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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 Back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01 GG Vol. 21. 6. 10. 바야흐로 오늘날 게임업계의 키워드는 메타버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게임지에서 일하는 필자도 하루에도 몇 통씩 메타버스 관련 보도자료를 받는다. 오전에만 한국콘텐츠진흥원, 버추얼휴먼,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그리고 에픽게임즈 코리아로부터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담긴 보도자료를 받아서 읽었다.그래서 대관절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보도자료는 대답이 없다. 메타버스는 최근 만들어진 개념어가 아니다. 접두어 메타(Meta)에 세상을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메타버스는 ‘초월적 세상’ 정도로 읽을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메타버스를 "유저간 공유되는 영구적인 3차원 가상 공간을 현실 세계와 연결해 만들어진 미래의 인터넷" [1] 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에 메타버스를 알리는 데 앞장서는 김상균 강원대 교수는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 [2] 라고 썼다. 최근 뜨는 용어로 부각된 메타버스를 완전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메타버스가 약속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이라는 들썩임에 동조하기 어렵다. 메타버스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이미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제공하고 있어서 ‘새로운’ 감각을 받지 못했다. 또 과문한 탓에 아직 게임과 메타버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했다. 게임이라는 매체는 오래전부터 디지털 세상에서 유저간 공유되는 3차원 가상 공간을 제공해왔다. 어쩌면 게임이야말로 메타버스의 프로토타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오늘날 메타버스를 아젠다로 삼은 기업들은 대부분 게임사이거나 게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젠슨 황은 GPU와 메타버스 플랫폼 <옴니버스>를, 팀 스위니는 언리얼엔진과 <포트나이트>를, 마크 저커버그는 오큘러스 헤드셋과 <호라이즌>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업계가 그간 게임이라고 호명하던 대상을 달리 불러야 할 까닭은 되지 않는다. 필자는 다소 확정적으로 오늘날 메타버스라는 마케팅 용어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행어가 모이는 메타버스… 과연? 이런 와중에 ‘초월적 세상’의 화폐를 NFT, 대체 불가능 토큰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상당히 활발하다. 현재 생태계에서 메타버스는 기업들이 자사 콘텐츠에 기존 화폐가 아닌 NFT를 도입하기 유리하도록 활용되고 있다. 일찌감치 블록체인 사업에 뛰어든 위메이드는 <미르4> 글로벌 버전의 NFT 결제를 지원할 예정이다. 네이버제트가 서비스 중인 <제페토>는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다른 유저와 만나 점프, 슈팅, 라이딩 게임을 할 수 있다.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인앱 재화가 있고, 페이팔 계정을 통해 재화를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다. 현행 게임법은 사행성을 띤 게임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페토>는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네이버제트는 <제페토>가 게임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가상세계 플랫폼의 법적정의를 분명히 하고 게임과 구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3] 고 제안했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 일이다. 게임 생태계 일각에서는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게임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답을 찾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법에 가상세계를 어떻게 제도에 담을지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2021년 메타버스라는 방패를 들고 섰다. 그리고 필자는 <제페토>와 뒤에 살펴볼 <세컨드라이프> 의 지향점은 유사하다고 본다. 규제 당국은 암호화폐와 관련한 룰이 없어 난감하다. 스카이피플은 거래소 없이 자율등급을 받아서 게임을 연 뒤 게임 밖 NFT 거래소를 열어 아이템을 판매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파이브스타즈>는 15세 등급으로 운영됐고, 거래소 운영을 확인한 게임물관리위원회는 게임의 등급분류를 취소시켰다. (6월 23일 스카이피플은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했다. [4] ) 7월 국회에서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가격을 암호화폐로 사고파는 것이 합당한지를 놓고 토론회가 열렸다. 이렇게 메타버스의 이름 아래 몇 년 동안 업계에서 유행했던 개념들이 하나로 모이고 있다. 메타버스는 VR과도 밀접하다. 전진수 SK텔레콤 메타버스 컴퍼니장은 “VR도 메타버스로 가는 여정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듣고 VR에 대한 업계의 회의가 떠올랐다. 정부는 실감형 콘텐츠를 미래 먹거리로 보고 적잖은 공적 자원을 투자했다. 정부는 작년 실감형 콘텐츠 육성에만 1,500억 원을 투자했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K-실감형 콘텐츠는 없다. 그런데 조사에 따르면, 2019년 연간 매출액 10억 원 미만인 VR 관련 회사가 68.7%다. 이 중 ‘1억 원 이상 3억 원 미만’이 23.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100억 원 이상 매출 기업은 전체 조사대상 중 6.3%, 4개 업체에 불과했다. [5] VR은 언젠가 크게 뜰 수 있고, 메타버스 콘텐츠의 톱니바퀴가 되겠지만, 오늘날 언급되는 장밋빛 전망은 대중이 실제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곳에 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초월적 세상’인가? 가장 우려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 있다. 메타버스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사용자 생각은 얼마나 하고 있냐는 것이다. 메타버스 IP의 소유권은 기업이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기업이 철저하게 소유권을 가지는 ‘초월적 세상’에서 유저들은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이윤 창출을 지상과제로 삼는 기업들이, 돈이 안 돼서 메타버스를 ‘섭종’한다면 메타버스에 진심이던 사람들은 세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블리자드는 2018년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공식 e스포츠 리그를 즉각 폐지해버린 적 있다. 비록 그 수가 주도적인 e스포츠보다 적었지만, 선수와 팬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메타버스의 최우수 사례로 알려진 <마인크래프트>의 청소년 이용 불가 사태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바뀐 MS의 정책에 의해 미성년 회원들이 게임이 즐길 수 없게 되었다. 10년 넘게 유지 중인 셧다운제의 비합리성과 별개로 MS는 이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미성년자들을 차단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아울러 콘텐츠 산업은 흥행 산업이다. AR이 뜰 것 같았지만 널리 성공한 콘텐츠는 <포켓몬 GO> 하나였던 것처럼, 우후죽순 등장하는 메타버스 콘텐츠가 모두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혹 <제페토>에서 <로블록스>로 또 <마인크래프트>로 디지털 국경을 넘나드는 정력적인 유저층도 존재하겠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이 원하는 그림은 아닐 것이다. 게임이 메타버스의 프로토타입이라면, 넷마블의 스토리 플랫폼 〈BTS 유니버스 스토리〉가 모든 메타버스가 뜰 수 없다는 주장의 적절한 근거가 될 것이다. 사용자들은 그저 IP가 좋아서, 홍보모델의 팬이라는 이유로 그 콘텐츠에 애착관계를 가지고 오래도록 붙잡지 않는다. [6] 코로나19가 끝나도 메타버스에서'만' 만나시겠습니까? 한편 코로나19를 극복하려는 여러 모색은 세간의 메타버스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건국대 총학생회는 가상 캠퍼스를 만든 뒤 그곳에서 축제를 진행했고, 트래비스 스콧은 <포트나이트> 안에서 가상 콘서트를 열었다. BTS 멤버들도 <메이플스토리>와 <서든어택>으로 아미와 만남을 가진 적 있다. <마인크래프트>로 졸업식을 연 일본 초등학생 사례도 있다. 이러한 이벤트는 메타버스의 사례로 자주 호출되지만, 코로나19로 발생된 제약을 극복하려는 대체재 성격이 강하다. 건국대 학생들에게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에도 메타버스 축제를 열자 한다면 과연 기뻐할까? 코로나19가 끝난 뒤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을 언택트로만 보려고 할까? 이전부터 뮤지션들은 인터넷으로 팬들과 소통하지 않았나? 또 <마인크래프트>로 졸업식을 연 학생들은 분명 귀엽고 독창적인 시도를 했지만, 알려진 총인원은 8명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인류는 코로나19와 그로 빚어진 고난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고, 조금씩 그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로도 우리는 언택트 라이프를 이어나갈까? 필자가 봤을 때, 판데믹은 온라인 소통의 이점을 재확인해주었을 뿐이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전격 이주하는 출발점은 아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가 메타버스는 현실의 삶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해서 매일 밤 <클럽하우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 시국’을 뚫고 만났다는 유의 사례는 상당히 많다. “코로나 사태에도 붐비는 클럽과 헌팅포차”를 보면 알 수 있듯 “인간은 신체를 가졌기에 (중략) 지난 5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모이는 경향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 [7] 이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8]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는 실제 만남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토론이 메타버스의 밸류에이션을 바로 매길 수 있다 메타버스라는 신조어에 대한 토론도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배달 어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평점을 남기는 것도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을까? 에 국순당 주점 광고를 하는 게 메타버스인가? 어디까지가 메타버스이며, 메타버스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직 메타버스에는 규범적, 기술적 의미에 대한 정의가 부족하다. 미국의 린든 랩에서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세컨드 라이프>는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유무형의 가치를 실현시키고, ‘린든 달러’를 현금화 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다. 당시 <세컨드 라이프>가 게임인지 소셜미디어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 토론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대두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단일 플랫폼의 온라인 시뮬레이션보다는 라이프의 영토를 온라인 그 자체로 확대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세컨드 라이프>를 소셜미디어가 아닌 게임으로 분류하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메타버스가 일반화된 미래에 <세컨드 라이프>를 메타버스의 원류로 분류할 지도 모른다. 2007년, <세컨드 라이프>는 한국에서도 공식 서비스를 진행한 적 있다. 당시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여성가족부 3개 부처가 한 자리에 모여 <세컨드 라이프>를 어떻게 볼지 회의를 연 적 있다. 지난한 논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보자면, 린든 화폐의 환전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린든랩은 한국 공식 서비스를 2009년에 마쳤다. 이와 별개로 <세컨드 라이프>의 접속자 규모는 감소했다. 앞으로 우리가 메타버스의 벨류에이션을 매길 때 <세컨드 라이프>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어떤 장벽이 작용했나, 사용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기업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앞서 살펴본 <제페토> 문제를 볼 때도 함께 비춰봄직하다. 마치며 메타버스에 ‘기회의 땅’이나 ‘골드러시’ 같은 수식어가 붙은 보도를 본다.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 한다. 19세기 금을 따라 서쪽으로 ‘러시’한 개척민 중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중에는 지하 깊은 곳에서 금을 캤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착각한 사람들이 캤던 것은 금이 아니라 유황과 철을 화합한 파이라이트, 황철석이었다. 진짜로 금이 나와서 대박이 터진 곳도 있었지만, 금이 동나자 이내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다. [9] 1821년,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그레거 맥그레거는 항해에서 돌아와 중앙아메리카의 포야이스라는 나라의 왕이 되었다며 ‘기회의 땅’ 포야이스의 국채를 사라고 홍보했다. 비옥한 토양에 사금이 물처럼 흐르는 곳이라며. 그러나 포야이스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10] 한 시장 조사 업체는 메타버스의 2025년 시장 규모가 2,800억 달러(약 315조 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달 기획재정부,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동으로 메타버스 TF를 꾸렸다. 언론과 시장은 메타버스에 대한 부푼 꿈으로 가득하다. 메타버스가 진정 잘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매운 사례도 한 번쯤 봐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족으로 붙여봤다. [1] 방승언, 「미래의 인터넷? '메타버스 게임', 거품일까 아닐까?」, 디스이즈게임, 2021.5.20. [2] 김상균, 「메타버스」, 플랜비디자인, 2020, p.23 [3] 한국콘텐츠진흥원, 「가상세계산업 관련법 개정 및 진흥법 제정방안 연구」 (2011) [4] 김한준, 「스카이피플 '파이브스타즈', 게임위에 집행정지 가처분 승소」,지디넷코리아, 2021.6.24. [5]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가상현실 게임사업체 실태조사」 [6] 김재석 「BTS 유니버스 스토리, 흥행 저조의 이유는?」, 디스이즈게임, 2020.10.7. [7] 유현준, 「공간의 미래」, 을유출판사, 2021, p.13 [8]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p.544 [9] https://ko.wikipedia.org/wiki/%EA%B3%A8%EB%93%9C_%EB%9F%AC%EC%8B%9C [10] https://en.wikipedia.org/wiki/Gregor_MacGregor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 Back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08 GG Vol. 22. 10. 10. 직관의 묘미. 전통적인 스포츠에서는 이를 현장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오늘날에는 통신 기술이 발달해서 누구나 집에서도 스포츠 경기를 시청할 수 있지만, 현장이 아니고서는 경기장의 열기와 습도, 환호와 희열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실제로 야구나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경기장을 가보고 팬이 되었다는 사례도 많다. 이러한 맥락에서 e스포츠에서도 코로나 19로 현장 중계를 할 수 없었던 기간에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편집장: 먼저 간단한 소개와 짧게나마 걸어오신 행보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함영승 PD: 네. 저는 라이엇 게임즈에서 방송 총괄을 맡고있는 함영승이라고 합니다. 4년 반 전에는 MBC에 있었고, 스포츠국에서 다양한 종목의 중계와 콘텐츠를 제작했었습니다. 편집장: MBC 스포츠국에 계셨으면 다양한 종목들을 다루셨을 것 같은데, 스포츠 PD 시절에 중계하셨던 것 중에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함영승 PD: 인천 아시안게임 농구 제작을 담당했었는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 처음으로 남자 농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행했던 평창 올림픽도 기억에 남고요.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인 모터스포츠 중계를 했던 경험도 기억이 많이 납니다. 일반 시청자분들이 잘 모르는 종목이다보니 스토리 라인을 살려주고 싶어서 다큐, 예능과 같은 사이드 콘텐츠도 만들고 기술적으로도 국내 최초로 차량 내부에 설치한 카메라를 생중계로 보여주며 다양한 재미를 드리고자 노력했었어요. 편집장: 스포츠 PD를 하다가 게임 쪽으로 넘어오셨는데, e스포츠를 중계하시면서 ‘기존의 스포츠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좀 더 특별하다.’ 이런 점이 있으신가요? 함영승 PD: 일단 (e스포츠는)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방송보다도 실시간 피드백이 매서운 그런 장르입니다. 이 지점에서 분명한 장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시청자들이 원하는 어떤 부분을 놓쳤구나’라는 것을 아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겠죠. 다만, 그 노력이 즉각적으로 반영돼서 고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어요. 예를 들어서 한 번 만든 타이틀이 너무 별로라는 평을 받아도, 그 타이틀을 다시 찍을 수는 없는 거죠. 선수단과의 약속이 있으니까요. 저희는 1년에 타이틀 찍는 날이 딱 정해져 있는 수준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만들었던 방향성이 틀렸다는 거를 깨달아도, 적어도 한 시즌은 지나야하는 아쉬움이 있을 때가 있고요. 마찬가지로 그래픽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되게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 예를 들면 “보라색투성이다”는 비판이 있었죠. '잘못됐다면 다음 시즌에라도 보강하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바로 고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즉각적으로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고요. 그런 부분이 기존 스포츠 방송 대비 차이점으로 와닿았었습니다. 편집장: 그런데 야구도 보면 시청자 문자 참여가 있지 않나요? 야구 중계하실 때 받으셨던 피드백과는 차이가 있나요? 함영승 PD: 제가 주말에 MBC에서 메이저리그를 정규 방송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언제였냐면, 류현진뿐만 아니라 추신수, 박병호, 김현수, 오승환, 강정호 이렇게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대거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해였어요. 당시에는 그 선수들을 동시에 중계했거든요. 왜냐하면 시청자분들 중에서 1회부터 9회까지 즐기는 코어(core)한 야구 팬들도 계시지만, 한국 선수 플레이만 보고 싶은 팬들도 물론 계시거든요. 하지만 채널 숫자의 한계상 모든 한국 선수의 플레이를 동시에 보여드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실험적으로 모든 한국선수들이 뛰고 있는 경기의 피드를 다 받아서 마치 올림픽 중계처럼 우리 선수가 타석에 서거나 투구를 할 때 마다 옮겨가며 중계를 했습니다. 심지어 그때 박병호 선수가 마이너리그에 내려갔었거든요. 그래서 마이너리그 피드를 인터넷으로 따가지고 그것까지도 보여줬어요. 실시간으로. 그러면서 그때 어떤 걸 동시에 했냐면, 그 당시에 MBC에서 유행했던 프로 중의 하나가 마리텔이었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실시간 댓글 서비스까지 같이 넣은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이런 반응이 보이죠. 근데 그때는(전통 스포츠에서는) 보통 응원이 많아요. 선수에 포커스가 되어있죠. 그런 응원이 있는데, 여기는 응원 못지않게 다른 피드백도 많거든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큰 특징 중 하나인데, 야구나 축구, 농구는 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리그오브레전드(이하 LoL)는 기업이 만들어낸 종목이라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버그가 있다고 해보죠. 또는 버그가 아니어도 어떤 챔피언이 OP(Overpowered)이면 라이엇을 욕하게 되죠. 그런데 저희는 단순히 방송 생산자가 아니라, 라이엇의 구성원이다 보니까. 일단 게임 욕을 해도, 라코(라이엇 코리아)가 욕을 먹고, 방송하다 심판 판정에 이슈가 생겨도 라코가 욕을 먹고, 저희가 잘못을 해도 당연히 라코가 욕을 먹고, 그 모든 게 하나가 되어서 돌아오다 보니까 그런 지점들이 복합적으로 와 닿는 게 있습니다. 다만, 그래서 더 능동적으로 고민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물론 시청자분들께 실망감을 드리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편 방송국처럼 거대한 인프라를 갖고 있는 방송사들도 개국하고 몇 년 간은 크고 작은 방송 사고가 꽤 있었지만 현재 자리를 잡았듯이 저희도 시청자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내부적으로도 꾸준히 인력 및 인프라를 늘려가며 성장해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질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장: e스포츠의 현장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 여기는 이제 스타디움이 있는 공간이지만 경기는 온라인상에서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현장을 중계하는 PD님의 입장에서 e스포츠의 현장 무대를 다른 스포츠의 현장과 비교한다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요? 함영승 PD: 일단 같은 점은 관객분들이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흥분감이 있어요. 열기나 이런 특유의 현장감이 분명히 존재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경기가 펼쳐지는 무대 자체는 온라인상에 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실존하는 선수들은 눈앞에 있잖아요. 그리고 저희 경기장이 부스가 아니라 오픈 무대잖아요. 그래서 선수들의 육성이 막 들려요. 막 ‘빨리 어디 가자’, ‘뭐 하자’ 이런 다급한 목소리도 들리기 때문에 현장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차이점은, 어떻게 보면 e스포츠의 되게 큰 특징인데, 캐스터, 해설가의 육성이 현장에 울려 퍼진다는 거죠. 야구장이나 축구장 가보시면 팬들의 웅성거림과 응원 소리, 응원가 이런 것들이 가득한 게 현장감을 주죠. 대신 거기에는 캐스터, 해설가가 없어요. 소거돼 있어요. 그거(해설가의 목소리)는 오직 방송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죠. 그러니까 기존 스포츠는 굉장히 오프라인적 이벤트이지만, 완성체로 만들어지는 것은 온라인인 거예요. 반대로 e스포츠 현장에서는, 경기 자체는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크게 보이고 거기에 캐스터, 해설가의 보이스까지 더해져요. 그래서 현장 관람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e스포츠가 더 박진감 넘치게 느낄 수도 있어요. 그리고 현장감을 더 가미시켜주기 위한 장치들로 저희 같은 경우는 원소용을 잡으면 해당 원소의 조명으로 바뀐다거나, 바론을 잡으면 바론 조명으로 바뀐다거나 이런 방법들을 쓰고 있거든요. 결과적으로 저는 캐스터와 해설가가 e스포츠 현장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 견해로는 중계진분들은 장내 흥을 띄우는 역할까지 해오셨다고 봅니다. 축구나 야구, 농구 어느 종목과 비교해도 우리 중계진처럼 높은 텐션을 유지하며 중계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솔로킬, 한타 순간순간마다 역전 홈런 수준의 텐션을 뿜어내시거든요. 장내 분위기를 고조시켜야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역할까지 같이 하고 계신 거라고 봅니다. 편집장: e스포츠가 가지는 현장감의 특징으로 캐스터와 해설가의 목소리를 언급해주셨는데요. 그러면 이런 상상이 듭니다. 선수가 굳이 무대에 서지 않고, 캐스팅만 하면 어떨까요? 관객들이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함영승 PD: 일단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미 그런 문화가 저희 안에서는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에요. 아시겠지만 CGV 상영이 그런 건데요. 이번 결승 같은 경우에는 전국 CGV 상영관에서 예매율이 90% 이상 되어서, 거의 한 8천 명이 결승을 CGV에서 보셨어요. 편집장: 저도 그 현장을 보고 싶어서 갔는데 너무 놀랐어요. 함영승 PD: 진짜 생각보다 엄청 많은 분들이 그렇게 즐겨주고 계세요. (CGV에서) 선수는 없었어요. 선수는 없지만, 대형 스크린이 주는 느낌, 사운드, 어떤 장면이 나왔을 때 함께 환호할 수 있는 유대감 이런 것들을 이미 즐기고 계신 것 같아요. 뷰잉 파티(viewing party)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는 다른 종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플레이오프 기간에는 경기장 안에 못 들어가신 팬들도 꽤 많았어요. 근데 매진이 됐는데도 여기에(롤파크) 오세요. 롤파크라는 공간이 그런 문화를 제공하는 거죠. LoL을 좋아하고 LCK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서 즐길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만들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표를 못 구해서도 오신 거예요. 함성이 안에서 막 새어 나오죠. 그때 저희가 롤파크 입장공간 쪽에도 경기를 틀어놓거든요. 그날 상당히 많은 분이 경기장 바깥 공간에 함께 모여 보시면서 응원을 하시는 모습에서 놀랐습니다. 편집장: 그런 지점들은 직관 스포츠와 방송 콘텐츠 사이의 새로운 점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요. 스포츠펍에서 프리미어리그를 다 같이 본다던가 그런 것과 유사한 걸까요? 함영승 PD: 월드컵 거리 응원이랑 동일한 거긴 합니다. 같이 보는 게 더 재밌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LoL이 더 잘 성장하면, ‘언젠가는 롤드컵 결승으로도 광화문 거리 응원이 가능한 시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제가 LCS 결승 중계 현장을 갔다가 되게 인상적이었던 게, 결승을 미식 축구장에서 했어요. 휴스턴에 있는 대형 미식 축구장 NRG 스타디움에서 했는데, 경기장이 개폐식 돔이라서 닫고 반으로 가르더라구요. 반을 갈라서 한쪽에서는 저희가 이번에 강릉에서 했던 일종의 팬페스타(Fan Festa) 같은 걸 하는 거예요. 안에 스폰서존도 만들고 각종 이벤트도 하고 그러는데, 개폐식 돔이고 반을 막으니 얼마나 깜깜하겠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문화를 향유하는 거죠. 아시다시피 LoL을 만들어서 서비스하고, e스포츠를 하고, 아케인을 만들고 하는 이 모든 행위가, ‘게임으로 오프라인에서도 유저분들께 유의미한 경험을 제공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 현장에 갔을 때 강하게 느껴졌어요. 거기 오신 분들은 어떤 팀을 응원하고 거기에서 다양한 즐길 거리들을 체험하면서 더 깊이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문화에 대한 동질감, 연대감 이런 걸 갖고 돌아가시는 거죠. 그래서 저희도 이번에 ‘1박 2일간 팬페스타의 형태로 행사를 진행해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요. 물론, 기획을 하면서는 팬페스타 담당자 두 분이 ‘우리 둘만 손잡고 이 넓은 경기장에 서 있는 거 아닐까’하는 악몽을 꾸실 정도로 압박감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거의 7천 명 정도의 관객분들이 오셨어요. 이런 문화 행사, 축제 현장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이 저희에게도 큰 의미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접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온라인 콘텐츠임에도 현장을 통해 유대감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편집장: 사실 e스포츠라고 표현은 하지만, 결승전은 일종의 피날레로서 반드시 오프라인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 문화가 있죠. 그건 말씀하신 것처럼 몇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와서 함께 함성을 지르고, 열광하면서 만들어지는 동질감과 유대감 때문일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 시대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온라인이 미처 채우지 못하는 뭔가가 있지 않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면 e스포츠의 현장감을 이야기할 때, 말씀해주신 부분들이 첫 번째는 아나운서의 캐스팅이었고, 두 번째는 오프라인에서 팬들이 가지는 유대감이라고 한다면 다른 요인은 없을까요? 함영승 PD: 선수들과의 상호작용이요. 저희가 공교롭게도 코로나가 터지면서 온라인 중계를 좀 했었어요. 그런데 온라인 중계를 진행하는 동안에 오프라인에 대한 갈증을 느꼈던 게 비단 저희나 팬분들만은 아니었어요. 선수들도 느꼈어요. 선수들도 ‘롤파크 와서 경기하고 싶다.’, ‘관중들이 있는 곳에서 게임하고 싶다.’, ‘관중들의 그 열기를 느끼고 싶다.’ 선수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그런 게 뭐 때문이냐면, 관객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멋진 플레이가 나왔을 때 순간적으로 환호성이 확 터지잖아요. 그런 걸 선수들도 느끼는 거예요. 그 울림이 느껴지는 거죠. 그때 선수들도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거예요. 특히 발로란트 같은 FPS 장르는 그런 지점에서 매력이 있는 게, 라운드가 명확하잖아요? 그러면 킬을 냈을 때 바로 함성이 빵빵 터져요.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그럴 때 선수들의 액션도 다른 게임에 비해 되게 크더라고요. 그런 것이 현장에 챈트(chant)를 유도해요. 편집장: 그러니까 선수의 플레이가 관객의 챈트 같은 새로운 인터렉션을 만들고, 거기에 또 선수가 반응을 하는. 그게 현장성이네요. 그것도 굉장히 핵심적인 지점이군요. 함영승 PD: 네.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 들어왔을 때 관객의 함성이 주는 웅장함, 그건 저도 많이 느껴봤어요. 저는 팬으로서도 많은 경기장을 다녀봤는데요. 텅 빈 데 가면 선수의 목소리가 다 들려요. 그런데 선수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도 긴장감이 별로 없어요. 반면에 관중이 꽉 들어찬 데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있거든요. 그게 스포츠를 보는 재미를 한껏 배가시켜주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선수들과 관중이 함께 한다는 것이 아니라, 관중들과 선수의 상호작용이 현장감을 만드는 것 같아요. 코로나 시기에 팬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서 “하나, 둘, 셋, OO 파이팅!” 이게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어떻게 했냐면, 경기 시작 전에 직원들이랑 관계사, 외주사 직원까지 롤파크에 다 모여서 오디오 녹음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 둘, 셋, OO 파이팅!”, “하나, 둘, 셋, OO 파이팅!”. 그리고 결승전 앞두고 그걸 틀어본 적이 있었어요. 팬들이 오글거린다고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중에는 ‘저거 그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결국은 많은 관객들이 주는 전율 같은 걸 느끼고 싶은 거고, 내가 좋아하는 이 문화에 대한 연대감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선수들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앞에 와서 인사를 하고, 끝나고 나서 팬 미팅을 하고 이런 접점이 있죠. 마치 아이돌 팬 미팅이랑 비슷한 형태의 문화가 있거든요. 전통 스포츠는 경기 끝나고 선수들 퇴장 동선에 서 있다가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는 경우는 있지만 매 경기 직후에 팬 미팅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제가 보기에 e스포츠만의 독특한 문화 같아요. 편집장: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지점에서는 특히나 퍼즈(pause) 걸린 상황도 핵심적일 것 같네요. 다른 스포츠의 경우에는 오류가 나거나 우천 취소가 나거나 했을 때, 그냥 대기 상태로 오히려 현장감이 식는 분위기인데, LCK 중계에서 퍼즈는 본격적으로 캐스터와 팬들이 소통하고 상호작용이 가시화되는 게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함영승 PD: 일단 퍼즈 상황이 없어야 하는데 이번 시즌 게임 이슈 등으로 특히 자주 발생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퍼즈 시 상호작용 같은 경우는 중계진 분들의 노고가 담겨있는데 아무래도 실시간으로 시청자 반응을 모니터링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좀 더 시청자들이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 파악을 할 수 있죠. 그리고 성캐(성승헌 캐스터)님이나 해설자분들도 ‘어떻게 보면 부정적일 수 있는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세요. 이런 지점이 캐스터님이나 해설자분들께 부담이 되기도 하죠. 그래도 실시간 댓글 반응을 알 수 있고, 많은 분들이 노력해주시는 덕분에 그 시간을 치어플(응원 메시지)이나 영상 등으로 소통하면서 대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장: 현장성이라는 게 참 정의하기는 어려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힌트가 곳곳에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러면 결론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e스포츠를 현장에서 만드시는 입장에서, 관객이 꽉 차고 시끌벅적했던 경기가 끝나고 빈 경기장을 보시면 집에 가기 전에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함영승 PD: 코로나 시기에 선수들도 숙소, 관중들은 무관중 저희만 이 현장을 지켰어요. 그러면 그 텅 빈 경기장에서 주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때는 저희가 항상 출퇴근할 때마다 약간 우울한 마음을 살짝 갖고 있었거든요. 이 텅 빈 극장을 지키는 관리인 같은 느낌이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난 다음에도 딱 그런 느낌이에요. 연극 공연이 끝난 뒤에 텅 빈 무대를 보는 느낌. 그러니까 관중들이 오시면, 극장에 손님들이 와서 영화 보기 전에 팝콘 사고 기다리면서 설레는 그런 현장. 그거를 보면 그 에너지가 여기 있는 제작진들한테도 느껴지고, 선수들한테도 전달되는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팬 미팅이 있고, 웅성웅성하지만, 그분들 다 떠나고 나면 3층 롤파크는 무섭습니다. (웃음) 상당히 어둡고 그 생명력이 싹 빠져나간 공간이 돼서 그런 느낌을 받아요. *시즌이 끝나서 텅 빈 롤파크. 함영승 PD의 말처럼 어둡고 외로운 느낌이 든다. 편집장: 그러면 마지막으로 아주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PD님은 방송 제작자이신가요? e스포츠 운영자이신가요? 방송 제작과 현장성이라는 두 영역 모두 걸쳐 있으신 것 같은데요. 함영승 PD: 저는 하는 역할이 그래도 아직은 방송 제작자에 가깝죠. 편집장: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감상들을 굉장히 많이 이야기해주셨잖아요? 스포츠 중계 때랑은 좀 다른 현장성인 거죠. 함영승 PD: 그게 어떻게 보면 제가 이쪽으로 옮기게 된 가장 큰 계기이기도 한데요. 저희가 경기장을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 차이가 큰 겁니다. 그러니까 경기장을 갖고,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죠. 기존에는 전국에 있는 모든 경기장에 중계차를 갖다 대고 중계를 해도, 저희 경기장이 아니었어요. 그저 차려져 있는 경기장에 카메라를 대고 담아오는 거예요. 근데 여기는 밥상 자체를 차려야 해요. 그리고 차린 것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끔 고민하고, 이를 위해서 이벤트 팀이나 리그 운영이나 사업팀 모두의 행위들이 종합되어서 현장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KBO이자, 스포츠방송 제작사이자, 잠실 야구장이에요. 이 3개가 결합되어 있는 구조인 거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제가 이쪽으로 옮기게 된 것이에요. 편집장: 현장에서 고민하는 방송 제작자의 길을 걷고 계시는군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앨런 웨이크2> - 화려하게 돌아온 고전 컬트작의 속편
