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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행위성, 응우옌, 행위성의예술, 북리뷰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aehyun Kwon Writes and plans a range of projects. Works in the art world, yet is always more drawn to things not readily regarded as art. Explores how things outside art might be thought through as objects within it. Continues researching with weight placed on a perspective that grasps the political as a matter of the sensory. (7000eichen@gmail.com )
-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콘솔게임 시장으로 진입하는 한국 게임산업을 바라보며
자주는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지만 가끔 닌텐도 스위치 구매를 후회할 때가 있다. 최근 2년 넘게 스위치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개인적인 게임 취향 탓이다. 무거운 테이스트에 충분한 핍진성을 통해 몰입감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데, 밝은 테이스트에 캐주얼한 게임이 많은 닌텐도가 잘 맞지 않음을 너무 늦게 즉 스위치 구매 후에 깨달았다. < Back 11 GG Vol. 23.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ggap Hong Freelance writer—a job title suspected of being a synonym for "unemployed." Started out as a reporter at Ddanzi Ilbo, where broke the first story exposing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s comment-manipulation operation. A lifelong gamer who wrote a first piece of game criticism in 2001—and is very glad it has since been lost.
-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빅브라더, 파놉티콘, 전체주의, 감시, 혁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ivist, Writer) Liang Chenglin (梁成林) (Activist, Writer) Myeonggyo Hong Activist and writer. Works at the social movement organization Platform C on East Asian international solidarity and social movements. Author of To My Vanished Chinese Friend and A Ghost Throws a Punch at the World, and translator of Xinjiang Uyghur Dystopia and Dying for an iPhone (co-translated).
- 컨트롤러로 인한 게임플레이의 진화
내가 처음 비디오 게임의 존재를 경험한 것은 1985년으로, 당시 업무차 미국에 자주 다녀오던 작은 고모부가 선물로 들고 온 퐁 전용 게임기가 시작이었다. 퐁은 그저 막대 위치를 롤링 스위치로 조절하며 공을 받아내는 단순한 테니스형 대전 게임이었지만, 나에게는 TV에 나오는 화면을 내가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들 만한 경험이었다. < Back 컨트롤러로 인한 게임플레이의 진화 11 GG Vol. 23. 4. 10. 내가 처음 비디오 게임의 존재를 경험한 것은 1985년으로, 당시 업무차 미국에 자주 다녀오던 작은 고모부가 선물로 들고 온 퐁 전용 게임기가 시작이었다. 퐁은 그저 막대 위치를 롤링 스위치로 조절하며 공을 받아내는 단순한 테니스형 대전 게임이었지만, 나에게는 TV에 나오는 화면을 내가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들 만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비디오 게임의 개념을 익힌 나는, 더 많은 경험을 위해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아케이드 문화에 빠져들었고, 당연하게도 부모님은 흡연하는 사람들이 많은 오락실에 내가 방문하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으며, 이러한 상황에 놓인 아이가 나 하나뿐만은 아니었으니, 결국 하나둘 아케이드를 포기하고 집에서 부모님이 사준 패미컴 및 PC로 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가정용 게임플레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오락실을 하교 후 방문하는 것과 최근 타이밍 좋게 창간한 게임 전문 잡지인 게임월드를 집에서 밤에 읽는 것으로 갈증을 채웠다. 아케이드를 포기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케이드를 고집했던 이유는 집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업계의 선두를 달리는 기술력이 분명한 그래픽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중 하나로 아케이드 특유의 전용 디바이스가 주는 재미가 있었다. 전용 기체와 전용 컨트롤러로 즐기는 것은 가정용 게임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그 차이는 가정용으로 발매된 아케이드 이식작을 친구의 집에서 플레이할수록 더욱 명백하게 느껴졌다. 이후 시간이 흘러 나도 가정용 게임기를 집에서 즐기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아케이드 게임을 보다 원코인에 오래 즐길 수 있도록, 이식 소프트의 플레이 목적 그 이상의 이유가 없었다. 아케이드에서 로터리 레버를 장착해 레버를 돌리며 공격 방향을 바꿀 수 있던 미드나이트 레지스탕스, 공격 버튼이 일체화된 롤링 스위치를 돌리며 공격 방향을 정할 수 있던 포가튼 월드, 아웃런 등을 즐기다 가정용 이식작을 플레이하면 같은 게임이라도 그래픽 이전에 손맛의 차이부터 명백했다. 물론 가정용 게임기 역시 게임 체험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전용 컨트롤러들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파워 글러브, 세가 액티베이터 같은 독특한 컨셉의 컨트롤러는 게임잡지의 소개 덕인지 국내에도 꽤 알려져 게임 매장에 전시된 경우가 많아 적잖이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인식률도 떨어지고 컨트롤러에 어울리는 게임이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화제성에 비해 대부분은 시장에서 몇 개월 만에 자취를 감췄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HM1I8wgtc * 세가 액티베이터는 8방향으로 손이나 발을 뻗어 적외선을 끊으면 해당 방향의 신호가 컨트롤러를 대체하는 물건이었는데, 초마다 입력이 필요한 베어너클 등을 대표로 선보였다. 물론 펀치나 킥을 초마다 내지를 수는 없었기에 플레이 감각은 예상대로 좋지 않았다. 이처럼 많은 가정용 특수 컨트롤러들이 그 컨셉을 기술력과 대응 소프트가 받쳐주지 못해 사장되었고, 살아남은 컨트롤러 중에는 아케이드 기분을 집에서 즐기게 해주는 아케이드 스틱 정도가 그나마 대중성을 확보한 정도였지만, 가정용 게임기의 기본 입력 디바이스가 변화하면서 같은 장르의 게임이라도 아케이드와 차별화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범퍼 버튼이 들어간 슈퍼 패미컴의 6버튼 패드 사양으로, 1983년 출시된 패미컴의 폭발적인 인기에 오랫동안 가정용 비디오 게임은 방향키+2~3버튼으로 설계가 이어지던 터라 그만큼 조작 체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버튼이 많아지니 아이템을 실시간으로 교체하는 등 기존보다 다양해진 조작은 특히 액션 게임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였고, 하드웨어의 성능 향상이 더해져 록맨 X 같은 명작 액션 게임이 다수 선보여지기도 했다. 라이벌에 해당하는 메가드라이브의 경우는 3버튼으로 출발했지만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인기 덕에 6개의 공격을 오른손으로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6버튼 컨트롤러가 추후 발매되었는데, 당연히 3버튼 패드도 대응해야 했던 만큼 대부분 메가드라이브 6버튼 대응 게임의 구성은 3버튼의 키 동시 입력 기능으로 구성된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후 등장하는 대부분의 게임기는 5세대부터 최소 5버튼 이상으로 기본 패드의 버튼을 배치했으며, 이미 액션 게임의 트렌드가 최소 4버튼 이상이 기본으로 자리잡혔기 때문에 그 이하의 버튼 구성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현재도 이러한 구성은 크게 변하지 않은 만큼, 패드에 추가된 버튼의 수가 가정용 게임 트렌드까지 바꾸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같이 아케이드와 점차 차별되는 점 때문에 당시는 슈퍼 패미컴과 메가드라이브를 6버튼 사양의 아케이드 기체에 연결 후 시간제 사양으로 오락실에서 즐길 수 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특히 이때 출시된 게임기 중 하나인 3DO의 경우, 다양한 포맷을 재생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로 개발된 만큼 본체가 아닌 패드에 3.5파이 이어폰 잭이 붙어있어, 게임 사운드를 패드에 꽂은 이어폰만으로도 들을 수 있었기에 밤에 가족들이 깨지 않을 정도로 방이 조용하면서도 내 귀는 손쉽게 1초도 방심할 수 없는 체험이 가능하기도 했다. 그 뒤 3D 기술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하고, 비디오 게임이 장난감에서 첨단 산업으로 이미지가 변하던 1996년에 출시된 닌텐도 64의 패드는 입력 디바이스의 혁신이라고 봐도 틀림없었다. 아날로그 스틱을 통해 스틱을 기울이는 만큼 캐릭터의 이동속도가 달라지는 것도, 디지털 패드의 8 방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360 방향을 인식하는 컨트롤 감각도 놀라움 그 자체였으며, 후면에 붙은 Z 버튼과 4개의 C 버튼을 활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면서 시점을 조정하며 총을 쏘는’ 동작을 키보드와 마우스 조합이 아닌 콘솔에서 패드로도 처음 경험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별도 발매된 주변기기를 통해 패드에 진동 기능을 탑재한 것도 신선한 체험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가정용 컨트롤러의 기본 사양은 아케이드와 전혀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후 플레이스테이션이 이러한 아날로그 스틱과 진동 요소를 채택한 듀얼쇼크 패드를 선보였으며, 5세대 게임기 전쟁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승리하며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익숙해진 양쪽 아날로그 스틱과 범퍼+트리거 버튼 구성은 점차 다른 게임기에서도 기본으로 자리 잡힌다. 그 뒤로도 각 게임기는 제조사마다 개성있는 컨트롤러를 선보였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발전한다. 닌텐도는 다시 게임큐브에서 아날로그 방식 트리거를 선보여 ‘누르는 동안’과 ‘완전히 눌렀을 때’의 조작이 별도로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세가는 드림캐스트까지 계속 기본 패드의 혁신보다 게임에 맞는 전용 컨트롤러의 생산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마이크로 게임 캐릭터와 대화가 가능한 씨맨을 선보일 정도로 놀라운 발상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yxOAItutHA * 전 세계에서 진동 기능을 재치 있게 사용한 게임을 꼽을 때 꼭 언급되는 메탈기어 솔리드의 ‘사이코 맨티스’ 이벤트. 