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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 Back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17 GG Vol. 24. 4. 10. 1. 들어가며 어린 시절 자주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되지 않았나 싶다. 가위바위보에서 손을 내고 희비를 오가게 되는 순간이나 공기놀이하다가 손을 삐끗하는 찰나 등, 노력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들은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단순한 놀이의 형태를 넘어, 내기나 겨루기와 같은,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놀이에 대한 속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다. 이 중 하위징아는 오늘날 놀이와 유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로 인식되며, 카이와는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보다 유형화해 계승한 인물로 언급된다. 이번 논문 세미나는 후자의 인물, 카이와가 명명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카이와의 놀이는 대체로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각각 경쟁, 우연(운), 모방, 현기증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경쟁의 아곤은 축구나 권투 등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놀이를 말한다. 알레아는 사다리 게임, 제비뽑기로 설명할 수 있고 미미크리는 역할극을, 일링크스는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돈 뒤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나 흥분감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루두스(Ludus)와 파이디아(Paidia)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운,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다.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2. 카이와와 알레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놀이는 다소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성과 연결되었을 때 도박이나 사행성 관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게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연성은 곧장 도박과 통하게 되는가? 어느 정도 우연성을 의지하게 되는 게임은 사행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개념은 결국 룰렛 머신 부류의 게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에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레아는 규칙을 통해 승패를 겨루지만 놀이하는 자가 그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놀이를 일컫는다. 알레아의 승패는 오로지 우연을 통해 갈리는 것이 특징이며 그 즐거움의 본질이란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을 통해 서로의 운명을 겨루는 데 있다.”(66쪽)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란 특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겨루기로 했을 때, 그 승부에서 발생한 운만으로도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연이 선사하는 위험과 기회는 공정하게 분배”(66쪽)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알레아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는 카이와를 의존해 왔기에 상당히 저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알레아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역할로 거듭나기 힘들다. 특히 카이와는 알레아와 아곤을 모순적이면서도 결속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알레아가 아곤보다는 보조적이라고 보았다(Caillois, 1967/2018). 이런 카이와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운의 힘이 달라지는, 어떠한 모순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 자수성가한 이에게는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운이 날 때부터 권력자였던 사람에게는 부인 받게 되는 게 그 예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운과 우연이 노력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환상에 빠트린다고 본 것이다. 3. 알레아-우연이 가지는 의미 연구자들은 카이와의 의견에서 한층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카이와가 우연의 비창조적인 부분에만 주목했으며, 우연을 다층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우연은 고대 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 ‘운명’과 ‘천운’을 비롯해, ‘천체’, ‘정의’, ‘징벌’, ‘미신’, ‘요행’, ‘행운’, ‘불행’, ‘행복’, ‘신’, ‘섭리’, ‘계시’, ‘기회’, ‘미래’, ‘가능’, ‘희망’, ‘기대’, ‘역설’, ‘반전’, ‘돌발’, ‘돌출’, ‘변수’ 등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화된 것이다(최성철, 2016). 가령 ‘운명’ 속 우연은 본래 신의 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였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의심할 수 없고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우연과 함께하는 ‘운명’은 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을 신에게 속박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을 불러오는 ‘자유’의 의미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진리(운명)를 거스르는 상징에서 언젠가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우연은 ‘운명’과 ‘자유’라는, 다소 상반된 두 개념에 깃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와가 이야기한 알레아는 운명과 자유 중 어떤 부분에 더 가까웠을까? 연구자들은 두 개념 모두 그렇다고 설명한다. 카이와가 서술한 우연이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서 ‘운명’이 나타나지만, 결국 알레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 ‘자유’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과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이 ‘자유’라는 개념에 훨씬 근접할 수 있겠으나,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아곤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운명’을 곧 ‘통제’로 단정해 온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를 ‘자유’가 공존하는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알레아를 세 층위로 나누면서 드러난다. 4. 알레아의 세 층위와 <하스스톤> 1) 주술적 알레아 연구자들은 알레아의 세 층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세 층위를 <하스스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로 주술적 알레아란 ‘주술’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어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존버(존나 버티기)’라는 말을 간단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술적 알레아는 신에 대한 의구심을 죄악시했던 중세 기독교 인식(최성철, 2016)을 계승해, 승리를 위한 노력이나 적극성을 생략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주술적 알레아의 핵심을 맹신과 더불어 “어떠한 개연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비이성적 즐거움”(70쪽)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주술적 알레아의 힘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약해졌다고 언급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가치관은 현대인들을 변화시켰고,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놀이하는 일도 적어지게 된 것이 이유다. 이에 연구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주술적 알레아는 사라졌지만, 알레아 그 자체에 잠재된 주술성이 플레이어에 따라 발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스스톤>은 주술적 알레아를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다. 연구자들은 ‘무작위 효과 카드’를 사례로 드는데, 이 카드들은 범용성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다만 이 중 일부는 역전의 열쇠로써 사용된다. 여기서 연구자들이 지목한 카드는 ‘난투’다. 난투 카드는 ‘무작위 하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하수인을 처치’하는 효과가 있어서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 애용되곤 한다. 연구자들이 주술적 알레아와 난투 카드를 함께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난투 카드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길 바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알레아는 역전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재현된다. 2) 시스템적 알레아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게 된 17세기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격변했던 때다. 투기, 도박 등이 대중적 공간에 나타나기도 한 이 시기는 알레아의 상업화도 함께 이루어졌다(Reith, 2006). 이후 19세기에 활성화된 카지노는 알레아의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카지노에 설계된 교묘한 시스템이 사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신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곳의 알레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침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시스템화 되어있다. 이런 시스템적 알레아는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닌, 플레이어와 사업주 간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한다. 현대 디지털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스템적 알레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랜덤박스가 있다. <하스스톤>은 카드 팩이 곧 랜덤박스다. 연구자들은 이 랜덤 카드 팩이 카지노의 수익 창출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분석한다. 철저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낮고, 플레이어에게는 ‘놀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랜덤 카드 팩은 개선된 성능의 아이템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서, 승률이 중요한 플레이어는 특히나 끊어내기 어렵다. 언급한 것처럼 랜덤박스는 여타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가 속속들이 침투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아가 사행성과 도박만을 뜻한다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3) 영웅적 알레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영웅적 알레아는 고대 시절부터 ‘내기’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내기는 특히 17~19세기의 기득권 사회에서 잘 이용됐는데, 이는 내기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탓이 크다. 내기(betting)가 가치 부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박(gambling)과 달리 뛰어난 판단과 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19세기에 발표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설명한다. 해당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기는 선택(guessing)과 증명(proving)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선택과 증명은 극복해 내기만 하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기능한다. 이걸로 짐작할 수 있는 영웅적 알레아의 핵심은 ‘자유의지를 기반 삼아, 운명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다. <하스스톤>에서 영웅적 알레아가 잘 드러나는 건 모험모드다. 이 모드는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로그라이크 형식을 띠는데, 플레이어가 각각의 난이도와 도전 방식을 ‘선택’하고 이를 클리어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런 영웅적 알레아는 단순히 승리하거나 클리어하는 걸 넘어,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에 중심을 둔다. 5. 나가며 물그릇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고, 랜덤박스에 지른 큰 금액을 재밌었으니 됐다며 합리화하고,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가 향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에 대한 내용은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 디지털 게임에 알레아가 형성될 자유도가 존재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몰입해 있을 때는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게임은 정해진 설정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에서 언급된 카지노의 체계와 동일하다. 반면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본래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운을 걸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임 공간 안에서,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결국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게임에는 제작자들의 계산과 기술이 개입되어 있는데, 두 알레아의 가치를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느냐는 소리다. 물론 연구자들도 두 알레아를 한정된 사례에만 적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게임이 애초 만들어진 세계,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락실 기기에 코인을 추가하는 행위나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캐릭터 육성 등에도 시스템적 알레아의 흔적은 남는다. 그러면 게임 안의 알레아들은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본문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관람적 알레아라는 개념을 결론부에 언급한다. 관람적 알레아는 게임 스트리밍이나 e스포츠 방송을 관람할 때 발현된다. 이 알레아는 타인을 매개로 하기에 상당히 간접적이다. 즉 게임을 즐기면서도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확률이 낮다. 이러한 측면에서 관람적 알레아를 주목할 필요성을 함께 제시하고 싶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우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와 알레아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오가면 사행성이나 도박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우연놀이’ 또한 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Caillois, R. (1967). Les jeux et les hommes. 이상률 (역) (2018). <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Reith, G. (2005). The Age of Chane: Gambling in West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최성철 (2016). <역사와 우연>. 서울: 도서출판 길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백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주얼 노벨 올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게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한 놀이 문화로 통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오락이 가능한 값비싼 콘솔기기로 시작해, PC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정 내 기초 게임 환경 구축이 가능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거리와 관계없이 편하게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 Back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08 GG Vol. 22. 10. 10. 게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한 놀이 문화로 통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오락이 가능한 값비싼 콘솔기기로 시작해, PC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정 내 기초 게임 환경 구축이 가능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거리와 관계없이 편하게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 우리가 접하는 '게임'의 모습은 계속 달라져왔다. 이런 게임의 변천사를 논하는데 있어서, 특히 국내에 한정해서 본다면 ‘PC방’은 빠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다. 이르게 본다면 그 태동이 이루어진 1990년대부터, 가장 활발했던 2000년대까지, 한국 게이머에게 있어서 PC방은 누구나 한번쯤 거쳐간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게이머라면, 누구나 ‘PC방’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수많은 게이머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은, 사실상 게임 트렌드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게임사들이 자사 게임의 인기를 확인하기 위해 PC방 순위를 확인했으며, 프로모션 역시 가장 먼저 PC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PC방은 여전히 존재는 하지만, 그 위세가 이전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온라인 시대가 대두되면서 단순히 PC방이 쇠락한 것일까? 아니면 오프라인상에서 게임을 즐기는 문화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이번 칼럼을 통해, 지금 PC방이 점한 위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PC방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곁에 ‘PC방’은 나름 오랜 시간 함께해왔다. 물론, 그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외국의 ‘인터넷 카페’처럼 게임을 제공하기 위한 공간보다는 PC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국내에 한정해서는 이 PC방은 그야말로 게임 하나만을 위한 시설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점이 PC방의 ‘황금기’로 통하는 2000년대 초다. 수많은 사람들이 PC방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를 형성한 시점으로, 이 시점에 이미 주요 가정에는 PC 보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별다른 방해 없이 친구들과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과 다양한 PC방 혜택 제공 등이 맞물리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시절의 분위기란… 아마 PC방이라는 단어를 듣고 친구들과 컵라면과 오다리를 먹으면서 게임을 즐기던 모습이 떠오른다면, 분명 이 당시에 PC방을 진하게 체험해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는 만큼, PC방에 대한 학부모 사이 경각심도 상당했다. 애당초 아직 게임을 즐기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동시에 PC방도 아직 간접 흡연 같은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에 점차 여러 규제들이 적용되던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이때 축적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나중에 PC방이 크게 달라진 후에도 걸림돌처럼 작용하기도 했다. 황금기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PC방은 e스포츠와 같은 게임 문화를 등에 업고 인기 시설로 군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분위기마저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PC방의 쇠퇴에 대해서는 매번 업계에서도 다양한 주장이 나오지만, 가장 많이 꼽는 것이 바로 ‘필요성’의 감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게임을 위해 가정 내 고사양 PC를 구매하는 일이 일반화됐으며, 게임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면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많이 사라졌다. 아울러,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디스코드’와 ‘스카이프’ 같은 음성 채팅 프로그램이 떠오르면서 오프라인 모임을 고집할 이유마저도 없어졌다. 사실 그간 게임을 하면서 부족하게 느꼈던 부분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마당에, 게이머들 입장에서 더 이상 PC방을 선택할 이유들이 많이 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 손님들의 게임 환경이 PC방을 뛰어넘은 셈이다. 이런 부분을 PC방 업계에서도 큰 위기로 인지하고, 이후에 크게 변한 모습이 우리가 현재 접하는 PC방 모습에 해당한다. 그저 게임 하나만을 보고 가던 시설은 복합 놀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상태며,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시설의 청결함과 다채로운 서비스를 내세우고 있다. 새롭게 달라진 PC방은 게임을 즐기는 손님의 편의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높은 고사양 PC와 주변기기는 기본이고, 보다 넓어진 좌석, 스마트폰 충전기 완비, 수준 높은 먹거리 판매, 그리고 특정 손님들 취향을 겨냥한 커플석, 단체석, 스트리머석 같은 좌석들도 존재한다. * PC방도 젊은 손님을 잡기 위해,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를 서비스의 발전을 반증하는 것처럼, 현 PC방의 매출에서 먹거리 매출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일부 PC방은 준수한 먹거리의 맛과 24시간 영업을 강점으로 내걸고, 배달앱까지 진출한 상태다. 주변 매장과의 경쟁이 점화될 수 있는 요금을 건드리는 대신에, 대부분 다른 서비스에서 활로를 찾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다양한 업체와의 협력도 지금의 PC방을 논하는데 있어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드웨어 브랜드, e스포츠 구단과 협력하여 이에 특화된 PC방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금 더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손님을 만족시키고, 단골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아끼지 않고 있다. * 먹거리도, 볼거리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금의 PC방이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가 자주 접했던 동네 PC방 시절과는 크게 다르다. 오히려 그 형태는 하나의 기업체에 가까운 편이며, 보다 철저하고 확실한 기획을 바탕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 마무리 단계가 아닌 한창에 해당한다. 늘어난 선택지 속 ‘PC방’의 입지 위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지금의 PC방은 이전보다 훨씬 시설 면에서, 서비스 면에서 앞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손님이 늘어나는 일만 남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좋은 시설이 해답은 아니다. 일단 소위 ‘황금기’로 통하던 시절과 지금 현재의 게임 문화 차이를 비교해보자. 일단 앞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과거에는 사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애당초 집에서 게임을 즐기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값비싼 콘솔은 아예 논외였다. 그런 의미에서, PC방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편한 마음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임을 위해 최적화된 PC 사양, 남들 눈치는 크게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 아울러 일부 게임의 월 정액제를 대신하는 가맹 PC방만의 혜택도 있어서 그야말로 게임을 위한 아지트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근처 PC방에 우연히 들렀다가 가까운 친구를 만날 확률이 높을 정도로, PC방은 만남의 장으로써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자연히 친구들이 많이 가는 PC방은 집결의 장소가 됐고, 이런 부분에서는 한 시절을 풍미한 다른 오프라인 게임 문화 ‘오락실’의 입지를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게임은 이제 가장 보편적인 놀이 문화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위한 고사양 PC도 집에 대부분 갖추고 있다. 아울러, 굳이 PC가 아니더라 모바일, 콘솔과 같은 다른 플랫폼 선택지도 다양하게 준비된 상태다. 이런 시점에 PC방으로 향하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손님 연령대의 변화다. 지난 2021년에 공개된 엔미디어플랫폼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PC방 이용자 수는 고등학생(17세~20세)과 대학생(21세~25세)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매출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초년생(26세~30세)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태다. 더욱이 이들의 이용 요금이 먹거리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PC방을 진득하게 이용하는 손님 태반이 연령대가 높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 엔디미어플랫폼 PC방 이용 유저 평균 사용 금액(시간) 현장 의견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이전과 달리 연령대가 높은 손님들이 예전처럼 단골로 자리잡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PC방 업주들은 결국 과거 PC방을 경험해본 세대들이 PC방을 주로 이용하는 것이고, 보다 다양한 것을 접하고 있는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PC방이 오프라인 게임 문화로써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고 보고 있다. 그 말처럼,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널려있다. 오프라인 게임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굳이 장소가 PC방으로 한정되지 않고, e스포츠 대회 관람, 게임 행사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그게 꼭 PC방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PC방이 더 이상 ‘필요’에 의해 가는 장소가 아닌 시점에, 현 PC방 업계가 보다 다양한 서비스를 품기 위해 다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대로, 지금 국내 게이머들 입장에서 오프라인상으로 게임을 즐기는데 있어서,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전과 같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된 시기도 아니거니와, 게임을 즐기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시기도 아니기에 사실상 이전처럼 PC방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는 힘든 상태다. 어떤 의미로, 우리가 기억하던 PC방에서 함께 놀면서, 그야말로 랜파티가 수시로 일어나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제 정말 ‘추억’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 PC방이 아니더라도, 오프라인 문화는 번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프라인 게임 문화가 이전에 비해 쇠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게임이 대표적인 취미로 자리잡으면서, 달리 PC방이 아니더라도 게임을 즐기는 방법은 e스포츠 대회, 코스프레, 오프라인 행사, 팝업스토어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아울러, PC방도 이런 분위기에 밀려나지 않고, 그 나름대로 지속 발전해나가면서 게임을 즐기기 위한 건전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그대로 이전과 같지는 않다고 보는 시선들도 있지만, 그만큼 이러한 PC방을 즐기는 방식이 계속 변화하는 시점이기에 아직 온전히 바뀐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 마찬가지로 PC방도 그에 걸맞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온라인 시대에 접어들면서 게임업계에서는 PC방과 같은 오프라인 문화를 이제는 쇠퇴했다고 보고 다소 외면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기회와 가능성이 산재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을 즐기는 문화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NN 취재 기자) 이찬중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즐기는 것과 더불어, 지금의 PC방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 별점·평점이라는 표면
