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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회] 게임비평의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 왔고 어디로 향해야 할까?
이번 대담에서는 창설에 기여했으며 초창기부터 공모전을 지켜보거나 심사위원 활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던 연구자 및 평론가들이 모여, 가 만들고자 했던 게임 비평 및 담론 장의 성격과 현재까지의 성과와 이력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게임 비평 씬에서의 후속세대 양성에 대한 고민과 계획을 함께 짚어보았다. < Back [대담회] 게임비평의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 왔고 어디로 향해야 할까? 26 GG Vol. 25. 10. 10. 2021년 여름 창간 이래 국내 디지털게임 비평의 활성화와 신진작가 발굴을 목표로 하는 <게임 제너레이션(이하 GG)>의 게임비평 공모전이 4회차를 맞았다. 이 공모전의 창간과 지속적인 개최에는 게임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발굴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 게임 비평 씬의 형성과 장기적인 유지 및 확장을 위한 고민들이 녹아 있다. 이번 대담에서는 창설에 기여했으며 초창기부터 공모전을 지켜보거나 심사위원 활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던 연구자 및 평론가들이 모여, 가 만들고자 했던 게임 비평 및 담론 장의 성격과 현재까지의 성과와 이력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게임 비평 씬에서의 후속세대 양성에 대한 고민과 계획을 함께 짚어보았다. 게임비평 담론 장의 구축 매개로서 의 성과 이경혁 편집장: 반갑습니다. 게임비평공모전이 올해로 4회를 맞아, 이번 호는 공모전 특집입니다. 는 게임 비평문화 담론의 확산과 동시에 게임 씬의 성립을 위한 후속세대 양성을 목적으로 창간 첫 해부터 공모전을 시작해 왔습니다. 오늘 오시지 못한 강신규 박사님을 포함하면 여기 계신 분들이 창간부터 함께한 개국공신 같은 분들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편집장 후기에서도 풀겠습니다만, 어느덧 4회를 맞으니 개인적으로 남다른 소회가 생기더라고요. 오래전 저와 함께 이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했던, <인문학협동조합>에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함께한 나의 동료들은 시작 당시의 마음과 지금의 차이는 어떤지, 현재 게임 비평 씬에 대한 각자의 생각은 어떤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 게임 비평이란 옛날에 시작할 땐 뭐였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지?’ 정도를 얘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정엽 박사: ‘비평’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어떤 담론의 장 같은 게 살아 있어야 작동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가 없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게임 비평을 위한 지면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게임을 빠르게 공략할 수 있는 형태의 리뷰나 게임에 대한 산업적 형태의 기사였죠. 거기서 약간의 비평적 톤이나 메타 분석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냥 필자가 그런 담론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로 한정됐었던 것 같고요. 제가 스스로 비평가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같은 저널이 생기는 게 게임 씬 내 비평적인 움직임을 만드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의 편집위원을 하진 않았지만 투고는 초반에 많이 했던 것 같네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이정엽 선생님은 공모전 심사위원도 하셨지요. 이정엽 박사: 네. 공모전 심사도 그렇고 초기에 일을 도왔던 것 같은데. 4년이 지나면서 바뀐 부분이 있다면 그런 형태의 (비평을 위한) 담론의 장이 형성됐다는 거. 게임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나 사회적인 분석들이 통용될 수 있는 어떤 무대가 만들어졌다는 건 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아니, 처음부터 너무 잘 말씀해 주시는 것 아닌가요. 읽는 분들이 자기들끼리 짜고 친다고 욕할 것 같은데... 이정엽 박사: 조금 뒤에서 까면 되잖아요(웃음) 잘한 부분은 칭찬을 해야죠. 그 전까지 못 했던 건 확실히 맞거든요. 저는 <디스이즈게임>, <게임톡>, <인벤> 등 여러 지면에 기사를 실어본 경험이 있지만, 게임 관련해서 특정한 비평적인 시각을 갖고 분석해달라는 식의 청탁은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데스크가 현재 게임계의 트렌드를 소화하는 데에 치중하다 보니 메타적 분석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지 않나. 그러다 보니 게임 비평 관련 장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죠. 이경혁 편집장: 근데 ‘게임비평 장’이 있다고 하기에는, 가 게이머나 학술 대중 사이에서 굉장히 많이 읽힌다고 얘기하기는 아직 어렵지 않습니까? 이정엽 박사: 일례로 과거에는 여러 개 있었지만 지금은 <월간 게이머즈>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국내 게임잡지잖아요. 저는 <게이머즈>가 게임 시장에서 고군분투하고 버티면서 하나의 게임 담론을 만드는 독립된 분야로 성립하고 있다는, ‘장’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매체가 존재하는 이유에 조회수나 구독률만으로 책정할 수 없는 지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는 제 생각에 국내에서 유일한 게임 비평지라는 생각이 들고요. 물론 다른 비평 조직들이 없었던 건 아니죠. <게임문화연구회>나 김상우 평론가님이 하셨던 <앨리스 온>도 있었지만, <앨리스 온>은 미디어 아트 쪽에 방점이 많이 찍혀 있었고. <게임문화연구회>는 저널을 만들기보다는 이너서클처럼 활동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외부의 사람들이 들어오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는 지속적으로 공모전을 하며 이너서클의 단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글 쓰는 필진도 굉장히 다양해졌잖아요. 제가 에 글을 안 쓴 지 한 1년쯤 된 것 같은데요. 요즘 나온 글을 읽으며 느끼는 게 잘 쓰는 후배들이 많아지니까 확실히 다양한 시각이 들어와서 좋아요. 그런 차원에서 오픈된 마인드로 계속해서 후속 세대가 양성된다는 생각이 들어 뜻깊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오영욱 선생님도 공모전을 1회부터 4회까지 쭉 지켜보셨을 텐데 어떠셨나요? 오영욱 박사: 네, 사실 이전에 네이버 공모전도 봐 왔는데 그게 한 5회 정도 했을거에요. 당시 상을 받으셨던 분들이 네이버에서 책도 발간하고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계속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지면이 없었어요. 수상자 중에 계속 활동하시는 분이 제가 알기로 한 분밖에 안 계시거든요. 그런데 에서는 수상자들이 활동할 공간을 계속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좋고 게임비평 씬이 형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고 있어요. 착각인진 모르겠지만 그간 게임 비평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가 꾸준히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면 2000년대 초에 <게이머즈>를 운영하던 게임문화가 일본에서 가져와서 발간한 <게임비평>이라는 잡지가 있었잖아요. 조금 나오다 휴간되었지만 그 후로도 사람들이 ‘우리도 그런 잡지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얘기를 계속 했었거든요. 지속적인 수요는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저는 지금 나오는 게임 비평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해요.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인 통찰이 담겨있고. 그 전시대의 게임 비평들은 사회적인 깊이는 담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과거에 물론 게임 평론가들도 존재했죠. 게임 잡지에 쓴 글을 모아 평론집을 내기도 하고. 그보다 더 전에는 <컴퓨터 학습> 같은 잡지에서 게임 공략을 하던 대학생들이 있었고. ‘하이텔’도 아니고 ‘케텔’ 시절에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애니메이션부터 게임 비평까지 같이 하셨던 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씬의 유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있고요. 반면 지금의 는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지는 부분들이 있어 좋은데 다만 이런 걱정은 있어요. 예를 들어 ‘경혁 샘이 쓰러지면 GG는 없어지겠지’ 같은 생각... 두 번째는 항상 얘기하던 거지만 지금 평론의 느낌이 인문학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든 종류의 칼럼들이 많다는 것. 저는 어쨌든 기본적으로 게이머고 개발자다 보니 인문학도는 아니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자라는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 옛날 게임잡지를 복간하려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 당시의 스타 기자들을 보면 그런 게 있거든요. 과거 스타 기자 중 하나인 정태룡 씨가 <게임라인>의 ‘B급 게임 코너'에서 <풍래의 시렌>이라는 게임을 추천한 적 있어요. 그 사람이 얘기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게임을 명작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발굴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있거든요. 당시 스타 기자가 자기가 좋아했던 B급 게임들을 추천하던 게 마치 영화 평론가의 픽처럼 동작했던 것 같아요. 요즘 영화 평론도 B급 영화도 막 건져내서 얘기하고 그러는데, 지금 에서 나오는 게임 얘기를 보면 사실 저희는 (발굴은커녕) 트렌드를 따라가기도 약간 힘들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에서 경혁 선생님 글을 많이 봐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대부분 게임에 대한 사회적, 외적 접근이 중심인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냉정하게는 제가 뭐 격겜을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울류 게임을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학계의 물은 살짝 먹었고. 이런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긴 해요. 그러다 보니 (에) 어느 정도 제 성격이나 제가 추구하는 게 묻어나기도 해요. 그런데 신기한 건 공모전은 제 뜻대로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공모전에 대해서는 글이 너무 아카데믹하지 않나, 이렇게 어려운 걸 사람들이 읽을까 항상 고민입니다. 나름대로 심사위원 풀에 계속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만. 오영욱 박사: 근데 생각해 보면... 예를 들어 저는 <버추얼 파이터>같은 격투 게임에서 프레임 단위로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 프레임의 의미나 전투 디자인, 게이머의 수용과정을 고찰하는 글을 보고 싶거든요. 근데 <버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프레임 가지고 때리고 맞고 이런 거 얘기하면 그걸 누가 볼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웃음). 반대로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미국의 당시 사회상황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게임을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글이라 비평하기 좋은 게임이지요. 이경혁 편집장: 아까 제가 하려던 얘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어느 정도 비평 씬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 아웃풋들이 ‘게임하지 않는 독자’에게 먹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게임 갖고 저런 얘기를 하는구나를 따라올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거죠. 근데 우리 공모전을 보면 실제로 정말 게임 메카닉을 파고드는 비평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유의미할 수 있지만, 첫째로 충분히 깊이 파고들지 못한다는 것, 둘째로 굉장히 좁은 독자층에게만 먹힐 수 있는 글이라는게 고민입니다. 저는 그걸 잘 풀면 격투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도 따라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리듬 게임 정도를 제외하면 거기까지 나갈 수 있는 필자가 아직까지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늘 가능성은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가 그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재현될 수 있다를 보여주진 못하지 않았나. 공모전이 이어진다면 그런 것들이 되게 중요한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정엽 박사: 공모전 심사를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회고를 해보면, 아카데믹한 글들은 기본적으로 대학원에서 보통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그 대상을 분석해야 된다는 형태의 교육을 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이론적인 배경을 넣고 게임이라는 대상을 분석해야 된다는, 인문학적인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수련들을 (필자들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평 씬과 학계의 씬이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학계 씬이 (비평 씬의 형성에) 완전히 부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아닌게. 아까 <레데리>같이 사회적인 배경이나 역사가 존재하는 게임이 비평적으로 분석하기 좋다는 말씀을 주셨지만, 저는 거기에서부터 게임이 다른 분야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로 같이 뻗어져 나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를테면 비교 대상으로 삼을 다른 분야의 저널이 영화에서는 <키노>나 <씨네21>, 음악에서는 <웨이브> 같은 게 떠오르는데요. 그런 잡지들이 폐간되거나 침체되면서 한국 음악에서 인디가 가지는 힘 자체가 같이 줄어든 것 같아요. 과거 같으면 내가 정말 좋은 어떤 음악을 들었는데 <웨이브>에 가면 이미 비평이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 글을 보며 작품에 대해서 느꼈던 부분이 상호 교차하면서 훨씬 더 깊이 있는 시선을 갖출 수 있게 되고. 한국 안에서 이런 형태의 대중문화 관련 비평들이 크로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거든요.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 정도까지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아요. 미국의 게임 비평 분야에서도 시도가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킬 스크린> 같은 저널도 있었고, 아트포럼 형태의 스타일로 게임을 예술적으로 비평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는데 거기도 딱 2016년에 장이 끝나거든요. 2010년대 중반이 사실 그 기간내 매체의 변화를 정량적인 차원으로 환산해서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자본주의 흐름으로 모든 것들을 환산해 버렸던 시점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신기하게도 그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가 참전했다는 게 저는 의미심장해요. 오영욱 선생님이 정리해 주셨지만 국내 게임 평론도 초창기의 흐름이 완벽하게 단절됐다고 생각하거든요.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게임 평론이라는 걸 (전문적으로) 했던 사람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다 학계에 적을 두면서 게임을 학술적으로 연구해서 살아남겠다는 형태였죠. 저도 그중의 하나였고. 그렇게 포지셔닝했던 사람들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누군가 새롭게 ‘게임 평론가’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혼자 주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회적인 형태의 공인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지면이 필요하고 담론의 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걸, 아마 누구보다 먼저 알고 그걸 지면화를 시킨 게 의 의의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영화도 비평이 망해가고 음악은 이미 아이돌 중심 음악으로 다 재편되어서 인디나 비평의 수혜랄까 이런 것들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된 상황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게임은 그래도 국내에서 계속 게임들이 나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최소한 논의할 장소가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 안도감 같은 것도 있어요. 우리 게임 씬 자체가 아직까지는 스스로에 대해서 반성적 회고를 할 수 있는 시선이 갖춰져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게임비평 공모전, 4년의 성찰과 아쉬움 이경혁 편집장: 아니, 깐다면서 왜 자꾸 칭찬을... (당황) 그럼 얘기를 돌려서 아쉬운 얘기에 초점을 맞춰 볼까요? 어쨌든 우리가 4년을 해 왔는데, 게임비평 공모전의 형식, 알려지는 숫자, 사회적 영향력 이런 면에서 우리는 뭘 더 해야 되고 뭐가 미진했는가를 한번 진단해보면 좋겠습니다. 오영욱 박사: 우선 저는 트위터를 하고 있는데요. 사실 지금 평론 씬의 최전선은 어떻게 보면 트위터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기존 평단에 없던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좋은 평론을 내서 출간하기도 하거든요. 지브리 영화나 안노 히데아키에 대해서 트윗을 쓰는 분이 계셨는데, 어떤 씬이 있고 이 장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혼자 타래로 몇백 개의 트윗을 다셨거든요. 그 트위터 글만 모았는데 그게 두 권짜리 책으로 나왔어요. 그런 분들이 게임에 대한 글도 쓰시곤 하는데, 그런 느낌의 글들은 제가 지면에서 못 봤던 비평이기 때문에 공모전에도 올라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아마 심사위원이었다면 저는 그런 글을 올려봤을 것 같아요. 다만 트위터에서 글을 쓰시는 분들은 이 공모전의 존재를 모를 가능성도 있어서. 저희가 그나마 가장 열심히 활동하는 데가 트위터이긴 하지만 그런 부분들이 조금 아쉬워요. 어쨌든 (에 글을) 내는 사람들을 보면 학계가 좀 많다는 느낌을 받고요. 이정엽 박사: 저도 공모전 심사를 하면서 받았던 초기 글들은 여전히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좀 있다고 보이고요. 어떤 글들은 방법론을 증명하기 위한 글인가라는 싶을 정도로 과도한 것들도 있었고. 사실 평론의 1차적인 목적이 분석할 대상이 게임이고 이 게임이 가지는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1차적 목적을 망각하는 글들이 꽤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편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나 미술, 애니나 웹툰 비평하시던 분들이 그 쪽의 담론 장이 사라지니까 기존에 자신이 했던 형태의 방법론을 가지고 게임을 분석하는 글을 많이 투고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글들은 상대적으로 방법론적인 강박이 덜했던 것 같아요. 그런 비평을 하셨던 분들은 기본적으로 비평이 대상에 대한 어떤 애정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고, 사실 그런 의미에서 (분야간) 접점이 게임 장 안에서 많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를 들면 권태현 선생님이 24호에 쓰셨던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분석글 같은 경우 사실 미술 비평가의 시선이 아니라면 쓸 수 없었던 형태의 글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접점을 갖춘 글들이 안에 더 많이 들어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4년간의 모든 로 데이터를 보면 생각보다 공모전 응모작 수에서 학계가 압도적인 건 아니긴 합니다. 또 아쉬웠던 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정엽 박사: 전에 이경혁 선생님께서 게임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얘기를 하셨었지요. 그 표현이 참 좋았던 게 게임을 통해서 다른 연결 지점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고, 게임을 통해서 외부적인 담론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얻어져야 게임이 대중문화로서 성립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이를테면 <씨네21>을 보면 영화 얘기를 하지만 사회 문제를 얘기하고, 영화가 가지는 어떤 그 담론의 자장을 풍성하게 넓히는 역할들이 보여지거든요. 그런 것들이 게임 안에만 갇히게 하지 않고 우리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지점에 대한 인식을 자연스럽게 시켜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대부분 퀄리티가 좋지만, 뭐랄까 게임 안의 담론들이 그냥 게임 안에 다 갇혀 있는 거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아요. 게임이 세상을 보는 창이어야 하는데, 게임을 통해서 외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서 게임을 계속 보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사실 게임 평론도 그렇고 글밥을 먹는 분들이 대부분 갖는 강박이 있는 것 같은데요. 게임 바깥으로 나갔을 때의 두려움이라는 게 있는 듯합니다. 내가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니니까 이 얘기를 해서는 안 되겠다. 실질적으로는 더 많은 부분을 얘기해야 되는데 일정 부분 이상 이야기를 안 하고 그냥 게임 담론 안으로 마무리를 지어버린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게 매체의 단점 때문인지 아니면 게임 평론가들의 어떤 인식적인 한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분야 웹진이나 비평을 하는 매체와 비교했었을 때 여전히 갖고 있는 약점으로 보입니다. 오영욱 박사: 근데 그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누군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어요. 지금까지 게임 비평을 해 왔던 대부분은 기자들이었죠. 한국에서 게임 기자라는 직군 자체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다들 학생들이었어요. 게임 잡지를 처음 만들고 게임을 잘 모르는 어른들이 PC 통신이나 게임을 잘하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저단가 착취로 글을 쓰게 한 게 대부분 최초의 게임 공략이나 평론들이었던 겁니다. 