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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해시대 오리진’, 멀티플레이의 계층화와 사이버 농노들
비동기 멀티플레이는 모바일 게임의 시류에서 도드라진 방식이다. 모바일, 그리고 무선 네트워크라는 아직 태동기에 불안정성이 남아있던 플랫폼들은 참여자들이 동시에 접속하지 않으면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체계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현재 이 방식은 비단 모바일 플랫폼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특유의 선택적 연결성 덕분에 많은 게임에서 채용되곤 한다. < Back ‘대항해시대 오리진’, 멀티플레이의 계층화와 사이버 농노들 08 GG Vol. 22. 10. 10. 비동기 멀티플레이는 모바일 게임의 시류에서 도드라진 방식이다. 모바일, 그리고 무선 네트워크라는 아직 태동기에 불안정성이 남아있던 플랫폼들은 참여자들이 동시에 접속하지 않으면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체계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현재 이 방식은 비단 모바일 플랫폼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특유의 선택적 연결성 덕분에 많은 게임에서 채용되곤 한다. ‘대항해시대 오리진’ 은 분명 상시 온라인 접속을 요구하는 온라인 게임이지만,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와 직접 마주하거나 연결되는 순간이 매우 적다. 분명 마을에서 직접 캐릭터를 마주할 수 있는 게임임에도 할 수 있는 실시간 상호작용은 매우 적다. 플레이어 간의 전투는 서로가 서로의 전투력을 상정한 AI와 싸우는 비동기 전투로 이루어지며, 거래소의 경우에도 간접적으로 돈과 장비를 주고 받는다. 이 게임에서 가장 큰 온라인 활동 중 하나는 바로 ‘투자전’ 이다. 협동 콘텐츠는 전무하며, 정작 ‘대항해시대’ 하면 떠올릴만한 유저 해적질, 속칭 ‘유해’ 는 그 여파가 상당히 간접적이고 애초에 양쪽이 모두 비동기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서로의 전투력을 복사한 AI와 대결하는 식이다. 굉장히 상호작용성이 떨어지고, 실질적으로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맞붙는다는 느낌이 드는 콘텐츠는 투자전 하나 뿐이다. 이 투자전은 기본적으로 각 도시들에 두캇(인게임 머니)과 젬(유료 재화)을 소모하며 투자를 할 수 있고, 이 액수를 비교해 가장 높은 사람에게 시장 자리를 부여하고 해당 국가와 플레이어에게 소유권과 그 도시에서 발생하는 이득을 주는 시스템에 기반한다. 그래서 각자 중요한 항구를 두고 자본의 전쟁을 벌이고, 이 게임의 실질적인 PVP는 바로 이 투자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온라인 플레이의 구조 때문에 ‘대항해시대 오리진’ 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온라인 플레이에 접근할 수 있는가, 온라인에 천착해있는가를 자본이라는 조건으로 구분짓기 때문이다. 현재의 구조를 따르면 실질적으로 투자전을 통해 거시적인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을만큼의 자본이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한 게임 내 온라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자본은 물론 게임 내에서 벌어들이는 두캇을 포함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간당 수급량에 제한이 있는 두캇보다는 레드젬, 즉 현질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투자전 자체의 문제는 단순히 비동기 멀티플레이의 거시화라는 관점 하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지속적인 현금 투입을 유도해야 하는 한국형 F2P 게임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 투자전을 제외한 다른 온라인 플레이들이 전무하거나 또는 유의미할 만큼 게임 내 가치를 가지거나, 또는 플레이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겹치고, 때문에 이 ‘투자전’ 이 이 게임의 온라인 플레이 자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문제가 도드라져 보인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비동기 멀티플레이를 지원하고, 또 마찬가지로 운송이 핵심인 게임 ‘데스 스트랜딩’ 의 온라인 활동은 어떤가. 비록 두 게임은 플레이어의 시점, 플레이의 밀도, 스케일 등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운송과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테마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데스 스트랜딩’ 에서는 자신 이외의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는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온라인 동기화를 통해 다른 플레이어가 건설한 도로나 건물, 장비들이 무작위 선별을 통해 내 월드에 설치되어 있고, 이것을 내가 직접 사용하면서 플레이 자체에 변화가 생긴다. 도로 하나, 충전기 하나의 차이만 해도 굉장히 큰 게임이고, 설원에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운송을 하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설치해둔 충전기 하나를 본다면 그야말로 구원이나 다름없다. 내가 온라인 플레이에 참여하고 싶다면, 자원을 모아 건물을 설치하면 된다. 만약 정말로 필요한 건물을 적절한 위치에 설치했다면,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용하면서 무수하게 쌓인 좋아요, 일명 따봉을 보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 따봉은 플레이어가 온라인 플레이에 참여하도록 하는 순수한 원동력이다. 직접적인 채팅조차 불가능한 게임임에도 오히려 타 플레이어의 흔적, 영향이 게임 내에서 깊고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오히려 상시 온라인 접속을 요구하는 명실공히 온라인 게임인 ‘대항해시대 오리진’ 이 싱글 플레이도 가능한, 프리페이드 게임인 ‘데스 스트랜딩’ 에 비해 유저 간의 연결성, 온라인 플레이의 가치가 더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핵심은 동기식이냐 비동기식이냐, 플레이어 아바타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등의 차이는 이 상황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이런 상황 하에서 ‘대항해시대 오리진’ 온라인 플레이는 ‘계층화’ 된다. 앞서 말했듯 이 게임의 온라인 플레이는 투자전이 핵심이자,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투자전은 한편으로는 이 게임에서 현질을 유도하는 가장 큰 요소다. 한때, 필자가 플레이 중인 대서양1 서버에서 투자전이 한창 과열 양상에 들었을 때 한 플레이어가 도시 하나를 먹기 위해 들인 현금은 추정치 약 800만원이었다. 이 게임에는 수많은 도시가 있고, 그 플레이어는 수십개의 도시를 한꺼번에 차지했다. 그럼 대체 얼마의 자본이 투입된걸까? 이처럼, 투자전은 단순히 게임 내에서 벌어들이는 두캇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벌어진다. 즉, 일정 규모, 적어도 백만 단위의 현질을 하지 않고서는 주요 도시를 차지할 수 없는게 이 시스템이다. 여기서 이러한 ‘도시 하나에 의미있는 영향을 끼칠만한 액수의 투자금’ 이 바로 일종의 입장권 역할을 한다. 이 게임에서 의미있는 온라인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는 이 액수를 내야하고, 거기서 얼만큼을 더 지불해야 하는가는 게임의 시스템이 아닌 경쟁 상대의 지불 능력에 달려있다. 때문에, 이 게임 내에서 투자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는 지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의사결정이나 참여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이 게임의 권력구도, 그리고 국가 및 도시 배치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이는 마치 전근대 시절 대부분 국가의 전쟁이 하급 국민까지 모두 생사를 걸고 싸우는 총력전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권력 충돌이었던 양상과 일치한다. 결국 극소수의 투자자들을 제외한 플레이어들은 모두 사이버 농노가 되어 조금씩 이 게임의 제한된 콘텐츠를 소비해나갈 뿐이다. 그래서 그런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게임은 정말로 온라인 게임이 맞는가? 나는 이 온라인 게임의 일부로서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나? 또는 상위 계층에서 하향식으로 내려오는 영향에 맞추어 나는 어떤 영향을 상향식으로 끼칠 수 있는가? 보통 이러한 과금액수에 의한 플레이어의 계층화는 비슷한 F2P 모델을 가진 게임들에서는 모두 생겨나는 일이긴 하나, ‘대항해시대 오리진’ 은 그 계층의 카테고리도 얄팍하고, 상위 계층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훨씬 적음에도 그 괴리나 거리감은 훨씬 더 크다는 점이 부각된다. 즉, 왕족과 농노라는 양극화 계층만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 때문에 ‘대항해시대 오리진’ 의 플레이는 단순히 플레이어의 상승욕구를 자극해 돈을 쓰게하는 것을 넘어 아예 멀티플레이에 참여하는 걸 포기하도록 만든다. 물론 F2P 게임은 플레이어의 결핍을 만들어내고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현질을 하도록 유도한다. 수많은 역체감과 타인과의 비교우위를 만들어내어 이를 돋보이게 하고, 각 층위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조금씩 다른 플레이 목표를 가지도록 조정한다. 그러나 이 게임은 후자, 최상위의 계층이 아닌 플레이어들이 이러한 대단위 상호작용, 멀티플레이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나 별도의 멀티플레이 콘텐츠를 준비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가 벌어진다. 결과적으로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온라인 플레이와 오프라인 플레이의 특색은 그저 기술적인 네트워크 연결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플레이어에 따라 오히려 ‘대항해시대 오리진’ 보다 ‘데스 스트랜딩’ 이 더 ‘온라인 게임’ 일 수 있다. 물론 온라인 플레이와 오프라인 플레이가 상하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게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강점과 특유의 재미를 얼마나 잘 구축했느냐는 중요한 판단거리다. 그러나 ‘대항해시대 오리진’ 은 분명 온라인 게임이라는 명제를 깔고 있음에도 이 온라인 플레이가 매우 선택적으로, 그것도 돈에 의해 작동한다. 온라인 게임으로서 ‘대항해시대 오리진’ 의 세가지 큰 문제는 먼저 투자전 중심의 온라인 플레이로 인해 생기는 플레이어의 계층화, 두번째로는 그 투자전 자체도 어떤 기획의 복합적인 아름다움이나 재미는 없는 단순한 숫자 대결 콘텐츠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게임 내에 투자전 이외에 제대로 된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이런 게임이 된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은 이 게임 자체가 실무를 맡은 개발사가 기획 전권을 휘두르기 어려운 원본 IP를 토대로한 협력 개발 게임이고, 또 2차 클로즈 베타까지 게임의 근간이 계속 뒤엎어진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게임이라는 개발 상황의 문제가 있다. 더불어, 그 근간이 F2P 모바일 게임이기에 수익 구조가 일부 고객들의 고액 지출에 기대어 디자인된 부분도 있다. 또 고의적으로 전투 부분에서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을 최소화시킨 영향도 있다. PVP 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때문에 수많은 고객이 이탈한 ‘대항해시대 온라인’ 의 사례를 재현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대항해시대 오리진’ 의 온라인 플레이는 직접 그 플레이를 하게 되는 게이머의 입장보다는 온라인 플레이와 라이브 서비스를 결합하여 수익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회사의 입장이 더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단지 이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며, 국내 F2P 모델의 게임들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이다. 게임이 수익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산업화의 결과물이며 개발자들, 그리고 그 게임의 제작과 퍼블리싱에 참여한 모두가 정당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기형적 형태의 기획에 의존하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분명 과열된 투자전 와중에 벌어들인 수익은 상당하리라. 하지만 과연 그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투자전의 열기가 한차례 빠지고 난다면, 이 게임은 지속 가능성이 있을까? 이는 ‘대항해시대 오리진’ 의 개발자나 또는 서비스사에 대한 도덕적 규탄이 아니다. 이는 왜 이 게임의 온라인 플레이는 이전작인 ‘대항해시대 온라인’ 에 비해 퇴화할 수 밖에 없었는지, ‘대항해시대’ 라는 인기 IP 이자 수십년이 지나도 아직도 특별한 재미가 있는 이 플레이 로직을 기반으로 왜 이 이상의 온라인 플레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하는 게임 완성도 측면에서의 비판이다. 오프라인 베이스에 선택적 요소로서 비동기 멀티플레이가 첨가된 게임이, 오히려 상시 온라인 연결을 필요로 하는 대단위 멀티플레이어보다 오히려 더 밀도 있고 끈끈한 멀티플레이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항해시대 오리진’ 은 온라인 게임이 아니다. 멀티플레이어 게임이 아니다. 소수의 투자자들이 아닌 대다수의 플레이어들, 이 사이버 농노들은 이 ‘대항해시대 오리진’ 이라는 세계에서 어떤 플레이 목적, 또는 존재 의의를 찾아야 하는가? 그것이 이 과정을 거쳐 정제된 마지막 질문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다키스트 던전>을 <다키스트 던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발진이 어째서 전작과 후속작의 틀을 바꾸고자 했는지. 어떤 요소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만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다키스트 던전을 각별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 Back <다키스트 던전>을 <다키스트 던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21 GG Vol. 24. 12. 10. 지난 2021년 10월. 에픽 게임 스토어를 통해서 얼리 액세스를 시작한 ‘다키스트 던전 2’는 전작을 즐겼던 팬들에게는조금 당혹스러운 모습과 같았다.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전작의 연장선에 자리한 작품이었음에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플레이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다키스트 던전 2의 플레이는 조금 더 로그라이트에 가깝게 변했으며, 전작의 핵심 시스템이라 할 수 있었던 영지 관리와 같은 매니지먼트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플레이어들의 기대감을 정면으로 반하는 것임과 동시에, ‘대체 왜 이렇게 바꿨는가?’하는 질문을 낳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개발진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라는 문장으로 방향성을 일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 만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개발진이 어째서 전작과 후속작의 틀을 바꾸고자 했는지. 어떤 요소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만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다키스트 던전을 각별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우선, 전작인 다키스트 던전 1의 플레이를 잠시 떠올려보자. 전작을 떠올렸을 때, 가장 앞에 자리하는 것은 역시나 무척이나 어려운. 난도 있는 게임 플레이가 될 것이다. 다키스트 던전 1은 플레이어의 결정이 무게감을 가지는 타이틀로 설계되어 있다. 한 번의 실수가 파티를 사망으로 인도하며, 여차하면 잘 육성된 파티를 잃고 키보드를 내려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나올 정도였다. 다키스트 던전 1이 가지고 있는 높은 난도는 ‘운’으로 대표되는 확률이 가장 중심에 자리한다. 운에 따라서 플레이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한 대만 때리면 되는 상황에서 파티가 두 바퀴를 돌 때까지 빚맞춤이 뜬다거나. 어느 순간 갑작스레 데스 블로우를 맞아서 캐릭터가 상태 이상에 빠지는 등의 플레이를 마주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운은 플레이어 뿐만 아니라 적에게도 적용된다. 적에게 운이 제대로 적용될 때에는 다른 타이틀에서 느끼기 어려운 각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초로 작동한다. 위기의 상황에서 캐릭터인 영웅이 모든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하고 적을 순식간에 제거할 때의 쾌감이 대표적이다. 운은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것으로도 작동하지만, 한편으로는 플레이에게 잊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요소임은 분명했다. 개발진이 말하는 ‘도전과 영웅적 승리’라는 지향점이 각별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운이라는 것은 플레이어가 실패와 시도를 누적하는 것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영역으로 다뤄졌다. 던전에서 획득한 재화와 보상들을 이용해 영웅들을 육성하며, 조금 더 나아진 상태에서 다음 던전으로 출발할 수 있는 구조가 대표적이다. 마을 경영 콘텐츠들은 플레이어가 마주하는 ‘운’ 들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영역에 두도록 만들었다. 마치 처음에는 20면체 주사위를 굴리다가, 시간이 지나며 16면체로. 그 다음은 8면체로 조금씩 확률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여전히 운이라는 형태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플레이어가 마주하는 결과물이 조금씩 제어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게임 플레이는 점차 통제 가능한 영역이 늘어나고 궁극적으로는 다키스트 던전 1의 끝에 도달하는 경험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을 경영은 본질적으로는 타이쿤 장르와 같은 매니지먼트 형태를 가지게 됐다. 세부적인 수치를 조절하고 여분의 자원을 쌓고. 이를 적절하게 분배하는 플레이에 가깝다. 그렇기에 다키스트 던전 1은 후반부로 들어설수록 초반과는 다른 결의 정체성을 보여주게 된다. 통제 가능한 영역이 충분히 늘어나고. 플레이어가 게임 과정에 익숙해졌다면 다키스트 던전 1은 자원을 투입하고 거기서 보상을 얻는 플레이의 반복이다. 운을 어느 정도 감안해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시점부터 영웅과 파티는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인적자원과 같이 다뤄진다. 이 즈음부터 효율적으로 자원을 파밍하고 변수를 교정하며 제어하는 과정은 주력 인적자원이 더 나아가기 위한 자산을 축적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 즈음부터 플레이어의 선택과 실수. 그리고 변수를 통제하는 과정이 가장 앞에 자리하며 다키스트 던전 1이 추구하던 ‘도전과 영웅적 승리’라는 조금씩 희석된다. 플레이어는 게임에 익숙해져서 긴장감 보다는 일종의 루틴과 같은 게임 플레이를 하게 되며, 반복 플레이를 통한 자산의 누적으로 인하여 초기와 같은 경험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개발사인 레드훅 스튜디오는 다키스트 던전 1의 이와 같은 플레이를 일종의 한계라고 인식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 그리고 플레이 양상이 영향을 미쳤다. 초반부의 플레이가 각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좋았으나, 후반부로 들어설수록 변수가 통제되고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더불어 양날의 검과 같이 다뤄지는 변수들이 막대한 진입 장벽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흥미로운 것은 맞지만, 플레이어 전략에 맞는 플레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들어갔으며,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게임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전반적인 게임 플레이가 엔딩 까지의 플레이 타임을 가늠하기 힘들게 만들었으며, 꽤 많은 플레이어들은 중간 그라인딩 (파밍) 과정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게임을 중단하기도 했다. 도전 과제를 보면, 이러한 양상은 꽤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초반부에서 중반부.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콘텐츠를 달성한 사람의 비율은 극단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전작의 문제점을 인식한 레드훅 스튜디오는 후속작인 다키스트 던전 2를 통해서 또 다른 형태의 모험을 기획하는 결정을 내렸다. 전작의 변수들이 가져다주는 장점과 단점을 답습하지 않고 형태와 플레이 양상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앞서 언급한 ‘도전과 영웅적인 승리’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방침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웅적 승리. 즉, 고난을 넘어서는 행위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그리고 플레이어가 이를 어떻게 극복하도록 할 것인가에 가장 많은 고민을 들였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고난을 마주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이 결과를 낳고. 이를 통해서 고난을 극복하는 플레이가 핵심이다. 따라서 다키스트 던전 2는 플레이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확률을 조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모든 공격은 변수 없이 확정적으로 적중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는 어느 정도는 플레이어가 예상한 형태로 진행된다. 사전에 수립한 전략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한편, 토큰 시스템과 스킬 업그레이드의 조합을 통해서 플레이어의 전략 / 전술이 전작과 비교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확률적인 요소는 ‘지옥으로의 로드트립’이라는 컨셉에 맞춰서 조율이 이루어졌다. 다키스트 던전 2의 게임 플레이를 구성하는 변수들은 무작위 생성을 통해서 제공된다. 하나의 ‘런’으로 구성된 플레이가 자리하며, 플레이어들은 마차에 올라타고 무작위로 배치되는 이벤트와 적들을 마주하는 구조를 택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다키스트 던전 2는 확률과 변수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전작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 확률의 범위를 조금씩 좁혀나가는 것. 또는 반복 플레이를 통해서 통제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수립한 전략과 전술을 이용해 확률과 맞서는 데에 코어 게임 플레이를 집중한다. 다만, 전략과 전술이 수립되고. 육성이 완료된 상태에서는 전투 자체가 루틴을 갖기 마련이다. 토큰 시스템으로 변경이 되면서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도 줄어들었고 스트레스 관리도 사라지며 전투 과정 자체는 어느 정도 고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모든 것이 통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개발진은 여기서 캐릭터간의 관계를 플레이어가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위치시켰다.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장치로 캐릭터 관계를 넣어두면서 전투와 이후의 플레이는 플레이어의 예상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게임 플레이 과정에서 캐릭터들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안정적인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기 어려운 고난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전작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가늠이 안되는 게임 플레이 시간 / 그라인딩 과정은 거리가 그리 길지 않은 ‘런’을 통해서 보완됐다. 전작 대비 한 번의 플레이 시간 자체는 짧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작위로 구성된 요소들이 고난으로 제시되고 플레이어가 자신의 구상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핵심인 셈이다. 반복 플레이에서 누적되는 요소들은 마을이 아니라 ‘캐릭터’에게 집중한다. 이 또한 개발진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전작이 대략적인 세계관이나 분위기에만 집중했다면, 후속작에서는 각 캐릭터들을 세부적으로 설정하고 활용한다는 의도이기도 하다. 플레이가 누적되면서 캐릭터의 능력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캐릭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제시되는 것이 대표적인 요소다. 전작의 영웅들은 이제 이름으로 불리며, 인적 자원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고 성취하는 히어로에 가깝게 다뤄진다. 