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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제 민첩은 몇 점인가요?
RPG의 규칙은 수치의 미학이다. 이 규칙이 고도화될수록, 플레이어들이 교감해야 하는 수치와 수식도 고도화된다. 플레이어들은 더욱 강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한다.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개발용 어들을 가져오며, 각종 수치를 분석하고, 차트를 만들고, 성장 공식을 유추한다. 적 또는 다른 플레이어를 압도할 수 있는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경로와 해결책을 찾는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RPG에서는 플레이어 본인의 신체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RPG에서 캐릭터를 강력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플레이어의 전략적 사고, 소위 ‘뇌지컬’이다. < Back 그래서, 제 민첩은 몇 점인가요? 22 GG Vol. 25. 2. 10. 민망한 말이지만, 난 내 캐릭터들에게 그리 좋은 부모는 아니다. 한 명 잘 키워보려면 따져야 할 게 뭐 이리 많은지. 어떤 스킬을 획득해야 하고, 어디에 비용을 투자해야 하고, 어떤 무기를 쥐어줘야 하고, 그 무기는 어떻게 갈고닦아야 하고...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골치 아프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과거에 취했던 방법은, 최대한 많은 자원을 모아서 최대한 많은 옵션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레벨을 끝까지 올리고, 스킬 트리에서 가능한 모든 스킬을 획득하고, 가진 장비를 모두 강화했다. 그러나 현시대의 ‘캐릭터 육성’ 시스템은 내 무식한 방법론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었다. 급기야 <원신Genshin Impact> 같은 수집형 RPG에 이르러, 나는 내 손에 있는 모든 캐릭터를 키울 수 있는 자원 분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결국 목적은 하나다. 강한 캐릭터를 만드는 것. 게임 속에서 나를 대신할 이 캐릭터가 강력하고 유능하며 뛰어나길 바란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 보상을 얻길 바란다. 다른 플레이어를 짓밟을 수 있길 바란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능감을 추구한다. 강한 공격력, 화려한 스킬, 다양한 장비들을 통해 강화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들로 이 가상의 세계를 제약 없이 마음껏 누비는 것, 이는 현실에서의 내가 쉽게 얻을 수 없는 효능감이다. 검 하나를 제대로 쥐기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할뿐더러, 그렇게 연습한다고 해도 검에서 불을 뿜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는 손쉽게 영웅이 되고, 악당이 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 된다. 현실에서는 매일 아침 침대에 누워 체육관에 가야 할지 고민하는 나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더욱 큰 강함을 추구하며 부단히 내 몸을 단련하는 것을 일상처럼 여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실에서 내 몸을 단련하는 것과는 원리와 방법부터 다르다. RPG에서 강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 기나긴 숫자와의 싸움이 아니겠는가. 맥락을 가진 수치들의 집합 RPG의 규칙은 수치의 미학이다. 비디오 게임뿐 아니라, 종이와 펜으로 즐기는 TRPG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수치로 표현된다. 단순히 힘이 센 캐릭터, 튼튼한 캐릭터, 민첩한 캐릭터라는 수사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로 나타내는 게 먼저다. <크툴루의 부름Call of Cthulhu>에서는 체력, 근력, 그 밖의 무기 사용 능력 등을 수치화하며,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Vampire: the Masquerade> 같은 작품에서는 더 나아가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의 종류 및 등급까지 수치화한다. 신체적 능력이 수치화되고 나면, 이때부터 게임과 플레이어의 모든 상호작용은 수치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적과 공방을 주고받은 결과, 어떠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 현재 나의 상태 등이 끊임없이 기록되고 계산되며 게임이 진행된다. 내가 얼마나 유능한지, 또는 무능한지,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는 결산된 수치를 통해 확인된다. 캐릭터의 성장 역시 수치화되어 기록된다. 한 턴이 끝날 때마다 해당 턴의 활동 내역을 반영해 기존의 수치가 재조정되거나, 일정 수치 이상의 경험치를 달성하고 레벨이 한 단계 오를 때마다 기존의 수치에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주어진다. 특히 대부분의 비디오 게임에서는 조건을 달성할 때마다 자원을 공급하는 방법으로 성장을 제어한다. 자원은 유한하기에, 플레이어는 이를 캐릭터의 어떤 측면을 성장시키는 데에 활용할지 고민한다. 과거의 나처럼 최대한 많은 자원을 확보해서 모든 옵션을 획득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이 방법은 쉽지도 않으며,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스킬 트리의 몇 가지 경로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강제된다면, 이제 나는 내 캐릭터의 진로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체적 능력을 보강해 주는 장비의 능력 역시 수치로 표기된다. 장비는 각자가 또 다른 캐릭터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 이에 기반한 상호작용, 그리고 자원을 투입한 성장. 여기에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장비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한다. 지금 획득하는, 기본 수치가 높지 않은 장비에 자원을 투자해서 성장시킬 것인지, 후에 획득할, 기본 수치가 높은 장비에 사용하기 위해 절약할 것인지. RPG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신체적 조건을 살피기 위해 명확한 수치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비단 신체적 조건뿐 아니라 정신적, 기타 다양한 능력적 조건들까지 캐릭터가 가진 모든 조건들은 수치 정보로 관리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수치들과, 수치들의 증감을 관리하는 수식만 제공된다면 RPG를 설계하고 플레이할 수 있다. RPG 캐릭터의 신체라는 것은, 이 수치들 중 일부에 ‘힘’, ‘민첩’, ‘체력’ 등의 서사적 맥락을 갖춘 단어와, 개연성을 갖춘 수식을 부여함으로써 형성된다. 플레이어들은 각 수치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 현실에서 개념을 가져온다. 이 수치들은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캐릭터에 언제나 동반되는 내재적 수치, 활성화 상태에서만 동반되는 외재적 수치. 플레이어들은 전자를 캐릭터의 몸과 연관 짓고, 후자를 캐릭터가 선택해 사용하는 도구와 연관 짓는다. 각 수치에 이러한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 게임 디자이너들의 일이며, 이를 설득력 있게 해내기 위해서는 신체 능력에 대한 본능적인 이해에 기인할 수밖에 없다. A가 상승하면 B도 상승할 수 있다. 이 수치들 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현실 감각에 기반한 맥락이다. A와 B를 각각 근력과 공격력, 또는 기력과 이동속도라고 생각하면, 이 수치들의 관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A와 B의 자리에 지구력과 적 시야가 들어가진 않는다. 현실 감각에 기반한 연관성을 도출할 수 없는 관계는 파악할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통해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시작 단계인, 캐릭터와의 동기화조차 어려워진다. 수치의 증감과 자원의 순환 개별적인 수치들에 맥락을 부여하고 설득력 있는 상관관계를 설정하면, 이제 게임 속 캐릭터는 또 다른 나로 인식되며, 게임 속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비슷한 속성의 현실적 개념들로 치환되고, 게임은 또 다른 현실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설계와 과정들은 RPG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고도화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공식처럼 자리 잡은 구조가 있다. 대표적 RPG 중 하나인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2020)>의 성장 시스템도 이를 보여준다. 앞서 말했던 내재적, 외재적 수치를 각각 신체와 장비라는 범주로 치환해 설명해 볼 때, <사이버펑크 2077> 속 캐릭터의 신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수치(우리가 흔히 스탯Stat이라 칭하는)들은 이 2가지 수치의 복잡한 결합 끝에 도출된다. * <사이버펑크 2077>의 신체는 경험치를 축적해 얻은 포인트의 투자로 강화된다. <사이버펑크 2077> 속 캐릭터의 신체는 크게 ‘특성’이라 불리는, 5가지 영역의 수치에 기반한다. [신체, 반사 신경, 테크 능력, 냉정, 지능]이라 명명된 영역은 각각 [체력, 치명타 확률, 방어력, 치명타 피해량, 램]이라 명명된 수치에 영향을 준다. 각 특성의 하위에는 많은 ‘특전’들이 서로 얽혀있다. 우리가 흔히 스킬이라 부르는, 캐릭터가 플레이 중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이다. 신체 능력 자체를 강화해 주거나 독특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이 특전들은 종종 상호 간 선후행 등의 상관관계로 얽혀있다. 이 내재적 수치들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자원은 플레이 중 캐릭터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축적된다. 이른바 ‘경험치’다. 경험치가 축적되면 레벨이 오르고, 포인트를 획득한다. 플레이어는 이 포인트를 원하는 특성과 특전에 투자해 캐릭터를 강화한다. 이 자원은 철저히 무형으로, 외부 환경과의 거래와 양도가 불가능하며, 캐릭터 내부에서 발원해 캐릭터 내부로 환원된다. 이는 장기적으로 캐릭터가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어떤 전투 스타일을 가진 용병으로 성장할지, 그러니까 캐릭터의 장래에 영향을 미친다. * 신체 수치에 영향을 주는 장비는 무기와 사이버웨어를 포함한다. 캐릭터가 사용하는 장비는 성장에 있어서 캐릭터와 유사한 방식을 가진다. 능력을 나타내는 초기 수치가 있고, 이는 장비의 성격, 또는 이젠 상식처럼 자리 잡은, ‘색’의 문법으로 나타나는 장비의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 각 장비마다 허용되는 개수의 부속품과 부품을 장착해 수치를 추가적으로 조정한다. 마치 캐릭터와 장비의 관계처럼, 이 역시 각자 다른 수치를 가진 부속품을 선택해 장착함으로써 해당 수치를 일시적으로 활성화한다. 외재적 수치의 성장에 투입되는 자원은 형태를 가진다. 업그레이드용 부품, 그리고 돈. 플레이어는 이를 다양한 장소에서 줍거나, 의뢰비 또는 해킹을 통한 전산 조작으로 계좌에 입금되는 액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자원들은 성장 외에도 다양한 목적과 방법으로 쓰일 수 있으며, 철저히 캐릭터 외부의 환경에서 순환한다. 장비에 얼마의 자원을 투자해 얼마나 개량을 했던, 해당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 수치들은 캐릭터와 게임 플레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육성되는 내면, 개조되는 외면 RPG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통해 효능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몸과 나의 몸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캐릭터의 몸(수치)을 둘러싼 맥락들이 현실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다양한 내재적, 외재적 수치를 마련했고, 현실적인 맥락도 갖췄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이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효능감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내가 막강한 존재고, 게임에 존재하는 모든 적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지루하다고 표현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쉬워서 오히려 어떠한 효능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와 대등한, 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가 나를 막아서고, 그래서 목표를 이루는 것에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이 생긴다면, 우리는 이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한 조치들을 취한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만족과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는 이를 ‘성장’이라고 부른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앞으로 맞닥뜨릴 더 큰 난관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RPG의 성장 역시 현실적인 맥락을 가진다. 근력을 많이 사용하면 근력이 증가하고, 무기에 업그레이드 부품을 투입하면 성능이 증가한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감각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RPG의 캐릭터 성장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캐릭터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특정 스킬 분야의 성장은 해당 스킬 분야의 투자로 환원된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스템이 ‘스킬’이다. 스킬은 [솔로, 엔지니어, 시노비, 넷러너, 헤드헌터]의 5가지 분야를 가지며, 각 분야에서 제시하는 특정 행위를 통해 획득하는 경험치를 체크한다. 그렇게 각 분야에서 일정 레벨을 달성할 때마다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는 보상을 제공하는데, 이 역시 각 분야와 관련된 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성을 가진 보상이다. 내 캐릭터가 넷러너 분야의 경험치를 많이 획득해 레벨을 올리면, 그로부터 얻는 보상을 통해 넷러너로서의 조예가 깊어진다. RPG가 플레이어들에게 묻는 기본적인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이다.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질문은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내 성장 방식은 내 캐릭터가 무엇이든 잘 하는 만능이 되길 바라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실제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선호하는 전투 방식과 무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플레이 스타일이 자리 잡고 나면, 플레이어는 더욱 뛰어난 암살자나 격투가가 되기 위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자원을 투자한다. 같은 RPG를 플레이하더라도 각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은 각자의 욕망만큼이나 다채롭다. 여기에 내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끼는 시스템이 있다. RPG가 플레이어에게 제안하는 성장 방식은 보통 플레이어가 가진 욕망을 캐릭터에게 투사함으로써 관념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방향에 가깝다. 앞서 말했듯이, RPG 캐릭터의 몸은 맥락을 가진 수치들의 집합으로 구축된다. 플레이어들은 이 가상의 몸에 근육과 장기, 뼈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사이버펑크2077>은 여기에 ‘사이버웨어’라는 맥락을 제공한다. * 사이버웨어 시스템은 관념적인 신체를 실재적인 신체로 상상하게끔 한다. 사이버웨어는 엄연히 장비, 그것도 다른 RPG에서 흔히 퍽, 부적 등의 개념으로 쓰이는 부가적 강화 장비다. 무기처럼 들고 휘두를 수 없고, 방어구(<사이버펑크 2077>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처럼 전투의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지도 않으며, 장착 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몇 가지 내재적, 외재적 수치를 조정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한다. <사이버펑크2077>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강해지고 싶다면 몸을 개조하라.’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골격, 신경계, 순환계, 외피 등 다양한 부위에 사이버웨어를 장착한다. 각 부위에 장착할 수 있는 사이버웨어는 해당 부위의 특성과 연결된다. 이로써 캐릭터가 단순히 수치로만 이루어진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각 부위가 기능하고 피가 순환하는 신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플레이어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강화하기 위해 현실 감각을 기반으로 어떤 신체 부위에 어떤 사이버웨어를 장착해 어떻게 ‘개조’해야 할지 구상한다. 이 개조를 몸이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 ‘사이버웨어 용량’도 고려하면서. 사이버웨어와 같은 맥락의 성장 시스템은 고전적인 방어구 시스템의 연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몸 위에 덧입으면서 추가적이고 일시적인 신체 기능 조정의 효과를 가지는 방어구 시스템의 개념에 비하면, 사이버웨어는 동일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보다 직관적으로 신체를 강화해 준다는 맥락을 제공한다.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경험치를 쌓고 포인트를 얻어 무형의 신체적 역량을 전문화하는 동시에, 다른 편에서는 실체를 가진 몸에 사이버웨어를 박아 넣는 신체 개조가 이루어진다. 분석하고, 전략을 짜고, 실행할 것 게임 인생의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RPG를 플레이하면서 예전처럼 최대한의 자원을 모아 모든 옵션을 획득하는 성장 방식을 취할 수 없었다. 내 캐릭터가 더욱 강하고, 빠르고, 유능해지길 원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매기고,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내가 가지고 싶은 스킬을 획득하고, 좋아 보이는 장비를 캐릭터의 손에 들려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겐 전략이 필요했다. <아노 1800Anno 1800>이나 <파이어엠블렘: 풍화설월Fire Emblem: Three Houses>을 플레이할 때의 내가 필요했다. RPG의 규칙은 수치의 미학이다. 이 규칙이 고도화될수록, 플레이어들이 교감해야 하는 수치와 수식도 고도화된다. 플레이어들은 더욱 강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한다.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개발용 어들을 가져오며, 각종 수치를 분석하고, 차트를 만들고, 성장 공식을 유추한다. 적 또는 다른 플레이어를 압도할 수 있는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경로와 해결책을 찾는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RPG에서는 플레이어 본인의 신체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RPG에서 캐릭터를 강력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플레이어의 전략적 사고, 소위 ‘뇌지컬’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실 경영에 가깝다. 수치로 구성된 가상의 몸에 대한 보고서를 실시간으로 받아보며,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지, 가용 자원이 얼마나 되며 이를 어디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흑자를 볼 수 있을지 계산한다. 플레이어는 정서적으로 이 몸과 동기화된 주체이면서도, 이 몸 자체는 플레이어가 실험대에 올려놓고 조목조목 뜯어봐야 하는 타자화된 객체다. 이 구조 안에서 몸이라는 것은 현실에서처럼 수양의 대상이 아닌 경영의 대상이 된다. * 캐릭터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수치는 한 페이지로 요약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신체 경영의 개념이 점차 현실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RPG가 구사했던 신체 능력의 수치화는 현실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의 몸과 관련된,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들을 여러 요소로 규정해 수치화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만들었다. 