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결과

Search this site

공란으로 1280개 검색됨

  •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게임비평의 쓸모

    게임 비평 역시 앞서 언급한 시의성이나 대규모 자본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글의 형식은 게임 비평일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 존재는 점차 자기 합리화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현재 한국 게임이 처해 있는 다양한 위기들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다키스트 던전>을 <다키스트 던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발진이 어째서 전작과 후속작의 틀을 바꾸고자 했는지. 어떤 요소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만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다키스트 던전을 각별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 Back 21 GG Vol. 24.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ilkwon Jeong A farmer, a baker, and a barista. Currently in an eighth year of writing as a game journalist. Striving to experience and witness as much as possible within the limited time given.

  •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 Back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17 GG Vol. 24. 4. 10. 1. 들어가며 어린 시절 자주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되지 않았나 싶다. 가위바위보에서 손을 내고 희비를 오가게 되는 순간이나 공기놀이하다가 손을 삐끗하는 찰나 등, 노력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들은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단순한 놀이의 형태를 넘어, 내기나 겨루기와 같은,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놀이에 대한 속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다. 이 중 하위징아는 오늘날 놀이와 유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로 인식되며, 카이와는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보다 유형화해 계승한 인물로 언급된다. 이번 논문 세미나는 후자의 인물, 카이와가 명명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카이와의 놀이는 대체로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각각 경쟁, 우연(운), 모방, 현기증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경쟁의 아곤은 축구나 권투 등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놀이를 말한다. 알레아는 사다리 게임, 제비뽑기로 설명할 수 있고 미미크리는 역할극을, 일링크스는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돈 뒤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나 흥분감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루두스(Ludus)와 파이디아(Paidia)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운,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다.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2. 카이와와 알레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놀이는 다소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성과 연결되었을 때 도박이나 사행성 관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게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연성은 곧장 도박과 통하게 되는가? 어느 정도 우연성을 의지하게 되는 게임은 사행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개념은 결국 룰렛 머신 부류의 게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에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레아는 규칙을 통해 승패를 겨루지만 놀이하는 자가 그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놀이를 일컫는다. 알레아의 승패는 오로지 우연을 통해 갈리는 것이 특징이며 그 즐거움의 본질이란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을 통해 서로의 운명을 겨루는 데 있다.”(66쪽)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란 특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겨루기로 했을 때, 그 승부에서 발생한 운만으로도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연이 선사하는 위험과 기회는 공정하게 분배”(66쪽)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알레아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는 카이와를 의존해 왔기에 상당히 저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알레아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역할로 거듭나기 힘들다. 특히 카이와는 알레아와 아곤을 모순적이면서도 결속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알레아가 아곤보다는 보조적이라고 보았다(Caillois, 1967/2018). 이런 카이와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운의 힘이 달라지는, 어떠한 모순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 자수성가한 이에게는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운이 날 때부터 권력자였던 사람에게는 부인 받게 되는 게 그 예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운과 우연이 노력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환상에 빠트린다고 본 것이다. 3. 알레아-우연이 가지는 의미 연구자들은 카이와의 의견에서 한층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카이와가 우연의 비창조적인 부분에만 주목했으며, 우연을 다층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우연은 고대 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 ‘운명’과 ‘천운’을 비롯해, ‘천체’, ‘정의’, ‘징벌’, ‘미신’, ‘요행’, ‘행운’, ‘불행’, ‘행복’, ‘신’, ‘섭리’, ‘계시’, ‘기회’, ‘미래’, ‘가능’, ‘희망’, ‘기대’, ‘역설’, ‘반전’, ‘돌발’, ‘돌출’, ‘변수’ 등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화된 것이다(최성철, 2016). 가령 ‘운명’ 속 우연은 본래 신의 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였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의심할 수 없고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우연과 함께하는 ‘운명’은 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을 신에게 속박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을 불러오는 ‘자유’의 의미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진리(운명)를 거스르는 상징에서 언젠가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우연은 ‘운명’과 ‘자유’라는, 다소 상반된 두 개념에 깃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와가 이야기한 알레아는 운명과 자유 중 어떤 부분에 더 가까웠을까? 연구자들은 두 개념 모두 그렇다고 설명한다. 카이와가 서술한 우연이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서 ‘운명’이 나타나지만, 결국 알레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 ‘자유’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과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이 ‘자유’라는 개념에 훨씬 근접할 수 있겠으나,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아곤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운명’을 곧 ‘통제’로 단정해 온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를 ‘자유’가 공존하는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알레아를 세 층위로 나누면서 드러난다. 4. 알레아의 세 층위와 <하스스톤> 1) 주술적 알레아 연구자들은 알레아의 세 층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세 층위를 <하스스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로 주술적 알레아란 ‘주술’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어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존버(존나 버티기)’라는 말을 간단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술적 알레아는 신에 대한 의구심을 죄악시했던 중세 기독교 인식(최성철, 2016)을 계승해, 승리를 위한 노력이나 적극성을 생략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주술적 알레아의 핵심을 맹신과 더불어 “어떠한 개연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비이성적 즐거움”(70쪽)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주술적 알레아의 힘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약해졌다고 언급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가치관은 현대인들을 변화시켰고,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놀이하는 일도 적어지게 된 것이 이유다. 이에 연구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주술적 알레아는 사라졌지만, 알레아 그 자체에 잠재된 주술성이 플레이어에 따라 발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스스톤>은 주술적 알레아를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다. 연구자들은 ‘무작위 효과 카드’를 사례로 드는데, 이 카드들은 범용성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다만 이 중 일부는 역전의 열쇠로써 사용된다. 여기서 연구자들이 지목한 카드는 ‘난투’다. 난투 카드는 ‘무작위 하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하수인을 처치’하는 효과가 있어서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 애용되곤 한다. 연구자들이 주술적 알레아와 난투 카드를 함께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난투 카드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길 바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알레아는 역전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재현된다. 2) 시스템적 알레아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게 된 17세기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격변했던 때다. 투기, 도박 등이 대중적 공간에 나타나기도 한 이 시기는 알레아의 상업화도 함께 이루어졌다(Reith, 2006). 이후 19세기에 활성화된 카지노는 알레아의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카지노에 설계된 교묘한 시스템이 사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신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곳의 알레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침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시스템화 되어있다. 이런 시스템적 알레아는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닌, 플레이어와 사업주 간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한다. 현대 디지털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스템적 알레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랜덤박스가 있다. <하스스톤>은 카드 팩이 곧 랜덤박스다. 연구자들은 이 랜덤 카드 팩이 카지노의 수익 창출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분석한다. 철저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낮고, 플레이어에게는 ‘놀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랜덤 카드 팩은 개선된 성능의 아이템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서, 승률이 중요한 플레이어는 특히나 끊어내기 어렵다. 언급한 것처럼 랜덤박스는 여타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가 속속들이 침투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아가 사행성과 도박만을 뜻한다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3) 영웅적 알레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영웅적 알레아는 고대 시절부터 ‘내기’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내기는 특히 17~19세기의 기득권 사회에서 잘 이용됐는데, 이는 내기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탓이 크다. 내기(betting)가 가치 부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박(gambling)과 달리 뛰어난 판단과 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19세기에 발표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설명한다. 해당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기는 선택(guessing)과 증명(proving)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선택과 증명은 극복해 내기만 하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기능한다. 이걸로 짐작할 수 있는 영웅적 알레아의 핵심은 ‘자유의지를 기반 삼아, 운명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다. <하스스톤>에서 영웅적 알레아가 잘 드러나는 건 모험모드다. 이 모드는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로그라이크 형식을 띠는데, 플레이어가 각각의 난이도와 도전 방식을 ‘선택’하고 이를 클리어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런 영웅적 알레아는 단순히 승리하거나 클리어하는 걸 넘어,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에 중심을 둔다. 5. 나가며 물그릇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고, 랜덤박스에 지른 큰 금액을 재밌었으니 됐다며 합리화하고,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가 향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에 대한 내용은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 디지털 게임에 알레아가 형성될 자유도가 존재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몰입해 있을 때는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게임은 정해진 설정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에서 언급된 카지노의 체계와 동일하다. 반면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본래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운을 걸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임 공간 안에서,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결국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게임에는 제작자들의 계산과 기술이 개입되어 있는데, 두 알레아의 가치를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느냐는 소리다. 물론 연구자들도 두 알레아를 한정된 사례에만 적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게임이 애초 만들어진 세계,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락실 기기에 코인을 추가하는 행위나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캐릭터 육성 등에도 시스템적 알레아의 흔적은 남는다. 그러면 게임 안의 알레아들은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본문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관람적 알레아라는 개념을 결론부에 언급한다. 관람적 알레아는 게임 스트리밍이나 e스포츠 방송을 관람할 때 발현된다. 이 알레아는 타인을 매개로 하기에 상당히 간접적이다. 즉 게임을 즐기면서도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확률이 낮다. 이러한 측면에서 관람적 알레아를 주목할 필요성을 함께 제시하고 싶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우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와 알레아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오가면 사행성이나 도박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우연놀이’ 또한 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Caillois, R. (1967). Les jeux et les hommes. 이상률 (역) (2018). <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Reith, G. (2005). The Age of Chane: Gambling in West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최성철 (2016). <역사와 우연>. 서울: 도서출판 길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모 온라인 게임에 복귀했습니다.