런의 반복을 하는 과정에서 캐릭터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관계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며 캐릭터 자체의 매력과 설득력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인적 자원에서 어떠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되는 과정과 같다. 이렇게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과 여기에 곁들여서 세계를 여행한다는 가치는 다키스트 던전 2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지향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을 하나에서 이야기가 끝났던 전작과 다르게, 다키스트 던전의 세계를 한층 더 넓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얼리 액세스 기간 동안 다키스트 던전 2가 지향했던 변화들은 제대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흥행과는 별개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개발진이 구축했던 플레이들은 각 요소들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캐릭터들의 이야기와 함께, 역경을 넘어 승리라는 쾌감을 제공하는 것에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릴 만하다. 결국, 게임 플레이가 바뀌었어도 ‘도전과 영웅적인 승리’라는 가치는 다키스트 던전 2에서도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메커닉이나 실제 게임 플레이 양상이 크게 바뀌기는 했지만, 개발진이 제시하고자 했던 가치는 여전하다. 갑작스레 큰 성공을 거둔 인디 타이틀틀이 시리즈로 더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만들었고, 다방면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명확하게 남기고 있다. 그리고 현재. 다키스트 던전 2는 현재 준비 중인 무료 업데이트를 통해서 전작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결에 자리한 신규 게임 모드 ‘킹덤스’를 준비 중에 있다. 다키스트 던전 2의 원래 모드가 개발진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면, 킹덤스의 신규 모드는 전작을 플레이 했던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아들인 결과처럼 보인다. 전작의 영지 관리와 다키스트 던전 2의 플레이가 어느 정도 합쳐진 신규 모드는 다키스트 던전 2와는 다른 또 다른 변화이기도 하다. 2021년 에픽 게임즈에서 얼리 액세스를 출시한 이후 정식 발매까지 3년의 시간이 걸린 만큼, 이제 월드 전반을 더 확장한다는 의도에 맞춰 변화를 가미했다. 그간 쌓아온 것들을 바탕으로 세계와 캐릭터. 그리고 여러 게임 플레이를 동시에 잡겠다는 의도다. 전작의 코어 플레이였던 영지 관리는 그 개념을 변용해 킹덤스에 들어갔으며, 그간 런을 통해 이야기를 쌓은 캐릭터들은 해당 모드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적 자원과 같이 다뤄진다. 전작에서 아쉬웠던 점들을 기존 모드의 게임 플레이에서 보충했던 만큼, 이후에는 플레이어의 니즈에 맞춰 관리적인 측면을 늘리겠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식 출시 이후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다키스트 던전 2의 변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전작의 거대한 진입 장벽이 되었던 변수를 조율하는 한편, 한 번의 플레이 시간을 낮추는 결정. 그리고 형태가 크게 달라졌음에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고난을 극복하며 달성하는 영웅적 승리’를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고민이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다키스트 던전 2는 이 영웅적 승리가 게임 세계관 측면에서 보다 설득력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과정인 것이며, 동시에 영웅적 승리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맛볼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추기 위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두 작품에서 이 가치는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 단지 형태가 다를 뿐이다. 플레이어가 고난을 마주하고 극복하도록 만드는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의 방법론. 고난을 극복하고 영웅적 승리를 달성했을 때의 경험. 이것이 같은 방향에서 자리하고 있기에, 다키스트 던전 2를 후속작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마블 스파이더맨 2, 코믹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하는 방법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그건 방법론도 다양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독자를 설정하지 못하면 어떤 좋은 이야기라도 먹히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은 이야기를 쓰기 전에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기를 당부했다. 그리고 매번 그의 가상의 독자 역할을 맡아준건 그의 부인, 태비사 킹이었다. 비록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좋은 이야기에서는 필수적인 고민이다. < Back 마블 스파이더맨 2, 코믹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하는 방법 15 GG Vol. 23. 12. 10. 요즈음의 콘텐츠는 독립적이지 않다 . 모든 콘텐츠는 유기적이고 , 서로 다른 매체 ,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가지를 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 .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하더라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수많은 매체에서 저마다 다른 과실을 맺어내는 미디어 프랜차이즈는 모든 창작물이 지향하는 바가 되었다 . 비디오 게임과 관련된 수많은 프랜차이즈들도 여러 방면으로 확장을 시도해왔다 . 영화에서 시작해 이미 코믹스 , 소설 , 애니메이션이 계속 쏟아져 나온 ‘ 스타워즈 ’ 는 게임 쪽에서도 루카스아츠의 작품들을 위시해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 ‘ 헤일로 ’ 는 반대로 게임에서 영상물 , 소설 , 코믹스로 뻗어나간 사례다 . 이런 흐름은 슈퍼히어로 파생 작품들도 시작지점만 다를 뿐 유사하다 . 하지만 슈퍼히어로 창작물들은 어떤 면에서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 바로 캐넌 , 정사의 기준이 매우 느슨하다는 점이다 . 미국의 코믹스는 하나의 정사가 아니라 , 수많은 비사들의 집합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 제작사 , 제작자 쪽에서 캐넌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 코믹스는 개별 이슈가 서로 다른 설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의 공인된 정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수많은 비사 중에서 인기가 많고 , 가장 퀄리티가 좋은 것들이 선택을 받아 이어나가는 식의 구조를 띈다 . 때문에 유독 코믹스 기반의 파생 작품들은 독자적인 서사를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 코믹스의 감각을 그대로 이어가던 많은 창작물들이 혹평을 받고나서야 사람들은 ‘ 코믹스는 생각보다 대중적이지 않다 ’ 는 사실을 깨달았다 . 원작 코믹스 팬들의 기준으로 만들게 되면 , 지나치게 유치하거나 아무리 원작 설정이라지만 선을 넘는게 있었던 것 . 슈퍼히어로 기반의 최고의 프랜차이즈였던 MCU 가 최근 부진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 스칼렛 위치를 위시한 캐릭터들의 코스튬이 점점 원작을 닮아가고 , 설정만 믿고 배경서사를 생략하거나 , 인물 간의 관계를 대충 그리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 . 그러다보니 중심 서사도 재미가 없어지고 , 또는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 특히 멀티버스의 적극적인 채용은 그런 이른바 ‘ 뇌절 ’ 의 끝으로 가 , 모든 이슈와 관련 설정을 다른 차원의 이야기 , 그저 멀티버스라는 식으로 사건의 근원과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서 더더욱 성의없는 이야기처럼 보이게 했다 . * 스파이더 토템 , 마스터 위버 , 스파이더 마더 … 문자 그대로 우주로 뻗어나가는 설정 그렇다면 ‘ 마블 스파이더맨 2’ 게임은 어떨까 . 우선 , 스파이더맨은 원작 코믹스에서는 그야말로 뇌절 설정의 상징이다 . 스파이더 토템 같은 설정이 바로 그러한데 스파이더맨과 같은 거미류 슈퍼히어로의 숫자가 늘어다나보니 추가된 설정으로 , 그냥 유전자 변이 거미에게 물려 생긴 슈퍼히어로가 갑자기 우주적이고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 거기에 스파이더맨은 복식만 수십가지에 이르고 ,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스파이더 센스에 대한 묘사도 작품마다 제각각이곤 한다 .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 코믹스가 각 작가에 의해서 뇌절에 뇌절에 뇌절을 반복하여 마구잡이로 확장한 뒤에 , 이 중에 괜찮은 걸 타이인 이벤트로 정리하면서 채택하는 식으로 전체 흐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 그러니 기본적으로 굉장히 난잡하고 , 온갖 좋은 , 그리고 나쁜 설정이 난립하면서 그 안에서도 어떤 설정은 버려지고 어떤 건 정사로 채택된다 . 물론 코믹스 팬들에게는 이것이 재미요소였고 , 다른 것보다 훨씬 짦은 코믹스의 소비 사이클에서는 괜찮은 방법이기도 했다 . 그러나 , 게임이나 영화처럼 제작 기간이 길고 한 작품의 서사 단위가 긴 매체에서는 이런 방식을 채택할 수 없었다 . 때문에 게임이나 영화는 그 자체로 일종의 총집편처럼 , 작품이 어떤 설정을 채택하고 있고 ,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다 . 인섬니악의 비디오 게임 ‘ 마블 스파이더맨 ’ 시리즈는 그 정리의 시작을 빌런과 주인공 , 스파이더맨의 관계 정리에서부터 시작한다 . ‘ 스파이더맨 ’ 에게는 정말이지 수많은 빌런이 있다 . 단일 히어로로서는 가장 많은 빌런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 그와중에 극적인 서사를 위해서 스파이더맨이 어떤 빌런을 만나게 될지를 미리 정리해두는건 매우 중요했다 . 그래서 1 편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스파이더맨이 이미 히어로 활동을 한지 꽤 시간이 지났고 , 수많은 잡다한 빌런들을 이미 다 정리했다는 걸 단 번에 보여준다 . 스콜피온 , 라이노 , 벌쳐 같은 단일로서는 큰 비중을 가지기 어려운 빌런들은 이미 스파이더맨을 만나 싸웠고 , 감옥에 가있다 .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인 옥타비우스 박사가 서사의 중심으로 초반부터 등장한다 . 여기서 대강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 이 작품의 스파이더맨은 여러 잡다한 빌런들은 이미 다 처리했지만 , ‘ 닥터 옥토퍼스 ’ 나 ‘ 그린 고블린 ’ 은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 그리고 서사가 옥타비우스 박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상 ,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이 빌런과 대적하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다른 설정들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 아직 스파이더맨이 되기 전인 마일즈 모랄레스는 피터 파커의 그 유명한 각성의 과정 , 본작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스킵한 그 과정을 대신 되풀이하고 보여주며 , 이 작품의 후반이나 또는 다음 작품에서 그가 두번째 스파이더맨이 될거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 히로인은 그웬 스테이시가 아니라 MJ 라는 것 , 이번 스파이더맨이 가진 기술적 역량들 , 그리고 멀티버스 따위는 없다는 것 , 그의 경제적 상태 등등 수많은걸 빠르게 정리한다 . 우리는 이미 ‘ 스파이더맨 ’ 이라는 캐릭터를 알고 있다 . 이는 코믹스보다는 대중 서사인 영화의 덕택이 더 클 것이다 . 그래서 이미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부분은 게임에서는 빠르게 생략되거나 암시되며 , 그 이상의 부분들은 명시적으로 정리된다 . 그래서 모든 독자들 , 스파이더맨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코믹스팬부터 스파이더맨이라고는 영화 밖에 보지 않은 이들까지 모든 독자를 동일한 출발선에 위치시킨다 . 이는 이 게임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점 중에 정말 일부분이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다 . 그러나 , 서사가 이 게임에서 정말 중요한 위치이고 그 서사라는게 원작과 수많은 변형이 이미 있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즉 , 이 게임은 ‘ 무엇인가 ?’ 뿐만 아니라 ‘ 무엇이 아닌가 ?’ 도 동시에 이야기해야 한다 . 이 스파이더맨은 멀티버스도 아니고 , 등장하지 않을 빌런은 누구이며 , 우리가 아는 스파이더맨 서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같은걸 계속 전해야 한다 . ‘ 마블 스파이더맨 2’ 는 이런 부분이 더더욱 중요했다 . 2 편이 제대로 가속을 받아 서사를 진행시키려면 1 편에서의 이런 정지작업이 필수였고 , 그 다음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 그 때문에 2 편에서는 새로운 인물들 , 그리고 이전에 등장했지만 아직 서사적인 쓰임이 다하지 않은 인물들 ,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 전면에 나서야 하는 기존의 인물들 등 수많은 인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 오스본 부자가 전면에 나섰고 , 베놈이라는 새로운 빌런을 위해 필요한 부가 인물들도 등장한다 . 그리고 동시에 기존의 빌런들이 퇴장하기 시작한다 . 벌쳐 , 스콜피온 같은 부가 빌런들은 확정적인 죽음을 통해 서사에서 사라진다 . 이런 과정을 통해 , ‘ 이미 익숙한 이야기 ’ 인 스파이더맨은 ‘ 새로운 이야기 ’ 로서의 당위성을 얻게 된다 .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 간의 관계 , 설정 장치 , 서사의 흐름들을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어기면서 , 전체 총합은 크게 변하지 않음에도 굉장히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만들어 낸다 . * 어쩌면 이런 부분이 좀더 설득력을 줄 수도 있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에게 원작은 좋은 참고가 되기도 하지만 , 많은 경우에는 독이 된다 . 이유는 근본적으로 원작과 파생작들은 대체로 차원 자체가 다른 ( 말그대로 과학적인 의미의 ‘ 차원 ’ 도 )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아무리 1 대 1 로 대응하여 옮기더라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고 , 또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 1 대 1 이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결국 스핀오프나 파생작품들은 원전의 요소들을 취사선택할 수 밖에 없으며 , 이 취사선택이 어떻게 되느냐가 항상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 특히나 코믹스에서 온갖 설정을 쏟아내는 슈퍼히어로물은 이 문제가 더욱 심하다 . 간단하게는 코스튬의 재현에서부터 멀리가면 빌런의 선택 , 캐릭터에 걸친 부가 서사들의 선택까지 모든게 선택의 문제가 된다 . 가령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뇌절 그 자체인 설정들과 절대 빼놓아서는 안되는 설정들이 많이 있다 . 벤 삼촌의 죽음은 스파이더맨을 구성하는데 빠져서는 안되는 사건이다 . 반대로 스파이더 토템 같은 설정이나 , 많은 이들이 고평가하는 이슈인 ‘ 슈피리어 스파이더맨 ’( 닥터 오토퍼스의 정신이 스파이더맨의 육체에 깃들어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 ) 의 경우에도 자칫하면 설정이 과한 , 표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 ‘ 마블 스파이더맨 ’ 시리즈는 여기서 재미있는 선택을 한다 . 먼저 벤 삼촌의 죽음 같은 , 영웅을 형성하는 서사를 모두 본편에서 빼버렸다 . 설정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 이미 작품 상에서는 오래전 지나간 일이며 구체적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되기보다는 플레이어 , 스파이더맨의 팬들이 ‘ 당연히 그런 사건이 있었겠지 ’ 라고 추측하고 넘어가게 만든다 . 대신에 이런 시련을 본편에서 겪는 건 2 대 스파이더맨인 마일즈 모랄레스다 . 이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건 항상 구태의연하고 지루할 위험이 있다 . 그게 비록 필수적인 부분이라 하더라도 , 서사를 정직하게 항상 모든 사건의 발단에서 시작하는 건 좋은 수가 아니다 . 모든 서사는 시작부터 독자를 강력하게 흡인할 의무가 있으며 , 이야기의 시작지점은 이야기의 마무리와의 간극을 고려해 정해져야 한다 . 동시에 비극의 과정을 마일즈 모랄레스에게로 옮겨 , 플레이어들에게 쉽게 인정받기 어려운 2 대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본작에 녹이고 , 감정적인 이입을 만들어 낸다 .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은 , 원작의 설정을 차용하되 그 주도권은 확실하게 본작에 있고 , 원작의 설정을 가져오는데에 1 대 1 로 매칭하지 않고 적절히 변용한다는 점이다 . 이는 마치 기표와 기의의 상관관계 같다 . 예를 들어 ‘ 베놈 ’, ‘ 카니지 ’, ‘ 스크림 ’ 같은 주요한 이름들은 모두 등장하지만 , 그 기표 아래에 본질들은 원작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 카니지의 정체인 클리터스 캐서디는 광신도 컬트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캐릭터성을 부여 받아 뉴욕 전체를 흔들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이끌어 DLC 의 리딩 빌런이 될만한 포스를 풍긴다 . 반면에 스크림은 단편적인 등장이지만 MJ 의 속내를 피터 파커에게 비춰주고 , 둘의 화해와 결합을 더 단단하게 하는 기폭제로서 작용한다 . * 본작의 베놈은 그 정체가 코믹스와 다르지만 ,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심비오트를 활용하는데 있어 베놈 , 카니지 , 안티베놈 , 스크림을 넘어서서 2 세대니 뭐니하는 설정으로 양산되던 것들을 모두 쳐내고 유명한 심비오트까지만 딱 사용한 것도 적절한 원전의 채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이렇게 원작 설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설정을 본작이 우위를 가지고 취사선택하고 있다는 점 , 또한 설정에 과도하게 매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매우 훌륭하다 . MCU 는 오히려 그런 설정 자체에 휘말려 , 수많은 등장인물을 그대로 등장시키면서 적절한 번안을 하지 못해 영화 내에서 캐릭터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이 역력하다 . ‘ 이터널스 ’ 에서 청각장애인으로 번안하여 꽤 깊이있는 캐릭터를 보여준 마카리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특색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실크의 경우 , 원작에서는 지나치게 피터 파커에 의존하는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었던걸 의식하듯 마일즈 모랄레스와의 다른 접점을 가지고 등장한다 .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 중간에 등장한 헤일리의 주변인물과 동일하다면 ( 비슷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 실크 , 신디 문도 원작과 다른 독자적인 캐릭터 서사의 길을 걷는 듯 보인다 . 이런 과정을 통해 , 우리가 그 탄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모두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가 또 한 번 새로운 이야기로서 매력을 품게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 무엇보다도 원전의 설정을 있는 그대로 모두 써야 한다는 강박 아래 미리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설정 덩어리가 아니라 , 쳐낼 것은 쳐내고 핵심만을 남김으로서 가지각색인 플레이어들의 사전 지식 정도와 무관하게 ( 물론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 자체는 알고 있어야 하지만 )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는게 중요하다 .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 까지만 챙겨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들이다 . ‘ 마블 스파이더맨 2’ 의 서사는 단순히 본작 , 아니 조금 더 나가서 1 편에서 시작된게 아니다 .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수십년 동안 여러 차원을 통해 이어진 스파이더버스에 플레이어들을 중간 난입시켜야 하는 게임이다 . 동시에 이미 지난 수많은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겪은 이들에게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여야 했다 . 이 두가지를 모두 잡는건 성공보다 실패가 가까운 일이지만 , 인섬니악은 그걸 해냈고 , 그래서 올해 최고의 게임을 논하는데 한자리를 꿰차기 부족하지 않다 . ‘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 그건 방법론도 다양해서 이기도 하지만 , 무엇보다 제대로 된 독자를 설정하지 못하면 어떤 좋은 이야기라도 먹히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스티븐 킹은 이야기를 쓰기 전에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기를 당부했다 . 그리고 매번 그의 가상의 독자 역할을 맡아준건 그의 부인 , 태비사 킹이었다 . 비록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 어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 , 하는 고민은 좋은 이야기에서는 필수적인 고민이다 . 훌륭한 독자설정 , 그리고 이들을 휘어잡기 위한 폭넓으면서 절제된 이야기 . ‘ 마블 스파이더맨 2’ 은 올해 최고의 서사 중 하나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돌아 마주한 것은 언어의 순수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아니다. 70년대에 탄생하고, 90년대에 완숙하여, 2000년대에 끝없이 분화한 이 장르를 태초의 조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RPG’라고 부르던 조건은 이제, 수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취사적으로 선택되고 조립되고 분화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 순수한 RPG라는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 < Back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3 GG Vol. 25. 4. 10.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 [1] 는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장르다. 이 장르는 태생부터 특정한 테이블 탑 게임을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모델로 삼으며 탄생했다. 초기 비디오게임 RPG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테이블탑 RPG(이하 TRPG)인 《던전즈 & 드래곤즈》(이하 D&D)를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것에 목표로 두었다. 대부분 미국의 대학 내 인트라넷 시스템이었던 PLATO [2] 를 그 플랫폼으로, D&D를 즐기던 대학생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세간에도 잘 알려져있다. 또한 리처드 개리엇의 초기 작품인「아칼라베스」 역시 초기 버전의 제목이 DnD였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이 독특한 장르는 이러한 외부적 게임을 디지털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장르다. 물론 다른 장르들, 예를 들어 스포츠나 대전 격투 역시 현실의 ‘게임’을 디지털적으로 구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RPG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번역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RPG가 디지털의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대상이 육체의 운동이나 정형화된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TRPG를 구동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것, 그것은 TRPG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이 참가자들의 ‘언어’라는 사실이었다. TRPG 역시 대개는 적절히 구성된 게임 세계와 가변성이 큰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불편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한 기반적 틀거리에 한정된다. TRPG는 그 이상의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게임 내에 등장하는 장애물의 종류, 풀어야 하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참가자들 이외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설령 특정한 적 캐릭터에게 수치적 데이터가 있다고 한들, 그들이 어떤 배치로, 어떤 전략으로, 어느 정도의 사기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마음 가짐으로 플레이어들과 대립하는지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합의와 심판의 역할을 맡는 ‘게임 마스터’에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이러한 세계와 게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상호 반응할 것인가, 당면한 문제를 어떠한 과정으로 해결할 것인가 역시 모두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확정된다. TRPG라는 게임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기반은 언어이며,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RPG는 이 기반의 ‘거대함’을 번역하는 것을 요구받은 장르다. *「울티마」(1981)는 자율적으로 접촉 가능한 세계를 통해 거대함의 컨셉을 작동시킨다. 