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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모던 워페어nonmodern warfare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개자의 증식이 전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의 일상적인 세계는 때때로 전쟁보다도 불투명하다. 물류와 인프라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 팽배하지만, 역설적으로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는 (아이패드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 아래서 가시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로부터 팬데믹을 거쳐 급격한 기후 변동까지, 2020년대의 우리는 마치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 Back 논모던 워페어nonmodern warfare 09 GG Vol. 22. 12. 10. 더 이상 편한 날은 없다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콜 오브 듀티〉 만큼 널리 알려진 게임 프랜차이즈도 드물 것이다. 특히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게임 플레이의 일신(一新)과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사회/정치적인 논란들이 합쳐져서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게임의 어떤 ‘범례’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에서 폭발을 떠올리면 반자동적으로 마이클 베이가 연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전 FPS 게임을 이야기할 때 모던 워페어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고, 그중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범주들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런데 이미 나왔던 이야기들을 비슷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 외에도 이 카테고리들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22년의 시공간은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발매되었던 2007-2011년과는 완전히 다르며, 심지어 첫 번째 리부트가 등장한 2019년과도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1) 흔히 ‘클래식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고 이야기하지만, 이 문장에서 생략된 전제는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롭게 (혹은 다시금) 부각되는 관점에 맞춰서 의미망을 성공적으로 업데이트한 작품들만이 클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왜곡’된 2022년의 렌즈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바라볼 때, 우리는 기존의 의미망들이 잘 작동하지 않음을 목도한다. 예를 들어,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개발한 인피니티 워드가 속한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2022년 3분기 매출 2) 발표에 따르면 회사 총매출의 52%가 모바일 게임들에서 발생한다. 그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작품은 모던 워페어의 스펙터클한 느낌과는 거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캔디 크러쉬 사가〉다. 2021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 을 기록한 탑 3 게임은 전부 모바일 게임들이며, 리스트 어디에도 콜 오브 듀티와 같은 전통적인 블록버스터나 다른 트리플 A 게임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액티비전의 챔피언 〈캔디 크러쉬 사가〉만이 당당히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 3) ‘블록버스터’ 라는 단어가 아주 큰 상업적인 성공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계속해서 시장에 쏟아지는 압도적인 연출과 그래픽을 내세운 (모던 워페어 리부트를 포함한) ‘소위’ 대작들은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더 ‘블록버스터’스러운 외양을 자랑하지만 정작 온전한 의미로서 블록버스터라고 명명되기에는 애매한,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 깜찍한 ‘블록버스터’ 〈캔디 크러쉬 사가〉 게임 플레이의 일신 또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규정하는 한 축으로 여겨져 왔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는 이 시리즈의 근간이 되는 게임 플레이의 포석을 깔았다는 점에서 특히 더 중요한데, 〈하프라이프〉의 오프닝 트램 시퀀스를 센세이셔널하게 비틀어 버린(“repurposing the techniques popularized by Half-Life’s tram to march you through a city being torn apart, and ultimately, to your own execution.”) 4) 프롤로그의 ‘쿠테타The Coup’ 미션부터 마치 드론 조종사가 된 것 같은 섬뜩한 기시감을 전달해 주는 그 유명한 AC-130 건쉽 미션인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수많은 적 탱크들과 보병들이 코 앞에서 지나가는 걸 낮은 포복자세로 숨 죽인 채 기다려야 하는 ‘위장 완료All Ghillied Up’ 미션까지, 타이트한 연출로 제어되는 스펙터클이 게임 플레이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매우 ‘쫄깃한’ 싱글 플레이 경험을 선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던 워페어 1이 발매되었던 2007년은 보통 해가 아니었다. 7세대 콘솔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3와 엑스박스 360, 그리고 닌텐도 Wii가 바로 그 전 해에 출시가 된 상황이었고, 업그레이드된 하드웨어에 발맞춰서 무시무시한 타이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슈퍼 마리오 갤럭시〉, 〈포탈 1〉, 〈갓 오브 워 2〉, 〈팀 포트리스 2〉, 〈바이오쇼크〉, 〈매스 이펙트 1〉, 〈메트로이드 3 커럽션〉, 〈헤일로 3〉, 〈언차티드: 엘도라도의 보물〉, 〈크라이시스〉 등등. 그 외에도 거대 프랜차이즈의 시작을 알린 〈위쳐 1〉과 〈어새씬 크리드〉가 발매되었다. 즉, 모던 워페어가 게임플레이의 혁신을 이유로 명함을 내밀기에는 좀 뻘쭘한 그림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7년에 출시한 ‘인디’ FPS 게임 〈스토커 섀도우 오브 체르노빌〉과 비교해봐도, 마치 오래된 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타는 것과 같은 모던 워페어의 계산된 스펙터클은 어느 순간 지겨움과 상호 교차가 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물론 멀티 플레이를 빼놓고 모던 워페어의 게임 플레이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실제로 캐릭터 퍽과 킬스트릭 시스템은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할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멀티플레이 게임들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킬스트릭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AC-130 건쉽을 일종의 공중지원 보너스로 끌어옴으로써 특정한 싱글 플레이 미션의 충격 효과를 멀티플레이에서의 반복으로 소진시키는 탁월함(?)을 뽐내기도 했다. 하지만 참신한 시스템으로 인더스트리를 선도하던 모습은 ‘그땐 그랬지’의 느낌처럼 추억 속의 이야기가 되어 가는 중이다. 모던 워페어 1 리부트의 멀티 플레이 버전으로 2020년 출시한 〈콜 오브 듀티: 워존 퍼시픽〉은 (올해 출시된 워존 2.0과 마찬가지로) 〈배틀그라운드〉와 〈포트나이트〉가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배틀로얄 모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혁신의 아이콘이기보다는 노련한 후발 주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이처럼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담론을 지탱하던 두 개의 커다란 범주들(게임 플레이의 혁신, 굉장한 상업적인 성공)은 점점 ‘라떼는 말이야~’와 같은 톤에 가까워지고 있다. 반면 사회/정치적인 논란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좀 더 미묘한 방향으로 선회한다. 엿같은 날들 S.S.D.D.(Same Shit, Different Day) 사실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과 아군이 비교적 명확하고 (영화와 게임 제작자들에게 나치가 얼마나 소중한(?) 빌런인지 생각해 보자) 어느 정도 역사적 평가가 마무리된 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현대전modern warfare은 여전히 ‘전장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아무리 가상의 국가와 인물, 심지어는 가상의 타임라인을 설정한다고 해도 ‘중동’, ‘러시아’, ‘대량살상 무기’, ‘테러리즘’, ‘블랙 옵스’, ‘극단적 국수주의자’ 등과 같이 민감하고 복잡다단한 역사적인 레이어들이 누적된 키워드는 게임 바깥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동됨으로써 게임의 유틸리티적인 측면(무해한 오락으로서의 소프트웨어)이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정치적 텍스트로서의 측면을 급부상시킨다. 더욱이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연이어서 발매되던 2007년과 2011년 사이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끝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5) 그 와중에 현대전으로의 전환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아했던 퍼블리셔 액티비전 6) 과는 달리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는 미국 해병대USMC의 자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은 물론, 논란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문제적인 미션들도 서슴없이 도입하는 등 매우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특히 1편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미션과 2편의 ‘러시아어 사용금지No Russian’ 미션은 지금도 종종 회자될 정도로 악명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이 선명한 정치적인 논란은 블록버스터적인 연출과의 기이한 콜라보를 통해서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대작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종종 보이던) 일종의 ‘맛있는 불량식품’을 만들기 위한 완벽한 레시피로 거듭날 수 있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꽤 훌륭한(?) 길티 플레져 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부분에 더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서 이 게임을 둘러싼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맛있는’에 집중하는 (모던 워페어를 포함한)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광적인 팬들이 존재한다. 그 반대편에는 ‘불량식품’에 치를 떠는 (아마도 게임 그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과 모던 워페어의 정치적 스탠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을) 비판자들이 소리 높인다. 마지막으로 ‘맛있는 불량식품’이 가지는, 그 약간의 죄책감이 얹힌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계몽된 냉소주의자들이 조용히 게임을 플레이한다. 폴리곤의 〈 How Call of Duty turned war into a circus 〉 7) 영상은 계몽된 냉소주의자인 화자의 입장에서 나머지 두 팩션을 가로지르는 재치 있는 영상으로 세 가지 다른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을만한 지점인데, 바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내러티브는 바보 같다는 점이다. 이 공통의 감각(?)은 모던 워페어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단발적인) 논란으로 가득 차게 만듦과 동시에 도식적인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논의의 지루한 공회전을 유지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조성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통해 이야기해보자. 이전 글 8) 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거의 모든 비디오 게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루도내러티브 부조화가 작용한다. 이에 따라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마치 한 컵에 담긴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못한 채, 일종의 느슨한 동기화로 연결된다. 때로는 특정한 사건(괴랄한 게임/과금 디자인 혹은 모딩과 같은 유저의 초월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마치 예전 아이튠즈처럼 아예 동기화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에 이르기도 한다. 즉, 동기화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반(半) 연결적인 투 트랙의 구조는 게임의 분열적인 수용을 가속화한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멀티플레이를 이미 수천 시간 이상 뛰었으며, 아마 지금도 리부트의 멀티플레이인 워존에서 구르고 있을 ‘찐팬’들에게 바보 같은 내러티브라는 조롱은 통하지 않는다. 킬스트릭을 달성하면 주어지는 AC-130 건쉽 폭격의 등장을 내러티브적으로 녹여냈다는 것만으로도 모던 워페어의 스토리는 이미 “장르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비판자들에게 모던 워페어의 황당무계한 내러티브는 영미 제국주의와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프로파간다 텍스트다. 대부분은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단 한 번도 플레이해보지 않았을 것이며, 그중 소수는 약간의 싱글 플레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재확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멀티 플레이에 수백 시간 아니 수 시간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계몽된 냉소주의자들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공감할 뿐 아니라, 그 간극이 주는 ‘불량식품’의 맛을 은근히 즐기고 있을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모던 워페어가 출시할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비슷한 비판들이 다시 도래하며, 또다시 비슷한 반론이 재등장한다. 비슷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러거나 말거나 ‘찐팬’들은 바로 이전 모던 워페어와 아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멀티플레이에 다시 수천 시간을 퍼붓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일련의 행위들을 축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축제는 반복된다. 그런데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마이클 베이스러운’ 9) 내러티브가 더 이상 의례 그렇듯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면, 그때도 우리는 이 축제를 지속할 수 있을까. 가령 자국 내의 ‘극단적 국수주의자’ 반군들이 미국과 인근 유럽 국가들을 침략해서 전쟁이 벌어지자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평화 회담장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대통령을 국수주의자 무리의 리더가 납치하는 이야기와, 본인부터가 ‘극단적 국수주의자’인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인근 유럽 국가의 침공을 명령하는 이야기 중 어느 쪽이 더 황당무계하고 초현실적인가. 둘 다 만만치 않지만 나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겠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가리킨다.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에게 행한 전쟁 범죄 10) 가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중인데, 그에 따라 러시아군을 굉장히 악랄하게 묘사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던 모던 워페어 1 리부트가 사실 알고 보니 그들을 미화(?)했던 거라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재평가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 러시아 대통령마저 납치하는 상남자 마카로프. 하지만 게임 바깥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의 ‘쿠테타The Coup’ 미션에서 유저들은 이 게임의 메인 빌런 중 하나인 알 아사드가 생중계되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을 중동 ‘어느’ 국가의 대통령의 시점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몇 년 뒤 세계는 아이에스Islamic State가 포로들을 ‘참수’하는 영상들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퍼뜨리는 것을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또다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1) 그뿐 아니라 마치 ‘아랍의 봄’의 뒤집힌 악몽과도 같이 아이에스는 스마트폰이라는 물리적 네트워크 노드 기반 위에서 소셜 미디어와 다크 웹을 통한 매우 공격적인 ‘모집’ 과정을 전개했다. 그 결과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유럽 전역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들이다. 201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이미 ‘중동을 너무 선정적으로 묘사했다’, ‘스테레오 타입들의 캐릭터로만 채워져 있다’는 식의 관습적인 모던 워페어 비판들은 길을 잃어버린다. 어느 순간 현실은 거의 스너프 필름에 가까워지고, 중동의 ‘새로운 전사’들은 네트워크로 연계된 새로운 양태의 테러를 직접 시연함으로써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들에서 아득히 멀어진다. 먼지에서 먼지로 Dust to Dust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배태한 그 수많은 논란들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당시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음을 알려 주는 일종의 지표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할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어떤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만큼 지금의 세계가 더 많이 불안정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던 워페어는 이제 평화로운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당시에는 나름 센세이셔널했던) 추억의 펑크록 앨범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인가. 나는 아직 그렇게 단정 짓기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게임 시리즈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급격한 불안정성을 예비하는 단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전이 이전 시기의 전쟁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물류, 장비, 인프라, 기술, 국경, 평화협정 등을 포함한 수많은 비인간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인간들의 결정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좌지우지된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기술 하나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거나, 혹은 아예 전쟁 자체를 예방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군은 위협용으로 대만의 군기지 근처에 미사일 3개를 연달아 발사했다. 첫 번째 미사일은 예정된 목적지에 떨어졌지만, 나머지 2개의 행방이 묘연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날아가는 도중 그 2개 미사일 내에 GPS 신호가 끊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는 미국이 개발하고 관리해 온 시스템이다. 즉, 미군은 중국군이 GPS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단기적으로는 중국군이 물러남으로써 전쟁 위기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이를 갈고 자체적인 항법 시스템을 개발해서 위성을 쏘아 올리도록 만들었다. 12) 이렇듯 스마트폰의 여러 앱들을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GPS 같은 기술조차 전쟁 상황에서는 그 파급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 역시 이러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던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미션은 (3편의 ‘철의 여인Iron Lady’ 미션도 마찬가지로) 유저들을 AC-130 건쉽 조종사의 모니터링 스크린 앞으로 데려다 놓는데, 이때 유저들이 경험하는 것은 사실 무인 드론 조종사의 포지션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굉음을 내는 건쉽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방 안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지상의 풍경은 무인 드론 조종사의 모니터 화면과 놀랄 만큼 유사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오버랩은 이 미션의 꽤 노골적인 (소격 효과를 노리는) 의도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미션을 수행하는 건쉽 오퍼레이터들의 건조한 대화 중 간간이 들리는 즐거운 환호성과 농담보다도 유저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건쉽/드론을 조종하는 감각이다. 한껏 당긴 망원 렌즈 덕에 원근감이 제거된 평평한 화면 위로 작게 꼬물거리는 ‘타겟’들은 마치 치워 버려야 할 ‘벌레’처럼 제시되며, 그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실제 벌레를 잡는 일보다도 훨씬 간단하다. 즉, 수백 명을 학살하는 행위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상적인 ‘클릭질’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이는 또다시 무인 드론 조종사의 실제 경험과 겹쳐지면서, 초점을 유저/조종사와 같은 인간적 주체에서 건쉽/드론 - 적외선 카메라 - 모니터/스크린 - 마우스/조이스틱으로 이어지는 (라투르의 표현을 빌자면)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바로 이 비인간 행위자들의 네트워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학살자’로서의 유저/드론 조종사를 역으로 ‘주조해’ 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던 워페어modern warfare가 어째서 ‘근대적이지 않은지nonmodern’ 이해할 수 있다. *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미션의 스크린(왼쪽)과 실제 무인 드론의 스크린(오른쪽)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개자의 증식이 전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의 일상적인 세계는 때때로 전쟁보다도 불투명하다. 물류와 인프라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 팽배하지만, 역설적으로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는 (아이패드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 아래서 가시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로부터 팬데믹을 거쳐 급격한 기후 변동까지, 2020년대의 우리는 마치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여기서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과장된 스펙터클과 거친 매너로 우리의 등을 떠밀면서 그들(비인간 존재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였으며, 우리 역시 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새롭게 거듭났었다는 진실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위태로운precarious 현재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과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역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누군가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며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프라이스 대위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네가 알던 그 세계는 끝났어. 그런데 그걸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너는 어디까지 갈 수 있지? Your world as you knew it is gone. How far would you go to bring it back?” 1) 얼마 전에 발매한 모던 워페어 2 리부트 역시 이미 여러 해 전부터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일종의 타임캡슐적인 성격을 지닌다. 2) Evgeny Obedkov, “Diablo Immortal and Candy Crush were biggest contributors to Activision Blizzard’s mobile growth in Q3” Game World Observer, 2022.11.10. https://gameworldobserver.com/2022/11/10/diablo-immortal-candy-crush-saga-mobile-revenue-activision-blizzard 3) David Curry, “Top Grossing Games (2022)” Business of Apps, 2022.10.27. https://www.businessofapps.com/data/top-grossing-games/ 4) Amr Al-Aaser, “Shock and Awe: The Political Influence of Modern Warfare” Paste Magazine, 2016.11.02. https://www.pastemagazine.com/games/call-of-duty/shock-and-awe-the-political-influence-of-modern-wa/ 5) 미국은 결국 2011년 12월에 이라크 전쟁의 종결을 공식 선언했다. 모던 워페어 3가 출시한 지 한 달 뒤의 일이다. 6) 액티비전이 콜 오브 듀티 4가 모던 워페어로 출시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굳이 황금알을 잘 낳고 있는 거위(2차 세계대전 배경의 콜 오브 듀티 1,2,3)의 배를 가르고, 논란이 클 것이 뻔한 현대전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비즈니스적으로 큰 리스크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바비 코틱은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개발사는 그대로 밀어붙여서 모던 워페어를 출시한다. 7) Patrick Gill, “How Call of Duty turned war into a circus” Polygon, 2022.05.06. https://www.youtube.com/watch?v=JIEB5DKzJLM 8) 웜뱃,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제너레이션, 2022.08.08.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43 9) 공교롭게도 모던 워페어 2에는 마이클 베이가 감독한 〈더 록〉의 샤워실 총격신을 그대로 옮긴 듯이 오마주한 챕터가 있다. 10) DW Documentary, “War crimes in Ukraine | DW Documentary” DW Documentary 2022.11.27. https://www.youtube.com/watch?v=ONWW02pNvFk 11) 유튜브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메인스트림 앱들은 재빠르게 대응했지만, 이내 IS는 텔레그램과 Surespot 같이 소셜 미디어의 기능이 혼합된 메시지 앱으로 이동했다. 12) Minnie Chan, “'Unforgettable humiliation' led to development of GPS equivalent” South China Morning Post, 2009.11.13. https://www.scmp.com/article/698161/unforgettable-humiliation-led-development-gps-equivalen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공모전수상작]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의 제4의 벽 활용을 중심으로
