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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 Back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05 GG Vol. 22. 4. 10. 평등한 게임이라는 환상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이런 주장은 다양한 이유로 게임에 접근조차 어려운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극 빈곤층 등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많은 게임 커뮤니티들에서 어린 고수들에게 게임의 도道를 사사 받은 풋내기 성인들의 경험담 같은 것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어쨌거나 게임의 세계에서는 게임 잘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사실은 유효하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은 오늘날 게임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재능하나로 돌파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지는 따져볼 일이다. 데이터 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을 배반하는 데이터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령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NBA(전미농구협회)를 가난한 흑인들이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장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데이터는 반대다. NBA는 점차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이 가난한 선수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규칙을 지키는 등의 사회적 능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1). ‘게임을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임이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에는 무시당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것을 놔두는 것은 책임방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런 개입들은 필연적으로 게임을 더 돈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Pay to win이라는, 돈을 많이 낼수록 강해지고 승리하는 게임들의 승승장구와, 하나의 게임을 잡다하게 쪼개서 팔아치우는 부분유료화의 전면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게임들이 있다. 하지만 자녀가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신형 컴퓨터를 사주고 프로게이머 학원에 보내주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게임계에서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인성’논란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한 문제들은 앞선 예처럼 교육과 양육환경의 문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프로스포츠들에 비하면 아직은 덜 체계화 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만약 e-sports가 진짜로 다른 인기 스포츠들만큼의 위상을 획득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경쟁하면서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은 티어로 알 수도 없고, 반영되지도 않는다. 엄마가 모욕이 된 세계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렇듯이, 게임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평등하게 소통하기보다는 무차별적 모욕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혹자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모욕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평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욕이 진짜로 ‘무차별적’인지는 살펴봐야 한다. 박서련의 단편 소설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2)은 동명의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소설은 무용을 전공할 뻔하고, 외국계 게임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하나 낳은 중산층 가정주부인 ‘당신’3)의 이야기를 다룬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게임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아이에게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부모인 당신은 고민 끝에 게임과외를 떠올린다. 최초로 찾아온 것은 명문대를 다니며 챌린저 티어인 남자 대학생이다. 그는 게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나무라며 부모라도 아이가 하는 게임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게임을 가르쳐 주겠다던 그는 그걸 빌미로 손을 잡고 가슴에 팔꿈치를 갖다 대며 성추행을 한다. 이제 어리지로 순진하지도 않은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고, 단호하게 그를 내쫓는다. 불쾌감을 뒤로하고 새롭게 만난 과외선생은 다이아 티어의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이다. 당신은 그에게 여성적 매력이 없음을 안도하며 아이의 과외선생으로 낙점하지만, 그는 아이가 아니라 당신이 게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선생의 등쌀에 떠밀리듯 당신은 게임을 시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놀랍게도 재능이 있었다. 당신은 승리를 쌓아가며 오랜만에 온전한 성취감을 맛본다. 순식간에 아이의 티어인 브론즈를 넘어 골드에 진입한 당신은, 때마침 아이의 라이벌이 아이와 전교회장 출마를 두고 게임으로 승부를 내자고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신은 불신하는 아이를 이겨 실력을 입증하고, 아이의 라이벌을 게임으로 불러내 보기 좋게 압살해버린다. 하지만 사실 게임을 그다지 잘 하지도 못했던 아이의 라이벌은 패배에 승복하지 않고 아이의 계정에 접속해 있는 당신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쏟아낸다. 그리고 당신은 알게 된다. 게임에서 ‘엄마’는 그 자체로 욕설로 받아들여지고, 당신이 엄마라고 타이핑할 때마다 ‘XX’가 그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아이의 라이벌은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너희 엄마를 외치지만, 게임은 엄마인 당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이긴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패배감을 맛본다. 게임, 엄마, 여성 이 소설은 여성과 게임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례들을 엮어 한편의 악몽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악몽은 엄마의 것이다. 소설 속의 ‘당신’은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엄마이고, 자녀 양육에 관한 최신의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 중산층이다. 훈육과 금지보다 이해와 도움을 통해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고, 과도한 애정관계를 형성해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소위 깨인 엄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은 이런 듣기 좋은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은 아이의 미래를 자신의 계획과 계산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고,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이는 의존적이고 버릇없게 자라고 있다. 당신은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하려 하는 미숙한 어른임에도, 자신이 아이를 빈틈없이 케어하고 있다는 허위의 자족감에 빠져 있다. 따라서 소설은 엄마인 당신을 온전한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빠져있는 함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심지어 공모하고 있는 존재에 가깝다. 게임문화에서 엄마의 표준적인 모습은 당장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닦달하는 존재이지만, 소설 속의 당신은 이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녀의 모든 영역을 빈틈없이 조망하고 싶어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게임에 직접 뛰어들게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지든 방임이든 개입이든 간에 게임은 엄마들에게 불안의 영역이다. 그것이 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게임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담론이나 연구들은 온전한 논의가 아니라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정해두고 말하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마들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게임에 맞서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런 역할들을 엄마가 도맡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양육과 돌봄이라는 문제가 엄마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엄마의 일’로 여겨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모든 삶이 평가되는 종류의 문제이다. 하지만 학업성적이나, 일의 성과 같은 것에 비해 양육은 지극히 평가가 어렵다. 사회적으로는 아이가 명문대에 입학하고 고소득 직업을 갖는 것 정도가 성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잘못이 되고야 만다. 이 함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양육의 책임을 모든 가족과 사회에 실질적으로 분산하고, 엄마들에게 합당한 사회적 인정과 자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엄마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지운다. 직장에서는 자기만 조직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밖에서는 이기적인 ‘맘충’이고, 가족들에게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엄마이자 아내다. 게임에 대한 ‘엄마’들의 적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방어적인 반응이다. 자신의 의무는 아무것도 줄어든 것이 없는데, 남편과 자녀가 시간과 돈을 게임이라는 잘 알지도 못할 것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의 악몽은 여자에 대한 것이다. 