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결과

공란으로 1280개 검색됨

  • [editor's view]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심 어스>라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특정 생물군을 지능을 가진 사회적 군집체로 진화시킬 수 있는데, 이들이 기술발전만 급격하게 이루고 철학과 윤리 발전이 늦어지면 결국 핵전쟁으로 멸망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에서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 Back 02 GG Vol. 21.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asom Seo Studied curatorial studies and art history. Now and then curates exhibitions or writes, and mostly plays games. A member of "Mods," a game club for curators.

  •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o Kim Majored in English literature and studies the ways women's love is represented in medieval romance. Has played games steadily for a long time, but often thinks that, had it not been for encountering Koei's Uncharted Waters franchise in middle school, the trajectory of life would have turned out entirely different. Keenly interested in how contemporary media—video games, films, television dramas—deal with history, historical settings,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history and the individual (women in particular).

  • [Editor's View] AAA의 반대편을 향한 탐색

    이를 테면 B급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이 그러합니다. 특유의 감성을 아예 하나의 코드로 삼아 발전하는 B급 장르는 영화나 만화 등에서의 감성을 이어가며 게임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얹지만, 이른바 ‘똥겜’으로 불리는 그룹들 또한 존재합니다. 그저 못 만들었다고만 평가하기에는 그곳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당신의 기억을 <언패킹>: 정리 게임이 기억을 다루는 방법

    기억은 세부 사항이 완전히 보존된 텍스트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인 이미지의 집합으로 우리에게 떠오른다. 이때 사물은 기억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자신과 관련된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소환한다. < Back 당신의 기억을 <언패킹>: 정리 게임이 기억을 다루는 방법 31 GG Vol. 26. 8. 10. * <언패킹> 시작 화면 당신이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 가정해 보자.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을 알기 위해선 우선 과거의 당신이 남긴 기록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일기부터 사진, SNS 게시물과 메신저의 대화 내역까지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숱한 기록을 남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기록은 선별된 기억이다. 어떠한 사실을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작성되는 ‘기록’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남긴 흔적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발 안쪽에 무게를 실어 걷는 버릇 때문에 안쪽만 닳은 신발 밑창은 기록이 아닌 흔적이다. 만들어질 때부터 의도와 해석이 개입되는 기록과 달리 흔적은 의도 바깥의 영역에서 생겨나고,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흔적은 기록에 비해 태생적으로 소박하다. 그러나 때로 흔적은 기록보다 더 충실하게 그 주인을 설명해 준다. 기록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쓰일 수 있지만 물성을 갖춘 흔적은 정직하다. 그러니 기억을 잃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단서는 일기나 SNS가 아니라 자신이 쓰던 방의 물건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소유하기로 처음 선택할 때는 필요와 취향이라는 의도가 개입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물 자체가 우리의 흔적이 되기도 한다. 최초의 의도를 벗어나 사물과 주인의 관계가 계속해서 재설정되기 때문이다. 흔적은 주인과 사물의 관계에서 태어나 사물에 내재되고 세월에 의해 변화한다. 덕분에 흔적에는 기록에는 없는 자생력이 깃든다. 벤야민이 자신의 서재를 정리하며 쓴 에세이 ‘나의 서재를 정리하다: 수집에 대한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사물이 수집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집가 자체가 사물 속에 거주한다. [1] ” 대부분의 시간 우리의 인식에서 벗어나 있는 이 생기는 우리가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예고 없이 분출된다. 사물과의 관계를 재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다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건을 버릴 것인가,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인가? 손이 닿고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둘 것인가, 구석에 넣어둘 것인가? 판단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다시 질문한다. 나는 여전히 이 물건이 필요한가? 얼마나 오래 가지고 있었나? 이전엔 어떻게 사용했나? 이 물건을 언제,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나? 흔적을 살피며 우리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던 기억을 소환한다. 이삿짐을 정리하거나 대청소를 하다 보면 물건에 얽힌 추억을 들여다보다 정리는 뒷전이 되곤 하듯이. 2021년 출시된 정리 게임 <언패킹>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모아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한다. * 스테이지를 완료할 때마다 앨범에 사진이 쌓인다. 정리란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인간은 이 행위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넘어 쾌감을 얻도록 진화했다. 사실 정리만큼 놀이의 형식에 들어맞는 일도 없다. ‘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주창한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는 자유롭게 받아들여졌으되 엄격히 적용되는 규칙을 따르며 몰입을 통한 즐거움을 수반하는 일이다. 다만 실생활에서의 정리는 유희를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닌 노동이기에 놀이가 아닌 일상생활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럼에도 정리와 놀이는 각자의 긴 역사 속에서 복수의 속성을 공유해왔으니, ‘정리 게임’이라는 게임 장르의 출현도 자연스럽다. 스팀에서 ‘정리(Organizing)’ 태그로 분류된 게임들을 살펴보면 주로 ‘퍼즐’, ‘릴랙싱’ 태그가 함께 붙어있다. , , 등이 대표적이다. 즉 게임으로서의 ‘정리’는 정답이 정해진 퍼즐을 푸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게 하되, 점수 경쟁이나 과하게 복잡한 규칙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행위로 여겨진다. <언패킹>도 마찬가지로 퍼즐 게임으로 분류된다. 이사 간 집에 짐을 풀어 제자리를 찾아 정리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전부다. 모든 물건의 자리가 정확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재량을 발휘해 취향껏 인테리어를 꾸밀 수도 있지만, 쓰임새에 따라 물건이 있어야 할 알맞은 공간은 지정되어 있어 최소한의 규칙은 따르며 진행해야 한다. 스테이지가 진행될수록 이삿짐은 점점 늘어나고 이사를 가는 집도 커져 정리가 한층 복잡해진다. 그러나 <언패킹>은 정리를 퍼즐과 꾸미기 이상의 행위로 설계했다. <언패킹>에서 정리라는 플레이는 사물이라는 흔적을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이다. <언패킹>은 사물을 통해 유년기부터 가정을 이루기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처음으로 생긴 자기 방에서 시작해 대학 자취방, 사회초년생 생활, 애인과의 첫 동거, 이별 후 본가로의 귀환, 새 사랑과의 만남과 독립 등 삶의 주요 국면마다 주인공은 이사를 가게 된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몇 년도에 이사를 하게 되었는지와 소지품의 변화뿐이다. 정리를 완료한 후 사진을 찍으면 이사를 마친 주인공의 소회가 제시되지만, 새로운 집에 대한 평가나 이사 당일의 감정 표현 정도로 주인공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 * 박스에서 랜덤으로 나온 이삿짐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 있다.(직접 캡처) 플레이어는 이삿짐을 꾸리는 과정에는 관여할 수 없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면 처음 보는 집에 이삿짐 박스가 잔뜩 쌓여 있고, 플레이어는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짐을 풀어야 한다. 1997년부터 2018년까지 20년에 걸친 시간 동안 소지품은 남아 있거나, 사라졌거나, 새롭게 추가된다. 플레이어는 이 흔적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추측하게 된다. 2010년, 주인공은 애인의 집으로 들어가 첫 동거를 하게 된다. 애인의 물건들 사이를 비집고 주인공의 짐을 밀어 넣다 보면 자연히 취향의 차이가 들어온다. 그는 취미로 기타를 연주하고,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신다. 2012년, 이별 후 주인공은 본가로 돌아간다. 사진 속 전 애인의 얼굴에 압정을 꽂아 놓은 것으로 보아 끝이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시작한 우쿨렐레 연주와 드립커피는 주인공의 취미와 취향으로 남았다. 2010년 스테이지 이후로 우쿨렐레와 악보집, 커피용품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만으로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 주인공의 취향이 드러나는 거실(직접 캡처) 첫 스테이지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건들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그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미술용품 브랜드를 프로 작가가 될 때까지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취향이 확고하고 그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재봉이 뜯어질 때까지 들고 다닌 돼지 인형에서도 그 고집이 엿보인다. 돼지 인형은 어릴 때부터 그녀의 모델이었고, 작가가 된 그녀가 출판한 동화책의 주인공이 된다. 인형 외에도 한 번 애정을 준 물건은 쉽게 놓지 못해 어렸을 때 사용한 연습장과 가장 좋아하는 책 시리즈는 어느 집의 책장이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매번 늘어나는 비디오게임과 보드게임은 그녀의 가장 오래된 취미다. 좋아하는 물건을 살 때는 꼭 종류별로 모으는 수집가의 성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퍼즐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은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불가항력적으로 추론에 참여하게 된다. 박스에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 어떤 순서로 물건이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플레이어는 짐 하나를 꺼낼 때마다 유심히 그 물건을 들여다보고 평가해야 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물건을 기억하게 되고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새로 생긴 물건을 알아보게 된다. 스토리를 추론해 정답을 맞히거나 핵심 단서를 수집하게 하는 등, 이 과정을 적극적인 플레이 요소로 지정할 방법은 많다. 많은 정리·퍼즐 게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내러티브적 요소를 구현한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콘셉트인 의 경우 정리 과정에서 모은 단서로 회고록을 복원하게 하고, 는 NPC와의 대화와 ‘이상현상’이라는 미스터리 요소를 도입해 스토리를 인식하게 한다. 게임에서 정리라는 퍼즐이 내러티브와 결합하며 사물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정리는 이를 들여다보는 행위가 된다. * 의 회고록 정리 화면 ⓒSecret Mode 여기서 <언패킹>이 여타의 정리 게임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드러난다. 현실에서의 정리와 게임에서의 정리 사이에는 자발성의 유무 이외의 목적 차이가 있다. 내러티브의 발견이 게임의 명시적인 목적으로 제시될 경우 사물의 위치는 해석 대상을 넘어 단서 혹은 증거로 구체화한다. 이때 역설적으로 사물은 그것이 담고 있는 기억, 의미와 분리된다. 내러티브의 구성을 최우선 목적으로 둔 플레이어는 전체 이야기를 짜맞추는 데 들어맞는 의미만을 부분적으로 탈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 인간의 삶에는 대주제나 기승전결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정리에서도 각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를 하나의 서사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산개한 기억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물질과 기억』(1896)에서 주장했듯 기억은 세부 사항이 완전히 보존된 텍스트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인 이미지의 집합으로 우리에게 떠오른다. 이때 사물은 기억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자신과 관련된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소환한다. 정리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기억은 이처럼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언패킹>이 제시하는 플레이는 정리와 기억이 연결되는 현실의 메커니즘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정리 게임에서 물건의 주인은 늘 가상의 인물이자 타인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자신이 정리해야 할 물건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주인공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듯이, 혹은 잃었던 기억을 찾아가듯이 어렴풋하게나마 주인공의 자아를 구성할 수 있다. 어떠한 명시적 내러티브 없이 사물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기억은 우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맺은 사물 속에서도 거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벤야민의 상념을 빌려본다. “기억된 것, 생각된 것, 의식된 것, 이 모두는 자기 자산의 초석이 되고, 액자, 주각, 자물쇠가 된다. 시대, 주변 경관, 수공 작업, 이전의 소유주 — 소유주의 이러한 물건은 저마다 진정한 수집가에게 한데 모아져 하나의 마법적 백과사전이 되고, 그 총체가 소유주 대상물의 운명이 된다 [2] .” 그렇다면 <언패킹>에서 플레이어의 정리는 주인공에 대해 쓴 백과사전을 훑어보는 일이다. 백과사전을 읽는다고 세계를 완벽하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듯, 정리가 끝난 뒤에도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짐작될 뿐이다. 이 느슨한 이해의 방식은 앞서 언급한 <언패킹>의 유연한 규칙에도 반영되어 있다. 자리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물건은 없다. 그래서 현실의 우리도 정리를 한다. 제자리를 찾는 일에는 정답이 없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물건의 자리도, 나 자신의 자리도. 넘치는 물건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다 보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1] 발터 벤야민, 『라디오와 매체』, 고지현 역, 현실문화, 2021, 239. [2] 발터 벤야민, 앞의 책, 2021, 227. Tags: 기억, 언패킹, 정리 게임, 코지 게임, 사물과 기억, 발터 벤야민, Unpacking Game, Cozy Games, Environmental Storytelling, Memory in Gam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에디터) 박유진 시사 유튜브·팟캐스트를 만드는 직장인이자 평범한 게이머. 시사를 녹여낸 게임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종종 함께합니다.