앨런이 갇혀있는 어둠의 장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에 앞서, 앨런 웨이크 시리즈의 개발사인 레메디 엔터테인먼트(Remedy Entertainment, 이하 ‘레메디’) 및 이 개발사가 핀란드 게임업계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 Back <앨런 웨이크2> - 화려하게 돌아온 고전 컬트작의 속편 15 GG Vol. 23. 12. 10. **본 기사의 영문 원문은 아래 URL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00359dad-c657-476c-a5fd-39a27a875ff3 <앨런 웨이크2>는 범죄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 앨런 웨이크를 주인공으로 하는 2010년작 게임이 오랜만에 돌아온 후속작이다. 첫편은 슬럼프로 고통 받던 앨런이 아내 앨리스와 함께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 브라이트폴즈(Bright Falls)로 휴가를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부는 호수 한 중간에 있는 작은 섬에 위치한 오두막에 머물기로 하는데, 아내와 싸우고 악몽 같은 저녁시간을 보낸 앨런이 자신이 운전했는지 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차 안에서 깨어난다. 브라이트폴즈의 주민들은 앨런에게 그 호수에 오두막 같은 것은 수십년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알려주는데, 그러한 가운데 앨런이 절박하게 아내를 찾아나서면서 복잡하게 소용돌이 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자신이 쓴 기억이 없는 책 속의 사건들이 앨런의 주변에서 현실로 나타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앨런 웨이크2>에서는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다른 차원에 갇혀 뒤틀린 버전의 뉴욕을 헤매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앨런은 게임의 두번째 주인공인 사가 앤더슨(Saga Anderson)이라는 FBI 요원이 개입하는 스토리를 만들어서 현실로 돌아오려 한다. 사가의 스토리 또한 브라이트 폴즈에서 시작되는데, 앨런의 또 다른 자아들이 앨런과 대적하면서 상황이 악화된다. 현실세계에 너무 많은 피해가 가기 전에 그들을 파괴해야 하는데, 이는 작가에게 달려있다. 3인칭 슈팅과 서바이벌 호러 장르에 속하는 이 게임은 그 템포나 액션장면의 페이스로 볼 때 <레지던트 이블>과 <사일런트 힐> 사이의 어디쯤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앨런이 갇혀있는 어둠의 장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에 앞서, 앨런 웨이크 시리즈의 개발사인 레메디 엔터테인먼트(Remedy Entertainment, 이하 ‘레메디’) 및 이 개발사가 핀란드 게임업계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레메디 엔터테인먼트 - 데스 랠리서부터 앨런 웨이크 첫편까지 레메디는 인기 프랜차이즈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핀란드의 개발사다. 1996년 처음으로 <데스 랠리>를 출시한 이래 레메디는 핀란드를 넘어 글로벌하게 이름이 알려진 개발사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한 덕도 없진 않았지만, 게임의 플레이 경험 뿐 아니라 게임 디자인에 있어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했던 레메디의 야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레메디의 발전에 있어 행운이 있었다면, <데스 랠리>가 비슷한 시기 <듀크 뉴켐 3D(Duke Nukem 3D)>를 출시했던 아포지(Apogee, 후에 3D realms가 된다)를 통해 출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듀크 뉴켐 3D>의 인기가 레메디의 거대 퍼블리셔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보장받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데스랠리>는 1990년대 후반 10만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이 성공은 레메디가 후속편 <맥스 페인(Max Payne)> 개발에 뛰어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2001년 출시된 <맥스 페인>은 핀란드 개발사로서는 처음으로 글로벌 규모로 큰 성공을 거둔 사례였으며, 게임 개발업이 “너드나 하는 일”로부터 “진지한 커리어”로 이동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맥스 페인>은 필름누아르 스타일의 스토리텔링과 배경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플레이어가 시간을 늦춰서 적보다 빠르게 조준할 수 있게 해주는 “불렛 타임”이라는 메카닉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002년 레메디는 <맥스 페인> 시리즈에 대한 판권을 천만 달러에 테이크투 인터랙티브(Take-Two Interactive)에 팔았고, 락스타 게임즈(Rockstar Games)는 2003년 후속작 <맥스 페인의 몰락(The Fall of Max Payne)>을 출시했다. 이 게임은 8백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로써 레메디와 맥스 페인은 핀란드 게임업계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비디오게임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기자 게임에 대한 연구 및 개발작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가 생겨난다. 2003년경부터 핀란드의 고등교육기관(HEI)에서 비디오게임을 강의나 수업 주제로 삼기 시작했고, 다수의 교육기관에서 학사 및 석사, 나아가 박사 과정까지 게임에 초점을 맞춘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레메디의 성공은 비디오게임 부문이 핀란드 내 일상에 스며들게 한 촉매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게 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핀란드의 게임산업 역사는 프로그래밍 및 게임 콘솔에 대한 취미가들의 관심이 증가했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90년대에 들어가서는 PC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오늘날까지 유효한 “데모씬(Demoscene)” - 일종의 컴퓨터 예술 하위문화 - 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프로그래머들은 데모씬 영역에서 일궈온 자신의 경험을 비즈니스로 만들었는데, 성공한 게임으로 데모씬을 만들면서 출발했던 최초의 개발자 집단으로는 <스타더스트(Stardust)> 및 <슈퍼 스타더스트(Super Stardust)>로 잘 알려진 블러드하우스(Bloodhouse)나 나중에 하우스마크(Housemarque)로 합쳐지게 되는 테라마크(Terramarque) 등이 있다. 하우스마크는 최근작 <리터널(Returnal, 2021)>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등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레메디나 하우스마크 같은 게임사들이 성공을 이어가면서 게임 산업과 교육, 취미, 데모씬, 그리고 커리어로서의 게임이 여전히 굳건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맥스 페인 이후 레메디는 새로운 아이디어 구상에 돌입했고 2년 뒤인 2005년 <앨런 웨이크>가 탄생한다. 마이크로소프트 게임 스튜디오가 협업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앨런 웨이크>는 2010년 XBOX 360용으로, 2012년에는 윈도우즈 PC용으로 출시되었다. 처음에는 기대했던 수준의 판매고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후 4백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하면서 이 게임은 서바이벌 호러 장르의 컬트작으로 자리매김한다. <앨런 웨이크>는 많은 부분에 있어 <맥스 페인>과 상반되게 만들어졌다. 레메디가 액션보다는 내러티브와 분위기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맥스 페인이 액션에 걸맞는 직업인 경찰이었던 것에 반해 앨런이 작가로 설정된 것도 다소 특이한 설정이었다. 나아가 <앨런 웨이크>는 에피소드식 구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레메디에 따르면 <앨런 웨이크>가 게임의 결말 이후 일종의 브릿지로서 연결될 DLC의 첫 시즌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앨런 웨이크 이후 - 2010년부터 2023년까지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본다면 2010년 출시 후 <앨런 웨이크>가 일으킨 파장은 곧장 후속편이 나올 수 있었을 정도라 볼 수 있겠지만, 퍼블리셔 입장에서 당시의 매출은 곧장 후속편 출시를 결정하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IP를 원했기 때문에, 레메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다. 2013년 레메디는 <퀀텀브레이크(Quantum Break)>의 2015년 출시를 공표하였으나 Xbox One 독점판매 게임들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출시가 연기된다. <퀀텀브레이크>에서 초점은 어둡고 거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201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깔끔한 SF로 옮겨간다. <퀀텀브레이크>는 시간 여행이 잘못되면서 시간상 균열이 점점 커지는 와중에 세계의 종말을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한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은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서 이를 막아야 한다. 레메디가 만들었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 또한 <앨런 웨이크>에 비해 액션성을 추구하는 3인칭 슈터 게임이다. 레메디는 <퀀텀브레이크>를 "엔터테인먼트 경험"과 "트랜스미디어 액션 슈팅 게임과 텔레비전의 하이브리드"라고 홍보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게임 내 "정션 포인트"라고 불리는 구간에 보게 되는 라이브 액션 텔레비전쇼와 게임간의 통합이다. 이 텔레비전쇼는 플레이어의 선택/결정을 반영하며 다음 에피소드의 진행을 위한 스테이지를 구축한다. 이처럼 하나의 작품 내에 2개의 장치를 병치한 것은 스토리와 게임플레이, 비주얼, 배우들의 연기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쇼를 게임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는 반응이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은 창의성을 제대로 밀어부칠 때 지불해야 하는 비용과 같은 것이고, 레메디는 그러한 시도로 유명한 개발사다. <퀀텀브레이크>는 Xbox One세대의 새 IP 중 <씨 오브 씨브즈(Sea of Thieves)>가 출시되기 전까지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퀀텀브레이크> 이후 레메디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결별하고 2017년 기업공개(또는 주식 발행)을 진행했다. <퀀텀브레이크>의 퍼블리싱 판권은 여전히 마이크로소프트의 소유인 가운데 2019년 레메디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앨런 웨이크>의 퍼블리싱 판권을 인수했다. 십여년에 이르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오랜 제휴관계 이후 처음으로 구상한 신규 IP는 P7이라 불리는 프로젝트였다. 동시에 레메디는 스마일게이트의 <크로스파이어(Crossfire)> 후속편의 스토리모드를 개발하고 있다고 공표했다. 제휴를 통해 운영 해온 기업으로부터 공개 기업으로의 전환은, P7프로젝트 작업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서 개발 지연에 의한 비용의 상승을 방지해야 함을 의미했다. <앨런 웨이크>는 출시되기까지 7년이 걸렸고 <퀀텀브레이크>는 5년이 걸렸다. 레메디는 P7프로젝트를 3년만에 해내면서 또 다시 성공을 일궈냈다. <컨트롤(Control, 2019)>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에서는 다시 한 번 초점이 변화했는데, 이번에 그 초점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의 변화 보다는 플레이어 주변에서 게임 세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맞춰졌다. <컨트롤>에서 주인공 제시 페이든(Jesse Faden)은 미국의 비밀 기관 연방통제국(FBC)의 초자연 현상 전담기구인 올디스트하우스(Oldest House)>를 탐험한다. 연방통제국의 새로운 국장으로서 제시는 현실에 침투해서 오염시키는 히스(the Hiss)라 불리는 적을 해치우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활용해서 환경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게임은 제시가 어렸을 적 남동생이 납치되었던 사건 및 FBC가 확보한 힘이 깃든 물체(Object of Power)와 관련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본부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히스가 올디스트하우스 바깥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면서 히스의 목적은 무엇이며 남동생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제시에게 달려있다. 어렸을 적 그녀가 남동생과 살던 동네는 오디너리(ordinary)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컨트롤>은 레메디가 제작했던 이전의 작품들이 그렇듯 스토리텔링과 세계관, 시청각적 재현 및 캐릭터에 대한 호평 등으로 상업적 성공과 비평단에서의 성공을 모두 거머쥐었다. <컨트롤>이 말 그대로 여러가지 방식으로 스토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세계는 결국 자신의 고유한 어둠의 장소에 갇힌 어떤 작가와 공유된 것이었다. 크로스파이어X 사태 <앨런 웨이크2>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기 전 레메디가 배워야 했던 아주 중요한 교훈이 하나있었다. 2016년 이후 레메디가 <컨트롤>과 함께 작업을 병행한 프로젝트였던 <크로스파이어X(2022)>의 스토리 모드 개발이다. 간단히 말해서 레메디는 오랜 작업기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모드의 시간과 템포가 느리고 캐릭터가 얄팍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스토리 모드 작업에서 실패했다. 여타의 개발사들도 레메디가 한 것과 다를 바 없이 할 수 있을 작업이었다. 즉 “레메디의 표식”이 그 스토리 작업에 없었던 것이다. 레메디가 이 경험으로 배운 교훈이란, 다른 이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개발사로서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크로스파이어X>는 2022년 2월에 출시된 후 16개월만인 2023년 5월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이 게임은 형편없는 콘트롤, 지루한 스토리모드, 클리셰로 가득한 멀티플레이 경험 등으로 인해 서구 시장의 소비자를 겨냥하는데 크게 실패했다. 서구에서 1인칭 슈팅 게임은 <콜오브듀티(Call of Duty)>, <헤일로(Halo)>, <오버워치(Overwatch)>, <배틀필드(Battlefield)>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키우려면 레메디가 만든 근사한 스토리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다. 앨런 웨이크를 위해 다시 한 번, 모든 힘을 모으다 레메디가 만든 게임의 역사를 살펴봤으니, 이제는 현 시점 우리의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앨런 웨이크>의 후속편과 위에 언급했던 것들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베데스다(Bethesda)가 특유의 스타일이 있듯 레메디도 마찬가지다. <앨런 웨이크2>에서 레메디는 기존 개발 작업으로부터 얻은 교훈과 게임이 줄 수 있는 경험의 한계를 밀어부치고자 하는 열정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켰다. 레메디 특유의 에피소드식 게임플레이, 타임라인과 캐릭터 스토리의 교차 등이 그에 해당한다. 나아가 플레이어는 스토리상에 개입하는 순서를 선택할 수 있으며 어둠의 시간동안 벌어지는 현실의 변화를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다. <앨런 웨이크2>는 어둠의 공간에 13년간 갇힌 작가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앨런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게임 첫 편에서 사건이 벌어졌던 브라이트폴즈에서 벌어지는 호러스토리를 쓰는 것이라 느낀다. 게임은 서바이벌 호러 장르 및 범죄물과 늘상 불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환경 속에서 디테일과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추는 레메디 특유의 스타일을 통합시켰다. 레메디가 에피소드식으로 재현되는 게임의 한계를 더욱 밀어부치는 방식 중 하나는, 게임의 스토리를 플레이어가 원하는 순서대로 완결지을 수 있도록 부여해준 자유다. 최초의 시작과 마지막의 엔딩은 사가 앤더슨과 앨런 각각의 관점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인물의 개별적 스토리는 약 20여 시간동안 게임이 진행되면서 점차 서로 얽혀간다. <앨런 웨이크>의 성공은 레메디가 <앨런 웨이크2>를 통해 자신들이 배웠던 교훈 및 강점을 제대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또 다른 성취를 이룬 것이라 평할 수 있다. 다양한 퍼즐의 시도 및 향후 이어질 속편 작업을 위해 구축한 특정한 경험 등 <앨런 웨이크2>의 수준 높은 게임플레이와 스토리텔링에서 나타나는 양질의 엔터테인먼트 경험 제공을 향한 개발자들의 열정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2023년은 다른 해였다면 여러번 상을 받았을 법한 놀라운 게임들이 대거 등장한 해였다. <앨런 웨이크2>는 2023년 후반기에 출시되었음에도 2023 Game Awards ceremony의 8개 분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올해 이미 Golden Joystick Awards 2023에서 the Critic’s Choice를 수상했다. 이 어마어마한 해에 <앨런 웨이크2>에 대적할 수 있는 게임으로는 <발더스 게이트3(Baldur’s Gate 3)>가 유일해 보인다. 레메디가 <앨런 웨이크2>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을 자명한 것이었고 그 결과물은 매우 훌륭했다. 레메디는 이 후속편을 통해 미래의 트렌드를 세웠고 고품질의 서바이벌 호러 장르를 전면으로 이끌어 냈다. 이는 레메디와 핀란드 게임업계에 좋은 소식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레메디가 일궈낸 연속적인 성공은 개발 환경이 갖춰지고 자원이 적절히 활용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엉터리 수익화 관행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레메디는 게임에 대한 열정과 애정에 시간과 공간이 확보되면 확실히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레메디는 라이브 서비스로부터 완결된 패키지 및 완성된 엔터테인먼트 경험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주요 기업 중 하나다. 게이머들은 60달러 - 요즘은 70달러 - 의 절반이 넘는 가격이 매겨진 반짝이는 말 스킨 따위보다는, 하나의 완결작으로서의 게임을 더 원하고 또 중시할 것이다.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 - 레메디 커넥티드 유니버스 마침내, 혹은 또 다른 시작이다. 레메디 게임의 스토리텔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친애하는 작가 앨런 웨이크와 어둠의 존재가 <컨트롤>의 두번째 확장판 “컨트롤:이계사(Control: AWE)”에서 등장함으로써 확인된 레메디 커넥티드 유니버스(Remedy Connected Universe, RCU)라는 세계관이다. <컨트롤>에서 플레이어는 FBC가 앨런 웨이크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을 찾을 수 있었다. 레메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샘 레이크(Sam Lake)는 <컨트롤>과 <앨런 웨이크>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컨트롤: 이계사>는 그 첫번째 크로스오버 작품임을 확실히했다. 샘 레이크는 전에 레메디가 수년간 커넥티드 유니버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유해왔다고 언급한 적 있는데, 마침내 <컨트롤>과 <앨런 웨이크>를 통해 그러한 측면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앨런 웨이크2>는 FBC 및 브라이트폴즈에서 벌어진 일들과 완전한 연결고리를 구축했다. FBI 요원으로서의 경력이 사가 앤더슨이 주목을 끌면서 브라이트 폴즈에서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이 유니버스를 통합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이 세계들은 보다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연결성은 스핀오프작인 <앨런 웨이크의 아메리칸 나이트메어>에도 등장하는데, 오디너리라고 불리는 마을(앞서 제시의 과거를 언급한 부분 참조)과 꽤 다루기 힘든 또 다른 캐릭터가 그것이다. 아, 그리고 브라이트폴즈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FBC의 청소부 아티도 잊지 말길. 레메디의 <컨트롤> 후속편 작업이 확정된 가운데, FBC와 제시의 이야기가 사가와 앨런의 이야기와 통합될 것임도 확실하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현 시점에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시점에 당신은 앨런 웨이크와 사가 앤더슨이 되어 손을 놓을 수 없는 환상적인 서바이벌 호러 게임 속으로 몰입할 수 있다. 준비하고 대비하되 빛을 너무 빨리 소진하지 말 것. 지난 수년을 통털어 최고인 호러게임이 여기에 있으며, 이 게임은 레메디가 지난 날 배운 교훈들을 통해 자신의 강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ostdoctoral Researcher) Henry Korkeila PhD, MSc, is postdoctoral researcher whose recent work has focused on the avatarization of our analog cultures as they inevitably turn into digital cultures. Special focus has been on avatars themselves, usage of avatars in their different contexts including multiple online video game genres. He has approached avatars through the types of capital, or resources, they have. His recent works in progress continue to explore the cultures of MMOs, and game accessibility and inclusivity at large.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우크라이나 사태의 de jure와 de facto
러시아 안에서 차르가 된 푸틴은 그렇게 러시아 바깥까지 제패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그런 장면은 역사 다큐멘터리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만 보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진짜로 사람이 죽고 다치기 때문이다. < Back 우크라이나 사태의 de jure와 de facto 06 GG Vol. 22. 6. 10. 역사가 매력적인 게임 소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시드 마이어의 〈문명〉,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토탈 워〉, 지금은 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가 배급하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모두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빚을 진 게임이다. 코에이의 에리카와 요이치(가명 시부사와 코우)는 〈삼국지〉, 〈대항해시대〉, 〈신장의 야망〉 등 동서의 역사를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었다. 동명의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대표되는 '대전략'(Grand Strategy) 부류의 게임들은 보다 넓은 시점에서 역사 속 국가들을 조망한다. 이런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주로 유라시아 대륙, 또는 아메리카까지 포함한 '전 지구' 위에서 한 국가를 선택하여 플레이한다. 플레이어는 그 나라를 경영하며 내정을 살피고 다른 국가들과 외교적, 군사적인 행동을 펼쳐나가며 특정한 목표를 이뤄나가게 된다. 2020년 출시된 〈크루세이더 킹즈 3〉는 대전략 장르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게임은 전략 시뮬레이션 전통의 국가 경영, 내정, 건설, 전쟁 등의 기능이 충실하게 반영된 가운데, 가문의 계보를 이어가는 재미도 준다. 플레이어가 선택한 가문의 '막장 드라마' 급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종영한 사극 〈태종 이방원〉의 캐치프레이즈에서 표현을 빌려오자면, 〈크루세이더 킹즈 3〉는 국(國)과 가(家)가 두루 담겨있는 게임이다. 이렇게 오늘날 〈크루세이더 킹즈 3〉의 스팀 평가는 '매우 긍정적', 메타크리틱 점수 91점을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이번 글에서는 〈크루세이더 킹즈 3〉와 우리 현실 세계에서 발생 중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000여년 전 중세 봉건사회와 오늘날을 일 대 일로 비교하는 것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2022년에는 국가지도자의 2세끼리 결혼을 시키지 않으며, 만에 하나 결혼을 한다고 해서 동맹이 형성되지는 않으며, 지도자의 자리도 (북한이나 가봉 같은 나라들을 빼고는) 세습되지 않는다. 게임 전문지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게임을 현실에 빗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필자 개인의 지정학에 대한 이해 또한 부박한 수준이다. 하지만 주로 논하려는 〈크루세이더 킹즈 3〉가 어떻게 국경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며, 뒤바뀌는지(국경을 ‘되찾기’ 위한 액션에 나서는지) 잘 풀어낸 게임이므로 조심스럽게 글을 써보려 한다. 두 개의 권역이 충돌할 때 전쟁은 시작된다 〈크루세이더 킹즈〉(이하 크킹) 시리즈에서는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가 게임 학습의 ‘스타팅 포인트’로 제시된다. 〈크킹 3〉에서도 마찬가지. 플레이어는 랭커스터, 얼스터에서 활동하던 공작들을 복속시키고 아일랜드 왕국을 선포한다. 그 다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대치 중인 브리튼 섬으로 넘어가 접수가 완료되면, 플레이어는 브리튼 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정복전쟁이 완료된 후에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게임을 시작한다고 가정했을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리력으로 아일랜드 다른 지역 공작들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다. 전쟁에는 언제나 명분이 필요하며, 그 명분을 만들어나가는 활동이 〈크킹3〉 플레이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명분을 충족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권역의 불일치’가 있다. 〈크킹3〉에는 규범 권역(de jure)과 실질 권역(de facto)이 있다. 규범 권역이란, 어떤 공작에게 이 지역부터 이 지역까지, 어떤 왕에겐 이 공국들을 아우른다는 일종의 관습적 권역이다. 신조어 ‘국룰’이 실제로 ‘국가의 룰’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통용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jure’를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러나 게임 속 유럽에서 국경은 칼로 딱 자르듯이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공작의 나라(공국)이 내 공국 영토를 침범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실제 지도 위에 그어진 지역을 실질 권역이라고 부른다.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이 일치하지 않을 때, 플레이어는 전쟁의 명분을 얻게 된다. 이 권역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사실상 〈크킹3〉의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왜 나의 봉토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인지, 왜 내 땅을 침범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이 전쟁의 일차적인 명분이 된다. 