초기 미국의 컴퓨터 RPG(이하 CRPG)들은 이 거대함을 ‘게임 세계’라는 컨셉으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세계는 선형적이거나 순환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는 사전적으로 규정된 세계 내에서 자율적으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기능을 얻었다. 「울티마」는 탑뷰로 내려다본 세계와 1인칭의 시점으로 구현되는 던전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던전의 구성은 난수적이긴 했으나 일정한 패턴을 통해 구현되었다. 플레이어는 어떤 곳에 먼저 들를지, 무엇을 먼저 구매할지 따위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반응해나가야 했다. 「위저드리」는 그보다는 더 좁은 세계인 다층 구조의 지하 던전을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물과 플레이어는 비선형적 관계를 맺었다. 좁은 지하의 터널 내부에서도 ‘어떤 방’을 ‘어떤 순서로’ 탐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몫이었으며, 때로는 모험을 포기하고 다시 지상으로 귀환해 상태를 재정비하고 다시 내려가야 했다. 물론 이러한 반응성의 세계는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이를테면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나 「조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CRPG는 이런 어드벤처 게임들과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체계를 내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일종의 ‘수치에 의한 캐릭터 규정과 성장의 체계’다. 이 체계는 전적으로 그들이 원본으로 삼던 D&D의 것을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언어라는 구조를 완전히 빌려올 수 없었던 디지털의 방법론에서 이 수치 개념이야 말로 가장 구현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도 했다. 지미 메이허Jimmy Maher는 《CRPG의 르네상스 파트 1》에서 이 문제를 꽤나 신랄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CRPG는 전투와 병참 관리가 전부인 게임 엔진 위에 스토리와 세계 구축이라는 얇은 외피를 씌웠고, '롤플레잉role-playing' 게임이 아니라 '롤플레잉roll-playing'이 되었다.’ [3]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구현은 RPG라는 것이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혹은 다른 ‘거대한 서사’를 지탱하려는 비디오 게임 장르들과 구분되는 지점을 형성한다. RPG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위대해짐’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요컨 당대의 서사를 내포하는 다른 장르의 주인공들 역시 ‘더 복잡하고 장대한’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장애물과 마주하는 주인공 그 자체가 그에 상응할만한 존재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4] 하지만 RPG가 D&D로부터 빌려온 이 캐릭터 성장의 구조는 플레이어의 캐릭터에게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부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 위대한 상태에 도달해 더 거대한 위협을 무찌르는 에픽epic [5] 의 서사의 구축이 가능해진다. [6] 한편 이러한 장대함의 구조는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을 대체할만한 또 하나의 컨셉, 즉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줬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장르인 RPG는 ‘(거대한) 게임 세계’와 ‘(거대한) 에픽의 서사’라는 두 가지 컨셉을 지닌 장르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핵심은 이 두가지 컨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컨셉들이 발현시키는 고유한 RPG만의 체감 조건에 있다. 넓고 반응 가능한 세계, 그리고 점차 ‘위대해지는’ 캐릭터의 변화는 플레이어를 게임의 내부에서 ‘정처없이 서성거리’도록 내민다. 이런 구조는 원뿔형의 나선으로 토픽화 된다. 플레이어는 넓은 반응 중심의 게임 세계에서 다양한 대상을 만나며 ‘정처없이’ 움직이고, 이러한 움직임이 캐릭터를 ‘점차 위로 상승’시켜 최종적으로는 꼭대기peak와 접촉한다. 이런 구조는 초기 미국의 RPG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코드를 어느 정도 변용해 받아들인 일본의 RPG(Japanese RPG, 이후 JRPG)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단, 이 하위 장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퀘스트」는 프로듀서의 지향 [7] 에 의해 ‘게임 세계’보다는 ‘에픽의 서사’가 더 강조되었고, 이후의 JRPG가 그러한 서사에 더 집중하도록 만드는 기반을 부여했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RPG라는 것이 탄생한다. 선형 혹은 순환형 세계에서 변화를 가지지 않던 주인공들이 존재하던 세계에 ‘정처 없는’ 플레이가 들어선 것이다. 1990년대 : CRPG의 고전기 이렇게 형성된 RPG라는 장르는 1990년대에 이르러 그 형태가 더욱 졍교해진다.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Role-playing Game Studies》(2018) 에서 슐스Schules, 피터슨Pterson, 피카드Picard는 ‘게임 제작 수의 폭발적인 증가와 출시되는 게임의 질적 향상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학계와 팬들은 1990년대를 CRPG의 황금기로 간주한다.’ [8] 고 쓰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은 이후의 RPG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게임들, 블리저드의 「디아블로」,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 인터플레이의 「폴 아웃」,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II : 대거 폴」,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 등이 발매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수/다종의 제작과 발매는 장르 내부에서의 적극적 분화를 이끌어낸다. 이 시기에 RPG가 유독 비디오 게임계의 주요 화두가 된 것은 비디오 게임 환경의 전적인 이동에 있기도 했다. 1990년대 개인용 PC의 보편화와 더불어 닌텐도, 세가의 적극적 공세는 비디오 게임의 소비 공간을 아케이드에서 가정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러한 소비 공간의 변화는 게임의 소비 방식 자체를 ‘일회적 양식’에서 ‘다회적 양식’으로 크게 변화시켰고, 플레이어들은 다회의 플레이가 맥락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월드」같은 플랫포머 게임조차 맥락적 다회 플레이를 의식하는 구성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경혁은 《현질의 탄생》에서 이렇게 적는다. "(게임의 소비 공간의 변화를 통해) 첫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변화는 긴 호흡의 게임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엔딩 없이 무제한으로 반복되던 초창기 게임들은 서서히 나름의 서사를 가진, 다시 말해 엔딩이 있는 게임의 형태로 변화했다. (...) 콘솔/PC 게임들이 보여주는 세이브/로드를 통해 초장 시간의 서사를 갖는 게임 플레이는 (...)" [9] 70~80년대에 발흥한 RPG라는 장르는 이러한 비디오 게임 소비의 공간적 변화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작동한다. 호리이 유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점점 강해진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거든요. AVG는 수수께끼가 막히면 할 일이 없어져버리지만, RPG라면 일단 레벨을 올리기만 해도 즐길 수 있잖아요. 수수께끼를 풀고 레벨도 올리면서 계속 나아가면 많이 놀 수 있는데다가,(후략)." [10] 이 시기를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etti의 장르 사이클에 놓고 본다면 전적으로 고전기 [11] 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전기는 ‘중간단계로서 균형, 풍요, 안정 같은 고전적인 이상을 구현’ [12] 한다. 즉, 80년대에 만들어진 RPG라는 장르 규칙은 1990년대의 폭발적 증가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이상적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이 때의 RPG들이 무엇을 그 고전적 이상으로 삼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RPG를 ‘RPG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거대한 세계,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보다도 그것을 달성시키는 ‘양식 조건’, 수치적 캐릭터 구성과 그 성장 체계에 기울어진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RPG를 ‘다른 장르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RPG’라는 태그를 달 수 있는 조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수치화된 ‘능력치’라는 것이 있는지, 점수화된 경험을 모아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통해 이 시기에 ‘RPG화’라는 욕망은 이 메커니즘을 어떻게 이식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예를들어 시에라 온라인이 이러한 ‘RPG성’을 이식해 만든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 「퀘스트 포 글로리」 [13] 의 경우, 역시나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양식 조건이다. 당시의 게임 잡지인 《PC 매거진》 1993년 1월호는 이 게임의 세번째 작품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한다. ‘이전의 「퀘스트 포 글로리」와 마찬가지로, QG3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과 그래픽 어드벤처가 혼합된 게임입니다. 캐릭터의 특성과 능력은 능력치의 리스트에 의해 정의됩니다. 상황의 성공 여부는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지며, 연습을 통해 스킬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14] 이러한 규정은 연구자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구석이 있다. 2008년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에 실린 마이클 히친스Michael Hitchens와 앤더스 드레이센Anders Drachen의 《롤플레잉 게임의 다양한 얼굴들》에는 싱글 플레이어 디지털 롤플레잉 게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이러한 게임은 캐릭터의 수치적 표현에 의존하며, 펜 앤 페이퍼 게임의 전형적인 스킬과 능력의 수치적 향상에 따라 캐릭터가 성장한다.’ [15] 또한 2012년 발매된 《비디오 게임 대백과》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장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모든 RPG에는 정량화할 수 있는 특징(테이블탑 스타일 RPG에서 사용되는 캐릭터 시트와 동등한 디지털적 요소)을 가진 플레이어 캐릭터가 있으며 캐릭터의 성장이 성공의 중심 척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RPG 규칙 시스템에는 자주 '경험치 레벨'이 포함되는데, 이는 게임에서의 성공적인 진행을 통해 새로운 능력과 스킬로 '레벨 업'할 수 있는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다.’ [16] *《PC GamePro》에서 배포한 「디아블로」(1996)의 리뷰 프린트 광고. 잡지에 따라서는 Action RPG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러한 양식 조건만으로 RPG를 설명할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96년 블리저드의 「디아블로」가 출시된 뒤, 해당 게임을 CRPG로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7] 그럼에도 「디아블로」는 여러 게임 잡지들의 기사 등에서 ‘RPG’로 홍보되었으며 전통적 팬덤의 입장과 무관하게 RPG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업계에서는 RPG라는 게임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수치적 캐릭터 규정과 성장 방식을 하나의 문법으로 사용했다. 설령 전통적 RPG의 팬덤이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편 이러한 비교적 가벼운 규정은 1990년대에 RPG의 제작을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으며, 덕분에 다종으로 분화할 토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탄생한 SRPG의 경우 세계와의 접촉이 선형적이고 불가역적임에도 불구하고 RPG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게임 무대stage에서의 자유로운 전술적 지침이 이러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일부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90년대는 그것의 고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과 동시에 그것에 다종의 분화를 만드는 수정기의 초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분화는 크게는 RPG의 거대 컨셉을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느냐를 통해 분화되었다. 요컨대 지리적 요건에 의해서는 일시적으로 서구식 RPG(Western RPG, 이후 WRPG)라고 불리웠던 그것과 JRPG로, 인터넷이라는 기술 조건에 의해서는 단일 플레이어 RPG와 멀티 플레이어 RPG로 분화되었다. 이 때 이 분화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전적으로 RPG의 핵심인 ‘거대한 컨셉’에 대한 각자 다른 접근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할 필요는 있다. 90년대 말의 RPG 1 : 지리적 분화로서의 WRPG와 JRPG 먼저 지리적 분화는 RPG가 내포한 ‘거대함’의 컨셉을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WRPG는 거대한 ‘세계’에 방점을 찍는 반면 JRPG는 거대한 ‘서사’에 방점을 찍는다. 특히 WRPG는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로, JRPG는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로 이러한 특징의 엇갈림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일시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던 CRPG, 특히 D&D를 기반으로 하는 CRPG를 완전히 전복한 작품으로 꼽히는 「발더스 게이트」는 21세기 이후 서양식 RPG의 가장 모범적인 구성을 명백히 한다. 당연히 「발더스 게이트」 역시 에픽의 서사를 추구하지만, 그 내부에서 세계와의 접촉은 두 개념으로 분할되어 작동한다. 먼저 ‘주된 서사’는 챕터의 단위로 분절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각 챕터의 내부에서 세계를 향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실행해 세계의 수많은 요소와 접촉하고 상호 작용한다. 물론 이러한 절차 기반의 세계 탐험은 이 게임보다 약 5년에 앞서 발매된 다이나믹스의 「크론도의 배신자」에서 이미 확립된 개념이긴 하나, 「발더스 게이트」는 이러한 세부적 접촉을 관리하는 저널의 역할, 그리고 각각의 접촉이 발생시키는 상당한 수준의 다면적 반응을 통해 세계 자체가 가진 생동성을 극히 도드라지게 만들어냈다. 단순히 세계에 흩뿌려진 작은 서사의 조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 캐릭터가 가진 특성이 대화의 양상에 반영되거나, 대화 양상이나 접촉의 순서가 이후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세계의 생동을 전달한다. 따라서 「발더스 게이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코드는 결국 ‘세계’가 된다. 이는 그와 유사한 시기에 발매된 두 편의 「폴 아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로, 결국 이 시기 WRPG는 초기 CRPG가 가져온 ‘세계’의 맥락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파이널 판타지 VII」는 전적으로 서사의 맥락을 향해만 나아간다. 발매 당시 「파이널 판타지 VII」는 서사의 중간을 채우는 화려한 컷씬으로 그 특징이 규정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파이널 판타지 VII」에는 온갖 기이한 요소들이 산재한데, 특히 이야기의 진행을 메우는 미니 게임의 역할이 그렇다. 「파이널 판타지 VII」에는 챕터와 챕터를 메우는 독특한 구성의 미니 게임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들은 슬로프에서 스노우 보드 타기, 잠수함을 조종해 적기를 격추하기 등 완전히 다른 장르로 발현되곤 한다. 게다가 각각의 미니게임은 (RPG의 규칙적 전제인) 플레이어의 성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완전 독립된 구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지점을 갖는다. 이들의 이상한 점은 이러한 외부적 플레이를 플레이어에게 강제하는 구성이라는 점에 있다. 마치 스퀘어 소프트는 자신들이 상정한 서사 전체를 ‘체험’시키려는 요량으로, 그러니까 서사가 허용한다면 그것을 게임 플레이로 해석해 체험시키겠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진 것 처럼 보인다. 즉 이 세계는 「발더스 게이트」처럼 플레이어에게 반응하기 보다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반응하길 바란다. 이 반응 요청의 하부 구조에 ‘에픽의 서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기묘한 게임의 세계적인 성공은 JRPG라는 것이 작동하는 원리가 그 무엇보다 ‘에픽의 서사’에 있음을 천명한다. JRPG는 ‘서사’라는 컨셉을 위해서라면 ‘세계’라는 축 마저 납작하게 만들 각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 VII」(1997)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서사에 상응하는 미니게임을 갑작스럽게 던지곤 한다. 이들은 21세기 초를 규정하는 다른 중요한 RPG들,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플레인스케이프 : 토먼트」(이하 「토먼트」)와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X」의 분명한 토대가 된다. 21세기 초 사반세기의 RPG의 규정에는 이들로부터 이어지는 지리적 양태를 무시할 수 없는 흔적이 있다. 90년대 말의 RPG 2 : 통신 기술의 기반으로부터의 멀티 플레이어 RPG 한편 20세기 말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 혁명적 디지털 기술의 변모가 존재하던 시기다. 이 조건은 RPG라는 장르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데, 본디 RPG가 모델로 삼고 있던 TRPG는 그 자체가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 반응성의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동시에 감각 시킨다는 조건은 RPG의 이상적 모델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MORPG 또는 MMORPG는 그 선조로서 MUG를 가지고 있다. MUG는 기본적으로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같은 텍스트 어드벤처를 다수의 환경이 동시에 즐기는 것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세계를 공유할 경우, 그 안에는 인식을 위한 ‘동일한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텍스트 어드벤처들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추상적 이미지만으로는 한계지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결국 ‘수치로 규정되는’ RPG의 양식적 기반이 그 내부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터넷의 전송 가능한 데이터의 수치가 증가함에 따라 텍스트라는 한계지점을 넘어 최종적으로 그래픽으로 운용되는 세계가 구동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MMORPG는 단연 1997년 출시된 「울티마 온라인」이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가장 확고히 인식되는 욕망은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어떤 면에서 이 게임으로부터는 TRPG의 그것을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 ‘거대 세계’라는 컨셉 안에서라면 그것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까지도 느껴진다. 물론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은 무한한 가능성의 조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와 대면하는 게임 마스터라는 접면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울티마 온라인」은 모든 플레이어 캐릭터가 직접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어줌으로서, 가상적 세계 그 자체를 인간의 힘으로 ‘구동’시키고 싶어한다. 플레이어는 필요에 따라 여러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는데, 보편적인 RPG의 주인공인 ‘모험을 하는’ 캐릭터 외에도 경제 활동에 투신하는 직업인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게임 내부에서 연결되고, 관계 맺고,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울티마 오리진」의 이상적 모델이다. 따라서 여러면에서 「울티마 온라인」이 상정하는 ‘거대 세계’의 모델은 TRPG의 그것보다 더 커다란 측면이 있으며, 따라서 이 두 세계라는 컨셉은 오히려 구분되어 버린다. 즉, 「울티마 온라인」의 진행은 어느 순간 CRPG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TRPG를 지나쳐버린다. 한편 싱글 플레이 RPG, 이를테면 「발더스 게이트」나 「디아블로」 등에서는 네트워크 기능을 통해 동일한 세션을 함께 즐기는 멀티 플레이가 탑재된다. 특히 D&D를 그 원전으로 삼는 「발더스 게이트」는 TRPG의 온라인 세션을 염두에 둔 구성임이 명백했다. 「발더스 게이트」를 동시에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세계의 구성물이 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반응하는 존재로만 기능하도록 구성되어있다. 사실상 이 구성은 디지털 구조에 게임 마스터의 역할을 뒤집어 씌운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심플한 「디아블로」는 하나의 지하 던전을 함께 헤집고 다니는 반응적 ‘파티’를 구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 경험은 사실상 고전 아케이드 게임인 「건틀렛」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은 「울티마 온라인」이 품고 있는 ‘다수의 플레이어에 의해 거대 컨셉이 스스로 구현되는 것’과는 거리를 둔다. 어떤면에서 보면 이 두 분화의 관계는 WRPG와 JRPG의 더 거대한 버전처럼도 보인다. 이를테면 「울티마 온라인」은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더욱이 거대하게 만드는 대신, 에픽의 가능성을 극도로 줄여버린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감각하는 서사는 본질적이기 보다는 구성적이다. 따라서 체감적인 서사성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조지프 캠벨의 의미에서) ‘신화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찰하며 만들 수 있는 서사에는 역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여전히 서사의 중심을 게임 시스템이 귀속시키려는 「발더스 게이트」는 더 전통적인 측에 속한다. 캠벨의 주장에 따라 신화적 서사가 ‘신의 세계’에 다녀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신 또는 그에 준하는 존재로서의 서사를 인가하는 자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발더스 게이트」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게임 마스터라는 역할이며, 그것을 ‘기계 장치의 신’에 맡겨둠으로서 거대 서사라는 컨셉을 기능시킨다. 1990년대의 유산과 21세기 초의 RPG들 앞서 설명한 분화들의 결과는 21세기 초입의 가장 중요한 RPG로 그 효과를 연장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발더스 게이트」는 「토먼트」로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유산으로 남긴다. 이때 「토먼트」는 「발더스 게이트」가 가진 하이 판타지적 컨셉들로부터 이탈해 전투와 그에 준하는 세팅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인 ‘이름없는 자’가 어떻게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지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게임 진행의 형식이 되어주는 것을 넘어, 「토먼트」가 궁극적으로 그리는 에픽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준다. 이렇게 「발더스 게이트」로부터 「토먼트」로 이어지는, 거대 세계의 컨셉을 통해 에픽의 서사를 달성한다는 개념은 21세기의 WRPG가 반복해서 품는 모델이 된다. 