  • [논문세미나] '스트리트파이터'는 무술martial arts인가?

    그리고 그 운용기술, 다시말해 주어진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관념과 자세에서 존스는 70년대 무술영화 붐과 2000년대 대전격투 게임이 같은 맥락에 선다고 분석한다. 오늘날 현대 격투기에서 사실상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은 파훼되었지만, 7-80년대에 이소룡 영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동양무술은 북미에서 실제로 무술 도장의 붐을 이끌어냈고 수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괴성을 지르며 신체를 움직이는 무술의 동작을 따라하게 만들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EVO #37 이벤트 또한 동시대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디지털화된 무술과 비슷한 무엇을 따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Back 13 GG Vol. 23.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나는 짤렸다: 미국 게임계의 해고 붐 한복판의 현장 스케치

    2023년 11월 나는 짤렸다. 상사가 예정에도 없는 짧은 미팅을 제안했고 그 때 부터 뭔가 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고 있던 큰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해지했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불안함은 현실이 됐다. 상사가 나에게 절대 퍼포먼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해줬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북미, 미국, 해고, AAA게임, 게임산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hoon Hong Lives in California and works in the game industry. Aims to offer insight to as many people as possible through podcast appearances and contributions to various outlets. Hopes to spend a lifetime writing engaging pieces across every field, from fashion to games.

  • About GG | 게임제너레이션 GG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주)크래프톤이 후원하는 격월간 게임문화비평전문웹진. 게임비평 및 연구결과 수록. 게임문화 교양웹진, 게임 제너레이션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게임문화 담론을 선도해 나가고자 2021년 8월에 창간한 게임비평 전문 웹진입니다. 2개월에 한 번씩 GG는 동시대 디지털게임의 주요 주제를 선정해 다양한 시각에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밝히고자 합니다. GG의 철학 GG는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디지털게임이 차지하는 영향력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디지털게임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게임을 하는 이도 안하는 이도 게임으로부터 영향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GG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현대 대중문화담론이 처한 위기는 무거움과 가벼움 양 쪽 모두를 딛고 있습니다. 학술적인 깊은 논의들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으며, 널리 퍼지는 이야기들은 게임문화담론의 깊이를 품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GG는 '학술지보다 가볍게, 웹진보다 무겁게'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다 게임문화를 보다 무겁게 다루는 일이 충분히 대중적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한 독자와 필자를 찾아내고 담론장에 유통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GG를 만드는 사람들 척박한 게임문화담론을 개척하는 일에는 많은 인력과 자원, 시간이 들어갑니다. GG는 게임문화재단에서 제작을 맡고 있으며, 그 후원을 (주)크래프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크래프톤의 후원은 전적으로 후원에 머무르며, 웹진 제작과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러한 후원을 바탕으로 GG는 많은 게임연구자들과 협업하며 게임문화담론의 생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내외를 망라한 젊고 명망있는 게임연구자들, 게임의 문화적 비평에 의지를 가진 비평가들이 GG와 함께합니다. 더불어 새로운 필진의 발굴을 위해 GG는 매년 1회 게임비평공모전을 주최, 동시대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자 노력중입니다. GG가 꿈꾸는 미래 한국은 게임문화에 있어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문화담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비단 한국어권에 머물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GG는 장기적으로 한국의 게임문화담론을 전세계와 공유하고자 하는 미래를 꿈꿉니다. 해외의 다양한 게임연구, 담론, 비평을 공유하고, 또 한국에서 생산된 논의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와 함께 디지털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서의 GG를 우리는 상상합니다.

