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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억을 <언패킹>: 정리 게임이 기억을 다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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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8. 10.

* <언패킹> 시작 화면

당신이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 가정해 보자.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을 알기 위해선 우선 과거의 당신이 남긴 기록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일기부터 사진, SNS 게시물과 메신저의 대화 내역까지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숱한 기록을 남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기록은 선별된 기억이다.


어떠한 사실을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작성되는 ‘기록’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남긴 흔적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발 안쪽에 무게를 실어 걷는 버릇 때문에 안쪽만 닳은 신발 밑창은 기록이 아닌 흔적이다. 만들어질 때부터 의도와 해석이 개입되는 기록과 달리 흔적은 의도 바깥의 영역에서 생겨나고,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흔적은 기록에 비해 태생적으로 소박하다.


그러나 때로 흔적은 기록보다 더 충실하게 그 주인을 설명해 준다. 기록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쓰일 수 있지만 물성을 갖춘 흔적은 정직하다. 그러니 기억을 잃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단서는 일기나 SNS가 아니라 자신이 쓰던 방의 물건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소유하기로 처음 선택할 때는 필요와 취향이라는 의도가 개입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물 자체가 우리의 흔적이 되기도 한다. 최초의 의도를 벗어나 사물과 주인의 관계가 계속해서 재설정되기 때문이다. 흔적은 주인과 사물의 관계에서 태어나 사물에 내재되고 세월에 의해 변화한다. 덕분에 흔적에는 기록에는 없는 자생력이 깃든다. 벤야민이 자신의 서재를 정리하며 쓴 에세이 ‘나의 서재를 정리하다: 수집에 대한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사물이 수집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집가 자체가 사물 속에 거주한다.[1]


대부분의 시간 우리의 인식에서 벗어나 있는 이 생기는 우리가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예고 없이 분출된다. 사물과의 관계를 재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다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건을 버릴 것인가,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인가? 손이 닿고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둘 것인가, 구석에 넣어둘 것인가? 판단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다시 질문한다. 나는 여전히 이 물건이 필요한가? 얼마나 오래 가지고 있었나? 이전엔 어떻게 사용했나? 이 물건을 언제,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나?


흔적을 살피며 우리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던 기억을 소환한다. 이삿짐을 정리하거나 대청소를 하다 보면 물건에 얽힌 추억을 들여다보다 정리는 뒷전이 되곤 하듯이. 2021년 출시된 정리 게임 <언패킹>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모아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한다.


* 스테이지를 완료할 때마다 앨범에 사진이 쌓인다.

     

정리란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인간은 이 행위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넘어 쾌감을 얻도록 진화했다. 사실 정리만큼 놀이의 형식에 들어맞는 일도 없다. ‘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주창한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는 자유롭게 받아들여졌으되 엄격히 적용되는 규칙을 따르며 몰입을 통한 즐거움을 수반하는 일이다. 다만 실생활에서의 정리는 유희를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닌 노동이기에 놀이가 아닌 일상생활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럼에도 정리와 놀이는 각자의 긴 역사 속에서 복수의 속성을 공유해왔으니, ‘정리 게임’이라는 게임 장르의 출현도 자연스럽다. 스팀에서 ‘정리(Organizing)’ 태그로 분류된 게임들을 살펴보면 주로 ‘퍼즐’, ‘릴랙싱’ 태그가 함께 붙어있다. <A Little to the Left>, <A Storied Life: Tabitha>, <Whisper of the House> 등이 대표적이다. 즉 게임으로서의 ‘정리’는 정답이 정해진 퍼즐을 푸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게 하되, 점수 경쟁이나 과하게 복잡한 규칙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행위로 여겨진다.


<언패킹>도 마찬가지로 퍼즐 게임으로 분류된다. 이사 간 집에 짐을 풀어 제자리를 찾아 정리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전부다. 모든 물건의 자리가 정확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재량을 발휘해 취향껏 인테리어를 꾸밀 수도 있지만, 쓰임새에 따라 물건이 있어야 할 알맞은 공간은 지정되어 있어 최소한의 규칙은 따르며 진행해야 한다. 스테이지가 진행될수록 이삿짐은 점점 늘어나고 이사를 가는 집도 커져 정리가 한층 복잡해진다. 그러나 <언패킹>은 정리를 퍼즐과 꾸미기 이상의 행위로 설계했다. <언패킹>에서 정리라는 플레이는 사물이라는 흔적을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이다.


<언패킹>은 사물을 통해 유년기부터 가정을 이루기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처음으로 생긴 자기 방에서 시작해 대학 자취방, 사회초년생 생활, 애인과의 첫 동거, 이별 후 본가로의 귀환, 새 사랑과의 만남과 독립 등 삶의 주요 국면마다 주인공은 이사를 가게 된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몇 년도에 이사를 하게 되었는지와 소지품의 변화뿐이다. 정리를 완료한 후 사진을 찍으면 이사를 마친 주인공의 소회가 제시되지만, 새로운 집에 대한 평가나 이사 당일의 감정 표현 정도로 주인공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


* 박스에서 랜덤으로 나온 이삿짐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 있다.(직접 캡처)

플레이어는 이삿짐을 꾸리는 과정에는 관여할 수 없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면 처음 보는 집에 이삿짐 박스가 잔뜩 쌓여 있고, 플레이어는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짐을 풀어야 한다. 1997년부터 2018년까지 20년에 걸친 시간 동안 소지품은 남아 있거나, 사라졌거나, 새롭게 추가된다. 플레이어는 이 흔적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추측하게 된다.