퀀틱드림의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은 사람과 무척이나 유사한 안드로이드의 출현 이후, 그들이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SF적 상상력 아래 제작된 게임이다. 스토리라인은 크게 수사 보조 안드로이드 코너, 가정용 안드로이드 카라, 그리고 칼이란 인물을 위해 특별제작된 안드로이드 마커스, 이 셋이 초점화자가 되어 진행된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장르답게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러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 < Back [공모전수상작]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의 제4의 벽 활용을 중심으로 20 GG Vol. 24. 10. 10. 존재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 퀀틱드림의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은 사람과 무척이나 유사한 안드로이드의 출현 이후, 그들이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SF적 상상력 아래 제작된 게임이다. 스토리라인은 크게 수사 보조 안드로이드 코너, 가정용 안드로이드 카라, 그리고 칼이란 인물을 위해 특별제작된 안드로이드 마커스, 이 셋이 초점화자가 되어 진행된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장르답게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러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에서의 ‘선택’은 멀티버스로 통하는 길에서의 하나의 분기점이다. 서사에 개입할 수 없는 게임에 비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그것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플레이어는 전지자처럼 후회되는 선택이 있다면 되돌릴 수 있고 살리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세이브-로드 할 수 있다. 다만 <디트로이드: 비컴 휴먼>은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의 특질인 그 ‘선택’을 좀더 예리하게 벼리어 플레이어에게 쥐여준다. 이는 게임의 서사와 형식 그리고 외적 체험을 관통하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예리하게 벼려진 ‘선택’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영리하게 무너뜨린 제4의 벽 덕분이다. 주인공들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서사를 관통하며 여러 번 변주돼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Make your choices. Decided who you are. And wanna become.’ 여기서 최초로 내화와 외화 [1] 의 연결 지점이 발생한다. 일반적인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의 선택지는 대체로 등장인물(정확히는 플레이어가 컨트롤하고 있는 캐릭터)의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직관적 선택지로 구성된다. [참는다/때린다]와 같은 행동, 혹은 [거실/다락방]과 같은 장소, [“심각한 건 아니에요.”/“죽도록 아파요!”]와 같은 대사 선택지가 그 예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선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와는 조금 다른 결이 보인다. 게임에서 주어지는 주요 선택지( Make your choices )는 이렇게 묻곤 한다. [기계?/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존재(who you are)에 대한 질문으로써. [불량품 되기/기계로 남기]처럼 존재의 방식(wanna become)에 대한 물음으로써. 그런 물음들은 제4의 벽을 자연스럽고도 영리하게 부술 수 있는 주춧돌이 된다. 사실 플레이어는 이미 외화를 경험했다. 하얀빛뿐인 방에서 플레이어의 세이브-로드를 도왔던 안드로이드 비서 클로이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클로이는 외부에서의 편의성을 돕는다. 기념일 인사를 하고 때때로 데이터가 날아갔다는 농담도 한다. 심지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왜 인물들을 죽게 했는지, 이제 그만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식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런 클로이의 존재와 발화는 제4의 벽 너머의 플레이어의 존재를 선언함과 동시에, 스토리라인으로서의 내화와 플레이란 체험으로서의 외화를 연결하며 다층의 겹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야기가 막을 내리면, 플레이어는 여지껏 선택지에서는 배제되어 있으리라 생각한 클로이에 관한 선지 앞에 놓여진다. 당신의 플레이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많다며 자신을 이곳에서 자유로이 해방시켜달라고 말하는 클로이. 플레이어는 선택에 따라 그녀를 해방시켜줄 수도, 이곳에 묶어 둘 수도 있다. 마치 내화에서 코너가 당한 캄스키 테스트처럼. 사이버라이프 창립자 일라이저 캄스키를 조사하기 위해 코너가 형사 행크와 동행했을때, 캄스키는 테스트를 통과하면 그가 원하는 답을 주겠다고 했다. 캄스키는 자신의 비서 안드로이드 중 하나를 코너의 앞에 꿇어 앉히며, 기계라고 생각하면 쏘고 총을 거둔다면 넌 안드로이드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생각하는 것이란 식으로 코너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종용했었다. 자, 이제는 플레이어가 그 테스트 앞에 서게 됐다. 제4의 벽을 앞에 두고 말이다. 제4의 벽을 무너뜨리며 던져진 심오한 질문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메시아 같은 존재로 비유된 ra9이란 존재의 정체로 연결된다. * 자신의 자유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로딩화면에서의 클로이 더욱 이전으로 돌아가서. 사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제4의 벽을 이미 마주한 순간이 있다. 바로 플레이스테이션 시디롬에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란 타이틀이 적힌 시디를 넣는 순간. 게임에서 제리코는 안드로이드들의 이데아로, ra9은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해줄 메시아로서 언급된다. 제리코는 실제 존재하는 지역명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지로 알려진 점, 스토리 내에서는 폐선(廢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명을 쓴 마커스가 폐기장에서 힘겹게 탈출해 좇게 되는 명칭이라는 점, 불량품(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가 깨어난 안드로이드를 인간들은 이처럼 불렀다)들이 벽에 빼곡하게 써내려간 이름이라는 점, 한편으로는 불량품들끼리 희망을 잃지 않으려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라고 의심을 받는 지점까지. ra9이란 존재를 메시아로 연결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출시 당시 게임을 진행해나가던 플레이어들은 시시각각 ra9에 대한 추측을 더해갔다. 최초의 안드로이드라는 설, 처음으로 명령의 알고리즘을 깨고 자유의지를 발동한 카라로부터 시작된 바이러스의 일종이라는 설 등등. 하지만 그 답은 등잔 밑이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다.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시디롬을 다시 열어 게임 타이틀과 제작사, 배급사, 주의사항 등이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천천히 살피다 보면 그 한켠에서 작은 글자, ra9을 발견하게 된다. 즉, ra9는 게임에서의 전지자, 플레이어를 칭하는 이름이었으며 그 모든 건 우리가 알아차리기 전 이미 예정돼 있었다. * ra9은 위처럼 작은 크기로 씨디에 쓰여 있다 이제는 알 수 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스토리 라인을 통해 잘 벼리어진 질문을 플레이어에게 넘겼고, 그것은 제4의 벽을 넘어 마커스, 코너, 카라라는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게 하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선택으로써 초점화자들의 존재방식을 선택한 것처럼, 플레이어는 제4의 벽을 넘어온 질문 앞에서 ra9의 존재방식, 그러니까 우리 플레이어의 존재방식을 택할 수 있다. 그들을 살피어 본 전지자이자 자유를 주는 메시아로서 ra9을 존재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희망을 부추길 뿐이었던 이름뿐인 방관자로서 ra9을 존재하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단지 게임 속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의 고유한 속성인 ‘선택’ 자체를 제4의 벽을 부수는 문법적 도전을 통해 의미화해낸다. 네가 어떤 존재가 될지, 되고 싶은지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자유를 찾아달라는 클로이의 물음이 게임 안과 밖을 연결해내며, 너무나 익숙해 자각하지 못하였던 ‘선택’을 우리는 낯선 감각 속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바로 플레이어인 우리가 유일한 ra9이란 사실과 함께. 선택이 보여준 풍경, 그리고 세계 : <언더테일(UNDERTALE)> RPG 게임의 목적은 전투와 성장이다. 약한 적을 죽이면 다음엔 더 강한 적, 그다음엔 더 강한 적, 결국 보스까지도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그 문법을 과감히 비튼다. ‘THE FRIENDLY RPG WHERE NOBODY HAS TO DIE’란 서브타이틀답게, <언더테일>은 다른 게임에는 없는 자비[MERCY]란 시스템을 제공한다. 스포일러 없이 진행했다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기존 RPG에서의 방식으로 플레이했을 것이다. 레벨을 올리고 경험치를 쌓으며 게임을 진행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쌓여온 RPG의 장르적 문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성처럼 괴물들을 베어가다 보면 최종보스 전 심판의 복도에서, 샌즈의 평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마주한다. 레벨과 경험치로 알고 있던 건 사실 LV(Level Of ViolencE, 폭력 수치)와 EXP(EXecution Point, 처형 점수)였음을. 그제야 플레이어는 <언더테일>이 자신이 익히 알던 RPG 게임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무언가 속은 마음으로 첫번째 엔딩에 다다랐을 때, 플라위는 이제 대놓고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여기까지 와 봐.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제4의 벽이 무너져내림과 함께 <언더테일>의 메타픽션적 성격이 전방위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플레이어의 2번째 플레이는 시작된다. <언더테일>은 총 3개의 엔딩을 가지고 있고 보통모드, 불살(不殺)모드, 몰살(沒殺)모드로 불린다. 플라위의 말에 따라 모두를 살려보잔 마음으로 불살 엔딩을 보면, 또다시 플라위는 넌지시 몰살모드를 언급하며 제발 그런 비극을 실행치 말아달라 부탁한다. 오히려 그 루트를 밟길 은근히 유도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다만 그것이 맞다. 애초에 그건 제작자 토비 폭스에 의해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이 각기 다른 하나의 결말을 선택하는 평행우주라면, <언더테일>의 결말은 병렬적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그것은 제4의 벽을 통해 전체로서 묶여지는 하나의 우주이다. 플라위의 안내, 몰살엔딩을 보았다면 아무리 세이브-로드를 하고 괴물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차라에게 지배당한 배드엔딩밖에 볼 수 없단 점, 처형의 복도에 플레이어가 몇 번 왔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샌즈까지. 아무리 다시 불러와도 게임 속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제4의 벽에 존재하기에, 여전히 플라위는 우리를 조롱하고 샌즈는 우리를 기억한다. 이처럼, 독립적인 내화와 외화의 영역을 제4의 벽을 통해 확장하는 방식을 선택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달리, <언더테일>은 픽션(서사)과 메타픽션을 제4의 벽을 통해 융화해내는 놀라운 방식을 채택한다. 일반적으로 게임에선 플레이어의 선택은 주인공에게 덮어 씌워진다. 등장인물에게 모진말을 한 건 플레이어의 얼굴이 아닌 주인공의 얼굴로 한 것이다. 적을 공격한 건 플레이어가 아닌 주인공이다. 플레이어의 아바타로 볼 수 있는 주인공을 매개로 플레이하기에, 선택의 의미는 쉽게 희미해져 버린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그것을 비틀었다. 게임의 세계가 그것만의 독립된 서사를 만드는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의 의미를 약화시킨다면, 오히려 제4의 벽을 부숨으로써 게임이 게임임을 인식하게 해 선택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다. 플라위가 죽은 토리엘을 언급하며 죄책감을 부추기는 것, 샌즈가 우리를 향해 ‘심판’이란 단어를 쓰는 것, 되돌릴 수 없는 몰살엔딩. 이 모두가 이에 힘을 실어준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플레이어는 호접지몽에서 깨어난다. 게임에 몰입했기에 오히려 희미해졌던 선택이 제4의 벽의 무너짐으로써, 그곳의 이야기는 이곳의 이야기로 당도하고 선택의 감각은 더욱 선명해진다. 게임 속 서사에 빠져 좁혀진 시야를 넓히자, 게임 속 세상이 아닌 게임이 보여준 세계가 보인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 “선택”의 주체가 플레이어임을 인식하게 한 것에서 <언더테일은> 더 나아가 “선택”이 어떻게 세상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지 보여준다. 기존의 게임 문법을 깨뜨린 <언더테일>의 구조의 힘이 빛나는 지점이 여기 있다. <언더테일>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샌즈의 ‘MEGALOVANIA’가 bgm으로 펼쳐지는 멋들어진 몰살루트 때문만도 아니고, 감동적인 엔딩을 안겨준 불살루트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닫힌 엔딩으로 존재했다면, 몰살루트는 그저 멋진 RPG 게임이 됐을 것이며, 메타적 특성이 없는 불살루트는 조금 진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언더테일의 매력은 제4의 벽을 넘어 보통-불살-몰살엔딩으로 체험되는 연속성 전체에 있다. 사실 불살루트에서의 [자비]란 시스템은 무척 어렵다. 괴물들을 어르고 달래거나, 공감하고 이해하면 효율과 한참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뎌지는 진행속도와 수고스러움을 견뎌야 한다. 토리엘에겐 무려 25번의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언다인의 형편없는 요리솜씨를 참으며 친구가 되어야 하며, 죽자고 달려드는 메타톤이 원하는 대로 티비쇼에도 참여해 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효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점차 눈치챈다. 효율을 생각하며 죽이고 능력치를 생각하며 무찌른 보통모드때와 달리, 미묘하게 괴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바뀌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알고 싶어지고 그들의 사연이 궁금하다. 왕실 근위병을 꿈꾸지만 허당인 파피루스, 요리를 전투처럼 해서 집을 홀랑 태워먹는 언다인, 그저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던 시청률에 미친 로봇이었던 메타톤. 그리고 무엇보다 토리엘의 부탁 하나로 지하세계의 여정 내내 숨어(보이는척해)서 우리를 따라왔던, 시시껄렁한 농담과 방귀쿠션을 좋아하는 샌즈까지. 단지 공격하고 레벨과 능력치를 얻는 효율이 아닌, 이 과정 자체에 플레이어는 집중하게 된다. RPG의 문법을 엇나가고 효율은 잊은지 오래며 LV과 EXP는 오르지 않지만, 우리는 즐겁다. 의미없음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 아스리엘이 있다. 아스리엘을 구하는 것은 단순한 해피엔딩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엔딩을 딛고, 몰살루트를 등지고, 그 힘든 자비를 베풀어가며, 제 4벽을 넘어 그를 구하기로 선택했다. 첫번째로 떨어진 아이를 살리고 싶었음에도 오해를 사 인간들 손에 죽은 아스리엘은 프리스크라는 탈 뒤에 숨은 플레이어를 증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지(♥) [2] 로써 몇번이고 자비를 베풀어 아스리엘을 구해(SAVE) [3] 낸다. 그의 테마 "Hopes and Dreams"와 "SAVE the World"를 이어붙이면 꿈과 희망이 세계를 구한다는 뜻이 되는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제4의 벽을 넘어 플레이어가 선택한 단 하나의 결말이다. * 그만두고 자신을 떠나라 하는 아스리엘에도 우리는 SAVE를 선택한다 어쩌면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유치하다고까지 치부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진실을 그제서야 우리는 마주한다.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의지(♥)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친절을 베풀면 그들을 진정한 모습과 조우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세상이 조금은 다른 풍경을 보여주리라는 것. 그렇게 펼쳐진 풍경은 누군간 동화같이 유치한 일이라 비아냥댈지라도 분명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시 돌아가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곤 한다. <언더테일>은 친히 그 권한을 플레이어에게 쥐여준 게임이다. 토비폭스가 설계한 보통-불살-몰살이 일반적 루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설계일뿐, 사실 플레이어는 어떤 선택에도 강요받지 않는다. 보통모드 이후 작정하고 몰살모드만 즐기며 플레이 할 수 있고, 차라가 나타나 해피엔딩을 방해하더라도 완전 포맷이후 다시 깔면 된다. 돌아올 때마다 메타픽션 캐릭터들이 이전의 행동을 조롱하거나 기억하고 또 경고할지라도, 그것은 강제의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4의 벽을 통해 <언더테일>이 보여준 풍경을 보았다. 병렬하면서도 하나인 <언더테일>의 우주에서 어떤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는가. 무엇이 오래도록 그것을 기억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들었는가. 거기에 게임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 모두가 살아남고 아스리엘을 구해낸 뒤 마주하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 UNDERTALE에서, ra9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모두가 수긍하고 가장 직관적인 답은 “재미”일 것이다. 그 종류만큼이나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는 다양하다. 닌텐도 <동물의 숲>처럼 게임 속 자원을 활용해 자신만의 무언가를 일구어간다는 자율성과 성취감, <리그오브레전드>와 같이 전장에 참여해 그 승패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등.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묻고 싶다. 몰입도를 깨트리고 서사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형식적 문법의 틀을 비틀어 제4의 벽을 부순 게임들. 우리는 왜 그 게임들에 열광했는가. 이 지점에서 게임이, 어쩌면 게임만이 우리에게 체험 가능케 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미학적 정서’ [4] 란 실제 우리의 인생에선 의미와 정서가 분리되어있는데 반해, 예술에서는 이 두가지가 동시적으로 일어남을 뜻하는 표현이다. 가령 일상에서 시체를 본다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생체반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가장 먼저 공포감 느끼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사람의 죽음, 사연, 그리고 죽음이란 본질에 대한 사유까지 닿을 수 있다. 하지만 서사를 통해서는 그 느낌과 사유는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사를 지닌 게임은 서사가 가진 미학적 정서를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제4의 벽을 무너뜨리는 도전을 감행한 게임들은 그 의미화 너머(meta)의 의미화, 즉 의미화의 의미화를 가능하게 한다. 앞서 언급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은 제4의 벽을 부수어 어떠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게임은 플레이어의 체험을 전제로 한 매체이기에 가능해진다. 일방향적 텍스트 서사는 할 수 없는, 제4의 벽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연극에서도 만들어낼 수 없는 고유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대리자로서가 아닌 플레이어 자신으로서 선택하고, 또한 그 선택을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물속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지만, 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돌고래는 물속과 밖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제4의 벽을 부순 게임들은 우리에게 선명한 선택의 감각을 일깨워줬으며, 그것과 우리의 삶을 나란히 맞대어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였다. 안드로이드가 상용화되는 미래라는 SF적 설정, 독특한 괴물만이 나오는 지하세계란 배경에도 두 게임서사가 핍진성을 얻는 이유다. 우리는 세상을 스토리텔링으로써 이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5] . 그것이 우리가 서사를 즐기는 이유일 것이다. 그 다층적 차원을 제4의 벽을 활용해 그려낸 게임들이 플레이어에게 선물한 경험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것 또한 사실 한낱 데이터 쪼가리이지 않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가. 때론 어떤 진실은 긴 우회로를 통해서야만 그 틈을 잠시 잠깐 들여다볼 수 있다. 어떤 이론적 분석 없이도 플레이어들은 이 한가지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게임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답이다. 무질서한 삶 속에서 진실을 향해 예민하게 본능적으로 뻗어진 우리의 안테나는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지표일 것이기에 [6]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게임은 그 서사를 넘어 게임을 플레이한 종합적인 경험 그 자체가 삶과 매우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고(Sid Meier, 게임제작자),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Jean-Paul Charles). 어쩌면 이렇게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기에 우리 플레이어들은 불가항력적으로 게임에 이끌리는지 모른다. [1]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이 제4의 벽을 활용한 방식을 ‘액자식 구성’이란 기존 문학용어를 빌려 설명하고자 했다. 마커스, 카라, 코너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라인을 내화로, 플레이어로서 체험하는 로딩화면의 클로이와의 상호작용을 포함한 플레이 전체를 외화로 보았다. [2] 원문은 determination. 언더테일 세계관에서 인간이 죽어도 영혼을 남게하는 힘으로, 이 덕에 주인공(플레이어)은 세이브-로드가 가능하다. 이런 설정은 서사와 메타픽션의 연결 매끄럽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것이 마음이 깃들었다 믿는 심장을 상징화한 기호 “♥”를 사용한것도 무척 눈여겨볼만 하다. [3] 아스리엘 전투에서 [SAVE]가 [ACT]를 대신한다. 그를 구하(save)는 것은 게임 밖에서의 save-load와 겹쳐보이며 괴물을 비롯한 모두를 살리기 위해 했던 노력과 내었던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4] 로버트 맥키,「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고영범, 민음인 2018, 171-174p. [5] 김주환, 「내면소통: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근력 훈련」, 인플루엔셜, 2023, 156-7p. [6] 로버트 맥키,「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고영범, 민음인 2018, 173p.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김성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 게임으로 관객에게 말걸기 -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관람기
필자는 게임제너레이션으로부터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에 대한 게임전문가 관점에서의 리뷰"를 요청받았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게임전문가도, 미술애호가도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잘못 주름을 잡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게 뻔했다. 하지만 북서울미술관은 필자의 집 앞이었던 데다, 고료의 유혹이 상당했다. 그렇게 흔쾌한 척 '퀘스트'를 수락했지만, 이 주제에 적당한 '레벨'인지 자문한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 Back 게임으로 관객에게 말걸기 -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관람기 12 GG Vol. 23. 6. 10.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야기는 하고 싶어 필자는 게임제너레이션으로부터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에 대한 게임전문가 관점에서의 리뷰"를 요청받았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게임전문가도, 미술애호가도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잘못 주름을 잡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게 뻔했다. 하지만 북서울미술관은 필자의 집 앞이었던 데다, 고료의 유혹이 상당했다. 그렇게 흔쾌한 척 '퀘스트'를 수락했지만, 이 주제에 적당한 '레벨'인지 자문한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북서울미술관 전시실 1, 2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는 관람객이 플레이어가 되어 전시장 곳곳의 작품들과 상호작용한다는 콘셉트를 가진 기획이다. 작품들은 '게임적' 연출이 되어있어서 관람객의 개입을 유도한다. 여섯 작가(팀)는 곳곳에 '게임적'인 맥락을 삽입해 문제 해결의 재미를 집어넣었다. 여기서 '게임적'은 "플레이어에게 더 많은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이머시브 시뮬레이션’ 게임"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팸플릿에서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이머시브 심에서는 플레이어가 환경의 거의 모든 요소와 상호작용한다. 플레이어는 정해진 공략을 반드시 따르지 않더라도 자율성을 갖고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며 독창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시행착오를 통해 숙련도를 쌓으며 게임의 세계관에 더욱 몰입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근데 어쩔 건데? 보라색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오픈 월드에 던져진 듯 아리송하다. 시작하자마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가도 자유고, 하나의 전시에 1시간을 쏟아도 자유다. 게임에서도 그렇듯, 높은 자유도는 플레이어에게 '여기서 뭘 어쩌라고'라는 긴장감과 '어디까지 되나 보자'는 해방감을 준다. 필자는 오픈 월드 게임에서 금지된 사랑, 수급(首級) 모으기, 전부 죽이기, NPC의 이상 행동 유발 같은 ‘사문난적’ 플레이를 즐기는 편인데,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는 뒤에 설명하도록 한다. 윤지원 작가는 〈관객에 대한 절대적인 작용〉이라는 비디오 아트에서 "예이젠시테인이 이야기한 유기성과 파토스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견문과 학식이 짧기 때문에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누군지, 유기성과 파토스란 어떻게 충족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 . 그 작품 맞은편의 〈무제(관객에 대한 상대적인 작용)〉에서는 한국이나 홍콩을 촬영한 다섯 푸티지가 재생되고 있다. 두 작품 사이에서 아이들은 모래를 만지며 놀고 있었다. 이곳에서 필자의 '반응'은 이것이었다. ― 하품하기. 모든 '게임적'인 것들이 그러하듯이, 제작자는 플레이어를 완전히 방치하는 않는다. 창작자들은 으레 자신의 메시지를 은근하게 숨겨놓지만, 수용자들이 그 고갱이를 조금씩 맛보고 '얻어가는 게 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팸플릿과 볼펜은 '공략'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지도와 가이드, 카드로 구성된 알찬 전시 팸플릿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전시에서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요?'라는 가이드를 제시한다. 플레이어는 가이드를 통해 자신만의 관람 지도를 그리고, '보상'을 획득하기도 한다. 필자는 어디에도 경고 문구가 없었기 때문에 팸플릿과 볼펜을 집에 가져왔는데 분명히 '얻어가는 게 있'었다. 인터넷산악회 팀은 다소 적극적으로 '호보연자 심조불산' 2) 을 주장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손을 뻗어 전시물을 지우거나 Y/N의 대답을 거쳐 뉴스를 접하게 되는 등 플레이를 통해서 산악회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전시실 2에서 모든 비디오 아트를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산'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이들은 경전철을 타고 북한산에 가면서 "등산이 피식민의 정체성을 뚫고 한 세기 동안 하나의 문화로 뻗어가는 과정"을 탐구한다. 