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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 Back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27 GG Vol. 25. 12. 10. 게임 연구,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게임 연구를 한다고 자기소개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게임 연구요? 그럼 코딩하시나요? 게임 개발 쪽인가요?" 게임을 연구한다는 말이 곧 기술 연구나 프로그래밍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게임 연구에는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디어 연구, 문화 연구, 장르 연구, 철학이나 미학 연구 등 게임을 바라보는 지평은 다양하다. 그러나 '게임 연구'라는 말은 여전히 명확한 윤곽을 갖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혼란은 비단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연구자들 스스로도 게임 연구가 어느 학문 분과에 속하는지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 미디어학과 강의실, 컴퓨터공학과 실험실, 문화연구 세미나실 가운데 어느 곳이 그 자리가 될 수 있을까? 2025년 5월 일본에서 출간된 『クリティカル・ワード ゲームスタディーズ ― 遊びから文化と社会を考える』(이하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의 네 명의 편저자 – 이노우에 아키토(井上明人), 마츠나가 신지(松永伸司), 요시다 히로시(吉田寛), 마틴 로스(Martin Roth) – 는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게임 연구는 기존의 대학 분과나 학문 제도로는 수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가 바라보는 지평 그렇다면 일본의 게임 연구자들은 게임 연구의 이 불안정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에서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 게임 연구의 현주소는 흥미롭다. 편저자들은 게임 연구가 "새롭고 영역횡단적인 학문"이기에 전체와 현위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인정한다. 앞서 국가별로 게임 연구가 주도되는 학문의 영역이 다르다고 언급했듯, 이러한 지역적 편차는 게임 스터디즈가 아직 확립된 학문 분과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이라는 대상 자체가 단일한 학문적 렌즈로는 포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게임 제작에 요구되는 기능이 프로그래밍부터 영상, 시나리오, 세계관 설정,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듯, 게임 연구 역시 문과도 이과도 아닌, 혹은 문과이면서 동시에 이과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책의 구성에도 반영된다. 네 명의 편저자는 각기 다른 전문 분야와 배경을 가진다. 편저자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연구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 내에서 각자의 게임 연구에 임해도 좋다"며, 학문적 다원주의를 적극 옹호한다. 일본 게임 연구가 주목하는 것들 이러한 학문적 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그 답은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책의 제1부 이론편은 '룰(Rule)', '미디어(Media)', '놀이(Play)', '픽션(Fiction)',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소셜(Social)', '인공물(Artifact)',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 등 8개 핵심 개념을 다룬다. 주목할 점은 하나의 개념을 네 명의 편저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설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룰' 개념을 둘러싸고 "게임은 룰인가", "룰 개념의 다의성과 다양한 성질", "룰은 게임을 정의하는가"라는 세 가지 소제목 하에 서로 다른 시각이 제시된다. 이는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가 다양한 견해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적 전략이다. 제2부 키워드편은 27개 항목으로 구성되며, 현재 게임 문화와 게임 연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여기에 수록된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현재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떤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드러난다. 이 항목들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묶인다. 첫째, 기술적·물질적 기반 주제다. 'NFT', '에뮬레이션', '아카이브', '플랫폼'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단순히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경제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미디어로 파악한다. 특히 아카이브와 에뮬레이션 파트는 게임의 보존과 접근성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게임이 점점 더 '사라지는' 미디어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다. 플랫폼 개념은 게임이 중립적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와 경제 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문화적 쟁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접근성과 장애의 표상', '게임 행동 장애(Gaming Disorder)'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둘러싼 정치성을 전면화한다. 젠더 파트는 게임 문화의 남성중심성과 배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접근성 파트는 장애인 게이머들의 경험이 어떻게 주변화되어왔는지를 다룬다. 게임 행동 장애 파트는 WHO의 질병 분류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면서, 게임 플레이를 병리화하는 담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 현상과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플레이어의 창조적·전복적 실천에 대한 주제다. '게임 실황', 'UGC(User-Generated Contents)', '치트', '내비게이션'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개발자가 설계한 대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임 실황은 게임 플레이를 관람 가능한 퍼포먼스로 전환하는 실천이고, UGC는 플레이어를 공동 창작자로 위치시킨다. 치트는 게임의 룰을 의도적으로 위반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이러한 항목들은 게임 연구가 '텍스트 분석'에서 '실천과 문화 연구'로 확장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넷째, 게임의 사회적 확장에 대한 주제다. '스포츠', '투어리즘',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더 이상 오락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게이미피케이션은 업무, 교육, 건강관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이 게임의 논리로 재편되는 현상을 가리키며, 투어리즘 파트는 <포켓몬 GO> 같은 게임이 실제 공간의 이동과 경험을 재조직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스포츠 파트는 e스포츠의 부상과 함께 게임과 전통적 스포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다룬다. 다섯째, 메타적 성찰에 대한 주제다. '비평(Criticism)', '윤리(Ethics)', '역사 서술', '내러티브(Narrative)', '몰입' 같은 개념들은 게임을 연구하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윤리 파트는 게임 내 폭력 표현, 착취적 과금 모델, 개발 노동 조건 등 게임을 둘러싼 다층적 윤리적 쟁점들을 다룬다. 역사 서술 파트는 게임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탐구한다. 비평 파트는 게임 비평의 언어와 방법이 무엇인지,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묻는다. 제3부 북가이드편은 20개의 필독 문헌을 소개한다. 하위징아(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카이와(Caillois)의 『놀이와 인간(Man, Play and Games)』 같은 고전부터, 예스퍼 율(Jesper Juul)의 『하프 리얼(Half-Real)』,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설득적 게임(Persuasive Games)』 같은 현대 게임 연구의 주요 저작까지 망라한다. 흥미롭게도 편저자들은 일본어 문헌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밝히는데, 이는 "일본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접근이 어려운 외국어 문헌 소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어쩌면 내용보다 형식에 있을지 모른다. 서문에서 편저자들은 독자에게 "이 책을 도중에 내던지고 즉시 자신만의 게임 스터디즈를 시작해도 좋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책에는 다양한 전문 분야와 연구 테마를 가진 많은 저자들이 다루는 현재진행형의 게임 스터디즈가 담겨 있으므로, 끝까지 읽는 것을 권장한다"고도 덧붙인다. 이는 게임 연구라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영역에서 학술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게임 연구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게임 연구 커뮤니티와 연구 서적이 서서히 쌓여 왔고, 이 책은 그 축적의 위에 서서 ‘입문용 지도’를 제안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게임 연구 씬뿐만 아니라 한국의 게임 연구 현장에서도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는 명확한 학문적 경계나 방법론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을 문제로 보기보다, 오히려 가능성으로 전환하려 한다. "문과도 이과도 아니다", 기존 학문 제도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은 패배주의적 자조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적 실험을 위한 생각의 전환에 가깝다. 일본의 지형, 한국의 질문 사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미학, 철학, 미디어 이론, 기술사 등 인문학적이고 이론 지향적인 게임 연구 관점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 연구, 디자인학 연구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며, 지역이나 대학별로 강조하는 학문 분과도 다르다. 한국 역시 커뮤니케이션학, 미디어학, 문화연구는 물론이고 게임 정책 연구, 산업 분석, 기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이 공존한다. 두 나라 모두 게임 연구를 단일한 학문 체계 안에 정착시키기보다는, 여러 분과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이라는 대상을 탐구해왔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게임 연구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교의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는 문화적 맥락과 제도적 환경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젠더 담론, 게임 병리화 담론, 아카이브와 보존 문제, 플레이어 실천의 의미 등 한국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쟁점들을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연구 지형을 새로운 각도에서 성찰하게 만든다.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단순히 일본 게임 연구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게임 연구자들에게도 "당신은 게임을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고 볼 수 있다. 나가며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완결된 지식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게임 연구라는 영역이 여전히 형성 중이며,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긴장과 대화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 연구는 확립된 지식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탐구의 과정이며, 따라서 단일한 방법론이나 관점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임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권위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지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35개의 키워드와 20개의 필독서는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이라기보다, 계속 수정되고 확장될 '잠정적 지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제시하는 비전이 순탄하게 실현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임 스터디즈가 기존 학문 제도에 수용되지 않는다는 진단은, 동시에 제도적 지원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문적 다원주의는 지적 풍요로움을 약속하지만, 공통의 언어와 방법론이 부족해지는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 게임 연구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일본 게임 연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고,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며, 동시에 새로운 참여자들을 초대한다. 한국의 게임 연구자와 게임 문화 연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비교 참조점이자, 우리 자신의 게임 연구 지형을 성찰하게 만드는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게임을 어떤 학문적 렌즈로 바라보고 있는가? 국내 게임 문화의 고유성과 글로벌 게임 연구 담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게임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일은, 이 질문들을 다시 꺼내어 놓게 만드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아이프리버스』와 『비밀의 아이프리』, “프리파라 아저씨”: 무엇이 ‘비밀’인가?
체크 남방을 입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자기 몸뚱이만 한 알록달록한 보라색 아케이드 게임기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이 밈처럼 퍼진 적이 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프리파라』다. 모두가 사진을 찍혀 밈이 되어 인터넷 세상을 부유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프리파라 “프리파라 아저씨”들이 있었고, 프리파라의 시대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프리파라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도 프리파라 아저씨(들)이었다. < Back 『아이프리버스』와 『비밀의 아이프리』, “프리파라 아저씨”: 무엇이 ‘비밀’인가? 27 GG Vol. 25. 12. 10. 비밀의 아이프리 체크 남방을 입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자기 몸뚱이만 한 알록달록한 보라색 아케이드 게임기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이 밈처럼 퍼진 적이 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프리파라』다. 모두가 사진을 찍혀 밈이 되어 인터넷 세상을 부유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프리파라 “프리파라 아저씨”들이 있었고, 프리파라의 시대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프리파라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도 프리파라 아저씨(들)이었다. 이미지 1: 2020년대 들어서는 “어이 내 몸으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짤”로도 알려진 이미지. “프리파라 아저씨”로 검색해도 찾을 수 있다. ‘밈화’된 이미지들이 곧잘 그렇듯 원본 이미지의 출처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프리파라』 기기가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아이프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프리 아저씨가 되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 정도까지 바지 정장을 입고 (때에 따라 넥타이까지 한다) 일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한밤중이 다 되어서 아이프리를 하러 가면, 꼴이 영락없이 후줄근한 ‘프리파라 아저씨’의 전형 그 자체다. 집에서 가까운 대형 마트에도 아이프리 기기가 있지만, 어린이와 주부 용품이 있는 층에 있는 단 한 대뿐인 아이프리 기기를 쓰고 있으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더라도 왠지 여자아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내의 오락실을 선호한다. 그래도 가능하면 너무 후줄근하지 않은 차림으로, ‘아이돌 프린세스’에 어느 정도 걸맞은 용모로 아이프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나에게 프리파라를 가르쳐 주고 우정 티켓을 교환해 준 프리파라 아저씨들보다 나와 놀아준 적도 없는, 서울 시내의 가챠샵에서 로리타 양복을 차려입고 멋들어지게 프리파라를 하던 프리파라 언니들에 가까운 태도를 어느새 체화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이프리를 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아이프리를 플레이함으로써 우리는 아이프리적 태도와 가치관이 우리 안에 침투하도록 허락하고, 나아가 우리의 현실을 조종하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아이프리는 『프리티 리듬』, 『프리파라』 등을 발매한 신소피아와 타카라토미 아츠의 ‘여아용 아케이드 게임’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TV 애니메이션과 병행되는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로, 주요 대상층으로 아동을 상정했기에 오락실이 아닌 주택가 주변의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이프리 게임기는 두 종류가 있는데, 플레이어의 아바타인 ‘마이 캐릭터’에게 옷을 입혀서 간단한 리듬게임을 플레이하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이프리버스』, 그리고 라이브를 감상하고 TV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카드를 수집할 수 있는 『비밀의 아이프리』가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작중 캐릭터들에게 있어서 아이프리가 어쩌다 ‘비밀의’ 아이프리가 되었는지 간략하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러한 애니메이션 스토리의 디테일이 작품의 제목까지 『비밀의 아이프리』로 설정된 이유를 완전하게 설명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사실 시간순으로는 『비밀의 아이프리』라는 IP 타이틀이 먼저 정해지고, 애니메이션 각본의 상세가 나중에 작성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개연성이 있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러면 아이프리는 도대체 왜 비밀인 것인가? 