솔직히, 끝내주게 편리하고 매력적인 개념 아닌가. 인간을 구성하는 모호한 개념들을 객관적인 수치로 가시화할 수 있다니. 타인과의 우열을 명확히 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몸을 얻기 위한 전략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니. 그렇다 보니, 이제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인간을 수치화하길 원한다. 인간의 체력, 지구력, 민첩성 등을 수치로 계산해 분석함으로써 인간을 파악할 수 있길 희망한다. 실제로 스포츠 현장에서는 선수의 신체 능력을 계량화하여 경기력 증진을 위한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으니, 이 제공하는 맥락과 현실이 그리 다르진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개념을 현실에 완벽히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으리라 나는 믿는다. 현실을 매혹하는 몸의 수치화 우리는 우리의 몸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의 신체 기능과 능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완벽히 파악이 끝난 상태인가? 수천 년에 걸친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파킨슨병을 초래하는 명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스포츠계에서는 해당 종목에서 요구되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에 이러한 계량화가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규정한 요소에 자의적으로 계산한 수치를 넣어 서로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이를 반대로 보면, 여전히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고 수치화되지 않은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먼저 규정되고 수치화된 요소가 있다는 것은, 해당 사회에서 그 요소를 다른 요소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그 요소를 특정 방식으로 수치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판단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게임에서 어떤 요소를 규정하고 수치로써 다룰 것인지는, 디자이너가 그 게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에서 어떤 요소를 규정하고 수치로써 다룰 것인지는,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에서는 때로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를 ‘기적’, 또는 ‘절실함’ 같은 단어로 표현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그간 규정되고 수치화되지 않은 신체적 요소와, 우리가 주목하지 않은 상관관계가 작동한 결과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편의상 판단한 규칙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수집형 RPG의 규칙으로도 확대된다. <원신>의 기본 멤버들에게 열심히 경험치 아이템을 먹이는 나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애들이 많은데 왜 아직도 걔네를 키워요?’라고 묻는다. 수집형 RPG에서 캐릭터는 장비의 일종이다. 등급이 나뉘어있고, 기본 능력과 성장의 한계에도 차이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바꿔 끼울 수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요건들로 복잡하게 구성될 태생적 차이를 별의 개수나 색으로 간단하고 명쾌하게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할지, 버려야 할지가 한눈에 보인다. 엄연히 장비화되었지만 캐릭터의 역할도 하는지라, 현실의 사람에게도 이렇게 명확한 규칙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의 등급을 매긴다는, 인간의 오랜 본능과도 맞닿아있으니. 온갖 요소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계산하기에 앞서, 사람 자체를 단순하게 등급화해 우열을 가리는 것이 훨씬 편리하긴 하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기준을 만드는 우리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신뢰할 수 없는 판단 기준을 통해 산출된 등급에 따라 사람을 대우하는 것은 적절한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현실을 모방하기 위해 구성된 수치의 묶음으로 RPG 캐릭터를 구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우리는 실체를 가진 우리의 몸을 수치로 채우고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객관과 논리의 가치에 열광하며, 모든 것을 측정해 가시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재구성된 우리의 몸은 정말로 본래의 우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RPG 캐릭터의 몸을 단련하는 전략적 뇌지컬만으로, 현실 세계의 몸에서도 성장을 통한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가? RPG의 수치를 읽어나가는 눈으로 현실을 읽어나가는 것은 가능한가? 이 수치들의 조합은... 무궁합니다. 객관적 수치로 이루어진 RPG 캐릭터의 몸은 현실 속 인간의 몸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공정하며, 신뢰할 수 있다. 자원을 투자한 만큼 성장할 수 있으며, 대체로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수치를 읽어나가는 충분한 감각만 있다면, 어떤 상태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에 보인다. 현실에서는 가능성이지만, RPG에서는 확신이다. 때문에 가장 효율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왕도가 존재한다. 추천 트리, 빌드, 다양한 비법서들이 개발되어 공유된다. 얼마나 빨리 캐릭터를 성장시켜 게임을 끝내는지 경쟁한다. 늘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RPG는 자신이 얼마나 전략적이며 유능한지 부단히 경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다. 전략성이 곧 캐릭터의 신체적 강력함으로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만 가끔은, 정해진 길로만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가 RPG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생에 정해진 길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도 효율을 운운하며 우리를 제약하는데, 게임 속에서 펼쳐진 새로운 인생에서까지 늘 효율을 따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캐릭터를 경영하며 스킬 포인트를 어떻게 확보해 투자하는 것이 가성비가 좋을지 궁리하는 내게 묻는다. 게임 속에서까지 정답을 찾느라, 쓸데없는 재미를 추구하는 게이머의 사명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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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itle of Disco Elysium, a highly controversial role-playing game that came out in 2019, does not tell you much about what kind of a game it is or what it's about. In fact, it's not easy to deduce why the word "disco" is included in the title of the game when its story centers around a derelict alcoholic detective investigating a murder in the port city Revachol, a place of mixed industrial prosperity and dilapidation. < Back 09 GG Vol. 22.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앞으로 소개할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aca)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게임 개발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게임 규칙과 놀이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론’(ludology)의 주요 이론가이다. 게임을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보며 서사로서의 게임 연구를 고수한 ‘서사론’(narratology)에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놀이냐 서사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쟁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 프라스카는 게임 연구에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 Back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04 GG Vol. 22. 2. 10. 앞으로 소개할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aca)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게임 개발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게임 규칙과 놀이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론’(ludology)의 주요 이론가이다. 게임을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보며 서사로서의 게임 연구를 고수한 ‘서사론’(narratology)에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놀이냐 서사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쟁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 프라스카는 게임 연구에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나아가 우르과이 출신 게임 개발자로서 그는 상업적인 게임과 실험적인 게임들을 넘나들면서 독창적인 게임들을 개발하기도 했다.『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이라는 학위논문을 쓰기도 한 그의 관심은 게임을 통해 억압과 폭력, 차별, 전쟁과 같은 사회의 현실 문제와 씨름하는 게임들을 만들어 왔다. 프라스카가 제안하고 실천한 ‘시리어스 게임 serious games’, ‘뉴스게이밍 newsgaming’, ‘교육적 게임 educational games’, ‘다큐게이밍 docugaming’ 같은 프로젝트들은 상업적 성공을 향한 오락 일변도의 주류 게임을 넘어 게임의 사회적 효용성과 실천적 잠재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게임이 교육과 사회적 인식이라는 목적을 강조하다 보면 재미라는 게임의 핵심 요인을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날이 다양해져온 게임의 장르와 콘텐츠, 그리고 게임 테크놀로지와 게이밍 환경의 꾸준한 진화 속에서 프라스카의 제안과 실험은 일정한 시의성을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게임을 만들고 누구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의 민주화’에 값하는 ‘놀이 정보계’(ludic infosphere)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게임생태계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면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토론하고, 나아가 사회 인식과 공감의 상승을 시도하는 프라스카의 꿈은 ‘몽상’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게임들만이 주로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현실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미 있는 문제작들이 발표되고 있기도 하다. ‘재미’와 ‘인식’의 균형을 향해 아직 나아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시리어스 게임’, ‘임팩트 게임’의 초기 제안자라 할 만한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에듀테인먼트와 시사 게임 프로젝트 프라스카의 게임 철학은 “비디오게임이 반드시 오락적일 필요는 없다”는 다분히 논쟁적인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은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다. 프라스카 역시 게임의 오락성과 재미를 중시하고 그가 만든 게임들 역시 재미적 요소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그의 게임인 는 1천 300만 카피를 팔 수 있었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은 세계적인 독일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이며 실천가였던 브레히트(B. Brecht)와 그를 계승한 실험적 연출가 보알(Augusto Boal)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재미라는 것이 주류 대중문화와 오락산업의 관행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와 오락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굳이 시끌벅적한 스펙터클 속에 순간적 쾌감이 아닌 주변 현실을 돌아보고 인식하는 가운데서도 재미와 오락을 찾을 수 있음을 모색하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배움의 재미’ 혹은 ‘깨달음의 재미’는 프라스카에게도 이론적ㆍ실천적 화두였던 셈이다. 프라스카에 따르면 비디오게임은 원래 비오락적인 용도로 탄생했다. 군사훈련을 위해 도입된 각종 시뮬레이터들이나 명시적으로 교육적 목표를 표방하는 게임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디지털 에듀테인먼트’(Digital Edutainment)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교육용 게임들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에듀테인먼트’는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를 결합해서 만든 신조어로서 학생들의 참여와 흥미를 유발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이나 수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바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능해진 학습자의 능동적 상호작용과 참여 가능성은 주입식 교육의 대안으로까지 여겨졌다. 곤잘로 프라스카 역시 학습 플랫폼으로서 디지털 미디어가 갖는 요소들을 인정하며 이러한 장점들을 비디오게임의 사회적 기능전환에 유용한 장치로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대체로 오늘날에도- 비디오게임의 교육적 활용이 순전히 수학이나 과학, 어학 교육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프라스카의 관심은 유저들이 상호 토론과 공감을 통해 비판적 사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비디오게임의 디자인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비디오게임의 모델은 다음과 같은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의 구상에 기반한 게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3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더욱 복잡한 사회적 비평을 계발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시뮬레이션의 문화적 파급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이 모든 시뮬레이션들을 일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식별할 수는 있다. 이는 모델 고유의 가정들에 대한 플레이어의 도전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시뮬레이션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은 시뮬레이션을 의식-상승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시뮬레이션은 비디오게임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말처럼 그의 실험이 이루어지던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게임들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혐의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괴물이나 몬스터, 트롤들 일색이거나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일상인들과 거리가 먼 캐릭터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심시티〉나 〈심즈〉 등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들의 등장하고 멜로, 역사물, 갱스터 등의 장르들로 게임의 소재와 주제가 다양해지면서 상황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임들 다수는 현실의 문제나 모순들을 회피하고 ‘디즈니랜드 같은 방식’으로 삶을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프라스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다수의 게임 연구자들에 의해 게임에 대한 무비판적 동일시를 의미하는 ‘에이전시’(agency)와 ‘몰입’(immersion)이 게임의 바람직한 효과들로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플레이어-주체가 게임 규칙과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의 창조야말로 게임 개발자의의 미덕이라고 보는 사이 인종/젠더/민족(국민)/종교 등의 차별 의제들은 살며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주류 게임들이 상업적 성공에 꽂혀 현실의 억압과 차별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미지 재현과 플레잉 규칙을 통해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고착화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게임의 판타지적 설정이 아니라 게임 대상들과 게임 규칙에 담긴 차별과 억압에 대한 무감각 혹은 그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다. 우리는 비디오게임의 플레이가 연극이나 영화의 감상과 분명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와 비디오게임 캐릭터 사이의 거리는 다른 예술의 수용자-캐릭터 사이보다 훨씬 더 밀접하다. 프라스카의 지적처럼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라라 크로프트가 혹 신장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마리오가 편집증 증세를 지닌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들 캐릭터나 게임상의 괴물들은 모두 수단이고 커서일 뿐이다. 게임의 캐릭터들은 대체로 평면적 캐릭터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그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가 아니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슈퍼맨, 스파이더맨, 제임스 본드 등의 영웅이고 싶지만 게임의 경우 그런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 우리가 바로 그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게임에서 마리오는 영웅이 아니다. 내가 바로 영웅이고 마리오는 하나의 커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에게 자유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게임의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행위를 위한 커서가 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를 게임의 영웅 혹은 신으로 자각한다. 게임의 자유도와 상호작용성에 따른 게임의 몰입은 게임 이면의 규칙에 묻어나는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자연화’(neutralization)하기 쉽게 만든다. 프라스카는 주류 컴퓨터게임들의 이러한 한계들을 비판하면서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탐색하게끔 허용하는 캐릭터 중심의 비디오게임, 더 나아가 게임의 행동 규칙을 플레이어 스스로 변경할 수 있는 컴퓨터게임을 구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또 보알이 연극을 통해 실험했던 것을 컴퓨터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관건은 “재미 경험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적 이슈들과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강화하는 비디오게임”의 개발이다. 