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결과
Search this site
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게임 시장에서 비디오 게임 콘솔과 범용 PC의 40년 경쟁이 낳은 변화들
범용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PC 게이밍’이 성립되기 전 게임은 그 자신만을 구동하는 독자적인 콘솔의 영역에서 오롯이 유희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용 기기가 아니라 범용 기기에서 실행되는 PC 게임의 세계는 콘솔의 옆에서 어떻게 자라났고 이 둘의 접촉은 어떤 변화를 낳았을까? < Back 24 GG Vol. 25.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eong-Yi Writes with an interest in the interrelations among violence, suffering, and division. Produced works including Mapping the Affective, Pouring Water into a Poisoned Bottomless Jar, and Monthly Paper, and served as dramaturg for the plays Opera Charlotronique and The Man Who Became a Pillow. Author of Hormone Journal and Game Chorus, and co-author of A Mad, Love Song.
- [논문세미나] 데이터가 만든 신화: ‘동남아 성장 신화’를 주도하는 게임 시장 분석 보고서 비판
그러나 동남아시아 시장의 전망에는 비판도 따른다. 게임 시장 전망을 내놓는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들이 사실은 시장 담론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홍콩과학기술대학교 웡(K.T. Wong) 교수는 2022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며, 뉴주(Newzoo)와 같은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이 만들어낸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 시장”의 서사가 이 지역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구성된 분석이라고 지적한다. < Back [논문세미나] 데이터가 만든 신화: ‘동남아 성장 신화’를 주도하는 게임 시장 분석 보고서 비판 26 GG Vol. 25. 10. 10. *논문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The Data-Driven Myth and the Deceptive Futurity of “the World’s Fastest Growing Games Region”: Selling the Southeast Asian Games Market via Game Analytics (2022) https://journals.sagepub.com/doi/10.1177/15554120221077731#fig1-15554120221077731 게임 업계 종사자라면 한 번쯤 동남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 시장”이라는 말이 업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수년 전 중국이 신흥 게임 시장으로 주목을 받았을 때, 많은 게임 퍼블리셔들은 중국 시장을 선망했고 실제로 큰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이제 그 뒤를 잇는 차세대 성장지로 동남아시아가 호명되고 있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캄보디아, 미얀마, 브루나이, 라오스, 동티모르. 이 11개의 국가에는 게임 업계에 ‘제 2의 노다지’를 약속하는 미래의 잠재 고객들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시장의 전망에는 비판도 따른다. 게임 시장 전망을 내놓는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들이 사실은 시장 담론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홍콩과학기술대학교 웡(K.T. Wong) 교수는 2022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며, 뉴주(Newzoo)와 같은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이 만들어낸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 시장”의 서사가 이 지역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구성된 분석이라고 지적한다. 이 글에서는 웡 교수의 논문 내용을 요약 전달하고, 우리가 믿어온 동남아시아 시장의 성장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글로벌 데이터 분석 기업 ‘뉴주(Newzoo)’ 로고 업계 담론을 움직이는 거대한 영향력, 뉴주(Newzoo) 뉴주는 세계에서 널리 인용되는 글로벌 데이터 기업 중 하나다. 게임과 디지털 기기 사용 관련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으며, 미래 시장을 예측하고 정기 현황을 결산하는 보고서를 발간한다. 뉴주의 보고서는 시장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무수한 기사로 인용되고,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보고서에 참고되며, 무엇보다 게임 업계인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어 주요 의사 결정과 투자의 흐름에 관여하고 있다. 뉴주가 데이터 분석 보고서를 유통하는 방식에는 크게 무료와 유료로 나뉜다. 유료의 경우, ‘2025년 글로벌 모바일 게임 시장 전망’과 같은 심층 보고서를 판매하는 형태로, 단독 상품 하나에 약 5,000달러에 판매된다. 하지만 실제로 더 큰 파급력을 지닌 것은 무료 버전의 보고서다. 무료로 제공되는 보고서는 유료의 일부분을 제공하는 라이트 버전이다. 누구든 다운로드할 수 있기에 출시 직후 언론에 빠르게 인용된다. 더 깊은 분석이 담겨 있는 버전보다, 라이트 버전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셈이다. 뉴주가 무료 보고서에서 “동남아시아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라고 하면, 이는 곧 업계와 대중이 공유하는 ‘사실’처럼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세상을 뉴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웡 교수의 비판 지점은 단순히 이 분석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있지 않다. 뉴주가 담론에 권위 있는 기업으로서 미래를 ‘만들어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 있다. 뉴주의 2015년 동남아시아 게임 시장 보고서 자본주의적 시간성으로 본 동남아시아 뉴주는 네덜란드 기업이다. 이들이 쓴 동남아 시장 보고서 서론 부분을 보면, 대상 독자가 누구인지 힌트가 있다. 지난 번 중국 시장 보고서가 반응이 좋았다며, 다음 먹거리가 뭔지 기다렸을 독자를 위해 새로운 것을 준비했다는 투다. 이들의 독자는 주로 북미와 유럽의 서구권이고, 일본과 한국의 동북아시아권까지도 포함된다. 뉴주의 보고서가 그려내는 동남아시아의 이미지는 단순한 숫자와 그래프 같지만, 그 밑에는 특정한 시간관이 숨어 있다. 동남아시아는 아직 덜 발전했지만 곧 따라올 시장으로 묘사된다. 아직 개발 ‘중’인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으로서, 곧 선진국이 위치한 현재에 도달할 것이라는 직선적 시간관이다. 웡 교수는 이러한 시간관을 ‘자본주의적 시간성’으로 판단한다. 우리 모두 현재에 살고 있음에도, 보고서 속 동남아시아는 다른 시간대로서 구분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이 아직 뒤처져있는 과거로 비춰지는 과정에서 지역의 역사적 맥락, 인종 및 언어와 같은 복잡성은 사라지고, 11개 국가는 외부인이 이해하기 쉬운 ‘단일 시장’으로 뭉뚱그려진다. 이런 시선은 낯설지 않다. 16세기부터 서구가 동남아시아를 바라보던 틀과 닮아 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 열강에게 동남아시아는 자본을 창출하는 식민지였다. 기나긴 역사 끝에 탈식민 과정을 거쳐 자생력을 회복했음에도, 오늘날 이 지역은 다시금 외국 자본의 기회의 땅으로 호명된다. 실제로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는 정책적 기조와 디지털 불법 복제 방지 운동, 중산층 소비력 증가가 보이면서 이곳은 게임 신흥 시장으로서 외국의 입맛을 당기고 있다.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에도 반복적으로 드리우는 것이다. ‘신화’라는 이름의 성장 서사 웡 교수는 이 지점에서 ‘신화(myth)’가 발생한다고 본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말한 신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신화란 어떤 의미를 사회 속에서 ‘당연한 것’처럼 굳어지는 체계다. 우리가 접하는 광고, 기사 같은 것들의 텍스트와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재구성되어 본래의 역사적 맥락을 잃고 새로운 개념으로서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보이게 하는 체계가 바로 신화다. 여기서 허구냐 사실이냐의 문제는 핵심이 아니다. 바르트는 자신의 저작 <신화론>에서 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흑인 병사의 이미지를 신화의 예로 든다. 이 이미지는 “프랑스 제국은 인종에 상관없이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나, 그 이면에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 지배 역사, 군국주의, 국가주의의 복잡한 맥락을 지우고 있다. 뉴주의 동남아시아 게임 시장 보고서는 데이터 분석을 전달하고 동시에, 성장 신화를 생산한다.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 시장”이라는 문장도 신화와 같다. 동남아시아는 끝없는 성장의 보고라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둔갑한다. 내재하는 식민지 역사, 문화적 다양성, 불평등, 계급 같은 복잡성은 지워지고 ‘성장’만이 유일한 진실처럼 제시된다. 동남아 시장 신화를 구성하는 장치 웡 교수는 뉴주 보고서가 만들어내는 동남아시아 시장 신화를 구성하는 몇 가지 장치를 짚어낸다. 분석 대상이 된 뉴주의 보고서는 2015년, 2017년에 발행된 동남아시아 게임 시장 관련 문서 3종이다. 1)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소비자 뉴주가 동남아시아 성장 신화에 핵심적으로 등장시키는 데이터는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사람들(players-yet-to-be)의 수치이다. 이 수치는 인구 수에서 게임 이용자 수를 뺀 값으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인구 수가 100명이고 게임 이용자 수가 30명이면, 나머지 70명은 아직 게임을 하지 않지만 앞으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사람들로서 희망적인 수치인 것이다. 사실 이 데이터는 실재하는 데이터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보고서 속에서만큼은 이미 숫자로 살아 움직인다. 웡 교수는 이를 “보고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소비자”라고 부른다. 뉴주가 파는 것은 결국 미래의 수익이 될 수도 있는 전망 그 자체다. 2) 임의적 단일화와 선택적 분할 뉴주가 제시하는 전세계 게임 시장 분석 도표에서 국가별 이용자 데이터는 미국, 중국, 인도처럼 국가 단위별로 나뉘어져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는 11개 국가가 속했음에도 ‘동남아시아’로 묶여 1개로 산정된다. 필요에 따라 묶어지고, 또 나누어진다. 동남아시아 11개국 중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는 묶어져 ’Big 6’라는 이름으로 강조된다. Big 6는 동남아시아 내 핵심 시장이다. 반면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동티모르, 브루나이의 나머지 국가는 기타(Other)로 묶인다. 이 국가들은 도표에서 잿빛의 어두운 색깔로 칠해지며, Big 6의 밝은 색과는 비교되며 사실상 존재가 지워진다. 뉴주의 임의적 지역 통합 및 분할이 문제적인 이유에 대해 웡 교수는 말레이시아의 중국인 게임 이용자 사례를 든다. 역사적으로 한족의 유입이 있었던 말레이시아는 인구의 30%가 중국계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은 경제 활동에 능한 사업가라는 스테레오타입을 형성했고, 식민지 지배층과 말레이인 사이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사회적 불평등을 발생시켜왔다. 현대에 이르러 말레이시아 내 중국계는 말레이인보다 상대적으로 게임을 많이 즐긴다. 말레이시아 게임 시장에서도 매출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부 게임 퍼블리셔는 말레이시아에 중국어로 게임을 서비스하기도 한다. 그러나 뉴주의 그 어떤 보고서도 이러한 복잡성은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말레이시아가 “모바일 게임(매출 기준) 상위 10위에 중국 게임 타이틀의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라는 점을 강조는 하지만 그 이면의 배경은 방 안의 코끼리처럼 무시되고 있다. 보고서에 등장한 ‘Big 6’ 도표 3) 끝없는 성장을 보장하는 수치 뉴주의 동남아시아 보고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장치는 연평균 성장률(CAGR)이다. CAGR은 특정 기간 동안 매년 일정한 비율로 성장했다고 가정하는 계산식이다. 5년 동안 시장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면, CAGR은 매년 몇 퍼센트씩 성장해야 2배가 되는가를 수치로 보여준다. 실제 세계는 경기 변동, 규제, 사회적 사건 등으로 요동치지만 CAGR은 불확실성을 모두 지워버리고 깔끔한 직선적 상승 곡선만 남긴다. 보고서를 읽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남아시아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시장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국내총생산(GDP) 지표 역시 마찬가지다. GDP는 자본주의 발전 정도를 숫자로 서열화하는 지표다. 개발도상국의 GDP가 빠르게 오르는 이유는 따라잡아야 할 간극이 크기 때문인데, 보고서는 이를 근거로 “동남아시아 시장이 두 배 성장했다”는 헤드라인을 뽑는다. ‘GDP 상승 = 발전 = 미래 = 희망’이라는 등식이 자동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수치들이 현재의 성장만 강조하며 과거와 미래를 지운다는 점이다. 수치를 언급할 때 과거 식민 경험이나 사회적 불평등, 미래의 성장 둔화 가능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현재의 그래프만이 남아서 마치 미래가 이미 보장된 듯한 착각을 준다. CAGR과 GDP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담론적 장치이다. 우리가 읽어야 할 데이터 너머의 맥락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웡 교수의 비판은 뉴주의 보고서의 진위 여부가 아니다. 보고서가 전달하는 것은 데이터 분석이자, 데이터 기반 신화이다. 이 신화는 동남아시아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복잡한 맥락들을 새롭고 깔끔한 의미로 구성하고,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화한다. 동남아시아는 실제로 잠재력이 큰 시장이다. 하지만 그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끝없는 성장의 신화만 좇는다면, 투자와 전략은 번번이 현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임 업계가 진정으로 자본주의적 성공을 원한다면 숫자의 화려한 곡선 너머에 가려진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조건을 함께 읽어야 한다. 데이터는 객관적 진실처럼 보이지만, 그 해석과 표현 방식은 특정한 이해관계와 시선을 반영한다. 숫자가 어디서 왔고 어떤 관점을 담고 있는지 묻는 일은 절대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Back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17 GG Vol. 24. 4. 10. 방치형 RPG 비판 1)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2)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타비카에루’는 방치형 게임의 ‘이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시장은 ‘AFK 아레나(剑与远征)’, ‘마법거울의 전설(魔镜物语)’, ‘아이린 시편(爱琳诗篇)’ 등 ‘맵밀기(推图)’ 3) 를 큰 축으로 하여 수집, 육성, 트래킹, 턴제 자동전투 등 다양한 플레이 방식을 결합한 중국산 방치형RPG게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의 시청각적 외관은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로직은 일관성이 있다. 심지어 게임의 전투나 스토리 전개는 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거나 구동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자동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유형의 수익을 취하고 관리하기 위해 이따금 게임 속 개체를 클릭하기만 하면 게임을 최대한 즐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로 ‘스킨을 교체한다’ 4) 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주의를 끌지 못하던 미니게임에서 대중화된 게임 장르로 변모한 이 질적 변화는 게임 역사의 자연적인 진화에 그치지 않으며,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가 되고 있다. ‘게임’이란 ‘현실’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의 문예적인 표상이며, 현실과 대응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장르의 미디어적인 특성상, 게임성을 커버할 만큼 스토리성이 강한 서사적 게임을 제외하면, 오늘날 RPG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의 ‘거대 서사’ 5) 형식을 통해 객관적 현실을 명료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宽)가 말했듯 ‘거대한 게임’ 6) 의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투영할 뿐이다. 이에 따라 우노 츠네히로는 21세기 들어 RPG 등 방치형 게임 장르가 전후 일본의 서브컬처 속 ‘고질라 명제(ゴジラの命題) 7) ’, 즉 허구——객관적 현실이 아님——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주관적 현실을 게임을 통해 써내려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와 연관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게임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각 구조에서 주관적인 사회 현실을 추출하고, 이미지화하는 능력을 뜻한다. 객관적 현실을 발화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오늘날,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이 동시대에 대해 갖는 사명은 자역주의적 방식으로 객관적 현실을 직접 드러내는 게 아닐 것이다. 플레이 방식 등 신체적 감각에 호소하는 혁신적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은 ‘고질라 명제’를 따라 현대 중국의 주관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서 방치형RPG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1. 자동화, 수동성, 자아의 구조 방치형RPG에 대한 산발적 논의에서 저우쓰위(周思妤)는 이런 게임의 핵심 특징은 “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는 것” 8) , 즉 플레이어가 최대한 플레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플레이 방식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반역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촉각 매체 9) 이며, 그 매개적 특수성은 플레이어가 게임 장치와 빈번하고 밀접한 물리적 상호작용(즉, ‘플레이’)을 수행하도록 요구한다. 