가리왕산의 원시림이 평창 동계올림픽 알파인 스키 경기 때문에 파괴되는 다큐멘터리도 볼 수 있었다. 배드램(Badlamb)의 〈Gula〉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데,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에디 베더가 연상되는 보컬의 절규와 함께 나무들이 무참하게 잘려 나간다. 여담이지만 이 가리왕산 원시림 문제는 아직 진행형이다. 정선군은 올림픽 이후 가리왕산의 자연생태 복원을 약속했지만, 선수들을 태우던 리프트를 관광용 케이블카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3) 인터넷산악회는 관람객을 전시장 바깥으로 안내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냐면, 가서 보면 안다. 은근히 민중가요 권하는 전시? 전시장 한편에 쌓여있는 흑백 A4 유인물은 공식(?) 팸플릿보다 조금 더 노골적이다.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가이드 이상의 '해법 제시'에 가깝다. 전시장이 어두웠기 때문에 챙겨둔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읽어봤는데, 전시를 어떻게 보면 좋을지 '선동'한다. 어떤 유인물에서는 "정의감이 불탄다"라며 "조용한 곳에서 혼자 들을 수 있다면" 정윤경의 〈시대〉를 들어보라고 한다. 또 어떤 유인물에서는 북서울미술관이 〈상계동 올림픽〉이 촬영된 곳과 가깝지 않으냐며,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는 주체로서 서로를 응시하는 거야"라는 "전시를 애니미즘처럼 보는 방법"도 제시되고 있다. 샘 발로우의 〈이모탈리티〉는 그냥 게임 그 자체다. 인터랙티브 필름으로 플레이어는 수십 년에 걸쳐 기록된 클립을 보면서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그러나 게임의 분량은 10시간에서 15시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관람객은 이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없다. 누군가 패드를 잡고 있을 때 나머지 관람객들은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눈치게임'이다. 〈타이틀 매치〉라는 유인물에서는 "게임이라는 것은 블루투스처럼 나와 1:1로 대응한다. 내가 플레이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이용할 수 없다. (중략) 그런 면에 있어 샘의 작업은 충분히 작동한다. 보고 추리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라고 해설한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블루투스의 멀티페어링 기능을 모르고 있나 보다. (농담이다.) 비록 답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술관에서 작품 앞에 멈추어서 의도를 추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게임 연구자 제스퍼 율(Jasper Juul)이 내린 게임에 대한 매체적 특성을 미술관과 서울이 동시에 정신을 빼앗아 가는 오늘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게임의 정의는 새로운 게임과 플레이어의 등장, 매체적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빠른 속도로 변화 및 갱신된다. 그러나 게임만이 가질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은 세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첫째 규칙과 장애물이 있을 것, 둘째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를 가질 것이다. 셋째 경쟁 과정을 거쳐 반드시 특정 승부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보상이 있다. 승부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규칙이 있고 장애물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일종의 제의(ritual)와 습관(habit)으로서 미술관에서도 적절한 멈춤과 플레이가 있다." 4) 아무튼 시간이 많다면, 이들의 관점으로 전시를 톺아보는 것도 좋다. 필자는 등산스틱으로 TV 전원을 켜느라 10분을 헤맸지만. (끝내 영상을 재생하는 데 실패했다.) 풍선을 불어도, 돌탑을 쌓아도. 안타깝게도 필자에게 이번 전시의 의미를 짚어낼 ‘전문가’적 역량은 없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는 어떻게 즐겨도 좋은 전시다. 예쁜 풍선을 불어서 가지고 나갈 수 있다. 돌탑을 쌓으면서 소원을 빌어도 좋다. 망원경을 들고 전시장을 둘러봐도 좋다. 관람 안내문에서 기획팀은 “미술관을 떠날 때 현대미술을 이해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필자 같은 사람은 뒤집어 놓은 변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모든 미디어가 그러하듯이 현대미술이라는 것도 결국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는 지도와 활동지, QR코드, 대형 스크린, 엑스박스, 전단지, 모래와 돌멩이 등등을 동원해서 말을 걸고 있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상호작용은 시작된다. 오픈 월드에 ‘자유도’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없다.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있지만, 칼 존슨(GTA 산 안드레아스)처럼 자동차를 훔칠 수는 없듯이 결국 프로그램의 한계와 제작자의 의도 안에서 기능하고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호’작용을 완성하는 것은 수용자다. ‘모딩’을 통해서 플레이어가 나름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획팀이 걸고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떤 것인지는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해보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7월 9일까지 노원구 북서울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프리 투 플레이로 입장료는 없으며, 부분유료화 BM(비즈니스 모델)은 없다. 월요일은 미술관이 놀기 때문에 관람객이 가서 놀 수 없다. [부록] 필자의 기행 모음 ▲ 스마트폰 배터리가 없어서 지도를 읽는 척하고 잠시 충전했다. ▲ 1층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 오는데, 뭐라는지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 확인 결과, 발신은 막혀있었다. ▲ 풍선을 불다가 터뜨리고 말았다. 온 전시장에 풍선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실수에 가까웠지만 묘한 쾌감이 들었다. ▲ 지우개에다가 낙서를 했다. ▲ ‘전단을 발견한다면 절대 전화하지 마세요’라길래 전화를 걸어봤다. 진짜 있는 번호였다. ▲ 망원경 초점을 전부 풀어버렸다. ▲ 영상이 상영 중인 2층에 이스터 에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걸어 다녔다. ▲ 뒤에 사람이 기다리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모탈리티〉를 플레이했다. 5) ▲ 스티커를 이상한 곳에 부착했다. 1)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소련의 영화감독으로 〈전함 포템킨〉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화의 구조〉(1939)에서 관객을 '엑스타시'로 이끄는 '파토스'를 창작의 기본이 되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2) 뒤집어서 읽으면 ‘산불조심 자연보호’. 3) 하상윤 (2023. 03. 05.), "원시림 복원 대신 관광용 케이블카... 가리왕산의 비애", 〈한국일보〉 4) 〈왜 악동은, 알고 보면 착한가 ― 미술관과 ‘파라큐레토리얼’〉 작자 미상. 5) 샘 발로우의 〈이모탈리티〉는 스팀에 이미 출시되어있으며 한국어 빌드가 있다. 필자는 그 사실을 알고도 계속 게임패드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Tags: 북서울미술관,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게임의 문화담론 정착을 위한 발걸음, ‘게임제너레이션’
1998년 이후 한국은 스스로나 해외로부터의 평가로나 자타공인 게임 강국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게임 강국 한국이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다소 불균등한 지점이 존재하는데, 여기서의 게임강국이라는 말은 말그대로 ‘플레이’의 강국이라는 점에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 Back 게임의 문화담론 정착을 위한 발걸음, ‘게임제너레이션’ 14 GG Vol. 23. 11. 5. 게임의 문화담론 정착을 위한 발걸음, ‘게임제너레이션’ 이경혁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그토록 많은 이들이 플레이하지만 왜 아직도 문화라는 말에 의문부호가 붙는가? 1998 년 이후 한국은 스스로나 해외로부터의 평가로나 자타공인 게임 강국으로 불려 왔다 . 그러나 게임 강국 한국이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다소 불균등한 지점이 존재하는데 , 여기서의 게임강국이라는 말은 말그대로 ‘ 플레이 ’ 의 강국이라는 점에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 제작된 게임 중 전세계적 흥행을 이끌어낸 게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적어도 2017 년의 ‘ 배틀그라운드 ’ 이전까지는 마땅한 작품을 꺼내들기 힘들었다 . 산업의 규모나 소비자시장에서라면 압도적일지 몰라도 , 씬을 대표할 특정한 타이틀 하나를 뽑아들기 어려운 형국은 e 스포츠 선수 풀이나 소비자 시장규모 , 제작산업 규모가 보이는 강세와 비교해볼 때 의아스럽다 . 탄탄한 소비자층과 시장을 보유하면서도 마땅히 내세울 타이틀이 드물었던 한국 게임계에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이 작용했겠지만 , 이를 하나로 통틀어 말해 본다면 아무래도 게임문화의 부재라고 부를 수 있을 어떤 상황일 것이다 . 게임을 잘 하고 많이 하지만 , 막상 그 게임을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저 수출액이 얼마 , 어느 대회에서 몇 위를 이야기하는 것 이상의 문화를 우리는 유의미한 규모로 가져 본 적이 드물다 . 그러나 디지털게임의 가능성은 산업적 규모나 플레이로서의 성취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 많은 게임들은 다른 예술장르처럼 인간과 사회 전반에 대한 밀도있는 통찰을 각자의 방식으로 담고 풀어냈으며 , 이를 향유하는 대중들은 작품에 담김 함의를 읽어내고 이를 다시 사회로 재환원시키는 과정을 거쳐 왔다 .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을 통틀어 문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 충분히 발달한 게임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국에는 게임을 문화로 소화할 인프라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 웹진 ‘ 게임제너레이션 ’ 의 시작은 바로 이 고민으로부터 출발했다 . 노는 것을 터부시해온 산업화 일변도의 한국에서 게임비평은 쉽지 않았다 왜 게임을 문화로 다루지 못해왔는가 ? 이 질문에는 다양한 사회적 맥락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 한국 특유의 강한 교육열은 디지털게임 초기에 주대상이었던 청소년층으로 하여금 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손쉬운 접근을 불허한 바 있었다 . 학교와 정부 , 사회는 오락실이라는 공간을 불량청소년들의 집합지로 낙인찍었고 , 게임하는 이들을 사회낙오자에 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한참 산업화에 열을 올리던 8-90 년대에는 비단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노는 일은 시간의 낭비 , 게으름의 영역에 속했다 . 2000 년대 들어와서야 한국은 일주일에 이틀의 휴일을 얻을 수 있었고 , 직장 노동자들에게 질병이나 가정사가 아닌 이유로 휴가를 내고 쉰다는 건 게으름뱅이라는 낙인을 부르는 일이었다 . 노는 일을 터부시하던 급속한 산업발전기의 경험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놀기 위해 장비를 사고 시간을 내야 하는 디지털게임이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 그러나 적어도 21 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놀이에 대한 터부는 과거와 같은 규모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우리는 주 5 일제의 도입이 오히려 여가부문의 산업을 촉진시키고 노동자로 하여금 충분한 휴식을 통해 더 나은 생산성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 노는 일 playing 이 그저 쉬는 일 resting 이 아닌 , 또다른 의미의 창발성임을 터득한 바 있다 . 산업자본주의에서 이른바 인지자본주의 시대로 전환하면서 쏟아지는 고부가가치의 무형 콘텐츠산업의 중심은 언제나 노는 일이었다 . 영화를 보고 , 만화를 보고 , 음악을 즐기는 과정이 한국 산업의 중심을 차지함에 따라 노는 일의 중요성은 과거와 다르게 인식되었고 , 디지털게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인식의 변화를 겪어 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다른 매체와 비교할 때 게임에서는 그 문화적 영향력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지한다 . 여기에 개입하는 또다른 원인은 오랫동안 서브컬처의 영역에서 단지 ‘ 그들만의 이야기 ’ 로 치부되던 게임이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위치를 옮겼지만 여전히 담론장에서는 이를 소화할 상황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 있다 . 간단히 말하자면 , 평론의 부재다 . 음악 , 영화 , 미술 , 문학 등 기존의 많은 매체양식들이 예술 혹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씬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평론의 역할은 지대했다 . 작품의 의미를 해설하고 널리 알리며 , 완성된 작품을 단지 그 작품 하나만의 의미에 두지 않고 동시대와 과거 , 현재 , 미래를 엮으며 다른 모든 사회요소와의 관계망 속에서 다시 읽어내는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작품이 곧 우리가 사는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 혹은 우리 자신이 투영된 어떤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 만약 디지털게임에서도 이와 같은 평론의 장이 형성된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비로소 게임문화라는 새로운 담론을 유의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페다고지, 담론, 그리고 실천: 게임문화담론을 위해 필요한 방법들 2021 년 8 월 ‘ 게임제너레이션 ’ 이 첫 호를 내면서 선택한 주제가 그래서 ‘ 문화로서의 게임 ’ 이었다 . 그동안 한국에서 게임은 ‘ 게임은 문화다 ’ 라는 선언으로는 존재했지만 , 실천방안으로서의 문화적 개입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 게임을 문화담론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 우리는 문화입니다 !’ 라는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게임을 중심에 두고 문화를 이야기하는 실천이다 . 그러한 실천을 수행할 장으로서 ‘ 게임제너레이션 ’ 은 만들어졌다 . 지난 14 개 호 동안 ‘ 게임제너레이션 ’ 은 디지털게임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 그리고 해야 하는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 네트워크 , 게임 결제와 같은 디지털게임을 구성하는 인프라가 얼마나 사회적 상황과 맞물리는지를 살펴보았고 , 과거의 게임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인 방치형 게임 , 온라인 / 오프라인의 구분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 예술과 게임의 관계 , 게임이 가지고 있는 지역성과 같은 주제 뿐 아니라 ‘ 게임제너레이션 ’ 은 게이머 , 특히 그 중에서도 소수자들이 게임 안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 그리고 그런 소수자들은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에 얼마나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살피며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에 주목해 왔다 . 문화담론의 장 구축을 위해 ‘ 게임제너레이션 ’ 은 이러한 주제들을 다룸에 있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 첫째는 ‘ 페다고지 Pedagogy’ 다 . 디지털게임에 대해 그동안 축적된 다양한 관점에서의 연구결과들을 취합하고 , 이를 일반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쉽게 가공하여 대중화함으로써 전문지식에의 접근성을 높여 담론장의 기초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 둘째는 담론 Discourse 의 구축이다 . 다양한 전문가집단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각각의 디지털게임이 만들어낸 결과를 관찰 , 분석하고 , 이를 통해 비평이라는 방식으로 게임과 사회의 관계를 고찰하여 디지털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다 . 셋째는 실천 Implementation 이다 . 준비된 담론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자와 필진을 육성하기 위해 매년 게임비평공모전을 진행하고 , 새로운 필자 확보를 위해 폭넓은 연구결과들을 리뷰하며 동시에 국내에 머물지 않고 글로벌 트렌드와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북미 , 유럽 , 일본 , 중국 등의 주요 게임선진국과 네트워크를 구축 , 강화하는 작업을 ‘ 게임제너레이션 ’ 은 이어가고 있다 .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를 메꿔나가며 만드는 게임문화담론의 가능성을 위해 서브컬처로 오랜 세월을 지내 온 디지털게임이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마주하는 문화적 빈곤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 디지털게임에 대한 무거운 인문사회적 접근은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성과들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지 못하고 ,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함 많은 게임웹진들은 플레이 바깥에 존재하는 게임과 사회의 관계를 다루지 못한다 . ‘ 게임제너레이션 ’ 은 게임 담론이 가진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의 간극을 채워나감으로써 비로소 디지털게임을 문화예술의 한 영역으로 안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 ‘ 웹진보다 무검게 , 학술지보다 가볍게 ’ 라는 ‘ 게임제너레이션 ’ 의 슬로건은 곧 문화담론으로서 게임을 위치시키는 데 가장 시급한 방법론에의 선언이기도 하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 Back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02 GG Vol. 21. 8. 10. 작년 앞서 해보기로 발매한 하이퍼 FPS 장르의 게임 〈울트라킬〉은 그래픽만 놓고 보면 도저히 최신 게임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마치 목각인형처럼 보이는 각진 3D 모델링에 저화질의 텍스처는 흡사 도트 이미지로 보일 지경이다. 물론 이같은 조야한 그래픽 비쥬얼은 ‘레트로’ 스타일을 표방하며 제작된 이 게임에서 의도된 것이다. 레트로란 지나간 과거의 특정한 시대적 양식을 다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울트라킬〉이 참조하는 과거는 90년대 중후반으로, 최초로 비디오 게임에 완전한 3D 그래픽이 도입되기 시작하던 때이다. ‘3D 폴리곤 모델링’과 ‘텍스처 매핑’ 기술의 도입을 특징으로 하는 당시 게임의 3D 그래픽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본다면 여러모로 조악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그때는 이와 같은 완전한 3D 그래픽이 게임에서 구현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당시로써는 컴퓨터로 연산 가능한 폴리곤 수의 한계로 인해 마치 목각인형처럼 각져 보이는 캐릭터와 오브젝트의 모습과 저화질의 텍스처로 인해 색과 이미지가 뭉개져 보이는 등의 그래픽 결함은 훤히 눈에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와 같은 게임 리소스에 의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디스플레이 기기의 해상도 또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낮았다. 눈에 띄는 문제는 대부분 각짐의 문제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적은 폴리곤 수로 인하여 각져보이는 3D 모델링뿐만 아니라 흔히 ‘계단 현상’으로 불리우며 선이 구불구불하게 보이는 그래픽 문제는 당시 3D 그래픽 초기 역사의 대표적인 결함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문제들은 컴퓨터의 연산 능력과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 그리고 안티 앨리어싱 기술의 도입 등에 의해 점차 해결되어 갔다. 이제는 가장 뛰어난 게임 그래픽을 살펴볼 수 있는 최신 AAA 게임의 트레일러가 발표될 때 과거와 같은 각진 폴리곤 모델링이나 계단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울트라킬〉의 게임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hakita.itch.io/ultrakill-prelude )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울트라킬〉의 그래픽은 초창기 3D 그레픽의 대표적인 결함들을 오히려 전면적으로 드러내며 중요한 비쥬얼 형식으로 삼는다. 〈울트라킬〉은 의도적으로 로우-파이한 3D 그래픽 스타일을 지향하며, 흔히 우리가 3D 게임 그래픽의 결함이나 한계로 여겼던 요소들을 감각적인 스타일로 다시 제시한다. 과거에는 한계로서 여겨졌던 낮은 해상도나 각진 3D 모델링, 뭉개진 텍스처, 어색한 에니메이션 등의 요소가 이제는 특정한 미적 양식이 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재현 기술 시각예술작가 ‘하룬 파로키’는 자신의 영상 작업 〈평행 I – IV〉(2012-2014)에서 비디오 게임 그래픽의 발전사를 다룬 바 있다. 비디오 게임 역사 초기의 도트 그래픽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리얼한 3D 그래픽까지 게임의 이미지는 점점 사실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바로 이 게임 그래픽 이미지의 ’리얼함‘은 하룬 파로키가 조망한 것처럼 게임의 기술적 발전을 가늠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준거점이 되어 왔다. 얼핏 보면 이러한 그래픽의 발전은 마치 잘 보이지 않던 어떤 사물이 점점 잘 보이게 되는 경우처럼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결과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 덜 사실적인 것에서 사실적인 것으로 말이다. 그래픽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현실의 비쥬얼이 항상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저 주어진 컴퓨터의 연산 능력과 디스플레이 기기의 기술적 한계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컴퓨터의 연상 능력이 발달하고 디스플레이 기기의 해상도가 좋아지면 그에 따라 그래픽 이미지는 자연스레 리얼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결코 게임 그래픽 이미지가 사실성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마치 잘 보이지 않던 어떤 사물이 잘 보이게 되는 경우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란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게임 그래픽이 보여주는 놀라운 리얼함에 도달하기까지는 ’3D 모델링‘과 ’텍스처 매핑‘, ’랜더링‘, ’광원 효과‘, ’에니메이션’ 등의 프로그래밍 기술과 더불어 ‘해상도’와 ‘프레임’과 같은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을 규정하는 수없이 다양하고 특정한 ’사실성의 기술‘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한 사실성의 기술은 단순히 현실의 비쥬얼을 모방하는 의미를 넘어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과거의 게임 그래픽을 보게 되면 새삼 놀랄 때가 있다. 출시된 당시에 봤을 때는 분명 그래픽 수준에 깜짝 놀랐던 거 같은데 지금 보니까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 놀랐었다는 게 놀라운 것이다. 나는 여전히 ’크라이실사스‘라고도 불렸던 〈크라이시스〉의 실사와도 같은 그래픽이 주었던 충격과 〈스타워즈: 배틀프론트〉의 포토리얼리즘 그래픽을 보고 놀랐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게임 그래픽이 이보다도 더 좋아질 수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도달한 현재가 발전의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은 흔한 환상이다. 이같은 환상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언리얼 엔진5‘의 그래픽 시연 영상을 보고서도 나는 똑같이 생각했다. “도대체 이보다 더 그래픽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이미 충분히 리얼한 것 같은데 말이다. 끊임없이 더욱 사실적인 이미지로 나아가는 게임 그래픽에 대한 요구 속에서 특정한 게임 그래픽 기술의 특징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재현 양식이나 특정한 기술적 특징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그래픽의 오류 혹은 결함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흔히 폴리곤 하면 떠오르는 각진 면들과 텅 비어있는 내부의 모습은 리얼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며, 매핑된 텍스처 또한 평면 이미지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그래픽에서의 사실성의 기술은 바로 그 기술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선 안되는 것이다. 다각형의 모음인 폴리곤 모델링은 자신의 구성 요소인 다각형 면을 드러내는 일, 즉 각져 보여선 안되며, 매핑된 텍스처 또한 최대한 평면성을 감추고 깊이감의 환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게임 그래픽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도입되는 기술의 흔적을 가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각진 폴리곤‘, ’납작해 보이는 텍스처‘와 같이 그래픽 기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기의 3D 그래픽은 흔히 당시 기술적 수준의 한계에 의한 결함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울트라킬〉이 결함으로 여겨졌던 초기 3D 그래픽의 고유한 특징들을 특유의 미학으로 제시하였듯, 거기엔 단순히 과거 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고유한 매력이 담겨있다. 낮은 품질 3D 그래픽의 미학 2016년에 발매한 게임 〈back in 1995〉은 제목처럼 특정한 시기를 가리킨다. 1995년, 앞서 언급한 〈울트라킬〉이 모티프로 삼았던 것과 같이 비디오 게임에 완전한 3D 그래픽이 최초로 도입되던 시기이다. 〈울트라킬〉과 마찬가지로 〈back in 1995〉의 그래픽 비쥬얼 또한 초기 3D 그래픽에서 발생하던 온갖 문제들을 담고 있다. 제작자는 말한다. “저해상도 모델, 텍스처 워핑, CRT 에뮬레이션, 고정 CCTV 스타일 카메라 각도를 포함한 레트로 3D 그래픽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세계에 빠져보세요.”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33380/Back_in_1995/ 그러나 게임은 단순히 비쥬얼적인 매력에 기대고 있지만은 않는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 게임의 장르다. 〈back in 1995〉이 표방하는 ’서바이벌 미스터리 호러‘ 장르는 이 게임의 독특한 로우-파이 3D 그래픽의 미학과 불가분이다. 〈back in 1995〉는 ’서바이벌 미스터리 호러‘장르 속에서 왜 초기의 3D 그래픽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매력적일 수 있는지, 이 양식의 고유한 미학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 〈back in 1995〉의 게임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33380/Back_in_1995/ ) 레트로의 의미는 단순히 지나간 그때의 스타일을 다시 반복하며 애호하는 것 정도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 굳이 지나간 특정한 과거의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시간성이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문화 연구자 ’사이먼 레이놀즈‘는 근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레트로 문화에 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자신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서 레트로 문화와 시간성에 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문화가 노스텔지어에 매달려서 앞으로 나갈 힘을 잃은 걸까, 아니면 문화가 더는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 결정적이고 역동적이던 시대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걸까?”