별점의 역사를 짧게 훑어보자. 최초의 별점은 1820년경 영국의 마리아나 스타크가 펴낸 『유럽대륙 여행가이드』라 알려져 있고, 본격적으로 별점이 대중화된 것은 1920년대 시작된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을 통해서다. < Back 별점·평점이라는 표면 20 GG Vol. 24. 10. 10. 별점의 역사를 짧게 훑어보자. 최초의 별점은 1820년경 영국의 마리아나 스타크가 펴낸 『유럽대륙 여행가이드』라 알려져 있고, 본격적으로 별점이 대중화된 것은 1920년대 시작된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을 통해서다 [1] . 국내에 경우 『조선일보』에 기고하던 영화평론가 정영일이 미국의 영화평론가 레너드 말틴이 매년 발간한 『레너드 말틴의 영화 가이드북 Leonard Maltin's Movie Guide 』의 별 4개 만점 시스템을 별 5개 만점 시스템으로 변경해 가져온 것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으며 [2] , 1995년 『씨네21』의 창간과 함께 대중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포털사이트의 시대가 열리며 영화는 물론 음악, 문학, 만화 등 거의 모든 대중문화 영역에 별점 평가를 남기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플랫폼의 시대인 지금 음식점은 물론 배달, 과외, 중고거래, 택시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 별점 평가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악의적인 별점테러가 자영업자에게 큰 손해를 입히거나 창작자의 평판을 박살내는 등 일종의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별점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출발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상을 평가하거나 평가를 찾아보기 위한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의 영역에서 특히 공고하게 자리 잡은 별점 평가는 기자와 평론가들이 남기는 잡지와 신문의 공식적인 별점부터 (지금은 서비스 종료한) 네이버 영화와 다음 영화의 네티즌 평점, 왓챠피디아나 키노라이츠와 같은 관객 개인이 직접 평점과 짧은 평을 남길 수 있는 서비스로 이어진다. 해외의 경우에도 IMDB와 레터박스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다른 방식도 존재하는데, 단순한 호불호를 표기하는 것이다. 가령 레너드 말틴이 별점평가를 도입한 것과 비슷한 시기 대중적 영화평론가로 이름을 알리던 로저 이버트는 ‘엄지 올리기/내리기(thumbs up/thumbs down)’ 평가방식을 도입했는데, 이와 같은 방식은 ‘썩음/신선함(rotten/fresh)’으로 호불호를 표기하고 참여한 이들의 평가 비중을 퍼센트화하여 공개하는 로튼토마토로 이어지며, 현재 CGV에서 사용하는 ‘골든에그’ 평가의 경우에도 이를 참조한 것이다. 별점 평가가 대상을 수치화하는 것에 비해 단순 호불호만을 표시하는 이러한 방식은 조금 더 환영받는다. 별점 평가가 별점테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넷플릭스에서 별점을 폐지하고 좋아요/싫어요 표기 체계로 변경한 바 있다. 혹은, 아예 메타크리틱에서처럼 각 사이트의 평점을 100점 만점 시스템으로 환산하여 조금 더 정교한 평점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게임 웹진의 글인데 영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다. 현재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 또한 사실 별점보단 단순 호불호 평가다. 스팀의 경우 긍정적/부정적 평가만 남길 수 있으며, 긍정적 평가가 80~100%는 매우 긍정적, 70~79%는 대체로 긍정적, 40~69%는 복합적, 20~39%는 대체로 부정적, 0~19%는 매우 부정적으로 구분되고, 리뷰가 500개 이상이면서 긍정적 평가가 95~100%일 경우 압도적으로 긍정적, 0~19%인 경우에는 압도적으로 부정적, 리뷰가 50개 미만이면서 80~100%는 긍정적, 0~19%는 부정적으로 표기하는 등 총 9개의 평가로 구별된다. 2017년 국내 런칭한 게임 전문 커뮤니티 플랫폼 ‘미니맵’의 경우 별 5개 평가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유저가 남긴 평가를 기준으로 취향과 성향에 맞는 게임을 추천해준다는 지점에서 영화 별점 플랫폼 왓챠피디아와 유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게임 부분에서 전문가들의 평점으로 채워지는 대표적인 매체는 메타크리틱일 것이다. 영화, 드라마, 음악, 게임 등의 분야에서 여러 웹진이 남긴 평점을 종합해 100점 만점으로 평균을 내는 메타크리틱은 대부분의 극찬(Universal acclaim, 90~100), 전반적인 호평(Generally favorable reviews, 75~89), 복합적이거나 보통(Mixed or average reviews, 50~74), 전반적인 혹평(Generally unfavorable reviews, 20~49), 압도적 저평가(Overwhelming dislike, 0~19)의 다섯 단계로 구별된다. 여러 전문가의 평가를 종합한다는 점에서 로튼토마토가 신뢰를 얻는 것처럼, 여러 평점을 종합한 결과라는 지점에서 유저들의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게임의 정식출시 전 미리 플레이해본 평론가와 기자들의 평점이 가장 먼저 공개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관심도가 높다. 이처럼 평점과 별점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중 비평의 가장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트리플A 게임의 메타크리틱 점수가 공개되는 날이면 소셜미디어와 게임 커뮤니티에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주요 게임의 대형 업데이트는 스팀 평가란의 변동을 통해 즉각적 반응으로 표기된다. 영화에서의 별점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수다거리 정도일 뿐 뉴스거리까진 되지 못하지만 [3] , 메타크리틱이나 스팀 평가의 공개와 변동은 게임언론의 기사로 다뤄지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디스이즈게임은 지난 2월 출시된 <그랑블루 판타지 리링크>가 출시 당일 스팀에서 ‘복합적’ 평가를 기록한 것이 며칠 뒤 ‘매우 긍정적’으로 변한 것을 두고 “출시 초기의 악평을 극복한 모양새”라고 평가한다 [4] [5] . 게임메카는 지난 4월 <백영웅전>, 이번 8월 <검은 신화: 오공>이 각각 출시를 앞두고 공개된 메타크리틱 평점을 보도하며 평점과 리뷰 내용을 종합하여 게임을 평가한다 [6] . 물론 스팀의 평가는 출시 이후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가 남긴 평가이며 메타크리틱은 평론가와 기자 등 전문가로 구성된 이들이 남긴 평점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두 평점 모두 게임의 퀄리티를 평가하는 주요한 지표로서 자리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점은 정말로 비평의 기능을 수행하는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의 사례처럼 유저와 전문가 사이의 견해 차이가 논란으로 비화된 사례는, 어떤 면에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전문가들이 남긴 평점이 비평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메타크리틱에서 현재 132명의 전문가에게 93점(100점 만점)을 받아 ‘메타크리틱 머스트-플레이’ 마크를 받은, 163,543명의 유저에서 5.8점(10점 만점)의 평점을 받아 ‘복합적 혹은 평균’을 받은 상반된 평가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비평이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나아가 이것이 논란으로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평점이 비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증거한다. 오히려 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질만한 것은 게임즈비트의 저널리스트 딘 타카하시가 <컵헤드>의 튜토리얼을 가까스로 통과하고 첫 스테이지마저 클리어하지 못하는 처참한 게임플레이 [7] 를 보여준 뒤 혹평하는 프리뷰 기사 [8] 를 작성했던 사건이다. 게임의 기본적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그의 플레이는 많은 게이머로 하여금 ‘전문가’로서 활동하는 그의 전문성을 의심케 했다. 평점이 갖는 비평으로서의 기능 이전에 전문가로서 전문성을 갖지 못한 이들이 평점을 남긴다는 사실은 많은 게이머의 분노를 끌어냈다. 사실 전문성이란 것은 애매한 영역이며, 명확한 기준은 없다. 더군다나 게임 평론가가 되기 위해서 (게임제너레이션의 공모전 등이 있긴 하지만) 등단을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게이머들은 그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을 요구한다. 마치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영화 별점을 매길 때 “비평적으로 할복자살할 마음의 준비” [9] 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종종 게임 평론가들이 남긴 평점은 그들의 모든 비평적 견해를 대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하지만 게임 평점을 남기는 일련의 전문가들이 겪는 고충은 단지 평점 혹은 별점이라는 표면만으로 환산되기 어렵다. 그것은 비평 행위라기엔 (정성일의 말이 드러내는 것처럼) 너무 가볍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은 2007년 영화 <디 워>와 관련해 영화비평과 관련한 논란이 벌어졌을 당시 대중비평(mass criticism)에 관한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비평에서 드러난 ‘대중’은 기존 평론가들이 제시하지 못한 참신하고 새로운 각도의 영화보기의 가능성에서부터 파워 블로거나 파워 트위터리안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에 의해 쉽게 의견이 조작될 수 있는 획일성까지, 또한 특정 영화인이나 비평가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악플에서도 드러나듯이 별다른 성찰이 없는 파시즘적인 양상까지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0] 프롬소프트웨어의 <엘든 링>이 출시됐을 당시 메타크리틱 97점이라는 평론가 점수가 논란이 됐었다. 게임 자체의 높은 난이도 속에서 평론가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온전한 평가를 내렸을지에 관한 의심과 평점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만들어낸 논란이었다. 이에 대해 유튜버 ‘중년게이머 김실장’이 남긴 말은 참고할만 하다. “(<엘든 링>이라는) 하나의 타이틀이고 똑같은 게임인데, 우리는 그 게임을 통해서 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까?” [11] 모든 문화예술 작품(혹은 상품)은 향유자의 경험을 전제로 삼는다. 다만 그 경험의 파생물로서 등장하는 비평이 비평으로서 승인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대상을 경험했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 김실장의 말은 하나의 게임을 두고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딘 타카하시의 다소 극단적 사례처럼 플레이 실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선호하거나 더 잘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 장르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마감의 문제로 평론가에게 부여된 게임플레이 시간의 제약이 문제일 수도 있다. <엘든 링>이나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이 볼륨이 큰 게임의 경우 하나의 게임을 전혀 다른 경험으로 받아들일 길이 게임 자체에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게임플레이 경험은 녹화되어 리플레이될 수 있을지언정 과학적으로 재연될 수는 없다. 그 경험은 한 편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만큼 동등한 경험이 되지 못한다. 게임 비평이 지닌 곤란함은 여기서 출발한다. A라는 게임의 고인물이 B 게임의 뉴비가 되기도 하고, 모든 게임을 훑어가며 플레이하는 라이트 유저와 하나의 게임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헤비유저 사이의 차이도 존재한다. 그 안에서 비평의 토대라할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꽤나 곤란하다. 누군가가 발견한 요소를 누군가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여러 제약이 가져오는 탐색의 불가능은 게임 전체를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모두가 비평가의 태도로 게임을 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가? 웹진과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별점과 평점은, 영화에서의 별점이 일종의 마케팅 효과를 지닌 것처럼, 게임 구매를 결정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줄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을 진지한 비평과 등치시키는 것은 경험의 차이, 혹은 평점이라는 표면 뒤에 있는 리뷰와 비평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것에 가깝다. 참고하되 그것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 우리는 미슐랭 3스타 식당에 가서 음식 맛이 없다고 할 수도, 이동진 평론가가 별 5개를 부여한 영화를 보고 지루함에 빠져 잠들 수도 있다. 경험이 상대적인 것처럼 비평 또한 상대적이다. 별점과 평점은 그 상대성의 표현일 뿐이다. [1] 김성태 (2021.05.24). ‘별점’의 함정, 무엇이 문제인가. <지디넷 코리아>. https://zdnet.co.kr/view/?no=20210524104310 [2] 한현우 (2009.03.31). [그것은 이렇습니다] Q: 영화나 뮤지컬에 '별(★)점'을 매기는 이유는?.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30/2009033002002.html [3] 물론 올해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박평식 평론가가 별점 4.5개를 준 것으로 크게 화제가 되며 기사까지 난 적이 있지만, 이는 오히려 예외적 사건이다. 대부분의 영화기자/평론가의 별점은 보도자료나 포스터 디자인 등 마케팅의 하나로써 사용된다. [4] 김승주 (2024.02.06). '복합적'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스팀 평가 역주행한 게임. <디스이즈게임>. https://thisisgame.com/webzine/nboard/11/?page=3&n=184405 [5]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복합적’ 평가의 주된 이유는 출시 초기 발견된 버그 때문이었다. 버그나 최적화의 문제는 유저 평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평가기준이 된다. 다만 서로 다른 기술적 환경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 사이에서 그것은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나아가 그것은 비평과 얼마나 관련 있는가? 이것은 이 글에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6] 이우민 (2024.04.22). 평작과 수작 사이, 백영웅전 메타크리틱 78점. <게임메카>.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748202 , 김미희 (2024.08.19). 분위기·전투 호평, 검은 신화: 오공 메타크리틱 82점. <게임메카>.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752250 [7] Cuphead Gamescom Demo: Dean's Shameful 26 Minutes Of Gameplay https://www.youtube.com/watch?v=848Y1Uu5Htk&embeds_referring_euri=https%3A%2F%2Fnamu.wiki%2F&source_ve_path=MjM4NTE [8] Dean Takahashi. (2017.08.24.). Cuphead hands-on: My 26 minutes of shame with an old-time cartoon game. GameBeat. https://venturebeat.com/games/cuphead-hands-on-my-26-minutes-of-shame-with-an-old-time-cartoon-game/ [9] 정성일, 허문영 (2010). [씨네산책2] 정성일과 허문영이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2). <씨네21>. 776호. [10] 심영섭 (2007). ‘대중비평(Mass Criticism) 시대’의 등장, 그리고 비평가와 대중의 거리(距離). http://fca.kr/ab-1068-4 [11] 엘든링에 대한 엇갈린 평가? 경험과 기대에 대한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LSndHMGBFMA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게임과 예술 : 게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문에 현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 일정한 미적인 속성을 체계적이고 인공적으로 구성한 형식이 아니면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했다. 사진과 영화가 아날로그 기술적 혁신에 대응하는 형식이었다면, 게임은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고도의 예술형식이라고 보는 게 당연하고 타당했다. “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 Back 게임과 예술 : 게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12 GG Vol. 23. 6. 10.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다" - 베르그송 1. 게임은 예술인가 우문에 현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 일정한 미적인 속성을 체계적이고 인공적으로 구성한 형식이 아니면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했다. 사진과 영화가 아날로그 기술적 혁신에 대응하는 형식이었다면, 게임은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고도의 예술형식이라고 보는 게 당연하고 타당했다. “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1) 더욱이 게임은 일찌감치 여느 예술 못지않게 당대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과 감정을 담아냈다. 어쩌면 그 이상이다. 게임은 사람들과 ‘호흡’한다고, 게임을 통해서 사람들끼리 ‘공명’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도대체 게임의 어떤 점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MMORPG에서 여럿이 함께 난관을 하나씩 극복하며 최종보스를 잡는 경험도, 싱글 액션게임에서 고독한 게이머가 산산히 흩어진 세계(와 조각난 이야기)를 힘겹게 짜맞추어 나가는 과정도, 예술적 경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임은 기존의 예술적 형식과 경험을 반복하는 동시에 갱신하며, 예술·세계·경험을 확장시킨다고 봐야 했다. 물론,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는 과정이 녹록하지 않고, 여러 불편한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있었다. 전례가 있지 않은가. 영화 사진 만화 등 뒤늦게 등장한 예술형식들은 이 통과의례를 거쳤으며, 여전히 시험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임이라고 예외는 될 수 없을 테니,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고난의 시기’만 잘 넘기면, 어렵지 않게(?) 정착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당연히 준비할 거리는 있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과 미술 같은 예술과 똑같지는 않았기에 ‘설명’이 필요했다. 새로운 형식들을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 그 때문에 다른 특성을 띠는 게 무엇인지, 밝혀야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꼬였다. 이 점에서 게임은 영화에 비해서 운이 나빴다. 그것도 매우. 2. 서사, 그 예견된 잘못된 만남 생각해 보면, 문학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였고, 그만큼 성공할 때가 많았다. 미술과 음악은 물론이고, 최근에 등장한 영화까지 문학의 위성예술로 만들고자 했던 전례를 생각해 보라. 문학의 이른바 ‘멀티’ 행보는 유구하게 악명 높다. 2) 역사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미술이었다. 역사와 함께 태어났지만, 미술은 언제나 ‘찬밥’ 신세였다. ‘시는 회화와 함께’ut pictura poesis라는 테제처럼, 미술은 문학이 되고 싶었고, 문학의 기준에 따랐다. 아니, 따라야 했다. 더욱이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비롯해 이후에도 쟁쟁한 문학·이론이 뒷받침했다.(서구에서 성경은 역사·서사 자체였다) 역사는 (그리고 종교와 이념과 체제는) 언제나 문학의 편이었다. 역사 자체가 그것들이 뒤섞인 ‘이야기’story이지 않은가. 그들은 마음대로 미술과 음악 등에 마수를 뻗쳤고, 서사를 형식에 상관없이 우격다짐 밀어 넣었다. 미술은 그렇게 종교화나 역사화가 되었고, 음악은 가극이 되었다. 미술의 경우 20세 중반이 돼서야 겨우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평면, 그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어떤 다른 예술과도 공유할 수 없는 유일한 조건이며, 따라서 모더니스트회화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평면성 그 자체에로 향하는 것이다.” 3)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을 ‘평면성’flatness으로 규정하고, 비미술적인 것에 전면전을 선포했다.(물론, 문학이 완전히 ‘청소’된 것은 아니었고, 현재도 여전히 곳곳에서 진지전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다) 영화는 비교적 형편이 나았다. 기술적 태동기를 짧게 거친 후, 영화의 잠재력을 알아차린 전위대가 일찍부터 달라붙었다. 만 레이가 대표적일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다다 등, 그들은 선언부터 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필요하다면 스스로 비문학적 문학을 하는 예술집단이었다. 예술의 외부인 자본과 산업도 한몫 거들었다. 그것들은 영화형식의 기술적 본성을 완전히 실현시켰다. 강철에서 다리로 뛰는 철마가 아니라 바퀴로 구동하는 기차를 제작했듯, 영화의 형식을 완전히 개방시켰다. 매체의 양적 속성을 합리화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순수이론 영역은 오해를 양산했다. ‘기술적 반응과 질료적 실현’은 ‘순수예술·대중문화’의 범주로 엉뚱하게 굴절되어, 결국은 ‘머릿수’ 논쟁으로 곡해되어 전파됐고, 두고두고 ‘서열놀이’가 이어졌다. 이후,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서 교정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일소됐다고 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게임은 영화에 비해서 운이 나빴다. 더욱이 게임은 영화와도 매우 달랐다. 돌연변이나 괴생명체 같다고 할까. 영화는 그래도 사진과 연극이란 징검다리로 기존의 예술과 연결됐고, 예술적 전위들이 재빠르게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에 게임은 모든 게 기존의 예술과 단절되어 발원했다. 최초의 게임 〈퐁〉을 생각해 보라. 출력되는 모니터, 입력하는 인터페이스, 장치내부의 숨겨진 이진수체계 등, 기존의 예술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형식이 달랐다. 더욱이 생산자도 생산환경도 개발자에 실험실이었으니, 완벽한 이종(異種)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후, 문학 미술 음악 등 기존의 예술을 내용으로 ‘흡수’하면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형태로 가시화됐지만, 사진과 영화에 비해서 처음에 느꼈던 이질적인 ‘거리’는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게임이 성숙하고 형식이 완연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자, 설명이 요구됐다. 게임은 예술인가, 예술이면 무엇 때문인가, 꼬리에 물 듯 질문이 이어졌고, 예술적 ‘인정과 인증’이 필요해졌다. 문학은 언제나 그렇듯 독보적으로 빨랐다. 역시 서사가 전가의 보도였다. 장장 2000년 넘게 호령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생각해 보라. 장수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곰곰 생각하면, 문학은 참 이상하다. 미술이나 음악은 다른 곳에 차용돼도 청구하지 않는데, 문학은 늘 청구한다. 때로는 월권을 서슴지 않는다. 게임이 운이 나빴던 것은 (영화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개발과 예술의 거리는, 비평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이 상황은 나아졌다고는 해도,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할 사람도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4) 이론적 무주공산, 누구에게 이보다 쉬운 등반은 없었을 것이다. 