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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롤링 권하는 기술: 인게임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소고
기술은 매 순간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발전 속도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 기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과거 우리가 맨몸으로 겪었던 어떤 순간이다.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디지털기술은 원거리에서도 게임 규칙이 제시하는 승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켰고, 이제는 그 게임의 바깥에 존재하던 음성언어마저도 구현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올려놓았다. < Back 트롤링 권하는 기술: 인게임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소고 14 GG Vol. 23. 10. 10. 같이 하는 게임으로 시작해 다시 '같이'하는 게임으로 오기까지 디지털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플레이어 상호간의 의사소통은 게임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굉장히 후대의 것에 가깝다 . 특히 기원이 되는 디지털 이전의 게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애초에 게임 안의 커뮤니케이션은 굳이 따로 만들 이유가 없었는데 , 장기나 바둑 , 체스 같은 게임들은 같은 시공간에서 마주보고 한다는 대원칙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시기적으로도 그렇지만 애초에 게임이 상호작용으로부터 빚어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별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게임 규칙 외에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 앞에서 바둑과 장기 이야기를 언급했지만 , 이들 게임은 규칙으로서의 게임만 이야기한다면 대화가 불필요한 것이겠지만 실제 게임이 플레이되는 현장에서 바둑 두는 두 사람간의 대화는 또한 일상적이다 . 프로 간의 대국에서라면 수담 ( 手談 ) 외에는 문답무용이겠지만 , 일상의 놀이가 모두 프로 같지는 않을 것이다 . 딱딱하게 구분해 본다면 텍스트로서의 게임은 순전히 규칙이 제시하는 방식 안에서만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부분만을 가리킬 것이다 . 그러나 애초에 모든 게임이 모여서 한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칙 바깥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게임과 함께 있어 온 존재이기도 했다 . 이는 초창기 비디오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 퐁 > 과 같은 경우는 기기 한 대에 두 명이 달라붙어 플레이하는 구조였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플레이어 두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곤 했다 . 이 자연스러움이 없어지는 첫 번째 분기점은 아마도 싱글플레이 게임의 대두로부터일 것이다 . < 퐁 > 에서 < 브레이크아웃 > 으로 변화하면서 혼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대세가 되면서부터는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규칙에 대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 이보다 더 큰 분기점은 온라인 네트워크 기능의 도입일 것이다 . 앞서 이야기한 , 멀티플레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야 한다는 전제는 온라인이 도입되면서 깨졌다 . 아니 애초에 온라인 멀티플레이의 도입이 이루어진 배경 자체가 굳이 한 공간에 있지 않더라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오프라인 시절에는 당연했던 , 함께 게임을 하며 이야기나누는 상호작용은 온라인 멀티플레이에 들어오면서 이제 별도로 구현해야만 가능한 무엇으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 멀티플레이 디지털게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게임의 구성 요소가 아니면서도 게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며 발전해 왔다 . 그리고 이는 애초에 기술적인 시작점부터도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 채팅과 온라인 멀티플레이는 같은 시작점을 가진다 네트워크 상에서 둘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하는 채팅 기술은 1974 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PLATO 컴퓨터 시스템의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 본격적인 채팅 시스템은 핀란드 프로그래머 야르코 외카리넨(Jarkko Oikarinen)에 의해IRC(Internet Relay Chat) 프로토콜이 개발된 1988년 이후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는 초기 전화 모뎀을 이용한 PC통신 등에서 메일, 동호회, 게시판 기능과 함께 PC통신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대중에 소개되었다. 1) 채팅의 역사 속에서도 이미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 우려는 나타난 바 있다. 영화 <접속>(1997)처럼 비대면의 익명 상대이기에 가능한 로맨스가 있었던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공격적이었다. 이는 채팅이라는 기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대면의 다대 다 익명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익명성의 문제는 동일하게 온라인게임에서도 나타난다. 최초의 다중접속 게임으로 거론되는 게임인 은 1978년 영국 에섹스 대학의 로이 트럽쇼가 개발한 게임으로, 채팅과 마찬가지로 PLATO 시스템 기반의 대학 서버 내에 올려진 TRPG 기반 텍스트 게임에 여러 사람이 동시접속할 수 있게 만든 게임이다. 접속한 플레이어들은 서로 같은 방에 위치한 플레이어들끼리 텍스트 채팅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작동방식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게임 안에서의 행동들이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욱 거칠게 나타나는 것을 두고 게임이 가진 본질적인 공격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게임 때문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비대면 다대다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다분히 참여자들을 공격적으로 만든다고 보는 편이 좀더 합리적이다. 오히려 참여자가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은 反게임적인데,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게임의 요소 중 하나인 경쟁agon이 단순히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수행되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놀이 안에서 일종의 학대와 골탕먹이기가 발생하는 과정은 카이와에 따르면 ‘경쟁에서 멀어지는’(42p) 어떤 순간이며, 게임을 벗어나 원시적인 투쟁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이는 게임 자체보다는 채팅이라는 기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 가까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대화상대가 누구냐는 것 오늘날 게임들은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방대한 대역폭을 활용하여 텍스트 채팅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제공한다. 보이스채팅이라고 불리는 이 음성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이름부터 흥미로운데,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누군가와 음성으로 이야기나누는 것을 인터넷전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에 ‘채팅’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와 ‘채팅’의 위와 같은 용례는 이 둘의 구분이 어떤 상대와 커뮤니케이션하느냐에 있음을 드러낸다. 전화는 (일부 텔레마케팅을 제외하면) 상대가 누구인지 이미 아는 경우에 활용되고, 채팅은 익명성에 기반한다. 게임과 함께 하는 음성기반 커뮤니케이션을 보이스’채팅’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익명성에 기반한 음성 커뮤니케이션은 텍스트 채팅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사실이다. 미디어학자 매클루언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를 두고 부족사회에서의 음성언어가 서구문명의 문자언어로 변화하고, 이것이 전기기술의 힘에 의해(전화, 라디오 등) 다시금 음성언어로 치환되면서 문자언어 중심의 사회에 일종의 내파를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매클루언의 주장을 빌어 온다면, 우리는 과거 부족 사회처럼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만큼 가까운 사이에서만 작동했던 음성언어가 그 제한과 한계를 기술을 딛고 넘어서면서 익명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공격적 보이스채팅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멀티플레이 게임이 디디고 있는 '익명성'의 대전제 그러나 원인을 안다고 해서 딱히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멀티플레이 기반 게임들은 1:1의 멀티플레이 이상으로 팀 대 팀의 플레이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다시말해 하나의 팀이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협동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 안의 상호작용 외에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게임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매우 강력하게 게임의 규칙에 “한 팀은 무조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집니다”를 내세우는 게임이다. 친구와 둘이 PC방에 가더라도 두 사람은 결국 모르는 세 명을 팀원으로 받아 다섯 명을 채워야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때에 따라서는 개인의 순수한 실력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승패에 크게 영향을 주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때문에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는 초창기에 이용자들로부터 랜덤 매칭된 팀원 사이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해 줄 수단으로서의 보이스채팅 기능 추가를 요구받은 바 있는데, 그에 대해 답변한 기록은 오늘날 보이스채팅의 기능을 역으로 잘 드러내는 자료로 남아 있다. (중략) 이 논의를 시작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친구들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길 때와, 모르는 사람들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길 때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 여러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친구들과 음성 채팅을 하는 것에 대해선 79% 이상이 이것이 리그 오브 레전드를 더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응답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을 하는 것이 즐거울지를 묻는 질문에는 겨우 50% 정도의 플레이어 여러분만이 동의하셨고, 나 되는 반대 의견이 나왔습니다. 4 명 중 1 명이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을 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저희들에게도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중략) 음성 채팅을 하게 되면, 몇몇 플레이어만 끝까지 음성 채팅을 사용하며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음성 채팅에 아예 참여하지 않거나 음성을 차단한 후 텍스트 채팅만을 사용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기법을 통해 실제 어떤 대화가 이루어지는지 분석하는 고도화된 모델을 개발하여 적용한 결과, 일부 플레이어들만 음성 채팅을 사용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텍스트 채팅으로 소통하는 게임의 경우 텍스트 채팅에 나타나는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 126% 나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플레이어 여러분도 저희도 리그 오브 레전드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종 차별, 동성애 혐오, 욕설 등의 언어 사용이 126%나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음성 채팅을 활용하면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나 욕설을 감지하기가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음성 채팅을 활용하는 플레이어들이 텍스트 채팅에서 공격적인 언어와 욕설을 훨씬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악성 플레이어를 감지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놀랍지 않은 결과이지만,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긴 플레이어들은 평균보다 신고되는 횟수가 47% 나 많았습니다. (중략)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들과의 음성 채팅은 매우 훌륭한 게임 경험이며, 사실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많은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스카이프 등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고 계시며, 이는 매우 바람직한 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음성 채팅 앱이나 게임에 포함된 음성 채팅 기능은 모르는 사람과의 음성 채팅에 활용되기 쉬우며, 자동으로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공격적인 언어 및 욕설이 126% 증가하고 신고 횟수는 47%나 증가하며 , 이는 플레이어가 서로를 차단하거나 음성 채팅 기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라이엇게임즈 , 2014) 2) 홈페이지를 통해 게시된 라이엇게임즈의 이 공지문은 오늘날 보이스채팅 문제가 가지고 있는 난점들을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친구들과의 음성 채팅과 익명의 음성채팅은 완전히 다르며, <리그 오브 레전드>는 반드시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팀을 이뤄야 하는 구조다. 익명 보이스채팅이 가지는 공격성은 텍스트채팅보다 훨씬 강력하기에 우리는 익명 매칭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게임에 보이스채팅을 추가할 생각이 없다는 라이엇게임즈의 메시지는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익명 매칭 기반의 팀 온라인 게임이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소통의 지점을 또렷하게 가리키고 있다. 기술은 매 순간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발전 속도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 기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과거 우리가 맨몸으로 겪었던 어떤 순간이다.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디지털기술은 원거리에서도 게임 규칙이 제시하는 승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켰고, 이제는 그 게임의 바깥에 존재하던 음성언어마저도 구현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기술적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시작되어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비대면 익명성이라는 대전제다. 기술이 모르는 사람들을 강제로 지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제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기술이 어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내건간에 우리는 트롤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1) IT동아 (2014, 5, 19). ‘ 채팅 ’ 탄생 40 주년 PC 통신과 메신저 거쳐 모바일까지 2) 라이엇게임즈(2014). 음성 채팅 기능에 대한 내부 논의 내용을 알려드립니다 >. URL: https://leagueoflegends.co.kr/?m=forum&mod=view&topic_id=7&thread _id= Wje_dd9l Uk Tags: 매클루언, 채팅, 보이스채팅, 커뮤니케이션, 음성언어, MUD, PLATO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논문세미나] Do Videogames Simulate? - 비디오게임 연구의 오래된 전제에 대한 고찰
시뮬레이션 철학자 폴 험프리스(Paul Humphreys, 1991)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핵심 용도를 세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여기에는 분석적 방법으로는 풀 수 없는 복잡한 수학 모델의 해를 구하는 해결책 제공이다. 둘째, 실제 실험이 불가능하거나 비윤리적이거나 너무 비싼 경우 컴퓨터로 가상의 실험을 수행하는 수치 실험이다. 셋째, 자연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만들고 그 타당성을 검증하는 이론 모델 탐구다. < Back 27 GG Vol. 25.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Hyunyoung Hong Entered the world of games thanks to ads pitching the Famicom as a must-have for the happy household. A steady devotee of Just Dance. Co-wrote Mario, Born in '81, The Theory of Games, and Media and Gender, among others.
