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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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4. 10.
[편집자주]
비디오 게임은 그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해 관찰해 보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각을 지닐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시각과 기술에 대한 시각이 있을 수 있고, 게임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시각과 게임개발자에 대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미디어에 대한 시각과 산업에 대한 시각도 있으며, 최소한 사회변화와 게임의 역사에 대한 시각도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없어서는 안 될 두 개의 성악 파트처럼, 그 소일거리라는 강바닥에서 지식의 악장을 연주한다.
펑파이신문(www.thepaper.cn)의 ‘아이디어 시장’ 섹션은 인문과 사상조류의 관점에서 오늘날 게임적 현실의 주요한 방향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조사 및 파악해 게임 비평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매주 토요일 ‘게임론’ 연재를 시작한다.)
‘비평의 방향’, ‘역사의 시선’, ‘문화의 논리’, ‘매체와 현실성의 확장’ 등 다양한 글들이 담긴 연재로서, 한·중·일 관련 분야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연구자, 게임연구에 뜻을 둔 젊은 연구자, 게임업계의 선배들과 종사자 등 업계와 학계 각 방면 게임동호인들의 원고를 모을 것이다. 이를 통해 게임비평의 개념과 관점을 제시하고, 게임비평의 가치·가능성·방향·경로 등을 두고 토론할 것이다. 또, 역사를 지향 삼아 문화와 기술, 동아시아와 글로벌, 현대와 포스트모던 등 맥락에서 게임 역사의 원류와 방향을 드러내고, 게임텍스트와 사회문화 사조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탐구하는 것은 게임이 장난감에서 문화미디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특징을 나타낸다. 비판적 시각으로 오늘날 게임 세계의 내부적 원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 게임산업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문화생산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게임(산업) 문화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탐색하며, 게임의 전통적 매체에 대한 재생산과 게임을 통한 현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밖에도 이 연재는 게임과 젠더에 대한 토픽과 게임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젠더를 포함하며, 게임 속의 젠더 의제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어들에 대한 여러 기사들, 서버운영자(网管)와 스트리머(主播), 대리게이머(金币农夫; 중국 게임계의 한 현상.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게임을 하는 사람들), 따이롄(代练; 온라인 게임에서 누군가의 레벨업을 돕고, 돈을 받는 행위들), e스포츠 선수 등 게임이라는 영역 내 변두리에 있는 이색적인 집단을 소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매개로 일본과 한국에서 게임비평의 기준점을 제공했거나 제공하고 있는 해외 작품들을 골라 게임 배후의 광범한 구도에 대해 논할 것이다.
[역자의 말] 각주는 모두 국내 출간물 표기 또는 역주로, 원문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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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는 서민적인(接地气)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중국 학부모』는 모위완 게임즈(墨鱼玩游戏, Moyuwan Games)가 제작한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2018년 9월 29일 코코넛아일랜드 게임즈에서 대행해 출시했다. 이 게임이 출시되며 인터넷에선 많은 화제가 일었는데, 가장 인기있는 댓글평에는 “매우 리얼하다”, “실제 삶과 닮았다”, “너무 공감된다” 등이 있다.
『중국 학부모』의 게임 소개 페이지에는 “현실적인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자기 포지셔닝은 대부분의 게이머가 이 게임에 대해 평가하는 바와 일치한다. 이 게임은 아이가 태어나 대학 입시(高考)를 치르기까지를 따라가는데,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 미션은 바로 아이가 만족할만한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에 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부모와 자녀의 이중 역할을 맡는다. 부모로서의 플레이어는 자녀의 하루 일정을 짜야 하는데, 아이가 공부할 내용과 개발할 기술 등을 결정해야 하며, 자녀로서의 플레이어는 자녀의 시각에서 대인 관계와 문제 해결 등을 진행하고, 학급 임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이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오락용품을 사는 등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게임 플레이 방법으로서는 평범한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보이지만, 게임에 ‘리얼리즘’의 분위기를 채워주는 독특한 ‘중국식’ 가정의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학부모는 자녀를 활용해 이웃이나 친구의 자녀와 ‘체면 대결’을 치러야 하고, 아이는 부모의 체면을 세워줌으로서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춘절 연휴에 친척들과 ‘홍바오2) 쟁탈전(红包拉锯战)’을 치를 때 홍바오를 너무 빨리 먹으면 친척이 기분 나빠하고, 또 너무 양보하면 어머니가 기분 나빠한다. 홍바오를 가져갈 때 반드시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또, 부모에게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하면 부모는 “어린 애가 무슨 스트레스니?”라고 질책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 수치는 더 높아진다. 이처럼 모든 디테일들이 『중국 학부모』와 자녀들 간 세대 갈등을 강조하는데, 이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하다”고 “공감”하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에 대한 평가들은 비판과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디테일에 대한 언론들의 경탄은 『중국 학부모』를 더더욱 ‘중국식 교육’에 대한 비판의 훌륭한 소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중국 학부모』가 제시하는 다양한 ‘현실’이란 비단 중국 가정교육의 실제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 경험으로 구조적 문제를 감추는 것에 있다.