그 사람들은 게임 얘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사회 경험도 많지 않고, 심지어 대학 안 가고 계속 게임 하신 분들도 있고 잘 풀리면 게임 회사에 가시고. 그 분들은 정말 밥 먹고 게임만 했거든요. 사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 왔고요. 예를 들어 저는 <블랙 팬서>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흑인 운동의 맥락을 얘기해 주기 전까지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어요. 정치사회적인 지식도 예를 들면 학생운동부터 시작하셨던 경혁 선생님과 비교해 본다면 그게 끊겼을 때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할 때까지 사실은 잘 몰랐고요. 그런 상황에서 이제 게임을 해 온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요즘은 다양한 경험을 해본 분들이 많이들 게임을 하니까 많이 나아졌다고는 생각하는데. 옛날에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극단적인 게임 오타쿠들이었고 게임 비평을 하던 사람들은 게임에 대해서만 잘 알고 그거를 (외부와) 어떻게 연결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두 가지 고민이 드는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게임만을 딥하게 파거나 메카닉이나 UI에 치중한 글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공모전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유니크한 글들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근데 저도 과연 그런 글 중에 뭐가 정말 좋은 글인지를 확답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네요. 그리고 두 번째가 더 큰데, 잘 쓴 글이 하나 있을 때 이 필자가 이걸로 지속적으로 이 얘기를 할 수 있는지 지속성에 대한 담보가 정말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공모전의 목적은 결국은 신진 발굴인데, 4회 정도 진행해 보니 계속 작업을 하는 필자와 그렇지 못한 필자가 있지 않습니까? 냉정하게 얘기하면 게임 씬에서 자기 시각을 갖고 계속 비평이란 유의미한 활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누군가가, 저와는 또 다른 포인트에서 전문성과 지속성을 갖고 나오면 최고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런 필자를 찾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이정엽 박사: 그동안은 게임이 되게 기술 중심적인 미디어였고 게임 창작에는 큰 자본과 코딩실력 같은 것들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점점 그 장벽이 약해지고, 누구나 상용 게임 엔진을 바탕으로 게임을 쉽게 할 수 있게 됐죠. AI가 그런 허들을 더 낮춰주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게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소재적인 것들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게임도 사회 문제들을 굉장히 많이 다루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게이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게임의 대상은 되게 장르화돼 있고 패턴화되어 있다고 보여요. 그거를 누군가가 풀어줘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게임 비평 씬에서는 서구도 그렇고 한국은 더 없었다는 생각이 들고. 근데 조금씩 그런 움직임들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일례로 제가 BIC 심사위원장 하면서 제안한 ‘소셜 임팩트 게임상’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데요. 그런 것들이 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아 이런 주제로도 게임을 만들 수 있겠구나’라고 개발자가 역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BIC에서 소셜 임팩트 게임상을 만든 뒤에, <언폴디드: 동백이야기>같이 4.3 사건을 다룬 게임들이 나오기도 하고요. 게임의 소재적 다양성이 넓어지고 역사, 젠더, 심리, 1인가구의 문제 등을 다루는 임팩트 게임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결국 ‘장을 만들어 주는 게 사람들한테 얼마나 큰 역할을 미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역시 지금까지는 그 장을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한 것 같고요. 그런데 가 여기서 게임 안에 다시 갇혀버린다면 그건 가능성을 훨씬 더 줄이는 일인 것 같아요. 가 지금 보면 메인 토픽과 아티클, 인터뷰, 해외논문 번역 등 몇 가지 세션이 있는데 이 중 게임 바깥의 것을 보여주는 형태의 섹션이 필요하고, 그것과 게임의 관계를 어떻게 접목을 시킬 건지 통시적으로 점검하는 세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게임과 다른 분야의 접점을 넓혀줄 거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적으로 평론이라는 건 일종의 분석 대상으로 삼는 매체가 사회와 맺는 관계를 어떤 식으로 재증명해야 되는지를 스스로 나름대로의 어떤 논리를 가지고 뚫어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오타쿠의 한계다’라고 접어버리는 순간 그다음부터 그 가능성은 안 열린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형태로든 담론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혼자 할 수는 없으니 많은 다른 평론가들에게 그런 형태의 지면들을 유도해 가며 담론을 만드는 것부터가 가 다시 해야 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영욱 박사: 제가 편집위원회를 그래도 좀 오래 했었는데, 이정엽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시도들을 다 해봤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더라구요. 예전에는 UI/UX 특집을 매일 연재해보자고도 했었는데, 두세 번 다음부터는 필자를 못 구했던 것 같아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특집도 자주 만들었는데 그것도 요즘은 좀 잘 못하죠. 사실 뭘 다루냐를 결정하는 것도 힘들고 쓸 사람이 부족해서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그리고 또 드는 생각이, 예전에 제가 게임을 좋아하니까 대학에서 국문과에 있는 게임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텍스트 분석’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기억이 나요. 당시 전 공학 수학 배우던 공대생이었고 전공도 달라서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이 없었거든요. 어쨌든 평론의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변에 적잖이 있지만 ‘어떻게 글을 끝까지 쓰는 훈련을 받아서 정제된 형태의 글을 내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게임 씬의 후속 세대를 위한 과제와 전망 이경혁 편집장: 제가 매번 씬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결국 그 또래에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들이 모여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함께하는 그룹의 중요성이 크다는 걸 느껴요. 작년 공모전이 끝나고 제일 뿌듯했던 순간이 언제였냐면 수상자가 4명이 나왔어요. 지스타에서 시상식을 해서 다 초청했는데, 편집위원과 수상자들이 1차만 같이 하고 2차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는데 그 오신 분들끼리 2차를 가신거에요. 이 작업을 하며 3-4년 동안 가장 보람찼던 때가 그 순간이었어요. 이정엽 박사: 국문과에 오래 적을 두고 있다 보니 느낀 건데, 피어 리뷰를 통해서 생성되는 동료 의식이 중요하고 그런걸 만들어주는게 ‘문단’이잖아요. 글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사람의 강한 자아의식도 동료의 의식과 같이 부딪혔을 때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한번 거쳐서 객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자정 작용을 해주는 부분이 문단일 텐데요. 게임은 사실 개인적으로 즐기고 SNS에 올려서 내 기분을 발산하는 형태의 문화가 기본적으로 자리 잡았기에, ‘동료에 의한 피어 리뷰를 거친다’는 마인드를 굉장히 적게 가지고 있는 미디어였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게이머, 게임 생산자, 게임 평론가들 사이를 아우르는 형태의 접점의 장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정제되지 않았다고 해도 내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별로 부끄럽지 않은 거죠. 그런 마인드를 갖고 기본적으로 작업해 온 장르였기 때문에. 그런데 저는 평론이 어느 정도 공적인 담론에서 얘기해야 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리뷰든 논문이든 어떤 글에서 갖춰야 할 사회적인 요건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게임 씬은 그걸 기존의 학계나 평단, 예술계의 스타일을 빌려와서 형성해왔던 건데. 예컨대 아즈마 히로키처럼 타 분야에서 내공을 쌓은 사람이 와서 이 분야를 휘저을 때 그것에 대한 대응 논리가 형성이 안 되는, 일종의 어떤 식민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중요한 지적입니다. 매번 공모전마다 유행하는 주제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저희 1회차에는 내러톨로지, 루돌로지에 대한 글만 한 열 개가 왔어요. 보면서도 아쉬웠던 게 한 가지 주제가 휩쓸면 다 그쪽만 다루는 것 같은 거에요. 오영욱 박사: 항상 공모전 수상 소감들을 보면 ‘자기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 외로웠다’는 이야기들도 많거든요. 저는 그 분들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얘기를 주변에서 지인들과 할 수가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필진분들이 밖에서도 서로의 글을 읽고 비평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정엽 박사: 저도 그런 바람이 좀 있어요. 에서도 필진끼리 오프라인 만남 같은 것들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단 같은 경우에는 한 명이 등단하면 등단지 외의 다른 모임도 가면서 그 안에서 서로 인정해 주는 문화가 있고, 그게 무언의 사회적인 소속감을 만들기도 하거든요. 인정감, 소속감이 만들어지면 그걸 바탕으로 내가 쓰는 글에 대해 더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 문학 생태계나 씬 안에서 어떤 자장을 만들것인지 반성적인 태도를 갖게 되기도 하고요. 우리가 맨날 메타비평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 메타 비평을 하는 주체에게도 사회적인 인정이 주어진 상황에서야 메타적인 사고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공모전을 거쳐 나온 평론가들에 대한 지면을 마련해 주는 걸로 끝나지 않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준과, 그들이 왜 게임을 비평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질문에 대해 계속 화답할 수 있을 정도의 대외적인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비평이 지속될 수 있을 겁니다. 이런게 잘 형성이 된다면 어느 날 어떤 필자가 이경혁 선생님을 저격하려고 다른 잡지를 만들지도 몰라요. 그게 되어야 실질적으로 그 장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경혁 편집장: 그 점은 제가 더욱 신경써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어떤 인정과 존경을 이 바닥에서 만드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레거시 미디어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웃음) 외부에서는 여전히 오타쿠라는 말을 듣는 한편 내부에서는 평론가가 아니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요. 이제 시니어가 된 입장에서 다음 세대가 조금 더 편하게 자리잡게 하려면 말씀하신 사회적 인정을 어떻게 만들어주고 자존감을 북돋을 수 있는가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사실 오프라인 네트워크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잡지를 혼자 하고 있다 보니 그게 잘 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정엽 박사: 실은 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은 되게 외로운 형태의 싸움이었던 거 같아요. 경혁 선생님도 그런 차원에서 다른 미디어나 학계,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인 인준을 바라는 조직들로부터 부당하게 곡해당하거나 아니면 오타쿠 클리셰를 뒤집어 쓰시거나 이렇게 끝났다는 거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사실 에 대응할 만한 형태의 거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를 들어 게임 웹진들도 서로 계속 싸우고 있지만 그것은 비교대상이 될 수 있는 거울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자생력 측면에서 게임 평론이 웹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분명히 쉽지 않지요. 원고료도 줘야 되고 필자도 모아야 되고, 그 안에서 어떤 무브먼트도 만들어 나가야 되고, 자기만의 어떤 시각들을 확보해 나가야 되는데. 분야를 막론하고 평론들 자체가 많이 붕괴한 상황에서 게임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사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자장을 거의 못 만들고 있는 상황이니까. 여하간 어떤 거울이 빨리 생겨야 도 경쟁심도 갖고 배울 것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에서 역할이 좀 더 있다면 그런 걸 하고 싶어요. 후배 평론가들과 얘기를 더 나누고, 그분들이 아직 지면에 못 쓴 나머지 것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일지, 게임을 통해 세계의 어떤 측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이런 게 더 많이 나와야 된다라고 생각해서요. 여기도 어떻게 보면 세대 교체를 위한 ‘문단’을 형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여요. 오영욱 박사: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젊은 필자랑 이야기를 해볼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젊은 게임 연구자들도 사실 점점 줄어들고 있고, 저 같은 경우에는 게임 역사 얘기를 계속 해야 하는데 ‘게임 역사 연구자’라는게 있나, 내 작업물을 누군가한테 물려줘야 할 텐데 그걸 누구한테 물려주지 싶어요. 그러면 양성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나도 조금 있으면 40대 중반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소명이 오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 처음에 공모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우리 대담의 핵심은 게임비평 씬의 후속세대에 대한 고민이네요. 공모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우리는 ‘게임 이야기할 다음 세대의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일을 해왔던 것 같고요. 저는 실무자로서 씬 형성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항상 고민이 있고, 그래서 사실 이 자리도 처음에 같이 의견을 모았던 사람들에게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걸까라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공모전 수상작이 나가는 호에 같이 실리면 이 글을 보시는 다른 독자들도 함께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 Back 06 GG Vol. 22.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ilkwon Jeong A farmer, a baker, and a barista. Currently in an eighth year of writing as a game journalist. Striving to experience and witness as much as possible within the limited time given.
- 동시대 레트로 게임 : ‘동시대’와 ‘레트로’의 불편한 공존에 관해
우리의 동시대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현상, 즉 ‘레트로 스타일’이 존재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극단을 완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고전적인 픽셀 아트와 칩튠 사운드, 단조로운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게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우리의 보편 인식, 즉 기술 중심의 비디오 게임史에 입각해 보자면 이레귤러들로 봐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동시대 레트로 게임contemporary retro game’은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Back 동시대 레트로 게임 : ‘동시대’와 ‘레트로’의 불편한 공존에 관해 24 GG Vol. 25. 6. 10. 비디오 게임은 기술 기반의 매체다. 이 사실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전기와 디지털 신호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 놀이는 고도화된 컴퓨팅, CGI, 물리적 입력 장치, 디스플레이 등의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사를 같은 선線 위에 위치시킨다. 확실히 매년 반복되는 ‘신작 게임’ 발표의 현장은 기술의 각축전처럼도 보인다. 특히 AAA로 위시되는, 고도의 예산이 투여된 게임들은 지난해의 기술적 성취를 상회하며 더 강력한 시각적 완성도를 자랑하며 우리는 그에 열광한다. 그런데 우리의 동시대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현상, 즉 ‘레트로 스타일’이 존재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극단을 완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고전적인 픽셀 아트와 칩튠 사운드, 단조로운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게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우리의 보편 인식, 즉 기술 중심의 비디오 게임史에 입각해 보자면 이레귤러들로 봐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동시대 레트로 게임contemporary retro game’ [1] 은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 1. Steam에서의 복고풍(Retro) 태그와 픽셀 그래픽(Pixle Graphics) 태그의 출시량(위쪽)과 비율(아래쪽) 그래프. (출처 : steamdb.info ) Steam의 각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 태그 [2] 의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2024년 발매된 복고풍(Retro) 태그를 가진 게임의 수는 2,266편이며 픽셀 그래픽(Pixel Graphics) 태그를 가진 게임의 수는 4,250편으로 집계된다. 2024년에 Steam에 발매된 게임의 수는 29,063편이며 각 태그의 비율은 약 7.8%와 14.6% 정도로 확인된다. 그보다 5년 전인 2019년에는 각각 678편(5%)과 777편(5.7%)이었다. 즉 5년 사이에 발매 수는 각각 약 4배와 6배 정도로 증가했으며 전체 발매 수 대비의 비율은 1.4배와 3배 정도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3] 절대수뿐만 아니라 발매작 내에서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특성’이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으며, 점차 그 범주를 늘려가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명백한 경향이자 현상이다. 따라서 이 현상은 우리의 기초적인 인식을 위배한다. 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움직이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가 이러한 반동적인 현상을 만드는가? 왜 게이머들은 점차 ‘레트로 스타일’의 게임에 관심을 늘려가는가? 향수 현상으로서의 레트로 스타일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게이머들이 점차 향수에 의존해 간다는 관점이다. 이는 게이머의 전체 연령층 상승이 가져온 경향으로도 볼 수 있다.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ESA)에서 2021년 작성한 비디오 게임 산업 보고서 [4] 에 따르면 미국 게이머의 인구 비중은 18세 미만이 20%, 18~34세가 38%, 35세 이상은 통합 42%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통계에 의하면 20대 이하의 게이머들이 전체 수치에서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중년 이상의 비디오 게이머’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기관의 2015년에 보고서 [5] 에서는 18세 미만이 26%, 18~35세가 30%, 36세 이상은 통합 44%로 집계되는데 전체적으로 18세 미만에서 18세 이상으로 분포가 옮겨가는 형태로 보인다. 절대수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게이머의 전체 수치는 2015년은 1억 5천만이며 2021년에는 2억 2천만으로 약 1.5배의 상승을 보인다. 따라서 2015년에는 36세 이상의 게이머가 약 680만 명으로 추산, 2021년에는 약 950만으로 추산되기에 중년 이상의 게이머 절대수가 증가하는 추세인 것은 확실하다. 소위 말하는 ‘가벼운 게이머’, 즉 게임의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의 증가를 의심해볼 수도 있다. 그러한 관점을 위해 ‘게임에 대한 적극적 소비자’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Steam 사용자의 분포 분석으로 옮겨갈 수 있다. 2024년 statista.com 이 수집한 자료 [6] 에 의하면 41%를 차지하는 가장 다수의 그룹은 20~29세로 집계되며, 그 뒤로 가장 큰 비중은 29%를 차지하는 30~39세 그룹이 차지하고 있다. 20세 미만의 플레이어 그룹은 5% 정도를 차지하며 40대의 15%, 50대의 7% 보다도 낮게 집계된다. 결국 이러한 도식은 과거의 게임 경험을 가진 채 성장하는 ‘자기 역사를 가진 게이머’가 증가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30대 이후에 처음 비디오 게임을 접하는 인구보다는, 10대와 20대를 걸쳐 30대 이후에도 비디오 게임 플레이를 유지하는 게이머를 상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레트로 스타일 게임’에 대한 소구는 이러한 게이머들의 향수적 요청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옥스퍼드 인터넷 연구소와 시러큐스 대학교 공공 커뮤니케이션 스쿨은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의 게임 세션 기록을 통해 레트로 게임을 플레이한 플레이어가 대부분 자신이 10세 때 유행했던 게임을 자주 플레이했다는 연구 [7] 를 발표했다. 게임의 선택에 이러한 개인적 향수personal nostalgia가 개입되는 것이다. 