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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020년 이래 아이폰은 충전기 미포함으로 출시되고 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포장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서, 판매되는 아이폰 한 대당 소요되는 원자재량 및 포장용 패키지 절감을 통해 운송용 팔레트 한 대당 70% 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어 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Calma, 2020). < Back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2 GG Vol. 25. 2. 10. you can see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at below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3a3f169a-8f0a-4d4b-b844-a2fb22042dcc From physical to digital, 실물에서 디지털로 2020년 이래 아이폰은 충전기 미포함으로 출시되고 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포장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서, 판매되는 아이폰 한 대당 소요되는 원자재량 및 포장용 패키지 절감을 통해 운송용 팔레트 한 대당 70% 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어 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Calma, 2020). 이러한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애플의 충전기 미포함 조치는 친환경 전자제품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스마트폰 제조사뿐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여타의 제조업체들 또한 친환경적인 제품을 만들거나 최소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수익(2024년 기준 1,870억 달러)과 이용자수(2024년 기준 33억2천만명), 그리고 시간(하나의 제품이 매달 30억 시간에 달하는 엔터테인먼트 제공 가능)에 있어 세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분야(Ball, 2021; Konvoy Ventures, 2023; Sinclair, 2023; Technavio, 2025)는 어떨까? 비디오게임 및 디지털 산업 전반과 환경 간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비디오게임이 물리적 형태였던 시대(역주: 패키지게임 시대)에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으로는 위키피디아에 전용 페이지도 개설되어 있는 “아타리 비디오게임 매립”사건을 들 수 있는데, 2014년에 출간된 의 저자인 레이포드 귄스(Raiford Guins)는 1980년대에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해당 사건이 있었던 매립지 인근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Guins, 2014)한 바 있다. 이 전설적인 매립지 사건은 비디오게임 산업에 있어 플라스틱 사용의 절감이나 친환경적인 포장 등을 고민하는 지속가능성의 개념이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Martin, 2020), 이 시기 비디오게임이 물리적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이용자들은 비디오게임과 환경 간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스토어가 열리고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서 더 많은 게이머들이 실물 카피 대신 게임을 다운로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비디오게임 산업에 있어 친환경이라는 개념은 서서히 탄소 발자국과 에너지 소비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원의 청정도를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현재 우리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게이머, 퍼블리셔, 개발자, 정책입안자, 연구자 등 모든 측면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Tapsell & Purchese, 2021).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기반의 게임 언론 유로게이머(Eurogamer)의 크리스 탭셀(Chris Tapsell)과 로버트 퍼체스(Robert Purchese)는 게임과 환경에 관한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를 비롯해서 소비자로서 우리가 보다 책임감 있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심층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Tapsell & Purchese, 2021). 뿐만 아니라 환경을 주제로 하는 게임 제작 이벤트인 그린게임잼(Green Game Jam) 등의 운동이나 이니셔티브도 진행 중이다. “그린 게이밍(Green Gaming)”이라는 용어 또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이 찾아낸 비디오게임과 환경과 관련된 문제들은 무엇이며, 학계가 규정하는 그린 게이밍이란 무엇인가? Detour: A little bit about method, 연구방법론 간단히 살펴보기 최근 나는 동료들과 비디오게임과 환경 문제와 관련된 학술 논문과 단행본 및 챕터, 학회 발표문, 논문을 포함한 50개의 문서에 대한 체계적 검토를 진행했다(이 논문은 현재 심사 중이다) (Ho et al., 2024). 우리는 “그린게이밍(Green Gaming)”이나 “에코게임(Ecogames)”와 같은 여러 키워드를 활용해서 Web of Science와 Google Scholar 등 다양한 논문 추천 시스템을 포함한 여러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았다. 그 결과 400편 이상의 문서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를 제목과 초록 및 본문을 검토하는 여러 번의 스크리닝 과정을 거쳐 50개의 관련 문서를 골라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Main Contributors, (게임과 환경간 연구의) 주요 기여자들 미디어 연구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게임연구(traditional game studies)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이해를 구축하는데 기여해왔다. 미디어 연구분야는 비디오게임이 문학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텍스트의 일종으로서 이론적, 비평적 분석을 통해 보다 심도 있게 통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경향은 분석 대상의 대부분이 게임연구 분야의 논문이었던 우리 연구팀의 초록, 제목, 카테고리에 대한 단어 분석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알렌다 챙(Alenda Y. Chang)의 와 벤자민 에이브러햄(Benjamin J. Abraham)의 등의 대표적인 저작들은 비디오게임과 환경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개발자, 퍼블리셔, 소비자들이 비디오게임 산업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에 실린 여러 챕터들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 탐구를 볼 수 있다. 비디오게임은 단지 예술 작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도구이자 실현이다. 따라서 다른 영역들 또한 비디오게임이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를 이해하거나(심리학) 교육 목적으로 활용하거나(교육이나 건축) 비디오게임을 작동시키는 기술에 직접적으로 기여(컴퓨터 사이언스)하고 있다. 컴퓨터 사이언스 분야의 논문 대부분은 게임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기술과 방법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클라우드 게이밍이 이론상 친환경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제안(Chuah et al., 2014)되기도 했으나, 스태디아(Stadia)의 실패에서 보았듯, 클라우드 게이밍은 성공적으로 구현되지 못했다. 다른 연구에서는 클라우드 게이밍이 단순히 에너지 부담을 데이터 센터로 옮기는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데이터 센터들이 게임 운영 지원을 위해 일주일 내내 24시간 가동되어야 함을 지적하기도 한다(Aslan, 2020; Mills et al., 2019). Education: From video games to pro-environmental awareness, 교육: 비디오게임으로부터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까지 비디오게임의 핵심 하드웨어인 그래픽처리장치(GPU)는 현실을 시뮬레이션하기에 모자람 없는 성능을 제공해왔다. 현대 기술은 현실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창조해내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인간, 오우거, 마녀들이 놀랍도록 현실에 가까운 일상을 보낸다. 날씨 또한 사실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데, 추우면 몸을 떨고 비가 내리면 몸이 젖으며 들고 있던 철검이 번개를 맞기도 있다.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비디오게임의 몰입감과 포토-리얼리스틱한 그래픽은 기술적 관점을 넘어 예전 나의 스승이 수행했던 연구에서 암시했던 부분, 즉 (비디오게임이) 현실과 대중의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 과학자, 그리고 교육자들 또한 이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제프리 펑(Jeffrey Fung)은 태양계와 항성, 행성들은 시뮬레이션하는 GPU 기반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Fung, 2020). 따라서 환경 문제에 있어 비디오게임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용도 중 하나는 인식의 제고일 것이다. 연구자들은 특정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시리어스게임 또는 교육용 게임에서 잠재력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킥스타터 프로젝트로 시작하여 후에 미국 교육부의 지원도 받게 된 게임 에서 플레이어들은 생태학적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예측된 유성 충돌을 막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졌다. 이 게임에서 설계된 유한한 자원과 외부적 영향 요인은 현실적인 게임플레이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는 실제 상황에서 부딪히게 될 여러 어려움들이 반영되어있다 (Fjællingsdal & Klöckner, 2019). 연구자들은 또한 시리어스 게임, 상업용 게임, 풍자적 게임, 게이미피케이션 앱들이 게이머의 친환경적 행동 채택을 장려하는 효과를 평가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환경 문제 및 환경 착취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디자인된 이러한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의 인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게임 내 지속 가능한 기술들을 일상 생활의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어 중간 정도의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Boncu et al., 2022). 최근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 타이틀을 연구 대상으로 활용한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에드워드 J.크로울리는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게임의 교육적 측면을 연구하기 위해 <레드 데드 리뎀션2(Red Dead Redemption2)>의 세계를 활용했다(Crowley et al. 2011). 연구자들은 게임에 묘사된 야생동물종에 대하여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지식을 테스트했보았다. 그 결과 가상세계 내 여러 동물종과의 상호작용은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즉 플레이어들)의 종 식별 능력을 향상시켰는데, 특히 유제류와 어류에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 내에서 물고기를 잡는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물고기의 이름, 서식지, 심지어는 소리까지 배우고 기억했다. 그런가 하면 게이머들이 가상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색 식물이 많은 장소에 끌리고 이러한 지역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도 관찰됐다(Truong et al., 2018). Video games are more than playing, 비디오게임은 단순한 플레이 이상이다 비디오게임의 기술적 측면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컴퓨터 과학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문 분야는 ‘플레이’라는 비디오 게임의 특정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비디오 게임은 영화나 문학처럼 면밀히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간주되어 왔다(Gee, 2006). 그러나 영화나 문학의 경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행위는 상이한 개인들을 가로지르는 번역이 가능하다. 즉 의미에 대한 해석은 개인별로 다를 수 있지만, 소비하는 행위 자체는 개인들 간의 차이를 가로질러 동기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다양한 설정, 선호도, 장르에 따라 개인들 사이에서 상이하게 이해된다. 예를 들어 <콜오브듀티(Call of Duty)>의 플레이경험은 <캔디크러쉬(Candy Crush)>과 매우 다르다. 따라서 전통적인 게임 연구자들은 비디오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예를 들어, 게이머들이 <레드 데드 리뎀션2>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와 같은 가상 세계에 몰입할 때, 그 플레이는 예상치 못한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Crowley et al., 2021; Truong et al., 2018). 이에 더해 모든 게임에는 의도된 플레이 방식이 존재함에도, 스피드런(게임을 가능한 한 빨리 완료하는 것), 챌린지(한 가지 메커니즘만 사용하여 게임 완료하기), 모딩(외형 변경 또는 새로운 게임 만들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게이머들은 언제나 새로운 참여 방식을 찾아내 왔다. 이러한 행동들은 플레이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여기에는 비디오 게임에 내재된 무한하고 경계 없는 창의성이 구현되어 있다(Lamerichs, 2024; Scully-Blaker, 2024). 게이머들이 비디오 게임에 보다 빠져들수록 게임에 대한 다른 생각의 가능성 또한 증가한다. 그에 따라 연구자들도 비디오 게임 및 게임산업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진화시키고 있다(Abraham, 2022a; Fizek, 2024). 연구자들은 게임플레이에만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개발자, 규제, 퍼블리셔에 대해 보다 많은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의 저자 벤자민 J.에이브러햄(Benjamin J. Abraham)은 비디오 게임의 탄소 발자국을 생산부터 유통, 그리고 최종적으로 게이머들이 플레이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분석했다(Abraham, 2022a). 여기서 에이브러햄은 비디오 게임이 세계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포함해 더 큰 맥락에서 스스로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편 비디오 게임의 하드웨어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문데, 2019년 에반 밀스(Evan Mills)는 동료들과 비디오 게임 하드웨어의 에너지 사용과 관련된 기술적 연구, 에너지 정책, 컴퓨터 에너지 라벨링 프로그램 및 표준, 그리고 규제가 심각하게 부족함을 발견했다(Mills et al., 2019). 결론적으로 비디오 게임 소비가 실제로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제한적인 상황이라 하겠다. Green Gaming,그린 게이밍 2019년, 나는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Breath of the Wild)>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의 봉쇄 기간 동안 <동물의 숲: 뉴 호라이즌>의 섬은 낚시, 나무 심기, 꽃 가꾸기와 같은 일상적인 작업으로 가득 찬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다. 콜린 밀번(Colin Milburn)의 '그린 게이밍(green gaming)'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이러한 게임들은 "환경 통제적인 게임(games of environmental control)"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플레이어들이 직접적으로 환경을 제어하고 조작할 수 있는 유형의 게임을 뜻한다 (Milburn, 2018). 게임 연구의 짧은 역사 동안, 연구자들은 비디오 게임과 환경 간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에코게임,' '생태학적 게임,' '지속 가능한 게임,' 또는 '기후 변화 게임' 등과 같은 다양한 용어들을 '그린 게이밍'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해 왔다(Abraham, 2022b; Abraham & Jayemanne, 2017; de Beke et al., 2024). 하지만 이러한 용어들은 주로 학술적 맥락 내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왔을뿐 아니라, 앞서 설명한대로 플레이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다. 벤자민 에이브러햄이나 에반 밀스 같은 연구자들은 게이밍(gaming)을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유통, 특정 하드웨어의 선택, 이용자의 다변화된 선호도와 행동까지 관여됨으로써 보다 포괄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실제로 '그린 게이밍'을 구글링 해보면 높은 확률로 그 첫 검색 결과로서 HowStuffWorks가 나올 수 있는데, HowStuffWorks에서 다루는 내용의 초점은 게임플레이를 통한 에너지 절약, 하드웨어 재활용, 게임플레이를 통한 환경 인식 제고에 놓여져 있다(Watson, n.d.). 따라서 연구자들에게는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생산, 선택, 구매, 소비하는 것을 포함하는 그린 게이밍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요구된다 할 수 있다. 결국 "그린 게이밍이란, 비디오 게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 모두에 대해 환경을 의식하는 생산, 구매, 소비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개발자와 게이머들의 행동은 단순히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욕망뿐만 아니라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자원 보존에 대한 책임감에 의해 주도된다"(Ho et al., 2024). 기후 변화 및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상 활동에서조차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재고해야 함을 깨달은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라 할 수 있다. 비디오 게임 및 그것이 미치는 환경적 영향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현재 다소 제한적이고 불충분한 상황이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은 젊은 세대에게 지배적인 엔터테인먼트이며, 따라서 이제 질문은 더 이상 비디오 게임의 잠재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비디오 게임을 제작, 선택, 구매, 소비,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것에 놓여있다 하겠다. 참고문헌 Abraham,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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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만 또안 호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MMORPG 레이드와 확률에 대응하는 플레이어

    게임은 ‘불확실성’의 매체다. 보통 게임에서 불확실성은 두 차원으로 작동하는데, 하나가 게임의 결과와 관련된다면, 다른 하나는 게임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특정 기회의 작동과 관련된다. 고도의 플레이 스킬을 요구하는 게임이든 운 중심으로 플레이되는 게임이든, 플레이어가 그에 참여해 플레이한 결과가 어떤 것일지는, 실제 플레이를 끝내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 Back 17 GG Vol. 24.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북미에 불고 있는 게임업계 해고와 노조 설립 붐의 현장 스케치

    2025년의 게임업계는 단순한 고용환경 변화가 아니라,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재정립이 시작된 해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더는 개발자가 익명의 톱니바퀴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구조를 당연시하지 않는 시대다. 그리고 그 변화는 현장 구성원들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시작됐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게임산업, 노동조합, 해고, 북미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hoon Hong Lives in California and works in the game industry. Aims to offer insight to as many people as possible through podcast appearances and contributions to various outlets. Hopes to spend a lifetime writing engaging pieces across every field, from fashion to games.