  •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 Back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27 GG Vol. 25. 12. 10. 게임 연구,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게임 연구를 한다고 자기소개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게임 연구요? 그럼 코딩하시나요? 게임 개발 쪽인가요?" 게임을 연구한다는 말이 곧 기술 연구나 프로그래밍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게임 연구에는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디어 연구, 문화 연구, 장르 연구, 철학이나 미학 연구 등 게임을 바라보는 지평은 다양하다. 그러나 '게임 연구'라는 말은 여전히 명확한 윤곽을 갖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혼란은 비단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연구자들 스스로도 게임 연구가 어느 학문 분과에 속하는지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 미디어학과 강의실, 컴퓨터공학과 실험실, 문화연구 세미나실 가운데 어느 곳이 그 자리가 될 수 있을까? 2025년 5월 일본에서 출간된 『クリティカル・ワード ゲームスタディーズ ― 遊びから文化と社会を考える』(이하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의 네 명의 편저자 – 이노우에 아키토(井上明人), 마츠나가 신지(松永伸司), 요시다 히로시(吉田寛), 마틴 로스(Martin Roth) – 는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게임 연구는 기존의 대학 분과나 학문 제도로는 수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가 바라보는 지평 그렇다면 일본의 게임 연구자들은 게임 연구의 이 불안정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에서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 게임 연구의 현주소는 흥미롭다. 편저자들은 게임 연구가 "새롭고 영역횡단적인 학문"이기에 전체와 현위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인정한다. 앞서 국가별로 게임 연구가 주도되는 학문의 영역이 다르다고 언급했듯, 이러한 지역적 편차는 게임 스터디즈가 아직 확립된 학문 분과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이라는 대상 자체가 단일한 학문적 렌즈로는 포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게임 제작에 요구되는 기능이 프로그래밍부터 영상, 시나리오, 세계관 설정,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듯, 게임 연구 역시 문과도 이과도 아닌, 혹은 문과이면서 동시에 이과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책의 구성에도 반영된다. 네 명의 편저자는 각기 다른 전문 분야와 배경을 가진다. 편저자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연구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 내에서 각자의 게임 연구에 임해도 좋다"며, 학문적 다원주의를 적극 옹호한다. 일본 게임 연구가 주목하는 것들 이러한 학문적 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그 답은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책의 제1부 이론편은 '룰(Rule)', '미디어(Media)', '놀이(Play)', '픽션(Fiction)',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소셜(Social)', '인공물(Artifact)',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 등 8개 핵심 개념을 다룬다. 주목할 점은 하나의 개념을 네 명의 편저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설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룰' 개념을 둘러싸고 "게임은 룰인가", "룰 개념의 다의성과 다양한 성질", "룰은 게임을 정의하는가"라는 세 가지 소제목 하에 서로 다른 시각이 제시된다. 이는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가 다양한 견해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적 전략이다. 제2부 키워드편은 27개 항목으로 구성되며, 현재 게임 문화와 게임 연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여기에 수록된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현재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떤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드러난다. 이 항목들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묶인다. 첫째, 기술적·물질적 기반 주제다. 'NFT', '에뮬레이션', '아카이브', '플랫폼'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단순히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경제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미디어로 파악한다. 특히 아카이브와 에뮬레이션 파트는 게임의 보존과 접근성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게임이 점점 더 '사라지는' 미디어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다. 플랫폼 개념은 게임이 중립적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와 경제 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문화적 쟁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접근성과 장애의 표상', '게임 행동 장애(Gaming Disorder)'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둘러싼 정치성을 전면화한다. 젠더 파트는 게임 문화의 남성중심성과 배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접근성 파트는 장애인 게이머들의 경험이 어떻게 주변화되어왔는지를 다룬다. 게임 행동 장애 파트는 WHO의 질병 분류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면서, 게임 플레이를 병리화하는 담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 현상과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플레이어의 창조적·전복적 실천에 대한 주제다. '게임 실황', 'UGC(User-Generated Contents)', '치트', '내비게이션'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개발자가 설계한 대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임 실황은 게임 플레이를 관람 가능한 퍼포먼스로 전환하는 실천이고, UGC는 플레이어를 공동 창작자로 위치시킨다. 치트는 게임의 룰을 의도적으로 위반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이러한 항목들은 게임 연구가 '텍스트 분석'에서 '실천과 문화 연구'로 확장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넷째, 게임의 사회적 확장에 대한 주제다. '스포츠', '투어리즘',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더 이상 오락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게이미피케이션은 업무, 교육, 건강관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이 게임의 논리로 재편되는 현상을 가리키며, 투어리즘 파트는 <포켓몬 GO> 같은 게임이 실제 공간의 이동과 경험을 재조직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스포츠 파트는 e스포츠의 부상과 함께 게임과 전통적 스포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다룬다. 다섯째, 메타적 성찰에 대한 주제다. '비평(Criticism)', '윤리(Ethics)', '역사 서술', '내러티브(Narrative)', '몰입' 같은 개념들은 게임을 연구하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윤리 파트는 게임 내 폭력 표현, 착취적 과금 모델, 개발 노동 조건 등 게임을 둘러싼 다층적 윤리적 쟁점들을 다룬다. 역사 서술 파트는 게임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탐구한다. 비평 파트는 게임 비평의 언어와 방법이 무엇인지,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묻는다. 제3부 북가이드편은 20개의 필독 문헌을 소개한다. 하위징아(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카이와(Caillois)의 『놀이와 인간(Man, Play and Games)』 같은 고전부터, 예스퍼 율(Jesper Juul)의 『하프 리얼(Half-Real)』,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설득적 게임(Persuasive Games)』 같은 현대 게임 연구의 주요 저작까지 망라한다. 흥미롭게도 편저자들은 일본어 문헌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밝히는데, 이는 "일본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접근이 어려운 외국어 문헌 소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어쩌면 내용보다 형식에 있을지 모른다. 서문에서 편저자들은 독자에게 "이 책을 도중에 내던지고 즉시 자신만의 게임 스터디즈를 시작해도 좋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책에는 다양한 전문 분야와 연구 테마를 가진 많은 저자들이 다루는 현재진행형의 게임 스터디즈가 담겨 있으므로, 끝까지 읽는 것을 권장한다"고도 덧붙인다. 이는 게임 연구라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영역에서 학술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게임 연구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게임 연구 커뮤니티와 연구 서적이 서서히 쌓여 왔고, 이 책은 그 축적의 위에 서서 ‘입문용 지도’를 제안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게임 연구 씬뿐만 아니라 한국의 게임 연구 현장에서도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는 명확한 학문적 경계나 방법론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을 문제로 보기보다, 오히려 가능성으로 전환하려 한다. "문과도 이과도 아니다", 기존 학문 제도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은 패배주의적 자조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적 실험을 위한 생각의 전환에 가깝다. 일본의 지형, 한국의 질문 사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미학, 철학, 미디어 이론, 기술사 등 인문학적이고 이론 지향적인 게임 연구 관점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 연구, 디자인학 연구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며, 지역이나 대학별로 강조하는 학문 분과도 다르다. 한국 역시 커뮤니케이션학, 미디어학, 문화연구는 물론이고 게임 정책 연구, 산업 분석, 기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이 공존한다. 두 나라 모두 게임 연구를 단일한 학문 체계 안에 정착시키기보다는, 여러 분과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이라는 대상을 탐구해왔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게임 연구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교의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는 문화적 맥락과 제도적 환경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젠더 담론, 게임 병리화 담론, 아카이브와 보존 문제, 플레이어 실천의 의미 등 한국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쟁점들을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연구 지형을 새로운 각도에서 성찰하게 만든다.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단순히 일본 게임 연구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게임 연구자들에게도 "당신은 게임을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고 볼 수 있다. 나가며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완결된 지식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게임 연구라는 영역이 여전히 형성 중이며,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긴장과 대화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 연구는 확립된 지식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탐구의 과정이며, 따라서 단일한 방법론이나 관점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임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권위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지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35개의 키워드와 20개의 필독서는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이라기보다, 계속 수정되고 확장될 '잠정적 지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제시하는 비전이 순탄하게 실현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임 스터디즈가 기존 학문 제도에 수용되지 않는다는 진단은, 동시에 제도적 지원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문적 다원주의는 지적 풍요로움을 약속하지만, 공통의 언어와 방법론이 부족해지는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 게임 연구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일본 게임 연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고,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며, 동시에 새로운 참여자들을 초대한다. 한국의 게임 연구자와 게임 문화 연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비교 참조점이자, 우리 자신의 게임 연구 지형을 성찰하게 만드는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게임을 어떤 학문적 렌즈로 바라보고 있는가? 