많은 레트로게이밍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현상을 향수의 효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야코 수오미넨Jaako Suominen은 “레트로게이밍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외래어를 사용할 수 있다. 노스탤지어이다.” [8] 라고 서술했으며, 데이비드 하이네만David Heineman은 “비디오 게임에서의 향수가 흥미로운 이유는, 재출시된 게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플레이어가 정확히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9] 라고 쓴다. 물론 이들의 연구 방향은 어디까지나 동시대 레트로 게임을 소비하는 경향보다는 과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기는 레트로게이밍retrogaming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면을 통틀어서 중년의 게이머들에게 있어 ‘향수’가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공유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향수가 작동하는 방식은 당연히 일정량 과거에 대한 낭만성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제약이 존재하던 과거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혁신의 가능성을 가졌다는 전제다. 카밀 비친스키Kamil Wyczynski는 그의 연구 보고서《Meanings of Retrogaming Consumption for “Millennial” and “Generation X” Men》에서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뒤, 그들이 레트로게이밍을 즐기는 이유를 9가지로 ㅡ 조악하게 설계된 제품 경험, 미완성 상태로 출시, 소비자 노동, 온라인을 전제로 한 설계, 온라인 멀티플레이 중심, 창의성의 결여, (하드웨어의) 계획된 노후화, 불공정한 경쟁 환경, 이윤을 위한 설계 ㅡ 로 정리한다. [10] 대체로 소비자 관점의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확실히 ‘창의성의 결여’라는 대답은 존재감을 가진다. 연구 참여자 중 한 명은 이 문제에 대해 “80년대만 해도 게임들을 보면…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였어요, 새롭고, 혁신적이고, 그러니까… 혁신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똑같고 똑같은 게임들만 계속 나오는 것 같아요.”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다른 참여자는 그럼에도 ‘인디 게임 개발자에게는 좋은 환경’이라는 답을 한다. 비친스키는 여기에 이렇게 첨언한다. “참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소규모 회사들은 대형 게임 기업들보다 게임 제품을 설계할 때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디 개발자들은 오늘날의 레트로 게임들을 낳았던 초기 게임 산업의 환경을 모방하고 있다.” 즉,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게임이 더 창의적이던 ‘과거’를 충실히 모방하기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게임에 비해 더 창의적이라는 (향수 기반의)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 보스맨Frank Bosman은 이러한 경향을 ‘비디오게임 낭만주의Videogame Romanticism’라고 정리하는데, 그의 정리에 의하면 이것은 ‘이는 과거를 기술적으로는 열등했을지 모르나, 문화적·사회적·정신적으로는 우리 시대보다 우월했던 시기로 이상화하는 방식’이다. [11] 향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가 규정한 두 가지 향수의 개념을 차용한다. 보임은 《The Future of Nostalgia》에서 향수를 두 가지 개념, 복원적 향수Restorative Nostalgia와 성찰적 향수Reflective Nostalgia로 구분한다. 이 둘은 Nostalgia라는 단어의 어원인 Nostos(귀향)과 Algia(그리움)로 그 근원이 분리된다. 즉 Nostos에 더 많은 기원을 두고 있는 복원적 향수는 과거의 것을 ‘마땅히 돌아가야 할 시간적 고향’으로 이상화/낭만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반면 Algia에 그 근원을 두는 성찰적 향수는 과거라는 시간과의 물리적 단절을 받아들이는 성향이다. 이 향수는 대상의 직접 재현을 요청하기보다는 현재라는 시간과의 거리감을 통해 과거를 인지하는 경향이다. 앞서 비친스키 연구의 참여자들이 보인 태도는 정확한 의미에서 복원적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태도를 동시대 레트로 게임 전체에 적용할 수 있을까? 맷 보이어Matt Boyer는 Game Developer에 게재한 글에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오 레트로 게임’)이 복원적 향수를, 과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기려는 경향인 레트로게이밍이 성찰적 향수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12] 그의 논지에 따르면 레트로 스타일의 차용이란 이상화된 ‘과거의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한 방법적 동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어떠한 예시를 제시하진 않았으나, sebagamesdev의「파이트 앤 레이지Fight’n Rage」나 Hebi Lee의 「케이론즈 크립트Kharon’s Crypt」같은 게임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게임은 단순히 픽셀 그래픽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게임의 시각적 구성에서도 자신들이 ‘원본’으로 삼고 있는 게이밍 환경까지도 복원하려 한다. 예를 들어 「파이트 앤 레이지」는 CRT 모니터를 방불케 하는 필터와 화면의 곡면까지 재현하고 있으며, 「케이론즈 크립트」는 게임 화면의 외측에 ‘게임보이 컬러’의 외형까지 표시한다. 이것은 보이어가 함께 서술하고 있듯, 비디오 게임의 열렬한 플레이어가 개발자가 되며 발생한 현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개발자’로서 가장 첨단의 기술을 필요로하기보다는 ‘추억의 게임’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보인다는 점에서 상당히 향수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CRT의 질감을 남겨놓은「파이트 앤 레이지」(왼쪽)와 게임보이 컬러를 연상시키는 구성의「케이론즈 크립트」(오른쪽). 하지만 보이어가 자신의 글에 차용하고 있는 마리아 B. 가르다Maria B. Garda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다. 그는 오히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성찰적 향수에 해당한다고 논하며 「핫라인 마이애미Hotline Miami」, 「페즈Fez」,「FTL」, 「맥픽셀McPixel」을 예시로 든다. 그는 이 게임들이 단순히 과거의 형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 과거의 형식을 성찰하며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회고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향수라는 감정의 양식과 구조 자체에 대한 탐색으로 이해” [13]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페즈」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과거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 플레이어가 과거의 형식을 보며 느끼는 ‘향수’ 그 자체라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에서 향수가 재현되는 방법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삼기에, 가르다는 이러한 게임들은 전적으로 현대의 시기에서 ‘향수’라는 가능성을 조망하거나 탐구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물론 하나의 현상을 어떠한 맥락에 모조리 대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모두 복원적 향수나 성찰적 향수에 포함된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핵심은 ‘향수’ 그 자체에 있다. 게임 제작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두 가지 의미에서 향수의 범주 안에 있다. 하나는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재현적 욕망이며, 이것은 많은 경우 복원적 향수에 가담한다. 또 하나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창작적 환경, 이를테면 제한된 인력과 예산, 창의성의 발현을 위한 의도적 제한 등이 있다. 이는 많은 면에서 성찰적 향수에 속한다. 소비의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경우 복원적 향수에 속한다. Mossmouth의 「UFO 50」같은 게임은 ‘합팩’이라는 문화적 틀 없이 이해되기 어렵다. 「UFO 50」의 즐거움은 과거의 ‘불법복제판’을 상기시키는 관점에서 온다. 하지만 동시에, 「UFO 50」의 진지함이 과거의 ‘불법복제판’을 다른 방식으로 상기시키게 만든다면 이는 또한 성찰적 향수의 작용 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 되든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과거 없이’ 현존할 수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향수 바깥의 레트로 스타일 하지만 논의를 이렇게 좁혀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경향이 있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단순히 그것의 ‘향수’ 를 감지하는 게이머들에게만 어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원본으로 삼는 대상은 대체로 80~90년대의 8비트 또는 16비트 게임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게이머’로서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이러한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스타일이 하나의 현상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배경에는 분명, 향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작동들이 있을 것이다. Z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비디오 게임 연구는 대체로 이들의 작동 배경에는 ‘간접 향수second-hand nostlagia’ 또는 ‘역사적 향수historical nostalgia’가 작동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양식화된 역사성 또는 그러한 형식에 대한 대행된 향수로서 과거의 게임을 탐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옥스퍼드 대학의 《Reliving 10 years old》에서도 이러한 해석이 발견되는데,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의 클래식 게임을 플레이한 사용자 중 29%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단종된 콘솔의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연구자들은 이들의 게임 플레이는 개인적 향수가 아닌 역사적 향수의 작동이며, 따라서 향수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낸다. 물론 이는 설문의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의 프링글스는 올해 1월 레트로 게임기의 수리를 지원하는 Retro Console Clinic과 레트로 기기에 대한 약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 [14] 을 3gem과 동시에 진행했다. 이 결과에 의하면 Z 세대 설문자 중 24%가 레트로 게임 콘솔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설문에 참여자 중 74%가 이러한 ‘향수의 게임nostalgic games’이 더욱 편안함을 준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이것을 전부 향수의 효과로만 치부하는 방법과 거리를 두는 관점들도 있다. 프랭크 보스만은 이러한 현상을 레트로게이밍과 구분되는 빈티지 플레이Vintage Play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향유하지 않은 과거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패션이나 다른 문화에서의 빈티지 소비와 유사한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는 트레이시 다이앤 캐시디Tracy Diane Cassidy와 해나 로즈 베넷Hannah Rose Bennett의 빈티지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 “빈티지는 패스트패션의 부정적 이미지와 그 결과에 대한 대응 양식response이다.” [15] 라고 적는다. 말하자면 이러한 선택은 ‘가장 최신의’라는 형용사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작동한다. 물론 이때 그것에 대한 반발의 도피가 과거의 것이라는 점에서 일견 향수처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스만은 이렇게 적는다. “이 현상은 향수라기보다는 빈티지에 가깝다. 슬로우 게이머들 역시 슬로우 쿠커들처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이상화된 버전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16] 앞서 언급한 프링글스의 설문에서 역시, 설문자 중 78%가 레트로 기기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휴대폰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물론 지나치게 직접적인 대입은 불가능하겠으나, 여기에는 ‘현재의 기술’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지는 않은 것 같다. 따라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하나의 빈티지적 작용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패셔너블한 현상이다. 중년 이상의 게이머들과 달리, 젊은 게이머들에게 픽셀 그래픽스나 칩튠이 하나의 ‘대안적 스타일’로 여겨진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초고도의 포토 리얼리즘이 주는 어떠한 경외감은 현실적 문제로 인한 체감의 커브를 겪고 있다. 고도의 자본이 필요한 포토 리얼리즘이 체감적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 예산의 증가’는 점차 그 폭을 넓히기 때문에 사실상 제공할 수 있는 시각적 경외는 점차 감소하는 그래프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면에서 ‘기술의 투명화’, 요컨대 기술의 지나친 일상화가 해당 기술에 대한 경외를 저하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도 이 일상 기술이 더이상 경외를 주지 못할 때, 그에 반하는 재래 기술이 그 효과를 가져가기도 한다. 음악에서의 바이닐, 영화에서의 애니매트로닉스나 스톱 모션에 대한 복귀된 경외가 그러한 경향이기도 하다. 도미닉 바트만스키Dominik Bartmanski와 이안 우드워드Ian Woodward는 자신들의 저서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에서 “성공적인 문화적 도구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각각은 보다 깊은 만족을 주는 구체적인 경험의 집합을 수반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실용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일부 모더니즘 객체들이 유독 매력 없었던 것’도 알고 있다.” [17] 라고 적는다. 최고의 기술이 언제나 가장 아름답게 수용되지 않는 법인 셈이다. 그림 3. 픽소라마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100피스 퍼즐(Heye) 이 관점에서 픽셀 그래픽스는 바로 이러한 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다.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오면서 일종의 ‘뒤쳐진’ 스타일로 여겨졌던 픽셀 그래픽스는 그것을 체감하는 역사 경험자에 한해서만 작동한다. 오히려 시간성이 무화된 시기에 이들은 병렬적 인식 위에 올라갈 토대를 갖는다. 1997년 결성한 eBoy의 「픽소라마Pixorama」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아이소매트릭 스타일의 픽셀 아트를 이용해 세계의 여러 도시를 그리는 이 시리즈는 그 결성이래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루이비통에 의해 《TOKYO BY EBOY - TRAVEL BOOK》를 발매하거나 꼼데가르송 컬렉션에서 드레스의 패턴으로 사용되었다. 픽셀 아트 스타일이 동시대의 예술적 방법론의 하나로 인지된다는 것은 이것이 어떠한 ‘뒤쳐진 양식’으로 인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시각적 기표는 여전히 픽셀 아트로 표현된다. 그림 4. 게임적 이미지를 위해 픽셀 아트를 차용한 ‘메가 커피’의 광고 이미지 엘리자베스 E. 거피Elizabeth E. Guffy는 자신의 저서 《Retro : The Culture of Revival》에서 ‘레트로’란 단순한 과거가 아닌 근대로서의 과거 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회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더한다. “레트로는 감속 또는 반대 추진력의 형식을 제공하며,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끊임없는 충동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레트로의 회고적 소환은, 아무리 그 자체가 ‘모던’하게 포장되었을지라도, 그 과거를 진정한 의미에서 지나가 버린 것으로 표시한다. 연속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레트로는 우리를 이전 시대와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우리 앞을 지나간 것들과 분리될 때, 레트로가 끌어당기는 반작용의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18] 말하자면 레트로가 가진 본질적 속성이란 ‘전진’ 혹은 ‘진보’라는 지향성에 반발하고 그 역동성을 재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 역시 자신의 책 《레트로마니아》에서 이렇게 적는다. “한때는 전통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음악을 (아티스트로서) 생산하거나 (소비자로서) 지원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지금은 과거에 가장 깊이 중독된 집단이다. 인구 통계상으로는 여전히 최첨단 계급이지만 이제 그 역할은 선구자나 혁신가가 아니라 큐레이터나 아카이브 관리자가 됐다. 전위avant-garde가 아니라 후위arrière-garde가 됐다.” [19] 이를테면 현존하는 동시대 레트로 게임에 대한 소비 의식에는 단순한 향수 이상의, 전진적 기술 현상에 대한 반대의 의식이 존재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더 이상 뛰어난 포토리얼리즘이 놀라움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블라스퍼머스blasphemous》의 어두운 스타일과 부드러운 프레임의 픽셀 그래픽스는 ‘장인 정신’ 같은 아날로그적 경외를 느끼도록 만든다. 동시대 레트로 스타일의 증가는 우리가 현재 느끼는 기술에 대한 감각적 정체를 확인시켜 주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다면화하기 하지만 이 즈음에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이러한 ‘레트로 스타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귀환인가? 지금껏 이야기한 모든 전제는 비디오 게임에서의 레트로 스타일이 어떠한 극단적 단절이 있었던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레트로 스타일’은 (영화에서의) 무성 영화나 (음악에서의) 바이닐과 같은 존재인가?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이 기술을 경유해 현재의 시기에 도래시킨 공룡과 같은 ‘멸종의 흔적’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 전제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비디오 게임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것은 대체로 비디오 게임의 산업적 발전사, 그러니까 게이머들이 게임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매해서 플레이하는지’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그 현장을 아케이드에서 PC나 콘솔로 옮겨가는 방식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초기 비디오 게임사에서의 주인공은 아케이드와 아타리이고, 그 뒤를 잇는 주인공들이 닌텐도와 세가라는 서술에 우리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을 시작할 때 했던 이야기와 연결되듯, 비디오 게임에서의 ‘산업화’는 ‘기술적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를테면 게임 콘솔의 역사는 전적으로 기술적 혁신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2세대 콘솔, 3세대 콘솔이라며 역사를 짚어나갈 때 우리가 지시하는 것은 그것과 연결된 기술적 지평이다. 그리고 이 속도에 극도의 가속도를 붙인 것은 명백히 소니다. 5세대, 그러니까 32비트 이후부터 가속화된 컴퓨터 그래픽스의 혁신, 그리고 그것을 대표할 소프트웨어로서의 「파이널 판타지 VII」이 가져다준 충격은 비디오 게임의 진보를 시각 표현의 영역으로 안치시켰다. 그래서 플레이스테이션 이후의 비디오 게임의 역사란 ‘얼마나 더 진보한 시각 표현’과 마주하냐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관으로 봤을 때, 픽셀 그래픽스는 그 무덤으로부터 되돌아온 존재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이른바 5세대 콘솔과 공존하고 있었던 존재로서 ‘게임보이 컬러’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발매된 플레이스테이션은 확실히 쇼크였으며 이 엄청난 기기는 전 세계에 1억 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하지만 그와 병렬된 시기로 1989년 발매된 게임보이와 1998년 발매된 게임보이 컬러 역시 합계 누적 1억 1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마찬가지로 이어진 6세대에도 플레이스테이션2는 전 세계 누적 1억 6천만 대,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전 세계 누적 8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 시기에 플레이스테이션2가 보인 수치가 압도적이긴 하나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역사에서 지워질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다음 7세대에서 닌텐도 DS가 전 세계 누적 1억 5천만대로 플레이스테이션3의 8천만 대보다 더 앞선 수치를 보인다. 물론 닌텐도 DS는 성능상 어느 정도의 3D 그래픽스를 출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도의 3D 그래픽스가 불가능한 점에 더해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개발 환경을 유지했던 덕에 많은 게임들이 여전히 픽셀 그래픽스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발매되었다. 닌텐도의 휴대기기가 3D 그래픽스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건 2011년 발매된 3DS부터다. 말하자면 이 직전까지 휴대기기는 픽셀 그래픽스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20] 흥미로운 사실은 2011년의 3DS로 휴대기기가 3D 그래픽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시점에《아이작의 번제The Binding of Issac》같은 레트로 스타일의 인디 게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치 바톤터치가 이루어지듯, 픽셀 그래픽스의 역사는 단절 없이 유지되었다. 