  •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 Back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21 GG Vol. 24. 12. 10.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들이 으레 그러듯이 젠더 정체성만을 구심점으로 삼고 모이다 보니 사실상 소속원들끼리 정체성 외에 딱히 공통항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오히려 당연하게도 개개인 각자가 서로 전혀 다른 고유하고 개별적인 특질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나마 공유되고 있는 조그마한 지표라도 발견하면 그것들을 중심으로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향유한다. 특히 최근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에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게임들이 있다. <울트라킬> (2020), <시그널리스> (2022), <폴아웃: 뉴 베가스> (2010), <셀레스트> (2018), 그리고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 (2021)는 각자가 트랜스펨들을 중심으로 하는 탄탄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양식의 밈들에서도 유난히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게임들은 어째서 트랜스펨 [1] 들에게 선택된 것일까? 이 게임들이 트랜스페미닌 정체성과 따로 특별히 공모하는 지점이라도 있는 걸까? <울트라킬>: 천사의 자기탐색과 CCTV 플레이어 [2] <울트라킬>은 아직 얼리 액세스 상태인 인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상당한 크기의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초고속-초폭력 고옥탄가의 FPS 게임이다. 미래에 모든 인류가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울트라킬>의 세계관에서 오직 남은 것은 피를 연료로 삼아 작동하는 전쟁 기계들 뿐이다. 그리고 게임은 더 많은 피를 찾아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기계 “V1”의 이야기를 다룬다. 플레이어가 V1의 눈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는 지옥을 지배하는 천사들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위계가 모든 영혼을 억압하고 있다. 딱히 V1에게 저항적이거나 혁명적인 정신이 있어서 천계와 맞서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천계 의회를 대표해 검을 휘두르는 “지옥의 심판자” 가브리엘과 싸우게 된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한 명의 주인공이 한 명 이상의 여러 적수들, 혹은 체제 전체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구조는 액션 게임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심지어 아직 완결이 안 났음에도) <울트라킬>의 주요 적대 인물인 가브리엘이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천국에 대한 믿음을 주인공과의 만남을 통해 뿌리부터 의심하게 되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던 세계관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며 스스로의 생의 목적, 나아가서는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여정은 액션 게임의 문법 속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작 주인공 V1은 단 한 줄의 대사도 갖지 않고 그 스스로가 고유하고 특별한 인격을 가지지도, 당연히 존재의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울트라킬>의 서사는 주인공의 성장이 아니라 적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울트라킬>의 1막 마지막 장면의 보스전에서 가브리엘은 주인공과 첫 전투 이후 난생 처음으로 삶 전체에서 패배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때 대답 없는 신과 천국, 천사의 완전함에 대해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던 굳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패로 말미암아 천계에서 파면당한 가브리엘은 실패의 경험을 증오로 돌려 2막 보스전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게임 내 주인공의 적수라는 운명에 이기지 못하고 당연히 연거푸 패배하고 만다. 이 두 번째 패배 직후 가브리엘은 주인공으로 인해 피어올랐던 증오를 자기 존재 변화의 연료로 삼는다. 즉, 가브리엘은 절대적이며 운명적이어야 했을 신의 의지가 그대로 이뤄지지 않고 신의 가호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서 살아온 것이며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의문하게 된 것이다. “완벽해야 했을 조각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 (The pieces never fit together to begin with.)” 찾아온 현현顯現에 따라 가브리엘은 처음으로 검을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의 의지로 휘둘러 지금까지 스스로 명령을 따라왔던 천국 의회를 직접 몰살한다. 총 3막으로 예정된 전체 서사 중에 현재 2막까지 완성되어 있는 <울트라킬>에서 플레이어에겐 별다른 서사가 주어지지 않고 주인공은 적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촉매 역할을 담당한다. 즉, 오히려 서사는 적대 인물이 경험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가 인물의 변화 원인이 되어 적이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상대적 시선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이 겪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감정도 인격도 서사도 없는 V1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가브리엘과 정반대로 V1은 플레이어에게 오로지 게임 화면으로 송출되는 1인칭 시선만을 제공한다. V1은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없이 철저히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의 의지를 완벽하게 운반하는 그릇이 된다. 말하자면 주인공 캐릭터가 개별적 인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플레이어의 의지에 개입하지도, 플레이어를 방해하지도, 가리지도 않으며 분리 없이 플레이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가브리엘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으며 점점 독자적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소격 효과를 일으킨다. 플레이어 자신도 스스로 삶과 존재의 목적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충분히 겪어온 트랜스젠더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기보단 경험적 공감을 느끼는 일이 더 잦을 것이다. 나아가 <울트라킬>의 게임플레이는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팬 커뮤니티 형성에 용이한 조건을 가진다. 특히 게임 내 물리 엔진 및 총알 발사 메커니즘 등을 농락하며 수직 가속도를 수평 가속도로 전환해 맵을 눈 깜짝할 사이에 횡단하고 공중에 던진 동전에 총알을 420574331번 튕긴다든지 (아무렇게나 쓴 숫자가 아니라 실제 기록된 횟수이다) 하는 기행들이 가능한 환경은 플레이어들의 창의력과 집중력,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울트라킬>의 제작자 하키타 (Hakita)는 본인이 바이섹슈얼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그 외에도 3D 디자이너 겸 그래픽 프로그래머인 빅토리아 홀랜드 (Victoria Holland)와 컨셉 및 텍스처 디자이너 프랜시스 시에 (Francis Xie)는 본격적으로 각각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당사자이기도 하다. 즉, 작품 자체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에 의해 제작된 만큼 팬 커뮤니티 또한 성소수자들을 기반으로 구성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나아가 하키타는 기계 로봇인 주인공 V1에게는 어떤 젠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냐는 팬들의 논의에 V1은 기계이기 때문에 젠더가 없으나 he/him 대명사를 사용한다고 답변했으며, 그럼에도 <울트라킬>에는 동시에 기계“임에도” 젠더가 존재하는 개체들마저 있다. “마인드플레이어” (Mindflayer)라는 적이 대표적인데, 게임 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녀는 머리 부분만이 기계 본체임에도 그 아래로 인간의 신체 형태와 유사한 플라스틱 외피를 굳이 스스로 형성해 활동한다. 플라스틱 신체 부분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기능이 없이 오직 미적인 목적만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인드플레이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파괴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힘을 다해 이 플라스틱 신체를 보호하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필연적으로 주어진 신체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 형성한 몸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인드플레이어의 습성은 현실 속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단적인 비유로 읽힐 수밖에 없다. <시그널리스>: 몸과 시간, 인식의 비명 <시그널리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올해 출시된 <사일런트 힐 2>의 공식 리메이크보다도 더욱더 충실하게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서바이벌 호러 인디 게임이다. 즉, 게임플레이 측면에선 기본적으로 탑다운 형식의 2.5D 그래픽을 기용하며 때때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고 라디오를 비롯한 퍼즐을 적극적인 사용하며 의도적으로 불친절한 인벤토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그널리스>를 독립적인 걸작으로 만드는 면모는 극단적일 만치 비선형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언뜻 난해하기까지 한 연출 방식이다. <시그널리스>가 한계까지 실험한 표현주의적 연출은 바로 시간과 인식의 비선형성, 존재의 분열 등을 다루는 서사와 운명적으로 맞물리며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최근 인디 게임 중 <사일런트 힐>을 제대로 계승하는 또 다른 작품 <피어 앤 헝거> 시리즈가 그 계보 상의 공포와 끔찍한 그로테스크를 이어 나가고 있다면 <시그널리스>는 실질적으로 존재론적 비애와 절망의 측면에서 서바이벌 호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먼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 “유산 (Eusan)”은 성간 단위로 통치가 이루어지고 우주 개발을 진행 중이다. <시그널리스>의 세계관에서 “생체 공명”이라는 일종의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자들은 타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의 유기체 조직에까지 간섭할 수 있고, 나아가 집단의 의식을 변형하는 형태로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의 유산 당국은 기존의 제국 체제에 대한 반란을 통해 세워졌는데, 이 제국의 여왕이 바로 강력한 생체 공명 능력을 통해 인류를 다스리던 자였다. 즉, 전 제국은 인식론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현 당국은 제국 통치에 대한 반발로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유물론적 통치 사회가 탐험이라는 명목을 뒤집어쓴 기약 없는 우주 항해를 통해 한 생체 공명자 “아리안느 양”을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추방 조치에 처하자 인식론적 공포가 물질세계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생체 공명으로 인해 변이되고 있는 세계를 헤치고 아리안느를 다시 찾아야만 하는 복제-인조인간 “엘스터”를 조종한다. <시그널리스>의 세계 속엔 두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엘스터와 같은 “레플리카”이고 다른 하나는 레플리카의 원형이라는 의미로 레플리카가 아닌 인간을 이르는 “게슈탈트”이다. 레플리카는 뛰어난 개인들의 신경패턴을 복사해, 인공내골격에 생물학적인 배양물을 채워넣은 뒤 외골격으로 둘러싼 신체에 이식한 복제품들이다. 같은 판본을 기반으로 복제된 개체들이므로 예측 가능한 일꾼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복사 과정에서 기억은 전부 삭제하고 오로지 능력과 성격만을 남김에도 게슈탈트 생전의 중추 기억을 자극하는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기억의 편린이 재구성되고 만다. 또는 한정적이고 반복적인 임무 바깥의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면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자아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레플리카가 게슈탈트의 기억을 되찾는 낌새를 보이거나 명확한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들킨다면 그 즉시 “폐기”당한다. 즉, 게슈탈트와 레플리카 모두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사회 안에서 고유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내쫓기고 학대당한다. 특히 아리안느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많은 레플리카들은 그전까지 탄압당한 욕망과 트라우마 등을 고통스러운 형태로 드러낸다. 아리안느의 생체 공명은 단순히 현재 인식되는 공간적 물질계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기억과 시간까지 변이시키는데, 이로 인해 플레이어가 엘스터의 눈을 빌려 인지하는 세계엔 엘스터가 아닌 다양한 개인들의 경험 또한 섞여 들어온다. 특히 이 지점이 <시그널리스>의 서사와 연출을 난해하게 만드는 최전방이다. 현재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경험이 정확히 누구의 시공간이었는지 유추하기가 극도로 어려우며, 시퀀스마다 불규칙하게 게임은 1인칭과 3인칭 관점을 오가는데 플레이어는 관점 변경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엘스터를 통해 경험하는 타인의 기억 중 하나는 아리안느가 유물론적 기치를 바탕으로 한 유산 당국에서 경시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하얀 머리와 붉은 눈 등 남들과 다른 외모로 인해 성장 과정 속에서도 괴롭힘을 당해오던 것이었다. 규범 사회에서 예외적 존재로 배제당하고 항상 폭력의 최전방에서 사는 트랜스젠더에게 <시그널리스> 속 유산 사회와 그 시민들 사이의 고통스럽고 불합리한 관계는 먼 얘기가 아니다. 특히 유기체적, 즉,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존재인 레플리카는 트랜스젠더에게 비유 이상의 즉물적인 개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게임 내에선 레플리카의 피와 살은 언뜻 인간의 평범한 살점과 구분되지 않는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생체공학으로 가공된 조직이기에 표류한 우주선 안에서 게슈탈트가 배고프다고 레플리카의 살을 뜯어 먹어 봤자 소화를 시킬 수 없다는 지침을 찾을 수 있다. 레플리카라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그들은 고유한 인간 존재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자원”, 보급형, 모조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인간 도식의 모방이자 게슈탈트의 복제, 변주에 불과한 개체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레플리카는 단독적 인격과 자아가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판형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시그널리스> 작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게슈탈트, 레플리카를 막론하고 절대 대다수가 여성이다. 따라서 레플리카의 경우 그 키가 최대 260cm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로 이루어진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많은 트랜스펨에게 공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생체 공명의 영향으로 개인들이 몸의 물질적 차원과 몸에 대한 인식 사이의 경합을 겪어 변이하는 과정은 트랜스성의 관점에선 그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시그널리스>에서는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함선이나 우주정거장 등 세계 전체의 물질적 차원이 인식의 변화에 의해 피와 살점, 내장 등으로 점차 침식되어 간다. 마치 트랜스적 신체 인지 방식이 바깥 세계로까지 확장된 듯이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세계 관찰 관점의 자유를 제공하지 않고 1인칭 시각과 3인칭 시각을 임의로 강제하는 것 또한 매체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몸이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 유물론적 유산 사회가 시민 개인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명한다. 즉, 언뜻 호러 장르라는 특징 때문에 변이하는 신체가 존재들에게 고통이나 폭력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시그널리스>에선 오히려 그전까지 개개인의 존재를 가두고 각자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신체에 대한 인식의 반항이자 탈출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는 공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 또한 신체를 통해 인식하고 몸에 직접 기록되기 때문에 트랜스 당사자들은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도 비규범적인 경우가 많다. <시그널리스>에서 아리안느는 우주 속으로의 기약 없는 망명 속에서 결국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그녀의 왜곡된 시간은 그녀가 생체 공명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임 내 세계에까지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이는 트랜스젠더들이 반드시 고유한 트랜스성으로서는 아니지만 현실의 조건으로 인해 흔히 처할 수밖에 되는 트라우마적 경험들로 인해 직조당하는 시간의 영원성과 동일하다. 마치 전쟁 경험자들이 흐르지 않는 특정 시간 속에 갇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도, 일정하게 작동하지도 않는다. <시그널리스>는 서사의 비선형성 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공시성 (synchronizität)을 통해서도 인과적이지 않은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즉,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공명하는”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 말이다. 끝으로 블랙홀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는 우주 검열 가설을 제창한 로저 펜로즈의 이름이 아리안느가 탑승한 우주선에 붙어 있듯이 억압당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는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 분명 다양한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실재해 왔음에도 스스로의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현재 또한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당사자가 아닌 바깥의 시스젠더들에겐 전혀 미지의 영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주에선, 누구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3] 바깥을 향한 언어의 갈망 따라서 <시그널리스>는 <울트라킬>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밀착된 방식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기에 게임 외적 측면에서 살펴보지 않아도 어째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형성됐는지는 의문의 영역조차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쯤 되면 안 봐도 뻔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지만 2인 제작 게임인 <시그널리스>는 전적으로 트랜스 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제작자 유리 스턴 (Yuri Stern)은 논바이너리이고, 디자이너 바바라 비트만 (Barbara Wittmann)은 트랜스여성이다. 