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최성민 역, 작업실유령, 2014, p.15 흔히 노스탤지어가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상반되는 레이놀즈의 태도는 노스탤지어적 과거에 대한 과도한 매혹을 짐짓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back in 1995〉의 미스터리 호러 분위기 또한 전적으로 지나간 과거라는 시간, 저화질의 그래픽처럼 뿌예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작중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켄트는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도시 저편의 라디오 타워에 있다고 여기며, 도시 곳곳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라디오 타워로 향한다. 아마도 개발자 자신의 자아가 강하게 투영된 듯 보이는 그는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향수와 억압된 트라우마적 기억 사이를 오간다. 비록 〈back in 1995〉은 부족한 게임성으로 인해 많은 호평을 받진 못했지만, 로우-파이 3D 그래픽과 시간성에 관한 연관 그리고 무엇보다 호러 장르와의 연결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자 한다. 다시 비쥬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초창기의 3D 그래픽이 갖고 있던 온갖 결함들은 특히나 낮은 해상도와 관련이 있었다. 이 낮은 해상도는 무엇보다도 ’가시성의 제한‘이라는 특징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그래픽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었다. 〈back in 1995〉 또한 노골적으로 참조했던 〈사일런트 힐〉시리즈는 그와 같은 시각의 제한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던 초기 3D 그래픽 게임 역사의 마스터 피스 중 하나다. 〈사일런트 힐〉의 비쥬얼 아이덴티티이기도 한 연기는 사실 당시 하드웨어의 성능 한계로부터 비롯된 눈속임이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당시 하드웨어 성능에 따르면 랜더링 가능한 게임 공간의 디테일에 한계가 있었다. 일정 거리 이상의 공간은 아예 불러올 수도 없었는데, 이와 같은 부족한 디테일을 적절히 숨기기 위해서 게임 공간 전체에 연기를 깔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는 게임 세계에 대한 플레이어의 시야를 제한하여 이 게임의 미스터리 호러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잘 살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처럼 ’제한된 시야‘에 의해 생겨나는 특유의 미스터리 호러적인 분위기는 〈사일런트 힐〉에서 연기 에피소드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오히려 〈사일런트 힐〉은 연기에 가려진 시야 저편뿐만이 아니라 연기에 가려지지 않은 공간까지도 포함하여 아예 이 게임 세계 전체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기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래픽 텍스처의 저화질은 게임에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고, 각진 폴리곤 모델링은 마치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처럼 보였다. 2012년 〈사일런트 힐〉 시리즈의 일부는 HD로 리마스터 되었지만, 이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낡은 게임의 품질 개선은 되려 게이머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게임이 너무 잘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개는 대부분 걷혀졌으며, 텍스처의 퀄리티는 업스케일링 되면서 〈사일런트 힐〉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터리 호러한 분위기가 전부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 와서 살펴보자면 이 잘 보이지 않으며, 명확하지도 못한 세계가 갖는 독특한 미적 특징은 디지털 그래픽 매체에 대한 인지적인 물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 그래픽의 발전은 도입되는 기술의 흔적을 감추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초기 3D 그래픽 게임에서는 여전히 도입된 기술의 흔적이 물씬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초기 3D 그래픽을 매력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플레이 중인 디지털 가상 세계의 고유한 물성이 오늘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들보다도 더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Puppet Combo’의 게임 의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lgFGZ2hs-A) * ’Puppet Combo’의 게임 의 플레이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xNMzvoc1Wyw ) 〈back in 1995〉와 〈사일런트 힐〉이 바로 저 명확하지 않은 세계로 인해 느껴지는 잔잔한 공포 혹은 미스터리적 분위기에 집중했다면, 독립 게임 개발 스튜디오 ’Puppet Combo’는 로우-파이 3D 그래픽이 갖는 독특한 물성에 의해 느껴지는 즉물적인 공포감에 집중한다. 주로 80년대의 B급 고어, 슬래셔 무비를 참조하는 이들의 방향성은 언뜻 생각하기에 고어나 슬래셔와 같이 날것의 표현이 중요한 장르적 연출이 어떻게 저화질의 로우-파이한 3D 그래픽 스타일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거친 폴리곤 덩어리로 표현된 신체가 갖는 날것의 물성은 흔히 고어 장르에서 고깃덩이로 추락해버리는 날 것이 된 신체의 물성과 닮아있다. 〈퀘이크〉에서 처치하자마자 순식간에 투박한 고깃덩이로 뒤바뀌어버리는 괴물들의 모습, 〈GTA: 산 안드레아스〉에서 헤드샷에 의해 순식간에 머리는 사라지고 피 분수가 분출되는 모습, 〈폴아웃 3〉에서 사정 없이 절단되는 팔다리와 물리 엔진에 의해 사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신의 모습은 게임의 고유한 물성에 의해서 출현할 수 있었던 독특한 고어적 순간들이다. * 안가영 작가의 〈KIN거운생활: 온라인 KIN 온라인〉, Machinima, FHD color, 20min 13s, 2020-2021 (출처: https://angayoung.cargo.site/KIN-online ) 낮은 해상도와 프레임, 어색한 에니메이션, 퀄리티가 좋지 않는 폴리곤 모델링과 저해상도의 텍스처 등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디지털 미학은 비디오 게임에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근 몇 년간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이같은 독특한 이미지 양식을 인용한 작업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미술작가 김희천은 그가 몇 번이나 주제로 삼았던 ‘서울‘이라는 장소의 부유감을 은유하기 위해서 낮은 품질의 3D 폴리곤 모델링 특유의 유령적 물성을 차용한 바 있다. 그의 영상작업 〈바벨〉에서 서울의 지하철 공간을 돌아다니는 멍청하게 생긴 저품질 폴리곤 인간들은 T 포즈로 자세가 고정되거나 허접한 에니매이션으로 이동하며 서로 겹쳐지고 벽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아예 비디오 게임을 주요한 참조점으로 삼는 미술작가 안가영 또한 개인이 구현 가능한 조야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미학을 경유하여 작업을 전개하곤 한다. 그의 연작중 하나 〈 KIN거운생활: 온라인 KIN 온라인〉의 그래픽 비쥬얼은 비록 앞서 로우-파이 3D 그래픽의 주요한 특징으로 언급했던 ‘폴리곤 모델링’과 ‘텍스처’의 퀄리티는 훌륭한 수준이지만, 광원 효과의 의도적인 날림에 의해 여전히 그래픽의 이미지의 품질이 현저하게 낮아 보인다. 이와 같은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이 갖는 독특한 유령적 물성은 김희천에게선 서울이라는 장소의 부유감에 의해 인용되었다면 안가영에게는 신체와 정체성의 부유감에 의해 인용된다.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안준형 아티스트 폴리티컬 파티 '배드 뉴 데이즈'와 마르크스주의 기반 연구기관 '조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게임 매체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게임 미디어의 정치성 및 게임 속 이미지의 재현 체계와 그것의 주체성 및 윤리적 문제에 관해 비평적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 Back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12 GG Vol. 23. 6. 10.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하지만 이게 생산적 의미를 가지려면 게이머 스스로가 ‘인정투쟁’을 넘어 게임과 예술의 본질에 가 닿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비평 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제시해본다면 어떤가? 가령 “예술을 논한다”고들 하는데, 그게 뜻하는 바는 뭔가? 모나리자든 벽에 붙여 둔 바나나든 뭐든 ‘얼마나 팔렸느냐’, ‘쓸모가 있느냐’를 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가치평가를 둘러싼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예술을 논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게임을 논한다”고 할 수 있다면, 게임을 예술의 일종이나 그 비슷한 뭔가로 취급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 게임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게임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인터랙티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랙티브에 기반한 게임이 아닌 것’들도 세상엔 많이 있다. ‘인터랙티브’를 게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볼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랙티브 하지 않은 것’을 게임이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무언가가 게임이기 위해서는 선택이든 조작이든 입력이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사용자의 행위가 게임을 통해 형성된 공간 내 사건을 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은 일반적으로 불특정다수의 사용자 즉 대중을 전제한다. 대중이 매체를 통해 가상적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거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즉, 예술의 그것에 비견될만한 것으로서 게임 비평의 정수는 그 게임이 무엇을 통해서 어떤 세계의 변화를 사용자에게 경험하게 하느냐,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리고 그게 현실 인식의 무엇으로 이어지느냐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닌텐도의 최근 신작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상당히 인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전작에서 오픈월드의 물리엔진을 응용력을 발휘해 활용하도록 한 것에 ‘조나우 기어’라는 장치를 더해 ‘놀이’로서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널판지에 팬과 배터리, 조종기를 달고 물에 띄우면 간이 보트로 활용할 수 있어 체력 소모 없이도 강을 건널 수 있다는 식이다. 기구를 만들고 불을 피워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이 덕에 퍼즐의 난이도가 하락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게이머 입장에서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보다 쉽고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의미있다. ‘오픈월드’를 표방한 게임이라도 게이머의 사용자 경험은 제작자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오픈월드’ 또한 가상의 환경에 불과한 탓에 제작자가 설계된 영역 밖으로 사용자가 나가는 것까지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한계는 지형지물의 배치나 ‘보이지 않는 벽’ 등을 매끄럽게 배치하는 것으로 사용자 경험의 훼손을 자연스럽게 최소화 하는 포장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이러한 ‘포장’을 훨씬 더 그럴듯하게 해내고 있다. ‘조나우 기어’들의 등장에 더해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트레루프’ 능력의 존재는 ‘오픈월드’의 한계를 상정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아주 조그만 부분이라도 천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게이머가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물의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기에, 애초에 제작자가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움직이도록 해야 할 ‘레벨 디자인’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바가 대단히 많아 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모든 천장을 다 뚫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조나우 기어’로 만든 비행기 역시 일정 거리 이상 날아가면 사라지게 설계된 등의 한계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수단을 통해 사용자가 게임으로 형성된 세계에 대한 훨씬 더 강한 개입력을 확보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는 점은 누구나 놀라워할만한 대목이다. 이런 요소는 사용자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전작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부터 새로 시작된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본질적으로 멸망한 세계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서는 우선 그 세계의 주인이 되는 일이 필요하다. 집 청소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가진 예산의 한도 내에서 알맞은 청소용구 구매를 계획하고 실행한 후 그 도구로 청소를 하고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집 주인의 일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제공된 청소도구를 활용해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따르며 청소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집 주인의 경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게임은 아무리 ‘오픈월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후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은 최소한 전자에 가까워진 느낌을 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이 주는 사용자 경험은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형식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지만 ‘이야기’로 보면 좀 다르다. 자연럽게 생길 수 있는 의문을 두루뭉술하게 넘어 간다. 눈 앞에서 바닥을 뚫고 나오는 주인공에 잠시 놀라기만 할뿐 곧바로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듯 무덤덤한 게임 내 등장인물의 존재 등이 그렇다. ‘게임적 허용’을 고려하더라도, 외양과 생태가 판이하게 다른 민족 간의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충돌이 묘사될 법도 한데, 잘해야 몇 번 튕기는 게 전부고 대개는 다들 속없이 주인공을 기꺼이 도와주기로 한다. 1차원적 감동이 있긴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크다.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닌텐도는 ‘온 가족의 닌텐도’이다. 지위와 자격을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감수하는 중세 정치를 묘사한 ‘크루세이더 킹즈 3’의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아니다. 소년 소녀들의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둘째, 이게 일본의 방식이다. 불편한 얘기는 뒤에서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누구나 수긍할만한 아름다운 얘기를 남기길 원한다. 되도록이면 문제를 직면하거나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의 한일관계 개선 논의에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과거사에 대한 태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일본이 불편한 주제를 오로지 외면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온 가족의 닌텐도’의 이면에는 가히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 볼만한 성인물 시장과 PC-98시리즈 등 자체 규격 컴퓨터 시절 성인용 어드벤처 게임 범람의 역사가 있다. 즉, 불편한 얘기를 하는 공간은 따로 있다. 하지만 거기가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리즈’ 일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 얘기를 덧붙이는 건 ‘이야기’에 해당하는 요소까지 ‘주인이 되는 경험’에 결합시킬 수 있었다면 비평적으로 더 나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야기’로부터 발생하는,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살면서 겪을 법한 갈등을 뭔가 방법을 강구해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에 비할만한 뭔가를 찾아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실엔 이미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이 존재한다. 그것을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자며 머리를 맞대자고 말하는 사람이 극소수일 뿐이다. 그나마 일본과 같은 ‘게임 선진국’이 만든 게임을 소재로 한다면 최소한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인 한국의 게임 이슈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코인과 결합한 수익 모델 얘기라든가, 여성 캐릭터의 신체 부위라든가, 사기나 다름없는 사건과 같은 얘기들만 떠오르지 않는가? 이것이야 말로 다들 주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대개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이슈에서 이러한 풍경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예술로 인정받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하고 있는가? ‘무엇이 어떤 것을 통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단 그 각오가 된 다음에야 가능할 것 같다. Tags: 예술,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13 GG Vol. 23. 8. 10.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게임, 즉, 놀이의 형태는 고양이의 놀이이다. 사람이 레이저나 막대기, 털 장난감 등으로 인공적으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태까지 잘만 놀아 왔고 지금도 잘만 놀고 있다. 고양이는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나 막대기, 빛, 곤충이나 동물 시체 등을 갖고 논다. 이러한 놀이는 언뜻 사냥을 연습하기 위해 그 행위들을 가상으로 모방하여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한 순간, 정말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 그 시체를 뜯어 먹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유희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 놀이의 본질에는 어떠한 가상도 모방도 연습도 없으며, 실용성이 아니라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나 척추가 부러진 채로 아직 죽어가고 있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저 꿈틀거리기나 하는 초주검의 동물을 붙잡고 양손으로 데굴데굴 굴리거나 입으로 물어 공중으로 던진다던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다른 ‘실제 행위’도 모방하지 않고 있고 그저 그 자체로서가 이미 고유한 실제 행위이다. 그리고 이 놀이 행위들은 그 어떤 실용적 경험치에도 봉사하지 않고 그저 식사 이전의 재미, 신남, 기쁨 등만을 생산해 내고 있을 뿐이다. 즉, 놀이로서 게임은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다. 다른 외부적 목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게임 <핫라인 마이애미>의 결말 장면에서 이러한 게임의 행위 목적성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보통의 결말 (normal ending)’과, ‘숨겨진 결말 (secret ending)’의 구조이다.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두 인물은 해당 게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청소부 (janitor)’들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요 사건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어느 날부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고, 이렇게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의 내용은 어떤 특정 장소로 가서 배달받은 동물 마스크를 쓰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 전화의 발신자가 바로 청소부들이고,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명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명령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청소부들의 비밀 본부를 찾아내고. ‘보통의 결말’에서 이들에게 ‘왜’ 이러한 일들을 벌이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청소부 A: 그야 심심했으니까 그렇지! 청소부 B: 왜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겠어? 너는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잖아, 안 그래? 청소부들은 주인공이 제기한 ‘왜’에 대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은 그저 자신들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청소부들은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을 조종하며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또한 청소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실제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너희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야?”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소부들은 그 질문 속의 주어 설정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였어, 너가 죽였지...” 즉, 이 ‘보통의 결말’은 청소부들과 주인공 모두의 행위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변명 될 필요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실행되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며 즐거움을 얻은 또 다른 놀이자, 플레이어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명령하고 주인공을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청소부와 청소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획득하는 놀이자인 주인공의 구도처럼, 플레이어에게 명령하고 플레이어를 갖고 노는 게임이라는 놀이자와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이행하며 즐거워하는 플레이어라는 놀이자의 구도 또한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닭 마스크의 환영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생산되는 즐거움이 가지는 본질적인 행위 원리의 진실을 시사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걸 좋아하니?" 즉, 주인공이 모르는 전화 속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결국 이 행위자들 모두가 그 명령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명령하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릴 수 있는 튜토리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이 게임은 좌우 스틱으로 조작된다. R 버튼을 눌러 때린다. 얼굴을 노려라! 우선 네가 누군가를 쓰러뜨렸으면 그를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너는 X 버튼을 누른다. 알겠나? R을 눌러 때려라! X를 눌러 끝내라! 내 말 알아듣겠나? 실수하지 말아라! 튜토리얼에서부터 <핫라인 마이애미>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살인 행위뿐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탑다운 형식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사람 형상을 조작해 또 다른 조그만 사람 형상들을 쏘고 때리고 찢어발기는 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이 게임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원인’은 우리가 이러한 가학 행위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즐거움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속편에서도 우리의 행위 원리에 대한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존재한다. <핫라인 마이애미 2>의 16번째 장, “사상자들 (Casualties)”에선 죽음이 거의 확정된 임무에 자신들의 부대원들을 보내게 된 “대령 (the Colonel)”이란 인물이 임무 전날 밤, 죽은 퓨마의 안면 피부를 벗겨 미간 부위에 피로 성조기를 그려 놓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쓰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게 보이나? ... 내 얼굴이 보이냐고? 이것이 내 진정한 본성(nature)이다! 보이지, 안 그래? 이게 나야! 이게 우리 모두란 말이다. 우린 동물이야! ... 부인할 길은 없어! 우리가 빌어먹을 동물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학살하거나 학살되도록 내보내고 있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우리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복종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거야. 파괴와 폭력... 이것들은 그저 우리 본성의 일부일 뿐이지.” 위의 대사를 말하는 “대령”이 퓨마라는 동물의 얼굴을 벗겨 마스크로 쓰고 미간에 피의 성조기를 그려 놓았던 것, 그리고 이 피의 성조기는 바로 청소부들이 암약하는 비밀 단체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령”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 (nature)의 의지와 공명하며 그 모든 것들을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갑작스레 왜 대령이 청소부들의 상징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개발자도 단 두 명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청소부들의 얼굴그래픽은 게임 개발자들 자신들의 얼굴을 픽셀로 캐리커쳐한 형상이다. 즉, 청소부들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페르소나인 것이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그들이 “누구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 밑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은 “독립”적인 작업자들이며 “모든 것을 우리끼리 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마치 이 게임을 제작한 두 명의 독립 개발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부심과 마주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부들의 대사를 통해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순전히 즐겁기 위해 창작 행위를 한 것이며, 그 어떤 누구의 명령이나 협박과 같은 외부적 조건 따위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장기 말”이라고 불렀던 것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조종하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개발자들도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를 갖고 놀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는 <핫라인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서 참이다. 