게임에서 가장 심한의 모욕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여성형이다. 게임을 못한 것이 남자일지라도 욕을 먹는 것은 애꿎은 엄마와 전국의 아무 상관없는 ‘혜지’들이고, 평생을 모쏠로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남자친구 따라서’ 게임을 시작한 줏대 없는 게이머 취급을 당한다. 그런가하면 많은 남자게이머들이 여자게이머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여긴다. 엄마, 선생님, 여가부(!)처럼 여자는 게임을 방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게이머 여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저도 그 여성은 나보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며, 게임을 ‘가르쳐’줘야할 존재일 것이라는 가정이 붙는 경우가 대다수다. 게임을 잘하는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그의 실력은 언제나 ‘합리적 의심’에 휩싸이고, 폄훼당하기 일쑤다. 자신이 그 여성게이머보다 게임을 못하더라도, 게임실력을 의심하고 훈수를 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남성게이머들이 넘쳐난다. 게임문화의 공식적인 입장은 ‘게임만 잘하면 되지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이지만, 이것으로는 게임문화 전반에 넘쳐나는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를 설명할 수 없다. 딜루트는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에서 많은 게임커뮤니티의 주류담론들이 모두를 동등한 게이머로만 대해야 하며, 친목질을 방지하고 성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드러내선 안 되는 성별은 오직 ‘여성’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지칭하고, 여성 게이머 이슈에서는 입을 모아 조롱하기에 바쁘지만 그런 것에 문제를 제기할 때 만 “남자건 여자건 그냥 각자 게임을 하면 그만”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4) 최근 몇 년간에 걸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게임업계의 성차별, 남성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아시아시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런 흐름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게이머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의 책임 있는 단위들이 하다못해 말이라도 차별에 대한 반대를 뚜렷하게 표하는데 반해, 한국과 아시아는 모든 것을 소비자-게이머들의 뜻이라며 회피하기에 바쁘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일부 남성게이머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앞장서서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듯 오늘날의 게임문화는 엄마에게도 여성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이렇게 특정한 남성 집단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새로움도 품을 수 없음을, 그래서 결국에는 고립되고 도태될 것임을 예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당신’은 게임을 통해 그간 얻지 못했던 승리감을 맛본다. 그가 현실에서 다뤄야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결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고, 끝나지도 않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게임은 짧은 시간동안 승리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어쩌면 당신은 패배 역시 기뻤을지 모른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조차 없는 세상과는 다르게 명확하게 판정을 내려주고, 심지어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게임은 이미 현실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로 침식되어 있었고, 게임은 그를 “XX”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게임의 세계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 할 수 없고,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협곡에서도 똑같은 기울기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는 게임에서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며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한다. 나는 게임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지겨워진다. 왜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 기어코 현실의 가장 나쁜 것들을 끌고 들어오고야 마는가? 왜 누군가를 모욕하고 신뢰를 깨트리는 것에서 음침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녀야 하는가?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게임하는 것 대신에 진짜게이머와 가짜게이머를 구분하는 의미 없는 언쟁에 휘말려야 하는가? 게임은 가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 중 하나지만,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우려스럽다. 더 약탈적인 비즈니스모델,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지와 무시, 독성을 가득 머금고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커뮤니티문화. 이 흐름들을 멈출 수 없다면, 게임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우리와 닮은 ‘게임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손을 쓰지 못하게 되기 전에 게임을 되찾자. 이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1)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모두 거짓말을 한다》, 더 퀘스트, 2018. 2)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3) 당신은 이름이 아닌 2인칭 대명사이다. 4)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동녘,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평론가, 사회학연구자) 최태섭 지은 책으로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설명서》, 《한국, 남자》, 《잉여사회》 등이 있다.
- 북유럽 레트로: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
핀란드에서 컴퓨터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 였고 80년대부터는 상업화 되었으니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최초의 e스포츠 토너먼트 - 당시에는 “이스포츠”가 아니라 “핀란드 컴퓨터게임 챔피언십”이라 불렸다 - 가 1983년에 이미 개최되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게임플레이가 청소년들의 주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는다. < Back 02 GG Vol. 21.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Veli Matti-Kahulathi Veli-Matti Karhulahti is Senior Researcher at University of Jyväskylä and holds Adjunct Professorship in University of Turku. His research tackles gaming, play, and technology use in many ways, and he is the author of the book Esport Play: Anticipation, Attachment, and Addiction in Psycholudic Development (Bloomsbury, 2020). (Game Researcher) Bora Na A game researcher. Game-playing goes back quite a long way, but the first encounter with game studies came by chance, through a game course take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Since graduating, has carried out research and writing centered on game history and culture, here and there. Contributed to The History of Games, The Theory of Games, and Mario, Born in '81, among others.
-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Deluded Reality (망상 현실)〉: ‘통로’를 지나 풀 다이브(full-dive)
필자는 지난 호에서도 큐레이터 동료가 언급한 바 있는 전시, 《MODS》(2021, 합정지구, 서울)에서 장진승 작가와 프로젝트 ‘SYNC’를 진행했었다.1) 전시를 위한 이 프로젝트는 작가와 서로 관심이 있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대화는 동시대 시뮬레이션 비디오게임 플레이어의 자율성, 몰입도로 초점이 맞춰졌다.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unji Gu An aesthete, yet forever mulling over the carnivalesque grotesque. Loved tycoon games from an early age—and wrecked a spine for it. With games or anything else, can't stand not knowing, so races to the ending and often starts over.
- [Editor's view] 게임비평공모전에 부쳐
GG 7호는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꾸몄습니다. 게임비평이라는 영역 자체가 사회 전반에서는 다소 낯선 부문일 수 있겠지만, 무려 93건의 응모작이 들어온 것을 보면서 적어도 게임에 대한 비평적 접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심사 과정에서 가졌던 고민들과, 공모전과 GG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드리고자 합니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우리가 했다 번역을 - 한글 패치 30년의 흐릿한 역사
유저 한국어 번역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저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록을 성실하게 남기지도 않았고, 그 기록은 현재 대다수가 소실되어 있다. 또한 다수의 초기 번역 팀은 폐쇄적으로 작업했기에 사료가 존재한다 한들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ggap Hong Freelance writer—a job title suspected of being a synonym for "unemployed." Started out as a reporter at Ddanzi Ilbo, where broke the first story exposing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s comment-manipulation operation. A lifelong gamer who wrote a first piece of game criticism in 2001—and is very glad it has since been lost.