이러한 인식은 〈9ㆍ12〉나 〈마드리드 Madrid〉와 같은 프라스카 본인의 게임의 개발로도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작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게임 창작이 어려운 이들이 기존의 게임들을 비판적으로 ‘재매개’하여 자기 이야기를 만들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끈 고전 게임들을 활용할 경우 유저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참여와 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야 게임 창작 도구나 제작 엔진의 수준이나 직관성이 크게 향상되고 ‘로블록스’나 ‘디토랜드’ 등과 같은 양질의 플랫폼이 발표되어 프라스카의 실험 제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무척 커졌다. 프라스카의 실험은 일종의 게임 모드(mod)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수준도 비약적으로 향상되기도 했다. 문제는 플레이어-주체들의 의지와 인식에 달린 셈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게임들이 드문드문 인디 게임씬에서 발표되는 중이다. 게임 유저의 게임 모딩이나 창작의 환경이 지금보다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심즈〉를 이용하여 프라스카가 상상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 프라스카의 ‘억압받는자들의 비디오게임’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억압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이 그랬듯이 프라스카의 게임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들에 대해 ‘쟁점들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알의 연극 실험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으로서 비판적 사유와 논쟁을 위한 포럼(forum)의 역할만으로도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모든 게임들은 늘 제한적이고 이념적으로 편향적일 수 있다. 그리고 게임들은 개발자들도 예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플레이될 수도 있다. 프라스카는 문학이나 영화 못지않게 게임들도 훌륭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세리 터클의 주장에 동의한다. 터클에 따르면 게임과 시뮬레이션들에 있어 “시뮬레이션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이해는 정치권력의 핵심 요소이다. 시뮬레이션들에 강요된 왜곡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더욱 직접적인 경제적ㆍ정치적 피드백과 새로운 종류의 재현, 더욱 많은 정보의 채널들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다.” 프라스카는 이 정도로 게임 사용자들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대안적인 게임 창작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개발자들이 한데 힘을 모으고 실천적인 사례들을 창안하고 확산시켜 나갈 것을 촉구한다. 이처럼 프라스카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보알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연극’ 이념과 테크닉들을 비디오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관객-배우’가 직접 경험한 억압적 상황을 무대에서 소개하고 그에 대해 배우와 동료 관객들이 참여하여 대안적 해결책들을 연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게임들을 디자인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기존 게임의 이데올로기적 가정들에 도전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당시로서는 주류 게임을 이용하여 그 게임의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최근에야 소극적이나마 플레이어들 스스로 개작한 모드 게임들을 공유하고 플레이하는 일이 낯설지는 않다. 〈로블록스〉를 통해 게임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직접 구매하여 플레이하며 동료 플레이어들 상호 간에 소통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프라스카는 대략 20여년 전의 기술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난해해 보이는 실험들을 제안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그의 작업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 프라스카의 첫 실험은 게임 역사상 매우 성공했고 중요한 게임이었던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즈〉를 기능전환하는 것이었다. 〈심시티〉의 개발자이기도 한 윌 라이트는 〈심즈〉에서 일상의 삶과 생활을 시뮬레이트함으로써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심(Sim)이라고 불리는 캐릭터를 만들어 삶을 살며 주변을 관찰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원래 윌라이트는 이 게임의 아이디어를 버클리 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책『패턴 랭귀지』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이것은 건축이 인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256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이라고 한다. 윌 라이트는 비디오게임을 통해 이러한 다양한 패턴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을 만든 것이다. 〈심즈〉에서 우리는 인간관계나 가족관계, 혹은 인간관계가 어떻게 상호반응하는지를 추체험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디자인한 ‘심’들을 통해 인생을 계획하고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보며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동일시에 가까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심즈〉인 것이다. 플레이어가 ‘스킨 Skin’ 기능을 통해 직접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 벽지나 바닥재 등의 재료들로 집을 꾸미고 가족의 삶을 설계하는 일은 현실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중 단연 즐거운 것은 각종 게임 정보, 각 플레이어들의 캐릭터들과 심들의 삶 등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유저 커뮤니티가 있어 게임을 사회적 활동으로 승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커뮤니티 기능은 게임에 쉽게 싫증나지 않게 해주고 인간사의 여러 우발적인 사건들을 통해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회사가 계속해서 확장 팩을 내놓으면서 게임 세계와 행동 영역을 확장해나간 것도 게임의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 프라스카가 〈심즈〉를 시뮬레이션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의 게임 변형, 즉 ‘모드’(mod, modification)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에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영상이나 그 경험물들을 게임의 일부로 수용하고 그것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신선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심즈〉의 발표 당시 이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프라스카는 〈심즈〉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기능에 주목한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 영웅이나 스타, 혹은 자신들처럼 보이도록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를 구상한다. 물론 프라스카의 출발점은 원작 〈심즈〉의 규칙과 메커닉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이다. 이 게임은 가족의 삶과 인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게임 산업에서 분명한 약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소비주의적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플레이어들의 소유가 늘면 늘수록 친구가 늘어나는 식의 규칙을 내장하고 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이 게임은 도시 근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시뮬레이트하면서 전형적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백인중상층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플레이어들에게 캐릭터들의 겉모습만을 바꿀 수 있는 자유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게임 개발자의 설정이나 규칙, 이미지 재현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해볼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프라스카가 게임 규칙의 전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심즈〉가 비판적 사유의 촉진을 위한 실험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들이 플레이어들의 다양한 접근을 허락하도록 충분히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캐릭터의 겉모습을 바꾸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도전과 변형을 허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자질구레한 규칙들을 변형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것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중에 발매된 〈심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캐릭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규칙들에는 게임 혹은 게임을 만든 개발자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규칙에 대한 변경을 실험하도록 하는 것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의 목적이다. 우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양 skins’ 다운로드 기능에 추가로 다양한 개성의 캐릭터 디자인과 이에 대한 플레이어 상호 공유 시스템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존의 심즈는 6가지의 행동 스타일 혹은 인물 성향에 따라서만 게임을 진행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게임의 현실감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동료 플레이어들이 어떤 플레이어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해 그들 각각의 대안들을 디자인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플레이어들 서로 서로에게 더욱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의 개선을 요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디자인 툴’을 제공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보알의 연극 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이다. 즉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해 해답이 될 만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훌륭한 논쟁과 토론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심즈〉에 대한 기능전환이 비디오게임 자체의 위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최대의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해 기존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보다 더 많은 변형의 자유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프라스카가 아그네스(Agnes)라는 가상의 소녀를 통해 소개하는 사례를 통해 그의 생각을 구체화해보자. 아그네스 Agnes는 지금 한 동안 〈심즈〉를 플레이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 게임의 규칙과 기본 메커니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족 관계가 보다 현실적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 교환 Character Exchange’ 사이트로 가서 다양한 캐릭터들을 검색한다. 그녀는 흥미 있어 보이는 한 캐릭터를 발견한다. 이것은 ‘데이브의 알콜 중독 어머니 버전 0.9 Dave's Alcholic Mother version 0.9’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데 그 게임을 설계한 플레이어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어머니는 많은 시간을 일로 보내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 피곤하다. 여전히 그녀는 저녁을 조리할 것이고 약간의 청소도 할 것이다. 그녀의 가혹한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어머니는 많은 양의 위스키를 마신다. 그녀는 아이들과 애완동물 때문에 매우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를 시험해볼 생각을 하고 그녀가 이전에 플레이해왔던 집 안으로 그 캐릭터를 다운로드한다. 이 가정은 부부와 세 아이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운로드 이후 어머니는 ‘데이브의 알콜중독 어머니 버전 0.9’로 대체된다. 이 캐릭터는 흥미롭다. 한동안 그 캐릭터를 가지고 플레이하고 난 후 아그네스는 그 캐릭터가 어느 정도의 피로에 도달하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마시면 마실수록 가족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가 꽤 잘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가 동의할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음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 캐릭터의 배경은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에 덧붙여 이 캐릭터의 직업은 형편없다. 그리고 일들을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알콜 중독 어머니’는 거실의 작은 바에서 계속해서 퍼마신다. 아그네스의 생각에 알콜 중독에 걸린 사람은 빈약한 교육을 받았고 형편없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아그네스는 일반적으로 알콜 중독자는 집 주위에 술병을 감추지 공개적으로 마시려 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캐릭터 교환’ 사이트로 가서 다른 알콜 중독 어머니를 찾아본다. 그녀는 유망해 보이는 ‘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2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를 발견한다. 그것을 실험한 후 그녀는 이 캐릭터의 행동이 그녀가 그것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적합함을 깨닫는다. 그녀는 엄마가 감리교도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버전의 디자이너가 고집한 이유에 매료된다. 그 사실은 엄마의 알콜 중독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캐릭터 디자이너의 웹 페이지를 체크하고, 이 캐릭터가 감리교도였던 어떤 실제 인물의 실제 이야기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 것임을 말해주는 짧은 내러티브를 발견한다. 아그네스는 이 스토리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알콜 중독의 행동 부분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감리교도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의 코드를 변경하기 위해 ‘에디터 editor’ 기능을 이용하고 종교와 관련된 언급들을 삭제한다. 그녀는 또한 몇몇 작은 디테일들을 추가한다. 가령 엄마가 어떤 브랜드의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 후 그녀는 그것을 ‘아그네스의 알콜 중독 어머니 1.0-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0에 의거함 Agnes' Alcholic Mother 1.o-Based on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 탑재하고, 주요 행동 규칙에 대한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몇 주 후 아그네스는 알콜 중독 어머니의 플레이에 약간 싫증을 느끼고 그녀에게 약간 더 많은 개성을 부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가 생태론자 ecologist가 되면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그네스는 ‘피터의 급진 그린피스 활동가 버전 9.1 Peter's Radical Greenpeace activist version 9.1’을 다운로드한다. 그녀는 자신의 알콜 중독 어머니에 약간의 부수적인 변형들과 더불어 피터 버전의 코드를 편집하고 그것을 카피하고 짜깁기한다. 이제 어머니는 식물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고 술에 취했을 때도 고양이를 차거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차례 변형을 거친 후 아그네스는 스스로 설계한 게임을 사이트에 탑재한다. 이 게임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의 비평과 토론이 이어지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변형하여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고 탑재한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그네스나 다른 동료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변형 작업을 반복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의 게임에 대해 크고 작은 규칙들을 변경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과정은 보알의 ‘포럼연극’(forum theatre)처럼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한 참여자들 각자의 생각들을 피력하는 가운데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공감과 협력의 과정이다. 이는 전설적인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워〉의 완성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품을 팔던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과 그의 MIT 동료 해커들을 떠올리게 한다. 플레이어들은 크고 작은 정치적ㆍ사회적 억압들을 반영한 새로운 게임들을 디자인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게임에 비판적인 자기 의견을 반영하여 규칙이나 설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군가의 게임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태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업그레이드 버전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나 합의 도출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각자의 생각들을 담아 스스로 만들고 보탠 게임들로 어떤 문제들을 공유하고 업그레이드하면서 서로의 생각들을 발전시켜 나가며 인식의 확장과 상승을 경험하는 것이 프라스카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이러한 창작 플랫폼을 ‘메타 시뮬레이션’(meta-simul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참여와 소통을 도와주는 게임 창작 시스템을 가리킨다. 