자신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패드를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한 뒤, 염력으로 패드를 움직인다는 내용이다. 게임업계는 해마다 그래픽의 발전이 가장 큰 이슈이기에 사실 게임 패드의 발전은 자칫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세대가 변할수록 항상 꾸준히 발전해왔다. WII처럼 가속도계와 적외선 센서를 사용하여 사용자의 동작을 감지하기도 하고, 입으로 패드에 바람을 불면 게임 내 바람이 불기도 하며, 트리거에 패드 본체와는 별도의 진동을 탑재하여 FPS와 레이싱 게임 체험에서 특히 화제를 모은 엑스박스원의 임펄스 트리거, 자사의 최신 기종 컨트롤러에 기존의 회전형이 아닌 휴대폰과 같은 리니어 진동 모터를 탑재해 패드의 진동 촉감을 더욱 실감 나게 연출한 닌텐도와 소니, 최근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5의 듀얼센스에 선보인 적응형 트리거는 상황에 따라 트리거의 압력이 달라지도록 조절되어, 총의 탄약이 떨어졌을 때 탄이 격발되지 않는 느낌까지도 패드로 구현하고 있다. 이 밖에도 터치 패드 등 게임 입력 디바이스는 새로운 기술을 꾸준히 도입하며 발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기술들은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지만, 마이크 기능을 이용해 패드에 소리를 질러야 플레이어를 가로막은 문이 파괴되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를 멀리서 부르기도 하는 등 기술을 활용한 신선한 아이디어의 게임도 꾸준히 등장하게 한다. 현재는 주춤한 상태지만 아이토이를 시작으로 플레이스테이션 아이, 키넥트처럼 모션 감지 컨트롤러의 출현은 게임 컨트롤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으며, 여전히 레이싱 컨트롤러나 아케이드 스틱 같이 보다 특정 장르의 몰입감을 올려주는 컨트롤러도, 큰북의 달인 컨트롤러처럼 특정 게임에 완전히 최적화된 컨트롤러도, 한 손으로 모든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컨트롤러도 출시되고 있고, 기술력의 발전과 가격은 상관없으니 아케이드와 동일한 퀄리티이길 원하는 수요층이 트렌드가 되면서 가정용 특수 컨트롤러의 정교함도 아케이드와 차이가 사라진 지 오래되어, 이제는 역으로 가정용 패드를 아케이드 기계에 탑재하는 경우도 있다. 패미컴을 시작으로 현재의 게임 패드가 기본형으로 자리잡힌 것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 과정에서 이 작은 입력 디바이스는 꾸준히 진화했고, 그만큼 게임을 즐기는 방식도 풍부해졌다. 패드 기술과 게임의 발전은 분리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입력 디바이스에 첨단 기술이 적용되며 꾸준히 게임 체험도 발전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그 완성도를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한 게임들과, 플레이어와 입력 디바이스의 상호작용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IGN코리아 대표) 이동헌 1999년 월간 게임라인을 시작으로 게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기간을 게임 개발사에서 보낸 뒤, 게임 제작자보다 글로서 게임 문화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2018년부터 IGN Korea를 운영하고 있다.
-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08 GG Vol. 22. 10. 10. 안녕하세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입니다.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보급된다고 해서 영화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온라인 게임이 보편화된 시대라고 해서 오프라인 게임의 의미가 완전히 퇴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기에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이 갖는 의미에 주목합니다.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지 않아도 작동하는 무엇은 어쩌면 점점 희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속에서 또다른 의미로서의 ‘온라인이 아닌’ 게임으로 오프라인 게임의 의미는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따로 서버에 연결되지 않는 오락실 기기들,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만 오프라인 현장의 플레이가 더욱 중요한 PC방과 e스포츠를 넘어 아예 디지털의 범주 바깥에 존재하는 보드게임까지 우리는 오프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과 대립항을 이루는 여러 게임들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으로 드러나는 것은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대전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이기도 합니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라인이라는 개념이 갖는 관계망으로서의 의미를 통한 접근 또한 유효할 것이고, 그렇기에 이번 호의 기획은 어쩌면 온라인이라는 시대 배경에 대한 접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호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
사실 호러 게임은 꽤 마이너한 장르에 속한다. 물론 좀비물의 성격을 차용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거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AAA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 Back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 19 GG Vol. 24. 8. 10. ‘게임 보기’의 역사는 ‘게임 하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오락실에서 동네 고수의 플레이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시기부터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전 세계 게이머의 플레이를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는 지금까지, 타인의 게임플레이를 관람하는 형태는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게임 보기’는 단지 프로게이머들의 대전을 관람하는 스포츠의 형태나 고수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감탄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게임 하기’가 되어 간다. ‘게임 보기’를 기존의 게임에서 구성되는 매직서클의 바깥에서 매직서클 내의 세계와 규칙에 동참하는 메타-게이밍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게임과 게이머 사이에 형성된 매직서클을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의 관계로 확장한다. 이때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채팅을 통한 것 이외에도 각 플랫폼 별로 존재하는 후원 기능과 그에 따른 리액션 및 미션을 통해 작동하는데, 이는 스트리머-시청자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규칙으로서 매직서클을 구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을 바라보자. 사실 호러 게임은 꽤 마이너한 장르에 속한다. 물론 좀비물의 성격을 차용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거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AAA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AAA 게임의 적지 않은 수가 폭력과 유혈을 동반하는 고어 묘사를 하고 있다는 지점도 호러 게임이 마이너한 장르라는 것의 반례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대다수가 인디 게임으로 분류되곤 하는 게임들은 주로 플레이되기보단 스트리머에 의해 송출되고 시청자에 의해 관람된다. <프레디의 피자가게>부터 <파피 플레이타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히트 호러 게임은 출시 직후 스트리밍 플랫폼을 도배하곤 한다. 다만 이런 스트리밍에서의 성공 사례가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의 수로 직결되진 못한다. 스팀의 동시접속자 수나 인기차트와 같은 지표들은 멀티 플레이 게임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와 같은, 극소수의 성공 사례만을 알려줄 뿐이다. * [그림1, 2] <파피 플레이타임> 스크린샷과 스크린샷(출처: 스팀 상품페이지) 새로이 등장하는 호러 게임들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만 같다. 앞서 언급한 <프레디의 피자 가게>나 <파피 플레이타임>처럼 온라인상에서 밈이 되어버린 게임, 혹은 ‘사이렌 헤드’나 ‘백룸’ 같은 온라인 괴담의 인기에 힘입어 등장한 여러 게임은 게이머 개개인이 그것을 플레이하는 것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스트리머-시청자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소화된다. 나아가 의 성공 이후 우후죽순 등장하는, PC의 마이크를 인식해 소리를 내면 살인마나 크리처에게 살해당하는 구성의 호러 게임들은 스트리머가 점프스케어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모습 자체가 스트리밍의 주된 콘텐츠임을 드러낸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정은 굳이 호러 게임이 아닌 게임의 스트리밍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작동한다. <배틀그라운드>나 <리그 오브 레전드>처럼 고인물이 수두룩한 게임의 스트리밍 시청자들은 그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 미션의 형태로 제약 플레이를 하게끔 한다. 따라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 또한 게임이 제공하는 규칙을 두고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에 발생하는 새로운 유희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실력이 부족한 게임을 대신 해주는 고인물들의 플레이를 보듯 호러 게임이 너무 무서워서 하지 못하는 시청자는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본다. 혹은 호러 게임이 제공하는 공포의 상황을 상쇄시켜주는 스트리머의 리액션을 즐기기 위해 그것을 본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호러 게임과 가장 자주 비교된다고 할 수 있을, 호러 영화 이야기로 잠시 넘어가보자. 호러 영화의 관객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점프스케어를 비롯한 효과를 포함한) 폭력성 앞에 취약한 상태로 놓인다. 동시에 관객은 자신이 스크린 속 살인마나 초자연적 존재에게 직접 위협을 당하지 않는 안전한 객석에 앉아 있을 뿐이기에, 자신의 취약성을 내주고서도 호러 영화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폭력을 하나의 유희로서 즐길 수 있다. 이는 영화뿐 아니라 호러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혹은 SCP 재단과 같은 온라인 호러에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림 3] 스트리머/유튜버 풍월량의 호러 게임 스트리밍 썸네일 (출처: 풍월량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40TDKZkVw0 ) 다만 호러 게임의 경우 게이머가 직접 게임이 보여주는 폭력적인 이미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지점에서 영화를 비롯한 다른 매체들과 차이를 지닌다. 