그 경향의 연장에는 바이오웨어의 「스타워즈 : 구 공화국의 기사단」 시리즈와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시리즈, 「폴아웃」 시리즈, 라이온헤드 스튜디오의 「페이블」 등으로 연장된다. 또 한편 「파이널 판타지 VII」에서부터 발흥한 JRPG의 태도는 동 시리즈의 신작이었던 「파이널 판타지 X」로 연장된다. 「파이널 판타지 X」는 이전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세계의 직관적 체험’을 포기한 최초의 게임이다. 말미에 하늘을 나는 ‘비공정’을 획득해 세계의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었던 이 시리즈에서 ‘월드 맵’이라는 개념을 포기한 최초의 게임이다. 「파이널 판타지 X」의 세계는 길게 이어진 길쭉한 홈통이 몇개씩 연속으로 연결된 형태이며, 그 홈통들 사이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넓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비공정에 탑승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그 행선지를 여러개의 선택지 중 하나로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시각적으로는 세계의 가상 모델을 드러내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임의로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파이널 판타지 X」는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최소한도의 크기로 납작하게 만든 뒤,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만을 비대하게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면에서 21세기 JRPG를 규정하는 전제가 되어준다. 이를테면 21세기 초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아틀러스의 「페르소나」 시리즈 역시 그렇다. 본디 「진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으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외전임을 증명하는 ‘여신이문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거한) 3편부터 그 게임 플레이가 크게 변화한다. 여기서부터 이 시리즈는 세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부감적 시선을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공간이 아닌 시간을 통해 길쭉한 홈통을 만들고 플레이어를 통과시킨다. 하루하루의 행동을 통해 앞으로 진행하도록 요구하는 게임의 구성은 거대 세계에 응하는 체험이라는 감각을 끊어버리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컨셉 안에 플레이어를 가둬버린다. 「페르소나」는 일정 시기마다 벌어지는 대형 이벤트와 그곳에서 발생하는 인간적 드라마를 공간의 개념보다 더 강조한다. 「페르소나」 역시 에픽의 서사 앞에서 세계의 규모를 납작하게 누르는 시리즈라 할 수 있다. 90년대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또 다른 인기 JRPG 시리즈인 「포켓몬스터」 시리즈 역시, 몇 개의 구역이 홈통이 되어 서사의 핵심 축인 ‘마을’의 연결고리로 작동한다. 물론 이후의 모든 JRPG가 이런 ‘연속된 홈통의 구조’를 가지지는 않겠지만, 이후 JRPG에선 서사의 컨셉이 세계의 컨셉보다 우위라는 것, 서사가 세계를 짓누르는 구성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다. *「파이널 판타지 III」와 「파이널 판타지 X」의 비공정 화면의 비교 한편 21세기의 초입에 등장한 또다른 서양의Western RPG인 「디아블로 2」는 「발더스 게이트」의 논제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전작인 「디아블로」로부터 이어진 던전 크롤링 중심의 이 게임은 「로그」로부터 빌려온 무작위 생성의 던전을 그 세계의 핵심 축으로 가진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세계의 반응을 기대하기 보다는 세계에 ‘반응하며’ 탐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성은 어떤 면에서는 세계만을 비대하게 키워낸 MMORPG에 대응하며 존재하는 것 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반응성이 극히 적은 게임의 플레이는 웨스트우드의 「녹스」, 가스 파워드 게임의 「던전 시즈」 시리즈, 레이븐 소프트웨어의 「마블 얼티밋 얼라이언스」 등으로 이어지며 WRPG의 한 축을 이룬다. 단 이들은 첫번째 「디아블로」보다는 더 디테일한 서사를 중시하는 면이 있으나, WRPG와 유사한 정도의 반응적 세계를 구축하진 않는다는 면에서 다른 경향을 지닌다. 한편 MMORPG는 계속된 「울티마 온라인」의 논제, 플레이어를 구성물로서 세계를 구성하려는 욕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매달리는 측면이 있었다. 요컨 NPC에 의한 상행위를 완전히 지우고 플레이어들만으로 경제를 지탱하려 했었던 「애쉬론즈콜 2」나 플레이어를 세력에 귀속시키고 소통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플레이어들간의 군집적 결속을 유도하려 했던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이 대표적인 예시가 된다. 특히 1999년 발매된 SOE의 「에버 퀘스트」는 이러한 시스템의 ‘특화된 지점’의 인적 네트워크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세계의 구성에 있어 협력의 ‘필요성’을 통해 커뮤니티를 작동시키는 독특한 게임이었다. 「에버 퀘스트」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의 규모, 문제, 해결의 양상에서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 형태의 레벨 디자인의 변용을 통해) 방법론의 측면을 강화한다. 그 결과 플레이어들은 자의적으로 세계를 생동시켰으며, 「울티마 온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거대 세계’를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21세기의 MMORPG를 확고히 규정한 게임은 블리저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일 것이다. 「WoW」는 그 구성에 있어 이전의 MMORPG들이 거쳐온 다양한 개념들을 규합하고 있긴 하지만, 오히려 「울티마 온라인」의 논제인 ‘플레이어를 구성물로 세계를 구동’하려는 욕망으로부터는 꽤나 이탈해있다. 물론 팩션을 통한 응집이나, 인스턴스 던전과 레이드 등을 통해 발현되는 「에버 퀘스트」적인 커뮤니티 구성은 충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WoW」를 더 특별하게 만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싱글 플레이 RPG로부터 그 방법을 빌려온 ‘세계를 추동하는 거대한 서사’의 컨셉이기도 했다. ‘퀘스트 텍스트가 단순한 플레이버 텍스트가 아닌’ MMORPG로서 「WoW」는 독특한 지점에 있는 게임이다. 말하자면 「WoW」는 MMORPG가 끌고 나간 ‘거대 세계’의 컨셉을 이어받아 플레이어들을 구성물로 삼는 세계를 구축하는 한 편, 플레이어 캐릭터로 하여금 고전적인 RPG의 에픽 서사의 컨셉, 즉 ‘위대해지기’를 체감시키는 텍스트적 힘을 발휘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WoW」의 강점은 적절한 정도의 수동성이다. 특히 2010년 벌어진 거대 이벤트 ‘대격변’은 그 수동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세계의 형태, 구조를 뒤바꾼 이 충격적인 이벤트는 플레이어들의 참여적 성질로 벌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엔 오직 부여된 서사만이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WoW」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거대 서사’의 컨셉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이 수동적 변화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 레벨링 시스템의 보편화와 장르 재정립의 시대 그러는 한편, 비디오 게임의 주 무대가 완전히 가정으로 바뀌어버린 21세기는 고전적인 RPG의 양식적 모델이 가진 독립성이 붕괴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21세기는 비디오 게임의 플레이 형식을 맥락적 다회성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기술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장르에서도 ‘위대해지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캡콤의 「귀무자」 시리즈나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의 「갓 오브 워」 시리즈, 세가의 「용과 같이」 초창기 시리즈는 모두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형태에 귀속되어 있는 시리즈이다. 하지만 이들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강화되는 일종의 성장 테이블을 지녀 장기간 세션의 반복을 통해 점차 에픽의 위대함에 가까워진다. 물론 예시로 든 게임들은 21세기 초에 등장해 그 초석을 마련한 게임들일 뿐이다. 21세기의 ‘커다란’ 게임들이란 대체로 수집, 구매, 강화, 스킬 트리 등의 성장 체계를 기본적인 언어로 삼는다. 따라서 이 약 20년의 시기는 1990년에 세워두었던 RPG의 양식적 모델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더 이상 RPG는 수치화된 캐릭터 구성과 레벨식 성장이라는 것으로 장르 모델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정처없는 서성거림’이라는 모델 역시 그 존속에 불투명함이 발생한다. 「GTA 3」부터 가속화된 ‘오픈월드’라는 형식의 확산은, RPG라는 규정의 여부와 무관하게 플레이어 캐릭터를 펼쳐진 세계에서 이리저리 떠돌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세계를 향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고 그 반응을 기대한다. 게임 세계의 규모를, 용량이 닿는 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작금의 게임 세계에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장르 특유의 체감적 모델로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는 셈이다. * 아케이드형 벨트 스크롤 액션 게임에 가까운「캐슬 크래셔즈」역시 정처 없이 떠돌거나(좌), 캐릭터를 성장(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를테면 소니의 「마블스 스파이더맨」은 RPG인가? 이 게임에는 명백한 형태의 성장 체계(RPG의 양식적 모델)가 존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미 얼마든지 떠돌 수 있는 맨해튼의 지도(RPG의 체감적 모델)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게임을 ARPG로 부르지 않는다. 이런 구성은 락스테디의 「배트맨 : 아캄 수용소」를 위시한 아캄 시리즈나 레메디 엔터테인먼트의 「컨트롤」, 심지어는 베히모스의 「캐슬 크래셔즈」같은 아케이드 테이스트가 짙은 빗뎀업 게임까지 수도없이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이 게임들에게서는 ‘세계의 디테일한 반응’이나, ‘고전적 성장 시스템’ 등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소소한 어긋남은 RPG라는 장르의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해왔던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게임을 ‘RPG’라고 부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일까? 오히려 이러한 물음이, 사반세기가 지난 바로 지금에 와서 RPG라고 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맞닿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21세기 RPG의 사반세기 :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018년 Routledge로부터 발매된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에서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한 명의 플레이어가 컴퓨터 장치로 플레이한다. ● 플레이어는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 하나 이상의 캐릭터의 행동을 생성하고 관리한다. ● 컴퓨터는 모든 비플레이어 캐릭터를 포함한 게임 규칙과 게임 세계의 내부 모델을 실행하고, 인터페이스를 통해 표현을 렌더링하며 플레이어의 입력에 따라 모델과 표현을 업데이트한다. ●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시청각적 표현을 생성하는 계산 모델에 의해 구성된다. ● 게임 세계는 일반적으로 판타지, SF, 호러 또는 이들의 혼합물인 일종의 장르 픽션의 것을 따른다. ● 시도할 수 있는 캐릭터의 행동은 게임 인터페이스를 통해 제공되는 옵션으로 제한된다. ● 캐릭터의 능력과 행동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정량적 확률 규칙 시스템 또는 플레이어의 반사 신경과 명령 입력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 게임은 보통 여러 세션에 걸쳐 진행된다. ● 게임 내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게임 세계의 광범위한 스크립트(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 행동 포함)를 통해 사전 계획된 플롯을 따라 명확한 종료 지점을 향해 안내되지만, 플레이어는 이러한 플롯이 끝나기 전/도중/후 언제든지 개방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 전투 처리를 위한 광범위한 규칙이 있다. ● 플레이어 캐릭터는 성장 시스템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향상된다. [18] 비교적 최근에 정리된 규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규정이 앞서 제기한 RPG라는 장르 특성의 광범위화에 따른 해체 가능성을 돌파하도록 돕진 못한다. 요컨 상기의 모든 요건은 앞서 말했던 「마블스 스파이더맨」이나 그와 유사한 액션 어드벤처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RPG라는 장르의 개념적 소멸을 앞두고 있는 것인가? 물론 이제와서 ‘21세기에는 모든 게임이 RPG다.’라는 성긴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해체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가 ‘RPG’라고 하는 것을 어떠한 감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캐릭터를 강화하고, 적과 조우해 전투하는 일을 겪는다고 해도 「데드 스페이스」는 명백히 RPG가 아니지만 「세계수의 미궁」은 명백히 RPG로 인식된다. 단순히 턴 베이스의 전투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감각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위쳐」나 「다크 소울」을 RPG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접근해보자. 지금의 RPG가 무엇인가를 규정 또는 재규정하려는 태도로부터 잠시 이탈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21세기의 RPG는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극도로 분화되거나 통합되어버린 세계를 향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은 구분짓기categorizing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는 게임들은 액션 어드벤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태도로의 ‘액션 RPG’ 군집이다. 특히 근래에 도드라지는 것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을 위시한 일련의 느슨한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세계에 대한 극도로 희소한 규정이다. 요컨 소울 시리즈에서 플레이어에 대한 세계의 반응성이란 극도로 폭력적인 방향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쩐지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 ‘세계’ 자체가 그러한 반응만을 가지는 곳이라고 규정하려는 뉘앙스가 있다. 쉽게 말해서 이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설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이 세계를 규정하는 특징이 그렇다. 오직 이 세계의 언어란 간접화법의 언어, 쉽게 말해 ‘플레이버 텍스트’를 통해 우회하는 언어로서 세계의 규정을 전달한다. 이 세계에 「발더스 게이트」의 논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이 게임이 ARPG이기 때문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좀처럼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소울 시리즈는 초기 CRPG의 순수함을 유지하려 한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반응을 오직 ‘읽어야만’ 하는 세계. 읽는 시간 이외에는 세계가 가져다주는 극도의 폭력에 대항하며, 서성일 수 있는 품을 넓혀야 하는 그런 곳 말이다. 프롬 소프트웨어의 프로듀서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이런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감히 말하자면 「데몬즈 소울」에서는 소위 ‘게임 애호가’의 공통된 가치관,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는 ‘게임스러움’ 또는 ‘흥미로운 부분’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저드리」와 같은 많은 고전 게임이 가지고있는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인 게임의 속성 말입니다." [19] 즉 이 군집은 어떤 면에선 ‘행동의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던’ 시대의, 디지털 게임의 원시적인 개념들만으로 D&D의 형태를 재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기를 RPG라고 규정한다. 요컨 이것은 뒤틀린 형태의 에뮬레이션이다. 시대의 기술적 한계를 의도된 불편함과 폭력으로 규정하고는 그것을 최신의 기술로 되짚어 구현하려는 기이한 욕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군집에는 RPG라는 개념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존재한다. 이들은 RPG란 언어의 컨셉에 그 핵심이 있다는 사실에 의지한다. *「다크 소울」과 그에 연계된 게임들에 있어 에픽을 창조하는 것은 ‘말’이 아닌 ‘글’이다. 또 다른 먼 군집은 대한민국에서 ‘수집형 RPG’라고 불리우는 군집이다. 이들은 (약간은 강경한 태도를 가지자면) RPG라는 그 어떠한 기반도 가지지 못한 기이한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은 스퀘어 에닉스의 「확산성 밀리언 아서」로부터 비롯된 CCG(Collective Card Game)의 연장선상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 수집의 대상이 ‘카드’가 아니라 수치화된 캐릭터라는 점에서 RPG라는 위치를 점한다. 조은하는 이러한 한국형 수집 RPG의 시초적 게임으로 핀콘의 「헬로 히어로」를 들며, 이 장르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국내 개발사들은 일본 CCG가 스마트폰 환경 하에 효율적으로 재구성한 RPG 시스템을 일부 수용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일본 CCG의 일러스트 카드를 움직이는 2D, 3D 캐릭터로 바꾸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형식적인 전투 시스템을 화려한 스킬과 시네마틱 연출을 통해 볼거리를 만드는 작업들을 시도했다.’ [20] 여기서의 핵심 문구은 아마도 ‘스마트폰 환경 하에 효율적으로 재구성한 RPG 시스템’ 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발안하는 ‘RPG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990년대에 형성된, 양식 조건으로서의 RPG 구성요소, 즉 ‘수치화된 캐릭터와 그에 대한 성장 시스템’일 것이다. 요컨 모바일 중심의 이 ‘수집형 RPG’는 그러한 양식 조건이 바로 RPG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일군이다.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반응 추구, 생동성, 체감적인 ‘위대해지기’의 요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거대함의 두 컨셉(세계, 서사)이 모두 약화되어 작동하는 셈이다. 물론 수집형 RPG에도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세계과의 면밀한 접촉과 극단적으로 유리된, 텍스트 어드벤처의 그것과 동등한 위상으로 작동한다. 쉽게 말해 수집형 RPG에서 ‘거대 세계의 컨셉’은 실종되어 있고, ‘거대 서사의 컨셉’은 장르 밖에서 작동한다. 오직 RPG라는 형태는 양식으로서 기능하는데 그친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ARPG적 변용들, 「원신」이나 「젠레스 존 제로」등은 세계와의 생동을 그려내며 조금은 더 원형적인 RPG의 형태로 나아가는 면이 있다. 한편 MMORPG의 군집은 조금 복잡한 양태를 가진다. 라이브 서비스라는 명목 하에, MMORPG는 그 플레이어 요구의 개념이 크게 변화한다. 한 축은 MMORPG의 본질적인 욕망인 ‘게임 세계’의 소유로 뻗어나가는 군집이다. 21세기 초에 서비스를 시작해 여전히 유지되는 「EVE 온라인」을 필두로 경제 체계나 생활 콘텐츠를 채워나가는 경향의 게임들 (「아키에이지」, 「알비온 온라인」, 「검은 사막」, 「코난 엑자일」 등)이 한 축을 이루는 반면, 게임 세계와의 반응보다는 특정한 챕터 등의 절기를 중심으로 서사를 지속적으로 지원받는 서사 중심의 MMORPG(「파이널 판타지 14」, 「스타 워즈 : 구 공화국」, 「엘더스크롤 온라인」,「로스트 아크」 등)가 한 축을 이룬다. 하지만 초기 MMORPG가 추구했던 ‘세계 그 자체의 거대한 운용’을 극히 시도하는 경향은 줄어들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게임이 다루는 세계가 ‘게임 세계’라는 범주를 추월하려는 경향을 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쉽게 알 수 있듯 「EVE 온라인」 등이 장기간 발전시켜온 이 가상의 세계는 결코 친절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MMORPG는 이러한 비대해진 게임 세계가 곧 완전한 가상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한계 지점에 대한 토로와도 같다. MMORPG가 다루는 게임 세계가 TRPG가 다루는 게임 세계, ‘합의와 관리의 세계’를 추월해버렸을 때, 그 벽의 너머에서 접촉하는 것은 실제 세계의 영향력일 수 밖에 없다. MMORPG는 이미 CRPG의 순수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순수한 게임 세계라기보다는 현실 세계의 튀어나온 작은 혹, 현실세계의 영향이 장단기 반영되는 거울과도 같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여러면에서, 서사의 컨셉을 다시 끌고온 MMORPG들이 다시금 ‘ 체험 가능한 게임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결국 MMORPG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세계라는 컨셉을 중심에 두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RPG’라는 장르의 논리만으로는 수집할 수 없는 더 거대하고 독립적인 장르가 되어버렸으며, 더욱이 그렇게 나아가게 될 것만 같다. 또 다른 군집은 JRPG의 순수성을 추종하는 군집이다. JRPG의 테이스트가 일종의 보편 가능성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0년에 《JRPG가 고쳐야 할 10가지 방식》 [21] 이라는 굴욕적인 칼럼이 게재되기도 했다. 불과 15년전까지만 해도 JRPG는 고전적 RPG의 순수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온, 어떠한 변용된 돌연변이와도 같았다. 물론 해당 칼럼이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읽혔던 것은 아니나, 이러한 칼럼이 쓰여지고 유통된 배경에는 분명 서양 게이머 군집의 JRPG에 대한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제는 철저히 로컬리티의 결과물이다. 즉 ‘JRPG’라는 단어로부터 전달되는 지정학적 문제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칼럼이 정말로 JRPG가 ‘비교적 질이 낮은’ 장르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시기까지 RPG란 정말로 동-서라는 세계로 그 형태가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5년 정도가 지난 지금, JRPG는 하나의 코드로서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선다. 흥미롭게도 근 10년 사이에 나온 JRPG의 코드를 가진 게임들에는 일본 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게임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크로스 코드」(독일), 「코스믹 스타 히로인」(미국), 「피어 & 헝거」(핀란드), 「겟 인 더 카, 루저!」(캐나다), 「인디비지블」(미국), 「잭 무브」(대만), 「씨 오브 스타즈」(캐나다), 「클레르 옵스퀴르 : 33 원정대」(프랑스) 등등. 이는 게임 제작자의 세대 분리를 드러내는 통계적 결과일 수도 있다. 요컨대 JRPG를 서구세계에 알린 「파이널 판타지 VII」가 등장한지 약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코드를 자기 내부의 문화적 양식으로 인지하는 서구의 게임 제작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세대론보다 중요한 건 아마도 ‘세계’의 컨셉을 줄이고 ‘서사’의 컨셉을 증가시키는 밸런스의 RPG가 하나의 보편 가능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군집은 그러한 좁게 뻗은 길을 따르는 ‘위대해지기’ 역시 RPG라는 장르의 코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제 JRPG는 초기 CRPG의 간단한 번안물 이상이다. JRPG 역시 고전적 RPG의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영역을 지닌 하위 장르로 영속할 것이다. *「씨 오브 스타즈」(2023)는 전적으로 90년대 JRPG의 감각을 되살린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는 「크로노 트리거」나 「슈퍼마리오 RPG」 등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해야 하는 군집은, 그 무엇보다 본래의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지닌 군집이다. 이 군집에는 다음과 같은 게임들을 넣을 수 있다. 뮤네이처의 「인격해체」, 안샤르 스튜디오의 「게임 덱」, 점프 오버 디 에이지의 「시티즌 슬리퍼」 그리고 ZA/UM의 「디스코 엘리시움」. 