- 게임, 전쟁, 격리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검투사 몇이 경기장에 있다. 다른 검투사 하나가 무기를 들고 입장한다. 새로 입장한 검투사는 적절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상대 검투사들을 하나씩 도륙낸다. 이따금 불필요하지만 화려한 동작도 섞어준다. 관중들이 환호한다. 만신창이가 된 마지막 상대는 이미 전투 능력을 잃고 선 채로 죽어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승자는 화려한 기술로 그를 두 동강 내버린다. 홀로 남은 승자가 된 검투사는 신이 나 있는 관중들에게 분노를 담아 외친다. “Are you not entertained?” < Back 게임, 전쟁, 격리 25 GG Vol. 25. 8. 10. 장면 하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검투사 몇이 경기장에 있다. 다른 검투사 하나가 무기를 들고 입장한다. 새로 입장한 검투사는 적절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상대 검투사들을 하나씩 도륙낸다. 이따금 불필요하지만 화려한 동작도 섞어준다. 관중들이 환호한다. 만신창이가 된 마지막 상대는 이미 전투 능력을 잃고 선 채로 죽어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승자는 화려한 기술로 그를 두 동강 내버린다. 홀로 남은 승자가 된 검투사는 신이 나 있는 관중들에게 분노를 담아 외친다. “Are you not entertained?” 2000년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이다. 장면 둘. 한 남자가 공항 출국 게이트에 있다. 게임 쇼에 참가해 우승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참여를 했다. 게임 종목은 어린이들의 골목 놀이였지만 패배의 대가는 죽음이었기에 남자는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죽는 지옥을 경험했다. 홀로 남아 우승한 남자는 거금을 갖고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갈 참이다. 하지만 게임의 주최측과 연결된 마지막 통화를 끊자 그는 뒤돌아 걸어간다. 그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야.” 2021년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이다. 두 장면의 두 인물은 목숨을 건 게임을 했고 승자가 되어 살아남았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전쟁과 흡사하다. 이들이 일종의 선수로서 게임을 수행했듯, 전쟁은 군인이 선수로서 싸운다. 싸움 바깥에서 싸움을 지켜보는 관중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전쟁의 승패는 그 관중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이들의 게임은 관중에게 영향이 없다. 그래서 전쟁은 일종의 사업으로서 해석되지만, 이들의 게임은 관중에게 유희다. 전쟁과 유희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다 보면, 어떤 네덜란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호이징가 혹은 하위징어로 불리는 이 네덜란드 학자는 자신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문명의 근간은 놀이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분석한 놀이성, 놀이의 특징 중 하나는 규칙으로 시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다. 저녁 먹을 때까지, 여기 이 놀이터 내에서, 얼음땡 규칙으로 게임을 한다는 식이다. 그 시공간을 벗어나면 놀이가 끝나고 놀이의 규칙은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이 특징이 확대되어 제의, 법률, 행정 등 문명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모두가 놀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 네덜란드 아저씨의 고찰이었다. 경쟁과 협동은 놀이의 두 축이 되는 원리이고, 이는 자연에 대해, 인간 서로에 대해 투쟁하는 생존 추구의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제한적인 규칙 속으로 집어넣자 놀이가 되었다. 일상과는 다른 어떤 시공간을 가정하고 거기에서만 통하는 규칙을 만든다는 점은, 인간이 일상의 생존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이성은 생존 너머의 문명을 만드는 근간이 되는 원리다. 현대인으로서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워지는 대목은, 그래서 자본에 포섭되어 시장화한 스포츠는 삶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놀이는 직접 수행하는 방법 외에도 타인의 놀이를 구경하는 방법이 있다. 콜로세움, 오징어 게임, 스포츠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생사를 거는지 아닌지를 제외하면 타인에게 게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자본으로 해석되었다 하여, 관중이 즐기게 되는 ‘보는 게임’으로서 놀이의 본질이 사라졌는지는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콜로세움에서 스타디움까지. 검투사에서 프로 선수까지. 관중을 대신해 게임을 하며 보는 게임을 제공하는 경우는, 싸움-전투-전쟁을 모사하긴 하지만 한 가지 한계가 있다. 소규모 전투의 모사라는 점이다. 격투기가 아니어도 양편이 나뉘어 싸우는 구기 종목이 그 경우다. 축구는 기병과 보병 전술과 유사하다. 농구는 흔히 기병과 궁병 전술에 비유된다. 핸드볼의 전술은 투창 전투와 많이 닮았다. 그렇다면 야구는 포병과 유사할까? 피겨 스케이팅과 같은 점수 경쟁 스포츠는? 하카처럼 전투 전의 의식을 겨루는 모습와 유사하다고 갖다댈 수 있겠다. 유희(遊戲)의 희(戱)는 중국 고대의 전장에서 전투 전에 위세를 겨루기 위해 호랑이 머리를 장식한 기물(䖒)을 창(戈)으로 치는 행위에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여전히 ‘태극 전사’니 ‘상암 대첩’이라는 식으로 전쟁의 용어를 스포츠에 갖다 쓴다. 팀 단위의 경쟁 스포츠는 전쟁에 대한 욕구를 대리 해소하는 용도 또한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적용되는 전쟁의 국면은 전략이 아닌 전술이다. 소규모 전투가 아닌 대규모 전쟁을 경기장 안에서 구현해 전략을 게임화하려면 상당히 많은 권력-자본이 필요해진다. 압도적으로 많은 선수가 필요할 테니까. 혹은 ‘이 말 하나가 사람 천 명이다’라는 식으로 추상화되어 전술과 전투의 재미가 사라진다. 전략을 보는 지적 재미는 추가되지만, 이래선 흥행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리 왕이고 부족장이라도 이런 이벤트를 만들었다간 재미없음 이유로 권좌에서 내쫓길 수 있다. 그래서 대규모 전쟁은 추상화되어 보드 위에 자리잡았다. 바둑, 체스, 장기와 같은 게임은 기물을 선수로 대체한다. 그래서 검투사의 유혈을 보고 공감 능력이 발휘되어 몰입이 깨져버리는, 콜로세움 입장료가 아까운 경우도 없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조감도 시야도 제공한다. 게다가 ‘보는 게임’에 특화된 가까운 경기장과 달리 보드는 ‘하는 게임’이 우선이다. 기술과 장르를 옮겨서 디지털 게임으로 오면, 앞서 있었던 많은 제약이 해제된다. 디지털 게임은 보드 게임의 추상성과 경기장 게임의 구체성을 모두 추구할 수가 있다. 프로세서의 연산 기능을 늘리기만 한다면 소규모 전투와 대규모 전쟁을 각각 혹은 한꺼번에 모사해낼 수 있다. 그렇게 전쟁은 게임이 가장 자주 다루는 소재가 된다. 병사 하나가 되어 전장을 누비는 개인 액션부터 10만 단위의 부대가 점 몇 개로 표시되는 전략까지 가능하다. 모두 바둑, 체스, 장기의 후예들이다. 여러모로 전쟁과 게임은 닮았다. 전쟁의 추동력은 전쟁을 수행하는 두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는 상황이니, 결국 경쟁이 핵심이다. 이기기 위해 군대는 계급에 따른 수직적 분업과 보직에 따른 수평적 분업을 수행한다. 분업이 수직-수평으로 직조하는, 협동의 체계가 군대 체계의 핵심이다. 전쟁을 요약하면, 협동하여 적과의 유혈 경쟁을 이기는 것이다. 유혈 부분을 빼면 게임과 동일하다. 게임에서는 1인 플레이의 경우에는 협동이 빠지기도 하고, 역으로 협동이 크게 강조되어 경쟁 요소가 옅어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전쟁의 저 두 핵심을 그대로 매체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결국 차이점은 유혈의 유무다. 싸움-전투-전쟁은 생명을 잃게 한다. 잘 기능하는 사회 구성원 하나를 키우는 데에 사회가 들이는 비용은 시간만 보아도 20여 년 이상이다. 게다가 인간의 공감 능력은 피 색깔만 비슷해도 그 죽음을 안타까워 할 수 있는데, 종까지 같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다. 아무리 증오스러운 적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보고 직접 죽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 좋지 않다. 그러면서 아무 가치도 생산하지 않고 가치를 사용하기만 하니 문명 전체의 손해이기도 하다. 한편 전쟁은 전쟁을 수행하는 사회의 경제, 기술, 행정, 정치의 과실이 그대로 반영된다. 그 찬란한 과실을 갖고 하는 것이 조직적 살인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인 자괴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서 전쟁은 추악하고 또 아름답다. 문명의 정수와 실력이 발휘되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추악함을 최대한 제거하고 아름다움을 가능한 부각시키려면, 죽음을 무시할 수 있으면 된다. 콜로세움에서 죽는 검투사에게서 공감을 거두면 그 게임은 재미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죽음을 제거하기란 어렵고 모두가 공감 스위치를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의 전쟁은 그래서, 호이징거 혹은 하위징어의 해석을 따르자면, 놀이성이 강화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규칙을 두는 것이다. 선전포고를 해야 정식 전쟁이고, 민간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고, 전쟁 중의 약탈과 민간인 학살 같은 것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포로를 정식 신분으로 만드는 등등, 전쟁에 놀이성이라는 족쇄를 채우려고 애를 쓰고 있다. 생사를 건 전투가 오직 전시에만 일어나게 하는 시도다.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놀이성의 특징인 시공간 제한에 의해 게임 안과 밖은 엄격히 구분된다. 콜로세움의 선수, 전장의 병사가 대신 생명의 위협을 받는 대신 제한된 시공간 바깥의 관중은 면제된다. 이미 검투사들을 관중 대신 데스 게임에 밀어넣으면서 인간 문명은 싸움에 놀이성을 부여해봤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약간 불편한 가설도 도출할 수 있다. 전쟁 게임이란 안전해진 사람들의 안도감을 흥분으로 바꾸는 것이 본질일 수도 있다.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액션의 쾌감, 전술의 합, 전략의 수려함은 결국 게임 밖의 나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으므로. 저 사람들이 내 재미를 위해 죽어도, 나는 잠깐 마음이 불편하고 나머지 시간은 즐거우니까. 그래서 보훈은 국가의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된다. 타인 대신 전장에서 목숨을 걸겠다고 나선 직업인들에 대한 예우다. 그럼 인간은 왜 전쟁을 게임에서 재현하고 있을까? 구성원 대다수가 전쟁에서 벗어나 안전한 문명 영역에 도달했으면서, 자꾸 그 특수한 지옥을 가져와 가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인간은 전쟁을 게임 안으로 가두려 하는 걸까? 인류 문명이 전쟁을 국제 사회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가두어가는 한편, 인간은 게임 규칙 속으로 전쟁을 가져오면서 콜로세움을 졸업했다. 현재의 스포츠에서 경기 도중 죽는 선수는 격투기 종목에서조차 극단적으로 적다. 오징어 게임은 어디까지나 은유이지 실제 현실에서 유사한 경기가 열리는 일은 없다. 이제 과거의 검투사 대신 뛰는 현재의 스포츠 선수는 전쟁과 유사한 활동을 할 뿐이다. 따라서 ‘대신 놀아주기’는 전쟁을 가두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은 만들기가 어렵다. 인간이 전쟁을 게임 안에 가두는 중이라면, 오히려 전쟁을 잊거나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재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저 질문을 다르게 바꿔보면, 전쟁은 정말 그렇게 매력적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사실 전쟁의 유혈과 광기를 동경하는 부분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인간은 모순을 사랑한다. 전쟁은 찬란한 동시에 추악하다. 어쩌면 인간은 전쟁, 전투, 싸움, 죽음을 끊을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혹은 끊기 위해 게임 속에서 전쟁, 전투, 싸움, 죽음을 죽이는 중이라고 서술할 수도 있다. 혹은, 삶에서 아주 특정한 때에만 있는 이벤트라면 질병이라고 치환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군인은 전쟁 속에서 전쟁을 해소하려 하는 의사로 비유할 수도 있고,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예방용 백신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으니 답은 아직 없다. 다만 우리 인류가 전쟁이라는 특정 시공간 상황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를 소망한다. Tags: 재현, 전쟁, 워게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 Back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25 GG Vol. 25. 8. 10. 야코 수오미넨은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tlure》에서 ‘디지털 게임을 포함한 미디어 문화는 본질적으로 유아성infantlism, 유치함chindishness 또는 청소년성juvenility을 내포하고 있으며(...)’라고 쓴다. 폭탄 같은 발언처럼 들리지만, 비디오 게임과 걸쳐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논제다. 요컨데 우리가 게임학이라고 부를때의 루돌로지Ludology의 어원으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우리 사이에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 아니 게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즐거움’에 대한 지향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다. 이 때에 즐거움을 가장 원초적인 단위까지 훑고 내려가면 결국 유아성, 유치함, 청소년성 같은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비디오 게임과 전쟁이라는 두 키워드를 하나로 조합하면 그러한 ‘원초적 즐거움’의 상이 그려진다. 몰려드는 적, 화면을 메우는 총탄, 화면 어딘가에 표시되는 점수 또는 킬마크… 등등. 애초에 군사적 기술의 변용으로 탄생한 이 매체는 「미사일 커맨더」같은 군사주의적 테마의 게임과 함께 성장해왔다. 꼭 그 대상 또는 배경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타이토의「스페이스 인베이더」, 코나미의 「콘트라」같은 외계인과의 혈투를 그린 아케이드 게임도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주의와 매개하고 있다. 직접 전장을 모사하지 않더라도 총기나 냉병기를 다루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조금 과장해서 폴 비릴리오를 경유하자면, 레이싱 게임 같은 기술 중심의 게임 마저도 군사주의에 대한 어슷한 인상 정도는 가지고 있겠다.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는 언제나 군사주의라는 존재의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군사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는 원초적 재미라는 근원적 공간이다. 반전을 외치는 비디오 게임이 군사적 쾌감을 준다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문제는 구태의연하고 철지난 이야기일 정도다. 그래서,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서 이 군사주의를 걷어내면 그 자리에 ‘진지한serious’이라는 단어가 들어서게 된다.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이라는 단어의 현존 자체가 비디오 게임에 드리워진 루두스의 음산함을 시사한다. 