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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함: AAA와 인디게임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양날의 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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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4. 10.

이 글의 영어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동일한 수학적 현상이 가장 찬양되는 동시에 가장 경멸받는 현대 게임 디자인 원칙의 기초라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이 글은 바로 그 현상, 랜덤성(Randomness)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랜덤성은 언제나 게임 개발에 있어 일부분이었으나 특히 지난 십여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러 면에서 현 시점은 게임의 랜덤성 황금기라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논하는 랜덤성에 대한 고찰에 앞서 먼저 인지적 랜덤성(perceived randomness)과 객관적 랜덤성(objective randomnes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인지적 랜덤성은 우리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과 관련 있는데, 예를 들어 게임 내 이벤트가 '난데없이' 발생한 것처럼 느껴질 때, 또는 두 번째 플레이 시 앞서 플레이했을 때보다 이벤트가 덜 발생한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랜덤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완전히 불규칙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은 개발자의 신중한 계획에 따른 것이다. 반대로, 객관적 랜덤성은 진짜로 무작위적인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랜덤하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 여부와 무관하게 진정으로 무작위적임을 의미한다.

 

랜덤성이 지닌 다양한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들은 인지적 랜덤성과 객관적 랜덤성간 차이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서 진정한 랜덤성을 구현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프로그래머의 임무는 랜덤하게 보이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카지노를 재현한 게임(예를 들어 NES용 <카지노 키드(Casino Kid)>)의 개발자들은 카지노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진정한 랜덤성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도박과 유사한 메커니즘이 실제 화폐 구매와 결합되면서 부터다. 랜덤성과 소액결제가 결합되면서 우리는 현대 게임 디자인 내 랜덤성이 지닌 어두운 면을 직면하게 됐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7년 전 게임계를 강타했던 확형 아이템에 대한 논란으로, 이는 EA가 <스타워즈 배틀필드2(Star Wars Battlefield II)>의 속편을 출시했을 때 게임 플레이에서 중요해진 확률형 아이템의 역할에 대해 플레이어들이 예상치 못한 불만을 품고 반발했던 사건이었다. 이 게임에 대한 레딧(Reddit)의 게시물이 10만 개가 넘는 하위 포럼에서 가장 많은 싫어요를 받았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것이었다. 이 스캔들은 일부 유럽 국가에서 게임을 일종의 위장 카지노로 간주하고 게임 내 확률형 아이템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입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에 어떤 개발사들은 게임을 수정해서 확률형 아이템을 시즌 패스(<오버워치 2(Overwatch 2)>) 등의 다른 시스템으로 대체했고, 또 다른 회사들은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실제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확률형 아이템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랜덤 메카니즘(비록 동일한 시각적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이 특히 소위 가챠류 게임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원신(Genshin Impact)>의 출시 이후 글로벌해졌다.

 

한편, 주사위나 룰렛의 확률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처럼 확률이 공개되어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확률형 아이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로 도박과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가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게임의 랜덤성이 카지노에서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차이점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소위 '도박꾼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는 우연의 게임에서 더 많이 질수록 최종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기는 느낌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느낌은 그러한 인식이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라져야 한다. 다음에 던지는 동전은 이전의 모든 동전 던지기가 운이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합리적인 사람들이 "행운은 마침내 찾아올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지출을 계속한다.


디지털 게임의 이상한 점은, 이러한 느낌이 실제로 합리적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어지는 후속 뽑기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할 위험이 커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불운한 플레이어의 손실을 우려하는 개발자들은 가치있는 아이템의 드롭을 보장하는 “동정 메커니즘(pity mechanics, 편집자 주: 한국의 '천장'이나 토큰식 아이템과 유사한 의미다.)”을 도입하곤 한다. 개발자들은 플레이어가 랜덤의 무저갱에 빠지기 전에 자신이 의도한 최적의 경험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게임 초반에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드롭을 제어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두 번째 문제는 소위 "매몰 비용 오류"라 불리는 것과 관련된다. 우연의 게임에서 많은 돈을 잃은 도박꾼은 그 손실을 투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손실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곤 하는데, 이들은 불운이 연속되는 도중에 멈추면 불운함이 확정된다고 느낀다. 도중에 멈추는 것은 불운의 연속을 사실상 '만드는' 것이라 여기는 셈이다.