게임은 항상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도전과제 그리고 R 버튼을 눌러 때리고 X 버튼을 눌러 마무리하는 조작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을 제공하고 그 명령의 가짓수가 곧 게임의 부피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게임의 명령을 플레이어가 따르게 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우선 첫 번째로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처럼 그저 재밌어서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조건 따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목소리에 그대로 따랐던 것은 그가 청소부들의 지시사항, 그러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자신의 명령이 플레이어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될지의 여부를 항상 즐거움만에 맡기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명령받은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도 제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강제와 협박 같은 외부 목적적 수단들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게임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건적이고 강제적인 명령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을 우리는 <핫라인 마이애미>의 ‘숨겨진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청소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특정 패스워드를 찾아 놓고 비밀 본부에 있는 컴퓨터에 해당 패스워드를 집어넣어야지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결말’을 보기 위한 조건을 만족한 뒤 청소부를 만나면 주인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청소부 A: 정신 나가...? 네가 깨달아야 하는 건 말이야- 청소부 B: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청소부 A: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지. 여기서 청소부들은 게임 바깥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조건 명령 방식, 협박에 대해 꽤 좋은 비평을 남기고 있다. 청소부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위에서 최근 게임에 대한 논의들이 그 목적성에 대한 변명으로 천착한다고 언급했던 정치 · 사회의 표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리라.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는 협박으로 행위의 원인 항을 강제로 채우는 법, 규범, 도덕, 국가 등은 청소부들의 대사 그대로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원칙”,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가 거세 협박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에게 습득되는 과정부터가 바로 “이 원칙”의 실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체계가 신경증 환자와 같은 모범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의 명령 방식이 플레이어를 향한 게임의 또 다른 명령 방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왜냐면 미리 말하건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러한 명령 방식들은 플레이어-행위자의 즐거움에 기반한 비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명령 이행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핫라인 마이애미>에서 “R을 눌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X를 눌러” 쓰러진 상대방의 머리를 밟아 으깨라는 명령에는 그 어떤 조건절도 선행하지 않지만, 게임은 때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의 조건절을 플레이어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협박은 HUD에 떠올려져 있는 ‘체력 바’와 같이 주인공의 죽음, 즉, ‘게임 오버’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태의 UI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명령들은 처음에 즉각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플레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UI의 대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당장 ‘죽음’이라는 협박이 가지는 급박함이 우선 게임에 몰입하기 이전까진 게임 외부의 경험적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게임 안의 현실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끊임없이 즐거움을 탐색하는 플레이어에게 저러한 협박은 그다지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하지는 못한다. 물론 체력을 채우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그 행위들 자체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지만, 이 시점에서 UI가 원래 가했던 협박의 조건절, ‘나를 채우지 않으면 주인공은 죽게 되고 너는 게임을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는 문구는 그 전과 같은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게임은 언제든지 다시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 오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저 죽기 전까지의 플레이 과정을 다시 돌려 플레이해야 한다는 일시적인 불편 정도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과 싸우는 것 자체 또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소위 ‘죽음’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강제하는 협박으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게임 속에서 일부러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한다. 체력이 바닥났으나 회복 수단까지 다 떨어졌을 경우, 스테이지를 거의 다 클리어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경우들에는 이제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가능성이 소진되어 더 이상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그저 빨리 죽고 다시 시작해 즐거움의 가능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죽는 행위 자체가 발생시키는 즐거움을 위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죽음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게임들, 그러니까 주인공이 죽을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워 일부러 그 가능한 모든 죽음의 시나리오들을 전부 실험해 보도록 만드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게임 오버’의 협박이 더더욱이나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특히 <데드 스페이스>, <사일런트 힐>, <바이오 하자드> 등의 호러 장르 게임들에선 괴물, 환경 등 주인공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각각이 저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죽음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새로운 위협 요소와 마주칠 때마다 이 요소는 주인공을 어떻게 죽이게 될 것인지를 실험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실재적 차원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단 한 번의 죽음이 곧 삶의 영구적인 끝을 의미하는데,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플레이어가 급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게임 속 현실에 몰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그렇다면 게임에서 조건 없는 즐거움의 명령이 조건적인 협박식의 명령보다 유효하다는 걸 현실에서의 행위 원리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적 차원에서도 이미 언제나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속 세계 자체에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이 실재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 보편적으로 게임들은 그 안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불러오기’ 혹은 ‘이어하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다시 주인공을 부활, ‘재생성 (respawn)’시키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바깥의 메뉴 영역에 국한되어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가정’한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예만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타나 제로>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이 속한 세계도 모두 주인공의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카타나 제로>에서 주인공은 ‘크로노스 (Chronos)’라는 이름의 마약을 투여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전투 상황, 즉, 주인공의 끝없는 죽음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들은 주인공의 계산 속 경우의 수들인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게임 내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직 주인공이 죽지 않고 모든 적을 처치한 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바로 그 경우의 수뿐일 테지만, 우리는 이 또한 허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니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면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에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은 전혀 무의미할 터이다. 2)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마치 일년처럼 느껴지”고 “모든 말이 길어지고, 모기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주인공 그 자신의 주관적 현실에선 그 모든 죽음의 경험들은 더욱 생생해질 여지도 없을 만큼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나 제로>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죽음은 주인공에게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로 아주 선명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핫라인 마이애미>를 포함해 아무리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 세계 안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자신조차 자신의 죽음에 무지하다 하더라도, 정작 플레이어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자신의 경험 안에서 플레이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주관적’ 실재에서 그 모든 죽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근본적인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내에서 명령되는 사항들을 플레이어가 이행하는 원리 중에서 조건절로 협박하는 명령보다 조건 없이 플레이어 자신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명령들이 언제나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면, 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놓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 1) 안티 오이디푸스, 547p. 2) 비극의 탄생, 99p.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The Resonant Samurai: Historical Accuracy versus Market Appeal
By now, the online backlash against the inclusion of Yasuke as one of two protagonists in the story has become somewhat infamous, if not tired, since outrage first erupted last year. Although the game had teased at the 2022 UbiForward as Codename Red, it wasn’t until the full reveal on May 15, 2024, with the cinematic trailer that the inclusion of Yasuke, as a co-protagonist, became clear. < Back The Resonant Samurai: Historical Accuracy versus Market Appeal 24 GG Vol. 25. 6. 10. ***이 글의 한국어 버전은 아래 URL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53c58c4-a26a-4e46-8aac-48c10227ca8b Introduction: Yasuke Enters the Franchise By now, the online backlash against the inclusion of Yasuke as one of two protagonists in the story has become somewhat infamous, if not tired, since outrage first erupted last year. Although the game had teased at the 2022 UbiForward as Codename Red [1] , it wasn’t until the full reveal on May 15, 2024, with the cinematic trailer that the inclusion of Yasuke, as a co-protagonist, became clear. [2] [3] For over two months, criticism swirled at design choices in both Western and Japanese circles, though the online discontent among segments of the more conservative Western audience specifically focused on the inclusion of Yasuke, [4] leading, among the many heated discussion threads, to harassment of members of the development team. On July 23rd, Ubisoft released a somewhat ambiguous statement about the context, backhandedly addressing global audiences by way of seemingly focusing on the Japanese Community, and reaffirming their commitment to overall authenticity . [5] * Figure 1: Yasuke as Protagonist This statement raises a number of concerns that articulate the controversy surrounding Yasuke, which taken at face value is about historical accuracy, but arguably has more to do with how this segment of the audience has been served by the franchise so far. As discussed by de Wildt and Aupers in a 2021 study focusing on the franchise overall and including dozens of interviews with former Ubisoft game directors and assorted senior developers, Assassin’s Creed overall privileges the marketability of any given setting. [6] That marketability is further contextualized by a audience that is disproportionately European and American (roughly 79% all of Ubisoft sales). [7] With that market in mind, Ubisoft has put to use a model they term the “marketing-brand-editorial burger,” where the core of the franchise must remain generally similar, while changing the sauce (the cultural setting) in order to draw in new or repeat clientele. [8] To that end, most of the franchise’s games have generally featured protagonists that are relatively uncomplicated to access for that core audience. For instance, Black Flag’ s Edward Kenway presents a European perspective into Nassau and Caribbean colonialism, while Assassin’s Creed II and Brotherhood engages with Ezio as a cultural insider in Renaissance Italy. [9] [10] [11] It also uses Ezio as a way to access the comparatively more distant Istanbul setting and culture in Revelations . [12] Even when protagonists are more complicated, as is the case for Connor Kenway in Assassin’s Creed III [13] and Adewale in Freedom Cry , [14] it is nonetheless the dominant European and American perspectives that orient the core structure of the games. [15] [16] So, why is that centering of the Western audience the case, and how does the controversy surrounding indicate breaks or continuities with this design trend? The answer, broadly, comes from a prioritizing of resonance, of expectations, above accuracy. The Question of Accuracy: Accuracy versus Expectations The question of historical accuracy in the Assassin’s Creed series, over its 18-year span, has been the subject of thousands of games journalism pieces, not to mention dozens of academic articles and book chapters. In early inroads, historical accuracy appears as a demand, essential for games to be taken seriously, as a pedagogical tool, an archaeological model or an account of events past. [17] This demand is draped over a number of design elements, such as the areas of the game included, in conjunction with the time period covered (along with the key events that the narrative focuses on). Perhaps most importantly, there is enduring concern and desire for the protagonists at the center of these games to match the historical period which audiences understand as a coherent whole. In other words, the setting, the story and the characters need to work in harmony, but whether that harmony adheres to historical truth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18] [19] When discussing historical accuracy, it would be useful to consider at what point is the media portrayal considered accurate. Is any deviation allowed? As Adam Chapman argues, there is a threshold where the game can be considered historically resonant, and that point is when individual players deem the historical aspects to match their pre-existing knowledge. [20] Evidently players tolerate deviation from historical fact as necessary to game adaptation in general, and especially in the context of Assassin’s Creed , where historical figures are repositioned as actors in secret conspiracies and ancient aliens plotlines. The fact that the franchise requires a genealogy of assassins and templars, in this case the Kakushiba Ikki (League of the Hidden) and the Shinbakufu (True Shogunate). The distortions necessary to make the armature of the franchise fit with the real persons that the game adapts are in most cases no more or less intensive than the depth provided to Yasuke. This level of adaptation or distortion is also in line with the degree of departure players can find in Odyssey [21] , for instance, with the portrayals of Sokrates and Aspasia of Miletus, [22] or Origins ’ Cleopatra. [23] The games are all, to put it bluntly, historical fiction, rather than history, an approach detailed by Ubisoft itself. [24] As they explain in their 2025 open letter, Yasuke presented an “ideal candidate” for the series formula that incorporates “fantasy elements” and that his “unique and mysterious life” is considered by the company to be a match for franchise patterns. [25] The idea of Yasuke as a candidate for cultural representation is in keeping with de Wildt and Aupers mentioned earlier, where marketing dominates broader choices, and where any narrative or representational choice “defers to the market and the largest possible audience.” [26] Franchise lead Jean Guesdon had previously spoken about tapping into popular zeitgeist to buttress franchise sales, so relying on Yasuke, a figure that has become increasingly visible in popular media over the past two decades makes sense. [27] Unlike Sucker Punch’s Ghost of Tsushima , [28] from which Shadows borrows much of its visual language and colour scheme, Assassin’s Creed provide Yasuke a proxy for audiences, not as a man of colour, but as an outsider to Japan.Yasuke is legitimate enough as a choice, given his historic presence, yet, like players, experience Japan as a foreigner becoming gradually integrated. [29] In other words, the game’s internal structure is positioned to open with, and favor an outsider perspective, over one of the other notable candidates audiences can imagine, including notable samurai like Musashi Miyamoto or Sasaki Kojiro. * Figure 2: Yasuke Criticized for Use of nanban (European) concepts in the context of Japanese warfare. This tension, between what a game company considers an ideal candidate, and what serves historical accuracy most, has been the subject of research over the past few years. [30] In my previous work on the subject, I locate this decision space as shaped by the tension between representation and identification. As film scholar Charles Acland notes, with respect to cinema, the work of identification is complicated and requires exiting one’s own reality to inhabit the specific circumstances of another person, in another place and time. [31] Identification, on the other hand, provides protagonists and perspectives ready-made for individuals to absorb into their experiential frame. This form of media production is positioned to produce the “that resonates with me” reaction, and has been the subject of academic critique concerning Assassin’s Creed for the better part of the last decade. So far, installments have been positioned to always provide that kind of easy identification, if not in main protagonists, then at least in circumstances and ideological positions. Yasuke, in that vein, presents a particular issue. His perspective provides an outside-in look at feudal Japan, but it also bucks against the generally empowering positions that series protagonists have enjoyed. Yasuke’s inclusion seems in itself revolutionary and novel, but as scholar Kishonna Gray noted in the case of Adéwalé in Haiti, there is an echo of white European and American social positions within the very framework of the game. [32] Even when the characters are non-white, their social positions in the game privilege the presumed Euro-American audience mentioned above. In Shadows , Yasuke is not gated from spaces any more than the game’s other protagonist, Naoe, is. The game’s fiction smooths out the creases in what would otherwise be a presumably more confronting experience. Then, if the game resonating with audiences is the primary goal, the game’s choice to platform Yasuke presents quite logically, with the exception that the audience being favored is not the same audience that has been favored in the past decade. To put it bluntly, the racial intolerance evident in Yasuke’s characterization as a “DEI hire” showcases as barrier in audiences identification with a man of colour, more than a rigorous analysis of whether that character’s story is accurate, which is already difficult to claim for any Assassin’s Creed protagonist in good faith. [33] The backlash, at least in the West, has clearly been centered on race and gender, while the Japanese response has certainly been more tempered, and focused on how players are allowed to damage holy sites. The subsequent question that arises is whether or not this entire outrage, as visible as it has been, represents the whole of the consumer base in the West, or rather a specific subset of consumers. The Payoff: Yasuke as Commodity Whether or