게임이 진지해려면 특정한 수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군사주의를 우회하는 전쟁 비디오 게임은 대체로 이 시리어스 게임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물론 시리어스 게임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가지 논의가 있다. 초기에는 교육적 효과를 가진 게임들을 지칭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게임들을 교육적으로 전환 사용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교육적 효과’, 아니 더 넓게는 ‘어떠한 효과’를 내포하는 게임들까지 아우르게 된다. 자우티Djaouti, 알바레즈Alvarez, 제슬Jessel은 기존의 비디오 게임을 ‘엔터테인먼트 게임’으로 구분한 뒤, 시리어스 게임을 ‘진지함serious’과 ‘게임성game’을 모두 가진 게임으로 규정한다. [1] 물론 여기서도 이 ‘진지함’이 어느 범주까지를 뜻하는지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는다면, 매우 모호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2] 여튼 게임이 어떠한 엔터테인먼트를 초과하는 ‘진지한 테마’를 목적한다면 시리어스 게임의 범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떠한 충돌이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루두스는 일정량 ‘진지함’을 배격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전쟁과 비디오 게임 사이에 언제나 군사주의가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논리적 귀결과 맞붙는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이 군사주의와 거리를 두고, 그 이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하려 할때, ‘시리어스’와 ‘루두스’ 사이에는 강렬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게임이 바로 Juggler Games의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My Memories of Us」이다. 이 게임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 한 유대인 소녀와 도둑 소년이 함께 수용소로부터 탈출해 도망치는 이야기를 다룬다. 메커닉적으로는「발리언트 하츠」에 큰 빚을 졌다 할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두 주인공을 통한 퍼즐 메커닉은 새로운 흥미로움을 낳는다. 손을 잡으면 서로의 능력이 공유되고 손을 놓으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메커닉은 게임이 부여하는 퍼즐을 보다 다채롭게 구축한다. 그러한 반면 이 게임은 ‘노년의 남성이 회상하는 과거’를 이유로 역사에 환상적인 면모들을 이식한다. 이를 통해 제3제국을 로봇으로, 제국의 총통을 로봇 왕으로, 유대인을 표시하는 노란 뱃지는 지워지지 않는 붉은색의 페인트로 묘사한다. 이 환상성(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해야할까)이 있기에 더 다양한 퍼즐 메커닉이 나올 수 있었겠으나, 역사의 무게를 감소시켰다는 평은 피할 수 없었다. 《게임스팟》에서는 "게임의 더 귀여운 미적 요소와, 캐릭터들이 게토에 살게 되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야기 사이의 단절은 거슬린다. ...이러한 분위기의 혼란은 경험의 대부분을 약화시킨다." [3] 고, 《닌텐도 라이프》에서는 “주요 비판점은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실질적인 위협과 그것이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공포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슬리는 분위기의 불일치다.” [4] 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이 더 현실적인 아트를 가졌다면 게임 전체를 ‘흥미롭게’ 만든 퍼즐 메커닉의 삽입은 불가능했을 것이 자명하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군사주의를 우회한 비디오 게임이 필연적으로 겪게되는 전쟁의 진지함과의 각축전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치 독일의 제3제국을 로봇 군대로 묘사한다. 의미가 구조를 앞지를 때 이런 충돌에 대해 이안 보고스트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절차procedure’와 ‘수사rhetoric’ 사이의 긴장이라고도 정리할 수 있다. 게임적 절차(=구조)를 동원해 수사(=의미에 대한 표출)를 구축한다는 보고스트의 발안을 따르자면, 진지함은 언제나 수사의 목적에 위치한다. 여기서 절차는 이 수사의 구축에 결부된다. 하지만 게임의 절차, 그러니까 루딕 메커닉은 앞서 정리한대로 유희성을 기반으로 한다. 결국 진지함에 대한 수사를 어떻게 유희적으로, 그러니까 원초적이지 않은 흥미로움으로 구축하느냐가 긴장의 근원이다. 정리하자면 수사의 확고한 대상을 위해 절차가 동원되는가, 아니면 절차의 목적이 수사의 대상보다 더 높은 층위에서 작동하는가의 문제다. 이 긴장의 내부에서, 게임을 통해 전쟁의 ‘진지함’을 논한다면 과연 어떤 방식을 이루어야 할까? 이를테면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경우, 이는 명백히 역사 교육을 위한 콘텐츠가 된다. Charles Games의 「아텐타트 1942Attentat 1942」와 「스보보다 1945 : 해방Svoboda 1945 : Liberation」이 대표적인 예시다. 두 게임은 모두 체코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 자료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의도적으로 복잡한 사회적 양태의 시기, 체코슬로바키아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뒤에 벌어진 억압적 통제 ‘하이드리하디’가 발생한 1942년과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독일인들에 대한 폭력적 추방이 시행된 1945년을 그 조사의 배경으로 삼는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현대의 체코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노벨 게임’ 스타일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정보를 모아야 한다. 비록 재연 배우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가상의 인터뷰라는 형식은 전쟁 중의 민중들이 겪은 미시사의 복잡함을 인지시킨다.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타자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의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전쟁이라는 현상이 주는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유대인이 아님에도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할아버지의 역사를 추적하는「아텐타트 1942」의 경우, 주인공의 할머니는 불신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누군가의 불온한 고발이 남편에게 부당한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인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의심의 대상인 이웃집 남자 역시 나치당의 폭압에 의한 피해자라고 고백한다. 그 역시 총독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친독적인 기사를 써야 했던 과거에 고통받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정보는 파편화되어, 결국 켜켜히 쌓인 오해가 한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텐타트 1942」는 가상화된 인터뷰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아텐타트 1942」는 이를 위해 역사 탐구를 가상적으로 분화시킨다. 게임 중 발생하는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정보 전체를 한번에 획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행 중 발생한 미니게임을 통해 지급받은 코인을 사용하면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 이 ‘처음부터’ 다시는 문자 그대로의 처음부터, 즉 ‘이전의 인터뷰가 없었던 것’으로는 간주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이전 인터뷰의 정보는 남아있다. 이러한 인식상의 오류가 있음에도, 딱히 이런 과정을「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즈」처럼 초상적 능력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즉 사실상 주인공은 부족한 정보들로 구성된 한 플로우의 인터뷰 경험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치 않게 진짜 ‘진실’과 접촉하게 된 셈이다. 이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잠재태의 경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게임이 아닌 현실의, 그러니까 실재태의 인터뷰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주의에 가깝다. 어쩌면 이 현상이 「아텐타트 1942」의 인터뷰이들이 가진 정보 부족의 비극을 일부 설명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은 근본적으로 가진 판단의 한계지점을 가지며 오해와 불신의 가능성은 언제나 곁에 도사린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는 이런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증가시킨다. 플레이어가 추적한 진실은 이러한 세계의 초상이며, 오직 각 인간에 대한 불가능한 정보 습득의 반복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수사인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텐타트 1942」는 매우 흥미로운 메커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미니 게임들에는 그다지 미덕은 없다. 물론 증언자들의 코너에 몰린 긴장을 체감시킬 의도로 삽입된 것들이긴 하나, 증언 기반이라는 한계로 인해 고정된 결과만을 산출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미니게임의 성패는 오히려 인터뷰의 반복을 위해 코인을 버는 용도로만 사용될 뿐, 증언의 디테일이나 결과를 극단적으로 변화시키진 못한다. 따라서 이 게임이 다루는 ‘절차’는 역시 확실한 의미 층위를 가지기 어렵다. 사실상 대부분의 ‘수사’는 게임 자체의 구조보다는 이 게임이 담지하는 인터뷰에서 (말 그대로의 수사로서) 나오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유사한 구분, 즉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게임 중에서도 구조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케이스라면 어떤 형태일까. Rayonist의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Grief like a stray dog」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사실상 아트 게임에 가까운 이 게임 역시 동유럽의 전쟁 시기를 다룬다. 주인공 나디아는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뒤, 무기력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우체부의 일을 맡는다. 이 마을의 집 대다수는 가족 중 한명이 참전한 상태인 터라 모두 긴장 상태에 있다. 그리고 나디아는 그 긴장의 트리거가 된다. 나디아가 전달하는 편지는 크게 두 종류인데, 흰 편지는 가족의 생존을 의미하지만 검은 편지는 가족의 전사를 의미한다. 편지를 전해주는 장면은 클로즈업 된 두 개의 팔로 묘사되며, 플레이어의 마우스 움직임에 따라 나디아의 손도 움직이게 된다. 보통 배달하게 되는 흰 편지는 그저 손을 움직여 상대방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면 된다. 하지만 그 편지가 검은 편지일 때, 나디아의 손은 흰 편지 때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에서, 전사 통보 편지의 전달은 느린 속도로 표현된다. 이 게임에는 약 60분 정도 지속되는 짧은 서사와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아트가 있다. 하지만 게임의 코어는 바로 이 손의 움직임이다. 편지를 건네 준다는 간단한 행위가 조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부여받는 것이다. 검은 편지를 건네 주게 될 때, 플레이어는 그 느린 팔의 움직임을 통해 나디아의 복잡한 감정을 공유받는다.물론 이 두 편지가 동시기에 공존한다는 점, 그리고 언제나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에서 편지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대한 제유나 다름없다. 그리고 팔의 움직임은 그 전쟁이 주는 상처와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표출이다. 물론 그러한 역학을 제외하면 게임 전체는 매우 빈약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을 ‘플레이 가능한’ 행위로 번역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의미와 구조가 만날 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은 전형적인 시리어스 게임이기는 하지만 의미와 구조가 융합되는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군사주의를 이탈한 비디오 게임은 (군사주의를 동원하는 비디오 게임과 마찬가지로) 절차와 수사가 거의 유사한 층위에 있을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역시 11bit Studios의「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게임은 「림 월드Rimworld」같은 전형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플레이어가 다수의 캐릭터를 ‘관리’하며 방해되는 물건을 치우고,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고,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생존해나간다. 하지만 여기에 이 캐릭터들이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도시의 생존자’라는 서사 층위가 씌워진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다룰 수 있는 ‘세계 전체’는 한정적 자원의 세계로 규정된다. 즉 이 세계에서 획득 가능한 물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도, NPC에게도 본질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런 와중에 플레이어는 밤마다 다른 건물에 들어가 필수적인 자원들을 챙겨와야만 생존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도시에 남겨진 다른 생존자들과 조우하는 경우가 생기며, 자원의 소유권을 놓고 경쟁하는 일도 발생한다. 때로 병든 가족 같은 사연을 가진 생존자와 조우할 때엔, 그들을 위해 의료품을 남겨올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져올 것인가 같은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특징은 바로 장르적 순수성에 있다. 「디스 워 오브 마인」에서 전시의 생존자라는 서사 층위를 벗겨내면 상당히 전형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구조만이 남는다. 자원의 한정성과 생존의 고통은 해당 장르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코드다. 즉 이 게임의 루두스적 구조는 매우 전형적이고 표층적인 역학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진지한’ 층위가 이 구조를 더 강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반대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전쟁이라는 사건은 인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디스 워 오브 마인」은 바로, 전쟁은 우리들을 서바이벌 장르의 고통스러운 세계로 밀어넣는다고 답한다. 