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게임평론가의 솔직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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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10. 10.
평론은 애초에 대중적이지 않았다. 게임은 더욱 그럴 것이고.
평론이라는 영역이 대중과 유리되었다는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어찌보면 평론은 애초에 대중과 가깝게 있었던 적을 손에 꼽기 어렵기 때문이다. 출판이 그나마 활성화되었던 시절의 문학평론, 다양한 분야에 대한 비평이 이루어지던 잡지가 잘 팔리던 시절의 여러 평론 등의 옛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도 평론이 팔리던 시절에도 평론이 대중문화의 일부라고 이야기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대중적인 평론의 시절이라면 아무래도 영화평론의 전성기를 꼽을 것이다. 영화잡지가 지금보다 다채로웠던 시절도 따지고 보면 이 평론이 대중적이었느냐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대중적이라는 평가로 사람들의 기억에 영화평론이 남는 것은 평론이 대중적이었다기보다는 영화가 대중적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낫다.
평론이라는 이름을 단 모든 것들이 애초부터 대중성과 거리가 멀었는데, 디지털게임의 영역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평론이라는 이름을 단 많은 것들이 점차 사그라들어가고 있는 시점의 측면에서도 디지털게임의 평론이라는 말은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애초에 대중적이지 않은 글과 말의 방식이 단지 대중적인 매체를 다룬다고 해서 갑자기 흥할 리 없고, 안그래도 죽어가는 판이 단지 매체가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부흥할 이유도 없다. 여러 모로 게임평론의 생존 조건은, 좋지 않다.
교양으로서의 비평에 필요한 경험과 지식의 균형점
매체에 게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2014년부터니까, 나는 햇수로 어느새 10년차를 채운 게임평론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시작했던 일은 구르고 굴러 이름 뒤에 다양한 게임 관련 직함이 덧붙었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의 방향이나 의미, 가능성에 대해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잡지를 맡은 지도 만 삼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말과 글이 디지털게임을 이야기하는 데 필요하다고 쉽사리 선언하지 못한다.
따라서 게임평론이 어떻게 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도 나는 선뜻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수 차례 이어진 질문에는 한결같이 “씬”의 형성이라는 이야기를 해 오기는 했다. 이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현답이라기보다는 일반론을 주워섬기는 수준에 불과하다. 너무나 당연한 말. 읽는 사람이 늘고, 그러면 그 속에서 쓰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라는.
하나마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이 말은 중요하다. 게임평론, 비평의 쓸모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으니 필요의 당위성을 두 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이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원론 수준의 솔루션을 내지 못한다. 다만 ‘씬의 활성화’라는 원론은 각론에 들어가면 조금 더 다른 이야기를 담기는 한다.
이를 테면, ‘씬’이라는 일종의 구분짓기를 만드는 경계에는 ‘교양’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배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교양’은 비평을 존재하게끔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 때의 교양은 고정된 개념으로서의 지식이라기보다는 상호관계적이고 변증법적인 현상으로서의 의미다. 앞선 시대의 지식과 담론이 새로운 매체로 연장되고, 동시대의 경험과 의견이 이와 함께 버무려지면서 나타나는 지금 시대의 지식담론이다. ‘씬’을 만드는 조건에는 단순히 쓰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유무 뿐 아니라, 이들이 딛고 있는, 정의하기 어려운 이 교양이라는 조건이 추가된다.
교양이 매우 비정형적이며 유동적인 영역이라는 점은 게임비평의 현실적 존재를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다. 아주 단적인 이유를 먼저 꺼내보자면, 당장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를 비평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교양을 달성하기 위한 물리적 조건의 문제가 등장한다. 두 시간 내외로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디지털게임은 다른 매체에 비해 그 매체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비교불가능한 시간 소모를 요구한다. 스탠드얼론 패키지 하나를 클리어하는 시간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매우 작은 단위다. 패치마다 추가되는 요소들이 있고, DLC를 통해 확장되는 이야기가 있으며, 온라인게임의 경우에는 아예 릴리즈 버전마다 게임이 달라지기도 한다.
매체가 시간을 요구하는 조건 자체가 이미 험악한 난이도인데, 제한된 24시간의 하루를 똑같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교양을 위한 게임플레이와 기타 경험의 축적을 동시에 요구하는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요구가 될 수 있다. 게임과 학습이라는 두 영역의 교집합을 모두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는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둘의 균형보다는 한쪽으로 더 기울어진 평론의 생산이다. 3년째 비평공모전 심사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이 이 지점이다. 어떤 글은 오직 자신의 게임 경험만을 풀어놓으려 했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과 교감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로지 독자적이기만 한 경험은 비평이 아니라 감상에 머물게 된다. 또 어떤 글은 오로지 자신이 배운 일련의 지식체계에만 무게가 실리는 바람에 디지털게임 비평이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체득한 지식의 틀을 통해 게임을 보니 이렇다, 라는 적용에 머물기도 한다.