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의 행동을 디자인해라’라는 기능이 윌라이트의 〈심즈〉 원작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다만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하는 것만 허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심즈〉에서는 플레이어들의 행동 폭 역시 무척 제한적인데, 그들 캐릭터는 ‘단정’, ‘사교적’, ‘활동적’, ‘쾌활’, ‘섬세한’이라는 주어진 성격 안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복잡한 결들과 인간관계의 다층적 갈등들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프라스카가 보기에도 〈심즈〉는 다른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자유도에도 불구하고 규칙의 제한에 갇혀 있는 게임이고, 부자가 더 많은 친구를 갖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있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개발자가 마련해둔 규칙과 행동 패턴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에 딴지를 걸 수 없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심즈〉에 캐릭터의 부분적인 변경 이외에 게임 규칙 혹은 행동 규칙의 변경의 자유를 플레이어에게 허용하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PMO’ 프로젝트: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의 또 하나의 사례로 프라스카는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기’(Play my Oppression, PMO)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 역시 보알의 연극 테크닉인 ‘이미지 연극’(Image Theatre)에 바탕을 둔 실험이다. 이미지 연극에서 ‘관객-배우’들은 본인들의 억압적 상황이나 차별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몸 혹은 간단한 소품들을 ‘빚고’ ‘조각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해 볼 것을 요청받는다. 이 실험에서 ‘관객-배우’들은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몸만을 이용하여 어떤 ‘이미지’를 조각해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이미지를 수정하는 ‘이미지 연극’의 작업은 ‘몸으로 하는 포럼연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극의 목표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행위와 몸짓들을 통해 억압과 차별이 재생산되고 있고 가장 기본적인 육체적 수준에서 우리의 편향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왔음을 반성하는 것이다. 다른 인종, 종교, 젠더, 국적 등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은 몸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보알의 ‘이미지 연극’을 통해 참여자들은 뿌리 깊은 차별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구조와 제도 및 권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몸을 통해 체험하고 사유한다. 프라스카는 보알의 실험을 통해 처음 한 사람이 몸을 통해 제시한 자신의 ‘억압 이미지’에 대해 참여자들이 서로 그 이미지를 수정하며 일종의 ‘대안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상호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참여자들 스스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점에 주목한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PMO’ 비디오게임은 몸이 아니라 마우스와 자판, 조이스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그는 연극에서의 몸이 아니더라도 비디오게임의 특별한 기능을 활용하면 보알의 퍼포먼스와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다시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에서 그 해법을 찾는다. 물론 ‘포토앨범’ 기능이 게임 규칙의 설계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고 플레이어 자신의 선형적인 내레이션의 창작만 허용한다. 이 기능을 이용하여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순간을 담은 스냅 사진들을 활용하여 그것에 설명을 달고 자기만의 ‘가족앨범’을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재구성한 이 앨범은 인터넷에 마련된 사이트에 올릴 수 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능을 자기만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심즈〉를 플레이하는 주된 이유는 그래픽 이미지를 통해 게임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요한 장면을 캡쳐하고 거기에 주석을 붙임으로써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심즈〉의 디자이너 윌 라이트가 소개한 포토 앨범 중에는 폭력 남편과 살던 여성의 동생이 올린 글이 있었다. 인터넷 심즈 사이트에 올라온 이 콘텐츠에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언니가 폭력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경위, 남편이 더욱 폭력적으로 되어가면서 파경에 이르게 된 사연 등을 실감나게 보고하고 있다. 물론 허구적일 수도 있는 이 스토리는 무척 현실감이 있는 것이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활발한 토론의 계기를 제공했다. 윌 라이트는 게임의 토론 유발과 공감대 형성 과정에 주목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스토리텔링 구성 기능을 강화하기도 한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의 이행을 위해서는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이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화나 영화 같은 정적인 내러티브 시퀀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즉 게임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즈〉의 원래 ‘포토앨범’ 기능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완결적’ 사건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가 작성한 스토리는 고정된 것이고 닫힌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에 의한 이야기 변경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스토리를 경험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에 대해 댓글만 올릴 뿐 상황 자체의 변경을 통한 대안 제시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폭력남편’ 이야기를 올린 플레이어의 진짜 의도가 또 다른(‘대안적인’) 게임의 창조였다는 가정하에서 일종의 기능전환을 시도한다.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다른 행동 모델들을 실험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인간 관계들과 물질적 상황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상호토론을 통해 인간과 현실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자신들이 직면해 있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인식의 강화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프라스카의 기대이다.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즉 ‘PMO’의 실행을 위해서는 우선 한 참여자가 직접 겪거나 경험한 개인적 문제와 고민을 모델화한 게임을 창조할 수 있다. 이후 다른 참여자들은 그것을 플레이해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플레이어들은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 입장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게임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시뮬레이션 게임에 대한 플레이와 토론, 수정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사회ㆍ정치적 대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 물론 플레이어들 스스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참여를 위한 다양한 툴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그리고 비교적 쉽게 게임을 변경하거나 디자인할 수 있는 방편들이 주어지고 있다. 프라스카 역시 앞으로 컴퓨터게임이 더욱 대중화될수록 ‘시뮬레이션의 처리능력'(simulation literacy) 역시 더욱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오늘날의 시뮬레이션 창작 환경은 프라스카의 기대와 상상 그 이상으로 진화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곤잘로 프라스카가 제시한 사례를 통해 ‘PMO’의 과정을 구체화해보자. 프라스카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부모나 주변에 ‘커밍아웃’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터(Peter)라는 주인공을 가정하여 샘플 시나리오를 짠다. 일단 게임 커뮤니티에서 피터의 시나리오가 승인되고 나면 그는 이 문제를 토론하려고 하는 방에 게임을 만들어 놓는다. 프라스카는 이를 ‘옵 게임’(op-games, oppressive games), 즉 억압을 시뮬레이션 해놓은 게임으로 부른다. 이 게임에는 피터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복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문제들이 재현되어 있다. ‘옵-게임들’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보알의 연극처럼 성소수자 피터가 겪을 수 있을 문제들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것이다. 피터의 경우에도 부모에게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겪는 어려움들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고전 게임의 레벨 디자인처럼 말이다. 여기서 피터는 자신이 대결해야 할 세 가지 과제, 혹은 꼭 극복해야 할 세 개의 난제를 비디오게임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각각의 게임에 〈모욕〉, 〈나는 누구인가?〉, 〈사회〉라는 제목을 달아주었다. 〈모욕〉은 이상한 놈 취급을 당하는 주인공 피터가 주변 사람들, 특히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집단 따돌림과 구타를 당하는지를 보여준다. 피터는 우선 이 문제의 시뮬레이션에 적당한 고전 비디오게임을 선택한다. 피터는 손수 제작한 그래픽을 업로드하거나 이전에 누군가 제작해놓은 것을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디오게임의 기능 향상을 위해 몇몇 기능들을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단 고전 게임들에 기반하여 다양한 모드들을 창조해보고 그중 피터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유용한 것들을 선별하여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다양한 가능성들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고 보다 숙련된 플레이어들에게는 피터의 버전을 더욱 정교하게 개선하거나 수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프라스카의 피터는 다음과 같은 일러스트로서 자신의 첫 번째 게임을 표현한다. 이 일러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피터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게임 모딩의 템플릿으로 선택했는데 외계인의 우주선 그래픽을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학생들의 모습으로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원작 게임에서와는 달리 피터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발사할 수 없다. 피터가 지금 겪고 있는 곤란은 동료학생들의 집단 이지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처럼 행동을 통해 사태를 해결해버린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 게임을 즐기면 그만일 뿐 그 이상의 토론과 작업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는 이 시뮬레이션에 첨부해 놓은 ‘디자인 노트’에 이러한 사정을 밝혀 놓았고,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은 집단 토론과 참여를 통해 사태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몇몇 플레이어들은 피터의 게임을 수정하여 다른 버전의 게임을 디자인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 그림은 플레이어들이 제안한 또 다른 해결책을 보여주는 게임 그래픽들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이 주제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할 수 있는 예술작품(가령 노래나 시)을 창조하고 반 아이들과 이를 공유함으로써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다보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플레이어는 귀를 막고 있는 캐릭터를 통해 주변 학생들의 모욕스러운 공격들을 무시해버리라고 제안한다. 피터의 게임들에 대한 이러한 변형은 무척 간단한 것이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변형이 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은 ‘다중 선택’(multiple-choice) 매뉴얼을 활용함으로써 원작 게임의 모든 그래픽을 변경할 수 있고 자신의 사진이나 UCC 그래픽들을 업로드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탑재된 게임들을 매개로 오고 가는 다양한 의견들은 개인적 수준의 소박한 해결책부터 동성애나 소수자, 왕따 문제 등에 대한 사회ㆍ정치적 구조 분석과 원인 진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스카는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사회적 인식이 상승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게임의 다음 모형은 대전게임의 고전 〈스트리트 파이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피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여 게임을 디자인해 놓았다. 그는 거울에 반사된 자기를 볼 때마다 ‘괴물’을 본다. 내면의 성적 성향과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적 시선이 충돌하는 가운데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디자인 노트’에 피터는 이러한 일이 가끔 일어나는 일이며 그때마다 ‘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라는 분열적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 게임에서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 두 정체성’이 계속해서 치고 박는 싸움을 벌이는 일이 전부다. 여기서도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피터의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쟁점이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게임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답보다는 좋은 대화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법이니 말이다. 마지막 게임인 〈사회〉의 실물 모형은 〈테트리스〉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소년과 소년, 소녀와 소녀 커플을 짝지을 수 있다. 만일 플레이어가 소녀-소년 커플로 짝을 지우면 그 커플은 계속 재생산되거나 복제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도 어떤 커플이 가장 이상적인 커플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역시 게임의 목표는 엔딩을 맛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게임들은 모두 ‘열린 게임’이고 이는 참여자들의 토론과 참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성적 취향이라는 것이 지니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들을 토론할 것이고, 모든 커플의 차이는 그저 차이에 불과한 것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사회의 통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단 세 게임이 모두 온라인에 탑재되고 난 후 모든 참여자들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가운데 다양한 참여를 할 수 있다. 그저 게임만 플레이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게임 소감부터 피터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해결책들을 댓글의 형태로 올려놓을 수도 있다. 어떤 참여자들은 피터의 세 게임들에 자극을 받아 게임을 모딩함으로써 수정된 버전의 게임을 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그림은 〈팩맨〉에 기반하여 다른 플레이어(일명 ‘캐시’)가 디자인한 대안적 게임이다. 물론 ‘포럼’은 피터의 게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이 토론의 대상으로 추가되면서 더욱 많은 크고 작은 토론들이 가능할 것이다. 캐시(Cathy)라는 여성은 〈사이먼이 말하기를〉이라는 게임을 이용하여 몬스터 게임을 디자인한다. 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1등 따라하기〉 놀이처럼 말이다. 플레이어가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그 이미지는 서서히 변할 것이다. 캐시는 예전에 피터와 동일한 경험을 했었고 스스로 감내하고 맞서야 했던 수많은 차별적 상황들을 게임에 담아놓았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후 그녀는 친구의 도움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를 자기 게임의 테마로 삼았다고 보고한다. 결국 게임의 플레이와 토론 과정을 통해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연대의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의 방안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코로나 19의 상황을 거치며 우리의 삶이 무척이나 각박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중의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종, 젠더, 민족, 종교, 장애 등의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소수자들이 그들이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은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치며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억압과 차별의 철폐를 향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최근의 경우처럼 퇴행적인 ‘갈라치기’의 흐름이 강고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우리 사회도 결국에는 동료 시민들과 ‘같이 살며 같이 즐기는’ 공환(共歡, conviviality)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래는 그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아무개’들의 협력은 억압과 차별 없는 미래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게임에 앞서 문학과 연극, 영화, 만화 등은 소수자들의 고난과 상처를 감싸 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강력한 ‘상호작용’의 매체인 게임은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를 공감과 인식의 장으로 초대하며 연대의 매개자가 되어줄 것인가? 아직은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매체들도 그랬던 것처럼 게임 역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주제로 즐기며 배우는 기회들을 보다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미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보알의 연극에 영감을 받은 곤잘로 프라스카는 비디오게임 역시 억압적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보알의 연극 테크닉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연기자가 되게 함으로써 개인적ㆍ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과 해결책들을 표현하게 한다. 물론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이상적 결론’이 아니다. 프라스카의 목표는 주류 비디오게임들의 당연시되는 규범들을 해체하고 게임을 사회적 의제(agenda)에 대한 토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들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사태들을 게임에 담아내고 그 게임을 같이 플레이하며 토론하고 숙의하며 저마다의 대안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라스카의 게임 프로젝트는 구체적 실천의 필수적 전 단계인 반성과 인식의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적ㆍ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현실 인식의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대세는 아니지만 게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주류 게임산업이 주도하는 현실에서 프라스카의 비전들은 ‘몽상’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게임 창작 환경, 게임의 플레이를 넘어 ‘보기’와 ‘만들기’로 확장되고 있는 ‘게임하기’의 실천들은 게임의 다양성 환경 구축에 유리한 기회를 조성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주류 게임과 ‘다른’ 게임들에 대한 수요도 있다. 필요한 것은 게임 사용자들의 의지이며 전환적 사고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게임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과 향유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김겸섭 독일공연예술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공연예술과 문화연구 관련 공부와 함께 공연 및 축제 연출과 기획일을 하였다. 이후 공연학 공부를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디지털게임 연구를 시작하였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컴퓨터게임의 윤리』를 번역하였고 『모두를 위한 놀이 디지털게임의 재발견』,『노동사회에서 구상하는 놀이의 윤리』를 썼다. 지금은 독일공연예술과 문화콘텐츠 관련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타임라인
