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결과

Search this site

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관을 가진 신의 손』,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감추는 기억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경험이 있다. 시간을 들여서 정성껏 딸을 키웠는데, 마지막에 도착한 엔딩이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경험이다. 게임자체에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수치가 모자랐는지, 어느 계절의 일정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무심코 고른 선택지 하나가 모든 것을 갈랐는지에 대해 게임은 침묵한다. < Back 『관을 가진 신의 손』,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감추는 기억 31 GG Vol. 26. 8. 10. 들어가며: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기억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경험이 있다. 시간을 들여서 정성껏 딸을 키웠는데, 마지막에 도착한 엔딩이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경험이다. 게임자체에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수치가 모자랐는지, 어느 계절의 일정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무심코 고른 선택지 하나가 모든 것을 갈랐는지에 대해 게임은 침묵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몇 년, 현실의 몇 시간이었던 자신의 플레이를 스스로 되짚어야 하고, 혼자서 얻지 못한 답은 공략 게시판과 친구의 플레이 경험담 같은 것으로 채워진다. 육성 시뮬레이션은 처음부터 그런 장르였던 셈이다. 게임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플레이어의 기억이, 나아가 플레이어들의 기억이 메워온 장르 말이다. 그런데 이 익숙한 감각을 유독 극단까지, 그리고 유독 정교하게 밀어붙인 게임이 있다. 『관을 가진 신의 손(冠を持つ神の手)』, 통칭 ‘카모카테’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2009년 일본의 동인 서클 ‘코무기바타케(小麦畑)’가 발표한 육성 시뮬레이션 무료 동인 게임다. 시골에서 자라 어머니를 여읜 주인공은 어느 날 이마에 새겨져 있던 인장, ‘선정인’으로 인해 신의 선택을 받은 차기 왕 후보임이 드러나고, 왕성으로 강제로 옮겨진다. 제목의 '관(冠)'은 바로 이 왕관을 가리킨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플레이어가 아버지가 되어 딸을 키웠다면, 카모카테의 플레이어는 1년이라는 기한 안에 왕 후보가 되어 성장하고 왕성 안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 오랫동안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으로 남아 있던 이 작품은 2026년 6월 스팀을 통해 리메이크판이 정식 발매되면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이 게임을 이번 호의 주제인 ‘기억’ 앞에 세운 이유는,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플레이어의 기억에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대리 기억해왔는지를 이 게임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는 호감도 게이지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호감도는 존재하지만, 게임은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공략 캐릭터가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게임 시스템 내부 어딘가에 숫자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플레이어는 그 숫자에 접근할 수 없고, 대신 캐릭터에 대한 '인상'을 스스로 판단하여 입력하고 저장과 불러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게임이 기억하는 것과 플레이어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이토록 선명하게 갈라지는 게임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은 플레이어의 기억 중 무엇을 대신 기억해주고, 무엇을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두는가. 이 글은 ‘카모카테’ 라는 하나의 사례를 통해 따라가보고자 한다. 인상 시스템, 공략 캐릭터는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가? 이 게임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 호감도가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캐릭터에게 말을 걸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벤트를 겪어도 그 결과로 상대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감으로 이벤트의 선택지를 누르고, 감으로 인상도를 입력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각 캐릭터와의 만남과 이벤트를 겪은 뒤, 그 캐릭터에 대한 '인상(印象)'을 직접 입력한다. 『도키메키 메모리얼』처럼 호감도 확인이 시스템의 일부로 설계된 일반적인 연애/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면 시스템이 알아서 호감도 수치를 올리거나 내리고 그 결과를 게이지로 보여주었을 자리에서, 이 게임은 반대로 플레이어에게 묻는 것이다. 방금의 만남은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가. 조금 전 캐릭터와의 대화는 주인공 캐릭터에게 어떤 감정을 남겼는가. 그리고 이렇게 입력되어 누적된 인상도는 이후 어떤 이벤트가 발생할지, 이야기가 어느 분기로 흘러갈지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변수로 작동한다. 말하자면 이 게임에서 관계의 기록을 담당하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이다. 게임은 입력된 기록을 받아 계산할 뿐, 그 기록이 실제 관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첫 플레이는 이벤트를 줄줄이 놓친 채, 그 누구와도 이렇다 할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게임 내에 각 공략 캐릭터 당 애정, 우정, 증오, 배반, 살해 5가지의 루트나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 동인판 시절의 인상도 입력창 그 대신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동안 올려온 인상도를 단 한 번에 정반대로 뒤집어버리는 버튼이다. 그 버튼을 누르면, 캐릭터가 공략 캐릭터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애정에서 증오로, 증오에서 애정으로 돌변한다. 이 ‘반전’ 시스템은 한 회차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기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인상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호의로 쌓아온 관계를 순식간에 적의로, 적의로 쌓아온 관계를 순식간에 호의로 바꾸어 놓는 이 장치는 그 자체로 극적인 장치이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버튼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의 상황, 이유다. 호감도가 얼마나 쌓여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신중하게, 또는 감각에 따라, 그게 아니라면 그냥 누르는 것이다. 뒤집힌 결과가 어디에 도달할지는 결과를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게임은 끝내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무엇을 쌓아왔는지를 스스로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가에 따라, 이 시스템은 정교한 한 수가 되기도 하고 무모한 선택이 되기도 한다. * '반전' 시스템 게임 시스템으로서의 대리 기억 그렇다면 게임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는 플레이어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사실은 게임 내부에는 정확한 숫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호감도는 플레이어가 화면에서 확인할 수 없을 뿐, 게임 엔진 안에서는 캐릭터마다 하나의 변수로 계산되고 저장된다. 플레이어가 감으로 입력한 인상도와, 게임이 실제로 들고 있는 호감도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숫자를 유지하는 셈이다. 플레이어의 기억이 흐릿하고 주관적인 인상으로 남는 동안, 게임의 기억은 숫자 하나까지 정확하다. 세이브 파일이 보존하는 것도 이와 같은 층위에 있다. 육성 파라미터, 캐릭터별 호감도와인상도, 이후 분기의 조건, 도달 가능한 엔딩의 판정 조건 등, 이 모든 것은 저장되며, 그 기억은 게임의 몫이 된다. 다시 게임을 켜면 이 값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무엇을 몇 번 선택했는지, 어떤 이벤트를 몇 주차에 봤는지는 플레이어가 잊어도 게임은 잊지 않는다. 다만 게임이 기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다. 어떤 선택을 거쳐 지금의 상태에 도달했는지, 그 선택의 과정 자체는 저장되지 않는다. 세이브 파일에는 인상도 몇이라는 최종값만 남을 뿐, 플레이어가 어떤 대화와 어떤 장면에서 느낀 점을 통해 이 값을 만들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억은 과정을 소거한 결과값의 기억이다. 물론, 숫자만이 이 게임이 기억하는 전부는 아니다. 카모카테는 공략 캐릭터마다 고유한 테마곡을 두고, 해당 캐릭터의 이벤트가 시작되면 그 곡을 재생한다. 몇 마디만 들어도 곧 누구의 이야기가 시작될지 알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이 설계는 유료 음원을 쓸 수 없었던 동인판 시절부터 자체 음원을 갖춘 스팀판에 이르기까지 형태를 바꾸지 않고 이어져왔다. 숫자가 아닌 소리로 이루어진 이 기억은, 인상도만큼 정밀하지는 않아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을 정확히 짚어낸다.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진 기억 게임이 기억하는 것은 결과값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값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어떤 대사와 어떤 나레이션과 어떤 표정이 플레이어의 인상도를 움직였는가는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주인공이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감각, 관계가 지금 얼마나 따뜻한지 혹은 얼마나 서늘한지에 대한 체감은 세이브 파일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이것은 저장되지 않기에, 전적으로 플레이어 자신의 기억에 맡겨진다. 게임을 다시 켜면 스탯과 인상도는 그대로 이어지지만, 그 관계가 어떤 감정의 궤적을 그리며 여기까지 왔는지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복기해야만 이어진다. 그것은 공략 캐릭터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갖는 호감도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게임이 호감도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감춘다기보다는, 근사치로만 짐작하게 하는 쪽에 가깝다. 게임 안에는 두 가지 방법이 마련되어 있다. 하나는 시장에 방문해 '점을 보는' 것이다. 점술사는 공략 대상 캐릭터들 중 주인공에게 느끼는 호애도와 호우도가 가장 높은 인물과 가장 낮은 인물을 알려준다. 정확한 수치도, 중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의 순위도 아니다. 오직 양 극단만이 게임 세계 안의 언어로 플레이어에게 전달된다. 다른 하나는 인상도를 입력하는 화면 자체에 있다. 인상도를 입력할 때마다 화면의 배경색이 노란색, 초록색, 보라색으로 바뀌는데, 이 색은 플레이어가 방금 입력한 인상과 실제 호감도 사이의 간격을 나타낸다. 노란색이면 그 간격이 거의 없다는 뜻이고, 보라색이면 그 간격이 크다는 뜻이다. 정확한 수치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지만, 플레이어는 이 색을 단서 삼아 자신의 인상도가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가늠하며 다음 선택을 이어가게 된다. * 인상도와 호감도 격차에 따른 배경색 변화 점보기가 게임 세계 안에 놓인 장치라면, 배경색은 화면이라는 인터페이스 층위에 놓인 장치다. 두 장치는 형식은 다르지만 하는 일은 같다. 정확한 답을 주는 대신, 플레이어의 기억이 놓인 위치를 어림잡게 해주는 것이다. 완전히 보여주지도, 완전히 감추지도 않는 그 중간의 자리에서 플레이어는 계속 짐작하고 기억하며 플레이를 이어가야 한다. 저장되는 기억과 해금되는 기억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은 분명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 게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상도와 호감도라는 숫자는 게임 내부 어딘가에 정확히 존재하며, 세이브 파일은 그 숫자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존한다. 그런데도 카모카테는 그 기억을 플레이어에게 온전히 넘겨주지 않는다. 