호러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앞의 관객이 자신의 취약성을 안전하게 노출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호러 게임의 플레이어는 자신의 취약성을 게임플레이에 내어주어야 한다. 호러라는 장르가 전제하는 이미지(혹은 텍스트)의 폭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곧 호러 게임의 플레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러 게임의 스트리밍을 본다는 것은 시청자가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했다면 내어주었어야 할 취약성을 스트리머에게 양도한다고 할 수 있다. 스트리머는 시청자들을 대리해 호러 게임을 플레이하고, 자신의 취약성을 게임 내부와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외부 양쪽에 내어준다. 물론 스트리머의 실력이나 담력 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으나, 스피드런이나 공략 영상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전제는 유지된다. 훌륭한 실력으로 호러 게임을 돌파하건, 시청자를 대신해 비명을 지르건, 혹은 호러의 상황을 입담과 재치를 통해 코미디로 승화시키건 말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을 시청하는 것은 호러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호러 영화 속 주인공은 관객을 대신해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지만, 호러 게임 스트리머는 시청자를 대신하여 공포가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이라는 장소는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메타-게이밍의 매직서클을 형성함과 동시에, 스트리머가 시청자의 취약성을 대리하는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게임은? 이때 호러 게임은 게이머에게 점프스케어와 음산한 분위기로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콘텐츠이자, 스트리머-시청자 관계에서 발생한 매직서클 안에 포섭된 대상으로 변화한다. 점프스케어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스트리머를 보던 시청자는, 스트리머가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호러 게임의 묘사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호러 게임을 일종의 장난감에 가까운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 마치 호러 영화의 오래된 팬들이 슬래셔 영화 속 유혈낭자한 살인이나 고어영화 속 사지절단을 보며 환호하거나, 이러한 반응을 밀고 나가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스플래터를 비롯한 호러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취약성의 전제를 뒤집어야 한다. 호러 영화의 일반적 관객이 자신의 취약성을 노출시킴으로서 호러의 효과를 얻어낸다면, 호러 영화의 마니아는 자신이 앉아 있는 객석의 안전함을 무기 삼아 호러의 이미지를 즐긴다. 살인, 귀신, 악령, 크리처,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공포에 휩싸인 등장인물은 공포의 매개가 아니라 유희, 나아가 조롱의 대상이 된다. 호러 게임 스트리밍의 시청자들은 호러 영화 마니아의 태도로 그것을 본다. 시청자들에게 게임 속 살인마나 크리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스트리머를 골탕 먹이는 존재이다. 시청자들은 어두운 지하실이나 숲속을 굳이 들어가는 호러 영화의 주인공을 바라보듯 스트리머를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호러 영화/게임의 관객/게이머에게 기대되는 것이 공포의 이미지라면, 호러 게임 스트리밍의 시청자가 기대하는 것은 리액션이다. * [그림 4] 조르주 멜리에스 <악마의 집> 스틸컷 사실 이 리액션을 즐기는 것, 특히 무서운 것에 놀라는 타인의 리액션을 즐기는 것이 호러라는 장르를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1896년 조르주 멜리에스가 <악마의 집>을 만들었을 때, 그것의 공포는 카메라 트릭을 통해 박쥐가 사람이 되고 해골이 움직이는 것에서 오는 놀라움이었다. 서커스의 프릭쇼(freak show)가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로 만들어질 때, 관객들은 ‘비정상’이라 여겨지던 존재들을 목격하고 서로 놀라워했다. 호러 게임의 스트리밍은 그러한 광경을 스트리밍 플랫폼 위에 되살린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스트리머는 리액션을 선보이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보며 즐거워한다. 스트리머의 리액션을 극단적으로 끌어내는 일련의 사운드 반응형 호러 게임들은 여전히 기초적인 호러 트릭을 통해 그 반응을 만들어낸다. 스트리머와 시청자들은 게임의 소재로서 등장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애정하는 호러의 소재들을 바라보며 놀라워하고 반가움을 표하며 즐거워한다. 호러를 즐긴다는 것은 공포를 제공하는 대상에 익숙해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를 보든, 게임을 하든, 스트리밍을 시청하든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호러 게임 스트리밍을 보는 것은 차마 호러 게임을 플레이하지 못하는 ‘쫄보’들의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을,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장소 위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자아와 투쟁하던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게 만드는 방법 - 헬블레이드 2: 세누아의 전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천재나, 비현실적인 실력을 가진 전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곤란함은 그들의 비범함 앞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 Back 자아와 투쟁하던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게 만드는 방법 - 헬블레이드 2: 세누아의 전설 21 GG Vol. 24. 12. 10.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천재나, 비현실적인 실력을 가진 전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곤란함은 그들의 비범함 앞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일상적인 세계 속의 이례적인 인물이든, 이례적인 세계 속 일상적인 인물이든, 이들의 능력과 서사는 우리의 상상과 언어가 허락하는 한에서 필요한 만큼 설정될 수 있다. 아무리 극단적이고 허황되더라도. 여기엔 이들이 창조된 인물이기에 가지는 편리한 이점들이 있다. 이들이 가진 능력의 이면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뛰어난 능력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능력을 얻으며 걸어오는 길은 어땠는지, 어떤 부침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고, 때이른 지위와 성공의 대가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이를 ‘구태여’ 설명하는 것은 이들의 서사를 간혹 다채롭게 만들어줄 부차적 이야깃거리로 소비된다. 대개의 영웅 이야기에서는 영웅들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칭송하며, 이를 한층 낭만적으로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그 행보에 놓인 고통과 좌절이다.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사건은 순수한 백지 또는 기초적인 도덕주의자의 상태에 머물러있던 인물을 영웅으로 만든다. 이 고통은 마치 '훈장 같은' 흉터로 남아 영웅을 더욱 빛나고 고귀한 존재로 장식한다. 고통과 좌절을 겪은 영웅은 마침내 이를 극복하고 더 성장, 발전한다. 고통이 남긴 트라우마는 영웅의 의지와 용기 앞에서 무력화되고, 더 이상 그를 번민케 하거나 괴롭히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숭고한 영웅 이야기의 일부지만, 이 길이 때로는 어둠과 추악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매 순간 어떤 대가를 견뎌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세누아의 전설: 헬블레이드 IISenua’s Saga: Hellblade II(2024, 이하 전설)>이 직시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전작인 <헬블레이드: 세누아의 희생Hellblade: Senua’s Sacrifice(2017, 이하 희생)>은 세누아가 겪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부차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닌 서사의 핵심으로 다루며, 그녀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스스로를 구해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뒤이은 <전설>에서는, 이 세누아가 타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외부 세계로의 여행을 묘사하겠다 선언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고통을 파고들며 논하던 작품이, 이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논하는 주인공을 논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고 활용할 것인가? 그녀가 이 유산을 끌어안고 여정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OV: 세누아의 시선으로 보는 현실과 비현실 한 켈트 전사가 죽은 연인을 되살리기 위해 저승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이것이 <희생>의 기초적인 로그라인이다. 게임을 실행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신은 세누아가 몇 가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고, 존재하지 않는 형상들을 본다. 그녀를 학대한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심어진 부정적 자기 인식과 죄책감이 그녀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전투가 다가올수록 당신은 서서히 깨닫는다. 이 여정은 죽은 연인을 되살리는 여정이 아닌, 세누아가 스스로 짊어진 죄책감과 고통으로부터 일어서기 위한 여정이다. <전설>에서 시작되는 여정은 <희생>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따른다. <희생>에서 헬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홀로 떠났던 세누아는 이제 그녀의 민족을 침략한 노스먼의 땅이라는 현실의 공간으로 향한다. 더 이상의 침략을 막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대의도 가졌다. 자신의 과거와 개인적인 상실에서 기인한 고통에 맞섰던 세누아는 이제 그녀의 칼날을 내면에서 외면으로 돌려, 외부 세계에서 타인들을 괴롭히는 세상의 고통에 맞서려 한다. 그리고 게임을 실행한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전설>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성의 이야기를 시도하려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익숙한 목소리의 해설자가 당신을 반긴다. 