이를 통해 ‘입력 부족과 출력 과잉’ 10) 이라는 비대칭적 장력 속에서 플레이어의 신체적 경험 이상의 정신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역시 플레이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게임의 시간(즉, ‘제3시간’)을 진정한 게임 내러티브의 시간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11) 한마디로 말해, 게임을 체험하는 정확한 자세는 최대한 많이 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플레이 방식은 이와 반대인데, 최대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원리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역설적인 플레이 방법론을 구축한다. 이런 방법론은 어떻게 성립될까? 게임 과정의 자동화를 통해서다. 하지만 낮은 수준의 자동화 12) 는 모든 게임의 초석이기 때문에 게임의 자동화를 되풀이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거듭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가 인터페이스 내 임의의 위치를 클릭하면 아바타(avatar)가 자동으로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게임 설계가 실패하게 된다. 방치형RPG의 특수성은 자동화가 게임 프로그램의 국부적 자동 연산 및 실행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게임의 전반적인 작동 논리를 가리킨다는 것에 있다. 가령 ‘AFK 아레나’는 플레이어가 클릭하는 방식으로 이를 확인하고 추출해야 하는 경우에조차 다양한 자원 혜택을 제공한다. 이는, 표면상 방치형RPG가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이지만, 총체적 자동화(이하 ‘자동화’)의 게임 로직이 이러한 조작을 인체공학적으로 편안한 정도에 맞게 압축하고, 플레이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기존의 많은 게임들에서 노동력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방치형RPG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완전히 자동화된 스크립트 프로그램——모태는 반[反]플레이(counter-play)의 특징을 지닌 전자동 게임 ‘프로그레스 퀘스트(Progress Quest)’——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들의 방치형RPG 개입은 이런 게임들이 여전히 일반적 의미의 게임 '촉매'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합법성을 제공하고, 게임 배급사들이 게임 내 소비 행위(이하 ‘현질’) 13) 를 유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물론 자동화된 게임 로직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에 참여하지만 알고리즘이 계획한 게임 경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뿐 게임 경험의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방치형RPG 플레이의 감수성은 능동적인 탐색, 구성 또는 초극이 아니라 항상 수동적이게 된다. 한마디로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먹이를 주고, 플레이어는 편안하게 입을 벌리고 게임 시스템의 아낌없는 선물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 경험은 방치형 RPG의 대립자 14) 가 어긋나게 놓인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흔히 게임은 “실패의 예술” 15) 로 여겨지는데, 이는 게이머의 진로를 가로막는 다양한 대립자들, 플레이어의 기본 임무인 눈앞의 끝없는 대립자에 반복적으로 도전해 결국 게임을 클리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격투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ストリートファイターベガ)’를 할 때에는 마지막 상대인 베가(ベガ)를 이길 때까지 상대에게 한 번씩 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방치형RPG에도 이런 대립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엘피스 전기M: 스피릿 각성(斗罗大陆:武魂觉醒)’에서 ‘시련의 경계’에 도전했다가 전력 부족으로 패배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게임의 차이점은 대립하는 쌍방(즉, 플레이어와 게임)이 만났을 때 서로 어긋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즉, 방치형RPG의 자동화 논리로 인해 막을 수 없는 플레이어는 실제 높은 차원에 배치되고 반대쪽은 낮은 위치에 배치된다. 비록 낮은 단계의 대립자는 일시적으로 플레이어의 전진 속도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자동 전진하는 플레이어를 근본적으로 막거나 좌절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배칭형RPG와 일반 게임의 기본 차이점은 전자가 이론적으로 반대편을 이길 수 없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이머가 근본적인 ’게임불감증(卡关;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프로세스)’으로 인한 부정적 감정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이하 ‘방치형 플레이어’)가 게임 속 대립자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개조할 필요가 없다. 시간함수가 증가해 낮은 단계의 대립자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를 기다리거나, 현질로 이를 집어삼켜 소비주의의 쾌감과 만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가 반대편에 부딪혔을 때 '절대적 부정'을 느끼지 않고, 기껏해야 연속적인 플레이 경험이 끊기는 등 짧은 불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게임에서 현질을 하지 않는 대가일 뿐이다. 절대적 부정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플레이어에게 적대적인 액션 포지션이 할당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결 자체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방치형RPG는 “실패의 예술”의 반명제가 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게임에서는 대결하는 쌍방의 움직임과 동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플레이어는 정해진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플레이어는 역동적인 게임 내 역사적 여정을 구축하는 것에 참여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게임 체험은 자기자신과 게임 프로그램 간 상호작용에서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끝없이 공허한 순환 생성에 빠뜨릴 뿐이다. 따라서 방치형RPG는 기존 게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게임들에도 다양한 전투의 순간이 가득하지만, 그것의 역사적 여정은 다른 게임처럼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총력투쟁의 형태로 깊이 있게 추진되지 않는다. 비록 게임의 수치는 끊임없이 증식하고 비대해지지만(hypertrophy), 게임의 여정은 오히려 미리 설정된 알고리즘의 무성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가깝다. 단적으로 게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만, 유저들의 플레이 경험은 영원히 정체된 윤회 상태로 굳어져 ‘역사’는 끝난다. ‘역사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방치형RPG를 외형상 적개심으로 가득 찬 용담호혈(龍潭虎穴) 16) 을 날조할 뿐, 실제로는 한없이 순한 수치의 비경 속에 있다. 따라서 게이머들에게 철저하고 고통스러운 투쟁(清算)의 도전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은밀하게 자신의 안전구역으로 퇴행(regression)하라고 유도하고, 보상이란 형태의 게임 시스템이 주는 긍정적인 경험을 기다리고 즐기게 함을 뜻한다. 또한 방치형RPG의 긍정적 체험은 독특한데, 그것은 전통 비디오 게임에서 이중 부정의 간접 형태가 아니라(가령 코나미 게임 ‘콘트라’는 끊임없이 적을 죽이고 게임 내 모든 부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무효화한다), 오히려 게임의 알고리즘에 의해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통쾌함의 형태로 아낌없이 주어진다. 예컨대 ‘AFK 아레나’의 플레이어는 ‘키보드에서 손을 빼’ 17) 직접적으로 120분의 AFK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방치형 플레이어는 진정한 게임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부정적 능력만이 진정으로 게이머의 주체적 위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주는 긍정적 경험만을 받아들이는 게이머들은 추상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개성이 없는 게임의 종속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와 게임의 대립 구도에서 플레이어의 주체성을 논하는 게 아니다. 게임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플레이어와 자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는 몹을 향한 공격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힘겨루기를 구성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쾌락 구조에서 자신을 능동적인(향락적인) 행동 주체로 만든다. 이 행동의 주체는 사고와 신체의 측면에서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야만 게임에서 승리(예를 들어, 게임 중의 상대를 이기는 것)할 수 있고, 게임의 쾌락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앞서 언급한 이중 부정 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게임 시스템의 포획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을 게임 쾌락을 즐기는 능동적 행동 주체로 만들 수 없고, 자아에 대한 최후의 절제를 포기하고 게임 시스템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함으로써 적극적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방치형 플레이어는 게임의 호의를 행복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주체적인 자기결정 구조를 상실한다. 그/그녀(플레이어)는 게임과 쾌감에 의해 완전히 지배될 뿐,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방치형RPG의 무대에서 서서히 펼쳐지고 있음을 사실을 불현듯 발견하게 된다. 2. 부성의 절대권력 방치형RPG는 게임의 역설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게임 장르처럼) 부정적 매체 18) (혹은 죽음의 매체)가 아니라, 긍정적 매체(혹은 삶의 매체)이다. 게이머들은 주로 게임 속에서 AFK 19) 형식으로 자동으로 생성되는 대량의 자원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앉아서 즐긴다. 게이머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이 게임은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다른 이념적 전략을 사용하는데, 경계에 있는 상처를 달래는 진혼곡을 부드럽게 읊조리며 ‘알고리즘 모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적 환각을 만들어낸다. 알고리즘 모성의 무조건적인 보살핌 아래 플레이어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 보상 등 위로의 형태로 긍정적 경험을 즐길 수 있으며, ‘수동적 자동 만족’에 기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 모성은 플레이어의 본능적인 욕망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행복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으로 인해 크게 붕괴되었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된다. 여기서 알고리즘적 모성은 플레이어에게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유토피아를 열어준다. 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에 의해 크게 붕괴된다. 하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것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되게 한다. 이처럼 방치형RPG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알고리즘의 모성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모성은 게임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며, 이를 논의하기 전에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가졌다는 근거, 즉 게임의 주권적 힘(sovereign power)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게임 내 절대권력은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절대적 관할권을 의미하며, 그 물질적 기반은 절차상의 출처(procedural authorship) 20) 이다. 그것의 관찰 가능한 형태(동시에 극치의 형태)는 곧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생사여탈 권한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부정적 매체이기 때문에, 게임의 절대권력은 게이머들에게 주로 ‘죽음’의 관상을 보여주며, ‘죽음’(즉, 철저한 부정)의 의제를 지향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핵심 관심사는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피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새로운 예술로서 게임을 이해하는 학문적 출발점이 됐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와 요시다 히로시(吉田寬) 등 일본 학자들은 ‘죽음’을 주제로 ‘게임 리얼리즘(ゲームのリアリズム)’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21) 물론 게임 내 모든 죽음을 절대권력의 소행으로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 운영(system operation)과 단위 운영(system operation)에 대한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의 주장 22) 은 절대권력은 완전하고 선형적이며 정상적인 시스템 운영에서 나타나며 단위 운영의 절대권력은 분리되고(discrete) 불연속적이며 역동적인 단위 및 그 관계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スーパーマリオブラザーズ)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사망/낙하”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시스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의 방식에서 게임 시스템/규칙에 해당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리오 형제가 굼바(クリボー)와 같은 적을 건드려서 죽으면 플레이어는 단일 작전으로 인식한다. 절대권력의 관할권은 유닛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 타자를 이길 수 없다는 우발적 경험이 항상 플레이어의 필연적인 절대권력 인식보다 우선한다. 물론 때때로 시스템 작동과 장치 작동이 임계점까지 당겨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RPG 게임은 스토리상의 필요에 의해 갑자기 게임 플레이어가 상대 캐릭터에게 패배하도록 강제하지만, 게임 스토리는 종료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이러한 캐릭터와 절대권력의 일시적 중첩 상태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은 종종 게임이 예외상태(또는 플레이어가 ‘무적’ 상태에 진입했음을 뜻함)에 있음을 나타낸다. 절대권력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에 빠지는 경우처럼) 항상 수동적이고 게임 배경에 숨겨져 있다. 플레이어와 능동적으로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막 통과하려고 할 때, 즉 게임 보스 23) 의 형태를 취하고 플레이어의 경로를 차단할 때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플레이어에게 절대권력은 언제나 ‘제3자의 심급’ 24) 이란 위치에 놓이게 되며, ‘통제와 자유’ 25) 라는 게임의 절차적 변증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끝판왕을 물리치는 것뿐이다. 푸코와 아감본의 표현 26) 을 빌리자면, 절대권력은 형식적으로 고대 가부장적 권력(patria potestas)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모두 플레이어가 아바타 보스를 찾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권한만 갖는 ‘부친 살해’(弑父)의 구조 27) 로 이뤄져 있다. 현실의 외부(동시에 게임의 내부)에 취약하지만 완전히 환상적인 현실을 구축해야만 ‘부친 살해’ 게임을 통해 끝없는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미지’의 결말에 갇히게 된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이 상황이 흔들렸다. 최근 성공한 인기 게임 장르의 중요한 특징은 게임 속 절대권력이 끊임없이 전면에 등장해 플레이어의 ‘아버지 살해’ 수단과 감각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슈팅(逃殺, 도살) 28) 게임은 ‘축권(縮圈)’ 메커니즘을 절대권력의 화신으로 삼아 플레이어와 게임 시스템 사이에 배제적으로 삽입된 도살 관계를 구축한다. 절대권력은 “칼을 든” 죽음 정치의 살벌한 모습으로 게임 전면에 내세워 게이머들을 수색하고, 프로그램화된 레토릭(procedural rhetoric) 29) 의 형태로 게이머들에게 부정적인 칙령을 내린다. 게이머들은 그 권위를 존중하되 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절대권력은 강력하게 감지되고-떠다니며-편재되는 방식으로 게이머들에게 능동적으로 배출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의 형상이다. 즉, 죽이거나 도전받지 않으며, 오직 당신의 복종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모습의 절대권력은 동시대 게임 역사의 상상력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전환을 지향한다. 그러니까 관문 마지막마다 숨어 있어 죽여야 하는 특정 보스(그들은 게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메타 스토리와 스토리의 임계점에 있다)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죽일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반복된다. 이 때문에 게이머가 보스의 위치를 파악해 죽임으로써 게임 시스템/사회 현실을 초극하는 상징적 질서는 무력화된다. 