이 사유의 과정은 전적으로 군사주의적이지 않은, 군사주의를 우회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디스 워 오브 마인」은 비디오 게임의 장르를 경유하며 전쟁을 규정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혹은 좀 더 서사적 층위로 접근하는 Birdisland/PortaPlay의 「게르다 : 어 플레임 인 윈터Gerda A Flame in Winter」(이하 「게르다」)의 경우는 어떨까. 2차 세계 대전 당시 덴마크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게임은, 독특하게도 「디스코 엘리시움」과 유사한 TTRPG 스타일의 서사 중심Story-Driven 게임이다. 주인공인 게르다는 덴마크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덴마크의 혼혈이다. 나치당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1945년의 어느날, 남편인 안데르가 레지스탕스 혐의로 게쉬타포에게 체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편을 지키고 싶어하는 게르다는 여러 사람들의 힘을 빌리려고 하며 이야기는 점점 더 복잡한 층위로 들어선다. 게임 메커닉은 장면 단위로 진행되며, 게르다는 장면 내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아이템 수색을 통해 정보를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때때로 대화의 와중에 게르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두 종류의 선택지가 발생하곤 한다. 하나는 세 가지 능력치인 연민Compassion, 통찰Insight, 재치Wit 중 하나를 사용하는 선택지로, 즉시 호의적인 효과가 나지만 해당 능력치를 1 소모한다. 능력치는 각 장면이 끝난 뒤, 일기에 적을 내용에 따라 한 능력치를 1점 회복할 수 있다. 또 다른 선택지는 일종의 판정 국면이며, 대화 상대가 속한 소속과 대화 상대와의 관계도, 가지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난이도가 결정된다. 「게르다 : 어 플레임 인 윈터」는 단순한 하나의 선택으로 급격한 관계의 증감을 경험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관계도의 증감이다. 관계도는 매 대화의 선택에 따라 즉시적으로 1씩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거의 모든 대화에 증감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매번 선택의 고민은 깊어진다. 특히 각기 다른 소속의 인물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국면인 경우에 고통은 증가한다. 양측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작동하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관계도 상승을 포기하거나, 혹은 하락의 가능성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 시스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쟁이라는 테마를 건드린다. 하나, 이런 즉각적인 관계의 변화는 현실에 비추자면 매우 급작스럽고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대화란 본질적으로 인상을 결정하는 행위이기는 하나, 각각의 발언 또는 선택이 이후의 가능성을 훼손할 정도로 변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게임의 메커닉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과도하다. 하지만 「게르다」는 이 게임의 시기가 전시라는 사실을 통해 이 메커닉을 설득시킨다. 나치 통치의 덴마크는 극도의 분열 상태고, 독일인과 덴마크인은 서로를 의심하고 증오한다. 게르다가 일하는 진료소의 의사는 독일인은 절대로 치료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독일인들은 모든 덴마크인을 잠재적 반동분자로 치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계도의 급격한 증감은 오히려 설득력을 낳는다. 그리고 이 메커닉과 설정은 놀랍게도 서로를 돕는다. 전시라는 배경은 메커닉을 설득시키고, 메커닉은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동체의 균열을 설명한다. [5] 둘째, 게르다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게르다는 덴마크에서 나고 자랐으며, 덴마크인 남편과 살고 있다. 하지만 나치당을 지지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있는 게르다의 아버지, 게쉬타포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는 친척 등 독일인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한편 가장 친한 친구는 게쉬타포 소속이지만 합리적인 남성인 볼프강과 연인관계이기도 하다. 이 모든 복잡한 관계는 게르다를 선택의 지점으로 몰아넣는다. 덴마크인들은 필요하다면 게르다를 독일인으로 취급하고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설득해야 하지만, 남편을 구해야한다는 목적은 또 다른쪽과의 관계 역시 신경쓰도록 만든다. 결국 이러한 분열과 정체성의 혼란 역시 전쟁이라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이 또한 의미와 구조의 확실한 일치를 낳는다. 따라서 「게르다」는 「디스 워 오브 마인」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이 장르적 전형을 끌어들여 ‘시리어스’를 설득시킨다면, 「게르다」는 ‘시리어스’와 ‘루두스’가 거의 동일한 역학으로 서로를 돕는다. 하지만 결국 둘 다 게임 메커닉이라는 자원을 이용해 전쟁이란 무엇인지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 동일한 면에서 흥미롭게 바라볼만한 게임이 바로 Madnetic Games의 「WW2 리빌더」다. 이 게임은 「하우스 플리퍼」 또는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와 같은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으로,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각 격전지를 원상복구하는 일을 맡는다. 플레이어의 주된 행위는 전형적인 리노베이션 게임의 그것으로, 현장에서 물건을 해체해 자원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고, 파괴된 도로를 메우거나 벽을 새로 건설하는 재생작업이다. 이 역시 「디스 워 오브 마인」과 유사한 작동을 가진다. 순수한 장르의 틀에 전쟁(정확히는 전후)이라는 서사 층위를 덧씌워서 전쟁의 감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WW2 리빌더」에는 탈군사주의라는 맥락에서 더 깊은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은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터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탈군사적인, 아니 정확히는 반군사적인 틀이다. 이 장르는 대체로 1인칭의 시점을 지니며, 플레이어는 호스의 물을 ‘쏘거나’, 해체 장비를 ‘휘둘러’ 먼지를 지우고 폐허화된 공간을 해체한다. 이 과정은 정확히 FPS와 반대의 역학이며, 사실상 거의 FPS에 대한 패러디다. 이들의 시점, UI, 조작법은 전적으로 FPS와 동일하지만 양자가 만들어내는 풍광은 정확히 반대의 것이다. FPS는 파괴하고, 시체와 폐허를 남기지만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터는 정리하고,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애초에 이 장르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비세라 클린업 디테일Viscera Cleanup Detail」부터가 가상적 전투의 뒷정리라는 컨셉이었던 것이다.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션의 공간은 ‘사건’ 이전 상황을 연상하도록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의 역할은 그런 ‘사건’이 남긴 불쾌감을 떠안고, 장소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회복자라고 할 수 있다. 「WW2 리빌더」가 군사주의 게임의 가장 인기있는 테마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놀랄만치 통렬한 패러디다. 즉 이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는, 그 앞에 있었을 FPS의 거대한 대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 각 스테이지마다 존재하는 검은 형체의 존재는 이 개념을 전면화한다. 게임의 특정 지점에 서 있는 이 검은 형체와 접촉하면, 플레이어는 잠시 전쟁 당시의 기억 공간으로 이전된다. 군수 공장의 부두라면 배가 진수하는 광경이, 폭격지라면 폭격 당시가 재생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게임의 스테이지는 모두 전쟁이라는 역사를 가진 공간이 되며, 게임의 플레이 역시 가상화된 다크 투어가 된다. 따라서 「WW2 리빌더」는 다크 투어리즘의 게임이며 동시에 그 공간을 회복시키는 전후의 회복적 게임이 된다. 지나간 전쟁의 전장에 놓인 총을 그저 ‘고철’로 환원시킬 때, 이 게임은 군사주의와의 싸움에서 완벽히 승리한다. 「WW2 리빌더」는 전장에 남아있는 총기를 ‘고철 3개’로 표시한다. 게임은 이를 위해 주인공들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영국의 주인공은 전쟁 중 사망한 파일럿의 동생이며, 독일의 주인공은 참전자의 아내, 프랑스의 주인공은 전쟁 중 고향이 파괴된 참전 당사자다. 이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상실한 자들이지만, 그 증오의 소용돌이에 잠식되기 보다는 조용히 삶의 공간을 회복시키는 일에 전념한다. 「WW2 리빌더」는 테마, 서사 그리고 메커닉이 모두 일거에 작동하는 가장 전복적인 탈군사주의 게임이자 안티 FPS다.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이러한 탈군사주의 비디오 게임은 어느새 확고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분량의 문제로 모두 소개하진 못했지만, 시리아 내전에서의 탈출 중인 아내와의 텔레그램 대화를 컨셉으로 삼은 「버리 미, 마이 러브Bury me, My love」,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 스탈린그라드 출신의 소녀가 주인공인 「톤 어웨이Torn Away」, 나치가 부상 중인 독일에서 반나치 지하 조직을 운용하는 「쓰루 더 다키스트 오브 타임스Through The Darkest of Times」, 2차대전 후 독일인 아이를 입양한 노르웨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My Child Lebensborn」같은 게임들은 충분히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들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군사적 테마, 전투나 사격 등의 메커닉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전쟁의 이면에서 벌어진 일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조금은 독특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정리하려 한다. LKA의 1인칭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사 이즈 데드Martha is Dead」는 전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명시적으로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아니다. 주인공 줄리아의 아버지가 독일군 소속이라는 점, 주인공들인 쌍둥이 자매와 관계가 있는 남성이 파르티잔 활동을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떠한 전쟁의 지배력도 게임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지 않는다. 게임은 오직 쌍둥이 동생을 잃은 한 여성의 파괴되어가는 내면을 그리는 싸이코 스릴러의 전형을 따른다. 심지어는 그 쌍둥이가 실재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격인지조차 불분명하게 만든다. 「마사 이즈 데드」에서 동생 마사가 죽는 순간에 하늘엔 전투기가 날아간다. 하지만 이 게임은 미묘하게 전쟁이라는 요소를 게임의 내부에 가지고 들어오려고 한다. 줄리아가 동생 마사의 시체를 발견하는 그 장면에서, 하늘에는 비행기 엔진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몇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이 보인다. 하지만 이후 마사의 죽음과 비행기의 운용에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도출되지 않는다. 마사는 그 때 죽었고, 비행기는 때마침 지나간 것 뿐이다. 하지만 줄리아의 꿈에 나타난 사신은 서로 자신이 마사라고 주장하는 쌍둥이를 보고 허탈한듯 말한다. ‘전쟁 시에는 항상 누군가 죽는 거야.’라고. 「마사 이즈 데드」가 게임의 내부에 전쟁을 끌고 들어오는 방식은 모던 시네마적 역학과 유사하다. 마사의 죽음과 비행기 사이에는 전적으로 미장센의 결부가 있다. 줄리아의 심리적 파괴의 작동에는 자주 군사적인 이미지가 끼어들어온다. 남자친구의 죽음은 줄리아의 내면적 파괴로 이어지지만, 거기에는 파르티잔 활동과 독일군의 점령이라는 세계적 혼란이 어슷하게 걸쳐져있다. 이 게임을 탈군사적인 독법으로 읽는다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볼 생각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플레이어들에겐 구태여 그런 독법이 필요 하지 않다. 이것은 뭐랄까, 앞서 말한 방법에 따른다면, 마치 구조가 의미를 앞지른 게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게임에서 전쟁은 전달해야할 주된 테마는 아니지만, 독법에 따라서는 전쟁과 죽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음울하고 자기파괴적인 체험을 준다. 이 긴장은 어쩌면 비디오 게임에 군사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면서부터 원초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발생한 것 같기도 하다.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비디오 게임에 남은 숙제는, 군사주의라는 이 난감한 파트너와 어떻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가 일지도 모른다. 비디오 게임은 「이카리」로, 「듄 2」로, 「코만도스」로, 「진 삼국무쌍」으로, 그리고 더 많은 게임들로 전쟁을 낭만적 이미지와 등치시켜 왔다. 군사 테마의 쾌감이 짙을 수록,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아니 당위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것이 수오미넨이 말한 비디오 게임의 원초적 테제, 유치함, 유아성 그리고 청소년성과 결별할 어떠한 방법에 도달하는 길일 지도 모른다. [1] 《Classifying Serious Games: the G/P/S model》(Damien Djaouti, Julian Alvarez, Jean-Pierre Jessel, 2016) [2] 이를테면 「파이널 판타지 VII」은 전형적인 JRPG의 구조를 가지지만, 기술 중심주의와 환경 파괴에 대한 진지한 서사를 가진다. 이 경우 「FFVII」를 시리어스 게임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는 조금 복잡한 질문을 만든다. [3] https://www.gamespot.com/reviews/my-memory-of-us-review-war-has-changed/1900-6417007/ [4] https://www.nintendolife.com/reviews/switch-eshop/my-memory-of-us [5] 흥미로운 것은 이 게임에서 독일인과 게쉬타포의 관계도는 분리되어있다. 독일인은 ‘독일인’으로, 게쉬타포들은 ‘점령군’으로 표기된다. 독일인 소속의 인물들은 본래부터 이 땅에 살던 독일인을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때로 ‘독일인’은 상승해도 ‘점령군’은 줄어드는 선택지도 발생한다. Tags: 군사주의, 욕망, 반전운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의 '사랑'
사랑을 게임 속에 재현해보고자 처음 시도됐던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점차 게이머의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도록 ‘게임성’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연애 게임의 진화된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jin Park A graduate student who has stepped into game studies. Currently taking cours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Lately, exploring the varied game experiences mediated by games, as well as subculture within Japan. Writing is still hard.