세누아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목소리들은 여전히 그녀의 귓전을 맴돌고 있다. 아버지 진벨의 망령은 잊을만하면 나타나 세누아를 덮친다. 그리고 그녀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은 여전히 그녀 자신이다. [그림 1] * 전작에서처럼 세누아의 과거와 진벨의 망령에서 비롯된 비현실적 공간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해설자, 목소리들, 진벨의 망령은 <희생>의 전반에 걸쳐 플레이어에게 세누아의 내면을 묘사했다. 명백하게도 세누아 본인의 생각과 직관을 상징하는 이 요소들은 <전설>에서도 역시나 내밀하고 자세하게 작동하며, 세누아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과 그녀의 모든 행동 및 선택에 반응하고, 평가하고, 주석을 단다. 세누아가 마주하는 모든 현실 또는 비현실의 세계는, 플레이 내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그녀의 내면을 풀이하는 이 장치를 통해 다듬어져 묘사된다. 사실상 플레이어들은 변함없이 세누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작품의 초점은 세누아의 여정 자체가 아닌, 여정을 겪는 세누아의 내면에 맞춰져 있다. 떨쳐내지 못한 어둠을 동력으로 찾아가는 이정표 세누아의 새로운 여정은 분명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의 여정이다. <희생>에서 겪었던 여정과는 달리,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매 성취를 입증하고 평가받는다. 어떤 문제를 얼마나 해결해 무엇을 얻어냈는지가 중요해지며, 대개 이런 여정의 경우 감정이 논해지는 순간들은 마치 베일을 들추듯 제한된 장면에서의 특별한 기회로 허락된다. 그러나 <전설>은 상술했던 수단을 통해 여정의 매 순간 세누아의 내면을 플레이어에게 들려주는 것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뒤로한 채 영웅이 되어가는 인물의 내면을 관찰할 기회가 되는 것일까? 세누아가 노스먼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진벨의 망령이 그녀에게 말한다. ‘전부 두고 온 줄 알았느냐’고. 그녀가 벗어났다고 생각한 악몽이 다시 등장할 때마다, 세누아는 어김없이 타격을 입는다.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때마다 세누아는 자신을 탓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세뇌하면서 시작된 이 비합리적인 죄책감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더 이상 인신공양을 할 필요가 없게끔 거인을 물리치겠다고 외치는 순간에도, 역시나 인신공양으로 신을 달랬던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확신을 잃는다. 세누아가 거인을 물리칠 때마다, 사람들이 그녀를 신뢰한다. 그녀의 능력에 대한 평판이 쌓이고 새로운 동료가 생긴다. 영락없는 성취와 성장의 순간이지만, 목소리들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세누아의 내면을 들려준다. 아우구스트르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목소리는 그녀를 신뢰할지 불신할지를 끊임없이 논한다. 은신족은 세누아를 시험할 때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들을 집요하게 공략하고, 세누아는 매번 이 함정에 걸려든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이 작품에서 그녀가 이뤄내야 하는 최종적인 성취로써 묘사되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극복할 수도, 물리칠 수도 없다. 지난번 닥친 어둠에서 살아남았어도, 이번에 닥친 어둠 역시 두렵긴 매한가지다. 작품은 세누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모습이 아닌, 이 문제들을 가진 상태의 세누아, 이 문제들에 익숙한 세누아가 여정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 땅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감각, 내면의 의심, 불안과의 끊임없는 투쟁, 발목을 잡히는 감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노스먼의 땅에서 거인들의 실체를 알아채는 순간, 세누아는 공포가 만든 거짓에 지배당했던 익숙한 경험, 이를 꿰뚫어 보기 위해 싸워야 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곳의 사람들이 자신처럼 진실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는 자신만의 사명을 찾아낸다. * 야른비에른 숲 레벨은 세누아와 같은 문제들을 겪게 된 동료들을 안내하며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 <전설>은 이 지점에 세누아가 최종적인 성취를 달성할 수 있는 해답을 심어둔다. 그녀가 내면에서 겪었던 문제들, 그녀가 <희생>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맞서야 했던 문제들이 외면으로 끌려 나오자,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거인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세누아만의 무기로 벼려진다. 이해와 공감의 전략적 무기화 세누아는 자신의 동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침략자들인 노스먼의 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처치해야 할 적이라고 생각했던 노예 상인에게서, 한때 저승으로 가는 여정에서 자신을 잠식했던 어둠의 싹을 발견한다.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세누아가 물리쳐야 하는 잔혹한 괴물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 그녀가 과거에 걸었던 길을 걷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 된다. <전설>은 세누아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적인 외부 세계를 묘사함과 동시에, 세누아의 앞에 펼쳐진 여정의 모든 요소들에 세누아가 본인을 투영할 수 있는 측면을 만든다. 토르게스트르는 그녀처럼 억압적인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혀있고, 파르그림르는 그녀처럼 특별한 직관과 시선을 가졌으며, 아우구스트르는 그녀처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싸운다.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에 빠져있으며, 세누아는 이 땅에 만연한 도탄의 감각에 익숙하다. 그녀는 자신이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그 과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세누아는 이 여정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앞서 말했듯, 작품 전반에 걸쳐 그녀의 여정을 추동하는 것은 그녀가 극복하지 못한 이 문제들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녀가 이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녀의 여정에 이정표가 되어준다. 학살당한 이들의 고통을 잊지 못해 노스먼의 땅으로 향한 세누아는 어둠의 싹을 품고 있는 노예 상인을 이해하고, 자신이 찾던 고통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알아챈다. 마침내 진정한 근원을 마주하게 된 세누아는 이들조차 고통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이해하고, 이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여정을 완수한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최종적인 적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3명의 거인들이다. 신들에게 버림받은 노스먼의 땅에서 사람들을 두려움과 고통으로 지배하고, 바다 건너 세누아의 동족에게까지 공포를 퍼뜨리는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세누아가 이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방법은 그녀의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거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 작품에서 등장하는 보스전은 보스를 처치하는 것이 아닌 보스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은신족은 세누아에게 거인들의 사연을 들려줄 때, 이들의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배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아닌, 사람들이 상처받았고, 공포를 느꼈고, 각박해졌고, 호전적으로 변했음을 설명한다. 이는 작품 내에서의 특정한 상황이 아닌, 현실에서의 어떤 상황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통상적인 문제들로 그려지며, 세누아가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 - 이해와 공감을 작동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최소한의 맥락을 제공하는 서술이다. 이를 통해 은신족은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었던 일퇴이가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자신이 초래한 죽음들에 대한 샤우바리시의 죄책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끝없는 힘을 탐했던 고디의 집착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들을 거인으로 만든 고통의 근원들을 찾아 나서는 전후에는 세누아가 느꼈던 동일한 고통의 경험이 병치된다. 연인과 이웃들을 지키지 못했던 분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죄책감, 그리고 거인을 물리치는 구원자라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집착. 결코 죽일 수 없는 거인들을 해방하고, 거인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고통의 근원을 뿌리뽑는 이 임무는, 여전히 자신의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 세누아만이 발휘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라는 능력을 통해 완수된다.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스스로 상처 입을 정도로 치명적인 이 약점은, 그녀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만드는 서사적 열쇠로 사용된다. 전작이라는 뼈대에 영웅 서사의 살을 붙이다 <희생>이 주인공 세누아가 겪는 내적 고통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었다면, <전설>은 동일한 주인공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과업을 수행하게끔 만든다. 이 상반된 방향의 서사에서 작품은 늘 주인공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서사를 경험하는 당사자의 입장이라는 일관된 시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작품은 전작에서 서사의 중심이었던 여러 문제로부터 세누아를 극적으로 해방시킨 채 지나간 과거의 요소로 치부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활용해 타인마저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서사를 꾸려나간다.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 이해와 공감은 작품에서 단순한 메시지가 아닌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전략으로써 사용된다. 사태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고, 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는, 세누아만이 발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이들이 가진 능력의 이면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이를 설명할 뿐 아니라, 이와 무관해 보이는 목표를 가진 서사의 뼈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사실, 단순히 전작의 묘사적 장치들을 작품의 전반에 걸쳐 삽입하는 것, 그것만으로 전작에서 형성한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의 서사를 만들어나갈 수 있겠는가. 세누아의 고통을 직시해야 했던 이들은, 세누아 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 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 효율, 계산 가능성 그리고 민맥싱