  •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 Back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04 GG Vol. 22. 2. 10. 1. 미래는 널리 ‘분배’되지 않았다 사이버펑크의 효시가 되는 소설 『뉴로맨서』의 저자인 윌리엄 깁슨은 이렇게 적었다. “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 새로운 전자기기, 혁명적인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IT기업가들과 평론가들, 테크노크라트들이 이 문구를 인용해 왔다. 기술혁신이 사회를 이끌고, 정체된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이라는 산업적 낙관주의에 기인한 인용들이다. 이들의 발언에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기술의 진보를 사회의 진보와 동일시하는 기술결정론적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는 하이테크 전문가집단과, 신산업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분리하려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이다. 우리 엘리트들이 열심히 개발하고 제도화할테니, 무지몽매한 당신들은 초개처럼 동참하기나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새 기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해마다 스마트폰을 바꾸고 있지만 이를 직접 분해해 들여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알파고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을 이겼는지 자세히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유튜브와 피드에서 엄청난 콘텐츠 소비를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왜 내 앞에 추천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얼리어댑션과 진보의 상징인 아이폰이 계획적 노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공유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깁슨의 계시록적 문구를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라고 섣불리 해석한다. 그러나 깁슨이 왜 ‘spread’ 가 아닌 ‘distribute’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실제 전달하고 싶었던 뉘앙스는 “미래가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데도, 적절히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았다.” 였을 것이다. 신기술은 역사적으로도 사회적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불만을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증기기관과 전기·화학 및 소재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19세기, 서구 사회는 전에 없던 엄청난 생산력을 획득했지만 절대 다수의 노동인구는 최악의 빈곤에 시달렸다.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시 실태를 조사한 문헌을 인용하면서(특히 1850년대의 정부 보고서들) 산업도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20세보다도 짧았다!)과 영양상태가 선사시대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보다 나빴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괜히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찰스 디킨스가 『위대한 유산』같은 책을 쓴 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신 기술은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야한 공구로 노동하는 야만인들보다 더 오래 노동하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가진 자들에게는 궁전을, 빈자들에게는 움막을 생산한다.” 2. 사이버펑크라는 반문화적 문제계 따라서 사이버네틱스 제어혁명이 일어난 당시, 선구적인 컴퓨터기술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은 신기술에 대한 엄청난 우려와 낭만주의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행동주의를 선포했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개발하는데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들어갔는데, 왜 소수의 거대기업들이 그 권리를 독점하는가?’였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저 그런 타자기나 생산하던 IBM, 뜨내기 대학생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벼락부자가 된 것은 정부에서 주어진 특혜와 넘쳐나는 세금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자아내는 새로운 세계를 자본주의의 공간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통계(commons)로 만들기 위해서는 신기술들을 널리 ‘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기업과 국방성이 독점한 컴퓨터·인터넷을 만인이 조건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공공재화 하는 것이다.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공통의 네트워크는 이러한 이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확장시키는 정신적 통로들인 간-네트워크(inter-network), 인터넷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급진적인 정보기술 사상가인 존 페리 발로우는 199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공리주의이념을 월드와이드웹에 적용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종, 경제, 군사, 지역에 따른 특권과 편견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침묵과 동조를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 현실의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관한 법적인 개념들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들은 물질에 기반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는 물질이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휴머니티의 모든 감정과 표현이 연속적인 전체의 부분이며 비트의 전 지구적인 대화이다…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마음의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정부가 이전에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세상이 될 것이다.” - 존 페리 발로우,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1996) 사이버스페이스를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공간으로 상상하던 시기, 깁슨과 발로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대안적인 세계가 평등과 해방의 공동체로 건설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의 기대처럼 초기 사이버스페이스에는 환대와 존중이 공통윤리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민주주의 실험과 참여가 꽃피우는 영토로 거듭났다. 개인홈페이지와 정보공유가 미덕이던 초창기 PC통신과 웹 1.0 시대는 실제로 그랬다. 누구나 익명 게시판에서 애정이 듬뿍 담긴 글과 답변을 주고받고, 선망하는 마음으로 채팅방에서 타인을 기다리며 서로 연결되는 순간을 꿈꾸던 그런 때가 있었다. 비록 오늘날 인터넷은 분노와 언설, 비아냥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핵티비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은 ‘물질이 아닌, 정신만이 존재하는’ 이 신세계에 새로운 문화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사회관계들(인종, 젠더, 지역, 세대 등)에 기반한 구 문화는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광대한 성간을 채워 넣기 시작한 것은 지배질서 문화가 아닌 반문화(counter culture)였다. 배타적 소유와 일방적 상품 생산-소비문화가 아니라 공유와 연대의 문화를 창조할 당위가 요청됐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임금노동, 인종주의로부터 인류의 정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반문화. 선택된 시민들만의 교양에 반대하는 재즈와 록음악,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힙합·레게, 부르주아의 패션을 비웃는 노동계급의 데님패션,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뉴에이지와 히피이즘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구의 합리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전쟁과 범국가적 폭력, 홀로코스트, 주기마다 반복되는 경제대공황, 빈곤, 항구적 실업이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반문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이버-펑크’는 이와 같은 테크노 진보주의와 반문화 시대정신이라는 두 역사적 실타래가 엮이면서 등장한 문제계라 할 수 있다. 야심차게 장르명을 제목으로 차용한 〈사이버펑크 2077〉은 깁슨의 『뉴로맨서』를 필두로 해서 닐 스티븐슨의 『스노크래시』,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 매트릭스』, 영화 〈블레이드러너〉와 〈트론〉, 〈매트릭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와 〈아키라〉가 수놓은 사이버펑크의 별자리들을 하나의 은하계로 집대성한 게임이다. 〈2077〉은 그간 우리가 목겨해온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살풍경과 반문화적 열광에 대한 모든 노스탤지어가 망라되어 있다. 〈2077〉은 크게 세 가지의 문제적 시공간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어떤 유포리즘의 상상력이 결부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1. 오딧세이적 활극의 간-경계 시공간 〈2077〉은 세 가지의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스트릿 키드, 노마드, 기업하수인이 그것이다. 이 배경 설정은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19세기 대중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거리 부랑아의 SF적 재매개화라는 문제를 던진다. 거리를 비참하게 떠도는 부랑아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해킹)을 무기삼아, 뒷골목 정보거래와 갱들과의 경쟁에서 성장해온 인물군상이다. 크게 한탕 해서 성공을 꿈꾸는 얼치기 현상금사냥꾼이 거대 기술기업-권력의 음모와 연루되어 고난을 맞이하는 구도다. 이는 『뉴로맨서』 이후 사이버펑크가 하나의 장르문법으로 구축해 온 서사에 조응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와 몰리가 거의 동일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이 설정은 〈공각기동대〉의 모토코와 바토로 차용되었으며, 『스노크래시』에서는 히로와 와이티라는 인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일본도를 쓰는 한국계 피자배달부인 히로와 스케이트 배달부인 와이티는 메타버스(사이버스페이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지만 요즘엔 PVE나 NFT로 돈벼락을 맞을 수 있다며 온갖 사기가 판치는 그 메타버스가 맞다)에서는 잘 나가는 해커로, 유행하는 사이버 약물 ‘스노크래시’를 추적하는 의뢰를 맡고 그 과정에서 해커 갱단-거대기업의 권력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는 한때 이름을 날렸던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해커)였지만, 의뢰인의 정보를 빼돌린 댓가로 독극물 주사를 맞아 몰락한 인물이다. 케이스는 수수께끼의 인물 아미티지로부터 거대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센스/넷’에 침투해 전설적인 카우보이의 영혼이 복제된 데이터 ROM을 빼내면 대가로 신경복원술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미녀 카우보이 ‘몰리’와 함께 침투극에 발을 내딛는다. ROM은 카우보이의 침입을 차단하는 방벽 ‘아이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블랙아이스’에 침투했다가 죽음을 당한 전설적인 카우보이 ‘딕시-플래트론’의 인격이 담겨진 데이터 집합체이다. 〈2077〉의 현상금사냥꾼 주인공 V와 사고로 그의 인격에 빙의되는 전설의 현상금사냥꾼 조니 실버핸드, 그리고 픽서의 영혼을 가두는 사이버감옥 ‘미코시’와 ‘소울킬러’ 흑막인 거대 군벌기업 아라사카는 사이버펑크의 문법을 고스란히 계승하며 오딧세이적 활극을 연출한다. 그렇다면 왜 ‘활극’인가? 활극은 탈영토적이고, 대안적인 상상으로 재구축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이다. 물리적 현실의 제약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국경과 민족을 넘나들며 초월적인 모험을 펼치는 시공간으로서 활극은 하나의 공통계이다. 활극은 기존의 법이나 사회계약이 작동하지 않고, 자유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정의와 공동선이 우선시되는 장소다. 무협의 ‘강호’, 웨스턴의 ‘황야’, 스페이스오페라의 ‘우주’는 이러한 활극 공간의 무정부성과 자유를 펼치는 무대다. 국경과 민족, 인종과 성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활극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웨스턴의 문법은 다양한 지리적 맥락에 따라 새로 번역되고 재조립된다. 한국의 만주웨스턴은 〈쇠사슬을 끊어라〉(1971),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등에서 보듯이 ‘황야’를 미국 서부가 아닌 만주로 옮겨놓는다(마찬가지로 커리웨스턴, 스파게티웨스턴, 스시웨스턴 등 각 지역마다 웨스턴을 차용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에서 강조되는 ‘강호’에는 한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한민족까지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우주는 인간과 다양한 외계인 종족들이 만나고 협상하는 광활한 공통 공간으로서, 문화다양성이 자리잡은 대안세계에 대한 상상적 메타포가 도입된다. 요컨대 해안선과 산맥을 넘어 비물질의 신대륙을 건설한 사이버스페이스를 재현하는 문제로서 활극만큼 적절한 형식은 없을 것이다.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도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활극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이념을 역설적으로 재현하는 안티테제적 서사다. 〈2077〉의 나이트시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모험담은 사이버펑크의 활극을 고스란히 전유하는 동시에, 점점 악화되고 있는 자유와 기술 기축사회의 빅브라더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훌륭한 장치로 작동한다. 3.2. Turn on, Tune in, Drop out! 사이키델릭의 반자본주의적 시공간 〈2077〉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화려했던 사이버펑크의 반문화 흔적들이 사려 깊게 재현된다는 데에 있다. 선글라스와 가죽패션, 할리데이비슨과 메탈음악, 모히칸머리와 LSD, 프리섹스, 유체이탈과 화끈한 총격전, 일본도를 쓰는 테크노-사무라이, 말끝마다 은어와 욕설을 붙이는 쿨한 길거리 언어, 사랑 한 큰 술까지… 조니 씨발핸드와 나이트시티는 사이버펑크의 모든 문법들이 통하는 교과서 자체다. 일본도를 등에 맨 채, 마음에 맞는 라디오채널을 골라 들으며 유유자적 바이크를 타고 도시를 질주하는 경험은 다른 어떤 사이버펑크들보다 유의미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브레인댄스’ 라는 게임 속 영상기록매체(사실상 『멋진 신세계』의 촉감영화의 오마주인)에 들어가 재현을 만지고 조작하는 경험은 디지털 게임만의 고유한 매체성인 능동적 탐색과 조형행위를 십분 활용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제작사가 거창하게 광고했던 것과는 달리 한정적인 시퀀스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브레인댄스, 블랙월(현상금사냥꾼들을 막는 사이버 방벽) 너머의 초월적 이계에 대한 갈망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2077〉은 여타의 사이버펑크가 그러하듯 이 대안적 시공간을 충실히 재현한다. 〈공각기동대〉의 네트와 2501,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와 요원이 그렇듯 〈2077〉 또한 물질/관념, 육체/정신이 탈주하는 이데아로서 ‘사이버스페이스’를 묘사한다. 여기에서는 현실의 어떤 물리적 및 사회적 제약도 한계로 작용하지 않는다. 신체는 죽었지만 영혼이 살아남아 사이버스페이스의 지성체가 된 넷러너 알트 커닝햄은 대표적인 알레고리다. 니체는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라고 했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대탈주가 가능해진다. 1966년, 히피들의 성자이자 반문화의 선구자였던 티모시 리어리는 “전원을 켜고, 조율하고, 이탈하라!(turn on, tune in, drop out!)”라고 선동했다. 서구사회 전역에서 발발한 68혁명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는 수세기간 이어진 합리적 이성 중심 세계관에 신물이 난 터였다. 그 산물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계속된 경제공황과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로 파산을 선고받았다. 반대편 진영의 소련과 중국도 전체주의 감시국가로 변모하던 중이었다. 전 지구적 노동착취와 식민지 수탈, 감시국가, 전쟁에 사람들은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지적이고 무능한 인간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혁파하길 열망했다. 이 열망을 동력삼아 다양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여성해방, 생태주의, 탈성장, 노동거부, 마을공동체, DIY, 프리섹스 등이 주요 골자였는데 이는 앙시앙 레짐(구 체계)의 사고방식과 전부 단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즉 냉철한 이성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성을 해방시켜 물질의 굴레로부터 이탈하는 영성혁명이 새 방법으로 대두된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요가를 배우고 인도와 중국, 터키에서 내면을 발견하는 여행을 하는 것도 이 시기부터다(한국은 90-2000년대).