저장되지 않아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저장되어 있음에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부재의 문제가 아니라 은폐의 문제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육성 시뮬레이션은 처음부터 정보를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를 설계의 중요한 축으로 삼아온 장르였다. 수치를 전부 공개하고 그 위에서 최적의 육성을 계산하게 하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일부만 보여주거나 특정 조건에서만 확인하게 하는 게임도 있다. 카모카테는 이 스펙트럼에서 은폐 쪽으로 가장 기울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은폐는 플레이의 감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관계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에, 플레이어는 매 순간 가늠하고, 불안해하고,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하며 다음 선택을 고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확실성이 공략 캐릭터와의 관계를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수치로 확인되지 않는 마음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사람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채로 남는다. 이 역설을 게임 디자인의 언어로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스팀판의 도전과제 체계다. 제작자는 스팀 리메이크의 초회 플레이를 원래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하도록 설계했다고 밝혔다. 호감도는 보이지 않고, 육성에 대한 보정도 없으며, 주인공의 능력치를 올리는 것부터 쉽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가 시작된다. 그런데 엔딩을 하나씩 보고 도전과제를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그동안 잠겨 있던 기능이 하나씩 열린다. 이벤트명 표시, 이벤트 회상, 능력치 지원, 호감도 표시, 무효 선택지 표시, 그리고 반전을 주차당 한 번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능까지. 이 기능들은 원래 동인판 시절 유료 공략지원판에서 제공되던 것들이었으나, 스팀판에서는 플레이 자체를 통해 도달해야 하는 보상으로 재배치되었다. * 업적 달성으로 해금되는 공략지원기능 이 설계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이 글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게임 시스템의 형태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되 접근이 제한된 기억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잠겨 있다가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열리는 기능으로 이 게임 안에 구체화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쌓아가는 것은 인상도만이 아니다. 그 인상도에 접근할 권한 자체도, 플레이를 통해 함께 쌓여간다. 나오며 결국 이 게임의 인상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관계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모른 채로 계속 마주하는 것인가. 대부분의 게임은 전자를 택한다. 호감도는 게이지로 표시되고, 플레이어는 그 게이지를 보며 다음 선택을 계산한다. 카모카테는 후자를 택했다. 숫자는 존재하지만 감춰져 있고, 플레이어는 확신 없이 다음 대화를 건네야 한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이것은 프린세스 메이커가 이미 던져두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엔딩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쌓아왔는지 알 수 없었던 그 경험은,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기억에 무언가를 떠넘겨온 역사와 맞닿아 있다. 카모카테는 그 역사를 계승하되,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의 경계를 인상 시스템이라는 형태로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은 사례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무엇을 대신 기억해주고 무엇을 끝내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두는가는, 결국 그 게임이 관계를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카모카테의 답은 인상 시스템의 구조 그 자체에 이미 들어 있다. 게임은 정답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채점표로 내밀지 않고, 플레이어가 스스로 적어낸 인상과 감춰진 숫자 사이의 어긋남을 안은 채 다음 플레이로 나아가게 한다. 반전 버튼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 고려했던 것은 게임 내부의 숫자가 아니라 이벤트나 지금까지 골라온 선택지, 공략 캐릭터와의 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기억이었다. 게임은 숫자를 기억하고, 플레이어는 시간과 관계를 기억한다. 다음 플레이를 시작할 때, 인상도와 호감도는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그 관계를 기억하는 플레이어의 감각은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Tags: 기억, 관을 가진 신의 손, 카모카테, 육성 시뮬레이션, 프린세스 메이커, 동인 게임, 호감도 시스템, Raising Simulation Games, Princess Maker, Doujin Games, Japanese Indie Gam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 Back GG Vol. Tags: 게임비평공모전, 소버린 타워, 세이브 로드, 세이브 스컴, 완벽주의, 절차적 수사학, 이언 보고스트, 예스퍼 율, Sovereign Tower, Save Scumming, Procedural Rhetoric, Game Save System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Prompt2Videogame: 더빙의 오래된 미래

    이러한 맥락을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데스티니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 너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1조 개의 파라미터(매개변수)를 가질 GPT-4(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모델)에 연동된 데스티니는 플레이어와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잠재적인 사운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리 녹음을 했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운드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플레이어의 대답에 따라 반응이 3가지 정도로 나뉘는 고전적인 NPC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 역시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대화의 분기가 한 10가지쯤 될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도 없다. 그녀는 플레이어의 대답에 긴밀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며, 그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에 나설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대사나 대화에 있어서 데스티니에게 기존 게임 사운드의 특성들을 적용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 Back Prompt2Videogame: 더빙의 오래된 미래 10 GG Vol. 23. 2. 10. 그것은 운명의데스티니 2018년에 출시한 〈갓 오브 워〉와 그 후속작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는 흠잡을 데 없는 높은 완성도로 명성이 높다. 장점들을 열거하면 끝이 없겠지만, 특히 크레토스와 그의 아들 아트레우스를 둘러싼 캐릭터 서사는 이 시리즈가 어째서 그저 ‘손맛이 찰진’ 훌륭한 액션 게임에 머무를 수 없는지 명확히 드러낸다. 이와 같이 감정적 울림이 큰 서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좋은 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갓 오브 워 시리즈처럼 대규모 예산이 투여된 트리플 A 게임들은 그에 못지않게 성우들의 연기 또한 큰 변수로 작용한다. 계속해서 Boy!를 외쳐대는 크레토스의 낮게 깔리는 걸걸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유형의 캐릭터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1)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두 게임 모두에서 크레토스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배우 크리스토퍼 저지Christopher Judge는 얼마 전에 열린 ‘더 게임 어워드 2022’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시상식에서 예의 그 Boy!를 시전하는 순간, (〈갓 오브 워〉를 무척 즐겁게 플레이했음에도) 나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크리스토퍼는 크레토스와 전혀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종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스파르타 출신 상남자의 것이 틀림없었다. 미디어 철학자 곽영빈이 지적하듯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거의 대부분의 영상들 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응correspondence은, 대개 이처럼 ‘사실’이 아니라 스크린에 띄워진 이미지를 중심으로 우리가 사운드에 투사하는 ‘기대’에 부합하는 것일 뿐이다.” 2) 즉, 크레토스의 캐릭터가 크리스토퍼 저지의 목소리를 가져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이 노회한 전쟁의 신에게서 바로 그와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다. 이처럼 사운드의 ‘주체’와 사운드 사이의 자의적인 관계를 시각적인 정보에 의지한 기대를 투사하는 방식으로, 마치 필연적인 관계인양 유도하는 역학은 스크린 바깥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보고 목소리가 진짜 ‘깬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외모에 꼭 들어맞는 다른 어떤 ‘최적화된’ 목소리가 이미 존재하는 듯이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개개인들의 목소리가 그러한 암묵적인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넌센스적인 주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는 차치하고라도, 몸과 목소리의 관계는 정말 자의적이기만 한 것일까? 그 답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이와 관련한 한 흥미로운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9년 MIT의 컴퓨터 공학, AI 랩(CSAIL)은 자신들이 새로 개발한 AI 모델 Speech2Face 3) 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 모델을 기반으로 ‘훈련’된 알고리즘은 짧은 분량의 목소리 데이터 만으로도 그 사람의 얼굴을 ‘예측’해낼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때로는 실제 목소리들의 주인들과 놀랄 만큼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사용한 방법은 최근 거의 모든 인공지능 분야에서 사용되는 딥러닝의 방법론 중 하나인 자기주도학습(Self-supervised learning)인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잘 알려진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과는 달리 이 방식은 데이터를 일일이 레이블링하는 작업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Speech2Face 모델은 자신이 받아먹은(?) 대량의 데이터(수백만 개의 유튜브 비디오 세그먼트들) 속에서, 서로 대응하는 각각의 목소리와 얼굴이 가지는 어떤 공통된 상관관계를 스스로 ‘발굴’해낸다. 물론 이 모델을 창시한 연구자들조차 그 ‘상관관계’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혹은 이 관계가 상관관계를 넘어선 인과관계인지 단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결과가 목소리와 몸 사이의 자의성을 필연성으로 바꾸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장 섞인 거짓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설령 우리가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관계인지 끝내 알 수 없더라도) Speech2Face가 앞으로도 끊임없이 보완되어서 정말로 실제 얼굴과 거의 동일한 이미지들을 일관되게 예측해 낸다면 어떨까. 