놀이론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불가피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게임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관련된 전거를 찾았고, 자연스럽게 인류학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곳에 게임·놀이가 있었으니까. 더욱이 ‘행위’를 설명하기도 적합해 보였다. 그것은 일찍이 다른 문화·예술 형식이 들추어낸 적이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놀이는 미분화된 원시종합적 (예술)형식이다. 모든 게 녹아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정치와 사회를 배우고, 미술도 음악도 춤도 익힌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하면, 사람과 이론에 따라 선택되는 속성의 조합은 무한해진다. 어떤 이는 도박과 가면놀이를, 또 어떤 이는 다른 무엇들을 선택해 조합할 것이다. 이 작업은 끝이 없고, 발굴되는 유적이 늘어날 때마다 가설이 늘어나는 고고학처럼, 게임이 다양해질수록 선택되는 속성들의 조합도 똑같이 늘어날 것이다. 이후, 이렇게 성립한 ‘서사 대 놀이’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승패를 영원히 가릴 수 없는 카드게임과 전혀 다를 없었다. 이쪽이 이 카드(반례)를 내밀면, 저쪽은 저 카드(반례)를 내밀고, 이것이 영원히 진행된다. 이 미학적 PvP에서 문학이 졌을까. 사실 역사에서 문학이 지는 법은 거의 없었다. 역사는 (이념은 종교는 체제는) 언제나 문학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 개개의 논쟁에 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도는 영원히 남는다. 이 문학적 ‘문제’를 제거하지 않는 한, 문학적 ‘해’solution와 씨름해 봤자 소용이 없다. 이 문제는, 이 논쟁은, 이미 문학의 승리를 영구히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전리품’이며, 그런 식으로 폐쇄적인 담론구조를 만들어, 또 다른 생산적 담론을 은폐하고 차단하는 것은 훌륭한 ‘덤’이다. 3. 게임, 해석과 비평의 사이에서 모든 비평은 ‘텍스트’라는 것을 무엇보다 유념해야 한다. 하지만, 이 ‘언어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해서, 떨치기 힘들다. 그것은 본능에 가깝다. 비평조차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평의 내재적 운명이다. “모든 예술은 벙어리인 것이다…시는 언어를 사용하되 사심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즉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다.” 5) 비평이 예술에 대해서 말하는 권리라면,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비평의 태도는 모든 곳에서 ‘언어’를 발견하는 구조주의자와 비슷하다. 6) 그들은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서사를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비문학적인 것을 비평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다. 다른 매체의 고유한 굴곡을 ‘평평하게’ 다듬고 눌러서, 서사의 고속도로를 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언어로 분해하는 게 가장 쉽다. 그러한 해석에 반대해야 하며, 그것이 제1의 공리가 돼야 한다. 앞서 미술의 경우 장장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서사에서 겨우 독립했다고 말했다. 회화론은 1430년대에 와서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트가 처음으로 제창했고, 이때 처음으로 ‘의미 있는’ 그림에서 ‘정확한’ 그림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는 무엇보다 기하학의 세속적 형식인 원근법 덕분이었다. 말하는 방법이 아닌 보는 방법은, B.C. 4세기 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등장한 이후, 장장 1800년이 필요했다. 본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 본래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던 것이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소중한 자산이었지만, 카드 한 장에 불과했다. 카드게임을 할 만큼 패가 두둑히 마련된 것은, 20세기를 거치며 수많은 실천과 이론이 축적된 이후였다.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자(미래파)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년) 같은 작업은 텍스트가 한치도 침입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기껏해야 작품 전까지 작가의 행로나 그의 태도나 같이 활동한 집단을 묘사할 따름이다. 언어가 주변을 웅성거리며 맴도는 그곳은, 텍스트의 무덤이다. 7) *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블라디미르 타틀린. 그래서 〈에디스 핀치의 유산〉이나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같은 게임을 조심해야 한다. 물론, 좋은 게임들이란 사실은 틀림없다. 몇 시간 몰입해 끝내고 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솟구칠 것이다. 변신이나 미로 같은 구조를 보면 카프카를 언급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전체주의와 반영웅을 보면서 근대체제의 우의allegory로 분석하고 싶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입장에 따라서는 윤회까지 떠올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를 들어, 〈디아블로 3〉 2회차 경험을 생각해 보라. 과연 게이머가 레아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생각할까. 티리엘의 (지위) ‘하강’을 보면서 희랍비극의 과오harmatia 개념을 끄집어낼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이머의 머릿속에는 이번에 할 빌드와 하늘에서 ‘찰랑’ 빛나며 떨어지는 전설 아이템만 주시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이 346회차 하니까 서사적 경험은 1/346으로 줄었군 하면서, 게임의 평균회차로 서사적 경험을 ‘나누면’ 문제가 해결될까. 혹은 딱 한 차례 경험한 게이머를 심층면접해서 따로 정리해 ‘본질적’ ‘핵심적’ 서사적 경험을 증류하면 충분할까. 이런 식의 접근법은 넌센스다. 여기서 서사는 놀이동산에 입장할 때 필요한 ‘입장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가 인물도 사건도 심지어 개연성까지 타락시켰지만, 게이머가 게임을 계속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임에서 서사는 기껏해야 필요조건 중 하나지,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8)9) * '에디스 핀치의 유산'(위), '바이오쇼크'(아래) 4. 미술이라는 전례, 미래의 전령으로서 게임 현대에 미술은 문학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 본질로 부르든 핵심이라고 하든 ‘하나’를 고수하는 대신에, 그 하나마저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을 영역이라고 한다면, 무대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틀고 연극도 하고 강의도 하는 등, 실행가능하고 상상가능한 모든 행위가 ‘전시’되며, 심지어 요리도 한다. 미술은 말 그대로 ‘일반예술’이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게임은 미술과 비슷하다. 여러 다른 예술을 흡수하는 동시에, 심지어 경제 사회 정치 등 다른 부문까지 끌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과 게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술이 ‘사용’하는 수준이라면, 게임은 각각의 부문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윌리엄 깁슨) 깁슨의 말대로 미래가 널리 퍼져 있지 않을지는 몰라도, 게임이 미래의 일부를 선취해 게이머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최소한 게임이 전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일찍이 하우저는 연극을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부대끼며 대화하고 논쟁하며, 근대적 시민으로 형성됐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고독한 개인의 ‘묵독적 (혹은 해석적) 태도’가 연극은 물론 영화까지 점령했지만, 초창기 영화도 연극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10)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서 왁자지껄하게 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장면을 상기해 보라. 그곳에서 지금과 같은 개인의 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상은 없었다. 그 경험은 집단적이었고 역동적이었다.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의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이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Zertreuung과 정신집중Sammlung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영화는, 관중으로 하여금 비단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와 아울러 이러한 영화관에서의 관중의 비평적 태도가 주의력을 포함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종교의식적 가치를 뒷면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관중은 시험관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그는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인 것이다.” 11) 벤야민은 이 분산적 태도에서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예술(영화), 주체(대중)를 모색했다. 벤야민은 영화를 분석하며 미래를 진단했지만, 그의 묘사는 게임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물론, 그것이 연극이나 영화처럼 민주주의적 경험은 아닐 것이다. 벤야민이 기대했지만 실패했던 미래의 사회도 미래의 예술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과거의 예술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문학적 패악은 끝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각작용aesthesis 일반’의 변화다. 미시적 습속들의 변화, 말하는 화법들,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는 방식들, 물건을 교환하고 결제하는 행태들,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식들, 혹은 작업장의 봇들이나 디지털 사회범죄 같은 문제들 등등, 그 밑바닥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꾸준하고 착실하게 변화를 추동하는 기술적 동향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기원을 게임에서 찾자는 게 아니다. 그런 것도 있을 것이고,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경험과 태도의 변화를 게임이 주도하며, 게이머를 (혹은 인류를) 훈련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관찰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잘 만든 AAA게임에 주목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게임과 다른 사건과 다른 기획을 주시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 어차피, AAA게임들은 본성상 비평(제도)에 친화적이다. 그런 게임들은 언제나 할 ‘이야기들’이 많고, (게임 외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그러면 다른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예를 들어, 통계적 피드백을 게임에 접목해 게임행위를 미묘하게 비트는 행태 같은 것.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뻔한 서사적 결말들보다, 게임행위에 개입하는 통계수치의 ‘효과’를 분석하는 게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중요한 (윤리적) 판단을 할 때마다 통계수치와 비교해 보는가. 통계적 지표는 관찰대상이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지표의 기능을 상실한다. 피드백 루프가 발생해, 게이머가 행동을 선택할 때 지표로 삼는 순간, 지표기능이 교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별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렇게 미묘하게 인간·게이머의 ‘결정구조’를 변화시키는 방식들, 거칠게 말해서 수치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12) 게임 외부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메타의 메타버스 기획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블리자드 인수계획 같은 게 있겠다. 언뜻 보기에 메타의 메타버스는 과거 〈세컨드 라이프〉를 상기시킨다. 둘 다 커뮤니티 서비스의 3차원 확장인데, 게임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세컨드 라이프〉는 현실의 ‘보완재’에 불과했다면, 메타의 기획은 ‘대체재’를 지향한다는 것. 실패했지만 메타가 2019년 암호화폐 리브라를 발표했던 것도 생각해 보라. 메타의 메타버스는 온전한 세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인류 이주계획’인 것이다. 이 계획에서 게임이 직간접적으로 매개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달리 다가오는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행보도 의미심장하기는 비슷하다. 최근 인공지능 때문에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게임 쪽 확장도 광폭이다.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RPG 스튜디오 베데스다를 인수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까지 노리고 있다. 독점 논란 때문에 여의치 않아 보이지만, 성사만 된다면 어떤 양상이 벌어질지 사뭇 흥미롭다. 알다시피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사회’다. 시작은 달랐지만 이런저런 흐름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 메타의 '메타버스' 한때 예술은 미래의 안테나라고 했다. 이제 게임은 현재에 도착한 미래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균등하고 불균질적일 지라도. 1)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224~5. 2) 한국에서도 비슷한 패악이 되풀이됐다. 2000년대 초중반, 영화비평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때, 계간지 〈창작과비평〉은 ‘문학적으로’ 영화비평을 딱 한 번 시도했다. 편집위원 김영희가 앞장섰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김소영이 〈창작과 비평〉의 월권을 거세게 비판하며, 일단락(?) 되었다. 3) 클레멘트 그린버스, “모더니스트 회화,” 〈현대미술비평 30선〉, 계간미술편중앙일보사, 1992, 67쪽. 4) 이후 매체예술이나 뉴미디어 형태로 미술에서 반응하기 시작하긴 했다. 2000년 개최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디지털 호모 루덴스〉가 초창기 상황을 보여준다. 5) 노스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 한길사, 2000, 48쪽. 6) 들뢰즈,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518쪽. “사실상 오로지 언어적인 것에만 구조가 존재한다…무의식은 그것이 말하는 한에서, 그리고 언어인 한에서 구조를 지닌다. 신체는 징후들이라는 언어를 통해 말하는 한에서 구조를 지닌다. 사물들은 기호들의 언어인 침묵의 담론을 취하는 한에서 구조를 지닌다.” 7) 그러나 러시아 구성주의의 미래는 ‘배드 엔딩’으로 끝났다. 미래의 사회(였던) 소련에서 미래의 미술은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현재가 된 사회에서 과거의 문학에 패배했다.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는 일리야 레핀의 아류이자 후계자들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갈음됐다.(벤자민 부흘로, ‘팍투라’에서 ‘팍토그람’으로,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시각과언어사, 1995 참고) 8) 영화나 게임에서 비평가의 진술과 관객과 게이머의 선호가 충돌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쓰기 좋은 소재와 관객과 게이머의 경험은 ‘우연히’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하기 좋은 게임이 반드시 좋은 게임인 것도 아니다. 조금 과장하면, 졸작은 졸작대로 할 말이 많다. 9) 〈엘든링〉 같은 게임에서 파편화된 이야기 조각들을 찾는 게 ‘또 다른’ 게임행위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게이머가 서사와 무관하게 시간을 통제하며 행동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행태는 루카치가 생각했던 근대적 주체의 의미찾기 같은 게 아니다. 죽은 시체에서 단서찾기 같은 것으로, 에른스트 블로흐가 ‘죽은 이야기’라며 비판했던 범죄소설의 형식과 비슷하다. 영웅적인 주체가 의미를 찾는 여정이 약물중독자의 수수께끼 풀이로 귀결되는 것을 주류 (문학) 이론가들은 못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장르문학 딱지를 붙이며 서열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그렇기는 하다. 10) 1973년 〈록키 호러 픽쳐 쇼〉가 우발적으로 인기를 끌며, 이 정적이고 묵독적이고 해석적인 태도를 공격했다. 이 컬트영화가 영화제도와 관객성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 소규모 ‘반란’은 이내 진압되었다. 지금은 영화역사서 아니면,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다. 반면 게임에서 행위는 ‘디폴트 값’이다. 11)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228~9쪽. 12) 현재 미국은 범죄자의 재범가능성을 엄격한 수학적 통계적 알고리즘에 따라 평가하고 반영한다.(데이비드 섬프터, “편향없음은 불가능하다,”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해나무, 2022) Tags: 예술 미술 비평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김상우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미술 , 매체, 게임 세 가지로 세상을 응시하며 미술기획과 글쓰기하며 활동했다. 〈죄악의 시대〉(2010), 〈딱 한 판만〉(2009)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게임과 문화연구〉를 같이 썼고, 〈친밀한 살인〉, 〈튜링스 맨〉 등의 책을 옮겼다.
-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020년 이래 아이폰은 충전기 미포함으로 출시되고 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포장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서, 판매되는 아이폰 한 대당 소요되는 원자재량 및 포장용 패키지 절감을 통해 운송용 팔레트 한 대당 70% 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어 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Calma, 2020). < Back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2 GG Vol. 25. 2. 10. you can see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at below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3a3f169a-8f0a-4d4b-b844-a2fb22042dcc From physical to digital, 실물에서 디지털로 2020년 이래 아이폰은 충전기 미포함으로 출시되고 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포장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서, 판매되는 아이폰 한 대당 소요되는 원자재량 및 포장용 패키지 절감을 통해 운송용 팔레트 한 대당 70% 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어 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Calma, 2020). 이러한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애플의 충전기 미포함 조치는 친환경 전자제품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스마트폰 제조사뿐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여타의 제조업체들 또한 친환경적인 제품을 만들거나 최소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수익(2024년 기준 1,870억 달러)과 이용자수(2024년 기준 33억2천만명), 그리고 시간(하나의 제품이 매달 30억 시간에 달하는 엔터테인먼트 제공 가능)에 있어 세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분야(Ball, 2021; Konvoy Ventures, 2023; Sinclair, 2023; Technavio, 2025)는 어떨까? 비디오게임 및 디지털 산업 전반과 환경 간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비디오게임이 물리적 형태였던 시대(역주: 패키지게임 시대)에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으로는 위키피디아에 전용 페이지도 개설되어 있는 “아타리 비디오게임 매립”사건을 들 수 있는데, 2014년에 출간된 의 저자인 레이포드 귄스(Raiford Guins)는 1980년대에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해당 사건이 있었던 매립지 인근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Guins, 2014)한 바 있다. 이 전설적인 매립지 사건은 비디오게임 산업에 있어 플라스틱 사용의 절감이나 친환경적인 포장 등을 고민하는 지속가능성의 개념이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Martin, 2020), 이 시기 비디오게임이 물리적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이용자들은 비디오게임과 환경 간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스토어가 열리고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서 더 많은 게이머들이 실물 카피 대신 게임을 다운로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비디오게임 산업에 있어 친환경이라는 개념은 서서히 탄소 발자국과 에너지 소비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원의 청정도를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현재 우리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게이머, 퍼블리셔, 개발자, 정책입안자, 연구자 등 모든 측면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Tapsell & Purchese, 2021).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기반의 게임 언론 유로게이머(Eurogamer)의 크리스 탭셀(Chris Tapsell)과 로버트 퍼체스(Robert Purchese)는 게임과 환경에 관한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를 비롯해서 소비자로서 우리가 보다 책임감 있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심층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Tapsell & Purchese, 2021). 뿐만 아니라 환경을 주제로 하는 게임 제작 이벤트인 그린게임잼(Green Game Jam) 등의 운동이나 이니셔티브도 진행 중이다. “그린 게이밍(Green Gaming)”이라는 용어 또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이 찾아낸 비디오게임과 환경과 관련된 문제들은 무엇이며, 학계가 규정하는 그린 게이밍이란 무엇인가? Detour: A little bit about method, 연구방법론 간단히 살펴보기 최근 나는 동료들과 비디오게임과 환경 문제와 관련된 학술 논문과 단행본 및 챕터, 학회 발표문, 논문을 포함한 50개의 문서에 대한 체계적 검토를 진행했다(이 논문은 현재 심사 중이다) (Ho et al., 2024). 우리는 “그린게이밍(Green Gaming)”이나 “에코게임(Ecogames)”와 같은 여러 키워드를 활용해서 Web of Science와 Google Scholar 등 다양한 논문 추천 시스템을 포함한 여러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았다. 그 결과 400편 이상의 문서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를 제목과 초록 및 본문을 검토하는 여러 번의 스크리닝 과정을 거쳐 50개의 관련 문서를 골라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Main Contributors, (게임과 환경간 연구의) 주요 기여자들 미디어 연구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게임연구(traditional game studies)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이해를 구축하는데 기여해왔다. 미디어 연구분야는 비디오게임이 문학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텍스트의 일종으로서 이론적, 비평적 분석을 통해 보다 심도 있게 통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경향은 분석 대상의 대부분이 게임연구 분야의 논문이었던 우리 연구팀의 초록, 제목, 카테고리에 대한 단어 분석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알렌다 챙(Alenda Y. Chang)의 와 벤자민 에이브러햄(Benjamin J. Abraham)의 등의 대표적인 저작들은 비디오게임과 환경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개발자, 퍼블리셔, 소비자들이 비디오게임 산업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에 실린 여러 챕터들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 탐구를 볼 수 있다. 비디오게임은 단지 예술 작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도구이자 실현이다. 따라서 다른 영역들 또한 비디오게임이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를 이해하거나(심리학) 교육 목적으로 활용하거나(교육이나 건축) 비디오게임을 작동시키는 기술에 직접적으로 기여(컴퓨터 사이언스)하고 있다. 컴퓨터 사이언스 분야의 논문 대부분은 게임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기술과 방법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클라우드 게이밍이 이론상 친환경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제안(Chuah et al., 2014)되기도 했으나, 스태디아(Stadia)의 실패에서 보았듯, 클라우드 게이밍은 성공적으로 구현되지 못했다. 다른 연구에서는 클라우드 게이밍이 단순히 에너지 부담을 데이터 센터로 옮기는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데이터 센터들이 게임 운영 지원을 위해 일주일 내내 24시간 가동되어야 함을 지적하기도 한다(Aslan, 2020; Mills et al., 2019). Education: From video games to pro-environmental awareness, 교육: 비디오게임으로부터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까지 비디오게임의 핵심 하드웨어인 그래픽처리장치(GPU)는 현실을 시뮬레이션하기에 모자람 없는 성능을 제공해왔다. 현대 기술은 현실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창조해내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인간, 오우거, 마녀들이 놀랍도록 현실에 가까운 일상을 보낸다. 날씨 또한 사실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데, 추우면 몸을 떨고 비가 내리면 몸이 젖으며 들고 있던 철검이 번개를 맞기도 있다.