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전통 직물을 입고, 밥 말리의 드레드헤어를 백인들도 따라한다. 이른바 ‘정신줄을 놓은 채 몽상과 꿈의 원천의식을 좆는’ 사이키델릭은 리어리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LSD나 마리화나의 환각을 통해 더욱 이상적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반문화를 추종하던 청년들과 이상주의자들은 거리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된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주 52시간 노동, 보편적 복지, 차별금지법, 지속가능경제 등은 이 시대 영성혁명의 맹아에서 발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공고한 노동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근면성실하게 노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아낌없이 쓰는 소비사회의 레짐은 이들 반문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부는 즉각 법을 입안시켜 LSD와 환각제를 불법으로 규제하고(한국에서 마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미디어는 내면을 좆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면서 사회 탓만 하는 싸이코들, 성스러운 노동을 거부하는 이교도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반문화의 옹호자들은 이런 사회적 낙인을 비웃고 뒤틀었다. 이들은 구체제가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그 ‘펑크’가 되길 스스로 택했다. 외모를 괴이하게 꾸미고, 메탈 밴드를 결성하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고발하는 가사를 욕설처럼 내뱉으며, 튜닝한 오토바이로 도로를 질주하는 폭주족되기를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사이버펑크는 반체제적 사이키델릭의 이념적 파편들이 장르의 문법 속에서 재결정화된 문장들인 동시에, 노동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이 ‘힙하게’ 재현되는 대중문화 장소이기도 하다. 메탈 밴드 ‘사무라이’를 이끌며 군벌 기업들의 폭정을 비판하던 조니 실버핸드가 아라사카로 쳐들어가 화끈한 파장을 일으키고, V에 탑승해 반문화의 환등도시 나이트시티를 거니는 플레이경험에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이트시티는 사이키델릭의 어둡지만 섹시한, 좌절된 이상향들이 펼쳐지는 그런 시공간이다. 3.3. Becoming with: 기술적 탈신체화의 시공간 자유로운 외형 커스터마이징과 신체개조 시스템, 등장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기계신체 구현들은 〈2077〉의 탈신체화된 마음이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플레이어는 남성/여성의 외형과 성기를 교차 선택해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젠더와 신체의 횡단을 시스템에서 구현한 것도 재미있지만, 이에 따라 달라지는 서사 상호작용 및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크게 네 명의 인물들과 연애를 할 수 있는 분기들도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플레이어가 남성인 경우 게이 인 ‘캐리’와 여성 조력자 ‘팬앰’과 로맨스를 진행시킬 수 있으며, 여성인 경우 히스패닉 레즈비언인 ‘주디’와 남성 마초 ‘리버’와 연애를 선택할 수 있다. 남/녀라는 생물학적 성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경로들을 플레이어가 만들어갈 수 있으며, ‘탈 신체화’의 기술적 마법을 조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개발자들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강박때문에 억지로 끼워 넣은 설정이 아니라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다각적으로 이해했다는 징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질계의 질서가 해체되는 사이버펑크에서 신체는 더 이상 제약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될 수 있는 ‘becoming with ~’의 계기가 된다. 물질과 신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리퍼닥(사이보그 외과의)에게 인공 인지기관과 신체부위를 시술받으니, 더 이상 신체의 물리적 강도나 유전된 외형이라는 선험성이 무의미해진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아인 마음의 신체 또한 변화한다. 사이버펑크에서는 여성을 얕잡아본다거나 인종에 편견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적이다. 메레디스, 레지나, 로그, 다코타 스미스 같이 카리스마 넘치고 위험한 기계신체 여성들이 즐비한 나이트시티에서 그/녀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반면 미스티나 마마 웰즈, 이블린 같은 전통적인 성향의 여성들도 존재한다. 교조주의적 정체성 정치를 우회해 탈신체화된 판타지를 적절한 균형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에, 〈2077〉은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유연성을 잘 전유했다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1985년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라고 선언했다.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해러웨이 또한 사이버네틱스 과학기술이 인간 정신의 진보와 공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한계에서 탈코드화되는 상생의 미래에 대한 고고학적 은유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외형과 물리적 차이, 성역할에 따른 사회권력의 관계망은 유사성의 원리로부터 기인한다. 근대의 자연과학과 생물학은 외형과 진화의 유사 정도에 따라 세세한 분류학을 만들어냈다. 개과, 고양이과, 파충류, 포유류 등의 분류는 유사성과 더불어 차이 또한 만들어낸다. 백인과는 다른 흑인, 남성과는 다른 여성, 아리아인과는 다른 하류인종, 유럽인과는 다른 아시아인, 위대한 한족과 야마토민족과 구분되는 야만족 등… 이분법에 기반해서 사회적 권력(너를 차별할 수 있는 나)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권력은 차이와 호혜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래·고양이와 협력하는 인간, 아시아인과 흑인 친구, 서로 협조하는 LGBT와 이성애자들, 서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남성과 여성 등. 주어진 신체의 날인으로부터 벗어나는 ‘탈 신체화’의 순간에야 차이를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가 되어 함께하는 경험, 즉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을 상상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병폐와 파괴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별의 상상을 연결하는 강력한 은유(사이보그)가 필요하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사이버 펑크’의 탈 신체적 사회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름’을 넘어서 연대하는 경험이다. 인간, 개, 고양이 뿐 아니라 바이러스, 인공지능, 퇴비, 곤충,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객체들과 반려종이 될 준비가 되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평등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다. 기술은 미래에 그것을 가능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사이보그들이 활극을 펼치는 무정부적 시공간, 사이버펑크는 그렇게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 된다. 4. 극단의 시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고학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NPC는 몇 안되고, 엄청난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지만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처럼 물리적 자유의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사이버펑크의 팬이 아니라면 메인서사 진행과 큰 상관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사이드퀘스트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버그는 화룡점정을 찍으며, 갑자기 영향력을 잃는 캐릭터들(대체 메레디스는 V를 불러내 질펀하게 즐긴 다음 어디로 사라진 걸까?), 서사 진행을 위해 소모되는 팩션(부두보이즈는 블랙월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가?) 등 미숙한 게이밍 설계들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77〉은 사이버펑크 장르를 여러 방면에서 집대성한 정점으로 추켜세우기 아까움이 없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가 제기하는 반문화, 탈신체화, 초월이라는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쌓아올린 점, 그리고 각 주제들이 조화롭게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들과 조응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특히 오늘날처럼 극단적인 분열과 적대가 판치는 하수상한 시대, 철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새롭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뉴 클래식의 정류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 그 이후는 무엇이 도래할까? 인간 사회의 진보와 자유를 꿈꿨던 초창기 사이버펑크의 기획은 오늘날 종언을 고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인터넷을 대안적인 공간이라거나 새로운 민주주의 실천의 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사이버 공간’의 해프닝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은 더 이상 공통계(commons)도 아니다. 카피레프트도, 자유소프트웨어 운동도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빈 자리를 꿰찬 것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다. 콘텐츠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전지구에서 납세를 회피하며, 고용은 거의 하지 않는 다국적 IT 자본들. 어떻게 보면 〈2077〉과 같은 사이버펑크가 다시 귀환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2077〉의 멀티 엔딩 중 하나인 ‘악마’ 엔딩에는 거대기업 ‘아라사카에 완전히 항복하기’라는 선택지가 나온다. 말 그대로 그토록 죽어라 싸웠던 군벌독재 기업 아라사카에 백기투항하고, 생존을 위해 정신을 디지털 감옥인 미코시로 전송해 영원한 사이버 유령이 되어버리는 결말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떻게 그때처럼 다시금 반문화를 일으키고 자유를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다만 그 발자국들이 만들어낸 길들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샛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77〉이 제시한 사이버펑크라는 문제계는, 오래된 스토리텔링과 미래지향적 매체기술을 버무려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이 도래할 우리의 미래에 다시금 묵시록적 개연성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도시 밖도 자본의 바깥은 아니다 - 〈동물의 숲〉과 자본주의

    ‘문명 6’에 등장하는 ‘쇼핑몰’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업지구가 아닌 주거지역에 지을 수 있는 건물로 등장한다. 건물의 효과 또한 쇼핑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조금 다른데, 단순히 상업수익이 나는 곳이 아니라 거주민의 쾌적도와 지역의 관광을 크게 올려주는 효과가 핵심이다. 우리의 여가는 시스템 밖을 꿈꾸지만, 그 밖을 향하는 경로까지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상품화한다. 설령 무인도에서의 고요한 삶을 꿈꾸더라도 그조차도 Inc. 가 붙은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숲〉의 설정은 애초에 그런 삶을 생각하며 게임 시스템에 접속하게 되는 시대에 대한 거친 스케치로도 읽힌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윤석열 정부의 게임 정책을 예견해 보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당선자가 윤석열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공약을 열심히 들여다보면 집권 후 방향성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일 뿐이다. 다이나믹 코리아는 본게임 이전, 프리게임 때부터 치열하고 예측 불가능이다. < Back 윤석열 정부의 게임 정책을 예견해 보다 05 GG Vol. 22. 4. 10. 0) 프리게임 : 다이나믹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당선자가 윤석열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공약을 열심히 들여다보면 집권 후 방향성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일 뿐이다. 다이나믹 코리아는 본게임 이전, 프리게임 때부터 치열하고 예측 불가능이다. 때문에 게임 공약들이 폐기 혹은 수정의 대상이 될지, 그대로 정책으로 연결될지는 예측할 수가 없다. 공약에 대한 깊은 분석과 비평도 어렵다. 분석만으로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연관된 ‘사람’을 함께 보자. 해당 공약과 정책을 누가 만들고 동력을 제공하는지를 함께 본다면 불확실성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1) 본게임 맵 : 질병코드와 셧다운제 게임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반은 당선인 자신이 갖고 있는 게임에 대한 태도다. 게임 장르를 어떤 성격으로 바라보는지는 곧 게임의 맵과 같다. 맵에 가득한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제일 처음 만나볼 발언은 후보 시절 인벤닷컴과의 인터뷰다. 인터뷰어인 이두현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게임 중독의 질병코드화에 대해 물었을 때의 답변이다. “게임을 포함한 모든 문화콘텐츠들은 상품이기도 하지만 사용자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진흥과 규제를 적절하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략) 청소년들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부모님들에게 게임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접근 방향, 게임을 즐기는 자녀와의 관계 설정 등을 도울 수 있는 ‘교육과 이해의 과정’ 제공 등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질병코드화 인정이라기보다는 건강한 게임 이용을 교육하자는 태도이다. 또한 너무 짧은 답변이기에 태도 전반을 도출해내기엔 부족하다. 다만 “게임을 포함한 모든 문화콘텐츠”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면서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을 들었다는 점에 추측해볼 여지가 있긴 하다. 거칠게 바꿔보면 ‘이런 거 보고 자라서 뭐 되려고 그래?’라는 문장이며, 등급제도의 기반 논리이기도 하다. 딱히 문제가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 지점에서 선을 잘못 넘어가면 사전검열제도의 기반 논리로 둔갑한다는 점은 늘 염두에 둬야 한다. 반면 호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경우엔 이 발언이 질병코드화를 긍정하는 쪽으로 읽힐 수가 있는데, 마침 당시 윤석열 캠프에 있었던 두 사람 때문에 우려가 증폭됐다. 여성특보로 있었던 손인춘 전 의원은 셧다운제 확장을 발의한 이력이 있고, 아동폭력예방특보로 있었던 신의진 전 의원은 게임 중독을 강력히 주장한 악명이 있다. 증폭된 우려에 오래 쌓인 분노가 첨가되면서 후보에게 ‘질병코드화 긍정이냐 부정이냐’ 하는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여론이 만들어졌다. 기실 그 사이의 회색지대 선택지가 여럿 존재하긴 하지만, 대선과 같은 뜨거운 전장에서 던져지는 정치적 질문이라면 그런 영역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후보는 10여 일 후에 게임을 질병으로 보지 않는다고 진화를 시도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윤석열 캠프에서 게임 공약을 얘기할 때 앞으로 나서는 인사가 게임특위위원장으로 막 임명된 하태경 의원으로 바뀌었다. 비약과 가정을 많이 섞어서 추측한다면 게임 공약에 영향력을 주는 인사가 손인춘/신의진에서 하태경으로 바뀐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현재는 손인춘/신의진의 이름을 인수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담당자가 여럿 바뀌는 캠프 내 혼란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손인춘/신의진의 유산인 셧다운제에 대한 캠프의 태도는 어떨까. 현재 셧다운제는 청소년이 이용시간을 자율 선택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강제성이 사라져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캠프가 게임 분야를 하태경 체제로 정리하면서 제일 처음 정리해서 낸 공약은 셧다운제 이슈와 연결되어 있는 공약인, 전체 이용가 게임의 본인인증 면제다. 게임의 본인인증 제도가 도입된 배경 논리는 게임 과몰입과 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규제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전체이용가 게임에 한해서라도 해제하는 방향은 손인춘/신의진의 자장에서 국민의힘이 빠져나오고 있다는 정황일 수 있다. 다만 함정이 있으니, 이 공약은 윤석열 당선인의 공약서에 없다. 2) 공약 주무기 – 2Big : 확률형 아이템, e스포츠 지역연고제 그럼 이제 후보 시절 공약서에 있는 공약을 살펴보자. 