이러한 게임들은 전적으로 TRPG의 핵심인 ‘언어’를 믿는다.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은 세계의 구조로 틈입해 세계의 반응을 이끈다. 그 사이에 플레이어가 구체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규정된 난수의 규칙rule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그리고 게임은 전적으로 언어에 귀속되어야 하므로, 규칙의 사용까지도 플레이어에게 ‘언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 이 군집은 RPG라는 장르가 탄생하던 시기에 목적하던 것을 다시금 획득하려 든다. 바로 TRPG를 순수한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추종한다. 이들의 목적은 ‘TRPG적인’ 플레이를 비디오 게임의 과정으로 번역해 이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군집의 게임이 갑자기 근 몇년 사이에 도드라진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이전에도 아울캣 게임즈의 「패스파인더」 시리즈나 라리안 스튜디오의 「디비니티」 시리즈가 바이오웨어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과 (그리고 최근에 발매된 「발더스 게이트 3」와) 현재의 군집이 다른 것은,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적 어머니로서 D&D를 유일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게임 덱」, 「시티즌 슬리퍼」,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정확한 의미에서의 ‘전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캐릭터를 구성하는 수치적 체계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물리 세계’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서사의 중심 체계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22] 그런 면에서 이 구성의 배경에는 초기 게임 베이스의 TRPG가 아니라 2000년대 이후에 확산된 스토리 중심story-driven의 TRPG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이들은 TRPG라는 테이블 게임계의 움직임과 조응하는 방식으로서의 비디오 게임을 지향하는 감각을 준다. 그리고 이 마지막 군집의 등장이 비교적 최근이라는 사실은, RPG라는 장르의 충분 조건이 보편화를 통해 해체되어가는 시대라는 사실과 충돌한다. 즉 모든 비디오 게임이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가 되어가는 이 시대에, 이 게임들은 비디오 게임 바깥의 이상을 다시금 불러들여 RPG를 재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로베르트 쿠르비츠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롤플레잉 게임을 완전히 혁신하고 싶습니다. 그 혁명을 실현할 때까지 게임을 미세조정 했습니다. 스토리, 선택, 결과의 활용을 혁신하는 것이죠. 스킬의 용례. “스킬"이라는 의미. 저는 실제 삶, 인간의 상상력, 슬픔, 암시의 힘, 춤 등 테이블탑 RPG와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진정한 경험을 실제로 표현하는 평화로운 스킬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23]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달성은 섬세한 그래픽이나 구체적인 컷씬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다. 해결 가능성은 오직 언어, 언어 그리고 언어이다. 오직 언어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 게임의 제작자들은 긴 시간을 우회해, 그리고 필요한 바로 이 때에 RPG라는 장르의 핵심으로 다시금 언어를 소환한다. 이때 이 언어의 필요성은 시대의 기술과 미묘한 접합점을 만든다. 이 시점에서 「언커버 더 스모킹건」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이상향이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과 접촉하며 끝없이 앞질러 나갈 것인가? 글쎄, 그러한 예측까지는 아직 미진한 일인 것 같다. *「시티즌 슬리퍼」(2022)는 매일의 주사위를 굴리고 해당 주사위를 어떠한 업무에 쓰느냐로 하루의 진행이 결정된다. 하지만 결국 그런 행위의 중심에는 최종적으로 출력될 텍스트의 변형이라는 기대가 있다. 결국 RPG의, 약 반세기에 걸친 장르의 역사를 돌자 장르의 가장 순수한 조건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RPG는 언어라는 이상점으로 끝없이 향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금은 부정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언어라는 이상향이 RPG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돌아 마주한 것은 언어의 순수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아니다. 70년대에 탄생하고, 90년대에 완숙하여, 2000년대에 끝없이 분화한 이 장르를 태초의 조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RPG’라고 부르던 조건은 이제, 수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취사적으로 선택되고 조립되고 분화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 순수한 RPG라는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가능성, 타 장르와의 융합, 혁신은 다 각기 다른 분류로서의 RPG로 기능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 몇 가지 군집들을 들긴 했지만, 이 내부에서 전부 다루지 못한 다른 가능성들(요컨 로그라이크 군집, 레벨링을 동원하는 메트로바니아 군집 등)도 존재한다. 어쩌면 이제 RPG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유가 전부 통괄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장르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오는 RPG에 대한 가장 유효한 문장을 동원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이 지난한 글을 호세 P. 제이갈과 세바스티안 디터딩이 《롤플레잉 게임의 규정》의 전반부를 열기 위해 사용한 문장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사실 롤플레잉 게임(RPG)은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게임 현상, 즉 예외, 특이점, 게임 같지 않은 게임일지도 모릅니다.” [24] [25] [1] RPG는 한국에서는 보통 비디오 게임의 장르로 일컬어지지만, 그 발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먼저 등장한 테이블탑 또는 라이브 액션 게임을 부르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특정한 수식없이 RPG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본 글은 비디오 게임의 장르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RPG라는 단어는 비디오 게임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맥락에 따라 CRPG라는 단어를 병용한다. 테이블탑 게임은 TRPG로 구분하여 표기한다. [2] Programmed Logic for Automatic Teaching Operations의 약자. 1960년대 초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의 도널드 비처가 중심이 되어 개발한 시스템으로 PLATO IV라는 독립적인 단말을 통해 구동되었다. [3] “So, most CRPGs spread a thin veneer of story and world-building atop game engines that were really all about combat and logistics; they became “roll-playing” rather than “role-playing” games.” (The CRPG Renaissance Part 1. https://www.filfre.net/2025/01/the-crpg-renaissance-part-1-fallout/ ) [4] 이를테면 캡콤의 플랫포밍 액션 게임인 「마계촌」에서 주인공 아서는 최종적으로 마왕 아스타로스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아서의 변화는 게임 플레이 와중 획득한 아이템에 기반한 것들이며, 이 가역적 변화는 언제든지 아서를 최초의 모습으로 되돌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RPG에서의 성장은 이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불가역성을 전제한 것이다. [5] 여기서 사용하는 에픽을 ‘서사시’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시’라는 형식보다 그것이 담지하는 서사적 특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컨 《장르의 해부Anatomy of Genre》에서 존 트루비John Truby는 에픽을 ‘한 인간 또는 집단에 의해 국가 또는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이야기’로 규정한다. [6] 그들이 원본으로 삼는 D&D 역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D&D는 캐릭터의 진행에 따라 Basic, Expert, Companion, Master, Immortal라는 각기 다른 책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최종적으로 위대해진 캐릭터는 Immortal 단계에 이르러 불멸자의 시험을 통과해 필멸자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7] 호리이 유지는 본래 만화의 스토리 작가를 지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원래 저는 코이케 카즈오 극화 서당에 다니다가 만화가 지망생을 거쳐 라이터가 된 케이스다 보니 극화 원작을 하자는 마음도 있었고요.” (PLANETS Vol. 7, 「호리이 유지 인터뷰 : 일본 게임의 진화가 향하는 곳」, 2010) [8] ‘The 1990s is generally viewed by academics and fans as a golden age for CRPGs due to the explosion of games that were developed and the quality of games released’(《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9] 《현질의 탄생》, 이경혁, 2022, 이상북스 [10] “だんだん強くなる、というのが面白いなと思ったんですよ。AVGって謎に詰まるとやることがなくなっちゃうけど、RPGならとりあえずレベルさえ上げれば楽しめるので、謎解きつつレベル上げつつでずっとやっていけば、いっぱい遊べるし、。”(PLANETS Vol. 7, 「호리이 유지 인터뷰 : 일본 게임의 진화가 향하는 곳」, 2010) [11] 루이스 자네티는 영화 장르의 변화 사이클을 초창기, 고전기, 수정기, 패러디기로 나눈다.자네티의 장르 사이클은 기본적으로 영화 장르의 이론에 적용하는 개념이지만, 시장을 형성하는 매체 전반의 장르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충분히 도움이 되기에 여기에 적용한다. [12] 《영화의 이해》, 루이스 자네티, 2017, K-Books [13] 이 시리즈의 3편은 국내에 동서게임채널을 통해 「영웅의 길 3」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14] ‘Like the other Quest for Glory games, QG3 is a hybrid of Computer Role-Playing Game (CRPG) and graphic adventure. Your character's attributes and abilities are defeined by a list of statistics. SUccess in a task depends on skill levels, and practive improves those skill.’ (《PC Mag》 Jan. 1993) [15] ‘These games rely on quantitative representations of the character, with character development following the quantitative improvement in skills and abilities typical of pen-and-paper games.’ (《Many Faces of Role-Playing Game》, 2008,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 Michael Hitchens and Anders Drachen) [16] ‘one feature that is commonly considered a defining one is that all RPGs have playercharacters with quantifiable features (digital equivalents of the character sheets used in tabletop style RPGs), and character progression is used as a central measurement of success. Traditional RPG rule systems often include “experience levels,” meaning that successful advancement in games translates into “experience points” through which a PC can “level up” to new powers and skills.’ (《Encyclopedia of Video-Game》, 2012, Greenwood, Edited by Mark J. P. Wolf) [17] 구글 그룹에서 다음과 같은 유즈넷 대화를 찾을 수 있다. 해당 대화는 1997년 2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Diablo : an CRPG, what a joke!」 ( https://groups.google.com/g/comp.sys.ibm.pc.games.rpg/c/7wJEyHTsdkE/m/EnpYnKMTBnUJ?utm_source=chatgpt.com&pli=1 ) [18] 《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19] ‘If you dare to say, in "demon’s soul", I think that there is something that constructs game-like or interesting parts before the east-west of Ocean, with the common values of so-called "game lovers" . "Wizardry" It is a very simple and primitive game property that many of the classic games such as had.’ (「Interview with Mr. Hidetaka Miyazaki who gave birth to a world-class hit "Dark Soul" from inexperienced game production」, Gigazine, 2012) [20] 《한국형 수집 RPG 장르 형성 연구》, 조은하, 2018 [21] 《Top 10 Ways to Fix JRPGs》 ( https://www.ign.com/articles/2010/01/12/top-10-ways-to-fix-jrpgs ) [22] 「인격해체」만은 예외적으로 전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게임이 자신의 부모로 삼고 있는 것은 명백히 카오지움의 《크툴루의 부름》이다. [23] ‘I want to completely revolutionise role-playing games. We need to fine-tune our game until we make that revolution possible. To revolutionise the use of stories, choices, and consequences. The use of skills. What “skill” means. I want there to be peaceful skills that actually represent real life, human imagination, sadness, the power of suggestion, dance... you know, that whole range of authentic experiences you get from tabletop RPGs and from reality.’ (《Choose your own misadventure Part 2》, https://steamcommunity.com/games/632470/announcements/detail/1615021499154801682 ) [24] ‘In fact, role-playing games (RPGs) are maybe the most contentious game phenomenon: the exception, the outlier, the not-quite-a-game game.’ (《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25] 물론 해당 문장은 본문에서 테이블탑 RPG, 라이브 액션 RPG를 통괄하는 RPG라는 범주 전체를 포괄하는 문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분화해버린 비디오 게임 RPG에게도 충분히 통용되는 의미이리라. Tags: 롤플레잉, 장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기억으로 남을 이들, 기억으로 살아갈 이들
어릴 적, 할머니는 나에게 어느 겨울 숲에서 곰을 만나 사망한 친척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소 잔인한 이야기라 자세히 서술하진 않겠지만,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나는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 역시 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그는 곰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 Back 기억으로 남을 이들, 기억으로 살아갈 이들 31 GG Vol. 26. 8. 10. 어릴 적, 할머니는 나에게 어느 겨울 숲에서 곰을 만나 사망한 친척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소 잔인한 이야기라 자세히 서술하진 않겠지만,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나는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 역시 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그는 곰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름이나 성격, 한 일,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아닌, 죽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는.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한 세기도 채 되지 않는 인간의 삶이야말로 예정된 찰나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이 땅을 거쳐갔을 무수한 인류 중, 자신의 삶으로 남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다. 심지어 박물관에 모셔진 고대의 예술작품을 만든 장인이 누군지조차 많은 경우 우리는 알지 못한다.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수학 공식으로, 심지어 법률로 이름을 남긴 극소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나를 알고 있는 누군가의 머릿속에만 남게 될 것이고, 이들마저 떠난다면 그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다. 삶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죽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애석하게도, 이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기억의 주도권을 가진 것은 엄연히 타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에디스 핀치의 유산What Remains of Edith Finch(2017)>에서 에디스는 남편 스벤이 용과 싸우다 죽었다고 증언한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 많은 가족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그들을 죽음으로 기억한다. [그림 1] 핀치 가족의 가계도는 떠나간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져있다. 단지 기이하고 독특한 죽음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다소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하지 않은가. 작품은 핀치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을 들여다보면서 그들 삶의 좋았던, 행복했던 일화가 아닌, 그들의 마지막 죽음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죽음들이 단지 사실로서의 죽음이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의 기억을 통해 구현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몇 안 되는 동물이며, 때문에 작품이 이렇게 구현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과정은 죽음 그 자체를 구현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바바라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 중 에디스가 이것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바바라 핀치가 세상에 남긴 것은 잘린 귀 한 쪽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극적이고 허황된 타블로이드지의 가십 뿐이다. 이는 바바라의 엄마인 에디스가 선택한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매우 고의적으로 선택된 버전의 기억. 딸이 실종된(그리고 아마 잔혹하게 살해되었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에디스가 하필 이 잡지의 버전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바라의 죽음을 놀랍도록 모욕하는 이 버전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삶을 놀랍도록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영화로 반짝 스타가 된 아역배우. 이제 그녀의 영광은 쇠락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와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기회를 꿈꿨다. 그런 바바라가 자신의 전성기를 기억하고 열광하는 공포영화 속 괴물들과 살인마들에게 잡아먹힌다는 결말은 그런 면에서 유효하다. 영화를 사랑하고,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했던 바바라의 삶을 그녀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구현한다.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영정 앞에 이 잡지를 둔다. 그녀가 자신의 꿈과 미래를 빼앗긴 것이 단지 불운한 비극이었으리라는 현실적인 추측에 비하면 이 잡지는 그녀가 사랑하던 것들에 대한, 또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 대한 헌사일지 모른다. 바바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삶을 투영한다. 몰리는 자신이 사랑하던 바다생물에 대한 꿈을 꿨고, 거스는 아빠의 재혼을 경멸했다. 이는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드러난다. 때론 본인의 일기에서, 때론 주변인의 편지에서, 때론 사진으로도 기억이 증언되는 동안, 플레이어는 이들의 죽음을 직접 플레이한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수사관도, 탐정도 아니다. 플레이어에게 맡겨지는 몫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샘이 아내 케이에게 쓴 편지가 낭독되는 동안, 플레이어는 그레고리의 죽음을 플레이한다. 아니, 이는 단지 욕조에서 벌어지는 물놀이에 불과하다. 장난감 오리, 개구리, 블록 인형 친구들과 욕조의 깊은 바닥으로 헤엄치는 즐거운 탐험으로 묘사된다. 샘이 편지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그레고리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발견하며 즐거워하는 천진한 아기이기 때문에. 편지에서 그레고리의 죽음에 대한 경위는 아주 짧고 우회적으로 묘사되며, 샘은 슬퍼하고 자책하는 케이를 위로하기 위해 편지를 썼을 뿐이다. 그리고 이 편지가 두 사람의 이혼 서류 마지막 장에 쓰였다는 표현은 그레고리의 죽음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까지 묘사한다. [그림 2] 각 인물의 죽음을 다루는 스테이지는 인물의 삶에 맞춰 다양한 구성으로 디자인된다. 이 기억들은 본질적으로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플레이어는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죽음을 경험하고, 이 한 장면으로 떠나간 사람의 삶까지 경험한다. 저택 곳곳에 깃들어있는 다양한 죽음의 기억들은 다양한 장르와 무드의 스테이지로 구현된다. 이 죽음들이 가진 공통점은 이들이 얼마나 우연찮고 기이했냐는 것보다는, 이들이 당사자의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저택을 떠난 던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 난 모든 집에 들어가선 안되는 문과 들여다보는 구멍이 있다고 생각했다.” 핀치 가족의 저택에는 이곳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사위와 며느리인 스벤, 케이, 산제이의 흔적 역시도 작게나마 자리하고 있다. 이 저택은 가문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담긴 공간으로,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차 기이한 모양으로 확장, 증축되어, 이 저택의 마지막 사람인 던과 에디스 2세의 방은 저녁이라도 먹으러 내려오려면 5분은 족히 걸릴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여기서 이 저택의 역사는 끝난다. 던과 에디스 2세가 저택을 떠나면서, 그리고 이 저택에서 평생을 살아온 에디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림 3] 저택에는 이 곳에 머물렀던 가족만큼이나 많은 공간이 덧붙여져있다. 에디스의 아버지인 오딘이 노르웨이에서 이곳 오르카스 섬으로 집을 가져왔다는 설정은 이야기 전개의 이점과 흥미로운 요소를 부여한다. 이 저택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는다면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핀치 가족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이, 이 섬에서 살아온 4대가량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설정상의 편의가 있을 것이다. 오딘이 가져왔던 집은 오딘과 함께 오르카 섬 앞바다에 가라앉고, 에디스와 스벤 부부라는 새로운 세대가 집의 벽돌 일부를 떼어와 새로운 곳에 정착해 새로운 핀치 저택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이주민 가족의 서사를 비유하는 직관적인 방식이다. 