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비디오게임의 몰입감과 포토-리얼리스틱한 그래픽은 기술적 관점을 넘어 예전 나의 스승이 수행했던 연구에서 암시했던 부분, 즉 (비디오게임이) 현실과 대중의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 과학자, 그리고 교육자들 또한 이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제프리 펑(Jeffrey Fung)은 태양계와 항성, 행성들은 시뮬레이션하는 GPU 기반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Fung, 2020). 따라서 환경 문제에 있어 비디오게임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용도 중 하나는 인식의 제고일 것이다. 연구자들은 특정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시리어스게임 또는 교육용 게임에서 잠재력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킥스타터 프로젝트로 시작하여 후에 미국 교육부의 지원도 받게 된 게임 에서 플레이어들은 생태학적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예측된 유성 충돌을 막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졌다. 이 게임에서 설계된 유한한 자원과 외부적 영향 요인은 현실적인 게임플레이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는 실제 상황에서 부딪히게 될 여러 어려움들이 반영되어있다 (Fjællingsdal & Klöckner, 2019). 연구자들은 또한 시리어스 게임, 상업용 게임, 풍자적 게임, 게이미피케이션 앱들이 게이머의 친환경적 행동 채택을 장려하는 효과를 평가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환경 문제 및 환경 착취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디자인된 이러한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의 인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게임 내 지속 가능한 기술들을 일상 생활의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어 중간 정도의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Boncu et al., 2022). 최근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 타이틀을 연구 대상으로 활용한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에드워드 J.크로울리는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게임의 교육적 측면을 연구하기 위해 <레드 데드 리뎀션2(Red Dead Redemption2)>의 세계를 활용했다(Crowley et al. 2011). 연구자들은 게임에 묘사된 야생동물종에 대하여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지식을 테스트했보았다. 그 결과 가상세계 내 여러 동물종과의 상호작용은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즉 플레이어들)의 종 식별 능력을 향상시켰는데, 특히 유제류와 어류에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 내에서 물고기를 잡는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물고기의 이름, 서식지, 심지어는 소리까지 배우고 기억했다. 그런가 하면 게이머들이 가상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색 식물이 많은 장소에 끌리고 이러한 지역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도 관찰됐다(Truong et al., 2018). Video games are more than playing, 비디오게임은 단순한 플레이 이상이다 비디오게임의 기술적 측면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컴퓨터 과학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문 분야는 ‘플레이’라는 비디오 게임의 특정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비디오 게임은 영화나 문학처럼 면밀히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간주되어 왔다(Gee, 2006). 그러나 영화나 문학의 경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행위는 상이한 개인들을 가로지르는 번역이 가능하다. 즉 의미에 대한 해석은 개인별로 다를 수 있지만, 소비하는 행위 자체는 개인들 간의 차이를 가로질러 동기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다양한 설정, 선호도, 장르에 따라 개인들 사이에서 상이하게 이해된다. 예를 들어 <콜오브듀티(Call of Duty)>의 플레이경험은 <캔디크러쉬(Candy Crush)>과 매우 다르다. 따라서 전통적인 게임 연구자들은 비디오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예를 들어, 게이머들이 <레드 데드 리뎀션2>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와 같은 가상 세계에 몰입할 때, 그 플레이는 예상치 못한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Crowley et al., 2021; Truong et al., 2018). 이에 더해 모든 게임에는 의도된 플레이 방식이 존재함에도, 스피드런(게임을 가능한 한 빨리 완료하는 것), 챌린지(한 가지 메커니즘만 사용하여 게임 완료하기), 모딩(외형 변경 또는 새로운 게임 만들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게이머들은 언제나 새로운 참여 방식을 찾아내 왔다. 이러한 행동들은 플레이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여기에는 비디오 게임에 내재된 무한하고 경계 없는 창의성이 구현되어 있다(Lamerichs, 2024; Scully-Blaker, 2024). 게이머들이 비디오 게임에 보다 빠져들수록 게임에 대한 다른 생각의 가능성 또한 증가한다. 그에 따라 연구자들도 비디오 게임 및 게임산업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진화시키고 있다(Abraham, 2022a; Fizek, 2024). 연구자들은 게임플레이에만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개발자, 규제, 퍼블리셔에 대해 보다 많은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의 저자 벤자민 J.에이브러햄(Benjamin J. Abraham)은 비디오 게임의 탄소 발자국을 생산부터 유통, 그리고 최종적으로 게이머들이 플레이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분석했다(Abraham, 2022a). 여기서 에이브러햄은 비디오 게임이 세계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포함해 더 큰 맥락에서 스스로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편 비디오 게임의 하드웨어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문데, 2019년 에반 밀스(Evan Mills)는 동료들과 비디오 게임 하드웨어의 에너지 사용과 관련된 기술적 연구, 에너지 정책, 컴퓨터 에너지 라벨링 프로그램 및 표준, 그리고 규제가 심각하게 부족함을 발견했다(Mills et al., 2019). 결론적으로 비디오 게임 소비가 실제로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제한적인 상황이라 하겠다. Green Gaming,그린 게이밍 2019년, 나는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Breath of the Wild)>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의 봉쇄 기간 동안 <동물의 숲: 뉴 호라이즌>의 섬은 낚시, 나무 심기, 꽃 가꾸기와 같은 일상적인 작업으로 가득 찬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다. 콜린 밀번(Colin Milburn)의 '그린 게이밍(green gaming)'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이러한 게임들은 "환경 통제적인 게임(games of environmental control)"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플레이어들이 직접적으로 환경을 제어하고 조작할 수 있는 유형의 게임을 뜻한다 (Milburn, 2018). 게임 연구의 짧은 역사 동안, 연구자들은 비디오 게임과 환경 간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에코게임,' '생태학적 게임,' '지속 가능한 게임,' 또는 '기후 변화 게임' 등과 같은 다양한 용어들을 '그린 게이밍'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해 왔다(Abraham, 2022b; Abraham & Jayemanne, 2017; de Beke et al., 2024). 하지만 이러한 용어들은 주로 학술적 맥락 내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왔을뿐 아니라, 앞서 설명한대로 플레이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다. 벤자민 에이브러햄이나 에반 밀스 같은 연구자들은 게이밍(gaming)을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유통, 특정 하드웨어의 선택, 이용자의 다변화된 선호도와 행동까지 관여됨으로써 보다 포괄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실제로 '그린 게이밍'을 구글링 해보면 높은 확률로 그 첫 검색 결과로서 HowStuffWorks가 나올 수 있는데, HowStuffWorks에서 다루는 내용의 초점은 게임플레이를 통한 에너지 절약, 하드웨어 재활용, 게임플레이를 통한 환경 인식 제고에 놓여져 있다(Watson, n.d.). 따라서 연구자들에게는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생산, 선택, 구매, 소비하는 것을 포함하는 그린 게이밍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요구된다 할 수 있다. 결국 "그린 게이밍이란, 비디오 게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 모두에 대해 환경을 의식하는 생산, 구매, 소비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개발자와 게이머들의 행동은 단순히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욕망뿐만 아니라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자원 보존에 대한 책임감에 의해 주도된다"(Ho et al., 2024). 기후 변화 및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상 활동에서조차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재고해야 함을 깨달은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라 할 수 있다. 비디오 게임 및 그것이 미치는 환경적 영향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현재 다소 제한적이고 불충분한 상황이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은 젊은 세대에게 지배적인 엔터테인먼트이며, 따라서 이제 질문은 더 이상 비디오 게임의 잠재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비디오 게임을 제작, 선택, 구매, 소비,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것에 놓여있다 하겠다. 참고문헌 Abraham,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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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만 또안 호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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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18 노동의 반대편에 있는, 생산하지 않는 활동으로서의 놀이는 노동과 같은 방식의 효율이라는 방법론을 추구하게 되었다. 생산하지 않는 활동에서의 효율이란 어떤 의미일까? <역전재판 456 오도로키 셀렉션> : 법정 미스터리와 내재적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 ”이의있음!“ <역전재판>하면 가장 먼저 이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이 게임 시리즈를 2009년부터 하기 시작해서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재미있게 하고 있다. 주인공 변호사의 ”이의있음“ 이란 외침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한다. 2009년 당시만 해도 한글판이 정식 발매되지 않았던 때라서 모바일 폰으로 영문판을 사서 플레이했고, 스마트폰, 스마트패드가 생긴 뒤에는 어플리케이션을 구입해서 일본어판으로 플레이 했다. <역전재판>은 2019년이 되어서야 1,2,3편의 합본판이 한글화가 되어 정식 출시되었다. 그리고 올해 초 4,5,6편의 합본판이 출시된다는 소식에 너무나 반갑고 기대가 컸다. 어른이 되어서 하는 <역전재판>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다. 변호사가 외치는 ”이의없음“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만들까? Read More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Read More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Read More [Editor's view] 무용한 것들의 세계 속 효율을 생각하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중 하나였던 김희성(변요한 분)이 자주 하던 말을 떠올립니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그런 것들.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들 중에 유용한 것이 삶을 지탱하는 기초라면, 무용한 것들은 그 기초를 딛고 삶을 좀더 풍요롭게 만들곤 합니다. 먹고 살 만 해지면 자아 실현을 돌아본다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삶은 모두에게 요원하지만 누구나 꿈꾸는 것이겠지요. Read More [논문세미나] Time War: Paul Virilio and the Potential Educational Impacts of Real-Time Strategy Videogames 이번 논문 세미나는 하나의 사진과 함께 시작해 보려고 한다. 2011년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 상황실에서 찍힌 이 사진에서 오바마를 비롯한 현장의 인물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한데 모으고 있다. 회의를 하면서 띄워둔 자료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심각한 문제 발언을 했던 걸까? 여러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사진은 사실 빈 라덴 급습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을 지켜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한 것이다. 이들은 빈 라덴이 사살되기 전까지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을 모두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본 논문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게임, 젠더 연구자인 로렌스 허프스(Laurence Herfs)가 일본 학술지 ‘Replaying Japan’에 2021년에 투고한 논문이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외부자의 시선(특히 서양)에서 일본 게임을 일본 학술지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Read More [인터뷰] 공동연구처럼 돌아가는 스피드런의 세계, 스피드런 유튜버 천제누구 생산을 위해 기획된 방법론인 효율은 오늘날 디지털 게임에서 주요한 플레이 방법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효율적인 플레이를 위한 전략이 동원되고, 최고의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 플레이의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효율적 플레이의 정점에, 최단시간 내 게임 클리어를 목적으로 하는 스피드런(speedrun)이 있다. Read More 게임의 쓸데없음과 효율성의 미학: 게이머는 왜 하필 게임에서 효율적 행위를 추구할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 하느라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야!’ 이어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장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청년, 청소년들은 ‘가정-내-관리자’로부터 고함을 동반한 힐난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고통을 수반한 손길까지 언제든 주어질 수 있음을 감수해야 했다. Read More 나는 짤렸다: 미국 게임계의 해고 붐 한복판의 현장 스케치 2023년 11월 나는 짤렸다. 상사가 예정에도 없는 짧은 미팅을 제안했고 그 때 부터 뭔가 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고 있던 큰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해지했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불안함은 현실이 됐다. 상사가 나에게 절대 퍼포먼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해줬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Read More 물류는 게임 속에 어떻게 재현되는가 물류 전문기자로 살아온 것이 어언 10여년. 필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니 “물류는 어디에든 있다”이다. 물류(物類)란 그 단어가 품은 의미처럼 ‘만물의 이동’이다. 우리가 물류라고 굳이 인식하진 않겠지만,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오늘 입고 신은 옷가지와 신발, 식당에서 사용한 식기와 반찬 종지까지 모든 것에는 물류가 따라왔다. Read More 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없다 도발적인 제목을 들고 왔지만, 놀랍게도 필자는 어린이가 아니다. 더 놀랍게도 필자는 아직 2세가 없다. 당사자성이 없는 사람이 어린이와 게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게임제너레이션(GG) 편집장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가정에 어린이가 있는 필자를 새로 구해보시는 게 어떠냐'라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편집장은 '어린이가 없는 입장이 보다 객관적'이라고 답했다. GG 편집진의 고약한 취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Read More 인벤토리 시스템은 어떻게 효율을 재미로 연결시켰는가?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꽉찬 인벤토리에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2023년 대흥행을 이루었던 <발더스게이트3>에서는 아이템의 무게가 발목을 붙잡는다. 일반적으로 처음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어떤 아이템이 좋은 아이템이고, 어떤 아이템이 ‘잡템’인지 알 수 없어서 보부상처럼 모든 아이템을 들고 다닌다. 그러다 걸음걸이가 무거워지면 아이템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이때 무엇을 들고 다닐 것이고 무엇을 버리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유튜브나 커뮤니티에는 ‘발더스게이트 인벤토리 관리 꿀팁’ 글들이 무수히 올라와 있다. Read More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디지털게임 비평의 활성화와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매년 게임비평공모전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2024년의 공모전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Read More 타이쿤, 자유로운 세상을 생각하다 <돈스타브>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농사의 중요성을 알고있을 것이다. 당장의 굶어 죽을 위기에서 안정적인 식량 보급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밥을 찾아 헤매는 일은 너무나도 고달프다. 따라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게이머들은 어느 순간부터 터를 잡고 작물들을 키워나간다. 더 ‘효율적’으로 작물을 수집하기 위함이다. Read More 판단하고 행동하는 효율의 <피크민 4> 프라스카를 포함한 루돌로지스트 관점에서의 분석대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지털digital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비디오 게임은 세계를 어느 정도 계산 가능한 것digit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숫자로 치환된 현실을 가진다. 이것은 디지털 게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다. Read More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Read More 효율 같은 건 필요 없어: 느리고 답답하게 게임하기 효율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플레이 방식일 필요는 없다. 게임에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공에 관심 없는 것이나 열등하거나 패배적인, 혹은 의도에서 벗어난 부적응적인 태도라고 보긴 힘들다. <월든>에서 소로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속도를 발견했듯이, 무엇이 게임에서 ‘성공'인지 각자가 내리는 정의가 다를 뿐이며 플레이어 각각에게 존재하는 삶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비효율적인 게임 플레이는 게임이 단순한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닌 복합적인 경험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Read More 효율, 계산 가능성 그리고 민맥싱 테크 전문 월간지인 와이어드WIRED는 지난 3월 [1](효과/효율적 이타주의의 종언)이라는 장문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째서 특정한 철학 사조를 비판하는 철학자의 글이 기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잡지에 실리게 됐으며, 이토록 큰 관심을 유도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효과/효율적 이타주의(통칭 EA)가 처한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EA는 실리콘 밸리의 유력한 엔지니어들과 테크 억만장자들(이 두 그룹은 종종 겹친다.) 사이에서 이미 실질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ead More
- 그 많던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은 어디로 갔을까
자칫 우리는 게임과 게이밍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을 고정된 무언가로 잠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이 대상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다양한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게이머라고 부르는 집단은 결코 과거의 그들이 고정되지 않은 채 새로 들어오는 이와 나가는 이로 진폭을 만들며, 그 개개인 또한 시간과 환경의 변화 속에 각자의 이유로 변해간다. < Back 그 많던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은 어디로 갔을까 14 GG Vol. 23. 10. 10. 한때 대한민국을 휘어잡던, ‘한국인의 민속놀이’라는 별칭이 너무도 잘 어울렸던 ‘스타크래프트’는 이제 다른 의미로서의 민속놀이가 되었다. 모든 한국인이 할 줄 안다고 생각하기에 붙었던 민속놀이라는 이름은 이제 ‘틀딱들이나 하는 게임’이라는 의미로 변해가는 중이다. 새롭게 태어나 온라인게임에 진입하는 청소년들은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하지 않고, 혹시라도 중년들이 ‘라떼는 말이야~’로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또 한켠에서 ‘스타크래프트’는 여전히 성업중이다. 출시된 지 20여 년이 지난 게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타크래프트’는 여전히 PC방 점유율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적지 않은 유튜버들의 콘텐츠 기반이 된다. 심지어는 공식리그 종료 후 다양한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자체적인 리그가 자생할 정도니 그 생명력은 명실상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게임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흘러간 옛 게임이 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로부터는 계속 플레이되는, ‘스타크래프트’의 오늘이 보여주는 독특한 모습은 과거 ‘스타크래프트’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90-00년대 기준 2-30대가 중년이 되면서 겪게 된 변화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지상파 TV 프로그램에서 ‘스타크래프트’ 성대모사를 해도 전국민이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사실상 모든 젊은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스타크래프트’에 엮여 있었던 어떤 시기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한국 게임 역사 속에서 가장 대중적인 게임이었을 영광의 순간을 만들었던, 그 많던 스타크래프트 플레이어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게임과학연구원 게임과사람 센터는 2023년 중년 게이머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와 같은 질문을 마주했다. 2020년대 기준으로 중년이 된 약 30여명의 게이머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듣게 된, 그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떠나게 된 이유를 정리해 본다. 그냥 나이가 들어서, 오래된 게임이라서와 같은 당연한 이야기 이상으로 우리를 둘러싼 게이밍 환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되새기게 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라이트게이머는 로컬 플레이를 즐겼고, 그 로컬이 붕괴되어 떠났다 우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들을 간단히 짚고 지나가보자. 당연히도 당시 10대, 20대였던 플레이어들은 신체적 노화와 여가시간의 변화를 맞이하며 ‘스타크래프트’로부터 떠났다. 사실상 ‘스타크래프트’의 왕좌를 물려받았다고 평가받는 ‘리그 오브 레전드’로 왕년의 게이머들이 넘어가지 못한 이유도 대체로 여기에 있다. ‘스타크래프트’는 끝난 것 같고, 다른 게임은 뭐가 있나 보는데 새롭게 등장한 게임은 ‘스타크래프트’보다 복잡해 보이고, 멀티플레이 대전에서 딱히 이기기도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한 중년들은 아예 온라인 대전 게임을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신체 노화(이는 실제로 생물학적 노화보다는 ‘나는 늙었다’라는 자기인지가 더 중요한 개념으로 쓰인다) 속에서도 ‘스타크래프트’라는 콘텐츠 자체를 좋아하는 이들은 조금 색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일명 ‘컴까기’로의 전향이다. "스타의 최대 장점은 1대 7 pc 게임이 된다는 거예요. 혼자서 게임을 하기 좋죠. 치트키 써가면서 신나게 두들겨 패고 막 그런 것들이 되잖아요. 진짜 스트레스 해소인데, 규칙이랑 하는 법은 다 아니까요. (중략) 스타는 단축키가 몇 개 없어서 그나마 쉬워요." (C01) 인터뷰대상자 C01은 가볍게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게이머였다. 중년이 된 이후에도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지만, 과거만큼의 연습시간도 동체시력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배틀넷 대전을 포기했다. 그는 집 PC에 설치된 ‘스타크래프트’로 1:7 AI대전(일명 컴까기)을 즐기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멀티에서 승패를 가리는 대전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적당히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방식으로서의 ‘컴까기’는 그에게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배우는 수고로움까지도 회피할 수 있는 적절한 여가로 남는다. C01의 인터뷰가 중요한 것은 그가 ‘스타크래프트’ 마니아로 분류되는 게이머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2000년대 ‘스타크래프트’ 붐을 형성한 인구의 대다수는 라이트 게이머였다. 