그러므로 <울트라킬>과 <시그널리스> 모두 작품 내외 양면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한다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극도의 고난이도 플랫포머 게임 <셀레스트> 또한 말 그대로 게임 안팎으로 스스로와 싸우며 산에 올라가는 고난과 역경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리며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와 트랜지션 과정을 그려냈다. 역시 제작자 매디 소슨 (Maddy Thorson) 본인이 게임 출시 이후에 커밍아웃하였기도 하다. 그러나 <폴아웃: 뉴 베가스>와 같은 경우는 커뮤니티 상에서 다른 게임들보다도 특별히 사랑받고 있고 거의 트랜스펨의 상징과도 같은 지위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 자체가 직접적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고 있지도, 작품 제작 차원에 트랜스 당사자가 개입되어 있지도 않다.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도 전반적으로 <폴아웃: 뉴 베가스>와 크게 다르지 않고, <길티 기어> 시리즈 내에서 이미 2002년에 처음으로 출시되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역사를 가지고 존재해 왔던 “브리짓”이라는 캐릭터가 비교적 최근에 들어 와서야 본작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해당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춘 팬덤 문화가 형성된 바가 있지만, 이 한 명의 매우 국소적인 캐릭터를 제외하고 전체 게임 차원에서는 특별히 트랜스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도, 트랜스적 게임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게임과 가장 충실하고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는 트랜스펨들은 브리짓을 기점으로 유입층이 늘어난 팬덤 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전체적이고 실질적인 게임 영역에 자신을 투여하는 실제 격투 게임 대회를 중심으로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애초에 트랜스펨 개인들이 게임 영역에 대거 투입되고 전문적인 수준까지 훈련되는 일이 많은 것은 현실의 물리적 사회 공간에 참여가 허락되지 않고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며 아주 철저히 배제되어 온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랜 역사에서 오직 접근할 수 있는 취미라고는 외부의 공공장소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유가 크다. 따라서 이미 트랜스펨들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게임들을 즐겨왔고 그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좋은”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에 우연히 플레이 경험이 겹친 사례의 대표가 <폴아웃: 뉴 베가스>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선택지와 플레이어 행동에 대한 예상치 못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결과들, 대화의 풍요로운 문체 등 현대적 RPG 게임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폴아웃: 뉴 베가스>에 대한 트랜스펨들의 선호는 단지 자기 탐색의 시간을 불가피하게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트랜스 당사자들이 비교적 고상한 취향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으로 설명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문화 코드로 정체화하는 게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필요 조건인 것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트랜스펨 당사자들이 실제로 지금까지 각자가 시간을 많이 투여해 온 게임들이라는 것만이 약분 불가능한 최소한의 정수다. 애초에 트랜스 정체성 자체가 하나로 압축될 수 있는 단일한 결정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하고 고유한 개인들의 사실상 임의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에 당연한 사실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동일한 구심점을 축으로 공전하며 조직된 코드의 궤적들을 따라 문화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으로 주변적 존재들은 삶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끼리 같은 작품을 향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연결감을 느끼고 만연한 소외와 고독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을 매개 삼아 존재할 수마저 있다. 즉, 자신의 향유에 설명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증명을 이루고 작품을 자기 정체성의 코드로 기입해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기성 규범 사회의 문화 코드를 대여하거나 그것에 편입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탈취해 고유하고 독자적인 맥락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개별적 언어, 방언을 만들어 냄으로써 소수자들은 스스로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또한 밖으로 내쫓긴 이들에게 기존 사회와 언어 안에는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없으므로 대안적 관점을 창조해 내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역으로 작품 자체 또한 확장하고 그 의미를 다양화하며 그 질료를 풍요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즉, 트랜스펨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 구성 과정은 정체성과 게임이 상호적으로 재조직하는 교차 전이이다. 참조할 계보가 없는 돌연변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인공 고향은 말라붙은 터전에 다시 양분을 불어넣는다. 추신 트랜스펨들이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게임을 즐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 상의 연결과 공유가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측면이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맥락은 기존에 “여자”는 게임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 같지도 않은 편견이 생각보다 꽤 널리 퍼져 있었기에 트랜스펨들 또한 자신의 취미가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게 인식될까 봐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꺼리고 수치심에 부인하고 감추며 억눌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게이머에 대한 오명이 점점 벗겨지며 오히려 스포츠 게임과 같은 남성 위주 게임을 “캐주얼”한, 비전문적 게임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역으로 여성 게이머를 “코어”하며 전문적인, 집요한 플레이어들로 재조명하는 관점이 유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트랜스펨들도 수치심과 열등감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게임에 대한 취미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서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1] transfem. 트랜스페미닌(지정성별상의 남성이 젠더 스펙트럼상 여성에 좀더 가까운 경우)의 줄임말. 트랜스페미닌함을 지닌 개인들을 이를 때 자주 사용된다. [2] <울트라킬>의 주인공 V1은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닮은 머리로 인해 팬 커뮤니티 내에서 CCTV라는 별명을 얻었다. [3] In space, no one can hear you scream.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197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는 서민적인(接地气)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 Back 『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11 GG Vol. 23. 4. 10. [편집자주] 비디오 게임은 그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해 관찰해 보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각을 지닐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시각과 기술에 대한 시각이 있을 수 있고, 게임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시각과 게임개발자에 대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미디어에 대한 시각과 산업에 대한 시각도 있으며, 최소한 사회변화와 게임의 역사에 대한 시각도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없어서는 안 될 두 개의 성악 파트처럼, 그 소일거리라는 강바닥에서 지식의 악장을 연주한다. 펑파이신문( www.thepaper.cn )의 ‘아이디어 시장’ 섹션은 인문과 사상조류의 관점에서 오늘날 게임적 현실의 주요한 방향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조사 및 파악해 게임 비평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매주 토요일 ‘게임론’ 연재를 시작한다.) ‘비평의 방향’, ‘역사의 시선’, ‘문화의 논리’, ‘매체와 현실성의 확장’ 등 다양한 글들이 담긴 연재로서, 한·중·일 관련 분야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연구자, 게임연구에 뜻을 둔 젊은 연구자, 게임업계의 선배들과 종사자 등 업계와 학계 각 방면 게임동호인들의 원고를 모을 것이다. 이를 통해 게임비평의 개념과 관점을 제시하고, 게임비평의 가치·가능성·방향·경로 등을 두고 토론할 것이다. 또, 역사를 지향 삼아 문화와 기술, 동아시아와 글로벌, 현대와 포스트모던 등 맥락에서 게임 역사의 원류와 방향을 드러내고, 게임텍스트와 사회문화 사조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탐구하는 것은 게임이 장난감에서 문화미디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특징을 나타낸다. 비판적 시각으로 오늘날 게임 세계의 내부적 원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 게임산업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문화생산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게임(산업) 문화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탐색하며, 게임의 전통적 매체에 대한 재생산과 게임을 통한 현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밖에도 이 연재는 게임과 젠더에 대한 토픽과 게임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젠더를 포함하며, 게임 속의 젠더 의제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어들에 대한 여러 기사들, 서버운영자(网管)와 스트리머(主播), 대리게이머(金币农夫; 중국 게임계의 한 현상.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게임을 하는 사람들), 따이롄(代练; 온라인 게임에서 누군가의 레벨업을 돕고, 돈을 받는 행위들), e스포츠 선수 등 게임이라는 영역 내 변두리에 있는 이색적인 집단을 소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매개로 일본과 한국에서 게임비평의 기준점을 제공했거나 제공하고 있는 해외 작품들을 골라 게임 배후의 광범한 구도에 대해 논할 것이다. [역자의 말] 각주는 모두 국내 출간물 표기 또는 역주로, 원문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기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 는 서민적인(接地气) 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중국 학부모』는 모위완 게임즈(墨鱼玩游戏, Moyuwan Games)가 제작한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2018년 9월 29일 코코넛아일랜드 게임즈에서 대행해 출시했다. 이 게임이 출시되며 인터넷에선 많은 화제가 일었는데, 가장 인기있는 댓글평에는 “매우 리얼하다”, “실제 삶과 닮았다”, “너무 공감된다” 등이 있다. 『중국 학부모』의 게임 소개 페이지에는 “현실적인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자기 포지셔닝은 대부분의 게이머가 이 게임에 대해 평가하는 바와 일치한다. 이 게임은 아이가 태어나 대학 입시(高考)를 치르기까지를 따라가는데,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 미션은 바로 아이가 만족할만한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에 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부모와 자녀의 이중 역할을 맡는다. 부모로서의 플레이어는 자녀의 하루 일정을 짜야 하는데, 아이가 공부할 내용과 개발할 기술 등을 결정해야 하며, 자녀로서의 플레이어는 자녀의 시각에서 대인 관계와 문제 해결 등을 진행하고, 학급 임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이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오락용품을 사는 등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게임 플레이 방법으로서는 평범한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보이지만, 게임에 ‘리얼리즘’의 분위기를 채워주는 독특한 ‘중국식’ 가정의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학부모는 자녀를 활용해 이웃이나 친구의 자녀와 ‘체면 대결’을 치러야 하고, 아이는 부모의 체면을 세워줌으로서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춘절 연휴에 친척들과 ‘홍바오 2) 쟁탈전(红包拉锯战)’을 치를 때 홍바오를 너무 빨리 먹으면 친척이 기분 나빠하고, 또 너무 양보하면 어머니가 기분 나빠한다. 홍바오를 가져갈 때 반드시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또, 부모에게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하면 부모는 “어린 애가 무슨 스트레스니?”라고 질책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 수치는 더 높아진다. 이처럼 모든 디테일들이 『중국 학부모』와 자녀들 간 세대 갈등을 강조하는데, 이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하다”고 “공감”하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에 대한 평가들은 비판과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디테일에 대한 언론들의 경탄은 『중국 학부모』를 더더욱 ‘중국식 교육’에 대한 비판의 훌륭한 소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중국 학부모』가 제시하는 다양한 ‘현실’이란 비단 중국 가정교육의 실제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 경험으로 구조적 문제를 감추는 것에 있다. 과잉 경험 : ‘현실’과 ‘현장’ 『중국 학부모』의 시나리오 텍스트 내용 대부분은 현실 조사를 통해 발췌한 것으로, 조사 대상자가 진술한 실제 경험을 게임 속에 직접 배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학부모』의 줄거리는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구축한 거대한 ‘경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선 일련의 무작위(随机; 랜덤, 임의) 선택이 촉발되고, 플레이어의 선택은 아이의 속성치에 영향을 미친다. ● 오늘 부모님은 일찍 잠들었고, 당신은 방에서 몰래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10연승의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기 직전, 당신은 숨을 꾹 참는데… 그런데 돌연 방의 문이 열렸네요! ○ 휴대폰을 끄고 재빨리 숨을 참고 잠자는 척한다. 그리곤 긴장을 풀고 강좌를 듣는다. (기억력 40 증가) ○ 큰 소리로, 당신이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 방에서 나간다. (지능 50 증가) ○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플레이한다. 알고보니 그것은 가을바람이 지나간 잘못된 경보였다. (오성 悟性 50 증가) 이러한 유형의 선택지에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다른 길 - 부모님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휴대폰을 넘기는 등 - 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무작위 선택의 몰입감은 전적으로 플레이어 선택에 대한 제한에 기반하며, 플레이어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척하는 옵션으로 물러선다고 할 때, 플레이어가 ‘자주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수면 역시 플레이어의 현실 경험을 쌓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이는 나(플레이어) 스스로 선택하고 “공감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게임 속에서 촉발되는 무작위위 이벤트들도 있다. 이벤트가 발생하면 플레이어에게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선택을 하고나면 게임 화면상에 나와 같은 선택을 한 플레이어가 몇 명인지 알려준다. ● 엄마와 할머니는 기저귀를 사용할지,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할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 어린아이는 무료 입장! 하지만 당신의 키가 기준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엄마는 당신에게 무릎을 조금 굽혀서 기준선을 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네요.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 수업시간에 몰래 떠들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벌점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선생님에게, 애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시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와 같은 설계는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확고하게 포착한다. 플레이어가 ‘예’를 선택하든 ‘아니오’를 선택하든,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비슷한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아직 겪지 못한” 경험은 플레이어를 특정 집단에 속할 수 있도록 묶어주고, 여러 플레이어들이 “공감한다”고 외치게 하는 ‘현실’의 요소가 된다. 여기서 『중국 학부모』가 ‘리얼리즘’의 에토스를 구축하려는 전략이 드러난다: 즉,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제한함으로써, 플레이어는 특정 선택지 그룹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무작위위 선택’에서 플레이어의 ‘생각’인 것으로 바뀌도록 설정돼 있으며, 이러한 무작위 선택에서 플레이어의 경험(또는 미경험)은 일반적인 경험(또는 미경험)으로 변한다. 