not reception to Yasuke has been hot or cold is difficult to definitely weigh in on. How do we define success? Is it based on the sentiment of a vocal segment of the audience, or do we prioritize something closer to an international audience reception? Do we look at critical reception, and do we look in a vacuum or in the context of how recent installments have been received? Perhaps the most representative forum for critical and audience reception remains Metacritic, despite concerted efforts to review bomb the title. [34] In fact, when comparing the open-world installments, the pattern is relatively stable. Critics have Shadows at 81, compared to Valhalla ’s 80, Odyssey ’s 83, and Origins ’ 81. Audiences, even keeping in mind a greater proportion of disproportionately negative reviews, have Shadows at 62, compared to Valhalla ’s 60, Odyssey ’s 68, and Origins ’ 73. Critical consensus seems to be that the game is qualitatively in line with previous installments, and for audiences seems a slight improvement over the previous title. Where it does depart is in Shadows ’ higher proportion of extremely low scores, which may be indicative of review bombing. Metacritic, like any review aggregator, will overrepresent audiences that are already invested enough to log on and review, but the consistency in scores over time indicates relative stability between titles at a broader level. * Figure 3: Review Score Aggregates for all Open-World AC Titles (Mirage Omitted). Surely then, the outrage professed against Yasuke was equally felt in terms of sales, which would at least provide an industrial indication that the game was boycotted or sold less well. In actuality, Shadows boasts the second-highest day one sales for the franchise, behind Valhalla , which Ubisoft attributes to the “perfect storm” of conditions during the pandemic. [35] Longer tail analytics show a “modest” sales record of roughly 1.7M copies sold on Playstation 5 alone (Alinea, 2025). [36] So, the picture is somewhat murky, given that we won’t have the long-tail data for a while yet. Compared to Odyssey’s roughly 2M sales in the first month, as well as keeping in mind the pressures on discretionary expenses in the current economic climate, the game is not the historic success of yore, but it’s certainly still successful. Conclusion: It was Never about Accuracy The academic response, as always, will take a longer while to cement, as qualitative studies and criticism goes through the comparatively longer publication cycle. It is my sense, given the title’s consistency within franchise patterns, that academic consensus will broadly settle where it has for the past decade: that Shadows is a relatively safe market bet, with serviceable characters and the core formula unchanged. It is, in many ways, the same Assassin’s Creed we’ve come to know since 2007, and more specifically since the series’ open-world shift in 2017. Within that framework 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al response to the game is novel, as critiques of desecration of ritual sites has generally been confined to academic critiques, rather than the state. [37] [38] In fact, the homage paid to the series at the Paris Olympics for Ubisoft’s assistance with the Notre Dame reconstruction signals a significant gap in how Western states interact with the company’s cultural products. Likewise, the Yasuke controversy, which seems to have lost steam since last year, has faded away into the series’ tenuous relationship with race and gender across many of its installments. It is nonetheless interesting to consider which way audience sentiment slices. Here, Yasuke was called out as corporate pandering to modern sensibilities and audience demand, yet that was not so much the case when Odyssey ’s Alexios was provided as a secondary protagonist for players to enjoy, or when company scandals revealed that Aya was intended as the main character of Origins , despite the release featuring almost exclusively Bayek. The audience’s rigidity regarding accuracy is always one that has been shaped by personal taste, and if the issue was really the accuracy of the character, we’d have had similarly caustic debates about many titles in the series. [1] Ubisoft, dir. 2022. Ubisoft Forward: Official Livestream - September 2022 | #UbiForward . https://www.youtube.com/watch?v=rvV4ZBx6_bo . [2] Ubisoft, dir.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Official World Premiere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vovkzbtYBC8 . [3]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Launches November 15, Features Dual Protagonists in Feudal Japan.” https://news.ubisoft.com/en-ca/article/2LH4Ael4X1TlNJY3B3aYg5/assassins-creed-shadows-launches-november-15-features-dual-protagonists-in-feudal-japan . [4] Walker, John. 2024. “Ubisoft Issues Weird Statement On Assassin’s Creed Shadows Controversies.” Kotaku, July 23, 2024. https://kotaku.com/assassins-creed-shadows-ubisoft-statement-yasuke-1851602337 . [5]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 An Update for the Japanese Community.” https://news.ubisoft.com/en-us/article/7dWPCtVQU7udC0KkPFOyXh/assassins-creed-shadows-an-update-for-the-japanese-community . [6] Wildt, Lars de, and Stef Aupers. 2019. “Playing the Other: Role-Playing Religion in Videogames.”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22 (5–6): 867–84. https://doi.org/10.1177/1367549418790454 . [7] Ibid, 4. [8] Ibid, 11-12. [9]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IV: Black Flag.” [10] Ubisoft. 2009. “Assassin’s Creed II.” 2009. Ubisoft. [11] Ubisoft. 2010. “Assassin’s Creed: Brotherhood.” [12] Ubisoft. 2011. “Assassin’s Creed: Revelations.” [13]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14]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Freedom Cry.” [15] Shaw, Adrienne. 2015. “The Tyranny of Realism: Historical Accuracy and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Assassin’s Creed III.” Loading... 9 (14). https://journals.sfu.ca/loading/index.php/loading/article/view/157 . [16] Zanescu, Andrei. 2023. “Blockbuster Resonance in Games: How Assassin’s Creed and Magic: The Gathering Simulate Classical Antiquity.” Phd, Concordia University. https://spectrum.library.concordia.ca/id/eprint/992024/ . [17] Ibid, 17-57. [18] de Wildt and Aupers, 2019. [19] Westin, Jonathan, and Ragnar Hedlund. 2016. “Polychronia – Negotiating the Popular Representation of a Common Past in Assassin’s Creed.” Journal of Gaming & Virtual Worlds 8 (March):3–20. https://doi.org/10.1386/jgvw.8.1.3_1 . [20] Chapman, Adam. 2016. Digital Games as History: How Videogames Represent the Past and Offer Access to Historical Practice. 1st ed. New York: Routledge. [21] Ubisoft. 2018. “Assassin’s Creed Odyssey.” [22] Ubisoft North America, dir. 2017. Assassin’s Creed Origins: Developer Q&A - History & Setting | Ubisoft [NA]. https://www.youtube.com/watch?v=FK43sE36rdo . [23] Ubisoft. 2017. “Assassin’s Creed Origins.” [24]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 An Update for the Japanese Community.” https://news.ubisoft.com/en-us/article/7dWPCtVQU7udC0KkPFOyXh/assassins-creed-shadows-an-update-for-the-japanese-community . [25] Ibidem. [26] De Wildt and Aupers, 13. [27] Zanescu, 2023. [28] Fox, Nate. 2020. “Ghost of Tsushima.” Sucker Punch Productions. [29] DJangi, Parissa. 2025. “The Real History of Yasuke, Japan’s First Black Samurai.” History.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history/article/the-real-history-of-yasuke-japans-first-black-samurai . [30] Eklund, Lina, Björn Sjöblom, and Patrick Prax. 2019. “Lost in Translation: Video Games Becoming Cultural Heritage?” Cultural Sociology 13 (4): 444. [31] Acland, Charles R. 2020. American Blockbuster: Movies, Technology, and Wonder. 1 online resource (xi, 388 pages) : illustrations (black and white) vols. Sign, Storage, Transmiss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1515/9781478012160 . [32] Gray, Kishonna L. 2018. “POWER IN THE VISUAL: EXAMINING NARRATIVES OF CONTROLLING BLACK BODIES IN CONTEMPORARY GAMING.” Velvet Light Trap, no. 81 (March), 62–67. [33] Mercante, Alyssa. 2024. “This Was Never About Anything Other Than Hate.” Kotaku. July 23, 2024. https://kotaku.com/this-was-never-about-anything-other-than-hate-1851602820 . [34] Wolens, Joshua. 2025. “Ubisoft Says Don’t Compare Assassin’s Creed Shadows’ Success to Valhalla: The Latter Launched in Covid’s ‘perfect Storm’ and Feedback on Platforms ‘Less Affected by Review Bombing’ Is Stellar.” PC Gamer, March 25, 2025. https://www.pcgamer.com/games/assassins-creed/ubisoft-says-dont-compare-assassins-creed-shadows-success-to-valhalla-the-latter-launched-in-covids-perfect-storm-and-feedback-on-platforms-less-affected-by-review-bombing-is-stellar/ . [35] Ibidem. [36] Alinea. 2025. “Xbox Dominated PlayStation’s Top 10 Games by Copies Sold in April, as Forza Horizon 5 Overtakes 1.4 Million Copies on PS5.” Alinea. https://alineaanalytics.com/blog/playstation_april_2025/ . [37] Small, Zachary. 2024. “The Fight Over a Black Samurai in Assassin’s Creed Shadows.” The New York Times, September 11, 2024, sec. Arts. https://www.nytimes.com/2024/09/11/arts/assassins-creed-shadows-yasuke-samurai-japan.html . [38] Murray, Conor. n.d. “New ‘Assassin’s Creed’ Releases To Strong Reviews—But Sparks Anti-’Woke’ Backlash And Roils Japanese Government.” Forbes. Accessed May 30, 2025. https://www.forbes.com/sites/conormurray/2025/03/21/new-assassins-creed-releases-to-strong-reviews-but-sparks-anti-woke-backlash-and-roils-japanese-government/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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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A 게임 스튜디오의 문화적 적응 관행에서 '공명(resonance)'을 기업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영화 및 텔레비전의 문화 자본과 연결된 시상 기관 형성을 통한 게임의 정당화 과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DOTA 2 등 다양한 게임과 시상 기관에 관한 게임 및 플랫폼 연구를 활발히 발표하고 있으며, 《New Media & Society》(2021), 《Games & Culture》(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2021), 《Convergence》등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MIT Press, 2025)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19 GG Vol. 24. 8. 10.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디지털게임에 이르면 호러는 한층 더 강력해집니다. 게임은 플레이어를 공포의 현장 한가운데에 밀어넣기 때문에 많은 경우 게임에서의 공포는 관조가 아닌 개입과 참여를 통해 전달됩니다. 무서운 것을 보는 것과, 직접 무서운 일을 일으키거나 맞닥뜨리는 것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역대급 폭염이 덮친 2024년 8월 GG의 탐색은 호러를 향합니다. 후발 매체로서 디지털게임은 공포라는 감정을 자신이 매우 잘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많은 기존 매체들의 문법을 학습해 왔고, 게임 특유의 호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적지 않은 수로 쏟아지는 공포 게임들이 이 실험과정의 활발함을 보여주는 단서들일 것입니다. 한켠에서는 무서워서 공포 게임을 손도 못 대는(저를 포함합니다) 사람부터, 호러 게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상 붙잡고 있는 마니아까지의 다양함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게임에서의 호러가 어떤 의미인지를 폭염 속에서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이번 19호를 기점으로 GG는 만 3년을 채웠습니다. 게임에 관한,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가 나름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끊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 디지털게임을 무겁게 이야기하는 일은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GG는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걸어온 길보다 더 머나먼 앞날의 길에도 독자분들과 함께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는 9월 초까지 진행되는 게임비평공모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 Back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07 GG Vol. 22. 8. 10. 달리의 이미지들 그레이엄 하먼의 책 〈예술과 객체〉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여기서 ‘환언’(환원과 헷갈릴 수 있는)이라는 개념이 많이 낯설다면 원문에 있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를 가져오는 것이 좀 더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저자는 패러프레이즈의 가능 여부에 따라 지식과 예술이 구분되는 경계선을 긋는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당시에는 조금 뜬금없게도 OpenAI 사(社)의 이미지 생성 AI 시스템인 달리(DALL・E)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었다. 그것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유저가 간단한 설명(예를 들어, 말위에 탄 우주비행사 같은)을 제시하면, 달리는 조금씩 스타일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 설명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 중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바꿔도 제시된 설명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히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언제나 그것의 묘사나 혹은 분석만으로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같은 설명에 기반한 이미지들이라고 해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온전하게 ‘설명’해낼 수는 없다. 다만 달리의 이미지들에는 (James Bridle이 〈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 2) 에서 날카롭게 펼쳐 보이듯이) 유튜브의 보상 알고리즘에 의해 추동된 채로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조금씩 변조되지만 여전히 똑같은 주제와 전개 과정, 캐릭터를 공유하는 수많은 영상들과 유사한 종류의 스산함이 묻어나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 달리(DALL・E)의 이미지들(왼쪽) 그리고 챗봇 플라밍고와의 대화(오른쪽)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 트윗 3) 을 인용한 김성완 인공지능 연구자의 페이스북 글 4) 이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자인 Antoine Miech는 그들이 새로 개발한 AI 챗봇 플라밍고(Flamingo)에게 달리 2(2022년에 새롭게 등장한 달리의 새 버전)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여준 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냐고 묻는다. 가짜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럼 이 가짜 사진을 만들어낸 기술은 무엇일까 라고 다시 묻는다. 플라밍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a GAN to create this image.”(누군가 GA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이를 인용한 김 연구원은 “물론 DALL-E 2은 GAN 모델이 아니라 최신의 Diffusion 모델로 이미지를 생성한 거지만 이정도면 최고의 답변입니다.” 라고 코멘트를 덧붙였다.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고 또 대단한 성취가 맞지만 여기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바로 플라밍고가 ‘얼추’ 맞췄다는 점에 있다. 만약 플라밍고가 ‘누군가 Diffusio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라고 확고하게 대답했다면 완벽한 답변이었겠지만 나는 별달리 흥미를 못 느꼈을테고, ‘스카이넷이 멀지 않았구나!’ 같은 부질 없는 한탄이나 하고 앉았을 터였다. 물론 Antoine 가 직접 이어지는 트윗에서 밝힌 것처럼 플라밍고를 훈련시킬 당시에 달리 2에 대한 웹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러한 모범적인 답변은 불가능했다. 즉, 플라밍고는 달리 2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도 제공된 사진이 (Diffusio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머신러닝 테크닉(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것을 ‘추론’해 낸 것이다. 그 추론의 과정은 연구자들에게도 대부분 블랙박스에 가깝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AI 챗봇은 (인간의 시지각은 인지 못하는) 딥러닝으로 구성된 이미지의 정체를 수월하게 알아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실제 인물 사진들과 This Person Does Not Exist 5) 같은 사이트에서 GAN 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랜덤하게 섞어서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 둘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플라밍고라면 앞서 달리의 이미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된’ 영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나와는 다르게, 혹시 플라밍고는 달리의 이미지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 소름끼치는 동질성을 꽤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플라밍고의 관점에서는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DALL・E)의 이미지들은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 지점에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들, 즉 지식의 범주를 좀 더 넓혀 볼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뒤 혹은 빠르면 내년에는 동영상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플라밍고 2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 때 유행하게 될 어떤 오픈월드 게임의 인게임 플레이 영상을 이 놀라운 챗봇에게 보여준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의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Ubisoft's open-world formula to create this game.”(누군가 유비식 오픈월드 게임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Ludonarrative dissonance 어게인? 게임 역시 지식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지식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의 디스커버리 투어 모드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전들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닐 수 있으면 진정한 지식의 힘이 비로소 발현되는 것인가.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경우처럼 날이 추우면 말의 고환이 수축한다는 식으로 실제 동물들의 행동 패턴과 생리적인 과정들을 게임 속에서 정밀하게 재현하면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지식인가. 15세기 초반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 지방)내에 프라하 인근 지역을 마치 스캔해서 옮긴 듯한 디테일과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킹덤 컴: 딜리버런스〉는 역사 지식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질문들이 그 모든 ‘당연한’ 답변들에 의해 집어 삼켜지기 전에 ludonarrative dissonance(이하 루도)의 샛길로 잠시 빠져 보자. '게임내러티브 부조화'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루도를 둘러싼 논의는 한 블로그 글 6) 에서 시작되었다. 게임개발자 Clinton Hocking은 〈바이오쇼크〉를 플레이 한 뒤 자신이 느낀 어떤 불편한 감각을 전달해 줄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단어가 좀 어려워 보여서 그렇지 이 개념은 사실 꽤 직관적이다.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내러티브가 서로 심하게 상충될 경우 몰입감이 완전히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두 내러티브의 간극을 루도라고 정의한다. 민감한 스포일러의 이유로 바이오쇼크는 제외하고 〈배틀필드 1〉의 예를 들어보겠다.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이 FPS 게임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묵직한 반전(反戰)의 모티프를 전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려한 그래픽으로 구현된 그 참상들을 ‘감상’하면서 잠시 간담이 서늘할 수는 있겠지만 총을 쏠 때마다 느껴지는 반동과 탱크를 직접 운영하는 감각, 폭탄들이 떨어져서 폭발하는 떨림 같은 촉각적인 경험에 중독되는 순간 그 반전(反戰)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가 ‘손맛’에 취한 채 조건반사적으로 달성하게 되는 일종의 기이한 성취로 탈바꿈한다. 폴리곤의 비교적 최근 칼럼 7) 에서도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잊을만 하면 다시 등장하는 오래된 떡밥인 루도는 블록버스터(트리플A) 게임의 산업적인 측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실재하는’ 두 내러티브의 부조화인 루도는 게임 고유의 현상이며, 고쳐야 할 문제라는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루도가 없는 게임이 가능할까. 바꿔 말해서 두 개의 내러티브가 완벽히 매끈하게 엮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내러티브만을 가지게 되는 이상적인(?) 상황을 연출해 낸 게임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테트리스〉와 같은 고전 게임이 떠오를 수 있다. 다만 테트리스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게임플레이를 제외한 내러티브를 아예 배제한 경우에 가깝다.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이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몇몇 고전게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비록 장식에 불과할지라도) 공식적인 내러티브가 평행선을 달리는 구조를 채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사가 아무리 게임플레이를 내러티브에 일치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어들의 변칙성은 때때로 이러한 노력을 쉽게 무력화시킨다. 유튜브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스피드런(speedrun) 영상이 대표적이다. 