그때에도 우리는 목소리와 몸의 연결이 완전히 랜덤 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Speech2Cartoon의 예시 더 나아가서 이 가능성은 다시 스크린 안으로 스며든다. Speech2Face의 연구자들은 직접 그들의 페이퍼 4) 말미에서, 이 모델은 실사 이미지뿐 아니라 (안드로이드폰의 Gboard와 같이 매우 간단한 키보드 앱을 이용해서) 특정한 목소리에 ‘적합한’ 이모지emoji를 만들어 내는 방식(Speech2Cartoon)으로 응용이 가능하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점점 더 실사 이미지와 구분이 되지 않는 불쾌한 골짜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임 캐릭터들의 얼굴 역시 목소리를 통해 예측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Speech2Videogame은 사실 매우 가까운 미래가 아닐까. 그리고 이 과정을 전제한다면, (여전히 블랙박스로 괄호 쳐져 있지만) 매우 정제된 수준의 목소리-얼굴 상관관계를 이용해서 역순으로 Videogame2Speech를 구성하는 일 또한 당연히 가능하다. 5) 게임 캐릭터(앞으로 이 캐릭터를 데스티니라고 부르도록 하자)의 외양에 걸맞은 목소리를 추측해 내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만들어 주는 생성모델Generative AI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어색한 기계음의 뉘앙스마저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폴리곤으로 빚어진 데스티니는 비로소 ‘그럴싸한’ 목소리의 자의성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목소리는 비록 우리가 기대한 음색과 톤은 아닐지 모르지만, (바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사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통해 이어진 그녀만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배우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파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듯, 목소리는 ‘운명적’이다. 순수게임사운드 비판 그렇다면 데스티니의 목소리를 더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언뜻 생각하면 간단해 보인다. 더빙은 (가장 건조하게 이야기하면)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에서 기존 사운드에 새로운 사운드를 믹싱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이 인간 배우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생성해 낸 목소리인지, 혹은 캐릭터와 목소리의 관계가 자의적인지 필연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건이 되는 것은 그 목소리가 앞서 언급한 간결한 정의에 들어맞는지의 여부다. 문제는 이 정의가 특정한 대립쌍들을 매우 명확하게 부각한다는 사실이다.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은 프로덕션 과정 이후이기 때문에 프로덕션 과정을 전제한다. 새로운 사운드는 기존 사운드에 대응하는 말이다. 후시녹음은 동시녹음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다만 게임 개발에는 (영화와 달리) 동시녹음 과정이 없다. 게임에 들어가는 모든 사운드는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에서 ‘기존 사운드’ 없이 믹싱 된다. 결국 우리는 게임 매체에서는 모든 게임에 들어가는 모든 사운드가 더빙된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6) 그러나 이 결론은 게임 더빙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단어를 빈 껍데기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들만으로 더빙을 한정 짓는 인위적인 범위 조절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모든 대사들은 더빙되었다’라는 식으로 똑같은 함정에 빠진다. 이쯤 되면 ‘게임 더빙’은 범위range의 대상이 아니라 범주category의 대상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것의 범주를 알기(혹은 새롭게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게임 더빙의 특수성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 게임의 (더빙된) 사운드는 무엇보다도 디지털 오브젝트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이는 기술철학자 Yuk Hui가 주장하는 광의의 개념으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게임 엔진이 서로 다른 맥락에 따라서 모아둔 데이터셋의 집합을 지칭하는 말이 오브젝트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7) 많은 경우 사운드 데이터는 다른 오브젝트들에 귀속되어서,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같은 ‘의미 있는’ 트리거를 기다린다. 〈갓 오브 워〉에서 종종 등장하는 ‘종 3개 빨리 치기’ 퍼즐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플레이어가 리바이어던 도끼를 날려서 종 하나를 맞추는 한 동작만으로도 이미 많은 트리거가 활성화된다. 먼저 도끼를 날리면서 크레토스가 내뱉는 기합은 크레토스의 캐릭터 오브젝트에서 나온다. 도끼 오브젝트는 날아가면서 또 특유의 사운드를 실행한다. 도끼 오브젝트와 충돌한 종 오브젝트 역시 마찬가지다. 그 후 다시 크레토스에게로 날아온 도끼가 그의 손에 감기는 순간 또 다른 사운드가 실행된다. 그렇다면 이 간단한 퍼즐을 끝내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트리거가 발동되어야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 게임 사운드의 확산 모양과 범위는 다양하게 설정 가능하다 사운드 데이터는 다른 오브젝트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오브젝트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투가 시작될 때의 긴박한 배경음악은 갑자기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바람 소리 혹은 빗소리는? 길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는? 이처럼 물리적 실체나 그 소리의 진원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도, 플레이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오브젝트는 그 세계 내에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운드 시스템에서 사운드는 매우 구체적인 트리거의 조건과 범위를 지닌 채 게임 세계 곳곳에서 공간적인 위치를 점유한다. 이 배치는 일차적으로 플레이어의 인터페이스적 개입을 전제하지만, 종종 (플레이어와는 관계없이) 여러 오브젝트들의 루틴이 충돌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예상치 못하게 풍부한(?) 사운드를 발동시키기도 한다. 8) 결과적으로 일직선의 게임플레이를 채택한 아주 선형적인 게임에서조차 사운드는 (많은 경우의 수에 따라 조합하는 방식으로) 비선형적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모듈화된 비선형적 사운드 조각들은 게임 사운드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위한 인프라적 토대가 된다. 그중 하나가 반복이다. 반복이라는 행위/상황(플레이어가 누르는 키, 캐릭터의 모션 등등)은 게임과 같은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사운드 역시 예외는 아니다. 플레이어는 종종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반복적인 사운드에 노출된다. 〈더 위쳐 3: 와일드 헌트〉의 본편과 두 확장팩을 전부 클리어하는 동안 우리가 듣게 되는 로취의 말발굽 소리는 횟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일일이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양일 것이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게롤트가 약공격으로 휘두르는 칼소리는 몇 번이나 될까? 쿠엔 표식의 발동 사운드는? 그런데 캐릭터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반복을 좀 더 의식하게 된다. 게롤트의 유명한 방백(?)인 “Wind’s howling”은 바람이 심한 언덕 같은 곳에 가게 되면 혼잣말로 할 법한 대사이긴 하다. 그러나 매번 완전히 똑같은 톤과 페이스로 이 대사를 계속해서 읊는 그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이 문장이 어째서 인터넷 밈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혼잣말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같은 대화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은 명백히 어색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역시 게임에서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의 메인 거점 중 하나인 드리프트우드 마을에는 여러 종류의 상인들이 모여 있는 큰 광장이 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플레이어는 아마 많은 대화들과 외침들이 중첩되어서 만들어 내는 활기에 취할 것이다. 그런데 그 광장을 이후로도 최소 수십 번은 방문하게 된다면? 어느 순간 광장에서 들리는 모든 대사를 외워서 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정확한 톤까지 머릿속에서 재생할 수 있게 된다. 9) 반복되는 대사들은 종종 이처럼 밈으로 고착화되는 방식을 통해 기존 맥락에서 탈구되는데, 어쩌면 이 현상은 게임 사운드의 중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 게임 사운드의 반복이 반복적인 트리거의 결과라면, 반대로 단 한 번도 트리거 되지 않는 사운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가능성에 머물 수 있음은 게임 사운드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위쳐 3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몇몇 중요한 사이드 퀘스트들과 멀티 엔딩들을 떠올려 보자. 100시간이 넘는 플레이 타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는 아마도 몇몇 중요한 대화들은 구경도 못한 채 게임을 끝낼 것이다. 이 부분을 더 밀고 나간 것은 흥미롭게도 그 전작인 〈더 위쳐 2: 왕들의 암살자〉이다. 위쳐 2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은 메인 내러티브의 중대한 분기점을 촉발한다. 그에 따라 그다음 챕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선택에 따라 플레이어는 그중 하나만을 경험할 수 있다. 2회 차를 통해서 두 부분을 모두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이 두 가능성은 적어도 이 기나긴 챕터에서 완벽히 다른 2개의 평행세계를 구축한다. 하나를 선택함에 따라 경험이 불가능해지는 다른 하나는 그저 어떤 씁쓸한 결말이라든가 짧은 엔딩 같은 것이 아니라, 커다란 지역을 누비며 다양한 캐릭터들과 상호작용하는 디테일한 이야기와 모험이다. 물론 플레이어가 다른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 모든 풍부한 사운드는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징이 언제나 내러티브의 분기 과정에서 서브루틴으로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디스아너드〉의 사례는 환원되지 않는 그 지점을 잘 포착해 낸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스텔스 플레이를 하도록 종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력과 운이 잘 맞아떨어진다면, 적들에게서 단 한 번의 의심조차 사지 않고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반대로 완전히 난장판을 만들면서 모두를 죽이고 미션을 클리어할 수도 있다. 이 두 개의 극단적인 시나리오 사이에는 둘을 각기 다른 비율로 조합한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이 경우의 수들은 메인 내러티브 분기와는 독립적으로,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계속되는 작은 선택들에 따른 분기로 인해 발생한다. 그리고 각각의 시나리오는 모두 고유한 사운드 스케이프를 갖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특정한 방식으로 한 미션을 클리어할 때, 실현되지 못하고 잠재적으로 존재했던 다수의 사운드 스케이프들은 저장 장치 속에서 분절된 사운드 데이터의 형태로 다시 잠든다. 오래된 미래 앞서 제기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다시 물을 수 있다. 데스티니의 목소리는 (더빙된) 게임 사운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명백한 답이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우리는 여기서 이 질문을 다시 뒤로 미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녀가 정말로 게임 캐릭터라면, 그 캐릭터가 어떻든 혹은 그 게임이 무엇이든 간에 앞서 서술한 게임 사운드의 특징들을 그대로 가져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데스티니가 기존의 방식대로 만들어질 게임에 속하는 캐릭터라면, 그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그녀는 ‘고유의 목소리’까지 얻어낸 캐릭터가 아닌가. 