국내 게임 문화의 고유성과 글로벌 게임 연구 담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게임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일은, 이 질문들을 다시 꺼내어 놓게 만드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 Back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26 GG Vol. 25. 10. 10.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1] ' 소외 '소외'만큼 현시대의 인간상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을까.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전자가 명확한 사회적 사건이라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달리, 후자는 개인 내부의 실존적 문제기 때문에 원인과 해법을 분별하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리 잡자 자연스레 그 개인의 문제인 소외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됐다. 이후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학술적 사회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더니, 소외란 -'그저 나쁜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에 내재된 본성임이 밝혀졌다. 이는 곧 소외가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알아낼 열쇠 중 하나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인간인 이상 결코 소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탓에 실존적 위기로써 소외가 다뤄진 지 근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소외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사회가 다각화되고 새로운 기술과 위기가 등장함에 따라 전에 없던 소외가 생겨났고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소외를 겪게 됐다. 우리 내부에 자리 잡은 외부가 우리와 함께 커졌다. 자동차가 땅을 기어다니는 일개 행성도 이 정도인데, 수많은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초거대 우주 정거장은 얼마나 심각할까?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이하 <청소부>)는 마치 소외를 게임화시켜 놓은 듯한 작품이다.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매우 번잡하고 발달한 곳이라서, 곳곳에서 값비싼 상품들이 거래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는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면 플레이어는 그저 푸른 피부의 중성적인 청소부일 뿐이고, 땅에 떨어진 잡동사니를 주워 소각하거나 팔아서 번 푼돈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녀가 버는 돈으로는 아무리 싼 식품도 버거우며 그렇다고 유사 식품을 사 먹으면 구토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종족은 정기적으로 '성별을 구매'해야 하기에 또 돈을 써야 하는 데다가, 어쩌다가 빨간 완장을 찬 공권력을 만나면 돈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녀는 언젠가는 이 거지 같은 곳을 벗어나고자 성실하게 일하지만, 일 하면 일 할수록 오히려 더 가난해지기만 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일이 닥치는데, 보물을 찾기 위해 들어간 지하 던전에서 저주에 걸려버린 것이다.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해골이 나타나 자꾸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죽을 맛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저주를 풀려면 세 개의 석판 조각을 모아야 하는데 그 과정도 전부 너무나 무의미하고 피곤한 일들 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고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이 우주 정거장 그 자체다. 단언컨대 이 정거장을 설계한 작자는 인류에 대한 끝없는 악의를 가진 천재일 것이다. 도대체가 길을 맙소사 찾을 수가 없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요일명도 아무 단어나 조합해서 만든 듯한 각종 고유 명사도 낯설지만, 그중에서도 정거장 구조는 특히나 낯설어서 도저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고통과 스트레스 . 그게 <청소부>가 플레이어에게 주는 전부다. 세 가지 소외 이렇게 <청소부>는 '안티-어드밴처 장르'답게, 일반적인 어드밴처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게임의 틀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다. 플레이어는 성장할 수 없고 활약할 수 없으며 극복하지도 못한 채, 그저 불가해한 원인에 의해 끊임없이 휘둘릴 뿐이다. 여느 게임과 달리 이 게임을 하면서 즐거움이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고 오히려 당혹감과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청소부>는 일종의 사회비판물을 지향한다. 실제로 개발자 브래드포드 호튼과 이소벨 샤샤는 게이머게이트를 비롯한 정치적 혐오나 가난한 청년들, 성 정체성 혼란 등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들을 본 게임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2] .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데, 왜냐면 본 작품은 단순한 사회적 사례를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청소부>는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플레이어를 소외시킨다. 첫째는 계급 에 의한 소외다. 플레이어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상품과 퀘스트 진행에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구매하거나 얻을 수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애초에 그것들이 게임 내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구매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데도 플레이어의 경제적 사회적 계급이 낮기 때문에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치 있는 상품을 홍보하는 찌라시라도 주인공에겐 또 하나의 소각할 쓰레기일 뿐이고, 수많은 우주선이 오고 가는 우주 정거장에서 살지만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다. 플레이어 또한, 향락과 가능성이 가득한 곳에서 살지만 그 무엇도 갈망할 수 없고 그저 삥이나 뜯기는 존재에 불과하다. 플레이어의 권리와 욕구 그리고 정체성이 -그의 자유의지나 합리적 근거가 아닌- 오직 계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일견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인간 사회 자체의 한계라 보는 것이 옳다. 자연적 경제가 원인이든 인위적 정치가 원인이든, 사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계급에 의한 소외가 있어왔다. 현대 대한민국에는 최고의 인프라를 가진 주거 시설이 즐비하지만 국민 중 다수는 평생을 일해도 그곳에 살 수 없다. 근현대 공산국가에도 안락하고 부유한 삶은 있었지만 이를 누릴 수 있는 이는 당과 가까운 사람들뿐이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은 물질뿐 아닌 능력, 사상, 민족, 종교, 성별, 거주지, 직업 등 온갖 차이에서 발생해왔다. 따라서 아무리 평등해지고 계급 간의 벽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개체가 아닌 이상은- 인간 사회라면 어디든 계급에 의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둘째는 부조리 에 의한 소외다. 퀘스트라고 주어진 것들은 전부 영문을 알 수 없고 전혀 즐겁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어째서 해골이 따라다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 어째서 저주를 풀기 위해서 성인 서적을 사야 하는지 혹은 지하에 숨겨진 오브젝트를 찾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홉 여신의 우상을 모으는 일은 정말로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우주 정거장 곳곳을 무식하게 돌아다녀야 하며, 심지어 마지막 퀘스트는 600 MC의 금액을 요구하는데 이를 벌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20일 넘게 노동만 해야 한다. 그 어떤 행운도 편법도 활약도 없다. 플레이어는 이유도 모른 채, 타인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혹은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괴롭고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한다. 더 어이없는 건 당초 목표인 우주 정거장을 벗어날 돈을 모았음에도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돈을 저주를 푸는 데 써버린다는 사실이다.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비상식적이기 그지없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비록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벌레가 됐다거나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소송을 당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부조리한 운명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탄생이 결정되고, 그 탄생 환경과 어렸을 적의 작은 선택이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성장한 후에도 그저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또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점은 어느샌가, 의문을 갖거나 거부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문지기가 자신을 위해 문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처럼, 우주 정거장에서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탈출을 망각한 주인공처럼, 방충망을 열어줬음에도 여전히 '방충망 너머에 밖이 있다'라고 굳게 믿고 방충망을 떠나지 않는 날벌레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든 운명 속에서 소외당한다. 셋째는 위치 에 의한 소외다. <청소부>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여기서 위치는 정체성으로서의 위치와 공간으로써의 위치 모두를 의미한다. 먼저 정체성으로서의 위치는 정기적으로 성전환을 해야 하는 기믹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별(로 상징되는 사회적 위치)을 꼭 가져야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성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성별의 이름이라곤 'CROSSFIT'이나 'DIRT'나 'MEH' 같이 무작위로 정한 듯한 이름뿐이다. (이는 요일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플레이어는 꼭 사회적 위치를 가져야 해서 식비를 아끼면서까지 위치성을 확보하지만, 정작 그 위치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이 의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공간으로써의 위치다.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당했지만 본 작품에서 가장 끔찍한 건 단연코 길 찾기다. 상술했듯 악의적인 천재가 설계했는지, 길을 찾는 건 커녕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건물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규칙성이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무작위라서 그 차이가 무의미하다. 둘째로 흔히 '디즈니 위니 Disney Weenie'라고 불리는, 어디서든 보이고 눈길을 끄는 구조물 [3] 이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구조물도 주변 건물이 다 높은 탓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고, 그래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는 살짝 스포일러인데- 가운데의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매우 유사한 몇 개의 구역이 반복된다. 그런데 플레이어는 도중까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기에 -상술한 이유 때문에 눈치채기 어렵다- 계속 돌아다녀도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고, 결국 전체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유의미한 차이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결국 각 기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기의가 아닌- 다른 기표와의 차이기 때문에, 차이가 상실되면 기표는 무화無化되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낯선 실재가 출현하게 된다. 자크 라캉의 '수집가 프레베르의 성냥갑 우화 [4] ',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게슈탈트 붕괴 현상, 리미널 스페이스의 반복된 이미지와 공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엔들리스 에이트' 등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위치를 가져야만 하는데, 위치는 유의미한 차이에 의해서만 성립하기에, 끝없는 반복에 갇힌 존재는 위치를 상실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소외에서 실존으로 의문은 해결되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본작이 소외의 결정체라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그게 게임의 의의일 수 있는가? 그저 답답하고 괴롭기만 한 이 게임에 도대체 어떤 효용성이 있단 말인가? 분명 게임의 기본적인 목적은 재미를 주는 것임에도 <청소부>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청소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외는 놀랍게도 재미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왜냐면 우리는 실존할 때 재미를 느끼는데, 역설적이게도 소외는 실존의 단초 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소외의 반대로 하면 실존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소외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실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소외와 실존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인간의 본질일 뿐이기에. 