과잉 경험 : ‘현실’과 ‘현장’
『중국 학부모』의 시나리오 텍스트 내용 대부분은 현실 조사를 통해 발췌한 것으로, 조사 대상자가 진술한 실제 경험을 게임 속에 직접 배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학부모』의 줄거리는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구축한 거대한 ‘경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선 일련의 무작위(随机; 랜덤, 임의) 선택이 촉발되고, 플레이어의 선택은 아이의 속성치에 영향을 미친다.
● 오늘 부모님은 일찍 잠들었고, 당신은 방에서 몰래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10연승의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기 직전, 당신은 숨을 꾹 참는데… 그런데 돌연 방의 문이 열렸네요!
○ 휴대폰을 끄고 재빨리 숨을 참고 잠자는 척한다. 그리곤 긴장을 풀고 강좌를 듣는다. (기억력 40 증가)
○ 큰 소리로, 당신이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 방에서 나간다. (지능 50 증가)
○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플레이한다. 알고보니 그것은 가을바람이 지나간 잘못된 경보였다. (오성 悟性 50 증가)
이러한 유형의 선택지에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다른 길 - 부모님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휴대폰을 넘기는 등 - 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무작위 선택의 몰입감은 전적으로 플레이어 선택에 대한 제한에 기반하며, 플레이어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척하는 옵션으로 물러선다고 할 때, 플레이어가 ‘자주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수면 역시 플레이어의 현실 경험을 쌓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이는 나(플레이어) 스스로 선택하고 “공감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게임 속에서 촉발되는 무작위위 이벤트들도 있다. 이벤트가 발생하면 플레이어에게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선택을 하고나면 게임 화면상에 나와 같은 선택을 한 플레이어가 몇 명인지 알려준다.
● 엄마와 할머니는 기저귀를 사용할지,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할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 어린아이는 무료 입장! 하지만 당신의 키가 기준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엄마는 당신에게 무릎을 조금 굽혀서 기준선을 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네요.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 수업시간에 몰래 떠들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벌점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선생님에게, 애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시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와 같은 설계는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확고하게 포착한다. 플레이어가 ‘예’를 선택하든 ‘아니오’를 선택하든,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비슷한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아직 겪지 못한” 경험은 플레이어를 특정 집단에 속할 수 있도록 묶어주고, 여러 플레이어들이 “공감한다”고 외치게 하는 ‘현실’의 요소가 된다.
여기서 『중국 학부모』가 ‘리얼리즘’의 에토스를 구축하려는 전략이 드러난다: 즉,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제한함으로써, 플레이어는 특정 선택지 그룹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무작위위 선택’에서 플레이어의 ‘생각’인 것으로 바뀌도록 설정돼 있으며, 이러한 무작위 선택에서 플레이어의 경험(또는 미경험)은 일반적인 경험(또는 미경험)으로 변한다. 이러한 설정 하에서 『중국 학부모』는 거대한 ‘경험의 집합체’로서 스스로의 고유한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중국 학부모』가 제공하는 경험은 결국 과잉 경험이다. 저우즈창(周志强) 교수는 벤야민의 「경험과 빈곤」(1933)3) 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위 ‘경험과 빈곤’이 반드시 사람들의 경험 생산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바로 ‘경험과잉’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생산 시스템이 끊임없이 현실적 상태를 감추는 경험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경험과 빈곤을 구성하게 된다. (…) 감정과 경험이 풍부할수록 실제 경험은 더 적어진다.”