그 목소리로 계속해서 같은 대사를 읊는다면, 그 광경은 좀 기괴하고 슬플 것이다. 11) 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때마침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게임 업계는 개발 프로세스의 엄청난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휩싸여 있다. * 생성모델을 이용해서 게임 에셋들을 만들기 시작한 기업들 실리콘 밸리의 유력한 벤처 투자 회사인 안드레센 호로위츠Adreessen Horrowitz는 생성모델Generative AI에 관한 최근의 보고서 12) 에서 게임 분야야말로 이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There hasn’t been a technology this revolutionary for gaming since real-time 3D.”) 더빙을 포함해 게임에 들어가는 모든 에셋들은 달리(DALL·E), 미드저니, 스테이블 디퓨전, ChatGPT와 같은 생성모델에 의해서 이미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종국에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통합적인 솔루션의 등장을 암시하며 보고서는 끝을 맺는다. 과장되었다거나 혹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할 의심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 보고서는 친절하게도 아소보 스튜디오가 개발을 맡은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의 사례를 든다. 잘 알다시피 이 시뮬레이션 게임의 맵은 (농담이 아니라) 지구 전체다. 이 정도 스케일의 맵을 만든다는 것도 상상이 잘 안 가지만, 비행기를 운전하면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마치 특정 도시를 그대로 옮긴 듯한 디테일 함에 또 놀라게 된다. 이와 같은 맵을 기존의 방식대로 만들려고 했다면 아마 불가능한 스케줄 덕분에 개발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답은 퍼블리셔인 마이크로소프트가 소유한 (위성사진을 포함한) 다양한 지리적 데이터에 있다. 13 ) 그들은 2D 이미지를 실제와 같은 3D 모델링으로 바꿔주는 AI 모델을 이용해서, 엄청난 양의 지리 데이터로부터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지구’를 만들어 냈다. 플라이트 시뮬레이터가 출시한 시점(2020년)과 여기에 쓰인 AI 모델이 본격적인 생성모델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을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데스티니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 너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1조 개의 파라미터(매개변수)를 가질 GPT-4(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모델)에 연동된 데스티니는 플레이어와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잠재적인 사운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리 녹음을 했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운드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플레이어의 대답에 따라 반응이 3가지 정도로 나뉘는 고전적인 NPC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 역시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대화의 분기가 한 10가지쯤 될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도 없다. 그녀는 플레이어의 대답에 긴밀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며, 그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에 나설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대사나 대화에 있어서 데스티니에게 기존 게임 사운드의 특성들을 적용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관건은 그녀의 목소리가 더빙인지의 여부 따위가 아니라, 생성모델로 만들어질 (그녀가 속한) 게임의 ‘사운드 스케이프’를 그려 보는 것이 아닐까. 좀 진부하지만 고전적인, 광활한 판타지 오픈월드 RPG의 세계를 상상해 보자. 규모에 걸맞게 수 백명의 캐릭터가 배정될 것이다. 그들 모두는 고유한 목소리를 할당받고, 역시 어마어마한 개수의 파라미터를 가진 AI 모델에 연동되어서 각기 특정한 ‘개성’을 갖는다. NPC끼리도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이 가능할 것이다. 마치 이 영상 14) 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화를 전개한다면, 곧 대화의 홍수로 인해 로그 데이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할 것이다. 곧이어 전 세계의 플레이어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게임에는 점점 더 많은 트래픽이 몰리고,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음성을 포함한) 로그 데이터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게임사는 노로그no-logs 정책을 표명할 것이다. 이제 누구의 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다. 어느 밤에, 플레이어는 데스티니와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데스티니는 마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음유시인처럼 서사시를 노래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이야기를 멈추고 조용히 경청할 것이다. 끝난 뒤에는 박수가 터져 나오고,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 것이다. 그녀의 서사시는 함께 있었던 동료들의 입을 통해 훨씬 더 오랜 시간 뒤까지 전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주는 억양과 분위기, 그리고 시의 특정한 운율은 그날 밤, 그곳에서 폴리곤의 대기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1) https://www.youtube.com/watch?v=Pobwy_es2uc Boy! 부분만을 따로 모아 편집한 몽타주 영상이다. 크레토스가 아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계속해서 Boy!라고 외치는 데에는 개발사 산타 모니카 스튜디오가 〈갓 오브 워〉 제작 중반까지도 아트레우스의 이름을 두고 고민을 했다는 어른의 사정(?)이 숨어 있다. 2) 곽영빈 외,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 (경기 파주: 프시케의숲, 2021), p.192. 3) https://speech2face.github.io/ 4) https://arxiv.org/abs/1905.09773 5) 예상하다시피 Speech2Face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에, Face2Speech를 구현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했다. 6) 실제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하고 편집해서 게임 내에 녹여내는 몇몇 인터랙티브 무비 게임들은 예외가 될 것이다. 이 장르의 가장 독창적인 개발자로 평가받는 샘 발로우Sam Barlow의 대표작으로는 〈허스토리〉, 〈텔링 라이즈〉, 〈이모탈리티〉 등이 있다. 7) 엔진에 따라 지칭하는 용어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언리얼 엔진에서는 오브젝트를 액터actor라고 부른다. 8) 드물게 발생하지만, 〈데이즈 곤〉에서 프리커 호드가 약탈자 캠프를 덮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플레이어는 덤불에 숨은 채로 느긋하게 그 ‘시끄러운’ 전투를 관람할 수 있다. 9) https://www.reddit.com/r/DivinityOriginalSin/comments/ex0kic/driftwood_square_in_a_nutshell/ 그 대화들을 아무 맥락 없이 이어가는 것은 디비니티 레딧에서 하나의 밈/놀이로 자리 잡았다. 10) 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와 〈리그 오브 레전드〉의 많은 대사들과 용어들이 한국에서 현지화의 형태로 밈화 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11) 호러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장치로, 등장인물이 (마치 로봇처럼) 같은 간격으로 계속 똑같은 대사를 중얼거리는 기믹을 떠올려 보자. 그 반대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도록 설정된 기계나 사물이 갑자기 등장인물의 말에 반응해서 특정한 대답을 하는 경우도 비슷한 효과를 갖는다. 12) James Gwertzman and Jack Soslow, “The Generative AI Revolution in Games” Adreessen Horrowitz, 2022.11.17. https://a16z.com/2022/11/17/the-generative-ai-revolution-in-games/ 13) 마이크로소프트는 Bing Maps를 소유하고 있다. 14) Jack Soslow, “Two AIs talking to each other [Original]” YouTube 2021.04.13. https://www.youtube.com/watch?v=jz78fSnBG0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 Back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04 GG Vol. 22. 2. 10. 1. 미래는 널리 ‘분배’되지 않았다 사이버펑크의 효시가 되는 소설 『뉴로맨서』의 저자인 윌리엄 깁슨은 이렇게 적었다. “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 새로운 전자기기, 혁명적인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IT기업가들과 평론가들, 테크노크라트들이 이 문구를 인용해 왔다. 기술혁신이 사회를 이끌고, 정체된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이라는 산업적 낙관주의에 기인한 인용들이다. 이들의 발언에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기술의 진보를 사회의 진보와 동일시하는 기술결정론적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는 하이테크 전문가집단과, 신산업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분리하려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이다. 우리 엘리트들이 열심히 개발하고 제도화할테니, 무지몽매한 당신들은 초개처럼 동참하기나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새 기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해마다 스마트폰을 바꾸고 있지만 이를 직접 분해해 들여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알파고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을 이겼는지 자세히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유튜브와 피드에서 엄청난 콘텐츠 소비를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왜 내 앞에 추천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얼리어댑션과 진보의 상징인 아이폰이 계획적 노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공유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깁슨의 계시록적 문구를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라고 섣불리 해석한다. 그러나 깁슨이 왜 ‘spread’ 가 아닌 ‘distribute’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실제 전달하고 싶었던 뉘앙스는 “미래가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데도, 적절히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았다.” 였을 것이다. 신기술은 역사적으로도 사회적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불만을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증기기관과 전기·화학 및 소재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19세기, 서구 사회는 전에 없던 엄청난 생산력을 획득했지만 절대 다수의 노동인구는 최악의 빈곤에 시달렸다.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시 실태를 조사한 문헌을 인용하면서(특히 1850년대의 정부 보고서들) 산업도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20세보다도 짧았다!)과 영양상태가 선사시대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보다 나빴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괜히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찰스 디킨스가 『위대한 유산』같은 책을 쓴 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신 기술은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야한 공구로 노동하는 야만인들보다 더 오래 노동하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가진 자들에게는 궁전을, 빈자들에게는 움막을 생산한다.” 2. 