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게임은 왜 힐링이 되었는가: 픽셀 농사와 진짜 밭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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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2. 10.

<스타듀 밸리>나 <목장 이야기>와 같은 농장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전원적 배경의 농부가 되어볼 수 있다. 이들 게임은 도시를 떠나 가족의 농장을 물려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동일한 서사를 공유한다.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가 최초로 마주하는 것은 잡초와 돌, 고목 등으로 뒤덮여 오랫동안 방치된 농지다. 이 허름한 농장을 하나씩 정리하고,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축사를 가꾸며 매일 꾸준히 노동한 결과가 주는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게임의 핵심 경험이다. 그 과정에 발생하는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는 공동체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이다.
농사 게임은 흔히 ‘힐링 게임’으로 분류된다. 경쟁이나 전투 중심의 게임이 순간의 긴장과 급박함을 요구하는 데 반해, 농장을 경영하는 일은 평화롭고 소박한, 말 그대로 ‘목가적 삶’의 감각을 제공한다. 밭에 심어진 옥수수도, 풀을 먹는 젖소도 플레이어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뿐이고 플레이어는 성장을 지켜보는 존재로 남는다.
필자 역시 직접 농사를 지어보기 전까지는 농사 게임을 ‘힐링’ 장르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 산골 마을에 거주하며 농촌 사회를 경험하고 손수 농작물을 생산해보니, 게임 속 농사와 현실의 농사 사이에는 생각보다 더 큰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게임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제 농사에서 어떤 요소들이 게임화되기 위해 제거, 단순화, 재배치되었는지를 관찰하게 되었고, 게임에서 ‘힐링’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농사를 게임으로 배워 시작하다
다음은 실제로 겪은 농사 이야기다. 도시 생활을 하다 산골 마을로 이주하고, 집 근처에 작은 텃밭을 얻게 되었다. 흙을 조금 파보니 지렁이가 여럿 꿈틀거릴 만큼 토양 상태는 비옥했다. 그대로 두기에는 아까운 땅이라는 생각이 들어 농사 짓기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게임 속에서는 수십 번의 계절을 보내며 방대한 경작지를 일군 베테랑 농부였지만, 현실에서는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조차 없는 초보자였다.
<스타듀 밸리>의 농부는 가장 먼저 땅을 일군다. 필자 역시 튜토리얼을 따라 하듯 밭에 쪼그려 앉아 돌을 골라내고 호미로 잡초를 제거한 뒤 삽으로 흙을 부드럽게 다져 올렸다. 뾰족한 호미로 땅을 내칠 때 가끔씩 땅 속에 살고 있던 지렁이가 걸려서 튀어올랐다. 땅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초를 다졌으니 이제 무엇인가를 심을 차례였다. 원래대로라면 씨앗을 심어야 했지만, 부스트 아이템 ‘모종’을 선택했다. 씨앗 단계를 지난 어린이 상태의 모종을 심으면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에서 심는 만큼 실패 확률도 적고 성장도 빨랐다. 모종 가게 주인에게 “초보자는 잎채소부터 시작하라”는 조언을 들었고, 오이나 딸기 같은 열매 작물은 아직 ‘해금되지 않은 고난이도 작물’이라 생각하고 청상추 모종 15개를 사 들고 돌아왔다. 봄 기운이 완연한 4월은 상추를 심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다.

스타듀 밸리의 농부는 파스닙 15개를 심으며 첫 농사를 시작한다
픽셀처럼 심기 vs 두둑과 고랑 만들기
밭으로 돌아온 뒤, 15개의 모종을 어떤 배열로 심을지 고민했다. <스타듀 밸리>에서 플레이어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는 과제는 봄의 작물 ‘파스닙’(무의 일종) 씨앗 15개를 파종하는 일이다. 플레이어는 도구를 장착해 땅의 ‘상태’를 한 칸씩 경작지로 변화시키고, 땅 한 칸당 씨앗 한 개를 심어 파종을 총 15칸에 걸쳐서 진행한다. 이때 일반적으로 플레이어들은 5x3 또는 3x5의 대칭적 구조로 밭을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짝이 맞는 이 패턴을 안정적인 구조로 받아들인다.
<스타듀 밸리>를 오래 플레이한 탓에, 씨앗 15개를 ‘반듯하게’ 심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실제 밭에서도 상추 모종을 똑같은 구조로 심었다. 상추 역시 3x5의 비슷한 구조로 심어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텃밭은 게임의 논리를 거부했다. 상추들은 서로의 잎이 뻗어나갈 공간이 부족해졌고, 잎과 잎이 맞부딪히며 통풍이 안되어 병충해가 발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밀식된 상추는 성장하면서 서로의 잎을 밀어내는 생존 경쟁을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가운데 줄에 위치한 상추는 공간이 없어서 직접 손이 닿지 않아 관리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작물 위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농부가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 있어야 했다.