테크 전문 월간지인 와이어드WIRED는 지난 3월 [1](효과/효율적 이타주의의 종언)이라는 장문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째서 특정한 철학 사조를 비판하는 철학자의 글이 기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잡지에 실리게 됐으며, 이토록 큰 관심을 유도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효과/효율적 이타주의(통칭 EA)가 처한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EA는 실리콘 밸리의 유력한 엔지니어들과 테크 억만장자들(이 두 그룹은 종종 겹친다.) 사이에서 이미 실질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민맥싱, 최적화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게임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전시 리뷰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담론장을 떠돌고 있다. 게임과 예술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행정과 법의 영역에서도 게임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물론 예술가, 행정가,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게이머 각각의 입장과 목표는 모두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게임 주제전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기에 일단 《게임사회》라는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전시, 미술관,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Taehyun Kwon Writes and plans a range of projects. Works in the art world, yet is always more drawn to things not readily regarded as art. Explores how things outside art might be thought through as objects within it. Continues researching with weight placed on a perspective that grasps the political as a matter of the sensory. (7000eichen@gmail.com )
- [대담회]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 야스케 논란을 보는 여러 관점들
2024년 공개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는 시리즈 최초로 일본 전국시대를 무대로 삼으며, 여성 시노비와 흑인 사무라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된 이후 흑인 사무라이 주인공의 인종과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으며, 이는 국내외 커뮤니티에서 역사 고증의 문제를 넘어 서구중심주의나 PC주의 비판 등의 다양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번호 GG에서는 홍현영 박사, 이정엽 박사, 강신규 박사 세 명의 디지털 게임연구자 및 인문사회 연구자들을 만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쟁점을 나누고, 오늘날 게임이 재현하는 역사와 정체성의 의미와 딜레마를 검토해 보았다. < Back [대담회]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 야스케 논란을 보는 여러 관점들 24 GG Vol. 25. 6. 10. 2024년 공개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는 시리즈 최초로 일본 전국시대를 무대로 삼으며, 여성 시노비와 흑인 사무라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된 이후 흑인 사무라이 주 인공의 인종과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으며, 이는 국내외 커뮤니티에서 역사 고증의 문제를 넘어 서구중심주의나 PC주의 비판 등의 다양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번호 GG에서는 홍현영 박사, 이정엽 박사, 강신규 박사 세 명의 디지털 게임연구자 및 인문사회 연구자들을 만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쟁점을 나누고, 오늘날 게임이 재현하는 역사와 정체성의 의미와 딜레마를 검토해 보았다. 이경혁 편집장: GG의 이번 호 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배경설명을 해 드리자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17년 정도 된 오래된 프랜차이즈고요. 그간 예루살렘 근방의 어쌔신 집단, 이탈리아 피렌체, 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다가 사실상 시리즈 최초로 동아시아를 다룬 게 이번의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끝 무렵을 다루면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이번 작품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는데, 하나는 ‘후지바야시 나오에’라는 일본 여성 시노비이고 나머지 하나는 ‘야스케’라는 흑인 사무라이입니다. 이 중 후자가 이슈가 되었죠. ‘일본을 다루는 게임인데 일본인이 주인공이 아닌 경우가 어딨냐, 서구인들이 멋대로 만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고, 특히 무슨 게임이 나와도 항상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고증이 엉망이다’라는 등의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흑인의 재현에 관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의 논란이 기존의 논란과는 다른 맥락에서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란에서 어떤 점에 주목을 해야 할지, 그리고 이 논란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다음 게임과 게임 담론을 만들 때 우리가 고려해야 될 건 무엇일지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일단은 다들 관련 이슈를 보시니 어땠는지요? 커뮤니티 반응은 어떠셨을까요? 역사적 인물 ‘야스케’, 고증인가 상상력인가 홍현영 박사: 야스케라고 하는 캐릭터가 실제로 역사적 사료에 잠깐 등장한 내용을 굉장히 부풀려서 만들어낸 캐릭터잖아요. 커뮤니티 몇몇 댓글을 보면 저는 그게 궁금하더라구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무라이의 삶’이 있는것 같은데 그게 뭘까. 사무라이로서 재현되어야 되는 특정한 삶과 자격이 있는데 야스케가 그 자격에 속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또 이런 댓글도 봤습니다. 노부나가가 실제로는 야스케를 일종의 트로피처럼 데리고 다녔을 거다. 인간으로서의 존재라기보다는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사물이나 대상에 가까웠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이런 댓글을 굉장히 확신에 찬 태도로 쓴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라는 점이 가장 신기하고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일본 현지에서도 흑인 사무라이에 대해서 여러 말이 많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이정엽 박사: 역사적으로는 야스케가 실제로 사무라이가 아니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노부나가에게서 정식 사무라이가 될 때 받는 태도(太刀)와 집을 받았고 부하처럼 데리고 다녔다는 설들도 있습니다. 사실 전국시대가 게임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재현되었고, 202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NHK 대하드라마의 사례처럼 기존의 역사관과 다른 인물상이 재현되기도 했거든요. 저는 콘텐츠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변용의 범주가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야스케를 무사로 격상을 시켜서 활용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을 펼쳐왔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서 그간 정사에 완벽하게 맞게끔 나왔던 주인공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와 상당히 밀접한 형태의 역사로 다가오고, 특히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 역사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상당히 민감히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감정적 요인’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제가 처음 <어쌔신 크리드>를 하며 충격받았던 부분은, 야스케가 주인공일 때 플레이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와 ‘침묵’ 사이에서 선택하게 하잖아요. 여기서 전자를 고르면 반 년도 안 되어 오다 노부나가의 곁에서 같이 전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야스케가 노부나가와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혔음을 보여주는 부분이죠. 그 장면을 보며 ‘이 게임은 이런 형태로 극적인 허용을 최대치로 넓혀 놓고 상상력을 발휘해 들어가는구나’ 싶었고, 그때부터 이 게임에서 고증과 관련된 검증은 내려놓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야스케가 노부나가의 최심복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얼마나 흥미로운가의 여부만 초점을 놓고 파악하자는 거죠. 이경혁 편집장: 인정적인 면에 조금 더 주목을 해보죠.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공이라서 문제가 된 거라면, 만약 그 주인공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홍현영 박사: 방금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무라이의 상’을 언급한 바 있는데요. 아까 토템이나 트로피 이야기도 그렇고, 흑인 사무라이 비판 담론들에서 야스케는 정말 뭐랄까 ‘인간’으로서의 행위가 가능한 주체로 표현이 되지 않고 있거든요. 일본 전통이나 서브컬처에서 활용되는 사무라이의 전형성이라는게 있다면,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주체로 호명될 수 있는 존재는 흑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경혁 편집장: 생각해 보면 서양인 사무라이 설정도 영화로는 꽤 나왔던 것 같은데, 거진 백인 사무라이였네요. 