사이버펑크라는 반문화적 문제계 따라서 사이버네틱스 제어혁명이 일어난 당시, 선구적인 컴퓨터기술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은 신기술에 대한 엄청난 우려와 낭만주의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행동주의를 선포했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개발하는데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들어갔는데, 왜 소수의 거대기업들이 그 권리를 독점하는가?’였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저 그런 타자기나 생산하던 IBM, 뜨내기 대학생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벼락부자가 된 것은 정부에서 주어진 특혜와 넘쳐나는 세금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자아내는 새로운 세계를 자본주의의 공간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통계(commons)로 만들기 위해서는 신기술들을 널리 ‘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기업과 국방성이 독점한 컴퓨터·인터넷을 만인이 조건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공공재화 하는 것이다.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공통의 네트워크는 이러한 이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확장시키는 정신적 통로들인 간-네트워크(inter-network), 인터넷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급진적인 정보기술 사상가인 존 페리 발로우는 199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공리주의이념을 월드와이드웹에 적용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종, 경제, 군사, 지역에 따른 특권과 편견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침묵과 동조를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 현실의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관한 법적인 개념들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들은 물질에 기반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는 물질이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휴머니티의 모든 감정과 표현이 연속적인 전체의 부분이며 비트의 전 지구적인 대화이다…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마음의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정부가 이전에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세상이 될 것이다.” - 존 페리 발로우,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1996) 사이버스페이스를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공간으로 상상하던 시기, 깁슨과 발로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대안적인 세계가 평등과 해방의 공동체로 건설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의 기대처럼 초기 사이버스페이스에는 환대와 존중이 공통윤리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민주주의 실험과 참여가 꽃피우는 영토로 거듭났다. 개인홈페이지와 정보공유가 미덕이던 초창기 PC통신과 웹 1.0 시대는 실제로 그랬다. 누구나 익명 게시판에서 애정이 듬뿍 담긴 글과 답변을 주고받고, 선망하는 마음으로 채팅방에서 타인을 기다리며 서로 연결되는 순간을 꿈꾸던 그런 때가 있었다. 비록 오늘날 인터넷은 분노와 언설, 비아냥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핵티비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은 ‘물질이 아닌, 정신만이 존재하는’ 이 신세계에 새로운 문화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사회관계들(인종, 젠더, 지역, 세대 등)에 기반한 구 문화는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광대한 성간을 채워 넣기 시작한 것은 지배질서 문화가 아닌 반문화(counter culture)였다. 배타적 소유와 일방적 상품 생산-소비문화가 아니라 공유와 연대의 문화를 창조할 당위가 요청됐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임금노동, 인종주의로부터 인류의 정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반문화. 선택된 시민들만의 교양에 반대하는 재즈와 록음악,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힙합·레게, 부르주아의 패션을 비웃는 노동계급의 데님패션,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뉴에이지와 히피이즘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구의 합리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전쟁과 범국가적 폭력, 홀로코스트, 주기마다 반복되는 경제대공황, 빈곤, 항구적 실업이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반문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이버-펑크’는 이와 같은 테크노 진보주의와 반문화 시대정신이라는 두 역사적 실타래가 엮이면서 등장한 문제계라 할 수 있다. 야심차게 장르명을 제목으로 차용한 〈사이버펑크 2077〉은 깁슨의 『뉴로맨서』를 필두로 해서 닐 스티븐슨의 『스노크래시』,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 매트릭스』, 영화 〈블레이드러너〉와 〈트론〉, 〈매트릭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와 〈아키라〉가 수놓은 사이버펑크의 별자리들을 하나의 은하계로 집대성한 게임이다. 〈2077〉은 그간 우리가 목겨해온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살풍경과 반문화적 열광에 대한 모든 노스탤지어가 망라되어 있다. 〈2077〉은 크게 세 가지의 문제적 시공간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어떤 유포리즘의 상상력이 결부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1. 오딧세이적 활극의 간-경계 시공간 〈2077〉은 세 가지의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스트릿 키드, 노마드, 기업하수인이 그것이다. 이 배경 설정은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19세기 대중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거리 부랑아의 SF적 재매개화라는 문제를 던진다. 거리를 비참하게 떠도는 부랑아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해킹)을 무기삼아, 뒷골목 정보거래와 갱들과의 경쟁에서 성장해온 인물군상이다. 크게 한탕 해서 성공을 꿈꾸는 얼치기 현상금사냥꾼이 거대 기술기업-권력의 음모와 연루되어 고난을 맞이하는 구도다. 이는 『뉴로맨서』 이후 사이버펑크가 하나의 장르문법으로 구축해 온 서사에 조응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와 몰리가 거의 동일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이 설정은 〈공각기동대〉의 모토코와 바토로 차용되었으며, 『스노크래시』에서는 히로와 와이티라는 인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일본도를 쓰는 한국계 피자배달부인 히로와 스케이트 배달부인 와이티는 메타버스(사이버스페이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지만 요즘엔 PVE나 NFT로 돈벼락을 맞을 수 있다며 온갖 사기가 판치는 그 메타버스가 맞다)에서는 잘 나가는 해커로, 유행하는 사이버 약물 ‘스노크래시’를 추적하는 의뢰를 맡고 그 과정에서 해커 갱단-거대기업의 권력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는 한때 이름을 날렸던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해커)였지만, 의뢰인의 정보를 빼돌린 댓가로 독극물 주사를 맞아 몰락한 인물이다. 케이스는 수수께끼의 인물 아미티지로부터 거대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센스/넷’에 침투해 전설적인 카우보이의 영혼이 복제된 데이터 ROM을 빼내면 대가로 신경복원술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미녀 카우보이 ‘몰리’와 함께 침투극에 발을 내딛는다. ROM은 카우보이의 침입을 차단하는 방벽 ‘아이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블랙아이스’에 침투했다가 죽음을 당한 전설적인 카우보이 ‘딕시-플래트론’의 인격이 담겨진 데이터 집합체이다. 〈2077〉의 현상금사냥꾼 주인공 V와 사고로 그의 인격에 빙의되는 전설의 현상금사냥꾼 조니 실버핸드, 그리고 픽서의 영혼을 가두는 사이버감옥 ‘미코시’와 ‘소울킬러’ 흑막인 거대 군벌기업 아라사카는 사이버펑크의 문법을 고스란히 계승하며 오딧세이적 활극을 연출한다. 그렇다면 왜 ‘활극’인가? 활극은 탈영토적이고, 대안적인 상상으로 재구축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이다. 물리적 현실의 제약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국경과 민족을 넘나들며 초월적인 모험을 펼치는 시공간으로서 활극은 하나의 공통계이다. 활극은 기존의 법이나 사회계약이 작동하지 않고, 자유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정의와 공동선이 우선시되는 장소다. 무협의 ‘강호’, 웨스턴의 ‘황야’, 스페이스오페라의 ‘우주’는 이러한 활극 공간의 무정부성과 자유를 펼치는 무대다. 국경과 민족, 인종과 성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활극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웨스턴의 문법은 다양한 지리적 맥락에 따라 새로 번역되고 재조립된다. 한국의 만주웨스턴은 〈쇠사슬을 끊어라〉(1971),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등에서 보듯이 ‘황야’를 미국 서부가 아닌 만주로 옮겨놓는다(마찬가지로 커리웨스턴, 스파게티웨스턴, 스시웨스턴 등 각 지역마다 웨스턴을 차용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에서 강조되는 ‘강호’에는 한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한민족까지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우주는 인간과 다양한 외계인 종족들이 만나고 협상하는 광활한 공통 공간으로서, 문화다양성이 자리잡은 대안세계에 대한 상상적 메타포가 도입된다. 요컨대 해안선과 산맥을 넘어 비물질의 신대륙을 건설한 사이버스페이스를 재현하는 문제로서 활극만큼 적절한 형식은 없을 것이다.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도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활극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이념을 역설적으로 재현하는 안티테제적 서사다. 〈2077〉의 나이트시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모험담은 사이버펑크의 활극을 고스란히 전유하는 동시에, 점점 악화되고 있는 자유와 기술 기축사회의 빅브라더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훌륭한 장치로 작동한다. 3.2. Turn on, Tune in, Drop out! 사이키델릭의 반자본주의적 시공간 〈2077〉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화려했던 사이버펑크의 반문화 흔적들이 사려 깊게 재현된다는 데에 있다. 선글라스와 가죽패션, 할리데이비슨과 메탈음악, 모히칸머리와 LSD, 프리섹스, 유체이탈과 화끈한 총격전, 일본도를 쓰는 테크노-사무라이, 말끝마다 은어와 욕설을 붙이는 쿨한 길거리 언어, 사랑 한 큰 술까지… 조니 씨발핸드와 나이트시티는 사이버펑크의 모든 문법들이 통하는 교과서 자체다. 일본도를 등에 맨 채, 마음에 맞는 라디오채널을 골라 들으며 유유자적 바이크를 타고 도시를 질주하는 경험은 다른 어떤 사이버펑크들보다 유의미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브레인댄스’ 라는 게임 속 영상기록매체(사실상 『멋진 신세계』의 촉감영화의 오마주인)에 들어가 재현을 만지고 조작하는 경험은 디지털 게임만의 고유한 매체성인 능동적 탐색과 조형행위를 십분 활용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제작사가 거창하게 광고했던 것과는 달리 한정적인 시퀀스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브레인댄스, 블랙월(현상금사냥꾼들을 막는 사이버 방벽) 너머의 초월적 이계에 대한 갈망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2077〉은 여타의 사이버펑크가 그러하듯 이 대안적 시공간을 충실히 재현한다. 〈공각기동대〉의 네트와 2501,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와 요원이 그렇듯 〈2077〉 또한 물질/관념, 육체/정신이 탈주하는 이데아로서 ‘사이버스페이스’를 묘사한다. 여기에서는 현실의 어떤 물리적 및 사회적 제약도 한계로 작용하지 않는다. 