따라서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서사층 내에서 자동 증식하는 게이머들 사이의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의 싸움에 갇히고, 게임의 메타서사층에 존재하는 게이머와 게임 시스템 간 ‘거대한 이야기’는 돌파하지 못해 비정치적이고 퇴화하는 순환 구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이다. (상호텍스트화된) 게임의 세계를 뒤흔드는 통섭적인 기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화되고 만연해진 부권적 절대권력의 칙령에 게이머들이 끊임없이 에피소드 간 ‘생사’의 윤회에 뛰어오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경쟁(즉, 상호경쟁)으로는 총체적 게임/현실 딜레마를 벗어날 해결책과 초월적 쾌감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영원히 공전하는 챗바퀴처럼 “지금-여기”에서 종결될 뿐이다. 3. ‘모성적 디스토피아’ 방치형RPG 역시 이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에 휩싸여 탄생한 게임 장르다. 절대권력은 늘 전면에 나서지만 상징 질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람을 살게 하는 부성적 절대권력이 아니라, 권력기술로 하여금 직접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모성적인 빛을 발하는 권력기술로, 그것의 상징물은 죽음의 ‘검’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모태’다. 이는 곧 앞서 언급한 절대권력에 관한 논의를 갱신해야, 비로소 방치형RPG라는 새로운 게임 장르와 그 은유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푸코와 아감벤은 모두 절대권력의 전형적인 특권 중 하나가 생살여탈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푸코의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들과 아감벤의 수용소에 갇힌 호모사케르는 형벌을 단지 형벌받는 환경——죽음의 위협 속에 던져진다는 뜻——에서 절대권력이 그들에게 휘두르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두려워 하고 있을 뿐이다. 방치형RPG는 완전히 반대다. 그것은 게이머를 긍정적 경험이 생산되고 흐르는 모태(즉, ‘긍정사회’) 30) 에 두고, 그들이 갈망하는 다양한 성장 자원을 자동으로 제공한다. 그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위협도 가하지 않고, 다만 그/그녀를 정성껏 보살피고 만족시켜 줄 뿐이다. 태아들은 부정적인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이 태내에서 오는 긍정적 경험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일 수 있다. 한마디로 방치형RPG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타카하시 루미코(高桥留美子) 31) 식 부권 억압(부정성 체험)이 없는 ‘낙원’, 즉 “물질만 있을 뿐 스토리텔링 32) 은 없”는 욕망의 공간을 만든다. 이 낙원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체험은 모두 제거되고, 게이머는 게임에서 실질적인 실패를 겪지 않는다. 기껏해야 욕구 충족의 지연을 직면할 뿐이다. 가령 ‘마법거울의 전설’의 게이머들은 중심 스토리의 자동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아닌 휴식 중이던 자의식이 ‘실패'라는 우발적 사건에 의해 다시 활성화되는 걸 경험한다. [자의식이] 활성화되면 그들은 두뇌를 조금 사용해 다음을 선택해야 한다. 1) 기존 캐릭터와 소품의 구성 체계를 최적화해 시행착오를 겪고 확실한 자동 전투에 재투자한다; 2) 전쟁 전력을 즉시 높이고 자동 전투를 충족하기 위해 현질을 한다. 3) 현질 충동이 없다면 잠시 서브 스토리로 주의를 돌리고, 시간이 흘러 전투력이 자동으로 증가하면 메인 퀘스트에 계속 도전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게이머는 게임 프로그램의 대립자를 위해 배척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를 경험한 취약한 순간에 모성의 절대권력에 안겨 그것과 조화 및 동일화되면서 재기한 후의 필연적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헤겔식]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면, 방치형RPG에서는 긍정적 경험치가 끊임없이 자동 증가하기 때문에 게임 시스템에 대한 순종은 합리적 플레이 태도가 된다. [이 상황에서] 노예인 게이머는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므로, 자비로운 주인 편에 서서 더 유순해지고 일방적 상황에 순종적으로 빠져든다. 이 일방향적이고 사유하지 않는(thoughtless) 게이머들은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게임의 '좋은' 사실만 무분별하게 경험한다. 따라서 방치형RPG의 부정성과 비판성, 초월성, 그리고 절대권력은 결코 확립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매직사이클(magic cycle) 33) 이 부여한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게임의 쾌락과 현실에 대한 욕구가 자동 충족되는 방식으로 즐긴다. 분명히도 방치형RPG는 절대권력에 대한 게이머의 경계가 완전히 해제되어 게이머에게 반역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이는 게임이 직면하게 되는 안티게임의 메커니즘을 근절할 뿐만 아니라, 게이머의 안티게임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소모했기 때문이다. 게이머의 모든 욕구를 부드럽게 충족시켜주는 방치형RPG는 게이머와 게임 간의 적대 관계를 시간함수에 따른 희소성과 만족감이라는 비적대적 공식으로 전환해버린다. 그렇기에 게이머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언제 실현될지, 어떻게 하면 그 실현을 가속화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된다. 이는 게이머가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애착을 형성하고도 다른 게임처럼 안티게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방치형 RPG의 장점이다. 누가 자신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장난기 많은(게임) 어머니를 원망하고 반항하겠는가? 그러나 방치형RPG라고 해서 앞서 말한 잔혹한 슈팅게임의 안티테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동일한 사회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상반된 게임 해결법일 뿐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네이쥐안’ 사회——장기간의 고성장 이후 GDP 성장률이 실질적인 둔화기로 접어든 사회경제적 상황——의 가부장적 절대권력(즉, 슈팅게임)에 맞서 강경한 전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더라도, 그리고 네이쥐안이 마땅히 벗어나고 비판해야 할 잘못된 사회 상태라고 믿더라도, '게이머'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결단력' 34) 을 갖고 잔인한 '사회/게임'(즉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탈출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를 말할 수 있는 사회적/심리적 공간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모성의 우산을 씌워주며, 긍정적인 게임 체험 쪽으로 끊임없이 속삭인다. “얘야, 넌 정말 대단해! 멋져! 내가 해결해줄게...” 다시 말해,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이머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게이머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35) 게임/사회에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폐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노 츠네히로의 말처럼 이것은 모성의 유토피아보다는 모성의 디스토피아(母性のディストピア)일 수 있다. 후자는 우노 츠네히로가 아즈마 히로키의 미연시 게임 장르에 대한 비평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서 발전한 독특한 서브컬쳐의 상상력을 설명한다. 그는 근대국가를 국가의 ‘아버지’로 의인화하며, 국민의 성숙은 그들이 국가 안에서 가부장제적 아버지 36) 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드래곤 퀘스트(ドラゴンクエスト)’와 ‘젤다의 전설(ゼルダの伝說)’ 등 일본의 국민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이 공주를 구하는 서사는 얼핏 보면 사랑 이야기지만, 게이머가 공주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성숙(즉, 주인공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을 이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패전국 일본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은 승전국 미국에 의해 실추된 일본 아버지가 아니라, 태내부터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섬의 어머니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표면적인 게임 내용만 보면 위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공주를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층적인 문예 심리를 살펴보면 게이머가 공주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의 성숙을 깨달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출된 공주는 대문자 어머니가 되고, 게임을 클리어한 게이머는 아버지가 되지만, 대문자 어머니에 의지해 성숙해지는 왜소한 아버지다. 모성적 디스토피아는 대문자 어머니가 왜소한 아버지를 키운다는 전후 일본의 상상력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노 츠네히로는 모성적 디스토피아가 전후 일본에 한정된 특수한 상상력에서 인터넷 환경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인 현대 사회의 상상력으로 진화했다며 그것의 설명 37) 을 확장해왔다. 인터넷 사회는 자녀(즉, 인터넷 사용자)를 정보 고치(즉, 태아)에 던져 넣고 모든 소음을 제거한 후,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모든 정보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로 계속 제공하는 사회이다. 그것은 모성적 유토피아에 대한 자기 망상을 부풀린다. 이 같은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성의 디스토피아'는 발전된 개념이다. 우노 츠네히로의 연구 시야에는 중국 사회나 방치형RPG가 있지 않지만, 모성의 디스토피아의 통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게임을 유토피아가 아닌 모성의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느냐는 점이다. 첫째로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모성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치형RPG에서 모성적 폭력은 배제된 폭력이다. 그것은 게이머를 태아 속에 완전히 가두고, 온정적으로 그를 위해 태아 내의 모든 실질적 대립을 배제한다. 동시에 그것은 게이머의 성장을 촉진하는 부정성과 이질성도 배제한다. 이로 인해 그들을 편안한 자기 망상 속에 끊임없이 팽창시키도록 이끈다. 둘째, 일체화의 폭력, 즉 상술한 배제성으로 인해 게이머는 대립자(가령 방치형RPG의 다양한 몹)에게서 어떤 공고화된 타자성(Andersheit)이나 낯섦(Fremdheit)도 느끼지 않는다. 게임의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통합(Gleichschaltung)되는 과정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성적 폭력은 결국 긍정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폭력은 게이머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배척하지 않고 흡수한다. 과보호하는 방식으로 약화시키고 마비시켜 결국 게이머를 포획한다. 현실과 정반대인 알고리즘의 모성애에 취한 플레이어는 더욱 유순해지고 ‘투지’를 잃게 된다. 한마디로 모성폭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자아의 궁극적 성숙을 회피하고 어머니의 자궁에 사는 형태로 순수한 자기 망상의 삶을 살게 한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현실의 고민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소마(soma)를 만든다. 그러나 이 약물은 단순한 쾌감 논리가 아닌 복잡한 보상 메커니즘에 호소하며, 직접적인 욕구 충족 회로가 아닌 현실의 영역에서 게이머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이는 방치형RPG가 일종의 왜곡된 게임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게이머들이 실재계의 상처받은 경험(예를 들어 현실이 허락했음에도 실현되지 않는 개인의 성공)에 다시 끌려들어가는 단순한 쾌감구조가 아니라, 게임은 세계를 상징하는 심벌로 자신을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 뱃속에서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을 꾸고 있는 플레이어는 여전히 현실의 맥락에 던져진 육체를 갖고 있지만, 현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21세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계를 통한 철저한 사회적 성숙을 새삼 갈망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방치형RPG는 게임 내에서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갓스 커넥션은 레벨링, 랭킹, 전투 목록, 길드 전쟁과 같은 사회적 경쟁의 원리를 모방한 게임 내 메커니즘을 설정한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방치형RPG가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게임 안에서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갓니스 커넥트(Goddess Connect)’는 게임 내에서 등급, 순위, 차트, 길드전 등 사회적 경쟁원리를 모방한 메커니즘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의 모성에 대항할 만큼 충분히 높은 가부장제적 권력을 실제 게임에서 소환하는 게 아니다. ‘오래된 게임 세계’의 상징적 질서에 대한 기념비 역할을 하며, 게이머에게 그들의 실재계 외상을 보다 명확하게 표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효율적으로 자신을 자위할 수 있도록 한다. 우노 츠네히로의 논지로 돌아가 보자.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적 모성(즉, 대문자 어머니)을 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레이어를 방치형RPG로 끌어들이는 인프라가 되며, 나아가 ‘깨어 있는’ 플레이어가 현실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모성적 디스토피아의 논리에서 왜소한 아버지를 소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방치형RPG의 꿈 만들기 기능을 강화하고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4. 게임 자본가의 환상 알고리즘의 모성적 위안 아래에서 플레이어는 방치형RPG를 플레이할 때 항상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다른 게임에서처럼 과로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계획(프로젝트)과 전반적인 컨트롤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영역에 있는 한, “근육과 뼈를 다치지 않고”(즉, 가급적 플레이하지 않으며) 가끔씩 명령을 내려 게임의 자동 수익과 최고의 경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완벽한 자아에 대한 신화를 허구화하고, 그러한 자아에 대한 플레이어의 상상과 경험을 충족시키는 꿈나라와 같은 현실 미러링 게임이다. 유희 자본주의(ludocapitalism)의 비판적 틀을 통해 이러한 게임들을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도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playbour)——이러한 유형의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를 조작하도록 유도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손쉬운 조작과 자동 증식 혜택은 기존 게임과는 다른 ‘게임 관리자’라는 아이덴티티 이미지를 심어줬다. 루도자본주의의 비판적 틀 안에서 이러한 게임을 계속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로 이해할 수 있지만 - 결국 이러한 게임은 플레이어를 운영하도록 초대한다 - 과도한 노력과 수익의 자동 생성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 비해 '게임 매니저'라는 상상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운영의 과도한 용이성과 수익의 자동 증식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비교하여 '블루칼라'가 아닌 '블루칼라' 플레이어인 '게임 매니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이들은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인식하게 됐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게임 관리자는 기업가적 주체의 자기 망상이지만, 지난 10년간 국내 주류 게임에 존재했던 자기 망상(예: 멀티플레이 온라인 전략게임의 ‘경제인’과 슈팅게임의 ‘성인’)과는 다르다. 게이머는 한편으로 ‘기업’, 즉 게이머 사이에 존재하는 잔인한 외부 경쟁에 노출되지 않고, 일체의 외부적인 기업 위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보호받는다. 대신 게이머는 조직의 내부 업무로 편안하게 돌아가 보람 있는 게임 자산 관리(예: 카드 뽑기, 카드 조합, 캐릭터 업그레이드 등)를 즐기고 조직의 모든 것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는 높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38) 다른 한편 보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 관리자의 이미지에서 신체적, 심리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자동화된 게임 로직 덕분에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의 끝없는 자기 착취 39) 를 자동화된 ‘알고리즘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다. 플레이어는 성가신 게임 조작, 전투 전략, 팀워크 및 기타 사소한 퀴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직의 미래를 계획하고 이끌며, 자동으로 배가되는 자원을 받고, ‘게임 자본가’에 속하는 행복한 즐거움을 누릴 준비를 하면 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게임 콘텐츠 외적인 부분까지 보면 게임 관리자는 게임 인터페이스 내의 가상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게임과 현실의 상호관계를 관리한다. 방치형RPG의 자동화된 플레이는 플레이어를 게임 시간에 따른 현실의 혼잡함에서 사실상 해방시켜 게임 작업과 현실 업무를 함께 실현하고, 게임 시간을 현실 시스템에 완전하고 매끄럽게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 히어로즈(Idle Heroes)’의 많은 게이머들은 직장에서 '낚시'를 하는 동안 게임을 켜고 게임 콘텐츠를 빠르게 관리한 후, 자동으로 게임이 계속되게 한다. 