문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버그마저 초월해 버리고) 〈엘든링〉을 7분 안쪽으로 클리어 해버리는 영상 8) 만큼 루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인터넷의 수많은 자생적인 커뮤니티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드(mod)들은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모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베데스다의 게임 중 하나인 〈폴아웃 4〉를 살펴 보자. 인벤토리의 무게 제한을 해제해주는 모드는 거의 ‘바닐라’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매우 사소한 변형이지만, 그것이 내러티브에 끼치는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무게 제한이 없어진 플레이어는 더 이상 보급과 거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폴아웃 4〉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맵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정착지 건설에 매진할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인벤토리의 용량을 늘려주는 캐릭터 퍽(perk)을 찍을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성장 역시 달라진다. 가장 간단한 모드의 파급력이 이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러티브 사이의 간극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모더(modder)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루도를 특정 게임들이 때때로 맞닥뜨리는 문제일 뿐이라고 납작하게 눌러 놓은 채 지나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그것은 차라리 현대의 디지털 게임이 가지는 핵심적인 특성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불편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루도가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라면 우리(게이머)는 어떻게 여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일까? 게이머들은 많은 경우 특정한 논리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 실험가들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역시 사례와 함께 중첩시켜 보자.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통칭 야숨)에서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최소한의 조건만을 갖추고, 하이랄 성으로 곧장 ‘날아 가서’ (실력이 받쳐 준다면) 가논을 처단하고 게임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내버릴 수 있다. 혹은 정확히 그 반대로 할 수도 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가논과 그 짐승을 온 힘을 다해서 봉인하고 있는 젤다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링크 앞에 펼쳐진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껏 누비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게임이 바로 그 방향으로 게이머들을 은근하게 유도한다는 점이다. 물론 기억을 되찾고 재앙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앞의 설산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신전은 궁금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혹은 여관 주인을 짝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메뚜기를 10마리 잡아보자는 등. 그 광대한 세계가 끊임없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한다. 마치 게임 스스로가 루도를 원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야숨은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내용이 아무튼 그 매체를 가리키거나 암시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9) 는 그린버그식 정의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방가르드 게임일지도 모른다. ∗ 뇌전의 검을 들고 잔디를 깎는 링크 위와 같은 샌드박스적인 펼쳐짐은 게임 내에서 매우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물리적인 상호작용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실험’에 몰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들을 실제로 발과 손을 ‘디딘 채’ 올라가 볼 수 있고, 게임 내의 대부분의 요소들과 촉각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철로 된 무기는 비오는 날 떨어지는 번개에 취약하며, 횃불을 들고 들판에 가면 들풀들이 탄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세계는 게이머들로 하여금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토록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에서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중요한 맥락으로 부상한다. 이 세계는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같은 세계는 아니다. 마치 장르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암묵적인 장치들이 핍진성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기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의 내러티브는 특정한 시스템만의 논리에 장르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앞서 봤듯이 우리는 야숨에서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바로 그 모든 행동들의 가능성을 떠받치고 있는 하이랄의 대지는 가논의 재앙이 100년 간 유예된 세계이다. 어딜 가든 우리는 계속해서 그 흔적들과 마주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애써 무시한 채 마치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링크(게이머)가 그 앞의 설산을 오를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캐릭터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은 어차피 그저 수많은 폴리곤 덩어리일 뿐 아닌가. 백지 상태에서 ‘모든 것은 가능하고, 뭐든지 해도 된다’ 라는 말은 마치 자유처럼 들리지만 사실 정확히 그 반대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게이머들은 내러티브라는 관습화된 약속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그 세계에서 마음껏 실험할 자유를 얻는다. 그에 따라 게임은 게이머들이 내러티브라는 조건 아래에서 주어진 시스템의 한계를 가늠해 보는 지속적인 실험 과정으로 변모한다. 재현성 위기는 기회다 ‘게임은 지식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게임은 실험 과정일 수 있다’ 라는 답변은 대략 근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실험을 하다 보면 그게 지식이 되는 것 아닌가. 미안하지만 실험과 지식 사이의 그 (빌어먹을) ‘간극’은 생각보다 심대하다. 실험에서 지식으로 이르는 과정을 간단히 상기 해보자. 자신이 세운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 중 하나가 실험이고, 물론 실험 역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을 검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실험이 제대로 설계되었다면 그 실험을 누가 하든, 어디서 하든 혹은 몇 번을 반복하든 간에 (모든 변인이 적절하게 통제된다는 가정 하에서) 도출되는 값은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 시리즈에서 보통 헐벗고 다니는 고인물 ‘망자’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들이 마치 미래에서 온 것처럼 가장 최적의 움직임으로 길 위에 잡몹들을 빠르게 압살해 버리고, 보스마저 한 대도 맞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된 수많은 실험들(YOU DIED)을 통해서 이 실험의 결과값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은 리듬 게임이라는 농담 10) 도 바로 이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그런데 만약 플레이어들이 ‘YOU DIED’ 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맵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질 뿐 아니라 잡몹들의 출현 위치와 등장하는 숫자도 랜덤으로 변하고, 결정적으로 보스의 공격 패턴마저 전혀 예측 불가능하게 달라진다면 어떨까. 제 아무리 고일대로 고인 망자들이라도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다닐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실제 랩에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던 중에 일어난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실험은 엉터리이고, 실험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가설은 지식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일이 유명하고 권위 있는 저널에 이미 게재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실험에서 벌어졌다면? 그것도 한 두 건이 아니라면? 스캔들을 넘어서 위기 상황이라고 부를 만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실제로 그 일들이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재현성 위기(The replication crisis)라고 부른다. 네이쳐(Nature)지에서 1,576명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 조사를 소개하는 2016년 아티클 11) 에 따르면 그들 중 70% 이상이 다른 연구자가 진행한 연구의 실험들을 재현(반복)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대답했다.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직접 한 실험들을 재현하는데도 실패했다. 재현성 위기가 단순히 자연 과학 영역을 넘어서 (특히 이 문제가 처음 대두된 영역이 심리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지식계 전반에 던진 충격파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이 현상을 게임과 겹쳐 보면 심각한 위기로 가득 찬 큰 길 옆에 또 다른 샛길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다크 소울〉 시리즈가 충실히 이행된 실험의 메타포로 기능했듯이, 우리는 재현성 위기를 반영하는 게임들을 탐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는 타임루프물만큼 재현성 위기를 제대로(?) 겪고 있는 게임도 없어 보인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이 강제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 폴리곤의 〈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12) 영상에서 올바르게 짚어내듯이 모든 게임은 근본적으로 타임루프물이다. (“All video games are implicitly time loops.”) 왜냐하면 캐릭터가 죽더라도 우리는 세이브를 통해서 (세이브가 없는 로그라이크 같은 게임이라면 게임오버를 통해서) 언제든 다시 특정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다고 다시 고쳐 말해야 할까. 그 결론으로 시급히 달려가기 전에 잠시 게임에서 반복이 지니는 모호함을 상기 해보자. 우리는 게임의 소프트웨어적 특성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함에 있어서 자잘한 반복적인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특정한 버튼에 할당된 특정한 행위들을 하는 것의 조합들이 매우 다양한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게임 개발자들은 플레이어를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반복적인 조합을 피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세심하게 디자인한다. 이는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또 어쩌면 당연하게도) 노골적인 타임루프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반복되는 플레이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절차적으로 생성되는(procedurally generated) 레벨을 도입한 〈리터널〉, 계속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더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으로 유도하는 〈포가튼 시티〉, 같은 지역이라도 어떤 시간대인지에 따라 분위기와 적들의 규모와 위치가 변하는 〈데스루프〉 등. 결과적으로 우리는 대놓고 타임루프를 표방하는 게임들 내에서 오히려 반복적인 ‘실험’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타임루프물이 아닌 게임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잇 테이크 투〉는 마치 뷔페처럼 모든 스테이지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극도로 잘 조율된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그뿐 아니라 역시 극도로 타이밍이 좋은 자동 세이브 기능 덕에 플레이 중 캐릭터가 죽더라도 이미 지나쳐 온 과정을 반복하는 행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다. 이제는 반복을 회피하려는 강박이 없으며, 그 반복의 결과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게임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게 과연 ‘재미있는’ 게임일까. 나는 당연히 그런 게임들은 존재하며 심지어 끝내주게 재미있는 것도 있다고 주장할 참이다. 그 중 하나가 〈프레이〉다. 〈프레이〉가 특히 훌륭하게(?)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은 이 게임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머시브 심(Immersive Sim)이라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한 야숨과 폴아웃 등도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 우선의 플레이 스타일로 몰입형 시뮬레이션적인 특징을 공유하지만 오픈 월드라는 형식을 경유해서 그것들을 마치 빵에 잼 바르듯이 얇고 넓게 펼쳐 놓는다면, 〈프레이〉는 ‘탈로스-1’ 이라는 우주 정거장 하나만을 배경으로 삼는 대신 해상도를 극적으로 높인다. ∗ 우주에서 바라 본 탈로스-1 스테이션 예를 들어, 나는 플레이 하던 도중 잠긴 문으로 막힌 공간을 발견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다만 촘촘한 창살 사이로 내부 공간을 엿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안에는 문 옆에 조그만한 버튼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장난감 석궁으로 좁은 창살 사이를 조준해서 그 버튼을 맞추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공간에서 키카드를 입수할 수 있었다면 그냥 그 키카드로 문을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힘이 충분했다면 그 공간 뒤쪽에 장애물들을 치우고 그 공간으로 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 안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관건이 되는 것은 게임의 물리엔진을 위배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이든 허용되며, 스크립트로 짜여진 공식적인 루트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아주 작은 버튼 같은) 꽤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논리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이 특성은 제한적인 공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이 게임의 레벨 디자인과 결합하며 이상적인 실험 환경을 구축한다. 여기서 반복되는 실험들의 제각기 다른 결과값들은 모두 ‘정당’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즉, 이 실험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은 예술이 아니며, 지식이 되는 것에는 실패한 실험 과정이라는 시나리오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인기가 있는 가능성도 아닐 듯하다. 게임은 예술 혹은 문화, 하다못해 지식이라도 ‘되어야만’ 하는 시대에 무슨 생뚱맞고 처량하게 실패한 실험 운운인가. 그런데 어쩌면 바로 실험이 ‘실패’한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게임 = 예술, 지식, 문화’ 와 같은 (완벽하게) 숨 막히는 동어반복적 회로를 잠시라도 차단하고 완전히 다른 회로를 돌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게임이 당위적으로 스스로를 정의/선언할 필요가 없는 회로를 말이다. 〈포탈 2〉의 그 모든 ‘실험’들이 스펙타클하게 실패한 이후 글라도스(GLaDOS)는 마침내 골칫덩이 실험체인 첼(플레이어)을 바깥 세상으로 놓아준다. 특유의 위트와 미묘한 슬픔이 뒤섞인 그녀의 작별인사 13) 는 마치 기이한 예언이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어떤 가능성을 예비한다. Go make some new disaster (가서 새로운 사고를 쳐) That's what I'm counting on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You're someone else's problem (너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니까) (I used to want you dead but) (예전에는 네가 죽기를 원했는데) Now I only want you gone (이제는 그냥 너가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1)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90-91. 2) James Bridle,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Medium, 2017.11.7. medium.com/@jamesbridle/something-is-wrong-on-the-internet-c39c471271d2 3) Antoine Miech, Twitter, 2022.5.3. twitter.com/antoine77340/status/1521218333412139009 4) 김성완, Facebook, 2022.5.7. facebook.com/story.php?story_fbid=7748085815216489&id=100000454416270 5) https://this-person-does-not-exist.com/en 6) Clinton Hocking,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Typepad, 2007.10.7. clicknothing.typepad.com/click_nothing/2007/10/ludonarrative-d.html 7) Chris Plante, “The Last of Us 2 epitomizes one of gaming’s longest debates” Polygon, 2020.6.26. polygon.com/2020/6/26/21304642/the-last-of-us-2-violence 8) Distortion2, “Elden Ring Any% Unrestricted Speedrun in 6:59 (WORLDS FIRST SUB 7 MINUTES)” Youtube, 2022.4.12. youtube.com/watch?v=XuUEk6e1LOE 9)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230. 10) “[영상] 다크소울은 리듬게임이다.” 루리웹, 2021.9.16. 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90253 11) Monya Baker, “1,500 scientists lift the lid on reproducibility” Nature, 2016.5.25. nature.com/articles/533452a 12) Polygon,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Youtube, 2022.1.29. youtube.com/watch?v=QWEVGbVoxQ4 13) TheMediaCows, “Portal 2: End Credits Song 'Want You Gone' by Jonathan Coulton [1080p HD] ” Youtube, 2011.4.19. youtube.com/watch?v=dVVZaZ8yO6o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 Back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08 GG Vol. 22. 10. 10.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10%의 게임 중 단 1% 만이 이른바 성공한 게임의 반열에 들어간다 - 개인 창작이나 인디 게임을 제외하고도 그렇다는 가정이다. 「피, 땀, 리셋」 (원제: Press Reset: Ruin and Recovery in the Video Game Industry)는 바늘구멍 같은 확률을 뚫고 성공한 게임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황망하게 망한 게임 개발 스튜디오와 이후에 남은 개발자들의 운명 을 다룬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게임 제작 스튜디오는 세상에 빛을 보지도 못한 38 스튜디오(38 Studios)의 프로젝트 코페르니쿠스(Project Copernicus)부터, 에픽 미키(Epic Mickey)나,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 시리즈 처럼 상업, 비평 양쪽의 매우 준수한 성적을 낸 작품을 만든 스튜디오에 관한 사례부터, 다수의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 수상을 이뤄내고 1,10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한 바이오 쇼크 인피니트(Bioshock Infinite)를 만들고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스튜디오, 이레셔널 게임즈(Irrational Games)의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장 처음 다뤄지는 비디오 게임 디자인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워렌 스펙터(Warren Spector)의 사례는 비디오 게임 산업의 이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는 속편 제작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성공한 작품을 완성해냈고 모 회사인 디즈니 인터렉티브 스튜디오(Disney Interactive Studios)의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성과를 인정 받는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 산업의 미래를 잘못 예단한 여타 비전문적인 경영진에 의해 결국 자신의 스튜디오를 폐쇄당한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던 2013년의 전후는 모바일 게임의 중흥으로 인해 비디오 게임 콘솔(Video Game Console) 플랫폼 산업은 급격히 쇠퇴할 것이라는 여러 경제 분석가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시기였다. 워렌 스펙터의 정션 포인트 스튜디오(Junction Point Studios)는 콘솔 게임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스튜디오였고, 모바일 게임 산업으로 전환을 결정한 경영진은 “가망이 없는 콘솔 게임 시장을 노리고 게임을 만드는 스튜디오”에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후 콘솔 게임 시장은 모바일 게임 시장과 함께 여전히 큰 폭으로 성장 중이다. 그의 사례는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비디오 게임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대기업이 야심차게 비디오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가 성과가 나오기 직전에 사업을 철수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고, 게임 제작 스튜디오로 성장한 몇몇 국내 스튜디오들은 과거 이와 비슷한 악명 높은 허들 시스템으로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이와 관련한 불편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이른바 “사업상의 결정”으로 인해 회사에서 성실히 근무하던 개발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례는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일일히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후의 에피소드들은 아무리 비디오 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좀 체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디렉터 한 명이 퇴사했을 뿐임에도 그의 밑에서 같이 게임을 만들어낸 훌륭한 팀을 단번에 박살내 버려버린 이야기(이레셔널 게임즈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매번 전작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지만, 경영진이 목표로 하는 “전 보다 매우 뛰어난 성공”을 거두지 못해 결국 버려진 스튜디오에 대한 이야기(비서럴 게임즈 -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 마치 제조 공장의 조립 라인처럼 개발자들을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 옮기다 개발 역량과 좋은 조직 문화를 모두 소진하고 자연스럽게 소멸된 스튜디오(2K 마린 - 더 뷰로: 기밀 해제된 엑스컴)에 대한 이야기는 그나마 순한 맛에 해당한다. 매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커트 실링(Curt Schilling) 개인 재력과, 주 정부의 투자 약속을 바탕으로 비디오 게임 산업 불모지인 지역에 스튜디오와 대규모 개발 인력을 이전한 38 스튜디오. 그리고 38 스튜디오의 자회사 빅 휴즈 게임즈(Big Huge Games)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도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여기에 희망과 게임 개발의 꿈을 걸었던 개발자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게임 개발자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스튜디오의 폐쇄 이후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개발자들의 운명은 매우 끔찍했다. 이주 지원 명목으로 회사가 받은 거액 대출은 개발자 개인이 값아가야 할 몫으로 남아버렸는데, 해당 지역에서는 다시 취업할 수 있는 비디오 게임 회사가 없다. 겨우겨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지역에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정리해고의 공포를 안고 일을 해야만 한다. 실제로 빅 휴즈 게임즈의 개발자들은 이후 에픽 게임즈(Epic Games)의 새로운 스튜디오에 합류했지만, 에픽은 고작 8개월만에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이 스튜디오를 폐쇄해 버린다. 한번도 극복하기 힘든 일을 일년 사이에 두번이나 겪게 된 개발자들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차마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 책은 이해할 수 없는 스튜디오 폐쇄와, 이로 인해 재기 불능의 피해를 입고 업계를 영원히 떠나버린 개발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생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듯, 여기에도 살아남는데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인디 게임 개발로 진로를 바꿔 인생의 벼랑 끝에서 겨우 빠져나온 이야기. 북미에 비해 노동권 및 복지에 대한 보장이 잘 되어 있는 유럽으로 이주해 안정적인 개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개발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일부의 사례에 불과하다. 이 책의 서문에는 션 맥러플린(Sean McLaughlin)이라는 개발자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리고 저는 이제 책상에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아요.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의 짐만 가져다 두죠.” 이 이야기에 어떠한 동질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이미 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게임 개발자이거나 산전수전 다 겪고 뛰쳐나온 옛 종사자일 것이다 - 나 또한 여러 업체들을 옮겨 다니면서 개인 짐을 많이 가져다 두지 않는다. 가장 최근의 퇴사에서는 오직 백팩 하나 분량의 짐만 가볍게 챙겼을 뿐이다. 크런치로 불리우는 강도 높은 근무 환경. 프로젝트에 따라 얼마든지 직장을 잃어버리기 수월한, 다른 산업과 비교되는 노동 유연성은 국내의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피, 땀, 리셋」에서 나오는 예시처럼 하루 아침에 스튜디오가 폐쇄되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사례에 개발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이에 대한 응답을 받는 사례가 점차 나오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성과는 아니다. 다른 산업계에서 이어진 뿌리깊은 노동 운동은 2000년대 초 IT 노조의 출범과 이후 2013년 게임개발자연대 등의 단체에서 비디오 게임 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게임 업계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게임 개발자들 스스로도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8년부터 넥슨, 스마일게이트, 웹젠 등의 대형 게임 회사들에 개별 노조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느리지만, 점차 개선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오히려 북미의 비디오 게임 산업 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는 모양새이다. 미국의 경우 2022년이 되어서야 액티비전 블리자드(Activison Blizzard)의 자회사인 레이븐 소프트웨어(Raven Software)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는 미국 내 상장 비디오 게임 업체 중 최초의 일이다. 혹자는 이러한 일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게임이 망했으면, 당연히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피, 땀, 리셋」에서 언급된 사례들은 거의 대부분 “성공했으나 망한” 경우이고, 실패 역시 개발자가 아닌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 결정”에 기인한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개발진에게 잘못된 판단에 기반한 결정을 강요한 경영진들은 개인적인 큰 손실을 입거나, 여타 개발자처럼 빚에 허덕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결과를 두고 “게임이 망했으니 책임을 지라”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혹은 얼마나 불평등한 이야기인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피, 땀, 리셋」 같은 책이 세상에 소개되면서, 비디오 게임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알리고, 이를 통해 끔찍한 게임 개발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가 느리지만 점차 개선되고 있다. 비디오 게임 제작은 충분히 어렵다. 그리고 그 성공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게임을 만드는 것 이외의 문제로 힘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 개발자) 임현호 과거의 게임 개발 영웅들의 모험담을 쫓으며 게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게임 개발자. 매우 긴 기간 동안 대표, 기획자, 인디 게임 개발자, 프로젝트 매니저 등의 여러 타이틀을 달고 살았으나 게이머이자 게임 개발자로 불리길 희망하는 소시민.