내 의견으로는, 아이프리가 비밀인 이유는 아이돌 프린세스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아이프리는 분명히 위험한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아저씨라면 더욱 그렇다. 넥타이를 꽉 조이고, 선배와 거래처에는 깍듯하게 대하고, 여유는 최소한으로 두고 솔선수범 성실하게 노동하되 질병을 얻거나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는 아저씨가 ‘아이돌’로도 모자라서 ‘프린세스’를 추구하는 데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여아’라고 해서 아이프리가 완전히 안전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1] . 당신이 어른이라면,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보자―‘공주병’이라는 표현이 가장 효과적인 인신공격으로 작용하는 것은 초등학교 교실이다. 아이프리는 자의식과 미의식의 과잉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이캐릭터’의 신체성과 퍼포먼스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해리 현상이다. 그것은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바비니쿠 원조 아케이드용 미소녀 옷 입히기 카드게임이었던 『멋쟁이 마녀♥ 러브 and 베리』(2004) [2] 는 큰 틀에 있어서 ‘프리파라’나 ‘아이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지고 있는 의상 카드의 바코드를 게임기에 스캔해서 가상의 미소녀를 코디하고, 라이브 무대를 상징하는 리듬게임을 플레이해서 점수를 얻고, 플레이 보상으로 얻는 새로운 의상 카드는 다음 게임 플레이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된다. 차이점은, 『러브베리』에서 플레이어는 스티커북을 열어 옷 입히기 스티커를 붙이듯 ‘러브’, ‘베리’, 혹은 ‘미샤’의 의상을 고르고 그들의 라이브를 대리로 플레이했다면, 이후에 발매된 게임들에서는 플레이어 자신의 아바타가 되는 캐릭터를 스스로 이름 붙이고 기본적인 신체 부위의 단위에서부터 커스텀한다는 점이다. 나아가서 아이프리에서는 ‘마이캐릭터 룸’이라는 웹페이지와 연동하여 간단한 프로필을 작성하거나, 남의 ‘마이캐릭터’ 사진에 ‘좋아요’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로써 기존에는 픽션 속 캐릭터의 코디력과 댄스력을 키우는 일종의 육성 게임에 가까웠던 러브베리의 장르적 지향성으로부터, 아이프리에 이르러서는 플레이어 자신의 가상의 육체를 치장하고 공유하는, 말하자면 VRChat에 가까운 이입형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변형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VRChat 이용자 및 ‘버추얼 유튜버’들을 표현하는 용어 중 ‘바비니쿠’라는 단어가 있다. ‘바비니쿠’ 혹은 ‘버미육’은 ‘버추얼 미소녀 수육(バーチャル美少女受肉)’의 줄임말로, 대개 지정성별 남성인 사람이 버추얼 아바타를 통해 미소녀의 육체로 활동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바비니쿠에 관한 연구는 바비니쿠가 대체로 수육자에게 기존의 신체로는 불가능했던 표현의 자유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경향성을 발견해 왔다. 여기에는 버추얼 미소녀의 육체를 수육하는 이의 ‘현실’ 내지는 비-버추얼 육체는 미소녀가 아니며 대체로 아저씨라는 전제가 있다 [3] . 체크 남방을 입은 육중한 프리파라 아저씨의 육체를 대리하는 늘씬하고 화려하고 어린 마이 캐릭터는 이러한 ‘바비니쿠’의 정의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듯하다. 여기서 잠시 “프리파라 아저씨” 밈에 등장하는 게임인 프리파라를 살펴보자. 마이캐릭터 룸 같은 웹페이지와의 연동도 없었고, 최신 티켓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플레이 데이터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프리파라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은 단연코 ‘우정티켓’이다. 프리파라의 ‘카드’는 ‘티켓’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프리티켓’에는 공연 티켓이나 비행기 티켓처럼 절취선이 있는데, 절취선을 아래로는 플레이어의 세이브 데이터와 캐릭터에게 입힐 수 있는 의상의 데이터가 담겨있고, 절취선 위로는 친구에게 주는 ‘우정 티켓’이다. 플레이어가 우정 티켓을 게임에 읽어 들이면, 우정 티켓의 소유주를 플레이어 자신의 게임 세계에 불러올 수 있는 식이다. 이미지 2: 한국어판 프리티켓. 위쪽의 우정티켓을 뜯지 않은 상태이다. 이미지 3: ‘마이캐릭터 룸’ 웹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모두의 프리포토’ (왼쪽), WEB 프렌드 카드 (오른쪽). 프리파라와 아이프리버스 사이에 인터넷 기술은 한층 발전하여, 아이프리버스는 만나본 적 없는 이 세상 어딘가의 플레이어를 나의 아이프리 광장에 등장시키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남의 라이브 사진에 ‘좋아요’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정 티켓의 역할을 계승하는 ‘프렌드 카드’는 이제는 ‘마이캐릭터 룸’ 웹페이지에서 내려받아 스마트폰으로 공유하고 스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돈선필은 이러한 “기술적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온라인에 접속하는 그 순간에만 미소녀로 변신하는 유연성”이 발휘되어 “모든 선택이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의 조건이 만족된다고 보았다. ‘우정티켓’이 전자 발송이 가능해짐으로써, ‘좋아요’한 아이돌 프린세스와 ‘친구’가 되어 ‘함께’ 라이브를 하고 사진을 찍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상대가 프리파라 아저씨인지 프리파라 언니인지 어떤지 같은 사실은 완벽하게 아이프리버스라는 세계관verse 바깥의 영역으로 가려질 수 있게 되었다. NPC와 플레이어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마이캐릭터 NPC(논-플레이어 캐릭터)와 플레이어 캐릭터, 그리고 플레이어의 경계는 때때로 모호해진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가 이입하여 조종하는 캐릭터를 플레이어 캐릭터, 플레이어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를 NPC로 총칭하는 듯하나, ‘컷씬’으로 대표되듯 플레이어 캐릭터를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경우 [4] 도 있고, 반대로 NPC로 여겨지는 캐릭터를 조종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한 게임도 있다. 캐릭터를 ‘조종한다’는 개념의 정의에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정해진 스토리라인에 따라 UI가 지정한 범위의 움직임만을 실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캐릭터를 조종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비평가 안준형이 서술하듯, “오히려 마치 내가 그의 정해진 운명을 재생할 뿐인 주인공 캐릭터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5] . 이미지 4: 『아이프리』에서 ‘프렌드 카드’를 스캔하면, ‘프렌드’가 정중앙에 나타난다. 프리파라 및 아이프리에서 ‘우정티켓’이나 ‘프렌드카드’로 불러온 ‘친구’는, 실은 QR코드의 데이터에 저장된 신체부위와 의상의 조합을 불러올 뿐, 친구의 당장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환되고 움직임은 게임 코드에 내재된 모션을 재생할 뿐이라는 점에서, 이 행위를 멀티플레이어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용례로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아이프리 게임 속 친구는 NPC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논의와 같이, 플레이어의 주관으로 정해진 마이캐릭터 파츠와 의상을 불러와서 짜여진 움직임을 재생한다는 점에서는 ‘마이캐릭터’ 역시 ‘친구’와 다르지 않다. 안준형은 현실 세계를 불완전하게 재현하는 가상 세계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NPC의 다양성”의 한계를 든다. 아이프리버스에서 만나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아바타는 NPC와 동일한 모션으로 움직이더라도, 누군가의 주관과 취향이 반영된 의상과 누군가에게 고유한 이름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으므로 “복제인간”의 혐의를 벗어나는 듯하다 [6] . 마이캐릭터는 대개 짜여진 대로 움직이는 만큼, ‘버그’를 위시한 예기치 못한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아이프리버스에서 플레이어가 리듬게임을 잘 치거나 엉망으로 치면 스코어에 다소간의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아이템의 획득에 차질이 생길 수는 있으나, 예상치 못하게 캐릭터의 움직임이 흐트러지거나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매끄럽게 최적화된 그래픽의 재생에는 실패의 가능성도, 망설임도 없다. 반면, 기존의 바비니쿠 관련 논의의 중심이 되는 버추얼 유튜버나 VRChat 아바타는 마이캐릭터와 달리 컴퓨터 코드로 짜여진 각본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한 버추얼 유튜버들이 드러내는 사실은, 가상에서 현실을 감각하는 순간은 가상이 현실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가상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발생하는 버벅거림과 균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버추얼 아바타에 반영하는 모션 트래커가 실패하는 순간에 우리는 버추얼 아바타 너머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떠올리고 [7] , 게임 맵의 제한된 범위는 순환하되 어느 순간 칼로 자른 듯 끝나버리지는 않는 우리의 물리적인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8] . 버추얼 유튜버를 연구한 돈선필이 관찰하듯 “의도하지 않은 열화된 상태는 우리에게 실재하는 대상 특유의 정서를 전달”한다면, 열화의 여지를 인게임 UI로 단단하게 제한한 아이프리에는 비밀이 새어 나올 균열이 없는 듯이 보인다. 프리티켓의 절취선 사이로 새어 나가는 혁명적인 비밀에 관하여 영이의 저서 『게임 코러스』는 “코러스에서 발생”한 연극을 “UI의 연속체”인 게임에 비교한다. 고대의 연극에서는 배우가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나 대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UI처럼 합창단이 비일상적이고 도취적 차원의 세계가 존재함을 나타냈다고 한다. 『아이프리』의 게임 세계도 연극 세계와 비슷하다. 동전을 넣고 QR코드를 스캔하여 플레이어 캐릭터를 불러오고 의상을 입히는 일련의 UI의 연속이 플레이어를 비밀의 세계로 불러온다. 마침 아이돌 게임인 아이프리의 세계는, 말 그대로 “무대 위의 디오니소스적 세계”(61)인 셈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코러스는 ‘무대 위의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결국 이 무대 위의 세계가 곧 자신들의 현실로서 실재한다고”(23) 깨닫고 실천하기 위한 장치였다. 영이는 게임의 UI가 연극의 코러스와 같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UI가 플레이어를 “배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게임 코러스>가 대표적 예시로 드는 <언더테일>에서는, “픽셀 그래픽 게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임이 갑자기 실사 그래픽을 사용”하거나 “게임이 화면 바깥으로 기어나와 게임 자신의 프로그램 제목까지 바꾸”는 연출이 플레이어를 배반하고 “플레이어를 경험적 현실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61). 게이머 용어로는 ‘자유도’로 일컬어지는, UI가 허락하는 게임 속 움직임의 범위에 있어서 프리파라와 아이프리는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 앞서 서술했듯, 의외성이나 버그 등 “UI의 배반”으로 일컬어질 만한 현상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나 프리파라의 가상 세계에는 균열이 있었다. 그 균열은 바늘자국처럼 일렬로 숭숭 뚫린 구멍의 모양으로, 인쇄업계에서는 그 균열을 가리켜 ‘미싱’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 균열로부터 프리티켓을 “똑하고 반으로 나눠서 친구들을 컴플릿하자バキンと半分こで 友達コンプリートしよ [9] ”는 프로파간다야말로 프리파라의 세계의 근본이었다. 우정티켓은 실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물리적 ‘현실’의 세계에서 교환될 필요가 있었다. 프리파라 아저씨와 만나거나, 적어도 우편을 교환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자크 데리다라는 철학자나 일반우편으로 티켓을 교환한 경험이 있는 여러 프리파라 유저들의 기록에 따르면 우편물이 반드시 발신인으로부터 수신인에게 똑바로 도착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발신이라는 절차가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벌써 비밀에는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비록 프리파라 아저씨들의 ‘비밀’에 균열을 내는 기능을 대표적으로 도맡았던 우정티켓은 이제는 프리파라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이프리는 여전히 카드 용지가 부족해지면 직원을 불러와야 하는 카드 게임이고, 여전히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게임기와 조그만한 의자와 동전 투입구와 카드 배출구가 있는 아케이드 게임이다. 질량 없이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이프리에서 프렌드 카드의 데이터를 불러 오거나, 마이캐릭터 룸에서 누군가의 사진에 좋아요를 찍거나, 아이프리 광장에서 다른 사람의 마이 캐릭터와 마주칠 때 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 각각 가상과 현실이라고 생각되었던 게임과 삶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아이프리 아저씨는 자신이 모션 파일을 재생하는 소녀를 바라보는 감상자인 동시에, 그녀를 “추동하는 의지”[ 10] 이자 그녀 “안의 사람 [11] ”이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에게는 ‘아이돌’을, ‘프린세스’를 표현하고자 하는 능동적이고 반동적인 욕망이 있다. 2020년경 업로드된 프리파라 게임 OST 「Realize!」를 “완전 카피”한 남성을 찍은 유튜브 쇼츠의 조회수가 요사이 폭발적으로 올라, 2025년에는 프리파라의 음악과 댄스를 맡은 원본 아티스트 i☆Ris가 반대로 “완전 카피남”을 모방하는 영상을 틱톡에 게시했다. 여자 아이돌과 완전 카피 프리파라 아저씨가 “힘을 합쳐 두근거림을 발견力合わせて トキメキ探してく [13] ”하는 프리파라의 전복적 가치를 “리얼라이즈”하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손색없는 장면이다. 이미지 5: 통칭 “완전카피남 完コピニキ”로 알려진 남성이 「Realize!」를 완벽하게 따라하고 있다 [14] . (왼쪽) / 「Realize!」를 포함한 프리파라의 OST 전반을 맡은 아이돌 유닛 I☆Ris의 공식 틱톡 채널에 게시된 영상 [15] (오른쪽) 그리고 시스-헤테로-비장애인-신경전형인-성인 남성들의 가치로 가득한 사회를, 아이돌 프린세스들이 소녀들의 파라다이스에서 체득한 이데올로기로 모두 전복하고 만다면…… 프리파라의 제작사가 스스로 드러낸 욕망의 편린인 아래 사진이 만우절 농담에 그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16] [1] TV 애니메이션 〈비밀의 아이프리〉의 초반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들이 각각 아이프리를 비밀로 향유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주인공 히마리와 미즈키는 개인적인 층위에서는 서로에게 알리지 않고 아이프리에 ‘데뷔’한 사실을 숨기고 있고, 사회적인 층위에서는 마땅히 학생의 본분이어야 할 공부를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작중 학교 사회에 내려진 아이프리 금지령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2] 일본에서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국내에서는 세가코리아를 통해 2006년부터 서비스되었던 『멋쟁이 마녀♥러브 and 베리 オシャレ魔女♥ラブandベリー』는 세가가 개발한 카드 게임 형식의 아케이드 게임이다. 2025년 지금까지도 일본 남자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시리즈인 『벌레킹 ムシキング』의 여아용 버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 ‘러브베리’와 ‘벌레킹’은 동일한 규격의 기기로 가동되었다. https://ja.wikipedia.org/wiki/%E3%82%AA%E3%82%B7%E3%83%A3%E3%83%AC%E9%AD%94%E5%A5%B3%E2%99%A5%E3%83%A9%E3%83%96and%E3%83%99%E3%83%AA%E3%83%BC https://dpg.danawa.com/news/view?boardSeq=60&listSeq=877378&past=Y [3] “브레디키나와 지아드...에 따르면, 바비니쿠 문화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저항한다. 버튜버들은 연약함, 의존적임, 매력적임과 같이 자기 자신에 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보편적 남성성에 벗어나는 특성들을 수행하기 위해 ‘나’를 표현하고 탐구하는 수단으로서 미소녀 아바타를 선택한다.” 우엉. 2022년 2월 22일. 미소녀를 뒤집어 쓴 남성들.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https://fwdfeminist.com/2023/02/22/vol-7-7/ “바비니쿠들이 미소녀를 연기하며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이분법적 성별의 역할극에 빠져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대안점이 바비니쿠라는 형태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돈선필. 2025년 1월 16일. 레자: 가면보다 무겁고 허물보다 두터운 것.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http://semacoral.org/features/sunpildon-reja-lighter-than-the-mask-thicker-than-the-shell [4] 영이. (2025). 게임 코러스. 워크룸프레스. 53 [5] 안준형. 2021년 5월 1일. 안준형_게임 세계의 유물론적 유령들과 폐쇄성: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안 무너진대요. 크리틱-칼. http://www.critic-al.org/?p=6525 [6] 위의 글 [7] 돈선필. 앞의 글 [8] 안준형. 앞의 글 [9] 森月キャス, Make it!, 2014 [10] 게임 속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추동하는 의지가 된다.” 영이, 앞의 책. 53 [11] “버츄얼 유튜버 팬덤 사이에서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을 ‘안에 있는 사람(中の人)’이라고 따로 부르는 명칭이 있는 것을 보아도 확실한 현실 인식을 확인할 수 있지요.” 돈선필, 위의 글. [13] Hifumi, inc., Realize!, 2015 [14] @maelbeek (2020). i☆Ris realizeを完コピするオタクおじさんが凄すぎるwww / A man who copies woman's movement perfectly [영상]. 유튜브 쇼츠. https://www.youtube.com/shorts/pDOrdfAcfgg [15] i☆Ris (2025). あの動画、知ってますか…? #プリパラ #i_Ris #アイドル #コピーダンス #UNIDOL #ユニドル2425冬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영상]. 틱톡. https://www.tiktok.com/@iris_official_1107/video/7472738322863934727 [16] タカラトミーアーツ公式. (@tartsPR). “4月4日からの『アイドルタイムプリパラ』放送開始に合わせて、タカラトミーアーツでは名刺交換の代わりに「トモチケ交換」を行なうことが義務付けられました。これから弊社社員と出会うお客様、ぜひパキってください。 #pripara #エイプリルフール #アーツフール .” 2017년 4월 1일. 트위터. https://x.com/tartsPR/status/84797681760442777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윤수빈 2007년부터 시작된 포켓몬스터 시리즈와의 인연으로 게이머가 되었으나, 2023년에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포켓몬 게임 시리즈의 출력 텍스트인 "햇살이 강해졌다!"가 삶의 모토. 좋아하는 게임이 생기면 동인지를 만드는 삶을 살아왔지만, 2024년부터는 게임 비평이라는 새로운 감상의 언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종종 '룬츠'라는 닉네임으로 2차 창작을 쓰고 그린다.