방치형RPG의 인기는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의 비합리성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합리성에 대한 은유적인 자기 참조가 된다. 게임 관리자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방치형RPG를 둘러싼 역설, 즉 방치형RPG의 기본 논리가 놀이의 영역에서 "최대한 많이 플레이하라"에서 "플레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라"로 역설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플레이하라"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실제 21세기(즉, 중국에서 그래픽 네트워크 게임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이후) 들어 그것[게이머의 정체성]은 게임 노동자에서 게임 관리자로 변모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자신을 게임 내 자산 소유자로 간주하고, 자동 증식하는 캐릭터, 장비, 소품, 화폐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의 포트폴리오와 리스크를 신중하게 최적화하여 게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 전투에 참여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처럼 '제스처'와 '지시'를 통해 '알고리즘 노동자'가 자신의 명령을 자동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할 필요가 없으며, 대신 기업주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지시'하며 '알고리즘 작업자'가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한다. 이러한 게임 경험은 현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부유층에게만 허락된 '성공한 사람' 40) 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방치형RPG의 매니지먼트는 위선적이다. 관리 경로는 이미 정의되어 있고, 게임 프로그램은 플레이어가 실제로 무수히 많은 전략/전술 아이디어에 두뇌를 동원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게임 알고리즘과 연산에 많은 부담을 주고 게임 디자인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가끔씩 자동 조종으로 실행되는 사업을 점검하고 게임의 정해진 경로를 따르도록 초대될 뿐, 게임의 내부 운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삼국지(三国志) 시리즈’와 같은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과 비교하면 이러한 장르의 게임은 관리 측면에서 위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지’에서는 플레이어가 도시의 내정을 관리해야 하며,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잘못된 관리로 인해 컴퓨터 상대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방치형RPG에선 그런 걱정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 알고리즘 모성은 게임의 모든 상대를 다운그레이드하여 플레이어가 잘못된 관리의 결과를 겪을 필요가 없고, 자산 관리의 자동 증식만 즐길 수 있다. 즉, 방치형RPG의 관리자는 매니지먼트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수반되는 '관리자의 상상력'은 자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려는 플레이어의 실제 욕망을 효과적으로 채워준다. 아즈마 히로키가 분석한 미연시 게임과 같은 정체성에 대한 상상은 현실의 압도적인 무력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며 41) , 이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는 간절히 갈망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부족한 무언가임이 분명하다. 상술한 관리자적 상상의 위선은 또한 "사고"의 정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일반적으로 산술적인 텍스트 42) 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고하는 것은 “복잡한 사고의 탐구 활동”이 아닌 플레이어가 알고리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단순한 ‘계산’으로 축소된다. 가령 게임 내에서 가장 높은 전투력을 달성하기 위해 캐릭터를 조합하는 방법을 계산한다던지 말이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자동화 로직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관리의 만족'이라는 원칙에 따라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방치형RPG의 본질적 매력은 플레이어가 과도한 게임 플레이 노동을 피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거의 제로 비용으로 높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성의 폭력이 다시 폭력화될 가능성을 열어준다. 게임 개발자와 운영자는 수익을 내기 위해 플레이어를 게임에서 '이탈'시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방치형RPG가 제공하는 긍정적 경험에 계속 몰입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잠시 게임을 떠나 알고리즘 모성의 다음 자동 위로를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 위로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위로의 간격은 절대적으로 연장된다. 이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형태의 폭력이며, 강압적으로 연속성을 중단하는 것에 의존한다. 알고리즘 모성의 편안함에 빠져 있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 방해받지 않고 즐기는 긍정적인 경험에서 갑자기 철수하는 것은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비부정적 부정성은 게임 전반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보다 더 고통스럽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결핍감이 아니라, '얻었지만 또 잃었다'는 상실감을 지향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트라우마 위에 소금을 한 움큼 더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5. 결론 한마디로 방치형RPG게임은 한병철이 말한 ‘권태사회’ 43) 의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권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플레이어를 비관적인 자기착취 사회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그들은 게임에서 자신을 다른 플레이어와 적극적으로 경쟁하는 순수하게 효율화된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인기를 구가하는 MMO슈팅게임 게이머들과 달리, 이(방치형RPG) 게이머들은 ‘공포’가 아닌 편안한 ‘퇴화’의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참여(어쩌면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하고, 게임에서의 다양한 경쟁 메커니즘과 그 이면의 사회적 상상력을 즐긴다(jouissance). 44) 다른 한편에서 이 ‘기계적 육체로서의’ 게이머는 정신적인 소모로 인한 자아 붕괴를 피하기 위해 방치형RPG 같은 자동/수동형 플레이 방식으로 알고리즘 모성에게 자신을 양보하는 걸 선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게이머는 자신을 관리자로 상상하고 새로운 자아실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아실천이 직면한 것은 매우 판이하면서도 현실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긍정적 경험을 게이머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며, 모성적 광휘를 발하는 절대권력(즉, 모성적 디스토피아)이다. 이 모성적 절대권력은 한편으론 게이머의 실재적 상처를 치유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에게 도망칠 수 없는 모성 폭력을 가한다. 나아가 게임 자본주의와 공조해 게이머를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의 위협에 노출시킨다. 이를 통해 방치형RPG는 겉으론 무한히 부드러운 수치 선경이 되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비디오 게임 세대 45) 가 은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릉도원이 아니며며, 여전히 초극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자동으로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라는 게임의 시대에 우리는 진정으로 초월적인 게임 장르를 모색해야 한다. 1) 본문은 중국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와 상하이 철학사회과학기금 청년 프로젝트인 '융미디어 맥락에서 e스포츠 이미지 구축 및 가치 혁신 연구'의 결과물로, <문예연구 文艺研究>지 2023년 10호에 발표됐다. 2) 영어권에서는 클리커 게임(clicker games) 또는 성장 게임(incremental games)으로 불린다. 3) ‘推图(퉤이투)’에서 ‘图(투)’는 게임 속 ‘맵’을 의미하고, ‘퉤이’는 게임의 주요한 줄거리를 ‘클리어’하는 걸 뜻한다. 즉 ‘맵밀기’는 플레이어가 줄거리를 클리어하기 위해 두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4) 여기서 '스킨 교체'는 게임의 핵심 플레이방식을 바꾸지 않고 시청각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게임을 새로운 게임으로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5) 오츠카 에이지, 『物語消費論:ビックリマンの神話学(이야기 소비론)』, 新曜社, 1989년, 10~24페이지. 오츠카 에이지는 서브컬처의 설정과 세계관을 거대한 이야기(大きな物語)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大きな物語'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중국어로의 번역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저우즈창(周志强)은 이 개념을 서양의 'big story' 이론을 차용하기보다는 'grand narrative'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저우즈창, 『游戏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게임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중 이질성의 순간")』, 南京社会科学, 3호, 2023년 참조). 이 논문에서는 저우즈창의 관점을 채택했다. 6) 일본 서브컬처 연구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오츠카 에이지의 '거대한 이야기'를 '거대한 비이야기(大きな非物語)'로 발전시켰고, 우노 츠네히로는 후자를 '거대 게임(大游戏)'으로 확장시켰다. '거대한 비이야기'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 뒤에 존재하는 스토리텔링이 없는 거대한 정보 모음(즉, '데이터베이스')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 “動動化するポストモダン: 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 Shogun, 2001, 62쪽을 참조하라. “반면 '거대 게임'은 거대한 비이야기의 정적 구조 속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상호작용하는 동적 구조를 강조한다” (우노 츠네히로, 『마터니티のディストピアⅠContact』, 하야카와쇼텐, 2019년, 112쪽). 7)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의 디스토피아: 접촉편)』,83페이지 8) 저우쓰위, 리용(李勇), 《“让游戏自己玩”:방치형 게임与超级自我(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라: 방치형 게임과 초자아)》,《南京社会科学(난징사회과학)》, 2023년, 제3기. 9) 中島誠一『触覚メディア——TV ゲームに学べ!次世代メディア成功の鍵はここにあった(촉각 미디어--TV 게임에 배우라! 차세대 미디어 성공의 열쇠는 여기에 있었다)』(株式会社インプレス주식회사 임프레스,1999年)145페이지. 10) ‘입력 결핍’이란 게임 플레이 행위가 게임 화면 외부에서 게임 입력 장치를 조작하는 물리적 행위에 불과하고 그 상징적 의미가 빈곤한 것을 말한다. ‘과잉 산출’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게임 화면 내에서 상징적 의미의 구체적 확장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는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여 삼국지 게임 속 조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조조를 통해 중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그/그녀는 단순히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고 있을 뿐이다. 마츠모토 켄타로 『ゲームのなームのなかで、人はいかにして「曹操」になるのか: 「體験の創出装置」としてのコンピュータゲーム」 (마츠모토 켄타로, 왕이란, 편역, 『일중문화토라 ナショナルコミュニケション: コンテンツ・メディア・歴歴歴歴部・社会』ナナニーシヤ 출판, 2021) 107페이지를 참조하라. 11) 저우즈창, 상동 12)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처린(车琳) 옮김, 贵州人民出版社(구이저우인민출판사), 2020년판, 32쪽. 13) [역주] 원문의 ‘커진(氪金)’은 직역하면 ‘크림톤'과 ‘돈'을 뜻하지만, 중국 온라인 게임에서는 현질을 가리킨다. 14) [역주] 원문의 ‘对立面’(대립면/대립자)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모순의 통일(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을 가리킨다. 15) Jesper Juul, 《失败的艺术:探索电子游戏中的挫败感(실패의 기술: 비디오 게임에서의 좌절 탐구)》,杨子杵、杨建明 옮김, 베이징이공대학출판사, 2019년판, 130페이지. 16 ) [역주] 고사성어 용담호혈은 ‘지세가 매우 험준한 곳’을 뜻한다. 17 ) [역주] 원문의 ‘쾌속괘기(快速挂机)’는 ‘AFK(away from keyboard)’를 지칭한다. 18 ) 姜宇辉(장위후이), 《数字仙境或冷酷尽头:重思电子游戏的时间性(디지털 원더랜드 또는 콜드 엔드: 비디오 게임의 시간성에 대한 재고)》,《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19 ) 플레이어가 조작하지 않아도 프로그램 스크립트가 자동으로 실행되는 게임을 가리킨다. 20 ) Janet H. Murray(자넷 H. 머레이,), Hamlet on the Holodeck: The Future of Narrative in Cyberspace(햄릿: 사이버 공간에서 내러티브의 미래),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Singapore: The Free Press, 1997, p. 143. 21 ) 요시다 히로시, 《游戏中的死亡意味着什么?——再访“游戏现实主义”问题(게임에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게임 리얼리즘' 문제 재조명")》,《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선집)》,邓剑编译(덩지안 편역),上海书店出版社(상하이서점출판사), 2020년판, 237~273쪽. 22 ) Ian Bogost, Unit Operations: An Approach to Videogame Criticism,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6, pp. 3-4. 23 ) 보스는 반드시 특정 캐릭터일 필요는 없으며, 캐릭터가 아닌 상태로 설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게임 패스 목표를 설정하는 시뮬레이션 건설 게임도 게임 보스로 해석할 수 있다. 24 ) '타자의 계층'이라는 개념은 오사와 마사유키가 '초월적 타자'라고 부르는 것을 언급하며 제안한 개념이다. 오사와 마사유키, "오타쿠 이론: 광신주의, 타자성, 정체성", 덩 지안 편저,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 비평 에세이 선별, 상하이 서점 출판사, 2020년판, 79-116쪽 참조. 오사와는 게임 오타쿠를 포함한 오타쿠의 주체성을 논할 때 지젝의 논지를 인용하여 "개인으로서의 신체를 자기 정체성 있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은 타자"라는 것이 개인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자와는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를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타자와는 달리 우연적인 '내적 타자'와 상징의 영역에 있는 거대한 타자와는 달리 필연적인 '초월적 타자'로 구분한다.". 인간의 자기 동일화 과정에서 내적 타자는 모방 가능한 이미지로 기능하고, 초월적 타자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추상적 규범으로 등장하며(예: 푸코의 감옥 속 보이지 않는 감시자에 대한 전경, 오사와 마사유키의 『[増補補][増补], 『허구 시대의 열매』(치쿠마쇼보, 2009, 223-224) 참조) 서로 전제하고 있다. 1-3쪽), 상호 배타적인 전제다. 초기 비디오 게임의 버그가 타자 대리현상의 증상이라는 오사와의 관찰에 착안하여, 최고 권력은 게임 보스를 대리인, 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 타자'(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제3자')로 등장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임에서 최고의 권력은 보스로 대표되며, 즉 게임의 전체 영역을 통제하는 '초월적 타자'로서(즉, '제3자의 위계'로 기능하는), 플레이어는 보스를 죽임으로써만 게임의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25 ) 요시다 히로시, 「規則と自由の弁証法としてのゲーム——〈ルールの牢獄〉でいかに自由が可能か?(규칙과 자유의 변증법으로서의 게임--〈규칙의 감옥〉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立命館言語文化研究(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 26권 제26호, 19-27쪽. 26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 제1권 - 인식의 의지』, 셰비핑 옮김, 상하이인민출판사, 2016년판, 113쪽; 아감벤, 『호모사케르: 벌거벗은 삶』, 중앙편집번역출판사, 2016년판, 126쪽. 27 ) 게임 디자인 초기에는 유명한 게임인 제비우스나 후크처럼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 반복 게임이 많았다. 이러한 게임에서도 각 레벨이 끝날 무렵에는 흔히 '미니 보스'로 알려진 캐릭터가 해당 레벨의 '아버지'로 등장하곤 했다. 28 ) 서클 수축은 탈출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도망치는 플레이어가 결국 정면으로 맞붙게 될 때까지 게임의 위험 구역이 안전 구역을 계속 집어삼키는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29 )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0, pp. 1-64. 30 ) 한병철, 《권태사회》, 吴琼(우총)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 1~14페이지. 31 )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후쿠신 키드(うる星やつら)>에 등장하는 모성 공간을 가리킨다. 우노 츠네히로, "ゼロ年代の想像力 야근 시대의 상상력"(하야카와 쇼텐, 2011), 242-252쪽 참조. 32 ) 우노 츠네히로, 『若い読者のためのサブカルチャー論講義録(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아사히신문출판사, 2018년, 91쪽. 일본어 ‘物语’는 ‘故事(이야기)’라는 뜻이다. 33 ) Johan H.