커뮤니티에 모여 전략을 연구하고 e스포츠 중계를 챙겨보며 빌드를 연구하고 수련하는 하드코어 이용자보다 대중적 붐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라이트게이머들의 머릿수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니아들은 여전히 유튜브와 배틀넷에 남지만, 이들은 한 번의 열풍이 지나가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빠져나간 이유는 그들이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 콘텐츠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다같이 몰려다니는 재미였죠. 혼자 있으면 굳이 pc방에 가진 않았을 것 같아요." (C08) "스타를 하더라도 과거만큼 당연히 열심히 하지는 않는 것 같고 가끔씩 물어보면 그래서 같이 만나서 게임을 하기가 쉽지는 사실은 않은 것 같아요 ." (C06) 라이트게이머의 ‘스타크래프트’는 게임 그 자체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교류의 수단으로서가 더 강했다. 배틀넷에서 익명의 상대와 1:1로 실력을 겨루기보다 이들의 플레이는 주로 다같이 모여 PC방에 가서 2:2, 3:3의 대전을 벌이는 형태였다. 간혹 모인 친구들의 숫자가 홀수가 나오면 함께 팀을 짜서 배틀넷에 들어가거나, 이른바 ‘깍두기’를 껴주는 방식으로 플레이가 진행되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고 부르는 방식과는 구분된다 . ‘로컬 플레이’라고 이름붙여볼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 기능을 사용하지만, 라이트게이머들의 플레이는 가급적 오프라인에서 이미 관계가 형성된 이들과 함께 즐기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이들은 익명의 상대와 승부를 벌이는 것 자체에는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부담스러움을 느꼈고, 승패와 무관하게 함께 게임하고 노는 일을 중시했다. 올해 초에 국내에 번역된 C. T. 응우옌의 <행위성의 예술>에는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응우옌은 플레이를 그 목적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성취형 플레이와 분투형 플레이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면, 성취형 플레이란 게임이 텍스트 안에서 제시하는 규칙으로서의 목표가 플레이어의 목적과 일치하는 경우이고, 분투형 플레이는 그 목표와 목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다. 배틀넷 기반의 온라인 익명 매치 멀티플레이가 성취형 플레이라면, PC방을 중심으로 오프라인 지인들끼리 모여 벌이는 ‘스타크래프트’ 대결은 분투형 플레이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 붐의 중심을 이뤘던 라이트게이머들은 자신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떠난 이유로 더 이상 게임을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게임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적지 않은 이들이 배틀넷 상에 존재하지만, 애초에 배틀넷 익명 대전이 아닌 로컬 플레이를 즐겼던 이들에게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게임하던 로컬 커뮤니티 – 학교, 동네, 회사 등 – 가 해체되면서 더 이상 게임을 같이 할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스타크래프트’ 라이트게이머들은 결국 나이가 들면서 생활하는 커뮤니티가 변화하며 ‘스타크래프트’를 왕년의 놀이로 추억하게 된 것이다. PC는 점점 더 보편 디바이스가 아닌 환경으로 가고 있다 2000년대의 라이트게이머들이 떠난 자리는 새롭게 자라난 세대가 채우면 될 일이다 .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로컬 플레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가 차지했으니 ‘스타크래프트’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여기에 더해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스타크래프트’는 다소 먼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PC라는 ‘스타크래프트’ 구동 플랫폼의 위상이 맞은 변화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리그 오브 레전드’도 곧 맞이하게 될 변화일 것이다. “집에 PC가 있으면 집에서도 (스타를)하죠. 밤에 집에서 혼자 배틀넷 들어가서도 멀티 했어요.” (C03) “이것도 사실은 좀 불법 영역이긴 한데... 군대 내의 공식 PC방 말고도 업무용 PC에 스타를 깔아서 다른 사무실하고 연결해서 플레이하기도 했었어요.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C06) ‘스타크래프트’는 기본적으로 PC에서 구동되는 게임이다. PC기반의 RTS게임은 키보드 + 마우스라는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스타크래프트’의 조작은 실제로 마우스 없이는 플레이가 매우 어려운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다. 초심자가 새로운 게임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는 의외로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에 대한 적응이 중요하다. 처음 3차원 공간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은 전후좌우로의 이동감각조차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스틱을 사용해 복잡한 커맨드를 넣는 대전격투 게임은 그 숙련도 자체가 문제가 되어 뉴비 유입을 저해하는 요소로도 기능한다. ‘스타크래프트’의 키보드 + 마우스 컨트롤은 언뜻 보기에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가 키보드 + 마우스라는 인터페이스가 보편화된 시대라는 전제 안에서 성립하는 이야기다. 지금의 중년 세대는 1990년대에 이른바 ‘PC 교육 의무화 정책’을 거치면서 어린 시절부터 PC를 다루는 법을 익혔고, 각 가정에는 일종의 필수 가전제품처럼 PC가 한 대씩 놓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20년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이 구비하는 PC의 비율은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2009, 2003)의 ‘인터넷이용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한국 가정의 PC 보유율은 80.9%였으나, 2022년에는 56.2%로 10여년 사이 30%p 이상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PC 외의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디지털 디바이스 전반을 포괄하는 ‘컴퓨터 보유율’이 2022년 기준 81.0%라는 점을 고려하면 모바일 디바이스의 대중화 이후 가정에서의 데스크탑 PC 보유율이 크게 저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집에 들어오면 발가락으로 PC 전원버튼부터 누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PC생활의 시대는 저물어가는 중이다. PC의 키보드와 마우스로 처리하던 많은 일들은 이제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통해 훨씬 더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다. 가정 및 개인용 디지털 디바이스로서의 PC가 태블릿, 스마트폰에 자리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키보드 + 마우스라는 기본 인터페이스의 보편성은 점차 소실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지금 pc는 사용을 할 수가 없죠. 그런 고사양 노트북도 지금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왜냐하면 지금 주로 문서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러고 이제 애들이 있으니까 컴퓨터나 이런 걸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은 주로 하는 거는 피시방에 가거나 아니면은 핸드폰이나 태블릿으로 주로 하니까. 가능하면 이제 모바일 기기에 다가 넣고 하려고 하고 있어요." (A03) 인터뷰에 응한 많은 중년 라이트게이머들에게 PC기반 게임은 이제 상대적으로 하드코어한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었다. 각종 컴퓨터 쇼핑몰에 가보면 볼 수 있는, 게이밍 PC라고 이름붙은 PC의 가격이 사무용보다 훨씬 비싸게 나오는 장면이 이를 증명한다. 게임용 PC는 어느 정도 게임에 관심과 의지가 있는 이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비용을 치르면서 구매하는 무엇이 되었고, 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친구들과 함께 적당히 즐기고는 싶은 수준의 라이트 게이머들은 PC보다는 다른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작동하는 게임으로 중심을 옮기게 된 것이다. PC로 로컬플레이 하던 이들이 모바일 온라인 시대를 맞이하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문화현상이 등장하는 것보다 퇴보하는 것의 원인을 찾는 일은 훨씬 어렵고 쉽게 일반화할 수 없다.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떨어지고 체력이 예전같지 않은 문제부터 경제생활에 종사하며 여가시간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가장 일반적이라면, 이 연구과정에서 나는 그만큼의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라이트게이머들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을 더 많은 이유들을 마주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라이트게이머들이 지적한 두 가지 이유, 로컬플레이의 소멸과 PC환경의 퇴조라는 두 지점은 단지 ‘스타크래프트’ 시절에만 머무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게임과 게이머의 변화까지를 아우르는 무엇이라는 점이었다. 자칫 우리는 게임과 게이밍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을 고정된 무언가로 잠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이 대상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다양한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게이머라고 부르는 집단은 결코 과거의 그들이 고정되지 않은 채 새로 들어오는 이와 나가는 이로 진폭을 만들며, 그 개개인 또한 시간과 환경의 변화 속에 각자의 이유로 변해간다. 사람의 변화도 그러할진대, PC라는,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당연했던 어떤 기기가 다음 세대 혹은 PC게임에 딱히 열정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이제 매우 어색한 기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한다면 우리는 게이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만 한번 더 짚어내는 데 그치고 만다. Tags: 스타크래프트, 중년, 중년게이머, PC, 로컬플레이, 응우옌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보다 책임감 있는 재현을 실천하는 게임을 향해
어떤 매체에 대한 담론은 해당 매체가 겨냥하는 수용자 또는 이용자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매체와 맺는 관계에는 어떤 의도들이 담겨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를 드러낸다. 북미와 유럽의 게임 관련 공공 담론에 있어 오랫동안 게임은 - 거칠게 말해 - 번쩍이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는 오락에 하릴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십대 소년들을 위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왔다. < Back 보다 책임감 있는 재현을 실천하는 게임을 향해 04 GG Vol. 22. 2. 10. - You can see the english version in this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86 어떤 매체에 대한 담론은 해당 매체가 겨냥하는 수용자 또는 이용자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매체와 맺는 관계에는 어떤 의도들이 담겨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를 드러낸다. 북미와 유럽의 게임 관련 공공 담론에 있어 오랫동안 게임은 - 거칠게 말해 - 번쩍이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는 오락에 하릴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십대 소년들을 위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정형화 되어있는 게이머에 대한 인식에 의문을 표하면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실제 사람들의 다양성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부모의 스마트폰으로 처음 게임을 접하게 된 유아들, 〈워드퓨드(Wordfeud)〉 같은 게임에 빠진 은퇴한 여성, 손주와 〈카운터 스트라이크〉 게임을 함께 하는 할머니 게이머 등이 포함된다. 또한 〈포트나이트〉를 배회하며 함께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게이 게이머나 잠든 아기 옆에서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엄마도 포함될 수 있다. 게임 문화의 규범 비평 디지털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당연히 - 정형화된 유형의 플레이어들이 아니라 - 나름의 개별적인 방식으로 게임을 경험하는 실제 플레이어들이다. 지난 십 년간 게임 저널리스트, 문화 비평가, 학자들은 주류 게임 내 젠더와 인종, 장애, 나이, 신체에 대한 재현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왔다. 이러한 논의가 밀도 있게 시작된 것은 북미였지만, 이제는 유럽에서도 규범 비평(norm critique)이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게임 내 재현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3가지로 나뉜다. 첫째, 게임이 사람들의 다양한 정체성 또는 정체성의 여러 측면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둘째, 게임의 이용자층에서 주변화되어있는 사람들에 대한 재현이 어떠한가, 셋째, 게임 업계 내 주변화된 사람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그들의 업무 환경은 어떠한가. 이 세 가지 요소는 공공 담론상에서 상호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게임에서 여성이 부정적으로 재현될 경우 여성 플레이어들이 그 게임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라고 여겨지며, 게임 업계 내 주변화된 사람들의 양상이 개선되면 게임 내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개선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어느 정도 사실일지라도,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점을 게임학자들은 지적한다.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게임들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가 수적으로 적고, 그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한정되는 등 오랫동안 불균형이 존속되어왔으며, 여성 캐릭터들의 외모가 시각적으로 성적인 매력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왔음은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1983-2014년 사이에 출시된 5백편이 넘는 게임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90년대 후반에 정점을 찍은 여성 신체의 성적 대상화는 2006년 이후부터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감소 추세는 업계 전반적으로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게임이 진지한 주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하면서 시작된 느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헬블레이드: 세누아의 희생(Hellblade: Senua’s Sacrifice)〉를 출시한 영국의 게임사 닌자씨어리(Ninja Theory)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타밈 안토니아데스(Tameem Antoniades)는 인터뷰를 통해 이 게임이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정신병으로 인한 고통이 어떠한 경험인지 플레이어들이 진정으로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2018년 덴마크에서 인디게임 데모로 출시된 〈포가튼(Forgotten)〉은 알츠하이머로 인한 고통이 어떠한지를 표현했다. 이 게임은 현재 오토스코피아 인터랙티브(Autoscopia Interactive)에서 개발 중이다. 유럽의 인디게임 업계 또한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물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게임개발사 픽셀 헌트(The Pixel Hunt)가 개발한 〈Bury me, My love〉는 유럽을 횡단해서 프랑스 파리까지 이동하는 한 시리아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2021년 가을에는 영국의 AAA 게임사 플레이그라운드 게임즈(Playground Games)가 인기 레이싱 게임 〈포르자 호라이즌(Forza Horizon)〉의 다섯번째 판을 내놓으면서, 게임 내에서 의수나 의족을 찬 캐릭터를 생성하는 것과 성 중립적인 대명사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주류 언론의 헤드라인을 통해 알렸다. 많은 논쟁이 게임 캐릭터에 대한 재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운데, 포용적인 게임 디자인이 이 특정한 문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상하고 있는 인디게임 산업은 AAA 산업의 잘 다듬어진 모델 너머에 존재하는 경험들을 전달하고자 하는 게임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게임들은 또한 컴퓨터 앞에서 오랜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을 수 없는 플레이어들에 맞는 플레이 모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상은 IO인터랙티브(IO Interactive) 같은 소수의 거대 스튜디오를 제외하고 대부분 소규모의 인디 게임 개발자들로 구성되어있는 덴마크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 〈포가튼(Forgotten)〉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경험을 전달하고자 하는 짧은 게임이다. 기억 상실과 왜곡의 감각을 주기 위해서 게임 캐릭터들의 얼굴이 흐려져 있다. 플레이어층의 확장 이처럼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는 변화상은 플레이어층의 다양화라는 두번째 문제로 부분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게임산업은 새로운 수용자층을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플레이어들에 호소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게임 내 주변화된 정체성에 대한 재현과 플레이어층의 다양성 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으며, LGBTQ 등 주변화된 집단의 사람들은 게임 내 LGBTQ 캐릭터가 부정적으로 재현될지라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주류 매체조차 게임 내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문제적 재현에 관심을 가지면서, 게임사들이 그와 같은 부정적인 정형화를 반복 재생산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공공 담론 그 자체가 게임업계로 하여금 강력한 구매력을 지닌 집단을 겨냥하여 새로운 이용자층으로 포섭하도록 장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 내 주변화된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묘사의 문제는 상황의 한 단면을 설명하는데 그칠 뿐이다. 많은 주변화된 집단들은 여전히 괴롭힘과 차별,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데, 특히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할 때 심각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플레이어의 주변화 문제를 다루는 유럽 내 담론이 주로 (젊은) 여성 플레이어의 경험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종이나 사회·경제적으로 주변화된 사람 등 여타의 주변화된 집단의 상황은 여전히 공공 담론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주변화된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을 존중하면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음에도, 게임 업계가 여전히 그러한 집단이 지닌 플레이어로서의 가능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대를 통한 노동 조건의 개선 지난 수년 간 게임 업계 내 주변화된 사람들의 문제는 상당한 주목을 받아왔다. 업계 내 주변화된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1ReasonWhy 해쉬태그를 통해 업계 내 차별과 성차별주의, 괴롭힘에 대해 알리기 시작하면서 십년 전부터 주목 받아온 이 문제는, 지난 몇년 동안 유럽의 AAA 업체 내 유해 업무 문화나 성적 부정행위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다시 헤드라인에 오르기 시작했다. 북유럽에서는 아직 이와 유사한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러 매체에서 폭력이나 가해 행위의 몇 가지 사례를 다룬 바 있다. 노동조합은 명백히 이와 같은 문제에 대처하는 기관으로서 주변화된 노동자들을 위한 환경의 개선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강력한 노동조합의 전통을 지닌 스칸디나비아 반도임에도 이 권역 내 게임 업계의 노동자 조합은 아직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주변화된 인물에 대한 책임감 있는 게임 내 재현이나 남성 게이머라는 정형화된 규범의 바깥에 놓인 플레이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문화의 조성 등과 같은 다양한 논의들이 벌어지고 있는 공공 담론의 다른 한편에서는 업계 내 조직의 변화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다 요르겐센 이다 요르겐센은 덴마크의 코펜하겐 IT 대학(IT University of Copenhagen)에서 게임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젠더 재현, 게임 문화, 매체로서의 게임 등과 관련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서던 덴마크 대학(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에서 박사후 과정 중에 있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공명하는 사무라이: 역사적 정확성과 시장성 사이에서
이제 어느 정도 피로감마저 느껴질 만큼 야스케라는 인물이 게임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실에 대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반발은 이미 잘 알려진 논란이 되었다. 이 논란은 2024년 처음 불거졌는데, 사실 2022년의 유비포워드Ubifoward 행사에서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가 ‘코드네임 레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당시에는 야스케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 Back 공명하는 사무라이: 역사적 정확성과 시장성 사이에서 24 GG Vol. 25. 6. 10. ***You can see an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3b16cb9b-4ee8-4852-86b0-0147005c11c6 ***원문의 상세 각주는 원문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야스케, 프랜차이즈에 합류하다 이제 어느 정도 피로감마저 느껴질 만큼 야스케라는 인물이 게임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실에 대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반발은 이미 잘 알려진 논란이 되었다. 이 논란은 2024년 처음 불거졌는데, 사실 2022년의 유비포워드Ubiforward 행사에서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가 ‘코드네임 레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당시에는 야스케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2024년 5월 15일 공개된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처음 유비소프트는 야스케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논란은 이때부터 불붙었다. 캐릭터 공개 이후 두 달 넘게 서구와 일본 양 쪽의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 캐릭터의 디자인 선택을 둘러싼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서구의 일부 보수적 성향을 지닌 게이머층은 야스케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어 격렬한 토론을 벌였으며, 일부는 개발팀 멤버들을 향한 사이버불링도 시도했다. 유비소프트는 2024년 7월 23일 다소 모호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명목상으로는 일본 커뮤니티를 향한 메시지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세계 이용자층을 겨냥해 자신들의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야스케. 이 성명은 야스케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이는 역사적 정확성에 관한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지금까지 어쌔신크리드라는 프랜차이즈가 특정한 관객층들을 어떻게 만족시켜 왔는가에 더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2021년 de wildt, Auspers의 연구에 따르면(이 연구는 유비소프트의 전직 게임디렉터 및 고위개발자 수십 명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어떤 시대적 배경을 선택하느냐는 결정에서 시장성Marketability을 우선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비소프트는 ‘마케팅-브랜드-에디토리얼 버거’라는 모델을 사용한다. 이는 프랜차이즈의 핵심 요소는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소스(문화적 배경)’는 그때그때 바꿔 새로운 고객층을 유입시키거나 기존 고객층의 재구매를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어쌔신 크리드> 프랜차이즈 대부분의 게임은 핵심 고객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인공을 내세워 왔다. 예를 들어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켄웨이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소Nassau(역주: 바하마의 최대도시)와 카리브해 인근의 식민주의 역사를 경험케 한다. <어쌔신 크리드 2>와 <어쌔신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에지오 아우디토레라는 주인공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문화를 체험케 하고, <어쌔신크리드: 레벨레이션>에서는 에지오를 매개로 하여 비교적 (서구인들에게) 낯선 이스탄불이라는 공간을 탐험하게끔 한다. 주인공이 좀더 복잡한 경우(예를 들어 <어쌔신크리드 3>의 코너 켄웨이, <어쌔신크리드: 프리덤 크라이>의 아드왈레 등)에도, 게임의 중심 구조는 여전히 유럽 및 미국의 관점으로 구성된다. 왜 이처럼 <어쌔신크리드> 시리즈는 서구 중심의 디자인을 지속해 왔을까? 그리고 이번 야스케 논란은 이러한 디자인 경향으로부터 어떠한 단절 혹은 연속성을 보여주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정확성보다는 ‘공명Resonance’, 즉 관객의 기대와 감정적 반응을 우선하는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확성의 문제: 역사적 정확성과 게이머의 기대 사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18년간 꾸준히 역사적 정확성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에 있어 왔다. 