 게임들을 직접 플레이해보면 모두 조금씩 다른 구석을 가지고 알고 있다는걸 알게 된다. 장르 내에서 플레이 패턴이 상당히 비슷한건 부인할 수 없겠지만, 원래가 ‘장르’라는건 비슷한 핵심 요소를 공유하는 것들끼리 모아둔 것을 칭하는 말이다. 월정액제 mmorpg들을 만들던 시기 게시판에 모여든 유저들이 입을 모아 ‘요새 mmorpg들은 어차피 다 천편일률적이지 않나요?’하는 의견이 큰 호응을 얻었던 것도 기억한다. 난 그 ‘천편일률적’이라 불리우는 게임들 중 하나를 만들면서 같은 장르 내의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후의 수익 모델에 기대하는 것 결국 온라인 게임의 수익 모델이 부분유료화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분유료화로 뭉뚱그려 취급되는 과금 모델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기초적인 치장 아이템으로부터 게임 진행에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경험치 획득 효율 향상 효과 상품까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기간제 아이템이 한때는 높은 매출을 올리는 상품이었던 것도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최근에 이 분야에서 가장 핫한 이슈는 아마도 확률형 아이템일 것이다. 그러나 확률형 아이템조차 적절한 선에서 형성된 소위 ‘천장’과 공들여 만든 캐릭터가 연계하여 컨텐츠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그 대상을 구입하게 하는 게임이 있는가하면, 더 우월한 효과를 갖기 위해 컴플리트 가챠를 완성해야하는 형태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다름이 눈에 들어온다. 전자의 경우 자신이 구입한 컨텐츠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지만, 후자는 다른 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부분유료화 상품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나가겠지만, 가능하다면 ‘구입한 후에 후회하지 않는’ 방향을 지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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