이러한 설정 하에서 『중국 학부모』는 거대한 ‘경험의 집합체’로서 스스로의 고유한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중국 학부모』가 제공하는 경험은 결국 과잉 경험이다. 저우즈창(周志强) 교수는 벤야민의 「경험과 빈곤」(1933) 3) 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위 ‘경험과 빈곤’이 반드시 사람들의 경험 생산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바로 ‘경험과잉’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생산 시스템이 끊임없이 현실적 상태를 감추는 경험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경험과 빈곤을 구성하게 된다. (…) 감정과 경험이 풍부할수록 실제 경험은 더 적어진다.” - 저우즈창, 「유사 경험 시대의 문학정치비평 - 벤야민과 우화론 비평」(伪经验时代的文学政治批评——本雅明与寓言论批评), 『난징사회과학』, 2012년 제12기. 과잉 경험은 거짓 경험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감정이 충만하며, 생생한 경험을 가리킨다. 하지만 풍부하고 충만한 것처럼 보이는 과잉 경험이 많을수록, 실제적인 경험은 적어진다. 『중국 학부모』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은 모두 이와 같은 과잉 경험이다. 그것들은 진실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분노의 정서와 자조적인 구원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수십 가지의 무작위 이벤트와 옵션들이 구성한 과잉 경험의 집합체에서 플레이어의 지나간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 몇 가지만 있으면 그것들은 죄다 “공감”과 같은 것으로 식별될 것이다. 별자리 안내서의 어떤 별자리에 대한 서술처럼 한두 가지 자신과 맞아떨어지는 내용만 있으면, 독자는 “정말 진짜같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의 ‘리얼리즘’은 차라리 “현장주의”라고 하는 편이 낫다. 저우즈창 교수는 “오늘날 리얼리즘은 서민적인 행위나 사실적 표현이라는 담론에 포위되어, 서서히 현장주의로 대체되고 있다” 4) 고 말한 바 있다. 즉, 점차 더 많은 ‘리얼리즘’ 작품들이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공감’을 ‘실제 상황’으로, 과잉 경험을 실제 경험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 경험은 현장감이 충만하고 감정도 풍부하지만, 반드시 진실된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중국 학부모』는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한 ‘통점’을 통해 과잉되고도 풍부하며 충만한 고통의 경험을 플레이어의 유일한 경험으로 설정한다. 벤야민은 「경험과 빈곤」에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 평가 절하가 진지전에 의해 까발려진 전략 경험, 인플레이션에 의해 까발려진 경제 경험, 기근을 통해 폭로된 신체 경험, 권력자들에 의해 까발려진 윤리적 경험 등 그들이 직접적으로 겪은 전쟁과 그 영향에 의해 폭로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전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는 전쟁의 이러한 문제를 설명할 수 없었을 때 그러한 경험 부족을 은폐하기 위해 균열을 메우는 일련의 심령주의(오컬트)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인 경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 할 때마다 사람들은 명확한 비난의 대상을 찾는 경향이 있다. 심령주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대 중국 책력 상의 불길한 징조라던지, 관상이 좋지 않았다던지, 흉년(流年不顺) 등 비난 대상이 그것이다. 즉, 경험의 과잉을 통해 경험의 결핍을 덮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라는 이 게임에서도 ‘중국 학부모’는 플레이어들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중국 학부모』가 드러내는 과잉 경험은 구조적 문제에 대해 ‘가정’이라는 매우 적나라한 답을 제공한다. 청년들이 대인관계, 일과 학업, 심지어 친밀한 관계에서 겪는 각종 문제들은 하나같이 가족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중국 학부모’는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고정 지시어” 5) , 즉 대상 안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다른 이들과 구별해낸 잉여이다. 원래 지적될 수 있는 것으로서 ‘중국 학부모’는 좋은 외모에, 독선적이며,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의 “유효한” 특징들을 암시했다. 하지만 ‘가정 원죄’라는 맥락에서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이는 일련의 특징들이 ‘중국 학부모’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 학부모가 이와 같은 특징들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중국 학부모’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고정 지시어로서의 “중국 학부모”와 반유대주의 논리 속의 유태인은 궤를 같이 한다. ——즉, 당신이 까다롭고,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에 유태인인 게 아니라, 당신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당신은 까다롭고 돈만 밝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독일 사회 전체의 문제는 유태인의 존재로 축소되어버렸듯, 각종 사회문제들은 게임 속에서 ‘중국 학부모’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과 같다. “부모를 용서하라” : 주정주의 7) 적 해결 방안 『중국 학부모』 게임을 시작할 때 한 문장의 인용구가 나타난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나이가 들면 부모를 심판하며, 때로는 부모를 용서한다.” 8) - 오스카 와일드 이 문구는 게임 전체의 기본 아이디어로서 ‘부모를 용서하라’로 설정했다. 플레이어가 1라운드를 끝내고 다음 세대 아이를 키우기 시작할 때, 게임의 2라운드에도 흥미로운 대화가 등장한다. 아빠(이전 세대의 플레이어가 키운 자식) : 생각치도 못했지만 나도 아이를 가질 나이가 됐으니, 교육을 잘 시켜야 할텐데, 우리 부모님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해!!! 엄마(이전 세대의 플레이어가 택한 동반자) : 당신과 함께 시부모님댁에 갈 때마다 당신이 아버님이랑 똑같단 생각이 들어! 생각하긴 뭘 생각해! 얼른 기저귀나 갈아! 대화를 나눈 후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게임은 이전의 메커니즘, 시스템, 무작위 이벤트, 무작위 선택 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체면 대결’, ‘홍바오 쟁탈전’, ‘재능 대결’, ‘작문 백일장’ 등 이벤트들이 마찬가지로 적지 않게 일어나고, 플레이어들은 부모의 희망 수치와 스트레스 수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춤으로써, 아이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가출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게임은 바로 이처럼 “당신을 당신의 부모로 바꾸는” 반복적 메커니즘을 통해, 플레이 방법의 측면에서 플레이어가 “부모를 용서”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비록 당신이 부모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더라도, 게임의 모든 메커니즘은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즉, 아이들에게 기술을 학습하도록 해야 하고, 아이들의 스케줄을 정리해야 하고, 아이들이 높은 성적을 받도록 해야 하며, 좋은 일자리를 얻도록 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아이는 메커니즘 속에서 새로운 ‘중국 학부모’가 된다. 그렇게 새로운 부모가 된 플레이어는 “내가 원치 않던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부모님의 고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게임 엔딩을 맞으면 아이의 소감 한 구절이 나타난다. “대입 시험 전과 후의 일상이 꽤 다른 것 같단 생각을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저 자신은 더는 아이가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부모님 눈에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거죠. 부모님과 늘 함께 했던 날들이 그리워요. 그게 어떠했든 꽤나 아름다운 시기였어요.” 『중국 학부모』는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게임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온정적인 핵심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부모 탓은커녕 그리움과 용서가 담겨 있다.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네요.” —— 즉, 어린 시절에는 비록 항상 혼나고 이해받지 못했지만, 커서 보니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됐고, 부모님 눈에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게임 속에서 세대 간의 각종 갈등은 단지 노련한 농담에 불과하며, 감정의 대화합이 주제인 셈이다. 2015년에 인기리에 방송된 『환락송(欢乐颂)』에는 남존여비의 가정에서 자란 판셩메이(樊胜美)가 등장하는데, 한때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 중심에 있었다. 그 이후로 부모와 자녀 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여러 화제작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했다. 『도정호 : 가족의 재발견(都挺好)』, 『아빠와 함께 유학을(带着爸爸去留学)』, 『소환희(小欢喜)』 등이 그것이다. 이 드라마들은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중국 학부모’들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들의 내러티브에서 모든 문제는 가족 갈등에서 비롯되며, 문제해결 방식은 단 하나, 바로 부모와 자녀가 서로 이해하는 것에 있다. 따뜻한 결말로 과정상의 갈등을 희석시키는 것은 가정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드라마 『도정호 : 가족의 재발견』 전체 서사의 전환점은 마지막에 쑤다창(苏大强)이 유언을 남기는 부분에 있다. 쑤밍위(苏明玉)의 회사에서의 위기, 쑤밍청의 결혼 파탄, 쑤밍저의 사업 문제는 모두 쑤다창이 오열하며 “너희 세 형제자매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행동하고, 도울 수 있는 한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해결된다. 이때부터 온 가족의 관계가 빠르게 바뀌기 시작하는데, 쑤밍위는 아버지가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이유가 바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에 따라서 이 드라마의 전반부 갈등과 문제의 전말이 분명해진다. 한바탕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신파극이 일가족의 진실된 곤경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부모를 용서하라”는 주정주의적 결말은 가족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대체하는 해결이기도 하다. 과잉 경험 속에서 부모가 유일한 원망의 대상으로 세팅되어 있다면, “부모를 용서하라”의 결말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 되는 셈이다. 게임 전체의 설정은 플레이어가 부득불 ‘전철을 반복’하는 것에 있으며, 게임의 원망하는 내용과 감동적 결말은 플레이어가 부모를 용서하는 ‘전철을 반복’하도록 한다. 이는 일종의 스스로 문제를 옮긴 뒤 스스로를 설득하는 자화자찬의 대체 해결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부모』의 반복적인 메커니즘에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 부모가 낳은 문제가 아니라, 게임 메커니즘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용서하는 결론의 온정 강박 하에서 우리는 다시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네가 부모가 되어도 이렇게 할 거야” 같은 부모의 고뇌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리얼리즘 신화 『중국 학부모』에서 과잉 경험은 그것의 ‘리얼리즘’을 구축하는 기본요소다. 한데 흥미로운 점은 게임 전체의 리얼리즘이 하나의 ‘신화’를 기반으로 하며, 이것이 게임의 세대 간 속성의 계승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는 다른 모의 양성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키우는 대상의 속성을 평가하는 수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게임 속에서 아이의 속성은 IQ, EQ, 체력, 기억력, 상상력, 매력 등 다섯 가지로 나뉜다. 속성별 수치는 아이의 과목별 성적과 장래 직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게임의 기본적인 플레이 방법은 바로 부모의 ‘스케줄링’과 아이의 ‘브레인스토밍’을 기반으로 속성의 수치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전자는 부모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아이의 일정을 배치하여 아이의 특정 기능들을 배양하는 것이고, 후자는 아이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미니게임을 통해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세대 간 속성 계승은 바로 플레이어 세대가 키운 아이가 다음 라운드 게임에서 키울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이전 세대의 우세적인 속성이 아이의 몸에 물려지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플레이어가 키운 아이가 결국 프로그래머가 되면 다음 세대 아이는 IQ에 15점이 추가되고, EQ는 3점, 상상력 3점, 기억력 5점, 신체 3점이 추가된다. 만약 아이가 운동선수가 된다면, 신체에 더 많은 능력치가 추가되고, 다른 속성들엔 더 적게 부여된다. 세대 간 속성 계승을 통해 다음 세대 아이는 반드시 이전 세대보다 우수해지는데, 이는 즉 플레이어들이 세대를 거듭해 꾸준히 키워나가기만 한다면, 당신의 아이는 항상 칭화대와 베이징대 같은 명문대에 합격해 인생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게 됨을 뜻한다. 이처럼 “다음 세대가 전 세대보다 강하다”는 설정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본 동력이 된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의 게임 목표는 모두 “우리 가문의 몇 대손이 베이징대학에 합격하는지 보는 것”에 있다. 속성 수치로 플레이어의 게임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초 설정이다. 게임이 플레이할 가치를 갖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게임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플레이어들의 투입 시간이 누적되고 플레이 전략의 최적화됨으로써 끊임없이 수치가 증가할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게임 속 아이의 인생은 단순하고도 곤란해진다. 단순함이란 시간을 들여서 수치를 쌓고 최적화 전략을 짜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고, 곤란함이란 아무리 훌륭한 방안을 사용하더라도 자연적인 속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잉 경험으로 가득 찬 이 ‘리얼리즘’ 게임은 구조적 문제를 감추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돌출시킨다. 즉, 가장 비현실적이고 게임화된 수치 시스템을 빌리지 않는 한, 게임의 리얼리즘적 기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과 가장 무관한 부분인 세대 간 속성의 계승은 하나의 예정된 신화인데, 이 게임의 모든 ‘리얼리즘’이 이러한 계층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만약 이와 같은 신화 예고를 제거해버리면 그것이 중국 학부모든 미국 학부모든, 아이를 성공시킬 수 없다. 이 게임의 근본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다. 한 측면에서 아이는 그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의 속성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아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모순을 잠재우기 위한 계층 상승 신화는 곧 무결점 피부를 보여주면서도 그 속의 끔찍한 흉터를 암시하는 마스킹액과 같다. 여기서 세대 간 속성 계승에 따른 계층 상승은 그 자체의 비현실이 작품의 리얼리즘적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하나의 ‘리얼리즘 신화’가 되었다. 합리적이고 진실되며 현장감 넘치는 디테일을 모두 제거하고나면, 상징계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하드코어만 남게 되는데,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실재계의 손상”이다. 벤야민의 맥락에서 이 하드코어는 바로 아름다운 경험의 실체를 까발리는 인플레이션, 기근, 권력자이다. 그것은 바로 신화를 들춰내는 리얼리즘의 역설이며, 이는 우리에게 “계층 상승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출한다. 『중국 학부모』는 이 문제에 대해 말없이 침묵하며, 자신이 지닌 리얼리즘의 거짓을 폭로한다. 계층 상승의 신화 속에서 당신은 다섯 시간에 걸쳐 세 아이를 키우고 갑부나 대문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계층이 고착화된 구조적 문제 앞에서는 자녀의 학교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평생 열심히 일해도 자녀가 매일 수업을 빼먹고 인터넷PC방에 다니다가 결국 대입 시험에 실패해 “아빠는 맨날 일만 하느라 바빠서 내 공부엔 관심도 없었는데, 우리 집안은 내게 뭘 가져다 줬나"같은 글을 올릴 수 있다. 경제학자 마일스 코라크(Miles Corak)는 ‘위대한 개츠비 곡선(Great Gatsby Curve)’을 제시하면서 미국의 계층분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 곡선은 언론이 ‘아메리칸 드림’의 거짓을 지적할 때 볼 수 있다. 하지만 2003년 이래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도 0.46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핀디에(拼爹) 지수로 불리기도 하는 세대 간 소득탄력성 계수(intergenerational elasticity; IGE) 역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세대 간 소득탄력성 지수는 세대 간 소득 변화를 보여주며, 한 세대의 경제적 소득이 다음 세대의 경제적 소득 또는 경제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나타낸다.) 바로 이 두 지수가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구성하는 X·Y축이다. 『중국 학부모』에서 과잉 경험은 문제를 가정 문제로 단순화하고, 용서하는 결말은 이성주의 대결을 주정주의적 포용으로 유화시킨다. 최종적으로 이 게임은 우리에게 가족 구성원들 간에 서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다. 물론, 가족의 윤리적 문제는 상호 이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부모님의 고된 노력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 메커니즘의 강압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계층 상승의 신화와 고착화된 현실 사이에서 『중국 학부모』는 현실적인 디테일들로 가득하지만, 거짓된 신화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중국 학부모』의 리얼리즘은 결국 하나의 코딩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과잉 경험으로 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온정적인 결말을 통해 대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상상계와 상징계의 겹들은 실재계의 존재를 말소해버린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코딩에서 벗어난 하드코어는 언제나 실재계의 왜상으로 게임 속에 존재함으로써, 그 리얼리즘으로하여금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계층 상승의 ‘리얼리즘 신화’이다. 