게임 공약은 340쪽이 넘는 공약서 기준으로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캠프는 그 한 페이지에서 4개 항목을 짚었는데, 2가지 큰 항목과 2가지 작은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항목에서 하태경 의원의 흔적이 보인다. - 1Big: 확률형 아이템 공약서 252페이지는 게임 공약이고, 이 페이지의 제목은 이렇다. “게임산업의 불공정 문제를 해소하고 e스포츠를 대한민국 미래산업으로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초점이 불공정에 맞춰져 있다. 누구에 대한 불공정일까? 공약 내용에 따르면 게이머들이 겪는 불공정이다. 윤석열 당선인의 게임 공약 첫 번째 큰 줄기는 확률형 아이템 규제다. 아이템 확률 조작은 이미 국정감사에도 진출한 이슈다. 국회에서 실제 확률을 소비자에게 공개하라고 한 후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해 자율 규제에 대한 회의론이 짙어졌다. 그래서 윤석열 캠프는 아예 게임이용자권익보호기구를 일정 규모 이상 게임사마다 설치하게 하고, 이용자가 직접 확률형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한다. 이슈 선정은 좋지만 불안감은 존재한다. 당선인 자신이 인터뷰 당시에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공개를 ‘영업비밀 공개’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으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영업비밀 공개 의무화 등의 강력한 규제도 무조건 능사가 아닙니다.” 감시 기구를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게 꼭 게임사 내에 만드는 형태여야만 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또한 다중뽑기 같은 일부 형태는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징벌하는 형식의 규제 대신, 정보 공개와 감시 정도를 선호하는 우파 색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공약은 하태경 의원이 대표로 발의해 계류중인 게임산업법 개정안의 내용이기도 하다. 하태경 의원실은 이 개정안을 확률조작 국민감시법이라고 명명했다. 게임물이용자권익보호위원회라는 기구를 문체부 내에 만들어서 컨트롤 타워로 삼고, 게임사 내에는 이용자위원회를 두는 방안이다. 윤석열 공약과 거의 동일하니 하태경 발의안이 공약으로 들어온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반면 경쟁 상대였던 이재명 캠프의 관련 공약은 조금 더 단호했다.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의 기능을 확대하는 정도로 규제를 갈음하지만, 동시에 컴플리트 가챠 등의 다중뽑기는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공약이었다. 즉 현재 규제를 강화하면서 금지 지역을 설정하는, 경쟁자의 공약에 비하면 윤석열 당선인의 공약은 어느 정도 게임사의 입장을 반영한 정책이다. 다르게는 자율 규제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정책이라고 서술할 수도 있다. 아마 이 공약이 정책으로 실현되면, 몇몇 게임사는 사내의 보호기구를 무력화할 방안을 연구할 것이고 정부의 보호위원회는 이를 막으려 들면서 정책 전선이 만들어질 것이다. 즉 이런 전선이 안 만들어지면 이 제도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기능을 제대로 할 경우에도 대기업의 회피 기동을 잡아내지 못하면 중소기업 차별 이슈가 불거질 수 있다. 사내의 소비자보호기구를 만들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야 할 것이고, 이들은 대기업처럼 무력화 시도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경우 중소기업이 할 말은 ‘왜 쟤들은 피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안 되느냐’ 하는 볼멘소리다. 이 부분들이 향후 이 제도 시행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 2Big: e스포츠 지역연고제 e스포츠 지역 연고제가 두 번째 큰 공약이다. e스포츠 구단을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겠다는 포부가 돋보인다. 지역 사회마다 PC방이 있으니 이 네트워크를 이용해 아마추어 리그를 만들고, 이 리그를 프로 구단의 유망주 풀로 활용한다. 당연히 동네 PC방에서 게임 좀 하는 유소년들은 유소년 클럽 시스템으로 들어갈 수 있다. 유소년 클럽 – 아마추어 리그 – 프로 리그의 단계적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면 클럽이나 구단에서 선수들을 상대로 게임 교육을 할 때 게임 리터러시 교육을 할 수 있다. 이 커리큘럼을 통해 중독 혹은 온건한 용어를 써서 과몰입을 줄일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지도자 또한 자격증을 신설해 체계적 배출이 가능하게 한다. 단계적 리그 체계는 모든 프로 스포츠의 꿈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 꿈을 완벽하게 이룬 프로 스포츠는 야구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 야구조차도 그나마 완전히 이룬 상태는 아니며, 다른 3대 구기 종목은 아직 벽을 넘지 못하고 청소년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 기대어 버티는 중이다. 과연 e스포츠는 그 벽을 제대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 공약 또한 하태경 의원이 추진 중인 정책이다. 대선 직전이던 지난 2월 8일, 하태경 의원실은 김승수/허은아 의원실과 함께 지역연고제 도입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 패널에는 샌드박스게이밍의 정인모 이사, 크래프톤 e스포츠팀의 김우진 팀장, 인벤의 이두현 기자, 전 프로게이머이자 국민의힘 청년 보좌역인 한우성 등이 참여했다. 지역 연고제 관철을 위한 성격인지라 긍정적인 입장 위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두현 기자의 토론 내용은 부정적인 시각이 묻어난다. 이두현 기자는 e스포츠 산업의 특성이 팬 위주이기 때문에, 지역으로 인위적 재편을 시도하는 것은 산업을 망칠 우려가 있다는 논지를 폈다. 이두현 기자는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의 주장을 인용하기도 했다. 정인모 이사의 경우엔 지역연고제가 정착된 중국의 예를 들며 성공 가능성을 피력했는데, 이상헌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지역연고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기에 중국에서 성공한 것이다. 각 지역에 지어진 경기장을 채울 수 있는 관객의 수가 담보되어야 하는데 한국은 그만큼의 인구가 되지 않는다. 또한 e스포츠는 팀 위주의 팬심이 아닌 선수 위주의 팬심으로 돌아가는 리그다. 선수가 구단을 이적하면 그 팬은 기존 구단에 남지 않고 선수와 함께 이동한다. 게다가 e스포츠는 오프라인 직관만이 가지는 메리트가 상대적으로 적다. 경기장의 물리적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지역연고제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콘텐츠진흥원이 작년 12월에 발표한 ‘2021 e스포츠 정책연구’에서도 부정적인 연구 결과가 있다. 중국처럼 산업 초기에 지역연고제 기반으로 디자인이 되었다면 팬 문화가 그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지만, 한국은 이미 e스포츠 산업이 원숙기에 들어선 후라서 지역연고제를 강행하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다. 오히려 공약 내용에 있는 유소년 클럽과 아마추어 리그 확충은 지역연고제의 결과나 과정이 아니라 전제 조건에 더 가깝다.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비판 논거와 반대 연구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역연고제가 스타 프로리그 시절부터 20년 동안 제시된 정책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제시된 만큼 오랫동안 논의가 되어 왔고, 적합하지 않거나 너무 어렵기 때문에 추진되지 못한 정책이다. 그럼 윤석열 캠프와 하태경 의원은 이렇게 오래된 주장을 왜 정책으로 내건 것일까? 추측해볼 단서는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e스포츠 구단을 유치해 지역연고제 구단을 만들면 운영 자본이 필요하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 리그는 이렇게 필요한 자본을 대기업 자본에서 가져오는 것에 익숙하다. 그리고 스포츠 구단을 설립/운영하는 기업은 그 비용의 10%만큼 세금 감면 혹은 공제를 받는다. 작년 12월에는 이 조세특례 종목에 e스포츠가 추가되었다. 또한 윤석열 캠프의 공약에는 체육진흥투표권, 즉 스포츠토토에 e스포츠 종목을 추가해 자금을 끌어오겠다는 청사진이 있다. 사실 이 이슈 역시 작년 초에 이상헌 의원과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합동으로 논의를 시작한 주제다. 그리하여 e스포츠 지역연고제 공약은 부자 구단주들과 토토의 자본을 리그로 끌어오겠다는 내용으로 치환할 수 있다. 다만 진정으로 지역연고제가 e스포츠의 미래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 사람이 지켜봐야 할 지표는 부산 리브샌드박스다. 게임 구단 최초로 지방자치단체와 연고 협약을 맺어 연고제를 실험하는 구단이다. 구단 프론트 인력을 지역에서 채용하고, 지역 경기장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역 내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력 풀을 만들어가려는 중이다. 2) 공약 보조무기 - 2Small : 소액 사기 전담기구, 장애인 접근성 오프닝 공약과 2가지 큰 공약 줄기 사이에는 2가지 작은 공약도 있다. 디테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생활밀착형이 될 수 있겠다. 작은 공약 첫째, 게임 내의 소액 사기를 전담하는 수사기구를 설치한다. 너무 작은 사안이긴 하지만, 캠프가 유권자의 적절한 목소리를 수신한 사안이다. 디테일한 공약의 크기만큼이나 잘 다뤄지지 않은 공약인데, 이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궁금하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예로 들면 몇백 몇천 골드 수준의 사기 피해를 당한 유저는 이를 구제 받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피해를 산정하기 위해 유저간 거래 시세를 적용할까 아니면 해당 골드를 입수하기 위해 들어간 유저의 시간을 적용할까? 또한 소액 사건의 수사를 맡는 경찰은 사건이 접수되면 사이버수사국 요원으로 배정을 할까 혹은 전담기구 내에 전담 요원을 만들어서 배정할까? 후자라면 신규 채용 필요가 생기지만, 윤석열 당선인은 공무원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검사는 이 사건을 어떤 형태로 기소할 것이며, 동시에 판결을 맡을 판사의 업무량 상승은 고려가 될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작은 공약 둘째, 장애인의 게임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임접근성진흥위원회’를 설치한다. 대선 기간 동안 언론은 이 공약에 아무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이 공약 역시 하태경 의원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작년 4월 20일에 발의된 게임산업법 개정안에는 하태경 의원, 그리고 국민의힘 비례대표로서 장애인을 대표하는 김예지 의원, 진보의 정의당 류호정 의원 등이 참여한 법안으로 현재 계류 중이다. 이 법안은 정부에게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향상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도록 의무를 지우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21세기 초입부터 제기가 되었고, 2004년에는 국제게임개발자협회(International Game Developers Association, IGDA)가 개념화하여 게임 개발 지침을 만들면서 조류(wave)가 시작되었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접근성 지침, 장애인 플레이어 환경 가이드와 같은 가이드라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조류에 맞춰가는 법안인 것이며 공약으로 바뀌자 해당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권고를 내리는 기구로 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내용이 된 것이다. 장애인 게임 접근성에 관해서 잘 정리된 정보는 게임제너레이션 3호에 강신규 연구자의 글( 링크 )에 있으며, 장애인 게임 유저로서 강신혜 작가가 쓴 글( 링크 )은 게임제너레이션의 4호에 실려 있다. 이 분야를 연구자와 당사자가 쓴 저 두 편의 글보다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 공약에서 핵심이 될 부분은 게임접근성진흥위원회가 내릴 권고의 무게다. 현재 독립적 지위를 가진 위원회로서 권고의 무게가 가장 무거운 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다. 하지만 그런 인권위 권고조차 정부 부처나 기업이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권고는 법적 강제성이 약하기 때문에 불수용 결정이라는 제도적 출동 사례가 생기는 것이다. 과연 게임접근성진흥위원회의 권고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지니게 될까? 3) 중요 NPC : 하태경 의원 윤석열 당선인의 게임 공약을 분석하기 위해 처음에 살펴봤던 것은 인벤닷컴과의 인터뷰였다. 하지만 서면으로 이루어진 이 인터뷰는 당선인의 실제 답변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 게임 공약을 정리해서 처음 발표하던 1월 12일, 윤석열 후보는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것이 아니고 선대위 내부에서 답변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시기는 하태경 의원이 선대위 내에서 게임특위위원장이 되는 시기외 맞물린다. 12일의 공약 발표에서도 공약에 대한 질의 응답은 윤석열 후보 자신보다 하태경/원희룡 두 사람이 더 많이 했다. 따라서 향후 윤석열 정부의 게임 정책의 핵심은 하태경 의원이 될 것으로 예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태경 의원은 현재 인수위에서 맡은 직책이 없다. 현직 국회의원이라 행정부 인수위에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한국 정치에서 그런 이유의 인선은 없었다. 당장 배준영 의원은 인수위에서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에 들어가 있고, 추경호 의원은 기획조정분과의 간사로 들어가 있다. 이번 인수위 인선은 유독 문화체육 분야가 약하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특히 게임 분야는 한 명도 없다. 하태경 의원이 인수위 인선에서 빠졌다는 것은 당선인이 게임 공약의 우선순위를 앞에 놓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공약 사항 외에 놓친 것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인벤닷컴 인터뷰로 돌아가 보자. 인터뷰어인 이두현 기자는 국회에서 계류 중인 게임산업법 전부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질문했다. 이에 대한 당시 답변은 원칙적 찬성이었으나, 정작 법안 내용을 캠프가 모르고 있었다. “개정안 내용의 골자는 게임의 사행성과 사용자들의 게임중독에 관한 규제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동안 우리나라 온라인게임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수많은 일자리와 혁신도 주도했던 만큼 업계의 애로 사항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 국민의힘은 온라인게임 본인인증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이 대표 발의해 아직 계류 중인 게임산업법 전부개정안은 사행성/게임중독 규제에 대한 내용과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이 전부개정안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게임배급업을 명확히 규정하고 관련 요소의 법적 정의를 해서 구역을 명확히 구분한다. 2. 중소게임사에 문체부가 예산 지원을 할 법적 근거를 만든다. 3. 비영리 인디 게임에 등급 분류를 면제시켜 주고, 패치가 등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경우 새로 등급 분류를 면제시켜 주는 등 등급분류제의 많은 부분을 손질한다. 이 내용 중 일부는 다른 개정안 통과로 인해 이루어졌다. 4. 등급 표시 외에도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정보 등을 명시하도록 의무화한다. 5. 국내 업장이 없는 외국 회사가 국내에서 게임 사업을 할 때 국내 대리인 지정, 지사 설립이나 운영대리회사 지정을 하게 만들어서 수익 일부가 국내 경제권에 남도록 한다. 이번 회기의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회기 시작 후 2년 동안, 게임산업법 관련한 입법 활동으로 등급분류제와 확률형 아이템 규제를 손질하는 작업을 주로 하는 중이다. 그런 활동 사이사이로 셧다운제 내용 완전 삭제, 장애인 접근성 등의 내용이 있다. 이상헌 의원의 전부개정안은 현재 문체위의 메인 퀘스트 중간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위의 입법 활동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도, 이 내용을 캠프가 혹은 하태경 의원이 몰랐다는 것은 의아한 부분이다. 하태경 의원이 이 전부개정안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인벤닷컴 인터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P2E 게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다. “국민 여론에서 사행성 논란이 있다면 건전한 놀이문화가 되기도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국민 대다수가 이해한다면 P2E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에서 최소한의 고려를 해 볼 수는 있겠지만, 환전성이 가능한 게임에 대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됩니다. 사행성 논란이 없어져야 해당 시장도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부분은 지난 2월 28일에 내려진 사법부 결정과 궤가 같다. 환전을 하는 게임에 대해 이뤄진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환전업을 금지한 게임산업법의 해당 조항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유저 간의 게임머니 거래는 묵인할 수 있지만, 게임사가 게임머니를 현금으로 환전해주는 형태는 불법이 맞다는 확언이었다. 이는 한국 P2E 게임의 선택지를 극도로 좁게 하는 판결이며, 1월 초에 나온 캠프의 태도와 부합하는 판결이다. 다시 0) 애프터게임 : out of focus 윤석열 당선인의 게임 공약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장단점이 매우 뚜렷하다. 대부분은 결을 잘 잡았지만 의구심이 드는 지점의 공백이 너무 크다. 과연 당선인이 이 공약들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장담하기 어렵다. 반면 공약 작성 당사자로 보이는 하태경 의원을 중심으로 봤을 때, 국회와 연계하여 정책 전개를 해나갈 전망은 희망적이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정황상 게임 정책의 국정과제 우선순위가 매우 뒤쪽일 것 같기 때문이다. 어차피 국회와의 연계가 필요한데, 그 하태경 의원은 다른 문체위 의원들이 집중하는 초점에서 반쯤 벗어나 있다. 낙제점은 아니지만 미싱 링크가 볼수록 크게 보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컨슘 미> 리뷰: 개인적 게임의 등장과 먹는 행위의 의미적 변화