- 저우즈창, 「유사 경험 시대의 문학정치비평 - 벤야민과 우화론 비평」(伪经验时代的文学政治批评——本雅明与寓言论批评), 『난징사회과학』, 2012년 제12기.
과잉 경험은 거짓 경험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감정이 충만하며, 생생한 경험을 가리킨다. 하지만 풍부하고 충만한 것처럼 보이는 과잉 경험이 많을수록, 실제적인 경험은 적어진다. 『중국 학부모』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은 모두 이와 같은 과잉 경험이다. 그것들은 진실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분노의 정서와 자조적인 구원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수십 가지의 무작위 이벤트와 옵션들이 구성한 과잉 경험의 집합체에서 플레이어의 지나간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 몇 가지만 있으면 그것들은 죄다 “공감”과 같은 것으로 식별될 것이다. 별자리 안내서의 어떤 별자리에 대한 서술처럼 한두 가지 자신과 맞아떨어지는 내용만 있으면, 독자는 “정말 진짜같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의 ‘리얼리즘’은 차라리 “현장주의”라고 하는 편이 낫다. 저우즈창 교수는 “오늘날 리얼리즘은 서민적인 행위나 사실적 표현이라는 담론에 포위되어, 서서히 현장주의로 대체되고 있다”4) 고 말한 바 있다. 즉, 점차 더 많은 ‘리얼리즘’ 작품들이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공감’을 ‘실제 상황’으로, 과잉 경험을 실제 경험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 경험은 현장감이 충만하고 감정도 풍부하지만, 반드시 진실된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중국 학부모』는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한 ‘통점’을 통해 과잉되고도 풍부하며 충만한 고통의 경험을 플레이어의 유일한 경험으로 설정한다.
벤야민은 「경험과 빈곤」에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 평가 절하가 진지전에 의해 까발려진 전략 경험, 인플레이션에 의해 까발려진 경제 경험, 기근을 통해 폭로된 신체 경험, 권력자들에 의해 까발려진 윤리적 경험 등 그들이 직접적으로 겪은 전쟁과 그 영향에 의해 폭로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전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는 전쟁의 이러한 문제를 설명할 수 없었을 때 그러한 경험 부족을 은폐하기 위해 균열을 메우는 일련의 심령주의(오컬트)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인 경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 할 때마다 사람들은 명확한 비난의 대상을 찾는 경향이 있다. 심령주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대 중국 책력 상의 불길한 징조라던지, 관상이 좋지 않았다던지, 흉년(流年不顺) 등 비난 대상이 그것이다. 즉, 경험의 과잉을 통해 경험의 결핍을 덮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라는 이 게임에서도 ‘중국 학부모’는 플레이어들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중국 학부모』가 드러내는 과잉 경험은 구조적 문제에 대해 ‘가정’이라는 매우 적나라한 답을 제공한다. 청년들이 대인관계, 일과 학업, 심지어 친밀한 관계에서 겪는 각종 문제들은 하나같이 가족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중국 학부모’는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고정 지시어”5) , 즉 대상 안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다른 이들과 구별해낸 잉여이다. 원래 지적될 수 있는 것으로서 ‘중국 학부모’는 좋은 외모에, 독선적이며,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의 “유효한” 특징들을 암시했다. 하지만 ‘가정 원죄’라는 맥락에서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이는 일련의 특징들이 ‘중국 학부모’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 학부모가 이와 같은 특징들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중국 학부모’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고정 지시어로서의 “중국 학부모”와 반유대주의 논리 속의 유태인은 궤를 같이 한다. ——즉, 당신이 까다롭고,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에 유태인인 게 아니라, 당신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당신은 까다롭고 돈만 밝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독일 사회 전체의 문제는 유태인의 존재로 축소되어버렸듯, 각종 사회문제들은 게임 속에서 ‘중국 학부모’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과 같다.