- 어려움에 직면한 유럽의 게임 구독 서비스
스태디아는 실패했고, 엑스박스 게임패스는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게임팬들로부터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가운데, 유럽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서비스가 미래 시장성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오늘날 게임 시장에서 하드코어 게이머는 소수다. 유럽에서 게임은 나이를 뛰어넘어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 되어있는 활동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6~60세 연령대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아마도 휴대폰으로 무료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그친다 할지라도, 따라서 현 시점에 클라우드 게임이 그리 매력적인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독 기반 게임의 부상은 그리 먼 시점의 일이 아닐 수 있다. < Back 09 GG Vol. 22.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Ida Jørgensen Holds a PhD in game studies from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where her research revolved around gender representation, game culture and games as media. Today she works as a postdoctoral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Game Researcher) Bora Na A game researcher. Game-playing goes back quite a long way, but the first encounter with game studies came by chance, through a game course take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Since graduating, has carried out research and writing centered on game history and culture, here and there. Contributed to The History of Games, The Theory of Games, and Mario, Born in '81, among others.
- ‘병’의 은유 : 요코오 타로의 질병 서사
<니어> 시리즈와 <드래그 온 드라군> 시리즈에서 질병은 반복해서 절망의 폐쇄회로를 다룬다. 세계멸망의 꽃이 나타나 드래그 온 드라군 월드에 레드아이가 퍼지고, 카임은 레드 드래곤과 계약을 맺어 2003년 도쿄 신주쿠에 이르기까지 결전을 벌이며, 레드 드래곤의 몸속에 마소가 확산되어 니어 월드에 전파되고, 인간이 만든 로봇들은 마소를 다른 세계로 돌려보내 세계멸망의 꽃은 Zero의 눈에 탄생하게 된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드래그온드라군, 니어오토마타, 질병서사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ivist, Writer) Zhang Cheng (Activist, Writer) Myeonggyo Hong Activist and writer. Works at the social movement organization Platform C on East Asian international solidarity and social movements. Author of To My Vanished Chinese Friend and A Ghost Throws a Punch at the World, and translator of Xinjiang Uyghur Dystopia and Dying for an iPhone (co-translated).
- 엘든 링: 황금 나무가 솟은 정원
게임을 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도달한다. 완성한 지도에서 더 이상 가지 않은 장소는 없으며, 무한한 탐험을 약속하던 세계는 더 이상 광야가 아니다. 그때 〈엘든 링〉은 그림 같은 정원에 가까워진다. 자연물과 폐허를 포함한 정원은 “열정적인 기억, 회한, 달콤한 멜랑콜리를 더 잘 자극할 목적으로 새로이 부재를 만들어낸다.”16) 설령 엔딩이 일종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에도, 플레이어들은 불완전한 총체성을 해소할 길 없이 꿈꾸며 정원을 헤맨다. < Back 엘든 링: 황금 나무가 솟은 정원 10 GG Vol. 23. 2. 10. 조지 R. 마틴을 협업자로 병기한 첫 트레일러가 공개되며 기대를 모았던 〈엘든 링〉은 메타크리틱 97점을 기록하며 출발했다. 2022년 11월 15일을 기준으로 1,700만 장 이상이 판매되며 화제 되었고, 2022년의 최다 GOTY수상작으로 꼽혔다. 1) 〈엘든 링〉이 매끄럽게 GOTY의 궤도에 안착했는지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GOTY로 꼽은 언론들은 그에 호의적으로 일단락하는 듯하다. 디지털트렌드는 “프롬 소프트웨어의 어려운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며 탐험할 수 있다”며 2) , 폴리곤은 “섬세한 게임 디자인이 별도의 첨언 없이도 즐거운 탐험을 경험하게 해준다”고 3) 서술한다. 한편 이러한 코멘트는 〈엘든 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토론을 환기한다. 이전 작과 매우 흡사한 스타일로 출시된 〈엘든 링〉에게 과연 신작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대표적일 것이다. 조지 R. 마틴이 골격을 짰다는 〈엘든 링〉의 설정은 〈다크 소울〉 시리즈나 〈블러드본〉과 확연히 다르지만, 그러한 작품들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태껏 스튜디오가 쌓아 올린 역량을 총합하여 게임을 제작했다는 디렉터 인터뷰는 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4) 조언이나 혈흔과 같은 온라인 플레이 요소부터 시작해, 게임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메커닉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도처에 치명적인 함정을 배치하고 죽으면 여태껏 모은 자원을 잃는다는 페널티를 부과하며, 맵 탐색의 종착지에 보스전을 지정”하는 기획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추동하는 원리의 타락, 등장인물의 유산과 역사” 등의 요소와 맞물리며 특유의 효과를 자아낸다. 〈데몬즈 소울〉에서 유래한 스타일은 ‘소울본’ 게임의 문법을 확정한 것처럼 보인다. 5) 기존 다크 소울 시리즈는 엄격한 구성을 취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한정된 공간 내에 밀집한 함정을 파훼하며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플레이어에게 주어진다. 무사히 다음 세이브 지점으로 도달하는 과정에서 숱한 죽음을 겪으며 일종의 모범 답안을 찾아 나가야 하는 셈이다. 맵의 특정한 요소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조율하며 일정한 질서를 형성한다. 잠긴 문과 같은 장치는 별도의 동선을 요구하며, 위험한 구간을 생략할 수 있게 해주는 숏컷은 맵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반면에 〈엘든 링〉은 단선적인 길을 우회할 수 있는 선택지를 여러 갈래로 제공한다. 그러나 〈엘든 링〉이 오픈 월드라는 사실은 이전 작과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부각한다. 오픈 월드는 열려 있다는 의미의 ‘오픈(open)’과 게임 공간을 의미하는 ‘월드(world)’의 합성어로, 플레이 과정에 있어 고정된 순서가 존재하지 않아 공간 이동에 대한 제한이 없는 게임의 형식을 일컫는 용어다. 6) 초반에 배치된 보스인 트리 가드는 이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에서 보스전을 치르는 때는 맵 탐색을 완수했을 때이다. 보스전을 무사히 클리어하면 세이브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으며, 다음 맵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림그레이브 초입에 튀어나온 트리 가드의 존재는 난데없다는 인상을 안긴다. 