그래서 게임과 중독에 관한 글을 쓸 때 모든 식자들은 엘리트주의적 정서를 느낀다. 이 복잡한 맥락을 나는 잘 정리해서 이해했으니 알려주고 싶다! 실제로 이 글의 서두는 그렇게 쓰여졌고, 완성 후에 후회했다. 그런 정리는 이미 너무 많다. 현재에는 게임 중독, 혹은 게임이용장애에 대해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과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가치 있을 것이다. < Back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타임라인 14 GG Vol. 23. 10. 10. 게임 중독, 지겨운 단어 2019년 5월 25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72회 총회에서 국제질병분류(ICD)의 제11차 개정판이 발표했다. 대규모 개정이 28년만이었다. 28년 묵은 업데이트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 질병 코드가 14000여 개에서 55000여 개로 대폭 늘었다. 이 개정에 게임이용장애가 질병 코드 6C51을 얻어 등재되면서 논의가 폭발했다. 게임에 대한 탄압, 중독 아니고 과몰입, 중독 아니고 이용장애, 게임은 문화, 게임은 산업, 물질 중독이 아닌 행위 중독, 이 모든 담론 속의 맥락이 제각각 근거가 있었다. 인류 사회 전체에서 어지러운 난상 토론이 일어났다. 그나마 최근에야 좀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단어와 개념들이 이리저리 얽힌다. 게임과 폭력, 두 단어가 만났을 때 일어났던 혼란은 게임과 중독, 두 단어가 만났을 때도 그대로 일어났다.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게임과 중독에 관한 글을 쓸 때 모든 식자들은 엘리트주의적 정서를 느낀다. 이 복잡한 맥락을 나는 잘 정리해서 이해했으니 알려주고 싶다! 실제로 이 글의 서두는 그렇게 쓰여졌고, 완성 후에 후회했다. 그런 정리는 이미 너무 많다. 현재에는 게임 중독, 혹은 게임이용장애에 대해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과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가치 있을 것이다. 각계의 입장 의료와 보건 영역에서는 예방과 치료를 위한 사회적 투자를 주문한다. 게임이용장애가 수면장애, 섭식장애와 같은 행위 중독이고, 인류사에서 이를 질병으로 규정한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적용과 관찰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새로운 중독 개념을 관찰하여 도입하는 과정이라는 인류사적 맥락에서 타당하다. 산업과 문화 영역에서는, 이 두 관점이 상호보완이 되다니 감개무량하지만, 우려에서 반대까지를 표현하고 있다. 예술 분야 혹은 산업 전반에 대한 낙인 효과를 우려하는 관점이다. 훌륭한 아이디어라 해도 현실에 적용될 때는 다운그레이드/침강 현상이 일어났던 역사를 고려할 때 타당하다. 의료 논리와 업계 논리의 타당성이 충돌한다. 행정부 부처 별로도 의견이 충돌한다. 문화 계열은 반대, 보건 계열은 찬성이다. 1차적인 이유는 역시 예산이다. 돈을 받아 집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의 중요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런 사업 임무는 제각각 중요할 것이다. 반면 이들에게 돈을 내어주는 입장인 기획재정부는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정치의 시간 이렇게 논리와 입장이 충돌할 때 정리하는 업무를 인간은 정치라고 부른다. 한국의 정치 또한 다른 모든 나라처럼 질병 코드 등재에 관련된 행정 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WHO에서 개정된 ICD를 반영하라는 ‘권고’를 한국 정부에 보낸다. 권고받은 정보를 한국 행정부처가 검토하여 한국의 질병분류인 KSD에 전체 혹은 일부를 반영한다. 이번의 경우, 새로 늘어난 것만 41000여 개 질병이니 검토 및 분류 작업은 오래 걸릴 것이고, 따라서 최소 2025년의 정기 개정 시기에 반영될 것이거나 그보다 늦어질 수도 있다. 이 절차의 소관 부서는 보건복지부가 아니라 통계청이다. 반영 이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수행하겠지만, ISD의 성격이 수많은 질병을 규정하고 코드화하여 모아놓은 통계 편람이기 때문에, 반영 업무 자체는 통계청이 주관해야 한다. 한국은 2019년 7월 23일에 통계청에 민관 협의체를 만들었다. WHO의 ISD 갱신 2개월 후이니 매우 빠른 편이다. 그런데 이 민관 협의체는 41000여 개 신규 질병 코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용장애, 대중적 용어로는 게임중독 질병 코드 하나만을 다루는 협의체다. 민간위원 14명과 정부위원 8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의료, 게임, 법조, 시민단체, 기타 전문가, 교육부, 과학기술부, 여성가족부, 통계청, 국가조정실, 복지부, 문화체육부의 인물이 모두 들어가 있다. 관련자는 물론 관리자 역할인 국가조정실까지 모두 모인 것이다. 이 22인이 연구와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면, 국가통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 등재 결정으로 이어진다. 민관협의체의 타임라인 민관협의체는 결정을 내릴 근거를 수집하기 위해 먼저 연구 용역을 3건 발주했다. 연구들은 2019년 12월부터 구체적 단계에 들어갔고, 2년 후에야 완성이 되었다. 이 3건의 연구를 토대로 회의가 연거푸 열렸는데, 2022년 1월 12일의 8차 회의에서 일이 벌어졌다. 올라온 연구 보고서 셋 중에서 하나의 신빙성과 정합성을 일부 민간위원이 문제 삼은 것이다. 해당 보고서는 게임이용장애의 역학조사가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내용의 ‘게임이용장애 실태조가 기획’ 연구였다. 역학조사를 통해 계량화된 수치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데, 연구 셋 중에서 유일하게 질병코드 도입 찬성측에 유리한 연구 결과였다. 아무튼 이 연구에서 문제점이 지적되자 후속 보완 연구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이후 민관협의체는 8개월 동안 후속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을뿐더러 추가 회의도 열리지 않았다. 정권 교체기였기 때문에 생긴 지연이라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졌다. 정지해있던 민관협의체는 2022년 말에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상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2월 21일, 통계청은 언론 보도에 대한 반박 보도자료를 냈다. 해당 보도는 사라진 것으로 보여 확인할 수 없지만, 민관협의체 회의에서 통계청 관계자가 ‘한국은 WHO 결정을 그대로 수용해야 해서 게임이용장애는 질병코드에 등재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민관협의체 무용론이 등장한 것이다. 통계청은 민관협의체의 결정은 효력이 있고 한국은 국내표준분류를 만들 때 국내 여건을 감안한다는 내용의 반박을 했지만, 해가 바뀐 4월 4일 국민일보는 여전히 민관협의체 무용론이 존재한다 는 보도를 했다. 8차 회의 이후 아직도 후속 보완 연구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함께였다. 이에 대해서는 통계청과 국무조정실 양쪽에서 반박 보도자료를 내놨다. 후속 연구는 9차 회의에서 결정된 후 세부계획 수립 중에 있으며 2023년 4월 중에 착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같은 내용의 반박이 4월 24일 뉴스원의 기사 에 대해서도 나왔다. 즉, 2023년 10월 현재에는 아직 연구가 진행중일 것이다. 통계법 제22조 1항 그렇다면 민관협의체 무용론의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통계법이다. 통계법 제22조는 표준분류 조항이다. 1항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통계청장은 통계작성기관이 동일한 기준에 따라 통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국제표준분류를 기준으로 산업, 직업, 질병·사인(死因) 등에 관한 표준분류를 작성·고시하여야 한다.” 국제표준분류, 예를 들어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등재 사안에서는 WHO의 ICD가 기준이 된다는 의미를 ‘국제표준분류를 따라가라’ 의미로 보면 강제조항이 된다. 반면 ‘참고하라’는 의미로 보면 권고조항이 된다. 언론 보도에 나온 분위기를 보면 민관협의체와 그 주변 분위기는 강제조항 해석이 우세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강제조항 해석이 우세하고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라는 의미는 즉, 현재 민관협의체의 분위기는 질병 코드 등재에 부정적인 쪽으로 흐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런 분위기를 포착한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인 2023년 2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통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 바로 해당 22조 1항을 고치는 내용이다. 국제표준분류가 기준이 아닌 참고가 되며, 전문가와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 수렴을 거쳐 국제표준분류의 반영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가 들어가는 개정안이다. 하지만 윤석열 행정부는 이 개정안에 대해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반대 입장이다. 한국의 통계 기준이 국제 기준과 지나치게 거리를 두게 되면 국가간의 통계 비교 문제가 생긴다는 우려, 즉 통계 기준의 갈라파고스화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헌 의원의 통계법 개정안은 아직 계류 중이며, 21대 국회의 회기 막바지임을 고려하면 이대로 회기 종료가 되어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고, 이와 별개로 국무조정실에서 4월 20일, 별도의 연구 용역이 나왔다. ‘게임산업 규제 개선 및 진흥 방안 연구’였는데, 여기에 게임 질병 코드 사안도 들어가 있었다. 통계청 산하 민관협의체에서 결론을 늦게 내고 있으니, 중앙부처 주도로 질병 코드 등재를 강행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국무조정실은 곧바로 그런 의도가 아니며, 결정 주체는 통계청의 민관협의체라고 확언을 했다. 국무조정실의 이 발언은 두 가지 의미로 독해가 가능하다. 첫 번째, 민관협의체의 연구 용역과 별도의 계획은 없다. 즉, 민관협의체에게만 권한이 있다. 두 번째, 민관협의체의 결론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계획은 없다. 즉, 지지부진해져서 결론이 안 나오면 계획을 세우겠다. 두 번째 해석에는 약간의 비약이 들어가 있으므로 가능성은 낮다. 여기까지가 질병 코드 등재에 관한 타임라인이며, 타임라인은 4월 말로 끊겨 있다.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2023년 10월 현재, 한국은 아직 민관협의체가 발주한 추가 연구 용역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구도 이 사안에 가장 깊게 연관된 플레이어는 국회, 행정부, 산업계, 문화계, 의료계다. 이 중에서 의료 외에는 미지근하거나 방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질병 코드 등재에 대해 의료계는 찬성, 산업계와 문화계는 반대 입장이다. 행정부는 대체적으로 미지근하다.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부처 간의 찬반 의견이 팽팽한 것이 이유로 보인다. 반면 정치권은 이 사안을 다루는 소수 국회의원들의 주도로 반대쪽으로 기울고 있다. 과방위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은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을 관철시키며 게임 중독 용어를 게임 과몰입으로 대체했다. 통계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상헌 의원은, 여당 국민의힘의 하태경 의원과 함께 게임계의 여론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노력하는 주요 정치인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인들의 활동을 언론이 보도하는 모습에서는 논조의 변화가 읽힌다.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되어 소위원회에 상정이 되면, 이에 대해 국회 내 전문위원들이 검토보고서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상헌 의원의 통계법 개정안 발의에 대한 보도에는 김일권 수석전문위원이 검토보고서 넣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인정할 경우 관련 규제와 낙인효과가 일으킬 악영향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법률 전문위원의 의견이 기사화에 포함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바, 언론사가 찬반 중 어느 쪽의 의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WHO가 ISD를 전면 개정한 2019년에는 ‘게임 중독’이 용어로 사용되면서 게임에 부정적인 기사가 많이 생산되었다. 반면 2020년에는 게임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담론이 계속 유통되었고, 이런 여론이 조성되면서 2022년의 게임의 문화 예술 지위가 인정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2023년의 게임 과몰입 용어를 사용한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한국의 여론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언론의 태도 변화로 읽어낼 수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책은 여론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등재 사안을 다루는 통계청 민관협의체의 절차가 느린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찬반 의견이 강력히 부딪히는 가운데, 코드 등재를 하지 않으면서도 그 부작용 방지를 철저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한 일처리를 하는 중이라서 느린 것일 수 있다. 혹은 행정부 내에 코드 등재를 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서 싸우는 중이라서 느린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서술한 해석에는 약간의 비약과 희망이 들어가 있으며, 실제는 두 가지 해석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Tags: 게임중독, KCD-11, ICD-11,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BIC 2022 탐방기
9월 1일부터 9월 4일 까지 부산역 근처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게임 행사가 열렸다.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발이다. 올해로 8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은 완전 비대면으로, 2021년엔 사전선정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할수 있게 한정적으로 열렸다. 코로나가 완저히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해제되면서 3년만에 완전 오프라인으로 열린 셈이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 Back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28 GG Vol. 26. 2. 10. 비디오 게임 메커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럴싸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허드슨 소프트의 1983년 작 「바이너리 월드」를 떠올리곤 한다. 이 게임의 메커닉은 1인에 의한 비대칭성의 동시조작을 그 중심에 둔다. 게임의 스테이지는 좌우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스테이지의 상단에만 협소하게 연결된 통로가 보인다. 플레이는 좌우의 두 캐릭터(패미컴 판이라면 펭귄)을 동시에 조작하는데, 양자는 Y축의 움직임은 공유하지만 X축의 움직임은 반대로 적용된다. 한쪽의 펭귄은 플레이어의 조작계 그대로 움직이지만, 반대쪽의 펭귄은 역전된 X축의 움직임을 가진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흐트러진 두 조작계에 적응해가며 두 펭귄을 골인 지점에서 만나게 해야 한다. 두 캐릭터는 연인이라는 설정이며, 플레이어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게임의 메커닉은 명백히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그 불편한 조작계로 체험시키고 있다. 「바이너리 랜드」는 1인 플레이 게임이지만 이 게임을 통해서 코옵 플레이라는 독특한 수용자성의 면모를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코옵 플레이, 그러니까 '두 플레이어의 협업'이라는 개념에는 양자간의 어긋남과 불응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둘이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그 맥락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초의 아케이드용 코옵 플레이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파이어 트럭」 역시 전열차와 후열차를 각자 움직여 목적지까지 간다는 '어긋남'의 감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플레이의 쾌감은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간섭해 해결 불가능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전제한다. 두 플레이어의 놀라운 협응이 혼돈을 정지시킬 때에 쾌감은 발생하는 것이다. * 「바이너리 랜드」(1983)는 협응의 문제를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체험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코옵 플레이의 메커닉, 아니 그보다는 코옵 플레이를 발생시키는 전제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따라가며 점차 변화해왔다. 그 미묘한 변화는 둘의 ‘차이’를 얼마나 벌려놓는지의 문제와 관계된다. 예를 들어 닌텐도의 「마리오 브라더스」나 타이토의 「버블 보블」, 테크노스 재팬의 「더블 드래곤」 같은 아케이드 코옵의 대명사같은 게임들은 차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좁혀놓는다. 이들이 언제나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는 양자(1플레이어와 2플레이어)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명제가 붙는다.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은 그 동질성을 구태여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코옵 플레이는 협력성이라는 목표지향은 작동하고 있었을지언정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오직 상황적 문제로만 제기되었다. 「마리오 브라더스」의 경우, 뒤집어진 적을 쳐내려는 찰나에 다른 플레이어가 그 적을 되돌려놓아 어이없게 사망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이 때에 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란 '나'라는 플레이어 역시 작동시킬 수 있는 수행성의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즉 이 사건들의 통제 불가능성은 '나'의 대행된 몸을 통해서 유추하거나 다시금 재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다. 이런 전제를 경유하자면, 이 때 코옵 플레이의 대상인 두번째 플레이어, 이른바 '너'는 구태여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존재하기에 흥미로워지는 국면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게임을 올바르게 돌파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되는 면도 있었던 셈이다. 