    <컨슘 미(Consume Me)>는 여러모로 특이한 면이 많은 게임이다. 중국계 미국인 개발자 제니 지아오 샤(Jenny Jiao Hsia)와 그의 동료 AP 톰슨(AP Thompson)이 개발한 이 게임은 2025년 IGF(Independent Games Festival)에서 그랑프리에 해당하는 시머스 맥널리 상을 수상했다. 글로벌 게임 씬에서 가장 권위있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에서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게임 언론에서 이 게임이 리뷰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산업 담론에만 관심 많은 한국의 게임 웹진은 차치하고라도 1,000건이 넘는 스팀 게임 리뷰 중에서도 한국어 리뷰는 단 3건에 불과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메타크리틱에 따르면 <컨슘 미>를 비평한 매체는 17군데로 이 가운데에는 《Edge》, 《Eurogamer》 등 주요 게임 매체를 포함하여 《Guardian》과 같은 종합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유독 국내에서는 <컨슘 미>에 대한 거의 아무런 비평도 일어나지 않았다. < Back A Review of Consume Me: The Rise of the Personal Game and the Shifting Meaning of Eating 30 GG Vol. 26. 6. 10. Consume Me is a game with many peculiar facets, in more ways than one. Developed by the Chinese American developer Jenny Jiao Hsia and her collaborator AP Thompson, it won the Seumas McNally Grand Prize—the grand prize—at the 2025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Despite winning at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festival in the global game scene, there is not a single instance of this game being reviewed in domestic game media. Setting aside, of course, Korea's game webzines with their interest only in industry discourse, even among the more than 1,000 Steam reviews, Korean-language reviews number a mere three. Why has this happened? According to Metacritic, seventeen outlets reviewed Consume Me , including major game media such as Edge and Eurogamer , as well as general-interest papers like the Guardian . Yet in Korea uniquely, almost no criticism of Consume Me arose at all. This is, above all, perhaps because Consume Me was a personal game—one that transformed Jenny's own story, to a certain degree, into a fictionalized game situation. Of course, given that domestic game journalism has developed within an industry-centered grammar, this response may, in a way, be only natural. Korean game discourse has long developed around industrial elements—market size, platform competition, business models, updates, e-sports—and as a result, a critical language for reading games at the level of personal expression or performative experience was relatively hard to accumulate. Yet individuals who had been developing small games survived within the market from the late 2000s on, switching their weapons little by little to Flash, Unity, HTML5, and so on, and this became the occasion for a democratization of indie game development. Anna Anthropy, who in 2012 wrote a book titled Rise of the Videogame Zinesters , regards games in it as a tool of artistic and personal expression and emphasizes the message that anyone can become a creator.[1] As the accessibility of game-making tools increased, she argued, one could make games expressing personal experiences and emotions even without programming skills. She explained this current by way of the "zine" movement, the self-publishing culture of the past. The book's subtitle is "How Freaks, Normals, Amateurs, Artists, Dreamers, Drop-outs, Queers, Housewives, and People Like You Are Taking Back an Art Form." Jenny, who developed Consume Me , was no more than a sensitive teenager—keenly attuned to dieting and good at drawing—but on entering the NYU Game Center and meeting a partner who could shore up the programming, she became able to turn her own autobiographical story into a game. Consume Me takes as its material the obsession with dieting that Jenny experienced during her high school years. The player takes Jenny's position and, through puzzle-form minigames, must hit calorie targets when eating, and when these are exceeded, must meet the calorie target through exercise, household chores, and the like. But as the chapters progress, the tasks and events imposed on Jenny pile up. In Chapter 2, she has to save money for a date with her boyfriend, which has to be covered by helping with chores and getting an allowance from her mother. In Chapter 3, a rival appears at school and she must win the contest against them, while at the same time the calorie-management figures rise. And in Chapter 4, she has to keep up a long-distance relationship with her boyfriend, where sending messages or making video calls all mortgages what little free time remains in the day. Before long, exercise gets pushed back, and laundry, cleaning, walking the dog, studying, and the rest are easily neglected. * A mealtime scene from Consume Me The progression of Consume Me unfolds, on the whole, through this form of dieting and time management. Up to this point, the method differs little from existing game mechanics. But the developer's mechanical framing of the act of eating, and the attitude with which the game brings itself to a close, show a difference from games faithful to genre grammar. Generally, the act of eating in games has been keyed to the grammar of reward systems—the recovery of energy, growth through buffs, and so on. But in Consume Me , the act of eating leads to guilt and to self-censorship through calorie calculation, and this expands into the psychological anxiety of Jenny, the protagonist within the game. Another interesting point is the hand-drawing-based visual style of Consume Me . Jenny's expressions and gestures within the game, the shapes of the food, the interface design—all maintain a doodle-like exaggeration and cuteness, which keeps the player from viewing the in-game situations only through an excessively tragic or pathological lens. Jenny is engulfed in anxiety as she endlessly calculates calories and fails at self-management, but the game does not reproduce this only in a heavy, depressive way. Rather, Consume Me maintains a somewhat comical, self-deprecating distance while making us observe self-loathing and obsession. This mode of expression seems closer to having the player follow, for a moment, the wavering performative structure of a human being than to pushing them into cheap pity or self-pity. The mealtime scenes of Consume Me proceed as simple minigame-style puzzle-fitting. The foods appear in forms like Tetris blocks, and through these you must fill Jenny's stomach to the brim. But there are always a block or two's worth of cells you can't fill, and this lowers Jenny's satiety figure. To make up for it, you can get by—buying a one-cell block, a cheese topping, for $3 at the shop and then fitting the puzzle. Only, this cheese topping is very high in calories relative to its block size and also high in price, so it can't be used often. The player therefore always has to keep low-calorie but high-priced vegetable dishes and the like stocked, expensively, at the shop, and for this must perfectly help with the mother's chores to top up the allowance. But if you stay faithful only to chores and the act of eating, time runs short for studying, exercising, and dating the boyfriend, so rigorous planning and time management according to schedule and events become necessary. Yet Consume Me shakes up this time-management system by inserting, midway through the schedule, random events the player can hardly control. The ideal body, diet, and self-management the player pursues are, at a glance, set up as in-game goals, but the game continually inserts points at which this ideal body and self-management are bound to fail. Even without recalling the rhetoric of failure[2] from Ian Bogost's famous game-theory book Persuasive Games , this game has made us retrace that process of failed self-management we have experienced countless times in daily life. The failure one comes to experience in Consume Me can be seen as closer to a device that makes you experience how unsustainable modern society's self-management ideology is, rather than simply meaning a failure of self-management. Strictly speaking, however, Consume Me does not use the extreme rhetoric of failure of works Bogost cited as examples in Persuasive Games , such as September 12th or McDonald's Videogame . The game's ending, in several events, makes you traverse back and forth between a procedurality and causality so rigidly close to our lives and a humanity whose outcome cannot be known. Moving into Chapter 3, Jenny's boyfriend Oliver goes into a brief long-distance relationship, and here the game decreas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by –3 each day. Chatting by message recovers +2 in the relationship, and a video call recovers +5, but message chat consumes one hour and a video call two hours. Since the free time given in a day is only two hours, the player always has to invest at least about an hour in chores, studying, exercise, and so on, and spends the remaining hour on message chat with Oliver. Yet despite this investment, repeating only message chat will inevitably drive the two's relationship toward catastrophe. After many twists and turns, on moving into Chapter 4, Jenny faces a situation where, after a consultation with the college guidance counselor, she has to settle on a target university and write an admissions essay. Since this demands still more time, Jenny tearfully confides the situation to Oliver. At this Oliver kindly replies, "Our relationship isn't a video game. Do I look that petty to you? Even if you don't contact me for a week or so, I think our relationship is fine. So focus on writing your college admissions essay." * A video-call scene from Consume Me In this way, Consume Me shakes up the trap of the mechanical pattern inherent in the game's procedural rhetoric (or rhetoric of failure) itself, foregrounding the strengths of the personal game. In the end, at some point in this game, the player comes to realize that it is hard to sustain this mechanical self-management mechanic perfectly. In that process, Jenny, the protagonist within the game, comes to realize for herself that she cannot perfectly accomplish dieting, romance, exercise, college admissions, and friendships all at once. And then she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because life goes on anyway, she has to live on somehow. This shows, in a way, the process of "self-compromise" by which our lives are always sustained—something with a face very different from the procedurality of the digital game. To show how the mechanical face of a game's procedurality can be supplanted by the I-novel-like individuality of the modern novel, Consume Me pushes the player into a structure of agency. The philosopher C. Thi Nguyen has explained games as an art form of "temporary agency," in which the player temporarily borrows another structure of agency.