신화의 불가능성은 그 현실의 거짓을 암시하고, 달콤한 꿈 뒤에는 감출 수 없는 고착화된 모순이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 모순에 접근하려고 하면 주정주의적 가르침은 가족애를 내세워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혹은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전이시켜버린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공감의 향수나 ‘중국 학부모’에 대한 원망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게임 전체의 논리 뒤에 감추어져 있는 진짜 문제이다. 우리가 되물어야 하는 것은 ‘중국 학부모’가 어떠하냐가 아니라, 왜 이러하냐에 있다. ‘중국 학부모’의 문제는 가정의 윤리 문제가 아니며, 자녀와 부모 간 갈등 완화로 해결할 수도 없다. 이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우리는 더 이상 ‘출신 가정’의 아픔에 매달리지 않고 사회 전체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구어 ‘接地气’는 정치인이나 인기 연예인 등이 유명인답지 않게 소탈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대중의 일상과 접촉하며 어울리고, 대중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중의 습관과 문구 등을 사용하는 것 등을 지칭한다. 중국 바깥의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포퓰리즘 현상을 대중의 언어생활에서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홍바오는 중국 춘절 연휴에 주고받는 돈주머니로, 한국으로 따지면 세뱃돈과 유사하다. 대다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위챗’ 등 소셜미디어앱에는 ‘홍바오’ 기능이 있는데,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룹채팅방 안에서 나눠줄 수 있다. 카카오톡에도 이와 유사한 기능이 있다. 3) 국내에서는 2008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최성만 옮김, 길)에 수록되어 출간됐다. 4) 저우즈창, 「현실-사건-우화: 리얼리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现实·事件·寓言:重新思考现实主义)」, 『남국학술(南国学术)』, 2020년 제1기. 5) 현실 세계와 대비되는 가능성의 세계(possible universe; 논리학·철학에서 가능성·필연성·우연성 등의 양상 명제를 논리적으로 다루기 위한 이론적 장치)에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 표현을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사울 크립키(Saul A. Kripke)의 반기술주의가 우리가 본질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고 어떤 특정한 영역의 결정적 역할을 공식화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제공해준다고 본다. 크립키의 ‘고정 지시어’ 개념은 라캉의 ‘지배기표(master signifier)’ 개념과 일치한다. 지배기표는 대상의 실증적 속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표작용적 행위를 통해 화자와 청자 간 새로운 상호주관적 관계를 확립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중국 학부모”라고 하면 우리는 대상이 가진 실증적 속성들에 포함되는 게 아니라 발화 수행으로 상징적 위임을 그 대상에 부여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상징적 현실과 관계가 창출되며, 그 관계에서 특정한 책무를 떠맡는다. 6)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새물결, 2013. 원서: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7) 원문의 ‘情感主义’는 주정주의(emotionalism)의 중국식 표현으로, 이성이나 지성보다 감정이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감정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8) 이 유명한 문구는 오스카 와일드가 1890년에 집필한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의 등장인물 헨리 워튼경이 한 말이다. 9) ‘比拼老爹’의 준말로, 스스로 경쟁(比拼)하지 않고, 부모(老爹)의 능력에 의존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저우스위, 周思妤 난카이대학 문학대학원 석사과정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최적화하는 재미, 최적화된 세상 - 자동화 시뮬레이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최적화와 효율을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최적화 게임’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의 최적화를 이뤄온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최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게임에서 최적화의 행위를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자본주의로 최적화된 우리 사회의 비가시화된 영역을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이 줄 수 있는 의미이지 않을까? < Back 최적화하는 재미, 최적화된 세상 - 자동화 시뮬레이션 27 GG Vol. 25. 12. 10. 대학을 다닐 때, 책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교수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질문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 후두부를 강력하게 두드렸던 당시 교수님의 답변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교수님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집 정리를 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집에 큰 가구가 새로 생긴다면 기존의 가구들을 재배치해야 하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들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나의 편향과 신념, 습관, 체계들이 무너지고 새로 쌓이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이 학문의 의미이자 재미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당시 교수님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우습게도 내가 이때의 대화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순간은 자동화 게임을 할 때이다. 자동화 게임을 즐겨본 유저라면, 자기 기지를 제 손으로 부숴보지 않은 유저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만약 한 번도 손보지 않고 엔딩을 향해 달려갔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그전까지의 내 기지가 아무리 완벽했어도 재구성과 재배치의 작업이 필요하다. 단순히 새로운 기계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동선과 최적의 환경, 최적의 효율을 위해 다시 기지의 모든 곳을 다듬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급박한 상황이라면 임시적으로나마 비효율적인 기지를 만들어놓을 수 있겠지만, 게임 플레이 시간이 쌓일수록 게이머의 다음 과제는 효율적인 기지 구성을 향해 나아간다. <끝없는 재구축의 과정> 자동화 게임? 최적화 게임!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애써 만들어놓은 기지를 부수고 새로 구축하는 과정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자동화 게임을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위의 문장을 반박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의 장르를 바꿔보자. 만약 RPG를 하는데 10시간 가까이 레이드한 보스몹을 결국 잡지 못하거나, 겨우 잡은 보상을 잃어버린다면 그 상실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혹은 지금까지 모은 재화들을 해킹당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허탈함과 분노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자동화 게임에서는 수십 시간씩 공을 들여 만든 기지여도 효율적이지 않으면 자기 손으로 부수고 새로 짓게 된다. 심지어 부수고 새로 지을 각이 보이지 않으면 산뜻하게 지금 기지를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지금까지 쏟은 시간을 버린 것과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면서 이걸 해결하고 더 좋은 기지를 만들 수 있다는 설레임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처럼 자동화 게임에서는 결과물이 중요하지 않다. 자동화 게임의 재미는 마치 레고처럼 창의성을 발휘해서 자신의 기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다만, 레고와 다른 점은 창의성을 발휘하는 목적이 주관적 심미성이나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고 명확한 효율성 자체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동화 게임의 게이머들은 게임을 하다가 노트를 펴서 수치를 계산하는 수학자가 되기도 하고, 게임 내 기술이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마 ‘대체 그 게임은 무슨 재미로 하는 거야?’라고 물을 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의 과정과 다를 것이 없지만, 직장에서는 오롯이 추구할 수 없는 최적화 과정 자체에서 이 게임의 재미가 나온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자동화 게임의 목적은 자동화에 있지 않다. 완전히 자동화된 환경을 만들어서 바라본다면 뿌듯한 감정을 느끼겠지만, 그것이 뿌듯한 이유는 최적화를 향한 나의 노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적화 게임’이 게이머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것은 변수의 계산 가능성 덕분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은 변화무쌍하고 다층적이며 예측불가능하다. 그러나 게임에서는 수치적으로 변수가 제공되어 계산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며, 잘 만든 ‘최적화 게임’들은 게이머에게 단계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과제들을 제시한다. <산소미포함(Oxygen Not Included, 이하 산미포)>을 즐긴 게이머라면 누구나 산소 부족-식량 부족-전기 부족-물 부족-자원 고갈의 어려움을 순차적으로 겪을 것이다.(물론, 중간중간 앞 단계의 과제들이 다시금 찾아온다) <팩토리오(Factorio)>와 <새티스팩토리(Satisfactory)>에서는 필요한 광물이 순차적으로 늘어난다. 게이머들은 이러한 변수 앞에서 자원을 활용하고 환경을 구축하며 최적화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다시 돌아보는 막스 베버의 통찰 그런데 시야를 넓혀보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모든 게임이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이라지만, 자동화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는 특히나 현실과의 유사성이 높은데도 게임을 하면서 현실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변수의 성격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게다가 공장이라는 공간적 배경도 게이머의 경험에 따라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서 유통과정까지 효율을 추구하는 게임의 구조가 현실과 흡사함에도 관련 논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커뮤니티를 둘러봐도 ‘현실에서 효율을 추구하지 않는 자신이 왜 게임에서 효율을 좇는지’ 궁금해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답글이 달리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한국인의 특성’처럼 부정할 수도 없지만 논의에 도움도 되지 않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다. 자동화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비와 욕망이 직접적인 변수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RPG뿐만 아니라 <데이브 더 다이버>나 <문명>처럼 파편적으로라도 경제 시스템을 구현한 게임과 비교했을 때, 복잡다단하고 가변적인 욕망의 소유자는 물론이고, 정해진 확률에 따라 거래를 하려는 소비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산미포>의 복제체(Duplicant)들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치만을 요구할 뿐이고, 문화적, 정신적 요구치인 사기와 스트레스 역시 소비 과정 없이 최소치의 수치만 충족시키면 되며, <팩토리오>와 <새티스팩토리>의 플레이어는 다른 인간 자체를 만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시뮬레이션의 생산물은 교환가치를 가진 ‘재화’가 아니라 다음 단계를 위한 ‘재료’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화 시뮬레이션에서 구현되는 세상은 현실의 산업 자본주의와 흡사한 형태로 발전한다. 이러한 점은 ‘소비의 욕망 구조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막스 베버의 통찰을 되돌아보게 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생산 과정에서 찾았다. 베버에 따르면, 종교 개혁 이전에는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개인의 외부, 즉 교회와 종교 권력이 확정시켜주었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청교도인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이러한 차이는 일상생활에서의 차이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종교 의례를 충실히 참여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청교도인들에게 일상은 신이 자신에게 요구한 삶의 태도를 증명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에 청교도인들은 세속적 직업 수행을 신의 소명으로 여기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더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동에 임했다. 이때의 자본주의 정신은 합리적 계산과 체계적인 노동, 절제된 생활, 이윤의 재투자 등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축적된 자본은 또다른 생산을 만들면서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소비와 욕망의 매커니즘이 구현되지 않는 세상은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확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게임 내 재료가 쌓이면, 이는 바로 다음 생산 활동을 위해 투입된다. 많이 사용되는 재료는 더 넉넉하게 쌓으려고 하지만, 이 역시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인한 축적이다. 그렇게 공장은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은 물품을 만들 수 있게끔 점점 확장된다. 그 자체로 목적성을 가지는 생산 과정은 베버의 말처럼 다른 생산으로 이어지며 산업 자본주의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변수. 물류 산업 자본주의가 확장되는 또 하나의 변수는 물류 시스템이다. 자동화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물류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면, 게임의 중반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형태가 컨베이어 벨트가 되었건, 기차가 되었건, 드론이 되었건 생산 과정을 효율적으로 최적화하려면 물류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특히, 자동화 시뮬레이션의 고급 기술들은 여러 자원들을 대량으로 요구하기에 자원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생산품 역시 필요한 것으로 보내야 한다. 따라서 효율에 대한 추구와 산업의 발전은 물류 시스템의 탄생을 낳는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물류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영역이고 산업 발전의 산물일 뿐이다. 실제로 게임을 하면서 물류 시스템을 가장 중요한 변수로 먼저 떠올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크 레빈슨의 통찰은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다. 레빈슨은 <더 박스: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에서 물류 시스템의 발전이 산업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역설한다. 컨테이너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모든 항구에서 짐을 일일이 손으로 싣고 내려야 했다. 도난이나 파손의 위험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운송비가 막대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컨테이너가 표준화되자 운송비가 줄어들면서 공장들은 항구 근처에 위치하지 않아도 되게 바뀌었으며, 원재료부터 완제품까지 만들던 공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인 분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게다가 운송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업들은 재고를 쌓아두지 않게 되었으며, 필요한만큼 만들어 필요한 곳에 파는 Just-in-Time 생산이 가능해졌다. 레빈슨은 이로 인해 분업화와 같은 기업 구조의 변화는 물론이고, 세계화와 노동 시장, 도시의 구조까지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자동화 시뮬레이션을 생각해본다면, 물류 시스템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만이 아니라, 필요를 만들어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새티스팩토리>에서 운송 수단이 발달하면, 그전까지는 멀어서 염두에 두지 않던 효율성 좋은 자원을 사용하게 되고 기지가 확장된다. 자원에 여유가 생기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더 많은 기기들을 만든다. <산미포>에서 기존에는 어쩔 수 없이 복제체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지점도 자동화되며 최적화의 대상과 방식이 변한다. 분업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생산물이 늘어난다. 물류 시스템의 발전이 산업 자본주의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존재가 비가시화된 세상에서 현실의 비가시화된 존재를 상상하기 그런데 이처럼 현실에서의 욕망과 탐욕 없이, 생산이 생산을 낳고 물류가 필요를 낳는 세상에서도 착취와 소외의 흔적은 발견된다. 공장의 최적화를 위해서는 변수 없이 돌아가는 부품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의 자동화 게임들은 착취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자 한다. <팩토리오>와 <새티스팩토리>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공장 내부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며 0.01초 단위로 작업을 규제받는 현실의 노동자가 나오진 않는다. <산미포>는 등장하는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복제체로 정의한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판단력이 제거된 복제체들의 움직임은 게이머의 죄의식을 희석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 위에서 최적화를 위한 플레이는 자본주의의 생산 모델 발전 경향을 답습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유가 생기면 복지를 신경쓰기 시작한다> 게임의 초기 단계에서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게임 시스템이 시간과 능력, 생산량들을 표준화해놓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분업과 세분화 작업을 통해 노동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테일러주의적 운영 방식을 보인다. 