강신규 박사: <어쌔신 크리드>에서 백인 사무라이가 나왔어도 논란이 되었을 수 있지만, 야스케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재현을 두 번 비튼 거죠. 사무라이를 백인도 아니고 심지어 흑인으로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어떤 문화적 고정관념을 굉장히 거슬리게 했기 때문에 더 그런 반응이 나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리 서양 회사에서 만든 게임이라 해도 동양 고유의 사무라이라는 직업을 다룰때는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이 배경에 깔려있는 거고, 흑인이 등장하니 이 불쾌함을 지우기 위해서 ‘원래 역사적으로는 어땠냐’ ‘실제로 이게 가능한 거냐’는 말을 들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선생님들의 말씀과 연결되지만, 저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역사 왜곡도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일부 게이머들이 욕하는 PC 강요가 좀더 맞아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흑인 사무라이 논란은 ‘하나의 게임 안에서 다양성과 핍진성을 중심으로 한 재현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거죠. 게다가 유비소프트의 그동안의 게임들은 대체로 이래 왔습니다. 오리지널에서도 이집트 사람, 바이킹 등 여러 민족들이 등장해 왔지만, 동아시아적 남성성의 핵심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는 사무라이에 흑인 캐릭터가 배치되자 이런 논의가 불거졌던 것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야스케가 화제가 제대로 됐을 거라 생각하고 재현의 정치나 다양성의 정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효과가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이정엽 박사: 사무라이가 실제로 전투했던 방식이 게임 메카닉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피는 것도 재밌는 부분입니다. 전국시대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특징은 부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려는 욕망이 강한, 구조주의적인 다이묘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런 자의 심복들이 게임에서는 ‘암살 닌자’와 ‘무쌍 찍는 흑인 무사’로 재현된다는 것이죠. 잘못하면 조총 한 방 맞고 끝날 수 있는 상황을 매우 판타지적으로 재해석하는 건데요. 사실 <다크 소울>로 대변되는 액션 RPG류가 히트를 치다 보니까, 유비소프트에서도 트렌드에 맞춰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게임의 액션성을 강화하려던 시도가 아니었나 싶어요. 거기에 가장 맞는 형태의 캐릭터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기존의 잠입액션을 포기할 수 없어서 나오에를 넣었고, 무쌍을 위해 야스케를 넣으면서 양쪽을 다 잡는 일종의 절충안을 넣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신규 박사: 결국 이런 인물들에게 서사 권력을 어떤 식으로 나누어 줄지에 대해 이정엽 선생님이 운을 띄워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를 플레이해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들어보면 전투 방식부터 해서 현지 언어를 할 수 있느냐 이런 부분들까지, 게임 속 흑인 사무라이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최종의 결정권을 게임 플레이어에게 주는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유비소프트의 결정 자체가 굉장히 정치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쪽에서도 당연히 이런 논란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입니다. <어쌔신 크리드>에 드러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이경혁 편집장: 사실 <어쌔신 크리드>는 기존에 암살이 메인인 게임이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암살이 잘 안 나오는데 그 이유는 암살이라는 메카닉 자체가 갖는 일종의 지루함 때문일까 싶거든요. 처음 암살을 해보면 숨는 기분도 들고 굉장히 재미있지만, 규칙에 익숙해진 순간부터는 넘기 힘든 벽이 있습니다. 무쌍은 액션 상황을 칼질 몇 번에 금방 해결할 수 있지만, 암살은 기다려야 하니 게임 플레이 시간도 늘어지죠. 그 때문에 게임 메카닉적인 면에서도 액션을 강렬하게 표현한 캐릭터가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일본의 무예를 대표하는 두 가지 캐릭터인 시노비와 사무라이를 선택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근데 우리의 핵심 주제는 ‘왜 그 사무라이는 흑인이었을까’가 되는거죠.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은, <어쌔신 크리드>를 하다 보면 계절이 바뀌는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걸 보면서 서구에서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국가를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극심한 계절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더라구요. 다시 말해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서구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전제 자체가 매우 명확하고, 오리엔탈리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신규 박사: 그런데, 애초에 게임이라는 무국적인 공간 안에 일본을 구현하는 것도 굉장히 의도적인 것이기에 그 재현은 당연히 실제와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유비소프트에서 만든 그동안의 게임이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전부 사실성이 중요한 게임은 아니었다고 하셨잖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 말도 실은 조금은 모순되는 게,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언제나 대체 역사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역으로 항상 역사가 중요했던 게임이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에 기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그렇고, 게임의 주요 홍보 포인트로 ‘플레이어가 현장에 가서 진짜로 전자 관광을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을 내세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는 관광 모드까지 있죠. 이정엽 박사: 동의합니다. 제가 거부감이 조금 들었던 부분은 야스케가 실제로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오다 노부나가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일본어를 너무 잘하고, 일본에 있는 다양한 문화적인 습성들을 굉장히 빠르게 내면화한 캐릭터라는 거였어요. 이때 ‘흑인’이라는 설정은 사실상 스킨 같은 것이고, 실은 서양인들 입장에서 ‘일본의 대체역사 안에서 내가 무사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라는 부분을 빠르게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 생각합니다. 계절 표현이나 게임 구조물들도 꽤 고증이 잘 된 게임이지만 문제는 캐릭터 설정에서 ‘흑인이면 응당 가졌어야 할 이 문화에 대한 낯섦’, ‘일본 문화권과 흑인이 부딪히는 충돌의 지점’들이 충분히 나왔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 지점이 거의 재현이 안 된거죠. 프란츠 파농이 이미 후기 식민주의의 문제점으로 식민지 본국에서 가진 심상들을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세대의 사람들도 내면화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지요. 야스케를 만약 문화적 충돌이나 갈등이 들어가는 캐릭터로 묘사했다면 상당히 설득력과 핍진성 있는 캐릭터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요. 이를 삭제한 채로 완벽하게 일본적인 것을 내면화한 흑인 사무라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본식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의문이 드는 거죠. 설정까지는 그런 허용을 할 수 있어도 세부적인 재현에서는 여러 문제가 있고 그게 더욱 우리의 거부감을 증폭시켰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앞뒤를 잘라놓고 보면, 야스케는 그냥 검은 피부의 일본인일 뿐인거죠. 홍현영 박사: 저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흑인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써 외국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일본에 대한 상을 부각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거는 그냥 유비소프트에 대한 저의 과도한 기대였고(웃음) 전혀 그런 방식으로 나오지 않는군요. 강신규 박사: 그러니까 그 캐릭터가 거기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이나 복잡할 수 있는 이 사람의 여러 정체성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거네요. 이경혁 편집장: 최소한의 서사를 위한 고려는 되어 있지만 정말 스토리텔링에서의 세팅일 뿐이고, 사실 게임에서는 그보다 야스케라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다른 NPC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봐야 하거든요. 게임 중간에 국숫집 아저씨와 농담을 나누는 부분이나 일본의 다양한 진미를 모으는 서브 퀘스트 같은 게 나오는데, 일본 땅에 온 지 얼마 안 된 낯선 흑인 캐릭터가 능숙하게 농담을 하고 일본의 진미를 다 알아보는 걸 보면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긴 하죠. 이정엽 박사: 지금 시대에는 일본이 굉장히 인기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고, 우리 세대에서는 일본 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다 한 번씩은 접해봤을 것이기 때문에 서양인의 입장에서 다루기 제일 좋은 지역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떻게 보면 자신이 이렇게 ‘약간만 알고 있는 공간’이 이런 형태의 판타지적 허용을 가장 쉽게 설정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경혁 편집장: 전국시대라는 배경 또한 그렇습니다. 가장 일본에서 유명한 시대기도 하고 이미 역사적으로 서양이 개입한 시대거든요. 그래서 <어쌔신 크리드>가 참 영리한 선택을 했으면서도 한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게, 결국 서양인이 일본에 들어오는 시대를 선택했잖아요. 물론 역사적 맥락상으로도 예수회가 들어오고 서양인 선교사들을 따라 템플 기사단과 암살단이 들어온다는 선택을 하는게 자연스럽죠. 