핀치 가족을 따라다닌다는 ‘저주’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도 그럴듯한 긴장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저택은 에디스에게서 시작해 에디스로 끝난다는 사실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자녀를 낳았고, 손주를 길렀고, 증손주를 봤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는 이 저택을 지키면서, 이곳에 왔다가 떠나간 많은 가족 구성원들(심지어 반려동물까지)을 기록했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방이 있다. 각자의 방에는 각자의 삶이 담겨있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도 이 방은 비워지지 않고,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된다. 에디스는 모든 방에 떠나간 구성원들을 기리는 제단을 만들었다. 새롭게 생겨나는 구성원들에게는 비워진 방이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이 마련된다. 이 저택이 이렇게 기이한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저택은 에디스의 기억이 담긴 무형의 저장소, 그러니까 그녀의 머릿속이 물리적 형태로 구현된 공간이다. 집의 공용공간들 역시 숨 막힐 정도로 많은 사진, 책, 신문, 소품들로 가득하다. 모든 크고 작은 부분들이 에디스의 삶에 쌓여온 크고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해변에 위치한 저택의 창 너머로는 종종 바닷속에 가라앉은 옛날 집의 흔적이 보인다. 에디스가 노르웨이에서 살아왔을 어린 시절이 담긴 집은 이제는 저 먼 바다에 그녀의 아버지와 가라앉아있고, 이제 그녀는 이 집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새로운 가족과 함께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일궈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게 가족이 늘어났고, 방이 늘어났고, 저택이 커졌다. 죽음이 쌓였고, 무덤이 늘어났다. 그녀가 간직한 기억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저택을 떠났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 손녀 던이 결국 한 아이를 잃고 난 다음 했던 일은, 에디스가 간직한 이 기억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새어 나오지 않도록 죽은 가족들의 방을 봉인하는 일이었다. 에디스가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기억을 꺼내오지 않도록 입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에디스는 이렇게 봉인된 방문에 엿보기 구멍을 뚫었다. 던의 아이들에게 아주 조금씩 그녀의 기억을 얘기해 주기 위해서. “이 모든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은,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딘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기로 한 것은 가족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이곳에서도 저주는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했다. 에디스의 다섯 아이 중 한 아이만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세 손주 중 한 아이만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세 증손주 중 한 아이만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이 ‘저주’가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죽음이라는 사실 그 자체뿐이다. 시작도 끝도 알려지지 않은 이 저주의 실체는 플레이어들에겐 끝까지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남는다. 하지만 적어도 핀치 가족의 구성원들은 이 저주의 존재를 믿거나 최소한 의식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오딘은 저주를 믿었다. 아마 아내인 잉게보르와 아들 요한의 죽음을 저주와 연관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저주를 피한다며 노르웨이를 떠났다. 다섯 남매 중 유일하게 어른이 된 샘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군인이자 생존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의 아이들도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들의 삶을 지배하고, 평생의 행동과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는 저택을 떠났고, 누군가는 저주에 맞섰다. 그리고 이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보존해 온 사람이 에디스다. 부모부터 손주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을 ‘저주’ 때문에 잃은 사람이다. 때문에 던이 아이들을 저주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분리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을 저주로부터 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이었다. 바바라가 공포영화 속 괴물들에게 잡아먹혔고, 월트가 두더지인간이었고, 스벤이 용 모양 미끄럼틀을 만들다가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용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말하는 에디스의 기억으로부터 분리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이 저주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디스가 저주의 기억을 보존하려 했던 것은, 평생을 겪어왔던 무수한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가족들을 기리고, 그들이 단지 이 땅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가 아니라, 각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름과 개성과 삶을 가졌던 소중한 존재들이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있는 유일한 사람인 에디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공포였을 가족의 저주는, 에디스가 가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리는 방식이었다. [그림 4] 에디스는 가족들의 삶이 깃든 모든 공간에 가족들을 기리는 제단을 마련했다. 유달리 독특했던 이 가족의 죽음들, 삶의 모습을 반영한 죽음의 양태는 에디스가 죽은 뒤 저택을 떠난 가족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에디스의 제단으로 남지 못한 가족들의 죽음은 플레이할 수 있는 스테이지가 되지 못한다. 어쩌면 평범한 죽음들이고, 어쩌면 저주에서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에디스의 기억을 거친다면 이들의 죽음 역시 다른 모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던 오딘이 옛 집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핀치 가족의 새로운 세대가 시작된 것처럼, 에디스가 세상을 떠나고 저택이 버려지며 또 다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다. 노르웨이에서의 가족의 역사가 해변 저 멀리 가라앉은 옛 집에서 삐죽 나와있는 지붕으로 남은 것처럼, 오르카 섬 저택에서의 가족의 역사는 에디스 2세가 기록한 한 권의 일기장으로 남았다. 망각은 기억의 필연적인 최후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억은 점점 희석되고 희미해질 것이고, 우선순위가 점점 밀려날 것이고,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결국 핀치 가족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주의 이야기 역시 잊혀질 것이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기에, 가족의 기억 역시 선택할 수 없다. 루이스가 부친의 인도계 혈통에 더욱 마음을 두었던 이유는, 핀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이 공동체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이 기억을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결국 저택에 돌아와 비범한 죽음을 맞았으니, 저주를 피해 가지는 못한 모양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쌓인 기억은 반드시 즐거울 수만은 없다. 때로는 온갖 치부와, 지저분한 구설수와, 못난 감정의 응어리와, 죽음과, 상실이 끼어들어가기 마련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이를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벗어나려 애쓴다. 상실의 기억이 누군가에겐 저주가 되고, 저주가 누군가에겐 애도가 되고, 애도가 누군가에겐 평생을 따라다니는 공포로 남는다. 이 모든 기억을 품은 기이한 저택에는 삶을 담은 죽음이 가득하고, 평생 이 저택을 지켜온 한 여성은 묵묵히 이를 기록하며 떠나간 이들을 기린다. 이들을 단지 죽은 자가 아닌, 실제로 이 땅을 밟고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누군가로 남기기 위해. 작품이 이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아닌 죽음에 대한 다른 이의 기억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죽음은 사건이라기보다는 한때 살아있었고 지금은 기억되기에 충분한 누군가의 결말이 되었다. 삶으로 이름을 남길 만큼 비범하진 않았지만, 다른 이의 머릿속에 잠시라도 남아있기엔 충분한 누군가. Tags: 기억, 에디스 핀치, 왓 리메인즈 오브 에디스 핀치, 죽음의 재현, 가족 서사, 워킹 시뮬레이터, What Remains of Edith Finch, Giant Sparrow, Death in Video Games, Walking Simulator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 아포칼립스의 거울: 불완전한 정보는 어떻게 인간을 심판자로 만드는가?
태양 폭발로 문명이 무너진 세계, 플레이어는 매일 밤 TV 앞에 앉아 정부가 배포하는 식별 가이드를 시청한다. 지하에서 올라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방문자’를 색출하라는 임무다. 뉴스는 완벽하게 고른 흰 치아, 털 없는 매끈한 겨드랑이, 빛에 민감해서 충혈된 눈 등을 방문자의 징후라고 보도한다. 위생 관리가 불가능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청결함은 역설적으로 괴물의 증거가 된다. 이 플레이어에게 건네는 첫 번째 질문이다. < Back 아포칼립스의 거울: 불완전한 정보는 어떻게 인간을 심판자로 만드는가? 28 GG Vol. 26. 2. 10. 태양 폭발로 문명이 무너진 세계, 플레이어는 매일 밤 TV 앞에 앉아 정부가 배포하는 식별 가이드를 시청한다. 지하에서 올라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방문자’를 색출하라는 임무다. 뉴스는 완벽하게 고른 흰 치아, 털 없는 매끈한 겨드랑이, 빛에 민감해서 충혈된 눈 등을 방문자의 징후라고 보도한다. 위생 관리가 불가능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청결함은 역설적으로 괴물의 증거가 된다. 이 플레이어에게 건네는 첫 번째 질문이다. 문제는 정보는 필연적으로 맥락을 삭제한 채 극도로 단편적으로 전달된다는 점에 있다. 뉴스가 ‘방문자’라고 말한 기준을 현장에 적용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진다. 문을 두드린 남자는 자신의 손톱 밑 흙에 대해 정원사라서 당연하다고 항변하고, 치아가 고른 이는 최근에 교정을 마쳤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붉게 충혈된 눈을 가진 여성은 빛에 민감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잃고 밤새 울었기 때문일 수 있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정보는 ‘충혈된 눈은 곧 괴물’이라는 공식뿐이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연을 품고 있다. 그러나 생존 본능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하고 안전한 공식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결국 플레이어는 정원사를, 교정 환자를, 유가족을 잠재적 괴물로 규정하고 총구를 겨누게 된다. 위험한 존재를 집에 들이는 것은 플레이어뿐 아니라 같은 장소에 기거하는 생존자들의 안전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림1. 정보만으로 인간과 ‘방문자’를 구분할 수 없다고 해서 혼자 생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에서 집에 혼자 남는 경우는 ‘방문자’의 표적이 되거나 연제청에 잡혀가 제거된다. 게임의 엔딩 중 하나인 ‘비질란테의 분노’는 불완전한 정보를 맹신한 인간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방문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자경단원은 “너 같은 인간들이 내 친구를 죽였다”고 울부짖으며 플레이어의 집을 찾아온다. 그가 움켜쥔 전리품, 즉 뽑힌 치아와 잘린 손가락은 그가 사냥한 대상이 괴물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진짜 인간의 것이다. 이는 방문자의 식별 징후인 ‘완벽하게 고른 치아’를 색출하겠다는 강박이 개인적 원한과 결합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자를 괴물로 오인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준다. 자경단원은 스스로를 공동체의 심판자로 규정했지만, 결국 그는 괴물보다 더 끔찍한 학살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손에 들린 전리품은 단순한 증거물이 아니라, 인간성을 잃고 광기에 잠식된 자경단원의 몰락을 상징하는 물증이다. 이 엔딩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불완전한 식별 기준이 무력, 그리고 맹목적인 복수심과 결합할 때 어떤 참혹한 결과를 낳는지를 경고하며, 괴물을 잡겠다는 집착이 오히려 인간을 괴물로 변모시킨다는 아이러니를 그려낸다. <격리 구역(Quarantine Zone: The Last Check)>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관료주의적 시스템 안으로 끌어온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서 격리 시설 관리자가 된 플레이어는 검문소에 선 생존자들을 오직 수치로만 판단해야 한다. 체온계, 청진기, 육안 검사라는 도구가 주어지지만 이 역시 인간의 생사를 가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리에 있는 상처가 좀비에게 물린 자국인지 단순히 넘어져 생긴 멍인지 구별하기 어렵고, 얼굴이 붉은 것은 감염 증상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더위에 익은 것일 수도 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를 압박하는 것은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비용이다. 감염자를 들이면 기지가 위험해지고, 의심스러운 자를 모두 격리하면 수용 시설 유지비가 폭증한다. 결국 플레이어는 화씨 180도 이상이라는 숫자에만 매몰되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일단 추방하는 효율성의 논리를 택한다. 아이의 떨림이나 생존자의 호소는 배제된 채, 인간은 오직 데이터로 전락한다.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플레이어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성벽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감염자보다, 모호한 정보 앞에서 효율성을 택하는 자신의 손끝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반면 는 시각 정보가 주는 공포를 역이용해 판별 행위 자체를 무력화하는 독특한 지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샘은 창문을 열어 ‘방문자’라 불리는 우주적 존재를 목격하거나 인식하면 끔찍한 괴물로 변이한다는 명확한 정보를 획득한다. 샘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물리 법칙이 무시된 미로로 변해 있으며, 복도에는 하키 마스크를 쓴 거구의 여성, 머리가 카메라와 융합된 이웃 라일, 바퀴벌레 떼가 뭉쳐 지성을 갖춘 바퀴 씨 등 기괴한 형상의 이웃들이 돌아다닌다. 기존의 서바이벌 호러 문법대로라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 제거하거나 배제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지만, 샘은 시각적 기표가 주는 혐오감을 넘어 그들의 내면을 보기를 택한다. 그는 변이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거처를 제공하며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은 괴물의 외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샘에게 고마움을 표하거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등 인간적인 유대와 이성을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게임 후반부에 이웃이자 조력자였던 ‘11’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판별의 무의미함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증명된다. 인류의 기원은 사실 우주를 떠도는 거대한 생명체인 방문자의 미세한 말단 신경세포였으며, 인간이 방문자를 목격하는 순간 발생하는 변이는 외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라는 환상이 깨지고 본체와 하나가 되려는 회귀 본능의 발현이었다. ‘11’이 기억을 지우고 육체와 분리되면서까지 숨기려 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곧 괴물의 일부”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눈으로 보고 괴물이라 판별하며 배척하려 했던 존재는 가장 근원적인 자아의 본모습이었고, 이 게임에서 창문은 외부를 감시하는 방어 기제가 아니라 내면의 끔찍한 기원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시각적 정보에 의존해 타자를 괴물로 규정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불완전한 정보가 어떻게 우리를 진실로부터 격리시키는지를 이 게임은 역설한다. 판별의 서사는 <도시전설 해체센터>에 이르러 물리적 실체를 넘어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정보’ 그 자체에 대한 가차 없는 폭로로 확장된다. 앞선 작품들이 가시적인 괴물과 인간의 경계를 획정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SNS와 미디어라는 거울에 투영된 비가시적 공포, 즉 도시전설의 이면을 해체하는 인식론적 탐구에 집중한다. * 그림2. <도시전설 해체센터>의 침대 밑의 남자 에피소드. 괴담은 단편적인 시각 정보와 결합되어 확산된다. 플레이어는 ‘침대 밑의 남자’, ‘저주받은 상자’, ‘도플갱어’ 등 전형적인 괴담의 형식을 띤 사건들을 추적하지만, 그 심연에서 마주하는 것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인간의 뒤틀린 욕망과 악의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침대 밑의 남자’의 경우, SNS를 통해 괴한의 침입이라는 공포가 실시간으로 확산되지만 그 실상은 타인의 파멸을 발판 삼아 이득을 취하려는 치밀한 기획이었다는 사실을 플레이어는 확인할 수 있다. 목격자를 자처했던 김하나는 사실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브로커였으며, 피해자를 심리적 궁지로 몰아 통제하기 위해 괴한을 고용한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대중은 자극적인 이미지와 텍스트에 매몰되어 피해자를 향한 무분별한 신상 털기와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진짜 괴물은 침대 밑의 괴한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유희로 소비하고 확산시킨 익명의 대중과 조작된 정보 그 자체다. ‘저주받은 상자’ 에피소드 역시 궤를 같이한다. 상자를 접한 이들이 뱀의 환각과 심장마비를 일으킨다는 소문은 오컬트적 저주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남미산 환각 성분과 알코올의 상호작용에 의한 화학적 반응으로 밝혀진다. 저주의 매개체로 여겨진 치아와 인형 또한 광신도 집단 ‘삼매지마’에 세뇌된 택배 기사가 살의를 담아 배치한 범죄 도구에 불과했다. 나아가 후반부의 ‘그레이트 리셋’ 음모는 실체 없는 공포가 어떻게 사회를 붕괴시키는지 극명하게 투영한다. 테러 집단은 예언의 형식을 빌린 카드를 유포해 대중의 불안을 선동하고, 이를 주가 조작과 사회 혼란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가 재앙이라 믿었던 현상들은 사실 조회수를 갈구하는 미디어, 타인을 해하려는 악의, 그리고 검증 없이 정보를 유포하는 대중 심리가 합작한 거대한 시뮬라크르였던 셈이다. “소문 자체가 악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인간이 문제”라는 센터장 빈차아의 일갈은 이 게임의 문제의식을 관통한다. 현대의 아포칼립스는 핵전쟁이나 좀비 창궐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혐오를 배양하고 인간성을 잠식하는 순간 도래한다. <도시전설 해체센터>는 불완전한 정보를 맹신하고 확산시키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시대의 진정한 공포임을 역설하며, 판별의 화두를 타자가 아닌 ‘정보를 소비하는 나 자신’에게로 돌려놓는다. 앞서 언급한 네 편의 게임이 공유하는 핵심은 판별이라는 행위가 지닌 윤리적 함정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정보와 모호한 기준을 손에 쥐고 너무나 쉽게 타인을 심판대에 세운다.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의심하는 동안 그 의심의 근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잊어버린다. “당신은 인간입니까?”라는 질문은 결국 “당신은 단편적인 정보로 타인을 괴물로 낙인찍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괴물은 바깥에서 침략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손쉬운 정보로 심판하려는 게으른 시선 속에 이미 도사리고 있다. 아포칼립스가 비추는 거울 속에서 플레이어는 괴물이 아니라 정보를 맹신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Tags: 포스트휴먼, 인본주의, AI, 인공지능, 비인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공모전수상작]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마인크래프트(Minecraft)는 겉시늉의 세상이다. 엉성한 외피 이미지로 포장된 네모난 객체들이 생태계를 이룬다. 또한 현실과 비현실, 매끈함과 모서리, 플레이어와 데이브(주인공), 원형과 변형 등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데이브의 몸으로 젖지 않는 비를 피해 귀가한다. 그리고 온기 없는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인다. 방 안이 따뜻한 빛으로 물들면, 솜 없는 침대에 누워 깨어 있는 채로 잠에 든다.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seo Park Studied art theory and works in the visual arts through exhibitions, criticism, and workshops. With an interest in (un)science, explores new media art and video games. Recent projects include the research Uncanny Games and Eerie Games (2024,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RE:SEARCH), the exhibition Echoes of Dysfunction (2024, WWW SPACE), the workshop Game Criticism for the Oppressed (2024, Art Korea Lab's Art Lab Club), and the exhibition-workshop Playful Media (2024, Haja Center Media Art Workshop).
- 몰입은 정말 즐거움의 중심에 있는가? - 칙센트미하이의 flow를 다시 생각하다