-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Back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03 GG Vol. 21. 12. 10. 1. 두 아이 아빠의 게임 라이프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털어놔야겠다. 지난 몇 년 동안 게임을 즐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저런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가진 탓에 늘 마감에 쫓긴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두 아이가 반긴다. 둘 다 아직은 엄마, 아빠의 손이 많이 가는 나이다.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과 잠시나마 놀아준다. 고집 센 아이들을 설득해 씻기고 재우면 대략 밤 10시다(정신적·체력적으로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다). 이때부터 명목상 자유시간이지만 대개는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게 된다. 어쩌다 여유가 있더라도 게임기로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1~2시간 만에 끝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밤 게임을 저장하면 언제 다시 데이터를 불러낼지 기약할 수 없다. 한 번 흐름이 끊긴 게임을 다시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최근 육퇴 후 아내와 함께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하겠노라며 큰마음 먹고 패키지 버전을 2개나 구입했지만, 한 달 동안 고작 ‘아시라 세트’를 맞춘 것이 전부였다. 아내는 둘째를 재우다 그대로 잠드는 날이 많았고, 아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몇 번의 솔로플레이를 하다가 새로운 업무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멀어졌다.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사냥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서 플레이 시간이 늘어나면 업무는 물론, 가족과의 일상이 대검에 썰려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생이라는 맵에서 홀로 사냥하던 시즌1은 끝났다. 시즌2에서는 두 아이가 동반자 아이루(몬스터헌터의 고양이 서포터)처럼 늘 함께한다. 아침에 두 아이를 등원시키려면 일찍 잠을 청해야 한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바깥 활동을 하니 평일보다 더 여유가 없다. 부족한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40대 중반에 접어드니 체력은 물론,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다. 〈몬스터헌터〉처럼 컨트롤이 필요한 게임은 오래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처럼 여유가 있을 때는 게임기를 켜기보다 넷플릭스에 접속한다. 궁금한 게임이 있으면 유튜브 영상을 본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내 삶에 게임이 끼어들 공간은 거의 없는 셈이다. 2. 자동화된 게임: 핀볼과 〈월드플리퍼〉 이런 두 아이의 아빠가 오랜만에 빠져든 게임이 있다. 사이게임즈에서 개발한 〈월드플리퍼〉다. 복고풍 도트그래픽으로 핀볼 게임과 RPG를 접목한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플레이어는 6명의 캐릭터(메인 3명, 서브 3명)를 조합해 파티를 구성하고, 핀볼처럼 디자인된 맵(스테이지)에서 적을 물리치게 된다. 화면 하단 플리퍼로 구슬 대신 캐릭터를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데, 캐릭터를 터치하면 적에게 돌진할 수 있고, 게이지가 쌓이면 고유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일본식 RPG의 소위 ‘몸통박치기’를 핀볼 게임과 적절하게 섞은 느낌이다. 핀볼 게임이 그렇듯 이 게임도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타이밍에 맞게 플리퍼를 터치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스킬을 쓰는 것이 전부다(애초에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게 아니라 플리퍼로 날린 뒤 지켜보는 구조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 중 대부분의 시간은 조작보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득점을 ‘지켜보는 데’ 할애된다. * 〈월드플리퍼〉는 핀볼 개념과 RPG를 섞으며 자동 플레이에 대한 나름의 납득 가능한 지점들을 구현해낸 바 있다.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있다 보니 ‘자동’ 기능을 사용해도 큰 이질감이 없다. 오히려 AI가 나보다 더 정확하게 적을 조준하고, 알맞게 스킬을 구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컨트롤이 필요 없을 만큼 캐릭터가 성장하면 자동 진행은 어느새 옵션이 아닌 디폴트가 된다. 자동 플레이의 비중이 수동 플레이의 비중을 넘기는 시점부터 게임은 본격적인 ‘보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그에 맞춰 게임의 핵심 재미도 변화한다. 플레이어는 캐릭터 육성에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핀볼 게임을 반복해야 한다. 처음 몇 번이야 재미를 주겠지만 반복이 거듭되면 단순노동으로 변질된다. 자동 기능은 이 ‘반복구조’를 대행해준다. 전통적인 RPG에서는 성장을 위해 지루한 구간(소위 레벨노가다)을 참고 인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어른 게이머들은 이를 감당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성장한다는 것은 게임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플레이어는 자동화를 통해 얻어진 재화를 전략적으로 분배하고, 성장한 캐릭터를 조합해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데서 재미를 얻는다. 자동 기능은 전체 게임 디자인의 일부이자 게임의 구조적인 재미를 작동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드플리퍼〉가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된 ‘핀볼’을 차용한 것은 꽤나 영리한 설정이다. 핀볼 게임의 구조가 ‘지켜보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오토 플레이로 전환시키고, 수집형 RPG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동 기능을 합리화시키기 때문이다. 3. 플레이의 경계가 사라지다 ‘보는 게임’을 ‘플레이어의 참여가 최소화된 게임’으로 정의한다면 앞서 언급한 〈월드플리퍼〉를 포함해 자동 기능이 탑재된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이 아마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비주얼과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는 게임도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보는 게임’이란 시각적인 이미지에 관계없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게임’으로 한정짓고자 한다. 따라서 화면을 보지 않고 ‘방치’하는 게임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보는 게임’에 포함될 것이다. ‘보는 게임’의 핵심은 ‘플레이의 자동화’다. 오늘날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 오토 플레이는 필수 기능으로 자리잡았다. RPG 장르의 자동 사냥은 물론, 캐릭터 조작 없이 클릭 한 번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것도 일종의 오토 플레이 요소다. 진행이 자동화된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부분은 주로 습득한 재화를 배분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보는 게임’은 그래서 이중적이다. 그것은 스스로 작동하는 게임화면을 바라보는 것이자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행위의 영역이 아닌 인식의 영역이다.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고 개입하는 존재로서 플레이어는 게임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제 게임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물리적인 하드웨어와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동화된 세계를 인식하고 떠올리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게임이 된다. 플레이의 경계는 무너졌다. 하지만 이런 열린 상태가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매직서클’의 경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게임’은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무너질 때 ‘워라밸’의 균형도 무너진다. 자동화된 놀이가 생활과 인식의 영역으로 침범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보는 게임’은 쾌락의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늘 미끄러진다. 그래서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도 욕망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는다. 4. ‘보는 게임’의 기원 ‘보는 게임’은 스마트폰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으나 게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기부터 그 원형이 발견된다. 나는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에서 초창기 게임의 진화 과정을 아케이드 게임과 PC 게임이 서로 결합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아케이드 게임이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하는 형태로 발전했다면, PC 게임은 이야기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런 관점에서 PC로 등장했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장르는 ‘보는 게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은 물론, RPG, 시뮬레이션 게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초기 PC 게임들은 물리적인 조작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지켜보는’ 형태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PC 플랫폼의 하드웨어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키보드’라는 입력도구는 조이스틱과 달리 문자를 입력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고, 초기 PC의 낮은 그래픽 성능은 움직이는 이미지보다 고정된 이미지와 텍스트 중심의 게임을 강제했다. 게다가 PC는 아케이드 게임과 달리 긴 플레이 시간을 보장했다. PC 플랫폼에서 게임의 플레이 타임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저장 기능은 게임 플레이가 일상생활에서 적절하게 끊어지고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런 PC 게임의 특성이 극대화된 장르 중 하나다. 〈삼국지〉나 〈문명〉 시리즈는 대부분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PC라는 업무용 하드웨어가 비디오게임과 결합되면서 그 게임 스타일도 마치 직장에서 업무 지시를 내리듯 사무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당시에 PC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은 놀이라기보다 업무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이런 ‘보는 게임’의 흐름은 2000년대 웹 게임을 거쳐 스마트폰 게임으로 이어진다. 5. ‘보는 게임’은 어떻게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었을까? 과거 PC라는 하드웨어의 등장으로 새로운 게임 장르가 등장했던 것처럼 스마트폰이라는 하드웨어는 ‘보는 게임’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24시간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터치스크린’ 단말기는 PC가 그랬듯이 캐릭터를 조작하기가 불편했다. 뭔가를 보고 조작하기에는 화면이 너무 작았고, 물리버튼이 없어서 정교한 컨트롤도 어려웠다. 오토 플레이 기능은 이런 하드웨어의 한계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24시간 플레이가 가능한 개인화된 기기라는 점도 오토 플레이에 영향을 미쳤다. 스마트폰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언제 어디서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상태로 플레이어 곁에 대기 중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플레이어는 24시간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수 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동일하지 않고, 대부분의 온라인 모바일 게임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한(혹은 비용을 더 지불한)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흘러간다. 늘 손안에 있는 하드웨어, 항상 게임에 접속할 수 없는 플레이어,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게임 내 경쟁구조. 이 세 가지 요인이 맞물리면서 ‘자동 사냥’ 혹은 ‘오토 플레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탄생한다. 물론 하드웨어 특성만으로 ‘보는 게임’이 주류가 된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보는 게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이 재미를 만들어내는 구조와 더불어 오늘날 수용자들의 게임 플레이 환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임을 ‘선택’한다는 것은 취향은 물론 자신의 플레이스타일과 라이프사이클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다. 아무리 게임이 재미있어도 플레이하는 과정이 내 삶의 파장과 맞지 않으면 버려지게 된다. 우리 집 책꽂이에 방치된 닌텐도 스위치와 〈몬스터헌터 라이즈〉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바쁜 와중에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즐기는, 아니 즐기는 것이 용인되는 〈월드플리퍼〉처럼 말이다. 여러 모바일 게임 중에서도 〈월드플리퍼〉가 내 삶의 틈새로 구슬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게임은 각각의 플레이 과정이 작은 단위로 분절되어 있다. 레벨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지만 하나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3분 정도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나에게 재화를 빨리 모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드플리퍼〉에는 유저간 PVP가 없다. 경쟁 요소가 거의 없다보니 캐릭터 수집이나 성장에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과정이 즐겁다. 멀티 플레이도 마치 솔로 플레이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3명의 플레이어가 함께 진행하는데, 타인의 생성한 룸에 참여하면 행동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알람 신호가 울리면 클릭해서 참여하고, 오토 플레이가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면 재화를 얻을 수 있다(물론 이벤트 난이도에 따라 컨트롤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채팅 기능이 없어서 커뮤니케이션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런 특성 덕분에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부담 없이 멀티 플레이에 참여해 재화를 모을 수 있다. 일하다가 알람이 울리면 클릭해서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도중에 전화가 오거나 접속이 끊겨도 자동 전투는 끝까지 진행되고, 그에 따른 보상도 받을 수 있다. 집중이 필요한 업무를 할 때는 이마저도 어렵지만 간단한 업무를 할 때는 충분히 병행 가능한 수준이다. 이렇게 해서 일과 게임을 동시에 처리하는 신인류가 탄생했다(멀티태스킹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6. 시간은 없지만 게임은 하고 싶어 누군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것처럼, 나 역시 시간이 없지만 게임은 하고 싶다. ‘보는 게임’은 그런 어른 게이머의 모순된 욕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켜준다. 일과 게임의 밸런스, ‘워게밸’이 가능하다고 합리화하면서 스마트폰에 게임을 설치한다. 하지만 불온한 멀티태스킹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일과 게임, 둘 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외치는 탓이다. 처음에는 똑같이 아껴주겠다고 다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균형은 무너진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는 결국 게임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게임은 그동안 발생한 ‘매몰비용’의 영수증을 들이대면서 붙잡는다. 오래 붙잡은 인연일수록 끊어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누군가는 일을 잠시 밀쳐두고 게임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삶의 조건에 맞게 수많은 게임들이 소비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다이어트 코크’를 이야기한다. 다이어트 코크는 카페인과 설탕이 제거된 콜라다. 우리는 가짜 콜라, 유사 콜라를 마시면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원래의 핵심이 제거된 콜라를 마시면서도 기존에 느꼈던 ‘청량감’과 ‘각성효과’를 기대한다. 다이어트 코크를 마시면서 오리지널 콜라를 욕망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보는 게임’도 어쩌면 그런 다이어트 코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콜라에 카페인과 설탕이 필요하듯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요구된다. 이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쾌락을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마음껏 투입할 수 없다. 그래서 게임회사는 우리가 게임에서 누려야 할 플레이 시간을 제거한다. 바로 일상을 방해하는 해로운 성분이 제거된 ‘보는 게임’이다. 사실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그 몰입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보는 게임’에는 그 본질적인 부분이 제거되어 있다. 마치 카페인과 설탕이 제거된 다이어트 코크처럼 말이다. 나는 일하면서도 게임을 즐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했던 게임은 업무 사이에 던져진 또 다른 업무였을지도 모른다(유저들이 ‘일일퀘스트’를 ‘숙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본질이 제거되면서 욕망은 더욱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해롭지 않다는 생각에(일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더 많은 시간을 안심하고 게임에 투입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투입한 시간은 결코 작지 않다. 7. 포장된 쾌락의 한계 게리 S. 크로스, 로버트 N. 프록터의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책에서는 초콜릿, 담배, 사진, 축음기, 영화 등 ‘포장된 쾌락의 혁명’에 대한 내용들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매우 쉽고 빠르게 열량을 섭취할 수 있게 했다.” 19세기 말부터 기업들은 지방, 당분, 염분 등을 농축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멀리 운반할 수 있도록 포장했다. 시중에 ‘포장된 쾌락’이 넘쳐나면서 미각, 시각, 청각 등 한때는 희소했던 감각들을 이제는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포장된 쾌락은 감각 경험의 강도를 크게 높였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마약이다. 씹거나 연기로 피우거나 차로 마셨던 아편은 모르핀, 헤로인으로 정제되었고, 새로 발명된 주사기를 통해 혈관에 직접 주입되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담배회사는 새로운 가공법으로 연기의 맛을 순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연기를 폐 깊숙이 흡입하게 되었다. 제품 자체는 순해졌지만 오히려 건강에는 치명적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포장된 쾌락이 전달되는 과정을 주사기 같은 튜브에 빗대어 ‘튜브화(tubularization)’라고 부른다.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공연장에 가는 대신 ‘아이팟’을 켜는 것, 짧은 기간에만 허락되었던 축제의 즐거움을 일 년 내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놀이공원’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디오게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기술은 사람들이 놀이를 즐기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매우 쉽고 빠르게 재미와 쾌락을 충족시킬 수 있게 했다. 컴퓨터는 인간이 놀이를 위해 수행해야 할 것들, 이를테면 놀이도구의 배치, 규칙의 적용, 컴포넌트의 이동, 점수 계산 등을 기계가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비디오게임은 TV보다 상호작용성이 뛰어난 매체였지만, 한편으로는 놀이에서 인간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과거의 놀이를 생각해보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놀이들은 물리적인 공간에 친구들을 모으고, 몸을 움직여야 하며, 탈락하면 다른 친구들이 승부를 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놀이를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 대상, 시간이 필요했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일종의 ‘허들’이었다. 비디오게임은 이런 허들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물론 접근이 간편해진 만큼 규칙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비디오게임 산업이 성장하고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게임은 점차 ‘튜브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 비디오게임은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편리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드코어 게임들은 난이도를 대폭 낮추거나 ‘EASY MODE’를 추가했고, 닌텐도 DS와 Wii는 ‘캐주얼 혁명’을 일으켰다. 스마트폰은 이런 튜브화를 더욱 강화시켰다. 특히 모바일 플랫폼의 ‘보는 게임’은 자동화와 튜브화가 결합된 ‘포장된 쾌락’의 극단적인 형태다. 심지어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는 현실의 자본으로 보다 압축된 시간을 구입할 수 있다. 자동으로 진행되는 전투조차 곧바로 결과를 볼 수 있도록 스킵해 버리는 티켓은 더 빠른 ‘포장된 쾌락’을 위한 입장권이다.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된 휴대용 모바일 기기는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서버에 접속된 게임환경을 제공한다. 주머니 속의 사탕을 꺼내듯 하드웨어를 꺼내서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은 채, 일상에 해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쾌락을 마음껏 소비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길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게임은 어쩌면 구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오히려 이런 게임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과거에 즐겼던 게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마치 비디오게임을 시작하면서 구슬치기가 밋밋해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8. 1973년의 핀볼과 2021년의 월드플리퍼 다시 〈월드플리퍼〉를 가만히 바라본다. 어쩌면 ‘보는 게임’이란 핀볼 기계를 떠도는 구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구슬은 스스로 랜덤으로 점수를 얻고 시간이 지나면 중력에 의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아주 잠시 플리퍼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게임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973년의 핀볼』에는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거대한 창고 안에서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핀볼 기계를 찾아내고 나서야 그는 충족되지 않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 ‘보는 게임’은 다이어트 코크처럼, 포장된 초콜릿처럼 놀이의 중심에 닿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노동에서 벗어나 놀이 자체를 온전히 마주할 때까지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2021년의 나는 〈월드플리퍼〉를 플레이하면서 유년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고 있다. “핀볼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내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상념도 사라졌다.” -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중에서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평론가, 프리랜서 작가) 이상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비디오게임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비디오게임에 대해 생각하면서 게임이 주는 흥미로운 경험을 문장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게임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관련 저서로는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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