- 농사 게임은 왜 힐링이 되었는가: 픽셀 농사와 진짜 밭 사이에서
평화로운 게임과 다르게, 현실은 훨씬 가혹했다. 노루망을 치지 않아서 상추 밭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현실에서는 야생동물, 폭염, 장마, 해충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침입한다. 각종 병충해도 단 몇 주 사이에 농사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너무 덥거나 습하면 작물이 빠르게 상하고, 한 번의 폭우로 뿌리가 썩어버리기도 한다. 농부는 이러한 피해 요소들을 ‘기본값’으로 가정하고, 당연한듯이 울타리와 농약, 비료, 배수로 등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동원하여 농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 Back 농사 게임은 왜 힐링이 되었는가: 픽셀 농사와 진짜 밭 사이에서 27 GG Vol. 25. 12. 10. <스타듀 밸리>나 <목장 이야기>와 같은 농장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전원적 배경의 농부가 되어볼 수 있다. 이들 게임은 도시를 떠나 가족의 농장을 물려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동일한 서사를 공유한다.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가 최초로 마주하는 것은 잡초와 돌, 고목 등으로 뒤덮여 오랫동안 방치된 농지다. 이 허름한 농장을 하나씩 정리하고,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축사를 가꾸며 매일 꾸준히 노동한 결과가 주는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게임의 핵심 경험이다. 그 과정에 발생하는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는 공동체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이다. 농사 게임은 흔히 ‘힐링 게임’으로 분류된다. 경쟁이나 전투 중심의 게임이 순간의 긴장과 급박함을 요구하는 데 반해, 농장을 경영하는 일은 평화롭고 소박한, 말 그대로 ‘목가적 삶’의 감각을 제공한다. 밭에 심어진 옥수수도, 풀을 먹는 젖소도 플레이어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뿐이고 플레이어는 성장을 지켜보는 존재로 남는다. 필자 역시 직접 농사를 지어보기 전까지는 농사 게임을 ‘힐링’ 장르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 산골 마을에 거주하며 농촌 사회를 경험하고 손수 농작물을 생산해보니, 게임 속 농사와 현실의 농사 사이에는 생각보다 더 큰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게임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제 농사에서 어떤 요소들이 게임화되기 위해 제거, 단순화, 재배치되었는지를 관찰하게 되었고, 게임에서 ‘힐링’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농사를 게임으로 배워 시작하다 다음은 실제로 겪은 농사 이야기다. 도시 생활을 하다 산골 마을로 이주하고, 집 근처에 작은 텃밭을 얻게 되었다. 흙을 조금 파보니 지렁이가 여럿 꿈틀거릴 만큼 토양 상태는 비옥했다. 그대로 두기에는 아까운 땅이라는 생각이 들어 농사 짓기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게임 속에서는 수십 번의 계절을 보내며 방대한 경작지를 일군 베테랑 농부였지만, 현실에서는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조차 없는 초보자였다. <스타듀 밸리>의 농부는 가장 먼저 땅을 일군다. 필자 역시 튜토리얼을 따라 하듯 밭에 쪼그려 앉아 돌을 골라내고 호미로 잡초를 제거한 뒤 삽으로 흙을 부드럽게 다져 올렸다. 뾰족한 호미로 땅을 내칠 때 가끔씩 땅 속에 살고 있던 지렁이가 걸려서 튀어올랐다. 땅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초를 다졌으니 이제 무엇인가를 심을 차례였다. 원래대로라면 씨앗을 심어야 했지만, 부스트 아이템 ‘모종’을 선택했다. 씨앗 단계를 지난 어린이 상태의 모종을 심으면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에서 심는 만큼 실패 확률도 적고 성장도 빨랐다. 모종 가게 주인에게 “초보자는 잎채소부터 시작하라”는 조언을 들었고, 오이나 딸기 같은 열매 작물은 아직 ‘해금되지 않은 고난이도 작물’이라 생각하고 청상추 모종 15개를 사 들고 돌아왔다. 봄 기운이 완연한 4월은 상추를 심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다. 스타듀 밸리의 농부는 파스닙 15개를 심으며 첫 농사를 시작한다 픽셀처럼 심기 vs 두둑과 고랑 만들기 밭으로 돌아온 뒤, 15개의 모종을 어떤 배열로 심을지 고민했다. <스타듀 밸리>에서 플레이어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는 과제는 봄의 작물 ‘파스닙’(무의 일종) 씨앗 15개를 파종하는 일이다. 플레이어는 도구를 장착해 땅의 ‘상태’를 한 칸씩 경작지로 변화시키고, 땅 한 칸당 씨앗 한 개를 심어 파종을 총 15칸에 걸쳐서 진행한다. 이때 일반적으로 플레이어들은 5x3 또는 3x5의 대칭적 구조로 밭을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짝이 맞는 이 패턴을 안정적인 구조로 받아들인다. <스타듀 밸리>를 오래 플레이한 탓에, 씨앗 15개를 ‘반듯하게’ 심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실제 밭에서도 상추 모종을 똑같은 구조로 심었다. 상추 역시 3x5의 비슷한 구조로 심어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텃밭은 게임의 논리를 거부했다. 상추들은 서로의 잎이 뻗어나갈 공간이 부족해졌고, 잎과 잎이 맞부딪히며 통풍이 안되어 병충해가 발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밀식된 상추는 성장하면서 서로의 잎을 밀어내는 생존 경쟁을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가운데 줄에 위치한 상추는 공간이 없어서 직접 손이 닿지 않아 관리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작물 위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농부가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 있어야 했다. 결국 ‘한 칸에 한 개의 작물 배치’ 논리는 게임식 접근법이었다. 현실에서는 게임에서의 칸 개념보다는 모종을 심는 ‘두둑’과 여유를 두는 ‘고랑’의 개념이 적절했다. 현실의 농사에서 한 포기의 상추는 한 칸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통풍, 배수, 관리 접근성을 포함해 더 큰 생태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게임이 제시한 그리드 기반의 단순한 규칙은 실제 농사에서는 훨씬 복잡한 생태적 배치의 문제로 변환되었다. 생장할 여유 간격을 두고 심어진 상추 밭. 출처: 드래곤 별밭 아뜨리에 블로그 현실 농사는 농작물 피해를 디폴트 값으로 둔다 그래도 상추들은 비좁은 환경에서도 제법 잘 자라주었다. 조심스레 잎을 따내어 수확이 가능했다. 수확한 상추로 쌈과 샐러드를 풍성하게 차려먹으니 요리의 즐거움은 구현되지 않았던 게임 속 농부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상추는 많이 수확해도 금방 다시 자라서 화수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확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며칠 만에 물을 주러 나가보니, 밭이 텅 비어있었다. 상추가 있던 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상추가 있었는데, 없었다. 다른 밭에 잘못 왔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야생 동물인 노루가 습격한 결과였다. 생각해보면 노루가 참 좋아할 만했다. 나의 텃밭은 억세고 질긴 들풀보다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상추가 한 가득 자라있는 완벽한 식탁이었다. 대부분의 농사 게임에서 울타리란, 미적 요소이거나 부가적인 설치물에 가깝다. <스타듀 밸리>에서는 농작물의 피해를 미미한 이벤트로 발생시킨다. 허수아비 설치물이 커버하는 영역에 놓이지 못한 땅은 야간에 등장한 까마귀로 인해 1~2개의 작물이 사라진다. <파밍 시뮬레이터>에는 병충해나 야생동물의 피해를 아예 구현하지 않는다. 잡초가 수확량을 조금 줄이는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반면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벼농사에 발생하는 해충과 병해, 잡초의 종류를 현실처럼 다양하게 구현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에 실패한다고 하여 품질과 수확량이 감소할 뿐, 벼가 다 죽어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다. 평화로운 게임과 다르게, 현실은 훨씬 가혹했다. 노루망을 치지 않아서 상추 밭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현실에서는 야생동물, 폭염, 장마, 해충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침입한다. 각종 병충해도 단 몇 주 사이에 농사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너무 덥거나 습하면 작물이 빠르게 상하고, 한 번의 폭우로 뿌리가 썩어버리기도 한다. 농부는 이러한 피해 요소들을 ‘기본값’으로 가정하고, 당연한듯이 울타리와 농약, 비료, 배수로 등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동원하여 농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노동하는 신체성을 지워야 힐링은 완성된다 상추밭이 야생동물의 습격으로 초토화된 후, 여름 작물인 아삭이 고추 몇 그루를 심으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초여름 기운을 받은 고추는 순조롭게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며 주렁주렁 열매 맺을 준비를 마친 듯했다. 그러나 어느 날, 초록색으로 보여야 할 고추 줄기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십 마리의 노린재가 깨알같이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노린재는 당장 열매를 떨어뜨리지는 않지만, 식물의 영양분을 가로채 성장을 저해하고 열매를 부실하게 만든다. 농약을 칠 수 있었지만 많은 친환경 농부들이 권장하지 않았다. 손으로 잡아서 없애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했다. 페트병을 반으로 자른 통에 물을 채우고, 고추 줄기 아래에 대고, 통에 떨어지게끔 손으로 노린재 떼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이 작업을 매일 반복해야만 했다. 노린재와의 전쟁이 끝나면 덥고 습한 날씨를 틈타 민달팽이가 올라타서 고추 열매를 갉아먹었다. 이 과정에서 게임에는 겪지 않은 농사의 육체적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한여름 야외에 몇 분만 서 있어도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농부에게 모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여름의 밭이라는 야외 공간은 야생 모기가 무차별적으로 달려들기 좋고, 식물을 스치기라도 하면 진드기가 몸에 달라붙어 자기도 모르게 피를 빨릴 수 있다. 게임 속 농부는 밀짚모자에 멜빵바지라는 낭만적인 룩을 입고, 현실의 농부는 긴 챙 모자에 마스크부터 팔토시, 스카프까지 생존을 위한 전투복을 입는다. <스타듀 밸리>에서 플레이어의 신체는 화면 구석의 ‘스태미나 게이지’로 단순하게 표상된다. 곡괭이질을 하거나 물을 주면 게이지가 줄어들고, 기력이 바닥나면 탈진한다. 그래도 침대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체력은 언제 그랬냐는 듯 100% 회복된다. 게임 속 노동은 조작 장치를 거쳐 대리 수행되기에, 플레이어는 온 몸에 흘러내리는 땀,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 벌레에 물리는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게임이 선사하는 힐링은 역설적으로 노동하는 주체의 몸을 소거했기에 가능하다. 현실의 농사는 클릭 몇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잠을 잔다고 해서 누적된 피로가 말끔히 씻기지도 않는다. 이러한 육체적 한계는 필연적으로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 <파밍 시뮬레이터>가 거대한 트랙터와 콤바인을 조작하는 재미를 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의 농업은 인간의 몸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의 부하를 기계가 대신해주는 것에 익숙하다. 실제 한국의 농촌 현실을 들여다보면, 고령화된 농촌에서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것은 억 대를 호가하는 농기계들이고, 농기계를 운용하거나 기계가 닿지 않는 궂은 일 처리는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의 손에 맡겨진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 먹는 매끈한 농산물은 힐링 게임이 보여주지 않는 기계 소음과 이주 노동자들의 땀 속에서 생산된다. 최근 각광받는 스마트팜 역시 온도와 습도, 영양 공급을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스템에 맡김으로써 예측 불가능하고 고통스러운 자연 속의 인간 노동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결국 농사 게임이 주는 평화로움은 현실 농사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통스러운 육체성과 노동의 구조를 차단한 채 수확의 성취감만을 정제하여 제공하는 셈이다. 게임 농부는 치유받지만, 현실 농부는 치열하게 싸운다 우리는 이른바 ‘힐링’이라는 감각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농사짓는 행위가 게임에서 힐링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전원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삼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농업이 갖는 복잡성을 제거하고 변형함으로써 불확실한 노동을 ‘확실한 노동’으로 재구성하는 점에 있다. 현실의 농업은 기후, 병해충, 노동력, 시장 변수 등 수많은 요소가 개입하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활동이다. 수확의 결실을 맺기까지 요구하는 힘의 투입은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럽고, 장기간을 요구하며 때로는 실패를 수반한다. 반면 게임은 매체적 성격상 불쾌감을 최소화하고 쾌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만약 현실의 불확실성과 고통을 그대로 재현한다면 게임은 ‘재미’라는 핵심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다루는 게임들은 반드시 선택, 제거, 증폭의 단순화 과정을 거쳐 현실의 농업을 플레이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농사 게임이 현실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은폐 여부가 아니라, 농사가 어떤 구조적 조정을 거쳐 ‘힐링’으로 재배치되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이 간극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게임 속 농사가 만들어내는 힐링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농업을 둘러싼 조건을 재사유하게 만드는 하나의 분석적 지점임을 확인하게 된다. 현대인들이 농사 게임에서 힐링을 느끼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일상이 게임 속 농사보다 훨씬 더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성과를 내도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현대의 노동 환경 속에서, 게임 속 농사는 노력한 만큼 정확히 돌아오는 공정한 세계를 제공한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반드시 작물이 자라고, 수확하면 반드시 돈이 들어온다. 이 깨끗한 루틴의 반복에서 오는 예측 가능성과 통제 가능성이야말로 게임이 제공하는 진짜 힐링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것 중에서 '농사'라는 형식을 빌려 이러한 힐링을 추구하는 것일까? 농업이라는 인류 최초의 생산 활동은 본래 자연과의 협상이자 불확실성과의 공존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이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농업을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재탄생시킨다. 어쩌면 자연을 완전히 계량화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현대 사회가 자연에 대해 갖는 판타지이자 근대적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동시에 농사 게임은 우리가 상실한 것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손으로 땅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 도시화된 삶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지 못한다. 농사 게임은 이 단절된 관계를 상상적으로나마 복원한다. 결국 농사 게임이 제공하는 힐링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현실 농사의 고통을 삭제한 안전한 판타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노동과 결실의 직접적 연결'이라는 근원적 만족감을 제공한다. 게임 속 농부가 되는 경험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 만족감을 게임 속에서 찾아 헤매는가? 우리의 노동은 왜 게임 속 농사만큼 명확한 보상과 연결되지 않는가? 그리고 진정한 치유는 게임이 제거한 바로 그 불확실성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은 농사 게임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을 넘어, 우리 시대의 노동과 자연, 그리고 치유에 대한 욕망을 성찰하게 만든다. 게임 속 농사와 현실의 농사 사이의 간극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보더랜드4 - 변방의 수렵채집
탐험가들의 후예로서 우리 인간은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낭만을 갖고 있다. 황무지, 너른 들판, 혹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풍부한 사냥감을 품은 목초지?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담은 숲? 농사 짓기 딱 좋은 비옥한 강변? 식량원이 바닥나서, 종교적 열망에 들떠서, 단순한 호기심에서 등등 여러 이유로 호모 사피엔스는 터전을 걷고 일어나 지도의 바깥으로 행진했다. < Back 보더랜드4 - 변방의 수렵채집 27 GG Vol. 25. 12. 10. 탐험가들의 후예로서 우리 인간은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낭만을 갖고 있다. 황무지, 너른 들판, 혹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풍부한 사냥감을 품은 목초지?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담은 숲? 농사 짓기 딱 좋은 비옥한 강변? 식량원이 바닥나서, 종교적 열망에 들떠서, 단순한 호기심에서 등등 여러 이유로 호모 사피엔스는 터전을 걷고 일어나 지도의 바깥으로 행진했다. 지도는 내 삶의 터전이 있는 지역을 가운데에 놓고 그리게 된다. 지도의 끄트머리는 세계의 끄트머리고, 그 바깥은 다른 세계다. 그 경계를 넘어가면 다른 천하가 펼쳐진다. 천하통일은 그 경계 안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 경계 지역은 변방이다. 변방의 개념은 중심 지역이 성립해야 생겨난다. 생존과 공동체 존립에 중요한 자원, 물과 식량과 재료가 많은 곳에 인구가 몰려 중심이 되고, 변방은 그런 중요도가 떨어지는 먼 곳이기에 인구 밀도도 낮다. 권력도 중앙 권력과 결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두 세계가 맞닿는 지역이기에 보통 방패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변방의 인상은 혹독한 환경 혹은 강인한 거주민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변경백 작위, 중국의 만리장성은 그런 방어의 맥락이 낳은 결과물이다. 경계의 땅. 영어로 직역하면 보더랜드 정도가 될 것이고, 이는 루트 슈터라는 하위 장르를 정립시킨 슈팅 게임의 명작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하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무대인 행성들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의 지도에서 변방에 속한다. 자원이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고, 환경은 딱 거주만 가능할 정도로 혹독하다. 멸망한 옛 문명이 남김 유적인 ‘볼트’가 있긴 하지만 이 행성에만 있는 유적도 아니니 중요한 행성이 아니다. 그래서 권력화한 기업들이 채굴과 전쟁을 위해 온 적은 있다. 그들이 데려온 인력은 노예 노동을 맡은 죄수 혹은 용병들이었고, 이들은 기업이 떠난 후에도 남았다. 자원과 유적을 놓고 만인이 만인을 적대하는 세계가 되었다. 공동체가 만들어지긴 했으나 마을 혹은 용병단 정도의 규모다. 방어의 맥락은 없지만 폭력으로 다져진 사람들이 사는 ‘변방’이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오프닝은 이런 변방 공간의 덧없는 폭력성을 보여준다. 처음 카메라가 잡는 대상은 10초 안에 허무하게 죽는다. 그 인물을 죽인 인물들도 몇 초 후에 죽는다. 생명의 존엄 같은 개념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세계라는 것을 빠르게 보여준다. 이 정도면 변방을 넘어 세계 바깥이다. 보더랜드를 비롯한 황무지 서사의 특징은 서사의 무대가 되는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 구조, 더 정확히는 제도화된 권력 구조가 없거나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만드는 사회적 종족이고, 공동체의 작동을 위해 권력 구조를 만들고, 권력의 작동을 통해 생존 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면 인구가 늘어나 공동체가 확장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문명이 등장한다. 