더불어 트리 가드를 처치하면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인 황금 할버드는 까다로울 만큼 높은 근력 수치를 요구한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가 실제로 활용하기까지 시차가 발생한다. 따라서 트리 가드 보스전에서 승리의 보상은 서버에 저장되지 않는 플레이어 고유의 경험을 강조하며, 정서 패턴을 구축한다. 설령 보스를 쓰러뜨리지 않더라도 엘레의 교회에서 세이브 포인트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전 작에서 학습한 메커닉과 배치되기도 한다. 물론 〈엘든 링〉에서 등장하는 모든 보스가 트리 가드처럼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기존의 문법을 연장하여 보스를 활용한다. 림그레이브에서 호수의 리에니에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접목의 고드릭이 놓여 있고, 도읍 로데일에 들어서려면 최소한 두 명의 데미갓을 제패해야 한다. 동선을 제한하는 조건을 둠으로써 플레이어의 행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는 플레이어에게 시기에 따라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여 광범위한 정보나 상황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유도하는 활성 제약이기도 하다. 7) 그러나 다양한 우회로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조건은 이전만큼의 당위성을 갖지 못한다. 플레이어는 반드시 고드릭 보스전을 거치지 않더라도 스톰 빌 성벽의 외곽을 통해 호수의 리에니에로 진출할 수 있으며, 아예 림그레이브 남부에서 함정 포탈을 타고서 도읍 로데일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NPC들은 우회로의 존재를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이는 단선의 우회라는 방식을 학습하게 하며, 우회로의 존재는 필드가 품은 넓은 역량을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그 외에도 간편해진 시스템은 그 자체로 풍부한 선택지를 확보한다. 〈엘든 링〉에서는 지도를 통해 축복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기동성이 뛰어난 영마를 쉽게 소환하고 해제하여 공간을 용이하게 정복한다. 위의 언론들에서 일컫던 ‘다양한 전술’에 기여하는 셈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유도’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게이머들이 오픈 월드라는 수사에 기대하는 가치를 고려해보았을 때 〈엘든 링〉이 이를 충족하는지 확언하기는 조금 어렵다. (비록 자유도라는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된 바 없이 맥락마다 다른 의미를 갖지만) 놀이는 본질적으로 교란이며, 무언가의 정상적 상태를 교란하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기대는 근본적이다. 마인 크래프트와 같은 샌드박스 형 게임이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는 그가 선택한 행위에 관해서 게임이 유의미한 피드백을 되돌려 주기를 원한다. 유원지로서 기대되는 오픈 월드는 다양한 행위를 수행하는 포괄적인 장이다. 그렇게 플레이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충하게끔 해준다. 그러나 〈엘든 링〉에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다지 넓지 않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개입하는 방식이 비/적대로 간소화되기 때문이다. 대면하는 거의 모든 것은 전투 가능한 상태이다. 언제든 죽음으로 정복될 여지를 가진다. 접촉 메커니즘은 적대와 평화를 가르는 한 번의 칼질로 규명된다. 그런 점에서 〈엘든 링〉에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포함해 게임 세계에 놓인 구조물이 단순하다는 지적 역시 유효하다. NPC들은 원자화된 개인의 이합집산에 불과하며, 대사의 자막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이는 “실존적 복잡성에서 잠시 피난하여 적절한 행위를 산출하는 행위적 유형을 체득하게 한다”는 티 응우옌의 게임에 관한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8) 최종 보스전은 〈엘든 링〉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구현한다. 라다곤의 육체는 녹아내려 한 자루의 칼로 빚어진다. 뒤이어 등장한 엘데의 짐승은 생명체라기보다 관념에 가까워 보이며, 이를 무엇인가로 확정해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스전이라는 형태를 통해 플레이어의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때리고 구르고 피하는 일련의 행위로 그를 해석한다. 세계성을 구축하려는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그 스스로 인식하는 범위 이상으로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길 바란다, 〈엘든 링〉의 메커니즘은 그러한 역량을 소거할 위험을 안긴다. 다크 소울 1에서는 게임 플레이의 장과 주변의 플레이 불가능한 공간을 흩뜨리는 방식으로 공간감을 높였다. 9) 플레이어는 숏컷을 뚫고, 현재 상호작용 불가능한 문 너머에서 반짝이는 아이템을 보며 공간에 관한 상상을 확장할 수 있다. 그 배후로 늘어진 배경 이미지는 비록 탐험 불가능한 영역일지라도 공간에 대한 경험을 통합해준다. 대신에 〈엘든 링〉은 풍경을 활용함으로써 플레이어가 탐구할 여백을 확보한다. NME는 〈엘든 링〉을 GOTY로 선정하며 풍경의 매력을 언급한다. 10) 확실히 풍경은 섬세한 오브젝트나 아름다운 색채 등을 통해 심미적 경험을 안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NME는 스톰 빌 성, 레아 루카리아와 같은 레거시 던전의 전체 윤곽이 포괄되는 시야로 이를 언급하고 있다. 공기원근법은 이전 작에 비해 약화하여 멀리 떨어진 대상을 눈앞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풍경은 단순히 보고 읽는 배경이 아니라 실제로 플레이어가 횡단하며 상호작용하는 주된 장이라는 점에서 각별하게 다가오며, 경험을 정교하게 부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11) 〈엘든 링〉에서 튜토리얼을 마치면 어두운 지하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와 림그레이브에 들어서게 된다. 위로 상승하는 동선은 널찍이 펼쳐진 바깥의 필드 중앙에 우뚝 선 황금 나무와 일치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나무는 틈새의 땅에서 살아가는 한갓 미물과 대비를 이룬다. 나무 아래 나열된 신수탑은 한눈에 포착된다. 주요 보스를 격파하고 방문하는 장소인 신수탑은 앞으로 진행할 여정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그렇게 풍경은 플레이어가 사건을 겪고 맥락을 형성하게 될,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 한편 필드에 늘어선 폐허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며 플레이어의 경험을 입체적으로 부연한다. H. 루에젠과 푹스는 폐허의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언리얼 엔진 5 공개 영상을 독해한다. 그에 따르면 포토리얼리즘의 사실적 구현이 몰두하는 주요한 부분은 어떻게 더 사실적으로 몰락과 폐허를 그려낼 것인가의 문제다. 12) 폐허는 과거에 존재했던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면서 동시에 그 단절을 드러낸다. 유적석이나 신전석과 같은 재료는 한때 거기에 파편이 아닌 총체가 남아 있음을 주지시킨다. 설령 소멸이나 죽음이라 할지라도. 13) 이 때 게임이 플레이어의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감상은 경외심과 공포를 함께 아우르는 낭만주의적 정서인 숭고와 닮았다. 지각과 감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표상하면서 숭고는 생겨난다. 