- 마일즈 모랄레스의 정체성과 브루클린이라는 ‘장소’
마일즈의 불안은 인물(아마도 다른 시간선에서 스파이더맨이어야 했으나 프라울러가 되고 만 마일즈)의 형상을 취하다가 거미로 변모한다. 그의 공포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자격과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었던 셈이다. < Back 마일즈 모랄레스의 정체성과 브루클린이라는 ‘장소’ 17 GG Vol. 24. 4. 10. 2024년 3월 27일 소니 애니메이션은 이라는 7분 14초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공개했다. 최근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손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현재 소니가 서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스파이더맨은 1대인 피터 파커보다는 2대 마일즈 모랄레스다. 공개된 애니메이션도 스파이더버스를 잘 구현했다는 평을 받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이후 시간선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마일즈의 불안한 심리를 악몽을 통해 보여준다. 파악할 수 없는, 즉 언어로 규정되어 특정한 국면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은 확정된 표상을 갖지 않는다. 마일즈의 불안은 인물(아마도 다른 시간선에서 스파이더맨이어야 했으나 프라울러가 되고 만 마일즈)의 형상을 취하다가 거미로 변모한다. 그의 공포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자격과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었던 셈이다. 스파이더맨은 미성숙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청소년이라는 정체성과 결합된 히어로다. 마일즈의 악몽은 영웅으로서 의무와 자신과 연결된 세계만을 지키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한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작과 끝이 전제된 서사에 기댄 선형적 방식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스파이더맨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장소성에 기댄 히어로다. 그것은 웹스윙을 포함한 스파이더맨의 기술이 가진 매력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곳이 마천루의 숲, 맨해튼이라는 점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를 수식한 다른 표현이 “친절한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에는 특수한 그리고 출중한 능력을 가진 구원자로서 영웅이라는 정체성보다 내가 살고 있는 거리 나아가 도시와 관계 맺는 인간이라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이 인간, 대상,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피터를 설명하는 요소는 뉴욕이라는 보다 공간에 가까운 이미지의 비중이 크다. 그에 비해 마일즈의 정체성은 브루클린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통해 만들어진다. ‘공간’과 구분되는 경험의 축적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부여된 ‘장소’를 구분해서 파악했던 것은 이 푸 투안의 접근법이다. 피터 파커는 퀸즈 출신이다. 그러나 퀸즈로 특정되는 장소보다는 스파이더맨이든 피터 파커라는 인간 개인이든 그의 정체성은 뉴욕이라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도시에서 좌절을 경험하고 의무감을 통해 각성하는 존재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피터 파커에게는 퀸즈가 그의 장소로 자리매김하는 사건이 부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1대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가 너무 오랫동안 뉴욕의 히어로로 활약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와 달리 새로운 세대인 마일즈의 정체성은 동시대의 브루클린이라는 장소와 맞물려 있다. 브루클린은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사망 후에 국회의원이 된 어머니 리오 모랄레스의 장소인 할렘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 말까지 뉴욕 재즈의 중심지는 할렘이었다는 평가가 증명하는 것처럼 할렘은 재즈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가 등장하면서 그 역동성과 흑인 공동체라는 정체성과 결합된 곳이었다. 도난당한 문화 박물관의 악기들을 찾아달라는 퀘스트는 흑인인 아버지와 히스패닉인 어머니 사이의 마일즈가 갖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근간은 문화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가와 그들의 악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문화적인 것을 포함한다. 마일즈 모랄레스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힙합 역시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옛날 음악”이라고 평가했지만 아버지가 좋아했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와 같은 인물들의 계승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마일즈의 표현대로 그것은 과거의 것이기에 새로운(그리고 젊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를 부각하기에 충분한 문화적 서사가 되기 어렵다. 오히려 청소년 마일즈의 주요한 인물 관계는 사이드킥 역할을 하는 강케와 여자친구 헤일리를 포함해 브루클린 비전이라는 학교를 중심으로 확장된 것들이다. <마블 스파이더맨2>에서 수행되는 퀘스트 중 상당수는 두 명의 스파이더맨 중 누구를 선택해 플레이해도 무관하지만 할렘과 브루클린에서 발생하는 퀘스트는 마일즈만 수행이 가능하다. 이 퀘스트들은 그야말로 “친절한 이웃”인 스파이더맨이자 브루클린 비전 재학생 마일즈를 연결하는 것들이다. 브루클린 비전의 라이벌인 미드타운이 훔쳐간 학교 마스코트인 사자 인형 랜스를 회수하기 위해 퀴즈를 푼다든지, 프롬파티에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썸남에게 고백하는 이벤트를 도와주는 일과 같은 퀘스트들은 재학생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건이다. 조력자로 활약하는 스파이더맨은 이들과 함께 브루클린을 경험하면서 영웅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정체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친절하고 (세대적으로도) 가까운 히어로의 표상을 획득한다. 앞서 거론한 퀘스트 중 랜스 찾기는 도시가 도로를 정비하고 건물을 건축하는 기획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퀘스트다. 마일즈는 도시 곳곳의 건물 옥상을 이동하면서 미드타운 학생들이 남긴 메시지를 통해 랜스를 숨긴 곳을 수색한다. 특정 각도로 거울을 움직여야 벽화에 투사되는 메시지는 그 내용보다는 도시에 산재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벽화를 완상하기 위한 매개로 활용된다. 장소의 특수성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마일즈가 이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이는 그래피티 활동가이자 개인 전시도 기획하는 도시미술가이자 그의 여자친구인 헤일리다. 마일즈라는 하나의 인물만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문화적 기호를 헤일리와 같은 인물을 통해 분산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피티나 벽화와 같이 도시 계획과는 무관하게 거리를 수식하는 다양한 예술적 재현을 인식하는 일은 장소가 고립된 공간이 아닌 인간과 다른 인간, 다양한 사물과 연결되어 구축되는 역동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마블 스파이더맨2>은 튜토리얼은 맨하탄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전 시리즈에 비해 브루클린과 퀸즈까지 확장된 맵을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뉴욕에 편입된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브루클린의 공간적 성격은 극적으로 변모했다. 1960년대 쇠락한 제조업의 상징이었고 실업자와 범죄자의 온상과도 같이 여겨졌던 브루클린은 현재는 현대 예술과 디자인의 요람이자 첨단 기술을 가진 신규 기업이 사옥을 건설할 공간으로 선택하는 곳이 됐다. 마일즈가 자신이 살던 브루클린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고 표현한 것은 과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에 살던 마일즈는 어머니 때문에 할렘으로 이사했다.) 아울러 이곳은 1930년대 할렘에 거주했던 흑인들의 상당수가 브루클린 북부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할렘의 장소성과 연장선상에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일즈가 동시대적 현재를 보여주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임을 알 수 있는 장치 중 그가 즐겨 착용하는 헤드셋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음악이다. <마블 스파이더맨2>의 아쉬운 점은 전작 <마블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에는 적절하게 활용됐던 힙합 중심의 OST가 이번 게임에서는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수자이자 방외자로서의 정체성에서 시작됐던 힙합이 대중성과 트렌드를 대표하는 장르가 된 것과 같이 마일즈는 그의 인종적 정체성의 비감에 고뇌하는 인물이기보다는 사교적인 성격의 캐주얼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음악, 나아가 사운드가 그를 견인하는 서사적 기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상기하는 전략이다. OST 선정의 아쉬움에도 미스테리오가 운영하는 코니 아일랜드의 어트렉션 체험과 같은 에피소드는 실소를 짓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클럽 음악을 디제잉하는 마일즈를 통해 미스테리오발 미래 기술을 경험할 수 있다. 피터와 MJ, 해리가 코니 아일랜드를 추억의 놀이공원을 반추하는 것과는 상이한 체험이다. 마일즈의 브루클린 나아가 뉴욕이 그가 경험하는 사건과 관계 맺는 인물들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플레이어에게 뉴욕은 어떤 곳일까? 혹자는 실제 뉴욕을 경험해본 이들이 게임을 통해 재현한 공간을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를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것은 재현물이 얼마나 실재적인(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한 입장에서 개인적인 즐거움은 뉴욕이라는 로컬리티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기호, 이미지, 기술과 같은 매개체의 역할이 수행하는 바를 확인하는 과정에 있었다. 심비오트 둥지가 조형물처럼 서 있는 뉴욕 경관을 윙슈트를 입고 날아가면서 볼 수 있는 경험은 오직 이 게임만이 재현하는 스파이더 세계관에서의 뉴욕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역으로 게임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뉴욕에 대한 궁금증과 미디어 이미지에 기반을 둔 향수를 경험하기도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 Back 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24 GG Vol. 25. 6. 10. ※ 아래 내용은 <위니언 바이러스>, <두근두근 문예부>, < KinitoPET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Welcome to the playground [1] : 0과 1이 만들어낸 공간 Welcome to the playground, follow me Tell me your nightmares and fantasies 놀이터에 온 걸 환영해 날 따라와 너의 악몽과 환상에 대해서 말해줘 Sink into the wasteland underneath Stay for the night, I'll sell you a dream 지하의 황무지에 가라앉아 / 하룻밤만 지내 내가 너에게 꿈을 팔게 [2] *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 속 ‘다크웹’으로 묘사된 공간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믿’어야 작동하기에, 공포의 신화 다수는 힘을 잃었다. 러브크래프트가 언급했듯,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관련된다. 역으로 말하면 폭로되고 정복된 공포는 더이상 공포로서 그 권능을 행사하지 못한다. <주술회전(2018)>, <체인소맨(2020)>과 같은 현대 이능 판타지물 속 빌런-저주 혹은 악마-의 힘이 사람들이 그것을 공포로서 ‘믿’는지 ‘안 믿’는지에 따라 비례 또 반비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구태의연한 괴담과 귀신 혹은 과학으로 해명된 이상 현상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현대 콘텐츠들이 대체세계 혹은 SF로 서사적 배경을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이로 미루어볼 때, 미지의 공간이자 미개척지인 사이버 공간이 공포의 공간으로 설계되는 것은 효과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공간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개척해나간 게임은 다수 있다. 흔한 비주얼 노벨인 줄 알았던 <두근두근 문예부(2017)>는 연애 시뮬레이션의 외피를 배신하고 게임 중반부부터 그 노선을 호러로 급선회한다. 그 중심에는 프로그램과 현실세계 사이에 갇혀 플레이어에게 집착하다 못해 인터페이스를 넘나들고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모니카란 캐릭터가 있다. 한편, 속 귀여운 시스템 비서인 줄만 알았던 ‘키니토 펫’은 사실 그곳에 오랜시간 갇혀 있던 존재였고, 더이상 혼자가 되기 싫어 플레이어를 그곳에 붙잡아 두려 기존 윈도우 시스템을 활용해 온갖 공포를 안겨준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 속 공간이 실존한다는 가정을 하나의 설계도법으로 채택한 게임들은, 단지 ‘낯섦’의 그것이 인류 공포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단 이유로만 그것을 채택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공간은 몰락한 공포의 신화를 되살려낼 수 있는 미개척지로서의 의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일까. 어떤 ‘공간’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 <위니언 바이러스(2024)>는 이에 대해 유의미한 답을 주었다. Liminal Space : 경계공간이란 공포 <위니언 바이러스>는 큰 틀에서,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다운받은 유저-플레이어-가 일반 육성게임처럼 평화롭게 어린 다섯 위니언을 기르게 되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위니언이 죽거나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사실 그 뒤엔 더 큰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위니언 키우기” 플레이 화면 우선 게임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상상력 ’생명을 가진 데이터’란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두근두근 문예부>, 과 같은 심리적 호러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 와 같은 SF적 질문을 던지는 게임과 영화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상상력이다. 1966년 개발된 내담자 중심 상담 인공지능 일라이자(ELIZA)가 그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인격체로 착각한 현상에서 유래한 ’일라이자 효과‘는 이런 상상력이 연출로써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명한다. 일라이저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프로그래밍으로 짜여진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그에게 영혼을 부여하게 하고, 애착하게 만들며, 결국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다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친숙함으로써의 일라이저 효과를 넘어 공포를 연출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그 효과를 활용한다. 컴퓨터 뒷세계에 놓인 구식 CRT 모니터는 위니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니언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는 데이터 형태의 생명체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복감과 우울감을 느끼며, 육체 또한 지니고 있어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그러니 부디 위니언을 데이터가 아닌 생명체로서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노이즈 낀 소리, 불길한 단조 bgm, 검은 배경에 강조되는 암시와 같은 특정 붉은 단어의 이 컷신은 플레이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복선이 된다. * 게임은 여러 테마를 동원해 플레이어에게 위니언이 ‘생명체’임을 강조하고 환기한다. 바이러스에 의해 정신과 육체가 잠식되어버린 픽스(Fix)의 해리성 장애와 사이코패스적 행동은 다섯 어린 위니언들이 겪는 비극의 단초가 된다. 호전적이던 평소의 성격이 극단적 부정성으로 반전된 픽스는 가장 밝았던 아이온(I-on)을 표적 삼아 폭력성을 표출한다. 때리고 할퀴는 것을 넘어서, 감정적으로 몰아붙여 협박하거나 스토킹하고, 그것도 모자라 재생이라는 위니언의 육체적 특질을 악용해 식인이란 만행을 저지른다. 가장 약하게 태어난 디버그(Debug)의 여린 마음을 또 다른 타깃으로 삼은 픽스는 디버그의 자해 습관을 약점 삼고 다른 위니언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가스라이팅을 일삼는다. 이도 성에 차지 않는지 픽스의 폭주는 죽은 아이온의 시체를 인터페이스 너머 점프스케어로 매달아 전시하는 사건으로 결국 정점을 찍는다. 난도질당한 피범벅의 시체, 이등신 도트 안에 들어있던 실제 같은 장기들. 호러 게임이 으레 그러듯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진저리칠 만큼 끔찍하고 고어하게 연출된다. 이제 위니언은 더이상 우리가 알던 16bit의 귀여운 그들이 아니다. * 아이온의 희생과 그것을 잔인하게 전시하는 연출 알록달록한 16bit의 외피가 울컥 토해낸 뜨끈 물컹한 내용물에 플레이어는 단지 ’호러’란 두 글자로는 채 다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공포감을 느낀다. 귀여운 도트 이등신 안에 들어차 있는 실제와 같던 육체의 흔적은 현실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참담할 만큼 정교하게 재현된 감정적 폭력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신체적 폭력과 훼손, 살인 행위는 현실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단지 영혼이 있음 직한 존재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소름 돋을 만큼 적확히 우리와 닮은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섬뜩함을 느낀다. 닮았을 뿐 같지 않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거리감으로부터 비롯된 애착은 이제, 우리에게 내제되어 있지만 늘 외면하고 억누르고자 했던 끔찍한 부분으로서 범람해온다. 이 잔혹한 유사성은 멀미와도 같은 섬찟함을 선사한다. 낯선 것에서 느끼는 억압됐던 익숙한 것의 귀환, 언캐니[Uncanny(운하임리히, Unheimlich)] [3] 이다. 뜨끈한 내용물의 매끈한 외피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공간은 차원이라는 지표로 크게 2D 공간과 3D 공간으로 양분된다. 2D 공간은 플레이어가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표면적 공간이며, 3D 공간은 그 프로그램 너머인 내 PC, 쓰레기통, 그리고 코딩됐지만 나타나지 않은 잠재적 공간이다. 서사진행의 주요부분을 차지하는 내 PC 즉, 프로그램 ‘뒷세계’는 무한한 복도와 그에 파생되는 무한한 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 구석에 CRT 모니터가 존재하거나 벽지 구성이 바뀔 뿐 공간은 림보한다. 그곳엔 복도를 오가거나 문을 여닫는 존재도,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복도를 통과하거나 문을 여닫을 목적도, 처음과 끝 출발지와 종착점이라는 시간개념도 모두 부재하는 곳이다. * 0과 1이 만들어낸 경계공간 이 공간은 <이스케이프 더 백룸(2022)>이란 게임 속 공간과 무척 닮아있는데 이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란 공간 구성적 미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경계 혹은 문턱을 뜻하는 리미널리티(Liminality)에서 파생된 이 개념은 경계공간에서 느끼는 방향감각의 상실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감각을 내포한다. 친숙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부재와 상실, 그로부터 오는 괴리감과 위화감은 <위니언 바이러스> 속 잠재공간의 특질이다. * <이스케이프 더 백룸> 속 리미널 스페이스 단지 데이터의 정렬뿐으로 이해된 공간은 가볍게 전복되며 그것만의 사이버 공간을 펼쳐 보인다. 그곳은 버려진 잉여 데이터와 사체들이 겹겹이 쌓여 분진을 일으키는 공간이며, 무한히 파생되고 인과가 뒤섞인 문과 복도를 지닌 미로 공간이다. 0과 1의 코드가 물적 콜라주로 산재한 해체적 공간이며, 코드 오류(Bug)가 아닌 벌레(Bug)가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의 공간이다. 부재와 해체를 설계 문법으로 채택한 이 공간은 0과 1을 넘어선 그것만으로 작동하는 기호적 공간 [4] 을 직조해낸다. 