반대로 말하면 권력 기구 따위 없는 세계는 문명의 세계가 아니다. 야생의 법칙 중 하나인 폭력의 법칙이 제1규칙의 자리에 있게 된다. 자원도 많지 않은데 이를 제도적으로 가공 생산품으로 바꿔낼 문명도 존재가 희박하다 보니, 대부분의 자원과 도구 – 무기는 서로를 죽이고 뺏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 토마스 홉스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투쟁하는 자연 상태를 상정하고 여기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권 개념을 끌어냈다. 완벽한 자연 상태의 자유에서는 오히려 개인의 생존이 위험하기에 인간은 자유를 일부 포기하면서 공동체 권력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다는 논리였다. 물론 잘 죽이고 잘 뺏으려면 협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을 단위나 도적단 단위 정도의 공동체는 만들어지지만 그 이상의 권력은 쉽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등장하면 행성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유적, 볼트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면 볼트를 열고 싶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충돌한다. 그렇게 갈등이 끊이지 않고, 플레이어는 그 갈등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상대를 총으로 쏴 그의 자원과 무기를 탈취한다. 쏘고 줍는, 루트 슈터 장르가 보더랜드 시리즈에서 정립되었다. * 상자를 열고 적을 죽여서 전리품을 얻는 것은 전투를 컨텐츠로 삼는 거의 모든 장르에 있는 자원 수급 방법이지만, 보더랜드 시리즈와 같은 루트 슈터 장르에서는 의미가 약간 달라진다. 루트 슈터 장르를 지탱하는 두 행동, 쏘는 행위 슈팅과 줍는 행위 루팅은 이 장르에서 가치 있는 재화와 장비를 획득하는 주된 방법이다. 구매와 보상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그리고 가치가 가장 높은 방법은 적에게서의 루팅이다. 보통의 MMORPG에서도 루팅은 주요한 획득 방법이지만, 제작이나 퀘스트 보상이라는 다른 주요 획득처가 존재한다. 같은 전리품 맥락의 획득이지만 루트 슈터에서는 다른 획득처가 중요하지 않거나 없다. 그리하여 루트 슈터에서의 루팅은 약탈 혹은 채집에 가깝고, 시뮬레이션으로의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수렵 채집의 시뮬레이션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마침 변방, 세계 바깥이라는 작중 세계의 황량함은 수렵 채집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부족 규모의 공동체, 황무지에서 벌이는 적대적인 개체들과의 전투, 약탈, 문명 이전의 서사다. 보더랜드 시리즈를 수렵 채집 시대에 SF 스킨을 씌워 문명 바깥을 구현한 작품으로 본다면, 최근작인 4편의 서사적 맥락이 독특해진다. 이전작들의 무대인 판도라 행성은 변방 내지는 세계 바깥이라고 요약하기 딱 좋은 시공간이었다. 4편의 카이로스 행성은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여기에는 타임키퍼의 교단이라는 지배 권력이 존재한다. 타임키퍼의 지배 수단은 볼트(Bolt)라는 장치다. 이를 사람의 신체에 심어 모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의 우주적 사명이라는 것을 교리화하여 세뇌하다시피 한 신도들을 조직화해 교단을 꾸렸다. 이 세력이 카이로스를 지배하면서 외부에서의 관찰에 잡히지 않도록 행성 전체를 가려놓기도 했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지도에 없는 행성이었고, 운 나쁘게 불시착한 용병이나 해적들이 토착민과 함께 경쟁하며 살고 있다. 즉 카이로스는 중심 성계에서 변방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강력한 독재 권력이 지도에서 지워놨기에 변방이 된 것이다. 게임 플레이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플레이어는 볼트(Vault)를 열기 위한 경쟁을 하는 볼트 헌터고, 카이로스의 볼트를 독점하려는 타임키퍼와 그의 교단을 상대로 전투와 약탈을 한다. 이전작에서의 회사, 용병단 등의 적과 형태는 다르지 않다. 반면 설정된 반동 세력의 규모와 성격은 정반대다. 카이로스에는 교조적 독재 문명이라는 제도 권력이 존재한다. 전제를 다시 정리해보자. 변방은 각 세계의 끝이기에 문명이 없거나 옅다. 방어 전담 지역이기 때문에 혹은 중요하지 않아 무관심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방/바깥은 만인 투쟁 상태의 무법 지대로 그려진 것이며, 그래서 보더랜드 시리즈의 수렵 채집 시뮬레이션을 펼쳐놓기 좋은 무대다. 반면 카이로스는 명백히 문명화된 설정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수렵 채집 시뮬레이션, 문명 바깥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지역 중에선 아웃랜드, 크아레쉬처럼 이미 문명이 멸망한 지역이 등장한다. 이런 지역은 열리기 이전, 정보가 거의 없을 때는 황무지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진입하여 스토리를 접하게 되면 각 세부 지역에 존재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체를 만나고, 그들에게서 퀘스트를 받거나 그들과 적대해 싸우면서 아직 문명의 잔재가 남아있음을 접하게 된다. 이는 카이로스에서의 서사와 유사하다. 이건 수렵 채집이 아니라 전쟁의 서사다. 그렇다면 카이로스를 무대로 한 보더랜드4의 이면에 독재는 문명이 아니라는 함의가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전쟁과 대립이 다시 시대의 테마로 떠오르고 있는 현재의 지구 정세와 연결해 사유할 지점이 생긴다. 변방의 황무지 행성이라는 무대를 홉스의 자연 상태에 가깝게 포장하는 데에는 보더랜드의 설정에 존재하는 기업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총기와 장비는 제조사마다 독특한 특수 효과를 지닌다. 이 제조사들은 여러 행성을 실질 지배하는 지배 권력이기도 한데, 작중의 은하계는 이미 정치 권력이 기업 권력에 무력으로 패배한 상태로 기업 간의 경쟁이 곧 전쟁을 포함하는 세계다. * 국가가 사라지고 기업이 정치 권력을 대체하는 세계는 SF에서 보통 디스토피아로 묘사된다. 보더랜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기업들은 적으로 등장하는 서넛을 제외하고는 묵직한 배경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이들이 벌이는 경쟁 내지는 기업 전쟁은 플레이어의 스토리와는 거리가 있다. 그 서사는 변방이 아닌 저기 중심부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기업 중에서 플레이어의 스토리 수행에 의해 사세가 기우는 경우는 있어도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런 배경 설정에서 다른 해석을 뽑아낼 수 있다. 홉스가 상상했던 자연 상태에 가까운 상태는 문명 바깥의 상태다. 독재 치하에서 폭력이 제1수단인 카이로스 또한 문명 외의 상태라면, 기업 전쟁이 횡행하는 은하계 또한 문명 외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약간의 비약은 섞여있지만 말이다. 지도 밖으로의 행진은 개척의 서사다. 우리가 겪은 마지막 개척 경험은 미국 서부 개척을 마지막으로 현실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보더랜드의 수렵 채집 시뮬레이션은 개척이 아닌 생존 서사에 가깝다. 문명은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는 바, 생존 서사는 곧 문명의 농도가 옅거나 없는 상태의 서사다. 더군다나 수렵 채집 행위를 매개로 하니 이는 전쟁의 생존 서사와 또 다른, 문명 유무의 맥락에서 읽히는 서사가 된다. 이런 사유의 끝에서, 폭력이 만성화되고 생존이 우선인 상태는 문명 외의 상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어쩌면 기업 전쟁이 만연한 보더랜드의 은하계처럼 겉보기에는 문명 사회로 보이는 상태도 문명이 옅어진 것일 수 있다.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자 인생이 마지막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수렵 채집의 세계에서 문명 국가의 세계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 Back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27 GG Vol. 25. 12. 10. 라이프 시뮬레이션과 '승리 조건의 부재'의 나비효과 <심즈>의 아버지이자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개척자 윌 라이트는 2001년 Game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긴다. 윌 라이트는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활성화하는 것이 자신이 게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라고 밝히며,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은 단순히 게임 디자인의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라이프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1. 윌 라이트(2010) (출처: 위키피디아)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와 시뮬레이션의 의사소통은 플레이어가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작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가 플레이 디자인을 완성하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에게 조작할 수 있는 플레이 환경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시뮬레이션에 대한 플레이어의 이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플레이 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특정한 방향으로 플레이어의 이해를 유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자체가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적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의 목표설정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시뮬레이션 게임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를 모델링하여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환경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플레이어는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미시계의 규칙들을 파악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가며 시뮬레이션을 탐구해 나간다. 특히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게임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를 우연히 확인해가며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서사를 획득해 간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게임들을 본질적으로 소프트웨어 장난감에 가깝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게임이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특정한 가능성보다는 각 플레이어가 가능한 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큰 해법 공간을 제공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만약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에 훨씬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난감에는 정해진 목표도 없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는 주체 스스로가 놀이의 규칙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윌 라이트의 이런 인터렉티브 디자인 철학은 ‘심시리즈’를 비롯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목적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종속된 플레이를 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우연히 시뮬레이션을 만지다보니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윌 라이트가 지적하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의 장난감적인 특성은, 게임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상기하게 만든다. 게임은 오랫동안 로저 이버트를 포함한 많은 평론가와 연구자에게 존재론적으로 예술의 특성을 가진 매체로는 인정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들이 제시하는 평가의 근거는 대게 칸트가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 그리고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개념에 근거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목적성’의 표상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특정한 목적의 귀속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불렀다. 칸트에게 미적 경험은 인식적 판단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개념적 파악이나 실용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관조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칸트는 자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어떤 질서인지는 모른다는 것이고, 종속된 것들은 딱히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내적인 질서 창출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법칙만을 추구하는 의지를 욕망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이를 ‘선의지’라고 부르며,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라고 보았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어떤 자유로운 유희를 허용받으며, 하나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지성의 합법칙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칸트의 개념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와 같은 것들이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 것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아주 우연히 도달하게 되는 경지 같은 것이 된다. 물론, 칸트가 이렇게까지 ‘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데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주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타우마제인(thaumazein)’이라고 부르는, 인간에게 철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개념이 기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이 경이로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무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타우마제인은, 설명하자면 “매번 보는 노을이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나한테는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현상” 정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칸트에게 ‘선의지’란 무언가를 추구하는 힘이나 동력 같은 것이라기보단, 프로그래밍 코드를 돌리다가 리팩토링 안 한 스파게티 코드가 문득문득 시스템과 맞아떨어지며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경이 체험 같은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을 제공한다면, 게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는 힘을 잃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예술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단순히 규칙의 집합이나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스템과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게임 연구자들 역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게임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만들만한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 가능성을 분석해왔다. 윌 라이트 자신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뮬레이션을 ‘역설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플레이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가 중간 모델이며,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MDA에서 DPE로, 시스템 산출물에서 주관적 경험으로 오늘날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연구자는 아마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의 대표작으로 종종 소개되는 (Thatgamecompany, 2012)의 개발자이기도 한 로빈 후니케(Robin Hunicke)일 것이다. 후니케는 2004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기 위한 MDA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MDA 프레임워크란 시뮬레이션 게임의 플레이를 디자인하는 개발자를 위한 프레임워크로, 게임을 개발할 때 매커니즘, 상호작용, 미학 혹은 경험 순서로 플레이를 설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1. MDA 도식과 요소별 개념] - 출처: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Robin Hunicke, 2004) - 동시에 후니케는 MDA 프레임워크가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을 구조화해 분석할 수 있으며, 플레이 경험을 시스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플레이 동기와 시스템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발자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후니케는 개발자는 MDA의 흐름으로 '설계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에 접근하면 되고, 플레이어는 ADM의 흐름으로 '경험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니케의 MDA 프레임워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가진 플레이 특성을 경험 지향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은 분명하나, 미학 혹은 경험이 매커니즘과 상호작용에 종속된 결과로만 이해하게 만드는 한계 역시 품고 있다. MDA 프레임워크가 플레이에 대해 계층적으로 접근한 것은 게임플레이 디자인에 있어 명확함을 담보해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게임 디자인의 유기성을 저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림2. DPE 도식] - 출처: 「The Design, Play, and Experience Framework」(Brian Winn, 2008) - (DPE는 본래 게이미피케이션 분석을 위한 프레임워크로, 베네디스는 DPE가 MDA보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 분석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제네시스 베네디스(Genesis Benedith)는 MDA 프레임워크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며, MDA 프레임워크가 UX전략이나 연출과 같은 규칙으로 환원 불가능한 게임 요소를 분석에서 배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베네디스는 MDA가 <심즈>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DLC 등에 의한 게임의 기술 변화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플레이어가 창출한 서사 아크 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궁극적으로 MDA가 게임 개발에 있어 매커니즘 편향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베네디스는 이러한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하는데, 이는 MDA가 집중한 내재적 분석을 외재적 요소까지 확장시킨 것에 가깝다. 