벨라는 게임에서 “닫힌 가능성의 광대한 공간을 드러냄으로써” 유희적 숭고가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14) 이는 로어에서도 유사하게 발견 가능하다. 아이템 로어는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황금시대를 부분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엘든 링〉에서는 몹이나 지역에 관한 이해를 도와줄 별도의 코덱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도감이나 백과사전 따위를 기대하기 어렵다. 대상과 관련한 이야깃거리는 장비 아이템의 설명란에 짤막하게 붙어 있을 따름이다. 수많은 아이템에 산개된 정보를 일일이 재조합해야 한다. NPC의 대사나 비석과 같이 특정한 국면에서 상호작용 가능한 정보는 플레이어가 별도로 스크린샷을 찍어두어야만 저장할 수 있다. 불친절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사실상 정보의 폐허이기도 하다.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 특유의 불분명한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로어를 짜 맞춰 ‘프롬뇌’를 굴리며 이야기를 추론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활성화했다. 부재하려는 것을 되살리려는 고고학적 시도인 셈이다. 고고학자 빌 팔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Archaeology Tube가 Video Game Archaeology 카테고리를 통해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그러한 시선으로 다루는 게 대표적이다. 15) 수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는 〈엘든 링〉은 미스터리의 탐구를 종용하는 듯하다. 게임에서는 지도 후면을 통해 지하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지상의 이미지가 겹치며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저는 그 자체로 비밀을 품은 땅이다. 추레한 몰골의 고드윈이나 드넓게 펼쳐진 붉은 부패의 늪은 미스터리의 탐구를 흥미롭게 만든다. 이처럼 〈엘든 링〉은 가지 않은 장소에 대한 환상을 유지함으로써 유지되는 플레이 동기를 지속한다. 그 세계는 적대의 원리에 의해 고독하고 적의에 차 있으나 동시에 그 특유의 부동성으로 기억과 경험을 수용해준다. 게임을 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도달한다. 완성한 지도에서 더 이상 가지 않은 장소는 없으며, 무한한 탐험을 약속하던 세계는 더 이상 광야가 아니다. 그때 〈엘든 링〉은 그림 같은 정원에 가까워진다. 자연물과 폐허를 포함한 정원은 “열정적인 기억, 회한, 달콤한 멜랑콜리를 더 잘 자극할 목적으로 새로이 부재를 만들어낸다.” 16) 설령 엔딩이 일종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에도, 플레이어들은 불완전한 총체성을 해소할 길 없이 꿈꾸며 정원을 헤맨다. 1) Statistia, “Lifetime unit sales generated by Elden Ring worldwide as of November 2022”,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300663/elden-ring-sales-worldwide/ 2) Mike Mahardy and Polygon Staff, “The 50 best video games of 2022”, 2022.12.06., https://www.polygon.com/what-to-play/22956981/best-games-2022-list 3) Giovanni Colantonio and Tomas Franzese, “The 10 best video games of 2022”, 2022.12.05., https://www.digitaltrends.com/gaming/best-video-games-2022-top-10/ 4) “Elden Ring is based on a culmination of everything we've done with the Dark Souls series and with our games thus far.” Will Nelson, “‘Elden Ring’ is the “culmination” of FromSoftware’s games says Miyazaki“, 2021.12.30., https://www.gamesradar.com/elden-ring-fromsoftware-hidetaka-miyazaki-interview/ 참고. 5) Florence Smith Nicholas and Michael Cook, The Dark Souls of Archaeology: Recording Elden Ring. 2022. In Proceedings of the 17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Foundations of Digital Games.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1p. 6) 김정선, 오픈월드 게임의 레벨디자인 및 시스템 요소 연구 : ‘젤다의 전설 : 야생의 숨결’을 중심으로, 2019 한국게임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2019, vol.20(3), 300쪽. 7) 윗글, 301쪽. 8)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22), 86쪽. 9) Daniel Vella, No mastery without mystery: Dark Souls and the ludic sublime, Game Studies, 2015. vol.15(1). 10) “Best Bit: The way Elden Ring uses stunning vistas to show your objectives: Stormveil looming over Limgrave, the reveal of Liurnia and Raya Lucaria afterwards, the descent to Siofra River, the dragon in Leyndell…”, NME, “The 20 best games of 2022”, 2022.12.06., https://www.nme.com/features/gaming-features/the-20-best-games-of-2022-3360445 11) Paul Martin, The pastoral and the sublime in Elder Scrolls IV: Oblivion, Game Studies, 2011, vol.11(3). 12) Eduardo H Luersen, Mathias Fuchs, Ruins of Excess: Computer Games Images and the Rendering of Technological Obsolescence, Games and Culture, 2021. vol. 16(8), 1091p. 13) 장 스타로뱅스키, 자유의 발명/이성의 상징, 이충훈 역, 파주: 문학동네, (2018) 202쪽. 14) Daniel Vella, No mastery without mystery: Dark Souls and the ludic sublime, Game Studies, 2015. vol.15(1) 15) Archaeology Tube, An Archaeologist Plays Elden Ring (FIRST IMPRESSIONS), 2022.02.27., https://www.youtube.com/watch?v=Imtkh8B3U2Q 16) . 장 스타로뱅스키, 224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게임이 이야기를 경험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최근에는 <마라톤>을 플레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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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재난에 “‘별 혹은 행성의 불길한 국면’이라는 첫 번째 정의와 ‘갑작스럽거나 커다란 불행’이라는 두 번째 정의가 함께 관계”해 왔을 때, 일반적으로 <데스티니2>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전자의 의미를 조명하는 쪽에 가깝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데스티니, 재난서사, 포스트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yuri Kim Interested in the ways games let us experience stories. After poking around here and there, lately played Marathon.