[3] Just as the I-novel put the interiority of the modern subject into language, the personal game makes the system that constitutes the contemporary personal subject playable and makes us think within it. And after internalizing the player into thoroughly following the system of procedurality, it arrives at an ambiguous ending that defends humanity by deftly twisting, through the flaws within that structure, the point that our lives are not composed of procedurality alone. In fact, the first time I played Consume Me was at BIC in 2019. At the BIC held the year just before COVID broke out, I was serving as chair of the jury, and the Consume Me I played then was a game dealing only with the current Chapter 1—that is, the eating disorder Jenny had experienced. That incomplete build was somewhat closer to a social impact game than the present one, and the individuality did not protrude much. But after five years of development, the Consume Me released on Steam returned, with added volume, as a more composite personal game combining romance, college admissions, friendships, and more. To be sure, the clear problem-framing of the eating disorder was somewhat diluted, and the density of closed obsession that the early demo had possessed was also reduced. Yet over those five years of development, Consume Me changed, beyond a simple social impact game, into a personal game encompassing the structure of life as a whole—romance, college admissions, friendships, labor. The commercialized Consume Me became a far richer and more playable game, but precisely because of that richness, the suffocating sense of self-management that the early demo had shown was somewhat eased. If the early Consume Me was a game that pushed the player into a single obsessive performative structure, the finished Consume Me came closer to a game that shows the fact that, even within that structure, the human being can never, in the end, be fully proceduralized. * The various weekly goals and self-management system of Consume Me So why, then, have such personal games rarely emerged in contemporary game development culture? The explanation that large-scale game development, being collective creation, made personal expression impossible, and that only with indie games could solo developers or small teams finally speak such stories aloud—this, I think, is only half right. The game is a medium required to have a structure of agency that makes you play it in a particular direction, and a system transparency in which a clear purpose of play must be set. In other words, that the medium of the game has long been designed in a way unsuited to expressing "personal experience" corresponds, I would suggest, to the other half of the explanation. Compared with the media of literature and film, which relatively quickly accepted an individual's depression, desire, obsession, and trivial emotions as objects of expression, the game long developed its systems only around victory, mastery, conquest, efficiency, and clear goals. In other words, the game needed a simplified rationality for clear goals, calculable values, optimizable choices, and the like—and the personal game, using various rhetorical devices, is expressing, little by little, the eating disorders, depression, self-loathing, anxiety, and obsession that had been hard to express in games. For this reason, the personal game does not stop at being merely a game that handles a personal story. Consume Me , by twisting the structure of agency granted to the player, depicts the ordinary individual—the wavering human being—who experiences emotional depletion while enduring repetitive obsession, self-surveillance, and the failures that follow from imperfect choices. If the modern I-novel discovered the interiority of the modern person, the contemporary personal game makes playable the very performative structure of the contemporary human who lives within the logic of self-management and optimization. And Consume Me , by ceaselessly inserting contingency, failure, and emotional wavering into that structure, shows the fact that the human being can never be fully proceduralized. [1] Anna Anthropy, Rise of the Videogame Zinesters (Seven Stories Press, 2012). [2] Ian Bogost has noted a rhetoric of failure whereby a game developer, through the design of mechanics, deliberately inserts a process of failure into the game, making the player experience failure and thereby arrive at an intended realization. This rhetoric of failure is recognized as a game-specific rhetoric difficult to realize in other media.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The MIT Press, 2010). [3] C. Thi Nguyen, Games: Agency as Art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인터뷰] 게임은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MMCA서울관 〈게임사회〉 展

    국내 국립 미술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기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사회〉 전에 대한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 GG는 〈게임사회〉 전에 다녀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왔다. < Back [인터뷰] 게임은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MMCA서울관 〈게임사회〉 展 12 GG Vol. 23. 6. 10. ‘게임’하면 떠오르는 장소로 미술관이라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소 독특한 형식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게임과 현대미술이라는, 얼핏 보면 낯선 두 영역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국내 국립 미술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기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사회〉 전에 대한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 GG는 〈게임사회〉 전에 다녀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왔다. Q. 반갑습니다. 먼저, GG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시민들의 솔직한 감상평을 듣는 자리로 구성했는데요. 〈게임사회〉 전시는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는 대부분 오는 편이라, 이번 전시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왔어요. 〈게임사회〉한다고 해서 게임으로 미술적인 것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어요. -오늘 친구를 만나서 점심 따로 먹고 차 가져왔는데 카페 가는데, 주차되는 곳 가려고 하다보니까 여기 오게 되었어요. -저도 근처에서 약속 잡은 김에 실내에서 시원하게 있으려고 왔어요. 전시 정보는 트위터 통해서 예술가와 게임업계분들 통해서 접하게 되었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예술 전시를 많이 봐왔고, 지금은 게임을 좋아하는데, 〈게임사회〉는 게임이라는 정박지가 있으니 그 지점에서 무엇을 펼쳐나갈지가 궁금해서 오게 되었어요. Q.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어떠셨나요? -전시 자체가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위해서 구성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대중을 겨냥하고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 애초에 타겟팅이 게임을 좋아하는 대중은 아닌 것 같고, 게임을 도구로 쓰는 현대미술 작가들의 전시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연령은 크게 상관있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게임 전시는 아닌 것 같았어요. 게임 개발자로서 이건 게임 전시는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웹에서 접했던 느낌과의 차이가 있었어요. 북미 인터넷 밈에 절여진 느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더 친절하고 소프트했어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래서 라이트한 유저들 그러니까 오락실 게임을 기대하고 오는 유저들한테는 좀 많이 기대와 다를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하드코어 게이머를 위해서 만든 전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래서 이거는 여느 미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오히려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층이 나눠져 버리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흔히 말하는 게임 박람회와 달리 국현에 무슨 전시하는지 모르고 그냥 우연히 왔다가 가볍게 플레이해보고 가기에는 괜찮은 전시가 아닌가 싶어요. Q. 그렇다면, 오늘 전시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실까요? -저는 완전 어렸을 때 보던 게임이랑 요즘에 나오는 그래픽 좋은 것들을 시간별로 보는 게 좋았어요. 1세대 게임 중에서 특히 ‘팩맨’이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 단순한 구조인데 이런 의미를 드러낼 수 있구나 했죠. -어릴 적에는 TV 앞에 가서 게임팩을 연결해서 마리오를 봤는데, 영화관처럼 의자에 앉아서 마리오를 본다는 것? 사실 마리오는 영화관 의자랑 안 어울리는 작품 구성이잖아요. 그런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주는 감각들이 흥미로웠어요. -전시 초입부에 텍스트 기반 게임(반지하게임즈의 ‘서울 2033’)을 전시해놓았잖아요. 거기서 광고가 틀어졌는데, 처음엔 이게 가짜 광고인가 했어요. 그런데 진짜더라고요. 저는 이게 미술관의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게임 내적인 것들이 미술관에 침투하는 느낌 이 들었어요. 실제로 이런 생각을 의도한 건가 싶었어요. 사실 우리가 게임할 때 광고는 일상적인 경험이기도 하잖아요. 의도치 않은 것들이 미술관에 들어오는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서울 2033’이 무료버전으로 깔려 있는 것은 전시가 미흡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보통 사람들은 전시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저도 ‘서울 2033’이 기억나는데, 그 게임은 음성 인식도 되고, 장애인도 즐길 수 있다고 써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1인 게임 개발에 관심이 있는데, 정확히 작품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정체성 게임(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의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마주하게 하는 게 재밌었어요. 저도 제 정체성과 관련해 어드벤쳐 게임 만드는 것을 생각 중에 있거든요. -마지막 영상(김희천 작가의 ‘커터3’)도 두 번을 봤는데, 첫 번째랑 두 번째가 다르더라고요. 처음에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봤을 때, 게임 속의 캐릭터가 변화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모호해지는 것이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나타낸 것 같아서 두 번째 봤을 때 더 재밌게 받아들여졌습니다. * 반지하게임즈의 ‘서울2033’ Q. 이번 전시에는 관람객의 상호작용(interaction)할 수 있는 컨텐츠가 많았는데요. 전시에서 인터랙션 경험들은 어땠나요? -사실 워낙 미술이 어렵잖아요. 게다가 제가 게임이랑 친한 사람은 아니어서 조금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게 많았는데, 요즘 전시 트렌드와도 게임이 잘 맞는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현대 미술 쪽으로 접근하면 재밌을 수도 있겠는데, 저는 일단 영상물에 집중을 잘 못해서 전시 볼 때도 영상물을 오랫동안 안 보는 편 이거든요. -인터랙션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어요. 메시지를 인식할 시간을 줘야 해석하거나 할 텐데 시간이 충분치 않다보니 그러지 못했어요. 어떤 기기는 사전 예약해야 한다던데 심지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데도 예약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었던 게 아쉬웠어요. -제가 갔던 시간은 그래도 사람이 조금 좀 없는 시간이었거든요. 저는 거기 있는 모든 게임들을 이렇게 그래도 해보려고 노력했는데도 각 콘텐츠 당 플레이 타임이 평균적으로 1분을 안 넘겼던 것 같아요. 사람이 없었음에도 뒷사람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그거를 제가 계속 잡고 있기에 좀 미안하더라고요. -저는 미술관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랙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캐치가 안 되더라고요. 게임 플레이야 당장 유튜브를 켜도 볼 수 있고, 미술관에서는 대체로 모르는 사람들이 플레이하는데 그 인터랙션 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그리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미술관이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이고, 전혀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면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관점 자체가 미술관을 너무 신비화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게임적 질감은 흥미로웠지만, ‘게임적 질감을 통해 인터랙티브 전시를 하는 것이 현대미술에서 그렇게 새로운 것인가? ’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말씀하신 내용들을 듣다보니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점들도 적잖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미술관 설명이 어렵잖아요. 조금 더 쉽게 풀었으면 어땠을까요? 미술관에 자주 오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반대로 기존의 미술작품과 달리 이걸 너무 친절하게 해설해준다고 생각했어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은 난해한데, 게임 전시는 또 반대로 너무 단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관객이 들어가서 인터랙션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단순하거나 너무 친절하게 해설해 놓았다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은 게임전시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은 너무 쉽고 간단해요. 팩맨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은 아니잖아요. -동시에 텍스트로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고 해요. 중국 작가의 작품 중에 한자랑 철학적 주제들을 자막으로 설명하는데, 비슷한 게임 중에 ‘디스코 엘리시움’과 비교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자막으로 설명을 하니까 이게 오히려 게임 오브제로 설명되는 것 말고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개 글을 열심히 읽었어요. 기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글을 읽고 뒤돌아서니까 아이들 작품이 있었는데, 이 전시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어린이들 전시는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게 있었지만, 그게 전반적인 전시와는 잘 안 어울렸던 것 같아요. 그저 나열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가 ‘ 게임 전시인지’, ‘게임을 전시하는’ 것인지가 모호했던 것 같아요 . 