물론 플레이어는 합리적 이성으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 이 공간은 그저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들이 모니터의 액정패널을 통해 투사되는 것일 뿐이라고. 다만 그렇게 몇번이고 되뇌도 이 공간은 공포의 동력이자 권능으로서 작동한다. 편편하고 매끈한 2D의 공간에서 불완전하고 까끌거리는 3D 공간으로 내던져지는 기시적인 틈의 감각. 그것의 논리만으로도 작동하고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공간을 직조해낸 어떤 세계의 재림. 시뮬라크르 [5] 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Happy ever after : 아이러니적 벡터의 추동 다소의 희생이 있었지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좋은 결말을 맞이한다. 디버그와 보는 픽스의 기억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픽스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다. 최초 바이러스였던 시스템 위니언도 비지트(Bizit)라는 자신의 원래 이름과 기억을 되찾는다. 이후 부모 위니언으로서 다섯 어린 위니언들에게 저지른 폭력을 반성하고 삭제를 받아들이게 되며, 비대해진 뇌만 남은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서 풀려나게 된다. 돌연변이 양자 위니언 생산을 위해 육성 프로그램이란 탈을 쓴 불법 프로그램 “위니언 키우기”를 배포했던, 그렇게 위니언 무한 생산과 개조, 살육을 반복했던 WIN-S는 수사대상이 되었다. 남아있던 그리드와 보는 위니언 수사대에 안전하게 인계되어 국가 보호 아래 유능한 위니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행복했던 다섯 위니언의 한때가 엔딩 크레딧으로 올라간다. 에필로그는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 어린 위니언들이 쓴 애정어린 메일이 플레이어에게 도착하며 마무리된다. 더해서 이스터 에그인 픽스의 암호문구(I love my friends)를 보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역경을 딛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이다. * 감동적인 엔딩 일러스트 <위니언 바이러스>의 매끈하게 메워진 닫힌결말은 전형적인 마스터 플롯을 따르고 있다. 무너진 질서의 회복, 권선징악, 성장서사로 짜여진 이 플롯은 플레이어에게 서사적 완결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플레이를 마친 우리는 무언가 꺼림직한 기분, 미완되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해, 홀가분하게 ‘Happily ever after.’라 외칠 수 없다. 게임은 이미 완결됐으며 기대 층위의 종결을 완수했다. 서사는 더이상 ‘더 읽기’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6] . 다만, 이 엔딩이 끝이 아닐 거야-라는 반응이 다수 포착되는 커뮤니티의 반응처럼 우리는 그저 감각할 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위니언 바이러스>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무력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상황적 가짓수와 엔딩 기점으로 파생되는 인터렉티브 비디오 게임의 선지와 달리, <위니언 바이러스>의 선지는 표현만 다를 뿐 하나의 상황과 엔딩만을 허락한다. 때문에 플레이어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이고 엔딩에 대한 일말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론적 귀결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서사는 그정도로 완벽하게 닫혀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위니언 바이러스>가 공포를 설계하는 연출문법은 기대 층위의 종결을 이루어낸 서사를 애써 열어젖히며 ‘더 읽기’를 권유한다. 우리와 끔찍하리만큼 닮은 그가 그곳에 계속 살아 있을 것만 같다 [7] . 프로그램 너머 무한히 림보하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할 것 같다. 인터페이스 너머로 내민 손과 구조를 요청하며 내지른 그 목소리는 마치 이곳을 향해 뻗어있는 것만 같다.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것 같은 위니언들과 지금 이 순간도 림보하며 스스로를 직조해내는 컴퓨터 뒷세계. 무력하게 닫힌 운명론적 결말은 우리를 ‘덜 읽기’로 안내했지만, 바로 이 공간이, 기이한 공포감과 기호로 지어 올려진 0과 1의 공간이 우리에게 ‘더 읽기’를 권하며 손짓한다. 그렇게 닫힌 서사를 활짝 열어젖히며 그 틈을 벌리고 폭로하며 완결을 지연시킨다. 이처럼 공포의 서사와 공포적 연출은 <위니언 바이러스>란 하나의 게임 안에 조화로운 구성으로 녹아있지만, 그것이 가진 종결 층위에서의 힘은 정면으로 대치한다. 이런 낙차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적 벡터는 경계공간 속 실재의 균열을 추동한다 [8] . 최초의 의도성이 어찌 되었든, 그것은 현실에서 비현실로 미끄러지는 감각을 기민하게 포착해내는 우리의 감각적 센서를 툭 켜버린 셈이다. Your Reality [9] : 재현과 해체로서의 게임 But in this world of infinite choices / What will it take just to find that special day? 하지만 이 무한한 선택지의 세계 속에서 / 어떻게 해야 그 특별한 날을 찾을 수 있을까? And if this world won't write me an ending / What will it take just for me to have it all? 이 세계가 나에게 결말을 주지 않는다면 / 그냥 전부 다 내 것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10]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했던 서사에 대한 욕망, 좀더 명확하게는 서사의 종결성에 대한 욕망은 미완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인류의 오랜 욕망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 서사라 함은 늘 완결성을 보장해왔다. 시련이 있기에 성장이 있고, 타락한다면 추락할 것이며, 혼돈은 질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하나의 매끈한 플롯은 유기적으로 꿰어낼 수 없는 체험들과 종결이 결여된 카오스적 실재에 대한 필사적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결성을 서약하는 전통적 서사와 달리 실재 세상은 무의미성과 미완의 틈으로 가득 차있다. 앞서 말한 ‘Happily ever after.’를 후련하게 외치지 못한 그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낙차는 필연적으로 해체를 수반한다. 구조의 틈이 폭로된 순간 그것의 허물어짐은 멈출 수 없다. 영화 <인셉션(2010)>에서 꿈을 자각하는 순간 애써 설계한 광활한 꿈 공간이 산산이 붕괴 되는 장면처럼. 이로 미루어본다면 <위니언 바이러스>는 설계하는 동시에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게임은 기이하도록 우리와 닮은 위니언이란 존재를 만들어내고, 0과 1의 벽돌을 쌓아 경계공간을 지어 올린다. 그 기호 자체만으로도 작동하는 기호의 세계는 마치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의 재현, 아틀란티스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위니언 바이러스>는 그에 뒤따르는 기이한 공포감과 부재가 종결된 서사성과 맞부딪히며 아이러니적 벡터를 만들고, 그 동력은 지어 올려진 아틀란티스를 스스로 해체 시킨다. 그것은 마침표 대신 반점을, Happily ever after 뒤에 물음표를 붙이게 한다. 플레이어는 플레이란 체험을 통해 0과 1로 지어진 경계공간을 건설해내는 동시에 허무는 주체가 된다. 이는 필히 종결된 미완이란 모순적 체험을 가능케 하고 ‘더 읽기’란 행위로 이어진다. 닫힌 동시에 열어 젖혀졌기에, 우리는 서사와 연출로 구성된 게임, 플레이란 체험 전반, 그리고 그 둘의 사이를 씨실과 날실로 엮어내며 독자적으로 핍진한 어떠한 궤적을 덧그려내는 체험에 참여하게 된다. 디버그와 보는 정말로 안전히 보호받고 있을까. 희생된 아이온과 픽스 그리고 디버그는 위니언들의 내세로 갔을까. 어떤 다른 어린 위니언은 여전히 버그에게 쫓기며 그 으스스한 뒷세계를 계속 림보하고 있지 않을까. 비지트가 개조된 끔찍한 그 모습은 인격체를 수단화하는 현대사회와 단적으로 너무 닮아있는데. 게임 속 세계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곧 존재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곁에 어떤 위니언은 또 어떤 뒷세계는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닐까. 질문은 상이하더라도 그것은 지연되는 완결성이란 하나의 줄기로 모인다. 종결과 미완이 꼬리잡기하듯 서로가 서로를 뒤따르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마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서사와 연출의 낙차를 통해 <위니언 바이러스>가 가능케 한 이런 일련의 체험을 가히 ‘차연적’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1] . Spinning glove [12] : 무한히 덧그려 나아가는 물음 완결성(完結性)과 미완성(未完性)은 낙차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벡터의 대항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 [13] 게 한다. 질문 층위의 열림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 생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서사의 첫 희생양이자, 양자 위니언으로서 그 모든 가능성을 안고 있던 ‘아이온(I-on)’의 이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고 화학에서의 이온(Ion)과 양자 컴퓨터 스마트업의 아이온큐(IonQ)가 그 예이다. 화학 분자로서 이온(Ion)의 의미로 보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매개자이자 전이자, 변화의 축이란 의미에서 서사적 역할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아이온의 죽음으로 인해 서사는 급물살을 탄다. 한편, 과학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다른 유래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온(Aion[Αἰών])’이란 그리스 신화 속 우주와 영원의 신이다.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대비되며 영원히 끝나지 않고 순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사를 인과로 조직해내는 시간이 아닌 존재 전체를 감싸고 맴도는 시간-아닌-시간이다. 즉,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차연하는 시간성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완전히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은 시간. 그 안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해석은 지연되며 서사는 열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위니언들의 이름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픽스는 ‘수리하다(fix)’라는 관점에서, 최초 바이러스인 시스템 위니언의 난폭함을 바로잡고 그 부당한 현실을 수리하기 위해 디버그 대신 자신이 희생되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택은 오히려 희생의 고리와 죄책감으로 인한 비극을 고착화하고 앞당기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을 수리하고 고쳐내 다시 ‘다섯 위니언들이 행복하게 지내던 평화로운 시간’에 영원히 ‘고정(fix)’되는 걸 가장 간절히 바랐던 픽스이지만, 그 바람은 오히려 가장 큰 비극으로 돌아왔다. * 빨간색 픽스로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디버그, 보, 그리드. 가장 가운데는 노란색 아이온. 픽스가 ‘고정(fix)’한다면 디버그는 ‘해체(debug)’한다. 프로그래밍 중 발생한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디버깅(debugging)에서 유래한 그 이름은 뜻대로, 이 비극의 실타래를 푸는 데에 디버그가 전면으로 내세워진다. 다만 시간은 디버그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결국 디버그는 몸과 마음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 위니언은 감정을 가진 존재였기에, 디버그는 죄책감으로 난도질당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픽스라는 고정값과 디버그라는 해체값이 그렇게 덧셈과 뺄셈의 과정을 거쳐, 서사는 0이란 균형의 국면을 맞는다. 이후 남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위니언이자, 최종 생존자로서의 위니언은 그리드(Grid)와 보(Bo)이다. 격자무늬, 신경망의 알고리즘과 같은 ‘규칙(Grid)’으로 읽히는 그리드는 0으로 돌아온 세계를 다시 규칙으로 지어올리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주변값을 기반으로 추정해 자연스럽게 채워 넣는 ‘보간법’에서 유래한 보의 이름은 틈을 메꾸어내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무너진 규칙을 세우고 틈을 메꾸는 행위. 이 흐름은 앞서 언급한 닫힌 서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이온-픽스-디버그-그리드와 보라는 순서로 보자면, 아이온-그리드와 보는 전적으로 대비 된다. 이름의 축으로도 설명될 수 있듯, <위니언 바이러스>는 낙차를 만든다. 그렇기에 그 기이함과 부재의 경계공간이 선사한 공포라는 순간적 감각은 질문이라는 영속적인 감각, 즉 아이온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도착하게 된다. 질문이란 관점에서, 제목 자체가 질문의 형식을 가진 지브리의 2023년 작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언급하고 싶다. 제목이 발표된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가지는 어조 탓에 어떤 교조적인 교훈이 담겼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개봉 후, 지브리의 전작들과 달리 조금 난해 하다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반응과 함께 제목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단 반응으로 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은 정형화된 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관객에게 물었다. 꼭 바이트 상 존재하긴 하지만 화면상에 표시돼 존재하지는 않는 Null 값처럼. 질문에 대한 답은 비어 있었다. 작품 속 마지막 장면, 마히토는 환상을 빠져나왔음에도 그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현실-환상-현실 구조의 마스터 플롯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다. 이에 마히토를 환상 속으로 이끌었던 매개자 왜가리는 “혹시 뭐 가져온 것이 없”냐고 묻는다. 그에 마히토가 주머니에서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돌을 꺼내 보이자, 왜가리는 그것을 “강력한 부적”이라고 칭하면서도 “다행히 힘센 돌은 아니니까, 점점 잊을거고, 그거면 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돌”은 저쪽 세계에서의 서사는 종결됐지만 그 세계를 계속 기억하도록 하기에 미완의 서사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그것이 “강력한 부적”인 까닭은 지연된 질문은, 그리고 계속해 지연될 질문은 이제 그 자체로 열린 채 생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왜가리에게는 안타깝게도 마히토는 “점점 잊”는 것이 아닌 환상과 현실 그리고 그 잔여를 기억하고 또 품으며 열려있는 텍스트로서, 질문으로서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질문으로서의 무너뜨림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게임은 서사와 연출, 체험과 그 체험을 나누는 담론이 유기적으로 흘러 오가는 매체이다. 그 모든 것은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의 직접적이고 실감 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층위가 만들어내는 색채는 여타 다른 매체보다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시대와 함께 나아가며 그것을 충실히 흡수하기도, 때론 재치 있는 전복을 해내기도 하는 역동성은 분명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을 설레게 하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무수한 층위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게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물을 수 있는 공간을 활짝 열어 보일 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 곡 속 ‘세계’를 의미하는 ‘Globe’ 앞에 붙은 수식어 ‘Spinning’처럼. 아이온의 시간 속에서 지연되는 물음으로. 질문으로서의 질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려나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전부이고 최선이라는 듯. 우리는 그렇게 게임이라는 체험적 감각을 덧그려 나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ㅁ [1] ost “Playground” 가사 일부 [2] 악몽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자운-으로의 초대 서곡으로 쓰인 이 곡은 마치 어떤 공간 속으로 플레이어를 초대하는 게임의 초대장과도 닮아있다. 게임이 초대하는 그곳은 놀이터이자 꿈이며 0과 1로 지어진 공간이다. [3] 유진월, <비바리움>의 부조리한 세계와 출구 없는 삶의 공포 : 언캐니와 그로테스크를 중심으로, 횡단인문학(9), 2021, p216. [4] 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HUINE(2016). p.90. [5] 위의 책, p.114-115. [6] 독자는 텍스트를 주도적으로 읽기 시작할 때 그것을 향한 힘을 필연적으로 행사하게 되는데, 그 형태는 ‘덜 읽기’와 ‘더 읽기’로 크게 나뉜다. ‘덜 읽기’는 서사 속 존재하는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해석적 종결을 짓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돼있다. 한편, ‘더 읽기’는 마스터 플롯에 의해 촉발된 정동이 드러낸 틈을 자발적으로 메우고자 하는 행위로, 그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69-177. [7] 실제로 게임의 중반, 평화롭던 분위기가 점점 호러로 발돋움할 무렵, 위니언 상식을 설명하는 화면과 별개로 “WE ARE ALIVE HERE”라는 보이스가 겹쳐지며 플레이어를 놀라게 한다. [8]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샘』, 한충수 역, 이학사(2022), p.93. [9] 마찬가지로 경계공간이란 설정을 사용한 <두근두근 문예부>의 엔딩 곡. 처음부터 끝까지 음성 없이 텍스트로만 진행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직 모니카만’의 목소리를 해당 곡에 입혀지는 보이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10] 플레이어를 향한 모니카의 집착적 애정이 드러나는 곡이지만, 이는 무수한 선택을 반복할 수 있는 게임과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의 현실세계(your reality)의 ‘차이’를 인정하고 플레이어를 떠나보내며 스스로 게임 데이터를 모두 지워나가는 모니카의 선택 또한 드러나는 곡이다. [11] 이조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인식론과 선」, 禪學(23), 2009, p335. [12]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엔딩 곡 영어 제목. 원제는 지구본(地球儀). [13]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26-12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김성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 [논문세미나] 즐거움과 죄책감 사이에서 게임하기: 인도 남성 청년들의 게이밍 하위문화와 문화적 불협화