-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왜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의 수면 습관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왜 이 수면 측정 앱은 흥행에 성공했는가? < Back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16 GG Vol. 24. 2. 10. 내 포켓몬이 부르니까 자러 가야지 2023년 7월 처음 출시된 포켓몬 컴퍼니의 새로운 모바일 게임 <포켓몬 슬립Pokémon Sleep>은 출시 2개월 만에 전 세계 누적 수면 시간 10만년을 돌파 1) 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장르를 내세우며 이 앱이 게임이라고 주장했다. 게임의 방식은 단순하다. 이용자가 자면, 게임은 이용자의 수면패턴을 분석하고 이에 맞는 포켓몬을 수집한다. 보다시피 이용자가 재미를 느낄 요소라고는 포켓몬밖에 없다. 즉 <포켓몬 슬립>의 흥행은 오로지 ‘포켓몬스터’라는 유명하고 사랑받는 주머니 괴물들의 매력 하나만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 세계 엄청난 열풍을 일으킨 <포켓몬 GO>의 목표 또한 오로지 현실 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포켓몬을 포획하는 것이었다. 포켓몬스터라는 IP는 성공적으로 게임 이용자에게 재미를 유도하고 두 게임을 ‘게임’이라고 인식시켰다. 일단 게임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자 두 게임은 IP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IP를 통해 흥행에 성공한 게임은 역으로 자신들의 현실과의 접합을 이용해 포켓몬스터 IP의 해상도를 높여갔다. <포켓몬 슬립>을 살펴보자. <포켓몬 슬립>이 이용자 수면 측정의 개연성으로 채택하는 것은 바로 포켓몬의 잠자는 모습 연구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이용자의 파트너 포켓몬은 잠자기 약속을 지키라며 이용자에게 알림을 띄운다. 이용자는 파트너 포켓몬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눈을 뜬 이용자를 맞이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수면 습관을 가진 새로운 포켓몬들이다. 이를 반복하며 이용자는 포켓몬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성장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용자는 자연스럽게 매일 밤 포켓몬과 함께 잠들고, 포켓몬과 눈 뜨는 일상을 보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용자는 게임에게 지시받은 대로 매일 포켓몬이라는 생명체를 ‘연구’하게 된다. 포켓몬 연구자가 된 이용자는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생명체에 대해 현실의 생명체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포켓몬이라는 형상은 이용자 속에서 점점 구체화되며, 이용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매개로 그들과 가장 내밀한 일상을 공유하며 ‘현실을 함께 한다’는 감각을 전달받는다. 구체화된 형상과 실재하는 감각이 심상에서 결합하며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생명체는 현실 공간에서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포켓몬 컴퍼니의 이 같은 전략은 기존 팬들의 애착을 강화하고 모바일의 접근성을 이용해 새 이용자를 유치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이러한 전략은 포켓몬스터가 단순히 거대한 IP일뿐만 아니라 꾸준히 콘텐츠의 무한확장 및 구체화를 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켓몬 컴퍼니는 대내외적으로 포켓몬이라는 생명체를 구체화시키고 그들과 이용자의 거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IP를 개발해왔다. 대표적인 사례인 <포켓몬 GO>는 그저 일부분이다. 현재 포켓몬 게임은 가장 기본이 되는 콘솔 게임이외에도 모바일 게임, 오프라인 카드게임, 아케이드 게임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다. 어딜 가나 보이는 다양한 상품과의 콜라보 ‘굿즈’까지 포함할시 포켓몬은 체감상 비둘기보다도 자주 목격된다. 포켓몬이라는 허구의 생명체는 여러 매개를 통해 지금도 끈질기게 현실을 침범하고 있는 셈이다.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인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의 DLC에서는 이용자가 포켓몬을 씻기고, 먹이는 걸 넘어 포켓몬의 몸으로 행동하고 다른 이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포켓몬 슬립>이 게임이냐? 앞선 일련의 전략들은 현실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AR 게임 <포켓몬 GO>의 엄청난 흥행과 현실의 생활 습관을 관리하는 <포켓몬 슬립>의 약진이라는 특수한 결과를 탄생시켰다. 왜 ‘특수한’ 결과일까? 평소 우리가 보아온 다른 사례들과 비교하면 쉽게 답을 알 수 있다. 이 대대적인 IP 경쟁력 강화 작업은 포켓몬 컴퍼니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포켓몬 슬립>은 정말 ‘게임’인가? <듀오링고Duolingo>는 ‘게임하듯 재미있게’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습 앱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게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녹색 부엉이가 호들갑을 떨어도 <듀오링고>를 재미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포켓몬 슬립>은 <듀오링고>처럼 수면습관 개선이라는 명백히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지만 게임으로 여겨진다. 물론 앞서 말했듯 포켓몬의 존재 덕분이다. ‘포켓몬’에 대한 애정이 사람들을 웬 수면측정 앱으로 이끌었다.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란 게임이 아닌 분야에 게임적 요소를 적용하여 흥미를 유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이 연로한 단어를 모셔온 이유는 이 단어가 근래에는 더 이상 예전만큼 주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이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금, 게임적 메커니즘 또한 인간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매일 금융거래 앱에 들어가 출석체크를 하고 포인트를 받으며, 중고거래 앱에서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며 자신의 레벨을 올린다. 이것은 달리 말해 이런 세상에서 게임이 ‘게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게임적 요소로 치장한 가지각색의 서비스보다 그들이 조금 더 게임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다수의 게임에게 이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게임은 게임적 요소를 통해 이용자를 유혹해야만 하는 실용적인 목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명감이나 따내야할 사업 예산이 없는 이상 게임에 실용적인 목적을 넣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게임의 본질, 즉 재미에만 충실하면 당연히 게임은 금융거래 앱이나 중고거래 앱보다 재밌고 게임 같다. 그렇지 않은 게임도 물론 일부 있다. 그에 대해선 유감이다. 이런 현실에 반해 포켓몬 컴퍼니는 실용적인 목적을 역으로 자신들의 IP 강화에 이용하였다. 게임 이용자는 대개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이번에는 훨씬 최신이지만 마찬가지로 근래 관심이 부쩍 시들어버린 단어를 가져와보겠다. 바로 한때 전 세계인을 3차원 가상공간으로 불러 모았던 메타버스(Metaverse)다. 코로나19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진 메타버스 열풍은 빠르게 퍼진 만큼 빠르게 식었다. 