신체는 죽었지만 영혼이 살아남아 사이버스페이스의 지성체가 된 넷러너 알트 커닝햄은 대표적인 알레고리다. 니체는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라고 했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대탈주가 가능해진다. 1966년, 히피들의 성자이자 반문화의 선구자였던 티모시 리어리는 “전원을 켜고, 조율하고, 이탈하라!(turn on, tune in, drop out!)”라고 선동했다. 서구사회 전역에서 발발한 68혁명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는 수세기간 이어진 합리적 이성 중심 세계관에 신물이 난 터였다. 그 산물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계속된 경제공황과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로 파산을 선고받았다. 반대편 진영의 소련과 중국도 전체주의 감시국가로 변모하던 중이었다. 전 지구적 노동착취와 식민지 수탈, 감시국가, 전쟁에 사람들은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지적이고 무능한 인간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혁파하길 열망했다. 이 열망을 동력삼아 다양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여성해방, 생태주의, 탈성장, 노동거부, 마을공동체, DIY, 프리섹스 등이 주요 골자였는데 이는 앙시앙 레짐(구 체계)의 사고방식과 전부 단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즉 냉철한 이성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성을 해방시켜 물질의 굴레로부터 이탈하는 영성혁명이 새 방법으로 대두된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요가를 배우고 인도와 중국, 터키에서 내면을 발견하는 여행을 하는 것도 이 시기부터다(한국은 90-2000년대).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전통 직물을 입고, 밥 말리의 드레드헤어를 백인들도 따라한다. 이른바 ‘정신줄을 놓은 채 몽상과 꿈의 원천의식을 좆는’ 사이키델릭은 리어리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LSD나 마리화나의 환각을 통해 더욱 이상적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반문화를 추종하던 청년들과 이상주의자들은 거리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된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주 52시간 노동, 보편적 복지, 차별금지법, 지속가능경제 등은 이 시대 영성혁명의 맹아에서 발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공고한 노동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근면성실하게 노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아낌없이 쓰는 소비사회의 레짐은 이들 반문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부는 즉각 법을 입안시켜 LSD와 환각제를 불법으로 규제하고(한국에서 마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미디어는 내면을 좆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면서 사회 탓만 하는 싸이코들, 성스러운 노동을 거부하는 이교도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반문화의 옹호자들은 이런 사회적 낙인을 비웃고 뒤틀었다. 이들은 구체제가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그 ‘펑크’가 되길 스스로 택했다. 외모를 괴이하게 꾸미고, 메탈 밴드를 결성하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고발하는 가사를 욕설처럼 내뱉으며, 튜닝한 오토바이로 도로를 질주하는 폭주족되기를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사이버펑크는 반체제적 사이키델릭의 이념적 파편들이 장르의 문법 속에서 재결정화된 문장들인 동시에, 노동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이 ‘힙하게’ 재현되는 대중문화 장소이기도 하다. 메탈 밴드 ‘사무라이’를 이끌며 군벌 기업들의 폭정을 비판하던 조니 실버핸드가 아라사카로 쳐들어가 화끈한 파장을 일으키고, V에 탑승해 반문화의 환등도시 나이트시티를 거니는 플레이경험에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이트시티는 사이키델릭의 어둡지만 섹시한, 좌절된 이상향들이 펼쳐지는 그런 시공간이다. 3.3. Becoming with: 기술적 탈신체화의 시공간 자유로운 외형 커스터마이징과 신체개조 시스템, 등장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기계신체 구현들은 〈2077〉의 탈신체화된 마음이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플레이어는 남성/여성의 외형과 성기를 교차 선택해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젠더와 신체의 횡단을 시스템에서 구현한 것도 재미있지만, 이에 따라 달라지는 서사 상호작용 및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크게 네 명의 인물들과 연애를 할 수 있는 분기들도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플레이어가 남성인 경우 게이 인 ‘캐리’와 여성 조력자 ‘팬앰’과 로맨스를 진행시킬 수 있으며, 여성인 경우 히스패닉 레즈비언인 ‘주디’와 남성 마초 ‘리버’와 연애를 선택할 수 있다. 남/녀라는 생물학적 성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경로들을 플레이어가 만들어갈 수 있으며, ‘탈 신체화’의 기술적 마법을 조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개발자들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강박때문에 억지로 끼워 넣은 설정이 아니라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다각적으로 이해했다는 징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질계의 질서가 해체되는 사이버펑크에서 신체는 더 이상 제약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될 수 있는 ‘becoming with ~’의 계기가 된다. 물질과 신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리퍼닥(사이보그 외과의)에게 인공 인지기관과 신체부위를 시술받으니, 더 이상 신체의 물리적 강도나 유전된 외형이라는 선험성이 무의미해진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아인 마음의 신체 또한 변화한다. 사이버펑크에서는 여성을 얕잡아본다거나 인종에 편견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적이다. 메레디스, 레지나, 로그, 다코타 스미스 같이 카리스마 넘치고 위험한 기계신체 여성들이 즐비한 나이트시티에서 그/녀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반면 미스티나 마마 웰즈, 이블린 같은 전통적인 성향의 여성들도 존재한다. 교조주의적 정체성 정치를 우회해 탈신체화된 판타지를 적절한 균형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에, 〈2077〉은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유연성을 잘 전유했다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1985년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라고 선언했다.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해러웨이 또한 사이버네틱스 과학기술이 인간 정신의 진보와 공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한계에서 탈코드화되는 상생의 미래에 대한 고고학적 은유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외형과 물리적 차이, 성역할에 따른 사회권력의 관계망은 유사성의 원리로부터 기인한다. 근대의 자연과학과 생물학은 외형과 진화의 유사 정도에 따라 세세한 분류학을 만들어냈다. 개과, 고양이과, 파충류, 포유류 등의 분류는 유사성과 더불어 차이 또한 만들어낸다. 백인과는 다른 흑인, 남성과는 다른 여성, 아리아인과는 다른 하류인종, 유럽인과는 다른 아시아인, 위대한 한족과 야마토민족과 구분되는 야만족 등… 이분법에 기반해서 사회적 권력(너를 차별할 수 있는 나)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권력은 차이와 호혜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래·고양이와 협력하는 인간, 아시아인과 흑인 친구, 서로 협조하는 LGBT와 이성애자들, 서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남성과 여성 등. 주어진 신체의 날인으로부터 벗어나는 ‘탈 신체화’의 순간에야 차이를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가 되어 함께하는 경험, 즉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을 상상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병폐와 파괴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별의 상상을 연결하는 강력한 은유(사이보그)가 필요하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사이버 펑크’의 탈 신체적 사회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름’을 넘어서 연대하는 경험이다. 인간, 개, 고양이 뿐 아니라 바이러스, 인공지능, 퇴비, 곤충,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객체들과 반려종이 될 준비가 되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평등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다. 기술은 미래에 그것을 가능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사이보그들이 활극을 펼치는 무정부적 시공간, 사이버펑크는 그렇게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 된다. 4. 극단의 시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고학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NPC는 몇 안되고, 엄청난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지만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처럼 물리적 자유의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사이버펑크의 팬이 아니라면 메인서사 진행과 큰 상관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사이드퀘스트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버그는 화룡점정을 찍으며, 갑자기 영향력을 잃는 캐릭터들(대체 메레디스는 V를 불러내 질펀하게 즐긴 다음 어디로 사라진 걸까?), 서사 진행을 위해 소모되는 팩션(부두보이즈는 블랙월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가?) 등 미숙한 게이밍 설계들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77〉은 사이버펑크 장르를 여러 방면에서 집대성한 정점으로 추켜세우기 아까움이 없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가 제기하는 반문화, 탈신체화, 초월이라는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쌓아올린 점, 그리고 각 주제들이 조화롭게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들과 조응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특히 오늘날처럼 극단적인 분열과 적대가 판치는 하수상한 시대, 철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새롭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뉴 클래식의 정류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 그 이후는 무엇이 도래할까? 인간 사회의 진보와 자유를 꿈꿨던 초창기 사이버펑크의 기획은 오늘날 종언을 고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인터넷을 대안적인 공간이라거나 새로운 민주주의 실천의 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사이버 공간’의 해프닝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은 더 이상 공통계(commons)도 아니다. 카피레프트도, 자유소프트웨어 운동도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빈 자리를 꿰찬 것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다. 콘텐츠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전지구에서 납세를 회피하며, 고용은 거의 하지 않는 다국적 IT 자본들. 어떻게 보면 〈2077〉과 같은 사이버펑크가 다시 귀환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2077〉의 멀티 엔딩 중 하나인 ‘악마’ 엔딩에는 거대기업 ‘아라사카에 완전히 항복하기’라는 선택지가 나온다. 말 그대로 그토록 죽어라 싸웠던 군벌독재 기업 아라사카에 백기투항하고, 생존을 위해 정신을 디지털 감옥인 미코시로 전송해 영원한 사이버 유령이 되어버리는 결말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떻게 그때처럼 다시금 반문화를 일으키고 자유를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다만 그 발자국들이 만들어낸 길들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샛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77〉이 제시한 사이버펑크라는 문제계는, 오래된 스토리텔링과 미래지향적 매체기술을 버무려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이 도래할 우리의 미래에 다시금 묵시록적 개연성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대항해시대 2 한글 폰트 구합니다 ─ 비제도권 게임 로컬라이제이션의 짧은 역사