베네디스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분석하기 위해 게임 요소를 Design, Play, Experience로 확장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한다. DPE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맥락을 중심으로 게임을 분석하여, 주관적 경험에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레임워크를 지나치게 넓게 확장하고, MDA가 왜 오늘날 시뮬레이션 게임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간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MDA에서 DPE 프레임워크로 넘어오며 주관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분석이 왜 하필 플레이어의 주관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조이>, 콘텐츠 진공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즈음에서 크래프톤이 야심차게 ‘앞서 해보기’로 공개했던 <인조이(InZOI)>(2025~)를 떠올려보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인조이>는 플레이어에게 까다로운 플레이 환경을 요구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버그가 많고, 콘텐츠는 진공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더구나 엔비디아와 협력을 통해 게임 내에 AI NPC ‘스마트조이’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현 상태만 두고 보면 <인조이>의 AI 환경 수준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아직까지는’ CDPR의 <사이버펑크 2077>와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는 분명히 <인조이>의 단점이며, 우발적 사건들이 난입할 가능성을 생각해가며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가장 중요한 소구점 중 하나인 ‘쾌적한 플레이 환경’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으로 인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최적화 문제 △잦은 크래시 △예측 불가능한 버그로 인해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할 게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점만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임 커뮤니티가 비판하고 있는 ‘콘텐츠 진공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상태를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콘텐츠 진공상태’ 만큼은 (최소한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인조이>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조이>가 ‘앞서 해보기’를 런칭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 요인이자 존재 가치라고 생각한다.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상태는 <심즈>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세계’보다는 ‘일상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현대세계와 일상성(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에서 일상을 일종의 패턴이자 리듬이라고 지적하며, 반복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을 ‘환상과 진실, 힘과 무력함이 교차하는 지점,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과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만나는 곳’이라고 변증법적으로 정의하며, 일상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리듬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형되는 갈등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구간을 동일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이 패턴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점을 통해 구분할 수는 없으나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일성’을 ‘차이 혹은 변화 없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 혹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와 변화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그 차이와 변화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조이>에서 ‘콘텐츠 진공’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향을 지시하지 않음 △플레이어가 게임 빌드나 시퀀스 내의 사건에 개입하기 어려움(혹은 없음)에 가까워 보인다. <인조이>의 개발일지를 보아도 플레이어블한 개발보다는 생성형 인터랙티브 무비의 빌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가령, 가장 최근에 쓰여진 11월 26일 패치노트에는 “ 무법자 기질 조이가 자율 행동으로 '훔치기' 상호작용을 진행하지 않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고, 11월 19일 패치노트에는 “ 식사 후 2시간이 지난 음식 그릇을 일괄 정리할 수 있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으며, 대부분의 패치에 AI의 행동을 감상하는 것으로 플레이 요소가 종결되는 빌드들이 개선사항으로 나온다. 이는 플레이어의 조작 경험을 ‘클릭 후 감상’ 정도의 극단적 단순함으로 느끼게 만들며, 폐쇄적인 플레이 환경 아래 놓여있다는 감각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조이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조이들은 자율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피로를 느끼며, 사회적 욕구를 느낀다.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조이들에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나 <심즈>와 달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지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심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플레이어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심즈>와는 분명 다른 특성이다. <심즈>에서는 심이 불을 내면 플레이어가 개입해 불을 끄거나 소방관을 불러야 한다. 심이 직장을 잃으면 플레이어가 새로운 직업을 찾아주어야 하고, 관계가 악화되면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채무 갚기’라는 커다란 미션 아래 다양한 할 거리를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동물의 숲>과도 다르며, 점수와 같은 수직적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타듀벨리>와도 다르게 보인다. <동물의 숲>은 채무 상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공한다. <스타듀벨리> 역시 콘텐츠의 볼륨이 클지언정 농장 경영이라는 명확한 프레임워크 안에서 수익, 작물 품질, 마을 주민과의 관계 등 측정 가능한 수직적 성과 지표들을 제공한다. <인조이>에도 카르마 시스템이 있지만, 카르마 시스템이 수직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람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조작 감각의 부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인조이>의 게임 특성은,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조작 압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PvE가 아닌 PiE(Player in Environment)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PvE가 플레이어가 환경과 대결하는 구조라면, PiE는 플레이어가 환경 속에 존재하며 환경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PiE와 메타적 경험, 혹은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 이때 우리는 Environment가 게임이 가진 미시계의 전체적인 세팅과 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으며, 글의 서두에서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PiE에서 플레이어는 조작을 통해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파악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조작이 사실상 제한된 게임 환경을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게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인조이> 디스코드 같은 공간이 그러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인조이> 플레이어는 결국 게임 밖을 나와 디스코드 와 같은 공간을 통해 인조이의 단순한 조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인조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이 펼쳐지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플레이어가 직접 <인조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인조이>와 <인조이> 밖을 오고가며 내가 <인조이>를 플레이하는 이유와 정보를 비교해가며 공략 아닌 공략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과정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 가까우며, 매우 불편하고도 비효율적인 플레이 경로를 가졌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긴 경로와 과정은 <인조이>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와 다른 플레이어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조이>와 그 개발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나의 플레이 목표에 개입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개입은 <인조이>의 플레이가 플레이어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는 상태로 귀결된다. 동시에 <인조이>를 플레이 과정을 늘어뜨려 <인조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주관을 통해서만 <인조이>를 파악하게 만든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플레이어가 시뮬레이션을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고 표현했다. 플레이어는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시뮬레이션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1]. 이는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과 컴퓨터의 모델이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이며, <인조이>는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욱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 순간들이 우연히 상상했던 서사와 맞아떨어질 때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체험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게임에서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이란 바로 그 감각이 아닐까? 이는 <인조이>가 게임을 통해 AI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입력한 명령이 시스템의 자율적 질서와 우연히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이상한 순간들이 있다. <인조이>가 제공하는 ‘콘텐츠 진공’ 상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게임이 명확한 목표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매력적인 경험은 아닐 수 있다. <인조이>의 현재 상태는 분명히 미완성이며, 기술적 한계와 버그로 인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플레이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인조이>가 보여주는 실험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시스템의 자율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예측 불가능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창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임을 예술로 보는 가능성이란, 그 플레이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아름다움의 섬광에 있다. 그리고 <인조이>는,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섬광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PiE, 즉 환경 속의 플레이어로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경험의 지평은 아닐까. 참고문헌 ○ Celia Pearce (2001). 「Sims, BattleBots, Cellular Automata God and Go: A Conversation with Will Wright」. Game Studies. - https://www.gamestudies.org/0102/pearce/ ○ Hunicke, R., LeBlanc, M., & Zubek, R. (2004).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AAAI Workshop on Challenges in Game AI. ○ Benedith, G. (2024). 「Decoding The Sims: Analysis of Gamification Frameworks, User Experience, and Game Design Evolution」. Arizona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최적화하는 재미, 최적화된 세상 - 자동화 시뮬레이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최적화와 효율을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최적화 게임’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의 최적화를 이뤄온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최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게임에서 최적화의 행위를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자본주의로 최적화된 우리 사회의 비가시화된 영역을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이 줄 수 있는 의미이지 않을까? < Back 최적화하는 재미, 최적화된 세상 - 자동화 시뮬레이션 27 GG Vol. 25. 12. 10. 대학을 다닐 때, 책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교수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질문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 후두부를 강력하게 두드렸던 당시 교수님의 답변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교수님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집 정리를 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집에 큰 가구가 새로 생긴다면 기존의 가구들을 재배치해야 하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들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나의 편향과 신념, 습관, 체계들이 무너지고 새로 쌓이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이 학문의 의미이자 재미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당시 교수님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우습게도 내가 이때의 대화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순간은 자동화 게임을 할 때이다. 자동화 게임을 즐겨본 유저라면, 자기 기지를 제 손으로 부숴보지 않은 유저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만약 한 번도 손보지 않고 엔딩을 향해 달려갔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그전까지의 내 기지가 아무리 완벽했어도 재구성과 재배치의 작업이 필요하다. 단순히 새로운 기계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동선과 최적의 환경, 최적의 효율을 위해 다시 기지의 모든 곳을 다듬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급박한 상황이라면 임시적으로나마 비효율적인 기지를 만들어놓을 수 있겠지만, 게임 플레이 시간이 쌓일수록 게이머의 다음 과제는 효율적인 기지 구성을 향해 나아간다. <끝없는 재구축의 과정> 자동화 게임? 최적화 게임!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애써 만들어놓은 기지를 부수고 새로 구축하는 과정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자동화 게임을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위의 문장을 반박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의 장르를 바꿔보자. 만약 RPG를 하는데 10시간 가까이 레이드한 보스몹을 결국 잡지 못하거나, 겨우 잡은 보상을 잃어버린다면 그 상실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혹은 지금까지 모은 재화들을 해킹당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허탈함과 분노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자동화 게임에서는 수십 시간씩 공을 들여 만든 기지여도 효율적이지 않으면 자기 손으로 부수고 새로 짓게 된다. 심지어 부수고 새로 지을 각이 보이지 않으면 산뜻하게 지금 기지를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지금까지 쏟은 시간을 버린 것과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면서 이걸 해결하고 더 좋은 기지를 만들 수 있다는 설레임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처럼 자동화 게임에서는 결과물이 중요하지 않다. 자동화 게임의 재미는 마치 레고처럼 창의성을 발휘해서 자신의 기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다만, 레고와 다른 점은 창의성을 발휘하는 목적이 주관적 심미성이나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고 명확한 효율성 자체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동화 게임의 게이머들은 게임을 하다가 노트를 펴서 수치를 계산하는 수학자가 되기도 하고, 게임 내 기술이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마 ‘대체 그 게임은 무슨 재미로 하는 거야?’라고 물을 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의 과정과 다를 것이 없지만, 직장에서는 오롯이 추구할 수 없는 최적화 과정 자체에서 이 게임의 재미가 나온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자동화 게임의 목적은 자동화에 있지 않다. 완전히 자동화된 환경을 만들어서 바라본다면 뿌듯한 감정을 느끼겠지만, 그것이 뿌듯한 이유는 최적화를 향한 나의 노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적화 게임’이 게이머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것은 변수의 계산 가능성 덕분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은 변화무쌍하고 다층적이며 예측불가능하다. 그러나 게임에서는 수치적으로 변수가 제공되어 계산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며, 잘 만든 ‘최적화 게임’들은 게이머에게 단계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과제들을 제시한다. <산소미포함(Oxygen Not Included, 이하 산미포)>을 즐긴 게이머라면 누구나 산소 부족-식량 부족-전기 부족-물 부족-자원 고갈의 어려움을 순차적으로 겪을 것이다.(물론, 중간중간 앞 단계의 과제들이 다시금 찾아온다) <팩토리오(Factorio)>와 <새티스팩토리(Satisfactory)>에서는 필요한 광물이 순차적으로 늘어난다. 게이머들은 이러한 변수 앞에서 자원을 활용하고 환경을 구축하며 최적화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다시 돌아보는 막스 베버의 통찰 그런데 시야를 넓혀보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모든 게임이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이라지만, 자동화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는 특히나 현실과의 유사성이 높은데도 게임을 하면서 현실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변수의 성격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게다가 공장이라는 공간적 배경도 게이머의 경험에 따라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서 유통과정까지 효율을 추구하는 게임의 구조가 현실과 흡사함에도 관련 논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커뮤니티를 둘러봐도 ‘현실에서 효율을 추구하지 않는 자신이 왜 게임에서 효율을 좇는지’ 궁금해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답글이 달리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한국인의 특성’처럼 부정할 수도 없지만 논의에 도움도 되지 않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다. 