그림 5. GBA의「젤다의 전설: 네 개의 검」(왼쪽)과 NDS의「어드밴스 워즈: 듀얼 스트라이크」(오른쪽) 그러니까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 기술에서 무엇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픽셀 그래픽스로 대표되는 ‘레트로 스타일’은 그 명맥이 끊기지 않은채 하나의 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앞서 말한대로 레트로 스타일은 ‘무덤에서 되돌아온’ 형식도 아니며, 바이닐 처럼 ‘무사귀환한 왕의 포맷’ [21] 도 아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는 오히려 픽셀 그래픽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버전의’ 사관 집필이 가능하다. 비디오 게임의 통사에 있어 게임보이 어드밴스와 닌텐도 DS가 가지는 위상은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를 수 없다. 이들은 한번도 산업이라는 필드에서도 주류 바깥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픽셀 그래픽스는 ‘언제나’ 비디오 게임사의 주류를 함께해온 포맷이다. 다만 우리의 기초적인 인식, 즉 비디오 게임의 역사란 곧 ‘가장 진보한 기술을 다투는 각축장’이라는 사고 체계에 의해 눈이 멀어버렸던 건 아닐까. 우리가 얼핏 가지게 되는 비디오 게임史란 기술 중심주의에 함몰되기 쉽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라는 통사를 고려할 때 이 내부에는 더 다층적이고 복잡한 기술적 요건들이 도사린다. 즉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2~3와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웹에서 서비스된 플래시 게임과 피처폰용의 게임들과도 병렬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렇지만 이들도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하나의 영역을 만들고 (비록 일부는 끊겨버렸다 하더라도) 그 고유의 선형을 구성한다. 그림 6. 좌측 상단부터 「러브드」(플래시), 「레이디언트 히스토리」(NDS), 「갓 오브 워 3」(PS3), 「미니 게임 천국 5」(피처폰). 모두 2010년 발매된 게임들이다. 결국 ‘비디오 게임의 그래픽은 언제나 포토리얼리즘을 목표로 했다’는 서술에 대해서는 절반의 동의만 가능하다. 이런 분석은 아니메를 그 목표 지점으로 삼았던 80~90년대 일본 콘솔의 주류 스타일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비디오 게임에 있어 ‘기술’이란 (다른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며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그저 무엇인가가 그러한 사유에 잦은 연막을 작동시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트로 스타일’이 과거에 대한 참조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에는 ‘과거’가 무한히 연장되는 힘이 있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과거’를 아직까지도 연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계속 플레이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비디오 게임의 기술을 다층적으로 분화시켰고, 덕분에 비디오 게임의 ‘과거’는 언제나 현재화하며 유지될 수 있었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그러한 연장의 결과일 뿐, 결코 첨단 기술에 반하며 등장한 돌연변이나 이레귤러가 아니다. 이 연장 또는 생존, 혹은 유지야말로 비디오 게임이 가진 복잡한 생명력을 더 확고히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기술적 역사관을 본래의 형태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비디오 게임은 ‘포토리얼리즘’ 또는 ‘오픈 월드’ 같은 기술적 첨단을 위해서만 달려온 것이 아니다. 비디오 게임은 기술 기반의 매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기반의 기술을 역사의 층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지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비디오 게임과 접촉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비디오 게임은 앞으로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것이 ‘기술과 함께하는 한’ 끝없이 다양한 생태계로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의 기록은 결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간은 직선이나 더 나은 점진적 행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에게 관여하는 별자리와 같다는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의식 [22] 은 우리의 역사에도 유효할 것이다. [1] 페이레스 카얄리Fares Kayali와 조세프 슈Jusef Schuh는 《Retro Evolved: Level Design Practice exemplified by the Contemporary Retro Game》에서 ‘복고풍 감각과 현대적이고 집중력 있는 게임플레이의 조합’의 게임을 Contemporary Retro Game라고 명명한다. [2] Steam의 태그 기능은 유저에 의해서 직접 부여되는 시스템이다. 게임 개발자는 게임을 등록할 때 해당 게임에 속하는 태그를 설정하며, 페이지가 생성된 이후에는 유저들에 의해 자유롭게 태그를 추가할 수 있다. 단 게임와 무관하거나 부적절한 태그는 개발자에 의해 제거가 가능하며, 장기 존속하더라도 유저들의 투표에 의해 부절적한 태그는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관리된다. [3] 앞서 설명한대로 태그는 유저들에 의한 자의적 관리 기능이기 때문에 게임이 발매된지 한참이 지나고나서 부여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것을 고려할 때, 발매 당시 기준에서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복고풍’을 지칭한 경우는 더 적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발매된 지 시간이 지난 게임에 유저들이 ‘복고풍’을 붙이는 경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2021 Essential Facts about the Video Game Industry》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2021) [5] 《2015 Essential Facts about the Video Game Industry》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2015) [6] Steam Statistics By Release, Sale, Demographics, Usage, Operating System, Revenue And Facts, (Pramod Pawar, Rohan Jambhale) https://www.coolest-gadgets.com/steam-statistics/ [7] 《Reliving 10 years old: Descriptive Insights into Retro Gaming》 (Nick Ballou/Nicholas David Bowman/Thomas Hakman/Andrew K Przybylski, Oxford Internet Institute/SI Newhouse School of Public Communications Syracuse University, 2025) [8]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lture》(Jaako Suominen, 2007) [9] 《Public Memory and Gamer Identity: Retrogaming as Nostalgia》(David S. Heineman, 2014) [10] 《Meanings of Retrogaming Consumption for “Millennial” and “Generation X” Men》(Kamil Wyczynski, 2021) [11] 《Video Game Romanticism: On Retro Gaming, Remakes, Reboots, Game Nostalgia, and Bad Games》(Frank Bosman, 2023) [12] 《Video Games & Nostalgia: An Intertwined Relationship》(Matt Boyer, 2019) [13] 《Nostalgia in Retro Game Design》(Maria B. Garda, 2014) [14] https://www.kelloggs.co.uk/content/dam/europe/kelloggs_gb/pdf/The%20nostalgia%20is%20real%20Pringles%20launches%20NEW%20Retro%20Console%20Clinic%20as%2080%20percentage%20of%20Brits%20fall%20back%20in%20love%20with%2000s%20and%2090s%20tech.pdf [15] 《The Rise of Vintage Fashion and the Vintage Consumer》(Tracy Cassidy / Hannah Bennett, 2012) [16] 《Video Game Romanticism: On Retro Gaming, Remakes, Reboots, Game Nostalgia, and Bad Games》(Frank Bosman, 2023) [17]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Dominik Bartmanski/Ian Woodward, 2015) [18] 《Retro : The Culture of Revival》(Elizabeth E. Guffy, 2002) [19]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2014, 작업실유령) [20] 물론 소니의 7세대 휴대기기인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은 소니의 고성능 정책을 이어받아 닌텐도 DS와는 차별화된 그래픽 전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시기 대표적 휴대기기란 닌텐도 DS였다는 점에 이견을 두긴 어려울 것이다. [21]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Dominik Bartmanski/Ian Woodward, 2015) [22] 《It’s Art Historian Aby Warburg’s World. We’re Just Living In It》(Mattew Bowman, 2024) / https://artreview.com/its-art-historian-aby-warburgs-world-were-just-living-in-i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오락실 시대의 대표주자 대전격투 게임, 어떻게 변해왔나
200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에 초점을 맞춰, 사반세기 동안 대전격투게임과 그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주요 변화 양상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적 맥락, 산업 구조, 기술 변화, 문화 수용 등의 차원을 고려한다. < Back 23 GG Vol. 25. 4. 10. Tags: 대전격투게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 Back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22 GG Vol. 25. 2. 10. 컴퓨터를 격파하는 법 인터넷을 배회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분노에 찬 누군가가 컴퓨터나 모니터 (혹은 프린터와 같은 여타의 주변 기기들)를 때려 부수는 밈과 마주친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온 이 밈의 시작은 1997년에 무려 이메일을 통해서 바이럴된 영상이다. [1] 시기를 고려하면 놀랍지 않게도 이 영상은 인터넷 최초의 바이럴 영상 중 하나로 여겨진다. 즉 컴퓨터를 ‘격파’하는 밈은 그 자체로 밈의 역사이자 현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카타르시스 충만한 밈은 어째서 죽지도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일까. 바꿔 말하면 이 밈은 왜 여전히 작동하는 것일까. 물론 부수지 말아야 할 것을 부숴버리는 쾌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좀 더 농담을 다큐로 받아 보자. 특정한 세부 장르의 서로 다른 작품들이 어떤 공통된 내러티브적 요소들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컴퓨터 격파 밈’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뼈대를 갖추고 있다. 모니터 안의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좌절 혹은 공포에 휩싸인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그 모니터 혹은 컴퓨터 전체를 때려 부순다. * 전설이 되어 버린 “badday.mpg” 흥미로운 지점은 그들에게 좌절 혹은 공포를 준 대상과 그들이 때려 부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오롯이 모니터의 스크린과 키보드 혹은 프린터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상징적 인터페이스(GUI)에서 받은 충격을 엉뚱하게 기계적 인터페이스(스크린, 키보드)에 화풀이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간극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은 모니터 속 전자 회로의 논리적 구조에 직접 접속이라도 할 것처럼 주먹으로 모니터를 꿰뚫어 버린다. 인터페이스는 연결하지만, 또 차단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신체는 진화/퇴화와 최적화 사이를 불안정하게 진동한다. ‘컴퓨터 격파 밈’은 인터페이스가 처한 아포리아에 관한 우화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해결책도 제시하는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것 없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 버리라고. 그런데 매듭이 끊어지는 순간 도래하는 것은 카리스마에 압도된 고요함 같은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다는 웃음이다. 안타깝지만 진심 어린 펀치로도 그 모든 복잡다단한 인터페이스의 레이어들을 뚫고 추상 기계라는 ‘물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주먹이 가닿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인터페이스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밈의 과도한 액션들은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기능한다. 밈을 보는 사람들은 뜬금없이 강렬한 타격에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동시에 인터페이스에 내재한 긴장 관계가 이런 식으로 해소될 수 없음을 갑작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끊어야 할 매듭도 없다는 진실도. 이것이 ‘컴퓨터 격파 밈’이 지금까지 작동을 멈추지 않은 이유이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유동하는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는 편재한다. 이 문장은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이제는 거의 모두가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일과 여가를 가리지 않고 쓰게 되는 랩탑/컴퓨터 그리고 우후죽순 늘어나는 식당/카페의 키오스크까지, 사람들은 지금도 손가락을 열심히 놀려서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처럼 디지털 기기들이 일상을 완전히 에워싸기 전에도 인터페이스는 도처에 있었다. 현재의 디지털 환경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인 조건 중 하나인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기 전의 시기를 떠올려 보자. 1930년대의 경성을 정처 없이 떠도는 소설가 구보씨의 의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인터페이스에 직면한다. 구보씨가 타고 다니는 ‘전차’에서부터 백화점의 ‘승강기’, ‘전기 보청기’, ‘경성역’, ‘자동차’, ‘축음기’, ‘자전거’, ‘전화’, “'간다(神田)' 어느 철물점에서” 구입한 “한 개의 '네일 클립퍼'”까지. 요컨대 인터페이스는 ‘편재해 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명백한 시대적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1930년대의 경성과 2020년대의 서울은 편재하는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연속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는 ‘도처에 있음’이라는 말 속에 혼재하는 다른 두 인터페이스의 맥락을 서로 떼어놓고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폰 노이만 구조의 발명이 그 둘 사이를 가르는 가장 선명한 구분 선이 될 수 있을 텐데, 왜냐하면 이 구조의 컴퓨터는 (애니악ENIAC과는 달리) 소프트웨어적으로 프로그램을 구현할 수 있게 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더 고도의 추상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저 인터페이스의 측면 뿐 아니라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의 측면에서도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 작동 사이의 부분적인 단절은 더욱 심화한다 . [2] 이 구도는 박해천이 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상기시킨다. “ 기계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리적 형식으로 존재했다. 이런 시각적 연속성 덕분에, 특정한 조형 언어로 그것을 상징화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스크린을 통해서만 자신의 현존성을 드러낼 뿐, 언제나 조형 언어의 상징적 질서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실제로 디지털 제품의 전자 회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세계와 감각적으로 불연속적인, 그래서 종종 ‘탈물질적’이라고 과장되곤 하는 미세한 전자들의 운동에 의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 [3] 관건은 (기계 테크놀로지와는 달리) 트랜지스터에 기반한 디지털 기기들에는 인터페이스가 ‘잘 붙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터페이스 자체를 독립적인 개념으로서 부각하면서 내적인 완결성을 갖춘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인터페이스 역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개인 컴퓨터에서 가상 머신virtual machine을 구축하거나 혹은 가상화virtualization 기술을 사용한 서버들이 밀집된 데이터 센터에 기반한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할 때, 실행 중인 프로그램은 API를 통해서 가상의 하드웨어가 제공하는 컴퓨팅 리소스를 할당받는 방식으로 물리적인 하드웨어와의 관계로부터 다시 한번 추상화한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의 경험 또한 이와 같은 미끄러짐을 가시적으로 잘 드러낸다. 특히 비디오 게임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데, 왜냐하면 게임은 하드웨어적인 연산을 요구하는 소프트웨어인 동시에 그 연산을 ‘시스템적으로’ 비껴가는 놀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게임이 그래픽 하드웨어의 발전과 밀접하게 맞물려 왔던 역사적 맥락은 이 미디어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선형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식의 목적론적인 환상을 강화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는 지점은 게임이, 테크크런치 디스럽트Techcrunch Disrupt와 같은 행사에서 어떤 스타트업이 공들여 만든 데모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신적인 컴퓨팅 기술을 향한 집착은 게임의 욕망과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의 역사는 한정된 컴퓨팅 자원의 제약 속에서 인터페이스적 ‘눈속임’의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들은 당시 디스플레이 기술의 한계를 텍스트로 극복해 보려는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 [4] 에서 장르의 기원부터 인터페이스-하드웨어의 긴장 관계를 내포한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장르의 커뮤니티가 누구보다도 깐깐한 ‘고인물’들로 가득하다는 맥락과 결합하면서 장르적 전형archetype의 핵심으로 전면화한다. 따라서 하드웨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2023년에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스테이시스: 본 토템>은 마치 살아있는 화석처럼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이 ‘응당’ 따라야 하는 많은 관습적인 디테일을 유지한다. 이를테면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작동이 되는’ 인터페이스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그것을 찾지 못하면 게임이 실패한 숨은그림찾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게임에서 ‘퍼즐’은 먼저 적절한 인터페이스를 발견한 다음 그것과 올바르게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알아내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과정 중에 플레이어들은 상황적인 증거를 긁어모아서 머릿속으로 ‘연산’하거나 혹은 ‘숨은그림’이 숨겨진 스크린을 마우스로 하릴없이 여기저기 찔러보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쓰게 된다. 결국 작동하는 인터페이스와 상호 작용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또한 본격적인 하드웨어적 연산이 발생하는) ‘실감나는’ 과정은 실제 게임 플레이 중 극히 일부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게임 유저 인터페이스UI는 크게 다이어제틱(diegetic) UI와 논다이어제틱(nondiegetic) UI로 나뉜다. 이런 식으로 나뉘는 기준은 게임이 창출하는 허구의 세계가 UI를 인지하고 그에 따라 반응하는가의 여부다. [5] 일례로 <디아블로> 시리즈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던 (지금은 사라진) 오버레이 맵은 전형적인 논다이어제틱 UI라고 볼 수 있다. * 와우의 압도적인(?) UI HUD(head-up display)로 대표되는 논다이어제틱 UI는 군사적인 기원에 걸맞게, 플레이어들이 더 효율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추상화된 형태(막대그래프,미니맵,그리드 인벤토리 시스템 등)로 빠르게 전달한다. 알렉산더 R. 갤러웨이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미지의 다이어제틱한 공간의 가치는 강등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논다이어제틱 의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6] 라고 썼다. 이 문장은 논다이어제틱 UI가 낭만적인 판타지 픽션의 공간을 어떤 식으로 ‘전쟁상황실’로 탈바꿈시키는지 간결하게 짚어낸다. 반면 <스테이시스: 본 토템>은 다이어제틱 UI에 대부분의 상호 작용을 의존한다. 추상적인 형태의 정보 전달은 지양되며, 플레이어들은 아이소메트릭 뷰로 표현된 이 디스토피아의 공간에 좀 더 시각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심지어는 인벤토리 창에 있는 아이템을 다른 공간에 있는 캐릭터에게 클릭 한 번으로 넘기는 (매우 논다이어제틱하게 느껴지는) 기능마저 QSD(Quantum Storage Device)라는 이름의 기술로 그 세계 내에서 정당화된다. 이처럼 UI는 스테이시스의 ‘배경’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플레이어들은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떼어다가 아이템으로 만들 수도 있다. 