대면 활동이 제한되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현실의 사회·경제활동이 가능하단 점은 한때 메타버스를 주목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게임과의 차별점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현재 남아있는 <로블록스Roblox>나 <제페토ZEPETO> 등의 메타버스 공간을 게임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 세계는 현실과 닮아있을지언정 현실 공간과 별개의 규범으로 운영되며, 이용자들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들이 즐거운 이유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타버스로 통칭되는 게임의 현재 모습은 현실의 사회·경제활동을 수행하는 것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메타버스의 대다수 이용자가 어린 연령대라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블록스>의 로우 폴리곤 세상은 빈말로도 현실과 닮았다고 할 수 없다. 이용자들은 현실과 다른 다양한 세계를 넘나들며 체험하고 교류하는 것을 주요 즐거움으로 삼는다. <제페토>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에 <제페토>는 어쨌든 얼굴인식과 AR 기술을 활용한 메타버스로 소개되지만, <제페토>의 아바타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제페토>를 깊게 즐길수록 아바타가 점점 현실의 모습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달라진 아바타로 다양한 테마의 배경을 즐기는 것이 <제페토>의 핵심이다. 이 사실은 대부분의 AR 게임이 왜 흥행에 실패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즐거움을 원하는 게임 이용자는 대개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반면 포켓몬이 선사하는 이 모든 간접 체험에도 포켓몬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생명체다. 이용자들은 포켓몬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현실에서 보고 싶어 한다. 가상공간에서 굳이 현실의 일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현실의 일에 가상의 상상력이 끼어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AR 게임이 <포켓몬 GO>라는 사실은 AR 기술의 한계에도 포켓몬이 그들의 방대한 배경을 통해 이용자들을 감성적으로 매혹하고, 이를 믿어주고 싶은 이용자들이 넘어가준 것에 가깝다. ‘포켓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게임이 현실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현실에 첨가할 매력적인 가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다른 도구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보통은 기술력으로 돌파구를 찾고, 그래서 돈이 많이 든다. 캐릭터는 좋은데 게임성은 별로? <포켓몬 슬립>은 강력하게 형성된 IP에 힘입어 성공한 ‘게임’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그 자체로 이용자들이 ‘포켓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모바일 게임의 규모를 무시할 수 없는 현재의 게임 지형에서 포켓몬 컴퍼니의 이러한 노력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포켓몬 슬립>의 사례는 매력적인 캐릭터 IP의 영향력이 단순히 뽑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 수집 모바일 게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캐릭터 IP는 게임의 한 구성 요소를 넘어 독자적으로 재미와 아우라를 창출할 수 있는 요소로 등극하였다. 독자성을 가진 IP는 결코 베껴지지 않는단 점에서 그것을 보유한 회사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남는다. 점진적으로 애착 관계를 형성한 이용자에게 캐릭터의 존재는 이미 현실이고, 이는 대체 불가능하다. 다만 캐릭터 IP가 게임 안에서 독자적으로 재미를 창출하는 지위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임과 동시에 아이러니한 논란을 동반한다. IP는 게임의 중대한 구성 요소로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재미를 담보하지만, 게임 이용자들이 ‘게임성’이라는 각자 다른 정의를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할 때 ‘캐릭터’의 존재는 흔히 논외이기 때문이다. ‘게임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대개 재미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캐릭터를 보며 느끼는 재미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이용자들 사이에서 격한 ‘게임성’ 논란을 일으켰다. 같은 시기 같은 장르의 다른 게임에 비해 질 낮은 그래픽과 각종 버그 등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지적 또한 매 게임 시리즈마다 있어왔다.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출시 초기에는 게임이 불가능할 정도의 다양한 버그가 문제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용자들이 게임을 할 때 이 모든 요소는 종합적으로 고려되므로, 이런 식의 분리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게도 게임의 모든 요소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미비한 기술력이나 불합리한 시스템은 게임 진행 및 몰입을 방해해 시리즈 자체의 호감을 하락시키며, 그것은 IP도 마찬가지다. ‘게임성’이라는 합의되지 않은 정의를 합의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미 이용자들의 게임 선택 기준에는 IP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포켓몬은 왜 우리의 수면을 책임지려 하나? 왜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의 수면 습관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왜 이 수면 측정 앱은 흥행에 성공했는가?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은 이용자가 키, 몸무게, 습성, 성격, 먹이와 서식지를 넘어 잠자는 모습까지 연구하게 만들며 구체화된 형상으로 머릿속에 안착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점차 거리를 좁히며 치밀하게 이용자의 현실 공간에 침투해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포켓몬에 대한 애정이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들고, 게임 플레이는 다시금 이용자의 애정을 강화시켰다. 게임에서 흔히 ‘현실’이라는 요소가 가상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구조를 통해 <포켓몬 슬립>이라는 독특한 ‘게임’은 목표를 달성했다. 이것은 현재 게임에서 IP라는 요소가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인 재미를 달성할 수 있는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동시에 이는 오랜 기간 축적된 IP가 어디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확실한 것은, 포켓몬은 앞으로도 이용자들의 일상을 서슴없이 침략하고 더욱 친근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1) 디스이즈게임, 2023.10.20., 수면 게임 ‘포켓몬 슬립’ 전 세계 누적 수면 시간 10만 년 돌파, https://www.thisisgame.com/webzine/game/nboard/225/?n=17908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대학원생) 손민정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과 문화를 공부 중입니다. 글과 함께한 만큼 게임과 늘 함께 해왔습니다. 별별 게임 다 합니다.