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London, Bost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80, p. 10. 34 ) '결단주의'는 우노 츠네히로가 2000년대 초반 일본 서브컬처 작품의 문학적 상상력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제안한 개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을 유지할 수 없으며,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즉, 히가시 히로키가 말하는 '빅 스토리'를 공유할 충분한 압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한다는 전제에서 포스트모던적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즉, 히가시 히로키가 큰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부족하다), 여전히 자신이 믿는 가치를 선택한다(즉,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작은 이야기를 거부하여 미야다이 신지가 '섬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같은 작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형성한다). 한 마디로 결정론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가치 상대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결과로, 결정의 내용과 이유보다 결정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노 츠네히로, "초과근무 시대의 상상력", 185쪽 참조. 35 ) 우노 츠네히로, 『遅いインターネット(느린 인터넷)』, 幻冬舎, 2023年, 178페이지. 36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5페이지 37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18페이지 38 ) 그렇다고 해서 기업/플레이어 간 경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페이트에서는 랭크전, 길드전 등 경쟁 메커니즘이 여전히 소셜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게임의 자동화된 설계로 인해 경쟁의 실패가 외부화되어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에 존재하는 자동화된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임에서의 실패로 인해 심리적으로 파산하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정서적 경험도 발생하지 않는다. 요컨대, 플레이어는 게임/비즈니스 경쟁 과정에서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놓인다. 39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宋娀(송송)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판, 23페이지. 40 ) 王晓明(왕샤오밍), 《半张脸的神话 반쪽 얼굴의 신화》,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3年版,第27—33页。 41 ) 아즈마 히로키, 《萌的本事,止于无能性——以〈AIR〉为中心 모에의 역량, 무능에서 멈추다 - AIR를 중심으로》,덩지엔 편역, 《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 문선》,214페이지. 42 ) 산술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달리 알고리즘에 의해 내러티브와 경험이 주도되는 텍스트를 말하며, 배경의 숫자 연산이 전경의 게임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것이 기본적인 내러티브 기법이다. 43 ) 한병철, <권태사회>, 53~61페이지 44 ) Sean Homer, Jacques Laca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p. 89. 45 ) 蓝江(란장), 《宁芙化身体与异托邦:电子游戏世代的存在哲学(몸과 헤테로토피아의 님피: 비디오 게임 세대의 실존 철학)》,《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학자) 덩 젠 , 邓剑 쑤저우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부교수. 디지털게임 문화연구를 주 관심사로 다루며, 〈澎湃新闻〉에서 게임에 관한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다.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 Back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27 GG Vol. 25. 12. 10. 라이프 시뮬레이션과 '승리 조건의 부재'의 나비효과 <심즈>의 아버지이자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개척자 윌 라이트는 2001년 Game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긴다. 윌 라이트는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활성화하는 것이 자신이 게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라고 밝히며,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은 단순히 게임 디자인의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라이프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1. 윌 라이트(2010) (출처: 위키피디아)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와 시뮬레이션의 의사소통은 플레이어가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작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가 플레이 디자인을 완성하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에게 조작할 수 있는 플레이 환경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시뮬레이션에 대한 플레이어의 이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플레이 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특정한 방향으로 플레이어의 이해를 유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자체가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적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의 목표설정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시뮬레이션 게임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를 모델링하여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환경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플레이어는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미시계의 규칙들을 파악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가며 시뮬레이션을 탐구해 나간다. 특히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게임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를 우연히 확인해가며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서사를 획득해 간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게임들을 본질적으로 소프트웨어 장난감에 가깝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게임이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특정한 가능성보다는 각 플레이어가 가능한 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큰 해법 공간을 제공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만약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에 훨씬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난감에는 정해진 목표도 없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는 주체 스스로가 놀이의 규칙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윌 라이트의 이런 인터렉티브 디자인 철학은 ‘심시리즈’를 비롯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목적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종속된 플레이를 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우연히 시뮬레이션을 만지다보니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윌 라이트가 지적하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의 장난감적인 특성은, 게임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상기하게 만든다. 게임은 오랫동안 로저 이버트를 포함한 많은 평론가와 연구자에게 존재론적으로 예술의 특성을 가진 매체로는 인정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들이 제시하는 평가의 근거는 대게 칸트가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 그리고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개념에 근거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목적성’의 표상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특정한 목적의 귀속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불렀다. 칸트에게 미적 경험은 인식적 판단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개념적 파악이나 실용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관조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칸트는 자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어떤 질서인지는 모른다는 것이고, 종속된 것들은 딱히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내적인 질서 창출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법칙만을 추구하는 의지를 욕망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이를 ‘선의지’라고 부르며,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라고 보았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어떤 자유로운 유희를 허용받으며, 하나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지성의 합법칙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칸트의 개념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와 같은 것들이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 것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아주 우연히 도달하게 되는 경지 같은 것이 된다. 물론, 칸트가 이렇게까지 ‘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데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주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타우마제인(thaumazein)’이라고 부르는, 인간에게 철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개념이 기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이 경이로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무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타우마제인은, 설명하자면 “매번 보는 노을이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나한테는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현상” 정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칸트에게 ‘선의지’란 무언가를 추구하는 힘이나 동력 같은 것이라기보단, 프로그래밍 코드를 돌리다가 리팩토링 안 한 스파게티 코드가 문득문득 시스템과 맞아떨어지며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경이 체험 같은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을 제공한다면, 게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는 힘을 잃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예술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단순히 규칙의 집합이나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스템과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게임 연구자들 역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게임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만들만한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 가능성을 분석해왔다. 윌 라이트 자신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뮬레이션을 ‘역설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플레이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가 중간 모델이며,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MDA에서 DPE로, 시스템 산출물에서 주관적 경험으로 오늘날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연구자는 아마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의 대표작으로 종종 소개되는 (Thatgamecompany, 2012)의 개발자이기도 한 로빈 후니케(Robin Hunicke)일 것이다. 후니케는 2004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기 위한 MDA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MDA 프레임워크란 시뮬레이션 게임의 플레이를 디자인하는 개발자를 위한 프레임워크로, 게임을 개발할 때 매커니즘, 상호작용, 미학 혹은 경험 순서로 플레이를 설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1. MDA 도식과 요소별 개념] - 출처: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Robin Hunicke, 2004) - 동시에 후니케는 MDA 프레임워크가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을 구조화해 분석할 수 있으며, 플레이 경험을 시스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플레이 동기와 시스템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발자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후니케는 개발자는 MDA의 흐름으로 '설계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에 접근하면 되고, 플레이어는 ADM의 흐름으로 '경험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니케의 MDA 프레임워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가진 플레이 특성을 경험 지향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은 분명하나, 미학 혹은 경험이 매커니즘과 상호작용에 종속된 결과로만 이해하게 만드는 한계 역시 품고 있다. MDA 프레임워크가 플레이에 대해 계층적으로 접근한 것은 게임플레이 디자인에 있어 명확함을 담보해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게임 디자인의 유기성을 저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림2. DPE 도식] - 출처: 「The Design, Play, and Experience Framework」(Brian Winn, 2008) - (DPE는 본래 게이미피케이션 분석을 위한 프레임워크로, 베네디스는 DPE가 MDA보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 분석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제네시스 베네디스(Genesis Benedith)는 MDA 프레임워크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며, MDA 프레임워크가 UX전략이나 연출과 같은 규칙으로 환원 불가능한 게임 요소를 분석에서 배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베네디스는 MDA가 <심즈>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DLC 등에 의한 게임의 기술 변화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플레이어가 창출한 서사 아크 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궁극적으로 MDA가 게임 개발에 있어 매커니즘 편향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베네디스는 이러한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하는데, 이는 MDA가 집중한 내재적 분석을 외재적 요소까지 확장시킨 것에 가깝다. 베네디스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분석하기 위해 게임 요소를 Design, Play, Experience로 확장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한다. DPE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맥락을 중심으로 게임을 분석하여, 주관적 경험에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레임워크를 지나치게 넓게 확장하고, MDA가 왜 오늘날 시뮬레이션 게임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간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MDA에서 DPE 프레임워크로 넘어오며 주관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분석이 왜 하필 플레이어의 주관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조이>, 콘텐츠 진공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즈음에서 크래프톤이 야심차게 ‘앞서 해보기’로 공개했던 <인조이(InZOI)>(2025~)를 떠올려보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인조이>는 플레이어에게 까다로운 플레이 환경을 요구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버그가 많고, 콘텐츠는 진공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더구나 엔비디아와 협력을 통해 게임 내에 AI NPC ‘스마트조이’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현 상태만 두고 보면 <인조이>의 AI 환경 수준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아직까지는’ CDPR의 <사이버펑크 2077>와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는 분명히 <인조이>의 단점이며, 우발적 사건들이 난입할 가능성을 생각해가며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가장 중요한 소구점 중 하나인 ‘쾌적한 플레이 환경’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으로 인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최적화 문제 △잦은 크래시 △예측 불가능한 버그로 인해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할 게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점만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임 커뮤니티가 비판하고 있는 ‘콘텐츠 진공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상태를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콘텐츠 진공상태’ 만큼은 (최소한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인조이>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조이>가 ‘앞서 해보기’를 런칭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 요인이자 존재 가치라고 생각한다.