“부모를 용서하라” : 주정주의7)적 해결 방안
『중국 학부모』 게임을 시작할 때 한 문장의 인용구가 나타난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나이가 들면 부모를 심판하며, 때로는 부모를 용서한다.” 8)
- 오스카 와일드
이 문구는 게임 전체의 기본 아이디어로서 ‘부모를 용서하라’로 설정했다. 플레이어가 1라운드를 끝내고 다음 세대 아이를 키우기 시작할 때, 게임의 2라운드에도 흥미로운 대화가 등장한다.
아빠(이전 세대의 플레이어가 키운 자식) : 생각치도 못했지만 나도 아이를 가질 나이가 됐으니, 교육을 잘 시켜야 할텐데, 우리 부모님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해!!!
엄마(이전 세대의 플레이어가 택한 동반자) : 당신과 함께 시부모님댁에 갈 때마다 당신이 아버님이랑 똑같단 생각이 들어! 생각하긴 뭘 생각해! 얼른 기저귀나 갈아!
대화를 나눈 후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게임은 이전의 메커니즘, 시스템, 무작위 이벤트, 무작위 선택 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체면 대결’, ‘홍바오 쟁탈전’, ‘재능 대결’, ‘작문 백일장’ 등 이벤트들이 마찬가지로 적지 않게 일어나고, 플레이어들은 부모의 희망 수치와 스트레스 수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춤으로써, 아이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가출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게임은 바로 이처럼 “당신을 당신의 부모로 바꾸는” 반복적 메커니즘을 통해, 플레이 방법의 측면에서 플레이어가 “부모를 용서”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비록 당신이 부모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더라도, 게임의 모든 메커니즘은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즉, 아이들에게 기술을 학습하도록 해야 하고, 아이들의 스케줄을 정리해야 하고, 아이들이 높은 성적을 받도록 해야 하며, 좋은 일자리를 얻도록 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아이는 메커니즘 속에서 새로운 ‘중국 학부모’가 된다. 그렇게 새로운 부모가 된 플레이어는 “내가 원치 않던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부모님의 고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게임 엔딩을 맞으면 아이의 소감 한 구절이 나타난다.
“대입 시험 전과 후의 일상이 꽤 다른 것 같단 생각을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저 자신은 더는 아이가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부모님 눈에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거죠. 부모님과 늘 함께 했던 날들이 그리워요. 그게 어떠했든 꽤나 아름다운 시기였어요.”
『중국 학부모』는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게임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온정적인 핵심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부모 탓은커녕 그리움과 용서가 담겨 있다.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네요.” —— 즉, 어린 시절에는 비록 항상 혼나고 이해받지 못했지만, 커서 보니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됐고, 부모님 눈에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게임 속에서 세대 간의 각종 갈등은 단지 노련한 농담에 불과하며, 감정의 대화합이 주제인 셈이다.
2015년에 인기리에 방송된 『환락송(欢乐颂)』에는 남존여비의 가정에서 자란 판셩메이(樊胜美)가 등장하는데, 한때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 중심에 있었다. 그 이후로 부모와 자녀 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여러 화제작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했다. 『도정호 : 가족의 재발견(都挺好)』, 『아빠와 함께 유학을(带着爸爸去留学)』, 『소환희(小欢喜)』 등이 그것이다. 이 드라마들은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중국 학부모’들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들의 내러티브에서 모든 문제는 가족 갈등에서 비롯되며, 문제해결 방식은 단 하나, 바로 부모와 자녀가 서로 이해하는 것에 있다.
따뜻한 결말로 과정상의 갈등을 희석시키는 것은 가정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드라마 『도정호 : 가족의 재발견』 전체 서사의 전환점은 마지막에 쑤다창(苏大强)이 유언을 남기는 부분에 있다. 쑤밍위(苏明玉)의 회사에서의 위기, 쑤밍청의 결혼 파탄, 쑤밍저의 사업 문제는 모두 쑤다창이 오열하며 “너희 세 형제자매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행동하고, 도울 수 있는 한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해결된다. 이때부터 온 가족의 관계가 빠르게 바뀌기 시작하는데, 쑤밍위는 아버지가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이유가 바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에 따라서 이 드라마의 전반부 갈등과 문제의 전말이 분명해진다. 한바탕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신파극이 일가족의 진실된 곤경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부모를 용서하라”는 주정주의적 결말은 가족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대체하는 해결이기도 하다. 과잉 경험 속에서 부모가 유일한 원망의 대상으로 세팅되어 있다면, “부모를 용서하라”의 결말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 되는 셈이다.