또는 그 아이템들을 이리저리 주물럭거리거나, 조합해서 다시 배경으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다. ‘작동하지 않는’ 인터페이스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다소 기묘한 순서의 과정을 거쳐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가 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프로세스를 여러 번 겪다 보면, 배경/전경 그리고 ‘작동하는/작동하지 않는’의 임의적인 이분법은 희미해진다. 플레이어들은 탐정이라도 된 듯이 집요하게 인터페이스를 쫓지만, 인터페이스는 마치 유령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출몰했다가 다시 사라진다. 입력과 출력의 이벤트 호라이즌 이렇듯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 사이의 어긋남은 (기술의 발전 경로에서 비롯된) 어느 정도 내재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에 비해 인터페이스와 유저들의 신체 사이에서의 ‘단절’은 플레이어들의 심리가 결부된 디지털 게임의 산업적인 추세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후자의 케이스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서 이야기했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맥락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다시 말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인터페이스의 미끄러짐은 하드웨어의 ‘실제적인’ 작동과는 다소 독립적으로 디지털 인터페이스 자체의 논리를 유도한다. 그것의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오히려 폴더의 리얼리티 효과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용자가 폴더를 더블 클릭한 이후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즉 사용자가 납득하고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 사건들이 전개될 때, 아이콘의 리얼리티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성의 원리’는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핵심 원리라고 할 수 있다....(중략).... 결과적으로 스크린의 기호 체계는 입력과 출력의 인과율이 지배하게 된다.” [7] 애초에 유저들을 기만하기 위해 설계된 다양한 종류의 다크 패턴이나 유저 인터페이스의 인과성 자체를 거의 사보타주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광고 페이지들을 제외하면, 위 인용문에서 제시된 원리는 2025년 현재도 많은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동일하게 유지된다. 즉 인터페이스가 하드웨어의 작동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과는 별개로 스크린 내에서는 원인(입력)에 따른 결과(출력)가 확고하게 ‘인과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서는 이러한 인과성의 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한다. 먼저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에 걸쳐 있는 케이스부터 시작해 보자. 입력 버퍼링은 특히 플랫폼 게임이나 대전 격투 게임과 같은 장르를 개발할 때 널리 쓰이는 트릭이다. 이 두 장르의 공통점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세심하고 복잡한 컨트롤이 요구되며, 실패할 시 패널티가 즉각적으로 부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버퍼 윈도우 없이 게임을 디자인하게 되면 (입력과 출력의 타이밍이 ‘정확’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게임이 불공평하며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개발자들은 점프한 캐릭터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시 점프 버튼을 누른다고 해도 그 입력이 캐릭터의 다음 행동에 반영이 되도록 하는 식으로 적당한 수준의 버퍼 윈도우를 설정한다. 혹은 대전 격투 게임에서 필살기를 쓰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복잡한 버튼 연타와 조이스틱 움직임을 다른 행동 중에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다음 액션에 반영된다. 물론 이와 같은 입력과 출력 사이의 의도적인 지연은 여전히 인과성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게임마다 다른 버퍼 윈도우의 임의적인 길이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트리트 파이터 6>의 경우 상당히 긴 버퍼 윈도우로 인해서 입력한 필살기의 커맨드가 전혀 엉뚱한 순간에 발현되는 불만들이 플레이어들에게서 자주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게이머들은 일상적으로 인과성의 작은 ‘균열’을 종종 감지한다. 그런데 이 케이스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입력 버퍼링이라는 트릭 자체가 플레이어의 주관적 경험에 초점을 맞춘 ‘최적화’를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이다. 게임과 여타 유틸리티 앱의 목적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게임의 최적화는 생산성의 향상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유틸리티 프로그램들의 목적은 효율적인 일 처리다. 따라서 입력과 출력의 확고한 인과성은 업무를 최적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게임의 목적은 ‘효율적인 일 처리’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입력과 출력의 인과율”은 노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적당히 무시해도 된다. 아니 무시하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깨뜨리는 것도 괜찮다. 단,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그것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감각/착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인터페이스를 완벽히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얻는 효능감은 게임플레이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최적화란 인터페이스적 감각 속임인 셈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8] 에 등장하는 한국 조이스틱의 특수한 진화 과정이다. 과거 오락실에서는 소모품인 조이스틱을 주기적으로 교체하거나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게이머들은 오래되어서 유격이 심한 조이스틱에 익숙해진 채로 동작이 큰 그들 나름의 게임플레이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후에 등장한 조이스틱들은 새 제품이라 유격이 적었음에도 한국 게이머들의 습관에 맞춰서 일부러 입력값을 민감하지 않게, 즉 의도적으로 ‘멍청하게’ 만들어 왔다는 이야기다. 입력 버퍼링의 사례에서 균열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면, 한국 조이스틱의 예시는 게임의 최적화가 입력과 출력의 인과율을 어떤 식으로 교란하는가에 대한 어떤 범례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유저 편의성’을 향한 인과율의 침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딥러닝을 활용해서 더 적은 컴퓨팅 파워로 업스케일링을 구현하는 기술로서 출발했던 엔비디아의 DLSS(Deep Learning Super Sampling)는 최근 출시한 DLSS 4에 이르면 래스터화로 렌더링된 프레임 하나당 뉴럴neural 렌더링으로 생성된 프레임이 최대 3개까지 더해지는 일종의 실시간 AI 그래픽 생성 기술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적 성취가 인터페이스의 인과성과 대체 무슨 상관일까. 이를 연결 짓기 위해서는 게임의 프레임과 입력 지연시간 사이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 생성된 프레임이 더해질수록 입력 지연시간은 꾸준히 상승한다. 통상적으로 게임의 초당 프레임 개수가 많아질수록 입력 지연시간은 줄어든다. 스크린을 초당 30번 리프레쉬하는 것보다는 60번 리프레쉬 할 때 플레이어가 입력한 값이 바로 다음 프레임에 반영되는 시간 간격이 훨씬 짧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이 높아질수록 게임의 ‘손맛’은 더욱 찰져진다. 특히 거의 자동반사적인 컨트롤이 요구되는 멀티플레이어 FPS 게임을 주로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프레임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은 반비례 관계는 프레임의 일부분을 뉴럴 렌더링에 의존하는 DLSS 업스케일링까지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데 뉴럴 렌더링만을 이용해서 프레임을 완전히 새로 ‘생성’해 내는 DLSS 4의 멀티 프레임 생성MFG 단계에 이르면, 흥미롭게도 프레임의 개수가 몇 배로 불어나는 동안 입력 지연시간은 극적으로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소폭 상승한다. [9] 여기서 곧바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곱절로 더해진 뉴럴 렌더링된 프레임들이 플레이어의 입력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렌더링 된 프레임들 사이의 ‘빈 시간’을 픽셀 하나하나의 다음 위치를 예측하는 식으로 꼼꼼하게 채워 넣는 AI 연산의 복잡한 과정에는 유저의 ‘인풋’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멀티 프레임 생성 기능을 최대로 설정해 놓고 게임을 플레이할 때, 스크린에 출력되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나의 입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른 무언가라고 봐야 한다. 입력과 출력의 확고했던 인과율은 느슨하고 불투명한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인터페이스는 직접적으로는 상호 작용이 불가능한 것들을 맞붙이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필요성이 이것은 그저 투명하고 ‘필연적인’ 연결 장치라는 서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인터페이스는 연결하지만, 또 차단하며, 때로는 연결된 관계 전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일그러뜨리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것은 ‘확장된 기계’나 ‘확장된 신체’로서 단순히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신체를, 그러니까 연루된 모든 것들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할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자다. 따라서 인터페이스는 어떤 번역을 위한 도구로 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장치로 납작하게 이야기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표면 장력이 어마어마한 총체적인 디지털 표면에 가깝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투명한 표면 아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많은 경우 바로 그 표면이 우리의 감각을 끊임없이 ‘최적화’한다. 플레이어의 입력 없이도 다음 프레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동 사냥’이 전면화된 시대에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중이다. 인터페이스에서 오는 미세한 감각에 오랜 시간을 쏟아온 게이머라면 말 그대로 몸으로 동의할 것이다. 게임은 진정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꿔버린 것이다. [1] 클라우드는커녕 소셜 미디어도 이제 막 태동하던 시절이라 이 막대한(?) 용량의 영상은 이메일 주소를 타고 돌며, 다수의 이메일 서버를 다운시켰다. Joe Veix, “The Strange History of One of the Internet's First Viral Videos” Wired 2018.01.12. https://www.wired.com/story/history-of-the-first-viral-video/ [2] 스위칭 소자를 직접 배선으로 이은 하드웨어적인 프로그래밍에 기반한 애니악조차도 진공관과 스위치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2진법으로 추상화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3] 박해천,『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2009, 166. [4] AG Staff, “An overview of genre history, by The Art of Point-and-Click Adventure Games: Part I” Adventure Gamers 2020.06.12. https://adventuregamers.com/articles/view/an-overview-of-genre-history-by-the-art-of-point-and-click-adventure-games [5] 영화에서 배경음악은 대표적인 논다이어제틱 사운드 중 하나다. 공포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으스스한 음악이 그들의 모습과 오버랩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6] Alexander R. Galloway, The Interface Effect (Cambridge, UK: Polity Press, 2012), 51. [7] 박해천,『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2009, 174. [8] 전은기,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게임제너레이션, 2021.08.10.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adda44f-a475-4385-9b30-35cd4146581f [9] Digital Foundry, “Nvidia GeForce RTX 5090 Review: The Fastest Gaming GPU (A Lot Of) Money Can Buy” YouTube 2025.01.24. https://www.youtube.com/watch?v=Dk3fECI-fmw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 멀티플레이의 계층화와 사이버 농노들
비동기 멀티플레이는 모바일 게임의 시류에서 도드라진 방식이다. 모바일, 그리고 무선 네트워크라는 아직 태동기에 불안정성이 남아있던 플랫폼들은 참여자들이 동시에 접속하지 않으면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체계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현재 이 방식은 비단 모바일 플랫폼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특유의 선택적 연결성 덕분에 많은 게임에서 채용되곤 한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yungKyu Lee Game journalist (2014–), writer (2006–), gamer (1996–).
- 유보된 이야기와 넓어진 유희공간- <용과 같이 8>
이 글에서 다루는 <용과 같이>는 전통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취급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카무로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수두룩하고, 선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으며, 무수한 미니게임이 게임의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 Back 17 GG Vol. 24.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게임에서 고통과 피로는 어떻게 사회적 재현이 되어왔는가?: 게임의 스트레스 재현과 스토리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고통과 피로로서 게임에서 재현한 스트레스는 UI를 통한 연장된 체현을 넘어 시뮬레이션으로 적극 활용된다. 이는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으로서 높은 품질의 몰입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게임에 대한 감상과 이해는 어떤 세계로 그 시뮬레이션을 이해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 Back 게임에서 고통과 피로는 어떻게 사회적 재현이 되어왔는가?: 게임의 스트레스 재현과 스토리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22 GG Vol. 25. 2. 10. 게임과 고통을 비평할 때 빠지지 않는 레퍼런스들이 몇가지 있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과 같은 책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레퍼런스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평하는 것 역시 필요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역사는 뿌리깊고 도도하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무엇보다 비평으로 매만지기 어려운 수준으로 실재적인 현상이며,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없이 레퍼런스만을 빌려 주장을 펼치는 일은 인문학과 게임 비평을 풍성하게 만들기는커녕 비평의 빈곤을 야기할 수 있고, 심각한 경우 비평과 현상의 간극을 벌리는 맹아를 심는 일이 될 수 있다. 더불어 고통과 피로는 대중적으로 익숙하지만, 그 맥락과 역사는 중요도에 비해 상세하게 조명된 사례가 극히 적다. 조금 더 지면을 할해하고, 주장을 돌고 늘어뜨리더라도 인류를 훝어온 고통과 피로의 역사를 간단하게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외재인(外在因)에 내재인(內在因)으로,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이해의 역사 오랜 시간 인류는 고통과 피로를 외재적 요인에 의한 감정 변화로 믿어왔다. 물론, 그 믿음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동양(최소한 한글)에서 말하는 고통의 경우, 먹는 것으로 인한 감정의 변화를 배경으로 두었다고 여겨진다. 국립국어원 표준대국어사전은 고통을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으로 정의한다. 이때 의미의 중추를 이루는 ‘괴롭다’는 ‘고(苦)+롭다’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 苦(쓸 고)는 풀 초(艹) 부수를 사용하는 한자로, ‘(맛이) 쓰다’ ‘괴롭다’ 뿐만 아니라 ‘쓴맛’ ‘씀바귀’와 같이 먹는 것과 직접 연결되는 묘사를 뜻으로 가지고 있다. 즉, 고통의 괴로움은 무엇을 먹을 때 느끼는 쓴맛을 바탕에 둔 단어라 할 수 있다. 피로의 경우에도 외재적 요인을 변화의 원인으로 본다. 疲‘지칠 피’와 勞‘일할 노’가 합쳐진 피로는 ‘지칠 때까지 일한 상태’를 의미한다. 疲(지칠 피)의 부수가 질병을 의미하는 병질 염(疒)을 부수로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병들 때까지 일한 상태’라는 점에서 ①[지칠 때까지 일한 상태] ②[지칠 때까지 일할 수밖에 없는 상태] 정도로 여길 수 있다. 서양에서도 고통의 원인이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믿어왔으며, 이를 언어화해왔다. 결과된 사건으로 인한 고통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Pain의 경우, ‘처벌 또는 범죄로 인한 고통 또는 손실’ 혹은 ‘신체적 또는 신체적 고통, 지속적이고 강하게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신체 감각’로 정의한다. Pain보다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고통인 Suffer 또한 외재적 요인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로 지칭하는 데 쓰인다. Suffer의 경우 ‘고통이나 괴로움 또는 해로움이 가해진 것, 고통이나 괴로움 또는 슬픔으로 따르게 된 것’으로 정의되는데, 가해지(inflicted)거나 따르게 된(submit) 것으로 인한 감정 결과라는 점에서 외재적 요인을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한다고 볼 수 있다. Suffer의 경우에는 12~13세기에 기록된 사례들을 바탕으로 정의되어 전승된 것으로, 이 시기가 중세 후기라는 점에서 ‘to submit to god’과 같이 신의 의지 하에서 벌어진 필연적 우연의 증후로 고통을 이해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고통과 피로는 동서양 간에 필연과 우발 혹은 의지의 문제 등 작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핵심적으로는 내재적 요인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 말해, 인류는 고통과 피로가 내재적으로 발명되거나 발견되는 요인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는 그 이유가 외부에서 기인한 내부의 변화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이해는 관찰과 귀납을 바탕으로 현상을 이해한 근대의 20세기에 이르며,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취합되는 경향을 보인다. 20세기에도 스트레스 역시 외재적 요인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는 193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내분비학 교수 한스 셀리에(Hans Selye, 1907~1982)가 네이처지에 개재한 「다양한 유해 자극으로 생긴 증후군(A syndrom Produced by Diverse Nocuous Agent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재에 대항하는 내재의 고통, GAS와 스트레스 *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 (출처: 위키피디아) 193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내분비학 교수 한스 셀리에는 네이처지에 「다양한 유해 자극으로 생긴 증후군(A syndrom Produced by Diverse Nocuous Agent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출판한다. 한스 셀리에는 위 논문에서 실험군 쥐들을 ‘한겨울에 옥상 지붕 위에 올려놓기’ ‘고의로 상처 내기’ ‘극심하게 더운 보일러실에 가두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유해 자극(Nocuous Agents)을 가한 뒤, 실험군 쥐에서 생긴 신체적 반응과 일반 쥐의 신체 반응을 비교 측정했다. 그 결과, 다양한 유해 고통을 가한 쥐들에게서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 반응 과정이 공통적으로 관찰되었다. 이 과정은 유해 자극이 들어오면 뇌의 시상하부가 코르티코트로핀 방출호르몬(corticotropin-releasing hormone, ‘CRH’)을 분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CRH는 뇌하수체로 이동해 부신겉질자극호르몬(adrenocorticotropic hormone, ‘ACTH’)으로 불리는 코르티코트로핀을 방출시킨다. 이때 ACTH는 혈관을 통해 부신으로 이동하여 코르티솔 등의 당질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한다. 그리고 당질코르티코이드는 부신속질을 포함해, 체내로 퍼진다. 체내로 퍼진 당질코르티코이드는 지방세포에서는 지방산을 생산하고 근육세포에서는 단백질을 분해하게 만들어 포도당 대사를 높인다. 한편 부신속질에서는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해 혈압 상승과 심장 박동 증가에 관여하는 등 교감 신경이 지배하는 기관의 작용을 촉진한다. 이렇게 생산된 포도당과 빠르게 돌아가는 혈류들은 뇌 등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여 유해 자극에 대한 대항을 촉진하고 일시적인 에너지 대사를 높인다. 