저는 오락실(루 양의 ‘물질세계의 위대한 모험’)에서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미디어아트인지 게임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룬 파로키의 〈평행〉은 국현에서 2019년, 2020년 이 즈음에 이미 전시했던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똑같은 작품이 이번에도 실어졌던 게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파로키 작품은 이전에 십자로 되어 있었고, 평행 1,2,3,4 작품을 사방에서 볼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줬는데, 지금은 벽면에 평면적으로 배치되서 파로키가 드러내고자 했던 지점을 조금 탈각시킨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 루 양 작가의 대규모 영상 설치 작품 ‘물질 세계의 위대한 모험’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게임의 질감이 미술관 스크린으로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에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접근성 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 흑인 트렌스젠더만 해도 서서 플레이해야 하고, 눈높이가 안 맞으면 게임을 할 수가 없어요. 현대 미술은 그걸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흑인 트렌스젠더 작품이란 전형적인 교차성 작품인데, 다양성을 흑인-페미니즘에 집중한 느낌이었어요. 거기에서 ‘장애’는 교차하는 변수일텐데 이런 부분이 탈각되는 것은 아쉬웠어요. -제가 갔을 때는 흑인 트랜스젠더 전시 중에 하나가 아예 꺼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돌아다니면서 다시 보니까 처음에 ‘이 세계에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랬는데 거기에 ‘아니요’ 버튼을 누르면 그냥 바로 꺼지더라고요. 사실 그거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있죠. 문제는 그 화면에 그러니까 그 화면이 떴을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화면이 한 10분씩 꺼져 있으니까 ‘그냥 고장 났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맞아요. 그렇게 꺼져버리면 다른 관람객들은 중간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뭐야?’ 하고 지나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4관에 오락실처럼 마련해놓은 부스에 앉아서 하는 게임이 꺼지고, 바탕화면으로 가더라고요. 이건 흑인 트랜스젠더 전시관에서 ‘이 세계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NO’를 눌러서 화면이 꺼지는 것과 오락실 게임에서 바탕화면으로 가는 것이 상동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게임에서 최근에 많이 얘기되는 게 기술문화 내적인 것도 내적인 것이지만 ‘기계가 진동한다’ 거나 ‘ 기계가 오류를 일으킨다 ’거나가 많이 논의되는데, 화면이 꺼진 것은 의도된 것이며, 바탕화면으로 간 것은 분명 기술적 문제겠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게임이라는 혹은 게임이 실어진 기계가 매끈한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울퉁불퉁함 혹은 물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어색한 사람들과 있어서 흑인 트렌스젠더 게임을 플레이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다음 방에서 해설 영상 같은 것이 나오잖아요. 해설 영상이 뭘 말하려는 것인지는 명료하게 제시되었지만, 동시에 이게 그럼 기존의 ‘미술 작품과 뭐가 그렇게 다른가’를 묻게 되더라고요. * 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 작가의 작품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 Q.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게임에 대해서 한 마디를 하신다면? -‘우리 이런 것도 한다’라면서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게임을 전시하는 것이 어떤 새로움을 주는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미술과 마찬가지로 게임에도 사회적 변화가 있구나라는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는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가 질감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해요. 영상 내적인 게 그 공간이랑 되게 겹쳐지는 부분들이 많고, 당장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그 공간을 바라보게 구조가 있잖아요. 빈백에서 누워서 보면 스크린(김희천의 ‘커터 3‘)이 보이고, 1층 2층 벽 같은 것들이 보이니 그 겹쳐짐 자체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쾌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1관과 4관을 본 다음에 그걸(김희천의 ‘커터 3‘) 봤는데 전시에서 추구하는 미감 같은 게 조금 중첩되는 것 같았어요 . 게임이나 게임 오브제, 혹은 게임 아키텍처가 미술관에 들어오는 느낌으로 흥미롭게 봤습니다. -공공미술이 시민 교육을 목적으로 할 때, 게임을 같이 가져가는 거는 굉장히 힘들지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을 해요 -저도 게임이라는 주제 자체를 미술관에서 다룬다는 게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임을 미술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공공성을 담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국현에서 강아지들을 인터렉티브하게 볼 수 있게 전시를 했었어요. 강아지 전시죠. 전시 앞에는 뭘 붙여도 말이 된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냉장고로도 전시를 했더라고요. 냉장고도 말이 되고, 강아지도 말이 되네. 그리고 게임도 말이 되네. 그렇다면, 그 너머(More than)가 가능하려면 좀 더 게임 자체의 무언가를 추가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예술전시가 굳이 게임을 통해야만 하는지? ‘게임전시’인지 ‘게임을 전시하는 것’인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Q.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더 확장시켜봅시다. 향후에 이런 전시가 또 기획된다면, 어떤 지점들을 보완하면 좋을지 제언을 해주시겠어요? -게임과 예술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전시를 하게 된다면, ‘조금 더 게이머로서의 경험이나 게임 자체에 대한 탐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임을 활용해서 혹은 게임을 중요한 테마로 했던 기존의 국현 바깥의 전시에 비해 국현의 접근이 보수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게임 제너레이션(Game Generation)에서도 소개되었을 것 같긴 한데, 서울시 행화탕 ‘가상정거장’에서 했던 ‘에란겔 다크 투어리즘’이나 아니면 마인 크래프트와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게임과 현대미술의 접점으로 보여줬던 급진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 에란겔 다크 투어리즘은 게임 내적으로 들어가서 의미를 전유해서 좀 되게 흥미로웠던 작품인 것 같은데, 저는 거기서 게임 기기의 질감이 드러났던 것이 흥미로웠어요. * 서울시 행화탕 ‘가상정거장’ 전시 프로젝트: 에란겔 다크 투어https://youtu.be/bxVCJVKH11o -그런데 지금 국현 전시는 어째서인지 되게 보수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보수적이라는 말은 게임 질감이든, 인터렉티브 작품이든, 스크린에서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국현이기에 어쩔 수 없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큰 미술기관이다 보니까 급진적으로 나가기는 까다로운 부분들이 있겠다 싶었어요. -어떤 게임의 경우, 2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어떠한 규칙도 어떠한 플레이 목적도 딱히 알 수 없었는데, 그런 작품은 그냥 미감만 보고 나와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감만 보고 나와야 한다는 것. 그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렇게 미감만 보는 전시가 기존에 없던 전시인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는 거죠. -기껏해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게임 전시를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시간이에요. 그것은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지점일 것이라 생각해요. -그냥 무책임하게 자신의 어떤 감성과 감수성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영역들이 저한테는 항상 무책임함으로 읽혀요. 저는 예술에서 늘 열려 있다. 그러니까 해석은 열려 있고, 그거는 관람객의 몫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저한테는 되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대한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작가는 스스로가 고민을 해야죠. -게임 전시라고 했을 때 미술 안의 다양한 소재 중 하나가 아니라 게임이 줄 수 있는 어떤 특이점들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를 봐야겠죠. -저는 게임이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들어요. 현대미술 같은 경우에는 적극적인 관람객의 능동성 같은 것들을 강조한다는 지점에서 사실은 게임이랑 되게 닿아있다고 생각해요. 둘 다 수용자들이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를 열어놓지만, 그게 작가의 무책임함으로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하는 것도 같아요. 그래서 전 게임과 예술은 서로에게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게임전시인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온 것 같습니다. 덕분에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다채로운 의견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참여자 태백(가명), 26살, 여성, 전 게임 QA 김성은, 30대 후반, 여성, 프리랜서 김재원(가명), 20대 초반, 여성, 학생 박진욱(가명), 30대 후반, 남성, 언론직 종사자 한승진(가명). 30대 초반, 남성, 에디터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하태현 문화와 역사, 종교와 게임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임을 즐깁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 궁리하며 살고 있습니다.

  •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 Back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27 GG Vol. 25. 12. 10.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문명적 통치를 다룬다. 그 시조인 맥시스의 「심시티」를 시작으로 유비 소프트「ANNO」시리즈,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주 플래닛」이나 「플래닛 코스터」를 시작할 때 플레이어를 반겨주는 것은 너른 자연의 공간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이러한 ‘자연적 풍경’을 깎아내고 변형시키고 자원화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이 주어진다. 이 관계를 역산해보자. 이 게임들에서 ‘자연의 풍경’이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규정된다. 「심시티」를 켜고 비어있는 세계를 가만히 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한히 시간을 보내보자. 화면에 수놓아진 자연적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조차 없을 것이다. 이 공간들은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부터 생동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오직 플레이어에 의해 문명적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제공된 공간일 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저서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에서 맥시스의 ‘심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기 있는 맥시스사의 게임 「심앤트」, 「심어스」, 「심시티」, 「심시티 2000」 그리고 「심라이프」는 모두 컴퓨터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지도 제작 게임이다. 이 게임들에서는, 생명 그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 제작이 곧 세계 제작이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화의 데카르트적 격자 관습 안에서, 이 게임들은 사용자들이 탐험, 창조, 발견, 상상, 개입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과학자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데이터 기록 실천, 실험 프로토콜, 세계 설계를 배우는 것은 이 테크노사이언스 영역에서 정상적 주체가 되는 과정의 매끄러운 일부다. 지도 제작 실천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하는 투영법projections을 배우는 것이다. 각 투영법은 특정한 종류의 관점perspective을 생산하고 함축한다.” [1] 그런 의미에서 프리 라이브스의 「테라 닐」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역 건설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이 게임은 ‘발전하기 위한 건설’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테라 닐」의 목적은 자연의 재생에 있다.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여기에 ‘역 건설게임’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플레이어는 모든 스테이지에서 자연을 완전히 되살린 뒤, 자신의 모든 건설물을 파괴하고 이 공간을 떠나야 한다. 이를 통해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스스로 생동하는 자연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마지막의 철수 공정을 마친 뒤 원한다면 얼마든지 재생된 세계를 관람할 수도 있다. 「테라 닐」에 최초로 제공되는 빈 땅은 「심시티」 또는 본 장르의 다른 게임들에서 보이는 빈 땅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에 가깝다. 「심시티」의 그곳은 자연인 척 모사되었을 뿐 진짜 의미에서의 자연은 아닌 공간이다. 그것은 생명의 형태를 패러디한 공간이며, 동시에 문명의 통치가 ‘필요한’ 그저 사멸되어 있는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테라 닐」의 빈 공간은 본래부터 멸망의 음울함을 가진 공간이다. 「테라 닐」이라는 제목조차 제국주의 시절 원주민의 땅을 ‘주인 없는 땅’이라 명명할 때 사용한 단어 ‘Terra Nullius’를 떠오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게임의 역학에 있어 양 공간의 기능과 목적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테라 닐」은 그 죽음의 이미지를 전면화함으로서 장르적 기능을 역행해 재생이라는 목적을 도출해낸다. 「테라 닐」은 ‘역 건설’이라는 게임적 메커닉을 통해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들이 가지고 있던 (해러웨이가 정의한) ‘지도그리기’의 역학을 무참히 드러내버린다. 「테라 닐」의 빈 땅 그런 의미에서, 「테라 닐」은 일종의 생태주의 게임이다. 그리고 「테라 닐」이 생태주의 게임인 이유는 기존의 건설 경영 게임들이 가진 반 생태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테라 닐」의 혁신성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들이 가진 ‘지도 그리기’의 역학, 문명에 의한 자연 통치의 보편화에 저항할 때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초적인 메커닉이라는 점이다. 그곳이 오염된 땅이라는 전제가 있다고 한들 플레이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건물을 세우고, 그를 통해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를 소모해 다시금 건물을 세워 나가는 방식으로 ‘빈 땅’을 (건물이 아닌 식물로) 채워나간다. 리뷰 등에서 종종 지적되고 있듯, 「테라 닐」에는 수상한 미스터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플레이어가 재생해야하는 이 세계의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건물을 짓기 위한 (게임 내에서는 녹색의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포인트의 정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는 이 게임에서의 문명과 자연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는 복원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연유로 이렇게 파괴된 것일까? 핵전쟁이 있었을까? 극심한 환경오염의 결과인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인가? 아니면 운석 충돌에 의한 예상치 못한 파멸인가? 이 조건의 공백은 플레이어의 행위가 올라설 지지대를 치워버린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는 자연을 ‘재생’하라는 미션을 건내고 있을 뿐이다. 즉 플레이어가 지금 수행하는 수복이 실패에 대한 책임의 행위인지, 세계의 재건이라는 극복의 의지인지 모호하게 굴고 있는 셈이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재생의 기술을 가진 플레이어와 재생을 필요로 하는 땅이라는 이분화된 관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조건이 지워지는 순간, 플레이어에게는 일정한 ‘선한 의지’만이 주어진다. 책임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에 그 행위 전체가 자연의 수복이라는 고귀함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위대한 일’을 위해 남겨져 있는 이 공간이 바로 「테라 닐」의 비어있는 땅이다. 