그러다 초기 생산물이 쌓이면,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컨베이어 벨트를 사용하는 포드주의로 발전한다. <산미포>에서 노동자의 식당이나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는 것도 부분적으로나마 복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포드주의와 맞닿는다. 이후 생산과 물류 시스템이 정착하고 당장 생존에 여유가 생기면 환경을 바꾸거나 주변을 꾸미기 시작한다. 낭비를 최소화하는 작업을 할 여유가 생기면서 근로만족도와 스트레스도 챙긴다. 팀워크와 자발성을 게임에서 구현할 수는 없지만, 생산성과 복지를 결합한다는 측면에서는 도요타주의적 운영 방식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최적화와 효율을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최적화 게임’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의 최적화를 이뤄온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최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게임에서 최적화의 행위를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자본주의로 최적화된 우리 사회의 비가시화된 영역을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이 줄 수 있는 의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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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 Back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19 GG Vol. 24. 8. 10.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 중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특수한 조건에서만 실현 가능한 장르를 게임을 통해 재현하는 일은 그 목적이 플레이어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라면 성공하기 쉽지 않다. 코스믹 호러는 단어 그대로 인간의 사유와 이성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거대한 존재를 마주쳤을 때 경험하게 되는 우주적 공포를 의미한다. 오랜 기간을 통해 축적해 온 문명을 포함한 인간적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 불가해한 공포를 목도하는 상황과 그에 대한 매혹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대변하는 특징이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적 세계관은 그가 활동했던 시대보다는 오히려 지금에 와서 적극적으로 향유되고 차용하고 있다. “거기서 크툰을?”이라는 밈으로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하스스톤>의 고대신의 저주 덱만 하더라도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의 고대신 중 하나인 크툴루 이미지를 빌려온 대표적인 사례다. 크툰(C'Thun)이라는 이름조차 크툴루(Cthulhu)를 연상케 하는 의도적인 작명이다. 게임을 비롯한 서브 컬쳐에서 크툴루가 코스믹 호러를 대표하는 표상이자 오마쥬로 손쉽게 활용되는 이유는 러브크래프트의 작업물 중 드물게 크툴루 만이 소설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외양이 묘사되어 있고 작가의 스케치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각화할 수 있는 뚜렷한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점은 공포를 야기하는 데는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의 크리쳐를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나 <콜 오브 크툴루>와 같은 게임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요인 중 하나는 시각적 재현을 통해서는 공포를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래픽 해상도나 디자인, 크리쳐의 거대함을 체감할 수 있는 상대적 크기의 구현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하게 가시화된 것일수록 공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러브크래프트는 기이한 이야기가 예술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정밀하게 사건을 묘사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분위기의 조성을 제안한 바 있다. 코스믹 호러를 경험하게 되는 소설적 사건은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허구적인 것이기에 정밀한 묘사를 통해 리얼리티를 획득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인간의 기분을 명확하게 상징화하는 것이야말로 묘사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영역이다. 공포, 그것도 특정한 맥락의 사건을 통해 야기되는 감정의 결을 상징화하는 작업은 시각을 중점적으로 매개하는 매체가 좀처럼 도전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모호함, 불분명함에서 오는 상상이 야기하는 불안감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공포 영화는 본질적으로 시각 중심적 매체라는 영화의 장점 일부를 포기하고 카메라의 시야를 제한하고 대상을 어둡고 흐릿한 배경을 통해 부각하는 전략을 취한다. 아울러 관객이 사건을 목도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동시에 감상의 가이드라인으로써 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사건 전개의 중심축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 감상자가 경험하는 무력감, 일방향적인 위치에서 수행되는 관음에서 비롯된 공포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글의 마중물로 활용한 인용문과 같이 공포는 대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기원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앎으로 포섭할 수 없는 존재를 목도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다만 서술자는 광인으로 대변되는 낯선 타자를 목격할 때 경악하거나, 서서히 잠식되는 광기로 인해 미지의 대상에 매혹되며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을 진술하는가로 나뉠 뿐이다. 최소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이 둘은 선행과 후행의 문제일 뿐 어느 쪽을 배제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소설 <벽 속의 쥐>의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는 <다키스트 던전>은 고대신의 유적을 저택에 은닉하고 있는 전대 가주의 편지로 시작된다. 지하의 유적을 탐사하며 결국 고대신의 제물로 후손을 끌어들인 선조의 목적을 저지하더라도 탐사대의 파멸은 불가피하다. 광기에 잠식된 이들은 결코 이전과 동일한 내면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키스트 던전>은 후손의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과 새로운 희생양이 될 또 다른 후손을 초대하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은 서사는 한낱 인간으로서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악의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하는 러브크래프트적 세계관을 잘 보여줬다. 그러나 그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다키스트 던전>이 광기를 하나의 변수이자 수치화할 수 있는 요소로 디자인한 게임이라는 점이다. 공포가 대응할 수 없는 미지에서 창출되는 감정이라면 공포 게임의 행위성은 그를 위배하는 방식으로, 달리 말하면 미지를 해소하고 장악하는 방식으로 디자인된다. 이 모순적인 결합방식을 시도한 결과물 중 눈여겨볼 만한 대표적인 게임은 크툴루 세계관을 기반으로 추리와 코스믹 호러의 공존을 시도한 <셜록 홈즈: 디 어웨이큰드>이다. 추리는 과학을 포함한 근대적 지식을 동원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지향하는 행위다. 이 경우 만약 이성이 미지를 해체하는 유용하고 적확한 도구라면 해소될 수 있는 공포는 하나의 소재로 활용될 뿐이다. 그러나 <셜록 홈즈: 디 어웨이큰드>의 서사는 이성과 공포의 대결에서 공포에 손을 들어줬다. 홈즈는 어머니를 파멸로 이끈 광기가 자신에게도 유전될 것을 염려하면서도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괴이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광기에 접근한다. 그리고 광기에 매혹된 자신이 근대적 이성으로 무장한 이전의 ‘나’는 같은 인간일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성은 미지의 사건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도구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질서와 법칙으로 무장한 자신의 세계가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불안한 외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홈즈는 이전과는 다른 내면을 가진 인간이 된다. 심지어 고대신을 소환하고자 하는 이교도의 제의를 저지한 후일담에서 짐작할 수 있듯 홈즈의 정신은 그의 정체성이 붕괴되었던 상황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것은 게임을 통해 재현된 캐릭터의 내면일 뿐이며 플레이어의 영역에서 꼼꼼하게 단서를 모아가며 추리하는 플레이 경험은 이 게임이 ‘호러’ ‘어드벤처’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전자의 수식어가 약소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차라리 행위성을 제한하는 동시에 특정 행위성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광기를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다키스트 던전>이 광기를 활용하는 방식이 바로 그런 형태다. 플레이어는 지속적으로 특정 확률로 이상상태를 겪는 캐릭터들을 컨트롤하며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관철할 수 없는 세계를 인식한다. 물론 이것은 공포를 직접적으로 창출하기보다는 긴장감을 통해 몰입감을 고조시키는 효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포를 해소하는 어드벤처식 게임 장르를 대신해 제안할 수 있는 하나의 예시로 고려될 수는 있을 것이다. <드렛지> 역시 광기를 게임적 요소로 활용한다. <드렛지>는 확률의 결과물만 보여주는 <다키스트 던전>보다 광기에 노출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게임 초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새롭게 마을에 정착하고자 하는 낚시꾼의 일과 사이에는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질감이 불거져 나온다. 심해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기괴한 생김새의 어종, 이방인인 주인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응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대사, 낮과는 전혀 다른 위협이 도사린 밤바다의 풍경은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정작 크툴루의 오마쥬인 것이 분명한 고대신은 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매우 짧게 모습을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재현되면 될수록, 즉 대상을 명확하게 인지할수록 공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측면에서 이와 같은 전략은 유의미하다. 오히려 <드렛지>는 미지의 존재가 응시하는 시선을 화면 상단이나 심해의 충혈된 눈으로 표현하거나 광기에 잠식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점차 붉게 번져가는 파라미터 등의 인터페이스로 재현한다. 불분명하고 암시적인 분위기가 캐릭터의 불안을 야기하고 공포라는 감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광인은 타자의 모습으로 재현되기 쉽다. 그러나 <드렛지>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이성의 영역에서는 확신할 수 없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투신하는 인간의 모습과 미지에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줬다. 희생된 아내를 부활시키기 위한 수집가의 광기는 설사 그것이 고대신을 소환해 마을이 소멸하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다섯 가지의 물건을 모아달라는 의뢰를 수락한 어부는 결국 이것이 스스로 초래한 비극의 후일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광기는 자신의 다른 얼굴이었던 셈이다. 코스믹 호러는 이제까지 믿어왔던 판단 능력에 대한 의심이자 철학의 붕괴, 신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공포다. 정상성,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포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명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토대, 근거가 전면적으로 붕괴될 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발상이 게임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플레이가 경험하는 공포란 오히려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 Back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27 GG Vol. 25. 12. 10.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문명적 통치를 다룬다. 그 시조인 맥시스의 「심시티」를 시작으로 유비 소프트「ANNO」시리즈,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주 플래닛」이나 「플래닛 코스터」를 시작할 때 플레이어를 반겨주는 것은 너른 자연의 공간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이러한 ‘자연적 풍경’을 깎아내고 변형시키고 자원화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이 주어진다. 이 관계를 역산해보자. 이 게임들에서 ‘자연의 풍경’이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규정된다. 「심시티」를 켜고 비어있는 세계를 가만히 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한히 시간을 보내보자. 화면에 수놓아진 자연적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조차 없을 것이다. 이 공간들은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부터 생동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오직 플레이어에 의해 문명적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제공된 공간일 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저서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에서 맥시스의 ‘심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기 있는 맥시스사의 게임 「심앤트」, 「심어스」, 「심시티」, 「심시티 2000」 그리고 「심라이프」는 모두 컴퓨터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지도 제작 게임이다. 이 게임들에서는, 생명 그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 제작이 곧 세계 제작이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화의 데카르트적 격자 관습 안에서, 이 게임들은 사용자들이 탐험, 창조, 발견, 상상, 개입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과학자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데이터 기록 실천, 실험 프로토콜, 세계 설계를 배우는 것은 이 테크노사이언스 영역에서 정상적 주체가 되는 과정의 매끄러운 일부다. 지도 제작 실천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하는 투영법projections을 배우는 것이다. 각 투영법은 특정한 종류의 관점perspective을 생산하고 함축한다.” [1] 그런 의미에서 프리 라이브스의 「테라 닐」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역 건설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이 게임은 ‘발전하기 위한 건설’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테라 닐」의 목적은 자연의 재생에 있다.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여기에 ‘역 건설게임’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플레이어는 모든 스테이지에서 자연을 완전히 되살린 뒤, 자신의 모든 건설물을 파괴하고 이 공간을 떠나야 한다. 이를 통해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스스로 생동하는 자연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마지막의 철수 공정을 마친 뒤 원한다면 얼마든지 재생된 세계를 관람할 수도 있다. 「테라 닐」에 최초로 제공되는 빈 땅은 「심시티」 또는 본 장르의 다른 게임들에서 보이는 빈 땅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에 가깝다. 「심시티」의 그곳은 자연인 척 모사되었을 뿐 진짜 의미에서의 자연은 아닌 공간이다. 그것은 생명의 형태를 패러디한 공간이며, 동시에 문명의 통치가 ‘필요한’ 그저 사멸되어 있는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테라 닐」의 빈 공간은 본래부터 멸망의 음울함을 가진 공간이다. 「테라 닐」이라는 제목조차 제국주의 시절 원주민의 땅을 ‘주인 없는 땅’이라 명명할 때 사용한 단어 ‘Terra Nullius’를 떠오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게임의 역학에 있어 양 공간의 기능과 목적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테라 닐」은 그 죽음의 이미지를 전면화함으로서 장르적 기능을 역행해 재생이라는 목적을 도출해낸다. 「테라 닐」은 ‘역 건설’이라는 게임적 메커닉을 통해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들이 가지고 있던 (해러웨이가 정의한) ‘지도그리기’의 역학을 무참히 드러내버린다. 「테라 닐」의 빈 땅 그런 의미에서, 「테라 닐」은 일종의 생태주의 게임이다. 그리고 「테라 닐」이 생태주의 게임인 이유는 기존의 건설 경영 게임들이 가진 반 생태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테라 닐」의 혁신성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들이 가진 ‘지도 그리기’의 역학, 문명에 의한 자연 통치의 보편화에 저항할 때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초적인 메커닉이라는 점이다. 그곳이 오염된 땅이라는 전제가 있다고 한들 플레이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건물을 세우고, 그를 통해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를 소모해 다시금 건물을 세워 나가는 방식으로 ‘빈 땅’을 (건물이 아닌 식물로) 채워나간다. 리뷰 등에서 종종 지적되고 있듯, 「테라 닐」에는 수상한 미스터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플레이어가 재생해야하는 이 세계의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건물을 짓기 위한 (게임 내에서는 녹색의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포인트의 정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는 이 게임에서의 문명과 자연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는 복원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연유로 이렇게 파괴된 것일까? 핵전쟁이 있었을까? 극심한 환경오염의 결과인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인가? 아니면 운석 충돌에 의한 예상치 못한 파멸인가? 이 조건의 공백은 플레이어의 행위가 올라설 지지대를 치워버린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는 자연을 ‘재생’하라는 미션을 건내고 있을 뿐이다. 