이는 과정은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으로 불리며, 한스 셀리에는 이 과정의 연속을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고 발표한다. * GAS의 3단계 (출처: 위키피디아)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 GAS)’은 크게 [경계(Alarm)→저항(Resistance)→소진(Exhaustion)] 3단계로 분류되지만, 한스 셀리에는 주요한 현상은 3단계인 소진에서 나타난고 보았다. 1단계와 2단계는 투쟁-도피 반응의 강도 차이가 있을 지언정 스트레스 자극에 반응해 신체 보호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주요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1단계와 2단계 실험군 쥐의 경우 흉선・비장・임파선이 수축했으며, 체온이 내려가고 소화기가 손상되는 공통 반응을 보였으며, 그 후 48시간이 지나면 부신이 커지고 성장과 생식선이 위축되는 2단계 반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러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유해 자극에 노출된 실험군 쥐의 경우 소화계·심혈관계 장애를 비롯해 궤양・우울증 등을 보였다. 이는 만성적인 상태로 신체가 신체 보호를 포기하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결과였다. 특히 다양한 유해 자극에 대한 공통반응이라는 점에서 ‘만원 지하철’ ‘찜통 더위’ ‘살을 애는 추위’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되는 고통과 피로를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묶어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한스 셀리에는 위 과정이 모두 자율 교감 신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한 것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재인에 의해 발생된 신체의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대신 한스 셀리에는 외재인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이 주장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누적된 내재의 피로, CSR과 사회 자본 * 셸쇼크를 겪고 있는 군인 (출처: 위키피디아) 한스 셀리에가 발표한 주장의 직관성만큼이나, 산업계는 발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치료나 의료 활동에 한스 셀리에의 발표를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즉각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한스 셀리에의 스트레스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통용되진 않았었다. 오늘날 우리가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양차 세계대전, 특히 세계 2차 대전의 그림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양차 세계 대전은 대규모 사상자와 함께 급진적으로 많은 임상 데이터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전투 피로 반응(Comabat Stress Responce, ‘CSR’)에 관한 것이었다. 전투 피로(Combat Fatigue)로 불리기도 하는 CSR이란 전투 스트레스로 인해 전투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다양한 행동을 포괄하는 급성 반응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기 못하거나 느린 반응을 보이는 등 군사 작전의 누적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반응을 포괄한다. CSR는 세계 1차 대전에서 있었던 임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된 연구 분야다. 미국의 의료 장교 토마스 셀만(Thomas W. Salmon, 1876~1927) 등이 출판한 「영국군의 정신 질환 및 전쟁 신경증(셸쇼크) 치료와 구호」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나, 이러한 자료들이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대규모 살육을 재현하기 전까지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셀만이 세웠다고 여겨지는 PIE원칙의 활동 등이 그러하다. PIE원칙은 ①사상자를 전투 소리가 들리는 전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치료 할 것(Proximity) ②즉각적 치료를 시행하되 특정 환자의 부상 완치를 기다리지 않을 것(Immediacy) ③모든 사람이 휴식과 보충을 거친 후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도록 만들 것(Expectancy)을 요구한다. 그러나 PIE원칙은 휴식이 필요한 군인을 참호로 밀어넣는 근거로 활용되며 수많은 PTSD환자와 ‘비겁함을 보인다’는 이유로 즉결처형되는 피해자들을 양상했다. 세계 2차 대전에 이르러서야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통해 ‘셸쇼크(Shell Shock)’와 같은 반응이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피묻은 경험을 통해 스트레스는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의료 개념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학계에서 신호체계로 받아드려지던 스트레스 반응 또한 누적되면 실생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파급은 단순히 스트레스가 신체를 망가뜨린다는 데 그치지 않고, ‘외재인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뒤집어놓았다. 이는 오늘날 스트레스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일컫어지는 신경 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Morris Sapolsky, 1957~)에 의해 학제화 되었다. 새폴스키는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Why Zebras Don't Get Ulcers, 1994)』에서 원숭이와 같이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를 연구하며, 사회성이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요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로버트 새폴스키 새폴스키는 종교나 사회경제적지위(Social Economic Status, SES)와 같은 지수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 바탕에는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온 진화적 경향이 있다고 지목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들은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인 시공간과 상황에 대한 출처를 기억할 수 있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을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나아가 일화기억의 누적을 통해 복잡한 통계적 규칙을 의미 기억(Sementic memory)으로 가공시키고, 이를 말 그대로 ‘육체화’ 시켜왔다. 스트레스는 이러한 생존 전략에 따른 육체화 시스템의 일종이다. 이는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환경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자율신경계를 진화시켜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스트레스라는 말이 된다. 즉,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쉽게 노출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트레스 과정을 밟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일화기억을 누적하여 의미기억으로 넘길 때 벌어지는 상상(Imagination)을 겪을 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새폴스키는 이 과정에서 SES지수와 같은 사회성이 스트레스와 결합된다고 주장하며, 그 과정을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우리가 부자 동네에서 원활한 치안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산다면 카페에서 화장실 갈 때 노트북과 같은 고가품을 잃어버릴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치안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면, 카페에 노트북을 가져가는 것은 도난을 경험할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적인 상황으로 번안하면, 강남에 살면 좋은 교육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가 높은 미래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일 때, 나는 그럴수 없다’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작동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 가난이 스트레스를 높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연히 비교가 쉽고 소통이 활발한 환경은 스트레스를 받을 확률 또한 높인다. 스토리징 시스템 역량에 따라 내재화된 시스템 지금까지 아주 거칠고 간략하게 고통과 피로가 어떻게 스트레스로 이해되었고, 스트레스에 대한 인지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알아보았다. 그 과정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인지와 이해는 외재인에서 내재인으로 변해왔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는데, 그 배경을 지목하자면 컴퓨터의 변화는 가소성(Plasticity)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가소성이 높다는 것은 복잡한 프로토콜 시스템을 완성해 왔다는 뜻이며, 더 깊게는 그 프로토콜은 (적정엔지니어링이라는 전제 하에) 대용량 스토리지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대용량 스토리징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의 관점에서 고통과 피로의 재현은 컴퓨터 게임에서 스토리징 시스템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내재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였다. 게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주 간략하게 스토리징의 역사를 훝으면, 스토리지는 인간의 힘을 빌리는 방식을 통해 (거의 완전히) 외재적으로 존재해왔으나, 점차 컴퓨터 시스템 안으로 내재화되며 비가시적으로 변해왔다. HCI의 관점에서 초기 컴퓨터의 스토리징은 인간의 수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었다. 이는 최초의 컴퓨터로 호명되곤하는 애니악과 같은 경우에도 오늘날 컴파일링(Compiling)에 해당하는 과정에 인간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즉, 컴퓨터의 높은 추상 수준을 인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인간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점차 마그넷 테이프인 플로피 디스크와 같은 자기장 방식에서 광학 방식의 CD로 발전되며 차차 가소성을 높여갔다. 그리고 SSD와 같은 반도체 수준에 이르러서는 높은 수준의 가소성을 확보했다. 더불어 하드웨어 수준의 스토리지를 넘어서, 데이터센터 바탕의 클라우드 프로토콜 단계까지 제어할 수 있는 블록체인과 같이 소프트웨어 수준의 스토리지로 발전했다. 외재성을 빌린 형식적 고통, * 테니스 포 투 (출처: 위키피디아) 스토리지가 컴퓨터 시스템 안으로 내재화된 과정은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기록을 외주화하여 인간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시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록이라는 인산의 피로가 컴퓨터 안으로 스토리지가 녹아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컴퓨터의 시뮬레이션 역량을 높여온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역시 고통과 피로를 인간의 영역에서 시뮬레이션의 영역으로 옮기며 고통과 피로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게임의 고통과 피로는 초창기 게임들에서도 (굉장히) 옅은 방식으로라도 관찰할 수 있는 요소다. 그만큼 초창기 게임들에서는 스트레스의 영역에 있다고 정의하는 게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추상성으로 고통과 피로를 재현했었으며, 초창기 게임에서 재현된 고통과 피로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외재성을 통해야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작해야 상징 수준의 고통과 피로를 재현한 셈이다. 이러한 상징으로는 승리와 패배라는 아주 기초적인 단위의 고통과 피로가 있었다. 종종 최초의 게임으로 지목되곤 하는 (1958)의 경우에 고통과 피로를 염두해두고 기획되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의 개념은 명확했는데, 이는 게임의 디자인 자체가 테니스를 재현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는 원자력이 핵개발만으로 쓰이지 않으며, 평화로운 사용에도 기여할 수 있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제작된 매체였다는 점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기획된 게임이었다는 말인데, 이는 를 디자인한 히긴보텀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놀이의 투기성’을 활용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놀이의 투기성’이란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의 『호모 루덴스』에서 소개되는 놀이의 본성 중 하나로, 하위징아에 따르면 사행성을 내포하는 투기는 단순히 금전적 사행성을 넘어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한 운명을 결정하는 주사위 게임의 사례와 같이 주술적 의미를 바탕으로 한다. * IBM 305 RAMAC (출처: 위키피디아) 놀이의 투기성은 놀이의 4가지 원칙 중 하나인 강한 경쟁성과 쉽게 혼합될 수 있으며, 놀이의 이 두 가지 요소는 놀이의 참여자로 하여금 몰입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추측컨대 히긴보텀은 놀이가 가져오는 몰입효과를 겨냥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놀이의 투기성은 사행성이 내재한 것처럼 사적으로든 형이상학적으로든 손실이라는 고통을 창출할 수 있는 맹아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 승/패를 전제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UI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경기장에서 승/패라는 일회적인 제로섬을 통해 고도로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고통을 생산한다. 이는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그 외재성이 더 강해지는데, 여기에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도 껴 있다. 최초의 하드디스크(HDD)로 불리는 IBM 305 RAMAC의 경우, 보조 저장장치임에도 1톤이 넘는 장치였다. 즉, 애초에 기록으로 결과를 누적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에는 심각한 오버엔지니어링이었을 수 있다. 누적과 고통의 현실적 재현, 헬스바 시스템과 그 후예들 * 퐁 (출처: 위키피디아) 을 통해 형식적 고통이 재현된 이후 게임은 고통을 누적시키는 방식으로 지 않았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는데, 를 계승하여 게임을 대중적으로 보급시켰다고 여겨지는 아타리의 (1972) 또한 만큼이나 간단한 그래픽과 규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역시 전용콘솔을 통해 보급되었다. 다만, 이를 단순히 스토리지의 용량과 크기 문제 등 하드웨어적인 문제만으로는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IBM이 8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상업적으로 출시한 해는 1971년이며, 이때 생산된 플로피 디스크들이 IBM370의 부품으로 사용되었다치더라도 소량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정착된 것은 1973년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보다는 가소성을 시스템에 프로토콜화 하는 방식에 있어서 편의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유의미한 HCI 가치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은 이나 가정용으로 출시된 (1975)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당시 에 사용된 RAM을 포함해 회로 기판의 분석을 차치하더라도, 과 에서 재현되는 승/패의 형식적 고통은 이 재현한 것을 횟수로 누적하는 방식에 그쳤기 때문이다. 고통의 재현에 있어 혁신은 오히려 아타리의 <가라테>(1979)와 같이 격투 시스템을 가진 게임을 통해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격투를 통한 직접적인 가격의 고통을 기호적으로 재현하고는 있으나 원리적으로는 의 수준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고통을 누적의 개념으로 바라본 사례는 ‘아타리 쇼크’를 2년 흘러보낸 뒤에야 이뤄졌다. 남코의 <드래곤 버스터>(1985)는 헬스바 시스템을 도입하며 누적된 스트레스를 게임에 내재된 UI의 형태로 구현하며 누적된 고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혁신의 바탕에는 PC의 보급과 같은 사건들 역시 한 몫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I284D4y1q4 * <스트리트 파이터2> 롱플레이 (출처: https://youtu.be/xI284D4y1q4?feature=shared ) 이러한 헬스바 시스템이 이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HCI로 활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스트리트 파이터2>(1991)부터다. <스트리트 파이터2>에서는 헬스바가 일정부분 줄어들면 패배를 뜻하는 K.O.가 깜빡이는 방식으로 시각적 요소를 통해 긴박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긴박성의 연출까지 오는 데에는 <페르시아의 왕자>(1989)와 같이 플레이 시간을 60분으로 제한하고 이를 “60 MINUTE LEFT”와 같은 경고문구를 통해 시간을 한정 자원으로 제시하는 등의 플레이 디자인의 발전 또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게임 내에서 헬스바의 상태에 따라 K.O.가 깜빡이는 형태로 가소성을 적극적으로 시스템 안으로 끌고 들어오며 피로의 누적과 고통을 엮는 방식의 스트레스를 제시하며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데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피로의 누적과 고통을 엮어 게임의 플레이 디자인에 가소성을 추가하는 방식은 가소성 스토리지가 어느 정도 완성된 PC들이 가정에 보급이 완료되어가며 더 각광받기 시작한다. <블러디 로어>(1997)의 경우에는 공격과 피해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동물로 캐릭터를 변신시킬 수 있는 수화 시스템으로 가소성을 내재화하기도 했다. 이렇게 특정한 값이 누적된 결과, 높은 공격성을 갖추게 되는 형태의 가소성 내재는 스트레스를 단순히 손상의 성질로 보는 것이 아닌, 변화의 성질로 해석했다는 데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현대적 사례로는 프롬소프트의 <세키로: 새도우 다이 트와이스>(2019)의 체간 시스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세키로>의 체간은 캐릭터의 현 상태와 피해의 누적과 방어 정도 등을 상세하게 고려하여 GAS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핍진성 높은 스트레스를 재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fV_dJx5TRTQ * <세키로> 체간 시스템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V_dJx5TRTQ ) <토탈워>, 예측하는 유닛과 스트레스 경험으로서 HCI <세키로>와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유닛)의 상태를 고려하여 스트레스를 플레이에 내재한 사례는 21세기 초반부터 대중화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세가의 <토탈워>시리즈(2000~)를 생각해볼 수 있다. <토탈워>시리즈에는 사기(Moral)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는데, 물론, <토탈워> 초기작인 <쇼군: 토탈워>(2000)의 경우, 사기가 떨어지면 깃발의 색이 변하며 패주(敗走) 등으로 결과가 구현되는 스트레스 재현의 양상을 보인다. <쇼군>에서 독특한 점은 처형을 통해서 사기를 충전할 수 있게 시스템화 해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교육을 재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나름의 윤리를 새우는 행위를 플레이에 직접 재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게임 내에서 사건에 따라 사회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 사기 시스템을 통해 유닛이 처벌이라는 교육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학습했다고 여기는 HCI로 볼 수도 있다. <토탈워>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미디블: 토탈워>에 이르면, 사건에 따른 사회성 구성이 더욱 구체화 된다. <미디블>에서는 포로의 몸값을 받는 것을 통해 사기가 충전되기도 하는데, 이는 경제적 가치를 확인하는 사건이 사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토탈워>는 내재된 가소성에 따라 단순히 게임의 UI요소를 변경시키는 것이 아닌, 스트레스를 시뮬레이션 플레이할 수 있게 구현해 높은 수준의 HCI를 구성해간다. 더불어 높은 수준으로 구현된 HCI는 당대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들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이를 통해 당시를 상상하게 만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 내지된 스트레스 시스템을 통해 <로마2 : 토탈워>를 지나치게 플레이어블하게 만든 점, 그리고 그 직후 <토탈워: 아틸라>처럼 내지된 스트레스 시스템을 내러티브를 풀어내는데 적극 활용했을 때 그 체험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곱씹어볼만한 감상을 제공한다. 이처럼 고통과 피로로서 게임에서 재현한 스트레스는 UI를 통한 연장된 체현을 넘어 시뮬레이션으로 적극 활용된다. 이는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으로서 높은 품질의 몰입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게임에 대한 감상과 이해는 어떤 세계로 그 시뮬레이션을 이해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게임의 이용자가 게임에 내재된 스트레스 시뮬레이션을 통해 어떤 사회를 구성하느냐로 귀결될 수 있다. 특히 나 <리니지>와 같은 복잡한 MMORPG의 경우, (본지에서는 분량과 허락된 시간 상 패키지로 제한하여 언급된 타이틀들과 달리) 보다 생생한 가상의 SES를 구성하며 게임 내에서 체험하는 장소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통계라도 다루면 다행인) 사회학의 차원이 아닌, 심도있는 의료학적 이해와 폭넓은 컴퓨터 공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 고되고 지난하며 큰 보상을 바랄 수 없는 작업이겠으나, 넓은 확장성이 기대되는 만큼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1] “Punishment, penalty, suffering or loss inflicted for a crime or offence.”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pain (n.1), sense 1.a,” September 2024, ( https://doi.org/10.1093/OED/3543292423 ) [2] “Physical or bodily suffering, a continuous, strongly unpleasant or agonizing sensation in the body”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pain (n.1), sense 3.b,” September 2024, ( https://doi.org/10.1093/OED/9428204415 ) [3] “To have (something painful, distressing, or injurious) inflicted or imposed upon one; to submit to with pain, distress, or grief.”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suffer (v.), sense I.1.a,” September 2024, ( https://doi.org/10.1093/OED/7485489281 .) [4] Thomas W. Salmon,(1917). 「The Care and Treatment of Mental Diseases and War Neuroses ("Shell Shock") in the British Army」 ( https://archive.org/details/caretreatmentofm00salmrich/page/8/mode/2up ) [5] H. Matson (2016). 「The treatment of “shell shock” in World War 1: Early attitudes and treatments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and combat stress reaction」 (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924933816023981 ) [6] 국내에는 『스트레스: 당신을 병들게 만드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사이언스북스)로 번역되어 있다. [7] Tristan Donovan(2010). 『Replay : the history of video games』 ( https://archive.org/details/replayhistoryofv0000dono ) [8] Edwin Zschau.(1973). "The IBM Diskette and its Implications for Minicomputer Systems". (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6536793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인터뷰]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에 대한 동시대의 감각들 - GG필진 대담회