해당 국가가 다른 종교를 채택했다면, ‘성전’을 벌일 수 있다. 중세 사회에서 성전이야말로 전쟁을 선포할 가장 좋은 구실이며, 바티칸의 교황은 틈만 나면 근동(Near East) 사회에 십자군을 보내려 든다. 게임의 권역들은 만고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게 되고, 이 변화는 플레이어의 유불리에 작용하게 된다. ‘이 규범 권역은 우리 왕국의 것’이라고 유럽 국가들 사이에 널리 인정받을 수 있고, 플레이어의 폭정으로 인해 봉토를 받은 공작들이 독립을 선언한다면 결과적으로 규범 권역은 줄어든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규범 권역이 바뀌는 것을 보려면, 브리튼 왕국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령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되려면 100여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제(諸) 세력들은 호시탐탐 플레이어가 빼앗아간 고토(古土)를 수복하려 들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에게는 여러 옵션이 있다. 교황의 든든한 지지를 뒤에 업고 적들을 이단으로 꾀어내던가, 일부 프랑스 공작들을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만들던가, 규범 권역으로 돌아가 집안 살림이나 잘 신경쓰거나, 공국이 감히 설칠 수 없도록 더 강력한 제국을 선포하거나… 그리고 〈크킹3〉가 어려운 까닭은 그 작전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계자가 갑자기 죽어버리거나, 왕이 며느리로부터 대시를 받거나, 합스부르크에 시집보내려던 딸이 매독에 걸리면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 ‘국’에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가’에 소홀하게 되면, 플레이어가 선택할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크킹3〉의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은, 실제 역사가 보여준 모습을 훌륭하게 게임으로 빚어냈다. 역사에서도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이 불일치할 때 전쟁은 벌어졌다.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은 마땅히 되찾아야 할 땅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던 터전이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알라의 뜻을 받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자신들이 이끌어야 하는 땅이라고 주장하며 성전을 선포한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ISIS다. 전쟁은 어떻게 끝나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다. 이러고 싶지 않지만, 악마의 변호인이 되어보자는 심산으로 러시아의 입장에서 두 권역 이야기를 해보자.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규범 권역을 침범하고 있다. 우리는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치를 보장해주었으며, 오랜 기간 물적·인적 교류를 맺어왔다. 그런데 ‘키예프’ 루스 한 뿌리였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어 금지 법안을 발의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인구 17% 비중을 차지하는 러시아인들을 박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실질 권역과 국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역내 안보에 위협이 되는 국제 기구에 가입하려 들고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탄압 선봉엔 ‘네오나치’ 세력들이 있으므로, 이들을 축출하기 위한 ‘일부 군사작전’을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크라이나는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이 쓴다고 해서 필자가 ‘천사의 변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규범, 실질 권역을 모두 침범하고 있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별개의 주권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역내 평화를 위해 가지고 있던 핵탄두를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소련으로 보내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이고자 하는 욕망이 크고, (근시일 내 불가능하겠지만) 그를 위한 조약 기구에도 합류하고 싶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은 차별받지 않고 공존하고 있으며 독립을 선포한 두 곳의 공화국 역시 모두 러시아의 공작에 의한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비롯한 전국에 포격과 비인도적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양측이 서로 평행선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그 조율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크킹3〉에서는 전쟁을 끝내는 4가지 조건이 있다. ― (a) 승전은 전쟁에서 상대를 압도한 것이 확인될 때 플레이어가 자신이 내건 명분이 맞다며 ‘요구압박’을 하고, 열세에 놓인 상대방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루어진다. 게임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b-1) 무조건 평화는 상대방에게 지금까지의 전쟁을 ‘없었던 일로 하지 않을래’라고 묻는 것으로 개전의 명분에 따라서 다른 조건의 협상을 벌이게 된다. 주로 전쟁 중에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커맨드다. (b-2) 기독교 국가로 플레이하는 경우, 전쟁이 끝나기 전에 교황이 성전을 선포해도 전쟁은 없었던 일이 된다. (b)의 결과는, 개전 이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다. (c) 패전은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상대방이 이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플레이어는 그 사실을 무조건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플레이어는 잘못된 전쟁을 선포했음을 인정하는 배당금을 상대에게 보내야 하며 휘하의 신하들은 왕을 불신하게 된다. (b-2)를 빼고 보자면, (a), (b), (c)를 단순히 승무패로 나눌 수 있을 듯하며 현실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결과 또한 승무패로 분류할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러시아로부터 군대를 모두 물려내고 나토를 가입하고, 푸틴으로부터 배상금까지 얻어낸다면 (a), 러시아와 협상 테이블에서 어디까지가 ‘개전 이전 상태’인지를 합의한다면 (b), 나라의 운명을 러시아에게로 맡기기로 한다면 (c)가 될 것이다. 동맹은 동맹국의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의무이며, 〈크킹3〉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 중인 동맹국에 파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플레이어의 위신이 훼손될 수 있다. 게임에서 선전을 포고할 때 쓰이는 자원이 바로 위신이므로, 한동안 전쟁 명분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현실에서도 국제사회에서 동맹은 매우 중요한데, 벨라루스 또한 러시아와 함께 ‘군사작전’에 나섰다.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있는지 주종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릴 듯하다. 반면에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가 동맹국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를 보내고 경제제재를 가하지만, 직접적인 액션은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나토의 또다른 핵심 축인 독일은 패전 이후 처음으로 재무장을 선언했다. 새로운 국경을 만들겠다는 욕망은 게임에서나 〈크킹3〉으로 현대 사회의 국가 관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제국주의와 냉전이 세계지도에 한 일을 중세 배경 게임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플레이하고 싶다면 같은 개발사(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빅토리아〉를 찾으면 된다.) 아프리카의 ‘자로 잰 듯한’ 국경은 실제로 자로 잰 것이며, 이후 숱한 아프리카의 민족 분쟁이 그 줄긋기의 영향을 받았다. 아프리카의 숱한 민족분쟁에 관해서 〈르몽드 세계사〉는 “아프리카는 종족 자체가 사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국가를 만들기도 한다 (중략) 중앙집권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식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한다. 태국의 라마 5세는 ‘국가의 지도’를 편찬해 국민성을 만들려고 했지만, 국가의 가장자리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행정력이 전파되기 전까지 국가가 뭔지 관심이 없었다. 태국 정부는 냉전 시대에서야 산악지대를 넘나드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주민들을 명부에 등록했다. 국경은 산맥과 강줄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통치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러시아는 제국 때나 소련 때나 지금에나 부동항을 면한 흑해 연안의 도시들을 노리고 있다. 푸틴의 도박은 수많은 명분들로 포장되어있지만, 어찌 보면 본질은 러시아식 부동항 공략의 재현이다.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국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안에서 차르가 된 푸틴은 그렇게 러시아 바깥까지 제패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그런 장면은 역사 다큐멘터리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만 보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진짜로 사람이 죽고 다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르몽드 세계사」, 권지현 옮김, 휴머니스트, 2008 통차이 위니짜꾼 , 「지도에서 태어난 태국 – 국가의 지리체 역사」, 이상국 옮김, 진인진, 2019 CK3 Wiki, “Titles”, (2022-05-27) Steam, “Crusader Kings III”, (2022-05-27) Wikipedia, "Grand strategy wargame", (2022-05-2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UX를찾아서] 오버워치에는 미니맵이 없다
미니맵은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UI(User Interface)중 하나로, 게임의 상단이나 하단 구석에 항상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표시되는 작은 지도를 말한다. 특히 MMO(Massively Multiplayer Online) 게임이나 FPS(First Person Shooter) 장르에서 게이머의 시야는 1인칭 혹은 3인칭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미니맵이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확장된 버전의 전체 지도는 특정 버튼을 눌렀을 때 보이는 토글(toggle) 화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미니맵은 대부분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Head Up Display)로서 화면에 상시 표시된다. < Back [UX를찾아서] 오버워치에는 미니맵이 없다 05 GG Vol. 22. 4. 10. 미니맵은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UI(User Interface)중 하나로, 게임의 상단이나 하단 구석에 항상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표시되는 작은 지도를 말한다. 특히 MMO(Massively Multiplayer Online) 게임이나 FPS(First Person Shooter) 장르에서 게이머의 시야는 1인칭 혹은 3인칭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미니맵이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확장된 버전의 전체 지도는 특정 버튼을 눌렀을 때 보이는 토글(toggle) 화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미니맵은 대부분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Head Up Display)로서 화면에 상시 표시된다. 게이머는 미니맵을 통해 전체적인 게임 세계 속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주변 환경과 사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게임에는 크게 두 가지의 공간 감각이 동원된다. 아바타의 신체를 경유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얻는 감각을 지각된 공간감각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전체적인 게임 세계 속 스스로의 위치와 관계를 파악함으로서 얻게 되는 인지된 공간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맵은 그러한 두 차원의 공간감을 통합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미니맵은 게이머가 게임 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주며 게임의 그래픽이나 서사가 미처 채워 넣지 못한 공간감을 보조해 준다. 나아가 공간을 사회적 행위의 결과물로서 구성된 것으로 본다면, 게임 환경을 그려내는 3D 그래픽이나 프로그래밍 된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미니맵 또한 게임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 글에서는 게임 속 미니맵이 무엇을 그려내고 재현하는지 보다는 미니맵이라는 비유를 통해 조망하는 시점과 가시성이 어떤 위계 관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는 게임 내에 구현되는 공간을 넘어, 게임을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서열체계와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다만, 이 글이 이론이나 구체적인 분석을 포함하기 보다는 관련된 역사와 사건들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미니맵”과 같은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미니맵의 작은 역사 * 〈Rally X〉(1980) 우측의 미니맵(위)과 〈Defender〉(1981)(아래) 상단의 미니맵. 미니맵의 초기 형태는 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니맵은, 지금과 비교해서 굉장히 단순한 그래픽을 사용했던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들, 가령 〈Rally X〉(1980)이나 〈Defender〉(1981) 같은 게임들에서도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케이드 게임에서는 주로 단조롭고 비슷한 지형지물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미니맵은 지도의 역할보다는 근처의 적들을 보고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레이더 기능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 미니맵이 조금 더 ‘지도’와 유사한 형태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에 발매된 〈젤다의 전설〉에서 부터이다. 화면 좌측 상단의 회색 사각형은 젤다의 전설이 배경이 되는 하이랄의 전체 지형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의 초록색 점은 현재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구역이 전체 지형 중에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오늘날 다양한 정보와 기능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미니맵과는 달리, 당시의 미니맵은 플레이어의 위치 외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상호작용도 전무한 수준이었다. 1986년작 젤다의 전설에서 미니맵의 그래픽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동하더라도 플레이어가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초록색 점은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젤다의 전설〉(1986). 왼쪽 상단의 회색 사각형이 미니맵의 역할을 한다. * 〈젤다의 전설〉(1986)의 전체 맵. 이것이 미니맵에서 회색 영역으로 표시된다. 〈슈퍼 메트로이드〉(1994)에서는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해 플레이어가 탐험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플레이어가 이미 탐색한 지역을 붉은색으로 표시해주는 기능을 도입한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직 탐색하지 않은 미지의 지역을 가리거나 까맣게 남겨두어 정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전장의 안개(fog of war)는 1977년 작 〈엠파이어(empire)〉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지만, 이를 미니맵에 도입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평가받았다. * 〈슈퍼 메트로이드〉(1994). 우측 상단 미니맵에 플레이어가 지나온 지역이 붉은색으로 표시된다. * ‘전장의 안개’를 처음 도입한 〈엠파이어〉(1977). 이런 ‘전장의 안개’는 다른 게이머와 대적하는 멀티 플레이어 RTS(Real-Time Strategy) 장르 게임에서 자주 이용되는 게임 메커니즘이다. 아군 유닛을 전장의 안개가 낀 지역에 정찰 보내 시야를 확보하고 적군의 위치와 진입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이 같은 게임들에서 필수 전략으로 여겨진다. 일부 악의적인 유저들은 불공정한 방식으로 승리하기 위해 전장의 안개를 없애주는 불법 프로그램(맵핵; map hack)을 사용하기도 한다. * 아군이 정찰하지 않은 지역의 정보가 ‘전장의 안개’로 차단되는 〈스타크래프트〉(1998). 왼쪽 하단이 미니맵이다. 이런 ‘전장의 안개’가 적용된 미니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적인 지도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근대의 지도 제작은 식민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자주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과 타 민족과의 전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마치 RTS 대전 게임에서 전장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미지의 검은 땅을 정찰하고, 적군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도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축소하고 기호화 시켜 표현한 재현물이라면, 그러한 지도를 재현한 미니맵은 게임 공간의 재현, 그리고 지도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재현에 대한 재현이 된다. 2000년대 이후 MMO, RPG, 오픈 월드 어드벤처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에서 미니맵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포함하게 되었다. 도로, 몬스터, 적군, 친구, 퀘스트 가능 여부, 상점과 여관 등 건물들, 목적지까지의 거리, 방위 등 많은 정보들이 기호와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플레이어에게 제공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면서부터는, 화면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이런 미니맵이 유명 트리플-에이 게임 시리즈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7년, 한 코타쿠(Kotaku) 기자는 “지난 15년 동안 부상한 대악마, 비디오 게임 미니맵의 지배가 마침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2017년부터 줄줄이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 〈호라이즌 제로 던(Horizon Zero Dawn)〉, 〈파 크라이(Far Cry) 5〉에서 미니맵이 사라지거나 그 자리를 작은 나침반이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택에 대해 어쌔신 크리드의 디렉터 진 게스돈(Jean Guesd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미니맵에서 하나의 아이콘에서 다른 아이콘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방식을 깨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쏟은 노력과 자원 때문에 우리는 플레이어가 주변 풍경을 바라볼 수 있기를 정말로 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니맵을 나침반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나침반은 여전히 힌트와 정보를 제공하지만, 당신 역시 세계에 참여하고 더욱 관여해야 합니다.” 게임에서 미니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니맵이 세계로부터 눈을 돌리고 조잡한 아이콘과 목적지를 가르키는 화살표만 따라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처음 게임에 미니맵이 도입되었을 때, 게이머들에게는 비디오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일종의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게임이 등장하고 40-5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미 베테랑 탐험가가가 된 게이머들에게 미니맵은 오히려 세계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걸리적거리는 요소가 된 것이다. * 〈GTA 3〉 왼쪽 하단에 위치한 동그란 미니맵. 내려다보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 FPS 장르 게임들인 〈배틀그라운드(PlayerUnkown’s Battlegrounds〉(2017)와 〈포트나이트(Fortnite)〉에는 미니맵이 있지만, 〈오버워치(Overwatch)〉(2016)에는 미니맵이 없다. 2016년, 〈오버워치〉의 치프 디자이너 제프 카플란(Jeff Kaplan)은 왜 〈오버워치〉에 미니맵을 추가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초보 유저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앞으로도 미니맵을 도입할 생각이 없다고 답한 바 있다. 미니맵을 제공했을 때, FPS 장르에 익숙한 고수 유저들과 초보 유저들 간의 실력 간극이 더 크게 벌어지기 때문에 초보 유저들을 배려하기 위해 미니맵을 제공하지 않도록 선택했다는 것이다. 전장의 안개를 구현하는 RTS 장르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전 게임들에서는 정보 싸움이 승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다만 〈오버워치〉에서는 적의 위치나 진입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UI가 구현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고지대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운용하는 캐릭터 조합과 전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지대를 선점했을 때 적군에 비해 공격할 수 있는 각도가 잘 나온다거나 후방 유닛을 공격하기가 쉬워진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야를 확보해 진입경로와 전략을 파악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오버워치〉에서는 이러한 고지대를 선점할 수 있는 점프기나 z축 이동기가 있는 유닛들을 선택하는 전략이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오버워치〉에서도 미니맵과 유사한 화면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오버워치〉의 프로 레벨 경기를 시청하는 것이다. 공식 〈오버워치〉 리그는 게임 리그 시청자들에게 게임의 상황을 최대한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의 화면을 제공한다. 그러한 시점 중 하나가 바로 이 탑-다운(Top-down) 시점이다. 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 옆에 띄워주는 화면은 아니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미니맵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진영과, 유닛들의 진입 경로와 대치 구도를 아이콘을 통해 설명하는 화면이라는 점에서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 〈오버워치〉 리그의 탑-다운 뷰. * 〈오버워치〉 리그의 중계 화면. 뿐만 아니라 과거 〈오버워치〉 리그의 공식 중계 사이트였던 트위치(Twitch)에서는 〈오버워치〉 리그 올-액세스 패스(Overwatch League All-Access Pass)를 구매하는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시점과 각도로 경기를 시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준 바 있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스펙타클을 제공해주었다. 경기가 중계되고 있는 메인 화면과 더불어,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몸에 그대로 들어가 마치 그의 몸에 빙의한 듯한 시점으로 경기를 시청할 수도 있었고, 위에서 본 탑-다운 시점과 같이 위에서 모든 유닛들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정작 게임을 플레이하는 선수들의 캐릭터는 게임 내 중력법칙에 묶여 게임 속 땅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 했던 반면 (물론 특정 기술을 사용해 잠시 동안 공중에 떠 있을 수는 있다) 게임을 시청하는 사람과 중계진은 자유롭게 떠다니며 선수-캐릭터들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점에 대한 일종의 공간적인 비유로서, 프로 선수와 시청자 간의 높고 낮은 위치 설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오버워치〉 리그를 플레이하는 프로 선수 안에서도 고지대를 선점한 플레이어와 그렇지 못한 플레이어가 있는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선수와 리그 경기를 시청하는 시청자 사이에는 가시성의 격차가 존재한다. 〈오버워치〉의 플레이어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높은 지대로 올라가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지대를 선점하더라도 선수는 관객이 볼 수 있는 광경을 볼 수 없다. 반면 관객은 선수의 시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야와 정보의 불균형함은 제레미 벤담이 제안하고, 미셸 푸코가 근대적인 공간의 전형으로서 비평했던 파놉티콘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는 학교, 병원, 군대와 같은 공간들도 본질적으로는 파놉티콘 구조를 띄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감시 체계는 그러한 시설 안의 재소자들(학생, 환자, 군인들)을 유순하게 길들인다고 보았다. 파놉티콘 구조는 오늘날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정보의 세계에도 편재한다. 빅 테크 회사들이 이용자의 성별, 나이, 위치, 검색 기록과 시청 기록 등 갖가지 정보를 수집해 맞춤 광고를 내놓는다는 것은 오늘날 더 이상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버워치〉와 같은 대전 게임에서 미니맵이 사라지는 것은, 앞서 제프 카플란이 말했듯,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소수의 고수가 정보를 독식하는 것을 견제하고 게임이 극단적으로 서열화 되는 것에 맞서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여전히 이스포츠의 관객에게는 선수가 볼 수 없는 것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는 마치 신과 같은 눈이 부여된다. 물론 이러한 시선의 위계가 게임 리그를 시청하는 재미의 큰 부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절대적인 관찰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김지윤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신체적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게임 연구를 시작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을 써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 [Editor's View] 재현의 도구냐, 사행성의 도구냐를 묻는 오늘날의 디지털 주사위