이미 기존의 프랜차이즈 시리즈에서 암살단의 기원을 서구 역사에 따라가는 것으로 밝혀놨기 때문에, 일본에서 암살단이 자생적으로 나타났다고 쓰면 기존의 설정이 다 붕괴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왔기에 이 이야기는 ‘일본의 암살단 이야기’가 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어쌔신 크리드>라는 프랜차이즈 안에서 이후에 어떤 제3세계를 건드리건, 이 이야기는 반드시 이미 서구의 역사에서 완성된 암살단과 기사단 이야기가 제3세계에 넘어가는 형태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히스토리아 자체가 이미 서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리즈가 이야기의 다양성을 만들려면 무대도 바꿔야 되고 이제 계속 다른 세계를 다뤄야 되거든요. 어쩔 수 없이 그 확장의 과정 또한 이미 역사에 존재했던 제국주의적 확장의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정엽 박사: 말씀하신 대로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비롯된 형태의 대체 역사가 인류 역사의 여러 단면들을 거쳐 간다는 <어쌔신 크리드> 설정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을 그간 어떤 균열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대부분의 문명권이 서양의 흐름을 어느 정도 따라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유비소프트의 개발자들이 간과했던 부분들은 ‘서양인 개발자’가 대체역사를 만들었을 때 아시아 유저들이 갖는 문화적 거리감이, 같은 것을 동양인 개발자가 만들 때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여전히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너희가 왜 우리 역사를 다루니’라는 식의 어떤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장벽들이 각 문화권 내에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이 있고 그걸 건드린 거라고 봐요. 이를테면 한국의 개발사가 나오에의 암살물과 야스케의 무쌍물을 만들겠다고 하면 과연 이런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나왔을까 싶은 거죠. ‘역사’와 ‘관광’의 모순된 결합 홍현영 박사: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서양 세계 내부 구성원이 등장하는 방식이었거든요. 실은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재현들이 얼마나 평면적이고 얄팍한 방식인지 포착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이번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서양인 관광객’이 가지고 있는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시선에 가깝게 재현된다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아까 이야기한 야스케가 오사카의 명물 음식을 먹는 장면은, 과연 관광이랑 무엇이 다를까요? 물론 이 게임에서 전자 관광이 중요한 모티브이기는 하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그 시대가 가진 특수한 맥락이나 다양한 재현 양상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전자 관광에서 요구할 만한 부분에 대한 1차적인 충족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가 가지고 있던 배치 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데 그쳤다고 보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관광’이란 표현이 그래서 굉장히 핵심 키워드라고 느껴집니다. 태초부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는 관광이라는 요소가 있었지만, 문제는 이뿐 아니라 이 시리즈가 역사라는 키워드를 또 하나 끌고 간다는 거죠. 하지만 역사는 관광과는 달라요, 같을 수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역사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둘을 계속 꿰맞추려는 시도를 오랫동안 해 왔어요. 역사를 기반으로 한 투어 프로그램도 굉장히 많잖아요. 저는 그런 역사 관광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모순을 이 게임이 어느 순간 정확하게 보여준 게 아닌가 싶어요. 이정엽 박사: 저는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극적인 허용과 설정 변용을 자국 개발자나 비슷한 형태의 문화권 개발자가 하면 문제가 덜 되는데, 왜 서양 개발자가 하면 큰 반발과 문화적인 배리어가 발생하는지 짚고 싶어요. 예를 들면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에서 사무라이 문화를 재해석하는 형태로 ‘광선검’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은유적인 시도들은 굉장히 많이 있었죠. 그냥 그렇게 바라보듯이 허용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쉬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동의도 되지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사례를 보면 다르게 생각도 됩니다. 이 드라마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지만 조금 찜찜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이 드라마가 구한말 항일의병 독립운동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독립운동의 주체는 다 외세란 말이죠. 주인공도 미국인이고. 하지만 우리는 별로 그거에 대해서 거부감을 안 느껴요. 결국 <미스터 션샤인>은 한국 제작진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만약 똑같은 기획을 간사이에서 제작했다고 생각한다면 얘기는 정말 달랐을 겁니다. 강신규 박사: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만약 유비소프트가 일본 회사고 야스케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설령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논란이 되는 사례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미스터 션샤인> 같은 사례가, 이를테면 누가 만들었느냐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얼마나 자연스러우냐’가 더 중요한 거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쨌든 역사를 재현하는 것 자체는 사실 무조건 해석의 산물인데, 그걸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말한 모든 걸 다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누가 만들었고, 다른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재현하고 있으며, 그게 얼마나 안에서 잘 녹아 있는지 등등 말입니다. 홍현영 박사: 저는 <미스터 션샤인>이 인물의 정체성을 그렇게 단순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쌔신 크리드>와 같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례로 ‘유진 초이’라는 캐릭터는 미국인이 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백정 출신으로 기본적으로는 국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존재였잖아요. 처음부터 조선인의 바운더리 안에서 튕겨져 나가는 존재였죠. 유일하게 지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었고요. 그랬기 때문에 다른 국적을 취득했고 심지어는 국민으로서 한 번도 승인받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인이기를 기대받는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갖는 매우 아이러니한 공감대가 있는 거죠. 저는 야스케도 이런 식으로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면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화를 냈을까 싶습니다. 이정엽 박사: 유비소프트에서 <어쌔신 크리드>의 제작처가 몬트리올 스튜디오인데, 몬트리올이 독특한 형태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만 합니다. 몬트리올이 캐나다에 있지만 영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동시에 다 들어가 있잖아요. 정형화된 어떤 민족성 같은 것들로부터 굉장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조금만 내려가면 뉴욕 등 여러 민족들이 사는 용광로 같은 도시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문화적인 교류나 상상력을 개입시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고 봅니다. 근데 동아시아인들이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부분까지는 고려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글로벌화되었다고 하지만 동아시아는 아직까지 자국 내 문화를 중점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공간이잖아요. 아마 <어쌔신 크리드>에서 그리스나 이집트 사례를 내부까지 파고 들어가면, 실질적으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 안에 문화권을 정형화시키고 스테레오 타입을 만드는 등 문제적으로 느껴질 구간들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이경혁 편집장: 최소한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다고 했으면 일본 쪽의 자문진이 더 두꺼웠어야 한다, 그 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은 어떤 제작자가 만들더라도 타자화를 끌고 올 수밖에 없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필연적으로 관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관광객도 주체일 수는 없거든요, 항상 타자인 거고. 홍현영 박사: 그렇죠,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야스케가 아쉽습니다. 관광객의 장점은 사실 그 구역 내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고착화된 통념이나 기대 지평, 사고, 세계관을 오히려 바깥에서 다른 방식으로 느슨하게 사유할 수 있다는 점이거든요. 야스케가 차라리 관광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게임 시리즈의 정체성과 캐릭터 기대지평의 충돌 이정엽 박사: 사실 <어쌔신 크리드>에서 특이하게 재현되는 부분은 동아시아에서 흑인의 존재를 정말 모르다 보니 야스케를 바라보는 일본인의 반응을 열심히 구현했다는 점이에요. 야스케를 바라보며 눈치 보고 놀라는 일본인의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정작 야스케는 거기에 있어서 특별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죠.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야스케에 대한 재현보다는 개발자들이 뭘 그리고 싶었는가입니다. 야스케의 존재를 빨리 서양 유저들에게 내면화시키고 싶었고, 그 때문에 어떤 형태의 통역이 필요한 형태의 존재가 아니게끔 철저하게 서양식으로 캐릭터화된 존재를 만드는 게 목표였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이 캐릭터가 암살단의 일원이 되어서 기존의 업무들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 문화권에 거부감을 느끼는 캐릭터 존재가 나온다면 전 시리즈의 어떤 통일성에 위배가 되는 부분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문화권에서 특이하고 이질적인 형태의 존재를 집어넣었지만, 플레이어가 얘한테는 빨리 동화되어야 하고. 