즉 플레이어가 지금 수행하는 수복이 실패에 대한 책임의 행위인지, 세계의 재건이라는 극복의 의지인지 모호하게 굴고 있는 셈이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재생의 기술을 가진 플레이어와 재생을 필요로 하는 땅이라는 이분화된 관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조건이 지워지는 순간, 플레이어에게는 일정한 ‘선한 의지’만이 주어진다. 책임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에 그 행위 전체가 자연의 수복이라는 고귀함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위대한 일’을 위해 남겨져 있는 이 공간이 바로 「테라 닐」의 비어있는 땅이다. 이 조건은 에코모더니즘의 비전과 연결된다. 2015년 에코모더니즘 선언문An Ecomodernism Manifesto과 함께 발족한 이 사조는 기술 발전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의 더 나은 삶Well-being을 증진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환경 철학이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Anthropocene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금의 세계를 ‘좋은 또는 위대한 인류세’로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건다. 이 사조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비판을 겪었다. 특히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이들이 인류세를 ‘퇴보의 상징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게 해주는 전환’으로 받아들이며 ‘흥분과 기쁨의 기색을 보이며 환영하고 있다’ [2] 고 강하게 비판한다. 「테라 닐」이 ‘땅’을 다루는 태도 역시 이러한 비판의 도마 위에 있다. 땅의 탄생 조건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좋은 또는 위대한 재생’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와 동시에 게임에 작동하는 모든 기술적 토대는 자연에 과시적으로 작동한다. 어떻게보면 「테라 닐」의 ‘땅’은 자연적으로 재생할 수 없다는 음울한 자연성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심시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생하지 못하는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이든, 자연을 재생시키는 것이든 ‘빈 땅’으로 규정된 장소들은 스스로 생장하지 못하는 한계지어진 곳이다. 오직 기술만이 변화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테라 닐」은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과 공명한다. 녹색의 자원으로부터 한편 이 게임이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다. 모두 말라버린 지상에 충분할만치 지하수를 공급할 수 있는 펌프를 시작으로,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극적으로 변동시킬 수 있는 장비, 그에 더해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고효율의 발전기가 사용된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고능한 장비를 ‘어떠한 자원을 통해’ 설치하는지 역시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각 건물의 설치는 게임 내에서 획득하는 ‘녹색의 포인트’를 통해 설치할 수 있는데, 이 포인트는 자연의 회복 정도에 따라 일정량 확보되는 구조다. 게임이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두 개념의 관계, 즉 ‘자연의 회복’과 ‘기술의 설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관계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과연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 채취하지 않고서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가? 플레이어는 기술을 통해 자연을 ‘재생시키는 국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 이 기술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는 이 관계는 「ANNO 1800」에 대한 반복된 비판과 연결되는 구석이 있다. 해상로를 통한 자원의 보충을 기반으로 하는 「ANNO 1800」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원주민과 착취 노동의 조건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이 게임에는 그저 일용직 노동자인 호날레로jornalero와 전문 노동자인 오브레로obrero라는 자발적인 존재들이 묘사될 뿐이다. 즉 플레이어에게 있어 어떠한 자원적 획득은 그 채집의 노동과 ‘마찰 없는 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PC Gamers》의 사무엘 호티Samuel Horti는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식민지화를 노예제, 잔혹함, 폭력, 질병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 라며 이러한 구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이 끊어진 관계를 통해 플레이어는 자원의 운용에 어떠한 심적 불편함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으로 이행하게 된다. 「테라 닐」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고도의 기술 그리고 설치와 운용이라는 고도의 코스트를 요하는 작업들이 어떠한 물적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지 제거됨으로서, 이 게임은 혹여나 기술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연 착취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물론 이것을 밸런스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술이라는 문명의 투입은 자연의 재생 정도와 일정량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제한다면 이 관계는 포인트의 ‘소모’가 아니라 지도 위에 세워진 건물의 ‘점유도’와 대비되는 자연의 회복 ‘정도’로 묘사되는 것이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 즉 이 메커니즘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테라 닐」의 메커닉은 매우 알기 쉬운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일정한 건설을 통한 ‘수익’과 그 자본의 ‘소비’를 통한 성장 모델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테라 닐」은 건설 시뮬레이션에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착취적 모델을 통해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모순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자본의 획득과 소비’라는 관계가 근간이 되어있는 한 비판이라는 목적에는 완전히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스킨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면, 그저 현 인류의 보편적 사유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분재화된 자연으로 「테라 닐」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게임의 가장 흥미로운 메커닉인 철거 국면에 그 답이 있다. 각 스테이지의 말미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건설물들을 해체하고 그 땅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해체에도 포인트가 소모되기 때문에 건설의 과정에서부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를 미리 설계해 둘 필요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포인트를 소모해 철거 국면을 끝낸 뒤 모선과 함께 날아오를 때의 쾌감이 「테라 닐」의 핵심적인 재미다. 환경 조성에 의한 보너스 포인트의 목록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땅은 해러웨이적으로 ‘지도화된’ 땅이다. 플레이어는 이 아름다운 땅을 만들기 위해 땅 전체의 온도, 습도, 방사능의 양 등의 수치를 안정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제시되는 ‘일정한 정도의 환경 조건’을 달성하면 대량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는다. 특정한 환경의 조성은 동물들의 복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치게 기적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수치적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체계다. ‘동물의 귀환’이라는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생태적인 결과가 그저 (광의의) 경제적 결과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솔직해지자. 이 동물들은 「심시티」에서 RCI의 밸런스를 명확히 했을 때 보상으로 받는 인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플레이어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아름다운 땅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기술적 관리에 의한 보상물이다. 재생을 거친 인간의 ‘철수’는 이 보상을 더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극단의 분리주의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윌리엄 크로넌William Cronon의 관점을 따라가보자. 크로넌은 『The trouble with Wilderness : or Getting back to the wrong nature』에서 야생wilderness라는 개념이 19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발명된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논한다. 이것이 발명품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야생’이 전적으로 문명 내부에서의 이상화를 위해 자연-문명이라는 이원화를 이용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크로넌이 보는 발명된 야생이란 문명이 바라보는 ‘숭고하고 신성한 사원’이자 ‘강인한 개척자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간이 된다. 야생을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거주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은폐된다. 그리고 인간과 끝없이 분리된 이상적 공간인 자연은 오히려 인간이 점유한 곳으로부터 점차 밀려난다는 것이다. [4] 도대체 「테라 닐」에서 재생을 주도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곳에 자연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재생된 자연에서 인간이 떠나야 함을 당위로 만든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는 완전히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가? 「테라 닐」의 마지막 미스터리는 크로넌이 설명하는 불안의 위계를 담지한다. 「테라 닐」의 인류가 바라보는 자연이란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잔존하는 거대화한 분재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테라 닐」의 플레이를 끝내고 나면 그런 의문에 봉착한다. 왜 이 게임의 인류는 재생된 자연과 하나되어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연의 재생이 가능한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연과의 격리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테라 닐」의 인류가 거주하는 곳은 게임의 배경이 되는 행성에서 까마득히 먼 또 다른 행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억류된 오염과 방사능과 오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재생의 기술이 보여주는 모순의 빈 공간에는 이렇듯 분리된 불안의 상상력이 가득 차오른다. 크로넌은 이러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의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 비자연과 자연, 타락과 비타락이 세상을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개념적 지도로 기능하는 양극적 도덕 저울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풍경의 전체 연속체를 포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도시, 교외, 전원, 야생은 각각 고유한 적절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것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그 각각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멀리 사는 이국적인 타자만큼이나 내면의 타자와 옆집의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자연적 사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이다. 특히 우리는 도시에서 야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집"이라는 단어 안에 어떻게든 포함될 수 있는 공통의 중간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결국 집은 우리가 생계를 꾸리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책임을 지는 장소이며, 그 안에 있는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지속시키려 노력하는 장소다.” [5] 역 건설이라는 메커닉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 플레이어가 「테라 닐」의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미지는 재생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신적인 관점의 감상 모드다. 나무가 우거지고, 비가 내리고, 바다에 산호가 가득한 이 풍요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결코 향유할 수 없다. 감상 모드를 끝내고 나서면 사라지는 이 환영과도 같은 이미지에는 실제로 플레이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잠시나마라도 이 안에서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낚시를 하는 체험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을 모두 끝내면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샘플을 실은 우주선이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를 이끌어온 환경 재생 매뉴얼이 그 우주선의 내부에 안치된다. 이는 환경의 재생을 끝내고 ‘그들만의 삶’을 인정하며 또 다른 재생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광경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구의 샘플들을 통해 어떠한 환경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준비처럼도 보일 수 있다. 「테라 닐」의 플레이 플로우가 그 모든 과정을 증명한다. 우주선이 ‘지구의 것’을 가지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상해보자. 인류는 지구를 두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으며, 지금 가지고 날아가는 모든 샘플과 자료는 그들의 행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또 다른 행성을 ‘지구화Terraforming’하려한다는 상상은 끊어낼 수 없다. 수복이 끝난 행성은 홀로 놔둔 채, 인간은 우주로 나아간다. 아니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나가보자. 혹시 「테라 닐」의 우주에는 인류가 없는 것 아닐까? 이 세계를 재생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다른 차원, 다른 의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테라 닐」의 세계 내에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 훼손의 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징벌적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제공하는 것은 우리는 절대 가지지 못할 ‘안전한 절멸’의 경험이다. 모니터 바깥의 인간, 그러니까 재생 주체로서의 플레이어는 세계 내부와 무관하게 현전하며 행성을 관리한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절멸의 아픔을 낭만적으로 느끼는 이 주체에게 있어,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행성은 그저 잘 가꿔진 분재의 일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샘플을 가지고 떠나는 우주선의 아름다운 상승은 우주 전체가 분재화될 씨앗 운반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안전한 절멸의 경험은 결국 무한한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가 펼쳐진 가능성의 우주를 꿈꾸게 한다. [1] Donna Harraway(1997),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 Routledge [2] 클라이브 해밀튼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2018) [3] Samuel Horti(2019), 「What Anno 1800 gets wrong, and right, about colonialism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PC Gamers [4] William Cronon(1995), 『Uncommon Ground: Rethinking the Human Place in Nature』 [5] William Cronon(1995), 앞의 책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2023 동아시아 인디게임 답사기: bitsummit 그리고 G-eight

    제일 더운 7월에 개최하기로 마음먹은 듯한 일본의 인디 게임 행사 “BitSummit”과, 버닝 비버와 마찬가지로 작년으로 2회차를 맞이한, 그리고 날짜도 거의 비슷하게 12월 초에 개최하지만 훨씬 따뜻한 대만 타이베이의 “G-Eight”이 오늘 답사기의 주인공들이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unhyeok Lim A former science student, former economics major, and current game designer—who can't tell whether a love of well-rounded "hexagon" characters is why life turned out balanced, or whether life turning out that way is why the hexagon characters appeal. Lives a life of enjoying, and now and then learning.

  • 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것,