    90년대 정식 퍼블리셔를 통해서 게임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들어오면서 당시 게이머들은 이전보다 풍족하게 한국어로 된 게임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이전에도 게임의 한국어화 시도도 존재했으며 당시를 살아온 게이머들은 기억하고 있겠지만 당시에도 정식으로 출시되기 힘든 게임들의 비공식적인 이용자 한국어 패치가 존재했다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모바일게임 이용자의 입장에서 게임 라이브러리 구독에 대해 생각해보기

    2022년 9월 29일 구글 스태디아의 서비스 종료가 발표되었다. 스태디아는 클라우드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서비스로 또 한가지의 특징은 월정액으로 구글이 계약해서 제공하는 여러 게임을 플레이할수 있는 게임 라이브러리 구독 서비스였다는 점이다. 다만 따로 돈을 내야하는 게임도 있어서 완전한 구독형 서비스는 아니었다. 제공하는 게임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고 최신 게임을 하려면 월정액 요금 외에도 추가적인 비용을 내야했기 때문에 구글 스테디아는 이용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 구글의 의지 부족으로 서비스를 종료했다.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게임과 예술] 로딩중인 세계의 권태와 노동에 관한 소고

    상희는 유희와 즐거움의 이미지로서 소비되던 게임의 형식을 빌려 디지털 산업 사회에서 노동하는 신체에 관한 감각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즉각적인 쾌락과 만족, 완전히 개인화된 세계에서 내면적 사유로서 ‘권태’가 가진 정서를 재조명한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inju Lee Lee Minju majored in Western painting and art theory. Writes and organizes a range of projects. Has curated Animal Loop (Gong-Won, 2019, co-curated), which exam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performance and performance documentation; Non-Caption Interview (An Unexpected Combination, 2021, curated), which illuminated the aesthetics and politics of the documentary image; and #2 (Doosan Gallery, 2023, co-curated), which explored the event-ness of the exhibition through the form of theater. Attending to the events and performative qualities that images produce, reflects on critical writing and researches the translational relationship between image and text.

  • 게임이 새로운 브랜딩 전장이 될 때: 나이키, 로블록스, 그리고 베트남 사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 게임 시장은 향후 디지털 브랜드 참여 및 혁신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며, 특히 동남아시아 내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새로운 마케팅 전환점에서 발 빠르게 대응하고 현명하게 투자하는 브랜드는 차세대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나이키랜드, 로블록스, 베트남, 메타버스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DOAN Nguyen Huyen Anh, NGUYEN Thanh Binh, TRAN Tien Bang, PHAN Quang Anh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Back 13 GG Vol. 23.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injung Son Studying modern literature and culture at the Graduate School of Sungkyunkwan University. Has always been with games as much as with writing. Plays all sorts of games—every kind there is.

  •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Back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03 GG Vol. 21. 12. 10. 오늘날의 게임 생태는 많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e스포츠는 ‘보는 게임’으로의 전환이 가장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다. e스포츠의 시청자층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직접 게임을 하지 않지만 중계를 챙겨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실제로 2012년에 1억 3000만이었던 세계 e스포츠 시청 규모는 2023년에 6억 4,600만 명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있어 우려도 존재한다. 급변하는 게임 환경 속에서 e스포츠 시장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속 빈 강정이 되지 않을지에 관한 우려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처럼 게임 생태는 급변할 수 있음에도,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얼핏 보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게임과 교육을 접목시키려 한다. 심지어 게임 교육기관이 미국 대안학교로 인증을 받고, 유수의 대학들과도 연계했다. 이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어떤 상(想)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젠지 글로벌 아카데미(GGA, 이하 GGA)의 백현민(Joseph Baek) 디렉터를 편집장이 만나고 왔다. 편집장: 기본적으로 아카데미가 가지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백현민 디렉터: 저희의 비전은 저희 학생들이 e스포츠 내에서 성공적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성공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각기 다른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편집장: 그러면 그 비전 속에서 학생들의 일과나, 한 학기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등 아카데미의 실제 운영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먼저 젠지 엘리트 e스포츠 아카데미(GEEA)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GEEA는 국제학교로서 학업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엘리트 학교에서 하루 4시간 고등 교육에 해당하는 수업을 받고 그다음에 저희 건물로 넘어와서 e스포츠 관련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때, 수업들은 블록 스케줄 식으로 운영이 돼 월, 수 / 화, 목을 나누어 각기 다른 수업을 하고, 금요일은 선택 과목을 듣게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e스포츠에 관련해 제공하는 교육은 게임 이론 즉, 영상을 보면서 게임에 대해 배우는 부분도 있고, 스크림을 통해서 팀플레이를 배우는 부분도 있고, 금요일 선택 과목 같은 경우에는 e스포츠의 역사나 e스포츠 업계에 관하여 배우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교육적 관점에서 저희 GEEA의 특별한 지점은 단순히 게임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개별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친다는 부분입니다. 많은 학부모님이 저희한테, “자녀가 예전에는 잠도 안 자고, 밥도 제때 안 먹었고 게임을 했는데, GEEA 수업을 듣고 나서는 새벽 1시에도 영어 숙제를 하고 있었다”는 말씀들을 해주십니다. 이처럼 학업이나 일상적인 부분에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데, 저희는 이런 학업적인 성장이 그들의 게임 플레이에도 반영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생들의 평균 티어가 다이아 3이었을 때, 평균 티어가 다이아 1인 다른 학원과의 스크림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저희 학생들이 피지컬 쪽에서 떨어지더라도 팀플레이로 부족한 부분들을 메꾸었기 때문입니다. 편집장: 결국 게임 플레이라는 것이 그냥 ‘논다’는 의미로만 묶이지 않는 것 같아요. 학업도, 게임도 일종의 사회 활동이고 이런 활동을 통해 게임 플레이에서도 기존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고 계시는 거지요? 백현민 디렉터: 네. 맞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반으로 저희의 두 번째 주요 프로그램인 GGA 온라인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GGA는 온라인 학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GGA 온라인은 개개인의 역량에 맞춘 굉장히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로 선수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경우에 ‘이번 플레이가 좋았다’, ‘안 좋았다’는 식의 단순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희 코치님들 같은 경우에는 ‘이 순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팀원의 플레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지’ 등 세부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학생의 게임 실력뿐 아니라 소통하는 방법 등 인간적인 영역에서의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저희 학생들끼리도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었지?’ ‘그 전략이 왜 성공했지?’ 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소통을 합니다. 이러한 초점은 많은 학생들이 더 빠른 속도로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편집장: 요즘에는 사설이나 과외 형태로 개인 강습을 받는 학원이나 프로그램이 많은데, GGA 같은 경우에는 그냥 게임을 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네. 저도 그 부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최고의 선수가 단순히 게임 실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게임을 통해서 인간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학생들은 더 높은 티어의 선수들과 스크림을 해서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점수나 티어 등에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인간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 학원을 운영했었는데 다른 학원들을 보면 굉장히 대표적인 한국 스타일, 그러니까 시험 점수를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시험을 볼 때 필요한 전략이나 노하우, 팁들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시험 점수는 올라가겠지만, 시험 점수 이외에는 얻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학생들에게는 내용을 이해하고 이 내용이 왜 중요한지 강조하곤 합니다. 그리고 GGA에서도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성장을 함으로써 티어가 함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편집장: e스포츠 선수들 같은 경우에 한동안 인성 문제로 굉장히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e스포츠 플레이에 대한 교육을 받는 데 인성에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가 되고 있나요? 백현민 디렉터: 네. 저희도 그런 부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좀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미국에서는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이 ‘소프트 스킬’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에서 필요한 전문적 지식이나 능력이라기보다 팀워크나 리더십, 소통, 적응력 등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부분들을 소프트 스킬이라고 하는데, 하버드 조사에 따르면 직업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의 85%가 소프트 스킬이라고 합니다. 