알 수 없는 미래를 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음악과 문학, 영화 등 기존의 많은 매체들이 시간선을 따라 정해진 사건을 풀어가는 형태였던 것과 달리 디지털게임은 '알 수 없음'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왔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완벽하게 모사할 수는 없고, 제한된 방법으로서의 확률 계산을 통해 게임은 그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상황과, 그 상황에 놓인 인간의 머뭇거림과 결단을 그려내고자 한다. < Back [Editor's View] 재현의 도구냐, 사행성의 도구냐를 묻는 오늘날의 디지털 주사위 17 GG Vol. 24. 4. 10. 알 수 없는 미래를 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음악과 문학, 영화 등 기존의 많은 매체들이 시간선을 따라 정해진 사건을 풀어가는 형태였던 것과 달리 디지털게임은 '알 수 없음'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왔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완벽하게 모사할 수는 없고, 제한된 방법으로서의 확률 계산을 통해 게임은 그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상황과, 그 상황에 놓인 인간의 머뭇거림과 결단을 그려내고자 한다. GG 17호에서 우리는 디지털게임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던 운과 확률이라는 방식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수학적 알고리즘이 품고 있는 독특한 미래에의 상은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에 이르러 재현의 여러 방법론 중 하나로 편입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행성에 가까운 수익모델로 자리잡기도 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이건 부정적인 의미이건 상관없이, 디지털게임 아니 게임 그 자체에서 확률과 운의 문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은 명확하다. 파웰 그라바첵의 지적대로, 오늘날 게임에서의 랜덤성은 한편으로는 도박으로의 길에, 한편으로는 새로운 재현 가능성으로의 길에 동시에 걸쳐져 있다. 양날의 검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이 확률의 문제는 게임을 플레이하고 연구하고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이 양날의 검을 다루는 개발자들, 마케터들, 그리고 양날의 검 앞에서 최적의 선택을 위해 몸부림치는 게이머들을 살핀다. 애초에 랜덤을 만들 수 없는 연산기계가 꽃피운 화려한 확률의 세계라는 아이러니 위에서 놀이의 근원에 자리한 운과 확률을 바라보는 일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또 유용한 일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Back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21 GG Vol. 24. 12. 10.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차지해 온 지라, 중국의 디지털게임을 향한 도전에서 중국 고전은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바 있었다. GG의 지난 칼럼(참조)에서처럼, 중국의 디지털게임 제작은 초창기부터 <봉신연의>, <료재지이> 같은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디지털게임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유기>는 매우 자주 디지털게임으로의 시도가 이어져 온 작품이다. 8비트 게임 시절부터 중국에서는 <대화서유>, <서유기>, <서전취경>과 같은 여러 회사에 의한 다양한 게임 장르로의 시도가 서유기를 딛고 이루어졌다. (관련내용은 GG 2호, "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 참조) 비단 중국에만 국한되었다기보다는 <서유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판타지성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전반에서 현대적 대중문화 콘텐츠로의 잦은 시도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손손>과 같은 아케이드 디지털게임화, <서유기>를 초기 모티프로 삼아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아예 서구권 전반에서 ‘손오공’이 아닌 ‘손 고쿠’를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성공한 <드래곤볼>과 같은 사례와 함께 한국에서도 <날아라 슈퍼보드>를 기반으로 한 ‘사오정 시리즈’의 성공이나, <마법천자문>과 같은 사례들이 서유기라는 고전 판타지의 확장성을 증명한다. 동아시아 고전 판타지라는 강한 배경을 가진 게임 <검은 신화: 오공(이하 <오공>)의 제작 발표가 있은 뒤부터 이 게임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한편의 기대와 한편의 걱정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티저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서의 상당한 완성도가 오래도록 다시 익혀 내어 온 고전의 새로운 게임적 재해석에 빛나는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또 서유기?’라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주제에 안이하게 천착해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는 시장 규모에 비해 오랫동안 이렇다 할 ‘문화적 업적’으로서의 대표작을 보여주지 못한 중국 게임제작 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 배경이었다. 높은 장르적 완성도는 세계관과 결부되며 빛을 발한다 <오공>의 성과는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적 측면에서도 상당하다. 곤술과 창술이라는 우슈에 기반한 무기 액션은 특유의 부드러운 초식 연격을 통해 매끄러운 전투 흐름을 완성했고, 사실상 전투 액션의 핵심이 되는 강공격은 천지를 울리는 과장법을 무리없이 연출해내내는 데 성공했다. 전투 액션에서의 성공은 게임 시작부터 이어지는 주인공 캐릭터의 완성도 이상으로 다채로운 기믹을 자랑하는 수많은 보스 몹들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른바 ‘복붙’으로 만들어지는 장면들 대신 풍성한 파훼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다양한 전투 도전이 게임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이끌어냈다. 난이도 설정이 별도로 없다는 점은 일부 게이머들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고전적인 방식인 ‘시간을 들이면 해결된다’는 기믹을 살려둠으로써 완화점을 두었다. 초반부는 소울라이크를 방불케 할 만큼 확실히 도전적인 난이도를 보여주지만, 특정 구간들을 지나면서 열리는 도술과 특성이 누적되면서 난이도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을 들이면 못 넘어설 것은 아니라는 일련의 안도감을 부여한다. 소울라이크 느낌을 내면서도 게임 오버에도 경험치를 흘리지 않게 만들어진 디자인은 난이도 설정이 없다는 점을 보완하는 디자인이었고, 게임은 전반적으로 쉽다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지만 그렇다고 초심자를 완전히 내팽개친다고만은 볼 수 없는 타협점을 보여주었다. 디지털게임의 성취를 바라볼 때 메카닉만을 뚝 떼어 보는 것은 게임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단순히 막대기를 돌리고 휘두르는 공격 액션이 훌륭하다고 하면 굳이 ‘서유기’라는 배경과 이야기라는 스킨을 덧씌운 게임에서 우리가 받는 감상을 정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공>의 성취 또한 상당히 공들인 전투 액션이 어떤 세계관 하에서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는지와 결부될 때 비로소 본격적인 의미를 드러내는데, 기본적으로는 ‘서유기’의 세계관을 활용하되, 손오공의 서역 여정길 당시가 아닌 그 다음의 이야기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 게임은 이 세계관을 21세기에 디지털게임으로 재현할 때 필요한 많은 자유로움을 끌어낸다. 신분제 시절의 판타지가 못다 한 이야기의 현대적 재구성 중국의 또다른 판타지 소설인 ‘봉신연의’와 마찬가지로 ‘서유기’ 또한 요괴라는 이름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총출동한다. <오공>은 ‘서유기’에 등장한 수많은 요괴들 중 액션 어드벤처 게임에서 도드라지는 기믹이 될 수 있는 요괴들을 서유기 원작의 순서와 관계없이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고전 판타지 소설이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 재구성될 때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서 <오공>은 주인공인 손오공의 서역 행보를 되새기는 것이 아닌, 그가 죽은 뒤 그의 후계를 자임하는 주인공 ‘천명자’의 행보를 그려낸다. <오공>이 그려낸, 삼장법사 일행의 고행이 끝난 뒤의 세계는 원작이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원작의 상상력을 이어 간다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어떤 세계의 후속담이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공>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서역에서 가져온 대승의 불경이 중국에 도착했다면 이 세계는 부처의 대자대비심으로 이전보다 나은 세계가 되었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오공>은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일행이 지났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아예 원작에서 투전승불의 지위에 올라 해탈에 이른 것으로 결론지어진 손오공은 게임 시작부터 죽었다고 나온다. 관세음보살이 현장법사에게 일러 주었던, 중생을 구제할 대승의 새 불경은 딱히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 <오공>이라는 게임의 출발점이다. 더욱 의뭉스러운 것은 세계의 남은 자들이 그런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불경을 다시 가져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버린 손오공의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주인공 천명자는 부처의 지위를 버리고 다시 원숭이 왕으로 살고자 했다 죽게 된 손오공이 세상에 남긴 육근을 모아 손오공의 부활을 시도한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 방법이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이 아니라 손오공의 부활이라는 점은 언제나 다음에 이어질 세상을 보다 낫게 만드는 것을 암묵적 전제로 삼는 디지털게임의 구조 안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다. 원전 ‘서유기’가 그려낸 세계는 신격 존재들과 인간들, 그리고 요괴들이라는 구분이 엄격한 세계였다. 일종의 신분제라고도 볼 수 있을 이 구분은 한편으로는 엄격하면서도 아예 고정불변인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원래 요괴 출신이었던 손오공이 천계의 부름을 받아 옥황상제와 겸상하거나 투전승불이 될 수도 있고, 천계의 군인이었던 천봉원수와 권렴대장이 잘못을 저질러 요괴로 환생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신분은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지만, 그 오름과 내림이 명확한 격차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신분제는 태생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상벌적 개념에 가깝다. <오공>의 시작부분에서 손오공은 천계로 부름받은 투전승불이라는 지위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해 천계는 군대를 보내 손오공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는 고전 소설 ‘서유기’가 시대적 한계로 그려내지 못한 지점을 21세기의 디지털게임이 다시 가져올 때 살려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고전 판타지의 게임을 통한 현대적 재해석은 이미 크게 시도된 바 있는데, <오공>의 제작진들이 직접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한 바 있는 <갓 오브 워> 리부트 시리즈다. 원작이 되는 북유럽 신화가 오딘과 토르라는 주신들의 관점에서 진행된 바 있다면, 게임으로 등장한 <갓 오브 워>의 북유럽 신화는 실제 신화 속에서 반영웅의 위치에 있었던 로키의 시각에서 신화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시점을 바꾸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는데, 오딘의 지혜는 게임 안에서 교활함으로 재해석된다. 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 들고, 그 신의 범주에 들지 못한 이들의 저항은 주신들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멸망, 라그나뢰크인 것이다. 라그나뢰크가 예언한 세계의 종말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해석은 고전적 신분제 사회를 벗어난 현대에 들어 신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주요한 관점이다. 그리고 <오공>은 같은 맥락으로 ‘서유기’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에 나선다. 신분제가 명확했던 시절에는 자연스러웠을 신계가 인간계를 관리하고(혹은 보호하고) 있는 모습은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에 들어서는 그 자체로 이미 억압적인 무언가가 된다. 로키라는 악신의 존재를 활용한 <갓 오브 워>의 방식 대신, <오공>은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요괴 출신이지만 천계의 명령에 순순히 복무했던 이가 받은 의심과 실망을 부각시킴으로써 고전적 신분제 하에서의 평화와 행복이 가진 모순을 정면으로 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각론은 다르지만, 두 게임 모두 고전 사회에서 만들어진 신화와 판타지가 현대 관점에서는 여전히 모순일 어느 지점을 향해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냈다는 점에서 신화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평을 받을 만 하다.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 이 게임의 의미에 다가가는 어려움에 대해 고전 소설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성공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제작진들이 고전 소설로서의 ‘서유기’를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 ‘서유기’는 원전 자체가 보편적 교양 소설로 취급받으며, 한국에 비해 폭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실제 <오공> 안에 등장하는 원작 출신의 많은 캐릭터들은 원작에서 보여줬던 성격과 캐릭터를 게임 특성에 맞게 변형한 상태로 등장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특성이 게임 메커닉과 강하게 결부되며 게임을 말그대로 살아움직이는 ‘서유기’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로 만들어진 2차창작 콘텐츠로서의 <오공>은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서유기’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바깥의 게이머들에게는 미처 다 전달되지 않는 지점 또한 적지 않다.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다음 회에서 풀어보자는 말의 의미는 중국 문화권이 아니면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충분히 잘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오공>에 대한 아쉬움은 역으로 이 게임이 원전에 너무나 충실했다는 점에서 원전이 보편적이지 않은 이들에겐 미처 그 정교함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에 온다. 원전에 대한 세심한 재해석에 경탄하면서도 내내 이걸 서구권 게이머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를 떠올린 것은, 게임의 기저에 흐르는 ‘서유기’라는 원전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을 여러 서브 컨텐츠들이 충분히 갖춰지지는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사천왕과의 전투라는 것도 아마 서양권 이용자들에겐 '멋진 거대 몬스터와의 박력있는 전투'까지만 전달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논문세미나] No homosexuals in Star Wars? BioWare, ‘gamer’ identity, and the politics of privilege in a convergence culture
콘디스는 <스타워즈: 구 공화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진정한’ 게이머의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살핀다. 콘디스는 ‘진정한’ 팬 또는 게이머 무리가 미디어 환경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유토피아적 공간을 이룩하고 게임 내 특권적 지위를 이루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 Back [논문세미나] No homosexuals in Star Wars? BioWare, ‘gamer’ identity, and the politics of privilege in a convergence culture 16 GG Vol. 24. 2. 10. 들어가며 메간 콘디스(Megan Condis)는 인종이나 성별, 성적 정체성을 게임 및 기술을 통해 바라보는 연구자다. 젠더가 기술 속에 어떻게 녹아드는지 주목한 콘디스는 2018년에 온라인 게임 문화 속 남성성에 주목한 책을 펴낸 바 있다. 이번 호에서 다루는 그의 텍스트도 그러한 관점에서 작성된 것으로, 콘디스는 ‘팬’과 ‘게이머’라는 칭호를 퀴어 이론과 접목해 분석한다. ‘팬’, ‘게이머’와 같은 칭호는 같은 게이머 그룹의 인정이 있어야만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다. 콘디스가 ‘팬’이나 ‘게이머’를 눈여겨본 이유도 이 특권에서 기인한다. 이 텍스트에서 콘디스는 게이머 그룹 내 특권적인 칭호들이 성별이나 인종, 계급에 따라 어떻게 부여되는지, 그 법칙에 알맞지 않은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마주하는지 살핀다.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검열과 <드래곤 에이지>의 동성 로맨스 콘디스가 이 연구를 위해 제시하는 게임은 바이오웨어(BioWare)에서 제작된 MMORPG인 <스타워즈: 구 공화국(Star Wars: The Old Republic)>이다. 과거 <스타워즈: 구 공화국> 공식 사이트는 게이, 레즈비언과 같은 용어를 검열했는데, 이 일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해당 게임의 유저들은 ‘온라인 게임에 현실의 성 정치 문제를 끌고 오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검열에 찬성한 이들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문제가 게임에 적용되는 것은 게임의 매력을 반감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문제가 이성애 중심적 권력 구조로 나타난다고 본 콘디스는 게이머 그룹의 인정을 받은 이, 즉 ‘진정한’ 게이머가 이성애자로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애자 게이머는 정상성이라는 영역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반면 커밍아웃한 퀴어 게이머는 이성애자 게이머들과 달리, 게임 문화를 해치는 침입자로 간주된다. 여기서 콘디스가 보고자 하는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콘디스는 ‘진정한’ 게이머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이들과 그럴 수 없는 이들의 격차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스타워즈: 구 공화국>과 같은 논란은 동일 제작사의 게임인 <드래곤 에이지(Dragon Age)>에서도 발생했다. 이때의 논쟁은 <드래곤 에이지>에 등장하는 게이 캐릭터의 로맨스가 도화선이 되었다. <드래곤 에이지>는 <스타워즈: 구 공화국>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데, 콘디스는 이를 게임 제작자와 일부 팬 사이에서 나타나는 특권적 관계 상실에 의한다고 분석한다. 특권적 관계 상실은 퀴어 게이머를 수용하는 게 이성애자 남성 게이머들의 신임을 잃는 것보다 더 나은 매출 지표를 얻을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콘디스는 이 사례에 대해 계몽된 게이머 집단이 이전보다 나은 미디어 환경을 추구하고, 기업은 그 요구에 마지못해 응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매출 지표만으로 따졌을 때, 바이오웨어는 왜 초기부터 이러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을까? 이는 대다수의 기업과 게이머들이 눈여겨본 ‘테크노 유토피아’라는 개념과 연결해 이야기할 수 있다. 소수자와 약자가 없는 테크노 유토피아 게임연구는 스포츠계와도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닌다. 스포츠계의 동성애 혐오나 성차별 관련 연구가 놀이에 관한 것으로 확장되었고, 이것이 게임연구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게임연구들은 여성, 퀴어와 같은 소수자 및 약자를 게임 안으로 진입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했다. 여기서 주로 나타난 의견이 소수자와 약자의 특성을 돌아보고, 그에 대응하는 다양한 캐릭터를 게임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콘디스는 해당 관점이 페미니스트적/퀴어적 게임 비평의 기틀이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이것이 젠더 및 섹슈얼리티의 본질주의적 가정에 의존한다고 함께 꼬집는다. 가령 여성이 게임과 일체화되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여성 아바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젠더 및 섹슈얼리티의 본질주의적 가정이다. 게임 산업과 학계의 이런 관점은 게이머 개인의 능력이나 맥락을 살피지 못하게끔 만든다. 이에 콘디스는 산업이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과연 어떤 게이머가 ‘진정한’ 게이머로서 인정받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콘디스가 이런 사유를 끌어가면서 언급하는 개념이 ‘테크노 유토피아’다. 콘디스는 ‘진정한’ 게이머의 기준이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활발하게 이야기된 테크노 유토피아적 수사학(techno-utopian rhetoric)과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게임에서의 테크노 유토피아는 신체적 요소가 게임을 통해 가려지며, 그에 따라 혐오 문제도 사라진다고 보았다. 현실의 차별적 요소는 게이밍 공간에 들어오면서 무화된다. 다시 말해 게임은 차별로 이어질 만한 현실 요소를 보이지 않게 하고, 그 결과 유토피아적 공간이 된다. 혐오와 관련된 문제를 굳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콘디스는 다음의 사실들을 지적한다. 첫째, 흔히 게이머라고 인식되는 이들은 비장애인이자 백인인 이성애자 남성이다. 둘째, 테크노 유토피아적 관점은 게임의 이성애적 관점 및 남성성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것이 드러난 한 사례가 바이오웨어 측이 시행한 검열이었다. 즉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유저 중 테크노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게이머’는 한정된다. 현실 공간과 게임 공간의 분리 콘디스가 이 연구를 통해 관찰하고자 한 건 바이오웨어를 옹호한 측의 게이머들이었다. 이들은 현실과 게임에 명확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현실의 정치적 문제와 깊게 연결된 사안들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진정한’ 게이머들은 현실 요소의 개입이 게임의 매력이나 효과를 약화한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현실 공간과 놀이 공간의 완전한 분리를 얘기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매직서클(magic circle)’ 개념과도 이어진다. 매직서클은 게임 안에 현실 문제가 침투할 수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콘디스가 살핀 게이머들이 현실 요소의 개입을 경계한 이유도 여기서 나타난다. 현실의 정치적 문제가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로운 게임 세계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직서클은 자연히 테크노 유토피아와도 연결된다. 콘디스는 게이머들이 게임 안에서 비정치적인 경험을 원하도록 학습되어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육체가 사라지면서 이루어지는 이 학습을 통해, 게임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검열에 실망한 유저들이 ‘진정한’ 팬이나 게이머가 아니라고 한 이들도 이러한 흐름에서 부각되었다. 콘디스는 이런 흐름이 퀴어 게이머들을 ‘유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전하며, 해당 규칙이 존속될 경우 게이머를 정의하고 분류하는 기준이 더욱 엄밀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게이머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앞서 서술했듯이 테크노 유토피아는 현실의 신체적 요소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게임 안에서 무화된다고 본다. 이것은 게임, 나아가 온라인 공간을 평등의 장으로 인식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게이머들이 주장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온라인 공간에 진입함으로써 현실 요소도 가려지기에, 현실의 정치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콘디스는 ‘진정한’ 게이머들이 테크노 유토피아를 보전함으로써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보호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보르도(Bordo, 1995)를 인용하여, 온라인에 접속하면서 일어나는 신체와 정신의 분리가 백인 이성애자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작용한다고도 설명한다. 여성, 퀴어, 소수 인종, 장애인은 정상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그들에 비해 결핍적인 존재로 판단된다. 한 마디로 정상으로 분류되는 것은 언제나 백인이자 이성애자인 남성이었다. 특히 이 텍스트에서 퀴어에 집중한 콘디스는 게임의 기본값이 이성애자로 전제되어 있기에 퀴어성이 지워지며 거부당한다고 본다. 평등을 이야기하는 듯한 현실 공간과 게임 공간의 분리는 오히려 차별적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이에 콘디스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정치적인 맥락으로써 작동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이오웨어의 검열과 검열 철회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검열 문제는 2009년 4월에 발생했다. 이 문제가 불거진 공식 포럼은 본래 길드를 모집하거나 게임 소식을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기능했다. 그러던 중 바이오웨어 측 관리자들은 평소 부정적이라 인식되는 특정 단어들을 검열하기로 하였다. 이는 포럼을 더욱 친화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결정이었다. 문제는 검열되는 단어 중에 ‘게이’와 ‘레즈비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성소수자에 관한 용어 검열은 드문 사례가 아니며, 이 검열은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지닌다. 이것이 <스타워즈: 구 공화국>에도 나타나자, 검열이 성소수자를 더욱 소외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섞인 글들이 업로드되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게이머’는 성소수자와 관련된 문제가 너무나 정치적이라는 명목하에, 바이오웨어의 결정을 옹호하였다. 다만 이 문제는 기타 온라인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언론의 주목까지 받게 되면서 반전되었다. 바이오웨어는 곧 성소수자 관련 용어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끔 조치했다. 콘디스는 이 일련의 흐름이 융합 문화의 사회적·정치적 역학관계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검열 논란이 있고 난 후 바이오웨어의 게임은 퀴어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등, 그 나름대로 퀴어 친화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에 ‘바이오웨어가 주요 고객층을 무시했다.’거나 게임 내 동성애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호소하는 이들이 등장했으나, 바이오웨어는 이전과 달리 그 의견을 반박하고 거부하였다. 콘디스는 해당 게시글 작성자들이 이성애와 남성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정해 말하거나, ‘이성애자 남성 게이머’라는 단어 세분화에 거부감을 가졌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콘디스는 <스타워즈: 구 공화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진정한’ 게이머의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살핀다. 콘디스는 ‘진정한’ 팬 또는 게이머 무리가 미디어 환경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유토피아적 공간을 이룩하고 게임 내 특권적 지위를 이루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게임에 한정되지 않고 대부분의 미디어 문화에 포함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콘디스는 미디어 문화의 권력 흐름과 공유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진정한’ 팬 및 게이머 무리의 행동 양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가며 콘디스의 텍스트를 살피면서 <스타워즈: 구 공화국>과 퀴어에 관한 글을 하나 더 보게 되었다.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오랜 유저가 쓴 이 글은 퀴어 요소를 원하는 게이머가 지불해야 할 금액과 시간을 언급하고 있었다. 1) 작성자에 따르면 <스타워즈: 구 공화국>은 확장팩인 Rise of the Hutt Cartel부터 퀴어 캐릭터를 선보였는데, 이 확장팩은 유료로 제공되었다. 작성자는 이후로도 <스타워즈: 구 공화국>에서 퀴어적인 요소를 원한다면 그에 대한 DLC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고 밝혔다. 물론 DLC의 기능이 퀴어 캐릭터를 추가하는 데서 그치지는 않겠지만, 이 이야기는 게임이 상정하고 가는 이성애적 요소를 개인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게 해준다. 한 마디로 퀴어적 요소를 원하는 이들은 이성애적 플레이에 만족하는 이들보다 더 오랜 기다림과 금액 지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팬이 제기한 문제는 한국 게임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몇몇 게임들은 동성 캐릭터 간의 결혼이 불가능한 상태다. 이에 게이머들이 문의를 해봐도 공식적인 답변이나 실현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 이외에는 장애인에 관한 것이 있다. 콘디스는 퀴어적인 요소에 집중했지만, ‘진정한’ 게이머가 되지 못하는 유저에는 장애인도 포함된다. 여기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약속했던 <마비노기>가 ‘시각장애인이 게임을 할 수 있느냐’며 공격당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볼 때, 소수자이자 약자인 이는 일반적인 게이머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 ‘진정한’ 게이머들이 현실의 정치적 요소를 게임 내부로 들여오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기존 규칙을 강화시키고자 한다는 콘디스의 분석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한편 콘디스가 말하는 ‘진정한’ 게이머의 기준 일부는 한국인에게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은 ‘진정한’ 게이머의 조건에 관해서다. 단순히 남성이고 이성애자이며 비장애인인 사람이면 되는가? 연령이나 게임의 숙련도, 과금 액수, 디바이스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한국의 게임 주체로 상정되는 집단은 어떠한 이들인지 앞으로 점차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Bordo, S. (1995). Unbearable Weight: Feminism, Western Culture, and the Body. California: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 원문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gaymingmag.com/2021/09/lgbtq-representation-star-wars-the-old-republic-is-complicated-but-rewarding/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백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주얼 노벨 올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 미술관에 놓인 게임: 게임은 미술관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한글로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영아적 판타지가 위협받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Μουσείον을 무세이온이라고 표기해야 할 때다. 오랜 옛날 무사이Μουσαι의 신전을 부르던 이름이다. 갱스터 근성을 타고 태어난 로마인들이 그곳을 참숯으로 만들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여러 기록에 따르면, 무세이온은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을 거느린 거대기관으로, 세상의 온갖 학자들이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싸면서 각종 연구를 자행하였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보존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 Back 미술관에 놓인 게임: 게임은 미술관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12 GG Vol. 23. 6. 10. 1. 미술관의 기원 한글로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영아적 판타지가 위협받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Μουσείον을 무세이온이라고 표기해야 할 때다. 오랜 옛날 무사이Μουσαι의 신전을 부르던 이름이다. 갱스터 근성을 타고 태어난 로마인들이 그곳을 참숯으로 만들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여러 기록에 따르면, 무세이온은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을 거느린 거대기관으로, 세상의 온갖 학자들이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싸면서 각종 연구를 자행하였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보존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세이온은 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시설이 아니었을까? 아쉽게도 주변머리만 남겨놓고 머리통을 빡빡 민 수도사들은(예를 들면 에라스무스) 무세이온을 이집트 왕이 헬레니즘 세계의 온갖 이교도적인 보물을 쌓아놓은 곳쯤으로 상상했다. 그리하여 왕이나 귀족이나 교회나 메디치 가문 등등의 소장품을 쌓아놓는 공간을 뮤제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무세이온의 이름을 따서. 그리고 나중에 일본인들은 뮤제움을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나누어 받아들였다. 그 무렵은 중세와 달리 ‘예술품인 것’과 ‘예술품이 아닌 온갖 수집품’의 구별이 생길 때였다. 일본을 통해 대부분의 근대어를 갖게 된 우리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으로, 미술관은 사실 박물관과 정확히 같고, 그것의 주 기능은 온갖 물건을 수집, 보존, 해석, 연구하는 데 있다. 전시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 위의 모든 미술관들은 대중에 개방하는 전시를 널리 일삼고 있는 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미술관은 완전히 근대의 산물, 좀 더 정확히는 대혁명의 산물이다. 이 사실을 언급하는 유명한 미술사가(예를 들면 앙리 웃세)가 지금까지 2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사실인즉 로마인의 갱스터 혈통을 물려받은 무리들이 왕을 단두대에 신나게 썰고 역대 왕들이 홀로 덕질해온 수집품들을 강탈해 공화국의 공공재로 선언했다. 이로써 최초의 근대적 미술관이 탄생했다. 공화국의 미술관Muséum de la république이 본래 명칭인 그곳은 한글로 발음을 표기할 수 없으니 간단히 루브르라고 하자. 