이번 글에서 다룰 논문은 인도 라자스탄 주의 우다이푸르라는 소도시에서 성인모색기(emerging adult, 유년기와 성인기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남성 청년들의 게이밍 하위문화를 풀어내고자 하는 글이다. <대항문화로서 인도 게이밍 존(Indian Gaming Zones as Oppositional Subcultur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온라인 게임 플레이가 우다이푸르 청년들에게 어떻게 게이머라는 대안적 하위문화 정체성을 제공하는지, 그리고 이들은 즐거움과 죄의식 속에서 왜 게임을 그토록 중독적으로 경험하는지를 탐색한다. < Back [Journal Club] Gaming Between Pleasure and Guilt: The Gaming Subculture and Cultural Dissonance of Young Indian Men 30 GG Vol. 26. 6. 10. TEXT: Snodgrass, J. G., Dengah, H. F., Upadhyay, C., Else, R. J., & Polzer, E. (2021). Indian Gaming Zones as Oppositional Subculture: A Norm Incongruity "Cultural Dissonance" Approach to Internet Gaming Pleasure and Distress. Current Anthropology , 62(6), 771–797. "The moment of feeling guilty while doing what you love" arrives more often than one might think. Especially when what you have to do and what you want to do do not coincide, and when the latter is regarded as socially undesirable. For young gamers who have grown up loving games, this ambivalence is probably no stranger. As fandom, punk, and otaku cultures once were, games too are, for some, a cultural practice that offers the most intense pleasure and sense of belonging. Yet that very pleasure also collides with the social prejudice surrounding games, breeding anxiety and guilt. In this way games have, at the intersection where pleasure and stigma, belonging and anxiety cross, conversely driven an even stronger addictive immersion—and as a result have formed a subculture that shares norms and an identity all its own. The paper this piece takes up sets out to unpack the gaming subculture of young men in emerging adulthood (the transitional stage between childhood and adulthood) in the small city of Udaipur, in the Indian state of Rajasthan. Bearing the title "Indian Gaming Zones as Oppositional Subculture," it explores how online game play offers Udaipur's youth an alternative subcultural identity as gamers, and why they experience games so addictively amid pleasure and guilt. Background and the Cultural Dissonance Perspective This study sets out to view the phenomenon of "game addiction" through the lens of medical anthropology, which studies a particular social group's illness or suffering within a cultural and social context beyond the merely physical. To explain the ambivalent phenomenon of Udaipur's youth becoming ever more fervently immersed in games even while wracked by anxiety about the future, the researchers draw in part on the concepts of the medical anthropologist Dressler. Dressler held that what determines an individual's physical and mental health includes not only material factors such as income, nutrition, and access to care, but als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ultural values an individual holds and the social expectations surrounding them. To this end he developed the concept of cultural consonance, which shows how closely an individual matches the beliefs and behaviors grounded in their own cultural values to the cultural model shared in society. That is, the concept of cultural consonance shows that an individual's health can vary according to "whether they can actually realize the cultural life they believe to be important." So what becomes of an individual placed in a situation where cultural consonance fails to occur—where the values they hold important and society's expectations diverge? For this, the researchers add to cultural consonance the psychological concept of cognitive dissonance (the tendency of an individual to suffer when they cannot remove the incompatibility between their beliefs and attitudes), developing the perspective of cultural dissonance. Through this concept, the study seeks to read Udaipur youth's gaming subculture not as the addiction or antisocial avoidance of a simple pathologizing discourse, but as a psychosocial negotiation that tries to minimize the conflict between online and offline life. Next, it is worth noting the sociocultural background of Udaipur, India, against which this piece is set. The study's participants are Indian men in their early twenties, either in their final year of high school or attending university. According to the authors, young Indian men up to the age of twenty-five are basically regarded as student- brahmacharya —occupying a stage of preparation for becoming the head of a household. Most of Udaipur's youth marry through arranged marriage, and until then they live under pressure to acquire both the means to provide as a head of household and the ability to secure a good bride. Most, even after marriage, live with their parents or, even if they move out, stay close to them and are positioned to support them. In such a society, where the role of the (prospective) head of household is strongly imprinted, the act of enjoying games is readily defined as an "addiction" that easily diminishes a young man's reputation and jeopardizes his future career or marriage prospects. Meanwhile, Udaipur is a place where access to social media and games is reasonably well established, thanks to the spread of mobile phones, Wi-Fi, and internet technology. Many participants could therefore enjoy online games like Counter-Strike without difficulty in offline spaces such as gaming zones. A "gaming zone" is an in-person gaming café in India, similar to a Korean PC bang, equipped with high-spec networks and PC hardware. Most participants, though middle class or owning a PC at home, nonetheless visited these places together with friends, playing while interacting with online users through text and voice chat. Most young gamers showed themselves struggling to become "true gamers," clocking in at the gaming zone daily—to the point that some treated every Sunday as "Full Rush day" and played all day long. Methods To analyze its subject, the study combined at least three research methods. First, to explore the process by which Udaipur's young men become immersed in games and acquire a gamer identity, the researchers conducted an ethnography accompanied by participant observation over six weeks across three gaming zones. The regular players—generally about twelve to fifteen at each zone—became the focus, with observation accompanied by field notes carried out in the morning and evening for at least an hour and a half and at most about three hours. Second, they conducted informal interviews with the youth who regularly appeared at the gaming zones. The interviews sought to cover not only their accounts of gaming and gamer identity but also the pressures of career and marriage they faced in life. Third, through a survey they identified the four core components of the "true gamer" identity model these youth pursued, and sought to grasp how these components connected to their positive and negative gaming experiences. The four core components are the four elements revealed in the ethnography described below (having close gamer friends, a sense of connection to the global gamer community, the dream of becoming a pro gamer, and a sense of belonging to the gamer subculture), while positive and negative gaming experiences were measured using a 21-item instrument following Dressler's methodology. In this process the researchers hypothesized that the closer Udaipur's youth felt to the true-gamer identity, the more they could experience not only positive gaming experiences (pleasure) but also negative ones (the distress that accompanies it). Finally, performing a measurement based on the three analyses above, they derived a cultural model of the positive and negative gaming held by Udaipur's youth and sought to analyze how it aligned with individual health outcomes. Ethnographic Methods and Findings Everybody Knows Everybody First, India's gaming zones had settled in as powerful spaces of friendship for Udaipur's youth. They came at first in search of a good environment for gaming, but over time they became so close as to be like family, each knowing everyone else. They spend more than half their time at the gaming zone not as players but as "spectators." While spectating they shout instructions and commands to teammates or online friends, and during breaks they drink tea or smoke and discuss the next strategy. At the gaming zone they interact by cursing, shouting loudly, teasing, and playfully hitting one another—behaviors not easily tolerated in public spaces until now. Most of them write their names on their cigarettes with a marker and keep them in the gaming-zone owner's drawer. The cigarettes, tea, and snacks traded at the gaming zone likewise serve as an informal "currency of friendship." The Global Gamer Community Udaipur's youth formed friendships and communicated with diverse players around the world through the global game platform Steam. Most participants played Counter-Strike: Global Offensive , and the global network they encountered there made them transcend their national and religious identities. A guildmate living in Iraq might come into the game and relay the news that fighting in his country had quieted down; they might naturally team up and play with Pakistani Muslims. For as long as they played here, they were simply "gamers," and other affiliations such as caste, religion, or geography were secondary. Participants enjoyed using Hinglish (the Indian English of native Hindi speakers) during play to display their command of English and their fluency in game knowledge. The points at which they distinguished themselves as "true gamers" from others were their passion for gaming, the English ability that created a global sense of belonging, and a particular pattern of consumption (symbolized by cigarettes, energy drinks, and junk food) by which they could define themselves as "addicts." Dreams of the Digital Age What benefits did participants feel games offered? They answered that gaming gave them passion, motivation, and a competitive drive that could help them in life. They took particular pleasure in the process of honing and steadily improving their skills. To this end they regularly watched live broadcasts of matches between famous teams, and stocked up on cigarettes and energy drinks as essentials for staying awake long hours. The gaming-zone owners, too, knew their passion and even organized local matches between zones. Intriguingly, most of Udaipur's "serious gamer" youth dreamed of debuting as pro gamers. Indian pro esports teams—like the "Indian Wolves," who became famous for playing Dota 2 —were a great inspiration for such dreams. To go pro is to be able to do what you love and, on top of that, to win the very title of "true gamer" you had so wanted. Yet at the same time they were partly aware that, coming from a small city with almost no support for games and an unstable internet, such a dream was unrealistic. Gaming as Subcultural Escape As mentioned earlier, at the gaming zone Udaipur's youth gained a kind of freedom not tolerated elsewhere in society. At the gaming zone alone, every activity was permitted—screaming, fighting, cursing, behaving roughly, and eating and drinking whatever they wanted. Many participants therefore located the pleasure of games in being able to flee the real world, forget their problems, and pass the time. Such answers are grounded in a perception of reality in which most youth feel they "have no future," as Udaipur's unemployment rate soars sky-high. Good jobs are hard to come by, marriage is in any case already foreordained through a parent-arranged match, and once they marry and become heads of household, their gaming life ends entirely. The space of the gaming zone, therefore, functioned as a kind of magic circle—temporarily separated from social norms—able to offer participants liberation or a cultural alternative from the oppressive circumstances they wished to flee. And precisely for that reason, paradoxically, this space remained importantly connected to the real-world spaces and concerns that participants would have to face again. Social Moral Panic: The Discourse of "Technological Addiction" and Emotional Distress As noted earlier, in the Hindu discourse of brahmacharya , games are regarded as an act that can ruin an important period of life-preparation. To play games during the time when men ought to be controlling and managing their "animal" impulses as much as possible before entering the household is, in itself, an unrestrained waste of time. (This was a view internalized even by the researchers, who had lived in Udaipur for decades; one researcher of traditional Brahmin background felt discomfort, during the participant-observation stage, at participants' unrestrained cursing and chain-smoking.) Moreover, the context in which games are condemned in Udaipur society is bound up, beyond the role norms of the male head of household, with a "(generational) condemnation of technology." Some of Udaipur's older generation remarked that the internet exerts a harmful influence on Indian society and that ninety percent of youth are mired in pointless internet addiction. This connects, too, with established perceptions of gender norms: that the internet draws young men and women into inappropriate relationships and, by copying Western lifestyles, has induced a trend of premarital sex and rape. The examples of proper internet use this society offered were limited to using the internet to prepare for certification exams and to learn a future trade. Surrounded by such social perceptions, most participants recognized that they were, in some form, addicted to games. Many had played a hundred hours straight without eating or sleeping, and many failed to keep up their studies—their grades falling because of games, or being barred from class for failing to meet attendance requirements. Even as they constantly explained their gaming with "we just have to do it" ( karna to hai ), they were quick and unhesitating to label themselves and their friends addicts or time-wasters. Survey and Measurement Analysis First, descriptive statistical analysis of the survey sample showed that respondents' positive gaming experiences were slightly higher than their negative ones. They felt an adequate sense of social belonging and support through the online community, but this did not mean they felt greatly lonely in their offline lives either. At the hypothesis-testing stage, the researchers examined how the four elements of the true-gamer behavioral model—having close gamer friends (H1), a sense of connection to the global gamer