이 형태의 '너'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도플갱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차이는 오히려 그것의 필요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것 아닐까? '내'가 돌파할 수 없는 것을 '너'라서 돌파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의 방식만으로는 유추와 재현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는 방법으로서의 '너'를 마주시키는 것이 변화의 명제였을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는 기능이 같지만 특수 공격에서만 차이가 발생하는 「서유항마록」 정도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로 하여금 '캐릭터를 통해 어떠한 해결법을 제시하겠다'라는 차이의 문제가 드러난다 [1] .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 까지 온다면, '숙련된 내가 더 다루기 어려운 캐릭터를 선택해 너를 보조하겠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다름의 방식이 도래한다. 캡콤은 이런 탐구의 선지자이며 선구자다. 이 방식의 극한을 아케이드라는 공간에서 체험시킨 것이 바로 「던전즈 & 드래곤즈 : 섀도우 오버 미스타라」(이하 「SOM」)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클래스는 서로 다른 조작, 기능, 해법, 필요를 지닌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클레릭에게는 치료를 요구하고, 특정한 무기나 아이템은 다른 이의 기능을 위해 양보한다. 상자를 여는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는 아이템의 다이내믹함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결정과 연결된다. 이 때 중요한 건 플레이에 그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티에 클레릭이 없다면 치료 마법을 요구할 수 없다. 매직 유저가 없다면 광역 마법을 통해 적을 일소하거나 보스를 빠르게 다운 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SOM」은 함께 플레이하는 타인의 존재가 소통의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체험을 준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근간이 여기에서부터였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수 있다. 동질성과 차이의 문제를 지나치면 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필요성의 문제다. 차이의 발생과 필요성의 발생은 온건히 맞물리지 않는다. 클레릭이 있다면 치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치료 마법은 게임 플레이의 충분 조건은 되더라도 필요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더 뛰어나면, 숙련되어 있다면, 적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안전한 루트를 알고 있다면 '너'의 도움을 구태여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있는데 구태여 만류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너'가 다르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되었다. 하지만 '너'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근원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너'는 여전히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문제 없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너'를 지우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교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기반의 매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비디오 게임은 포커를, 바둑을, 보드게임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의 연산 처리 능력은, 때로 '너'의 필요성을 지우기 위해 동원된다. TT 게임즈의 레고 게임 시리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샘플이다. 이 시리즈에는 '두 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 '한 사람이 플랫폼을 만들어준 사이에 점프해 넘어가기' 같은 협력 기반의 퍼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태여 인간인 '너'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홀로 플레이하는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을 보조할 AI 서포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버튼을 함께 눌러주고, 내가 점프하는 동안에 플랫폼의 형성을 유지시켜 준다. 그러고보면 「SOM」에도 여러개의 발판 스위치를 눌러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긴 하지만, 그 근처에는 언제나 '사람을 대신할' 갑옷상像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이에 더해 적 캐릭터를 이용해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레고 호빗」(2014)같은 레고 비디오 게임들은 AI를 보조를 통해 협력의 퍼즐을 돌파할 수 있다. 물론 비디오 게임이 꼭 '너'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가부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는 이미 ‘네’가 존재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와 ‘나’를 어떻게 관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더 논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전까지 말한 두 가지 명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첫째, 차이를 가질 것 그리고 둘째, 상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두가지 명제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너'를 요구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전제를 수렴한다면, 이 안에는 ‘나’와 ‘너’라는 관계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즉, 1플레이어인 ‘나’에게 있어서 ‘너’는 무관계한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너’는 필요한 협력의 존재로서 바로 ‘나의 플레이’라는 세계에 초대되어야 한다. 즉 ‘나’와 ‘너’가 함께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은 두 종류의 근원어, ‘나-너’와 ‘나-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버는 ‘나-너’라는 근원어는 ‘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그것’의 근원어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이는 사뭇 운명적이다. 이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는 내가 대상을 관찰, 계측, 수량화, 가치 매김 등으로 만드는 방향성을 지칭한다. 부버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형상과 흐름은 ‘나-그것’을 향해 가는 결정론을 지니기에, ‘나-너’에 대한 지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부버의 논의가 가진 거대함을 비디오 게임의 코옵 플레이에 적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의 규정은 이상할 정도로 비디오 게임의 수량화된 세계를 감각하는 우리의 체계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나-너’라는 관계, 대상을 ‘그것’이 아닌 더 본질의 무언가로 감각하고 존치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헤이즈라이트와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게임들, 「어 웨이 아웃」, 「잇 테익스 투」, 「스플릿 픽션」의 특징은 이러한 ‘나-너’라는 관계를 통해서만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게임의 기초적인 메커닉을 도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다. 단순히 협력적 게임 플레이,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경험의 문제만으로는 이 게임들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도사리는 건 그보다는 더 명백한 조건이다. 이 게임들은 게임의 플레이를 위해 특정화된 ‘너’를 요구한다. 가장 알기 쉬운 조건은 ‘랜덤 온라인 매칭’의 비적용이다. 요제프 파레스는 이 게임들을 ‘소통이 가능한 누군가’와만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건짓는다. 온라인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불특정한 누군가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와 온라인으로 즐기겠다면, 프렌즈 패스를 이용해 아주 쉽게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강제적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모두 이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이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은 강력한 소통의 가능성이다. ‘동시에 또는 연속된 특정 행위를 함께 해서 상황을 돌파한다’는 전제조건에서 특별한 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은 이 행위를 ‘직접적 소통의 방식을 통해’ 돌파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물론 플레이어가 원한다면 온라인을 통해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프렌즈 패스를 전달해, 함께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 둘 셋’의 구호를 던져서 함께 빠져나가야 하는 손뼉치기의 형식에서 어색함을 느낀다면 이 게임들의 지향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게임들은 플레이의 목적에 역전을 두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두 사람이 동원되기 보다는, 때로는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 게임들이 동원된다는 바로 그 느낌 말이다. 특히 요제프 파레스가 이 게임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서사의 틀이 이런 감각을 확충시킨다. 파레스가 말했듯 이 게임들에는 각각의 ‘관계의 감정’이 코드처럼 준비되어 있다. 「어 웨이 아웃」은 신뢰, 「잇 테익스 투」는 사랑, 「스플릿 픽션」은 우정이다. 이 게임들의 서사는 이 관계 감정들의 실현 불가능 혹은 분열의 직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두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이 관계들이 예비되어 있다는 듯이. 그런 면에서 앞서 말한 역전의 느낌은 게임 플레이 내내 도사린다. 마법의 사각형Magic Rectangle 그래서 이 게임들을 플레이할 때 느끼는 감각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라는 조건을 클리어 하고 나면, 함께 플레이하는 ‘너’와 게임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너’는 현실의 조건들과 매개되어 있기에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진 대상이다. 하지만 「잇 테익스 투」를 매개한다면, ‘너’는 특정한 스테이지에서 ‘내’가 발사하는 못을 박아주는 망치가 되어준다. 못 만으로는 게임 내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매우 특별해진다. 스테이지의 구조에 따라서 ‘너’는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 화염을 쏴주는 사람, 중력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며,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는 둘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더 특별한 것은 이것이 어떠한 ‘롤플레이’의 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잇 테익스 투」를 플레이할 때, 조준에 자신이 없는 파트너가 ‘나’에게 못의 역할을 넘겨주고 자신은 망치의 역할을 가져간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코디와 메이의 입장을 역전시켰지만 그로 인한 혼란은 그다지 겪지 않았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누가 코디이고 누가 메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너’가 아닌 다른 이가 나에게 코디 또는 메이가 되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 뿐,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매개하는 ‘대역의 몸’을 바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플릿 픽션」(2025)을 플레이 하다보면 서로의 특기를 따라 캐릭터를 교체하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여기(=플레이의 장소)에는 4개의 몸이 있다. ‘나’, ‘너’, ‘리오/코디/미오’, ‘빈센트/메이/조이’라는 몸들. 실제의 몸과 디지털의 몸은 각각 묶음 쌍이 되어 서로를 교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와 디지털의 관계라면 언제든지 서로를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리고 ‘리오/코디/미오’와 ‘빈센트/메이/조이’가 각별해지는 만큼 실제의 몸들도 그러한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결과물로서의 컷씬을 감상하며 ‘우리’의 성취와 분열 가능성에 대한 연장된 소통을 나눈다. 이 안에는 외부와의 교환 불가능한, 내부에서만의 한정된 교환을 허가하는 닫힌 체계가 발생한다. 요한 하위징아의 단어를 전유하자면, 이는 ‘마법의 사각형’이다. 이 닫힌 사각형 내부는 정말로 제의적이다. 디지털의 몸이 ‘함께’ 체험하는 것은 미묘하게도 ‘우리’가 함께 체험하는 감각을 준다. ‘우리’가 함께함의 기능을 증가시킬 수록, 디지털의 몸이 나아가는 ‘함께’도 점차 효과적으로 변모한다. 디지털의 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감상의 대상이면서도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즉, ‘우리’는 디지털의 몸을 매개하며 현실의 동시적 행위를 체험함과 동시에 디지털의 몸이 진행하는 서사를 감각한다. 사각형 안에서 네 개의 꼭짓점은 서로를 ‘그것’으로 인지하지 않는 관계적 울타리를 짓는다. 그렇기에 「어 웨이 아웃」의 마지막 부분, 빈센트의 배신과 대립의 구성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Gamecloud의 닉 밸런타인Nick Ballantyne은 이 게임의 후반부에 대해 《The What, Why & WTF: A Way Out’s Ending Sucked》 [2] 라는 강력한 제목으로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대체로 강한 협력적 체계를 갑작스레 대립 구조로 바꿔 불편함을 야기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마법의 사각형의 구조로 본다면 조금 관점이 달라진다. 이 게임에서 빈센트가 배신한 대상이 디지털의 파트너인 리오만이 아닌 것이다. 그는 현실의 ‘두 몸’ 까지도 배신한 것이 된다. (필요에 따라 디지털의 몸을 서로 바꿨을 수도 있는) ‘우리’는 그것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빈센트의 진위와 진심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규약의 위반이며, 사각형의 마법을 깨어버릴 저주다. 이후의 작품들인 「잇 테익스 투」와 「스플릿 픽션」이 주인공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심어놓을지언정, 다른 ‘셋’을 배신하지 않도록 구성하고 있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법의 사각형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를 확고히 만들 수 있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사건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 웨이 아웃」(2018)의 후반 전개가 주는 파격적인 배신감은 역설적으로 ‘마법의 사각형’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 따라서 차이는 전제조건이어야 하지, 규약의 위배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알려진 다름만이 다름으로 인정될 때에야 ‘우리’는 코옵이라는 사건과 마주할 수 있다. 가치없는 ‘너’와 마주하는 순간으로서 물론 이러한 규약의 힘과 에너지가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에게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킵 토킹 앤 노바디 익스플로드」나 「더 패스트 위딘」, 「레고 보이저스」같은 게임들 역시 특정화된 대상으로서의 ‘너’를 소환한다. 이 게임들에서 무엇인가를 달성하고, 함께 손뼉을 치고 기뻐할 때 ‘너’는 그 순간 특별한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부버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가 ‘너’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너’로 영원히 존재하는 종교적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코옵 플레이를 통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너’를 감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앞서 언급한 조건들, 차이를 가질 것과 필요로 할 것이 만족된다면 특별한 ‘우리’가 탄생할 조건도 될 수 있다. 대체불가능성의 탄생이다. 빌럼 플루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타자인 너는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내가 너에 관하여 어떤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물들이 가치를 잃는 것이다. 사물들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는 이유는 내가 네 안에서 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나의 타자인 너는 모든 가치의 무가치한 기반이다.” [4] 우리는 삶에서 ‘가치없는 너’를 얼마나 경험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나와 다른 ‘너’가, 게임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될 때에 우리는 교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우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비디오 게임이라는 필요성의 세계가, 그러니까 ‘그것’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아이러니야 말로 ‘우리’가 ‘함께’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된다. 플루서는 이어서 ‘나’와 ‘너’는 죽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불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게임은 불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옵 플레이는 비디오 게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 되리라. * 통신을 주고 받는 「레고 보이저스」(2025)의 두 주인공들 [1] 「서유항마록」의 세 플레이어 캐릭터는 기초적인 조작계를 공유하며, 어느 정도의 능력치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일종의 특수 공격인 대금단大金丹을 소모하는 공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2] https://gamecloud.net.au/features/opinion/a-way-outs-ending-sucked [3]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2010) [4] 빌럼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역, 필로소픽(202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ivist, Writer) Feng Tien Shao (Activist, Writer) Myeonggyo Hong Activist and writer. Works at the social movement organization Platform C on East Asian international solidarity and social movements. Author of To My Vanished Chinese Friend and A Ghost Throws a Punch at the World, and translator of Xinjiang Uyghur Dystopia and Dying for an iPhone (co-translated).