이번 GG의 대담에서는 게임연구자 김규리, 평론가 이선인, 그리고 이경혁 편집장이 함께 시뮬레이션 장르의 확장과 변주 과정을 짚으며, 쉽사리 정의하기 어려운 시뮬레이션의 다층적 의미를 통해 우리가 게임 비평자로서 도달해야 할 질문은 무엇인지 탐색해 본다. < Back [인터뷰]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에 대한 동시대의 감각들 - GG필진 대담회 27 GG Vol. 25. 12. 10. 게임에 대한 무수한 분류 중 ‘시뮬레이션’ 만큼 넓고 모호한 개념도 드물 것이다. 모의 전투부터 시작해서 탑승기에 대한 모사, 역사 재현, 도시 건설과 운영에 이르기까지 시뮬레이션은 다양한 메커니즘과 재현 방식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의미로 호출되고 있다. 장르로서의 시뮬레이션이 점차 모호해지는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한 재현과 재미 사이에서 시뮬레이션 게임의 핵심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도 점차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고 있다. 이번 GG의 대담에서는 게임연구자 김규리, 평론가 이선인, 그리고 이경혁 편집장이 함께 시뮬레이션 장르의 확장과 변주 과정을 짚으며, 쉽사리 정의하기 어려운 시뮬레이션의 다층적 의미를 통해 우리가 게임 비평자로서 도달해야 할 질문은 무엇인지 탐색해 본다. -------------------------------------------------------------------------------- 시뮬레이션, 그 정의의 모호함 이경혁 편집장 : 의 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대주제로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모든 게임이 시뮬레이션이라지만, 광의의 의미를 차치하고 ‘시뮬레이션은 왜 장르명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왜 어떤 게임은 시뮬레이션이라 부르고, 다른 게임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보는가. 결국 우리 필진 중에 누구를 데려다 놔도 ‘시뮬레이션’이라는 의미를 각자 다르게 쓰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그동안 시뮬레이션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서로 다른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좀 묶어서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각자가 좋아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 무엇이었는지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김규리 게임연구자: 저는 <유로 트럭>을 좋아했거든요. 그냥 차를 운전하는 것뿐 아니라 (거기서 등장하는) ‘사고’가 재밌었어요. 한 번은 제가 염소 치즈를 싣고 운반지에 배달해야 했는데, 운전 경험도 없고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가는데 앞길이 도로 보수 중이라 다른 길을 찾아야 했어요. 그걸 모르고 저는 한 곳만 뱅뱅 돌고 뒤에서 치즈는 다 녹고 있고(웃음) 그러다 너무 길을 못 찾는 이 상황이 화가 나서 그냥 길에 정박해서 잠을 자버렸거든요. 그렇게 했더니 날짜가 지나면서 도로 공사도 끝나고 해서 배달을 완료했는데, 제품은 손상이 되었고 결국 적자를 떠안게 된 일이 있었어요. 근데 저는 그 경험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이경혁 편집장: 규리님은 ‘탈것 시뮬레이션’ 자체의 재미보다도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드러나는 다른 시간이나 유통 데이터에서 나오는 재미를 보신 거네요. 듣다 보니 ‘사고’가 없는 운전은 재미가 없기에 사고 자체가 탈것 시뮬레이션에서도 되게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선인님은 어떤 걸 재밌게 하셨나요? 이선인 평론가 : 저는 <세틀러 2>가 역시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인 것 같아요. <듄 2>도 그렇구요. RTS 초기작들인데 몇 번을 클릭을 했는지 몰라요. 그 멍청한 CPU와 몇 번씩을 (싸우고) 한 번씩 클리어를 다 해보고 했네요. 이경혁 편집장: 소위 말해 탑뷰로 하는 시뮬레이션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상황을 내가 보고 통제할 수 있다는 전지전능감이라고 할까요? <심시티>부터 시작되는 그 느낌이 있죠. 제 얘기도 해보자면, 저는 여러 게임 장르 중에서도 시뮬레이션을 전문으로 합니다. <산소미포함>, <드워프 포트리스>, <파밍 시뮬레이터>, <투 포인트> 시리즈, 최근에는 <캡틴 오브 인더스트리>라고 섬에서 하루 종일 자원만 파는 게임도 있네요. 그러다 <림월드>로 넘어가고요. 완전히 시뮬레이션 매니아로 인생을 살았는데 이번 주제를 하면서 생각보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되게 마이너했다는 걸 깨닫기도 했어요. 혹시 처음으로 해본 시뮬레이션 게임은 무엇이셨나요? 이선인 평론가: 제가 처음 해 본 시뮬레이션은 <듄>보다도 더 앞으로 가네요. <삼국지 1>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시부사와 코우가 만드는 코에이 역사 시뮬레이션 시리즈가 제일 기억에 남지 않을까요? <노부나가의 야망>이나, 나폴리를 다루는 <랑펠로>, 몽골을 다루는 <원조비사> 같은 게임들이 있었죠. 그러면서 <대항해시대> 시리즈로 넘어가게 되네요. 이경혁 편집장: 역사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니 저는 최근에 <크루세이더 킹즈> 동아시아 패치가 나와서 이 바쁜 와중에 해봤거든요. 기본적으로 봉건제 시뮬레이션을 표방하고 있는데, 동아시아에는 봉건제가 없으니까 중세의 백작, 남작 같은 걸 어떻게 구현할까 싶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만 하더라고요. 중간중간 결정도 ‘이번 과거시험에서 컨닝을 할까 말까’였어요(웃음) 나름 시뮬레이션 게임이니까 중국 역사를 다뤄야겠다는 고민을 한 것 같은데 그 철저한 고증의 결과가 이런 거죠. 중국의 사대부라는 건 공부가 답인 거고. 또 서양은 자기 영지와 장원이 있잖아요? 근데 여기는 관료제니까 시험을 잘 보면 자꾸 다른 데로 발령을 내더라고요. 이선인 평론가: 그게 뭔가 ‘시뮬레이션을 해야 된다’는 자의식이 그런 것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느낌이 있네요. 이경혁 편집장: 그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해야 재미있다’는 얘기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시뮬레이션 게임 평가를 잘 들어보면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와 고증을 너무 심하게 해서 재미가 없다는 평가가 같이 나오잖아요. 아까 말한 탈것 시뮬레이션의 맥락이 아니라 정말 어떤 메카닉 자체를 재현하는 방식의 시뮬레이션에 있어 재미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듯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 보편적인 시뮬레이션이 뭐였을까 생각해 봤을 때 딱 하나가 떠오르는데요. <심즈>입니다. <심즈>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이유는 뭘까요? 즉 일상생활의 시뮬레이션이 어떻게 게임이 될 수 있을까의 문제입니다. 엄밀하게 정의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이유를 얘기하다 보면 우리는 시뮬레이션이 게임으로서 이런 의미다를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선인 평론가: 원래 일상생활이 제일 재미없는 것들 중 하나인데, (<심즈>류는) ‘햄스터’의 대용물 같다는 뉘앙스가 있긴 해요. 내가 완전히 플레이 캐릭터로서의 삶을 대행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내가 누군가의 삶을 관리해 준다는 느낌이 좀 강하게 들다 보니까요. 그런데 실은 시뮬레이션의 정의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이번에 에 청탁을 받고 <테라 닐>을 보내긴 했는데, 다시 (플레이)하면서 이게 시뮬레이션이 맞나 싶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이건 퍼즐 게임이에요. 그러면서 근래 했던 게임들을 다 짚어봤는데 모두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면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하면 또 아닐 수 있겠더라고요. 심지어는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도 그래요. <어쌔신 크리드>의 디스커버리 모드 같은 것도 시뮬레이션 쪽인데 이 게임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고요. 그렇게 되니 이제 와서 이걸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그걸 장르로 불러야 되는지도 좀 막막해진 상태입니다. 김규리 게임연구자: 게임도 광의의 의미에서 그렇고 시뮬레이션은 정말 다양한 범주의 의미화가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시뮬레이터라고 부르는 게임이나 소프트웨어를 보면 저는 뭔가 정밀한 숙련 조작을 할 수 있는 기술처럼, 어떤 차갑고 중립적인 이미지가 늘 뇌리에 떠오르더라고요. 역사라든가 내러티브 혹은 재현의 외피를 덜어낸 가장 기계적인 메카닉이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핵심이 된다는 인상이 항상 있었어요. 그래서 외피나 재현 같은 건 분할 가능하지만, 핵심적인 조작은 어디든 적용이 될 수 있게끔 하는 (메커니즘을) 시뮬레이터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방금 시뮬레이션이 차갑고 중립적인 느낌이 있다고 하셨지만, 역으로 <염소 시뮬레이터> 같은 경우엔 또 다른 의미가 되지 않나요? 하지만 그 게임도 보면 시뮬레이터라고 부르죠. 이선인 평론가: 그렇죠. 심지어는 최근에 나온 <크라임 씬 클리너>도 청소 시뮬레이터에 속하지만 서사가 쫀쫀하게 들어가 있고, 어떤 범죄적 세계로부터 이탈하려는 주인공의 강력한 욕망 같은 게 항상 이 밑에 도사리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처럼 강력한 내러티브를 품고 있는 게임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해야 되는가라는 문제에도 봉착한 것 같아요. 장르가 아닌 선언으로서 시뮬레이션 이경혁 편집장: 결국 ‘시뮬레이션이 정말 장르일까?’ 라는 문제로 들어가게 되네요. 장르로 시뮬레이션을 얘기한다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좀더 두터운 정의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장르로서 이 게임은 시뮬레이션이고 저 게임은 아니다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생각도 들긴 하네요. 이선인 평론가 : SRPG라고 하는 장르도 예전엔 Simulation RPG의 줄임말이었는데, 요즘은 Strategy RPG로 쓰더라고요. RTS(Real-Time Strategy)도 원래는 리얼타임 시뮬레이션이었잖아요. 시뮬레이션이라는 용어들이 게임 분류에서도 다 탈각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맞습니다. 실제로 Simulation이 Strategy로 바뀌는 순간에 ‘이 게임이 왜 시뮬레이션이냐’는 방식의 여러 논쟁과 반발들이 있었던 게 기억나요. 예전에 우리는 <스타크래프트>를 시뮬레이션으로 받아들였지만, 후대에는 어딜 봐서 시뮬레이션이냐는 반응이 있죠. 이선인 평론가: 제가 정리를 좀 해봤는데, 그렇다면 왜 과거의 Simulation에서 Strategy가 되었느냐를 생각해 보니 복잡계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삼국지>라고 하면 아케이드, RPG 같은 당대의 (다른) 삼국지 게임들에 비해 코에이 삼국지의 복잡계가 높다는 느낌을 받아요. 즉 복잡하니까 더 다양한 뭔가를 수행할 수 있고 그게 ‘시뮬레이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은데. 다른 장르들의 복잡계가 상승하면서 기존의 시뮬레이션 장르들과 매우 유사한 지점에 온 것 같거든요. <삼국지 2>와 <마운트 앤 블레이드>를 비교하면 후자의 복잡계가 압도적으로 높아요. 전자는 이미 시뮬레이션으로서의 가치가 좀 없어 보이는 느낌도 있죠. 이경혁 편집장: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도 재밌을 것 같아요. 복잡계라고 표현해 주신 게 어떻게 보면 연산의 양과 연산에 활용되는 데이터의 수, 연산 노드 자체의 개수라고 말해 본다면, 옛날 <삼국지 2> 돌리는 PC로는 <마운트 앤 블레이드>를 돌릴 수가 없죠. 그런데 특히 그래픽 같은 외적인 것 말고 순수하게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 자체에 들어가는 연산 수가 결국은 시대의 평균이 있는 거잖아요. 그 시대의 평균을 가지고 우리가 똑같이 존재하는 현상 자체를 모사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메커니즘 자체에 들어가는 연산의 양이 (어느 정도 있다면) 실제 연산결과와 무관하게, 이렇게 방대한 데이터의 연산을 통해 가상 세계를 구현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외피로서 ‘시뮬레이션’이라는 용어가 활용되었던 건 아닌가. 이렇게도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본다면 시뮬레이션은 장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울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요즘 저런 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표방하는 게임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김규리 게임연구자: 그리고 애초에 거기서 전제되는 시뮬레이션과 게임 간의 일종의 우열 관계가 있잖아요. 시뮬레이션이 (다른 게임보다) 좀 더 현실적인 거고 좀 더 정밀하게 재현한 것이라는 함의가 계속 개입이 되는데, 지금은 그것 자체가 와해된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그래서 더 이상 그런 부분이 작동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손갑철이라는 분을 아실까요? 그 분이 거의 30년 전부터 하이텔 시뮬레이션 게시판에서 활동한 것을 바탕으로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에 대한 해설서를 집필하셨어요. 엄청난 두께인데, 이게 내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항공에 대한 모든 것을 숙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잖아요. 시뮬레이션을 대할 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굉장히 진지하고 일종의 사명 의식까지 느낄 정도의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이경혁 편집장: 아까의 얘기가 개발자가 선호하는 시뮬레이션이었다면, 규리님 말씀은 이용자가 받아들이는 시뮬레이션의 차원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와닿는 게, <크루세이더 킹즈>를 할 때도 저는 어쨌든 과거를 열심히 봤단 말이에요. 이 시스템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보단 주어진 대로 과거에 급제해야겠다, 내가 급제를 못하면 아들을 잘 키워서 급제시키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게임에 빠져들었거든요. 그냥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걸 계속 그렇게 만들어 가려고 했으니까 저는 그걸 시뮬레이션으로 받아들인 거죠. 시뮬레이션은 중립적일 수 있는가?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시뮬레이션이라는 건 두 축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개발자가 연산을 통해 세계를 구현하려고 했다는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을 진짜 나의 플레이로 받아들이려는 일종의 태도. 이 둘을 같이 얘기할 수 있겠네요. 개발자와 소비자가 같이 만들어가고, 그 두 개가 일치되는 지점이 있으니까 시장에서 상품으로 기능하는 게 아닐까요. 혹시 이런 지점에서 정말 재미있게 하신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으실까요? 게임 메카닉도 잘 만들었고, 개발자들 선언에 동의하며, 나도 정말 즐겁게 플레이했던 게임이. 이선인 평론가: 저의 경우 재미있게 하면 보통 시뮬레이션의 느낌을 좀 덜 갖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까 <세틀러 2> 얘기를 했는데 이게 시뮬레이션인가 싶으면 그런 세계가 어디 있나요, 말도 안 되긴 해요(웃음) 이경혁 편집장: 저는 <세틀러> 류 중에는 옛날에 로마가 나오는 <시저 3>을 재밌게 했었는데, 그것도 누군가가 시뮬레이션의 관점으로 접근을 하면 말이 안 되긴 해요. 그 게임은 도로를 건물에 효율적으로 붙여야 작동을 하는 게임인데, 시뮬레이션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로마 시대를 굉장히 재미있게 만든 시뮬레이션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처음엔 다 날음식만 먹다가 로마 액젓이나 와인이 공급되고 집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점점 재밌어지죠. 그러면 사람들은 (게임에서) 그 길의 문제를 본 게 아니에요. 그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시뮬레이션에서 디테일을 크게 보지 않아도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김규리 게임연구자: 이 경우는 오히려 게임 메카닉 자체는 로마랑 관계가 없는 건데 어떤 장식적인 요소를 통해 역사 시뮬레이션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우 같네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게임 메카닉 자체는 <심시티>가 한 번 확립한 운영 건설 시뮬레이션 메커니즘이 계속 변주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시티 빌더’ 얘기 쪽으로 들어가볼까요? 이게 왜 재미있을까. 사실 <심시티>가 갖고 있는 독특한 메커니즘 하나가 배제이긴 합니다. 기본적으로 시장 행정가의 시점으로 게임을 운영하기 때문에 게임 목적에서 이미 자기가 보유한 토지의 가치를 올린다는 방향이 설정되어 있죠. 빈 땅에 인프라를 깔고 산업을 늘려서 세금을 걷고 재투자를 해서 마천루가 가득한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게, 이 게임엔 원래 땅에서 살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빠져 있습니다. 결국 젠트리피케이션 얘기로 갈 수밖에 없는거죠. 제가 보기에 <심시티>가 설계하고 재현하는 세계는 어떻게 보면 주류 상업경제의 세계인 거죠. 김규리 게임연구자: 실제로 <심시티> 제작자 윌 라이트가 도시 경영 메커니즘을 꾸리기 위해 제이 포레스터의 도시계획이론서 <어반 다이나믹스(Urban Dynamics)>를 참고했다고 하더라구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아까 얘기한 대로 ‘시뮬레이션’이 굉장히 차갑고 기계적이고 중립적인가? 에 대해 아니라는 반례를 댈 수 있겠네요. 이 얘기는 요즘 사회과학 쪽에서 많이 얘기하는 기술의 중립성 문제와도 맞닿는 게 아닌가 싶어요.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중립적일 수 있을까? 우리가 특히 어떤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시뮬레이션을 이야기할 때는 이 얘기를 꼭 같이 해야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서 사실 비평하기 제일 좋은 장르가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규리 게임연구자: 앨피 본이 <게임, 사랑, 정치>에서도 계속 미연시를 공격하죠. 문화적으로 잘못된 아이들의 관계맺기 방식이라는 식으로 좀 나쁘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니까 시뮬레이션이 마치 아케이드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그 자체의 메커니즘을 플레이어의 오감 속으로 그냥 편입시켜 버리는 방식으로서의 시뮬레이션 자체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결국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랑 착종되어 있고 그 구조가 평탄하지 않다면 비판의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선인 평론가: <심시티> 시리즈가 나올 때 실제로 북미에서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찾아보니 심지어 도나 해러웨이도 책의 한 꼭지로 글을 쓴 게 있네요. <심시티>를 다룬다는 건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다는, 말하자면 문명의 통치로 전환시키는 국면이라는 논조의 비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게이밍 기술로서의 시뮬레이션이 결국 세계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가상의 데이터로 설계해서 그 가상 공간 안에서도 작동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이 기술을 갖고 뭔가 표현하는 건 굉장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거죠. 저는 <대항해시대> 게임의 영문 표현이 , 차트가 되지 않은 바다라는 것도 흥미로워요. 지도상의 발견이라는 게 아직 미개척된 세계를 다 차트화하는 과정인 건데, 그렇다면 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이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다루는 과정도 결국 일종의 ‘차팅’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는 그냥 불연속적이고 자연적으로 있는 어떤 현상과 사건들을 디지털 게임 안에 넣으려면 이거를 필연적으로 그리드화해야 하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깎여 나감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시뮬레이션에서) 봐야 될 건, 무엇이 깎여 나갔는가? 혹은 무엇을 어떻게 연산했길래 우리는 저것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이해하게 되는가? 이런 과정일 것 같습니다. 이선인 평론가: 사실 곤잘로 프라스카 이후 우리가 게임은 시뮬레이션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현실로부터의 선별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요. 