이러한 감정은 전통적인 우연의 게임에서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이지만, 온라인 게임에서는 개발자가 특정 플레이어를 겨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달라진다. 일부 개발자들은 모바일 게임 개발자들에게 고액 유저를 겨냥해서 특별 혜택을 제공하거나 심지어는 게임 전체를 그들에 맞춰 바꾸라고 공개적으로 조언한다.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일부 플레이어의 경우 손해를 보더라도 많은 지출을 하는 것이 투자로 간주되며, 이를 통해 스스로가 게임의 개발자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AAA 및 부분유료화 업계에만 집중했다면 위에서 설명한 어둠의 패턴이 이 글의 유일한 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10년간 랜덤성은 인디 게임개발사들이 만든 게임에서도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인디게임쪽에서는 이 기술이 격렬한 윤리적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 랜덤성은 오히려 오픈월드 서바이벌 게임과 같은 새롭게 떠오르는 인기 장르의 탄생과 로그라이크와 같은 오래된 장르 부활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랜덤성과 오늘날 인디 게임의 성공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인디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랜덤성이 그토록 인기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여러 요인들이 매우 운좋게 합쳐진 데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가장 큰 이유로는 개발 비용의 절감을 들 수 있다.


인디 게임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진공에서 개발되는 것은 아니며, 대작 게임에 길들여진 플레이어들의 새로운 게임 습관에 적응하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인디 게임은 제작비 면에서 대작 게임과 경쟁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가격 대비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디 게임은 훨씬 나은 리플레이성, 더 다양한 파워-업과 무기들, 또는 더 큰 오픈월드와 같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장점들은 랜덤성을 능숙하게 활용할 때 가능해진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가장 오래된 장르 중 하나로서(오리지널 로그가 출시된 것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의 30년간을 틈새 장르로서 연명하다가 지난 10년동안 주류 게임의 대열에 들어섰다. 개발자들이 이 장르를 해체하고 다른 많은 장르에 로그라이크적인 랜덤성을 섞어 넣은 것은 이 특이한 궤적이 형성될 수 있었던 주 이유였다. 이러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두 게임이 바로 <스펠렁키(Spelunky, 2008)>와 <아이작의 번제(The Binding of Issac, 2011)>다. 이들 게임이 출시되기 전까지 로그라이크는 매우 엄격한 기준을 준수해야 했는데, 퍼머 데스(perma-death), 랜덤 환경, 루팅(loot)이 포함되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RPG 장르에 속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대부분의 장르에서 동일한 유형의 랜덤성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비로소 로그라이크 혁명이 발발했다.


랜덤 환경 생성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또 다른 장르, 즉 <마인크래프트(Minecraft)> 이후에 출시된 서바이벌 게임 장르의 기반이 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장르의 인기는 기존 게임들에서는 단순하고 부차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했던 제작(크래프팅)과 생존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이었다. 하지만 이 장르의 대중화에 있어 랜덤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무시해선 안된다.


인디 게임의 제한적 예산은 개발자들로 하여금 특정 장르 게임의 제작을 어렵게 만들어왔다. 한정된 자원으로 <GTA>나 <스카이림(Skyrim)> 같은 오픈 월드 게임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유지 관리해야 하는 라이브 서비스 게임도 마찬가지다. 절차적으로 생성된 월드와 <마인크래프트> 이래 대중화된 얼리 액세스 모델은 인디 개발사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매출과 플레이어 참여의 측면에서 AAA 개발사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비록 절차적으로 생성된 월드가 정교한 디테일이나 사실성 측면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된 월드와 경쟁할 수는 없다해도, 규모 면에서는 수작업 월드를 능가할 수 있으며 무한한 탐험을 가능케 해준다.

 

한편 랜덤성을 사용하여 두 번의 플레이 세션이 동일하지 않도록 하는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갈증을 느낄 염려가 없다. 게임 제작의 용이성은 보다 자유로운 디자인 관행으로 확장되어 소규모 팀에서도 보다 수월하게 게임 개발작업을 관리할 수 있게 해준다.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불운이나 행운은 플레이 경험의 일부로서 개발자가 모든 운이 '공정’하도록 또는 균형이 잡혀있도록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디자인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상황(예컨대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해진)은 종종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게임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많은 스트리머가 극단적이고 독특한 상황을 추구하는 가운데, 랜덤성은 그러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현재 게임 산업 내 랜덤성의 인기와 그것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인식은, 처음에는 놀랍게 여겨질 수 있으나 우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랜덤성이 과거의 아날로그 게임들에서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주사위나 막대 던지기, 카드 섞기 등은 놀라움과 리플레이 효과를 더하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사용되어온 매우 오래된 메커니즘이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수백 년 동안 간단한 규칙으로서 사용되어왔다. 동시에 바로 그 동일한 것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아 오락을 도박으로 만들 때 쉽게 오용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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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IT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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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연구자)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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