- [논문세미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 4>의 다양성 이면에 있는 위계적 구조
이러한 논의는 게임의 특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남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설령 게임의 내용이 아무리 진보적인 가치를 담으려 해도 게임 메커니즘이 보수적 가치를 재생산한다면 사실상 게임은 대안우파적 속성을 내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Back [Journal Club] The Hierarchical Structure behind the Diversity of Age of Wonders 4 31 GG Vol. 26. 8. 10. Paradox’s Age of Wonders 4 (hereafter AoW4) — released in 2023, yet posting strong sales with every DLC — is well known to Korean gamers as a game that folds together the virtues of the Civilization series and Heroes of Might and Magic . The system that counts as AoW4’s greatest trait and virtue is the ability to customize a people within the game. Beyond the races of the standard fantasy worldbook — elves, dwarves, orcs, goblins — it fields varied folk carrying cultures and traits of their own: the frog-formed Toadkin, the goat-like Goatkin, the Syrons resembling the Na’vi of the film Avatar . It grants, further, the freedom to customize their cultures (Barbarian, Feudal, Primal, Reaver, Industrious, Dark, and so on) and even their racial traits. These features are credited with maximizing immersion in the world and adding depth to strategy and tactics. The freedom to recompose a people yields one further property: it lets the game slip past critical discourse on how racial violence is represented. The mechanics of the 4X genre (eXplore, eXpand, eXploit, eXterminate) generally presuppose quantifying populations and peoples into manageable resource units, and so can draw the criticism of reproducing a one-sided, authoritarian concept of race. As one may feel, playing the Civilization series, that faint unease — “it rests on history and particular heroes, so it isn’t exactly to be refuted, and yet casting Korea as the technology people and Japan as the war people is somehow…” — representations of race and racial traits cannot escape the criticism of being built atop an essentialist, hierarchical concept of race. AoW4, though, is relatively free of such criticism: first, because directly linking race in reality to the concept of a fantasy people is a logical leap; and second, because even if some racial stereotype does surface in play, that is the gamer’s violence showing itself within a free system — not the game’s fault. If anything, a system that separates a people’s appearance from its traits, each freely customizable, might overturn stereotypes long repeated in fantasy worlds — might even sprout doubt toward the discriminatory perspective that ties race to racial character in reality. But Mark Hines of the University of Kentucky raises a flag against this perception — because he views representation in games not simply as text, but in connection with play. And his discussion, while moving past the classical critique of racism, makes one ponder how the specificity of games might touch their political implications. In this Journal Club, let us look at how the seemingly progressive race system of a fantasy game connects to real-world racism. Floating Signifiers and a Reinforced Racial Order As noted above, AoW4 is a subtle challenge to fantasy media’s essentialist ways of depicting race. The game induces players to consider the interplay of racial aesthetics, culture, technology, and morality within fantasy — showing that racism in the game is not something hierarchized essentialistically for the player to inherit, but something the player produces along with an array of cultural factors. Yet Hines criticizes AoW4 for constructing a subtle and harmful racial worldview even as it evades essentialist racial depiction. The concept he deploys is Stuart Hall’s “floating signifier”: a word or symbol that holds no single fixed meaning, filled with different meanings from era to era and context to context. To this Hines adds the insight of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the floating signifier does not stop at semantic fluidity, but is a field of political contest in which different groups vie for command of that very fluidity. AoW4 appears to let players compose the meaning of a people freely — but beneath, he points out, something fixed still remains. How, then, does AoW4 construct a harmful racial worldview? As C. Thi Nguyen has argued, games hold great power because they can flatten the complexity and ambiguity of reality. Questions as tangled as “what counts as success in my life” or “how should I treat other people” the game systematizes and quantifies, producing goals clear and consistent. But look at AoW4’s goals, and a reductive racial worldview centered on the white male shows through. The empire as a whole may comprise several peoples, for instance — but each individual city must be composed of one people alone. The very picture of different peoples living together in a single city does not exist in the game. Moreover, the player who holds the most members of a given people can transform that entire people at a stroke by magic — even those of its members who belong to the enemy’s side. This quietly implants the perception that a people is bound as one body regardless of political belonging. The hero system is similar. The player may bring in heroes from other civilizations and use them on their own side, but a hero’s inborn magical capacity remains that of the original people. Rather than dissolving into a new culture, the capacity follows the hero about, as if it were a law of the cosmos fixed from the beginning. Such a setting ends by nailing race down as “what one is simply born as.” The 4X Genre Meets White Male Subjectivity What matters, though, is not simply that the game figuratively rehearses the logic of white nationalism. The game’s simplification lets the white-male-centered gamer split their real-world experience from the game world, treating racial and gendered discrimination as if it “did not exist” — and internalize, across the boundary of reality and game, a transcendent racial law. The spatial setting of countless parallel worlds, for instance, turns battle with other peoples into a universal law — “different beings always discover difference and take it as warrant for violence” — while the cyclical time of repeated play makes the game’s principles of rule and war look like “common sense,” like “eternal truth.” Go a step further, and the game — in letting players remake a people’s traits at will — meets Silicon Valley’s TESCREAL discourse (techno-utopian eugenic thought) head on. The player reforms their subjects by magic in whatever direction they wish, and the design makes pressing forward with a single people strategically superior to an empire of mixed peoples. In Hines’s phrase, this amounts in effect to playing at eugenics: the elitist logic — if there is a social problem, why not technically improve the population, systematize it numerically, and reorder the world? — rehearsed in the guise of an enjoyable game system. One may suspect the criticism excessive, since every game is, after all, made of player action; but precisely in making the authority given to the player — the deciding subject at the meta level — feel value-neutral, the game paradoxically displays the effect of internalizing a principle of “eternal objectivity.” Does the criticism, then, apply only to gamers who are white men? It does not. The heart of Hines’s critique lies in the sociopolitical process itself that disciplines humans into “fully human / half human / non-human.” AoW4’s real allure lies in this racializing process of designing a people by freely combining body, mind, culture, and ideology — and it is the player who confers the hierarchy. At a glance, AoW4 seems to overturn the fixed ideas of race. In fact it has only packaged the process of race-formation more flexibly and elegantly, to suit a post-racial mood, while keeping intact the underlying frame that hierarchizes and others around the player. And so the player — whatever their actual race — is endowed with the values of the white man: he who judges coolly, shoulders strategic risk, and endures for the greater gain. The Game That Rehearses the Hierarchical Structure What Hines wants to say through the paper comes down, in the end, to one thing. In AoW4, a people’s appearance and culture may be shaken and recombined without limit — but the premise that “difference becomes the grounds of antagonism” never shakes at all. The people may seem to drift free like a floating signifier, but beneath sits a single fixed axis to which every meaning adheres. The interesting point here is that Hines does not treat the problem as a defect of AoW4 as an individual game. What he really aims at is the 4X genre — and, further, the properties of the medium of games itself. The capacity to reduce complex social judgment to clear numbers and hierarchies; the structure that hands the player, gripping perfect information, the authority to redesign the world. These properties, Hines says, fit the right-wing worldview uncannily well — the very form of the game is built to make that worldview feel peculiarly comfortable, peculiarly fun. What is more, the game’s promise that one can be anything and make anything makes it hard even to bring out fundamental questions about the hierarchies of reality. The sense that “it’s only a game” is precisely the device that sets the player at the greatest distance from political judgment. The discussion leaves a provocative question about the nature of games. To overstate it: “however progressive the values a game’s content tries to hold, if the game’s mechanisms reproduce conservative values, does the game not in effect harbor an alt-right property?” Push the logic to its end, and not only 4X games but strategy simulation at large, automation sims, deck-building games, build-optimization RPGs — even idle games — can be read as mechanisms reproducing the neoliberal values of systematization and efficiency (city simulations that reduce citizens to indices of happiness and tax revenue, say, or factory-automation games that handle population as an input–output function). At this point, though, Hines’s argument is not fully tied off. He draws his own line — quantification in games, he says, does not in itself lead to right-wing thought — yet the essay as a whole treats that very quantification and hierarchization as evidence of a right-wing worldview. How the distance between the two is to be closed is a question the paper leaves unanswered. So too with the line dividing racism from “post-racial racism”: Hines defines the latter as a posture that acknowledges difference while leaving the antagonism between differences as something natural — but where the narrative conventions peculiar to the fantasy genre end (conflict between peoples is, after all, also a device that keeps a story running) and where the infiltration of a political worldview begins remains ambiguous. That ambiguity is likely why the paper reads less as a complete argument than as one provocative question. Even so, the question itself is worth chewing over. Is the combination we meet again and again in games — “free design” joined to “inevitable antagonism” — really the product of chance alone? Or is the medium of games built, from the start, to favor that combination? Rather than delivering a finished answer, Hines’s paper makes us doubt, once more, where the fun of the games we enjoy comes from. References Hines, M. (2026). Racecraft à la carte: Fantasy assemblages in Age of Wonders 4. Game Studies, 26(2). https://gamestudies.org/2602/articles/hines Tags: 인종주의, 기호론, 4X, 제국주의, 우생학, 에이지 오브 원더스 4, 4X 전략게임, 게임과 인종주의, 판타지 종족, 부유하는 기표, 논문세미나, Age of Wonders 4, 4X Strategy Games, Race in Video Games, Game Studies, Stuart Hall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won Seo Studies culture in pursuit of a more interesting life. Curious about a wide range of cultural domains, including games, religion, and film.
- 일상시뮬레이션, 현실을 편집하는 꿈을 꾸다 - <심즈> 시리즈를 중심으로
<심즈>는 특정 대상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소위 ‘라이프 시뮬레이션(Life Simulation)’ 비디오 게임 중에서도 대명사 격에 위치한 시리즈다. 현대적인 직업을 갖고, 퇴근 후 집안일을 하며, 때에 맞춰 공과금을 내야 하는 생활을 다루는 <심즈> 시리즈는 “가장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실현하는 비디오 게임으로 예화 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심즈> 시리즈의 디자이너 윌 라이트(Will Wright)는 최초에 <심즈>를 구상했을 때 이 게임이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을 회사에 설득하기가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ngHoon Majored in literature. Loves games and comics. The Sims 4 isn't really a favorite, yet has logged some 1,500 hours in it—unsure whether that's a source of shame or just funny. Also goes by the pen name Ttuibuchi.