국공립과 사립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미술관들은 루브르와 같은 기능을 한다(잘 하든 못 하든). 루브르 이전에도 브장송이라든지 몇몇 동네에 공개전시를 여는 미술관이 드물게 있긴 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루브르와 같은 기능이란 무엇인가? 작품을 수집, 보존, 해석, 연구하는 일에 더해 전시도 하는 것이다. 단지 볼거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작품을 시대나 주제에 맞게 선별함으로써 사회 공통의 기억과 서사를 불러일으켜 공화국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전시다. 즉, 미술관의 원래 기능은 근대국가의 국민을 만드는 일이다. 좋은 미술관은 민주주의 발전의 경험, 여권신장의 역사, 이민자나 소수자를 대표représentation하는 기억, 변화해온 사회의 풍경 등을 담는 작품을 꾸준히 수집해 전시하고, 그럼으로써 사회구성원 모두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다. 반면 영 좋지 못한 미술관은 미술 자체의 동시대적 실험 따위를 다루면서 사회구성원 모두로부터 멀어진다. 2. 미술관의 쇠퇴 그런데 위와 같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19세기나 20세기까지의 일이다. 초강력 21세기가 도래한 지금, 미술관은 쇠퇴하고 있다. 정확히는 ‘루브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할 힘이.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19세기에 발명된 근대미술이 이제 과거처럼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200년 전, 아니 150년 전만 해도 그림과 조각이 가장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주는 매체였다. 바다를 그린 그림을 평생 내륙에서 살아온 사람이 처음 보았을 때 느꼈을 미술의 마법 같은 힘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제 미술에서 그런 힘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터넷, 스마트폰,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통한 시각이미지가 넘쳐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바다풍경’을 미술은 더 이상 그려낼 수 없다. 더구나 근대국민국가의 역할이 시효를 다하면서 단일한 공동체서사 또한 끝물이다. 이것이 둘째 이유다. 오늘날은 별의별 개인의 개별서사가 확산되는 시대다. 각자가 서사를 재구성하고 재전유하면서 스스로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다시 써내려간다(오만가지 젠더와 인종과 종교와 문화 정체성이 탄생해온 지난 십여 년을 떠올려보라). 국가가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는 역할 대신 세금을 뜯으며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로 바뀌었듯, 미술관 또한 공동체 서사기능 대신 입장료를 뜯으며 구경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관광 비즈니스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셋째는 미술관이 반드시 수장해야 하는 시대적〮지역적 작품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가 하드웨어로서의 미술관은 지어놓았으나 이렇다 할만한 지역미술 씬 자체가 없는 지역미술관의 예를 들 수 있다. 이런 미술관은 아무런 공적 역할이 없는 짐짝일 뿐이다. 때로는 작품이 있어도 곤란하다. 예컨대 한국의 7,80년대 미술을 국립미술관은 어떻게 선별하고 배열해야 하는가? 훌륭한 작품은 웬만하면 독재에 부역하여 민주화 이후 국가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역사적 저항의 현장에 있었던 작품은 웬만하면 훼손되어 사라졌거나 질적으로 좋지 않다. 그 시대의 삶을 증언해 줄만한 작품은 별로 없다. 미술품 생산이 일어날 만큼 여유롭지 않았고, 그나마도 웬만하면 검열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미술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넷째 이유는, 미술관에 돈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쇠퇴하는 한편으로 미술의 향유는 압도적으로 시장을 경유하게 되어, 세계 미술시장에 전례 없는 거품이 발생했다. 미술품이 공예품이나 공산품에 비해 특별히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가치에 비해 미술품이 너무 비싼 탓에 미술관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때로는 기업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작품을 충분히 구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왕을 단두대에 신나게 썰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근 들어 전세계 미술관에서 상설전이 축소되고 기획전과 대관전이 늘어나는 경향이 확산된 데는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미술관은 ‘루브르와 같은 기능’을 잃었다. 달라진 시대에 미술관이 어떻게 변모할지는 아직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21세기 거의 모든 미술관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 있다. 영상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의 가파른 증가다. 미술관은 본질적으로 19세기적 근대미술을 위한 공간이다. 설렁설렁 걸어 다니면서 작품을 눈으로 읽게끔 설계되어있다. 그런 곳에 반복재생되는 영상을 설치해보았자 전시지킴이의 신경증 발병확률을 효과적으로 올릴 수 있을 뿐, 영상은 미술관이 아닌 상영관에 알맞다. 지구상의 어떤 미술관도 상영관은커녕 집보다도 나은 영상시청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여기서 집이란 TV와 소파가 있는 일반 가정집을 뜻한다. 그럼에도 영상은 이제 미술관뿐 아니라 베니스 비엔날레 등 세계의 주요 미술행사까지 사실상 장악했다. 영상미술의 성장은 시간의 예술이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일까? 물론 흥미로운 영상작품이 많기도 하지만, 그 뒤의 이유는 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우선 운송비와 보관비가 들지 않는다. 복제 가능하므로 원본이 훼손될 염려도 없다. 국경을 쉽게 넘을 수 있고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전시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적은 비용으로 현대미술 국제전을 열 수 있다. 영상을 주업 또는 부업으로 하는 미술작가가 늘어난 것도 미술관을 주 판매처로 하는 경제적 전략의 이유가 있다. 이런 현상도 미술관의 원래 기능이 쇠퇴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표다. 3. 미술관에 놓인 게임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도 프랑스인의 61%가 1년에 단 한번도 미술관과 박물관을 포함, 전시회를 방문하지 않았다. 1년에 5회 이상 방문한다는 프랑스인은 고작 8% 1) 에 불과했다. 인구의 다수가 미술관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는 통계는 너무 많은 나라에 너무 많이 있어서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미술전시회에 관객이 가득 차고 미술대상 수상작이 신문 1면에 실리는 시대를 경험했지만, 우리 세대는 미술 전시란 으레 고요히 비어있는 행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는 현재 미술관이 처한 상황의 중핵이 아니라 곁가지에 불과하다. 미술관을 찾지 않는 비관객은 미술관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미술관의 주요 관객은 해당 공동체의 시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관광객이다. 나머지 소수의 관객은 전세계 어느 통계를 보아도 점점 더 점점 더 고학력〮고소득층으로 굳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입장료를 아무리 낮추어도 점점 더 소수 특수계층이 향유하는 공간이 되어간다. 달리 말하면, 현재로서는 상위계층에 복무하거나 그저 관광상품이 될 수 밖에 없는, 원래의 공적인 기능을 잃은 미술관은 존재의 이유마저 잃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미술관은 게임을 전시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파리 그랑팔레에 이어 뉴욕현대미술관,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한국국립현대미술관까지, 게임을 주제로 하는 대형 전시를 열었다. 물론 게임은 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할 마음이 없다. 그런데 미술관이 게임을 불러들이는 까닭은 게임을 예술로 승인하기 위함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의 구조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미술관 나름의 절실한 필요가 있다고 해도 좋다. 새로운 관객층과 새로운 예술을 미술관에 데려오기 위해 게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임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게임은 감상의 대상인가, 체험의 대상인가? 전자라면 단지 몇 명의 플레이어만이 컨트롤러를 잡을 수 있는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미적 감상이 극소수에게만 허용된다. 후자라면 게임전시 자체가 제품시연회와 비슷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애초에 감상과 체험이 나누어지는 것이기는 할까? 의문은 호기심천국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게임이 미술작품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미술관에 놓이는 것인가? 미술관으로서는 감상이든 체험이든 전시를 통해 게임을 어떻게 재정의하는지나 어떤 관객을 위해 무엇을 보이려고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상을 전시할 때도 그러하니까. 그러나 게임은 영상과 다르다.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는 실패가 예정된 기획일지도 모른다. 미술관 스스로 무수히 많은 게임을 수집하고, 일정 주제에 따라 분류, 선별함으로써 만들어진 전시가 아니라면 특히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게임의 예술성이나 작동방식 때문이 아니다. 게임은 영상처럼 싸지 않다. 각각의 작품에 맞는 물성이 있는 기기가 필요하다. 운반비와 보관비가 든다. 전시기간 중에도 계속해서 비용이 든다. 관객/이용자가 기기를 직접 조작하므로, 관객규모에 비례해 훼손이나 고장의 위험도 커진다. 지난 달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를 예로 들어보자. 정식오픈 전날, 기자간담회를 막 끝마친 시점에 이미 펌프기기 형태의 게임작품은 망가져 오작동하고 있었다. VR형태의 가상현실 작품은 같은 구간이 반복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실험실에서 눈을 뜬 후 작품 속 나레이터의 안내를 듣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일반에 공개하기도 전에 그랬으니, 전시 오픈 후에도 비슷한 고장이 여럿 발견되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려면 능숙한 엔지니어가 전시장에 상주하면서 매순간 모든 작품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미술관이 부담하기엔 너무 많은 비용이다. 그래서 본인은 미술전시로서의 게임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4. 미술관 전시보다 상설 게임박물관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는 게임을 예술로 정의한다. 오랜 옛날에는 예술에 포함되지 않았던 그림과 조각이 르네상스를 거치며 예술이 되었듯이, 또 사진과 영화와 만화 등이 20세기에 예술로 인정받았듯이. 게임은 시각예술과 음악, 영상, 문학적 서사가 혼합된 인터렉티브한 총체예술이다. 하지만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게임에게도, 미술관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모든 예술이 미술관에 어울리지는 않는다. 연극이 예술이라 하여도 굳이 미술관에서 상연한다든지, 문학이 예술이라 하여도 책 페이지를 찢어 미술관 벽에 붙인다든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드물게 있기도 하지만, 각각의 예술매체는 각각의 장르에 더 좋은 공간이 따로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위한 국공립극장과 문학을 위한 국공립도서관이 따로 있듯이, 게임도 게임을 위한 국공립시설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저비용 혹은 무비용으로 게임을 할 수 있는 곳.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기기들을 갖춘 곳. 그런 곳을 우리는 PC방이나 게임방, 플스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렇다, 그런 공간을 공공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인은 주장하는 것이다. 나아가 더 필요한 것은 게임 자체만을 위한 박물관의 신설이다. 게임박물관은 방문객이 적은 비용으로 게임을 시연해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문화적 관행 가운데 하나인 게임을 보존, 연구하면서 인류의 기억에 남겨두기 위해 필요하다. 게임박물관이 있는 나라는 이미 많다. 파리의 게임박물관, 영국 셔필드의 국립비디오게임박물관, 로마의 비디오게임박물관, 베를린의 컴퓨터게임박물관 등, 각각의 게임박물관들은 저마다 다른 주제와 테마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게임을 수집해 공개한다. 게임과 게임기기는 물론 게임작품에 관한 여러 역사적 자료들도 끌어 모으는 중이다. 모든 게임박물관은 방문객이 직접 게임을 해볼 수 있게끔 신〮구형 PC와 게임기기들을 갖추고 있다. 일부 게임박물관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게임박물관들은 소규모에 불과하지만, 21세기의 남은 3/4을 지나면서 크게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아직까지 게임박물관이 없다. 문체부가 3년 전부터 게임박물관 설치를 추진했으나 아직까지 기본계획조차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 게임박물관이 없다는 말은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아 플레이하던 게임기기(과자가 덤으로 나왔다)라든지 오락실에서도 밀려나는 옛 게임들, 한때는 휴대폰처럼 들고 다녔던 소형게임기기 등이 그대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옛 게임만이 아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앞으로 유행에 밀려날 게임들도 곧 사라지게 된다. 또 자가 게임기기를 가진 사람은 게임을 향유할 수 있지만 게임기기가 없는 사람은 향유할 수 없는 문화격차가 방치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제목의 질문을 던져본다. 게임은 미술관이 처한 어려움을 구제할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그럴 필요가 없다. 게임은 미술관의 미술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은 미술에 의해서만 지탱된다. 본인은 우리 세대가 죽기 전에 미술창작의 많은 부분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미술이라는 단어는 지나간 과거의 인간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 미술관은 다시 박물관의 역할로 돌아가, 근대미술박물관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지금 게임에 필요한 것은 미술전시를 위한 근대적 공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예술인 그 자신을 위한 시설이다. 1) Statista Research Department, Frequency of visiting museums/temporary exhibitions in France 2018, Published Dec 9, 2022 Tags: 예술,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술가) 손이상 미술을 공부하고 사진작업을 하다가 밴드 음악을 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공연 연출을 하다가 공공미술 기획자가 됐다. 윈도우95에서 구동되는 턴제 게임만 한다.
-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Back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17 GG Vol. 24. 4. 10. 방치형 RPG 비판 1)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2)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타비카에루’는 방치형 게임의 ‘이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시장은 ‘AFK 아레나(剑与远征)’, ‘마법거울의 전설(魔镜物语)’, ‘아이린 시편(爱琳诗篇)’ 등 ‘맵밀기(推图)’ 3) 를 큰 축으로 하여 수집, 육성, 트래킹, 턴제 자동전투 등 다양한 플레이 방식을 결합한 중국산 방치형RPG게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의 시청각적 외관은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로직은 일관성이 있다. 심지어 게임의 전투나 스토리 전개는 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거나 구동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자동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유형의 수익을 취하고 관리하기 위해 이따금 게임 속 개체를 클릭하기만 하면 게임을 최대한 즐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로 ‘스킨을 교체한다’ 4) 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주의를 끌지 못하던 미니게임에서 대중화된 게임 장르로 변모한 이 질적 변화는 게임 역사의 자연적인 진화에 그치지 않으며,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가 되고 있다. ‘게임’이란 ‘현실’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의 문예적인 표상이며, 현실과 대응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장르의 미디어적인 특성상, 게임성을 커버할 만큼 스토리성이 강한 서사적 게임을 제외하면, 오늘날 RPG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의 ‘거대 서사’ 5) 형식을 통해 객관적 현실을 명료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宽)가 말했듯 ‘거대한 게임’ 6) 의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투영할 뿐이다. 이에 따라 우노 츠네히로는 21세기 들어 RPG 등 방치형 게임 장르가 전후 일본의 서브컬처 속 ‘고질라 명제(ゴジラの命題) 7) ’, 즉 허구——객관적 현실이 아님——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주관적 현실을 게임을 통해 써내려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와 연관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게임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각 구조에서 주관적인 사회 현실을 추출하고, 이미지화하는 능력을 뜻한다. 객관적 현실을 발화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오늘날,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이 동시대에 대해 갖는 사명은 자역주의적 방식으로 객관적 현실을 직접 드러내는 게 아닐 것이다. 플레이 방식 등 신체적 감각에 호소하는 혁신적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은 ‘고질라 명제’를 따라 현대 중국의 주관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서 방치형RPG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1. 자동화, 수동성, 자아의 구조 방치형RPG에 대한 산발적 논의에서 저우쓰위(周思妤)는 이런 게임의 핵심 특징은 “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는 것” 8) , 즉 플레이어가 최대한 플레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플레이 방식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반역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촉각 매체 9) 이며, 그 매개적 특수성은 플레이어가 게임 장치와 빈번하고 밀접한 물리적 상호작용(즉, ‘플레이’)을 수행하도록 요구한다. 이를 통해 ‘입력 부족과 출력 과잉’ 10) 이라는 비대칭적 장력 속에서 플레이어의 신체적 경험 이상의 정신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역시 플레이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게임의 시간(즉, ‘제3시간’)을 진정한 게임 내러티브의 시간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11) 한마디로 말해, 게임을 체험하는 정확한 자세는 최대한 많이 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플레이 방식은 이와 반대인데, 최대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원리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역설적인 플레이 방법론을 구축한다. 이런 방법론은 어떻게 성립될까? 게임 과정의 자동화를 통해서다. 하지만 낮은 수준의 자동화 12) 는 모든 게임의 초석이기 때문에 게임의 자동화를 되풀이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거듭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가 인터페이스 내 임의의 위치를 클릭하면 아바타(avatar)가 자동으로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게임 설계가 실패하게 된다. 방치형RPG의 특수성은 자동화가 게임 프로그램의 국부적 자동 연산 및 실행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게임의 전반적인 작동 논리를 가리킨다는 것에 있다. 가령 ‘AFK 아레나’는 플레이어가 클릭하는 방식으로 이를 확인하고 추출해야 하는 경우에조차 다양한 자원 혜택을 제공한다. 이는, 표면상 방치형RPG가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이지만, 총체적 자동화(이하 ‘자동화’)의 게임 로직이 이러한 조작을 인체공학적으로 편안한 정도에 맞게 압축하고, 플레이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기존의 많은 게임들에서 노동력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방치형RPG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완전히 자동화된 스크립트 프로그램——모태는 반[反]플레이(counter-play)의 특징을 지닌 전자동 게임 ‘프로그레스 퀘스트(Progress Quest)’——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들의 방치형RPG 개입은 이런 게임들이 여전히 일반적 의미의 게임 '촉매'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합법성을 제공하고, 게임 배급사들이 게임 내 소비 행위(이하 ‘현질’) 13) 를 유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물론 자동화된 게임 로직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에 참여하지만 알고리즘이 계획한 게임 경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뿐 게임 경험의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방치형RPG 플레이의 감수성은 능동적인 탐색, 구성 또는 초극이 아니라 항상 수동적이게 된다. 한마디로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먹이를 주고, 플레이어는 편안하게 입을 벌리고 게임 시스템의 아낌없는 선물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 경험은 방치형 RPG의 대립자 14) 가 어긋나게 놓인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흔히 게임은 “실패의 예술” 15) 로 여겨지는데, 이는 게이머의 진로를 가로막는 다양한 대립자들, 플레이어의 기본 임무인 눈앞의 끝없는 대립자에 반복적으로 도전해 결국 게임을 클리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격투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ストリートファイターベガ)’를 할 때에는 마지막 상대인 베가(ベガ)를 이길 때까지 상대에게 한 번씩 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방치형RPG에도 이런 대립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엘피스 전기M: 스피릿 각성(斗罗大陆:武魂觉醒)’에서 ‘시련의 경계’에 도전했다가 전력 부족으로 패배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게임의 차이점은 대립하는 쌍방(즉, 플레이어와 게임)이 만났을 때 서로 어긋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즉, 방치형RPG의 자동화 논리로 인해 막을 수 없는 플레이어는 실제 높은 차원에 배치되고 반대쪽은 낮은 위치에 배치된다. 비록 낮은 단계의 대립자는 일시적으로 플레이어의 전진 속도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자동 전진하는 플레이어를 근본적으로 막거나 좌절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배칭형RPG와 일반 게임의 기본 차이점은 전자가 이론적으로 반대편을 이길 수 없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이머가 근본적인 ’게임불감증(卡关;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프로세스)’으로 인한 부정적 감정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이하 ‘방치형 플레이어’)가 게임 속 대립자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개조할 필요가 없다. 시간함수가 증가해 낮은 단계의 대립자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를 기다리거나, 현질로 이를 집어삼켜 소비주의의 쾌감과 만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가 반대편에 부딪혔을 때 '절대적 부정'을 느끼지 않고, 기껏해야 연속적인 플레이 경험이 끊기는 등 짧은 불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게임에서 현질을 하지 않는 대가일 뿐이다. 절대적 부정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플레이어에게 적대적인 액션 포지션이 할당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결 자체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방치형RPG는 “실패의 예술”의 반명제가 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게임에서는 대결하는 쌍방의 움직임과 동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플레이어는 정해진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플레이어는 역동적인 게임 내 역사적 여정을 구축하는 것에 참여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게임 체험은 자기자신과 게임 프로그램 간 상호작용에서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끝없이 공허한 순환 생성에 빠뜨릴 뿐이다. 따라서 방치형RPG는 기존 게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게임들에도 다양한 전투의 순간이 가득하지만, 그것의 역사적 여정은 다른 게임처럼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총력투쟁의 형태로 깊이 있게 추진되지 않는다. 비록 게임의 수치는 끊임없이 증식하고 비대해지지만(hypertrophy), 게임의 여정은 오히려 미리 설정된 알고리즘의 무성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가깝다. 단적으로 게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만, 유저들의 플레이 경험은 영원히 정체된 윤회 상태로 굳어져 ‘역사’는 끝난다. ‘역사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방치형RPG를 외형상 적개심으로 가득 찬 용담호혈(龍潭虎穴) 16) 을 날조할 뿐, 실제로는 한없이 순한 수치의 비경 속에 있다. 따라서 게이머들에게 철저하고 고통스러운 투쟁(清算)의 도전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은밀하게 자신의 안전구역으로 퇴행(regression)하라고 유도하고, 보상이란 형태의 게임 시스템이 주는 긍정적인 경험을 기다리고 즐기게 함을 뜻한다. 또한 방치형RPG의 긍정적 체험은 독특한데, 그것은 전통 비디오 게임에서 이중 부정의 간접 형태가 아니라(가령 코나미 게임 ‘콘트라’는 끊임없이 적을 죽이고 게임 내 모든 부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무효화한다), 오히려 게임의 알고리즘에 의해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통쾌함의 형태로 아낌없이 주어진다. 예컨대 ‘AFK 아레나’의 플레이어는 ‘키보드에서 손을 빼’ 17) 직접적으로 120분의 AFK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방치형 플레이어는 진정한 게임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부정적 능력만이 진정으로 게이머의 주체적 위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주는 긍정적 경험만을 받아들이는 게이머들은 추상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개성이 없는 게임의 종속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와 게임의 대립 구도에서 플레이어의 주체성을 논하는 게 아니다. 게임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플레이어와 자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는 몹을 향한 공격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힘겨루기를 구성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쾌락 구조에서 자신을 능동적인(향락적인) 행동 주체로 만든다. 이 행동의 주체는 사고와 신체의 측면에서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야만 게임에서 승리(예를 들어, 게임 중의 상대를 이기는 것)할 수 있고, 게임의 쾌락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앞서 언급한 이중 부정 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게임 시스템의 포획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을 게임 쾌락을 즐기는 능동적 행동 주체로 만들 수 없고, 자아에 대한 최후의 절제를 포기하고 게임 시스템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함으로써 적극적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방치형 플레이어는 게임의 호의를 행복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주체적인 자기결정 구조를 상실한다. 그/그녀(플레이어)는 게임과 쾌감에 의해 완전히 지배될 뿐,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방치형RPG의 무대에서 서서히 펼쳐지고 있음을 사실을 불현듯 발견하게 된다. 2. 부성의 절대권력 방치형RPG는 게임의 역설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게임 장르처럼) 부정적 매체 18) (혹은 죽음의 매체)가 아니라, 긍정적 매체(혹은 삶의 매체)이다. 게이머들은 주로 게임 속에서 AFK 19) 형식으로 자동으로 생성되는 대량의 자원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앉아서 즐긴다. 게이머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이 게임은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다른 이념적 전략을 사용하는데, 경계에 있는 상처를 달래는 진혼곡을 부드럽게 읊조리며 ‘알고리즘 모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적 환각을 만들어낸다. 알고리즘 모성의 무조건적인 보살핌 아래 플레이어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 보상 등 위로의 형태로 긍정적 경험을 즐길 수 있으며, ‘수동적 자동 만족’에 기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 모성은 플레이어의 본능적인 욕망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행복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으로 인해 크게 붕괴되었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된다. 여기서 알고리즘적 모성은 플레이어에게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유토피아를 열어준다. 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에 의해 크게 붕괴된다. 하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것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되게 한다. 