생각해 보라, 소외란 자기 자신을 보장하던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인데, 애초에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받는 상태 자체가 곧 그 무언가에 의한 소외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을 보장하던 것을 상실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이며, 이는 곧 실존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인 이상 언제나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것은 -언제나 독립되어 있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에 보장받던 '그것은 그저 일시적 수단일 뿐 결코 영구적 본질이 아님'을 항상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락한 보장 상태에서 박탈당하는 사건, 즉 소외다. 특정한 직업이나 사유재산 같은 물질을 잃었을 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지고, 말도 안 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쳐할 때 스스로에 의한 (그리고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되며, 고정된 좌표를 상실하고 위상적 비전체로 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너무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일뿐더러 <청소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다른 예시를 들어야 한다. <킹덤컴 시리즈>나 <언더월드>같이 높은 자유도의 오픈월드 RPG가 재밌는 것은, 게임이 상당히 복잡한 데 비해 플레이어의 계급과 능력치가 낮은 탓에 초반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소외), 점차 성장하고 적응하다 보면 계급의 격차를 극복하거나 혹은 반대로 계급의 벽을 우회하여 자유롭게 활동(실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넷핵>이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 등의 로그라이크 '계열' 게임들은 실수 한 번으로 자신의 모든 걸 잃을 수 있지만(소외), 오히려 그렇기에 특정 빌드나 플레이 스타일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실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탠리 패러블>이나 <페이퍼 플리즈>와 같은 게임이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근거 없고 불합리한 명령이 부과되고 플레이어는 이를 따라야만 하지만(소외),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터 와일즈>, <섹시 브루탈>, <포가튼 시티> 등의 타임 루프물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플레이어의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고 그래서 게임 내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위기에 처하는데(소외), 이때 플레이어는 각종 활동과 추론을 통해 반복되는 연쇄를 끊고 차이(실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이 게임들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실존한다. <청소부>에서 경험한 소외가 진짜인 만큼, 이 게임들에서의 실존 또한 진짜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소외의 효용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는 단연코 <레인 월드>다. <레인 월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척박한 야생을 배경으로 하는 생존 플랫포머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끔찍한 조작감의 하얀 생물 '슬러그캣'으로써 살아남아야 한다. 이 세계의 생태계는 매우 유기적이고 적대적이어서 각양각색의 동식물과 현상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데, 문제는 슬러그캣이 그 먹이 피라미드의 거의 밑 바닥이라 대부분의 생물이 천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의 무대는 오래전에 멸망한 인류가 남긴 정체불명의 구조물과 그 위에 퇴적된 자연 지형이라 맵이 극도로 복잡한데, 목적지를 가르쳐주는 가이드도 거의 없어서 길 찾기는커녕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내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우는 피난처를 제외한 모든 공간과 그 위의 생물을 -물론 슬러그캣도- 집어삼켜 버리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죽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벌레를 잡아먹고 피난처를 찾아야만 한다. 말 그대로 낯선 세상에 피투彼投되어 배타적 환경에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디자인했을까? <언더월드>처럼 플레이어가 고통받기를 바랬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레인월드>의 개발자 요아르 야콥슨Joar Jakobsson은 ' 맨해튼의 쥐 ' [5] 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지하철에 살고 있는 쥐는 그 지하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쥐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는 쥐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지하철을 마치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데, 어쨌거나 쥐는 무엇이 자신에게 위험하고 유용하고 맛있는지를 알며 결국 중요한 건 그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쥐의 인식은 지하철을 건설하고 이용하는 인간들의 인식과 다르겠지만, 배부르기만 하다면 쥐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지하철의 낯섦과 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쥐의 방식과 세계관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다. '맨해튼의 쥐'가 '쥐의 맨해튼'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개발자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유학했을 때의 경험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레인월드>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막 게임을 시작하면 알 수 없는 생물과 공간에 휘둘려 고통받을 뿐이지만, 점차 적응하면 할수록 뭐가 좋고 나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여전히 그것들의 정체는 모르지만, 어떤 행동과 선택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는 안다. 어느샌가 미로 같던 맵을 앞마당처럼 돌아다니게 되더니, 심지어는 자신을 잡아먹던 포식자까지 사냥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피투성에서 기투로, 소외가 실존이 된 것이다.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재미 이쯤에서 제목을 바꿔야 할 듯하다. 소외와 실존의 작동 원리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라는 질문과 '게임은 어떻게 우리가 실존할 수 있게 해주는가?'라는 질문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미 둘러본 바 있다: 게임은 향유자가 직접 참여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매체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같은 미디어는 작품이 향유자에게 일방적으로 작용하고, 그래서 작중에서 소외나 실존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수신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실감 나는 대리 체험에 불과하다. 반면 <청소부>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생존하기 위해 매일 쓰레기를 줍는 노동을 하는 것도, 비싸고 좋은 상품을 사려다가 단념하는 것도, 제대로 된 음식과 값싼 유사 식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도, 상한 음식과 젠더 캡슐을 먹어야 하는 부조리에 얽매이는 것도, 불합리하고 지루한 퀘스트를 묵묵히 진행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을 매일 일기로 쓰는 것도 전부 플레이어의 몫이다. 그렇기에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 채 소외되는 것도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 자신이다. 소외를 실존으로 승화시킨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가 직접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발현해야 하지만, 이는 소외를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에 먼저 소외를 직접 당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를 당하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휘둘려야 하는데, 이는 오직 플레이어가 직접 그 세계에 참여하고 맞부딪힐 때만 가능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상실해야 하고, 자신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직접 소외당하고 실존하는 경험은 참여형 미디어인 게임에서만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재미' 또한 오직 게임의 전유물이다. (때로는 소외도 그 자체로 재미가 된다) 그런 점에서 <청소부>가 선사한 그 끔찍한 경험에는 제대로 의미가 있다. 게임이 실제로 플레이어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자유의지와 정체성에 관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게임이 플레이어를 실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기 때문이다. 비록 <청소부> 자체는 두 번 다시 플레이하고 싶지도 추천하기도 힘든 게임이지만, 그 시도는 게임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자꾸 소외네 실존이니 반복하는데, 그렇다면 게임의 의의는 실존이라는 것인가? 실존이 재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이는 정말로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왜냐면 실존이 곧 재미고 재미가 곧 실존 이기 때문이다. 분명 실존이라는 개념은 학술 용어로 자주 쓰이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핵심적이기에, '오락'처럼 가벼운 개념과는 상반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락도 인간의 일부고 오락에서 느끼는 재미 또한 그렇다. 재미 중에서는 크리쳐 100마리를 도살하거나 0.02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상품을 얻는 재미도 있지만,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미지 너머의 새로운 곳으로 도약하는 재미도 있다. 지금까지 계속 얘기했던 바로 그 재미 말이다. 그렇다면 실존이 재미있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고, 재미를 위해 실존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인간 존재를 고찰하는 것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둘은 게임 속에서 하나가 되니까. 분명 본 글의 의의 중 하나는 '게임이 인간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도구'임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과 재미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함을 증명하는 시도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게임을 더욱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몰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게임이 <청소부>와 같거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임이 줄 수 있는 재미에는 실존적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외의 재미들도 모두 가치있고 필요하다. 게다가 실존적 재미는 기본적으로 소외를 전제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 불친절함은 무력감으로 부조리함은 당혹감으로 불합리함은 불쾌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즐거워야 할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절반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소외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실존해야 한다. 왜냐면 그럴 때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고, 오직 게임만이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이 시작되며, 무엇보다 훨씬 짜릿하고 차원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게임이여, 계속해서 우리를 소외시켜다오. '방황해 보지 않으면 자각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야' [6]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317행 [2] https://www.vice.com/en/article/diaries-of-a-spaceport-janitor-asks-players-to-find-the-beauty-in-garbage/ [3] https://mouseplanet.com/the-origin-of-the-disneyland-wienie/5245/ [4] 자크 라캉, <세미나 7. 강의 8> (1960.01.20) [5] https://www.vice.com/en/article/rain-world-is-like-stalker-but-a-platformer-and-youre-a-rodent/ [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7847행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류호준 게이머. 오락으로써의 게임도, 작품으로써의 게임도, 실험으로써의 게임도 모두 중시합니다.