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상태는 <심즈>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세계’보다는 ‘일상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현대세계와 일상성(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에서 일상을 일종의 패턴이자 리듬이라고 지적하며, 반복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을 ‘환상과 진실, 힘과 무력함이 교차하는 지점,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과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만나는 곳’이라고 변증법적으로 정의하며, 일상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리듬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형되는 갈등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구간을 동일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이 패턴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점을 통해 구분할 수는 없으나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일성’을 ‘차이 혹은 변화 없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 혹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와 변화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그 차이와 변화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조이>에서 ‘콘텐츠 진공’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향을 지시하지 않음 △플레이어가 게임 빌드나 시퀀스 내의 사건에 개입하기 어려움(혹은 없음)에 가까워 보인다. <인조이>의 개발일지를 보아도 플레이어블한 개발보다는 생성형 인터랙티브 무비의 빌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가령, 가장 최근에 쓰여진 11월 26일 패치노트에는 “ 무법자 기질 조이가 자율 행동으로 '훔치기' 상호작용을 진행하지 않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고, 11월 19일 패치노트에는 “ 식사 후 2시간이 지난 음식 그릇을 일괄 정리할 수 있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으며, 대부분의 패치에 AI의 행동을 감상하는 것으로 플레이 요소가 종결되는 빌드들이 개선사항으로 나온다. 이는 플레이어의 조작 경험을 ‘클릭 후 감상’ 정도의 극단적 단순함으로 느끼게 만들며, 폐쇄적인 플레이 환경 아래 놓여있다는 감각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조이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조이들은 자율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피로를 느끼며, 사회적 욕구를 느낀다.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조이들에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나 <심즈>와 달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지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심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플레이어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심즈>와는 분명 다른 특성이다. <심즈>에서는 심이 불을 내면 플레이어가 개입해 불을 끄거나 소방관을 불러야 한다. 심이 직장을 잃으면 플레이어가 새로운 직업을 찾아주어야 하고, 관계가 악화되면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채무 갚기’라는 커다란 미션 아래 다양한 할 거리를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동물의 숲>과도 다르며, 점수와 같은 수직적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타듀벨리>와도 다르게 보인다. <동물의 숲>은 채무 상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공한다. <스타듀벨리> 역시 콘텐츠의 볼륨이 클지언정 농장 경영이라는 명확한 프레임워크 안에서 수익, 작물 품질, 마을 주민과의 관계 등 측정 가능한 수직적 성과 지표들을 제공한다. <인조이>에도 카르마 시스템이 있지만, 카르마 시스템이 수직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람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조작 감각의 부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인조이>의 게임 특성은,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조작 압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PvE가 아닌 PiE(Player in Environment)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PvE가 플레이어가 환경과 대결하는 구조라면, PiE는 플레이어가 환경 속에 존재하며 환경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PiE와 메타적 경험, 혹은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 이때 우리는 Environment가 게임이 가진 미시계의 전체적인 세팅과 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으며, 글의 서두에서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PiE에서 플레이어는 조작을 통해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파악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조작이 사실상 제한된 게임 환경을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게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인조이> 디스코드 같은 공간이 그러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인조이> 플레이어는 결국 게임 밖을 나와 디스코드 와 같은 공간을 통해 인조이의 단순한 조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인조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이 펼쳐지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플레이어가 직접 <인조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인조이>와 <인조이> 밖을 오고가며 내가 <인조이>를 플레이하는 이유와 정보를 비교해가며 공략 아닌 공략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과정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 가까우며, 매우 불편하고도 비효율적인 플레이 경로를 가졌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긴 경로와 과정은 <인조이>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와 다른 플레이어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조이>와 그 개발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나의 플레이 목표에 개입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개입은 <인조이>의 플레이가 플레이어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는 상태로 귀결된다. 동시에 <인조이>를 플레이 과정을 늘어뜨려 <인조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주관을 통해서만 <인조이>를 파악하게 만든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플레이어가 시뮬레이션을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고 표현했다. 플레이어는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시뮬레이션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1]. 이는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과 컴퓨터의 모델이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이며, <인조이>는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욱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 순간들이 우연히 상상했던 서사와 맞아떨어질 때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체험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게임에서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이란 바로 그 감각이 아닐까? 이는 <인조이>가 게임을 통해 AI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입력한 명령이 시스템의 자율적 질서와 우연히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이상한 순간들이 있다. <인조이>가 제공하는 ‘콘텐츠 진공’ 상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게임이 명확한 목표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매력적인 경험은 아닐 수 있다. <인조이>의 현재 상태는 분명히 미완성이며, 기술적 한계와 버그로 인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플레이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인조이>가 보여주는 실험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시스템의 자율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예측 불가능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창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임을 예술로 보는 가능성이란, 그 플레이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아름다움의 섬광에 있다. 그리고 <인조이>는,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섬광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PiE, 즉 환경 속의 플레이어로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경험의 지평은 아닐까. 참고문헌 ○ Celia Pearce (2001). 「Sims, BattleBots, Cellular Automata God and Go: A Conversation with Will Wright」. Game Studies. - https://www.gamestudies.org/0102/pearce/ ○ Hunicke, R., LeBlanc, M., & Zubek, R. (2004).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AAAI Workshop on Challenges in Game AI. ○ Benedith, G. (2024). 「Decoding The Sims: Analysis of Gamification Frameworks, User Experience, and Game Design Evolution」. Arizona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디지털게임 비평의 활성화와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매년 게임비평공모전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2024년의 공모전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 Back 19 GG Vol. 24. 7. 22.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논문세미나] Breaking Barriers –The Emergence of a Video Game Culture and Industry in the Arab World
세계 각국을 먼나라 이웃나라로 나눌 때,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먼 나라다. 아랍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아랍의 게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막상 아랍의 게임에 대하여 찾고자 결심한다면 우리는 의외로 많은 정보들과 마주할 수 있다. 급성장하는 아랍의 게임시장이 가진 매력적인 자본과 가능성에 전 세계의 게임사들이 눈독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도 포함이다. < Back 24 GG Vol. 25.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injung Son Studying modern literature and culture at the Graduate School of Sungkyunkwan University. Has always been with games as much as with writing. Plays all sorts of games—every kind there is.
- 온라인으로 코옵할 수 있는가? 그럼 깍두기는?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벌어지던 놀이에는 깍두기라는 게 있었음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인생 경력이 그다지 길지 않은 어린이들의 사회에서는 한 두 살의 차이가 체력과 경험, 지혜 면에서 막대한 차이를 만들어냈고, 경우에 따라선 같은 놀이판에 끼기 어려울 정도의 격차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네 놀이터의 멤버라는 건 늘 정해진 숫자였고, 원활한 놀이를 위해선 때로는 룰을 비틀어가며 경험이 부족한 친구에게 어드밴티지를 줘야 했다. < Back 온라인으로 코옵할 수 있는가? 그럼 깍두기는? 28 GG Vol. 26. 2. 10. 깍두기라는 룰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벌어지던 놀이에는 깍두기라는 게 있었음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인생 경력이 그다지 길지 않은 어린이들의 사회에서는 한 두 살의 차이가 체력과 경험, 지혜 면에서 막대한 차이를 만들어냈고, 경우에 따라선 같은 놀이판에 끼기 어려울 정도의 격차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네 놀이터의 멤버라는 건 늘 정해진 숫자였고, 원활한 놀이를 위해선 때로는 룰을 비틀어가며 경험이 부족한 친구에게 어드밴티지를 줘야 했다. * 어린이들 사이에서 한 두살 차이는 어마어마한 피지컬 차이다. 보통은 경험과 피지컬이 부족한 막내들이 깍두기로 들어오곤 했다. 비단 놀이터에서만이 아니라 디지털게임 이전에 존재했던 많은 놀이에서 우리는 깍두기 개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 천년의 경력과 팬덤을 보유한 바둑에는 하수에게 몇 점 깔고 두도록 하는 접바둑이 있었고, 고수가 기물 하나를 떼고 두는 오드 체스 같은 개념들도 로컬에선 보편적이었다. 중년들의 골프에도 멀리건(실패 타수를 빼주는 방식), 컨시드(홀컵에 공이 붙으면 넣은 것으로 인정)와 같은 깍두기 룰이 일반적이라는 점은 적당히 수준이 맞는 게임 파트너를 현실에서 만나고 엮이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하는 놀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놀이는 최소한의 파트너를 요구한다. 소꿉놀이, 병정놀이부터 바둑, 장기, 체스와 카드게임, 놀이터의 오징어게임까지 놀이는 대체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다. 놀이의 전제에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은 <테니스 포 투>나 <스페이스 워>, <퐁>같은 초창기 비디오게임들 또한 2인용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말은 놀이의 대전제이기도 했다. 초기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게임의 발전은 그래서 어느 정도는 같이 게임할 상대라는 대전제를 기계로 대체하는 데 집중되기도 했다. 2인용의 <퐁>은 공 튀기기의 상대를 사람에서 쌓인 블록으로 바꾸며 1인용인 <브레이크아웃>이 되었고, 기계 한 대에 동전 하나로 두 사람이 놀던 게임은 1대에 1명, 1코인으로 변화하며 수익률과 회전률 개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퐁>과 같은 2인용 게임은 상호 경쟁의 구조이지만 90년대에 등장하는 경쟁형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위시한 대전격투 게임과 비교한다면 이는 코옵에 가깝다. 둘의 차이는 두 플레이어가 서로 대결하느냐 아니냐에 있기보다는 투입한 코인의 가치를 두고 현실에서도 승패의 결과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퐁>이 마치 테니스 코트를 대여료를 내고 빌려 함께 노는 것과 같다면,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좀더 본격적으로 코인을 걸고 벌이는 투기장에 가깝다. 분명 놀이를 위해 대전격투 게임의 두 참여자는 상호 조응하지만, 우리는 이를 코옵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락실의 코옵은 두 참여자가 같이 코인을 넣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플레이하며 실패시 둘 다 게임오버가 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플레이였다. 따라서 코옵은 이뤄지지 않는다. 오락실에서 일어나는 실질적 코옵과 경쟁형 멀티플레이 모두 딱히 깍두기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도 지적했듯이, 플레잉 파트너가 될 사람을 모으고 넓히는 기능으로 깍두기 룰이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경쟁이 아니라 함께 힘을 합치는 코옵이라면 깍두기가 아니라 그냥 패널티 플레이가 되고, 동전의 가치가 걸린 격투게임에서 깍두기 따위는 누가 허용하겠는가? (물론 친구라면 짠발을 안쓴다 정도의 동네 룰 안에 들어가긴 할 것이다.) 놀이 파트너를 모으는 일의 고단함 온라인게임 시대의 등장은 놀이의 오랜 고민 중 하나인 함께 할 파트너 문제를 대단히 놀라운 방식으로 해결해버렸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전 상대를 찾아주는 기본적인 매칭 시스템은 누적된 플레이어의 전적을 점수화해 적당한 긴장감이 감도는 비슷한 실력의 대결로 만들어내는 형식으로 진화했다. 함께 5인용 던전을 돌아야 하는 MMORPG는 초기에는 사람 구하느라 광장에서 하루종일 외치기만 날리며 점프만 뛰는 구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매칭 시스템이 도입되며 손쉽게 원하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 파티찾기는 전용 채팅 채널에 올라오는 구인구직 글을 텍스트 필터링하는 애드온의 방식으로 시작했다. 