-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 Back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12 GG Vol. 23. 6. 10.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하지만 이게 생산적 의미를 가지려면 게이머 스스로가 ‘인정투쟁’을 넘어 게임과 예술의 본질에 가 닿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비평 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제시해본다면 어떤가? 가령 “예술을 논한다”고들 하는데, 그게 뜻하는 바는 뭔가? 모나리자든 벽에 붙여 둔 바나나든 뭐든 ‘얼마나 팔렸느냐’, ‘쓸모가 있느냐’를 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가치평가를 둘러싼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예술을 논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게임을 논한다”고 할 수 있다면, 게임을 예술의 일종이나 그 비슷한 뭔가로 취급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 게임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게임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인터랙티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랙티브에 기반한 게임이 아닌 것’들도 세상엔 많이 있다. ‘인터랙티브’를 게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볼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랙티브 하지 않은 것’을 게임이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무언가가 게임이기 위해서는 선택이든 조작이든 입력이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사용자의 행위가 게임을 통해 형성된 공간 내 사건을 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은 일반적으로 불특정다수의 사용자 즉 대중을 전제한다. 대중이 매체를 통해 가상적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거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즉, 예술의 그것에 비견될만한 것으로서 게임 비평의 정수는 그 게임이 무엇을 통해서 어떤 세계의 변화를 사용자에게 경험하게 하느냐,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리고 그게 현실 인식의 무엇으로 이어지느냐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닌텐도의 최근 신작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상당히 인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전작에서 오픈월드의 물리엔진을 응용력을 발휘해 활용하도록 한 것에 ‘조나우 기어’라는 장치를 더해 ‘놀이’로서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널판지에 팬과 배터리, 조종기를 달고 물에 띄우면 간이 보트로 활용할 수 있어 체력 소모 없이도 강을 건널 수 있다는 식이다. 기구를 만들고 불을 피워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이 덕에 퍼즐의 난이도가 하락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게이머 입장에서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보다 쉽고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의미있다. ‘오픈월드’를 표방한 게임이라도 게이머의 사용자 경험은 제작자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오픈월드’ 또한 가상의 환경에 불과한 탓에 제작자가 설계된 영역 밖으로 사용자가 나가는 것까지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한계는 지형지물의 배치나 ‘보이지 않는 벽’ 등을 매끄럽게 배치하는 것으로 사용자 경험의 훼손을 자연스럽게 최소화 하는 포장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이러한 ‘포장’을 훨씬 더 그럴듯하게 해내고 있다. ‘조나우 기어’들의 등장에 더해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트레루프’ 능력의 존재는 ‘오픈월드’의 한계를 상정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아주 조그만 부분이라도 천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게이머가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물의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기에, 애초에 제작자가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움직이도록 해야 할 ‘레벨 디자인’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바가 대단히 많아 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모든 천장을 다 뚫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조나우 기어’로 만든 비행기 역시 일정 거리 이상 날아가면 사라지게 설계된 등의 한계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수단을 통해 사용자가 게임으로 형성된 세계에 대한 훨씬 더 강한 개입력을 확보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는 점은 누구나 놀라워할만한 대목이다. 이런 요소는 사용자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전작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부터 새로 시작된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본질적으로 멸망한 세계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서는 우선 그 세계의 주인이 되는 일이 필요하다. 집 청소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가진 예산의 한도 내에서 알맞은 청소용구 구매를 계획하고 실행한 후 그 도구로 청소를 하고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집 주인의 일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제공된 청소도구를 활용해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따르며 청소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집 주인의 경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게임은 아무리 ‘오픈월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후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은 최소한 전자에 가까워진 느낌을 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이 주는 사용자 경험은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형식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지만 ‘이야기’로 보면 좀 다르다. 자연럽게 생길 수 있는 의문을 두루뭉술하게 넘어 간다. 눈 앞에서 바닥을 뚫고 나오는 주인공에 잠시 놀라기만 할뿐 곧바로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듯 무덤덤한 게임 내 등장인물의 존재 등이 그렇다. ‘게임적 허용’을 고려하더라도, 외양과 생태가 판이하게 다른 민족 간의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충돌이 묘사될 법도 한데, 잘해야 몇 번 튕기는 게 전부고 대개는 다들 속없이 주인공을 기꺼이 도와주기로 한다. 1차원적 감동이 있긴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크다.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닌텐도는 ‘온 가족의 닌텐도’이다. 지위와 자격을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감수하는 중세 정치를 묘사한 ‘크루세이더 킹즈 3’의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아니다. 소년 소녀들의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둘째, 이게 일본의 방식이다. 불편한 얘기는 뒤에서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누구나 수긍할만한 아름다운 얘기를 남기길 원한다. 되도록이면 문제를 직면하거나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의 한일관계 개선 논의에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과거사에 대한 태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일본이 불편한 주제를 오로지 외면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온 가족의 닌텐도’의 이면에는 가히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 볼만한 성인물 시장과 PC-98시리즈 등 자체 규격 컴퓨터 시절 성인용 어드벤처 게임 범람의 역사가 있다. 즉, 불편한 얘기를 하는 공간은 따로 있다. 하지만 거기가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리즈’ 일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 얘기를 덧붙이는 건 ‘이야기’에 해당하는 요소까지 ‘주인이 되는 경험’에 결합시킬 수 있었다면 비평적으로 더 나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야기’로부터 발생하는,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살면서 겪을 법한 갈등을 뭔가 방법을 강구해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에 비할만한 뭔가를 찾아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실엔 이미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이 존재한다. 그것을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자며 머리를 맞대자고 말하는 사람이 극소수일 뿐이다. 그나마 일본과 같은 ‘게임 선진국’이 만든 게임을 소재로 한다면 최소한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인 한국의 게임 이슈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코인과 결합한 수익 모델 얘기라든가, 여성 캐릭터의 신체 부위라든가, 사기나 다름없는 사건과 같은 얘기들만 떠오르지 않는가? 이것이야 말로 다들 주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대개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이슈에서 이러한 풍경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예술로 인정받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하고 있는가? ‘무엇이 어떤 것을 통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단 그 각오가 된 다음에야 가능할 것 같다. Tags: 예술,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