자동화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비와 욕망이 직접적인 변수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RPG뿐만 아니라 <데이브 더 다이버>나 <문명>처럼 파편적으로라도 경제 시스템을 구현한 게임과 비교했을 때, 복잡다단하고 가변적인 욕망의 소유자는 물론이고, 정해진 확률에 따라 거래를 하려는 소비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산미포>의 복제체(Duplicant)들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치만을 요구할 뿐이고, 문화적, 정신적 요구치인 사기와 스트레스 역시 소비 과정 없이 최소치의 수치만 충족시키면 되며, <팩토리오>와 <새티스팩토리>의 플레이어는 다른 인간 자체를 만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시뮬레이션의 생산물은 교환가치를 가진 ‘재화’가 아니라 다음 단계를 위한 ‘재료’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화 시뮬레이션에서 구현되는 세상은 현실의 산업 자본주의와 흡사한 형태로 발전한다. 이러한 점은 ‘소비의 욕망 구조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막스 베버의 통찰을 되돌아보게 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생산 과정에서 찾았다. 베버에 따르면, 종교 개혁 이전에는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개인의 외부, 즉 교회와 종교 권력이 확정시켜주었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청교도인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이러한 차이는 일상생활에서의 차이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종교 의례를 충실히 참여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청교도인들에게 일상은 신이 자신에게 요구한 삶의 태도를 증명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에 청교도인들은 세속적 직업 수행을 신의 소명으로 여기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더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동에 임했다. 이때의 자본주의 정신은 합리적 계산과 체계적인 노동, 절제된 생활, 이윤의 재투자 등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축적된 자본은 또다른 생산을 만들면서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소비와 욕망의 매커니즘이 구현되지 않는 세상은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확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게임 내 재료가 쌓이면, 이는 바로 다음 생산 활동을 위해 투입된다. 많이 사용되는 재료는 더 넉넉하게 쌓으려고 하지만, 이 역시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인한 축적이다. 그렇게 공장은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은 물품을 만들 수 있게끔 점점 확장된다. 그 자체로 목적성을 가지는 생산 과정은 베버의 말처럼 다른 생산으로 이어지며 산업 자본주의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변수. 물류 산업 자본주의가 확장되는 또 하나의 변수는 물류 시스템이다. 자동화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물류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면, 게임의 중반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형태가 컨베이어 벨트가 되었건, 기차가 되었건, 드론이 되었건 생산 과정을 효율적으로 최적화하려면 물류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특히, 자동화 시뮬레이션의 고급 기술들은 여러 자원들을 대량으로 요구하기에 자원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생산품 역시 필요한 것으로 보내야 한다. 따라서 효율에 대한 추구와 산업의 발전은 물류 시스템의 탄생을 낳는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물류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영역이고 산업 발전의 산물일 뿐이다. 실제로 게임을 하면서 물류 시스템을 가장 중요한 변수로 먼저 떠올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크 레빈슨의 통찰은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다. 레빈슨은 <더 박스: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에서 물류 시스템의 발전이 산업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역설한다. 컨테이너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모든 항구에서 짐을 일일이 손으로 싣고 내려야 했다. 도난이나 파손의 위험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운송비가 막대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컨테이너가 표준화되자 운송비가 줄어들면서 공장들은 항구 근처에 위치하지 않아도 되게 바뀌었으며, 원재료부터 완제품까지 만들던 공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인 분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게다가 운송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업들은 재고를 쌓아두지 않게 되었으며, 필요한만큼 만들어 필요한 곳에 파는 Just-in-Time 생산이 가능해졌다. 레빈슨은 이로 인해 분업화와 같은 기업 구조의 변화는 물론이고, 세계화와 노동 시장, 도시의 구조까지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자동화 시뮬레이션을 생각해본다면, 물류 시스템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만이 아니라, 필요를 만들어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새티스팩토리>에서 운송 수단이 발달하면, 그전까지는 멀어서 염두에 두지 않던 효율성 좋은 자원을 사용하게 되고 기지가 확장된다. 자원에 여유가 생기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더 많은 기기들을 만든다. <산미포>에서 기존에는 어쩔 수 없이 복제체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지점도 자동화되며 최적화의 대상과 방식이 변한다. 분업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생산물이 늘어난다. 물류 시스템의 발전이 산업 자본주의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존재가 비가시화된 세상에서 현실의 비가시화된 존재를 상상하기 그런데 이처럼 현실에서의 욕망과 탐욕 없이, 생산이 생산을 낳고 물류가 필요를 낳는 세상에서도 착취와 소외의 흔적은 발견된다. 공장의 최적화를 위해서는 변수 없이 돌아가는 부품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의 자동화 게임들은 착취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자 한다. <팩토리오>와 <새티스팩토리>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공장 내부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며 0.01초 단위로 작업을 규제받는 현실의 노동자가 나오진 않는다. <산미포>는 등장하는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복제체로 정의한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판단력이 제거된 복제체들의 움직임은 게이머의 죄의식을 희석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 위에서 최적화를 위한 플레이는 자본주의의 생산 모델 발전 경향을 답습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유가 생기면 복지를 신경쓰기 시작한다> 게임의 초기 단계에서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게임 시스템이 시간과 능력, 생산량들을 표준화해놓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분업과 세분화 작업을 통해 노동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테일러주의적 운영 방식을 보인다. 그러다 초기 생산물이 쌓이면,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컨베이어 벨트를 사용하는 포드주의로 발전한다. <산미포>에서 노동자의 식당이나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는 것도 부분적으로나마 복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포드주의와 맞닿는다. 이후 생산과 물류 시스템이 정착하고 당장 생존에 여유가 생기면 환경을 바꾸거나 주변을 꾸미기 시작한다. 낭비를 최소화하는 작업을 할 여유가 생기면서 근로만족도와 스트레스도 챙긴다. 팀워크와 자발성을 게임에서 구현할 수는 없지만, 생산성과 복지를 결합한다는 측면에서는 도요타주의적 운영 방식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최적화와 효율을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최적화 게임’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의 최적화를 이뤄온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최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게임에서 최적화의 행위를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자본주의로 최적화된 우리 사회의 비가시화된 영역을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이 줄 수 있는 의미이지 않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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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3 자동사냥, 오토플레이가 보편화되며 점차 직접적 인터랙션이 물러나는 현대의 모바일 게임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GG는 '보는 게임'을 꼽았다. 방치형 게임 뿐 아니라 직접 플레이 대신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관전하는 '스트리밍'의 방식을 포함해, 게임에서 상호작용이 뒤로 밀려나는 현상에 주목한다. '실험 게임 페스티벌'이라는 실험: 아웃오브 인덱스의 여정 아웃 오브 인덱스 (Out Of Index: 이하 OOI) 는 국내 유일의 실험 게임 페스티벌이다. 자바 언어의 에러 메시지 중 ‘배열을 벗어났다’는 뜻의 ‘Array Index Out Of Bounds’ 에서 영감을 얻은 페스티벌의 이름은, ‘장르’나 ‘트렌드’ 와 같은 단어로 설명되어지는 일반적인 분류(Index) 밖에 자리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다루고자 하는 페스티벌의 철학을 담고 있다. Read More [Editor's View] Ways of Seeing 아이템을 기획하는 내내 편집위원들과 편집장은 보는 게임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에 대해 토로했다. 어디까지가 게임일 것인가? 어디부터가 게임의 변화인 것인가? 인간의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동시대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즉시성있는 답변보다 늘 우직하게 본질을 바라보는 질문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보는 게임’의 시대에 감히 어떤 정답을 내리기보다는, 다양한 질문과 사유를 통해 이 시대 게임의 변화를 사유하는 계기로 ‘GG’3호가 자리잡을 수 있었으면 한다. Read More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Read More 간접경험으로서의 보는게임 -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및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를 중심으로 보는 게임이란 무엇인가? 대다수는 'e-스포츠'와 '실황 플레이'를 예시로 들 것이고 실제로 이 두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두면서 보는 게임이라는 개념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다만 2021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서 기고된 이경혁의 『보는 게임과 Z세대』라는 글에서는 보는 게임의 역사에 대해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구경하는 것과 PC방 문화를 보는 게임의 기원을 삼은 것이다. 후자 같은 경우 PC방이라는 한국적인 현상임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보는 게임' 자체는 한국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임을 염두에 두면 흥미로운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경혁의 글은 그 점에서 '보는 게임'이 관람을 통해 얻는 만족감이라는 오래된 인류의 유흥거리와 맞닿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Read More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Read More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데스루프〉 는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어떤 선형 구조의 게임들은, 모두 그 과정의 가치가 결과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영원회귀가 가지는 긍정성은 결과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은 과정은 다시금 플레이 할 가치를 빠르게 잃는다. 그러나 〈데스루프〉 는 그 결말에 이르러 진정으로 모든 과정을 긍정해버리면서 다시금 그 루프로 뛰어들게 만든다. 물론 플레이 메카닉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시 이 게임의 파괴와 생성을 플레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퇴장한 후에도 이들이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플레이한 과정보다 더 즐거운 유희가 될 거란 것도. 이 부분이 조금은 특별하다. Read More 로우스코어 걸: (Not Really) Full Game Walkthrough 게임의 현실성에서 빠져나와, 잠시 현실의 게임성을 생각해보자. 세계가 0과 1의 현실로 재구성되고 있다 해도, 거기서의 ‘룰즈 오브 플레이’와 그에 따른 난관이 본질상 그대로라면 세계는 언제까지나 익숙한 현실일 뿐이다. 불균등하고 블록화된 구조로 작동하는 접속가능성(connectivity)이라든지, 메타버스와 관련해 각종 투기가 당연하다는 듯 횡행하는 상황 등을 둘러보면, 과거의 기술 물신적 낙관과는 다르게 가상 인프라의 역능 역시도 딱히 평평해지지 않는 세계의 현실에 귀속되어 있는 것 같다. Read More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채팅 비활성화와 게임 커뮤니티 문화 2019년 브리 아나 우는 게임이 단순한 모방 범죄와 폭력성을 유발하고 있다는 담론에서 벗어나 이제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와 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또한 사회 문제가 생겼을 때 게임을 모방한 사건이나 게임 중독자의 일탈 행동 등 개인의 책임을 묻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이머 문화와 커뮤니티의 유해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지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Read More 모두를 위한 게임을 향하여: 게임 접근성 문제 게임 접근성을 우리 사회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관련 제도와 사업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공공과 민간의 노력이 동시에 요청된다. 게임 접근성이 사회권 차원에서 제기되는 공공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공공이 먼저 관련 연구와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우리 사회의 게임 소외계층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고, 그들이 게임에 접근할 시 어려운 점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이용행태를 보이는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 Read More 무엇이 이스포츠팀을 팀으로 만드는가 2021년 10월말, 이스포츠 업계에서는 전기가 될만한 일이 일어났다. 북미의 명문 이스포츠 구단인 페이즈 클랜이 SPAC을 통해서 내년 상반기에 나스닥 상장을 노린다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사실 이스포츠 구단들의 성장세는 가팔랐고 증권시장에 상장하는 것이 최초도 아니다. 덴마크의 이스포츠 구단 아스트랄리스는 2019년 나스닥 코펜하겐 거래소에 상장됐고 영국의 길드 이스포츠는 2020년에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란 것은 페이즈 클랜 측이 밝힌 기업 가치는 10억 달러였다. Read More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Read More 변해가는 게임의 위상, 다큐의 관점도 변한다 - 〈하이스코어〉리뷰 2000년대 중반 이래 게임을 다루는 다큐 프로그램들이 간간이 등장해온 가운데 넷플릭스가 서비스 중인 〈하이스코어〉는 가장 최근에 출시된 게임 역사 다큐 프로그램이다. 큰 틀에서 볼 때 게임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주요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 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게임 역사를 다룬 저술이나 다큐 프로그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전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발굴한 점이 눈에 띈다. Read More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Read More 보는 게임의 한복판에서 보는 현재: 게임유튜버 김성회 ‘보는 게임’을 게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이를 두고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실제로 조작하지 않는 것은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특별한 조작 없이도 진행되는 ‘방치형 게임’은? 아예 참여하지 않고 관전만 하는 그러니까, 게임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게임을 둘러싼 시선과 그것을 향유하는 방법이 변해가는 오늘날 ‘보는 게임’을 이끄는 유튜브 ‘김성회의 G식백과’의 진행자 김성회를 만났다. 변화의 과정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 만큼 양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Read More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Read More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 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게임을 한다”라고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컴퓨터 앞에 앉아 역동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모양새를 “게임을 한다”라고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닥타닥”(키보드), “딸깍딸깍”(마우스), “삐걱”(의자). PC방이라면 “웅성웅성”까지. 사람들은 기계 앞에 올곧이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다. 누가 봐도 게임을 하는 모습은 티가 났다. 그래서 게임을 할 때 방, 거실, 피시방, 플스방 같이 분리된 공간으로서 게임의 장소가 중요했고,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그곳에 방문을 해야 했다. Read More 왜 스네이크는 들개가 되었는가 1987년 코지마 히데오(小島秀夫, Hideo Kojima) 감독이 제작한 〈메탈 기어(Metal Gear)〉는 여러 가지 의미로 특이한 게임이었다. 한 명의 캐릭터로 적진을 돌파한다는 점은 같은 제작사의 〈콘트라(Contra)〉 시리즈, 그 외 많은 게임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경험이다. 그러나 스테이지를 헤쳐나가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사뭇 새로운 감각이었다. Read More 왜 한국 콘솔시장은 작을까? - 한국 콘솔게임에의 회상 8, 90년대에 성장한 게이머들은 아마 대부분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현재 한국 게임 시장에서 콘솔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2020 게임백서에 따르면 4.5%인데, 사실상 명맥만 남았다고 볼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의 비율이 1.4%다. 북미의 38.4%와 유럽의 37.5%, 남미의 19.1%는 물론이고 2022년 세계 시장 비율인 25.2%와도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아시아 시장의 콘솔 게임 비율은 8.7%인데, 한국의 작은 콘솔 시장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PC 게임과 모바일 게임은 아시아에서 각각 25.7%과 54.1%로 다른 권역에 비해 차이가 극명하다. Read More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일본의 ‘보는 게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는 게임은 확실히 기존의 하는 게임과는 구별되는 현상이지만 완전한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존재했다. 