2021년에 출간된 는 바로 그 생략을 지적한다. 제목을 한글로 옮기면 “몰입에 반하여”가 되듯, 이 책은 몰입 이론의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인 사용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관건은 몰입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자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론을 충분히 재검토해서 이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떤 가치를 전제하며,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몰입의 반대나 해체가 아닌 재검토에 가깝다. < Back 몰입은 정말 즐거움의 중심에 있는가? - 칙센트미하이의 flow를 다시 생각하다 28 GG Vol. 26. 2. 10. 주변을 잊게 만드는 경험, 몰입 게임을 하다보면 어느새 훌쩍 지나간 시간에 놀랄 때가 있다. 행동 하나하나 의식하기보다 자연스럽게 게임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 즐기게 되는 순간. 항간에 ‘시간 순삭’ 게임이라고 평가되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나 <문명> 시리즈의 리뷰에서는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침이 됐다”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모든 게임이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게임을 즐기며 빠져드는 경험을 겪는다. 이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개념으로 ‘몰입’ 또는 ‘플로우(flow)’가 있다. 몰입이란 하나의 활동에 깊이 빠져든 상태에서, 자기 의식이 옅어지고 시간과 공간 감각이 약화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1990년에 베스트셀러 (국내 번역: 몰입, FLOW)를 통해 이 이론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정의만 놓고 보면, 사람들이 게임하면서 푹 빠졌던 감각은 “몰입 상태에 있다”로 설명된다. 한창 긍정심리학과 자기계발 열풍이 있을 때, 몰입 이론은 자기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필승 전략으로 소개됐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게임 분야에서 이 게임이 “왜 재미있는지”를 설명하는 분석 틀이자 “잘 만든 게임은 이렇게 만들어야한다”는 설계 규범으로 자주 쓰인다. 게임 디자인, 게임 경험 분석, 게이미케이션, 게임 연구 등 학계 및 산업계 전반 종사자라면 알아야 할 ‘기본 지식’ 중 하나다. Against Flow, 몰입에 반하여 사실, 이론이 널리 쓰인다고 해서 충분히 검토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몰입의 조건‘이라는 말의 요약본만이 체크포인트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이론의 효용만 강조되고, 조건이 딛고 있는 전제는 생략된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충분한 검토 없이 우리는 몰입이라는 개념을 그저 ‘좋은 것’으로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론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주변의 사상적 맥락을 살피면, 몰입 이론은 그렇게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무색무취의 중립성을 띠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실제 사용되는 현장에서는 이러한 검토가 자주 생략된다. 2021년에 출간된 는 바로 그 생략을 지적한다. 제목을 한글로 옮기면 “몰입에 반하여”가 되듯, 이 책은 몰입 이론의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인 사용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관건은 몰입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자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론을 충분히 재검토해서 이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떤 가치를 전제하며,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몰입의 반대나 해체가 아닌 재검토에 가깝다. 이 글은 가 던진 문제의식을 발판으로 삼아, 몰입 이론을 다시 들여다보려 한다. 이론의 정합성보다는 게임 학계와 산업계에서 이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쓰여왔는지를 점검해보고자 한다. * , MIT Press (2021)** 이론의 시작: 인간을 성장시키는 즐거움에 대한 질문 몰입 이론은 처음부터 성공한 게임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은 절대 아니었다. 이론을 제시한 칙센트미하이는 1960년대 후반, 인간이 언제 자신의 활동을 즐겁고 의미있게 경험하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등산가, 체스 플레이어, 화가, 무용수, 운동선수 등이 다양한 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보상이 없어도 활동 그 자체에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묘사했고, 행동에 대해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배고픔이나 위험에 대한 감각까지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1971년 칙센트미하이는 이 경험을 ‘몰입’이라는 모델로 개념화하여 논문으로 제시했다. 몰입의 영어명은 행동이 끊기지 않고 흐르는 듯한 감각을 비유한 ‘플로우(flow)’이며, 또 다른 영어 단어인 immersion과는 차이가 있다. 몰입 이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요소는 ‘실력’과 ‘도전‘이다. 실력은 개인이 현재 보유한 수준이고, 도전은 목표가 요구하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몰입은 이 두 수준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발생한다. 만약 실력보다 도전이 낮으면 지루함을 느끼고, 반대로 실력이 도전보다 높으면 불안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균형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상호 조정되어야 한다. 실력이 향상되면 도전의 수준도 함께 상승해야 몰입이 유지된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 상태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즐거운 과정임을 밝혔다. 이 설명은 단순하면서도 설득력을 가지며 이후 다양한 분야에 ‘즐거움의 정치학’이라는 명칭으로도 확산되었다. 이론의 성격: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그렇다면 칙센트미하이는 왜 이러한 이론을 주창하게 되었을까? 그가 몰입에 탐닉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개인사가 깊게 얽혀 있다. 그는 193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정면으로 겪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전쟁을 피해 헝가리로 가게 되었고, 비극적으로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그 여파로 칙센트미하이의 가족들이 소련군에 의해 죽거나 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무의미하고 잔혹하고 혼란스러웠다”라고 기억한다. 칙센트미하이는 난민 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체스를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체스를 두는 순간, 그는 자신의 주변에 펼쳐지는 전쟁의 혼란을 잊어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깨닫게 된다. 그에게 체스는 세계의 붕괴 속에서 내면을 되찾는 방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린 시절 전쟁에서의 경험은 이후 그의 학문적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칙센트미하이는 소련으로부터 삶이 무너졌기에 소련이 추구하던 사회 변혁 사상에도 반감을 갖게 된다. 사회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관점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이어졌다. 1967년 칙센트미하이의 초기 저작을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사회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한 것에 그가 개탄하면서, 계급의식과 혁명의 사회적 흐름에서 자아를 해체하지 말고 오히려 개인적 의식을 강화해야 비로소 연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의식이 약화될수록 사회적 연대 역시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몰입은 ‘소외’를 다루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소외란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노동의 결과와 자기 자신, 타인으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해소하지 못하는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몰입 이론을 생각했다. 몰입 이론에서 소외는 외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에서 해결 가능하며, 혁명 없이도 삶에 몰입함으로써 소외를 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 변혁이 반드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비판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었다. 인간을 그저 반응 기계처럼 보는 행동주의, 인간의 행위를 무의식과 욕망의 산물로 해석하는 정신분석학, 그리고 개인을 구성하는 외부적 힘을 밝혀내는 일에 중심을 두는 20세기 철학 전반의 흐름이 그에게는 의식의 몰락처럼 보였다. 칙센트미하이는 의식이 만들어내는 개인 행위성의 힘을 되찾고자, 여러 사상들과의 긴장 속에서 몰입 이론의 정치적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몰입 이론은 단순한 심리 상태 설명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가 직접겪었던 경험에 대한 증명이며, 개인의 의식이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는 관점에 대한 반박이자, 소외의 문제를 다시 배치하려는 시도였다. 몰입은 즐거움을 설명하는 개념이기 이전에, 개인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하나의 입장이었다. * TED 강연 <몰입, 행복으로 향하는 비밀>(2008) 중 칙센트미하이. 출처: https://www.ted.com/talks/mihaly_csikszentmihalyi_flow_the_secret_to_happiness 이론의 재배치: 자본주의 그리고 게임 칙센트미하이가 1970년대 처음 이론을 주장했을 때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이론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여러 저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TED 강연은 성공적으로 확산되었다. 몰입은 긍정심리학과 자기계발 담론에 빠르게 흡수되면서, 어느새 개인의 ‘성장’과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몰입은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하는 심리학 이론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몰입이 약속하는 것은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성취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저서 <굿 비즈니스>에서 몰입을 통해 노동자의 만족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고 관리자에게 제안하며, 사회 변혁의 대안으로 개인의 행위성을 되찾고자 했던 초기 구상은 결과적으로 더 깊은 몰입과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몰입은 삶을 재구성하는 태도라기보다 성과를 관리하는 기술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게임 산업에서도 이런 개념 전환은 그대로 반복된다. 몰입은 이용자의 게임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이탈을 줄이며, 소비를 지속시키는 효과적인 개념이다. 많은 게임 디자이너들은 앞서 살펴본 이론적 배경이나 문제의식 없이 몰입을 게임 디자인의 핵심 원리로 제시한다. 경험을 설명하던 개념은 어느새 경험을 통제하는 기준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결과 몰입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하나의 실천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다. <림월드>의 제작자 타이난 실베스터는 몰입을 좋은 게임 경험의 기반으로 규정한다. 몰입이 깨지면 경험 전체가 무너진다고 말하면서, 나쁜 게임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몰입이 깨져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에픽 게임즈와 유비소프트에서 UX 전문가로 있었던 셀리아 호든트 역시 그의 저서 <게이머의 뇌>에서 몰입 이론의 실력-도전 난이도 곡선을 제작 프레임워크로 언급한다. 그리고 “몰입 파괴자”, 예를 들면 불공평한 죽음과 실패, 화면의 정지, 너무 긴 카메라 워크나 컷신은 이 개발자가 반드시 피해야 할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런 담론은 해외뿐 아니라 국내 게임 개발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업의 관점에서 플레이어가 게임에 더 오래 머물고, 주의를 게임 외부로 돌리지 않는 상태는 매우 이상적이다. 집중이 유지될수록 다음 콘텐츠와 다음 상품을 제안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몰입은 즐거운 경험의 조건인 동시에, 소비를 지속시키기 위한 환경 조건이다. 이론의 현재: 스스로 난이도를 고치는 게임 게임 산업이 점차 발전하면서 몰입 이론은 게임 시스템 설계까지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적 난이도 조정(DDA, dynamic difficulty adjustment)이다. DDA는 플레이어가 좌절하거나 지루해지기 전에 난이도를 조정해 몰입 상태를 유지하려는 설계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선택을 통해 능동적으로 조정하거나 시스템이 자동으로 조정하는 방식이 있다. 어느 방식이든 공통된 목표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실력 수준과 도전이 균형을 이루는 자신만의 ‘플로우 존’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게임의 시스템은 플레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 결과에 따라 적의 수, 이동 속도, 공격 빈도 같은 요소들이 자동으로 조정된다. 고전적인 예로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 적의 수가 줄어들수록 남은 적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구조를 들 수 있다. 현대의 게임들은 이보다는 복잡한 방식으로 여러 변수를 동시에 조정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DDA는 자연스럽게 작동해야하며 플레이어는 이 변화를 체감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플레이어가 게임에 맞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성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DDA가 깊은 곳에서 몰래 작동할수록 플레이어는 자신의 실력 향상의 환상을 믿게 된다. DDA는 몰입 이론에 크게 의존하며 발전해왔다. 문제는 DDA가 지향하는 바가 즐거움을 생성하기보다 좌절과 지루함을 사전에 제거하는 데에 맞춰졌다는 점이다. 게임 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임 중단, 접속 종료, 환불 등을 방지하기 위해, 몰입 이론은 위험 관리 수단이다. 이 구조는 궁극적으로 몰입을 중독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지속적으로 ‘맞춰진’ 경험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감각만을 반복적으로 강화한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일들이 더 거칠고 불편하게 느껴지며, 게임에 몰입하는 동안 현실의 불안이나 우울을 잊게 된다. 하지만 잠시 잊혀질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몰입이 끝났을 때 다시 마주하는 것은 잠시 뒤로 밀어두었던 현실이다. 흥미롭게도 칙센트미하이는 자신의 연구에서 게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놀이를 통해 몰입을 설명할 때 든 예시는 주로 체스였다. 1990년대 이르러서야 게임을 몰입의 사례로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그마저도 텔레비전 시청을 비판하는 맥락이었다. 그는 무비판적으로 텔레비전 시청에 빠져드는 상태를 경계했고, 마찬가지로 게임에 무비판적으로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가 꿈꿨던 이상적인 개인의 성장형 몰입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는 쏙 빠지고 난이도 곡선만이 남아서 업계를 떠돌고 있다. 이론의 비판적 소비를 위하여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통해 개인이 소외를 극복하고 삶의 활동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동시에 그는 여러 저작에서, 몰입이 중독이나 자기중심적 소비, 현실 회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한 자원이라는 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 외과 의사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수술하는 일을 즐겼던 의사는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휴가를 못 즐기고 수술해볼 수 있는 다른 병원을 휴가지에서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몰입은 어떤 경우에 고립을 초래하여 자아 내부에만 집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칙센트미하이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몰입이 좋은가 나쁜가를 가르는 데 있지 않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플레이의 미학>을 쓴 브라이언 업튼은 몰입이 매력적인 요소이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실력과 도전을 두 축으로 한 매끈한 그래프 바깥에서도, 즐거움은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다. 가끔 그 어긋남 자체가 경험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숙련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좌절을 지속하거나, 아예 몰입을 깨뜨릴 목적의 게임은 무수히 많다. 나아가 는 거리두기를 통해 몰입을 깨는 게임, 몰입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게임 등 다양한 경험의 양상을 여러 사례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론이 단편적으로 소비되는 현 상황을 되돌아보고, 비판적 소비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몰입 이론이 굳어져 사용되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은 참고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 Back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21 GG Vol. 24. 12. 10. 우리가 흔히 빛의 속도라고 부르는 표현이 있다. 요즘은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완전히 잡혀서 SF를 다루는 콘텐츠에서도 실제로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속도를 내는 우주선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실제 빛의 속도가 몇인가를 굳이 외우고 사는 사람들도 적은 편이다. 검색을 해보면 빛의 속력은 진공 상태에서 299,792,458 m/s 인데 우리가 흔히 알기 쉽게 비교하는 서울과 부산 간의 거리로 이것을 생각하면 1초에 460번정도 왕복할수 있는 셈이다. 조금 더 거리를 늘려보자. 서울의 정확한 지구 반대편의 위치를 고르라면 아마 바다 위가 될 테고, 그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부에노스 아일레스일 것이다. 부에노스 아일레스까지의 거리는 약 20000km 정도이고, 빛으로는 1초에 7.5번정도 왕복할 수 있다. * 서울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의 거리. 1초에 지구를 7번 반 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엄청 빠른 속도임에 분명하지만 어? 빛이란게 생각만큼 안빠른데? 싶은 생각도 든다. 쉽게 생각해보자. 여러분이 게임을 하는데 현대적으로 요구하는 모니터의 프레임레이트(초당 뿌려주는 화면의 개수)는 60fps 일테고, 고사양 게임용 디스플레이라면 144fps 일 것이다. 144fps 라면 프레임이 전환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프레임당 6.94ms 이고, 빛이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0.133ms 이다. 대략 19프레임 정도가 지나간 셈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지구 표면을 지나는 가장 가까운 선으로 연결하고 진공 상태의 빛의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었을 때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이에서 통신을 할 때는 설령 광섬유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거리가 최단거리도 아닐 뿐 더러 여러 가지 중계기, 광섬유가 아닌 통신망 등을 거치며 발생하는 손실에 의해 이론상의 시간 안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런 부분은 게임을 만드는데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점점 컴퓨터의 속도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시간을 줄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게임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정보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흐름 관점에서 게임을 보면 이는 물리적인 입력이 가상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플레이어의 감각으로 전달되는 순환 구조이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컴퓨터의 구성요소들을 생각해보자. * 컴퓨터의 3요소: 입력장치, 처리장치, 출력장치. 우리가 보통 디지털 기기에서 즐기는 형태의 게임이 돌아가는 기계는 거의 다 이런 형태다. 입력, 출력, 처리 장치가 분리되어있는 경우도 존재하고 게임기처럼 입력장치(게임패드), 처리장치(각종 프로세서, 등등), 출력장치(스피커, 스크린)가 합쳐져 있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기들의 시간은 사람의 신경반응속도를 제외한다면 게임에 미치는 시간적인 영향은 대부분 CPU의 처리속도와 저장매체의 통신속도 정도다. 턴제 게임이라면 문제가 없다. CPU플레이어들의 수많은 행동들을 계산하는 것도 이용자들은 기꺼이 기다려주기도 한다. RTS라면 이러한 문제점에 대비하기 위해 게임 안에 등장하는 유닛의 숫자를 제한한다. 유닛 수가 너무 많아저셔 각 유닛에 대한 처리가 CPU에 부담을 주거나 화면에 많은 유닛이 등장하면서 GPU의 처리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게임 개발자가 겪는, 특히 줄일 수 있다면 가장 줄여야만 하는 시간이라는 장애물은 어떤 것일까. 대표적인 부분은 로딩과 랙이다. 물론 개발 작업에 사용해야 하는 시간부터 이용자가 게임에 참여해 놓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게임에 영향을 끼치지만 프로그래머가 컨트롤해야 하는 시간들은 이 부분이고 최대한 없는 것처럼 숨겨야 게임의 경험이 부드러워지는 부분이 바로 로딩과 랙이다. 좀 더 과거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흔히 저장 아이콘으로 기억하는 디스크만 하더라도 나왔을 무렵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카세트 형식의 자기 테이프보다 데이터를 읽어오는 속도에서 굉장한 우월함을 보였다. 당시 게이머들은 30분~1시간씩 데이터 로딩을 기다려가면서 게임을 해왔는데 게이머는 사실상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프로그래머들은 그 느린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 한정된 용량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능을 내도록 수많은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사용해왔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이라면 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여기에 인체 신경의 반응속도까지 고려한다면 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진다. 만약 온라인 게임 서버 등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나의 행동에 피드백할 수 있는 또다른 플레이어 B 가 존재한다면? 실제로 명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플레이어 A 가 한 행동이 플레이어 B 에게 도달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들을 쭉 나열해보자. * 데이터의 흐름에 걸리는 시간들 플레이어 A가 모니터에서 상황을 인식하고 (13ms), 고민한다음 (100ms), 손으로 입력한후(200ms), 키보드로부터 컴퓨터가 입력을 받아(1ms), 공유기로 신호를 보내고 (0.5ms), 인터넷으로 신호를 전달해서 (30ms), 게임서버로 보내진후 (30ms), 서버에서 처리를 한 후 다시 인터넷으로 신호를 보내서 (30ms), 상대방의 공유기에 신호가 도달하고 (30ms), 공유기에서 PC로 (0.5ms), 게이밍PC에서 모니터로 (10ms), 사람의 눈이 모니터에서 신호를 확인할 때까지 걸리는 (13ms)까지. 판단과 반응속도에 걸린 시간 300ms를 제외하면 158ms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이건 그냥 그럴수 있다는 것이고 사실 인터넷은 여러 레이어를 통해서 연결이 진행되기 때문에 실제 시간은 이것보다 훨씬 많이 걸릴 뿐더러 컴퓨터 사양, 네트워크 환경, 서버와의 거리, 사람의 컨디션 등으로 이 수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다만 이 수치를 아무리 줄여도 결국 중간 단계가 늘어날수록 딜레이는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을 정보의 흐름이라고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게임의 데이터 처리에 있어 사용자의 모든 입력을 반영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만든 한국의 게임을 아르헨티나의 한국 게임을 사랑하는 청년이 플레이한다면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 게임 서버가 사용자의 입력에 반응할 때까지 0.13초 정도가 필요하다. 이는 144Hz환경으로 환산한다면 19프레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빛의 속도로 통신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계산이고 실제 현실에서는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대략 0.3초 정도의 지연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조차 사실은 가장 낙관적인 계산이기도 하다. 만약 정말 서버가 유저의 입력을 기다려서 처리를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한번의 처리를 0.3초에 한 번씩밖에 할 수 없고, 이는 1초에 3번밖에 계산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게임이 정보의 흐름이라면 결국 이 흐름의 속도는 이용자가 게임을 하는데 느끼는 핵심적인 경험의 요소 중 하나가 된다. 턴제 게임이라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게임들이라면 이러한 데이터 지연 시간 문제는 플레이에 큰 장애를 만들 수 밖에 없다. 