이 조건은 에코모더니즘의 비전과 연결된다. 2015년 에코모더니즘 선언문An Ecomodernism Manifesto과 함께 발족한 이 사조는 기술 발전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의 더 나은 삶Well-being을 증진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환경 철학이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Anthropocene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금의 세계를 ‘좋은 또는 위대한 인류세’로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건다. 이 사조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비판을 겪었다. 특히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이들이 인류세를 ‘퇴보의 상징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게 해주는 전환’으로 받아들이며 ‘흥분과 기쁨의 기색을 보이며 환영하고 있다’ [2] 고 강하게 비판한다. 「테라 닐」이 ‘땅’을 다루는 태도 역시 이러한 비판의 도마 위에 있다. 땅의 탄생 조건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좋은 또는 위대한 재생’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와 동시에 게임에 작동하는 모든 기술적 토대는 자연에 과시적으로 작동한다. 어떻게보면 「테라 닐」의 ‘땅’은 자연적으로 재생할 수 없다는 음울한 자연성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심시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생하지 못하는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이든, 자연을 재생시키는 것이든 ‘빈 땅’으로 규정된 장소들은 스스로 생장하지 못하는 한계지어진 곳이다. 오직 기술만이 변화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테라 닐」은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과 공명한다. 녹색의 자원으로부터 한편 이 게임이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다. 모두 말라버린 지상에 충분할만치 지하수를 공급할 수 있는 펌프를 시작으로,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극적으로 변동시킬 수 있는 장비, 그에 더해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고효율의 발전기가 사용된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고능한 장비를 ‘어떠한 자원을 통해’ 설치하는지 역시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각 건물의 설치는 게임 내에서 획득하는 ‘녹색의 포인트’를 통해 설치할 수 있는데, 이 포인트는 자연의 회복 정도에 따라 일정량 확보되는 구조다. 게임이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두 개념의 관계, 즉 ‘자연의 회복’과 ‘기술의 설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관계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과연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 채취하지 않고서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가? 플레이어는 기술을 통해 자연을 ‘재생시키는 국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 이 기술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는 이 관계는 「ANNO 1800」에 대한 반복된 비판과 연결되는 구석이 있다. 해상로를 통한 자원의 보충을 기반으로 하는 「ANNO 1800」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원주민과 착취 노동의 조건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이 게임에는 그저 일용직 노동자인 호날레로jornalero와 전문 노동자인 오브레로obrero라는 자발적인 존재들이 묘사될 뿐이다. 즉 플레이어에게 있어 어떠한 자원적 획득은 그 채집의 노동과 ‘마찰 없는 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PC Gamers》의 사무엘 호티Samuel Horti는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식민지화를 노예제, 잔혹함, 폭력, 질병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 라며 이러한 구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이 끊어진 관계를 통해 플레이어는 자원의 운용에 어떠한 심적 불편함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으로 이행하게 된다. 「테라 닐」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고도의 기술 그리고 설치와 운용이라는 고도의 코스트를 요하는 작업들이 어떠한 물적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지 제거됨으로서, 이 게임은 혹여나 기술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연 착취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물론 이것을 밸런스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술이라는 문명의 투입은 자연의 재생 정도와 일정량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제한다면 이 관계는 포인트의 ‘소모’가 아니라 지도 위에 세워진 건물의 ‘점유도’와 대비되는 자연의 회복 ‘정도’로 묘사되는 것이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 즉 이 메커니즘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테라 닐」의 메커닉은 매우 알기 쉬운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일정한 건설을 통한 ‘수익’과 그 자본의 ‘소비’를 통한 성장 모델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테라 닐」은 건설 시뮬레이션에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착취적 모델을 통해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모순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자본의 획득과 소비’라는 관계가 근간이 되어있는 한 비판이라는 목적에는 완전히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스킨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면, 그저 현 인류의 보편적 사유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분재화된 자연으로 「테라 닐」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게임의 가장 흥미로운 메커닉인 철거 국면에 그 답이 있다. 각 스테이지의 말미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건설물들을 해체하고 그 땅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해체에도 포인트가 소모되기 때문에 건설의 과정에서부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를 미리 설계해 둘 필요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포인트를 소모해 철거 국면을 끝낸 뒤 모선과 함께 날아오를 때의 쾌감이 「테라 닐」의 핵심적인 재미다. 환경 조성에 의한 보너스 포인트의 목록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땅은 해러웨이적으로 ‘지도화된’ 땅이다. 플레이어는 이 아름다운 땅을 만들기 위해 땅 전체의 온도, 습도, 방사능의 양 등의 수치를 안정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제시되는 ‘일정한 정도의 환경 조건’을 달성하면 대량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는다. 특정한 환경의 조성은 동물들의 복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치게 기적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수치적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체계다. ‘동물의 귀환’이라는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생태적인 결과가 그저 (광의의) 경제적 결과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솔직해지자. 이 동물들은 「심시티」에서 RCI의 밸런스를 명확히 했을 때 보상으로 받는 인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플레이어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아름다운 땅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기술적 관리에 의한 보상물이다. 재생을 거친 인간의 ‘철수’는 이 보상을 더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극단의 분리주의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윌리엄 크로넌William Cronon의 관점을 따라가보자. 크로넌은 『The trouble with Wilderness : or Getting back to the wrong nature』에서 야생wilderness라는 개념이 19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발명된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논한다. 이것이 발명품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야생’이 전적으로 문명 내부에서의 이상화를 위해 자연-문명이라는 이원화를 이용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크로넌이 보는 발명된 야생이란 문명이 바라보는 ‘숭고하고 신성한 사원’이자 ‘강인한 개척자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간이 된다. 야생을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거주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은폐된다. 그리고 인간과 끝없이 분리된 이상적 공간인 자연은 오히려 인간이 점유한 곳으로부터 점차 밀려난다는 것이다. [4] 도대체 「테라 닐」에서 재생을 주도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곳에 자연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재생된 자연에서 인간이 떠나야 함을 당위로 만든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는 완전히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가? 「테라 닐」의 마지막 미스터리는 크로넌이 설명하는 불안의 위계를 담지한다. 「테라 닐」의 인류가 바라보는 자연이란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잔존하는 거대화한 분재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테라 닐」의 플레이를 끝내고 나면 그런 의문에 봉착한다. 왜 이 게임의 인류는 재생된 자연과 하나되어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연의 재생이 가능한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연과의 격리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테라 닐」의 인류가 거주하는 곳은 게임의 배경이 되는 행성에서 까마득히 먼 또 다른 행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억류된 오염과 방사능과 오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재생의 기술이 보여주는 모순의 빈 공간에는 이렇듯 분리된 불안의 상상력이 가득 차오른다. 크로넌은 이러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의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 비자연과 자연, 타락과 비타락이 세상을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개념적 지도로 기능하는 양극적 도덕 저울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풍경의 전체 연속체를 포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도시, 교외, 전원, 야생은 각각 고유한 적절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것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그 각각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멀리 사는 이국적인 타자만큼이나 내면의 타자와 옆집의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자연적 사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이다. 특히 우리는 도시에서 야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집"이라는 단어 안에 어떻게든 포함될 수 있는 공통의 중간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결국 집은 우리가 생계를 꾸리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책임을 지는 장소이며, 그 안에 있는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지속시키려 노력하는 장소다.” [5] 역 건설이라는 메커닉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 플레이어가 「테라 닐」의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미지는 재생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신적인 관점의 감상 모드다. 나무가 우거지고, 비가 내리고, 바다에 산호가 가득한 이 풍요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결코 향유할 수 없다. 감상 모드를 끝내고 나서면 사라지는 이 환영과도 같은 이미지에는 실제로 플레이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잠시나마라도 이 안에서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낚시를 하는 체험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을 모두 끝내면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샘플을 실은 우주선이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를 이끌어온 환경 재생 매뉴얼이 그 우주선의 내부에 안치된다. 이는 환경의 재생을 끝내고 ‘그들만의 삶’을 인정하며 또 다른 재생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광경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구의 샘플들을 통해 어떠한 환경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준비처럼도 보일 수 있다. 「테라 닐」의 플레이 플로우가 그 모든 과정을 증명한다. 우주선이 ‘지구의 것’을 가지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상해보자. 인류는 지구를 두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으며, 지금 가지고 날아가는 모든 샘플과 자료는 그들의 행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또 다른 행성을 ‘지구화Terraforming’하려한다는 상상은 끊어낼 수 없다. 수복이 끝난 행성은 홀로 놔둔 채, 인간은 우주로 나아간다. 아니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나가보자. 혹시 「테라 닐」의 우주에는 인류가 없는 것 아닐까? 이 세계를 재생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다른 차원, 다른 의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테라 닐」의 세계 내에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 훼손의 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징벌적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제공하는 것은 우리는 절대 가지지 못할 ‘안전한 절멸’의 경험이다. 모니터 바깥의 인간, 그러니까 재생 주체로서의 플레이어는 세계 내부와 무관하게 현전하며 행성을 관리한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절멸의 아픔을 낭만적으로 느끼는 이 주체에게 있어,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행성은 그저 잘 가꿔진 분재의 일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샘플을 가지고 떠나는 우주선의 아름다운 상승은 우주 전체가 분재화될 씨앗 운반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안전한 절멸의 경험은 결국 무한한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가 펼쳐진 가능성의 우주를 꿈꾸게 한다. [1] Donna Harraway(1997),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 Routledge [2] 클라이브 해밀튼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2018) [3] Samuel Horti(2019), 「What Anno 1800 gets wrong, and right, about colonialism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PC Gamers [4] William Cronon(1995), 『Uncommon Ground: Rethinking the Human Place in Nature』 [5] William Cronon(1995), 앞의 책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Editor's View] 손이 바쁜 공모전 특집호를 마무리하며

    비록 한 해에 여섯 호 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GG의 발행은 꽤나 연속성이 있는 편입니다. 두 달에 한 번 발행하는 잡지를 위해 발행 전 달에 기획회의를 하고, 걸맞는 필자를 섭외한 뒤 각각의 필자들이 한 달간 원고를 준비합니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13 GG Vol. 23.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eong-Yi Writes with an interest in the interrelations among violence, suffering, and division. Produced works including Mapping the Affective, Pouring Water into a Poisoned Bottomless Jar, and Monthly Paper, and served as dramaturg for the plays Opera Charlotronique and The Man Who Became a Pillow. Author of Hormone Journal and Game Chorus, and co-author of A Mad, Love Song.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KRAFTON_Horizontal_Logo_Black.jpg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