관련한 게임 매체들의 기사만 해도 수 천 건에 달하고, 이를 다룬 학술논문과 단행본의 챕터들도 무수하게 출판된 바 있다. 초창기 논의에서는 주로 게임이 교육의 도구로서 활용되거나 혹은 고고학적 모델, 과거 사건에 대한 충실한 재현의 사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역사적 정확성은 필수적이라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게임 디자인에서의 여러 요소들, 이를테면 다루는 지역, 시간적 배경, 게임 서사가 집중하는 주요 사건들에 걸쳐 투영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게이머들이 게임의 중심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 그 시대적 배경과 조화를 이루는 인물이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배경, 이야기, 캐릭터가 일관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화가 실제 역사적 진실과 부합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게임에서 다뤄지는 역사적 정확성이란 언제 어떤 지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일정 수준의 허용 가능한 왜곡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아담 채프먼Adam Chapman은 플레이어가 자신의 사전지식과 게임 속 역사적 요소가 일치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게임은 비로소 ‘역사적으로 공명historically resonant’한다고 본다. 실제 플레이어들은 일반적으로 게임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변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특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처럼 암살단, 기사단과 같은 비밀조직 뿐 아니라 외계인 음모론까지 등장하는 경우에는 이를 좀더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이번 작품에서도 암살단과 기사단에 대응하는 일본 내 조직인 카쿠시바 잇키, 신바쿠후와 같은 설정이 있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러한 구조적 왜곡은 시리즈 전반에서 나타나며, 실존 인물들을 게임 속에서 틀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야스케에 대해 가해진 각색 역시 다른 주요 인물들에 비해 특별히 과도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쌔신크리드: 오딧세이>의 소크라테스와 아스파시아, <어쌔신크리드: 오리진>의 클레오파트라 역시 높은 수준의 각색을 거친 사례다. 이 시리즈는 역사 그 자체라기보다는 언제나 ‘역사적 픽션’이었으며, 이는 제작사인 유비소프트 또한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해 온 사실이었다. 유비소프트는 2025년 발표한 공개 메시지에서 야스케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시리즈의 공식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며 그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삶이 이 프랜차이즈의 패턴과 잘 부합한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언급한 de Wildt와 Aupers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마케팅적 고려가 언제나 주요한 판단 기준이며, 모든 서사적, 표상적 결정은 ‘시장에서 가장 많은 이용자층’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책임자인 장 게스동Jean Guesdon 또한 대중적 유행을 반영해 프랜차이즈 판매를 강화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여년 간 점점 대중문화콘텐츠 내에서 가시성이 높아진 야스케라는 인물을 기용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서 다양한 시각적 기호들과 색채 감각을 차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즈>는 야스케를 단순한 유색인종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일본사회에 접근하는 외부자로서의 캐릭터로 설정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플레이어(역주: 서구권 플레이어를 가리킨다)와 마찬가지로 외부자의 시선에서 접근해 일본을 서서히 이해해 가는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플레이어가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유명한 사무라이들, 이를테면 미야모토 무사시나 사사키 코지로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전략적 접근이다. * 야스케는 일본의 전쟁에 난반(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개념을 사용한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게임사의 이상적 대상 선정 기준과 역사적 정확성에 부합하는 선택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학계에서도 주목받은 바 있었다. 필자의 기존 연구에서는 이 결정과정을 ‘대표성representation과 동일시identification 사이의 긴장’으로 분석한 바 있다. 영화연구자 찰스 애클랜드Charles Acland는 영화의 맥락에서 ‘동일시’란 관객이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장소, 다른 인물의 상황 속으로 몰입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지적했다. 이와 반대로 ‘대표성’은 관객이 자신의 경험들에 쉽게 흡수할 수 있는 인물과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관객으로부터 ‘나에게 와닿는다’는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이며, 지난 10여년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 대한 학술적 비평의 주요 주제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는 항상 이와 같은 쉬운 동일시가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왔다. 비록 주인공이 그 시대와 문화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더라도 서구권의 핵심 게이머층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황, 혹은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마련되어 있어 왔다. 그런 점에서 야스케는 매우 독특한 사례다. 그는 봉건시대 일본에 외부자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시리즈가 제공해온 주체적인 주인공으로서의 포지션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그의 등장은 분명 혁신적이고 새롭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지만, 연구자 키쇼나 그레이Kishonna Gray가 아이티를 배경으로 삼았던 <어쌔신크리드: 프리덤 크라이>의 아드왈레 사례에서 지적했듯, 게임의 기본 틀이 여전히 백인 중심의 미국, 유럽을 기준으로 한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백인 캐릭터라 할지라도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게임 내 서사가 결국 서구 중심의 관객 시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즈>에서 흑인 이방인인 야스케는 또다른 주인공인 일본 태생의 나오에와 비교했을 때 게임 내 여러 공간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제한을 갖지 않는다. 실제였다면 좀더 강한 충돌과 도전적인 상황이 나왔을 많은 요소들은 게임 속에서 상당히 부드럽게 처리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게이머와의 공명’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면, 야스케라는 캐릭터가 전면에 나선 선택은 충분히 논리적이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기존 10여 년간 게임이 우해대 온 이용자층과는 다른 새로운 이용자층을 겨냥하고 있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야스케가 DEI(다양성, 평등성, 포용성)에 기반한 채용이라고 비난받은 사례는 해당 캐릭터의 서사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유색인종과 동일시하기 어렵다는 이용자층이 가진 인종적 편협성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쌔신크리드> 가 보여준 그간 어떠한 주인공이라도 그 이야기가 역사적 진실에 철저히 부합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기에 이러한 비판은 모순적이기도 하다. 이번 반발 사태는 적어도 서구권에서는 인종과 성별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에 반해 일본측의 반응은 좀더 절제된 양상이면서 게임 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성스러운 장소(역주: 이를테면 신사의 토리이 같은 곳의 훼손 가능성 문제 등)에 대한 훼손 요소를 향한 우려가 주된 쟁점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즈>에서 표출된 논란은 과연 서구권 전체 게이머층의 의견을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일부 특정한 소비자집단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부각된 것인가? 보상의 국면: 상품으로서의 야스케 야스케에 대한 게이머들의 반응이 실제로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를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른바 ‘성공’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목소리가 큰 일부 게이머층의 반응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좀더 국제적이고 넓은 범주에서의 게이머 수용 양상을 고려해야 할까? 혹은 비평적 평가를 참고하되 이를 고립된 사례로 볼 것인지, 아니면 최근 시리즈 작품들과의 비교 맥락 속에서 평가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현재까지 평론가와 게이머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플랫폼으로는 메타크리틱을 꼽을 수 있다. 비록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도 일부 조직적인 리뷰 테러 시도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메타크리틱을 통해 보면 실제로 오픈월드 기반 시리즈들 사이에서의 비교에서는 꽤 안정적인 패턴을 볼 수 있다. 평론가 평점에서 <섀도우즈>는 81점, <발할라>가 80점, <오디세이>는 83점, <오리진>은 81점으로 대체로 유사한 수준이다. 이용자 평점의 경우 전체적인 비율에서 부정적 리뷰가 많다는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섀도우즈> 62점, <발할라> 60점, <오디세이> 68점, <오리진> 73점으로 <섀도우즈>에 대한 평가는 기존 시리즈에 대한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흐름 안에 놓인다. 종합해보면 비평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이번 작품이 전반적인 품질 면에서 기존 시리즈와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이용자 평가에서는 직전 작품에 비해 소폭 개선된 반응이 나타난다.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섀도우즈>에서 ‘극단적으로 낮은 점수’의 비중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는 점인데, 이는 리뷰 테러의 영향을 시사하는 지표일 수 있다. 메타크리틱 역시 다른 리뷰 플랫폼과 같이 적극적으로 로그인해 리뷰를 남길 만큼 깊숙하게 개입하는 게이머층의 의견이 과대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평가점수의 일관성은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상대적 안정성을 드러내고 있고, <섀도우즈>또한 이 흐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야스케를 둘러싼 논란은 실제 판매 실적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는가? 산업적 차원에서 게임이 보이콧되거나 판매실적 부진으로 이어졌는지 또한 중요한 지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판매량을 보면, <섀도우즈>는 이 프랜차이즈의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출시 첫 날 판매량을 기록했다. 1위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외부효과에 힘입어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발할라>임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수치다. * 모든 오픈월드 기반 <어쌔신크리드> 타이틀에 대한 리뷰 점수 집계(미라지 제외). 장기 판매량 분석에 따르면 현재까지 <섀도우즈>는 플레이스테이션5 플랫폼에서만 약 170만장이 판매되었다(Alinea, 2025). 아직은 장기 판매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며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점은 감안하자. 참고로 <오디세이>는 첫 달동안 약 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현재의 경제상황 속에서 가처분소득에 대한 압박을 고려할 때, 이번 작품이 과거를 아우르는 역사적 대성공에 가까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상업적 성공으로 평가할 만한 수치는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문제의 본질은 정확성 이슈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학계의 반응이란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이다. 질적연구와 비판적 담론은 좀더 긴 출판 주기를 가지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시점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번 작품이 프랜차이즈의 기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가 아니었음을 고려한다면 학계의 후속 결과 또한 지난 10년간의 의견과 유사한 합의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즉, <섀도우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시장적 선택’을 따랐으며, 적절히 기능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임의 핵심 공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다. 어떤 면에서 이번 작품은 우리가 2007년부터 익히 알아온 그 <어쌔신 크리드>이며, 특히 2017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오픈월드 형태로의 전환 이후의 방향성을 그대로 이어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틀의 유지 속에서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새로운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게임과 같은 가상세계에서 발생한 의례 공간의 훼손 문제에 대한 비판은 주로 학술 담론장 안에 국한되어 왔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국가 차원의 대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다. 이는 <어쌔신크리드> 시리즈가 파리 노트르담 성당 화재 이후 복원 지원을 통해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장식하며 공식 찬사를 받은 것과 같이 서구권 국가들이 유비소프트의 콘텐츠와 상호작용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야스케 논란은 출시 초기 이후 점차 온도가 식어가고 있으며, 프랜차이즈 전반에 걸쳐 존재해 왔던 인종과 성별 문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으로 흡수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이 논란이 여전히 흥미로운 점은, 이번 사례에서 이용자들의 정서가 어떤 방향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점에서다. 야스케는 현대적 감수성과 이용자 수요에 영합하는 기업적 행보로 비판받았지만, 기존과는 다른 사례였다. <오디세이>에서 알렉시오스가 서브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제공되었을 때는 별다른 논란이 없었고, <오리진>의 개발 기획에서 최초에는 여성 캐릭터 아야Aya가 주인공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실제 출시 후에는 남성 바예크가 진주인공격으로 구성된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큰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이용자들이 이른바 ‘정확성’에 대해 보이는 경직성은 실제 정확성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적 취항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만약 이번 논란이 정말로 특정 캐릭터가 가진 역사적 정확성에 관한 문제였다면, 그동안의 시리즈 속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에 대해 이번과 같은 격렬한 논쟁이 나타났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Andrei Zanescu Andrei Zanescu is a postdoctoral fellow and part-time faculty member in Communication Studies, and Anthropology & Sociology, at Concordia University, in Montreal, Canada. He specializes in AAA studio cultural adaptation practices involving resonance as a corporate strategy, as well as the legitimation of games through the formation of awards bodies tied to film and television cultural capital. He regularly publishes game and platform studies concerning a range of games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 DOTA 2) and awards bodies, and in New Media & Society (2021), Games & Culture (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 (2021) and Convergence (Forthcoming). He is also a co-author of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 (MIT Press, 2025).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콩코르디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와 인류학·사회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 및 시간강사로 재직 중이다. AAA 게임 스튜디오의 문화적 적응 관행에서 '공명(resonance)'을 기업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영화 및 텔레비전의 문화 자본과 연결된 시상 기관 형성을 통한 게임의 정당화 과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DOTA 2 등 다양한 게임과 시상 기관에 관한 게임 및 플랫폼 연구를 활발히 발표하고 있으며, 《New Media & Society》(2021), 《Games & Culture》(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2021), 《Convergence》등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MIT Press, 2025)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Can “Black Myth: Wukong” Be Truly Understood Beyond Chinese Cultural Borders?
As a cultural epicentre of East Asia for centuries, China has consistently brought its classical literature to games. From the earliest days of video games, Chinese developers have adapted their classic literature like “Investiture of the Gods (Fengshen Yanyi)” and “Strange Tales from a Chinese Studio (Liaozhai Zhiyi)” into virtual worlds. < Back Can “Black Myth: Wukong” Be Truly Understood Beyond Chinese Cultural Borders? 24 GG Vol. 25. 6. 10. ** You can see a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f480c8b6-53a4-4440-a3f4-af2f6c23e547 As a cultural epicentre of East Asia for centuries, China has consistently brought its classical literature to games. From the earliest days of video games, Chinese developers have adapted their classic literature like “Investiture of the Gods (Fengshen Yanyi)” and “Strange Tales from a Chinese Studio (Liaozhai Zhiyi)” into virtual worlds. Among these classics, “Journey to the West” in particular has been adapted into numerous games. Since the 8-bit era, Chinese game studios have repeatedly reimagined the tale through various genres, as seen in titles like “A Chinese Odyssey”, “ The Journey to the West 2”, “Water Margin” etc. (For more details on this, check out our previous GG article: "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 (Korean only) The digital adaptations of Chinese classics like “Journey to the West” extend across the broader East Asian cultural sphere, as their imaginative world and iconic characters have inspired countless modern media. For instance, in Japan, arcade games like “SonSon” (1984) were adapted directly from the novel. Then there’s the manga series “Dragon Ball” inspired by “Journey to the West”, which became so famous worldwide that its protagonist’s name ‘Son Goku’—a Japanese pronunciation of ‘Son Wukong’—particularly became a norm. In South Korea, animations like “Flying Superboard” and its sequel “Sa Oh Jeong” series—a Korean pronunciation of ‘Sha Wujing’ that is one of the main characters of “Journey to the West”—still bring people’s nostalgia from childhood. And even today, many Korean kids grow up reading educational comic books like “Magic Thousand Characters”, again inspired by the “Journey to the West”. These examples illustrate the remarkable cultural elasticity of this classic literature, capable of transcending national boundaries and resonating with contemporary audiences across generations. However, the initial announcement of “Black Myth: Wukong” was somewhat mixed with high anticipation as well as cautious scepticism. On the positive side, the game’s teaser trailer showcased a well-polished action-adventure experience, bringing gamers’ excitement about the game’s visual aesthetics and combat design. It also raised anticipation of how well ancient mythology would be able to come to life in modern digital gameplay. At the same time, some expressed concern as it is yet another “Journey to the West” adaptation that has been tried numerous times, which posed a risk of players' higher expectations and potential criticism on the industry’s creative stagnancy (i.e., ‘revamp, again?’). This mixed response was also accompanied by broader concerns about the Chinese game industry at that time, which had yet to produce internationally well-received, critically acclaimed ‘cultural heritage’ game titles. How “Wukong” gameplay mechanics shine through its genre Fortunately, “Black Myth: Wukong” received a positive reaction upon its release as it stands out for its storytelling and technical mastery within the action-adventure genre. Drawing inspiration from traditional Chinese martial arts like staff yielding and spear-based Wushu, the game delivers a delicately designed combo-driven combat system. Its powerful attacks are exaggerated just enough to feel engaging without becoming overblown. The true triumph of its combat design, however, lies in its diverse and intricately designed boss combats. Rather than relying on copy-paste fighting scenes, the game challenges players to solve the puzzle of various combat patterns. Interestingly, there is no difficulty selection menu in “Black Myth: Wukong”, which is a hurdle for some players. This makes the game’s early stages undeniably challenging, reminding us of infamously difficult ‘Souls-like games’. But the game balances this with a classic game design principle: Let the time and effort get you through. As players progress to the later stages of the game, they can naturally gain access to new spells that gradually ease the difficulty. This gradual progression of the game offers a sense of relief to the players, assuring them that their tryouts will eventually be rewarded. Importantly, even though the game does have a Souls-like vibe, it avoids one of the genre’s more punishing features, and players don’t lose anything upon game over. In a nutshell, “Black Myth: Wukong” is not easy, but it also doesn’t wholly withdraw casual players. Instead, it managed to find a balanced middle ground. Of course, evaluating a game based solely on its in-game mechanics would only offer a partial understanding of its overall design. If the game had just