게임 전체의 설정은 플레이어가 부득불 ‘전철을 반복’하는 것에 있으며, 게임의 원망하는 내용과 감동적 결말은 플레이어가 부모를 용서하는 ‘전철을 반복’하도록 한다. 이는 일종의 스스로 문제를 옮긴 뒤 스스로를 설득하는 자화자찬의 대체 해결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부모』의 반복적인 메커니즘에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 부모가 낳은 문제가 아니라, 게임 메커니즘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용서하는 결론의 온정 강박 하에서 우리는 다시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네가 부모가 되어도 이렇게 할 거야” 같은 부모의 고뇌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리얼리즘 신화
『중국 학부모』에서 과잉 경험은 그것의 ‘리얼리즘’을 구축하는 기본요소다. 한데 흥미로운 점은 게임 전체의 리얼리즘이 하나의 ‘신화’를 기반으로 하며, 이것이 게임의 세대 간 속성의 계승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는 다른 모의 양성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키우는 대상의 속성을 평가하는 수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게임 속에서 아이의 속성은 IQ, EQ, 체력, 기억력, 상상력, 매력 등 다섯 가지로 나뉜다. 속성별 수치는 아이의 과목별 성적과 장래 직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게임의 기본적인 플레이 방법은 바로 부모의 ‘스케줄링’과 아이의 ‘브레인스토밍’을 기반으로 속성의 수치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전자는 부모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아이의 일정을 배치하여 아이의 특정 기능들을 배양하는 것이고, 후자는 아이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미니게임을 통해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세대 간 속성 계승은 바로 플레이어 세대가 키운 아이가 다음 라운드 게임에서 키울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이전 세대의 우세적인 속성이 아이의 몸에 물려지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플레이어가 키운 아이가 결국 프로그래머가 되면 다음 세대 아이는 IQ에 15점이 추가되고, EQ는 3점, 상상력 3점, 기억력 5점, 신체 3점이 추가된다. 만약 아이가 운동선수가 된다면, 신체에 더 많은 능력치가 추가되고, 다른 속성들엔 더 적게 부여된다. 세대 간 속성 계승을 통해 다음 세대 아이는 반드시 이전 세대보다 우수해지는데, 이는 즉 플레이어들이 세대를 거듭해 꾸준히 키워나가기만 한다면, 당신의 아이는 항상 칭화대와 베이징대 같은 명문대에 합격해 인생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게 됨을 뜻한다.
이처럼 “다음 세대가 전 세대보다 강하다”는 설정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본 동력이 된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의 게임 목표는 모두 “우리 가문의 몇 대손이 베이징대학에 합격하는지 보는 것”에 있다. 속성 수치로 플레이어의 게임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초 설정이다. 게임이 플레이할 가치를 갖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게임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플레이어들의 투입 시간이 누적되고 플레이 전략의 최적화됨으로써 끊임없이 수치가 증가할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게임 속 아이의 인생은 단순하고도 곤란해진다. 단순함이란 시간을 들여서 수치를 쌓고 최적화 전략을 짜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고, 곤란함이란 아무리 훌륭한 방안을 사용하더라도 자연적인 속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잉 경험으로 가득 찬 이 ‘리얼리즘’ 게임은 구조적 문제를 감추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돌출시킨다. 즉, 가장 비현실적이고 게임화된 수치 시스템을 빌리지 않는 한, 게임의 리얼리즘적 기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과 가장 무관한 부분인 세대 간 속성의 계승은 하나의 예정된 신화인데, 이 게임의 모든 ‘리얼리즘’이 이러한 계층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만약 이와 같은 신화 예고를 제거해버리면 그것이 중국 학부모든 미국 학부모든, 아이를 성공시킬 수 없다. 이 게임의 근본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다. 한 측면에서 아이는 그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의 속성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아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모순을 잠재우기 위한 계층 상승 신화는 곧 무결점 피부를 보여주면서도 그 속의 끔찍한 흉터를 암시하는 마스킹액과 같다.