이미지출처: 와우인벤 애드온게시판 이는 특히 <리그 오브 레전드>나 <오버워치>같이 게임의 기본적인 규칙이 고정된 팀원 수를 요구하는 게임에 이르면 매우 중요해진다. PC방 상황을 중심으로 그 앞 세대 게임일 <스타크래프트>의 플레이 양상과 비교해 보자. 세 명의 친구가 모여 PC방에서 놀기로 한다. <스타크래프트>시대였다면 이 셋의 선택은 대부분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배틀넷의 모르는 세 사람과 대결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3:3 헌터 초보만요”가 이들이 만드는 방제였고, 셋은 오프라인의 지인이 협력해 익명의 팀 하나에 맞서는 플레이를 밤새 즐겼을 것이다. * <스타크래프트> 멀티플레이에서 고수는 설 자리가 없다. 모든 방은 초보만 찾는다. 같은 인원수가 <오버워치>와 <리그오브레전드>에 이르면 이 코옵은 조금 이상해진다. 다섯 명이 한 팀이어야 하는 것이 대전제인 <리그오브레전드>에서 이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세 사람이 대전에 뛰어들고, 이름도 실력도 모를 온라인의 두 사람을 팀원으로 받아들인다. 같은 세 명이지만, 게임의 대전제가 바뀌면서 이들의 놀이는 코옵에서 코옵이 아닌, 혹은 절반만 코옵인 어떤 상황으로 넘어간다. 같이 앉은 세 사람은 계속 목소리로 “정글 어디갔냐!”를 외치겠지만, 그 목소리는 같은 팀의 나머지 두 명에겐 닿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인원 수가 달라지면 상황은 좀더 극적으로 변한다. 네 명이라면 같은 두 상황에서 이들은 <스타크래프트>를 2:2로 구성할 것이다. 이 팀 매칭에는 꽤 많은 정보들이 들어간다. 참가한 네 사람의 게임실력, 경험, 친밀도가 팀 구성에서 검토된다. 하지만 <리그오브레전드>에서는 세 사람과 동일하게 그저 5인 팟의 한 자리를 용병으로 받는 구조가 된다. 물론 지인팟이 네 명이 된다는 점에서 패배의 책임을 좀더 용병에게 몰기 쉽다는 안정감은 발생할 것이다. 다섯 명의 상황은 <스타크래프트>에서는 다시금 깍두기 룰을 부활시키도록 만든다. 2:3의 팀 매칭을 위해서는 고수 2명과 하수 3명을 나누어 불균형한 팀을 짜야 하기 때문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완벽한 5인팟을 짜는 기쁨을 누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깍두기 룰의 원인이었던 파트너 찾기가 온라인에서 손쉬워지면서 깍두기는 없어져야 했겠지만, 우리는 5인팟에서 여전히 깍두기 룰이 살아남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5인팟에서 파트너는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 5인 플레이는 정확히는 온라인 게임이 아니다. 네트워크를 사용해 여러 대의 PC를 연결했지만 우리는 이를 온라인게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글 안에서 쓰는 온라인게임의 의미는 정확히 ‘파트너를 온라인에서 찾는 게임’이고,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는 온라인에서 익명의 게임 파트너를 찾는 과정을 가리킨다. MMORPG의 던전 찾기라면 조금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길드 같은 공간에서 5인팟을 찾는 것은 위의 구분으로라면 오프라인 파트너 매칭에 가깝고, 실제로 깍두기 룰과 유사한 방식, 이를테면 고렙 유저의 저렙 버스 태워주기가 횡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10인, 25인을 넘어 40인에 이르는 대규모 공격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대형 콘텐츠를 플레이하려면 지인팟만으로 팀을 꾸리기 불가능하며, 이때부터는 구인공고를 날리고 면접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다만 그렇게 구한 공대원은 정규 공격대일 경우 정기 출석과 채널 활동을 통해 서로 친목을 다지며 지인 혹은 준지인이 되며 다시금 오프라인 매칭에 가까운 인원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지 않은 공격대원의 사례다. 이른바 ‘막공’, 딱히 아는 네트워크가 아니지만 힐러가 모자라(힐러는 항상 모자라니까) 자리를 채워야 할 사람을 모으는 경우가 있고, 아예 이것이 정규화된 던전 찾기, 공격대 찾기와 같은 본격적인 온라인 익명매칭 시스템의 경우가 있다. 앞서 이야기한 지인, 혹은 준 지인의 사례와 이 둘은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데, 그 결정적 차이는 이 관계가 매우 인스턴트하다는 점에 있다. 공격대 찾기나 막공 지원으로 들어온 플레이어와도 죽이 잘 맞으면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게 만난 관계는 일회적이다. 우리는 지난주 파티에서 함께 한 플레이어를 ‘전우’로 느낄 수 있는가?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관계는 일회적이고 찰나적이며, 두 번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렇기에 MMORPG 코옵의 온라인 매칭은 <리그오브레전드>의 그 팀 매칭과 인스턴트하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온라인게임의 등장이 함께 할 파트너를 손쉽게 찾아준다는 변화를 가져왔다고 앞서 설명한 말에 이제 의미 하나를 덧붙일 수 있겠다. 그 새로 찾은 파트너가 온라인이 아닌 매칭과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인스턴트함이다.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놀이상대는 언젠가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물론 그렇기에 원수가 되는 일도 흔하다), 온라인 매칭은 그 목적이 코옵이건 아니건간에 대체로 일회적이며, 다분히 ‘게임을 같이 한다는’ 목적성만에 오롯이 부합하는 관계에 집중된 인스턴트 파트너 관계다. 합리화되는 놀이 속의 코옵 온라인게임의 인스턴트한 파트너 관계로 이뤄지는 코옵의 문제를 살펴보다 보면 베버가 이야기한 도구적 합리성 이야기에 매우 닿아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목적의 효율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계산하고 선택하는 행위로서의 도구적 합리성은 게임이라는 놀이를 할 때 순수하게 그 놀이 자체를 위해 필요한 항목들에 집중된 연산으로 구성되는 온라인 인스턴트 매칭으로 나타난다. 고레벨 아이템을 주는 레이드몹 사냥을 위해 최저 아이템렙과 공략경험을 필터링해 멤버를 구성하건, 개개인이 가진 게임 기록에 의거해 비슷한 점수대의 플레이어들을 한 팀으로 모아 비슷한 평균점수의 상대와 매칭시키건 상관없이 온라인게임에서의 코옵은 기본적으로 도구적 합리성의 결과에 가깝다. 베버의 논지를 곱씹어보면, 결국 깍두기란 매우 전근대(!)적인 놀이문화라는 결론에 닿게 된다. 게임이라는 규칙이 제시하는 승리나 대결의 우위보다 팀과 파트너를 구성하고 그 상호작용 자체, 혹은 그 놀이를 통해 매직 서클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놀이 결과와는 무관한 상호관계를 바라보는 깍두기 룰은 아마도 베버가 오늘날 온라인게임을 플레이했다면 지적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전근대적 요소였을 것이다. 베버는 언제나 분석에서 가치중립성을 강조하는 양반이었고 그의 근대, 전근대에 대한 분석은 딱히 어떤 가치판단이 들어간 결과물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온라인의 도입으로 인해 달라진 코옵과 팀매칭의 사례를 두고 무엇이 더 좋았다 나쁘다를 비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는 친목과 우애가 만들어지는 오프라인의 팀매칭 코옵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지인 베이스로는 4인팟도 꾸리지 못하는 현실에 낙담하며 온라인 매칭의 편리함을 즐기기도 하는 것이 나다. 하지만 정말 어느 순간 규칙의 사이를 메꾸던 윤활유로서의 깍두기가 모든 종류의 온라인 코옵에서 말라붙어버리는 것은 오래 묵은 게이머 입장에서는 그 매끄러움이 남긴 향수 때문이라도 아쉬움을 만드는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다. 다시금 돌아보면 온라인 시대에 이뤄지는 온라인 기반의 코옵이라는 건 오래된 코옵의 방식을 대체했다기보다는 그 중의 일부를 더욱 매끄럽고 정밀하게 가다듬은 결과에 가까워 보인다. 그 과정에서 휘발된 오프라인 기반의 어떤 관계들은 결함이라기보단 기술과 제도에 의한 선택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이 놓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아간 아쉬움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지는 못해도, 적어도 온라인게임을 굳이 PC방에 모여서 함으로써 아쉬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들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PC방도 예전같지 않다는 말을 듣다보면, 그 PC방 시대와 함께 휘발되는 되게 오래된 무언가도 함께 예전같지 않다는 말에 묶여 있음을 어렴풋이 직감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 Back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12 GG Vol. 23. 6. 10. *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2. 괄호에 숫자로 페이지만 표시한 것은 모두 상기 책의 인용이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응우옌은 이 책에서 이렇게 분투하는 플레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해 나간다.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회의론자들의 반박들을 논파하면서 어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방법론으로 게임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 『게임: 행위성의 예술』 표지 이미지 응우옌의 논의는 게임 담론 내부의 논쟁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학, 예술학 등 게임과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담론장까지 면밀히 검토하면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것을 통해 게임을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규정하고, 예술로서 게임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책 전반에 깔려있는 철학자 특유의 논법은 (그가 베트남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철학/미학 담론 안에서만 대부분 작동하는데, 이는 내재적인 논리를 단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 논하겠지만 이토록 정교한 논의를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근본적인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이 책은 차라리 게임의 존재론이거나 게임을 통해서 삶을 대하는 방법을 돌아보는 윤리학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게임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까지 생각하도록 만든다. 또한 응우옌이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인터페이스 장치 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고 즐기는 디지털 비디오 게임뿐만 아니라 보드 게임, 등산, 술자리 게임, 나아가 사랑까지 포괄하면서 삶 그 자체까지 나아간다. 앞서 말을 꺼냈듯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핵심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응우옌이 고안한 개념이 아니라, 버나드 슈츠의 개념을 가져와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 책의 초반부의 대부분은 슈츠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분투형 플레이의 회의론자들, 특히 성취형 플레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논파해 나가는 내용이다.) 우리는 게임을 할 때 무조건 이기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때로는 심지어 이겨버리는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76) 게임이 쉬워져서 난이도를 보다 어렵게 조정하는 상황이나 애인과 보드게임을 하는 상황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헨리 시지웍의 ‘쾌락주의의 역설’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설명한다. 쾌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를 비우려고 하면 절대로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오직 다른 목표에 헌신해야만 그러한 쾌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요가는 특정한 자세를 취하는 육체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손을 뻗어서는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영적 효과에 가닿으려는 행위성의 형식이다. 학부 시절 즐기던 술자리 게임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술자리 게임에서 기를 쓰고 이기려고만 한다면 그 게임은 아무런 재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술자리 게임을 통해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서 서로 웃고 친해지는 것이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진짜 목적이다. 〈트위스터〉 같은 게임을 통해서도 분투형 플레이의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제한된 행위성을 통해서 결국 넘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일부러 넘어지면 재미가 없어진다. 진짜로 실패하여 넘어졌을 경우에만 재미가 생긴다. 진심으로 게임이 제안하는 어떤 동작을 하려고 최선을 다할 경우에만 진짜 실패가 되어 모두가 크게 웃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성공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성공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이렇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goal)와 목적(purpose)이 어긋나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을 취한다면,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수단을 취하기 위해서 결과를 추구한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러면서도 일시적인 목표에 제대로 몰입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게임 속 목적에 완전히 몰입해야만, 목표는 추구될 수 있다. 게임의 과정을 즐기려면 일시적으로 승리에 대한 관심을 철저하게 장착해야한다. 누군가 게임에 진지하게 몰입하지 못한다면 그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금방 재미를 잃고 만다. 이것이 분투형 플레이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응우옌은 게임과 사랑을 비교하기도 한다. 사랑의 경우 목표에 대한 진심 어린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자신의 감정을 도구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릇된 나르시시즘이다. 심할 경우 스토커가 되어버린다. 게임에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 속 목표에 그토록 진정성 있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가 일시적이고 인공적인 형식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부루마블〉을 할 때, 게임 속 씨앗은행 화폐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던 게임이 끝나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종이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부루마블 속 화폐를 계속 소중하게 여겨서 게임이 끝난 뒤에도 마차 상자 안에 넣지 못하고 지니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만해도 살짝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논할 때, 오늘날 온라인 게임들의 화폐가 실제 세계의 화폐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응우옌의 책에서 이러한 문제는 의도적으로 간과되어 있다.) 한국 맥락에서 〈리니지〉 작업장 같은 사례를 떠올린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게임과 노동의 구분이 사라지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게임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게임은 특정한 방식으로 형식화된 환경과 행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게임 속 목표들은 현실과 달리 굉장히 명료하다. 현실에서는 그토록 뚜렷할 수 없는 것들이 게임에서는 목적론적으로 명백한 것으로 재구성된다. 수치화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기도 한다. 삶을 그 자체로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은 삶의 목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문제를 낳는다.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다시 돌아와, 분투형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목표들에 일시적으로 헌신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변덕스러움이 요구된다. 기존의 행위성 관련 논의들은 행위자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분투형 플레이는 행위성에 여러 가지 유의미한 불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100) 행위성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긴 시간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을 장착할 수 있는 인간 행위성의 유동적인 역량과 자율성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분투이다.(98) 그렇기에 게임 속 목표가 일회용이라는 점은 게임이 허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라는 매체가 행위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식화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측면이 된다. 게임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게임의 목표와 규칙, 그리고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제약 체계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환경 등을 고안한다. 게임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실천적 행위성, 그리고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을 통해 특정한 실천적 경험을 조형해 내는 것이다. 이런 형식화의 차원에서 게임을 예술적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임 디자이너의 매체는 행위성이다. 하나의 표어로 만들어 보자면,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이다.”