focused on featuring a combat system without a deep dive into the original story and world setting of the “Journey to the West” classic, the game’s true meaningfulness would have been greatly devalued. Fortunately, “Black Myth: Wukong” achievements in combat design gain full significance as they align well with its narrative. First of all, the game sets itself as a sequel to “Journey to the West”, focusing on what could have happened after the original classic. This way, the developers enabled the game’s creative flexibility, allowing them to reinterpret the classic mythology through a modern lens – reshaping the story suitable for the 21st-century players. A modern reinterpretation of a pre-modern fantasy world Like the “Investiture of the Gods”, another well-known Chinese classic fantasy literature, “Journey to the West” portrays various mythological creatures called ‘Yaoguai’. The Yaoguai kings and Yaoguai chiefs in “Black Myth: Wukong” are placed in the game not in chronological order according to the classic but based on how relevant it is for the game’s system and combat progression. So, rather than retracing the already-familiar story of the pilgrimage of Sun Wukong, the game opens the venue for the story of a mysterious warrior named “The Destined One”, Wukong’s successor, which makes the game’s progression more compelling in an action-adventure game structure. Meanwhile, the world that “Black Myth: Wukong” portrays is set after the conclusion of the original story of “Journey to the West”. Like many ancient classics, the original novel concludes with a happy ending and a moral message – that the world (probably) became better after the epic journey to the West. I mean, if sacred Buddhist scriptures were successfully brought to China, the world was meant to usher in an era of compassion and enlightenment. Right? Apparently not. The story of “Black Myth: Wukong” persistently challenges the idea that the pilgrimage was far from lasting salvation. In the game, we can see that the villages mentioned in the original story now remain in ruins. It is revealed that Sun Wukong, who, in the original classic, is described as having achieved enlightenment after his journey, had already died. The Buddhist scriptures were far from ushering in a utopia. What’s even more devastating about the “Black Myth: Wukong” story is that the people left in ruins no longer seek salvation through religious belief. The hope is very much lost. Instead, they cling to the idea that one day, the monkey king will resurrect. And that’s when the game’s protagonist, The Destined One, embarks on a quest to gather Wukong’s scattered relics (“Six Senses of the Great Sage”) to bring him back to life. As such, the game sets itself apart from the core message of the original classic. It’s not the Buddhist scriptures that would bring salvation, but people themselves—a hero, the protagonist (the player). Another story element to look into is the world setting. The world depicted in the original “Journey to the West” was set in strict hierarchies between divine beings, humans, and non-humans (Yaoguai). It is not strictly based on one’s origin (e.g., birth, species) but something that one’s commitments can alter. For instance, Sun Wukong, who was originally a Yaogui, is summoned to the divine realm and ends up sharing a table with the Jade Emperor or even attaining the rank of “Victorious Fighting Buddha”. On the other hand, divine beings like Marshal Tianpeng and General Juanlian can commit grave sins and be demoted to Yaoguai. But “Journey to the West” is also a world where one’s status is ranked and can rise or fall with clear consequences between rewards and punishments. Punishment, as in, at the beginning of “Black Myth: Wukong”, Sun Wukong cries out in despair, declaring that his elevated status (as the Victorious Fighting Buddha) is ultimately meaningless. In response to his outcry, the divine beings sent an army to silence him. This moment captures a critical aspect that the original “Journey to the West” couldn’t express, about the irony of the class system, but which a 21st-century digital game can now. In fact, this kind of modern reinterpretation of classical fantasy through games has already been tried out, most notably in the “God of War” reboot series, which the developers of “Wukong” have openly described as one of their inspirations. While the original Norse mythology is typically tol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high gods, such as Odin and Thor, the “God of War” reboot retells the myth from the viewpoint of Loki, a figure traditionally seen as an anti-hero. Without a doubt, such a shift of protagonist altered the tone of the story. Odin’s famed wisdom, for example, is reinterpreted in the game as cunningly manipulative. It also turns out that the gods strive to dominate the world solely for their own good, and Ragnarök is not the end of the entire world but the collapse of those self-interested divines’ world. Such reinterpretation is key to reshaping the meaning of myth and, in some sense, more fitting with the narrative of a modern era that has long moved on from the rigid hierarchies of the caste system. And there’s “Black Myth: Wukong” that embarks on a modern reinterpretation of the Chinese classic “Journey to the West”. In an era where rigid class hierarchies were once the norm, the idea of divine beings overseeing mankind is now reinterpreted as a form of oppression. When “God of War” choose to reinterpret the myth through the lens of Loki, “Black Myth: Wukong” takes a different approach and emphasises the doubt and disillusionment that the original Wukong had suffered as a Yaoguai treated unequally by the divine beings. The game “Wukong” outside the Chinese cultural sphere A modern reinterpretation of a classic “Journey to the West” truly shines thanks to how the game developers have deeply and richly delved into the classic literature. It is not particularly surprising, considering how the original “Journey to the West” is loved and read by many modern-day Chinese even today. It is remarkable to see that characters in “Black Myth: Wukong” are all well-adapted game versions of the original novel, with altered personalities and traits tailored to suit the game’s mechanics and design. Some characters are also tightly integrated into gameplay mechanics, playing a major role in transforming the game into a truly modern interpretation of the classic. But, on the other side, because it is a derivative work built on a deep understanding of the “Journey to the West”, its digital game version “Black Myth: Wukong” inevitably includes story elements that may not fully resonate with players who had less exposure to the original novel. For example, many Korean gamers claimed that they struggle to understand the UI button that says “Let’s find out in the next edition” at the end of each chapter (Translator’s note: In the game’s English version, it is just translated as “Next Chapter”) [SP1] [SP2] . Some couldn’t realise whether this leads to the next chapter or a new edition, etc. This is because this particular UI in the Korean version was a direct reference to how each chapter is addressed in the “Journey to the West” – borrowing the original novel’s exact phrases used at the end of each instalment. Such details show that exposure to the original classic is somewhat of a necessity to fully grasp the hidden metaphors in the game. *A screenshot of the “Black Myth: Wukong” Korean version at the end of chapter two. On the bottom, next to the ∆ button, it says, “Let’s find out (more) in the next edition”. This confused the Korean players, who did not read the original novel. Surely, “Black Myth: Wukong” is an exceptionally well-crafted game. But one downside is that it is so well tailored to the original classic, and thus, the game’s intricacy may not fully convince players unfamiliar with the source material. While I was so impressed by the game’s meticulous reinterpretation of the classic, I couldn’t help but wonder, ‘Would people who haven’t read the original novel be able to understand all these?’ ‘How will players outside the Chinese cultura sphere, let’s say, Western players [SP3] [SP4] , be able to understand all of this?’ In order to resolve such confusion, perhaps the game may need to implement supplementary materials further to help players gain the additional context they might need to grasp the deeper layers of the original novel. *Would players without any knowledge of Chinese mythology understand the twisted story embedded in the Four Heavenly Kings’ battle scene? Or would they just regard it as one of the many epic battle scen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KyungHyuk Lee He has been close to games since childhood, but it was not until 2015 that he started talking about games in earnest. After living as an ordinary office worker, he entered the life of a full-time game columnist, critic, and researcher through a series of opportunities. Books such as "Game, Another Window to View the World" (2016), "Mario Born in 1981" (2017), "The Theory of Game" (2018), "Wise Media Life" (2019), and "The Birth of Reality" (2022); papers such as "Is purchasing game items part of play?" (2019); "Dakyu Prime" (EBS, 2022), Gamer (KBS), "The Game Law", 2019 BC) and "Economy of Game", etc.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institute 'Dragon Lab'.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잘 짜인 레벨 디자인.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는 1985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4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달리고. 뛰고.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 Back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16 GG Vol. 24. 2. 10. 잘 짜인 레벨 디자인 .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시리즈는 1985 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 물론 , 이 시리즈는 40 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 달리고 . 뛰고 .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 밟고 뛴다는 액션 측면은 유지하면서 부가적으로 붙는 아이디어는 시리즈의 첫 작품과는 다른 갈래에서 발전을 이룩했다 . 2D 플랫포밍을 넘어서 3D 플랫포밍으로 전환된 것도 이제 엿말이다 . 매 시리즈마다 새로운 컨셉을 제시하고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수집품을 찾는 탐색형 타이틀까지 발전이 이루어졌다 .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지고 마리오 시리즈가 지속적인 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무르는 작품도 나왔다 . 시리즈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2D 플랫포밍 . 우리가 2D 마리오 시리즈라 부르는 작품들이 그 예다 . 첫 플레이가 익숙해지면서 플랫포밍의 난이도가 점차 오르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비슷한 메커닉을 채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그 결과 , 2D 마리오 시리즈는 여타 3D 마리오나 탐색형과 다르게 변화하지 않는 . 혹은 매너리즘이라는 굴레에 빠지기 시작했다 . 새로운 컨셉은 다른 마리오 시리즈에서 진행하고 있기에 근본적으로는 뛰고 밟고 변신하는 것과 같이 변화할 수 없는 플레이가 자리했다 . 늘 비슷하다는 혹평과 저조한 판매량 . 그것이 11 년 동안 후속작이 나오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 파생작과 달리 11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 , 자리한 후속작 . 2D 마리오 시리즈의 갈래에 있는 ‘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 ( 이하 슈퍼 마리오 원더 ) 는 이제 익숙함을 넘어 매너리즘이 되어버린 플레이와 흐름을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 다른 시리즈가 근본적인 메커닉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컨셉으로 변화를 추구하듯이 , 효과적이고 쉼 없는 놀라움의 연속으로 본인들의 미래를 새로이 그리고자 했다 . 슈퍼 마리오 원더는 마리오 시리즈이기에 항상 같은 선상에 있던 플레이 양상 ‘ 뛰고 / 밟고 / 변신한다 ’ 는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 . 이와 동시에 그간의 시리즈와는 다른 경험을 주기 위한 게임 디자인이 곁들여졌다 .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변화와 플레이 과정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변화를 통해서 슈퍼 마리오 원더는 놀라움이라는 큰 가치를 전하기 시작한다 . 슈퍼 마리오 원더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되던 레벨 디자인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 레벨 디자인의 교과서처럼 다가오는 형태 . 즉 , 첫 코스에서 굼바를 밟으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 이는 2D 마리오 시리즈가 꾸준하게 쌓아온 문법이기도 하다 . 플레이어가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를 배우고 엔딩에 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했다 . 순차적으로 설계된 코스별 구조는 레벨 디자인 측면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시도이자 결과물이었다 . 게임을 진행하며 조금씩 난이도를 올려나가고 플레이어가 학습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였으니까 .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백한 단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 지난 몇 년간 2D 마리오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약점 . ‘ 게임 플레이를 엔딩까지 진행한 사람이 적다는 점 ’ 으로 이어진다 . 플레이 과정에서 선보인 것들을 모두 활용하게 만들고 있기에 , 플레이어의 조작이 많은 영향을 미치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조작 타이밍에서 한 번의 실수가 실패로 이어지기도 하며 , 플레이어가 이를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적은 편이었다 . 그리고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마주하는 레벨 디자인도 오랜 시간 재생산되며 , 익숙함의 영역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조작과 도전 체계에서 나오는 어려움이라는 감정 . 그리고 시리즈를 지속하며 이제는 익숙해진 레벨 디자인과 플레이 양상 . 슈퍼 마리오 원더는 이러한 두 개의 개선점을 가장 중심에 두고 게임 플레이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 시리즈의 전통이라 부를 수 있는 요소를 개편하고 지금까지 없었던 것들을 덧붙이는 과정과 같았다 . 우선 , 슈퍼 마리오 원더는 이와 같은 시리즈 전통의 레벨 디자인을 벗어나 ,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어느 정도 자유로이 플레이할 수 있는 형태로 두고 있다 . 하나의 메커닉을 선보이고 이를 체득시키는 과정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 동시에 난이도를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두면서 몇 개의 층위로 도전적인 게임 플레이라는 측면을 잡아낸다 . 대표적인 변화는 40 년 가까이 유지되던 시간 제한을 삭제한다는 결정이다 . 시간 제한이 사라지며 슈퍼 마리오 원더의 코스는 탐색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변모했다 . 탐색을 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코스에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장소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개발진은 코스 여기저기에 숨겨둔 것들을 제공하는 한편 , 다음 코스로 넘어가기 위한 ‘ 원더 시드 ’ 라는 수집품을 조건으로 배치해 뒀다 . 이를 통해서 코스의 시작부터 끝까지 죽지 않고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 원더 시드를 획득하는 것이 슈퍼 마리오 원더의 중요한 지점으로 자리한다 . 샌드박스나 탐색형 마리오 시리즈의 그것과 같이 , 플레이어가 평면적으로 구성된 환경을 자유로이 둘러보고 코스를 클리어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 원더 시드를 찾는 것이 코스 클리어의 진정한 목적이 되고 시간 제한도 없어졌다는 것은 곧 , 꼭 어려운 코스에 도전하지 않아도 진행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 게임 내 상점 등에서 원더 시드를 구매할 수도 있으므로 쉬운 코스를 선택해 엔딩까지 도달하는 방법도 가능해졌다 . 이렇게 개발진은 플레이어가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 캐릭터에 능력을 부여하는 ‘ 배지 ’ 나 코스별 난이도 표기 등이 대표적인 예다 . 배지의 경우 플레이어가 난이도를 직접 조정할 수 있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 액션 측면에서 다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거나 . 조금 더 멀리 날아가는 등의 기능이다 . 코스 자체의 어려움은 ★의 수로 표기되어 플레이어가 얼마나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해뒀다 . 이를 통해서 슈퍼 마리오 원더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단계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 이전처럼 정해진 순서대로 클리어를 해야만 엔딩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 직관적인 표기를 통해 쉬운 코스부터 어려운 코스까지 단계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 다음 월드로 진행하는 것 또한 키 아이템인 ‘ 원더 시드 ’ 가 담당하므로 사람에 따라서는 일부 코스를 거치지 않고도 게임의 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슈퍼 마리오 원더는 도전적인 코스와 그렇지 않은 코스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 이마저도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 적과 접촉해도 사망하지 않는 요시나 톳텐 같은 캐릭터를 통해 한 단계 난이도를 낮추는 것도 가능해졌다 . 온라인 가입자에게 제공되는 멀티 플레이는 끝까지 엔딩에 도달하는 데에 일조한다 .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만 물리적인 간섭이 없는 ‘ 라이브 고스트 ’ 형태로 멀티 플레이를 설계하면서 플레이어들이 간접적으로 협력하고 부활 지점을 만들도록 했다 . 마리오 메이커와 같이 경쟁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코스 완주에 도움을 주는 형태로 작동한다 . 게임 내에서 다른 플레이어에게 도움을 받거나 . 의미가 없이 재활용되던 시간이나 점수를 탈피하고 . 플레이어가 지표를 통해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을 보면 , 거기서 나오는 결과물은 명확하다 . 혁신적이거나 지금까지 없던 것이 아님에도 2D 마리오 시리즈 내에서는 큰 변화다 . 큰 어려움 없이도 누구나 도전 가능한 플레이를 코스나 메커닉의 직접적인 변화 없이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한편 , 자꾸 사망해 진행에 어려움이 있다면 보너스 스테이지와 같은 부가적인 요소를 자연스레 꺼내 간접적으로 돕는다 . 궁극적으로는 구조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던 게임 플레이 양상이 탐색형 마리오 시리즈의 문법을 곁들이면서 많은 변화를 거친 셈이다 . 40 여년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게임 구조가 조금 여유롭게 변화했다 . 그리고 변화를 거치며 필연적으로 생기는 공간들은 새로운 기믹을 더하는 것으로 채운다 .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변화이자 전면에 자리하는 요소인 ‘ 원더 플라워 ’ 의 존재다 . 코스 진행 도중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 원더 플라워 ’ 는 기능적으로는 명확한 즐거움을 준다 . 이전 시리즈의 코스 구성을 보면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 이전 시리즈에서 하나의 코스는 월드 컨셉의 아래에 있었다 . 수중 코스나 성 안 코스와 같이 월드의 컨셉에 맞춰서 개별 코스가 디자인되며 , 이와 어울리는 새로운 기믹과 플레이 방법이 제공되는 구조였다 . 원더 플라워는 이렇게 월드 컨셉 아래에 있던 코스의 디자인을 극단적으로 뒤트는 일종의 ‘ 킥 ’ 이자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에 가깝다 . 이전 시리즈의 경우 , 월드의 컨셉을 따라가면서 코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약간의 제한이 되기도 했다 . 치밀한 레벨 디자인으로 설계되어야 하기에 새로운 기믹을 넣거나 이질적인 요소를 넣기 어려워서다 . 하지만 슈퍼 마리오 원더는 앞서 언급한 구조적 변화로 말미암아 월드 컨셉의 제한에서 보다 자유롭게 다뤄진다 . 코스 중간에 만나게 되는 원더 플라워는 플레이어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점으로 인도한다 . 때로는 퀴즈쇼를 하게 되기도 하며 , 원래 코스에서 보지 못했을 다양한 색감의 플레이 등이 제공된다 .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원더 플라워는 개발진이 구상한 독특한 발상의 총체다 . 코스 자체를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하며 , 발상의 근본적인 출발 지점이 기존 시리즈의 한계를 벗어난다 . 심지어 사이드뷰에서 탑뷰로 시점을 바꾼다거나 . 이전까지 진행한 코스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하는 등 온갖 상상력들이 여유 공간을 채운다 . 결국 슈퍼 마리오 원더는 코스를 돌파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타이틀이 아니게 된다 . 이전 시리즈가 초급 - 중급 - 상급으로 차근차근 레벨 디자인과 도전적인 즐거움을 주었다면 , 이제는 다양한 기믹과 아이디어를 선보이는 형태로 다뤄진다 . 이를 통해서 비슷한 코스처럼 다가오다가도 순식간에 인상과 경험 자체가 달라지는 장면을 마주한다 . 