  • QUOVADIS, 게임법 - 국회 안에서 바라본 게임법 진행의 경과와 미래

    물론 전부개정안의 모든 내용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발의하고 보니 보완해야할 부분들도 여럿 보였다. 특히 국내대리인지정제도는 더욱 강화해서 발의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개정안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부분들은 심사 과정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될 것이다. 또한 다른 게임법 일부개정안과도 병합심사되어 더 좋은 내용으로 고쳐질 것이다. 이를테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컴플리트 가챠 규제 법안이나 이용자 권익보호위원회 규정 법안과 함께 병합심사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내딛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국민의 꾸준한 관심은 국회를 일하게 한다. < Back QUOVADIS, 게임법 - 국회 안에서 바라본 게임법 진행의 경과와 미래 01 GG Vol. 21. 6. 10. 게임법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쓰다가 순서를 거꾸로 뒤집었다. 아무래도 현재 게임법이 어떤 단계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시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법안이 발의되고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발의-상임위원회 심사-법제사법위원회 심사-본회의 심사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전부개정안은 상임위원회 심사단계에 있다. 상임위원회 심사는 다시 전체회의 상정-법안심사소위원회 심사-전체회의 의결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부개정안은 상정 단계를 지나 법안소위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발의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심사가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공청회 순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여‧야 문체위 소관 법안에 대한 이견으로 심사 속도가 더딘 것이다. 공청회부터 설명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법안의 종류부터 설명해야 한다. 법안은 크게 제정법안, 전부개정안, 일부개정안으로 구분된다. 제정법안은 말 그대로 여태껏 없었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다. 전부개정안은 기존에 있던 법이지만 어떠한 이유로 법의 체계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싹 바꾼 형태다. 마지막으로 일부개정안은 어떤 법의 몇몇 조항만 개정하여 발의한 유형이다. 게다가 제정법안과 전부개정안을 대상으로는 한 가지 절차가 더 필요하다. 국회법상 공청회를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일부개정안에 비해 전부개정안과 제정법안을 심사할 때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을 진술인으로 불러 이 법안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 이를 통해 법안을 심사할 때 참고하게 된다. 공청회는 상임위 교섭단체 간사간 협의에 따라 생략이 가능하다. 공청회를 생략하면 법안 심사에 걸리는 시간이 단축될 수 있지만, 반면 심사가 부실해질 수 있고 법사위에서 공청회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류될 우려도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21대 상반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여‧야 간사는 발의된 모든 문체위 소관 제정법안과 전부개정안을 대상으로 공청회를 실시하고, 그 순서는 발의순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게임법 공청회는 15번째 순서다. 한참 오래 걸릴 것처럼 보이지만, 여차저차 공청회가 계속 열렸다. 이제 게임법 앞에 놓인 공청회는 불과 네다섯개 정도다. 여‧야 정쟁을 설명하자니 국회의 구성원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하지만 숨기지 않고 세세하게 얘기하겠다.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원회는 문화 및 예술 분야의 법안을 심사하는 1소위원회와 관광‧체육 분야의 법안을 심사하는 2소위원회로 나뉘어 있다. 2소위원회는 꽤 잘 진행되어 왔다. 문제는 1소위다. 일단 문체위 소관으로 발의되는 법안 중 1소위 소관의 법안 수가 2소위 법안보다 많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야간 이견이 컸던 법안들은 거의 다 1소위 법안들이었다. 법안을 심사하다가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정회를 한다. 정회하고 간사간 협상을 시도하는 것인데, 타결이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다. 후자의 경우엔 머리가 아파진다. 정회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거나, 산회하고 다음 회의 전까지 협의를 이어가기로 하고 회의가 끝나게 된다. 심할 때는 법안소위가 아예 열리지 못하는 회기도 왕왕 있다. 이 경우, 해당 쟁점 법안 뒤에 심사를 기다리던 나머지 법안들까지 심사가 밀리게 된다. 앞서 말한대로 쟁점법안들은 거의 1소위 법안인데, 가뜩이나 법안 수도 많은데 병목현상까지 생기면서 심사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면 게임법이 2소위 소관이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다 아예 심사도 못하고 전부개정안이 폐기되는거 아니냔 불안이 엄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 이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은 법안은 ‘언제’심사될 지의 문제일 뿐, 심사 자체는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부개정안을 제외하고서도 확률형 아이템 관련 법안이 이미 3건이나 발의되어 있고, 발의 절차에 있는 법안이 2건 더 있다. 이처럼 특정 사안에 대해 여러 건이 발의 되어 있는 법안은 심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낮다. 국회에서 일한 지 10년 차다. 그동안 적지 않은 수의 법안을 만들어 왔다. 국민에게 칭찬을 받을 때도, 반박할 수 없는 비판을 들을 때도 있었다. 정말 좋은 내용의 법안인데 생각하지도 못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임기 만료 폐기될 때도, 일사천리로 통과될 때도 있었다. 법안 하나하나가 모두 내 자식 같고,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법안을 만드는 정책보좌진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때문에, 어떤 법안에 가장 애정이 깊은지 물어보면 답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떤 법안을 추진할 때 가장 힘들었나 물어보면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게임법 전부개정안이다. 게임법처럼 이해관계자가 많고, 첨예한 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게임법이 게임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이 유독 크기도 하다. 역사에 비해 발전 속도가 빠른 산업일수록 이런 경향이 큰데, 게임산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게임법 조항 하나만 개정돼도 파급력이 클 때가 많다. 조항 하나에도 이런데, 수십 개의 조항이 새로 쓰여지는 제정법안이나 전부개정안은 말할 것도 없다. 조항만 많은 것이 아니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묶여있는 게임의 종류들도 많다. 몇 가지만 꼽아보자. 온라인 pc게임, 모바일 게임, 아케이드 게임, 웹보드 게임, 콘솔 게임, 교육용 게임, VR 게임, 여기에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블록체인 게임까지. 종류는 여러 가지인데 법은 하나다. 물론 게임법 내에서 몇 가지 구분을 둔다고는 하지만, 게임 저마다의 특징을 모두 반영하기란 불가능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 한국게임산업협회, 게임문화재단, 모바일게임협회, 한국게임개발자협회, 한국게임학회 등등… 게임 종류별, 직업별 의견을 내는 목소리들도, 추구하는 바도 각양각색이다. 목적 자체가 이윤추구인 게임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법 하나에 이 모든 내용을 담으면서도 모두가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게임법 전부개정안을 우리 의원실에서 발의하기 내키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데, 이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심사 과정 내내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야 할 것이 뻔해 보였다. “욕먹기 싫은건 당연하다. 이해한다.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국민이 그 노력을 몰라줘도, 언론에 기사가 많이 나오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쉽고 편한 길만 가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렇게 정치를 배우지 않았다.”이 문제로 이상헌 의원님께 보고드렸더니 하신 말씀이다. 결국 우리 의원실에서 게임법 전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발의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확률형 아이템 이슈는 언론에 많이 다뤄져서 내용을 알고 계신 분들도 많다. 확률형 아이템 이슈를 두고 게임업계와 논쟁하는 동안, 많이 괴로웠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묘하게 법안과 나를 헐뜯었다. 추측성 음모론도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게임업계인이나 기자들 여러명과 서먹해지기도 했다. 전부개정안의 다른 조항과 연관된 다른 이해당사자들은 내 뒤를 밟는다던지, 면전에서 몸 조심하라는 협박까지도 했다. 그래도 앞을 보고 걸어가야 한다. 전부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이상헌 의원님 말씀대로 힘들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고(産苦)가 크지만, 통과되고 나면 이용자 권익보호가 보다 강화될 수 있고 게임업계도 한층 성숙해질 것이라 믿는다. 물론 전부개정안의 모든 내용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발의하고 보니 보완해야할 부분들도 여럿 보였다. 특히 국내대리인지정제도는 더욱 강화해서 발의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개정안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부분들은 심사 과정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될 것이다. 또한 다른 게임법 일부개정안과도 병합심사되어 더 좋은 내용으로 고쳐질 것이다. 이를테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컴플리트 가챠 규제 법안이나 이용자 권익보호위원회 규정 법안과 함께 병합심사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내딛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국민의 꾸준한 관심은 국회를 일하게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국회 보좌관) 이도경 역대 국회 게임 관련 법안 최다 발의·최다 통과 시킨 것이 자부심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자부심은 와우에서 리치왕 하드모드 서버 퍼스트킬 한 것과 카오스 유명 클랜인 RoMg에서 샤먼을 했다는 사실입...