우리가 구태여 시뮬레이션이 더 정치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도 결국 이게 현실의 모사임을 전제하게 되는 측면이 있어서 그런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우리가 <진삼국무쌍>을 할 때 병사 얼굴이 안 나오는 것에는 신경을 안 쓰는데, <어게인스트 더 스톰>을 할 때 노동자들 얼굴이 안 나오는 것에는 신경 쓰곤 하잖아요. 어떤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 우리에게 현실을 자꾸 비추게 만드는 근간이 되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SF 시뮬레이션은 어떻습니까? <갤럭틱 시빌라이제이션>이나 아니면 <문명>을 이야기해보아도 좋겠네요. <문명>을 다루는 비평의 방식도 사실은 세대가 좀 바뀐 것 같습니다. 초창기1세대에 <문명>이 극찬받은 이유는 일종의 대본이 없이 AI들에게 상황과 조건만을 부여했더니 이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실제 역사랑 유사했기 때문이었거든요. 2세대에 들어오면 이 게임의 근간에 자리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나옵니다. 실제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명들이 전근대적 제국주의건 근대적 제국주의건 ‘확장성’에 기반한 문명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피드백을 받아서 <문명> 4편 이후부터는 제3세계와 비서구, 비남성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문명> 같이 실존하는 역사의 시뮬레이션을 다루는 것도 재미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선인 평론가 : 하지만 여전히 어떤 문명을 고르더라도 (게임 내에서) 지정된 테크트리는 서유럽 중심으로 이미 짜여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가도 (진행이) 똑같아지는 부분은 비판받고 있지요. 말씀하신 제국주의나 비서구, 비남성 문제를 <문명>이 일종의 스킨의 측면에서 돌파하려고 했었던 게 오히려 위화감을 줬던 것 같아요. 김규리 게임연구자: 맞습니다. 기존의 똑같은 서사와 구도에 캐릭터 스킨만 바꿔서 ‘여성도 지배자야’라고 이야기하는 게 도대체 어떤 임파워링이 될 것인가에 대한 회의도 있었죠.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메이저한 인류의 역사라는 원전 자체가 굉장히 남성 중심적이고 전쟁과 전복, 확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기에, 역사 시뮬레이션을 만들 때 다른 얘기를 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겁니다. 이에 앞선 선결 과제가 ‘대안 역사’일 텐데, 결국 전쟁과 갈등 없이 게임이라는 디자인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돼요. 대부분의 게임들이 충돌과 갈등과 극복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다보니 여기서부터는 좀 어려워지더라고요. ‘도구’로부터 ‘놀이’로, 시뮬레이션의 이행 이경혁 편집장: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해 보자면, 재현하려는 오브제가 눈에 보이는 뭔가가 아니라 그 뒤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구조나 메커니즘일 경우 대부분 시뮬레이션이라는 방법을 사용해 재현하려고 하는 거겠죠. 예를 들어 <심시티>에서는 도시 자체보다도 도시와 세상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거고요. 그럴 경우 현실의 문제를 외피를 넘어 한 겹 더 볼 수 있는 도구로서의 시뮬레이션은 충분히 유의미할 겁니다. 어떻게 보면 비판적 게이밍이나 사회 참여적 게이밍을 할 때 ‘시뮬레이션’은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론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우리가 이것만 가리키진 않지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운전 시뮬레이션은 또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것도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다른 시뮬레이션이잖아요? 김규리 게임연구자: 제가 사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운전에 문외한이라 익혀볼 겸 운전면허 시뮬레이션도 알아봤는데요(웃음). 물론 시뮬레이션 운전이 효과가 있느냐에 대한 이견들도 많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비용 절감의 문제가 제일 클 거에요. 이경혁 편집장: 아니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진짜 놀랐는데, 요즘은 면허 시험을 직접 운전이 아니라 시뮬레이터를 하고 딴다면서요? 많이 싼가요? 김규리 게임연구자: 운전 시뮬레이션은 40시간 정도 연습권이 한 50만 원 정도인데 일반적으로 그냥 운전면허 준비장에 가는 것의 반값 정도에요. 훨씬 더 싸고 체험도 많이 할 수 있어서 다들 간다고 하더라구요. 현실을 쉽게 모조하고 대체하면서 비용까지 절약해 주는 이점이 확실히 큰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 얘기야말로 게임의 방법론이 되기 이전의 시뮬레이션의 방법론이네요. 예를 들어 전쟁을 직접 하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드니 모의 게임으로 효과를 보자. 이런 차원의 시뮬레이션은 지금도 많이 쓰지 않을까요? 전투기 조종사들 시뮬레이션도 있을 거고요. 김규리 게임연구자: 네. 마이크로소프트가 프로그램화하기 이전에도 ‘플라이트 시뮬레이션’은 역사적으로 계속 존재했는데, 미국에서 양차 대전 사이에 항공기 운송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비행사 양성 비용 문제 때문에 그전까지는 유원지에나 처박혀 있었던 조종 시뮬레이션이 본격적으로 훈련에 도입됐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어떤 정형화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이 사람이 이런 환경 안에서 충분히 조작을 숙지하면 그 이후에 현실에서 어떤 변수가 오더라도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어떤 항상성에 대한 일종의 평균치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이 영역 전반에서 크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조사하다가 신기했던 게, 한국에서 나온 어떤 논문은 아예 인공지능 주행 자동차의 AI 알고리즘을 에 박아 놓았더라구요. 아예 연구논문을 이렇게 구성한 걸 보면서, 이런 구성이 게임 밖 세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리라는 믿음이 작동하고 있고. 그 믿음을 통해서 이것이 학술 장에 등록이 되고 학계의 지식 자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됐구나 하는, 너무도 당연스럽겠지만 저에게는 새로웠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이선인 평론가: 약간 옆으로 뛰는 얘기지만,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명에 나름대로 영향을 준 전봉 같은 곳이 있는데요. 옛날에 SSI(Strategic Simulations, Inc.)에서 나온 <컴퓨터 비스마르크>라는 전략 시뮬레이션이 있는데, 아발론 힐의 보드게임 <비스마르크>와 유사했죠. 처음 이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는 용어는 어느 정도는 ‘테이블 게임을 시뮬레이트한다’는 의미에서 썼던 것 같아요. 그 후 이 용어가 일반론으로 넘어오면서, 예를 들면 시스템 소프트의 <대전략> 같은 게임들을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면서 정착된 느낌이 있는 듯해요. 이경혁 편집장: 그래서 저 또한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정체불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BCTP(Battle Command Training Program)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었어요. 우리 사단과 어느 사단을 지정해서 이 두 사단이 모의 전투를 벌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때의 시뮬레이션은 재미 용도가 아니잖아요. 특히 직업군인들은 진급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성과의 문제고 일종의 실제 용도에 가까운 시뮬레이션이었는데 우리 부대 단장은 그 전투를 즐기더라고요. 그래서 아까 얘기했던 시뮬레이션이 현실의 도구에서 ‘재미’로 넘어오는 어떤 순간에 좀 이런 것도 있었던 게 아닐까 해요. 이선인 평론가: 생각해 보면 그렇네요.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는 게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재미를 담지하고 있는 거라면, 결국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적다는 것. 현실적으로 실패에 대한 피드백이 극도로 낮기 때문에 이걸 즐김으로써만 빠져나올 수 있는 부분이 되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이 실패는 나를 죽이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거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심지어 게임 오버가 되어도 사람들은 세이브 로드를 하면서 그 삶과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요. 시뮬레이션이 가격이 싸서 발전한 놀이라고 하지만, 사실 플레이를 생각했을 때는 절대 싼 가격은 아니에요. 비행 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은 이 장비를 다 갖추잖아요. 제 친구는 한 4-500을 썼는데, 기종이 하나 바뀌면 이 세팅 장비를 전부 다 바꿔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흥미로운 건 그 친구가 비행 시뮬레이션을 하다가 관제에 흥미를 갖게 되서 언제부턴가 게임에서 관제만 하기 시작하더라구요. 게임사도 그런 플레이어들의 수요를 아니까 그 관제 기능을 추가해 준 거죠. 여기서는 뭐가 재미가 될지 모르는 거에요. 이선인 평론가: 근데 이쯤 오면 시뮬레이션과 롤플레잉에도 어느 정도의 상당한 섞임이 생기네요. 어떻게 보면 롤 플레잉이라는 장르명은 잘못 뺏긴 것 같아요. 이쪽이 롤 플레잉이란 장르가 되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웃음) 이경혁 편집장: ‘롤플레잉’도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추상화된 형태로 롤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과 오히려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걸로 롤 플레이를 시키는 것, 이 둘의 차이로 갈라지는 거 아닐까요? 김규리 게임연구자 : ‘쉽 시뮬레이터’ 같은 것도 엮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플라이트에 비하면 쉽 시뮬레이터는 좀 발달이 늦긴 했거든요. 여러 이유가 있긴 하겠지만 제가 알기로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비로소 쉽 시뮬레이터가 대중화된 형태로 나왔다고 들었어요. 내가 이 망망대해에서 하염없이 바뀌지도 않는 파도를 보며 플레이하려면 결국 어떤 종류의 목적의식을 계속 고취해야 되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전쟁이라는 뒷설정 같은 것들이 활용되면서 훨씬 그 상황에 이입하게 만들어 주는 거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일종의 롤 플레잉을 하면서 배의 조정 자체에 내가 사명감을 지니고 동화될 수 있도록 그렇게 작용하는 기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이선인 평론가: 결국 게임으로서의 시뮬레이션은 이러한 서사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는 측면이 있네요. 이경혁 편집장 : 우리가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이 좀 모호하다는 얘기로 시작을 해서, 이런저런 의미를 하나씩 잡고 연원도 찾아보고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지도 생각해 보았는데요. 결과적으로 시뮬레이션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뮬레이션’의 의미 자체는 매우 불명확하지만, 이 불명확하다는 것은 시뮬레이션을 반드시 엄밀하게 정의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말이 가리키고 있는 행위가 품고 있는 더 많은 다양성들을 개별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도로 오늘 얘기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로 사용되는 다양한 게임 플레이와 게임 제작의 의미들을 꺼내보다 보면 우리가 말한 것 이외에도 다른 이야기들도 충분히 나올 수 있겠지요? 의 이번 호에서도 필자마다 조금씩 다른 시뮬레이션을 얘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모신 두 분께서 관련 아티클을 쓰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봅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로우스코어 걸: (Not Really) Full Game Walkthrough
게임의 현실성에서 빠져나와, 잠시 현실의 게임성을 생각해보자. 세계가 0과 1의 현실로 재구성되고 있다 해도, 거기서의 ‘룰즈 오브 플레이’와 그에 따른 난관이 본질상 그대로라면 세계는 언제까지나 익숙한 현실일 뿐이다. 불균등하고 블록화된 구조로 작동하는 접속가능성(connectivity)이라든지, 메타버스와 관련해 각종 투기가 당연하다는 듯 횡행하는 상황 등을 둘러보면, 과거의 기술 물신적 낙관과는 다르게 가상 인프라의 역능 역시도 딱히 평평해지지 않는 세계의 현실에 귀속되어 있는 것 같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in Kim A member of "Mods," a game club for curators. Thinks now and then about art as legacy, or art as subculture, and now and then curates an exhibition.
- 로우스코어 걸: (Not Really) Full Game Walkthrough
게임의 현실성에서 빠져나와, 잠시 현실의 게임성을 생각해보자. 세계가 0과 1의 현실로 재구성되고 있다 해도, 거기서의 ‘룰즈 오브 플레이’와 그에 따른 난관이 본질상 그대로라면 세계는 언제까지나 익숙한 현실일 뿐이다. 불균등하고 블록화된 구조로 작동하는 접속가능성(connectivity)이라든지, 메타버스와 관련해 각종 투기가 당연하다는 듯 횡행하는 상황 등을 둘러보면, 과거의 기술 물신적 낙관과는 다르게 가상 인프라의 역능 역시도 딱히 평평해지지 않는 세계의 현실에 귀속되어 있는 것 같다. < Back 로우스코어 걸: (Not Really) Full Game Walkthrough 03 GG Vol. 21. 12. 10. 게임의 현실성에서 빠져나와, 잠시 현실의 게임성을 생각해보자. 세계가 0과 1의 현실로 재구성되고 있다 해도, 거기서의 ‘룰즈 오브 플레이’와 그에 따른 난관이 본질상 그대로라면 세계는 언제까지나 익숙한 현실일 뿐이다. 불균등하고 블록화된 구조로 작동하는 접속가능성(connectivity)이라든지, 메타버스와 관련해 각종 투기가 당연하다는 듯 횡행하는 상황 등을 둘러보면, 과거의 기술 물신적 낙관과는 다르게 가상 인프라의 역능 역시도 딱히 평평해지지 않는 세계의 현실에 귀속되어 있는 것 같다. * 《MODS》 (사진: 박승만) 공적 기금에 의지할 기회를 얻어서야 겨우 전시를 만들 수 있는 기획자 입장에서, 그럴 때마다 필자가 처한 상황도 그 현실의 일부임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된다. 동료 기획자들과 각자의 게이머적 시선으로 게임을 시각 예술의 문제와 교직해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MODS》 1) (합정지구, 2021)에 참여하면서, 우리 팀은 가상성과 링크된 레토릭으로서의 게임보다는 ‘경기’로서의 게임을 경유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기획된 게 바로 〈로우스코어 걸 Low Score Girls〉이다. 제목의 참조 대상은 다름아닌 〈하이스코어 걸 ハイスコアガール〉로, 이 만화의 주된 내러티브 공간인 아케이드 센터는 경기로서의 고전적 성격에 방점이 찍힌 장르의 게임이 주로 서비스되는 곳이다. 〈로우스코어 걸〉은 시각 예술과 연계된 이런저런 현실적 ‘난관’들에 대응하는 참여 작가들을, 그런 게임 안에서 경기의 논리를 배반하며 임의의 트랙을 질주하는 게이머들처럼 가시화하려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ww-fmkGuk ‘설정된 경로를 주파하는’ 게임 경험의 압축적이고 간명한 구조 때문인지, 레이싱은 과거 아케이드 게임 업계가 새로운 재현 기술을 우선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었던 주된 대상이었다. 세가(Sega)가 자랑했던 전설적 크리에이터 스즈키 유(鈴木裕)의 원근법적 집착으로 1985년 등장한 〈행온 Hang-On〉은 최초의 ‘체감형’ 레이싱 게임으로,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스프라이트 확대/축소 기능으로 구현된 유사 3D 서킷을 바이크 형태의 컨트롤러에 올라타 공략하게 된다. * 김예슬, 〈Skid〉 (사진: 박승만) https://www.youtube.com/watch?v=g7nIjDF4TTA * 〈Skid〉에 사용된 영상 김예슬의 〈Skid〉는 그런 식의 ‘체감’이 여과하는 모든 현실에 대한 기념비로, 스턴트 바이크 라이딩을 촬영한 라이브 푸티지와 CBR250을 커스터마이즈한 실제 스턴트 바이크가 활용됐다. 다리 밑이나 공터, 또는 공사 중인 고속도로 현장과 같은 곳을 물색해 이루어지는, ‘공도’ 밖의 장소에서야 구성 가능한 게임인 스턴트 라이딩. 스턴트 동작에 적합하도록 개조된 탓에 번호판이 부여될 수 없는 바이크는, 신체를 운반하는 수단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체의 연장에 해당하는 무엇처럼 다가온다. 일정한 물리적 위험이 담보된 채 스턴트 동작을 실연하는 순간의 자족적 열락과 같은 건 과연 ‘체감형’ 게임으로 재현될 수 있을까? 더불어, 시선을 과거로 돌려, ‘스포츠’로서의 바이크 너머 과거로 밀려난 오랜 ‘폭주’의 역사에 대해, 재현의 윤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고, 할 수 없었을까? 영상과 격절돼 단상 위로 미끄러진 ‘실물’ CBR250은, 열화된 현실인 게임과 열화된 게임인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며 그런 부류의 질문들을 환기한다. * 김효재, 〈파쿠르 Parkour〉 (사진: 박승만) 김효재의 영상 설치 작업인 〈파쿠르 Parkour〉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아예 세계의 필요충분조건이 된 사변적 지평에서의 프리러닝을 다룬다. 1인칭 액션 게임 〈미러스 엣지 Mirror’s Edge〉의 소재였던 스포츠 파쿠르(Parkour)의 명칭은 ‘여정(journey)’을 뜻하는 프랑스어 ‘parcours’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렇듯 파쿠르는 규칙에 따른 순위를 다루는 ‘경기’가 아니라, 신체 능력만으로 지형지물에 자유로이 호응해 달려가며 이루어지는 구도적 수행이다. 파쿠르에 임하는 동안의 여정에서 느낄 수 있는 위험과 두려움이란 수행자에게 있어 자기 한계의 인식이기도 하지만, 그건 육체로부터의 예비된 자유를 지시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파쿠르 Parkour〉의 화자는 타율적 스틱과 버튼으로 매개되어야만 했던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에서의 ‘몸’이 완전히 불식된 세계를 살아가는 신인류로서, 현재의 파쿠르적 실천을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실현된 가능성의 잠재태로서 소환한다. 모든 게 데이터로 환원되어 연결된 세계. 그래서 ‘에어플레인 모드’에서조차 그 무엇과도 데이터 전이를 일으킬 수 있는 세계. 그곳에서 ‘몸’은 특정한 정체성의 고정적 준거가 아니라 유동적 연결망 내에서의 노드(node)에 가까운 잠정적 윤곽일 뿐이며, 의식의 흐름과 파쿠르적 몸짓은 같은 것이 돼 그 자체로 〈파쿠르 Parkour〉의 이미지 시퀀스를 형성하면서,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트랙션 데모를 보여준다. * 문주혜, 〈Dragon and Ten of Swords (사진: 박승만) 문주혜의 〈Dragon and Ten of Swords〉에서 미리 추상화/모듈화된 오브젝트의 집적으로 2D 횡스크롤 슈팅 게임의 보스처럼 보이는 용, 그리고 레이어의 질서를 넘어 근경에서부터 원경의 용의 몸을 베어내고 있는 듯한, 구상적 형태를 취하되 장식적 어조로 반복되는 검들의 조합은 지난 두 번의 개인전에 걸쳐 시도했던 상이한 작업 방식이 종합된 결과다. 작법을 변주하는 가운데 문주혜는 일관되게 전통적 재료인 장지를 사용하면서, 그 특유의 ‘스며드는’ 물질성을 통해 자신이 플레이하던 게임에서 채집했거나 참조한 이미지를 ‘봉인’해왔다. 크리스 고토-존스(Chris Goto-Jones)의 논의 2) 에서와 같이 게이머를 전통적 의미에서의 ‘무사’로 바라볼 수 있다면, 게이머의 의경(意景)이 표현된 회화는 일종의 사인화(士人畵)라 할 수 있을까? 문주혜의 작업을 두고 관성적으로 ‘동양화’라는 표현을 쓰는 부주의는 그런 농담 같은 지점에서야 그나마 허락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이 동양화라는 개념에 이제 어떤 의미론적 ‘규칙’이 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행적 접근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굳이 농담처럼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맥락화와 역사화를 위한 동일성의 도식을 애써 추출해내려는 시선을 억제하고, 제도화된 개념인 ‘동양화’를 김효재의 〈파쿠르 Parkour〉가 ‘몸’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때의 가능한 운동성은 무엇일까? 〈로우스코어 걸〉의 후속 프로젝트는 바로 그 지점을 재차 게임과 결부시키며 출발하는데, 이에 대해선 〈로우스코어 걸〉의 공동 기획자 홍성화에 의해 추후의 지면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MODS》의 다른 프로젝트들이 기획자가 작가에 가까운 롤을 수행한 결과물을 선보이거나(TTT, 파핑파핑 리얼리티), 팀업된 기획자와 작가 각각의 결과물이 같은 층위에서 작동하게끔 하면서(Sync) 어느 정도씩은 거리를 뒀던 전시로서의 전형성을, 〈로우스코어 걸〉은 일반화된 양상의 기획전 형식을 취해 오히려 최대한 가져가고자 했다. 여기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로 〈로우스코어 걸〉은 《MODS》가 필연적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는 ‘전시’란 형식을, ‘작가’, ‘공중(public)’, ‘예술’, 그리고 ‘예술계’와 같은 것들을 성립시키는 회로로부터 출력된 ‘게임’의 일부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볼 때 나머지 세 프로젝트가 그 시스템에 기판의 규격이 허용하는 어떤 외부 장치 같은 게 결합된 결과에 해당한다면, 〈로우스코어 걸〉은 순정 상태에 가까운 그 게임을 김예슬, 김효재, 문주혜 세 작가가 플레이하는 방식을 익숙한 ‘게임’의 장르적 이미지를 맥거핀 삼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우린 〈로우스코어 걸〉이, 《MODS》에 빌트인(built-in)된 뭔가를 합정지구 1층에 선행 적시해두는 기획전이자 일종의 해체적 아케이드 센터로 보이길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코인 투입구 없이, 아무런 조작계 없이, 워크스루(walkthrough) 영상이나 마찬가지인 ‘보는 게임’임을 견지하면서, 그리고 나아가 ‘기판과 게이머의 단절’에 ‘플레이와 구경꾼의 단절’이 친화적으로 중첩되는 장일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전시와 관객 사이를 상호적이게 하는 충분히 투명하고 반질반질한 어떤 접면이 있어서 거기서부터 현실을 초과한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식의 향긋한 모델은 늘 의심스럽기에. ‘전시’와 ‘관객’이라는 조건부터가 이미 현실의 회로에 의한 구성물이기에. 1) https://www.artbava.com/exhibit/mods/ 2) Chris Goto-Jones, “Is Street Fighter a Martial Art? Virtual Ninja Theory, Ideology, and the Intentional Self-Transformation of Fighting-Gamers.” Japan Review 29 (2016): 171-208.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술기획자) 김세인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 멤버. 레거시로서의 미술, 또는 서브컬처로서의 미술에 대해 가끔씩 생각하며, 가끔씩 전시를 기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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