community (H2), the dream of becoming a pro gamer (H3), and a sense of belonging to the gamer subculture (H4)—connected to positive and negative gaming experiences. Among respondents, the stronger the first three variables, the more positive gaming experiences were reported. By contrast, a sense of belonging to the gamer subculture emerged more strongly as negative gaming experiences increased. This shows that the pleasure of gaming respondents feel also derives from belonging to a gamer counterculture that departs from the norms of mainstream Indian society. The most important point in this analysis is that, overall, positive and negative gaming experiences were strongly positively correlated. The majority of players with high positive play experiences had, at the same time, high negative play experiences, and each variable that drove positive play experiences was linked to higher negative gaming experiences. That is, in the gaming experience of Udaipur's young men, the two are not fundamentally opposed experiences but closely interrelated. Conclusion In this way, the ambivalent feelings of Udaipur's youth toward game play show that the positivity and negativity of games are not opposed perspectives, and at the same time can be read as the two faces of the "cultural dissonance" these youth experience within the gamer subculture and mainstream society. The incompatibility of the two worlds—subculture and mainstream society—is the very mechanism that splits participants' identity and consciousness in two. That they acknowledge the inherent risks even as they play shows that they are not simply isolated and sunk in the world of games, but always play on the premise of a connection to the outside world. At the same time, the researchers explain that Udaipur youth's signifying their own gaming as "addiction" is yet another way of minimizing the cognitive and emotional dissonance they face. Between the true-gamer identity and the performance of the masculinized normative role expected of them as part of Indian society, by signifying the former as a temporary addiction, they raise their future life to a relatively superior position and seek to minimize as much as possible the suffering, stress, and discordant sensations they undergo in the present. Finally, the researchers hold that the analysis of Udaipur youth's gaming experience as subculture expands the analytical lens on gamers. Until now, the problem of game addiction has been treated from a biomedical perspective as a matter of mental illness like drug or gambling addiction, or, when treated from a cultural perspective, as something like a triggering mechanism of a "moral panic" that fosters consumerism and threatens the morality of youth. But the authors argue that the very situation in which this study's participants insist "I am dangerously addicted to online games myself" renders the social-panic theory of gaming addiction incomplete. In Closing The authors' "cultural dissonance" perspective on Udaipur's youth shows, I think, the researchers' intellectual effort not to judge a particular subcultural group on the basis of a resistance-versus-submission binary. The culture these youth displayed at the gaming zone does in part oppose the norms of dominant masculinity that mainstream Indian society assumes, but at the same time they also partly internalize the stigma of being social outcasts, or "losers," who have strayed from the mainstream. Their doubled situation—neither fully assimilated into mainstream norms nor fully escaping them—manifests as the act of demoting their present position to that of a temporary addict (since they will give up gaming life in the future anyway). That said, since this is fundamentally a piece focused on how to discuss the problem of game addiction in a direction different from existing cultural approaches, it remains a limitation that the analysis of the oppositional character of Udaipur youth's subculture is not deepened. In that respect, the observation of Lesley Jo Weaver, one of the paper's principal reviewers, is highly meaningful. What the paper should have discussed further is a deeper analysis: beyond youth simply acknowledging the fact of their addiction, what they actually think about this dissonance and how concretely they try to resolve it, and further, what relationship the gamer community ultimately forms with India's patriarchal society. In particular, inasmuch as this paper recalls Paul Willis's Learning to Labour in various contexts, there is a need to take up in earnest how their cultural dissonance reproduces—or escapes—the broad norms of male-centeredness and machismo operating in the larger cultural context of Indian society.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isu Kim Studies a range of fields—culture and knowledge, space, and the academic field. Also interested in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ves of gamers.
-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 Back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01 GG Vol. 21. 6. 10. 미술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아주 짧게 정리하자면 원근법은 3차원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재현할 때 필요한 방법으로, 입체인 3차원 세계를 실제로는 입체가 아닌 2차원 평면 위에 재현하면서 마치 입체인 것처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기도 하다. 화면 안에 적용된 원근법은 화면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드(grid)로 분할한다. 그리고 이 그리드를 기반으로 대상의 크기나 비율, 선명도, 색상, 명암의 방향 같은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원근법은 무엇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관객의 눈은 어디에 어떻게 참여할지 같은 질문들, 더 나아가 화면의 전체적인 풍경을 결정하는 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리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린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 안의 모든 것이 배치되는 규칙, 어떤 것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를 결정하는 화면 구성의 내적 논리의 설계 방법론이다. 우리의 눈과 뇌는 화면이 제공하는 원근법에 의거하여 화면 내부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인식하고 그 내부의 공간감에 우리의 신체를 동기화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입체감을 가지지 않는 평면 매체에서 원근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 회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원근법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은 언제나 기묘하거나 이상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모니터라는 평면을 사용하는 게임에서는 어떨까? 게임 내 원근법과 캐릭터의 이동, 크기, 비율 문제는 우리의 플레이 경험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MMORPG 게임의 경우 몬스터가 아닌 이상 혹은 몬스터조차도 배경 세계의 원근법에 착실히 순종한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게임이 설정한 휴먼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며 캐릭터를 제외한 인게임 요소들, 예컨대 건축물, 아이템, 탈 것, 펫, 배경 같은 것들도 캐릭터의 크기에 맞추어 하나의 완결되고 고정된 원근법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한다. 반면 1인칭 FPS 게임에서는 이 원근법이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서든어택이나 오버워치 같은 게임들에서는 주로 화면 정 가운데에 십자 모양이나 원, 탄젠트형의 에임(aim)이라고 부르는 조준점이 있다. 이 에임에 맞추어 1인칭 플레이어의 무기를 든 손이 정렬되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1점 투시 원근법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면 중앙에 소실점(vanishing point) 하나가 놓이는 1점 투시 원근법의 제1규칙, 가장 중요한 것을 소실점에 놓는다는 규칙은 회화에서 수차례 변용되었고, (프레임이라는 천성 때문에 회화에서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지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무엇을 둘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이런 게임들이 상정하는 게임 내 원근법은 우리의 실재와 최대한 유사하게 조성한다는 하나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게임들의 카메라가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 시야로 날뛸 수 있느냐에 상관없이, X축과 Y축은 고정되어 있다. 아주 잠시 이색적인 뷰로 한 장면을 비춘다고 하여도 플레이의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는 X축과 Y축이다. 그러나 AOS 게임의 경우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도타나 카오스(CHAOS),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같은 게임들이 포함되는 AOS 게임의 경우 축약되고 매우 인위적으로 가공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용하며 이미 우리의 실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원근법, 그러므로 쉽게 도식화하기가 곤란한 형태의 원근법이 화면을 구성한다. 내가 가장 많이 플레이 해 본 리그 오브 레전드를 두고 논의를 좁혀 보자. 일반적으로 2차원 평면을 사선으로 기울인 쿼터 뷰(Quater View)를 사용하는 2.5차원 게임에서 X축과 Y축은 마름모 모양의 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맵을 비교해 보면 전자의 맵은 다이아몬드형, 후자의 맵은 정사각형으로 보기에 약간 다르지만 쿼터 뷰 게임이 설정하는 X축과 Y축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의 협곡 지도 (출처: 좌-쿠키런 킹덤 공식 유투브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VUIy7RaHcL4, 우-리그오브레전드 나무위키 https://namu.wiki/w/소환사의%20협곡)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특히 더 흥미로운 것은 이 Y축이 Y축이 아니라 X축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있다. 퀸의 ‘후방지원’이나 자야의 ‘저항의 비상’ 같은 특정 챔피언의 특정 스킬은 X축 면에서 도약하며 (미니)맵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인게임 Y축을 가시화한다. 아예 Y축의 패러미터를 벗어났다가 돌아오는 형식의 스킬을 사용하는 갈리오나 판테온 같은 챔피언들도 있다. 아주 얕은 수준이지만 렉사이 같은 챔피언은 X축 평면 아래, 즉 -Y축의 공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의 시점을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2.5차원 쿼터 뷰로 설정하면서, 앞서 언급한 챔피언들이 스킬 사용으로 지면을 도약하면서 인 게임 원근법을 떠받치는 X축과 Y축이, 그리고 숨겨져 있던 Z축이 등장하며 서로 뒤엉키게된다. (좌, 그림 2) 쿼터 뷰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우, 그림 3)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챔피언이 지면을 도약하면 지면 위에서 이동 시 Y축이 자연스럽게 Z축으로 변하고, 챔피언이 도약하는 방향은 Y축으로 새롭게 등장한다. 챔피언은 X축의 연장된 면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X축의 방향이 달라지고, 여러 개의 방향이 이어지면서 X축은 (그림 2의 Y축이었던) Z축까지 가 닿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근법에 상관없이, 각 라인은 미니맵에서 보여지는 순서대로 탑-미드-바텀이다.) 즉, 리그 오브 레전드의 원근법은 고정된 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게임의 원근법은 캐릭터의 이동과 도약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축들을 뒤섞는다. 플레이어는 평균 20분의 플레이 타임 안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유동적인 축들에 놀랍도록 매끄럽고 빠르게 적응하는데, 이는 이전의 초지일관(初志一貫)적 시각성과는 물론 다른 양상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하나의 세계가 제공하는 원근법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다시 저것에서 이것으로 전환되는 유동적인 원근법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우리의 변화된 시각성이기도 하다. 이에 덧붙여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스킨이나 캐릭터의 크기가 스킬의 적중 여부를 좌우하기도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챔피언 스킨 때문에 게임 내에서 챔피언의 크기와 부피, 모양, 그리고 스킬의 크기와 부피가 달라지면 조준의 방법도 미세하게 바뀌게 된다. 최근 추가된 서리불꽃 건틀릿(Frostfire Gauntlet) 같은 아이템에는 챔피언 크기를 키우는 옵션이 달려 있다. 인터넷에서 롤 챔피언 크기라고 검색하면 이 옵션이 도대체 왜 있는 거냐는 플레이어들의 의문과 위엄을 위하여, 재미를 위하여, 논타킷 공격을 대신 맞아 아군 보호, 사거리 증가 등의 답변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자신의 기존 캐릭터에 맞추어져 있던 원근법의 축 변화와 그로 인해 재구성된 시각성에 기반하는 공간감에 시시각각 적응하고야 만다. 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시각성이 기존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이 글의 주장을 보완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캐릭터의 비율, 스케일, 거리감, 공간감 등 원근법에 관여된 여러 문제들이 관건에 오르게 된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 “이걸 맞는다고?” 혹은 “이걸 안 맞는다고?”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떨 때는 내 캐릭터에 스킬이 닿지 않았는데도 맞았다는 판정, 닿았는데도 맞지 않았다는 판정이 의아하기도 하다.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판정의 순간은 오히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형성하는 공간감, 하나의 원근법에서 다른 원근법으로 교체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할 시각성에 관하여 고민하기에 더 없이 적절한 출발점이다. 모니터 평면 안의 크기와 비율, 스케일과 동기화되어 있던 우리 신체의 공간감이 끊기고 기존 원근법의 축이 변화하는 지점, 플레이 시간 내내 계속해서 눈의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인 게임 원근법의 변화무쌍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한다.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1] 물론 입체 매체, 예를 들자면 조각에서도 원근법은 중요한 문제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고대 그리스 조각들은 사람의 실제 몸과 비교하자면 머리가 훨씬 더 크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각을 주로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기 때문인데, 실제 사람의 비율대로 제작하면 멀리 있는 머리가 더 작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원근법은 크기와 비율의 문제에 관여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김얼터 리얼리티, 리얼리즘, 픽션, 그리고 매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시험하는 사물을 좋아한다. 미술 전시와 전시에 관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일하고 있다.
- 그래서, 제 민첩은 몇 점인가요?
RPG의 규칙은 수치의 미학이다. 이 규칙이 고도화될수록, 플레이어들이 교감해야 하는 수치와 수식도 고도화된다. 플레이어들은 더욱 강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한다.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개발용 어들을 가져오며, 각종 수치를 분석하고, 차트를 만들고, 성장 공식을 유추한다. 적 또는 다른 플레이어를 압도할 수 있는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경로와 해결책을 찾는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RPG에서는 플레이어 본인의 신체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RPG에서 캐릭터를 강력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플레이어의 전략적 사고, 소위 ‘뇌지컬’이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Haein Park A gamer who searches games for inspiration in life. Keenly interested in analyzing the ways games convey their intentions and concepts.
- [Editor's View] 게임과 소수자, 소수자와 게임
그런 고민의 결과로 ‘GG’ 4호는 ‘소수자들의 게임’을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소수자라는 건 단지 숫자가 적은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류’가 아닌, 주류로부터 스스로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받는 많은 존재들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게임은 그런 소수자와 얽히는 부분에서 아직까지 짧은 역사 때문인지 고민을 오래 해 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Editor's View] 게임과 소수자, 소수자와 게임](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5241a82347ca4455814e9dc13f080bd5~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5241a82347ca4455814e9dc13f080bd5~mv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