결국 ‘한 칸에 한 개의 작물 배치’ 논리는 게임식 접근법이었다. 현실에서는 게임에서의 칸 개념보다는 모종을 심는 ‘두둑’과 여유를 두는 ‘고랑’의 개념이 적절했다. 현실의 농사에서 한 포기의 상추는 한 칸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통풍, 배수, 관리 접근성을 포함해 더 큰 생태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게임이 제시한 그리드 기반의 단순한 규칙은 실제 농사에서는 훨씬 복잡한 생태적 배치의 문제로 변환되었다.

생장할 여유 간격을 두고 심어진 상추 밭. 출처: 드래곤 별밭 아뜨리에 블로그
현실 농사는 농작물 피해를 디폴트 값으로 둔다
그래도 상추들은 비좁은 환경에서도 제법 잘 자라주었다. 조심스레 잎을 따내어 수확이 가능했다. 수확한 상추로 쌈과 샐러드를 풍성하게 차려먹으니 요리의 즐거움은 구현되지 않았던 게임 속 농부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상추는 많이 수확해도 금방 다시 자라서 화수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확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며칠 만에 물을 주러 나가보니, 밭이 텅 비어있었다. 상추가 있던 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상추가 있었는데, 없었다. 다른 밭에 잘못 왔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야생 동물인 노루가 습격한 결과였다. 생각해보면 노루가 참 좋아할 만했다. 나의 텃밭은 억세고 질긴 들풀보다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상추가 한 가득 자라있는 완벽한 식탁이었다.
대부분의 농사 게임에서 울타리란, 미적 요소이거나 부가적인 설치물에 가깝다. <스타듀 밸리>에서는 농작물의 피해를 미미한 이벤트로 발생시킨다. 허수아비 설치물이 커버하는 영역에 놓이지 못한 땅은 야간에 등장한 까마귀로 인해 1~2개의 작물이 사라진다. <파밍 시뮬레이터>에는 병충해나 야생동물의 피해를 아예 구현하지 않는다. 잡초가 수확량을 조금 줄이는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반면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벼농사에 발생하는 해충과 병해, 잡초의 종류를 현실처럼 다양하게 구현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에 실패한다고 하여 품질과 수확량이 감소할 뿐, 벼가 다 죽어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다.
평화로운 게임과 다르게, 현실은 훨씬 가혹했다. 노루망을 치지 않아서 상추 밭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현실에서는 야생동물, 폭염, 장마, 해충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침입한다. 각종 병충해도 단 몇 주 사이에 농사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너무 덥거나 습하면 작물이 빠르게 상하고, 한 번의 폭우로 뿌리가 썩어버리기도 한다. 농부는 이러한 피해 요소들을 ‘기본값’으로 가정하고, 당연한듯이 울타리와 농약, 비료, 배수로 등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동원하여 농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노동하는 신체성을 지워야 힐링은 완성된다
상추밭이 야생동물의 습격으로 초토화된 후, 여름 작물인 아삭이 고추 몇 그루를 심으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초여름 기운을 받은 고추는 순조롭게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며 주렁주렁 열매 맺을 준비를 마친 듯했다. 그러나 어느 날, 초록색으로 보여야 할 고추 줄기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십 마리의 노린재가 깨알같이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노린재는 당장 열매를 떨어뜨리지는 않지만, 식물의 영양분을 가로채 성장을 저해하고 열매를 부실하게 만든다.
농약을 칠 수 있었지만 많은 친환경 농부들이 권장하지 않았다. 손으로 잡아서 없애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했다. 페트병을 반으로 자른 통에 물을 채우고, 고추 줄기 아래에 대고, 통에 떨어지게끔 손으로 노린재 떼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이 작업을 매일 반복해야만 했다. 노린재와의 전쟁이 끝나면 덥고 습한 날씨를 틈타 민달팽이가 올라타서 고추 열매를 갉아먹었다.
이 과정에서 게임에는 겪지 않은 농사의 육체적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한여름 야외에 몇 분만 서 있어도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농부에게 모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여름의 밭이라는 야외 공간은 야생 모기가 무차별적으로 달려들기 좋고, 식물을 스치기라도 하면 진드기가 몸에 달라붙어 자기도 모르게 피를 빨릴 수 있다. 게임 속 농부는 밀짚모자에 멜빵바지라는 낭만적인 룩을 입고, 현실의 농부는 긴 챙 모자에 마스크부터 팔토시, 스카프까지 생존을 위한 전투복을 입는다.