    선택을 위해 제시되는 두 개의 분기점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 삶, 매끈한 하나의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굴절된 한 분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그 선택이 충실한 것임을 간절하게 희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 Back 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것, 21 GG Vol. 24. 12. 10. 모든 미디어는 동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다른 매체들을 상호 참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기를 통해 구현된 게임과 비교해본다면 콘솔이나 PC를 통해 플레이할 수 있는 지금의 어드벤처 게임은 동일한 영역에서 다루기 어려울 정도다. 하나의 사(史)를 기술할 수 있을 만큼 개별적인 영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게임은 각각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게임 디자인을 비롯한 재현적 특징과 이에 따른 플레이 방식이 상이하게 분화됐다. 이 과정에서 게임은 다른 시각 중심의 미디어 기법을 적극적으로 재매개(remediation)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자주 활용되는 영화의 컷 분할이나 카메라 기법부터 드라마 시리즈를 차용한 에피소드식 전개를 서사를 구성하는 큰 축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그 예시를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앞서 거론된 미디어들보다는 드물지만 보다 이전부터 근대를 상징하는 기술이자 매체였던 대상, 바로 ‘사진’을 재매개하는 방식을 통해 주요 사건을 전개하는 게임도 존재한다. 돈노드의 대표작 가 그러하다. 블랙웰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 맥스는 5년 만에 혼자 돌아온 고향에서 적응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클로이와 재회하기 이전까지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사진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할 것인가 여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나서 맥스의 세계는 단절되었던 우정과 관계의 회복, 학교 내 커뮤니티에서 초래되는 약물을 포함한 폭력의 문제, 나아가 지역 내 실종사건까지 급속하게 확장된다. 지역 유지인 가문 덕분에 교내에서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집에서는 무시당하는 네이선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적인 성향을 통해 보여준다. 그 네이선이 총기로 위협하다 살해한 대상이 자신의 친구이자 이사하면서 관계가 단절된 클로이라는 것을 맥스는 시간을 돌려 그녀를 구한 뒤에서야 깨닫는다. *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특정한 관점과 초점을 맞출 대상을 선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맥스가 찍은 파란 나비는 의 시발점이자 선택의 종결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된다. 결정적 실수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동일한 시간선의 과거를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수정하고자 하는 상상은 너무도 흔한 클리셰가 되었다. 다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소환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세이브’, ‘로드’라는 게임 디자인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부터 요시다 히로시(吉田寛)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특수한 재현 양상이 다른 미디어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지적은 유구하다. 게임이 다른 미디어를 재매개하며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웹소설, 애니메이션 역시 게임을 재매개하며 새로운 방식의 서사를 찾아냈다. 에서 시간을 조절하는 맥스의 능력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특정한 국면을 분절적으로 저장하고 다시 불러오거나 실패한 과거를 성공한 현재로 덮어쓴다는 게임의 독특한 시간 재현 방식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정지시키고 특정한 국면의 시간선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음에도 맥스의 이능은 전능하지 않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붙들고자 하는 이능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도 사진을 매개로 하고 있으며 사진이 갖는 매체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맥스가 자신이 찍힌 사진을 통해 사진이 포착한 시간의 한정된 공간 일부에 위치한 자신의 행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세 번째 에피소드인 ‘카오스 이론’ 중에서도 후반부다. 클로이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대마를 피우며, 트레일러에 거주하는 마약상에게도 협박을 받는 문제적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라 생각한다. 맥스가 도달한 시간선은 바로 그 클로이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직전 집을 나설 때다. 사진이 포착한 좁은 공간 내에서 차키를 숨기는 일에 성공한 맥스는 클로이의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건을 막는다. 그러나 13살의 맥스가 저지한 사고 이후 18살의 맥스가 되어 마주한 새로운 현재는 전신 마비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클로이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는 맥스의 시점에서 선택한 결과가 과거, 현재,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지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특정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에 자리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재현을 위한 도구로 캔버스가 아닌 사진기를 선택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사진은 결국 특정한 앵글을 통해 제한된 대상의 부분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의 주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그것은 어떤 대상을 선택하고 무수한 상황 속에서 특정 국면만을 포착하는 하나의 시선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동시에 분절된 샷(shot)은 결코 인간이 전지적일 수 없으며 파편화된 특정 장면을 통해 이어놓은 느슨한 인과가 늘 그 밖의 다른 균열을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매체적 특성은 어드벤처 게임의 수색 혹은 탐사와도 맞물린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 서사가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과는 별도로 특정한 상황에서 정지된 시간과 공간에 위치한다. 다수의 선택지를 대면하기에 앞서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탐색은 맥스의 이능과 게임이 디자인한 플레이어의 권력을 중첩시킨다. 플레이어 아울러 맥스는 판단을 지연하거나 혹은 선택을 번복하는 방식을 통해 더 나은 경로를 찾고 자신이 계획한 시간선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지향점이다. 특정한 국면에서 수행되는 서사와 탐사는 가능성의 다른 지점들의 내적 규모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접한 유형을 통해서만 타인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모든 면모를 알 수 있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 불가능하다. 클로이가 실종자 몽타주를 붙여 가면서 애타게 찾고 있던 레이첼 역시 탐색을 거듭하다 보면 클로이가 진술한 친구 레이첼과는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교사 제퍼슨과 내연 관계였다는 소문, 마약상 프랭크와 연인에 가까워 보이는 정서적 유대를 가졌던 과거는 클로이가 아는 레이첼과는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예다. 블랙웰을 다니는 누구라도 그를 싫어할 것이라 평가받는 클로이의 양부 데이빗은 암실에 감금된 맥스가 탈출하는 데 일조하는 결정적인 활약을 한다. 비록 그가 직업 군인이었던 시절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압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클로이를 염려하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강박에 가까운 조사와 수집, 수사를 통해 뒤늦게 증명된다. 그렇기에 (플레이어와 맥스 모두를 포함한) ‘나’의 현재적 판단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쉽지 않다. 불확실하게 알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선택과 번복이 계속될수록 시간선을 리셋하는 것에 대한 리스크는 커지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그럼에도 선택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책임에 따라오는 무게를 동반한다. 의 탁월한 지점은 마지막 선택을 남겨둔 맥스의 ‘악몽’ 부분의 묘사에 있다. 게임은 이제 플레이 문법의 관성을 비튼 메타 게임도 그 수를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정한 서사적 클리셰를 누적해왔다. 친구 혹은 연인, 부모님과 같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한 선택과 분투는 익숙한 서사다. 그러나 대화가 단절되어 멀어졌다 5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위해 분투하는 맥스의 내면은 어떨까? 클로이와 만난 일주일 간의 맥스는 분명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누구 하나의 충실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클로이는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고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인간상이다. 동시에 몇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정서적으로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악몽이 맥스에게 보여주는 클로이는 그녀의 미숙함을 조롱하고 맥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맥스와의 관계 이상의 유대를 과시한다. 악몽은 자신의 충실성이 배반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내면을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살리고 싶어 했던 클로이와의 관계가 아카디안 만을 떠나서도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반복되던 블랙웰에서의 일주일이 그들의 가장 예외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 선택을 위해 제시되는 두 개의 분기점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 삶, 매끈한 하나의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굴절된 한 분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그 선택이 충실한 것임을 간절하게 희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夢としてのクソゲ

    「ファミコンを通じて超能力を開発する」というテーマで開発されたゲームがあった。 1980年代当時の日本の超能力ブームのなか、超能力者として知られていた清田益章氏(通称、「エスパー清田」)が監修した『マインドシーカー』(FC,1989)という作品だ。作中に登場する清田氏の指示をこなし、この作品を遊ぶことで、実際に超能力が使え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た。 < Back 夢としてのクソゲ 05 GG Vol. 22. 4. 10. * 이 글의 한글 번역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culturemagazinegg.wixsite.com b3ca971a-22ba-428a-8fde-4af1a167b94f "패미컴을 통해 초능력을 개발한다"라는 테마로 개발된 게임이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초능력 붐 속에서 초능력자로 알려졌던 키요타 마스아키(清田益章; 통칭, 에스퍼 키요타)씨가 감수한 〈마인드시커〉라는 작품이다. 플레이 과정에서 조언자 격으로 등장하는 키요타씨의 지시를 받아 가며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핵심 컨셉은 "실제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였다. 超能力開発ゲーム『マインドシーカー』 「ファミコンを通じて超能力を開発する」というテーマで開発されたゲームがあった。 1980年代当時の日本の超能力ブームのなか、超能力者として知られていた清田益章氏(通称、「エスパー清田」)が監修した『マインドシーカー』(FC,1989)という作品だ。作中に登場する清田氏の指示をこなし、この作品を遊ぶことで、実際に超能力が使え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た。 筆者も、このゲームを昔、実際にやってみたことがある。しかしながら、そもそもゲームが要求する課題に応えることができない。「では、まず透視をしてみましょう」とか、「予知をしてみましょう」というような課題が次々に出てくる。残念ながら、かすかな超能力も秘めていなかった(?)筆者にとっては、初期の課題からしてすでに達成困難だった。そのため、超能力は得るには至らなかった。 『マインドシーカー』は、まともにクリアすることができず、まともに楽しむことも難しく、(おそらく)超能力を開発することもできない。それゆえ、この作品は、何一つ成功を収めているとは言えない作品であると言ってもいい。 そう、何一つ成功を収めていないのだ。 しかし、それでも、この作品には、特筆すべきものがあると言いたい。 それは、作り手と、遊び手の、ゲームへの「夢」が詰め込まれているということだ。そのあまりに直接的な夢のあり方の痕跡を確認できるという意味において、この作品ほどわかりやすい作品は珍しい。本稿では、この「夢」をどのように評価するべきかということを少しだけ書いてみたいと思う。 夢の装置としてのコンピュータ・ゲーム 『マインドシーカー』の発売された当時、コンピュータ・ゲームという文化が、かつて担っていた面白さの一部は、このようなものだった。すなわち、人々の無制限な夢を実現してくれる機械であるということだった。 コンピュータの中のキャラクターと対戦ができる。登場人物と話ができる。モニターに向かって銃を撃ったら反応を返してくれる。声を入力することができる……今では当然とも思えるこれらのことは、1980年代に多くの人の目の前に急速に日常に現れた新しいテクノロジーのあり方だった。「コンピュータが進化すれば、ゲームでなんでもできるようになる」という、無責任な夢を多くの子供が信じたし、ゲームの作り手は、その夢をどんどん具現化していった。それが1980年代の、ファミコンがヒットし、ゲームというメディア自体が多くの人の、果てしない夢を、ある意味で無責任に担ってしまうことが可能だった時代の風景だった。 もっとも、テクノロジーが人々の「夢」を無責任に背負うという構図それ自体は、コンピュータば・ゲームに限ったことではない。佐藤俊樹は、情報社会の未来を語る情報社会論の言説が何度も何度も同じ夢を繰り返しみてきたということを1996年に指摘している(『ノイマンの夢・近代の欲望』1996,講談社選書メチエ)。1970年代にも夢は語られ、1980年代にも夢は語られ、繰り返し、繰り返し「情報技術が社会を変える」という「神話」が語られてきたという。佐藤は、図書館のなかに溜まっている情報社会論を議論する構図がほとんど変化していない、ということをある日、発見し、そのことに驚いたという。 「コンピュータがどう社会を変えていくか」という言説が、オトナが社会に見る夢を際限なく拡大させる装置であるとするならば、1980年代のコンピュータ・ゲームは、子供が遊びに見る夢を際限なく拡大させていく装置であったと言ってもいい。1980年代の世界は、その夢の「素朴さ」という点において、2022年現在とは隔絶したものがある。もちろん、2022年現在においても、人々はAIに過剰な夢を託し、もっと本格的なVRゲームの実現を心待ちにしている。しかし、1980年代に見られた夢とは、どうも、その性質が異なっている。 誰が、1980年代のクソゲーの担い手だったのか? 何が異なっているのかといえば、無茶な夢の担い手が、一体誰だったのかということだ。 1980年代の伝説的なクソゲーを作ったのは、ポッと出の新人 や、他業界の素人 には限らなかった。「クソゲー」の担い手は、しばしばゲーム業界の中心人物だった。 『マインドシーカー』の開発プロデューサーは、あの『パックマン』の生みの親である岩谷徹が勤めている。そして、開発の中心にいた鈴木浩司は、その後1997年にRPGのあり方に大きな波紋を投げかけた『moon』の開発に関わり、今で言うインディーゲーム文化の先駆けとなる作品に大きな貢献を果たした人物でもある。 ゲーム業界の重要人物が、「クソゲー」に関わるという構図は、実は珍しくない。アメリカの家庭用ゲーム機のマーケットの崩壊(いわゆる「アタリショック」)を導く要因の一部となった「伝説のクソゲー」として参照される『E.T.』(Atari 2600,1982)の開発担当者Howard Scott Warshawも、当時のアタリ社におけるスター開発者だった。『Yar’s Revenge』(Atari 2600,1981)というAtari 2600において最も売れたとされるタイトルの開発者である 。Howard Scott Warshawは、無茶な話を勢いよく引き受けて、『E.T.』を作った。 ちなみに、日本の1980年代の代表的なクソゲーである『たけしの挑戦状』は、今で言うところの「オープン・ワールド」の実装を夢見て、華々しく失敗した作品ということができるが、これはゲーム業界の内部ではなく、タレントのビートたけしによる素朴な発案だった 。 彼らは、コンピュータ・ゲームに人々が見ていた「夢」を引き受け、そして失敗したのである。 今思えば、それは、あまりにも馬鹿馬鹿しく、未熟で、粗末なものだった。そう、言うことはできる。そして、時代の寵児たちが、馬鹿馬鹿しい失敗をできたということは、ゲーム業界全体が若い時代特有の特権だったといってもいい。馬鹿げた夢をひきうけ、それに無謀に挑戦することが許されたのだ。それは、出来上がった作品を見てみれば、不幸なプロジェクトだったようにも見えるかもしれない。 しかし、2022年の現在から見てみれば、業界のトップスターが、ひどく馬鹿げた企画に、馬鹿げた予算をかけ、馬鹿げた情熱を注ぐということは、ほとんど見ない風景になってしまった。もちろん、突拍子もない企画でヒットを狙おうとすることや、失敗するプロジェクト自体は今でも存在する。しかし、そこにトップクリエイターが最初から張り付き、巨額の予算がかけられるということ自体は、ゲーム開発に関わるリスクの意識が発達した現代の大規模開発では、なかなか見られないものになった。 繰り返すが、1980年代のクソゲーのもつ「愚かさ」は、開発者たちの無能さゆえではない。むしろ、未熟で有能な人々が、夢を煮詰めたプロジェクトに全力で取り組んだものの痕跡が、1980年代の「クソゲー」なのである。 新しいものをつくる装置としてのクソゲー これほどまでに、素朴な欲望の発露によって、大作を作ろうとする志しは、今となっては、むしろ眩しくすらある。 「超能力を開発できるゲーム」など、馬鹿らしいにもほどがあるし、1980年代に大規模なオープン・ワールドのゲームをつくろうなどという野望もあまりに無理があった。   この後、コンピュータ・ゲームという世界のなかに漂う「夢」を引き受ける一つのピークとして生まれた作品は、1999年の『シェンムー』(DC,1999)だっただろう。『シェンムー』もまた、夢が詰め込まれた作品だった。『シェンムー』はもう一つの現実世界をゲームの中に実装しようという多くの人が夢見ることの一つを、愚直に実現しようとした作品の一つだ。この作品が残したのは赤字だけではなく、失敗とも成功ともなんとも言い難い強烈な印象だった。今の「オープン・ワールド」と言われる作品の多くは、直接にせよ間接にせよ『シェンムー』の試行錯誤の結果を反映させてつくられている。 コンピュータに人々が見る「夢」は多くの場合、無責任なものだ。 それはしばしば愚かだったり、詐欺まがいであると言ってもいい。その愚かさはしばしば滑稽なものになり、出来上がったものは笑いを誘う。人々が何かを笑うときというのは、ある認識の枠組みを外側からメタ視点に立てるようになっている瞬間でもある。夢は、その内側にまどろんでいるときには尊く、その外側に出れば、ときには笑いを誘う。「夢」を見るとういうことは、その意味で滑稽であることが宿命付けられたものだと言っていい。 ゲーム業界が成熟するほどに、笑えるほどに愚かな作品をつくることは大手のトップクリエイターの仕事としては難しくなった。その結果、1990年代も後半になってくると、より小さなゲームの開発元が果敢なクソゲーも、単に開発力不足によるクソゲーも、その両方を担うようになっていった。現代では広大に広がるインディーマーケットがその主力を担っている。 我々は、笑えるほどに愚かしいものをつくることによって、新しいものをつくることができるとも言える。我々が新しいものを見たいと思い、前に進みたいと思う欲望と、笑えるほどに愚かな作品をつくってしまうことは表裏一体の現象である。 私は『マインドシーカー』を起動して、久々に遊んでみると、そこにはもちろん、笑ってしまうような馬鹿馬鹿しさがある。たしかに、ゲーム自体は馬鹿らしいのだ。しかし、このゲームは、同時に輝いているようにも感じてしまう。それは、その馬鹿らしさを可能にしているものの存在を背後に感じ取ってしまうからだ。夢をみて見たいと思う人々の子供のようなワクワクとした気持ちが、この作品の裏側には横たわっている。それは無茶なものだったとしてもいい。 それこそが世界の多様さと豊かさのありようだ、と私は考える。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Inoue Akito ゲーム研究者。現在、立命館大学講師。国際大学GLOCOM助教、関西大学特任准教授などを経て現在に至る。「ゲームとは何か」という問いを中心に据えつつ、ゲームのアーカイブや、ゲームを応用した社会的課題の解決に関わるプロジェクトなどにも取り組んでいる。 Game researcher. Currently a Senior Lecturer at Ritsumeikan University. After completing a master's degree at Keio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Media and Governance, he worked as an assistant professor at International University of Japan GLOCOM and a specially appointed associate professor at Kansai University before assuming his current position. He is also involved in projects related to game archives and databases. He is the author of "Gamification" (NHK Publishing, 2012).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ivist, Writer) Feng Tien Shao (Activist, Writer) Myeonggyo Hong Activist and writer. Works at the social movement organization Platform C on East Asian international solidarity and social movements. Author of To My Vanished Chinese Friend and A Ghost Throws a Punch at the World, and translator of Xinjiang Uyghur Dystopia and Dying for an iPhone (co-trans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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