저도 많은 프로 선수들이 과거 인성 문제로 논란이 되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아직도 e스포츠의 평판이 안 좋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다음 세대의 선수들의 인격을 육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부분은 다음 세대 선수들이 좋은 쪽으로 업계를 대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세대에 투자함으로써 e스포츠 업계가 장기적으로 성공적인 미래를 가질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에 게시된 GEEA의 수업 사진 편집장: 아카데미의 첫 번째 사업이 일종의 대안 교육의 형태이면서 한국에서는 생소한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생소함이 같이 있는데 첫 번째는 게임을 가지고 교육을 한다는 생소함. 두 번째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스포츠와 교육을 병행한다는 생소함입니다.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는 교육과의 병행을 목표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 교육이 정말 성과가 있을지 실제로도 학부모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으실 텐데 주로 어떻게 답변을 하시나요? 백현민 디렉터: 네. 학부모님들이 그런 걱정을 많이 하세요. 특히 한국에서는 학업과 스포츠를 병행한다는 일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전통적인 스포츠보다 e스포츠가 학업과 병행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통적인 스포츠는 신체적인 부분에 많이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 e스포츠는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서 그런 부분들이 인간적인 성장 혹은 학업적인 성장을 많이 유도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생 중에서는 학교에서 성적이 굉장히 안 좋거나 학교를 자퇴한 학생들이 있었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학교를 간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e스포츠의 특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한 학생 같은 경우에는 저희한테 처음 왔을 때 실력이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거치고 현재 오버워치 팀 서울 다이너스티의 선수로 등록이 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런 성공 사례들을 기반으로 전에는 학교에서 성적을 잘 못 내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성적을 잘 내는 학생들도 저희 프로그램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미래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 많이 오고 있습니다. 편집장: 대안학교 이야기가 나왔는데, 젠지 아카데미는 대안학교로의 기능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나요? 백현민 디렉터: 먼저 GEEA는 공식적으로도 대안학교로 인정을 받고 있고요. GGA 온라인의 경우, 대안학교는 아니지만 결국은 GEEA와 같은 결과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GGA 역시 e스포츠 교육을 중점으로 하고 있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외국으로 유학 가거나 한국 내에서 대학교를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편집장: 고등학교를 대안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게임의 특성상 경쟁을 하다 보니까 지거나 도태된다는 점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은데, 혹시 그런 지점들에 대한 관리가 별도로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물론 학생들이 경쟁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코치들이야말로 그런 부분을 케어해 주시기에 가장 적합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코치들은 전부 프로 경험이 있거나 업계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일해온 분들이기에 게임 내에서의 승패와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코치진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을 잘 케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안학교라는 게 남들과 다른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에는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한다고 해서 좋은 직업이나 좋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e스포츠라는 색다른 길을 감으로써 더 성장을 하고 더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편집장: 많은 학생들이 프로 게이머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립니다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도달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당연히 많은 청소년이 좌절감을 느낄 것인데,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좌절감을 걷어내고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주셔야 하잖아요. 이에 어떤 길들을 주로 제시하시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진출해서 본인도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례가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둘 다 한꺼번에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은 학생들이 저희 GGA를 찾아오는 이유는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부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학생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GGA가 자동으로 프로 게이머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꿈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점입니다. 다만, 조금 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꿈을 좇게끔 도와주는 것인데, 프로 선수가 된다는 꿈 하나만 너무 좁은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프로 선수가 되기를 실패했을 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너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학생들이 좀 넓은 시야를 갖고 다양한 가능성을 바라보게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학에 진학한 친구를 사례로 말씀드리자면 그 친구 같은 경우에는 프로 선수가 꿈이었지만 나이나 기타 상황의 문제로 프로 선수가 되지 못했고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새로운 꿈으로 삼았지만 그것도 잘 안 됐습니다. 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국의 캔터키 대학에 40% 장학금을 받고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캔터키 대학에서 e스포츠 관련 부분에 대해 리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 학생 같은 경우에는 저희 젠지 재단에서 후원을 받고 젠지와 인턴십 경험까지 하면서 꿈을 확장시킨 사례입니다. 프로 선수라는 원래 꿈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저희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대안이나 다른 커리어를 제공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집장: 한국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일 것 같은데요. 홈페이지에 지금 나와 있는 소개를 보면 미국 대학으로의 진출 케이스들이 많은데 현실적으로 한국 학부모들은 아카데미 출신이 한국 대학에 특례 입학 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백현민 디렉터: 네. 저희도 한국 대학과 파트너십을 맺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아직도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는 게임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거나 애들이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혹은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많습니다. 이에 저희는 e스포츠를 보는 시선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스포츠와 게임 업계는 전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미래에 성장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e스포츠라는 업계가 책임감 있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려면 이런 시선을 바꿔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의 대학들이 시선을 바꿀 수 있게끔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희 졸업생 한 명이 이번에 한성대학교에서 20% 장학금을 받고 진학하게 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한성대학교는 ‘리그 오브 레전드’ 관련 신설 학과를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졸업생은 아니지만 GGA 학원을 경험한 학생도 비슷한 목표를 달성한 학생이 있습니다. 편집장: e스포츠는 굉장히 큰 산업이죠.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우려, 즉 하나의 게임, 하나의 장르가 영원할 수 없다는 리스크도 분명히 있습니다. 만약 한 장르가 쇠퇴했을 때, 그 길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막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실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네. 말씀하시는 부분도 분명히 우려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같은 사례가 있다시피 게임 종목이 갑자기 퇴보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일단 다양한 종목을 가르치고 있고, 무엇보다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게임 자체라기보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학생들이 성장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게임, 새로운 종목들이 나오면 그것을 통해서 또 미래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데 노력하려고 합니다. 편집장: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서 게임이, 그리고 e스포츠가 어떤 식으로 인식되면 좋겠다라는 꿈이 있으실까요? 백현민 디렉터: 중요한 것은 게임과 e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뀔지에 관한 것일 것 같습니다. e스포츠를 사랑하고 e스포츠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업계가 더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사회적으로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선수들이나 코치, 매니저 등 e스포츠라는 환경 자체는 만들어져 있었지만,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거나 체계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 Back 28 GG Vol. 26.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nin Lee Writes and lectures freely across comics, games, and film. A lifework: clearing every Final Fantasy title except the MMORPGs. Mainly plays on the Steam Deck.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KRAFTON_Horizontal_Logo_Black.jpg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