<스타듀 밸리>에서 플레이어의 신체는 화면 구석의 ‘스태미나 게이지’로 단순하게 표상된다. 곡괭이질을 하거나 물을 주면 게이지가 줄어들고, 기력이 바닥나면 탈진한다. 그래도 침대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체력은 언제 그랬냐는 듯 100% 회복된다. 게임 속 노동은 조작 장치를 거쳐 대리 수행되기에, 플레이어는 온 몸에 흘러내리는 땀,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 벌레에 물리는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게임이 선사하는 힐링은 역설적으로 노동하는 주체의 몸을 소거했기에 가능하다.
현실의 농사는 클릭 몇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잠을 잔다고 해서 누적된 피로가 말끔히 씻기지도 않는다. 이러한 육체적 한계는 필연적으로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 <파밍 시뮬레이터>가 거대한 트랙터와 콤바인을 조작하는 재미를 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의 농업은 인간의 몸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의 부하를 기계가 대신해주는 것에 익숙하다.
실제 한국의 농촌 현실을 들여다보면, 고령화된 농촌에서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것은 억 대를 호가하는 농기계들이고, 농기계를 운용하거나 기계가 닿지 않는 궂은 일 처리는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의 손에 맡겨진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 먹는 매끈한 농산물은 힐링 게임이 보여주지 않는 기계 소음과 이주 노동자들의 땀 속에서 생산된다. 최근 각광받는 스마트팜 역시 온도와 습도, 영양 공급을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스템에 맡김으로써 예측 불가능하고 고통스러운 자연 속의 인간 노동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결국 농사 게임이 주는 평화로움은 현실 농사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통스러운 육체성과 노동의 구조를 차단한 채 수확의 성취감만을 정제하여 제공하는 셈이다.
게임 농부는 치유받지만, 현실 농부는 치열하게 싸운다
우리는 이른바 ‘힐링’이라는 감각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농사짓는 행위가 게임에서 힐링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전원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삼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농업이 갖는 복잡성을 제거하고 변형함으로써 불확실한 노동을 ‘확실한 노동’으로 재구성하는 점에 있다. 현실의 농업은 기후, 병해충, 노동력, 시장 변수 등 수많은 요소가 개입하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활동이다. 수확의 결실을 맺기까지 요구하는 힘의 투입은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럽고, 장기간을 요구하며 때로는 실패를 수반한다.
반면 게임은 매체적 성격상 불쾌감을 최소화하고 쾌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만약 현실의 불확실성과 고통을 그대로 재현한다면 게임은 ‘재미’라는 핵심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다루는 게임들은 반드시 선택, 제거, 증폭의 단순화 과정을 거쳐 현실의 농업을 플레이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농사 게임이 현실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은폐 여부가 아니라, 농사가 어떤 구조적 조정을 거쳐 ‘힐링’으로 재배치되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이 간극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게임 속 농사가 만들어내는 힐링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농업을 둘러싼 조건을 재사유하게 만드는 하나의 분석적 지점임을 확인하게 된다.
현대인들이 농사 게임에서 힐링을 느끼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일상이 게임 속 농사보다 훨씬 더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성과를 내도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현대의 노동 환경 속에서, 게임 속 농사는 노력한 만큼 정확히 돌아오는 공정한 세계를 제공한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반드시 작물이 자라고, 수확하면 반드시 돈이 들어온다. 이 깨끗한 루틴의 반복에서 오는 예측 가능성과 통제 가능성이야말로 게임이 제공하는 진짜 힐링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것 중에서 '농사'라는 형식을 빌려 이러한 힐링을 추구하는 것일까? 농업이라는 인류 최초의 생산 활동은 본래 자연과의 협상이자 불확실성과의 공존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이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농업을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재탄생시킨다. 어쩌면 자연을 완전히 계량화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현대 사회가 자연에 대해 갖는 판타지이자 근대적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동시에 농사 게임은 우리가 상실한 것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손으로 땅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 도시화된 삶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지 못한다. 농사 게임은 이 단절된 관계를 상상적으로나마 복원한다.
결국 농사 게임이 제공하는 힐링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현실 농사의 고통을 삭제한 안전한 판타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노동과 결실의 직접적 연결'이라는 근원적 만족감을 제공한다. 게임 속 농부가 되는 경험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 만족감을 게임 속에서 찾아 헤매는가? 우리의 노동은 왜 게임 속 농사만큼 명확한 보상과 연결되지 않는가? 그리고 진정한 치유는 게임이 제거한 바로 그 불확실성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은 농사 게임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을 넘어, 우리 시대의 노동과 자연, 그리고 치유에 대한 욕망을 성찰하게 만든다. 게임 속 농사와 현실의 농사 사이의 간극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