이처럼 방치형RPG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알고리즘의 모성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모성은 게임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며, 이를 논의하기 전에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가졌다는 근거, 즉 게임의 주권적 힘(sovereign power)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게임 내 절대권력은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절대적 관할권을 의미하며, 그 물질적 기반은 절차상의 출처(procedural authorship) 20) 이다. 그것의 관찰 가능한 형태(동시에 극치의 형태)는 곧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생사여탈 권한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부정적 매체이기 때문에, 게임의 절대권력은 게이머들에게 주로 ‘죽음’의 관상을 보여주며, ‘죽음’(즉, 철저한 부정)의 의제를 지향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핵심 관심사는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피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새로운 예술로서 게임을 이해하는 학문적 출발점이 됐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와 요시다 히로시(吉田寬) 등 일본 학자들은 ‘죽음’을 주제로 ‘게임 리얼리즘(ゲームのリアリズム)’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21) 물론 게임 내 모든 죽음을 절대권력의 소행으로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 운영(system operation)과 단위 운영(system operation)에 대한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의 주장 22) 은 절대권력은 완전하고 선형적이며 정상적인 시스템 운영에서 나타나며 단위 운영의 절대권력은 분리되고(discrete) 불연속적이며 역동적인 단위 및 그 관계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スーパーマリオブラザーズ)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사망/낙하”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시스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의 방식에서 게임 시스템/규칙에 해당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리오 형제가 굼바(クリボー)와 같은 적을 건드려서 죽으면 플레이어는 단일 작전으로 인식한다. 절대권력의 관할권은 유닛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 타자를 이길 수 없다는 우발적 경험이 항상 플레이어의 필연적인 절대권력 인식보다 우선한다. 물론 때때로 시스템 작동과 장치 작동이 임계점까지 당겨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RPG 게임은 스토리상의 필요에 의해 갑자기 게임 플레이어가 상대 캐릭터에게 패배하도록 강제하지만, 게임 스토리는 종료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이러한 캐릭터와 절대권력의 일시적 중첩 상태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은 종종 게임이 예외상태(또는 플레이어가 ‘무적’ 상태에 진입했음을 뜻함)에 있음을 나타낸다. 절대권력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에 빠지는 경우처럼) 항상 수동적이고 게임 배경에 숨겨져 있다. 플레이어와 능동적으로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막 통과하려고 할 때, 즉 게임 보스 23) 의 형태를 취하고 플레이어의 경로를 차단할 때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플레이어에게 절대권력은 언제나 ‘제3자의 심급’ 24) 이란 위치에 놓이게 되며, ‘통제와 자유’ 25) 라는 게임의 절차적 변증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끝판왕을 물리치는 것뿐이다. 푸코와 아감본의 표현 26) 을 빌리자면, 절대권력은 형식적으로 고대 가부장적 권력(patria potestas)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모두 플레이어가 아바타 보스를 찾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권한만 갖는 ‘부친 살해’(弑父)의 구조 27) 로 이뤄져 있다. 현실의 외부(동시에 게임의 내부)에 취약하지만 완전히 환상적인 현실을 구축해야만 ‘부친 살해’ 게임을 통해 끝없는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미지’의 결말에 갇히게 된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이 상황이 흔들렸다. 최근 성공한 인기 게임 장르의 중요한 특징은 게임 속 절대권력이 끊임없이 전면에 등장해 플레이어의 ‘아버지 살해’ 수단과 감각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슈팅(逃殺, 도살) 28) 게임은 ‘축권(縮圈)’ 메커니즘을 절대권력의 화신으로 삼아 플레이어와 게임 시스템 사이에 배제적으로 삽입된 도살 관계를 구축한다. 절대권력은 “칼을 든” 죽음 정치의 살벌한 모습으로 게임 전면에 내세워 게이머들을 수색하고, 프로그램화된 레토릭(procedural rhetoric) 29) 의 형태로 게이머들에게 부정적인 칙령을 내린다. 게이머들은 그 권위를 존중하되 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절대권력은 강력하게 감지되고-떠다니며-편재되는 방식으로 게이머들에게 능동적으로 배출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의 형상이다. 즉, 죽이거나 도전받지 않으며, 오직 당신의 복종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모습의 절대권력은 동시대 게임 역사의 상상력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전환을 지향한다. 그러니까 관문 마지막마다 숨어 있어 죽여야 하는 특정 보스(그들은 게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메타 스토리와 스토리의 임계점에 있다)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죽일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반복된다. 이 때문에 게이머가 보스의 위치를 파악해 죽임으로써 게임 시스템/사회 현실을 초극하는 상징적 질서는 무력화된다. 따라서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서사층 내에서 자동 증식하는 게이머들 사이의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의 싸움에 갇히고, 게임의 메타서사층에 존재하는 게이머와 게임 시스템 간 ‘거대한 이야기’는 돌파하지 못해 비정치적이고 퇴화하는 순환 구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이다. (상호텍스트화된) 게임의 세계를 뒤흔드는 통섭적인 기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화되고 만연해진 부권적 절대권력의 칙령에 게이머들이 끊임없이 에피소드 간 ‘생사’의 윤회에 뛰어오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경쟁(즉, 상호경쟁)으로는 총체적 게임/현실 딜레마를 벗어날 해결책과 초월적 쾌감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영원히 공전하는 챗바퀴처럼 “지금-여기”에서 종결될 뿐이다. 3. ‘모성적 디스토피아’ 방치형RPG 역시 이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에 휩싸여 탄생한 게임 장르다. 절대권력은 늘 전면에 나서지만 상징 질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람을 살게 하는 부성적 절대권력이 아니라, 권력기술로 하여금 직접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모성적인 빛을 발하는 권력기술로, 그것의 상징물은 죽음의 ‘검’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모태’다. 이는 곧 앞서 언급한 절대권력에 관한 논의를 갱신해야, 비로소 방치형RPG라는 새로운 게임 장르와 그 은유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푸코와 아감벤은 모두 절대권력의 전형적인 특권 중 하나가 생살여탈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푸코의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들과 아감벤의 수용소에 갇힌 호모사케르는 형벌을 단지 형벌받는 환경——죽음의 위협 속에 던져진다는 뜻——에서 절대권력이 그들에게 휘두르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두려워 하고 있을 뿐이다. 방치형RPG는 완전히 반대다. 그것은 게이머를 긍정적 경험이 생산되고 흐르는 모태(즉, ‘긍정사회’) 30) 에 두고, 그들이 갈망하는 다양한 성장 자원을 자동으로 제공한다. 그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위협도 가하지 않고, 다만 그/그녀를 정성껏 보살피고 만족시켜 줄 뿐이다. 태아들은 부정적인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이 태내에서 오는 긍정적 경험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일 수 있다. 한마디로 방치형RPG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타카하시 루미코(高桥留美子) 31) 식 부권 억압(부정성 체험)이 없는 ‘낙원’, 즉 “물질만 있을 뿐 스토리텔링 32) 은 없”는 욕망의 공간을 만든다. 이 낙원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체험은 모두 제거되고, 게이머는 게임에서 실질적인 실패를 겪지 않는다. 기껏해야 욕구 충족의 지연을 직면할 뿐이다. 가령 ‘마법거울의 전설’의 게이머들은 중심 스토리의 자동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아닌 휴식 중이던 자의식이 ‘실패'라는 우발적 사건에 의해 다시 활성화되는 걸 경험한다. [자의식이] 활성화되면 그들은 두뇌를 조금 사용해 다음을 선택해야 한다. 1) 기존 캐릭터와 소품의 구성 체계를 최적화해 시행착오를 겪고 확실한 자동 전투에 재투자한다; 2) 전쟁 전력을 즉시 높이고 자동 전투를 충족하기 위해 현질을 한다. 3) 현질 충동이 없다면 잠시 서브 스토리로 주의를 돌리고, 시간이 흘러 전투력이 자동으로 증가하면 메인 퀘스트에 계속 도전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게이머는 게임 프로그램의 대립자를 위해 배척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를 경험한 취약한 순간에 모성의 절대권력에 안겨 그것과 조화 및 동일화되면서 재기한 후의 필연적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헤겔식]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면, 방치형RPG에서는 긍정적 경험치가 끊임없이 자동 증가하기 때문에 게임 시스템에 대한 순종은 합리적 플레이 태도가 된다. [이 상황에서] 노예인 게이머는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므로, 자비로운 주인 편에 서서 더 유순해지고 일방적 상황에 순종적으로 빠져든다. 이 일방향적이고 사유하지 않는(thoughtless) 게이머들은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게임의 '좋은' 사실만 무분별하게 경험한다. 따라서 방치형RPG의 부정성과 비판성, 초월성, 그리고 절대권력은 결코 확립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매직사이클(magic cycle) 33) 이 부여한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게임의 쾌락과 현실에 대한 욕구가 자동 충족되는 방식으로 즐긴다. 분명히도 방치형RPG는 절대권력에 대한 게이머의 경계가 완전히 해제되어 게이머에게 반역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이는 게임이 직면하게 되는 안티게임의 메커니즘을 근절할 뿐만 아니라, 게이머의 안티게임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소모했기 때문이다. 게이머의 모든 욕구를 부드럽게 충족시켜주는 방치형RPG는 게이머와 게임 간의 적대 관계를 시간함수에 따른 희소성과 만족감이라는 비적대적 공식으로 전환해버린다. 그렇기에 게이머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언제 실현될지, 어떻게 하면 그 실현을 가속화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된다. 이는 게이머가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애착을 형성하고도 다른 게임처럼 안티게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방치형 RPG의 장점이다. 누가 자신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장난기 많은(게임) 어머니를 원망하고 반항하겠는가? 그러나 방치형RPG라고 해서 앞서 말한 잔혹한 슈팅게임의 안티테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동일한 사회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상반된 게임 해결법일 뿐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네이쥐안’ 사회——장기간의 고성장 이후 GDP 성장률이 실질적인 둔화기로 접어든 사회경제적 상황——의 가부장적 절대권력(즉, 슈팅게임)에 맞서 강경한 전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더라도, 그리고 네이쥐안이 마땅히 벗어나고 비판해야 할 잘못된 사회 상태라고 믿더라도, '게이머'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결단력' 34) 을 갖고 잔인한 '사회/게임'(즉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탈출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를 말할 수 있는 사회적/심리적 공간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모성의 우산을 씌워주며, 긍정적인 게임 체험 쪽으로 끊임없이 속삭인다. “얘야, 넌 정말 대단해! 멋져! 내가 해결해줄게...” 다시 말해,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이머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게이머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35) 게임/사회에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폐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노 츠네히로의 말처럼 이것은 모성의 유토피아보다는 모성의 디스토피아(母性のディストピア)일 수 있다. 후자는 우노 츠네히로가 아즈마 히로키의 미연시 게임 장르에 대한 비평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서 발전한 독특한 서브컬쳐의 상상력을 설명한다. 그는 근대국가를 국가의 ‘아버지’로 의인화하며, 국민의 성숙은 그들이 국가 안에서 가부장제적 아버지 36) 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드래곤 퀘스트(ドラゴンクエスト)’와 ‘젤다의 전설(ゼルダの伝說)’ 등 일본의 국민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이 공주를 구하는 서사는 얼핏 보면 사랑 이야기지만, 게이머가 공주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성숙(즉, 주인공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을 이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패전국 일본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은 승전국 미국에 의해 실추된 일본 아버지가 아니라, 태내부터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섬의 어머니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표면적인 게임 내용만 보면 위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공주를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층적인 문예 심리를 살펴보면 게이머가 공주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의 성숙을 깨달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출된 공주는 대문자 어머니가 되고, 게임을 클리어한 게이머는 아버지가 되지만, 대문자 어머니에 의지해 성숙해지는 왜소한 아버지다. 모성적 디스토피아는 대문자 어머니가 왜소한 아버지를 키운다는 전후 일본의 상상력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노 츠네히로는 모성적 디스토피아가 전후 일본에 한정된 특수한 상상력에서 인터넷 환경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인 현대 사회의 상상력으로 진화했다며 그것의 설명 37) 을 확장해왔다. 인터넷 사회는 자녀(즉, 인터넷 사용자)를 정보 고치(즉, 태아)에 던져 넣고 모든 소음을 제거한 후,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모든 정보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로 계속 제공하는 사회이다. 그것은 모성적 유토피아에 대한 자기 망상을 부풀린다. 이 같은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성의 디스토피아'는 발전된 개념이다. 우노 츠네히로의 연구 시야에는 중국 사회나 방치형RPG가 있지 않지만, 모성의 디스토피아의 통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게임을 유토피아가 아닌 모성의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느냐는 점이다. 첫째로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모성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치형RPG에서 모성적 폭력은 배제된 폭력이다. 그것은 게이머를 태아 속에 완전히 가두고, 온정적으로 그를 위해 태아 내의 모든 실질적 대립을 배제한다. 동시에 그것은 게이머의 성장을 촉진하는 부정성과 이질성도 배제한다. 이로 인해 그들을 편안한 자기 망상 속에 끊임없이 팽창시키도록 이끈다. 둘째, 일체화의 폭력, 즉 상술한 배제성으로 인해 게이머는 대립자(가령 방치형RPG의 다양한 몹)에게서 어떤 공고화된 타자성(Andersheit)이나 낯섦(Fremdheit)도 느끼지 않는다. 게임의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통합(Gleichschaltung)되는 과정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성적 폭력은 결국 긍정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폭력은 게이머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배척하지 않고 흡수한다. 과보호하는 방식으로 약화시키고 마비시켜 결국 게이머를 포획한다. 현실과 정반대인 알고리즘의 모성애에 취한 플레이어는 더욱 유순해지고 ‘투지’를 잃게 된다. 한마디로 모성폭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자아의 궁극적 성숙을 회피하고 어머니의 자궁에 사는 형태로 순수한 자기 망상의 삶을 살게 한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현실의 고민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소마(soma)를 만든다. 그러나 이 약물은 단순한 쾌감 논리가 아닌 복잡한 보상 메커니즘에 호소하며, 직접적인 욕구 충족 회로가 아닌 현실의 영역에서 게이머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이는 방치형RPG가 일종의 왜곡된 게임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게이머들이 실재계의 상처받은 경험(예를 들어 현실이 허락했음에도 실현되지 않는 개인의 성공)에 다시 끌려들어가는 단순한 쾌감구조가 아니라, 게임은 세계를 상징하는 심벌로 자신을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 뱃속에서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을 꾸고 있는 플레이어는 여전히 현실의 맥락에 던져진 육체를 갖고 있지만, 현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21세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계를 통한 철저한 사회적 성숙을 새삼 갈망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방치형RPG는 게임 내에서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갓스 커넥션은 레벨링, 랭킹, 전투 목록, 길드 전쟁과 같은 사회적 경쟁의 원리를 모방한 게임 내 메커니즘을 설정한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방치형RPG가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게임 안에서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갓니스 커넥트(Goddess Connect)’는 게임 내에서 등급, 순위, 차트, 길드전 등 사회적 경쟁원리를 모방한 메커니즘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의 모성에 대항할 만큼 충분히 높은 가부장제적 권력을 실제 게임에서 소환하는 게 아니다. ‘오래된 게임 세계’의 상징적 질서에 대한 기념비 역할을 하며, 게이머에게 그들의 실재계 외상을 보다 명확하게 표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효율적으로 자신을 자위할 수 있도록 한다. 우노 츠네히로의 논지로 돌아가 보자.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적 모성(즉, 대문자 어머니)을 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레이어를 방치형RPG로 끌어들이는 인프라가 되며, 나아가 ‘깨어 있는’ 플레이어가 현실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모성적 디스토피아의 논리에서 왜소한 아버지를 소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방치형RPG의 꿈 만들기 기능을 강화하고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4. 게임 자본가의 환상 알고리즘의 모성적 위안 아래에서 플레이어는 방치형RPG를 플레이할 때 항상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다른 게임에서처럼 과로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계획(프로젝트)과 전반적인 컨트롤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영역에 있는 한, “근육과 뼈를 다치지 않고”(즉, 가급적 플레이하지 않으며) 가끔씩 명령을 내려 게임의 자동 수익과 최고의 경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완벽한 자아에 대한 신화를 허구화하고, 그러한 자아에 대한 플레이어의 상상과 경험을 충족시키는 꿈나라와 같은 현실 미러링 게임이다. 유희 자본주의(ludocapitalism)의 비판적 틀을 통해 이러한 게임들을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도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playbour)——이러한 유형의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를 조작하도록 유도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손쉬운 조작과 자동 증식 혜택은 기존 게임과는 다른 ‘게임 관리자’라는 아이덴티티 이미지를 심어줬다. 루도자본주의의 비판적 틀 안에서 이러한 게임을 계속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로 이해할 수 있지만 - 결국 이러한 게임은 플레이어를 운영하도록 초대한다 - 과도한 노력과 수익의 자동 생성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 비해 '게임 매니저'라는 상상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운영의 과도한 용이성과 수익의 자동 증식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비교하여 '블루칼라'가 아닌 '블루칼라' 플레이어인 '게임 매니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이들은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인식하게 됐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게임 관리자는 기업가적 주체의 자기 망상이지만, 지난 10년간 국내 주류 게임에 존재했던 자기 망상(예: 멀티플레이 온라인 전략게임의 ‘경제인’과 슈팅게임의 ‘성인’)과는 다르다. 게이머는 한편으로 ‘기업’, 즉 게이머 사이에 존재하는 잔인한 외부 경쟁에 노출되지 않고, 일체의 외부적인 기업 위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보호받는다. 대신 게이머는 조직의 내부 업무로 편안하게 돌아가 보람 있는 게임 자산 관리(예: 카드 뽑기, 카드 조합, 캐릭터 업그레이드 등)를 즐기고 조직의 모든 것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는 높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38) 다른 한편 보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 관리자의 이미지에서 신체적, 심리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자동화된 게임 로직 덕분에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의 끝없는 자기 착취 39) 를 자동화된 ‘알고리즘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다. 플레이어는 성가신 게임 조작, 전투 전략, 팀워크 및 기타 사소한 퀴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직의 미래를 계획하고 이끌며, 자동으로 배가되는 자원을 받고, ‘게임 자본가’에 속하는 행복한 즐거움을 누릴 준비를 하면 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게임 콘텐츠 외적인 부분까지 보면 게임 관리자는 게임 인터페이스 내의 가상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게임과 현실의 상호관계를 관리한다. 방치형RPG의 자동화된 플레이는 플레이어를 게임 시간에 따른 현실의 혼잡함에서 사실상 해방시켜 게임 작업과 현실 업무를 함께 실현하고, 게임 시간을 현실 시스템에 완전하고 매끄럽게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 히어로즈(Idle Heroes)’의 많은 게이머들은 직장에서 '낚시'를 하는 동안 게임을 켜고 게임 콘텐츠를 빠르게 관리한 후, 자동으로 게임이 계속되게 한다. 방치형RPG의 인기는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의 비합리성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합리성에 대한 은유적인 자기 참조가 된다. 게임 관리자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방치형RPG를 둘러싼 역설, 즉 방치형RPG의 기본 논리가 놀이의 영역에서 "최대한 많이 플레이하라"에서 "플레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라"로 역설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플레이하라"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실제 21세기(즉, 중국에서 그래픽 네트워크 게임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이후) 들어 그것[게이머의 정체성]은 게임 노동자에서 게임 관리자로 변모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자신을 게임 내 자산 소유자로 간주하고, 자동 증식하는 캐릭터, 장비, 소품, 화폐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의 포트폴리오와 리스크를 신중하게 최적화하여 게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 전투에 참여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처럼 '제스처'와 '지시'를 통해 '알고리즘 노동자'가 자신의 명령을 자동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할 필요가 없으며, 대신 기업주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지시'하며 '알고리즘 작업자'가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한다. 이러한 게임 경험은 현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부유층에게만 허락된 '성공한 사람' 40) 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방치형RPG의 매니지먼트는 위선적이다. 관리 경로는 이미 정의되어 있고, 게임 프로그램은 플레이어가 실제로 무수히 많은 전략/전술 아이디어에 두뇌를 동원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게임 알고리즘과 연산에 많은 부담을 주고 게임 디자인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가끔씩 자동 조종으로 실행되는 사업을 점검하고 게임의 정해진 경로를 따르도록 초대될 뿐, 게임의 내부 운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삼국지(三国志) 시리즈’와 같은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과 비교하면 이러한 장르의 게임은 관리 측면에서 위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지’에서는 플레이어가 도시의 내정을 관리해야 하며,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잘못된 관리로 인해 컴퓨터 상대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방치형RPG에선 그런 걱정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 알고리즘 모성은 게임의 모든 상대를 다운그레이드하여 플레이어가 잘못된 관리의 결과를 겪을 필요가 없고, 자산 관리의 자동 증식만 즐길 수 있다. 즉, 방치형RPG의 관리자는 매니지먼트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수반되는 '관리자의 상상력'은 자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려는 플레이어의 실제 욕망을 효과적으로 채워준다. 아즈마 히로키가 분석한 미연시 게임과 같은 정체성에 대한 상상은 현실의 압도적인 무력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며 41) , 이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는 간절히 갈망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부족한 무언가임이 분명하다. 상술한 관리자적 상상의 위선은 또한 "사고"의 정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일반적으로 산술적인 텍스트 42) 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고하는 것은 “복잡한 사고의 탐구 활동”이 아닌 플레이어가 알고리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단순한 ‘계산’으로 축소된다. 가령 게임 내에서 가장 높은 전투력을 달성하기 위해 캐릭터를 조합하는 방법을 계산한다던지 말이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자동화 로직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관리의 만족'이라는 원칙에 따라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방치형RPG의 본질적 매력은 플레이어가 과도한 게임 플레이 노동을 피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거의 제로 비용으로 높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성의 폭력이 다시 폭력화될 가능성을 열어준다. 게임 개발자와 운영자는 수익을 내기 위해 플레이어를 게임에서 '이탈'시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방치형RPG가 제공하는 긍정적 경험에 계속 몰입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잠시 게임을 떠나 알고리즘 모성의 다음 자동 위로를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 위로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위로의 간격은 절대적으로 연장된다. 이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형태의 폭력이며, 강압적으로 연속성을 중단하는 것에 의존한다. 알고리즘 모성의 편안함에 빠져 있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 방해받지 않고 즐기는 긍정적인 경험에서 갑자기 철수하는 것은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비부정적 부정성은 게임 전반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보다 더 고통스럽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결핍감이 아니라, '얻었지만 또 잃었다'는 상실감을 지향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트라우마 위에 소금을 한 움큼 더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5. 결론 한마디로 방치형RPG게임은 한병철이 말한 ‘권태사회’ 43) 의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권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플레이어를 비관적인 자기착취 사회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그들은 게임에서 자신을 다른 플레이어와 적극적으로 경쟁하는 순수하게 효율화된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인기를 구가하는 MMO슈팅게임 게이머들과 달리, 이(방치형RPG) 게이머들은 ‘공포’가 아닌 편안한 ‘퇴화’의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참여(어쩌면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하고, 게임에서의 다양한 경쟁 메커니즘과 그 이면의 사회적 상상력을 즐긴다(jouissance). 