특히 가정용 콘솔과 함께 일본의 게임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게임센터에서는 이러한 ‘보는 게임’은 흔하게 일어나는 광경이었다. Read More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도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최적화하는 재미, 최적화된 세상 - 자동화 시뮬레이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최적화와 효율을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최적화 게임’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의 최적화를 이뤄온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최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게임에서 최적화의 행위를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자본주의로 최적화된 우리 사회의 비가시화된 영역을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이 줄 수 있는 의미이지 않을까? 버튼 읽기 대중문화의 변화 위에서 게임의 미래를 묻다: GXG2025 컨퍼런스 GG 세션, <시각예술콘텐츠의 오늘과 미래> <시각예술콘텐츠의 오늘과 미래>라는 제목은 게임 행사에서 게임 비평 잡지가 기획한 자리의 이름이라고 보기에 너무나 방대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로서의 게임을 이해하려면 현실의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매체들과 게임이 어떻게 협응하는지, 또 대중문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야 한다. 버튼 읽기 [인터뷰] 25년간 게임의 지평은 어떻게 바뀌었나? : 게임 역사연구자 나보라, 게임 아카이비스트 오영욱 대담회 한때 미래 세계를 의미했던 21세기가 들어선 지도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 25년 동안 많은 문화적 변화가 야기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게임은 급격한 속도로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왔고 다양한 문화적 유산들을 만들어냈다. 이번 호에서는 게임 역사 연구자인 나보라 박사와 게임 아카이빙을 하고 있는 오영욱 박사를 모시고 그동안 우리의 게임이 얼마나 변했는지에 대해 대담회 형식으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버튼 읽기 [인터뷰] SNS의 규칙을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바꾸는 여정 : <페이크북> 제작사 반지하 게임즈 이유원 대표 SNS가 현대인의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교통, 통신의 기술이 해마다 급격하게 발전하고, 문화적 양상은 그보다 더 빠르게 급변하기에 오늘날 SNS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SNS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상의 규칙성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녹이는 데 특화된 ‘반지하 게임즈’이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SNS의 규칙을 게임화하였을까? GG 2호 이후 오랜만에 반지하 게임즈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버튼 읽기 [인터뷰] AI로 새로운 게임성을 만든다는 것: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의 이가빈 PD,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의 한규선 PD 크래프톤의 스튜디오 중 하나인 렐루게임즈는 딥러닝 기술을 게임과 접목시켜 새로운 경험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여러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음성 역할 시뮬레이터와 프리폼 채팅 어드벤처라는 독특한 게임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번 호에서는 평단과 게임사의 관점뿐 아니라, 유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이하<즈큥도큥>)의 이가빈 PD와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이하<스모킹건>)의 한규선 PD를 만나, AI 기술의 가능성과 현시점에서의 한계를 짚어보고, 새로운 게임성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버튼 읽기 인벤토리 시스템은 어떻게 효율을 재미로 연결시켰는가?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꽉찬 인벤토리에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2023년 대흥행을 이루었던 <발더스게이트3>에서는 아이템의 무게가 발목을 붙잡는다. 일반적으로 처음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어떤 아이템이 좋은 아이템이고, 어떤 아이템이 ‘잡템’인지 알 수 없어서 보부상처럼 모든 아이템을 들고 다닌다. 그러다 걸음걸이가 무거워지면 아이템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이때 무엇을 들고 다닐 것이고 무엇을 버리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유튜브나 커뮤니티에는 ‘발더스게이트 인벤토리 관리 꿀팁’ 글들이 무수히 올라와 있다. 버튼 읽기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버튼 읽기 [인터뷰]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만들어내는 게임 문화: PUBG UX 유닛 한수지 실장, UI 디자인팀 문휘준 팀장 그러나 오늘날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단순하지 않다. 보이스 채팅이 생기고, 다양한 방식의 전술적 소통 방식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런 변화는 게임 문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가 게임의 재미와 플레이 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PUBG의 UI 디자인팀 문휘준 팀장과 UX 유닛 한수지 실장을 만나고 왔다. 버튼 읽기 [인터뷰] 창간 2주년,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게임제너레이션> 이경혁 편집장 인터뷰 그렇다면 독자들과 여러 필진이 함께 만들고 있는 게임 담론은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읽고 쓰는 행위는 게임문화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 창간 2주년을 맞아, GG의 이경혁 편집장과 평소에는 담지 못했던 웹진 자체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왔다. GG가 만들어졌던 배경이나, GG를 만드는 당시 상상했던 독자층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더욱 고민하게 할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버튼 읽기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 많은 사람들이 인생 첫 게임을 ‘플래시 게임’으로 접했고, ‘마시마로’나 ‘졸라맨’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등 플래시는 2000년대 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플래시 서비스의 종료는 단순히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단종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며, 그 문화적 산물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버튼 읽기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튼 읽기 ‘인디게임’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반지하게임즈 이유원 대표 인디게임의 범주에 관해서는 여러 행위자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바, 모두를 만족시킬 온전한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념적인 개념어의 범주와 상관없이 지금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인디게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반지하게임즈’의 이유원 대표를 만나 그가 정체화하고 있는 인디게임은 어떤 개념이며 지향점은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2021년 9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이 직접 반지하게임즈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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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19 호러는 디지털게임에서 무엇인가? 게임에서의 호러는 다른 매체의 호러와는 무엇이 같고 다른가? 게임이라는 놀이매체를 가지고 공포감을 다루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Read More Frights, Fears, and Fallout: Layers of Horror in Popular Gaming In my personal gaming history I have two distinct memories of fear. The first time I was truly scared while playing a game was during the first Resident Evil in what has become a notorious scene from the game. Though at the time Resident Evil felt more like a slower action game than a horror game, there was one key moment when the player walks down a hallway when suddenly one dog, then another bursts through the windows from the outside causing fright, disorientation, and panic. This is an example of a pretty standard jump scare in games (and other media), and though it did frighten me at that moment, I didn’t carry any greater fear of those dogs and what they represented beyond a slightly heightened anxiety while I walked the halls of Spencer Mansion. Read More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Read More Playing with Shivering Bodies: Expectation, Exploration, Perception The dark hallway I walk through seems to be deserted. I can only hear my own steps and the eerie soundscape of the cranking metal pipes surrounding me, and can barely see what lays beyond the light of my flashlight. I’m afraid, as I don’t know if something is waiting in the shadows for me. As I enter the next room, I hear heavy breathing and as the light catches a mutilated body, in between the dead and living, I feel my stomach contract from disgust. Read More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Horror Video Games and the “Active-Passive” Debate 호러 비디오 게임과 “능-수동” 토론 / 데이비드 크리스토퍼 & 에이단 로이즐러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위의 작품들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루돌로지적 행위성을 강조하는 이분법으로는 위 작품들이 발휘하는 특유의 효과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모든 호러 게임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의 원리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Read More [인터뷰] AI로 새로운 게임성을 만든다는 것: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의 이가빈 PD,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의 한규선 PD 크래프톤의 스튜디오 중 하나인 렐루게임즈는 딥러닝 기술을 게임과 접목시켜 새로운 경험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여러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음성 역할 시뮬레이터와 프리폼 채팅 어드벤처라는 독특한 게임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번 호에서는 평단과 게임사의 관점뿐 아니라, 유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이하<즈큥도큥>)의 이가빈 PD와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이하<스모킹건>)의 한규선 PD를 만나, AI 기술의 가능성과 현시점에서의 한계를 짚어보고, 새로운 게임성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Read More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 지난 6월과 7월, 전시장 ‘팩션’에서는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라는 게임의 형식과 관객 참여형 예술을 결합한 전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열렸다. 전시장을 활용해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TRPG 게임 마스터가 되고 게임의 참여자인 관객들은 재난이 닥친 고향에 돌아왔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되어 함께 이야기를 구성한다. Read More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Read More 공포와 액션의 사이에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공포 게임의 공포는 반드시 옅어지고, 무뎌지고, 희석되고, 탈각된다.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이 9개의 넘버링과 3개의 외전과 3개의 리메이크, 그 외 다수의 서브 작품을 진행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 태생적 모순을 피하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7편의 방향성을 2~4편의 리메이크작과 8편 또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긍정하고 활용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Read More 두려움, 공포 그리고 폴아웃: 게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공포의 양상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해오면서 기억하고 있는 공포의 유형으로는 2가지가 있다.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겁을 먹은 것은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의 악명 높은 장면을 플레이했을 때였다. 당시 <레지던트 이블>은 호러 게임이라기 보다는 속도가 느린 액션 게임쪽에 가까웠는데, 게임 내에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뒤이어 또 다른 한 마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두려움과 혼란, 공포를 느꼈다. Read More 떨리는 몸으로 플레이하기: 기대, 탐험, 그리고 인식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간다. 내 발소리와 금속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끼익거리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을 깨뜨린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 너머의 어둠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음 방에 들어서자,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오고, 훼손된 사람의 신체가 불빛에 드러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 모습에 나는 속이 메슥거린다. Read More 비디오게임과 기이한 유령들의 세계 비디오게임에서 유령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물론 다들 이것이 꽤나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령은 수많은 비디오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슈퍼 마리오」시리즈의 부끄부끄부터 「F.E.A.R.」 시리즈의 알마까지, 비디오게임에는 다양한 아이코닉한 유령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Read More 인간인듯 인간아닌 인간같은 너: 좀비의 과거와 오늘 좀비물은는 비단 디지털게임에서만 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앞선 매체들인 영화나 소설 등에서도 좀비는 매력적인 소재로 특히 호러물에서 자주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마도 게임에서의 좀비 또한 앞선 매체들의 영향 아래 놓였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게임에 등장하는 좀비의 의미는 다른 매체의 의미를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게임 특유의 요소들로 인해 조금 더 두드러진다. 이 글에서는 좀비에 관한 긴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하고, 디지털게임에서의 좀비라는 보다 좁은 주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Read More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Read More 플레이할 결심: 공포 게임을 못_잘_안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적 자기반성을 토대로 나는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포 게임이 무섭기 때문이다. 무서워하라고 만든 게임을 무서워해서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긴 한데 뭔가 아쉽긴 아쉽다. 바로 내가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공포 게임에도 명작이 참 많다. Read More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 사실 호러 게임은 꽤 마이너한 장르에 속한다. 물론 좀비물의 성격을 차용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거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AAA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Read More
- 게임제너레이션::필자::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한송희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Jisu Kim
I am interested in a variety of topics concerning culture, knowledge, space, and learning environment.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fe of gamers are also something that fascinates me. Jisu Kim Jisu Kim I am interested in a variety of topics concerning culture, knowledge, space, and learning environment.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fe of gamers are also something that fascinates me. Read More 버튼 읽기 [Interview] The Story of Digital Game Diversity & Accessibility and Making Books About it – Kyung-jin Lee, Diversity & Inclusion Director at Smilegate In August 2024, Smilegate – one of the best-known South Korean game developers & publishers, published two books aimed at game developers, focusing on game accessibility and diversity. The first book, “게임 접근성 개념과 사례 (Concepts and Cases of Game Accessibility)”, explores the concept and current state of accessibility and diversity in South Korean games and case studies. It also delves deep into design approaches to ensure all players can fully enjoy games without restrictions. Smilegate’s second book, “콘텐츠 다양성 개념과 사례(Concepts and Cases of Content Diversity)”, introduces the idea of "cultural diversity" and examines how it has been implemented in South Korean media and games.