여기서 세대 간 속성 계승에 따른 계층 상승은 그 자체의 비현실이 작품의 리얼리즘적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하나의 ‘리얼리즘 신화’가 되었다. 합리적이고 진실되며 현장감 넘치는 디테일을 모두 제거하고나면, 상징계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하드코어만 남게 되는데,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실재계의 손상”이다. 벤야민의 맥락에서 이 하드코어는 바로 아름다운 경험의 실체를 까발리는 인플레이션, 기근, 권력자이다. 그것은 바로 신화를 들춰내는 리얼리즘의 역설이며, 이는 우리에게 “계층 상승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출한다. 『중국 학부모』는 이 문제에 대해 말없이 침묵하며, 자신이 지닌 리얼리즘의 거짓을 폭로한다.
계층 상승의 신화 속에서 당신은 다섯 시간에 걸쳐 세 아이를 키우고 갑부나 대문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계층이 고착화된 구조적 문제 앞에서는 자녀의 학교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평생 열심히 일해도 자녀가 매일 수업을 빼먹고 인터넷PC방에 다니다가 결국 대입 시험에 실패해 “아빠는 맨날 일만 하느라 바빠서 내 공부엔 관심도 없었는데, 우리 집안은 내게 뭘 가져다 줬나"같은 글을 올릴 수 있다.
경제학자 마일스 코라크(Miles Corak)는 ‘위대한 개츠비 곡선(Great Gatsby Curve)’을 제시하면서 미국의 계층분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 곡선은 언론이 ‘아메리칸 드림’의 거짓을 지적할 때 볼 수 있다. 하지만 2003년 이래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도 0.46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핀디에(拼爹) 지수로 불리기도 하는 세대 간 소득탄력성 계수(intergenerational elasticity; IGE) 역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세대 간 소득탄력성 지수는 세대 간 소득 변화를 보여주며, 한 세대의 경제적 소득이 다음 세대의 경제적 소득 또는 경제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나타낸다.) 바로 이 두 지수가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구성하는 X·Y축이다.
『중국 학부모』에서 과잉 경험은 문제를 가정 문제로 단순화하고, 용서하는 결말은 이성주의 대결을 주정주의적 포용으로 유화시킨다. 최종적으로 이 게임은 우리에게 가족 구성원들 간에 서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다. 물론, 가족의 윤리적 문제는 상호 이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부모님의 고된 노력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 메커니즘의 강압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계층 상승의 신화와 고착화된 현실 사이에서 『중국 학부모』는 현실적인 디테일들로 가득하지만, 거짓된 신화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중국 학부모』의 리얼리즘은 결국 하나의 코딩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과잉 경험으로 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온정적인 결말을 통해 대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상상계와 상징계의 겹들은 실재계의 존재를 말소해버린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코딩에서 벗어난 하드코어는 언제나 실재계의 왜상으로 게임 속에 존재함으로써, 그 리얼리즘으로하여금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계층 상승의 ‘리얼리즘 신화’이다. 신화의 불가능성은 그 현실의 거짓을 암시하고, 달콤한 꿈 뒤에는 감출 수 없는 고착화된 모순이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 모순에 접근하려고 하면 주정주의적 가르침은 가족애를 내세워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혹은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전이시켜버린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공감의 향수나 ‘중국 학부모’에 대한 원망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게임 전체의 논리 뒤에 감추어져 있는 진짜 문제이다. 우리가 되물어야 하는 것은 ‘중국 학부모’가 어떠하냐가 아니라, 왜 이러하냐에 있다. ‘중국 학부모’의 문제는 가정의 윤리 문제가 아니며, 자녀와 부모 간 갈등 완화로 해결할 수도 없다. 이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우리는 더 이상 ‘출신 가정’의 아픔에 매달리지 않고 사회 전체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