2010년, 주인공은 애인의 집으로 들어가 첫 동거를 하게 된다. 애인의 물건들 사이를 비집고 주인공의 짐을 밀어 넣다 보면 자연히 취향의 차이가 들어온다. 그는 취미로 기타를 연주하고,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신다. 2012년, 이별 후 주인공은 본가로 돌아간다. 사진 속 전 애인의 얼굴에 압정을 꽂아 놓은 것으로 보아 끝이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시작한 우쿨렐레 연주와 드립커피는 주인공의 취미와 취향으로 남았다. 2010년 스테이지 이후로 우쿨렐레와 악보집, 커피용품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만으로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 주인공의 취향이 드러나는 거실(직접 캡처)

첫 스테이지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건들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그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미술용품 브랜드를 프로 작가가 될 때까지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취향이 확고하고 그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재봉이 뜯어질 때까지 들고 다닌 돼지 인형에서도 그 고집이 엿보인다. 돼지 인형은 어릴 때부터 그녀의 모델이었고, 작가가 된 그녀가 출판한 동화책의 주인공이 된다.


인형 외에도 한 번 애정을 준 물건은 쉽게 놓지 못해 어렸을 때 사용한 연습장과 가장 좋아하는 책 시리즈는 어느 집의 책장이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매번 늘어나는 비디오게임과 보드게임은 그녀의 가장 오래된 취미다. 좋아하는 물건을 살 때는 꼭 종류별로 모으는 수집가의 성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퍼즐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은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불가항력적으로 추론에 참여하게 된다. 박스에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 어떤 순서로 물건이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플레이어는 짐 하나를 꺼낼 때마다 유심히 그 물건을 들여다보고 평가해야 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물건을 기억하게 되고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새로 생긴 물건을 알아보게 된다.


스토리를 추론해 정답을 맞히거나 핵심 단서를 수집하게 하는 등, 이 과정을 적극적인 플레이 요소로 지정할 방법은 많다. 많은 정리·퍼즐 게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내러티브적 요소를 구현한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콘셉트인 <A Storied Life: Tabitha>의 경우 정리 과정에서 모은 단서로 회고록을 복원하게 하고, <Whisper of the House>는 NPC와의 대화와 ‘이상현상’이라는 미스터리 요소를 도입해 스토리를 인식하게 한다. 게임에서 정리라는 퍼즐이 내러티브와 결합하며 사물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정리는 이를 들여다보는 행위가 된다.


* <A Storied Life: Tabitha>의 회고록 정리 화면 ⓒSecret Mode

여기서 <언패킹>이 여타의 정리 게임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드러난다. 현실에서의 정리와 게임에서의 정리 사이에는 자발성의 유무 이외의 목적 차이가 있다. 내러티브의 발견이 게임의 명시적인 목적으로 제시될 경우 사물의 위치는 해석 대상을 넘어 단서 혹은 증거로 구체화한다. 이때 역설적으로 사물은 그것이 담고 있는 기억, 의미와 분리된다. 내러티브의 구성을 최우선 목적으로 둔 플레이어는 전체 이야기를 짜맞추는 데 들어맞는 의미만을 부분적으로 탈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 인간의 삶에는 대주제나 기승전결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정리에서도 각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를 하나의 서사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산개한 기억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물질과 기억』(1896)에서 주장했듯 기억은 세부 사항이 완전히 보존된 텍스트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인 이미지의 집합으로 우리에게 떠오른다. 이때 사물은 기억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자신과 관련된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소환한다. 정리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기억은 이처럼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언패킹>이 제시하는 플레이는 정리와 기억이 연결되는 현실의 메커니즘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정리 게임에서 물건의 주인은 늘 가상의 인물이자 타인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자신이 정리해야 할 물건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주인공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듯이, 혹은 잃었던 기억을 찾아가듯이 어렴풋하게나마 주인공의 자아를 구성할 수 있다. 어떠한 명시적 내러티브 없이 사물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기억은 우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맺은 사물 속에서도 거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벤야민의 상념을 빌려본다. “기억된 것, 생각된 것, 의식된 것, 이 모두는 자기 자산의 초석이 되고, 액자, 주각, 자물쇠가 된다. 시대, 주변 경관, 수공 작업, 이전의 소유주 — 소유주의 이러한 물건은 저마다 진정한 수집가에게 한데 모아져 하나의 마법적 백과사전이 되고, 그 총체가 소유주 대상물의 운명이 된다[2].” 


그렇다면 <언패킹>에서 플레이어의 정리는 주인공에 대해 쓴 백과사전을 훑어보는 일이다. 백과사전을 읽는다고 세계를 완벽하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듯, 정리가 끝난 뒤에도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짐작될 뿐이다. 이 느슨한 이해의 방식은 앞서 언급한 <언패킹>의 유연한 규칙에도 반영되어 있다. 자리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물건은 없다.

그래서 현실의 우리도 정리를 한다. 제자리를 찾는 일에는 정답이 없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물건의 자리도, 나 자신의 자리도. 넘치는 물건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다 보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1] 발터 벤야민, 『라디오와 매체』, 고지현 역, 현실문화, 2021, 239.
[2] 발터 벤야민, 앞의 책, 2021, 227.

Tags:

기억, 언패킹, 정리 게임, 코지 게임, 사물과 기억, 발터 벤야민, Unpacking Game, Cozy Games, Environmental Storytelling, Memory in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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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시사 유튜브·팟캐스트를 만드는 직장인이자 평범한 게이머. 시사를 녹여낸 게임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종종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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