  • 라이브 서비스 전쟁 · 역사 기계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

    <폭스홀>은 극단적으로 상세화된 활동적 측면으로, <헬다이버즈 2>는 운영진의 적극적 개입과 플레이어 활동 반영 등의 실시간 소통의 방식으로 각각 전쟁 앞 개인의 감각을 생산해 플레이어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 < Back 라이브 서비스 전쟁 · 역사 기계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 25 GG Vol. 25. 8. 10. 게임에서 전쟁은 주제로, 소재로, 또 하나의 주된 장르로 그 태동부터 아주 오랜 시간 다뤄져 왔다. RPG, RTS, FPS, TPS 등 형태를 가리지 않고 전쟁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현상의 부분적 측면들을 다뤄 왔으며 MMO 장르에서 플레이어들이 형성한 길드, 혹은 클랜 간의 전쟁은 그 자체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전쟁들을 짧은 기간 안에 축소판으로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출현한 라이브 서비스 (Live Service) 형식으로 운영되는 멀티플레이 전쟁 게임들은 종래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쟁을 다룬다. 여기서 전쟁의 라이브 서비스 측면은 교전 대상을 정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등의 구조적이고 정치적 측면을 게임의 개발진이나 운영자가 대신 전담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선 2003년 <플래닛사이드>에서 2012년 <플래닛사이드 2>로 이어지는 전신이 존재하긴 했었지만 2022년에 발매된 <폭스홀>과 2024년에 발매된 <헬다이버즈 2>는 각각 PVP와 PVE의 형식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주안점을 두며 이전보다 훨씬 본격적인 차원에서 전쟁을 구현한다. “지속적 세계 전쟁” - <폭스홀> <폭스홀>에서 플레이어는 조감도로 비치는 화면 아래 놓인 아주 작은 군인 한 명을 조종한다. 서버에 접속하자마자 성별과 피부색 등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어차피 군모와 군복으로 전부 가려진 아주 작은 신체들은 시각적으로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별개로 선택해 참여할 수 있는 콜로니얼 (Colonials)이라는 연방국과 워든 (Wardens)이라는 제국의 서로 국경을 맞댄 진영들은 각각 녹색과 청색의 대표색 말고도 장비 및 기반 시설, 시작 구역의 지형 등 적잖은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이 차이 또한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지는 않고 예를 들어 워든의 무기는 성능이 다소 우월한 대신 생산 비용이 비싼 등 접근 방식에 차이를 줄 뿐이다.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폭스홀>은 무기 생산은 물론이고 자원 채취까지, 즉 군사 활동의 모든 물리적 측면을 플레이어들이 직접 운영해야 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러나 기존의 RTS 게임과는 달리 한 진영의 전체 유닛들을 한 명의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전장에서 플레이어는 그저 단 하나의 유닛만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동 및 행동 속도, 소지 물품의 무게, 조준 시간 등 각 유닛의 역량은 너무 한정되어 있는 나머지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해당 싸움 속에서도 영웅적 활약은커녕 아주 작은 총알받이 하나의 역할 이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니 게임 내 병과 간 수행 가능한 작업을 구분 짓는 시스템상 제한이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병이 의무병의 치료를 돕는 것도, 의무병이 보급병의 병참을 돕는 것도 순수하게 ‘여력’ 상 불가능하다. 군장 무게상 치료에 필요한 구급상자를 보병이 소지하고 있을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만에 하나 구급상자가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총을 내려놓고 그것을 주워 착용한 뒤 그 안에 붕대를 채워 넣는 데 걸릴 시간이면 이미 총알에 맞아 죽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병참은 트럭과 같은 이송 장치를 모는 것이 아니면 물자를 들고 옮기는 건커녕 기지에서 하나하나 꺼내는 데만도 시간이 적잖이 걸리며 심지어 창고에서 물자를 꺼내는 시간과 기지에서 꺼내는 시간은 천지차이이다. 또 병참 안에서도 물자 이동과 군수품 생산, 그리고 자원 생산 사이의 역할이 전부 하나하나 나뉘어 있으며 역시 여기도 시스템상에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업무 수행 역량의 한계 때문에 자연스레 플레이어들이 특정 역할을 전담하게 되는 것이다. <폭스홀>에서 각각의 플레이어는 하나의 분야 속 하나의 아주 작은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커다란 전쟁을, 현실 시간으로 짧게는 10일에서 길게는 50일까지도 걸리는 전쟁을 영원히 반복해서 작동시킨다. <폭스홀>이 자신을 “지속적 세계 전쟁 (Persistent World Warfare)”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한번 선택한 진영은 바꿀 수 없으며 전체 지도는 게임 내 실제 축척으로 한 변의 길이가 1km인 육각형으로 구획된 43개의 지역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 즉 대략 111.7km²의 전체 넓이를 가진 거대한 (프랑스의 수도 파리시 전역이 105.4km²) 전장에서 평균 3,000명가량의 플레이어가 한꺼번에 싸우려면 이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은 결국 병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보급 활동은 앞서 설명했듯 단계적으로 각 활동이 절차적으로 세세하게 나뉘어 있는 이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기제로는 다소 터무니없는 시간을 소모하는데, 예를 들어 경기관총 100개와 그 탄창 120개가 각각 생산 시간이 1시간씩 걸린다. 그리고 재고를 확인하고 15상자에서 60상자 사이의 물품을 적재한 뒤 차량을 주유하며 전방에서 후방으로 이동하는 데 도로 상황과 차량의 종류 등 변수에 따라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20분까지 걸린다. 지금 여기에 물자 생산에 필요한 자원 채취 및 정제 시간, 생산 기반 시설 건설, 시설 작동을 위한 연료 보급 등을 위한 시간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달렸는데 전방 근처에서 적군 파르티잔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 모든 군사 활동을 하나하나 전부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어들이 수행해야 하니 한 번에 기여할 수 있는 범위는 당연히 한정된다. 활동 종류에 시스템상 제약이 존재하지도 않고 채팅은 존재하지만 지휘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계급은 있지만 별도로 권위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니 플레이어들은 자주적으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역할을 맡는다. 전방 재고를 확인하여 어떤 부족한 물자를 채워 놓을지도 보급병이 알아서 선택해야 하고 자원을 채취하다가도 채팅에서 전방 보병들이 무기 부족을 외치면 급하게 트럭을 돌리는 일도 생긴다. 물론 자유도의 부작용으로 같은 물자를 동시에 여러 명이 배달해 잉여분이 쌓이는 경우나 보병보다 위생병이 몰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폭스홀>에선 오인 사격도 가능하고 이처럼 활동에 제약이 없다 보니 아군 방해의 걱정이 있을 수 있지만 다행히도 신고 및 정지 시스템은 존재하며 나아가 한 번에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되어 있는 점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애초에 마음먹고 방해 공작을 벌이는 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대규모 전쟁 활동을 시뮬레이션하는 이 게임의 면모가 가장 여실히 기록된 일화는 2022년 초창기 물류 노조 파업 사건이다. 게임 내 물류 부서에 노조가 결성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파업까지 벌이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일 터이다. 실제로 해당 파업은 기사화 [1] 도 되었고 노조 자체적으로 만든 웹사이트에 아카이브도 되어 있는데 당시 물류 운영의 불합리한 환경에 제기한 열한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공공 재고 및 정제소 적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림. 2. 게임 초반 부품 확보가 과하게 어렵고 경쟁적이며 비건강함. 3. 공장 주문 유지 시간이 너무 짧음. 4. 생산 건물들에 연대 차원의 대기열이 필요함. 5. 컨테이너들이 물류 작업의 폐쇄회로 운영을 불가능케 함. 6. 전방과 후방 사이에 물류 시설 부족. 7. 물량을 쉽게 합칠 수 없기 때문에 재고 안에서 재료 포장을 푸는 것이 극단적으로 느림. 8. 화물선 전체 양의 폐품을 기본 자재로 가공할 수 없음. 9. 비축 재고 내 상자 양 제한이 너무 적음. 10. 전쟁 첫날부터 눈보라가 오는 것은 말이 안 됨. 11. 맵 상에 끼인 차량 강제 이동 명령어를 한 전쟁에 세 번까지 밖에 사용 못하는 건 너무 적음 [2] . 이 파업은 49일간 진행되어 결국 개발진이 위 요구 사항들을 업데이트에 반영하기로 하며 막을 내렸다. “모든 일이 정사” - <헬다이버즈 2> <폭스홀>이 미국과 유럽의 1 · 2차 세계 대전을 섞어 가상의 배경에서 재현하고 있다면 <헬다이버즈 2>는 미래 세계의 우주 전쟁을 구현한다. <헬다이버즈 2>는 4인분대로 작전에 배치되는 3인칭 협동 PVE 슈터로, <폭스홀>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헬다이버”의 체형 및 목소리를 정할 수 있지만 헬멧과 방어구에 가려 그 안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헬다이버들은 궤도에 정박한 구축함에서 외계생물과 로봇 군단 등 다양한 적 세력 한복판으로 강하정을 타고 직접 투하되어 구축함의 지원을 받으며 싸운다. 여기서 한복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고 또 하나하나가 플레이어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전투력을 지닌 적들 사이에 둘러싸이게 된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플레이어가 강력한 보호 장비나 압도적 화력을 소지한 채 지상에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플레이어는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 로봇의 총탄이나 외계 생명의 발톱 등에 한두 방 맞으면 단숨에 몸이 토막 나며 죽는다. 그나마 플레이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AI 지능에 비해 조준과 반응 속도, 판단력 등이 나은 점, 그리고 구축함의 궤도 공격 지원이지만 궤도 공격의 경우 피아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고폭탄이나 레이저에 무수히 육편이 된다. 또 플레이어의 공격 또한 <폭스홀>처럼 오인 사격이 가능해 같은 분대원 간에도 많은 사망 요인을 낳는다. 군장의 무게로 인해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져도 낙사하고 헤엄을 칠 수 없어 얕은 물에서 익사하는 것에 이르면 어이없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끊임없이 죽으며 다시 투입되는 과정은 게임 내 허용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설정상 정말로 한명 한명의 병사가 일일이 죽으며 증원되는 것이다. 즉, <헬다이버즈 2>는 플레이어가 복무하게 되는 인류 세력이 “슈퍼지구”라는 황당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군국주의 파시즘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를 게임플레이 장치로 구성한 작품이다. 생명 경시를 넘어 병사 하나하나를 말 그대로 총알로 써 가며 외계 세력을 선제 침공하는 슈퍼지구는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이 침략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적들더러 “전체주의” “계급사회” “외계인 혐오주의” “팽창주의” “폭정”로 자신들이 현재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역으로 뒤집어씌워 모함한다. 작중 외계 세력은 크게 세 가지인데 ‘테르미니드’는 신체에서 연료를 추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슈퍼지구가 공격하고 있는 곤충 형태의 외계 생물들이다. ‘오토마톤’은 A부터 F까지 등급으로 시민권을 나누고 A와 B등급 시민마저도 공휴일에 최대 1시간의 휴식 시간만을 가질 수 있으며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위해선 허가증을 작성 후 제출해야 하는 극단적인 전체 · 감시사회에 반기를 든 분리세력으로 패권국에 저항하기 위해 신체를 개조한 기계 세력이다. 특히 일루미닛이란 고등 외계 종족의 경우에 슈퍼지구는 그들이 대량살상병기를 가지고 있다는 명분을 들며 침략했는데, 이는 미국의 2003년 이라크, 2025년 이란 침공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슈퍼지구가 내세우는 “통제민주주의” 이데올로기까지 <헬다이버즈 2>는 해당 게임이 현실 미국에 대한 풍자임을 숨기지 않는데, 통제민주주의 아래 시민들은 컴퓨터가 정해준 결과를 투표할 뿐이지만 이 ‘민주주의’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으로 헬다이버는 전투 내내 “ 민주주의 맛 좀 봐라!”, “ 번영 을 위하여!”, “이 다친 팔로는 자유 를 전파할 수 없어” 등 세뇌의 표제어들이 담긴 함성을 질러댄다. 튜토리얼 지역에서부터 플레이어는 석판으로 세워진 고용 계약서 주변 15미터 이내에 1초만 서 있어도 서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정작 3.3번 항목에 따르면 해당 계약서를 직접 읽는 것은 계약 위반에 해당한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파시즘에 대한 묘사의 끝은 바로 운영자들이 “진리부”를 통해 게임 내외로 내리는 공지다. 