경험과 지식,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둘 모두가 필요한 것이 교양을 딛고 서는 게임평론의 전제가 된다는 생각은 굳건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대중성은 오히려 게임평론에 필요한 요소 중 이 둘보다 후순위에 선다. 경우에 따라서는 훌륭한 게임 경험과 이를 적절히 일반화하고 풀어내는 지식의 조화만으로도 대중성은 완성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성의 문제
비평과 평론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놓치는 또 하나의 균형점은 시장성이다. 어떤 이들은 비평이 경제적 문제와 무관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게임에 대해 말하고 글쓰는 일로 먹고사는 입장에서 이는 다소 아쉬운 소리로 들린다. 결국은 이 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리잡기 위해서는 들인 노력과 시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는 노동으로 자리잡아야 하는데, 그러한 부분이 고려되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학계와 같은 곳은 역으로 그런 시장논리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논리와 지식의 생산을 위해 일종의 소도와 같은 형태로 연구자를 보호하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긴 하지만, 게임비평과 같은 경우는 아직 그와 같은 보호논리 안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더 슬픈 것은 오히려 그 학계라는 곳 또한 평론과 마찬가지로 이미 최초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많이 엇나가 있다는 점이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기보다는 사업실적으로까지도 평가받는 공간에서 경제적 문제와 무관한 비평의 성립이 가능할까?
때문에 지금의 게임평론가는 작게는 자신이 먹고살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법, 좀더 넓게는 앞서 말한 형이상학적 의미의 “씬”의 형성이 현실에서 어떻게 다른 경제적 주체들과 관계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해법을 가져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의무를 등에 지게 된다. 단순히 말과 글을 준비하는 일만으로도 벅찬데, 그러한 결과물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어떻게 관계맺는지까지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일을 생업으로 가져가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두 가지의 방법이 현실에 존재한다. 전업이 아닌 부업, 혹은 취미로 게임평론을 수행하는 것이 첫 번째다. (실제로 나도 처음 시작이 그랬다.) 하지만 이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미 교양으로서 평론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요구하는 시간을 생업에 나눠 써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생산물로서의 평론이 경제적 가치로 직결될 수 있는 루트 – 이를테면 최근의 유튜브 운영 – 같은 방식이 실제 존재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는 다분히 어려운 문제다. 보다 빠르고 감각적인 매체로서 자리잡아가는 인터넷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교양으로서의 다소 느리고 무거운 감각의 게임평론을 안착시키는 것을 장담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수익을 노린다면 보다 자극적인 형태의, 이를테면 강한 어조로 ‘똥겜’을 욕한다던가, 별점을 통해 줄세우기를 한다던가, 혹은 게이머 커뮤니티와 같은 여론의 흐름들이 원하는 방향에 편승한다던가 하는 방식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는 교양으로서의 평론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이 나타날 수도 있겠고 또 그러한 노력이 없다고 이야기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이것이 게임평론의 살길이다 라고 자신있게 주장하지는 못하겠다.
다시 일반론으로
현재 전업 게임평론가, 게임연구자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고민하는, “게임평론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는 그래서 다시 교양으로서의 평론이 어떻게 하면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남을 것인가 라는, 게임 자를 뗀 평론의 생존 일반론 편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평론이라는 것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유지 가능하게끔 만들고 그 영향력이 다시금 게임제작자, 이용자들에게 미치게끔 하려는 일은 결국 ‘게임’ + ‘평론’ 이라는 두 개념 중 ‘평론’을 살리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특수성으로서의 ‘게임’은 일반론으로서의 ‘평론’을 활성화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할 것이다. 가장 많은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고, 산업적으로 가장 큰 매출의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게임’ 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에서 대중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해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비단 게임평론가들 뿐 아니라 평론이라는 것의 사회적 기능을 인지하고 그것에 일련의 의무감을 지닌 모두가 함께 해 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아니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오히려 ‘게임’ 평론가는 차라리 다른 영역에 비해 조금 더 나은 인프라를 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게임연구자,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단 것이 10년 전이었고, 이런저런 활동 끝에 한 가지 해법으로 게임제너레이션이라는 잡지를 시작한 것이 3년 전이었다. 감히, 정말 감히 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한 매체의 영향력에 다른 벡터를 부여할 수 있는 평론이라는 힘을 부여하는 데 있어 10년 전 보다는 먼지만큼이나마 나은 디딤돌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온 경과를 뿌듯해하기엔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은 절벽이 더 높고 두터워 보인다. 현실의 전업 게임평론가는, 보통 이러한 고민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