- 플레이어들은 왜 ‘한글패치’를 하고 있을까?
이른바 ‘한글패치’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였다. 해당 연구를 진행하면서 여러 커뮤니티 게시글이나 코멘트, 심지어 인터뷰 참여자에게 꾸준하게 보고 들었던 이야기의 대명제는 “게임은 항상 균등하게, 지역에 관계없이 생산/소비되진 않는다”였다. 우리는 일방향적 콘텐츠 전사, 서구 중심 문화적 동질화 등 미디어 제국주의가 팽배한 시대가 아닌, 능동적 미디어 수용자에 의한 재해석과 전유의 시대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으니, 적어도 미디어는 각 지역의 수용자들에 의해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유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jin Park A graduate student who has stepped into game studies. Currently taking cours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Lately, exploring the varied game experiences mediated by games, as well as subculture within Japan. Writing is still hard.
- 보는 요리, 플레이하는 서바이벌: 요리 서바이벌 예능과 게임 사이의 빈 자리
요리하는 게임은 많다.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재료를 조합하고, 제한 시간 내 접시를 완성하는 게임 말이다. 그런데 정작 텔레비전 방송이 오랫동안 다듬어 온 ‘요리 서바이벌’은 디지털 게임 안에서 좀처럼 장르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 비대칭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왜 요리는 방송에서 그토록 잘 작동하는 게임이 되었는데, 게임에서는 요리의 질을 두고 겨루는 경연의 중심에 서지 못할까? < Back Watched Cooking, Played Survival: The Empty Seat Between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and Games 30 GG Vol. 26. 6. 10. There are many cooking games—the kind where you take a customer's order, combine ingredients, and finish a plate within a time limit. Yet the "cooking survival" format that television has spent so long refining has rarely managed to establish itself as a genre within digital games. This asymmetry is the starting point of this essay. Why has cooking become a game that works so well on broadcast, while in games it has never stood at the center of a competition contesting the quality of the cooking itself? Cooking programs are often lumped in as a variation on informational entertainment or mukbang, but the survival type, at least, is hard to see only in those terms. The rules are clear, resources and time are limited, and judgment and elimination follow. It also offers the pleasure of spectatorship. Strip it down to the skeleton of its form and it already sits very close to a (watched) game. Among these,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is the case that reveals cooking's game mechanics in their most compressed form, while Culinary Class Wars is the case that stacks character and narrative atop those mechanics to raise the density of the story. How the Refrigerator Becomes a Game Board The cleverness of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lies in simplifying the conditions surrounding cooking to the extreme. A limited resource pool—the guest's refrigerator; a short cooking time of fifteen minutes; a head-to-head structure in which two chefs (or teams) clash simultaneously; tense, play-by-play coverage; and immediate tasting and judgment. Within a single episode, these elements complete themselves in a closed loop. Rather than a cooking program, it looks closer to a one-round fighting game. *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Image source: JTBC The crux here is not the cooking itself but the design of the rules surrounding it. Ingredients are not infinite, and time is always short. The two chefs start from the same conditions but must build an edge through different strategies and levels of skill. Rather than explaining a chef's touch or philosophy at length, the broadcast focuses on how that touch reveals itself through combinations of choices made within the constraints. As a result, the viewer reads the flow of the match rather than the outcome of the dish. This structure connects to what game studies often call the pleasure of rule-based play. Not because you can freely do anything, but precisely because what you can do is limited, choice acquires meaning and generates tension. In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 the refrigerator is a kind of inventory and map at once. The chefs calculate the scarcity and combinatorial possibilities of ingredients on the spot, claiming a key ingredient before their opponent or taking a detour route. Like the refrigerator's owner and the cast, the viewer follows that flow and scores it in their head. They don't cook directly, but they have become a spectator who already understands the rules. Each episode's contest clearly ends with one person's victory, yet the viewing experience as a whole doesn't accumulate so simply. Each chef's style, recurring tactics, favored ingredients, and the reactions and character that the editing emphasizes all pile up episode after episode. With those items, the viewer builds a kind of chef-character pool inside themselves. This one is the steady type, that one the adventurous type, another a player stronger in the back half than the front. At this point,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is a cooking program and, at the same time, acquires the grammar of a spectator game. Black and White, Character and Narrative Culinary Class Wars is the same cooking-survival format, but its unit of design is somewhat different. Beyond a single round's contest, it pulls the entire season into one long campaign. The program's strength lies less in comparing cooking ability than in its capacity to translate differences in ability into differences in character. * Culinary Class Wars. Image source: Netflix The very naming of "black spoon" and "white spoon" already looks like a set of character slots. Instead of remembering contestants merely as chefs, the viewer watches the series tracking what background each person rose from, who they form a rivalry with, in which moments they waver, and in which moments they bring their power to bear. Unlike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 where the game mechanics are pushed to the foreground, Culinary Class Wars devotes far more time to repackaging the differences those mechanics produce as character narrative. The gamification tendency that appears across survival entertainment is tied to this as well. If rules, missions, elimination, and promotion are the skeleton, what gets layered on top is generally an empathizable character and a growth narrative. Just as a game grants the player not only a mission but also a role, survival entertainment likewise parcels out narrative positions to its contestants. Someone becomes the overwhelming favorite, someone the possibility of an upset, someone a variable long remembered even if they don't survive in the end. What makes Culinary Class Wars interesting is that it fills the fundamental limitation—the inability to convey the taste of food directly—with an excess of character and contest narrative. Unable to show taste, it amplifies the drama surrounding taste as much as possible. The viewing experience of Culinary Class Wars doesn't stop at confirming the win or loss of a dish. The viewer is absorbed in tracking who will stand at the narrative center of this round, and how a loser's defeat will be converted into either a thing overcome or a springboard for an upset. The true gastronomy offered to us outside the screen, unable to sense the food's taste, is nothing other than the clashing dissonance the characters produce as they collide. Culinary Class Wars is, in effect, a sophisticated storytelling factory that endlessly produces, atop the skeleton of competition rules, the character narratives the public can grow fervent over. The Metagame of Cooking Survival To discuss the relationship between cooking survival and games more dimensionally, it's worth attending to the concept of the metagame. In a narrow sense, the metagame is the higher-order strategy surrounding a game's win or loss; in a broader sense, it points to the entire practice of interpretation, spectating, prediction, and recontextualization that unfolds around a game. Together with fellow researchers, I have argued that "watching games" is an independent act bridging the inside and outside of a game, and that it needs to be discussed in relation to the expansion of game play. Borrowing this perspective, watching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seems less like simple viewing and more like a continuous metagame the viewer performs around the rules, the characters, and the outcomes. When watching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 the viewer scores the chefs' choices in real time, imagines which combination they would have picked, and, after the broadcast, can search for the recipe and reproduce it in their own kitchen. In Culinary Class Wars , the layers of the metagame grow thicker still. Who benefits from the editing, what contest structures are being designed for the next episode, what effect a particular contestant's survival has on the entire season's narrative—about all this, viewers debate endlessly outside the broadcast. Social media, YouTube clicks, comments under articles, even reviews of visits to a featured chef's restaurant—all flow in as part of that debate. Even when the round inside the studio ends, the play of toying with its result continues outside the studio. Cooking, as material, suits the amplification of the metagame especially well. Strategy or item builds are usually hard to follow unless you've actually played the game yourself, but cooking is a domain everyone feels they know, or can follow, to some degree. The ingredients in the fridge, familiar cooking methods, restaurant experiences, the memory of one's own palate—these are already within the viewer's everyday life. And so cooking survival becomes a contest of expertise and, at the same time, a domain that permits the amateur's meddling (even if matching a professional's level of quality is hard). Thanks to this, it becomes possible for the viewer to move back and forth among judge, coach, and player. Why Cooking in Games Is Usually Not Survival So why did television make cooking into such an excellent game, while games have kept cooking bound to the level of an auxiliary system or "life content"? For one, the two media handle cooking in entirely different ways. Unable to convey actual taste, broadcast foregrounds the form of competition and the drama of character, thereby growing the imagination about taste. A game, by contrast, is a medium the player must operate directly. The moment cooking is dragged into a matter of refined judgment and taste, turning it into rules and designing feedback becomes difficult. A good system in a game generally requires a clear relationship between input and result. Press the attack button and a damage figure appears; time your dodge right and a bigger attack opportunity comes back around. But the taste of cooking is hard to reduce to a single number. Even the same medium-cooked steak may strike one person as perfectly done and another as overcooked. Broadcast can paper over this difficulty with the authority of the judges, the rhythm of the editing, and the contestants' expressions, actions, and narratives. A game, however, must establish a consistent judging system the player can accept. The reason so many games route cooking through buffs, recovery, and crafting systems is, I think, not unrelated to this. Rather than contesting qualitative differences in taste, converting cooking into a functional result is far easier by design. Of course, it's not as if games that directly contest the quality of cooking don't exist at all. In Princess Maker 2 , a harvest festival is held every October, and it included a contest where you cook a dish with your cooking skill to decide a winner—cooking and sensitivity stats being the evaluation criteria. More fully, Battle Chef Brigade is an example that wove together ingredient hunting, match-3 puzzles, and judges' rulings to elevate a cooking tournament into the game's main plot. But such cases are, at best, closer to exceptions. The common path is to go toward the cooperative-and-chaotic physical comedy of the Overcooked series, or toward the cooking-motion-centered minigames of Cooking Mama . All thoroughly fun games, of course, but a different flavor from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where authority, narrative, and elimination interlock over the quality of the cooking. It also bears noting that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is a genre that consumes the social drama surrounding taste rather than taste itself. If in Culinary Class Wars what matters is who rose from what background and what choice they made in the face of what crisis, then in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 too, the chef's character, banter, and psychological battle with the opponent generate as much of the fun as the combination of fridge ingredients. When broadcast gamifies cooking, the material it places at the center is the people, class, taste, expertise, and improvisation that food reveals. The materials at work here are essentially one-off and contingent, and above all they are rooted in the real lives the contestants carry outside the broadcast. The name of a restaurant one chef has run for years, the reputation another has built up in the industry, the next day's business he'll face after a defeat—these create the weight of a single round. Broadcast pulls this external weight in as is and gives it meaning through editing and judgment, but a game must hold all that weight internally from the start. For a game to transplant these materials, it must make the player experience them as repeatable rules—and it's precisely the design of that repeatability that proves unexpectedly thorny in the case of cooking. So the seat that remains empty, still or yet, is not the cooking game. It is the form of a game that systematizes social judgment of and spectatorship over taste while being unable to reproduce taste directly—or, more precisely, the seat where such a form would sit. This empty seat is less a limitation of games than something close to the very spot where broadcast's strength is located. Broadcast layers authority, editing, and character narrative over a one-off contest, offering the viewer a "game-like" experience anew each time. For a game to pull off the same thing, it would have to embrace within the medium a separate apparatus to translate one-off-ness into repeatability—things like real-time viewer voting, season-based operation, or linkage with an external reputation system. Until that work gets underway in earnest, cooking survival is likely to remain, for the time being, the game broadcast does best. The success of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paradoxically reveals a domain games have not yet fully absorbed, while at the same time, even amid a current in which broadcast grows ever more game-like, it shows in the clearest form what only broadcast can still do. How Watched Cooking Becomes Play By this point, calling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merely "game-like broadcasting" begins to feel insufficient. It is a text in which the act of watching itself becomes play. Even without cooking directly, the viewer reads the rules, picks characters, predicts outcomes, and goes on extending the board even outside the broadcast. If Please Take Care of My Refrigerator shows, in compressed form, the appeal of a single round's design and immediate decision, Culinary Class Wars stretches that same decision into a long-form narrative, heightening the continuity of spectatorship. Both are alike in being broadcast-as-metagame. The interesting part is that this play created by broadcast then returns to real-world eating. Viewers follow recipes, visit the chefs' restaurants, and invest particular ingredients with new meaning. These practices that keep going outside the magic circle are no different from the process by which watching, talking about, and imitating a game becomes, in itself, a culture. In the end, cooking-survival entertainment can be called a vast metagame apparatus that bundles up, all at once, the competition, judgment, and spectatorship surrounding cooking—and the imitation and related consumption that follow. Television here did not broadcast cooking; it turned the act of cooking, through the most popular means available, into a playable story.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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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디스는 <스타워즈: 구 공화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진정한’ 게이머의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살핀다. 콘디스는 ‘진정한’ 팬 또는 게이머 무리가 미디어 환경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유토피아적 공간을 이룩하고 게임 내 특권적 지위를 이루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 Back 16 GG Vol. 24.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ahin Park Interested in the boundary between the real and the virtual. Recently returned to a certain online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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