격투게임, RTS, MMORPG, 액션게임, 많은 게임들은 이러한 이유로 온라인상의 멀티플레이로 구현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게임 개발자들은 결국 이를 극복하고 온라인상에서 플레이어에게 지연이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구현을 이루어냈다.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과거에 이런 네트워크 지연으로 발생하는 게임의 버그들은 모든 기계장치가 모여있는 작업환경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아서 출시 시점에서야 몸으로 겪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지연 처리의 중요성이 개발과정에서 부각되며 언리얼 엔진의 데디케이티드 서버부터 iOS의 에뮬레이터까지 게임 실행 차원에서 네트워크 지연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일종의 에뮬레이션을 제공하는 경우들도 등장했다. 정보전달 속도라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자들은 다양한 해결책을 고안하고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네트워크에서 지연이 발생했다면 그냥 동기화가 될 때까지 플레이어를 기다리게 만드는 방법도 존재한다. 모두가 다 같이 게임의 정지상태를 기다려줄 수 있는 참을성만 존재하면 괜찮다. 옛날 편지로 바둑을 두시던 분들 정도의 참을성이라면, 그리고 그런 게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시간으로 움직여야 하는 게임들이라면 아무래도 이러한 기다림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게임 개발자들은 어떤 사람들의 대답이 늦어져도 게임이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들을 계속 적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방법은 예측이다. 게임 프로그램이 이용자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다. 예측을 해낼 수 있다면 네트워크 딜레이가 1초가 있어도 괜찮다. 컴퓨터가 1초 후의 이용자의 움직임을 예측했다면 1초후에 보여줄 것을 미리 계산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게임 안에서의 흐름은 완전하게 동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컴퓨터는 완벽한 예언가가 아니다. MMORPG나 액션게임을 하다가 만약에 상대방의 컴퓨터가 이동속도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부분을 겪었다면 컴퓨터가 예언을 실패한 것이다. 컴퓨터는 상대방의 이동을 예측해서 재현했지만 실제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에 나중에 입력된 실제 행동에 맞춰 미리 재현했던 부분과의 차이를 억지로 맞추는 것이다. * 캐릭터의 동기화. 갑자기 이동시키거나 보간해서 미끄러듯이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전격투에서는 이런 시간의 문제가 특히 많이, 깊게 발생한다. 과거의 격투게임의 대전은 오락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혹은 같은 기기에서 두 개의 게임패드가 붙어 이루어졌다.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었지만 격투게임의 이용자들은 자신의 입력을 가장 빠르게 게임에 입력하기 위해서 자신의 반사신경과 사고를 다듬는 것은 물론, 프레임 레벨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의 메커니즘을 파고들기도 했다. 이는 실제 게임의 입력 프레임과 처리 프레임, 그것이 모니터에 출력되는 프레임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1프레임 단위로 기술의 승패가 결정되는 대전 격투게임의 세계에서는 이런 상황까지 분석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오락실이란 공간이 시대의 변화에 못 버티고 점차 사라지는 환경에서 많은 대전격투게임들의 대전이 네트워크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올라오면서 네트워크 레이턴시는 격투 게임 개발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초기에는 네트워크 레이턴시 대응에 익숙하지 않아 나쁜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대 대전 격투게임에 이르면 네트워크 대전 지원이 필수 요소로 인식되면서 기술과 꼼수 두 측면에서 모두 괄목할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격투게임에서 주로 이용되는 부분은 롤백이다. 흔히 롤백 넷코드라고 불리는 이러한 기능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컴퓨터가 미리 예측해서 해당 부분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게임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을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입력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면 컴퓨터는 어떻게 이를 처리할까. 몇프레임 뒤로 게임을 롤백해버린다. 이런 대응을 위해 애니메이션 단위에서 몇 프레임이 뒤로 돌아가도 어색하지 않도록 아트 단위에서 작업하는 게임들도 존재하며, 어떤 게임들은 기술 발동의 애니메이션 시간에 조금 여유를 둬서 네트워크를 동기화할 시간을 벌기도 한다. 입력이 들어가자마자 발동되는 잡기 기술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MMORPG도 비슷하다. 게임들의 캐스팅(주문시전) 시간에는 서버와의 통신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기능들이 일정부분 들어있다. 플레이어와 서버, 혹은 다른 플레이어 사이에서 주문의 결과를 동시에 나타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동기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이는 네트워크 레이턴시를 어떻게 숨길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많은 MMORPG가 논타겟팅이 아닌 타겟팅인 부분도 같은 이유에서다. 논타겟팅으로 진행을 한다면 타겟이 위치한 좌표가 서버와 플레이어의 컴퓨터 사이가 같은 시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동기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이 이유는 플레이어가 실제로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기술을 시전했을 때 기술의 성공 유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지연을 숨기기 위해 게임의 디자인 측면에서 약점을 숨겨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특히 즉시 기술이 발동하는 부분은 한번에 보내는 데이터의 양부터 속도까지 여러 가지 영향을 받는 요소이기 때문에 MMORPG에서는 한번에 많은 스킬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스킬을 사용했을 때 쿨타임 후에 동작하는 부분부터 타겟팅 문제,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호 충돌 판정 제거와 같은 부분은 게임 서버의 개발 난이도를 낮추는 요소들이다. 물론 과감하게 여러 트릭과 기술력으로 문제점을 정면돌파하는 경우들도 존재한다. 만 명이 넘어가는 공통 월드의 MMORPG, 100명이 한 레벨에서 경쟁하는 FPS나, 4안 멀티가 가능한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등은 그 전까지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힘들다는 평가를 받던 도전을 트릭과 기술력으로 돌파했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한편, 숨길 수가 없는 네트워크 지연은 앞서 말했듯이 강력하게 숨겨버린다. 예를 들어 게임 캐릭터의 위치는 조금 달라도 이용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결제한 금액이 틀리는 건 문제의 차원이 다르며, 보안 문제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영역에서의 시간 지연은 강렬한 연출로 가려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 캐릭터 수집 가챠 게임의 캐릭터 뽑기에서 초반에 기대감을 연출하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은 이용자의 소비를 유도하는 강렬한 후킹 요소이기도 하지만, 서버와의 통신시간을 감추는 트릭이기도 하다. 드물게 준비된 연출 시간보다 반응에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경우 문이 열리거나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고 계속 이펙트가 돌아가는 연출을 본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아니라 데이터가 오가는 레이턴시 역시 개발자들에게는 주요하게 뛰어넘어야 할 벽들이다. 오픈월드는 특히 이 문제가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장르인데, 오픈월드 내의 이동속도에 걸리는 제한 등은 이러한 하드웨어 한계로부터 기인한다. 오픈월드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했을 때 게임 월드의 로딩이 늦어진다면 이미 플레이어가 목표지점에 도착한 후에 건물이 생겨나던가 NPC가 생겨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개발자들에게는 극복해야하는 요소들이다. 블리자드의 <월드오브 워크래프트>는 이러한 로딩에 대한 요소를 레벨 디자인적인 요소로 해결하였다. 스톰윈드나 오그리마, 언더월드, 썬더 블러프의 입구는 한번에 도시 내부가 다 보일 수 없도록 통로를 크랭크 형태로 디자인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도시 내부에 들어가는 동안 도시 내 환경 요소들의 로딩을 마무리하기 위한 트릭 중 하나다. * 스톰윈드 정면.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직진하는 대신 좌우의 크랭크식 통로로 꺾어져 들어가야 하며 이 시간동안 컴퓨터는 도시를 로드한다. 출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 사이트. 지연시간 문제를 아예 강력한 기계적인 성능으로 메꿔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플레이스테이션 5부터 게임기에서는 SSD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게임 로딩의 주요한 병목이 되는 디스크로부터 데이터를 읽어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게임 개발자들이 다양한 프로그래밍, 디자인 기술을 통해 시간지연 문제에 대응해 온 것 이상으로, 게이머들 또한 로딩과 랙을 중요하게 다루며 대응하고 발전해 온 바 있다. 최적화된 게임 플레이를 원하는 이용자들은 최대한 로딩을 적게 보기 위한 방법을 하고 실험하고 도입하고 있다. 특히 격투게임의 경우는 레이턴시를 프레임 단위로 계산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고수들 사이에는 일반적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처럼 다인 참여형 대규모 레이드가 주요 콘텐츠인 게임에서도 게이머들은 자신의 DPS를 높이기 위해 스킬과 스킬 사이의 입력에 시간적인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게임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한다. 개발자 입장에서 가장 황당한 경우는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틈을 노리는 기술들을 네트워크 대전에서 사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정상적인 네트워크 레이턴시라면 기술이 막혀야 하는 상황에서 레이턴시로 인해 클라이언트에서 기술이 막히기 전에 한번 더 기술을 사용하는 이런 특수한 사례들을 이용자는 성공률이 낮다고 하며 사용하지만, 개발자 입장에서는 네트워크 레이턴시, 즉 랙이 존재해야만 들어가는 기술을 사용하는 사례를 보며 네트워크 레이턴시조차 개발자들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하는 이용자들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임 개발자에게 지연시간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지만 게이머들에게는 이조차 자신이 이용할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개발자들은 이 장애물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싸우고, 이용자는 현실적인 랙에 적응하고 이용해가면서 디지털게임은 계속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단절을 넘어서-퀘이크 리마스터
최근 다수의 리마스터 타이틀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과거 발매되었던 게임의 비주얼이나 시스템을 조정해 다시금 선보이는 리마스터 / 리메이크들이 예다. ROM 혹은 디스크 등의 형태를 넘어서 디지털로 복각되고 라이브 서비스를 진행하는 MMORPG 또한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거의 빌드를 그대로 서비스하는 사례도 여럿이다. < Back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단절을 넘어서-퀘이크 리마스터 02 GG Vol. 21. 8. 10. 최근 다수의 리마스터 타이틀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과거 발매되었던 게임의 비주얼이나 시스템을 조정해 다시금 선보이는 리마스터 / 리메이크들이 예다. ROM 혹은 디스크 등의 형태를 넘어서 디지털로 복각되고 라이브 서비스를 진행하는 MMORPG 또한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거의 빌드를 그대로 서비스하는 사례도 여럿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것에서 영감을 얻는 타이틀도 다수를 만날 수 있다. 8-bit / 16-bit를 넘어 픽셀 그래픽 자체가 레트로를 대표하는 비주얼로도 사용된다. 큰 흐름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과거의 작품들이 현재의 시장에 다시금 얼굴을 비추고 나름의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상태다. 마치, 패션과 대중음악에서 과거의 스타일을 레트로라는 이름 아래 재조명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게임에 있어서 레트로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패션이나 대중음악에서 말하는 레트로 혹은 뉴트로와는 다르게 구분 방식도. 기준도 모호하다. 과거의 문화를 누리는 방식과 대상에 차이를 보인다고는 하지만, 게임에 있어서는 시기 정도만이 레트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얼마 전까지 레트로가 패미컴 시절의 게임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현재는 PS1 혹은 PS2까지 포함할 정도로 범주가 확장됐다. * 2000년에 발매된 〈디아블로2〉도 시기 상으로는 레트로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게임에서의 레트로는 과거의 작품을 의미하는 형태. 클래식(Classic)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움을 소비하는 것 그리고 경험하지 못한 과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과는 기준과 양상이 다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단순히 올드 게이머들을 위한 추억 팔이로. 반대로 다른 누군가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로 바라보기도 한다. 과거의 게임이 시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에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게임이 과거 타이틀에서 보여준 플레이와 디자인을 이용해 무수히 많은 시간과 시도를 더하며 켜켜이 쌓여나가는 형태로 정립되어 있어서다.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두고 가치를 더하는 발정 과정이므로 다른 문화적 요소와 달리 게임은 향유층 혹은 세대 간의 단절이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십년 전 게임을 플레이하며 과거에 대한 연민과 추억을 소비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새로운 시장과 소비층을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본질적으로 과거의 타이틀은 지금과 비교해서 표현 한계가 명확했던 시절의 것일 뿐. 잃어버리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회사나 작품이 달라지더라도 플레이라는 형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개선되고 발전했다. 더불어 여기에 새로운 생각들이 더해지면서 게임의 발전 중간마다 지점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항상 진행 중인 게임의 발전에서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된 작품. 그리고 다른 세대와 함께 공유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작품을 갖게 된다. 이 사이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새로이 등장한 향유층과도 접점을 유지할 가능성을 남긴다. 게임의 발전 과정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형태로 진행되기에, 각 계층 사이 또한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기에 레트로와 같이 그리움에 단어로 규정하기 보다는 과거 타이틀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 〈슈퍼 마리오〉 처럼 시리즈가 오랜 역사를 가질수록 과거 타이틀은 현재와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속 속에서 게임이란 매체의 발전은 곧, 표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연속적인 사고의 집합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타이틀은 과거의 작품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있다. 시장에 선보인 바 있는 타이틀의 일부 요소를 차용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서 게임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층위와 시장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아이디어의 그 근원에서 마주하는 가치. 즉, 어떻게 이러한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거기에 고전작들을 바라보기 위한 단서가 있다. 수많은 레트로 스타일의 게임이 나오고 있음에도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근원이다. 소위 ‘레트로 스타일’로 대표되는 비주얼 측면을 넘어서 과거 고전 타이틀이 존재감을 갖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국내 기준으로 8월 20일 발매된 〈퀘이크 리마스터〉를 보자. 발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여겨볼 디자인적 측면이 눈에 띈다. 〈퀘이크 리마스터〉는 밸런스 측면에서 약간의 조정을 제외하면, 1996년 원작에서 변한 것이 없음에도 말이다. 텍스쳐와 광원 등이 지금에 맞게 조정되었을 뿐이고 게임을 이루는 뼈대와 플레이 흐름이 그 시절의 것 그대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 플레이 자체는 여전히 흥미롭고 전반에 걸쳐 생각해볼 거리를 남긴다. 과거의 시점에서 현재의 게임들에 던지는 질문들이다. 돌이켜보면 〈퀘이크〉는 id 소프트웨어가 1993년 발매한 〈둠〉에 비견될 정도로 게임 업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던 타이틀이다. 풀 폴리곤 기반 FPS로의 전환과 이에 따른 VGA의 발전. 3D 환경에서의 자유로운 시점 조작과 레벨 디자인. 이후 〈하프라이프〉와 〈콜 오브 듀티〉 등에도 영향을 줬던 게임 엔진. 인터넷을 이용한 멀티 플레이와 경기. 여기서 파생된 WASD 조작 등 현재에도 통용되는 여러 요소들이 퀘이크에서 출발한다. 이와 같은 발전상은 현재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졌던 요소들이다. 〈퀘이크〉가 폴리곤 환경을 십분 활용해 구축한 레벨 디자인과 자유로운 시점 등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새로운 시점과 플레이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시도이자 해답이었다. 〈퀘이크〉를 통해 만들어낸 하나의 문법은 이후에도 일종의 기준이 됐다. 당시의 개발자들은 퀘이크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분하고 해석하며,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동시에 3D 환경의 발전과 기기의 성능 상승으로 더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표현할 기계적 한계와 자원도 늘어났다. 특유의 빠른 속도는 하이퍼 FPS라는 경향으로의 발전으로. 고저차를 활용하는 레벨 디자인은 이후 다른 회사의 작품들을 거치며, 더 나아지는 경향을 보여줬다. 근본적인 플레이 흐름을 생각해 볼 때에는 〈퀘이크〉의 그것과 현대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다. 예전과 비교해서 시대와 기기의 성능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FPS는 id 소프트웨어가 이룩했던 근본적 의도와 발상의 틀 안에서 여전히 재구축되고 나름의 해석과 관점을 더하고 있는 모습이다. 〈퀘이크 리마스터〉가 보여주는 일면들은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현재에도 적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20년이 넘게 지난 타이틀임에도 여전히 재미있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게임 디자인의 본질과 당시 개발자들이 고민했던 지점들이 현재도 분명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의 한계를 넘기 위한 고민과 노력. 어떤 플레이를 전달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시리즈가 단절되었을지라도 과거를 통해 얻은 가치는 그대로 유지되며 현재까지 계속되는 하나의 경향이 된다. 다른 문화 분야에서의 레트로 / 뉴트로가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출발해 이를 소비하는 형태라면, 게임에서의 레트로는 소비 측면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사상의 근원을 찾아나가는 여행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고전 게임을 현재에도 플레이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기준으로 다시 현재의 게임들을 비춰보는 행위가 된다. 과거 개발진이 고민했던 시점과 결과물이 이를 통해서 현재의 게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게임 플레이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당시에 어떤 고민과 해답을 내렸는지를 살펴보면, 개인마다 새로운 방향성이 보이기 마련이다. 이를 통해서 수용자인 플레이어는 현재의 게임을 자신의 기준에 맞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다. 그리고 거기서 얻어진 깨달음은 〈셔블 나이트〉와 같이 과거 게임의 장점을 조립하고 재구축한 타이틀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결과물에서 출발해 새로운 형태의 표현과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셈이다. 마치며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과거의 타이틀은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게임들이 시장에 발매될수록. 단순 비주얼 측면에서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기보다는 거기서 어떤 것들을 배울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투박함 안에 포함된 그 당시 개발자들의 고민과 결과물. 그리고 명확한 한계를 넘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경험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거의 게임을 찾고 플레이하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현재 향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게임을 바라보기 위한 시각의 정립이다. 게임이라는 매체이자 표현 형태의 발전은 과거에 항상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앞으로 나올 게임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것을 바라보며 각 요소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이 곧 게임이라는 매체의 발전상이다. 따라서 발매된 지 오래 지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핑, 협상, 그리고 그림 -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게임은 본질적으로 소셜입니다. 1970년대 후반의 MUD게임에서부터 90년대 초반의 MMORPG에 이르기까지, 게임을 하는 것은 사회성을 기르고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져 왔습니다. 미디어에서 만연한 ‘외톨이’ 게이머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정반대입니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핑, 커뮤니케이션, 트롤링, 음성채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Cortney Blamey Courtney is a Communication PhD student and game designer at Concordia University, Montreal, Canada. Her doctoral research concentrates on the process of meaning-making in games tackling serious themes and exploring this relationship between player and designer in her own critical game design process. Her previous research unpacked Blizzard’s approach to community moderation in Overwatch by investigating both developer and community inputs on forums. She is a member of the mLab, a space dedicated to developing innovative methods for studying games and game players and TAG (Technoculture Arts and Games).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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