그러나 그 인물이 흑인이라는 형태의 인지는 계속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곳의 인물들은 야스케를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나는 매우 일본화한 캐릭터다’라는 것들을 끊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홍현영 박사: 달리 말하면, 지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 흑인 캐릭터 재현에서 드러나는 기대 지평들이 계속 부딪히는 거네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시리즈는 결국 서구의 시리즈인 건데, 동양 얘기를 하려니까 어려워진 것이지요. 그런데 나름 플레이를 해보면, 중간중간의 설정이나 장치를 보면 개발자들이 이 문제를 나름 고민했다는 것도 느껴져요. 제일 대표적인 게 주인공을 듀얼로 설정한 것입니다. 암살의 시노비와 액션의 사무라이를 설정함으로써 젠더나 인종 차원에서 다양성이 고려된 설정 등으로 이야기가 됐을 겁니다. 결국 이 논쟁의 근본적인 문제는, 재현이나 고증 차원의 이야기보다 역사는 서구에 의해 쓰였다는 점을 게임 내 장치로는 미처 넘어서지 못한 게 제일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강신규 박사: 우리가 이 게임에서는 야스케라는 존재를 통해 ‘서구 중심의 동양 재현’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식의 어떤 경유 지점이나 시그널이 없는 다른 일반적인 게임들에 있어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오늘 자리가 만들어진 계기는 사실 플레이어들이 이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였지요. 한국에 있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문제를 역사왜곡 뿐 아니라 PC 비판 등의 담론을 통해 접근한다면 이에 대한 논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논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정엽 박사: 우리가 야스케 얘기는 많이 했지만 시노비인 나오에에 대한 얘기는 별로 안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여성 닌자가 존재했었냐는 의문이 있고 일부에서는 여성 닌자가 고위 인사들의 운송이나 특수한 형태의 임무 수행을 위해 있었다고는 하는데요.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에서는 여성 닌자를 중점적인 역할로 배분해서 암살과 무쌍을 동시에 할 수 있게끔 캐릭터를 배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기존 시리즈에서 ‘에지오’를 중심으로 나왔던 전형적인 캐릭터성을 여기 와서 해체하는 거죠.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 이 게임에서 고증은 더 이상 제 생각에는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라고 보여져요. 이경혁 편집장: 약간 멍에를 쓴 것 같기도 해요. 아까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의 문제를 이야기하셨는데, 이 게임의 원래 정체성과 메카닉 자체는 지루해졌고 대중들이 환호하는 쪽으로 가기 시작했더니 다른 문제들이 터지고 좀 이런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이정엽 박사: 우리가 지금까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 대해 암살 메카닉과 관광 등을 쭉 얘기해 왔는데, 이제 그 정체성에 있어서 관광은 유지하고 있지만 암살이나 서양 중심에 대한 정체성은 포기한 것 같기도 해요. 시리즈의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식으로 일종의 선언을 한 것으로도 느껴지거든요. 이경혁 편집장: 오히려 그래서 그냥 고증을 떠나 우리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하는 게임이라고 세게 밀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이정엽 박사: 그러려면 아예 정말 더 문화적인 은유가 들어갔어야 했는데 매우 리얼하게 묘사해 놓고 ‘우리는 서양 중심적으로 할게’라고 얘기하니까 그 이율배반이 나오는 지점이 있는거죠. <어쌔신 크리드>를 하다 보면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했기 때문에 정말 그곳 안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있잖아요. 굉장히 재현이 잘 되어있고 그걸 관광의 요소로 넣는 게 사실 이 시리즈의 미덕이었는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을 테고요. 이경혁 편집장: 관광이라는 게 분명히 장점도 있지만 갖고 있는 한계가 매우 명확한데, 그것이 게임이 되고 특히 역사라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조심스러운 소재와 만났을 때 결국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계속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정엽 박사: 이를테면 역으로 매우 옥시덴탈리즘적으로 만들어진 게임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입니다. 이 시리즈를 보면 서양 재현에 있어 굉장히 일본적인 시선이 많이 들어가 있고, 일본인 자신들의 문화권을 서양과 비교하고 싶어하는 욕망들이 그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걸 통해서 일본의 게임 회사들이 자신의 문화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방법론을 그동안 펼쳐왔던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는 그 게임을 플레이할 때 서양이 왜 이렇게 재현되었는지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권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옥시덴탈리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걸 게임적인 허용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거든요. 물론 아시아권이 오랜 기간 서구 문명에 의한 피식민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양보가 불가능한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양만 동양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동양 또한 서양을 그렇게 포장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그려왔던 게 게임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생님들과 제가 견해가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형태의 서양이 보여주는 시각 자체를 어느 정도 긍정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해당 문화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는 이상 그 문화권 사이에서 해석의 문제는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런 형태의 문제 제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충분히 건설적으로 갈 수 있는 문제인데 이것 자체를 그리지 못하게 막는다는 게 잘못된 발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커뮤니티 내 플레이어의 반응들에 대해 이경혁 편집장: 우리가 이 논란을 게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봤었잖아요, 저는 거기서 흑인이라는 키워드도 꽤 다양한 역할을 했다고 봐요. 게임 커뮤니티에서 논의되는 ‘흑인’은 이 게임에서 단독으로 유래된 맥락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인어공주> 와 같이 그 앞에 있었던 흑인 캐릭터의 맥락들이 있어요.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흑인의 활용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오래 해온 커뮤니티의 입장에서 형성된 흑인에 대한 이미지가 있고, 이것이 <어쌔신 크리드> 논쟁에 와서 달라붙은 것은 아닐까 싶거든요. 이정엽 박사: 저는 이 부분에서 개발자와 유저 상호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충분히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한다는 점을 문제삼고도 싶습니다. 실제로 미국 게임 개발자 사이에서 고집스러운 PC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컨텐츠가 나올 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의 사례처럼 이에 대한 백래시도 너무나도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은 야스케는 역사적인 근거도 있고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게끔 만들어진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들에서 유래하는 백래시의 영향을 받아 지나치게 세게 얻어맞고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을 넣어서 나름대로 고증에 성공해서 갔는데도 PC주의로 매도당하는 측면이 있는 거죠. 그런 백래시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나름대로의 고증을 갖춘 형태의 게임의 근거 자체를 무너뜨리는 건 매우 문제적이라 봅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쓰는 게 아니고 콘텐츠를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의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작품이고 그 안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은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얼마든지 허용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발자가 어느 정도 의무감을 가지고 그 안에서 그 세계관이 갖추는 나름대로의 핍진성을 추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개발자도 유저도 그 원칙들을 양쪽 다 위배하며 서로 간의 진영 싸움을 오랜 기간 고집스럽게 벌여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실은 ‘자신이 어떻게 재현되는가’의 문제를 정말 중요시하기보다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라는 것이 모든 양쪽 진영의 목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콘텐츠가 그를 통해서 오히려 더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경혁 편집장: 오늘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서 앞에 얘기와 붙여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는 그 앞에 흑인 캐릭터 설정에 대한 맥락이 없었다면 생각보다 별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냥 ‘흑인이 온지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일어를 잘해’라며 웃고 넘어갔을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결국 이 담론이 커뮤니티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커뮤니티에는 그 앞의 맥락이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야기를 끌면 한도 끝도 없는 주제이긴 하지만, 약속드린 시간이 다 되어 대담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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