(35) 예술은 특정한 형식을 가지고 미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응우옌은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형식을 통해서 미적 경험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과 플레이어가 취할 일시적 행위성을 형식으로 삼아서 우리에게 특정한 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의 아름다움은 행위가 형식화된 제약 속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게 제한되는 조건이 여기에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게임 디자이너의 형식이기도 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 경기에서 페이커의 플레이가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움직임의 절대적인 형태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의 엄밀한 규칙의 체계 안에서 게임의 목표와 관련된 엄청난 행위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문제는 제한된 행위성의 형식 안에서 성공만이 예술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위성을 제한하면서 발생하는 실패나 부조화에서도 예술성을 드러난다. 키보드의 QWOP 버튼만을 이용해 다리의 관절을 제각각 조정하여 달리기를 해야하는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일부러 조작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형식 안에서 제대로 한번 달려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 자체가 그 게임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 베네트 포디(Bennett Foddy)가 2008년에 만든 게임 〈QWOP〉. 출처: https://www.foddy.net/2010/10/qwop/ 게임은 이렇게 특정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위의 형식으로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타당하고, 오늘날 게임과 예술을 둘러싼 논쟁적인 담론에서도 중요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응우옌의 논의를 딛고서 다시, 게임이 왜 예술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범주와 관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필요하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면서 음악이나 회화 같은 예술의 매체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모더니즘적 장르 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게임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영역을, 예술을 통해서 게임이라는 영역을 불안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가 예술에 편입되면서 발생했던 과거의 논쟁들을 변증법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한편으로 이 책에는 니콜라 부리요나 권미원 같이 미술계에서는 낯익은 필자들도 등장한다. 응우옌은 사회적 관계나 공동체에 관련된 예술 형식을 논하는 관점을 게임에 적용하며 니콜라 부리요의 논의를 빌려온다. “예술은 특수한 사회성을 생산하는 공간이다.”라는 니콜라 부리오의 말을 빌려와 게임도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282)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의 미학』에서 관계를 다루는 예술 작업들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이례적이고 특수한 관계적 상황을 창출한다며 옹호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지는 관계가 ‘작은 유토피아’를 창출한다는 그의 주장은 다양한 차원의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그러한 관계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클레어 비숍의 논의는 굉장히 유효한 비판이다. 물론, 응우옌이 책에서 언급하는 게임이 모두 니콜라 부리오식 관계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행위와 관계를 통해서 적대를 감각할 수 있는 사례들에 대한 언급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렌다 로메로가 2009년에 만든 보드게임 〈기차〉에서 플레이어들은 기차를 운행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나중에 그 기차가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나치의 기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브렌다 로메로(Brenda Romero)가 2009년에 만든 게임 〈기차(Train)〉. 출처: http://brenda.games/train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에는 저자성의 문제도 있다. (보통 한명의) 예술가가 정해진 미적 형식을 인준하고 통제하는 전통적인 저자성은 굉장히 근대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관념이다. 응우옌의 논의에는 게임을 전형적인 예술의 개념틀에서 비추어 보기 위해 게임 디자이너를 전통적인 예술의 저자로 상정하는 문제가 전반에 깔려있다. 응우옌은 12쪽 각주 2번에서 게임 디자이너가 복수의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짚으면서도 논의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한명인 것처럼 상정할 것이라고 쓰는데, 오히려 게임의 저자가 한명일 수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성의 문제는 단지 게임을 제작하는 관점에서만 중요한 논의가 아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저자성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해 생각해야한다. 반갑게도 응우옌은 책의 후반부에 게임의 아름다움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미적 책임이란) 게임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사이에 복합적으로, 예술가와 관객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책임이 주로 플레이어에게 있고 다른 경우에는 디자이너에게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책임은 복합적인 협업의 형태를 띤다. 이 경우, 게임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미적 효과의 상당수를 성취하고, 그 최종 결과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미적으로 귀속된다.”(253) 이러한 언급은 이 책에서 게임의 미적 역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디자이너가 의도하지 않은 행위성을 발생시키는 플레이어의 역능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행위성의 제약을 위반하거나 허점을 찾아내는 플레이어들이 있다. 주어진 역량을 의심하고, 게임 자체를 전유해 버리는 플레이어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비틀어 ‘해방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역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해방된 플레이어들은 단지 주어진 행위성을 가지고 노는 정도가 아니라, 게임을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게임에서 서로를 죽이지 않고 함께 산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는 플레이어들을 떠올린다. 바로 이런 곳에서 미학(감각)의 정치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사유할 틈을 만들어 낸다. 응우옌의 논의를 이러한 관점과 함께 밀어붙여 볼 수도 있다. 그가 게임과 게임 플레이의 자율성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이 고안한 제한된 행위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행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되고 형식화된 행위성이 그곳에 있다는 점이다. 게임은 형식화된 행위성들의 다발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게임을 통해서 다양한 행위성들의 라이브러리를 탐험하게 된다. 혹은, 서로 다른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여러 가지 행위성들을 넘나들 수 있게 된다. 게임이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 예술이라면, 그것이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예술적이다.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는) 우리에게 여러 행위성을 넘나들고, 완전히 상충하는 여러 유형을 오갈 것을 요구한다.”(341) 심지어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의 상충되는 태도를 종합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명료하게 조직화된 가치들 사이를 오가며 가치에 대한 어렵고 세심한 질문을 던질 것을 주문받는다. 응우옌이 보기에 게임은 이런 방식으로 명료성과 유혹의 쾌를 폐기한 뒤, 가치를 대하는 세밀함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 “게임의 구조는 우리의 자율성 전체를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다.”(125)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특정한 방식의 행위성에 순응하도록 만들지만, 우리는 그런 게임을 통해서 행위성 자체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성이 제한적으로 형식화되어 있기에 해방적으로 전유할 가능성도 열린다. 응우옌은 우리가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를 통해 특정한 실천적 틀에 너무 집착하거나 너무 명료한 목표를 고수하지 않을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딘가에 푹 빠졌다가 또 빠져나오고, 깊게 몰입했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는 방법을 게임을 통해서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형식화된 행위성을 통해서 행위의 역량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게임이라는 가장 목적론적인 체제를 통해서 세계가 목적론적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상황을 다시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내는 일이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책을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1) 이러한 논의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C. 티 응우옌의 또 다른 논고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글에서 응우옌은 예술 감상 또한 고투의 과정이라고 쓴다. 예술 감상은 결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술 감상에 목표(goal)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술품 앞에서 가이드북이나 미술사 교과서만 읽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예술을 감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삶이 예술작품으로써 결말이 열려 있는, 끝나지 않는 대화가 되기를 바라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변으로써 끝나버릴 무언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옮긴이 이동휘의 블로그: http://economic-writings.xyz/text/textblocks1/art_is_a_game.html Tags: 행위성, 응우옌, 행위성의예술, 북리뷰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 게임 to 현실, 현실 to 게임: <게임의 사회학> 서평
〈게임 사회학〉은 저자 스스로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었다. 저자가 스스로 게이머들이 왜 이런 행동을 보였을지 이유를 추적하고 그 인과성을 검증하는 모델을 세우는 과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정량적인 연구라도 연구 문제를 설계하고 모델에 어떤 변수를 채택하고 분석 결과를 해석하는 일은 다시 사람의 몫이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이나 통계학 연구자들이 딥러닝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딥러닝 모델이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관계를 설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eXplainable AI) 필요성이 부각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XAI는 알고리즘이 왜 이런 결과를 내놓았는지 추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량적인 연구와 정성적인 연구가 연결되는 지점이며, 앞으로 게임과 그 관련 데이터를 활용한 사회과학 연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Byeongjun Kim Research professor at the Center for Digit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KAIST. As an undergraduate, a literature-loving youth who studied Korean literature, but in graduate school majored in natural language processing and data science. Works mainly on digit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 research using large-scale data and quantitative methods. The favorite game of a lifetime was Warcraft III, race of choice the Orcs. Sadly, these days there's no time to actually play.
-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 Back 21 GG Vol. 24.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세계건설〉, 게임 방법론의 새로운 예술적 적용
무한한 가짓수를 만들어내는 작품과 함께 영화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하나, 찰리스라는 소녀가 겪은 이야기 한 줄기를 최적경로로 뽑아낸 애니메이션 작품이 놓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게임이었다면 무언가 관객의 상호작용을 유도했을 법한 장치를 동원했으리라고 여겼을 진부함을 넘는 도발적인 태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들 속에 단 한줄기로 이어진 세계선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놓인 의미는 인류가 오랫동안 탐구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경지에 놓여있는 그 카르마와 다르마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접근경로에의 제시로 읽힌다. < Back 06 GG Vol. 22.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Editor's View] 21세기 1쿼터를 마무리하며
나이든 게이머들에겐 섬뜩하게 들릴 수 있지만, 2000년대가 시작된 것도 올해로 벌써 25년, 한 쿼터가 지났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네 강산은 벌써 두 번 하고도 반은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대중화에 힘입어 디지털게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시점도 아마 그와 비슷한 만큼의 시간을 겪어왔을 것입니다. < Back [Editor's View] 21세기 1쿼터를 마무리하며 23 GG Vol. 25. 4. 10. 나이든 게이머들에겐 섬뜩하게 들릴 수 있지만, 2000년대가 시작된 것도 올해로 벌써 25년, 한 쿼터가 지났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네 강산은 벌써 두 번 하고도 반은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대중화에 힘입어 디지털게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시점도 아마 그와 비슷한 만큼의 시간을 겪어왔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첫 1쿼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GG는 지난 사반세기를 돌아보는 기획을 꾸렸습니다. 갈수록 세상이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디지털게임이 시간을 겪으며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잠시 착시를 겪기도 합니다. 25년 전에 유행하던 게임은 오락실 게임이 아니라 <스타크래프트>와 <펌프잇업>이었고, <갤러그>나 <테트리스>같은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들은 아예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난 25년의 세월동안 디지털게임과 그를 둘러싼 문화는 다시 되돌아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장르와 플랫폼을 넘어 게임하는 사람들의 구성과 인구 자체도 대격변을 겪은 것이 21세기 첫 쿼터를 보낸 디지털게임의 변화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막 게임문화라는 것이 대중성을 가져가기 시작할 때 즈음의 모습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의 게임과 게임문화가 나아가는 방향을 한번쯤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디지털게임을 뉴미디어라는, 다소간의 경외와 다소간의 과장이 섞인 개념만으로 부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보편미디어의 일환으로, 마치 공기처럼 그 존재가 특별히 여겨지지 않는 무언가로 자리잡기 시작한 디지털게임의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25년전의 과거 모습과 오늘의 게임을 비교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 꽂아둔 GG 23호라는 마일스톤 하나를 통해 다가올 2050년에 또 한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쿼터도 늘 GG와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논문세미나] 데이터가 만든 신화: ‘동남아 성장 신화’를 주도하는 게임 시장 분석 보고서 비판](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8137465a92a740f7a36178c98e26e8a0~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8137465a92a740f7a36178c98e26e8a0~mv2.jpg)



![[논문세미나] Breaking Barriers –The Emergence of a Video Game Culture and Industry in the Arab World](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653d382d09b14cefbd9a02032ae56268~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653d382d09b14cefbd9a02032ae56268~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