이전에 했던 경험의 확대 재생산이 아닌 , 지속적으로 새로운 경험이 자리하는 것이다 . 새로운 경험과 놀라움의 지속적인 공급은 원래의 마리오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요소를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 오랜 시간 시리즈를 내면서 익숙해졌기에 경험 자체가 흐릿해졌지만 , 근본적으로는 토관을 거쳐서 새로운 장소가 나왔을 때 . 혹은 블록을 두드렸을 때 나오는 즐거움이 슈퍼 마리오 시리즈가 전하는 핵심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 하지만 그 당시의 특별한 경험은 현재 시점에서 익숙한 것이 되었고 이제 놀라움을 전하지 못했다 . 원더 플라워는 시리즈가 시간을 쌓아오며 도달했던 ‘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 을 정면에서 비튼다 . 어떤 기믹과 상황이 나올 것인지 알 수 없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경험들이 꽃을 피운다 . 코스마다 하나씩 마련된 원더 플라워는 시점이나 플레이 양상을 바꾸기도 하면서 코스 자체를 두 개의 맛으로 설계한다 . 일반적인 점진적인 난이도 구성을 보여주는 코스는 물론이고 , 놀라움이 가득한 원더 플라워 코스까지 . 다채로운 경험이 자리하게 되는 모습이다 . 정리하자면 , 슈퍼 마리오 원더는 그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원더 플라워를 통해 비트는 한편 , 코스의 전반적인 설계는 이전 시리즈의 것을 따르고 있다 . 그리고 자칫하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두 개의 요소를 한데 묶어서 뒤섞는다 . 결과적으로 개발진이 시도한 접목은 놀라움이 된다 . 이전 2D 마리오 시리즈에 없던 비주얼과 경험이 자리하는 한편 ,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 없이 모든 순간이 발견과 감탄의 연속으로 승화한다 . 이제 2D 마리오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월드 중심의 설계는 없다 . 대신 기믹과 이를 활용하는 디자인이 코스 전반을 관통하며 , 여기서 새로운 기믹과 플레이 양상을 ‘ 원더 플라워 ’ 로 더한다 .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슈퍼 마리오 원더는 시리즈 첫 작품이 전했던 놀라움에 가까워진다 . 덩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그 때의 감정 . 토관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을 때의 발견과 같은 것들이다 .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면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 시리즈의 한계를 벗어난 슈퍼 마리오 원더는 새로운 자극을 연속적으로 주는 데에 가장 큰 가치가 있다 . 그렇기에 모든 순간이 즐겁고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 지켜야만 하는 플레이 양상과 치밀한 레벨 디자인을 어느 정도 덜어내더라도 놀라움을 택한 슈퍼 마리오 원더 . 오랜 고민 끝에 매너리즘을 탈피하고 감탄과 발견이라는 고전적 가치를 재발견한 타이틀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비디오 게임이라는 강신술의 세계에서(장려상)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구차한 물음에 수많은 미디어들은 상당량 유사한 패턴으로 반응한다. 이를테면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이자 해당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육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아바타 캐릭터로 이루어진 초대형 MMORPG라는 형태로 구현되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가깝다. 1994년 방영을 시작한 〈기동무투전 G 건담〉에서도 이미 플레이어의 육체를 트레이싱해 반응하는 아케이드 대전 액션 게임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주장하는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통상 플레이어 육체의 즉시적 피드백, VR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세계의 확립, 대체 육체가 활동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적 환경이라는 3개의 요소를 고정된 표징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 Back 비디오 게임이라는 강신술의 세계에서(장려상) 07 GG Vol. 22. 8. 10.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구차한 물음에 수많은 미디어들은 상당량 유사한 패턴으로 반응한다. 이를테면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이자 해당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육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아바타 캐릭터로 이루어진 초대형 MMORPG라는 형태로 구현되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가깝다. 1994년 방영을 시작한 〈기동무투전 G 건담〉에서도 이미 플레이어의 육체를 트레이싱해 반응하는 아케이드 대전 액션 게임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주장하는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통상 플레이어 육체의 즉시적 피드백, VR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세계의 확립, 대체 육체가 활동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적 환경이라는 3개의 요소를 고정된 표징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 세가지 요소가 주장하는 것은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일체화된 움직임으로 정확히 환원된다. 이러한 미디어가 보통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면, 진보된 기술이 플레이어와 캐릭터라는 두 육체간에 발생하는 근원적인 ‘막(barrier)’을 제거해 줄 것이라는 상상에서 기인한 셈이다. 이는 역으로 그러한 막의 제거, 그러니까 일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이 마치 ‘루두스적 이데아’로 인지되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컨트롤러,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시점과 시간성의 분리 등은 기술이라는 한계로 인해 구현하지 못하는 일체화의 우회적 시뮬레이션에 그친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이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잘못된 신화에서 기인한 인식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캐릭터와의 일체화에 대해 끝없는 미끄러짐을 경험한다. 요컨데 처음 게임 컨트롤러를 잡아본 사람의 행위를 감상할 때에, 우리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끝없이 트레이싱하려는 이상한 율동성을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게임에 익숙해질 때가 오면 그러한 율동은 금새 사라지고 마는데, 이는 어떠한 허들을 넘어가는 순간에 자신과 캐릭터가 분리된 육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게이머들에게 여전히 골칫거리로 분류되는 3D 멀미의 경우 또한 이런 미끄러짐의 정확한 예시가 된다. 3D 멀미의 주요 골자는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감각을 하나로 융합시켰을 때-요컨데 두 육체가 하나인 것으로 다룰 때- 양자가 느끼는 감각의 틀이 어긋남에 따라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많은 경우 3인칭 모드로 변경하면 해소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육체는 캐릭터와의 분리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당초 2D 플랫포머의 안정적인 플레이 감각이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주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랍 풀롭Rob Fulop의 그 유명한 문장, “그는 나예요. 마리오는 하나의 커서입니다.He’s me. Mario is a cursor.”에서 오직 후자의 문장만을 취할 생각이다. 마리오는 커서이며, 그렇기에 내가 아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명령(command)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을 통해 하나의 총체적 현실을 도출하는 매체에서 양자의 연결을 무시한다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지 않다. 때문에 두 육체간의 일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일정량 불가능한 문제다. 여기서 부정해야 하는 것은 두 육체가 완전한 합일을 지향한다는 목적론적 요청이다.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확실히 일체화한다. 단, 그것은 완전한 합일을 지향하지 않는다. 애당초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완전히 다른 감각, 시점, 정보들로 게임 내부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일체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일련의 대전 액션 게임들은 상당히 단순한 현실-적과 나라는 일대일의 상황-만을 시뮬레이트하며,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설정적으로 ‘숙달했을 것’이 당연한 동작들을 발생시키기 위해 특정한 조작을 필요로 한다.. 플레이어가 동작과 그 속성을 더 많이 익힐수록 캐릭터 역시 자신의 숙달성을 더 돋보이게 표출할 수 있기에 둘은 다소의 일체성을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양자간에는 완전히 다른 정보의 값을 갖는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좌측면에서 상황을 바라보며-이를 통해 두 인물 간의 거리에 대해 객관적 정보를 얻는다-, 자신 뿐만이 아닌 ‘상대편 캐릭터’의 체력과 기력이라는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게임 내부의 현실에서는 결코 가시화될 수 없는 정보다. 그 외에도 RPG의 레벨, 장비의 전투력, 스테이터스 이상이나 각 스킬의 수치화된 정보 역시 결코 캐릭터들의 현실에선 정량화될 수 없는 정보값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플레이어와 캐릭터가 일체의 위계를 형성한다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요컨데 플레이어는 캐릭터에 비해 월등히 초월적 존재이며 그러한 초월성을 가지지 못한 캐릭터와 분리된 채 현존한다. 물론 이 초월성이 영속적 전능성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플레이어는 유대교적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적 신성에 가깝다. 소위 말하는 갓 게임(God Game) 조차도 그 권능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피터 몰리뉴의 〈파퓰러스〉나 〈가더스〉가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해준다.) 때문에 그 권능의 표출을 위해서는 권능을 현현할 그릇이 필요하며, 많은 경우 이는 캐릭터의 역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영웅들은 플레이어라는 초월적 신성을 담기 위한 그릇, 단어 그대로의 ‘아바타(Avatar)’로 기능한다. 플레이어-캐릭터의 관계는 부분적 혹은 일시적 일체화이며 이는 강신(降神)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더 명확해진다. 공교롭게도 조지프 캠벨은 영웅을 ‘신의 세계에 뛰어들어 현실의 대안을 찾아 돌아오는 자’로 규정하고, 전근대 종교에서 무당들이 행하던 사회적 역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캐릭터들은 게임 내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레이어라는 신성에게 일시적으로 몸을 빌려주는 강신술사(Channeler)에 더 가까운 존재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게임 내 컷씬(Cut-Scene)의 문제에 대입해보면 흥미롭게 읽힌다. 컷씬은 플레이어로부터 명령권을 회수하는 불능의 시간이며, 때문에 캐릭터는 충분히 자아를 되찾은 듯 행동한다. 많은 비디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컷씬에서 캐릭터가 너무 쉽게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종종 지적하는데(게임 내부에는 명백히 회복이나 부활의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시적 권능의 해제로부터 발생한 일이라고 상상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캐릭터의 초월성은 오로지 초월적 존재-플레이어-의 강신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에 국한된다. 죽음이란 필멸자의 문제이며 애석하게도 불멸자의 위치는 오직 플레이어에게만 허용된 위치인 것이다. 절벽에 떨어진 마리오가 지정된 숫자만큼 다시 체크 포인트로 되돌아올 수 있는 건, 그 시간동안 플레이어라는 초월자에게 그 몸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관념론적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각각의 게임 캐릭터들은 그들이 플레이어를 받아들이는 정도에 있어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데, 크게 상이하다 말할 만큼 세분화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관점에서 캐릭터를 다음과 같은 유형화가 가능하다. 1-신성(Deity) : 갓 게임,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전략 시뮬레이션 등의 장르에서 발생하는 유형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는 와중에 특별한 아바타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제공하는 권능을 육체의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 2-피그말리온 아바타(Pygmalion Avatar) : 캐릭터의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탑재한 일부의 게임들에서 발견되는 유형이다. 단 이 유형에서의 핵심은 인물의 조물성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캐릭터의 위치가 공백임을 전제한다는 점으로 특징된다. 말하자면 이 유형의 아바타는 캐릭터의 생성과 동시에 그 육체가 세계에 출현한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준다. 다수의 MMORPG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에 해당한다. 3-퍼펫 아바타(Puppet Avatar) : 이 유형은 피그말리온 아바타와는 달리 그 존재가 이미 세계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게임의 진행 시간 전체에서 꽤 밀도 높은 ‘자아의 공백’ 상태가 유지된다. 캐릭터는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정확한 대화의 내용이 생략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한다. 말하자면 게임의 세계가 플레이어라는 신성을 강림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직조해낸 ‘비어있는 몸’에 가까운 존재다. 초기 아케이드 게임에서부터 〈드래곤 퀘스트〉 스타일의 JRPG까지 비교적 초기 게임에서는 보편적인 유형이었다. 4-샤먼 아바타(Shaman Avatar) : 이 유형은 서사적인 관점에서 명백한 자아를 갖추고 있다. 게임의 플레이 시간의 대부분 플레이어에게 육체를 내어주지만, 주체적으로 발언이 가능하다. 때로는 완전히 육체의 권리를 되찾아 일시적인 행위를 행한다.(컷씬) 플레이어는 이 육체가 허용하는 시점에 한해서만 그 육체를 점거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때문에 이 유형의 플레이어는 특히 자주 관객의 시점으로 게임을 지켜보게 된다. 내러티브 중시의 게임들에는 일상적인 유형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모든 게임의 일체화의 패턴을 포용하지는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요컨데 피그말리온 아바타 혹은 퍼펫 아바타 수준의 게임들도 때로는 ‘말하지 않는 컷씬’이라는 독특한 패턴을 통해 자아의 수복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들은 자아가 비어있기 때문에 언어를 잃었다기 보다는, 과묵한 존재라는 특정한 캐릭터리티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비디오 게임이 가지는 양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플레이어의 개입이라는 패턴 역시 지나치게 다면화된 탓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문제의 제기가 가능해진다. 비디오 게임 플레이가 신성한 외적 자아(플레이어)와 강신을 바라는 육체(캐릭터)의 합일의 결과라고 한다면, 이 때에 강신을 주도하는 것은 누구인가. 물론 강신이란 기본적으로 그것을 바라는 술사가 신의 허락을 취득하였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미 허락이 완료되었다면 이후 현상을 주도하는 것은 강신술을 다루는 술사의 몫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비디오 게임에서의 두 주체간의 주도권이란 매우 복잡한 양태로 발전된다. 캐릭터의 육체에 명령을 내리는 건 외적 자아인 플레이어이지만, 그러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세계 내부에 소환하는 것은 캐릭터의 의지에 가깝다. 이 관념론적 개념을 현실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다면, 플레이어는 어떠한 외삽(Mod 등)이 작동하기 전 까지는 게임 디자이너가 준비한 육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때문에 종종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는 원치 않는 자아와 원치 않는 육체라는 이중의 트러블이 발생하기도 한다. 불응하는 신성, 〈라스트 오브 어스 2〉 먼저 원치 않는 자아, 강신의 결과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신성의 몸부림에 가장 근접한 예는 너티독의 〈라스트 오브 어스 2〉(이하 〈라오어2〉)일 것이다. 이 게임은 수많은 이슈를 표층으로 가져오며 순식간에 태풍의 눈으로 작동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문제가 바로 게이머 집단과 평단이라는 양자간의 가시화된 충돌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러한 일이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는 일상화된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라오어2〉의 양 집단간 균열에 있어서 핵심을 정치적 공정성에 관한 해석 정도로 묶는 것은 문제를 지엽적으로 만든다. 사실 이 게임의 서사와 메시지는 수정주의 이후 웨스턴으로 수십번 반복된 헤묵은 것인데, 오직 그것을 양 인물에 대한 대리 체험으로 전달한다는 면에서만 특별하다. 플레이어는 서로간에 증오를 가진 두 인물-앨리와 애비-의 플레이를 번갈아 반복하면서 양자간의 입장을 밝히는 구조로 가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갑자기 달려들어 별 수 없이 칼로 찔러 죽였던 한마리 개가, 이후 애비와의 공놀이를 위해 다시 등장하는 파트이다. 게임적으로 설정된 소규모 안타고니스트가 상호반응이 가능한 대상이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 디자이너가 상정하는 이상적 구조가 대번에 파악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여기서 개를 죽이지 않는 선택지를 삽입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맞이하게 될 정신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게 되기를 요청하곤 하지만, 아마 내가 시간을 돌려 최초의 플레이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개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라오어2〉의 플레이 구조에 어떠한 탁월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탁월함이란 어떠한 명백한 전제를 요청하고 있다. 이 게임의 핵심과 접촉하려면 플레이어가 두 인물 모두와 ‘일체화’해야만 한다. 이 평행한 구조의 두 서사는 두 인물 모두의 입장을 체험의 형태로 제공하며, 두 인물이 가진 상이함와 동일성을 인지시키기 위해 구축되어 있다. 때문에 플레이어는 적극적으로 두 인물과 일체화해야 하는데 〈라오어2〉의 작동은 많은 경우(특히 게이머 집단들의 경우에) 이 지점에서 정지한다. 바로 신성한 자아의 적극적인 불응이다. 이 게임을 기다려온 많은 플레이어들, 그러니까 전작 〈라스트 오브 어스〉의 주인공 조엘과 ‘일체화’를 겪었던 신성들은 감정적으로 애비라는 육체를 밀어낸다. 앞서 말했듯 플레이어라는 신성은 그리스적 신성이며, 그 초월성과 더불어 매우 감정적인 존재로 특화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로듀서라는 강신술 메커니즘의 설치자에 의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앨리/애비라는 육체로 강림하지만 그들의 감정은 이러한 강신술의 결과를 수용하지 못한다. 때문에 육체의 활동은 정확한 경험으로 치환되지 못하고 그 시점에서 정지하거나(게임을 그만 두거나), 불편한 기억으로 남는다(게임을 계속 진행하거나). 이 합일이라는 현상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 중 하나를 만족해야 한다. 첫째, 조엘이라는 육체와의 합일을 감정적 문제로 남기지 않는다. 둘째, 그 합일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잊을 수 있다. 셋째, 혹은 모든 합일을 흐릿하게 바라본다. 즉, 강림의 정도를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플레이어가 가지는 초월성이란 캐릭터에 대비해 상대적인 위치에서 그럴 뿐이다. 개별의 플레이어는 자신의 삶에서 결코 초월적이지 못하기에 이러한 조건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극히 간단하지 않다. 때문에 〈라오어2〉의 메커니즘은 부분적으로 실패를 겪는다. 이 실패의 연유는 극히 간단하다. 닐 드럭만은 앞서 언급했던 ‘완벽한 일체성의 신화’로 게임의 메커니즘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일체화하며, 스스럼없이 그 체험을 추종한다는 전제로 게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신성이 육체에 불응할 것이라는 상상을 가지지 못한 채 현상을 바라본다. 그가 이를 윤리적 부재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 역시 이러한 사실에 기준한다. ‘당연한 합일’을 이루고도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성의 문제(실제로 그는 그러한 뉘앙스의 트윗을 게시했다.)이거나 윤리의 문제일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한 자연스러운 일체화의 신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신성한 자아와 육체가 빈번히 불화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커다란 실수다. 이는 완벽하지 않은 강신술의 가장 주요한 사례가 된다. 거부하는 육체, 〈라이브 어 라이브〉 하지만 때로 육체가 순수한 자아를 되찾기 위해 신성을 거부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슈퍼패미콤으로 발매된 스퀘어의 RPG 〈라이브 어 라이브〉(이하 〈LAL)는 이러한 보기 드문 현상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샘플이다. 본 게임의 8번째 시나리오인 ‘중세편’은 퍼펫 아바타의 유형으로 플레이어와 관계를 가지는데, 앞선 7개의 시나리오가 샤먼 아바타였다는 사실과 비교하자면 꽤나 흥미로운 변경점이다. 이 ‘중세편’은 전적으로 에닉스의 RPG 〈드래곤 퀘스트〉의 패러디이다. 왕과 공주, 마왕, 용사 등의 표상 조합을 통해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드래곤 퀘스트〉의 세계를 상상하게 되며, 주인공 올스테드가 자아가 비어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화룡점정을 맺는다. 앞선 시나리오들과의 차이에 불구하고 의문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장치의 배치에 기인한다. 〈LAL〉은 철저하게 장르 중심적 시나리오를 제공하기에 중세편의 장치 역시 〈드래곤 퀘스트〉의 컨벤션을 따를 뿐이라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편의 종반에 모든 사건을 겪은 올스테드는 퍼펫 아바타의 한계를 스스로 깬다. 그는 자신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내 이름은 오디오, 마왕 오디오다!’라는 선언을 던진다. 퍼펫 아바타의 특성이 자아의 공백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비워져있던 육체가 자아를 ‘생성해낸’ 장면으로 해석된다. 올스테드는 그 순간 자신의 육체를 점거하던 외적 자아(플레이어)를 밀어내고 그 위치에 자신의 자아를 안치시킨다. 플레이어가 일체화를 거부했던 〈라오어2〉와 반대의 역학이다. 올스테드는 비어있는 육체라는 정체성을 깨부수고 신성한 자아와의 합일을 스스로 거부한다. 때문에 이렇게 태어난 마왕 오디오는 9번째 시나리오 ‘통합편’에서 보스로 등장한다. 이 놀라운 반전은 얼핏 보면 서사적 구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러톨로지적 관점으로는 결코 해석해낼 수 없다. 이 구성에는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관계라는 근본적 역학에 대한 질문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올스테드의 각성이 왜 놀라운가? 단순히 그의 수동성이라는 설정을 반전시켰기 때문인가? 중세편 시나리오 자체에 도사리는 배신의 서사 때문인가? 가장 중요한 장치는 올스테드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올스테드가 왜 말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답을 내어야 하는 구조다. 때문이 이 장면이 플레이어-캐릭터라는 분화된 자아-육체의 역학으로 환원되는 것이며, 캐릭터 자아의 공백은 오직 루두스적 목적에 복무하는 장치이다. 이 장면은 결코 서사적 동학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 없다. 〈LAL〉의 이 사건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두가지다. 첫째, 플레이어-캐릭터라는 이분화된 구조를 분명히한다. 그 둘이 분리되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이벤트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또한 플레이어의 권능을 무력화한다. 플레이어는 영구적으로 조종자라는 권능을 박탈 당하고(사실 마왕이 된 올스테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새드 엔딩의 선택지가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그는 퍼펫 아바타가 아니라 샤먼 아바타로 기능함으로써 박탈의 기능을 일정량 유지한다.), 강신술의 압력을 통해 스스로의 손으로 그 마왕을 해치우는 길로 내몰린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초월성에 대해 의심을 가진 채 게임의 남은 부분을 진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LAL〉은 초월적 권능을 가시화한 뒤 그 한계를 시험한다. 〈LAL〉은 플레이어 초월성에 대한 일정량의 실험이다. 물론 이는 소위 말하는 게임 시스템에 관한 실험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서사적인 실험도 아니다. 차라리 이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예술의 힘」에서 언급한 신실재론적 예술론의 개념에 가깝다. 게임이라는 콤포지션이 그 수용자와 어떤 장(場)을 이루는지 확고히 하려는 실험이라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신과 육체는 더욱 불화해야 한다. 비디오 게임은 완전한 합일이라는 신화로부터 가급적 빨리 탈피해야 한다. 곤살로 프라스카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언급하듯이 비디오 게임과 소격효과는 훌륭한 한쌍이다. 반응하기 때문에 몰입에 근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관계를 간소화한 맥락의 도출이다. 비디오 게임의 메커니즘은 두 육체가 근본적으로 불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더 확고히 작동한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의 의미망은 결코 합일의 신화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이오 쇼크〉에서 합일의 거짓이 폭로될 때에 비로소 의미망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신(플레이어)과 육체(캐릭터)는 더욱 불화해야 한다. 그것만이 의미의 오작동을 멈추고, 우리에게 사유의 기쁨을 가져다 줄 지름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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