-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 Back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18 GG Vol. 24. 6. 10.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다양한 행위 중에서도 가장 합목적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가 곧 게임 플레이인 것이다. 열역학 법칙으로 보면, 게임은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부문에 해당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게임플레이의 위상은 ‘어떤 게임을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예컨대 자동차를 만들 때 설계자는 물리학적 효율성에 온 힘을 기울이면 된다. 에너지 효율, 내구성 등이 우선이고 감성의 영역인 디자인은 그 다음에 온다. 그런데 게임의 설계자들은 이 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게이밍에서 절대적 효율성, 절대적 감성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두 행성 간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라그랑주점을 포착하듯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에서는 치열한 두뇌 게임이 펼쳐지고, ‘설계적 효율성’ 과 ‘플레이의 효율성’은 복잡계의 영역으로 간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고도 노동 집약적인 산업과 밀접해 있기 때문에 특히 트리플A 게임은 이 라그랑주점을 찾는 노하우를 생산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플레이어들은 이 안정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점으로부터 벗어나 예상치 못한 궤도를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영화나 방송 산업이 장르 문법이나 컨벤션을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도 설계자도 틀에 박힌 수학적 질서도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편으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같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위기를 겪고 있는 유비소프트와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이다.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로 유명한 유비소프트는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글로벌 퍼블리셔다.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대다수의 게임들은 아주 비슷한 플랫포머 구간을 가지고 있는데, 게임 속 메인 진행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사이드 스토리를 수행하면서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게이머로 하여금 나머지 공간을 탐색하도록 유도하는 파트다.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 실감나는 전투 등으로 치장된 메인스토리 진행을 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반드시 ‘유비식 오픈월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구간은 제작하기 쉽다. 심지어는 자사에서 같은 엔진으로 개발한 다른 게임의 프리셋과 소스, 레벨링 노하우를 가져다 쓸 수도 있다. 유비소프트에 ‘게임 제작의 테일러리즘’이라는 웃지못할 라벨이 붙여진 이유는 이처럼 플레이어들과의 치열한 라그랑주점 찾기를 2순위로 미뤄두고 도입한 개발 프로세스의 균질화가 게임의 매커닉과 플랫폼구간에서 노골적으로 현상되기 때문이다. 이러니 유비식 오픈월드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은 플랫포머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한숨을 쉬며 1년차 예비군이 훈련장에 와서 으레 하듯이 뻔하고 관습적인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간다. 똑같은 농담, 비슷한 목표와 성취, 하찮은 심부름, 좀 더 원활한 다음 페이즈 진행을 위한 아이템 수집 등…이 때부터 플레이를 지배하는 것은 치열함이 아니라 관성이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관성에 익숙한 존재다. 관성도 플레이의 중요한 요소다. 똑같은 던전에 들어가서 수십 번씩, 땅 짚고 헤엄치듯 한 손으로 클리어해나가는 플레이어들, 스피드런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것을 관음증처럼 지켜보는 게임 ‘시청자’들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한 네트워크 속에서 게임플레이의 암묵지는 결국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은 악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쌔씬 크리드> 에서도, <와치독> 에서도, <디비전> 에서도, <고스트리콘>에서도 똑같은 감각으로 비슷한 사이드퀘스트 구간을 헤매다 보면 설계자도 플레이어들도 반발하게 된다.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은 유비소프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실패하고 있다. 유비소프트가 개발 층위에서의 테일러리즘을 도입했다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면, 엔씨소프트는 플레이 층위에서 포드주의를 도입했다가 과소소비라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비슷한 사이드퀘스트와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이뤄진 유비식 오픈월드는 적당히 플레이하면서 넘기면 된다. 그런데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은 여기에 비즈니스 모델까지 더했다. 플레이어들을 처음부터 ‘린저씨’로 호명하고, 그들이 게임 설치에 앞서 두둑한 현금부터 준비할 것을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관습적인 플레이가 뭔지를 먼저 끼워넣는 식이다. 패키지 관광객들을 싣고 하루에 수십 군데를 투어하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협약을 맺은 곳이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들이다. 한국의 특성은 이렇게 성공한 한 선구적인 사례들을 후발 주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카피한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리니지 라이크’의 모든 게임들에서 ‘유비식 오픈월드’와 같은 ‘한국식 과금 구간’을 본다. 심지어는 플레이타임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현금결제 창이 뜰지도 플레이어들은 예측하게 된다. 엔씨를 포함해 그간 한국 게임사들이 ‘생산한’ 게임들은 이 문법을 따라 포드주의적 자동화까지 도입, 방치형 게임이나 자동사냥으로까지 진화했다. 이 게임들은 게임플레이의 관성과 새로움 사이의 경합, 개발자와 플레이어간의 합리적 두뇌게임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교환의 법칙으로 환원한다. 레벨업도, 좌충우돌도, 글리치도 어뷰징도 없는 세계 – 얼마나 매끄러운가? 그러나 이런 식의 포드주의는 필연적으로 ‘탈숙련화’를 야기한다. 노동의 탈숙련화가 아니라 개발의 탈숙련화, 플레이의 탈숙련화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엔진을 실험하지 못해 뒤처지고, 플레이어들은 다른 게이밍의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다. 포드주의가 야기한 문제, ‘탈숙련화’는 자본주의의 역설이자 자동화의 고질병이다. 포드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어셈블리 라인에 완전 자동화 결합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시적으로 매출은 엄청나게 증대됐다. 대량의 노동자들은 해고되거나 회사를 떠났고, 공장에 남은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동화 기기 옆에서 빗질이나 허드렛일 따위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탈숙련화가 진행되자, 역설적이게도 미국 전체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빠졌다.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포드 공장에 도입된 모델이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도 우후죽순 도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가 되거나 비숙련 단순직종으로 이동,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고 재고가 증가하는 역설이다. 숙련노동자들이 사라지자 생산 현장에서 공유되던 암묵지 노하우들도 사라졌고, 결국 미국의 완전자동화 산업은 일본의 반자동화 산업에 헤게모니를 내주게 되었다. 포드주의는 야심찬 자동화를 추구했지만 그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들의 삶이 불안정해질 뿐 아니라 공산품들의 품질도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했다. 유비나 엔씨의 제국이 조금씩 몰락하는 가운데, 게임 설계자들은 ‘탈숙련화’가 게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이제는 상기해야 한다. 경제적이고 수학적인 효율성은 게이밍에서 다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광기어린 사람들이고, 설계자들은 정교한 건축술을 구사하지만 동시에 베토벤의 영감으로 창조하기도 하는 입법자들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글리치를 찾거나, 최단시간 레벨업 경로, 보스 제거에 가장 효율적인 세팅을 찾아내고자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능동적면서 복잡한 시행착오가 동반되어야 재미를 느낀다. <세키로>나 <다크 소울> 시리즈에 몰입한 사람들은 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손가락 관절염을 느끼며 한 보스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댈까? 역사에 문외한인 <문명>의 플레이어는 왜 17세기에 스텔스기를 완성하는 세종대왕과 몇날 며칠 자웅을 겨루는가? 자학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향한 복잡성의 과정, 게이밍의 역학적 질서도와 복잡성이 교차하는‘에르고딕(ergodic)’에 탑승한 승객이어서이다. 그들은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게임패드를 집어 던져가며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보스를 클리어한 다음, 이를 깨기 위해 동원한 다양한 전략과 방법, 세팅, 꼼수까지 자랑스럽게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랑할 것이다. 이렇게 공유되고 축적되는 숙련 비법은 모든 플레이어들에 의해 재즈 스탠다드 음악 연주처럼 변주될 것이고, 개발자들도 이를 참고할 것이다. ‘숙련화’ 된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에 의해 긍정적 피드백(positive feedback) 루프가 완성된다. 게이밍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와 개발자 모두를 놀라게 하며 희열에 차게 만들고, 새로운 매커닉과 창의적인 구조가 만들어진다. 탈숙련화가 아니라 숙련화, 소외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유비식 플랫포머 승객’ 이나 ‘린저씨’들과 그들을 고객으로만 호명하는 개발사들에는 그런 피드백 루프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유비소프트와 엔씨 및 이들의 ‘탈숙련화’ 모델을 참조로 하는 모든 게임개발사들은 비즈니스 모델이나 제작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숙련된 플레이어들로부터 숙련된 플레이를 확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잘 활성화된 게임은 당연히 <마인크래프트>다. 플레이어가 설계자가 되고, 설계자가 자신이 창조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노하우는 오픈소스 환경에서, 커뮤니티에서 공유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전문가집단과 협업을 하거나 공동 프로젝트까지 한다. 숙련화된 설계자와 플레이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모두가 ‘합리적 트릭스터’ 다. 우리는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최근 열광하는 숙련화 게임의 두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는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게임이 전통적인 게임 서사와 미장센으로 뉴트로로 돌아오는 방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 생성AI를 활용한 게이밍의 등장이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 테일러리즘이나 포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산업 부문에서나 게이밍에서나 완전히 화려하게 자동화된 기술진보가 아니라 결국 합리적 효율성과 주체적 효능감 사이를 횡단하는 사람들,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길을 여는 것을 본다. ‘트릭스터’의 감각을 상실한 게임의 설계자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체스를 두지 못한다. 트릭스터는 질서를 가장한 혼돈을 창출하기 좋아하는 악당이고, 꾀를 내어 난제들을 교묘히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현자다. 게이밍은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속일까, 황금율을 어떻게 파괴할까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라그랑주점을 찾아나가는 장이다. 문학이나 시네마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시네마의 관객은 종종 맥거핀을 찾아내고 실망하거나 핍진하지 못한 연출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밍에서 좋은 설계자들은 재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기만할지를 숙고한다. 플레이어들은 설계자의 주권을 깨트리는데서 희열을 느낀다. 게이밍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탈숙련화 게임이 아닌 숙련화 게임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8비트 게임의 등장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된 게이밍 경험은 유비식 오픈월드나 한국형 과금 게임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Tags: 오픈월드, 트릭스터, 포디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