새로운 적을 먼저 업데이트해놓고 공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어들이 발견하면 이 진리부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들이 테르미니드 중 날아다니는 개체들이 등장한 것을 발견하자 진리부는 “벌레는 날 수 없으며 벌레 동조자들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같은 진리부가 “언제나 날아다니는 벌레의 가능성을 믿어왔다”라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던 것과 같은 일은 예삿일이다. 게임 외적 공지마저 이러한 설정에 이입하며 “인류부는 전투 이동 안전 지침에 대한 개정안을 발표하여 헬다이버가 강하 중 스스로 각성제를 투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이전에는 “가위를 들고 달리는 행위”와 “실제 수류탄으로 저글링하는 행위”와 동일한 위험 구역으로 분류되었던 행위입니다”, “우리의 혁신적인 군사 연구팀이 더 날카로운 깃대를 개발한 덕분에 깃발은 이제 적들에게 직접 자랑스럽게 꽂을 수 있습니다. 죽어있든지 살아있든지 말이죠. 이것으로 적들의 피로만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슈퍼지구의 영원한 색깔이 바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와 같은 식으로 패치 내용을 알린다. 난이도와 같은 플레이 시스템 차원에서도 일루미닛은 느린 발사 속도로 거의 정확하게 플레이어를 사격하는 것에 반해 오토마톤은 빠른 발사 속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격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오토마톤의 상황 인식 프로토콜” 성능 때문이라고 서술하는 등 설정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풍자적으로 이입하는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헬다이버즈 2>에서 라이브 서비스 전쟁 게임으로서의 측면이 빛나는 지점은 바로 이 운영자의 개입이다. 플레이어가 배치될 수 있는 행성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바로 은하계의 전황이 플레이어의 참여에 따라 실시간으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운영자는 앞서 말한 진리부의 입을 빌어 슈퍼지구, 그리고 교전 중의 세 세력이 각각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기적으로 알리며 은하계 지도 상황을 변경한다. 이는 새로운 전쟁 이벤트 (제트팩 오토마톤 등장, 블랙홀 출현, 일루미닛의 슈퍼지구 본성 침공 등)나 임무 (“두마 티어” 행성 확보, 샘플 22,000,000개 수집, 테르미니드 1,500,000,000마리 처치 등)를 소개하며 또 이 이벤트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참여를 집계하고 다시 참여 통계를 반영해 임무 성공 혹은 실패 등 향후 이벤트 전개를 정하는 피드백 고리를 형성한다. 이는 플레이어들에게 계속해서 다른 환경의 맵을 경험할 기회를 만드는 설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개개인이 스스로 하나의 커다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한다. 특히 운영진은 플레이어 커뮤니티 내에서 공유되는 경험을 게임 내 공식 설정으로 만들기까지 하는데, 절망적인 난이도로 악명 높았던 전장 “말레벨론 크릭” 행성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추모일을 지정했던 것이나, “마르파르크” 행성에서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신무기 재료를 구하는 임무와 “버넌 웰스” 행성에서 아동 중환자 병원 생존자를 구출하는 임무가 사실상 둘 중 하나만 성공할 수 있는 작전으로 동시에 주어졌을 때 플레이어들이 후자의 행성으로 집결하자 실제로 개발진이 아이들의 감사 편지를 그려 공식 계정에 올리고 세이브더칠드런 재단에 기부를 했던 일처럼 그 범위가 역시나 게임 안팎으로 활개 친다. 그리고 당연히 성공뿐 아니라 실패 시에도 방어 대상이었던 행성이 영영 파괴되어 잔해만 남는 등 그 영향이 뚜렷하게 궤적을 남긴다. 이러한 운영 방식에 대해 커뮤니티 내에서 <헬다이버즈 2>의 플레이어들은 파시즘에 대한 풍자로 유명한 또 다른 게임 시리즈 <워해머 40K>에서 “(수없이 많은 매체상으로 묘사되는) 모든 것이 정사”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는 것을 빌려와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정사”라는 의미로 살짝 비틀어 쓴다. 전쟁이라는 역사 기계 앞 개인의 참전 <폭스홀>와 <헬다이버즈 2>는 둘 모두 각각 제목 그대로 참호전의 참혹함과 전장의 지옥을 그리는 데 주력한다. <폭스홀>에선 전쟁 한번에 평균 3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헬다이버즈 2>에선 출시 이후 1년간 총 28억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전쟁에서 혼자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개 병사이자, 광막한 죽음 앞에 선 자그마한 개인에 불과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현실에서 한 인간 앞에 ‘참전’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규모를 짐작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슈터, 즉 액션 장르인 <헬다이버즈 2>에서 그래도 하나의 ‘전투’에선 목숨을 희생하며 혹은 특출나게 뛰어난 실력으로 중요한 목표를 개인이 달성하는 업적이 가능하지만 그래봤자 그 업적은 전체 은하 전쟁 차원에선 미미한 숫자로 실제 구축함 귀환 후 화면에 뜨는 기여도 수치는 0.0015% 정도에 불과하다. PVP임에도 지휘 체계가 없는 <폭스홀>과, 적진과 아군 작전을 전부를 운영자가 대신 움직이는 <헬다이버즈 2> 모두 위계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영향력은 아무리 게임을 오래 해도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보다 유달리 커지지 않는다. 이것이 <폭스홀> 말마따나 ‘지속적’인 전쟁 경험을 제공하는 비결이리라.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사회지리학자였던 레프 메치니코프 (Lev Mechnikov)는 고대 중국의 거대 건축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양자강의 운하와 황하의 제방들은 십중팔구 수세대에 걸친 정교하게 조직된 공동작업의 소산이다. (...) 이러한 노동은 시간이 지나야만 바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노동의 계획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수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3] . 즉, 자신이 당장 운송한 물자가 정확히 전쟁에 어떻게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몇 시간 째 배달하는 콜로니얼의 트럭 운전수나 진리부의 공지만 믿고 오토마톤 공장 습격 작전에 뛰어드는 헬다이버는 마치 기계 속 하나의 부품과 같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실제로 산업사회의 기계 속 노동자는 도박사와도 같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벤야민은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 (Alain)이 “도박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독특한 면은 어떠한 게임도 이전에 이루어진 게임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도박에 있어서는 어느 편도 확실한 입장에 있지 않다. 이전에 이겨서 벌었던 것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포착한 것을 변주해 “기계노동자의 기계조작이 먼저번의 기계조작의 동작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동작이 먼저번의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도박에 있어 한탕이 그때마다 이전의 한탕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조작의 동작도 매순간마다 그 이전의 동작과 차단된 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임금노동자의 작업은 노름꾼의 작업과 그 나름대로 짝을 이루게 된다”라는 고찰을 생산한다. 즉 마치 로그라이트 장르처럼 느껴지는 이 공통 구도상에서 노동자와 도박사 모두에게 “양자의 작업은 하나같이 일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4] .”라고 썼다. 콜로니얼의 트럭 운전수와 헬다이버 모두 다음 날, 혹은 며칠이 더 지나서야 그나마 지도상에서 전선이 살짝 전진한 것을 보며 희미하게 자신 행위의 사소한 영향력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임하는 같은 작업이 또 다시 어떤 결실로 맺어질지는 정확하게도 구체적으로도 알지 못하면서도 전장으로 향한다. 벤야민은 이처럼 과거 · 미래와 분리된 시간을 통해 관망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실은, 수천 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 하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로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5]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가 형식적 측면에서 전쟁, 그리고 역사적 시간과 관계하고 있다면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 (Obsidian Entertainment)의 게임들은 주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 앞 한 개인의 인식이라는 문제를 연속적으로 다루어 왔는데,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기사단 2>의 ‘크레이아’에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로 이어지는 인물상은 인과를 알 수 없는 운명의 의지 앞에 너무나도 왜소한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투신하는 초인의 꿈을 꾼다. 특히 두 작품 모두의 서사 전체에서 전쟁은 지배적인 이야기꾼이고 두 인물은 국가 사이에 흐르는 그 거대한 힘의 충돌 앞에 개인이 역사와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 고뇌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관은 옵시디언이 포착한 전쟁 앞에서 문자 그대로의 현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전쟁은 역사를 쓰는 것도, 지우는 것도 가능한 그 무엇보다 “현재시간” 속의 것인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그 성격상 필연적으로 전쟁은 개인이 역사와 관계하도록 강제하고, 그 개인들은 또 반동 인물로서 주인공에게 파편인 동시의 영원인 역사를 잇고 전해 나간다. 전쟁과 역사에 대해 이와 같이 주제적 측면에서 사유하는 시도는 그야말로 태초부터 형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형식적 측면에서 그 자체를 체화하고 시뮬레이션하는 사례는 오직 게임에서만 발생해 왔다.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그 원리를 인간 본질에서 찾은 바 있는데, " 국가들의 역사를 한낱 우리에게 많은 부분이 숨겨져 있는 인간성의 내적 소질의 현상으로 본다면, 국가들의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목적인 목적들에 따르는 자연의 모종의 기계적인 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국가는 정복하기를 희망하는 이웃 나라가 있는 한, 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자기를 확대하고, 하나의 보편왕국을, 즉 그 안에서 일체의 자유와 그리고 그것과 함께하는 덕, 취미, 학문이 소멸할 수밖에는 없는 하나의 체제를 향해 애쓴다. 그러나 이 괴물은, 모든 이웃 나라들을 삼켜버린 다음에, 결국은 저절로 해체되어 봉기와 분열에 의해 많은 작은 국가들로 쪼개진다. 이 작은 국가들은 하나의 국가연합을 향해 노력하는 대신에, 다시금 그들 각각이 전쟁을 정말로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똑같은 놀이 를 시작한다 [6] . " 다시 말해 칸트는 국가를 인간 본성의 표현으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전쟁 또한 그 성질에 내재된 하나의 치명적인 “악”이며, 심지어 그 자체로서 목적성을 가지는 자기 완성적 · 순환적 “놀이”이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폭스홀>은 극단적으로 상세화된 활동적 측면으로, <헬다이버즈 2>는 운영진의 적극적 개입과 플레이어 활동 반영 등의 실시간 소통의 방식으로 각각 전쟁 앞 개인의 감각을 생산해 플레이어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특히나 플레이어들에게 위계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지 않고 또 개인으로서의 플레이어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체감되는 전쟁의 크기를 키우고,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에 참여했다는 생생한 실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은 ‘악의 반영’으로서 놀이에 대한 놀이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인간 행위의 본질에 대한 섬광을 계속해서 비춰 나간다. [1] https://www.nme.com/news/gaming-news/foxhole-logistics-union-ends-49-day-strike-after-demands-met-3173270 [2] https://logiunion.com/archive/openletter/ [3]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서울, 민음사, 1983), 76쪽. [4] 위의 책, 145쪽. [5] 위의 책, 355쪽. [6] 임마누엘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파주: 아카넷, 2015), B30=VI34. Tags: 온라인게임, 라이브서비스, 전쟁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KRAFTON_Horizontal_Logo_Black.jpg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