44) 다른 한편에서 이 ‘기계적 육체로서의’ 게이머는 정신적인 소모로 인한 자아 붕괴를 피하기 위해 방치형RPG 같은 자동/수동형 플레이 방식으로 알고리즘 모성에게 자신을 양보하는 걸 선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게이머는 자신을 관리자로 상상하고 새로운 자아실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아실천이 직면한 것은 매우 판이하면서도 현실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긍정적 경험을 게이머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며, 모성적 광휘를 발하는 절대권력(즉, 모성적 디스토피아)이다. 이 모성적 절대권력은 한편으론 게이머의 실재적 상처를 치유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에게 도망칠 수 없는 모성 폭력을 가한다. 나아가 게임 자본주의와 공조해 게이머를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의 위협에 노출시킨다. 이를 통해 방치형RPG는 겉으론 무한히 부드러운 수치 선경이 되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비디오 게임 세대 45) 가 은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릉도원이 아니며며, 여전히 초극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자동으로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라는 게임의 시대에 우리는 진정으로 초월적인 게임 장르를 모색해야 한다. 1) 본문은 중국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와 상하이 철학사회과학기금 청년 프로젝트인 '융미디어 맥락에서 e스포츠 이미지 구축 및 가치 혁신 연구'의 결과물로, <문예연구 文艺研究>지 2023년 10호에 발표됐다. 2) 영어권에서는 클리커 게임(clicker games) 또는 성장 게임(incremental games)으로 불린다. 3) ‘推图(퉤이투)’에서 ‘图(투)’는 게임 속 ‘맵’을 의미하고, ‘퉤이’는 게임의 주요한 줄거리를 ‘클리어’하는 걸 뜻한다. 즉 ‘맵밀기’는 플레이어가 줄거리를 클리어하기 위해 두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4) 여기서 '스킨 교체'는 게임의 핵심 플레이방식을 바꾸지 않고 시청각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게임을 새로운 게임으로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5) 오츠카 에이지, 『物語消費論:ビックリマンの神話学(이야기 소비론)』, 新曜社, 1989년, 10~24페이지. 오츠카 에이지는 서브컬처의 설정과 세계관을 거대한 이야기(大きな物語)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大きな物語'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중국어로의 번역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저우즈창(周志强)은 이 개념을 서양의 'big story' 이론을 차용하기보다는 'grand narrative'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저우즈창, 『游戏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게임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중 이질성의 순간")』, 南京社会科学, 3호, 2023년 참조). 이 논문에서는 저우즈창의 관점을 채택했다. 6) 일본 서브컬처 연구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오츠카 에이지의 '거대한 이야기'를 '거대한 비이야기(大きな非物語)'로 발전시켰고, 우노 츠네히로는 후자를 '거대 게임(大游戏)'으로 확장시켰다. '거대한 비이야기'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 뒤에 존재하는 스토리텔링이 없는 거대한 정보 모음(즉, '데이터베이스')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 “動動化するポストモダン: 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 Shogun, 2001, 62쪽을 참조하라. “반면 '거대 게임'은 거대한 비이야기의 정적 구조 속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상호작용하는 동적 구조를 강조한다” (우노 츠네히로, 『마터니티のディストピアⅠContact』, 하야카와쇼텐, 2019년, 112쪽). 7)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의 디스토피아: 접촉편)』,83페이지 8) 저우쓰위, 리용(李勇), 《“让游戏自己玩”:방치형 게임与超级自我(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라: 방치형 게임과 초자아)》,《南京社会科学(난징사회과학)》, 2023년, 제3기. 9) 中島誠一『触覚メディア——TV ゲームに学べ!次世代メディア成功の鍵はここにあった(촉각 미디어--TV 게임에 배우라! 차세대 미디어 성공의 열쇠는 여기에 있었다)』(株式会社インプレス주식회사 임프레스,1999年)145페이지. 10) ‘입력 결핍’이란 게임 플레이 행위가 게임 화면 외부에서 게임 입력 장치를 조작하는 물리적 행위에 불과하고 그 상징적 의미가 빈곤한 것을 말한다. ‘과잉 산출’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게임 화면 내에서 상징적 의미의 구체적 확장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는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여 삼국지 게임 속 조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조조를 통해 중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그/그녀는 단순히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고 있을 뿐이다. 마츠모토 켄타로 『ゲームのなームのなかで、人はいかにして「曹操」になるのか: 「體験の創出装置」としてのコンピュータゲーム」 (마츠모토 켄타로, 왕이란, 편역, 『일중문화토라 ナショナルコミュニケション: コンテンツ・メディア・歴歴歴歴部・社会』ナナニーシヤ 출판, 2021) 107페이지를 참조하라. 11) 저우즈창, 상동 12)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처린(车琳) 옮김, 贵州人民出版社(구이저우인민출판사), 2020년판, 32쪽. 13) [역주] 원문의 ‘커진(氪金)’은 직역하면 ‘크림톤'과 ‘돈'을 뜻하지만, 중국 온라인 게임에서는 현질을 가리킨다. 14) [역주] 원문의 ‘对立面’(대립면/대립자)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모순의 통일(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을 가리킨다. 15) Jesper Juul, 《失败的艺术:探索电子游戏中的挫败感(실패의 기술: 비디오 게임에서의 좌절 탐구)》,杨子杵、杨建明 옮김, 베이징이공대학출판사, 2019년판, 130페이지. 16 ) [역주] 고사성어 용담호혈은 ‘지세가 매우 험준한 곳’을 뜻한다. 17 ) [역주] 원문의 ‘쾌속괘기(快速挂机)’는 ‘AFK(away from keyboard)’를 지칭한다. 18 ) 姜宇辉(장위후이), 《数字仙境或冷酷尽头:重思电子游戏的时间性(디지털 원더랜드 또는 콜드 엔드: 비디오 게임의 시간성에 대한 재고)》,《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19 ) 플레이어가 조작하지 않아도 프로그램 스크립트가 자동으로 실행되는 게임을 가리킨다. 20 ) Janet H. Murray(자넷 H. 머레이,), Hamlet on the Holodeck: The Future of Narrative in Cyberspace(햄릿: 사이버 공간에서 내러티브의 미래),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Singapore: The Free Press, 1997, p. 143. 21 ) 요시다 히로시, 《游戏中的死亡意味着什么?——再访“游戏现实主义”问题(게임에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게임 리얼리즘' 문제 재조명")》,《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선집)》,邓剑编译(덩지안 편역),上海书店出版社(상하이서점출판사), 2020년판, 237~273쪽. 22 ) Ian Bogost, Unit Operations: An Approach to Videogame Criticism,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6, pp. 3-4. 23 ) 보스는 반드시 특정 캐릭터일 필요는 없으며, 캐릭터가 아닌 상태로 설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게임 패스 목표를 설정하는 시뮬레이션 건설 게임도 게임 보스로 해석할 수 있다. 24 ) '타자의 계층'이라는 개념은 오사와 마사유키가 '초월적 타자'라고 부르는 것을 언급하며 제안한 개념이다. 오사와 마사유키, "오타쿠 이론: 광신주의, 타자성, 정체성", 덩 지안 편저,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 비평 에세이 선별, 상하이 서점 출판사, 2020년판, 79-116쪽 참조. 오사와는 게임 오타쿠를 포함한 오타쿠의 주체성을 논할 때 지젝의 논지를 인용하여 "개인으로서의 신체를 자기 정체성 있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은 타자"라는 것이 개인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자와는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를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타자와는 달리 우연적인 '내적 타자'와 상징의 영역에 있는 거대한 타자와는 달리 필연적인 '초월적 타자'로 구분한다.". 인간의 자기 동일화 과정에서 내적 타자는 모방 가능한 이미지로 기능하고, 초월적 타자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추상적 규범으로 등장하며(예: 푸코의 감옥 속 보이지 않는 감시자에 대한 전경, 오사와 마사유키의 『[増補補][増补], 『허구 시대의 열매』(치쿠마쇼보, 2009, 223-224) 참조) 서로 전제하고 있다. 1-3쪽), 상호 배타적인 전제다. 초기 비디오 게임의 버그가 타자 대리현상의 증상이라는 오사와의 관찰에 착안하여, 최고 권력은 게임 보스를 대리인, 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 타자'(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제3자')로 등장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임에서 최고의 권력은 보스로 대표되며, 즉 게임의 전체 영역을 통제하는 '초월적 타자'로서(즉, '제3자의 위계'로 기능하는), 플레이어는 보스를 죽임으로써만 게임의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25 ) 요시다 히로시, 「規則と自由の弁証法としてのゲーム——〈ルールの牢獄〉でいかに自由が可能か?(규칙과 자유의 변증법으로서의 게임--〈규칙의 감옥〉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立命館言語文化研究(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 26권 제26호, 19-27쪽. 26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 제1권 - 인식의 의지』, 셰비핑 옮김, 상하이인민출판사, 2016년판, 113쪽; 아감벤, 『호모사케르: 벌거벗은 삶』, 중앙편집번역출판사, 2016년판, 126쪽. 27 ) 게임 디자인 초기에는 유명한 게임인 제비우스나 후크처럼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 반복 게임이 많았다. 이러한 게임에서도 각 레벨이 끝날 무렵에는 흔히 '미니 보스'로 알려진 캐릭터가 해당 레벨의 '아버지'로 등장하곤 했다. 28 ) 서클 수축은 탈출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도망치는 플레이어가 결국 정면으로 맞붙게 될 때까지 게임의 위험 구역이 안전 구역을 계속 집어삼키는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29 )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0, pp. 1-64. 30 ) 한병철, 《권태사회》, 吴琼(우총)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 1~14페이지. 31 )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후쿠신 키드(うる星やつら)>에 등장하는 모성 공간을 가리킨다. 우노 츠네히로, "ゼロ年代の想像力 야근 시대의 상상력"(하야카와 쇼텐, 2011), 242-252쪽 참조. 32 ) 우노 츠네히로, 『若い読者のためのサブカルチャー論講義録(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아사히신문출판사, 2018년, 91쪽. 일본어 ‘物语’는 ‘故事(이야기)’라는 뜻이다. 33 ) Johan H.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London, Bost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80, p. 10. 34 ) '결단주의'는 우노 츠네히로가 2000년대 초반 일본 서브컬처 작품의 문학적 상상력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제안한 개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을 유지할 수 없으며,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즉, 히가시 히로키가 말하는 '빅 스토리'를 공유할 충분한 압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한다는 전제에서 포스트모던적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즉, 히가시 히로키가 큰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부족하다), 여전히 자신이 믿는 가치를 선택한다(즉,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작은 이야기를 거부하여 미야다이 신지가 '섬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같은 작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형성한다). 한 마디로 결정론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가치 상대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결과로, 결정의 내용과 이유보다 결정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노 츠네히로, "초과근무 시대의 상상력", 185쪽 참조. 35 ) 우노 츠네히로, 『遅いインターネット(느린 인터넷)』, 幻冬舎, 2023年, 178페이지. 36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5페이지 37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18페이지 38 ) 그렇다고 해서 기업/플레이어 간 경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페이트에서는 랭크전, 길드전 등 경쟁 메커니즘이 여전히 소셜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게임의 자동화된 설계로 인해 경쟁의 실패가 외부화되어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에 존재하는 자동화된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임에서의 실패로 인해 심리적으로 파산하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정서적 경험도 발생하지 않는다. 요컨대, 플레이어는 게임/비즈니스 경쟁 과정에서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놓인다. 39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宋娀(송송)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판, 23페이지. 40 ) 王晓明(왕샤오밍), 《半张脸的神话 반쪽 얼굴의 신화》,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3年版,第27—33页。 41 ) 아즈마 히로키, 《萌的本事,止于无能性——以〈AIR〉为中心 모에의 역량, 무능에서 멈추다 - AIR를 중심으로》,덩지엔 편역, 《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 문선》,214페이지. 42 ) 산술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달리 알고리즘에 의해 내러티브와 경험이 주도되는 텍스트를 말하며, 배경의 숫자 연산이 전경의 게임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것이 기본적인 내러티브 기법이다. 43 ) 한병철, <권태사회>, 53~61페이지 44 ) Sean Homer, Jacques Laca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p. 89. 45 ) 蓝江(란장), 《宁芙化身体与异托邦:电子游戏世代的存在哲学(몸과 헤테로토피아의 님피: 비디오 게임 세대의 실존 철학)》,《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학자) 덩 젠 , 邓剑 쑤저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부교수. 디지털게임 문화연구를 주 관심사로 다루며, 〈澎湃新闻〉에서 게임에 관한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다.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4X장르의 강자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구축한 대전략의 길
개인적으로 4X/대전략 게이머가 되는 일에는 하나의 허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문명’ 시리즈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4X, 대전략 게임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느냐다. 애초에 일반적으로는 4X 라는 명칭도 무슨 소리인지를 잘 모른다. < Back 4X장르의 강자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구축한 대전략의 길 21 GG Vol. 24. 12. 10. 확장이 아닌 제약이 효과적일 때, 4X/대전략은 재미있어진다 개인적으로 4X/대전략 게이머가 되는 일에는 하나의 허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문명’ 시리즈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4X, 대전략 게임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느냐다. 애초에 일반적으로는 4X 라는 명칭도 무슨 소리인지를 잘 모른다. 4X/대전략 게임을 좀 다르게 설명해보자면, 일종의 인류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저런, 그저 특징의 나열일 뿐인 장르명(Exploration / Expansion / Exploitation / Extermination)이 되었겠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조차, 4X를 대전략 게임과 한데 묶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어쨌건 4X 게임의 플레이 동기는 대부분 어떤 집단을 운영하는데에서 시작하며, 집단 간의 갈등에서부터 심화된 플레이가 피어난다. 당연히 그동안 인류사에서 있어왔던 갈등을 모사하게 되며, 사회 그 자체를 구현하는데 의의를 두기도 한다. 그러나 4X 게임의 태생적인 딜레마는, 결국 현실의 사회 구조를 비롯한 실제 세상의 시스템을 게임상에 구현하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형태가 ‘현실’ 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게임의 각 부가 정말로 현실만큼 치밀하게 구현된다면 최종의 형태는 현실 그대로의 시뮬레이션이 된다는 아주 간단한 귀납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4X은 오히려 현실성의 단계를 떨어트리지 않으면 독자적인 차별화가 불가능해진다는 모순에 도달한다. 물론 그 최종의 형태에 도달하기까지 무한정의 개발 자원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4X 라는 장르 이름이 내포하듯 모든 것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한적으로, 단지 그것을 대단위 시뮬레이션으로 스케일을 키운 것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수많은 4X 게임들은 저마다 특화된 구현 요소, 또는 테마, 또는 소재를 가지는 방식으로 발달해왔다. 분명 경제, 정치, 전쟁 같은 여러 요소를 동시에 포괄해야하는 게임임에도 어떤 게임은 경제, 어떤 게임은 전쟁 이런식으로 특화된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이다. 현실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개발 자원의 문제와 함께 이러한 각각의 특색화만이 ‘문명’ 이라는 성전이 존재하는 시장에 자신의 게임을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중 재미있는 사례는,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라는 4X 계의 거성이 자신들의 4X 게임 라인업을 구축한 방식이다. 다른 시뮬레이션들이 점점 더 전체적인 스케일을 확대하고 시뮬레이션의 깊이를 늘리며 전형적인 팽창의 형태로 발전할 때, 이들의 게임들은 오히려 스케일을 낮추고, 제한적인 묘사를 활용해 4X의 다른 발전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시대별로 정렬하기, 그리고 각각의 주제로 정렬하기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4X 시리즈는 기본적으로는 각각의 역사적 시대 배경으로 나뉜다. 중세를 다룬 ‘크루세이더 킹즈’ 부터 근대를 다룬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와 ‘빅토리아’,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다룬 ‘하츠 오브 아이언’ 이 촘촘하게 시대를 따라가며, 여기서 로마 시대를 다룬 ‘임페라토르: 롬’, 먼 미래 SF를 다룬 ‘스텔라리스’ 가 있다. 이 덕분에 다른 4X 게임과 비교하여 특기할만한 점은 게임 플레이에 시간적 제한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각각 시작 년도와 종료 년도가 서기로 구분되며, ‘크루세이더 킹즈’ 가 시작되는 11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1945년 까지의 시기를 4개의 게임이 나누어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 모아보니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게임들이다 그리고 시대를 넘어 이들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각각의 타이틀 시리즈가 핵심 테마, 작동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각각의 시리즈 모두가 경제, 외교, 문화, 정치, 전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구현 정도는 매우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하츠 오브 아이언’ 은 당연하게도 전쟁을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하여 전투의 디테일이 깊으며, 이를 위해 따라오는 경제, 외교, 정치 등이 다음 순위로 구현되어 있다. 하지만 ‘빅토리아’ 는 경제, 문화 중심의 게임으로서 전쟁, 전투가 상당히 간략화되어 있고,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워 상대를 경제적으로 굴복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는 근대의 태동 답게 외교가 핵심이고, 경제가 그 다음 순위로 따라온다. ‘크루세이더 킹즈’ 는 중세 특유의 가문 단위 정치에 핵심을 둔 게임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껏 조여진 플레이 메카닉은 저마다 다르게 작동한다. 물론 4개의 시리즈는 같은 엔진을 공유하기 때문에 플레이 측면에서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자신의 핵심 메커니즘 만큼은 독자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하츠 오브 아이언’ 은 병기 생산, 연구, 보급, 부대 편성부터 운용까지 전쟁의 모든 부분이 디테일하게 구현되어 있으며 개별 부대를 컨트롤하여 작전 목표를 달성케 한다. 하지만 다른 시리즈에서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그저 병력의 생산과 대단위 컨트롤만이 가능하다. 반대로 ‘빅토리아’ 는 경제 중시 게임 답게 물자를 생산하고, 경제권역을 만들어 수출입품을 통해 상대의 경제를 장악하며 각종 외교 수단으로 이를 보조하는데, 다른 게임에서는 구현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처럼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4X 게임 시리즈는 시대 별로, 또 주제 별로 정렬되어 있으며, 각각의 게임이 조명하지 않는 요소, 콘텐츠는 아예 삭제되어 있거나 매우 간략하게 묘사/구성되어 있다. 이는 어찌보면 4X 라는 장르적 이상론에서 거리가 멀어진, 모반적인 기획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계 없는 구현은 4X의 이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감한 포기가 일종의 타협으로 느껴질 수 있듯, 4X 라는 이상론을 내려놓고 ‘우리는 이것만 세밀하게 묘사할거야’ 라고 하는 셈이니. 하지만 그 이상론을 살짝 내려놓았을 때의 얻어지는 이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크게 두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바로 접근성과 게임을 통한 현실의 심화적 모사다. 먼저 이런 비유를 들고 싶다. 제공자의 관점에서 파인 다이닝에서 요리를 코스로 내놓는 이유, 또 새로운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이전의 요리와 모든 집기류를 정리하고 치워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물론 모든 요리를 한 번에 내오면 식는다, 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결국 핵심은 어느 새 요리가 나온 시점에 오직 그 요리만이 집중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4X 게임들은 바로 이런 파인다이닝 코스와 동일한 효과를 낸다. 즉, 핵심적인 영역이 아닌 다른 부분들이 배제됨으로서 플레이어의 집중력은 한 곳으로 모이게 되며, 이는 4X 의 게임의 고질적인 약점, 즉, 방대한 만큼 플레이 자체가 산만하게 된다는 약점을 다른 식으로, 그리고 개발비용을 절감하면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한 번 각 시대별 작품의 심화 요소를 살펴보면 그 요소(전쟁, 무역, 경제, 상속, 탐험, 개척)가 당시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압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다루는 ‘하츠 오브 아이언’ 이 전쟁 중심의 게임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고, 한창 식민지 개척과 열강의 산업화가 한창이던 ‘빅토리아’ 의 시기가 무역과 경제적 갈등을 다루는 것도 당시 시대의 핵심을 보여주며, 초기 근대화 시기, 대항해시대 무렵 서구 중심의 개척과 확장, 무역 전쟁이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의 중심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정도로 끝났던 간략한 인류사의 시대적 키워드와 맞아 떨어지고, 그 핵심 요소를 열쇠로 하여 당시의 시대를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진주만 습격, 루거오차오 사건,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등이 게임 상에서도 벌어지며, 단순히 이름만 알고 지나갔던 이 일들이 왜 벌어졌는지, 어떠한 맥락에서-또 어떠한 효과를 위해, 각각의 열강들이 벌인 일인지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어찌보면 굉장히 훌륭한 역사교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플레이 메카닉을 습득하고 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게 중요한 게임 장르 특성상, 각 게임 요소의 학습 중요성이 차등적이라는건 매우 중요하다. 어떤 팩션을 고르던 자원 관리, 개발, 무역, 군대 생산과 전투 등 모든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습득이 필요한 ‘문명’ 시리즈와는 달리,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들은 지극히 난이도가 낮은 팩션도 존재하고, 각 시대적 핵심 기믹을 조금씩 익히면서 게임에 적응하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게임을 고르기 훨씬 쉬워진다는 이점도 존재한다. 4X 게임들은 그 특유의 방대함 때문에 구입 전 게임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은 두가지 기준으로 일단 게임을 분류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적 시대, 그리고 좋아하는 관리/플레이 요소로 게임을 좀더 나누어 볼 수 있고, 그게 핵심적인 선택 기준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 덕분에, 우리는 각 시대를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 무제한적인 외적 확장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 4X 게임의 역사를 훑어보면, 모든 것을 구현하여 하나의 게임 안에 최대한 많은 피처를 우겨넣는 방향성과 시작부터 제약을 걸어두고 그 제약 내에서 디테일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성을 각각의 게임이 취사선택하며 발전해왔다. 전자는 ‘문명’ 이나 ‘마스터 오브 오리온’ 이 대표적이며, 후자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들과 ‘슈퍼파워’ 같은 게임들로 대표된다. 이러한 패러독스 인터렉티브 게임들의 특색은 일방적으로 다른 게임에 비해 낫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요소다. 전체 그림을 최대 해상도로 세밀하게 그릴 수 없다면 중요한 부분만 세밀하게, 나머지는 다소 뭉개는 선택을 했고, 이 때문에 당연히 한계도 존재한다. 그걸 알고있는지,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는 마치 자신들이 소위 ‘모든걸 담은’ 게임을 못만들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듯이, 은하 스케일의 아주 정석적인 4X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스텔라리스’ 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단순히 무제한적인 확장, 마치 게임 내적 플레이처럼 계속해서 게임의 스케일이 커지고 모든 부분의 묘사가 세밀해지는 것만이 4X, 대전략 게임의 발전 양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찍이 ‘슈퍼파워’ 같은 시리즈가 증명했듯, 이 장르에서는 일종의 제한적 플레이, 또는 핵심의 첨예화도 매우 주요한 강점이 될 수 있다. 4X의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플레이 목적성 부여, 그리고 어떻게 해야 게임을 잘하는 것인지 플레이 개선의 방향성을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게임에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대전략류 게임의 시작은 10시간, 20시간, 길게는 50시간이나 100시간 이후부터라고 말하곤 한다. 일리 있는 말이고 하나의 장르적 요소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그게 과연 무조건적으로 옳은 디자인인지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는 각각의 게임을 통해, 서로 다른 역사적 관점으로 해당 시대를 풀어내면서 자칫 모두 똑같을 수 있는 게임 시리즈를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게임으로 승화시켰다. 모두가 같은 엔진으로 같은 구동 방식을 가진 게임들임을 고려하면, 이 자체는 기획적 차별화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 제공 방식이 모든 면에서 우월하거나 옳다는 건 아니지만(DLC로 게임을 완성하는 방식 같은 것), 때로는 마치 장르의 기본을 모반하는 듯한 발상의 전환이 장르가 부딪힌 벽, 또는 한계를 넘는 타개책이 될 수도 있다. 본래 모든 발전의 역사란 정-반-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이들이 반인지 정인지는 더 나중의 4X/대전략 게임들이 알려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일본의 ‘보는 게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는 게임은 확실히 기존의 하는 게임과는 구별되는 현상이지만 완전한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존재했다. 특히 가정용 콘솔과 함께 일본의 게임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센터에서는 이러한 ‘보는 게임’은 흔하게 일어나는 광경이었다. < Back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03 GG Vol. 21. 12. 10. 1. ‘보는 게임’에 대한 기억 필자는 어릴 적부터 그다지 게임에 소질이 없었던 탓에 점프를 하여 성벽을 오르거나 호랑이를 탄 채 불타는 링을 뛰어넘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시도도 한 번 못 해본 채 늘 동일한 순간에서 몇 번이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게이머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어린이는 자라서 주로 남들은 안 하는 게임만 ‘보는’ 어른이 되었다. 필자의 소위 ‘보는 게임’과 관련된 가장 오래되고 충격적인 경험은 전자오락실이 아니었다. 한번은 필자와 동생보다 몇 살 많았던 6학년짜리 엄마 친구 아들이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현란한 동작으로 버튼을 눌러 공격을 피하고 조이스틱을 움직이며 놀라운 속도로 결승선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한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고수였다. 직접 하는 것만큼 긴장한 우리는 손에 땀을 쥔 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고수를 진심을 다해 응원했다. 두번째는 일본의 어느 복합 엔터테인먼트 체인점이었다. 최고 난이도의 곡을 북을 치는 속도, 절묘한 타이밍, 강약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플레이하던 고수는 퍼포먼스를 마치곤 구경하던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다른 게임기를 향해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나갔다. 이렇게 직접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고수의 플레이는 보는 것을 넘어 게임 자체를 예술 작품을 감상 하듯 바라보게 되었고 마치 스포츠 경기를 관람 하듯 프로게이머의 경기를 즐기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 게임 방송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직접 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게임 플레이를 보면서 즐기는 ‘보는 게임’ 이 게임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보는 게임’은 타인의 플레이를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실력도 키워 보겠다는 목적성을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해본 적 없는 (혹은 할 생각이 없는) 게임이라도 타인의 플레이를 보는 것으로 또 다른 재미를 느끼며 플레이어가 직접 하는 게임과는 별개로 ‘보는 게임’ 만의 즐거움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1) 최근 몇 년 사이에 일본에서도 게임 방송 2) 이나 e스포츠와 같은 ‘보는 게임’이 디지털 네이티브 3)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방치형 플레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감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났으며 여배우 혼다 츠바사나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대형 유튜버 히카킨 (HIKAKIN) 4) 이 게임 채널을 개설하기도 하였고,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 방송을 주로 하는 샤루루(しゃるる) 와 같은 게임 전문 방송인도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게임 방송을 위한 전용 스트리밍 플랫폼을 전문으로 제공하는 OPENREC.tv나 Dozle(도즈루) 5) 와 같은 회사들도 주목받고 있다. e스포츠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져 플레이어 커뮤니티가 주최하는 이벤트 및 대회가 늘어나게 되었고 일본의 유명 연예 프로덕션인 요시모토 흥업(吉本興業)에서 e스포츠 팀을 창설하는 등 이전과 달리 다양한 기업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AbemaTV와 같은 케이블 방송 뿐 만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서도 e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일본의 ‘보는 게임’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게임 방송과 e스포츠를 중심으로 일본의 새로운 ‘보는 게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용한 인터뷰는 2021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총 10명의 2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 사이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반구조식 인터뷰를 통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중 일부 내용을 번역하여 인용하였다. 2. 새로운 세대의 전유물? 평소 인터넷 방송을 자주 보는 것은 주로 10~20대로 이전부터 인기가 있었던 〈회전 초밥집 전 메뉴 시켜서 클리어하기〉와 같은 ‘한번 해보았다(〇〇やってみた)’ 형식의 방송과 함께 게임 방송의 인기가 급격하게 올라가게 되었다. 6) 이러한 영향인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 <코로코로믹스 (コロコロミック)>(小学館) 가 실시한 2019년 ‘관심 있는 직업 랭킹’에서 이전에는 순위에 들지 못했던 프로게이머와 게임 전문 방송인(주로 게임 유튜버)이 각각 2위, 3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7) 본인이 직접 플레이하지 않는 게임 관련 영상을 자주 찾아본다는 N은 ‘보는 게임’의 매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멋진 장면을 보거나 (드물기는 하지만) 게임 공략을 참고하려고 본다. 플레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개가 다양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중략]…전혀 다른 게임을 하는 친구들과도 좋아하는 게임 방송에 대한 정보는 공유할 수 있고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다" (N, 20대, 남, 대학생). 평소 e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자주 본다는 Z는 ‘보는 게임’의 재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게임에 대한 공략법도 알 수 있고, 야구나 축구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며 보는 것과 같은 재미가 있다" (Z, 20대, 남, 아르바이트). N과 Z에게 있어서 ‘보는 게임’은 ‘하는 게임’과는 분명히 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는 게임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이다. 게임은 하지 않지만 게임 방송을 자주 본다는 W는 집에서 주로 방송을 틀어 놓고 운동을 하면서 보거나 듣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 (본인의 최애 (推し))이 (게임을 하면서) 보이는 반응도 재미있고 (성우이기 때문에 ) 해설하는 목소리도 좋아서 굳이 프로게이머와 같은 고 스킬이나 화려한 테크닉이 없어도 매우 재미있다" (W, 20대, 여, 회사원).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게임 방송을) BGM처럼 들었다. 주로 집에서는 틀어놓고 보면서 공부하면서 들으면서…청소하면서 보면서…들으면서… [중략]…해본 적 없어도 (공략 방법 등이) 새롭고 그 자체만으로 게임은 즐길 수 있다" (H, 20대, 여, 대학생). H의 부모님은 게임을 하면서 성장한 세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고 쉽게 몰입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W와 H의 경우처럼 게임 방송과 같은 새로운 ‘보는 게임’에 익숙한 세대에게 ‘보는 게임’은 때때로 ‘라디오와 같은 듣는 게임’이기도 하며 때론 운동이나 청소 등과 같이 ‘다른 무엇인가를 동시에 하면서 하는 게임 (しながらゲー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게임 방송을 보는 것은 비단 젊은 세대 뿐만이 아니다. 일본 게임의 전성기를 ‘하는 게임’을 체험하면서 성장한 세대 중에도 게임 방송을 자주 보는 이들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30대의 K와 M, 40대의 C가 이에 해당한다. 어렸을 적부터 다가시야 (駄菓子屋) 8) 나 제과점 앞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는 K와 M은 비슷한 ‘보는 게임’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K는 다양한 플랫폼의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C는 평소 타인과 경쟁할 필요도 없고 그냥 보면서 힐링이 되는 〈펭귄의 섬〉 과 같은 스마트폰 게임을 주로 하는데 동일한 맥락에서 게임 방송을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게임 방송을 본다는 M은 이렇게 말한다. "많이는 보지만 단순히 송신되는 것을 그냥 그대로 받은 느낌? 이랄까…… 게임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보는 게임’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M, 30대, 남, 서비스직). 3. ‘보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보는 게임’ 문화는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일까? 게임 문화를 주도해 왔으며 ‘하는 게임’에 익숙한 이들은 이처럼 게임 방송은 ‘보는 게임’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게임 방송이나 e스포츠와 같은 새롭게 등장한 ‘보는 게임’이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특히 Y는 시간이 날 때마다 다양한 게임을 하지만 게임 방송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게임을 하면 (게임 방송을 보는 것)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동영상을 볼 시간에 역시 직접 플레이하는 편이 몇 배는 더 즐겁다" (Y, 30대, 남, 대학원생). Y는 ‘보는 게임’을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가 게임을 할 때 서로의 순서를 기다리며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훈수를 두면서 게임을 보던 광경이라고 설명한다. 즉 ‘보는 게임’ 에서는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타인과 같은 플레이 경험과 공간,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플레이한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연결된 화면이나 채팅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거리가 존재하는 환경에서의 ‘보는 게임’은 게임을 완전히 체험하고 있다고 하기 어려우며 플레이의 경험 자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 진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어느 시기부터 ‘보는 게임’으로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다며 I는 일본의 전자오락실인 게임 센터(ゲームセンター)에서의 ‘보는 게임’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게임 센터에서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이 능숙하게 플레이하는 것을 주변의 모두가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구경했던 적이 있다 … [중략]… 신입생과 이야기할 때 처음 해본 게임이 스마트폰 게임이고 게임 센터도 별로 가본 적이 없다고 해서 세대 차이가 느껴져 충격을 받았다" (I, 30대, 남, 대학원생). 게임을 본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며 게임 방송이나 e스포츠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Y나 I가 경험한 것과 같은 ‘보는 게임’ 이 존재했다. 특히 닌텐도에서 1983년 발매한 〈패미컴(패밀리 컴퓨터: ファミリーコンピュータ)〉이 일본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게임은 가족과 함께,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 여가로서 자리를 잡았고 아케이드 게임 역시 이전부터 특유의 직접 몸을 움직여 ‘하는 게임’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아케이드 게임의 주된 플레이 공간인 게임 센터는 젊은이들이 게임을 하면서 서로 교류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한국의 PC방과 같은 대표적인 게임 공간 (장소)으로 ‘보는 게임’이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9) *레트로 분위기의 게임 센터 〈쟈리가니(ザリガニ)〉(왼쪽) 와 〈제로(ゼロ)〉 (오른쪽). (2016-11-24일본, 오사카 촬영). 친구의 플레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보는 게임’이 이루어지는 장소. 대부분의 게임 센터들이 위치상으로도 그렇지만 게임 센터 외부에 설치된 게임기가 많아 행인이나 주위의 다른 플레이어들이 쉽게 플레이를 볼 수 있는 ‘보는 게임’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에 가깝다. 게임 센터에서 플레이하는 것은 이처럼 언제라도 ‘보는 게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멋진 플레이를 보는 것은 게임 방송을 통해 타인의 플레이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를 풍미한 게임의 고수 〈다카하시 명인(高橋名人)〉 10) 의 플레이를 보면서 박수를 보내며 열광하던 이들이 있었으며 격투 게임 대회에서는 친구들의 플레이를 구경하며 응원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처럼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게임 플레이에 익숙한 게임 문화에서 새로운 ‘보는 게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반면 처음 접한 게임이 스마트폰 게임이며 보거나 듣는, 혹은 ‘무엇을 하면서 보는 게임’을 체험하며 성장한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보는 게임’은 TikTok이나 Instagram에 사진을 올리거나 ‘좋아요’와 같은 공감을 얻고 공감 하는 것과 동일한 함께 공유하는 경험일 수 있다. 게임 방송이 다루는 게임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격투 게임이나 슈팅 게임에서 높은 점수를 내거나 플레이어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방송도 있지만 앞서 언급된 것처럼 프로게이머가 아니더라도 또는 특별한 스킬이 없어도 게임을 하면서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 방송이나 80년대 혹은 90년대의 매니악한 레트로 게임 (retro game) 플레이를 하는 게임 방송이 많다. 물론 감상할 수 있는 게임 방송도 인기가 있다. 예를 들자면 〈게임 산책(ゲームさんぽ)〉 11) 채널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채널에서는 다양한 게임들을 소개하고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전형적인 ‘보는 게임’ 콘텐츠이다. 그러나 타인이 플레이하는 것을 게임 테마와 관련된 전문가인 초대 손님들이 보면서 코멘트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마치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좌담회처럼 진행된다. 즉 ‘보는 게임을 보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게임’을 재해석하고 평가하는 새로운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게임 방송에서 대신 도전해 주고 있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 만큼 그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멋진 플레이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는 N과 H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게임 방송은 동료나 친구 혹은 그 구역의 고수가 플레이 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이러한 게임 플레이를 통해 친근함을 느끼고 마치 자신이 플레이 하는 것과 같이 동일시하기도 한다. 한편, 집에서 그리고 게임 센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했던 일본의 게임 문화를 주도해 온 30~40대의 세대들에게는 게임 방송을 ‘보는 게임’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4. ‘e스포츠는 뭐가 다르죠?’ 일본의 e스포츠 그렇다면 e스포츠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e스포츠라는 용어가 알려지게 된 것은 2015년 〈사단법인 일본 e스포츠협회 (JeSPA)〉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2018년 문부과학성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e스포츠 대회 개최나 프로게이머 팀의 출범이 잇따르며, 스폰서계약을 체결하려는 기업들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공개된 KADOKAWA Game Linkage의 조사에서도 일본의 2019년 e스포츠 시장 규모가 이미 60억 엔을 넘어섰으며 코로나로 인한 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의 e스포츠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본에서 e스포츠라는 용어가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각 게임 센터에서 개최하는 격투 게임 중심의 게임 대전 이벤트가 있었다. 하이스코어를 목적으로 하는 게이머 (고수) 12) 들이 존재했고 아케이드 게임의 전성기에 등장한 〈스트리트파이터II〉 13) 로 인해 플레이어가 서로 대전하는 게임 문화도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 디지털과 아날로그 할 것 없이 게임을 자주 한다는 T는 ‘보는 게임’으로의 e스포츠는 역시 익숙하지 않다며 e스포츠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e스포츠와 RTA(Real Time Attack)와 뭐가 다른가? 차이가 있다면 있겠지만 게임은 역시 하는 거다. 경기를 보는 것과 다르다. 보고 하고 보고 하고. 일본에서는 게임 콘텐츠도 PvP나 PvE나, Minecraft 등 서바이벌 적인 것 만이 인기있는 콘텐츠가 아니니까" (T, 30대, 남, 회사원).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e스포츠를 즐기는 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나 T의 이야기처럼 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바둑이나 장기 대회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e스포츠를 관람한다는 것은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또한 국제적인 e스포츠 대회에서 인기있는 종목들 중에는 일본에서는 그다지 인기 없는 장르의 게임도 많다. 한국에서는 이미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거액의 상금이 걸린 대규모 대회나 유명 기업들과 스폰서를 체결한 대회들이 개최되면서 프로게이머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젊은 세대에게도 e스포츠라는 ‘보는 문화’는 친숙한 광경은 아니다. e스포츠는 일본에서 아직 ‘관람형’ 보다는 ‘하는’ 게임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가정용 콘솔 게임기가 많이 보급되어 상대적으로 PC게임이 주종목으로 채택되는 e스포츠의 시작이 늦어지게 되었지만 14) 2018년에는 기존의 e스포츠 3개 단체가 통합하여 〈일본 e스포츠 연합 (JeSU)〉이 발족하게 되었다. 15) 물론 일본에도 한국과 같은 e스포츠가 존재하지만,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와 연계한 형태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일본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6) 한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이 e스포츠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일본에서는 중소도시의 현/구/시 도청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역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e스포츠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인프라가 준비되기도 전에 e스포츠의 지역 대회는 활성화되었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 비해 인구감소 및 고령화에 따른 문제를 겪고 있는 중소도시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데 e스포츠가 지역 활성화 뿐만 아니라 노년층의 건강 증진을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e스포츠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17) 와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지역 경제를 부흥하고자 하는 목적도 가진다. 대표인 사례로 이바라키(茨城県)현에서는 e스포츠를 통해 지역 세대 간 격차를 줄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고등학생을 위한 e스포츠 대회나 e스포츠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아카데미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일본 최초의 47개의 도/부/현이 참가하는 이벤트〈도/부/현 대항e스포츠대회(全国都道府県対抗eスポーツ選手権2019IBARAKI)〉를 개최하였다. 또한 교토부(京都府)에서는 2019년 〈교토 e스포츠 서밋〉이 열렸고 2021년에는 지역 경제 부흥을 도모하는 〈KAMEOKA e-SPORTS PARTY〉를 가메오카 온천 지역에서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도/부/현 대항 e스포츠 대회(全国都道府県対抗eスポーツ選手権2019IBARAKI)〉의 앰배서더 Vtiber 이바라키 히요리 (茨ひより) (왼쪽) 18) 과 교토의 의 포스터 (오른쪽) 일본 e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교육 기관도 생겨나고 있다. 주로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중심으로 프로게이머 양성 학교가 설립되었고 대학에서는 e스포츠를 커리큘럼에 넣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19)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장수 인구가 많은 일본에서 노년층의 건강 관리를 위해서도 e스포츠가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액티브티협회〉에서는 ‘건강 게임 지도사’ 의 자격증 코스를 통한 교육 세미나와 노년층을 위한 e스포츠 이벤트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20) 이러한 e스포츠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국의 중소 도시에 e스포츠 시설과 팀이 생기면서 이웃 지역과의 대회 등을 개최하기 위한 시니어 e스포츠 팀도 나타나게 되었다. 21) * 평균 연령 65세 이상으로 구성된 시니어 e스포츠 팀 의 공식 홈페이지, https://matagi-snps.com/ (2021년 10월 06일 접속)(왼쪽) 과 건강 게임 지도사 양성 강좌 안내 전단지 (오른쪽) T가 언급한 것과 같이 일본에는 일반적인 e스포츠 대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RTA in Japan〉과 〈AFTER 6 LEAGUE〉가 있다. 사단법인 RTA에서는 운영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RTA in Japan〉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1년에 2번에 걸쳐 『RTA in Japan Summer』와 『RTA in Japan Winter』를 개최하고 있으며 일단 특정 게임을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해야 하므로 주로 〈천수의 사쿠나히메(天穂のサクナヒメ)〉나 〈별의 커비 64(星のカービィ64)〉,〈 슈퍼 마리오 64 DS(スーパーマリオ64DS)〉와 같은 게임이 다수 플레이 종목에 포함된다. 〈AFTER 6 LEAGUE〉는 대회 타이틀이 상징하는 것처럼 퇴근 후 (6시 이후) 플레이하는 회사원을 중심으로 하는 e스포츠 리그이며 뜨거운 반응을 얻어 2022년에 2번째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의 경우는 〈리그 오브 레전드〉나 와 같은 주로 국제적인 e스포츠 대회의 종목인 게임을 중심으로 덴츠 ( Dentsu.Inc ) 등의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대회이다. * 〈AFTER 6 LEAGUE〉의 공식 홈페이지, https://a6l.jp/ (2021년 10월 06일 접속) 지금까지는 국제 e스포츠 대회에서 널리 알려진 프로 게임 팀이나 프로게이머는 드물다. 22) 일본 국내의 e스포츠 대회는 상금 역시 매우 적은 수준인데 이것은 대회의 상금 규정이 〈경품 표시법(景品表示法)〉과 〈도박 관련 형법(賭博罪)〉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3) 따라서 일본의 e스포츠 대회에서는 국제 대회와 같은 많은 상금을 걸 수도 비싼 입장료를 받아 수익을 낼 수도 없는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도/부/현을 중심으로 경기 시설이 설치되고, 2018년부터는 공인 프로게이머를 위한 프로라이선스가 제도화되었다. 이에 따라 상금에 대한 규정도 변경되어 대규모의 e스포츠 대회가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됨에 따라 e스포츠 활성화의 가능성이 늘어나게 되었다. 24) 그러나 아직까지는 단발성 이벤트화 되어 있는 e스포츠 대회, 열악한 관람 문화, 전문적인 프로게이머의 부족으로 인해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고 남아있는 과제는 많아 보인다. 5. ‘보는 게임’과 ‘~하면서 보는 게임’ 일본의 ‘보는 게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는 게임은 확실히 기존의 하는 게임과는 구별되는 현상이지만 완전한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존재했다. 특히 가정용 콘솔과 함께 일본의 게임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센터에서는 이러한 ‘보는 게임’은 흔하게 일어나는 광경이었다. 둘째, 새로운 ‘보는 게임’인 게임 방송과 e스포츠의 수용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가정용 콘솔과 아케이드 게임 중심의 게임 문화에서 성장하여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플레이 경험이 익숙한 이들에게 물리적 환경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느끼기 어려운 새로운 ‘보는 게임’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며 e스포츠 경우도 그러하다. 물론 일본 e스포츠의 출발점은 이전의 격투 게임 대회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현재와는 달리 플레이어 간의 팬 교류 행사나 오락실 홍보 이벤트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확장된 방식의 ‘보는 게임’인 게임 방송이나 세계적인 e스포츠의 흐름과는 다른 전개를 보이게 된 e스포츠와 관련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타인의 플레이를 보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수월하게 공유되지 못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셋째, 현재 일본에서 새로운 ‘보는 게임’을 경험할 수 있는 무대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는 것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전과 비교하여 이러한 ‘보는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따라서 타인의 플레이를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공유하면서 동시에 ‘보면서 들으면서~하면서’ 즐기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기존의 게임문화와는 또 다른 게임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대에 따라 즐기는 게임의 장르나 플랫폼이 다르며 어디까지 ‘보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달라질 것이다. ‘보는 게임’ 이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게임 플레이를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교류하고 확장시켜 다시 새로운 즐거움을 공유해 나가는 방식이며 이처럼 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다. 앞으로 ‘보는 게임’ 혹은 ‘~하는 게임 보는 게임’이 어떤 식으로 더욱더 변화될 것인지를 기대해본다. 1) 이경혁.『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 게이머, 게임을 말하다』. 로고폴리스. 2016. 2) 게임실황동화 (ゲーム実況動画) 혹은 줄여서 게임실황(ゲーム実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YouTube, Twitch 이외에도 니코니코 동화 (ニコニコ 動画) 사이트가 있다. 3) 디지털 디바이스로 가득한 환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성장한 이 세대에게 디지털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 방법을 제시한 마크 프렌스키 (2006)는 이들을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설명한다. Prensky, M. (2006). Don't bother me, Mom, I'm learning!: How computer and video games are preparing your kids for 21st century success and how you can help!. St. Paul: Paragon house. 4) 유튜브에서 게임 방송 콘텐츠가 인기를 얻게 되자 <히카킨 게임스>라는 채널을 개설하였다. PC 게임 뿐만 아니라 모바일 게임 등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5) 유명 유튜버 Dozle(ドズル)를 중심으로 하는 회사로 주로 <마인크래프트> 관련 게임 방송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6) Cross Marketing.『YouTubeの利用実態に関する調査』.2020. https://qr.paps.jp/W9uDU(2021년 10월 06일 접속) 7) <코로코로믹스온라인 (コロコロミックオンライン)>의 홈페이지, https://corocoro.jp/82218/ (2021년 10월 6일 접속)) 8) 옛날 문방구 (문구점)와 비슷한 형태로 가게 앞에 몇 대의 게임기가 설치되어 있거나 과자와 어린이들의 장난감 등을 주로 판매한다. 9) 加藤裕康.『ゲームセンター文化論メディア社会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 新泉社. 2011. 카토(加藤)(2011)는 게임을 ‘보면서 즐기는 문화’를 형성해온 게임 센터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메타적인 게임 현상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게임 센터는 일본 특유의 게임 문화와 맞물려 있을 뿐 만 아니라 게임을 하거나 보는 행위 이외에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간의 교류가 형성되는 장소로 게임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10) 패미컴 붐과 함께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게이머이며 특기는 1초에 16회이상의 연타였고 그의 35주년을 기념하여 2021년 <타카하시명인 탄생 35주년기념 앱 ~게임은 1일 1시간!~ (高橋名人35周年記念アプリ〜ゲームは1日1時間!〜)> 이 앱으로 출시되기도 하였다. 11) Livedoor사의 이 채널은 ‘다양한 관점에서의 게임 방송’을 컨셉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2021년 3월 20일 <모여라 동물의 숲> 편에서는 마을의 부엉이 박물관 설립을 테마로 설정했는데 국립미술관 큐레이터와 예술 전문가를 초대하여 게임 플레이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 플레이 뿐 만 아니라 실제 게임 속 큐레이션 및 작품의 재현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다. 12) 게임의 최고 점수를 노리는 고수들을High Scorer (ハイスコアラー)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3) 1991년 등장한 이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전국 게임센터 대항 격투게임 대회 영상 등이 판매되기도 하였다. 14) 青山学院大学総合研究所研究ユニット「五輪eスポ」.『eスポーツ産業論』. 同友館. 2020. 15) 는 주로 e스포츠 대회의 보급, 프로라이선스의 발급 및 프로게이머의 육성을 지원하고 있다. 2020년 8월말 현재 전국적으로 25개의 지부가 생겨났다, 공식 홈페이지, https://jesu.or.jp/ (2021년 10월 06일 접속) 16) 筧誠一郎 .『e スポーツ地方創生~日本における発展のかたち~』.白夜書房. 2019. 17) e스포츠를 전망이 밝은 비즈니스 분야로 꼽히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적합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18) 공식 홈페이지, https://www.ibaraki-esports.com (2021년 10월 06일 접속) 19) 게이오 대학에서이라는 수업이 개설되었고 쿠마모토 산업대 중심으로 이 설립되었다. 20) 공식 홈페이지, http://www.jp-activity.jp (2021년 10월 06일 접속) 21) 아키타현(秋田県)에서 일본 최초의 시니어 e스포츠 프로 팀이 활동하고 있다. 팀명은 로 주로 포트나이트를 중심으로 플레이하는 팀이다. 22)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진 선수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전문적인 프로게이머 선수가 부족하고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전업 프로게이머 전문 육성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겸업 선수들 중에는 게임 실력이 좋은 사람이 ‘어쩌다 보니 프로게이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는 경우도 있다. 23) 프로게이머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일반인’이 게임 플레이를 보여주고 고액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경품 관련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로 규정된다. 따라서 10만엔을 넘어가는 상금은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4) 그러나 일본 최초의 e스포츠 프로라이선스에는 국제 대회의 등록 종목인 <하스스톤>이나<리그 오브 레전드>,<스타크래프트 II>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리츠메이칸대학 기누가사 종합 연구 기구 전문 연구원) 신주형 주로 시리어스 게임과 시리어스 게임을 플레이하는 장소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리츠메이칸대학 게임 연구 센터 (RCGS)의 게임 아카이빙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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